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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정치변동과 문화코드 변화 - 오종진, 강지선
터키 정치변동과 문화코드 변화 - 오종진, 강지선
터키 정치변동과
문화코드 변화 ***
Ⅰ. 들어가는 말 1)
* 한국외국어대학교 터키 아제르바이잔어과 교수
** 한국외국어대학교 터키-중앙아시아-몽골학과 석사과정
*** 이 글은 “리더십과 정치문화변동: 아타튀르크와 에르도안을 중심으로”, 「중동문제연구」,
20권, 2호, 2021”을 수정, 보완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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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수락 연설에서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 개헌을 시사했다. 터
키 국내정치의 현안으로 의원내각제 폐기와 대통령제 도입이 부
상했다(김대성 2017, 16). 글로벌 언론은 그를 ‘21세기 술탄’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2017년 4월 16일,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 중심제로의 헌법 개
정을 안건으로 둔 국민투표가 진행되었다. 개헌은 52%의 찬성표
를 얻어 가결되었다. 이듬해 8월, 조기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에르도안은 두 선거에서 모두 승리를 거머쥐었
다. 글로벌 언론은 대통령의 책임과 행정적 의무를 모두 위임받
은 에르도안이 ‘제왕적 대통령제’ 실현에 성공하며 ‘터키의 독재
자’에 등극했다고 표현했다. 아울러 세계 언론은 에르도안 대통
령과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AKP, Adalet ve Kalkınma Partisi)이
강력한 정권 형성과 함께 추진해 온 보수적 정책을 근거로 에르
도안 정부를 ‘이슬람주의 정부’라고 평가하며 현 대통령을 ‘터키
의 술탄’, ‘술탄 대통령’ 등으로 수식한다. 이처럼 정치체제의 변
동은 에르도안 대통령의 수식어를 변화시켰다.
더불어 터키 사회의 문화코드에도 가공할 만한 변화를 불러일
으켰다. 의회해산권까지 위임된 강력한 대통령제는 에르도안 정
권의 방향대로 정책 기조가 설정되고, 수행될 수 있는 바탕을 마
련했다. 이슬람교 가치를 대변하는 보수주의가 힘을 얻기 시작했
다. 터키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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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기되었으며,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 간 갈등이 발생하여 국론
이 분열되었다. 아타튀르크 이래 공화국과 세속주의의 보호자로
여겨지던 군부는 국론 통합과 정국 안정을 강조하며 1980년까지
총 3번의 쿠데타를 일으키며 정치에 개입했다. 특히 1980년 쿠데
타의 주도자인 케난 에브렌(Kenan Evren) 합참의장은 대통령으
로 취임해 대통령 권한이 강화된 이원정부제(오종진 2018, 300)를
실시하기도 했다.
군부 쿠데타와 민정 이양이 반복되던 시기를 거쳐, 1990년대
초에는 ‘터키식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조어될 만큼 정치가 안정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연립정부라는 한계를 극복하
지 못하였으므로 지속적인 정책을 입안할 동력이 충분하지 않았
다. 더불어 터키식 세속주의를 포용하여 촉진하고자 하면서도 종
교적으로 민감하고 세속적인 집단(Yavuz & Öztürk 2019, 2;
Yavuz 2003; Davison 2003; Warhola and Bezci 2010)을 중심으로
이슬람 속 세속주의의 형태로 이슬람의 정치화가 이루어지며 정
치권이 개편되고 있었다.
이후 터키공화국은 1994년 경제위기, 1999년 대지진을 경험하
며 심갂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실업률이 증가하고 기업이
파산하였으며 국민총생산이 감소했다. 국민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 줄 강력하면서도 청렴한 정치인과 정당을 원하기 시작했
다. 이때, ‘국익 중시’라는 표어 아래 에르도안 현 대통령이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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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정치체제와 문화코드를 비교 및 분석해
시사점을 찾고자 했다. 먼저, 역사 순서 속에서 사실 및 발전 과
정을 정리하는 통시적 관점을 중심으로 각 정권의 형성 배경을
고찰하고, 각 정권이 탄생하게 된 시대적 배경과 대내외적 상황
에 대한 정치사적 설명과 분석을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관점에서의 순차적 분석은 각 정권이 정치체제를 어떻게 변동시
켰는지, 변동된 정치체제가 어떠한 문화코드를 창조하여 사회 전
반에 확산시켰는지를 알 수 있게 할 것이다. 문화코드는 비단 해
당 정권의 대표적 키워드에 그치지 않으며 당시의 터키공화국과
동시대의 터키공화국을 형성하는 주요 요소라 할 수 있다. 따라
서 ‘정권별 정치체제 변동과 문화코드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는
본 연구는 정치·역사·사회·문화를 아우르는 통합적 분석이면서도
터키공화국의 특정 단면을 설명하기 위한 단초로 적용 가능하다
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체계화된 정리를 통
해 각 문화코드가 사회문화의 변화에 미친 영향을 정치·역사·사
회·문화를 포괄하는 통섭적 시각에서 포착해 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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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그중 한 명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제국이 패망하여 국가의 주권이 위
험에 처하자, 아타튀르크는 터키 민족만을 위한 국가를 건국하겠
다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치러진
독립전쟁을 통해 오스만 의회가 아닌 아타튀르크와 그가 이끄는
대국민의회가 대내외적 대표성을 인정받았다. 1923년 10월 23일,
술탄의 지휘 아래 이슬람교에 국가의 중심 가치를 두고 다민족·
다문화 사회를 유지해 온 오스만제국은 공화제 체제 아래 세속
주의에 국가의 중심 가치를 두고 터키 민족만을 위한 사회를 구
성하고자 하는 터키공화국으로 변모한다. 그 중심에는 터키 민족
의 지도자로 급부상한 아타튀르크가 있었다.
오스만제국에서 터키공화국으로의 변혁은 가공할 만한 사회문
화적 변화를 가져왔다. 변화의 가장 큰 원인은 국가의 주권이 술
탄이 아닌 국민에게 있다는 공화제에서 비롯되었다. 아타튀르크
가 국민에게 익숙하지 않은 공화제를 공고히 하고자 각종 개혁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소위 ‘혁명’이라고까지 불리며 연구되어
온 아타튀르크의 개혁정책은 강력한 리더십과 정치권력을 기반
으로 실행되었다. 따라서 터키공화국 초기 문화코드 변화상을 이
해하기 위해서는 아타튀르크가 구현한 정치체제와 개혁정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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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타파 케말 사령관이 아닌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대통
령은 고립외교노선을 추구하며 내부정치를 진보적으로 지휘하고,
세속주의를 기초로 한 개혁과 개방을 급진적으로 추진하였다. 칼
리프제 폐지, 정교분리, 정당정치 확립, 페즈 착용 금지 등 의복
제한과 일부다처제 폐지, 여성참정권 부여 등 양성평등 정책(우
덕찬 2003, 163-167) 추진을 통해 터키 사회는 새로운 옷을 입었
다.
또한 경제력은 훈련된 인력, 즉 문화에 의존한다는 견해를 옹
호(Bozkurt Güvenç 1997, 36)하며 사회통합과 국민계몽에 집중하
기도 했다. 가능하면 설득을 통해, 설득이 안 되면 강제로라도 문
화 개혁을 추진할 생각(앤드류 망고 2012, 338)이었던 만큼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하향식으로 행해졌다. 마을회관 같은 국민의
집(Halkevi)을 지역별로 개소하여 민중교육을 추진한 것이 대표적
인 예이다. 비록 지식인 계층과 농민 계층 간 이해에 온도 차가
있었을지언정 터키 사회는 새로운 사상을 키우게 되었다.
왕정이 아닌 공화제, 세습 군주인 술탄이 아닌 선거를 통한 의
회와 대통령이 등장한 20세기 초 터키의 정치변동은 사회변혁과
함께 새로운 문화코드를 이끌어냈다. 터키식 세속주의와 진보적
권위주의라는 문화코드가 사회 전반에 확산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터키식 세속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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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정치적 권위와 제도를 공식적으로 분리하기 위한 코드가
아니었다. 사회를 새롭게 설계하기 위한 실증주의적 국가 이데올
로기였다. 공공 영역에서 종교를 제거하면서 국가의 권력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자코뱅적 급진주의에 기반
을 두고, 정치가 사회를 재구성하는 능력을 강조했다(Yavuz &
Öztürk, 4).
이에 케말리스트들은 세속주의를 공화국 건국 철학의 가장 중
요한 원칙으로 취급했다. 사회문화적으로 새로운 도덕적 규범과
사고를 제시하며 이슬람교 신앙과 이슬람주의자들을 배제하고자
했다. 새로운 정신문화를 지닌 터키인의 창조이면서 터키 사회
대부분을 형성하고 있던 무슬림을 소외시키는 건국 원칙이자 문
화코드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스만 정체성’에서 벗어나도록 강요
받은 민중은 아직 무슬림 정체성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
았다. 아타튀르크는 국민계몽을 위해 대중활동을 펼쳐야 했고,
터키어와 역사를 확립해야 했으며, 서구식 교육을 확산시켜야 했
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생활과 정신의 바탕
이었던 이슬람교는 쉽게 대체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터키식 세속주의는 서구화를 근간에 둔 근대 터키공
화국으로의 전환을 가능케 한 이념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반서
구 세속주의와 아랍민족주의를 근간에 둔 다른 이슬람권 세속주
의 국가들과의 차별성을 보인다. 이러한 차별성의 핵심에는 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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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시도하고, 이탈리아 형법을 차용한 새 형법을 도입했다.
상술한 바와 같이 터키식 세속주의는 서구화에 기반한 근대화
를 이루기 위해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은 아타튀르크가 강하게
추진한 개혁사상이자 정치사상이다. 이와 같은 정치사상은 터키
사회 전반에 변화를 가져오며 뿌리 깊은 문화코드로 발전하였다.
진보적 권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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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인한 사회와 문화의 변화 가속이라는 결과 외에도 오스만제
국 시기 강력한 기제였던 공존의 유산을 와해시키고 그 가치를
저해하여 민족 내 갈등을 유발한 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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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체제의 강력한 변곡점이었다.
에르도안 정권이 정치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한 것이 변
곡점 파동의 시작이었다. 3선 총리 이후 2014년부터 대통령직을
수행해 온 에르도안은 대내외적 혼란을 이유로 내각책임제의 유
지가 아닌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의 실현을 언급했다.
2017년 4월 16일, 터키 전체 유권자의 87%가 참여하여 개헌
국민투표가 이루어졌다. 높은 국민 참여율과 대내외적 관심이 수
반된 선거는 가결되었다. 전체 유권자의 51.4%가 개헌안에 찬성
했다. 고작 138만표 차이3)였다. 이로써 비록 연정과 쿠데타로 점
철된 역사였으나, 형태는 의원내각제를 유지해 왔던 터키의 정치
체제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로의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대통
령의 권한에 고위인사(장관, 판검사위원회 일부 인원) 임명권, 의
회해산권, 행정명령 발표권, 비상사태 선포권, 예산 제안권4) 등이
추가되었다. 2018년 치러진 대선에서 에르도안은 신(新) 정치체
제의 핵심인 대통령직에 선출되었다. 그는 더욱 강력해진 정치권
력을 기반으로 현재까지 국정을 운영해오고 있다. 즉, 2017년의
개헌 국민투표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치적 승리이자 터키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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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가 종료된 2007년,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에르도안 대통령과
압둘라 귤 전 대통령은 각자의 직위를 바꾸어가며 집권을 지속
했다. 이러한 기간 동안 에르도안의 정치권력은 계속해서 강화되
었다.
마지막으로, 에르도안의 국정 운영 능력 또한 변화를 가능케
한 또 하나의 변수였다. 2003년부터 3선 총리를 연임하다가, 2014
년 터키의 첫 직선제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것은 에르
도안의 국정 운영 능력이 일종의 대중시험에 합격했다는 의미이
기도 할 것이다. 그는 국익을 중심으로 스윙 스테이트(Swing
State) 외교 노선을 추구했다(오종진 2020, 27). 국가 권력을 친이
슬람 국가주의 체제인 보수 체제로 확장하고, 내부 정치도 같은
방향으로 안정화하고자 했다. 정치가 안정화되면서 경제도 성장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2002년에 비해 2011년의 물가상승률은 세
자리에서 한 자리로 회복되었으며 GDP는 3배 이상 성장하였다.
2012년의 IMF 졸업은 집권당의 능력과 인기를 급속히 상승시켰
다. 다시 말해 국민들은 에르도안 정권의 정치 및 경제 운용 능
력을 확인하며 친이슬람 정치인이 배제 대상이 아닐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정권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 또한 부드러워
졌다고 판단된다.
이 밖에도 정치적 불안정의 해소, 연립정부로의 복귀 위험성
제거, 민·관료 엘리트 활동의 회색 지대 제거, 정치 시스템 내 이
터키식 이슬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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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와 결을 같이 하며, 정치 이슬람주의 시대의 살아있는 증인으
로 그 존재감을 공고히 하였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끄는 친이슬람 성향 정권의 성공적인 국
정 운영과 정치안정에 따른 경제안정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면서
대중은 이들을 점차 인정하게 되었다. 친이슬람 정권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각 변화는 터키 사회 내 터키식 이슬람주의라는 문화
코드의 확산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에르도안 정권의 친이슬람 성향이 늘 같은 방향을 가
리켰던 것은 아니다. 터키식 이슬람주의 문화코드가 터키 사회에
확산되는 정도 또한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2000년대와 2010년대로 그 시기를 구분하여 그 차이를 구
분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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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rupa Birliği Uyum Yasa Paketleri)을 제정하며 이슬람과 서방의
공존 가능성을 제시하려 노력했다. 사형제와 간통제 폐지, 사이
프러스 분쟁 해결 시도, 쿠르드인 차별 완화 시도, 인권 개혁안
도입, 국가안보법원 폐지가 그 예이다.
바야흐로 국내 자유화와 세계화의 맥락에서 새로운 이슬람 정
치 언어가 출현했다(Hasan Kosebalaban 2005, 1). 터키식 세속주
의를 포용하고 촉진하는 종교적으로 민감하고 세속적인 집단
(Yavuz & Öztürk, 2)을 중심으로 이슬람 속 세속주의의 형태로
이슬람의 정치화가 이루어지며 정치권이 개편되어 온 것이다.
정치권의 개편, EU 지향적 법률 등은 사회 분위기에 영향을
미쳤다. 터키 내 이슬람 자아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성공적이었
다. 2000년대 터키식 이슬람주의는 서구적 가치와 이슬람적 가치
를 동시에 포용하는 문화코드로 사회에 인식되었다. 이슬람주의
자들은 더 이상 배제의 대상이 아니었다.
터키 정치변동과 문화코드 변화 39
키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가 많다. 귤렌 조직은 현 시점에도 테러
조직으로 치부된다. 세속주의자와 온건 이슬람주의자 세력을 약
화시킨 에르도안 정권은 이슬람주의를 강화할 때 불편할 수 있
는 요소들을 사전에 해결한 셈이 되었다. 이들은 혼란한 와중에
도 2010년 개헌안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재판소의 재판관 선출과
임명 방식을 수정하는 등 민주주의적 타당성을 지속적으로 확보
했다.
국외 배경으로는 2011년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등에
서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며 본격화된 ‘아랍의 봄’을 들 수 있다.
국제적으로 터키는 이슬람과 세속주의의 양립 가능성을 증명하
는 긍정적인 이슬람 세속국가 모델로 인식되었다. 에르도안 정권
에게는 터키식 이슬람주의 정치체제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확
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에르도안 정권은 무슬림 세계
의 패권자로 인정받고자 하는 청운의 뜻을 품고 신오스만주의를
주창하며 터키식 이슬람주의의 확산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2017년 대통령 중심제로의 전환을 의제로 한 국민 투표
에서 개헌이 확정되어 정치체제가 변화하고, 2018년 에르도안이
대선에서 승리한 후 2010년대 후반의 터키식 이슬람주의는 더욱
이슬람 지향적으로 변화했다. 2019년에는 터키의 교육과정에서
진화론이 배제되기도 하였다. 2020년 7월 24일에는 ‘아야 소피아
성당’으로 알려져 있던 하기아 소피아가 오스만제국 시절과 같이
보수적 권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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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반을 기초로 이슬람 가치를 강조한 보수적인 정책들을 강력하
게 추진해 온 에르도안 대통령 역시 강력한 권력에 힘입어 종교
색 강한 보수적 권위주의를 사회문화 전반에 확산시켰다(오종진
2020, 18).
2002년부터 10여 년 동안 현실화된 정치적 안정과 소득증대는
보수적 권위주의에 대한 불만을 후순위로 미루게끔 했다. 그러나
‘선경제 후정치’ 레토릭에 밀린 불만이 불식될 수만은 없었다.
2013년 5월 31일, 이스탄불 신시가지 중심에 위치한 게지(Gezi)
공원을 전통 군대 막사와 백화점으로 개발하려는 계획에 반대하
는 진보적인 청년층과 환경론자들의 시위가 시발점이었다. 경찰
의 강경 진압에 맞서 세속주의자들이 지지를 표명했다(이희수
2013, 174).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평화
시위를 주문하며 선처를 약속했으나, 시위대는 동원된 물리력에
의해 해산되었다.
청년 세대 또는 세속주의자만이 에르도안의 보수적 권위주의
에 불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온건 이슬람주의로 분류되는
귤렌주의자들도 불만을 품었다. 상술했던 2016년 7월 귤렌 쿠데
타 미수 진압 직후부터 약 2년간, 7차례에 걸쳐 국가비상사태가
연속 선포되었다. 이 시기가 에르도안식 보수적 권위주의를 강화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에르도안 정권은 국가비상사태 권한을 근거로 대규모 구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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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나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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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문화코드에 반발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결론적으로 아타튀르크 정권과 에르도안 정권은 터키식 세속주
의와 터키식 이슬람주의라는 대비되는 문화코드를 사회에 확산시
켰다. 터키식 가치관을 문화에 편입시켰다는 점은 공통적이나, 수
행 주체와 수용 주체는 반대되었다. 에르도안 정권의 지지층은 터
키의 이슬람 보수층과 지방의 중하 계층으로 터키식 세속주의에
대한 반발심을 안고 터키식 이슬람주의의 형성에 열광했다.
권위주의를 사회에 확산시켰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지닌다.
단, 진보적 권위주의와 보수적 권위주의라는 종교를 바라보는 시
각, 엘리트중심 하향식 국정 운영과 선거로 검증된 민중의 지지
를 받는 상향식 국정 운영이라는 대중주의 실현 방식에서 차이
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 부분 경직된 사회 분위기를
형성한 것은 동일하다.
에르도안의 권위주의는 아타튀르크 권위주의에 빚을 지고 있
다는 점도 유의미하다. 외부 위험 요소를 대비하여 내부 결집을
유도하고 성공해낸, 강력한 리더십을 지닌 지도자를 경험한 국민
이므로 에르도안 패권에 대한 수긍이 수월했을 수 있다. 유목민족
의 칸들과 유사한 권력메커니즘이 적용된 결과였다. 강력한 리더
십이 있는 인물 중심 정치가 전형적인 유목국가 정치의 특징이라
면 터키는 오스만제국의 유지를 도왔던 체제와 인물, 두 요소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인물이 더 중시된다는
터키 정치변동과 문화코드 변화 47
참고문헌
[국내문헌]
[국외문헌]
터키 정치변동과 문화코드 변화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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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District of Columbia,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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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ÜRKİYE CUMHURİYETİ ANAYASASI(터키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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