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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교회) 기독교강요 강설 (120), 3권 4장 32-33절, 징벌과 징계의 차이
(양재교회) 기독교강요 강설 (120), 3권 4장 32-33절, 징벌과 징계의 차이
기독교강요 강설(120)
범위: 3권 4장 32-33절
본문: 잠언 3:11-12
32. 첫 번째 차이점 : 징벌은 저주와 진노를 드러내나 징계는 축복과 사랑을 증언함
불경건한 자들이 현세의 삶에서 겪는 고통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일종의 지옥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그들은 그곳에서부터 그들의 영원한 저주를 멀리 떨어져 미리 바라보고 있다고 우리에게 묘사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결코 이것 때문에 그들 자신을 개선시키거나 어떤 유익을 얻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서막을 통하여 종국적으로 그들이 머물게 될 무시무시한 지옥을 준비하게 된다.
여호와는 징계하시는 분으로서 자기 종들을 매섭게 징계하시지만 그들을 죽음에 넘기지는 않으신다(시
118:18). 그러므로 그들은 그의 막대기로 맞는 것이 자기들에게 선하며 그들의 참교육을 증진시킨다고 고
백한다(시 11971). 우리가 모든 곳에서 읽게 되듯이 성도들은 평온한 마음으로 그러한 형벌들을 받아들였
다. 그 가운데 이 첫 번째 종류의 채찍을 피하게 해 달라고 항상 힘을 다해 기도했다. 예레미야는 말한다.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가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
하나이다 주를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
으소서”(렘 10:24-25), 나아가 다윗은 말한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
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시 6:1 참조 시 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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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71) "Ubi admonet non solum nihil obstrependo proficere, qui iuste plectuntur, sed doloris
mitigationem suppetere fidelibus, consilium Dei reputando," 472) Augustine, Enchiridion vii, 27 (MPL
40. 245; ed. O. Scheel, p. 18; tr. LCC VII. 355), Quot. Battles tron. 68.
가 알듯이, 그는 영원히 그것을 욕되게 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이는 형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계획이나
정서가 아니라, 엄한 형벌을 받는 자들이면 누구나 경험하는 심한 고통을 의식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는 신자들에게 평소의 준엄함을 보이시며 찌르실 뿐만 아니라 때때로 그들이 보기에 자기
들이 지옥의 저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여겨지게 될 만큼 큰 상처를 입히신다. 그리하여
자기의 진노가 그들에게 마땅함과 그들이 자기들의 악행에 대해서 언짢아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
하여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며, 근심 가운데서도 서둘러 은총을 간구하는 것이 타당함을 증언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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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으로 단련시키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는 이러한 특별한 말씀들을 통하여 자기의 절제와 온유를 제시
하시는 동시에 하나님의 손이 자기에 거슬러 맞선다는 것을 느끼는 자들은 극도의 치명적인 공포로 혼란
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신다. 선지자를 통하여 그는 자기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온유하게 징계하
시려고 얼마나 많이 마음을 쏟으셨는지를 드러내신다. 불 가운데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
니하고 적용 사 48:10)라고 그는 말씀하신다. 만약 은처럼 하셨다면 전부 다 소진되고 말았을 것이다(참
조, 사43:2),여호와는 징계가 자기 백성을 정결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시면서도 그것이 자기 백성
을 과도하게 지치게 하지 않도록 조절하신다고 덧붙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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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는 이러한 증거들을 무관심하게 지나쳤다고 해서 그 무지가 형벌을 모면하
는 구실은 될 수 없다. 그들은 처벌을 받아도 더 나은 마음으로 돌이키지 않으며 단지 자기들이 빠진 큰
악 가운데서 하나님을 심판관이시며 보복자로 깨닫게 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매를 맞는 것은 그를 거역한 범죄의 대가로 학대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
로 회개에 이르게끔 인도함을 받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이는 지나간 시간보다 오히려 미래와 관련된다고
우리는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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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하나님은 사울에게서 왕국을 빼앗으심으로 그에게 징벌을 내리셨고(삼상 15:23) 다윗에게서 그의
어린 아들을 취하심으로 그를 질책하여 개선시키셨다(삼하 12:18). 같은 의미로 바울의 다음 말씀도 받아
들여져야 한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
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즉 하나님의 자녀가 하늘 아버지의 손으로 고통을 받게 될 때 이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형벌이 아니라 우리가 가르침을 받게 되는 징계일 따름이다. 476)5)
이 사안에 있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분명히 우리와 함께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징계가 내려지는
형벌들이라도 다양하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성도들에게는 그것들이 죄사함에 뒤따르는 투쟁과
훈련이 되는 반면, 유기된 자들에게는 죄사함이 없이 당하는 불의에 대한 형벌이 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다윗과 경건한 사람들에게 가해진 형벌들을 상기시키고 난 후에, 그들은 이러한 일종의 낮아짐을 통하여
자기들의 경건을 훈련시키거나 단련시키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고 말한다. 477)6)
참으로 이사야가 유대 백성이 여호와의 손으로 완전한 징계를 받아 불법의 사함을 받았다고 전할 때(사
402) 죄가 사해지는 은총이 형벌에 대한 지불에 의지하고 있음을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말하
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이미 충분한 형벌로 고초를 겪었다. 그 무게와 그 수로 말미암아 너희는 오랫동
안 근심과 슬픔에 젖어 이미 쇠약해졌으므로 이제는 너희가 충만한 자비의 소식을 듣고 너희 영혼이 즐거
2) 473) Pseudo-Chrysostom, Sermode poenitentia et confessione, in Opera, ed, Erasmus (Basel, 1530), V. 514 (1547 ed..
V. 907), Quot, Battles tr.. n. 69.
3) 474) Augustine, Psalms, Ps. 102 (Latin, Ps, 101), 20 (MPL 37, 1332; tr. NPNF VIII. 500); Ps. 139 (Latin, PS. 138), 15
(MPL 37. 1793; tr. LF Psalms VI. 204), Quot, Battles tr, n, 70,
4) 475) "non alio consilio Deum punire suam ecclesiam nisi ut subacta resipiscat,"
5) 476) "dum nos filii Dei manu coelestis patris affligimur, non haec poena est qua confundamur, sed castigatio
duntaxat qua erudiamur,"
6) 477) Augustine, On the Merits and Remission of Sins II. xxxiii. 53-xxxiv. 56 (MPL 44, 182ff; tr, NPNF V. 65-67),
Quot, Battles tr.. n. 71.
워하며 나를 아버지로 느낄 시간이다."
여기에 하나님은 아버지의 인격을 입으시고 자기 자녀들에게 한층 더 가혹한 형벌을 내리지 않으실 수 없
었던 자기의 의로운 엄정함에 대해 심지어 후회한다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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