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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교회 금요말씀

기독교강요 강설(108)
범위: 3권 3장 24-25절
제목: 회개에 앞서는 은총
본문: 고린도후서 2:14-17

24. 은총이 선행하지 않는 거짓 회개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는 주님의 자비를 간청하면서 도피처를 찾아 도망치는 자들에게 전적으로 사함이 거
절된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고 그의 관용에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쉽게 답할 수 있다.
여기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께로 돌이키는 자들에게 은총이 부인된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기들의 배은
망덕으로 인하여 영원히 눈이 먼 자들이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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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의로운 심판에 의해 처벌을 받은 후 다시 일어나 회개에 이르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339)1) 말하고 있다.
에서의 예는 이에 아주 잘 부합된다. 사도는 이에 대해서 에서가 자기의 잃어버린 상속권을 회복하려고 눈
물과 통곡으로 애썼으나 그것을 얻지 못하였다고 지적한다(히 12:16-17). 이는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슥 7:13)라는 선지자의 경고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런 식의 말씀들은 참 회심이나 하나님에 대한 기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불경건한 자들이 이전에는
자기들의 모든 선이 여호와의 도움에 달렸다는 사실을 태연하게 무시했으나 극도의 난국에 빠지게 될 때
비로소 그 사실을 인식하며 가질 수밖에 없는 불안을 표현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도움을 주님께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들에게서 떠나가고 없다고 신음하고 있을 뿐이다. 선지자가 '부름'을 통해서, 사도
가 '눈물'을 통해서 제시하는 것은 다름아닌 절망에 빠진 사악한 자들의 마음을 초조하게 하고 쑤시는 저
무서운 고통이다.
우리는 이를 깊이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선지자를 통하여 죄인이 회개하면 즉시 자비를
베푸신다고 선포하시는 하나님은 자기 자신과 다투고 계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드러날 것이다(겔
18:21-22). 내가 이미 말했던 바와 같이, 340)2)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앞서지 않으면 더 좋게
변화될 수 없음이 확실하다.
자기를 부르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속임이 없다는 것 역시 확실하다. 그러나 유기된 자들은
자기들의 악행에 대한 처방을 얻으려면 하나님을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까이 오시면 도망치는데,
그들을 산란하게 하는 그 눈먼 고통을 '회심'과 '기도'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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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하나님은 거짓 회개를 받지 아니하시고 이용하심
여기서 우리는 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사도는 거짓 회개가 341)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전하
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아합은 은총을 얻고 자기에게 부과된 형벌을 모면했는가? 확실히 그가 행
한 만년(晩年)의 행실을 보면 갑작스럽게 닥친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외에는 없지 않는가? (왕상
21:28-29)실로 그는 굵은 베를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땅에 누웠으며(왕상 21:27) 성경이 그에 대해서 증
언하듯이,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였다. 그러나 자기 마음이 여전히 완고하고 악의에 부풀어 있는 한, 옷을
찢는다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돌이켜 그에게 관용을 베푸셨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위선자들은 때때로 이렇듯 얼마간 용서를 받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여전히 그들 위
에 머문다. 이는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에게 본을 보이려는 뜻에서이다. 아합에게 형벌이 경감

1) 339) "omnino negat posse ad poenitentiam surgere: quod scilicet aeterna caecitate ob suam
ingratitudinem iusto Dei iudicio percussi sint,"
2) 340) 앞의 제21절을 칭한다.
3) 341) "ficta poenitentia,"
되었다고 해서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 그것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뿐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저주는 감춰지기는 했지만 그의 집에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그는 영원한 파멸
로 중단 없이 나아갔다.
에서에게서도 동일한 경우가 발견된다. 그는 배제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인 축복이 그의 눈물로 인
하여 용인되었다(창 27:38-40).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영적인 기업은 그 형제들 가운데 오
직 하나의 손에만 쥐어지게 되었다. 에서가 제외된 가운데 야곱이 택함을 받게 되었을 때에 상속권이 단절
된 에서에게는 하나님의 자비가 차단되었다. 그러나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창 27:28)으로 살찌게 되
는, 짐승과 같은 인간에게 부여된 위로만 남게 되었다. 342)4)
내가 지금 말한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본으로 여겨져야 하므로,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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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기울이고 노력을 다하여 더욱 열심히 신실한 회개에 이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참
되게 진심으로 하나님께 회심하게 될 때 심지어 무가치한 자들이라도 그들이 자기 자신들에 대해서 일말
의 실망이라도 보이면 그들에게 관용을 미치게 하시는 하나님이 기꺼이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이러한 일로 배우는 바는, 강철 심장 못지않은 뻔뻔한 이마를 지니고 무서운 심판을 멸시하여
아무것도 아닌 유희와 같이 여기는 완고한 자들에게는 그 심판이 미리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
식으로 하나님은 자주 이스라엘의 자녀들에게 손을 펼치셔서 비록 그들의 부르짖음이 거짓되고 믿을 수
없는 그들의 마음이 이중적이라 하더라도(참조, 시 78:36-37) 그들의 재난을 경감시켜 주셨다. 그러나 그
가 시편에서 한탄하신 바와 같이 그들은 즉시 그들 자신의 천성으로 되돌아갔다(시78:57).
이렇듯 하나님은 이토록 친밀한 편의를 베푸셔서 그들이 진지한 회심에 이르게 하시고자 원하셨거나 아니
면 그들이 변명할 수 없게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얼마 동안 형벌을 사하신다고 해서 그것을 영
구적인 법으로 자기에게 부과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는 때때로 더욱 엄격하게 위선자들에게 맞서 일어나
셔서 그들에 대한 형벌을 배로 부과하신다. 이는 그가 거짓을 얼마나 미워하는지를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내가 말했듯이, 그는 몇몇 본들을 통하여서 기꺼이 은총을 베풀고자 하시는 자기의 성향을 드러내
심으로써 그것들로 인해서 경건한 사람들이 용기를 얻어 그들 자신의 삶을 교정하도록 하신다. 그리고 박
차를 가하면 뻔뻔스럽게 발길질을 하는 자들의 교만을 더욱 가중히 저주받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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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42) 칼빈은 여기와 마찬가지로 창27:38-39의 주석에서도 70인역(LXX) 라틴어역(Vulgata)을 따라서


이삭이야곱에게 한 축복과 에서에게 한 축복의 순서를 맞바꾸어 다룬다. 그러나 히 11:20 의 주석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Quot, Battles tr.. n.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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