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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T2 W4 10. 10.

(Mon) 공연예술비평론 공연예술학전공 석사과정 한준희


Peter Lamarque, “The Intentional Fallacy”

의도주의의 오류THE INTENTIONAL FALLACY

|p.177-1| ‘의도주의의 오류’라는 표현은 비평가 윌리엄 윔샛(William K. Wimsatt)과


먼로 비어즐리(Monroe C. Beardsley)가 공동 집필하고 1946년에 출판한 논문의 제명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오류란 타당하지 않은 논증 방식으로, 윔샛과 비어즐리는 작가의 의
도와 관련된 ‘외적 증거’에 기반해 문학 작품의 의미나 가치에 대해 내린 비판적 판단을
잘못된 것이라 주장했다. 또 다른 논문에서 그들은 그 오류를 ‘시와 그 기원 사이의 혼
동, [즉] 발생론적 오류(the Genetic Fallacy)1의 특별한 사례’라 기술했다. 그들은 그에 반해
‘작가의 설계나 의도는 문학예술 작품의 성공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가용하지도 바람직하
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p.177-2| 비록 [윔샛과 비어즐리의] 논문이 지대한 관심을 자아냈고, 계속하여 토


론과 논쟁의 주제가 되고 있지만, 그 입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비평가는 시인
이 아니라 시에 집중해야 한다는 견해는 1946년 이전에도 종종 단언되어왔다. 시인이자
비평가인 T. S. 엘리엇(T. S. Eliot)은 그의 유명한 에세이 「전통과 개인의 재능」(1919)에서
‘정직한 비평과 예민한 감상은 시인이 아닌 시로 향한다’고 주장했다.2 비평가 C. S. 루이
스(C. S. Lewis)와 E. M. W. 틸리야드(E. M. W. Tillyard)는 『개인적 이단』(1939)3에서 비슷한
문제로 토론하였고,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1891)에서 불
가피한 역설의 정황 중에 ‘예술을 드러내고 예술가를 숨기는 것이 예술의 목표’라 썼다.4

|p.177-3| 하지만 윔샛과 비어즐리[의 논문에]는 심금을 울리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다. 논문은 신선하며, 논쟁적이고, 강한 논조로 주장되어, 이내 1940년대와 1950년대 북
미에서 발전한 신비평(the New Criticism)의 이론적 초석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논문은] 단
순히 의도[라기보다] 그 이상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 목표 대상은 ‘성실성(sincerity)’, ‘충실
성(fidelity)’, ‘자발성(spontaneity)’, ‘진정성(authenticity)’, ‘진실성(genuineness)’, ‘독창성

* 단행본, 소설, 희곡 제명은 겹낫표(『』), 논문, 시의 경우 홑낫표(「」)를 사용하였다.


제명은 국역 출판물이나 논문의 번역 사례를 최대한 참고하여 번역하였다.
** 각주와 제명 제외, 원문의 이탤릭체는 궁서체를 사용하여 표기하였다.
*** 원문의 미주를 번역 과정에서 각주로 대체하였고, 역주와 원주의 구분을 밝혀 적었다.

1
발생론적 오류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타당성 및 논리 순서의 문제와 기원 및 시간적
순서의 문제를 혼동하는 오류.” Collins English Dictionary, s.v. “Genetic Fallacy.”
2
인용된 문장으로 시작되는 문단에서 엘리엇은 “이전까지 쓰인 모든 시의 살아있는 총체로서의
시”라는 개념 제시를 통해, 몰개성 시론(the Impersonal theory of poetry)을 소개하고, 이어 “성숙한
시”의 요건이 “더 정교하게 완성된 매개체”로의 기능임을 지적하여 시인, 그의 개성, 감성보다
‘시’, 그 기술적 완성도 등에 중점을 두어야함을 역설하고 있다. T. S. Eliot, ‘Tradition and the
Individual Talent.’, Perspecta 19 (1982), p. 39.”
3
단행본 후면 표지의 내용에 따르면, “루이스는 작가 자신의 개성과 전기는 글쓰기에 전혀 영향
을 끼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반면, 틸리야드는 반대로 작가의 상상력과 개인의 이야기가 작품
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남긴다고 주장한다.” C. S. Lewis and E. M. W. Tillyard, The Personal Heresy;
a Controverse, (1965).
4
인용문은 소설의 서문에서 발췌한 것으로, ‘불가피한 역설의 정황’은 서문에 쓰인 문자 그대로
‘역설’적인 문장들과, 그 역설을 통해 유미주의자로 알려진 와일드의 관점에서 불필요하게 여겨
지던 예술 논쟁들, 이를테면 사실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 예술의 도구적, 도덕적 가치 등의 논
쟁 등의 정황을 동시에 지칭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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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ality)’5 등의 연관된 관념 모음과 함께 (원 논문에서 수차례 등장하는 개념으로서의)


특정 낭만주의였다. 여기에는 비평 양식 간의 충돌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문학 개
념 구상들, [다시 말해] 문학을 개인적 표현의 수단으로 보는 낭만주의적 개념 구상과, 문
학을 순수한 언어적 예술 요소로, [즉] 윔샛의 표현을 빌면 ‘언어적 도상(verbal icon)’으로
여기는 모더니즘 개념 구상 간의 충돌이 있었다.

|p.177-4| 윔샛과 비어즐리 같은 반의도주의자들과 의도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은


비평가와 철학자들 모두에 의해 계속되며, 그 어느 때보다도 미묘하고 복잡해졌지만, 수
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언어철학(philosophy of language), 화행이론(speech act
theory), 심리철학(philosophy of mind) 6 이 거론되고,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예시들이 각 측에
서 언급되고, ‘저자의 죽음(the death of the author)’의 강령을 포함하여 구조주의와 후기구조
주의에 초점을 맞춘 광범위한 비판적 논쟁으로 인해 더욱 진창에 빠지게 되었다.

반의도주의자의 주장The anti-intentionalist case


|p.178-1| 비평의 의도주의에 반대하는 주장에는 많은 갈래가 있는데, 일부는 원
논문인 「의도주의의 오류」에서, 일부는 윔샛과 비어즐리가 이후에 각각 쓴 글에서, 일
부는 다른 독립적인 출처에서 나타난다. 비어즐리는 가장 현저하게는 『미학: 비평 철학
의 문제들 』 (1958), 『 비평의 가능성 』 (1970), 그리고 『 미학적 관점 』 (1982)에 수록된
「 의도와 해석: 되살아난 오류 」[를 통해] 여러 차례 이 주제로 돌아왔다. 윔샛의 가장
주목할 만한 재평가는 데이비드 몰리나(David Newton-de Molina)가 편집한 영향력 있는 문
집 『문학적 의도에 대하여』(1976)에 수록된 「기원: 오류 재고」이다.

|p.178-2| 다음은 반의도주의의 몇몇 주요 구성 테제이다.

1. 의도는 ‘가용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p.178-3| 작가의 의도를 비평가가 가용할(available) 수 없다는 주장은 사실에 대한


주장처럼 보이며, 바람직하지(desirable) 않다는 주장은 규범이나 원칙에 대한 주장처럼 보
인다. ‘문예 작품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의 의도에 호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원
칙은 특히 비판적 판단을 위해 적정한 종류의 증거에 대한 비평 개념 구상에 기초한다.
그에 대하여는 아래에 논의할 것이다. 의도의 가용성은 다르게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과
연 때때로 그들 작품과 독립적인 작가의 생각 또는 의도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 없
기도 하다. (호메로스나 잠언의 저자들을 생각해보라.) 그러나 때로는 저자가 자의식적으
로 그들의 의도를 기록하기도 하고 (엘리엇은 시 『황무지』에 대해 메모를 남겼고, W. B.
예이츠(W. B. Yeats)는 그 자신의 시적 상징주의(poetic symbolism)에 대해 논하였으며), 현존

5
원 논문에서 윔샛과 비어즐리는 상기 관념들을 “의도주의 학파의 비밀번호”의 예시로 나열하며,
마치 “‘표현(expression)’이 항상 미학적 소통을 의미”하는 것 같이 위의 모호한 관념들이 “분석
의 용어”와 “더 정확한 가치철학적(axiological) 용어”로 동일시되는 편이 낫다고 주장하고 있다.
K. Wimsatt and M. C. Beardsley, ‘The Intentional Fallacy’, The Sewanee Review 54, no. 3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46), p. 476.
6
언어철학, 심리철학의 경우, X의 철학(Philosophy of X)이라는 철학의 하위 분야 수준에서 그 광의
적 의미를 짐작 가능하다. 화행론(speech act theory)은 언어행위이론, 화행이론이라고도 불리며,
문학비평용어사전에 따르면, “언어란 무엇인가보다는 언어는 무엇을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언
어학의 한 유파”이다. 문학비평용어사전, s.v. “화행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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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저자들은 언제든 그들이 무엇을 의도하였는지 질문받을 수 있다. [의도의] 가용성에


대한 반의도주의자들의 주장은 한갓 사실의 문제보다 더 깊이 [논의되어야] 한다.

|p.178-4| 첫째, 의도에 대한 독립적 접근 부족이 해석에 극복할 수 없는 장벽이


되지 않는 어떤 경우가 참이라면, 원리적으로 그러한 독립적 접근에 대한 호소가 비평을
위해 필요하지는 않다. 물론, 그것이 [즉, 독립적 접근에 대한 호소가] 어떤 경우에 있어
유용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함의하지는 않는다. 둘째로, 모든 경우, 심지어 협조적이며
현존하는 작가의 경우라도, 작품을 탄생시킨 작가의 미세한 정신적 상태는 작품 탄생 이
후에는 접근할 수 없다고 [반의도주의자들은] 주장할 수 있다. 윔샛은 ‘작품 바깥의 [영
역]에서 예술가가 의도하거나 의미하는 정신에 가장 근접한 것은 여전히 작품 내에서 자
체적으로 드러나는 실질적인 의도나 작용하는 심리만큼에 미치지는 못할 것’이라고 적었
다.7

|p.179-1| 반의도주의자가 의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윔샛


과 비어즐리는 작가의 ‘설계하는 지성’이 ‘시의 원인’일 수 있음을 선뜻 인정하며, 단지
그것이 시를 판단하기 위한 기준이 되는 것을 부정할 뿐이다. 또한 그들은 작품에 실현
된 의도를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반의도주의자들에 따르면, 만일 의도가 작품에 실현
되었을 경우 이를 [굳이] 작가와 상의할 필요가 없으며,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다면 의도
는 작품 자체와 관련 있다할 수 없다.

2. 의도는 평가를 위한 기준이 아니다.

|p.179-2| 「 의도주의의 오류 」 에서 윔샛과 비어즐리는 평가에서의 작가 의도의


역할과 해석에서의 그 역할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 윔샛은 「기원: 오류 재고」에서
가치에 대한 의도와 의미에 대한 의도에 관련된 다양한 종류의 주장이 추가될 수 있음을
보이며 그 구분을 명확히 하려 노력했다. 가치를 먼저 살펴보자. 예술가가 작품을 만든
유일한 목적이 돈을 벌거나 명성을 얻는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그 의도가 생산된 작품의
가치에 영향을 미치겠는가? 반의도주의자는 그렇지 않을 것 [다시 말해, 작품의 가치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며 작품은 그 자체의 가치(merits)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
장한다. 그리고 명백하게도 걸작을 만들려던 작가의 의도가 걸작이 만들어진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작품이 작가가 성취하길 목표했던 바를 ([이를 테면] 아마도 정서적 반응의
표현을) 완전히 포착한 작품이 있다고 한들, 작품 자체에 대한 독립적 평가의 여지는 여
전히 존재한다. 이 부분에서 반의도주의자들은 예술적 성공이 성공적인 표현에 있다고
주장한 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나 R. G. 콜링우드(R. G. Collingwood)와 같
은 낭만주의적 표현주의자들(the Romantic expressivist)과 충돌한다. 반의도주의자는 능숙하
게 실행된 살인이 살인자의 상상력을 입증할 수 있지만, 후자는 그 행위 자체의 도덕적
가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p.179-3| 마지막으로, 의도주의자는 의도가 문학적 가치와 관련 있어 보이는 또


다른 종류의 경우로, 패러디(parody) 또는 풍자(lampoon)의 의도를 제안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윌리엄 맥고나걸(William McGonagall)의 끔찍한 졸시(doggerel) 「테이교 참사」 8 가

7
[원주1] W. K. Wimsatt, ‘Genesis: A Fallacy Revisited’, in David Newton-de Molina (ed.), On literary
Intention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1976), p. 136.
8
세계 최악의 시인으로 종종 일컬어지는 맥고나걸은 부족한 어휘량, 시적 은유, 상징, 운율에 대
한 몰이해 등 다양한 방면에서 최악으로 평가받곤 한다. 인용된 시는 그의 대표작으로 1879년
의 실제 참사를 소재 삼아 1880년에 발표되었다. 졸시(doggerel)는 일부 작가들이 풍자 등의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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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적 시를 패러디한 것이라는, 다시 말해 고의로 형편없고 과장되게 의도된 것이라 알


려지면, 이 작품은 재치 있고 즐거운 작품으로 재평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작품이
어떻게 의도되었는지를 알아야만 비로소 작품을 평가할 수 있다는 주장일 것이다. 이러
한 사례들은 패러디적 특질이 독립적 의도에 전적으로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
에서 스스로 드러날 것임을 틀림없이 주장할 반의도주의자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이
다.

3. 의도는 문학 해석을 위한 기준이 아니다.

|p.179-4| 반의도주의자 주장의 초점은 대개 평가보다는 의미에 맞춰져 있다. 비평


가의 일은 작품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며, 반의도주의자에게 그 의미는 작가 심리가 아
닌 순수 언어적, 역사적, 광범위한 문화적 자원을 통해 복원 가능한 것이다. 그 근저에는
의미의 본성뿐만 아니라 문학의 본성에 대한 심오한 문제도 있다. 비록 몇몇 의미의 경
우에, 예를 들면 대화적 의미처럼, 무엇이 화자의 의중에 있는지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
라는 것이 입증될 수 있다고 해도, 문학적 의미 그 자체가 이런 방식의 심리학적인 것으
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p.180-1| 비어즐리는 문학적 의미에 대한 동일성(identity) 논제를 진술하며, ‘문학


적 작품이 의미하는 바는 작가가 작품을 만들 시에 의미하는 바와 동일하다’는 것을 부
정한다. 9 첫째로 마치 인쇄기의 오류가 문장의 의미를 바꿀 때의 사례처럼 ‘저자의 의미
가 빠진 원문상의 의미’가 있음을 주장한다. 둘째, ‘텍스트의 의미는 작가 사후에 변할 수
있으며’, [이러한] 비어즐리의 주장은 마크 아켄사이드(Mark Akenside)의 1744년 시 「상상
의 즐거움」의 한 구절인 ‘그가 나긋한(plastic) 팔을 들어 올렸네’의 예로 뒷받침된다. ‘플
라스틱’이라는 단어는 현재 그 단어가 쓰였던 때에 가질 수 없었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새로운 의미가 시에 유효하든 아니든, 예시는 텍스트의 의미가 의도된 의미와 항상
동일하지는 않음을 보여준다. 셋째로 ‘텍스트는 저자가 의식하지 못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의미는 무의식적일 수도 있고, 함축된 의미가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다.

|p.180-2| ‘텍스트적 의미’와 ‘저자의 의미’의 구분은 철학자 H. P. 그라이스(H. P.


Grice)가 언어철학에 도입한 ‘문장 의미(sentence meaning)’와 ‘화자 의미(speaker’s meaning)’
(때로는 ‘발화자의 의미(utterer’s meaning)’) 사이 구분의 일례이다. 그 구분은 빈정거림
(sarcasm)의 사례를 통해 간단히 설명된다. 누군가 값비싼 화병을 넘어뜨린 맥락에서 ‘영
리하군’이라는 문장을 내뱉음으로써, 화자는 ‘어리석군’을 의미[하는 발화를] 할 수 있다.
이에 ‘똑똑하다’의 의미 중에 하나가 ‘멍청하다’임이 뒤따르지는 않는데, 단어는 고유의
의미론적 의미를 유지하지만, 화자는 반대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
히 문장 의미와 화자 의미를 구분하는 것이 반의도주의 주장을 수립하지는 않는다. 문장
의미(또는 텍스트적 의미)만이 문학적 해석에 관련성이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는 추가적
논증이 필요하다. ‘문학 작품이 의미하는 것’으로부터 ‘텍스트적 의미’로 이행하는 비어즐
리의 주장에는 중대한 실수가 있다. 후자는 작가가 의도한 의미와는 잘 구별될 수도 있

도로 우스꽝스럽게 작시한 경우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맥고나걸의 작품의 경우는 문자 그대로


형편없는 졸시에 해당한다. 200편이 넘게 다작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결 같았던 그의 기량과 주변
의 시선과 혹평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는 그의 생전 기록으로 인해, 그가 패러디의 의도를 가
지고 작품 활동을 했다고 보기는 힘드나, 역설적이게도 그런 그의 일관성과 성격을 근거로 혹
자는 음모론 격으로 맥고나걸이 의도적으로 졸시들을 창작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9
[원주2] Monroe C. Beardsley, The Possibility of Criticism (Detroit: Wayne State University Press, 1970),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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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이것이 문학 작품이 의미하는 바는 곧 텍스트적 의미와 같다고 결론 지어주지는


않는다.

|p.180-3| 반의도주의자들은 사적 의도에 궁극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소위 의미


의 험프티 덤프티(Humpty-Dumpty) 이론으로 빠지게 된다고 주장하는데, [이 이론은] 루이
스 캐럴(Lewis Carroll)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한 험프티 덤프
티]가 ‘당신에게 영광이 있다’라고 말할 때, 실은 ‘당신을 논쟁에서 완전히 이겼다’를 의
미한다고 주장한 데서 유래하였다. [인물] 험프티 덤프티[의 주장]에 반박하자면, 의도만으
로 의미를 결정할 수 없는데, [의미는] 공적으로 받아들여진 언어적 관습에 크게 의존해
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습에 대한 지식을 통한 의미의 회수 가능성(retrievability)은
반의도주의자 주장의 핵심이다. 물론, 의도주의자들이 관습의 역할을 인정할 수도 있지만,
‘영리하군’의 발화가 ‘어리석군’을 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화자가 의도한 것에 부분적으로
의존해야만 한다고 여전히 주장한다. 문제는 빈정거림(풍자)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일어
나는지 그 자체가 대단히 관습화되어 있다는 사실로 인해 복잡하다.

|p.180-4| 텍스트가 언어적 변화 또는 눈에 띄지 않은 함의를 통해 저자가 인식하


지 못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비어즐리의 주장은 해석의 지침으로서 저자의 오류 가능
성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원칙적으로 반의도주의자는 저자 본인의 해석을 텍스
트적 정당화를 요구하는 해석들 중에 하나 정도로 간주한다. 저자의 자체적 독해를 비평
가들이 직접적으로 부정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윔샛은 ‘체홉(Chekhov)의 작품 『갈매기』
와 『벚꽃동산』을 희극으로 만들고 싶었던 (편지를 통해 드러난) 그의 욕망’을 예로 든
다. 윔샛이 말하길, 이는 ‘좌절될 운명으로 … 스타니슬랍스키(Stanislavsky)의 성공적이고
잘 정립된 비극으로서의 작품 해석으로 끝날 뿐이었다.’ 10 반의도주의자에게 있어 저자의
전기적 사실이 하나의 해석을 지칭할 지라도, 그 해석의 적정성은 반드시 작품 자체와
관련하여 확립되어야 한다. 이는 [곧] 해석을 위한 증거의 종류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
킨다.

4. 시의 의미에 대한 ‘외적’ 증거의 부적정성

|p.181-1| 적어도 윔샛과 비어즐리에게 있어 반의도주의의 기저를 이루는 것은 비


판적 관행의 개념 구상이다. 엘리엇의 시 「 프루프록의 사랑노래 」 속에 존 던(John
Donne)에 대한 인유(allusion)가 있는지에 대해 논의하는 「의도주의의 오류」 마지막 단
락에서 윔샛과 비어즐리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접근 방식을 기술한다. 11 [바로] ‘참되고
객관적 비평 방식’인 ‘시적 분석과 주해(exegesis)’ 그리고 ‘전기적 혹은 발생적 연구 방식’

10
[원주3] Wimsatt, ‘Genesis: A Fallacy Revisited’, p. 131. / 체홉은 『갈매기』와 『벚꽃동산』이 비극
으로 연출되는 것에 대단히 불만이 많아서 그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스타니슬랍스키가 그의
작품을 망쳤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시대의 쇠락은 감상주의자들을 위한 최고의 주제”로 왕왕
간주되지만, 체홉에게 있어 작품 『벚꽃동산』의 “구 질서의 쇠락”과 이로 인한 “귀족 가문의
사회적 무용성”등은 전혀 비극의 소재가 아니었고, 그는 “심지어 일 부분은 소극(farce)”이길 의
도했다고도 전해진다. Jacqueline E. M. Latham, ‘“The Cherry Orchard” as Comedy’, Educational Theatre
Journal, Vol. 10, No.1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58), p. 21-2.
11
원논문에서 윔샛과 비어즐리는 엘리엇의 시구 중 “나는 인어가 노래하는 것을 들었네, 서로가
서로에게(I have heard the mermaids singing, each to each,)”라는 시구에서 “내게 인어들 노래를 듣게
알려주오(Teach me to heare Mermaides singing,)”라는 던의 시구와의 유사성을 느낄 수 있다는 예시
를 시작으로 과연 엘리엇이 던의 시에 대해 인유한 것인지, 이를 따지는 것이 유의미한지를 논
하고 있다. Wimsatt and Beardsley, ‘The Intentional Fallacy’, p. 48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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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양자 간] 차이는 작품의 의미에 대한 주장의 근거로 무엇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에 있다.

|p.181-2| 반의도주의자들에게 있어 가장 유의미한 일부 증거는 작품 ‘내적’인 것


으로, ‘이는 의미론과 통사론(syntax)을 통해, 관행적 언어 지식을 통해, 문법과 사전 그리
고 사전의 출처가 되는 모든 문헌을 통해, 일반적으로 개개 언어와 문화를 형성하는 모
든 것들을 통해 발견된다.’ 대조적으로 일부 증거는 ‘외적’이다. 이는 ‘사적이거나 개성적
인 것, 언어적 사실로서의 작업 일부가 아닌 것’이며, ‘이를 테면, 저널 또는 편지 또는
보도된 대화’에서 비롯된다. 그 다음으로 ‘중간적 종류의 증거’가 있는데, ‘작가의 개성에
대한 것, 또는 작가나 작가가 속한 집단(a coterie)에 의해 단어나 주제에 붙여진 사적이거
나 반(半)사적(semiprivate)인 의미에 관한 것’이다.

|p.181-3| 윔샛과 비어즐리는 이러한 증거의 종류들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존재


하지 않음을 인정하며, 이를테면 작가의 고유한 개성적(idiosyncratic) 의미가 언어에 흡수
됨으로 세 번째 [중간적] 범주에서 첫번째 [내적] 범주로 이동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
들의 요점은 단지 적용되는 방법론적 원칙으로서 ‘내적’ 증거가 다른 두 종류의 증거를
넘어서는 지위를 갖게끔 하는 것이다. (종종 그래왔듯) 반의도주의자들에게 무엇이 작품
(또는 텍스트) ‘안’에 있고 또 ‘바깥’에 있는지 선명히 구분해야 한다고 비난하는 것 또한
합리적이지는 않다. 결국, 작품의 의미에 대한 ‘내적’ 증거가 언어 전체, 대부분의 문헌,
그리고 ‘언어와 문화를 형성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한다면, ‘안’과 ‘바깥’의 구분은 상당히
미약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심리적이거나 ‘사적’ 본성에 해당하는 좁게 정의된 ‘외적’ 증
거의 부류를 거부하는 데에 전념하는 반의도주의[의 논지 또는 입장]을 약화시키지는 않
는다. 반의도주의가 작품으로부터 저자[나 저자에 관한 것]으로 추론을 끌어낼 수 없음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비평가들이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전기를 들여보지 않을 지라도, 전
기 작가들은 그들의 주제를 밝히기 위해 적정하게 작품을 바라볼 수 있다.

|p.182-1| 시적 인유는 종종 반의도주의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황


무지』의 ‘달콤한 테임즈여, 부드러이 흘러라 내가 노래를 마칠 때까지’라는 구절이 스펜
서(Edmund Spenser)의 「결혼축가」를 인유한다 말하는 것은 (비어즐리의 「의도와 해석:
되살아난 오류」의 예시) 엘리엇이 이러한 연결을 의도했음을 암시한다. 12 엘리엇이 스펜
서의 시를 알고 존경했다는 증거는 그 인유에 찬성하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엘리엇이
스펜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증거는 그에 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유와 의
도의 관계는 치열하게 논쟁되고 있다. 의도된 인유는 실패할 수 없는가? ‘상호 텍스트성
(intertextuality)’이라는 더 넓은 구조에 기반하여, 작가가 알지 못한 인유가 발생할 수도
있지 않은가? 작가의 인유와 작품의 인유 사이의 구분이 없지 않은가? 「의도주의의 오
류」에서 윔샛과 비어즐리는 엘리엇이 그의 인유를 상술한 『황무지』에 대한 메모의 중
요도에 대해 상세히 논한다. 윔샛과 비어즐리는 단순한 의도주의를 지지하는 것과는 별
개로 사례가 복잡하고, 메모가 ‘작품의 다른 부분과 같이 판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2
‘달콤한 테임즈여, 부드러이 흘러라 내가 노래를 마칠 때까지(Sweet Thames, run softly till I end my
song)’의 시구는 스펜서의 연작 소네트에서 각 스탠자의 마지막 행마다 반복되어 나타난다. 위
시구를 직접적으로 차용한 엘리엇의 사례를 제외하고도 ‘달콤한 테임즈’를 오마주하거나 암시
한 사례들은 영미권 작품에서 다수 포착된다. 비어즐리, 라마르크가 펼치고 있는 논증과 별개로
엘리엇은 스펜서의 작품을 인유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Michael Whitwort, ‘‘Sweet Thames’ and
The Waste Land’s Allusions’, Essays in Criticism, Vol.48 (1998)
6
2022 T2 W4 10. 10. (Mon) 공연예술비평론 공연예술학전공 석사과정 한준희
Peter Lamarque, “The Intentional Fallacy”

5. 작가를 극적 화자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p.182-2| 반의도주의의 중심 신조는 시가 인간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곳에서도 ‘시


의 생각과 태도를 즉각 극적 화자에게 귀속시켜야하고, 만약 작가에게 한다면, 단지 전기
적인 추론 행위에 의해서만 그리 해야 한다’는 것이다. 13 시적 분석으로 보조된, 시의 극
적 화자가 느끼거나 생각한 바에 대한 주장과 ‘외적 증거’로 보조된, 실제 작가가 느끼거
나 생각한 바에 대한 주장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반의도주의자들에 따르면, 양자 간의 이
행은 문예 비평의 일부가 아니다. 비어즐리는 철학자 J. L. 오스틴(J. L. Austin)의 화행이론
을 가져와 언표내적 행위(illocutionary act) 14 의 수행과 (이를 테면, 진술, 질문, 지시) 언표
내적 행위의 재현을 구분짓는다. 그는 (「의도와 해석」에서) 서정시가 재현이지 수행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가 영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
을 때:

[England hath need of thee:] she is a fen


Of stagnant waters: altar, sword, and pen,
Fireside, the heroic wealth of hall and bower,
Have forfeited their ancient English dower
Of inward happiness. [We are selfish men;]
[영국은 그대가 필요하다.] 그녀는 늪
침체된 물의. 제단, 칼, 그리고 펜,
난롯가, 전당과 방의 영웅적 부귀는
박탈당했네 그들 선조의 상속을
마음의 행복이라는. [우리는 이기적인 자들]15

비어즐리의 관점에서, 우리는 워즈워스가 ‘영국을 비난하는 언표내적 행위를 재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워즈워스의 1802년 영국에 대한 실제 감정이 어떻든, 비평가는 시
에 표현된 감정에 집중해야 하고, 그 [감정]들을 시적 화자의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6. 문학 작품은 자족하는 언어적 실체이다.

|p.182-3| 반의도주의는 종종 문학 작품의 특정 개념 구상과 관련이 있다. 비어즐


리는 ‘문학 작품은 그 특질이 [작품의] 해석과 판단의 확인에 있어 결정적인 성질을 가지
는 자족적인 실체(self-sufficient entity)’라는 자율성(autonomy)의 원칙을 상정한다. 16 이러한
성질들은 본질적으로 언어적인 것이지, 심리적인 것이 아니다. 윔샛과 비어즐리는 시가
‘탄생 시에 작가로부터 분리되어 그것에 대해 의도하거나 통제하려는 작가의 힘을 넘어
서 세상으로 퍼져간다’고 확언한다. 공적 영역 내에서 시는 ‘내적 증거’의 자원을 통해서
완전히 설명되는 ‘언어적 도상’이다. 이는 비평 이론이 어떻게 존재론 (즉, 작품의 존재

13
[원주4] W. K. Wimsatt and M. C. Beardsley, ‘The Intentional Fallacy’, in Newton-de Molina (ed.), On
Literary Intention, p. 2.
14
발화수반 행위라고도 번역되는 언표내적 행위는 오스틴에 의한 개념으로 사전적 정의는 다음
과 같다: “화자가 특정 단어들을 발화함으로써 수행되는 행위, 이를테면 약속이나 협박. 언표내
적 행위는 진술, 거절, 질문 등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말함으로써 행해지는 언어적 행위이다.”
Collins English Dictionary, s.v. “Illocutionary Acts.”
15
[역주] 인용된 시구는 2행부터 6행까지에 해당하며, 당대의 문제 상황을 제기하는 내용은 이탈
리아 소네트 형식의 첫 8행(octave) 공식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 3, 4행에 쓰인 환유, 제유 등의
원관념을 밝혀 의역하기보다, 사전적 의미를 따라 직역하였다. William Wordsworth, “London, 1802”
in Poems, in Two Volumes (1807).
16
[원주5] Beardsley, Possibility of Criticism, p.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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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Lamarque, “The Intentional Fallacy”

양태) 이론과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분명한 예이다.

7. 강한 반의도주의와 ‘저자의 죽음’

|p.183-1| 반의도주의는 ‘저자의 죽음’(롤랑 바르트(Roland Barthe)의 1968년 도발적


선언)을 수반하지 않지만, 후자는 전자를 수반한다. 실로 후기구조주의자들 사상의 많은
갈래는 강한 반의도주의를 수반한다. 바르트의 견해는 ‘글쓰기란 모든 목소리, 모든 기원
의 파괴’라는 복잡한 ‘글쓰기’(écriture) 이론에 기초하고 있다. 그 견해는 문학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글쓰기를 아우른다. 쓰인 텍스트는 어떠한 확정적인 의미도
갖지 못하고, 저자 의도의 제한 영향 하에 있지 않으며, 텍스트는 ‘그 어느 것도 독창적
이지 않은 다양한 저술물들이 뒤섞이고 충돌하는 다차원적 공간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오직 언어 그 자체와 다른 텍스트들만이 해석의 적정한 근거로 간주될 수 있는 윔샛과
비어즐리의 ‘내적 증거’ 개념과 얼마간의 연결성을 보일 수 있다. 만약 각 텍스트가 오직
(‘기원’에 기반하지 않는)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면, 최종 결과
는 바르트가 ‘기의(the signified)의 무한한 유예(또는 미확정)(deferment)’이라 부르는 것이
어야 한다. 이는 독자에게 새로운 창의적 자유를 제공할 뿐 아니라, 비평을 ‘상호텍스트
성’, 즉 텍스트들의 병치에 기반하게끔, 그리고 작가 기반의 심리학과 전기에서 벗어나게
끔 장려한다. 하지만 윔샛과 비어즐리의 반의도주의는 바르트의 것과 동일하지는 않은데,
전자는 문학을 일상적 담론과 떼어 두는 특징적 종류의 ‘자율성’에 기반해 전적으로 문
학 작품에 적용시키는 것인 반면, 후자는 모든 텍스트들에 대해 일률적으로 다루는 것
[이기 때문]이다.

|p.183-2| 다른 후기구조주의자들의 신조들도 역시 작가를 의미의 원천으로 두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일례는 바로 고정된 ‘자아(self)’ 또는 ‘주체(subject)’의 관념에
대한 (주로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자크 라캉(Jacques Lacan), 그리고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와 같은 이론가들과 연관된) 공격이다. 이 관점에서의 자아란 의미의 원
천과 마찬가지인 하나의 산물(a product)로, 다양한 담론들이 밝혀낸다기보다는 부여하는
정체성들의 구성이다. 만일 일원적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적 의도 또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의도주의의 오류의 강령은 언어 또는 자아에 대한 이러한 강한 테제들에
전념하지는 않는다.

의도주의자의 응답The intentionalist response


|p.183-3| 적어도 ‘시적 분석’이 전기적 비평보다는 우선할 정도로, ‘의도주의의 오
류’ 발간 이후 다양한 강점을 가지는 반의도주의는 한 세대의 비평가들에게 불문의 규범
이 되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언제든 이론적인 문제들이 제기될 때면, 의도주의에 대한
방어가 반의도주의의 방어보다 수적으로 우세하곤 하였는데, 이는 이 주제에 대한 가장
저명한 두 개의 문집인 몰리나의 문집(1976)과 개리 아이스밍어(Gary Iseminger)의 『의도
와 해석』(1992)에 명백히 나타난다.

|p.184-1| 이하와 같은 몇몇 특징적인 의도 찬성적인 주장들이 있다.

A. 의도는 사적이고 접근 불가한 것이 아니다.

|p.184-2| 길버트 라일(Gilbert Ryle)의 『마음의 개념』(1949)과 루드비히 비트겐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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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Lamarque, “The Intentional Fallacy”

타인의 『철학적 탐구』(1953) 출간 이후, 데카르트에 의해 집대성된, 정신 생활의 막연


한 사적 영역을 상정하는, 육체-정신 이원론에 대해 철학자들은 점점 더 회의적이 되었
다. 더 선호하게 된 견해에 따르면, 누군가의 생각, 욕망, 의도를 설명한다는 것은 그 개
인만이 직접 접근 가능한 신비한 내적 세계를 짐작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사회적 상
호작용과 관찰 가능한 반응들에 대하여 복합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의도는 공적으
로 접근 가능한 영역의 일부가 되었고, 문학 작품들은 다른 어떤 현시적 행위들과 마찬
가지로 의도의 좋은 지표로 간주되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러한 정신의 개념 구상은 의
도의 불가용성에 대한 반의도주의자들의 주장(상기 (1)의 내용 참조)을 약화시키지만, 그
개념 구상 스스로가 반의도주의 그 자체를 논박하지는 않는데, 증거의 종류에 대한 주장
(상기 (4)의 내용)과 텍스트의 자율성(상기 (6)의 내용)에 대하여서는 영항을 끼치지 못하
기 때문이다.

B. 의미와 의도의 불가분성

|p.184-3| 의도주의는 언어철학의 발달 뿐 아니라 심리철학으로부터도 지지를 받


았다. 언어에 대한 두 가지 철학적 견해, 그라이스의 ‘비자연적 의미’ 이론 17 과 오스틴과
J. R. 서얼(J. R. Searle)의 화행론이 의미와 의도의 연결에 대해 주창한다. 전자에 의하면,
모든 언어적 의미는 궁극적으로 의도의 측면에서 설명 가능해야 하며, 후자에 따르면, 의
도는 개인적인 화행(예를 들어 약속, 주장, 또는 질문하는 것) 분석에 있어 필수적 역할
을 한다. 하지만, 이 이론들이 의미의 설명에 있어 의도의 언급을 더 받아들일 만하도록
만들지라도, 그 자체로 문예 비평의 의도에 대한 논쟁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그 논쟁의
핵심은 의미론적 의미나 (역사적, 문학적 자원에 의해 보강된) 관습적 의미가 문학 해석
의 토대로 충분한지에 관한 질문이다. 그라이스의 문장 의미와 화자 의미의 구분(상기 (3)
의 내용)은 그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 못하는데, 해석이 전자를 겨냥한 것인지 후자를 겨
냥한 것인지에 대해 확립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작가는 화행을 수행하는 것
이 아니라, 단지 화행 수행을 재현할 뿐이라는 비어즐리[의 주장](상기 (5)의 내용)이 옳
다면, 화행의 의도적 본성은 다시 결정적이지 않은 것이 된다.

|p.184-4| 비평가 E. D. 허쉬(E. D. Hirsch)의 『해석의 타당성』(1967)은 의도주의에


대한 가장 체계적인 방어를 제공하며, 충분성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윔샛과 비어즐리
에 정면으로 반하는 그의 견해는 ‘텍스트는 [곧] 그 저자가 의미한 바를 의미한다’는 것
이다. 그의 주장은 의미의 확정성(determinacy), 그리고 텍스트가 의미할 수 있는 것과 의
미하는 것 사이의 차이에 기초한다. ‘거의 모든 단어 배열은 의미의 관습 하에 하나의 의
미 복합체 이상을 적법하게 나타낼 수 있다. 단어 배열은 누군가가 그에 의해 무언가를
의미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특정 의미도 없다.’ 그는 이하와 같이 이어간다.

A determinate verbal meaning requires a determining will. Meaning is not made determinate
simply by virtue of its being represented by a determinate sequence of words. ... [U]nless one
particular complex of meaning is willed ... there would be no distinction between what an author

17
그라이스가 규정한 비자연적 의미(non-natural meaning)는 기호내용과 인과 관계를 맺는 기호가
자연적으로 기호내용을 의미하게 되는 자연적 의미와 구분되는 개념으로, “본질적으로 언제나
특정한 행위자가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표현수단을 이용하여 특정한 상대방으로 하여금 뭔가
를 이해하도록 의도하는 경우에 존재”하며, 비자연적 의미의 기호는 “의미주체가 아니라 의사
소통의 수단”이기에, 라마르크의 진술처럼 궁극적으로 그 의미는 의도에 달려있다 간주할 수
있다. 박성철, ‘‘비자연적의미’의 의미-그라이스의 의사소통행위 이론과 화용언어학적 기초 논
의.’, 독일어문학 10, no.1 (2002), p. 4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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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Lamarque, “The Intentional Fallacy”

does mean by a word sequence and what he could mean by it. Determinacy of meaning requires
an act of will.
확정적인 언어 의미는 확정적 의지를 필요로 한다. 의미는 단순히 단어의 결정된
배열에 의해 표현된 상태에 의하여 확정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 … 하나의 특정한
의미 복합체로 의도되지 않는다면 … 단어 배열로 저자가 무엇을 의미하였는지와
그것을 통해 무엇을 의미할 수 있었는지의 구분은 있을 수 없다. 의미의 확정성은
의지의 행동을 필요로 한다.

허쉬는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의도될 때 확정적 의미가 모호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의미와 의의(significance)의 구분을 주장하는데, 후자에 대하여 밀턴(John Milton)이
‘부지불식간에 악마의 편’이라는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잘 알려진 비평적 주장의 예
시를 들어 설명하며, [블레이크의 주장은 작품] 『실낙원』의 의미의 일부가 아니라 밀턴
의 성격과 관련된 의의라 주장한다.18

|p.185-1| 그러나 반의도주의자들은 허쉬의 전제들 중 몇 가지에 대해, 특히 개별


작품마다 ‘특정적이고 자기동일적이며 변하지 않는 의미의 복합체’가 있다는 전제[에 대
해], 예를 들어 비어즐리는 작품의 의미는 변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상기 (3)의 내용),
그리고 의지의 행동 없이 확정적 의미가 있을 수 없다는 전제[에 대하여서도] 역시 이의
를 제기할 수 있다. 윔샛과 비어즐리는 텍스트적 의미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확정성을 얻
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바르트와 후기구조주의자들은 확정적 의미의 관념 그 자체
에 대해 회의한다.

|p.185-2| 더 급진적 형태의 의도주의는 비평가 스티븐 냅(Steven Knapp)과 월터 벤


마이클스(Walter Benn Michaels)의 『이론에 반대하여』(1985)에 의해 옹호되었다. 그들은
‘의도없는 의미’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허쉬가 ‘의도가 존재하기 이전 해석의 순간’, 즉
(텍스트가 의미할 수 있는) 일련의 의미들이 (텍스트가 의미하는 바를 생성하기 위해) 작
가의 의지의 행동을 기다리는 순간을 상상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 주장한다. 냅과 마이
클스는 일련의 단어들조차도 언어의 문장으로 간주되며, 필시 이미 의도를 가진 행위 주
체자에 의해 생성되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이 의미론적 의미 또는 언어의 의
미에 대한 관념을 어느 정도로 거부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어떤 공유된 언어적 관습
에 의존하지 않고도 어떻게 화자가 (의도 그 이상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었을지 알기는
어렵다. 그러한 의존이 없다면, 냅과 마이클스의 의미론은 냅과 마이클스는 험프티 덤프
티의 의미 이론과 진배없을 것이다.

C. 가설 의도주의 대 실제 의도주의

|p.185-3| 최근 철학자들 사이에서 ([특히] 아이스밍어의 『의도와 해석』(1992)에


두드러지게) 허쉬, 냅과 마이클스 같은 작가들의 ‘실제 의도주의’와 ‘가설 의도주의’ 간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철학자 노엘 캐럴(Noël Carroll)은 ‘올바른 텍스트의 해석은 저자의
실제 의도와 양립 가능한 텍스트의 의미’라는 ‘온건한’ 설명의 ‘실제 의도주의’를 옹호하

18
[원주6] 이 문단의 인용문들은 모두 이하에서 발췌하였다: E. D. Hirsch jun., Validity in Interpretation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67), pp. 1, 4, 46-7, 63. / 허쉬가 밀턴의 예시를 제시하기 이전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의의(significance)는 항상 ‘무엇에 대해 의미하는 것(meaning-to)’이지 결코
‘무엇 속에 의미하는 것(meaning-in)’이 아니다. 의의는 항상 누군가의 언어적 의미 속에 있는
것과 그 바깥에 있는 것 사이의 관계를 수반하는데, 이 관계는 작가 그 자신 또는 그의 주제와
관련하여서도 적용된다.” Ibid. 6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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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 이러한 옹호는 독자들이 문학 작품에 ‘대화의 흥미’를 가지고 있어 저자가 소통하
고자 하는 바를 꽤 적절하게 이해하도록 시도[한다는 주장]을 근거로 한다. ‘가설 의도주
의자들’ 특히 철학자 윌리엄 톨허스트(William E. Tolhurst)와 제럴드 레빈슨(Jerrold Levinson)
은 문학적 의미를 화자나 발화자의 의미(상기 (3)의 내용)가 아니라 ‘의도된 해석자로서
우리의 입장에서 작가의 의도된 의미에 관해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적절한 정보들의 투
영’이라는 의미에서 ‘발화 의미(utterance meaning)’에 연관시킴으로써 캐럴의 온건한 입장
에도 이의를 제기한다.19 다시 말해, 비평가의 과업은 ‘작품의 내적 구조와 창작에 관련된
주변 맥락’에 대해 충분히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의도된 관객 중 이상적 구성원의 관점에
서 작가의 의도를 가정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렇게 가정된 의도는 실제 의
도와 일치할 것이지만, 꼭 그러할 필요는 없는데, ‘만약 우리가 … 가용한 전체 텍스트적
증거와 맥락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받는 예술가로서 작가의 작품의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
으면서, 더 영리하거나 더 주목할 만하거나 더 상상력이 풍부한 작품을 만든 것으로 작
가를 이해할 수 있다면, 아마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20 가설 의도주의는
의도주의와 반의도주의 사이의 절충안으로 제시되어 양측의 중요한 특징들을 포함시킨다.
작가의 의도가 하는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문학 작품을 일상적 담화와 구별되는 소통의
형태로 보고 있으며, 해석에 있어 전기보다 비판적 가설의 우선순위를 강조한다.

D. 피할 수 없는 작가와의 연관성

|p.186-1| 의도주의자들은 종종 문학 작품이 아무리 ‘자율적’ 언어 구조로 보이더


라도, 그리고 얼마나 바람직하든 혹은 그렇지 않든, ‘암시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실제 작
가의 존재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부면에 있어 제거 불가능한 것이라 주장할 것이
다. 때때로 작가의 ‘범주적(categorical)’ 의도와 그의 ‘의미론적’ 의도가 구분 지어지곤 한
다. 후자는 문장 또는 작품-전반적 수준에서의 텍스트적 의미에 관한 것으로, 의도주의의
오류 논쟁의 상당 부분이 이에 집중되어 있다. 전자는 엄밀하게 의도를 의미하지는 않지
만, 텍스트가 속한 그 범주와 연관되어 있다.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작가의 의미론적 의
도는 (언어학적 오용이나 서투른 표현을 통해) 실패하거나 텍스트적 의미를 충분하게 결
정하지 못할 수 있는 반면, 작품이 어떤 종류인가를 결정하는 보다 기본적인 범주적 의
도는 확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작품이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시인지 일기장의 항목인지는
작가의 범주적 의도에 의해 결정되며, 이러한 의도는 의도주의자에 따르자면 해석이 진
행되기에 앞서 반드시 알려져야만 한다. 아마도 맥고나걸의 예시(상기 (2)의 내용)의 경
우 범주적 의도의 예시로 다뤄져야 할 것이다. 이론의 소지가 있으나 우리는 판단하기에
앞서 맥고나걸이 그의 시구들을 어떤 범주(진지한 운문, 패러디, 익살)로 의도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p.186-2| 일부 의도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는 작품 속에 보여지


는 특정한 ‘인격적 자질’로부터 작가가 어느 정도까지 거리를 둘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
다. 만약 우리가 작품을 ‘세심한’, ‘지각력 있는’, ‘지적인’, 또는 ‘성숙한’ 것으로 (혹은 ‘겉

19
[원주7] Jerrold Levinson, ‘Intention and Interpretation: A Last Look’, in Gary Iseminger (ed.), Intention and
Interpretation (Philadelphia: Temple University Press, 1992), p. 224.
20
[원주8] Ibid. 225. / 인용된 원문에서 레빈슨은 ‘최고’의 의도 가설은 두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하나는 “인식론적인 ‘최고’”에 해당하는, “이상적 독자 입장의 일원에게 모든 가용한 증거가 주
어진 상태에서, 가장 옳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의 경우가 라마르크가
인용하고 있는 경우, 즉, “비평적 너그러움(charity)의 원칙에 따라서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작품
을 예술적으로 더 나은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해석 수준을 고르는” 경우에 해당한다. Ibid.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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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 부리는’, ‘유별난’, ‘감상적인’과 같이 부정적으로) 묘사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자질을


필연적으로 글 자체 뿐 아니라 작가에게 귀속시키지 않는가? 반의도주의자들은 그러한
인격적 자질이 실제 작가와 동일하다 볼 수 없는 ‘극적 화자’나 ‘통제하는 지성’에게 부
여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작가가 필경 그가 가지고 있지 않은 태도를 모방할 수 있고, 실
재로는 부재함에도 성실성이나 헌신 같은 표현력을 가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
품에 대한 것이라 알려진 판단으로부터 작가를 얼마나 멀리 떼어 놓을 수 있을 지는 한
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평가 F. R. 리비스(F. R. Leavis)는 『위대한 전통』(1962)에서
조지 엘리엇(George Eliot)의 작품 『플로스 강변의 물방앗간』 속 매기 툴리버라는 인물
묘사에서 부족함을 발견하는데, ‘조지 엘리엇의 매기에 대한 예감(presentiment)에는 자기-
이상화의 요소 … 그리고 자기-연민의 요소가 있다. 매기를 통해 표현된 자신의 미성숙
함에 대한 조지 엘리엇의 태도는 성숙한 태도와는 정반대의 것이다.’ 21 여기서 리비스는
작품의 특징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저자에 대한 비판을 끌어낸다. 반의도주의자들은 틀림
없이 그러한 추론을 거부하겠지만, 그런 판단이 만약 [사실적으로] 옳은 것이라면 어째서
[작품으로부터 저자에 대해 추론해내는] 그런 방식이 저자 반영을 실패할지를 이해하기
는 힘들다. 철학자 콜린 리아스(Colin Lyas)는 다른 종류의 예를 사용하는데, ‘만약 우리가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가 『닥터 지바고』의 통제하는 지성이 표현하는 종류의 태
도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이 『수용수 군도』에서의 태도
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발견한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22

|p.187-1| 특히 작품의 ‘인격적 자질’에 대해서는, 우리는 의도 자체로부터 떨어져


있다. 그러나 의도주의의 오류에 대한 논쟁은 항상 문예 비평에서 작가의 역할에 대한
더 폭넓은 문제들로 확산되어 왔다. 윔샛과 비어즐리가 전기적 비평 또는 심리적 비평
종류들을 쫓아내긴 하였지만, 그들이 작가에 대한 비평가의 당연한 아니 어쩌면 필연적
인 관심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한 듯하다.

21
[원주9] F. R. Leavis, The Great Tradition (Harmondsworth: Penguin, 1962), p. 54. / 조지 엘리엇의 작품
들은 대체로 전형적인 ‘신데렐라식’ 서사를 보이는데, 작품 속 여성 중심 인물은 대개 작가의
분신인 것으로 간주되곤 한다.
22
[원주10] Collin Lyas, ‘The Relevance of the Author’s Sincerity’, in Peter Lamarque (ed.), Philosophy and
Fiction: Essays in Literary Aesthetics (Aberdeen: Aberdeen University Press, 1983), p. 33. / 파스테르나크
와 솔제니친 모두 자전적 체험에서 기반하여 각 작품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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