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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正典) 이 되었나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正典) 이 되었나
박유희**
<차례>
1. 임권택 영화 재론(再論)
2. 작가주의의 이면, 국책영화
2.1. 임권택 작가론의 틀
2.2. 국책영화로서의 성취
3. 현실주의와 민족 이념의 양가성
3.1. 우수영화에서 리얼리즘과 예술영화로
3.2. 현실주의의 두 얼굴, 리얼리티와 순응
3.3. 분단 시대 퇴행적 가부장의 예술
4. 정전(正典)으로서의 임권택 영화와 그 의미
<국문초록>
이 글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예술영화로 추앙받는 임권택 영화에 대한 재론이다. 본고의 목적
은 기존 연구에서 집중해온 임권택 영화의 내재 미학에 대한 구명과는 궤를 달리하여 국가와의 관
계 속에서 임권택 영화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국면을 밝히는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선행
연구에서 축적되어온 평가, 즉 임권택 영화가 한국영화사의 중요한 국면을 드러내고 있음을 인정하
는 데서 시작하고자 했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임권택 영화가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로 정전이 될 수
있었는지를 묻고자 했다. 이를 위해 임권택 영화 미학이 어떤 과정과 역학 속에서 형성되었는지를
추적하였다. 이를 통해 임권택 영화 미학의 맥락과 임계를 밝히고, 나아가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영
화의 정체성을 성찰하고자 했다.
지금까지 임권택 영화는 1970년대를 기준으로 크게 두 시기로 나뉘어 논의되어 왔다. 그리고 후
기에 해당하는 영화를 중심으로 작가주의 논의가 전개되었다. 그런데 임권택 감독은 1970년대에는
국책에 부응하여 반공·계몽영화를 충실히 만들었고, 1980~90년대에 예술영화를 만들면서도 한편으로
는 반공영화와 계몽영화를 계속 연출했다. 또한 그가 이념 관련 영화를 만들 때 그것은 국가가 허용
하는 범주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국가의 한계치 내지 지향과 작가의식을 조응시키며 지속
적으로 국가의 지원을 이끌어냈으며, 국가의 보상과 해외영화제에 대한 기대 속에서 입지를 확보해
갔다. 따라서 1970년대 국책영화와 그러한 틀을 답습한 이후 영화정책은 임권택 감독의 존재 기반이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이후 임권택 영화에서는 전쟁과 분단, 이념갈등, 계급모순 등의 문제를 개
인의 구도(求道)나 여성수난과 절합하며 할리우드 영화와 변별되는 미학을 탐색한다. 이 과정에서 임
권택 영화는 보수적이고 계몽적이면서도 엄정한 리얼리즘의 세계를 보여주며 충무로에서 1980년대
한국의 당면 문제를 다루는 영화로서의 위상을 구축해간다. 그러면서 1970년대에는 국책영화의 맥락
에 놓여 있던 임권택 영화가 리얼리즘 영화 내지 예술영화로 호명되기 시작한다. 한편 임권택 감독
은 이러한 영화들을 통해 해외영화제로의 진출을 도모한다. 마침 해외영화제에서는 탈냉전의 기류
를 타고 동아시아 영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로컬리티를 전면화하는 영화들이 속속 입상하고
있었다. 이때 임권택 영화는 국가를 대표하는 예술영화로 나서게 된다. 이로써 상충될 수도 있는, 리
얼리즘과 국가가 지원하는 예술영화는 ‘내부에의 억압’와 ‘외세에 대한 저항’이라는 민족 이념의 양
가성 속에서 역시 양면성을 지닌 임권택 감독의 도저한 현실주의를 통해 손잡는다. 생존하기 위한
데에서 출발한 임권택 감독의 현실주의는 한때 리얼리즘 영화로서의 성취를 이루었지만, 한편으로
는 또 다시 살아남기 위해 얼마든지 변모하고 정향될 수 있는 것이었다. 1990년대 이후 임권택 영화
는 ‘한국적 예술영화’라는 깃발 아래 유럽영화제 수상을 향해 한층 경도된다. 그러면서 그의 영화는
리얼리즘에의 탐구를 내려놓고 가부장 이데올로기와 역사의 수난에 순응하는 태도를 한국인 고유의
정서로 미화하는 영화로 정향된다.
해방 이후 한국의 예술영화가 갖추어야 할 조건은 문학에 비견되는 예술성, 서구영화제에서의
인정, 네오리얼리즘이나 누벨바그 영화에 근접하는 영상미, 그렇지 않으면 한국의 향토색, 당대 현실
문제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종교적·예술적 고뇌 등이었다. 임권택의 작가주의 영화로 분류되는 영
화들 중 1980년대 영화의 상당수는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면서도 당대 현실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임권택 영화가 그러한 치열함을 <태백산맥>까지 밀고 나갔다면 한국영화의 임계는 보다 확장될 수
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처음부터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임권
택 영화에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가와 현실을 거스르면 안 된다는 도저한 현실주의가 저류하고 있
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기에 그의 영화는 정전이 될 수 있었다. 예술영화를 넘어 정전이 되기 위해서는 대중
의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 내거나 통합적 의견을 대표할 수 있는 힘을 필요로 한다. 정전은 해당
문화에 대한 허구적 정체성을 상징화하는 동시에 공고히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
라진 전설 <아리랑>이나 해방 이후 선구적인 리얼리즘 영화로 대접받는 <오발탄>이 한국영화 정
전의 계보를 구성해왔다. 임권택 영화는 <서편제>에 이르러 이 계보에 확실히 이름을 새기게 된다.
이는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 예술영화라는 깃발과 함께 현실과 대면하는 것을 내려놓고 보수적 예술
의 맥락으로 정향하면서 이루어낸 성과였다. 그러나 그러한 예술의 경지는 가부장의 폭력으로 인한
고통을 민족의 수난으로 추상화하고 그로 인한 비극을 민족 고유의 정서로 합리화하며 이루어진 것
이었기에 <오발탄>의 세계보다 오히려 퇴행적이기도 하다. 이러한 임권택 영화의 한계는 분단된 한
국을 대표하는 반쪽 민족영화의 한계이자 비극이다.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正典)이 되었나?∙박유희 45
주제어 : 계몽영화, 국책영화, 리얼리즘, 반공영화, 문예영화, 민족영화, 예술영화, 임권택 영화, 정전,
현실주의
1. 임권택 영화 재론(再論)
「
1) 한국영상자료원 편, 한국영화 100선은 어떻게 선정되었나 , 한국영화 」
100선: <청춘의 십자로>에서 <피에타>까지, 한국영상자료원, 2015, 9면.
2) 위의 글, 9면.
3) 7편은 <짝코>(1980), <만다라>(1981), <길소뜸>(1985), <티켓>(1986), <씨
받이>(1986), <서편제>(1993), <춘향뎐>(2000)이다. (위의 글, 12면.) 참고
로 한국영화 70년 代表作 選 200 에서는 유현목 감독 영화가 16편 선정
되어 1위였다. 그 중 <오발탄>은 교과서에 지속적으로 실리는 영화가
되었다.
46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
4) 박기범, 문학 교과서의 영화 수용 양상에 대한 비판적 검토 , 문학교 」
육학 제18호, 한국문학교육학회, 2005, 371-374면.
5) 제7차 교육과정에서 <서편제> 다음으로 많이 수록된 영화는 <오발탄>(7
종)과 <공동경비구역 JSA>(6종)이었다. 이 두 영화도 최근까지 교체되지
「
않고 교과서에 실리고 있다. 박기범, 문학 교과서의 영화 수용 양상 연
」
구: 2012 고시 교육과정에 따른 검정교과서를 중심으로 , 한국언어문학
제91호, 한국언어문학회, 2014, 371-373면.
正典
6) ‘정전( , Canon)’은 문학의 기성체계에서 묵시적인 합의를 통해 위대
尺
하다고 인정한 작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 '자( )', '척도', '표준', ‘규
범’ 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으며, 성서의 정통성 여부에 대
한 판단과 승인 과정에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성서와 같이 해당
사회에서 정통적 표준이라고 판단되고 승인된 책을 연구와 교육의 대상
으로 삼으면서 정전의 개념이 확립되었다. 근대문학에서 정전은 그 사
회에서 지속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와 예술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합의된
작품의 목록을 지칭한다. 한국영화의 정전 또한 이러한 개념의 연장선
상에서 선정되어 왔다.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正典)이 되었나?∙박유희 47
자료집은 10여 권7)에 이른다. 심지어 그의 이름으로 영화연구소와 예술
대학이 세워지기도 했다.8)
식민지 조선영화사까지 통틀어 우리 영화사에서 그 어느 감독도 이러
한 대접을 받은 적이 없다. 식민시시대의 전설이자 민족영화의 원조로
추앙되는 나운규 정도가 임권택에 필적할 만한 주목을 받아왔다 하겠으
나 나운규의 경우에는 현전하는 영화가 없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임권택
과 비교가 불가능하다. 그 결과 임권택 영화는 한국영화사에서 민족을
대표하는 예술영화의 살아있는 전범으로 자리매김 되었고, 나아가 임권
택의 필모그래피 자체가 한국영화사이고 임권택은 ‘한국영화의 아버지’
라는 등식에까지 이르게 되었다.9)
Ⅰ
7) 대표적인 것으로는 정성일 편, 한국영화연구 :임권택, 오늘, 1987; 사
토 다다오, 고재운 역, 한국영화와 임권택, 한국학술정보, 2000; 임권
·
택, 정성일 대담 이지은 자료정리,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1-2, 현
·
문서가, 2003; 김경현 데이비드 E. 제임스, 김희진 역, 임권택 민족영화
만들기, 한울, 2005; 유지나 편, 영화, 나를 찾아가는 여정 : 임권택 감
독의 영화연출 강의, 민음사, 2007; 동서대학교 임권택 영화연구소 편,
·
영화감독 10인의 연출수업 1, 예린원, 2012; 한국영상자료원 부산국제
영화제 공편, 거장 임권택의 세계, 한국영상자료원, 2013; 김대중, 임
권택 영화, 커뮤니케이션북스, 2016 등이 있다.
8) 동서대학교 임권택 영화연구소와 임권택영화영상예술대학이 그것이다.
임권택 영화연구소에서는 임권택, 신문으로 본 역사 1-2(동서대학교
임권택영화연구소, 2013)를 펴내기도 했다.
9) 신화화가 시작된 것은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임권택을 집중 인터뷰한 내
용을 골조 삼아 국내외 영화연구자들의 비평을 모은 한국영화연구 :임 Ⅰ
권택(1987)을 출간하면서부터이다. 현장에 있는 감독으로서 비평계와
학계로부터 동시에 이렇게 집중적인 조명을 받은 예는 한국영화사에서
전무후무했다. 16년 후인 2003년에 정성일은 1987년 인터뷰 자료에 새로
―
운 인터뷰 1986년부터 1987년까지 1520분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 2002
―
년 7월말부터 12월초까지 진행된 64시간의 인터뷰 를 추가하여 임권
택이 임권택을 말하다라는 두 권의 책으로 출간한다. 그것은 2000년에
<춘향뎐>이 한국영화로서는 최초로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하고,
2002년에 <취화선>으로 임권택 감독이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는 동안 준
비된 책이었다. 이 책의 서문에서 정성일은 “임권택 감독님은 나에게 영
화적 아버지다.”라고 고백하며, “임권택을 말한다. 그것은 한국영화를 말
48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 Ⅲ 」
15) 인터뷰: 임권택은 말한다 ( ) 1973-1980 <잡초>에서 <우상의 눈물>까지 ,
앞의 책, 1987, 136면.
異色的 試圖 狀況劇
16) <잡초>는 “ 邦畫界 의 ”으로 “ 를 탈바꿈”하고 있다는
雜草
호평을 받았다. “길섶에 돋아난 女人 같은 한 을 잡아 있을 법한 모
든狀況 狀況
을 부여하고 그러한 女人 속에서 그 이 어떻게 자기를 살아
雜草 確定
가는가를 관찰해보는 작품. < 自生的
>는 된 시나리오가 없이 으
異色的
로 만들어지는 美國 大學
인 작품이다. 켄트 소요사건 때 클레아
記錄映畵的 劇映畫
블룸을 내세워만든 技法 着眼 미디움 쿨의 에서 한 이
對立
작품은 작가와 감독이 때때로 날카롭게 의견 을 벌여 촬영을 보류
女主人公 役
하는가 하면 金芝美
분례 을 맡은 여우 양까지 자신이 견해
修正
를 주장하고 나와 작품을 「 邦畫界」
하기도 한다.” ( 탈바꿈하는 , 동
아일보, 1973.4.17, 5면.)
「 旗手」
17) 깃발 없는 , 경향신문, 1979.9.14, 5면.
正典)이 되었나?∙박유희 53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2.2. 국책영화로서의 성취
「
24) 영화감독 李長鎬 大麻草 立件」
등 흡연 , 경향신문, 1976.1.28, 7면.
25)「非難 빗발친 < 雪國 出品」
> , 동아일보, 1977.6.4, 5면.
26) ‘계도성’은 ‘예술’, ‘오락’과 더불어 상업영화에 외화수입권을 수여하는
기준 중 하나였다. (「外畫 補償制」 코터 폐지로 맥 빠진 優秀映畫 」
선정 ,
경향신문, 1975.8.25, 4면.)
58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 」
37) 주유신, 민족 영화 담론, 그 지형과 토픽들 , 영상예술학회 학술대회
논문집 2008년 춘계학술대회, 영상예술학회, 2008, 24면.
「
38) 소설 「偶像 의 눈물 /」 世耕
흥업 映畫化」
, 동아일보, 1981.1.30, 12면.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正典)이 되었나?∙박유희 63
의 저항이 거세지고 있었다. 이때 영화동호회와 대학 운동권을 중심으로
영화의 대중성과 파급력을 사회운동으로 전화(轉化)할 가능성이 적극적
으로 타진된다. 열린 영화와 민족영화는 그것을 대표하는 두 진영이
었는데, 양쪽 모두 ‘리얼리즘’을 내세워 기존의 관습을 혁신하는 형식적
새로움과 사회 변혁에 복무할 수 있는 내용의 새로움을 주장했다. 그리
고 그것은 ‘할리우드 영화’로 대표되는 기존 상업영화의 관습에서 벗어난
영화를 지향하는 것이었다.39) 그러나 논쟁에 비해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실제 텍스트의 생산이 미약하여 담론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러한 담론은 계몽적 이론으로, 상업영화 비평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임권택 영화가 리얼리즘 내지 예술영화로 평가받으며 한국영화의 대표
로 부상하는 데에는 1980년대 들어서 대두한 이러한 영화운동 담론이 배
면에 존재한다.40)
한편 1980년대는 에로틱 멜로드라마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예컨대 1982
년에 한국영화 흥행 1위는 <애마부인>이었고, <낮은 데로 임하소서>,
<겨울로 가는 마차>, <꼬방동네 사람들>, <여자의 함정>, <속 영자의
전성시대>, <금강혈인>, <반노>, <애인>, <탄야>가 2위~10위를 차지
했다. 이 중에서 반절 이상은 1970년대 말부터 성행한 관습적 멜로드라마
의 맥락에 놓여있는 영화들이었다. 이 와중에 <낮은 데로 임하소서>나
「
39) 1980년대 영화 담론에 대해서는 김소연,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담론의
」
형성 , 실재의 죽음, 도서출판B, 2008, 36-47면 참조.
40) 당시 젊은 영화평론가들이 만든 계간지 영화언어(1989년 겨울호)에서
는 ‘1980년대 한국영화 10 베스트’라는 제목 아래 10편의 영화에 대한
脫
비평을 실었다. 이때 10편의 선정 기준은 ‘사회의식’과 ‘탈( ) 할리우드
영화를 위한 표현 양식의 가능성’이었다. 그리고 선정된 영화 10편은
<바보 선언>, <바람 불어 좋은 날>, <만다라>,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
닭은>, <황진이>,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티켓>, <과부춤>,
<짝코>, <길소뜸> 이었다. 10편 중 4편이 임권택 영화였다. ( <바보선 「
」
언> 80년대 최고/ 계간 영화언어 선정 , 한겨레신문, 1990.1.24, 16
면)
64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 」
44) 국제무대 겨냥 영화제작 활발 , 동아일보, 1987.10.27, 16면.
45) 1988년 9월부터 10월까지 <만다라>, <상록수>, <길소뜸>이 ‘우수 한국
영화시리즈’로 MBC TV에서 연달아 방송되고, 같은 시기 KBS ‘한국영
화걸작선’에서는 <내일 또 내일>이 방송된다. 1989년 1월에 MBC ‘한국
영화초대석’에서 <씨받이>가, 3월에는 KBS ‘한국영화걸작선’에서 <안개
마을>이 방영되고, 같은 해 9월에는 MBC ‘한국영화초대석’ 에서 <연산
일기>가 방송된다. 이듬해인 1990년 1월에는 KBS ‘일요한국영화’에서
<아다다>가 전파를 탄다. 모두 임권택 영화가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하는
것과 맞물리는 시기였다. 1990년대에는 한가위, 설날, 석가탄신일 등의
「
특선영화로 임권택 영화가 방영된다. ( 한가위 안방극장 볼거리 풍성 , 」
「 」
경향신문, 1992.9.10, 27면; 설날 특선영화 <개벽> , 한겨레신문,
「
1993.1.22, 16면; 부처님 오신 날 특선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 (K1
」
오후 2시) , 한겨레신문, 1994.5.18, 14면.)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正典)이 되었나?∙박유희 67
절된 것이다. 그런데 이럴 경우 그는 모험하거나 무리하지 않고 포기하
거나 타협한다. <비구니> 제작이 어렵게 되자 그는 곧바로 반공영화
<노을>의 연출을 수락한다.47) 그러면서 <비구니> 제작팀을 <노을>에
그대로 데려가고, 이때 빠진 김지미는 <길소뜸>에서 주인공으로 기용한
다. 제6공화국 말기 <태백산맥>을 연출하려다 좌절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는 정부쪽으로부터 그 영화를 지금 꼭 만들어야겠느냐는 연락을 받고
영화 제작을 유보했다고 고백한다.48) 그리고 바로 <서편제>에 돌입하고
<서편제>로 크게 성공하자 그때 다시 <태백산맥>을 만든다. 그런데 우
익단체들의 테러 위협이 잇따르자,49) 그는 예정되었던 <태백산맥> 후편
을 포기하고 이후에 이념 관련 영화는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한다.50)
일련의 사실은 1970년대에 반공영화와 계몽영화를 만들던 임권택 감독
이 어떻게 <왕십리>나 <족보>를 만들게 되었으며, 1980~90년대에 해외
영화제를 겨냥한 예술영화를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안보 부문 수상을 노
린 반공영화와 흥행을 노린 액션 영화를 연출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단
서를 제공한다. 그는 일과 사람에 모두 성실하면서도 무리수를 두지 않
으며 현실에 빠르게 적응한다. 이러한 태도의 기저에 흐르는 것은 ‘도저
한 현실주의’다. 그는 현실적이기 때문에 어떤 여건에서도 영화를 만들
[표 1] 시나리오 심의의견서51)
제명 깃발 없는 기수
종별 반공물
「 」
51) 한국공연윤리위원회, 극영화 시나리오 심의결과 보고 , 1979.7.27. (한국
영상자료원 소장.)
70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종합
본 작품은 다음의 지시사항을 준수하시기 바랍니다.
의견
지시 1. 본 작품은 해방 후 좌우익의 충돌로 혼란했던 시기를 소재로 다룬 것이
사항 므로 당시의 사회 환경을 몸소 체험하지 못한 오늘날의 청소년을 위해
서는 보다 확실한 사건의 진상과 등장인물의 반공주의적인 행동을 부
각시켜 주제를 분명하게 하실 것.
2. 학생들의 시위와 구호, 특히 명기되지 않은 구호묘사에 대해서는 관계
기관의 감수를 받아 제작하실 것.
3. 미군정에 관한 이야기는 왜곡되지 않게 표현하실 것.
「 」
55) 박유희, 1980년대 문예드라마 <TV문학관> 연구 , 한국극예술연구 제
57집, 한국극예술학회, 2017, 141-142면 참조.
「
56) 임권택이 나의 선택, 나의 길에 실린 회고록의 제목을 영화로 풀어낸
」
생존의 들풀 이라고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正典)이 되었나?∙박유희 73
이라는 국가적 목표와 본격적으로 함께 한다. 그러면서 임권택 영화는
‘총체성’을 지향하게 되고 언어에의 의존도가 높아지며57) 국면의 사실감
보다는 계몽적인 성향을 강하게 드러낸다. 동시에 가부장적인 세계관도
보다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그리고 그러한 요소들이 임권택 영화의 미학
을 구성해 간다.
해외영화제 수상은 해방 이후에 꾸준히 지속된 국가적 과제이자 한국
예술영화 실현에 대한 영화계의 갈망이었다. 한국전쟁 이전에 이미 문예
영화 논의가 시작되고 <해연>(이규환, 1948)이나 <마음의 고향>(윤용규,
1949)과 같은 영화가 제작된 것은 그것을 잘 말해준다. 한국전쟁 이후에
그러한 갈망은 더 커지고 국가 차원의 지원도 본격화되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라쇼몽>(구로사와 아키라, 1950)이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은 그러한 갈망을 한층 부추기기도 했다.
당시에 목표로 삼았던 예술영화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을 원작
으로 하여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라쇼몽>에 필적할 만한 ‘한
국적인 영화’, 즉 문학을 원작으로 전근대를 배경으로 삼아 현실 문제와
는 거리를 둔 차원에서 한국의 지역색을 드러내는 영화였다.
그러한 영화에 대한 경주는 1960년대 문예영화 보상이 강화되면서 더
욱 가속화되어 향토성 계열의 문예영화로 정형화 되어간다. 네오리얼리
즘과 누벨바그 영화의 영향으로 모더니즘 계열 영화가 예술영화의 한 갈
래를 차지하지만, 그 유형의 영화들은 대중성 면에서 약했기 때문에 소
수 엘리트를 위한 영화로 점차 축소된다.58) 그런데 1960년대부터 1970년
대까지 영화들에서는 일제와 공산주의에 대한 저항 이외의 저항을 다루
는 것은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운규의 <아리
「
59) 박유희, ‘검열’이라는 포르노그래피: <춘몽>에서 <애마부인>까지 ‘외설’
」
검열과 재현의 역학 , 대중서사연구 제21권 3호, 대중서사학회, 2015,
128-138면 참조.
60) 임권택 감독이 국제영화제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에는 마침 영화진흥공
사 사장으로 김동호 위원장이 부임하면서, 국제영화제에로의 진출이 활
발해진 것에도 영향이 있었다. 정훈 계통 관리들이 업무를 처리하던 영
화진흥공사에 처음으로 문공부 소속 김동호 위원장이 사장으로 부임하
면서 영화제를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해외 영화제를 다니면서 열정적으
로 한국영화를 알렸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2, 124면.)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正典)이 되었나?∙박유희 75
해서 부끄러웠다는 것이다.61) 그러면서 임권택 영화는 ‘우리의 것’, ‘전통’,
‘한’ 등을 한국적 미학으로 내세우는 가운데 현실과 유리되어 예술을 위
한 예술로 보수화된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서편제>
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서편제>는 <태백산맥> 제작이 좌절된 상황에서
칸영화제 출품을 목표로 기획된 영화였다. 1990년을 맞이하는 인터뷰에
서 임권택 감독은 “작품의 주제, 흐름 등에 대해 자신보다 외국의 비평가
들이 훨씬 잘 꿰뚫고 있다며, 1990년에는 또 다른 정직한 작품들로 세계
영화제에서 승부를 내겠다.”라고 다짐한다.62) 이때부터 임권택 영화는 해
외영화제만을 바라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군의 아들>(1990) 또한
칸영화제를 겨냥한 영화였는데, <겨울여자>(김호선, 1977) 이후로 깨지지
않고 있던 한국영화 흥행 기록을 경신한다. 임권택 감독의 이름 앞에 ‘거
장(巨匠)’이라는 말이 붙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이듬해에 임권택 감독
은 김용옥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또 다시 해외영화제를 노리고 <개벽>
을 연출하나, 이 영화는 흥행에 참패한다. 그래도 <개벽>은 대종상 최우
수작품상63)을 비롯해, 청룡영화상, 춘사영화상 등 국내영화상을 석권하
고 영화진흥공사에서 선정하는 ‘좋은 영화 5편’에 들어 포상을 받는다.64)
그리고 <장군의 아들> 또한 ‘좋은 영화’에 선정된다. 영화진흥공사가
1986년부터 선정했던 ‘좋은 영화’ 71편을 보면 그중 7편(<티켓>, <연산일
기>, <아다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장군의 아들>, <장군의 아들
2>, <개벽>)이 임권택의 영화이다. 이는 감독별 1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
65) 좋은 영화 林權澤 位」
감독 1 , 동아일보, 1992.2.1, 26면.
「 」
66) 좋은 영화 무료감상회 , 동아일보, 1992.3.28, 26면.
67) 11편은 <마농의 샘>, <죽은 시인의 사회>, <미션>, <시네마천국>, <인
어공주>, <레인맨>, <사운드 오브 뮤직>, <아마데우스>, <판타지아>,
<베어>, <개벽>이었다.
「
68) 인터뷰 소설: 태백산맥 영화화 임권택 감독 ’빨치산 아버지 개인사 넘
」 「
어 한국 현대사 정면 파헤칠 터 , 한겨레신문, 1992.2.16, 9면; 막노동
」
일꾼서 한국영화 큰 별로 / 인물탐구 임권택 , 한겨레신문, 1992.3.13,
20면.
「 」
69) 영화 <태백산맥> 수정 없이 공륜 통과 , 한겨레신문, 1994.9.9, 22면.
「 」
70) <태백산맥> 조정래 씨 초청강연 , 한겨레신문, 1994.9.13, 21면.
「 」
71) 영화 <태백산맥> 실망, 원작 인물 왜곡 묘사 , 한겨레신문, 1994.9.28, 10면.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正典)이 되었나?∙박유희 77
을 받는다. 대하소설 태백산맥이 우리 사회에서 지니는 의미와 임권택
감독의 위상, 그리고 30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자된 영화의 규모와 이 영화
에 대한 대중의 기대 등 여러모로 볼 때 이 영화가 이 정도에 그친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이 영화가 흥행에서 실패하자 임권택 영화는 <서
편제>와 같은 세계로 돌아선다.
만일 <서편제>가 성공하기 이전에 <태백산맥>이 제작되었다면 임권
택 영화의 행보가 달라졌을까? 임권택 영화는 국가에서 금지하는 선을
넘은 일이 없고, <장군의 아들>에서 1970년대 민족주의 활극 문법을 재
구성하며 보수화되고 있었던 것으로 볼 때 국가의 상황이 크게 변하지
않는 한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임권택 영화는 <개
벽>에서 ‘인본주의’를 들고 나오면서 보수화의 논리까지 마련하고 있었
다. “1894년 농민봉기의 원동력이 됐던 동학의 반봉건·반외세 투쟁을 왜곡
묘사했다”라는 <개벽>에 대한 비판에서도 드러나듯이72), 임권택 영화는
현실과 대면하는 것을 포기하고 모든 대립과 갈등을 무의미한 것으로 굽
어보는 세계로 나아간다. 민족의 정서와 미학을 ‘한’이라는 추상으로 일
원화하는 <서편제>는 이러한 도정에서 나온 영화였다.
<서편제>가 한국영화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돌파하고 전사회적으로 엄
청난 화제가 되자 서편제 영화이야기가 출간된다. 그 머리말에서 임권
택 감독은 ‘우리 소리’, ‘우리 가락’, ‘우리 것’ 등의 형태로 ‘우리’라는 말을
9번이나 사용한다.73) 여기에서 ‘우리’는 ‘민족’과 ‘전통’이라는 함의를 지니
며, 국민 통합의 미학에 대한 욕망을 내재한다. 사실 ‘유랑-운명’의 모티프
로 과거와 고향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며 도시인의 피로를 위무하고 대중
과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서사는 1960년대에 <역마>나 <메밀꽃 필
무렵>과 같은 문예영화에서 관습화되어 1980년대 문예드라마를 통해 대
「 」
72) 이이화, 영화수상: 역사를 왜곡한 김용옥의 시나리오 개벽 , 역사비
평 1991년 겨울호(통권 제17호), 역사문제연구소, 1991, 393-39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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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임권택 편, 앞의 책, 1993, 91면.
正典)이 되었나?∙박유희 79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
76) 이에 대해서는 박유희, 민족계몽과 예술지상주의 사이: 1960년대 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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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Abstract
How Did the Films of Im Kwon-Taek Become a Canon?
Park Yuhee
This paper reviews the films directed by Im Kwon-taek, who is revered as a master
of art film in South Korea. Taking a different route from previous studies that focused on
the internal aesthetics of his films, this study set out to investigate the identity of his
films in their relationship with the state. The study started by recognizing the evaluations
of his films accumulated in previous studies such as that his films revealed important
aspects in the history of South Korean film and contained elements to make him deserve
the nickname “Father of South Korean film.” The study then asked the question why his
films became a standard to represent South Korean film. By trying to answer this
question, the investigator traced the process and dynamics of his film aesthetics in its
formation, examined the identity and threshold of his film aesthetics, and further reflected
on the identity of art film to represent South Korea.
Im's films have been discussed in two major periods around the 1970s with discussions
about his auteurisme added to his films produced in the second period. The director
responded to the national policy by devoting his efforts to anti-communist and
enlightenment films in the 1970s and continued to make anti-communist and
enlightenment films in the 1980s and 1990s in addition to art films. He never deviated
from the extent allowed by the state when making ideology-related films. Making his
consciousness as an author correspond with the threshold and orientation of the state, he
received consistent support from the government and established his position in the middle
of government rewards and expectations for overseas film festivals. Thus, it is no
exaggeration to say that his films based on the national policies of the 1970s and the
임권택 영화는 어떻게 정전( 正典)이 되었나?∙박유희 87
following film policies based on the earlier framework were the base of his existence.
Entering the latter part of the 1970s, however, Im incorporated relevant issues such as
the division of North and South Korea, ideological conflicts and contradictions of social
classes into a personal pursuit of truth, and women's suffering into his films and explored
his own aesthetics that were distinguished from those of Hollywood movies. In the process,
his films depicted the conservative, enlightening, and very strict realistic world and made
him a Chungmuro director dealing with the issues facing South Korea in the 1980s. It
was around that time when his films, which used to be in the context of National policy
films in the 1970s, started to be called Realism film or Art film. Armed with these films,
the director attempted to enter overseas film festivals, which then took more and more
interest in East Asian movies and awarded a prize to films that put locality in the
forefront according to the post-Cold War trend. Im's films are presented as Art films to
represent South Korea. As a result, Realism films and government-funded Art films, which
could contradict each other, joined together through the Practicalism he challenged of
himself based on his double-sidedness in the middle of the ambivalence of national
ideology between internal oppression and resistance against foreign power. His Practicalism
as a kind of hardheaded realism, which started to endure, made achievements as realism
films, but it was open to endless changes and directions for another round of survival.
Entering the 1990s, his films were more honed to win an award at European film festivals
under the banner of Korean-style art film. His films were, at the same time, oriented
toward the beautification of an attitude to comply with the patriarchal ideology and the
ordeal of history with his inquiry into realism put aside through the emotions unique to
Korean people.
Since the Liberation of Korea, South Korean art films have been required to meet
several conditions including artistry comparable to literature, recognition at Western film
festivals, image aesthetics close to Neo-realism and Nouvelle Vague films, local colors of
Korea, and religious and artistic anguish with some distance from real contemporary issues.
88 한국극예술연구 제58집
Many of Im's auteurisme films in the 1980s meet those requirements and also deal with
real contemporary issues. If he had pushed his intensity till Taebaeksanmaek (The Taebaek
Mountains), the threshold of South Korean film might have been extended further. He did
not, however, make the choice or the choice might have been impossible from the
beginning since the deep realism that one could not go against the state and realism to
survive was flowing throughout his films. It is also a reason why his films were able to
survive and became a canon. It is the identity and limitation of his films, and at the same
time, the limitation and tragedy of half-nationalistic film to represent a divided Korea.
Key words : Anti-communist film, Art film, Canon, Enlightment film, Literary film, Nationalistic film, National policy
film, Practicalism, Realism film, The Films of Im Kwon-Tae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