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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이라는 제목의 미국 드라마가 있다.

1883 년에 독일에서 건너온 100 여명


정도의 이민자 가족들이 텍사스 주에서 오레곤 주 포틀랜드까지 가는 여정을
그렸다. 마차가 있지만 어린아이와 노인이 타거나 짐을 옮기는데 사용된다. 나머지
사람들은 걸어서 간다. 길도 잘 모르고 강도떼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기에 가이드 겸
보호자로 남북전쟁 때 군인으로 복무했던 총잡이 2 명을 고용한다.

3,500km 의 거리를 걸어가야 한다. 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 중간에 강이라도 만나면


절망한다. 다리가 놓여있지 않기 때문이다. 강이 끊어지는 곳까지 가려면 너무 먼
거리를 우회해야 하므로 수심이 얕은 곳을 택해서 그냥 건너간다. 마차가 떠내려
가고, 사람도 떠내려 간다. 먼저 건너 간 사람들이 밧줄을 묶고 그 밧줄을 잡고
건너게 하는 시도도 해보지만 힘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그 방법도 소용없다.

폭풍을 만나면 마차는 회오리 바람에 날려 산산조각이 나서 부숴지고 마차 안에


두었던 식량과 생활비품도 강풍에 흩어져 분실된다.

추위도 엄청난 고통이 된다. 그래서 추위가 닥치기 전에 포틀랜드에 도착하기


위하여 길을 서두르지만 시간을 잡아먹는 일은 계속 생긴다.

독사에게 물린 사람의 다리는 썩어가고 있고 의사는 가까운 곳에 없다. 환자에게


위스키 한 병을 나발 불게 하여 만취상태에 빠뜨려 놓는다. 그리고 칼과 톱으로
근육을 자르고 뼈를 썰어서 다리를 잘라낸다. 아무리 곤죽이 되도록 취해 있어도
술이 마취제를 대신할 수 없으므로 환자는 극심한 고통에 결국 혼절한다.

법도, 법집행자도 없는 곳이다. 수시로 강도떼의 습격을 받아 재산과 목숨을


빼앗긴다. 여자는 겁탈도 당한다. 같은 이민자 중에서도 양아치가 있다. 이들은
남편을 잃은 가족에게서 식량을 빼앗는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포틀랜드에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다고 해도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개척되어 있지도 않은 황무지라는 점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곳이 기후가 괜찮고 농사짓기 좋은 땅이라는 막연한 소문만 듣고 그리로 가고
있다. 100 여명의 인원 중 원래의 목적지인 포틀랜드까지 도착하는 사람은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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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명이나 될까?

이 드라마의 주제는 아니겠지만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국가의 역할을 새삼


생각하게 됐다.

국가가 있다면 인프라 구축 사업을 하였을 것이다. 도로와 철도를 건설하고 긴 강이


있을 때는 일정한 간격으로 다리를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1883 년에도 미국의
곳곳에 철도가 놓여 있었지만 기차표 값이 너무 비싸서 가난한 사람들은 탈 엄두를
못 냈다.

국가가 제 기능을 했다면 강도떼를 소탕했을 것이고 약한 이민자 가족을 등쳐먹는


양아치를 감옥에 가두어서 혼냈을 것이다.

국가는 그런 일을 해야 한다. 그런 일을 하라고 국민들은 세금을 내고 있다.

재벌회장의 아들이 유흥주점에서 종업원들로부터 맞았다. 분노한 재벌회장은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유흥주점을 습격하여 종업원들에게 보복 폭행을 가하였다.
나중에 종업원들에게 돈을 주고 합의를 하였지만 재벌회장은 구속되었고 1 심에서
징역 1 년 6 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국가가 있을 때는 이처럼 사적인 복수가 금지된다. 그 재벌회장은 경호원들을


호출할 것이 아니라 수사기관에 내 아들이 폭행당했다고 신고를 하였어야 한다.
경찰은 범인을 색출하고, 검사는 필요한 경우에 보완수사를 하여 증거를 확실히
모은 다음에 기소를 하여야 한다. 법원은 범죄행위에 상응하는 형벌을 선고하여야
한다. 재판이 확정되면 법무부는 수형자를 교도소에 가두어서 판결 주문(主文)대로
형집행을 하여야 한다.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법치국가의 시스템이다.

형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대상은 국가, 사회, 개인이다. 국가의 존립을 위험하게


하거나 국가의 기능을 망가뜨리는 자, 사회의 기강을 해치고 사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자, 개인의 생명, 재산, 성적자유, 명예를 침해하는 자들을 처벌하기 위하여
형법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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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나 사회가 무너지면 개인도 같이 망한다. 법은 국가와 사회를 지키고, 공정한
경쟁을 하지 않고 반칙하는 자를 골라내서 가차없이 응징해야 한다. 그 응징이
일벌백계의 교훈이 될 수 있도록 엄혹(嚴酷)해야 한다.

개인에 대한 범죄는 ‘국가가 피해자를 대신해서 복수를 하는 것’이 형벌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재벌회장은 자기 아들이 눈을 폭행 당했다고 경호원들을 동원하여 가해자들을


일렬로 세운 후 눈 부위를 집중적으로 때렸다고 한다.

국가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피해자가 눈을 두들겨 맞아도, 성폭행을 당해도,


피땀 흘려 모은 돈을 사기 당해도 가해자들에 대한 형벌은 ‘교도소에 일정한 기간
동안 가두는 것’으로 통일되어 있다. 벌금형도 있고 사형도 있다. 그러나 벌금형은
가해자에게 대체로 고통이 되지 않는다. 사형은 1997 년 이후로 집행된 적이
없으므로 우리나라는 사실상 사형 폐지국가라고 볼 수 있다.

감옥을 일제시대 때는 형무소라고 불렀다. 해방 이후에는 교도소라고 부른다. 교도


(敎導)는 ‘가르쳐서 이끈다’는 뜻이다. 단지 사람을 가두어 놓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범죄인을 교화하고, 기술을 가르쳐서 사회에 복귀시키겠다는 좋은 의도다.

과연 교도소는 교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을까? 아니, 교화가 가능하기는


할까? 교도소에 오래 있으면 악한 사람이 착한 사람으로 바뀔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어린아이를 성폭행한 범인이 12 년을 교도소에서 복역하였는데도 출소 후 자기
동네에 거주하면 안된다고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에서일까?

교도소에서 교화되기는커녕 오히려 다른 범죄자들로부터 범죄수법을 배우는 일이


더 많으므로 교도소는 일명 ‘학교’라고 불리기도 한다.

교도소의 명칭을 감옥으로 다시 바꾸고, 형벌은 국가가 피해자를 대신해서 피해자가


당한만큼 복수를 해 주는 것이 본질이라고 인식하고, 그 인식에 맞추어서
범죄수사를 하고, 재판을 하고, 형집행을 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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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조선시대 때나 있었던 태형(笞刑)을 부활하자거나 교도소 내에서 교도관에
의한 가혹행위를 인정하자는 식의 야만적인 주장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교도소에서 범죄자를 착한 사람으로 교화시키겠다는 허위의식(虛僞意識)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교도소는 범죄자에게 고통을 줘야 하는 곳이다. 범죄자의
입장이 아니라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봐야 한다는 의미다.

학교폭력 같은 경우에도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가해학생에 대하여 걸핏하면 관대한


처분이 내려지고는 한다. 소년은 얼마든지 나중에 변할 수 있으므로 주홍글씨를
새기면 안된다는 그럴듯한 주장이 힘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폭력을 당한 피해학생과 피해학생의 부모 입장에서는 어떨까? 재벌회장처럼


돈과 권력이 있다면 깡패를 사서라도 가해학생에게 피해학생이 당한 고통, 그대로
안겨주고 싶지 않을까? 그런 증오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잘못된 일일까?

그 가해학생의 학적부에 그 가해학생의 학교폭력행위를 낱낱이 기록하고 보존하게


함으로써, 피해학생들이 성장하면서 또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겪게 될 트라우마
(trauma)에 상응하는 고통을 미래에도 가해학생에게 주는 것이 과연 반인권적,
시대착오적 발상일까?

싸움을 못하는 피해자가 양아치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는데 정의롭고 주먹이 센


사람이 나타나 자기 대신 그 양아치를 내가 맞은 만큼 두들겨 패주면 얼마나
시원할까.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사법시스템은 그렇게 피해자를 대신해서 복수해주고


있을까? 내 대답은 ‘아니다’이다.

첫째 수사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둘째 수사를 열심히, 제대로 하지 않거나


못한다. 셋째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기소하지 않는다. 수사기관(경찰, 검사)의
입장에서는, 기소하지 않고 사건을 뭉갰을 때의 리스크와 기소해서 무죄를 받았을
때의 리스크를 비교해 볼 때 후자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가 없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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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를 수집해서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이 수사를 하는 이유다. 넷째, 법원이
유죄판단을 한다고 하더라도 선고형은 대체로 솜방망이다. 이와같은 일들이 왜
생기고 있는지에 대하여는 다른 글에서 설명할 것이다.

2023. 1. 26. 자 신문에 무기수인 이씨에게 고등법원에서 사형선고를 하였다는


기사가 났다. 이모씨는 아직 서른살도 되지 않았지만 금을 거래하러 온 40 대
피해자를 둔기로 때려서 살인하고 금 100 돈을 빼앗아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이씨는 교도소에서 같은 방을 쓰던 40 대 수형자에게 지속적으로 가학행위를 하고


폭력을 행사하여 결국 죽이고 말았다. 살인죄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1
심에서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러나 2 심인 고등법원에서는 1 심 판결을 취소하고
사형을 선고하였다. 사형을 선고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씨가 강도살인죄를 저지른 지 불과 2 년 만에 살인 범행을 했다. 돈을


위해서라거나 원한 관계에 의해서가 아닌, 뚜렷한 이유도 없이 단순히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피해자를 괴롭혔다. 피해자의 부검 결과를 면밀히 살펴보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을지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다. 짧은 기간 내에 두 명을 살해했고
여러 차례 재소자에게 폭력을 휘두른 피의자에게 교화 가능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이에게 무기징역 이하의 형을 선고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고
본다.”

무기징역 이하의 형’에서 ‘이하’란 무기징역형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즉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자에게 또다시 무기징역형을 선고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다는
뜻이다.

이런 것이 제대로 된 판결이다. 이렇게 해야 피해자 가족은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는다. 1 심 판결대로라면, 즉 무기징역형을 복역하고 있는 자에게 무기징역형을
선고한다면, 이씨는 앞으로도 교도소 안에서 또 다시 사람을 죽을 때까지 때릴 수
있다. 이씨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이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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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 심에서 이씨에게 사형선고를 해도 사실은 무기징역을 선고한 것과
마찬가지다. 위에서도 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는 1997 년 이후로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에게 사형집행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형수는 무기수와 똑같다.

사형을 선고해야 하는 이유는 그런 잔인한 범행을 저지른 자에게 죽음의 고통을


겪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형선고를 해도 사형집행도 하지 않고 있지만 그 사형선고
조차도 2016 년 2 월에 총기를 난사하여 동료 군인들 여러 명을 죽인 임모씨 이후로
한 번도 없었다. 그 날 이후로는 위 이모씨가 처음이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살인 사건이 일어났는가. 살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피해자에게 준 악독한 범행을 저지른 자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 악랄한 범죄자들에게도 법원은 사형은 피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하였고 어쩌다


사형을 선고했어도 사형집행을 하지 않으니 사형수는 늙거나 병들어 죽을 때까지
교도소에서 국가예산으로 밥을 먹고 살고 있다. 피해자들의 원통함은 달랠 길이
없다.

사적복수를 금하고 국가에게 형벌권을 위임하였다면 국가는 그 형벌권을 제대로


행사하여야 한다. 피해자를 위로하는 유일한 방법은 가해자에게 상응하는 고통을
주는 것이고 국가는 그 일을 수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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