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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향 인문과학논총 제39권 3호 pp.

181-209

동아시아의 문화냉전과 영화의 위상


: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1)

위경혜**
2)

국문초록

이 글은 반둥회의부터 베트남전쟁까지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동남아 주요 국


가 영화의 위상을 통하여 문화냉전의 양상을 살핀 것이다. 연구를 위하여 동남아
시아영화제와 영화 상영 공간 그리고 역사적 텍스트로서 <액트 오브 킬링 The
Act of Killing>를 분석했다. 1960년대 중반 인도네시아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하
여 살펴본 바, 영화제는 2차 세계 대전이후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하는 통로였으
나 동시에 그것의 불가능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신중국’의 등장과 동북아 최전선
반공 기지로서 한국의 수립, 한일수교에 이은 냉전의 분업 형성 그리고 ‘비동맹
중립’ 국가를 모색했으나 결국 사회주의로 경도된 인도네시아 등 물리적 거리와
이념을 초월하여 관통된 문화냉전의 일면이었다. 냉전기 동남아시아의 영화 상영
공간에 대한 현지인의 해석과 의미부여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꾸린 자들
을 살펴본 바, 종족과 이산 그리고 문화 번역의 문제는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동

* 이 논문은 2018년 정부(문화체육관광부)의 재원으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지원


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ACC-2018-RF-07).
** 전남대학교 사회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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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시아 지역 사회의 정치사회적 상황에 따라 달리 나타났다. 나아가 미국 주도


의 문화냉전 구축 형성에 대하여 저항 또는 협동하는 과정에서 영화를 둘러싼 일
상은 해당 국가 구성원의 삶을 구성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주제어: 대학살, 문화냉전, 미공보원, 동남아시아영화제, 베트남전쟁, <액트


오브 킬링>, 영화 상영, 이동영사, 인도네시아, 중국, 항미원조, 프
리만

I. 서론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후반까지 한국영화의 중흥 시기로 불리는


기간 동안 극장은 문화 담론의 시대적 아이콘(icon)이었다. 극장은 오락장이
자 재건(再建)을 앞세운 국가 권력의 전시장이자 미소 대립 구도에 따른 문
화냉전(cultural cold war)을 구축하는 주요 장소가 되었다. 그만큼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 정점의 ‘자유아시아’ 형성에 있어서 영화의 역할이 절대적이
었음을 말한다. 영화는 물리적으로 특정한 공간에 세워진 건물을 포함하여
가설극장 그리고 비(非)극장으로 분류되는 문화원에서도 상영되었다.
이 글이 주목하는 시기는 1955년 반둥회의(Bandung Conference) 개최부
터 1960년대 중반 베트남전쟁까지이며 특별히 인도네시아에 관심을 둔다. 그
동안 한국전쟁 이후 영화를 중심으로 문화냉전의 양상을 규명한 다수의 성과
가 이뤄져왔다.1) 하지만 기존 연구는 일국(一國) 차원에서 주로 이뤄지면서

1)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 양대 진영은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 진영 사람들의 “정


신과 마음”을 “보다 은밀하고 정치적이며 교묘한 방식으로” 얻기 위한 작업을 수
행한다. 이를 위하여 대중문화에 속하는 선전 포스터, 라디오 방송, 잡지, 재즈밴
드, 발레단, 오케스트라 등 사업을 펼쳤다. 문화냉전으로 일컫는 이러한 작업은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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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기 동아시아 맥락에서 연동된 문화냉전의 보편성과 개별성에 관한 성찰


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따라서 이 글은 한국과 함께 역사적 사건을 공유하
거나 해당 사건의 자장에 놓인 동남아시아 특정 국가를 중심으로 문화냉전
양상에 관한 이해를 확장하고자 한다.
인도네시아는 1965년 한일수교와 베트남전쟁 참전 등 냉전체제의 분업 형
성에 따른 한국 사회 변화와 긴밀히 연관된다. 무엇보다도 인도네시아는 제2
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선 ‘제3의 역
사적인 길’을 모색한 국가라는 점에서 탈냉전 시기 참고 대상으로서 대표성
을 지닌다. 특히, 인도네시아의 건국 당시와 다른 방향으로 국가 체제를 전환
시킨 1965년 ‘대학살(genocide)’은2)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극장 문화와 비
교 및 참고 대상이 된다.
동남아시아 특히 인도네시아의 정치와 문화에 관한 연구는 다수 이뤄졌지
만, 문화 분야 가운데 영화 관련 연구는 드물다. 소수 존재하는 영어권 영화
연구는 거의 2대 대통령 수하르토(Soeharto) 집권(1968~1988) 시기에 집중
된 상황이다. 즉, 반제국주의와 비동맹노선을 취한 수카르노와 달리 미국을
포함한 서방 여러 나라와 밀착한 관계를 유지한 ‘신체제’ 형성 이후에 관한
연구가 대부분이다.3) 따라서 이 글에서 구체적으로 다룰 내용은 1945년 이

계적으로 1990년대 들어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한국의 경우 영화와 극장 그리고


아시아재단 등에 걸친 다양한 주제에 대한 연구가 이뤄졌다. 이에 대하여 다음을
참고. Charles K. Armstrong, The Cultural Cold War in Korea, 1945-1950,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62. No. 1, 2003, pp. 71-99.
2) ‘대학살’은 1965년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Partai Komunis Indonesia)의 쿠데타
를 진압한 인도네시아 군부(the Indonesian military leadership)의 역(逆) 쿠데타
이후 발생한 대량 인민학살을 칭한다. 즉, 동년 9월 30일 수카르노를 지지하는 공
산주의자들이 군부 고위 사령관 6명과 국방부 장관 부관을 살해하는 일종의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해당 쿠데타는 하루 만에 진압되었고, 쿠데타에 연루
되었다는 의혹으로 1966년 5월 수카르노 대통령은 실각당한다. 쿠데타 진압에 앞
장선 수하르토(Soeharto)는 권력을 장악하고 군부와 대척점에 있던 공산당을 와
해시키면서 인도네시아 민간인에 대한 대학살을 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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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인도네시아에서 차지하는 영화 및 동남아시아영


화제의 위상 그리고 영화 상영에 관여한 인적 집단의 활동 등이다. 연구를
바탕으로 특정 국가가 처한 역사적 맥락에서 발현된 문화냉전의 개별적 양상
을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II. 문화냉전 체제의 영화와 영화제

1. 동남아시아영화제가 남긴 문제의식

1955년 4월 18일부터 24일까지 인도네시아 자바(Java)의 반둥에서 반둥


회의가 열렸다.4)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포함하여 전체 29개국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특별히 주목을 받은 국가는 두 곳이었다. 하나는 냉전체제 아시아
의 중심을 환기시킨 ‘신중국’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미소 대립을 넘어 ‘비동
맹’ 모델을 주도적으로 모색한 인도네시아였다.
중국은 1950년 한국전쟁에 참여하면서 신생 사회주의 국가로서 자신의 존
재를 이미 드러낸 바 있다.5) 하지만 중국의 반둥회의 참석은 아시아 적대 전

3) 이에 대하여 다음을 참고. 안청시 · 전제성 엮음, 『한국의 동남아시아 연구: 역사,
현황 및 분석』,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9.
4) 반둥회의는 인도네시아, 중화인민공화국, 인도, 이집트 그리고 유고슬라비아를 중
심으로 열렸다. 한국과 북한, 대만,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리고 이스라엘 등은 반공
과 호전성 그리고 인종 차별주의 등을 이유로 회의에서 제외되었다. 강준만, 『세
계문화 사전: 지식의 세계화를 위하여』, 인물과 사상, 2005, pp. 653-657.
5) 중화인민공화국은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의 기치 아래 ‘중국인민
지원군’을 동원하여 한국전쟁에 참여했다. 한국전쟁 참전은 새로운 국가로서 중국
건설과 구성원의 통합 그리고 냉전 구도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위상을 재고시켰다.
강월전(康月田), 「항미원조 전쟁 동원의 회고 및 고찰(抗美援朝战争动员的回顾
与思考)」, 『군사역사(军事历史)』 2000년 제5기(期), 2000, pp. 34-39; 진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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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미소(美蘇) 대결에서 미중(美中) 대결’로 이동시키는 한편으로 중국을


아시아의 중심으로 다시 상상하도록 만들었다.6) ‘신중국’은 반둥회의에 참여
한 29개국 가운데 22개 국가와 외교 관계를 형성하지 않았지만, 동남아시아
의 국민국가 형성과 관련하여 의미심장한 존재였다. 1945년 이후 서구 제국
으로부터 독립한 동남아시아가 국경(영토)의 문제와 더불어 다양한 종족으로
인한 국민 통합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7) 즉, 동남아에 다수 분포
된 화교(華僑)는 냉전체제와 연동된 국민국가 형성의 주요 고려 대상이었다.
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화인(華人)’이 살고 있는8) 인도네시아에게 더
욱 특별한 문제였다.
1946년 빤짜실라(Pantja Sila) 대원칙을 통해 천명한 바와 같이9) 미소의

「한국전쟁 시기 ‘중국군’의 참전과 동원 유형 및 구성에 관한 연구」, 『정신문화


연구』39(4), 2016, pp. 37-71.
6) 이병한, 「‘두 개의 중국’과 화교정책의 분기 ― 반둥회의(1955) 전후를 중심으로
―」, 『중국근현대사연구』 45, 2010, pp. 95-128; 장세진, 「안티테제로서의
‘반둥정신(Bandung Spirit)’과 한국의 아시아 상상(1955~1965), 『사이間SAI』
15, 2013, pp. 135-169. 장세진에 따르면, 반둥회의 개최로 인한 ‘아시아 상상’
은 글로벌 차원의 냉전 서사와 아시아 각국 현지의 내셔널리즘과 긴밀히 결부되
었다.
7) 박경태, 「’화교(華僑)’에서 ‘화인(華人)’으로- 식민시기와 냉전시기 인도네시아의
화인 정책」, 『다문화사회연구』2(2), 2009, pp. 34-35.
8) 박경태, 앞의 글, pp. 41-45. 박경태는 정치적 법률적 속성을 반영하는 화교(華
僑)라는 용어 대신에 민족적 속성을 반영하는 화인(華人)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화인은 중국 국적의 유무에 상관없이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는 점 역시
지적한다.
9) 1946년 6월 1일 수카르노가 행한 연설인 ‘빤짜실라의 탄생(The Birth of Panca
Sila)’을 말한다. ‘자유 인도네시아’를 위한 다섯 가지 원칙을 의미하는 빤짜실라
(Pantja Sila)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세계주의(cosmopolitanism)가 아니라 민
족주의를 인정하는 국제주의를 지향하고 동의와 협의에 기반을 둔 대의정치(代議
政體)를 시행하며 서구식 민주주의가 아니라 정치적 평등을 포함한 경제 분야에
서도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 정의 원칙을 지향하였다. 또한 원칙은 알라(Allah)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였다. 클라이브 크리스티 편저 · 노영순 옮김, 『20세기 동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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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구도를 넘어 ‘중립아시아’를 모색한 인도네시아에게 반둥회의 개최는 상


징적인 일이었다. 실제로 아시아에 대한 논의는 반둥회의보다 1여 년 앞서
1954년 5월 8일 열린 동남아시아영화제(the Southeast Asian Film Festival
약칭 ‘영화제’)에서 먼저 제기되었다.10) ‘영화제’ 개최는 1953년 11월 필리
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영화제작가연맹(FPA, Federation of Motion
Picture Producers in Asia, 약칭 ‘연맹’)에 기원을 두었다.11)
‘영화제’ 개최는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에게도 각별하게 다가왔
다. ‘연맹’에 참여한 영화감독 우스마르 이스마일(Usmar Ismail)과 말릭
(Djamaluddin Malik)은 인도네시아 영화의 지도자로 불리는 자들이었고, 이
들은 수카르노와 정치적 견해를 공유했기 때문이다. 이스마일의 영화는 1945
년 이후 4년 동안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위해 투쟁한 내용을 다뤘으며, 말
릭은 수카르노의 지원으로 영화사 페르사리 회사(Persari Company)를 설립
하고 스튜디오를 건립했다.12) 영화는 다수의 종족과 언어 그리고 종교로 구
성된 인도네시아에게 정치적 공동체 형성을 위한 주요한 매체로 인식되었다.
신생 독립국가로서 인도네시아가 영화와 맺은 상관관계는 영화 제작 편수를
통해 먼저 확인된다. 즉, 네덜란드와 벌인 독립 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950
년 인도네시아의 극영화(feature films) 제작 편수는 전년도 8편에서 23편으

아시아의 역사』, 심산, 2004, pp. 216-227.


10) 동남아시아영화제는 1957년부터 ‘동남아’를 삭제하고 ‘아시아영화제’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1982년 ‘태평양’이라는 용어를 추가하여 ‘아시아태평양영화제’로 바
뀌었다. 인도네시아의 동남아시아 명칭은 Festival Film Asia Pasifik(약칭 FFAP)
이다.
11) 아시아영화제작가연맹의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자는 인도네시아 영화감독
우스마르 이스마일과 말릭을 포함한 필리핀의 마누엘 레온(Manual de Leon), 일
본의 마사이치 나가타(Masaichi Nagata) 그리고 홍콩의 런 쇼(Run Shaw)였다.
Katinka van Heeren, “Contemporary Indonesian Film: Spirits of Reform and
Ghosts from the Past”, PhD diss., Universiteit Leiden, 2009, p.27.
12) David Hanan, Cultural Specificity in Indonesian Film: Diversity in Unity,
Palgrave Macmillan, 2017, pp. 6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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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세 배 가까이 늘었으며, 이러한 증가 추세는 1955년 65편을 기록하면서


정점을 찍었다.13)
무엇보다도 일본의 참여에도 불구하고 ‘영화제’ 명칭을 ‘동남아시아’로 표
기한 것은 아시아 문화 연대의 주도국으로서 인도네시아의 위상을 부각시킨
작업이었다. 하지만 1945년 이전 일본과 동남아 국가 간 ‘구 제국-구 식민’
이 남긴 청산되지 않은 역사 문제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체제 형성은
‘영화제’의 성격을 동남아 각국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
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두 차례에 걸친 인도네시아의 ‘영화제’ 불참을 통해서
나타났다. 첫 번째 불참은 1954년 제1회 동남아시아영화제를 동경에서 개최
했을 때였다. 해당 영화제에 출품할 영화를 제작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일본과 냉랭한 외교적 관계를 이유로, 수카르노는 자국의 영화사 페르피니-
페르사리(Perfini-Persari)14)와 일본의 공동 영화 제작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두 번째 불참은 1968년에 일어났는데, 1965년부터 1966년 초반까
지 군부 쿠데타와 ‘대학살’에 따른 정치적인 혼란으로 영화제에 출품할 작품
을 제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15)
인도네시아가 ‘영화제’ 개최를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가운데 흥미로운 일이
발생했다. 1956년과 1960년 각각 인도네시아가 ‘영화제’ 주최를 요구했으나
모두 거절된 사건이다. 1956년 인도네시아의 ‘영화제’ 주최 희망은 영화를
통하여 독립 국가로서 자신의 존재를 세계적으로 승인을 받는 한편으로 내적
으로 국민의 결속을 다지려는 의도였다. 나아가 반둥회의 개최국으로서 입지

13) Karl G. Heider, Indonesian Cinema: National Culture on Screen,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1, p.19; 이는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던
1957년과 1958년 사이 제작 작품 수가 세 배의 차이를 보인 한국의 상황과 유사
하다.
14) 페르피니-페르사리(Perfini-Persari)는 각각 이스마일과 말릭이 설립한 영화 제
작사이다.
15) Katinka van Heeren, 위의 글, pp. 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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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다져 아시아의 문화적 연대를 주도하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1955년 65편이라는 독립 이후 최고 수치의 작품 제작과 이스마일
의 ‘연맹’ 부회장 직함에도 불구하고16) 1956년 인도네시아의 ‘영화제’ 개최
희망은 무산되었다. 그것은 ‘영화제’ 주최 측이 반제와 반식민 노선을 따르는
수카르노의 정치적 입장을 존중하지 않은 결과였다.17) 1954년 제1회 ‘영화
제’ 개최 당시 인도네시아가 중국과 북한을 ‘영화제’에 참가시킬 것을 발언한
사실 역시 그러한 결정에 영향을 끼쳤다. ‘영화제’ 개최 국가는 특정 국가의
영화제 입회를 허가하거나 또는 옵서버(observer)로서 초청 권한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18) 즉, 인도네시아의 ‘영화제’ 개최는 대만과 한국을 불참
대상 국가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인도네시아의 ‘영화제’
불참과 ‘영화제’ 개최 시도의 좌절은 중립아시아의 건설 매개로서 ‘영화제’를
반공의 문화냉전 블록(bloc) 형성의 에이전트(agent)로 만들었다. 즉, 1965년
인도네시아가 ‘연맹’을 탈퇴하자 이사장 나가타 마사이치(永田雅一)가 ‘연맹’
의 가입 조건을 ‘자유 민주국가’로 한정한다고 밝힌 것이다.19) 참고로, 1964
년 8월 17일 수카르노가 사회주의 노선을 분명히 제시한 ‘위험하게 산 해(A
Year of Living Dangerously)’의 연설 역시 ‘연맹’의 결정에 영향을 끼친 것
으로 짐작된다.20)
인도네시아의 첫 번째 ‘영화제’ 개최 요구가 좌절되자 1956년 영화 제작

16) 이영재, 「아시아영화제와 한홍합작 시대극-‘아시아영화’라는 범주의 생성과 냉


전」, 『대동문화연구』88, 2014, p.276.
17) Katinka van Heeren, 위의 글, p.28.
18) 「동남아영화제의 수확, 차기 주최국 결정에 한국 의사 반영」, 『경향신문』
1955년 6월 1일 4면.
19) 「방화 네 편을 공개: 명년도엔 마련(馬聯)서 열기로」, 『동아일보』 1965년 5
월 12일 3면.
20) 인도네시아가 처음으로 아시아영화제(1957년 동남아시아영화제에서 아시아영화
제로 개칭)를 주최한 것은 반공 이념에 기반을 둔 수하르토 집권 이후인 1970년
6월의 일이었다. Katinka van Heeren, 위의 글, p.28.
동아시아의 문화냉전과 영화의 위상
: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189

편수는 전년 대비 절반에 가까운 36편으로 줄었으며, 그러한 감소 추세는


1959년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두 번째로 ‘영화제’ 개최를 요청한 1960년 제
작 편수는 전년 대비 두 배로 반등하여 38편을 기록했다.21) 이는 신생 독립
국가에서 차지하는 영화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즉, 동남아시아영화
제는 영화제에 참여한 국가의 정치와 영화 산업을 둘러싼 이해관계의 압축판
이었다. ‘영화제’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을 앞세우며
아시아 번영의 주체를 자처한 일본에게 재기(再起)의 기회였고, 중화인민공화
국의 수립과 함께 대륙의 광활한 영화 시장을 상실한 홍콩에게 동남아시아
시장 개척의 기회였다.22) 하지만 그것은 인도네시아에게 반제와 반할리우드
(anti-Hollywood) 그리고 제3의 역사적 발전 경로를 모색한 기회였다. 하지
만 아시아의 호명 아래 상충하는 욕망의 경합 장소였던 ‘영화제’는 중립아시
아를 지향한 인도네시아에게 실험장이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 인도네시아
는 ‘다양성 속의 통합(Unity in Diversity)’이라는 통치 이념을 달성하기에 너
무나도 벅찬 냉전의 소용돌이 가운데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2. 문화냉전과 영화 그리고 영화 상영 공간

영화를 통하여 국민국가 형성을 대내외적으로 승인 받으려는 인도네시아의


시도는 인구 가운데 다수를 차지한 화교와도 연관되었다. 수카르노 정권은
화교에 대하여 경제적인 제재만 가할 뿐 정치와 문화를 수용하는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즉, 화교에 의해 장악된 유통 및 소규모 생산 부문을
회수한 인도네시아 토착 엘리트의 제재마저도 국민 형성을 위한 선전 작업으
로 해석될 정도로 긍정적이었다.23) 영화 산업의 경우, 1950년대 화교는 인

21) 1960년대 회복한 인도네시아의 영화 편수는 1961년부터 다시 감소하기 시작하


여 1968년 최저인 8편을 제작하는 데 그친다. Karl G. Heider, 앞의 책, p.19.
22) 이영재, 「아시아영화제와 한홍합작 시대극-‘아시아영화’라는 범주의 생성과 냉
전. 대동문화연구」, 88, 2014, pp. 263-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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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네시아 영화 제작사의 대부분을 소유했으며, 1960년대 중반 인도네시아 극


장의 90%를 소유할 정도로24)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수카르노 정권의 화교에 대한 태도는 미국 문화의 영향력 아래 놓인 인근
국가의 모습과 대조적이었다. 예를 들어, 태국 최대의 군사 기지 롭부리
(Lopburi)에 자리한 군인극장(Soldier's Theater)에 대한 태국민의 태도를 들
수 있다. 극장은 지역민 생활세계의 다양한 경험이 펼쳐지는 곳이라는 점에
서, 영화 상영 공간에 대한 해석과 의미부여는 대중의 무의식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 지점이다. 롭부리의 군인극장은 총리이자 육군 원수(Prime
Minister Field Marshal) 피분(Plaek Phibulsongkram)에 의해 설립되었
다.25) 피분은 독일과 이탈리아 특히, 일본의 파시스트 정부를 모델로 삼아
국가를 통치한 인물로 전해진다. 그는 국민국가 건설 과정에서 화교를 태국
국민으로 강제적으로 통합시키는 입장을 취했는데, 화교에게 태국 이름을 만
들고 태국 언어를 사용하도록 법률로 정했다. 게다가 태국 사회 전복을 시도
하는 주범으로 화교를 지목하여 중국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고취시켰다.
화교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는 독재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잠재우는
수단으로서 군인극장을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군인극장에 종사한 여성 노인
의 구술에 따르면, 군인극장은 “태국 군인과 국민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중국 사업가가 소유한 극장”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 극장은 우리의 것이고
우리에 의해 운영된다는” 것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26) 중국에 대한 태

23) 박경태, 앞의 글, pp. 51-52.


24) David Hanan, Cultural Specificity in Indonesian Film: Diversity in Unity,
Palgrave Macmillan, 2017, p.66.
25) 쁠랙 피분송크람(Plaek Phibulsongkram)은 태국의 제3대 총리(1938~1944)와
제11대 총리(1948~1957)를 지냈다. 제3대 총리 기간 시암(Siam)에서 태국으로
국호를 바꿨다. 그가 군인극장을 설립한 시기는 확인 불가능하지만, 총리로서 그
의 복무 기간을 고려해보면 1957년 이전의 일인 것으로 짐작된다.
26) 필립 제이블런(Philip Jablon)은 2008년부터 ‘동남아시아 극장
프로젝트(Southeast Asia Movie Theater Project)’의 일환으로 동남아시아
동아시아의 문화냉전과 영화의 위상
: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191

국민의 태도는 1950년대 중국이 동남아 국가와 우호적인 관계 형성을 시도


한 것과 비교된다. 중국 정부가 ‘화교는 해당 국가의 혁명에 참여하지 않음’
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화교의 이중국적 취득을 권장했기 때문이다.27) 하지
만 그들의 기원이 중국이건 대만이건 상관없이, 화교는 동남아 각국이 처한
냉전의 논리에 따라서 변용되고 소환되는 존재였다.28)
극장을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구현 공간으로 규정한 것은 문화 번역
(cultural translation)의 문제와 연결될 가능성 역시 지녔다. 그러한 사례는
베트남의 경우를 우회하여 살필 수 있다. 당대 남베트남의 관객은 지역에 따
라서 선호하는 장르의 영화가 달랐는데, 사이공 관객이 서부극을 포함한 영
어권 영화를 즐겨 관람한 반면, 지역 관객(regional audiences)은 아시아 각
국의 영화에 관심을 보였다.29) 이러한 상황에서, 1975년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의 단관 극장에 대한 사진 아카이브(Archive)를 만들고 있다. Tahiat


Mahboob, “Gallery/Interview: Preserving Southeast Asia’s Movie Palaces
Through Photography”, Asia Society,
https://asiasociety.org/blog/asia/galleryinterview-preserving-southeast-asi
as-movie-palaces-through-photography에서 인출. (2018.08.01.)
27) 조봉래, 「중국공산당의 동남아화교에 대한 정책의 변화와 그 사상적 배경」,
『중국학논총』55, 2017, p.101.
28) 태국의 군인극장이 중국에 대한 적대를 고무하고 정치권력에 대한 도전을 무마
시킨 것은 한국의 군단(軍團) 소재지에 설립된 군인극장과 비교된다. 동남아 국가
와 달리 종족(ethnics) 갈등이 부재한 한국의 군인극장은 전투 욕망을 효과적으로
동원하기 위한 남성성(男性性)을 동원한 공간이었다. 게다가 미군(美軍)의 대민
(對民) 원조사업비를 지원받아 군인극장을 개관한 사실은 문화냉전 구축의 실천장
으로서 군인극장의 효용가치를 증명한다. 위경혜, 「군민(軍民) 협동과 영화 상영:
강원도 ‘군인극장’」, 『대중서사연구』20(1), 2014, pp. 252-253.
29) 과거 사이공에서 남쪽으로 60km 떨어진 작은 마을 ‘탄 힙(Tan Hiep)’에서
극장을 운영한 여성 노인 ‘센 유엔(Sen Nguyen)’의 구술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1955년 그녀의 아버지는 ‘탄 힙’에서 ‘Kim Hoang 극장’을 운영했다. Sheila
Pham, “In search of Vietnam's nearly forgotten cinema history” ABC뉴스,
http://www.abc.net.au/news/2017-03-14/in-search-of-vietnams-nearly-forg
otten-cinema-history/8349478에서 인출. (2018.06.15.)
192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제39권 3호

국가로서 통일을 달성하고 체코와 러시아 그리고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에서


수입한 영화를 상영했다. 그런데 이들 국가의 영화를 상영하면서 자막이 아
니라 오리지널 트랙(original track)에 소리를 입힌 더빙(voice-over
interpretation) 방식을 취하였다. 더빙 영화 상영은 단순히 문맹과 관련된 문
제가 아니었다. 1960년대 활황을 맞은 홍콩 영화가 베트남의 화교 커뮤니티
를 대상으로 성공적으로 진출한 사실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30)
인도네시아와 마찬가지로 1960년대 거대한 화교 커뮤니티가 형성된 베트
남에서 더빙 영화 상영은 문화 번역의 가능성을 의미했다. 즉, 다수 종족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고 이뤄진 언어의 단일화는 국민국가 형성을 전제한 것이
다. 이는 더빙의 과정에서 번역 주체의 목적에 따라서 영화의 내용을 수정하
고 재구성할 가능성을 의미한다. 1964년 인도네시아가 할리우드 영화 수입을
금지시키고 공산권 국가의 영화를 상영한 사실로 미뤄보아, 인도네시아 극장
에서 상영된 영화 역시 이러한 가능성을 충분히 지녔다.31) 더욱이 인도네시
아의 일류 극장(first-class cinemas)과 이류 극장(second-class cinemas)이
각각 할리우드 영화와 인도네시아 영화를 주로 상영한 사실을 고려했을
때,32) 언어의 단일화는 지역과 계층의 차이를 소거하는 방식으로 번역을 수
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요컨대, 동남아국가의 영화를 둘러싼 문화냉전은 중

30) Sheila Pham, 앞의 글.


31) 영화 상영 현장의 언어 문제는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이 현지 사정에 따라서 지
역적으로 다르게 나타난 것을 통해 추론할 수 있다. 즉, 미국의 동남아 국가에 대
한 공보 활동은 1950년대 복수(複數)의 언어로 제작된 라디오 선전 방송 <미국의
소리 Voice of America>를 통해 우회적으로 확인된다. <미국의 소리>는 중국에
서 표준어를 포함한 광둥어, 상하이어, 객가어(客家語) 그리고 티벳어 등으로 제
작되어 하루 열 시간 이상 송출되었다. 객가어 즉, 하카(Haka) 언어 방송까지 시
행한 것은 1949년 ‘자유중국’이 된 대만을 포섭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대하여 다
음을 참고. ‘Trends in VOA Penetration and Effectiveness’, Based on IRE
Staff and Field Studies, RG 306 A1 Entry 1008 BOX 2, 1952년 10월 10일.
32) David Hanan, Cultural Specificity in Indonesian Film: Diversity in Unity,
Palgrave Macmillan, 2017, p.69.
동아시아의 문화냉전과 영화의 위상
: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193

화인민공화국의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면서 내셔널리즘과 종족 그리고


이산(diaspora)의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III. 문화냉전 수행의 일상화 – 프리만(preman)이라는


존재

동남아 지역에서 냉전이 가장 고조된 시기에 발생한 사건으로 평가되는33)


‘대학살’은 미소의 냉전 구도를 벗어나 ‘제3의 역사적 길’을 모색한 인도네시
아의 노력을 무산시켰다. ‘대학살’은 인도네시아의 교도 민주주의(敎導 民主
主義, Guided Democracy) 정체(政體)와34) 1963년 수카르노 자신의 종신
(終身) 국가 원수 지명과 관련된다. 무엇보다도 ‘대학살’은 1964년 베트남전
에 대한 미국의 본격적인 개입과 연관된다.
1964년 8월 17일 수카르노의 연설 ‘위험하게 산 해’에서 알 수 있듯이, 수
카르노는 사회주의 지향을 공표하고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포함한 동남아를
넘어 동북아 특히, 한국과 연대를 호소했다.35) 당시 박정희 정권이 미국의

33) 1965년 인도네시아의 사건을 냉전기 대학살의 관점에서 접근한 연구는 다음을
참고. (Eds.) Katharine McGregor, Jess Melvin, Annie Pohlman, The
Indonesian Genocide of 1965: Causes, Dynamics and Legacies, Switzerland:
Palgrave Macmillan, 2017.
34) 교도 민주주의는 수카르노 대통령을 중추로 삼고 그를 이념적으로 동조하는 정
당들의 연합과 무장 세력이 지방에서 지지하는 권위주의적 정부 체제를 말한다.
클라이브 크리스티 편저 · 노영순 옮김, 앞의 책, p.343.
35) 수카르노는 이 연설을 통하여 “인도네시아 혁명은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나는 전 세계에, 모든 우방과 적국에, 어떠한 악마도 신령
도 망령도 한국, 베트남, 캄보디아 그리고 인도네시아가 서로 친구가 되어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지 않은 신세계로 힘을 합쳐 행진해 가는 것을 방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선언한다.”라고 밝혔다. 클라이브 크리스티 편저 · 노영순 옮김, 위의 책,
194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제39권 3호

요청보다 앞서 베트남 파병을 자청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수카르노가 어떠한


이유로 한국과의 연대를 강조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의 연설이 인도차이나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을 향한 사실이다. 수
카르노의 연설 2주 이전인 8월 2일 미국이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을 구실로 북베트남과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대학살’은 “계급적 이익, 종교적 열정, 공동체 사회 간 증오, 깊은 이념적
인 차이 모두”를 반공주의 폭력에 동원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대학살의 과정
에서 “군사령관의 명령을 받은 수천에 이르는 자경 집단”이 인도네시아 전역
에서 공산당의 동조자로 ‘알려진’ 이들을 살해하고 체포했기 때문이다.36) 대
학살은 인도네시아 화교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즉, 인도네시아 군경이
반공(反共)과 반화(反華)를 이유로 30만 명에 이르는 화교를 살해했다. 또한
1967년 수하르토 정권은 중국과 국교를 단절하고 중국과 연계를 맺은 화교
를 용공파(容共派)로 분류했으며 중국어 사용과 인쇄물을 금지했다.37)
이러한 상황에서 인도네시아의 문화냉전의 모습은 앞서 살펴본 반공의 문
화 블록(bloc)으로 전환된 ‘영화제’에 국한되지 않았다. 일상의 영역에서 진행
된 문화냉전은 국가의 이념과 종교 그리고 종족과 관련된 모든 갈등 요인을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로 봉합한 ‘대학살’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이는 조슈아
오펜하이머(Joshua Oppenheimer)와 크리스틴 신(Christine Cynn)이 감독한
다큐멘터리 <액트 오브 킬링 The Act of Killing>(2013)을 통해서 확인된다.

p.383.
36) 최소 50만 명에 달하는 대학살에 참여한 자들이 반세기 동안 “인도네시아 민족
주의라는 정서에 가려져 있던 강력한 내적 분쟁에 대응한 자들”이라는 점은 주목
된다. 이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점이 문화적 정체감과 종교적인 신념이라는 근
본적인 요인들과 결합하여 발생한 마르크시즘과 반공산주의 사이의 분쟁이었다.
이에 대하여 다음을 참고. 클라이브 크리스티 편저 · 노영순 옮김, 위의 책, pp.
426-437.
37) 홍재현, 「인도네시아 화교사회 형성과 반화교폭동에 대한 연구」, 『중국인문과
학』47, 2011, pp. 410-413.
동아시아의 문화냉전과 영화의 위상
: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195

<액트 오브 킬링>은 1960년대 인도네시아의 극장 문화에 대한 정보를 직접


적으로 제공하지는 않으나 그것을 우회적으로나마 추론할 가능성을 지닌 작
품이다. 즉, 영화는 특정한 시기를 묘사하고 반영하는 역사적 자원이자 담론
형성에 이바지한다는 점에서 역사적 텍스트(texts)로서 가치를 갖는다. 역사
는 기록의 부재와 사건 발생의 가능성을 지닌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영화에
서 제시된 이미지와 서사 구조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풍부한 해석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액트 오브 킬링>은 ‘대학살’에 참가하여 1,000명 정도의 사람을 살해했다
고 자랑삼아 고백하는 늙은 폭력배 안아르 콩고(Anwar Congo)와 그의 패거
리의 학살에 대한 회상과 재연으로 구성되었으며, 북부 수마트라의 수도
(North Sumatra capital) 메단(Medan)에서 촬영되었다. 주목할 부분은 자신
의 살인 행위를 재연하는 주요 인물 안아르 콩고가 자칭하는 ’프리만
(preman, free man의 인도네시아 발음)’이라는 세력이다. ‘대학살’ 이전 안아
르 콩고는 특정한 직업 없이 극장 앞에서 암표를 팔아 생계를 꾸린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를 즐겨보고 ‘반항의 청춘 아이콘’으로
알려진 할리우드 배우 제임스 딘(James Dean)과 서부극 스타 존 웨인(John
Wayne)을 동경했다.
수카르노도 한때 열광적인 팬(fan)이었을 정도로 인도네시아에서 할리우드
영화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38) 1950년대 영화 제작사가 7개에 불과했
을 때 수입사는 28개에 이를 정도로 수입 영화가 인도네시아 시장을 장악했
다. 1950년 54편의 영화가 제작될 때, 인도네시아의 수입 영화는 863개였고
이 가운데 미국 영화는 전체의 76.5%에 해당하는 660개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1964년 3월 ‘제국주의 미국영화 보이콧 위원회(Committee to

38) Jennifer Lindsay, “Heirs to world culture 1950-1965 An Introduction”,


(Eds.) Jennifer Lindsay and Maya H. T. Liem, Heirs to World Culture:
Being Indonesian, 1950-1965, Brill, 2012, p.14.
196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제39권 3호

Boycott Imperialist American Films)’의 미국 영화 수입 금지 조치와 함께


바뀌었다. 극장에서는 인도네시아 자국 영화와 공산주의 국가에서 수입한 영
화만 상영했으며, 이러한 조치는 ‘대학살’이 발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39) 따
라서 할리우드 영화 상영 저지로 생계 위협을 받은 안아르 콩고가 ‘프리만’을
자칭하고 공산주의자 색출에 가담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친미
감정에 사로잡힌 그에게 사회주의에 경도된 수카르노의 정치적 입장과 미국
공보 기관 즉, 미공보원(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에 대한 인도네
시아 군중의 공격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프리만’은 영어권에서 ‘갱스터(gangster)’ 또는 ‘폭력배(thugs)로’ 번역 가
능하다. 이들은 정치권력과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자신의 삶을 꾸린 자들이
었다.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프리만’은 빤자실라
청년 조직체(Pemuda Pancasila, Pancasila Youth)와 더불어 군대에 의해 이
용당한 존재였다.40) 흥미롭게도, ‘프리만’이 극장 운영에 관련된 사실은 한국
전쟁 이후 한국의 흥행업계 상황과도 유사하다.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폭력
에 동원되는 대가로 극장 운영과 영화 상영에 관여한 정치깡패 임화수를 연
상시키기 때문이다. 임화수는 전국극장협회 부회장으로 일하면서 영화 제작
과 상영에 깊이 관여한 인물이다. 인도네시아의 프리만은 한국의 임화수와
같은 반민반관(半民半官)과 절대적으로 등치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하지
만 대한청년단 단원으로 활동한 이력을 배경삼아 한국전쟁 이후 미군부대에
서 유출한 필름으로 순회 영화를 상영한 지방 흥행사들은41) 10여년의 시간

39) David Hanan, Cultural Specificity in Indonesian Film: Diversity in Unity,


Palgrave Macmillan, 2017, pp. 69-71.
40) ‘대학살’ 과정에서 16년 동안 억류되었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
면, “빤짜실라 청년단은 잔혹했으며 군대는 프리만을 이용했다.” Galuh Wandita,
“PREMAN NATION: Watching The Act of Killing in Indonesia”, Critical
Asian Studies, 46(1), 2014, p.168.
41) 전남 화순군 퇴역 경찰 김귀술과 부산 국제시장 상인 이쾌섭의 이력이 이를 말
한다. 이들의 이력에 대하여 다음을 참고. 위경혜,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 비
동아시아의 문화냉전과 영화의 위상
: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197

을 뛰어넘어 동남아와 동북아를 관통하는 문화냉전의 일상을 중첩적으로 보


여준다. 반공 이념이 프리만의 ‘대학살’ 수행에 정당성을 부여했다면, 반민반
관에게 그것은 그들 생계를 유지하는 방편이 되었다. ‘프리만’이 종족과 종교
그리고 이념 간 갈등을 봉합한 ‘대학살’과 반공 정권의 등장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라면, 반민반관은 신생 독립 국가로서 대한민국의 출범에서 그 기원을
두었다.42) 요컨대, <액트 오브 킬링>의 마지막 엔딩 크레디트(ending
credits)에 기재된 수많은 익명(anonymous)의 참여자들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수하르토 퇴진 이후 ‘개혁체제(Era Reformasi)’로 불리는
시기에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인도네시아 사회의 폭력성을 말한다.43) 인도
네시아는 현재에도 여전히 ‘프리만의 국가’이다.44)

도시 지역 순회 영화 상영 - 국민국가 형성과 영화산업의 발전 -」, 『지방사와


지방문화』11(2), 2008, p.286, 각주 35); 이쾌섭, 「한국전쟁 당시 부산 국제시장
상인들의 삶」, 국사편찬위원회, 『2011년도 구술자료수집사업 OH_11_005_이쾌
섭_11』, pp. 1-51.
42) 대한청년단은 향보단(鄕保團)과 민보단(民保團)과 같은 우익 청년단체를 통합하
여 등장했다. 향보단은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의 치안을 담당하고 선거 이후
경찰 보조를 위해 결성된 이후 각 지방 좌익의 선거 방해를 제압하는데 활용되었
다. 향보단은 이후 민보단(民保團)으로 재조직되면서 경찰과 합동 공방 훈련을 거
치고 전투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군경과 함께 무장공비 토벌과 군수물자 운
반 활동 등에 동원되었다. 민보단은 이승만의 우파 청년단 통합 지시에 따라
1948년 11월 대한청년단으로 개편되었다. 이만재, 「제1공화국 초기 향보단 · 민
보단의 조직과 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93, 2017, pp. 309-352.
43)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 대통령의 집권 기간인 1966년부터 1998년까지 시기를
신질서로 부르며, 수하르토 퇴진 이후를 ‘수하르토 이후 시대’ 또는 ‘인도네시아
개혁 체제(Era Reformasi)’로 구분한다.
44) Galuh Wandita, 앞의 논문, p.168.; Karl G. Heider에 따르면 1960년대 초반
예술 연합은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었고, ‘대학살’ 이후 공산주의 영향력의 종식과
함께 좌익 연합은 그들의 영화와 함께 사라졌다. Karl G. Heider, 같은 책, p.17.
198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제39권 3호

IⅤ. 일상을 넘어 제도로 – 미국 공보원의 활동

냉전기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에 있어서 영화의 역할은 현지인의 ‘마음을


얻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하여 UN의 활동을 포함하여 ‘자유세계’의 수호자로
서 미국을 홍보한 영화는 상업극장뿐만 아니라 미공보원의 이동영사를 통해
서도 이뤄졌다. 1960년 기준 현재 동남아 지역에만 58개의 미공보원이 개원
하여 사업을 수행하면서45) 보편적 모델로서 미국의 선전과 친미 정서를 형
성하는데 주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도네시아의 반미(反美) 시위는 미공보
원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1964년 12월 시위 군중이 자카르타(Jakarta) 소
재 미공보원의 장서(藏書) 1만 5천 권을 불태우고,46) 동부 자바(Java)의 주
요 도시 수라바야(Surabaya)의 미공보원과 북부 수마트라 메단에 소재한 미
국 공보원 도서관을 습격하고 방화한 것은 그것의 일례였다.47)
미공보원에 대한 항의는 인도네시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북베트남에 전
면전을 개시한 미국에 대한 베트남인의 저항 역시 미공보원의 도서관 파괴와
방화로 나타났다.48) 이에 더하여, 공산단체에 속한 인도네시아인 3천명이 베

45) 1950년대 미국의 해외공보처(United States Information Agency, USIA)는 그


것의 현지 기관인 미공보원을 세계 76개국에 217개 설립했다. 대부분 현지인으로
구성된 해당 기구에 종사한 인원은 10,000명에 이르렀다. Tony Day, “Honoured
guests Indonesian-American Cultural Traffic, 1953-1957”, (Eds.) Jennifer
Lindsay and Maya H. T. Liem, Heirs to World Culture: Being Indonesian,
1950-1965, Brill, 2012, p.121.
46) 「1주일 동안에 평온 잃었던 곳 세계의 난동지대」, 『경향신문』 1964년 12월
12일 4면.
47) 「미공보원에 방화, 인니 데모대」, 『경향신문』 1964년 12월 9일 2면; 「미공
보원을 습격 인니(印尼) 군중 월맹 폭격 항의」, 『동아일보』 1965년 2월 19일
1면.
48) 이에 대하여 다음을 참고. 「월남사태, 극도로 악화 / 반미 반정부시위 확대 / 다
낭 · 키농시 선 학생들이 데모 / 불교도 청년 백 명 체포」, 『경향신문』 1965년
1월 25일 1면;「반정운동 각지파급 / 사이공=데모대 군경과 대결 / 다낭=키 수상,
동아시아의 문화냉전과 영화의 위상
: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199

트남전쟁에 의용군으로 지원하고자 북베트남대사관에 모이면서 반미의 기운


이 고조되었다.49) 이러한 상황에서 <액브 오브 킬링>의 안아르 콩고가 ‘프리
만’을 자칭한 것은 자연스러운 대응이었다. 1950년부터 1955년 사이 매년
700편의 미국 영화가 인도네시아에 수입되었고, 인도네시아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와 대적할 희망조차도 가질 수 없을 정도로50) 주요 도시를 장악했다. 게
다가 미국은 1950년에 이미 인도네시아의 영화 산업에 개입하고 있었다. 즉,
1950년 미국 국무성이 “저개발 국가의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고 경제와 사회
발전을 위하여 사회 및 기술적 지원”을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인도네시아에
‘기술협조부서(Technical Cooperation Administration)’을 건립하여 영화 제
작 경비 및 장비를 지급하고 제작 인력을 훈련시켰다.51)
1950년대 초반 미공보원에서 제작한 영화가 인도네시아에서 상영되었다.
자카르타 소재 미공보원에 따르면, 1953년 한 해 미공보원 영화를 관람한 사
람은 천만 명에 달했다. 또한 1950년대 후반 미공보원이 비도시 지역을 의식
하면서 이동영사(mobile film unites)를 통한 다큐멘터리 상영에 나섰다.52)
당시 인도네시아 5개의 주요 섬 가운데 수마트라 섬과 자바 섬 간 경제 발전
정도가 차이를 보인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를 경험하는 정도가 달랐기 때문이
다. 특히, 다수의 섬으로 구성된 인도네시아 지형으로 인하여 인도네시아인의
영화에 대한 노출 정도와 선호는 달랐다.53) 1961년 기준 현재 인도네시아

불도와 회담 / 후에=전차대 시내에 진입」, 『경향신문』 1966년 4월 6일 1면.


49) 「월맹 위한 의용군 인니 3천명 지원」, 『동아일보』 1965년 4월 22일 4면.
50) David Hanan, Cultural Specificity in Indonesian Film: Diversity in Unity,
Palgrave Macmillan, 2017, p.69.
51) Tony Day, 앞의 글, p.131.
52) Tony Day, 앞의 글, p.121.
53) 1980년대까지 인도네시아의 영화 관람 비율은 지역마다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1981년 기준 현재 자카르타, 칼리만탄(Kalimantan) 그리고 리아우(Riau) 지역의
관람 비율은 높은 데 비하여, 자바 동부(East Java)와 동부 도서 지역(the
eastern islands)은 낮았다. 게다가 자바 동부 지역민들은 영화보다는 인도네시아
200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제39권 3호

인구 가운데 60%가 자바 섬에 살고 있었으며, 이 섬 가운데 자카르타와 수


라바야는 경제와 정치의 중심지였다. 이에 반해서 시골은 라디오 세트 작동
에 필요한 전압조차도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었다.54) 이는 미공보원이 비도시
지역에 이동영사를 파견하여 영화 상영에 주력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인도네시아 현지인이 미공보원을 대상으로 반미 감정을 표출한 모습은 동
시기 미공보원의 현지 기관인 문화원을 통하여 문화냉전을 구축한 한국과 대
조적이었다. 미공보원이 인도네시아의 비도시 지역까지 순회 영화를 상영한
이유는 베트민(Vietminh)의 승리에 따른 동남아의 도미노(domino)식 공산화
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한일수교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으로
대표되는 한국-일본-베트남을 축으로 동아시아의 새로운 냉전체제를 구축한
것은55) 미국으로 하여금 동남아의 공산화 저지에 집중할 수 있는 전제조건
을 마련한 것이었다. 게다가 동시기 박정희 정권은 대국민 홍보를 위한 뉴스
를 제작하여 동남아 국가와 친선을 강조했다. 국립영화제작소는 베트남전쟁
과 관련된 문화영화를 다수 제작하고 <대한뉴스>에 ‘월남 소식’을 신설했
다.56) 또한 1966년 2월 박정희의 동남아 국가 순방 – 말레이시아, 태국 그
리고 대만 – 을 포함하여 같은 해 10월 필리핀 방문을 뉴스로 제작하여 전국
의 극장을 포함한 문화원에서 상영했다.
한편 베트남전쟁을 포함한 인도네시아 ‘대학살’로 동남아 국가에서 반공의
기운이 드세지는 가운데 반둥회의를 통해 아시아의 주역으로 각인된 – 하지

전통 그림자 연극인 와양(wayang) 공연을 선호했다. Karl G. Heider, 앞의 책,


p.21.
54) “Communication Habit Indonesia”, RG306 Office of Research and
Reference entry P78 container 20_Indonesia, 1961년 11월 29일.
55) 전재성,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을 둘러싼 미국의 대한(對韓)
외교정책」, 『한국정치외교사논총』26(1), 2004, p.78.
56) 박선영, 「프레임 속의 전쟁: 국립영화제작소와 국군영화제작소의 베트남전쟁 영
화를 중심으로」, 허은 편, 『영상과 아카이빙 그리고 새로운 역사쓰기』, 도서출
판 선인, 2015, pp. 244-284.
동아시아의 문화냉전과 영화의 위상
: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201

만 여전히 동남아 국가에서 내셔널리즘과 사회주의에 반하는 움직임을 상기


시킨 – 중화인민공화국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즉, 1966년 5월부터 시
작된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한국전쟁에 참여하면서 기치를 내건 ‘항미원조(抗
美援朝)’ 주제의 영화를 다시 제작한 것이다.57) 인민의 재교육을 통한 사회
주의 건설을 재차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신중국’ 건설부
터 인민에 대한 선전전 수행의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영화에 주목했고, 이를
위하여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항미원조 전쟁을 소재로 다수의
영화를 제작했다.58) 또한, 대도시보다 관람 기회가 부족한 비도시 지역의 극
장 설립을 고려했으며 내륙 도시와 소규모 마을에서 이동영사를 동원하여 영
화를 상영했다.59)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지속적인 계급투쟁이 강조되면서
이동영사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1963년 중국 공산당이 농촌 사회주의 교
육 운동을 전개하면서 농촌의 “이동방영대(移動放映隊)”의 역할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교육 운동의 수요에 호응하여 혁명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
들고 영화 상영을 위한 광대한 네트워크(web) 형성을 주장했다. 조선족 변사
‘해원(海元)’의 일기를 통해 확인되는 바와 같이,60) 이동방영대의 해설원은
‘인민의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 당의 붉은 선전원’으로 칭송되었다. 요컨대,

57) 장동천 지음, 『영화와 현대 중국』, 고려대학교출판부, 2008, p.184.


58)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제작된 항미원조 전쟁 소재 영화는 <상감령
上甘嶺>(사멍沙蒙 · 린산林杉, 1956), <창공을 나란히 날아서 長工比翼)(왕빙王
冰 · 리수텐李舒田, 1958), <38선에서 三八線上>(스원즈 史文幟, 1960) 등이었
다. 이들 작품 가운데 <상감령>은 ‘철의 삼각지’로 불리는 강원도 김화 부근 오성
산 봉우리 이름에서 영화의 제목을 가져왔다. 이곳은 휴전 직전 중국군과 미군 사
이 벌어진 치열한 전투로 유명하다. 미국과 열전을 치른 장소를 직접 지시하는 영
화의 제작은 ‘신중국’ 건설에서 차지하는 항미원조 전쟁의 높은 위상을 의미한다.
이에 대하여 다음을 참고. 장동천 지음, 앞의 책, pp. 149-151.
59) 슈테판 크라머(Stefan Kramer) 지음 · 황진자 옮김, 『중국영화사』, 이산,
2000, p.81.
60) 염인호, 「중국 조선족 변사 해원의 삶과 일기 – 모택동 시대를 중심으로 –」,
『민족문화연구』 66, 2015, pp. 226-227.
202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제39권 3호

1960년대 동남아와 동북아는 지리적 거리를 초월하여 미공보원과 문화원 그


리고 이동영사를 둘러싸고 민중의 마음을 얻으려는 ‘문화 전쟁’을 치르고 있
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게 그것은 ‘대학살’과 친미 정권의 등장으로 마무
리되었다.

V. 결론

이 글은 동아시아 문화냉전의 형성과 전개 과정에 개입한 영화의 위상을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하였다. 반둥회의부터 베트남전쟁 시기까지
영화제를 포함한 극장은 ‘신생’ 국가 – 정치적 독립 국가부터 새로운 정체(政
體)를 형성한 국가까지 – 의 건설과 연관되었다. 동남아시아 국가의 문화냉전
은 ‘신중국’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특히, 화교는 ‘신중국’과 동남아
시아 현지 국가 사이 정치적 욕망과 역학(力學)에 따라 위상이 달라졌다.
인도네시아는 1954년 동남아시아영화제와 1955년 반둥회의 개최를 주도
하면서 미소 대립을 넘어선 제 3세계의 역사적 길을 모색하고 아시아 연대를
시도했다. 하지만 아시아라는 공동 의제의 제출은 여러 역사적 요인들 - 네
덜란드 점령기 화교와 인도네시아 토착인 간의 분리와 독립 이후 사회주의
국가로 등장한 ‘신중국’ 그리고 미국 주도의 문화냉전 구축 등 – 로 인하여
다양한 문제를 제기했다. 구 제국의 유산과 냉전 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동남아시아는 종족과 이산 그리고 문화 번역을 포괄하는 내셔널리즘의 문제
와 중층적으로 얽혀있었다.
이 글은 인도네시아 현대사에 있어서 이례적일 정도로 “민감한 시기”인
1965년 ‘대학살’에 주목하여61) 영화의 사회성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

61) Karl G. Heider, 같은 책, p.17.


동아시아의 문화냉전과 영화의 위상
: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203

하여 영화제와 영화 상영 그리고 인적 네트워크를 살폈으며, 그 결과 문화냉


전이 동아시아라는 지역 단위에서 수행되는 방식을 규명하였다. 또한, 동북아
와 동남아라는 지역적 구분을 넘어서 한국전쟁부터 베트남전쟁까지 연동된
문화 냉전의 양상을 살폈다. 하지만 동남아시아 국가 상호 간 과거 유럽 제
국의 지배 경험과 새로운 이념적 지형에 따른 문화냉전 정책의 다양성을 추
적하지 못 한 점은 한계로 남는다. 무엇보다도 인도네시아 내부의 연구결과
물에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은 안타깝다. 인도네시아는 여전히 ‘프리만의 국가’
라는 사실이 다시 환기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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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3면.
동아시아의 문화냉전과 영화의 위상
: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207

ABSTRACT

Cultural Cold War and the Status of Cinema in East


Asia
: focusing on the Republic of Indonesia

Wee, Gyeonghae (Chonnam National University)

This work examines the historicity of the cultural landscape


surrounding films and the place of film exhibition in Southeast Asian
countries especially in Indonesia regarding the cultural cold war during
the period spanning from the Bandung Conference to the Vietnam War.
Moreover, this paper investigates the status of cinema during the
period, the meaning of the Southeast Asian Film Festival which started
in 1954, and the social activities of people who were involved in
movie theaters. This essay especially analyzes the movie entitled The
Act of Killing to discover how people who called themselves “preman”
(freeman in English) participated in the ‘Genocide’ in 1965 as
anti-communists.
For Indonesia, making films was a way of building the new
nation-state after liberation from Holland in 1950. In addition, the
208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제39권 3호

Southeast Asian Film Festival was held for the purpose of the
formation of ‘New Asia’ led by Indonesia's ideology. However, it
showed its impossibility. In other words, film showings were
interlinked with the contexts of historical and political phases: the
building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the construction of the
anti-communist base of South Korea, the introduction of ‘New Japan’
to South Korea led by the Korea-Japan Treaty of 1965 and the
practice of socialism in Indonesia.
The cultural landscape surrounding movie theaters in Southeast
Asian countries manifested their locality while resisting against, and at
the same time, cooperating with the Cultural Cold War regime amidst
their political circumstances. This is also correlated with nationalism
issues such as ethnic politics, diaspora, and cultural translation in
multi-layered ways, along with the problems of the old and new
imperialism - remnants of World War II. Even these locality have
molded the daily lives of their people and construction of their cultural
identity.

Key Words: Bandung Conference, China's Campaign to Resist US


and Aid North Korea, Cultural Cold War, South-East
Asian Film Festival, Nationalism, Mobile Film Units,
Film Exhibition, People's Republic of China, Preman,
Republic of Indonesia, USIS, Vietnam War, The Act of
Killing
동아시아의 문화냉전과 영화의 위상
: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209

원고 접수일 : 2020년 7월 31일


심사 완료일 : 2020년 8월 31일
게재 확정일 : 2020년 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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