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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주제

• 1. 우리에게 연민과 동정이 필요한 이유

• 2. 우리가 연민과 동정을 거부해야 하는 이유

• 3. 건강한 삶이 필요로 하는 것들
행복, 빛, 밤 1

•행복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빛인가, 아니면 밤인가?


니체의 비극적 최후

• 니체는 1844년에 태어나 1900년까지 살았다. 아니, 사상가로서의 니체는 보다 일찍 죽었다. 1889년
1월 2일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니체는 정신발작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
다. 다만 그가 마부에게 얻어 맞는 말의 목을 끌어 안으며 흐느끼다 바닥으로 쓰러졌다는 목격담이
자주 언급된다. “내 형제여!” 니체는 흐느끼며 말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후 니체의 정신은
1990년 사망 때까지 다시는 회복되지 않았다.
1889년 브뤼셀에 입성하는 그리스도,
제임스 앙소르

• 니체의 정신을 영원한 어둠이 집어삼키기 일 년 전 벨기에의 화가 제임스 앙소르는 <1889년


브뤼셀에 입성하는 그리스도>(이하 <1889년 그리스도>)라는 기이한 그림을 그렸다. 앙소르
는 무신론자였다. 그러니 그가 예수를 신의 아들로 생각했을 리는 만무하다. 앙소르의 그림은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다.
• 2000년 전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그를 향한 민중의 배신과 분노였
다. 예수는 결국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다. 1889년 브뤼셀에 입성하는 예수 역시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다. 신앙심이나 온화한 사랑이라고는 조금도 엿보이지 않는 군중의 표정은 그들이
2000년 전 예루살렘의 군중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용납할 준비가 조금도 되어 있지 않다는 것
을 암시한다.
지금의 인간이 아니라 미래의 인간을
사랑하라!
• 차라투스트라가 권유하는 것처럼 지금 내 곁에 있는 이웃이 아니라 먼 미래의 인간을 사랑하
는 일은 매우 어렵다. ‘이봐, 적당히 하라고!’ 이것이 끝물 인간의 모토이다.
• 군중이라는 이름의 끝물 인간들은 본질적으로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몰아낸 환전상과
다르지 않다.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신성하지 않고, 설령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이익을 남기
는 데 방해가 되면 증오와 분노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러니 대체 인간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
을까? 거의 모든 인간은 결국 끝물 인간인 군중에 속하지 않는가? 거의 모든 인간이 끝물 인
간에 불과한 그러한 시대에 먼 미래의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인간
이 지금보다 다소간 아름다워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믿음이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보증할 수 있을까?
억측에 불과한 신

• “신은 하나의 억측일 뿐이다. 그렇기에 나는 너희의 억측이 너희의 창조적 의지를 앞지르지
않기를 바란다.”
• “만약 신들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자신이 신이 아니라는 것을 참고 견딜 수 있을까? 그렇기에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신은 곧은 것을 모두 구부러지게 하고, 서있는 것을 모두 비틀거리게 하는 사상이다. … 시간
은 사라져야 하고, 덧없는 모든 것은 허상이어야 한다는 말인가? … 하나인 것, 완전한 것, 움직
이지 않는 것, 충만한 것,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모든 가르침 - 나는 이것을 사악하고 인간에게
적대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위험한 동정심

• 차라투스트라에 따르면 어쩌면 초인이 될 수도 있었을 예수가 좌절한 까닭은 인간을 동정했
기 때문이다. 인간을 동정하는 자는 인간을 부끄러운 존재로 여기는 자이다. 인간을 부끄러운
존재로 여기는 자는 인간이란 멸망 당해 마땅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자다. 인간이란 멸망 당해
마땅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자는 인간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부끄럽게 느끼는 자다. 그는 사랑
받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 “고귀한 자는 다른 사람이 수치심을 갖지 않도록 마음 쓰라고 자신에게 명령한다.”
• “진실로 나는 동정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자비로운 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너
무도 수치심이 부족하다.”
기쁨으로 삶을 긍정하는 법을 배우라!

•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뒤로 인간은 즐기는 법을 너무나 몰랐다. 형제들이여, 오직 이것만이


우리의 원죄다!”

• 차라투스트라는 그 누구의 친구가 되는 데 적합한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 가차없이 싸워야 했


다. 적당한 행복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끝물 인간에 맞서, 군중에 맞서, 거의 모든 인간에 맞서,
자신이 부단히 투쟁해야 함을 니체는 알고 있었다.
끝물 인간의 양심
• 끝물 인간들의 분노와 증오, 조롱, 광기의 바탕에는 항상 도덕이 있다. 그 도덕의 모토는 다음
과 같다: ‘ 적당한 행복의 실현을 훼방하는 모든 인간은 악인으로서 처벌 받아야 한다.’

• 그러니 차라투스트라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 “죄를 지은 자와 양심의 가책을 받는 자들 역시 쓸어버려라. 내 말을 믿으라, 친구들이여. 양심


에 가책을 받으면 남을 물게 되는 법이다.”
• “하지만 가장 나쁜 것은 자잘한 생각들이다. 자잘한 생각에 몰두하느니 차라리 악을 저질러
버리는 것이 더 낫다!”

• 지나치게 교만한 자나 지나치게 열등의식이 강한 자의 주위 사람들은 날마다 지옥을 경험하


며 살 수밖에 없다. 교만한 자와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자는 모두 남들 마음에 상처를 남길 뿐
아니라 그 상처를 끝없이 반복해서 헤집는다. 그들 인격의 추악함과 자잘함이 가차없이 폭로
되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교만과 열등의식은 둘 다 삶을 억압하는 최악의 악덕인
것이다.
고통 받는 친구가 있거든 그를 위한 딱
딱한 침대가 되어라!

• “그러나 너에게 고통 받는 친구가 있거든 너는 그의 고통이 쉴 수 있는 쉼터가 되도록 하라.


그러면서도 딱딱한 침대, 야전침대가 되도록 하라. 그렇게 해야만 너는 그에게 가장 필요한
자가 될 것이다.”
제임스 앙소르,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
상, 1899

• “착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 다 독을 마시게 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착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 다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모든 사람이 서서
히 자살을 하는데도 바로 그것을 삶이라고 부르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 2000년 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군중은 이익만을 쫒는 환전상의 마음을 가졌지만 동시에
매우 엄격한 도덕주의자들이었다. 양심의 가책이란 원래 이렇게 자가당착적인 방식으로 살
아가는 자들에게서 특히 가혹하게 나타나는 법이다. 엄격한 도덕의 관점에서 보면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신의 마음은 얼마나 추한가? 그러니 그들은 악착 같이 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어야 했고, 자신들을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만 하는 인생의 패배자가 되게끔 만든 세상을 증오
해야 했으며, 그러한 자신과 다른 모든 자들을 학대해야 했다.
• 1889년 및 1899년의 세계는 어떠했을까? 세기말을 향해 가던 유럽의 인간들은 2000년 전 예
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군중보다 더 훌륭했을까? 니체와 앙소르의 눈에는 별로 그렇지 않았
던 것 같다. 자본주의가 결정적으로 승리를 거둔 세상에서 군중이 원하는 것은 언제나 이익이
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약속에 의거해 움직이는 생산체제이기에 군중의 마음 속에 강력한
도덕의식을 불어넣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윤리적 개인의 창조야말로 자본주의의 성패를 결정할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니 자본주의는 사적인 이익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자들을 엄격한 도덕적 양심의 소유
자로 만들어야 할 자가당착적인 시도였던 셈이다.
다음 주 수업 안내
• 주제: 행복, 빛, 밤 2

• 교재: <그림으로 보는 니체> 제5장

• 과제: 다음의 주제들 중 하나를 골라 A4 용지 ½ 쪽 분량 이상의 글로 표현해보세요.


• 1. 건강한 도덕, 병든 도덕
• 2. 사랑과 기쁨을 부르는 도덕
• 3. 증오와 슬픔을 부르는 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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