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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주째>

국제환경의 데탕트에서 신냉전으로 전환과 냉전체제


붕괴기의 동아시아 국제정치

o 1979-1989년: 신냉전기인 동시에 냉전체제의 붕괴에 이르는 시기


-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1979.12), 소련의 폴란드 무력 개입
(1980.12), 미국 레이건 정부의 대소 강경정책, 미국의 SDI계획 발
표와 미소 군비경쟁, 미일동맹의 강화 등으로 새롭게 냉전이 강화
되면서
- 미소 냉전의 격화에 의해 냉전체제의 붕괴에 이르는 시기

I. 국제환경의 데탕트에서 신냉전으로 전환기의


동아시아 국제정치

1. 국제환경의 데탕트에서 신냉전으로 전환

o 1969년 7월 닉슨대통령에 괌에서 발표한 닉슨독트린은 미국이 아시아


맹방과의 기존 조약은 이행할 것이나 미국의 군사개인은 축소할 것임
을 명백히 했음.

o 그 이후 10년, 아시아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 베트남의 공산화 통일(1975)에 따른 도미노 현상으로 캄보디아,
라오스가 공산화되는 등 인도차이나반도가 공산화되었고
- 동남아조약기구(SEATO)의 해체,
- 한반도에서는 6만 여명의 주한미군이 3만 명으로 감축
- 소련 극동군의 증강,
-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 중동 유전지대의 취약성 노출1) 등 일련의 불안한 사태 발생

1) 중동지역에서 소련군의 병력 증강
o 이 기간 동안, 국제정치는 데탕트적 분위기였지만, 동맹국들은 허약한
미국의 지도력에 실망하고 안보에 불안감을 느낌.

o 소련은 미국의 나약한 모습과 허점에 주목, 국내외적으로 데탕트 분위


기를 무시했음.
- 1970년대 후반 극동 소련군 증강
-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 침공
=> 국제정세는 일거에 데탕트적 상황에서 신냉전적 상황으로 악화.

2. 신냉전적 상황으로의 악화와 미국의 대소련 강경정책

(1) 미소관계의 악화와 미국의 대소련 강경전략으로 전환

o 국제환경이 데탕트 분위기에서 신냉전 상황으로 악화되면서 미소관계


는 악화되고, 미국은 대소련정책을 강경정책으로 전환함.

o 아시아와 중동 지역에서 소련 군사력의 위협은 계속 증강되었는데,


19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국제환경이 데탕트 분위
기 에서 신냉전 상황으로 악화되고, 걸프 연안 국가들이 소련 군사력
에 안보 위협을 느끼게 되자,
- 1980년 1월 페르시만의 수호를 천명한 ‘카터 독트린’의 발표함.
: 걸프지역에서의 미국의 이익이 위협받는다면 필요한 경우 군사력
을 통해서라도 방어할 것이라고 경고함.
- 인도양과 아라비아해에 미 해군력과 공군력 증강

* 세계 석유 공급의 상당 부분이 미군 감시 아래 안전하게 페르시아만을


통해 흘러나오는데, 미국이 없다면 세계 석유 공급은 차질이 불가피
함.

*1947년 그리스와 터키가 공산화 위협을 받을 때 트루먼 대통령이 발표


한 ‘트루먼 독트린’과 유사
(2) 레이건 행정부의 소련 봉쇄를 위한 동맹체제 강화

① 미국의 대소련 강경정책의 기조

o Strong America를 지향하며 America Great Again를 기치로 내걸고


등장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국제환경의 신냉전적 상황과 소련의
팽창주의에 적극적으로 대응함.

o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을 세계 도처에서 폭력과 혁명을 선동하는 악


(惡)의 제국으로 간주하고,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였는데,
- 닉슨 독트린을 전면 수정하는 전략을 추구하며 소련 봉쇄를 위한 동
맹체제의 강화를 추진

◆ 닉슨 독트린의 주요 내용과 전략적 특징

o 닉슨 독트린(1969.7.25)의 주요 내용
- 미국은 앞으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국지전에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
- 강대국의 핵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하여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하여 대처하여야 한다
: 직접 위협을 받은 국가가 자국 방어의 1차적 책임을 다하기를
기대한다
- 핵보유국이 미국의 동맹국을 위협할 경우, 미국은 핵우산을 제공한

* ‘닉슨 독트린’의 발표 직후, 베트남에 주둔하던 미국 지상군의 감축이


추진되었음.
- 1968년말에 548,000명이던 미국 지상군의 병력은 단계적으로 철수
하여 1972년말에는 29,655명으로 대폭 감축되었음.

o 닉슨 독트린의 정치적 특징
-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소련에 대한 미국의 절대적 힘의 우위에서
상대적인 힘의 우위로 변화함.
: 베트남전쟁에서 국력 소진
: Disengagement Policy에 따라 미국의 기지를 괌・하와이線으로 후퇴
- 이데올로기를 세력균형으로 대체
-> 중국의 전략적 활용 -> 중국과 관계개선

* 닉슨독트린: 중국과의 관계개선과 중국의 전략적 활용을 전제로 구상

o 미국은 소련 봉쇄라는 대전략 차원에서 미중관계 개선으로 중국으로


하여금 소련을 견제하도록 하였고,
- 중일 국교정상화를 통하여 중일간의 우호적 관계 구축으로 소련을
견제하도록 하였음.

o 또, 미국은 중국과 일본을 상호 견제하며 세력균형을 이루도록 함.

=> 아시아 세력균형체제의 구축


- 소련 VS 중국・일본-미국

o 1970년대 한반도에서의 남북대화도 새로운 아시아 세력균형체제의 구


축과정에서 이루어졌음.
- 남북대화도 닉슨 독트린의 하나의 과정에서 나타난 산물.
*영화 <실미도>
-1968년 창설된 ‘실미도 684부대’('684 주석궁폭파부대')에 관한 영화

o 닉슨 독트린의 군사기술적 특징
- 미국은 베트남전쟁 등에서 인간을 기초로 하는 지상군과 기지정책은
인질적인 성향이 있기 때문에 그 한계를 인식함.
- 반전운동으로 징병제의 한계.
- 해외주둔 미군기지에 대한 현지인들의 反기지 투쟁.
o 미국은 제약조건이 많은 지상군과 기지정책을 포기하고 기술집약적인
해양정책으로 전환함.
- 모든 아시아 국가들이 바다라는 水路 혹은 해양을 매개로 자원을
수입 가공하여 다시 水路 혹은 해양을 통하여 수출하는 것에 주목
하고,
- 島嶼와 水路를 연결하는 해양에 대하여 해공력을 중심으로 지배권
을 확보하여 태평양 세력(Pacific power)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
하는 전략으로 전환,
: 島嶼水路戰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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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소련 봉쇄를 위한 닉슨 독트린의 전면 수정과
동맹 체제의 강화

o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계기로 미소관계가 악화되고 국제환경이


데탕트 분위기에서 신냉전 상황으로 악화되면서,
-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공산주의의 팽창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고
그 과정에서 미국에 협력하는 우방국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 위해
동맹체제의 강화를 추진

o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을 세계 도처에서 폭력과 혁명을 선동하는 악


(惡)의 제국으로 간주하고,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였는데,
- 대소 강경전략의 일환으로 닉슨 독트린을 거의 전면 수정하며 소련
봉쇄를 위한 동맹체제의 강화를 추진함.

o 레이건 대통령의 닉슨 독트린 수정


- 19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처럼, 소련이 지상으로 침
공할 때, 미국의 해양정책은 무력화되기 때문에
- 해양정책의 한계를 기지 강화정책으로 본완하며 이를 위한 동맹정책
(Alliance policy) 추진.

* 동맹정책
- 제3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동맹국간에는 서로 지원하는 쌍무적
성격이 강함.
=> 대소봉쇄의 전략적 특성이 내재.
->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한미동맹 강화
-> 미일정상회담을 통해 미일동맹 강화
: “일본열도 불침항모”(나카소네 총리)
-> 한미일 3각 공조체제 강화
: 한일관계 개선, 일본의 한국에 대한 ‘안보경제협력’ 40억달러 제공
(나카소네 총리, 미일전상회담을 위해 방미 직전 결정)

o 레이건 대통령은 중국이 대소전략의 파트너로 정치적 외교적 역할이


약하며 세력균형적인 역할도 약하다고 인식하고, 기지 철수정책을 핵
심으로 하는 닉슨 독트린의 해양정책을 전면 수정함.
-> 기지 강화정책 및 동맹정책을 추구
- 주한 미군기지의 강화 및 한미동맹 강화
- 주일 미군 기지의 강화 및 미일동맹 강화

③ 레이건 대통령의 군사력 강화와 소련의 경제 붕괴 전략

* 레이건 대통령의 유명한 말


: "자유는 공짜로 얻어지는게 아닙니다. 자유를 지킬만한 힘이 있을
때에만 가능 합니다"라고. 그만큼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뜻.
- 소련을 “악의제국” 이라고 비난을 하며 “힘에 의한 평화” 강조

o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군사력의


질적 증강을 추진하면서, 한편에서는 소련의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
약화, 소련 경제의 붕괴 등을 추구함.
- 폴란드 자유노조2) 등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발발한 반체제

2) 1980년 폴란드에서 발생한 자유노조의 총파업은 공산주의 체제를 반대하는


자유화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소련은 폴란드 자유노조의 반체제 운동이
동유럽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하여 폴란드 군부를 지원하며 개입함. 폴란드
자유노조의 리더 레흐 바웬사가 체포된 후에도 폴란드 노조의 반체제 운동
은 지속되었고, 결국 1989년 폴란드 인민공화국은 붕괴하고 동유럽에서는
자유주의 혁명이 발발하여 동구 사회주의는 무너짐. 레흐 바웬사는 노벨평
화상을 받았고, 자유폴란드의 대통령이 됨.
운동을 후방에서 지원하며3) 소련에게 외교적 타격을 가하면서,
소련의 재정을 악화시켜 소련 경제의 붕괴를 유도함.

- 중동 산유국과의 전략적 협력을 통하여 국제 원유가를 하락시켜,


원유 수출로 재정을 충당하던 소련에게 재정 악화의 압박을 가하
는 한편,
- 전략방위구상(SDI)로 소련으로 과도한 국방비 지출을 유도케 함으
로써 소련의 재정을 악화시킴.

o 소련 재정의 압박은 소련경제 파산의 주요원인이 되었고, 동유럽의 자


유화 운동의 파급과 함게 소련 붕괴의 주요 원이 되었음.

◆ SDI
- 1983년 일명 “별들의 전쟁(Star Wars)”으로 알려진 전략방위구상
(戰略防衛構想, SDI; Strategic Defense Initiative)을 발표

- 소련의 핵미사일을 무력화시킴으로써 핵전쟁에서 절대적 우위를 점


하기 위한 미사일 방어(MD) 체제
- 대륙간탄도탄(ICBM)을 비롯한 소련의 핵미사일을 비행 도중에
우주의 인공위성에서 발사하는 레이저 광선으로 단계별로 격추시
키는 전략구상
: 특히, 미사일이 발사된 직후 엔진이 연소중인 상승(boost) 단계
즉 1단계에서 에서 파괴하는 것

◆ SDI는 상호확증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tion)전략을 무력화

3) 1980년 폴란드에서 발생한 자유노조의 총파업은 공산주의 체제를 반대하는


자유화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소련은 폴란드 자유노조의 반체제 운동이
동유럽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하여 폴란드 군부를 지원하며 개입함. 폴란드
자유노조의 리더 레흐 바웬사가 체포된 후에도 폴란드 노조의 반체제 운동
은 지속되었고, 결국 1989년 폴란드 인민공화국은 붕괴하고 동유럽에서는
자유주의 혁명이 발발하여 동구 사회주의는 무너짐. 레흐 바웬사는 노벨평
화상을 받았고, 자유폴란드의 대통령이 됨.
o 상호확증파괴전략
: 적이 핵 공격을 가할 경우 적의 공격 미사일 등이 도달하기 전에 또
는 도달한 후 생존해 있는 보복력을 이용해 상대편도 전멸시키는 ‘보
복 핵 전략’, ‘공포의 균형’.
- 1991년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상호확증파괴는 냉전시대의 핵 억제전
략으로서 미소간 핵전쟁을 억제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함.

5. 미국의 대소련 전략과 미일동맹의 강화

(1) 전후 일본의 재군비와 미일동맹

o 중국대륙의 공산화에 이어 한국전쟁으로 아시아 냉전이 심화됨에 따


라, 미국은 1950년 2월에 성립된 중소동맹4)에 대응하여 1951년 9월
8일 일본의 주권을 회복시키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5)의 체결되던
날 동시에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하고, 전후 일본을 미국의 세계자본주
의체제와 안보체제에 편입시킴.
- 냉전이 확산되고 심화되던 1950년대 초반의 상황에서 미국은 일본
을 동아시아지역에서의 군사적 거점으로 활용하려는 전략을 추구하
게 됨.

o 그러나, 일본이 통상국가로서의 발전전략을 추구하게 됨에 따라, 일본


의 재군비는 미국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고 미일안전보장의 틀내에서
제한적 재군비를 소극적으로 전개됨.
- 헌법적 제약(헌법 9조)에 따라 ‘군대 아닌 군대’ ‘자위대’를 1954년
7월에 창설.

o 일본은 미일동맹체제를 기반으로 안보를 미국에 의지하고 통상국가로


서 경제대국을 향한 발전에 매진하며 경제안전보장에 역점을 둠.
- 1973-74년 제1차 석유위기를 겪으며 특히 경제안전보장을 중시,

4) 중화인민공화국이 1949년 10월 수립되고, 중국과 소련간의 우호조약이


1950년 2월에 체결되어 중소동맹이 성립됨.
5)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1952년 4월 28일 발효됨.
- 일본의 ‘안보 무임승차론’ 제기,
-> 경제동물(economic animal) 비난.

(2) 일본의 대미 협조노선의 강화와 미일동맹의 강화


- 군사력의 질적 증강

o 소련 핵잠수함6)의 극동지역의 극비 배치(1978), 소련 백파이어 폭격기


의 극동배치(1979)에 의해 동아시아지역의 안보환경이 위협을 받게 되
는 상황에서 19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국제정세가
신냉 전적 상황으로 악화되었고,
- 이에 일본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의 대소련 봉쇄전략에 응하며, 미
일동맹의 강화를 위한 군사력의 질적 증강을 추구함.

o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의 나카소네 총리는 ‘전방위 외교’에서 대미


협조노선으로의 전진’으로 전환하고,
- 미국의 대소련 전략에 응하여 해공군력 중심의 군사력 증강을 추구
- 1983년 1월의 레이건-나카소네 미일정상회담에서 미일공동운명체의
동맹를 주창하며 ‘일본열도 불침항모’의 전략적 추진을 역설

o 나카소네 총리는 미일공동운명체 노선에 따라 대미협조노선을 적극적


으로 추진하며 일본의 첨단 무기 기술을 미국에게 제공하기로 하였고
- ‘일본열도 불침항모’를 위하여 소련의 백파이어 폭격기 공격, 소련의
핵잠수함 공격 등 에 대응할 수 있는 3해협 방위와 해상방공전략7)
을 추진하며 이를 위해 해공군력의 양적, 질적 증강을 통한 해상방
공체제를 추진함.
: 소련 잠수함의 태평양 진출을 봉쇄하기 위한 소야해협8), 쓰가루

6) 소련은 극동지역의 잠수함 발사 핵미사일(SLBM)로 워싱턴을 공격할 수 있


음.
7) 일본이 섬나라이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침공은 우선 바다(海)와 하늘(空)
통하여 이루어 짐.
8)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와 러시아 사할린(Sakhalin) 사이의 해협으로 오츠크
해와 동해를 연결, 3해협 방위에서 소애해협의 방위를 가장 중시함.
해협, 쓰시마해협 3해협 방위

o 미일역할 분담과 Sea Lane 방위


- 유사시 미 해군이 그 위협의 원천인 극동 소련의 해·공군기지를 공
격하고, 일본의 해상자위대는 미국의 항공모함을 호위하면서 이를
지원하고 나아가 소련함대의 3해협통과를 저지하면서 봉쇄한다는 전

- 행동반경이 중동, 서남아시아에까지 확대된 극동미군을 보완하기 위

함이며, 미일 공동대처에 의하여 일본의 생명선인 해상수송로의 안

전확보를 도모

* 1980년대의 미소냉전의 격화와 도시바 사건.

o 한국이 일본열도의 방파제로서 한국의 안보가 일본의 안보에 직결된


다는 인식아래 안보경제원조를 요청한 한국에 대해,
- 나카소네 총리는 40억달러의 안보경제원조를 제공하기로 함.

o 이처럼, 일본은 미소대결의 신냉전 상황에서 대미협조노선을 적극적으


로 추진하며 미일동맹의 강화를 추진함.
- 미일동맹이 강화되면서 일본의 역할 분담과 전략적 중요성은 증대
: 미일동맹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초석
(cornerstone)으로 전략적 중요성이 증대.

II. 얄타체제와 냉전체제의 붕괴

1. 독일통일: 얄타체제의 붕괴

(1)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독일의 통일

o 동서독의 경제적 차이, 공산 동독의 주민에 대한 억압 등으로 동독 주


민의 동독 탈출이 점차 증대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1980년대 접어들면
서 폴란드 등 동유럽에서 일어나는 자유화 바람은 동독 주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침.

o 약 300만명의 동독 주민들이 이미 1961년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기 이


전에 서독으로 탈출하였는데.
- 1989년 7월 중순부터 동독 민주화를 요구하는 동독 주민들이 대대
적으로 서방으로 탈출하였는데,
-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1989년 11월 9일까지 약 22만 5천명이 동
독을 탈출함.

o 동독의 공산정권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소련의 고르바쵸프 공


산당 서기장은 1990년 1월 모드로우(Modrow) 동독 총리와의 회담에
서 독일 통일을 인정함.

o 모드로우(Modrow) 동독 총리는 총선거를 통해 연방국가를 수립한다


는 독일통일중립화안을 제안하였으나,
-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는 이를 거절함

o 마침내, 동독이 서독에 편입되는 통일을 하게 되는데,


- 동독의 공산주의체제가 붕괴되고 서독의 자유주의체제에 흡수됨으로
써, 서독은 실질적으로 “흡수통일”(1990.10.3)을 이루게 됨.

(2) 독일통일에 따른 독일 분단체제의 해체의 국제정치사적 의의

o 제2차 세계대전의 마무리를 위한 얄타회담의 결과, 독일은 연합국에


의해 강제로 분단되었는데, 냉전체제가 붕괴되는 상황에서 동서독이
하나가 되는 통일을 이룸.

o 제2차 세계대전의 마무리를 위한 얄타회담의 결과, 강대국에 의해 의


도적이고 전략적으로 분단된 독일의 통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얄
타체제의 해체를 의미함.
2. 소련연방 해체 : 동서 냉전체제의 붕괴

(1) 미국의 대소련 봉쇄전략

o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군사력의


질적 증강을 추진하면서, 한편에서는 소련의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
약화, 소련 경제의 붕괴 등을 추구함.
- 폴란드 자유노조9) 등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발발한 반체제
운동을 후방에서 지원하며10) 소련에게 외교적 타격을 가하면서,
소련의 재정을 악화시켜 소련 경제의 붕괴를 유도함.
- 중동 산유국과의 전략적 협력을 통하여 국제 원유가를 하락시켜,
원유 수출로 재정을 충당하던 소련에게 재정 악화의 압박을 가하
는 한편,
- 전략방위구상(SDI)로 소련으로 과도한 국방비 지출을 유도케 함으
로써 소련의 재정을 악화시킴.

o 소련 재정의 압박은 소련경제 파산의 주요원인이 되었고, 동유럽의 자


유화 운동의 파급과 함게 소련 붕괴의 주요 원이 되었음.

(2)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개혁・개방정책

9) 1980년 폴란드에서 발생한 자유노조의 총파업은 공산주의 체제를 반대하는


자유화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소련은 폴란드 자유노조의 반체제 운동이
동유럽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하여 폴란드 군부를 지원하며 개입함. 폴란드
자유노조의 리더 레흐 바웬사가 체포된 후에도 폴란드 노조의 반체제 운동
은 지속되었고, 결국 1989년 폴란드 인민공화국은 붕괴하고 동유럽에서는
자유주의 혁명이 발발하여 동구 사회주의는 무너짐. 레흐 바웬사는 노벨평
화상을 받았고, 자유폴란드의 대통령이 됨.
10) 1980년 폴란드에서 발생한 자유노조의 총파업은 공산주의 체제를 반대하
는 자유화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소련은 폴란드 자유노조의 반체제 운
동이 동유럽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하여 폴란드 군부를 지원하며 개입함. 폴
란드 자유노조의 리더 레흐 바웬사가 체포된 후에도 폴란드 노조의 반체제
운동은 지속되었고, 결국 1989년 폴란드 인민공화국은 붕괴하고 동유럽에서
는 자유주의 혁명이 발발하여 동구 사회주의는 무너짐. 레흐 바웬사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자유폴란드의 대통령이 됨.
*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개혁) / 글라스노스트(Glasnost, 개방)

o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대소 강경전략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1985년 3


월 소련에서는 브레즈네프의 뒤를 이어 고르바초프가 공산당 서기장으
로 등장하고
- 그는 새로운 사고(New thinking)에 의한 개혁・개방정책을 추구함.
-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를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체
제로 전환하려고 했음.

①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개혁・개방정책

o 정치: 공산당 1당 독재조항의 폐지와 대통령제 도입


- 공산당 이외의 정당 인정,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확대
- 1990년 다당제아래의 선거에서 당선되어 대통령(1990.3~1991.12)됨.

o 경제: 시장경제원리와 사유 재산제도를 도입

o 대외적으로
- 소련 경제의 발목을 잡던 아프가니스탄에서 1989년 철군 단행,
-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하고 중동부 유럽 공산주의권 국가의 변화
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언(1989.10.27.)
- 1989년 6월 총선거 후 폴란드 자유노조 주도의 비공산당 연립정부
수립을 승인11)
=> 1989-90년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이 민주화를 이룰 때 진압
을 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았음
-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
- 지중해의 몰타12)에서 미소정상화담(1989.12.2.-3.) 개최
->몰타선언(1989.12.3): '동서가 냉전체제에서 새로운 협력시대로

11) 1991년에는 노동자로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바웬사(Wałęsa, L.)가 대통령


에 당선되었으며, 2004년 유럽연합에 가입
12) 지중해의 몰타에서 부시대통령과 고르바쵸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미소정
상회담을 가짐.
들고 있다'고 선언; 냉전 해체의 공식 선언
- 바르샤바 조약기구 해체(1991.4)

◆브레즈네프(1906-1982) 독트린의 핵심 내용
- 사회주의 진영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개별 국가의 주권은 제한될
수 있다는 제한주권론
- 따라서, 중동부 유럽의 공산주의 국가에서 반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
거나, 미국을 필두로 한 서방국가가 공산주의 국가체제를 해체시키려
시도한다면 소련이 적극적으로 나서 이를 저지할 것이며 군사적 개입
을 할 것임.

◆몰타회담 냉전 해체의 공식 선언

몰타 미·소 정상회담(영어: Malta Summit, 러시아어: Мальтийский с


аммит)은 미국의 조지 H. W. 부시 대통령과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
바초프가 1989년 12월 2일과 3일, 이틀 동안 지중해 몰타에서 가진 정
상회담.

- 회담을 끝낸 두 정상은 공동기자회견에서 '동서가 냉전 체제에서 새로


운 협력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선언
- 또한 핵무기 감축 등 군축협정 체결을 위한 논의에 진전을 보았으며,
미국은 소련의 경제개혁정책에 광범위한 지원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

② 개혁・개방정책의 한계와 소련연방의 해체

o 폴란드에서 시작한 민주화의 물결은 점차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에게


확산되었고, 1989-90년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의 민주화 혁명은
소련내 개혁파들의 입지를 한층 강화시키면서 냉전의 해체의 도화선이
되었음.
- 1989년부터 냉전의 해체가 시작.
o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고르바초프는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며 커다란
기대를 받았지만, 민주화의 물결의 확산과 심각한 경제위기로 무너지
고 있는 소련을 공산주의체제로 회생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었음.
- 공산주의체제의 틀내에서 표현과 언론의 자유 확대, 다당제 인정,
시장경제와 사유재산의 도입 등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한계.

o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에 저항하던 소련공산당내의 강경세력은


1991년 8월 19일 쿠데타를 일으키고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감금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함.

o 그러나, 쿠테타는 소련 연방 중 가장 큰 나라인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으


로서 개혁파인 보리스 엘친에게 진압되어 3일 천하로 끝났고,
- 쿠데타의 실패로 3일만에 복권한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1991년 8
월 24일 소련공산당 서기장직을 사임하고 소련공산당을 해체
- 1991년 12월 25일 소련은 해체

* 1922년 12월 30일에 건국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약 69


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짐.

* 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논문 “역


사의 종언”(1989)에서 공산주의가 멸망한다고 판단하고 예견하였지만,
- 소련의 붕괴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왔음.

o 소련 연방의 해체후, 1992년 1월 구 소련 공화국들의 연합체로서 국


제기구인 독립국가연합(CIS,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가 설립됨
- 구 소련 구성국 15개국 중 9개국이 정회원국,
- 준회원국 등을 포함하면 현재 11개국.

*우크라이나는 원래 독립국가연합에서 비공식 참관국 지위를 갖고 있었


지만
- 2014년에 일어난 크림 위기,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돈바스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와의 갈등을 빚게 되었고,
- 2018년 5월 19일을 기해 독립국가연합(CIS) 탈퇴를 선언.

o 동서 냉전의 중심 축인 소련의 해체로 냉전체제는 종식을 고함.

o 현재,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가 남은 곳은 중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


국, 쿠바, 라오스, 베트남 등이고,
- 한반도에는 냉전이 잔존하고 있음.

□ 제2차 세계대전이후의 얄타체제는 독일 통일(1990.10.3.)로 해체되었고,


- 냉전체제는 소련의 해체로 종식되었음.
<제7주째>

탈냉전시대 국제정치와 동아시아 국제정치

1. 탈냉전시대 국제사회와 국제정치의 변화와 특징

(1) 이념대결의 종식과 구 공산권국가들의 체제전환

o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적 대결을 기반으로 하였던 냉전체제가


붕괴됨에 따라, 냉전체제의 해체에 따른 탈냉전시대의 도래는 국제관
계가 국가간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도록 함.

o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의 이념적 대결을 기반으로 하였던 진영간 대결


이 종식되고, 과거 공산주의 국가들이 체제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하
였으므로, 국제사회에서 경제교류,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됨.

- 특히,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 소련연방의 공산권 국가들은 정치적으


로는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체
제전환을 추진함.
- 국제기구의 가입과 서방 국가들의 자본 도입.
- 권력상층부는 과거 공산권의 고위직 인사들이 거의 그대로 존재.

Cf)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체스코 대통령 겸 공산당 서기장 처형


- 차우세스쿠는 1967년 대통령에 취임하여 1989년 12월 민주혁명으로
사형당할 때까지 24년 동안 루마니아를 통치,
- 그 일가를 당과 정부의 요직에 임명하여 족벌체제를 구축, 권력을
독점하고 강권통치를 행사, 언론 통제와 자유화 요구운동의 탄압
=> 1989년 12월 민주혁명으로 붕괴, 공개 처형

- 루마니아 공산당은 1964년 4월 탈소련 자주화 노선을 선언한 후 국


가이익과 주권을 독자적으로 행사,
김일성의 통치를 벤치마킹하여 개인숭배를 강요
- 수도 부카레스트는 작은 Paris라고 불리울 만큼 프랑스의 파리를 본
떠 만든 도시
: 도시 중앙에 파리에서 본 개선문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방사형 도
로가 놓여져 있으며, 개선문을 바라보는 인민궁전은 북한의 주석궁
을 모방하여 대리석으로 건축(현재 루마니아 의회궁으로 사용).

o 현재,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가 남은 곳은 중국, 베트남, 라오스 쿠바,


북한
- 정치: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
경제: 시장경제
Cf) 북한의 장마당

(2) 상호의존의 증대와 국제화, 세계화

o 현대 국제사회는 과학 기술의 발달로 공간을 극복하는 교통수단이 발


전되면서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쉬운데, 정치적 이
념의 장벽이 무너지고 탈냉전시대에 접어들면서 과거 공산주의 국가들
이 체제전환과 개방정책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국가간의 인적, 물적 교
류가 한층 활발해짐.

o 이와 같은 인적, 물적 교류의 활성화는 국가간의 상호의존을 증대시


시키는데,
- 동유럽 공산국가들과 소련이 심각한 경제위기를 계기로 몰락함에 따
라, 탈냉전시대에 동유럽 국가들과 러시아가 경제의 중요성을 인식
하고 체제전환과 개방정책을 추진하며 경제발전에 역점을 두었기 때
문에 경제적 상호의존이 증대되었음.

Ex) 국제사회에서 경제의 상호의존


: 노동력, 자원, 부품, 소재, 시장
o 경제적 상호의존과 정치・군사적 협력의 상호보완관계
- 경제적 상호의존의 심화는 정치・군사적 협력관계를 촉진하고 강화함.

Ex) 1990년대 일본의 첨단기술과 미국의 최첨단 무기의 상호 보완


- 일본의 반도체와 미국의 대류간 핵미사일
- 일본의 전자렌지 소재와 미국의 스텔스전투기

o 탈냉전시대에 접어들어 국내정치와 국제정치가 상호침투되고 연계되기


때문에 국내정치의 국제정치의 영역 구분이 모호해지고,
- 국제정치에서 high politics(정치, 군사)와 low politics(경제)의 구
분이 모호해짐.

o 그런데, 상호의존의 심화는 국가 간의 접촉과 이해관계의 증가를 의미


하지만,
반면 이해관계의 충돌에 의한 갈등이 발생할 소지가 큰 것도 의미함.
- 특히, 불평등한 상호의존관계에서는 갈등의 소지가 큼.

o 상호의존의 국제사회는 경제활동(생산과 교환)이 국경을 넘어 자유롭


게 이루어지고, 나아가 IT 등 정보화 기술이 발전하면서 경제의 세계
화, 문화의 세계화 등을 촉진시키고 지구촌의 시대가 도래하도록 함.

o 글로벌 차원의 경제적 상호의존의 심화는 글로벌 생산네트워크 및 판


매네트워크를 통하여 세계화의 흐름을 한층 가속화시킴.

o 탈냉전시대에서 국제화, 세계화는 국제자본의 영향력을 강화시킴.


- 다국적기업, 초국적 기업, 글로벌 대기업들의 영향력이 강화.
=> 글로벌 수준의 다국적기업 및 초국적 기업은 권력의 국가 집중을
완화시킴.

(3) 미소 양극체제에서 미국 일극체제 및 다극체제의 단-다극체제로


o 냉전기의 미소 양극체제가 소련의 해체로 인해 무너지고, 탈냉전기에
접어들면서는 미국의 군사력 등 월등한 국력을 바탕으로 한 일극체제
로 전환됨.

o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경제적으로는 일본과 독일도 한축을 이루었으므


로,
- 군사적으로는 미국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일극체제 또는 단극체제
- 경제적으로는 미국, 유럽연합(EU), 일본의 다극체제
=> 미국 주도의 단-다극체제 특징을 나타냄.

*국제연합(UN)의 운영 예산 (1) 미국 (2) 일본 (3) 독일이 부담.

(4) 중국의 부상에 따른 탈냉전시대의 신냉전

o 미국이 9.11테러(2001)이후 테러와 전쟁을 전개하면서 경제적 침체를


겪으며 미국의 국력이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가는 상황에서
- 중국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의 원조를 받았던 국가였지만,
2010년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강국이 됨.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성쇄』

o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소위 G2부상과 더불어 러시아 역시 소련 연방


직후인 1990년대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빠른 경제성장으로 군
사대국으로 등장함.
- 중국과 러시아는 전략적 협력으로 미국의 주도의 국제질서에 대항하
기 시작.
=> 미중관계의 갈등과 대립

o 미중관계의 대립은 트럼프-시진핑의 시대에 점점 심화되었고, 2020년


에 접어들어서는 ‘신냉전’의 격렬한 대립관계로 악화되었음.
o 이와 같은 미중간의 대립은 미중 양자간의 수준을 넘어 블록화 대립
의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 의해
한층 가속화되고 있음.

o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로 탈냉전시대의 도래에 따른


국제사회의 평화적 기류는 사라지고 있음.

2. 탈냉전시대 동아시아 국제정치의 변화와 특징

(1)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해체와 한계

o 폴란드에서 시작한 민주화의 물결은 점차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에게


확산되었고, 1989-90년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의 민주화 혁명은
소련내 개혁파들의 입지를 한층 강화시켰음.

o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개방개혁정책의 추진하면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였고,
-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동서가 냉전체
제에서 새로운 협력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냉전체제의 해체를
알리는 몰타선언(1989.12.3.)을 함,

o 이와 같은 유럽에서의 냉전체제의 해체 시작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


기장의 개방개혁정책은 동아시아 국제정치에도 영향을 미침.

o 특히, 소련과 동구 공산권의 경제적 어려움은 글로벌 차원에서 공산주


의 국가들의 경제를 어렵게 하였음.
- 경제난으로 붕괴 직전.
=> 중국과 북한도 경제난에 봉착.

o 유럽에서 냉전해체의 진행, 소련, 중국, 북한 등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


제적 어려움은 동아시아에도 냉전체제의 해체가 전개되도록 함.
o 한국의 노태우 정부는 1988년 8.8올림픽을 앞두고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 선언」(7.7선언)을 통하여 남북한 관계 개선과 사회
주의권과의 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를 표현함.
- 한국 노태우정부의 북방정책: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국교정상화 추구
: 한소수교(1990.9)와 한중수교(1992.4)

o 동아시아에서의 냉전체제 해체는 남북관계의 개선, 한소수교(1990.9)와 한


중수교(1992.4), 북한과 일본의 접근과 국교정상화를 향한 정상회담의 개최
등으로 나타났음.

(2) 한소관계의 개선과 수교(1990.9)

o 1884년 체결된 조러수호통상조약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1904년 파기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후 한소관계는 한국전쟁과 냉전
을 거치면서 적대적 관계가 지속됨.
- 교류가 없음.

o 적대적이던 한소관계는 1970년대 동서진영의 데탕트가 시작되면서 상


호입국 허용, 제3국을 통한 간접교역, 문화교류 등으로 점차 호전되었음.

o 그러나 1983년 9월 1일 'KAL기 피격사건'으로 개선의 분위기는 급격


히 냉각되었고, 냉랭하던 양국관계는 소련이 88올림픽에 788명의 대
규모 선수단을 참가시키면서 다시 호전의 계기를 마련함.

o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89년 4월 3일 소련 상공회의소 서울사무소가


개설되었고, 7월에는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모스크바사무소가 설
치되었으며,
- 이를 바탕으로 1989년 11월 17일 양국간 영사처(Consular
Department) 설치를 합의, 86년만에 공식외교관계를 복원함.
o 냉전의 해체기,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과 노태우정부의 북방정책의
맞물려 1990년 6월 한소수교정상회담의 결과,1990년 9월 한소 국교정
상화가 이루어짐.
- 1990년 9월 30일 유엔본부에서 세바르드나제 소련 외상과 최호중
외무장관이 '한 ·소 수교 공동성명서'에 서명함으로써 한국과 소련은
역사적인 수교를 수립하게 됨.
- 소련에 30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상환조건을 명시하지 않음)

*러시아: 한반도 통일문제에 매우 민감

(3) 한중관계의 개선과 수교(1992.4)

o 중국은 1949년 정부를 수립한 후 냉전시기에는 친미국가들과 이념적


적대관계에 있었음.
- 특히, 한국전쟁의 참전으로 인해 한국과는 거의 30년 동안 미수교
단절관계에 있었음.

o 1970년대 초반 미중간의 관계개선으로 국제정세가 데탕트(긴잔완화,


화해무드)적 상황으로 전환하자, 한국은 1973년 6·23선언을 통해 비적
대적인 국가에 문호를 개방하겠다고 선언하고 이념과 체제에 관계없이
모든 공산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하며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추진
함.
- 제3국을 통한 3각교역 등으로 간접 경제교류를 추진.

o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83년 5월 5일 어린이날 중국민항기가 공중피랍


되어 한국 춘천의 미군기지에 불시착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충격적인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과 중국은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당국 간 교섭을 시작함.

o 중국 민항기의 피랍사건 이후, 한중 양국은 체육, 관광, 이산가족, 친


척방문 등 비정치적인 영역에서 교류를 시작하였음.
-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에 중국이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하여
두나라 관계의 중요한 전환점이 이루어졌으며, 1988년 서울올림픽
과 1990년 북경 아시아경기대회에서도 서로의 선수단 교류가 있었
음(스포츠외교).

o 1990년 한국과 중국 양국은 영사기능의 일부를 수행하는 무역대표부


설치에 합의하여 새로운 교류의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1992년 8월 24
일 베이징에서 한중수교 공동성명에 서명하였음.
- 한중수교의 후속 조치로 중국이 요구한 한국과 대만의 단교
(주대만 한국대표부)

o 이후 한국과 중국은 활발한 경제, 문화, 사회 교류를 이어왔으며 2001


년 중국은 한국의 제2위 수출대상국으로 부상하였고,
- 현재, 한국의 제1위 수출대상국.

o 그러나, 2016년 7월 한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 배치와 이에 대한 중국의 보복으로 급속도로 냉각됐고, 거의 전
분야에서 교류가 중단되었음.
- 한국 단체관광 제한, 한국의 대중문화 금지 조치(한한령)
- 롯데 등 중국 진출기업들의 막대한 손실과 철수.

*한한령: 중국이 우리나라의 드라마와 영화, 예능과 같은 한류 콘텐츠


수출 및 한국 연예인의 중국 프로그램 출연 금지 조치

□ 한소수교와 한중수교의 영향으로 1991년 9월 18일 열린 제46차 유엔


총회에서 남북한이 각기 별개의 의석을 가진 회원국으로 유엔에 동시
가입하게 됨.
- 노태우정부의 '북방외교'의 성과 평가.

(3) 일본과 북한관계의 개선과 한계


① 1980년대 냉전 해체기의 북한과 일본의 접근

o 동서대립의 냉전시대, 일본과 북한은 국교정상화를 위한 관계개선을


추구하였지만, 냉전체제의 제약으로 한계를 노정하였음.

o 1987년 12월 미소 수뇌회담에서 INF전폐조약의 체결됨에 따라 국제


정세가 신냉전적 상황에서 데탕트적 상황으로 전환되고, 한국의 북방
정책 추진은 북일관계의 개선에 매우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음.
- 1988년의 ‘7․7 특별선언’을 통해 남북간의 대결․불신․적대관계를 극
복하고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의 시대를 열어가겠다고 천명하였던 노
태우정부는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반대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음.

o 1989년이후 동구 공산권의 몰락과 소련 연방의 해체는 아시아공산권


국가들로 하여금 심각한 경제난과 체제위기에 봉착하도록 하였는데,
-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북한은 경제지원을 기대하며
북일관계의 개선에 적극적으로 임함.
- 북일 국교정상화시 식민지 보상금

o 요컨대, 일본은 전후처리 외교차원에서 유일한 미수교국 북한과의 국


교정상화를 추구하게 되었고,
-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앞두고 생존전략의 차원에서 식민지 보상금을
받깅 위해 일본과의 국교수립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되었음.

o 일본정부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의 개최 직전에 대북 제재조치를 해제


하며 북일관계의 개선을 추구하였고, 1990년 9월 24-28일에 자민당·
사회당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함.
- 한소국교정상화(1990.9.30)가 이루어지는 시기에 자민당·사회당 대
표단 평양 방문.

o 1990년 9월 28일 노동당·자민당·사회당의 ‘3당 공동선언’ 발표


- ‘3당 공동선언’에는 북한이 제시한 북일관계의 개선을 위한 3가지
조건 즉 식민지지배에 대한 사죄와 보상, 각 분야의 인적 교류, 통
신위성의 이용과 북일 양국간의 직항항로의 개설, 여권문제의 해결
등이 수용되어 나타났음.

② 국교정상화회담의 개시와 한계

o 자민당·사회당 대표단의 방북 결과, 국교정상화회담를 위한 북일 교섭


이 본격적으로 전개됨.
- 자민당과 사회당 등 정치권의 주도로 시작된 일본의 대북한 접근 및
북일 접촉은 국교정상화를 위한 북일 교섭이 구체적으로 전개되면서
외무성을 통한 실무적 수준에서 추진되었음.

o 국교정상화회담은 베이징 예비회담 등을 거친 뒤, 제1차 국교정상화


회담이 1991년 1월 30-31일에 평양에서 개최되었고 이후 8차례가
개최됨.

o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북한과 일본 양국은 국교정상화회담에서 주요


의제에서 서로 다른 의견을 개진하며 대립하였음.
- 특히, ‘이은혜 문제’13)와 ‘핵사찰 문제’14)과 는 합의점을 찾지 못하
고 평행선,

o 결국, 1992년 11월 5-6일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8차 국교정상화회담에


서 ‘이은혜 문제’에 관한 실무자협의에서 북한측이 일방적으로 협의중
단을 선언함으로써, 국교정상화회담은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음.

o 그러나, 북한이 체제유지를 위한 차원에서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에 임


하였기 때문에 북일관계가 정체상태에 빠졌지만, 아주 냉각되고 악화

13) 이은혜는 김현희의 일본어 선생인데, 납치된 일본인. 제3차 국교정상화회


담부터 일본측이 제기.
14) 북한의 은폐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 문제, 제8
차국교정상화회담회담에서 일본측이 제기.
된 것은 아니었음.
- 국교정상화를 향한 북일 양국의 비공식 접촉이 곧 재개되었고, 북일
양국은 외무성 과장급 수준의 비공식·비공개 접촉을 베이징 등지에서
가지면서 국교정상화 교섭의 재개의 분위기를 조성해갔음.

③ 국교정상화을 향한 북일 정상화회담 개최

o 제8차 국교정상화회담(1992.11)의 결렬이후, 북일 ‘심의관급 회담’의


합의에 따라 ‘세계식량계획(WFP)’를 통한 일본의 대북식량지원이 추
진되고 ‘북송 일본인 처’ 제1진(1997.11), 제2진(1998.1)의 방일 및 고
향방문이 이루어지면서 북일관계는 다소 호전되기 시작하였음.

o 마침내, 제8차 국교정상화회담(1992.11)의 결렬이후, 7년만에 제9차


국교전상화회담이 재개되고 이어 제10차, 제11차 국교정상화회담이
개최되었음.
- 그러나, 또 다시 차기 국교정상화회담의 일정조차 합의하지 못한 채
막을 내렸음.

o 북일관계는 냉각되고 소강상태로 지속되다가, 한반도의 영향 즉 남북


관계 진전의 영향을 받으며 다소 진전되기 시작함.
-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 개최

o 이에,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도 일본 정부는 대사급 회담으로서는 북일


양측의 쟁점 현안에 대한 타협점을 찾는데 한계가 있을 것으로 평가
하였고, 다소 완화된 북일관계를 활용하며 정상회담을 추구함.
- 북한도 북일 정상회담의 개최에 긍정적으로 호응하는 입장을 보였
음.

o 북한이 북일 정상회담의 개최에 긍정적으로 호응한 전략적 의도에 대


해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할 수 있다.
- 첫째, 북한은 식량・에너지・외화 등의 부족으로 경제난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 처해있었기 때문에 국교정상화를 지향한 북일관계의
개선을 이용하여 일본으로부터 대규모 경제 지원을 받기 위함임.
- 북한은 경제난 극복을 위한 일환으로 북일 정상회담의 개최에 긍
정적으로 호응

- 둘째, 북일 정상회담의 개최 등 평화적인 대화 국면을 조성하고 국


교정상화를 지향한 북일관계를 개선하여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을
견제하기 위함.
- 북한은 북일관계의 개선을 이용하여 일본을 연결고리로 하는 미
북관계의 개선을 추구하고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의 완화를 위해
북일 정상회담의 개최에 긍정적으로 호응.

o 이와 같은 북한의 전략적 의도는 북일 정상회담의 개최를 가능하게


함.
- 전후 최초의 북일 정상회담이 2002년 9월 17일에 평양에서 개최.

o 2002년 9월 17일 오전에 개최된 김정일-고이즈미 제1차 정상회담은


납치된 일본인들의 사망문제로 인해 긴장되고 무거운 분위기였으나,
- 이어 개최된 오후 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예상외로 북한의
특수기관과 조총련의 공모에 의한 일본인 납치사실을 처음으로 시
인하고 사과를 함에 따라, 회담은 급진전.
- 북일간의 주요 현안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보상, 일본인 납
치문제,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 등이 일괄적으로 타결되었고,
- ‘9․17 평양선언’이 발표

o 제1차 김정일-고이즈미 정상회담의 의제별 합의와 ‘9·17 평양선언’의


발표는 향후 북일관계의 정상화를 위해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평가되
었지만,
- 북일관계에는 여전히 납치 일본인들의 사망에 관한 진상 조사문제,
핵·미사일 문제 등 심각한 갈등의 불씨들이 향후 과제로 내재되어
있음에 주목.
o 그러므로, 북일관계는 2002년 9월의 김정일-고이즈미 북일정상회담과
‘9·17 평양 선언’에 의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지만, 일본인 납치문
제와 북한 핵문제 로 인하여 그다지 진전되지 못하였음.

o 특히, 일본인 납치문제는 일본 국민들의 북한에 대한 정서적 반감을


증대시키며 뜨거운 국내 정치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북일관계는 냉각
상태를 벗어나기 어려웠음.

o 이와 같은 상황에서 중국이 북한 핵문제의 해결을 위한 6자회담15)을


성사시키고 주도하며 외교적 위상을 높여 나가자, 고이즈미 총리는 제
2차 북일정상회담을 기획하게 됨.

o 고이즈미 총리의 제2차 평양 방문과 북일 정상회담의 배경에 대해서


는 다음과 같이 지적할 수 있다.

- 첫째, 국내정치 차원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2004년 4·25 중의원 7・


17 참의원 선거의 승리를 위해 국내 정치의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납치 일본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였음.
- 즉, 고이즈미 총리는 2004년 4·25 중의원 7・17 참의원 선거의 승
리를 위한 국민지지율의 증대를 위한 전략적 승부수로서 제2차 평
양방문을 결단하였다고 지적할 수 있음.

- 둘째, 동북아 국제정치 차원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북한 핵문제를 둘


러싼 북미간의 일봅의 중재 역할, 북한 핵문제로 한계에 부딪친 남
북관계를 위한 일본의 일정부분 역할 등을 수행하며 주도권 경쟁자
인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제2차 평양방문을 기획하였다고 지적할 수
있음.

15) 6자회담은 북한의 핵 문제를 해결하고, 한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해


한국·북한·미국·중국·러시아·일본 등 6개국이 참가하는 다자회담인데, 2003
년 8월 제1차 회담이 시작되어 2007년 3월 제6차 회담으로 막을 내렸다.
- 당시 미국은 2004년 11월의 대통령 선거 등으로 북한문제에 깊게 간
여할 여유가 그다지 없었고,
- 한국 정부는 북한 핵문제로 인해 남북관계를 더 이상 진전시키
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는데 반해,
- 중국은 6자회담의 성사를 통해 ‘제2차 북핵 위기’16)를 봉합하며
동북아 지역에서 외교적 위상을 높이고 있었음.

o 이와 같은 국내 정치적 상황, 동북아 국제정치 상항, 북한 핵과 남북


관계 등을 고려하여 고이즈미 총리는 약 1년 8개월 만인 2004년 5월
22일에 제2차 평양방문을 단행하였고, 당일 약1시간 30분 정도의 짧
은 정상회담을 가짐.

- 고이즈미 총리는 납치 일본인의 사망 또는 행방불명에 대한 진상


재조사 합의, 납치 피해자 가족 5명의 귀국 동의 및 소가히도미의
가족 3인의 제3국 조기 면회, ‘9·17 평양선언’의 준수, 북한의 제4
차 6자회담 참가 및 미사일 발사 동결의 재확인 등의 성과를 거두
었고,
- 귀국시 일본인 납치 피해자와 그 가족 5명을 데리고 돌아왔음.
(일본 공항의 비행기에서 내리는 김일성배지를 단 초라한 모습,
이에 일본인들의 북한에 대한 부정적 인식 증대)

o 제2차 북일 정상회담의 성과로 고이즈미 내각에 대한 지지율이 상승


하는 가운데 일본 정부는 제2차 북일 정상회담의 후속 조치와 관련하
여 북한과 계속해서 공식 및 비공식 실무 수준의 접촉을 하였지만,
- 납치 일본인 문제와 핵미사일 문제 때문에, 북일관계는 순탄하게
진전되지 못했음.
- 핵미사일 문제: 북미 양자간의 핵심 의제
- 납치 일본인 문제: 북일 양자간의 핵심 의제,
일본인들의 북한에 대한 여론 악화와 일본 국내 정치문제화

16) 2003년 1월 10일 북한이 NPT에서의 ‘자동적이고 즉각적인’ 탈퇴를 선언함


에 따라 ‘제2차 북핵 위기’가 발생하였으나, 제2차 북핵위기는 새로운 방식의
대화체인 6자회담의 틀이 합의되고 전개되면서 봉합되었다.
o 고이즈미 총리와 일본 외무성의 노력으로 2004년 7월 8일에 소가 히
도미(曽我ひとみ)의 가족인 남편(미군 탈주병)과 2명의 딸이 싱가포르
를 거쳐 도쿄로 극적으로 왔고, 일본 TV들이 이들의 입국 모습을 생
중계하는 등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하였지만, 일본 납치자 의혹문
제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무마하는데 역부족이었음.

o 일본인 납치자 의혹문제에 대한 재조사 결과는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


았고,
- 게다가, 제3차 북일 납치자문제 실무자회의에서 북한측으로부터 받
아 온 요코다 메구미(横田めぐみ)17)의 유골이 DNA 검사 결과 다른
사람의 유골로 밝혀졌음.
=> 요코다 메구미의 가짜 유골 사건은 일본 국내의 북한에 대한 부정
적인 비판여론이 매우 커지도록 하였고, 나아가 북일간의 불신·갈
등도 한층 증폭되게 하였음.

o 그리고, 북한이 2006년 7월 5일 미사일을 발사하고 동년 10월 9일


핵실험을 감행하자,
- 고이즈미 총리를 계승한 아베 신죠 총리가 독자적 대북 조치를 단행
함과 더불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
게 되면서 북일관계는 한층 악화되었음.

o 이후, 일본과 북한은 공식 또는 비공식적으로 접촉과 대화를 가


졌지만, 북일관계는 진전되지 못하고 소강상태를 벗어나지 못함.
- 현재 북일관계는 소강상태

17) 1977년 11월 15일, 일본 니가타현에서 북한 공작원에게 납북된 납북 일본


인. 당시 13세의 중학생이었다. 니가타시 출신. 메구미의 부모인 요코타 시
게루와 요코타 사키에는 딸의 실종 후 납북 일본인들의 생환을 위해 수많은
활동을 했으나, 아버지 시게루는 2020년 6월 5일 결국 생전에 딸을 만나 보
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 일본의 대북제재

o UN 안보리는 2006년 북한의 제1차 핵실험 이후 총 10차례에 걸쳐


결의안을 채택하였는데,
- 북한과의 수출입, 금융거래, 화물검사, 인적교류 등 제 분야에서
UN회원국에게 대북제재 이행을 요구하고 있음.

o 2006년 이후 일본은 (1) UN 안보리 결의안(UN Security Council


Resolution)에 따른 대북 제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2) 국내법을
근거로 한 독자적 제재를 취하고 있음.

*조조무역
- 북일무역은 북한의 일본에 대한 채무문제로 중단되고
- 그 대신 조총련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간의 무역 즉 조조무
역으로 이루어졌으나, 조조무역도 북한에 진출한 조총련계 기업의 실
패,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 등으로 중단됨.

(4) 동아시아 패러독스

o 동서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탈냉전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동아시아 지역


에도 중국의 개혁·개방과 고도 경제성장, 러시아의 개혁·개방, 중・러
국경지역의 군사력 감축, 남북정상회담의 개최, 북일정상회담의 개최
등으로 정치-군사적 긴장이 완화되는 경향을 나타내 왔지만, 여전히
한반도 냉전기류의 잔존, 기존의 내재된 갈등 요인 등으로 인해 불확
실성·불안정성이 점증하고 있음.

o 동북아 지역에는 ‘중·러 전략적 동반자 협력 대 미국’의 상호 견제,


‘미·일동맹 대 중국’의 상호 견제, 지역 강국인 중·일의 경쟁과 갈등,
북한의 도발적 핵・미사일 실험, 한반도의 불안정한 평화공존, 해상 영
유권을 둘러싼 갈등과 분쟁, 역사문제에 의한 갈등 등 다양한 불안정
한 요인들이 내재하고 있음.
o 특히,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의 공세적 대외정책으로 중일관계의
갈등이 증대되고 있고, 중국이 G2로 부상함과 더불어 신형대국관계를
추구하면서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이 심화되고 있음.

o 그러므로, 동아시아 지역은 경제적 차원에서 중국의 고도 경제성장에


의해 교역량이 큰 규모로 증대하면서, 한국과 중국, 중국과 일본, 한
국과 일본 등의 경제적 상호의존이 상당히 증대하고 심화되어 가고
있지만,
- 정치·안보분야에서 갈등과 대립은 점증하며 지속되고 있다. 즉, 동아
시아 지역에는 경제분야의 상호의존과 정치·안보 분야의 갈등·대립
이 혼재해 있는 패러독스(paradox)가 내재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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