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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태국학회논총 28-2호 DOI:10.22473/kats.2021.28.2.

003

‘타이식 민주주의’의 혼합체제(hybrid


regime)적 특성에 대한 분석* 1)

2)

서경교**

I. 문제제기

‘타이식 민주주의(Thai-Style Democracy)’라는 용어는 태국에서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2014년 쿠데타 이후와 특히
2019년 3월 총선을 통해 총리로 재집권한 쁘라윳(Prayut) 정부와
관련된 논의에서 빈번하게 언급되는 단어가 되었다. 박은홍(2018:
214)은 2014년 쿠데타로 집권한 쁘라윳 군부정권을 1950년대 군부
쿠데타로 집권했던 싸릿(Sarit)의 ‘타이식 민주주의’ 모델의 부활이
라고 평가하였고, 2020년 한 해 쁘라윳 정부에 대하여 “의심받는
‘타이식 민주주의’”라는 설명(김홍구 외 2021: 81)이 제시되기도 하
였다.
컬란직(Kurlantzick 2015)에 의하면 “타이식 민주주의”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와 구별되는 “태국적 특성을 지닌 민주주의”를 의미
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그 명확한 의미가 제시되지는 않았
다. 태국 우본랏차타니대학 정치학과 교수인 티티폴(Titipol 2019)
은 보수적인 태국인 그룹들이 태국은 아직 “서구식” 민주주의나

* 본 연구는 2021년도 한국외국어대학교 교내 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작성


되었음
**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80 한국태국학회논총 28-2호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주장을 펴며 강조


하는 이른바 “타이식” 민주주의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보편적
인권을 부정한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타이식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는 민주화의 제3의 물결
이행과정에서 권위주의체제를 벗어나 자유민주주의체제로 향하는
정치체제들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와 분석에서 등장하는 “혼합체제
(hybrid regimes)”를 떠올리게 한다. “혼합체제”는 “민주적 요소와
권위주의적 요소가 함께 혼합되어 존재하는 체제”를 의미하는 것
으로 1960년대부터 사용되었기에 새로운 용어는 아니다(Diamond
2002: 23). 이러한 혼합적 특성을 띠는 정치체제들은 유사민주주의,
위임민주주의, 선거권위주의, 경쟁적 권위주의, 비자유민주주의 등
의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 용어들로 불려왔다. 타이식 민주주의 역
시 수식어가 붙은 민주주의로서 혼합체제의 한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본 연구의 목적은 현재 태국정치에 관한 논란의 중앙에 있는 타
이식 민주주의라는 개념의 시작과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이러한
타이식 민주주의의 전개과정에서 관찰되는 시기별 혼합체제적 특
성을 분석하고 평가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과 평가를 통하여
현재 태국정치가 당면한 타이식 민주주의에 관한 논쟁의 핵심을
이해함과 동시에 타이식 민주주의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고찰해보
고자 한다. 아울러 태국 사례연구를 통하여 혼합체제의 구체적인
유형으로서 타이식 민주주의에 대한 연구결과물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2장에서는 타이식 민주주
의와 혼합체제의 개념 및 기존논의들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이
어서 3장에서는 타이식 민주주의의 전개과정과 시기별 특성에 대
하여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는 앞선 논의들에 기초하여 타
이식 민주주의의 혼합체제적 특성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과 함께
그 함의를 제시하고자 한다.
‘타이식 민주주의’의 혼합체제(hybrid regime)적 특성에 대한 분석 81

II. 타이식 민주주의와 혼합체제: 개념과 논의

본 장에서는 연구의 핵심 개념이며 논의의 기초가 되는 타이식


민주주의와 혼합체제에 대한 개념 정의와 학자들의 기존 논의들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1. 타이식 민주주의(Thai-Style Democracy)

일반적으로 타이식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은 1950년대 싸릿 정권


의 등장과 함께라고 알려져 있다. 1957년과 1958년 두 차례의 친위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싸릿정부의 정치적 기반은 취약하였
다1). 이에 싸릿은 1932년 쿠데타를 주도하였던 피분을 포함한 해
외유학파 군부세력들과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하여 과거 절대군주
였던 라마 6세(1910-1925년 재위)가 구체화하였던 국가, 불교, 국왕
의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 “락타이(Lak Thai, Thai Principle)”를 태
국의 이상주의적인 국가질서로 내세웠다. 세 요소 중에서도 특히
불교와 국왕이라는 전통적 가치를 지지하며, 국왕이 불교의 수호
자가 되는 국가질서를 강조하였다. 기존 군부세력이 서구의 산물
인 의회민주주의에 기초한 입헌군주제 확립을 통해 권력의 정통성
을 얻으려 했던 반면, 해외 경험이 없으며 반의회주의적이었던 싸
릿은 태국의 전통적인 가치인 불교와 국왕을 강조함으로써 권력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하였다(김홍구 1998: 154-155; 서경교 2017: 65).
박은홍은 이에 대하여 타이식 민주주의는 싸릿이 집권한 후 군부

1) 1947년 쿠데타를 통해 3년간의 문민정부를 종식시키고 재등장한 피분정권하


에서 태국 왕실과 국왕의 지위는 극도로 위축되어 있었다. 1947년 쿠데타를
주도하였던 피분, 파오, 싸릿 사이의 갈등과 대립으로 인하여 싸릿이 1957년과
1958년 두 차례의 친위쿠데타를 통하여 피분과 파오를 제거한 후 권력을 장악
하였다(Samudavanija et al. 1985: 85-86)
82 한국태국학회논총 28-2호

와 왕실간에 체결한 “훈정동맹”의 지배 이데올로기 중 하나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타이식 민주주의에서는 민주주의보다 “타이다움
(쾀뺀타이)”가 더 중요하다고 지적하였다(박은홍 2018: 224-225).
유사한 맥락에서 휴이슨(Hewison)은 싸릿의 통치방식이 오늘날
논의되는 타이식 민주주의의 출발점이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처음
에 “타이식 정부(Thai-style government)”라고 불렸던 싸릿의 권위주
의적 통치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은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큭릿(Kukrit Pramoj)이었다고 설명한다. 큭릿은 싸릿의 타이식 정부
에 대하여 군부정권하에서 국가와 국민이 “좋은 사람(good man)”
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으며, 이러한 통치는 개인적 이익만을 추구
하는 나쁜 정치인들에 의한 통치와는 매우 다르다고 하였다. 따라
서 싸릿의 통치, 즉 타이식 정부는 이전에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할 대안이라는 주장이었다. 큭릿은 타이식 정
부가, 즉 좋은 지도자가 있는 군부통치가 태국의 전통적 정치제도
및 태국인들의 정서에 부합한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태국인들에게 적합하지 않으며, 그 증거로
서구식 선거에 의한 정치를 태국에 이식하려던 시도가 실패한 결
과로 1957년과 1958년의 쿠데타가 발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큭릿
에게는 나쁜 정치인들과 끔찍한 의회정치가 제거되고 사회적 평화
와 정치적 안정이 찾아온다면 쿠데타는 나쁜 것이 아니었다. 아울
러 큭릿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태국 사회는 국왕이 지휘하며 정
부나 관료들은 그 명령을 수행하는 유기적 조직체였다. 즉 국왕은
자녀와 같은 국민들을 자애롭고 올바르게 돌보는 아버지처럼 정부
가 국민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제공하도록 통제하고 관리하는 역
할을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국왕은 민주주의의 걸림돌이 아니라
타이식 정부와 타이식 민주주의의 가장 중심에 위치하며, 국민들
을 위하여 정부를 올바르게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도록 한다는 것
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정치지도자들을 이러한 역할을 하는 국왕
‘타이식 민주주의’의 혼합체제(hybrid regime)적 특성에 대한 분석 83

을 존경하고 옹호해야 한다는 것이 큭릿의 주장이었다. 다시 말하


면, 타이식 민주주의에서 국왕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며, 국왕은
국민들에게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그들을 돌볼 책임이
있으며, 국민들은 그러한 국왕을 존경하고 아끼는 관계로 분리될
수 없는 공존관계라고 주장하였다(Hewison 2009).

2. 혼합체제(Hybrid Regimes)

혼합체제는 민주주의체제와 권위주의체제의 서로 다른 특성이


혼재해 있는 정치체제를 일컫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체제의 필수
요소로는 소수의 권리를 보호하는 다수의 통치, 개인의 인권보장
과 집회 및 결사의 자유 보장, 자유로운 선거에 의한 평화적인 정
권교체, 군부에 대한 민간인 우위의 유지 등이 있다(Sartori 1987:
7; 서경교 2018: 84). 권위주의체제의 특성으로는 국민에게 책임을
지지 않는 정부, 대중적 활동이나 조직에 대한 정부의 통제, 소수
의 정부권력 독점 및 행정부의 입법부 통제 경향, 개인주의적이고
위계적인 정치권력 등이 포함된다(Sartori 1987: 185-190; Diamond
1989: 143; 서경교 2018: 84-85).
이와 같이 자유민주주의체제와 권위주의체제의 특성들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두 체제의 특성이 혼재되어 있는 정치체제가
급격히 증가한 것은 냉전체제가 종식되고 난 이후이다. 제3의 민
주화 물결 초기에는 이러한 혼합체제적 특성을 나타내는 사례들에
대하여 학자들은 민주화 이행이 진행되는 기간에 나타나는 일시적
인 현상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낙관적인 기대와는 달리
혼합체제적 특성이 지속되거나 권위주의체제 특성이 더 강화되는
여러 사례들이 나타나면서 혼합체제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하며
더욱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Levitsky
84 한국태국학회논총 28-2호

et al. 2002: 51).


아울러 더욱 많은 학자들이 여러 정당들 사이에 경쟁이 있고 또
선거 결과의 불확실성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정치체제를 민주주의
체제로 규정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경쟁이 존재하는 정치
체제이면서도 권위주의체제일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다이
야몬드(Diamond 2002: 23)는 새롭게 민주화 이행을 시작한 정치체
제들 중 많은 수가 민주적인 체제가 아니며, 더 이상 민주주의를
향해 움직이고 있지도 않다고 평가하였다.
레비츠키와 웨이는 경쟁적 권위주의체제의 증가에 관한 자신들
의 연구에서 민주적 요소와 권위주의적 요소를 동시에 가진 체제
들에 대하여 ‘혼합체제’라는 용어 이외에도 ‘준민주주의’, ‘선거민
주주의’, ‘유사민주주의’, ‘비자유민주주의’, ‘연성권위주의’, ‘선거
권위주의’, 그리고 프리덤하우스(Freedom House)의 ‘부분적으로 자
유로운’이라는 유형분류가 존재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런
혼합적 유형들에 대한 연구들이 갖고 있는 두 가지의 취약점이 있
다고 지적하였다. 첫째는 민주화 이행론이 갖는 편견에 영향을 받
았다는 점이다. “이행(transition)”이라는 개념에 함몰되어 혼합체제
들이 자유민주주의체제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고 단정하였기 때
문에 이 체제들을 부분적으로 민주적이거나 부족한 형태의 민주주
의로 설명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혼합체제는 민주주
의나 권위주의 등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정체되어 있다
고 지적하였다. 둘째는 ‘준민주주의’, ‘준권위주의’, ‘부분적으로 자
유로운’ 등이 중요하지 않은 기타의 유형으로 취급되었으며, 혼합
체제들간의 중요한 차이점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은 채로 얼버무리
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권위주의와 민주주
의 특성의 서로 다른 혼합들이 분명히 구별되는 역사적 근원과 함
께 경제적 성과, 인권, 민주주의 가능성 등에서 매우 다른 함의를
가질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Levitsky et al. 2002: 51-52).
‘타이식 민주주의’의 혼합체제(hybrid regime)적 특성에 대한 분석 85

자카리아(Zakaria 1997: 22-24)는 민주적으로 성립된 정치체제에


서 국민투표에 의해 선출된 지도자들이 일상적으로 자신들의 권력
에 대한 헌법적 제한을 무시하거나 국민의 기본권과 자유를 박탈
하는 현상들이 빈번하게 관찰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자카리
아는 서구에서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되어 ‘자유민주주
의’로 유지되고 있는 반면, 서구 이외의 지역에서는 이 둘이 분리
되어 민주주의는 왕성하게 꽃피고 있으나 자유주의는 그렇지 못하
다고 평가하였다.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를 ‘비자유민주주의
(illiberal democracy)’로 정의하며 자카리아는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는 민주주의로 향하는 과정에서 최종 종착점이 아니라 여러 가능
한 민주주의들 중의 하나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타이식 민주주의와 혼합체제에 대한 논의들
을 정리해보면 타이식 민주주의는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와는 분명
히 구별되는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부분적으로는
정당과 선거 등의 민주적인 요소들이 존재하는 정치체제이다. 따
라서 다음 장에서는 타이식 민주주의의 전개과정에서 관찰되는 혼
합체제적 특성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III. 타이식 민주주의의 혼합체제적 특성

본 장에서는 앞서 살펴본 타이식 민주주의가 어떤 전개과정을


거쳐 진행되어 왔으며, 그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혼합체제
적 특성들이 나타났는지 시기별로2) 살펴보겠다.

2) 시기별 구분은 태국정치의 중요한 사건들을 기준으로 연구자가 나누었음을


밝힌다.
86 한국태국학회논총 28-2호

1. 군부-국왕 동맹과 타이식 민주주의(1957-1973)

1932년과 1947년 쿠데타의 주도자인 피분은 유럽 유학을 통한


절대군주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소유자로 쿠데타 이후에 국왕
과 왕실의 영향력을 경계하여 국왕의 정치적 역할을 허용하지 않
았다. 그 결과 국왕은 피분 군부정권하에서 아무런 실권이 없는 유
명무실한 존재에 불과하였다(김홍구 1996: 171; 서경교 2012:
12-13). 3년간의 민간정부 후 1947년 쿠데타3)로 재집권한 군부는
1951년 이후로 경제영역에까지 관여하며 군부가 직접 운영하는 기
업을 설립하고 사업을 주도하면서 경제분야에서의 주도권과 영향
력까지 확보하였다. 이 과정에서 피분과 함께 1947년 쿠데타를 주
도하였던 싸릿과 파오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싸릿이 1957년 친위쿠데타를 통해 피분과 파오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Samudavanija et al. 1985: 85-86).
친위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싸릿정부는 선거없이 임시헌법을
공포한 후 강력한 권위주의 통치를 실시하였다. 따라서 해외 경험
이 없는 국내파들로 국왕에 대한 존경심을 지니고 있던 싸릿의 군
부세력은 자신들의 취약한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국
왕의 영향력을 통하여 권력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국왕
역시 1932년 쿠데타 이후 몰락한 왕실로 명맥만 유지하던 상황을
벗어나 왕실의 권위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
다. 그 결과 싸릿 정권하에서 군부의 권력과 국왕의 전통적인 영향
력이 결합된 태국적 특성의 군부권위주의체제가 확립되었다(Thak:
1979: 310-325; Morell et al. 1981: 4; 서경교 2018: 65). 이는 군부와
왕실 사이에 동맹관계가 형성되었음을 의미하며, 2006년 탁씬 정

3) 1947년 쿠데타와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김홍구(1996: 208-209), 서경교(2012:


5-6)를 참조하기 바람.
‘타이식 민주주의’의 혼합체제(hybrid regime)적 특성에 대한 분석 87

부를 붕괴시킨 군부 쿠데타 이후에 빈번한 논쟁의 대상인 ‘타이식


민주주의’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볼 수 있다. 싸릿 정부에서 시작
된 타이식 민주주의의 중요한 배경적 요인으로 태국의 전통적 가
치와 국왕의 영향력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겠다.
절대왕정체제의 불교국가였던 쑤코타이 왕국(1238-1438)에서 국
왕은 백성들이 행복하도록 정의롭게 통치하는 탐마라차의 존재로
추앙받았다. 뒤이어 아유타야 왕국(1350-1767)에서는 힌두교의 영
향으로 국왕을 신성시하는 데바라자(devaraja)의 개념이 더해졌다.
이로써 태국의 전통적 가치에서 국왕은 정치적 권위와 정통성을
지닌 존재일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 및 종교적 측면에서도 태국
사회의 가치관과 인식을 지배하는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김홍구
1998: 140-141; 이동윤 2004: 186; 서경교 2018: 63). 이러한 절대적
존경을 받던 국왕과 왕실이 입헌군주제를 표방하였던 1932년 쿠데
타 이후 겨우 명맥만 유지하던 상황에서 싸릿정부의 필요에 의해
군부와의 동맹관계를 형성함으로 그 지위와 영향력을 회복하기 시
작하였다. 군부와 왕실의 동맹관계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둘의 관
계는 최소한 대등하거나 군부가 우위에 있는 입장이었다고4) 할 수
있는 반면, 이후 태국정치에서 국왕과 왕실의 영향력은 점차로 증
대하였다. 특히 싸릿정부는 국왕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여 태국 군
부를 “국왕의 군대”라고 불렀으며, 군부는 국왕에게 층성을 맹세
하였다. 이와 같이 군부와의 동맹관계를 통하여 불교 수호자로서
위상을 회복하고 왕실의 영향력을 강화한 국왕은 이에 화답하여
공개적으로 싸릿정부를 옹호하고 경제 및 외교정책을 지지함으로
써 싸릿이 이끄는 군부권위주의체제의 정통성을 강화시켰다(김홍

4) 1932년 이후 1957년까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던 국왕과 왕실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싸릿정권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하여 왕실과의 동맹을 체결하였
지만 여전히 실질적인 권력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분석
이 가능하다.
88 한국태국학회논총 28-2호

구 1998: 154-157; 이동윤 2004: 195-196; 서경교 2018: 65-66). 이러


한 국왕의 영향력은 1963년 싸릿이 타계하고 타넘에게 권력이 이
양된 후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고 평가된다.
군부와 국왕 사이에 동맹이 맺어진 이 시기는 ‘타이식 민주주의’
가 도입되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단계로 평가된다. 출발점에서
본 타이식 민주주의는 외형적으로는 군부가 주도한 권위주의체제
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락타이 사상에 근거하여 탐마라차인
국왕이 인정하는 ‘좋은 사람’에 의한 통치라는 이유로 이를 국민들
을 위한 정치, 즉 민주주의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와 같은 정치
체제를 서구식 민주주의와 구분되는 ‘타이식 민주주의’라는 인식
을 국민들에게 심어준 시기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푸미폰 국왕
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요약하면 이 시기 태국의 정치체제
는 명목상으로만 민주주의였을 뿐이며 실제로는 권위주의체제 성
격이 지배적인 혼합체제였다고 평가된다.

2. 왕실네트워크 주도의 타이식 민주주의(1973-2001)

앞서 설명한 1957년 이후 군부와 국왕 사이의 동맹관계로 강화


된 국왕의 영향력이 태국정치에서 명확하게 증명된 것은 1973년
10월 사태였다. 타넘정부의 군부통치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을 중심
으로 하는 시위대와 군부의 대치로 유혈사태까지 발생한 1973년
10월 상황에 국왕이 개입하여 타넘과 군부를 정치에서 물러나게
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957년 싸릿의 주도로 시작된 군부와 국
왕의 동맹관계가 이제는 완전히 국왕의 주도로 전환되었음을 의미
하였다. 그 결과 태국정치에서 두 번째의 문민정부(1973-1976)가
등장했지만, 이번에도 불과 3년만인 1976년 군부 쿠데타로 태국은
다시 군부정권으로 돌아갔다. 주목할 부분은 1973년 타넘과 군부
‘타이식 민주주의’의 혼합체제(hybrid regime)적 특성에 대한 분석 89

를 퇴진시켰던 푸미폰 국왕이 1976년에는 쿠데타를 승인하고, 왕


실 측근인 대법관 타닌을 수상에 임명함으로 쿠데타와 뒤이은 정
부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는 점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1980년 쿠데타 주도세력의 지지로 쁘렘이
총리직에 오른 후 국왕과 군부의 역학관계이다. 쁘렘에게 불만을
가진 군부가 그를 축출하기 위해 1981년과 1985년 두 차례 쿠데타
를 시도하였으나, 쁘렘의 편에 선 국왕의 승인을 얻지 못하여 두
번 모두 실패한 쿠데타가 되었다(김홍구 2010: 64-65; McCargo
2005: 506). 이러한 상황을 통하여 태국정치에서 푸미폰 국왕은 군
부 쿠데타의 성공여부까지 결정할 수 있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
사함이 증명되었다. 이는 입헌군주제를 표방하는 어느 국가에서도
볼 수 없는 태국만의 특이한 현상으로 태국정치의 독특한 특성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국왕의 보호 아래 있었던 쁘렘의 집권기(1980-1988년)는 흔히 태
국의 준민주주의 시기로 알려져 있다. 군부의 두 차례 쿠데타 시도
에서도 살아남은 쁘렘은 집권기간 중 의회민주주의 기초를 놓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88년 총선을 통해 민간정부에게 평화
적으로 정권을 이양하고 물러났다. 국왕의 깊은 신임을 받았던 쁘
렘이 수상에서 물러난 후 왕의 자문기구인 추밀원(Privy Council)에
합류하고 곧이어 의장직을 맡으면서5) 국왕, 군부, 추밀원이 주도
하는 “왕실네트워크(network monarchy)”의 기능이 더욱 강화되었다.
왕실네트워크에 대해 맥카고(McCargo 2005: 499-519)는 태국정
치 이해에 필수적인 핵심 개념이라고 설명하였다. 국왕을 중심으
로 추밀원과 군부 등 세 요소가 연결되는 왕실네트워크는 1973년
부터 2001년까지 태국 정치를 주도한 대표적인 정치 네트워크라는
것이다. 왕실네트워크의 기본전제는 국가 정통성의 가장 중요한

5) 쁘렘은 이후 2019년 사망할 때까지 푸미폰 국왕에 이어 와찌라롱껀 국왕때까


지 추밀원 의장직을 수행하였다.
90 한국태국학회논총 28-2호

근원은 국왕이며, 국가적 위기사태에 직면했을 때 최종 결정권도


국왕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네트워크에서 중요한 정치적 사
안에 관한 국왕의 의중은 추밀원과 군부를 통해 태국정치에 반영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으며 표면
적으로는 의회 등의 정치제도를 통하여 진행되기 때문에 만약 그
러한 결정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국왕이나 왕실네트워크가 책임을
지는 일은 없다고 맥카고는 지적하였다. 즉 국왕을 중심으로 형성
된 왕실네트워크는 태국정치의 또 다른 특성으로 국왕의 정치적
권위와 영향력을 가능하게 하는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1988년 출범한 민간정부는 3년 후인 1991년 군부 쿠데타에 의해
붕괴되었고, 국왕은 쿠데타를 승인하였다. 쿠데타를 주도한 군부
가 총선 후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처음의 약속과는 달리 쿠데타를
이끈 쑤찐다 장군이 총리직에 오르자 방콕에서 군부정권에 반대하
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다. 군부가 시위대
에 무력으로 대응하면서 유혈사태가 발생하여 결국 1992년 5월의
위기사태로 귀결되었다(Neher 1992: 598-599; Bunbongkarn 1993:
218-220). 군부와 시위대 사이의 팽팽한 위기 상황에 푸미폰 국왕
이 직접 개입하여 시위대의 요구대로 군부를 퇴진시킴으로 위기사
태를 해결하였다. 이로써 태국정치에서 국왕의 강력한 정치적 영
향력이 재증명되었다6).
1992년 5월의 위기 사태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 편에 선
푸미폰 국왕의 개입으로 해결된 이후 태국의 민주화 이행은 순탄
하게 진행되었다. 위기 사태 직후 국왕이 임명한 과도정부가 1992
년 9월 총선을 실시하여 민간정부에게 권력을 이양하였다. 이후
태국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헌법으로 평가되었고 “국민의 헌법”이

6) 푸미폰 국왕의 재위 기간 중 가장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사건으로


1973년과 1992년 군부와 민주화 요구 시위대 사이의 충돌에 개입하여 두 번
다 군부 지도자를 정치에서 퇴진하도록 한 것이었다.
‘타이식 민주주의’의 혼합체제(hybrid regime)적 특성에 대한 분석 91

라 불린 1997년 헌법이 제정되었다. 1997년 헌법은 태국 민주주의


의 가장 큰 문제는 선거로 선출된 부패한 정치인이라는 인식을 공
유하는 시민운동 세력과 국왕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연합하여 만들
어낸 결과물이었다(Winichakul 2008: 29-30). 국왕의 개입으로 군부
가 퇴진하였고, 총선 결과 민간정부가 출범하였고, 새로운 민주적
헌법이 제정된 1997년 이후 태국에서는 더 이상 군부의 직접적인
정치개입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요약하면,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왕실네트워크가 태국정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1973-2001년은 혼합체제적 특성이 두드러
지게 나타난 시기였다. 먼저 국왕의 개입으로 군부가 정치에서 퇴
진하고 민간정부가 등장한 1973-1976년 기간, 1980년대 쁘렘 정부
하의 준민주주의 시기와 이어진 민간정부(1988-1991년) 시기, 그리
고 1992년 민주화 이행 이후 2001년 총선 실시까지는 제도적, 절차
적 측면의 민주화 이행이 순탄하게 진행되는 것으로 보였다. 반면
에 1976년과 1991년 쿠데타의 성공과 이후 군부세력의 정치적 영
향력이 확대된 시기에는 권위주의적 특성이 여전히 강력하게 나타
났다. 즉 국왕의 결정에 따라 민주적 체제가 성립되어 진행되기도
하였고, 반대로 민주적 체제를 붕괴시킨 쿠데타가 승인되고 권위
주의체제가 재등장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국왕의 승인 여부가
권력의 정통성을 결정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국왕은 명실상부한 태
국정치의 최고권력으로 자리잡은 반면, 태국정치의 혼합체제적 특
성은 더욱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졌다고 평가된다.

3. 탁씬의 등장과 ‘선거권위주의’(2001-2006)

1997년 헌법이 역점을 둔 것은 정치의 투명성과 책임성, 그리고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정부였다. 그러한 이유로 새 헌법은 상하원
92 한국태국학회논총 28-2호

모두를 직선제 선출로 바꾸었고, 행정부의 권한을 강화하였으며,


군소정당의 난립을 방지하고자 소수의 거대정당들이 형성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Pongsudhirak 2008: 141). 그 결과 2001
년 총선에서 신생 정당인 탁씬의 타이락타이당이 하원의석 과반에
가까운 승리를 거두었다.
경찰 간부 출신으로 이동통신사업으로 성공한 재력가인 탁씬은
사업가로서의 수완을 발휘하여 총선에서 기업경영 홍보 및 마켓팅
전략을 활용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30바트 의료보험과 농가부채
탕감 정책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빈민층과 농촌지역 유권자들에
게 효과적으로 다가갔다. 태국 정치사에서 신생정당인 타이락타이
당이 하원 500석 중 248석을 차지한 성과는 놀라운 것이었다7)(서
경교 2012: 20).
서민과 빈곤층을 위한 소득재분배 정책과 경제적 도약을 약속한
탁씬은 집권 후 총선에서의 공약을 착실히 이행함으로 자신의 정
치적 기반을 탄탄히 하였다. 새로운 태국을 건설하겠다는 슬로건
하에 강력한 리더십을 통하여 행정업무의 효율성을 높이는 관료개
혁을 실행하였고 경제분야 개혁을 통하여 경제성장도 이루었다.
농가부채 탕감과 저리융자 정책 등으로 농촌수입이 연 20%씩 증
가하였고. 저소득층을 위한 무상교육과 무상 의료서비스를 실시하
여 빈곤해소와 절대빈곤층의 감소 효과를 가져왔다(이병도 2009:
3). 이와 같이 탁씬의 강력한 리더십하에서 정치적 안정과 함께 경
제적 성과를 이룸으로써 농민과 빈곤계층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
고, 해외투자자들에게도 매력적인 투자처로 인정받는 성과를 거두
었다(Pongsudhirak 2008: 142-151; 서경교 2010: 82-83).
그러나 이러한 성과 이면에는 탁씬정부의 또 다른 특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2001년 집권 직후 탁씬은 언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함

7) 이러한 선거결과는 1997년 헌법이 의도하였던 군소정당의 난립을 방치하고자


하였던 새로운 선거체제의 고안이 성공적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타이식 민주주의’의 혼합체제(hybrid regime)적 특성에 대한 분석 93

으로 자유로운 언론 활동이 위축되었다(이동윤 2007: 183). 2003년


마약 및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탁씬 정부는 인권을 무시한 공권
력 동원으로 무고한 사상자들이 발생하였으며 불법적인 처형도 이
루어졌다. 특히 남부 무슬림 분리주의자들의 폭력사태 진압에서
군대를 동원한 무자비한 탄압정책으로 인해 국내외에서 지탄의 대
상이 되었으며, 푸미폰 국왕도 공개적인 우려를 표명하기에 이르
렀다. 그러나 탁씬은 인권침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국왕의 의견
을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Mutebi 2004: 78-80; 서경교 2012:
20-21). 탁씬은 또한 막대한 정치자금을 동원하여 야당과의 통폐합
을 추진하여 정당정치를 무력화시켰으며, 개인적 친분관계에 의한
인사로 비난받기도 하였다. 더욱이 탁씬은 국가와 기업은 유사한
조직이기에 관리방법도 비숫하다고 주장하며 국가를 책임지는 총
리로서의 위치와 역할을 기업을 운영하는 최고경영자처럼 수행하
였을 뿐 아니라 타이락타이당이 앞으로 20년간 계속 집권 가능하
다고 장담하였다(이동윤 2007: 182-183).
이와 같이 권력이 탁씬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민주적 절차를 통
한 권력이라는 겉모습과 다르게 권위주의적 통치행태를 보이는 것
에 대해 “탁씬화(Thanksinization)” 현상 또는 “민주적 권위주의”,
“선거권위주의”라는 평가가 제시되었다. 탁씬 집권 이후 야당과
학자, 언론인 등이 이러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
했지만 탁씬은 자신의 강력한 지지세력을 믿고 개의치 않았으며 4
년간의 임기를 다 마친 최초의 연립정부로 기록되었다. 탁씬의 권
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일부의 부정적인 평가와는 상반되게 2005년
총선에서 탁씬의 타이락타이당이 하원 의석의 3/4를 넘는 377석을
차지하여 태국 최초로 단일정당에 의한 정부가 성립되는 진기록을
세웠다.(Pongsudhirak 2003: 277-290; Panaspornprasit 2004: 257-266;
서경교 2012: 22-23).
그러나 타이락타이당과 탁씬의 압승으로 탁씬 반대세력들이 결
94 한국태국학회논총 28-2호

집하는 반작용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촉진시킨


요인들로는 2005년 총선 직후 불거진 최측근의 수뢰 혐의와 신공
항 건설과 관련된 뇌물 수수 의혹 등과 함께 탁씬 부인의 세금탈
루 의혹까지 있었다. 이로 인하여 부정부패로 얼룩진 정부라는 비
판과 함께 탁씬 권력의 정통성이 위협받는 상황까지 발생하였다.
방콕을 중심으로 남부 지역에서는 반탁씬 움직임과 함께 반탁씬
정서가 증가하였다(Case 2007: 633; 이병도 2009: 4). 그러한 상황에
서 2006년 1월 탁씬가족 소유 친(Shin)그룹의 주식 매각 관련 세금
탈루 혐의가 불거지면서 탁씬의 퇴진을 요구하는 국민민주주의연
대(PAD)가 결성되었고 일반대중들까지 반탁씬 대규모 시위에 참
여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에 탁씬은 의회를 해산하고 2006년
4월 총선을 실시하였고, 야당이 보이콧한 선거 결과는 또 다시 탁
씬의 압승이었다. 그러나 반탁씬 시위가 멈추지 않자 국왕은 선거
의 유효성 검토를 지시하였고, 사법부는 선거무효를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2006년 10월 총선을 재실시하기로 하였고, 탁씬은 관리
정부의 총리직을 유지하게 되었다(서경교 2010: 84-85).
탁씬이 집권한 기간(2001-2006) 태국정치의 특성은 민주화 이행
과정에서 빈번히 나타나는 전형적인 혼합체제적 양상을 띠었다.
즉 민주적 제도와 절차를 통해 집권한 정부가 권위주의적 통치행
태를 보이는 것이었다. 아울러 탁씬 정부에서 태국정치의 혼합체
제적 성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빈곤층과 농촌 유권자를 겨
냥한 정부정책들이 그들의 강력한 호응을 얻음으로 인해 탁씬의
권위주의적 통치가 더욱 힘을 얻어 강해지는 양상을 보였다는 점
이다. 반면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왕실네트워크의 입장에서는 탁
씬이 자신들의 권력기반과 이해관계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존재였
다. 즉 수십년간 왕실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태국 정치
과정에 탁씬과 타이락타이당의 존재는 예기치 못한 복병이었을 뿐
만 아니라, 나아가 국왕의 권위를 무시하고 왕실네트워크의 영향
‘타이식 민주주의’의 혼합체제(hybrid regime)적 특성에 대한 분석 95

력을 무력화 시키려는 시도를 서슴치 않는 위협적인 도발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전통적인 권위주의 세력과 선거로 등장한 민주적 정
치권력 사이의 갈등관계로 비쳐질 수 있었다. 그러나 탁씬 정부 자
체도 민주적인 외형과는 달리 실제로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권
위주의체제의 특성이 두드러진 혼합체제였다. 그러한 점에서 이
시기 태국정치는 기존의 타이식 민주주의와 선거권위주의라는 서
로 다른 혼합체제적 특성이 중첩되어 나타난 매우 복잡한 양상이
었다.

4. 군부의 재등장과 ‘타이식 민주주의’ 논쟁(2006-2021)

민주적 절차에 의한 선거결과로 집권하였지만 권위주의적 통치


행태로 비난받았던 탁씬 정부는 2006년 9월의 군사쿠데타로 붕괴
되었다8). 아이러니하게도 쿠데타는 탁씬 반대세력과 태국 민주주
의를 옹호하는 시위대들의 지지를 받았다9). 또한 국왕과 추밀원의
쿠데타 승인도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쿠데타의 원인으로 제시된
것은 2006년 2월 시작된 탁씬 반대세력과 탁씬 지지세력간의 폭력
적 충돌에 대한 우려, 탁씬 정부의 부패 혐의 및 왕실과 민주적 절
차에 대한 무시, 남부지역 사태를 해결하지 못한 무능함, 군 내부
분열조짐의 심화 등이었다(Ockey 2007: 136; 서경교 2012: 10-11).
권력을 장악한 군부는 의회를 해산하였고, 뒤이어 헌법재판소는
부정선거 연루를 이유로 타이락타이당을 해산하였다. 아울러 타이
락타이당 소속 주요 당료들의 정치활동을 5년간 금지하여 탁씬 세

8) 2006년의 쿠데타는 1992년 민주화 이행이 시작된 이후 14년간의 의회민주주


의를 무력화시킴으로 국내외적으로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9) 선거로 선출된 탁씬 정부를 붕괴시킨 군부 쿠데타가 태국 민주주의를 옹호하
는 시위대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은 태국에서 민주주의의 의미가 자유민
주주의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96 한국태국학회논총 28-2호

력을 제거하는 조치를 취하였다(Ockey 2008: 21).


탁씬 세력을 무력화하기 위한 또 다른 조치로는 2007년 헌법개
정의 내용을 들 수 있다. 행정부의 권력을 강화하였던 1997년 헌법
과는 반대로 2007년 헌법은 정당과 행정부의 권력을 축소하고 의
회 의원들의 권한을 강화하였다(Connors 2008: 484). 과거보다 민주
적으로 후퇴한 헌법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2007년 헌법은 국민
투표에서 60%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새 헌법에 기초해 2007년
12월 총선이 실시되었고, 결과는 친탁씬계 정당인 국민의힘당이
과반 의석에서 불과 7석 부족한 제1당이 되어 연립내각을 형성하
였다10)(Ockey, 2008: 21-24). 이러한 선거 결과는 탁씬세력을 정치
에서 몰아내고자 했던 2006년 쿠데타의 목표가 좌절된 것을 의미
하였다. 또한 헌법개정을 위한 국민투표에서는 쿠데타 지지세력의
힘이 우세한 것처럼 보였지만, 총선결과는 탁씬을 지지하는 유권
자가 여전히 다수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로 태국 정국은 친탁씬
정당을 중심으로 한 탁씬 지지세력과 왕실네트워크와 사법부를 중
심으로 한 탁씬 반대세력 사이의 팽팽한 긴장과 대립의 과정이 지
속되었다(이병도 2009: 14-15; Dalpino 2011: 155). 2011월 7월 실시
된 총선에서도 탁씬계의 프어타이당이 과반 이상의 의석을 획득하
여 잉락정부가 출범함으로서, 2001년 이후 실시된 다섯 차례의 선
거(2001년, 2005년-2회, 2007년, 2011년) 모두에서 탁씬계 정당이
승리하는 기록을 세웠다(서경교 2012: 25).
잉락정부에서도 탁씬 지지 대 반대 세력간의 갈등과 시위는 지
속되었다. 2013년 11월 두 세력간의 충돌이 정국혼란까지 야기한
결정적 이유는 잉락정부가 추진한 탁씬을 포함한 친탁씬계 정치인
들에 대한 포괄적 사면법과 상원의원 전원의 직선제 개헌안이었

10) 탁씬 정부를 붕괴시킨 쿠데타 세력이 주도한 2007년 헌법이 60% 득표로 통
과된 것과 헌법 개정 이후 실시된 총선에서는 다시 탁씬 세력이 승리한 상황
은 태국정치의 독특한 양면성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타이식 민주주의’의 혼합체제(hybrid regime)적 특성에 대한 분석 97

다11). 이러한 시도에 민주당과 시민단체 등 반탁씬 세력은 격렬히


반대하며 잉락총리 퇴진운동까지 벌였다. 2014년 3월에는 사법부
가 잉락총리의 권력남용 유죄판결을, 5월에는 헌법재판소가 총리
해임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혼란한 정국에 2014년 5월 군부가 질
서유지를 명분으로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이틀 뒤 쿠데타를 선언
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Prasirtsuk 2015: 202).
2014년 쿠데타를 주도한 쁘라윳을 총리로 한 군부정권은 쿠데타
직후 민심 수습을 위한 정책에 총력을 기울였다. 잉락정부가 지급
하지 못하고 밀려있던 농민에 대한 쌀 수매대금을 지급하였고, 서
민용 연료가격 상한제 및 동결, 생필품 가격 6개월간 동결, 농민들
의 주택자금 저리융자방안 등을 실행하였다. 또한 2015년까지 총
선을 실시해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약속하였다12)(Chachavalpongpun
2014: 170; 서경교 2015: 286). 이에 대해 박은홍(2018: 222)은 쁘라
윳 군사정부가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는 대가로 물질적 풍요를 제
공해주는 이른바 ‘성과 정당성(achievement legitimacy)’을 추구하였
다.”고 평가하며, 군부의 정책이 과거 자신들이 비난하였던 탁씬
및 잉락정부의 포퓰리즘과 유사하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군부의
정책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이후 가장 역점을 둔 부분이 민심
의 동향과 지지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이다. 탁씬의 통치
를 통하여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선거에서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 학습한 결과라고도 하겠다.
쁘라윳 군부정권에게 민심의 지지만큼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가

11) 상원 직선제 개헌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에도 잉락이 이를 무시하


고 밀어붙이려 하였다.
12) 그러나 총선은 계속 미루어져 2019년 3월에서야 실시되었다. 그 배경에는 총
선 실시를 위한 헌법개정이 계속 지연되어 2016년 8월에 국민투표를 통과하
였고, 이듬해 총선을 약속하였지만 10월에 푸미폰 국왕의 서거와 장례일정으
로 1년간 모든 정치일정이 중단됨으로 다시 미루어졌고, 장례 이후에도 또
연기되어 2019년에야 실시되었다.
98 한국태국학회논총 28-2호

헌법개정이었다. 2007년 헌법이 탁씬 세력의 제거에 성공하지 못


한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아 군부는 새로운 헌법개정에 심혈을 기
울였고 그 결과물이 2017년 헌법이다. 새 헌법은 군부의 정치개입
을 제도화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총리후보는 하원의원일 필요가
없으며, 군부가 임명하는 상원의원 250명이 직선제 하원의원 500
명과 함께 총리선출에 참여하도록 하여 군부 동의가 없이는 총리
가 될 수 없도록 하였다. 따라서 총선 이후 민정이양이 되더라도 5
년간 군부의 정치개입을 명문화함으로 군부의 권력유지를 위한 법
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기 때문에 완전한 민정이양이 불가능
한 구도였다(김홍구 외 2019: 135).
2011년 총선 이후 8년 만에 그리고 2014년 쿠데타 이후 여섯 차
례 연기된 끝에 실시된 2019년 3월의 총선은 군부가 의도했던 결
과로 나타났다. 군부가 주도한 팔랑쁘라차랏당이 득표수에서 1위
를 하여 116석(지역구 96석, 비례대표 19석)을 얻었고, 지역구 의석
수에서 1위를 한 탁씬계 프어타이당은 지역구만 136석을 차지하였
다. 신생 아나콧마이당13)이 80석을 획득한 반면 역사가 긴 민주당
은 53석 확보에 불과한 성적이었다(한유석 2020: 136). 의석수에서
는 프어타이당이 앞섰지만, 총득표수에서 앞선 군부주도의 팔랑쁘
라차랏당이 승리를 선언하며 연립내각을 구성하였고14), 6월 총리
선출에서 쁘라윳 군부정권 수장을 다시 총리로 선출하였다. 따라
서 총선 이후 태국은 겉모습은 민간정부가 출범한 것처럼 보이지
만, 실질적으로는 군부정권의 연장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김홍
구 외 2020: 75). 한유석은 2019년 총선의 특징을 다음 세 가지로

13) 2018년 3월에 창당한 신생 아나콧마이당은 군부주도로 제정된 2017년 헌법


의 개정 필요성, 군부독재 타도, 부패청산 등을 주장하며 2019년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다(한유석, 2020: 139).
14) 군부주도 정당이 팔랑쁘라차랏당의 승리 선언과 연립내각 정부 구성에는 중
도 성향의 민주당과 폼차이타이당의 선택이 결정적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김
홍구 외(2020: 79-80)를 참조하기 바람.
‘타이식 민주주의’의 혼합체제(hybrid regime)적 특성에 대한 분석 99

설명하였다. 팔랑쁘라차랏당 등 친군부 세력의 연정 구성과 군부


통치의 제도화, 프어타이당 등 친탁씬 세력의 패배, 그리고 신생
정당 아나콧마이당의 돌풍과 과거 거대 정당이었던 민주당의 참패
등이다(한유석 2020: 137-140).
총선 이후 태국 정국은 친군부 연립정부와 신생 아나콧마이당의
대립구도로 나타났다. 군부가 주도한 2017년 헌법 개정과 군부독재
반대를 주장하는 아나콧마이당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2020년 2월
정당법 위반을 이유로 정당 해산을 결정하였다. 표면적으로는 정당
법 위반이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쁘라윳 정부에 반기를 든 것에
대한 정부의 탄압으로 이해되었다. 아나콧마이당의 해산 결정 이후
특히 대학생 등 청년층을 중심으로 반정부 집회가 전국적으로 확산
되었다. 이러한 반정부 집회의 특징은 과거의 시위와 달리 사회관
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며 신속하게 집결 및 해산
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2014년 쿠데타 주도세
력인 군부가 계속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것에 반대하며 2017년 헌
법의 개정, 국회 해산과 총선 재실시 등을 요구하고 있다. 아울러
지금까지 태국에서 금기시되었던 왕실개혁까지 요구하고 있는 점
이 과거와 다른 점이다. 왕실개혁 요구와 관련해서는 푸미폰 전 국
왕과 비교하여 와찌라롱껀 현 국왕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평가와 함
께 집권세력인 군부가 왕권을 강화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기 때
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쁘라윳 총리는 헌법개정 요구에 대
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총리직 사임과 왕실개혁 요구는 받
아들일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김홍구 외 2021: 85-91).
탁씬정부를 붕괴시킨 2006년 쿠데타 이후 2021년까지 태국 정치
는 민주주의 관점에서 평가하자면 롤러코스터와 같은 시기였다.
두 번의 쿠데타(2006, 2014년)가 있었고, 2006년 쿠데타 이후에 두
차례의 총선(2007, 2011년)과 2014년 쿠데타 이후 2019년 총선이
있었다. 따라서 이 기간 태국정치의 혼합체제적 특성이 더욱 두드
100 한국태국학회논총 28-2호

러지게 나타났다고 평가할 수 있다. 쿠데타라는 권위주의적 특성


이 지배적인 정치상황을 ‘헌법개정’과 ‘총선 실시’라는 절차적 민
주주의로 포장하려는 시도가 두 차례 쿠데타 이후 모두 있었음은
주목할 만한 혼합체제적 특성이다. 2006년 쿠데타 세력은 자신들
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반면, 2014년 쿠데타 세력은 5년 가까
이 군부정권을 유지하며 제도적, 절차적 민주주의 방식을 활용하
여 궁극적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 그러나 2019년 총선과정 및
총선 이후에도 쁘라윳 정부는 표면적인 민주적 형식과는 달리 불
공정 경쟁과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이라는 권위주의적 특성으로 인
하여 대중적 반대에 직면하고 있는 양상이다.

IV. 분석과 함의

지금까지 타이식 민주주의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타이식 민주주


의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
째, ‘타이식 민주주의’의 출발점은 군부였다. 1932년 의회민주주의
를 표방한 쿠데타를 통하여 절대왕정체제 및 전통적인 국왕과 왕
실의 권위를 무력화시킨 것은 군부였다. 그러한 군부가 1950년대
권력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국왕과 동맹을 맺어 무력화된 국왕의
영향력을 회복시켜 타이식 민주주의의 근간을 만들었다.
둘째, 타이식 민주주의의 출발은 군부로부터였지만 이를 태국사
회에 뿌리 내리도록 한 것은 푸미폰 국왕이었다. 국왕의 전통적인
정치, 사회적 영향력과 불교 최고지도자로서 국민들에게 추앙받는
위치와 존재가 군부주도의 타이식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데 결정적
인 요인이었다.
셋째, 군부-국왕의 동맹관계는 국왕을 정점으로하는 왕실네트워
크를 통하여 작동되어왔다. 왕실네트워크는 비공식적인 제도로 막
‘타이식 민주주의’의 혼합체제(hybrid regime)적 특성에 대한 분석 101

후에서 활동하였지만 실제로는 태국사회의 어느 공식적인 정치제


도보다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 온 것으로 평가된다.
넷째, 타이식 민주주의에서는 국왕의 인정을 받은 ‘좋은 사람’이
좋은 정치지도자로 인식되었다. 국왕의 인정을 받은 좋은 지도자
의 대표적 인물은 앞서 살펴본 싸릿과 쁘렘을 들 수 있다. 반면, 유
권자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던 탁씬은 국왕을 존경하고 옹호해
야 훌륭한 정치지도자라는 요건에 미달될 뿐 아니라 자신의 이익
만을 추구하는 ‘나쁜 정치인’에 해당되었다.
타이식 민주주의의 전개과정에서 시기별 혼합체제적 특성에 대
한 분석과 평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957-1973년 사이
도입되고 뿌리를 내린 타이식 민주주의는 군부 권위주의체제를
“타이식” 민주주의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타이식 민
주주의는 명칭만 민주주의일 뿐 실제로는 권위주의체제적 특성이
강하였다고 평가된다.
다음으로 왕실네트워크가 타이식 민주주의를 주도하였던
1973-2001년 기간에는 절대왕정제가 붕괴된 1932년 이후 가장 강력
한 국왕의 정치적 영향력이 발휘된 기간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아
이러니하게도 이 기간 국왕은 군부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대 편에 서
기도 하였고, 반대로 그 민간정부를 붕괴시킨 군부 쿠데타를 승인
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 태국정치는 국왕의 결정에 따라 외
형상 민주적 체제와 권위주의체제를 번갈아 경험하였다. 이러한 점
에서 태국의 정치체제는 이 기간에도 여전히 권위주의적 특성을 보
였지만, 외형적으로는 정당간의 경쟁적 선거와 정권교체 등의 민주
적 요소들도 공존한 혼합체제적 특성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세 번째 시기로 분류된 2001-2006년의 기간은 탁씬의 등장과 함
께 태국정치에서 이전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양상이 관찰되었다. 탁
씬에게는 과거 정치인들에게는 없었던 빈곤층과 서민층의 강력한
지지를 끌어낸 선거전략과 정책적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민주적
102 한국태국학회논총 28-2호

절차를 통해 당선된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통치행태는 권위주의


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15). 더욱이 1950년대 이후 태국정치를 주도
하였던 왕실네트워크와 그 정점에 있는 국왕의 권위와 영향력에 도
전하는 무모함으로 인해 결국에는 군부 쿠데타로 권력을 잃는 비극
을 경험하였다. 국왕의 권위와 영향력을 기본 상수로 전제하는 타
이식 민주주의에서 국왕의 권위를 무시하고 왕실네트워크의 영향
력을 통제할 수 있다는 탁씬의 생각은 오판이었음이 증명되었다.
마지막으로 군부가 정치 전면에 재등장한 2006년 이후 2021년
현재까지 태국정치는 1992년 민주화 이행이 본격화되기 이전 군부
가 태국정치를 주도하였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2006년과 2014
년 쿠데타 이후 탁씬 세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헌법개정을 실시한
것도 과거 쿠데타 세력들과 유사하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의도를
가진 헌법개정은 권위주의체제의 특징 중 하나임은 주지의 사실이
다. 그러나 1992년 이전의 군부정권과 차별화되는 점도 있다. 특히
2014년 쿠데타를 주도한 쁘라윳은 쿠데타 직후 민심을 얻기 위한
여러 정책을 펼치며 유권자들의 환심을 얻으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핵심인 선거에서의 승리를 중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019년 총선 결과 쁘라윳이 재집권한 후 야당
에 대한 탄압으로 대표되는 권위주의적 통치가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권위주의적 성격이 강력한 혼합체제적 특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상의 논의들을 종합하면, 타이식 민주주의는 그 출발점에서부
터 명칭만 민주주의를 표방하였을 뿐 군부 권위주의체제적 특성이
강력한 정치체제였다. 가장 큰 특징은 푸미폰 국왕의 영향력이 타

15) 어떠한 측면에서는 탁씬의 선거권위주의 또는 민주적 권위주의도 변형된 형


태의 타이식 민주주의라고 할 수도 있다. 차이점은 타이식 민주주의는 국왕
을 정점으로 하는 것인 반면, 탁씬의 권위주의는 탁씬을 정점으로 하는 권위
주의체제를 꿈꾸었다고 할 수 있다.
‘타이식 민주주의’의 혼합체제(hybrid regime)적 특성에 대한 분석 103

이식 민주주의의 성립과 전개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국왕의 그러한 강력한 영향력 행사를 가능하게 한 것이 군
부와 추밀원을 포함한 왕실네트워크였다. 이러한 삼각편대의 강력
한 권한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탁씬은 서민층 유권자들의 강력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군부 쿠데타로 정치권력에서 축출되었다. 타이
식 민주주의의 아이러니는 다수 유권자 대중들의 지지가 권력의
기반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국왕을 포함한 왕실네트워크의 지지와
승인이 더욱 중요하게 작용하였다는 점이다.
끝으로 타이식 민주주의의 지속가능성과 관련된 함의를 살펴보
면 다음과 같다. 먼저 타이식 민주주의의 핵심축이었던 푸미폰 국
왕이 부재한 현시점에서 과연 왕실네트워크가 이전처럼 태국정치
를 주도해 나갈 수 있을 것인지 여부가 타이식 민주주의의 미래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현실적으로 와찌라롱껀
국왕이 아버지와 같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은 모두가 인
정하는 사실이다. 다음으로는 군부가 또 다른 중요한 변수이다. 특
히 푸미폰 국왕의 강력한 영향력이 더 이상 발휘될 수 없는 현상
황에서는 왕실네트워크 내부에서도 와찌라롱껀 국왕보다 군부의
영향력이 더 커질 수도 있다고 판단된다. 마지막으로는 군부와 왕
실의 정치적 영향력에 대해 부정적인 젊은 세대들의 움직임과 그
에 대한 정부의 대응 태도이다. 이들 반정부, 반군부 시위대들의
헌법개정, 총선 재실시, 왕실개혁 등의 요구사항에 대해 쁘라윳 정
부가 어떻게 대처하는냐에 따라 타이식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
을지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런 측면에서 타이식 민주
주의의 미래는 태국 군부와 군부의 정치권력 유지에 반대하는 세
력 사이의 역학관계와 이에 대한 태국 유권자들의 태도와 선택에
달려있다고 하겠다.

주제어: 타이식 민주주의, 혼합체제, 푸미폰, 군부, 탁씬, 쁘라윳


104 한국태국학회논총 2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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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한국태국학회논총 28-2호

<Abstract>

Analysis on ‘Thai-Style Democracy’:


Focusing on Characteristics of Hybrid
Regimes

Seo, KyoungKyo | HanKuk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


kkseo@hufs.ac.kr

‘Thai-Style Democracy’ is a democracy with Thai characteristics


which is differentiated with liberal democracy. Those chronological
characteristics of hybrid regimes of the Thai-Style Democracy since its
beginning are as follows: first, during the 1957-1973 period, Thai-Style
Democracy launched from the alliance between the military and the
king. It was a nominal democracy. In reality, it was a hybrid regime
with strong authoritarian characteristics. The following 1973-2001
period witnessed Thai-Style Democracy led by the network monarchy
of Thailand. Both civilian and military governments with hybrid
regime characteristics switched each other by the approval of the King
Bhumibol. The third period of 2001-2006 experienced more
complicated hybrid regimes including coexistence of authoritarian
leadership elected by the democratic procedures as well as the
long-standing Thai-Style Democracy. Lastly, the controversy on
Thai-Style Democracy restarted in 2006 with the military intervention
in politics again until now. The power of the military is still strong
within the government even after the 2019 election. In this regard, the
‘타이식 민주주의’의 혼합체제(hybrid regime)적 특성에 대한 분석 109

future of Thai-Style Democracy with hybrid regime characteristics


continuously remain uncertain.

Key Words: Thai-Style Democracy, Hybrid Regime, King Bhumibol,


The Military, Thaksin, Prayut

논문접수일 : 2021년 12월 28일


심사완료일 : 2022년 2월 10일
게재확정일 : 2022년 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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