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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正典)이 되었나?

박유희**

<차례>
1. 임권택 영화 재론(再論)
2. 작가주의의 이면, 국책영화
2.1. 임권택 작가론의 틀
2.2. 국책영화로서의 성취
3. 현실주의와 민족 이념의 양가성
3.1. 우수영화에서 리얼리즘과 예술영화로
3.2. 현실주의의 두 얼굴, 리얼리티와 순응
3.3. 분단 시대 퇴행적 가부장의 예술
4. 정전(正典)으로서의 임권택 영화와 그 의미

<국문초록>
이 글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예술영화로 추앙받는 임권택 영화에 대한 재론이다. 본고의 목적
은 기존 연구에서 집중해온 임권택 영화의 내재 미학에 대한 구명과는 궤를 달리하여 국가와의 관
계 속에서 임권택 영화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국면을 밝히는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선행
연구에서 축적되어온 평가, 즉 임권택 영화가 한국영화사의 중요한 국면을 드러내고 있음을 인정하
는 데서 시작하고자 했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임권택 영화가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로 정전이 될 수
있었는지를 묻고자 했다. 이를 위해 임권택 영화 미학이 어떤 과정과 역학 속에서 형성되었는지를
추적하였다. 이를 통해 임권택 영화 미학의 맥락과 임계를 밝히고, 나아가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영
화의 정체성을 성찰하고자 했다.
지금까지 임권택 영화는 1970년대를 기준으로 크게 두 시기로 나뉘어 논의되어 왔다. 그리고 후

* 이 논문은 2016년도 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6S1A5A8017337) 이 논문은 2017년 10월 28일, ‘문화콘텐츠와 극예술의 현재와
미래’라는 주제 아래 열린 가톨릭대학교 글로컬문화스토리텔링연구소·한국극예술학
회 공동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동명의 발표문을 수정 보완한 것임.
** 고려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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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에 해당하는 영화를 중심으로 작가주의 논의가 전개되었다. 그런데 임권택 감독은 1970년대에는
국책에 부응하여 반공·계몽영화를 충실히 만들었고, 1980~90년대에 예술영화를 만들면서도 한편으로
는 반공영화와 계몽영화를 계속 연출했다. 또한 그가 이념 관련 영화를 만들 때 그것은 국가가 허용
하는 범주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국가의 한계치 내지 지향과 작가의식을 조응시키며 지속
적으로 국가의 지원을 이끌어냈으며, 국가의 보상과 해외영화제에 대한 기대 속에서 입지를 확보해
갔다. 따라서 1970년대 국책영화와 그러한 틀을 답습한 이후 영화정책은 임권택 감독의 존재 기반이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이후 임권택 영화에서는 전쟁과 분단, 이념갈등, 계급모순 등의 문제를 개
인의 구도(求道)나 여성수난과 절합하며 할리우드 영화와 변별되는 미학을 탐색한다. 이 과정에서 임
권택 영화는 보수적이고 계몽적이면서도 엄정한 리얼리즘의 세계를 보여주며 충무로에서 1980년대
한국의 당면 문제를 다루는 영화로서의 위상을 구축해간다. 그러면서 1970년대에는 국책영화의 맥락
에 놓여 있던 임권택 영화가 리얼리즘 영화 내지 예술영화로 호명되기 시작한다. 한편 임권택 감독
은 이러한 영화들을 통해 해외영화제로의 진출을 도모한다. 마침 해외영화제에서는 탈냉전의 기류
를 타고 동아시아 영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로컬리티를 전면화하는 영화들이 속속 입상하고
있었다. 이때 임권택 영화는 국가를 대표하는 예술영화로 나서게 된다. 이로써 상충될 수도 있는, 리
얼리즘과 국가가 지원하는 예술영화는 ‘내부에의 억압’와 ‘외세에 대한 저항’이라는 민족 이념의 양
가성 속에서 역시 양면성을 지닌 임권택 감독의 도저한 현실주의를 통해 손잡는다. 생존하기 위한
데에서 출발한 임권택 감독의 현실주의는 한때 리얼리즘 영화로서의 성취를 이루었지만, 한편으로
는 또 다시 살아남기 위해 얼마든지 변모하고 정향될 수 있는 것이었다. 1990년대 이후 임권택 영화
는 ‘한국적 예술영화’라는 깃발 아래 유럽영화제 수상을 향해 한층 경도된다. 그러면서 그의 영화는
리얼리즘에의 탐구를 내려놓고 가부장 이데올로기와 역사의 수난에 순응하는 태도를 한국인 고유의
정서로 미화하는 영화로 정향된다.
해방 이후 한국의 예술영화가 갖추어야 할 조건은 문학에 비견되는 예술성, 서구영화제에서의
인정, 네오리얼리즘이나 누벨바그 영화에 근접하는 영상미, 그렇지 않으면 한국의 향토색, 당대 현실
문제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종교적·예술적 고뇌 등이었다. 임권택의 작가주의 영화로 분류되는 영
화들 중 1980년대 영화의 상당수는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면서도 당대 현실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임권택 영화가 그러한 치열함을 <태백산맥>까지 밀고 나갔다면 한국영화의 임계는 보다 확장될 수
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처음부터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임권
택 영화에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가와 현실을 거스르면 안 된다는 도저한 현실주의가 저류하고 있
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기에 그의 영화는 정전이 될 수 있었다. 예술영화를 넘어 정전이 되기 위해서는 대중
의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 내거나 통합적 의견을 대표할 수 있는 힘을 필요로 한다. 정전은 해당
문화에 대한 허구적 정체성을 상징화하는 동시에 공고히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
라진 전설 <아리랑>이나 해방 이후 선구적인 리얼리즘 영화로 대접받는 <오발탄>이 한국영화 정
전의 계보를 구성해왔다. 임권택 영화는 <서편제>에 이르러 이 계보에 확실히 이름을 새기게 된다.
이는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 예술영화라는 깃발과 함께 현실과 대면하는 것을 내려놓고 보수적 예술
의 맥락으로 정향하면서 이루어낸 성과였다. 그러나 그러한 예술의 경지는 가부장의 폭력으로 인한
고통을 민족의 수난으로 추상화하고 그로 인한 비극을 민족 고유의 정서로 합리화하며 이루어진 것
이었기에 <오발탄>의 세계보다 오히려 퇴행적이기도 하다. 이러한 임권택 영화의 한계는 분단된 한
국을 대표하는 반쪽 민족영화의 한계이자 비극이다.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正典)이 되었나?∙박유희 45
주제어 : 계몽영화, 국책영화, 리얼리즘, 반공영화, 문예영화, 민족영화, 예술영화, 임권택 영화, 정전,
현실주의

1. 임권택 영화 재론(再論)

2015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국내외 한국영화 팬들에게 한국영화 대


표작을 소개하고 한국영화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1)한국영화 100선을
펴냈다. 이 책은 “한국(고전)영화에 조예가 깊은 영화학자와 평론가, 영화
계 종사자”2)로 구성된 62명의 선정위원에게 식민지시기부터 2013년까지
개봉한 영화 중 한 사람당 100편 이내의 작품을 추천해줄 것을 의뢰하여
수합된 결과에서 추천 순위별로 100편 ― 실제로는 동률 작 때문에 101편
― 을 뽑아 해설한 것이다. 이는 1989년에 한국영화진흥공사에서 기획한
한국영화 70년 代表作 200選이 나온 지 26년 만에 국가 기관에서 편찬
한 한국영화 앤솔러지이다. 이 책에서 감독별 작품 분포 현황을 보면 임
권택 감독이 7편으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3)
2001년부터 시행된 제7차 교육과정에서는 매체 교육의 필요성이 강조
되며 영화가 문학 교과서에 수용되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고등학교 문
학 교과서에 수록되는 빈도 면에서 수위를 차지하며 꾸준히 실리는 영화
가 <서편제>이다. 2002년과 2003년에 나온 18종 교과서 중에서는 9종에
<서편제>가 실렸고,4) 이후 교과서가 새로 개정될 때마다 영화는 새로운


1) 한국영상자료원 편, 한국영화 100선은 어떻게 선정되었나 , 한국영화 」
100선: <청춘의 십자로>에서 <피에타>까지, 한국영상자료원, 2015, 9면.
2) 위의 글, 9면.
3) 7편은 <짝코>(1980), <만다라>(1981), <길소뜸>(1985), <티켓>(1986), <씨
받이>(1986), <서편제>(1993), <춘향뎐>(2000)이다. (위의 글, 12면.) 참고
로 한국영화 70년 代表作 選 200 에서는 유현목 감독 영화가 16편 선정
되어 1위였다. 그 중 <오발탄>은 교과서에 지속적으로 실리는 영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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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 교체되고 있음에도 <서편제>는 계속 수록되고 있다.5) 영화가 교


과서를 통해 보편적 교육의 텍스트가 되었다는 것은 문학과 같은 가치를
공인받았다는 의미이며, 일정한 영화가 지속적으로 실린다는 것은 정전6)
이 되었음을 말해주는 주요한 표지다. 이 두 가지 예만 보아도 임권택 영
화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영화사에서 임권택은 살아있는 신화다. 그는 50여년에 걸쳐 102편
의 장편 극영화를 연출했고, 한국영화 최고 흥행기록을 연달아 경신했으
며,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탄 것을 비롯해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주요
상을 수상하여 국외에 이름을 알렸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까지
그의 영화는 해외영화제로부터 가장 많이 초청받는 한국영화였고, 특별
전이 미국과 유럽에서 여러 번 열렸다. 특별전에는 학술 심포지엄이 따
랐으며 그의 영화는 국내외 영화학계에서 가장 많이 연구된 텍스트가 되
었다. 한국영화 감독론을 쓰는 연구자들은 책의 가장 앞머리에 임권택
감독을 배치하곤 하며, 그의 영화에 대한 국내 학위논문만 현재까지 40여
편, 국내 학술지 논문은 300편에 육박하고, 그의 영화만을 다룬 연구서와


4) 박기범, 문학 교과서의 영화 수용 양상에 대한 비판적 검토 , 문학교 」
육학 제18호, 한국문학교육학회, 2005, 371-374면.
5) 제7차 교육과정에서 <서편제> 다음으로 많이 수록된 영화는 <오발탄>(7
종)과 <공동경비구역 JSA>(6종)이었다. 이 두 영화도 최근까지 교체되지

않고 교과서에 실리고 있다. 박기범, 문학 교과서의 영화 수용 양상 연

구: 2012 고시 교육과정에 따른 검정교과서를 중심으로 , 한국언어문학
제91호, 한국언어문학회, 2014, 371-373면.
正典
6) ‘정전( , Canon)’은 문학의 기성체계에서 묵시적인 합의를 통해 위대

하다고 인정한 작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 '자( )', '척도', '표준', ‘규
범’ 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으며, 성서의 정통성 여부에 대
한 판단과 승인 과정에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성서와 같이 해당
사회에서 정통적 표준이라고 판단되고 승인된 책을 연구와 교육의 대상
으로 삼으면서 정전의 개념이 확립되었다. 근대문학에서 정전은 그 사
회에서 지속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와 예술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합의된
작품의 목록을 지칭한다. 한국영화의 정전 또한 이러한 개념의 연장선
상에서 선정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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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집은 10여 권7)에 이른다. 심지어 그의 이름으로 영화연구소와 예술
대학이 세워지기도 했다.8)
식민지 조선영화사까지 통틀어 우리 영화사에서 그 어느 감독도 이러
한 대접을 받은 적이 없다. 식민시시대의 전설이자 민족영화의 원조로
추앙되는 나운규 정도가 임권택에 필적할 만한 주목을 받아왔다 하겠으
나 나운규의 경우에는 현전하는 영화가 없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임권택
과 비교가 불가능하다. 그 결과 임권택 영화는 한국영화사에서 민족을
대표하는 예술영화의 살아있는 전범으로 자리매김 되었고, 나아가 임권
택의 필모그래피 자체가 한국영화사이고 임권택은 ‘한국영화의 아버지’
라는 등식에까지 이르게 되었다.9)


7) 대표적인 것으로는 정성일 편, 한국영화연구 :임권택, 오늘, 1987; 사
토 다다오, 고재운 역, 한국영화와 임권택, 한국학술정보, 2000; 임권
·
택, 정성일 대담 이지은 자료정리,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1-2, 현
·
문서가, 2003; 김경현 데이비드 E. 제임스, 김희진 역, 임권택 민족영화
만들기, 한울, 2005; 유지나 편, 영화, 나를 찾아가는 여정 : 임권택 감
독의 영화연출 강의, 민음사, 2007; 동서대학교 임권택 영화연구소 편,
·
영화감독 10인의 연출수업 1, 예린원, 2012; 한국영상자료원 부산국제
영화제 공편, 거장 임권택의 세계, 한국영상자료원, 2013; 김대중, 임
권택 영화, 커뮤니케이션북스, 2016 등이 있다.
8) 동서대학교 임권택 영화연구소와 임권택영화영상예술대학이 그것이다.
임권택 영화연구소에서는 임권택, 신문으로 본 역사 1-2(동서대학교
임권택영화연구소, 2013)를 펴내기도 했다.
9) 신화화가 시작된 것은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임권택을 집중 인터뷰한 내
용을 골조 삼아 국내외 영화연구자들의 비평을 모은 한국영화연구 :임 Ⅰ
권택(1987)을 출간하면서부터이다. 현장에 있는 감독으로서 비평계와
학계로부터 동시에 이렇게 집중적인 조명을 받은 예는 한국영화사에서
전무후무했다. 16년 후인 2003년에 정성일은 1987년 인터뷰 자료에 새로

운 인터뷰 1986년부터 1987년까지 1520분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 2002

년 7월말부터 12월초까지 진행된 64시간의 인터뷰 를 추가하여 임권
택이 임권택을 말하다라는 두 권의 책으로 출간한다. 그것은 2000년에
<춘향뎐>이 한국영화로서는 최초로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하고,
2002년에 <취화선>으로 임권택 감독이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는 동안 준
비된 책이었다. 이 책의 서문에서 정성일은 “임권택 감독님은 나에게 영
화적 아버지다.”라고 고백하며, “임권택을 말한다. 그것은 한국영화를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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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영화가 이러한 위상에 이르게 된 것에는 압도적인 연출 편수와


흥행기록, 그것에 부응하는 다양한 작품세계, 시의적절한 기획력과 추진
력, 굴곡진 인생편력과 성실하고 진중한 성품 등 다양한 요인이 작용하
고 있다. 이러한 요인들과 작품의 관계, 그리고 요인들 간의 상관성을 해
명하는 가운데 임권택 영화에 대한 상당한 논의가 축적되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임권택 작가주의로 귀결되며 임권택 신화를 계속 생산하
고 있다.
이러한 신화화에 대해 반성적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롭 윌슨은
Korean Cinema on the Road to Globalization: Tracking Global/Local Dynamics, or Why
Im Kwon-taek is not Ang Lee10)에서 “세계적인 자본의 흐름과 제국에 대항하
는 지역적 정체성을 다시 세울 수 있다고 주장하는” 민족영화 담론의 허
구성을 폭로함으로써 임권택 영화의 신화화에 반론을 제기한다. 그리고
임권택, 민족영화 만들기는 임권택 영화에 탈식민주의 이론을 통해 접
근함으로써 그의 영화를 둘러싼 민족영화 담론의 모순을 드러내기도 한
다.11) 또한 2007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임권택, 한국과 세계의 의미’라
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어 임권택 영화에 대한 기존 논의를 재론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이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둔 예는 없었다. 살아
있는 신화를 재론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거니와, 임권택 영

하는 한 가지 방법”이고, “동시에 20세기를 지나온 한국인을 말하는 한


가지 방법”이며, “임권택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한
반도 안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한국인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역
설한다.(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1, 8면.) 바야흐로 임권택 신화가
정점을 찍는 순간이었다.
10) 김소영 기획, 한국형 블록버스터, 아틀란티스 혹은 아메리카, 현실문화
연구, 2001, 249-271면.
11) 이 책은 “미국에서 한국영화에 대해서는 처음 출판된 단행본”(김경현 데 ·
이비드 E. 제임스, 앞의 책, 2005, 5면)으로서 결과적으로 ‘임권택 민족영
화 만들기’에 가장 크게 기여한 책이기도 하다.
正典)이 되었나?∙박유희 49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화를 논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그 위상에 벽돌 한 개를 더 얹는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권택 영화에 따라 붙는 민족영화나 리얼리
즘과 같은 수식어들에 문제를 제기하려고 할 때, 그것은 민족영화와 리
얼리즘을 다르게 정의하는 데로 나아갈 뿐이지 정작 임권택 영화에 대한
재론은 이루어지지 못하곤 했다. 후술하겠지만 이는 ‘민족’ 이념이 한국
사회에서 지니는 양가성, 그리고 ‘리얼리즘’에 대한 오랜 역사적 요구와
그 외연의 확장성과 연관되는 문제이다. 그 결과 임권택 영화에 대한 재
론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한국영화사의 모순과 질곡을 품은 임권택 영화
는 그대로 한국을, 혹은 민족을 대표하는 예술영화로 오롯이 남게 되는
것이다.
이에 이 글에서는 임권택 영화가 한국영화사의 중요한 국면을 대표적
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하고자 한다. 그런데 왜 하필
이면 임권택 영화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영화로 정전이 될 수 있었는지
를 묻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지금까지의 논의들이 해온 것처
럼 임권택 영화 미학의 비의를 밝히고 그 의미를 보다 심화시키려는 것
이 아니다.12) 그 미학의 임계를 밝히려는 것이며, 그 미학이 어떤 과정과
역학 속에서 구성되고 위상을 확보해갔는지를 보이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임권택 영화를 재론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영화의 정체
성을 성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12) 기존 논의의 대부분은 임권택 영화에 내재하는 미학의 구명에 집중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학위논문 40여 편 중에서 문학과의 상관성을 논하는 유
형이 50% 이상이고, 나머지는 영화 스타일이나 주제의식에 대한 탐구이
다. 이 중에는 동양 미학이라는 차원에서 일본의 오즈 야스지로나 중국
의 장이머우와 비교하는 연구, 매체 교육 측면에서 접근하는 연구 등도
포함된다. 이러한 비율이나 경향은 소논문의 경우에도 유사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50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2. 작가주의의 이면, 국책영화

임권택 영화는 1970년대를 기준으로 크게 두 시기로 나뉘어 논의된다.


그리고 후기에 해당하는 영화를 중심으로 작가주의 논의가 전개된다. 그
런데 이러한 논의에서 배제되는 것은 전기(前期)의 영화만이 아니다. <장
군의 아들>(1990~1992)과 같은 후기의 오락영화를 비롯해 계몽영화, 반공
영화가 대부분 배제된다. 이는 1970년대에 임권택 감독이 국책영화를 충
실히 연출했다는 것을 기술적 수련 과정으로만 간주하려는 데서 비롯된
다. 그러나 국책영화는 임권택 감독의 존재 기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
니다. 임권택 감독은 1970년대에는 국책에 부응하여 반공·계몽영화를 충
실히 만들었고, 1980~90년대에 예술영화를 만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반공
영화와 계몽영화를 계속 연출했다. 또한 그가 이념 관련 영화를 만들 때
그것은 국가가 허용하는 범주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국가의
한계치 내지 지향과 작가의식을 조응시키며 지속적으로 국가의 지원을
이끌어냈으며, 국가의 보상과 해외영화제에 대한 기대 속에서 위상을 확
보해갔다.

2.1. 임권택 작가론의 틀

임권택 감독의 굴곡진 삶은 여러 책과 언론에서의 인터뷰를 통해 비교


적 널리 알려져 있다. 그것은 1960년대에 액션영화 감독으로 출발하여 그
의 표현에 의하면 “닥치는 대로” 영화를 만들다가 1970~80년대에 자신의
존재와 대면하며 한국 사회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대해 깊이 사유하
게 되었다는 내러티브로 구성된다. 이러한 내러티브에는 기본적으로 ‘가
난과 이념 VS 민족(인본)과 예술’의 이분법이 놓이고, 점차 가난과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민족과 예술의 차원으로 나아간다는 발전 논리가 내재
正典)이 되었나?∙박유희 51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한다. 1990년에 동아일보에 발표했다가13) 1998년에 나의 선택, 나의 길


이라는 단행본에 재수록한 자전 에세이14)을 바탕으로 이를 요약하면 다
음과 같다. 아래 문장은 가능한 한 원문을 살린 것이다.

① 나는 연좌제에 묶인 빨갱이 가족이자 중학 3년 중퇴의 배움이 전부


인 사람이다.
② 나에게 영화와의 만남은 오직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일자리에 지나
지 않았다.
③ 나는 쇠심줄이고 양잿물, 악바리, 독종소리를 들어가면서 현장을 장
악해갔다.
④ 나는 싸구려 영화를 만들며 연명했고, 그래서 60년대의 저급한 내
영화들에 대해 본능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⑤ 내 영화라고 부르고 싶은 첫 번째 작품은 1973년에 만든 <잡초>다.
⑥ 나는 1970년대에 외화 쿼터를 따기 위한 방편으로 흥행을 생각하지
않고 영화를 만들어도 되는 풍토 속에서 영화 수업을 쌓아갔다.
⑦ 나는 <족보>에서부터 서양영화의 아류에서 벗어나는 길을 고민했
고, <깃발 없는 기수>와 <짝코>에서 이데올로기로 인해 겪어야 했
던 증오와 회한을 극복하고자 했다.
⑧ 내가 영화 속에 담아내고자 하는 것은 인본(人本)이다.
내러티브에 따르면 임권택 영화는 <잡초>를 기준으로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①부터 ④까지가 ‘생존을 위한 연출기’라면 ⑤부터 ⑧까지는 ‘작
가주의 시기’이다. 임권택 감독은 1987년 인터뷰에서, 먹고 살기 위해 12
년 동안 ‘싸구려 영화’ 50편을 만들고 났을 때 “거짓말 같은 거짓말”을 했

13) 임권택, 「自傳 …家出…


에세이 나의 길 (18) 빨치산 아들 생존의 들풀 歷
程」 , 동아일보, 1990.8.12, 8면.
「 」
14) 임권택, 영화로 풀어낸 생존의 들풀 , 임권택 외, 나의 선택, 나의 길,
산하, 1998, 10-20면.
52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다는 환멸이 들어서 비로소 처음으로 자신에게 솔직하게 만든 영화가


<잡초>였다고 말했다.15) 그리고 1960년대에 연출한 영화들에 대해서는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지우고 싶다며, <잡초> 이전 영화에 대한 부끄
러움을 여러 차례 표현했다. 실제로 임권택 영화가 ‘진지한 영화’로 인식
되며 비평의 대상이 된 계기가 <잡초>이기도 했다.16) 그런데 <잡초>는
현전하지 않으므로 작가주의 시기의 첫머리에는 <왕십리>(1976), <족
보>(1978), <짝코>(1980), <만다라>(1981)가 놓이곤 했다. 이 중에서 비평
적으로 크게 주목받기 시작한 영화가 <족보>이고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
시에 성취한 영화가 <만다라>이다. <족보>는 대종상 최우수감독상을
수상하였고17), 일본 NHK에서 방영되어 일본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
았다. <만다라>는 대종상 우수작품상을 수상한 것은 물론 베를린영화제
에 출품되어 본선에 오르면서 임권택 감독의 이름을 유럽에 알린다. <만
다라>부터 임권택 영화를 둘러싼 활발한 비평 담론이 형성되면서 임권
택 감독은 ‘작가’로 불리기 시작한다.
감독을 작가로 호명할 때 거기에는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 작가의식을
구현한다는 의미가 내포된다. 그래서 임권택 영화의 서사와 스타일은 모
두 임권택의 상상력과 창의력에서 비롯된 것이 되고, 임권택 영화는 그

「 Ⅲ 」
15) 인터뷰: 임권택은 말한다 ( ) 1973-1980 <잡초>에서 <우상의 눈물>까지 ,
앞의 책, 1987, 136면.
異色的 試圖 狀況劇
16) <잡초>는 “ 邦畫界 의 ”으로 “ 를 탈바꿈”하고 있다는
雜草
호평을 받았다. “길섶에 돋아난 女人 같은 한 을 잡아 있을 법한 모
든狀況 狀況
을 부여하고 그러한 女人 속에서 그 이 어떻게 자기를 살아
雜草 確定
가는가를 관찰해보는 작품. < 自生的
>는 된 시나리오가 없이 으
異色的
로 만들어지는 美國 大學
인 작품이다. 켄트 소요사건 때 클레아
記錄映畵的 劇映畫
블룸을 내세워만든 技法 着眼 미디움 쿨의 에서 한 이
對立
작품은 작가와 감독이 때때로 날카롭게 의견 을 벌여 촬영을 보류
女主人公 役
하는가 하면 金芝美
분례 을 맡은 여우 양까지 자신이 견해
修正
를 주장하고 나와 작품을 「 邦畫界」
하기도 한다.” ( 탈바꿈하는 , 동
아일보, 1973.4.17, 5면.)
「 旗手」
17) 깃발 없는 , 경향신문, 1979.9.14, 5면.
正典)이 되었나?∙박유희 53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의 역사의식과 가치관을 반영한 것이 된다. 물론 영화 텍스트에서 서술


주체의 최종 심급에는 감독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문학처럼 한
사람의 온전한 상상과 의지로 제작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외적으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배용균, 1989)이나 장 뤽 고다르의 영화처
럼 문학 창작과 같은 개인적 작가주의를 실현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일
반적으로 영화는 여러 생산자가 협업하는 가운데 창작되는 예술이다. 그
협업에는 감독, 스태프, 배우, 작가만이 참여하는 게 아니라 자본을 쥔 제
작자는 물론 정부, 언론, 그리고 관객까지 관여한다. 따라서 영화에는 내
재적 차원의 문제만이 아닌 다양한 맥락과 힘들이 작용한다. 그러한 맥
락과 힘들 또한 내재적 요소와 조응하지 않고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러한 맥락과 힘들이 내재적 요소를 구성하고 정향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내재 동인과 외재 변수의 역학을 함께 고려할 때
영화와 감독의 특성을 보다 충분히 해명할 수 있다.
그러나 기존 논의에서 임권택 감독을 ‘작가’로 호명할 때 대부분의 근
거는 거듭된 인터뷰를 통해 감독 자신이 구축한 내러티브에 기반을 둔다.
이에 따라 임권택의 작가주의를 보여주는 영화는 몇 편으로 한정되고,
그것 또한 주로 임권택 감독 자신의 선별에 의존한다. 이에 <잡초> 이전
에 만든 영화는 아예 없는 듯 취급되고 <씨받이>(1986) 또한 목록에서 슬
그머니 빠지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1970년대를 전후로 하여 임권택 감독
의 필모그래피를 크게 두 시기로 나누고 1980년대에 들어서며 작가주의
로의 행보가 본격화된 것이 임권택 작가론에서 거의 정론화(定論化) 되어
있기 때문에 <족보>(1978)부터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에 이르는 기
간에 만들어진 국책영화들, 예컨대 <아벤고 공수군단>(1982) 같은 반공영
화나 <복부인>(1980) 같은 계몽영화는 그 입지를 확보하기 어렵다.
이에 대해, 1980년대 초반에 임권택이 작가주의적 영화를 만들면서 한
편으로는 국책영화를 만들었던 것은 작가주의로 전변해가는 과정 속의
과도기적인 현상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54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만다라>와 <길소뜸>만 작가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장군의


아들>은 1990년대 영화지만 1960~70년대 활극을 방불케 하고, <아다다>
는 1956년 <백치 아다다>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으며, <태백산맥>
의 관점과 구조는 1970년대 말 이후 반공영화 내지 분단영화의 연장선상
에 있다. 오히려 이 영화들이 임권택 영화의 일관된 맥락과 특이점을 보
여준다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편 임권택의 작가주의를 논할 때 대표작 중 하나인 <만다라>는
1980년대 초반까지 우수영화 부문이었던 문예영화에 속하는 것이고, <길
소뜸>은 이산가족 찾기 사업에 맞춰 제작되고 탈냉전 분위기 속에서 베
를린 국제영화제를 겨냥한 기획영화였다. <짝코>는 반공영화로 기획·제
작되어 반공영화 부문 우수영화로 선정되었다. <신궁>(1979), <불의
딸>(1983)과 함께 전통 3부작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족보>(1978)나 예술
영화로 평가되는 <안개마을>(1982) 또한 문예 부문 우수영화 보상을 염
두에 두고 제작된 영화들이었다. 이와 같이 작가주의 계열로 분류되는
영화들 역시 국책영화의 자장 안에 놓여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임권택 영화를 논할 때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만들었다
는 영화들과 작가주의 영화 사이의 이분법적 구분은 정합하지 않다. 나
아가 임권택 작가주의의 이면에는 국가가 있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임권택 감독은 국가라는 구심력이 허용하는, 나아가 권장하는 범위에서
주로 움직였다. 따라서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그의 영화를 바라볼 때 그
의 다양한 영화들은 보다 정연하게 설명될 수 있다.

2.2. 국책영화로서의 성취

임권택 감독은 정창화 감독의 조감독으로 출발하여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했다.18)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였고, 이후 그는 크게
흥행하지는 못해도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데 무리 없는 감독으로 계속 일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正典)이 되었나?∙박유희 55
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는 액션영화를 비롯해 사극영화, 코미디영화 등
추리물 이외의 거의 모든 영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연출한다. 그에게 영
화판은 출신과 학력을 따지지 않고 일만 잘하면 밥을 주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도 스스로를 두고 그는 “출근하듯이 현장에 나가서
영화를 찍는 직업감독”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가 직능인(職能人)으로서
영화를 연출하고 생활 현장으로서 영화판을 대했다는 것은 그의 영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는 영화 만드는 일을 생활로 여겼던 사람이었
기 때문에 언제나 영화 제작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었
다. 1970년대의 영화 제작 상황은 “해마다 바뀌는 영화시책이 2~3월쯤 느
즈막이 제작사에 통보되면, 제작사는 그때부터 부랴부랴 기획을 하고 時
限인 6월까지 영화를 끝내려듦으로써 스태프와 연기자는 일시에 아우성
치면서 전투에 몰입”19)하는 것이었다. 영화시책이 매년 바뀌는 데다 그나
마 늦게 발표되기 때문에 영화는 언제나 급조품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이었다. 그런데 전투와 같은 이러한 상황에 임권택 감독이야말로 최적화
된 연출자일 수 있었다. 그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국책영화를
연출할 기회를 얻는 것은 액션영화 연출 경험이 풍부하여 ‘전쟁·액션·대
작’을 잘 만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것을 계기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보다 그가 어떤 제작 환경에
서도 발주자의 의도를 충실히 구현해 주는 연출자이자 시한에 맞춰 물건
을 납품하는 일꾼이었다는 데 있었다.
한국영화진흥공사 창립 기념작이었던 <증언>은 당시 최대 규모의 제
작비(1억 2천만 원)와 엑스트라, 게다가 육해공군의 전격 지원을 받은 반
공영화였다.20) 임권택 감독은 이 영화를 당시 정권이 원하는 극단적 반공

18) 「山岳戰에 새로운 趣向」, 동아일보, 1962.2.25, 4면; 「오락성 살린 역사


교재 / 두만강아 잘 있거라」, 경향신문, 1962.2.7, 4면.
19) 「映畫界 對話가 필요하다」, 동아일보, 1979.5.2, 5면.
20) 「六二五 素材 映畵製作」, 동아일보, 1973.9.1, 5면.
56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영화로 연출한다.21) 이 영화는 전국 7대 도시에서 일제히 개봉하여 2주


만에 22만에 가까운 인원을 동원하며22) 1973년에 가장 흥행한 방화(邦畫)
로 기록된다. 주로 학생을 대상으로 한 동원 관람의 결과였다. 뒤이어 임
권택 감독은 다시 영화진흥공사 지원작인 새마을영화 <아내들의 행
진>(1974)을 만들고, 반공영화 <울지 않으리>(1974)를 연출하며 계속 기회
를 얻게 된다. 같은 시기에 역시 영화진흥공사 지원으로 반공영화(<들국
화는 피었는데>, 1974)를 만들었던 이만희 감독이 염전(厭戰) 영화를 만들
었다는 이유로 검열과정에서 당국에게 편집권을 빼앗기고 이듬해 병사
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당시 국책영화를 만드는 일이 영화적 자의식을
가진 이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아울러 임권택 감독이 얼마나 정권
에 충실한 영화를 만들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임권택 감독은
“1970년대는 적어도 1960년대의 때 묻음을 조금씩 조금씩 벗겨냈던 시기”
라고 회고하면서 1970년대 자신의 영화 활동에 대해 소중한 시간이라고
평가한다.

남들은 새마을영화, 반공영화를 했다고, 그렇게들 무슨 소리를 하고 할


지라도 <아내들의 행진> 같은 영화들이, 후에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로
의 영화를 위해서 트레이닝을 하는 그런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거지요.23)

21) 당시 기사는 이 영화의 성격을 말해준다. “한국영화사상 가장 많은 제작


비와軍事支援 이 투입된 작품은 스케일이 방대하다는 점에서 일단 보아
國策
줄 만하나 한국영화 특히 限界性
영화의 反共같은 것을 드러냈다.
사상을 고취하기 위한國策 영화일수록 국책영화의 냄새를 피우지 않는
證言
쪽이 효과적이다. 그러나 < 反共
>의 경우 사상을 너무 정면에 내세
웠고共産主義者 說得力 半減
들을 피상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을 시키는 결
反戰映畫
과를 낳았다. 한국적 현실에서 를 들고 나오기도 어려웠겠지만
戰爭映畫 平和 志向
는 를 「證言 國策映
했을 때만 큰 뜻이 있지 않을까.” (
畫 限界性
의 」
드러나 , 동아일보, 1974.1.12, 5면.)
「觀客
22) 證言 」
모으는 < > , 매일경제, 1974.1.16, 8면.
23)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2, 25면.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正典)이 되었나?∙박유희 57

임권택 감독의 발언은 많은 감독들이 1970년대를 한국영화의 침체기,


불황기, 게다가 가혹한 검열로 인해 표현의 자유가 박탈되었던 암흑기로
회고하고 자신을 그러한 시대의 피해자라고 말하는 것과는 대비된다.
1970년대는 한국영화가 관객 입장료만으로 살아남기 힘든 시대였기 때문
에 영화 제작은 국가의 우수영화 보상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
니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생산자들은 흥행에 대한 부담이 적은 상태에서
영화를 만들 수 있기도 했다. 1970년대 영화감독들이 유명한 작가의 원작
을 빌려 ‘문예영화’라는 이름으로 저예산 영화를 만들거나, 외화수입권을
위한 ‘방화(邦畫) 쿼터’를 채우기 위해 필름을 반으로 잘라 관습적인 액션
물이나 멜로드라마를 찍었던 것은 관객 동원이 영화제작의 최우선 목표
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시기가 임권택 감독에게는
오히려 기회였던 것이다. 만일 이 시기의 한국영화가 시장 논리에 맡겨
졌다면 임권택 감독은 1980년대로 건너가지 못하고 영화 시장에서 도태
되거나 전혀 다른 연출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이미 ‘영상시대’로 상징되
는 청년문화가 영화계에도 도착해 있었고 임권택은 그런 신세대 감각과
는 거리가 있는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년문화를 이끌던 주역들은 1976년 대마초 사건으로 손발이
묶이게 된다.24) 그리고 1970년대 후반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원작의 <설
국>(고영남, 1977)을 해외영화제에 출품했다고 비난이 빗발칠 정도로25)
이분법적인 민족주의와 계도적인26) 분위기가 팽배했던 시기였다. 이 시
기에 임권택 감독은 국책영화 전문 감독으로 영화진흥공사 이사였던 정
진우 감독과 함께 승승장구하게 된다. 전쟁물, 역사물 등 대작영화 연출


24) 영화감독 李長鎬 大麻草 立件」
등 흡연 , 경향신문, 1976.1.28, 7면.
25)「非難 빗발친 < 雪國 出品」
> , 동아일보, 1977.6.4, 5면.
26) ‘계도성’은 ‘예술’, ‘오락’과 더불어 상업영화에 외화수입권을 수여하는
기준 중 하나였다. (「外畫 補償制」 코터 폐지로 맥 빠진 優秀映畫 」
선정 ,
경향신문, 1975.8.25, 4면.)
58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에는 임권택 감독이 항상 물망에 오르고,27) <상록수>(1978)와 같은 계몽


영화는 그의 몫이 된다.28) 그는 1977년 반공영화 <낙동강은 흐르는
가>(1977)로 대종상 감독상을 수상한 것29)을 비롯해 매년 국책에 잘 맞는
영화를 만들어 우수영화에 선정된다. 1977년에는 문공부가 우수영화 선
정에서 문예와 실화에 치중하면서 당시 가장 흥행하고 있는 하이틴 영화
가 모두 심사에서 탈락했는데, 이때 열일곱 살 해녀의 기구한 삶을 그린
<옥례기>(1977)는 실화와 문예를 충족시키며 우수영화에 선정된다.30) 그
리고 <족보>(1978)로 대종상 최우수감독상을, <깃발 없는 기수>(1979)로
대종상 최우수작품상(대통령상)31)을 수상하며 그는 영화상의 주요 부문
을 휩쓸기 시작한다.32) 이때의 영화가 대부분 당시 국책이 권장하는 예술
영화로서의 문예영화라는 것도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임권택 영화에서는 문학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의
비중이 현저하게 높아진다. 반공영화와 계몽영화를 만들다가 어떤 계기
로 <왕십리>나 <족보>와 같은 ‘작가주의 영화’로 돌아서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대해 임권택 감독은 새마을운동 영화를 만들다 보니 고향과 어머
니를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내적 계기로서는 그러
한 동기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의식이나 욕
망을 끌어내는 데 중요하게 작용한 외부 상황 또한 있었을 것이다. 임권
택 감독에게 영화 만드는 일이 생계요 생활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왕십
리>나 <족보>는 문예영화로서 반공영화, 계몽영화와 동일한 보상을 받

27)「國産映畫 大作 」 바람 , 동아일보, 1978.3.4, 5면.



28) 상록수 映畫化」 , 매일경제, 1977.10.14, 8면.
29)「大賞 執念 演劇·映畵藝術賞」
에 영화 < > , 경향신문, 1977.4.21, 6면.
30)「文藝·實話 脚光」
영화 , 동아일보, 1977.9.19, 5면.
「 大鐘賞
31) 18회 」
에 <깃발 없는 기수> , 매일경제, 1979.10.1, 7면.
32) 1970년대 말에 국가가 원하는 예술영화의 조건을 충족시키며 임권택과
함께 작품상과 감독상을 석권하곤 했던 감독은 유현목, 김수용, 정진우
등이었다.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正典)이 되었나?∙박유희 59
을 수 있었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지점이다. 이 시기에 그는 조해일
원작의 <왕십리>(1976)로 시작하여 가지야마 도시유키 원작의 <족보>
(1978), 심훈 원작의 <상록수>(1978), 김용성 원작의 <내일 또 내일>(1979),
천승세 원작의 <신궁>(1979), 선우휘 원작의 <깃발 없는 기수>(1979), 그
리고 1980년대에 들어서 전상국 원작의 <우상의 눈물>(1981), 김성동 원
작의 <만다라>(1981), 이문열 원작의 <안개마을>(1982), 한승원 원작의
<불의 딸>(1983) 등의 문예영화를 연달아 연출하며 국가의 보상을 받는
다.
임권택 감독은 ‘불황과 저질의 시대’에 반공, 계몽, 문예라는 우수영화
부문의 요건을 충족하면서 국가의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시의적절한
영화를 계속 기획하고 연출한다. <상록수>(1978), <족보>(1978), <만다
라>(1981), <안개마을>(1982) 등은 문예영화로, <깃발 없는 기수>(1979)나
<짝코>(1980) 등은 반공영화로 국가가 승인하는 우수영화의 범주에 포용
된다.33) 그러면서 한편으로 이 영화들은 임권택이 ‘작가’로 호명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임권택은 국가가 지원하는 영화의 범주 안에서
주로 문학 원작에 기대어 진지한 주제를 탐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계몽과 민족이라는 매개로 국책영화의 자장에 있던 영화
들을 리얼리즘, 예술영화, 민족영화라는 견지에서 재(再)해독하는 시대와
다시 조응하고 있었다.34)

33) 임권택의 <만다라>와 <우상의 눈물>은 1981년 우수영화 심사에서 1,2위


를 차지한다.( 「林權澤 다음 작품 宇進 」
과 , 경향신문, 1981.9.11, 12면.)
그리고 <짝코>는 반공영화 부문 특별상을 수상한다. 이는 편당 외화수
입 쿼터 1편을 받게 되는 핵심 부문이었다. 이때 임권택은 감독상도 수

상한다. ( 그랑프리 < 招待 」
받은 사람들> , 매일경제, 1981.10.23, 11면.)
34) 언론과 비평가의 관심은 주요한 징후다. <족보>는 한국영화기자회에서
수여하는 영화기자상(일간지와 통신, 주간지의 영화담당 기자들이 지난
1년 동안 제작돼 검열을 끝낸 작품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영화상)의 주

요 부문 3개상(작품상, 감독상, 남우상)을 수상한다.( 78년도 영화 記者
賞<족보>가 3개 部門 」
석권 , 경향신문, 1978.12.2, 6면.) 그리고 <내일
60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3. 현실주의와 민족 이념의 양가성

1980년대에 들어서며 국책영화의 맥락에 놓여 있던 임권택 영화는 리


얼리즘 영화, 예술영화, 혹은 민족영화로 호명되기 시작한다. 1970년대 후
반 이후 임권택 영화에서는 분단문제, 이념갈등, 계급모순 등의 시의적인
문제를 개인의 구도(求道)나 여성수난과 절합하며 할리우드 영화와 변별
되는 미학을 탐색하는 가운데 해외영화제로의 진출을 도모한다. 마침 해
외영화제에서는 탈냉전의 기류를 타고 동아시아 영화에 대한 관심이 고
조되었고 로컬리티를 전면화하는 영화들이 속속 입상하고 있었다. 이때
임권택 영화는 충무로에서 1980년대 한국의 당면 문제를 다루는 리얼리
즘 감독으로서의 입지를 구축하며 한편으로는 국가를 대표하는 예술영
화로 나서게 된다. 상충될 수도 있는 리얼리즘과 국가가 지원하는 예술
영화는 ‘내부에의 억압’과 ‘외세에 대한 저항’이라는 민족 이념의 양가성
속에서 역시 양면성을 지닌 임권택 감독의 도저한 현실주의를 통해 손잡
는다. 생존하기 위한 데에서 출발한 임권택 감독의 현실주의는 한때 리
얼리즘 영화로서의 성취를 이루었지만, 한편으로는 또 다시 살아남기 위
해 얼마든지 변모하고 정향될 수 있는 것이었다. 1990년대 이후 임권택
영화는 ‘한국적 예술영화’라는 깃발 아래 유럽영화제 수상을 향해 한층
경도된다. 그러면서 그의 영화는 리얼리즘에의 탐구를 내려놓고 가부장
이데올로기와 역사의 수난에 순응하는 태도를 한국인 고유의 정서로 미
화하는 영화로 정향된다.

3.1. 우수영화에서 리얼리즘과 예술영화로

또 내일>은 당시 이영일, 김종원, 정용탁 등 평론가가 뽑은 베스트7에


「 」
선정되었다. ( 평론가들이 뽑은 베스트7 , 동아일보, 1979.12.27, 5면.)
正典)이 되었나?∙박유희 61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임권택 감독이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첫머리에 놓고 싶어 하는 영화


<잡초>를 만든 것이 1973년이었다. 이 시기는 주지하다시피 유신헌법이
시행되며 독재체제가 강화된 때이다. 정권은 안보 위기를 강조하며 토착
적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반공의 도식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국민
의 기본권을 억압하였다. 이때 영화정책은 검열을 통해 규제하는 것을
넘어 국가가 원하는 영화 제작을 지원하는 쪽으로 전환된다. 영화진흥공
사의 설립과 반공영화나 계몽영화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은 이러한 정책
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화진흥공사에서 창작 지원하는 시나리오에 대한
심사기준35)은 당시 정권이 원했던 영화의 윤곽을 보여준다.36)

① 10월 유신을 구현하는 내용


②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애국애족의 국민정신을 고무․진작시키
는 내용
③ 새마을운동에 적극 참여케 하는 내용
④ 수출증대를 도모하는 내용
⑤ 전 국민의 과학화를 촉진하는 내용
⑥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군경 및 일반공무원상을 부각시키는
내용
⑦ 밝고 명랑한 청춘의 미래상을 그리는 내용
⑧ 창작에 의한 순수 문예물로서 예술성을 높이는 내용
유신체제에서 국가주의가 한층 강화된 항목이자 ①의 하위항목에 해
당하는 ②~⑥에서 ‘민족’과 ‘국가’를 위한 ‘국민’의 헌신이 거듭 강조되고

35) 월간영화 창간호, 영화진흥공사, 1973.6, 51면; 이혁상, 한국영화 진흥

기구의 역사 , 김동호 외, 한국영화정책사, 나남출판, 2005, 371면에서
재인용.

36) 이에 대해서는 박유희, 박정희 정권기 영화 검열과 감성 재현의 역학 , 」
역사비평 제99호, 역사문제연구소, 2012, 61-62면 참조.
62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있다. ‘민족과 국가’는 정권을 유지하는 데 국민을 동원하기 위한 이념적


수단으로 민족과 국가 내부의 이질적인 목소리를 억압하는 기제로 활용
될 수 있다.37)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청춘의 미래’와 ‘순수 문예물’
또한 운위되고 있다. 이 시기에 임권택 영화는 반공영화나 새마을영화에
서뿐 아니라 문예영화에서도 계몽성을 강하게 드러내곤 한다. 예컨대
<옥례기>는 17살 해녀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장애인 남편에게 출가하여
모든 고행을 견딤으로써 국가로부터 상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고, <내일
또 내일>은 출세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주인공이 아내가 자
살하자 뼈아프게 뉘우친다는 이야기다. 이와 같이 서사가 도덕적 건전함
으로 귀결되는 양상은 1980년대에도 계속되어 <우상의 눈물>에서는 기
태가 무섭다는 편지를 남기고 사라지는 원작과 달리 잘못을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는 것으로 결말이 수정된다.38) <만다라>의 경우에도 원작에서
는 법운이 지산의 길을 따르는데, 영화에서는 어머니를 대면한 후 자기
나름의 길을 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계몽적 의지와 윤리적 귀결은 임
권택 영화를 관통하며 그 기저에는 가부장적인 태도가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이는 임권택 영화가 본질적으로 ‘국가’나 ‘민족’의 이념과 쉽게 합치
될 수 있는 이유다.
그런데 1980년대에 반미(反美) 의식이 팽배하면서 민족 이데올로기는
외세에 대한 저항 이념으로 대두한다. 이에 ‘리얼리즘’과 함께 ‘민족영화’
가 할리우드에 대응하는 한국영화 담론으로 등장한다. 1980년대 후반 사
회 변혁에 대한 의지가 본격적으로 표출되면서 새로운 영화를 향한 이론
적 논의와 실천에의 요구 또한 커진다. 이 시기에 광주항쟁 비디오가 대
학을 중심으로 유포되며 영상매체의 정치적 힘이 새삼 증명되기도 했다.
또한 할리우드 영화 직배를 둘러싸고 스크린쿼터를 사수하려는 영화계

「 」
37) 주유신, 민족 영화 담론, 그 지형과 토픽들 , 영상예술학회 학술대회
논문집 2008년 춘계학술대회, 영상예술학회, 2008, 24면.

38) 소설 「偶像 의 눈물 /」 世耕
흥업 映畫化」
, 동아일보, 1981.1.30, 12면.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正典)이 되었나?∙박유희 63
의 저항이 거세지고 있었다. 이때 영화동호회와 대학 운동권을 중심으로
영화의 대중성과 파급력을 사회운동으로 전화(轉化)할 가능성이 적극적
으로 타진된다. 열린 영화와 민족영화는 그것을 대표하는 두 진영이
었는데, 양쪽 모두 ‘리얼리즘’을 내세워 기존의 관습을 혁신하는 형식적
새로움과 사회 변혁에 복무할 수 있는 내용의 새로움을 주장했다. 그리
고 그것은 ‘할리우드 영화’로 대표되는 기존 상업영화의 관습에서 벗어난
영화를 지향하는 것이었다.39) 그러나 논쟁에 비해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실제 텍스트의 생산이 미약하여 담론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러한 담론은 계몽적 이론으로, 상업영화 비평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임권택 영화가 리얼리즘 내지 예술영화로 평가받으며 한국영화의 대표
로 부상하는 데에는 1980년대 들어서 대두한 이러한 영화운동 담론이 배
면에 존재한다.40)
한편 1980년대는 에로틱 멜로드라마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예컨대 1982
년에 한국영화 흥행 1위는 <애마부인>이었고, <낮은 데로 임하소서>,
<겨울로 가는 마차>, <꼬방동네 사람들>, <여자의 함정>, <속 영자의
전성시대>, <금강혈인>, <반노>, <애인>, <탄야>가 2위~10위를 차지
했다. 이 중에서 반절 이상은 1970년대 말부터 성행한 관습적 멜로드라마
의 맥락에 놓여있는 영화들이었다. 이 와중에 <낮은 데로 임하소서>나


39) 1980년대 영화 담론에 대해서는 김소연,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담론의

형성 , 실재의 죽음, 도서출판B, 2008, 36-47면 참조.
40) 당시 젊은 영화평론가들이 만든 계간지 영화언어(1989년 겨울호)에서
는 ‘1980년대 한국영화 10 베스트’라는 제목 아래 10편의 영화에 대한

비평을 실었다. 이때 10편의 선정 기준은 ‘사회의식’과 ‘탈( ) 할리우드
영화를 위한 표현 양식의 가능성’이었다. 그리고 선정된 영화 10편은
<바보 선언>, <바람 불어 좋은 날>, <만다라>,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
닭은>, <황진이>,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티켓>, <과부춤>,
<짝코>, <길소뜸> 이었다. 10편 중 4편이 임권택 영화였다. ( <바보선 「

언> 80년대 최고/ 계간 영화언어 선정 , 한겨레신문, 1990.1.24, 16
면)
64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꼬방 동네 사람들>과 같이 1980년대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영화들


이 있는데, 전자는 <바람 불어 좋은 날>로 귀환한 이장호의 영화이고,
후자는 1980년대 총아로 등장한 배창호의 데뷔작이다. 이 해에 임권택 감
독은 <오염된 자식들>, <아벤고 공수군단>, <안개마을>을 내놓았으나
모두 10위 안에 들지 못한다. 그래도 세 영화는 국내 각종 영화상을 받게
되고, <아벤고 공수군단>은 대종상 안보 부문 작품상을 수상한다. 이후
이장호와 배창호를 비롯해 중견감독 이두용이 흥행을 이어갈 때에도 임
권택 감독은 일관되게 ‘한국적인 소재’로 ‘정치·사회적인 면’을 경유하며
‘본질적인 문제’를 탐구한다.41) 그리고 이 영화들로 국내 영화상을 석권하
고 우수영화 보상을 받으며 해외영화제에도 계속 진출한다.42) 1980년대
말에 이르러 이장호, 배창호, 이두용이 흥행 감독으로 소진되었을 때 임
권택 감독은 ‘해외영화제 수상 제조기’로 불리고 있었다.
여기에서 임권택 감독의 입지전적 전기는 그의 영화에 리얼리즘 내지
민족영화로서의 정당성과 위상을 부여하는 데 명분을 보태는 것이기도
했다.43) 이러한 상황에서 반공영화로 제작된 <짝코>와 이산가족 찾기에

41) 1982년 한국을 방문한 프랑스 감독 장 자크 샤크뮌데스의 강연 내용은


한국영화가 유럽영화제에 진출하는 데 참고점을 제공한다. 그는 한국영
화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정치 사회적인 면에서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
지 못하고 있는 듯”한 것이라고 하면서도, 한국영화가 국제무대에 진출
하려면 “무엇보다 한국적인 소재를 택해야” 하며 “가장 규모가 작은 영
화제 우선 참가, 우선 거기에서 평가받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佛」 監督
( 장자크 샤크뮌데스 , 氏 講演會 韓國映畵 / 너무 單調 」롭다 ,
동아일보, 1982.6.2, 12면.)
42) 1980년대에 임권택 감독은 <짝코>(1980), <우상의 눈물>(1981), <만다
라>(1981), <안개마을>(1982), <불의 딸>(1983), <길소뜸>(1985), <씨받
이>(1986), <티켓>(1986), <연산일기>(1987), <아다다>(1987),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를 연달아 연출한다. 임권택의 이러한 행보에는 송길한
작가와의 만남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짝코> 이후 임권택 감독은 송
길한과 작업하는 7년 동안 대표작을 만들어낸다.
43) 1990년 남북한 영화 관람에서 임권택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가 상영된

다. ( 잘 돼야 할 텐데 … 南北 」
대표단 긴장 , 매일경제, 1990.9.6, 2면.)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正典)이 되었나?∙박유희 65
맞춰 기획된 <길소뜸>은 민족문제를 보여주는 텍스트로 주목받는다. 그
리고 <만다라>와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불교를 통해 민족 특유의 문
화를 보여주는 예술영화이자 에둘러 사회적 실천을 주장하는 리얼리즘
영화로 평가되었다. 이러한 평가에는 <순교자>(유현목, 1964) 이후 기독
교 영화가 반공주의와 결합하여 예술영화로 인정받은 것과는 대조적으
로, <만다라> 이전까지 불교를 다룬 영화가 예술영화로 인정받지 못했
던 맥락도 한몫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은
해외영화제로의 진출이었다.
마침 서구 영화제에서는 유럽 영화가 할리우드의 위세에 밀리고 매너
리즘에 빠지는 가운데, 또한 냉전 구도가 붕괴되는 세계사적 흐름 속에
서 아시아 영화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중국의 장이머우, 첸카이거 등 제
5세대 감독들과 대만의 허우 샤오시엔, 에드워드 양과 같은 뉴웨이브 감
독들이 서구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러한 흐름 안에 놓여있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일본과는 다른] 아시아의 로컬리티를 드러내는 한국
영화들도 해외영화제에서 계속 수상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성과를 낸
것은 이두용이었다. 이두용의 <피막>(1981)이 베니스영화제에서 특별상
을 수상하는 것을 시작으로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3)가 칸영
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Un Certain Regard)’ 부문상을 수상하였다. 이 영
화들은 여성수난담 혹은 ‘토속적 에로티시즘’의 맥락에 있는 것들로 국내
에서는 식상한 것이었기에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치
마저고리 입은 여성을 팔아 서구 오리엔털리즘에 호소한다는 비판으로
부터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새로운 아시아 영화에 대
한 유럽영화제의 관심과 맞물리며 해외에서는 한국의 특성을 잘 드러내
는 영화로 간주되었다. 이에 여성수난을 민족예술로 치환하는 국제영화

그리고 이때부터 임권택이 좌익 집안 출신이라는 것이 화제가 되고, 동


아일보에서 자전 에세이가 연재되며 ’빨치산 아들‘로 호명되기 시작한
다.
66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제용 토속물이 하나의 장르를 형성하게 된다. 임권택의 <씨받이>, <아


다다>, 그리고 <아제 아제 바라아제> 또한 이러한 맥락에 놓여있는 영
화들이었다.44) 그러나 임권택의 영화는 분단 문제를 다루고 종교영화를
연출한다는 점에서 리얼리즘 영화 내지 예술영화로 평가되어 비판을 비
켜간다. 그리고 이러한 영화들이 해외영화제에서 계속 수상하면서 임권
택의 입지는 ‘예술영화 감독’으로 격상된다. 이제 그에게는 ‘명장(名匠)’이
라는 말이 따라붙게 되고 수상(受賞)할 때마다 전작(前作)들이 TV에서 방
영된다.45) 이에 따라 그의 위상과 명성은 한층 공고해지고 임권택 영화를
둘러싼 담론은 국가와 국민이 응원하는 민족 예술영화의 맥락으로 급격
히 옮겨간다.

3.2. 현실주의의 두 얼굴, 리얼리티와 순응

1980년대에 임권택 영화가 국내 영화상을 자주 타고 해외영화제에 진


출했다고 해서 언제나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다. 임권택 감독 또한 실
패하거나 좌절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통상 제작비 2~3배에 달하는
거액(2~4억)으로 기획되었던 <비구니>46)가 불교계의 반발로 제작이 좌

「 」
44) 국제무대 겨냥 영화제작 활발 , 동아일보, 1987.10.27, 16면.
45) 1988년 9월부터 10월까지 <만다라>, <상록수>, <길소뜸>이 ‘우수 한국
영화시리즈’로 MBC TV에서 연달아 방송되고, 같은 시기 KBS ‘한국영
화걸작선’에서는 <내일 또 내일>이 방송된다. 1989년 1월에 MBC ‘한국
영화초대석’에서 <씨받이>가, 3월에는 KBS ‘한국영화걸작선’에서 <안개
마을>이 방영되고, 같은 해 9월에는 MBC ‘한국영화초대석’ 에서 <연산
일기>가 방송된다. 이듬해인 1990년 1월에는 KBS ‘일요한국영화’에서
<아다다>가 전파를 탄다. 모두 임권택 영화가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하는
것과 맞물리는 시기였다. 1990년대에는 한가위, 설날, 석가탄신일 등의

특선영화로 임권택 영화가 방영된다. ( 한가위 안방극장 볼거리 풍성 , 」
「 」
경향신문, 1992.9.10, 27면; 설날 특선영화 <개벽> , 한겨레신문,

1993.1.22, 16면; 부처님 오신 날 특선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 (K1

오후 2시) , 한겨레신문, 1994.5.18, 14면.)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正典)이 되었나?∙박유희 67
절된 것이다. 그런데 이럴 경우 그는 모험하거나 무리하지 않고 포기하
거나 타협한다. <비구니> 제작이 어렵게 되자 그는 곧바로 반공영화
<노을>의 연출을 수락한다.47) 그러면서 <비구니> 제작팀을 <노을>에
그대로 데려가고, 이때 빠진 김지미는 <길소뜸>에서 주인공으로 기용한
다. 제6공화국 말기 <태백산맥>을 연출하려다 좌절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는 정부쪽으로부터 그 영화를 지금 꼭 만들어야겠느냐는 연락을 받고
영화 제작을 유보했다고 고백한다.48) 그리고 바로 <서편제>에 돌입하고
<서편제>로 크게 성공하자 그때 다시 <태백산맥>을 만든다. 그런데 우
익단체들의 테러 위협이 잇따르자,49) 그는 예정되었던 <태백산맥> 후편
을 포기하고 이후에 이념 관련 영화는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한다.50)
일련의 사실은 1970년대에 반공영화와 계몽영화를 만들던 임권택 감독
이 어떻게 <왕십리>나 <족보>를 만들게 되었으며, 1980~90년대에 해외
영화제를 겨냥한 예술영화를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안보 부문 수상을 노
린 반공영화와 흥행을 노린 액션 영화를 연출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단
서를 제공한다. 그는 일과 사람에 모두 성실하면서도 무리수를 두지 않
으며 현실에 빠르게 적응한다. 이러한 태도의 기저에 흐르는 것은 ‘도저
한 현실주의’다. 그는 현실적이기 때문에 어떤 여건에서도 영화를 만들

46)「大作 으로活路 映畫界」


찾는 , 경향신문, 1984.2.24, 12면.

47) <비구니>의 林權澤 反共 감독 」
영화 <노을> 연출 , 경향신문, 1984.7.17,
11면.

48) “다 지나간 이야기라 말하긴 뭐하지만 정부쪽으로부터 얘기가 있었어
요.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그렇게 객관적으로 그리기에는 아직 시기가

적당치 않다는 ” (임권택 편, 서편제 영화 이야기, 하늘, 1993, 71-72
면.)
「 」
49) <태백산맥> 영화저지 우익단체 궐기 , 한겨레신문, 1994.5.5, 11면; 「

영화 <태백산맥> 상영 말라 협박편지 , 동아일보, 1994.9.1, 21면; <태 「

백산맥> 극장 개봉 땐 화약 등 폭력 동원 불사 , 한겨레신문, 1994.9.1,
「 」
23면; 이념논쟁 회오리 문화예술계 확산 , 경향신문, 1994.9.1, 23면.
50)「林權澤 감독 우익단체협박 정신적 고통 <태백산맥> 2부 제작 않겠다 , 」
경향신문, 1994.9.8, 17면.
68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수 있었고, 그런 경험을 자양 삼아 계속 살길을 개척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옛 연인을 사기치고(<왕십
리>), 친일을 하면서도 족보를 위해 목숨을 버리며(<족보>), 자신의 안위
를 위해 혈육을 부정하는(<길소뜸>) 엄혹한 리얼리티가 그의 영화에서
구현될 수 있기도 했다. 요컨대 임권택 감독의 도저한 현실주의는 양면
성을 지닌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세파를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받
아들이는 체념이 깔려 있다. 여기에서 임권택 영화가 국가의 지향에 따
라 움직인 것은 불안한 현실에서 그래도 국가를 추수하는 것이 가장 안
전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래서 “나라가 하는 일에 맞
서서 이기는 것 못 봤다!”는 <태백산맥>에 나오는 노인의 일갈이 의미심
장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왕십리>, <족보>, <길소뜸> 등에서 보여준
리얼리즘의 경지와는 상충되는 듯한 임권택 영화의 또 다른 면모, 즉 이
념 관련 영화에서 언제나 국가가 허용하는 표현의 한계를 넘지 않는 것
또한 동일한 맥락으로 설명될 수 있다. 임권택 감독은 <짝코>, <깃발 없
는 기수>, <태백산맥>과 같은 이념 관련 영화를 만드는 것이 자신을 20
여 년 동안 떠돌게 만들었던 이유를 역사 속에서 ‘대면’해가는 과정이었
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이념에 의한 피해를 강조하고 그로 인
한 환멸을 보여줌으로써 결과적으로 반공영화로 귀결된다. 이 영화들에
서 ‘이념’으로 표상되는 것은 공산주의자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짝
코>와 <깃발 없는 기수>는 반공영화로 기획·제작되었으며 반공 부문 우
수영화로 선정되어 보상을 받기도 했다. 따라서 이 영화들은 임권택 감
독의 의지보다는 국가에서 요구하는 틀이 완강했던 장르에 속한다. 그런
데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자기 역사와의 대면’으로 표현하면서 성장
을 암시하는 것은 반공주의에 대한 ‘수락’ 내지 ‘동의’로 읽을 수밖에 없
다.
<깃발 없는 기수>는 해방 공간에서의 이념 대립을 그린 것으로 이념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正典)이 되었나?∙박유희 69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첫 번째 영화이다. 임권택 영화가 이념을 다루
는 방식은 향후에도 이 영화의 구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원작자인 선우휘는 대표적인
우익 민족주의 작가여서 그의 소설은 반공영화의 단골 원작이 되었다.
그런데 <깃발 없는 기수>는 원작보다 더 반공을 강조하는 쪽으로 각색
된다. 원작에서는 주인공 윤이 우익을, 순익이 좌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래서 윤과 순익은 사사건건 대립하고, 순익은 윤이 평안청년회
를 시켜 자신에게 린치를 가했다고 오해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순익(윤
양하)이 좌익을 대변하는 것은 동일한데, 곰(김희라)이 우익을 대변한다.
대신 윤(하명중)은 둘 사이를 중재하는 중도적인 입장의 인물로 설정된
다. 그리고 윤이 나오는 장면에는 줄곧 홍난파의 ‘봉선화’가 배경음악으
로 깔린다. 또한 원작에서는 실패한 공산주의자의 아들 성호가 아버지에
게 떠밀려 좌익운동에 가담하지만 결국에는 인민재판에서 친구를 구하
기 위해 목숨을 던진다. 이때 성호의 행동은 숙고 끝에 주체적인 결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영화에서 성호는 인민재판에서 좌익의 강요에
의해 친구를 먼저 찌르게 되자 우발적으로 도망치다가 좌익들에게 살해
된다.
이러한 각색은 제작진의 선택이라기보다는 검열에 의해 가이드라인이
지시된 것이었고,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 영화의 검열 서류를 보면 그것이 드러난다.

[표 1] 시나리오 심의의견서51)

제명 깃발 없는 기수

종별 반공물

「 」
51) 한국공연윤리위원회, 극영화 시나리오 심의결과 보고 , 1979.7.27. (한국
영상자료원 소장.)
70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작품의 해방 후 좌우익의 혼란한 사회를 ‘윤’이라는 기자의 눈을 통해 비판해본


주제성 작품. 윤은 철모르는 학생들이 좌익계에 가담하여 이용당하는 데 울분을
느낀다. 또한 미군과 소련군에게도 저항을 느끼지만 자신의 소신을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른 채 술로써 허전함을 달랜다. 하숙집 어린 아들이 좌익
에 가담했다가 희생되는 현장을 보는 순간 좌익의 지휘자 설을 암살한다
는 줄거리.

종합
본 작품은 다음의 지시사항을 준수하시기 바랍니다.
의견
지시 1. 본 작품은 해방 후 좌우익의 충돌로 혼란했던 시기를 소재로 다룬 것이
사항 므로 당시의 사회 환경을 몸소 체험하지 못한 오늘날의 청소년을 위해
서는 보다 확실한 사건의 진상과 등장인물의 반공주의적인 행동을 부
각시켜 주제를 분명하게 하실 것.
2. 학생들의 시위와 구호, 특히 명기되지 않은 구호묘사에 대해서는 관계
기관의 감수를 받아 제작하실 것.
3. 미군정에 관한 이야기는 왜곡되지 않게 표현하실 것.

<깃발 없는 기수>는 청소년들에게 관람시킨다는 것을 전제로 한 반공


영화였다. 따라서 당국에서는 “오늘날의 청소년을 위해서는 보다 확실한
사건의 진상과 등장인물의 반공주의적인 행동을 부각시켜 주제를 분명
하게”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그런데 임권택 감독은 이러한 반공영화들을
만들었을 당시의 심경에 대해 “결국 그걸 해야 한다면 나는 거기서 그것
을 기록으로서 남기고 싶은 거야.”52)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임권택 영화
를 구성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것은 반공영화를 만들면서도 나름
대로 역사의식 내지 작가의식을 견지하고자 했다고 주장함으로써 불가
피한 선택을 주체적인 것으로 환치하려는 욕망, 그리고 그 아래 완고하
게 버티고 있는 가부장적 책임의식이다. 임권택 영화에서는 모든 행동을

52)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1, 68면.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正典)이 되었나?∙박유희 71
가부장이 결정하고 그 책임 또한 가부장이 져야 한다는 태도가 두드러진
다. <족보>에서 종손인 설 씨 혼자 마지막 결단을 내리는 것은 임권택
영화의 이러한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후기로 갈수로 강화되
는데, 임권택 감독은 <아다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
이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조금 더 심지 깊게, 지긋하게 자기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여자보다



남자인 것 같애. [ ] 어디까지나 남성 우월적인 그런 사회를 우리는 쭉
살아왔잖아요. 그런 집안을 마지막까지 버틸 수 있는 것은 시아버지라고,
여자가 아니라고.”53)

이러한 태도는 임권택 영화에서 극단적인 여성 소외로 드러나곤 한다.


<깃발 없는 기수>에서 아들 성호가 끝까지 주체적인 의지를 가지지 못
하고 역사의 희생양이 되고 마는 것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
다. 유신체제기는 한 사람의 가부장 이외에는 새로운 청년 가부장조차
허용하지 않는 시대였다.54) 임권택 영화에서 일관되는 가부장적 태도는
시대라는 태생적 한계에 강하게 긴박된 증거이지만 결국에는 임권택 영
화를 지배하는 세계관이기도 하다.
이러한 세계관은 이념 관련 영화에서 민족주의자를 대립되는 입장을
통찰하는 관점에 배치하는 구도와도 연관된다. 이 구도는 <짝코>를 거
쳐 <태백산맥>에까지 이른다. <짝코>에서는 민족주의자가 따로 설정되
지는 않았지만 백공산(김희라)과 송기열(최윤석)을 모두 이념 대립과 전
쟁의 피해자로 그리면서 영화의 관점 자체가 그러한 입장을 취한다. 그

53)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2, 133면.



54) 이 시기의 남성 주체 문제에 대해서는 박유희, ‘그녀’라는 거울 속 타자
考」
들: <겨울여자>(김호선, 1977)의 남성인물 고( ) , 한국영상자료원 편, 
영화와 남성: 영화로 보는 한국사회와 남성, 한국영상자료원, 2017,
108-123면 참조.
72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리고 <태백산맥>에서는 이념을 부정하는 김범우(안성기)를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염상진(김명곤)이 마지막에 김범우 앞에서 이념에 대한 회의를
드러내는 것으로 각색한다.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좌익을 인간으로 그릴
수 있다는 것만도 1960~70년대 상황에 비하면 나아간 것이라 할 수도 있
을 것이다.
그러나 텍스트를 들여다보면 임권택 영화에서는 언제나 이념이 가해
자로 설정된다. 따라서 좌익은 섣부른 이상에 사로잡혀 날뛰다가 이념에
대한 회의와 허무 속에서 외롭게 죽어가는 것으로 재현되어, 결과적으로
임권택 영화는 반공영화의 계보에 놓이게 된다. 또한 <태백산맥>이 나
왔을 때에는 이미 이러한 관점이 텔레비전 드라마에서조차 일반화되어
있었다.55) 그럼에도 임권택 감독이 이러한 영화를 만드는 것을 자기를 대
면하는 과정이라며 긍정적으로 회고하는 것은 이 시대의 가이드라인을
거듭 수락하면서 내면화했거나 애초에 동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
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불가항력적 수락이든 능동적 동의이든
간에 그렇게 했기에 임권택 영화는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56)

3.3. 분단 시대 퇴행적 가부장의 예술

임권택은 1980년대 영화를 회고하면서 “나는 미학이 사실감을 우선하


는 감독이 아니에요.”라고 말한다. 이 말은 <왕십리>부터 <길소뜸>에
이르는 영화들에서 가장 적실할 것이다. 그런데 <씨받이>가 베니스영화
제에서 주요상(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임권택 영화는 다시 정향된다.
그리고 그것은 해외영화제, 그 중에서도 서구의 유수 영화제에서의 수상

「 」
55) 박유희, 1980년대 문예드라마 <TV문학관> 연구 , 한국극예술연구 제
57집, 한국극예술학회, 2017, 141-142면 참조.

56) 임권택이 나의 선택, 나의 길에 실린 회고록의 제목을 영화로 풀어낸

생존의 들풀 이라고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正典)이 되었나?∙박유희 73
이라는 국가적 목표와 본격적으로 함께 한다. 그러면서 임권택 영화는
‘총체성’을 지향하게 되고 언어에의 의존도가 높아지며57) 국면의 사실감
보다는 계몽적인 성향을 강하게 드러낸다. 동시에 가부장적인 세계관도
보다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그리고 그러한 요소들이 임권택 영화의 미학
을 구성해 간다.
해외영화제 수상은 해방 이후에 꾸준히 지속된 국가적 과제이자 한국
예술영화 실현에 대한 영화계의 갈망이었다. 한국전쟁 이전에 이미 문예
영화 논의가 시작되고 <해연>(이규환, 1948)이나 <마음의 고향>(윤용규,
1949)과 같은 영화가 제작된 것은 그것을 잘 말해준다. 한국전쟁 이후에
그러한 갈망은 더 커지고 국가 차원의 지원도 본격화되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라쇼몽>(구로사와 아키라, 1950)이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은 그러한 갈망을 한층 부추기기도 했다.
당시에 목표로 삼았던 예술영화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을 원작
으로 하여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라쇼몽>에 필적할 만한 ‘한
국적인 영화’, 즉 문학을 원작으로 전근대를 배경으로 삼아 현실 문제와
는 거리를 둔 차원에서 한국의 지역색을 드러내는 영화였다.
그러한 영화에 대한 경주는 1960년대 문예영화 보상이 강화되면서 더
욱 가속화되어 향토성 계열의 문예영화로 정형화 되어간다. 네오리얼리
즘과 누벨바그 영화의 영향으로 모더니즘 계열 영화가 예술영화의 한 갈
래를 차지하지만, 그 유형의 영화들은 대중성 면에서 약했기 때문에 소
수 엘리트를 위한 영화로 점차 축소된다.58) 그런데 1960년대부터 1970년
대까지 영화들에서는 일제와 공산주의에 대한 저항 이외의 저항을 다루
는 것은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운규의 <아리

57) 그는 이때부터 서술의 효율성을 지향하며, “시대 배경을 설명해야 하는


것들이 들어가야 그 극의 진행을 돕거나 할 때 기탄없이 내레이션을 쓰
기” 시작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2, 133면.)
「 」
58) 박유희, ‘문예영화’의 함의 , 영화연구 제44호, 한국영화학회, 2010,
129-147면 참조.
74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랑>을 전범으로 삼는 민족 예술영화에서 빠져서는 안 될 것이 ‘저항의


리얼리즘’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의 문예영화는 국책에 맞추기 위해 필수
적인 부분을 결락하고 있는, 절름발이 영화로 존재했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은 일종의 콤플렉스로 영화계 내부에 저류하고 있었다. ‘저항적 리얼
리즘’은 1960년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한다는 명분 아래 ‘전근대 유교 규범
에 부당하게 억압당하는 여성의 수난’을 그리는 에로티시즘 영화가 부상
하면서 왜곡된 형태로나마 활로를 찾는 듯했다. 그러나 국가 차원에서
생활 규범을 강화하면서 에로티시즘은 철퇴를 맞았고, 에로티시즘은 도
착적인 포르노그래피의 상상력으로 텍스트 이면에 스며들었다.59)
그러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서 <피막>,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
야> 등이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여성수난에 기대어 전근대 규범을
비판하는 영화들이 번성하게 된다. <씨받이>는 그 유형에 속하는 영화
였다. <씨받이>의 수상 이후 임권택 영화는 국제영화제를 겨냥하고 향
토색을 강화하는 쪽으로 전개된다.60) 그런데 임권택 감독은 <씨받이>와
같은 영화를 만든 것을 후회했다고 나중에 토로한다. 그는 “소위 조상신
을 받들고 그런 체제로 사람을 묶어내서 남아선호사상이라는 것을 통해
서 계속 이어가는 유교적 내세관이라고 그럴까. 이런 것들에 대한 비판
도 좀 하고 싶었고. 그렇지만 유교라는 게 남긴, 우리가 유교적 삶을 통
해서 지켜내고 떠받들고 하는 가운데 우러나는 기품들, 그런 것도 아름
다운 것으로 한번 드러내고 싶은 것”이었는데, 섣불리 비판만 한 것에 대


59) 박유희, ‘검열’이라는 포르노그래피: <춘몽>에서 <애마부인>까지 ‘외설’

검열과 재현의 역학 , 대중서사연구 제21권 3호, 대중서사학회, 2015,
128-138면 참조.
60) 임권택 감독이 국제영화제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에는 마침 영화진흥공
사 사장으로 김동호 위원장이 부임하면서, 국제영화제에로의 진출이 활
발해진 것에도 영향이 있었다. 정훈 계통 관리들이 업무를 처리하던 영
화진흥공사에 처음으로 문공부 소속 김동호 위원장이 사장으로 부임하
면서 영화제를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해외 영화제를 다니면서 열정적으
로 한국영화를 알렸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2, 124면.)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正典)이 되었나?∙박유희 75
해서 부끄러웠다는 것이다.61) 그러면서 임권택 영화는 ‘우리의 것’, ‘전통’,
‘한’ 등을 한국적 미학으로 내세우는 가운데 현실과 유리되어 예술을 위
한 예술로 보수화된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서편제>
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서편제>는 <태백산맥> 제작이 좌절된 상황에서
칸영화제 출품을 목표로 기획된 영화였다. 1990년을 맞이하는 인터뷰에
서 임권택 감독은 “작품의 주제, 흐름 등에 대해 자신보다 외국의 비평가
들이 훨씬 잘 꿰뚫고 있다며, 1990년에는 또 다른 정직한 작품들로 세계
영화제에서 승부를 내겠다.”라고 다짐한다.62) 이때부터 임권택 영화는 해
외영화제만을 바라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군의 아들>(1990) 또한
칸영화제를 겨냥한 영화였는데, <겨울여자>(김호선, 1977) 이후로 깨지지
않고 있던 한국영화 흥행 기록을 경신한다. 임권택 감독의 이름 앞에 ‘거
장(巨匠)’이라는 말이 붙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이듬해에 임권택 감독
은 김용옥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또 다시 해외영화제를 노리고 <개벽>
을 연출하나, 이 영화는 흥행에 참패한다. 그래도 <개벽>은 대종상 최우
수작품상63)을 비롯해, 청룡영화상, 춘사영화상 등 국내영화상을 석권하
고 영화진흥공사에서 선정하는 ‘좋은 영화 5편’에 들어 포상을 받는다.64)
그리고 <장군의 아들> 또한 ‘좋은 영화’에 선정된다. 영화진흥공사가
1986년부터 선정했던 ‘좋은 영화’ 71편을 보면 그중 7편(<티켓>, <연산일
기>, <아다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장군의 아들>, <장군의 아들
2>, <개벽>)이 임권택의 영화이다. 이는 감독별 1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61) 그는 “이런 토양에서 자라고 이런 나라에서 길러진, 자연히 우러난 종교


적 심성이라고 해야 할까. 이거를 <씨받이>를 통해서 이따위 짓을 하고
그런 식을 비판하면서 영화에 담았다는 것에 대해서 경솔했다는 생각을
하는 거요.”라고 말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2, 92-93면.)

62) 만나고 싶은 사람 林權澤 」
감독 , 매일경제, 1990.1.11, 20면.
63)「大鐘賞 」
최우수작품상에 <개벽> , 동아일보, 1992.4.4, 13면.

64) 상반기 좋은 영화 선정 映振公 」
<개벽> 등 5편 , 매일경제, 1991.7.22, 10면.
76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1980~90년대에도 임권택은 국가의 혜택을 가장 많이 입는 감독이었음을


말해준다.65) 영화진흥공사는 수시로 좋은 영화 무료 감상회를 열어 임권
택의 영화를 상영하였고,66) 이제 임권택 영화는 흥행에 상관없이 ‘좋은
영화’로 인식되었다. 한 예로 서울 YMCA 청소년회관은 ‘친구에게 보여주
고 싶은 우리들의 영화’ 11편67)을 발표했는데 그 중에 한국영화로는 유일
하게 <개벽>이 선정된다.
이 시점에서 임권택 감독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영화화하겠다고
나선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소설은 1980년대 분단문학의 대표작으로
당시 이적 출판물로 논란이 되고 있었는데, 이것을 ‘빨치산의 아들’이 영
화화하겠다고 나선 것으로 기사화되며 더욱 화제가 되었다.68) 그러나
<태백산맥>은 이때 제작되지 못했다가 <서편제>가 <장군의 아들> 흥
행 기록을 경신하며 국민영화로 등극한 다음에 완성된다. <태백산맥>은
“좌도 우도 모두 사람을 떠난 이데올로기에 집착해서 우리가 옹호해야
할 진정한 이상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민족주의자 김범우의 물
음으로 결론지어지며 당시 검열기관이었던 공륜의 심의를 ‘무수정 통과’
한다.69) 이에 대해 조정래는 “임권택 감독 등에 대한 테러 협박으로 내용
이 소설과 달라져 안타깝다”며 아쉬움을 토로하고70), 원작을 읽고 영화를
기대했던 관객으로부터는 “원작을 왜곡한 세련된 반공영화”71)라는 비판


65) 좋은 영화 林權澤 位」
감독 1 , 동아일보, 1992.2.1, 26면.
「 」
66) 좋은 영화 무료감상회 , 동아일보, 1992.3.28, 26면.
67) 11편은 <마농의 샘>, <죽은 시인의 사회>, <미션>, <시네마천국>, <인
어공주>, <레인맨>, <사운드 오브 뮤직>, <아마데우스>, <판타지아>,
<베어>, <개벽>이었다.

68) 인터뷰 소설: 태백산맥 영화화 임권택 감독 ’빨치산 아버지 개인사 넘
」 「
어 한국 현대사 정면 파헤칠 터 , 한겨레신문, 1992.2.16, 9면; 막노동

일꾼서 한국영화 큰 별로 / 인물탐구 임권택 , 한겨레신문, 1992.3.13,
20면.
「 」
69) 영화 <태백산맥> 수정 없이 공륜 통과 , 한겨레신문, 1994.9.9, 22면.
「 」
70) <태백산맥> 조정래 씨 초청강연 , 한겨레신문, 1994.9.13, 21면.
「 」
71) 영화 <태백산맥> 실망, 원작 인물 왜곡 묘사 , 한겨레신문, 1994.9.28, 10면.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正典)이 되었나?∙박유희 77
을 받는다. 대하소설 태백산맥이 우리 사회에서 지니는 의미와 임권택
감독의 위상, 그리고 30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자된 영화의 규모와 이 영화
에 대한 대중의 기대 등 여러모로 볼 때 이 영화가 이 정도에 그친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이 영화가 흥행에서 실패하자 임권택 영화는 <서
편제>와 같은 세계로 돌아선다.
만일 <서편제>가 성공하기 이전에 <태백산맥>이 제작되었다면 임권
택 영화의 행보가 달라졌을까? 임권택 영화는 국가에서 금지하는 선을
넘은 일이 없고, <장군의 아들>에서 1970년대 민족주의 활극 문법을 재
구성하며 보수화되고 있었던 것으로 볼 때 국가의 상황이 크게 변하지
않는 한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임권택 영화는 <개
벽>에서 ‘인본주의’를 들고 나오면서 보수화의 논리까지 마련하고 있었
다. “1894년 농민봉기의 원동력이 됐던 동학의 반봉건·반외세 투쟁을 왜곡
묘사했다”라는 <개벽>에 대한 비판에서도 드러나듯이72), 임권택 영화는
현실과 대면하는 것을 포기하고 모든 대립과 갈등을 무의미한 것으로 굽
어보는 세계로 나아간다. 민족의 정서와 미학을 ‘한’이라는 추상으로 일
원화하는 <서편제>는 이러한 도정에서 나온 영화였다.
<서편제>가 한국영화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돌파하고 전사회적으로 엄
청난 화제가 되자 서편제 영화이야기가 출간된다. 그 머리말에서 임권
택 감독은 ‘우리 소리’, ‘우리 가락’, ‘우리 것’ 등의 형태로 ‘우리’라는 말을
9번이나 사용한다.73) 여기에서 ‘우리’는 ‘민족’과 ‘전통’이라는 함의를 지니
며, 국민 통합의 미학에 대한 욕망을 내재한다. 사실 ‘유랑-운명’의 모티프
로 과거와 고향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며 도시인의 피로를 위무하고 대중
과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서사는 1960년대에 <역마>나 <메밀꽃 필
무렵>과 같은 문예영화에서 관습화되어 1980년대 문예드라마를 통해 대

「 」
72) 이이화, 영화수상: 역사를 왜곡한 김용옥의 시나리오 개벽 , 역사비
평 1991년 겨울호(통권 제17호), 역사문제연구소, 1991, 393-396면.
73) 임권택 편, 앞의 책, 1993, 9-10면.
78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중화된 것이었다.74) 이 익숙한 서사를 판소리와 결합하고 그것을 향수를


자극하는 서정적 영상으로 구현한 것이 <서편제>였다. 그런데 해외영화
제를 겨냥한 소품으로 지나갈 수도 있었던 이 영화가 전사회의 요구와
기대에 조응하면서 그 모든 것을 응집하는 지점에 놓이게 된다.
당시 김영삼 정부의 개혁·개방 정책 속에 불어 닥친 UR태풍으로 한국
사회에는 경제적 위축과 국제화에 대한 불안이 있었다. 영화계에서도 할
리우드 직배로 한동안 수입원이었던 영화 수입업이 불가능해지자 외세
에 대한 저항 심리와 한국영화에서 활로를 찾고자 하는 가운데 고민이
깊어갔다. 또한 정부가 ‘문화창달 5개년계획’을 통해 문화산업의 개발을
중요한 정책 목표로 부각시킨 것도 이 해였다. 이 와중에 ‘사라져 가는
것’, ‘잃어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더불어 ‘우리 것’에 대한 질문과 요구
가 커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편 1960년대 말 이후 관(官)과 민
간에서 다각적으로 진행되어 온 전통문화의 발굴과 복원은 나름대로 성
과를 축적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국민 모두가 그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접해보지 못한 판소리를 소환한 것은 대중을 위로하
며 사회 각계의 명분을 세우기에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이 영화의 정치
적·사회적 효과는 각종 신기록이 증언한다. 한국영화사 상 최다 관객 동
원한 것은 물론이고, 청와대를 비롯한 비(非) 극장에서 최다 상영되었고,
김영삼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 김수환 추기경, 문익환 목사, 법정 스님
등 정계와 종교계 주요 인사들이 영화를 관람했다. 그리고 묻혀있던 이
청준의 원작소설이 이 영화의 흥행을 계기로 25만부가 팔리면서 베스트
셀러에 오르는 등 그 폭발력은 대단했다.75)
이 영화의 성공 이후 임권택 감독은 ‘거장’이라는 깃발 아래 ‘한국적 예
술영화’를 표방하며 유럽영화제 수상을 향해 매진한다. 그 안에서 보수적
인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역사의 수난에 순응하는 태도는 한국인 고유

「 」
74) 박유희, 1980년대 문예드라마 <TV문학관> 연구 , 2017, 136-142면.
75) 임권택 편, 앞의 책, 1993, 91면.
正典)이 되었나?∙박유희 79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의 정서로 미화된다. 그리고 2002년 결국 <취화선>으로 칸영화제 감독상


을 수상한다. 그것은 해방 이후 국가와 영화계에 의해 동시에 희구되어
온, 유럽영화제에서 인정받는 한국 예술영화를 향한 갈망이 실현되는 순
간이었다. 이 영화는 시네마스코프를 십분 활용해 한국의 자연을 담아내
면서 한국의 근대사를 자막을 통해 개괄적으로 설명하는 가운데 남성 예
술가의 고뇌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 유장하고 미려한 스펙터클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예술가의 표상은 1960년대 말 정권이 분
단으로 인한 예외상태를 강조하는 가운데 형성된 예술가 표상76)의 연장
선상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현재의 문제에서 이탈하여 과거
로 후퇴하면서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보수 논리를 합리화하고 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전통 예술’과 ‘한국인 고유의 정서’
라는 명분으로 <서편제>에 이어 가부장의 폭력을 합리화하고 있다는 혐
의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다. 더구나 1970년대 독재체제의 기반이 되었
던 것이 가부장적 전횡이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이 영화가 내세우는 미학
은 더욱 문제적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가 임권택 감독의 작가주
의가 도달한 지점이자 서구 유럽이 승인한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영화의
결정판이 되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문제점을 남겼다.

4. 정전(正典)으로서의 임권택 영화와 그 의미

이 연구는 임권택 감독이 한국을 대표하는 ‘거장’이 되고 그의 영화가


‘민족을 대표하는 예술영화’로서 한국영화의 정전이 되는 과정을 추적하
여 임권택 영화의 정체성을 재론하고자 한 것이다. 이 연구에서 주목했


76) 이에 대해서는 박유희, 민족계몽과 예술지상주의 사이: 1960년대 문예

영화에 나타난 식민지 예술가의 표상 . 한민족문화연구 제48호, 한민
족문화학회, 2014, 607-646면 참조.
80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던 것은 임권택 영화를 예술영화로 만들어가는 맥락과 그 속에서 임권택


영화 미학이 구성되고 정향되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이 연구의 목적은
대부분의 기존 논의가 해온 것처럼 임권택 영화 미학의 비의를 밝히고
그 의미를 심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 미학의 임계점을 밝히려는 것이
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임권택 영화의 본령을 재고해봄과 동시에 한
국 예술영화의 정체성을 성찰하고자 했다.
지금까지 임권택 영화는 1970년대를 기준으로 크게 두 시기로 나뉘어
논의되어 왔다. 그리고 후기에 해당하는 영화를 중심으로 작가주의 논의
가 전개되었다. 그런데 임권택 감독은 1970년대에는 국책에 부응하여 반
공·계몽영화를 충실히 만들었고, 1980~90년대에 예술영화를 만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반공영화와 계몽영화를 계속 연출했다. 또한 그가 이념 관련
영화를 만들 때 그것은 국가가 허용하는 범주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국가의 한계치 내지 지향과 작가의식을 조응시키며 지속적으로 국
가의 지원을 이끌어냈으며, 국가의 보상과 해외영화제에 대한 기대 속에
서 입지를 확보해갔다. 따라서 1970년대 국책영화와 그러한 틀을 답습한
1980년대 영화정책은 임권택 감독의 존재 기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 이후 임권택 영화에서는 전쟁과 분단, 이념갈등,
계급모순 등의 문제를 개인의 구도(求道)나 여성수난과 절합하며 할리우
드 영화와 변별되는 미학을 탐색한다. 이 과정에서 임권택 영화는 보수
적이고 계몽적이면서도 엄정한 리얼리티의 세계를 보여주며 충무로에서
1980년대 한국의 당면 문제를 다루는 영화로서의 위상을 구축해간다. 그
러면서 1970년대에는 국책영화의 맥락에 놓여 있던 임권택 영화가 리얼
리즘 영화 내지 예술영화로 호명되기 시작한다. 한편 임권택 감독은 이
러한 영화들을 통해 해외영화제로의 진출을 도모한다. 마침 해외영화제
에서는 탈냉전의 기류를 타고 동아시아 영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로컬리티를 전면화하는 영화들이 속속 입상하고 있었다. 이때 임권택 영
正典)이 되었나?∙박유희 81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화는 국가를 대표하는 예술영화로 나서게 된다. 이로써 상충될 수도 있


는 리얼리즘과 국가가 지원하는 예술영화는 민족 이념의 양가성 속에서
임권택 영화의 도저한 현실주의를 통해 손잡는다.
그런데 해외영화제에서의 수상이 이어지며 임권택 감독은 ‘거장’이라
는 깃발 아래 ‘한국적 예술영화’를 표방하며 유럽영화제 수상을 향해 더
욱 매진한다. 그 안에서 보수적인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역사의 수난에
순응하는 태도는 한국인 고유의 정서로 미화된다. 그리고 2002년 결국
<취화선>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다. 그것은 해방 이후 국가와
영화계에 의해 동시에 희구되어온, 유럽영화제에서 인정받는 한국 예술
영화를 향한 갈망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는 현재를 이탈하여
과거를 노스탤지어화한 상상계로 후퇴하면서 ‘전통 예술’과 ‘한국인 고유
의 정서’라는 명분으로 가부장의 폭력과 여성수난을 합리화하면서 얻어
낸 결과였다. 다시 말해 <취화선>이 구현하는 [민족] 예술가의 고뇌와
한국을 대표한다는 예술세계가 1970년대 독재체제의 기반이 되었던 가부
장의 전횡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문제적이지 않을 수 없다.
해방 이후 한국의 예술영화가 갖추어야 할 조건은 문학에 비견되는 예
술성, 서구영화제에서의 인정, 네오리얼리즘이나 누벨바그 영화에 근접
하는 영상미, 그렇지 않으면 한국의 향토색, 당대 현실 문제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종교적·예술적 고뇌 등이었다. 임권택의 작가주의 영화로 분
류되는 영화들 중 1980년대 영화의 상당수는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면서
도 당대 현실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그런데 예술영화를 넘어 정전이
되기 위해서는 대중의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 내거나 통합적 의견을 대
표할 수 있는 힘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서 가장 유효하게 작동하는 것이
‘민족주의적 계몽성’이다. 정전은 해당 문화에 대한 허구적 정체성을 상
징화하는 동시에 공고히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라진
전설 <아리랑>과 해방 이후 선구적인 리얼리즘 영화로 대접받는 <오발
탄>이 한국영화 정전의 계보를 구성해왔다. 임권택 영화는 <서편제>에
82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이르러 이 계보에 확실히 이름을 새기게 된다. 이는 해외영화제를 향한


한국영화의 대표라는 깃발과 함께 현실과 대면하는 것을 내려놓고 보수
적 예술의 맥락으로 정향하면서 이루어낸 성취였다. 그러나 그러한 예술
의 경지는 가부장의 폭력으로 인한 고통을 민족의 수난으로 추상화하고
그로 인한 비극을 민족 고유의 정서로 합리화하며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오발탄>의 세계보다 오히려 퇴행적이기도 하다. 이러한 임권택 영화의
한계는 분단된 한국을 대표하는 반쪽 민족영화의 한계이자 비극이다.
애초에 분단국가 한국의 예술영화에는 리얼리즘이 발 디딜 곳이 없었
다. 공산주의와 일제에 한해서만 비판과 저항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했던
시간 동안 예술영화에서 현실에 대한 엄정한 리얼리티는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에 ‘민족’의 함의에 ‘저항’이 내포되면서 리얼리즘 영화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1980년대 초반에 임권택이 성취한 국면의 리얼리
티는 이러한 태도가 가장 엄정했을 때 이루어진 성취였다. <왕십리>,
<족보>, <길소뜸> 등에서 임권택 영화가 선취하거나 구현한 리얼리즘
의 세계는 치열한 경지였다. 임권택 영화가 그러한 치열함을 <태백산
맥>까지 밀고 나갔다면 한국영화의 임계는 보다 확장될 수도 있었을 것
이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처음부터 불가능했을 수
있다. 임권택 영화가 구현한 리얼리즘의 이면에는 언제나 가부장적 책임
의식과 더불어 세파를 거스르지 않는 현실주의가 내재해 있었기 때문이
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이념을 환멸하며 이념의 패배를 운명으로 받아
들이는 태도가 깔려 있었다. 그가 시종일관 국가의 지향을 추수하면서
결국 보수적인 예술론으로 귀의한 것은 이러한 태도의 발로였다. 따라서
그가 민족을 대표하는 예술영화 작가를 선택하며 리얼리즘을 포기하는
것은 분단체제가 변하지 않는 한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이러한 임권택
영화의 선택, 그로 인한 성취와 한계의 노정은 그 자체가 한국의 리얼리
즘, 예술영화의 임계점을 보여준다. 동시에 한국 사회에서 정전(正典)이
될 수 있었던 행보와 요건을 증언하고 있다.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正典)이 되었나?∙박유희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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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Abstract
How Did the Films of Im Kwon-Taek Become a Canon?
Park Yuhee

This paper reviews the films directed by Im Kwon-taek, who is revered as a master
of art film in South Korea. Taking a different route from previous studies that focused on
the internal aesthetics of his films, this study set out to investigate the identity of his
films in their relationship with the state. The study started by recognizing the evaluations
of his films accumulated in previous studies such as that his films revealed important
aspects in the history of South Korean film and contained elements to make him deserve
the nickname “Father of South Korean film.” The study then asked the question why his
films became a standard to represent South Korean film. By trying to answer this
question, the investigator traced the process and dynamics of his film aesthetics in its
formation, examined the identity and threshold of his film aesthetics, and further reflected
on the identity of art film to represent South Korea.
Im's films have been discussed in two major periods around the 1970s with discussions
about his auteurisme added to his films produced in the second period. The director
responded to the national policy by devoting his efforts to anti-communist and
enlightenment films in the 1970s and continued to make anti-communist and
enlightenment films in the 1980s and 1990s in addition to art films. He never deviated
from the extent allowed by the state when making ideology-related films. Making his
consciousness as an author correspond with the threshold and orientation of the state, he
received consistent support from the government and established his position in the middle
of government rewards and expectations for overseas film festivals. Thus, it is no
exaggeration to say that his films based on the national policies of the 1970s and the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正典)이 되었나?∙박유희 87
following film policies based on the earlier framework were the base of his existence.
Entering the latter part of the 1970s, however, Im incorporated relevant issues such as
the division of North and South Korea, ideological conflicts and contradictions of social
classes into a personal pursuit of truth, and women's suffering into his films and explored
his own aesthetics that were distinguished from those of Hollywood movies. In the process,
his films depicted the conservative, enlightening, and very strict realistic world and made
him a Chungmuro director dealing with the issues facing South Korea in the 1980s. It
was around that time when his films, which used to be in the context of National policy
films in the 1970s, started to be called Realism film or Art film. Armed with these films,
the director attempted to enter overseas film festivals, which then took more and more
interest in East Asian movies and awarded a prize to films that put locality in the
forefront according to the post-Cold War trend. Im's films are presented as Art films to
represent South Korea. As a result, Realism films and government-funded Art films, which
could contradict each other, joined together through the Practicalism he challenged of
himself based on his double-sidedness in the middle of the ambivalence of national
ideology between internal oppression and resistance against foreign power. His Practicalism
as a kind of hardheaded realism, which started to endure, made achievements as realism
films, but it was open to endless changes and directions for another round of survival.
Entering the 1990s, his films were more honed to win an award at European film festivals
under the banner of Korean-style art film. His films were, at the same time, oriented
toward the beautification of an attitude to comply with the patriarchal ideology and the
ordeal of history with his inquiry into realism put aside through the emotions unique to
Korean people.
Since the Liberation of Korea, South Korean art films have been required to meet
several conditions including artistry comparable to literature, recognition at Western film
festivals, image aesthetics close to Neo-realism and Nouvelle Vague films, local colors of
Korea, and religious and artistic anguish with some distance from real contemporary issues.
88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Many of Im's auteurisme films in the 1980s meet those requirements and also deal with
real contemporary issues. If he had pushed his intensity till Taebaeksanmaek (The Taebaek
Mountains), the threshold of South Korean film might have been extended further. He did
not, however, make the choice or the choice might have been impossible from the
beginning since the deep realism that one could not go against the state and realism to
survive was flowing throughout his films. It is also a reason why his films were able to
survive and became a canon. It is the identity and limitation of his films, and at the same
time, the limitation and tragedy of half-nationalistic film to represent a divided Korea.

Key words : Anti-communist film, Art film, Canon, Enlightment film, Literary film, Nationalistic film, National policy
film, Practicalism, Realism film, The Films of Im Kwon-Taek

접수일: 2017년 11월 15일


심사기간: 2017년 11월 21일 - 12월 1일
게재결정: 2017년 1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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