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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The moment 2 권

목차

15. PET

16. 사형선고

17. 혼란

18. a full of hope

19. 대화

20. 공범

21. 교차

22. 올가미

23. 스톡홀름 증후군

24. 진술

25. 성찰

26. 유리

27. 균열

28. 탱고

29. 승리자

30. 광장
#15 PET

“역시 잘 어울려요.”

커넌은 머리가 붉으니까 분명 빨간색이 제일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크림은 마치 크리스마스에 원하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고, 커넌은 그런 그가
더 미웠다.

차라리 제게 목줄을 채우던 것처럼 모질게 굴면 마음이 더 편했을 텐데, 미운 마음을 먹게 했다가, 다시
또 일렁이게 하는 그가 너무 미웠다.

“…마음에 들어요.”

커넌이 조금 전보다 더 짙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러면서도 떨쳐내지 못한 어색함에 목줄을 만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다가 손에 걸린 방울이 딸랑이며 아는 체라도 해오면, 그에 못 이겨 다시 한번 시선을 내리기도 했다.

[my love PET]

그때 방울 옆에서 죽은 듯이 가만히 있던 펜던트가 뒤집히며 제 존재를 과시하니, 그제서야 거기에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차라리 영영 발견하지 못했다면 좋았을 텐데, 야속한 펜던트가 랜턴의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그에 커넌이 고개를 들어 크림과 눈을 맞추니, 그가 턱짓으로 펜던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에요.”

한참 골랐거든요.

그는 여전히 아까처럼 환히 웃고 있었다.

한겨울에 벽난로 앞에서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며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그러다가 고조되는 감정에 이끌려 커넌의 이마와 관자놀이, 그 사이 어디쯤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귀와 가까워서 그런지 유난히도 살과 살이 맞붙는 쪽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에 커넌이 그 소리를 따라 크림을 올려다보니, 어둠에 온몸이 안겨 머리카락과 눈동자만이 일렁이는


것이 퍽이나 예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미움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껏 그를 따라다니던 두려움도, 처음 느꼈던 사랑스러움도 사라지니, 끝내 미움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벨트처럼 채우고 잠그는 방식이래요.”

펫샵 직원이 강력 추천해 준 상품이에요.

크림이 얄밉게 코를 찡긋거렸다.

그러다가 처음 배운 것을 뽐내는 것처럼 커넌의 목에 채워진 목줄을 풀었다가 다시 채우기를 반복했다.

마치 그 원리를 설명하는 것처럼 구는 모양새에 커넌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크림을 바라보니, 그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할 수 있겠어요?”
그리곤 짙게 얽힌 시선 너머로 질문을 던지니, 커넌은 그저 기계처럼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일반적인
벨트와 같은 방식으로 on & off 가 가능하기도 했고, 지금 당장 이 순간을 모면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한번 해봐요.”

그렇게 말하는 크림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지금 제 목에 자신이 직접 목줄을 채워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크림이 보는 앞에서, 크림이 알려준 방식으로.

그제야 수치심이 온몸을 뒤덮었다.

마치 누군가의 개가 되어, 주인에게 예쁨 받기 위해 발버둥 치는 기분이었다.

못 하겠어요.

그에 커넌이 머뭇머뭇 고개를 저었다.

통하지 않는 저항이란 걸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그저 한번 버텨보는 것이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존심에 깊이 남을 상처에 변명조차 할 수 없을 테니까.

물론, 크림의 작은 손짓 하나, 눈짓 하나에도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말이다.

“못 하겠어요?”

크림이 커넌에게로 한 걸음 다가서며 거리를 좁혔고, 그에 의해 가까워진 랜턴의 강렬한 불빛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문밖으로 끌고 나갔다.

덕분에 이 황량한 어둠 속에는 커넌과 크림.

단둘뿐이니, 크림의 소리 없는 재촉이 온전히 커넌에게로 쏟아졌다.

그는 가끔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흘긋거렸고, 지루하다는 듯 고개를 모로 돌리며 한숨을 내뱉기도 했다.
“…못 하겠어요?”

그리고 크림이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을 때, 커넌은 덜컥 겁이 났다.

만약 그가 내게 질린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점차 크기를 키워나갔다.

귓가에선 잠시 멈췄던 여성의 울부짖음이 다시 들려왔고, 그럼 애써 무시하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눈앞에


펼쳐졌다.

크림!

그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귓가를 스치니, 그에 쫓기듯이 커넌이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그러다가 시야 속의 크림이 말갛게 웃는 것이 느껴졌을 땐, 이미 자신의 목에 다시 목줄이 채워진 후였다.

하아- 하아-

어둠 속에서는 자신의 벅찬 숨소리만이 가득 울렸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긴 사람처럼.

나를 뒤쫓는 사람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크림? 아니면 지금 처한 상황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대체 무엇을 탓해야 하는 걸까.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문제를 헤매는 기분이었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탓하며 자신에게서 도망치던 사람.

처한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은 사람.

커넌도 모르지 않았다.


자신을 벼랑 끝에 몰아넣은 사람은 결국 자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거봐요.”

잘 할 수 있잖아요.

굳이 만족스러움을 숨기지 않은 크림이 목줄로 손을 뻗어,

딸랑.

방울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그에 작은 방울이 앓는 소리를 내면, 그 소리에 맞춰 옆의 펜던트가 기척을 냈다.

아마도 그는 그것을 원했던 것이겠지.

‘넌 내 PET 이야.’

그는 굳이 그것을 말하지 않아도 각인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또 간과했던 거지.

커넌이 자신을 향한 조소를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이 지경까지 오니,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해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크림도 이런 과정을 모두 거친 것이 아닐까.

잠깐 그런 궁금증이 고개를 들었지만, 커넌은 애써 그를 무시했다.

이제 와서 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잘 따라줬으니, 보상으로 조명을 사 올게요.”

이 세상에서 가장 밝은 조명으로요.

크림이 다시 한번 목줄의 방울을 건드리고는 길게 이어진 족쇄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아마도 끝이 잘 고정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

그에 커넌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분노라고 하기엔 조금 초라했고, 원망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감정적이었다.

그렇기에 그저 그에 대한 미움이 불러온 혼동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혹은 그냥 제 위치를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들끓는 마음은 도무지 진정되지 않으니, 커넌이 무어라 입을 떼었으나 크림은 이미
문밖으로 나선 상태였다.

미세하게 열린 문틈으로는 희미한 불빛이 새어 들어왔고, 크림의 분주한 기척이 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끝내 그 기척도 사그라들고 기척을 쫓아낸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커넌은


그곳에 멍하니 서 있었다.

삐리릭-

깔끔한 전자음 소리를 끝으로 온 집에 삭막한 정적이 찾아왔고, 커넌은 그제야 숨을 쉴 수 있는 사람처럼
깊게 한숨을 뱉어냈다.

이제 정말 이 집에는 자신만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시 한번 그의 장난에 놀아나게 되는 것일까.

커넌이 황망하게 목줄을 내려다봤다.


그것은 헐렁하여 목을 조이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족쇄보다 편했다.

굳이 따지자면 족쇄에 묶여 허덕이던 때보다는 훨씬 좋은 조건이었다.

그의 개가 되어, 그가 준 우리에서, 그가 준 것을 먹고, 그의 입맛에 놀아나며 살아가는 삶.

커넌에게 있어서는 가장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어.”

커넌은 이곳이 지독히도 싫었다.

그는 이곳보다 더 밝고 따뜻한 곳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리 헐렁해도 무언가에 묶여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싸구려 직물의 까슬거리는 감촉은 연신 목 주변을 간질였고, 목을 긁적이듯 손을 움직이던 커넌이 고개를
숙여 목줄을 벗어냈다.

“…….”

기대는 했지만, 너무 아무렇지 않게 벗겨지는 목줄에 커넌은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방 안에서도 집 안에서도 자신 혼자뿐이었는데, 괜히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

얼떨결에 벗은 건지, 아니면 계속 무르익던 감정이 재촉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좀 전에 자신이 아닌, 쇠사슬이 묶인 곳을 확인하던 크림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는 끝까지 자신을 무시했던 걸지도 모른다.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이깟 헐렁한 목줄 하나에 허덕이며 도망칠 수 없는 병신.

혹은 그도 알고 있던 것이 아닐까?

반항 한 번 제대로 못 한 커넌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회를 준 것일지도 몰랐다.


후우-

거기까지 생각하자 손발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려왔다.

애써 그럴 거라고, 괜찮다고 자신을 다독여봐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었다. 허탈한 심정에


커넌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곤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다리를 온 힘을 다해서 버텨냈다.

그럼에도 꺾이려는 무릎을 손으로 짚는데, 굽은 등 너머로 땀이 후드득 떨어졌다.

점점이 떨어져 바닥에 고이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는 그때,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움직이는 그런 소리.

그에 커넌이 미세하게 열린 문틈으로 시선을 옮겼다.

희미한 빛 너머로 고요한 복도가 보였으나, 만약 밖으로 나간다면?

커넌은 제 두 눈을 따갑게 찌르던 환한 조명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딱 한 발자국.

현관 문고리에서 딱 한 발자국을 남겨놓고 팽팽하게 조여졌던 족쇄의 쇠사슬이 떠올랐다.

더불어 그때의 좌절감까지 함께.

“하지만 지금은?”

꿀꺽.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커넌은 본능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작 6 피트 정도 떨어진 곳이 마치 600 피트 앞에 있는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이내 문 앞에 도착하니, 예상했던 것처럼 목줄이 조여왔다.

그에 다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한참을 망설이던 커넌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좀 전까지는 희미하고 멀게만 보이던 빛이, 제가 알던 따갑고 환한 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진짜… 이게 뭐라고.”

이깟 족쇄가 뭐라고.

커넌이 신경질적으로 목줄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 와중에도 딸랑이며 제 존재를 과시하는 펜던트와 방울이 지독히도 미웠다.

아니, 가장 미운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사그라들지 않는 의심이었다.

혹시나 그가 나를 시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문을 열고 나가면 그가 거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진


않을까.

한번 고개를 든 것은 점차 크기를 부풀렸고, 다시 한번 커넌을 잠식시키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그렇게 두지


않았다.

손끝이 새하얗게 질리도록 세게 주먹을 쥔 커넌이 드디어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그제야 자신을 좀먹던
의심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리곤 마치 싸구려 게임을 단계별로 클리어하는 것처럼 거실, 거실 복도, 현관 복도, 현관 순으로
커넌이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구간에서는 매번 의심이 고개를 들었으나, 그 어디에도 크림은 존재하지 않았다.

삐리릭-

마침내 현관문이 입을 벌리고 커넌을 토해냈으나, 그곳에도 크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제야 밀려오는 안도감에 눈앞이 뿌옇게 변해갔다.

“울면 안 돼.”
지금은 아니야.

커넌이 제 소매를 끌어당겨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그제야 제 옷이 시야에 들어왔다. 제 것보다 품이 넉넉하기는 했으나, 길이는 꼭 맞았다. 계절감
없이 얇은 옷은 순전히 집 안에서만 입을 법한 것이었다.

그는 정말로 날 놓아줄 계획이었을까.

커넌이 제 옷을 매만지며 사색에 잠기는데, 엘리베이터 작동음이 들려왔다.

그에 퍼뜩 고개를 들어 엘리베이터를 확인하니, 1 층에 있던 것이 점점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누구 하나 방해하지 않으니 엘리베이터는 단숨에 층수를 바꾸며 다가왔고, 커넌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우선 옆집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애원을 하든지 협박을 하든지 우선 들어가서 혹시나 그에게 발각될 때를 위해 부엌에서 칼도 하나 훔치고,
죽어도 현관문을 열지 말라며 집주인과 실랑이를 하다 보면 경찰이 도착할 거라며 미련한 대책도 준비했다.

아니, 사실 그것보다도 간절한 것은 단 하나였다.

누구라도 좋으니,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어 주기를.

만약 나중에 자신이 죽더라도, 자신의 죽음 정도는 알려지길 바랐다.

그에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뻗어 초인종을 누르니,

띵동- 띵동-

밝고 경쾌한 벨 소리가 두어 번 울렸다.

만약 안에 아무도 없으면 어떻게 하지?

감히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커넌이 힐끔 엘리베이터의 층수를 바라보는데, 중간에서 잠시 멈췄는지 엘리베이터가 7 층에 멈춰 있었다.

그를 확인한 커넌이 조급한 마음을 담아 연신 초인종을 누르니, 그제야 안쪽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그에 커넌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지면서도 촉박함을 더해가니, 커넌이 현관문과 엘리베이터를 1 초에 한


번꼴로 번갈아 가며 돌아봤다.
-누구세요?

그때 안쪽에서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두꺼운지 웅웅거리는 것처럼 소리가 울렸는데, 지금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냥 아무나 좋으니까 지금의 자신을 모른 체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도와주세요, 제발 저 좀…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목소리가 지나치게 높고 들끓었다.

만약 자신이 안에 있는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어보려고 해도 그게 영 쉽지 않았다.

그에 커넌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해봐야 주먹이 퉁퉁 붓도록 문을 두드리는 일뿐이었다.

쾅쾅쾅-

고요함에 잠긴 것처럼 적막하기만 한 복도에 연신 둔탁한 소리가 울리자, 이내 안쪽에서 짜증스런 한숨


소리와 함께 철컥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커넌의 얼굴에 희망이 가득 차니, 감히 그것이 가져올 파장을 모르는 자의 여유였다.

아직 엘리베이터는 10 층에 위치해 있었고, 문이 열리면 당장 그 품에 뛰어들어, 몸을 숨기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철컥이며 잠금장치를 푸는 소리가 끝도 없이 이어졌고, 잠시 멈췄던 엘리베이터는 다시 힘을 내어


꾸역꾸역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자신을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들리는 기계 작동음에 커넌의 시선이 현관문과 엘리베이터를 바쁘게 오가는
순간, 현관문과 엘리베이터가 동시에 입을 벌렸다.

그에 커넌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니, 그 소리가 커넌의 귓가에 또렷하게 울렸다.


#16 사형선고

심장이 곤두박질친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그 이질적인 느낌에 커넌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제 발밑을 살폈다.

혹시나 바닥의 먼지구름 위를 부유하고 있는 제 심장이 발견되지는 않을까,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제야 그런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에 커넌이 고개를 들어 두려움에 일렁이는 눈빛으로 크림을 바라봤으나, 그의 시선은 커넌을 조금


비껴가 좀 더 뒤로 향하고 있었다.

그를 따라 커넌이 눈동자를 굴리니, 문밖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중년의 여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집에서 청소라도 하고 있었는지, 여성은 꽃무늬 에이프런 차림을 하고는 굳이 의아함을 숨기지 않은 채,
커넌과 크림을 번갈아 봤다.

그러다가 커넌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짜증 섞인 한숨을 깊이 내쉬거나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으나,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지금 커넌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크림의 시선이었다.

저 시선, 저 눈빛. 커넌은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이, 씨 X.’

인상을 쓰며 다가오던 그의 표정, 손짓과 발짓, 그 뒤를 따르는 비명 소리와 붉게 물들던 그의


머리카락까지.

그 모든 것이 마치 그린 것처럼 눈앞에 선명했다.

그것은, 살인을 앞둔 사람의 눈빛이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삼켜질 뿐이지….”

커넌은 그제야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지금 제 손에 무고한 사람의 생명까지 쥐어졌으니,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에 커넌이 재빨리 몸을 돌려 여성의 어깨를 밀치니, 여성의 입에서 비명이 터지기도 전에 두 사람을
삼킨 문이 거세게 닫혔다.

“아니,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지금 당장 경찰을 부르겠어요!

커넌에게 떠밀려 현관 위를 뒹굴던 여성이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고는,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다.

게다가 품에 소중히 갖고 있던 핸드폰 화면까지 밝히니, 그에 놀란 커넌이 다급하게 여성의 입을 막았다.

쉿-

커넌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며 제 검지를 여성의 입가에 갖다 대자, 잔뜩 겁을 먹은 여성이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그리곤 여성이 간절하게 외치니, 그를 바라보던 커넌은 여성의 모습에서 크림을 두려워하던 자신의 모습을
엿보게 됐다.
“아, 아니에요. 나는 피해자고 저, 저기 밖에 있는 남자가 사, 살인마예요.”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을 죽였을지도 몰라요.

그에 당황한 커넌이 다급하게 말들을 쏟아내는데, 그를 겁에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던 여성이 온 힘을 다해


커넌을 세게 밀쳤다.

그리곤 커넌이 어떠한 모션을 취하기도 전에 서둘러 문을 열어젖히니, 그 모든 순간들이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안 돼!”

바닥에 널브러진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커넌의 뒤늦은 절규가 여성을 따라 복도로 향했다. 여전히
복도에는 크림이 있었고, 여성은 당연하게도 그를 향해 달려나갔다.

그리고는 거의 크림에게 매달리다시피 한 모양새로 말을 쏟으니,

“아무래도 미친놈인 것 같아요.”

신고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얼핏 들린 목소리에는 혐오감이 가득 뒤섞여 있었다.

그에 커넌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여성을 바라보자, 여성이 깜짝 놀란 듯 크림보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런 여성의 행동은 순식간에 커넌과 크림의 입장을 반전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마도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크림이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것은 지금껏 봐온 그의 표정 중에서 가장 신이 난 것처럼 보이는 얼굴이었고, 그에 커넌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으나

말도 안 돼-

여성은 너스레를 떨며 크림의 어깨를 두드릴 뿐이었다.

“엠마는 집에 들어가 있을래요? 저분은 제가 케어해서 보낼게요.”

“괜찮겠어요?”

이상한 사람이면….

여성이 걱정 어린 시선으로 크림을 바라보자, 그는 정말 괜찮다는 듯이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그에


여성은 안심했다는 듯 부드럽게 웃어 보였고, 그를 지켜보던 커넌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모자란 놈.”

커넌을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서던 여성이 신경질적으로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쾅.

그리곤 사형선고 도장처럼 세차게 문이 닫히니, 그 차가운 잔재가 텅 빈 복도를 끌어안았다.

그에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던 커넌이 아까처럼 고개를 숙여, 제 발밑을 살폈다.


혹시나 아까 미처 발견하지 못한 심장이 홀로 울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 시답잖은 생각도 했다.

그러다가 짝짝이 신발을 신고 있는 발을 확인하고는 싱겁게 웃기도 했다.

정말 족쇄가 없는 걸까.

이미 발목에는 족쇄의 흔적이라곤 남아 있지도 않았으나, 이상하게도 그 부분이 계속 저릿저릿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가 안 보이는 곳에 자신도 모르게 족쇄를 채워둔 걸지도 몰랐다.

그는 자신이 족쇄에 묶인 줄도 모르고, 죽을 때까지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걸까.

커넌이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크림을 바라봤다.

“이제 전 죽는 건가요?”

최대한 의연하게 묻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자신이 듣기에도 목소리엔 미세한 떨림이 가득했으니까.

그에 커넌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마지막 자존심, 뭐 그런 거였는데, 이건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크림의 표정이 알 수 없게 변한 걸 보니 말이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입술이 꿈틀거렸고, 눈썹은 제멋대로 춤을 췄다.

그리고 그런 크림을 바라보며 커넌은 묘한 희열을 느꼈다.

조금이라도 그를 화나게 만들 수 있다면.

아주 잠깐이라도 그를 울릴 수 있다면.

그냥 그에게서 어떠한 것이든 감정의 모양을 한 무언가를 느낄 수만 있다면, 당장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devil.

어렸던 자신은 그 단어를 지독히 싫어했는데, 다 큰 자신은 그 단어를 미치도록 소망하고 있었다. 이런
게 모순이 아니면 무엇인가.
‘난 그 누구보다도 우리가 모순 같아요.’

커넌은 그렇게 말하던 크림을 잊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정말 모순인 걸까.

커넌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일 거라면 차라리 빨리 죽여줬으면 싶었다.

다만 욕심이라면 가능한 최소한의 고통으로 말이다.

커넌이 그런 되지도 않는 소원을 비는 그때, 머리 위로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제 욕심을 눈치챈 것일까?

커넌이 슬며시 눈을 떠 크림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고개를 모로 돌려 웃기 시작했다.

아니,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듯 허리를 접어 당장에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지독했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발밑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

자신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좀 전에 올렸던 입꼬리가 굳어, 계속해서 호를 그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의 주먹질에 뼈가 뒤틀리고, 피가 솟구치더라도.

웃고 있었으면 좋겠어.

커넌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등에 돋아난 핏줄들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두꺼워졌다.

제 힘을 이기지 못해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금방이라도 터질 화산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더 이상 세게 쥘 수 없을 것처럼 팽팽하게 조여진 주먹에 더욱더 세게 힘이 들어가는 순간, 커넌이 목청


높여 크림을 불렀다.
“크림!!!!”

커넌의 찢어질 듯 새된 고음이 아파트 복도에 울려 퍼졌다.

그에 그때까지도 복도에 울리던 크림의 웃음소리가 뚝 끊기니, 순식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게다가 그의 입꼬리가 과묵하게 평행을 그리니, 마치 커넌만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제 내가 죽나요?”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커넌이 다시 한번 물었다.

질문을 끝내고 입을 다물자 턱이 덜덜 떨리고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몸은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그 모습이 마치 황소를 재촉하는 투우사의 붉은 천 같았다.

그 무시무시한 뿔로 천을 찢으면 더 높은 환호성이 터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무시무시한 뿔로 투우사를 찢으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아마도요.”

그렇게 말하며 크림이 커넌의 양쪽 어깨를 쓸어내렸다.

마치 가여운 아이를 봤을 때 사람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그리고 커넌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최대한 차게 그의 손을 뿌리쳤고, 크림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가는 모습에 묘하게 만족감도
느꼈다.

아주 잠깐은 말이다.
“아악!”

미처 만족감에 취하기도 전에 크림이 커넌의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잡자, 커넌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커넌. 죽고 싶은 건 아니죠?”

사실은 살고 싶어서 미치겠죠.

크림이 무언가를 토해내듯 말을 쏟아냈다.

그에 커넌이 두 눈을 질끈 감자, 그를 지켜보던 크림이 커넌의 머리카락을 좀 더 세게 잡아당겼다.

손 속에 힘을 빼지 않은 거친 행동에 당장에라도 두피가 벗겨질 것만 같았다.

그 고통에 커넌이 손과 발을 허우적거리며 크림을 밀어내려 노력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지, 알 수만 있다면 당장에 땅이라도 길 텐데. 그렇죠?”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만약 긍정의 대답을 하면 어떻게 될까?

살고 싶어서 미치겠다고, 혹시 방법을 알고 있다면 제게 좀 알려달라며 바닥을 긴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파도처럼 커넌을 뒤덮었다.

하, 비루한 27 년의 인생이 끝까지 곪아서 썩는구나.

커넌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눈물을 꾸역꾸역 삼켜내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말이 달콤하게 귓가를 적시니, 그의 말처럼 살 수만 있다면.


누군가가 그 방법을 알려만 준다면 정말로 악마에게 영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알 수만 있다면 당장에 땅이라도 길 텐데.’

그렇죠? 자신을 비웃듯이 말하던 크림의 목소리가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되감기와 재생을 반복하는 것처럼 그 말이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알려줄까요?”

살 수 있는 방법.

크림이 고개를 좀 더 숙여, 커넌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문득 예전에 본 만화영화의 주인공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그에 커넌이 멍하니 그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누군가가 그 방법을 알려만 준다면 정말로 악마에게 영혼도 팔 텐데.

그렇다면 그는 악마인가, 자신은 그에게 영혼을 팔게 되는 걸까.

그 이전에 영혼이 없는 인간은 살아 있는 것인가.

그 묘한 괴리감에도 커넌은 그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아주 격렬하게.

며칠을 굶주린 아이에게 썩은 빵을 내밀며 먹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좀 전의 자신처럼 고개를 끄덕일 것


같았다.

“그럼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해봐요.”

“…죽고 싶지 않아요.”

“살고 싶다고, 살려달라고. 그렇게 말해봐요.”


“살고 싶어요. 나를… 크림이 나를, 살려줘요.”

방법이 궁금해요?

크림의 질문에 커넌이 다시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바라보던 크림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커넌을 끌어안았다.

그에 커넌이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크림의 등을 마주 안았다.

크림에게는 오래된 약국에서 맡아본 온갖 약품의 냄새가 풍겼고, 희미하게 담배 냄새가 묻어 나오기도
했다.

그의 체취에는 그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커넌은, 나만 따라오면 돼요.”

나만 바라보고, 내가 하는 대로 그저 따라오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크림이 좀 더 짙게 커넌을 끌어안았다.

그에 크림의 심장 소리가 오른쪽 가슴에 울려 퍼지니, 그 일정한 박동이 주는 안정감에 커넌이 슬며시
눈을 감았다.

이대로 영영 시간이 멈추면 좋을 텐데.

그런 말도 안되는 소원을 빌기도 했던 것 같다.

등 뒤에서 전자음 소리가 들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그에 커넌이 상체를 뒤로 무르며, 자연스럽게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는 크림을 바라봤다.

무언가 물어봐야 할 것 같았으나, 뇌는 생각을 멈춘 지 오래였다.

그런 커넌을 눈치챈 듯이 크림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니,

“우리 집이에요, 여기.”


좀 전의 그 여성분은 엠마, 우리 집 가정부고요.

크림의 말과 동시에 잠금이 풀렸다는 안내 멘트가 들려왔다.

육중한 문은 아무런 방해 없이 열렸고, 미세한 문틈 사이로 청소기 소음이 들려왔다.

아마도 여성, 엠마가 청소 중인 모양이었다.

좀 전에도 청소를 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나, 그럼에도 씁쓸한 감정이


사그라들지는 않았다.

“만약 엠마를 죽인다면, 오늘 커넌은 살 수 있어요.”

크림이 안쪽으로 앞장서며 말했다.

그 모진 말에 놀란 커넌이 걸음을 멈추고 크림을 황망하게 바라보는데, 정작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척


시치미를 뗐다.

마치 자신이 혼자만의 환청에 빠져 그를 의심하는 것만 같았다.

갑작스런 혼란스러움에 커넌이 고개를 돌려 엘리베이터를 확인했으나, 이미 1 층으로 내려간 엘리베이터는


마치 판사의 의사봉처럼 커넌의 사형선고를 확정시켰다.

결국 자신이 돌아갈 수 있는 곳은 크림뿐이니, 커넌이 다시 고개를 돌려 집안으로 시선을 던졌다.

크림은 이미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커넌에게 던져진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쾅-

두꺼운 문이 닫히며 크림과 커넌, 그리고 엠마를 집어삼켰다.

#17 혼란
집안으로 들어온 커넌은 여전히 멍한 시선으로 크림을 바라봤고, 그는 별 거 아닌 문제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 같으니,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 두 개를 들고는 무엇을 가지고 놀지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그 아무렇지 않은 표정에, 커넌은 좀 전에 그가 내뱉은 말을 자신이 맞게 알아들었는지 의심해야 했다.

‘좀 전의 그 여성분은, 엠마. 우리 집 가정부고요.’

만약 엠마를 죽인다면, 오늘 커넌은 살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던 크림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에 커넌이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섰으나, 이미 등 뒤로 현관문이 맞닿아 있는 상태였다.

크림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런 그의 모습에 커넌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방금 뭐라고 말했어요?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아요?

그렇게 묻고 싶었다.

혹시나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계속해서 그에게 확인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사실 커넌은 알고 있었다.

크림을 따라 이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가 시키는 모든 것들을 그저 따라야 한다는, 암묵적 동의임을.

알고는 있지만….

그저 그런 자신을 부정하고 싶었다.

자신은 그를 거역할 수 없다고.

살고자 하는 자신에게 그가 알려준 살 수 있는 방법을 따르는 것이라고.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지독한 이기심을 외면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크림이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크림은 지독히도 여유로웠고, 자신은 이토록 긴장하고 있었다.


“…크림.”

고민 끝에 커넌이 크림을 부르는 찰나, 집 안을 가득 채웠던 청소기 소음이 뚝 끊겼다.

그에 커넌의 목소리도 함께 잦아들어 가니, 크림이 그런 커넌을 바라보다가 예쁘게 눈을 휘었다.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 두 개를 들고는, 무엇을 가지고 놀지 고민하는 아이.

커넌은 그제야 크림이란 사람을 온전히 알게 된 기분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무엇을 시키려고 했는지까지.

그에 현실감이 돌아오니, 멀리서 엠마의 허밍이 들려왔다.

Dabby Boone 의 You light up my life.

자신의 어머니도 자주 흥얼거리던 노래였다.

서정적인 가사를 어찌나 애달프게 부르던지, 아직도 어머니의 허밍이 귓가에 맴도는 것만 같았다.

커넌은 그녀가 노래를 부를 때면 늘 숨을 죽여야 했다.

흥얼거리던 노래가 흐지부지 끝이 나면 또다시 고통이 찾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긴장할 것 없어요. 그녀는 혼자 살고, 최근 다녀간 곳들은 고작 해봐야 마트나 4 개월 전에


다녀온 미용실뿐이니까요.”

그녀를 죽인다고 해도, 그 누구도 커넌을 의심하거나 하진 않을 거예요.

크림이 커넌의 귓가에 속삭였다.

괜찮을 거예요.

크림의 말과 함께 그녀의 허밍이 섞여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울렸다.

그에 커넌이 두 손으로 귀를 꾹 누르자 더 이상 엠마의, 그리고 어머니의 허밍이 들려오지 않았다.


“저 노래가 너무 싫어.”

애달팠던 어머니의 표정이 보이는 것만 같으니까.

그녀는 무엇이 그리도 슬펐던 걸까? 내가 이렇게 옆에 있었는데. 내가 그토록 그녀의 곁을 지켰는데.

어머니는 아빠를 기다렸던 걸까? 그렇다면 왜 내게는 그토록 매몰찼던 걸까.

나도 좀 사랑해주지.

“나도 좀, 사랑해주지.”

저 노래가 너무 싫어.

당장 저 노래를 그칠 수만 있다면.

당장 노래를 부르는 그녀를 조용히 만들 수만 있다면.

쾅!

커넌이 신발장 위를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

거센 소리는 집 안 전체에 울렸다.

그에 의해 곧 엠마의 허밍도 그쳤고, 크림의 여유롭던 미소도 사라졌다.

커넌은 그런 크림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절대 후회하지 말자고.

만약 자신이 그의 손에 죽게 된다고 해도, 절대로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리며 그때 엠마를 죽일걸… 그런


후회는 하지 말자고 말이다.
“커넌.”

“…크림?”

크림이 이를 악물며 커넌을 부르는 동시에, 큰 소리에 놀란 엠마가 현관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겁을 먹은 건지 걸음걸이 하나하나에 조심성이 느껴졌고, 그 탓에 거리가 가늠되지 않았다.

그에 크림이 복도 모퉁이까지 걸음을 옮기니, 힐끔- 커넌은 도어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중 잠금이 걸려 있기는 했지만, 긴장하지만 않는다면 풀기에 어려움은 없어 보였다.

그저 버튼 하나 더 누르는 것뿐이야.

커넌이 마른침을 삼키며 마음속으로 카운트다운을 했다.

아무리 방음이 잘 되는 고급 아파트라고 해도 계단은 소리가 울리기 마련이었다.

당장에 비상계단으로 뛰쳐나가며 도와달라고 소리친다면 적어도 누구 하나는 빼꼼히 문을 열어보지는


않을까.

그러다가 운이 좋아서 경찰에 신고라도 들어가지는 않을까, 그런 실낱같은 희망에 젖어도 봤다.

“크림?”

그때 엠마의 목소리가 복도 모퉁이,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그에 크림의 신경이 온통 그녀를 향해 곤두섰고, 기회는 단 한 번이었다.

꿀꺽- 커넌이 마른침을 삼키며 도어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긴장할 것 없어. 긴장하면 안 돼.

그 누구보다도 긴장한 자신이 제일 시끄럽게 외쳤다.

혹시나 그 외침이 크림에게도 들릴까, 두려운 마음에 고개를 돌리는데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두근두근 세차게 뛰던 심장이 급하게 뜀박질을 멈추니, 온몸의 피가 발끝으로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저릿저릿한 감각에 모든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세워졌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도 무감각해진


기분이었다.

‘도망쳐.’

피눈물을 흘리던 여성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귓가에 퍼졌지만 커넌은 도망칠 수 없었다.

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고, 처절한 비명으로 크림을 부를 수도 없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모든 것이 꿈이길 바라며 의식을 놓는 것뿐이었다.

사무실 의자에서 발작처럼 몸부림치며 일어나, 탁상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다가 깜빡이는 조명에 한숨이나
몰아쉬는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바랐다.

***

똑딱똑딱.

일정한 박자로 움직이는 탁상시계는 마음을 편안하게도 만들고, 반대로 불안감을 고조시키기도 했다.

그에 커넌은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마다 테이블에 엎드려, 탁상시계의 초침을 따라 눈동자를 굴리고는
했는데 그러면 점차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지금의 커넌에게는 후자에 가까웠지만, 그럼에도 탁상시계에서 눈을 뗄 수는 없었다.

그저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으니까.

후우-
커넌이 한숨을 몰아쉬며 제 한 몸에도 버거운 듯이 신음을 토해내는 싸구려 철제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러다가 생각이 많아져 머리가 무거워지기라도 하면, 수갑이 채워진 제 손목에 이마가 닿을 정도로 등을
동그랗게 굽히기도 했다.

드문드문 기억나는 어제의 일들 속에서 들끓는 자신의 불안감이, 끊임없이 자신을 찔러오는 것 같았다.

“닥터 토마스….”

고작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저릿저릿한 기분이었다.

매번 욕심내어 제 이름처럼 부른 탓에 가깝던 것이 지금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고,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커넌이 느릿하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침착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당장은 솟아날 구멍 하나 없이 막막해 보여도, 아주 작은 바늘구멍 하나가 아쉬운 기분이었다.

그에 커넌이 기를 쓰며 머리를 굴리다가도 이내 이 지긋지긋한 감정에 맥이 탁 풀렸다.

“커넌.”

그때 맞은편에서 닥터 셰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보다도 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굳이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눈에 선했다.

그녀의 침울한 기분이 곧바로 커넌에게 날아와 꽂히니, 커넌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닥터 셰인과 시선을
얽었다.

“…닥터 토마스가 죽었어요.”


뇌사로.

구급차에서 급하게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지만, 이미 오랜 시간 숨이 끊어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닥터 셰인이 형식적인 말투로 현재 상황을 보고했으나, 울음 섞인 한숨은 미처 숨기지 못했다. 그녀는


언제나 애써 침착한 척 연기를 하지만, 사실상 그녀만큼 감정적인 사람도 없을 것이었다. 쉽게 지치고,
흥분하고, 누군가의 고통에 내심 기뻐하면서도 커넌의 무관심에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죽상이 되기도 했다.

감정적인 사람.

사실 그런 사람을 다루는 것은 비교적 쉬웠다.

멀리 밀어냈다가 최대한 가까이 끌어당기고, 그러다가 한없이 거리가 좁혀지면 다시 그만큼 밀쳐내면
그만이었다.

“닥터 셰인.”

“부검을 진행하기로 했어요.”

“셰인.”

“100% 확정은 아니지만, 결과가 나오면 아마도 커넌은 바로 구속이….”

“셰인!”

“…….”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닥터 토마스가 죽었다는 건 뭐고,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커넌이 제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아마도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었을 것이었다.

아아, 웃으면 안 되는데.

커넌이 씰룩이는 입꼬리에 힘을 주어, 애써 평행을 유지시켰다.

그러다가 그를 유지하는 것이 도저히 어려울 때에는,


쾅!

테이블에 이마를 세게 박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다가 깜짝 놀란 닥터 셰인이 서둘러 제 이름을 부르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상황이지 않은가.

“커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닥터 셰인이 발작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커넌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커넌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 세우니, 애써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고작 이 정도로는 피가 난다거나 흉터를 걱정할 만한 상처가 나지 않으니, 커넌은 오히려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녀에게는 지금보다 더 큰 무언가가 필요했다.

아아악!

그에 커넌이 크게 고함을 내지르며 온몸을 버둥거렸다.

그러다가 닥터 셰인이 조금 놀란 듯 주춤거리며 몸을 피하기라도 하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곤 버둥거리듯 몸을 움찔거리며 이마와 어깨를 바닥에 세게 부딪혔다.

“커넌, 커넌!”

닥터 셰인이 커넌의 움직임을 제지하려고 애를 썼으나, 그럼에도 커넌의 발작 증세는 멈추지 않았다.

그에 결국 닥터 셰인이 방 밖으로 달려나가니,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커넌이 조금 전보다 더 세게 양쪽 어깨를 바닥에 뭉갰다.

그리고 잠시 후 닥터 셰인과 두 명의 가드 요원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방 밖에서 닥터 셰인이 무어라 말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가드 요원들은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커넌을


제압하려 했다.

각자 커넌의 팔을 한쪽씩 잡아채어 뒤로 꺾은 후, 무릎으로 커넌의 허벅지를 내리눌렀다.

덕분에 커넌의 몸은 완전히 땅과 맞닿은 상태가 되었다.

이따금 커넌이 반항적으로 몸을 몇 번 움직였으나, 제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셰인.”

커넌이 눈에 핏발을 세우며 닥터 셰인을 올려다봤다.

그러다가 닥터 셰인의 지독히도 냉정한 눈빛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불안감에 일렁이는 두 눈을 질끈


감기도 했다.

셰인. 셰인.

적막감이 감도는 방 안에는 온통 커넌의 애절한 목소리만이 가득했고, 안타깝게도 그에 대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에 커넌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애달프게 떨어지니, 그 모든 것을 소리 없는 감시자. CCTV 가 제 두


눈에 온전히 담아내었다.

“나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당신들, 나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악에 받친 고함을 내지르던 커넌이, 끝내 제 분에 못 이겨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에 가드 요원들이 닥터 셰인의 눈치를 살피니, 주춤거리며 다가온 그녀가 가드 요원들을 물렸다.

그리곤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커넌의 몸을 툭 건드려봤지만, 역시나 그 어떠한 미동도 없었다.

<2 권에서 계속>

#18 a full of hope

도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깊은 사색에 잠긴 닥터 셰인이 깍지 낀 손 위로 턱을 괴며 두 눈을 감았다.

‘엄마, 아직 멀었어요?’

그렇게 묻던 첫째 샬론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또렷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불과 2 시간 전, 자신은 집에서 아이들에게 콘스프를 끓여주고 있었으니까.

워낙에 만드는 것이 쉽기도 하고 아이들도 잘 먹으니,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은 끓여 먹는 편이었다.

콘스프 정도는 눈감고도 할 수 있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으스대는 일도 적지 않았고, 그렇기에


잡생각이 많은 날에는 어김없이 콘스프를 만들어 먹었다.

생각도 하고, 더불어 요리도 가능했기에.

‘샬론, 히든, 엄마- 다 됐으니 어서들 오세요-’


그런 의미로 오늘도 콘스프를 끓였다.

넓적한 볼에 고소한 냄새를 한껏 풍기는 콘스프를 담으며, 혹시나 닥터 토마스에게서 연락이 오지는
않을까 연신 핸드폰을 확인해야 했다.

어쩌면 자신은 조금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경미한 상처라고.

병원에서 간단하게 드레싱을 받고 복귀하면 다시 그 뻔뻔하고 싸가지 없는 태도에 빈정이 상하며 일을


해야 하니, 조금 오래 입원하면 좋겠다.

그런 생각도 했다.

그러다가 커넌에 대한 생각이 부수적으로 따라오면, 그 역시 깊게 생각하지 않고 대충 흘려넘겼다.

‘엄마, 샬론, 히든. 다들 어서….’

거기까지 말을 하는데 여지껏 조용하기만 하던 핸드폰이 연신 징징거렸다.

그에 자신도 모르게 반색하며 핸드폰을 확인했으나, 그토록 기다리던 닥터 토마스의 전화는 아니었다.

‘여보세요, 셰인입니다.’

-셰인, 존입니다. 지금 병원장님께서 긴급회의를 소집하셔서….

전화는 짧고 간결하게 끝났다.

닥터 토마스 사건으로 인해 긴급회의가 소집되었으니 잠시 병원으로 오라는 전화였다.

그에 알겠다며 짧게 대답을 하고는 전화를 끊는데, 누군가가 톡톡 허벅지를 두드렸다.

‘히든?’
주인공은 둘째 히든이었다.

얼마 전에 산 토끼 그릇이 마음에 드니, 그곳에 콘스프를 덜어달라는 제안이었고 그에 그릇을 건네받아


콘스프를 한 국자 크게 떠서 그녀에게 건네었다.

‘엄마가 일이 생겨서 같이 콘스프를 못 먹을 것 같은데… 괜찮을까?’

그런 물음에 히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토끼 그릇이 그리도 좋은지, 시선은 온통 그곳으로 향해 있었다.

그에 서운함 반, 귀여움 반으로 볼을 꼬집자 그제야 히든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쏟아졌다.

‘할머니랑 언니랑 먹으면 돼요!’

히든의 뒤늦은 대답을 들으며 미련이 생기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걱정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엄마에게 간단한 전달사항을 말하고 잽싸게 주차장으로
빠져나오니, 머리카락부터 신발까지 온통 콘스프 냄새가 배어 있었다.

‘존, 지금 출발하면 15 분 정도 후에 도착할 것 같아요.’

차에 타서는 존에게 전화를 하며 잽싸게 시동을 걸었다.

출시된 지 20 년도 더 지난 자동차는 가끔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것 빼고는 아직까지는 쌩쌩했다.

다행히 오늘은 시동이 한 번에 걸렸고, 그에 맞춰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마침 자신도 병원장을 찾을 계획이었다.

물론 닥터 토마스를 먼저 보고 갈 계획이었지만, 그거야 순서만 바뀔 뿐이었다.

병원장에게는 할 말이 많았다.

달칵.

한참 운전을 하다가 늘 가지고 다니던 녹음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제법 오랜 시간을 함께한 탓에 낡은 녹음기는 기껏해야 1 시간 정도의 분량을 겨우겨우 녹음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녹음을 했다고 생각되면 USB 나 다른 장치에 옮겨둬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차마 이 녹음기를 버릴 수 없었다.

[모든 게 다 잘될 거야.]

녹음기를 버리면 그의 말도, 웃음도, 자신을 잃지 말라던 조언도 모두 버리는 것이 될 것 같았다.

그에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녹음 내용의 절반 이상이 커넌에 대한 내용이었으나, 중간중간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덧붙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에게 크림은, 나에게 있어 이 낡은 녹음기와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러나저러나 대체적으로 어두운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쉐일 톰슨. 닥터 토마스가 전에 치료를 했다가 실패한 환자다. 당시 나이는 17 살로, 이미


갱단의 청부살인업자로 활동한 이력이 있었다. 그는 단순 사이코패스 혹은 정신이상자가 아니다. 그는
목적 없이 살인을 즐기며, 동시에 그것에서 쾌감을 느낀다. 커넌은 그와 최소 6 개월이 넘는 시간을
동거했으며, 어쩌면 그에게 물들어 살인을 저지른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커넌. 커넌, 트윌턴 역시
죄책감이 없다. 그는 단순 스톡홀름 증후군이 아닌, …잠재적 사이코패스였을지도.’

거기까지 말하자 유리창 너머로 병원이 보였다.

a full of hope.

스산한 병원 분위기와는 어울리지도 않는 노란색 네온사인 불빛이 주차장을 가득 밝히고 있었다.

그에 병원에 있는 모든 환자들을 희망으로 가득 채워주고 싶다며 눈물짓던 병원장의 기사 사진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비틀기도 했다.

자신의 20 대를 온전히 함께한 이곳에서 지금까지 1000 명이 넘는 환자를 돌봤고, 그 과정에서 병원장을
본 것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중에서도 형식적인 만남은 처음 발령받은 날뿐이었다.

그는 병원 운영에 크게 관심이 없었기에 그저 병원에 문제가 생긴 경우에만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미 차고 넘치면서도 사그라들지 않는 돈 욕심에 병원 문제를 숨기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하아-

거기까지 돌아보던 닥터 셰인이 깊이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여전히 제 옷소매 끝에서는 콘스프 냄새가 물씬 풍겼고, 그에 현실감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닥터 셰인?”

그러다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온통 피로감에 젖은 존이 커피를 내밀었다.

그가 보기에는 자신도 피로감에 잔뜩 젖은 얼굴인 걸까, 문득 궁금증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부터는 자신이 a full of hope 의 정신담당의로, 존은 그런 자신의 담당 수행원이 될
것이었다. 여러모로 사람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커넌이 의식을 찾았어요. 닥터 셰인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합니다.”

존의 말에 닥터 셰인은 비로소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차 안에서 커넌에 대한 내용으로 녹음기를 가득 채우며, 절대 물러서지 말자고 굳게 다짐했건만 고작 그의


이름 하나에도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에 닥터 셰인이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죠..”

그렇게 말하며 문을 나서니, 닥터 셰인의 옆으로 존이 잽싸게 따라붙었다.

“여전히 조금 불안정하긴 하지만, 아까처럼 자해를 하거나 하진 않습니다. 다만….”

“…다만?”

존이 잠시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이, 두 사람은 커넌의 병실 앞에 서 있었다.

그에 닥터 셰인이 걸음을 멈추며 존에게 시선을 던졌다.

좀 전에 하던 말을 마저 하라는 의미였으나, 존은 대답 없이 병실로 시선을 옮길 뿐이었다.

후우-
결국 닥터 셰인이 긴 한숨과 함께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는 망설임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손잡이를 돌려 병실로 들어서니, 존이 그토록 머뭇거리며 말을


아낀 이유를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어디서 난 건지, 날이 바짝 선 칼을 쥐고는 누구를, 또 무엇을 그토록 경계하는지.

“커넌.”

제아무리 소리높여 그를 불러도 그 어떤 미동도 없었다.

그저 한껏 웅크리고 있는 몸에, 그가 자신을 온몸으로 경계하고 있음을 깨달을 뿐이었다.

커넌의 두 눈에는 독기가 가득했고 굳이 그를 숨기려고도 하지 않으니, 닥터 셰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커넌과 눈을 맞추고 있는 것뿐이었다.

“칼은 내려놓고 이야기하죠.”

만약 계속 그런 태도라면 나는 커넌과 대화할 생각이 없어요.

닥터 셰인이 최대한 감정을 배제시킨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커넌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으나, 닥터 셰인은 그가 조금 당황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 여러 가지 마음이 충돌하고 있겠지.

천사와 악마의 속삭임, 뭐 그런 걸까?

닥터 셰인이 존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뜻을 담아 한 행동은 아니었으나, 지레 찔린 건지 존이 병실에 들였던 발을 뒤로 무르며, 병실 문을


닫았다.

그에 삭막한 병실에 뜻하지 않게 두 사람이 가둬지니,


“지금 커넌의 상황이 좋지 않아요.”

닥터 셰인이 곧바로 본론을 끄집어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커넌과의 거리를 좁히니, 커넌이 칼을 잡은 손에 더욱더 힘을 주었다.

“상부에서는 커넌을 구속 조치하겠다고 했어요.”

닥터 토마스의 살인죄 명목으로요.

닥터 셰인은 한마디, 한마디 말을 내뱉을 때마다 자신에게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자신의 거짓말을 하는 재능 말이다.

과연 이걸 다 수습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으나 자신도 모르게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셰인. 이것은 명백하게 우리의 잘못입니다.’

그렇게 말하던 병원장의 목소리가 연신 귓가에 맴돌았다.

우리의 잘못? 그렇다면 닥터 토마스의 죽음 역시, 우리의 잘못이었던 걸까? 자신은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 닥터 셰인이 커넌의 무표정한 얼굴을 끊임없이 응시했다.

‘나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렇게 울부짖던 커넌의 모습은 닥터 셰인의 뇌리에 강력하게 박혀 있었다.

그의 표정과 섬세했던 감정, 억울함에 일어난 분노와 자신이 놓치고 있는 서늘한 무언가.

닥터 셰인이 그 모든 것에 집중하면서도 끊임없이 중요한 것들을 꼬집었다.

그의 잘못을 덮지 않되 용서해주는 것.

상부의 뭣 같은 조치에 수긍하면서도 수긍하지 않는 것.

닥터 토마스의 억울한 죽음이 단순 의료사고로 끝나지 않게 하는 것.

그 모든 것이 제 손에 달려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나도 그에 동의해요.”

지금껏 내가 느낀 커넌은, 반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거든요.

닥터 셰인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커넌을 관찰하듯 꼼꼼하게 살폈다.

혹시라도 그의 눈에서 아주 찰나라도 제가 아는 감정이 스친다면, 그냥 그거에 매달려 이 외로운 싸움에


모든 걸 걸 수 있을 것 같았다.

“커넌. 혹시 내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아무거나 좋아요. 어제 닥터 토마스와 있던 일 중에서 심기가 불편했던 점이나, 아니면… 그 전에 혼자


무슨 말을 했던 건지.

뭐 그런 거요. 정말 아무거나 좋아요, 난… 커넌을 돕고 싶거든요.

닥터 셰인이 커넌의 눈치를 살피며 점차 그와의 거리를 좁혀, 커넌이 웅크린 침대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에 닥터 셰인의 무게만큼 매트리스가 눌리니, 딱 그만큼 무게중심이 이동했다.


“닥터 셰인.”

날 설득하고 싶다면, 머릿속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부터 어떻게 좀 해봐요.

너무, 시끄럽잖아요.

커넌이 들고 있던 칼을 들어, 닥터 셰인의 이마 부근에 갖다 대었다.

그에 닥터 셰인이 주춤, 상체를 뒤로 물리니 커넌이 굳이 조소를 숨기지 않은 채 그 모습을 온전히 두


눈에 담아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예요.”

“…….”

“지금 당장 경찰과 병원장을 불러줘요.”

“커넌.”

“병원장이 다 알고 있죠? 당신들이 내게 약을 잘못 줬다는 것 정도는 말이야.”

“우리는….”

“솔직히 모르는 게 이상하잖아요.”

CCTV 가 내 방 안에만 3 대가 있는데 병원 구석구석, 얼마나 많이 숨겨뒀겠어.

커넌이 칼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한곳을 가리키니, 번쩍이는 CCTV 가 그런 커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었다.

그에 닥터 셰인의 눈빛이 일렁거렸고, 커넌은 그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당장 덮자고 그러든가요?”

“아니요, 커넌. 경찰에….”

“경찰에 꼰지를 리가 없지.”


여기 병원장이 얼마나 물욕이 심한데, 자기 스스로 세간의 질타를 받을 사건을 공개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커넌이 코를 찡긋거리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에 닥터 셰인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그 무엇을 말한다고 해도, 그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고작 10% 남짓일 테니까.

만만하지 않은 상대를 대하는 일은 언제나 어려웠으나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무작정 피할 수도 없었다.

“커넌.”

그에 닥터 셰인이 다시 한번 커넌을 부르는데,

“그래서? 그래서 닥터 셰인은 뭐라고 했어요?”

닥터 토마스가 죽었다고요!

울먹이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부드럽고, 어딘가 짓궂던 목소리가 급작스레 한껏 고조되었다.

그에 병실 안에 커넌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니, 닥터 셰인은 그 모든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금 그의 모습은 심히 불안정했으나, 닥터 셰인의 속내보다는 덜 시끄러웠다.

“그렇게 말했나요?”

커넌이 최대한 연민을 담은 표정으로 닥터 셰인과 눈을 맞췄다.

불쌍한 셰인. 홀로 발버둥 친다 한들, 누가 알아주겠어요.


그러다가 커넌이 고개를 모로 돌려 닥터 셰인과 시선을 더 깊게 얽혀오기라도 하면, 닥터 셰인이 제 분에
못 이겨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에 커넌이 눈동자를 내려 여린 살에 손톱이 박히고, 손끝이 하얗게 질린 닥터 셰인의 손을 빤히


바라봤다.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도 입꼬리가 내려오질 않으니, 그것도 퍽이나 난감했다.

-의-

#19 대화

“맞아요, 그렇게 말했어요.”

전부 사실이잖아. 병원 측에서 당신에게 약을 잘못 전달한 것도 사실.

그에 취한 건지, 아니면 제 감정에 취한 건지.

커넌이 닥터 토마스를 죽인 것도 사실.

커넌이 웃음을 감추지 못한 것처럼, 닥터 셰인 역시 굳이 증오를 숨기지 않았다.

“그랬더니 망할 병원장이 협박을 하더라고요.”

자신이 병원을 물려받아 운영해온 30 여 년간 이 정도의 사건 사고도 없었을 것 같냐고, 그럼에도 뉴스


기사 한 줄 나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 줄 아느냐며 누런 금니를 드러내며 짙게 웃어 보였다.

게다가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듯, 제 어린 두 딸과 어머니를 운운.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 역겨운 소리 집어치우라며 온갖 욕을 쏟아붓고 싶었으나, 그것이 현실이었다.

어린 두 딸과 어머니.
고작 한순간의 화풀이와 맞바꿀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저 눈 딱 한 번 감고 고개만 끄덕이면 되는 문제였다.

그럼에도 자신이 무슨 대답을 하고 있는지 너무 잘 알기에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것을 커넌에게 드러내는 것 역시 부끄러웠다.

“자신을 포함해 3 대는 족히 먹고 살 수 있으니, 제 걱정은 말라며….”

씨 X. 거기까지 말하던 닥터 셰인이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욕설을 내뱉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불같이 번지는 화를 도무지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후우-

닥터 셰인이 홀가분하게 묵직한 한숨을 내뱉자,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커넌이 작게 폭소했다.

단순히 입만 웃는 거짓 웃음도, 그렇다고 한쪽 입꼬리를 잔뜩 비튼 비웃음도 아니었다.

어쩌면 지금껏 커넌이 지은 그 어떤 웃음보다도 진실된 웃음이 아닐까.

닥터 셰인이 그를 세세하게 뜯어봤다.

뭐든 좋으니, 그저 그가 반성하는 모습만 보게 해달라고 신에게 바랐었는데.

이제 보니, 깊은 반성 끝에 말갛게 웃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것이 비록 지금 이 순간이 가져온 혼자만의 착각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병원장에게 지기 싫어서라도, 이번 사건의 책임이 커넌에게도 있단 사실을 밝혀낼 거예요.”

“…벌써 기대되네요.”

“사실 그러기 전에, 그냥 커넌이 반성이라는 걸 했으면 좋겠어.”


적어도 커넌이 본인의 잘못을 뉘우칠 줄은 알았으면 좋겠고, 그게 가능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요.

…너무 과한 이야기 같지만요.

닥터 셰인의 눈에서 눈물이 도르륵 굴러 떨어졌다.

감정이 극에 달한 기분이었다.

분하고 그가 미웠으나 동시에 안쓰럽고, 이런 제 감정을 그와 나누고 싶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이런 제 감정을 그가 알아주기를 바랐다.

마치 일방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아이처럼 잔뜩 떼를 쓰고 싶었다.

“나는 울기까지 했으니, 커넌은 내게 하고 싶은 말을 해요.”

아무거나 좋으니까.

닥터 셰인이 손등으로 눈물 자국을 지웠다.

그에 부끄러운 마음도 함께 닦이지는 않을까 내심 기대도 했다.

그리곤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대충 바닥에 던져버렸다.

부스스하게 풀어져 있던 머리도 하나로 올려 묶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제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하아-

그런 닥터 셰인을 바라보던 커넌이 피곤하다는 듯 깊이 한숨을 토해냈다.

할 수만 있다면 몸속에 존재하는 모든 산소를 뱉어내고, 자신도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지고 싶었다.

하지만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는 것을 자신도 모르지 않았다.

그녀는 진득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고, 자신도 굳이 그를 피하지 않았다.


말을 하라니.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걸까.

커넌이 고개를 모로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았기에 창문 밖에는 희미한 태양이 존재했다.

해님을 보니, 또다시. 어김없이 그가 떠올랐다.

“…거울 본 적 있어요?”

거울 말이에요. 우리가 흔히 보는 거울.

크림과 함께 했을 때, 그의 집에는 거울이 하나도 없었어요.

아니, 있기는 했는데 그 자리에 없었죠. 크림이 모두 깨뜨렸거나 혹은 떼어냈거든요.

커넌이 평소와 달리 사적인, 그리고 중요한 말들을 쏟아내니, 닥터 셰인이 다급하게 녹음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쯧-

조금 더 빨리 녹음기를 꺼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하루는 무슨 심경의 변화였는지, 거울을 잔뜩 사 온 날이 있었어요.”

아직도 기억나요.

1 월 22 일, 오후 4 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고 날씨가 엄청 맑았어요.

평소 그렇게까지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날은 날짜, 시간, 날씨까지 또렷하게 기억나요.

아마 그날이, 제가 처음으로 살인을 한 날인 것 같아요.


“…크림의 가정부였던, 엠마. 맞죠?”

닥터 셰인이 갑작스레 시작된 커넌의 이야기를 멍하니 듣다가 어정쩡하게 질문했다.

그에 커넌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은 모르고 이름만 알아요.”

엠마. 또렷이 기억나요.

한 50 대 정도의 여성이었고, 제법 덩치가 있었으나 키가 작아서 그런지 체격은 그렇게 크지 않았어요.

커넌이 엠마의 키를 가늠하며 제 갈비뼈 부근으로 손을 휘둘렀다.

당시에 크림에게서 도망치자고 했는데, 엠마가 거절하자 홧김에 머리를 내리쳤던 것 같아요.

“사실 잘 기억나지 않아요.”

어쩌면 닥터 토마스처럼 기억에서 지워버린 걸지도 모르죠.

커넌이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며 말했다.

아마도 확실하지 않은 기억을 꺼내어 말한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 때문인 것 같았다.

“괜찮아요.”
그에 닥터 셰인이 잠시 고민하다가, 그렇게 말했다.

“해리성 기억상실증. 그렇게 말해요, 우리는.”

납치 및 감금을 경험한 대다수의 피해자들이 겪는 일종의 후유증이죠.

닥터 셰인이 최대한 무심하게 말했다.

사실이었으니까.

몇 년 전 닥터 셰인이 상담한 여성 중에도 그런 경우가 있었다.

피해자는 살인범이 아닌 강간범에게 감금되었고, 수차례 성폭행도 당했다고 진술했다.

사건 브리핑도 제법 크게 이루어졌고, 피해자의 진술 수위가 높았으니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나날이 높아져만 갔었다.

하지만 후에 알려지기를, 피해자는 단 한 차례의 성폭행도 당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를 감금한 범인이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약물 중독자였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를 막는 최후의 방법으로 감금을 선택했다.

[딸을 위한 어머니의 희생, 눈물]

그런 헤드라인이 걸린 뉴스들이 줄을 지어 발간되기도 했다.

어머니의 선처 호소에 결국 그녀는 10 년에 해당하는 입원 치료 명령을 받았고, 그녀는 치료 기간 동안


매번 같은 말을 했다.

자신은 피해자고, 성폭행을 당했으며 이번에는 새로운 범인으로 전 남자친구를 지목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 남자친구도 조사했으나, 전 남자친구 역시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는 성불구자이기도 했으나, 숨겨진 동성애자였기 때문이다.


‘환자의 말을 모두 믿을 필요는 없어.’

문득 그렇게 말하던 닥터 토마스가 떠올랐다.

“의사는 환자의 말을 100% 신뢰하지 않아요.”

하지만 방금 한 말은 증거가 명확하니 믿을게요. 그래서 어떻게 됐죠?

닥터 셰인이 유연하게 말을 넘겼다. 그에 커넌이 지그시 눈을 감으며 당시를 회상했다.

“엠마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어요.”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점차 붉게 변하는데, 무섭더라고요.

커넌은 닥터 셰인의 무덤덤한 반응에 오히려 마음이 놓였던 것 같다.

주절주절. 여기까지 말하려고 한 게 아닌데,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입을 놀렸다.

“크림에게 도와달라고 물으니까, 크림이 거울 속에 숨으라고 알려줬어요.”

커넌의 말끝에 닥터 셰인이 녹음기를 톡 두드렸다.

그녀가 인터뷰를 하면서 중요한 대목을 표시하는 방법이었다.

거울 속에 숨으라니.

당시 커넌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비정상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사면, 아니. 육면이 거울이었어요. 천장도 바닥도.”

고개를 돌리면 내가 있고, 그곳 너머에 내가 있고, 또 내가 있고. 숨을 수 없고, 누군가를 속일 수도


없고.

커넌, 커넌. 누군가가 자꾸 나를 불러서 눈을 떴던 것 같아요.

**

커넌. 커넌.

어디선가 희미하게 자신의 이름이 들려왔다.

누구지? 커넌이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소리는 점점이 울렸으나 어딘가에 고인 것처럼 퍼져 나가진
않았다.

게다가 목소리까지 익숙한 기분이었다.

그에 커넌이 부스스하게 눈을 뜨자, 바로 앞에 또 다른 자신이 마주하고 있었다.

“…커넌.”

갑작스레 마주한 자신의 얼굴에는 붉고 푸른 꽃들이 가득 자리 잡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던 커넌이 손을 들어, 그중 유난히도 돋보이는 꽃을 톡 건드리니 미세한 통증이 뒤를 따랐다.

그에 커넌이 인상을 찌푸리니,

“아파?”
거울 속 자신이 물었다.

커넌은 애써 고개를 저었지만, 거울 속 자신은 별로 믿지 않는 눈치였다.

“커넌?”

커넌이 거울 속 자신을 부르자 그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에 커넌이 제 입꼬리 주변을 매만졌으나, 거울 속 자신은 그러지 않았다.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지? 커넌이 두 눈을 꾹 감았다.

앞에도 옆에도, 위, 아래. 온통 자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으나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고, 커넌은 그것이 두려우면서도 괜스레


화가 났다.

내가 커넌이면, 저기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그는 커넌이 아닌 건가? 그렇다면 자신은?

아니, 잠깐만. 내가 커넌이 맞기는 한 걸까?

그걸 누가 인정해주지?

하물며 나조차 나를 헷갈려하는데, 누가 날 믿어주겠냐고!

커넌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좁은 공간 안에 온통 제 목소리만이 가득 채워져, 서로 그 부름에 대답했고 그 가운데에서 커넌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커넌은 나야.”

내가 진짜 커넌이야.

커넌이 손을 들어 두 귀를 막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적막함이 온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아니, 비단 그것만이 아니었다.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자신을 바라보는 12 개의 눈.

그것이 보내는 시선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지독했던 소란스러움보다도 더 지독한 침묵이었다.

아니야, 커넌은 나야.

그때 거울 속 누군가가 툭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커넌은 나야, 내가 커넌이야.

연신 그렇게 외쳐댔다.

지독했던 소란스러움보다 더 지독한 침묵.

그리고 그보다 더 지독한 소란스러움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시끄러워, 거울 주제에 뭘 안다고!”

커넌은 나라고! 커넌이 주먹을 세게 쥐었다.

금방이라도 거울을 향해 뻗어 나갈 것처럼 근육이 팽팽하게 조여졌다.

허옇게 질린 손에 어울리지도 않는 힘줄이 툭 불거져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낮고, 더불어 편안한.

그는 누구지? 커넌이 턱을 치켜 세워 위를 바라봤다.

밖으로 나가고 싶어.

커넌이 위를 향해 손을 뻗자, 거울 속 자신도 손을 뻗었다.

그에 서로의 손이 맞닿으니, 한없이 차갑고 딱딱하기만 했다.

만약 정말 단순한 거울이라면 쉽게 깰 수 있지 않을까?

커넌이 거울에 손끝이 맞닿은 채로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커넌은 가장 중요한 순간에서 망설였고, 거울 속 자신은 그를 놓치지 않았다.
‘근데 그럼 뭐 해? 누가 널 인정해주는데?’

‘네가 진짜 커넌이라는 증거가 있냐고-’

‘크림은? 크림도 네가 진짜라고 그럴까?’

‘네가 엠마를 죽이지 않아서 아-주 실망했다고!’

‘아까 크림 표정 봤어? 난 너무 무서워서 못 보겠더라.’

‘그래서 정신을 잃은 거야? 응?’

커넌, 대답해봐. 그래서 그런 거야? 다시 순식간에 목소리가 쏟아졌다.

이번에는 제아무리 귀를 막고 눈을 감아도 벗어날 수 없으니 그저 도망치고자 발버둥 치기에 급급했다.

‘커넌, 대답해봐. 정말 크림이 너를 살려둘 것 같아?’

‘아니지, 아니야-’

‘여기서 나가면 곧 엠마처럼 머리가 펑 터져서 죽을 거야.’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다 꺼져버려, 당장 꺼지라고! 커넌의 새된 비명과 함께 거울 속 자신이 사라졌다.

허억, 허억.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가 두 눈을 뜨자, 자신을 품은 공간이 온통 암흑에 뒤덮여 있었다.

“커넌?”
겁에 질린 커넌의 목소리가 암흑 위를 걸었으나, 그들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에 잠시 주변을 살피던 커넌이 몸을 돌려 뒤쪽 거울을 바라봤다.

아니, 사실 뒤쪽 거울인지 옆쪽 거울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자신이 자신이 아니고, 공간의 경계가 모호한.

그래, 이를테면 자신의 두려움을 뭉쳐 만든 공간 같았다.

“…커넌?”

커넌이 흐릿한 인영에 눈살을 찌푸렸다.

겨우 자신의 몸 하나 구겨 넣을 수 있는 비좁은 공간에 아이 하나가 앉아 있으니, 아주아주 익숙한


등이었다.

작고 굽은 등은 언제나 눈물에 잔뜩 젖어 있었다.

뭐가 그렇게 슬픈 거야? 왜 항상 그렇게 울고 있어? 왜 그렇게 누군가를 증오하고 있는 거야?

커넌이 작은 등을 향해 손을 뻗는데, 아이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그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 무거운 압박감 속에서 자신의 숨소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져, 커넌이 다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아주 작게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울고 있었구나.

커넌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체감상으로는 고작 한 번 깜빡인 것 같았는데, 어느새 아이의 눈물이 한 방울씩 고여 눈물 강을 만들고


있었다.

커넌이 시선을 내려 눈물 강을 바라봤으나, 암흑 속에서는 그것이 눈물인지 핏물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저 눈물이라고 믿는 수밖에.

커넌이 눈물 강에서 시선을 떼어 아이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아이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고, 어느 곳을 돌아봐도 온통 암흑뿐이었다.

그에 이곳이 그저 암흑 속인지, 아니면 아이가 흘린 눈물 강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자신이 꿈으로 도피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20 공범

“어쩌면 크림은 내가 그 유리를 깨고 나오길 바랐던 걸지도 몰라요.”

아마 날 시험한 거겠죠. 그런 의미로 난 탈락이에요.

커넌이 고개를 조금 숙여 보이며 허망하게 웃었다.

그와 함께 양쪽 어깨가 축 처지는 것을 닥터 셰인은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환자를 다독여주고, 그의 안 좋았던 경험을 수정해주는 것이 매뉴얼이지만, 닥터


셰인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저 맞다고 긍정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나마 남은 의사의 양심을 지켰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어떻게 나온 거죠?”

“…모르겠어요.”

당시 기억이 너무 희미해서.

커넌이 다시 한번 마른세수를 하다가, 그냥 손바닥에 얼굴을 숨겨버렸다.

지금은 그저 그 누구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상태로 그 말만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요.”

그때 당시에 거울 속 나와 실제의 내가 바뀐 것은 아닐까? 진짜 나는 거울 속으로 사라지고 없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결국 진짜를 잡아먹은 가짜인 것인가? 그런 생각이요.

커넌이 혼란스럽게 말을 이었다.

닥터 셰인은 좀 전처럼 그의 말에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녹음기를 톡, 한 번 더 두드릴 뿐이었다.

사실 닥터 셰인이 듣고 싶은 것은 그의 혼란스러움이 아닌 살인 당시의 기억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살인을 했는지, 그때 당시에는 어떤 기분이었는지.

하지만 그는 기억이 없다며 그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아아, 이 얼마나 훌륭한 처세술인가.

“거울에서 나온 후, 별다른 일을 겪지는 않았나요?”

“전혀요.”

“그렇다면 엠마의 시체 처리는 어떻게 했죠?”

결국 닥터 셰인이 콕 짚어, 자신이 듣고자 하는 부분을 건드렸다.

그에 커넌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가니, 그 묘한 위화감에도 닥터 셰인은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자신의 감정을 들키는 순간, 그와의 싸움에서 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지금은 그저 최대한 차분하고 냉정하게 마음을 먹어야 했다.

“그냥 대놓고 묻지 그래요.”


살인을 할 때 어떤 무기를 사용했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내가 살인을 하자 크림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그런 게 궁금한 거잖아요.

커넌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닥터 셰인을 바라봤다.

마치 닥터 셰인의 모든 속내를 파악하고 있다는 듯, 입가를 조금 비틀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닥터 셰인은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녹음기나 한번 두드렸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으나, 시선은 커넌을 조금 비껴가, 벽으로 향해 있었다.

“묻고 싶지만, 참고 있었어요.”

이렇게 기분 나쁜 티를 숨기지 않을 걸, 빤히 알았거든요.

후우-

닥터 셰인이 무거운 한숨을 길고, 얇게.

아주 오랫동안 내뱉었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홀가분해지는 기분이었다.

“하, 차라리 솔직해서 좋네요.”

하지만 어쩌죠?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는데.


커넌이 어금니를 세게 꽉 깨물며 입꼬리를 올리자, 닥터 셰인은 그저 조금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관심이 없다는 듯 굴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내심 아쉬워하는 감정들이 맴돌고 있었다.

“난 그런 걸 하는 사람이거든요.”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마음의 상처를 깔짝깔짝 건드려 파헤치고서는, 다시 쌓아주는 거죠.

뭐, 파헤치기 전보다 조금 더 예쁘게 쌓인다면 좋은 거고.

그렇지 않다면 아쉬운 거고.

닥터 셰인이 책임감 없는 말을 주절거렸다.

순간 커넌은 그녀가 해탈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에게 솔직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를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크림이 꺼내줬던 것도 같아요.”

결국 커넌은 그녀의 솔직한 거짓말에 그냥 속아주기로 했다.

뭐,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제 마음의 무덤을 깔짝깔짝 파헤쳐, 그 전보다 좀 더 예쁘게 쌓을 수 있다면
좋을 것도 같았다.

커넌이 어정쩡하던 자세를 고쳐, 침대 등받이에 온전히 제 몸을 기대었다.

고작 그 하나만으로도 긴장감이 완화되는 기분이니, 숨겨뒀던 이야기를 하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
거울 속에는 태양도, 달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 시간을 알아차릴 수 없었고,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얼마나 이곳에 있었는지, 혹은 얼마나 더 이곳에 있어야 나갈 수 있는지.

그런 사소한 것조차 알 수 없었다.

그냥 이대로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커넌은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정말로 엠마를 죽이지 않아서 크림이 화가 난 모양이야.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커넌을 괴롭혔다.

만약 좀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엠마를 죽일 수 있었을까? 문득 고개를 든 생각에 커넌은 침묵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하는 자신에게 혐오감이 일 것만 같았다.

“후회하지 마, 커넌 트윌턴.”

절대 후회하지 말자고 다짐했잖아.

만약 자신이 그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도, 절대로 당시를 떠올리며 그때 엠마를 죽일걸.

그런 후회는 하지 말자고.

커넌이 제 마음을 세게 꼬집었다.

“크림.”

커넌은 거울 속에서 수도 없이 크림의 이름을 되뇌었다.

크림, 크림.

고작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수천, 수만 번을 불러도 크림은 대답하지 않았고, 그런 크림이 몹시도 원망스러웠으나, 결국 그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울 속에서의 시간이 경과할수록 못된 마음이 들었다.

만약 크림이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면, 그래서 이곳에서 나가 엠마를 마주한다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엠마는 이미 죽었는걸?”

깊은 어둠 속, 공허와도 같은 목소리가 맴돌았다.

제아무리 후회하지 말자고 다짐했어도, 결국 인간은 나약하기 마련이었다.

이제는 본인도 슬슬 인정해야 할 때였다.

지독히도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에 아무리 입이 쓰고, 허탈함과 자기 혐오감이 몰려와도 그 모든 것에 눈을 감아야 했다.

“진짜… 진짜 싫다.”

커넌이 두 손에 얼굴을 묻어 좀 더 짙은 어둠을 불러왔다.

차라리 그 어둠에 물들어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사람은 죽으면 모두 빛으로 돌아간다던데, 자신은 그러지 못할 것 같았다.

이토록 어둠과 잘 어울리니, 빛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가장 어두운 빛일 게 분명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어둠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싱거운 생각을 하는 찰나,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커넌이 있던 어둠 속으로 빛 한 줄기가 스며들었다.

그것은 매우 뜨겁고 눈부셨으며, 동시에 커넌을 눈물짓게 만들었다.

커넌은 그 빛을 보자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크림.”

위를 가로막고 있던 거울 지붕이 치워지니, 당장에라도 커넌을 바스러뜨릴 것 같은 강렬한 빛들이 그를


품에 안았다.

그리곤 커넌을 거울 밖으로 이끌어 그 뜨겁고 아늑한 품 안에 무릎 꿇리니, 커넌은 영문도 모르고 그에
허덕여야 했다.

만약 가능하다면 이대로 빛의 품에 안겨 자신도 빛이 되고 싶었다.

“커넌.”

하지만 크림이 걸림돌이 되고, 자신의 어둠이 방해가 되니 그저 소망은 소망으로 남겨둬야 했다.

커넌은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 감았던 눈을 떠 크림을 바라보는데,

“왜 그랬어요?”

그가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뭐가요? 그런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그가 어떤 대답을 할지가 두려웠다.

아니. 자신이 했던 수많은 행동들이 모두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그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나고 억울했으나, 그저 온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제아무리 꿋꿋하게 두려움을 숨긴다고 한들, 결국 어떻게 해도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자신은 무엇이 그토록 두려운 것일까.


그의 표정? 말투? 태도? 아니다.

그의 표정은 평소보다 겁에 질린 듯이 보였고, 그의 말투는 다정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의 태도야 하도 오락가락하니, 이제는 그 무엇도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커넌은 이미 대답이 정해진 질문에 계속해서 반문할 뿐이었다.

“왜 그렇게 잔인하게 사람을 죽인 거예요?”

대체 엠마를 왜 죽인 거냐고요! 바로,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크림의 절규 같은 외침에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는 현실.

커넌은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거짓말이야. 모두 그의 거짓일 거야.

제아무리 자신을 설득하고 다독여봐도, 요동치는 심장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야… 나는 죽이지 않았어.”

그건 크림이…. 거기까지 말을 내뱉는데, 제 발끝에 무언가가 툭 걸려왔다.

그것은 폭이 좁고 길이가 기다란 상자였는데, 안에 무엇이 든 것인지 무게가 상당했다.

중앙 부근에는 무언가에 젖은 듯 종이가 울고 있었고 그곳을 기점으로 비린내가 진동을 하니, 코를 찌르는
악취에 커넌이 인상을 썼다.

그에 크림이 상자를 들어 커넌의 코 밑에 들이미니, 양쪽에 짙게 남은 손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굳이 묻지 않아도 그것이 엠마를 죽일 때 쓰인 무기임을 알 수 있었다.

거울이 들어 있던 상자.
“설마 기억나지 않는 거예요?”

크림이 목소리를 낮춰 물으니, 커넌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지 않아요.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크림이 내게 엠마를 죽이라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내가 죽이지 못해 나를 가둔 거잖아요.

커넌이 끊임없이 고개를 저으며 자기를 변호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복잡한 마음이 뒤엉켜 혼란을 야기하니, 이제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이 모든 말들도
거짓처럼 느껴졌다.

“크림이 날 가둔 거잖아요. 맞죠?”

커넌이 크림에게 매달려 애달프게 물었다.

그렇다고 해주세요. 내 말이 맞다고, 크림이 날 가둔 게 맞다고 해주세요.

커넌이 무게중심을 못 잡고 이리저리 휘청이자, 크림 역시 그에 맞춰 제 몸을 휘청거리게 놔뒀다.

그러다가 커넌이 제 손이라도 슬며시 잡아 오면, 그것을 상자의 중앙으로 가져가 이미 딱딱하게 굳은 피
위를 매만지게 했다.

“커넌.”

그리곤 커넌의 손 위로 제 손을 포개었다.

끈적하게 묻어난 피보다 그의 손이 더 끈적하게 달라붙으니, 도무지 그를 밀어낼 방법이 없었다.

그에 커넌의 손에는 크림의 지문이, 크림의 손에는 커넌의 지문이 남겨졌다.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자, 그의 지문에 조금 안심됐다.


안심하는 자신의 모습이 지독히도 싫어 외면했으나, 자신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린 이제 공범이에요.”

그렇죠? 내가 거울 속으로 숨으라고 알려줬잖아요. 커넌은 그에 따랐고요.

크림의 말에 커넌이 그를 올려다봤다.

공범, 고작 그 단어가 주는 만족감에 입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갔다.

자신은 그것을 원하는 것이었을까. 함께.

고작 그 소속감에 잠시 망설이던 커넌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맞춰 크림이 상자를 던지듯이 바닥에 내려놓았다.

여유로움 속에서 다급함이 느껴지니,

“크림.”

커넌이 그를 불렀다.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그의 이름을 자꾸만 부르고 싶었다.

그만 칭얼거려야 한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지만, 이런 제 맘을 알아차리고 다가와 주는 그가 마냥 좋았다.

그러다가 짙게 시선이라도 얽힌다면, 무작정 그의 손에 이끌려 그가 하라는 대로.

그가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크림.”

커넌이 다시 한번 크림의 이름을 불렀다.


그에 빤히. 혹은 가만히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히고, 서로가 서로의 애달픈 감정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에 불을 지피듯 크림이 커넌의 얼굴 위를 천천히 쓸어내리니.

커넌의 이마를 지나 그의 눈에 뜬 금빛 노을, 태양의 어루만짐이 가득한 두 뺨.

그곳을 굽이굽이 지나, 괜히 심술궂게 도톰한 입술을 톡 두드렸다.

그의 움직임에 맞춰 얼굴 위의 솜털들이 일어서고 눕기를 반복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손길이 닿은 곳곳에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웃어요.”

크림이 그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이렇게요? 커넌의 질문에 크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적당한 피로감과 만족감이 뒤섞여 있었고, 커넌은 이상하게도 그런 그가 좋았다.

꼭 살아 있는 사람 같아.

커넌이 제 감정에 떠밀려 크림의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두근, 두근.

세차게 뛰는 제 심장 위로 그의 느린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그것은 금방이라도 뜀박질을 멈출 것처럼 느렸고, 그에 의해 자신의 심장이 더 빨라 보였다.

차라리 이대로 영영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여전히 그와 함께이고, 불편한 현실에서 멀리 떨어질 수 있을 테니까.

커넌이 제 가슴에서 그를 떼어놨다.

그러자 그의 느리고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것만 같던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고작 그 하나로 자신은 이렇게 미치도록 불안하고 초조한데,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저 평상시와 같이 차분했고, 동시에 뜨겁게 들끓었다.

#21 교차
“지금 크림은, 어떤 기분이에요?”

알고 싶어요.

품을 수 있는 최대의 한계, 그 밖까지 당신을 더 깊게 품는다면 이 아쉬움이 조금이라도 사그라들 수 있는


건지.

지금보다 더, 훨씬 더 가까이한다면 당신이 품은 커다란 비밀을 내 작은 품에 끌어안을 수 있을지.

커넌이 뒷말들을 몽땅 숨기고는 달랑 물었다.

혹시나 제가 숨긴 질문들에 그가 넌지시 긍정의 눈짓이라도 해주지는 않을까, 내심 기대한 마음도 숨겼다.

그에 크림은 침묵했고, 커넌 역시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또 저 혼자 애가 타고, 오직 자신만 멀어진 그의 심장박동을 그리워할 뿐이었다.

또 나 혼자만 그렇지.

커넌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을 구겼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몸과 마음에 가장 무거운 족쇄를 채우고 싶었다.

그에 도망갈 몸도 마음도 사라지게 되면 온전히 나만을 바라봐줄까, 그게 궁금했다.

“잘 모르겠어요.”

커넌의 두 뺨과 콧잔등, 이마와 턱 끝에 남겨진 태양의 매만짐을 바라보던 크림이 고개를 모로 돌려,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벌써 해가 지기 시작하는지, 붉은 노을이 푸른 밤을 피해 서둘러 빌딩 숲으로 잠수를 시도했다.

태양이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밤은 빠르게 찾아왔고, 그것은 크림의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만약 부엌의 작은 조명마저 없었다면 크림도, 그리고 커넌도 어둠에 물들어 형체를 잃었을 터였다.
“해가 짧네.”

크림이 실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커넌이 고개를 들어 크림을 바라보니, 그의 작은 웃음소리 역시 푸른 밤을 피해 서둘러 사라져버려


커넌은 그게 몹시도 아쉬웠다.

다시 한번 웃어줘요. 정말 당신이 웃은 게 맞나요? 커넌의 물을 수 없는 궁금증이 제멋대로 크기를


부풀렸으나 누구 하나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지도, 그렇다고 해소시켜 주지도 않았다.

그저 크림의 매끄러운 입꼬리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며,

아, 그가 웃은 게 맞구나.

그렇게 자답할 뿐이었다. 그러다가도 혹시 그가 다시 홀로 웃지는 않을까, 괜스레 기대도 했다.

“…원래 그런 거 잘 몰라요, 나.”

기분, 마음, 감정. 뭐 그런 거요.

그때 크림이 창밖에 고정되었던 시선을 가져와 넌지시 커넌에게 던졌다.

그에 커넌이 시선이라도 얽으려고 하면 잽싸게 그를 피해 서둘러 주방으로 달아났다.

그는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것처럼 보폭을 넓혀 춤을 추듯 거닐었고, 그러다가 냉장고 끝에 발끝이


닿기라도 하면 그냥 그곳에 멈춰 설 뿐이었다.

“상대방 표정을 읽는 것도 어렵고, 내뱉은 말을 해석하는 것도 어렵고.”

아, 내가 뱉은 말을 주워 담는 건… 아주 젬병이죠.

크림이 짓궂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에 작은 조명이 일렁임을 만들어 그를 비추니, 크림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커넌을 집어삼켰다.

자신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빛으로 향했다.


“크림.”

못내 그것이 서러워 이름을 부르자, 냉장고를 뒤적이던 크림이 맥주캔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술은 좀 해요?”

그에 커넌이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니,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크림이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상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탁-

냉장고 문을 닫은 크림의 손에는 캔맥주 세 개와 망고 음료 한 캔이 들려 있었다.

그 애꿎은 조합에 커넌의 시선이 끈적하게 따라붙으니, 크림이 거실 테이블 위로 그것들을 쏟듯이
내려놓았다.

그에 커넌이 그를 따라 테이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치 조금 이른 저녁을 먹는 기분이었다.

창문 밖에선 구름에 태양을 빼앗기고 있었고, 크림은 홀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반적인 가정에서는 저녁마다 이런 풍경이 펼쳐지는 걸까, 문득 그런 게 궁금해졌다.

“바닐라 향이랑, 크랜베리 향 중에 뭐가 더 좋아요? 코튼 캔디도 있어요.”


크림이 서랍에서 주섬주섬 향초를 꺼내며 커넌을 돌아봤다.

서랍에는 비슷한 크기의 향초들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는데, 그중 포장지가 벗겨진 것은 단 세 개뿐이었다.

그에

“그냥, 바닐라요.”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 커넌은 달달한 향을 별로 좋아하진 않았으나, 그냥.

크림이 들어 보인 것 중에서 바닐라 향초가 가장 많이 닳아 있기에 그냥 그렇게 했다.

바닐라 향을 좋아하는구나, 애기 같네.

그런 생각에 불쑥 웃음이 터졌다.

“뭔가 지금이랑 안 어울리네요.”

커넌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향초에 불을 붙여 테이블 위로 올려두던 크림이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

뭐가요? 그의 눈빛이 궁금증을 숨기지 않고 곧장 커넌에게 향했으나, 커넌은 그저 입꼬리를 좀 더


끌어올릴 뿐이었다.

‘알고 싶어요.’

그냥 작은 심술이고, 큰 진심이었다.
그가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 초조했으면 싶었다.

하지만 크림은 부엌 조명 스위치를 내리며 그런 커넌의 심술도, 자신의 궁금증도 함께 꺼트렸다.

순식간에 집 안이 어둠에 물들었고, 작은 조명보다 더 희미한 촛불이 힘겹게 어둠과 사투를 벌였다.

커다란 유리창에는 마치 액자처럼 잠수에 성공한 태양이 걸려 있었다.

‘예쁘다.’

커넌이 잠시 넋을 놓고 그것을 바라봤고, 크림은 남몰래 그런 커넌을 바라봤다.

촛불의 일렁임이 커넌의 머리를 타고 이리저리로 넘어 다녔고, 그 탓에 제가 그어놓은 붉은 줄이 더 짙게


보였다.

예쁜 사람. 그냥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어요?”

커넌이 창문 밖으로 던진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대뜸 질문을 던졌다.

“그거 아주 사적인데.”

크림이 장난스레 대답했다.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이 실수를 했다며 꼬집는 말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하지만 커넌은 사과하지 않았다.

그냥, 오늘은 평소와 다른 기분이었다.

자신이 엠마를 죽였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 걸까?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단조차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크림이 말한 공범이라는 유대감 때문인 걸까?
아니. 고작 그것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평소의 크림과 지금의 크림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냥 지금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다 이해해줄 것 같았다.

“내가 정말 엠마를 죽였나요?”

“…네.”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아요.”

“원래 처음 살인은 그래요.”

너무 강렬한 탓이겠죠, 뭐.

크림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를 집어 들었다.

“무서워요.”

발길을 돌려 창가로 향하는 크림의 뒤에다 대고 커넌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창틀에 앉아 커넌을 한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이내 맥주를 마시니, 그런 그를 보자 커넌도 갈증이 일었다.

그것은 단순한 목마름이 아니었다.

더 강한 안정감에 대한 갈증. 자신은 크림과 하나가 되고 싶었다.

그에 커넌이 맥주를 집어 들었다.

조금이라도 그와 비슷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행동, 말투, 표정. 그것보다도 더 강한 무언가.

달칵.
캔을 따는 소음이 지독히도 크게 느껴져, 커넌이 자신도 모르게 크림의 눈치를 살폈다.

더는 그에게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다.

이 작은 마음을 그가 알아주길 바라면서도, 모든 걸 다 알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창밖을 바라보던 크림이 시선을 끌어와 커넌을 바라봤다.

작게 움츠린 어깨와 잔뜩 굳은 표정에 시선이 갔다.

인간은, 각인된 공포에 약하다. 커넌 역시 그랬다.

그의 온몸에서 공포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때 커넌이 입을 빠끔거렸다.

아마 사과를 하려는 것이겠지.

미안하다고 하면 자신이 용서해줄 거라는 묘한 확신도 있겠지.

그에 어떤 반응을 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던 것도 같았다.

평소처럼 뺨을 때리고, 만약 그보다 더 기분이 나쁘면 주먹을 쥐려나.

하지만 오늘은 그러지 싶지 않았다.

무엇이 다른 걸까.

그에 크림이 커넌보다 좀 더 빨리 입을 열었다.

“괜찮아.”

“…….”

괜찮아. 고작 그 한마디에 심장이 일렁였다.


태양은 서둘러서 몸을 숨겼고, 덕분에 이 어둠을 밝히는 것은 고작 엄지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불꽃이었다.

커넌이 그에 의지해서 크림을 바라봤다.

크림 역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뒤늦게 머리를 키운 감정은 도통 사그라들지 않는다.

“우리 엄마는 매춘부였는데, 엄청난 인기녀였어요.”

하루에 족히 20 명은 넘게 상대를 했대요.

모두 자신과 뜨거운 밤을 보내고 싶어 안달이었다고, 늘 제게 자랑을 했죠.

엄청 어렸을 때부터 일을 했는데, 보통 자기 또래들은 생리가 시작되면서 일을 그만뒀대요.

근데 자기는 꿋꿋하게 버텨냈다며 어찌나 으스대던지.

이야기를 하는 동안 크림의 입가에는 끊임없이 미소가 그려졌으나, 어쩐지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이야기의 무게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목소리가 슬프게 들렸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직도 그 표정이 선명해요.”

포주도 자기만 예뻐했다고 말하는데, 마치 나비 같았지…. 훨훨 날아서 구름에 닿기를 바라는.

크림이 잠시 두 눈을 감았다.

지독히도 미운, 밉기만 한 그녀의 일생을 그리면 늘 가슴이 아팠다.

그 예쁜 나비 하나를 품어줄 하늘이 없다는 것이 언제나, 늘 원망스러웠으니까.

근데 어느 날, 갑자기 구역질이 올라오더래요.

상대방 겨드랑이 냄새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넘겼는데, 하루 종일 굶고 마주한 빵 냄새가 그렇게 역할 수가


없었대요.

아마 직감적으로 예상했을 거예요.

몸을 파는 여자니까 피임을 제대로 했을 리도 없고, 어린 나이였으니 사실 마음이 가는 남자도 한,


둘쯤은 있었겠죠.

처음에는 포주에게 사실을 숨겼는데 점점 배가 불러오니까, 어쩔 수 없이 일부러 밥을 많이 먹었대요.

마치 살이 찐 것처럼. 그랬더니 포주가 뭐라고 한 줄 알아요?

“다이어트 좀 해.”

웃기죠? 사실 아무런 관심도 없던 거야.

포주한테는 그저 돈 벌어오는 창녀였으니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정도였던 거지.

잠시 말을 쉬던 크림이 커넌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으니, 적막하던 곳에 크림의 따가운 웃음소리가 가득 찰 뿐이었다.

그에 커넌은 그 어떠한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이야기를 덤덤하게 말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른 걸까.

그는 어떤 환경에서 그 고통을 견디며 살아왔을까.

일렁이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그 뜀박질이 어찌나 강한지, 그 쿵쾅거림을 견디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난 태어나기 전부터 축하받지 못한 존재예요.”

우리 엄마는 태어나서 울부짖는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만약 내가 엄마였다면 태어난 나를 바로 죽여버렸을 텐데…. 만약 나였다면 말이에요.

근데 엄마는 그러지 못했어요.

심각한 산후우울증에 모두가 저와 떨어뜨려 놓으려고 했을 때에도 나를 챙겨서 달아났죠.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냥 혼자는 무서웠던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거기에 조금 안심했어요.

크림이 계속해서 말을 덧붙였다.


술에 취한 걸까, 아니면 떠올린 과거에 사로잡힌 걸까.

뭐든지 상관없었다.

그냥 조금이라도 빨리 얼룩진 그의 과거를, 그를, 그의 미래를 안아주고 싶을 뿐이었다.

그에 커넌이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크림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자신을 올려다보는 크림의 뒤통수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두근, 두근.

덕분에 크림의 귓가에 커넌의 심장박동이 크게 울렸다.

그 일정하고 불안정한 소리에 맞춰 크림이 두 눈을 감았다.

커넌의 품은 따뜻하고 습했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우는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22 올가미

“차라리 당신이 아주 모진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의 상처에 이토록 아픔을 느끼지 못하도록. 조금의 연민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커넌이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그에 크림이 고개를 들어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잔잔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당신을 이렇게 묶어두지 못했겠지.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분위기를 깰 테니까.

크림이 자세를 고쳐 커넌과 마주했다.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니, 커넌의 표정이 좀 더 잘 보였다. 큰 눈망울에 그보다 더 큰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그에 크림이 손가락으로 커넌의 눈두덩이를 톡 두드리니, 고여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크림이 그를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마치 한참 떼를 써서 원하던 막대사탕을 받아낸 아이와도 같은 기분이었다.

“커넌은 하고 싶은 얘기 없어요?”

“…어떤 거요?”

“뭐든 좋아요.”

오늘은 그냥 그러고 싶은 날이잖아요.

날도 저물었고, 조명이 은은하게 무드도 있고, 우리는 서로를 끔찍이 사랑하는 연인 같은 포즈이고.

크림이 커넌의 등에 팔을 둘러 그를 꽉 끌어안았다.

그렇게 하니 커넌의 심장 소리가 제 오른쪽 가슴에서 세차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마른 몸은 갈비뼈가 돌출되어 있었는데, 그 딱딱함이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서로를 끔찍이 사랑하는 연인.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달콤하고 끈적이는 말이었다.

“커넌은 내가 무서워요?”

여전히? 크림이 추궁하듯 물었다.

커넌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 역시 답을 찾지 못했기에.

그를 무섭다고 하기에는 안쓰러웠고, 무섭지 않다고 하기에는 가슴이 일렁였다.

아마도 이 일렁임의 의미를 알 때까지는 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겠지.

커넌이 씁쓸하게 크림을 내려다봤다.


“나는 가끔 내가 무서워요.”

매일 누군가가 나를 쫓아올 것만 같아요.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고, 그 어디에도 나를 쫓는 사람이 없는데….

가끔은, 그냥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렇게 말하며 크림이 품에서 커넌을 밀어냈다.

그와 함께 마주했던 오른쪽 뺨의 열기가 순식간에 사라지니,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가 없던 하루.

그가 없던 밤.

불을 켤 이유가 없고, 자신을 위해 울어줄 사람이 없는 곳.

이렇게 초조할 바에는 그냥 그를 부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쁜 유리병에 담아 원할 때마다 보고, 초조할 때마다 손에 쥘 수 있다면.

“어때요? 커넌이 보기에도 이런 내가 비정상처럼 보여요?"

크림이 애달프게 물어왔다. 처음인 것 같았다.

그에게서 이런 감정을 느낀 것은.

두려울 줄 알았던 일에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그를 온전히 품고 싶다는 생각에 초조해진다면.

그의 존재가 이토록 애달프게 다가온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라면.

이것은 무슨 감정일까.

커넌이 크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작은 행동에도 조심스러움이 가득하니,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손끝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톡 건드리는
것뿐이었다.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

“아프지 않고.”

아니, 아파도… 아픈 일이 생겨도 아프지 않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냥 입이 먼저 말하고, 뒤늦게 머리가 따라가는 기분이었다.

크림은 머리가 좋으니 잘 알아들을 거야.

그냥 그런 되지도 않는 위로를 남겼다.

“커넌, 그 누구도 내가 행복하길 바라지 않아요.”

다들 내 아픔을 소망하고, 내가 죗값을 받기를 바라겠죠.

크림을 많이 겪어보진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지금의 그가 진짜라는 걸.

무섭지 않고, 공격적이지 않다.

상처가 가득했고, 사랑에 목이 마른 사람이었다.

그것을 누가 알아줄까.

만약 자신이 죽게 된다면, 이 사실을 누가 알고 있을까.

누가 또 알게 될까.

누구도 몰랐으면 좋겠어.


그의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이 내가 유일했으면 좋겠어.

그게 가능하다면, 그렇다면 좋겠어.

커넌의 심장이 다시 한번 일렁였다.

“내가 바라요.”

커넌이 크림과 눈을 맞췄다.

그와 여러 번 눈을 맞추긴 했지만, 지금과는 다른 느낌들이었다.

크림의 회청색 눈동자 위로 촛불의 불꽃이 일렁였다.

그는 울고 있지 않으나 울고 있었고, 그가 울지 못하기에 그냥 자신이 대신 울어버렸다.

감정은 전염성이 심하다.

그러니 내 감정도 당신에게 전염이 되기를.

커넌이 바라고 또 바랐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크림. 사랑.

그 무엇도 이 단어를 대신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고작 그 단어 하나에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그 뜀박질에 온몸이 춤을 추는 것 같았고, 쿵쾅거림에 갈비뼈가 뻐근하게 아파 왔다.

언제나 그만 보면 그랬다.

이제 더 이상 그가 무섭지 않았다.

안쓰럽고 애달프며, 동시에 뜨겁고 벅찼다.

지금껏 그가 하는 말들 중에서 가장 좋은 단어들만을 골라 기억했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했다.

‘크림’이라는 기억장을 열면 예쁘고 좋은 단어들만 떠오를 수 있도록.

아마 인지하기도 전부터 그랬던 것 같다.

크림을 사랑한다.

수없이 많은 감정으로 그것을 덮어봐도 결국엔 숨겨지지 않았다. 사랑한다, 그를.

“사랑해요, 크림.”

-의-

***

“뭐 하나 알려줄까요?”

커넌이 닥터 셰인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에 닥터 셰인이 커넌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겼으나,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커넌은 질문을 던지고는 입을 굳게 다물어, 자신의 대답을 재촉했다.

굳이 냉정하게 대할 필요는 없었으나, 그에 응할 필요성도 딱히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무니, 병실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안 넘어오네.”
쯧.

커넌이 혀를 차며, 일으켰던 상체를 침대 등받이에 기대었다.

그 모습을 빤히 응시하던 닥터 셰인이 어깨를 으쓱이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커넌이 하고자 했던 게 무엇인지, 닥터 셰인도 모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그의 계산된 행동이라는 것도.

미끼를 던지면 자신이 그것을 물지 않을 걸 알면서도, 결국 그는 그 어떠한 핑계를 대서라도 무언가를


말할 것이었다.

“그래서 할 말이 뭐죠?”

닥터 셰인이 평소보다 조금 더 새침하게 물었다.

그에 그녀를 빤히 보던 커넌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어 표정을 숨기니, 닥터 셰인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커넌을 관찰했다.

그녀는 결코 자신처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자신은 크림이 제 마음을 깨우쳐 준 것처럼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물러설 수 없었다.

결국 그 어느 쪽이든 낭떠러지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아빠의 붉은 머리카락 색에 반했대요.”

근데 웃기게도 내 머리카락 색은 싫어했어요.

아마도 아빠를 떠올리게 해서 그랬겠죠.

지금은 잘 알지만, 그땐 너무 어렸고 엄마는 두려움의 존재였기에 그냥 나도 내 머리카락 색을 싫어했어요.


하루는 학교에서 작은 사건이 있었고, 아무것도 해소되지 않는 기분에 곧장 마트로 향했어요.

그리곤 검은색 염색약을 구입해서 공중 화장실에서 염색을 했죠. 사실 안일한 생각이었지만, 나는… 나는
그렇게 하면 엄마가 기뻐할 줄 알았어요.

거울을 보며 드디어 내가 원하던 평범한 행복을 얻었다고 생각했죠.

커넌이 잔뜩 긴장한 목에서 힘을 살짝 뺐다. 그리고는 금세라도 사그라들 것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마치 나비 같았어요, 훨훨 날아서 구름에 닿기를 바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우스운지.

커넌이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닥터 셰인 역시 꼭 자신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어정쩡한 그 표정에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우리 엄마는 태어나서 울부짖는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만약 내가 엄마였다면 태어난 나를 바로 죽여버렸을 거예요, 만약 나였다면 말이에요.

근데 엄마는 그렇게까지는 못했어요.

아빠가 그리웠으니까…

우리 아빠는 저보다 좀 더 갈색빛이 도는 적색 머리카락이었대요.

지금 생각해보니까 어쩌면 엄마는 내가, 아빠와 달라서.

내가 아빠를 더 완벽하게 닮지를 못해서 날 더 미워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커넌이 계속해서 말을 덧붙였다.

때때로 씁쓸한 표정을 짓다가도 애써 마음을 추스르는 듯, 금세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런 커넌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닥터 셰인은 그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고르고 또 골랐다.


무작정 위로의 말을 던지기엔 그의 인생이 너무 고달팠다.

그에 닥터 셰인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어린 두 딸을 떠올렸다.

닥터 셰인, 그녀 역시 사별로 혼자가 된 여자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커넌과 그의 엄마에게 약간은 공감했던 걸지도 몰랐다.

폭력을 정당화할 순 없지만, 적어도 커넌의 엄마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어떤 마음으로 어린 커넌을


대했을지는 알 것만 같았다.

“…감히 내가 조금 공감이 되네요.”

“…….”

“감히요.”

“괜찮아요, 닥터 셰인.”

커넌이 씁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헛된 위로는 필요 없다는 거절의 의미가 짙었고, 닥터 셰인 역시 그를 모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는 척을 하지도 않았지만, 그저 지금은 그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지금껏 그를 담당하면서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는 순간이었으니까.

자신은 의사니까.

“이제 셰인에 대해서도 얘기해줘요.”

사람 대 사람으로요.

커넌이 일부러 호칭을 붙이지 않고 불렀다.

그에 닥터 셰인이 어떤 거요? 그렇게 물으니, 커넌이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렸다.


“뭐든 좋아요.”

오늘은 그냥 그러고 싶은 날이잖아요.

나는 또 기억나지 않는 살인을 했고, 갑자기 꺼낸 엄마 얘기에 마음도 너덜너덜하죠.

오늘이 아니면 언제 이런 이야기를 하겠어요.

셰인도 털어내고 싶은 일이 있다면 지금 털어내고 다시 다 잊어요.

커넌이 마지막 쐐기를 단단히 박아넣자, 잠시 머뭇거리던 닥터 셰인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몹시 지쳐 보였고, 그녀가 내뱉는 한숨이 그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녀가 하는 말들은 모두 아픈 말이었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암 투병과 죽음, 아이들을 혼자 키우며 겪은 어려움, 우울증약을 복용했던 이야기.

다행히 지금은 거의 회복되었다는 말과 어머니는 여전히 그런 자신을 걱정했고, 스스로 자처하여 아이들의
보모가 되었다는 푸념까지.

커넌은 그것들을 그저 묵묵히 들었다.

가끔은 시선을 모로 돌려 그녀와 같이 창밖을 바라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가끔은, 그 사람이 참 많이 그리워요.”

닥터 셰인이 애써 아무렇지 않게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커넌이 그런 닥터 셰인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지금 기회를 놓친다면 다음이란 존재할 확률이 거의 zero 에 가까웠다.

그에 커넌이 두 눈에 글썽이는 눈물을 쥐어 짜내어 바닥으로 떨구었다.

닥터 셰인은 그것을 보다가 그냥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고, 소리 없는 커넌의 흐느낌이 방 안을 습하게


만드는데,
“하지만 내 감정은 커넌의 것과 달라요.”

닥터 셰인이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자신도 모르지 않았다.

그가 했던 말들 중, 80%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는 것을.

하지만 나머지 20%는? 그는 왜 80%의 진실과 20%의 거짓을 뒤섞어 제게 말을 한 걸까.

닥터 셰인이 다시 시선을 커넌에게로 옮겼다.

조금 전까지 함께 일렁이던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평소의 차갑고 무심한 표정 그대로였다.

그에 커넌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짜증스러움을 감추지 못했고,

“커넌의 감정은 잘못됐어요.”

닥터 셰인은 그를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쉐일 톰슨에게 걸려들어, 연신 허덕이면서도 크게 발버둥을 치지 않은 이유.

족쇄가 없음에도 달아나지 않았고,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던 이유.

사랑? 커넌은 그런 별 같잖은 놀이에 심취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굳이 따지자면 ‘올가미’, 그런 것과 더 닮아 있었다.

#23 스톡홀름 증후군

“…그게 그렇게 큰 문제인가요?”


커넌이 공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잘못된 것, 그것이 그렇게 문제냐고.

그런 커넌의 질문에 닥터 셰인이 달싹이던 입을 굳게 다물었다.

3 년 전, 예전에도 그런 환자가 있었다.

제 아버지의 친구에게 납치되어 12 년의 세월을 잃었던 그레이스 일븐.

그녀는 볕도 구름도 들지 않는 지하창고 방에 갇혀, 온전히 그가 주는 것을 입고 먹으며 살아왔다.

납치 당시 그레이스의 나이는 26 살이었고, 바깥으로 나온 날은 그녀의 생일이었다.

하늘에서는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바라보던 그레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 비도, 그의 선물인가요?’

당시 그녀의 물음에 모든 심리학자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12 년. 무려 12 년이란 세월을 빼앗긴 피해자였다.

당장에 경찰에게 화풀이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던 그녀는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한 걸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수많은 심리학자들은 당시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때 한 심리학자가 이런
말을 남겼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그에게 의지했고, 깊은 사랑을 느끼는 ‘스톡홀름 증후군’입니다.

그 이후 스톡홀름 증후군에 대해 많은 연구가 펼쳐졌고, 완벽한 정의를 얻지는 못했으나 나름의 수확은
있었으니, 스톡홀름 증후군.

그것은 실제로 납치를 당한 대부분의 피해자들에게서 은연중에 관찰된 심리적 반응으로, 피해자의
두려움이 가져온 반작용과도 같은 것이었다.

즉, 가해자의 위협적인 행동과 태도에 두려움을 느낀 피해자가 사실은 그가 좋은 사람이고,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믿게 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사회는 이런 결과에 혀를 내두르며 비난을 아끼지 않았고, 닥터 셰인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커넌. 그는 당신의 진정한 감정마저 빼앗은, 아주 파렴치한 인간이에요.”


“…….”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던 당신의 인생을 빼앗은 거라고요!”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를 그렇게 말하지 마!”

커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닥터 셰인을 노려봤다.

흔들리겠지. 그 누구도 자신에게 현실을 말해주지 않았으니.

조용한 강가에 던진 작은 돌덩이가 가져오는 파장은 그 크기보다도 클 테니까.

닥터 셰인이 입가를 끌어올렸다.

“너도 알고 있잖아.”

“…….”

“진실을 외면하려고 하지 마. 네가 아는 크림과 진짜는….”

“아니야, 아니야!”

심술을 잔뜩 섞어 빈정거리던 닥터 셰인의 말은 자신의 목을 조르는 커넌의 절규와 함께 끊겼다.

네가 그에 대해서 뭘 안다고 지껄여.

닥터 셰인의 목을 조르는 커넌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뻣뻣했다.

그의 몸은 언제나 경직되어 있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기 때문이었다.

그에 제 마음대로 목 하나 조르지 못하니, 닥터 셰인의 말이 좀 더 가슴에 사무쳤다.

그녀가 지껄인 모든 말이 다 맞다고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에 커넌은 입술을 앙다물었고, 닥터 셰인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니,

“아니라고?”
네 꼴을 좀 봐! 닥터 셰인이 커넌의 손등에 제 손톱을 박아넣었다.

마치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싸움을 하는 기분이었다.

커넌은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이, 자신이 보내버린 시간들이 우스웠다.

자신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알 수 없었다.

“영락없이 그를 닮아가고 있잖아.”

잔인하고 음산하며, 남을 해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지.

불만은 하늘을 찌르고, 매사에 부정적인 꼴을 좀 보라고.

“예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작은 것에 감사하고, 사소한 것에 행복하던 때로 말이야!”

닥터 셰인이 온 힘을 다해 커넌을 밀어냈다.

그에 커넌이 중심을 잃고 바닥을 뒹구니, 닥터 셰인이 때를 노려 재빠르게 자신의 재킷을 향해 달렸다.

혹시 모른다며 존이 챙겨준 비상 마취제가 재킷 주머니에 있을 터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고작 커넌에게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안심해버린 몸은 자꾸만 안락함을 찾았고, 그에 온몸에서 힘이


빠지려고 했다.

‘할머니랑 언니랑 먹으면 돼요!’

하지만 닥터 셰인은 당장의 안락함보다 조금 더 후의 안락함을 바랐다.

히든의 말에 엄마라는 단어도 포함시키고 싶었다.


그에 이를 꽉 깨물고 악바리로 버텨내니, 그녀의 손끝에 재킷 소매 부분이 잡혀 왔다.

“아니에요. 닥터 셰인이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그때 바닥을 뒹굴던 커넌이 몸을 일으켜 단숨에 닥터 셰인을 따라잡으니, 이번에는 목이 아니라


머리카락을 그러쥐었다.

그리곤 제 온몸으로 닥터 셰인을 내리누르니, 두 사람의 몸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닥터 셰인의 재킷


위로 엎어졌다.

“크림을 만나기 전에도 내 인생에는 작은 것에 감사하고, 사소한 것에 행복하던 순간은 없었어.”

잔인하고 음산하며, 남을 해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불만은 하늘을 찌르고 매사에 부정적인.

그건 크림이 아니라 나예요, 닥터 셰인.

커넌이 닥터 셰인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마치 좀 전에 자신의 상처를 뒤적이던 때처럼, 한없이 나약하고 초라하게. 그러면서도 터지려는 웃음을
참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저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있죠, 나는 이제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지 않을 거예요.”

그저 크림이 너무 보고 싶어요, 닥터 셰인.

그를 품에 안고, 동시에 그의 품에 가둬져 그가 내뱉는 숨으로 삶을 연명하고 싶어요.

온전히 그에게 기대어, 그밖에 모르고 그가 내 세상인 것처럼.

커넌이 닥터 셰인에게 매달리다시피 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의 간절함에 닥터 셰인이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지금 자신이 들고 있는 주사가 비상 마취제가 아닌, 기억을 바로잡고 나쁜 일들을 모두 잊게 해주는


마법 주사라면 좋겠다며 푸념할 뿐이었다.

**

짙은 어둠에 숨은 두 사람은 마치 좁은 곳에 가둬진 것처럼 한껏 몸을 포개었다.

그러다 누군가의 바르작거림에 맞댄 살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게 못내 아쉬운 듯 서로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도 했다.

“크림.”

커넌이 크림의 어깨를 끌어당겨 제 품에 안으니, 그가 커넌의 어깨를 감싸 다시 커넌을 품었다.

온전히 살과 살을 맞대어도 아쉬움이 짙으니, 서로가 서로의 품에 안겨 상대를 품고 싶어 했다.

마치 심장이 두 개인 것처럼 왼쪽과 오른쪽에서 교차로 두근, 두근 박동이 울렸다.

그에 자신의 심장이 왼쪽의 것인지, 아니면 오른쪽의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커넌.”

크림이 커넌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이마와 관자놀이, 그 사이 어디쯤에 입을 맞췄다.

귀와 가까워서 그런지 살과 살이 맞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려왔다.

커넌이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크림이 입을 떼지 않고 커넌의 눈두덩이와 미간 사이까지 입을


맞췄다.

간지러워.
커넌이 설핏 웃으니 크림이 커넌의 얼굴 위로 입술을 내려 눈두덩이, 광대뼈 위의 주근깨, 코끝과 입술산,
입술 옆, 턱뼈에 점점이 입을 맞췄다.

그러다가 쇄골 중앙의 움푹 파인 곳을 혀로 핥아 올리기라도 하면, 커넌의 몸이 활처럼 휘어져 바들바들


떨렸다.

그에 크림이 커넌의 허리를 감싸 안으니, 그의 손과 마주 닿은 갈비뼈가 불에 타는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니, 비단 그곳만 뜨거운 것은 아니었다.

크림이 만지고 입을 맞춘 온몸이 뜨거움에 아우성이었다. 그중 가장 뜨거운 곳은 다른 곳도 아닌 혀였다.

혀가 뜨거울 수도 있구나.

커넌이 낯선 감각에 허덕였다.

누군가와 혀를 섞는다는 것은 굉장히 기분이 묘한 일이었다.

내 것이 아닌 무언가가 침입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몹시 불쾌한 일임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계속해서 귓가에 맴도는 질척이는 소리가 세차게 뛰는 심장에 부채질을 하니, 마치 쉬지 않고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숨이 벅찼다.

으응-

커넌이 보채듯 숨을 내뱉으며 발을 굴러 소파 위로 도망쳤다.

그에 저항하듯 티셔츠가 돌돌 말려 가슴팍을 드러냈으나, 미처 내릴 생각도 못 한 채 커넌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가 잔뜩 충혈된 눈으로 크림을 바라보기라도 하면, 맹수처럼 숨을 고르던 그가 두 눈을 번뜩였다.

“커넌.”

손등으로 입가의 타액을 닦아낸 크림이 단숨에 커넌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시선을 내려 커넌의 말려 올라간 옷자락.


아니, 어쩌면 그보다 좀 더 자극적인, 이를테면 그의 유두에 시선을 던졌다.

피부가 하얘서 옅은 분홍빛일까 생각했지만, 커넌의 유두는 함몰되어 있었다.

크림이 그를 시선으로 탐닉하고 어루만지니, 그 묘한 간지러움에 커넌의 발가락이 자꾸만 안으로 굽었다.

“크림.”

커넌이 이름을 부르자 크림이 기다렸다는 듯, 커넌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마치 산토끼가 바위 위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것처럼, 뭉쳐 올라간 옷자락 너머로 그의 작은 머리통이


빼꼼히 올라와 있었다.

왠지 그만 보면 애가 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음에도 그가 한없이 모자랐다.

그에 커넌이 손을 뻗어 크림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차마 힘을 주어 세게 쥐지는 못하고 그저 손안에 감추듯이 가두니, 크림이 허무한 듯이 설핏 웃어 보였다.

“커넌, 온몸이 달아요.”

원래 이래요? 크림이 마치 화가 난 것처럼 인상을 썼다.

그를 온전히 바라보던 커넌이 두 손으로 크림의 얼굴을 감싸 자신에게로 이끌었다.

마치 모든 감각이 그에게만 집중된 것처럼 아쉽고 들뜨고, 제멋대로 변덕을 부렸다.

“잘 모르겠어요.”

꼭 알아야 하나요? 커넌이 어린아이처럼 보채자, 크림이 간질이듯 제 입술을 커넌의 입술에 닿을 듯 말
듯하게 대었다.
그에 애가 탄 커넌이 빨리, 빨리. 자꾸 재촉하니, 코끝이 맞닿은 채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빨리, 커넌이 다시 재촉하니, 크림이 시선을 내려 커넌의 입술을 바라봤다.

“다시 해도 돼요?”

커넌이 그것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크림이 눈동자만을 올려 커넌과 눈을 맞췄다.

“감아요, 눈.”

맞닿은 입술로 그의 말이 전해졌다.

그 간지러운 감각이 좋아 커넌이 못 알아들은 척, 괜히 고집을 부렸다.

그에 크림이 불만스러운 듯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으나, 예전처럼 그가 무섭지 않았다.

“크림이 먼저 감아요. 눈.”

커넌이 입술만을 벙긋거렸다.

그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알아들을까? 궁금증이 고개를 드는 찰나 크림이 천천히 눈을 감으니, 커넌이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피부가 까매서 잘 몰랐는데 그도 주근깨가 있었다.

자신처럼 넓게, 많이는 아니었지만.

속눈썹은 지독히도 길었고, 당장에 손을 뻗어 그것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거세게 일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급해할 필요가 없으니, 커넌도 그저 두 눈을 감을 뿐이었다.


#24 진술

“데이븐, 이거 자료 좀 수정해줘.”

아서가 데이븐에게 서류철 하나를 건네며 멋쩍은 듯 웃어 보였다.

두툼한 서류철에 겨우 서류 두 장을 넣어 건네자니 여간 민망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름 부탁하는 입장으로써 답지 않게, 예의 좀 차린답시고 서랍을 뒤져 찾은 새것이었는데,

“…아서, 이건 조쉬의 일이잖아.”

데이븐이 무표정한 얼굴로 칼같이 잘라 거절했다.

그뿐만 아니라 영혼 없는 눈길로 서류철을 바라보는 만행도 스스럼없이 저질렀다.

그에 아서가 이글거리는 눈을 부라리니, 데이븐이 찔끔 귀를 막았다.

“알지! 근데 그 자식한테 맡기면 꼬박 이틀은 붙잡고 있을 거라고!”

젠장! 아서가 신경질적으로 옆에 있던 휴지통을 걷어찼다.

덕분에 안에 들어 있던 구겨진 서류뭉치들이 바닥으로 흩어지니, 아서가 그중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시체 부검 결과서]
서류의 가장 위에 적힌 글씨를 읽던 아서가 하, 황당하다는 듯 숨을 뱉었다.

없어져서 한동안 사무실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것이 태평하게 쓰레기통에서 나오다니.

아서가 그것을 들어 보이며 데이븐을 돌아봤다.

“설마 이딴 자식에게 일을 맡기라는 거야?”

아서의 말에 데이븐이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그리곤 깊게 한숨을 내쉬며 아서의 테이블에 놓인 서류를 빼앗듯이 낚아챘다.

“까짓거 하면 되잖아.”

데이븐이 서류철을 두어 번 앞뒤로 흔들어 보이고는 신경질적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그에 정작 아서는 답답함을 토로하지도 못하니, 요근래 며칠은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았다.

고작 사람 하나 없을 뿐인데, 사무실을 너머의 삶이 달라져 있었다.

“젠장, 망할 커넌 자식.”

원래부터 일에 관심도 흥미도 없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아서가 깊게 한숨을 내뱉다가 고개를 들어 커넌의 자리로 시선을 던졌다.

늘 구부정한 자세로 서류를 뒤적이던 놈이었다.

커피도 싫어하면서 괴롭힐 목적으로 갖다 준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던 모습이 짙게 남아 있었다.


3 개월. 그가 사라진 지 벌써 3 개월이라는 시간을 넘어 100 일을 앞두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사직서도 남기지 않았다.

덕분에 망할 인수인계는 오롯이 아서의 몫으로 떨어졌다.

100 일 동안 약 6 명의 인턴이 지나갔다.

고작 이틀도 채 버티지 못하고 떠난 놈들도 수두룩했다.

“…아무리 어정쩡한 태도였어도 일은 잘했지.”

갑작스런 허탈감에 아서의 고개가 밑으로 푹 꺾이니,

‘넌 시키는 일만 제대로 하면 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거면 된다고.’

커넌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모진 제 말에도 그저 고개만 주억거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본래 성격이 그런 건지, 아니면 자신에게 지레 겁이라도 먹은 건지.

7 여 년의 세월 동안 자신이 맡은 일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마무리 짓던 놈이었다.

그런 놈이 갑자기 도망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동료들의 괴롭힘 때문에? 일에 흥미가 없었나? 아니면
다른 무언가?

“다른 이유….”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도무지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에 아서는 깊은 고민의 늪에 빠져야 했다.


일은 산더미처럼 쌓였고, 나름 오래 버티고 있는 조쉬는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도무지 일이
늘지 않았다.

이렇게 하다가는 그나마 도움이 되던 데이븐까지 자리를 박차고 나갈 상황이었다.

만약 그가 아니라면 그다음은 자신이었다.

계속 이대로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데이븐.”

아서가 결심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곤 일에 절어 있던 데이븐을 부르니, 그가 고개만 들어 아서를 올려다봤다.

“도저히 이대로는 못 견디겠다. 가자.”

“…어디를요?”

아서의 기세에 눌린 데이븐이 긴장한 듯, 평소와 달리 정중하게 물었다.

평소라면 뭘 그렇게 진지하냐면서 비웃었을 아서 역시 비장한 표정으로 데이븐을 바라봤다.

바깥은 뜨거운 태양이 잠들었으나, 여전히 그 열기가 식지 않고 있었다.

데이븐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한번 커넌의 자리를 돌아봤다.

“커넌이 어디 있는지 알아냈어요?”

데이븐이 내심 기대감을 안고 눈을 빛냈다.

그리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니 나름 슬림핏을 자랑하던 엉덩이에 어느새 두툼하게 살이 붙어 있었다.


평소 자기관리에 철저한 데이븐이 운동을 빼먹었을 리는 없고, 커넌의 빈자리 덕분에 의자에 앉아 있을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커넌, 그 개자식.

데이븐이 두 손으로 제 엉덩이를 두어 번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커넌, 그 개자식 찾으러 가자.”

“어디로 가서 찾을 건데요?”

커넌은 가족도 없는데….

데이븐의 물음에 아서가 핸드폰을 들어 보이니, 그를 바라보던 데이븐이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사무실에는 여전히 할 일이 쌓여 있었고, 조쉬 녀석은 메신저나 두드리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이대로 가다간 사무실 폐업은 굳이 먼 미래가 아닐 수도 있었다.

어쩌면 두 사람의 손에 커넌과 회사, 더불어 동료들의 생계가 달려 있는 셈이었다.

그에 데이븐이 결의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요. 경찰서.”

**

크림은 생각보다도 손이 컸다.

손바닥을 넓게 벌려 커넌의 배 위에 올려두면, 그의 양쪽 갈비뼈에 크림의 엄지와 새끼손가락이 각각


위치할 정도였다.

여기 있어.

그것이 주는 무게감에 커넌은 안도했다.


드디어 그를 온전히 갖게 되었다는 만족감에 숨이 벅찼고, 그럼에도 자꾸만 욕심이 났다.

그에 커넌이 두 손으로 크림의 팔목을 잡아 조금 더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기니, 그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커넌이 원하는 대로 따라주었다.

“커넌.”

평소보다도 낮은 크림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귀에 박혔다.

커넌이 그를 따라 입을 벙긋거렸다.

온몸이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웠으나, 정신은 또렷한 기분이었다.

“뜨거워요.”

“어디가?”

“…온몸이.”

온몸이 뜨거워요.

커넌이 더운 숨을 뱉었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데, 자신만 허우적거리는 꼴이 우스웠다. 마치 깊은 바닷물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거센 파도를 만난 것 같았다.

위태롭고 벅차면서, 동시에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더, 더 해주세요.”

커넌이 크림의 손등 위로 손톱을 세워 자국을 남기니, 그에게도 붉은 것들이 잔뜩 생겨났다.


커넌의 붉은 머리카락과, 잔뜩 상기된 두 사람, 크림의 생채기 난 손등까지.

푸른 밤에 쫓겨 달아난 태양이 다시 눈을 뜬 것만 같이, 짙은 어둠 사이로 온통 붉은 두 사람이 위치했다.

그에 홀린 듯 크림이 고개를 숙였다. 목적지는 커넌의 목덜미였고, 그를 더 붉게 만들 무기는 자신의


송곳니였다.

마치 뱀파이어처럼 커넌의 목에 그것을 박아 넣으면, 그 생소한 감각에 놀란 커넌이 다시 한번 몸을


휘었다.

그는 거부할 수 없고, 감히 끊어낼 수 없는 마약이었다. 자신을 점점 망치고, 무너뜨릴.

“커넌.”

너무 예뻐요.

크림이 커넌의 귓바퀴를 쪽쪽 빨았다.

그에 살가죽만 남았던 귓바퀴가 통통하게 부어오르니, 크림이 그것을 이로 깨물고 다시 한번 핥았다.

그의 모든 것이 과분할 정도로 달게 느껴졌다.

벌써 그에게 중독이 된 걸까, 크림이 숨을 깊게 들이마셔 커넌의 체취를 몸에 새겼다.

“크림, 크림.”

고통에 허우적거리던 커넌이 애달프게 크림을 불렀다.

그에 커넌, 크림이 제 이름을 불러주기라도 한다면 고작 그것만으로도 고통이 잊혀졌다.

크림. 당신은 이제 나의 치료제다.

효과가 좋고, 그만큼 부작용도 강한.

“사랑해요.”
사랑해요, 크림.

커넌이 크림의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그에게 매달리지 않는다면 당장에 터질 것처럼 뛰는 심장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도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해요, 우리.”

아무도. 그것이 가족이든, 친구든, 회사 동료든. 누구든 상관없으니 그냥 그렇게 해요, 우리.

커넌이 간절한 눈빛으로 크림에게 온전히 매달렸다.

당장 그에게 말한 것인지, 그저 자신을 향한 다짐인지.

내뱉은 말이 도로 제 귀로 들어왔다.

아무도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자고. 그것이 누구든 상관없으니 그냥 그렇게 하자고.

**

“…그러니까… 커넌, 트윈턴.”

“윌이요, 커넌 트윌턴.”

“…그래요, 커넌 트윌턴.”

아서는 앞에 앉아 있는 경찰관을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일은 제대로 하면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근무태도였다.

일에 대해 흥미도 없어 보일뿐더러 잔뜩 구부정한 허리는 도무지 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녀석과 닮았으니… 일은 잘하겠네.

아서가 그런 농담 식의 위로를 스스로에게 던졌다.


“실종된 지… 3 개월이 되었다고요?”

“정확히는 실종인지 모르겠어요. 연락도 없이 잠수를 탔는데, 집을 모르거든요.”

“…어… 그러니까, 지금 실종신고를 하러 오신 거죠?”

“…그렇다고 치죠.”

후우-

아서가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를 뒤적이니, 주머니 안은 열기로 뜨거웠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커넌에게 수십 통의 부재중을 남긴 핸드폰이 뜨끈한 열기를 내놓은 탓이었다.

자신이 전화를 하면 화들짝 놀란 목소리로 다급하게 전화를 받을 줄 알았던 커넌은, 그 어떠한 연락도
취하지 않았다.

그에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여기 실종신고서 작성하시고 우선 집에 돌아….”

종이 위에 볼펜 하나를 얹어 대충 건네던 경찰관이, 미처 말도 다 잇지 못하고는 아서의 뒤로 시선을


던졌다.

그에 아서와 데이븐이 경찰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는데,

“아뇨, 신고서 작성하시고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세요.”


경찰관이 두 사람의 행동을 저지했다.

그리곤 답지 않게 친절한 미소도 지으니,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던 아서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아, 아이… 선생님, 신고서 작성하시라니까요-”

그러자 경찰관이 크게 당황하는 것으로 보니, 굳이 왜 그러느냐고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제 막 경찰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체격이 큰 남자, 아서가 본능적으로 남자에게 관심을 보였다.

“경찰관님! 실종된 저희 직원 좀 찾아주세요!”

그리곤 대뜸 손을 들며 소리치니, 아서의 외침에 놀란 데이븐이 몸을 주춤 뒤로 물렸다.

그러다가 아차 싶었는지 잽싸게 외쳤다.

“트윌턴이요! 커넌, 트윌턴!”

그런 두 사람의 찰떡 호흡에 자리로 향하던 남자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일순 남자와 시선을 얽힌 아서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가 이 팀의 반장이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려 보이는 걸 보니 특진을 한 게 아닐까 싶었다.

아마도 정직하게 일 처리를 할 것 같아 마음이 기울었다.


“실종 신고요?”

남자의 반응에 아서와 데이븐은 희망을 얻었고, 다른 경찰관들은 좌절했다.

남자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자신의 자리로 보이는 테이블 위에 이리저리 널려 있는 서류를 대충 합쳐
들었다.

곳곳에 필기의 흔적이 빼곡했고, 아서는 그가 열정적인 경찰관임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며칠 전부터 실종 신고가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어요.”

남자가 가져온 서류뭉치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퍼뜨렸다.

그리곤 그중에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얼핏 흘겨봐도 가장 필기가 많은 페이지인 것 같았다.

“그리고 제가 그 모든 실종 신고를 파헤치고 있고요.”

남자가 볼펜 꽂이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붉은색 볼펜을 골라 들었다.

그에 아서는 그가 묘하게 강박증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자세히 보니 글자가 빼곡한 종이에는 붉은색으로
필기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를 확인한 아서가 고개를 들어, 남자에게로 진득하게 시선을 고정했다.

“물론 접점이 하나도 없어서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었지만 말이에요.”

…우스운 말이지만,
남자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마치 할 말을 고르는 듯 한참을 망설였다.

그에 아서와 데이븐의 시선이 깊어지기라도 하면 난감함에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 이럴 때엔, 피해자가 많아질수록 수사하기가 편해지죠.”

죄송합니다.

덧붙인 말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아서와 데이븐이 괜찮다며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자신을 ‘톰 맥아덤’이라고 소개했다.

그냥 편하게 톰이라고 부르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톰은 느껴지는 것보다도 훨씬 열정적인 남자였다.

그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자료는 풍부했고, 그는 작은


진술조차 허투루 듣지 않았다.

작은 단서가 모여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고 말하는 그가, 아서는 지독히도 믿음직스러웠다.

“그런 의미로 지금까지 나타난 실종자들의 특징이 모두 하나같이 달라요. 이게 무얼 뜻하는지


아시겠어요?”

“…아니요,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들이 납치된 거라면, 납치범에게는 확실한 의도가 없다는 겁니다. 보통 납치를 할 때엔 큰
이유가 있거든요. 살인, 장기매매, 금품갈취, 복수 등등 다양하지만 명백하죠. 그런데 지금까지 접수된
실종 피해자들은 접점이 단 하나도 없었어요. 금품갈취라고 하기엔 세 번째와 네 번째, 일곱 번째
피해자는 노숙자와 같은 행색이었죠. 복수라고 하기엔 접점이 아예 없고, 장기매매라고 하기엔 두 번째
피해자의 사회적 위치가 너무 높아요.”

이게 과연 무얼 뜻하는 걸까요.

톰이 아서와 데이븐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에 괜스레 긴장감이 맴도니, 아서가 힘겹게 침을 삼켰다.


#25 성찰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살인. 톰은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단순 살인을 위한 납치가 일어나고 있다고.

그에 아서와 데이븐이 어정쩡한 표정을 지으니, 슬픔도 분노도 아니었다.

황당함이라고 하기엔 너무 놀랐고, 의심이라기엔 톰의 모든 것이 너무 완벽했다.

“그러니까… 살인을 위해서 사람을 납치한다는 건가요?”

“그, 그러니까… 연쇄 살인… 연쇄 살인, 뭐 그런 거요?”

아서와 데이븐의 과장스런 질문에 톰이 입을 다무니, 무거운 침묵이 경찰서 안에 자리했다.

어쩌면 이보다 더 완벽한 대답은 없었다.

비록 그들은 직장 동료를 찾으러 왔다고 했으나, 언제나 이 사실을 말하는 건 어려웠다.

자식을 찾으러 온 사람들은 눈물바다가 되었고, 부모를 찾으러 온 사람들은 화를 냈다.

그들의 앞에서 톰은 언제나 죄인이었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최대한 열심히 찾아보겠습니다.

처음 경찰이 되었을 땐,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톰은 알고 있다.

그 말이 얼마나 무거운 말인지.

그렇기에 톰은 그저 입을 다물 뿐, 그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다.


“…찾을 수는 있나요?”

아서가 차분한 음성으로 묻자, 데이븐이 그런 아서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서는 평소처럼 침착해 보였다.

아니, 평소보다도 침착해 보였다.

데이븐은 그런 아서가 대단하면서도 동시에 무서웠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커넌을 찾으려고 안달인 거죠? 묻지 못한 질문이 목구멍이 걸린 것처럼 불편했다.

“아직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서 100% 확답을 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톰이 고개를 숙였다.

그에 아서와 데이븐이 잠시 당황한 듯 그의 정수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둘이 짠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제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알 것이다.

이건 톰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결국 아서와 데이븐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다.

톰은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고, 자신들 역시 그랬다.

“새로운 소식이 있다면 바로 연락드리죠.”

톰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미니, 아서가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고작 그 작은 온기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놓이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아서의 진심 어린 인사를 끝으로 데이븐이 그를 이끌었다.

누구 하나 먼저 나서지 않으면, 질척이는 아쉬움에 사로잡혀 경찰서를 떠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에 아서가 느릿하게 발걸음을 떼려는데, 소란스럽게 경찰서 문이 열렸다.

“저희 아들 좀 찾아주세요…. 저희 두 아들이 며칠째 연락이 안 돼요.”

여성의 울먹임에 아서와 데이븐이 시선을 맞추니,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고개를 돌려 톰을 바라봤다.

그에 톰이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단서의 시작이었다.

***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천장이었다.

벌써 밤이 찾아온 것인지 환한 조명이 머리맡을 밝혔으나, 그럼에도 머리가 멍했다.

마치 무언가 중요한 것을 까먹은 것도 같았고, 아닌 것도 같았다.

뭐였더라.

가만히 생각해봐도 도통 기억나지 않으니, 그 익숙함에 커넌이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썼다.

종종 자신이 잠에 들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으면, 회진을 돌던 의사나 간호사가 제 팔뚝에 주사를 꽂아


넣곤 했다.

그러면 잠시 후 몽롱한 의식 끝에 어둠이 찾아왔고, 다음 날 아침. 딱 지금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라고?’

무언가를 빼앗긴 것만 같은 아주아주 더러운 기분.

‘네 꼴을 좀 봐!’

마치 시궁창을 뒹굴고는 그를 씻어내지 않은 채, 그대로 이불에 누워 느끼는 찝찝함. 지금 기분이 딱


그랬다.

‘영락없이 그를 닮아가고 있잖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아주. 아주아주 더러웠다.

“닥터 셰인.”

커넌이 어금니를 악다물고는 닥터 셰인을 불렀다.

그에 아래턱에 힘이 잔뜩 들어가니, 잇새로 뿌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네까짓 게…. 커넌이 주먹 쥔 손에 힘을 주자, 순식간에 하얗게 질린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이 들끓는 분노를 다스릴 수는 없었다.

그에 침대 옆 협탁을 세게 내려치며 커넌이 화풀이를 했다.

역시 자신과 크림 사이를 방해하는 것들은 다 죽여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를 이미 알면서도 굳이 하지 않으니, 이런 꼴이 되는 거였다.


당장에 그녀를 죽여버려야 했다. 지금 당장.

“가능하지?”

커넌이 고개를 들어 창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비록 자신과 함께 들끓어줄 태양은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다행히 작은 몸을 잔뜩 웅크린 병신은 그곳에


있었다.

커넌이 그를 번뜩이는 눈으로 바라보자, 무릎에 얼굴을 묻었던 어린 커넌 역시 고개를 들어 커넌과 시선을
얽었다.

그에 둘이 동시에 눈을 빛냈으나, 확신이 없으니 그저 서로를 노려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왜 대답이 없어? 가능하지?”

커넌이 자신을 재촉했으나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럼에도 애가 타지 않는 걸 보니, 자신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거겠지.

결국 그가 없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저 그를 등에 업고, 그의 기세에 으스댈 뿐이었다는 것을.

결국 제 스스로는 알을 깨고 나올 수도, 자신을 감싸는 굴레에서 탈피할 수도 없는 것이다.

“…커넌 트윌턴… 진짜 한심해….”

결국 커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끝없는 자기혐오에 빠지는 것이었다.


‘왜 아직도 여기 있어?’

당장 닥터 셰인을 잡으러 가야지-

설마 그러지 못하는 거야? 왜? 크림이 없으니까? 크림이 없는 너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본인을 보다


정확하게 바라보는 편이구나? 그렇다는 걸 사실은 너도 알고 있지? 창문 속 아이가 수도 없이 물었지만
커넌은 끝내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별 하나 없는 하늘에 외로이 떠 있던 달님이 태양에게 자리를 넘겨줄 때까지 뜬눈으로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크림.”

커넌이 뻑뻑한 눈을 끔뻑거리며 나지막하게 크림의 이름을 불렀다.

그에 어둠과 빛을 빠르게 오가는 것처럼, 그토록 가까웠던 크림 역시 금세 멀어져 버렸다.

그에게 받던 만족감이 없어지니 텅 빈 자리를 상실감이 채워갔다.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도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크림 도우넌. 어째서 내게 그 이름을 가르쳐준 거예요?

당신의 이름은 그게 아니잖아요.

나를 가지고 놀고 싶었나요? 당신에게 휘둘리는 내 모습은 어땠죠? 그로 인해 만족했나요? 단 한 번도


내게 싫증을 느낀 적이 없나요? 내 미련함이 당신의 가슴을 옥죄고, 때로는 지루함에 하품을 참은 적은
없었나요?

크림. 나는 아직도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많고, 당신과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어째서.

“어째서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거야.”

커넌이 숙였던 고개를 다시 되돌렸다.


그리고는 눈을 뜨니 병실이 제멋대로 햇살에 끌어안겨 있었다.

그에 커넌이 발을 구르고 엉덩이를 뒤로 밀어 최대한 태양에게서 달아나니, 그런 커넌에게 삐친 건지


아니면 그냥 저 좋다는 사람을 향해 떠난 건지.

구름에 넙죽 업힌 태양이 떠나갔다.

그에 병실이 다시 그늘에 삼켜지고, 시간이 지나 그보다 더 짙은 어둠이 드리우면 어김없이 아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동그란 어깨를 한껏 끌어안고는 무엇이 서러운지, 아니면 무언가에 잔뜩 심통이 난 건지.

온갖 대로 인상을 쓰고는 커넌을 빤히 바라봤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커넌이 신경질적으로 묻자, 아이가 화들짝 놀라는 척 몸을 뒤로 물렸다.

전부터 계속 말을 걸었으면서 이제 와서 자신을 볼 수 있는 거냐며 너스레를 떠는 꼴이 같잖았다. 그


모습이 작은 불씨가 되어 가슴속에서 응어리진 감정에 불이 붙었다.

당장에 한 손으로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게.

커넌이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고는, 손끝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힘을 풀지 않았다.

그에 손톱이 여린 살을 파고들어 피가 맺힐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때 아이의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라리 대놓고 웃으면 기분이 덜 상했을 텐데, 꾸역꾸역 웃음을 참다가 터진 것처럼 웃는 소리였다.

그 명백한 비웃음에 커넌이 얼굴을 붉히며 창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닥쳐.”

커넌의 차가운 시선과 말투에도 아이의 웃음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말만 단호할 뿐이지, 감정은 더 빠르게 고조되었다.

마치 병실에 남은 마지막 공기를 급히 들이마시는 것처럼 커넌의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그럼에도 아이의 웃음이 멈추지 않으니, 그에 커넌이 몸을 일으켜 성큼성큼 창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닥쳐, 닥치라고.”

닥치란 말이야! 커넌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병실을 한가득 채웠다.

커넌이 주먹 쥔 두 손에 더욱더 세게 힘을 주었다.

당장에 튀어 나가 창문을 부수고, 아이를 꺼내어 목을 조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다 알면서.’

그때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 알면서, 내가 뭐가 불만인지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커넌이 그랬어, 너는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아이가 끝없이 중얼거리며 커넌을 원망스레 바라봤다.

그에 들썩이던 커넌의 어깨가 점차 차분함을 되찾으니,

“…내가 커넌이야.”

커넌이 확신을 갖지 못한 말투로 대답했다.

내가 커넌이야.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내가.


내가 크림이 사랑하던, 크림이 사랑하는, 크림이 사랑할 사람.

그게 바로 나라고.

차마 그 뒷말까지는 내뱉지 못하고 목구멍 깊숙이 삼켜냈다.

‘아니야- 너는 커넌이 아니야.’

그때 거울에서 뒤바뀌었잖아.

기억이 안 나는 거야? 응? 아이야. 지금 네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잘 봐봐. 아이야, 네가 정말로


커넌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이의 말에 커넌이 고개를 들어 창문으로 시선을 던지자, 어느새 자신의 모습은 사라지고 아이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에 허탈하게 웃으니, 창문 속 아이가 따라 웃었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커넌이 입을 뻐끔거리자 뒤이어 아이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거짓말이 아닌걸? 너도 알고 있잖아.’

크림이 그랬잖아.

거울 뒤로 숨어요, 거기는 안전하니까. 내가 도와줄게요. 나를 믿을 수 있겠어요? 아이가 마치 크림의


목소리를 따라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게 깔아 말했다.

그에 커넌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니, 아이가 그를 따라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래서 너는 고개를 끄덕였잖아.’

그런데 거울 뒤로 숨은 다음에는 어떻게 했지? 크림에 대한 믿음을 접고, 덜컥 겁을 먹어서는… 거울


속에 있던 너와 자리를 바꾼 거잖아! 왜 그래, 아이야? 어서 눈을 떠! 네가 누군지 정확하게 마주하라고!
눈을 떠! 어서 눈을 뜨라고!

한껏 고조된 목소리가 고막을 찢을 것처럼 내질러졌다.

그것이 병실을 가득 채우고,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듯 커넌의 온몸을 감싸 안으니, 커넌이 두 귀를 막으며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

시끄러워. 너무 시끄러워서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까, 제발 누가 저 입 좀


다물게 해봐.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커넌이 고함과 함께 두 손을 뻗었다.

자신이 크림의 말에 속아 거울 뒤로 숨었다면, 저 아이는 창문 뒤로 숨은 것이다.

그곳에서 자신을 기만하고 농락하며 그 묘한 희열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곳으로 나오면 아무것도 아닌 놈이. 당장에 한 손으로 제압할 수 있는 새끼가.

손끝에 창문이 닿았다고 생각된 순간, 마치 아이의 멱살을 쥐는 것처럼 커넌이 주먹을 쥐었다.

당장에 이 창문을 깨뜨리면 두 손에 그가 붙잡힐까, 아니면 깨진 유리 파편에 뒤섞여 영영 사라지게 되는


걸까.

“그딴 헛소리 할 거면… 그냥 영영 사라져버려.”

궁금증을 확인하듯 커넌이 주먹에 힘을 주니, 곧이어 큰 소리와 함께 창문이 깨져, 유리 파편들이
이리저리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그중 하나가 커넌의 뺨을 훑어 자국을 남기니, 그 저릿한 통증에 그저 그것이 아이겠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에 시끄럽게 요동치던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텅 빈 병실에는 오로지 저 혼자였다.

“내가, 커넌이야.”

깨진 유리창 틈으로 뜨거운 햇살이 스며드니, 이번에는 커넌 역시 그를 피하지 않았다.

그저 그것을 소중하게 손에 가두어 희미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의-

#26 유리

“선배님, 저기 저 환자 왜 저러죠?”

“아, 뭐가-”

“아이, 그러지 말고… 좀 보세요.”

“혼자 뭐 하는 거야?”

CCTV 를 바라보던 가드 요원이 다급하게 커넌의 병실 CCTV 화면을 확대했다.

화면 속 그는 무언가에 잔뜩 겁을 먹은 것처럼 침대 위를 서성거렸고, 그러다가 무언가에 놀란듯 벽에 딱


달라붙기도 했다.

그리고는 중얼중얼 입을 쉴 새 없이 움직이니,


“…내가, 커넌이야?”

한 가드 요원이 그를 따라 입을 놀렸다.

“저놈은 저거, 하루도 평온한 날이 없어.”

“이번에 닥터 토마스 사건에도 연관이 있다고 하던데요?”

그에 가드 요원 둘의 관심이 온전히 커넌에게로 향했다.

아침에는 회진도 없고, 환자들은 식사에 열중하는 시간이기에, 본래 아침의 정신병원은 가드 요원들에게
가장 지루한 시간이었다.

그런 가드 요원들에게 심심풀이 땅콩이 제 스스로 굴러왔으니, 굳이 그를 발로 차버릴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두 명의 가드 요원이 신랄하게 CCTV 영상 속의 커넌을 비웃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저거, 저게 뭐, 뭐 하는 겁니까?”

“…야, 야. 다, 닥터 불러라. 빨리!”

두 가드 요원의 얼굴에 맴돌던 웃음기가 점차 사라지고, 안색이 차갑게 굳어갔다.

가드 요원 하나가 급하게 닥터를 콜하는 동안, 다른 한 명은 다급하게 녹화 버튼을 눌렀다.

“아이 씨, 내가 이래서 정신병원은 싫다고 한 거야!”


그러다가 괜히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곧이어 창문 깨지는 소리가 중앙복도에 울리니, 전쟁통에 터진 폭탄에 놀란 것처럼 가드 요원 둘이


다급하게 달려나갔다.

“닥터 셰인 콜 했어?”

한참 달리던 가드 요원 하나가 묻자, 다른 한 명이 엄지로 뒤를 가리켰다.

그에 뒤를 돌아보자, 다급한 콜에 달려 나온 닥터 셰인이 멀찍이서 두 사람을 따라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자 가드 요원이 닥터 셰인과 병실을 번갈아 가며 돌아보더니 이내 조금 큰 목소리로 외쳤다.

“닥터 셰인! 저거 완전 미친놈이에요. 미친놈!”

“아이, 선배님!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셰인, 어서요!”

두 가드 요원과 닥터 셰인, 그리고 먼저 병실 앞에 도착한 다른 가드 요원까지.

조용하기만 하던 복도가 연신 떠들썩했다.

자신을 재촉하는 부름에 닥터 셰인이 뜀박질에 좀 더 박차를 가했지만, 평소 펜만 잡던 터라 언제나


달리기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덕분에 1 분 1 초가 지독히도 길게 느껴지니, 약 160 피트의 거리가 그보다 10 배는 더 멀어 보였다.

“침착해야 해.”
그리 말하며 이성적인 판단을 하려 노력했으나, 현재 자신의 목적지가 커넌의 병실이라는 것을 눈치챈
다음부터는 그를 과감히 포기해야 했다.

게다가 유리가 깨지는 소리까지 크게 울리지 않았는가?

“젠장, 그러길래 유리창을 없애야 한다고 했는데!”

닥터 셰인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모든 병실에는 성인 남성 평균 키의 절반 정도가 되는 창문이 존재했는데, 직접적인 일광욕이 우울증


치료에 효과적이라는 빌어먹을 논문에 혹한 병원장의 명령 때문이었다.

병원에 근무하는 대부분의 의사 및 관계자들의 반대에도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벌써 수차례 환자들에 의해 유리가 깨졌고, 운이 나쁜 경우에는 그를 이용한 자해나 자살 시도 소동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병원에서는 그 어떠한 제재도 할 수 없으니, 닥터 셰인은 드디어 오늘. 또 한 번의 사건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셰인!”

“커넌은?”

닥터 셰인이 숨도 고르지 못한 채, 곧바로 커넌의 병실로 들어섰다.

깨진 유리 파편들이 그린 그림으로 바닥이 어지럽기는 했으나, 그를 다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고요했다.

그 이상한 정적에 닥터 셰인이 옆에 서 있던 가드 요원에게 물으니, 그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나머지 손으로 창문 쪽을 가리켰다.

“…창문….”
그에 닥터 셰인이 불안함과 안심이 공존하는,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힌 채로 시선을 옮겼다.

창문. 그것은 5 년 전 병원장의 독재적 명령에, 끝내 모든 관계자들이 고개를 끄덕여 만들어졌다.

역시 저 창문을 없애야 했는데, 아니 애초에 만들지를 말아야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3 년 후, 닥터 토마스의 강력한 주장으로 모든 병실 창문에 쇠창살이 설치되었다.

물론 인권 등의 문제로 목소리가 커지기는 했으나, 이후 다시 잠잠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닥터 셰인은 조금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쇠창살이 있으니 기껏 해봐야 깨진 유리 파편으로 자해를 한 것이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면 저번처럼


뾰족한 유리 조각을 들고 간호사를 협박한 것이지 않을까? 그냥 다시 한번 그를 잘 타이르면 마무리될
것이라며 자신을 진정시켰다.

“…커넌?”

그러나 가드 요원이 가리킨 창문을 바라보는 순간, 무릎이 꺾여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해야 했다. 왜
처음부터 인지하지 못했던 것일까.

애초에 병실에서 커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어야 할 쇠창살이 이리저리 굽어, 마른 남성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커넌!”

닥터 셰인이 힘겹게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창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에 창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주니, 곧이어 닥터 셰인의 새된 비명 소리와


함께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커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커넌이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가슴팍 위를 묵직하게 누르는 팔이 없었다면 말이다.

분명 살과 살이 맞닿아 있었는데 자신의 체온이 더 높아서 그런지, 시리도록 차가운 기분이었다.

그에 혹시나 악몽이 다시 시작된 것은 아닐까 걱정하던 마음이 안정감을 되찾아갔다.

평소 본인도 체온이 낮은 편이었지만, 크림은 유난히도 체온이 낮은 사람이었다.

가끔은 시체처럼 차갑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심장은 세차게 뛰는 남자였다.

두근, 두근.

커넌이 크림의 가슴팍에 귀를 기울였다.

일정한 박자로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가 묘한 안정감을 주는 듯, 커넌의 입꼬리가 작게 호를 그렸다.

“크림, 사실은 일어났죠?”

커넌이 장난스럽게 묻자, 크림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떴다.

그리고는 고개를 모로 숙여 제 품에 안긴 커넌을 내려다보니, 크림의 입술이 커넌의 앞머리에 스쳐 마치


아기 바람이 지나간 것처럼 그를 뒤흔들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크림의 질문에 커넌이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어떻게 알았을까? 자신조차 의문이 들었다.

그냥.

정말 그 단어 그대로였다.
마치 잠의 요정이 자신의 귓가에 알려준 것처럼 그냥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커넌은 그냥 대답하지 않았고, 크림도 그런 커넌을 재촉하지 않았다.

늦은 아침의 해는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었고, 두 사람의 사이에도 묘한 기류가 흘렀다.

“모처럼 좋은 꿈을 꾼 것 같아요.”

유난히도 햇살이 따뜻했고, 바람이 이마를 간질였어요.

그에 설핏 웃으면, 내가 내뱉은 콧바람이 우스워 다시 한번 웃었던 것 같아요.

주변에는 엄마를 닮은 나비가 끊임없이 날갯짓을 했고, 그를 품어줄 꽃이 만개해 향기로웠어요.

온통 어둠만 가득했던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빛만이 가득하니, 만약 내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몹시 좋은 꿈이었어요.

크림은 지금도 꿈을 꾸는 것처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끊임없이 말을 이었다.

그에 커넌이 슬며시 그의 손을 잡으면, 자신보다 좀 더 강한 힘으로 크림이 손을 마주 잡아 왔다.

그의 온기에 자신이 차가워진 건지, 아니면 자신의 온기에 그가 따뜻해진 건지.

어느새 두 사람의 체온이 동일하게 변해 있었다. 그에 커넌이 설핏 입꼬리를 올리니, 그의 말처럼 제가


내뱉은 콧바람에 다시 한번 웃음이 터졌다.

“앞으로도, 크림이 좋은 꿈만 꿨으면 좋겠어요.”

아프지 않고, 아파도 아프지 않고.

고작 그런 이마를 간질이는 햇살이나, 자신이 내뱉은 콧바람에 웃는 것이 아니라.

날갯짓을 하는 나비를 보며 엄마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굳이 그런 것이 아니라도 당신의 인생에 빛이 가득했으면 좋겠어요.

그것에 지독히도 익숙해져서 더 이상 그를 보고도 좋은 꿈이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고작 그런 것들을 보면서 자신의 죽음을 그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자신이 생각해도 순 억지인 말들이었다.

있는 대로 단어들을 주워 모아, 되는 대로 말로 내뱉은 것처럼 순 엉망인 말들이었다.

그럼에도 제 욕심을 마냥 받아줄 사람이 있다는 믿음에 끊임없이 어리광이 쏟아졌다.

그에 혹시나 그가 싫증을 느낄까 두려우면서도, 이런 자신을 그냥 받아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고마워요.”

그리고 그런 제 생각을 다 안다는 듯, 크림이 살포시 이마를 맞대어 왔다.

그에 크림의 이마가 마냥 차갑게 느껴지니, 자신의 뜨거운 이마가 보다 더 잘 느껴졌다.

그제야 커넌은 혹시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꿈인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이 ‘고작’이라고 표현한 모든 것들이 사실은 자신의 바람인 것은 아닐까.

이 모든 것이라 하면 어디서부터 의미하는 것일까, 혹시 크림을 만난 처음 그 순간부터 제 꿈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그만 일어날까요?”

그때,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 크림이 맞댄 이마를 거두며 몸을 일으키니, 커넌이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처음. 원래 있던 집과 달리 이곳은 꾸며진 느낌이 하나도 없는 곳이었다.

침대 옆 협탁에는 그가 읽다가 둔 것으로 보이는, 책갈피가 꽂힌 책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다육


식물 화분도 두어 개가 놓여 있었다.

베개는 오래 사용한 듯 숨이 조금 죽어 있었고, 슬리퍼 역시 발꿈치 부분이 조금 닳아 있어 거친 느낌을


주었다.

한쪽에 놓인 옷걸이에는 그의 잠옷이 걸려 있었지만, 잘 입지 않는지 바지의 칼주름이 여실히 남아 있었고,


좀 더 위에 무심하게 툭 걸쳐진 모자는 그의 favorite 아이템일 것만 같았다.

크림의 진짜 집.
정말로 그가 살아가고 있는 곳. 꾸미거나 보태지 않고 거짓이 없이 그를 보여주는 곳. 그렇기에 조금 더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인간적인 냄새? 자신이 내뱉은 말에 커넌이 픽- 저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

인간적이라니.

누군가를 죽인 곳에 대한 평가로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았다.

게다가 자신이 그런 평가를 하다니.

커넌이 절레절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마치 얇디얇은 유리 한 장을 발밑에 깔고, 그 위로 조심히 걸음을 옮기는 것 같았다.

행복하고 잔뜩 들떴으나, 동시에 위태롭고 조심해야 했다.

“크림.”

문득 그런 것이 궁금해졌다.

자신이 밟고 있는 이 유리는 과연 어느 정도의 무게까지 견뎌줄까.

제가 어디까지 제멋대로 굴고, 제멋대로 날뛰어도 괜찮은 걸까.

그에 크게 발을 굴러봐도 미동조차 없으니, 결국 힘껏 뛰어 두 발로 쿵, 쿵.

그렇게 충격을 주는 미련한 방법밖에는 없었다.

“저번에 물어봤었는데, 이번에는 조금 돌려서 물을게요.”

사람을 언제 처음 죽여봤어요? 꿀꺽.

커넌이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긴장감에 메마른 침을 힘겹게 삼켰다.

어쩌면 그도 아무렇지 않게, 태연하게 대답해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다.

적어도 제가 밟고 있는 유리가 그 정도의 무게는 견뎌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크림은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고, 커넌은 굳이 유리의 균열을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27 균열

“……그게 그렇게 궁금한가?”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고, 언제 처음 사람을 죽였는지.

정말 그게 궁금해요? 크림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커넌을 돌아봤다.

그에 태양의 일렁임에 반사된 크림의 눈동자가 제 한 몸 사리지 않고 연신 번뜩이니, 그 익숙한


날카로움에 놀란 커넌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 참 이상하지….”

내가 어떤 아이였는지는 별로 궁금해하지 않더라고요.

주로 어떤 걸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지, 친구는 많았는지 적었는지, 어떤 걸 좋아하고 싫어했는지, 그런


흔한 걸 물어보는 사람이 없더라고.

그저 자극적인 것만 원해서는… 사람을 왜 죽였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죽일 때는 어떤


기분이었는지, 굳이 그런 것만 궁금해하지.

그리고 커넌도… 결국 그런 게, 궁금하다는 거죠? 크림이 굳이 실망감을 감추지 않고 물으니, 커넌 역시


굳이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이런 걸 원한 게 아닌데….

그제야 제 발밑을 겨우 받치고 있던 유리의 균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에 쉽사리 발을 떼지도, 그렇다고 언제 깨질지 모를 유리 위를 계속 지킬 수도 없으니, 이래저래


곤욕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언제 처음 사람을 죽였냐고요?”


“저기, 크림. 나는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언제 처음 죽였다고 말하면?”

믿을 자신은 있고요? 크림의 말에 커넌이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 말을 꺼내고 싶었으나, 도무지 그것이 무언인지 알 수 없었다.

그에 무엇이 제 입을 다물게 만든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원망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크림의 시선 끝에 덩그러니 놓인, 자신을 치워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동네에 작은 과일 가게가 하나 있었어요.”

워낙 못 사는 동네이기도 하고 다들 험악하기만 하니까, 장사가 잘될 턱이 없었죠.

그에 주인아저씨 표정이 매일매일 안 좋았는데, 그러다가 또 과일 하나를 팔면 헤벌쭉하게 웃는 모양이…


참, 좋았지.

크림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에 그가 웃고 있는 건지, 아니면 울고 있는 건지.

잘 알 수 없었다.

그저, 그가 말하는 것처럼 과일 가게 주인을 아주 좋아했구나.

그 사실만이 또렷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고작 그 웃음 하나를 보려고 매일매일 그 과일 가게 앞을 지나갔어요.”

그러다가 혹시라도 그가 인상을 쓰고 있으면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라도 가게에 있는 과일을 몽땅 사주고


싶었죠.

근데 사실 돈이 없으니까, 그중 가장 못난 것 하나도 사 먹을 수 없었어요.


그냥 마음만 앞선 거죠…. 근데 어느 날, 그 아저씨가 갑자기 날 불렀어요.

‘꼬마야.’

덩치는 산만 했는데, 목소리는 모기처럼 얇았죠.

그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서 헤벌쭉하니 웃으며 아저씨를 올려다봤어요.

그랬더니 그 아저씨가, 그 가게에서 가장 탐스러운 사과 하나를 집어서 넌지시 내 주머니에 욱여넣어 주는


거예요.

“돈이 없는데요.”

그렇게 말했더니 괜찮다며 예의 그 웃음을 지어 보이는데, 눈물이 다 나더라니까요?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거예요.

누군가가 목적도, 대가도 없이 내게 친절을 베풀어준 때요.

그때를 회상하듯 크림이 두 눈을 지그시 감으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커넌의 두 눈에도 덩달아 눈물이
고였다.

그에 자신이 이토록 감정적인 사람이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이 일렁이고 그 거센 파도에 휩쓸리니 마치 자신이 크림인 것만 같았다.

“테일러, 존 스미스.”

매일 그 가게 앞을 서성인 지 꼬박 3 개월 만에 알게 된 이름이에요.

한국계 미국인이었는데,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한국이란 나라를 가본 적은 없다고 그랬어요.

그에 걸맞게 겉모습도 완전한 미국인이었죠.


어렸을 땐 아저씨의 우락부락한 몸매가 참 부러웠는데, 다 커서 생각해보니까 그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몸을 키웠던 것 같아요.

여러모로 어린 나보다는 어른인 그에게 무서운 동네였죠.

크림이 감았던 두 눈을 떠, 커넌과 시선을 얽었다.

아니, 어쩌면 그의 시선은 커넌의 두 눈에 고인 눈물방울로 향한 건지도 몰랐다.

빛을 등진 갈색 눈동자가 마치 부유하는 사막의 먼지 같으니, 그의 두 눈에 고인 눈물방울은 오아시스와


다름이 없었다.

“빚을 졌다고 그랬어요.”

가게 벌이가 시원찮을 때에 맞춰서 고향의 어머니가 맹장 수술을 받게 되었다며, 7,000 달러를


빌려달라고 그랬대요.

기한은 3 주였는데, 꼬박 3 주 동안 매일같이 가게의 모든 과일을 다 팔아야 갚을 수 있는 금액이었어요.

어쩌면 못 갚을 걸 알았던 건지도 모르죠.

그냥 막막한 삶에서 도망치기 위한 변명이었을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날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지독히도 평온했거든요.

헤벌쭉 웃던 그 얼굴보다도 예뻤어요.

아마 죽어서도 못 잊을 거예요.

그가 지었던 웃음과 습관처럼 했던 표정. 다정하던 말투와,

‘괜찮단다, 꼬마야.’

괜찮다고 말해주던 그 목소리까지. 모두 다.

커넌과 눈을 맞추던 크림이 다시 두 눈을 감았다.

감정은 전염성이 높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예쁘다 예쁘다 했더니,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온 건지. 그는 자꾸만 자신을 뒤흔들었다.

평소처럼 뿌리치면 그만이건만 왜 그에게만은 항상 이토록 어려운 건지 몰랐다.

“그때가 아마 11 살이었을 거예요.”

7 살쯤부터 갱단 밑에서 심부름을 했었거든요.

처음에는 기껏 해봐야 돈이 가득 들어 있는 봉투를 재킷 속에 숨겨, 배달하는 정도였어요.

물론 고작 그걸로도 두 손을 벌벌 떨던 겁쟁이였지만 그 나이에 벌 수 없는 돈을 손에 쥐여주니, 아마


누구라도 거부하지 못했을 거예요.

게다가, 100 달러가 모이면 엄마에게서 벗어나 장난감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겠다는 당찬 포부도
있었으니,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죠.

‘쉐일. 이번 심부름을 잘 끝내면, 평소의 10 배를 줄게.’

어때, 하겠어? 그렇게 묻는 목소리에 고개가 떨어질 것처럼 끄덕였어요.

혹시나 다른 사람에게 일거리를 넘길까 두려울 정도로 간절히 원했죠.

평소의 10 배면 100 달러가 될 테니까 당장에 엄마에게서 벗어나 장난감 왕국으로 갈 수 있겠다며
조잘조잘 떠들기도 했어요.

‘장난감 왕국? 그거 좋네! 근데 그거 알아?’

국왕에게는 칼이 필요하잖아요.

근데 나는 가지고 있질 않으니, 장난감 왕국으로 갈 수 없다며 호들갑을 떨었죠.

그에 내가 잔뜩 울상이 되면, 그를 놓치지 않고 칼을 들이밀었어요.


‘자, 네가 그토록 원하던 칼이야.’

그럼 나는 그걸 들고선 그들이 말하는 악당을 물리치러 가야 했죠.

그들이 과일 가게 아저씨 사진을 들이밀며 악당이라고 말하면, 그때부터 그는 내게 악당이어야 했어요.

크림의 감은 눈에서 눈물방울 하나가 비집고 나와 틈을 만드니, 나머지 것들도 그를 놓치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

그의 얼굴은 그 어떤 일그러짐조차 없었으나, 그렇기에 커넌은 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원래 그런 거 잘 몰라요, 나. 기분, 마음, 감정. 뭐 그런 거요.’

그제야 그때의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야. 이제서야. 겨우 이제 와서야.

그게 너무도 원망스럽고 미안하여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 그만 말해요, 크림.

힘겹게 벌어지는 그의 입도 다물어주지 못했다.

꾸역꾸역 자신을 삼키려 발버둥 치는 감정을 애써 무시하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커넌에게는 벅찬


일이었으니까.

“그는 내게 아버지였는데, 나는 그에게 악당이라는 탈을 뒤집어씌운 거죠.”

그럼에도 그때는 선택지가 없다며, 그를 찾아갔어요.

찾아가는 동안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그걸로 작은 강을 만들 수 있을 정도였어요.

그렇게 말하는 지금의 크림도 작은 강을 만들 수 있을 것처럼, 한번 만들어진 눈물길은 마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미안해요, 아저씨.”

미안해요.

지금 울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 걸까.

11 살 무렵의 어린 크림일까, 아니면 지금 당장 제 앞에 있는 크림인 걸까.

그가 누구여도 상관없었다.

그냥 누구든지 좋았다. 당장에 제 품에 끌어안고 그의 눈물이 강을 만들 수 없게 훼방을 놓고 싶었다.

그에 커넌이 성큼 다가가 크림을 품에 안으니, 평소 건조하기만 하던 그가 제 품에서 눅눅하게 젖어


들었다.

“그 질문이 너무 싫어요.”

사람을 왜 죽였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죽일 때는 어떤 기분이었는지.

전부 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늘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으니, 굳이 물어서 들추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크림이 슬며시 커넌을 밀어냈다.

그에 커넌이 힘없이 밀려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가 생기니, 고작 그것만으로 애달픈 마음이 배가 되는 것


같았다.

“…그냥,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탓을 하거나 뭐라고 하려던 게 아니라, 그저 알고 싶었어요.


크림이 누구를 죽였고, 왜 죽였고, 그런 게 궁금했던 것도 아니에요.

그냥. 그냥 내가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크림의 어디까지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 게 궁금했던 거예요.

커넌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크림의 손을 잡았다.

여전히 제 발밑의 유리에는 균열이 가득했고 그에 쉽사리 발을 떼지도, 그렇다고 언제 깨질지 모를 유리


위를 계속 지킬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제 자리를 찾은 것처럼 편안한 기분이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죽였어요.”

내가 살려고. 그 이후로도 계속 죽였어요.

전혀 모르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어제 길거리에서 마주친 사람을 죽이기도 했어요.

시간이 지나니까 그냥 아무 생각 없었어요.

이걸 해야지 내가 산다, 당장 죽이지 못하면 다음은 내가 될 수도 있다.

그냥 그것만 떠올리며 심부름을 했어요.

어느새 장난감 왕국을 그리지 않게 되고, 고작 100 불로는 그 어디서도 살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즈음엔, 사람 목숨이 돈처럼 보였어요.

저 사람을 죽이면 얼마, 저 사람을 다치게 하면 얼마.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다 보니까 내가 먹는 거, 입는 거, 사는 집과 타고 다니는 자동차까지 모두 다


그런 돈으로 산 거더라고요.

‘살려주세요.’

나는 누군가의 울부짖음을, 누군가의 목숨을, 누군가의 원망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구나.

그제야 실감이 났던 것 같아요.

크림이 커넌의 손을 마주 잡아 자신 쪽으로 세게 잡아당기니, 중심을 잃은 커넌이 그대로 크림을 향해


휘청였다.
그에 크림이 고개를 숙여, 가까이에 위치한 커넌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니까 감당할 수 있는 걸 물어요, 커넌.”

날 제대로 보지도 못할 거면서, 그런 걸 왜 물어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크림이 다시 커넌의 가슴을 밀쳤다.

그에 커넌의 몸이 두어 발자국 밀려나니, 크림이 그 모습을 보며 말갛게 웃어 보였다.

그의 멈추지 않던 눈물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인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28 탱고

“…모두 거짓이었나요?”

과일 가게 아저씨부터, 그의 헤벌쭉하니 웃는 모습, 그를 보기 위해 매일 그곳에 찾아간 것과 탐스런


사과를 욱여넣어 주던 그에 의해 흘린 눈물, 장난감 왕국과 건네받은 칼, 악당의 탈을 씌운 죄책감까지.

모두 거짓인가요? 커넌이 허탈감을 떨쳐내지 못한 채 물었다.

그의 멈추지 않던 눈물처럼 제 눈물도 함께 사라진 것 같았다.

지금까지 우리는 무엇을 한 걸까.

그저 마냥 서로의 시험에 걸려들어 서로 실망하고 서로 상처 입은 걸까, 아니면 자신의 일방적이었던


것일까.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
“결국 커넌이 원하던 대답을 들었으니, 모두에게 좋은 거 아니에요?”

아니면, 설마 진심을 듣고 싶었던 건가? 커넌이 그랬잖아요.

그냥 시험해본 거라고.

자신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궁금했다고.

나는 그런 커넌에게 대답을 했고, 커넌은 스스로 제 시험에 점수를 매겼고.

그럼 된 거 아닌가? 크림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고, 그럼 커넌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냥 그가 하는 말이 모두 맞는 척.

어정쩡한 표정으로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면 되었다.

제아무리 자신의 한심함에 넌더리가 나더라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면 모든 것이 괜찮았다.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고, 그 외의 방법은 아는 것이 없었다.

“커넌의 시험에 나를 동참시키려 하지 마요.”

거북하고 기분 나쁘니까.

크림이 손을 뻗어 커넌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툭 건드렸다.

굳이 고르고 골라 내뱉은 모진 말들과 달리 그 손길이 지나치게 다정하니, 고작 그 하나에 또다시 마음이


일렁였다.

그를 온전히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으나, 그렇지도 않았다.

무자비하며 솔직한 크림과 다정하지만 솔직하지 못한 크림. 둘 중 진짜는 누구일까, 아니 둘 다 거짓은


아닐까.

커넌은 끊임없이 의심해야 했다. 상대를 시험하고 있는 사람이 자신인지, 그인지.

“장난이에요, 커넌.”
놀랐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저 그의 다정함에 속고 싶었다.

코를 찡그리며 짓궂게 웃는 얼굴에 허무한 듯 잔뜩 풀어져, 그가 건드린 머리카락의 일렁임을 느끼고


싶었다.

그에게 상처받고 싶지 않았고, 고작 한걸음 앞에 위치한 낭떠러지로 자처해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에 커넌은 또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냥 그가 하는 말이 모두 맞는 척.

그렇게 아프고 힘든 것들을 애써 무시하며 삐걱이는 자신을 재촉하여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보다 슬슬 배고프죠?”

뭐라도 간단히 먹어야겠어요.

그럼 크림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돌렸고, 언제나 그렇듯 그가 버리고 간 커다란 공간 위엔 자신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그 지독한 고독을 홀로 끌어안아야 했다.

귓가에는 고독이 자신을 씹어 삼키는 정적이 울려 퍼졌고, 결국 그걸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아까 커넌이 깨기 전에 간단하게 리조또랑 머쉬룸 스프를 좀 만들어봤어요.”

괜찮다면 먹어요, 맛은 장담 못 하지만.

부엌으로 향하던 크림이 잠시 뒤를 돌아 커넌을 바라봤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못 봐줄 정도도 아니었다.

그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짓궂게 웃어 보일까, 아니면 그를 따라 표정을 굳힐까 잠시 고민했으나, 그


모든 고민이 무색하게도 자신을 마주한 때부터 이미 제 입은 웃고 있었다.

“밥 다 먹으면, 잠깐 같이 나갔다 올래요?”

“…어디를요?”

“그냥 밖이요.”
근처 패밀리 공원도 좋고, 쇼핑 센터에 가서 커넌 옷을 사는 것도 좋고, 영화관에 가서 이번에
개봉했다는 로맨스 영화를 봐도 좋고, 다 좋아요.

커넌과 함께라면.

그가 굳이 덧붙이지 않은 말이, 굳이 뇌리에 파고들어 깊숙이 박혀왔다.

그에 들리지도 않은 그 말이 온통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다음에는요?”

“뭐 하고 싶은 거 있어요?”

“크림이야말로, 저랑 뭐 하고 싶은 거 있어요?”

근처 패밀리 공원 말고, 쇼핑 센터에 가서 내 옷 사는 거 말고, 영화관에 가서 이번에 개봉했다는 로맨스


영화 보는 거 말고요.

그거 말고, 크림이 진짜로 하고 싶은 거요.

커넌이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을 포기하고 단숨에 크림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의 말대로 부엌에서는 은은한 머쉬룸 스프 냄새가 풍겼고, 곳곳에는 리조또 특유의 느끼함이 더해져
있었다.

거짓을 거짓처럼 하지 않고, 사실을 거짓처럼 하는 남자.

알아도 알아도 부족한 남자.

온전히 손에 쥐었다고 생각했으나 고작 손가락 하나도 잡을 수 없는 남자.

자꾸만 안달이 나는 기분이었다.

그가 탐나고 동시에 벅찼으며, 딱 한 번이라도 그를 오롯이 마주할 수 있다면 두 눈이 멀어도 좋을 것


같았다.

“내게 원하는 게 뭐예요?”


함께 죄책감을 나눠 가질 동료인가요? 아니면 뒤집어씌울 병신? 사랑을 착취할 수 있는 감정노동자?
제멋대로 굴어도 모든 걸 받아줄 누군가? 뭐라도 좋으니, 속 시원히 말해봐요.

크림이 진짜 원하는 것이 뭔지.

커넌이 크림과의 거리를 한껏 좁혀 바짝 따라붙으니, 크림이 그를 감정 없는 눈으로 바라봤다. 마치


시선으로 커넌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춤을 췄다.

그러다가 입을 열어 말을 내뱉으니, 비로소 그가 원하는 것이 그곳에 있었다.

“탱고요.”

“…….”

“나와 탱고를 함께 춰줄 사람.”

“…….”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내가 가진 죄책감은 온전히 내 몫이에요.”

괜찮단다, 꼬마야.

그렇게 말하던 아저씨의 목소리를 지울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뒤집어씌울 생각도, 커넌의 감정을 착취할 생각도, 제멋대로 굴 생각도 없어요. 그저,

크림이 하던 말을 잠시 멈추고 커넌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곤 잔뜩 몸을 움츠린 커넌의 양손을 가져가 제 손에 얽으니, 두 사람의 손이 어정쩡하게 마주해


있었다.

완전히 잡히지도 그렇다고 떨어져 있지도 않았다. 마치 두 사람의 관계처럼.

“나와 함께 춤을 춰줄 사람이 필요했죠.”

태양이 뜨겁게 세상을 비추는 시간에, 그를 만끽하는 사람들이 잔뜩 늘어선 광장 한가운데에서 춤을 추는


거예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우릴 향해 쏟아지고, 그에 한껏 취해 온 광장을 누비며 춤을 추다가 문득 서로 눈을
맞추면 해사하게 웃어도 보고.

그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보이지 않고, 그 무엇도 들리지 않으며, 마치 세상에 단둘만 남은 것처럼
오롯이 서로에게 의지하는 거예요. 오로지 우리 둘만을 위한 순간인 거죠.

크림이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두 눈을 지그시 감고는 제 손에 얹힌 커넌의 손을 힘주어 잡으니, 그 손을


마주 잡을지 놓을지 선택하는 것은 온전히 커넌의 몫이었다.

“이렇게.”

크림이 말과 동시에 한 손으로 커넌의 상체를 끌어당겼다.

그에 서로의 가슴이 맞닿을 것처럼 가까워졌으나, 그 무엇보다도 서로의 숨결이 가까이에 위치하니 커넌이
급히 숨을 들이켰다.

그러다가 크림이 스텝을 밟으며 몸을 움직이면, 그에게 못 이기는 척 어설프게 스텝을 밟았다.

크림이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커넌은 왼쪽으로, 다시 크림이 왼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커넌은
오른쪽으로. 마치 하나의 몸처럼 자유롭게 움직였다.

“아르헨티나 하층민 지역에서 처음 생겼는데, 원래 명칭은 ‘바일리 꼰 꼬르떼(baile con corte)


였어요.”

멈추지 않는 춤이라는 뜻이래요.

매일 오후 2 시, 새벽 5 시. 194 번 채널을 틀면 항상 그 시간엔 탱고 영상이 나왔어요.

흑백에 잡음까지 섞인 오래된 영상이었는데, 처음에는 남녀 둘이서 격정적으로 싸우는 줄 알았어요.

혹시 여자가 멋지게 이기지는 않을까, 무슨 이유로 남녀 둘이 싸우는 걸까.

그런 궁금증을 가지고 봤었죠.

주절주절 말을 잇던 크림이 잔뜩 신이 난 아이와도 같이 말갛게 웃어 보였다.

그에 당시의 어린 크림이 마치 눈앞에 위치한 것만 같으니, 작은 등을 동그랗게 말고선 호기심 어린


눈으로 TV 속 두 남녀를 바라보고 있었겠지.

괜히 가슴이 간질거리는 기분에 커넌이 저도 몰래 그의 손을 세게 맞잡았다.


“나는 춤은 늘 즐겁고, 우아하고, 밝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탱고를 추는 두 사람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 게… 뭐랄까, 하루하루 힘겹게 삶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모습과 비슷해 보였어요. 그게
아니라면 열심히 죽어가고 있는 모습 같은 거요.”

그리고, 그냥 그 이후부터 탱고가 좋더라고요.

크림의 악센트는 조금 강한 편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가 말하는 ‘탱고’라는 단어가 지독히도


매력적이게 들려왔다.

정말 즐겁다는 듯 얘기하던 그가 두 사람의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따라 하기라도 하면 커넌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흠뻑 빠지고 말았다.

“뭘 원하냐고 물었죠.”

커넌에게 뭘 원하냐고요.

크림이 제 가슴에서 커넌을 밀어내며, 온전히 시선을 맞추었다.

그에 두 눈은 당장에라도 타버릴 것처럼 뜨거웠으나, 홀연히 남은 가슴은 차게 식어만 갔다.

그 공허함을 뜨거운 태양이 채우니, 어느새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태양이 자리해 있었다.

곧 있으면 그 뜨거움에 커넌의 머리는 더욱더 붉게 무르익을 것이고, 어쩌면 크림 역시 그럴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아무것도.”

커넌은 그 동질감에 심장이 벅찼는데, 크림은 그런 자신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며 선을 그었다.
그럼에도 그가 밉거나 싫지 않으니, 달리 보면 자신의 잘못 같기도 했다.

이제는 이런 제 감정이 옳은 건지, 잘못된 건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시선 한 번, 눈길 한 번에 일렁임은 크기를 키웠고, 나중에는 그런 자신이 예뻐 보였다.


당장 이 벅찬 마음을 그에게 전달하고 싶어 온몸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그냥… 내게도 온 거라고 믿었을 뿐이에요.”

나와 함께 광장 위를 맴돌며, 당장에 목이 꺾여 죽을 것처럼 함께 춤을 춰줄 사람이요.

그에 크림이 박차를 가하기라도 하면, 누군가가 등을 떠민 것처럼 당장에 크림의 품에 제 한 몸을 던지고


싶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좋을 것 같았다.

그의 말처럼 함께 광장의 한가운데로 달려가 목이 꺾여 죽을 것처럼 춤을 추고, 그러다가 두 눈이


마주치면 서로의 영혼을 탐하듯 입을 맞추며 붉은 태양 빛에 물든 그를 마주하고 싶었다.

“크림이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그게 무엇이든 좋을 것 같았다.

마치 보니 앤 클라이드(Bonnie and Clyde)처럼 함께, 아니 어쩌면 애수(Waterloo bridge)의


마이라처럼 혼자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이든, 크림과 함께 나눈 추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29 승리자

깨어났나 봐.

아니라니까? 그치만 방금 눈썹이 꿈틀거렸는데? 아까도 그랬는데 안 일어났잖아. 조용히 해, 바보들아.

그러다가 깨어나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뭐야? 지금 깨우려던 거 아니었어? 맞아, 아니야. 맞아,
아니야!
수군거리는 소리에 커넌이 잠에서 깨어났다.

최대한 작게 실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는데, 수많은 형체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마치 UFO 에 납치되어 외계인들에게 둘러싸인 인간처럼 말이다.

그 묘한 괴리감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차라리 모르는 척 두 눈을 질끈 감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여기는 어디지? 꿈속인 걸까? 그 아이는 어디로 갔지? 잡지 못해서 도망친 걸까? 그를 증명하는 것처럼
왼쪽 팔목 부근부터 팔 전체가 시큰거렸다.

쇠창살을 팔로 내려치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미련한 짓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 아이를 잡을 수 있다면, 아주 찰나에 떠오른 생각은 끊임없이 커넌을 사로잡았다.

마치 그 아이가 모든 사건의 실마리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소란스럽던 공간이 한순간에 정적에 휩싸이니,

‘일어난 것 같은데?’

코앞에서 들려온 음성이 보다 더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것은 온기는 없었으나 기척은 있었고, 체취는 없었으나 불에 타고 난 것처럼 재를 남겼다.

그에 놀란 커넌이 본능적으로 움찔, 몸을 뒤척였다.

자신이 느끼기에도 움직임이 컸으니, 다른 것들이 모를 수가 없었다.

‘거봐, 일어났다니까?’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지독한 정적을 깨고 말을 내뱉자, 순식간에 끅끅거리는 웃음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그것은 점점 고조되어 나중에는 귀를 따갑게 괴롭혔으나, 커넌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감은 눈이 떠지지 않길 바라며 힘을 주는 것이 전부였다.

커넌, 눈 좀 떠봐. 왜 자꾸 모르는 척하는 거야?


웃음기 가득한 음성은 정면에서 방향을 바꾸어 귓가로 이동했고, 그를 따라 목소리가 입체처럼 번져나갔다.

마침내 귓가에 더운 숨이 닿는다고 생각된 순간, 강압적인 힘이 억지로 눈꺼풀을 위아래로 잡아당겼다.

헉.

커넌이 발작처럼 움찔거리던 몸을 다급하게 일으켜 세웠다.

급하게 들이마신 숨에 사레가 걸려, 연신 콜록거리기도 했다.

잠시 후 기침이 겨우 멈추자 바람 빠진 풍선처럼 온몸이 까라졌다.

그에 숨을 몰아쉬며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으나, 그 어떤 것도 제대로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아니, 그냥 자신이 덮어버린 것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또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울컥.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질타 어린 마음이 존재감을 키우려고 했다.

그리고 그때,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니 커넌이 잔뜩 긴장한 채로 고개를 돌렸다.

사실 더 이상 그 무엇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심경이었으나, 그저 본능에 지나지 않았다.

“…닥터 셰인?”

그런 커넌의 시선 끝에 닥터 셰인의 모습이 보이니, 커넌이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 내어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곤히 잠든 모양인지 침대에 기댄 그녀의 콧바람이 커넌의 손등을 간질였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커넌이 제가 덮고 있던 이불 끝을 끌어와 닥터 셰인의 어깨 위로 덮어주었다.

병원이라 실내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된다고는 해도, 어쩐지 닥터 셰인의 어깨가 춥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커넌은 몰랐다.

정작 온기를 빼앗긴 자신의 어깨가 얼마나 추웠는지 말이다.


“…다 꿈이었다.”

다 꿈이었어.

커넌이 양쪽 팔로 제 다리를 끌어안고는 잠시간 얼굴을 묻었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은데, 그게 잘되지 않았다. 마치 두 다리와 두 팔이 잘려나가고, 오로지 몸통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바다에 빠지면 그대로 잠길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영영 도망칠 수 있을 텐데.

“거짓말.”

거짓말쟁이. 위선자. 넌 다시 살아나려고 발악을 할 거야.

잘리지 않은 두 팔과 두 다리를 열심히 저어서 어떻게 해서든 물 위로 올라올 테고, 가쁜 숨을 뱉어내며


토악질을 하겠지.

만약 정말로 두 팔과 두 다리가 잘렸다 하더라도 온몸을 뒤흔들어서라도 살려고 발버둥 칠 거야.

‘거짓말쟁이. 위선자.’

진짜 커넌은 어디에 있어? 왜 고작 너 같은 거랑 커넌이 뒤바뀐 거야.

진짜 커넌을 돌려줘. 크림이 마음을 준 사람은 진짜 커넌이지, 고작 너 같은 위선자가 아니라고.

‘아니야. 내가 진짜 커넌이야. 아이와의 싸움에서 내가 이겼고, 나는 증명했어.’


몸이 열두 조각으로 나뉜 것처럼 온통 시끄러웠다.

커넌이 그를 잠재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창문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모든 신체가 병실 안에 갇혀 있었고 밖으로 나간 것은 고작 손끝 정도였으나, 고작 그 손끝으로


모든 신경이 몰린 것만 같았다.

그에 미지근한 햇살이 뜨겁게 커넌을 꿰뚫었고, 커넌이 주먹을 쥐어 그 들끓는 감각을 손안에 가두었다.
실제로 햇살을 가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들끓음이 가라앉질 않았다.

예전에 학교에서 괜한 트집을 거는 선생님께 손바닥을 맞았을 때처럼.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엄마를 말리며 생존본능처럼 그녀의 손을 감쌌을 때처럼.

아서에게 맞은 뺨을 감싸고 등신처럼 눈물만 흘렸을 때처럼.

햇살이 쨍하게 내리쬐는 광장에서 크림의 손을 맞잡고 처음으로 탱고를 췄던 그 날처럼 말이다.

“…거봐, 내가 진짜지.”

커넌이 시선을 내려 제 주먹을 바라봤다.

좀 전처럼 태양의 들끓음은 그대로였고, 이대로 손바닥이 몽땅 타버려도 좋을 것 같았다.

흔적은 짙을수록 더 많은 것을, 깊이 상기시키니까.

**

“커넌, 뭐 해요?”

크림이 신발장 앞에 서서 제 손을 내려다보는 커넌을 불러세웠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었는지, 제 부름에 퍼뜩 놀란 커넌이 재빠르게 눈을 맞춰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커넌이 대답과 함께 다급하게 제 낡은 운동화에 발을 꿰었다.

형광등 빛에 반사된 크림의 구두는 케첩을 흘려도 그대로 미끄러질 것처럼 매끄럽게 닦여 반짝이고
있었는데, 제 낡은 운동화는 마치 바닥에 붙은 것처럼 도무지 움직이질 않았다.

크림의 구두는 지금 당장 무도회장에서 춤을 춰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으나, 자신의 운동화는


길고양이조차 거들떠보지 않을 정도로 더러웠다.

이러나저러나 여러모로 자신과는 다른 모양새에 기가 죽으니, 그토록 원하고 기다렸던 바깥 외출이 마냥


반갑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게 아니면 벌써 어딘가에 억압되어 묶여 있는 것을 더 원하게 된 것은 아닐까?

커넌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거실, 더 정확하게는 테이블 위에 놓인 목줄을 바라봤다.

만약 저걸 다시 제 목에 채운다면 이 불안감을 떨칠 수 있는 걸까.

커넌이 잠시 고민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두 눈을 감아버렸다.

“가요.”

커넌이 대답과 동시에 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크림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커넌의 팔목을 잡아 이끌었다.

우리 정말로 나가요? 그런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은 여전히 가슴 언저리에 남아 있었고, 혹시 이게 자신이 일으킨


망상일지도 모른다는 믿음도 있었다.

하지만 크림에게 잡힌 팔목 부근은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웠고, 오랜만에 신은 신발의 감촉은 지독히도
낯설었다.

“다행히 오늘 날씨가 좋더라고요.”


아까 커넌이 잘 때, 슬쩍 봤어요.

크림이 약속을 어기고 주머니 속의 물건을 몰래 들여다본 아이와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는 얼마나 귀엽게 다가오는지 아마 그는 평생 모를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말이다. 그에 커넌이 조금 싱겁게 미소를 지었다.

“저번에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눈이 시리도록 하얀 백금발의 머리카락과 그림자에 숨은 것처럼 까만 피부.

‘그렇게 가기 싫다면 오늘은 나랑 갈래요?’ 푸른 눈을 빛내며, 낯간지러운 말을 서슴없이 건네는 남자.

‘난 태어나기 전부터 축하받지 못한 존재예요.’ 덧붙여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남자.

내가 정말 당신을 거절할 수 있었을까요? 만약에. 아주 만약에, 당신과 평범하게 만났다면 어땠을까요?


그 어떤 협박도 두려움도 없고, 그저 우리 둘이 우연한 기회로 만나서 촛불 하나로 분위기가 무르익고,
속에 숨겨두었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며 소소한 위로를 주고받는 그런 관계였다면.

“어떤 생각이요?”

그런 별거 아닌 관계였다면 어땠을까.

그럼 이토록 아쉽지 않고,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았을까.

크림, 나는 오늘도 나 혼자 제멋대로 정해버린 우리의 결말에 이토록 아쉽고, 아프고, 슬퍼요.

비록 당신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래요. 나는 그래요.

당신이 이런 내 생각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반응을 하려나 궁금하면서도 굳이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진


않아요. 그러니까 이런 내 생각은,
“…비밀이에요.”

하핫.

잔뜩 기대를 했던 크림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곤 몸을 돌려 커넌과 마주하니, 굳이 무슨 생각인지 듣지 않아도 이미 들어버린 것만 같았다.

입술을 꾹 다문 그는 지독히도 슬퍼 보였고, 툭 건드리면 당장에라도 큰 눈물방울이 연신 꼬리에 꼬리를


물고 흘러내릴 것 같으니, 덕분에 크림 역시 입을 다물어야 했다.

“여기서 조금만 가면 큰 광장이 나오는데, 아마 사람들이 제법 있을 거예요.”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나요?”

그러다가 누군가가 당신이 ‘살인자’라는 걸 알게 되면 어쩌죠? 그런 걱정이 가장 먼저 고개를 들었다.

그에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이 목에 가득히 걸려 숨이 벅찬 기분이었으나, 그런 커넌을 아는지


모르는지 크림은 어쩐지 조금 신난 것처럼 보였다.

유난히도 발걸음이 가벼웠고,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피어 있었다.

“기왕이면 관객이 많은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오늘이 내 처음이자 마지막 무대예요, 커넌.

햇살을 담아 일렁이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예쁘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둘은 이미 광장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크림의 말처럼 광장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처럼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아니면 그가 관객을 모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오랜만에 수많은 사람들과 시선이 얽히니 조금 어지럼증이 일어날 뿐이었다.

그에 커넌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자, 그 모습을 빤히 내려다보던 크림이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당황했어요?”

생각보다 좀 많긴 하네요.

크림이 그렇게 말하며 커넌과 거리를 좁혔다.

그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커넌과 크림 쪽으로 향하니, 그 소리 없는 움직임이 따갑게 온몸을 찔러왔다.

“신경 쓰지 말아요.”

어차피 모르는 사람들이고, 그 아무도 커넌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니까요.

만약 너무 무섭다면 내 안으로 숨어요.

그렇게 말하며 크림이 한 손을 커넌의 등 뒤로 둘러 그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낮 동안 뜨겁게 타오르던 태양의 기세가 한풀 꺾여가는 만큼 크림의 품속은 지글지글 들끓고 있었고, 그
뜨거움에 놀란 커넌이 다급하게 그곳을 빠져나오려 했으나 크림은 놔주지 않았다.

“아까 내가 한 말, 기억해요?”

나와 함께 광장 위를 맴돌며, 당장에 목이 꺾여 죽을 것처럼 함께 춤을 춰줄 사람.

크림이 말을 잠시 멈추며, 나머지 손으로 커넌의 손을 마주 잡았다.

광장의 끝자락에 위치한 가게에서는 너무 무겁지 않은 음악이 흘러나왔고, 문득 크림이 말했던 두 남녀의
잔뜩 일그러진 표정이 떠올랐다.
그에 커넌이 뻣뻣하던 제 손에 힘을 주어 크림의 손을 마주 잡으니,

“나는 그게 커넌이라고 생각해요.”

이내 크림이 커넌의 귓가에 스치듯, 그러나 또렷하게 말을 가두었다.

더 이상 자신에게 벗어날 수 없도록. 벗어날 수 있음에도 벗어날 수 없도록 말이다.

#30 광장

“내가 살던 곳에도 작은 광장이 있었어요.”

너무 작아서 사실 광장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였지만, 그래도 나름 자랑이었죠.

원래는 바닥에 대리석 타일을 깔아서 굉장히 멋스러웠대요.

그런데 동네가 동네인지라, 사람들이 자꾸 타일을 떼어 가서 중고로 판매했다는 거예요.

몇 번 수리를 했었는데, 고쳐도 고쳐도 계속해서 떼어 가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고치지 않았대요.

덕분에 나는 회색빛 시멘트 바닥만 봤어요.

물론 대리석 타일이야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지만 그냥… 만약 대리석 타일이 깔려 있었다면 내 기억


속의 광장이 조금은 더 예쁘지 않았을까.

뭐 그런 아쉬움이 남아요.

자신이 알고 있는 광장의 모습을 더듬으며 크림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무 한 그루 없이 휑한 광장에는 온통 흙빛 얼굴을 한 사람들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그 위를 담배


냄새가 감싸 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린 크림에게는 한없이 과분한 곳이었다.

감히 대리석 타일은 바랄 수도 없었고, 회색빛 시멘트 바닥은 군데군데가 파인 탓에 걷기만 해도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게 해주었다.
그에 다른 사람들은 짜증스레 얼굴을 구기며 발끝에 걸린 돌덩이를 신경질적으로 차버렸으나, 크림은 춤을
추고 싶은 날이면 어김없이 바닥이 가장 많이 파인 곳을 찾았다.

“사실 별다른 건 기억이 안 나는데… 유난히도 지워지지 않는 사람은 있어요.”

매일같이 광장 끄트머리에서 노래를 크게 틀고선, 빵과 과일을 팔던 노인이었는데, 길이 울퉁불퉁하니까


매번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광장에 들어왔어요.

그럼에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광장에 모습을 비췄어요.

그리고 나는… 나는, 그게 참 좋았거든요? 나와 말동무가 되어주는 사람은 처음이기도 했고, 그의 주름진
목소리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거든요.

물론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그 노인을 못마땅해했을 거예요.

동네 사람들 중 90%가 밤낮이 바뀐 생활을 했는데 매일매일 시끄러운 노래를 틀었거든요.

하루는 껄렁껄렁한 갱단 부하들이 심심풀이로 노인의 보따리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빵과 과일을


짓밟았어요.

힘겹게 음악을 토해내던 라디오도 망가뜨렸죠.

힘없는 노인은 그저 바라보는 것밖에 못 했어요. 물론 나도요.

그런데 다음 날 노인이 다른 라디오를 가져와 노래를 트는 거예요.

그 모습에 오기가 생긴 갱단 부하들이 또 라디오를 망가뜨렸고, 다음 날 노인은 또 다른 라디오를 가져와


노래를 틀었죠.

그렇게 작은 투닥거림이 몇 번 반복됐어요.

갱단 부하들은 화를 참지 못했고, 노인은 여전히 평온했죠.

그리고 며칠 후에 갱단 부하들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광장의 허름한 의자에서 담배를 피웠어요. 그리고 그
이후로 노인의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죠.

“…더불어 내 말동무도 사라졌고요.”

크림이 콧바람을 일으키며 설핏 웃어 보였다.


그에 제멋대로 움직이는 제 발을 내려다보던 커넌이 고개를 들어 크림과 눈을 맞췄다.

제아무리 노력해도 크림의 우아한 춤 선을 따라 할 수 없었고, 아무리 크림의 눈을 바라봐도 그의 슬픔을


추슬러줄 수 없었다.

그저 크림의 춤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이었다.

그가 오른쪽 발을 앞으로 내밀면, 커넌은 왼쪽 발을 뒤로 빼었다.

그 모습이 마치 도망가려는 사람과 그를 붙잡는 사람의 처절한 몸부림처럼 보였다.

“그리고 며칠 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깨달았어요.”

그 허름한 노래가 없는 광장이 얼마나 고독하고 애달픈지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크림이 다시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더불어 그의 몸이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뒤로 크게 젖혀졌다.

그에 목이 완전히 젖혀져, 툭 불거진 울대뼈가 유난히도 돋보였다.

커넌이 그 모습에 넋을 놓고 크림을 바라보는데, 평소보다 조금 느리게 저물던 태양이 재촉하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크림을 비추었다.

아니, 그냥 비추는 것이 아니라 제 욕심껏 비추니, 크림의 머리카락이 노랗게, 그러다가 붉게, 다시
보랏빛으로 색을 바꿔 갔고, 커넌이 그 모든 것을 황홀하게 바라봤다.

“아름다워요.”

홀린 듯 말을 뱉고 나자, 크림의 슬픔에 제대로 공감하지 못한 자신을 눈치챘다.

그에 커넌이 민망한 듯 입술을 짓씹는데,

“커넌도요.”
크림이 말갛게 웃으며 커넌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잡아 왔다.

그럴 리가.

그를 바라보던 커넌이 뒤늦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어렵게 꺼낸 자신의 말동무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사소한 칭찬 때문이었는지 커넌은 괜스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에 눈을 크게 홉뜨자, 이글거리는 태양 빛이 눈을 찔러왔다. 그게 너무 눈부셔 눈앞이 뿌옇게


번져갔는데, 만약 이대로 영영 앞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던 크림의 모습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으니.

“춤은 언제 배웠어요?”

“음… 따로 배우지는 않았어요.”

“…그럼 왜 이렇게 잘 춰요?”

커넌의 질문에 크림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커넌의 한쪽 손을 높이 들어 그의 몸을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리니, 커넌이 놀란 듯이 두 눈을


크게 뜨고 크림을 바라봤다.

커넌은 좀 전의 자신이 얼마나 우아했는지 모를 것이다. 자신이 크림에게 짓는 마음과 그의 것이 다르지


않다는 것도 말이다.

“매일 봤거든요.”

보고, 또 보고. 그 후에 또 보고, 다시 보고. 오후 2 시 방송을 놓치면 굳이 새벽 5 시에 일어나서


비몽사몽하게 보고 또 봤어요.

그러다 보니까 어느새 춤을 다 외웠더라고요. 그렇게 음악 하나 없이 탱고를 췄어요.

매일, 매일.
잠에서 깨기 힘들 것 같으면 꼬박 밤을 새우기도 했었다.

고작 그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열심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무슨 숙제를 떠안은 것마냥 나름의 최선을 다했었다.

가상의 파트너를 만들어 허공을 끌어안고 스텝을 밟노라면, 뒤늦게 따라오는 허무함에 밟히지 않으려
열심히 발을 놀려야 했다.

“왜 노래 없이 춤을 췄어요?”

“…마땅하게 맞는 곡을 못 찾았거든요.”

일부러 동네의 모든 레코드 상점에 갔었어요.

주인장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해서 구석으로 몸을 숨기고, 모든 레코드판을 훑었죠.

사실 내가 무슨 노래를 찾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어요.

그 노인이 틀었던 낡고 오래된 노래요. 수많은 저항 끝에 결국 망가져, 음계 하나 남기지 못한 노래.

“그 노인은 어떤 노래를 틀었어요?”

“사실 모르겠더라고요. 테이프가 다 늘어나서 어떤 부분은 음이 밀리기도 했거든요.”

그럼에도 눈을 감고 노래를 음미하던 그 노인의 모습은 그린 듯이 선명해요.

광장에 뜨거운 태양이 뜨면 노인은 마치 해바라기와도 같은 표정을 지었어요.

광장에 비가 오는 날에는 가림막 하나 없는데, 노인만 젖지 않았죠.

하루는 말도 못 하게 눈이 펑펑 내렸는데, 추위에 지친 노인이 내게 그랬어요.

‘아이야, 혹시 시간이 남아 심심하거든. 이 노인의 말동무가 되어주지 않겠니?’


그에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노인의 작은 난로 앞에 앉아 몸을 녹였어요.

맹추위 탓에 광장에는 쥐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고, 덕분에 노인의 낡은 노랫소리가 더 잘 들려왔어요.

음악에 맞춰 툭툭, 테이블을 두드리던 노인의 손마디가 아직도 기억나요.

추위에 코끝은 잔뜩 붉어지고 손마디 마디가 시렸는데도 그게 너무 좋아서, 가만히 두 눈을 감고 노래를


들었어요.

말은 안 했지만, 나 그 노래 제법 좋아했거든요.

크림이 아쉬움을 담아 말을 마쳤다.

“그랬어요?”

그에 커넌이 어린아이를 달래듯 물어오면 크림은 그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빵도 맛있었어요. 마을에 아이는 나밖에 없었거든요. 덕분에 팔고 남은 빵은 모두 다 내 몫이었어요.”

“나름 예쁨 받고 있었네요?”

“…그럴지도요.”

크림이 어깨를 으쓱였다. 동작이 커서 그런지 그것조차 춤의 일부분 같았다.

그게 조금 우습기도 하고, 콩깍지 탓인지 멋져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고작 어깻짓 하나에 일렁이는 자신이 우스워서 커넌은 작게 웃어 보이기도 했다.

도심 한가운데에 위치한 광장에서 다른 사람의 시선에 자유롭고, 여유로운 남자였고, 그저 그와 맞닿아


있을 뿐인데 자신 역시 그렇게 느껴졌다.

마치 오르골 위를 활보하는 조각상처럼 말이다.

가끔은 한껏 풀어져 방금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흘러내렸고, 가끔은 힘껏 끌어당겨 팽팽한 신경전을 가졌다.

목줄은 크림의 손에 쥐어져 있었기에, 커넌은 계속해서 긴장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커넌이 재미있다는 듯 크림이 짙게 웃어 보였다.

괜히 한번 놀리고 싶은 마음에 스텝을 크게 밟아 거리를 벌리니, 그에 맞춰 커넌이 휘청거렸다.

“힘들어요?”

아니면 아직도 부끄러워요?

크림이 미소 띤 얼굴로 넌지시 묻자 잠시 망설이던 커넌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지나치게 많았고, 춤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스텝도 계속 꼬이고 비틀거리며 크림에게 이끌려 다니기 일쑤였다.

만약 크림이 유연하게 넘겨주지 않았다면 수차례 넘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이었다.

평소 늘 사무실에 박혀 있었기 때문인지, 사람이 많은 곳은 영 젬병이었다.

게다가 크림이 그를 콕 짚어 상기시켜주니, 덕분에 커넌의 얼굴이 곧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지금 커넌의 얼굴을 바늘로 콕 찌르면, 온몸의 피가 다 나올 것 같아요.”

그래도 이 광장의 바닥을 모두 적실 수는 없을 거예요.

그를 빤히 바라보던 크림이 짓궂은 웃음과 함께 조금 크게 스텝을 밟으니, 순식간에 두 사람의 거리가


벌어졌다.

그에 커넌이 아쉬운 듯 표정을 일그러뜨리면, 크림이 그를 세게 잡아당겨 다시 그 거리를 좁혔다.

마치 크림에게 조종당하는 것처럼 커넌의 몸이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저릿함이 끝나질 않았고, 그 생소함에 커넌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귀여워요, 커넌.”
난 당신의 그런 점이 좋아.

두 사람의 거리가 한껏 가까워진 찰나, 크림이 커넌의 귓가에 속삭였다.

크림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귓가에는 더운 숨이 불어왔다.

그 익숙한 낯섦에 깜짝 놀란 커넌이 슬쩍 뒤로 물러서자, 그를 바라보던 크림이 불만스레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커넌과 맞잡은 손을 잡아당기며 한 손을 크게 두르니, 어느새 크림의 가슴에 커넌의 등이


위치했다.

그 메마른 몸을 한껏 끌어안은 크림이 만족감에 슬쩍 두 눈을 감으며, 다시 한번 커넌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람이 많아서 부끄럽다면, 다 없애줄까요?”

“…네?”

크림의 질문에 놀란 커넌이 서둘러 크림을 마주 봤다.

덕분에 마치 한 몸인 것처럼 포개졌던 두 사람이 떨어지고, 크림에게 닿아 있던 모든 부분들이 차갑게


식어갔다.

커넌은 그것이 못내 아쉬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안심하게 되었다.

그 묘한 표정을 지켜보던 크림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훑으니, 모두 하나같이 크림과 커넌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자신의 청춘을 그리는 노인과 두 사람을 비웃고 경멸하는 청년, 무관심과 관심 사이에 서 있는 중년
여성과 교과서에서 배운 부도덕함을 실제로 보게 된 아이의 당혹스러움이 자리했다.

하나하나 눈을 맞추면 재빠르게 제 눈을 피하다가도, 금세 제자리로 돌아왔다. 우습고, 가증스럽고,


불편했으며, 동시에 지독히도 따가운 시선이었다.

<3 권에서 계속>

-의-
더 모먼트(The moment) 2

지은이 | Xant

표지 | 형향

펴낸곳 | 글빚는이야기꾼

등록 | 2017 년 6 월 1 일

[제 2017-000041 호]

ISBN | 979-11-972368-3-9

©2020, X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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