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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3
강의 3
1) 문화의 배경
① 진골귀족, 부의 집중화
ㄱ.“재상가에는 祿이 끊이지 않고 奴童 3천. 甲兵․牛․馬․猪도 上等, 바다나 산에 목축
미곡으로 利息, 갚지 못하면 노비로 삼음.” (신당서)
ㄴ. 헌강왕대(9세기 후엽, 바로 뒤가 진성여왕) 경주의 인구는 178,936호.
민가는 초가가 없고 기와집이 즐비, 숯으로 밥 해먹음.(삼국유사)
ㄷ. 금입택 ; ‘쇠드리댁’ ‘금드리댁’을 한역한 말로 금을 입힌 집.(삼국유사)
헌강왕대 36채 있었다고 함. 왕족과 거의 동등한 진골의 저택이었던 듯
- 9C 들어 금사용 억제했으나 강제할 수 없을 정도로 진골세력 강대
② 농민의 삶은 피폐화
ㄱ. 효녀 지은 ; 헌강왕대 경주인. 홀어머니 봉양.(삼국사기, 삼국유사)
- 32살 되도록 결혼하지 않고 품팔이와 구걸로 봉양.
쌀 10여섬에 부잣집 노비 되자 화랑 효종랑이 구해 양민 되게 함.
→ 몰락 농민이 노비가 되는 현상
ㄴ. 효자 향덕 ; 경덕왕 14년(775) 웅천주(공주)인.(삼국사기. 삼국유사)
- 흉년과 전염병이 돌 때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어머니를 구함.
→ 9세기 농민봉기의 배경
2) 불교사상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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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5개국 다니다 727년 중국 安西 도착. 금강지와 많은 불경 번역, 오대산에서 여생 보냄
- 1908년 프랑스 페리오(Pelliot)가 둔황동굴에서 책 발견, 현재 파리국립도서관 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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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단에 의해 단상의 불국토와 단하의 속계로 양분 : 석단 위 청운교·백운교, 칠보교·연화교
○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전소된 뒤 19세기 초까지 40여 차례 중수.
- 현존하는 주요 건물은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 복구된 것
○ 무영탑 전설; 아사달과 아사녀→국가적 불교행사에 대한 백성들의 고통과 원한
○ 관음전 : 무설전 뒤의 작은 전각. 전체가 밋밋한 오르막인데 갑자기 지형이 산처럼 솟음
- 계단도 매우 가파름. 높이 솟은 산 상징하려 땅 돋운 흔적이 역력. 계단 기울기도 의도적
- ‘4대 관음성지’ : 섬이나 바닷가 산처런 높은 곳에 위치.
양양 낙산사 홍련암, 강화 석모도 보문사, 남해 금산 보리암, 여수 향일암
- 관음신앙은 대승불교 많은 경전에 존재 : ‘화엄경’ ‘법화경’ ‘아미타경’ ‘능엄경’ 등
- 불국사는 내륙에 자리 잡았지만 ‘화엄경’에 나타난 관음보살의 상주처를 상징적으로 재현
- 가장 낮은 곳 한미한 중생도 위안 받고 구원받지 못한다면 진정한 불국일 수 없다는 의식.
② 석굴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창건 시작, 774년 혜공왕때 완성. 석불사의 암자
○ 김대성 설화 ; 貧女의 아들로 부잣집에서 고용살이. 주인이 시주할 때 중이 “하나를 베풀
어 만 배를 얻으니” 기원하는 것을 듣고 자신의 私耕 밭 두어 이랑 모두 시주. 죽는 날 재상
김문량 집에 환생. 현생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세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세웠다 함.
(삼국유사 효선9, 大成孝二世父母)
→ 현재의 고통은 전생의 업보 때문.
→ 현재신분 인정. but 자신의 因에 의해 내세운명이 결정
→ 신분변화 가능성 시사
○ 360개 돌을 맞추어 바깥을 흙으로 덮은 인공석굴. 자연통풍·채광·온도·습기 조절
- 주실의 천장은 돔 형식. 연꽃무늬 지붕돌은 세 조각. 이는 지금도 어려운 기술.
③ 경덕왕과 김대성
○ 경덕왕 초기 김대정 : 745~750년 중시 자리에 있었음
- 김씨 왕족 출신. 아버지 김문량도 성덕왕 때 중시 자리에 있었음
- 750~774년 중시 자리에서 물러나 불국사와 석불사 창건 담당
○ 김대성의 전세 부모란 : 본존불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동해구. 문무왕릉과 감은사 존재
(1) 불국사의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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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공사:사찰 정면 위아래 석축 돌난간과 난간기둥,청운교 등 돌계단 난간 제거하려다 보존
○ 1924년 다보탑 해체보수, 법당 중수 등 대규모 개수. 다보탑속 사리장치 행방불명
해방후 대대적 복원
석가탑 사리장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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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석가탑의 해체복원 등 부분적 보수, 1969~1973년 대대적인 보수복원.
- 무설전·관음전·비로전·경루·회랑등 복원, 대웅전·극락전·범영루·자하문등 새로 단장
- 석가탑 2층 탑신에서 ‘무구정광다라니경’ 발견. 세계 최고 목판 인쇄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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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체범위 : 돌란대와 동자주, 중대석이 있는 2층 하부 사각난간, 2층 중앙부의 팔각난간,
상륜부. 2층 중앙부 팔각난간 받침석은 강화처리한 뒤 접합할 작정.
(3) 석굴암
해방 후 석굴암 논란
○ 우리 손으로 응급처치한 것은 1950년대. but 증기세척이 고작.
- 1951년 촬영된 '본존불 어깨와 흉부에 흘러내린 새똥이 말라붙어있고 이끼·곰팡이·먼지 등
으로 까맣게 오염되어 있는' 사진 한장, 우리 무관심이 고스란히 담겨있음
○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복원된 것은 1960년대.
- 전실에 목조전각 건립, 제2의 시멘트 두겁을 씌워 비와 바람·날짐승·습기에서 보호.
- 입구의 시멘트 옹벽 철거, 보수공사 때 제자리 잃은 금시조 등의 제자리 찾기 등
○ 석굴암 원형 논란 : 해안과 인접, 해발 565m에 조성된 석굴사원.
- 1960년대 토함산 기상자료에 따르면 온전한 날이 많지 않음.
: 안개 123일, 비 134일, 눈 40일, 결빙일 110일.
- 전각이든 유리각이든 조각상 보호해야 함
- 1891년의 보수공사가 기록된 <토함산석굴중수상동문>에 '짧고 긴 서까래' '도끼질이며 톱질
이요' '대들보' 등과 같은 부분 보임. 목조 건축이 있었음을 추정.
: 일부 학자나 문화재 전문가의 석굴암의 원형(일제 보수 직전)과 다를 수 있음
- 시멘트 철거 문제 : 조금의 충격도 주지 않고 어떻게 시멘트를 철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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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1909년 4월. 조선통감부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 일행이 석굴암을 둘러본 뒤 찍은 단
체사진. 제복 차림의 한 일본 관리가 본존불의 무릎 위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다.
<사진 2> 1913~15년 석실 법당 본체 해체뒤 시멘트로 전면 개축. 전실 전각이 사라져 기차터
널 방불케 하는 외관. 1951년 본존불(김한용 사진)은 새똥·이끼·곰팡이·먼지 뒤집어쓴 모습.
<사진 3> 현재 석굴암 본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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