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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교회 금요말씀

기독교강요 강설(103)

범위: 3권 3장 11-12절

제목: 성도 안에 거하는 죄

본문: 로마서 7:15-21

11. 중생한 자들은 죄의 지배권을 벗어났으나 여전히 율법에 불순종하는 죄를 지음 

하나님은 세례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약속하시며, 그것을 택함 받은 자들 가운데서 이루는 교회를 모든 죄


로부터 깨끗하게 하신다고 일컬어지신다(엡 5: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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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죄의 질료 자체보다 죄책과269)52 관계된다. 실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중생시키심으로써 이


일을 수행하시는바, 그 결과 죄의 지배권이 270)53 그들 가운데서 소멸된다. 왜냐하면 성령의 능력이 압도
적으로 작용하여 그들이 이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고 승리자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는 지배하지 못
할 뿐 그들 가운데 여전히 거주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롬 6:6) 죄의 법이 하나님의 자녀들 안
에서 폐지되었으나(참조, 롬8:2) 그 자취들은 여전히 남아 있어, 비록 그들을 지배하지는 않으나, 그들이
자기들의 연약함을 의식하고 겸손해지도록 한다. 진실로 우리는 그러한 자취들이, 마치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성도들에게 돌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러한 일이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일
어났기에, 그렇지 않았다면 의당 죄인들이며 하나님 앞에서 죄의 책임이 있었을 성도들이 죄의 책임으로부
터 자유롭게 되었다고 동시에 주장한다. 

우리가 이러한 견해를 확정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사안에 대한 명백한 증언들이
성경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선포하고 있는 것보다 더 분명한 증언을
찾으려고 들 것인가? 첫째, 사도는 이곳에서 중생된 사람의 인격에 대해서54 말한다(롬 7:6). 이에 대해서
우리는 다른 곳에서 272)55 이미 다루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확고한 논리로 이를 밝히 설명하고 있다.
273)56 그가 "악"과 "죄"라는 말을 274)57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나는 침묵하겠다. 우리에게 맞서
서 아우성치는 자들은 이 말들에 대해서 트집을 잡고자 원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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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라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것인가? 누가 의를 가로막는 방해거리가 죄라는 사실을 부인할 것인가? 영적
인 비참함이 있는 곳에는 죄가 내재한다는 것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그러나 이 병에 관한 모든 것이 바울
에 의해서 선포된다. 

둘째, 우리는 이 문제 전부를 간략하게 다룰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율법에서 취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
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마 22:37)라는 명령을
받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 영혼의 모든 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해야 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는 헛된 생각에 이끌려서 마음속에 작은 욕구라도 275)58 그릇되게 품거나 그
것에 동의하는 자들은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 명령을 성취할 수 없음이 확실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갑작스런 충동에 영향을 받고, 지각을 좇아 이해하며, 마음으로 생각을 품는 일은 영혼의 기능들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그것들이 헛되고 사악한 생각들을 문 열고 받아들인다면 이는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모든 육체의 욕정을 죄로 인정하지 않고 정욕을 일게 하는 질병을 그저 '부싯깃'이라고 칭


할 뿐인 자들은 율법에 대한 위반이 죄라는 사실을 필히 부인한다. 

12. 죄는 최초의 인류에게 부여된 욕구가 아니라 타락한 인류의 무질서한 욕정임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람이 본성상 사로잡히게 된 모든 욕정이 본성의 조성자이신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부여되었으므로 그 전부가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 불합리하게 보일 것이다. 276)59 이에 대해서 나는 이렇
게 대답한다. 우리는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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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님이 처음 창조의 때에 사람들에게 새겨 주신 천품에 속한 욕구들을277)60 저주하는 것이 아니다. 인성


자체를 지워 내지 않는 한 이러한 것들을 지워 낼 도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통
치 규범에 맞서 다투는 무례하고 방종한 충동들을 278)61 저주하는 것이다. 참으로 이제 사람의 모든 재
능이 본성의 타락으로 인하여 너무나 사악해지고 부패하게 되어서 그의 모든 행위는 영구적인 무질서(ατα
ξια)와 무절조를 279)62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무절제는 280)63 욕구들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욕구들을 사악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혹 당신이 이 사안을 몇몇 말로 요약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악한 욕정들 모두가 사람들에게 속한다고 가


르치며 그 욕정들에, 그것들이 본성적이라는 점에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무질서하기 때문에, 죄에 대한 책
임을 부과한다. 과연 그것들이 무질서한 이유는 부패하고 오염된 본성으로부터는 순수한 것도 신실한 것도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281)64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보면 이러한 가르침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과 그리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는 펠


라기우스주의자들이 갖은 애를 써서 자기를 시달리게 한 반감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여 때때로 '죄'라는 말
을 사용하기를 꺼려하였다. 이 점을 고려한다고 할지라도, 성도들 안에 죄의 법은 여전히 남아 있고 죄책
만 제거된다고 쓴 그의 글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뜻이 우리의 뜻과는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충분
히 지적해 준다. 28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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