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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2020년 4월호 (Urimunhwa April 2020)
우리문화 2020년 4월호 (Urimunhwa April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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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진년 화첩 』 丙辰年畵帖
김홍도金弘道, 1745~1806년 이후
1796년, 종이에 수묵 담채, 26.7 × 31.6cm
U RIM U N HWA
별별마당
월간 우리문화
vol.282 | 2020 04 4 테마기획
발행인 김태웅 우표로 본 문화유산 / 은종호
발행일 2020년 4월 1일
편집고문 권용태 10 이달의 인물
편집주간 한춘섭 매듭의 美를 전하다 -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3호 노미자 매듭장 / 양지예
편집위원 곽효환, 김 종, 김찬석, 오광수,
오양열, 장진성, 지두환 16 바다 너머
편집담당 음소형 Banjiha? 그게 뭡니까? / 강진우
발행처 한국문화원연합회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49(도화동, 성우빌딩) 12층 20 시와 사진 한 모금
전화 02)704-4611 | 팩스 02)704-2377
회상 / 김형복
홈페이지 www.kccf.or.kr
등록일 1984년 7월 12일
등록번호 마포,라00557
기획편집제작 서울셀렉션 02)734-9567 문화마당 Cultural Encounters
56 문화 보고
옛 노래와 이야기를 품은 한국가사문학관 / 이행림
60 계절과 우리
청명에서 곡우 사이 / 이신조
62 한국을 보다
우리마당
64 북한사회 문화 읽기 ⑭
북한 화장품 이야기 / 오양열
68 불현듯
마음 씻고 마음 여는 개심사에 꽃이 피면 / 임운석
30 70 독자투고
지방에 피는 꽃에도 단비 내려야 / 조수기
72 NEWS, 편집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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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1599-4236
■ 원고 투고나 <우리문화>에 대한 의견, 구독신청 등은 편집부(eumso@kccf.or.kr)로 보내주세요.
■ 게재된 기사 및 이미지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이 책자는 국고보조금을 지원받아 제작합니다.
별별마당 ㅣ 테마 기 획
세계
일반적으로 우표의 기능을 떠올리면 유산
‘우편요금의 선납’만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우표 수집 취미郵趣; philately’ 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발행우편법 제1조의 2하는 기능도 있다.
우표는 국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제반 특색을 고려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에
특성과 문화적 발전상황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우표 스스로가 지니는
세계 유산 등록 특별(창덕궁 선정전)
문화적 의의 역시 크다. (2001년 발행)
부처님 오신 2600주년 기념
(1977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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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유산 등록 특별(해인사 장경판전)
(1998년 발행)
미륵사지석탑
(1978년 발행)
세계 유산 등록 특별(수원 화성)
(2002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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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유산 등록 특별(종묘제례)
(1999년 발행) 필라코리아 2014 세계우표전시회 기념 아리랑
(2014년 발행)(최초이자, 유일한 한지 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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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강술래2009년 등재는 풍작과 풍요를 기원하는 풍속
의 하나로 음력 8월 한가위 보름달 뜬 밤에 수십 명
의 마을 처녀가 모여 손을 맞잡아 둥그렇게 만들어
돌며, 한 사람이 ‘강강술래’의 앞부분을 선창하면
여러 사람이 이어받아 노래를 부르는 민속놀이다.
한산모시짜기2011년 등재는 모시풀을 이용하여 전통
방법에 따라 모시옷감을 짜는 기술로, 수확, 모시풀
삶기와 표백, 모시풀 섬유로 실잣기, 베틀짜기의 여 민속 시리즈(추석)(강강술래)
(1987년 발행)
러 과정으로 이뤄진다. 여성이 이끄는 가내 작업으
로 가족과 이웃이 함께 모여모시 두레 조화로운 분위
기에서 결속을 다지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국인에게 필수적인 김치 또한 문화유산이 되었
다. 정확하게는 ‘김치,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문화’
전체를 무형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아 2013년 등재
되었다. 김장 문화는 늦가을에 춥고 긴 겨울을 나
기 위해 여러 사람이 모여 많은 양의 김치를 담그 한국의 전통음식 시리즈(배추김치)
(2001년 발행)
고 나누는 우리의 오랫동안 행해진 음식 풍습이다.
민속 시리즈(길쌈)(모시짜기)
(1990년 발행)
세계 유산 등록 특별(제주해녀문화)
술을 사용하는 일종의 레슬링으로 전통 명절, 장이
(2018년 발행)
서는 날, 축제 등 다양한 시기에 행해진다. 우승자
는 농사의 상징인 황소를 상으로 받으며, ‘장사’라
제50회 전국체육대회 기념(씨름)
(1969년 발행) 는 타이틀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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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1949년 발행)
한글 500주년 기념
(1946년 발행)
팔만대장경
(1969년 발행) 세계 유산 등록 특별(정족산 사고와 태조실록)
(2000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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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불교의 요체要諦를 모아 상·하 두 권으로 편집 국채보상운동 기록물2017년 등재은 외채로 인한 망국
한 책이다. 1377년에 그의 제자들이 청주 흥덕사에 을 극복하고자 국가가 진 빚을 국민이 갚기 위해
서 이를 금속활자로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세계 최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일어난 운동의 기록물이
초의 가동可動 금속활자본이다. 이는 독일 구텐베르 다. 술과 담배를 끊고, 반지와 비녀를 내놓고, 기생
크의 ‘42행 성서’ 금속활자본보다도 78년이나 앞선 과 걸인 심지어 도적까지 의연금을 내는 등 전 국
것으로, 그 역사적 가치가 뛰어나다. 민의 약 25%가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은 2007년 등재되었다.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2017년 등재은 금·은·옥에 아름
고려대장경판은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모은 1,511종 다운 명칭을 새긴 어보御寶, 오색 비단에 책임을 다
6,802권에 달하는 경전을 가로 70cm, 세로 24cm 할 것을 훈계하고 깨우쳐주는 글을 쓴 교명敎命, 옥
의 나무판에 새겼는데, 이 나무판이 모두 81,258장 이나 대나무에 책봉하거나 아름다운 명칭을 수여
에 달한다. 이 때문에 흔히 ‘팔만대장경’으로 불린 하는 글을 새긴 옥책과 죽책, 금동판에 책봉하는
다. 제경판의 ‘제’는 ‘모두 제諸’로, ‘해인사가 보관한 내용을 새긴 금책을 말한다.
모든 경판’을 뜻한다. 제경판은 총 5,987판이다. 왕세자나 왕세손에 책봉되면 국왕에게 옥인, 죽책,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1592~1598 때 진중에서 거의 교명을 받아 왕권 계승자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왕
매일을 친필로 기록한 7책 205장의 필사본 일기 세자나 왕세손이 국왕에 즉위하면 왕비도 금보, 옥
<난중일기>2013년 등재는 군사령관이 개인적인 소회, 책, 교명을 받았다. 1392년부터 1966년까지 570여
날씨, 전장의 지형, 서민의 생활 등 전장에서 겪은 년을 지속해서 책보冊寶를 제작하여 봉헌한 사례는
이야기를 쓴 책으로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 우리나라뿐이다.
기 힘든 귀한 기록이다. 글·사진 은종호 공학박사, 한국우편엽서회장
( ) 괄호 안은 등재 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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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이달 의 인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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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물들인 끈을 한 올 한 올 엮다 보면
그 끝에 꽃이 피어나고 나비가 날아든다.
듭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선생의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노라니
의 나도 모르게 매듭의 아름다움에 빠져든다.
매듭과의 운명적인 첫 만남
를
당시 어머니의 나이를 훌쩍 넘은 선생이 무더운 여
우아하게 올린 머리에 단아한 한복을 입은 노
미자 선생은 상상했던 매듭장의 모습 그대로였다.
전 름 올이 고운 모시 적삼을 입고 연봉매듭을 엮던
어머니의 모습과 꼭 닮은 모습으로 작업대 앞에 앉
한복 맵시만큼이나 고운 미소로 취재진을 맞아주
는 그녀를 따라 작업실이 있는 자택으로 들어서니
하 아 끈을 한 올 한 올 정성스레 엮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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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공예대전에 출품되는 공예 분야가 20가지가
넘는데, 31회가 진행되는 동안 매듭으로 대통령상
을 수상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래서 아무도
하지 못했던 것을 내가 한번해보면 어떨까 하는 도
전의식과 사명감이 생기더라고요. 매듭을 하는 많
은 분께 매듭이 이렇게 인정받는 전통공예라는 걸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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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니 열정이 대단하다. 매듭을 잡고 있을 때면
행복의 정도가 매번 클라이맥스를 치닫는다고 한
다. 40여 년의 세월 동안 매듭을 포기하고 싶다거
나 그만두고 싶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선
생의 말이 빈말은 아닌 듯싶다.
“매듭을 처음 배울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어떻게 끈 하나를 접어 이런 형태가 나올까 신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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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재미있습니다. 끈을 잡고 매듭을 시작하면 결과
가 어떻게 나올지 기대되고 벅차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업을 합니다.”
40여 년 한 길을 걸어온 장인은 마치 눈앞에 기대
하고 고대했던 매듭 작품이 완성되기라도 한 것처
럼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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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속에서 장 밖으로 나온 매듭
과거에는 매듭이 쓰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노 4 8사 끈목 짜는 모습
5 국화 매듭 맺는 모습
리개와 도포끈 등 남녀의 의복을 장식했을 뿐만 아
니라, 각종 주머니와 부채에도 매듭이 멋을 더했으
며, 두루마리 편지를 꽂아두던 고비와 방장걸이와
발걸이, 횃대 등 실내에 사용되는 기물에도 매듭 어 있는 문화를 장 밖으로 끌어낼 수 있을까’를 생
을 드려 장식했다. 가마와 악기, 불교의 기물들에도 각한 끝에 현대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밥상에서
매듭이 빠지지 않았다. 이처럼 매듭은 신분과 계층 식탁 문화로, 전등에서 스탠드 문화로 자연스럽게
을 초월해 사용되었으며, 특유의 화려함과 섬세함 생활이 바뀌었듯이 전통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시
으로 일상 곳곳을 조화롭게 장식했다. 하지만 서 대에 맞는 매듭을 만들고 보급해야 하지 않을까 생
구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생활과 문화가 변화하 각한 것이다. 특히 ‘사람들이 작품을 보고 갖고 싶
면서 매듭이 쓰이는 곳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선 다는 마음이 들어야 현대화에 성공한 것’이라는 선
생은 아름다운 매듭이 일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안 생의 생각에 따라, 현대의 쥬얼리 작가와의 협업을
타깝게 여겨 매듭의 현대화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 통해 브로치를 만들었고, 핸드백, 벨트, 스탠드, 실
다. 처음 시작은 ‘노리개’였다. 사람들이 혼사나 어 내장식까지 그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다. 또한 매
떤 특별한 행사에서 한복을 입을 때 딱 한 번 달면 듭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미자 선생이 회장을 맡고
그만인 노리개를 비싼 돈을 들여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김은영전승매듭연구회’에서는 현대생활에
있느냐고 말하는 것을 듣고, 이런 생각이 계속되면 접목할 수 있는 주제를 하나씩 내세워 해마다 전
우리 문화는 과거 속으로 그냥 사라져 버리겠구나 시회를 열고 있다. 그동안 현대식 아파트에 어울리
하는 위기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는 ‘실내장식’, 의상과 매치할 수 있는 ‘현대 의상과
‘어떻게 하면 특별한 행사 때 말고도 일상에서 매 매듭’ 등을 주제로 전시회를 개최하며 현대 문물과
듭을 사용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장 속에 잠들 의 접목을 끊임없이 시도해 왔다. 매듭의 현대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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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서고 있는 매듭장답게, 현대식 인테리어로 장
식된 선생의 집안 곳곳에도 전통이 깃들어 있었다.
접시 색감과 맞춰 매듭으로 장식한 테이블보를 식
탁에 깔고, 유럽 귀족이 쓰던 촛대를 사들여 갓과
나비매듭으로 장식하고, 크리스마스에는 색색의
오색 실로 만든 매듭 장식으로 트리를 대신하며 몸
소 매듭의 현대화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야말로, 진정한 매듭의 현대화가 아닐까.
전통 계승에 대한 사명감으로
예순 중반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선생의 일과
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개인 작업 하는 시간 외
에는 모두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시간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현재 ‘문화재보호재단’에서
운영하는 한국건축공예학교에서 기초반부터 연구
반, 전문반까지의 학생을 가르치고, ‘서울시 무형문
화재 돈암문공예관’에서는 매듭을 배우고 싶어 하 많은 외국인에게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알릴 수
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이런 선 있다는 것, 매듭을 통해 역사와 문화를 전파할 수
생의 노력 때문일까. 해가 갈수록 매듭을 배우려는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보람된 일이냐는 것이다. 선생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역사박물관에서 8년간 특 또한 우리나라 학생들 뿐만 아니라 어학당의 외국
강을 해온 선생은 이런 변화를 더욱 체감하고 있 인 학생들, 일본에서 온 수학여행단에 꾸준히 매듭
다. 단기강좌로 몇 주 배우는 학생뿐만 아니라, 끈 을 알려주며 민간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염색부터 전통적인 방법으로 실을 짜고 매듭을 맺 하고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전통문화의 세계화, 매
는 것까지 배우는 전문가 과정을 이수하려는 학생 듭의 대중화가 아닐까.
이 점점 늘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앞으로 매듭 “김은영 선생님께서는 매듭만큼 한국인의 정서가
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지 않을까 기대 많이 배어 나오는 공예가 없다고 가르치시면서 제
하고 있다. 자를 키우고 매듭을 알리고자 애쓰셨어요. 그 때문
“현재 남아 있지 않은 유물을 자료를 통해 하나하 에 지금껏 매듭의 명맥이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나 복원해 나가는 것도 보람 있지만, 제자들이 매 저 또한 열심히 제자들을 가르치고, 문화를 복원하
듭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매듭에 깊이 빠져드는 것 는 데 앞장서 전통매듭의 명맥이 앞으로도 계속 이
을 볼 때면 더욱 큰 보람을 느낍니다. 앞으로 우리 어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현대화 작업도
전통공예인 매듭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더욱 발 꾸준히 진행해 매듭이 현대인들의 생활 속으로 좀
전하려면 계속해서 매듭을 전승할 사람이 필요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기 때문이죠.”
선생은 학생들에게 매듭을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이
글 양지예 프리랜서 기자
민간외교관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끈 하나로 사진 김정호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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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바다 너머
Banjiha?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4관왕 수상에 이어 전 세계적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가운데, 많은 외국인이 영화의 주요 배경인 반지하 주택에 관심을 보이고
그게 뭡니까?
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지하 주택이 외국에는 없기 때문이다.
영국 BBC가 한국어 그대로 ‘Banjiha’라 표기했을 만큼 한국에만 있는 주거구
조인 반지하 주택은 왜 생긴 것일까. 또한 외국인들은 어떤 집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미래의 주거문화는 어떤 모습일까.
영화 <기생충>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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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의 단면 품은 반지하 통계청의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전체 가
지난 2월 9일현지 시간, 미국 LA에서 열린 제92회 구 중 1.9%에 해당하는 37만여 가구가 반지하에 거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연은 단연 영화 <기생충>이었 주한다. 2005년 59만여 가구와 비교해 크게 줄어든
다. 전 세계는 상업영화의 본고장 한가운데에서 작품 수치다. 요즘은 건축 기술의 발달로 과거의 문제점들
상·감독상·각본상·국제장편영화상 등 오스카 트로피 이 많이 개선됐다. 특히 요즘은 반지하 공간을 모임
4개를 ‘쓸어 담은’ 한국 영화에 비상한 관심을 보냈 공간·자료실·전시장 등으로 리모델링해 새로운 사회
고, 이는 영화의 주요 배경 중 하나인 ‘반지하’로 이어 적 가치를 창출하는 프로젝트가 곳곳에서 진행되고
졌다. <기생충> 주인공 기택송강호 분 가족이 사는 반 있다. 반지하가 영화에서처럼 마냥, 절망적인 이미지
지하 주택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 인 것만은 아닌 셈이다.
라만의 독특한 주거 양식이기 때문이다.
창문의 절반이 지층으로 가려진 희한한 주택 구조의 각국의 상황과 환경에 맞춰 발달한 해외 주거문화
밑바닥에는 남북 분단이라는 아픔이 면면히 깔려 있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들이 한데 얽혀 반지하
다. 1968년 북한에서 내려온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주택을 만들어 냈듯, 해외에도 각국의 상황과 환경
를 습격한 직후, 정부는 건축법을 개정했다. 전쟁 등 에 걸맞은 주거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가깝고도 먼
국가비상사태 시 벙커로 사용할 수 있도록 신축 주택 나라 일본은 고온다습한 기후를 우선적으로 고려한
에 지하 공간을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주요 개방적 주택 구조다. 창문을 많이 만들고 지붕을 높
골자였다. 이에 따라 이후 지어진 단독·연립주택에는 게 설치해 통풍성을 높이는 데 중점을 둔 것이다. 이
지하층이 생겼고, 초창기에는 주로 창고로 쓰였다. 와 함께 지진이 빈번한 지역 특성상 주택을 높게 짓
1970년대부터 산업화가 본궤도에 오르자, 1차 산업 지 않고, 진동에 부서지기 쉬운 철근 콘크리트 대신
에 종사하던 농촌 젊은이들은 새로운 기회와 일자리 나무를 사용한 목조주택이 보편화 됐다. 그러다 보니
를 찾아 서울로 모여들었다. 급격한 인구 증가에 주 화재와 방음에 다소 취약하다는 단점도 품고 있다.
거 공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등장한 구 중국은 전통적으로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
원투수가 지하층이었다. 무일푼으로 상경한 세입자 사상을 갖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주택에도 그대로
들은 조금이라도 더 싼 방을 찾고 싶었고, 집주인들 반영됐는데, 중국의 전통 주택은 마당인 중정을 중심
은 지하층을 이용해 월세를 받고 싶었다. 수요와 공 으로 여러 채의 건물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내향
급이 맞물리며 지하층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적 공간 구성이 가장 큰 특징이다. 세계에서 세 번째
자, 정부는 1984년 건축법 규정을 완화해 3분의 2 이 로 넓은 영토를 자랑하는 중국이 이처럼 폐쇄적인 면
상 묻혀 있어야 했던 지하 부분을 2분의 1 이상으로 모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최근에는 인구가
줄였다. 그만큼 바깥과 통하는 창문이 커졌고, 열악 밀집된 대도시를 중심으로 아파트도 많이 들어섰는
하지만 조금이나마 더 숨통 트이는 생활공간이 만들 데, 건축 골조만 분양하고 내부 인테리어 공사는 각
어졌다. 반지하 주택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 곁 집주인이 도맡는다. 이 또한 자기중심적 성향의 한
에 안착했다. 단면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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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우리나라보다 100배 이상 넓은데 인구는
7배가 채 되지 않는다. 이렇듯 인구 대비 국토가 넓
은 만큼 미국의 중산층은 마당이 딸린 널찍한 단독
주택에서 생활한다. 문지방과 화장실 바닥 배수구가
없고, 도배보다는 페인트를 선호한다. 이러한 미국형
단독주택은 보통 대단지로 조성되는데, 이웃과 담이
없거나 낮은 개방형 구조를 지닌 것이 특징이다. 대
도심에서는 비싼 집값을 조금씩 나누어 부담하는 셰
어하우스가 인기다. 은퇴한 부부들은 컨테이너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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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형 주택으로 개조한 모빌 홈mobile home을 끌고 다
니며 전국을 여행하기도 한다.
유럽의 주요 도시에 가면 거리마다 예스러운 멋이 살
아 있음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 오래전부터 형성
되어 온 도시의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는 방식으로 도
시를 성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수백 년
된 주택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데, 내부 또한
원래의 멋을 살리는 방향으로 리모델링한다. 고로 다
소 좁지만 아늑한 느낌을 주는 집이 많다. 또한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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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층고가 낮아 도시 미관을 해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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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주거는 ‘경험’이라는 특별한 가치도 제공한다. 혼 주거에 대한 확고한 생각으로 그 장단점에서 벗어났
자 살 때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비슷한 사람들과 다. ‘떠받들며 살지 않아도 되는 집’, ‘완전히 나로 존
함께 나누고, 그 안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해 나 재할 수 있는 집’이 이들의 모토다.
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장점을 중요한 점은, 주거에 대한 밀레니얼·Z세대의 생각이
배울 수 있고, 공동의 문제에 대해 보다 쉽게 해결할 전 세계적 트렌드라는 사실이다. 공유주거에 대한 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숙명과 념과 확신은 선진국일수록 강하고, 자신만의 주거 형
도 같은 외로움을 상당 부분 덜 수 있다. 이런 장점 때 태를 만들고자 하는 개개인의 욕구도 점점 커지고 있
문에 경제적 여유가 있음에도 공유주거를 택하는 사 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주거문화의 대혁신을 예
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고하고 있다. 집에 나를 맞추는 게 아니라 내 삶에 걸
이동형 주택과, 넓은 대지 대신 옹골찬 내실을 택하 맞은 집을 선택하고 꾸미는 시대가 점점 가까워지고
는 협소주택도 널리 퍼지고 있다. 집에 자신만의 개 있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도 집에 대한 생각을 조금
성을 한껏 살릴 수 있다는 것이 이들 주택의 가장 큰 씩 바꿔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특장점이다. 아파트는 집값이 비교적 안정적이지만
비싸고 획일화돼 있으며, 관리비 등 유지비용이 상당
글 강진우 문화칼럼니스트
히 많이 들어간다. 이동형·협소주택을 택한 사람들은 사진 셔터스톡, Flickr(@naval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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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시와 사진 한 모 금
김 형 복
월간 <문예사조> 시 부문 등단
부산강서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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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세월 가고
별이 되고 그늘이 되는 순간 속에서
전생의 인연으로
먼 산의 가을처럼 무늬 지는 날
비울 때 더욱 빛나는 낯선 명상처럼
내 곁에 머물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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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옹기 종 기
일상의 예술
‘조각보’
Everyday Art:
Jogak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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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I c onic I tem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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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한국 의 서 원 ①
인간의 손길이 있되 없는 듯
‘병산서원’
Byeongsan Seowon:
Architecture that Melds with 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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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Korea’s Seowon
지난해 7월 한국 문화계에 낭보가 전해졌다. 바로 ‘한국의 서원 Korea’s cultural community received good news in July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9개의 서원소수서원, 도 2019: Nine traditional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
산서원, 병산서원, 옥산서원, 도동서원, 남계서원, 필암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이 유네스 called seowon (Sosu Seowon, Dosan Seowon, Byeongsan
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이다. 세계유산위원회는 그 선정 이유로 Seowon, Oksan Seowon, Dodong Seowon, Namgye Seowon,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 Piram Seowon, Museong Seowon, and Donam Seowon)
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를 꼽았다. were placed on the UNESCO World Heritage List. The World
Heritage Committee described them as “evidence of a neo-
Confucian cultural tradition passed down to Korea today
through education and social customs.”
not surprising; in fact, their placing on the list came much later than
안동 병산서원(사적 제260호) it should have. The seowon have both inherited the neo-Confucian
Byeongsan Seowon, Andong (Historic Site No. 260)
traditions of Northeast Asia and exhibit cultural traits native to
Korea (specifically, the Joseon Dynasty). Some may ask why only
한국의 서원은 살아 있는 전통 Korea’s traditional seowon have become world heritage sites when
한국의 서원이 세계유산이 된 것은 당연한, 아니 외려 늦은 traditional academies in China—where such academies originated
일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서원은 여러 면에서 동북아시아의 성 in the first place—have not. There are several reasons for this, but
리학적 전통을 승계하면서도 한국조선 고유의 문화적 측면을 보 the biggest one, in my opinion, is that Korea’s seowon still more or
여주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서원 전통은 중국에서 비롯된 것인 less function today as they were built to. Originally, seowon were
데 왜 중국의 서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가 되지 않고 한 educational institutions built to pay homage to ancestors who had
국 것만 등재되었느냐고 의문을 표할 수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 great learning and to teach students about neo-Confucianism. While
지만 가장 큰 이유로 한국의 서원은 부분적이나마 여전히, 본연 the role of Korea’s traditional seowon has drastically changed over
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서원이란, 학문 the years, families still conduct ancestral rites at these places. That is
이 뛰어난 조상을 제사 지내고 후학에게 성리학을 교수하기 위해 why I call Korea’s traditional seowon “living traditions.”
세워진 교육기관이다. 지금의 한국 서원은 교육 기능이 많이 축 International attention has also focused on the architecture of
소되었지만 가문을 중심으로 한 의례는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다. traditional seowon . Seowon were constructed in a way unique to
이런 면에서 한국의 서원은 살아 있는 전통이라 할 수 있다. Korea and were built with an eye for design. The tradition of building
서원의 기능적 측면뿐만 아니라 건축물 자체로도 주목 받았다. seowon did come from China; however, Korea’s seowon were built
한국의 서원 건축은 고유하면서도 뛰어난 안목으로 이루어졌다. very differently from Chi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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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류성룡 선생의 위패를 모신 ‘존덕사’
Jondeoksa, built to enshrine “Seoae” Ryu Seong-ryong’s ancestral tablet
비록 서원 전통이 중국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서 Byeongsan Seowon: Isolated from Joseon’s political sphere
원 건축은 중국과 사뭇 다르다. This article focuses on Byeongsan Seowon, but I cannot i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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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앞서 말했듯 서원은 16세기 중반 이후 politics of the Joseon Dynasty. This isolation, however, allowed
향촌의 유학자들이 그 지역의 주요한 유학자들을 제사 지내고 후 the seowon to be preserved from the Prince Regent Heungseon
학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유교식의 교육기관이다. Daewongun’s (Prince Gung) order to demolish all seowon . Was this
성균관이나 향교가 국립교육기관이라면 서원은 사립교육기관이 the irony of fate? Seowon were built from the mid-16th century
라고 할 수 있겠다. 서원의 발생에 대해 조선 중기의 위대한 학자 by Confucian scholars in rural areas to pay tribute to important
였던 유형원은 성균관이나 향교가 과거 시험에만 집착해, 그것을 Confucian scholars from local areas and teach students about neo-
개선하고자 성리학의 순수한 정신을 교육하는 서원이 생겼다고 Confucianism. Seonggyungwan National Academy and hyanggyo
보았다. 그런가 하면 16세기에 벼슬길에 올라 성리학적인 정치를 (provincial schools) were run by the government, but seowon were
실현하려 했다가 실패하고 낙향한 사림파들이 세운 것이라는 설 what you could call “privately run.” Yu Hyeong-won, a great scholar
도 있다. of the mid-Joseon period, believed that seowon had appeared because
one of them. The biggest reason they are fascinated by this seo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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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만대루’
Mandaeru Pavilion, offering a scenic bird’s eye view of the landscape
것은 가능한 자연에는 손 대지 않고 인간의 건축이 자연에 안기 does not impact the surrounding natural environment; essentially,
는 것과 같은 건축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 병산서원이 바로 이런 it is a way of constructing a building so that it seems to just melt
방법을 통해 건축되었다. into its surrounding natural environment. Byeongsan Seowon was
우리가 병산서원 같은 유교 건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보는 방 constructed in this very way.
법을 알아야 한다. 전통적인 유교 건축은 불교 건축과 외양은 비 To properly understand the Confucian way of constructing
슷하나 건축 원리는 상반된다. 어떻게 상반되는 것일까? 불교 건 a building like Byeongsan Seowon, we need to know what we are
축은 밖에서 보는 건축이라면 유교 건축은 안에서 밖을 보는 건 seeing when we look at it. While traditional Confucian construction
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불교의 절은 밖에서 볼 때 장엄하게 techniques seem very similar to Buddhist construction techniques, the
보이도록 짓지만, 유교 건축은 안에서 바깥을 볼 때 그 경광이 아 principles they follow are completely opposite from each other. How
름다운 지점에 건물을 짓는다. 절은 신앙의 중심인 붓다가 있는 so? Buildings built using Buddhist construction techniques focuses
집을 화려하게 지어 신도들의 신심을 끌어낸다. 그에 비해 유교 on how the building looks from the outside looking in. Confucian
는 핵심이 인간에 있기 때문에 인간을 중심으로 건축을 한다. 따 building techniques, on the other hand, focus on how the building
라서 유교 건축은 밖에서 보면 안 된다. 그렇게 보면 멋있는 것이 looks from the inside out. Ultimately, what this all means is that
하나도 없다. 대신에 안에서 밖을 보면 수려한 자연이 들어온다. Buddhist temples are built to look magnificent when viewed from the
병산서원이 꼭 그렇다. 어떤 각도로 찍든 바깥에서 담은 병산서 outside, but buildings constructed in the Confucian way boast beautiful
원의 모습은 별로다. 그러나 강당입교당의 원장 자리에서 본 경광 views from inside the building. Temples are built in a stunning fashion
은 압권이다. 서원의 핵심 인물인 원장의 자리에서 볼 때 가장 아 to house the holy being that Buddhists revere, the Buddha, and to
름다운 경치가 나오게 서원이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encourage religious devotion among believers. Buildings constructed
그 자리에서 보면 바로 앞에 있는 만대루가 엄청난 건축적 장치 using Confucian techniques, however, do not focus on the outside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대루 지붕 위로는 앞산인 병산과 하늘 architecture of a building. Rather, Confucian architects considered that
이 보이고 기둥 사이로는 낙동강이 보인다. 그리고 밑으로는 땅 the buildings they created are “inside human beings” and thus built
이 있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는 자연을 구성하는 하늘과 물과 the structures with a “focus on humans.” That is why you should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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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만대루가 없었으면 어 observe Confucian buildings from the outside. There is nothing great
떠했을까? 앞에 있는 산과 강이 너무 강하게 인간의 공간, 즉 앞 looking about their outer architecture. Viewed from the inside out,
마당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그것을 조금 순화시킬 필요가 있 however, the buildings provide a splendid view of nature. Byeongsan
다. 그러나 인위적인 것은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그런 생각에 따 Seowon is a perfect example of this. Pictures taken from all angles of
라 강당 앞에 건물을 세우되 만대루처럼 기둥과 지붕만 있는 단 the seowon are unremarkable. But the view from the director’s seat in
출한 집을 세움으로써 인간의 손길을 최소화했다. 그런 끝에 인 the lecture hall (Ipgyodang) is a sight to behold. The seowon was built
간의 손길이 있되 없는 것 같은 기막힌 모습이 나타났다. 이게 바 to ensure that the most beautiful view of nature would be had from the
로 한국인이 지닌 친자연적 성향이다. 이 만대루라는 건물을 그 seat of the seowon’s most important figure, the director.
냥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이 건물에 엄청난 건축 Viewed from the director’s seat, the Mandaeru Pavilion situated
적인 원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외국 건축가들이 just in front of the seowon is a fantastic architectural device. Through
병산서원에 오면 말을 잊고 감상만 한다고 한 것이다. 물론 만대 the top of Mandaeru Pavilions’s roof, you can see Byeongsan
루에서 보는 풍경도 절경이다. 그래서 거기 앉아 있으면 돌아갈 Mountain and the sky; the Nakdonggang River, meanwhile, can be
줄을 모른다. 이처럼 강당과 만대루에 앉아서 경치를 감상해보면 seen through the columns; look below, and you can see the earth.
왜 서애가 이곳에 서원을 지으려고 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So, in sum, you can see all the elements of nature—the sky, water,
and earth—in one glance from that seat. What would happen if
글 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
사진 아이클릭아트 Mandaeru Pavilion wasn’t there? The view of the mountain and river
enjoy—a view that was engineered by humans yet seems not to have
sentiment inherent in Koreans. While the pavilion may not look like
yourself sitting there all day. In fact, you will realize why Ryu Seong-
ryong built the seowon where he did when enjoying the scen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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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지역 문 화 스 토 리
승리와 평화의 기원
통제영 둑제
먼 옛날부터 전투의 끝은 상대방 장수의 목을 베어 창에 꽂아 들
고 외치는 환호였다. 그건 그 전투에서 이겼다는 신호였다. 전투
에서 이기면 다음 전투가 벌어질 때까지 잠시나마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창에 꽂아 든 적장의 머리를 형상화하여 만든 것을 ‘둑기
纛旗’라 한다. 둑기는 군신을 상징하게 되었고, 왕이나 장수가 출전
할 때면 승리를 기원하며 둑기에 제사를 지냈다. 이를 ‘둑제纛祭’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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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L oc a l Culture Stories
초헌례 모습
Scene of chohyeonrye, the first libation o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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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3
1 홍둑
Red dukgi
2 흑둑
Black dukgi
3 집사 관세
Ritual cleansing
4 둑제 제례상 차림
Dukje ritual 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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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quent dukje became detrimental, all dukje rituals were suspended established the basic norms of all rituals, outlining five categories of
in 1377 toward the end of the Goryeo Dynasty. Dukje reappeared national rites: auspicious rites (gillye ), felicitous ceremonies (garye ),
with the emergence of the Joseon Dynasty. ceremonies for welcoming foreign envoys (billye ), ceremonies for
Upon founding the Joseon Dynasty in 1392, Yi Seong-gye military review (gullye ), and funeral rites (hyungnye ). Thus, the
made two dukgi (one red and one black) the following year and Joseon Dynasty instated dukje as a national ritual.
entrusted his second son Prince Yeongan with dukje rituals. Whole For military officials, dukje held considerable import as a ritual
oxen were used as sacrificial offerings as the ritual officer (jipsagwan ) comparable to seokjeonje , the sacrifices to Confucius made by civil
performed the ceremonies dressed in armor or military uniform. officials. When mobilizing troops, the dynasty always held dukje
Soldiers absent during dukje were severely punished, sentenced to boost morale and pray for victory. During peacetime, the dukso
to flogging (gonjang ) the next day. By institutionalizing dukje , the shrine housing dukgi served as the site for dukje held in the spring
newly founded dynasty enforced the army’s supreme command and and fall, officiated by the minister of war as a ritual for national
solidified its own royal authority. prosperity and welfare. In the provinces, soldiers, commanders,
In the third year of King Sejong’s reign (1421), dukje was made a warriors, or local magistrates served as libation officiants for dukje ,
national sacrificial rite categorized as a small-scale national rite (sosa ) offering liquor to spirits during the rituals.
the fifth year of King Seongjong’s reign (1474) saw the publication A ritual continued during the Imjin Waeran
of Gukjo oryeui (Five Rites of the Dynasty), which included dukje When a Japanese invasion precipitated the Imjin Waeran (1592–
as one of the small-scale auspicious rites (gillye ). Gukjo oryeui 1598) waged in the mid-Joseon Dynasty, the Joseon gover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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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 잔을 올리는 제관·종헌관세 번째 잔을 올리는 제관으로 총 3헌관이다. 초헌 고 푸른색 융복戎服; 조선 시대 군복에 검정 화자靴子; 장화처럼 길게 올라오
관은 통제사였다. 제사를 진행하는 집사관은 모두 부하 장수였 는 신발를 신고 허리에 환도를 찼다. ‘간척무’를 추는 무공舞工은 푸
다. 모든 제관이 그러하듯 제사 전에는 몸이나 행동을 삼갔다. 제 른색 융복에 방패와 도끼를 들었다. ‘궁시무’는 붉은 융복에 활과
사 하루 전에는 목욕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둑사에 모여 사 화살을, ‘창검무’는 푸른색 융복에 창과 칼을 들었다.
당 안팎을 청소했다. 장막을 치고 경건한 마음으로 제사에 쓸 음 첫 번째로 술잔을 올리는 ‘초헌례’ 때, 태조 이성계의 무공과 조
식을 준비했다. 선의 건국을 송축하는 ‘납씨가納氏歌’를 부르면 왼손에는 방패를,
둑제를 지내는 날, 헌관은 투구와 갑옷에 동개활과 화살을 꽂아 넣어 등 오른손에는 도끼를 각각 든 4명의 무공이 북쪽을 향하여 간척무
에 지도록 만든 물건를 둘렀다. 10여 명의 집사는 흑립에 호수虎鬚를 꽂 를 추었다.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의식인 ‘아헌례’에도 역시 납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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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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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ed a position titled “commander-in-chief of the naval forces On the day of dukje , ritual officiants in helmets and armor
of the three provinces” to streamline its system of command. The also wore donggae , a back quiver for bows and arrows. Masters of
commander’s headquarters were named the Navy Headquarters of ceremony (numbering around ten) wore black hats decorated with
Three Provinces, often shortened to Navy Command Headquarters feathers, blue military uniforms (yungbok ), and black boots (hwaja ),
or Navy Headquarters. The Navy Headquarters of Three Provinces, along with military swords (hwando ) on their sides. Dancers
which commanded the naval forces of Chungcheong-do, Jeolla-do, performed the ceremonial dance gancheokmu in blue military
and Gyeongsang-do provinces, also observed dukje rituals. These uniform, wielding axes and shields. For the dance gungsimu , dancers
dukje were started in the eighth month of 1593 (26th year of King wore red uniforms with bows and arrows; for changgeommu ,
Seonjo) at Hansanjin (present-day Hansando Island) by the first dancers wore blue uniforms with spears and swords.
Commander-in-Chief Yi Sun-sin. His war diary Nanjung ilgi makes Once the first glass of libation was offered, the song “Napssiga”
three references to dukje held at the Navy Command Headquarters. (a paean to King Taejo Yi Seong-gye’s military valor and to the
Dukje continued amid the life-threatening circumstances of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Dynasty), was sung as four dancers
Imjin Waeran. performed gancheokmu facing northward, each wielding a shield
In 1604 (37th year of King Seonjo), following the outbreak and ax in their left and right hands. “Napssiga” was sung again for
of the Imjin Waeran, the Navy Command Headquarters relocated the second libation offering as four dancers performed gungsimu ,
to Duryongpo (present-day Tongyeong) in the southern area of each wielding a bow and arrow in their left and right hands.
Goseong-hyeon county. Over the ensuing 300 years, the Navy “Napssiga” was sung one last time during the final libation offering as
Command Headquarters served as the late Joseon Dynasty’s bulwark two dancers faced each other to perform changgeommu , each with
against foreign invasion. The dukso shrine was on a hill lying to the a spear and sword in their hands. As the ritual vessels were removed
left of the headquarters. Every year on Gyeongchip (“day of spring (the procedure called cheolbyeondu ), the song “Jeongdongbanggok”
awakening” marking the third of twenty-four solar terms) and (a paean to King Taejo’s military victory against Yuan Dynasty
Sanggang (“first day of frost” marking the eighteenth solar term), intruders and to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Dynasty) was sung
three libation officiants led dukje rituals at the Navy Command as the ten dancers performed together. They formed a thrice-spun
Headquarters in accordance with Gukjo oryeui . circular line for the hoeseonmu dance, followed by the thrice-
repeated pattern of stepping back and forth for the jintoemu dance.
Musicians and dancers in helmets and armor The ritual vessels comprised an incense burner, candlesticks,
Dukje was observed with three ritual officiants for offering libations: and multiple vessels—including byeon , du , bo , gwe , go , jak , jeom ,
choheongwan (first libation officiant), aheongwan (second libation myeok , bi , noe , jak , se , and sangjun —required in specific numbers,
officiant), and jongheon (final libation officiant). The naval such as eight byeon and eight du . Two dukgi were raised for the
commander-in-chief served as the first libation officiant. Officers rituals, one red and one black. The military articles (gunmul ) housed
under his command served as masters of ceremony responsible for in the Navy Command Headquarters included obangsingi flags as
carrying out ceremonial proceedings. As customary, ritual officiants well as the ritual arrows gwani and yeongjeon , which were displayed
exercised bodily and behavioral discretion before the ceremonies. outside the shrine gate (sinmun ) but within the main three-door
They donned newly washed clothes after bathing the day before and gate (oesammun ).
gathered to clean the dukso shrine inside and out. Pitching a tent, Instead of using real weapons, the dukje music and dance
they then prepared ceremonial food with reverent minds. featured weapon-shaped implements (mugu ) made to resem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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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를 부르나, 춤은 왼손에 활을 잡고 오른손에는 화살을 각각 든 둑기는 홍둑기와 흑둑기 2기를 세운다. 통제영 군물軍物은 오방신
4명의 무공이 궁시무를 춘다. 세 번째의 ‘종헌례’에도 납씨가를 기, 관이, 영전 등인데 둑소 신문神門의 바깥, 외삼문 안쪽에 세웠다.
부르나, 춤은 창과 검을 각각 든 2명의 무공이 서로 마주 보며 창 둑제의에서 행해지는 악무樂舞는 실제 무기가 아닌 무기를 형상화
검무를 춘다. 제기를 거두는 철변두에는 태조가 원나라 오랑캐를 하여 만든 방패·도끼·활·화살·창·검 등의 무구舞具를 사용한다.
물리친 무공과 함께 조선의 창업을 찬양하는 정동방곡正東方曲에 악기는 주로 군영에서 사용하는 북과 징 등의 타악기로 한정되었
맞춰 무공 10명이 함께 춤을 춘다. 일렬로 서서 세 번 원을 돌고 다. 제사를 진행하는 헌관과 집사는 물론, 악기와 춤을 담당하는
다시 세 번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며 ‘회선무’와 ‘진퇴무’를 춘다. 악공樂工과 무공舞工 또한 갑옷과 투구 차림으로 제사에 참여했다.
제기祭器는 향로·촛대를 비롯하여 변·두·보·궤·조·작·점·멱·비·
뇌·작·세·상준 등이며, 변籩과 두豆는 각각 여덟 그릇을 사용했다. ‘둑기’는 아직도 통영 사람들의 수호신
통제영 둑제는 조선 시대 지방 군영의 가장 전통적이고 그
규모 또한 가장 큰 군영 의식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조선 시
11 궁시무
Gungsimu 대 통제영 둑제에 관한 흔적은 현재도 통영 곳곳에서 찾아볼 수
12 회선무 있다. 옛 통제영의 ‘둑사당 터’는, 옛날 둑제를 지내던 산마루라
Hoeseonmu
는 뜻의 토박이지명인 ‘뚝지먼당둑제를 지내는 언덕’이라 부른다. 아직
빈터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옛날 ‘뚝장군’이 이곳에 통영성統營城
을 쌓고 왜적을 물리친 후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영웅설화가 남아
있다. 기골이 장대하고 뚝심이 센 사람을 일러 ‘뚝장군’이라 칭하
기도 한다. 아직도 이곳 인근의 주민들은 기제사를 지낸 후 거리
손을 빌 때면 항시 ‘우리 뚝장군 몫’이라며 사립문 밖에 제삿밥을
차리고, 국태민안과 안가태평을 두 손 모아 기원하는 전래 풍습
도 남아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둑기는 후세의 영웅 설화
와 함께 ‘뚝장군’이란 인격신으로 변모되어 이 고장의 민간신앙
으로 뿌리내렸다. 둑기는 아직도 통영 사람들의 수호신이다.
통영문화원은 지난 2019년 10월 24일 상강일에 통제영 둑제를
11
재현했다. 통제영 둑제 복원 및 재현 행사는 전통문화를 활성화
하는 동시에 민족문화를 계승·발전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
다. 나아가 통제영 둑사당을 복원하여 조선 시대 일본의 침략을
방비하던 삼도수군통제영의 상징이며 군영의 수호신이었던 둑기
를 다시 세워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긍지와 함께 전통적 극일혼
克日魂의 표상으로 삼았으면 싶다.
글 김일룡 통영문화원장
사진 통영문화원, 문화콘텐츠닷컴(한국콘텐츠진흥원)
‘지역N문화’ 누리집에서
12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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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수군통제영 중영. 둑제를 재현하며 임시로 ‘통제영둑사(統制營纛祠)’라는 현판을 붙였다.
Navy Command Headquarters Jungyeong Hall with a temporary name plaque reading “Navy Command Headquarters Duksa”
shields, axes, bows, arrows, spears, and swords. Musical instruments the spirits with offerings of rice placed outside twig gates, observing
were usually limited to percussion instruments such the buk (barrel traditional customs of praying for national prosperity, welfare, and
drum) and jing (gong). Along with the ritual officiants and masters peace. Over the passage of time, heroic tales have transformed
of ceremony, musicians (akgong ) and dancers (mugong ) also donned dukgi into the personal deity Ttukjanggun, which has taken root in
helmets and armor while performing in dukje . regional folk religion. To this day, dukgi remains the guardian spirit
of Tongyeong.
To this day, dukgi remains the guardian spirit of Tongyeong On October 24, 2019, in time for Sanggang, the Tongyeong
Dukje rituals held at the Navy Command Headquarters were among Culture Center reenacted the dukje rituals of the Navy Command
the most time-honored traditions of regional army forces as well as Headquarters. The restoration and reenactment of dukje hold
the largest military rituals in scale. Traces of Joseon-era dukje are considerable significance, revitalizing traditional culture while also
detected in present-day Tongyeong. The site of the former Navy continuing and furthering national customs. One can only hope
Command Headquarters is called ttukjimeondang , a local idiom that the entire duksadang shrine will be rebuilt. Once restored, the
for “mountain ridge where dukje were offered.” The ground has dukgi —a symbol of the Navy Command Headquarters that repelled
withstood the ages as a vacant lot. Heroic tales still recount the feats Joseon-era Japanese invasion and also the guardian spirit of the
of Ttukjanggun (“Duk General”) who built the Tongyeongseong navy—shall be raised once again as a proud sign of victorious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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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마을 산 책
성주
한개마을, 고샅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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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Wa l k i ng through V illages
대구에서 30번 국도를 타고 성주 방향으로 달리다 유유히 흐르는 If you drive down National Route 30 from Daegu toward
낙동강 위 성주대교를 지난 다음, 성주군 성남면 소재지를 지나 Seongju, passing by Seongjudaegyo Bridge with the
우회전 길로 접어드니 기와집, 초가집이 모여 있는 예스러운 마을 Nakdonggang River flowing leisurely underneath, and
풍경이 펼쳐진다. 600여 년 역사의 한개마을이다. 마을의 맨 앞 then take a right after going by the administrative center
에 마을의 이정표인 듯 노란 은행나무가 서 있다. 그 모습이 수백 of Seongnam-myeon village in Seongju-gun county, you
년 역사의 마을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믿음직스럽다. will find yourself facing an old traditional village with
cottages and tile-roofed houses. Hangae Folk Village, as
the town is called, has a 600-year-old history. A yellow
ginkgo tree stands at the very front of the village like
a signpost, almost as if it has steadfastly protected the
village through hundreds of years of history.
마을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재인 ‘한개마을’ Hangae Folk Village: A National Folklore Cultural Heritage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자리한 한개마을은 동네 Property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재 제255호로 지정된 전통 마을이다. 마을 Hangae Folk Village is in Daesan-ri, Wolhang-myeon, Seongju-gun,
이 번창했을 때는 100호가 넘었다고 하나 지금은 70여 호만 남 Gyeongsangbuk-do, and is designated National Folklore Cultural
아있다. 6·25 전쟁으로 여러 채의 한옥이 파손되고 완전히 소실 Heritage Property No. 255. There were more than 100 houses in the
되기도 했다. 남아있는 집 중 한주종택, 월곡댁, 북비고택, 교리 village during its heyday, but only around 70 still exist today. Some
댁, 하회댁, 극와고택, 진사댁 등 일곱 고택은 경상북도 민속문화 of the houses were damaged, while others were destroyed, during
재다. 마을에서 가장 먼저 하회댁이 1750년경 지어졌고, 교리댁, the Korean War. Of those remaining, seven of the old houses (Hanju
북비고택, 한주종택은 1700년대 후반에, 다른 큰 한옥들은 1800 Head House, Wolgok House, Bukbi Old House, Gyori House, Hahoe
년대에 건축되었다. 건립 시기와 집주인에 따라 배치 평면 공간 House, Geukwa Old House, and Jinsa House) have been named
구성이 각각 개성을 달리하고 있다. Gyeongsangbuk-do Folklore Cultural Heritage Properties. The oldest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1450년 of them, Hahoe House, was built around 1750, while Gyori House,
경 입향한 이래 600여 년을 내려오면서 성산 이씨星山李氏가 모여 Bukbi Old House, and Hanju Head House were built in the late
살고 있다. 1700s. The other, larger traditional Korean houses were built in the
마을은 전체적으로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전저후고前抵後高 지 1800s. Their location, size, and structure are all different depending
형을 이루고 있다. 그 높낮이는 땅의 고저 차이만 아니라 신분, 가 on when they were built and who owned them.
문의 위계를 나타낸다. Hangae Folk Village has been occupied by the Seongsan Yi Clan
over the past 600 or so years following Seongsan Yi U’s (星山 李友)
마을 공간 구성의 중요한 특징은 ‘안채’에 있어 return to the village, his hometown, around 1450 after he was made
과거의 한개마을은 대체로 다섯 부분으로 나뉘었다. 주거지 the city magistrate of Jinju during King Sejong’s reign (1418–1450).
의 뒤쪽 중앙부를 ‘한개’ 또는 ‘윗마’라고 부르고, 그 동쪽과 서쪽
을 각각 ‘동녘’ ‘서녘’이라 했다. 그리고 진사댁 앞의 동서 방향 길 The ladies’ quarters: A unique spatial feature of the village
주변은 ‘도촌’, 그 아래는 ‘아랫막’ 또는 ‘아랫마’라고 불렀다. 서녘 In the past, Hangae Folk Village was broadly divided into f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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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s. The central part of the village behind the houses was called
Hangae or Winma, while the eastern and western sides of the village
were simply called the “eastern side” and “western side.” The area
surrounding the road heading east and west in front of Jinsa House
was called Dochon, while the area below that was called Araenmak
or Araenma. The Winma of the western side of the village was where
many traditional Korean houses with all the proper formalities were
built. These houses were home to the most academically and socio-
교리댁 대문 economically exceptional people in the village.
Gyori House main gate
The large road seen directly from the entrance to the village is
called “Westerly Road.” Going down this road, Jinsa House, Gyori
House, Ungwa Head House, Bukbi Old House, and, finally, Wolgok
House can be seen on the right-hand side. If you stand at the end of
the fence behind the village that rests up against a mountain, you will
have a panoramic view of the entire village and see the Baekch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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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멋과 품위를 품은 ‘교리댁’ upwards off the main road. The tiled wall that stretches away from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3호인 ‘대산동 교리댁’은 마을 위 the front gate into the distance is a dominating feature. The dramatic
쪽에 위치하여 진입 과정에 있는 대문에서부터 우아한 멋과 품위 and dignified aura exuded by the house is a perfect example of what
를 드러낸다. 학자의 벼슬을 상징하는 키 큰 회화나무 그늘과 어 you would expect from the house of a high government official.
우러진 대문은 큰길에서 약간 오르막에 떨어져 있다. 대문과 이 The oldest house in the village, Gyori House was built in 1760
어져서 길게 뻗은 기와 담장은 주위를 압도하고 있다. 겉모습부 (the 36th year of King Yeongjo). The ancestral shrine on a gently
터 품격 있는 드라마틱한 요소를 보여주듯 벼슬 높은 집의 위상 sloped hill behind the men’s quarters is unlike ordinary shrines:
을 가장 잘 보여준다. separate from other buildings, it’s an unassuming and quiet space
영조 36년1760에 지어져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으로, 사랑채 with a narrow wooden porch; it also lacks dancheong (traditional
뒤편 나지막한 언덕에 있는 사당은 일반 사당과는 달리 툇마루가 multicolored paintwork on wooden buildings).
있는 별채로 단청이 없이 소박한 정적공간이다. The most alluring part of the house is the study located between
집의 매력은 대문과 사랑채 사이에 붙어있는 서재이다. 집주인이 the front gate and the men’s quarters. You can sense that the owner
서재에 많은 책을 갖추고 독서를 하고 글을 썼음을 짐작할 수 있 had a lot of books in the study and that he read and wrote there.
다. 집의 이름인 ‘교리’는 조선 시대 집현전, 홍문관, 교서관, 승문 The house’s name is Gyori, which indicates that the owner was a
원에 속하여 문필에 관한 일을 맡았던 문관 벼슬이다. government official involved in making records affiliated with the
Sado
Eungwa Head House (凝窩宗宅, Gyeongsangbuk-do Folk Culture
Heritage Property No. 44) is the birth site of the Seongsan Yi Clan. In
응와종택 대문
Eungwa Head House main gate the first year of King Gyeongjong, the reclusive scholar Yi I-sin made
Yeongjo, lived after being removed from his post for pointing out the
called Bukbichae. This small, four-room house was said to have been
built in the exact way of the wooden chest Crown Prince Sado was
trapped in until dying from hunger. Doors usually face the south or
east, but the gate made of twigs faces the north. This is because Yi
Seok-mun took off the door facing southwards and made one fac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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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와 이원조의 증조할아버지이 사도세자 죽음의 부당함을 직언하다 파직 places both hands in front of their face and bows) every morning.
당하고 낙향하여 살았던 집이다. The house is called Bukbi Old House because of the loyalty it shows
별도의 담장으로 구획된 아래 사랑채를 북비채라고도 한다. 4칸 toward Crown Prince Sado and because it eased the yearning Yi had
의 반듯한 집은 사도세자가 갇혀 죽었던 뒤주 형상 그대로의 모 for the prince.
습으로 지었다고 한다. 보통 남쪽이나 동쪽을 향해 문을 내는데
사립문이 북쪽으로 나 있다. 이는 이석문이 남쪽으로 나 있던 대 Wolgok House: A closed-off world
문을 뜯어 한양이 있는 북향으로 문을 내고 매일 아침 읍을 올렸 Wolgok House (Gyeongsangbuk-do Folk Culture Heritage Property
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를 향한 충절과 그리움을 달랜 집으로 ‘북 No. 46) is so large that there is even a pathway inside the house. The
비고택’으로도 불린다. house is located at the very top of the village near a mountain. The
men’s quarters, which is built on a slope with two steps, and especially
폐쇄적인 구조를 가진 ‘월곡댁’ the wall made from earth that surrounds the women’s quarters and
월곡댁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6호은 집 안에 길이 있을 정도로 대 the annex, do not look like they are part of the house. When looking
지가 넓고 규모도 크며 뒷산에 가까운 마을의 가장 위쪽에 위치 down from the porch of the men’s quarters, you can see the village
한다. 경사진 땅에 구축한 2단 기단 위에 세워진 사랑채와 안채와 below and the Baekcheon Stream flowing far in the distance.
별채를 둘러싼 토석土石 담은 주택답지 않게 무겁게 보인다. 사랑 You can enter the women’s quarters directly without going
채 마루에서 내려다보면 아랫마을과 멀리 흘러들어오는 백천이 through a “middle door” from the men’s quarters, but the route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through the annex to the ladies’ quarters is more closed off: you must
사랑채에서는 중문을 거치지 않고 안채에 들어갈 수 있으나 별채 go through a “middle building” first. The annex was space used by
에서는 중문채를 거쳐야 안채를 드나들 수 있는 폐쇄적인 구조 the owner’s children who hadn’t yet been married off; later, however,
다. 별채는 분가하지 않은 자녀들의 거처였으나 후일에는 소실의 the space was said to have been used by concubines.
거처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Hanju Head House and Hanju Jeongsa: The deepest part of
the village
The alluring Hanju Head House (Gyeongsangbuk-do Folk Culture
월곡댁 안채 마당 Heritage Property No. 45) is located the furthest away from Hangae
Inner yard of the ladies' quarters, Wolgok House
Folk Village’s entrance and has undergone the most changes
the mountain path behind the Wolgok House wall, there are t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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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정사 한주고택 평면도
Hanju Jeongsa Hanju House ground plan
가장 깊은 곳에 ‘한주종택’과 ‘한주정사’ lake and outer-wing building. Hanju Head House was originally built
한주종택寒洲宗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5호은 한개마을에서 가장 by Yi Min-geom in 1767 (the 43rd year of King Yeongjo) but was
깊은 곳에 있으며 건축적 공간의 변화가 가장 많은 매력적인 집이 refurbished by “Hanju” Yi Jin-sang in the third year of King Gojong
다. 월곡댁 담장 뒤 산길을 내려오면 첫 번째 골목을 만나게 된다. (1866).
오른쪽으로 난 조용한 골목을 들어서면 2개의 대문채가 있다. 곧 Hanju Jeongsa is an annex of the Hanju Head House. The
이어 보이는 대문으로 들어서면 구한말 독립운동가 이승희 생가 building was built in a highly dignified fashion and was where Joseon
인 한주종택이다. 왼편에 안채는 대문채, 정침, 광채, 아래채가 □ scholars polished up on their learning and enjoyed their taste for
자형을 이루며 안마당을 감싸고 있다. 오른편에는 정자와 연못 아 the arts. The building is built on a high stone foundation that allows
래채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한주종택은 영조 43년1767 이민검 those inside to enjoy looking at the surrounding nature and even
이 창건했던 것을 고종 3년1866 한주 이진상이 중건한 집이다. 한 observe scenery in the distance. The traditional-looking pine trees in
주정사는 한주종택의 별채로, 조선 시대 선비들이 학문을 연마하 the front yard and the square pond (called ssangji , 雙池) located next
고 풍류를 즐겼던 격조 높은 집이다. 높은 석축 위에 세워져 있어 to the pavilion put the unique beauty of Korea’s traditional gardens
주변의 자연을 즐기고 멀리 경관까지 바라볼 수 있다. 앞마당의 on display.
고풍스러운 소나무와 정자 옆 공간에 배치한 네모반듯한 연못 쌍 The highlight of the Hanju Head House is the numaru (elevated
지雙池는 한국 전통정원의 아름다움을 독창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room) at the center of a two-room daecheong (main hall), with
앞뒤로 트인 2칸의 대청을 가운데 두고 서쪽에 방 한 칸, 동쪽에 one room to the west, two rooms to the east, and one of the eastern
두 칸 방이 있고, 동쪽 방의 앞 남쪽으로 있는 높은 누마루가 압권 rooms facing south. When looking out from the front yard toward
이라 할 수 있다. 앞마당에서 정사를 바라보면 활주가 받들고 있 the jeongsa , the cheoma (curvy edge of the roof) supported by arches
는 처마지붕이 마치 학이 날개를 펼친 듯 우아한 자태다. is a magnificent sight to see—almost as if the wings of a crane are
spread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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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팔도 음 식
산채비빔밥
sanchaebibimb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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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Pr ovinc ial Cuis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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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namul for Lean “Look now, the king and his avaricious officials gorge on
meat, while you poor people have nothing to eat and so
Times? have to forage in the fields and woods for grass roots and
a Scarce Delicacy! This colonial view of history was drilled into the minds
of the Korean masses by the Japanese during their
occupation of Korea. For the sake of reclaiming Korea’s
priceless culture of sannamul, the wild greens and herbs
collected in the hills and served as side dishes, we must
set the distorted record straight.
Sannamul wasn’t a last resort in times of famine as the mud smeared their rubber shoes. These women, we are told,
A distinction should be drawn here between “grass roots” and “tree were not Chinese, Russians, or Japanese, but inevitably Koreans.”
bark.” It’s true that Koreans sometimes ate the inner bark of pine (Hong Seung-myeon, Chewing on Early Summer in the Bamboo
trees toward the end of the Japanese colonial occupation. During the Grove: A Hundred Flavors and a Hundred Thoughts by Hong Seung-
war, ordinary Koreans had little to eat and had to resort to famine myeon , Samuban, 2003)
foods like bark. But that’s different from the custom of sannamul . Readers will note this wasn’t Korea, but the Chinese city of
When the Japanese spoke of inedible “grass roots,” they meant Changchun. There weren’t just Koreans living there, either: the city’s
sannamul . The Japanese thought that the Koreans dug up roots and inhabitants represented a melting pot of Koreans, Chinese, Russians,
plucked grass because they didn’t have anything to eat—but they and Japanese. They were all poor, but only the young Korean women
were wrong. Koreans treasured sannamul . Even today, when Koreans went out to the fields and woods to pick wild greens in the early
enjoy a high level of prosperity, they still eat a variety of these wild spring. Hong Seung-myeon said that “Koreans have a unique genetic
greens, including chwinamul (aster scaber), gosari (bracken fern heritage that enables them to identify, harvest, and digest wild
fiddleheads), and dureup (angelica shoots). Obviously, they’re not greens.” In short, sannamul wasn’t a “famine fod” only eaten by the
eating them for lack of other options. Journalist Hong Seung-myeon poor.
“Spring returns after the long cold winter in [Jiandao]. Freed Lamenting the loss of sannamul culture
from the ice, the muddy fields teem with life, and the shoots of grass According to a historical anecdote, even “Dasan” Jeong Yak-yong,
rise up together. This was the time of year when young women filled a prominent noble in the Joseon royal court during King Jeongjo’s
their baskets with greens in the fields on the outskirts of Changchun reign, set aside his duties in Hanyang (present-day Seoul) to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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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shing and pick wild greens without the king’s permission. Does it
that the peasants turned to when they had nothing else to eat?
way to know exactly who “Mr. Yu from Jangdan” was. But given
the founding of the Joseon Dynasty, we can safely infer that he was
a nobleman of great learning. The line “the basket is full of the fair
2 colors of spring” appears to refer to a gift the writer received, namely
Songdang thinks fondly of the “house in the leafy shade” and tries to
got from China. The Japanese, too, once cherished dishes prepared
with a range of wild greens that grow in the early spring. Yet, f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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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 reason, this culture surrounding mountain herbs is waning.
The plants are still eaten in Korea, but the lovely tradition—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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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한류 포 커 스
한국 영화,
제3의 뉴 한류를 향하여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린 날, 한국 영화의 위상은 <기 러약 2천16억 원로 지난 1년간 모든 한국 영화가 전 세계에서 올린
생충> 이후와 이전으로 나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 매출액의 2배 이상을 벌어들였다. K드라마가 제1의 한류를, K팝
<기생충>의 등장 이전인 2017년과 2018년, 한국 영화 수출액 이 제2의 한류를 주도했다면, 이제는 K무비 차례가 아닐까. K무
은 대략 3천만 달러에서 4천만 달러평균 473억 원 정도였다. 그러나 비는 지금 영화 <기생충>이 보여준 것처럼 제3의 한류를 향해
2020년 <기생충> 한 편의 전 세계 흥행 수입이 1억7,420만 달 순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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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H allyu Foc us
Korean Film:
Towards the Third Korean Wave
On the day of the 92nd Academy Awards ceremony, it 174.2 million (KRW 216 billion), which is more than four
occurred to me that the stature of Korean film as Hallyu times the total annual profit generated around the globe
(“Korean Wave”) will now and forever be explained in two by all of the exported films combined. If K-dramas and
parts: before and after Parasite. In 2017 and 2018, before K-pop led the first and second phases of Hallyu, it seems
Parasite, the total profit from overseas export of Korean like the time has come for K-movies to take over. As
films was about USD 30–40 million (approx. KRW 47.3 testified by Parasite, K-movies are on their way to create
billion). But as of today, the profit generated worldwide the third wave of Hallyu.
by Parasite alone since the beginning of 2020 is US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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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 해외 진출 다변화를 꾀하다 Korean films seek diverse modes of overseas expansion
최근 한국 영화는 기존의 ‘해외 수출’과 ‘해외 직접 배급’으 Recently, the Korean film industry has been diversifying overseas
로 귀결되는 해외 판매 전략을 벗어나 다변화하고 있다. 한국 영 sales strategies and finding alternatives to existing ones that end
화의 현지 리메이크나 합작 영화가 그중 하나다. 베트남의 경우 at overseas export and direct overseas distribution. One of the
한국 영화 포맷을 수혈해 <대디 이슈>와 <하이퐁>, <버터플라 alternatives is to collaborate with overseas filmmakers to produce
이 하우스> 등을 제작하였고, 실력 있는 현지 감독과 배우가 의 remakes of Korean films. Vietnam, for one, has adopted the Korean
기투합해 흥행에 성공하며 지속적인 한국 영화의 확장 가능성을 film production format to produce films such as Daddy Issues, Furie,
증명하고 있다. 리메이크의 경우 심은경, 나문희 주연의 <수상 and Butterfly House . With talented local directors and actors joining
한 그녀>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수상한 그녀>는 베 forces, the films have seen great turnout corroborative of Korean
트남, 인도, 필리핀, 일본, 태국, 인도네시아, 미국에서까지 앞다 film’s potential for continuous expansion. Miss Granny , starring
투어 리메이크했으며, 그뿐만 아니라 각국에서 흥행 돌풍을 일으 Shim Eun-kyung and Na Moon-hee, is the top example of a remade
켰다. 제목도 ‘내가 니 할미다’, ‘20세여 다시 한번’ 등등 각양각 movie. This film has been competitively remade in Vietnam, India,
색으로, 다시 젊어지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 이를 가족 안의 문제 the Philippines, Japan, Thailand, Indonesia, and the United States,
로 재치 있게 버무려 낸 것이 동아시아 전역에 두루 흥행에 성공 and has seen a rush of enthusiastic audiences every time. A well-
한 포인트로 꼽힌다. 한 마디로 원 소스 멀티 테리토리One source played case of the “one source, multiple territories” strategy in short,
Multi territory 전략이 제대로 먹힌 것으로, <수상한 그녀>의 리메이 the Miss Granny remake phenomenon exemplifies Korean film’s
크 열풍은 한국 영화 해외 진출이 다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diversified expansion into overseas territories.
상적 사례라 할 수 있겠다.
Korean culture depicted in foreign films
한국 문화를 알리는 해외 영화 What’s interesting is that not only are Korean films growing popular,
흥미로운 점은 한국 영화뿐만 아니라, 해외 영화들도 한국의 but foreign films are also including elements of Korean culture
문화적 요소를 자국 영화에 버무려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 문화의 in various ways that evoke curiosity. The Malaysian film Kimchi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말레이시아 영화 <너를 Untuk Awak , a romance depicting a Malaysian and a Korean
위한 김치>는 한국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말레이시아인과 한국계 student studying at a Korean college, was well-received by the
말레이시아인의 사랑 이야기를 다뤄 말레이시아 관객들에게 호 Malaysian audience. The Netflix film To All the Boys I’ve Loved
평을 받았다. 한국과 말레이시아를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영상미 Before centering around a half-Korean, half-American girl living
와 김치로 재회하게 되는 독특한 설정이 눈길을 끈다. 한편 넷플 in America captures the protagonist bowing on New Year’s Day in
릭스 제작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에는 재미교포 hanbok with her sister and making kimchi with her American dad,
인 혼혈 한국 소녀가 등장하는데 동생과 한복을 입고 세배를 하 greatly contributing to the worldwide spread of Korean culture.
는 장면은 물론, 김치를 담그는 미국인 아빠가 등장하여 한국 문 From Korean viewers’ perspective, the movie becomes twice as
화를 전 세계에 전파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한국 관객들 입장에 fun with the rare joy of seeing their culture in a new context and
선 새로운 맥락과 낯선 환경에 놓인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기이 unfamiliar environments.
한 재미가 배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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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날의 검, OTT The OTT phenomenon: a double-edged sword
이번엔 OTT 이야기를 해보자. 글로벌 OTTOver the top는 모 Let’s take a look at the OTT (over-the-top) market. Global OTTs
바일과 인터넷을 통해 극장에 걸릴 만한 영화 콘텐츠를 제공하 are content-providing services offering mobile and online access to
는 서비스로 넷플릭스, 아마존 프라임 등으로 대표된다. 이제는 mainstream films; the likes of Netflix and Amazon Prime are readily
OTT 시장이 인터넷 비디오 시장을 주도하면서, 아예 극장 개봉 invested in this market. Now, the OTT market is dominating the
과 병행하는 자체 오리지널 영화 제작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online video market, releasing films simultaneously with theaters,
봉준호 감독의 <옥자>가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다. 넷플릭스 오 and even producing original films. Bong Joon-ho’s Okja is a good
리지널 영화로 제작된 <옥자>는 극소수의 극장에서 극히 드문 example. Produced as a Netflix original movie, Okja was screened in
회차로만 상영되었고 대다수의 사람은 넷플릭스를 통해서만 <옥 just a small number of theaters, and the larger public was only able
자>를 볼 수 있었다. to see it on Netflix.
OTT 사업자들은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서 제작 OTT conglomerates with massive capital are purchasing
되는 영화, 드라마 등 콘텐츠의 판권을 한 번에 구매한다. 바로 이 copyrights left and right from all over the world, but this
점이 양날의 검이다. OTT 시장의 확산으로 소비자에게 시간과 phenomenon is a double-edged sword. While the growth of the OTT
장소, 더빙과 자막 선택의 번거로움 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 market freed viewers from the hassle of selecting between theaters
가 주어졌지만, 여전히 영화 산업 수익의 가장 큰 비중은 극장 매 and showtimes, or choosing subtitles or voiceovers, filmmakers are
출에서 오기 때문이다. facing restrictions from theaters when box office sales still account
for the largest share of film industry profits across the globe.
이제는 제2, 제3의 봉준호를 찾아야 할 때
플랫폼의 변화는 결국 극장의 문턱을 넘어 전 세계에 우리 In search of the second and third Bong Joon-ho
영화를 골고루 배달할 전 지구적 선반이 될 전망이다. 그러나 특 The new video platforms are ultimately expected to serve as
정 OTT 서비스 회사가 배급을 독점하는 현상도 감수해야 한다. internationally shared shelves of content, allowing for Korean
플랫폼의 변화를 받아들여 OTT 시장을 어떻게 글로벌 콘텐츠를 films to step over the threshold of theaters and stride into the
위한 기회의 땅으로 탈바꿈하게 만들 것인가? 결국 해답은 역시 world. But this may come at the price of a handful of OTT services
<기생충> 이후의 전략으로 시선이 쏠린다. <기생충>이 주는 교 monopolizing distribution. Accepting this platform shift, how can
훈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로컬한 것이 가장 글로벌하다”는 변 we transform the OTT market into a market of opportunity for
함없는 진실일 것이다. 반전이 가득한 흥미로운 플롯. 매력적이 global content? This question leads us back to the question of what
고 입체적인 캐릭터. 전 지구적 관심을 촉구할 수 있는 문제의식. to make of the post-Parasite era. The lesson taught by Parasite is,
한국적인 로컬과 글로벌이 멋들어지게 만날 때, 전 세계를 휘어 ironically, the unchanging truth that “the most local is the most
잡을 수 있는 기적 같은 비전이 생긴다. 그러므로 이제는 또 다른 global.” An interesting plot full of twists, compelling and complex
봉준호, 도약의 기회를 기다리는 숨어 있는 제2, 제3의 봉준호를 characters, and awareness that evokes global interest—when what’s
기꺼이 찾아내야 할 시점이 아닐까. local to Korea goes global, it miraculously forms a vision that takes
hold of the world. So now is the time to reach out and find those in
the dark, covertly preparing to take that leap and become the next
Bong Joon-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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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조선 人 LO V E ④
일생을 노래한
시인 부부
아내의 재능을 귀하게 여긴 ‘윤광연’
조선 성리학자들은 서로 공경하고 예의를 갖추는 부부관계
를 권장했다. 16세기 대학자 이율곡은 예법의 경지로 들어가려면
남편과 아내가 평소 친밀함을 경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18세기
문장가 이덕무는 선비들이 잠자리에서도 함부로 행동하지 말고
조심하라는 생활 지침을 남겼다. 남녀의 위계질서가 깨지기 때문
이다. 부부의 사랑은 억압되었고 가부장의 권위가 우선이었다.
그런데 18~19세기에 상품경제가 발달하고 신분 계층이 분화하면
서 유교적 부부관계에도 변화가 생겼다. 양반들 가운데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몰락한 ‘잔반殘班’이 늘어났다. 바느질
하고 베 짜고 농사지으며 궁핍한 살림을 책임진 것은 부인네들이
었다. 그중에는 경전을 읽거나 시문을 짓는 등 가부장의 영역까
지 넘나든 여인들도 적지 않았다. 똑똑하고 유능한 아내들은 사
랑도 야무지게 했다.
여성의 재능과 헌신을 귀하게 여기는 남편들도 등장했다. 그들은
가부장의 권위를 벗고 아내를 대등한 존재로 인식했다. 1836년
선비 윤광연은 4년 전에 세상을 떠난 부인 강정일당조선 후기에 활동
한 여성 시인이자 서예가의 문집을 간행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도 않
았고 주위의 빈축을 사기도 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정일당
강씨를 ‘여자 선비’라고 여겼으며 문집을 낼 자격이 충분하다고
믿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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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같은 해, 같은 달에 나서 한마을에 살았으니/오늘 밤 만남 이니 그렇다 치고, 삼의당은 어떻게 한시를 자유자재로 지었을
이 어찌 우연이리오” 까? 아무리 양반이라도 여성은 정규교육이 허락되지 않았던 조
신부, “하늘엔 밝은 달 가득하고 뜰에는 꽃이 가득한데/꽃 그림 선 시대가 아닌가. 사실 그는 연산군 때 최초로 사화를 입은 김일
자에 달그림자 더해졌네/달빛인 양 꽃인 양 낭군님과 마주 보노 손의 후손이었다. 사림 명문가 집안의 딸답게 어릴 적부터 한글
라니/세상 영욕이야 어느 집 이야기인가” 로 된 <소학小學>을 뗐고 한문까지 배워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삼의당三宜堂 김 씨가 기록으로 남긴 결혼 첫날밤 신혼부부의 대 섭렵한 것이다.
화다. 한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주고받으며 아름다운 인연을 노래 조선 여성에게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내조內助’였다. 삼의당은
했다. 김삼의당은 1769년 전라도 남원 서봉방에서 태어나 18세에 물론, 하립의 집안도 몰락한 양반가였다. 이들 잔반의 지상과제
동갑내기인 담락당湛樂堂 하립과 혼인했다. 하늘이 맺어준 배필이 는 과거시험에 급제해 벼슬길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하립 또한
었을까. 두 사람은 한마을에서 소꿉친구로 자랐는데 신기하게도 산사 등지에서 공부하다가 과거 보러 서울을 오갔다. 정기시험과
생년월일까지 같았다. 부부는 첫날밤부터 지적인 대화를 거리낌 특별시험이 잇달아 있으면 한동안 서울에 체류하기도 했다. 이
없이 나눌 만큼 마음이 잘 맞았고 말도 잘 통했다. 하립이야 유생 ‘고시생 남편’의 뒷바라지는 아내 삼의당의 몫이었다.
“심부름하는 아이를 시켜 과거 시험장의 소식을 물었다가 당신이
이번에도 낙방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생 많으셨지요? 그
래도 저는 앞으로도 힘껏 돕겠습니다. 작년에는 머리카락을 잘라
양식을 마련했고, 올봄에는 비녀를 팔아서 여비를 마련했습니다.
제 장신구들이 다 없어진다 해도 당신의 과거시험 비용이야 어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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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라게 할 수 있겠습니까? 가을에 경시慶試; 나라의 경사를 맞아 치르는
과거가 있다고 하니 또 내려오지 못하겠지요. 마침 소식을 전하는
길이 있어 이렇게 편지를 띄우고 웃옷 한 벌 보냅니다.”
조선 시대 과거시험은 비용이 꽤 드는 일이었다. 서울 오가는 양
식과 여비, 현지 체류비까지 다 마련하려면 시골 잔반들은 등골
이 휘었다. 선비의 아내들은 삼의당처럼 머리카락을 자르고 비녀
를 팔아서 ‘고시생 남편’ 뒷바라지에 보탰다. 어디 그뿐인가. 삯
바느질하고 베를 짜며 부모님과 자식들까지 부양했다. 그러나 잔
반의 시험 합격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19세기에 이르면 일부 세
도가들이 문과 급제를 휩쓸게 된다. 몰락한 양반들은 희망 고문
을 당하면서 사실상 들러리를 섰다. 10년이고 20년이고 과거를 하립(남편)과 김삼의당(아내)의 초상화
서울에서 십 년 동안 분주했던 손님
글 권경률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오늘은 초당에 신선처럼 앉아있네
사진 진안군
- 김삼의당, ‘초당봉부자음草堂奉夫子吟’ 그림 필몽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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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 당 ㅣ 문화 보고
옛 노래와 이야기를 품은
한국가사문학관
남도의 아름다운 자연과 벗하며 음풍농월吟風弄月; 바람을 읊고 달을 보고 시를 짓는다했을
옛 선비들의 모습이 절로 그려지는 곳이 있다.
그곳은 바로 전남 담양군 가사문학면에 자리하고 있는 한국가사문학관.
감성 충만해지는 봄! 봄빛으로 물든 자연이 보이고, 선조들의 멋과 풍류가 보이는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보고寶庫 한국가사문학관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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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가사문학관 전경
2 헌종이 송순에게 내린 시호장과 사령장(가운데 위, 아래)
3 전시관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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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할 때 담양을 첫손가락에 꼽는 이유는 담양에
서 탄생한 가사 작품들이 가사문학의 백미로 불리
기 때문이다. 또한 담양은 조선 중기 이서의 ‘낙지
가’를 비롯해 20세기 정해정의 ‘민농가’에 이르기
까지 600여 년 동안 가사문학이 끊임없이 지속되
어 온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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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사실이 전시되어 있다. 이 밖에 하서 김인후
河西 金麟厚, 서하당 김성원棲霞堂 金成遠,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과 관련한 작품들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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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계절 과 우 리
明
시대의 24절기는 이를테면 ‘농부를 위한 스케줄 양력 4월 20일경인 곡우는 더더욱 농사와 밀접한
러’였던 셈이다. 청명과 곡우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관련이 있는 절기다. ‘곡식을 기름지게 하는 봄비
‘농번기’가 시작된다. 이름 그대로 맑고 푸른 봄 하 가 내리는 날’이 그 이름의 의미다. 대대로 벼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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穀
는 가장 중요한 과업이었다. 먹거리가 풍족하지 않 때가 있다. 봄의 꽃망울을 감탄하며 바라보거나, 밤
던 시절, 흉년이 든다는 것은 사람의 목숨을 위협 하늘의 별자리를 애써 찾기도 한다. 문득 바다가 보
하는 재앙이 될 수도 있었다. 농부들은 곡우가 되 고 싶고, 숲속에서의 하룻밤을 기대하고, 비나 눈이
면 모내기에 쓸 싹을 틔우기 위해 지난가을 추수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다 알 수 없는 감정에 도취되
해 소중히 보관한 볍씨를 물에 담갔다. 한 해 농사
의 첫 단추를 끼우는 셈이었으니 그 과정은 더없이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진행되었다. 볍씨를 담근 후
雨 기도 한다. 나 자신이, 우리 모두가, 대자연의 일부
이기 때문이다. 청명과 곡우를 비롯해 24절기의 본
질은 과거 농경시대의 생활상 그 자체가 아니다. 수
풍년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내기도 했고, 그즈음 초 천 년의 시간이 응축된 그 스물네 개의 이름은 우
상을 치르거나 부정한 일을 당한 사람은 악귀를 쫓 리에게 속삭이듯 말을 건다. 이 계절이 허락한 삶에
는 의식을 치른 후에야 농사일을 할 수 있었다. 곡 충실하라고, 이 시간과 공간의 기운을 만끽하라고...
우 무렵은 전남 흑산도 부근에서 겨울을 보낸 조기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로서 스스로가 대자연의
떼가 충남 서해안으로 북상하는 때이기도 한데, 이 일부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신비한 우주의 질서 속
때 잡힌 조기가 유난히 맛이 좋아 ‘곡우사리’라는 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너
이름으로 부르며 최상품으로 쳤다. 또한 봄을 맞은 무 거창하다 할지 모르지만, 분명히 그렇다.
나무에 물이 많이 오르니, 이즈음의 자작나무나 박 청명에서 곡우 사이, 바야흐로 완연한 봄이다. 농
달나무의 수액이 건강에 이롭다 하여 ‘곡우물 먹 부처럼 부지런히 가래질을 하거나 경건하게 볍씨
기’라는 풍습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를 담글 일은 없겠지만, 그런 마음으로 한강 변의
청명과 곡우에 대한 전통을 살펴보니, 역시 21세기 잔디밭을 맨손으로 쓰다듬고 맨발로 밟아볼 계획
도시인과 24절기는 무관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 이다. 그리고 오래도록 봄의 강과 하늘을 바라보고
르겠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물질적 풍요와 디지 싶다. 이맘때는 굳이 그래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털의 편리에 익숙해져 있으면서도, 우리는 따스한 도시에서의 삶은 그조차 쉽지 않으니.
햇볕 한 줌과 상쾌한 바람 한 줄기를 간절히 원할 글 이신조 소설가,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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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당 ㅣ 한국 을 보 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얼터드 카본> 한 제반 상황에 대해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며칠 전 KBS 라디오의 클
래식 음악 프로그램에 어떤 남자 청취자가 보낸 문자가 귀에 와 닿았다. 자신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지 않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초 슬로모션’ 시대가 되니 방송국이 클래식 음
악을 들려주는 걸 감사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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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에 젖을 시간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국악은 한국인의 삶의 그림자 속에 출몰하는 유
령처럼 보이는 일이 잦다. 새로운 슬리브를 장만할 수 없어서 옛 슬리브 그대로 남은 채
늙은 세대에겐 ‘가장 깊은 고통에서 나온 일그러진 환영’이 되기 일쑤인데, 그 고통은 식
민지 시절의 고통일 수도 있고, 이산의 고통, 전쟁의 고통, 변화의 고통일 수도 있다. 젊은
이들에게 국악은 ‘과거 한국의 유령’으로,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떨
어지지 않는’ 것이다. 소위 밀레니얼 세대는 말한다. “우리는 한국인이지만 당신이 표현
하는 ‘한’이란 건 우리 것이 아니에요. 그것 좀 없애버려요!”
며칠 전 페이스북에 끝없이 제공되는 코로나19 관련 글들 사이에서 재미있는 정의를 보
았다. “전통: (명사) 죽은 동료 집단으로부터 받는 사회적 압력.” 기발하고도 슬픈 정의라
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동료들을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는 전통 음악인들의 생존 여
부는 젊은이들의 처분에 달려 있다. ‘문화재’로 불리는 우리의 음악인들은 청중이 원하는
것, 시간 부족 시대인 이 시대의 것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 현악기든, 건반이든, 몇 가지
를 조화시킨 화성이든, 미소든, 음악을 빵! 터뜨리기 위한 무언가를 주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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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당 ㅣ 북한 사 회 문 화 읽 기 ⑭
북한 화장품
이야기
작년 3월 말 조선중앙통신은 ‘《은하수》 대 《봄향기》’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봄향기’는 1949년 9월에 창립한 신의주화장품공장에서 생산
하는 화장품 브랜드이고, ‘은하수’는 1962년에 정식 화장품공장으로 발전
한 평양화장품공장에서 생산하는 브랜드이다. 이처럼 이름도, 생산라인도
다른 ‘은하수’와 ‘봄향기’이지만, 북한에서 생산하는 대표적인 화장품 브
랜드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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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대표 화장품 브랜드 <은하수>와 <봄향기>
‘봄향기’는 1949년 9월에 창립한 신의주화장품
공장에서 생산하는 화장품 브랜드로, 개성 고려인삼
을 주성분으로 하며 불로초 배양액, 히알루론산을 비
롯한 기능성 물질들, 감초, 둥굴레, 살구씨 등 수십 가
지 천연 약재 성분들이 들어있다. 신의주화장품공장
에서는 노화 방지용, 피부 보호용건성, 유성, 정상, 남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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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성다기능성, 치료용, 미백용, 분장용, 머리칼용, 세척용, 향수,
분장도구 등 323가지의 화장품들을 생산하고 있다
<메아리>, 2019.11.18.. 국제발명전시회에서 두 번 입상한
바 있는 ‘봄향기’는 20여 개국에 수출하는 브랜드로,
2006년에 한국에서 시판한 적도 있다. 한편 ‘은하
수’는 1959년에 발족한 생산협동조합을 모체로 하여 3 4
인기가 높은 ‘미래’, 천연 기능성 성분들을 원료로 하 등분… 아련한 느낌이 전해져 오는 아름다운 우리말
여 만드는 ‘선녀’, 그리고 ‘대동강’, ‘너와 나’ 등의 브랜 들이다.
드가 있다. 북한의 인터넷 선전매체와 <노동신문> 등에는 화장
품에 대한 소개나 개발 소식, 봉사 현황, 시설 현대화,
우리말이 주를 이루는 북한의 화장품 명칭 국제화에 관한 기사가 자주 실린다. 2019년에는 ‘봄
화장품 명칭에 있어 우리 화장품들이 영어, 프 향기’ 4건, ‘은하수’ 4건, ‘금강산’ 2건, ‘선녀’ 1건, 향상
랑스어, 이탈리아어 등을 무분별하게 남용하고 있는 무역회사의 개성고려홍삼화장품 1건 등 12건의 화장
데 반해, 북한은 크림, 샴푸머리물비누, 린스 등 최소한 품 소개 및 개발 기사가 실렸고, 2020년에는 2월 말
의 외국어만을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분크림파운 까지 이미 5건이 실렸다.
데이션, 물크림로션, 세척/세수크림클렌징폼, 면도크림세이 2018년 5월에는 전국 화장품 부문 학술토론회가 평
빙 폼, 염색크림, 미백크림, 자외선방지/해볕방지크림 양화장품공장에서 3일간 진행되었고, 2019년 11월
선크림, 살결물스킨로션, 분가루파우더, 머리칼고착제헤어스 에는 평양역전백화점에서 ‘전국화장품전시회’가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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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기사 내용 보도일 보도매체 장품들도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서 “피부 영양 강화
수십 가지의 염색 성분과 산화방지제, 피부자극 완화제, 머리칼 에 효과적인 불로초 엑스엑기스, 저분자 콜라겐, 저분
은하수 영양제를 함유한 염색크림 개발, 염색 시간 3분, 염색 보존 한 20.1.7. <메아리>
달, 피부와 머리칼 자극 최소화 자 히알루론산을 미생물 배양법으로 제조하여 만든
자외선방지 살결물은 자외선과 각종 전자기파에 대한 산란, 차 화장품들을 내놓은 신의주화장품공장 제품 역시 녀
폐, 흡수를 통해 피부 손상을 막아주고 보습작용과 항산화 기 20.1.26. <조선의 오늘>
능, 피부손상 수복기능을 가진다. 성들이 너도나도 찾고 있다. 금강산합작회사의 제품
콜라겐 펩티드와 불로초 추출물이 함유된 염색샴푸는 머리칼
들은 항산화 효과가 뛰여난뛰어난 나노화한 셀렌을 개
봄향기 과 머리피부를 물로 적시는 과정 없이 머리칼을 5분 만에 검은 20.2.6. <조선의 오늘>
색으로 변화시키며, 색을 오랫동안 유지 성 고려인삼 추출물과 결합한 것으로써, 자연미가 느
천연미백제, 자외선 방지제, 영양제들을 첨가한 미백화장품은
피부에서 검은 색소(멜라닌)의 생성을 억제하고 자외선을 차 20.2.10. <메아리>
껴지고 방수성이 좋은 것이 특징이다. 사과의 향 및
단, 영양 공급과 혈액순환 촉진
아미노산 추출물, 과일씨 기름을 배합하여 제조한 대
릉라과학기술교류사의 기능성 역삼화장품 : 역삼미백 살결물
- 은 미백효과와 여드름, 색소 침착 및 반점, 알레르기를 방지, 물 20.2.23. <메아리> 동강과일종합가공공장의 향수, 물크림, 샴푸, 린스 등
크림은 기초화장제나 밤(夜)크림으로 사용
은 청신한 향기를 며칠간 지속시켜 주어 처녀들의 이
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룡악산비누공장의 물비누 제
간 개최되었다. 평양화장품공장, 신의주화장품공장, 품들, 그리고 왕벌젖, 유모란기름, 쑥 추출물이 들어
금강산합작회사, 묘향천호합작회사, 나리화장품기 있는 살결물, 분크림, 밤크림, 머리영양물과 같은 《미
술교류사, 평양향료공장, 룡악산비누공장을 비롯한 래》 제품들도 피부와 머리칼의 윤기를 더해 주는 것
수십 개 단위가 참가한 전시회에는 930여 종에 13 으로 하여 중년녀성들 속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고
만 7천여 점의 화장품, 80여 종의 향료 제품이 출품 전했다.
되고, 60여 건의 연구성과 자료가 제출되었다<로동신
문>, 2019.11.12.. 전시장 방문 기사를 게재한 인터넷 매체 화장품 제조시설 개선과 현대화 이루어져
<류경>2019.11.15.은 ‘은하수’ 제품에 대해 “피부 속의 김정은은 2015년 2월 평양화장품공장을 현지
로페물노폐물을 깨끗이 제거해 주는 새 비누들과 화장 지도하면서 “외국 상표의 마스카라는 심지어 물에 닿
독 제거 효과가 좋고 안면 혈액순환 개선이 뚜렷한 아도 그대로인데, 우리 제품은 하품만 해도 번져서
기능성 화장품들, 그리고 미안美顔 제품들이 눈길을 ‘너구리 눈’이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후에도 김정
끌고 있다. 피부 신진대사를 활성화하여 로화를 막 은은 평양화장품공장과 신의주화장품공장을 두 차
아주는 화장품들과 여러 가지 원인으로 생기는 여드 례씩 더 현지 지도하면서, 화장품 제조시설 개선과
름, 검버섯, 주근깨 등을 치료하는데 효능이 높은 화 제품의 품질 향상을 촉구했다. 이러한 지시로 2019
년 1월에 평양화장품공장에 합성공정, 색감생산공정
등 생산공정의 현대화, 10월에 신의주화장품공장의
병렬로보트 개발을 통한 제품 포장 공정의 무인화,
2020년 1월 신의주화장품공장에 현대적인 향수 생
산공정의 창설 등 제조시설의 개선과 현대화가 이루
어졌다. 또한 <류경>2020.3.8. 보도에 따르면, 현재 신
의주화장품공장에서는 연건축 면적 6,000여㎡ 규
7 모의 봄향기연구소 건설이 마감단계에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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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품 품질 개선에 노력한 결과, 2019년 1월에 ‘은
하수’ 25종이 유라시아경제동맹의 품질 인증을 받았
고, 11월에 장미와 녹두를 기본원료로 한 ‘은하수’ 6종
이 추가로 인증 받았다.
‘봄향기’도 세계지적소유권기구WIPO로부터 공장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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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시험소가 내놓은 특허기술인 ‘불로초 배양물과
그를 이용한 노화방지 영양액’으로 WIPO상발명가 메달
과 증서을 받았다. 북한은 현재, 화장 도구의 가상사용
과 어떤 화장이 맞는지 미리 시험할 수 있는 스마트
폰용 앱인 ‘지능형 손전화기 프로그람 <봄향기> 1.0’
의 출시 등 각 브랜드가 서비스로 경쟁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금강산’은 화장방법보급실(2019년 9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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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당 ㅣ 불현 듯
마음 씻고 마음 여는
개심사에 꽃이 피면
봄이다. 꽃소식이 전국 각지에서 향긋한 꽃내음과 함께 날아온다. 꽃 한 송이에 생명의 진리가 담겼다
애써 봄이 왔다고 호들갑을 떨지 않더라도 꽃소식이 들리면 지난해부터 특별한 취미가 생겼다. 정원 가꾸
으레 봄이 왔다고 여긴다. 봄이기에 꽃이 피는 게 아니라, 기가 바로 그것이다. 1년 동안 집 앞뜰과 뒤뜰을 모
꽃이 피어 봄이라고 하지 않던가. 두 정복하고 올해부터는 옥상정원을 가꾸기 시작
4월, ‘마음을 씻고 마음을 연다’는 이름의 개심사에는 했다. 정원의 꽃나무를 가꾸기 위해서는 많은 정성
왕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이 필요하다. 반려동물처럼 반려식물이라는 말이
나온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꽃은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향기와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꽃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마저 평온해지고 아름다워지는 느
낌이다. 잠시나마 마음이 꽃을 닮아가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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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당 ㅣ 독자 투 고
지방에 피는 꽃에도
단비가 내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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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은 ‘굴뚝 없는 산업’으로 하나의 ‘상품’ 미국은 <아바타> 영화 한 편으로 우리나라 중형승용차 30만 대
지방의 문화축제가 나아가지 못하고 답보상태인 원인이 무엇 를 판매한 수입을 올렸고, 영국 소설가인 존 로널드 톨킨의 <반
일까. 예산 부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예산 부족으로 창작 지의 제왕>은 책과 드라마, 영화로 제작되어 총 100억 달러약 12조
품이나 특색 있는 문화상품의 개발이 곤란하고, 공연장 또한 부족 억 원가량의 수익을 올렸다. 이처럼 문화예술은 ‘굴뚝 없는 산업’으
한 실정이다. 얼마 없는 공연장마저 연예인들이 지방 순회공연을 로 21세기에 걸맞은 하나의 ‘상품’이다. 따라서 지방시대에 부응
할 때마다 독차지하는 바람에 지방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예 하는 특화사업 육성을 위해 지역에 소재한 기업과 금융기관, 대
술인들은 자기 지역 공연장임에도 그 무대에 오르기가 쉽지 않다. 학 등에서도 지방문화사업 육성을 위한 메세나에 적극적으로 참
이런 관계로 작은 무대를 꾸며서 지역축제를 한다고 해도 주민이 여해야 한다.
와주지 않아 관객 없는 행사가 되고, 점점 지역
문화는 가뭄에 곡식이 시들어 가듯 활짝 꽃피지 ‘품앗이 공연’ 등도 문제 해결의 한 방안
못하고 고사하는 현상이 되풀이되고 있다. 지역의 공연장 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문화의 중요성이나 필요성은 인식하면서도 우 서는 공공기관의 시설은 물론, 종교기관의 시
리 사회의 뿌리 깊은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문 설 또한 문화예술 공연을 위해 대여해주는 것
화예술을 홀대하는 것도 문제지만, 문화예술의 이 필요하다. 유럽에서는 수백 년의 역사가 담
씨앗을 심고 키워내는데 필요한 경제권을 지닌 긴 종교시설에서 음악회를 열고 미술 전시회나
분들의 관심과 지원이 미약한 것도 지역문화 국제학술 세미나 등을 개최한다. 이를 통해 지
발전의 난제라고 할 수 있다. 역주민에게는 문화예술을 접할 기회를 제공하
문화와 예술의 나라 이탈리아에서는 15세기부 고, 종교 관계자는 종교 인구 저변 확대 등을 꾀
터 상업이나 금융업으로 거대한 부를 쌓은 대 할 수 있다. 즉, Win-Win이다.
기업들이 학문과 예술 활동을 후원하는 ‘사회 한편, 지방의 문화예술단체나 문화예술인의 규
환원 투자’를 펼쳤다. 이는 르네상스 시대를 펼치게 되는 원동력 모가 작고 자체 사업비가 부족해서 지역별로 문화축제 행사에 특
이 되었다. 이들의 후원에 꽃을 피운 문화예술 유적들은 현재까 색작품이나 창작품을 제작하여 무대에 올릴 수 없어 같은 작품을
지 남아 그들의 후손들까지 먹여 살리고 있다. ‘재탕’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작품을 계속해서 무대에 올리면 지
우리나라는 1994년 한국메세나협회가 설립되었는데, 2014년까 역주민들에게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
지 20년간 기업이 문화예술 발전을 지원한 금액은 약 2조6,950 해서는 인근 시·군과 문화예술 작품공연을 품앗이 공연으로 풀
억 원에 달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초자치단체시·군에서 문화예 어나갈 수 있다. 또한, 지역 단위 문화예술인 육성을 위한 장학제
술단체에 지원하는 예산 규모는 전체 1%도 되지 않는다. 경기도 도 운영을 제안하고 싶다. 지금 각종 장학금 운영단체는 많지만,
의 경우 체육문화 발전을 위해 1980년도부터 지방자치단체별로 천편일률적으로 ‘공부 잘하는 학생’을 위주로 한 장학금제도다.
전국체전종목을 직장팀으로 육성토록 권고하여 시·군별로 육상, 물론 이외 체육특기생 등에게 주는 장학금 등도 있지만, 전체 장
축구, 배구, 역도, 레슬링, 사이클팀 등을 육성한 결과, 1990년부 학금의 범위를 문화예술 특기생에게까지 넓혀주었으면 하는 바
터 전국체전에서 서울의 아성을 넘어 종합우승을 독차지하는 성 다. 이는 지방문화예술인 육성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적을 거두고 있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에서 문화예술팀을 육성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지방문화 발전을 위해서는 각 문화단체
하고 지원하는 곳은 별로 없고, 오직 너도나도 복지시책에 ‘무상’ 뿐만 아니라 정부, 시민 할 것 없이 모두 다 함께 지혜와 힘을 합
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예산을 쏟아붓고 있다. 왜 오래도록 먹고 쳐야 한다.
살 양식으로 후손에게 물려줄 문화유산에 투자는 아니 하는지 묻
고 싶다. 글 조수기 한국문화원연합회 정책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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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항일독립운동
NE W S
U RIM U N HWA 발행처·문의 전라북도문화원연합회
정선 탄광촌 주민들의 삶을 담은 문화
집필 박임용 외 9인 ㅣ 발행처·문의 정선문화원
•응모기한 2020. 6. ~ 8.
•시 상 1등(금남상, 1명) 포함 총 72명
편집후기
한춘섭 편집주간
72
자치기
Jachigi
ISSN 1599-4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