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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경기도 하남)

■ 유네스코 세계유산

■ 등재연도: 2014 년

■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에 유사시를 대비해 임시 수도로서 역할을 담당하도록 건설된 산성입니다. 서울에서
남동쪽으로 25㎞ 떨어진 험준한 산지에 위치해 있는데요, 산성의 둘레가 12㎞로 도시가 들어설 수 있을 만큼
넓습니다. 특히 남한산성은 다른 나라의 침입에 맞서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세운 산성이라는 점에서 한민족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나타내는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한산성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옛 유적도 발견되는데요, 이는 7 세기에 처음 성을 쌓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고쳐 지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17 세기에는 청나라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성곽을 크게 증축하고 새로운 화포와
무기에 대비해 방어 시설과 건물들을 새로 세웠지요. 남한산성은 오랜 세월 동안 지방의 도성이었으면서 아직도
대를 이어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살아 있는 유산’입니다. 성곽 안쪽에는 오래전에 만들어진 다양한 형태의
군사·민간·종교 시설 건축물의 증거가 유적으로 남아 있지요. 세계유산위원회는 남한산성이 17 세기 극동지역에서
발달한 방어적 군사공학 기술이 집대성된 산성으로서 한국의 산성 설계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점, 요새화된
도시를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라는 점을 높이 평가해 세계유산으로 등재했습니다.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2001)

■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 등재연도: 2001 년

■ 연행지: 종묘

■ 종묘는 조선시대에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왕실의 사당을 말하는데요, 이곳에서 지내는 제사의식을
‘종묘제례’라고 부릅니다.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중요하기 때문에 ‘종묘대제’라고도
합니다.
유교가 국가의 근본이념이었던 조선시대에는 조상에 대한 숭배를 인간의 도리이자 나라를 다스리는 가장 중요한
법도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건국하고 번영시킨 왕과 왕실의 조상들, 그리고 국가 발전에 공헌한 문무
대신들에게 왕이 직접 참여해 제사를 드렸던 것이죠.
국가 차원에서 유교의 ‘효’를 실천하는 중대한 행사인 만큼, 종묘제례는 엄격한 법도와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제례를 올릴 때에는 장엄하면서도 절도 있는 음악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데요,
이를 통틀어 ‘종묘제례악’이라고 합니다. 종묘제례악으로는 각각 열한 곡으로 구성된 <보태평>과 <정대업>
이라는 화려하고 중후한 음악이 쓰입니다. 여기에 맞춰 간결하면서도 힘찬 노래를 부르는데요, 위대한 국가를
세우고 발전시킨 왕의 덕을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종묘제례악이 연주되는 동안 무용도 곁들여집니다. 8 줄로 늘어선 64 명의 무용수가 각각 문치를 상징하는 문무
(文舞)와 무공을 상징하는 무무(武舞)를 춥니다. 문무는 역대 선왕들의 문덕을 기리는 춤으로 ‘양’을
상징하는데요, <보태평>에 맞추어 피리와 꿩의 깃털이 달린 도구를 들고 춤을 추지요. 무무는 선왕들의 무공을
칭송하는 춤으로 ‘음’을 상징하며, <정대업>에 맞추어 나무로 만든 칼과 창, 활과 화살을 들고 춥니다.

■ Q: 종묘와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 A: 쉽게 말해 종묘는 왕조의 조상을 모시는 사당 즉 건축물입니다. 반면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의식과 이때 연주하는 음악과 춤을 일컫는 말입니다. 종묘는 1995 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2001 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습니다.
■ ≪난중일기≫는 이순신(1545-1598) 장군이 임진왜란(1592-1598) 때 진중에서 쓴 친필 일기입니다.
장군의 개인적 소회뿐만 아니라 날마다의 교전 상황, 날씨나 전장의 지형, 당시 서민들의 생활상까지 상세하게
담겨 있지요. 일기의 역사적 배경이었던 임진왜란은 외형적으로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치러진 전쟁이었지만, ‘
일본이 동아시아 세력 확보를 위해 일으킨 전쟁’이라는 세계사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또한 임진왜란에
관한 전쟁 사료 중 육지에서 벌어진 전쟁에 관한 자료들은 상대적으로 풍부한 반면, 해전에 관한 자료로는 ≪
난중일기≫가 유일하다고 할 만큼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난중일기≫는 당시의 동아시아
국제 정세와 군사적 갈등을 포함한 세계사 연구에 중요하며, 세계적 관점에서도 매우 귀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 Q: 전쟁 때 작성된 일기 형식의 기록물은 적지 않을 것 같은데요, ≪난중일기≫가 갖고 있는 차별화된 특징은


무엇인가요?
A: 물론, 전시 상황을 다룬 일기 형식의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등재된 사례는 있습니다. 2 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치하에 놓인 유대인의 삶을 담은 ≪안네의 일기≫, ‘영국 육군 원수 더글러스 헤이그의 제 1 차
세계대전 당시 자필 일기’ 등이 여기에 해당되지요. 그런데 서양에서는 전시에 개인이 단독으로 전쟁 상황을
담은 문집 형태의 기록물을 남기는 일이 근현대에 와서야 체계화되었지요. 반면 ≪난중일기≫는 이보다 400 여 년
앞선 시기에 군 사령관에 의해서 방대한 분량으로 집필돼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이순신 장군은 당시 교전 상황이나 날씨, 지형 등 전투에 영향을 주는 주변 여건은
물론,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반 백성의 삶과 이들과 생사를 함께한 장군 개인의 소회까지 ≪난중일기≫
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또한 일기 형식을 빌려 16 세기 후반 전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당시 조선의 사회상과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자세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전쟁 중 군 지휘관이 전장에서 겪은 이야기를 장기간에 걸쳐
적은 기록물은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하는데요, 이는 ≪난중일기≫가 지닌 기록유산으로서의
희귀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난중일기≫는 국가 공식자료가 아님에도 임진왜란 당시 조선 내부와 조선을
둘러싼 동아시아의 갈등 관계를 조명해볼 수 있어 세계사 연구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 Q: ≪난중일기≫에 이순신 장군의 어떤 모습이 담겨 있는지 궁금합니다.


A: 이순신 장군이 우리나라 역사와 전 세계 해전사에 남긴 발자취에 대해서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이순신 장군을 ‘영웅’의 모습으로 기억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발발 이후 7 년간의
기록이 담긴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인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는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승리해야 한다는 강박감과 함께 밀려오는 두려움을 가감 없이 표현하기도 했으며, 어머님의
병환을 걱정하는 대목에서는 전장에 나와 직접 모시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슬픔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0
배나 많은 수의 배를 지닌 왜군과 싸워 이겼던 명량해전에서는 천운이 따라준 덕분에 어렵고 힘든 전투를 이길 수
있었음을 솔직히 밝히고 있습니다.
≪난중일기≫에서 우리는 ‘장군 이순신, 인간 이순신’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적 앞에서 움츠러든 휘하
장수들에게 불호령을 내리는 모습에선 추상같은 위엄이 드러나고, 겨울밤 혹한에 떨고 있을 군사와 백성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장면에선 다정한 인간적 면모가 엿보입니다. 바람 앞 촛불 같은 나라의 운명을 짊어지고 맨 앞에서
수군을 이끌던 그도 여느 사람처럼 고통과 두려움, 걱정과 외로움 같은 감정에 휩싸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결국
불굴의 의지로 역경을 딛고 일어서서 혁혁한 전공을 쌓아 올리며 나라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냅니다.
이순신 장군은 ‘칼을 쥐었지만 결코 붓을 놓지 않았던’ 무인이자 선비였습니다. ≪난중일기≫에는 장군이 직접
쓴 시도 여러 편 수록돼 있는데요, 문인이라 해도 될 정도로 빼어난 글솜씨를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그가 긴박한 전장에서 7 년간이나 친필로 일기를 적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장군이 그 누구보다도 기록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사람이라는 방증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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