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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양세시기

洌陽歲時記

경도잡지 97
해제
1.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의 서지사항

󰡔열양세시기󰡕는 조선 순조 때 김매순(金邁淳)이 열양(洌陽), 곧 한양(漢陽)의


연중행사를 기록한 책이다. 1책 필사본으로, 또는 󰡔대산초고(臺山草藁)󰡕로 전해
온 것을 1911년 광문회(光文會)에서 󰡔동국세시기󰡕, 󰡔경도잡지󰡕와 합본하여 활자
본으로 간행하였다. 1월에서 12월까지 1년 동안의 행사와 풍속을 21항목으로 분
류하여 기술한 내용으로, 주로 서울의 풍속을 다루었는데 󰡔동국세시기󰡕와 같이
연원(淵源)을 주로 중국 풍속에서 찾았다. 책 끝에 저자의 발문(跋文)이 있고
윤직(尹稷)이 교열하였다고 적었다.
소장처별로 고려대본, 연세대본, 그리고 국립민속박물관본이 있는데, 광문회본은
고려대본을 모본으로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두 본 모두 빠진 부분들이
많고 또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열양세시기는 특히 다른 두 세시기에 비해 빠
진 부분에 대한 인식 없이 그동안 인용되어 온 점을 감안하면 이를 새로 보완하
는 작업의 의의가 매우 큼을 알 수 있다.

□ 저자 : 金邁淳(1776~1840)

열양세시기 99
□ 작성년도 : 1819년
□ 소장처 : 연세대 도서관, 고려대 도서관, 국립민속박물관
□ 판본, 수량, 크기 : (연세대본) 筆寫本, 10卷 5冊 중 7卷, 13.8×16.9cm
(고려대본) 筆寫本, 1冊, 13.8×16.9cm
□ 주요 내용
대산(臺山) 김매순(金邁淳)의 시문집(詩文集)으로는 그가 죽은 후 39년 만에
아들 나주목사 선근(善根) 등이 편집하고 문인인 김상현(金尙鉉) 등이 정정(訂
定)하여 1879년에 활인, 간행한 󰡔대산집(臺山集)󰡕이 있고 간행을 보지 못한
󰡔대산초고(臺山草藁)󰡕 10권이 있다. 전자는 서울대 규장각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후자는 연세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중 권 7의 내용이 󰡔열
양세시기󰡕다. 대산이 초고를 작성하기는 순조 19년, 즉 1819년이다.

□ 책의 구성
10권(卷) 5책(冊)에는 옥당고사(玉堂故事),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궐여산
필 보(闕餘散筆 補), 지괴집(識愧集), 희렵집(喜獵集) 및 기타 시문(詩文)으
로 구성되어 있다. 불분권(不分卷) 4책의 내용은 보장(報狀), 완문(完文), 절목
(節目), 장계(狀啓), 감결(甘結), 전령(傳令) 등 대산(臺山)이 외관(外官)에
나아갔을 때 작성된 공안(公案)들이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의 구성은 경
도잡지나 동국세시기와 마찬가지로 월별로 하였고 맨 앞에 병서(幷序)를 넣었다.
이 책은 다른 두 세시기(󰡔동국세시기󰡕와 󰡔경도잡지󰡕)에 비해 국내 학자의 문헌
이 많이 소개되고 있으며, 특히 안동 김씨 집안 선조들의 문적을 적극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 인용된 중국 세시기 등 관련 문헌은 다음과 같다.

金堉 「羸羌」
金昌協 시
金昌翕 「新歲詩」
唐韋巨 󰡔食譜󰡕
申靖夏 시

100 조선대세시기 Ⅲ
楊萬里 「上元」 시
呂滎公 󰡔歲時雜記󰡕
呂祖謙 「祭式」
兪漢雋 「元日雜詩」
陸放翁 󰡔歲首詩󰡕
陸放翁 󰡔重五󰡕
李秉淵 시
車天輅 시
󰡔東醫寶鑑󰡕
󰡔樂府󰡕
󰡔名物󰡕
󰡔白香山集󰡕
󰡔四民月令󰡕
󰡔譯語類解󰡕
󰡔禮記󰡕
󰡔五禮儀󰡕
󰡔周禮󰡕 「夏官」
󰡔周禮󰡕 「酏食」
󰡔天寶遺事󰡕
󰡔漢志󰡕
󰡔後漢書󰡕 「禮儀志」

2. 󰡔열양세시기󰡕 와 저자 김매순(金邁淳)

김매순(金邁淳, 1776~1840)의 호는 대산(臺山)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정조 19년(1795)에 약관의 나이로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사인(舍人) 등을 거쳐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고 정조 임금의
특별한 배려로 6년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러나 31세에 사촌형인 김

열양세시기 101
달순(金達淳)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20여 년을 경기도 양주 미수(渼水)에
서 병거(屛居)하였다. 후에 예조참판, 강화부유수 등을 역임했으며 63세 이후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매진하였다. 문장(文章)으로는 홍석주(洪奭周)
등과 함께 당시 으뜸으로, 여한십대가(麗韓十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고 학문
으로는 한원진(韓元震)의 학설을 지지하는 호론(湖論)에 속했다. 덕행으로도 이
름이 있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열양세시기󰡕가 수록된 󰡔대산초고(臺山草藁)󰡕의 존재에 대한 언급은 대산에게
수학한 김상현이 쓴 󰡔대산집(臺山集)󰡕 발문(跋文)에 나온다. 이와 관련하여 위
와 같은 전거(典據)에 대한 고증과 함께 󰡔유헌집(猶軒集)󰡕 취기권(聚記卷)의
초록(鈔錄)을 보완한 집교(輯校) 작업은 민영규(閔泳珪)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향토서울󰡕(제2호,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58)에 실려 있다.

대산 김매순 안동 김씨 계통도 (󰡔萬姓大同譜(上)󰡕(356~358쪽)

始祖
金宣平――――――――――金璠 ―――――――󰠏󰠏󰠏 生海 󰠏󰠏―――――󰋼
洪傑女 李忱(景明君)女

生海 大孝 系)尙憲 系)光燦 壽增
李忱女 李英賢女 仁祖文衡 同知 - 府使
完山人 廣州人 左相 贈領議政 - 曹漢英女
鄭泰亨女 李義老女 金래女 - 昌寧人
迎日人 星州人 金悌男子 - 壽興(出)
李億正女 延安人 - 壽恒 󰋼
全州人

壽恒 昌集 濟謙 省行 履長 復淳
進壯文壯 進文領相 進文壯承旨 壬寅禍 忠旌 - 泰淳
重領相 耆 忠獻公 忠愍公 竹醉 忠正公 不祧 - 麟淳(出)
文衡 夢窩 宋炳遠女 醉柏軒 洪重衍女 - 頤淳
文忠公 朴世楠女 峻行(出)
不祧 文谷 墓驪州 元行(出)
羅星斗女 達行 履基
墓楊州 李潗女
坦行 履素
蔭南原府使
余樂軒 韓百增女

102 조선대세시기 Ⅲ
昌協 崇謙 元行(系) 履安 鳳淳(系)
進文壯禮判 觀復庵 進士議祭酒 進士議祭酒
文衡 文簡公 朴權女 贊善 文敬公 贊善 三山齋
不祧 農岩 美湖 洪龜祚女 李纘華女
李端相女
履直 麟淳(系)
夭 李慶甲女

昌翕 󰠏󰠏󰠏󰠏󰠏󰠏󰠏󰠏 養謙 󰠏󰠏󰠏󰠏󰠏󰠏󰠏󰠏󰠏󰠏 範行 󰠏󰠏󰠏󰠏󰠏󰠏󰠏󰠏󰠏󰠏 履鉉 達淳


進逸執義 蔭導僉 蔭加平 履鏞 逸淳
進善 文康公 李蓄女 申錫華女 履銈 近淳
三淵 簡行(出) 履鎬 廸淳
李世長女 和行(出) 履瑛 逈淳
致謙(出) 履鏽 󰠏󰠏󰠏󰠏󰠏󰠏󰠏󰠏󰠏 邁淳 󰠏󰠏󰠏 善根(系)
厚謙(出) 文淸公
趙德潤女
昌業 󰠏󰠏󰠏󰠏󰠏󰠏󰠏󰠏 祐謙 󰠏󰠏󰠏󰠏󰠏󰠏󰠏󰠏󰠏󰠏 由行 󰠏󰠏󰠏󰠏󰠏󰠏󰠏󰠏󰠏󰠏 履興
敎官不仕 申潚女 進三陟府使 履寅
老稼齋 曺德周女 李德英女 履翼
李涑女 彦謙 悌行 履大
述耕齋 權성女 文右承旨
自樂軒
李德重女
信謙 亮行 履九
進壯敎官 逸司業刑參
贈祭酒 文敬公 文簡公 止庵
櫓巢 李頤命女 權定性女

昌緝(出)
生師傅賓主
圃蔭 洪處宇女
昌立 󰠏󰠏󰠏󰠏󰠏󰠏󰠏󰠏 厚謙(系) 󰠏󰠏󰠏󰠏󰠏󰠏 簡行(系) 󰠏󰠏󰠏󰠏󰠏󰠏 履錫
十八夭 澤齋 蔭永柔
李敏敍女 李秉成女

열양세시기 103
열양세시기 洌陽歲時記

기 記1)

내가 강촌에서 긴 여름을 보내면서 날을 보낼 거리를 찾지 못하다가 우연히 시


강(侍講) 여대림(呂大臨)2)이 역양(歷陽)에 있을 때 명절을 만나 공부를 쉬고
둘러앉아 술을 마시며 세시풍속의 일들을 잡다하게 적었던 것을 기억하고 흔연히
마음에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윽고 그 뜻을 따라 우리 풍속 중에 보고 들은 것
을 생각나는 대로 차례로 늘어놓으니 80여 가지나 되었다. 비록 우초(虞初)3)나
제해(齊諧)4)와 같이 속되고 자잘한 것이어서 대아(大雅)가 볼 것은 못되며 기이
함을 좋아하는 양자운(楊子雲)5)이 보면 그 내용에 아전이나 미천한 군졸의 이야
기가 없다고 지적될까 걱정되어 쓴 글을 태우고 싶은 마음이 크나 이도 쉽지 않

1) 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앞으로 ‘연대본’이라고 함)은 발(跋)이 기(記)로 맨앞에 위치


하므로, 이에 따랐다.
2) 여대림(呂大臨, 1040~1092)은 중국 송나라 섬서성 사람으로 향약을 만든 남전여씨(藍田
呂氏) 4형제의 한 사람이다.
3) 우초(虞初)는 중국 전한 때 하남 사람으로 속담을 모아 소설을 만들어, 소설이 그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4) 제해(齊諧)는 괴상하고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잘 하는 인물, 또는 책으로 󰡔장자(莊子)󰡕 「
소요유(逍遙㳺)」에 나온다.
5) 양자운(楊子雲)은 중국 전한 때 유학자 양웅(楊雄)으로 자운은 그의 호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 두루 물어 󰡔방언(方言)󰡕이란 책을 만들었다.

열양세시기 105
은 일이다. 두오랑(杜五郞)6)이 “편지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한 것처럼 써
놓고도 묻어버리는 일도 흔할 터인데 굳이 이것을 적어 나의 창피한 면을 알리고
자 한다.
기묘년(1819) 유두일(流頭日)에 열양외사(洌陽外史)가 씀.

江村長夏無以遣日 偶記呂侍講在歷陽時遇節日 休學團坐飮酒雜記歲時風俗


事 欣然有會于心 遂倣其義例 就本國謠俗所見聞者 隨憶輒錄標配銓7)次 得
八十餘事 雖虞初齊諧鄙俚叢瑣 不足以備大雅之觀 使好奇8)如楊子雲者見之
鉛槧之摘或不在計吏衛卒下也 然焚棄筆硯殊大不易 比之杜五郞並書不知所
在亦太多事矣 書此以識吾媿 己卯流頭日洌陽外史書

6) 두오랑(杜五郞)은 중국 후한 때 사람인 두안(杜安)이다.


7)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앞으로 ‘고대본’이라고 함), 연대본, 국립민속박물관 소장본(앞
으로 “민박본”으로 줄임)에는 “銓”이 “詮”으로 되어있으나 여기에서는 광문회본을 따랐다.
8) 고대본(광문회본)에는 “奇”가 “音”으로 되어 있다.

106 조선대세시기 Ⅲ
정월

입춘 立春

입춘 며칠 전에 승정원(承政院)에서는 당하관 시종(侍從)과 초계문신 중 각


대전과 궁에 붙일 춘첩자(春帖子)를 지을 제술인 명단을 임금에게 올리고 대제
학(大提學) 대제학을 차출할 수 없으면 양 관9)의 제학(提學) 에게는 오언율시와 칠언율
시 및 절구(絶句)의 운(韻)을 각기 한 편씩 출제하게 한다.10) 그리고는 과거 시
험처럼 삼하(三下) 이상의 점수를 합하여 입격자를 뽑는데, 분배(分排)의 표지
로 채워 넣은 글머리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를 세어 그 수대로 베껴 제출하게 한
다.11) 춘첩자를 쓸 종이는 길고 넓은 닥종이를 써서 세로로 자른 다음 검정실 무
늬의 큰 테와 위로 연잎, 아래로 연꽃을 새긴 문양판을 찍어 만든다. 각신(閣臣)
은 제학부터 대교(待敎)까지 각자의 뜻에 따라 짓고 각 문체로 써서 올린다. 정
월초하루에 쓰는 연상시(延祥詩)나 단오 때의 단오첩(端午帖)도 이와 같은 방식
을 따른다.
여염과 시전에서도 모두 전지(剪紙)에 ‘입춘(立春)’이라고 써서 기둥과 문 상
방에 붙인다. 혹은 ‘입춘’ 대신 시사(詩詞)를 쓰기도 하는데 새봄을 축하하고 각
오를 새롭게 하는 뜻을 담은 것은 궁전의 춘첩자와 같다.
농가에서는 입춘일에 보리뿌리를 캐어 하루 묵혔다가 그 생긴 것을 보고 한 해
점을 치는데, 세 가닥 이상이면 풍년이고 두 가닥이면 중간으로, 단지 뿌리만 있

9) 양 관이란 홍문관과 예문관을 말한다.


10) 오언시나 칠언시는 글자 수를, 율시나 절구는 구(句)의 수를 따르는 근체시(近體詩)의
분류방식이다.
11) 제술 채점은 전체를 10푼(分)으로 나누는데, 1등인 거수(居首)가 10푼이고 삼하는 1푼
이다.

열양세시기 107
고 가지가 없으면 흉년으로 여긴다.

前立春數日 承政院就堂下侍從抄啓各 殿宮春帖子製述人牌 招大提學 大提


學未差則招兩舘提學 以五七律絶各一篇出䪨12) 科次選入格三下以上計合 用番

數篇首撗勒幾畵分排標識 使之依數寫進 紙用長廣楮注縱截之 每截印烏絲


大欄上作蓮葉下作蓮花 閣臣則自提學至待敎隨意撰各體寫進 元日延祥詩端
午帖放此 閭閻市廛 皆剪紙 寫立春貼之13)柱楣 或代以詩詞 道祝釐之意 如
宮殿春帖子之例 農家以立春日14) 採宿麥根 占歲美惡 三歧以上爲豊 兩歧
爲中熟 單根不歧 則爲歉

원일 元日

좋은 쌀로 가루를 내어 체를 쳐서 고르고 맑은 물에 반죽하여 찐 것을 안반에


놓고 떡메로 오래 친 다음 조금씩 떼어 손으로 비벼 문어발처럼 둥글고 길게 늘
인 모양의 떡을 만드는데, 이것을 권모(拳模)라고 하며 가래떡을 말한다. 미리
준비해 둔 장국이 끓을 때 가래떡을 동전 모양으로 얇게 썰어 넣으면 끈적거리지
도 않고 부서지지도 않아 좋다. 또 여기에 돼지, 소, 꿩, 닭 등의 고기를 넣는다.
섣달그믐 밤중에 집식구 수대로 끓여 한 그릇씩 먹는다. 이것을 떡국[餠湯]이라
고 한다. 여항에서는 어린아이 나이를 물을 때 “여태 떡국 몇 그릇 먹었냐.”고 묻
는다. 내 생각에는 중국 송나라 시인 육방옹(陸放翁)15)이 「세수시(歲首詩)」16)에
서 “밤중에 제사를 지낸 후 박탁(餺飥)을 나누어 먹었다.”고 쓰고 주(註)를 달기
를 시골풍속에는 새해가 되면 반드시 떡국을 먹는다고 하고 이것을 동혼돈(冬餛
飩), 연박탁(年餺飥)이라고 하였는데, 이 떡국을 말하는 것 같다.

12) 䪨은 韵, 韻과 같은 글자이다.
13) 민박본에는 “寫立春大吉四字貼之”로 되어있다.
14) 고대본에서 以立春日을 추가하였다
15) 육방옹(陸放翁)은 중국 송나라 산음(山陰) 사람으로, 이름은 유(游)이며, 방옹은 호다.
보장각(寶章閣)의 대제(待制)를 지냈고 85세를 살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16) 「세수시」는 「세수서사시(歲首書事詩)」로 󰡔검남시고(劒南詩稿)󰡕 권38에 있다.

108 조선대세시기 Ⅲ
중들은 섣달그믐밤 자시가 지나면 인가 문밖을 돌며 큰 소리로 재미(齋米)를
청 한다. 수세(守歲)하느라 모여 앉아 통금이 해제된 것도 모르고 떠들다가 이
소리를 들으면 서로 돌아보며 “벌써 새해가 되었네.”라고 한다. 정조 임금 원년에
중이 도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 이후로 이러한 풍속은 끊어졌지만 지방에
는 간혹 있는 일이다.
대궐 궁전 부근에서 포를 각기 세 번 쏜다. 지방 관아에서는 광대들이 괴뢰의
탈을 쓰고 바라를 울리고 곤봉을 휘두르고 호령을 하면서 무엇을 몰아내는 시늉
을 하며 몇 차례 두루 돌아다니다가 나간다. 대개 악귀를 쫓기 위해 행해 온 나
례(儺禮)의 오랜 풍속이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17)에는 설날과 동짓날에 모두 임금이 어전(御殿)으
로 나와 하례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어 때를 당하면 신하들은 품계를 올려 행사
를 치르려 하지만 그때마다 대개는 임금이 임의로 정지시킨다. 그 이유는 조선왕
조의 법도가 겸손하고 검소한 것을 서로 받들므로 문서로는 예법이 존재함을 밝
혀두지만 실제로는 이를 생략하여 간편하고 꾸밈없음을 쫓으려는 것으로 중국에
서도 한나라나 당나라 이래로 따라오지 못하는 바다.
하루 중 밝고 맑은 때를 골라 의정부 대신이 임금에게 새해 문안드리기 위해
종친과 문무백관 중 2품 이상 신하를 인솔하여 인정전 뜰 품계석 아래 문무를 가
려 순서대로 선다. 승지 1인과 사관 2인이 나아가 각 궁전의 승전중사(承傳中
使)18) 궁의 중사는 승언중사(承言中使)라고 칭한다. 에게 청을 넣으면 중사는 대전에

서 나와 대신 앞에 무릎을 꿇는다. 대신 이하 모두 무릎을 꿇고 대신이 “정조(正


朝)에 문안(問安)드립니다.”라고 구두로 전하면 중사가 일어나고 대신 이하 모두
일어난다. 중사가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에 나와 대신 앞에 무릎을 꿇
으면 대신 이하 모두 무릎을 꿇는다. 중사가 “지도(知道)19)궁의 중사는 지실(知悉)

17) 󰡔국조오례의󰡕는 조선 세종 때 국가의 모든 의례절차를 오례(五禮)인 길례(吉禮), 빈례


(賓禮), 가례(嘉禮), 군례(軍禮), 흉례(凶禮)로 분류하여 제정한 책이다. 세종 때 󰡔경제
육전속전(經濟六典續典)󰡕이 이루어지고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상정되어 후에 󰡔경
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에 들어간다. 그러나 당시에는 완성되지 못하고 세조 때
강희맹(姜希孟)의 손을 거쳐 성종 때인 1474년에 신숙주(申叔舟), 정척(鄭陟) 등이 완
성하였다.
18) 중사(中使)란 대궐 안에서 왕의 명령을 전하는 내시(內侍)를 말한다.

열양세시기 109
이라고 말한다.”라고 구두로 전하면 대신 이하 모두 물러간다. 약방(藥房), 내각(內

閣), 승정원(承政院), 옥당(玉堂)20)의 관원들은 합문(閤門) 앞에서 문안드리는


데, 절차는 위와 같다. 동지 때나 제석 때의 문안도 같은 방식인데, 제석 때는 신
시(申時), 즉 오후 4시경 전후에 행한다. 외관직은 목사 이상의 벼슬만 설과 동
지에 전문(箋文)21)을 올려 하례 드리고 각신(閣臣)을 지낸 사람은 비록 현감(縣
監)으로 있더라도 역시 전문을 올린다. 탄신일에도 이와 같다.
선조(先朝), 즉 정조 임금 때는 매년 설에 친히 만든 권농윤음(勸農綸音)을 8
도 관찰사와 4도(四都)22) 유수(留守)에게 내렸는데, 대개 이것은 동한(東漢)
때 동경에서 입춘날이면 범죄자를 관대(寬大)하게 처리하는 교서를 내렸던 것과
같은 뜻이다.
설날부터 초사흘까지 승정원에서는 각방(各房)의 공사(公事)를 받아들이지 않
고,23) 내외아문(內外衙門)에서도 출근하지 않으며 시전도 문을 닫고 감옥은 비
워놓으며 지체 높은 관리들은 집에 손님을 들이지 않고 명함만 받아둔다. 농암
(農巖)24) 선생 시에 “대문에 놓인 손님 명함 사흘을 머물고 비취색 잔의 도소주
가 소년을 일으킨다.”고 하였다.25) 내 생각에는 󰡔사민월령(四民月令)󰡕에 술을 드리는 순
서는 마땅히 작은 데서 시작된다고 한 것으로 보아 나이 어린 자가 먼저 일어나 술을 받는다는
뜻일 것이다.

남녀노소 모두 새로 만든 의복 한 벌을 입는데, 이것을 설빔[歲庇廕]이라고 한


다. 친척이나 이웃 어른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인사하는 것을 세배(歲拜)라고 한
다. 손님이 오면 술과 음식을 차려 대접하는데, 이것을 세찬(歲饌)이라고 한다.

19) 지도(知道)는 알았다는 뜻으로 임금이 사용하는 말이다.


20) 옥당(玉堂)은 홍문관을 말한다.
21) 전문(箋文)은 한문 문체(文體)의 이름으로. 나라에 길흉(吉凶)이 있을 때 신하가 임금에
게, 그리고 임금이 그 어버이 상왕의 수하(壽賀) 때 써 올리는 4 ․ 6체의 글이다.
22) 4도(四都)란 송도, 수원, 광주, 강화를 말한다.
23) 각방공사(各房公事)란 승정원에서 6조(曹)의 일을 챙겨 임금에게 상주(上奏)하는 임무
를 말하는데, 이를 하지 않으므로, 결국 관리 모두가 정초 3일간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
이 된다.
24) 농암(農巖)은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호로, 저자인 김매순의 고조부 김창흡의
형이다.
25) 시는 󰡔농암집(農巖集)󰡕 권6에 있으며 제목은 원조유회경낙구사구점시아배(元朝有懷京洛
舊事口占示兒輩)다.

110 조선대세시기 Ⅲ
설날 이후 수삼일 동안은 장안의 남녀들은 여유롭게 단장하고 나들이옷을 입고
돌아다니다가 구석진 길에서도 아는 이를 만나면 문득 반갑게 웃으며 “새해엔 크
게 평안하시오.”라고 말하면서 길하고 경사스런 일만 들추며 서로 축하하는데, 예
를 들면 “(올해엔) 아들을 보시오”, “벼슬에 나아가시오”, “병환이 없기를”, “돈
많이 버시오”, 등의 말로 각기 상대방이 바라는 사항으로 문안하는데, 이것을 덕
담(德談)이라고 한다. 돌아가신 나의 고조할아버지가 지은 「신세시(新歲詩)」에
“장안 남녀가 길에서 축하를 나누는데 이날 안색은 양쪽 모두 윤기가 있다.”고 하
였다.26)

好稻米作末細篩 淸水拌勻 蒸27)熟置木板上 用杵爛搗 分作小段 摩轉作餠


體團而長如八梢魚股 名曰拳模 先作醬湯候 沸將餠細切如錢形 投之以不粘
不碎爲佳 或和以豬牛雉鷄等肉 除夕夜半家人計口喫一椀 名曰餠湯 閭巷28)
間問兒小年齒 輒曰 今喫餠湯幾椀 放翁歲首詩云 中夕祭餘分餺29)飥 註 鄕
俗歲日 必用湯餠 謂之冬餛飩 年餺飥 疑卽此物也 僧人候除夕子夜半 到人
家門外高聲請齋米次 守歲者 方襍坐諠譁不覺更闌 聞此聲 則相顧曰 歲已
新矣 先王初元 禁僧尼不得入都城 故此風遂絶 而鄕村間或有之 禁中宮殿
近處 各放砲三響 外邑官府 則優人着傀儡假面 鳴鑼揮 一作楎 棒呵喝 作驅
逐狀 回旋數匝而出 盖侲儺遺法也30) 五禮儀 正朝至日皆 御殿受賀而臨時
禀 旨輒權停盖 本朝家法以謙儉相承著其文以存禮制畧其實以從簡質此漢唐
以來中朝之所不及也 平明議政大臣 率宗親文武百官二品以上 詣仁政殿品
石下成班序立 承旨一員史官二員進去請各殿宮承傳中使 宮則稱承言 中使出
詣大臣前跪 大臣以下皆跪 大臣口告問安 中使起 大臣以下皆起 中使入內
少頃出詣大臣前跪 大臣以下皆跪 中使口傳知道 宮則曰知悉 大臣以下退 藥

26) 저자 김매순의 고조부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이다. 「신세시(新歲詩)」


는 󰡔삼연집(三淵集)󰡕 권1에 있다.
27) 고대본에는 “蒸”이 빠져 있다.
28) 광문회본에는 “巷”이 “閻”으로 되어 있다.
29) 고대본에는 “餺”이 “ ”으로 되어 있는데 바로잡았다. 아래 “年餺飥”의 “餺”도 마찬가지이다.
30) “禁中宮殿近處~盖侲儺遺法也”는 고대본(광문회본)에서 추가하였다.

열양세시기 111
房內閣政院玉堂詣閤門問安如上儀 至日除夕放此 除夕用申時 外官牧使以
上正至日進箋陳賀 閣臣雖縣監亦進箋 誕日放此 先朝每於元朝 下御製勸
農綸音于八道觀察使四都留守 盖東京以立春日下寬大書之意也 自元日至三
日承政院不入各房公事 內外衙門不開坐 市廛閉 囹圄空 公卿家不許輒通門
刺 農巖詩曰朱門賓刺留三日翠勺屠蘇起少年 按四民月令云 進酒次第當從小起以
年少者先起31) 男女老少皆着新套衣服曰歲庇廕 遍謁親戚鄰里長老曰歲拜 客

至設酒食32)餉之曰歲饌 歲後數三日都中士女往來穰穰靚粧袨服交映 阡陌塗


遇所識輒笑嘻嘻 道新歲太平 舉吉慶事以相賀 如添丁進祿除憂病獲錢粮之
類 各視其人所望謂之德談 高祖考新歲詩曰都人33)士女途中賀 是日顔色兩
敷腴

모든 법사에서는 금지 조항을 두고 있는데, 이중 우금(牛禁)34)이 가장 크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해당 기관에서 패를 내어 잡아 조치한다. 그러나 매년 설을
맞이하여 간혹 특지(特旨)로 3일간 패를 깊이 보관하고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숨김없이 소를 잡아 팔 수 있으므로 큰 고기 덩이를 시내 곳곳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저암(著庵) 유한준(兪漢雋)35)의 「원일잡시(元日雜詩)」에 “동
쪽 교외 소는 흥인문으로, 남쪽 교외 소는 숭례문으로, 양쪽 문으로 들어오는 소
가 하루에 천 마리인데 도성 안에 살아남은 소는 한 마리도 없다.”고 하였는데,
속담에 가까운 말이긴 하나 실상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설날부터 보름까지 소년들은 서로 모여 윷놀이를 한다. 이것을 척사(擲柶)라고
부르기도 한다. 보름이 지나면 윷을 거두어 감추는데, 이날 이후로 계속하면 농사
에 해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름을 넘겨 윷놀이를 하면 벼가 죽는다.”라는
속담도 있다. 놀이하는 법은 다음과 같다. 종이에 동그라미 20개를 바깥으로 빙

31) 세주부분은 고대본(광문회본)에서 추가하였다.


32) 고대본에는 “食”이 “肉”으로 되어 있다.
33) 민박본에는 “都中”으로 되어 있다.
34) 우금이란 농우(農牛)를 보호하기 위하여 소를 일체 잡지 못하게 하는 금지법이다.
35)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의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자는 만청(曼淸) 여성(汝成), 호
는 저암(著庵), 창애(蒼厓)다. 문인이자 서예가로 이름 높던 유한지(兪漢芝)의 사촌형으
로 문장뿐 아니라 서화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학자다.

112 조선대세시기 Ⅲ
둘러 그리고 다섯 번째 동그라미마다 안으로 직선으로 동그라미 2개를 그린다.
정 가운데에 동그라미를 하나 그리면 모두 29개다.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동
그라미에는 자호를 표기하는데 첫 번째는 입(入), 두 번째는 공(拱), 세 번째는
열(裂), 네 번째는 출(出)이라고 쓰고 가운데 동그라미는 방(房)이라고 쓴다. 윷
은 둥근 나무토막을 둘로 쪼개 산가지 모양으로 네 개를 만든다. 두 사람이 상대
가 되어 던지는데 엎어지고 잦혀진 상태를 보고 정해진 동그라미 숫자에 따라 말
을 두어 나간다. 모두 엎어지면 모로 다섯 칸을 움직이고, 모두 잦혀지면 윷[柔]
으로 네 칸, 셋이 잦혀지고 하나가 엎어지면 걸로 세 칸, 둘씩 잦혀지고 엎어지면
개로 두 칸, 셋이 엎어지고 하나가 잦혀지면 도로 한 칸을 움직인다. 가야할 칸에
말이 미리 있을 때 적의 말이면 먹고 자기 말이면 합한다. 모나 윷이 나오거나
적의 말을 먹으면 연이어 던진 다음 모두를 합쳐 계산한다. 말을 두는 방식은 오
른쪽에서 돌아 한 바퀴 돌고 나오는데 ‘입이나
’ ‘공’ 위치에 간 말은 꺾어 안으로
빨리 돌 수 있고 ‘입’으로 들어간 말은 ‘방에
’ 이르면 또 왼쪽으로 꺾을 수 있으므
로 가장 빠르다. 그 속도의 차이나 어긋나고 바름이 예측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
은 네 말을 빨리 나오게 하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
여자아이들은 짚을 베개 모양으로 묶어 땅에 놓고 그 위에 널판을 올려놓은 다
음 좌우로 균형을 맞추고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서로 엇갈리며 뛰는데, 몸을 높이
올릴수록 잘한다고 한다. 이것을 널뛰기[跳板戱]라고 한다.
설날 밤에 민속에서는 이강신(羸羌神)이 인가에 들어와 신을 훔치는데, 이를
당한 사람은 재앙이 있다고 하여 집집마다 신을 감추고 아이들에게는 일찍 자고
문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훈계한다. 처음에는 어린아이들을 겁주려는 데서 나온것
같으나 이제는 익숙한 풍속이 되었다. 잠곡 김육(1580~1658)은 1619년 설날에
다음과 같은 「이강(羸羌)」36)이란 제목의 오언고시(五言古詩)를 썼다.

諸法司皆有禁條 而牛禁爲大 有犯者該司出牌拿治 每當正朝 或以特旨限三


日藏牌 則民間公得屠宰肥肉 大胾磊落坊市 兪著庵漢雋元日雜詩曰東郊之

36) 「이강(羸羌)」이란 시는 󰡔잠곡선생유고(潛谷先生遺稿)󰡕 권1에 수록되었다.

열양세시기 113
牛興仁門南郊之牛崇禮門兩門牛入日千頭一入城中無返魂 詞雖近俚 而亦可
謂記實矣 自元日至上元 少年相聚作四木戱 或稱擲柶 過上元則收局藏之謂
不利於稻 諺曰過望擲柶禾稻死 其法畵紙爲圈 二十圈在外圓布 每五圈向內
直布 二圈中置一圈 摠二十九圈 外圈向內處各標字號 第一曰入 第二曰拱
第三曰裂 第四曰出 中一圈命之曰房 剖木爲四枚如环珓狀 兩人對擲 視其
仰俯 計圈置馬而行之 皆俯曰牡行五圈 皆仰曰柔行四圈 三仰一俯曰桀行三
圈 俯仰各二曰開行二圈 三俯一仰曰刀行一圈 先有馬當其圈 敵則食之 己
則合之 得牡柔者食敵馬者連擲合計 凡置馬皆從出右 繞行于外一周而出 値
入拱二圈則折而內差速 由入者値房則又折而左最速矣 遲速奇正不一其端
大要先出四馬者勝 兒女輩束藁如枕形置之地 加板其上 令左右適均 兩人對
立迭跳以竦 身高者爲雋 名曰跳板戱 元日之夜 俗爲羸羌神入人家竊屨 被
竊者有殃 家家取屨藏之 戒兒童早睡無得出門 其初似出於誑嚇小兒 而遂以
成俗 潛谷金相國堉有羸羌詩曰

옥황상제 곁에 작은 귀신 있으니 帝旁有小鬼


그 이름 이강이라 하지 其名曰羸羌
파리한데 날래기는 바늘 같고 瘦削銳如針
형체는 가늘면서 길지 形體細而長
설날 밤 짙은 어둠을 타고 元宵乘暗黑
머리는 풀고 옷소매는 걷은 채 被髮褰衣裳
표연히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飄然自天下
기세는 어찌 그리 양양한지 志氣何揚揚
바람과 비를 수레삼아 달리고 風雲爲駕馭
해와 달이 빛 없는 때를 즐겨 日月喜無光
인간 세상 두루두루 다니는데 周行遍人寰
어느 곳이든 안가는 곳 없지 無處不方洋
구중 궁궐 대문도 밀어젖히는데 尙排九重門
몇 길 높은 담장쯤이야 문제되랴 何有數仞墻

114 조선대세시기 Ⅲ
부호들 집은 훌쩍 넘어 들어오고 乘陵富豪宅
가난한 마을은 걸어서 들어오지 踐踏貧賤鄕
주인 잠들기를 몰래 기다리다 潛伺主人睡
신발 훔치고는 재앙을 내리니 竊履施禍殃
집집마다 모두 두려운 마음으로 家家盡疑懼
대문 걸어 잠그고 신발 깊이 감추지 閉戶深自藏
아이들은 겁이나 감히 밖을 못나가고 兒童不敢出
아녀자들은 서로 놀라 떨고 있으니 婦女相驚惶
맘대로 조화의 권세를 오로지 하고 頗專造化權
삶과 죽음의 그물망 잡을 만하지 能執生死網
예로부터 내려오는 얘기라고 하나 流傳自古昔
그 말 참으로 황당하다 此語誠荒唐
인생에는 정해진 분수가 있어 人生有定分
대명은 하늘에 달려 있는 법인데 大命懸穹蒼
하찮은 한 마리 요괴가 么一麽妖魅
아무리 독한들 어찌 상처 입힐까 雖毒焉能傷
하물며 상제의 밝은 빛이 又況上帝明
아래 세상을 두루 비추시며 照臨下土方
온갖 신들은 각기 자리 지키고 百神守其位
일월성신 밝은 빛 들어내는데 星辰耀精芒
어찌 이런 기괴한 귀신을 받아들여 其容此怪鬼
망령되게 기세를 부리게 하나 妄使氣勢張
단지 생각건대 천도가 멀다보니 但念天道遠
짧은 생각으론 헤아리기 어렵구나 難以寸心量
사악함은 본디 바름을 해치고 邪固害於正
이치도 간혹 법에 어긋나는데 理或反其常
망망한 저 넓은 하늘 속에 茫茫廣莫中
요기가 어찌 창성할 수 없으랴 得無妖氣昌

열양세시기 115
깊이 생각하니 온갖 감회 일어나고 沈思百感生
전혀 맹랑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지 恐亦非孟浪
어찌하면 의천검 큰 칼을 얻어 安得倚天劒
구름 뚫고 그 놈 내장 도려낼까 決雲刳其腸

도화서에서는 세화(歲畵)를 올리는데 금갑신장(金甲神將)은 궁전 문에 붙이고


신선을 그린 그림, 닭이나 범을 그린 그림은 친척이나 가까운 신하에게 하사하기
도 한다.
궁궐에서는 해일과 자일에 각색의 비단으로 주머니[佩囊]를 만드는데, 여러 끈
을 꿰고 묶어 아래로 내려뜨려 유소(流蘇)를 만드는데 큰 나비가 달린 듯 모양
이 화려하다. 이것을 설날 문안드리러 온 측근 신하와 공경대부, 재상 등에게 하
사한다. 이것의 유래는 매우 오래되었으나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은 해
와 자가 십이지의 끝과 처음이므로 이날 주머니를 만드는 것은 한 해의 복록을
주머니에 담는 뜻이라고 한다.
설날과 보름에 인가에서는 선조 제사를 지낼 때 제수로 강정(羗飣)을 높이 친
다. 도수가 높은 술로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떡을 만들어 가늘게 썬 다음 끓는 기
름에 넣으면 누에고치처럼 둥글고 크게 부풀어 오르는데, 그것에다 엿과 볶은 흰
참깨를 묻힌 것이 강정이다. 혹은 볶은 콩가루를 묻히기도 한다. 󰡔주례(周禮)󰡕37) 「이식
(酏食)」의 주석에 “술과 쌀로 떡을 만드는데 지금의 기교병(起膠餠)38)과 같다.”
고 하였는데 아마 그것도 강정의 한 종류인 것 같다. 중국 송나라 동래(東萊) 여
조겸(呂祖謙)39)이 쓴 「제식(祭式)」에 “설날 누에고치를 올린다.”는 문구가 있고
성재(誠齋) 양만리(楊萬里)의 「상원(上元)」시 중에 “사퇴(麝䭔)는 궁중 풍으로
큰 잔치를 도와주고 분견(粉繭)은 시골풍으로 고향생각 나게 한다.”고 하였는

37) 󰡔주례(周禮)󰡕는 주나라 때 작성되고 후대에 증보한 중국 최고(最古)의 법전으로 당대


이후부터 이렇게 불렸다.
38) 기교병(起膠餠)은 기면병(起面餅)이라고도 하며 표면에 쌀가루를 발라 발효시킨 것으로
강정과 같다.
39) 여조겸(呂祖謙)은 송나라 사람으로 시, 서, 춘추에 능통하였으며 주희(朱熹), 장식(張
栻)과 함께 강남의 삼현(三賢)으로 불렸다.

116 조선대세시기 Ⅲ
데,40) 여기서 분견이란 강정을 말한다. 퇴(䭔)는 찐 떡이다.

圖畵署進歲畵 金甲神將貼宮殿門 仙人鷄虎貼照壁 或頒賜戚畹近臣家 禁中


以亥子二日裁各色綾緞造佩囊 穿結雜41)組下作流蘇栩栩如大蝴蜨 正朝候班
近臣卿宰例得頒賜 其來甚久而莫省所以 或曰亥子居十二辰終始 以是日造
囊者 囊括一歲福祿之意也 正朝上元 人家祭先羌飣爲上羞 羌飣者以烈酒和
糯米粉搦搏作餠 細切待乾 用油浴煎 卽浮起圓大形如蚕繭 沃以餳炒白胡麻
衣之 或用炒菽屑 周禮酏食䟽云以酒酏爲餠若今起膠餠 疑卽羌飣之類 東萊祭
式有元日薦繭之文 楊誠齋上元詩曰麝䭔宮樣陪公讌粉繭鄕風憶故園 粉繭者
今之羌飣也 䭔蒸餠也42)

인일 人日

공조(工曹)에서는 화승(花勝)43)을 올린다. 또한 각 궁전에 동인승(銅人勝)을


진상하는데, 이것은 구리로 공 모양을 만들어 그 위에 인형을 새긴 것이다.
정월 인일, 삼월 삼짇날, 칠월 칠석, 그리고 구월 중양절에 임금이 친히 문제를
내어 성균관 상재(上齋)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시험을 치르게 하는데, 대신과
홍문관과 예문관 제학을 독권관(讀券官)으로 삼아 임금 앞에 나아가 과거의 순
서를 정한다. 시험에 수석한 자에게는 간혹 급제를 내리기도 하고 그 나머지도
성적대로 상을 내린다. 이것을 절일제(節日製)라고 하며, 어떤 때는 사학(四學)
학생에게도 시험자격을 주는데, 이 경우는 통방외(通方外)라고 한다.

40) 양만리(楊萬里)는 송나라 사람으로 시의 제목은 고소관상원전일석배사객관등지집(故蘇


館上元前一夕陪使客觀燈之集)이며 󰡔성재집(誠齋集)󰡕 권29에 있다.
41) 고대본에는 “雜”이 “襍”으로 되어 있다.
42) “䭔蒸餠也”는 고대본(광문회본)에서 추가하였다.
43) 화승(花勝)은 고대 부녀(婦女)들이 머리를 장식했던 일종의 수식(首飾)으로 색종이를
가위로 잘라 만든다. 인승(人勝)이라고도 하며 인일에 만들며, 그래서 인일을 인승절(人
勝節)이라고도 한다.

열양세시기 117
工曹進花勝 又鑄銅如圓毬狀 上刻人形名曰銅人勝 殿宮各進一枚 正月人日
三月三日七月七夕九月九日 下御題于成均館試取上齋生 以大臣及兩館提學
爲讀券官詣榻前科次 居首者往往賜第 其餘頒賞有差名曰節日製 有時並四
學生許赴謂之通方外

상신일 上辛日

이날 임금은 사직단에 나아가 풍년을 기원하는 기곡대제(祈穀大祭)를 행하는


데, 방식은 종묘 의례와 같다. 임금이 직접 제사를 올리지 못할 경우는 대신들이
섭행(攝行)한다. 정조 임금은 재위기간 24년 동안 매년 꼭 친향(親享)을 하였는
데, 비록 위예(違豫)44)한 때라도 조정 신하들이 섭행(攝行)을 극력 청하여도 허
락하지 않았으니 백성을 생각하고 농사를 중히 여김이 이같이 지극하였다. 사직
제사는 이전에는 중사(中祀)였으나 정조 임금 11년(1787)부터 대사(大祀)로
승격되었다.

大駕親行祈穀大祭于社稷 百官陪祭如太廟儀 非親享則大臣攝行 先朝臨御


二十四年每歲必親享 雖間値違豫 廷臣力請攝行亦不許 勤民重農之意 嗚呼
至矣 社稷舊在中祀 至先朝丁未始陞爲大祀

상해일 上亥日

부녀자들은 이날 조두(澡豆)45)를 만든다. 속담에 돼지날에는 조두를 만들어 얼


굴을 씻고 쥐날에 잘 차려 입으면 출가한 형제가 집에 돌아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만큼 안색이 좋아져서 다시 보게 된다는 뜻이다.

44) 위예(違豫)란 제왕이 병이 생겼을 때 삼가 가려서 쓰는 휘칭(諱稱)이다.


45) 조두(澡豆)란 고대 이래 세수나 목욕할 때 쓰던 용품으로 팥을 갈고 여기에 향료를 섞
어 만든 비누다.

118 조선대세시기 Ⅲ
婦女以上亥日作澡豆 諺曰豕日作豆鼠日盛飾 出去親哥還家不識 謂顔色美
好改觀也

보름날 上元

찹쌀을 대강 쪄서 만든 밥에 기름과 꿀과 진장을 넣어 비비고 씨 뺀 대추 살과


깐 밤을 잘게 썰어 쌀 양에 맞게 고루 넣고 다시 은은한 불에 쪄서 제사상에 올
리고 손님에게 대접하며 동네 이웃이 서로 나눈다. 이것을 약밥[藥飯]이라고 한
다. 우리 관습에 꿀을 약으로 쓰므로 꿀밥을 약밥이라고 하고 꿀과자를 약과라고 한다. 세속에 전
하기를 신라 소지왕이 까마귀 말을 듣고 금갑(琴匣)을 쏘아 화를 면한 이적이
있어 감사의 뜻으로 까마귀밥으로 만든 것이 약밥이고 이것이 우리 고유의 풍속
이 되었다고 한다. 역관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우리 사신들이 연경에 가서 보름
을 쇠게 되면 반드시 요리사에게 이 음식을 만들게 하는데, 연경 귀인(貴人)들이
이것을 맛보면 반색을 하며 다른 음식을 다 마다할 정도로 좋아하지 않는 자가
없지만 그 방법을 전하여도 만들지 못한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까마귀 설은 매
우 황당한 이야기지만 중국에는 이것이 없으므로 우리 고유의 풍속이라는 설은
무고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근자에 본 책 중에 당나라 위거원(韋巨源)이 쓴 󰡔
식보(食譜)󰡕46)라는 책에 ‘유화명주(油畵明珠)’라는 글이 있어 그 주석을 보니
“보름 때 먹는 유반(油飯)은 약밥 재료 모두를 간략히 말한 것이니 앞으로는 유
반이라고 해야 한다. 그렸다고 한 것은 붉은 옻칠이 섞인 것처럼 보이고 명주같
다고 한 것은 매끈하고 고운 빛깔이 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이것은 곧 약밥을
뜻하므로 중국의 문물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며 신라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은 호
사가들이 멋대로 이 고사에다 억지로 붙인 것이다. 그러면 중국에는 옛날에 있었
는데 지금은 왜 없는가. 그것은 마치 주나라와 노나라 예제는 없어졌지만 담(郯)
나라에 그것이 관기(官紀)로 남았고 하(河)와 낙(洛)의 음악과 학문은 사라졌지

46) 위거원(韋巨源)은 중국 당나라 때 인물로 음식에 관한 해설서인 󰡔식보(食譜)󰡕를 썼다.


여기서 유화명주(油畵明珠)의 유화는 약밥이 번지르르한 모양을, 명주는 그 색을 표현한
것이다.

열양세시기 119
만 민(閩)에서 유학이 일어난 것과 같다. 문물이 본시 이런 것인데 어찌 약밥뿐
이겠는가.
이날 날이 밝아올 때 술을 한잔 마시는데, 이것을 귀밝이술[明耳酒]이라 하고
밤 세 톨 깨무는 것을 부스럼 깬다[咬瘡果]고 한다.
또 이른 새벽에 정화수 한 그릇 길어오는 것을 용알뜨기[撈龍子]라고 한다. 정
결한 종이에 흰밥을 싸서 강물에 던지는 것을 어부심[魚鳧施]이라고 한다.
부녀자나 아동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친한 사람을 만나면 급히 부른다. 그 사람
이 응답하면 곧 “내 더위 사라.”고 한다. 불러도 지나가고 응하지 않으면 팔지 못
한 것이다.
10월 초부터 남자아이들은 연날리기를 하고 여자아이들은 나무로 만든 작은 호
로(葫蘆) 3개를 차고 다닌다. 이듬해 정월 보름밤이 되면 가지고 놀던 연은 공중
으로 날려 보내고 차고 다니던 호로는 길에 버리는데 엽전 1전씩 매단다. 이를
방액(防厄), 즉 액막이한다고 한다.
여항의 소민들은 점쟁이[日者]에게 명수(命數)를 물어 흉성(凶星)이 든 해라
는 점이 나오면 제웅[芻人]을 만들고 뱃속에 엽전을 넣어 길가에 버린다. 그러면
이를 기다리던 아이들이 제웅을 치고 부수어 엽전을 빼간다. 이를 대액(代厄),
즉 액땜이라고 한다.
보름날 밤에 열두 다리를 걸어서 건너면 열두 달 액을 모두 없앨 수 있다고 하
여 재상과 귀인으로부터 여항 백성들까지 늙거나 병든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리밟기를 하러 나온다. 가마나 말을 타고 오기도 하고, 지팡이도 짚고 나막신을
끌고 나오기도 하여 거리가 사람들로 꽉 찬다. 악기와 술병이 사람들이 모인 곳
마다 벌려 있다. 일 년 중에 도읍이 구경꾼들로 성황을 이루는 날은 오직 보름밤
과 사월 초파일로 이 두 날만은 매번 임금의 명으로 통금을 해지한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볏짚을 만들고 쌀 주머니를 다는데, 위는 뾰쪽하게 하고 아
래는 넓게 하여 장대에 묶어 마당 가운데에 세운다. 이것을 화적간(禾積竿), 즉
볏가릿대라고 한다. 이것은 2월 초하루에 장대를 눕혀 매단 쌀을 꺼내 떡을 해
먹는다.
농가에서는 초저녁에 홰를 만들어 불을 붙인 다음 무리를 지어 동쪽을 향해 달

120 조선대세시기 Ⅲ
리는데, 이것을 달맞이[迎月]라고 한다. 달이 위로 뜨면 그 둘레의 색을 보고 그
해 풍년이 들지, 흉년이 들지 점을 친다.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47)의 다음
과 같은 시가 있다. “정월보름 농가에선 언제나 달뜨기를 기다린다. 북쪽 가까이
뜨면 산골에 풍년들고 남쪽으로 기울면 해변 곡식이 잘 익는다. 달이 붉으면 가
물까 걱정이고 흰색이면 홍수가 날까 두렵다. 알맞게 황색이어야 대풍년이 들 것
이로다.”
농민들은 수수깡을 세로로 가운데를 갈라 한쪽 편에 작은 구멍 열두 개를 뚫고
그 구멍마다 콩 한 알씩 박아 넣어 열두 달을 나누어 표시한다. 다른 한 쪽도 같
은 간격으로 열두 구멍을 파서 둘을 합친 다음 봉해서 물속에 넣어 하룻밤을 재
운 후 꺼내 열어보아 콩이 얼마나 불었는가에 따라 그달이 비가 많을 것인지 가
물 것인지 점치는데, 이것을 달불음[潤月]이라고 한다.
시정 소년들은 빈 공터에 모여 조를 나누고 진을 친 다음 돌을 던져 승부를 내
는데, 이것을 편싸움[邊戰]이라고 한다. 진행 도중에 머리가 깨지고 눈을 다쳐도
동정하는 일이 없다. 속설에 이기는 편의 방위에서 풍년이 든다고 한다.
향촌의 부잣집에서는 잡곡밥을 지어놓고 품을 팔아 어렵게 사는 이웃 사람들을
불러 한 그릇씩 먹인다. 부잣집이 많은 동네에서는 하루에 여러 그릇을 먹게 된
다. 속담에 “밥 아홉 그릇 먹고 땔감 아홉 짐 한다.”고 하는데, 밥을 배불리 먹어
기력이 강해졌다는 말이다.
이날 김에다 취나물 등속과 밥을 싸서 많이 먹으면 좋다고 하는데, 이를 복쌈
[縛苫]이라고 하며 역시 풍년을 기원하는 뜻이 있다.
보름에 인가에서는 개를 굶기는데 이날 먹이면 개 몸에 파리가 들끓는다는 속
설 때문이다. 속담에 명절을 굶고 넘어가는 사람을 비웃어 “개 보름 쇠듯 한다.”
고 한다.

47) 차천로(1556~1615)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 · 난우(蘭


嵎) · 귤실(橘室) · 청묘거사(淸妙居士)다. 조선 선조 때 문장가로 저서에 󰡔오산집(五山
集)󰡕이 있다.

열양세시기 121
粘稻米畧蒸爲飯 拌油蜜豉醬棗栗取肉細切投48)之多寡視米 再蒸爛熟 薦祖
羞賓鄰里相饋 名曰藥飯 東俗謂蜜爲藥 故蜜飯曰藥飯 蜜果曰藥果 世傳新羅炤智王
感烏告射琴匣之異 作以飼烏 遂爲土風云 聞譯人言 我使赴燕 値上元必令
饔人設此 燕中貴人得而甞之莫不變色大驩 百味盡廢 傳其方不得成 烏告49)
之說雖甚荒誕 中國無是物 則起於土風似不誣也 近閱唐韋巨源食譜有曰油
畵明珠 注云上元油飯摠藥飯材料而約言之必將曰油飯 畵者丹漆錯也 明珠
者潤麗色也 意藥飯 故是中國物而傳于東 自新羅始好事者從而傳會耳 然則
中國之昔有而今無何也 曰周魯無禮制而官紀於郯 河洛無絃誦而儒興於閩物
固有然者 豈獨藥飯哉 淸晨飮酒一盞曰明耳酒 嚼栗三[曰咬瘡果 凌晨汲井
華水一器謂之撈龍子凈紙裹白飯投水謂之魚鳧施 婦女兒童朝起遇所親者急
呼之 其人應則曰買吾暑暍 去不應則以爲賣不售 兒童以十月初 男放紙鳶
女佩木雕小葫蘆三枚 至上元夜鳶飄于空葫蘆捐于道 各繫50)一文錢 名曰防
厄 閭巷小民問命于日者謂年直凶星 則作芻人納錢于腹棄之道側 聽羣兒打
破取錢而去 名曰代厄 上元夜踏過十二橋謂之度盡十二月厄 自卿宰貴人以
至委巷庶民除老病外無不畢出 輿馬杖屧塡塞街坊 笙簫壺榼所在成聚 一年
中都邑遊觀之盛惟上元與四月八日爲最 此兩夜每降旨弛禁 有田者織稻穰貯
米束之 令上銳下廣縛竿立庭中謂之禾積竿 至二月初吉 偃竿取米作餻啖之
農家以初昏束炬點火 成羣向東而走 謂之迎月 月旣上 眂其輪色占歲美惡
車五山天輅詩曰 農家正月望 常51)候月昇天 近北豐山峽 差南稔海邊 赤疑
焦草木 白怕漲川淵 圓滿中黃色 方知大有年 農人取薥52)黍莖 中剖之 一邊
鑿小竅十二 每竅納菽一枚 分標十二月 一邊相對鑿竅如其數 復合而封之
投水中一宿 而出啓視燥濕 卜本月澇旱 謂之潤月 市井少年就空曠處 分曹
布陣投石決勝 謂之邊戰 雖破壞頭目不恤也 俗謂勝邊方位占豊年 鄕村上戶
作雜穀飯招隣里傭保人饋一椀 上戶多處或一日累椀 諺曰喫飯九椀負薪九擔

48) 고대본에는 “投”가 “収”로 되어 있다.


49) 연대본에는 “告”가 “音”으로 되어 있다.
50) 연대본에는 “繫”가 “係”로 되어 있다.
51) 고대본에는 “常”이 “相”으로 되어 있다.
52) 고대본에는 “薥”이 “蜀”으로 되어 있다.

122 조선대세시기 Ⅲ
言飽喫氣力健也 用海衣馬蹄菜之屬包飯而喫以多爲貴 名曰縛苫 亦祈穀之
意也 上元日人家不飼犬 謂飼則蠅繁 俗嘲飢度良辰者曰狗兒上元

열양세시기 123
2월

2월과 3월 사이에 간혹 바람이나 비가 겨울철53)같이 찬데, 속칭 이것을 꽃샘추


위[花妬媢]라고 한다. 속담에 “2월 바람에 큰 독이 깨지고 꽃샘추위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고 한다.
한강에 동빙고와 서빙고를 두어 얼음을 보관하였다가 나누어 주는데 모두 󰡔주
례(周禮)󰡕의 방식을 따른다. 2품 이상 관료와 각신(閣臣)에게는 빙패(氷牌)를
지급하여 길흉사 때 얼음을 쓸 수 있도록 하는데, 5월 초하루부터 7월 그믐까지
석 달 안에만 신청할 수 있다.

二三月之交往往風雨凄冷如冬令俗稱花妬媢 諺曰二月風打破大甕 花妬媢未


老死凍 京江置東西二氷庫 藏氷啓氷一用周禮 二品以上及閣臣皆給氷牌有
吉凶事得取氷用之 自五月朔至七月晦

초하루 朔日

우리 풍속에 2월 초하루는 노비날이라고 한다. 쌀가루로 만두 모양의 떡을 만들


고 껍질을 벗긴 팥을 소[餡]로 놓고 솔잎을 깐 시루에 넣어 찐다. 이것을 송편이
라고 하며 노비들에게 나이 수대로 두루 먹인다. 이날은 거실 안팎을 정결하게
치우고 구석 깊은 곳까지 비질을 하여 깨끗이 쓸어낸다.
정조 임금께서는 병진년, 즉 1796년 2월 초하루에 공경대부와 측근 신하에게
자[尺]를 내려 중화절(中和節)54) 옛일을 재현하였다. 이때 정조 임금이 친히 쓴

53) 본문의 동령(冬令)은 동계(冬季), 즉 겨울철과 같은 뜻이다.

124 조선대세시기 Ⅲ
시를 보면 “중화절에 자를 하사하니 홍니(紅泥)55)를 구중궁궐에 내린다. 이것으
로 오색선을 재단하여 산룡(山龍)56)을 깁도록 하기 위함이다.”고 하였다. 이 자
는 시중에 쓰이는 포백자[布帛尺]보다 조금 짧다. 내 생각에는 당시(唐詩)에 2
월 초하루를 중화절이라고 하였고, 󰡔백향산집(白香山集)󰡕57)에는 중화절에 자를
하사받고 감사장을 쓴 글이 있는데 “오늘 홍아(紅牙)로 만든 자와 은으로 만든
자 각기 하나를 하사받았는데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을 맞이하여 도량을 모
두 동일하게 하시라는 명을 내리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俗謂二月朔日直奴婢 粉米作餠如饅頭樣小豆去皮爲餡 入甑中覆松葉蒸熟名


曰松餠 遍饋奴婢如其齒數 淨掃室內外 雖僻奧處皆用帚箕 先朝丙辰仲春朔
日 頒公卿近臣尺修中和節故事 御題詩曰頒尺中和節 紅泥下九重 裁來五色
線 許爾補山龍 尺比行用布帛尺差短 按唐詩以二月朔日爲中和節 白香山集
有中和日謝恩賜尺狀云 今日奉宣賜紅牙銀寸尺各一者 當晝夜平分之時 頒
度量合同之令

초6일 初六日

농가에서는 초저녁에 묘수(昴宿), 즉 좀생이별과 달이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가를 보아 한 해 운수를 점친다. 둘이 같이 가거나 한 치 못되는 거리를 두고 앞
서가면 한 해가 길하고 만약 앞이나 뒤로 한 치 이상 멀리 떨어져 가면 그 해는
흉년이 들어 어린 것들이 먹을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하는데, 징험해 보면 자못 들
어맞는다.

54) 당나라 덕종(德宗) 때 농사력으로 2월 1일은 중화절(中和節), 3월 3일은 상사(上巳) 9


월 9일은 중양(重陽)이라고 하고 이를 합하여 삼령절(三令節)이라고 불렀다.
55) 홍니란 옥새(玉璽)를 찍는 인주이므로 옥새가 찍한 자(尺)를 내렸다는 뜻이다.
56) 산룡(山龍)이란 임금의 곤룡포에 그려진 산과 용을 말하는 것이므로 곧 임금을 나타내
며, 이 글은 임금을 보좌하라는 뜻을 담은 시다.
57) 󰡔백향산집(白香山集)󰡕은 백락천(白樂天)의 문집 이름이다.

열양세시기 125
農家以初昏眂58)昴宿去月遠近以占歲事 竝行及差前尺寸以內爲吉 若先後太
遼闊 則謂歲將儉 幼少不見収哺也 驗之頗中

상정 上丁

종묘에서의 석전례는 춘추로 2월 상정(上丁), 즉 첫째 정일(丁日)에 갖는다.


인가에서는 상반(㫾飯) 즉 세속에서 소위 점심 을 먹는 기준으로 삼아 이날 이후로
점심을 먹다가 가을 상정일이 되면 그만 둔다. 그것은 이 두 날이 해 길이의 기
준이 되기 때문이다.

文廟釋菜行於春秋二仲上丁 而人家㫾飯 俗所謂點心 視而起止 盖以是爲日晷


長短之候也

춘분 春分

춘분 전후로 보리와 밀을 심고, 일을 마치면 관찰사와 유수는 각기 관내의 농사


형편과 비가 충분히 왔는지를 임금께 아뢰고 대궐과 관상감, 승정원, 그리고 전국
의 감영에 모두 측우기를 설치한다. 내관이나 외관 모두 참석한 가운데 한 해 점
을 치는데 상강(霜降)이 되면 멈춘다. 춘분 후부터 추분 전까지 관찰사나 군수나
모두 가족을 거느리는 일을 허락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 일에 백성이 동원되
면 농사에 방해되기 때문이다.

春分前後種兩麥訖 觀察使留守各以部內農形雨澤 啓聞 大內及觀象監政院


內閣八道四都營下皆置測雨器 中外參驗以占歲事至霜降而止 春分後秋分前
不許營邑率眷 以其役民妨農也

58) 고대본(광문회본)에는 “眂”가 “目”으로 되어있다.

126 조선대세시기 Ⅲ
3월

경성의 꽃놀이는 삼월에 제일 성하다. 남산의 잠두(蠶頭)와 북악의 필운대(弼


雲臺)와 세심대(洗心臺)가 꽃놀이 하려는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곳이다. 구름같
이 모이고 안개 끼듯 꾀이는 것이 한 달 내내 줄지 않는다. 세심대는 선희궁(宣
禧宮) 뒤 산줄기에 있다. 신해년, 즉 1791년에 정조께서 육상궁(毓祥宮)과 선희
궁(宣禧宮)을 배알하실 때 보여(步輿)를 타고 기로소 원로들과 가까운 신하들을
거느리고 세심대에 올라 활도 쏘고 시도 지었는데, 이 때 이후로 매년 행하는 행
사가 되었다. 대개 이 두 궁과 영조 임금의 잠저가 모두 이 산 아래에 있기 때문
에 이 일대를 바라보는 성군의 마음은 마치 이곳을 풍패(豊沛)59)나 남양(南
陽)60) 같이 여기는 것이다. 근처에 거주하는 남녀노소 모두 목을 빼고 임금의 행
차를 기다린다. 이는 아득한 옛날에 영대(靈臺)61)와 반수(泮水)62)에서 있었던
유풍을 보는 듯하다. 을묘년, 즉 1795년 봄에도 정조 임금은 조정 신하와 세심대
아래 거주하는 유생들을 불러 운을 내린 후 화답하는 시를 짓게 하여 내각에서
합쳐 올리게 하였고, 신해년 이후에 지은 것들을 모아 상하 두 편으로 인쇄하도
록 하였다. 당시 참석했던 선비들에게는 어제시(御製詩)를 내렸는데 “두 산이 진
정 한 집처럼 보이고, 일천 그루 나무 또한 하나의 정원을 이루었다.”는 내용의
시구다. 이것은 일시에 전해져 태평성사를 담은 시로 암송되었다.
정조 임금은 송나라 고사를 모방하여 3월 중에 내각 신하들을 거느리고 후원에
서 꽃을 감상하고 낚시하는 연회를 가졌다. 계축년, 즉 1793년 봄에는 난정(蘭
亭)63)에서 있었던 고사(故事)를 따라 물굽이에 술잔을 띄워 마시는 모임을 가지

59) 풍패(豊沛)는 한나라 고조 유방의 고향이다.


60) 남양(南陽)은 후한 광무제의 고향이다. 풍패나 남양은 황실에서 보호하는 곳이다.
61) 영대(靈臺)는 주나라 문왕이 백성들과 동락하던 누대 이름이다.
62) 반수(泮水)는 주공이 여러 번비들을 회견하던 곳이다.

열양세시기 127
면서 자제들까지 참석하도록 명하였다. 승지와 사관까지 합치면 모인 수는 39인
이다. 정조가 승하하신 후 5년이 되는 갑자년(1804)에 내가 내각의 직책을 맡게
되어 봉모당(奉模堂)64)을 배알하고 이어 봄철 대봉심(大奉審)을 거행하였는데,
그 때 개유와(皆有窩)65)에 보관된 중국 서적을 볕 쬐이는 일로 후원에 가니 꽃
이 만발하였다. 늙은 서리가 앞을 인도하면서 연못과 누대와 정자를 가리키며 “이
곳이 정조 임금께서 각신들에게 잔치를 베푸시던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우두커
니 서서 이를 바라보니 선왕을 보는 듯 감회가 일었다.

京城花柳盛於三月 南山之蠶頭北岳之弼雲洗心二臺爲遊賞湊集之所 雲攅霧


簇盡一月不衰 洗心臺宣禧宮之後麓也 辛亥暮春 先王展拜毓祥宣禧二宮 以
步輿御是臺 率耆老近密諸臣射侯賦詩 自是歲以爲常 盖二宮及英宗舊御66)
邸皆在岳下 故聖意視此一區如豊沛南陽 而父老士女莫不引領望幸 藹然有
靈臺泮水之風 乙卯春則又招朝士儒生之居在臺下者 令賡歌以進 命內閣合
辛亥以後上下篇什印成一帙進御 諸生亦得頒賜 御製詩 有曰兩山眞一戶 千
樹亦同園 一時傳誦以爲太平盛事 先王倣宋朝故事 以三月中率內閣諸臣設
賞花釣魚宴於後苑 癸丑春以蘭亭舊甲爲曲水流觴之會 命諸臣子弟皆與焉
並承旨史官以備三十九人之數 昇遐後五年甲子 臣忝閣職肅拜奉模堂 仍行
春節大奉審 曝皆有窩四部書 時苑中百花盛開 老吏前導者指所歷池臺亭榭
曰此先王宴閣臣處也 竚立瞻望有珠簾羽帳之感

청명 淸明

우리나라 국전(國典)에는 󰡔주례(周禮)󰡕를 따라 한 해 다섯 번 개화(改火)한

63) 난정(蘭亭)은 중국 동진의 목종이 353년 계축년에 왕희지 등이 모여 목욕, 제액하던 정


자다.
64) 봉모당(奉模堂)은 역대 어제 서책을 보관하기 위해 정조가 창덕궁 안에 세운 건물 이름
이다.
65) 개유와(皆有窩)는 창덕궁 부용정 남쪽에 있던 건물로, 주로 중국 서적을 보관하였다.
66) 연대본에는 “御”가 없으나 고대본(광문회본)에서 추가하였다.

128 조선대세시기 Ⅲ
다는 문구를 넣었는데, 이 중 청명 때 하는 개화를 제일 중요하게 여긴다. 내병조
(內兵曹)67)에서는 청명절에 들어가는 시각을 기다렸다가 버드나무에 구멍을 뚫
고 비벼서 불을 만들어 올리면 임금은 이것을 내외의 모든 관청과 대신 집에 내
린다. 󰡔주례(周禮)󰡕 「하관(夏官)」을 보면 사관(司爟)68)이 화령(火令)을 관장한
다고 하였다.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주례󰡕에는 사계절을 따라 불을 바꾸는데
오직 3월을 제일로 치는 이유는 큰 불을 일으키는 심성(心星)69)이 이때 제일 높
게 뜨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國典依周禮有一歲五改火之文 而最重淸明 內兵曹候入節時刻鑽柳取火 進


御 頒于內外諸司及諸達官家 周禮夏官 司爟掌火令70) 張子曰周禮四時變火
惟季春最嚴 以大火心星其時太高也

한식 寒食

조상 묘에 올라 제사 지내는 것은 모두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른다. 풀을


뽑고 묘를 수리하는 것도 이 날을 택한다.

上墓行祭一遵朱子家禮 伐草修莎亦用是日

삼짇날 三日

우리 풍속에 기제사(忌祭祀)를 중히 여기고 시제(時祭)를 가볍게 여기는데,


이것은 변방 오랑캐 풍속을 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중엽에

67) 내병조(內兵曹)는 조선조 병조(兵曹)에 딸린 관청으로 궁궐 안에서 시위(侍衛)ㆍ의장


(儀仗)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68) 사관(司爟)은 봉화(烽火)등 불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직책이다.
69) 심성(心星)은 28수의 하나로 삼성(三星), 또는 삼성(參星)이라고도 한다.
70) “內兵曹~司爟掌火令”은 고대본에는 「한식(寒食)」조에 위치해있고 “頒于內外諸司及 諸達
官家”가 “頒于禁中諸司大臣家”로 되어 있다.

열양세시기 129
유현(儒賢)이 무리지어 나오고 예를 좋아하는 사대부가 많아지면서 시제를 중히
여기게 되었는데 대개는 가난하여 사시제(四時祭)를 다 지내지 못하고 봄가을로
두 차례 지내는데 그치는데, 봄에는 중삼(重三), 즉 삼월 삼일을, 가을에는 중구
일(重九日)에 행하는 자가 많다.

國俗重忌祭不重時祭未免夷陋 至本朝中葉儒賢輩出 士大夫多好禮者始以時


祭爲重 而大抵貧儉鮮能行四時祭 止行於春秋二時 而春用重三秋用重九者
爲多71)

곡우 糓雨

강에서 잡는 맛있는 고기로 공지(貢脂)72)라는 민물고기가 있다. 큰 것은 한 자


나 되며 비늘이 잘고 살이 쪄서 회로도 좋고 국을 끓여 먹어도 좋다. 이 고기는
매년 3월 초에 한강을 거슬러 동쪽으로 미음(渼陰)73)까지 올라와 멈춘다. 곡우
전후로 3일간이 가장 많고 이때가 지나면 곧 없어진다. 강촌 사람들은 이 고기를
통해 절기가 이른지 늦은지를 안다. 농암 김창협의 시에 “물고기가 곡우를 맞아
비늘 번뜩이며 올라간다.”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공지는
곡지(糓至)를 잘못 발음하여 생긴 말이라고 하는데 곡지란 곡우(糓雨)에 온다는
뜻이다.

江魚之美者有貢脂焉 大者尺許鱗細肌厚可膾可羮 每以三月初 溯流東上至


渼陰而止 糓雨前後三日爲最盛 過此則消耗向盡 江村人以占節氣早晩 農巖
詩云魚迎穀雨鱗鱗上 是也74) 或曰貢脂糓至之訛 糓至者以糓雨至也

71) 연대본은 삼짇날의 내용에 “重三重九士大夫家多以是日祭行時祭于廟 或不能祭則以時羞行


茶禮如家禮朔參儀”라고 되어있으나 여기에서는 고대본의 내용을 참고하였다.
72) 공지(貢脂)는 꽁치를 지칭하는 듯하나 꽁치는 바닷고기여서 그와 유사한 민물고기인 것
같다.
73) 미음(渼陰)은 과거 석실서원이 있던 미음나루 부근이며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이다.
74) “農巖詩云魚迎穀雨鱗鱗上 是也”는 고대본에서 추가하였다.

130 조선대세시기 Ⅲ
4월

위어(葦魚)는 제어(鱭魚)75)다. 생김이 얇고 좁고 머리는 커서 갈대 잎처럼 보


여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살지고 연하기가 보통 생선에 댈 수 없다. 4월 초가
되면 이 고기들이 바다 조수를 타고 올라오는데 바다와 통하는 강어귀에 간혹 있
지만 대개는 왕도(王都), 즉 수도 서울에 있으며 수도가 아닌 곳은 절대 볼 수
없다. 그러나 백제 수도인 부여나 고려 수도인 개성에서는 근근이 나는 정도며 오직
한양 행주에서 가장 많이 나고 맛도 좋다. 매년 입하(立夏)가 되면 사옹원(司饔
院)에서 낭관(郞官) 한 명을 차출하면 그가 소속 관원들을 거느리고 행주 물가
에 나아가 그물로 위어를 잡아 날마다 수라 만드는 주방에 공급한다. 그 나머지
는 상인들이 가져가는데, 이것과 임금이 하사한 것 등을 합하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그래서 3월과 5월 중에 서울 사람으로서 이 물고기를 배불리 먹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葦魚者鱭也 薄狹而長頭若葦葉然故名 腴嫩不侔常魚 以四月初乘潮而上 江


口通海處往往有之 而大抵皆王都非王都則絶不見 然扶餘 百濟都 開城 高麗都

所産厪厪 漢陽杏洲寔蕃而嘉 每立夏氣至 司饔院差郞官一員 率其屬出次洲


上 施罛取之日供御廚 其餘洩於商販 播於頒賜者不可勝數 故四五月之間
都人無不飽是魚者

75) 위어(葦魚)나 제어(鱭魚) 모두 웅어에 대한 다른 표기다.

열양세시기 131
초파일 八日

인가는 물론 관청과 시전에서 모두 등 대를 세운다. 등 대는 대나무를 잇대어


묶어 만드는데, 높은 것은 10여 길이나 된다. 비단을 잘라 만든 깃발을 등 대 위
에 단다. 깃발 아래에는 막대기를 가로 대어 고리를 단 다음 양쪽으로 줄을 달아
그 끝이 땅까지 내려오게 한다. 밤이 되면 점등하는데 많을 때는 10여 등을, 적
을 때는 서너 등을 단다. 등의 수는 집의 아이 수를 따른 것이다. 등은 재갈 물리
듯 층층이 쌓기 때문에 구슬로 꿴 듯이 보인다. 먼저 줄 한끝을 제일 꼭대기 등
머리에 잡아매고 다음에 제일 아래 등 꼬리에 매어 줄을 서서히 잡아당기면 고리
까지 올라가 멈춘다. 높은 곳에 올라가 보면 빛나는 모습이 마치 하늘을 가득 채
운 별 같다. 등 모양은 마늘형, 오이형, 꽃잎형, 날짐승형, 들짐승형, 누대형(樓臺
形) 등 가지각색으로 일일이 다 말할 수 없다. 아이들은 등 대 밑에 자리를 깔고
느티떡[楡葉餻]과 소금 간을 하여 찐 콩을 먹는다.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듯 물을
담은 동이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돌리면서 두드리며 즐거워하는데, 이것을 수부(水
缶)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상원(上元), 즉 정월 보름에 연등행사를 하는 반면 우
리는 사월 초파일에 한다. 그 기원은 불교에서 나온 것으로 이날이 석가의 탄신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궁가(宮家)와 내사(內司), 내영(內營)에서는 초파일에 등을 만들어 임금
에게 바쳐 정교함과 화려함을 경쟁하는 것이 오랜 관례였다. 선왕이신 정조 임금
께서도 대비전과 혜경궁에서 이를 좋아하시기 때문에 그 뜻을 따라 시절의 유풍
을 없애지도, 생략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한번은 이러한 일이 있었다. 임금이 여
러 신하들과 누각에 올라 관등(觀燈)을 하는데, 내영에서 먼저 들어온 등은 제작
법이 매우 기이하고 유리와 운모와 쇠붙이와 옥으로 등 깃을 장식하니 광채가 번
쩍이므로 보는 사람들이 주목하고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그런데 다음으로 내사
에서 등을 올리겠다고 청하자 왕이 이를 허락하여 잠시 후에 등이 들어오는데 시
골에서나 파는 싼 종이로 붙여 만든 오이 모양의 등이었다. 모두들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임금 또한 잠시 그 천함을 괴히 여겼는데, 이때 내관 일을 맡은 노황문

132 조선대세시기 Ⅲ
(老黃門)이 나와 엎드려 아뢰기를 “등은 이와 같은 수준 정도면 족한 줄로 압니
다. 불을 살라 밝음을 얻을 수 있는 점은 피차 한가지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잠
자코 말없이 있다가 내영의 등은 걷어 내보내고 나중에 온 등을 대궐안 뜰에 걸
라고 명을 내리었다. 이날 이 일을 본 자들은 경연 신하와 호위병으로부터 대궐
안 하인과 문지기에 이르기까지 서로 쳐다보며 동요하는 기색이었다. 오호라 선왕
이 가까이 있는 말을 잘 살핀 일은 순(舜) 임금과도 부합되는 것으로 비록 문지
방이나 길을 소제하는 천한 사람도 이 일로 충성심을 느낄 수 있었으니, 이와 같
이 성절(盛節)을 이루심은 수레의 규식(在輿之規)76)에도 있고 침실의 잠언(居
寢之箴)77)과도 같이 오로지 옛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일을 일으킨 노황문
은 궁중에 오래 거하여 임금이 예우하던 원로인데, 외부로는 그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자다.

人家及官府市廛皆竪燈竿 聯束竹木爲之 高者十餘丈 剪綵78)帛爲幟揷之竿


杪幟下橫木爲鉤 納繩鉤中 垂其兩端于地 至夕點燈 多者十餘少者三四 人
家則 以童稚口數爲凖 皆層累相啣如貫珠狀 先將繩一端繫于最上燈之頭 次
將一端繫于最下燈之尾 徐徐挽上至鉤而止 登高望之煜爚如滿天星宿 燈有
蒜苽花葉鳥獸樓臺之形 種種色色難以具悉 兒童就竿下布席 設楡葉餻鹽蒸
豆 覆瓠盆水中輪流考擊以爲樂 名曰水缶 中國燃燈用上元 而東俗用四月八
日 其源出於竺敎 盖以是日爲如來降期也 諸宮家及內司內營以八日 造燈進
御競尙精麗 其來久矣 先王上奉殿宮承歡順志於時節故事不欲遽加裁省 嘗
與諸近臣御樓觀燈 內營燈先入 形製甚奇飾以玻瓈雲母金璧翠羽光彩炫燿
觀者咸注目稱美已 而內司請進燈 上可之 少焉燈入乃邨巷所賣紙糊苽子樣
也 諸人愕然 上亦頗恠其陋 老黃門管司者進伏徐奏曰 燈如是足矣 炷火取
明彼如此一也 上黙然良久命撤內營燈出 取其燈懸之內庭 是日睹其事者自

76) “재여지규(在輿之規)”는 “재여유려분지규(在輿有旅賁之規)”로 여분(旅賁)은 수레 좌우에


서 호위하는 군사직 이다. 은나라 탕왕(湯王)의 고사(故事)에 나온다.
77) “거침지잠(居寢之箴)”은 “거침유설어지잠(居寢有褻御之箴)”으로 설어(褻御)는 가까이 모
시는 신하다. 주나라 선왕(宣王)의 고사에 나온다.
78) 고대본(광문회본)에는 “綵”가 “絲”로 되어 있다.

열양세시기 133
筵臣衛士以至掖隸門卒無不相顧動色 嗚呼先王之好察邇言同符大舜 故雖門
巷掃除之賤亦得以因事納忠 成此盛節在輿之規居寢之箴孰謂專美於古昔哉
老黃門盖宮中耆宿 上所禮遇者 外廷不知其名云

134 조선대세시기 Ⅲ
5월

단오 端午

우리나라에서는 단오를 수릿날[水瀨日]이라고 하는데 물여울에 밥을 던져 굴삼


려(屈三閭)79)를 제향하는 날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와 그곳이 서로 만리
이상 떨어져 있고 세대도 천년 이상 떨어져 있는데도 말과 풍속이 바뀌지 않고
그 정신도 명확하기가 예나 지금이나 같으니 어찌 감탄하고 사모하지 않을 수 있
을까.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진 자를 그리워하고 옛일을 좋아하는 것이 다른
지방에 비해 별나다. 마치 한자(韓子)80)가 말했듯이 연나라 선비와 조나라 선비
는 각기 그 나라의 성향에서 비롯되었다고 한 그런 것인가.
머리를 땋은 총각이나 처녀들은 창포를 캐다가 물에 끓여 머리를 감고 깨끗이
닦은 4~5치 되는 흰 뿌리를 끝에 붉은 칠을 하여 머리에 꽂기도 하고 몸에 차기
도 한다. 내 생각에는 󰡔대대례기(大戴禮記)󰡕81)에 단오 때 축란(蓄蘭), 즉 창포
로 목욕한다고 하였고, 송나라 왕기손(王沂孫)82)의 󰡔단오첩(端午帖)󰡕에 “창포를

79) 굴삼려(屈三閭)는 중국 초나라 충신으로 삼려대부(三閭大夫)를 지냈던 굴원(屈原)을 말


한다.
80) 한자(韓子)는 중국 당나라 문인 한유(韓愈, 768~824)다.
81) 이 내용은 󰡔대대례기󰡕 전 13권 중 제2권 「하소정(夏小正)」에 있다. 편저자인 대덕(戴
德)은 중국 한나라 사람으로 자는 연군(延君)이다. 󰡔예기(禮記)󰡕 214편을 줄여 󰡔대대례
기(大戴禮記)󰡕 85편을 구성하였다. 청나라는 기존의 13경(經) 외에 󰡔대대례기(大戴禮
記)󰡕를 비롯하여 󰡔국어(國語)󰡕 ․ 󰡔사기(史記)󰡕 ․ 󰡔한서(漢書)󰡕 ․ 󰡔자치통감(資治通鑑)󰡕 ․ 󰡔설
문해자(說文解字)󰡕 ․ 󰡔구장산술(九章算術)󰡕 ․ 󰡔주비산경(周髀算經)󰡕등 8책을 추가하여 21
경(經)이라고 하였다.
82) 왕기손(王沂孫, ?~1290)의 자는 성여(聖與),호는 벽산(碧山)으로 중국 절강 소흥(紹
興) 사람이다. 원나라 지배 때 학정(學正)을 지냈다. 󰡔세시잡기(歲時雜記)󰡕에 실린 원문
은 다음과 같다. “王沂公帖子云 明朝知是天中節 旋刻菖蒲要辟邪.”

열양세시기 135
나누어 주어 새기게 하는 것은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한 것
을 보면 그 유래가 몹시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남녀 연소자들은 그네뛰기를 한다. 서울이나 시골이나 모두 그네를 뛰지만 관서
지방이 더욱 활발하다.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서로 모여 즐기는
것은 설날과 거의 같다.
관상감에서는 도장으로 찍은 붉은 부적을 올리면 이것을 문 상방(上枋)에 붙인
다. 공경대부나 측근 신하들도 관례에 따라 부적을 얻는다. 그 반사문(頒賜文)은
다음과 같다. “오월 오일은 천중절이다. 위로 하늘이 내신 녹을 얻고 아래로 땅이
준 복을 받으며, 치우(蚩尤) 신의 동두(銅頭)와 철액(鐵額)과 적구(赤口)와 적
설(赤舌)로 4백 4가지 병을 일시에 소멸하니 율령을 내린 듯 서둘러라.” 정조
임금 을묘년(1895) 이후로 이것을 불경인 은중게(恩重偈)로 바꾸었는데 “나무
삼만다 모다니 엄 아아나 사바하오.”라고 하여 대개 효심을 일으키는데 화정(和
靖)의 금강경(金剛經)을 이용한 것이다.
직제학 벼슬을 했던 집안 당내 형 집에 선왕이 내린 쑥호랑이[艾花]가 하나 있
다. 가지 하나를 길이가 예닐곱 치, 두께가 세 푼 되게 깎고 몸체 중간부터 점차
좁게 하여 밑은 뾰족하게 만들었으므로 머리에 꽂기 좋다. 몸체의 중간 윗부분은
양면으로 창포 잎을 붙였는데 너비가 몸체만 하므로 그 나머지를 밖으로 약간 나
오게 한 것이 갑옷이 헤진 모양과 같다. 진홍 모시를 잘라 꽃을 만든 다음 그 속
을 잎이 있는 곳까지 뚫고 풀로 붙여 꽃받침이 위로 향하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오색실로 몸체를 꽃받침까지 비탈지게 동여 묶었다. 애호는 대개 궁중 풍속으로
그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추측컨대 󰡔명물(名物)󰡕83) 책을 참고하면 이것은 갈대쑥
(蒹艾)과 장명실(長命縷)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는 것 같으나 재료에 정작 쑥을
보지 못해 의심이 간다. 그러나 육방옹(陸放翁)의 시84) 「중오(重五)」에 “심하게
시들었지만 여전히 쑥 한가닥이 비녀가 된다.”고 한 것은 이 식물, 즉 쑥을 말한
것이다.

83) 󰡔명물(名物)󰡕은 󰡔시전(詩傳)󰡕에 나오는 여러 동식물명을 정리한 󰡔시전명물집람(詩傳名物


集覽)󰡕을 말한다.
84) 육방옹(陸放翁)의 시는 「세수서사시(歲首書事詩)」다.

136 조선대세시기 Ⅲ
사도시(司䆃寺)85)에서는 궁궐 창고의 메주콩을 도성 근처 사찰의 중들에게 맡
겨 장을 만든 다음 장곡(醬麯)은 󰡔역어류해(譯語類解)󰡕86)에 나오는데 우리 풍속으로 메주를

말한다. 단오일에 진상한다. 쌀이나 베를 다루는 아문(衙門)이나 도성에 거주하는


사대부 집에서도 마찬가지로 재료를 주고 시켰다가 진상을 바치고 나면 와서 찾
아간다.
공조와 호남 영남의 두 감영 및 통제영에서는 단오에 즈음하여 부채를 만들어
진상하였고, 조정의 시종신 이상과 삼영(三營)87) 모두 관례에 따라 차등 있게 받
는다. 부채를 얻은 자는 이것을 다시 친척이나 친구, 묘지기, 소작인 등에게 나누
어 준다. 그래서 속담에 향촌에서 생색을 낼 때 쓰는 말로 ‘여름에는 부채, 겨울
에는 책력(夏扇冬曆)’이란 속담이 생겼다. 통영으로부터 받는 진상품에는 추가로
가위와 인두, 은장도 등이 있다. 옛날 부채는 접지 않았다. 그래서 반첩여(班婕
妤)88)의 환선(紈扇)이란 시에 “둥글기가 명월같다.”고 한 것이다. 옛 󰡔악부(樂
府)󰡕89)의 백단선가(白團扇歌) 중에 장창(張敞)90)이 말을 몰고 장대가(章臺
街)91)를 갈 때 얼굴을 가린 채 말에 기대었다고 한 것이 이 물건이다. 영락(永
樂) 연간에 우리나라에서 접는 부채를 진공하였더니 황제가 이것을 보고 그대로
만들 것을 명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접는 부채가 세상에 퍼진 것이다.

85) 사도시(司䆃寺)는 조선조 때 궁중의 쌀과 장(醬) 공급을 맡아 보는 관청이다. 태조 1년


(1392)에 설치한 요물고(料物庫)를 3대 태종 때에 공정고(供正庫)로 고친 적이 있는데,
모두 사도시의 전신이다.
86) 󰡔역어류해󰡕는 숙종 16년(1690)에 역관(譯官) 김경준(金敬俊)·김지남(金指南)·신이행(愼
以行) 등이 편찬하여 사역원(司譯院)에서 간행하였다. 2권 2책이다. 청(淸)나라에서 일
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이나 문장 가운데 긴요한 것을 가려 한글 음을 달고 중국 음도 달
아 놓았다. 역과초시(譯科初試) 및 한학(漢學) 교재로 사용하였다.
87) 삼영(三營)은 삼영문(三營門)으로 훈련도감(訓鍊都監)ㆍ금위영(禁衛營)ㆍ어영청(御營廳)
및 삼군문(三軍門)을 말한다.
88) 반첩여(班婕妤)는 중국 전한시대 시인으로 반황(班況)의 딸이다. 첩여는 궁녀의 직명이다.
89) 악부(樂府)는 음악을 관장하는 관청 이름인데, 시중의 음악을 채취하여 악보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 음악이 실린 책을 󰡔악부(樂府)󰡕라고 한다.
90) 장창(張敞)은 중국 전한시대 선제(宣帝) 때 승상이다.
91) 장대가(章臺街)는 거리 이름이다. 장대는 중국 진(秦) 나라 때 궁전 안에 있던 누대(樓
臺)이다.

열양세시기 137
國人稱端午曰水瀨日 謂投飯水瀨享屈三閭也 地之相去萬有餘里 世之相後
千有餘年 謠俗不改精爽如在 何令人感慕至此也 抑東人之懷賢好古別於他
方 如韓子所云燕趙之士出乎其性者耶 男女丱角者採菖蒲煎湯洗沐 取根白
四五寸洗消 令淨朱塗其端 或揷或佩 按大戴禮五月五日蓄蘭爲沐浴 宋王沂
公端午帖旋刻菖蒲要辟邪 其所從來盖遠矣 男女年少者爲鞦韆戱 京鄕皆然
而關西尤盛 鮮衣美食相聚娛嬉 與元朝略同 觀象監印進朱符 揭之門楣 卿
宰近臣例得 頒賜文曰 五月五日 天中之節 上得天祿 下得地福 蚩尤之神
銅頭鐵額 赤口赤舌 四百四病 一時消滅 急急如律令 先朝乙卯以後易以恩
重偈 文曰曩謨三滿多 沒駄喃唵 誐誐 曩婆嚩訶 盖孝思所推而用和靖金剛
之意也 堂兄直學宅有 先朝時端午所賜艾花一枝 削木爲體長可七八寸博三
分許 自半以下漸殺至本而銳之令可簪 上半兩面夾以菖蒲葉 其博凖體其長
出體外少許 對袖如甲拆狀 剪絳紵爲花竅其心貫至葉處中貼糊之令瓣向上
以五色絲繫跗下斜縱過瓣纒束竟體 盖禁中故事 而未詳其緣起何 竊稽名物
似蒹艾長命縷二義 而材料中不見所謂艾者亦可疑也 放翁重五詩云 衰甚猶
簪艾一枝 卽此物也 司䆃寺以御廩黃豆分授近城寺刹雇僧徒 製醬麯 醬麯見譯

語類解 國俗稱爋造 以端午日進上 有米布衙門及都下士大夫家亦各出材寄製 待


進上後取來 工曹及湖南嶺南二監營及統制營趂端午造扇進御 朝廷侍從以上
三營皆例餉有差 得扇者又以分之親戚知舊塚人佃客 故諺曰鄕中生色夏扇冬
曆 統營所餉又有剪子砑刀銀鉐項刀92)之等 古者扇不摺疊 班婕妤紈扇詩曰
團團似明月 古樂府有白團扇歌 張敞走馬章臺街以便面附馬 皆是物也 永樂
中朝鮮進摺疊扇 帝命尙方照樣製之 遂遍天下

초10일 初十日93)

5월 10일은 태종 임금이 돌아가신 날이다. 임금은 22년을 재위하시면서 왕위 18

92) 고대본(광문회본)에는 “砑刀銀鉐項刀”가 “烙鐵佩刀”로 되어 있다.


93) 고대본(광문회본)에는 “初十日”이 “十日”로 되어 있다.

138 조선대세시기 Ⅲ
년, 상왕위 4년 하늘을 섬기고 근면히 백성을 다스림에 한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대점(大漸), 즉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은하수를 보며 가뭄을 걱
정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옥황상제를 만나면 비를 내려달라고 빌어 우리 백성에
게 혜택을 주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임종을 하자94) 하늘에서 과연 비가 쏟아졌
다. 이로부터 매년 태종의 기신일이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문득 비가 내리니 백
성들이 이를 태종우(太宗雨)가 내렸다고 한다. 선조 임금 때인 임진년(1592)이
되기 수년 전부터 이러한 징험이 점점 줄어들더니 얼마 안 있어 왜란이 일어났으
므로 사람들이 더욱 이상하게 여겼다. 임금이 돌아가신 해가 영락 20년(1420)이니 임진년

(1592)까지 171년이 된다. 근세 이래로 비록 해마다 반드시 비가 올 수는 없는 일이


지만 4, 5월간에 대개 가뭄이 들 때 농민들은 이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헌릉 전
하께서 우리를 돌보아주시겠지.”라고 말하고 이 날이 되어 비가 오면 흔쾌히 서로
말 걸기를 “헌릉 전하가 과연 영험이 있구나.”라고 한다. 오호라 옛 임금을 잊지
않음이 4백년이 하루 같으니 아름답고 장하다.

五月初十日 太宗恭定大王忌辰也 王在位二十二年 在位十八年95)在上王位四年爲

二十二年 敬天勤民夙夜不懈 大漸之日猶以雲漢爲憂曰予當請于上帝乞一雨以


惠吾民也 綴衣甫出天果沛然下雨 自是每値忌辰雨輒如期 國人稱之曰太宗
雨至 宣祖壬辰前數歲稍不驗 尋有島夷之亂96) 人尤異之 王薨於永樂二十年壬寅

至萬曆壬辰爲一百七十一年 近世以來雖不能每年必雨 四五月之交例多亢旱田野


小民猶詘指以須曰獻陵殿下庶幾顧我乎 至是日而有雨 則又莫不欣然相告97)
曰獻陵殿下果有靈矣 於戱不忘之思四百年如一日 猗歟盛哉

94) 본문에 나오는 철의(綴衣)는 휘장인데, 왕이 죽어 이것을 걷어내면 장례준비가 시작되기


때문에 왕이 임종하였음을 뜻한다.
95) 고대본(광문회본)에는 “在位十八年” 뒤에 “總”자가 씌여 있다.
96) 연대본에는 “亂”이 “難”으로 되어 있다.
97) 광문회본에는 “告”가 “顧”로 되어 있다.

열양세시기 139
6월

내의원에서는 유월 중 토왕일(土旺日)98)에 황제(黃帝)에게 제사하고 옥추단


(玉樞丹)을 제조하여 임금에게 올렸다. 임금은 이 약을 각신들에게 세 개씩 하사
한다.

內醫院以季夏土旺日祀黃帝 製玉樞丹進御 內賜閣臣人三枚

보름 十五日

신라와 고려 때 사람들은 남녀가 술과 음식을 갖추고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서


옛날 진유(溱洧)99)의 풍속처럼 머리도 감고 잔치를 열면서 즐기고 상서롭지 않
은 것들을 물리쳤다. 고로 이 날을 유두(流頭)라고 한다. 이후로 이러한 풍속은
없어졌지만 이로 인해 명절이 되어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수단(水團)과 수교
[水角兒]100)를 이 시절의 대표 음식으로 여긴다. 수단은 설날의 흰떡과 같은데,
그보다는 더 가늘고 자를 때 더 도톰하게 잘라 쌀가루를 묻혀 씌운 다음 끓는 물
에 잠시 삶아 건져 꿀물 속에 넣고 얼음으로 차게 해서 마신다. 수교는 밀을 맷
돌에 갈아 가늘게 체를 쳐서 밀기울을 걷어내고 물로 반죽하여 조금씩 떼어내 방

98) 토왕일(土旺日)이란 땅의 기운이 왕성한 날이라는 뜻이다. 입춘, 입하, 입추, 입동 네 절


기 전에 각기 토왕일이 18일간 있다.
99) 진유(溱洧)는 하남성에서 발원하는 진수(溱水)와 유수(洧水)를 말한다. 경치가 아름다워
남녀들이 몰려와 즐겼다. 󰡔시경(詩經)󰡕 「정풍(鄭風)」의 주석에 이것을 남녀춘유지락(男
女春游之樂)이라고 하여 음란함을 비유한 말이라고 하였다.
100) 수교위를 말한다. 수교위란 중국에서 물만두로 통하는 수교(水餃)라는 말과 발음이 비
슷하다.

140 조선대세시기 Ⅲ
망이로 골고루 손바닥 크기로 민다. 그리고 늙은 오이를 잘게 썰어 돼지, 돼지고
기, 쇠고기, 닭고기 등을 넣고 기름과 간장으로 조미한 것으로 푹 익혀 소를 만든
다음 이것을 양쪽 머리를 말아 합친 가운데에 넣어 오므리면 만두와 비슷한 모양
이 된다. 이것을 푹 쪄서 초장에 찍어 먹는다.
여형공(呂滎公)101)의 󰡔세시잡기(歲時雜記)󰡕에 “단오 때 수단을 만드는데, 또
한 백단이라는 이름이 있고 정교한 것은 적분단(滴粉團)이라고 한다.”고 했다. 장

뢰(張耒)102)의 시에 “수단과 얼음에 사탕을 담근다.”고 하였다. 󰡔천보유사(天寶遺事)󰡕103)에


“궁중에서는 매년 단양절이 되면 분단과 각서를 만들어 금빛쟁반에 놓고 소각궁
(小角弓)104)에 화살을 걸어 분단을 맞히게 하여 적중한 자에게 이를 먹게 한다.
대개 분단은 미끄러워 맞히기 어렵다.”고 하였다. 이것은 건단(乾團)으로 물에 넣지 않은

것이다. 이로 보건대 수단은 중국에서 단오절에 만드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유


두로 옮겨 만들게 된 것이다.
부녀자들은 밀가루로 바둑알만 하게 누룩을 둥글게 만든 다음 비단을 오려 붙
이면 오색이 서로 어울려 번쩍인다. 세 개씩 이어 달고 그 위에는 실 고리를 만
들어 찰 수 있게 한다. 이것을 서로 선물로 보내는데 유두 누룩[流頭麯]이라고
부른다.

羅麗時國人士女具酒食 就東流水頭沐浴 宴樂祓除不祥 如古昔溱洧之俗 故


名其日曰流頭 後來雖無此俗 而沿爲名節 至今不改 水團水角兒爲時食盛饌
水團者作餠如元日拳模而軆差細 切差厚 塗米粉爲衣 畧烹漉取入蜜水中調
氷105)啜之 水角兒者磨小麥 細篩去麩 拌水分作小片 用木椎子碾勻如手掌
大 老黃苽細切和豬牛鷄肉加油醬諸味 爛炒作饀捲合兩頭 當中摺蹙 略似饅

101) 여형공(呂滎公)은 여희철(呂希哲)로 자는 원명(原明)이다. 저서에 󰡔여씨잡기(呂氏雜記)󰡕


가 있다. 원문은󰡔고금사문류취(古今事文類聚)󰡕를 참조하였다.
102) 장뢰(張耒, 1054~1114)는 송나라 시인으로 자는 문잠(文潛), 호는 가산(柯山)이다. 강
소(江蘇) 청강(清江) 출신으로 소동파에게 배웠다.
103) 󰡔천보유사󰡕는 중국 당나라 현종 때의 기록으로 당시의 특별한 일이나 기이한 소문 등
을 기록하였다.
104) 소각궁(小角弓)이란 작게 만든 활이다.
105) 고대본(광문회본)에는 “氷”이 “水”로 되어 있다.

열양세시기 141
頭形 蒸熟蘸醋醬啖之
呂滎公106)歲時雜記107)云 端午作水團 又名白團 其108)精者名曰滴粉團 張耒

詩云水團冰浸砂糖裹 天寶遺事云 宮中每到端陽 造粉團角黍 貯於金盤中 以小


角弓架箭射粉團 中者得食 盖粉團滑膩難射也 此則乾團不入水者 據此則水團是
中國端午日所設 而吾東移設於流頭也
婦女取小麥屑作團麯如棊子 大剪綵帛塗之 五色相間斑瀾然 三三連綴 上作
絲鉤 令可佩 以相贈遺 名曰流頭麯

복날 伏日

개를 삶아 국을 해먹는 것은 양기를 돕기 위함이요, 팥죽을 쑤는 것은 여역 귀


신을 물리치기 위함이다.
세속에서 대추나무는 삼복에 열매를 맺는데 비가 오면 결실이 없다고 한다. 충
청도 청산과 보은 두 고을은 땅이 대추심기에 알맞아 그곳 사람들은 대추농사를
업으로 삼는다. 대추나무가 농장이 마주보고 있을 정도로 많아 시집보내는 비용과
입고 먹는 비용까지 다 이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호사가들은 “삼복일에 비가 붓듯
이 내리면 보은 처자 눈물은 비 오듯 쏟아진다.”는 말을 만들었다.

烹狗爲羮以助陽 煑豆爲粥以禳癘 俗謂棗樹以三伏日結子雨則不結 복山報


恩二邑地宜棗 居人以棗爲業 千樹之園所在 相望 婚嫁衣食悉出其中 故好
事者爲之語曰 三伏日雨如注 報恩處子淚如雨

106) 고대본(광문회본)에는 “呂榮公”으로 되어 있다.


107) 고대본(광문회본)에는 󰡔세시(歲時)󰡕, 연대본에는 󰡔세시기(歲時記)󰡕로 나와 있으나 여형
공(呂滎公) 여희철(呂希哲)의 저서는 󰡔세시잡기(歲時雜記)󰡕이므로 원래의 책이름을 따라
교정하였다.
108) 고대본(광문회본)에는 “其”가 “最”로 되어 있다.

142 조선대세시기 Ⅲ
7월

제주 옛 탐라국으로 전라도 관할 해중(海中)에 있다. 에서 공출한 말이 이달에 서울에


이른다. 상품은 사복시 소속의 궁궐 마구간을 채우고 그 다음은 차례로 동교(東
郊) 살곶이다리[箭橋] 목장에서 기른다. 대신 ․ 각신 ․ 시임승지(時任承旨) 및
사관 모두에게 하사품으로 한 필씩 내린다.

濟州 古耽羅國 在全羅道海中 貢馬以是月至京師 上品充閑廐 其次分畜東郊箭橋


牧場 大臣閣臣時任承旨史官皆得頒賜一疋

중원 中元

세상에 전해오기를 신라의 오랜 풍속에 왕녀(王女)가 6부 여자들을 거느리고 7


월 16일부터 대부(大部) 뜰에 아침 일찍 모여 길쌈하여 8월 보름에 그 공의 많
고 적음을 보아 진 편에서는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이긴 편에게 사례하면서 서로
가무를 하며 온갖 놀이를 하다가 파했다. 그래서 7월 보름을 백중절[百種節]이
라고 하고 8월 보름을 가배일(嘉排日)이라고 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신라와 고
려 때는 불교를 숭상하여 우란분(盂蘭盆) 때 공양하는 옛 풍속을 모방하여 7월
15일 중원일에 백종(百種), 즉 온갖 꽃과 과일을 갖추어 공양하고 복을 빌었으
므로 백종절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두 가지 설 중에 누가 옳은지 확실하
지 않지만 지금은 오로지 그 이름만 남았을 뿐 행사는 없다. 그러나 절에서는 이
날 재를 준비하여 조상의 혼 앞에 천신하고, 시정 백성들은 서로 모여 마시며 즐
기니 대개 위의 옛 풍속을 따른 것이다.

열양세시기 143
世傳新羅故俗 王女率六部女子 自七月旣望早集大部庭績麻 至八月十五日
考功多少 負者置酒食以謝勝者 相與歌舞作百戱而罷 故以七月望日爲百種
節 八月望日爲嘉排日 或曰羅麗崇佛倣盂蘭盆供遺俗 以中元日具百種花果
供養祈福109) 故以名其日 二說未詳孰是 今則惟存其名而並無其事 然僧家
以是日設齋薦先魂 市井小民相聚燕110)飮以爲樂 盖略沿舊習也

109) 연대본에는 “福”이 “禱”로 되어 있다.


110) 광문회본에는 “燕”이 “讌”으로 되어 있다.

144 조선대세시기 Ⅲ
8월

추분 秋分

제주 한라산과 남해 경상도 소속 현 이름이다. 금산 산 이름이다. 이 춘분과 추분에 노


인성(老人星)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곳 사람들 중 장수한 사람들을
보면 70~80세는 오히려 일찍 죽은 편이다. 근년에 순천 전라좌도의 읍 이름이다. 수
영에서 별을 보았다는 사람이 내게 말해주는데 노인성은 다른 별에 비해 매우 크
고 정홍색(正紅色)을 띠었고 환히 밝은 것이 달과 같다고 하며, 추분 전후로 수
일간 볼 수 있는데 매번 한밤중에 병(丙) 방향에서 떠서 새벽까지 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내 생각에는 󰡔후한서(後漢書)󰡕 「예의지(禮儀志)」111)에 중추가 있는 8
월에 수도 남교에서 노인성에 제 지낸다고 하였고, 󰡔예기(禮記)󰡕112)에도 제후들
이 자기 분야(分野)113)의 별에 제 지낸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국조오례의󰡕에 수
성에 대한 제사는 추분을 이용하여 5일간 재를 올리며 헌관은 삼품(三品) 벼슬
이 맡는다고 하였다. 여기서 수성은 노인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국초에
는 사전(祀典)에 이 제사가 들어 있었음은 의심할 바 없으나 도중에 없어져 지
금은 그것이 어느 때인지 알 수 없다. 1787년에 정조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널
리 물어 친히 성단(星壇)을 정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직접 서문을 지었으나

111) 󰡔후한서󰡕는 남조(南朝)의 송나라 대신 범엽(范曄, 398~445)이 편찬하였다. 범엽은 지


금의 하남성인 순양(順陽) 사람으로 자는 울종(蔚宗)이다. 책은 「원정십기(原定十紀)」,
「십지(十志)」, 「팔십열전(八十列傳)」 등 100권인데, 「십지」 중 「팔지(八志)」만 남아있으
며 그중 두 번째가 「예의지」다.
112) 󰡔예기󰡕는 주나라 말기 이래 고례(古禮)에 관한 설을 정비한 책이다.
113) 분야(分野)는 구역(區域)이란 뜻으로,고대에는 이에 근거하여 하늘의 구역에 상응하
여 지구의 길흉을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열양세시기 145
이루지 못하였다.

濟州漢拏山南海 慶尙道縣名 錦山 山名 皆以春秋二分見老人星 故土人多壽考


者七八十猶以爲夭 近年有見之於順天 邑名在全羅左道 水營者爲余言 星比他
星絶大色正紅煌煌如月 秋分前後數日皆有之 每以夜半升于丙地比曙不沒云
按後漢書禮儀志中秋之月祀老人星于國都南郊 禮諸候祭分野之星 天下之見
此星無如我國 而其見實在箕尾之南 政當我國分野 故五禮儀有祀壽星 儀日
用秋分齋五日獻官秩三品壽星卽老人星也 據此則國初之載在祀典無疑 而中廢
不擧不知在於何時 正廟丁巳博詢諸臣親定星壇享儀 御製序文欲行之而未果

중추 中秋

중추일을 ‘가배’라고 칭한 것은 신라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 달에 만물이 성숙하


고 또 중추가절이라고 칭하므로 민간에서는 제일 중히 여긴다. 이날 아무리 궁벽
한 시골의 가난한 집이라도 으레 모두 쌀로 술을 빚고 닭을 잡아먹는다. 안주나
과일도 분수에 넘치게 가득 차린다. 그래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
라.”는 말도 있다.
사대부 집에서는 설, 한식, 중추, 동지를 사명일(四名日)이라고 하여 묘제(墓
祭)를 행하는데, 설이나 동지 때 혹 행하지 못하더라도 한식과 중추 때 행하며
한식보다는 중추 때 많이 행한다. 유자후(柳子厚)114)가 “병졸과 노복과 품꾼과
걸인 모두가 부모 묘를 찾게 되었다.”고 말하였는데, 오직 이 날이 그러하다.

嘉排之稱昉於新羅 而是月也百物成熟 中秋又稱佳節 故民間最重 是日雖窮


鄕下戶 例皆釀稻爲酒殺鷄爲饌 肴115)果之品侈然滿盤爲之 語曰加也勿減也
勿 但願長似嘉排日 士大夫家以正朝寒食中秋冬至四名日行墓祭 而正至或

114) 유자후(柳子厚)는 당나라 말기 문인으로 당송팔대가의 한사람이다. 본명은 종원(宗元)


이고 자후는(子厚)자다.
115) 고대본(광문회본)에는 “肴”가 “又有”으로 되어 있다.

146 조선대세시기 Ⅲ
有不行者惟寒食中秋爲盛 而寒食又不如中秋之盛 柳子厚所謂皂隸傭丐皆得
上父母丘墓者 惟此日爲然

열양세시기 147
9월

세종 임금 때 우의정 유관(柳寬)116)이 당나라와 송나라의 고사를 본받아 삼월


삼짇날과 구월 중양일을 영절(令節)로 하여 대소 신료들에게 명승지를 택하여 유
람하고 즐기게 함으로써 태평한 기상을 나타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
다. 그러나 중엽 이후로 여러 차례 난리를 겪으면서 이 풍속은 쇠퇴하였으나 옛
일을 좋아하는 많은 사대부들은 중양일에 등고(登高)117)하여 시를 지으며 즐긴
다.

世宗莊憲王時 右議政柳寬請倣唐宋故事 以三月三日九月九日爲令節 使大


小臣僚選勝遊樂以形容太平氣象 上可之 中葉以來屢經喪亂 此風遂衰118)
而士大夫好古者多以重陽日登高賦詩爲樂

116) 유관(柳寬, 1346~1433)의 호는 하정(夏亭), 자는 몽사(夢思), 경부(敬夫)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개국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황해도 문화현에 있는 정계서원(程溪書
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하정유집(夏亭遺集)󰡕이 있다.
117) 등고(登高)란 높은 곳에 올라 양기를 흠뻑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118) “世宗莊憲王時 ~ 此風遂衰” 부분은 고대본(광문회본)에는 이 내용 대신 “楓菊時士女遊
賞略似花柳” (“단풍이 들고 국화가 피면 남녀가 구경하며 즐기는 것이 봄에 화류놀이 하
는 것과 같다.”)고 되어 있다.

148 조선대세시기 Ⅲ
10월

10월이 되면 추워지기 시작하므로 인가에서는 겨울나기를 하는데, 어느 것 하


나 이용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인데, 그중에서 김장하는 일이 가장 큰 일이다.
김장이라는 것은 무와 배추를 가져다가 소금물에 절인 다음 고추, 생강, 파, 마늘
등 온갖 조미료를 넣어 항아리에 가득 담아 땅에 묻어 얼어 터지지 않도록 방비
한다. 두자미(杜子美)의「추채(秋菜)」시에 “겨울 무는 식사의 반이다.”라고 한
것은 이를 말한 것이다.

孟冬始寒人家御冬 百用莫不及此措置 而沈藏爲大政 沈藏者取蘿葍根菘菜


莖沈鹽水爲菹 加椒薑蔥蒜諸味甕盛 而窖藏之以防凍壞 杜子美秋菜詩曰冬
菁飯之半政 此謂也

초하루 朔日

10월 초하루부터 내관직과 외관직 관원 모두 공복(公服)으로 난모(煖帽)를 착


용하는데, 당상관은 표피(貂皮)를 사용하고 당하관은 서피(鼠皮)를 사용한다. 이
것은 2월 초하루가 되어야 벗는다. 겨울이 따듯하고 봄이 추운 경우에도 자기 맘
대로 벗거나 쓰지 못한다.

自十月朔日 京外官公服皆着煖帽 堂上用貂皮 堂下用鼠皮 至二月朔日始除


雖冬煖春寒不得任便脫着

열양세시기 149
오일 午日

인가에서는 10월 말날에 떡을 쪄서 터주신에게 고사를 올리고 집안사람들을 불


러 같이 먹는데, 이 때 하는 떡을 마일병(馬日餠)이라고 한다. 무일(戊日)을 제
일로 치고 임일(壬日)이나 경일(庚日)을 그 다음으로 여긴다. 오직 병일(丙日)
은 피한다.

人家以十月午日甑餠祀土神 聚家人共啖 謂之馬日餠 戊爲上 壬庚次之 惟


丙不用

20일 二十日

강화 부근 바다 가운데에 암초가 있는데, 이것을 손돌목[孫石項]이라고 한다.


방언에 산수가 험하고 좁은 곳이 ‘목’[項]이 된다고 말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
기에 고려 때 손돌이라는 뱃사공이 10월 20일에 이곳에서 억울하게 죽어서 그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날이 되면 바람이 많이 불고 매섭게 추워 뱃사
람들은 조심하고 삼가며 집에 있는 사람도 털옷을 준비하고 근신한다.

江華海中有險礁曰孫石項 方言謂山水險隘處爲119)項 世傳高麗時120)有梢工


孫石者以十月二十日寃死于此 遂以名其地 至今値是日多風寒栗烈 舟人戒
嚴 居者亦謹備衣裘

119) 고대본(광문회본)에는 “爲”가 “謂”로 되어 있다.


120) 고대본(광문회본)에는 “世傳高麗時”이 “甞”으로 되어 있다.

150 조선대세시기 Ⅲ
11월

동지 冬至

관상감(觀象監)에서는 어람(御覽)하고 반사(頒賜)할 내년 역서(曆書)를 임금


께 올린다. 상품(上品)은 황색으로 장정한 황장력(黃粧曆)이고 그 다음은 청장
력(복粧曆), 백력(白曆), 중력(中曆), 월력(月曆), 상력(常曆) 등 종이 품질과
장정 모양으로 구별한다. 서울의 각 관청은 미리 종이를 모두 갖추었다가 관상감
에 부탁하여 인쇄한 다음 장관과 소속 관료들에게 차등을 두고 분배하여 각기 고
향과 이웃 친지들에게 줄 것을 마련하도록 한다. 이조의 서리들은 역서를 벼슬을
많이 낸 여러 진신가(搢紳家) 중에서 주인으로 삼은 집에 나누어주는데, 일명(一
命), 즉 초임(初任) 이상으로서 이조 전랑(銓郞)에 속한 자에게는 관례를 따라
청장력을 한 건씩 증정한다.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의 시에 “서리는 청장력
을 보내오고 집에서는 팥죽을 내온다.”고 하였다. 귀신을 몰아내는데 팥죽을 쓰는
것은 중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우리 풍속은 아니므로 자세히 열거하지 않는다.

觀象監進明年曆書 御覽及頒賜 上件皆黃粧121) 其次有복粧曆白曆中曆月曆


常曆等名色 以紙品粧樣爲別 京司各衙門預具122)紙物 付本監印出 長官與
郞僚例分有差 爲酬應鄕鄰之用 吏曹胥吏分主搢紳諸家所主家 自一命123)以
上名屬銓郞者 例呈복粧曆一件 李槎川秉淵詩曰 吏送복粧曆 家傳赤豆粥
辟鬼昉於中華不專爲國俗 故玆不詳列124)

121) 고대본(광문회본)에는 “粧䌙”으로 순서가 바뀌어 있다.


122) 광문회본에는 “具”가 “其”로 되어 있다.
123) 광문회본에는 “命”이 “名”으로 되어 있다.
124) 고대본(광문회본)에는 “列”이 “別”로 되어 있다.

열양세시기 151
12월

제주도는 감귤 생산지여서 세공품(歲貢品) 감귤이 동짓달과 섣달 두 달에 걸쳐


서울에 이르면 임금은 성균관 학생들에게 이것을 내린다. 그리고 친히 시험제목을
내어 절일제(節日製)의 예에 따라 시험을 치러 거수(居首), 즉 장원한 자에게는
급제를 내리는데 이것을 황감제(黃柑製)라고 한다. 서암(恕庵) 신정하(申靖
夏)125)의 시에 “팔도에서 하례 전문(箋文)이 같은 날 도착하고 제주 감귤은 그
다음으로 왔다.”고 하였는데, 동짓날 궁중의 모습을 읊은 것이다. 감귤이 세공으로
올 때 날씨가 매우 추우면 임금이 공인들을 직접 불러 보시고 옷도 주시고 먹을
것도 내려 먼 지방에서 온 백성을 위로하는 뜻을 보이시기 때문에 제주 공인들은
은택을 바라고 매우 추울 때를 기다려 장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감제는 12월에
여는 경우가 많다.
감영과 병영과 주현(州縣)의 지방관들은 연말이 되면 관할 지방의 토산물을 친
척과 친구들에게 선물로 보내는데, 이것을 세의(歲儀)라고 한다. 선물의 양과 질
은 각자의 뜻에 따르는데 평안도와 황해도 양도의 병마사(兵馬使)는 조정의 관
리로 시종(侍從)126) 이상의 벼슬을 한 자에게는 서로 알고 모르고를 떠나 세의를
하는데 단오 때 삼영(三營)에서 부채를 보내는 예처럼 물종과 서간의 말에 모두
정해진 법식이 있다.

125) 신정하(申靖夏, 1681~1716)의 본관은 평산(平山)으로 자는 정보(正甫)이고 호는 서암


(恕菴)이다. 숙종31년(1705)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 부교리(副校理)
등을 지냈다. 문집 󰡔서암집(恕菴集)󰡕이 있다.
126) 시종(侍從)은 시종신을 말하며, 조선조 때 홍문관 옥당(玉堂), 사헌부 ․ 사간원 대간(臺
諫), 예문관 검열(檢閱), 승정원 주서(注書)등 왕을 항상 시종하는 신하를 총칭한다.

152 조선대세시기 Ⅲ
濟州127) 産柑橘 歲貢以至臘二月至京師 頒賜舘學生 下御題試取如節日製
之例 居首者賜第名曰黃柑製 申恕庵靖夏詩曰 八道箋文同日至 濟州柑橘二
番來 盖至日詠禁中事也 貢柑之來値寒極 則自上引見領貢人 賜衣宣飯以示
柔遠之意 濟人覬望恩澤 必候極寒而入城 故柑製多在臘月 營閫州縣每於歲
末 以土物餉親戚知舊 謂之歲儀 多寡闊狹各自隨宜 而平安黃海兩道兵馬使
問朝廷搢紳曾任侍從以上 不以知不知爲限 物種書詞皆有定式 如三營端午
扇之例

납일 臘日128)

우리나라 역법은 동지 이후 세 번째 맞는 미일(未日)을 납일로 삼는데, 동방의


성덕(盛德)이 오행 중 목(木)에 있기 때문이다. 이날 종묘에 제사를 지내는데 1
월, 4월, 7월, 10월의 초하루에 지내는 사맹삭(四孟朔)과 더불어 오대향(五大
享)이 된다. 인가에서는 조상제사를 지내기도 하는데 초하루 삭참제(朔叅祭)나
명절에 천신하는 절천제(節薦祭)의 형식과 같다.
내의원(內醫院)과 모든 영문(營門)에서는 납일에 각종 환을 조제하여 공가와
사가, 서울과 지방 각지에 나누어 준다. 그 중 청심원(淸心元)과 소합원(蘇合元)
의 약효가 제일 좋다. 중국 연경 사람들은 청심원을 죽은 자를 일으키는 신단(神
丹)이라고 여겨 우리나라 사신이 연경에 들어가기만 하면 왕공(王公), 귀인(貴
人)들이 모여들어 달라고 하는 바람에 종종 졸라대는 것을 참지 못하여 제조 방
법을 전해주지만 마치 약밥의 예처럼 만들지 못하니 기이한 일이다. 혹자는 연경
에 우황이 없어 대용으로 타황(駞黃)129)을 쓰기 때문에 처방대로 만들어도 영험
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다.
납일에 잡은 짐승들은 모두 몸에 좋다. 그중에 특히 참새는 노약자에게 좋아 많
은 인가에서 그물을 길게 쳐 잡는다. 󰡔주례󰡕에 그물을 관장하는 나씨(羅氏)는 중

127) 고대본(광문회본)에는 “濟州古耽羅國也 地”로 되어 있다.


128) 광문회본은 “蠟日”로 되어있는데 바로잡았다.
129) 타황(駞黃)은 낙타 쓸개에서 나오는 황이다.

열양세시기 153
춘(中春)에 춘조(春鳥)를 그물로 잡아 국로(國老)를 보양한다고 하였다. 주나라
중춘은 지금 12월이다. 정씨(鄭氏) 주(注)에서 춘조(春鳥)는 지금 중국 호남성
의 참새류라고 하였다.

國曆用冬至後第三未爲臘 以東方盛德在木也 有事于太廟並四孟爲五大享


人家亦或祭先如朔叅節薦儀也130) 內醫院及諸營門以臘日造諸種丸劑 公私
京鄕無不波及 而淸心元蘇合元131)最有奇效 燕京人以淸心元爲起死神丹 我
使入燕自王公貴人無不聚首來乞 往往不勝嬲聒而傳方不能成 與藥飯一般亦
可異也 或曰燕中無牛黃代用駞黃 故雖依方造成而服之無靈 未知信否 臘日
所獲禽獸皆佳 而黃雀利於老弱 人家多張網捕之 周禮 羅氏中春羅春鳥以養
國老 周之中春今之十二月也 鄭氏註 春鳥今南郡黃雀之屬也

섣달그믐날밤 除夕

인가에서는 마루, 방, 아래채, 문, 부엌, 변소 등에 모두 밤새도록 등불을 켜고


상하노소가 닭이 울 때까지 자지 않는데, 이것을 수세(守歲)라고 한다. 아이가
피곤하여 자려고 하면 야단치면서 “오늘 밤 잠자면 두 눈썹이 센다.”고 겁을 준다.
내의원에서 벽온단(辟瘟丹)132)을 제조하여 임금께 올리면 임금은 설날 아침 일
찍 심지 하나를 불사른다. 그 처방은 󰡔동의보감(東醫寶鑑)󰡕133)에 있는데, 노래에
“신성한 벽온단이 세간에 전해져 설날 심지 하나 태우니 한해 내내 평안하리.”라
고 하였다. 여항에서는 간혹 이것을 빨간 주머니에 넣어 차고 다니기도 한다.
제석 전야에 관상감에서는 대궐 뜰에 귀신을 쫓는 의식인 대나(大儺) 행사를

130) 고대본(광문회본)에는 “也”가 빠져 있다.


131) 고대본(광문회본), 민박본에는 모두 “元” 대신 “丸”으로 나와 있다.
132) 벽온단(辟瘟丹)은 전염병을 예방한다는 향의 일종이다. 섣달 그믐밤에 이것을 술에 타
서 마시면 다음해일 년 동안 온역(瘟疫)을 피한다는 설이 있다.
133) 󰡔동의보감󰡕은 광해군 2년(1610)에 허준(許浚)이 지은 의서(醫書)로 전체 25권 25책으
로 이루어졌다. 1613년에 내의원(內醫院)에서 훈련도감의 개주갑인자(改鑄甲寅字)로 간
행하였다.

154 조선대세시기 Ⅲ
준비한다. 악공 중 한사람이 행사를 지휘하는 창수(唱帥)가 되고 몽기(蒙倛)134)
로 분장한 4명은 붉은 옷에 황금사목(黃金四目)의 가면을 쓰고 곰 가죽을 쓰고
창을 잡는다. 가면을 쓴 군졸 12명은 열두 신 당(幢)135)을 든다. 악공 10명은
도열(桃茢)136)을 잡고 뒤를 따르며 아동 수십 명은 가면을 쓰고 붉은 옷을 입고
붉은 건을 쓰고 초란이[侲子] 역을 맡는다. 창수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갑작
(甲作)은 흉직한 것을 잡아먹고, 필위(胇胃)는 호랑이를 잡아먹고, 웅백(雄伯)
은 도깨비를 잡아먹고, 등간(騰簡)은 상서롭지 못한 것을 잡아먹고, 남저(攬諸)
는 허물을 잡아먹고, 백기(伯寄)는 환상을 잡아먹고, 강량(强梁)과 조명(祖明)
은 둘이 함께 책사(磔死)137)에 기생하는 귀신을 잡아먹고, 위수(委隨)는 관(觀)
을 잡아먹고, 착단(錯斷)은 거(巨)를 잡아먹고, 궁기(窮奇)와 등근(騰根)은 둘
이 함께 벌레를 잡아먹는다. 무릇 이 열 두 신을 시켜 흉악한 것들을 내쫓기 위
해 네놈들을 위협하여 몸뚱이를 잡아다가 허리뼈를 부러뜨리고 네놈들의 살을 찢
고 내장을 뽑으려 한다. 네놈들 중 빨리 서두르지 않고 뒤에 가는 놈들은 열 두
귀신의 밥이 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초란이들은 예 하고 대답하고 엎드려 사죄
한다. 모든 악공들은 북을 치고 악기를 불며 흥을 돋우며 궁문에서 출발하여 성
문에 이르러 멈춘다. 국가에서 정한 의전(儀典)에 있는 내용이 이러한데 나는 일
찍이 궁에서 수세(守歲)한 일은 있었지만 한번도 이러한 일을 보지 못했다. 단지
각 궁전 근처에서 포를 두어 번 터뜨리고 마는 정도다. 대개 초라니 나례는 󰡔주
례󰡕나 󰡔한지(漢志)󰡕를 따른 것으로 국초에는 의전에 만들어 두었던 것인데 그
이후 이 일이 바르고 상식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 그만두게 한 것이다.

人家軒閤廊廡門竈圊溷皆點燈達夜 上下老幼限鷄鳴不眠謂之守歲 童稚困睡


則嚇曰 睡除夕雙眉白 內醫院製辟瘟丹進御 正朝早晨焚一炷 方見東醫寶鑑
歌曰 神聖辟瘟丹 留傳在世間 正元焚一炷 四季保平安 閭巷間或盛絳囊佩

134) 몽기(蒙倛)란 가로 퍼지고 딱 바라진 괴물이다.


135) 당(幢)이란 꼭대기에 우산 같은 것을 얹은 깃대다.
136) 도열(桃茢)이란 복숭아나무로 만든 귀신 쫓는 부적이다.
137) 책사(磔死)란 시체를 길거리에 버리는 무거운 형벌인 책형(磔刑)을 당한 시체다.

열양세시기 155
之 除夕前夜觀象監設大儺於闕庭 樂工一人爲唱帥 蒙倛四人朱衣假面黃金
四目蒙熊皮執戈 假面軍卒執十二神幢 樂工十人執桃茢從之 兒童數十着假
面朱衣朱巾爲侲子 唱帥呼曰甲作食歹匈 胇胃食虎 雄伯食魅 騰簡食不祥 攬諸
食咎 伯奇食夢 强梁祖明共食磔死寄生 委隨食觀 錯斷食巨 窮奇騰根共食
蠱 凡使十二神 追汝凶赫汝軀 拉汝幹節 解汝肉 抽汝肝腸 汝不急去 後者
爲糧 侲子曰喩 叩頭服罪 諸工鼓吹振作自宮門至城門乃止 國朝儀典所載如
此 而余嘗守歲于禁省未見有此事 但就各宮殿近處放火礟數次而止 盖侲儺
之法昉於周禮漢志 故國初亦嘗著爲儀典 而後來謂其事涉不經而罷之歟

156 조선대세시기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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