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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당위성:

중세 후기 유명론자 가브리엘 비엘의 “facere quod in se est” 교리에 반(反)하여

문병호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1. 서론: 과제와 접근

루터에 의해서 점화되고 칼빈에 의해서 일단락된 후 다음 세대로 전승 · 심화


된 종교개혁은, 무엇보다 그 방법론에 있어서, 원전(原典)으로 돌아가자는(ad fontes)
서구 르네상스 운동의 연장선에서 이해된다.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서 단지 고대 정신이나 사상의 재생(re-naissance)에 그치지 않는 바, 그 맥이 ‘과거’
자체가 아니라 ‘과거의 정통’에 닿아 있다. 이런 측면에서 종교개혁은 과거에 잇대고
자 하는 치열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와의 단절이라는 긴급한 과제를 안을 수
밖에 없었다.
사제중보주의에 천착한 중세교회는 그리스도의 의 외에 교회의 의가 성도의
온전한 구원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여기고 그 근거를 마련하고자 마리아론(Mariology)
을 수립해갔다. 이는 교황의 수위권(首位權, primatus)에 대한 명분을 찾기 위한 궁
극적인 방책이었다. 마리아론은 마리아가 영원한 동정녀(virgo sempiterna)로서 주님
께 주입한 은혜를 동일하게 교회에도 주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서 주님의 자리에
교회를 앉히고자 한 발상의 발로였다. 이러한 전통은 보나벤투라(Bonaventura,
1218?-1274)를 거쳐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6-1308)의 때에 일대 전기(轉
機)를 마련했던 프란치스칸 학파(the Franciscan School)의 주의주의(主意主義)를
계승하여 새로운 길(via moderna)을 모색한, 오컴(Occam of William, 1285-1349)
을 필두로 제창된 중세 후기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에 있어서 더욱 노골적으로
지지되었다. 종교개혁이 이에 대한 단절을 표명하였음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1)
그런데 종교개혁사와 그 전사(前史)를 다룸에 있어서 발군의 학자로 평가받아
온 오버만(Heiko A. Oberman, 1930-2001)이 유명론자로서 초창기 튀빙겐 대학교의
교수였던 가브리엘 비엘(Gabriel Biel, 1415?-1495)을 자신의 동명의 책에서 “중세
신학의 수확(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이라고 부르면서 그가 추구한 사
상은 단지 유명론이라는 특이성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 1090-1153)와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등을 섭렵하는
당대 총합적인 것으로서 단지 중세적이라고만 치부될 수 없으며 그 가운데 면면히 흐
르는 어거스틴 신학의 정통적 맥락이 올바로 읽혀져야 한다는 점을 부각시키면서부
터, 중세와 종교개혁의 연속성(continuity)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환기되었다.2) 그렇

1) Cf. Adolph Harnack, History of Dogma, vol. 6 and vol. 7, tr. Neil Buchanan (New York:
Dover Publication, 1961), 6.54-83, 174-200.
2) Heiko A.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Gabriel Biel and Late Medieval
Nominalism (Durham, NC: Labyrinth Press, 1983, reprint of Cambridge, MA: Harv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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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이러한 인식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으니, 이미 그 한 세기 전에 역사 신학
자 샤프(Philip Schaff, 1819-1893)는 비엘을 “마지막 스콜라 신학자(the last of
the Schoolmen)”라고 부르면서3) 오컴과 그의 신학이 종교개혁자들과 현대 철학에
수용되었다는 점을 강조한 적이 있었다.4) 심지어 샤프는 “만약 루터가 14세기에 살았
다면 한 사람의 오컴이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라고까지 하였다.5)
중세 말기의 유명론이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을 일의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예컨대 오버만은, 비엘에 의해서 신학적으로 추구된 “하나님은 사람이 최선을 다할
때 그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거부하지 않으신다(facientibus quod in se est Deus
non denegat gratiam)”는 모토와 관련하여—이는 “facere quod in se est”로 약칭
된다—루터가 이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전체적으로 그것에 대한 부정적인 입
장을 시종 견지했다고 주장하는 반면,6) 특히 칭의론과 관련하여 이 분야에 조예가 깊
은 맥그라쓰(Alster E. McGrath)는 루터의 십자가신학(theologia crucis)을 다룬 자
신의 책에서 루터가 이러한 입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실상 그
는 일생 유명론의 지지자로서 남아 있었다고 하여 다소 중립적인 입장에 서 있다.7)
이러한 입장차는 무엇으로부터 연원하는가? 그것은 유명론에 대한 관점의 차
이 때문인가 아니면 종교개혁에 대한 관점의 차이 때문인가? 이에 대한 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역사가의 평가는 각각의 주관을 넘어설 수 없으며, 역사에 대한
각각의 잣대 역시 단지 객관적일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본고에서
필자는 가히 잠자던 비엘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었다고 여겨지는 오버만이 그의 사상
을 어떻게 정리하고 있는지를 고찰한 후 관련된 부분에 대한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비판적 입장을 일고하고자 한다. 본고의 대부분은 오버만의 책 “중세
신학의 수확”을 통하여 비엘의 “facere quod in se est”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는데
할애된다. 비엘의 원자료는 본 오버만의 책에 인용된 것에 한정한다. 본고의 성격상,
그로써 충분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본 주제는 실재론과 유명론의 경계를 확정하
는 하나님의 의지와 이성의 관계, 기독론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의 의
미, 구원론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공로의 상합성(相合性) 혹은 상보성
(相補性), 교회의 본질과 성례의 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핵심 사안이 된다. 그러
므로 이에 대한 신학적 일별은 중세 말기의 유명론이 과연 종교개혁이 여명이라고 여

University Press, 1963), 특히, 5-7.


3)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6, The Middle Ages from Boniface VIII
to the Protestant Reformation 1294-1517 (Peabody, MA: Hendrickson Publishers, 1996,
reprinting of the 1910 first edition), 188.
4)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6.190-191.
5)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6.193.
6) Heiko A. Oberman, The Dawn of the Reformation: Essays in Late Medieval and Early
Reformation Thought (Grand Rapids: Eerdmans, 1992), 91-92, 97-103.
7) Alister E. McGrath, Luther’s Theology of the Cross (Oxford, UK: Blackwell, 1985), 36-40;
Ibid., “Mira et nova deffinitio iustitiae. Luther and Scholastic Doctrines of Justification,”
Archiv für Reformationsgeschichte 74 (1983): 37-60; Heiko A. Oberman, “Facientibus Quod
in se est Deus non Denegat Gratiam: Robert Holcot O. P. and the Beginnings of Luther’s
Theology,” Harvard Theological Review 55 (1962): 317-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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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질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합 답을 찾는데 주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2. 하나님의 의지(voluntas)와 이성(ratio): 절대적 능력(絶對的 能力,


potentia absoluta)과 정서적 능력(定序的 能力, potentia ordinata)

절대적 능력과 정서적 능력에 대한 고찰이 비엘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결정적


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믿음(fides)과 이해(intellectus)의 관계 곧 신
학과 철학의 관계를 형상적으로 드러낼 뿐만 아니라 원죄, 구속, 화목 등의 신학적
주제들의 실체적인 의미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에 대한 고찰은 우리의 순
수한 본성 상태(“ex puris naturalibus”)가 어떠한지를 돌아보게 한다.8) 정서적 능력
은9) 하나님이 세상을 자신과 자신의 피조물과 맺은 언약에 따라서10) 조성하고 유지
하는 능력으로서 자연과 은총의 질서의 항구성과 일관성을 담보한다. 반면 절대적 능
력은 하나님이 자기모순의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에 있어서—곧 오직 자기 자신의 본
성의 한계에 의해서만 제한되는 가운데—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칭한다.11)
비엘은 이러한 이중적 능력에 대해서 칭의의 과정에서12) 작용하는 주입된 은
혜(gratia infusa)와 성례의 효과를 다룰 때 특별히 주목하는 바, 오컴이 그러하듯이,
그 논지는 이러하다. 하나님은 자신이 자유롭게 수립한 법에 따라 무엇을 행하시는
능력(정서적 능력)과 그가 그렇게 원하지 않는 일을 하실 수 있는 능력(절대적 능력)
을 모두 가지고 계시다. 이 두 능력을 분리시켜 볼 수는 없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필연적으로(necessarily) 행하시지 않고 많은 일을 필요에 따라서(contingently)—곧
적절하게—행하신다. 하나님의 본질 외에 모든 것은 필연적인 무엇이 아니라 적절한
무엇이다. 사람은 이러한 이중적 능력 아래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와 하나님 앞에서
마땅하게—자기 공로로(meritoriously)—행할 수 없는 상태의 중간에 놓인 나그네
(viator)로서 저주받은 자(damnabilis)이자 복 받은 자(beatificabilis)로서 살아가게
된다.13)
하나님은 절대적 능력 가운데 자기 자신에 모순되지 않는 한 모든 일을 행하
실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 자신에게 모순되는 “비난을 돌릴 수 있는 악
(malum culpae)”인가? 하나님은 이차적인 원인에 구애받지 않고 뜻하시며 그 뜻을
이루신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법—그것이 영원한 법이든, 자연법이든, 실정법이든—

8)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30.


9) 필자가 “potentia ordinata”를 “정서(定序)적 능력”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정(定)하심
과 질서(序)라는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10) Cf. David C. Steinmetz, Calvin in Context (Oxford, UK: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43: “정서적 능력에 있어서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에 충실함이 중세 유명론의 핵심 주제이다.”
11) Richard A. Muller, Dictionary of Latin and Greek Theological Terms: Drawn Principally
from Protestant Scholastic Theology (Grand Rapids: Baker, 1985), 231-232.
12) 로마 가톨릭은 “iustificatio”를 “칭의(稱義)”가 아니라 “의화(義化)”라고 부른다. 이러한 이름은 그들
의 사상에도 부합한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iustificatio”를 논의가 되는 주제라는 점에서 그것에 대한
입장 여하를 불문하고 “칭의”라고 칭하고자 한다.
13)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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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모순되는 일을 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 법이 이미 정서적 능력 가운데 역사하
는 절대적 능력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성도의 구원에 있어서 작용하는 합
력적 공로(meritum de congruo)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의가 그의 자비 가
운데 역사함에 부합한다. 이런 점에서 오직 제1계명과 제2계명만이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하나님은 자신이 부당하다고 선포하신 어떤 것을 행할 수 있으시다. 그러나


만약 그가 그것을 행하신다면 그것은 올바른 것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
은 모든 의의 첫 번째 법칙이 된다.14)

하나님의 본질은 외계적 사역에(opera ad extra) 있어서 이성—혹은 이해—


과 의지의 불가분적 관계를 보증한다.15) 이는 절대적 능력과 정서적 능력이 불가분적
관계를 갖게 됨과 성도의 믿음과 선행의 공로와 그에 부합하는 은혜의 주입을 통한
성도의 구원을 담보하는 인식론적 근거가 된다.
비엘은 하나님이 우리를 나그네로서 이 땅에서 죄책 가운데(in culpa)와 은혜
가운데(in gratia) 두신 것은 그의 절대적 능력으로 말미암으나 그 가운데 우리가 우
리에게 주입된 은혜와 우리의 합력적 공로로 구원을 이루어가게 하시는 것은 그의 정
서적 능력으로 말미암는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비엘은, 타락 전 최초의 인류에게는
초자연적인 은총으로서 덧붙여진 은사(donum superadditum)가 부여되었으나 타락
후 그것이 소멸되었다고 본 아퀴나스와는 달리, 순수한 그 상태에서도(ex puris
naturalibus) 하나님의 덧붙여진 은사는 공로적 사역을 통하여 부여되며 이는 타락
이후에도 다를 바 없으나 다만 이제는 그 일이 비록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고 하더라
도 절반의 공로만 있을 뿐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입장은 스코투스를 충실히 계승한 면이 있다.16)
그러므로 초자연적인 은혜에 따른 주입된 신앙(fides infusa)이 없어도 자연
적인 상태에서 획득된 신앙(fides acquisita)이 있을 수 있으므로 덧붙여지는 특별한
은혜가 없어도 각자에게 합당한 공로가 돌려질 수 있으나 그 역은 불가하다고 비엘이
보았다고 주장하는 입장은 그릇되다. 비엘이 이러한 말—“licet fides acquisita
actum producere posset sine infusa, et non econverso”—을 한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과 관련해서는 적실성이 있으나 그것을 그의 정서적 능력에는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17) 결론적으로 오버만이 말하듯이, 비엘에 따르면, “지식의 결핍으로
말미암은 사람의 비극은 주로 그의 타락과 원의의 상실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
물로서의 그의 상태에 따른 자연적인 결과물이다.”18) 비엘은, 이러한 점에 착안해서,

14)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93-98, 인용, 96.


15)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98-99, 107-108.
16)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47-48; Muller, Dictionary of Latin and
Greek Theological Terms: Drawn Principally from Protestant Scholastic Theology, 192.
17)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33-34.
18)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6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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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욕편정(邪慾偏情, concupiscentia) 자체가 원죄라고 보는 롬바르드(Peter
Lombard, 1096-1160)로 대변되는 어거스틴파의 입장이나 사욕편정에 이르게 하는
원의의 상실을 원죄라고 보는 스코투스와 오컴의 입장에 치우치지 않고, 일종의 중립
적인 입장을 취하여 원의의 상실이 원죄의 형상이 되며 사욕편정은 그 질료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입받아 원의를 발동하여 사욕편정을 물리치면 그
합력적 공로가 구원에 이르는 의가 된다는 비엘의 주장과 상관성을 지니게 된다.19)
이와 같이 타락 전과 후를 일종의 양적 차이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비엘의
입장은 그가 구약과 신약을 보는 관점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구약의 성례들과 신
약의 성례들을 비교하면서 비엘은 후자의 은혜가 더 큰 것은 그것이 받는 자의 행위
에 따를 뿐만 아니라 거행된 행위에 따르기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리
스도는 그 자신이 하나님의 법의 제정자이신 반면에 모세는 단지 그것의 전달자 혹은
선포자에 머물 뿐이라는 점을 적시하면서 이를 설명한다. 이러한 이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정서적 능력 가운데 작용하는 절대적 능력에 대한 시각과 맥락을 같이 하는
바, 주목되는 것은 여기에서 구약의 옛 법(Old Law)과 신약의 새 법(New Law)의 연
장선에 교회의 캐논법(Canon Law)을 정위시키고 있다는 점이다.20) 이로부터 우리는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이 구원서정(救援序程, ordo salutis)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의
외에 교회의 의를 논의하는 일단(一端)의 근거를 엿볼 수 있다.

3. 그리스도의 의의 절대성과 충족성: 합력적 공로(meritum de congruo)와


합당한 공로(meritum de condigno), 선함(bonitas)과 공훈(dignitas)

비엘에 따르면, 원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류는 “거저 부여된 은사가 박탈되
었을(spoliatus a gratuitis)” 뿐만 아니라 “본성상 [그 형상이] 훼손되었다
(vulneratus in naturalibus).”21) 그러나 원죄의 영향은 자유의지와 관련해서 존재론
적이라기보다 심리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은혜의 주입에 대한 기대성향을
가지고 각자의 자질대로 최선을 다하면(facere quod in se est) 심리적인 회복에 이
를 수 있었다.22) 그것은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거부하지
않으신다는 믿음의 법칙(regula fidei)에 근거하였다. 이는 비록 타락으로 말미암아
최초에 주입된 은혜로 말미암은 내실적 신앙(fides formata)—곧 주입된 신앙(fides
infusa)—은 상실되었지만 각자의 자유의지로 획득된 신앙(fides acquisita)은 비록
그 자체로는 형식적 신앙(fides informis)의 양상을 띠지만 특별히 주입되는 은혜가
수반되어—이러한 은혜는 선행을 도울 뿐 아니라 그 행위를 받아들이는데 미친다—합
력적 공로(meritum de congruo)로부터 합당한 공로(meritum de condigno)에 이
르게 된다는 사실을 적시한다.23) 획득된 신앙은 죄를 정죄하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19)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121-122.


20)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112-119, 특히 117-118.
21)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128.
22)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129,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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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그의 도움 가운데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부여되는 사랑의 변증법을 인식한
다. 이로부터 사욕편정의 사랑(amor concupiscentiae)—곧 순전한 자기애(amor
amicitie sui)—이 순전한 사랑(amor amicitie)으로 고양된다.24)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의의 긴장이 궁극적으로 해소되는 것은 신인(神人)
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그는 행위로써 말씀의 개별적인 의미를 우리에게 알
려주신다. 그리하여 그를 믿음으로 이해에 이르게 된다(fides quaerens
intellectum). 그 안에서 하나님의 정서적 능력이 절대적 능력 가운데 작용하게 된다.
곧 그의 말씀이 그의 행위의 안내자가 된다.25) 그리스도의 사역은 오직 도덕적 질서
에 따라 자기 공로로 선한 일을 행한 자에게만 적용된다. 이러한 우리의 선함이 공훈
을 갖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 곧 합력적 공로로 말미암는 바,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께 돌려지는 합당한 공로에 따른 선물로서 주어진다. 여기에서 하나님
의 사랑이 그의 의 가운데 역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합당한 공로가26) 세 가지에
미쳐야 한다. 첫째, “행위자 가운데(in operante).” 그는 그리스도와 친구—혹은 그리
스도를 사랑하는 자(amicus)—가 되어야 한다. 둘째, “행위 가운데(in opere).” 그의
행위에 그리스도의 합당한 공로가 합력적으로 작용해야 한다. 셋째, “상주시는 분 가
운데(in premiante).” 그 행위가 상주시는 분에 의해서 받아들여져야 한다.27)
주입된 은혜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그의 자유로운 절대적 능력에 따른다.
이러한 능력은 필연적이 아니라 적절하게 작용하지만 그 뜻은 영원히 불변하다. 여기
에서 하나님의 자유(libertas)=후함(liberalitas)=자비(misericordia)의 등식이 성립되
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의에 침투되어 절대적 능력이 정서적 능력의 범주에 속
하게 된다. 곧 영원한 작정 가운데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적절한 뜻이 적절한
법으로 나타난다.28) 이러한 적절한 필연성 혹은 필연적 적절성은 비엘에게 있어서의
절대적 능력과 정서적 능력, 사랑과 의, 은총과 자연, 말씀과 행위의 변증법을 잘 드
러내고 있다.29) 이는 오컴의 면도날이 신학의 영역에 적용되는 영역이기도 하다.30)

23)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131-132, 245-246.


24)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133-134.
25)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50-51.
26) 뒤에서 보겠지만 이와 관련하여 비엘은 그리스도의 당하신 순종보다 행하신 순종을 강조한다.
27)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43-44.
28)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44-47.
29) 비엘 사상의 변증법적 성격에 관해서,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50-51,
133-134; Ibid. The Dawn of the Reformation, 91; Ibid., The Impact of the Reformation
(Grand Rapids: Eerdmans, 1994), 9; Reinhold Seeberg, Text-Book of the History of
Doctrines. Complete in Two Volumes, tr. Charles E. Hay (Grand Rapids: Baker, 1964),
2.204. 맥그라쓰는 비엘의 사상이 키케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를 하
나님께 직접적으로 적용한 측면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여기에서 말하는 변증법적 성격과 일맥상
통하는 점이 있다. McGrath, Luther’s Theology of the Cross, 105-106. 멀러는 이러한 경향이
유명론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철학이 신학에 관련을 맺는 영역을 논리와 변증법에 제한시키
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는 스코투스가 신학 자체(theologia in se)와 우리를 위한 신학(theologia
pro nobis)을 나누고 이러한 영역을 후자에 국한시키는데 상응한다. Richard A. Muller,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vol. 1, Prolegomena to Theology (Grand Rapids:
Baker, 1987), 62, 126.
30) Cf.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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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보나벤투라는 이러한 면도날을 기독론적으로 전개하였던 바, 그리스도의 생애
와 사역이 구체적인 계시이므로 이를 떠나서 추구되는 보편적 실재 개념은 단지 추상
적인 것으로서 이름으로만 존재할 뿐이라고 여겼다.31)
그렇다면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이 정서적 능력 가운데 작용하여 우리의 선함
(bonitas)이 공훈(dignitas)이 되는, 그 합력적 공로의 가치를 지니는 선행을 행하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달리 말해서, 합력적 공로가 우리에게 합당한 공
로가 되는 우리 편에 요구되는 조건은 무엇인가? 이와 관련하여 비엘은 우리의 선함
과 공훈의 교량 역할을 하는 성향(habitus)을 논의한다.32) 우리의 행위가 가치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선함이 요구된다. 우리의 선함을 자극하고 충동하는 성향이 은혜
로써 부여된다. 그 성향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진다. 그
리하여 그 받아들임(acceptio)으로 우리의 행위가 공훈을 지닌다. 주목할 것은 어거스
틴과는 달리 비엘은 이를 다루면서 공훈이 아니라 성향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
이다. 이렇듯 그저 주어진 은혜(gratia gratis data)보다 기꺼운 일을 행하는 은혜
(gratia gratum faciens)에 방점이 찍힌다. 후자와 관련된 “거룩하게 하는 성향적 은
혜(habitual sanctifying grace)”로서 성화뿐만 아니라 칭의도 설명된다.33)
여기에서 우리는 은혜의 성향—곧 창조된 은혜(gratia creata)—과 하나님의
받아들이심—곧 창조되지 않은 은혜(gratia increata)—사이의 일종의 변증법을 만나
게 된다. 이는 우리가 위에서 논한 바 있는 절대적 능력과 정서적 능력 사이의 변증
법과 맥이 닿아 있다. 성향은 은혜를 전제하지만 은혜에 앞선다. 이런 측면에서 그것
은 합당한 공로에 이르는 합력적 공로의 소여가 되지만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으며
다만 완전함에 이르는 반(半)-공로(semi-merit)가 될 뿐이다.34) 이는 “이차적인 영원
한 작정(second eternal decree)”으로 치부되는데,35) 오직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
속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영원한 작정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적절한 것으로 논의되
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우리의 선함과 하나님이 그것을 받아들이심이 필연적으로 요
구될 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는 것을 우리가 믿는다(per
gratiam domini nostri Jesu Christi credimus salvari)” 라는 사실이 그의 공로
혹은 의만이 절대적인 것이라거나 충족한 것이라는 사실을 지시하는 것은 아닌 것으
로 여겨진다.36)
비엘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고난이 대속의 의 전체는 아니며 그리스도의 공
로에 따른 하나님의 은혜의 주입이 성도의 선행(善行)에 종속된다고 본 바, 타락 후

31) Cf. Zachary Hayes, The Hidden Center: Spirituality and Spectulative Christology in St.
Bonaventure (New York: The Franciscan Institutes, 1981), 48, 107.
32) “habitus”는 영적 성향 혹은 능력을 칭한다. 이는 “habitus fidei”나 “habitus gratiae”나
“habitus infusus” 등으로 주로 사용되는데, 영혼에 주입된 영적 은사로서 인성의 일부를 이루게 되
는 자질의 자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Cf. Muller, Dictionary of Latin and Greek
Theological Terms, 134.
33)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161-164.
34)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169-171.
35)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172-174.
36)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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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설의 입장(the infralapsarian position)의 입장을 견지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
다.37) 그러나 비록 오컴의 “당나귀 기독론(the asinus-Christology)”에 전적으로 동
조하지는 않지만38) “이차적인 영원한 작정”을 운위하는 비엘의 입장을 두고 이러한
평가를 하는 것은 단지 공허할 뿐이다. 왜냐하면 개혁신학자들 가운데서 거론되는 전
택설과 후택설은 불변하는 영원한 작정의 존재를 전제하는 가운데 공히 이를 정하고
이루어 가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경륜을 문제 삼기 때문이다. 말할 나위도 없
이 비엘의 이러한 입장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은 대리적 속죄를 전제하는 가
운데 전개되는 개혁신학자들의 타락 후 예정설(Infralapsarianim)과는 근본적으로 궤
를 달리한다.39)
비엘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는 제한적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구원
을 실현시키는 수단이 될 뿐,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지 않으셨을지라도 하나님이 이전
에 택한 자들의 구원을 작정하셨다면 그들이 구원되었을 것이라고 여긴다.40) 비엘 역
시 십자가의 승리를 강조하지만 그것은 사탄에 대한 객관적 승리의 선포에 그칠 뿐
성도의 구원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의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고난
은 본질적으로 “소망의 사역(spes fidei)”을 감당한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다 이루심
으로써 사탄의 압제를 벗어나 우리가 고양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십자가 죽음 이후의 승천이 이에 대한 제일 사례가 된다.41)
비엘의 이러한 입장에는 초대교회 이후의 사탄배상설과 주관적 속죄설이 혼
재되어 있다.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는 가운데 비엘은 우리의 이러한
가능성을 그리스도에게 은혜를 주입한 마리아가 부활하고 승천하여 우리를 위하여
(pro nobis) 여전히 일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리아는 단지 주
님을 잉태하고 출산한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데 그치지 않고, 오버만이 말하듯이, “가
장 항구적이며 가장 의존할만한 구원의 수단이며 인류 구원의 최종성취이다.” 마리아
는 이러한 최종성취를 위한 은혜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이 우리가 가닿아야
할 이상적 모본이 된다.42) 그러므로 마리아와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고난
에 있어서 하나님의 일을 함께 수행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43) 다만 이에 대해서는 변
증법적 이해가 요구된다.44)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대속하심으로 우리가 그의 의
로 원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를 그리스도에게 은혜를 주입한 마리

37)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215-217. 오버만은 이 점에서 비엘의 입장이 오
컴과는 구별되며 다시 스코투스로 회귀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38)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250, 256, 259.
39) Cf.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3 vols. (Grand Rapids: Eerdmans, 1995, reprint),
2.316-321.
40) Cf. Seeberg, Text-Book of the History of Doctrines, 2.199. 그러나 이는 가정에 있어서 그러하
고 실제로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없다면 구원도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비엘의 입장을 너무 획
일화하여 전자에 지나치게 천착한 오류가 제에베르그에게 있다. 오버만은 시종 자신의 입장을 이와
차별화한다.
41)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233-235, 270.
42)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295, 313-317,
43)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298, 302-303.
44)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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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원죄가 없었음과 관련짓는 것이 그 한 사례가 된다.45) 여기에서 비엘은 스코투
스의 입장을 더욱 신학적으로 체계화하고 있다.46)

4. 자질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것(facere quod in se est)

4.1. 믿음의 공로

비엘에게 있어서 “믿음의 도(道, ratio fidei)”는 “합력적 공로의 도(道, ratio
de congruo)”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오컴의 면도날은 이해
를 구하는 믿음을 추구한다. 그것은 개별자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나온 직관적 지식
(notitia intuitiva)을 요소로 한다.47) 오캄은 직관적 지식을 감관적(感官的) 지각과 추
상적(抽象的) 개념 사이에 위치하는 구체적인 지식이라고 보았으며 추상적 지식은 이
러한 직관적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경우 그것은 단지 어느 종에
속한 일반적인 표상에 불과하다고 함으로써 실재론을 비판하였다.48) 이는 아리스토텔
레스의 형이상학으로만 다룰 수 없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은혜의 주입이 따르
지 않는 이상—곧 합력적 공로가 없는 이상—오히려 계시를 더욱 어둡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불명한 신앙(fides implicita)과 분명한 신앙(fides explicita)의 경
계가 은혜와 공로와 관련하여 그어진다.49)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fides ex auditu)!” 이와 관련하여 비엘은 믿음이
구원의 시작이자 열매이므로 믿음을 낳는 선포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리스
도의 몸 자체보다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가 선포된 말씀을 새로운 법으로 여기는 소
이가 여기에 있다.50) 믿음의 대상(fides quae)인 계시 자체가 아니라 믿음을 도구로
한(fides qua) 계시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51) 의지(voluntas)가
따르는 지식(notitia)이 없이는 사랑(amor)이 있을 수 없다. 성도의 믿음은 합력적 공
로의 도로써 작용하는 바, 주입된 은혜와 더불어 사랑—곧 선행—의 공로를 요소로 한
다.52)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주입된 신앙(fides infusa)은 하나님에 대한 전체적
인 믿음에 이르나 그것은 개별적인 계시로 말미암아 오히려 불명한 신앙(fides
implicita)이 되고 만다. 그러나 특별한 은혜 가운데 개별적인 말씀을 듣고 그것을 아
는 바대로 뜻을 정하여 행하는—곧 지식, 의지, 사랑의 요소를 지닌—획득된 신앙

45)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295.


46) Jaroslav Pelikan, The Christian Tradition: A History of the Development of Doctrine, vol.
4, Reformation of Church and Dogma (1300-1700)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4), 43, 47.
47)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61, 63-65.
48) Henry Osborn Taylor, The Medieval Mind: A History of the Development of Thought and
Emotion in the Middle Ages, vol. 2 (London: MacMillan and Co., Limited, 1911), 520-521.
49)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41, 62-63.
50)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23.
51)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40.
52)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6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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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des acquisita)은 각각의 말씀에 대한(“quot articula tot fides acquisite”) 분명
한 신앙(fides explicita)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은혜와 자연에 대한 비엘의
입장을 읽을 수 있다. “은혜는 오직 사람이 최선을 다할 때 부여된다.” 주입된 믿음은
단지 하나님의 정서적 능력이 작용하는 기반이 될 뿐이다. 그것은 성화의 은혜로서
작용할 때 획득된 신앙을 강화시킬 뿐이다.53) 비엘은 칭의에 있어서 은혜가 주입되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내적 성향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계시의 지식(notitia)
과 그것에 대한 인정(認定, assensus)을 두 요소로 하는 분명한 신앙과 통회(attritio)
를 수반하는 행위(operatio)를 요구한다고 주장한다.54) 이러한 사상은 구원의 핵심을
그리스도를 본받음(imitatio Christi)에서 찾고 그 지식에는 성향이 전제된다고 본 보
나벤투라에게서도 뚜렷이 나타난다.55)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는 비엘에 따르면 성화는 곧 믿음의 계층적 상승과 그
요소가 되는 지식의 계층적 상승을 의미한다. 이 경우 숨어계시는 하나님(deus
absconditus)과 계시하시는 하나님(deus revelatus)은 그분 자신이나 그분의 계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의 공로와 그에 따라 주입되는 은혜에 따라 다르
게 나타나시게 된다.56) 결국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거나 감추심이 성도 편의 개연
성(probability)에 놓이게 된다. 이런 점에서 비엘은 과학 혹은 이성을 연역적인 것으
로 보는 반면에 신학 혹은 신앙을 귀납적인 것으로 여긴다.57) 이는 단지 방법의 차이
를 노정할 뿐이다. 실체의 구별은 방법의 차이에 종속될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계
시를 이성의 토대에 세우고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지 않고 모두 합력적 공로로 바라보
는 비엘의 입장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그가 그리스도의 당하신 순종보다 행하신
순종을 중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경우 칭의의 법정성은 도외시되고, 의의 전
가가 아니라 의의 증가(incrementa iustitiae)만이 문제가 된다. 결국 칭의와 성화는
양적인 구별이 될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칭의는 의화(義化)가 될 뿐이다.58)
비엘은 성화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말씀과의 연합 가
운데 영적 진보를 이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칭의는 이러한 성화의 출발점으로서의
“영혼의 영적 출생(the spritual birth of the soul)”을 뜻하는 것으로서 그 과정에서
성령이 내주하여 “영화(靈化, spiritualization)”가 일어난다. 이는 우리가 언급한 의
화와 다를 바 없다.59) 비엘에게 있어서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합력적 공로와 합당한

53)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71-74, 82.


54) Seeberg, Text-Book of the History of Doctrines, 195-196, 199.
55) Hayes, The Hidden Center: Spirituality and Spectulative Christology in St. Bonaventure,
42-43, 48, 106, 130ff., 176ff.
56)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75-78.
57)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83-84, 89.
58) 그리하여 로마 가톨릭은 “iustificatio”를 “의화”로 “sanctificatio”를 “성화”로 부른다. 칭의와 성화
모두 ‘화(-catio, 化)“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로마 가톨릭은 이신칭의를 말하기는 하나 그 믿음은
그리스도의 공로가 우리 안에 적용되는 우리의 공로를 수반하는 내적 감화라고 보고 이러한 점에서
칭의의 본질을 의의 전가에서 찾지 않는다. Cf. George D. Smith, ed., The Teaching of the
Catholic Church: A Summary of Catholic Doctrine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55), 550.
59)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350, 353-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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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로가 구원의 과정에서 작용하는 양상의 차이로 나타날 뿐이다. 칭의는 합력적 공로
가 합당한 공로로서 여겨지는 일종의 전환점이 되는 반면 성화는 합당한 공로로써 완
전함에 이르는 과정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칭의는 객관적으로 규정된 일
차적 작정의 권내(圈內)에 있는 반면 성화는 그 완성에 이름에 있어서 이차적인 작정
이 주관적으로 작용할 가변적인 여지가 많다.60) 로마 가톨릭이 이를 빌미로 그리스도
의 의 외에 교회의 의를 말하고 마리아와 사제들과 천사들과 성인들의 중보의 당위성
을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61)

4.2. 거저 주어진 은혜(gratia gratis data)와 기꺼운 일을 행하는 은혜


(gratia gratum faciens); ‘행해진 일로(ex opere operato)’ 그리고 ‘행하는 자의 일
로(ex opere operantis)’

성도의 선행을 구원의 공로로 여기는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은 그것이 주입된
은혜와 더불어 합력적 공로로 역사함으로 효과적이라는 정서적 능력 가운데 작용한
다. 여기에서 “은혜의 법”이 거론되는 바,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 안에 있는 것으로 행
할 때 그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신다. 위에서 고찰했듯이, 이것이 “믿음의
도”이며 “합력적 공로의 도”이다.62)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의 주입으로 말미암아
거저 주어진 은혜(gratia gratis data)에 따른다. 이러한 은혜로 죄를 버리고 하나님
의 사랑 가운데 사는 자는 비록 죄의 부싯깃(fomes peccati)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도움(auxilium speciale)을 받아 기꺼운 일을 행하는 은혜(gratia
gratum faciens)를 더불어 누린다. 이러한 은혜는 세례와 회개에 있어서 행해진 일
로(ex opere operato) 말미암는데 그치지 않고 행하는 자의 일로(ex opere
operantis) 말미암는데 미친다.63)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거저 주어진 은혜가 기꺼운 일을 하는 은혜의 근간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둘째,
이는 칭의의 은혜와 성화의 은혜에 공히 미친다는 점이다. 이는 비엘이 행하는 자의
일로 말미암는 특별한 은혜의 ‘자질(quod in se est)’이 본성적으로—곧 본성과 은혜
의 구별됨이 없이—존재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엘에게 있어서, 성화에서
뿐만 아니라 칭의에 있어서조차 “은혜는 예비적 선행의 뿌리가 아니라 열매가 된다
.”64)
여기에서 비엘은 롬바르드에 대한 스코투스의 비판에 동조한다. 그 요지는 이
러하다. 칭의에 있어서 작용하는 그리스도의 의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의 공로에 기
반해서 작용한다. 즉, 행해진 일이 행하는 자의 일에 기초한다. 이 과정에서 칭의의

60)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194. 이와 관련하여 “죄인의 성향”과 “고해성사”
와 “영원한 상급”에 있어서 합력적 공로와 합당한 공로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주목하라.
61) Cf. Smith, ed., The Teaching of the Catholic Church, 528-533.
62)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53.
63)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134-139.
64)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139-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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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가 작용함은 물론이다. 성화는 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것은 단지 양에
있어서만 차이를 보일 뿐인 바, “은혜 가운데, 행해진 일로부터 자라감(an ex opere
operato growth in grace)”에 있어서 다르지 않다.65) 이렇듯 “facientibus quod in
se est Deus non denegat gratiam” 교리가 칭의와 성화의 과정에 모두 미치게 되
는 것이다. 이 경우, 칭의의 고유한 법정성이나 의의 전가가 무색해지고, 성화와 다를
바 없이 칭의가 의의 증가의 과정으로 여겨지게 된다. 이렇게 볼 때, 구원의 본질은
자연적 능력 가운데 주입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데서 추구된
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한 하나님에 대한 성도의 사랑에 방점이
찍힌다. 하나님의 은혜가 앞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한 진정한 사랑이 앞설 때
은혜가 즉시 주입되는 것으로 여겨진다.66)
칭의(justification)에 대한 비엘의 이해는 이러한 그의 입장을 극명하게 드러
낸다.
첫째, 하나님은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상급을 주시고자 하시는 자신의 불변하
는 결정에 매이신다.
둘째, 이는 영원한 은혜의 법을 지시한다. 그것은 정의를 페기하지 않고 오히
려 수립한다.
셋째, 죄인은 여전히 “순수한 본성의 상태(the status in puris
naturalibus)”에 머물며 은혜의 경계선(the demarcation line)에 까지 나아갈 수 있
다. 그러나 은혜의 주입이 없이는 은혜로운 상태에 이를 수 없다.
넷째, 타락한 인류도 자기 자신의 자연적인 능력으로 여전히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과 함께 피난처를 모색할 수 있다.
다섯째, 모든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 자연적으로 획득된 신앙이 있지만 주입된
신앙이 없다면 그것은 자체로 충족되지 않는다.
여섯째, 기독교인은 이방인과 비견하는 수준에서도 비록 주입된 신앙(내실적
신앙)은 상실했으나 획득된 신앙(형식적 신앙)을 지니며 이로써 자연적인 지식보다 더
욱 날카로운 지식을 얻는다.
일곱째, 자연인이 어느 정도 수준의 완전함에 이르렀을 때 은혜가 주입된다.
은혜의 주입은 사람이 최선을 다함에 있어서 요구되는 그 어떤 것도 변화시키지 않고
의지를 더욱 확고하고 완전하게 한다. 이와 같이 최선을 다하는 것은 믿음이 역사하
는 첫 번째 과정에 한정되지 않는다.
여덟째, 칭의는 동시에 오직 은혜로(sola gratia) 그리고 오직 행위로(solis
operibus) 말미암는다.
이러한 이해 가운데 비엘은 칭의가 근본적으로 정서적 능력에 제한되는 절대
적 능력의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이는 펠라기우스주의
(Pelagianism)를 대변한다.67) 비엘은 타락한 인류가 지상의 나그네(viator)로서 살아

65)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151-152.


66)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153-154.
67)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175-178. Cf. McGrath, Luther’s Theology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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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삶은 그 자체로 미움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사랑의 가치도 있는(“homo an
odio vel amore dignus sit”) 중립적인 것이라고 여긴다.68) 그러므로 최선을 다하는
이상 은혜의 주입으로 말미암은 합력적 공로를 얻은 후 합당한 공로에 이르게 되는데
장애가 될 것이 없다. 곧 그가 말하는 “이차적인 영원한 작정”을 이루는데 어떤 거침
도 있을 수 없다.69) 이러한 이해에 상응하는 바, 펠라기우스(Pelagius, 360-418)와
다를 바 없이, 비엘은 절대적인 예정을 부인하는 반면에,70) 주입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믿음의 성향 가운데 최선을 다하여 합력적 공로와 그에 따르는 합당한 공로로써
끝내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낼 사람을 미리 바라보시고(post previsa merita) 택하셨
다는 예지예정론(豫知豫定論)을 견지한다.71) 하나님의 영원한 예지가 그의 절대적인
능력의 영역에서 가변적일 수 있다고 여기는 가운데 그리한다.72)
여기에서 우리는 자신의 정서적 능력 가운데—혹은 그 제한 가운데—절대적
능력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단지 반(半)ㅡ공로가 될 뿐
이라고 여기는 비엘의 입장이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과 관련되어 술회(述懷)되는 신
학적 근거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선행(善行)이 은총보다 선행(先行)한다는 성경
(Tradition I)을 넘어서는(extrascriptual) 전통(Tradition II)에 우리를 맞닥뜨리게 할
뿐이다.73) 칭의와 다를 바 없이 이 부분에 있어서도 비엘은 트렌트 회의의 입장을 공
유하고 있는 것이다.74)

5. 칼빈의 거부

루터는 유명론의 영향권에 있었음이 분명해 보이지만 신인합력설(synergism)


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유일한 공로와 중보(monergism)를 주장한 점에 있어서는
이전과의 뚜렷한 단절이 있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의 외에 교회의 의와 같은 구원
의 질료(materia)가 따로 있다고 여기고 이신칭의 교리를 전면에 부각시켜 종교개혁
을 점화시켰지만 믿음에 있어서 최소한 받아들이는 공로는 믿는 자에게 돌려진다고

the Cross, 61-62.


68)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183.
69)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184.
70)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196.
71)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193.
72) Pelikan, The Christian Tradition: A History of the Development of Doctrine, 4.30.
73)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395. 멀러에 따르면 어거스틴은 교회의 “실천적
권위(practical authority)”를 강조한 반면 중세 로마 가톨릭은 성경을 압도하는 교회의 “형이상학적
우선권(metaphysical priotirty)”을 주장하였다. 중세 후기 유명론자들은 성경과 전통의 두 권위를
인정하기는 했으나 하나님의 계시의 궁극적인 원천이 성경이라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오버만이
Traditio I과 Traditio II를 구별한 것은 이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Richard A. Muller,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vol. 2, Holy Scripture: The Cognitive Foundation
of Theology (Grand Rapids: Baker, 1993), 39-43, 인용, 40.
74)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366, 406. 트렌트 회의의 교령은 우리가 위에서
다룬 합력적 공로와 합당한 공로, 성향, 의화와 성화, 의의 증가 등에 대한 비엘의 입장과 기본적으로
궤를 같이 한다. Cf. 문병호, “그리스도의 의(義)의 유일성과 객관성: 칼빈의 트렌트 회의 비판의 요
지(要旨)와 요체(要諦),” 『개혁논총』 32 (2014), 5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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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았다.75) 이에 반하여 칼빈의 입장은 단호하였다. 그는 구원의 질료뿐만 아니라 그
도구인(causa instrumentalis) 혹은 형상인(causa formalis)이 되는 믿음조차도 전
적인 은혜일 뿐 믿는 자의 편에 어떤 공로도 없음을 분명히 천명했다. 이는 중세와의
더욱 분명한 단절을 의미한다. 이하 이러한 칼빈의 입장을 그의 대작(opus
magnum) 『기독교 강요』를 통하여 몇 가지 측면에서 일고한다.
로마 가톨릭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은 선행(善行)에 의
해서 의롭다고 인정되어 그 공로로 자녀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영원한 중보자시며 그의 의 외에 다른 의는 없다.76) 로마 가톨릭은 선행에는 의를 얻
기에 충분한 공로가 없지만 “받아들이는 은혜(acceptans gratia)”인 점에서 큰 가치
가 있으며 우리에게 모자란 것은 잉여 공로로 채워진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
자체가 헛되다. 왜냐하면 보속(satisfactio)이 인정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77) 구원의
의로서 우리에게 돌려지는 의는 없다.78) 구원의 의는 오직 그리고 전적으로 그리스도
의 의로 말미암는다. 그 동력인(causa formalis)은 우리를 향한 성부 하나님의 값없
는 사랑(dilectio gratuita), 질료인(materialis)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
도의 순종(obedientia), 형상인(formalis) 혹은 도구인(instrumentalis)은 믿음(fides),
그리고 목적인(finalis)은 하나님의 선하심(bonitas)에 대한 영광(gloria)에 있다.79) 우
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의와 구원의 능력을 얻을 뿐만 아니라 의와 구원
자체를 얻는다. 그러므로 스코투스와 그 후예들이 구원의 은혜를 각 개인이 자력으로
공로를 세울 기회를 얻게 하신 것이라고 한 것은 그릇되다.80)
로마 가톨릭은 모든 경건의 중심축(cardo)가 되는 이신칭의를 박탈했다. 그들
은 선행은 자유의지에서 오며 그에 따른 내실적 신앙(fides formata)으로 우리가 구
원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의 선행과 공로도 하나님의 선물이다.81) 아퀴나
스는 내실적 신앙은 지식(이성)에 기초한 사랑(의지)의 열매를 맺는 완전한 신앙으로
서 그 공로로써 성도의 어떠함을 넘어서서 존재 혹은 실제 자체가 규정되는 요소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오직 성령만이 구원의 질료인 그리스도의 공로
가 역사하는 작용인(casua efficiens)이 된다고 함으로써 이러한 구별 자체를 단호히
거부한다.82) 또한 같은 맥락에서 불명한 신앙(fides implicita)과 분명한 신앙(fides

75) Pelikan, The Christian Tradition: A History of the Development of Doctrine, 4.145-150. 알
미니우스(Jacob Arminius, 1560-1609)는 이 부분에 있어서 더욱 모호함을 보였다.
76)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in libros quatuor nunc primum digesta, certisque
distincta capitibus, ad aptissimam methodum......, 1559, 3.14.11, in Io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a, ed. Guilielmus Baum, Eduardus Cunitz, Eduardus Reuss, 59 vols.
(Brunswick: C.A. Schwetschke, 1863-1900), vol. 2, 571-572. 이하 Inst. 3.14.11 (CO
2.571-572)와 같이 표기.
77) Inst. 3.14.12-15 (CO 2.572-574), 인용, Inst. 3.14.12 (CO 2.572).
78) Inst. 3.14.16 (CO 2.575).
79) Inst. 3.11.7; 3.14.17, 21; 3.15.5; 3.18.8 (CO 2.538, 575, 578, 583, 610).
80) Inst. 3.15.6 (CO 2.583-584).
81) Inst. 3.2.8-12; 3.15.7 (CO 2.403-408, 584-585).
82) Cf. Arvin Vos, Aquinas, Calvin, & Contemporary Protestant Thought: A Critique of
Protestant Views on the Thought of Thomas Aquinas (Grand Rapids: Eerdmans, 1985),
2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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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plicita)에 대한 구별도 거부한다.83)
로마 가톨릭은 칭의에 새로운 행실(삶)이 포함된다는 측면에서는 칭의와 성화
를 구별하지 않고, 칭의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의와 합력하여 생명을 얻게 되는 합
력적 공로가 작용하나 성화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의가 없이 자신에게 마땅하게 돌
려지는 합당한 공로가 작용한다는 점에서 칭의와 성화가 분리된다고 본다.84) 그러나
칭의와 성화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음으로(고전 1:30) 모두 은혜이나 칭의에는
성도의 행위의 개입이 없다는 점에서 구별된다.85) 칼빈은 이와 관련하여 “오직 믿음
에 의해서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도 의롭다 함을 받는다(sola fide non
tantum nos, sed opera etiam nostra iustificari)”는 점을 강조한다.86) 로마 가톨
릭은 칭의조차도 의화로 여기나 칼빈은 성화조차도 은혜로 여기는 것이다.87)
오시안더(Andreas Osiander, 1498-1552)는 우리 안에 내재하는 신적 소질
을 “본질적 의(iustitia essentialis)”라고 부르면서 이것이 주입된 은혜와 더불어 성도
의 구원을 이룬다는 주장을 한다. 이는 자연적 성향이나 자질에 은혜가 주입되어 작
용하는 합력적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됨을 주장하는 중세의 맥락에 서 있
다.88) 칼빈은 이를 비판하면서 칭의와 성화의 이중적 은혜(duplex gratia)는 자질의
주입(infusio qualitatis)으로 인한 신화(神化, deificatio)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mputatio iustitiae Christi)로 인한 영화(glorificatio)를 목적으로 함을 부각시
킨다.89) 또한 이에 따르면 칭의의 법정성이 무시되고 그것이 마치 신성의 분여나 신
성에의 참여와 같이 치부된다고 비판한다. 이 점에서 오시안더의 입장이 로마 가톨릭
의 보속 교리와 맥이 닿아 있음도 지적된다.90) 칼빈은 이러한 입장이 롬바르드에게도
나타난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일종의 펠라기우스주의(quidam pelagianismus)”라고
칭한다. 그리고 교황주의자들과 스콜라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는 의의 전
가가 아니라 거룩함의 열심을 돕는 영이라고 해석한다(gratiam Dei non gratuitae
iustitiae imputationem, sed spiritum ad studium sanctitatis adiuvantem
interpretantur)”고 일침을 가한다.91) 여기에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 비엘의 입장
에 대한 비판이 모두 함의되어 있다. 칼빈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말미암
은 전적 은혜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불변하며 역사상 필히 성취된다.

83) Inst.
3.2.2, 5 (CO 2.398-399, 400-401).
84) Inst.
3.14.11 (CO 2.571-572).
85) Inst.
3.16.1 (CO 2.586).
86) Inst.
3.17.5, 8-10 (CO 2.593, 596-598). 인용된 부분은 1543 Institutio, 10.70 (CO 1.787)에 처
음으로 나타난다.
87) Cf. Theodore W. Casteel, “Calvin and Trent: Calvin’s Reaction to the Council of Trent in
the Context of His Conciliar Thought,” Harvard Theological Review 63 (1970): 91-117.
88) Pelikan, The Christian Tradition: A History of the Development of Doctrine, 4.152; J.
Faber, “Imago Dei in Calvin: Calvin’s Doctrine of Man as the Image of God by Virtue of
Creation,” in Essays in Reformed Doctrine, tr. J. D. Wielenga (Alberta, Canada:
Inheritance Publications, 1990): 234-239.
89) Cf. Smith, ed., The Teaching of the Catholic Church, 552-555.
90) Inst. 3.11.5-6, 8, 10-12 (CO 2.536-538, 538-539, 540-545).
91) Inst. 3.11.15 (CO 2.546). Cf. Inst. 3.11.23 (CO 2.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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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결코 가변적이지 않다. 그 구원은 신인합력적이지 않으며, 그 뜻은 어떤 이차적
인 작정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92)

6. 결론: 종교개혁, 단절을 통한 심화

여느 유명론자와 다를 바 없이 비엘 역시 자신의 주의주의(主意主義)의 근거


를 하나님의 뜻을 빙자한 인간의 뜻,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뜻에서 찾고 있다. 이
를 변증법이라고 부르든, 순환논법이라고 부르든, 유래된 전통 혹은 Tradition II로
부르든, 하나님의 정서적 능력이 이렇듯 자의적으로 해석되는 이상 그 가운데 역사하
는 절대적 능력은 얼마나 더 무분별하겠는가? 또한 그것이 면죄부로 공로를 사고파는
것이든, 은혜를 받은 마리아를 영원한 동정녀로 삼아 은혜를 주입하는 자리에 세우는
것이든, 단지 사람일 뿐인 사제들을 사람을 위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 세
우는 것이든, ‘합력’과 ‘합당’의 경계가 분량으로 다루어지고 그 더함과 덜함이 구원자
가 아니라 구원을 받아야 할 자들의 편에서 헤아려진다면 그 헤아림은 또 누가 헤아
릴 것인가?
비엘은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맺은 언약이 그 속성상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
과 정서적 능력 그리고 이에 따른 합력적 공로와 합당한 공로의 구원의 질서를 제시
한다고 보지만93) 언약이 불변하는 영원한 구원협약의 역사적 성취경륜을 뜻하지 않는
이상 이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공허하다. 곧 언약은 “facere quod in se est“와 양
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비록 언약신학적 용례가 없지는 않았지만 비엘에게서 언약신
학을 논하는 것은 단지 모순될 뿐이다.94) 비엘에게서 우리는 반(半)펠라기우스
(semi-Pelagianism)로 경도(傾倒)된 중세적 언약관, 목적이 스코투스로부터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주의주의, 철학적 인식론에 대전환을 가져온 오컴의 면도날을 동시에
만나게 된다.95) 이런 측면에서 그를 중세신학의 수확이라고 부를 여지는 없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후대가 누릴 알곡은 되지 못한다. 그것은 쭉정이에 불과한 것
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엘에 대한 이상의 고찰을 통하여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종교개혁자들의 중세 혹은 중세말의 유명론과의 단절은 분명해 보인다는 점을 분명히
할 수 있다. 루터에서 보듯이 신학방법론과 계시 이해 등에 있어서 중세의 그늘을 벗
어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경우에도 복음 자체와 구원의 교리 등 핵심적인 성경의 가
르침에 있어서는 분명한 이전과의 단절이 있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이러한 단절은 더
욱 확고해져서 방법 그 자체에도 미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중세가 새로운 시대를

92) Inst. 3.23.8 (CO 2.705-706).


93) Cf. McGrath, Luther’s Theology of the Cross, 60, 104.
94) 다음에서는 유명론자들의 언약관에 대해서 언급을 할 뿐 이러한 부분이 충분히 지적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칼빈이 중세 말기의 언약주의에 대한 인식이 없지 않았다고만 결론적으로 지적함으로써 모호
함을 더하고 있을 뿐이다. Peter A. Lillback, The Binding of God: Calvin’s Role in the
Development of Covenant Theology (Grand Rapids: Baker, 2001), 46-57, 305.
95) Taylor, The Medieval Mind, 2.509-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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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한 나아감이 결여되었듯이, 종교개혁이 그 시대로 돌아감도 그 자취를 찾을 수 없
다. 종교개혁에 남은 중세의 흔적은 새로 취한 것이라기보다 아직 버리지 못한 그 무
엇이었다.

영원히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립니다(Soli Deo gloria in aeternum)!

[Bibliography]

Calvinus, Ioannes.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in libros quatuor nunc primum


digesta, certisque distincta capitibus, ad aptissimam methodum...... 1559.
Casteel, Theodore W. “Calvin and Trent: Calvin’s Reaction to the Council of Tr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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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rk: Dover Publication,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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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aventure. New York: The Franciscan Institutes,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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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ber, J. “Imago Dei in Calvin: Calvin’s Doctrine of Man as the Image of God by
Virtue of Creation.” In Essays in Reformed Doctrine. Tr. J. D. Wielen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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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minalism. Durham, NC: Labyrinth Press, 1983. Reprint of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63.

- 17 -
Pelikan, Jaroslav. The Christian Tradition: A History of the Development of
Doctrine. Vol. 4, Reformation of Church and Dogma (1300-1700).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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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aff, Philip.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6. The Middle Ages from
Boniface VIII to the Protestant Reformation 1294-1517. Peabody, MA:
Hendrickson Publishers, 1996. Reprinting of the 1910 First Edition.
Seeberg, Reinhold. Text-Book of the History of Doctrines. Complete in T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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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ith, George D. Ed. The Teaching of the Catholic Church: A Summary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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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호. “그리스도의 의(義)의 유일성과 객관성: 칼빈의 트렌트 회의 비판의 요지(要旨)와 요체
(要諦).” 『개혁논총』 32 (2014): 45-88.

영어제목) The Necessity of Reformation: A Critique of Gabriel Biel’s Understanding


of “Facere quod in se est”
주제어 국문) 비엘, 칭의, 성화, 그리스도, 종교개혁
주제어 영어) Biel, justification, sanctification, Christ, Reformation

국문초록)
본고의 목적은 저명한 역사신학자 오버만(Heiko A. Oberman)이 자신의 동명의 책에
서 “중세 신학의 수확(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이라고 칭한 유명론자
가브리엘 비엘(Gabriel Biel)의 신학을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 안에 있는 것—자질—
으로써 행할 때 은혜 베푸시기를 거부하지 않으신다(facientibus quod in se est
Deus non denegat gratiam)”는 교리와 관련하여 일고함으로써 중세와 종교개혁의
연속성(continuity)과 비연속성(discontinuity)에 대한 필자의 입장을 피력하고자 함
에 있다. 비엘은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맺은 언약이 그 속성상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
과 정서적 능력 그리고 이에 따른 합력적 공로와 합당한 공로의 구원의 질서를 제시
한다고 보지만 언약을 불변하는 영원한 구원협약의 역사적 성취경륜으로서 여기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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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상 이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공허하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절
대적인 두 요소로 삼는 언약은 그 본질상 “facere quod in se est“ 교리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종교개혁자들의
중세 혹은 중세말의 유명론과의 단절이 분명함을 확인하게 된다. 칼빈에게 있어서 이
러한 단절은 더욱 확고해진 바, 그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말미암아 성도 자신뿐
만 아니라 그의 행위도 의롭게 여겨진다고 함으로써 칭의와 성화의 이중적 은총을 분
명히 피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새로운 시대에 드리운 여전한 옛 자취가 남아있다면
그것은 새로 취한 무엇이 아니라 아직 버리지 못한 무엇으로서 헤아려져야 할 것이
다. 단절을 퇴보로 보는 역사학적 선입관이 없지 않지만, 종교개혁의 역사는 우리에게
단절을 통한 심화를 교훈하고 있다.

영문초록)
This paper aims at investigating the continuity and discontinuity between
the Medieval and Reformation era with reference to their doctrinal stance
on the revelation and grace of God working in the justification and
sanctification of the believers by taking a special look at Gabriel Biel’s
understanding of the principle “facientibus quod in se est Deus non
denegat gratiam(God does not deny giving His grace to the one who do his
or her best).” According to Biel, the covenant of grace made between God
and His people reveals God’s absolute and ordained power and, from these,
congruent and condign merit, but not more than a merely synergic grace
to enhance each believer’s habitus and qualitas(quod in se est) with a
proper infusion of grace. This perspective cannot be compatible with the
view to look upon salvation as the historical economy to fulfill God’s
eternal decree of unconditional redemption. Calvin clearly deploys his
position of this biblical teaching by indicating the fact that by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not only we ourselves but also our
works are justified without any payment, gratia immerita. This we cannot
find in Biel. He replaces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in this
double grace of justification and sanctification with the
increase(incrementum) of righteousness condignly acquired. This shows a
predominant element to set apart between the Medieval and Reformation
th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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