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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4), 3 3 13-15
( ) (104), 3 3 13-15
기독교강요 강설(104)
범위: 3권 3장 13-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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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욕이 죄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자들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약 1:15)라는 야고보의 말씀을 들어
우리의 입장에 반대하려고 든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은 어떠한 반론에 의해서도 반박되지 않는다. 야고보
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오직 나쁜 행위들과 실제적인 죄들에만 관련된다. 이렇게 이해하지 않는다
면, 심지어 악한 의지조차도 죄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여기에서 치욕스런 일들과
사악한 범죄들을 욕심에서 난 것들'이라고 부르고, 그것들에게 '죄'라는 이름을 돌리고 있음을 볼 때, 정욕
을 품는 것은 나쁜 일이며 하나님 앞에서 저주스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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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드러내 놓고 거만하게 이러한 자기들의 독단적 교리를 떠벌리지 않았다면, 사람의 마음이 이런 광
기에 빠져든다는 것을 나는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사안은 참으로 흉측스럽다. 자기들의 마음을 현혹
시켜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는 이런 자들의 이토록 불경스러운 무모함은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부정직과 정직, 의와 불의, 선과 악, 덕과 악 사이의 모든 선택을 포기할 것인가? "이런 구별은 옛
날 아담의 저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간음과 순결, 순전함과 간사함, 진리와 거짓, 정당한 거래와 강취 사이에는 어떤 구
별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쓸데없는 두려움은 버려라. 성령은 당신이, 그가 행하시는 대로 확실
하고 대담하게 자기를 드리기만 한다면 어떤 악도 당신에게 명령하지 않으실 것이다."287)69 이러한 괴상
망측함에 누가 놀라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욕에 눈이 멀어 제정신을 잃어버리고 일반 상식을
내버린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대중적인 철학이 288)70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위하여 어떤 그리스도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가? 그들은 어떤 성령을 분출하고 있는
가? 우리는 한 분 그리스도와 선지자들이 찬미한 한 분 그의 영을 인정한다. 복음은 그 영을 우리에게 계
시된 대로 선포한다. 그 영에 대해서 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을 우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 영은 살
인, 간음, 명정(술에 취함, 자만, 분쟁, 탐욕, 사기를 보증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 정숙, 술에 취하지 않
음, 절도, 화평, 절제, 진리를 조성하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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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성령이 우리의 성화를 위하여 부여되심으로 우리는 불결과 더러움으로부터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의
의를 순종하는 데 이른다. 이러한 순종이 제대로 되려면 저 사람들이 고삐를 느슨하게 풀어 주려 했던 정
욕을 먼저 길들이고 굴복시켜야 한다.
둘째, 우리는 성령에 의한 성화로 인하여 깨끗하게 되지만, 우리의 몸덩어리에 갇혀 있는 한에 있어서는
많은 악과 연약함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므로 완전과는 아주 동떨어진 우리는 항상 앞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며, 악의 덫에 걸려 있지만 그것과 날마다 씨름해야 한다.
이로부터 귀결되는바, 우리는 나태함과 안일함을 깨뜨리고 경각심을 가지고 마음을 집중해서 부지불식간에
우리 육체의 음모에 압도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도보다 더 많은 진보를 이루었다고 자만할 수 없는
우리로서는 마땅히 이러해야 할 것이다. 그는 여전히 "사탄의 사자"(고후 12:7)에 의해서 괴롭힘을 당하면
서도 그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육신 가운데서
일어나는 육신과 영혼의 분열을 가식없이 표현했다(참조, 롬 7:6-25) 28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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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변증이 있다. 본문의 의도는 죄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자 하는 것도, 자기가 범법한 것을 부
인하고자 하는 것도, 자기의 잘못을 희석시키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원인을 내세워 명분을
삼고자 하는 확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간구하는 가운데 이르고자 하는 정
화이다. 마치 성격이 모나지 않은 아이들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인정하며 용서를 빌고 또 용서를 얻기 위
하여 자기들이 자기 부모에 대하여 마땅히 드려야 할 경의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음을 증언하는 것과 같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들은 자기들이 의롭고 무죄하다는 것을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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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함'은 죄인이 자기의 사악함과 하나님에 대한 배은망덕을 인정하는 가운데, 자기에 대해서 내적으로 신
음하고, 자기의 잘못을 지적하며, 자기에 대해서 분노할 때 뒤따라 생긴다.
'두려움은 우리에게 돌아오는 마땅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엄격한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이 두 가지 모두를 우리가 마음속에 헤아릴 때마다 생기는 동요를 의미한다. 그때 우리는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고 이후에는 우리를 더욱 신중하게 만드는 묘한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앞에서 말한 근심이 두려움으로부터 생긴다고 볼 때, 이 둘은 함께 결합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내가 보기에, 사도가 사용한 '사모'라는 말은 우리가 의무를 부지런히 이행하고 명민하게 깨어 있어서, 우
리 자신들의 범죄들에 대한 인식이 필히 낳게 되는, 순종을 다하려 것을 의미한다.
사도는 계속해서 여기에 '열심'을 직접 관련시킨다. 이는 우리가 던지는, "나는 무엇을 해 왔는가?" "만약
하나님의 자비로 구출되지 않았다면 나는 어디로 빠져들어 갔을까?" 등과 같은 질문들이 우리를 찌르는
가시들이 되어 파고들 때 일어나는 열정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징벌'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향하여 더 엄격해지고 우리 자신의 죄들에 대해
서 더욱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수록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더 많은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
를 소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겁에 질린 영혼이 그 자체로 스스로에게 형벌을 가하
는 보복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소망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말할 나위도 없이 경건한
사람들은 부끄러움, 혼란, 신음,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 그리고 범죄들을 진지하게 인식함으로 생겨나는
다른 정서들이 어떤 종류의 형벌들인지 경험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절도를 유지하여 슬픔이 우리를 집어삼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두려워
하는 양심이 파멸하여 절망에 빠져드는 것보다 용이한 일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계교를
사용해서 사탄은 하나님을 무서워하여 쓰러진 사람들을 보게 되면 그들을 누구나 할 것 없이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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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슬픔의 소용돌이로 점점 더 잠기게 해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끝내는 겸손에 이르게 하고
은총에 대한 소망으로부터 떠나지 않게 하는 그런 두려움은 결코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우리는 사도의 명령에 부합되게 죄인으로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염려하기는 하되 지나친 공포에 중압
되어 피곤하며 낙심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히 12:3). 왜냐하면 회개를 통하여 우리를 자기 자
신에게로 부르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도망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사안에 대한 베르나르두스의 충고는 또한 유익하다. "죄로 말미암은 슬픔은, 그것이 계속되지만 않는다
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때때로 발길을 돌려 괴롭고 쓰라린 여러분의 길에 대한 회상을 뒤로하
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고요한 기억을 안은 고원으로 나아가기를 청한다. 쑥에 꿀을 섞자 잘 맞게 섞어
달게 해서 마시면 건강에 좋은 쓴맛으로 구원이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겸손히 자신을 성
찰하려거든 또한 여호와를 그의 선하심 가운데 성찰하라." 29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