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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 RI M U N H 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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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진년 화첩 』 丙辰年畵帖

<도담삼봉 > 島潭三峯

김홍도金弘道, 1745~1806년 이후
1796년, 종이에 수묵 담채, 26.7 × 31.6cm

보물 제782호인 『병진년화첩』 속 <도담삼봉>은 단

양팔경의 하나인 도담삼봉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린

것이다. 김홍도는 맑은 담채를 사용하여 도담삼봉의

장관, 고요히 흐르는 남한강, 옅은 안개와 아지랑이

속에 잠긴 먼 산, 절경을 보러 온 유람객들의 모습을

그림에 담았다. 따뜻한 봄날의 고요한 분위기가 시적

인 느낌을 준다. 아름다운 한국의 명승名勝이 화면에

꿈같이 펼쳐져 있다.

글 장진성 서울대 고고미술학과 교수


그림(소장) 삼성미술관 리움
Contents

U RIM U N HWA

별별마당
월간 우리문화
vol.282 | 2020 04 4 테마기획
발행인 김태웅 우표로 본 문화유산 / 은종호
발행일 2020년 4월 1일
편집고문 권용태 10 이달의 인물
편집주간 한춘섭 매듭의 美를 전하다 -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3호 노미자 매듭장 / 양지예
편집위원 곽효환, 김 종, 김찬석, 오광수,
오양열, 장진성, 지두환 16 바다 너머
편집담당 음소형 Banjiha? 그게 뭡니까? / 강진우
발행처 한국문화원연합회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49(도화동, 성우빌딩) 12층 20 시와 사진 한 모금
전화 02)704-4611 | 팩스 02)704-2377
회상 / 김형복
홈페이지 www.kccf.or.kr
등록일 1984년 7월 12일
등록번호 마포,라00557
기획편집제작 서울셀렉션 02)734-9567 문화마당 Cultural Encounters

22 옹기종기 Iconic Items


일상의 예술 ‘조각보’ / 안유미
Everyday Art: Jogakbo / An You-mee

24 한국의 서원 ① Korea’s Seowon


인간의 손길이 있되 없는 듯, 병산서원 / 최준식
Byeongsan Seowon: Architecture that Melds with Nature / Choi Joon Sik

30 지역문화 스토리 Local Culture Stories


승리와 평화의 기원, 통제영 둑제 / 김일룡
Rituals for Victory and Peace: Dukje at the Navy Command Headquarters /
Kim Ill Young

38 마을산책 Walking through Villages


성주 한개마을, 고샅길을 걷다 / 최상대
Walking through Seonju's Hangae Folk Village and Its Byways / Choi Sang-dae

44 팔도음식 Provincial Cuisine


우리 놀이문화 _ 자치기 가난해서 먹은 산나물? 없어서 못 먹은 귀한 음식! / 황광해
Sannamul for Lean Times? The Truth behind a Scarce Delicacy! / Hwang Kwang-hae
표지 이야기
긴 막대기로 작은 막대기를
48 한류포커스 Hallyu Focus
치거나 튀기면서 노는 '자치기'
한국 영화, 제3의 뉴 한류를 향하여 / 심영섭
표지 그림 박수영 일러스트레이터 Korean Film: Towards the Third Korean Wave / Sim Young-seop
공감마당
10 52 조선 人 LOVE ④
첫날밤 주고받은 한시처럼 일생을 노래한 시인 부부 / 권경률

56 문화 보고
옛 노래와 이야기를 품은 한국가사문학관 / 이행림

60 계절과 우리
청명에서 곡우 사이 / 이신조

62 한국을 보다

24 국악의 유령을 쫓아서 / 조세린 클락

우리마당

64 북한사회 문화 읽기 ⑭
북한 화장품 이야기 / 오양열

68 불현듯
마음 씻고 마음 여는 개심사에 꽃이 피면 / 임운석

30 70 독자투고
지방에 피는 꽃에도 단비 내려야 / 조수기

72 NEWS, 편집후기

56

ISSN 1599-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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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테마 기 획

세계유산은 선조로부터 물려받아 그 속에 살


고 있고 앞으로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우리 자산
이다. 우리나라는 1995년 ‘석굴암 및 불국사’와 ‘해
인사 장경판전’, ‘종묘’가 처음 유네스코 세계유산
으로 지정되었다. 석굴암과 불국사는 경주 토함산
에 있는 신라 시대 불교 유적으로, 석굴암 조각과
불국사의 석조 기단, 다보탑, 석가탑은 고대 불교
예술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일컬어진다.
1997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은 조정 관료

우표로 본 가 왕을 보좌하며 업무를 보는 외조外朝, 왕이 신하


와 국정을 수행하는 치조治朝, 왕과 가족이 취침하

문화유산 는 침조寢朝, 왕이 휴식하는 후원後苑으로 구성되어


궁궐 건축의 형식과 유교 예제가 요구하는 내용을
모두 갖췄다.

세계
일반적으로 우표의 기능을 떠올리면 유산
‘우편요금의 선납’만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우표 수집 취미郵趣; philately’ 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발행우편법 제1조의 2하는 기능도 있다.
우표는 국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제반 특색을 고려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에
특성과 문화적 발전상황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우표 스스로가 지니는
세계 유산 등록 특별(창덕궁 선정전)
문화적 의의 역시 크다. (2001년 발행)

부처님 오신 2600주년 기념
(1977년 발행)

4
세계 유산 등록 특별(해인사 장경판전)
(1998년 발행)
미륵사지석탑
(1978년 발행)

세계 유산 등록 특별(수원 화성)
(2002년 발행)

같은 해 지정된 ‘수원 화성’은 조선 정조 때 실학자


정약용이 외국의 사례를 참고한 포루, 공심돈 등의
방어시설을 도입하고 우리의 군사적 환경과 지형

부석사 무량수전 에 맞게 설치한 성곽으로, 우리나라 성곽문화의 백


(1977년 발행)
미로 불린다.
2015년 지정된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주의 공산
성과 송산리 고분군, 부여의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
성, 정림사지, 능산리 고분군, 나성, 익산의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 등으로 고대 왕국의 상호 교류를
통해 이룩된 건축 기술의 발전과 불교 확산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는 곳이다.
지난 2018년에는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의 이름
으로 통도사경상남도 양산시, 부석사경상북도 영주시, 봉정
사경상북도 안동시, 법주사충청북도 보은군, 마곡사충청남도 공
세계 유산 등록 특별(백제역사 유적지구)
주시, 선암사전라남도 순천시, 대흥사전라남도 해남군 등 7개
(2016년 발행)
세계 유산 등록 특별(제주 용암동굴) 사찰이 등재되었다. 이러한 사찰은 불교를 바탕으
(2009년 발행)
로 의례, 강학, 수행을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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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유산 등록 특별(종묘제례)
(1999년 발행) 필라코리아 2014 세계우표전시회 기념 아리랑
(2014년 발행)(최초이자, 유일한 한지 우표)

세계무형문화유산은 공동체와 집단이 자신의


환경, 자연, 역사의 상호작용에 따라 끊임없이 재창
해온 각종 지식과 기술, 공연예술, 문화적 표현이 무형
다. 공동체 내에서 공유하는 집단적인 성격을 지니
문화유산
며 사람을 통해 생활 속에서 주로 구전으로 전승되
어왔다.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2001년 등재은 종묘에
서 조선 왕조의 조상에게 행하는 유교 제향 의식이
다. 종묘제례는 왕실에서 거행하는 국가 제사로 길
례吉禮·흉례凶禮·군례軍禮·빈례賓禮·가례家禮가 있으며
‘효’를 실천의 근본으로 삼았다. 제례악은 제례가
봉행 되는 동안 연주되는 곡으로 기악과 노래, 춤
이 함께 행해진다.
판소리2003년 등재는 한 명의 소리꾼과 한 명의 고수
가 음악적 이야기를 엮어간다. 장단에 맞춰 부르 문학 시리즈(춘향전)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 특별
(1999년 발행) (강릉단오제 관노가면극)
는 표현력 풍부한 창노래, 일정한 양식을 가진 아니 (2007년 발행)

리말, 풍부한 내용의 사설과 너름새몸짓 등으로 구연


되는 판소리는 지식층과 서민의 문화를 모두 아우
른다는 특징이 있다.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
가, 적벽가, 배비장타령, 변강쇠타령, 장끼타령, 옹
고집타령, 무숙이타령, 강릉매화타령, 가짜신선타
령 등 열두 마당이 있으나, 조선 시대 가치관을 담
한국-슬로바키아 수교 20주년 기념(판소리)
은 앞의 다섯 마당만 정착되었다.
(2013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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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강술래2009년 등재는 풍작과 풍요를 기원하는 풍속
의 하나로 음력 8월 한가위 보름달 뜬 밤에 수십 명
의 마을 처녀가 모여 손을 맞잡아 둥그렇게 만들어
돌며, 한 사람이 ‘강강술래’의 앞부분을 선창하면
여러 사람이 이어받아 노래를 부르는 민속놀이다.
한산모시짜기2011년 등재는 모시풀을 이용하여 전통
방법에 따라 모시옷감을 짜는 기술로, 수확, 모시풀
삶기와 표백, 모시풀 섬유로 실잣기, 베틀짜기의 여 민속 시리즈(추석)(강강술래)
(1987년 발행)
러 과정으로 이뤄진다. 여성이 이끄는 가내 작업으
로 가족과 이웃이 함께 모여모시 두레 조화로운 분위
기에서 결속을 다지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국인에게 필수적인 김치 또한 문화유산이 되었
다. 정확하게는 ‘김치,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문화’
전체를 무형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아 2013년 등재
되었다. 김장 문화는 늦가을에 춥고 긴 겨울을 나
기 위해 여러 사람이 모여 많은 양의 김치를 담그 한국의 전통음식 시리즈(배추김치)
(2001년 발행)
고 나누는 우리의 오랫동안 행해진 음식 풍습이다.

민속 시리즈(길쌈)(모시짜기)
(1990년 발행)

농악2014년 등재은 공동체 의식과 농촌 사회의 여흥


활동에서 유래한 대중 공연예술의 하나다. 타악기
합주와 관악기 연주, 행진, 춤, 연극, 기예 등이 함
께 어우러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예술로 발전해
왔다. 농악은 마을신에 대한 제사, 액을 쫓고 복을
부르는 축원, 풍년제, 공동체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
한 행사 등 다양한 마을 행사에 협력을 강화하고
농악(1963년 발행)
정체성을 공유하는 역할을 한다.
씨름2018년 등재은 두 명의 선수가 허리에 찬 띠를 서
로 잡고 상대를 바닥에 넘어뜨리기 위해 다양한 기

세계 유산 등록 특별(제주해녀문화)
술을 사용하는 일종의 레슬링으로 전통 명절, 장이
(2018년 발행)
서는 날, 축제 등 다양한 시기에 행해진다. 우승자
는 농사의 상징인 황소를 상으로 받으며, ‘장사’라
제50회 전국체육대회 기념(씨름)
(1969년 발행) 는 타이틀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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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1949년 발행)

한글 500주년 기념
(1946년 발행)

팔만대장경
(1969년 발행) 세계 유산 등록 특별(정족산 사고와 태조실록)
(2000년 발행)

세계기록유산은 인류의 사회문화적으로 소중 기록


한 기록유산을 보존하고 활용하려 지정하는 유산
이다. 문화는 글과 행위로 표현된다. 수많은 문화 유산
유산은 글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남아 그 명맥을 이
어올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훈민정음은 ‘글자’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도 문화유산이다. 우리나라
는 1997년 <훈민정음>과 <조선왕조실록>이 처음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446년 음력
9월에 반포된 훈민정음 판본에는 1443년에 창제된
한글과 세종대왕의 반포문, 정인지 등 집현전 학자
의 해설과 용례를 덧붙여 쓴 해설서 해례본이 포함
되어 있다. 세종대왕의 이러한 업적은 유네스코가
문맹 퇴치에 이바지한 이에게 주는 세종대왕상King
Sejong Prize을 제정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세종대왕 세계 유산 등록 특별(훈민정음과 세종대왕)
(2000년 발행)
에 관련된 소재는 가장 자주 오르는 우리나라 우표
소재이기도 하다.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
(2007년 발행)
要節, 2001년 등재은 고려 말 백운화상白雲和尙, 1299~1374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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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불교의 요체要諦를 모아 상·하 두 권으로 편집 국채보상운동 기록물2017년 등재은 외채로 인한 망국
한 책이다. 1377년에 그의 제자들이 청주 흥덕사에 을 극복하고자 국가가 진 빚을 국민이 갚기 위해
서 이를 금속활자로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세계 최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일어난 운동의 기록물이
초의 가동可動 금속활자본이다. 이는 독일 구텐베르 다. 술과 담배를 끊고, 반지와 비녀를 내놓고, 기생
크의 ‘42행 성서’ 금속활자본보다도 78년이나 앞선 과 걸인 심지어 도적까지 의연금을 내는 등 전 국
것으로, 그 역사적 가치가 뛰어나다. 민의 약 25%가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은 2007년 등재되었다.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2017년 등재은 금·은·옥에 아름
고려대장경판은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모은 1,511종 다운 명칭을 새긴 어보御寶, 오색 비단에 책임을 다
6,802권에 달하는 경전을 가로 70cm, 세로 24cm 할 것을 훈계하고 깨우쳐주는 글을 쓴 교명敎命, 옥
의 나무판에 새겼는데, 이 나무판이 모두 81,258장 이나 대나무에 책봉하거나 아름다운 명칭을 수여
에 달한다. 이 때문에 흔히 ‘팔만대장경’으로 불린 하는 글을 새긴 옥책과 죽책, 금동판에 책봉하는
다. 제경판의 ‘제’는 ‘모두 제諸’로, ‘해인사가 보관한 내용을 새긴 금책을 말한다.
모든 경판’을 뜻한다. 제경판은 총 5,987판이다. 왕세자나 왕세손에 책봉되면 국왕에게 옥인, 죽책,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1592~1598 때 진중에서 거의 교명을 받아 왕권 계승자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왕
매일을 친필로 기록한 7책 205장의 필사본 일기 세자나 왕세손이 국왕에 즉위하면 왕비도 금보, 옥
<난중일기>2013년 등재는 군사령관이 개인적인 소회, 책, 교명을 받았다. 1392년부터 1966년까지 570여
날씨, 전장의 지형, 서민의 생활 등 전장에서 겪은 년을 지속해서 책보冊寶를 제작하여 봉헌한 사례는
이야기를 쓴 책으로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 우리나라뿐이다.
기 힘든 귀한 기록이다. 글·사진 은종호 공학박사, 한국우편엽서회장

( ) 괄호 안은 등재 년도

세계유산 무형문화유산 기록유산


석굴암 및 불국사(1995)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2001) <훈민정음(해례본)>(1997)
해인사 장경판전(1995) 판소리(2003) <조선왕조실록>(1997)
종묘(1995) 강릉단오제(2005) <승정원일기>(2001)
창덕궁(1997) 강강술래(2009) <불조직지심체유절>하권(2001)
수원 화성(1997) 남사당놀이(2009) 조선왕조 <의궤>(2007)
경주 역사지구(2000) 영산재(2009)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2007)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
제주칠머리당영등굿(2009) <동의보감>(2009)
(2000)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 처용무(2009) <일성록>(2011)
가곡, 국악 관현반주로 부르는 1980년 인권기록유산
조선 왕릉(2009)
서정적 노래(2010) 5·18 광주 민주화운동기록물(2011)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 대목장, 한국의 전통 목조 건축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의
(2010) (2010) 진중일기(2013)
남한산성(2014) 매사냥, 살아있는 인류 유산(2010) 새마을운동 기록물(2013)
백제역사유적지구(2015) 택견, 한국의 전통 무술(2011) 한국의 유교책판(2015)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2018) 줄타기(2011)
찾습니다’ 기록물(2015)
한국의 서원(2019) 한산 모시짜기(2011)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2017)
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2012)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2017)
김장,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문화
조선왕실의 인장 시리즈 中 고종수강태황제보 국채보상운동 기록물(2017)
(2013)
(2016년 발행)
농악(2014)
줄다리기(2015)
제주해녀문화(2016)
한국의 전통 레슬링(씨름)(2018)

9
별별마당 ㅣ 이달 의 인 물

10
곱게 물들인 끈을 한 올 한 올 엮다 보면
그 끝에 꽃이 피어나고 나비가 날아든다.

매 무형문화재 노미자 매듭장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매듭에서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듭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선생의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노라니
의 나도 모르게 매듭의 아름다움에 빠져든다.

매듭과의 운명적인 첫 만남

당시 어머니의 나이를 훌쩍 넘은 선생이 무더운 여
우아하게 올린 머리에 단아한 한복을 입은 노
미자 선생은 상상했던 매듭장의 모습 그대로였다.
전 름 올이 고운 모시 적삼을 입고 연봉매듭을 엮던
어머니의 모습과 꼭 닮은 모습으로 작업대 앞에 앉
한복 맵시만큼이나 고운 미소로 취재진을 맞아주
는 그녀를 따라 작업실이 있는 자택으로 들어서니
하 아 끈을 한 올 한 올 정성스레 엮어간다.

현대적인 가구와 고전적인 매듭 장식을 적절히 섞 다 첫 대통령상 수상의 기쁨


어 놓은 실내 인테리어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40여 시작은 호기심이었다. 어릴 때 어머니가 만들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매듭에 오롯이 인생을 바쳐온 었던 연봉매듭을 비롯해 나비매듭, 매화매듭, 잠자
서울시
선생의 매듭 사랑이 느껴졌다. 리매듭 등 다양한 문양의 매듭을 어떻게 하면 엮을
무형문화재
“제가 매듭을 시작한 지도 벌써 40년이 되어 가네 수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선생은 스승인 김은영
제13호
요. 정말 우연한 기회였죠.” 매듭장의 지도로 우리나라의 기본매듭 서른여덟
선생의 이야기처럼 매듭과의 첫 만남은 정말 운명 가지 종류를 하나씩 습득해 나가면서 매듭의 아름
적이었다. 20대 중반, 테니스를 치러 갔다가 우연
히 지금, 서울시 무형문화제 명예 보유자로 있는
노 다움에 흠뻑 빠져들어 매듭장의 길을 걷게 되었다.
지금은 서울시 무형문화재로서 작은 장신구에서
김은영 매듭장을 만나게 된 것이 계기였다. 전문가 미 의궤나 가마의 장식에 이르기까지, 현재 남아 있
의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썰미로 선생의 야무진 손
끝을 알아본 것일까. 김은영 매듭장은 선생에게 매
자 지 않은 옛 유물을 복원하는 데 힘쓰고 있다. 지난
2006년에는 ‘제31회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듭을 배워볼 것을 권했고 그녀는 두말하지 않고 이 ‘궁소교 매듭 장식’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실력
매듭장
끌리듯 매듭의 세계로 들어섰다. 선생은 ‘지금 생 을 인정받기도 했다. ‘궁소교 매듭 장식’은 창덕궁
각해 보면 그 이끌림의 근원은 어머니였던 것 같 에 소장된 조선 시대 궁중에서 쓰던 가마를 재현한
다’고 회고한다. 어릴 때부터 옷고름에 매듭을 만 작품으로, 여섯 명의 무형문화재 선생님들과 협업
들어 단추를 달고 상보나 수저주머니 등 집 안의 을 하면서 완성한 궁중 매듭 장식물이다. 전승공예
소소한 집기들을 직접 만들어 쓰던 어머니의 모습 대전에서 매듭 분야로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은 노
이 기억 속에 아련하게 남아있는 까닭이다. 지금은 미자 선생이 처음이다.

11
“전승공예대전에 출품되는 공예 분야가 20가지가
넘는데, 31회가 진행되는 동안 매듭으로 대통령상
을 수상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래서 아무도
하지 못했던 것을 내가 한번해보면 어떨까 하는 도
전의식과 사명감이 생기더라고요. 매듭을 하는 많
은 분께 매듭이 이렇게 인정받는 전통공예라는 걸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죠.”

느림의 미학, 몰입하는 즐거움


매듭은 끈목을 사용하여 맺고 엮어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드는 우리나라 전통공예로, 본래 묶고 매
는 실용적인 필요에 의해 탄생되었지만, 점차 장식
1
하는 용도로 쓰이게 된다. 매듭은 앞과 뒤의 모양
이 같고 중심에서 시작하여 중심에서 끝나며 좌우
대칭의 모양을 갖는 것이 특징으로, 매듭을 만들기
위해서는 명주실을 염색하고 끈목을 만들어 끈을
엮는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조선 시대 말기
에는 왕십리 주변에 매듭촌이 형성되어 분업을 했
지만, 지금은 모든 과정이 한 사람의 손을 거친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손으로 시작해 손으로 끝
나기 때문에 보통 하루 7~8시간 작업하는 것을 기
준삼아 노리개를 하나 만드는 데 일주일 정도의 기
간이 걸린다. 물론 매듭의 구성과 술의 굵기에 따

2 라 시간이 더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빨리빨리’


모든 것을 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어찌 보면 답
답한 작업일 수도 있지만, 선생은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매듭이야말로 느림의 미학을 느낄 수 있
는 산물이 아니겠냐고 이야기한다.
“빨리빨리만 강조하는 요즘 사람들이 매듭을 통해
느림의 미학, 중용의 삶을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
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한 걸음 멈추고, 나
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삶이 더
욱 풍요로워질 거예요.”
선생은 저녁을 먹고 그 이후부터 작업실에 홀로 조
1 궁 소교 매듭 장식
용히 앉아 매듭을 엮어간다. 그렇게 앉아 끈을 잡
2 기축년 진찬도중 지당판
3 3 대삼작 노리개 으면 자정이 지나 동이 틀 때까지 작업이 이어진다

12
고 하니 열정이 대단하다. 매듭을 잡고 있을 때면
행복의 정도가 매번 클라이맥스를 치닫는다고 한
다. 40여 년의 세월 동안 매듭을 포기하고 싶다거
나 그만두고 싶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선
생의 말이 빈말은 아닌 듯싶다.
“매듭을 처음 배울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어떻게 끈 하나를 접어 이런 형태가 나올까 신기하
4
고 재미있습니다. 끈을 잡고 매듭을 시작하면 결과
가 어떻게 나올지 기대되고 벅차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업을 합니다.”
40여 년 한 길을 걸어온 장인은 마치 눈앞에 기대
하고 고대했던 매듭 작품이 완성되기라도 한 것처
럼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이야기했다.

5
장 속에서 장 밖으로 나온 매듭
과거에는 매듭이 쓰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노 4 8사 끈목 짜는 모습
5 국화 매듭 맺는 모습
리개와 도포끈 등 남녀의 의복을 장식했을 뿐만 아
니라, 각종 주머니와 부채에도 매듭이 멋을 더했으
며, 두루마리 편지를 꽂아두던 고비와 방장걸이와
발걸이, 횃대 등 실내에 사용되는 기물에도 매듭 어 있는 문화를 장 밖으로 끌어낼 수 있을까’를 생
을 드려 장식했다. 가마와 악기, 불교의 기물들에도 각한 끝에 현대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밥상에서
매듭이 빠지지 않았다. 이처럼 매듭은 신분과 계층 식탁 문화로, 전등에서 스탠드 문화로 자연스럽게
을 초월해 사용되었으며, 특유의 화려함과 섬세함 생활이 바뀌었듯이 전통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시
으로 일상 곳곳을 조화롭게 장식했다. 하지만 서 대에 맞는 매듭을 만들고 보급해야 하지 않을까 생
구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생활과 문화가 변화하 각한 것이다. 특히 ‘사람들이 작품을 보고 갖고 싶
면서 매듭이 쓰이는 곳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선 다는 마음이 들어야 현대화에 성공한 것’이라는 선
생은 아름다운 매듭이 일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안 생의 생각에 따라, 현대의 쥬얼리 작가와의 협업을
타깝게 여겨 매듭의 현대화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 통해 브로치를 만들었고, 핸드백, 벨트, 스탠드, 실
다. 처음 시작은 ‘노리개’였다. 사람들이 혼사나 어 내장식까지 그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다. 또한 매
떤 특별한 행사에서 한복을 입을 때 딱 한 번 달면 듭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미자 선생이 회장을 맡고
그만인 노리개를 비싼 돈을 들여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김은영전승매듭연구회’에서는 현대생활에
있느냐고 말하는 것을 듣고, 이런 생각이 계속되면 접목할 수 있는 주제를 하나씩 내세워 해마다 전
우리 문화는 과거 속으로 그냥 사라져 버리겠구나 시회를 열고 있다. 그동안 현대식 아파트에 어울리
하는 위기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는 ‘실내장식’, 의상과 매치할 수 있는 ‘현대 의상과
‘어떻게 하면 특별한 행사 때 말고도 일상에서 매 매듭’ 등을 주제로 전시회를 개최하며 현대 문물과
듭을 사용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장 속에 잠들 의 접목을 끊임없이 시도해 왔다. 매듭의 현대화에

13
7

6 (좌)옥 오복광주리 브로치 삼봉술 노리개, (우)새 비취 브로치 사봉술 노리개


7 인경매듭 장식 개구리 브로치
8 상아 향수병 목걸이 장식
9 크러치백 매듭 장식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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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서고 있는 매듭장답게, 현대식 인테리어로 장
식된 선생의 집안 곳곳에도 전통이 깃들어 있었다.
접시 색감과 맞춰 매듭으로 장식한 테이블보를 식
탁에 깔고, 유럽 귀족이 쓰던 촛대를 사들여 갓과
나비매듭으로 장식하고, 크리스마스에는 색색의
오색 실로 만든 매듭 장식으로 트리를 대신하며 몸
소 매듭의 현대화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야말로, 진정한 매듭의 현대화가 아닐까.

전통 계승에 대한 사명감으로
예순 중반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선생의 일과
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개인 작업 하는 시간 외
에는 모두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시간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현재 ‘문화재보호재단’에서
운영하는 한국건축공예학교에서 기초반부터 연구
반, 전문반까지의 학생을 가르치고, ‘서울시 무형문
화재 돈암문공예관’에서는 매듭을 배우고 싶어 하 많은 외국인에게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알릴 수
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이런 선 있다는 것, 매듭을 통해 역사와 문화를 전파할 수
생의 노력 때문일까. 해가 갈수록 매듭을 배우려는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보람된 일이냐는 것이다. 선생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역사박물관에서 8년간 특 또한 우리나라 학생들 뿐만 아니라 어학당의 외국
강을 해온 선생은 이런 변화를 더욱 체감하고 있 인 학생들, 일본에서 온 수학여행단에 꾸준히 매듭
다. 단기강좌로 몇 주 배우는 학생뿐만 아니라, 끈 을 알려주며 민간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염색부터 전통적인 방법으로 실을 짜고 매듭을 맺 하고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전통문화의 세계화, 매
는 것까지 배우는 전문가 과정을 이수하려는 학생 듭의 대중화가 아닐까.
이 점점 늘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앞으로 매듭 “김은영 선생님께서는 매듭만큼 한국인의 정서가
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지 않을까 기대 많이 배어 나오는 공예가 없다고 가르치시면서 제
하고 있다. 자를 키우고 매듭을 알리고자 애쓰셨어요. 그 때문
“현재 남아 있지 않은 유물을 자료를 통해 하나하 에 지금껏 매듭의 명맥이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나 복원해 나가는 것도 보람 있지만, 제자들이 매 저 또한 열심히 제자들을 가르치고, 문화를 복원하
듭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매듭에 깊이 빠져드는 것 는 데 앞장서 전통매듭의 명맥이 앞으로도 계속 이
을 볼 때면 더욱 큰 보람을 느낍니다. 앞으로 우리 어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현대화 작업도
전통공예인 매듭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더욱 발 꾸준히 진행해 매듭이 현대인들의 생활 속으로 좀
전하려면 계속해서 매듭을 전승할 사람이 필요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기 때문이죠.”
선생은 학생들에게 매듭을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이
글 양지예 프리랜서 기자
민간외교관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끈 하나로 사진 김정호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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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바다 너머

Banjiha?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4관왕 수상에 이어 전 세계적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가운데, 많은 외국인이 영화의 주요 배경인 반지하 주택에 관심을 보이고

그게 뭡니까?
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지하 주택이 외국에는 없기 때문이다.
영국 BBC가 한국어 그대로 ‘Banjiha’라 표기했을 만큼 한국에만 있는 주거구
조인 반지하 주택은 왜 생긴 것일까. 또한 외국인들은 어떤 집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미래의 주거문화는 어떤 모습일까.

영화 <기생충>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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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의 단면 품은 반지하 통계청의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전체 가
지난 2월 9일현지 시간, 미국 LA에서 열린 제92회 구 중 1.9%에 해당하는 37만여 가구가 반지하에 거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연은 단연 영화 <기생충>이었 주한다. 2005년 59만여 가구와 비교해 크게 줄어든
다. 전 세계는 상업영화의 본고장 한가운데에서 작품 수치다. 요즘은 건축 기술의 발달로 과거의 문제점들
상·감독상·각본상·국제장편영화상 등 오스카 트로피 이 많이 개선됐다. 특히 요즘은 반지하 공간을 모임
4개를 ‘쓸어 담은’ 한국 영화에 비상한 관심을 보냈 공간·자료실·전시장 등으로 리모델링해 새로운 사회
고, 이는 영화의 주요 배경 중 하나인 ‘반지하’로 이어 적 가치를 창출하는 프로젝트가 곳곳에서 진행되고
졌다. <기생충> 주인공 기택송강호 분 가족이 사는 반 있다. 반지하가 영화에서처럼 마냥, 절망적인 이미지
지하 주택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 인 것만은 아닌 셈이다.
라만의 독특한 주거 양식이기 때문이다.
창문의 절반이 지층으로 가려진 희한한 주택 구조의 각국의 상황과 환경에 맞춰 발달한 해외 주거문화
밑바닥에는 남북 분단이라는 아픔이 면면히 깔려 있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들이 한데 얽혀 반지하
다. 1968년 북한에서 내려온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주택을 만들어 냈듯, 해외에도 각국의 상황과 환경
를 습격한 직후, 정부는 건축법을 개정했다. 전쟁 등 에 걸맞은 주거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가깝고도 먼
국가비상사태 시 벙커로 사용할 수 있도록 신축 주택 나라 일본은 고온다습한 기후를 우선적으로 고려한
에 지하 공간을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주요 개방적 주택 구조다. 창문을 많이 만들고 지붕을 높
골자였다. 이에 따라 이후 지어진 단독·연립주택에는 게 설치해 통풍성을 높이는 데 중점을 둔 것이다. 이
지하층이 생겼고, 초창기에는 주로 창고로 쓰였다. 와 함께 지진이 빈번한 지역 특성상 주택을 높게 짓
1970년대부터 산업화가 본궤도에 오르자, 1차 산업 지 않고, 진동에 부서지기 쉬운 철근 콘크리트 대신
에 종사하던 농촌 젊은이들은 새로운 기회와 일자리 나무를 사용한 목조주택이 보편화 됐다. 그러다 보니
를 찾아 서울로 모여들었다. 급격한 인구 증가에 주 화재와 방음에 다소 취약하다는 단점도 품고 있다.
거 공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등장한 구 중국은 전통적으로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
원투수가 지하층이었다. 무일푼으로 상경한 세입자 사상을 갖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주택에도 그대로
들은 조금이라도 더 싼 방을 찾고 싶었고, 집주인들 반영됐는데, 중국의 전통 주택은 마당인 중정을 중심
은 지하층을 이용해 월세를 받고 싶었다. 수요와 공 으로 여러 채의 건물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내향
급이 맞물리며 지하층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적 공간 구성이 가장 큰 특징이다. 세계에서 세 번째
자, 정부는 1984년 건축법 규정을 완화해 3분의 2 이 로 넓은 영토를 자랑하는 중국이 이처럼 폐쇄적인 면
상 묻혀 있어야 했던 지하 부분을 2분의 1 이상으로 모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최근에는 인구가
줄였다. 그만큼 바깥과 통하는 창문이 커졌고, 열악 밀집된 대도시를 중심으로 아파트도 많이 들어섰는
하지만 조금이나마 더 숨통 트이는 생활공간이 만들 데, 건축 골조만 분양하고 내부 인테리어 공사는 각
어졌다. 반지하 주택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 곁 집주인이 도맡는다. 이 또한 자기중심적 성향의 한
에 안착했다. 단면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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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우리나라보다 100배 이상 넓은데 인구는
7배가 채 되지 않는다. 이렇듯 인구 대비 국토가 넓
은 만큼 미국의 중산층은 마당이 딸린 널찍한 단독
주택에서 생활한다. 문지방과 화장실 바닥 배수구가
없고, 도배보다는 페인트를 선호한다. 이러한 미국형
단독주택은 보통 대단지로 조성되는데, 이웃과 담이
없거나 낮은 개방형 구조를 지닌 것이 특징이다. 대
도심에서는 비싼 집값을 조금씩 나누어 부담하는 셰
어하우스가 인기다. 은퇴한 부부들은 컨테이너를 이
1
동형 주택으로 개조한 모빌 홈mobile home을 끌고 다
니며 전국을 여행하기도 한다.
유럽의 주요 도시에 가면 거리마다 예스러운 멋이 살
아 있음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 오래전부터 형성
되어 온 도시의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는 방식으로 도
시를 성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수백 년
된 주택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데, 내부 또한
원래의 멋을 살리는 방향으로 리모델링한다. 고로 다
소 좁지만 아늑한 느낌을 주는 집이 많다. 또한 대체
2
로 층고가 낮아 도시 미관을 해치지 않는다.

주거를 관통하는 트렌드, ‘공유’와 ‘개성’


세계는 21세기와 4차 산업혁명을 맞아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 주거문화도 마찬가지다. 1980년
이후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는 주거에 관한
생각이 이전 세대와 완전히 다르다. 기성세대가 집
을 소유하려 했다면, 젊은 세대는 개인 공간을 제외
한 많은 부분을 공유하려 한다. 세계적 경기 침체와
3 부동산 가격의 급격한 상승으로 집을 살 여력이 없
거니와, 개인주의의 심화와 1인 가구의 증가로 주방·
편의시설 등을 굳이 소유해야 할 필요가 없어진 것
이다. 사생활만 보장된다면 나머지 영역은 기꺼이 공
유하며, 이를 통해 주거와 관련된 비용을 낮추고 자
기계발과 취미생활에 더 많은 투자를 한다. 공유주거
1 일본의 전통 주거양식. 지진이 잦아 목조주택이 보편화돼 있다. Co-living는 이제 공간 소비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개
2 중국의 전통 주거양식. 마당을 중심으로 건물이 둘러싸고 있다.
3 오스트리아 할슈타트. 도시의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며 발전했다. 념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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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주거는 ‘경험’이라는 특별한 가치도 제공한다. 혼 주거에 대한 확고한 생각으로 그 장단점에서 벗어났
자 살 때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비슷한 사람들과 다. ‘떠받들며 살지 않아도 되는 집’, ‘완전히 나로 존
함께 나누고, 그 안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해 나 재할 수 있는 집’이 이들의 모토다.
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장점을 중요한 점은, 주거에 대한 밀레니얼·Z세대의 생각이
배울 수 있고, 공동의 문제에 대해 보다 쉽게 해결할 전 세계적 트렌드라는 사실이다. 공유주거에 대한 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숙명과 념과 확신은 선진국일수록 강하고, 자신만의 주거 형
도 같은 외로움을 상당 부분 덜 수 있다. 이런 장점 때 태를 만들고자 하는 개개인의 욕구도 점점 커지고 있
문에 경제적 여유가 있음에도 공유주거를 택하는 사 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주거문화의 대혁신을 예
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고하고 있다. 집에 나를 맞추는 게 아니라 내 삶에 걸
이동형 주택과, 넓은 대지 대신 옹골찬 내실을 택하 맞은 집을 선택하고 꾸미는 시대가 점점 가까워지고
는 협소주택도 널리 퍼지고 있다. 집에 자신만의 개 있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도 집에 대한 생각을 조금
성을 한껏 살릴 수 있다는 것이 이들 주택의 가장 큰 씩 바꿔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특장점이다. 아파트는 집값이 비교적 안정적이지만
비싸고 획일화돼 있으며, 관리비 등 유지비용이 상당
글 강진우 문화칼럼니스트
히 많이 들어간다. 이동형·협소주택을 택한 사람들은 사진 셔터스톡, Flickr(@naval s)

Z세대는 사생활만 보장된다면 나머지 영역은 기꺼이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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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시와 사진 한 모 금

문득 이야기 속에서 인연 하나를 만나다


회상
지난 과거 속에서 만난 익명의 사람들
김 형 복
모두들 어디로 갔을까

서로의 눈빛을 가까이 하며

때로는 희망과 이별을 말하던 사람들

그리고 한때 생활의 안에서

무지개로 빛나던 미래는

김 형 복
월간 <문예사조> 시 부문 등단
부산강서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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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세월 가고

별이 되고 그늘이 되는 순간 속에서

그대와 내 안에서 가만히 놓이는 물음 하나

전생의 인연으로

먼 산의 가을처럼 무늬 지는 날

오늘은 공경한 은혜처럼

언제나 만나는 것도 이별을 전제하지만

비울 때 더욱 빛나는 낯선 명상처럼

내 곁에 머물고 있는

그대의 이별을 듣는다

우리가 안정할 때 비로소 서로를 부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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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옹기 종 기

일상의 예술
‘조각보’

Everyday Art:
Jogak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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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I c onic I tem s

Jogakbo is a traditional Korean wrapping cloth (known as a bojagi )


made from scraps of fabric. This article’s history can be traced back

to the Joseon Dynasty, a time when everything was precious, with

fabric being no exception. When Koreans of that time made clothing

or blankets, they’d save up the leftover scraps to make a bojagi , which


조각보는 말 그대로 천 조각으로 만든 보자기를 말한다. 천 was generally used as a tablecloth or a wrap for carrying items.
조각으로 만든 보자기의 역사는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Sometimes extra-large jogakbo were made to hold wedding gifts or
그때는 모든 게 귀하던 때였고 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사 drape over a window. Along with these diverse uses, jogakbo have
람들은 옷이나 이불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천을 알뜰히 모아 보 various applications in today’s clothing, furniture, handicrafts, and
자기를 만들어 물건을 싸거나 밥상을 덮는 데 사용했다. 그뿐만 architecture. Far from being a mere historical relic, in other words,
아니라 조각보를 크게 만들어 예단이나 혼수품을 싸기도 했고, the tradition remains in a harmonious dialogue with the present.
문에 치는 발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하게 사용됐던 조 As a Korean artifact, jogakbo has been compared to the works of
각보는 현대의 옷, 가구, 공예, 건축 등에까지 다양하게 응용되 Piet Mondrian (1872–1944) and Paul Klee (1879–1940), abstract
며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대와도 소통하고 융화할 수 있는 아 painters renowned for their partition of space. Just as in the abstract
이템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울러 공간 분할의 추상화가로 유 geometry that characterizes Mondrian’s paintings, jogakbo feature
명한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이나 파울 클레Paul Klee, a deft arrangement of colors that draws out their unique qualities.
1879~1940의 작품과 비견되는 한국의 유물로서 인정받고 있다. 기 The East Asian sentiments behind the five traditional colors known
하학적 추상을 표방했던 몬드리안의 작품처럼 세련된 색상 배치 as obangsaek (white, black, blue, yellow, and red) possess a powerful
로 각 색상이 지닌 느낌을 살리고, 동양적 정서가 담긴 ‘오방색’ quality of abstraction.
을 통해 강렬한 추상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Jogakbo has its beginnings in the wisdom and thrift of the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절약 정신에서 출발한 조각보는 오늘날 단 Koreans of the past. These pieces are no longer regarded as everyday
순한 생활소품에 머무르지 않고,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공예작품 items, but as handicrafts of outstanding artistic value. Stitching
으로 비상 중이다. 버려질 운명이던 가지각색의 보잘것없는 조각 seemingly worthless scraps of multicolored cloth, scraps that would
을 모아 하나의 작품으로 통합할 줄 알았던 능숙한 솜씨와 탁월 have otherwise been thrown onto the dustheap, into a work of art
한 미적 감각! 그것만으로도 조각보는 예술적 평가의 대상이 되 required a practiced hand and a refined aesthetic sense. That fact
기에 충분해 보인다. alone should be sufficient for jogakbo to merit artistic consideration.

글 안유미 편집팀 By An You-mee, editing t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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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한국 의 서 원 ①

인간의 손길이 있되 없는 듯
‘병산서원’
Byeongsan Seowon:
Architecture that Melds with 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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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Korea’s Seowon

지난해 7월 한국 문화계에 낭보가 전해졌다. 바로 ‘한국의 서원 Korea’s cultural community received good news in July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9개의 서원소수서원, 도 2019: Nine traditional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
산서원, 병산서원, 옥산서원, 도동서원, 남계서원, 필암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이 유네스 called seowon (Sosu Seowon, Dosan Seowon, Byeongsan
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이다. 세계유산위원회는 그 선정 이유로 Seowon, Oksan Seowon, Dodong Seowon, Namgye Seowon,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 Piram Seowon, Museong Seowon, and Donam Seowon)
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를 꼽았다. were placed on the UNESCO World Heritage List. The World
Heritage Committee described them as “evidence of a neo-
Confucian cultural tradition passed down to Korea today
through education and social customs.”

Korea’s seowon are “living traditions”


That Korea’s traditional seowon have become world heritage sites is

not surprising; in fact, their placing on the list came much later than

안동 병산서원(사적 제260호) it should have. The seowon have both inherited the neo-Confucian
Byeongsan Seowon, Andong (Historic Site No. 260)
traditions of Northeast Asia and exhibit cultural traits native to

Korea (specifically, the Joseon Dynasty). Some may ask why only
한국의 서원은 살아 있는 전통 Korea’s traditional seowon have become world heritage sites when
한국의 서원이 세계유산이 된 것은 당연한, 아니 외려 늦은 traditional academies in China—where such academies originated
일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서원은 여러 면에서 동북아시아의 성 in the first place—have not. There are several reasons for this, but
리학적 전통을 승계하면서도 한국조선 고유의 문화적 측면을 보 the biggest one, in my opinion, is that Korea’s seowon still more or
여주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서원 전통은 중국에서 비롯된 것인 less function today as they were built to. Originally, seowon were
데 왜 중국의 서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가 되지 않고 한 educational institutions built to pay homage to ancestors who had
국 것만 등재되었느냐고 의문을 표할 수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 great learning and to teach students about neo-Confucianism. While
지만 가장 큰 이유로 한국의 서원은 부분적이나마 여전히, 본연 the role of Korea’s traditional seowon has drastically changed over
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서원이란, 학문 the years, families still conduct ancestral rites at these places. That is
이 뛰어난 조상을 제사 지내고 후학에게 성리학을 교수하기 위해 why I call Korea’s traditional seowon “living traditions.”
세워진 교육기관이다. 지금의 한국 서원은 교육 기능이 많이 축 International attention has also focused on the architecture of
소되었지만 가문을 중심으로 한 의례는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다. traditional seowon . Seowon were constructed in a way unique to
이런 면에서 한국의 서원은 살아 있는 전통이라 할 수 있다. Korea and were built with an eye for design. The tradition of building
서원의 기능적 측면뿐만 아니라 건축물 자체로도 주목 받았다. seowon did come from China; however, Korea’s seowon were built
한국의 서원 건축은 고유하면서도 뛰어난 안목으로 이루어졌다. very differently from Chi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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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류성룡 선생의 위패를 모신 ‘존덕사’
Jondeoksa, built to enshrine “Seoae” Ryu Seong-ryong’s ancestral tablet

비록 서원 전통이 중국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서 Byeongsan Seowon: Isolated from Joseon’s political sphere
원 건축은 중국과 사뭇 다르다. This article focuses on Byeongsan Seowon, but I cannot in the

small space provided here talk about everything related to such


정치적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던 ‘병산서원’ a magnificent piece of heritage. That is why I will just focus my
이 글은 병산서원에 관한 것이긴 하나, 이 작은 지면에서 거대 discussion in this article on the architecture of Byeongsan Seowon.
한 유산인 병산서원의 모든 것을 다룰 수는 없다. 따라서 ‘병산서 Before moving to that discussion. I want to give a broad
원 건축’에 집중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overview of Byeongsan Seowon. As is well known, Byeongsan
그 전에 먼저 병산서원의 기본적인 정보부터 살펴보면, 병산서원 Seowon was a temple used to both commemorate “Seoae” Ryu
은 잘 알려진 것처럼 서애 류성룡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자 교육 Seong-ryong’s ancestral tablet and act as an educational institution.
기관이었다. 이 서원의 전신은 원래 풍산현에 소재하고 고려조부 The forebear of this seowon was the Pungak Seodang (豊岳書堂),
터 있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인데, 서애가 이것을 1572년 현재의 위 which was established during the Goryeo period in the town of
치로 옮겼다고 한다. 1607년 서애가 타계하자 1613년에 제자들이 Pungsan-hyeon. In 1572, Ryu moved that institution to its current
이 서당을 사당으로 탈바꿈해 서애의 위패를 모신 존덕사를 만들 location in Andong. When Ryu died in 1607, his students turned
었다. 그러다 그다음 해인 1614년에 이 사당의 이름을 병산서원 the school into a temple in 1613 and built a jondeoksa to enshrine
으로 고쳤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그대로 내려온 것이다. his ancestral tablet. In 1614, the temple was renamed Byeongsan
병산서원이 국가가 인정하는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승격된 것은 Seowon, which remains its name today.
매우 늦은 1863년의 일로, 이것은 병산서원이 정치적 중심에서 Byeongsan Seowon became a saaek seowon (賜額書院, a royally
오랫동안 벗어나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 때문에 병 chartered Confucian academy) many years later in 1863, an event
산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 벗어나 보존될 수 있었 that showed how long the seowon had become isolated from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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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앞서 말했듯 서원은 16세기 중반 이후 politics of the Joseon Dynasty. This isolation, however, allowed
향촌의 유학자들이 그 지역의 주요한 유학자들을 제사 지내고 후 the seowon to be preserved from the Prince Regent Heungseon
학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유교식의 교육기관이다. Daewongun’s (Prince Gung) order to demolish all seowon . Was this
성균관이나 향교가 국립교육기관이라면 서원은 사립교육기관이 the irony of fate? Seowon were built from the mid-16th century
라고 할 수 있겠다. 서원의 발생에 대해 조선 중기의 위대한 학자 by Confucian scholars in rural areas to pay tribute to important
였던 유형원은 성균관이나 향교가 과거 시험에만 집착해, 그것을 Confucian scholars from local areas and teach students about neo-
개선하고자 성리학의 순수한 정신을 교육하는 서원이 생겼다고 Confucianism. Seonggyungwan National Academy and hyanggyo
보았다. 그런가 하면 16세기에 벼슬길에 올라 성리학적인 정치를 (provincial schools) were run by the government, but seowon were
실현하려 했다가 실패하고 낙향한 사림파들이 세운 것이라는 설 what you could call “privately run.” Yu Hyeong-won, a great scholar
도 있다. of the mid-Joseon period, believed that seowon had appeared because

Seonggyungwan and hyanggyo focused too much studying for the


친자연적 건축의 진수를 보여주는 병산서원 ‘만대루’ gwageo (civil service examination) and were aimed at teaching the
병산서원의 구조를 보자. 대문인 복례문을 들어서면 만대루 pure spirit of Confucianism as a remedy to this situation. Others
가 나오고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입교당이 나온 argue, however, that members of the Sarim faction who became
다. 그 양옆에는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고, 강당 뒤로 가면 사 government bureaucrats established seowon in their hometowns
당인 존덕사 그리고 경판 등을 보존하고 있는 장판각이 있다. 서 after failing to achieve their neo-Confucian aims in politics.
원 밖에는 교육이나 배향 시 행정적 지원을 하는 전사청 등이 있
다. 이러한 기본적인 것은 다른 서원들과 같은데 병산서원만의 Byeongsan Seowon’s “Mandaeru Pavilion”: Putting the
특장점은 과연 무엇일까? 한국 건축학계의 권위자이자 한국예술 essence of “nature-friendly” architecture on display
종합학교 총장인 김봉렬 건축가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외국의 건 Byeongsan Seowon is made up of several parts. After entering the
축가들이 감탄하는 한국의 건축이 몇 개가 있는데, 병산서원이 main gate (Bongnyemun), you will face the Mandaeru Pavilion.
그중 하나라고 한다. 그들이 가장 감탄하는 점은 병산서원의 건 Going up the nearby stairs brings you to the Ipgyodang Lecture
축이 친자연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친자연적’이라는 Hall. On either side of the lecture hall is the dongjae , or eastern

dormitory, and the seojae , or western dormitory, and a study. Behind

the lecture hall is the jangpangak , which is where the jondeoksa


목판 및 유물을 보관하던 ‘장판각’
Jangpangak, which held woodblocks and relics is located and Ryu’s ancestral tablet is kept. Outside of the seowon

is the jeonsacheong , which provided administrative support for

education and orientations taking place in the seowon . All these

architectural features, however, are similar with other seowon . What

makes Byeongsan Seowon different? According to the president

of the Korean National University of Arts, Kim Bong-ryul, who is

an authority in Korea’s architectural world, foreign architects are

fascinated by several buildings in Korea, and Byeongsan Seowon is

one of them. The biggest reason they are fascinated by this seowon

is because it is constructed in a nature-friendly way. The whole

idea behind “nature-friendly construction” is that the buil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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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만대루’
Mandaeru Pavilion, offering a scenic bird’s eye view of the landscape

것은 가능한 자연에는 손 대지 않고 인간의 건축이 자연에 안기 does not impact the surrounding natural environment; essentially,
는 것과 같은 건축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 병산서원이 바로 이런 it is a way of constructing a building so that it seems to just melt
방법을 통해 건축되었다. into its surrounding natural environment. Byeongsan Seowon was
우리가 병산서원 같은 유교 건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보는 방 constructed in this very way.
법을 알아야 한다. 전통적인 유교 건축은 불교 건축과 외양은 비 To properly understand the Confucian way of constructing
슷하나 건축 원리는 상반된다. 어떻게 상반되는 것일까? 불교 건 a building like Byeongsan Seowon, we need to know what we are
축은 밖에서 보는 건축이라면 유교 건축은 안에서 밖을 보는 건 seeing when we look at it. While traditional Confucian construction
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불교의 절은 밖에서 볼 때 장엄하게 techniques seem very similar to Buddhist construction techniques, the
보이도록 짓지만, 유교 건축은 안에서 바깥을 볼 때 그 경광이 아 principles they follow are completely opposite from each other. How
름다운 지점에 건물을 짓는다. 절은 신앙의 중심인 붓다가 있는 so? Buildings built using Buddhist construction techniques focuses
집을 화려하게 지어 신도들의 신심을 끌어낸다. 그에 비해 유교 on how the building looks from the outside looking in. Confucian
는 핵심이 인간에 있기 때문에 인간을 중심으로 건축을 한다. 따 building techniques, on the other hand, focus on how the building
라서 유교 건축은 밖에서 보면 안 된다. 그렇게 보면 멋있는 것이 looks from the inside out. Ultimately, what this all means is that
하나도 없다. 대신에 안에서 밖을 보면 수려한 자연이 들어온다. Buddhist temples are built to look magnificent when viewed from the
병산서원이 꼭 그렇다. 어떤 각도로 찍든 바깥에서 담은 병산서 outside, but buildings constructed in the Confucian way boast beautiful
원의 모습은 별로다. 그러나 강당입교당의 원장 자리에서 본 경광 views from inside the building. Temples are built in a stunning fashion
은 압권이다. 서원의 핵심 인물인 원장의 자리에서 볼 때 가장 아 to house the holy being that Buddhists revere, the Buddha, and to
름다운 경치가 나오게 서원이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encourage religious devotion among believers. Buildings constructed
그 자리에서 보면 바로 앞에 있는 만대루가 엄청난 건축적 장치 using Confucian techniques, however, do not focus on the outside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대루 지붕 위로는 앞산인 병산과 하늘 architecture of a building. Rather, Confucian architects considered that
이 보이고 기둥 사이로는 낙동강이 보인다. 그리고 밑으로는 땅 the buildings they created are “inside human beings” and thus built
이 있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는 자연을 구성하는 하늘과 물과 the structures with a “focus on humans.” That is why you should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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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만대루가 없었으면 어 observe Confucian buildings from the outside. There is nothing great
떠했을까? 앞에 있는 산과 강이 너무 강하게 인간의 공간, 즉 앞 looking about their outer architecture. Viewed from the inside out,
마당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그것을 조금 순화시킬 필요가 있 however, the buildings provide a splendid view of nature. Byeongsan
다. 그러나 인위적인 것은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그런 생각에 따 Seowon is a perfect example of this. Pictures taken from all angles of
라 강당 앞에 건물을 세우되 만대루처럼 기둥과 지붕만 있는 단 the seowon are unremarkable. But the view from the director’s seat in
출한 집을 세움으로써 인간의 손길을 최소화했다. 그런 끝에 인 the lecture hall (Ipgyodang) is a sight to behold. The seowon was built
간의 손길이 있되 없는 것 같은 기막힌 모습이 나타났다. 이게 바 to ensure that the most beautiful view of nature would be had from the
로 한국인이 지닌 친자연적 성향이다. 이 만대루라는 건물을 그 seat of the seowon’s most important figure, the director.
냥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이 건물에 엄청난 건축 Viewed from the director’s seat, the Mandaeru Pavilion situated
적인 원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외국 건축가들이 just in front of the seowon is a fantastic architectural device. Through
병산서원에 오면 말을 잊고 감상만 한다고 한 것이다. 물론 만대 the top of Mandaeru Pavilions’s roof, you can see Byeongsan
루에서 보는 풍경도 절경이다. 그래서 거기 앉아 있으면 돌아갈 Mountain and the sky; the Nakdonggang River, meanwhile, can be
줄을 모른다. 이처럼 강당과 만대루에 앉아서 경치를 감상해보면 seen through the columns; look below, and you can see the earth.
왜 서애가 이곳에 서원을 지으려고 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So, in sum, you can see all the elements of nature—the sky, water,

and earth—in one glance from that seat. What would happen if
글 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
사진 아이클릭아트 Mandaeru Pavilion wasn’t there? The view of the mountain and river

would overly dominate the “space of human beings” in the seowon .


That’s why there’s a need to “purify” the view a bit.

Confucian architects knew they had to construct their buildings

with as little man-made obstructions as possible. This thinking led to


만대루 전경 the building of the Mandaeru Pavilion in front of the lecture hall—
Front view of Mandaeru Pavilion
it is, after all, a very simple structure with only a roof and columns.

This kind of architecture enabled the breath-taking view we can now

enjoy—a view that was engineered by humans yet seems not to have

been. Ultimately, Mandaeru Pavilion sums up the “nature-friendly”

sentiment inherent in Koreans. While the pavilion may not look like

much at a glance, the structure was built using great architectural

principles. That is also why foreign architects are taken aback in

fascination by Byeongsan Seowon when they visit it. Of course, the

view of nature from Mandaeru Pavilion is splendid. You may find

yourself sitting there all day. In fact, you will realize why Ryu Seong-

ryong built the seowon where he did when enjoying the scenery

while seated at the lecture hall and in Mandaeru Pavilion.

Written by Choi Joon Sik, professor, Graduate School of International


Studies, Ewha Women’s University
Photographs courtesy of iclick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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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지역 문 화 스 토 리

[ 지방문화원 원천콘텐츠 발굴지원 사업 ]

승리와 평화의 기원
통제영 둑제
먼 옛날부터 전투의 끝은 상대방 장수의 목을 베어 창에 꽂아 들
고 외치는 환호였다. 그건 그 전투에서 이겼다는 신호였다. 전투
에서 이기면 다음 전투가 벌어질 때까지 잠시나마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창에 꽂아 든 적장의 머리를 형상화하여 만든 것을 ‘둑기
纛旗’라 한다. 둑기는 군신을 상징하게 되었고, 왕이나 장수가 출전
할 때면 승리를 기원하며 둑기에 제사를 지냈다. 이를 ‘둑제纛祭’라
한다.

Rituals for Victory and Peace:


Dukje at the Navy Command
Headquarters
In days of yore, battles ended with victors slaying the
opposing commander, hoisting the severed head on
a spear amid cheers. This signaled the end of battle. A
victorious army would enjoy momentary peace before
the next war was waged. Modeled after the symbolic
image of an enemy’s head on a spike, the battle standard
called dukgi came to symbolize the warrior god while
serving as a focal point of pre-war rituals wishing kings
and commanders victory.

<악학궤범>에 기록된 의물 ‘둑’의 복원 이미지.


사진 출처: 문화콘텐츠닷컴(한국콘텐츠진흥원)
Ritual item duk redrawn based on records from Akhak gwebeom (Canon of Music)
Source: CultureContent.com (Korea Creative Content Age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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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L oc a l Culture Stories

둑제, 조선 왕조 때 국가의례로 정착 Dukje, the Joseon Dynasty’s national ritual


둑기는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한다. 927년, 후백제의 견훤 The earliest written mention of dukgi occurs in the Samguk sagi
이 적장 수오를 둑기 아래에서 죽였다고 한다. 이를 보아 후삼국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c. 1145). In the year 927, Gyeon
시대에 둑기가 이미 존재했으며 또한 ‘군신軍神’을 상징하는 의장 Hwon of the Later Baekje Kingdom killed the enemy commander
물의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217년 고려 고종 때 둑기를 Suo beneath a dukgi . Dukgi already existed in the Later Three
세우고 군사를 모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 충렬왕 7년1281 일본 Kingdoms period, symbolizing the warrior god and serving as a
을 정벌하기에 앞서 왕이 친히 군사를 정비하여 모은 후 둑제를 guardian flag. During the Goryeo Dynasty, King Gojong raised a
지냈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는 둑기를 보관하는 둑사당을 세우고 dukgi to gather soldiers in 1217; in 1281, the seventh year of his
출정할 때 외에도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 둑제를 지냈다. 이후 reign, King Chungnyeol assembled an army and held dukje rituals
둑제를 너무 자주 올려 폐해가 많아지자 고려 말인 1377년, 둑제 before leaving for Japan on a mission of military conquest. The
를 없앴다. 이후 둑제는 조선 왕조와 함께 다시 등장한다. Goryeo Dynasty constructed shrines (duksadang ) for storing dukgi
1392년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다음해 1393년, 홍둑과 흑둑 2개 and held regular dukje rituals on the first day and full moon day (15th
를 만들고 둘째 아들 영안군에게 명하여 둑제를 주관하게 했다. day) of every lunar month even when not waging war. When the

초헌례 모습
Scene of chohyeonrye, the first libation o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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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3

1 홍둑
Red dukgi
2 흑둑
Black dukgi
3 집사 관세
Ritual cleansing
4 둑제 제례상 차림
Dukje ritual table

제물로 소를 통째로 잡아 올리고, 철갑 및 무관복을 입은 집사관 임진왜란 중에서도 빼놓지 않던 제사


들이 제사를 지냈다. 둑제에 참여하지 않은 군사들은 다음날 곤 조선 중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원활한 통합 지휘 체계를 이
장을 쳐서 그 죄를 엄히 물었다. 이는 새로운 왕조의 건국과 함께 루기 위해 ‘삼도수군통제사’ 직제를 신설한다. 이러한 삼도수군
둑제를 제도화함으로써 군 통수권의 확립과 왕권의 안정을 기하 통제사의 본영을 ‘삼도수군통제영’이라 칭했으며 이를 약칭해
기 위함이었다. ‘통제영’ 및 ‘통영’이라 했다. 충청·전라·경상도를 총괄하는 삼
세종 3년1421에 이르자, 둑제를 국가제례 소사小祀의 예에 의하도 도수군의 총본영이었던 통제영에서도 둑제를 지냈다. 선조 26년
록 했으며, 그 의식의 절차를 구체하고 체계화하였다. 그 후 여러 1593 8월, 초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한산진에서 지낸 둑제가
차례 정비과정을 거쳐 성종 5년1474에 국가 제사인 길례의 소사에 그 시초다. 당시 수군진영에서 둑제를 지낸 기록을 충무공의 <난
둑제를 포함한 <국조오례의>를 펴냈다. <국조오례의>는 조선 왕 중일기>에서 3차례나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둑제는 임진왜란
조의 국가 의전인 길례, 가례, 빈례, 군례, 흉례의 5례를 확립하고 그 절체절명의 시기에서도 빼놓지 않았던 제사였다.
모든 의례의 기본이 되는 책이다. 둑제는 그렇게 국가의례로서 통제영은 임란 직후인 선조 37년1604 고성현 남쪽의 두룡포頭龍浦;
자리 잡게 되었다. 현 통영시 지역로 이진하며 정착하였다. 300년 동안 통제영은 조선
둑제는 문신이 공자를 모시는 ‘석전제釋奠祭’에 비견되는 무신들만 후기 왜적의 침략을 방비하는 총 본영이었다. 통제영 둑소는 본
의 대표적인 제례다. 나라에서 군대를 출동시킬 때는 언제나 둑 영의 서쪽 언덕 위에 있었다. 매년 경칩과 상강일에 삼헌관이 통
제를 지내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전쟁의 승리를 기원했다. 제영 둑제를 제향했다. 통제영 둑제는 <국조오례의>를 따라 지
평상시에는 봄가을로 둑기를 모신 둑소에서 병조판서가 국태민 냈다.
안을 기원하는 둑제를 지냈다. 각 지방에서는 도의 병사와 수사
등의 영장營將을 비롯한 각 고을의 수령이 헌관이 되어 둑제를 지 악공과 무공 또한 갑옷과 투구 갖춰
냈다. 둑제를 지내는 제관은 초헌관첫 번째 잔을 올리는 제관·아헌관두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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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quent dukje became detrimental, all dukje rituals were suspended established the basic norms of all rituals, outlining five categories of

in 1377 toward the end of the Goryeo Dynasty. Dukje reappeared national rites: auspicious rites (gillye ), felicitous ceremonies (garye ),

with the emergence of the Joseon Dynasty. ceremonies for welcoming foreign envoys (billye ), ceremonies for

Upon founding the Joseon Dynasty in 1392, Yi Seong-gye military review (gullye ), and funeral rites (hyungnye ). Thus, the

made two dukgi (one red and one black) the following year and Joseon Dynasty instated dukje as a national ritual.

entrusted his second son Prince Yeongan with dukje rituals. Whole For military officials, dukje held considerable import as a ritual

oxen were used as sacrificial offerings as the ritual officer (jipsagwan ) comparable to seokjeonje , the sacrifices to Confucius made by civil

performed the ceremonies dressed in armor or military uniform. officials. When mobilizing troops, the dynasty always held dukje

Soldiers absent during dukje were severely punished, sentenced to boost morale and pray for victory. During peacetime, the dukso

to flogging (gonjang ) the next day. By institutionalizing dukje , the shrine housing dukgi served as the site for dukje held in the spring

newly founded dynasty enforced the army’s supreme command and and fall, officiated by the minister of war as a ritual for national

solidified its own royal authority. prosperity and welfare. In the provinces, soldiers, commanders,

In the third year of King Sejong’s reign (1421), dukje was made a warriors, or local magistrates served as libation officiants for dukje ,
national sacrificial rite categorized as a small-scale national rite (sosa ) offering liquor to spirits during the rituals.

and given detailed, standardized guidelines. After several revisions,

the fifth year of King Seongjong’s reign (1474) saw the publication A ritual continued during the Imjin Waeran
of Gukjo oryeui (Five Rites of the Dynasty), which included dukje When a Japanese invasion precipitated the Imjin Waeran (1592–

as one of the small-scale auspicious rites (gillye ). Gukjo oryeui 1598) waged in the mid-Joseon Dynasty, the Joseon gover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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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 잔을 올리는 제관·종헌관세 번째 잔을 올리는 제관으로 총 3헌관이다. 초헌 고 푸른색 융복戎服; 조선 시대 군복에 검정 화자靴子; 장화처럼 길게 올라오
관은 통제사였다. 제사를 진행하는 집사관은 모두 부하 장수였 는 신발를 신고 허리에 환도를 찼다. ‘간척무’를 추는 무공舞工은 푸
다. 모든 제관이 그러하듯 제사 전에는 몸이나 행동을 삼갔다. 제 른색 융복에 방패와 도끼를 들었다. ‘궁시무’는 붉은 융복에 활과
사 하루 전에는 목욕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둑사에 모여 사 화살을, ‘창검무’는 푸른색 융복에 창과 칼을 들었다.
당 안팎을 청소했다. 장막을 치고 경건한 마음으로 제사에 쓸 음 첫 번째로 술잔을 올리는 ‘초헌례’ 때, 태조 이성계의 무공과 조
식을 준비했다. 선의 건국을 송축하는 ‘납씨가納氏歌’를 부르면 왼손에는 방패를,
둑제를 지내는 날, 헌관은 투구와 갑옷에 동개활과 화살을 꽂아 넣어 등 오른손에는 도끼를 각각 든 4명의 무공이 북쪽을 향하여 간척무
에 지도록 만든 물건를 둘렀다. 10여 명의 집사는 흑립에 호수虎鬚를 꽂 를 추었다.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의식인 ‘아헌례’에도 역시 납씨

5 변(籩). 과일이나 마른 음식 등을 담는 제기. 대나무로 만든다. 8 상준(象尊). 제사 때 막걸리를 담아 두는 코끼리 형상의 제기


Byeon, bamboo vessel for fruit or dried food Sangjun, elephant-shaped vessel for rice wine
6 두(豆). 떡, 고기, 젓, 김치 등을 담는 제기. 나무로 만든다. 9 작(爵)과 점(坫). '작'은 술을 담는 술잔을, '점'은 받침대를 말한다.
Du, wooden vessel for rice cakes, meat, salted seafood, and kimchi Jak, wine glass, and jeom, wine glass saucer
7 보(簠). 벼와 수수를 담는 제기. 구리로 만든다. 10 세(洗). 제사 때 제관이 손을 씻기 위해 물을 담는 그릇.
Bo, copper vessel for rice and sorghum Se, hand cleansing bowl for officiants

5 6 7

8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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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ed a position titled “commander-in-chief of the naval forces On the day of dukje , ritual officiants in helmets and armor
of the three provinces” to streamline its system of command. The also wore donggae , a back quiver for bows and arrows. Masters of

commander’s headquarters were named the Navy Headquarters of ceremony (numbering around ten) wore black hats decorated with

Three Provinces, often shortened to Navy Command Headquarters feathers, blue military uniforms (yungbok ), and black boots (hwaja ),

or Navy Headquarters. The Navy Headquarters of Three Provinces, along with military swords (hwando ) on their sides. Dancers

which commanded the naval forces of Chungcheong-do, Jeolla-do, performed the ceremonial dance gancheokmu in blue military

and Gyeongsang-do provinces, also observed dukje rituals. These uniform, wielding axes and shields. For the dance gungsimu , dancers

dukje were started in the eighth month of 1593 (26th year of King wore red uniforms with bows and arrows; for changgeommu ,

Seonjo) at Hansanjin (present-day Hansando Island) by the first dancers wore blue uniforms with spears and swords.

Commander-in-Chief Yi Sun-sin. His war diary Nanjung ilgi makes Once the first glass of libation was offered, the song “Napssiga”

three references to dukje held at the Navy Command Headquarters. (a paean to King Taejo Yi Seong-gye’s military valor and to the
Dukje continued amid the life-threatening circumstances of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Dynasty), was sung as four dancers
Imjin Waeran. performed gancheokmu facing northward, each wielding a shield
In 1604 (37th year of King Seonjo), following the outbreak and ax in their left and right hands. “Napssiga” was sung again for

of the Imjin Waeran, the Navy Command Headquarters relocated the second libation offering as four dancers performed gungsimu ,

to Duryongpo (present-day Tongyeong) in the southern area of each wielding a bow and arrow in their left and right hands.

Goseong-hyeon county. Over the ensuing 300 years, the Navy “Napssiga” was sung one last time during the final libation offering as

Command Headquarters served as the late Joseon Dynasty’s bulwark two dancers faced each other to perform changgeommu , each with

against foreign invasion. The dukso shrine was on a hill lying to the a spear and sword in their hands. As the ritual vessels were removed

left of the headquarters. Every year on Gyeongchip (“day of spring (the procedure called cheolbyeondu ), the song “Jeongdongbanggok”

awakening” marking the third of twenty-four solar terms) and (a paean to King Taejo’s military victory against Yuan Dynasty

Sanggang (“first day of frost” marking the eighteenth solar term), intruders and to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Dynasty) was sung

three libation officiants led dukje rituals at the Navy Command as the ten dancers performed together. They formed a thrice-spun

Headquarters in accordance with Gukjo oryeui . circular line for the hoeseonmu dance, followed by the thrice-

repeated pattern of stepping back and forth for the jintoemu dance.

Musicians and dancers in helmets and armor The ritual vessels comprised an incense burner, candlesticks,

Dukje was observed with three ritual officiants for offering libations: and multiple vessels—including byeon , du , bo , gwe , go , jak , jeom ,

choheongwan (first libation officiant), aheongwan (second libation myeok , bi , noe , jak , se , and sangjun —required in specific numbers,
officiant), and jongheon (final libation officiant). The naval such as eight byeon and eight du . Two dukgi were raised for the

commander-in-chief served as the first libation officiant. Officers rituals, one red and one black. The military articles (gunmul ) housed

under his command served as masters of ceremony responsible for in the Navy Command Headquarters included obangsingi flags as

carrying out ceremonial proceedings. As customary, ritual officiants well as the ritual arrows gwani and yeongjeon , which were displayed

exercised bodily and behavioral discretion before the ceremonies. outside the shrine gate (sinmun ) but within the main three-door

They donned newly washed clothes after bathing the day before and gate (oesammun ).

gathered to clean the dukso shrine inside and out. Pitching a tent, Instead of using real weapons, the dukje music and dance

they then prepared ceremonial food with reverent minds. featured weapon-shaped implements (mugu ) made to resem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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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를 부르나, 춤은 왼손에 활을 잡고 오른손에는 화살을 각각 든 둑기는 홍둑기와 흑둑기 2기를 세운다. 통제영 군물軍物은 오방신
4명의 무공이 궁시무를 춘다. 세 번째의 ‘종헌례’에도 납씨가를 기, 관이, 영전 등인데 둑소 신문神門의 바깥, 외삼문 안쪽에 세웠다.
부르나, 춤은 창과 검을 각각 든 2명의 무공이 서로 마주 보며 창 둑제의에서 행해지는 악무樂舞는 실제 무기가 아닌 무기를 형상화
검무를 춘다. 제기를 거두는 철변두에는 태조가 원나라 오랑캐를 하여 만든 방패·도끼·활·화살·창·검 등의 무구舞具를 사용한다.
물리친 무공과 함께 조선의 창업을 찬양하는 정동방곡正東方曲에 악기는 주로 군영에서 사용하는 북과 징 등의 타악기로 한정되었
맞춰 무공 10명이 함께 춤을 춘다. 일렬로 서서 세 번 원을 돌고 다. 제사를 진행하는 헌관과 집사는 물론, 악기와 춤을 담당하는
다시 세 번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며 ‘회선무’와 ‘진퇴무’를 춘다. 악공樂工과 무공舞工 또한 갑옷과 투구 차림으로 제사에 참여했다.
제기祭器는 향로·촛대를 비롯하여 변·두·보·궤·조·작·점·멱·비·
뇌·작·세·상준 등이며, 변籩과 두豆는 각각 여덟 그릇을 사용했다. ‘둑기’는 아직도 통영 사람들의 수호신
통제영 둑제는 조선 시대 지방 군영의 가장 전통적이고 그
규모 또한 가장 큰 군영 의식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조선 시
11 궁시무
Gungsimu 대 통제영 둑제에 관한 흔적은 현재도 통영 곳곳에서 찾아볼 수
12 회선무 있다. 옛 통제영의 ‘둑사당 터’는, 옛날 둑제를 지내던 산마루라
Hoeseonmu
는 뜻의 토박이지명인 ‘뚝지먼당둑제를 지내는 언덕’이라 부른다. 아직
빈터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옛날 ‘뚝장군’이 이곳에 통영성統營城
을 쌓고 왜적을 물리친 후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영웅설화가 남아
있다. 기골이 장대하고 뚝심이 센 사람을 일러 ‘뚝장군’이라 칭하
기도 한다. 아직도 이곳 인근의 주민들은 기제사를 지낸 후 거리
손을 빌 때면 항시 ‘우리 뚝장군 몫’이라며 사립문 밖에 제삿밥을
차리고, 국태민안과 안가태평을 두 손 모아 기원하는 전래 풍습
도 남아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둑기는 후세의 영웅 설화
와 함께 ‘뚝장군’이란 인격신으로 변모되어 이 고장의 민간신앙
으로 뿌리내렸다. 둑기는 아직도 통영 사람들의 수호신이다.
통영문화원은 지난 2019년 10월 24일 상강일에 통제영 둑제를
11
재현했다. 통제영 둑제 복원 및 재현 행사는 전통문화를 활성화
하는 동시에 민족문화를 계승·발전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
다. 나아가 통제영 둑사당을 복원하여 조선 시대 일본의 침략을
방비하던 삼도수군통제영의 상징이며 군영의 수호신이었던 둑기
를 다시 세워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긍지와 함께 전통적 극일혼
克日魂의 표상으로 삼았으면 싶다.

글 김일룡 통영문화원장
사진 통영문화원, 문화콘텐츠닷컴(한국콘텐츠진흥원)

‘지역N문화’ 누리집에서
12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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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수군통제영 중영. 둑제를 재현하며 임시로 ‘통제영둑사(統制營纛祠)’라는 현판을 붙였다.
Navy Command Headquarters Jungyeong Hall with a temporary name plaque reading “Navy Command Headquarters Duksa”

shields, axes, bows, arrows, spears, and swords. Musical instruments the spirits with offerings of rice placed outside twig gates, observing

were usually limited to percussion instruments such the buk (barrel traditional customs of praying for national prosperity, welfare, and

drum) and jing (gong). Along with the ritual officiants and masters peace. Over the passage of time, heroic tales have transformed

of ceremony, musicians (akgong ) and dancers (mugong ) also donned dukgi into the personal deity Ttukjanggun, which has taken root in
helmets and armor while performing in dukje . regional folk religion. To this day, dukgi remains the guardian spirit

of Tongyeong.

To this day, dukgi remains the guardian spirit of Tongyeong On October 24, 2019, in time for Sanggang, the Tongyeong

Dukje rituals held at the Navy Command Headquarters were among Culture Center reenacted the dukje rituals of the Navy Command

the most time-honored traditions of regional army forces as well as Headquarters. The restoration and reenactment of dukje hold

the largest military rituals in scale. Traces of Joseon-era dukje are considerable significance, revitalizing traditional culture while also

detected in present-day Tongyeong. The site of the former Navy continuing and furthering national customs. One can only hope

Command Headquarters is called ttukjimeondang , a local idiom that the entire duksadang shrine will be rebuilt. Once restored, the

for “mountain ridge where dukje were offered.” The ground has dukgi —a symbol of the Navy Command Headquarters that repelled
withstood the ages as a vacant lot. Heroic tales still recount the feats Joseon-era Japanese invasion and also the guardian spirit of the

of Ttukjanggun (“Duk General”) who built the Tongyeongseong navy—shall be raised once again as a proud sign of victorious spirit.

Fortress, defeating foreign enemies before dying a valiant death in


Written by Kim Ill Young, director, Tongyeong Culture Center
battle. Even now, “Ttukjanggun” serves as a moniker for people with
Photographs courtesy of Tongyeong Culture Center, CultureContent.com
strong grit and mettle. After ancestral rituals, local residents appease (Korea Creative Content Age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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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마을 산 책

성주
한개마을, 고샅길을 걷다

Walking through Seongju’s


Hangae Folk Village and Its Byw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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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Wa l k i ng through V illages

대구에서 30번 국도를 타고 성주 방향으로 달리다 유유히 흐르는 If you drive down National Route 30 from Daegu toward
낙동강 위 성주대교를 지난 다음, 성주군 성남면 소재지를 지나 Seongju, passing by Seongjudaegyo Bridge with the
우회전 길로 접어드니 기와집, 초가집이 모여 있는 예스러운 마을 Nakdonggang River flowing leisurely underneath, and
풍경이 펼쳐진다. 600여 년 역사의 한개마을이다. 마을의 맨 앞 then take a right after going by the administrative center
에 마을의 이정표인 듯 노란 은행나무가 서 있다. 그 모습이 수백 of Seongnam-myeon village in Seongju-gun county, you
년 역사의 마을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믿음직스럽다. will find yourself facing an old traditional village with
cottages and tile-roofed houses. Hangae Folk Village, as
the town is called, has a 600-year-old history. A yellow
ginkgo tree stands at the very front of the village like
a signpost, almost as if it has steadfastly protected the
village through hundreds of years of history.

마을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재인 ‘한개마을’ Hangae Folk Village: A National Folklore Cultural Heritage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자리한 한개마을은 동네 Property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재 제255호로 지정된 전통 마을이다. 마을 Hangae Folk Village is in Daesan-ri, Wolhang-myeon, Seongju-gun,
이 번창했을 때는 100호가 넘었다고 하나 지금은 70여 호만 남 Gyeongsangbuk-do, and is designated National Folklore Cultural
아있다. 6·25 전쟁으로 여러 채의 한옥이 파손되고 완전히 소실 Heritage Property No. 255. There were more than 100 houses in the
되기도 했다. 남아있는 집 중 한주종택, 월곡댁, 북비고택, 교리 village during its heyday, but only around 70 still exist today. Some
댁, 하회댁, 극와고택, 진사댁 등 일곱 고택은 경상북도 민속문화 of the houses were damaged, while others were destroyed, during
재다. 마을에서 가장 먼저 하회댁이 1750년경 지어졌고, 교리댁, the Korean War. Of those remaining, seven of the old houses (Hanju
북비고택, 한주종택은 1700년대 후반에, 다른 큰 한옥들은 1800 Head House, Wolgok House, Bukbi Old House, Gyori House, Hahoe
년대에 건축되었다. 건립 시기와 집주인에 따라 배치 평면 공간 House, Geukwa Old House, and Jinsa House) have been named
구성이 각각 개성을 달리하고 있다. Gyeongsangbuk-do Folklore Cultural Heritage Properties. The oldest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1450년 of them, Hahoe House, was built around 1750, while Gyori House,
경 입향한 이래 600여 년을 내려오면서 성산 이씨星山李氏가 모여 Bukbi Old House, and Hanju Head House were built in the late
살고 있다. 1700s. The other, larger traditional Korean houses were built in the
마을은 전체적으로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전저후고前抵後高 지 1800s. Their location, size, and structure are all different depending
형을 이루고 있다. 그 높낮이는 땅의 고저 차이만 아니라 신분, 가 on when they were built and who owned them.
문의 위계를 나타낸다. Hangae Folk Village has been occupied by the Seongsan Yi Clan

over the past 600 or so years following Seongsan Yi U’s (星山 李友)
마을 공간 구성의 중요한 특징은 ‘안채’에 있어 return to the village, his hometown, around 1450 after he was made
과거의 한개마을은 대체로 다섯 부분으로 나뉘었다. 주거지 the city magistrate of Jinju during King Sejong’s reign (1418–1450).
의 뒤쪽 중앙부를 ‘한개’ 또는 ‘윗마’라고 부르고, 그 동쪽과 서쪽
을 각각 ‘동녘’ ‘서녘’이라 했다. 그리고 진사댁 앞의 동서 방향 길 The ladies’ quarters: A unique spatial feature of the village
주변은 ‘도촌’, 그 아래는 ‘아랫막’ 또는 ‘아랫마’라고 불렀다. 서녘 In the past, Hangae Folk Village was broadly divided into f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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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s. The central part of the village behind the houses was called

Hangae or Winma, while the eastern and western sides of the village

were simply called the “eastern side” and “western side.” The area

surrounding the road heading east and west in front of Jinsa House

was called Dochon, while the area below that was called Araenmak

or Araenma. The Winma of the western side of the village was where

many traditional Korean houses with all the proper formalities were

built. These houses were home to the most academically and socio-
교리댁 대문 economically exceptional people in the village.
Gyori House main gate
The large road seen directly from the entrance to the village is

called “Westerly Road.” Going down this road, Jinsa House, Gyori

House, Ungwa Head House, Bukbi Old House, and, finally, Wolgok

House can be seen on the right-hand side. If you stand at the end of

the fence behind the village that rests up against a mountain, you will

have a panoramic view of the entire village and see the Baekcheon

Stream (白川) flowing in the distant field.


The inner yard of the ladies’ quarters (anchae ), a space reserved

for women, is the most important spatial feature of houses in the

village. Even compared to other traditional houses in Korea, the


교리댁 평면도
Gyori House ground plan
ladies’ quarter’s inner yard is located deep inside each house—as far

away from the entrances as possible. There are no saetgil (byways)

in the Hanju Head House or Wolgok House—most houses typically


의 윗마에는 격식을 갖춘 가문 중 가장 번성하여 학문적으로 또 followed the rules surrounding the spacing of the angil (inner path),
사회경제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사람들이 살아 격식을 갖춘 한옥 saetgil , men’s quarters, and ladies’ quarters. In accordance with this
들이 많이 지어졌다. system, the women’s quarters were always at the very back of the
마을 입구에서 바로 보이는 큰길 쪽이 서녘길이다. 이 길을 따라 house. The houses position the women’s quarters in diverse ways;
오른편으로 진사댁, 교리댁, 응와종택, 북비고택, 마지막에 월곡댁 however, these areas are always the most closed-off part of the
이 자리한다. 산과 맞닿는 마을의 뒤 담장 끝에 서면 전망대처럼 houses.
마을 전체와 멀리 백천이 흐르는 들판을 내려다보게 된다.
이 마을 공간 구성의 중요한 특징은 여성 공간인 안채 안마당이 Gyori House: Full of elegance and dignity
다. 한국의 여느 전통 집보다도 마을 공간에서 가장 멀리, 그리고 Gyori House in Daesan-dong, which is Gyeongsangbuk-do Folk
집 안에서도 가장 깊숙이 배치한다. 주거지 끝에 위치한 한주종 Cultural Heritage Property No. 43, is located at the very top of the
택과 월곡댁에서만 샛길이 생략되었을 뿐, 각각의 집들에서는 언 village and gives off an atmosphere of elegance and dignity as you
제나 안길, 샛길, 사랑채, 안채의 배열순서가 지켜졌다. 이러한 연 enter through its front gate. The shade of a tall locust tree—denoting
계과정에서 안채가 가장 안쪽에 놓인다. 안채 마당을 중심으로 that the scholar (owner) of the house is a high-ranking government
여성의 공간은 다양하면서도 가장 폐쇄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official—is in harmony with the front gate, which is on a slight sl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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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멋과 품위를 품은 ‘교리댁’ upwards off the main road. The tiled wall that stretches away from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3호인 ‘대산동 교리댁’은 마을 위 the front gate into the distance is a dominating feature. The dramatic
쪽에 위치하여 진입 과정에 있는 대문에서부터 우아한 멋과 품위 and dignified aura exuded by the house is a perfect example of what
를 드러낸다. 학자의 벼슬을 상징하는 키 큰 회화나무 그늘과 어 you would expect from the house of a high government official.
우러진 대문은 큰길에서 약간 오르막에 떨어져 있다. 대문과 이 The oldest house in the village, Gyori House was built in 1760
어져서 길게 뻗은 기와 담장은 주위를 압도하고 있다. 겉모습부 (the 36th year of King Yeongjo). The ancestral shrine on a gently
터 품격 있는 드라마틱한 요소를 보여주듯 벼슬 높은 집의 위상 sloped hill behind the men’s quarters is unlike ordinary shrines:
을 가장 잘 보여준다. separate from other buildings, it’s an unassuming and quiet space
영조 36년1760에 지어져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으로, 사랑채 with a narrow wooden porch; it also lacks dancheong (traditional
뒤편 나지막한 언덕에 있는 사당은 일반 사당과는 달리 툇마루가 multicolored paintwork on wooden buildings).
있는 별채로 단청이 없이 소박한 정적공간이다. The most alluring part of the house is the study located between
집의 매력은 대문과 사랑채 사이에 붙어있는 서재이다. 집주인이 the front gate and the men’s quarters. You can sense that the owner
서재에 많은 책을 갖추고 독서를 하고 글을 썼음을 짐작할 수 있 had a lot of books in the study and that he read and wrote there.
다. 집의 이름인 ‘교리’는 조선 시대 집현전, 홍문관, 교서관, 승문 The house’s name is Gyori, which indicates that the owner was a
원에 속하여 문필에 관한 일을 맡았던 문관 벼슬이다. government official involved in making records affiliated with the

Jiphyeonjeon (Hall of Worthies), Hongmungwan (College for the


사도를 향한 충절이 담긴 ‘응와종택’ Enhancement of Literature), Gyoseogwan (Government Printing
한개마을 성산 이씨의 발상지는 응와종택凝窩宗宅; 경상북도 민속문 Office), and Seungmunwon (Office of Diplomatic Correspondence).
화재 제44호으로, 경종 1년 처사 이이신이 처음 이곳에 터전을 마련
하였다. 영조 시절 사도세자의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돈재공 이석문 Eungwa Head House: Radiating loyalty toward Crown Prince

Sado
Eungwa Head House (凝窩宗宅, Gyeongsangbuk-do Folk Culture
Heritage Property No. 44) is the birth site of the Seongsan Yi Clan. In
응와종택 대문
Eungwa Head House main gate the first year of King Gyeongjong, the reclusive scholar Yi I-sin made

his home here. The house is where “Donjae” Yi Seok-mun (“Eungwa”

Yi Won-jo’s great grandfather), who was the royal military aide

(seonjeongwan ) for Crown Prince Sado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gjo, lived after being removed from his post for pointing out the

unfairness of Crown Prince Sado’s death.

The men’s quarters located below a separate wall in the house is

called Bukbichae. This small, four-room house was said to have been

built in the exact way of the wooden chest Crown Prince Sado was

trapped in until dying from hunger. Doors usually face the south or

east, but the gate made of twigs faces the north. This is because Yi

Seok-mun took off the door facing southwards and made one facing

northwards toward Hanyang to conduct eup (a ritual where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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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와 이원조의 증조할아버지이 사도세자 죽음의 부당함을 직언하다 파직 places both hands in front of their face and bows) every morning.
당하고 낙향하여 살았던 집이다. The house is called Bukbi Old House because of the loyalty it shows
별도의 담장으로 구획된 아래 사랑채를 북비채라고도 한다. 4칸 toward Crown Prince Sado and because it eased the yearning Yi had
의 반듯한 집은 사도세자가 갇혀 죽었던 뒤주 형상 그대로의 모 for the prince.
습으로 지었다고 한다. 보통 남쪽이나 동쪽을 향해 문을 내는데
사립문이 북쪽으로 나 있다. 이는 이석문이 남쪽으로 나 있던 대 Wolgok House: A closed-off world
문을 뜯어 한양이 있는 북향으로 문을 내고 매일 아침 읍을 올렸 Wolgok House (Gyeongsangbuk-do Folk Culture Heritage Property
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를 향한 충절과 그리움을 달랜 집으로 ‘북 No. 46) is so large that there is even a pathway inside the house. The
비고택’으로도 불린다. house is located at the very top of the village near a mountain. The

men’s quarters, which is built on a slope with two steps, and especially
폐쇄적인 구조를 가진 ‘월곡댁’ the wall made from earth that surrounds the women’s quarters and
월곡댁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6호은 집 안에 길이 있을 정도로 대 the annex, do not look like they are part of the house. When looking
지가 넓고 규모도 크며 뒷산에 가까운 마을의 가장 위쪽에 위치 down from the porch of the men’s quarters, you can see the village
한다. 경사진 땅에 구축한 2단 기단 위에 세워진 사랑채와 안채와 below and the Baekcheon Stream flowing far in the distance.
별채를 둘러싼 토석土石 담은 주택답지 않게 무겁게 보인다. 사랑 You can enter the women’s quarters directly without going
채 마루에서 내려다보면 아랫마을과 멀리 흘러들어오는 백천이 through a “middle door” from the men’s quarters, but the route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through the annex to the ladies’ quarters is more closed off: you must
사랑채에서는 중문을 거치지 않고 안채에 들어갈 수 있으나 별채 go through a “middle building” first. The annex was space used by
에서는 중문채를 거쳐야 안채를 드나들 수 있는 폐쇄적인 구조 the owner’s children who hadn’t yet been married off; later, however,
다. 별채는 분가하지 않은 자녀들의 거처였으나 후일에는 소실의 the space was said to have been used by concubines.
거처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Hanju Head House and Hanju Jeongsa: The deepest part of

the village
The alluring Hanju Head House (Gyeongsangbuk-do Folk Culture

월곡댁 안채 마당 Heritage Property No. 45) is located the furthest away from Hangae
Inner yard of the ladies' quarters, Wolgok House
Folk Village’s entrance and has undergone the most changes

architecturally. After coming to the side street after coming down

the mountain path behind the Wolgok House wall, there are two

daemunchae (outer servant’s quarters) on the quiet side street to


your right. If you head into the front gate straight ahead, you will

find yourself at Hanju Head House. The house is the birthplace of

Yi Seung-hui, the late Joseon independence activist. To the left you

will find that the outer servant’s quarters, a jeongchim (household

management building), a gwangchae (storage building), and an

araechae (outer-wing building) make a square shape and surround


the house’s front garden. To the right, there is a pavilion along with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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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정사 한주고택 평면도
Hanju Jeongsa Hanju House ground plan

가장 깊은 곳에 ‘한주종택’과 ‘한주정사’ lake and outer-wing building. Hanju Head House was originally built
한주종택寒洲宗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5호은 한개마을에서 가장 by Yi Min-geom in 1767 (the 43rd year of King Yeongjo) but was
깊은 곳에 있으며 건축적 공간의 변화가 가장 많은 매력적인 집이 refurbished by “Hanju” Yi Jin-sang in the third year of King Gojong
다. 월곡댁 담장 뒤 산길을 내려오면 첫 번째 골목을 만나게 된다. (1866).
오른쪽으로 난 조용한 골목을 들어서면 2개의 대문채가 있다. 곧 Hanju Jeongsa is an annex of the Hanju Head House. The
이어 보이는 대문으로 들어서면 구한말 독립운동가 이승희 생가 building was built in a highly dignified fashion and was where Joseon
인 한주종택이다. 왼편에 안채는 대문채, 정침, 광채, 아래채가 □ scholars polished up on their learning and enjoyed their taste for
자형을 이루며 안마당을 감싸고 있다. 오른편에는 정자와 연못 아 the arts. The building is built on a high stone foundation that allows
래채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한주종택은 영조 43년1767 이민검 those inside to enjoy looking at the surrounding nature and even
이 창건했던 것을 고종 3년1866 한주 이진상이 중건한 집이다. 한 observe scenery in the distance. The traditional-looking pine trees in
주정사는 한주종택의 별채로, 조선 시대 선비들이 학문을 연마하 the front yard and the square pond (called ssangji , 雙池) located next
고 풍류를 즐겼던 격조 높은 집이다. 높은 석축 위에 세워져 있어 to the pavilion put the unique beauty of Korea’s traditional gardens
주변의 자연을 즐기고 멀리 경관까지 바라볼 수 있다. 앞마당의 on display.
고풍스러운 소나무와 정자 옆 공간에 배치한 네모반듯한 연못 쌍 The highlight of the Hanju Head House is the numaru (elevated
지雙池는 한국 전통정원의 아름다움을 독창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room) at the center of a two-room daecheong (main hall), with
앞뒤로 트인 2칸의 대청을 가운데 두고 서쪽에 방 한 칸, 동쪽에 one room to the west, two rooms to the east, and one of the eastern
두 칸 방이 있고, 동쪽 방의 앞 남쪽으로 있는 높은 누마루가 압권 rooms facing south. When looking out from the front yard toward
이라 할 수 있다. 앞마당에서 정사를 바라보면 활주가 받들고 있 the jeongsa , the cheoma (curvy edge of the roof) supported by arches
는 처마지붕이 마치 학이 날개를 펼친 듯 우아한 자태다. is a magnificent sight to see—almost as if the wings of a crane are

spread out.

Written by Choi Sang-dae, architect, former chairman of the Daegu


Architects Association
글·그림 최상대 건축가, 전 대구건축가협회장 Illustrations by Choi Sang-dae
사진 한국관광공사 Photographs courtesy of the Korea Tourism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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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팔도 음 식

“보라, 왕과 탐관오리들은 고기를 먹고, 너희 가난한 이들은 먹을


가난해서 먹은 산나물? 것이 없어 산과 들에서 초근목피草根木皮를 찾아 헤매고 있다. 일본
의 식민통치가 너희들 썩어빠진 왕이나 고관대작들보다는 나을
없어서 못 먹은 귀한 음식! 것이다.”
이는 일제 강점기, 일제가 주입시킨 전형적인 식민사관이다. 이로
인해 사라진 우리의 소중한 산나물 문화를 다시 찾기 위해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산채비빔밥
sanchaebibimb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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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Pr ovinc ial Cuisine

산나물은 구황식물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송피松皮를 먹기도 했다. 송피는 소나무
껍질이다. 초근, 풀뿌리와 목피, 나무의 껍질은 다르다. 나무껍질을
먹었던 것은 일제 강점기 말기의 이야기다. 서민들은 먹을 것이 없
으니 그야말로 나무껍질이라도 먹어야 했다. 나무껍질을 구황식물
로 먹었던 것은 일제의 전쟁 때문이다. 산나물을 먹는 것과는 다
르다. 일본인들이 먹지 못하는 풀뿌리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산나
물이다. 먹을 것이 없으니 산나물, 풀뿌리를 캐 먹는다고 생각했
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산나물을 귀히 여겼다. 살
림살이가 넉넉해진 지금도 각종 취나물과 고사리, 두릅 등을 먹는
다. 먹을 것이 없어서 먹는 ‘풀뿌리’가 아니다. 언론인 고 홍승면 씨
1927~1983년의 글을 인용한다.

“길고 추웠던 동북의 겨울이 지나 봄이 찾아온다. 얼음이 풀려 땅


이 진 들판에 갑자기 생명이 약동하고 풀싹이 일제히 돋아난다. 고운 봄빛 광주리에 가득 차 있고
이 무렵, 장춘 교외의 들판에서 바구니를 들고 진 땅에 고무신을 모락모락 아지랑이 아른거리네
적시면서도 나물을 캐고 있는 아가씨들은 중국인도 아니고, 러시 지난밤 장단長湍에 비 내렸는지
아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니고, 영락없이 한국 아가씨들이었다 멀리서도 녹음 덮인 그대 집을 알겠구나
고 한다.”
(홍승면, <대밭에서 초여름을 씹다: 홍승면의 백미백상>, 삼우반, 2003.) 이 시의 제목은 “장단 유 선생이 시와 산채를 보내와 운을 빌려 감
사하다”이다. ‘장단 유 선생長湍 兪先生’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조
우리 땅도 아니고, 중국 장춘이다. 우리만 살았던 것도 아니고 한 선의 개국공신이 ‘유 선생’이라고 불렀으니 학문이 깊은 유학자,
민족, 중국, 러시아, 일본인들이 뒤섞여 살았다. 다들 가난하다. 이 사대부였을 것이다. ‘고운 봄빛 광주리에 가득 차 있고’라는 구절
른 봄이면 유독 한민족 아가씨들만 산과 들로 나물을 캐러 나간 에서 선물이 곧 산채, 산나물임을 알 수 있다. 지난밤에는 장단에
다. 홍승면 씨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나물을 가려내고, 뜯고, 봄비가 내렸다. 장단은 한양 도성과 개성 사이에 있다. 송당은 ‘멀
먹는 특이한 DNA가 있다”고 설명한다. 산나물은 가난한 이들만 리서도 녹음 덮인 집’을 찾아내고 그리워한다. 당대의 실세, 높은
먹는 구황식물이 아니었다. 벼슬아치가 봄나물을 선물 받는다. 그리고 시로 남겼다.
산나물을 우리만 먹었던 것은 아니다. 이른 봄에는 오신채五辛菜 혹
사라지는 산나물 문화가 그립다 은 오훈채五葷菜를 먹고, 선물도 했다. 오신채는 시작이 중국이다.
정조 시대의 사대부로 고위직 벼슬아치였던 다산 정약용조차 일본에서도 이른 봄, 여러 가지 나물로 만든 음식을 귀하게 쳤다.
천렵과 산나물을 구하기 위해 임금의 허락 없이 한양 도성을 벗어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산나물 문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우
나 ‘땡땡이’를 친 일화가 있다. 이래도 ‘산나물은 먹을 것이 없어 서 리나라 또한 산나물 전통은 남았으나 이른 봄, 사대부나 서민을
민들이 구황식으로 먹었던 풀뿌리’라고 할 수 있을까? 가리지 않고 서로 산나물을 선물하는 아름다운 문화는 사라졌다.
산나물의 아련한 아름다움을 노래한 송당의 시도 있다. 송당 조준 사라지는 산나물 문화가 아쉽고 또 그립다.
1346~1405년은 조선의 개국공신이다. 송당은 삼봉 정도전과 더불어
조선의 경제 구조를 설계했다. 글·사진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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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namul for Lean “Look now, the king and his avaricious officials gorge on
meat, while you poor people have nothing to eat and so
Times? have to forage in the fields and woods for grass roots and

The Truth behind


tree bark. You’ll do better under Japan’s colonial rule than
you have under your corrupt potentates and dignitaries.”

a Scarce Delicacy! This colonial view of history was drilled into the minds
of the Korean masses by the Japanese during their
occupation of Korea. For the sake of reclaiming Korea’s
priceless culture of sannamul, the wild greens and herbs
collected in the hills and served as side dishes, we must
set the distorted record straight.

Sannamul wasn’t a last resort in times of famine as the mud smeared their rubber shoes. These women, we are told,

A distinction should be drawn here between “grass roots” and “tree were not Chinese, Russians, or Japanese, but inevitably Koreans.”

bark.” It’s true that Koreans sometimes ate the inner bark of pine (Hong Seung-myeon, Chewing on Early Summer in the Bamboo

trees toward the end of the Japanese colonial occupation. During the Grove: A Hundred Flavors and a Hundred Thoughts by Hong Seung-
war, ordinary Koreans had little to eat and had to resort to famine myeon , Samuban, 2003)
foods like bark. But that’s different from the custom of sannamul . Readers will note this wasn’t Korea, but the Chinese city of

When the Japanese spoke of inedible “grass roots,” they meant Changchun. There weren’t just Koreans living there, either: the city’s

sannamul . The Japanese thought that the Koreans dug up roots and inhabitants represented a melting pot of Koreans, Chinese, Russians,

plucked grass because they didn’t have anything to eat—but they and Japanese. They were all poor, but only the young Korean women

were wrong. Koreans treasured sannamul . Even today, when Koreans went out to the fields and woods to pick wild greens in the early

enjoy a high level of prosperity, they still eat a variety of these wild spring. Hong Seung-myeon said that “Koreans have a unique genetic

greens, including chwinamul (aster scaber), gosari (bracken fern heritage that enables them to identify, harvest, and digest wild

fiddleheads), and dureup (angelica shoots). Obviously, they’re not greens.” In short, sannamul wasn’t a “famine fod” only eaten by the

eating them for lack of other options. Journalist Hong Seung-myeon poor.

(1927–1983) offered the following account:

“Spring returns after the long cold winter in [Jiandao]. Freed Lamenting the loss of sannamul culture
from the ice, the muddy fields teem with life, and the shoots of grass According to a historical anecdote, even “Dasan” Jeong Yak-yong,

rise up together. This was the time of year when young women filled a prominent noble in the Joseon royal court during King Jeongjo’s

their baskets with greens in the fields on the outskirts of Changchun reign, set aside his duties in Hanyang (present-day Seoul) to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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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shing and pick wild greens without the king’s permission. Does it

really make sense to regard sannamul as grassy roots, a famine food

that the peasants turned to when they had nothing else to eat?

There’s even a poem praising the subtle beauty of sannamul ,

written by “Songdang” Jo Jun (1346–1405). Songdang played an

instrumental role in establishing the Joseon Dynasty; he drew up its

economic blueprint alongside “Sambong” Jeong Do-jeon.

The basket is full of the fair colors of spring


1 A shimmering haze rises through the air

Rain fell on Jangdan last night

Even from a distance, I spot your house in the leafy shade

This poem was titled, “A verse written in gratitude for the

poetry and wild greens sent by Mr. Yu from Jangdan.” There’s no

way to know exactly who “Mr. Yu from Jangdan” was. But given

the courteous way he’s addressed by such an important figure in

the founding of the Joseon Dynasty, we can safely infer that he was

a nobleman of great learning. The line “the basket is full of the fair
2 colors of spring” appears to refer to a gift the writer received, namely

wild greens, or sannamul . The previous night, a spring rain had


fallen on Jangdan, between Gaeseong and the capital of Hanyang.

Songdang thinks fondly of the “house in the leafy shade” and tries to

spot it “even from a distance.”

Koreans aren’t the only people who’ve dined on wild greens.

There was an early spring tradition of eating the “five pungent

vegetables” or giving them to others, which the Koreans originally

got from China. The Japanese, too, once cherished dishes prepared

with a range of wild greens that grow in the early spring. Yet, for
3
some reason, this culture surrounding mountain herbs is waning.

The plants are still eaten in Korea, but the lovely tradition—shared

by aristocrats and commoners alike—of gifting each other with


1 울릉도 전호나물.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나물 중 하나다.
Jeonho, grown in Ulleungdo Island, is one of the earliest-budding herbs on sannamul has vanished. The vanishing of sannamul culture is a
the Korean Peninsula.
2 여러가지 산나물과 들나물로 차린 밥상.
serious shame and a great loss.
A table set with an assortment of sannamul
3 명이나물. 대궁이 붉은 것이 자연산이다.
Wild myeongi can be identified by the red at the base of the stems. Written and photographed by Hwang Kwang-hae, food colum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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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한류 포 커 스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 내 한 건물에서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을 알리고 있다.


Parasite’s Academy Awards advertised at a theater in Greenwich Village, New York City

한국 영화,
제3의 뉴 한류를 향하여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린 날, 한국 영화의 위상은 <기 러약 2천16억 원로 지난 1년간 모든 한국 영화가 전 세계에서 올린
생충> 이후와 이전으로 나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 매출액의 2배 이상을 벌어들였다. K드라마가 제1의 한류를, K팝
<기생충>의 등장 이전인 2017년과 2018년, 한국 영화 수출액 이 제2의 한류를 주도했다면, 이제는 K무비 차례가 아닐까. K무
은 대략 3천만 달러에서 4천만 달러평균 473억 원 정도였다. 그러나 비는 지금 영화 <기생충>이 보여준 것처럼 제3의 한류를 향해
2020년 <기생충> 한 편의 전 세계 흥행 수입이 1억7,420만 달 순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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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H allyu Foc us

영국에서의 <기생충> 상영 광고 모습 말레이시아에서 지난 2018년 상영된 <신과함께-죄와 벌>


Parasite poster in the UK Along with the Gods: The Two Worlds in Malaysian cinemas in 2018

Korean Film:
Towards the Third Korean Wave
On the day of the 92nd Academy Awards ceremony, it 174.2 million (KRW 216 billion), which is more than four
occurred to me that the stature of Korean film as Hallyu times the total annual profit generated around the globe
(“Korean Wave”) will now and forever be explained in two by all of the exported films combined. If K-dramas and
parts: before and after Parasite. In 2017 and 2018, before K-pop led the first and second phases of Hallyu, it seems
Parasite, the total profit from overseas export of Korean like the time has come for K-movies to take over. As
films was about USD 30–40 million (approx. KRW 47.3 testified by Parasite, K-movies are on their way to create
billion). But as of today, the profit generated worldwide the third wave of Hallyu.
by Parasite alone since the beginning of 2020 is US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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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 해외 진출 다변화를 꾀하다 Korean films seek diverse modes of overseas expansion
최근 한국 영화는 기존의 ‘해외 수출’과 ‘해외 직접 배급’으 Recently, the Korean film industry has been diversifying overseas
로 귀결되는 해외 판매 전략을 벗어나 다변화하고 있다. 한국 영 sales strategies and finding alternatives to existing ones that end
화의 현지 리메이크나 합작 영화가 그중 하나다. 베트남의 경우 at overseas export and direct overseas distribution. One of the
한국 영화 포맷을 수혈해 <대디 이슈>와 <하이퐁>, <버터플라 alternatives is to collaborate with overseas filmmakers to produce
이 하우스> 등을 제작하였고, 실력 있는 현지 감독과 배우가 의 remakes of Korean films. Vietnam, for one, has adopted the Korean
기투합해 흥행에 성공하며 지속적인 한국 영화의 확장 가능성을 film production format to produce films such as Daddy Issues, Furie,
증명하고 있다. 리메이크의 경우 심은경, 나문희 주연의 <수상 and Butterfly House . With talented local directors and actors joining
한 그녀>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수상한 그녀>는 베 forces, the films have seen great turnout corroborative of Korean
트남, 인도, 필리핀, 일본, 태국, 인도네시아, 미국에서까지 앞다 film’s potential for continuous expansion. Miss Granny , starring
투어 리메이크했으며, 그뿐만 아니라 각국에서 흥행 돌풍을 일으 Shim Eun-kyung and Na Moon-hee, is the top example of a remade
켰다. 제목도 ‘내가 니 할미다’, ‘20세여 다시 한번’ 등등 각양각 movie. This film has been competitively remade in Vietnam, India,
색으로, 다시 젊어지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 이를 가족 안의 문제 the Philippines, Japan, Thailand, Indonesia, and the United States,
로 재치 있게 버무려 낸 것이 동아시아 전역에 두루 흥행에 성공 and has seen a rush of enthusiastic audiences every time. A well-
한 포인트로 꼽힌다. 한 마디로 원 소스 멀티 테리토리One source played case of the “one source, multiple territories” strategy in short,
Multi territory 전략이 제대로 먹힌 것으로, <수상한 그녀>의 리메이 the Miss Granny remake phenomenon exemplifies Korean film’s
크 열풍은 한국 영화 해외 진출이 다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diversified expansion into overseas territories.
상적 사례라 할 수 있겠다.
Korean culture depicted in foreign films
한국 문화를 알리는 해외 영화 What’s interesting is that not only are Korean films growing popular,
흥미로운 점은 한국 영화뿐만 아니라, 해외 영화들도 한국의 but foreign films are also including elements of Korean culture
문화적 요소를 자국 영화에 버무려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 문화의 in various ways that evoke curiosity. The Malaysian film Kimchi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말레이시아 영화 <너를 Untuk Awak , a romance depicting a Malaysian and a Korean
위한 김치>는 한국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말레이시아인과 한국계 student studying at a Korean college, was well-received by the
말레이시아인의 사랑 이야기를 다뤄 말레이시아 관객들에게 호 Malaysian audience. The Netflix film To All the Boys I’ve Loved
평을 받았다. 한국과 말레이시아를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영상미 Before centering around a half-Korean, half-American girl living
와 김치로 재회하게 되는 독특한 설정이 눈길을 끈다. 한편 넷플 in America captures the protagonist bowing on New Year’s Day in
릭스 제작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에는 재미교포 hanbok with her sister and making kimchi with her American dad,
인 혼혈 한국 소녀가 등장하는데 동생과 한복을 입고 세배를 하 greatly contributing to the worldwide spread of Korean culture.
는 장면은 물론, 김치를 담그는 미국인 아빠가 등장하여 한국 문 From Korean viewers’ perspective, the movie becomes twice as
화를 전 세계에 전파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한국 관객들 입장에 fun with the rare joy of seeing their culture in a new context and
선 새로운 맥락과 낯선 환경에 놓인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기이 unfamiliar environments.
한 재미가 배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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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날의 검, OTT The OTT phenomenon: a double-edged sword
이번엔 OTT 이야기를 해보자. 글로벌 OTTOver the top는 모 Let’s take a look at the OTT (over-the-top) market. Global OTTs
바일과 인터넷을 통해 극장에 걸릴 만한 영화 콘텐츠를 제공하 are content-providing services offering mobile and online access to
는 서비스로 넷플릭스, 아마존 프라임 등으로 대표된다. 이제는 mainstream films; the likes of Netflix and Amazon Prime are readily
OTT 시장이 인터넷 비디오 시장을 주도하면서, 아예 극장 개봉 invested in this market. Now, the OTT market is dominating the
과 병행하는 자체 오리지널 영화 제작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online video market, releasing films simultaneously with theaters,
봉준호 감독의 <옥자>가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다. 넷플릭스 오 and even producing original films. Bong Joon-ho’s Okja is a good
리지널 영화로 제작된 <옥자>는 극소수의 극장에서 극히 드문 example. Produced as a Netflix original movie, Okja was screened in
회차로만 상영되었고 대다수의 사람은 넷플릭스를 통해서만 <옥 just a small number of theaters, and the larger public was only able
자>를 볼 수 있었다. to see it on Netflix.
OTT 사업자들은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서 제작 OTT conglomerates with massive capital are purchasing
되는 영화, 드라마 등 콘텐츠의 판권을 한 번에 구매한다. 바로 이 copyrights left and right from all over the world, but this
점이 양날의 검이다. OTT 시장의 확산으로 소비자에게 시간과 phenomenon is a double-edged sword. While the growth of the OTT
장소, 더빙과 자막 선택의 번거로움 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 market freed viewers from the hassle of selecting between theaters
가 주어졌지만, 여전히 영화 산업 수익의 가장 큰 비중은 극장 매 and showtimes, or choosing subtitles or voiceovers, filmmakers are
출에서 오기 때문이다. facing restrictions from theaters when box office sales still account

for the largest share of film industry profits across the globe.
이제는 제2, 제3의 봉준호를 찾아야 할 때
플랫폼의 변화는 결국 극장의 문턱을 넘어 전 세계에 우리 In search of the second and third Bong Joon-ho
영화를 골고루 배달할 전 지구적 선반이 될 전망이다. 그러나 특 The new video platforms are ultimately expected to serve as
정 OTT 서비스 회사가 배급을 독점하는 현상도 감수해야 한다. internationally shared shelves of content, allowing for Korean
플랫폼의 변화를 받아들여 OTT 시장을 어떻게 글로벌 콘텐츠를 films to step over the threshold of theaters and stride into the
위한 기회의 땅으로 탈바꿈하게 만들 것인가? 결국 해답은 역시 world. But this may come at the price of a handful of OTT services
<기생충> 이후의 전략으로 시선이 쏠린다. <기생충>이 주는 교 monopolizing distribution. Accepting this platform shift, how can
훈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로컬한 것이 가장 글로벌하다”는 변 we transform the OTT market into a market of opportunity for
함없는 진실일 것이다. 반전이 가득한 흥미로운 플롯. 매력적이 global content? This question leads us back to the question of what
고 입체적인 캐릭터. 전 지구적 관심을 촉구할 수 있는 문제의식. to make of the post-Parasite era. The lesson taught by Parasite is,
한국적인 로컬과 글로벌이 멋들어지게 만날 때, 전 세계를 휘어 ironically, the unchanging truth that “the most local is the most
잡을 수 있는 기적 같은 비전이 생긴다. 그러므로 이제는 또 다른 global.” An interesting plot full of twists, compelling and complex
봉준호, 도약의 기회를 기다리는 숨어 있는 제2, 제3의 봉준호를 characters, and awareness that evokes global interest—when what’s
기꺼이 찾아내야 할 시점이 아닐까. local to Korea goes global, it miraculously forms a vision that takes

hold of the world. So now is the time to reach out and find those in

the dark, covertly preparing to take that leap and become the next

Bong Joon-ho.

글 심영섭 영화평론가 Written by Sim Young-seop, film critic


사진 셔터스톡 Photographs courtesy of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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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조선 人 LO V E ④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 ‘유교 국가’ 조선에서는 어릴 때부터


남녀를 엄격하게 구별했다. 이성 간의 사랑을 ‘정욕’이라 하여 삼
첫날밤 주고받은
한시처럼
가고 멀리했다. 누구보다 친밀해야 할 부부관계도 오늘날과는 사
뭇 달랐다. 양반가에서는 아예 부부가 다른 공간에 거주했다. 남
자는 사랑채에, 여자는 안채에 머물도록 한 것이다. 그럼 부부는
어떻게 사랑을 표현했을까?

일생을 노래한
시인 부부
아내의 재능을 귀하게 여긴 ‘윤광연’
조선 성리학자들은 서로 공경하고 예의를 갖추는 부부관계
를 권장했다. 16세기 대학자 이율곡은 예법의 경지로 들어가려면
남편과 아내가 평소 친밀함을 경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18세기
문장가 이덕무는 선비들이 잠자리에서도 함부로 행동하지 말고
조심하라는 생활 지침을 남겼다. 남녀의 위계질서가 깨지기 때문
이다. 부부의 사랑은 억압되었고 가부장의 권위가 우선이었다.
그런데 18~19세기에 상품경제가 발달하고 신분 계층이 분화하면
서 유교적 부부관계에도 변화가 생겼다. 양반들 가운데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몰락한 ‘잔반殘班’이 늘어났다. 바느질
하고 베 짜고 농사지으며 궁핍한 살림을 책임진 것은 부인네들이
었다. 그중에는 경전을 읽거나 시문을 짓는 등 가부장의 영역까
지 넘나든 여인들도 적지 않았다. 똑똑하고 유능한 아내들은 사
랑도 야무지게 했다.
여성의 재능과 헌신을 귀하게 여기는 남편들도 등장했다. 그들은
가부장의 권위를 벗고 아내를 대등한 존재로 인식했다. 1836년
선비 윤광연은 4년 전에 세상을 떠난 부인 강정일당조선 후기에 활동
한 여성 시인이자 서예가의 문집을 간행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도 않
았고 주위의 빈축을 사기도 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정일당
강씨를 ‘여자 선비’라고 여겼으며 문집을 낼 자격이 충분하다고
믿은 것이다.

한시(漢詩)로 인연을 노래한 부부


바야흐로 조선 가정에 화목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조선 시대
전라도의 부부 시인, 김삼의당아내과 하립남편은 어땠을까?
신랑, “열여덟 신선과 열여덟 선녀가/동방화촉 좋은 인연 맺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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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같은 해, 같은 달에 나서 한마을에 살았으니/오늘 밤 만남 이니 그렇다 치고, 삼의당은 어떻게 한시를 자유자재로 지었을
이 어찌 우연이리오” 까? 아무리 양반이라도 여성은 정규교육이 허락되지 않았던 조
신부, “하늘엔 밝은 달 가득하고 뜰에는 꽃이 가득한데/꽃 그림 선 시대가 아닌가. 사실 그는 연산군 때 최초로 사화를 입은 김일
자에 달그림자 더해졌네/달빛인 양 꽃인 양 낭군님과 마주 보노 손의 후손이었다. 사림 명문가 집안의 딸답게 어릴 적부터 한글
라니/세상 영욕이야 어느 집 이야기인가” 로 된 <소학小學>을 뗐고 한문까지 배워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삼의당三宜堂 김 씨가 기록으로 남긴 결혼 첫날밤 신혼부부의 대 섭렵한 것이다.
화다. 한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주고받으며 아름다운 인연을 노래 조선 여성에게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내조內助’였다. 삼의당은
했다. 김삼의당은 1769년 전라도 남원 서봉방에서 태어나 18세에 물론, 하립의 집안도 몰락한 양반가였다. 이들 잔반의 지상과제
동갑내기인 담락당湛樂堂 하립과 혼인했다. 하늘이 맺어준 배필이 는 과거시험에 급제해 벼슬길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하립 또한
었을까. 두 사람은 한마을에서 소꿉친구로 자랐는데 신기하게도 산사 등지에서 공부하다가 과거 보러 서울을 오갔다. 정기시험과
생년월일까지 같았다. 부부는 첫날밤부터 지적인 대화를 거리낌 특별시험이 잇달아 있으면 한동안 서울에 체류하기도 했다. 이
없이 나눌 만큼 마음이 잘 맞았고 말도 잘 통했다. 하립이야 유생 ‘고시생 남편’의 뒷바라지는 아내 삼의당의 몫이었다.
“심부름하는 아이를 시켜 과거 시험장의 소식을 물었다가 당신이
이번에도 낙방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생 많으셨지요? 그
래도 저는 앞으로도 힘껏 돕겠습니다. 작년에는 머리카락을 잘라
양식을 마련했고, 올봄에는 비녀를 팔아서 여비를 마련했습니다.
제 장신구들이 다 없어진다 해도 당신의 과거시험 비용이야 어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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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라게 할 수 있겠습니까? 가을에 경시慶試; 나라의 경사를 맞아 치르는
과거가 있다고 하니 또 내려오지 못하겠지요. 마침 소식을 전하는
길이 있어 이렇게 편지를 띄우고 웃옷 한 벌 보냅니다.”
조선 시대 과거시험은 비용이 꽤 드는 일이었다. 서울 오가는 양
식과 여비, 현지 체류비까지 다 마련하려면 시골 잔반들은 등골
이 휘었다. 선비의 아내들은 삼의당처럼 머리카락을 자르고 비녀
를 팔아서 ‘고시생 남편’ 뒷바라지에 보탰다. 어디 그뿐인가. 삯
바느질하고 베를 짜며 부모님과 자식들까지 부양했다. 그러나 잔
반의 시험 합격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19세기에 이르면 일부 세
도가들이 문과 급제를 휩쓸게 된다. 몰락한 양반들은 희망 고문
을 당하면서 사실상 들러리를 섰다. 10년이고 20년이고 과거를 하립(남편)과 김삼의당(아내)의 초상화

연거푸 보다가는 논밭이 남아나는 게 없고 빚만 잔뜩 지게 돼 있


었다. 삼의당도 생활고에 시달리며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애틋한
시심으로 달랬다.

봄 흥취에 깁창에서 시 몇 수 이루니 선비 부부에게 농사일은 고됐지만 대신 삶은 다채롭고 풍성해졌


편편마다 다만 절로 상사相思를 말했을 뿐 다. 들녘에 땀을 뿌리고 먹는 새참은 어떤 산해진미도 견줄 수 없
수양버들 문밖에 심지 마오 는 인생의 참맛을 선사했다. 흐드러진 봄꽃을 꺾어 머리에 꽂으
인간의 이별 있음에 미움이 생겨난다오 면 팔랑팔랑 나비가 춤을 추며 주위를 맴돌았다. 결혼 첫날밤 동
- 김삼의당, ‘춘규사春閨詞’ 방화촉 밝히고 주고받은 한시처럼 그들은 어느덧 신선이요, 선
녀가 되어 있었다. 김삼의당은 논밭을 일구면서 전라도의 하늘과
김삼의당과 하립, 벼슬 꿈 접고 농사하며 해로 땅과 사람을 노래했다. 그가 지은 270여 편의 시문은 집안에 전
거듭된 낙방과 집안의 근심에 하립은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꿈 해져 내려오다가 1930년 <삼의당고三宜堂稿>라는 제목으로 출판
을 접고 만다. 과거시험 공부를 그만두고 낙향한 것이다. 되었다. 하립도 문인으로서 <담락당집湛樂堂集>을 남겼는데 그 가
부부가 32세가 되던 1801년, 농사를 지으려고 거처를 전라도 진 운데 200여 수의 한시가 번역되어 2000년에 나왔다. 두 사람은
안으로 옮겼다. 하립은 아내가 머무는 초당을 ‘삼의당三宜堂’이라 사이좋게 해로하다가 진안 땅에 함께 묻혔다. 마이산 기슭에 세
불렀다. 부인의 당호는 여기서 유래했다. 그는 손수 글씨를 쓰고 워진 부부 시인의 시비는 오늘도 나란히 정답다.
그림을 그려 벽에 붙였으며, 뜰에 꽃을 가득 심어 아내를 기쁘게
했다. 동갑내기 애처가의 살뜰한 정성에 삼의당 김 씨도 내심 흐 부부의 도는 인륜의 시작이요
뭇했으리라. 하여 만복의 바탕이 여기라오
도화시桃禾詩 한 편을 헤아려보면
노을은 비단을 이루고 버들은 연기 같으니 가정의 화목은 오직 당신에게 있소
인간세계가 아니라 별천지로다 - 하립, ‘초야창화初夜唱和’

서울에서 십 년 동안 분주했던 손님
글 권경률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오늘은 초당에 신선처럼 앉아있네
사진 진안군
- 김삼의당, ‘초당봉부자음草堂奉夫子吟’ 그림 필몽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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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 당 ㅣ 문화 보고

옛 노래와 이야기를 품은

한국가사문학관
남도의 아름다운 자연과 벗하며 음풍농월吟風弄月; 바람을 읊고 달을 보고 시를 짓는다했을
옛 선비들의 모습이 절로 그려지는 곳이 있다.
그곳은 바로 전남 담양군 가사문학면에 자리하고 있는 한국가사문학관.
감성 충만해지는 봄! 봄빛으로 물든 자연이 보이고, 선조들의 멋과 풍류가 보이는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보고寶庫 한국가사문학관을 다녀왔다.

4음보의 가사체로 이루어진 ‘가사문학’ 왜 ‘가사문학’ 하면 ‘담양’일까


가사문학歌辭文學이란 무엇일까. 사실 가사문학 담양 지역을 일명 한국 가사문학의 고향이라
은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가사歌辭는 4음보 연속체 고 말한다. 한국가사문학관이 세워진 곳도 담양이
의 율문으로 이루어진 조선조의 대표적 시가詩歌 장 다. 문학하는 선비들이 담양에만 있었던 것은 아
르 중 하나로 운문 문학에 속하지만, 그 내용이나 닐 텐데, 왜 가사문학하면 담양일까? 조선 시대 최
형식 면에 있어서 일반적인 시가와는 큰 차이를 보 초의 가사는 정극인의 ‘상춘곡’이다. 정극인은 조
이기 때문이다. 가사는 어떤 요소, 어떤 주제를 강 선 전기의 문신으로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고향
조하느냐에 따라 운문성이 강화되기도 하고 산문 인 정읍 태인에 내려와 그곳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성이 강화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시가’이면서 감 고 한다. ‘상춘곡’은 바로 그곳 태인에서의 삶을 그
상문·수필문·기행문의 성격을 띠기도 하기 때문에 린 작품이다. 정극인의 ‘상춘곡’ 이후로 가장 주목
단순한 시가라 하기보다는 운문과 산문의 중간 형 할 만한 가사 작품도 호남 지방에서 나왔다. 이는
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송순의 ‘면앙정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송순은 그
런 형태의 문학이 탄생하게 된 것일까. 조선의 사대 의 나이 41세에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 고향인 전남
부들은 정제된 형식의 시조보다 좀 더 자유롭게 자 담양에 면앙정을 짓고 자연을 즐겼는데, 그때 지
기 생각을 펼칠 수 있는 문학을 추구했다. 경기체가 은 작품이 ‘면앙정가’다. 송순의 ‘면앙정가’는 이후
가 있었지만 그것은 한자를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 에 등장하는 정철의 ‘성산별곡’에 영향을 주게 된
다는 한계가 있었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표현하 다. ‘성산별곡’은 정철이 전남 담양 창평에 내려가
기에도 적합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대부 있을 때, 그곳에 식영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풍류를
들이 고안해 낸 장르가 바로 ‘가사’였다. 다행히 가 즐기던 김성원을 예찬하며 부른 노래이다. 이를 포
사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작품들이 오늘날까지 남 함해 담양에서 지어진 가사 작품은 모두 18편으로
아있다. 그 주옥같은 작품들을 만나기 위해 우리나 알려져 있다. 전해지는 가사 작품 1만5,000편 가운
라 가사문학의 산실로 꼽히는 담양으로 향했다. 데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가사문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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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가사문학관 전경
2 헌종이 송순에게 내린 시호장과 사령장(가운데 위, 아래)
3 전시관 내부 모습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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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할 때 담양을 첫손가락에 꼽는 이유는 담양에
서 탄생한 가사 작품들이 가사문학의 백미로 불리
기 때문이다. 또한 담양은 조선 중기 이서의 ‘낙지
가’를 비롯해 20세기 정해정의 ‘민농가’에 이르기
까지 600여 년 동안 가사문학이 끊임없이 지속되
어 온 곳이기도 하다.

가사문학관에서 가사문학의 백미를 만나다


가사문학관은 총 3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유명한 면앙 송순俛仰 宋純과 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작
품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관람의 시작점이 되는 제1전시실에 그들의 작품 5

이 있다. 면앙 송순과 관련해서는 헌종 7년1841 2월


헌종이 면앙 송순에게 내린 시호장과 사령장 그리
고 송순이 80세 되던 해에 8남매에게 전답 및 노비
등 재산을 분배한 친필기록이 전시되어있다. 가사
문학의 대가로 꼽히는 송강 정철과 관련해서는 조
선조 14대왕 선조로부터 하사받은 술잔 은배·옥배
와 송강 정철의 친서를 모아 엮은 유묵집, 백세보
중, 백세진보 등을 만나볼 수 있다. 제1전시실을 나
와 제2전시실로 자리를 옮기면 사대부가 부녀자들
이 규방에서 창작·전승한 가사의 한 장르인 규방가
사를 만나볼 수 있는데, 친정어머니가 시집가는 딸,
또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시집살이 요령 등을 6

교시하는 훈계가사가 내용의 주류를 이룬다. 제2


전시실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허난설헌의 ‘규원
가’다. ‘규원가’는 남존여비의 유교 사회에서 사대
부가의 여성들이 겪어야만 했던 참담한 현실 세계
의 고독을 체념의 미학과 꿈의 시학으로 표현한 총
100구의 규방문학으로 여인의 한과 세월의 흐름
을 서러워하는 가사다. 제3전시실에는 눌재 박상訥
齋 朴祥의 충주 박씨 대동보, 눌재집, 분재기 등이 전
시되어 있고,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의 친필유묵, 석
천집조선조 고종 때 간행된 임억령의 산문집, 서석한운시·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소쇄원 경영에 대한 사실을
소쇄처사 양산보瀟灑處士 梁山甫의 후손들이 쓴 글인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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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사실이 전시되어 있다. 이 밖에 하서 김인후
河西 金麟厚, 서하당 김성원棲霞堂 金成遠,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과 관련한 작품들도 만나볼 수 있다.

멋과 풍류가 깃든 선비들의 누정문화


담양에 와서 가사문학관만 둘러보고 가기엔
조금 아쉽다. 가사문학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면 멋
과 풍류가 깃든 선비들의 누정문화도 체험해보자.
가사문학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한국 풍류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면앙정전라남도기념물 제6호과
주변경치가 너무나도 아름다워 그림자도 쉬어 간
다는 식영정명승 제57호이 있다. 식영정은 송강 정철
의 4대 가사 중 하나인 ‘성산별곡’이 탄생한 곳이
기도 하다. 가사문학관을 나와 식영정으로 향했다.
가사문학관 왼편으로 나 있는 돌계단 길을 따라 올
라가다 보면 정자가 나온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건물의 네 귀퉁이에 모두 추녀를 달아 만든 집으로
온돌방과 대청이 절반씩 차지하고 있는 정자인데,
이곳이 바로 식영정이다. 식영정 뒤로는 성산의 나
무들이 가득하고 앞으로는 광주호가 내려다보인
다. 이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 수많은 문인과 학자
들이 이곳에 머무르며 시문을 지어 노래하였다 하
니,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시인이 된 기분이다.
아울러 담양이 가사문학을 꽃 피운 가사문학 창출
8 의 비옥한 터전이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불합

5 송강집(정철의 시문집 11권 7책) 리하고 모순된 정치 현실을 떠나 낙남落南하여, 이


6 허난설헌의 규원가
곳 담양 일원에 누樓와 정자亭子를 짓고 빼어난 자연
7 석천집(고종 때에 간행된 석천 임억령의 시문집)
8 식영정(명승 제57호) 경관을 벗 삼아 시문을 지어 노래하였던 조선 시대
선비들. 그들과 만나기에 4월은 더할 나위 없이 좋
은 계절이다. 4월! 봄에 피는 꽃을 보듯 가사문학이
라는 꽃을 보러 가사문학관으로 향해보는 것은 어
한국가사문학관 이용 안내 떨까.

주 소 전남 담양군 가사문학면 가사문학로 877

문 의 061-380-2700~2703

관 람 09:00~18:00

시 간 어른 2,000원 / 청소년, 군인 1,000원 / 어린이 700원 글 이행림 편집팀

관람료 유치원생 및 65세 이상 무료 사진 김정호, 한국가사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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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계절 과 우 리

“이제 곧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


칩입니다”... “오늘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
청명 늘을 떠올리게 하는 청명은 양력 4월 5일쯤으로,
이 무렵의 농부들은 씨뿌리기를 앞두고 논밭의 흙
인데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24절기’
의 이름은 그저 일기예보에 등장하는 추상적인 단
에서 을 고르는 가래질을 한다. 겨우내 얼어 있던 대지
가 몸을 틀며 푸근한 봄기운을 받아들인다. 청명과
어에 불과할 때가 많다. 도시에서 개구리를 보기란 관련된 관습과 속설도 많다. 청명에 날씨가 좋은가
요원하고, 종일 머무르는 실내에서 낮과 밤의 변 나쁜가로 한 해 농사의 풍작과 흉작을 점쳤고, 어
화를 실감하긴 어려우니 말이다. 그러나 문득 ‘어
떤 순간’이 찾아온다. ‘하지夏至’ ‘입추立秋’ ‘백로白露’
곡우 촌에서는 청명에 날씨가 좋으면 바다에 어종이 다
양해져 어획량이 늘 거라 예상했다. 일부 지방에서
‘소한小寒’ 같은 단어가 무심히 흩날리는 꽃잎처럼
귓가를 스치며 새삼스러운 감각의 파문을 일으키
사이 는 청명에 ‘내 나무’를 심었는데, 집안의 아이가 성
장해 혼인할 때 함께 자란 나무를 베어 농을 만들
는 순간... 그 말言의 ‘기운’이 인공적인 것에 둘러싸 어 주었다고 한다. 현재 식목일과 청명의 날짜가
인 우리에게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날씨를, 계절 겹치는 것이 우연의 일치는 아닌 듯하다. 화창하고
을, 자연을 느껴보라 말을 건다. 아주 먼 곳으로부 싱그러운 기운이 가득한 청명은 ‘길한 날’로 여겨
터 도착한 미지의 신호 같다. 져, 조상의 산소를 보살피거나 이장移葬을 해도 탈
4월에는 ‘청명淸明’과 ‘곡우穀雨’가 있다. 봄 절기의 이 나지 않는 날이라 간주했다. 겨우내 미루었던
끝자락인 5번째와 6번째에 해당하는 청명과 곡우 집수리를 하기에도 좋은 날이었다. ‘청명에는 부지
는 ‘완연한 봄’이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잘 알려진
대로 24절기는 ‘농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절기
마다 그 기후에 맞는 농사일의 절차가 있어, 농경
淸 깽이를 꽂아도 싹이 난다’라는 속담만 보더라도,
옛사람들이 청명이 가진 왕성한 봄의 생명력을 얼
마나 특별하게 생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시대의 24절기는 이를테면 ‘농부를 위한 스케줄 양력 4월 20일경인 곡우는 더더욱 농사와 밀접한
러’였던 셈이다. 청명과 곡우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관련이 있는 절기다. ‘곡식을 기름지게 하는 봄비
‘농번기’가 시작된다. 이름 그대로 맑고 푸른 봄 하 가 내리는 날’이 그 이름의 의미다. 대대로 벼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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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가장 중요한 과업이었다. 먹거리가 풍족하지 않 때가 있다. 봄의 꽃망울을 감탄하며 바라보거나, 밤
던 시절, 흉년이 든다는 것은 사람의 목숨을 위협 하늘의 별자리를 애써 찾기도 한다. 문득 바다가 보
하는 재앙이 될 수도 있었다. 농부들은 곡우가 되 고 싶고, 숲속에서의 하룻밤을 기대하고, 비나 눈이
면 모내기에 쓸 싹을 틔우기 위해 지난가을 추수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다 알 수 없는 감정에 도취되
해 소중히 보관한 볍씨를 물에 담갔다. 한 해 농사
의 첫 단추를 끼우는 셈이었으니 그 과정은 더없이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진행되었다. 볍씨를 담근 후
雨 기도 한다. 나 자신이, 우리 모두가, 대자연의 일부
이기 때문이다. 청명과 곡우를 비롯해 24절기의 본
질은 과거 농경시대의 생활상 그 자체가 아니다. 수
풍년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내기도 했고, 그즈음 초 천 년의 시간이 응축된 그 스물네 개의 이름은 우
상을 치르거나 부정한 일을 당한 사람은 악귀를 쫓 리에게 속삭이듯 말을 건다. 이 계절이 허락한 삶에
는 의식을 치른 후에야 농사일을 할 수 있었다. 곡 충실하라고, 이 시간과 공간의 기운을 만끽하라고...
우 무렵은 전남 흑산도 부근에서 겨울을 보낸 조기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로서 스스로가 대자연의
떼가 충남 서해안으로 북상하는 때이기도 한데, 이 일부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신비한 우주의 질서 속
때 잡힌 조기가 유난히 맛이 좋아 ‘곡우사리’라는 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너
이름으로 부르며 최상품으로 쳤다. 또한 봄을 맞은 무 거창하다 할지 모르지만, 분명히 그렇다.
나무에 물이 많이 오르니, 이즈음의 자작나무나 박 청명에서 곡우 사이, 바야흐로 완연한 봄이다. 농
달나무의 수액이 건강에 이롭다 하여 ‘곡우물 먹 부처럼 부지런히 가래질을 하거나 경건하게 볍씨
기’라는 풍습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를 담글 일은 없겠지만, 그런 마음으로 한강 변의
청명과 곡우에 대한 전통을 살펴보니, 역시 21세기 잔디밭을 맨손으로 쓰다듬고 맨발로 밟아볼 계획
도시인과 24절기는 무관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 이다. 그리고 오래도록 봄의 강과 하늘을 바라보고
르겠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물질적 풍요와 디지 싶다. 이맘때는 굳이 그래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털의 편리에 익숙해져 있으면서도, 우리는 따스한 도시에서의 삶은 그조차 쉽지 않으니.
햇볕 한 줌과 상쾌한 바람 한 줄기를 간절히 원할 글 이신조 소설가,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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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당 ㅣ 한국 을 보 다

“국악의 유령을 쫓아서”


가야금 연주자 조세린 클락

최근 나는 코로나바이러스를 피한다는 이 영화에서 찾은 ‘전통을 고수하는 이들에 대한 은유’


유로 가야금 연습을 하거나 연구 논문을 <얼터드 카본>은 기술이 인간의 죽음을 정복해버린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펼쳐
쓰는 대신 넷플릭스에서 방영하는 공상과 진다. 누군가는 정신이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영혼이라 부르는 인간의 의식은 다운로드
학 스릴러 시리즈 <얼터드 카본>을 보며 되어 피질皮質; cortex의 ‘스택’에 쌓이고 ‘스택’은 유기체인 인체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시리즈의 원작은 지만 그 몸은 교체 가능한 스택의 ‘슬리브’에 지나지 않아, 옷처럼 누군가 잠시 입다가 자
2002년에 발간된 리처드 모건의 스팀펑 기보다 운이 나쁜 사람들을 위해 재활용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모건의 세계에
크 소설로, ‘시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서는 코로나19로 고통받는 사람은 스택에 자신의 영혼을 다운로드하고, 나이, 성별, 인종
따위의 신체적 특성 메뉴를 선택한 후 자신의 영혼을 감염되지 않은 슬리브에 살짝 끼우
면 된다. 물론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얼터드 카본>에서 ‘진짜 죽음’이 일어나는 건 오직
스택 자체가 파괴될 때뿐이다. 새로운 슬리브를 장만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계속 기존
의 슬리브로 버터야 하고 영생의 시대에 회자되는 각자의 유령 이야기가 된다. 주인공 타
케시 코바치는 “끝없는 미래와 함께 끝없는 과거가 온다. 우리를 뒤쫓는 유령들은 우리
의 깊디깊은 고통에서 나온 일그러진 환영들이다…”라고 말한다. 물론 우리 모두에겐 그
림자처럼 달라붙어 있는 유령들이 있다. 그 유령들은 개개인일 수도 있고 문화일 수도 있
다. 그렇지만 코바치가 말하듯이 “당신이 그림자들을 끝까지 쫓아간다면, 당신이 어리석
은 만큼 우직하게 유령들을 쫓아가 찾아낸다면 당신은 마침내 하나가 될 수도” 있다.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전통 그리고 전통을 추구하고 고수하려
애쓰는 예술가들, 즉 나와 같은 바보들에 대한 완벽한 은유라는 걸. 코바치는 또 이렇게
말한다. “시간은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우리는 공허에 맞서 버티며 과거와 우리의 유령
들, 우리 자신에게 죽어라 매달린다….” 적어도 코로나19 사태가 오기 전까지 21세기는
잠깐의 휴식조차 불허한 채 가속 중이었으니, 이 시대에 ‘국악’을 기다리고, 보고, 듣기 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얼터드 카본> 한 제반 상황에 대해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며칠 전 KBS 라디오의 클
래식 음악 프로그램에 어떤 남자 청취자가 보낸 문자가 귀에 와 닿았다. 자신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지 않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초 슬로모션’ 시대가 되니 방송국이 클래식 음
악을 들려주는 걸 감사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한국 젊은이들에게 국악은 과거의 유령일지도


시간의 부족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영원을 재는 가장 좋은 척도다. 한 시간짜리 산조
나, 장단과 장단 사이에 2초나 되는 긴 시간이 흐르는 궁중음악 같은 것을 들을 수 없게
만든 시간의 부족 말이다. 마지막 음표가 공기의 진동으로 잦아들기 직전 높은음의 마지
막 굽이를 음미하려면 참을성이 필요하다. 한국의 선조들은 이것을 ‘풍류風流’, 즉 바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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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에 젖을 시간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국악은 한국인의 삶의 그림자 속에 출몰하는 유
령처럼 보이는 일이 잦다. 새로운 슬리브를 장만할 수 없어서 옛 슬리브 그대로 남은 채
늙은 세대에겐 ‘가장 깊은 고통에서 나온 일그러진 환영’이 되기 일쑤인데, 그 고통은 식
민지 시절의 고통일 수도 있고, 이산의 고통, 전쟁의 고통, 변화의 고통일 수도 있다. 젊은
이들에게 국악은 ‘과거 한국의 유령’으로,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떨
어지지 않는’ 것이다. 소위 밀레니얼 세대는 말한다. “우리는 한국인이지만 당신이 표현
하는 ‘한’이란 건 우리 것이 아니에요. 그것 좀 없애버려요!”
며칠 전 페이스북에 끝없이 제공되는 코로나19 관련 글들 사이에서 재미있는 정의를 보
았다. “전통: (명사) 죽은 동료 집단으로부터 받는 사회적 압력.” 기발하고도 슬픈 정의라
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동료들을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는 전통 음악인들의 생존 여
부는 젊은이들의 처분에 달려 있다. ‘문화재’로 불리는 우리의 음악인들은 청중이 원하는
것, 시간 부족 시대인 이 시대의 것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 현악기든, 건반이든, 몇 가지
를 조화시킨 화성이든, 미소든, 음악을 빵! 터뜨리기 위한 무언가를 주어야만 한다.

색다른 외모라는 슬리브로 국악 무대를 하나 더, 그리고


과거로부터 달아나 앞으로 나아가려는 욕망은 리처드 모건의 미래에서도 계속된다.
코바치는 말한다. “아무것도 성스러운 건 없다. 우리가 받은 모든 선물, 우리가 발견한 모
든 자원, 우리의 눈을 끄는 새롭고 빛나는 모든 것들을, 우리는 ‘결국’ 오염시키고, 경멸하
고, 훼손한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것이 진보라 말하며, 파괴의 결과물을 서로에게 팔
고, 우리가 마구 휘젓느라 잃은 것들과 그 후에 남는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
는다.” 어쩌면 유령을 쫓는 것에 대한 값을 이렇게 치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값은 슬리
브를 벗어버린 자들만이 치르는 게 아니라, 아직은 우리 사이에서 버티고 있지만 머지않
아 콤팩트디스크만을 남기고 떠나갈 대가들까지 치르는 것이다. 언젠가 우리가 한국의
소리가 어떤 것이었나 듣고 싶어지면 구식 기계에 그 콤팩트디스크를 밀어 넣어야만 대
가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래전 나는 알래스카를 떠나 현재의 삶이라는 슬리브 속으로 들어왔다. 근 삼십 년 동안
나는 훌륭한 스승님들의 도움을 받으며 내 ‘스택’에 가야금 산조와 병창을 다운로드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열심히 다운로드하면서도 내게로 오는 어떤 것도 내게 속한 것은 아
니라는 걸 명심하고 있다. 젊은이들의 스택에 내가 배운 것들을 업로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내가 국악에 기여하고 있는 걸까 궁금해하는 일이 잦다. 나라는 사람은 가장
깊은 불안을 느낄 때조차 넷플릭스를 꺼버리고 연습실에 들어가 손가락과 가슴에 굳은
살을 만드는 괴롭고도 보람찬 물리적 노동을 재개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색다른 외모라
는 나의 슬리브로 몇 사람의 주목이라도 끌어 국악의 무대를 하나 더 제공하고, 그 무대
에서 국악의 음색, 리듬, 깊이와 힘, 유머, 그리고 정서로, 영원토록 할 수 없으면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인류를 아름답게 꾸며보리라 마음먹는다.
글 조세린 클락(趙世麟, Jocelyn Clark) 가야금 연주자, 배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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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당 ㅣ 북한 사 회 문 화 읽 기 ⑭

※ 이 글의 인용문은 북한 맞춤법 규정에 따라 표기한 것으로


우리나라 맞춤법 규정과 다를 수 있습니다.

북한 화장품
이야기
작년 3월 말 조선중앙통신은 ‘《은하수》 대 《봄향기》’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봄향기’는 1949년 9월에 창립한 신의주화장품공장에서 생산
하는 화장품 브랜드이고, ‘은하수’는 1962년에 정식 화장품공장으로 발전
한 평양화장품공장에서 생산하는 브랜드이다. 이처럼 이름도, 생산라인도
다른 ‘은하수’와 ‘봄향기’이지만, 북한에서 생산하는 대표적인 화장품 브
랜드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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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대표 화장품 브랜드 <은하수>와 <봄향기>
‘봄향기’는 1949년 9월에 창립한 신의주화장품
공장에서 생산하는 화장품 브랜드로, 개성 고려인삼
을 주성분으로 하며 불로초 배양액, 히알루론산을 비
롯한 기능성 물질들, 감초, 둥굴레, 살구씨 등 수십 가
지 천연 약재 성분들이 들어있다. 신의주화장품공장
에서는 노화 방지용, 피부 보호용건성, 유성, 정상, 남자용,
1 2
기능성다기능성, 치료용, 미백용, 분장용, 머리칼용, 세척용, 향수,
분장도구 등 323가지의 화장품들을 생산하고 있다
<메아리>, 2019.11.18.. 국제발명전시회에서 두 번 입상한
바 있는 ‘봄향기’는 20여 개국에 수출하는 브랜드로,
2006년에 한국에서 시판한 적도 있다. 한편 ‘은하
수’는 1959년에 발족한 생산협동조합을 모체로 하여 3 4

1962년에 정식 화장품공장으로 발전한 평양화장품


공장에서 생산하는 브랜드이다. 개성 고려인삼은 물
론 알로에, 비타민 E, 인삼, 당귀 등의 성분이 함유된
60여 가지 기능성 화장품이 있고, 낮과 밤에 쓰는 크
림을 따로 출시하고 있다. 2017년 10월에 설비를 현 5 6

대화하면서 일반, 기능성, 치료용 화장품들을 2018


년 말까지 250여 가지112종로 확대할 계획을 세웠다 프레이, 미안막마스크 팩, 입술연지립스틱, 입술보호용연지 1,2  봄향기 제품
3,4  은하수 제품
<조선신보>, 2018.6.15.. 이밖에 다품종 소량 생산의 고가 립밤, 볼연지볼 터치, 볼 분, ‘눈섭’연필/먹아이브로우 펜슬, 눈
5 금강산 제품
화장품인 ‘금강산’, 젊은 이미지로 인해 혼수용으로 등분아이섀도 등이다. 살결물, 분가루, 미안막, 연지, 눈 6 미래 제품

인기가 높은 ‘미래’, 천연 기능성 성분들을 원료로 하 등분… 아련한 느낌이 전해져 오는 아름다운 우리말
여 만드는 ‘선녀’, 그리고 ‘대동강’, ‘너와 나’ 등의 브랜 들이다.
드가 있다. 북한의 인터넷 선전매체와 <노동신문> 등에는 화장
품에 대한 소개나 개발 소식, 봉사 현황, 시설 현대화,
우리말이 주를 이루는 북한의 화장품 명칭 국제화에 관한 기사가 자주 실린다. 2019년에는 ‘봄
화장품 명칭에 있어 우리 화장품들이 영어, 프 향기’ 4건, ‘은하수’ 4건, ‘금강산’ 2건, ‘선녀’ 1건, 향상
랑스어, 이탈리아어 등을 무분별하게 남용하고 있는 무역회사의 개성고려홍삼화장품 1건 등 12건의 화장
데 반해, 북한은 크림, 샴푸머리물비누, 린스 등 최소한 품 소개 및 개발 기사가 실렸고, 2020년에는 2월 말
의 외국어만을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분크림파운 까지 이미 5건이 실렸다.
데이션, 물크림로션, 세척/세수크림클렌징폼, 면도크림세이 2018년 5월에는 전국 화장품 부문 학술토론회가 평
빙 폼, 염색크림, 미백크림, 자외선방지/해볕방지크림 양화장품공장에서 3일간 진행되었고, 2019년 11월
선크림, 살결물스킨로션, 분가루파우더, 머리칼고착제헤어스 에는 평양역전백화점에서 ‘전국화장품전시회’가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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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기사 내용 보도일 보도매체 장품들도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서 “피부 영양 강화
수십 가지의 염색 성분과 산화방지제, 피부자극 완화제, 머리칼 에 효과적인 불로초 엑스엑기스, 저분자 콜라겐, 저분
은하수 영양제를 함유한 염색크림 개발, 염색 시간 3분, 염색 보존 한 20.1.7. <메아리>
달, 피부와 머리칼 자극 최소화 자 히알루론산을 미생물 배양법으로 제조하여 만든
자외선방지 살결물은 자외선과 각종 전자기파에 대한 산란, 차 화장품들을 내놓은 신의주화장품공장 제품 역시 녀
폐, 흡수를 통해 피부 손상을 막아주고 보습작용과 항산화 기 20.1.26. <조선의 오늘>
능, 피부손상 수복기능을 가진다. 성들이 너도나도 찾고 있다. 금강산합작회사의 제품
콜라겐 펩티드와 불로초 추출물이 함유된 염색샴푸는 머리칼
들은 항산화 효과가 뛰여난뛰어난 나노화한 셀렌을 개
봄향기 과 머리피부를 물로 적시는 과정 없이 머리칼을 5분 만에 검은 20.2.6. <조선의 오늘>
색으로 변화시키며, 색을 오랫동안 유지 성 고려인삼 추출물과 결합한 것으로써, 자연미가 느
천연미백제, 자외선 방지제, 영양제들을 첨가한 미백화장품은
피부에서 검은 색소(멜라닌)의 생성을 억제하고 자외선을 차 20.2.10. <메아리>
껴지고 방수성이 좋은 것이 특징이다. 사과의 향 및
단, 영양 공급과 혈액순환 촉진
아미노산 추출물, 과일씨 기름을 배합하여 제조한 대
릉라과학기술교류사의 기능성 역삼화장품 : 역삼미백 살결물
- 은 미백효과와 여드름, 색소 침착 및 반점, 알레르기를 방지, 물 20.2.23. <메아리> 동강과일종합가공공장의 향수, 물크림, 샴푸, 린스 등
크림은 기초화장제나 밤(夜)크림으로 사용
은 청신한 향기를 며칠간 지속시켜 주어 처녀들의 이
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룡악산비누공장의 물비누 제
간 개최되었다. 평양화장품공장, 신의주화장품공장, 품들, 그리고 왕벌젖, 유모란기름, 쑥 추출물이 들어
금강산합작회사, 묘향천호합작회사, 나리화장품기 있는 살결물, 분크림, 밤크림, 머리영양물과 같은 《미
술교류사, 평양향료공장, 룡악산비누공장을 비롯한 래》 제품들도 피부와 머리칼의 윤기를 더해 주는 것
수십 개 단위가 참가한 전시회에는 930여 종에 13 으로 하여 중년녀성들 속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고
만 7천여 점의 화장품, 80여 종의 향료 제품이 출품 전했다.
되고, 60여 건의 연구성과 자료가 제출되었다<로동신
문>, 2019.11.12.. 전시장 방문 기사를 게재한 인터넷 매체 화장품 제조시설 개선과 현대화 이루어져
<류경>2019.11.15.은 ‘은하수’ 제품에 대해 “피부 속의 김정은은 2015년 2월 평양화장품공장을 현지
로페물노폐물을 깨끗이 제거해 주는 새 비누들과 화장 지도하면서 “외국 상표의 마스카라는 심지어 물에 닿
독 제거 효과가 좋고 안면 혈액순환 개선이 뚜렷한 아도 그대로인데, 우리 제품은 하품만 해도 번져서
기능성 화장품들, 그리고 미안美顔 제품들이 눈길을 ‘너구리 눈’이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후에도 김정
끌고 있다. 피부 신진대사를 활성화하여 로화를 막 은은 평양화장품공장과 신의주화장품공장을 두 차
아주는 화장품들과 여러 가지 원인으로 생기는 여드 례씩 더 현지 지도하면서, 화장품 제조시설 개선과
름, 검버섯, 주근깨 등을 치료하는데 효능이 높은 화 제품의 품질 향상을 촉구했다. 이러한 지시로 2019
년 1월에 평양화장품공장에 합성공정, 색감생산공정
등 생산공정의 현대화, 10월에 신의주화장품공장의
병렬로보트 개발을 통한 제품 포장 공정의 무인화,
2020년 1월 신의주화장품공장에 현대적인 향수 생
산공정의 창설 등 제조시설의 개선과 현대화가 이루
어졌다. 또한 <류경>2020.3.8. 보도에 따르면, 현재 신
의주화장품공장에서는 연건축 면적 6,000여㎡ 규
7 모의 봄향기연구소 건설이 마감단계에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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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품 품질 개선에 노력한 결과, 2019년 1월에 ‘은
하수’ 25종이 유라시아경제동맹의 품질 인증을 받았
고, 11월에 장미와 녹두를 기본원료로 한 ‘은하수’ 6종
이 추가로 인증 받았다.
‘봄향기’도 세계지적소유권기구WIPO로부터 공장 내
8
공업시험소가 내놓은 특허기술인 ‘불로초 배양물과
그를 이용한 노화방지 영양액’으로 WIPO상발명가 메달
과 증서을 받았다. 북한은 현재, 화장 도구의 가상사용
과 어떤 화장이 맞는지 미리 시험할 수 있는 스마트
폰용 앱인 ‘지능형 손전화기 프로그람 <봄향기> 1.0’
의 출시 등 각 브랜드가 서비스로 경쟁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금강산’은 화장방법보급실(2019년 9월 9

호 참고)을 운영하고 있고, ‘봄향기’는 ‘안면 피부 검사


기구'로 피부에 맞는 살결물이나 물크림 등을 선택하
도록 돕고 있으며, ‘은하수’도 얼굴의 어느 부위에 어
떤 화장품을 발라야 보다 효과적인가를 판단해 주는
‘자동분장 모의기구’를 설치하여 맞춤 상담을 해주고
있다.
북한의 화장품은 백화점과 장마당을 통해 판매되고
10
있는데, 점차 중국산과 한국산을 대체해 나가는 상황
7 전국화장품전시회장
이라고 하며, 남성용 화장품의 수요가 느는 추세라고
8  신의주화장품공장 내부
한다. 하지만 화장품값이 비싸기 때문에 정품은 중 9 신의주화장품공장 전시장
10 화장품 매장
산층 이상이 주로 구매하고, 일반 서민들은 북한 내
11 은하수 화장품 품질인증서
부에서만 유통되는 싼값의 ‘8.3제품’을 산다고 한다.
‘8.3제품’은 생산 증대 운동인 ‘8.3인민소비품창조운
동’을 통해 생산된 제품을 말하는데, 주로 각 공장, 기
업소, 협동농장 내 가내 작업반에서 생산하며, 공장
의 노동자가 원료를 따로 구해 만들거나 화장품 용기
를 빼돌려 생산하기도 한다<데일리 NK> 2017.1.5. 오늘날
북한은 대규모 건설사업과 함께 화장품의 질 개선을
자력갱생을 상징하는 사업 중의 하나로 보고 집중적
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글 오양열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초빙석좌연구위원


사진 <메아리>, <북한의 오늘>, <류경>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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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당 ㅣ 불현 듯

마음 씻고 마음 여는
개심사에 꽃이 피면
봄이다. 꽃소식이 전국 각지에서 향긋한 꽃내음과 함께 날아온다. 꽃 한 송이에 생명의 진리가 담겼다
애써 봄이 왔다고 호들갑을 떨지 않더라도 꽃소식이 들리면 지난해부터 특별한 취미가 생겼다. 정원 가꾸
으레 봄이 왔다고 여긴다. 봄이기에 꽃이 피는 게 아니라, 기가 바로 그것이다. 1년 동안 집 앞뜰과 뒤뜰을 모
꽃이 피어 봄이라고 하지 않던가. 두 정복하고 올해부터는 옥상정원을 가꾸기 시작
4월, ‘마음을 씻고 마음을 연다’는 이름의 개심사에는 했다. 정원의 꽃나무를 가꾸기 위해서는 많은 정성
왕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이 필요하다. 반려동물처럼 반려식물이라는 말이
나온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꽃은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향기와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꽃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마저 평온해지고 아름다워지는 느
낌이다. 잠시나마 마음이 꽃을 닮아가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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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과 열매를 맺는 과정에는 생 피웠고, 다른 나무에는 연초록 잎사귀가 돋았다. 품


명의 진리가 담겨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새로 보아 수령이 족히 100년은 더 돼 보인다. 고
봄꽃의 향연을 즐기기에 사찰만 한 곳이 있을까. 개를 들면 핀 벚꽃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푸지게
우리나라 사찰은 대부분 산중에 자리한다. 그러니 피었다. 벚꽃 뒤로 고색창연한 안양루의 단청이 색
어찌 봄을 알리는 꽃이 만발하지 않겠나. 불교문화 을 더한다. 오랜 세월을 겪은 탓에 원색의 아름다
에서 꽃은 정원수로, 창호의 물살로, 단청의 소재로 움은 찾아볼 수 없지만, 화장 장엄의 세계를 구현
사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연꽃이다. 연꽃은 더 하는 데는 전혀 부족하지 않다. 서까래에는 여지없
러운 진흙탕에서 피지만 결코 더러움에 물들지 않 이 연꽃이 그려져 있다.
고, 맑은 본성을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맑고 이맘때 개심사를 찾아야 할 이유는 명부전 앞 왕벚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나 세상을 정화한다는 ‘처염 꽃에 있다. 일명 겹벚꽃이라 부르는 이 나무는 보
상정處染常淨’의 의미가 있다. 불교에서는 연꽃 모양 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벅차게 한다. 벚나무의 수
을 여러 곳에 사용하는데 불상의 좌대 ‘연화좌’와 령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림잡아도 수백 년은 됐
단청에 사용하는 ‘연화문’이 대표적이다. 으리라. 품이 아름드리인 것은 물론이고 벚꽃잎도
커서 100원짜리 동전만 하다. ‘피안앵彼岸櫻’은 벚꽃
극락을 상징하는 벚꽃에서 위안을 얻다 이 극락을 상징한다는 뜻으로 절에서 피는 벚꽃을
지난달 봄의 전령사 매화가 양산 통도사, 순천 그리 부른다. ‘염화미소拈花微笑’라는 말이 있다. 영
선암사에서 각각 춘심에 불을 지폈다. 이번 달에는 취산에서 석가모니가 대중에게 설법하면서 한 송
그 불씨에 기름을 끼얹는 벚꽃이 만개한다. 사찰에 이 꽃을 들어 보이자 모두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
서 벚꽃을 즐기려면 서산의 개심사가 으뜸이다. 충 했는데 가섭迦葉만이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즉 염
남 서산에 자리한 개심사는 ‘마음을 씻고 마을을 화미소는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한다는 이심전
연다’라는 뜻으로, 백제 시대에 혜감국사가 창건했 심으로 전법傳法하는 것을 뜻한다. 개심사 뜰에 핀
다고 전한다. 개심사 입구는 여느 고찰처럼 거창하 벚꽃이 오늘날의 염화미소가 아닐까. 말을 해도 통
거나 웅장하지 않다. 주변 산들에 첩첩이 둘러싸여 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요즘, 말 없는 꽃이 삶의 위

1 불교에서는 벚꽃이 극락을 아늑한 품에 안긴 듯하다. 가파른 길을 따라 오르 안이 되니 말이다.


상징한다.
면 작은 연못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주변에 매화
2 벚꽃 뒤로 고색창연한 안양
루의 단청이 색을 더한다. 나무, 벚나무가 이미 잠에서 깨어나 화사하게 꽃을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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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당 ㅣ 독자 투 고

지방에 피는 꽃에도
단비가 내려야

문화와 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지역 구분 없이 수준 높

은 선진문화 공연이 전해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영

상매체 등을 통해 지역, 국경을 넘나들며 전파되고 있

기에 문화를 접하는 전 지역 관객의 관람 의식과 문화

이해도는 급상승 했다. 그러나 지방 단위 문화축제 수

준은 답보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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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은 ‘굴뚝 없는 산업’으로 하나의 ‘상품’ 미국은 <아바타> 영화 한 편으로 우리나라 중형승용차 30만 대
지방의 문화축제가 나아가지 못하고 답보상태인 원인이 무엇 를 판매한 수입을 올렸고, 영국 소설가인 존 로널드 톨킨의 <반
일까. 예산 부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예산 부족으로 창작 지의 제왕>은 책과 드라마, 영화로 제작되어 총 100억 달러약 12조
품이나 특색 있는 문화상품의 개발이 곤란하고, 공연장 또한 부족 억 원가량의 수익을 올렸다. 이처럼 문화예술은 ‘굴뚝 없는 산업’으
한 실정이다. 얼마 없는 공연장마저 연예인들이 지방 순회공연을 로 21세기에 걸맞은 하나의 ‘상품’이다. 따라서 지방시대에 부응
할 때마다 독차지하는 바람에 지방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예 하는 특화사업 육성을 위해 지역에 소재한 기업과 금융기관, 대
술인들은 자기 지역 공연장임에도 그 무대에 오르기가 쉽지 않다. 학 등에서도 지방문화사업 육성을 위한 메세나에 적극적으로 참
이런 관계로 작은 무대를 꾸며서 지역축제를 한다고 해도 주민이 여해야 한다.
와주지 않아 관객 없는 행사가 되고, 점점 지역
문화는 가뭄에 곡식이 시들어 가듯 활짝 꽃피지 ‘품앗이 공연’ 등도 문제 해결의 한 방안
못하고 고사하는 현상이 되풀이되고 있다. 지역의 공연장 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문화의 중요성이나 필요성은 인식하면서도 우 서는 공공기관의 시설은 물론, 종교기관의 시
리 사회의 뿌리 깊은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문 설 또한 문화예술 공연을 위해 대여해주는 것
화예술을 홀대하는 것도 문제지만, 문화예술의 이 필요하다. 유럽에서는 수백 년의 역사가 담
씨앗을 심고 키워내는데 필요한 경제권을 지닌 긴 종교시설에서 음악회를 열고 미술 전시회나
분들의 관심과 지원이 미약한 것도 지역문화 국제학술 세미나 등을 개최한다. 이를 통해 지
발전의 난제라고 할 수 있다. 역주민에게는 문화예술을 접할 기회를 제공하
문화와 예술의 나라 이탈리아에서는 15세기부 고, 종교 관계자는 종교 인구 저변 확대 등을 꾀
터 상업이나 금융업으로 거대한 부를 쌓은 대 할 수 있다. 즉, Win-Win이다.
기업들이 학문과 예술 활동을 후원하는 ‘사회 한편, 지방의 문화예술단체나 문화예술인의 규
환원 투자’를 펼쳤다. 이는 르네상스 시대를 펼치게 되는 원동력 모가 작고 자체 사업비가 부족해서 지역별로 문화축제 행사에 특
이 되었다. 이들의 후원에 꽃을 피운 문화예술 유적들은 현재까 색작품이나 창작품을 제작하여 무대에 올릴 수 없어 같은 작품을
지 남아 그들의 후손들까지 먹여 살리고 있다. ‘재탕’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작품을 계속해서 무대에 올리면 지
우리나라는 1994년 한국메세나협회가 설립되었는데, 2014년까 역주민들에게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
지 20년간 기업이 문화예술 발전을 지원한 금액은 약 2조6,950 해서는 인근 시·군과 문화예술 작품공연을 품앗이 공연으로 풀
억 원에 달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초자치단체시·군에서 문화예 어나갈 수 있다. 또한, 지역 단위 문화예술인 육성을 위한 장학제
술단체에 지원하는 예산 규모는 전체 1%도 되지 않는다. 경기도 도 운영을 제안하고 싶다. 지금 각종 장학금 운영단체는 많지만,
의 경우 체육문화 발전을 위해 1980년도부터 지방자치단체별로 천편일률적으로 ‘공부 잘하는 학생’을 위주로 한 장학금제도다.
전국체전종목을 직장팀으로 육성토록 권고하여 시·군별로 육상, 물론 이외 체육특기생 등에게 주는 장학금 등도 있지만, 전체 장
축구, 배구, 역도, 레슬링, 사이클팀 등을 육성한 결과, 1990년부 학금의 범위를 문화예술 특기생에게까지 넓혀주었으면 하는 바
터 전국체전에서 서울의 아성을 넘어 종합우승을 독차지하는 성 다. 이는 지방문화예술인 육성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적을 거두고 있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에서 문화예술팀을 육성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지방문화 발전을 위해서는 각 문화단체
하고 지원하는 곳은 별로 없고, 오직 너도나도 복지시책에 ‘무상’ 뿐만 아니라 정부, 시민 할 것 없이 모두 다 함께 지혜와 힘을 합
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예산을 쏟아붓고 있다. 왜 오래도록 먹고 쳐야 한다.
살 양식으로 후손에게 물려줄 문화유산에 투자는 아니 하는지 묻
고 싶다. 글 조수기 한국문화원연합회 정책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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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항일독립운동
NE W S
U RIM U N HWA 발행처·문의 전라북도문화원연합회

전라북도문화원연합회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던 지난


해를 기념하며, 한 해 동안 전라북도 지역의 항일독립운동 자료를 모아 <전북의 항
일독립운동>을 발간했다. 이 책은 지역별 항일 의병의 배경과 곳곳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에 대한 기록을 상세하게 담아내고 있다.

정선 탄광촌 주민들의 삶을 담은 문화
집필 박임용 외 9인 ㅣ 발행처·문의 정선문화원

광복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수많은 외지 사람들이 정선의 탄광을 찾으며


자연스럽게 새로운 문화들이 움텄다. 정선문화원은 <정선 탄광촌 주민들의 삶을 담
은 문화>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탄광촌에 거주했던 주민들의 생애사를 구술·채록하
고, 광부들의 삶 등을 상세하게 담아냈다.

제1회 금남(金南) 지역문화 글짓기 공모전

한국문화원연합회는 제22대·23대 연합회장을 역임하고 지역문화 발


전에 업적을 남긴 금남金南 이수홍 회장을 기리는 한편 미래 세대가 지
역문화에 대한 소중함을 느낄 수 있도록,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글짓
기 작품을 아래와 같이 공모할 예정이다.

•응모기한 2020. 6. ~ 8.
•시 상 1등(금남상, 1명) 포함 총 72명

※ 자세한 일정 및 내용은 추후 안내합니다. 故 이수홍 한국문화원연합회 전 회장

편집후기

봄과 함께 ‘이게 뭔가’ 싶은 큰 걱정거리가 사람들을 엄습했다. 바이러스의 공격은 예전에도 있었다.


숙종 때 ‘역병의 참혹함이 실로 예전 없이 번져, 1천6백여 명 떼죽음 시체가 서울에서 창궐하다니…’
라고 기록된 바 있다. 막막한 시절에도 그 시간을 버틴 지혜가 있었을까? 아등바등 살아낸 수많은 역
경 속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이 시련을 버텨야 한다. 이럴 때 눈이 녹으면 뭐가 되나? ‘물이 된다’고 원
소기호, 분자식으로 분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중요하겠지만, 눈이 녹으면 ‘봄이 된다’는 따스한 마
2020 04

음의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 같은 필자들을 찾아낸 문화의 군락지가 ‘서울셀렉션’ 앵글에 가득


차는 행복한 일이 많아지기를 편집인의 본분으로 기대해본다.

한춘섭 편집주간

72
자치기
Jachigi

ISSN 1599-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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