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fessional Documents
Culture Documents
(Xant) 더 모먼트 (the Moment) 2권
(Xant) 더 모먼트 (the Moment) 2권
The moment 2 권
목차
15. PET
16. 사형선고
17. 혼란
19. 대화
20. 공범
21. 교차
22. 올가미
24. 진술
25. 성찰
26. 유리
27. 균열
28. 탱고
29. 승리자
30. 광장
#15 PET
“역시 잘 어울려요.”
그렇게 말하는 크림은 마치 크리스마스에 원하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고, 커넌은 그런 그가
더 미웠다.
차라리 제게 목줄을 채우던 것처럼 모질게 굴면 마음이 더 편했을 텐데, 미운 마음을 먹게 했다가, 다시
또 일렁이게 하는 그가 너무 미웠다.
“…마음에 들어요.”
차라리 영영 발견하지 못했다면 좋았을 텐데, 야속한 펜던트가 랜턴의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한참 골랐거든요.
그러다가 고조되는 감정에 이끌려 커넌의 이마와 관자놀이, 그 사이 어디쯤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할 수 있겠어요?”
그리곤 짙게 얽힌 시선 너머로 질문을 던지니, 커넌은 그저 기계처럼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일반적인
벨트와 같은 방식으로 on & off 가 가능하기도 했고, 지금 당장 이 순간을 모면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한번 해봐요.”
못 하겠어요.
“못 하겠어요?”
크림이 커넌에게로 한 걸음 다가서며 거리를 좁혔고, 그에 의해 가까워진 랜턴의 강렬한 불빛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문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는 가끔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흘긋거렸고, 지루하다는 듯 고개를 모로 돌리며 한숨을 내뱉기도 했다.
“…못 하겠어요?”
크림!
그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귓가를 스치니, 그에 쫓기듯이 커넌이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하아- 하아-
“거봐요.”
잘 할 수 있잖아요.
딸랑.
‘넌 내 PET 이야.’
내가 또 간과했던 거지.
이 세상에서 가장 밝은 조명으로요.
“…….”
하지만 그럼에도 들끓는 마음은 도무지 진정되지 않으니, 커넌이 무어라 입을 떼었으나 크림은 이미
문밖으로 나선 상태였다.
삐리릭-
깔끔한 전자음 소리를 끝으로 온 집에 삭막한 정적이 찾아왔고, 커넌은 그제야 숨을 쉴 수 있는 사람처럼
깊게 한숨을 뱉어냈다.
“…그럴 순 없어.”
싸구려 직물의 까슬거리는 감촉은 연신 목 주변을 간질였고, 목을 긁적이듯 손을 움직이던 커넌이 고개를
숙여 목줄을 벗어냈다.
“…….”
혹은 그도 알고 있던 것이 아닐까?
점점이 떨어져 바닥에 고이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는 그때,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딱 한 발자국.
“하지만 지금은?”
꿀꺽.
“…진짜… 이게 뭐라고.”
이깟 족쇄가 뭐라고.
손끝이 새하얗게 질리도록 세게 주먹을 쥔 커넌이 드디어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그제야 자신을 좀먹던
의심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리곤 마치 싸구려 게임을 단계별로 클리어하는 것처럼 거실, 거실 복도, 현관 복도, 현관 순으로
커넌이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구간에서는 매번 의심이 고개를 들었으나, 그 어디에도 크림은 존재하지 않았다.
삐리릭-
“울면 안 돼.”
지금은 아니야.
그리고 그제야 제 옷이 시야에 들어왔다. 제 것보다 품이 넉넉하기는 했으나, 길이는 꼭 맞았다. 계절감
없이 얇은 옷은 순전히 집 안에서만 입을 법한 것이었다.
누구 하나 방해하지 않으니 엘리베이터는 단숨에 층수를 바꾸며 다가왔고, 커넌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애원을 하든지 협박을 하든지 우선 들어가서 혹시나 그에게 발각될 때를 위해 부엌에서 칼도 하나 훔치고,
죽어도 현관문을 열지 말라며 집주인과 실랑이를 하다 보면 경찰이 도착할 거라며 미련한 대책도 준비했다.
띵동- 띵동-
감히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를 확인한 커넌이 조급한 마음을 담아 연신 초인종을 누르니, 그제야 안쪽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도와주세요, 제발 저 좀…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쾅쾅쾅-
자신을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들리는 기계 작동음에 커넌의 시선이 현관문과 엘리베이터를 바쁘게 오가는
순간, 현관문과 엘리베이터가 동시에 입을 벌렸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를 따라 커넌이 눈동자를 굴리니, 문밖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중년의 여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집에서 청소라도 하고 있었는지, 여성은 꽃무늬 에이프런 차림을 하고는 굳이 의아함을 숨기지 않은 채,
커넌과 크림을 번갈아 봤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아이, 씨 X.’
그에 커넌이 재빨리 몸을 돌려 여성의 어깨를 밀치니, 여성의 입에서 비명이 터지기도 전에 두 사람을
삼킨 문이 거세게 닫혔다.
“아니,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지금 당장 경찰을 부르겠어요!
쉿-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그리곤 여성이 간절하게 외치니, 그를 바라보던 커넌은 여성의 모습에서 크림을 두려워하던 자신의 모습을
엿보게 됐다.
“아, 아니에요. 나는 피해자고 저, 저기 밖에 있는 남자가 사, 살인마예요.”
“안 돼!”
바닥에 널브러진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커넌의 뒤늦은 절규가 여성을 따라 복도로 향했다. 여전히
복도에는 크림이 있었고, 여성은 당연하게도 그를 향해 달려나갔다.
신고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말도 안 돼-
“괜찮겠어요?”
이상한 사람이면….
“모자란 놈.”
쾅.
정말 족쇄가 없는 걸까.
“이제 전 죽는 건가요?”
아주 잠깐이라도 그를 울릴 수 있다면.
devil.
어렸던 자신은 그 단어를 지독히 싫어했는데, 다 큰 자신은 그 단어를 미치도록 소망하고 있었다. 이런
게 모순이 아니면 무엇인가.
‘난 그 누구보다도 우리가 모순 같아요.’
커넌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웃고 있었으면 좋겠어.
“이제 내가 죽나요?”
어떤 반응이 나올까.
“아마도요.”
그렇기에 최대한 차게 그의 손을 뿌리쳤고, 크림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가는 모습에 묘하게 만족감도
느꼈다.
아주 잠깐은 말이다.
“아악!”
“커넌. 죽고 싶은 건 아니죠?”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알려줄까요?”
살 수 있는 방법.
그것도 아주 격렬하게.
“…죽고 싶지 않아요.”
방법이 궁금해요?
크림에게는 오래된 약국에서 맡아본 온갖 약품의 냄새가 풍겼고, 희미하게 담배 냄새가 묻어 나오기도
했다.
그에 크림의 심장 소리가 오른쪽 가슴에 울려 퍼지니, 그 일정한 박동이 주는 안정감에 커넌이 슬며시
눈을 감았다.
쾅-
#17 혼란
집안으로 들어온 커넌은 여전히 멍한 시선으로 크림을 바라봤고, 그는 별 거 아닌 문제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묻고 싶었다.
알고는 있지만….
서정적인 가사를 어찌나 애달프게 부르던지, 아직도 어머니의 허밍이 귓가에 맴도는 것만 같았다.
괜찮을 거예요.
그녀는 무엇이 그리도 슬펐던 걸까? 내가 이렇게 옆에 있었는데. 내가 그토록 그녀의 곁을 지켰는데.
나도 좀 사랑해주지.
“나도 좀, 사랑해주지.”
저 노래가 너무 싫어.
당장 저 노래를 그칠 수만 있다면.
쾅!
절대 후회하지 말자고.
“…크림?”
크림이 이를 악물며 커넌을 부르는 동시에, 큰 소리에 놀란 엠마가 현관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저 버튼 하나 더 누르는 것뿐이야.
그러다가 운이 좋아서 경찰에 신고라도 들어가지는 않을까, 그런 실낱같은 희망에 젖어도 봤다.
“크림?”
혹시나 그 외침이 크림에게도 들릴까, 두려운 마음에 고개를 돌리는데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두근두근 세차게 뛰던 심장이 급하게 뜀박질을 멈추니, 온몸의 피가 발끝으로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도망쳐.’
피눈물을 흘리던 여성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귓가에 퍼졌지만 커넌은 도망칠 수 없었다.
사무실 의자에서 발작처럼 몸부림치며 일어나, 탁상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다가 깜빡이는 조명에 한숨이나
몰아쉬는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
똑딱똑딱.
일정한 박자로 움직이는 탁상시계는 마음을 편안하게도 만들고, 반대로 불안감을 고조시키기도 했다.
그에 커넌은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마다 테이블에 엎드려, 탁상시계의 초침을 따라 눈동자를 굴리고는
했는데 그러면 점차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저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으니까.
후우-
커넌이 한숨을 몰아쉬며 제 한 몸에도 버거운 듯이 신음을 토해내는 싸구려 철제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러다가 생각이 많아져 머리가 무거워지기라도 하면, 수갑이 채워진 제 손목에 이마가 닿을 정도로 등을
동그랗게 굽히기도 했다.
드문드문 기억나는 어제의 일들 속에서 들끓는 자신의 불안감이, 끊임없이 자신을 찔러오는 것 같았다.
“닥터 토마스….”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커넌.”
그녀의 침울한 기분이 곧바로 커넌에게 날아와 꽂히니, 커넌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닥터 셰인과 시선을
얽었다.
감정적인 사람.
멀리 밀어냈다가 최대한 가까이 끌어당기고, 그러다가 한없이 거리가 좁혀지면 다시 그만큼 밀쳐내면
그만이었다.
“닥터 셰인.”
“셰인.”
“셰인!”
“…….”
그러다가 깜짝 놀란 닥터 셰인이 서둘러 제 이름을 부르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상황이지 않은가.
“커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그리곤 커넌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 세우니, 애써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아악!
“커넌, 커넌!”
닥터 셰인이 커넌의 움직임을 제지하려고 애를 썼으나, 그럼에도 커넌의 발작 증세는 멈추지 않았다.
“셰인.”
셰인. 셰인.
적막감이 감도는 방 안에는 온통 커넌의 애절한 목소리만이 가득했고, 안타깝게도 그에 대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엄마, 아직 멀었어요?’
넓적한 볼에 고소한 냄새를 한껏 풍기는 콘스프를 담으며, 혹시나 닥터 토마스에게서 연락이 오지는
않을까 연신 핸드폰을 확인해야 했다.
경미한 상처라고.
그런 생각도 했다.
그에 자신도 모르게 반색하며 핸드폰을 확인했으나, 그토록 기다리던 닥터 토마스의 전화는 아니었다.
‘여보세요, 셰인입니다.’
‘히든?’
주인공은 둘째 히든이었다.
그리고는 걱정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엄마에게 간단한 전달사항을 말하고 잽싸게 주차장으로
빠져나오니, 머리카락부터 신발까지 온통 콘스프 냄새가 배어 있었다.
병원장에게는 할 말이 많았다.
달칵.
[모든 게 다 잘될 거야.]
녹음 내용의 절반 이상이 커넌에 대한 내용이었으나, 중간중간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덧붙이기도 했다.
a full of hope.
자신의 20 대를 온전히 함께한 이곳에서 지금까지 1000 명이 넘는 환자를 돌봤고, 그 과정에서 병원장을
본 것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하아-
“닥터 셰인?”
“가죠..”
“…다만?”
후우-
결국 닥터 셰인이 긴 한숨과 함께 문손잡이를 잡았다.
“커넌.”
우리의 잘못? 그렇다면 닥터 토마스의 죽음 역시, 우리의 잘못이었던 걸까? 자신은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렇게 울부짖던 커넌의 모습은 닥터 셰인의 뇌리에 강력하게 박혀 있었다.
그의 표정과 섬세했던 감정, 억울함에 일어난 분노와 자신이 놓치고 있는 서늘한 무언가.
그의 잘못을 덮지 않되 용서해주는 것.
그 모든 것이 제 손에 달려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나도 그에 동의해요.”
“커넌. 혹시 내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닥터 셰인이 커넌의 눈치를 살피며 점차 그와의 거리를 좁혀, 커넌이 웅크린 침대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았다.
너무, 시끄럽잖아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예요.”
“…….”
“커넌.”
“우리는….”
그에 닥터 셰인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커넌.”
닥터 토마스가 죽었다고요!
울먹이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부드럽고, 어딘가 짓궂던 목소리가 급작스레 한껏 고조되었다.
“그렇게 말했나요?”
-의-
#19 대화
어린 두 딸과 어머니.
고작 한순간의 화풀이와 맞바꿀 수 없는 것들이었다.
후우-
“…벌써 기대되네요.”
감정이 극에 달한 기분이었다.
아무거나 좋으니까.
하아-
할 수만 있다면 몸속에 존재하는 모든 산소를 뱉어내고, 자신도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지고 싶었다.
“…거울 본 적 있어요?”
커넌이 평소와 달리 사적인, 그리고 중요한 말들을 쏟아내니, 닥터 셰인이 다급하게 녹음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쯧-
아직도 기억나요.
당시에 크림에게서 도망치자고 했는데, 엠마가 거절하자 홧김에 머리를 내리쳤던 것 같아요.
“괜찮아요.”
그에 닥터 셰인이 잠시 고민하다가, 그렇게 말했다.
사실이었으니까.
거울 속에 숨으라니.
**
커넌. 커넌.
누구지? 커넌이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소리는 점점이 울렸으나 어딘가에 고인 것처럼 퍼져 나가진
않았다.
“…커넌.”
“아파?”
거울 속 자신이 물었다.
“커넌?”
그걸 누가 인정해주지?
“커넌은 나야.”
내가 진짜 커넌이야.
커넌이 손을 들어 두 귀를 막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적막함이 온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그때 거울 속 누군가가 툭 말을 내뱉었다.
연신 그렇게 외쳐댔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커넌은 가장 중요한 순간에서 망설였고, 거울 속 자신은 그를 놓치지 않았다.
‘근데 그럼 뭐 해? 누가 널 인정해주는데?’
‘아니지, 아니야-’
허억, 허억.
“커넌?”
겁에 질린 커넌의 목소리가 암흑 위를 걸었으나, 그들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커넌?”
그 무거운 압박감 속에서 자신의 숨소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져, 커넌이 다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역시 울고 있었구나.
#20 공범
“…모르겠어요.”
당시 기억이 너무 희미해서.
“모르겠어요.”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상태로 그 말만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전혀요.”
그런 게 궁금한 거잖아요.
후우-
아주 오랫동안 내뱉었다.
“난 그런 걸 하는 사람이거든요.”
뭐,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제 마음의 무덤을 깔짝깔짝 파헤쳐, 그 전보다 좀 더 예쁘게 쌓을 수 있다면
좋을 것도 같았다.
**
거울 속에는 태양도, 달님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하는 자신에게 혐오감이 일 것만 같았다.
“후회하지 마, 커넌 트윌턴.”
그런 후회는 하지 말자고.
“크림.”
크림, 크림.
고작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수천, 수만 번을 불러도 크림은 대답하지 않았고, 그런 크림이 몹시도 원망스러웠으나, 결국 그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짜… 진짜 싫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어둠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싱거운 생각을 하는 찰나,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커넌이 있던 어둠 속으로 빛 한 줄기가 스며들었다.
그리곤 커넌을 거울 밖으로 이끌어 그 뜨겁고 아늑한 품 안에 무릎 꿇리니, 커넌은 영문도 모르고 그에
허덕여야 했다.
“커넌.”
하지만 크림이 걸림돌이 되고, 자신의 어둠이 방해가 되니 그저 소망은 소망으로 남겨둬야 했다.
“왜 그랬어요?”
그렇다면 무엇일까.
중앙 부근에는 무언가에 젖은 듯 종이가 울고 있었고 그곳을 기점으로 비린내가 진동을 하니, 코를 찌르는
악취에 커넌이 인상을 썼다.
거울이 들어 있던 상자.
“설마 기억나지 않는 거예요?”
하지만 그럴수록 복잡한 마음이 뒤엉켜 혼란을 야기하니, 이제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이 모든 말들도
거짓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 커넌이 제 손이라도 슬며시 잡아 오면, 그것을 상자의 중앙으로 가져가 이미 딱딱하게 굳은 피
위를 매만지게 했다.
“커넌.”
“우린 이제 공범이에요.”
“크림.”
커넌이 그를 불렀다.
“크림.”
“웃어요.”
꼭 살아 있는 사람 같아.
두근, 두근.
#21 교차
“지금 크림은, 어떤 기분이에요?”
알고 싶어요.
혹시나 제가 숨긴 질문들에 그가 넌지시 긍정의 눈짓이라도 해주지는 않을까, 내심 기대한 마음도 숨겼다.
또 나 혼자만 그렇지.
“잘 모르겠어요.”
커넌의 두 뺨과 콧잔등, 이마와 턱 끝에 남겨진 태양의 매만짐을 바라보던 크림이 고개를 모로 돌려,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만약 부엌의 작은 조명마저 없었다면 크림도, 그리고 커넌도 어둠에 물들어 형체를 잃었을 터였다.
“해가 짧네.”
아, 그가 웃은 게 맞구나.
아, 내가 뱉은 말을 주워 담는 건… 아주 젬병이죠.
못내 그것이 서러워 이름을 부르자, 냉장고를 뒤적이던 크림이 맥주캔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술은 좀 해요?”
그에 커넌이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니,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크림이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상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탁-
그 애꿎은 조합에 커넌의 시선이 끈적하게 따라붙으니, 크림이 거실 테이블 위로 그것들을 쏟듯이
내려놓았다.
마치 조금 이른 저녁을 먹는 기분이었다.
그에
“그냥, 바닐라요.”
커넌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향초에 불을 붙여 테이블 위로 올려두던 크림이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
‘알고 싶어요.’
그냥 작은 심술이고, 큰 진심이었다.
그가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 초조했으면 싶었다.
순식간에 집 안이 어둠에 물들었고, 작은 조명보다 더 희미한 촛불이 힘겹게 어둠과 사투를 벌였다.
‘예쁘다.’
“그거 아주 사적인데.”
다만, 자신이 실수를 했다며 꼬집는 말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하지만 커넌은 사과하지 않았다.
자신이 엠마를 죽였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 걸까?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단조차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크림이 말한 공범이라는 유대감 때문인 걸까?
아니. 고작 그것들 때문이 아니었다.
“…네.”
너무 강렬한 탓이겠죠, 뭐.
“무서워요.”
달칵.
캔을 따는 소음이 지독히도 크게 느껴져, 커넌이 자신도 모르게 크림의 눈치를 살폈다.
“…….”
무엇이 다른 걸까.
“괜찮아.”
“…….”
이야기를 하는 동안 크림의 입가에는 끊임없이 미소가 그려졌으나, 어쩐지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크림이 잠시 두 눈을 감았다.
“다이어트 좀 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정도였던 거지.
뭐든지 상관없었다.
두근, 두근.
우는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22 올가미
당신의 상처에 이토록 아픔을 느끼지 못하도록. 조금의 연민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커넌은 하고 싶은 얘기 없어요?”
“…어떤 거요?”
“뭐든 좋아요.”
날도 저물었고, 조명이 은은하게 무드도 있고, 우리는 서로를 끔찍이 사랑하는 연인 같은 포즈이고.
“커넌은 내가 무서워요?”
자신 역시 답을 찾지 못했기에.
그가 없던 하루.
그가 없던 밤.
이것은 무슨 감정일까.
“…….”
“아프지 않고.”
지금의 그가 진짜라는 걸.
그것을 누가 알아줄까.
누가 또 알게 될까.
“내가 바라요.”
“…사랑해요.”
언제나 그만 보면 그랬다.
이제 더 이상 그가 무섭지 않았다.
크림을 사랑한다.
“사랑해요, 크림.”
-의-
***
“뭐 하나 알려줄까요?”
“…안 넘어오네.”
쯧.
“그래서 할 말이 뭐죠?”
그리곤 검은색 염색약을 구입해서 공중 화장실에서 염색을 했죠. 사실 안일한 생각이었지만, 나는… 나는
그렇게 하면 엄마가 기뻐할 줄 알았어요.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아빠가 그리웠으니까…
“…….”
“감히요.”
“괜찮아요, 닥터 셰인.”
자신은 의사니까.
사람 대 사람으로요.
커넌이 마지막 쐐기를 단단히 박아넣자, 잠시 머뭇거리던 닥터 셰인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암 투병과 죽음, 아이들을 혼자 키우며 겪은 어려움, 우울증약을 복용했던 이야기.
다행히 지금은 거의 회복되었다는 말과 어머니는 여전히 그런 자신을 걱정했고, 스스로 자처하여 아이들의
보모가 되었다는 푸념까지.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이 비도, 그의 선물인가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수많은 심리학자들은 당시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때 한 심리학자가 이런
말을 남겼다.
그 이후 스톡홀름 증후군에 대해 많은 연구가 펼쳐졌고, 완벽한 정의를 얻지는 못했으나 나름의 수확은
있었으니, 스톡홀름 증후군.
그것은 실제로 납치를 당한 대부분의 피해자들에게서 은연중에 관찰된 심리적 반응으로, 피해자의
두려움이 가져온 반작용과도 같은 것이었다.
“너도 알고 있잖아.”
“…….”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네 꼴을 좀 봐! 닥터 셰인이 커넌의 손등에 제 손톱을 박아넣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잔인하고 음산하며, 남을 해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불만은 하늘을 찌르고 매사에 부정적인.
마치 좀 전에 자신의 상처를 뒤적이던 때처럼, 한없이 나약하고 초라하게. 그러면서도 터지려는 웃음을
참지는 않았다.
**
“크림.”
“커넌.”
간지러워.
커넌이 설핏 웃으니 크림이 커넌의 얼굴 위로 입술을 내려 눈두덩이, 광대뼈 위의 주근깨, 코끝과 입술산,
입술 옆, 턱뼈에 점점이 입을 맞췄다.
혀가 뜨거울 수도 있구나.
계속해서 귓가에 맴도는 질척이는 소리가 세차게 뛰는 심장에 부채질을 하니, 마치 쉬지 않고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숨이 벅찼다.
으응-
“커넌.”
크림이 그를 시선으로 탐닉하고 어루만지니, 그 묘한 간지러움에 커넌의 발가락이 자꾸만 안으로 굽었다.
“크림.”
왠지 그만 보면 애가 타는 기분이었다.
“잘 모르겠어요.”
꼭 알아야 하나요? 커넌이 어린아이처럼 보채자, 크림이 간질이듯 제 입술을 커넌의 입술에 닿을 듯 말
듯하게 대었다.
그에 애가 탄 커넌이 빨리, 빨리. 자꾸 재촉하니, 코끝이 맞닿은 채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다시 해도 돼요?”
커넌이 그것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크림이 눈동자만을 올려 커넌과 눈을 맞췄다.
“감아요, 눈.”
“데이븐, 이거 자료 좀 수정해줘.”
[시체 부검 결과서]
서류의 가장 위에 적힌 글씨를 읽던 아서가 하, 황당하다는 듯 숨을 뱉었다.
“까짓거 하면 되잖아.”
“젠장, 망할 커넌 자식.”
그런 놈이 갑자기 도망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동료들의 괴롭힘 때문에? 일에 흥미가 없었나? 아니면
다른 무언가?
“다른 이유….”
계속 이대로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데이븐.”
“…어디를요?”
커넌, 그 개자식.
“어디로 가서 찾을 건데요?”
“가요. 경찰서.”
**
여기 있어.
“커넌.”
커넌이 그를 따라 입을 벙긋거렸다.
“뜨거워요.”
“어디가?”
“…온몸이.”
온몸이 뜨거워요.
커넌이 더운 숨을 뱉었다.
“…더, 더 해주세요.”
“커넌.”
너무 예뻐요.
“크림, 크림.”
“사랑해요.”
사랑해요, 크림.
아무도. 그것이 가족이든, 친구든, 회사 동료든. 누구든 상관없으니 그냥 그렇게 해요, 우리.
내뱉은 말이 도로 제 귀로 들어왔다.
아무도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자고. 그것이 누구든 상관없으니 그냥 그렇게 하자고.
**
“윌이요, 커넌 트윌턴.”
“…그래요, 커넌 트윌턴.”
“…그렇다고 치죠.”
후우-
자신이 전화를 하면 화들짝 놀란 목소리로 다급하게 전화를 받을 줄 알았던 커넌은, 그 어떠한 연락도
취하지 않았다.
이제 막 경찰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체격이 큰 남자, 아서가 본능적으로 남자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가 이 팀의 반장이다.
남자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자신의 자리로 보이는 테이블 위에 이리저리 널려 있는 서류를 대충 합쳐
들었다.
그에 아서는 그가 묘하게 강박증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자세히 보니 글자가 빼곡한 종이에는 붉은색으로
필기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우스운 말이지만,
남자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마치 할 말을 고르는 듯 한참을 망설였다.
죄송합니다.
덧붙인 말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아서와 데이븐이 괜찮다며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들이 납치된 거라면, 납치범에게는 확실한 의도가 없다는 겁니다. 보통 납치를 할 때엔 큰
이유가 있거든요. 살인, 장기매매, 금품갈취, 복수 등등 다양하지만 명백하죠. 그런데 지금까지 접수된
실종 피해자들은 접점이 단 하나도 없었어요. 금품갈취라고 하기엔 세 번째와 네 번째, 일곱 번째
피해자는 노숙자와 같은 행색이었죠. 복수라고 하기엔 접점이 아예 없고, 장기매매라고 하기엔 두 번째
피해자의 사회적 위치가 너무 높아요.”
이게 과연 무얼 뜻하는 걸까요.
톰이 고개를 숙였다.
***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천장이었다.
뭐였더라.
‘네 꼴을 좀 봐!’
“닥터 셰인.”
“가능하지?”
커넌이 그를 번뜩이는 눈으로 바라보자, 무릎에 얼굴을 묻었던 어린 커넌 역시 고개를 들어 커넌과 시선을
얽었다.
“크림.”
그에 병실이 다시 그늘에 삼켜지고, 시간이 지나 그보다 더 짙은 어둠이 드리우면 어김없이 아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당장에 한 손으로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게.
차라리 대놓고 웃으면 기분이 덜 상했을 텐데, 꾸역꾸역 웃음을 참다가 터진 것처럼 웃는 소리였다.
“닥쳐.”
“닥쳐, 닥치라고.”
‘다 알면서.’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내가 커넌이야.”
내가 커넌이야.
그게 바로 나라고.
그때 거울에서 뒤바뀌었잖아.
아이의 말에 커넌이 고개를 들어 창문으로 시선을 던지자, 어느새 자신의 모습은 사라지고 아이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크림이 그랬잖아.
그것이 병실을 가득 채우고,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듯 커넌의 온몸을 감싸 안으니, 커넌이 두 귀를 막으며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
“시끄럽다고!”
손끝에 창문이 닿았다고 생각된 순간, 마치 아이의 멱살을 쥐는 것처럼 커넌이 주먹을 쥐었다.
궁금증을 확인하듯 커넌이 주먹에 힘을 주니, 곧이어 큰 소리와 함께 창문이 깨져, 유리 파편들이
이리저리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내가, 커넌이야.”
-의-
#26 유리
“선배님, 저기 저 환자 왜 저러죠?”
“아, 뭐가-”
“혼자 뭐 하는 거야?”
한 가드 요원이 그를 따라 입을 놀렸다.
아침에는 회진도 없고, 환자들은 식사에 열중하는 시간이기에, 본래 아침의 정신병원은 가드 요원들에게
가장 지루한 시간이었다.
“…저거, 저게 뭐, 뭐 하는 겁니까?”
“닥터 셰인 콜 했어?”
“셰인, 어서요!”
“침착해야 해.”
그리 말하며 이성적인 판단을 하려 노력했으나, 현재 자신의 목적지가 커넌의 병실이라는 것을 눈치챈
다음부터는 그를 과감히 포기해야 했다.
“셰인!”
“커넌은?”
“…창문….”
그에 닥터 셰인이 불안함과 안심이 공존하는,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힌 채로 시선을 옮겼다.
“…커넌?”
그러나 가드 요원이 가리킨 창문을 바라보는 순간, 무릎이 꺾여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해야 했다. 왜
처음부터 인지하지 못했던 것일까.
애초에 병실에서 커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커넌!”
**
커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커넌이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두근, 두근.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정말 그 단어 그대로였다.
마치 잠의 요정이 자신의 귓가에 알려준 것처럼 그냥 알 수 있었다.
“모처럼 좋은 꿈을 꾼 것 같아요.”
“…고마워요.”
“이제 그만 일어날까요?”
그때,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 크림이 맞댄 이마를 거두며 몸을 일으키니, 커넌이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크림의 진짜 집.
정말로 그가 살아가고 있는 곳. 꾸미거나 보태지 않고 거짓이 없이 그를 보여주는 곳. 그렇기에 조금 더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인간적이라니.
“크림.”
문득 그런 것이 궁금해졌다.
“사람들 참 이상하지….”
이런 걸 원한 게 아닌데….
잘 알 수 없었다.
‘꼬마야.’
“돈이 없는데요.”
그때를 회상하듯 크림이 두 눈을 지그시 감으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커넌의 두 눈에도 덩달아 눈물이
고였다.
“테일러, 존 스미스.”
매일 그 가게 앞을 서성인 지 꼬박 3 개월 만에 알게 된 이름이에요.
아마 죽어서도 못 잊을 거예요.
‘괜찮단다, 꼬마야.’
게다가, 100 달러가 모이면 엄마에게서 벗어나 장난감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겠다는 당찬 포부도
있었으니,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죠.
평소의 10 배면 100 달러가 될 테니까 당장에 엄마에게서 벗어나 장난감 왕국으로 갈 수 있겠다며
조잘조잘 떠들기도 했어요.
국왕에게는 칼이 필요하잖아요.
크림의 감은 눈에서 눈물방울 하나가 비집고 나와 틈을 만드니, 나머지 것들도 그를 놓치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
이제 그만 말해요, 크림.
“미안해요, 아저씨.”
미안해요.
그가 누구여도 상관없었다.
“그 질문이 너무 싫어요.”
전부 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어느새 장난감 왕국을 그리지 않게 되고, 고작 100 불로는 그 어디서도 살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즈음엔, 사람 목숨이 돈처럼 보였어요.
‘살려주세요.’
#28 탱고
“…모두 거짓이었나요?”
“…….”
“결국 커넌이 원하던 대답을 들었으니, 모두에게 좋은 거 아니에요?”
그냥 시험해본 거라고.
거북하고 기분 나쁘니까.
“장난이에요, 커넌.”
놀랐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저 그의 다정함에 속고 싶었다.
그렇게 아프고 힘든 것들을 애써 무시하며 삐걱이는 자신을 재촉하여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보다 슬슬 배고프죠?”
“…어디를요?”
“그냥 밖이요.”
근처 패밀리 공원도 좋고, 쇼핑 센터에 가서 커넌 옷을 사는 것도 좋고, 영화관에 가서 이번에
개봉했다는 로맨스 영화를 봐도 좋고, 다 좋아요.
커넌과 함께라면.
“그다음에는요?”
“뭐 하고 싶은 거 있어요?”
“크림이야말로, 저랑 뭐 하고 싶은 거 있어요?”
그의 말대로 부엌에서는 은은한 머쉬룸 스프 냄새가 풍겼고, 곳곳에는 리조또 특유의 느끼함이 더해져
있었다.
“탱고요.”
“…….”
“…….”
괜찮단다, 꼬마야.
그렇다고 뒤집어씌울 생각도, 커넌의 감정을 착취할 생각도, 제멋대로 굴 생각도 없어요. 그저,
그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보이지 않고, 그 무엇도 들리지 않으며, 마치 세상에 단둘만 남은 것처럼
오롯이 서로에게 의지하는 거예요. 오로지 우리 둘만을 위한 순간인 거죠.
“이렇게.”
그에 서로의 가슴이 맞닿을 것처럼 가까워졌으나, 그 무엇보다도 서로의 숨결이 가까이에 위치하니 커넌이
급히 숨을 들이켰다.
그러다가 크림이 스텝을 밟으며 몸을 움직이면, 그에게 못 이기는 척 어설프게 스텝을 밟았다.
크림이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커넌은 왼쪽으로, 다시 크림이 왼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커넌은
오른쪽으로. 마치 하나의 몸처럼 자유롭게 움직였다.
“뭘 원하냐고 물었죠.”
커넌에게 뭘 원하냐고요.
곧 있으면 그 뜨거움에 커넌의 머리는 더욱더 붉게 무르익을 것이고, 어쩌면 크림 역시 그럴지도 몰랐다.
커넌은 그 동질감에 심장이 벅찼는데, 크림은 그런 자신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며 선을 그었다.
그럼에도 그가 밉거나 싫지 않으니, 달리 보면 자신의 잘못 같기도 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좋을 것 같았다.
“크림이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그게 무엇이든 좋을 것 같았다.
#29 승리자
깨어났나 봐.
그러다가 깨어나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뭐야? 지금 깨우려던 거 아니었어? 맞아, 아니야. 맞아,
아니야!
수군거리는 소리에 커넌이 잠에서 깨어났다.
여기는 어디지? 꿈속인 걸까? 그 아이는 어디로 갔지? 잡지 못해서 도망친 걸까? 그를 증명하는 것처럼
왼쪽 팔목 부근부터 팔 전체가 시큰거렸다.
‘일어난 것 같은데?’
‘거봐, 일어났다니까?’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지독한 정적을 깨고 말을 내뱉자, 순식간에 끅끅거리는 웃음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마침내 귓가에 더운 숨이 닿는다고 생각된 순간, 강압적인 힘이 억지로 눈꺼풀을 위아래로 잡아당겼다.
헉.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울컥.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질타 어린 마음이 존재감을 키우려고 했다.
“…닥터 셰인?”
병원이라 실내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된다고는 해도, 어쩐지 닥터 셰인의 어깨가 춥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 꿈이었어.
“거짓말.”
‘거짓말쟁이. 위선자.’
그에 미지근한 햇살이 뜨겁게 커넌을 꿰뚫었고, 커넌이 주먹을 쥐어 그 들끓는 감각을 손안에 가두었다.
실제로 햇살을 가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들끓음이 가라앉질 않았다.
햇살이 쨍하게 내리쬐는 광장에서 크림의 손을 맞잡고 처음으로 탱고를 췄던 그 날처럼 말이다.
“…거봐, 내가 진짜지.”
**
“커넌, 뭐 해요?”
형광등 빛에 반사된 크림의 구두는 케첩을 흘려도 그대로 미끄러질 것처럼 매끄럽게 닦여 반짝이고
있었는데, 제 낡은 운동화는 마치 바닥에 붙은 것처럼 도무지 움직이질 않았다.
“가요.”
하지만 크림에게 잡힌 팔목 부근은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웠고, 오랜만에 신은 신발의 감촉은 지독히도
낯설었다.
“어떤 생각이요?”
그런 별거 아닌 관계였다면 어땠을까.
크림, 나는 오늘도 나 혼자 제멋대로 정해버린 우리의 결말에 이토록 아쉽고, 아프고, 슬퍼요.
하핫.
“당황했어요?”
생각보다 좀 많긴 하네요.
“신경 쓰지 말아요.”
낮 동안 뜨겁게 타오르던 태양의 기세가 한풀 꺾여가는 만큼 크림의 품속은 지글지글 들끓고 있었고, 그
뜨거움에 놀란 커넌이 다급하게 그곳을 빠져나오려 했으나 크림은 놔주지 않았다.
“아까 내가 한 말, 기억해요?”
광장의 끝자락에 위치한 가게에서는 너무 무겁지 않은 음악이 흘러나왔고, 문득 크림이 말했던 두 남녀의
잔뜩 일그러진 표정이 떠올랐다.
그에 커넌이 뻣뻣하던 제 손에 힘을 주어 크림의 손을 마주 잡으니,
#30 광장
뭐 그런 아쉬움이 남아요.
그리고 나는… 나는, 그게 참 좋았거든요? 나와 말동무가 되어주는 사람은 처음이기도 했고, 그의 주름진
목소리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거든요.
그리고 며칠 후에 갱단 부하들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광장의 허름한 의자에서 담배를 피웠어요. 그리고 그
이후로 노인의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죠.
커넌이 그 모습에 넋을 놓고 크림을 바라보는데, 평소보다 조금 느리게 저물던 태양이 재촉하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크림을 비추었다.
아니, 그냥 비추는 것이 아니라 제 욕심껏 비추니, 크림의 머리카락이 노랗게, 그러다가 붉게, 다시
보랏빛으로 색을 바꿔 갔고, 커넌이 그 모든 것을 황홀하게 바라봤다.
“아름다워요.”
“커넌도요.”
크림이 말갛게 웃으며 커넌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잡아 왔다.
그럴 리가.
그가 어렵게 꺼낸 자신의 말동무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사소한 칭찬 때문이었는지 커넌은 괜스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춤은 언제 배웠어요?”
“매일 봤거든요.”
매일, 매일.
잠에서 깨기 힘들 것 같으면 꼬박 밤을 새우기도 했었다.
가상의 파트너를 만들어 허공을 끌어안고 스텝을 밟노라면, 뒤늦게 따라오는 허무함에 밟히지 않으려
열심히 발을 놀려야 했다.
“왜 노래 없이 춤을 췄어요?”
“…마땅하게 맞는 곡을 못 찾았거든요.”
말은 안 했지만, 나 그 노래 제법 좋아했거든요.
“그랬어요?”
“나름 예쁨 받고 있었네요?”
“…그럴지도요.”
“힘들어요?”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저릿함이 끝나질 않았고, 그 생소함에 커넌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귀여워요, 커넌.”
난 당신의 그런 점이 좋아.
“…네?”
그 묘한 표정을 지켜보던 크림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훑으니, 모두 하나같이 크림과 커넌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자신의 청춘을 그리는 노인과 두 사람을 비웃고 경멸하는 청년, 무관심과 관심 사이에 서 있는 중년
여성과 교과서에서 배운 부도덕함을 실제로 보게 된 아이의 당혹스러움이 자리했다.
-의-
더 모먼트(The moment) 2
지은이 | Xant
표지 | 형향
펴낸곳 | 글빚는이야기꾼
등록 | 2017 년 6 월 1 일
[제 2017-000041 호]
ISBN | 979-11-972368-3-9
©2020, X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