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fessional Documents
Culture Documents
洌陽歲時記
경도잡지 97
해제
1.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의 서지사항
□ 저자 : 金邁淳(1776~1840)
열양세시기 99
□ 작성년도 : 1819년
□ 소장처 : 연세대 도서관, 고려대 도서관, 국립민속박물관
□ 판본, 수량, 크기 : (연세대본) 筆寫本, 10卷 5冊 중 7卷, 13.8×16.9cm
(고려대본) 筆寫本, 1冊, 13.8×16.9cm
□ 주요 내용
대산(臺山) 김매순(金邁淳)의 시문집(詩文集)으로는 그가 죽은 후 39년 만에
아들 나주목사 선근(善根) 등이 편집하고 문인인 김상현(金尙鉉) 등이 정정(訂
定)하여 1879년에 활인, 간행한 대산집(臺山集)이 있고 간행을 보지 못한
대산초고(臺山草藁) 10권이 있다. 전자는 서울대 규장각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후자는 연세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중 권 7의 내용이 열
양세시기다. 대산이 초고를 작성하기는 순조 19년, 즉 1819년이다.
□ 책의 구성
10권(卷) 5책(冊)에는 옥당고사(玉堂故事),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궐여산
필 보(闕餘散筆 補), 지괴집(識愧集), 희렵집(喜獵集) 및 기타 시문(詩文)으
로 구성되어 있다. 불분권(不分卷) 4책의 내용은 보장(報狀), 완문(完文), 절목
(節目), 장계(狀啓), 감결(甘結), 전령(傳令) 등 대산(臺山)이 외관(外官)에
나아갔을 때 작성된 공안(公案)들이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의 구성은 경
도잡지나 동국세시기와 마찬가지로 월별로 하였고 맨 앞에 병서(幷序)를 넣었다.
이 책은 다른 두 세시기(동국세시기와 경도잡지)에 비해 국내 학자의 문헌
이 많이 소개되고 있으며, 특히 안동 김씨 집안 선조들의 문적을 적극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 인용된 중국 세시기 등 관련 문헌은 다음과 같다.
金堉 「羸羌」
金昌協 시
金昌翕 「新歲詩」
唐韋巨 食譜
申靖夏 시
100 조선대세시기 Ⅲ
楊萬里 「上元」 시
呂滎公 歲時雜記
呂祖謙 「祭式」
兪漢雋 「元日雜詩」
陸放翁 歲首詩
陸放翁 重五
李秉淵 시
車天輅 시
東醫寶鑑
樂府
名物
白香山集
四民月令
譯語類解
禮記
五禮儀
周禮 「夏官」
周禮 「酏食」
天寶遺事
漢志
後漢書 「禮儀志」
2. 열양세시기 와 저자 김매순(金邁淳)
열양세시기 101
달순(金達淳)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20여 년을 경기도 양주 미수(渼水)에
서 병거(屛居)하였다. 후에 예조참판, 강화부유수 등을 역임했으며 63세 이후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매진하였다. 문장(文章)으로는 홍석주(洪奭周)
등과 함께 당시 으뜸으로, 여한십대가(麗韓十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고 학문
으로는 한원진(韓元震)의 학설을 지지하는 호론(湖論)에 속했다. 덕행으로도 이
름이 있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열양세시기가 수록된 대산초고(臺山草藁)의 존재에 대한 언급은 대산에게
수학한 김상현이 쓴 대산집(臺山集) 발문(跋文)에 나온다. 이와 관련하여 위
와 같은 전거(典據)에 대한 고증과 함께 유헌집(猶軒集) 취기권(聚記卷)의
초록(鈔錄)을 보완한 집교(輯校) 작업은 민영규(閔泳珪)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향토서울(제2호,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58)에 실려 있다.
始祖
金宣平――――――――――金璠 ――――――― 生海 ―――――
洪傑女 李忱(景明君)女
生海 大孝 系)尙憲 系)光燦 壽增
李忱女 李英賢女 仁祖文衡 同知 - 府使
完山人 廣州人 左相 贈領議政 - 曹漢英女
鄭泰亨女 李義老女 金래女 - 昌寧人
迎日人 星州人 金悌男子 - 壽興(出)
李億正女 延安人 - 壽恒
全州人
壽恒 昌集 濟謙 省行 履長 復淳
進壯文壯 進文領相 進文壯承旨 壬寅禍 忠旌 - 泰淳
重領相 耆 忠獻公 忠愍公 竹醉 忠正公 不祧 - 麟淳(出)
文衡 夢窩 宋炳遠女 醉柏軒 洪重衍女 - 頤淳
文忠公 朴世楠女 峻行(出)
不祧 文谷 墓驪州 元行(出)
羅星斗女 達行 履基
墓楊州 李潗女
坦行 履素
蔭南原府使
余樂軒 韓百增女
102 조선대세시기 Ⅲ
昌協 崇謙 元行(系) 履安 鳳淳(系)
進文壯禮判 觀復庵 進士議祭酒 進士議祭酒
文衡 文簡公 朴權女 贊善 文敬公 贊善 三山齋
不祧 農岩 美湖 洪龜祚女 李纘華女
李端相女
履直 麟淳(系)
夭 李慶甲女
昌緝(出)
生師傅賓主
圃蔭 洪處宇女
昌立 厚謙(系) 簡行(系) 履錫
十八夭 澤齋 蔭永柔
李敏敍女 李秉成女
열양세시기 103
열양세시기 洌陽歲時記
기 記1)
열양세시기 105
은 일이다. 두오랑(杜五郞)6)이 “편지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한 것처럼 써
놓고도 묻어버리는 일도 흔할 터인데 굳이 이것을 적어 나의 창피한 면을 알리고
자 한다.
기묘년(1819) 유두일(流頭日)에 열양외사(洌陽外史)가 씀.
106 조선대세시기 Ⅲ
정월
입춘 立春
열양세시기 107
고 가지가 없으면 흉년으로 여긴다.
원일 元日
12) 䪨은 韵, 韻과 같은 글자이다.
13) 민박본에는 “寫立春大吉四字貼之”로 되어있다.
14) 고대본에서 以立春日을 추가하였다
15) 육방옹(陸放翁)은 중국 송나라 산음(山陰) 사람으로, 이름은 유(游)이며, 방옹은 호다.
보장각(寶章閣)의 대제(待制)를 지냈고 85세를 살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16) 「세수시」는 「세수서사시(歲首書事詩)」로 검남시고(劒南詩稿) 권38에 있다.
108 조선대세시기 Ⅲ
중들은 섣달그믐밤 자시가 지나면 인가 문밖을 돌며 큰 소리로 재미(齋米)를
청 한다. 수세(守歲)하느라 모여 앉아 통금이 해제된 것도 모르고 떠들다가 이
소리를 들으면 서로 돌아보며 “벌써 새해가 되었네.”라고 한다. 정조 임금 원년에
중이 도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 이후로 이러한 풍속은 끊어졌지만 지방에
는 간혹 있는 일이다.
대궐 궁전 부근에서 포를 각기 세 번 쏜다. 지방 관아에서는 광대들이 괴뢰의
탈을 쓰고 바라를 울리고 곤봉을 휘두르고 호령을 하면서 무엇을 몰아내는 시늉
을 하며 몇 차례 두루 돌아다니다가 나간다. 대개 악귀를 쫓기 위해 행해 온 나
례(儺禮)의 오랜 풍속이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17)에는 설날과 동짓날에 모두 임금이 어전(御殿)으
로 나와 하례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어 때를 당하면 신하들은 품계를 올려 행사
를 치르려 하지만 그때마다 대개는 임금이 임의로 정지시킨다. 그 이유는 조선왕
조의 법도가 겸손하고 검소한 것을 서로 받들므로 문서로는 예법이 존재함을 밝
혀두지만 실제로는 이를 생략하여 간편하고 꾸밈없음을 쫓으려는 것으로 중국에
서도 한나라나 당나라 이래로 따라오지 못하는 바다.
하루 중 밝고 맑은 때를 골라 의정부 대신이 임금에게 새해 문안드리기 위해
종친과 문무백관 중 2품 이상 신하를 인솔하여 인정전 뜰 품계석 아래 문무를 가
려 순서대로 선다. 승지 1인과 사관 2인이 나아가 각 궁전의 승전중사(承傳中
使)18) 궁의 중사는 승언중사(承言中使)라고 칭한다. 에게 청을 넣으면 중사는 대전에
열양세시기 109
이라고 말한다.”라고 구두로 전하면 대신 이하 모두 물러간다. 약방(藥房), 내각(內
110 조선대세시기 Ⅲ
설날 이후 수삼일 동안은 장안의 남녀들은 여유롭게 단장하고 나들이옷을 입고
돌아다니다가 구석진 길에서도 아는 이를 만나면 문득 반갑게 웃으며 “새해엔 크
게 평안하시오.”라고 말하면서 길하고 경사스런 일만 들추며 서로 축하하는데, 예
를 들면 “(올해엔) 아들을 보시오”, “벼슬에 나아가시오”, “병환이 없기를”, “돈
많이 버시오”, 등의 말로 각기 상대방이 바라는 사항으로 문안하는데, 이것을 덕
담(德談)이라고 한다. 돌아가신 나의 고조할아버지가 지은 「신세시(新歲詩)」에
“장안 남녀가 길에서 축하를 나누는데 이날 안색은 양쪽 모두 윤기가 있다.”고 하
였다.26)
열양세시기 111
房內閣政院玉堂詣閤門問安如上儀 至日除夕放此 除夕用申時 外官牧使以
上正至日進箋陳賀 閣臣雖縣監亦進箋 誕日放此 先朝每於元朝 下御製勸
農綸音于八道觀察使四都留守 盖東京以立春日下寬大書之意也 自元日至三
日承政院不入各房公事 內外衙門不開坐 市廛閉 囹圄空 公卿家不許輒通門
刺 農巖詩曰朱門賓刺留三日翠勺屠蘇起少年 按四民月令云 進酒次第當從小起以
年少者先起31) 男女老少皆着新套衣服曰歲庇廕 遍謁親戚鄰里長老曰歲拜 客
112 조선대세시기 Ⅲ
둘러 그리고 다섯 번째 동그라미마다 안으로 직선으로 동그라미 2개를 그린다.
정 가운데에 동그라미를 하나 그리면 모두 29개다.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동
그라미에는 자호를 표기하는데 첫 번째는 입(入), 두 번째는 공(拱), 세 번째는
열(裂), 네 번째는 출(出)이라고 쓰고 가운데 동그라미는 방(房)이라고 쓴다. 윷
은 둥근 나무토막을 둘로 쪼개 산가지 모양으로 네 개를 만든다. 두 사람이 상대
가 되어 던지는데 엎어지고 잦혀진 상태를 보고 정해진 동그라미 숫자에 따라 말
을 두어 나간다. 모두 엎어지면 모로 다섯 칸을 움직이고, 모두 잦혀지면 윷[柔]
으로 네 칸, 셋이 잦혀지고 하나가 엎어지면 걸로 세 칸, 둘씩 잦혀지고 엎어지면
개로 두 칸, 셋이 엎어지고 하나가 잦혀지면 도로 한 칸을 움직인다. 가야할 칸에
말이 미리 있을 때 적의 말이면 먹고 자기 말이면 합한다. 모나 윷이 나오거나
적의 말을 먹으면 연이어 던진 다음 모두를 합쳐 계산한다. 말을 두는 방식은 오
른쪽에서 돌아 한 바퀴 돌고 나오는데 ‘입이나
’ ‘공’ 위치에 간 말은 꺾어 안으로
빨리 돌 수 있고 ‘입’으로 들어간 말은 ‘방에
’ 이르면 또 왼쪽으로 꺾을 수 있으므
로 가장 빠르다. 그 속도의 차이나 어긋나고 바름이 예측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
은 네 말을 빨리 나오게 하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
여자아이들은 짚을 베개 모양으로 묶어 땅에 놓고 그 위에 널판을 올려놓은 다
음 좌우로 균형을 맞추고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서로 엇갈리며 뛰는데, 몸을 높이
올릴수록 잘한다고 한다. 이것을 널뛰기[跳板戱]라고 한다.
설날 밤에 민속에서는 이강신(羸羌神)이 인가에 들어와 신을 훔치는데, 이를
당한 사람은 재앙이 있다고 하여 집집마다 신을 감추고 아이들에게는 일찍 자고
문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훈계한다. 처음에는 어린아이들을 겁주려는 데서 나온것
같으나 이제는 익숙한 풍속이 되었다. 잠곡 김육(1580~1658)은 1619년 설날에
다음과 같은 「이강(羸羌)」36)이란 제목의 오언고시(五言古詩)를 썼다.
열양세시기 113
牛興仁門南郊之牛崇禮門兩門牛入日千頭一入城中無返魂 詞雖近俚 而亦可
謂記實矣 自元日至上元 少年相聚作四木戱 或稱擲柶 過上元則收局藏之謂
不利於稻 諺曰過望擲柶禾稻死 其法畵紙爲圈 二十圈在外圓布 每五圈向內
直布 二圈中置一圈 摠二十九圈 外圈向內處各標字號 第一曰入 第二曰拱
第三曰裂 第四曰出 中一圈命之曰房 剖木爲四枚如环珓狀 兩人對擲 視其
仰俯 計圈置馬而行之 皆俯曰牡行五圈 皆仰曰柔行四圈 三仰一俯曰桀行三
圈 俯仰各二曰開行二圈 三俯一仰曰刀行一圈 先有馬當其圈 敵則食之 己
則合之 得牡柔者食敵馬者連擲合計 凡置馬皆從出右 繞行于外一周而出 値
入拱二圈則折而內差速 由入者値房則又折而左最速矣 遲速奇正不一其端
大要先出四馬者勝 兒女輩束藁如枕形置之地 加板其上 令左右適均 兩人對
立迭跳以竦 身高者爲雋 名曰跳板戱 元日之夜 俗爲羸羌神入人家竊屨 被
竊者有殃 家家取屨藏之 戒兒童早睡無得出門 其初似出於誑嚇小兒 而遂以
成俗 潛谷金相國堉有羸羌詩曰
114 조선대세시기 Ⅲ
부호들 집은 훌쩍 넘어 들어오고 乘陵富豪宅
가난한 마을은 걸어서 들어오지 踐踏貧賤鄕
주인 잠들기를 몰래 기다리다 潛伺主人睡
신발 훔치고는 재앙을 내리니 竊履施禍殃
집집마다 모두 두려운 마음으로 家家盡疑懼
대문 걸어 잠그고 신발 깊이 감추지 閉戶深自藏
아이들은 겁이나 감히 밖을 못나가고 兒童不敢出
아녀자들은 서로 놀라 떨고 있으니 婦女相驚惶
맘대로 조화의 권세를 오로지 하고 頗專造化權
삶과 죽음의 그물망 잡을 만하지 能執生死網
예로부터 내려오는 얘기라고 하나 流傳自古昔
그 말 참으로 황당하다 此語誠荒唐
인생에는 정해진 분수가 있어 人生有定分
대명은 하늘에 달려 있는 법인데 大命懸穹蒼
하찮은 한 마리 요괴가 么一麽妖魅
아무리 독한들 어찌 상처 입힐까 雖毒焉能傷
하물며 상제의 밝은 빛이 又況上帝明
아래 세상을 두루 비추시며 照臨下土方
온갖 신들은 각기 자리 지키고 百神守其位
일월성신 밝은 빛 들어내는데 星辰耀精芒
어찌 이런 기괴한 귀신을 받아들여 其容此怪鬼
망령되게 기세를 부리게 하나 妄使氣勢張
단지 생각건대 천도가 멀다보니 但念天道遠
짧은 생각으론 헤아리기 어렵구나 難以寸心量
사악함은 본디 바름을 해치고 邪固害於正
이치도 간혹 법에 어긋나는데 理或反其常
망망한 저 넓은 하늘 속에 茫茫廣莫中
요기가 어찌 창성할 수 없으랴 得無妖氣昌
열양세시기 115
깊이 생각하니 온갖 감회 일어나고 沈思百感生
전혀 맹랑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지 恐亦非孟浪
어찌하면 의천검 큰 칼을 얻어 安得倚天劒
구름 뚫고 그 놈 내장 도려낼까 決雲刳其腸
116 조선대세시기 Ⅲ
데,40) 여기서 분견이란 강정을 말한다. 퇴(䭔)는 찐 떡이다.
인일 人日
열양세시기 117
工曹進花勝 又鑄銅如圓毬狀 上刻人形名曰銅人勝 殿宮各進一枚 正月人日
三月三日七月七夕九月九日 下御題于成均館試取上齋生 以大臣及兩館提學
爲讀券官詣榻前科次 居首者往往賜第 其餘頒賞有差名曰節日製 有時並四
學生許赴謂之通方外
상신일 上辛日
상해일 上亥日
118 조선대세시기 Ⅲ
婦女以上亥日作澡豆 諺曰豕日作豆鼠日盛飾 出去親哥還家不識 謂顔色美
好改觀也
보름날 上元
열양세시기 119
만 민(閩)에서 유학이 일어난 것과 같다. 문물이 본시 이런 것인데 어찌 약밥뿐
이겠는가.
이날 날이 밝아올 때 술을 한잔 마시는데, 이것을 귀밝이술[明耳酒]이라 하고
밤 세 톨 깨무는 것을 부스럼 깬다[咬瘡果]고 한다.
또 이른 새벽에 정화수 한 그릇 길어오는 것을 용알뜨기[撈龍子]라고 한다. 정
결한 종이에 흰밥을 싸서 강물에 던지는 것을 어부심[魚鳧施]이라고 한다.
부녀자나 아동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친한 사람을 만나면 급히 부른다. 그 사람
이 응답하면 곧 “내 더위 사라.”고 한다. 불러도 지나가고 응하지 않으면 팔지 못
한 것이다.
10월 초부터 남자아이들은 연날리기를 하고 여자아이들은 나무로 만든 작은 호
로(葫蘆) 3개를 차고 다닌다. 이듬해 정월 보름밤이 되면 가지고 놀던 연은 공중
으로 날려 보내고 차고 다니던 호로는 길에 버리는데 엽전 1전씩 매단다. 이를
방액(防厄), 즉 액막이한다고 한다.
여항의 소민들은 점쟁이[日者]에게 명수(命數)를 물어 흉성(凶星)이 든 해라
는 점이 나오면 제웅[芻人]을 만들고 뱃속에 엽전을 넣어 길가에 버린다. 그러면
이를 기다리던 아이들이 제웅을 치고 부수어 엽전을 빼간다. 이를 대액(代厄),
즉 액땜이라고 한다.
보름날 밤에 열두 다리를 걸어서 건너면 열두 달 액을 모두 없앨 수 있다고 하
여 재상과 귀인으로부터 여항 백성들까지 늙거나 병든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리밟기를 하러 나온다. 가마나 말을 타고 오기도 하고, 지팡이도 짚고 나막신을
끌고 나오기도 하여 거리가 사람들로 꽉 찬다. 악기와 술병이 사람들이 모인 곳
마다 벌려 있다. 일 년 중에 도읍이 구경꾼들로 성황을 이루는 날은 오직 보름밤
과 사월 초파일로 이 두 날만은 매번 임금의 명으로 통금을 해지한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볏짚을 만들고 쌀 주머니를 다는데, 위는 뾰쪽하게 하고 아
래는 넓게 하여 장대에 묶어 마당 가운데에 세운다. 이것을 화적간(禾積竿), 즉
볏가릿대라고 한다. 이것은 2월 초하루에 장대를 눕혀 매단 쌀을 꺼내 떡을 해
먹는다.
농가에서는 초저녁에 홰를 만들어 불을 붙인 다음 무리를 지어 동쪽을 향해 달
120 조선대세시기 Ⅲ
리는데, 이것을 달맞이[迎月]라고 한다. 달이 위로 뜨면 그 둘레의 색을 보고 그
해 풍년이 들지, 흉년이 들지 점을 친다.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47)의 다음
과 같은 시가 있다. “정월보름 농가에선 언제나 달뜨기를 기다린다. 북쪽 가까이
뜨면 산골에 풍년들고 남쪽으로 기울면 해변 곡식이 잘 익는다. 달이 붉으면 가
물까 걱정이고 흰색이면 홍수가 날까 두렵다. 알맞게 황색이어야 대풍년이 들 것
이로다.”
농민들은 수수깡을 세로로 가운데를 갈라 한쪽 편에 작은 구멍 열두 개를 뚫고
그 구멍마다 콩 한 알씩 박아 넣어 열두 달을 나누어 표시한다. 다른 한 쪽도 같
은 간격으로 열두 구멍을 파서 둘을 합친 다음 봉해서 물속에 넣어 하룻밤을 재
운 후 꺼내 열어보아 콩이 얼마나 불었는가에 따라 그달이 비가 많을 것인지 가
물 것인지 점치는데, 이것을 달불음[潤月]이라고 한다.
시정 소년들은 빈 공터에 모여 조를 나누고 진을 친 다음 돌을 던져 승부를 내
는데, 이것을 편싸움[邊戰]이라고 한다. 진행 도중에 머리가 깨지고 눈을 다쳐도
동정하는 일이 없다. 속설에 이기는 편의 방위에서 풍년이 든다고 한다.
향촌의 부잣집에서는 잡곡밥을 지어놓고 품을 팔아 어렵게 사는 이웃 사람들을
불러 한 그릇씩 먹인다. 부잣집이 많은 동네에서는 하루에 여러 그릇을 먹게 된
다. 속담에 “밥 아홉 그릇 먹고 땔감 아홉 짐 한다.”고 하는데, 밥을 배불리 먹어
기력이 강해졌다는 말이다.
이날 김에다 취나물 등속과 밥을 싸서 많이 먹으면 좋다고 하는데, 이를 복쌈
[縛苫]이라고 하며 역시 풍년을 기원하는 뜻이 있다.
보름에 인가에서는 개를 굶기는데 이날 먹이면 개 몸에 파리가 들끓는다는 속
설 때문이다. 속담에 명절을 굶고 넘어가는 사람을 비웃어 “개 보름 쇠듯 한다.”
고 한다.
열양세시기 121
粘稻米畧蒸爲飯 拌油蜜豉醬棗栗取肉細切投48)之多寡視米 再蒸爛熟 薦祖
羞賓鄰里相饋 名曰藥飯 東俗謂蜜爲藥 故蜜飯曰藥飯 蜜果曰藥果 世傳新羅炤智王
感烏告射琴匣之異 作以飼烏 遂爲土風云 聞譯人言 我使赴燕 値上元必令
饔人設此 燕中貴人得而甞之莫不變色大驩 百味盡廢 傳其方不得成 烏告49)
之說雖甚荒誕 中國無是物 則起於土風似不誣也 近閱唐韋巨源食譜有曰油
畵明珠 注云上元油飯摠藥飯材料而約言之必將曰油飯 畵者丹漆錯也 明珠
者潤麗色也 意藥飯 故是中國物而傳于東 自新羅始好事者從而傳會耳 然則
中國之昔有而今無何也 曰周魯無禮制而官紀於郯 河洛無絃誦而儒興於閩物
固有然者 豈獨藥飯哉 淸晨飮酒一盞曰明耳酒 嚼栗三[曰咬瘡果 凌晨汲井
華水一器謂之撈龍子凈紙裹白飯投水謂之魚鳧施 婦女兒童朝起遇所親者急
呼之 其人應則曰買吾暑暍 去不應則以爲賣不售 兒童以十月初 男放紙鳶
女佩木雕小葫蘆三枚 至上元夜鳶飄于空葫蘆捐于道 各繫50)一文錢 名曰防
厄 閭巷小民問命于日者謂年直凶星 則作芻人納錢于腹棄之道側 聽羣兒打
破取錢而去 名曰代厄 上元夜踏過十二橋謂之度盡十二月厄 自卿宰貴人以
至委巷庶民除老病外無不畢出 輿馬杖屧塡塞街坊 笙簫壺榼所在成聚 一年
中都邑遊觀之盛惟上元與四月八日爲最 此兩夜每降旨弛禁 有田者織稻穰貯
米束之 令上銳下廣縛竿立庭中謂之禾積竿 至二月初吉 偃竿取米作餻啖之
農家以初昏束炬點火 成羣向東而走 謂之迎月 月旣上 眂其輪色占歲美惡
車五山天輅詩曰 農家正月望 常51)候月昇天 近北豐山峽 差南稔海邊 赤疑
焦草木 白怕漲川淵 圓滿中黃色 方知大有年 農人取薥52)黍莖 中剖之 一邊
鑿小竅十二 每竅納菽一枚 分標十二月 一邊相對鑿竅如其數 復合而封之
投水中一宿 而出啓視燥濕 卜本月澇旱 謂之潤月 市井少年就空曠處 分曹
布陣投石決勝 謂之邊戰 雖破壞頭目不恤也 俗謂勝邊方位占豊年 鄕村上戶
作雜穀飯招隣里傭保人饋一椀 上戶多處或一日累椀 諺曰喫飯九椀負薪九擔
122 조선대세시기 Ⅲ
言飽喫氣力健也 用海衣馬蹄菜之屬包飯而喫以多爲貴 名曰縛苫 亦祈穀之
意也 上元日人家不飼犬 謂飼則蠅繁 俗嘲飢度良辰者曰狗兒上元
열양세시기 123
2월
초하루 朔日
124 조선대세시기 Ⅲ
시를 보면 “중화절에 자를 하사하니 홍니(紅泥)55)를 구중궁궐에 내린다. 이것으
로 오색선을 재단하여 산룡(山龍)56)을 깁도록 하기 위함이다.”고 하였다. 이 자
는 시중에 쓰이는 포백자[布帛尺]보다 조금 짧다. 내 생각에는 당시(唐詩)에 2
월 초하루를 중화절이라고 하였고, 백향산집(白香山集)57)에는 중화절에 자를
하사받고 감사장을 쓴 글이 있는데 “오늘 홍아(紅牙)로 만든 자와 은으로 만든
자 각기 하나를 하사받았는데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을 맞이하여 도량을 모
두 동일하게 하시라는 명을 내리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초6일 初六日
열양세시기 125
農家以初昏眂58)昴宿去月遠近以占歲事 竝行及差前尺寸以內爲吉 若先後太
遼闊 則謂歲將儉 幼少不見収哺也 驗之頗中
상정 上丁
춘분 春分
126 조선대세시기 Ⅲ
3월
열양세시기 127
면서 자제들까지 참석하도록 명하였다. 승지와 사관까지 합치면 모인 수는 39인
이다. 정조가 승하하신 후 5년이 되는 갑자년(1804)에 내가 내각의 직책을 맡게
되어 봉모당(奉模堂)64)을 배알하고 이어 봄철 대봉심(大奉審)을 거행하였는데,
그 때 개유와(皆有窩)65)에 보관된 중국 서적을 볕 쬐이는 일로 후원에 가니 꽃
이 만발하였다. 늙은 서리가 앞을 인도하면서 연못과 누대와 정자를 가리키며 “이
곳이 정조 임금께서 각신들에게 잔치를 베푸시던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우두커
니 서서 이를 바라보니 선왕을 보는 듯 감회가 일었다.
청명 淸明
128 조선대세시기 Ⅲ
다는 문구를 넣었는데, 이 중 청명 때 하는 개화를 제일 중요하게 여긴다. 내병조
(內兵曹)67)에서는 청명절에 들어가는 시각을 기다렸다가 버드나무에 구멍을 뚫
고 비벼서 불을 만들어 올리면 임금은 이것을 내외의 모든 관청과 대신 집에 내
린다. 주례(周禮) 「하관(夏官)」을 보면 사관(司爟)68)이 화령(火令)을 관장한
다고 하였다.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주례에는 사계절을 따라 불을 바꾸는데
오직 3월을 제일로 치는 이유는 큰 불을 일으키는 심성(心星)69)이 이때 제일 높
게 뜨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한식 寒食
上墓行祭一遵朱子家禮 伐草修莎亦用是日
삼짇날 三日
열양세시기 129
유현(儒賢)이 무리지어 나오고 예를 좋아하는 사대부가 많아지면서 시제를 중히
여기게 되었는데 대개는 가난하여 사시제(四時祭)를 다 지내지 못하고 봄가을로
두 차례 지내는데 그치는데, 봄에는 중삼(重三), 즉 삼월 삼일을, 가을에는 중구
일(重九日)에 행하는 자가 많다.
곡우 糓雨
130 조선대세시기 Ⅲ
4월
열양세시기 131
초파일 八日
132 조선대세시기 Ⅲ
(老黃門)이 나와 엎드려 아뢰기를 “등은 이와 같은 수준 정도면 족한 줄로 압니
다. 불을 살라 밝음을 얻을 수 있는 점은 피차 한가지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잠
자코 말없이 있다가 내영의 등은 걷어 내보내고 나중에 온 등을 대궐안 뜰에 걸
라고 명을 내리었다. 이날 이 일을 본 자들은 경연 신하와 호위병으로부터 대궐
안 하인과 문지기에 이르기까지 서로 쳐다보며 동요하는 기색이었다. 오호라 선왕
이 가까이 있는 말을 잘 살핀 일은 순(舜) 임금과도 부합되는 것으로 비록 문지
방이나 길을 소제하는 천한 사람도 이 일로 충성심을 느낄 수 있었으니, 이와 같
이 성절(盛節)을 이루심은 수레의 규식(在輿之規)76)에도 있고 침실의 잠언(居
寢之箴)77)과도 같이 오로지 옛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일을 일으킨 노황문
은 궁중에 오래 거하여 임금이 예우하던 원로인데, 외부로는 그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자다.
열양세시기 133
筵臣衛士以至掖隸門卒無不相顧動色 嗚呼先王之好察邇言同符大舜 故雖門
巷掃除之賤亦得以因事納忠 成此盛節在輿之規居寢之箴孰謂專美於古昔哉
老黃門盖宮中耆宿 上所禮遇者 外廷不知其名云
134 조선대세시기 Ⅲ
5월
단오 端午
열양세시기 135
나누어 주어 새기게 하는 것은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한 것
을 보면 그 유래가 몹시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남녀 연소자들은 그네뛰기를 한다. 서울이나 시골이나 모두 그네를 뛰지만 관서
지방이 더욱 활발하다.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서로 모여 즐기는
것은 설날과 거의 같다.
관상감에서는 도장으로 찍은 붉은 부적을 올리면 이것을 문 상방(上枋)에 붙인
다. 공경대부나 측근 신하들도 관례에 따라 부적을 얻는다. 그 반사문(頒賜文)은
다음과 같다. “오월 오일은 천중절이다. 위로 하늘이 내신 녹을 얻고 아래로 땅이
준 복을 받으며, 치우(蚩尤) 신의 동두(銅頭)와 철액(鐵額)과 적구(赤口)와 적
설(赤舌)로 4백 4가지 병을 일시에 소멸하니 율령을 내린 듯 서둘러라.” 정조
임금 을묘년(1895) 이후로 이것을 불경인 은중게(恩重偈)로 바꾸었는데 “나무
삼만다 모다니 엄 아아나 사바하오.”라고 하여 대개 효심을 일으키는데 화정(和
靖)의 금강경(金剛經)을 이용한 것이다.
직제학 벼슬을 했던 집안 당내 형 집에 선왕이 내린 쑥호랑이[艾花]가 하나 있
다. 가지 하나를 길이가 예닐곱 치, 두께가 세 푼 되게 깎고 몸체 중간부터 점차
좁게 하여 밑은 뾰족하게 만들었으므로 머리에 꽂기 좋다. 몸체의 중간 윗부분은
양면으로 창포 잎을 붙였는데 너비가 몸체만 하므로 그 나머지를 밖으로 약간 나
오게 한 것이 갑옷이 헤진 모양과 같다. 진홍 모시를 잘라 꽃을 만든 다음 그 속
을 잎이 있는 곳까지 뚫고 풀로 붙여 꽃받침이 위로 향하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오색실로 몸체를 꽃받침까지 비탈지게 동여 묶었다. 애호는 대개 궁중 풍속으로
그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추측컨대 명물(名物)83) 책을 참고하면 이것은 갈대쑥
(蒹艾)과 장명실(長命縷)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는 것 같으나 재료에 정작 쑥을
보지 못해 의심이 간다. 그러나 육방옹(陸放翁)의 시84) 「중오(重五)」에 “심하게
시들었지만 여전히 쑥 한가닥이 비녀가 된다.”고 한 것은 이 식물, 즉 쑥을 말한
것이다.
136 조선대세시기 Ⅲ
사도시(司䆃寺)85)에서는 궁궐 창고의 메주콩을 도성 근처 사찰의 중들에게 맡
겨 장을 만든 다음 장곡(醬麯)은 역어류해(譯語類解)86)에 나오는데 우리 풍속으로 메주를
열양세시기 137
國人稱端午曰水瀨日 謂投飯水瀨享屈三閭也 地之相去萬有餘里 世之相後
千有餘年 謠俗不改精爽如在 何令人感慕至此也 抑東人之懷賢好古別於他
方 如韓子所云燕趙之士出乎其性者耶 男女丱角者採菖蒲煎湯洗沐 取根白
四五寸洗消 令淨朱塗其端 或揷或佩 按大戴禮五月五日蓄蘭爲沐浴 宋王沂
公端午帖旋刻菖蒲要辟邪 其所從來盖遠矣 男女年少者爲鞦韆戱 京鄕皆然
而關西尤盛 鮮衣美食相聚娛嬉 與元朝略同 觀象監印進朱符 揭之門楣 卿
宰近臣例得 頒賜文曰 五月五日 天中之節 上得天祿 下得地福 蚩尤之神
銅頭鐵額 赤口赤舌 四百四病 一時消滅 急急如律令 先朝乙卯以後易以恩
重偈 文曰曩謨三滿多 沒駄喃唵 誐誐 曩婆嚩訶 盖孝思所推而用和靖金剛
之意也 堂兄直學宅有 先朝時端午所賜艾花一枝 削木爲體長可七八寸博三
分許 自半以下漸殺至本而銳之令可簪 上半兩面夾以菖蒲葉 其博凖體其長
出體外少許 對袖如甲拆狀 剪絳紵爲花竅其心貫至葉處中貼糊之令瓣向上
以五色絲繫跗下斜縱過瓣纒束竟體 盖禁中故事 而未詳其緣起何 竊稽名物
似蒹艾長命縷二義 而材料中不見所謂艾者亦可疑也 放翁重五詩云 衰甚猶
簪艾一枝 卽此物也 司䆃寺以御廩黃豆分授近城寺刹雇僧徒 製醬麯 醬麯見譯
초10일 初十日93)
138 조선대세시기 Ⅲ
년, 상왕위 4년 하늘을 섬기고 근면히 백성을 다스림에 한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대점(大漸), 즉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은하수를 보며 가뭄을 걱
정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옥황상제를 만나면 비를 내려달라고 빌어 우리 백성에
게 혜택을 주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임종을 하자94) 하늘에서 과연 비가 쏟아졌
다. 이로부터 매년 태종의 기신일이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문득 비가 내리니 백
성들이 이를 태종우(太宗雨)가 내렸다고 한다. 선조 임금 때인 임진년(1592)이
되기 수년 전부터 이러한 징험이 점점 줄어들더니 얼마 안 있어 왜란이 일어났으
므로 사람들이 더욱 이상하게 여겼다. 임금이 돌아가신 해가 영락 20년(1420)이니 임진년
열양세시기 139
6월
보름 十五日
140 조선대세시기 Ⅲ
망이로 골고루 손바닥 크기로 민다. 그리고 늙은 오이를 잘게 썰어 돼지, 돼지고
기, 쇠고기, 닭고기 등을 넣고 기름과 간장으로 조미한 것으로 푹 익혀 소를 만든
다음 이것을 양쪽 머리를 말아 합친 가운데에 넣어 오므리면 만두와 비슷한 모양
이 된다. 이것을 푹 쪄서 초장에 찍어 먹는다.
여형공(呂滎公)101)의 세시잡기(歲時雜記)에 “단오 때 수단을 만드는데, 또
한 백단이라는 이름이 있고 정교한 것은 적분단(滴粉團)이라고 한다.”고 했다. 장
열양세시기 141
頭形 蒸熟蘸醋醬啖之
呂滎公106)歲時雜記107)云 端午作水團 又名白團 其108)精者名曰滴粉團 張耒
복날 伏日
142 조선대세시기 Ⅲ
7월
중원 中元
열양세시기 143
世傳新羅故俗 王女率六部女子 自七月旣望早集大部庭績麻 至八月十五日
考功多少 負者置酒食以謝勝者 相與歌舞作百戱而罷 故以七月望日爲百種
節 八月望日爲嘉排日 或曰羅麗崇佛倣盂蘭盆供遺俗 以中元日具百種花果
供養祈福109) 故以名其日 二說未詳孰是 今則惟存其名而並無其事 然僧家
以是日設齋薦先魂 市井小民相聚燕110)飮以爲樂 盖略沿舊習也
144 조선대세시기 Ⅲ
8월
추분 秋分
열양세시기 145
이루지 못하였다.
중추 中秋
146 조선대세시기 Ⅲ
有不行者惟寒食中秋爲盛 而寒食又不如中秋之盛 柳子厚所謂皂隸傭丐皆得
上父母丘墓者 惟此日爲然
열양세시기 147
9월
148 조선대세시기 Ⅲ
10월
초하루 朔日
열양세시기 149
오일 午日
20일 二十日
150 조선대세시기 Ⅲ
11월
동지 冬至
열양세시기 151
12월
152 조선대세시기 Ⅲ
濟州127) 産柑橘 歲貢以至臘二月至京師 頒賜舘學生 下御題試取如節日製
之例 居首者賜第名曰黃柑製 申恕庵靖夏詩曰 八道箋文同日至 濟州柑橘二
番來 盖至日詠禁中事也 貢柑之來値寒極 則自上引見領貢人 賜衣宣飯以示
柔遠之意 濟人覬望恩澤 必候極寒而入城 故柑製多在臘月 營閫州縣每於歲
末 以土物餉親戚知舊 謂之歲儀 多寡闊狹各自隨宜 而平安黃海兩道兵馬使
問朝廷搢紳曾任侍從以上 不以知不知爲限 物種書詞皆有定式 如三營端午
扇之例
납일 臘日128)
열양세시기 153
춘(中春)에 춘조(春鳥)를 그물로 잡아 국로(國老)를 보양한다고 하였다. 주나라
중춘은 지금 12월이다. 정씨(鄭氏) 주(注)에서 춘조(春鳥)는 지금 중국 호남성
의 참새류라고 하였다.
섣달그믐날밤 除夕
154 조선대세시기 Ⅲ
준비한다. 악공 중 한사람이 행사를 지휘하는 창수(唱帥)가 되고 몽기(蒙倛)134)
로 분장한 4명은 붉은 옷에 황금사목(黃金四目)의 가면을 쓰고 곰 가죽을 쓰고
창을 잡는다. 가면을 쓴 군졸 12명은 열두 신 당(幢)135)을 든다. 악공 10명은
도열(桃茢)136)을 잡고 뒤를 따르며 아동 수십 명은 가면을 쓰고 붉은 옷을 입고
붉은 건을 쓰고 초란이[侲子] 역을 맡는다. 창수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갑작
(甲作)은 흉직한 것을 잡아먹고, 필위(胇胃)는 호랑이를 잡아먹고, 웅백(雄伯)
은 도깨비를 잡아먹고, 등간(騰簡)은 상서롭지 못한 것을 잡아먹고, 남저(攬諸)
는 허물을 잡아먹고, 백기(伯寄)는 환상을 잡아먹고, 강량(强梁)과 조명(祖明)
은 둘이 함께 책사(磔死)137)에 기생하는 귀신을 잡아먹고, 위수(委隨)는 관(觀)
을 잡아먹고, 착단(錯斷)은 거(巨)를 잡아먹고, 궁기(窮奇)와 등근(騰根)은 둘
이 함께 벌레를 잡아먹는다. 무릇 이 열 두 신을 시켜 흉악한 것들을 내쫓기 위
해 네놈들을 위협하여 몸뚱이를 잡아다가 허리뼈를 부러뜨리고 네놈들의 살을 찢
고 내장을 뽑으려 한다. 네놈들 중 빨리 서두르지 않고 뒤에 가는 놈들은 열 두
귀신의 밥이 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초란이들은 예 하고 대답하고 엎드려 사죄
한다. 모든 악공들은 북을 치고 악기를 불며 흥을 돋우며 궁문에서 출발하여 성
문에 이르러 멈춘다. 국가에서 정한 의전(儀典)에 있는 내용이 이러한데 나는 일
찍이 궁에서 수세(守歲)한 일은 있었지만 한번도 이러한 일을 보지 못했다. 단지
각 궁전 근처에서 포를 두어 번 터뜨리고 마는 정도다. 대개 초라니 나례는 주
례나 한지(漢志)를 따른 것으로 국초에는 의전에 만들어 두었던 것인데 그
이후 이 일이 바르고 상식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 그만두게 한 것이다.
열양세시기 155
之 除夕前夜觀象監設大儺於闕庭 樂工一人爲唱帥 蒙倛四人朱衣假面黃金
四目蒙熊皮執戈 假面軍卒執十二神幢 樂工十人執桃茢從之 兒童數十着假
面朱衣朱巾爲侲子 唱帥呼曰甲作食歹匈 胇胃食虎 雄伯食魅 騰簡食不祥 攬諸
食咎 伯奇食夢 强梁祖明共食磔死寄生 委隨食觀 錯斷食巨 窮奇騰根共食
蠱 凡使十二神 追汝凶赫汝軀 拉汝幹節 解汝肉 抽汝肝腸 汝不急去 後者
爲糧 侲子曰喩 叩頭服罪 諸工鼓吹振作自宮門至城門乃止 國朝儀典所載如
此 而余嘗守歲于禁省未見有此事 但就各宮殿近處放火礟數次而止 盖侲儺
之法昉於周禮漢志 故國初亦嘗著爲儀典 而後來謂其事涉不經而罷之歟
156 조선대세시기 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