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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바다로 가자.

202382031

시퍼런 바닷물이 복사뼈를 핥는다. 허여멀건 원피스 자락이 파도 위를 넘실댄다. 땅거미


가 기는(@지는/오타) 시간이 되면 부두에는 고기잡이배가 하나둘씩 돌아와 제 자리를 찾아
갔다. 짠 내를 몰고 온 늙은 어부 하나가 해변을 보고 소리친다.

“곧 해가 지니까 어서들 들어가쇼! 곧 만조요!”

가는 발목 새로 물거품이 사그라든다. J는 어부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밀려가는 파도


를 향해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곧 밀물이 들이칠 거야.”


“그게 중요해?”

하긴, 그런 게 중요하진 않지. 이어진 말에 J가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다갈색 눈동자엔


어렴풋한 다정함이 맴돌았다. 흰 모래사장 위에 사람들의 발자국이 찍힌다. 전부 돌아가는
발자국이다. 안전한 나의 집을, 편안한 나의 쉼터를 향하는 발걸음이었다. 나는 그들의 뒷모
습을 시선으로조차 좇지 않으리라 결심하고서 저 파란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는 여
전히 서슬 퍼렇게 빛나는 바다와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나의 J가 있다. 그 애가 나를 호
명한다.

“연우야. 저기 저 너머 좀 봐.”

J의 시선은 저 수평선 너머에 있다. 나는 구태여 그 애의 시선을 쫓지 않고 바다로 한 걸


음 더 다가가기를 택했다. 포말이 부수어지는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저 너머에 귀신고래가 있어.”


“저 너머에?”

응, 저 너머에. 이윽고 모래사장은 고요해졌다. 나를 제한 모든 인간이 이곳을 빠져나간


탓이다. J의 눈동자는 여전히 지평선 너머에 박혀 있다. 슬그머니 그 애를 향해 다가가 싸
늘한 손 새로 내 손을 밀어 넣었다. 나는 J의 손이 좋았다. 축축하고 미끈한 피부와 짧디
짧은 손톱. 6개의 손가락과 깍지를 끼는 것은 보통 사람들은 겪을 일 없는 독특한 경험이겠
지. 그래, 난 그게 좋았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미지, 나의 J. 바다에서 태어난 나만
의…….

“연우야.”
“응.”
“오늘이야.”

알고 있어, 내가 답한다. J의 엄지손가락들이 하나뿐인 나의 엄지를 쓰다듬는다. 저 위쪽


부둣가에서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린다.

“요새는 멀리 나가도 물고기가 영 안 잡혀.”


“이 주변엔 정말 씨가 말랐는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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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잉… 정말 여길 떠야 하나? 한 달 만에 저기까지 씨가 마를 줄은….”
“그러고 보니 그 이야기들 들었어? 저어~ 옆에 횟집 있잖어? 그 만수네 말여. 그 집 아가
바다에 홀렸다든디(@던디/사투리 구어체에서 –던으로 수정)….”

저런 한탄도 벌써 석 달째다. 나는 괜한 조바심에 J의 손을 조금 더 꽉 쥐었다. 단단히


맞물린 손 너머로 냉기가 스멀스멀 퍼진다. 부는 바람이 차갑다. 곧 겨울이 올 전조다. 늦가
을의 바다는 생각보다 미적지근하다.

“갈까?”

차오른 조수가 정강이를 적신다. J는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걸음 뒤로 짤각이는 금속음


이 뒤따른다. 낡은 청재킷 주머니에서 나는 소리다. 나아가는 곳마다 파문이 인다. 네 시선
끝, 갯바위 뒤 작은 동굴 하나가 있음을 알았다. 뉘엿뉘엿 해가 지는 하늘은 오늘따라 유독
맑다.

나는 걸음을 재촉해 J와 발을 맞췄다. ‘같이 가자’ 하고 말을 걸면, J는 나를 흘긋 보고선


고개를 돌린다. 평온한 그 얼굴을 보고 있자면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비실비실 웃음이 새
어 나왔다. 네 그런 낯짝이 좋았다. 무슨 상황이 닥치더래도 안색 한 번 바뀌지 않던 그 인
두겁에, 나는 첫눈에 빠지고야 만 것이다.

흰 원피스에 노을 물이 든다. 소금기에 절은 옷자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진다. 새벽 바다처


럼 허연 피부 위에 붉음이 번졌다. 햇빛을 너무 오래 받은 탓이었다.

“피부 안 따가워?”
“따가워. 그렇지만 한 번쯤은 이렇게…….”

뒷말은 이어지지 않는다. 기어코 바다는 우리의 허벅지를 적시고, 해변을 집어삼킨다. 수
면 위로 흰 원피스가 둥둥 떠올랐다. 태양을 집어삼킨 대지에 어슴푸레한 달빛이 깔린다.

저 뒤에서 장 씨네 아주머니가 소리쳤다. 연우야! 연우야!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어


딜 가니 얘! 꿈결 같은 소리다. 그저 나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J는 첨벙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유영하듯 앞을 나아간다. 소음을 일으키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다.

갯바위를 지나면 동굴이 있다. 네가 처음 눈을 뜬,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곳이다. 나는 청


재킷 주머니에 한쪽 손을 집어넣었다. J가 나를 본다. 시커먼 눈동자 속에 불안한 얼굴의
내가 서 있다.

“연우야.”
“…들어갈까?”

네 손을 잡아끌고 앞을 향해 걷는다. 너는 군말 없이 내 뒤를 따랐다. 겹친 피부로 소금


기가 옮는다. 손등이 근질댄다. 바닷물이 외피를(@피부를/이해하기 쉽도록 수정) 기는 감각
이 선연했으나 나는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너를 처음 만난 그날처럼, 망설임 하나 없
이, 그저 앞으로. 눈을 감는다. 주머니에 박아 넣은 손이 면도날을 잡아챈다. 너는 기다렸다
는 듯 걸음을 멈췄다. 나도 몸을 돌린다. 얼굴에는 미소를 걸어놓은 채다.

- 2 -
“만조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조금 있으면 금방. 가슴께까지 들어찰 거야.”

그래? 그렇구나. 너는 멀뚱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다. 3개월 전, 처음 만난 그 순간 그


대로의 너다. 변화한 것은 나뿐이다. 시야가 흔들린다. 호흡이 흐트러지고 세상이 아득해진
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쏟아지려는 찰나에 네가 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니까 어서, 시간이 별로 없어.”

훤히 드러난 목에 날붙이가 닿는다. 반사적으로 움찔대는 살갗이 눈에 들어온다. J는 태


연자약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네가 입을 연다.

“해보고 싶다고 했잖아. 지금 그 소망을 이룰 때야.”


“…응.”

네가 말갛게 웃는다. 그 웃음을 본 나는 전능감(@전능/사전 미기재 번역체)에 빠진다. 무


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나도 함께 웃었다. 약속했으니 해내야지. 맞아. 나
는 조금 더 전지한 시점으로 우리를 바라보리라 마음먹었다.

연우의 손이 J의 어깨를 잡는다. J는 잡고 있던 연우의 손을 놓고서 아주 느릿하게 눈꺼


풀을 삼박인다. 연우가 숨을 삼켰다. 긴장감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결심했다면 해내야
만 해. 연우가 생각한다. 너는 나를 전능하게 만든다. 하지 못할 것을 가능케 하고, 믿지 않
던 것을 믿게 한다.

면도날이 창백한 피부를 가른다. 상상보다도 능숙한 손놀림이다. 정말 별로 어려운 것도


없잖아?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갈라진 틈새로 J의 눈동자만큼 어두운 무언가가 흘러
나왔다. 아릿할 정도로 달큼한 향이 후각을 마비 시킨다. J는 고통을 호소하지 않는다. 발버
둥 치지도 않았다. J는 웃고 있었다. 입꼬리를 당기고 눈을 접어,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동굴 입구로 달빛이 스며든다. 연우의 손이 J의 뒷덜미를 잡아 고정한다. 식어가는 가을


바다로 J가 섞여 든다. 물에 뒤섞인 잉크처럼 일렁이던 검정이 어느새 헤엄치기 시작했다.
벌어진 입으로 J가 언어를 뱉는다. 연우는 그 광경 속에서 이질감과 함께 기이한 기쁨을 느
낀다.

“괜찮아, 괜찮아… 아, 나는 드디어…….”

돌아가는 거야. J의 입이 어물댄다. 연우는 면도날을 떨어트릴까 두려워 양손에 힘을 준


다. 금방이라도 질끈 내려앉을 듯한 눈꺼풀의 무게를 견디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수중의 J가 일렁인다. 쏟아지고 뒤섞여 마구 헤엄치던 그것들이 플랑크톤처럼 반짝이며


형체를 찾는다. 바다가 숨을 쉬고 있어. 손아귀 속 네가 천천히 흩어진다. 나는… 아니, 연우
는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난다. 네가 손을 뻗어 나
의 뺨을 쓸어내린다.

“어서, 연우야. 어서.”

- 3 -
흰 피부가 반딧불처럼 빛난다. 처음 보았던 그때와 다를 것이 없다. 연우는 좀 더 팔을
저어 J를 조각냈다. 언젠가 네가 했던 말이 불쑥 떠올랐다.

‘횟감을 친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매일 하듯이.‘

눈이 무겁다. 쇳물을 들이켠 것처럼 인후가 뜨겁다. 붙잡은 J의 몸 위로 짭짤한 눈물방울


이 후두둑 떨어진다. 손 틈새로 네가 흐르고 있었다. 입술을 꾹 깨문 현재의 내가 답했다.

“뭐가, 물고기야…. 뭐가 대체 물고기냐고….”

너는 사람이잖아, 살아있잖아.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손끝으로 젤라틴 덩이를


가르는 감각이 전해진다. 두 개의 엄지가 연우의 뺨을 어루만졌다. 연우의 곁으로, 그 사이
로 물고기들이 지나간다. 모두 J였던 것들이다. 풍덩―. J의 몸이 수면과 충돌하는 소리다.

“울, 지마. 울지마아아아…….”

바람 빠진 피리 같은 목소리가 웃음을 머금었다. 동굴이 반짝인다. 연우는 안다. 이곳은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걸. 닿아있는 J의 몸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다. 나는 이 손으로
그 애를 헤집어대는 것을 멈추고, 아직 흩어지지 않은 J를 있는 힘껏 끌어안고야 말았다.
조각나도 죽지 않는 너를 이 품에 가득 담는다. 바닷물은 벌써 가슴께까지 차올랐다. J로
얼룩진 손은 온통 검기만 하다.

환한 동굴 속에서 J가 쏟아진다. 너였던 것들은 멋대로 생을 얻어 바다를 향해 헤엄쳐 나


아 간다. 반짝임 속에 그의 일부와 나만이 남았다. 동굴 속에 연우의 소리가 메아리쳤다. 머
릿속에서는 네 목소리가 들린다. 3개월 전의 네가 이곳에 있다. 동굴 안에서 멍한 얼굴의 J
가 나를 바라본다. 지금보다도 무미건조한 얼굴이다. 나는 목소리의 떨림을 감출 생각도 않
은 채 물었다.

“네가, 네가… 사라지면, 사라지면 어쩌, 어쩌지…?”

네가 웃는다. 수압에 목이 막힌다.

“오면 되지, 바다로.”

바다로 오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연우는 그렇게 말하지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물이


차오른다. 바다로 오면 되는구나. 그래, 바다로 가면 돼. 하하, 웃음이 났다. 두려움인지 슬
픔인지 모를 감정이 일렁인다.

코로 바닷물이 들어온다. 만조다. 느껴지지 않는 J를 잡기 위해 연우가 팔을 허우적댄다.


머릿속이 불타는 것 같다. 나는 반짝이는 바닷속에서 눈을 감지도, 뜨지도 못하고서 그 애
를 찾는다. 연우가 생각한다. J, 돌아와, 돌아와…….

아득하다. 산소가 부족한 감각에 목을 긁는다. 부력으로 떠오른 머리가 동굴 천장에 부딪


힌다. 나는 생각한다. 아니, 연우는 생각한다. 나는…, 의식이 흐려진다. 눈이 감긴다.

감은 눈 너머로 모호한 꿈이 넘실댄다. 하얀 원피스와 웃고 있는 J. 규칙 없이 춤을 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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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말과 빛. 어릴 적 들었던 말이 들린다. ‘꼭 몇십 년에 한 번은 바다에 홀리는 사람이 있
대.’ J를 처음 본 순간에도 떠오른 말이었다. 나는 정말로 너에게 홀린 걸까? 그렇다면 너는
바다인가? 너는 바다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바다에 거대한 고동이 울려 퍼진다. 저건 귀신고래의 울음소리인가? 물어도 답해줄 사람


은 없다. 눈을 감는다. 눈꺼풀 위로 쏟아지는 빛이 너무 밝다. 그 속에서 나는 깨어날 생각
도 없이, J가 했던 언젠가의 말을 떠올린다.

‘연우야, 바다에 가자.’

그래, 바다로 가자. 너를 만나러 가야지, 가야 해. 갈 수 있다면 어떻게서든…. 물고기가


헤엄치는 소리가 들린다. 해변가 바위에 파도가 하얗게 부서진다. 창백한 빛이 드리운다. 여
전히 바다는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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