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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을 두른 레즈비언들은 어디로 갔는가 미국 레즈비언의 역사 속 1970-1980년대 페미니즘 성전쟁 (Feminist sex wars) 의 의미
가죽을 두른 레즈비언들은 어디로 갔는가 미국 레즈비언의 역사 속 1970-1980년대 페미니즘 성전쟁 (Feminist sex wars) 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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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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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여성학계에서 나온 국내외 대부분의 성전쟁 연구들은 이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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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 각축을 중점적으로 조명하면서 성전쟁을 그 배경이나 전개, 결과
에 있어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페미니즘의 논쟁사의 한 챕터로 위치짓는
다. 가령 이나영은 성전쟁 시기 갈등이 가장 폭발적으로 분출된 사건이었
던 바너드 학회가 “섹슈얼리티에 관한 페미니즘의 분석을 심화, 확장”시
켰다고 평가한다.2) 캐롤린 브론스타인은 성전쟁이 섹슈얼리티에 대한 페
미니즘의 담론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함으로써 미국 페미니즘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고, 이에 따라 제2물결 페미니즘의 방향전환에 핵심적인 역할
을 했다고 평가한다.3)
그러나 성전쟁을 페미니즘 진영 내의 섹슈얼리티 논쟁으로만 파악하는
것은 이 사건을 낳은 또 다른 핵심적인 조류를 간과한다. 성전쟁은 페미니
즘의 역사와 레즈비언의 역사라는 두 조류가 만나며 벌어진 일련의 사건
들이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를 거치며 페미니즘과 레즈비언의 제휴가
점점 더 가속화됨에 따라 여성운동은 레즈비언들이 사회적 삶을 영위하는
중요한 거처로 거듭났다. 성전쟁의 무대는 이러한 페미니즘과 레즈비언의
제휴 속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그리고 질문을 ‘레즈비언들은 이 사건을
어떻게 경험했는가’로 바꾸게 되면, 우리는 전혀 다른 역사를, 말하자면
배제와 검열, 그리고 투쟁의 역사를 목격하게 된다. 성전쟁 시기 S/M
행위와 같은 ‘문제적’이라고 기소된 섹슈얼리티에 대한 첨예한 논쟁은
논쟁에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 공동체 내에서 이 ‘문제적인
몸’을 지닌 개인들이 물리적으로 배제되는 사태를 동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배제되고, 축출되고, 거부당한 이들은 레즈비언들 중에서
2) 이나영, 「급진주의 페미니즘과 섹슈얼리티: 역사와 정치학의 이론화」, 경제와사회 82호, 비판사회학
회, 2009, 32쪽.
3) Bronstein, Carolyn, Battling Pornography: The American Feminist Anti-Pornography Movement, 1976-1986,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pp.306-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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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과정을 살펴본다(2장). 이어 S/M 레즈비언들에게 급격하게 적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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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변해가는 이론적, 정치적 토양을 살펴보고(3장), 그 속에서 배제당하
던 이들이 저항적 조직화를 시도하는 과정, 그리고 고조된 긴장이 최종적
으로 폭발하는 과정을 추적해볼 것이다(4장). 이 같은 접근을 통해 이론적
논의가 주를 이루는 성전쟁 연구사에 역사 속 주체들의 생동하는 얼굴을
돌려주면서, 성전쟁을 ‘문제적인 몸’들이 경험한 투쟁의 역사로 다시 써보
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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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항하는 힘으로 재구성했다.5) 둘째로, 1971년 레즈비언 페미니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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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에 호응하며 이전 시대까지 레즈비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던 ‘전미
여성협회(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 NOW)’가 레즈비언들이 경험
하는 억압 역시 정당한 페미니스트 의제라고 천명함으로써 보다 더 레즈
비언 친화적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여성운동의 이와 같은 입장 전환은
레즈비언들의 여성운동 합류에 불을 붙였다.
“페미니즘은 이론, 레즈비어니즘은 실천”과 같은 구호는 바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제창되었다. 그리고 레즈비언/레즈비어니즘과 페미니즘
의 이러한 이론적, 정치적 제휴는 페미니즘 공동체 내에서 레즈비언들의
입지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이는 많은 레즈비언들이 페미니즘 조직에서
수용과 지지를 경험하게 해준 요인이었다. 1973년에 쓰인 로빈 모건의
“레즈비어니즘과 페미니즘”은 여성운동에 속해있는 레즈비언으로서 당
시 여성운동과 레즈비언들의 조우를 그가 어떤 방식으로 경험하였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는 “레즈비언의 에너지가 여성운동의 존재로 인하
여 완전히 새로운 양상으로 거듭났”으며, 이러한 에너지가 “시위, 집회,
무도회, 영화, 연극 그룹, 위기지원센터 등에서 폭발”했다고 증언한다. 말
하자면 여성운동은 레즈비언들의 “둥지(breeding ground)”로 거듭났던 것
이다.6)
그러나 동시에, 레즈비언 페미니즘이 마련한 이론적 토대 위에서 이뤄
진 레즈비언과 페미니즘 조직의 활발한 만남은 이어질 성전쟁의 갈등의
불씨를 이미 내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불안한 동거’였다. 레즈비어니즘
이 남성 지배에 대한 저항의 원천으로 재구성됨에 따라, 레즈비언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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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페미니즘의 이상과 연동되었다. 이는 레즈비언들을 규범에 가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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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적 이상에 박제하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개인들을 부역자라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리
하여 페미니즘의 기대가 실제의 레즈비언들의 삶에서 틀어지는 순간, 갈
등은 폭발적으로 고조되었다.
3. 배제-반포르노 페미니즘의 전개
7) Califia(a), Pat, “Feminism and Sadomasochism”, Blasius, Mark & Phelan, Shane, ed., We Are Everywhere:
A Historical Sourcebook of Gay and Lesbian Politics, NY: Routledge, 1997, p.522.
8) 이나영(2009), 앞의 글, 26쪽.
9) Vance, Carol, ed., Pleasure and Danger: Exploring Female Sexuality, London: Pandora Press, 1984, p.434.
10) Comella, Lynn, “Revisiting the Feminist Sex Wars”, Feminist Studies, vol. 41, no. 2, 2015, p.451.
11) Bronstein(2011), op. cit.,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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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의 죄목은 “강간”으로부터 시작해서 “인종주의, 계급주의, 가정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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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관계 문제, 질 삽입성교 선호”로, 더 나아가 “파시즘”과 “제3세계에
대한 정치적 억압”으로까지 확장되었다.12) 이러한 S/M에 대한 페미니즘
의 수사학에 “탑[삽입자]과 바텀[피삽입자]의 사회적 관계는 남자와 여자,
흑인과 백인, 이성애자와 퀴어 사이의 사회적 관계와 유사하지” 않고,
“계급, 인종, 젠더는 S/M 역할 놀이를 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것도 아니고
상응하는 것도 아니”라는 S/M 레즈비언들의 목소리는 반영되지 않았
다.13) 대신, 레즈비언 S/M은 오직 남성 우위 사회에서 나타나는 성 불평등
을 은유하는 메타포로만 거론되었다.14)
이러한 상황은 페미니즘 공동체 내부에서 S/M 레즈비언들에 대한 대
대적인 축출로 이어졌다. 캐서린 데이비스는 S/M 레즈비언들이 “반페미
니스트로 낙인찍혔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여겨졌다”고 증언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부정당하고 내쫓겼고 이단자가 되었다.”15) 루빈에 따르
면 이러한 비난은 “S/M 레즈비언들의 권리에 의문을 제기하고, 정당한
페미니스트의 지위에서 우리를 제명하는 데 이용되었다.”16) 그 결과로
초래된 것은 S/M 레즈비언들의 사회적, 심리적 위축이었다. 이들은 한때
사회적 삶의 거처였던 여성공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에 두려
움을 갖게 되었고, 사회적으로 고립되었으며, 악의적인 낙인 속에서 “자기
의심과 자기혐오 속으로 던져졌다.”17)
12) Davis, Catherine, “Introduction: What We Fear We Try To Keep Contained”, Samois, ed., Coming to
Powers: Writings and Graphics on Lesbian S/M, Samois, 1981, p.8.
13) 게일 루빈(2015), 앞의 책, 272쪽.
14) Califia(b), Pat, “A Personal View of the History of the Lesbian S/M Community and Movement in San
Francisco”, Samois, ed., Coming to Powers: Writings and Graphics on Lesbian S/M, Samois, 1981, p.245.
15) Davis(1981), op. cit., p.8.
16) 게일 루빈(2015), 앞의 책, 413쪽.
17) Califia(b)(1981), op. cit., pp.282-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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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페미니즘 매거진과 레즈비언 매거진 등이 레즈비언 S/M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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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적 글을 실었고, 이러한 반 S/M적 기사에 대한 반박문을 게재할 것을
거부했다.19) 검열의 시도는 매거진뿐만 아니라 반포르노 페미니즘이 강력
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지역 여성 커뮤니티와 학계에서도 반복되었
다. 가령 지역 서점들은 S/M 저술을 매대에 올리는 것을 거부했으며,
S/M 레즈비언들은 학회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보이콧 시도와 마주해야
했다. 사모아 회원이던 루빈은 1979년을 전후로 하여 몇 년에 걸쳐 그
어떤 공적인 발표에도 초청받지 못했다고 증언한다.20)
그러나 1980년에 이르면 국면이 전환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발단
은 1980년 4월 18일 WAVPM이 개최한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사도마조히
즘에 대한 포럼(Forum on Sadomasochism in the Lesbian Community)”이었
다. 분열을 초래한 것은 포럼 진행자들의 S/M에 대한 과도한 악마화였다.
가령 포럼에서 수전 그리핀은 “가부장제 사회 안의 모두가 S/M이라는
질병에 걸려있지만, 사모아와 다른 S/M 행위를 실천에 옮기는 자들은
이 질병의 보다 극악한 형태”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적대적인 발언들은
포럼 내부의 분위기를 동요시켰고, 특히 포럼 내의 레즈비언들은 다른
레즈비언들이 질병으로 묘사된 데에 분노했다.21) 결과적으로 이 포럼은
반포르노 운동에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점점 힘을 얻는 결과를 초래했다.
1981년에는 이러한 경향이 가속화되었다. S/M 레즈비언에 대한 검열의
주된 전장이었던 페미니즘 매거진과 저술에서부터 반포르노 페미니즘의
지배적 권위가 흔들리는 듯한 징후가 포착된다. 가령 페미니즘 매거진
《히얼지스Heresies》가 발간한 섹슈얼리티 특별호는 성관계와 폭력, 포르
19) 위의 책, 267쪽.
20) 위의 책, 391쪽.
21) Califia(b)(1981), op. cit.,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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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그리고 S/M간의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한 것으로 만드는 반포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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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에 도전했다. 연달아 《소셜리스트 리뷰Socialist Review》, 《게이
커뮤니티 뉴스Gay Community News》, 《레즈비언 인사이더Lesbian Insider》등
의 매거진이 S/M 레즈비언에 우호적인 글을 실으며 이와 같은 경향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러한 국면의 전환은 S/M 레즈비언들에게 긍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저항이 조직화되어 가고, 대립이 더욱 첨예해지면서
주류 사회에서도, 페미니즘 진영, 게이/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도 S/M이
점차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시화는 오히려 주류사회의
S/M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기도 했으며, 반포르노 운동의 S/M에 대한
반대를 더욱 맹렬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 S/M 레즈비언
들은 “깨진 우정들, 문전박대의 경험들, 그리고 상심”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들었다고 칼리피아는 기록한다.22) 그리고 이렇게 서부전선에서 고조된
긴장은 1982년 4월, 뉴욕의 바너드 학회로 이어졌다.
바너드 학회는 9개월이 넘는 준비과정 끝에 800명이 넘는 여성이 참여
한 대규모의 행사였다. 그리고 학회를 둘러싸고 벌어진 열띤 논쟁과 그것
이 낳은 일종의 신화는 이 학회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자주 잊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사모아를 위시로 한 S/M 레즈비언들과
반포르노 페미니스트들의 담론적 대결 구도로 바너드 학회를 평가하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23) 그러나 바너드 학회에서 벌어진 갈등의 본질은
이 학회에 참여하는 개인들의 특정한 성적 행위를 비난하고, 이들에 대한
검열과 배제를 시도하는 것에 가까웠다.
뉴욕의 반포르노 페미니즘 단체였던 ‘포르노그래피에 반대하는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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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men Against Pornography, WAP)’은 사모아가 학회 배후에 존재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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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하면서 바너드 학회가 S/M 옹호 학회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학회
시작 전부터 조직적인 반대를 전개했고, 이러한 반대는 학회가 개최되는
내내 이어졌다. 학회 당일, 반대 시위자들은 “페미니즘 섹슈얼리티를 위하
여,” “S/M에 반대한다”라는 구호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전단을 배포했고,
전단의 핵심적인 주장은 바너드 학회가 S/M 옹호 학회이므로 반페미니즘
적이라는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사모아를 비방하는 내용, 그리고 S/M과
같은 반페미니즘적 행위를 행한다고 기소된 인물들을 ‘아웃팅’하는 ‘블랙
리스트’가 적혀있었다.24)
이같은 사모아에 대한 비방은, 사모아는 바너드 학회에 초대받은 바가
없었고, 갈 계획도 없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25) 이 대목에서 사모아는
샌프란시스코 기반의 단체였고, 바너드 학회는 뉴욕에서 열렸다는 점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바너드 학회가 S/M 옹호 학회라는 주장
은 학회에서 실제로 제기된 학술적 주장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캐롤 반스
가 작성한 학회 기획안에 따르면 바너드 학회는 “섹슈얼리티는 탐험과
쾌락, 그리고 행위성(agency)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규제와 억압,
그리고 위험이기도 하다는 점을 고려”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26)
이처럼 반대 시위가 학회에서 실제로 논의되었던 학술적 주장에 대한
반대가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이들이 사모아와 참여자 개개인에 대한
비방과 배제를 시도했다는 점은 바너드 학회에서 폭발적으로 분출된 갈등
의 성격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말하자면 바너드 학회는 서부전
선에서 고조되었던 반포르노 페미니즘 진영과 사모아 간의 갈등이 동부로
24) Vance, Carole S. ed., Pleasure and Danger: Exploring Female Sexuality, Bost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84, pp.433-434.
25) Califia(b)(1981), op. cit., p.280.
26) Vance(1984), op. cit., p.443.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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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1980년대로 접어들수록, 여성공간이 모든 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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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언, 모든 여성을 위한 공간이 될 수 없다는 점이 점점 더 명백해져갔다.
S/M 레즈비언들은 그러한 긴장을 가장 격렬하게 온 몸으로 받아낸 이들
이었다. 기실 성전쟁은 성소수자들이 처하는 이중적 폭력, 즉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폭력과 담론적 폭력 모두를 선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말하
자면 이 시기 페미니즘 공동체에서 레즈비언들을 페미니즘의 이상에 박제
하고 이들의 삶을 이론의 부속물로 취급함으로써 이들의 경험을 탈각시키
는 담론적 차원의 폭력이 있었고, 이는 공동체 내부에서 그들을 배제시키
는 물리적 폭력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배제는 칼리피아의 기록에서 드러
나듯이 사적인 삶에서는 “연인”과 “친구”를 잃는 결과로, 공적인 영역에
서는 “출판업자”와 “주거공간”, 그리고 “평판”을 잃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위기가 새로운 기회로 이어지는 역사는 성전쟁의 역사에서도
반복된다. 페미니즘 조직에서 추방당한 레즈비언들이 갈 곳을 잃은 채로
무력화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꾸린 커뮤니티는 “양성애자 여성, 게이
남성, 양성애자 남성, 그리고 다른 일탈적 레즈비언들”로 구성되었다.29)
그 결과 S/M 레즈비언들은 여성간의 자매애와 레즈비언 분리주의를 주장
하는 1970년대 페미니즘의 분리의 장벽을 최초로 가로지른 존재들이 되었
다.30) 성전쟁 시기에 설립된 사모아의 조직문화 역시 이러한 횡단을 보여
준다. 레즈비언 페미니즘 조직의 주류 경향과는 달리, 사모아는 양성애자
여성과 이성애자 여성을 포함하여 S/M을 수행하는 모든 여성들에게 조직
의 회원권을 인정했다. 이는 남성과 결부되는 성적 지향을 배척한 레즈비
언 분리주의 경향으로부터의 분명한 이탈이었다. 이처럼 저항의 움직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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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도처에서 트랜스젠더를 추방할 것을 요구하는 ‘트랜스젠더 배제적 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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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즘(TERF)’의 부상을 목격하고 있다. ‘문제적인 몸’들이 자신의 정당성
을 입증하기 위한, 그리고 여성공간 내에서의 시민권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으로 내몰리고 있는 작금의 사태는 성전쟁의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성전쟁의 역사가 주는 교훈이 있다면, 페미니즘 공동체는 이념과 운동의
모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평등을 꿈꾸는 약자들의 사회적 삶을 위한
공적 공간이기도 하다는 점, 그리고 이 공적 공간에서 이론적 논쟁은 논쟁
에 머물지 않고, 실질적으로 배제의 정치학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일
것이다. 어떤 ‘토론’에서, 누군가가 보다 특권적이고 안전한 위치에서 ‘발
언’할 수 있을 때, 그 반대편에는 자신의 존재를 걸고 ‘투쟁’해야 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투쟁으로서의 삶으로 내몰리는 ‘문제적인 몸’들을 보듬
을 수 있는 더 포괄적인 페미니즘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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