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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진*·강지선**

터키 정치변동과
문화코드 변화 ***

Ⅰ. 들어가는 말 1)

2014년 8월 10일, 총리직을 3차례 연임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


르도안(Recep Tayyip Erdoğan) 수상은 터키공화국 역사상 국민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새로운 터키’
를 기치로 내걸며 선출된 에르도안 대통령은 첫 직선제 대통령

* 한국외국어대학교 터키 아제르바이잔어과 교수
** 한국외국어대학교 터키-중앙아시아-몽골학과 석사과정
*** 이 글은 “리더십과 정치문화변동: 아타튀르크와 에르도안을 중심으로”, 「중동문제연구」,
20권, 2호, 2021”을 수정, 보완한 것임.

터키 정치변동과 문화코드 변화 15
당선 수락 연설에서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 개헌을 시사했다. 터
키 국내정치의 현안으로 의원내각제 폐기와 대통령제 도입이 부
상했다(김대성 2017, 16). 글로벌 언론은 그를 ‘21세기 술탄’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2017년 4월 16일,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 중심제로의 헌법 개
정을 안건으로 둔 국민투표가 진행되었다. 개헌은 52%의 찬성표
를 얻어 가결되었다. 이듬해 8월, 조기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에르도안은 두 선거에서 모두 승리를 거머쥐었
다. 글로벌 언론은 대통령의 책임과 행정적 의무를 모두 위임받
은 에르도안이 ‘제왕적 대통령제’ 실현에 성공하며 ‘터키의 독재
자’에 등극했다고 표현했다. 아울러 세계 언론은 에르도안 대통
령과 집권 여당인 정의개발당(AKP, Adalet ve Kalkınma Partisi)이
강력한 정권 형성과 함께 추진해 온 보수적 정책을 근거로 에르
도안 정부를 ‘이슬람주의 정부’라고 평가하며 현 대통령을 ‘터키
의 술탄’, ‘술탄 대통령’ 등으로 수식한다. 이처럼 정치체제의 변
동은 에르도안 대통령의 수식어를 변화시켰다.
더불어 터키 사회의 문화코드에도 가공할 만한 변화를 불러일
으켰다. 의회해산권까지 위임된 강력한 대통령제는 에르도안 정
권의 방향대로 정책 기조가 설정되고, 수행될 수 있는 바탕을 마
련했다. 이슬람교 가치를 대변하는 보수주의가 힘을 얻기 시작했
다. 터키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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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atürk)가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주장하며 국가 기본 원칙으로
세워 둔 터키식 세속주의(터키어 Laiklik)의 변형이 시도되었다.
이슬람 가치에 부합하는 사회문화의 변화가 가속되는 시점이 되
었다고 할 수 있다.1)
터키공화국은 이러한 극적인 정치변동을 이전에도 여러 번 경
험한 바 있다. 터키공화국의 근현대사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도 그러하였듯 격동적이다. 그 경험들이 모여 지금 터키
공화국의 정치체제와 문화코드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상술하
였던 1923년 터키공화국 건국 시점의 정치만 해도 제국에서 공
화국으로, 절대왕정에서 강력한 대통령이 존재하는 의원내각제로
지각변동을 겪었다. 터키 독립투쟁의 지도자이자 건국의 아버지
인 아타튀르크는 공화인민당(CHP, Cumhuriyet Halk Partisi)이라
는 유일 정당을 창당하고, 1대~4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1946년 다당제가 허용되어 민주당(DP, Demokrat Parti)이 창당
되었다. 1950년이 되자 CHP 독재체제가 막을 내렸다. 민주당 창
당 이래로 군소정당이 난립했다. 연정이 지속(오종진 2017, 62)되
며 여러 혼란이 나타났다. 평균 3~4개 정당이 연정함으로써 정치
혼란이 발생했고, 각종 이권단체가 주장을 남발하여 사회 혼란이

1) 본 시각의 배경 및 내용에 관해서는 다음 논문들을 참조하시오(M. Hakan Yavuz, 2019;


M. Hakan Yavuz & Ahmet Erdi Öztürk, 2019; İsmail Akyüz, 2016; 이희수, 2013;
한구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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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기되었으며,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 간 갈등이 발생하여 국론
이 분열되었다. 아타튀르크 이래 공화국과 세속주의의 보호자로
여겨지던 군부는 국론 통합과 정국 안정을 강조하며 1980년까지
총 3번의 쿠데타를 일으키며 정치에 개입했다. 특히 1980년 쿠데
타의 주도자인 케난 에브렌(Kenan Evren) 합참의장은 대통령으
로 취임해 대통령 권한이 강화된 이원정부제(오종진 2018, 300)를
실시하기도 했다.
군부 쿠데타와 민정 이양이 반복되던 시기를 거쳐, 1990년대
초에는 ‘터키식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조어될 만큼 정치가 안정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연립정부라는 한계를 극복하
지 못하였으므로 지속적인 정책을 입안할 동력이 충분하지 않았
다. 더불어 터키식 세속주의를 포용하여 촉진하고자 하면서도 종
교적으로 민감하고 세속적인 집단(Yavuz & Öztürk 2019, 2;
Yavuz 2003; Davison 2003; Warhola and Bezci 2010)을 중심으로
이슬람 속 세속주의의 형태로 이슬람의 정치화가 이루어지며 정
치권이 개편되고 있었다.
이후 터키공화국은 1994년 경제위기, 1999년 대지진을 경험하
며 심갂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실업률이 증가하고 기업이
파산하였으며 국민총생산이 감소했다. 국민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 줄 강력하면서도 청렴한 정치인과 정당을 원하기 시작했
다. 이때, ‘국익 중시’라는 표어 아래 에르도안 현 대통령이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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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당(AKP)을 창당한다. IMF 구제금융을 받기 시작한 2002년,
에르도안은 신선하고 청렴하며 개혁적인 이미지를 앞세워 선거
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 수십 년의 연정 역사에서 처음으
로 단독정당이 의석수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정부가 수립된다.
단독정당 겸 집권 여당이 된 AKP는 현대화된 정치 이슬람의 정
체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정체성은 2010년대가 되면서
부터 점차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정치적 도전과 위기가
있었지만 AKP는 다양한 선거를 통하여 국민적 지지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하였다. 단독 정부가 힘들어지자 AKP는
2018년 조기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우파 겸 민족주의 정당인 민
족주의행동당(MHP, Milliyetçi Hareket Partisi)과 선거연대를 꾸려
전체 득표율의 과반을 유지하며 현재까지도 집권당의 입지를 지
속하고 있다.
정치변동이 발생하고 변동된 체제에 부합하는 정책이 펼쳐질
때마다 터키 사회와 문화 역시 변화를 겪었다. 사회의 핵심인 문
화코드를 변화시키는 주요 원인 중 하나로서 정치변동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본 글은 공화국 건국 초기 아
타튀르크 정권과 건국 100년을 마주한 에르도안 현 정권의 정치
체제와 문화코드를 비교함으로써 정치변동이 사회 전반을 관통
하는 문화코드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글은 문헌 자료들을 기초로 터키 정권의 기초 가치 체계를

터키 정치변동과 문화코드 변화 19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정치체제와 문화코드를 비교 및 분석해
시사점을 찾고자 했다. 먼저, 역사 순서 속에서 사실 및 발전 과
정을 정리하는 통시적 관점을 중심으로 각 정권의 형성 배경을
고찰하고, 각 정권이 탄생하게 된 시대적 배경과 대내외적 상황
에 대한 정치사적 설명과 분석을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관점에서의 순차적 분석은 각 정권이 정치체제를 어떻게 변동시
켰는지, 변동된 정치체제가 어떠한 문화코드를 창조하여 사회 전
반에 확산시켰는지를 알 수 있게 할 것이다. 문화코드는 비단 해
당 정권의 대표적 키워드에 그치지 않으며 당시의 터키공화국과
동시대의 터키공화국을 형성하는 주요 요소라 할 수 있다. 따라
서 ‘정권별 정치체제 변동과 문화코드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는
본 연구는 정치·역사·사회·문화를 아우르는 통합적 분석이면서도
터키공화국의 특정 단면을 설명하기 위한 단초로 적용 가능하다
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체계화된 정리를 통
해 각 문화코드가 사회문화의 변화에 미친 영향을 정치·역사·사
회·문화를 포괄하는 통섭적 시각에서 포착해 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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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정권과 정치문화코드 변동

터키공화국의 전신인 오스만제국은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유


럽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지닌 국가였다. 넓은 영토만큼 민족 구
성도 다양했는데, 튀르크 민족을 비롯해 20여 개 민족(이은정
2013, 244)에 달했다. 다민족·다문화 정책과 정복 정책을 통해 수
백 년 동안 번영했던 오스만제국은 19세기에 들어 쇠락하기 시
작한다. 강력해진 유럽제국주의의 위협, 연속된 전투 패배와 그
에 따른 영토손실, 산업화와 자본주의라는 급격한 세계질서 변화
에 따른 경제위기, 프랑스혁명이 퍼뜨린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사
상이 피지배 민족에게 불러일으킨 독립을 향한 열망 등이 쇠락
의 원인이었다.
오스만제국 술탄과 지식인들은 여러 방식으로 국력 회복을 시
도했다. 사상의 흐름 속에서도 그 노력이 엿보인다. 오스만제국
민이라는 공통 정체성을 창조하여 사회 안정을 꾀하고자 했던
오스만주의가 선포되었으나 확산에는 실패하였다. 이후 서구 발
전상을 따라 근대화를 이루자는 동시대의 서구화주의, 튀르크 민
족 간 통합을 추구한 범튀르크주의, 이슬람의 깃발 아래 신자 간
통합과 이슬람교적 가치를 추구한 이슬람주의 사상이 주창되었
다. 튀르크인이 아닌 터키인만의 민족주의를 주장한 지식인들도
있었다. 군인이었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이하 아타튀르크)

터키 정치변동과 문화코드 변화 21
도 그중 한 명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제국이 패망하여 국가의 주권이 위
험에 처하자, 아타튀르크는 터키 민족만을 위한 국가를 건국하겠
다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치러진
독립전쟁을 통해 오스만 의회가 아닌 아타튀르크와 그가 이끄는
대국민의회가 대내외적 대표성을 인정받았다. 1923년 10월 23일,
술탄의 지휘 아래 이슬람교에 국가의 중심 가치를 두고 다민족·
다문화 사회를 유지해 온 오스만제국은 공화제 체제 아래 세속
주의에 국가의 중심 가치를 두고 터키 민족만을 위한 사회를 구
성하고자 하는 터키공화국으로 변모한다. 그 중심에는 터키 민족
의 지도자로 급부상한 아타튀르크가 있었다.
오스만제국에서 터키공화국으로의 변혁은 가공할 만한 사회문
화적 변화를 가져왔다. 변화의 가장 큰 원인은 국가의 주권이 술
탄이 아닌 국민에게 있다는 공화제에서 비롯되었다. 아타튀르크
가 국민에게 익숙하지 않은 공화제를 공고히 하고자 각종 개혁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소위 ‘혁명’이라고까지 불리며 연구되어
온 아타튀르크의 개혁정책은 강력한 리더십과 정치권력을 기반
으로 실행되었다. 따라서 터키공화국 초기 문화코드 변화상을 이
해하기 위해서는 아타튀르크가 구현한 정치체제와 개혁정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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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3년 공화국 건국과 정치체제 변동

아타튀르크의 정치체제와 개혁정책은 후대에 이르러 ‘케말리


즘(Kemalism)’ 혹은 ‘아타튀르크주의’라 명명된, 그가 주장했던 6
가지 원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여 실행되었다.
아타튀르크를 비롯한 신생 터키공화국 건국 중심 세력은 오스
만제국 시절, 청년 오스만인과 청년 터키인을 계승하며 적극적인
개혁을 추구한 서구지향형 지식인들이었다.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은 다른 지식인들처럼 아타튀르크 역시 ‘자유주의’가 행정부에
서 더 중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술탄 등 확고한 지배
계급만의 자유가 아닌 국민의 정치적 자유를 반영할 수 있는 공
화제가 서구화된 근대국가에 가장 적합한 정치체제라고 여겼다.
그의 상상은 1923년 10월 23일,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주의가 반영된 공화국 선언을 통해 현실화 되었다.
아타튀르크의 공화국 선언은 국가 주권 제도화와 다름없었다.
이후 그는 간선을 통해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그러나 건국 초기, 독립전쟁을 거치며 형성된 아타튀르크의 리더
십은 공고하며 매우 강력했다. 국민들은 오스만제국민의 신민적
사고에서 탈피할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고, 신생 국가는 아직
대내외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아타튀르크는 어렵게 얻어낸 독립
을 보전하고 신생 공화국을 근대화 및 안정화하기 위해 시대가
부여한 강력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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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타파 케말 사령관이 아닌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대통
령은 고립외교노선을 추구하며 내부정치를 진보적으로 지휘하고,
세속주의를 기초로 한 개혁과 개방을 급진적으로 추진하였다. 칼
리프제 폐지, 정교분리, 정당정치 확립, 페즈 착용 금지 등 의복
제한과 일부다처제 폐지, 여성참정권 부여 등 양성평등 정책(우
덕찬 2003, 163-167) 추진을 통해 터키 사회는 새로운 옷을 입었
다.
또한 경제력은 훈련된 인력, 즉 문화에 의존한다는 견해를 옹
호(Bozkurt Güvenç 1997, 36)하며 사회통합과 국민계몽에 집중하
기도 했다. 가능하면 설득을 통해, 설득이 안 되면 강제로라도 문
화 개혁을 추진할 생각(앤드류 망고 2012, 338)이었던 만큼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하향식으로 행해졌다. 마을회관 같은 국민의
집(Halkevi)을 지역별로 개소하여 민중교육을 추진한 것이 대표적
인 예이다. 비록 지식인 계층과 농민 계층 간 이해에 온도 차가
있었을지언정 터키 사회는 새로운 사상을 키우게 되었다.
왕정이 아닌 공화제, 세습 군주인 술탄이 아닌 선거를 통한 의
회와 대통령이 등장한 20세기 초 터키의 정치변동은 사회변혁과
함께 새로운 문화코드를 이끌어냈다. 터키식 세속주의와 진보적
권위주의라는 문화코드가 사회 전반에 확산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24 투르크-알타이권의 문화코드, 기업문화와 이문화관리


2. 새로운 문화코드의 출현: 터키식 세속주의, 진보적 권위주의

터키식 세속주의

터키식 세속주의는 프랑스식 강경 세속주의(laïcité)의 영향을


받았지만, 개별적 맥락에서 독자적인 터키만의 세속주의로 발전
되었다. 이는 미국식 세속주의(Secularism)와도 다르다.
1937년에 이르러 터키공화국 헌법에 불변의 국가 원칙으로 기
재된 세속주의는 “신성한 종교적 감정은 국정 및 정치와 혼재할
수 없으며(서문)”, “모든 사람은 양심, 종교적 신념 및 신념의 자
유를 가진다(제24조).”고 표현되어 있다. 특히 제10조에는 "언어,
인종, 피부색, 성별, 정치적 사상, 철학적 신념, 종교, 종파 및 이
와 유사한 이유로 차별 없이 법 앞에서 평등”해야 한다는 자세한
해석이 등장한다. 단순한 정교분리가 아닌 사회 전반의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인 것이다. 이로써 터키의 국가 행정은 종교
적 규칙에 의존하지 않으며, 개인은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갖고,
국가는 국민의 예배 권리를 보호하는 형태를 띤다.
터키식 세속주의는 유럽의 세속주의와도, 다른 이슬람 국가의
세속주의와도 확연히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터키식 세속주의
가 상향식(bottom-up)으로 등장한 유럽의 세속주의와 달리 하향
식으로 형성되고 지시되었다는 사실이다(Öztürk 2016, 4). 오스만
제국 잔재를 청산하는 등 시대적 변혁을 주도해야 했던 아타튀
르크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수용된 터키의 세속주의는 단순히

터키 정치변동과 문화코드 변화 25
종교적, 정치적 권위와 제도를 공식적으로 분리하기 위한 코드가
아니었다. 사회를 새롭게 설계하기 위한 실증주의적 국가 이데올
로기였다. 공공 영역에서 종교를 제거하면서 국가의 권력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자코뱅적 급진주의에 기반
을 두고, 정치가 사회를 재구성하는 능력을 강조했다(Yavuz &
Öztürk, 4).
이에 케말리스트들은 세속주의를 공화국 건국 철학의 가장 중
요한 원칙으로 취급했다. 사회문화적으로 새로운 도덕적 규범과
사고를 제시하며 이슬람교 신앙과 이슬람주의자들을 배제하고자
했다. 새로운 정신문화를 지닌 터키인의 창조이면서 터키 사회
대부분을 형성하고 있던 무슬림을 소외시키는 건국 원칙이자 문
화코드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스만 정체성’에서 벗어나도록 강요
받은 민중은 아직 무슬림 정체성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
았다. 아타튀르크는 국민계몽을 위해 대중활동을 펼쳐야 했고,
터키어와 역사를 확립해야 했으며, 서구식 교육을 확산시켜야 했
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생활과 정신의 바탕
이었던 이슬람교는 쉽게 대체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터키식 세속주의는 서구화를 근간에 둔 근대 터키공
화국으로의 전환을 가능케 한 이념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반서
구 세속주의와 아랍민족주의를 근간에 둔 다른 이슬람권 세속주
의 국가들과의 차별성을 보인다. 이러한 차별성의 핵심에는 아타

26 투르크-알타이권의 문화코드, 기업문화와 이문화관리


튀르크의 근대 문명을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그는 근대 문명에
환상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나라가 생존하는 데 필요
한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문명은 가장 훌륭하고 가장
진실한 체제였다. 심지어 “문명사회에서 죽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이슬람 성인들의 성지를
언급하기도 했다(앤드류 망고 2012, 394).
이슬람문화에서 벗어나 서구적 문명을 추구하려는 아타튀르크
의 세속주의 개혁 노력은 의회 설립 후 공교육을 단일화하며 종
교 학교를 폐지한 것, 종교 관련 기관 및 제도를 폐지한 것, 1924
년 칼리프제를 일방적으로 폐지한 것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특히
칼리프제 폐지는 터키 내 개혁 수행과 달리 전 세계의 무슬림들
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이었다. 1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슬람
정체성, 힘, 정통성의 강력한 상징(Graham E. Fuller 2007, 26)으
로 이슬람 세계에서 최고의 종교적 권위를 누렸던 칼리프가 아
타튀르크의 결정으로 인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이 밖에도 근대 문명을 국민들의 일상에 적용하기 위한 세속
적인 법 제정이 지속되었다. 당시 이슬람교도를 상징하던 페즈
착용을 금지했다. 데르비시 교단의 모든 시설과 묘역을 폐쇄하고
성직자를 해임했다. 이슬람 성직자들의 터번 및 예복 착용을 금
지했다. 이슬람력을 폐지하고 기독교력을 사용했다. 샤리아를 폐
지하고 스위스 법을 모방한 새 민법을 통과시켜 여성의 지위 향

터키 정치변동과 문화코드 변화 27
상을 시도하고, 이탈리아 형법을 차용한 새 형법을 도입했다.
상술한 바와 같이 터키식 세속주의는 서구화에 기반한 근대화
를 이루기 위해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은 아타튀르크가 강하게
추진한 개혁사상이자 정치사상이다. 이와 같은 정치사상은 터키
사회 전반에 변화를 가져오며 뿌리 깊은 문화코드로 발전하였다.

진보적 권위주의

아타튀르크 정권의 두 번째 문화코드는 ‘진보적 권위주의’이다.


오랜 전쟁을 통해 얻은 귀한 독립이었으므로, 아타튀르크는 “국
내에 평화, 세계에 평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터키공화국의 재건
을 우선시했다(오종진 2020, 21).
터키의 진보적 권위주의는 세속주의적 권위주의를 의미한다.
상술한 세속주의 정책을 아타튀르크 대통령의 강력한 힘과 신속
한 결정으로 수행해나간 것이 그 예이다. CHP 일당독재체제의
지원으로 가능했던 개혁이었다. 일당독재체제와 강력한 대통령의
통치는 필연적으로 권위주의로 이어졌다. 의회가 존재하였으나,
CHP 일당독재체제 하에 아타튀르크 대통령의 리더십에 반기를
드는 이는 적었다.
비록 아타튀르크는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여 민주주의가 실현
되고 정치적 투쟁을 통해 국가의 이익을 공동으로 모색할 수 있
도록 의회에 야당이 존재하기를 염원하였으나, 그가 원했던 야당

28 투르크-알타이권의 문화코드, 기업문화와 이문화관리


의 출현과 다당제의 실현은 아타튀르크 사후 1946년이 되어서야
가능해졌다. 1924년 창당된 진보공화당(Terakkiperver Cumhuriyet
Fırkası)은 1925년 발생한 쉐이흐 사이트 반란2)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1년 만에 해산되었다. 1930년 아타튀르크가 친구인 알리
페트히 오크야르(A. Fethi Okyar)에게 부탁하여 창당된 자유공화
당(Serbest Cumhuriyet Fırkası) 또한 개혁 반대 인물의 영입을 이
유로 자체 해산한다. 대항마 없이 지속되던 일당독재체제는 이미
강력한 대통령의 권위주의를 더더욱 강화했고, 권위주의를 유화
시킬 다른 시각을 가진 집단이 성장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케말리즘 6대 원칙에 천명되지 않았던 권위주의로의 귀
속은 공적 영역을 지배하려는 권위주의 국가 시스템의 출현과도
연관되었다. 일부 이슬람 지식인과 민중들은 세속주의뿐 아니라
진보적 권위주의에 반발하여 여러 차례 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것은 터키식 세속주의와 진보적 권위주의가 기반으로 하고 있
던 자코뱅적 급진주의의 결과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진보적 권위주의 문화코드는 강력한 정책 실행으

2) 이슬람 낙쉬반디 교단의 지도자 겸 쿠르드 민족주의자 비밀조직인 ‘Azadi(자유)’


회원인 쉐이흐 사이트의 주도로 발생한 쿠르드족 반란을 뜻한다. 당시 진보공화당
총재였던 카즘 카라베키르에게 아타튀르크의 정당 해산 지시를 전한 사람은 페트
히 수상이었다. 그는 5년 후 두 번째 야당의 창당인이 된다.

터키 정치변동과 문화코드 변화 29
로 인한 사회와 문화의 변화 가속이라는 결과 외에도 오스만제
국 시기 강력한 기제였던 공존의 유산을 와해시키고 그 가치를
저해하여 민족 내 갈등을 유발한 셈이 되었다.

Ⅲ.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정권과 정치문화코드 변동

서론에 서술한 바와 같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중앙정부 정권을 확보하기 이전의 터키 정치는 매우 혼란스러웠
다. 아타튀르크와 CHP의 일당독재체제는 1946년 다당제 허용을
거쳐 1950년 막을 내렸다. 다당제 허용 후 군소정당이 난립하고
연정이 지속되었다. 사회 혼란이 야기되고 국론이 분열되었다.
군부는 국론 통합과 정국 안정을 강조하며 총 3번의 쿠데타
(1960, 1971, 1980)를 일으켰다. 군부 쿠데타와 민정 이양이 반복
되던 시기를 거쳐, 1990년대 초에는 정치가 안정되는 것처럼 보
였으나 여전히 연립정부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으므로 강
력하고 지속적인 정책을 입안할 동력은 충분하지 않았다.
앞선 언급한 바처럼, 1990년대 터키는 경제 위기, 대지진을 경
험하는 등 경제적 혼란과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 줄 강력하면서도 청렴한 정치인과 정당

30 투르크-알타이권의 문화코드, 기업문화와 이문화관리


을 바라는 국민의 염원이 목도되었다. 이러한 흐름을 이용해 에
르도안은 오스만제국 말 공화국 건국 초기처럼 국익 중시라는
표어 아래 AKP를 창당했다. AKP는 당규 4조에서 당의 목적을
설명했는데, 법을 중시하며 민주적 절차를 통해 인간의 행복과
평안을 추구한다고 밝혔지만 종교적 색채는 전혀 드러내지 않았
다(김대성 2008, 10).
IMF 구제금융을 받기 시작한 2002년, 이스탄불 시장이던 에르
도안은 집권에 도전하며 청렴하고 개혁적인 이미지를 내세웠다.
변화를 향한 국민적 열망을 읽었던 에르도안과 AKP는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일당독재체제와 연정의 역사를 거쳐 단독정당
이 의원석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정부가 수립되었다.
2002년, 이슬람주의 정당인 AKP의 집권은 민주주의 틀 안에
서 선거라는 도구를 활용하여 이루어졌다. 적법한 절차를 통해
단독정당 겸 집권 여당으로 단독정부를 수립할 권한을 얻게 된
것이다. 20년이 지난 2021년에도 에르도안 대통령은 여전히 터키
정치사에서 ‘선거의 제왕’이라 평가된다(오종진 2018, 290).

1. 2002년 AKP 단독정부 수립과 정치체제 변동

2002년 이후로 에르도안은 약 20년째 정권을 유지 중이다. 그


는 여러 정치적 도전과 난제를 선거라는 돌파구를 통해 해결해
왔다(오종진 2018, 290). 특히 2017년에 실행된 개헌 국민투표는

터키 정치변동과 문화코드 변화 31
정치체제의 강력한 변곡점이었다.
에르도안 정권이 정치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한 것이 변
곡점 파동의 시작이었다. 3선 총리 이후 2014년부터 대통령직을
수행해 온 에르도안은 대내외적 혼란을 이유로 내각책임제의 유
지가 아닌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의 실현을 언급했다.
2017년 4월 16일, 터키 전체 유권자의 87%가 참여하여 개헌
국민투표가 이루어졌다. 높은 국민 참여율과 대내외적 관심이 수
반된 선거는 가결되었다. 전체 유권자의 51.4%가 개헌안에 찬성
했다. 고작 138만표 차이3)였다. 이로써 비록 연정과 쿠데타로 점
철된 역사였으나, 형태는 의원내각제를 유지해 왔던 터키의 정치
체제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로의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대통
령의 권한에 고위인사(장관, 판검사위원회 일부 인원) 임명권, 의
회해산권, 행정명령 발표권, 비상사태 선포권, 예산 제안권4) 등이
추가되었다. 2018년 치러진 대선에서 에르도안은 신(新) 정치체
제의 핵심인 대통령직에 선출되었다. 그는 더욱 강력해진 정치권
력을 기반으로 현재까지 국정을 운영해오고 있다. 즉, 2017년의
개헌 국민투표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치적 승리이자 터키 사회

3) “NİSAN 2017 REFERANDUM SONUÇLARI”,


https://www.sabah.com.tr/secim/16-nisan-2017-referandum/ (검색일: 2021.5.31.)
4) “A'dan Z'ye 16 Nisan referandumu: Madde madde yeni anayasa”,
https://www.haberturk.com/gundem/haber/1427214-adan-zye-16-nisan-referandumu-
madde-madde-yeni-anayasa (검색일: 2021.6.13.)

32 투르크-알타이권의 문화코드, 기업문화와 이문화관리


문화 변화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는 다음과 같은 요
소들이 주요 변수로 작용하였다고 생각된다.
먼저, 2016년 7월 15일 시도되었다가 실패한 ‘페툴라 귤렌
(Fetullah Gülen)의 쿠데타 미수’가 대통령제 실행 논의의 물꼬를
터 주었다. 터키에서 대통령제 논의의 역사는 1970년대가 시작이
었으나, 연이은 갑론을박으로 전망은 밝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해
당 사건으로 인해 타협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다양한 사회 및 정
치 집단 간 소통이 증진되었으며, 정당 간 협력이 강화되었다. 귤
렌 측 인사들이 관료 체계 내에 너무도 많이 자리를 잡고 있어
국가적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결과도 발표되었다. 마침내 여당
인 AKP와 민족주의 계열 우파 정당인 MHP가 같은 노선에 섰
다. MHP 의장의 연설을 통해 “터키 공화국의 생존을 위한 투쟁
이 개헌 국민투표와 연계되어 있다.”는 메시지가 던져졌다
(DURAN & MİŞ 2016, 23-24).
2002년 선거 이후 에르도안 대통령이 압둘라 귤(Abdullah Gül)
전 대통령과 공고한 권력 체제를 꾸준히 형성해 온 것도 하나의
변수였다. 에르도안 대통령과 압둘라 귤 전 대통령은 정치적 동
반자이자 서로의 지지자였다. 에르도안은 2003년부터 의원내각제
의 총리로서 최고의 책임을 부과받으며 의회 내외의 신임을 얻
었다. 압둘라 귤 전 대통령은 AKP 당선 이전부터 직무를 수행해
온 아흐메트 네즈데트 세제르(Ahmet Necdet Sezer) 전 대통령의

터키 정치변동과 문화코드 변화 33
임기가 종료된 2007년,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에르도안 대통령과
압둘라 귤 전 대통령은 각자의 직위를 바꾸어가며 집권을 지속
했다. 이러한 기간 동안 에르도안의 정치권력은 계속해서 강화되
었다.
마지막으로, 에르도안의 국정 운영 능력 또한 변화를 가능케
한 또 하나의 변수였다. 2003년부터 3선 총리를 연임하다가, 2014
년 터키의 첫 직선제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것은 에르
도안의 국정 운영 능력이 일종의 대중시험에 합격했다는 의미이
기도 할 것이다. 그는 국익을 중심으로 스윙 스테이트(Swing
State) 외교 노선을 추구했다(오종진 2020, 27). 국가 권력을 친이
슬람 국가주의 체제인 보수 체제로 확장하고, 내부 정치도 같은
방향으로 안정화하고자 했다. 정치가 안정화되면서 경제도 성장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2002년에 비해 2011년의 물가상승률은 세
자리에서 한 자리로 회복되었으며 GDP는 3배 이상 성장하였다.
2012년의 IMF 졸업은 집권당의 능력과 인기를 급속히 상승시켰
다. 다시 말해 국민들은 에르도안 정권의 정치 및 경제 운용 능
력을 확인하며 친이슬람 정치인이 배제 대상이 아닐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정권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 또한 부드러워
졌다고 판단된다.
이 밖에도 정치적 불안정의 해소, 연립정부로의 복귀 위험성
제거, 민·관료 엘리트 활동의 회색 지대 제거, 정치 시스템 내 이

34 투르크-알타이권의 문화코드, 기업문화와 이문화관리


원적 합법성 문제 해결, 민주주의 강화, 행정부와 입법부의 분리,
신속한 의사결정을 위한 행정부의 책임 확대 및 정당성 부여 등
이 대통령 중심제 추진 주장의 근거로 활용되었다(DURAN &
MİŞ, 18).

2. 비주류 문화코드의 부활: 터키식 이슬람주의와 보수적 권위주의

터키식 이슬람주의

언론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을 ‘21세기 술탄’이라 표기하는 데에


는 지배 구조와 강력한 정치권력을 비롯한 여러 이유가 있으나,
에르도안 정권의 친이슬람 성향이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치적 뿌리가 이슬람 정당이었다는 점에
서부터 정권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다. 1960년 쿠데타 이후 터키
정치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이슬람성향 정당들이 창당되기 시작
했다. 에르도안은 1980년 쿠데타 이후 군부에 의해 해산된, 이슬
람성향의 국가구제당(Millî Selamet Partisi, 1972-1981)에 입당해 정
치 생활을 시작했다. 국가구제당 해산 이후 그는 복지당(Refah
Partisi, 1983-1998), 미덕당(Fazilet Partisi, 1997~2001)을 거친다. 복
지당과 미덕당 모두 헌법재판소의 위헌 정당 판결을 통해 해산
된다. 이후 국가구제당을 계승해 온 이슬람 정당 계열은 구파와
신파로 분열되는데, 에르도안 대통령은 압둘라 귤 전 대통령과
함께 신파에 속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일부 이슬람 정당의 역

터키 정치변동과 문화코드 변화 35
사와 결을 같이 하며, 정치 이슬람주의 시대의 살아있는 증인으
로 그 존재감을 공고히 하였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끄는 친이슬람 성향 정권의 성공적인 국
정 운영과 정치안정에 따른 경제안정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면서
대중은 이들을 점차 인정하게 되었다. 친이슬람 정권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각 변화는 터키 사회 내 터키식 이슬람주의라는 문화
코드의 확산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에르도안 정권의 친이슬람 성향이 늘 같은 방향을 가
리켰던 것은 아니다. 터키식 이슬람주의 문화코드가 터키 사회에
확산되는 정도 또한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2000년대와 2010년대로 그 시기를 구분하여 그 차이를 구
분해보고자 한다.

1) AKP 1기(2002~2010): 서구를 포용하는 이슬람주의


2002년, 단독정당 겸 집권 여당이 된 AKP는 이슬람 계열 신파
정당으로서 현대적인 정치 이슬람 정체성을 보유한 정당이었다.
심지어 당 대표를 맡은 에르도안은 ‘종교주의, 인종주의 및 지역
주의’를 배격한다고 발표한 바 있었다(김대성 2008, 8). AKP의 인
적 네트워크는 이전 이슬람 정당들로부터 다수 계승되었으나,
2000년대에 들어선 조직의 지향점에는 변별점이 있었던 것이다.
AKP의 당수였던 에르도안은 이슬람의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36 투르크-알타이권의 문화코드, 기업문화와 이문화관리


그대로 유지하는 데 많은 관심을 두었다. 1990년대 이슬람의 정
치화가 교육적, 상업적, 연대적 네트워크를 가진 이슬람의 사회
적 기반을 어떻게 붕괴시켰는지를 생생히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1996년 밀리예트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민주주의는 목표가 아니
라 수단”5)이라고 말한 바 있었던 그는 세계화 시대에 이슬람주
의를 포함한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인정하며 친서방주의와 서구
화를 재고하기 시작했다. 에르도안은 세계화가 이슬람주의의 사
회적 기반인 전통 사회를 잠식하여 이슬람교를 약화시킨다는 기
존의 믿음 대신, 민주주의, 인권 및 법치주의라는 서구적 가치가
오히려 이슬람주의를 더 강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현대
정치의 보편적인 언어가 그가 생각하는 이슬람주의와 더 밀접하
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즉, 이슬람주의 개념의 다원
화였다. 이들의 이념은 역설적으로 이슬람의 정치적 정체성의 존
재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였다(ihsan D. Dağı 2005, 30-31). 터키
식 이슬람주의의 정치적, 사회적 출현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에르도안 정권은 1999년 터키의 EU 가입후보국 지위가
인정된 후 선출되었기 때문에, 중동과 이슬람세력의 구심점을 자
처하면서도 전통적인 반서구적 입장을 탈피하고자 했다. 특히
2003년~2004년 중 EU 가입 노력 차원에서 EU 지향적 법률

5) “Pazar Sohbeti”, http://gazetearsivi.milliyet.com.tr/Arsiv/1996/07/14” (검색일: 2021.6.17.)

터키 정치변동과 문화코드 변화 37
(Avrupa Birliği Uyum Yasa Paketleri)을 제정하며 이슬람과 서방의
공존 가능성을 제시하려 노력했다. 사형제와 간통제 폐지, 사이
프러스 분쟁 해결 시도, 쿠르드인 차별 완화 시도, 인권 개혁안
도입, 국가안보법원 폐지가 그 예이다.
바야흐로 국내 자유화와 세계화의 맥락에서 새로운 이슬람 정
치 언어가 출현했다(Hasan Kosebalaban 2005, 1). 터키식 세속주
의를 포용하고 촉진하는 종교적으로 민감하고 세속적인 집단
(Yavuz & Öztürk, 2)을 중심으로 이슬람 속 세속주의의 형태로
이슬람의 정치화가 이루어지며 정치권이 개편되어 온 것이다.
정치권의 개편, EU 지향적 법률 등은 사회 분위기에 영향을
미쳤다. 터키 내 이슬람 자아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성공적이었
다. 2000년대 터키식 이슬람주의는 서구적 가치와 이슬람적 가치
를 동시에 포용하는 문화코드로 사회에 인식되었다. 이슬람주의
자들은 더 이상 배제의 대상이 아니었다.

2) AKP 2기(2010~현재): 이슬람 지향성이 강화된 이슬람주의


에르도안 정권의 정치적 이슬람 정체성은 2010년대에 들어 이
전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슬람 지향성이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여성의 히잡 착용 금지법 폐지이다. 공화국
건국 이후 아타튀르크 정권이 하향식으로 세속주의 개혁을 시도
하며 페즈 착용을 금지했던 법과 반대되는 조치라 할 수 있다.

38 투르크-알타이권의 문화코드, 기업문화와 이문화관리


2008년, 대학 내 여성의 히잡 착용 인정 법안이 가결되었다. 2013
년에는 90년간 유지되어 온 여성 공무원의 히잡 착용 금지가 해
제되었다. 2017년에는 여군의 히잡 착용 금지가 철폐되기도 하였
다. 이슬람을 생활종교로 보는 시각에서 히잡 착용 자유화는 관
습적인 생활양식을 인정하는 상향식 조치이자 생활에 있어 필요
한 시도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세속주의라는 거름망을 약화
시키고, 이슬람교의 사회적 노출을 증가시키는 조치이기도 했다.
이후 히잡 착용은 개인 성향에 따른 선택의 문제로 남았다. 이와
같은 터키식 이슬람주의 강화를 가능케 한 국내외 배경은 다음
과 같다.
국내 배경으로는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2008년 AKP의
총선 압승 이후 집권 엘리트 집단에 이슬람주의자들이 대거 유
입된 것이다(이지은 2020, 51). 다른 두 가지 배경은 쿠데타와 관
련돼 있다. 먼저, 2007년 발각된 에르게네콘(Ergenekon) 집단의
무장 쿠데타 모의 사건이다. 사법적으로 반정부 비밀조직으로 평
가받은 에르게네콘 집단에는 세속주의 계열의 전·현직 군인과 언
론인, 정치인들이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세속주의 군부를 타
도할 수 있는 정당성이 확보되었다. 이 사건이 세속주의 세력의
자연스러운 약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가 많다. 마지막 배경은
상술한 바 있는 2016년의 ‘귤렌 쿠데타 시도’이다. 이 사건은 현
정부가 관련자들을 축출하며 온건 이슬람주의자 세력을 약화시

터키 정치변동과 문화코드 변화 39
키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가 많다. 귤렌 조직은 현 시점에도 테러
조직으로 치부된다. 세속주의자와 온건 이슬람주의자 세력을 약
화시킨 에르도안 정권은 이슬람주의를 강화할 때 불편할 수 있
는 요소들을 사전에 해결한 셈이 되었다. 이들은 혼란한 와중에
도 2010년 개헌안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재판소의 재판관 선출과
임명 방식을 수정하는 등 민주주의적 타당성을 지속적으로 확보
했다.
국외 배경으로는 2011년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등에
서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며 본격화된 ‘아랍의 봄’을 들 수 있다.
국제적으로 터키는 이슬람과 세속주의의 양립 가능성을 증명하
는 긍정적인 이슬람 세속국가 모델로 인식되었다. 에르도안 정권
에게는 터키식 이슬람주의 정치체제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확
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에르도안 정권은 무슬림 세계
의 패권자로 인정받고자 하는 청운의 뜻을 품고 신오스만주의를
주창하며 터키식 이슬람주의의 확산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2017년 대통령 중심제로의 전환을 의제로 한 국민 투표
에서 개헌이 확정되어 정치체제가 변화하고, 2018년 에르도안이
대선에서 승리한 후 2010년대 후반의 터키식 이슬람주의는 더욱
이슬람 지향적으로 변화했다. 2019년에는 터키의 교육과정에서
진화론이 배제되기도 하였다. 2020년 7월 24일에는 ‘아야 소피아
성당’으로 알려져 있던 하기아 소피아가 오스만제국 시절과 같이

40 투르크-알타이권의 문화코드, 기업문화와 이문화관리


‘아야 소피아 모스크’로 환원되었다. 아타튀르크가 부여한 ‘모든
종교 예배가 금지된 박물관’으로서의 정체성을 뒤로 한 채였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환원 당일, 아야 소피아 모스크의 첫 금요 예
배에 참석하며 그 정치적 의미를 더욱 부각시켰다6).
이처럼 터키식 이슬람주의는 2000년대와 2010년대 시간적 구
분에 따라 그 지향점에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터키식 이슬람주
의의 공통적인 면모는 에르도안 정권이 국민에게 이슬람의 동시
대적 가치를 설득하는 정치사상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세속주의
90년간 주변화되었던 이슬람 문화를 복원하려는 종교적 시도라
는 평가가 많다. 다시 말해 터키식 이슬람주의는 터키 사회 내
이슬람 정체성의 발현을 지지하는 사회적인 문화코드로 그 공통
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터키식 이
슬람주의는 사회 내 운신의 폭을 점차 넓혀가고 있다.

보수적 권위주의

에르도안 정권의 두 번째 문화코드는 ‘보수적 권위주의’이다.


대통령 중심제에서 발생할 수 있는 권력의 대통령 쏠림 현상은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표현을 낳았다. 선거를 통해 검증된 지지

6) “Erdogan Fulfills Cherished Goal, Opening Hagia Sophia to Prayers”,


https://www.nytimes.com/2020/07/24/world/europe/turkey-hagia-sophia-mosque-pr
ayers.html (검색일: 2021.6.1.)

터키 정치변동과 문화코드 변화 41
기반을 기초로 이슬람 가치를 강조한 보수적인 정책들을 강력하
게 추진해 온 에르도안 대통령 역시 강력한 권력에 힘입어 종교
색 강한 보수적 권위주의를 사회문화 전반에 확산시켰다(오종진
2020, 18).
2002년부터 10여 년 동안 현실화된 정치적 안정과 소득증대는
보수적 권위주의에 대한 불만을 후순위로 미루게끔 했다. 그러나
‘선경제 후정치’ 레토릭에 밀린 불만이 불식될 수만은 없었다.
2013년 5월 31일, 이스탄불 신시가지 중심에 위치한 게지(Gezi)
공원을 전통 군대 막사와 백화점으로 개발하려는 계획에 반대하
는 진보적인 청년층과 환경론자들의 시위가 시발점이었다. 경찰
의 강경 진압에 맞서 세속주의자들이 지지를 표명했다(이희수
2013, 174).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평화
시위를 주문하며 선처를 약속했으나, 시위대는 동원된 물리력에
의해 해산되었다.
청년 세대 또는 세속주의자만이 에르도안의 보수적 권위주의
에 불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온건 이슬람주의로 분류되는
귤렌주의자들도 불만을 품었다. 상술했던 2016년 7월 귤렌 쿠데
타 미수 진압 직후부터 약 2년간, 7차례에 걸쳐 국가비상사태가
연속 선포되었다. 이 시기가 에르도안식 보수적 권위주의를 강화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에르도안 정권은 국가비상사태 권한을 근거로 대규모 구속·해

42 투르크-알타이권의 문화코드, 기업문화와 이문화관리


고, 기업 자산 압류, 신문 폐간, 방송 중단, 비영리법인 해체 등을
단행했다.7) 국가비상사태에 국민의 기본권은 제한되고, 대통령은
입법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테러 용의자에 한해 법정 대리권 박
탈, 기소 없이 최장 30일 구금 및 체포, 무영장 수색, 자산압류절
차 간소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구체적 혐의 없이 공직자도 해임
할 수 있게 되었다(한국수출입은행 이스탄불사무소 2017, 2).
2021년까지 군인, 교사, 판사 등 공무원 14만여 명이 귤렌 연대
혐의로 해고8)되었고, 귤렌주의자 체포 작전은 현재진행형이다.
일련의 사건들로 터키의 사회 분위기는 점차 경직되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보수적 권위주의 문화코드는 시대를 구분하여 생
각해볼 수 있다. 정권 초기의 보수적 권위주의는 정국 안정과 경
제 활성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배경이 되어 주었
다. 그러나 급격하게 강화된 동시대의 보수적 권위주의는 반대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정국불안과 경제발전 저하를 유발하고,
사회와 문화를 경직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7) “터키 매체 “에르도안-여권연대 대표, 국가비상사태 해제 합의”,


https://www.yna.co.kr/view/AKR20180628165400108?input=1195m (검색일: 2021.6.1.)
8) “터키 정부, 비밀요원 동원해 반체제 인사 조카 납치”,
https://newsis.com/view/?id=NISX20210601_0001460146&cID=10101&pID=10100#
(검색일: 2021.6.2.)

터키 정치변동과 문화코드 변화 43
Ⅳ. 나가는 말

정치변동이 발생하고 변동된 체제에 부합하는 정책이 펼쳐질


때마다 터키 사회의 문화에는 변화가 있었다. 공화국 건국 초기
아타튀르크 정권과 건국 100년을 마주한 에르도안 현 정권의 정
치체제와 문화코드를 비교함으로써 정치변동이 사회 전반을 관
통하는 문화코드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했다.
아타튀르크는 1923년 10월 23일,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
는’ 민주주의가 반영된 공화국 선언을 선포했다. 그는 공화인민
당이라는 유일 정당을 창당하고, 1대~4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왕
정이 아닌 공화제가, 세습 군주 술탄이 아닌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의회와 강력한 리더십을 지닌 대통령이 등장한 것이다. 20세기
초 터키의 정치변동은 사회변혁과 함께 ‘터키식 세속주의’와 ‘진
보적 권위주의’라는 문화코드를 사회 전반에 확산시켰다. 그러나
‘오스만 정체성’에서 벗어나도록 강요받은 민중은 아직 무슬림
정체성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데다 하향식 권위주
의에 따른 정신 개조를 요구받았다. 이 때문에 엘리트 계급과 노
동자 계급, 도시 인구와 농촌 인구, 세속주의자와 이슬람주의자
간 갈등이 발생하게 되었다.
에르도안 정권의 집권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1세기
초 그는 정의개발당이라는 청렴하고 개혁적인 이미지의 친이슬

44 투르크-알타이권의 문화코드, 기업문화와 이문화관리


람 정당을 창당하고, 2002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다. 에르도안
정권은 국익을 중심으로 스윙 스테이트(Swing State) 외교 노선을
추구했다. 창당 초기에는 드러내지 않았으나, 에르도안 정권은
점차 국가 권력을 이슬람주의 체제인 보수 체제로 확장하고, 내
부 정치도 같은 방향으로 안정화하고자 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끄는 친이슬람 정권의 성공적인 국정 운
영, 정치안정에 따른 경제안정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면서 대중이
친이슬람 정권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터키식 이
슬람주의 문화코드의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
나 터키식 이슬람주의는 2000년대와 2010년대에 각기 다른 지향
점을 향한다. 2000년대에는 서구적 가치와 이슬람적 가치를 동시
에 포용하는 사회 분위기를 형성하였으나, 2010년대에는 이슬람
지향성이 강화되어 이슬람교의 사회적 노출을 증가시켰다.
선거에서의 압도적인 승리, 에르도안 정권의 공고한 정치권력,
2017년 대통령 중심제로의 개헌 국민투표 등을 통해 에르도안
정권 아래에서 보수적 권위주의가 확산되었다. 보수적 권위주의
문화코드 역시 시대를 구분하여 생각해볼 수 있다. 정권 초기의
보수적 권위주의는 정국 안정과 경제 활성화라는 두 마리 토끼
를 잡을 수 있는 배경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보수적 권위주의가
급격하게 강화된 동시대는 정국불안과 경제발전 저하를 유발하
고, 사회와 문화를 경직시키는 요인으로 기능하고 있다. 위 두 가

터키 정치변동과 문화코드 변화 45
지 문화코드에 반발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결론적으로 아타튀르크 정권과 에르도안 정권은 터키식 세속주
의와 터키식 이슬람주의라는 대비되는 문화코드를 사회에 확산시
켰다. 터키식 가치관을 문화에 편입시켰다는 점은 공통적이나, 수
행 주체와 수용 주체는 반대되었다. 에르도안 정권의 지지층은 터
키의 이슬람 보수층과 지방의 중하 계층으로 터키식 세속주의에
대한 반발심을 안고 터키식 이슬람주의의 형성에 열광했다.
권위주의를 사회에 확산시켰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지닌다.
단, 진보적 권위주의와 보수적 권위주의라는 종교를 바라보는 시
각, 엘리트중심 하향식 국정 운영과 선거로 검증된 민중의 지지
를 받는 상향식 국정 운영이라는 대중주의 실현 방식에서 차이
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 부분 경직된 사회 분위기를
형성한 것은 동일하다.
에르도안의 권위주의는 아타튀르크 권위주의에 빚을 지고 있
다는 점도 유의미하다. 외부 위험 요소를 대비하여 내부 결집을
유도하고 성공해낸, 강력한 리더십을 지닌 지도자를 경험한 국민
이므로 에르도안 패권에 대한 수긍이 수월했을 수 있다. 유목민족
의 칸들과 유사한 권력메커니즘이 적용된 결과였다. 강력한 리더
십이 있는 인물 중심 정치가 전형적인 유목국가 정치의 특징이라
면 터키는 오스만제국의 유지를 도왔던 체제와 인물, 두 요소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인물이 더 중시된다는

46 투르크-알타이권의 문화코드, 기업문화와 이문화관리


면에서 유목적 정치 코드가 유지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2021년 에르도안 정권은 여러 도전을 맞이하고 있다, 현 이스
탄불 시장인 에크렘 이맘오울루(Ekrem İmamoğlu)로 대표되는 터
키식 세속주의 야권의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고, 에르도안 정권의
인사였던 압둘라 귤 전 대통령과 알리 바바잔(Ali Babacan) 전 경
제부총리 등이 신당을 창당하여 활동함으로써 중도 우파의 분열
가능성이 심화되고 있다. 이슬람 지향성이 강화된 상징적이고 표
면적인 친이슬람주의 정책 강화로 정치적 이슬람에 반하는 여론
이 형성되기도 했으며, 코로나19 대응책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높고, 대통령 포고문에 의한 비합리적 국정 운영 및 즉흥적 외교
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 아울러 에르도안 대통령이 정치적 난제
를 조기 선거를 통해 해결해왔듯 범야권에서는 조기 선거를 주
장하고 있다.
에르도안 정권이 맞이하고 있는 도전에서도 알 수 있듯 상술
했던 터키식 세속주의와 터키식 이슬람주의, 진보적 권위주의와
보수적 권위주의 외에도 세계화, 자유화, 자본주의 등 여러 물결
로 인한 다양한 문화코드들이 터키 사회에 흡수되고 소멸하고
있다. 가치의 다원화는 앞으로 더 많은 문화코드를 터키 사회에
등장시킬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터키정치변동과 주류 문화코드
를 이해하는 것은 다원화되고 있는 문화코드 속에서 핵심을 찾
는 지름길이 아닌가 한다.

터키 정치변동과 문화코드 변화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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