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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선물

1. 깨달음이란 단지 인식일 뿐 전혀 어떤 변화가 아니다. * 빛의 길

기적수업은 우리에게 깨우침의 길을 제시해준다.


이 수업은 우리의 통상적인 지각과 의식, 그리고 정체감이 가려지고 왜곡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이러한 왜곡을 시정하는 방법을 제시해주고,
우리 자신과 세상을 더욱 분명히 볼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깨달음의 전환이야말로 수업에서 말하는 ‘기적’의 참뜻이다.

1-1. 너 자신을 알라 * <수업>의 본질

이 과정이 주어진 것은 우리에게 빛의 길을 활짝 열어 주기 위함이요


또한 우리가 잃었다고 여겼던 그 영원한 자기 Self에게로 돌아가는 법을 차근차근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본 교과의 목표는 내가 택하는 교사에 관계없이 " 나 자신을 알라. " 이다.
이것은 마음의 훈련 과정이다.
이를 위해 필수적인 것은 내가 쥐고 있는 모든 가치에 대해 기꺼이 의문을 제기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 과정은 사랑의 의미를 가르치는 데에 있지 않다.
그러한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 자연적 유산인 사랑의 현존을 깨우치는 데에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제거하는 일이다.

나의 목표는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1-2.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이 기적이다. * 기적

기적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무언가 이미 잘못 되어 온 것이다.
기적은 단지 부정에서 진실로의 전환이다.
기적들은 다만 ‘아니다’를 ‘그렇다’로 바꾸는 것일 뿐이다.
기적은 사랑의 표현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진정한 기적은 곧 그 표현들을 불러일으키는 사랑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이 하나의 기적이다.
한 순간 멈추고 잠잠해진 마음속으로 기적은 조용히 들어간다.
삶의 기적은 나이가 없으니, 시간 속에 태어나지만 영원 속에서 자란다.

오늘 나는 오직 기적만을 바칩니다.
그리하여 나는 기적을 내게로 되돌아오게 합니다.
1-3. 단 한가지의 목적 * 목적

내가 불안해지는 어느 상황에서건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아주 단순하게도,


"나는 이것이 어떻게 되길 바라는가?, 이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이다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이 시작이 되는 것은 바로 그것이 그 결과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의심은 소망들이 서로 싸우는 탓이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하라.
그러면 의심이 생길 리 없다. 온 마음으로 열망한다면 그 무엇도 어렵지 않다.
그 누구라도, 한결같고 확고한 목적을 가진 사람이라면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그 누구라도 자신의 목적에 화합하는 사람이라면 그 자신과 일치하는 사람이다.
모든 가슴이 필요로 하고, 모든 마음이 간청하고, 절망을 넘어선 희망과 공격심을 압도해 버리는 사랑,
그리고 증오심이 끊어버리려 애써도 여전히 신이 창조했던 그대로 남아 있는 형제애를
우리의 갈망들과 하나로 합쳐,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이 한 가지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나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내가 편안치 않은 이곳에서 내가 머무르고 있는 그 동안
그것은 내가 이 현실을 사는 목적이고, 내가 추구하는 결과이며,
나의 목표요, 나의 직분이며, 나의 삶입니다.

1-4. 천국이냐 지옥이냐 * 선택

나에게 가해지는 것 앞에서 더 이상 무력하다고 자신을 속이지 말라.


다만 내가 잘못 알았다는 점만 인정하라.
그러면 내 잘못의 결과는 사라질 것이다.
만약 스스로를 사랑스럽지 않은 자로 본다면 나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나 자신을 경멸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반드시 스스로를 모자란다고 여기기 마련이다.
시련들이란 미처 배우지 못했던 교훈들이 다시 한번 주어지는 것일 뿐,
그리하여 이전에 그릇된 선택을 했던 그 자리에서 이제 나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에 선택한 것이 나에게 가져다 준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진실과 손을 잡을 것인지 환상과 손을 잡을 것인지의 선택은 여전히 나에게 달려있다.
그러나 명심하라. 한 쪽을 택하는 것은 곧 다른 쪽을 놓아 버리는 것이다.
고통은 환상이요, 기쁨은 실재이다.
고통은 다만 잠일 뿐이며, 기쁨은 깨어있음이다.
고통은 속임수이며, 기쁨만이 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번 그야말로 이루어질 수 있는 단 하나의 선택을 한다.
환상들과 진리, 또는 고통과 기쁨, 또는 지옥과 천국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나는 내게 보이는 것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경험하는 느낌들은 내가 택하는 것이며,
이루게 될 목표는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게 우연히 일어난 듯 보이는 모든 것은
내가 요구하는 것이요, 요구했으므로 받는 것입니다.
1-5. 있는 그대로 * 진리와 현실

진리는 오로지 경험되어질 뿐이다.


그것은 묘사될 수도 없고 또한 설명될 수도 없다.
진리는 파괴할 수 있는 너의 능력 밖에 있으면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너의 능력 안에 오롯이 있다.
진리를 너 자신 밖에서 찾으려 하지 말라.
진리는 오직 네 안에만 있을 수 있다.
진리는 오직 현재 안에 놓여 있으므로 현재 안에서 찾으려 한다면 그것을 발견할 것이다.
진리는 너의 열망을 통해 네게로 회복된다.
진리 외의 다른 것에 대한 열망으로 인해 진리가 네게서 없어졌듯이.
한 사실이 네가 진리보다 더 애지중지하는 것과 어긋나지 않는 한, 어찌 그 사실이 두려울 수 있겠는가?
진리를 향한 탐구란 다만 진리를 가로막는 모든 것을 정직하게 살펴 찾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는 있는 그대로이다.
그것은 잃을 수도, 구할 수도, 찾을 수도 없다.
그것은 네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네 안에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인식될 수도, 인식되지 않을 수도 있다.
너는 진리로부터 멀어지면 안전하지 못하나 진리 안에서만은 안전하다.
실재야말로 유일한 안전지대이다.
진리는 단지 있는 그대로임으로써, 있는 그대로가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 너를 해방시킨다.
실재는 오로지 진리만을 받들고 있는 까닭에 실재가 위협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환상 밖에 없다
실재인 것은 그 무엇도 위협당할 수가 없다.
비실재인 것은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평화가 있다.
하나의 상황이 오롯이 진리에 바쳐졌을 때 평화는 필연적이다.

나는 진리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2. 너의 배움에는 한계가 없다. 왜냐하면 너의 마음에 한계가 없기 때문에. * 마음

우리의 모든 경험, 그 원천은 마음이다.


마음의 진정한 본질은 '무한히 초월적인 깨어있음' 이자 '창조적 원동력'이다.
그런데도 마음의 작용을 주도하는 우리의 잘못된 생각과 믿음이 마음을 왜곡시키고 위축시켜 왔다.
따라서 완전한 가능성으로 마음을 복구하기 위해 우리는 생각과 믿음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2-1. 마음 다스리기 * 마음

마음 하나하나가 모든 마음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모든 마음들이 하나인 까닭입니다.
내가 나의 마음속에 받아들이는 모든 것이 나에게는 현실성을 갖습니다.
내가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그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을 해방시키십시오. 그러면 해방된 세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사랑 없이 지각한다면 그 마음이 지각하는 것은 텅 빈 껍질이며
마음은 내부의 영혼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들은 하나로 합쳐져 있지만 육체들은 그러하진 않습니다.
마음에 육체의 속성을 부여할 때만이 마음은 분리 가능할 듯합니다.
그러면 마음은 조각나 있고 개별적이고 홀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육체는 마음의 영원한 속성인 보편적인 교감(交感)에 부과된 하나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그 교감은 내면적인 것입니다. 마음은 마음 자신에게로 다다르는 것입니다.
그 자체 내에서 그것은 아무런 한계도 갖고 있지 않고 그리고 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음은 나를 완전히 에워싸고 있습니다.
내가 마음 안에 있고 마음이 내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갖고 있는 마음을 우리의 모든 형제들이 함께 갖고 있고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형제들을 진정으로 알게 될 적에 그들은 치유될 것입니다.
마음들은 오직 진실 속에서만 하나로 합쳐질 수 있습니다.
꿈속에서는, 어떤 두 마음도 똑같은 한 목적을 나누어 가질 수 없습니다.
깨어난 마음은 자신의 근원과 자신의 자기Self와 자신의 성스러움을 아는 마음입니다.
성령(聖靈)을 섬기는 마음은 모든 면에서 시공(時空)의 법칙을 넘어서 영원히 제한받지 않으며
어떠한 편견에도 속박되지 않으며 그리고 자신에게 어떤 것이 요구되든
그것을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마음을 다스린다. 나의 마음은 나 혼자서 다스려야만 한다.


나는 내가 다스려야만 하는 한 왕국을 갖고 있다.
때로는, 내가 결코 그 왕국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 마음이 내게 의기양양하게 굴면서 내게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느끼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런데도 그것은 내가 그것 속에서 지각하는 어떠한 목적에든 봉사하도록 내게 주어진 것이다.
나의 마음은 오직 봉사할 수 있을 뿐이다.
합당하다고 보시는 대로 쓰시도록, 오늘 나는 내 마음의 봉사를 성령에게 바친다.
그렇게 하여 나는 내 마음을 지휘하느니 내 마음은 나만이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나는 신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내 마음을 풀어 주는 것이다.

2-2. 어떠한 믿음도 중립적일 수 없다. * 믿음

내 마음의 상태는, 그리고 마음 안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나의 인식은,


내 마음에 관해 어떻게 믿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그것이 어떠한 믿음이든 그 믿음은 무엇을 마음에 받아들일지를 결정하는 전제조건이다.
내가 무언가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 무언가를 나에게 진실한 것으로 만든 셈이다.
어떠한 믿음도 중립적일 수 없다.
모든 믿음은 내가 내리는 결정을 좌우하는 위력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결정이란 내가 믿는 모든 것에 바탕을 둔 결론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그릇된 생각들을 원상 복구하는 선결조건이다.

진실은 내 마음속의 모든 오류들을 고쳐 주리라.


2-3. 나는 생각에 대해 책임이 있다. * 생각

'한가로운/ 헛된 생각' 이란 것보다 자기모순적인 개념은 없다.


온 세상에 대한 지각을 낳게 하는 것을 헛되다고 부를 수는 없으리라.
내가 갖는 모든 생각 하나하나는 진리에 기여하거나 아니면 환상에 기여한다.
즉 진리를 확장하거나, 아니면 환상을 증대하거나 둘 중의 하나인 것이다.
나의 모든 생각은 내가 보는 세계의 어떤 부분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한 나의 지각이 바뀌려면 내가 힘써야 할 일은 바로 나의 생각에 대해서이다.
나 자신의 생각 말고 그 어떤 것도 나의 성장을 방해할 수 없다.
내가 택한 대로 내 생각을 움직이는 능력이 바로 내 생각이 가진 힘의 일부이다.
만약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나는 나의 생각에 그런 힘을 주기를 거부한 것이고,
따라서 나는 나의 믿음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나는 행위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고 생각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고 믿을지 모른다.
진실인즉, 나는 내 생각에 대해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나는 오직 이 생각의 차원에서만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행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나는 오로지 내 생각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나를 좌우하는 것은 오직 나 자신의 생각일 뿐이다.

2-4. 무엇을 보려 하는가? * 지각

잘못 지각하는 것은 두려움을 만들어 내고, 올바로 지각하는 것은 사랑을 키운다.


나는 지각하는 대상에 대해 반응하며, 지각한 바대로 행동하게 되어 있다.
내가 지각하는 것은 곧 내가 그러한 사고 체계가 사실이기를 바란다는 증거이다.
나는 다른 이로부터 지각하는 것을 나 자신의 내부에서 강화시킨다.
지각은 하나의 선택일 뿐 실재가 아니다.
하지만 네가 여태까지 깨달은 것보다 훨씬 더한 것이 바로 이 선택에 달려있다.
자신이 듣기로 선택하는 목소리에, 자신이 보기로 선택하는 광경에,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믿음 전체가 달려 있는 까닭입니다.
이것이 지각할 것에 대한 교육이 나에게 크게 필요한 이유이다.
나는 무엇을 보려 하는가? 선택권은 나에게 있다.
그러나 이 '본다는 것/바라봄'의 법칙을 배우고 내 마음이 이 법칙을 기억하도록 하라.
나는 나의 안에서 느끼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만일 자신의 내면에서 증오가 자리를 찾았다면 당신은 날카롭고 뾰족한,
뼈만 남은 죽음의 손가락에 잔인하게 붙잡혀 있는 무시무시한 세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자신의 내면에서 신의 사랑을 느낀다면, 나는 자비와 사랑의 세계를 내다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과 이해와 감사의 열린 마음으로 모든 사물들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십시오.
나는 스스로 자신의 지각에 얹어 놓은 한계에 관해 알 필요가 있고,
내가 자신에 대해 볼 수 있는 모든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을 지각할 수 있다.
지각하는 것에 따라서 마음이 보고자 열망하는 그 어떤 그림이라도 현실로 만들어낼 수 있다.
이 말을 명심하라. 이 말 안에 네가 선택하는 천국이나 지옥 중의 하나가 놓여 있다.
지각은 하나의 거울이지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내가 바라보는 대상은 곧
내 마음의 상태가 외부로 비추어지는 것입니다.

3. 잠잘 때의 꿈과 깨어 있을 때의 꿈은 형태만이 다르다. 그뿐이다. * 꿈과 환상

잠잘 때의 꿈으로부터
우리는 마음이 세상을 창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배우게 되는데,
그 세상은 우리가 잠든 가운데 완전히 실재인 것처럼 보이고,
또 우리의 밖에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하지만 이 꿈속에서 보는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은,
실은 우리가 객관적 실재로 오인한 우리 자신의 창작물인 것이다. 오직 우리가 깨어날 때만이,
꿈속에서 본 사건들 가운데 아무 것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이 과정이 강조하고 있는 점은, 우리가 '실재'라고 부르는 것 역시 하나의 꿈 이라는 것이다.
- 실재 : 우리가 아직 깨어나지 못했으며 그래서 인식하지 못하는 꿈 -
따라서 목표는 우리를 도와 꿈들 및 환상들을 인식하고 그들로부터 깨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3-1. 깨어나기 * 꿈

꿈은 보여준다.
내가 하고픈 대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힘이 내게 있다는 것과
또 내가 원하기 때문에 그 세상을 본다는 것을.
그리고 그 세상을 보는 동안 나는 그것이 현실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여기 한 세상이 있다.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내 마음속에 있는.
내가 깨어나서 보는 듯한 세상 역시 꿈속에서 본 그 세상의 또 다른 형태에 불과하다.
나의 모든 시간은 꿈꾸는 데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잠잘 때의 꿈과 깨어 있을 때의 꿈은 형태만이 다르다. 그뿐이다.
꿈속에서는 결과와 원인이 서로 뒤바뀐다.
여기에서는 꿈의 제작자가 자기가 만든 것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기적은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과, 그 꿈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환상을 다루는 핵심적인 단계이다.
자기가 환상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자각할 때 그것을 두려워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두려움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까닭은
자신이 꿈의 작가였지 꿈속의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꿈이 아예 사라지기전에 그 첫 변화는 내 두려움의 꿈들이 행복한 꿈들로 바뀌는 것이다.
용서하는 꿈들은 꿈속에 등장하는 모든 이에게 너그럽다.
그리하여 꿈꾸는 자에게 두려움의 꿈들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가져다준다.
나의 의지는 모든 공상과 꿈을 다스릴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내 의지를 신뢰하여, 그것이 나를 꿰뚫어 보며 그 모든 공상과 꿈 너머로 나를 데려가게 하라.
보다 더 마음에 드는 꿈이 있다고 하여 그 꿈들로 하여금 남의 수치와 비밀을 간직하게 놔두지 말라.
그 꿈들은 모두 하나이다. 그리고 하나임에, 그 모든 것 중에서도 이 한 가지 질문을 해야 한다.
"과연 이것이 천국과 하나님의 평화 대신 가질 만한 것인가?"
바로 그것이 나의 선택이다. 그렇지 않다고 속지 말라. 이 점에는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다.
나는 하나님의 평화를 택하거나 아니면 꿈을 청해 왔던 것이다.
하나님의 평화를 원하는 것이 내 진정한 뜻이라면 이는 곧 모든 꿈들을 버린다는 말이다.
환상을 원하는 자, 그래서 환상을 가져오는 방법을 구하는 자는 그 누구도 그 말에 진의를 두지 않는다.
그는 환상을 바라보았고, 그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하나의 꿈이 제공하는 것은 다른 꿈들과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달으면서,
이제야 그는 환상 너머로 나아가는 길을 찾는다.
꿈꾸는 일의 끝은 곧 두려움의 끝이다.

이제 나는 나에게 오직 진실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진실 안에서 모든 필요들은 충족되고, 모든 갈망들이 끝나며,
모든 희망들이 마침내 실현되고, 그리고 모든 꿈들은 사라진다.

3-2. 진리를 가리 우는 장막 * 환상

모든 환상은 그것이 사랑의 환상이든 증오의 환상이든 네게서 앎을 빼앗아 간다.


환상이란 진리를 가리 우는 장막이기 때문이다.
그토록 어둡고 무거워 보이는 환상의 장막을 걷어 올리기 위해 다만 필요한 것은,
모든 환상 너머 진리에 가치를 두는 것,
그리고 진리가 아닌 환상에 안주하기를 전적으로 마다하는 것이다.
모든 환상은 그 무거운 복장의 어두운 주름들 속에 아픔과 고통을 수반한다.
그 속에 스스로의 무를 숨기면서.
환상으로부터의 자유는 오직 환상을 믿지 않는 데에 있다.
환상을 실제같이 만들고자 하는 바램 이외에 과연 무슨 유혹이 있겠는가?
한 가지의 환상을 소중히 여겨 진리에 맞서 방어한다면
그 환상은 모든 진리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모든 환상을 실재처럼 만든다.
믿음의 위력을 그와 같은 것이다.
진리는 환상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
환상도 진리와 맞서 싸우지 않는다. 환상은 다만 저희들끼리 싸울 뿐이다.
나 자신에 대한 환상이 지속되지 않고서 다른 이에 대한 환상이 지속될 리 없다.
환상이 없다면 두려움도 의심도 공격도 있을 수 없다.
알아채기만 하면, 환상은 신속히 사라진다.
환상에 목적이 있으리라는 믿음이야말로 환상의 아버지다.
즉 환상이 어떤 필요에 봉사한다거나 어떤 욕구를 만족시켜 주리라는 믿음 말이다.
환상은, 그 목적이 없다고 인식될 때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환상 말고, 과연 무엇으로부터 우리가 구제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실재는 오직 완전한 평화만을 가져옵니다.


내가 동요되거나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언제나
내가 만들어 낸 환상으로 실재를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4. 시간에 있어 유일하게 영원한 측면은 지금이다. * 세상과 시간

이 과정은, 세상과 시간이란 마음의 피조물이자 꿈의 일부라고 가르친다.


이 점을 기억할 때,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에 대한 깨우침을 지니게 되며,
우리 자신을 시한적 세계 속에서 육신에 국한된 존재 이상으로 보게 된다.
우리는 자유롭다. 그래서 세상과 시간을 넘어 우리는, 항상 강조하듯,
바로 이 순간 그리고 매 순간 이미 현존하고 있는 영원불멸을 추구하는 것이다.

4-1. 세상은 마음의 거울 * 세상

지각이란 결국 마음이 투사된 것이다.


내가 보는 세상이란 다만 내가 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세상은 중요하다.
그것은 곧 내 마음의 실상에 대한 증인이요, 내적 상태에 대한 외적 그림이다.
인간은 생각하므로, 지각하는 것이다. 세상은 다만 태고의 진리를 현시할 따름이다.
즉 남들이 나에게 하는 행위는 다름 아닌 내가 그들에게 했다고 생각되는 행위임을 믿게 되리라.
세상은 내가 추구하는 목표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
그럴 수 있는 힘을 내가 주지 않는 한. 이 세상에 애착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포로로 붙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을 탈출할 수 있다.
나의 믿음 말고 과연 무엇이 세상을 사슬에 채워 놓겠는가?
그리고 내 진정한 <자아>말고 무엇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더 이상 세상은 나의 적이 아니다. 나는 그의 <친구>가 되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기억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치유되는 것이야말로 세상이 지향하는 전부이다.

나는 내가 보는 세상의 희생자가 아닙니다.

4-2. 오직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 시간

시간과 영원은 모두 네 마음 안에 있다.


그리고 시간을 오로지 영원을 회복하는 수단으로 지각하게 되면, 그 둘은 내 안에서 화해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이 세상이 베푸는 영원에 가장 가깝다.
영원의 음미가 시작되는 자리는 과거도 미래도 없는 바로 '지금'이라는 실재이다.
오직 있는 것은 '지금' 뿐이기에 현재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라.
그것은 영원토록 진실 된 것만을 지닌다.
모든 치유는 현재 안에 놓여 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이 그의 과거든 나의 과거든지 간에,
전혀 과거에 연관짓지 않고 바라보는 법을 배워 왔다면,
나는 '지금' 보고 있는 것으로부터 배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곧 과거를 놓아 주는 것, 그리하여 경멸하지 않고 현재를 바라보는 것이다.
현재란 시간이 존재했던 그 이전이요 또한 더 이상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때이다.
현재 안에 영원한 모든 것들이 있으며 그 모든 것들은 하나이다.
두려움은 현재의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과거와 미래의 것이다.
왜 천국을 기다리느냐? 그것은 오늘 여기에 있다.
시간은 대착각이다. 지나간 것 또는 미래에 있는 것이라는.
바로 여기 현재 안에서 세상은 자유로워진다.
왜냐하면 내 태고의 두려움으로부터 과거를 걷어 버리고 미래를 풀어줄 때
나는 해방을 맞이하며 또 그 해방을 세상에 주기 때문이다.
지금이 아닌 어느 시간에 진리가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인가.
현재야말로 존재하는 유일한 시간이다.
과거는 지나가 버린 것이요, 미래는 상상일 뿐.
걱정들은 다만 현재의 변화에 대항하여 방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 마음에서 과거가 끝나면 실재의 세계는 내 시야에 나타난다.


실재로는 내가 아무것도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거기에 있지도 않은 것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에고는 단지 관념일 뿐 사실이 아니다. * 잘못된 정체성

이 과정은, 우리가 꿈의 창조자라는 우리의 진정한 정체를 망각해 왔으며


그 자리에 하나의 잘못된 자아 관념, 즉 에고(ego)를 만들어 왔다고 주지시켜 준다.
에고는, 육체에 제한되어 있으면서, 혼자이고
다른 이들이나 우주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세상의 희생물로 스스로를 보고 있다.
꿈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바로 이 수축된 자아 관념의 망상적 성질을 인식하고,
육체가 쾌락을 붙잡으려는 수단이나 또는 진정한 자아를 가두어 버리는 감옥이 아니라,
배움과 교류를 위한 도구임을 자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5-1. 나는 육체가 아닙니다. * 육체

육체는 하나의 한계이다.


육체 안에서 자유를 구하는 자는 찾을 수 없는 곳에서 그것을 찾아다니는 셈이다.
육체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곧 네가 보는 형제 한 사람에게 이 한계를 부과하는 것이다.
너는 반드시 너 자신을 보듯 형제를 보기 때문이다.
마음은, 이제 더 이상 육체 안에 있으면서 육체에 단단히 매여 육체의 현존에 의해 보호를 받는다고
스스로를 여기지 않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육체는 다만 내 목적에 봉사할 수 있을 따름이다.
내가 바라보기에 따라, 육체는 그렇게 보일 것이다.
유혹은 그 온갖 형태로 어디에서 일어나든, 한 가지 교시(敎示)를 주려 한다.
유혹은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에게 설득하리라.
그분은 곧 육체일 뿐이며 죽어야만 될 자로 태어났고 그 유약함을 벗어날 수 없으며
유혹이 그에게 느끼도록 지시한 것에 묶여 있다고.
육체란 하나님의 아들이 진정한 < 자아 >의 부분을 다른 부분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세웠다고
상상하는 울타리이다.
육체를 교류의 수단으로 보는 것은 내 마음을 넓히고 나 자신을 치유하게 하는 것이다.
병이란 육체에 떠넘겨진 분노이며 그래서 육체는 고통을 당하게 된다.
치유란 오로지 교류를 위해 육체를 이용한 결과이다.
용서는 육체를 있는 그대로 보게 해준다.
배움이 완성되면 그만 버려지게 될 하나의 학습 수단으로 말이다.
더 이상 육체가 너를 유혹하지 않게 될 때,
그리고 네가 득실의 수단으로서 어떠한 가치도 육체에 두지 않을 때,
그제야 교류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어지며 너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처럼 자유로워질 것이다.
육체를 초월하는 자는 이미 한계를 초월한 것이다.

나는 육체가 아닙니다.
나는 자유롭습니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이 창조했던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5-2. 끊임없는 갈구 * 밑 빠진 독, 에고

에고는 문자 그대로 두려움에 찬 생각이다.


에고는 나의 믿음이다.
에고는 나의 정체성의 혼돈이다.
에고라는 내 마음의 이 조각은 너무나 보잘것없는 부분이기에
내가 전체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흡사 태양 앞의 한 가닥 햇살 같거나
또는 바다 위를 가물거리는 잔물결 같다는 것을 즉각 알게 되리라.
놀랄 만큼 거만하게도 이 하찮은 햇살은 자기가 햇살이라고 단정해 버렸고,
거의 식별하기조차 힘든 이 잔물결은 스스로 바다라고 자처하고 있다.
이 조그만 생각, 이 티끌보다도 작은 환상이 얼마나 외롭고 무서워할지를 생각해보라.
우주에 맞서 스스로를 단절 시킨 채....
이 보잘것없고, 울타리로 막은 부분을 너 자신으로 받아들이지 말라.
태양과 바다야말로 다름 아닌 나라고 하는 그것이다.
에고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은 내 마음에 달렸 있으니
믿음으로써 에고를 만들어 왔듯이, 이제 나는 그 믿음을 철회함으로써 에고를 떨쳐버릴 수 있다.
에고에게 나를 누르는 힘을 주는 것은 단지 에고에 대한 나 자신의 충성이다.
에고에 의한 교란은 나의 배움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힘을 내가 주지 않는 한 에고는 나를 교란 시킬 힘을 갖지 못한다.
필시 너는 에고가 제 것으로 인정했던 모든 목표의 뚜렷한 특징 한 가지를 알아챘으리라.
네가 그 목표를 성취했을 때에도, 에고는 너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에고가 한 목표에서 다른 목표로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하여 너는 계속해서 에고가 아직도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은 곧 에고로 하여금 네 마음을 지배하도록 놔두는 것이다.
아무도 혼자서는 에고를 참되게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둘 이상이 함께 진리를 추구한다면, 에고는 그 내용의 빈약함을 더 이상 방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결합이야말로 네 안에 있는 에고를 버리는 길이다.
우리의 서로 안에 있는 진리는 에고 너머에 있다.
너는 에고가 없으면 모든 것이 혼돈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확언하건데, 에고가 없으면 모든 것이 사랑이리라.
에고가 제 아무리 큰 소리로 부르더라도 그 목소리를 네가 떨쳐버릴 수만 있다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조금도 주지 않으려는 에고의
그 예쁘장한 선물을 네가 받지 않겠다고 한다면,
아직 말해지지 않은 <무엇이 구원인가?>에 대한 얘기에 네가 열린 마음으로 귀를 기울인다면,
이윽고 너는 힘에 있어서는 조용하고, 고요함에 있어서는 강하며,
또한 메시지에 있어서는 완전히 확실한 진리의 지엄한 <목소리>를 듣게 되리라.

5-3. 네가 보는 모든 것은 이미지들이다. * 자기관념

'나'라고 생각되는 그것은 곧 청산되어야 할 믿음이다.


보호가 필요한 '자아'는 진짜 자아가 아니다.
내가 일으키는 모든 반응은 스스로 나라고 생각되는 그것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내가 되고 싶은 그것이 곧 나라고 생각되는 그것이다.
그러므로 분명 내가 되고 싶은 그것이 내가 일으키는 모든 반응을 결정한다.
내 시야 안에서 자기의 가치를 더 크게 하려고 추구하는 모든 것은
나를 한층 더 제한하고, 내 진가(眞價)를 감추며,
내 진정한 < 자아 >에 대한 참된 깨침으로 이끄는 문에 또 하나의 빗장을 덧붙인다.
자아에 대한 관념은 마치 방패막이나 침묵의 장벽처럼 진리 앞을 가로막으며
내 시야에서 진리를 감춰버린다.
내가 보는 모든 것들은 이미지들이다.
왜냐하면 나는 시야를 흐리게 하고 시각을 굴절시키는 하나의 장막을 통해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아무것도 청명하게 쳐다 볼 수 없다.
세상에 대한 나의 관념은 바로 이 자아에 대한 관념에 달려 있다.
그러나 만약 그 중 하나라도 의문에 붙여진다면 그 둘은 모두 가버릴 것이다.

나는 '나 라고 하는 것'의 진실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내 마음이 완전히 치유되도록 하겠습니다.

6. 내가 구하고 찾던 그 어떤 보물이 과연 나의 [자아관]과 비교될 수 있겠는가?

* 진정한 자아관

자기 자신을 에고와 육체와 동일시하는 것을 단념한다는 것은


우리의 진정한 자아관에 눈뜨는 것이다.
이 진정한 정체성은 언제나 그러했던 대로 영원토록 변함없고 평화로우며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가 된 상태로 남아 있으면서,
다만 우리의 깨달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순수한 영이다.
6-1. 나는 무엇인가? * 정체성

한 가지 간단한 질문, <나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일어나게 하지 않는 갈등은 없습니다.


당신이 하는 모든 결정은 스스로 당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며
당신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가치를 나타냅니다.
당신과 당신이 함께하는 성스런 자기Self 사이에 있는 것은 환상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단지 죽기 위해서 울고 고통을 겪기 위해서 태어났으며
부질없는 희망들과 유린당한 꿈을 가진 허약하고 연약한 것으로 지각하는 당신은 이 말을 들으십시오.
지상과 천국 안의 모든 힘이 당신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당신이 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자신을 안전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과 자신을 동일시 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당신은 그것이 당신과 하나라고 믿을 것입니다.
나의 안전은 진실에 있지 거짓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 나의 안전장치입니다.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랑과 동일시하십시오. 그러면 편안할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과 동일시하십시오. 그리하면 나의 진아Self를 찾게 됩니다.

기억할 것은, 내 자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진아Self는 모든 것이다.
나는 내가 추구하는 그 대상과 마찬가지로 창조되었다.
나는 세계가 추구하고 있는 그 목적이다.

6-2. 밖에서 찾지 말라. * 진아 SELF

나 자신의 밖에 있는 그 어떤 것도 나를 두렵게 하거나 사랑스럽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의 밖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나 자신 안에서 찾아라.
나 자신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내가 궁극적으로 배워야만 할 점이다.
나의 내면 깊은 곳에 완벽한 모든 것이 있다.
나를 통해 세상 밖으로 빛을 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모든 것이.
내 안에 천국의 모든 것이 있다.
나의 가치를 확립하기 위해 나는 아무것도 행하거나 생각하거나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
빛과 기쁨과 평화가 내 안에 살고 있다.
"나는 하느님이 창조한 그대로입니다."
이 한 가지 생각이야말로 나 자신과 세상을 구하기에 충분하다.
이것을 참이라고 내가 믿기만 한다면.

내가 하나님과 하나라는 것을 상기하기 하소서.


내 모든 형제들과 내 [자아]는 하나입니다.
6-3. 영원한 자유 * 영

영은 영원한 은총의 상태에 있다. 나의 실재는 다만 영(靈)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영원한 은총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영은 스스로 <자아>표현을 찾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마음을 이용한다.
그리고 영에게 봉사하는 마음은 평화롭고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마음은 또한 스스로 영에서 갈라진 것이라 여길 수 있고 육체 안에서 스스로를 지각할 수도 있다.
마음은 자기와 혼동하는 것이다.
마음의 자체작용이 있어서 마음은 평화로울 수 있으며, 행복은 마음의 생각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너의 마음은 환상에게 사로잡힐 수 있지만 그러나 영은 영원토록 자유롭다.

7. 두려움은 비난하고 , 사랑은 용서한다. * 길에서의 장애물들


내가 '환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우리의 진정한 정체를 인식하고자 한다면,
나의 깨우침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극복해야만 한다.
분노와 공격, 방어와 죄, 두려움과 비판 등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나의 무가치함과 부당함, 그리고 허약함이라는 잘못된 믿음에서 이러한 장애물들을 만들어 낸다.
그것들을 버리기 위해 나는 기꺼이 청명한 의식의 빛 속에서 장애와 믿음 모두를 살펴보아야 하며,
이를 통해 그들의 망상적 본성이 인식될 수 있다.
그제야 비로소 나의 자연적 상태인 기쁨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7-1. 고통의 원인은 바로 나 자신 * 고통

고통은 하나의 신호이다. 진리 대신 환상이 군림하고 있다는. 고통은 그릇된 시각이다.


어느 형태로든 고통을 경험한다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자기기만의 증거이다.
고통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똑바로 보아 사라지지 않을 고통의 형태란 없다.
아무 것도 나를 다치게 할 수 없다. 그럴 힘을 내가 주지 않는 한.
고통은 다만 내가 나 자신을 잘못 알아 왔다는 신호일 따름이다. 너는 보지 못하느냐?
스스로 무력하다는 그 괴상한 믿음으로부터 네 모든 불행이 생겨난다는 것을. 너 자신 밖에서 찾지 말라.
거기서 틀림없이 찾게 되리라 고집하면서 그 원하는 것을 부질없이 찾아 헤매는 일에서부터
너의 모든 고통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세상을 둘러보라. 그리고 거기 있는 고통을 살펴보라.
네 가슴은 지쳐 버린 형제들에게 기꺼이 안식을 주고 싶지 않겠느냐?
그들은 틀림없이 너 자신이 풀려나기를 기다린다. 그들은 네가 자유롭게 되기까지 사슬에 묶여 지낸다.
고통이란 네가 자유로워지지 않으려고 즐겨 지불해 왔던 배상금이다.
네게 고통을 야기하는 것은 오로지 너의 생각뿐이다.
네 마음 밖에 있는 그 어떤 것도 너를 결코 아프게 하거나 다치게 할 수 없다.
너 자신 밖에 있으면서 핍박의 손을 뻗쳐오는 원인이란 없다.
너 자신 말고 그 누구도 네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너를 앓게 하거나 슬프게, 약하게 하거나 여리게 만드는 힘을 가진 것이라고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너야말로 단지 자신이 무엇인지를 자각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힘을 갖는다.

나는 아픔을 주는 모든 생각들을 바꾸기로 하겠습니다.


7-2. 죄책감에는 이유가 없다. * 죄책감

사랑과 죄책감은 공존할 수 없다.


한 쪽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쪽을 부정하는 것이다.
네가 죄책감을 느낄 때는 에고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에고만이 죄책감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죄책감은 언제나 파탄을 부른다. 죄책감은 공격심의 결과이다.
죄책감에 이유가 있다고 믿는 한 죄책감의 끝은 결코 오지 않으리라.
네가 배워야 할 점은, 죄책감은 언제나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과 또한 죄책감에는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너 자신이 해방됨으로써 죄책감에서 해방되라.
그 외에 자신의 안을 들여다보고 사랑의 빛을 보는 다른 길은 없다.
죄책감은 징벌을 청하고, 그 요구는 당연하게 여겨진다.
진리 안에서가 아니라 그늘과 환상의 세계 안에서는.
죄책감이 없는 마음은 고통을 당할 리 없다. 구원이란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오직 나의 비난만이 나를 다치게 합니다.


오직 나 자신의 용서만이 나를 자유롭게 놓아줍니다.

7-3.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 두려움

두려움은 어떠한 형태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말은 환상을 믿는 자들에게는 사실이 아니겠지만 그러나 환상이란 사실이 아닌 것이다.
진실인즉,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말은 단지 사실을 얘기하고 있을 뿐이다.
두려움은 실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알지 못하는 어린 아이의 마음속에 있다.
오직 네 마음만이 두려움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두려움을 정복하려 드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실은 두려움이 극복되어야 한다는 바로 그 생각에 의해 두려움은 세력을 휘두른다.
진정한 해결은 전적으로 사랑을 통한 정복에 달려있다.
두려움을 인식하고 가식 없이 두려움과 대면할 필요성이야말로 에고를 해소하는 핵심적 단계이다.
두러움 그 자체는 도와달라는 호소이다. 이것이 바로 두려움을 인식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이다.
두려움과 공격심은 어쩔 수 없이 결속된다. 오직 공격심만이 두려움을 만들어 낸다면,
그리고 네가 공격심을 있는 그대로 도와달라는 간청으로 본다면,
반드시 두려움이라는 비실재가 네게 밝혀질 것이다.
실제로 두려움은 곧 사랑을 향한 간청이기 때문이다.
네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보라. 오직 앞일에 대한 예상만이 너를 무섭게 할 것이다.
네가 비정상적인 믿음의 체계를 세워 왔던, 두려움이라는 주춧돌 하나하나 밑에 진리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두려움이 가버린 자리에 반드시 사랑이 들어오리니, 이 둘 밖에 달리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 없는 까닭이다.
하나가 나타나는 자리에, 다른 것은 사라진다. 내가 나누는 것이야말로 내가 가지는 유일한 것이 된다.
불안이 없으면 마음은 일체 너그럽기만 하다. 불안의 마음이 두려움을 초대할 뿐이다.

얼마나 나는 속았던가요.
내가 두려워한 것이 실은 마음속에 있었는데에도
오히려 세상에 있다고 생각했으니.
7-4. 정당화될 수 없는 것들 * 분노와 공격

모든 사랑스런 생각은 진실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어떤 형태를 띠든 상관없이 곧 치유와 도움을 향한 호소이다.
그 누구라도, 도와달라는 형제의 간청에 대해 분노로 응답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겠는가?
형제에게 기꺼이 주고자 하는 마음밖에 어떠한 응답도 적합하지 못하다.
그가 청하고 있는 것은 오직 그 한 가지 뿐이기 때문이다.
죄책감에 가치를 두는 바로 그 만큼 너는 공격이 정당화되는 세상을 지각하게 될 것이다.
죄책감이 무의미하다고 인식하는 바로 그 만큼 너는, 공격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지각하게 될 것이다.
모든 분노는 누군가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공격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축복받은 자들임을 모른다.
그들은 빼앗겼다고 믿기 때문에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어 주어라, 너의 풍족함을. 그래서 네 형제들에게 그네들의 풍족함을 가르쳐 주어라.
궁핍이라는 그들의 환상에 동조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길 것이다.
만약 네가 남의 실수를 공격한다면 너 자신을 다치게 할 것이다.
형제를 공격한다면 너를 그를 알 수가 없다. 너는 네가 공격하는 대상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안전이란 곧 공격의 완전한 포기이다.
네 공격적인 생각은 투영되기 때문에 너는 공격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공격을 두려워하면, 반드시 너 자신이 견고하지 않다고 믿게 된다.
그러므로 공격적인 생각은, 바로 너 자신의 마음 속, 공격적인 생각이 있는 곳에서 너를 허약하게 만든다.
분노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공격심에는 아무런 바탕이 없다.
바로 여기에서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이 시작되며, 그 해방은 완성될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공포의 꿈 대신 실재의 세계가 주어진다.
왜냐하면 용서가 기댈 곳이 바로 여기이며, 그리고 그것은 다만 자연스러울 뿐이기 때문이다.

7-5. 진리에 맞서는 무기 * 비판

무엇을 알려고 하기보다 비판하려는 마음이 평화를 잃게 하는 원인이다.


너는 모른다.
아무런 비판 없이 너 자신과 네 형제들을 만나는 데에서 오는 그 엄청난 해방감과 평화를.
비판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가두어 놓는다.
그것은 욕망이라는 불안정한 잣대로 실재의 부분들을 갈라놓기 때문이다.
실재를 비판하려 한다면 너는 실재를 알 수 없다.
비판이 들어 갈 때마다 실재는 빠져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비판이 있을 수 없고, 자기가 보는 것에 비난도 있을 수도 없다.
비교는 에고의 도구임에 틀림이 없다.
사랑은 아무런 비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월감은 언제나 비교를 한다.
우월감이란 것은 남에게서 보이는 결함에 의해 성립되며
또 결함이 될만한 것들은 모두 뒤져보고 시야 안에 분명히 들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지탱한다.
그것을 배워라.
잘 배워라.
왜냐하면 바로 여기에서 네가 알지 못하는 시간의 흐름에 의해 지체된 행복의 시간이 단축되기 때문이다.
비판은 진리에 맞서는 무기로 만들어진 것이다.
비판은 자기가 상대하는 것을 분리하여 마치 별개의 것인 양 따로 떼어놓는다.
그리고는 그것을 이용하여 네가 하고픈 것을 만들어 낸다.
비판은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체를 볼 수 없기 때문이고 또 그러므로 잘못 판단하기 때문이다.
지혜는 비판이 아니다.
지혜는 비판의 포기이다.

이미 나 자신을 용서했고 내가 누구인지를 기억했을 때,


나는 내가 보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축복해주는 것입니다.

7- 6. 어리석은 보호자 * 방어

네가 무언가에 대해 방어적이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면 이는 곧 너 자신을 환상과 동일화시켰던 것이다.


방어를 내려놓았을 때 오는 것은 위험이 아니다. 그것은 안전이다. 평화이다.
기쁨이다. 그리고 하나님이다.
갑옷을 입고 세상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지만 누구나 반드시 가슴을 두드려대는 공포심을 갖고 있다.
방어는 무서움을 만들어 낸다. 누군가 나에게 무섭다고 한다면 방어심을 풀 필요가 있다.
방어는 두려움에서 비롯되며, 방어가 이루어질 때마다 두려움은 가중된다.
너는 그것이 안전을 베푼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방어는 실체화된 두려움이며 정당화된 공포라는 것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방어는 단지 미친 환상의 어리석은 보호자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가 뚜렷하게 우리 마음에 밝아 오려면 무방비야말로 필요한 전부이다.
현재 나의 신뢰가 아니라면, 그 어떤 방어라 할지라도 미래를 지배하도록 놔두지 말라.
그러면 이 삶은 진리와의 뜻 깊은 만남이 되리니. 나의 방어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위험에 처하지는 않는다. 나는 방어가 필요하지 않다.
이점을 인식하라. 그러면 방어란 것은 사라지리라.

무방비 안에 나의 안전이 있습니다.

8. 두려움을 사랑으로 바꾸는 일이야말로 모든 치유와 연관된다. * 치유의 인간관계


인간관계는 배움과 치유와 깨우침을 위한 독특한 기회를 제공한다.
치유는 온전해지는 것, 즉 '일체(一體)'를 이루는 것'으로 다양한 접근 방법들이 있다.
이 방법들에 의해 두려움과 결핍에 바탕을 둔 인간관계가 거룩한 관계로 변화될 수 있다.
즉 사랑과 일체성의 깨우침에 걸림돌이 되는 것들이 치워진 거룩한 관계로 말이다.
우리가 죄책감과 슬픔의 무게와 더불어 과거를 놓아주고 현재에 깨어 있기 위한 방법으로서,
우리 자신들과 남들 모두에 대한 용서를 강조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교류를 확립할 수 있고,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또 서로에게서 우리의 진정한 [자아]을 인식하며, 이 공유된 Identity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8-1. 용서는 모든 것을 준다. * 용서를 실행하기

용서해달라고 청하지 말라. 그것은 이미 이루어졌다.


그 보다 용서해주는 법을 배우게 해달라고 청하라. 세상을 용서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이 끝이 있을 수 없음과,
그리고 그분이 창조하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실재가 아님을 너는 알게 되리라.
바로 이 한 문장 속에 우리의 전 과정이 설명되고 있다.
네가 원하는 그 무엇인들 용서가 해줄 수 없겠는가? 평화를 원하는가? 용서가 그것을 준다.
행복과, 고요한 마음과, 목적의 확실함, 그리고 세상을 초월하는 가치와 아름다움의 감각을 원하는가?
보살핌과 안전함, 그리고 늘 확고한 보호와 그 따뜻함을 원하는가?
흐트러지지 않는 고요, 결코 상처받을 수 없는 부드러움, 깊고도 변함없는 위안,
그리고 너무도 완벽하여 절대로 동요될 수 없는 안식을 원하는가?
용서는 이 모든 것을 네게 베푼다. 평화를 원한다면 오직 완전한 용서로만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정작 용서해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는, 바로 그 완전한 용서 안에서 너는 완전히 사면된다.
실재의 세계는 단지 묵은 것에 대한 완전한 용서에 의해 이룩된다.
과거를 용서하고 놓아주어라. 과거란 곧 가버린 것이기에.
두 눈을 들어, 서로의 환상에 대한 완전한 용서에서 태어나는 순결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라.
네가 용서하지 않은 이들을 너는 두려워한다.
그리고 두려움을 곁에 두고는 아무도 사랑에 이르지 못한다.
용서는 언제나 용서를 해주는 사람에 달려 있다.
용서는 네 형제와 너 자신 사이에 버티고 있는 것을 치워준다.
용서는 곧 네가 그와 함께 하며 떨어지지 않고자 하는 바람이다.
어떠한 종류의 공격에도 그에 대한 응답은 용서이다.
그리하여 공격은 그 효력을 상실하고, 미움은 사랑의 이름으로 보답 받는다.
네가 용서하는 사람에게는 너의 환상에 대해 너 자신을 용서하는 힘이 주어진다.
네가 주는 자유라는 선물에 의해 바로 너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다.
너는 줌으로써 받게 될 것이다. 줌과 받음은 같은 것이다.
너 자신에 대한 환상과 이 세상에 대한 환상은 하나이다.
모든 용서는 곧 너 자신을 위한 선물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용서는 이 세상의 크나큰 요구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 세상이 환상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용서하는 사람은 자신을 환상에서 해방시키는 반면,
용서를 억누르고 있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것이다.
용서를 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비판을 일삼는다.
왜냐하면 용서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정당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용서하는 사람은 반드시 진리를 정확히 있는 그대로 반갑게 맞이할 줄 알게 된다.
용서는 행복으로 가는 열쇠이다. 평화를 추구하기 위한 해답이 여기에 있다.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듯한 세상에서 의미를 찾게 하는 열쇠가 여기에 있다.
호시탐탐 너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고, 고요와 평화를 찾고자 하는 네 희망에 불신을 가져다주는,
그 확연한 위험 속에서도 안전으로 가는 길이 여기에 있다.
모든 물음들의 해답이 여기에 있다. 여기서 모든 불신의 끝이 마침내 보장되는 것이다.

나는 세상 모든 것들에게 용서를 보냅니다.


그리하여 내게도 용서가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8-2. 오직 사랑만을 가르쳐라. * 가르침과 배움

조용히 귀를 기울여 보라. 그리고 네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진실을 알도록 하라.
네게 더 이상의 배움은 요구되지 않으리라.
고통을 통해 배워야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부드러운 가르침은 기쁜 마음으로 습득되며 즐겁게 기억된다.
누구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배우고 싶고, 또한 잊지 않고 싶은 법이다.
너의 배움에 세상의 행복이 달려 있다.
사람은 누구나 무언인가를 가르친다. 그리고 시종일관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네가 어떤 전제를 조금이라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불가피하게 취하는 책임이며,
그리고 어떠한 사고체계 없이는 아무도 자신의 삶을 엮어 나갈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종류이든 네가 일단 하나의 사고체계를 발전시켜 왔다면
너는 그 사고체계에 의해 사는 것이고 또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문제는 네가 가르칠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다. 거기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본 과정의 목적은 이렇게 애기할 수 있으리라.
네가 배우고 싶은 것을 바탕으로, 가르치고 싶은 것을 선택하는 방법을 너에게 제시해주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가르치는 것은 곧 배우는 것이요, 그리하여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는 똑같다는 것을.
또한 가르침은 곧 끊임없는 진행형이라는 것을. 가르침과 배움은 지금 네가 가진 가장 큰 힘이다.
그것은 너로 하여금 네 마음을 변화시키며 또 다른 이들을 도와 그들의 마음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늘 명심하라. 너는 네가 믿고 있는 것을 가르치게 될 것이다. "가르침으로써 또한 배우게 되리라."
네가 가르치는 그것이 너를 가르치고 있음을 잊지 말라.
네가 가르치는 것을 너는 자신 안에서 강화시킨다. 왜냐하면 너는 그것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네 모든 형제들에게 빛을 베풀지 않는 한 너는 그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네 손에서 빛을 가져갈 때 너는 그 빛이 너 자신의 것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 어떤 상황도 반드시 너는 무엇이며, 다른 이들은 네게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가르치는 기회인 것이다.
그 이상도 아니지만, 결코 그 이하도 아니다.
그 누구에게도 "나는 당신처럼 되고 싶지 않다."고 가르치지 말라.
네 형제는, 바로 너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다. 네가 가르치는 모든 것을 너는 배우고 있다.
오직 사랑만을 가르쳐라. 그리하여 사랑은 너의 것이며 네가 곧 사랑임을 배워라.
오직 사랑만을 가르쳐라. 너라고 하는 것은 곧 사랑이니까.

8-3. 그를 보듯이 너 자신을 보리라. * 형제를 알아가기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거룩한 만남임을 명심하라.


너는 그 사람을 보듯이 너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그를 대하듯이 너 자신을 대하게 될 것이다.
그를 생각하듯이 너 자신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절대 이것을 잊지 말라.
너는 그 사람 안에서 너 자신을 찾거나 잃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모든 사람 안에 살고 있듯이 모든 사람이 네 안에 살고 있다.
다만 감사만이 네 형제에 대한 합당한 응답이다.
그의 애정 어린 생각 뿐 아니라 도와달라는 호소에 대해서도 그에게 마땅히 고마움을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 두 가지를 진실 되게 지각하기만 한다면
둘 다 네 깨인 의식 속으로 사랑을 가져가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네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형제로 인식하라.
오직 평등한 관계만이 평화롭기 때문이다.
네 형제들을 너 자신으로 볼 때 너는 해방될 것이다.
형제를 위해, 평화만이 네가 원하는 전부일 때 비로소 너는 형제의 진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위해 원하는 것을 너도 받게 될 것이다.
진실인즉, 함께 서 있는 너와 네 형제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네가 형제를 쳐다 볼 때마다 너희 둘 앞에 그리스도가 서 계신다.
네 형제의 잘못을 꿈꾸며 지내는 대신 그의 너그러움을 꿈꾸어라.
그가 입혔던 상처를 세어보는 대신 그의 사려 깊음을 꿈꾸어라.
그의 환상을 용서하라. 그리고 그에게 받았던 모든 도움에 감사하라.
또한 그가 네 꿈속에서는 완전치 못하다는 이유로 그가 준 수많은 선물들을 저버리지 말라.
네 형제의 꿈은 무시해 버려도 된다.
너는 형제의 환상을 그토록 완전하게 용서해 줄 수 있기에 그는 네 꿈으로부터 구원자가 되는 것이다.
네게 달려 있는 것은 형제를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단지 있는 그대로 그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네 형제가 너와의 공동 창조자임을 알기 전에는
네가 바로 하나님과의 공동 창조자임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나와 하나인 내 형제에게 평화.


우리를 통해 모든 세상이 평화의 축복을 받게 하소서.

8-4.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 치유와 온전함

모든 하나하나의 상황은, 올바로 인식되기만 한다면 치유를 위한 기회가 된다.


치유란 본질적으로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치유란 과거로부터의 해방이다.
너는 형제 한 사람의 가치를 깨달음으로써 그를 치유하는 것이다.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곧 너 자신을 치유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분 홀로 기억될 수 없다. 바로 이것이 네가 잊고 있었던 점이다.
그러므로 네 형제의 치유를 너 자신의 치유로 인식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기억하는 길이다.
네 안에서 빛나고 있는 하나님의 반영(反映)이 온 세상에 가져다 줄 수 있는 그 치유의 위력을
단 한 순간이라도 깨달을 수만 있다면 너는 세상을 치유하는 거룩한 형상을 받아들이기 위해
네 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하는 일을 기다리기만 할 수 없으리라.
우리는 온전하다고 하는 열망 속에서 온전하게 된다.
오직 치유되기만을 바란다면 너는 치유된다. 단 하나의 목적이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병이 분리하는 마음들에서 생겨나듯이 치유는 곧 결합하는 마음들에서 오는 결과이다.
치유되는 사람들은 치유의 도구가 된다. 용서하는 것이 곧 치유하는 것이다.

병이란 진실에 맞서는 방어입니다. 나는 [나라고 하는 그것]의 진실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내 마음이 온전히 치유되게 할 것입니다.
나는 오직 진실로 도움이 되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나는 나를 보내신 [그분]을 나타내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행할지를 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보내신 [그분]이 나를 주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분]이 바라는 곳이면 그 어디든 흡족하며 [그분]이 거기 나와 함께 가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이 내게 치유를 가르치시도록 놔둘 때 나는 치유될 것입니다.
8-5. 너와 나의 관계 속에 세상의 빛이 있다. * 거룩한 관계

형제들과 함께 해왔던 이들은, 에고가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믿음을 스스로 멀리해 온 사람들이다.
거룩한 관계란, 진실로는 <나의 한 부분인 그것>과 함께 하는 관계이다.
거룩하지 못한 관계는 차별에 바탕을 두며,
이 관계 속에서는 서로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상대방은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거룩한 관계는 다른 전제에서 출발한다.
각자는 이미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았고, 또 아무런 부족함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 사람은 자신의 완성을 받아들이면서 자신과 같이 온전한, 다른 이와 함께 함으로써 그 완성을 드높인다.
그는 이 자아들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보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육체의 차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너처럼 창조된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기 전에는 너 자신의 완전함을 알 수 없다.
기꺼이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려고 할 때
너는 흔쾌히 일치된 교류로 들어가고자 할 뿐 아니라 평화와 기쁨 또한 헤아리게 될 것이다.
<왕국>은 그 홀로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왕국> 자체인 너 역시 너 자신을 홀로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라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걷어 올리지 못할 장막이란 없다.
진리를 네 인간관계를 위한 목표로 받아들였을 때 이미 너는 평화의 전달자가 된 것이다.
인간관계가 평화의 도구가 되어버린 이상 어떠한 환상도 그 평화를 어지럽힐 수 없다.
다른 이와 관계 속에 이 세상의 빛이 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함께라면 우리의 마음은 분리된 부분들의 힘을 훨씬 능가하는 그 무엇으로 융화된다.
분리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 마음속에, 우리 마음으로서 확립된다.
이 <마음>은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에 완벽한 것이다.

당신은 나와 하나인 <SELF>이며, 이 <자아> 안에 있는


우리의 <창조주>와 합치되어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존중함은 나의 존재 때문이며
그리고 우리 둘을 하나로 사랑하시는 그 분의 존재 때문입니다.

9. 평화는 사랑이 머무르는 상태이자 사랑 자체를 나누려고 추구하는 상태이다.


* 평화로운 대안
마음은 오직 평화로울 때만이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아울러
사랑과 기쁨 그리고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의 기억이라는 해방의 영향력에
열려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바로 이 경험 안에서 우리의 온전함과 <자아>, 그리고 구원을 회복하는 길이다.

9-1. 머무를 곳은 여기가 아니다. * 귀향

사랑하기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너는 헤쳐 나가지 않겠느냐?


이 여행은 그처럼 보이니까.
그것은, 결코 변한 적이 없었던 하나의 목표를 향해 떠나는 여행, 거리(距離)가 없는 여행이다.
너는 여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영원 속에서 머무른다.
너는 다만 꿈속에서 여행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안전한 곳은 고향이다. 무릇 여행이라는 것은 없다.
오직 하나의 깨우침이 있을 뿐.
각자 따로 떠났던 여행, 그리고 그 어떤 곳으로도 인도하지 못한, 길고도 무의미한 여행 후에야
너희는 함께 고향에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너는 네 형제를 찾았고 서로의 길에 빛을 비추리라.

나는 한 순간을 고요히 멈추고 고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9-2. 오늘 자유로워져라.

중요한 것은 어서 너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일이다.


네가 만약 다른 마음들에게 평화를 주려 한다면 너 자신이 갈등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포로로 잡아두지 말아. 묶어두려 하지 말고 풀어주어라.
그래야 네가 자유로워진다.
너는 자유를 포기할 만큼 자유롭지는 않다. 단지 자유를 부정할 만큼만 자유로울 뿐.
단 한사람의 '노예'가 이 땅에 걸어 다니는 한 너의 자유는 완전하지 못하다.
오늘 자유로워져라.
그리하여 아직도 스스로를 육체 속에 갇힌 노예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네 자유의 선물을 건네주어라.
너는 자유로워져라.
그래서 <성령>은 굴레에서의 너의 탈출을 이용하여 자신들이 얽매여 있고 절망적이며 무섭다고 여기는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으리라.
사랑으로 하여금 너를 통해 그들의 두려움에 대체하게 하라.

나는 당신을 나 자신의 한 부분으로서 성령께 드립니다.


당신을 이용하여 나 자신을 구속하고 싶지 않은 이상
당신이 해방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내 자유의 이름으로 당신의 해방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가 다 함께 해방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9-3. 구원은 큰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 구원

관념을 바꾸는 것이 곧 구원의 과업이다.


기뻐하라. 정녕 구원이 요구하는 것은 그다지도 작고, 대단치 않으니.
실제로 구원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리고 심지어 환상 속에서조차 다만 용서가 두려움을 대신하길 요구할 뿐이다.
구원은 곧 풀어 버리는 것이다.
구원은 단지 관념에서의 탈피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마음에서 환상을 걷어 올리는 사람들이야말로 이 세상의 구원자들이다.

구원은 나의 유일 자아[SELF]로부터 옵니다.


9-4. 네가 바로 사랑이다. * 사랑

사랑은 진정으로 사랑을 원하는 어떤 마음속으로든 당장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원해야만 합니다.
당신이 할 일은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 내부에서 당신이 사랑에 대항하여 세운
모든 장벽들을 찾아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시간이 아니라 환대를 따라갑니다.
당신이 오직 사랑만을 원할 때, 당신에겐 그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이 함께 나누는 것이라면, 사랑 자체를 통하지 않고서 어떻게 사랑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을 주십시오. 그러면 사랑이 당신에게로 올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 자신에게 끌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격심을 준다면, 사랑은 숨어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오직 평화 속에서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진실만을 바라보는 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거기에서 사랑은 사랑 자신을 보는 까닭입니다.
당신 내부에 있는 사랑으로는, 그 사랑을 확대하는 것 이외에는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필요한 게 없습니다.
당신은 혼자서 사랑을 환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혼자서는 신을 알 수 없으니, 그것은 신이 당신의 형제 없이는 당신을 알 수 없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함께라면 당신은 사랑을 알지 못할 수가 없으니,
그것은 사랑이 당신을 알지 못하거나 혹은 당신 속에 있는 사랑 자신을 알아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은총이란 겉으로 보이는 증오와 두려움의 세계 안에서 신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감사의 마음은 사랑과 손에 손을 잡고 가고 하나가 있는 곳에는 다른 하나가 반드시 있습니다.
신뢰 없는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사랑은 당신에게 모든 방어물들을 단지 어리석은 것으로 내려놓으라고 청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당신인 것을 기억할 것을 당신에게 가르쳐 줌을 목적으로 하는 수업이라면
진정으로 당신인 것과 사랑인 것 사이에는 결코 차이가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사랑이 의미하는 바에 관해 당신이 아주 어렴풋한 인식이라도 성취했다면
당신은 잴 수 없는 거리만큼을 당신의 해방을 향해 전진할 것입니다.
당신의 내부에 있는 신의 사랑을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것을 도처에서 볼 것입니다.

그것은 도처에 있기에. 사랑. 그것이 나를 창조했고 그것이 나이다.

9-5. 하나님은 내면에 머무르신다. * 하나님을 향한 깨우침

하나님에 대한 기억은 오직 기억하기로 한 마음에서만,


그리고 실재를 조종하려는 비정상적 욕망을 버린 마음에서만 떠오를 수 있다.
자기 자신조차 조종하지 못하는 네가, 하물며 이 우주를 조종하겠다고 나설 수는 없으리라.
다만 꼭 필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훈련시켜 그 모든 하찮고 당치도 않은 목표들을 무시해 버리고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이란 점을 명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보는 것은 곧 너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면에 머무르신다.
너를 위한 하나님의 뜻은 곧 온전한 행복이다.
하나님께 향하는 여행이란
단순히 [내가 늘 있는 그곳]과 [영원토록 나라고 하는 그것]에 대한 앎을 다시 깨우치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환상이 이 세상을 장악하기 전에 우리가 알았던


태고의 진리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번 다음과 같이 말할 때마다
세상은 이미 모든 환상에서 벗어나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하나님은 오직 사랑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나 역시 그러합니다. "

9-6. 너는 이미 갖고 있다. * 평화의 조건들

평화는 필연적이다. 평화를 주는 사람들에게는.


평화는 네 안에 있는 한 성분이다. 너는 바깥에서 그것을 찾을 수 없다.
평화에 대한 바램이 진정한 바램일 때 평화를 찾는 방법이 주어진다.
정직하게 평화를 구하는 개개의 마음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말이다.
가르침이 그 어떤 형태를 띠더라도 그것은, 만약 그 사람의 간구가 진지하다면,
그 사람이 놓칠 수 없게끔 그를 위해 계획된 형태이다.
그러나 만약 그의 간구가 진지하지 않다면, 받아들임을 통해 진정으로 습득될 가르침의 형태란 없다.
"나는 하나님의 평화를 원합니다"
입으로만 이 말을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이 말을 하는 것은 모든 것이다.
진심으로 평화를 원하는 마음은 반드시 다른 마음들과 한데 어울리기 마련이다.
평화를 얻게 되는 연유가 바로 그것이다.
평화를 구하는 유일한 길은 평화를 가르치는 것이다.
네게 필요한 만큼 세상도 평화가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느냐?
네가 받고 싶은 만큼 세상에다 평화를 주고 싶지 않느냐?
그렇지 않는 한, 너는 평화를 받지 못하리니.
평화를 드넓혀야 할 너의 사명을 받아들였을 때 너의 평화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평화는, 드러나게 함으로써 보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평화를 세상 안으로 들게 하기 위해 네가 왔음을 명심하라.
평화가 곧 진리와 온전함의 조건이요, 또 이들이 없이 평화가 있을 수 없다면,
반드시 평화가 있는 곳에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하나님에 대한 기억은 고요한 마음에 깃든다.
갈등이 있는 곳에 그 기억이 다가올 수 없는 까닭은, 스스로에 맞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마음은
영원한 온유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묵상에 잠긴 마음 속으로 마침내 그 빛이 들어가게 될 때,
혹은 누군가 드디어 그 목표를 달성할 때,
언제나 따라오는 것은 다만 한 가지 행복한 깨달음이다.
"나는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평화를 막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그리고 공격심이 그 나름대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 안에 놓여 있는 평화를 인식할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주는 사람들은, 세상이 파괴할 수 없는 [천국]에서 고향을 찾은 것이다.
그곳의 평화는 이 세상을 담고도 남을 만큼 크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평화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것을 못 찾을 리 없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부정하여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않게 해달라고 청하기 때문이다.
청하는 것을 이미 갖고 있다면 그 누가 만족하지 못하겠는가?
하나님의 평화는 지금 네 안에서,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 안에서 빛나고 있다.
그것은 고요함 안에서 우주 보편적으로 인지된다.
하나님의 평화가 지금 내 안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바로 그 평화 안에서 만물이 내게 빛나게 하소서.
그리고 나는 내 안에 있는 그 빛으로 그들을 축복하게 하소서.

9-7. 왜 천국을 기다리고만 있느냐! * 빛과 기쁨

너는 세상의 빛이다.
그 빛은 네 안에 있다.
어둠은 빛을 가릴 수 있으나 꺼 버릴 수는 없다.
왜 천국을 기다리고만 있느냐?
빛을 찾고 있는 사람들은 단지 자신들의 눈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빛은 지금 그들 안에 있다.
깨달음은 다만 인식일 뿐 전혀 변화가 아니다.
사랑과 기쁨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기쁨에는 아무런 대가가 없다.
그것은 너의 신성한 권리이다.
너는 바로 오늘 모든 고통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다.
성심껏 수련하라.
선물은 너의 것이다.

용서는 세상의 빛으로서의 내 기능입니다.


내 형제여, 평화와 기쁨을 난 당신께 드립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평화와 기쁨이 내 것으로 될지니.

10. 새로운 시작

어느덧 이미지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시간이 올 것이다.


그 때 너는 결국 네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보게 되리라.
바로 이 밀봉되지 않은, 열린 마음이야말로 거리낌없고 얽매임 없이 진리가 돌아오는 곳이다.
[자아]에 대한 관념이 치워진 곳에 진리는 정확히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이제 한 순간 멈춰 서서 우리가 배워 왔던 모든 것들, 우리가 가졌던 모든 생각들, 그리고
사물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우리가 지녔던 모든 선입관을 잊어버리자.
이 세상의 존재 이유에 대한 우리만의 사념(思念)들을 이제 기억하지 말도록 하자.
우리는 모르는 것이다.
개개인에 대해 지녔던 개개의 이미지가 우리 마음으로부터 헐거워져 쓸려가 버리게 하자.
비판에 때 묻지 말고, 그 누군가에 대해 네 마음에 떠오르는
선이나 악에 관한 어떠한 생각들도 의식하지 말라.
이제 너는 그를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너는 자유롭게 그에 관해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새롭게 배울 수 있다.
조용히 있기만 하라.
오늘 너의 수련이 세상에 관한 생각 너머로 너를 들어올리게 하기 위해, 그리고
육체의 눈으로부터 네 시각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이 밖에 아무런 규칙도 필요치 않으리라.
다만 고요히 멈추고 귀를 귀울여라.
단지 이렇게만 해보라.
고요히 멈추고, 네가 무엇이고 하느님은 무엇인지, 그 모든 생각들을 접어두어라.
세상에 관해 배워 왔던 모든 개념들, 너 자신에 관해 품고 있던 모든 이미지들을 접어두어라.
네 마음이 생각하기에 옳다 아니면 그르다, 좋다 아니면 나쁘다라는 모든 것으로부터,
또 네 마음이 가치 있다고 판단하는 모든 생각으로부터,
그리고 네 마음이 창피하다고 여기는 그 모든 사념들로부터 네 마음을 비워라.
아무것도 붙잡지 말라.
과거가 가르쳐 준 단 한가지 생각도,
또는 전에 네가 그 무엇으로부터 배웠던 단 하나의 믿음도 남기지 말라.
이 세상을 잊어 버려라.
이 과정을 잊어 버려라.
그리고 완전히 텅 빈 손으로 네 하느님께 다가가라.

<마음에는 기적의 씨앗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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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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