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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국제 문화 교류와 콘텐츠의 현대적 활용 방안-3
최치원의 국제 문화 교류와 콘텐츠의 현대적 활용 방안-3
한 정 호(경남대학교 교수)
1. 들머리
2. 최치원 한시 속의 인물
3. 최치원의 인간관계와 문화교류
1) 문사:학제・학문적 교류 체험
2) 관료:행정・외교적 교류 체험
3) 승려:이념・사상적 교류 체험
4) 우인 또는 기타 인물:인륜・사회적 교류 체험
4. 마무리
1. 들머리
2. 최치원 한시 속의 인물
구분 대상 인물 한시 제목 창작 시기 비 고
오만 수재의 석별 시에 답하다
876년 율수현위
(酬吳巒秀才惜別 二絶句)
오만(吳巒)
강남 가는 진사 오만을 보내며
881년 고변 종사관
(送進士吳巒歸江南)
진사 전인의에게
875년 낙양 유람 때
(成名後酬進士田仁義見贈)
전인의(田仁義)
낙양의 벗에게
875년 낙양 유람 때 전인의(?)
(留贈洛中友人)
수재 양섬에게
876년 율수현위
(酬楊贍秀才送別)
양섬(楊贍)
문사 진사 양섬의 송별시에 답하다
884년 귀국 무렵
(酬進士楊贍送別)
진사 장교가 병중에 보낸 시에 화답하며
장교(張喬) 880년 고변 종사관
(和張進士喬村居病中見寄)
신축년에 진사 오첨에게
오첨(吳瞻) 881년 고변 종사관
(辛丑年寄進士吳瞻)
시어사 고운에 화답하여 중양절에 국화를
읊다 884년 귀국 무렵
(和顧雲侍御重陽詠菊)
고운(顧雲)
늦은 봄날에 시를 지어 사신으로 간 벗
고운에게 화답하다 884년 귀국 직후
(暮春即事 和顧雲友使)
1) 문사:학제・학문적 교류 체험
2) 관료:행정・외교적 교류 체험
1.
해마다 유원(儒苑)에는 가시덤불 우거지고 年年荊棘侵儒苑
여기저기 전장(戰場)에는 연기와 흙먼지 자욱하네. 處處烟塵滿戰場
오늘 아침 선부(宣父)를 만나고서 豈料今朝覲宣父
문장 접하니 무릇 안목이 열리고 넓혀지네. 豁開凡眼睹文章
2.
난리 때라 모든 일이 슬프기만 하여 亂時無事不悲傷
난조(鸞鳥)와 봉황(鳳凰)도 놀라 서울을 떠나가네. 鸞鳳驚飛出帝鄕
기수(沂水)에 목욕하던 제자 생각나 應念浴沂諸弟子
봄이 오면 한결같이 이별의 슬픔을 녹이네. 每逢春色耿離腸
3.
강 건널 때에 도와주길 바라더니 濟川終望拯湮沈
훌륭한 글을 보고 속된 마음 씻었네. 喜捧淸詞浣俗襟
안타깝게 읊으며 저 바다로 돌아가니 唯恨吟歸滄海去
깊은 은혜 갚지 못해 눈물만 흘리네. 泣珠何計報恩深
- 「양주에 피난 중인 좌주 상서의 시에 화답하며
(奉和座主尙書避難過維陽寵示 絶句三首)」
3) 승려:이념・사상적 교류 체험
4) 우인(友人) 또는 기타 인물:인륜・사회적 교류 체험
이 시에서 가리키는 “고향 친구”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밝혀낼 수 없다. 하지만 최치원과
같은 시대에 당나라 들어가 과거에 급제하고 시로써 이름을 날렸던 인물로는 박인범
(朴仁範)을 들 수 있다. 만약 그 벗이 박인범이라 가정한다면, 이 시는 883년에 지은
작품이다. 아무튼 최치원은 당나라 산양(山陽)에서 고향의 벗을 만나 “초산(楚山)의 봄”을
즐겼다. “타향에서 고향 사람 만나기”는 참으로 어려운데, 다시금 그 벗과 작별하는 것에
대해 슬퍼하고 있다.
4. 마무리
【도 움 글】
1. 기본자료
∙ 최치원, 허경진 옮김, 고운 최치원 시선, 평민사, 1989.
∙ 최치원, 김진영・안영훈 옮김, 고운 최치원 시집, 민속원, 1997.
∙ 최치원, 김수영 편역, 최치원 선집-새벽에 홀로 깨어, 돌베개, 2008.
∙ 최치원, 이상현 옮김, 고운집, 한국고전번역원, 2009.
∙ 최치원, 최광식・최영성 역주, 고운최치원선생문집(상, 하), 고운국제교류사업회, 2016.
∙ 최치원, 최영성 옮김, 최치원 전집 2 고운문집. 아세아문화사, 1998.
∙ 임영주・송성안・한정호 엮음, 최치원이 읊은 시의 향기, 마산문화원, 2015.
2. 참고자료
∙ 고운국제교류사업회, 고운 최치원의 시문학, 문사철, 2011.
∙ 구본기, 「최치원의 시세계」, 한국한시작가연구 1집, 태학사, 1995.
∙ 김동준, 「귀국기 최치원 한시의 자부(自負)와 장심(壯心)에 대하여」, 진단학보
112호, 2011.
∙ 김복순, 「최치원의 해외체험과 문화수용」, 한국문화연구 10집, 2006.
∙ 김은미, 「최치원의 삶과 시적 대응」, 한국문학논충 제67집, 한국문학회, 2014. 8.
∙ 김인종과 여럿, 고운 최치원, 민음사, 1989.
∙ 김중렬, 「나・당 문인의 교류시 연구」, 동양고전연구 제6집, 1996.
노 성 미(경남대학교 교수)
Ⅰ. 머리말
Ⅱ. 작품 개관 및 유람의 특징
Ⅲ. 유람록에 형상된 최치원문화경관
1. 홍류동의 명문(銘文)
2. 해인사의 진상전과 학사대
Ⅳ. 마무리
Ⅰ. 머리말
Ⅱ. 작품 개관 및 유람의 특징
10) 여조겸이 편찬한 『와유록』을 허균(1569~1618)이 구한 이후, 조선시대에는 이 이름으로 기행문 선집이 많이 편찬되었다. 조선중
기 이후 김종직(1431-1492)의 『유두류록』, 홍백창(1702-1742)의 『동유실기』 등과 같이 하나의 산을 유람한 기록이 단행본으
로 편집되어 널리 읽혔고, 홍인우(1515-1554)의 『관동일록』과 성해응(1760-1839)의 『동국명산기』 등은 산과 명승에 관한
인문지리서의 성격을 지닌다. 또 『와유록』이나 정원림(1731-1800)의 『동국산수기』와 같은 유산기 선집까지 출판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종묵, 「조선시대 와유문화(臥遊文化) 연구」, 『진단학보』 98, 진단학회, 2004, 참조.
11) 죽헌 위계창(1861-1943)이 「가야산기」를 쓰면서 미수 허 목(1595-1682)의 「가야산기」를 그대로 베낀 것이나, 농곡 김명
범(1730-1808)이 「가야산유록기」의 말미에 “유람록을 기록하는 문장에 대해서는 벗 노자능이 크게 선창하고 내가 이어 가다듬었
다. 뒷사람들이 보면 반드시 소금강의 선유록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한 것 등을 볼 때 유람에는 유람록이라는 과제가 따라 다녔
던 것으로 보인다.
12) 우응순(2006), p.428
13) 유산기 창작의 1차적 배경은 여말선초 사대부들의 의식과 대자연관에 있다. 또 세종대부터 진행된 팔도지리지의 편찬,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인문지리지의 편찬이 유산기 성립이라는 당대의 사회 문화사적 흐름을 주도했다. 이에 대해서는
이혜순・정하영 외 공저, 『조선중기의 유산기 문학』, 집문당, 1997, pp.14-27, 참고.
14) 정우락, 「조선중기 강안지역의 문학 활동과 그 성격-낙동강 중류지역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시론」, 『한국학논집』 40, 계명
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0, 참고.
○홍류동, 무릉교
1400 가야산해인사조현당기(김일손,1490)
△치원대, 독서당
15) 『와유록 목록』은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1868-1943)가 조선시대 기행문 선집인 『와유록(臥遊錄)』의 목록을 따로 필사한
책이다. 이들 관계에 대해서는 이종묵, 「조선시대 와유문화(臥遊文化) 연구」, 『진단학보』 98, 2004, 참고.
16) 유람에 동참한 김대유, 송구보, 이호원, 송시숙, 하응기 등을 차례로 만나는 과정, 조현당 기문을 부탁한 나발화상과 나눈
대화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7) 이것은 청량산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유산기인 주세붕(1495-1554)의 「유청량산록」이 창량산 유산과 유산문학의 전범을 만든
것과 같은 현상이다. 김일손과 정구의 가야산 유람록은 후배 선비들의 가야산 유람을 촉진하는데 그치지 않고 유람록을
창작하게 하는 추진체가 되었다고 본다.
18) 이덕무는 1779년(39세)에 규장각 초대 검서관으로 발탁되었다. 정조의 신임을 받아 1781년 내각검서관, 사도시주부, 사근
도찰방, 광흥창주부, 적성현감 등을 거쳐 1791년 사옹원주부가 되었다. 그가 가야산을 유람했을 당시 해인사의 접빈 형태를
보면 당시 그의 정치적 위상을 알 수 있다.
19)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참고
가야산을 유람하는 사람은 최치원의 은둔처를 순례한다는 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그들은
경관을 마주대하고 최치원의 은둔에 대한 각자의 논평을 드러내고 있다. 최치원이 불가에
의탁한 것을 이단의 가르침에 빠진 것으로 비난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세속을 벗어난
초월로 인식20)하고 있다. 그래서 가야산은 신선과 범인이 사는 영역으로서 골자기 밖의
속세와 구분되는 별천지로 해석된다. 이것은 최치원의 가야산 은둔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20) 이구의(2013)는 한시 속에 나타난 가야산의 형상을 초탈, 교유, 명승, 도학의 장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그 중에서 탈속(脫俗)
의 장으로서의 가야산을 다룬 것이 가장 많다고 했다. 이는 최치원의 은둔을 세속적 명리를 초월한 삶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러기에 시적 자아는 가야산에서 현실의 고단함에 속박된 자신을 돌아보면서 최치원을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21) 이시선은 1685년에 「유속리산기」, 1686년에 관동(關東)의 금강산, 백두산, 묘향산, 구월산을 유람하고 「관동록」을 짓고
1696년 72세의 나이에 가야산을 유람하고 「유가야산기」를 지었다. 그는 만년에 가야산을 유람함으로써 일생의 소회를 다
해소한 것으로 생각했다.
22) 이러한 태도는 조선 후기 여성들의 가야산 기행가사에도 나타난다. <가야희인곡>의 “최고운애 노든자최 홍유동이 여기로다
무러보자 홍류동아 고금일을 뉘알리요/ 고은선생 어대가고 비인정자 날앗든고 신선대여 가신후에 언제다시 오셧든야/ 나도
여기 왓드락고 부대함개 일너다오”에서 작가는 최치원의 종신을 선화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홍류동을 최치원과 소통하는
장소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최치원문화경관으로서의 가야산이 일반적인 인식이었음을 말한다. 여성의
가야산 기행가사에 대해서는 최은숙, 「가야산 기행가사의 작품 양상과 표현방식」, 『온지논총』 41, 2014, 참고.
23) “다전(茶田)에 이르러 참찬(參贊) 면우 곽종석을 찾아보았다. 면우는 치포관을 하고 건을 쓰지 않았다. 일어나 읍을 하며,
“병이 나서 예를 차리지 못합니다.”라고 말하였다. 내가 “선생님은 무슨 병입니까?”라고 하자 “어찌할 수 없는 병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생님은 시절의 흐름에 병이 걸린 것입니까?”라고 하며 학문의 세태에 대해 나눈 두 사람의 대화체 형식으로
구성된 독특한 유람록이다.
24) 유척기의 「유가야산기」(1712)에 보면 승려에게 부탁하여 불상을 모시는 진상전 안의 기둥에까지 이름을 새긴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선비들이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데 얼마나 집착했는지 알 수 있는 단적인 예라 하겠다.
1. 홍류동의 명문(銘文)
무릉교(武陵橋) 학사대(學士臺)
26) “천석 사이에는 홍류동, 취적봉, 광풍뢰, 음풍대, 완재암, 분옥폭, 낙화담, 첩석대, 회선암이 있다. 골짜기에 나오면 무릉교와
칠성대가 있으니 모두 학사의 큰 글씨를 돌에 새기었다.”
27) “골짜기 가운데에는 최고운의 시를 돌에 새긴 것이 있는데 물결에 마모되어 지금 다시 확인할 수 없으나, 우암 송시열이
골짜기의 절벽에 옮겨 새긴 것은 규룡이 날아오르며 발로 움켜잡는 듯하다.”
28) “일찍이 들으니 우암 송시열 선생이 최치원의 시구인 ‘짐짓 흐르는 물로 하여금 산을 에워싸게 하네’를 써서 바위 면에
새겼다고 하였는데, 이끼가 글자를 덮어 찾을 수가 없다.”
29) 종현, 『보장천추 비밀의 계곡』(해인사출판부, 2015), p.56에 보면, 지관 스님이 당시 우암의 시석을 탁본하고 찍은 사진이
있다. 현재와 비교하면 돌의 오른쪽 상판 귀퉁이가 잘려나간 것을 알 수 있다. ‘朴壽祖朴○○’의 ‘○○’이 탈락되었다. 그리고
시석의 오른쪽에 바위의 상층부 한 단이 굴러 떨어졌거나 하여 없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30) 종현(2015)에서 ‘이증원’이라 한 ‘增(증)’은 ‘堛(벽)’을 잘못 읽은 것으로 보인다.
34) “법당 서쪽에는 진상전이 있다. 전 안에는 법당처럼 비로 등 세 불상을 모셨다. 금탑 두 개가 좌우에 서 있는데 왼쪽 것은
20층이고 오른쪽 것은 33층이다. 부처상 뒤에는 하얀 비단으로 짜서 만든 천불상을 걸어 놓았다. 불상 한 좌의 몸체는
길이가 한 치 정도이고, 몇 천 년을 이어 내려왔으나 아직도 마모되지 않았다.”
38) 최치원이 학사대 옆에 회화나무를 심은 것은 회화나무가 중국에서 학자수(學者樹)로 여겨지는 것과 관련하여 생각해볼 수
있다. 대의 이름을 학사대라 하고 학자수로 대의 뒤를 숲으로 만들었으니 그의 해인사 은둔기도 여전히 학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39) 김도수는 1727년 9월 경양(景陽)의 관직을 그만 두고 12일 유람을 나섰다. 남원, 하동, 진주, 합천을 거쳐 21일 가야산
홍류동에 도착했으며 22일 해인사 법당 구경을 했다. 「남유기」는 12일에 길을 떠나 10월 5일에 한강, 숭례문을 지나 집에
도착하기까지의 23일간의 여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또 유람을 마치고 돌아온 7일 만인 10월 11일에 삼각산 신왕사
에서 유람록을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여정과 견문 내용이 어느 유람록보다 상세하다.
40) 현재 천연기념물 제541호로 지정된 해인사 학사대의 나무는 소나무가 아니라 전나무이다. 전나무는 소나무과에 속하는
상록침엽교목인데, 이 전나무를 소나무로 부른 것 같다.
Ⅳ. 마무리
41) “바위 중간에는 수 십 발이나 되는 구멍이 남북으로 뚫려 있어 정상 봉우리로 가는 길이 되었다. 그 안에는 바위샘이 있는데,
매우 맑아서 어떤 사람은 마시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씻기도 하였다. 위에 축축이 젖은 곳에 방울진 물이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 같았다. 두 방울을 손으로 잡고 발로 버티며 다시 한 층을 올라가니 금잔디가 평평하게 펼쳐져 있어서 수 십 사람이 앉을
수 있었다. 우비정에서 개구리가 떠다니다 펄쩍 뛰었다. 해채(薤菜)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고운 최치원이 심은 것이라 하였다.”
(김문호, 「남유가야산기」, 1872)
42) “고개를 오르고 절벽을 넘어 우두봉에 올랐는데, 이것이 가장 높은 봉우리다. 꼭대기에 우물이 있는데 모양이 소의 코와
비슷하다. 아래에 굴이 있는데 고운 최치원이 노닐다가 명명한 곳이라 한다.”(송병선, 「가야산기」, 1872)
43) “일주문 위에는 석천 임억령이 지은 오언절구가 있어서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문 밖에는 돌을 깎아 빙 돌아
가게 하여 유상곡수(流觴曲水)를 만들었는데 이것도 또한 최치원의 자취라고 한다.(허돈, 「유가야산기」, 1625)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