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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교회 금요말씀

기독교강요 강설(115)
범위: 3권 4장 21-23절
제목: 천국 열쇠의 권세
본문: 마태복음 16:13-20

21.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들의 지식을 고문관으로 삼음


그들은 자기들이 가치 있는 사람들과 가치 없는 사람들을 무분별하게 풀고 매고 한 것을 가장 명백한 그
들 자신의 체험들이 자기들에게 입증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에도 지식이 없이 권한을 남용한다. 그들은 권
한을 선용하기 위하여 지식이 요구된다는 것을 감히 부정하지 않지만 여전히 그 권한 자체가 악한 사역자
들에게도 위탁되었다고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그 권한은 다음의 말씀에 있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
서 매거나 풀면 하늘에서도 매이거나 풀리리라”(마 16:19; 18:18 병합 적용).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약속이
거짓이어야 하거나 이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매고 푸는 것이 잘하는 것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약속은 매이거나 풀리는 사람의 공로에 따라서 제한된다는 말로 회피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
다. 풀리거나 매일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풀리거나 매일 수 없다고 우리도 고백한다. 복음 전파자
들과 교회는 이것의 존귀함을 헤아릴 말씀을 가지고 있다. 그 말씀 가운데서 복음 전파자들은 그리스도 안
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죄사함을 모든 사람에게 약속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품지 않는 모든
사람 가운데, 그런 모든 사람 위에 저주를 발할 수 있다. 교회는 이를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선포한다.
“음행하는 자나 … 간음하는 자나 … 도적이나 살인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
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적용. 고전6:9-10)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을 가장 확실한 사슬
로 맨다.

반면에 같은 말씀으로, 교회는 뉘우치는 사람들은 풀고 위로한다. 풀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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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엇인지 매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권한, 맬 수도 없고 풀 수도 없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권한은
어떤 권한인가? 사면권이 불확실한 것이라면 왜 그들은 푸는 권한이 자기들에게 부여되었다고 말하는가?
아무 소용이 없다면 이 가상의 권한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러나 나는 이 한 곳의 말씀으로도 이것이 아
무것도 아니거나, 아니면 너무나 불확실해서 도무지 그 무엇으로도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참으로 열쇠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는 선한 사제들이 있다는 사실과 그 권한이 비합법적으로 사용됨으로
써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그들이 인정한다고 할 때,423)1) 나를 풀어 준 사제가 열쇠를 사용하는 선한 사
역자라는 믿음을 누가 생기게 해 줄 것인가? 만약 그가 악하다면 이 하찮은 사면권 외에 더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나는 당신 속에서 무엇이 매여야 하며 무엇이 풀려야 하는지 모릅니다. 나는 열쇠
를 합당하게 사용하는 데 있어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당신에게 공로가 있다면 나는 당신을
풀어 줍니다." 이 말을 평신도에게 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를 듣고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투르크인이나 마귀에게나 그나마 값어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음의 말과 같
다. "나는 풀기 위한 확실한 규범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의 공로가
부합된다면 당신을 풀 권한이 나에게 부여되었습니다."424)2)

여기에서 우리는 그들이 열쇠를 사려분별의 권위이자 수행하는 권한으로 정의하고, 지식을 고문관으로서,
마치 고문관과 유사한 것으로서 선용하기 위하여 그것들에 덧붙여졌다고 말할 때,425)3) 그것이 무엇을 겨

1) 423) Lombard, Sentences IV. xix, 1. 5 (MPL 192, 889, 892), Quot, Battles tr.. n. 44.
2) 424) "verbum Dei non habeo, certam solvendi regulam; sed autoritas mihi data est te absolvendi, si ita sunt tua merita,"
냥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 없이 정욕대로 방자하게 다스리기를
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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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극도로 무지한 거짓 교사인 사제의 사려분별에 의지하여 매고 품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합법적인 사역자들이라 하더라도 믿음에 의지하는 방면)에는 항상 모호함이


남아 있기 때문에 혼동이 덜하지 않다고 반박한다면, 나아가 죄인들에게는 자기들의 믿음을 판단할 자격이
없는 사역자 자신이 자기들의 방면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으므로 어떤 위로도, 심지어 냉랭한 위로조차도
없을 것이라고 반박한다면, 이에 대해서는 준비된 답이 있다.

첫째 문제는 죄가 사제에게 알려지기 전에는 사해지지 않는다고 여기는 데 있다. 이에 따르면, 사함이 사
제의 판단에 달려 있게 되므로 누가 방면을 받기에 합당한지에 대한 사려 깊은 분별이 없으면 이러한 과
정 전체가 아무것도 아니고 허무하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이 말하는 권한은 심문과 연계된 재판권이
며 은총과 방면은 이것에 한정된다. 이 부분에 있어서 어떤 확고한 것도 발견되지 않는다. 실로 끝없는 심
연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고백이 순전하지 않다면 은총의 소망 역시 불구가 되기 때문이다. 426)4)

둘째 문제는 사제는 죄인이 자기 악행에 대해서 성실하게 진술하고 있는지 알고 있지 않는 한 판단을 연


기해야 한다는 데 있다.

마지막 문제는 사제들의 극도의 무지함에 있다. 그들 대부분은 구두장이가 밭을 경작하는 것보다 더 이 직
분을 수행하기에 부적합하다. 나머지도 거의 모두 자기들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교황의 방면에 대한 혼돈
과 회의는 그것이 사제라는 인물에 근거할 뿐만 아니라 그의 지식에 의존하여 보고되고, 조사되고, 확인된
사안들에 대해서만 판단하려고 한다는 점도 기인한다.

누군가 이런 유의 선한 교사들에게 이런 식으로 어떤 죄가 사함을 받게 되면 그 후에는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묻는다면, 그들이 올바르게 대답할 수 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은 사
제가 죄의 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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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듣고 난 후 용서한 죄들에 관해서 선언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아직 책임을 면하지 못한 다른 죄들
이 남아 있는 이상 그 선언이 아무 유익도 없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고백하는 자의 편에서는 사제의 사
리분별에 의존하는 반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
기에, 고백하는 자의 치명적인 불안이 그 속박된 양심을 사로잡는다는 사실은 명백해진다. 427)5)

우리가 가르치는 교리는 자유롭고 이 모든 모순을 떠나 있다. 방면은 죄인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를
신뢰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에서 속죄를 신실하게 찾으며, 자기가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기뻐할 때 베
풀어진다는 점에서 조건적이다. 이러하므로 전령의 직분을 감당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시된 것을
공표하기 때문에 잘못을 범할 수 없다. 428)6) 죄인은 자기의 선생이신 그 자신의 일반적인 규범, 곧 불경

3) 425) "claves esse autoritatem discernendi, et exsequutionis potestatem; scientiam accedere consiliarium, et instar
consiliarii ad bonum usum esse." 이에 대한 언급이 앞의 제15절에서 있었다.
4) 426)"quia ubi integra non est confessio, mutila etiam est spes veniae." 이에 대한 언급이 앞의 제18절에서 있었다.
5) 427) "Exparte confitentis quam perniciosa anxietas conscientiam devinctam teneat, hinc patet, quod dum recumbit
in sacerdotis discretionem, ut loquuntur, nihil ex verbo Dei statuere potest,"
6) 428) "Conditionalis enim est absolutio ut confidat peccator sibi propitium esse Deum, modo sincere in Christi
sacrificio expiationem quaerat, et acquiescat oblatae sibi gratiae, Ita errare non potest, qui pro officio praeconis,
quod sibi ex Dei verbo dictatum est, promulgat."
건하게도 교황권에 의해서 멸시를 받은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 9:29 참조. 8:13)라는 규범에 따라 그리
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간단한 조건이 적용될 때 실로 참되고 분명한 방면을 누릴 수있다.

23. 하나님에 대한 고백만으로 불충분하다고 여기며은총을 쪼개는 사술

나는 그들이 어떻게 성경의 가르침을 열쇠의 권한과 혼합시키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논의한다고 약
속한 적이 있다. 이는 교회의 통치를 다루는 부분에 429)7) 더욱 적합한 사안이라고 여겨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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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일부는 복음의 선포에 관련
되고, 일부는 출교에 관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마 16:19:18:15-18 요. 20:23) 교황주의자들은 이를 전
혀 앞뒤가 맞지 않게 왜곡시켜 청죄 고백과 비밀 고백을 430)8) 합리화하는 근거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나
는 독자들이 이를 상기하길 바란다. 그들은 사제들이 자기들에 의해 인정된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사용된
푸는 권리가 사도들에게 부여되었다고 반론을 제기하지만, 이 원리는 거짓되고 어리석은 것임이 쉽게 밝혀
진다. 왜냐하면 믿음에 응하여 베풀어지는 방면은 값없는 복음의 약속으로부터 취해진 은총에 대한 증언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431)9) 그러나 교회의 권징 과정에서 행해지는 다른 종류의 고백은 비밀스러운 죄
와는 전혀 무관하며 교회에 거치는 공적인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한 본보기와 관련된다.

그러나 그들은 사제가 검찰관으로 입회하지 않는 이상 오직 하나님께만 고백하거나 평신도들에게 고백하


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여기저기서 증언들을 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들의 부지
런함은 가증하고 욕되다. 고대 교부들이 죄인들에게 그들의 목사들 앞에서 자기 짐을 풀어놓으라고 권면했
을 때 이는 죄를 낱낱이 낭송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고백을 당시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롬바르두스
(Lombardus)와 그 아류들은 자기 변명을 일삼아 단순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속이기 위하여 자의적으로
위에 탐닉한 듯이 보인다.

실로 그들도 푸는 것은 항상 회개에 수반하는 것이므로 아직 죄인이 고백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회개하


여 변화를 받은 이상 이제는 어떤 속박도 남아 있지 않다고 올바로 인정한다. 이런 이유로 사제는 '죄를
용서한다'라고 하기보다 '죄가 용서되었다'라고 공표하고 선언한다.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으니, 그들은 '
선언한다'라는 단어를 교활하게 왜곡시켜 교리의 자리에 의식을 끌어들이는 끔찍한 오류를 범한다. 그러면
서 이미 하나님 앞에서 은총을 얻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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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은 교회의 면전에서도 방면이 되었다고 덧붙인다. 이러한 혼란을 겪는 가운데서, 그들은 우리가 이미 말
했던 일반적인 권징 과정에서 하는 고백의 자리에 각 개인이 고유한 용도로 하는 고백을 자의적으로 끌고
들어온다. 그러나 공적인 고백은 심각하면서도 지적되어 알려진 죄에 해당하는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한 것
이므로 사적인 고백과 구별되어야 한다.

그들은 이러한 궁지에 몰리자 잠시 후 자기들의 그나마 남은 절제를 타락시키고 부패하게 만드는 또 다른
사죄의 방식을 덧붙인다. 다름 아닌 형벌과 보속을 부과하는 것 432)10)이다. 433)11) 이로써 그들은 하나
님이 모든 곳에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견실한 것을 자기들의 희생제물들로써 둘로 나누는 권리를 자기들이

7) 429) Institutio. 4.12.1-13.


8) 430) "ad auricularem secretam confessionem,"
9) 431) "quia absolutio quae fidei servit, nihil aliud est quam testimonium veniae ex gratuita evangelii promissione
sumptum,"
10) 432) "cum iniunctione poenae et satisfactionis,"
11) 433) Lombard, Sentences IV, xvil. 4, 5; IV, xvill. 6, 7 (MPL 192, 882f, 887f), dist, xvii. 여기의 많은 인용은 다음을 출처
로 한다. Pseudo-Augustine, De vera et falsa poenitentia viii, 22 (MPL 40, 1120f; Smits II. 263). Quot, Battles tr., n,
48.
가졌다고 오만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순히 회개와 믿음을 요구하시므로 이러한 분할이나 항변
은 극히 불경한 것이다. 이는 마치 사제가 스스로 호민관의 배역을 맡아서 434)12) 하나님과 중재를 한답
시고 거들먹거리면서 어떤 죄인이든 간에 호민관의 자리 앞에서 꿇어 엎드려 매를 맞지 아니하면 하나님
이 순전히 후하심을 베푸셔서 은혜로 받아들이는 자리에 서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12) 434)"tribuni personam sustinens." 고대 로마에서 호민관은 원로원과 민회에서 제안된 안건에 대한중재권을 지녔다. 이는 거부
권을 포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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