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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교회 금요말씀

기독교강요 강설(109)
범위: 3권 4장 1-3절
제목: 스콜라주의자들의 회개
본문: 마태복음 9:9-13

1. 스콜라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회개의 세 가지 요소 :마음의 통화, 입의 고백, 행위의 보속

이제 나는 스콜라 궤변론자들이 가르쳤던 회개에 관한 것들을 논의하는 데 이르렀다. 그것들을 나는 가능


한 한 조금만 돌아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 책에 가르침의 개요가 343)1) 갖춰지기만을 간절히 원하
므로 경계를 허물고 모든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을 이
사안을 괜히 수많은 책에 포함시켰으므로, 만약 당신이 그 책들의 작은 앙금에 조금이라도 빠진다면 결코
헤어 나올 출구가 없을 것이다.

우선 그들의 정의 가운데, 우리는 그들이 회개에 대해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옛날 사람들의 책들로부터 인용한 어떤 경구들을 붙들고 있지만 그것들은 회개의
의미를 절대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회개는 이전에 행했던 죄들에 대해 우는 것이며
울어야 할 것들을 범하지 않는 것이라거나, 지나간 악행들에 대해 애통하는 것이며 애통해야 할 것들을 또
다시 범하지 않는 것이라거나, 범했던 것을 괴로워하고 있는 것 자체를 벌하는 어떤 괴로운 복수라거나,
각자가 범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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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한 악행들로 말미암은 마음의 고통과 영혼의 쓰라림이라는 것이다. 344)2)

논쟁적인 사람은 이를 쉽사리 부정할 수 있겠지만, 교부들이 이것들에 대해서 말한 것이 옳았다는 것을 우


리는 인정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목할 것은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회개를 기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들이 구출되었던 같은 범죄들 속으로 다시금 빠지지 않도록 권고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이
다. 크리소스토무스(Chrysostomus)의 말은 그중 하나에 속한다. "회개는 죄를 씻어 내는 약, 하늘로부터
주어진 선물, 놀라운 능력, 율법들의 힘을 초월하는 은총이다."345)3)

그뿐 아니라 이후에 스콜라주의자들에 의해서 가르쳐진 교리는 이러한 교부들의 정의들보다 한층 더 저급


하다. 왜냐하면 당신이 유추하게 되듯이, 그들은 그것을 다룸에 있어 외부적인 훈련에 고집스럽게 초점을
맞추고, 부분적으로는 육체를 길들이고 부분적으로는 악행을 징계하고 벌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훈육과 준
엄함이 회개라는 사실을 자기들의 수많은 책들을 통하여 말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삶의 참된 교정을 낳는 마음의 내적 갱신에 대해서는 놀라우리만큼 침묵을 지킨다. 그들 가운데 통


회와 뉘우침에 관한 많은 말이 있음은 사실이다. 그들은 많은 근심을 유발시켜 영혼을 학대하고, 그것이
무수한 난간과 불안의 심연에 빠져들게 한다. 그때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히고 나서 모든

1) 343) "ad docendi compendium."


2) 344) Cf. Gregory the Great, Homilies on the Gospels II. hom, xiv. 15 (MPL 76, 1256); Columbanus, Penitential [ca, 600] A. 1 (MPL 80.
223; tr. J. T. McNeill, Medieval Handbooks of Penance, p. 250); Pseudo-Ambrose, Sermons xxv, 1 (MPL 17, 655); Lombard,
Sentences IV, xiv, 1 (MPL 192, 869); Pseudo-Augustine, De vera et falsa poenitentia viii, 22 (MPL 40, 1120), 이 가운데 마지막 작품은
기 독교 강요에서 열일곱 번 나오고 그중 이곳 4장에서 네 번 나온다. Smits, Saint Augustin dans T'Oevre de Jean Calvin II, 263. Quot,
Battles tr., n, 1,
3) 345) Chrysostom, Homilies on Repentance, hom, vii, 1 (MPG 49. 338) 회개를 치료하는 약(medicina)으로 보는 것은 초대 교회의 교부들과 회
개의 교본들(libri poenitentiales)을 쓴 중세의 저자들에게 흔히 나타난다. Cf, A, Harnack, Medizinisches aus der altesten
Kirchengeschichte (Texte und Untersuchungenzur Geschichte der altchristlichen Literatur VIII [1892). pp. 137ff,; McNeill and Gamer,
Medieval Handbooks of Penance, pp. 44f., 182; McNeill, A History of the Cure of Souls, pp. 44f,, 114, 119, 134, 179, 315. Quot.
Battles tr., n, 2.
쓰라림을 가벼운 의식들로써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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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얼마나 교활한지, 회개가 마음의 통화, 입의 고백, 행위의 보속으로 346)4) 나뉘어 정의되게끔 한
다. 그들은 자기들이 이러한 삼단논법들을 짜내는 데 전 생애를 소모했다고 보이기를 원하겠지만 그것은
변증법적이라기보다 정의를 내린 것에 불과하다. 347)5)

누군가 변론가들에 의해서 모종의 논의가 계속되고 있는 이 정의에 근거해서, 한 사람이 비록 입으로 고백
하지는 않더라도 이전에 행했던 죄들에 대해서 울 수 있고 울어야 할 것들을 범하지 않을 수 있으며, 지나
간 악행들에 대해서 애통할 수 있고 애통해야 할 것들을 범하지 않을 수 있으며, 범했음을 괴로워한 것에
대해서 형벌을 가할 수 있다는 등으로 결론을 내린다면, 어떻게 이 구분법이 계속해서 유지되겠는가? 왜
냐하면 만약 한 사람이 참으로 회개하면서도 고백은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고백이 없는 회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마 자기들이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회개를 성례로 보는 한에 있어서 그렇다고 하거나, 자기들이
회개를 정의할 때 포함시키지는 않았지만 이 구분은 회개의 전체적인 완전함과 관련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이 나를 비난할 이유는 될 수 없다. 그들이 더욱 순수하고 명확하게
정의하지 못한 탓을 그들 자신에게 돌리게 하자. 확실히 나는 우둔함 탓에 무슨 사안에 대해서 논쟁할 때,
모든 것을 모든 논쟁의 핵심이자 기반인정의 자체에 돌린다.

그러나 교사인 척하는 그들의 방자함은 그냥 두기로 하고 이제 그 세 가지 부분들 자체를 순서대로 둘러


보도록 하자. 그들은 없어질 사소한 것들을 치장해서 비밀들이라고 부르면서 거만을 떨지만 그것들은 그냥
지나가도록 하자. 그들이 기교를 부리며 교묘하게 논쟁을 일삼고 있는 것들을 파악하는 데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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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큰 수고가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꼼꼼히 다루는 것은 독자들에게 쓸데없는 것으로 피로를
안길 뿐이라고 여겨진다. 사람들을 자극하고 흥분시키는 문제들 그리고 그들을 비참하게 얽어매는 질문들
에 대해서 사실상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입방아를 찧을 뿐이다. 예컨대 다른 죄들에 대한 완고함은
그냥 남겨 둔 채 한 가지 죄만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 하나님이 가하신 형벌들에
대한 보속이 가능한지, 그들은 추하고도 불경건하게도 사람들이 날마다 소죄(小罪)들에348)6) 대해서만 회
개를 해야 한다고 정의하고 있는바, 또한 죽을 죄(大罪)들을 위해서 349) 반복해서 자주 회개들을 하는 것
이 가능한지, 이런 질문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회개는 파선 후 두 번째 판자" 350)7)라고 한 히에로니무스
(Hieronymus)의 말에 기초하여 그들은 큰 오류에 빠져 여전히 자기 혼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로써 그들은 여전히 결코 야수적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자기들이 저지른 과오의 천분의 일 혹은 그
이하만큼도 느끼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2. 첫째 요소: 마음의 통화,

4) 346) "in contritionem cordis, confessionem oris, satisfactionem operis." '마음의 통화(contritio cordis), '입의 고백(confessio oris), '행위의
보속'(satisfactio operis)을 회개의 세 요소로 보는 것은 중세의 수많은 저술들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다루어졌다. Lombard, Sentences IV, xvi, 1
(MPL 192, 877); Gratian, Decrenum II, i, 40 (Friedberg 1. 1168); Opera, ed, Erasmus, 1530, II. 347 (1547 ed., V. 904). 마지막 작품은
크리소스토무스의 글이라고 오해되었다. 루터는 이 세 가지 요소에 대해서 누차 공격하였다. Werke WA VI.610; VII. 112. 이에 맞서서 로마 가톨
릭 신학자 존 피셔(John Fisher, 1469-1535)는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Assertionis Lutheranae confiutatio (1523), pp. 156-178, Quot,
Battles tr.. n. 3.
5) 347) "nihilo magis dialectice quam definierunt,"
6) 348) "de venialibus peccatis," Cf, Augustine, Enchiridion xix, 71 (MPL 40, 265; tr, LCC VII, 381); Caesarius of Arles (468/470-542),
MPL 39, 2220; Columbanus, Regula coenobialis, ed. O. Seebass in Zeitschrift für Kirchengeschichte XV (1895), 366-386, sec, 1 (tr,
McNeill and Gamer, Medieval Handbooks of Penance, p. 258); Aquinas, Summa Theol. III, bxxxviii, 1, Quot, Battles tr., n. 4. 349)"pro
mortalibus peccatis."
7) 350) "secundam tabulam post naufragium," Jerome, Letters lxxxiv, 6; cxxx, 9 (MPL 22, 748, 1115; tr. NPNF 2 ser. VI. 178, 266);
Lombard, Sentences IV, xiv. 1 (MPL 192, 869; tr. LCC X, 348); Council of Trent, session 6, ch. xiv (Schaff, Creeds II. 105). 이에 대한
루터의 반박. Babylonish Captivity, section on Baptism, Werke WA VI; tr. Works of Martin Luther II. 219, 222, Quot, Battles tr., n, 4,
통회는 우리의 자질에 따른 것이 아니며 공로가 없음

진정 여기에서 우리는 당나귀의 그림자에 관한 성가신 논쟁이 351)8) 아니라 그 어느 것보다 심각한 문제
인 죄사함에 관해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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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주목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그들은 회개를 위하여 세 가지, 즉 마음의 통회, 입의 고백, 행위의 보속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죄사함을 얻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종
교 전체와 관련해서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로, 어떤 법으로써, 어떤
조건 가운데, 얼마나 용이함 혹은 어려움으로 죄사함을 얻을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과 가장 밀접하게 관
련될 것이다. 이 지식이 명백하고 확실하게 유지되지 않는다면, 양심은 어떤 쉼도, 하나님과의 어떤 화평
도 어떤 화신도, 어떤 평정도 가지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쉼 없이 떨고, 요동치고, 불같이 타오르고, 고문
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미워하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도망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죄사함이 그들이 덧붙인 이러한 조건들에 의지한다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비참하고 더 개탄
스러운 것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통회를 은총을 얻기 위한 첫 번째 몫으로 352)9) 삼는다. 그들
은 통화가 마땅한 만큼 이루어지도록, 즉 합당하게 그리고 충분하게 353)10)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언제 이러한 통화를 올바른 방식으로 수행했다고 확신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들은 단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쓰라린 울음으로 각자의 죄를 진지하면서도 신랄하게 고백하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낳는 이러한 슬픔에는 후회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고후 7:10). 그러나 큰 죄에
대한 책임으로 신랄한 고통이 부과되어야 하며, 그 고통은 은총에 대한 확신과 저울 위에서 서로 균형을
맞추어야 하므로, 여기에서 참으로 비참한 양심은 가공할 방식들로 고문을 당하고, 자기들에게 죄들에 대
한 마땅한 통화가 부과되어 있는 것을 깨닫는 동안에 몹시 괴로워한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이 얼마의 빚
을 졌는지를 가늠할 수 없으므로 자기들의 빚을 다 지불했는지도 분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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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들이 우리는 우리의 자질대로 행하여야 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항상 같은 곳으로 되돌려지게 될
것이다. 언제, 감히 누가 자기의 죄를 통탄하기 위해서 모든 능력을 다 바쳤다고 자기 자신에게 고백할 수
있겠는가?

양심은 오랫동안 자기와 씨름하고 오랜 몸부림 가운데 자기를 훈련시켜 왔지만 도무지 쉴 피난처를 찾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양심의 어느 한부분이라도 가라앉히기 위해서 자기로부터 슬픔을 우려내고
눈물을 짜내어 각자의 통화를 이룬다. 354)11)

3. 통회는 그리스도의 의를 무마시키지 않고 오히려 전제함

그러나 만약 그들이 내가 중상모략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통회에 대한 이런식의 가르침에 의해서 절망의
나락으로 이끌리지 않거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참 슬픔을 대신해서 거짓된 슬픔을355)12) 내세우지

8) 351)"de asini umbra rixam." 이솝 우화에 나오는 말로서 나귀를 빌려주었지만 나귀 그늘 밑에서 쉬는 권리까지는 양도하지 않았다고 문제 삼는다
는 이야기이다.
9) 352) "primam obtinendae veniae partem,
10) 353) "debitamhoc est iustam et plenam," Biel, Epythoma pariter et collectorium circa quatuor sententiarum libros IV, ix, Cf, C, R,
Meyer, The Thomistic Concept of Justifying Contrition, pp. 60f.. 190㎡, Quot, Battles tr.. 7. 6.
11) 354) Ubi ergo diu secum luctatae, et longis certaminibus exercitae conscientiae, portum tandem in quo resideant non inveniunt, ut
se aliqua saltem parte leniant, dolorem a se extorquent, et lacrymas exprimunt, quibus suam contritionem perficiant,"
12) 355) "simulationem doloris judicio Del, pro vero dolore."
않는 그런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실제로 나오게 하여 보이도록 보자. 우리가 어느 곳에서 말했듯이, 죄
사함은 회개가 없이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죄에 대해서 양심으로 고통을 당하고 상처를 입은
사람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자비를 순수하게 간청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는 회개가 죄사함의 원인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진정 그들은 저 영혼의 고문들,
즉 지불되어야 할 빛들을 제거해 내었다. 우리는 죄인이 자기의 양심의 가책이나 자기의 눈물을 바라보지
말고 두 눈을 주님의유일한 자비에 고정시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356)13) 우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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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자들”(마 11:28)로서 그에게 부름을 받았음을 상기하면서,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시
고, 마음으로 통회하는 자들을 낫게 하시고, 포로된 자들에게 놓임을 선포하시고, 눌린 자들을 자유롭게
하시고, 애통하는 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으셨다고 배우게 되었다(사 61:1; 눅 4:18). 따라서 자
기들의 의에 만족해서 자기들의 가난함을 인식하지 않는 바리새인들과 하나님의 진노에 무덤덤해서 자기
들의 악에 대한 처방을 찾지 않는 냉소주의자들은 여기에서 제외된다. 그러한 자들은 수고하지도 않고, 무
거운 짐을 지지도 않고(마 11:28), 마음으로 뉘우치지도 않고, 속박되지도 않고, 포로 되지도 않았다.

죄인이 수행할 수 없는 합당하고 충분한 통화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게 된다고 가르치는 것과, 죄인이 자
기의 비참함을 앎으로 자기의 불안, 곤함, 예속을 깨닫게 하여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 주리고 목말라하게
함으로써 시원함, 쉼, 자유를 찾게끔 하고, 결국 죄인이 겸손함 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끔 가르
치는 것 간에는 참으로 큰 차이가 있다.

13) 356) "poenitentiam non esse causam remissionis peccatorum, Illa autem animarum tormenta sustulimus, quod debita praestanda sit,
Peccatorem docuimus non in suam compunctionem, neque in suas lacrymas intueri, sed utrumque oculum in solam Domini
misericordiam defigere," Institutio, 3.3.20. Cf. Melanchthon, Loci communes (1521), ed, Engelland, pp. 92, 96, 119; tr, Hill, pp. 117,
181f, 211. Quot, Battles tr.. n.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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