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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토를 향한 신라인의 이상세계 : 불국사와 석굴암

○ 영상자료 : ‘석굴암 불상에도 색을 칠했다’

○ 불국사 경내 2009년 사적 제502호.


- ‘석굴암석굴'(문화재 정식명칭) 1962년 국보 제24호 지정.
- 1995년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공동 등록.
○ 2000년 12월, ‘경주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에 등재.

1) 문화의 배경

① 진골귀족, 부의 집중화
ㄱ.“재상가에는 祿이 끊이지 않고 奴童 3천. 甲兵․牛․馬․猪도 上等, 바다나 산에 목축
미곡으로 利息, 갚지 못하면 노비로 삼음.” (신당서)
ㄴ. 헌강왕대(9세기 후엽, 바로 뒤가 진성여왕) 경주의 인구는 178,936호.
민가는 초가가 없고 기와집이 즐비, 숯으로 밥 해먹음.(삼국유사)
ㄷ. 금입택 ; ‘쇠드리댁’ ‘금드리댁’을 한역한 말로 금을 입힌 집.(삼국유사)
헌강왕대 36채 있었다고 함. 왕족과 거의 동등한 진골의 저택이었던 듯
- 9C 들어 금사용 억제했으나 강제할 수 없을 정도로 진골세력 강대
② 농민의 삶은 피폐화
ㄱ. 효녀 지은 ; 헌강왕대 경주인. 홀어머니 봉양.(삼국사기, 삼국유사)
- 32살 되도록 결혼하지 않고 품팔이와 구걸로 봉양.
쌀 10여섬에 부잣집 노비 되자 화랑 효종랑이 구해 양민 되게 함.
→ 몰락 농민이 노비가 되는 현상
ㄴ. 효자 향덕 ; 경덕왕 14년(775) 웅천주(공주)인.(삼국사기. 삼국유사)
- 흉년과 전염병이 돌 때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어머니를 구함.
→ 9세기 농민봉기의 배경

2) 불교사상의 발전

○ 당나라, 인도에까지 佛法을 구하는 高僧이 많았다.


① 원효(617~686) : 정토교(‘나무아미타불’ 민중불교)
- 一心 ; 空有 대립, 俗眞 차별 극복.
“세계의 시초는 어떤 순수하고도 절대적 정신실체인 一心”,
“현실의 물질적 정신적 현상의 배후에는 一心이 내재”,
“일정한 단계에 이르면 다시 자기 본래 상태로 돌아와 자기 발전을 완성한다.”
② 의상(625~702) : 신라에서 화엄종 개창, 봉건사회의 불평등을 합리화
- 661년 당나라 지상사로 곧바로 찾아감. 그곳에서 지엄(智儼)으로부터 화엄학 배움
- 670년 당 공격 소식에 귀국. 문무왕 전장·노비 거절, 태백산 칩거. 676년 부석사 창건
③ 혜초(704~?) : 『왕오천축국전』 3권 집필. 책이름만 전하는 앞뒤 떨어진 책 2권 발견
- 719년 당나라에 가서 남인도 밀교승 金剛智에게 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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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5개국 다니다 727년 중국 安西 도착. 금강지와 많은 불경 번역, 오대산에서 여생 보냄
- 1908년 프랑스 페리오(Pelliot)가 둔황동굴에서 책 발견, 현재 파리국립도서관 보관

3) 최고의 예배, 불국사와 석굴암

○ 경덕왕대는 전제왕권의 절정기, 신라 下代의 시작.


- 진골귀족의 자신만만함이 드러난 문화(균형미․절제미)

① 불국사 : 법흥왕 26년(539) 창건,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이 중건.


○ 축조 당시 약 2000칸 대사찰. 당시 염원한 이상세계 불국정토를 3갈래로 구현
- 세 공간 대웅전·극락전·비로전 :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법화경),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무량
수경), 비로자나불의 연화세계(법화경)
- 대웅전 영역의 석가탑(석가여래상주설법탑)과 다보탑(다보여래상주증명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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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단에 의해 단상의 불국토와 단하의 속계로 양분 : 석단 위 청운교·백운교, 칠보교·연화교
○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전소된 뒤 19세기 초까지 40여 차례 중수.
- 현존하는 주요 건물은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 복구된 것
○ 무영탑 전설; 아사달과 아사녀→국가적 불교행사에 대한 백성들의 고통과 원한
○ 관음전 : 무설전 뒤의 작은 전각. 전체가 밋밋한 오르막인데 갑자기 지형이 산처럼 솟음
- 계단도 매우 가파름. 높이 솟은 산 상징하려 땅 돋운 흔적이 역력. 계단 기울기도 의도적
- ‘4대 관음성지’ : 섬이나 바닷가 산처런 높은 곳에 위치.
양양 낙산사 홍련암, 강화 석모도 보문사, 남해 금산 보리암, 여수 향일암
- 관음신앙은 대승불교 많은 경전에 존재 : ‘화엄경’ ‘법화경’ ‘아미타경’ ‘능엄경’ 등
- 불국사는 내륙에 자리 잡았지만 ‘화엄경’에 나타난 관음보살의 상주처를 상징적으로 재현
- 가장 낮은 곳 한미한 중생도 위안 받고 구원받지 못한다면 진정한 불국일 수 없다는 의식.
② 석굴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창건 시작, 774년 혜공왕때 완성. 석불사의 암자
○ 김대성 설화 ; 貧女의 아들로 부잣집에서 고용살이. 주인이 시주할 때 중이 “하나를 베풀
어 만 배를 얻으니” 기원하는 것을 듣고 자신의 私耕 밭 두어 이랑 모두 시주. 죽는 날 재상
김문량 집에 환생. 현생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세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세웠다 함.
(삼국유사 효선9, 大成孝二世父母)
→ 현재의 고통은 전생의 업보 때문.
→ 현재신분 인정. but 자신의 因에 의해 내세운명이 결정
→ 신분변화 가능성 시사
○ 360개 돌을 맞추어 바깥을 흙으로 덮은 인공석굴. 자연통풍·채광·온도·습기 조절
- 주실의 천장은 돔 형식. 연꽃무늬 지붕돌은 세 조각. 이는 지금도 어려운 기술.
③ 경덕왕과 김대성
○ 경덕왕 초기 김대정 : 745~750년 중시 자리에 있었음
- 김씨 왕족 출신. 아버지 김문량도 성덕왕 때 중시 자리에 있었음
- 750~774년 중시 자리에서 물러나 불국사와 석불사 창건 담당
○ 김대성의 전세 부모란 : 본존불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동해구. 문무왕릉과 감은사 존재

4) 현재의 불국사와 석굴암

(1) 불국사의 복원

일제의 1910년대 실측도면 36장과 복원 공사


○ 2009년, 1910년대 불국사 실측수리도면 36장 발견. 1910~20년대 2회 수리공사
- 절의 퇴락 극심 : 대웅전·자하문 등 영역, 본전(극락전)·안양문 영역 2부분만 남음
대웅전의 경우 백운교·청운교, 그 위 석축이 실측.
- 목조·석조 건물 : 자하문, 범영루, 다보탑·석가탑, 대웅전 외에 대웅전 서쪽에 하나의 문과
작은 건물로 추정되는 '堂' 있었음. 사찰업무 용도로 사용 추정
- 극락전 영역 : 더욱 변형 극심. 연화교·칠보교 위에 통용문(현 안양문) 있고, 문과 본전(극락
전) 사이에 별도 건물 응접실·주지실 있었음. 본전 기단 동쪽에도 잇대어 건물 하나 더 딸려
있고, 대웅전·극락전을 구분하는 석축은 무너져 경사로와 계단이 있음. 자하문 주위의 상부 석
축도 무너져 흙언덕처럼 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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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공사:사찰 정면 위아래 석축 돌난간과 난간기둥,청운교 등 돌계단 난간 제거하려다 보존
○ 1924년 다보탑 해체보수, 법당 중수 등 대규모 개수. 다보탑속 사리장치 행방불명

<1910년 범영루> <1910년 불국사 전경>

해방후 대대적 복원

석가탑 사리장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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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석가탑의 해체복원 등 부분적 보수, 1969~1973년 대대적인 보수복원.
- 무설전·관음전·비로전·경루·회랑등 복원, 대웅전·극락전·범영루·자하문등 새로 단장
- 석가탑 2층 탑신에서 ‘무구정광다라니경’ 발견. 세계 최고 목판 인쇄물.

(2) 석가탑과 다보탑

석가탑에서 나온 문서, 43년만에 해독 (2009년)


○ 석가탑은 국보 제21호, 1966년 9월 도굴단이 훼손.
- 해체·수리 과정에서 금동제 사리기, 금속·목제·유리구슬 등 다양한 유물과 종이뭉치 발견.
유물은 일괄 국보 126호 지정. 흙먼지와 응고된 덩어리 墨書紙片은 일단 제외
- 1997년 본격 해체 복원작업, 2007년 내용 파악.
○ ‘중수문서': 석가탑은 고려초에 중수, 고려시대 불국사 운영과 승려조직 등 기록.
- 보협인다라니경 일부, 불국사 무구정광탑 중수기, 불국사 서석탑 중수형지기, 불국사탑 중수
보시 명공중승소명기(名公衆僧小名記) 등 3종의 중수문서 발견.
- 한자와 구결자가 있는 희귀 자료로 고려시대 우리말 연구에 귀중한 자료
- ‘석가탑 신화'(석가탑이 한 차례도 보수되지 않았다)의 붕괴
; 2회의 대대적 중수 이유와 과정 기록. 고려 현종 15년(1024)과 정종 4년(1038).

다보탑 36년만에 ‘재수술’ (2008~2009년)


○ 다보탑 수리 : 1925년 전면 해체 수리, 1972년 2층 하부 사각난간과 상륜부 보수
○ 2층 난간부 배수불능, 빗물이 내부 침투해 두공형 받침 오염, 풍화로 훼손 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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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체범위 : 돌란대와 동자주, 중대석이 있는 2층 하부 사각난간, 2층 중앙부의 팔각난간,
상륜부. 2층 중앙부 팔각난간 받침석은 강화처리한 뒤 접합할 작정.

(3) 석굴암

앵글에 비친 석굴암의 100년


○ 1909년 4월말,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 일행 방문. 석굴암 본격 알려짐
- 소네 : 통감직을 사임하고 귀국한 이토 히로부미를 대신하여 통감직 대행.
- 당시 촬영한 사진 2점 : 현재까지 알려진 국내 최초 석굴암 사진.
○ 1912년, 초대 총독 '테라우치 마시타케' 석굴암 탐방. 본격적인 보수공사 논의
- 3차례 보수공사. 석굴암은 창건 후 처음 해체, 시멘트 두겁이 덮임.
- 1910년대 보수공사때 석굴암에서도 상징성 큰 천개석에 새겨놓은 '日本' 두 글자
○ 전시회에서 만난 한권의 작은 수첩(우리나라 각 지역과 문화재 정보)
- 1909년 당시 일본 순사를 비롯하여 한국에 있는 모든 일제 관리들이 반드시 지참
- 석굴암이 일본에 본격적으로 알려지면서 발길이 더욱 빈번.

▲ 1909년 일제가 만든 우리나라의 지역과 문화재 등의 정보가 수록된 검은 수첩

해방 후 석굴암 논란
○ 우리 손으로 응급처치한 것은 1950년대. but 증기세척이 고작.
- 1951년 촬영된 '본존불 어깨와 흉부에 흘러내린 새똥이 말라붙어있고 이끼·곰팡이·먼지 등
으로 까맣게 오염되어 있는' 사진 한장, 우리 무관심이 고스란히 담겨있음
○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복원된 것은 1960년대.
- 전실에 목조전각 건립, 제2의 시멘트 두겁을 씌워 비와 바람·날짐승·습기에서 보호.
- 입구의 시멘트 옹벽 철거, 보수공사 때 제자리 잃은 금시조 등의 제자리 찾기 등
○ 석굴암 원형 논란 : 해안과 인접, 해발 565m에 조성된 석굴사원.
- 1960년대 토함산 기상자료에 따르면 온전한 날이 많지 않음.
: 안개 123일, 비 134일, 눈 40일, 결빙일 110일.
- 전각이든 유리각이든 조각상 보호해야 함
- 1891년의 보수공사가 기록된 <토함산석굴중수상동문>에 '짧고 긴 서까래' '도끼질이며 톱질
이요' '대들보' 등과 같은 부분 보임. 목조 건축이 있었음을 추정.
: 일부 학자나 문화재 전문가의 석굴암의 원형(일제 보수 직전)과 다를 수 있음
- 시멘트 철거 문제 : 조금의 충격도 주지 않고 어떻게 시멘트를 철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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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1909년 4월. 조선통감부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 일행이 석굴암을 둘러본 뒤 찍은 단
체사진. 제복 차림의 한 일본 관리가 본존불의 무릎 위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다.
<사진 2> 1913~15년 석실 법당 본체 해체뒤 시멘트로 전면 개축. 전실 전각이 사라져 기차터
널 방불케 하는 외관. 1951년 본존불(김한용 사진)은 새똥·이끼·곰팡이·먼지 뒤집어쓴 모습.
<사진 3> 현재 석굴암 본존불

▲ 석굴암 원형 추적에 단서가 되는 <토함산석굴중수상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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