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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문제연구, 제20권 2호

중동문제연구소, 2021, 67~102

터키공화국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변동 연구:


아타튀르크와 에르도안을 중심으로*

Leadership and Transformation of Political Culture in


Turkey: A Focus on Mustafa Kemal Atatürk and Recep
Tayyip Erdoğan

오종진**, 강지선***
Oh, Chong-Jin, Kang, Ji-Seon

목차

Ⅰ. 서론
Ⅱ. 아타튀르크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변동
1. 1923년 공화국 건국과 정치체제 변동
2. 새로운 정치문화의 출현: 세속주의, 진보적 권위주의 리더십
Ⅲ. 에르도안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변동
1. 2002년 AKP 단독정부 수립과 정치체제 변동
2. 비주류 정치문화의 부상: 이슬람주의, 보수적 권위주의 리더십
Ⅳ. 결론

* 본 논문은 2020년도 한국외국어대학교 교내학술연구비의 지원과,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


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7S1A2A3055970).
** 한국외국어대학교 터키·아제르바이잔어과 교수
*** 한국외국어대학교 터키·중앙아시아·몽골학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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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터키공화국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변동 연구:


아타튀르크와 에르도안을 중심으로

오종진*, 강지선**

본 논문은 터키공화국 초기 아타튀르크 정권과 건국 100년을 마


주한 에르도안 현 정권의 정치체제와 정치문화를 비교함으로써 리
더십과 정치문화가 어떻게 연동하고 변화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
이다. 문헌 자료를 기초로 터키 정권의 기초 가치 체계와 현 정권의
차이를 파악하고, 두 리더십간 정치체제와 정치문화를 비교·분석하
여 그 차이와 공통점을 찾고자 하였다.
두 정권 모두 지도자의 강력한 리더십을 기반으로 국정을 운영했
다. 리더십과 정치체제 변동은 정치문화의 변화와 그로 인한 사회
문화의 변화를 견인하고 있다. 터키공화국을 건국한 아타튀르크 정
권은 ‘터키식 세속주의’와 ‘진보적 권위주의’라는 새로운 정치문화
를 출현시켰고, 현 에르도안 정권은 ‘터키식 이슬람주의’와 ‘보수적
권위주의’라는 그동안 비주류였던 리더십과 정치문화를 부상시켰
다.
따라서 본 연구는 정치·역사·사회·문화를 아우르는 통합적 분석
을 통해 터키공화국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변동의 단면을 설명하고
자 했다. 이는 최근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터키 정치사회를 이해하

** 한국외국어대학교 터키·아제르바이잔어과 교수
*** 한국외국어대학교 터키·중앙아시아·몽골학과 석사과정
터키공화국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변동 연구ㆍ오종진, 강지선 ∙ 69

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된다.

※ 주제어: 리더십, 정치체제, 정치문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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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Leadership and Transformation of Political Culture in


Turkey: A Focus on Mustafa Kemal Atatürk and Recep
Tayyip Erdoğan

Oh, Chong-Jin*, Kang, Ji-Seon**

This research compares the political leadership and political culture


of Erdoğan’s administration and Atatürk’s regime. It examines the
impact of political change on the political code based on the leadership.
Both governments have ruled the Republic by changing the political
system, which affected the changes in political culture and social
culture. While Atatürk’s administration introduced new political cultures
like 'Turkish Secularism' and 'Progressive Authoritarianism,' Erdoğan’s
regime revived the minority political culture of 'Turkish Islamism' and
'Conservative Authoritarianism.' This article aims to understand the
recent socio-political change and cultural transformation from the
leadership perspective by utilizing various literature reviews.

※ Key Words: leadership, political system, political culture, Mustafa Kemal


Atatürk, Recep Tayyip Erdoğan

** Dept. Turkish-azerbaijani Studies, Hankuk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 Seoul, Korea


** Dept. Turkish-Central Asia-Mongolian Studies, Hankuk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
Seoul, Korea
터키공화국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변동 연구ㆍ오종진, 강지선 ∙ 71

Ⅰ. 서론

2014년 8월 10일, 총리직을 3차례 연임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


도안(Recep Tayyip Erdoğan) 수상은 터키공화국 역사상 국민 직접선
거를 통해 선출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새로운 터키’를 기치로
내걸며 선출된 에르도안 대통령은 첫 직선제 대통령 당선 수락 연
설에서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 개헌을 시사했다. 터키 국내정치의
현안으로 의원내각제 폐기와 대통령제 도입이 부상했다(김대성
2017, 16). 글로벌 언론은 그를 ‘21세기 술탄’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2017년 4월 16일,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 중심제로의 헌법 개정
을 안건으로 둔 국민투표가 진행되었다. 개헌은 52%의 찬성표를 얻
어 가결되었다. 이듬해 8월, 조기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에르도안은 두 선거에서 모두 승리를 거머쥐었다. 글로
벌 언론은 대통령의 책임과 행정적 의무를 모두 위임받은 에르도안
이 ‘제왕적 대통령제’ 실현에 성공하며 ‘터키의 독재자’에 등극했다
고 표현했다. 아울러 에르도안 대통령과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
(AKP, Adalet ve Kalkınma Partisi)이 강력한 정권 형성과 함께 추진
해 온 보수적 정책을 근거로 에르도안 정부를 ‘이슬람주의 정부’라
고 평가해 온 세계 언론은 에르도안 대통령을 ‘터키의 술탄’, ‘술탄
대통령’ 등으로 수식한다.
이처럼 정치체제의 변동은 에르도안 대통령의 수식어를 변화시
켰다. 더불어 정치문화에도 가공할 만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의
회해산권까지 위임된 강력한 대통령제는 에르도안 정권의 방향대
로 정책 기조가 설정되고, 수행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이슬람
교 가치를 대변하는 보수주의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터키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가 종교와 정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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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를 주장하며 국가 기본 원칙으로 세워 둔 터키식 세속주의(터


키어로는 Laiklik)의 변형이 시도되었다. 이슬람 가치에 부합하는
사회문화의 변화가 가속되는 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1)
터키공화국은 이러한 극적인 정치변동을 이전에도 여러 번 경험
한 바 있다. 터키공화국의 근현대사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
라에서도 그러하였듯 격동적이다. 그 경험들이 모여 지금 터키공화
국의 정치체제와 정치문화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상술하였던
1923년 터키공화국 건국 시점의 정치만 해도 제국에서 공화국으로,
절대왕정에서 강력한 대통령이 존재하는 의원내각제로 지각변동을
겪었다. 터키 독립투쟁의 지도자이자 건국의 아버지인 아타튀르크
는 공화인민당(CHP, Cumhuriyet Halk Partisi)이라는 유일 정당을 창
당하고, 1대~4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1946년 다당제가 허용되어 민주당(DP, Demokrat Parti)이 창당되
었다. 1950년이 되자 CHP 독재체제가 막을 내렸다. 민주당 창당 이
래로 군소정당이 난립했다. 연정이 지속(오종진 2017, 62)되며 여러
혼란을 불러왔다. 평균 3~4개 정당이 연정함으로써 정치 혼란이 발
생했고, 각종 이권단체가 주장을 남발하여 사회 혼란이 야기되었으
며,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 간 갈등이 발생하여 국론이 분열되었
다. 아타튀르크 이래 공화국과 세속주의의 보호자로 여겨지던 군부
는 국론 통합과 정국 안정을 강조하며 1980년까지 총 3번의 쿠데타
를 일으키는 등 정치에 개입했다. 특히 1980년 쿠데타의 주도자인
케난 에브렌(Kenan Evren) 합참의장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대통령
권한이 강화된 이원정부제(오종진 2018, 300)를 실시하기도 했다.
군부 쿠데타와 민정 이양이 반복되던 시기를 거쳐, 1990년대 초

1) 본 시각의 배경 및 내용에 관해서는 다음 논문들을 참조하시오(Yavuz, 2019; Yavuz and


Ahmet, 2019; Akyüz, 2016; 이희수, 2013; 한구현, 2007).
터키공화국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변동 연구ㆍ오종진, 강지선 ∙ 73

에는 ‘터키식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조어될 만큼 정치가 안정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연립정부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
였으므로 지속적인 정책을 입안할 동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터키식 세속주의를 포용하는 친 이슬람적 정치집단들이
터키 정계에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들을 통해 점진적인 이
슬람의 정치화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Yavuz and Ahmet 2019,
2; Yavuz 2003; Davison 2003; Warhola and Bezci 2010).
이후 터키공화국은 1994년 경제위기, 1999년 대지진을 경험하며
커다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실업률이 증가하고, 기업이 파산하
였으며, 국민총생산이 감소했다. 국민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
줄 강력하면서도 청렴한 정치인과 정당을 원하기 시작했다. 이때,
‘국익 중시’라는 표어 아래 에르도안 현 대통령이 AKP를 창당한다.
IMF 구제금융을 받기 시작한 2002년, 에르도안 대통령은 신선하고
청렴하며 개혁적인 이미지를 앞세워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
둔다. 수십 년의 연정 역사를 지나 단독정당이 의원석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정부가 수립된다. 단독정당 겸 집권 여당이 된 AKP는 현
대화된 정치 이슬람의 정체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정체성
은 2010년대가 되면서부터 점차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정치
적 도전과 위기가 있었지만, AKP는 다양한 선거를 통하여 국민적
지지를 확인해가면서 그들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단독 정부가 힘들
어지자 AKP는 2018년 조기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우파 겸 민족주의
정당인 민족주의행동당(MHP, Milliyetçi Hareket Partisi)과 선거연대
를 꾸려 전체 득표율의 과반을 유지하며 현재까지도 집권당의 입지
를 유지하고 있다.
정치변동이 발생하고 변동된 체제에 부합하는 정치문화가 확산
될 때마다 터키 사회와 문화 역시 변화를 겪었다. 사회문화에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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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미치는 정치문화를 변화시키는 주요 원인 중 하나를 정치변동이


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본 글은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공화국 건국
초기 아타튀르크 정권과 건국 100년을 마주한 에르도안 현 정권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를 비교함으로써 리더십 변화가 정치문화에 미
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리더십의 변동은 한 국가의 정치변동은 물론 제도와 구조변동을
야기하기도 한다. 터키공화국에서도 본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아
타튀르크와 에르도안 대통령의 리더십 차이가 정치변동과 제도변
동은 물론 문화변동을 일으켰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사
항을 복합적으로 고려하면서 리더십 변동이 가져온 터키에서의 다
양한 변화와 함께 정치문화변동을 좀 더 집중적으로 분석해 볼 것
이다.
본 연구를 수행하기 위하여 국문, 영문 및 현지어 논문과 단행본,
복수의 정책 보고서, 언론기사 등 형식적인 체계를 갖추어 발표된
문헌적 텍스트 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 자료들을 기초로
하여 터키 정권의 기초 가치 체계를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리더십
과 정치문화 변동을 비교 및 분석하여 시사점을 찾고자 했다. 먼저,
역사 순서 속에서 사실 및 발전 과정을 정리하는 통시적 관점을 중
심으로 각 정권의 형성 배경을 고찰하고, 각 정권이 탄생하게 된 시
대적 배경과 대내외적 상황에 대한 정치사적 설명과 분석을 할 것
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관점에서의 순차적 분석은 각 정권이 정치
체제를 어떻게 변동시켰는지, 변동된 리더십이 어떠한 정치문화를
창조하여 사회 전반에 확산시켰는지를 알 수 있게 할 것이다. 따라
서 본 연구는 보다 체계화된 정리와 분석을 통해 리더십 변동이 정
치문화는 물론 사회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 영향으로 인
해 정치 및 사회문화에 어떠한 변화가 발생하였는지를 정치·역사·
터키공화국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변동 연구ㆍ오종진, 강지선 ∙ 75

사회·문화를 포괄하는 통섭적 시각에서 분석해 볼 것이다.


리더십과 정치문화는 해당 정권을 대표하는 키워드일 뿐 아니라
당시의 터키공화국과 동시대의 터키공화국을 형성하는 주요 요소
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가 진행할 ‘정권별 리더십과 정치체
제 변동 그리고 정치문화에 대한 분석’은 정치·역사·사회·문화를 아
우르는 통합적 분석이면서도 터키공화국의 특정 단면을 설명하기
위한 부분적 분석으로도 적용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판
단된다.

Ⅱ. 아타튀르크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변동

터키공화국의 전신인 오스만제국은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유럽


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지닌 국가였다. 넓은 영토만큼 민족 구성도
다양했는데, 튀르크 민족을 비롯해 20여 개 민족(이은정 2013, 244)
에 달했다. 19세기가 되자 다민족·다문화 정책과 정복 정책을 통해
수백 년 동안 번영했던 오스만제국은 쇠락하기 시작한다. 강력해진
유럽 제국주의의 위협, 연속된 전투 패배와 그에 따른 영토손실, 산
업화와 자본주의라는 급격한 세계질서 변화에 따른 경제위기, 프랑
스혁명이 퍼뜨린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이 피지배 민족에게 불
러일으킨 독립을 향한 열망 등이 쇠락의 원인이었다.
오스만제국 술탄과 지식인들은 여러 방식으로 국력 회복을 시도
했다. 사상의 흐름을 통해 그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오스만제국민이
라는 공통 정체성을 창조하여 사회 안정을 꾀하고자 했던 오스만주
의가 선포되었으나 확산에는 실패하였다. 이후 서구 발전상을 따라
근대화를 이루자는 동시대적 서구화주의, 튀르크 민족 간 통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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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구한 범튀르크주의, 이슬람교 깃발 아래 신자 간 통합과 이슬람


교적 가치를 추구한 이슬람주의 사상이 주창되었다. 튀르크인이 아
닌 터키인만의 민족주의를 주장한 지식인들도 있었다. 군인이었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도 그중 한 명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제국이 패망하여 국가 주권이 위험에
처하자, 아타튀르크는 터키 민족만을 위한 국가를 건국하겠다는 적
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치러진 독립전쟁
을 통해 오스만 의회가 아닌 아타튀르크와 그가 이끄는 대국민의회
가 대내외적 대표성을 인정받았다. 1923년 10월 23일, 술탄의 지휘
아래 이슬람교에 국가의 중심 가치를 두고 다민족·다문화 사회를
유지해 온 오스만제국은 공화제 체제 아래 세속주의에 국가의 중심
가치를 두고 터키 민족만을 위한 사회를 구성하고자 하는 터키공화
국으로 변모한다. 그 중심에는 터키 민족의 지도자로 급부상한 아
타튀르크가 있었다.
오스만제국에서 터키공화국으로의 변혁은 가공할 만한 사회문화
적 변화를 가져왔다. 변화의 가장 큰 원인은 국가의 주권이 술탄이
아닌 국민에게 있다는 공화제에서 비롯되었다. 아타튀르크가 국민
에게 익숙하지 않은 공화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각종 개혁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소위 ‘아타튀르크 혁명사’라고까지 불리며 연구
되어 온 아타튀르크의 개혁정책은 강력한 리더십과 정치권력을 기
반으로 실행되었다. 따라서 터키공화국 초기 정치문화 변화상을 이
해하기 위해서는 아타튀르크가 구현한 정치체제와 개혁정책을 살
펴볼 필요가 있다.
터키공화국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변동 연구ㆍ오종진, 강지선 ∙ 77

1. 1923년 공화국 건국과 정치체제 변동

아타튀르크의 정치체제와 개혁정책은 후대에 이르러 ‘케말리즘


(Kemalism)’ 혹은 ‘아타튀르크주의’라 명명된, 그가 주장했던 6가지
원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여 실행되었다.
아타튀르크를 비롯한 신생 터키공화국 건국 중심 세력은 오스만
제국 시절, 청년 오스만인과 청년 터키인을 계승하며 적극적인 개
혁을 추구한 서구지향형 지식인들이었다.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
은 다른 지식인들처럼 아타튀르크 역시 ‘자유주의’가 행정부에서
더 중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술탄 등 확고한 지배 계급만
의 자유가 아닌 국민의 정치적 자유를 반영할 수 있는 공화제가 서
구화된 근대국가에 가장 적합한 정치체제라고 여겼다. 그의 상상은
1923년 10월 23일,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주의가 반
영된 공화국 선언을 통해 현실화되었다.
아타튀르크의 공화국 선언은 국가 주권 제도화와 다름없었다. 이
후 그는 간선을 통해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그
러나 건국 초기, 독립전쟁을 거치며 형성된 아타튀르크의 리더십은
상당히 공고하며 매우 강력했다. 국민들은 오스만제국민의 신민적
사고에서 탈피할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고, 신생 국가는 아직 대
내외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아타튀르크는 어렵게 얻어낸 독립을
보전하고 신생 공화국을 근대화 및 안정화하기 위해 시대가 부여한
강력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무스타파 케말 사령관이 아닌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대통령
은 고립외교노선을 추구하며 내부정치를 진보적으로 지휘하고, 세
속주의를 기초로 한 개혁과 개방을 급진적으로 추진하였다. 칼리프
제 폐지, 정교분리, 정당정치 확립, 페즈 착용 금지 등 의복 제한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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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다처제 폐지, 여성참정권 부여 등 양성평등 정책(우덕찬 2003,


163-167) 추진을 통해 터키 사회는 새로운 옷을 입었다.
또한 경제력은 훈련된 인력, 즉 문화에 의존한다는 견해를 옹호
(Bozkurt Güvenç 1997, 36)하며 사회통합과 국민계몽에 집중하기도
했다. 가능하면 설득을 통해, 설득이 안 되면 강제로라도 문화 개혁
을 추진할 생각(앤드류 망고 2012, 338)이었던 만큼 사회문화 전반
에 걸쳐 하향식으로 행해졌다. 마을회관 같은 국민의 집(Halkevi)을
지역별로 개소하여 민중교육을 추진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비록
지식인 계층과 농민 계층 간 이해에 온도 차가 있었을지언정 터키
사회는 새로운 사상을 키우게 되었다.
왕정이 아닌 공화제, 세습 군주인 술탄이 아닌 선거를 통한 의회
와 대통령이 등장한 20세기 초 터키의 정치변동은 사회변혁과 함께
새로운 정치문화를 이끌어냈다. 터키식 세속주의와 진보적 권위주
의 리더십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새로운 정치문화의 출현: 세속주의, 진보적 권위주의 리더십

1) 터키식 세속주의

터키식 세속주의는 프랑스식 강경 세속주의(laïcité)의 영향을 받


았지만, 개별적 맥락에서 독자적인 터키만의 세속주의로 발전되었
다. 이는 미국식 세속주의(Secularism)와도 다르다.
1937년에 이르러 터키공화국 헌법에 불변의 국가 원칙으로 기재
된 세속주의는 “신성한 종교적 감정은 국정 및 정치와 혼재할 수
없으며(서문)”, “모든 사람은 양심, 종교적 신념 및 신념의 자유를
가진다(제24조)”라고 표현되어 있다. 특히 제10조에는 “언어, 인종,
터키공화국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변동 연구ㆍ오종진, 강지선 ∙ 79

피부색, 성별, 정치적 사상, 철학적 신념, 종교, 종파 및 이와 유사한


이유로 차별 없이 법 앞에서 평등”해야 한다는 자세한 해석이 등장
한다. 단순한 정교분리가 아닌 사회 전반의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인 것이다. 이로써 터키의 국가 행정은 종교적 규칙에 의존하
지 않으며, 개인은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갖고, 국가는 국민의 예배
권리를 보호하는 형태를 띤다. 터키식 세속주의는 유럽의 세속주의
와도, 다른 이슬람 국가의 세속주의와도 확연히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터키식 세속주의가 상향식(bottom-up) 리더십
으로 등장한 유럽의 세속주의와 달리 하향식 리더십으로 형성되고
지시되었다는 사실이다(Öztürk 2016, 4). 오스만제국 잔재를 청산하
는 등 시대적 변혁을 주도해야 했던 아타튀르크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수용된 터키의 세속주의는 단순히 종교적, 정치적 권위와 제
도를 공식적으로 분리하기 위한 코드가 아니었다. 사회를 새롭게
설계하기 위한 실증주의적 국가 이데올로기였다. 공공 영역에서 종
교를 제거하면서 국가의 권력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
로 하는 자코뱅적 급진주의에 기반을 두고, 정치가 사회를 재구성
하는 능력을 강조했다(Yavuz and Ahmet, 4).
이에 케말리스트들은 세속주의를 공화국 건국 철학의 가장 중요
한 원칙으로 취급했다. 사회문화적으로 새로운 도덕적 규범과 사고
를 제시하며 이슬람교 신앙과 이슬람주의자들을 배제하고자 했다.
새로운 정신문화를 지닌 터키인의 창조이면서 터키 사회 대부분을
형성하고 있던 무슬림을 소외시키는 건국 원칙이자 정치문화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스만 정체성’에서 벗어나도록 강요받은 민중은
아직 무슬림 정체성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타튀르
크는 국민계몽을 위해 대중활동을 펼쳐야 했고, 터키어와 역사를
확립해야 했으며, 서구식 교육을 확산시켜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80 ∙ 중동문제연구 제20권 2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생활과 정신의 바탕이었던 이슬람교는 쉽


게 대체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터키식 세속주의는 서구화를 근간에 둔 근대 터키공화
국으로의 전환을 가능케 한 이념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반서구 세
속주의와 아랍민족주의를 근간에 둔 다른 이슬람권 세속주의 국가
들과의 차별성을 보인다. 이러한 차별성의 핵심에는 아타튀르크의
근대 문명을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그는 근대 문명에 환상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나라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전제조건이라
고 생각했다. 그에게 문명은 가장 훌륭하고 가장 진실한 체제였다.
심지어 “문명사회에서 죽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수치
스러운 일”이라며 이슬람 성인들의 성지를 언급하기도 했다(앤드류
망고, 394).
이슬람문화에서 벗어나 서구적 문명을 추구하려는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 개혁 노력은 의회 설립 후 공교육을 단일화하며 종교 학
교를 폐지한 것, 종교 관련 기관 및 제도를 폐지한 것, 1924년 칼리
프제를 일방적으로 폐지한 것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특히 칼리프제
폐지는 터키 내 개혁 수행과 달리 전 세계의 무슬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이었다. 1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슬람 정체성, 힘, 정통
성의 강력한 상징(Graham E. Fuller 2007, 26)으로 이슬람 세계에서
최고의 종교적 권위를 누렸던 칼리프가 아타튀르크의 결정으로 인
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이 밖에도 근대 문명을 국민들의 일상에 적용하기 위한 세속적인
법 제정이 지속되었다. 당시 이슬람교도를 상징하던 페즈 착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수피즘의 상징이었던 데르비시 교단의 모든 시설
과 묘역을 폐쇄하고 성직자를 해임했다. 이슬람 성직자들의 터번
및 예복 착용을 금지했다. 이슬람력을 폐지하고 기독교력을 사용했
터키공화국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변동 연구ㆍ오종진, 강지선 ∙ 81

다. 샤리아를 폐지하고 스위스 법을 모방한 새 민법을 통과시켜 여


성의 지위 향상을 시도하고, 이탈리아 형법을 차용한 새 형법을 도
입했다.
상술한 바와 같이 터키식 세속주의는 서구화에 기반을 둔 근대화
를 이루기 위해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은 아타튀르크가 강하게 추
진한 개혁 사상이자 정치사상이다. 이와 같은 정치사상은 터키 사
회 전반에 변화를 가져오며 뿌리 깊은 정치문화로 발전하였다.

2) 진보적 권위주의 리더십

아타튀르크 정권의 두 번째 정치문화 리더십은 ‘진보적 권위주


의’이다. 오랜 전쟁을 통해 얻은 귀한 독립이었으므로, 아타튀르크
는 “국내에 평화, 세계에 평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터키공화국의
재건을 우선시했다(오종진 2020, 21).
터키의 진보적 권위주의 리더십은 세속주의적 권위주의를 의미
한다. 상술한 세속주의 정책을 아타튀르크 대통령의 강력한 힘과
신속한 결정으로 수행해나간 것이 그 예이다. CHP 일당독재체제의
지원으로 가능했던 개혁이었다. 일당독재체제와 강력한 대통령의
통치는 필연적으로 권위주의로 이어졌다. 의회가 존재하였으나,
CHP 일당독재체제 하에 아타튀르크 대통령의 리더십에 반기를 드
는 이는 적었다.
비록 아타튀르크는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여 민주주의가 실현되
고 정치적 투쟁을 통해 국가의 이익을 공동으로 모색할 수 있도록
의회에 야당이 존재하기를 염원하였으나, 그가 원했던 야당의 출현
과 다당제의 실현은 아타튀르크 사후 1946년이 되어서야 가능해졌
다. 1924년 창당된 진보공화당(Terakkiperver Cumhuriyet Fırkası)은
82 ∙ 중동문제연구 제20권 2호

1925년 발생한 쉐이흐 사이트 반란2)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1년


만에 해산되었다. 1930년 아타튀르크가 친구인 알리 페트히 오크야
르(A. Fethi Okyar)에게 부탁하여 창당된 자유공화당(Serbest
Cumhuriyet Fırkası) 또한 개혁 반대 인물의 영입을 이유로 자체 해
산한다. 대항마 없이 지속되던 일당독재체제는 이미 강력한 대통령
의 권위주의를 더더욱 강화했고, 권위주의를 유화시킬 다른 시각을
가진 집단이 성장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케말리즘 6대 원칙에 천명되지 않았던 권위주의로의 귀속
은 공적 영역을 지배하려는 권위주의 국가 시스템의 출현과도 연관
되었다. 일부 이슬람 지식인과 민중들은 세속주의뿐 아니라 진보적
권위주의에 반발하여 여러 차례 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것은
터키식 세속주의와 진보적 권위주의가 기반으로 하고 있던 자코뱅
적 급진주의의 결과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진보적 권위주의 정치문화는 강력한 정책 실행으로
인한 사회와 문화의 변화 가속이라는 결과 외에도 오스만제국 시기
강력한 기제였던 공존의 유산을 와해시키고 그 가치를 저해하여 민
족 내 갈등을 유발한 셈이 되었다.

Ⅲ. 에르도안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변동

서론에 서술한 바와 같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중앙정부 정권을 확보하기 이전의 터키 정치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2) 이슬람 낙쉬반디 교단의 지도자 겸 쿠르드 민족주의자 비밀조직인 ‘Azadi(자유)’ 회원인 쉐


이흐 사이트의 주도로 발생한 쿠르드족 반란을 뜻한다. 당시 진보공화당 총재였던 카즘 카
라베키르(Kâzım Karabekir)에게 아타튀르크의 정당 해산 지시를 전한 사람은 페트히 수상
이었다. 그는 5년 후 두 번째 야당의 창당인이 된다.
터키공화국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변동 연구ㆍ오종진, 강지선 ∙ 83

아타튀르크와 CHP의 일당독재체제는 1946년 다당제 허용을 거쳐


1950년 막을 내렸다. 다당제 허용 후 군소정당이 난립하고 연정이
지속되었다. 사회 혼란이 야기되고 국론이 분열되었다. 군부는 국
론 통합과 정국 안정을 강조하며 총 3번의 쿠데타(1960, 1971, 1980)
를 일으켰다. 군부 쿠데타와 민정 이양이 반복되던 시기를 거쳐,
1990년대 초에는 ‘터키식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조어될 만큼 정치
가 안정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연립정부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으므로 강력하고 지속적인 정책을 입안할 동력은
충분하지 않았다.
정치적 불안정은 경제적 혼란을 불러왔다. 터키는 1994년 경제위
기, 1999년 대지진을 경험하며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실
업률이 증가하고, 기업이 파산하였으며, 국민총생산이 감소했다. 국
민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 줄 강력하면서도 청렴한 정치인과
정당을 원하기 시작했다. 오스만제국 말기와 공화국 건국 초기처럼
국익 중시라는 슬로건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었고, 에르도안 대통령
은 이를 바탕으로 AKP를 창당하게 되었다. AKP는 ‘법을 중시하며
민주적 절차를 통해 인간의 행복과 평안을 추구한다’는 당규 4조의
내용을 통해 공당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하였고, 종교적 색채는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김대성 2008, 10).
IMF 구제금융을 받기 시작한 2002년, 이스탄불 시장이던 에르도
안 대통령은 중앙정부 집권에 도전하며 청렴하고 개혁적인 이미지
를 내세웠다. 변화를 향한 국민적 열망을 읽었던 에르도안 대통령
과 AKP는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일당독재체제와 연정의 역사
를 거쳐 단독정당이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정부가 수립되었
다.
2002년, 이슬람주의 정당인 AKP의 집권은 민주주의 틀 안에서
84 ∙ 중동문제연구 제20권 2호

선거라는 도구를 활용하여 이루어졌다. 적법한 절차를 통해 단독정


당 겸 집권 여당으로 선출되어 단독정부를 수립할 권한을 얻게 된
것이다. 20년이 지난 2021년에도 에르도안 대통령은 여전히 터키
정치사에서 ‘선거의 제왕’이라 평가된다(오종진 2018, 290).

1. 2002년 AKP 단독정부 수립과 정치체제 변동

2002년 이후로 에르도안 대통령은 약 20년째 정권을 유지 중이


다. 그는 여러 정치적 도전과 난제를 선거라는 돌파구를 통해 해결
해 왔다(오종진 2018, 290). 특히 2017년에 실행된 개헌 국민투표는
정치체제의 강력한 변곡점이었다.
에르도안 정권이 정치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한 것이 변곡
점 파동의 시작이었다. 3선 총리 이후 2014년부터 대통령직을 수행
해 온 에르도안 대통령은 대내외적 혼란을 이유로 내각책임제의 유
지가 아닌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의 실현을 언급했다.
2017년 4월 16일, 터키 전체 유권자의 87%가 참여하여 개헌 국민
투표가 이루어졌다. 높은 국민 참여율과 대내외적 관심이 수반된
선거는 전체 유권자의 51.4%가 개헌안에 찬성하며 가결되었다. 그
차이는 고작 138만 표였다.3) 이로써 비록 연정과 쿠데타로 점철된
역사였으나, 형태는 의원내각제를 유지해 왔었던 터키의 정치체제
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로의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대통령의
권한에 고위인사(장관, 판검사위원회 일부 인원) 임명권, 의회해산
권, 행정명령 발표권, 비상사태 선포권, 예산 제안권 등이 추가되었
다.4) 2018년 치러진 대선에서 에르도안은 신(新) 정치체제의 핵심

3) “NİSAN 2017 REFERANDUM SONUÇLARI”,


https://www.sabah.com.tr/secim/16-nisan-2017-referandum/ (검색일: 2021년 5월 31일)
터키공화국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변동 연구ㆍ오종진, 강지선 ∙ 85

인 대통령직에 선출되었다. 그는 더욱 강력해진 정치권력을 기반으


로 현재까지 국정을 운영해오고 있다. 즉, 2017년의 개헌 국민투표
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치적 승리이자 터키 사회문화 변화의 신호
탄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주요 변수로
작용하였다고 생각된다.
먼저, 2016년 7월 15일 시도되었다가 실패한 ‘페툴라 귤렌
(Fetullah Gülen)의 쿠데타 미수’가 대통령제 실행 논의의 물꼬를 터
주었다. 터키에서 대통령제 논의의 역사는 1970년대가 시작이었으
나, 연이은 갑론을박으로 전망은 밝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해당 사건
으로 인해 타협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다양한 사회 및 정치집단 간
소통이 증진되었으며, 정당 간 협력이 강화되었다. 귤렌측 인사들
이 관료 체계 내에 너무도 많이 투입되어 있어 국가적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결과도 발표되었다. 마침내 여당인 AKP와 민족주의 계
열 우파 정당인 MHP가 같은 노선에 섰다. MHP 의장의 연설을 통
해 “터키 공화국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 개헌 국민투표와 연계되어
있다.”는 메시지가 던져졌다(DURAN and Nebi 2016, 23-24).
2002년 선거 이후 에르도안 대통령이 압둘라 귤(Abdullah Gül) 전
대통령과 공고한 권력 체제를 꾸준히 형성해 온 것도 하나의 변수
였다. 에르도안 대통령과 압둘라 귤 전 대통령은 정치적 동반자이
자 서로의 지지자였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03년부터 의원내각제
의 총리로서 최고의 책임을 부과받으며 의회 내외의 신임을 얻었
다. 압둘라 귤 전 대통령은 AKP 당선 이전부터 직무를 수행해 온
아흐메트 네즈데트 세제르(Ahmet Necdet Sezer) 전 대통령의 임기가

4) “A'dan Z'ye 16 Nisan referandumu: Madde madde yeni anayasa”,


https://www.haberturk.com/gundem/haber/1427214-adan-zye-16-nisan-referandumu-madd
e-madde-yeni-anayasa (검색일: 2021년 6월 13일)
86 ∙ 중동문제연구 제20권 2호

종료된 2007년,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에르도안 대통령과 압둘라


귤 전 대통령은 각자의 직위를 바꾸어가며 집권을 지속했다. 이러
한 기간 동안 에르도안의 정치권력은 계속해서 강화되었다.
마지막으로, 에르도안의 국정 운영 능력 또한 변화를 가능케 한
또 하나의 변수였다. 2003년부터 3선 총리를 연임하다가, 2014년 터
키의 첫 직선제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것은 에르도안의 국
정 운영 능력이 일종의 대중시험에 합격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
다. 그는 국익을 중심으로 스윙 스테이트(Swing State) 외교 노선을
추구했다(오종진 2020, 27).5) 국가 권력을 친이슬람 국가주의 체제
인 보수 체제로 확장하고, 내부 정치도 같은 방향으로 안정화하고
자 했다. 정치가 안정화되면서 경제도 성장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2002년에 비해 2011년의 물가상승률은 세 자리 수에서 한 자리 수
로 회복되었으며 GDP는 3배 이상 성장하였다. 2012년의 IMF 졸업
은 집권당의 능력과 인기를 급속히 상승시켰다. 다시 말해 국민들
은 에르도안 정권의 정치 및 경제 운용 능력을 확인하며 친이슬람
정치인이 배제 대상이 아닐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정권을 바
라보는 국민들의 시선 또한 부드러워졌다고 판단된다.
이 밖에도 대통령 중심제 추진 주장의 근거로 정치적 불안정의
해소, 연립정부로의 복귀 위험성 제거, 민·관료 엘리트 활동의 회색
지대 제거, 정치 시스템 내 이원적 합법성 문제 해결, 민주주의 강

5) 스윙 스테이트 개념은 원래 미국 국내정치에서 사용되었지만, 일부 학자들은 국제정치에서


도 사용하고 있다. 나아가 현 정부 또한 터키가 스윙 스테이트로서 가지고 있는 가치를 인지
하고 이를 적극 활용하려 하고 있다. 미국의 The German Marshall Fund of United states는
연구보고서에서 터키를 비롯한 인도네시아, 브라질, 인도 등을 주요 스윙 스테이트로 보고
있다. 참조: Kliman and Fontaine, Global Swing States: Brazil, India, Indonesia, Turkey and
the Future of International Order, Washington DC, The German Marshall Fund of United
States, 2012 ; Kardas, “The Global Swing States and International Order: A Turkish View:,
GMF on Turkey, 2012.
터키공화국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변동 연구ㆍ오종진, 강지선 ∙ 87

화, 행정부와 입법부의 분리, 신속한 의사결정을 위한 행정부의 책


임 확대 및 정당성 부여 등이 활용되었다(Duran and Nebi, 18).

2. 비주류 정치문화의 부상: 이슬람주의, 보수적 권위주의 리더십

1) 터키식 이슬람주의

언론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을 ‘21세기 술탄’이라 표기하는 데에는


지배 구조와 강력한 정치권력을 비롯한 여러 이유가 있으나, 에르
도안 정권의 친이슬람 성향 또한 하나의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
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치적 뿌리가 이슬람 정당이었다는 점에서
부터 정권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다. 1960년 쿠데타 이후 터키 정치
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이슬람성향 정당들이 창당되기 시작했다. 에
르도안은 1980년 쿠데타 이후 군부에 의해 해산된, 이슬람성향의
국가구제당(Millî Selamet Partisi, 1972-1981)에 입당해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국가구제당 해산 이후 그는 복지당(Refah Partisi,
1983-1998), 미덕당(Fazilet Partisi, 1997~2001)을 거친다. 복지당과
미덕당 모두 헌법재판소의 위헌 정당 판결을 통해 해산된다. 이후
국가구제당을 계승해 온 이슬람 정당 계열은 구파와 신파로 분열되
는데, 에르도안 대통령은 압둘라 귤 전 대통령과 함께 신파에 속했
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일부 이슬람 정당의 역사와 결을 같이 하며,
정치 이슬람주의 시대의 살아있는 증인으로 그 존재감을 공고히 하
였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끄는 친이슬람 성향 정권의 성공적인 국정
운영과 정치안정에 따른 경제안정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면서 대중
88 ∙ 중동문제연구 제20권 2호

은 이들을 점차 인정하게 되었다. 친이슬람 정권을 바라보는 대중


의 시각 변화는 터키 사회 내 터키식 이슬람주의라는 정치문화의
확산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에르도안 정권의 친이슬람 성향이 늘 같은 방향을 가리켰
던 것은 아니다. 터키식 이슬람주의 정치문화가 터키 사회에 확산
되는 정도 또한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본
연구는 2000년대와 2010년대로 그 시기를 구분하여 그 차이를 구분
해보고자 한다.

① AKP 1기(2002~2010): 서구를 포용하는 이슬람주의


2002년, 단독정당 겸 집권 여당이 된 AKP는 이슬람 계열 신파 정
당으로서 현대적인 정치 이슬람 정체성을 보유한 정당이었다. 심지
어 당 대표를 맡은 에르도안은 ‘종교주의, 인종주의 및 지역주의’를
배격한다고 발표한 바 있었다(김대성 2008, 8). AKP의 인적 네트워
크는 이전 이슬람 정당들로부터 다수 계승되었으나, 2000년대에 들
어선 조직의 지향점에는 변별점이 있었던 것이다.
AKP의 당수였던 에르도안은 이슬람의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그
대로 유지하는 데 많은 관심을 두었다. 1990년대 이슬람의 정치화
가 교육적, 상업적, 연대적 네트워크를 가진 이슬람의 사회적 기반
을 어떻게 붕괴시켰는지를 생생히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1996년 밀
리예트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민주주의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
라고 말한 바 있었던 그는 세계화 시대에 이슬람주의를 포함한 이
데올로기의 종말을 인정하며 친서방주의와 서구화를 재고하기 시
작했다.6) 에르도안은 세계화가 이슬람주의의 사회적 기반인 전통

6) “Pazar Sohbeti”,
http://gazetearsivi.milliyet.com.tr/Arsiv/1996/07/14” (검색일: 2021년 6월 17일)
터키공화국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변동 연구ㆍ오종진, 강지선 ∙ 89

사회를 잠식하여 이슬람교를 약화시킨다는 기존의 믿음 대신, 민주


주의, 인권 및 법치주의라는 서구적 가치가 오히려 이슬람주의를
더 강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현대 정치의 보편적인 언어가
그가 생각하는 이슬람주의와 더 밀접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판
단된다. 즉, 이슬람주의 개념의 다원화였다. 이들의 이념은 역설적
으로 이슬람의 정치적 정체성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를 일부에서는 터키식 이슬람주의의 정치적, 사회적 출현이라고
평가하고 있다(Dağı 2005, 30-31).
특히 에르도안 정권은 1999년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후보국 지위
가 인정된 후 선출되었기 때문에, 중동과 이슬람세력의 구심점을
자처하면서도 전통적인 반서구적 입장을 탈피하고자 했다. 특히
2003년~2004년 중 유럽연합 가입 노력 차원에서 유럽연합 지향적
법률(Avrupa Birliği Uyum Yasa Paketleri)을 제정하며 이슬람과 서방
의 공존 가능성을 제시하려 했다. 사형제와 간통제 폐지, 사이프러
스 분쟁 해결 시도, 쿠르드인 차별 완화 시도, 인권 개혁안 도입, 국
가안보법원 폐지를 통한 군부의 영향력 제거 등이 그 예이다(외교
부 2018, 23).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국내 자유화와 세계화
의 맥락에서 이슬람의 새로운 정치 언어가 출현했다고도 평가하고
있다(Kosebalaban 2005, 1). 이들은 이슬람 친화적인 세속주의를 발
전시켜 정치권의 점진적인 개편과 변동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슬
람주의자들은 더이상 배제의 대상이 아니었다(Yavuz and Ahmet, 2).

② AKP 2기(2010~현재): 이슬람 지향성이 강화된 이슬람주의


그러나 에르도안 정권의 정치적 이슬람 정체성은 2010년대에 들
어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슬람 지향성이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여성의 히잡 착용 금지법 폐지이다. 공화국
90 ∙ 중동문제연구 제20권 2호

건국 이후 아타튀르크 정권이 하향식으로 세속주의 개혁을 시도하


며 페즈 착용을 금지했던 법과 반대되는 조치라 할 수 있다. 2008
년, 대학 내 여성의 히잡 착용 인정 법안이 가결되었다. 2013년에는
90년간 유지되어 온 여성 공무원의 히잡 착용 금지가 해제되었다.
2017년에는 여군의 히잡 착용 금지가 철폐되기도 하였다. 이슬람을
생활종교로 보는 시각에서 히잡 착용 자유화는 관습적인 생활양식
을 인정하는 상향식 조치이자 생활에 있어 필요한 시도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세속주의라는 거름망을 약화시키고, 이슬람교의
사회적 노출을 증가시키는 조치이기도 했다. 이후 히잡 착용은 개
인 성향에 따른 선택의 문제로 남았다. 이와 같은 터키식 이슬람주
의 강화를 가능케 한 국내외 환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2008년 AKP의 총선 압승 이후 집권 엘리트 집단에 이슬
람주의자들이 대거 유입된 것이다(이지은 2020, 51). 다른 두 가지
배경은 쿠데타와 관련돼 있다. 먼저, 2007년 발각된 에르게네콘
(Ergenekon) 집단의 무장 쿠데타 모의 사건이다. 사법적으로 반정부
비밀조직으로 평가받은 에르게네콘 집단에는 세속주의 계열의 전·
현직 군인과 언론인, 정치인들이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세속주
의 군부를 타도할 수 있는 정당성이 확보되었다. 이 사건이 세속주
의 세력의 자연스러운 약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가 많다. 마지막
배경은 상술한 바 있는 2016년의 ‘귤렌 쿠데타 시도’이다. 이 사건
은 현 정부가 관련자들을 축출하며 반정부 성향의 온건 이슬람주의
자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가 많다. 귤렌 조직은 현
시점에도 테러 집단으로 간주된다. 세속주의자와 반정부 성향의 이
슬람주의자 세력을 약화시킨 에르도안 정권은 이슬람주의를 강화
할 때 불편할 수 있는 요소들을 사전에 해결한 셈이 되었다. 에르도
안 정부는 혼란한 와중에도 2010년 개헌안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재
터키공화국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변동 연구ㆍ오종진, 강지선 ∙ 91

판소의 재판관 선출과 임명 방식을 수정하는 등 민주주의적 타당성


을 지속적으로 확보해나갔다.
국외 배경으로는 2011년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등에서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며 본격화된 ‘아랍의 봄’을 들 수 있다. 국제
적으로 터키는 이슬람과 세속주의의 양립 가능성을 증명하는 긍정
적인 이슬람 세속국가 모델로 인식되었다. 에르도안 정권에게는 터
키식 이슬람주의 정치체제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에르도안 정권은 무슬림 세계의 패권자로 인
정받고자 하는 국가 비전과 신오스만주의를 바탕으로 한 터키식 이
슬람주의의 확산을 시도하였다.
특히 국내 정치적으로는 2017년 대통령 중심제로의 전환을 의제
로 한 국민투표에서 개헌이 확정되어 정치체제가 변화하였고, 2018
년 에르도안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한 이후 2010년대 후반의 터키
식 이슬람주의는 더욱 이슬람 지향적으로 선회하였다. 2019년에는
터키의 교육과정에서 진화론이 배제되기도 하였다. 2020년 7월 24
일에는 ‘아야 소피아 성당’으로 알려져 있던 하기아 소피아가 오스
만제국 시절과 같이 ‘아야 소피아 모스크’로 환원되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환원 당일, 아야 소피아 모스크의 첫 금요 예배에 참석하
며 그 정치적 의미를 더욱 부각시켰다.7)
이처럼 터키식 이슬람주의는 2000년대와 2010년대 시간적 구분에
따라 그 지향점에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터키식 이슬람주의의 공통
적인 면모는 에르도안 정권이 국민에게 이슬람의 동시대적 가치를
설득하는 정치사상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세속주의 90년간 주변화되

7) “Erdogan Fulfills Cherished Goal, Opening Hagia Sophia to Prayers”,


https://www.nytimes.com/2020/07/24/world/Ürope/turkey-hagia-sophia-mosque-prayers.ht
ml (검색일: 2021년 6월 1일)
92 ∙ 중동문제연구 제20권 2호

었던 이슬람문화를 복원하려는 종교적 시도라는 평가가 많다. 다시


말해 터키식 이슬람주의는 터키 사회 내 이슬람 정체성의 발현을 지
지하는 사회적인 정치문화로 점차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터키식 이슬람주의는 터키 사회 내 운신의 폭을 점차 넓혀
가고 있다.

2) 보수적 권위주의 리더십

에르도안 정권의 두 번째 정치문화는 ‘보수적 권위주의’ 리더십


이라 할 수 있다. 대통령 중심제에서 발생할 수 있는 권력의 대통령
쏠림 현상은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표현을 낳았다. 선거를 통해 검
증된 지지기반을 기초로 이슬람 가치를 강조한 보수적인 정책들을
강력하게 추진해 온 에르도안 대통령 역시 강력한 권력에 힘입어
종교색 강한 보수적 권위주의 리더십을 사회문화 전반에 확산시켰
다(오종진 2020, 18).
2002년부터 10여 년 동안 현실화된 정치적 안정과 소득증대는 보
수적 권위주의에 대한 불만을 후순위로 미루게끔 했다. 그러나 ‘선
경제 후정치’ 레토릭에 밀린 불만이 불식되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2013년 5월 31일, 이스탄불 신시가지 중심에 위치한 게지(Gezi)
공원을 전통 군대 막사와 백화점으로 개발하려는 계획에 반대하는
진보적인 청년층과 환경론자들의 시위가 시발점이 되었다. 경찰의
강경 진압에 맞서 세속주의자들이 지지를 표명하기도 했다(이희수
2013, 174). 사건은 반정부 시위로 확장되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평화 시위를 주문하며 선처를 약속했으나, 시위대는 동원된 물리력
에 의해 해산되었다.
청년 세대 또는 세속주의자만이 에르도안의 보수적 권위주의에
터키공화국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변동 연구ㆍ오종진, 강지선 ∙ 93

불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온건 이슬람주의로 분류되는 귤렌


주의자들도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상술했던 2016년 7월 귤렌 쿠데
타 미수 진압 직후부터 약 2년간, 7차례에 걸쳐 국가비상사태가 연
속 선포되었다. 이 시기가 에르도안식 보수적 권위주의 리더십을
강화하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에르도안 정권은 국가비상사태 권한을 근거로 대규모 구속·해고,
기업 자산 압류, 신문 폐간, 방송 중단, 비영리법인 해체 등을 단행
했다.8) 국가비상사태에 국민의 기본권은 제한되고, 대통령은 입법
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테러 용의자에 한해 법정 대리권 박탈, 기소
없이 최장 30일 구금 및 체포, 무영장 수색, 자산압류절차 간소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구체적 혐의 없이 공직자도 해임할 수 있게 되었
다(한국수출입은행 이스탄불사무소 2017, 2).9) 2021년까지 군인, 교
사, 판사 등 공무원 14만여 명이 귤렌 연대 혐의로 해고되었고, 귤
렌주의자 체포 작전은 현재진행형이다.10) 일련의 사건들로 터키의
사회 분위기가 점차 경직되어가고 있다는 외부 평가가 많아지기 시
작했다.
결론적으로 보수적 권위주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는 시대를 구분
하여 생각해볼 수 있다. 정권 초기의 보수적 권위주의는 정국 안정
과 경제 활성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배경이 되어 주었

8) “터키 매체 "에르도안-여권연대 대표, 국가비상사태 해제 합의",


https://www.yna.co.kr/view/AKR20180628165400108?input=1195m (검색일: 2021년 6월
1일)
9) 참조, “Cumhurbaşkanına OHAL ilan yetkisi”,
http://www.aljazeera.com.tr/haber/cumhurbaskanina-ohal-ilan-yetkisi (검색일: 2021년 7월
12일)
10) “터키 정부, 비밀요원 동원해 반체제 인사 조카 납치”,
https://newsis.com/view/?id=NISX20210601_0001460146&cID=10101&pID=10100# (검
색일: 2021년 6월 2일)
94 ∙ 중동문제연구 제20권 2호

다. 그러나 급격하게 강화된 동시대의 보수적 권위주의는 반대의


결과를 보여주기도 한다.

Ⅳ. 결론

정치변동이 발생하고 변동된 체제에 부합하는 리더십과 정치문


화가 확산될 때마다 터키 사회와 문화 역시 변화를 겪었다. 공화국
건국 초기 아타튀르크 정권과 건국 100년을 마주한 에르도안 현 정
권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를 비교함으로써 정치변동이 정치문화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했다.
아타튀르크는 1923년 10월 23일,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주의가 반영된 공화국 선언을 선포했다. 그는 공화인민당이라
는 유일 정당을 창당하고, 1대~4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왕정이 아닌
공화제가, 세습 군주 술탄이 아닌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의회와 강력
한 리더십을 지닌 대통령이 등장한 것이다. 20세기 초 터키의 정치
변동은 사회변혁과 함께 ‘터키식 세속주의’와 ‘진보적 권위주의’라
는 정치문화를 사회 전반에 확산시켰다. 그러나 ‘오스만 정체성’에
서 벗어나도록 강요받은 민중은 아직 무슬림 정체성을 포기할 준비
가 되어 있지 않았던 데다 하향식 권위주의에 따른 정신 개조를 요
구받았다. 이 때문에 엘리트 계급과 노동자 계급, 도시 인구와 농촌
인구, 세속주의자와 이슬람주의자 간 갈등이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
고 있다.
현 대통령을 위시한 에르도안 정권의 집권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1세기 초 그는 정의개발당이라는 청렴하고 개혁적인 이
미지의 친이슬람 정당을 창당하고, 2002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터키공화국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변동 연구ㆍ오종진, 강지선 ∙ 95

다. 에르도안 정권은 국익을 중심으로 스윙 스테이트(Swing State)


외교 노선을 추구했다. 창당 초기에는 드러내지 않았으나, 에르도
안 정권은 점차 국가 권력을 이슬람주의 체제인 보수 체제로 확장
하고, 내부정치도 같은 방향으로 안정화하고자 하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끄는 친이슬람 정권의 성공적인 국정 운영,
정치안정에 따른 경제안정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면서 대중이 친이
슬람 정권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변화하기 시작했다. 터키식 이슬
람주의가 새로운 정치문화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
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터키식 이슬람주의는 2000년대와 2010년대
이후 시기에 따라 각기 다른 지향점을 향한다. 2000년대에는 서구
적 가치와 이슬람적 가치를 동시에 포용하는 사회 분위기를 형성하
였으나, 2010년대 이후에는 이슬람 지향성이 강화되어 이슬람의 사
회적 노출과 역할이 강조되었다.
아울러 선거에서의 압도적인 승리, 에르도안 정권의 공고한 정
치권력, 2017년 대통령 중심제로의 개헌 국민투표 등을 통해 에르
도안 정권 아래에서는 보수적 권위주의 리더십이 확대되었다. 보
수적 권위주의 리더십과 정치문화 역시 시대를 구분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정권 초기의 보수적 권위주의는 정국 안정과 경제 활
성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배경이 되어 주었다. 그러
나 보수적 권위주의가 급격하게 강화된 현재는 정국불안과 경제
발전 저하, 사회와 문화를 경직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평가가
많아지고 있다. 최근 현 정부의 리더십과 정치문화에 반발하는 시
위가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아타튀르크 정권과 에르도안 정권은 터키식 세속주
의와 터키식 이슬람주의라는 대비되는 정치문화를 사회에 확산시
96 ∙ 중동문제연구 제20권 2호

켰다. 터키식 가치관을 문화에 편입시켰다는 점은 공통적이나, 수


행 주체와 수용 주체는 상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에르도안 정권
의 지지층은 터키의 이슬람 보수층과 지방의 중하 계층으로 터키
식 세속주의에 대한 반발심을 안고 터키식 이슬람주의의 형성에
열광하고 있다.
아타튀르크와 에르도안은 국가지도자로 권위주의 리더십을 사회
에 확산시켰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지닌다. 단, 진보적 권위주의
와 보수적 권위주의는 종교를 바라보는 시각, 엘리트중심 하향식
국정 운영과 선거로 검증된 민중의 지지를 받는 상향식 국정 운영
이라는 대중주의 실현 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일정 부분 경직된 사회 분위기를 형성한 것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에르도안의 권위주의는 아타튀르크 권위주의에 빚을 지고 있다
는 점도 유의미하다. 다시 말해, 외부 위험 요소를 대비하여 내부
결집을 유도한 아타튀르크의 강력한 리더십을 경험한 터키국민은
어쩌면 에르도안 리더십에 대한 수긍이 조금은 수월했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유목민족인 터키인들은 칸들의 유사한 리더십과 권
력메커니즘을 이미 오랜 기간 경험했다고 볼 수 있다. 강력한 리더
십이 있는 인물 중심 정치가 전형적인 유목국가 정치의 특징이라
면, 터키는 오스만제국의 유지를 도왔던 체제와 인물, 두 요소를 모
두 포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터키 현대 정치에서는
상대적으로 인물이 아직도 더 중시된다는 측면에서 유목적 정치코
드와 리더십이 오늘날까지 어느 정도 유의미성을 지닌다고 보여진
다.
터키공화국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변동 연구ㆍ오종진, 강지선 ∙ 97

아타튀르크 리더십과 정치문화 에르도안 리더십과 정치문화

 터키식 세속주의  터키식 이슬람주의


키워드
 진보적 권위주의 리더십  보수적 권위주의 리더십

 강력한 리더십을 기반으로 국정 운영


 권위주의 리더십의 사회 확산 야기
공통점
 정치문화의 변동 야기
 터키식 가치관의 문화 편입 유도

 수용 주체
- 아타튀르크: 세속주의 지도층, 도시 진보 계층
- 에르도안 : 이슬람 보수층, 지방 중하 계층,
차이점 중도 우파성향의 엘리트 지도층
 리더십과 정치변동 실현 방식
- 아타튀르크: 하향식
- 에르도안: 상향식

<표1 아타튀르크과 에르도안의 리더십과 정치문화 비교>

2021년 에르도안 정권은 여러 도전을 맞이하고 있다, 현 이스탄


불 시장인 에크렘 이맘오울루(Ekrem İmamoğlu)로 대표되는 터키식
세속주의 야권의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였고, 에르도안 정권 인사였
던 압둘라 귤 전 대통령과 알리 바바잔(Ali Babacan) 전 경제부총리
등이 신당을 창당하여 활동함으로써 중도 우파의 분열 가능성이 가
시화되고 있다. 이슬람 지향성이 강화된 상징적이고 표면적인 친이
슬람주의 정책 강화로 정치적 이슬람에 반하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하였고, COVID-19 대응책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나 대통령령에 의
한 국정 운영 및 즉흥적 외교에 대한 비판도 늘어나고 있다.
98 ∙ 중동문제연구 제20권 2호

에르도안 정권이 맞이하고 있는 도전에서도 알 수 있듯 상술했던


터키식 세속주의와 터키식 이슬람주의, 진보적 권위주의와 보수적
권위주의 외에도 세계화, 자유화, 자본주의 등 다양한 가치가 터키
사회에 흡수되어 정치-사회-문화를 변동시키고 있다. 가치의 다원
화는 앞으로 더 많은 정치문화를 터키 사회에 등장시킬 것이다. 그
러나 터키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통치한 대통령들인 아타튀르크와
에르도안은 비슷하면서 다른 리더십과 정치문화를 구축했다. 따라
서 두 지도자가 구축한 리더십과 정치체제가 터키 사회문화에 미친
영향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것은 다원화된 정치문화 속에서 핵심을
찾는 지름길일 수 있다. 이는 터키공화국의 다음 100년을 읽어내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터키공화국의 리더십과 정치문화변동 연구ㆍ오종진, 강지선 ∙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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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진
소 속 한국외국어대학교 터키·아제르바이잔어과 교수
이메일 jin93@hanmail.net
강지선
소 속 한국외국어대학교 터키·중앙아시아·몽골학과 석사과정
이메일 jiseontr@gmail.com

논문접수일 2021년 7월 13일


심사완료일 2021년 8월 19일
게재확정일 2021년 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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