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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선정 신진연구자지원사업

결 과 보 고 서

사업명 2018년 선정 신진연구자지원사업


2017S1A5A80
과제번호
22332
연구과제명 국기 태권도 원류 무덕관 연구
연구책임자 주관기관 연구기간 연구비(간접비제외) 연구보조원

1차년도 10,000,000천원 1명

기본정보 2017-05-01 ~ 2차년도 10,000,000천원 1명


한국연구재단
김종길 2019-04-30
인문사회분야
(2년) 3차년도 천원 명

계 천원 명

(※ 선정연도를 포함하여 표지 내 모든 항목에 빠짐없이 기재)


목 차

Ⅰ. 연구목적 및 방법 ---------------------------------------1
1. 당초 연구의 목적, 필요성 및 연구목표 --------------1
2. 당초 연구 내용, 범위 및 방법 -----------------------18
Ⅱ. 연구수행 내용 및 결과 ---------------------------------22
Ⅲ. 연구결과 활용계획 --------------------------------------62

1. 연구결과 활용계획 ------------------------------------62


2. 연구성과 -----------------------------------------------64
Ⅳ. 참고문헌 ------------------------------------------------65

Ⅴ. 기관생명윤리위원회(IRB) 심의 -------------------------68
Ⅰ. 연구 목적 및 방법
1. 당초 연구의 목적, 필요성 및 연구목표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1) 연구의 필요성

오늘날 태권도는 한류의 표상이다. 여러 가지 무예적 특성을 가진 종목이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우리나라 문화 상품으로 자리매김을 한 신체문화가 있다. 그것은
어떠한 것을 표상하기 위한 상품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혼과 얼 그리고 민족적 주체
로서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혼과 얼을 담기위해 여러 선배들의 수많은 노고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황


기1)는 무덕이라는 독창적 유산을 남겨주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여러 가지 신체동
작에 대한 해석 분석과 그리고 재현으로 독창적 품새를 창안연구들이 미흡하였다.
단지 그 동안 남긴 사진들을 모아둔 사료들을 정리할 뿐이다.

그렇다면 국기 태권도에는 무예실제와 사상이 태권도 원류 무덕관2) 70년의 사관


을 간직하고 있다. 그 사관은 다양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
다. 지금 국기 태권도는 반박귀진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경기적 특성보다는 무예적
특성이 있는 도가 겸비된 기술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과거의 유산은 현재의 보석이
다. 이를 갈고 닥아 절차탁마하는 작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현시점에 서 있다. 하
지만 이를 연구하고 분석가 미흡하다.
그가 편찬한 무덕관 《수박도》 무예서적을 발간 하기 전 어떠한 어려움이 있었
는지를 살펴볼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에 관한 내용을 조사 및 분석하면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다. 

1) 황기는 1949년 5월에 『화수도교본』을 저술했다. 무예계에 최초로 간행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1956년 『무예
도보통지』를 접하고 한국 전통무예인 수박희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그 후 명칭을 수박도로 정착하는 계기가 된다. 그는
당시 복사기가 없던 시절, 2년에 걸쳐 <무예도보통지>를 꼼꼼하게 필사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대한수박도협회가 탄생된
다. 그것이 바로 1970년 5월 『수박도(唐手)대감』이며 1993년 8월 『무도철학』 등 모두 11권의 책을 저술했다.
2) 무덕관(1945년 11월 9일)을 창설한 황기(1914~2002)는 경기도 장단군에서 출생, 경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남만주
철도국에 근무하면서 당시 손꼽히던 양국진(楊麴震) 선생한데 본격적으로 무예를 수련했다. 그는 광복 후 서울에서 무덕
관을 창설, 초대 관장에 취임, 무술을 보급했는데 1956년 서울대 나현성 교수를 통해 서울대도서관에서 <무예도보통지>
를 발견하게 되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복사기가 없던 시절이라 근 2년간에 걸쳐 책을 서술하였다. 그리고 책대
로 수련하면서 당수도(唐手道)를 수박도(手搏道)로 명칭 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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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武藝圖譜通志》에 나오는 권법에 《수박도》언급하였다. 1957년에 처음
으로 무예서적인 《武藝圖譜通志》를 발견한다. 그 이유는 1945년까지 36년간 에
서도 일본 무예에 대한 것만 보고 들어와 우리나라의 문화와 무예 대해서는 지식이
전무한 상태였다. 수박도를 보급 발전시켜 공헌하고자 결심한 그는 놀라움과 환희
에 도취된다. 이 고서를 발견한 후부터 그는 매일 서울 대학 도서관에 나가 보고 연
구하면서 58년까지 이 책 전부를 복사해 왔다. 그는 이 책을 연구하여 정교한 해설
과 그 기법의 해설을 한국인은 물론 온 세계인들에게 보급시키고자 결심한다. 그러
나 이 서적은 번역 보완하여 우선 한글판을 발간하기 위해 착수하는데 참으로 어려
운 난관에 봉착한다. 즉 이 중요한 기법을 번역하고 그 해설을 발표함에 있어서 중
대한 사명감은 물론 이에 대한 능력 양성과 갖가지 준비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점이
다. 특히 《武藝圖譜通志》에 기재된 원문이 내포하고 있는 철학적인 사상이 기본
무예정신에 위배되지 않아야 한다. 기법과 역사와 전통이 자연스럽게 부합되어 본
질적인 면을 최대한 살려내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번역과 해설을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 외의 모든 문장이 모두 각 동작의 중


요골자만 기록되어 있어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고 한다. 각 동작은 물
론 자세와 요령, 보법에 있어서도 서로 상기되어 있지 아니한다. 주 동작에 대해 부
수되는 동작은 대부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원래 한문자는 글자 한자로써 광범위
한 의미와 방법, 여러 가지 표현을 내포하고 있다.

문장 기록을 한 당사자 외에는 의사와 방법을 완전히 이해가 참으로 어렵고, 사


람에 따라 여러 갈래로 해석하기 쉽고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전문 기술 분야에 대
한 문장이기 때문에 한학을 전공한 사람도 이문장의 완벽한 번역과 해설을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장을 가급적 완전하게 번역해설 하기에는 다음의 조
건들이 구비되어야 한다.

첫째, 한학에 능통해야 한다. 둘째, 진정한 무예가 무엇인가를 터득하여야 한다.
셋째, 무예 수박에 대해 실적으로 장구한 시일을 체험하여야 한다. 넷째로, 십삼세
에 대한 진리에 입각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상기한 네 가지 조건을 구비한 사람
만이 완전에 가까운 번역과 해설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는 문장에 내포되어 있는 요소와 조건, 그리고 기본동작을 그대로 살리는데 최선의
노력을 하였고 상기한 네 가지 조건을 부합시켜 모든 주 동작은 물론 부수되는 연
결동작을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면서도 실질적인 면을 참작하여 번역한다. 《武藝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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譜通志》를 발간 기록한 사람의 동작방법과 일치하도록 완전한 번역 해설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지만 그 근사치에는 도달 할 수 있었다. 그러나 《武藝圖譜通志》
에 기록된 실기에 대한 문장을 그대로 직역한다면 이는 무예로서의 진정한 가치는
이미 상실한 설명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내용을 살펴보듯이 현재 국기 태권도는 시대적 반응하는 나머지 옛 선배


들이 남긴 위대한 유산을 복원 및 재현 그리고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는 현실정이다.
전통무예인 태권도 원류인 무덕관(1945〜2015)의 재정비 및 발전과 더불어 세계의
대표 무예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기 위한 작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에 있다.

위에서 살펴보듯이 우리 무예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 바로 태권도


무덕의 역사관이다. 무덕관의 역사관에는 전통무예 실제의 극치와 신체사상의 이치
가 내포되어 있다. 무덕의 역사관은 우리 무예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이를 어떻게 하는지를 상세히 말해주지 못하고 있다. 우리 무예인들은 그 본질적인
면을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무덕관 사관의 역사자료다. 이 자료는 우리의 본질에 대한 생각이나
지금 행하고 있는 역사관에 대한 모든 일체인 것이다. 이 사관이 지향해야할 것은,
이를 체계화하여 이론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관의 실질적인 역사학을 올바
르게 정립하고 이를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7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무덕관은 현재
우리에게는 이러한 작업이 있어야 하는데, 즉 그 시대에 대한 역사관의 이치와 무덕
관 실제의 극치에 관해 생각하고 이를 분석하여야 한다. 이것을 초석으로 삼아 미래
의 무덕의 역사관을 비상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신체학문의 체계가 될 것이다. 무덕
관 역사적 함의를 체계화하기에 앞서 우리의 신체학문이 지금 직면하고 있는 크나
큰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이런 이유로 여러 가지의 문제점이
존재하지만 그 중에서도 무덕관 분야의 역사학이다. 이 분야는 옛 무덕의 선배들의
무예 실제이자 우리가 살아가는 정신적 지주의 역사관이다.

이와 같이 태권도 원류 무덕관 역사관을 구체적으로 조사‧분석하자면 사료들이 존


재하고 있었으나 정확한 문헌검증정립을 재대로 못하고 있어 자료수집이 미흡한 실
정이다. 전시자료도 수원 남창도장만 보유하고 있는 수준이며 이에 관련된 사료들
에 대한 분류 및 무예관의 역사자료집이 없어 그 역사적 가치와 의의가 없다는 것
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로 인해 태권도 원류 무덕관이 가지고 있는 역사관과 철학관
그리고 신체사상관의 이치 및 실제의 극치에 대한 의미와 가치관을 명확히 제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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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의 인식을 통해 뿌리 없는 실체의 존재 없는 현상에
난립하고 있는 역사성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한다. 올바른 무덕의 신체관과 역사관
에 나타난 의미와 가치를 제시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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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구의 목적
이 연구는 대한민국 전통무예인 태권도 원류 무덕관이 가지고 있는 역사관과 철
학관 그리고 신체사상관의 이치 및 실제에 대한 사료들이 존재하고 있으나 그 의미
와 가치관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문제점의 인식을 통해 각 도장에 난립하고 있는 역사성에 대한 자각이 있


어야 한다. 태권도 원류 무덕관의 신체관과 역사관에 나타난 의미와 가치를 제시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국기 태권도의 원류 무덕관의 주제의식은 역
사관과 철학관 그리고 신체사상관의 가치와 의의를 밝혀 전통성과 정통성을 역사적
근원과 신체학문실제에 관한 정체성 제시를 규명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더 나아가 무덕관의 정통성이 있는 역사관과 철학관 그리고 신체관이 가지고 있


는 다양한 실제와 신체사상사의 이치인 그 위대한 신체무예문화유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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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구주체의 창의성

(1) 연구과제의 도전목표


이 연구 내용의 필요 충분성은 국기 태권도의 원류 무덕관에 관한 올바른 역사성
과 정체성을 조사․분석․논의를 통하여 전통무예의 역사적 체계를 규명하고자 한다.
국기 태권도의 원류 무덕관에 보이는 무예실사에 관한 微視的 方法(Micro Method)
으로 연구가 진행되어야 올바른 신체가치관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한 연
구 도전목표의 필요 충분성을 달성하기 위한 연구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설정할 것이다.

첫째, 국기 태권도의 원류 무덕관에 관한 검증을 통해 전통무예계의 정체성을 살


펴보고자 한다. 이에 따른 국기 태권도의 원류 무덕관에 관하여 현재 학계에서는 그
동안 체육 및 무예사의 한 영역에서 전통무예에 있어서 한국무예로 살펴본 단편적
인 연구결과물이 많았으나, 국기 태권도의 원류 무덕관에 보이는 그 형태적 의미와
가치관에 대하여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에 관한 그 형태적 의미와 가치를 정
확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국기 태권도의 원류 무덕관사(史)에 대하여 미시적 방법
(Micro Method)으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국기 태권도의 원류 무덕관사(史)에 보이는 무예의 형태적 의미와 가치관


을 통해 다양한 측면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국기 태권도의 원류 무덕
관에 관한 정체성의 그 형태적 의미와 가치관에 대하여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연구계획은 국기 태권도의 원류 무덕관 무형유산으로서의 문화재적 인식을 재정립
함으로써 태권도의 다양한 측면의 교육적 체계화에 기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태
권도 관장 및 지도자 및 수련생, 전공학생들에게 교육적 가치를 제시하고자 한다.
국기 태권도 원류 무덕관의 무형유산의 문화적 가치를 통한 제반적인 지식을 습득
함으로써 한국무예의 교육적 질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이 연구과정에서 습득한 지
식들을 정부기관 태권도원, 국기원, 대한태권도협회. 세계태권도연맹과 전통무예 단
체를 통해 기대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도록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2) 연구과제의 필요성


이 연구과제의 필요성을 앞에서 살펴본바, 국기 태권도 원류 무덕관은 다양한 변
화와 변용의 환경 속에서 신체문화유산으로 발전을 거듭하는 가운데 그 우수성의
다양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국기 태권도 원류 무덕관의 지향적 의미와 가치관을 공
공기관 단체 및 체육․무예학계에서는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는 각
여러 대학의 체육․무예학과에 따른 국기 태권도 원류 무덕관에 관한 올바른 역사성
정립과 그 정체성의 체계적 형성에 대한 부재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식하고 있다. 이
에 관한 심도 있는 비교․조사․분석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보다 체계적인 신체문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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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으로서 그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국기 태권도 원류 무덕관에 관한 올바른 역사성과 정체성에 대
하여 명확히 정립하고자 한다. 이에 관한 구체적인 기반을 형성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연구문제 및 내용에 대한 범위와 방법을 진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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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태권도 원류 무덕관 역사적 재조명과 학문적 검토

무덕관[ 武德館 ] 3) 1945년 11월 9일 서울 용산역 부근의 철도국에서 '황기(黃


琦, 1914~2002)'에 의해 교통부 소속 운수부 당수도부로 창설된다. 그 후 1955년
5월 정식으로 무덕관 이름으로 중앙도장이 서울 중구 동자동에 개관한다. 그는
1936년 남만주 철도국에 재직 당시 양국진 선생으로부터 무예를 수련한 후 해방
후 국내에서 서적을 이용해 무예를 독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6년 각 지방의
기차역 창고에 도장을 개관하면서 1955년도에 전국에 9개의 지관을 신설한다. 또
한 한ㆍ중 친선 연무대회를 대한당수도 이름으로 시공관에서 개최하였다. 이 대회
는 국제행사로는 유사 이래 최초로 개최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철도국에서
수련생 지도는 함께 재직했던 현종명(청도관 출신)이 전담하고 1952년 한국 경찰
전문하교 사범을 비롯해 1953년 전국 중고등학교 사범, 1954년 마포 서대문교도소
사범 및 그 외 공군, 해군 사관학교에서 사범으로 활동했다.

특히 무덕관의 수련생들은 대부분 철도국 직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무실, 신성,


정의를 목표로 하여 수련하였다. 홍종수와 지상섭 등은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북지
역에, 전쟁 때문에 부산에 내려간 김인석은 경남지역에, 남삼현, 임명수는 대전 및
충남북 지역에, 오용균은 전북지역에, 박용화는 인천에, 김창진은 전남에, 박영진은
강원도에 세력을 확대하였다. 이처럼 태권도 원류 전국에 9개의 지관을 신설한 뒤
에는 한ㆍ중 친선 국제 당수도 연무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949년 5월에 『화수도교본』을 저술했다. 무예계에 최초로 간행된 것으로 기록


되고 있다. 그는 1956년 《武藝圖譜通志》를 접하고 한국 전통무예인 수박희에 심
취하기 시작했다. 그 후 명칭을 수박도로 정착하는 계기가 된다. 그는 당시 복사기
가 없던 시절, 2년에 걸쳐 <《武藝圖譜通志》>를 꼼꼼하게 필사했다고 하는데 이
것이 대한수박도협회가 탄생하게된 원동력이 된다. 1970년 5월 『수박도(唐手)대
감』, 1993년 8월 『무예철학』 등 모두 11권의 저서를 집필하게 된다.

황기의 무덕관은 국내외적으로 지부가 설치돼 수많은 제자를 배출한다. 수박도의


보급현황은 미국, 프랑스, 그리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영국 등 20여 개국이 된다.
무덕관 도복은 고구려 무사복장의 사양에 따랐고, 특히 <《武藝圖譜通志》>에서
복원한 무예가 '수박도'라고 하였다. '수박(手搏)'의 수(手) 자는 손이 아니라 사람을

3) 이경명, 2011.3.1., 태권도문화연구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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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하고 고수(高手), 명수(名手) 등의 자(字)와 같다고 한다.

이러한 태권도 원류 무덕관 7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사단법인 세계무덕관연맹


이 2015년 5월에 창립식을 했다. 이 자리에서 초대 총재로 서상렬4) 전 무덕관 사
무총장을 추대하였다.5)
이와 관련하여 세계무덕관연맹이 경기 수원시 남창도장에서 현판식을 거행했다.
태권도의 혼' 무덕관이 부활한 이유가 있다. 태권도 원류 무덕관 전통성과 세계무덕
관연맹의 향후 정책 방향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태권도의 스포츠화와 무덕관의 역사적 흔적을 묻는 것이다.

오늘날 태권도가 너무 변해져 가고 있는 현실을 보고 있다. 태권도는 상대를 제압


하는 무예로, 시간과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심신을 도약하고 올바른 인간완성을 목
적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요즘 태권도 도장은 청장년들의 수련자는 보기가 어렵다. 도복을 입은 나


이 많은 유단자도 거의 없을 뿐더러 역사성이 선명하고 수려한 품새적 측면의 무덕
관 도복을 입고 지도하는 사범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현실이다.

다만 태권도 스포츠 유니폼을 입은 청소년들만 삼삼오오 모여 시합에 필요한 점


수기술 연마에만 열중한다. 태권도대회에 출전해 메달을 획득하지 않으면 검은띠
승단과 동시에 도장에 나오지 않는 경향이 많다. 우리나라 국기 태권도의 앞날이 불
투명하다.

특히 태권도가 과거와 달리 쇠퇴해지고 태권도단체 내부에 잡음이 끊이지 않은


것은 결과물이다.

그러나 태권도 현대화 과정에서 협회를 구성한 주주인 모체관을 장애물로 여기고
집행부를 중앙집권제인 전횡체제로 전환한데서 생긴 역사적 흔적물이다. 하지만 모
든 무예는 유파에 따라서 그들 나름에 특징 있어야 한다. 정통성과 독특한 기법의
4) 서상렬(구명, 백낙언)은 2006.3월 “무덕관을 통합 하여야 한다”는 책을 발간, 무덕관의 재건과 통합을 역사적 사명감으로
집필 하였고 1955년 공군대학에서 정규과목인 당수도의 실제와 이론을 강의하였다. 또한 세계무덕원 충재에 추대
(2005.7)되어 통합 선봉에 있어서 선구자였다.
5) 영문 표기로는 World Moodukkwan Federation이라하고 약칭은 W M F 명칭이다. 연맹의 취지는 전 세계에 퍼져있는
무덕관 무예인들을 융합과 태권도의 발전을 지향하는 단체로 발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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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가 있기 마련이다. 단지 목적을 위해 모체관을 뿌리를 뽑아버리는 것은 자수상
목에 우를 범하는 경우이다.
단체통합이나 올림픽가입에 각관을 체제가 장애가 될 게 없는데도 전통이 있는
유파가 형성된 모체관을 폐지하고 관명마저 못쓰게 하는 것은 근본을 버리라는 말
과 같다.

이로 인해 태권도계에 혼란을 야기 시키는 결과를 만들었다. 태권도계의 내분이


끊이지 않는 것도 집행부를 구성하는 근본, 즉 근본 뿌리가 없기 때문이다. 중심을
받쳐주는 역할에 조직이 없음으로 중구난방에 소요가 생기는 것은 자명하다. 또한
태권도와 관계가 없는 외부인사들이 끌어 들이는 것이 크나큰 실책이다.

그렇다면 이를 살펴보기 위해 태권도 원류 무덕관 지난 변천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1945년 11월 故 황기가 ‘화수도’로 명명, 권법을 사사하다 한때는 ‘당수도’로
개칭하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 《武藝圖譜通志》』를 연구하던 중 고려시대
부터 수박희라는 고유무예가 존재해 왔던 것을 알게 되었고, 권법을 더욱 연구하고
재정립했다. 수박도 무예를 보급 전념하고자 1960년 6월 정부로부터 법인체 인가
를 받았다. 특히 1970년대 초에는 무덕관 관세가 제일일 정도로 자랑할 만했다. 그
러던 중 태권도 단일화와 모체관 해체 및 관명 불사용 조치가 시행되면서 법인체인
수박도를 제외한 당수도 무덕관, 태권도 무덕관은 분열에 서막을 맞게 된 것이다.
이것이 태권도 원류 무덕관 분열의 시작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수련생들의 단증발급이 큰 문제가 된다. 각 사범들이 본의 아니게 독


단적인 행동들을 하게 됐다. 이에 무덕관은 서서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애관심
을 갖은 사범들과 관원들은 무덕관의 미래에 대한 걱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능과
분열로 대책없이 애만 태워 왔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반세기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거대한 무덕관은 창파에 난파선 침몰직전까지 왔던 것이다.

둘째, 권도 원류 무덕관의 역사성은 흩어진 관을 모아 잊혀져가는 뿌리를 찾아 역


사적 흔적을 통해 태권도 원류 찾아 현재 정체성에 직면한 여러 가기 산재 되어 있
는 것을 묻는 것이다.

두 번째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태권도 원류 무덕관 역사연구이다. 태권도 원류 무


덕관 연구에 따른 역사관의 영역과 범위를 정립하고 해외 보급과정, 역사적 학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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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안 공식화ㆍ표준화의 기준 마련이 하는 연구가 시급한 실정이다. 신체문화자원인
태권도 무예문화의 활용한 태권도계의 학문에 관련 자료를 수집ㆍ분석해 타당성을
검토하고 나아가 무덕관과 태권도 역사적 흔적들을 수립하는 것이다.

또한 태권도 원류 무덕관의 사관에는 전통무예 실제의 극치와 신체사상의 이치가


내포될 것이다. 태권도 원류 무덕관의 사관은 태권도인들에게 무엇을 보아야 하며,
이를 어떻게 하는지 상세히 말해주지 못하고 있다. 태권도인들은 그 본질적인 면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무덕관의 사관의 역사자료이다. 이 자료는 우리의
본질에 대한 생각이나 지금 행하고 있는 역사관에 대한 모든 일체인 것이다. 이 사
관이 지향해야할 것을, 이를 체계화하여 이론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관의 실
질적인 역사학을 올바르게 정립하고 이를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다. 태권도 원류 무
덕관의 7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무덕관은 현재 태권도인들에게 이러한 작업이 있
어야 하는데, 즉 그 시대에 대한 역사관의 이치와 무덕관 실제의 극치에 관해 생각
하고 이를 분석해야 한다. 이것을 초석으로 삼아 신체학문의 체계가 될 것이다.

태권도 원류 무덕관 역사적 함의 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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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선행연구와의 비교(선행연구 내용물 정리에 있어서 제목 나열보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구체
적으로 작성할 것)

역사와 문화는 숭고한 정신과 희생이 필요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관을 형성할
수 있는 가치관을 만들어주는 사상이 있어야 한다.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사
람과 다른 사람들과 가치관이 형성할 수 있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역사와 문화는
그들이 생각하고 이를 계승발전 시킬 수 있는 존재론적 관점을 주어야 사관이 형성
된다. 이때 그들 속에 새로운 문화가 나오며 그것이 새 역사가 된다. 무예문화 역시
이를 만들고 계승발전 시킬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여야 한다. 우리 무예 중에 대표
하는 것이 태권도이다. 단 순간에 태권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모체관이 존재한다. 즉 강덕원ㆍ무덕관ㆍ송무관ㆍ오도관ㆍ정도관ㆍ지도관ㆍ
창무관ㆍ청도관ㆍ한무관 9대관을 일컫는다. 9대관의 마크는 지도관과 한무관을 제
외하고는 공통적으로 바른 주먹, 즉 오른 주먹을 상징적으로 택하고 있다. 표기에
있어 무덕관과 지도관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글과 영어, 2개어 표기를 선호하고 있
다.6)

그중에서도 황기라는 인물은 태권도 초석이 되는 여러 저서를 집필하였다. 1950


년 우리나라 최초의 무술 교본을 <화수도(花手道>라는 이름으로 발간하게 되고 그
후 <당수도 교본(1958)>, <당수도 보신법(1960)>, <수박도 대감(1970)>, <무도철
학(1993)> 등을 저술하였다. 하지만 그에 관련된 논문과 저서는 그리 많지 않다.

국기 태권도와 무덕관 역사서에 관련된 저서로는 서상렬(2015)의 『무덕관은 통


합하여야 한다.』을 보면 태권도의 본관 무덕관에 얽힌 이야기 등을 담고 있다. 황
기의 주요업적과 무덕관 성립배경 및 창립의의 그리고 태권도 통합과정을 수록되어
있다.

김용옥(2013)의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는 정신과 신체라는 막연한 이원이나


일원의 논리를 뛰어넘어 인간의 몸짓 그 자체를 언급한 내용이다. 대한태권도협회
(2015)의 『대한태권도협회 50년사』 는 태권도 역사의 중심에서 대한태권도협회
가 행정적으로 걸어온 50년의 역사를 경기 단체 입장에서 언급하였다. 이창후
(2003)의 『태권도 현대사와 새로운 논쟁들』은 『태권도 현대사와 새로운 논쟁
들』은 태권도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여 그 근원을 탐색해보고, 현대에 미치는 태

6) [네이버 지식백과] 태권도 9대관 마크 (태권도 용어정보사전, 2011. 3. 1., 태권도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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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도의 영향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태껸, 가라데, 합기도 및 닌자의 기술 등
의 역사를 재조명하여 태권도와 다른 기원에 대해 설명하는 등 다양한 측면에서 기
원설을 언급하고 있다. 이창후(2000)의 『태권도의 철학적 원리』 는 이광희의 태
권도 철학을 중심으로 태권도를 논한 저서로 태권도 자체에 내재한 원리들이 저자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한데 기인 태권도의 철학적 원리를 말하고 있다. 태권도의 조
화편, 원리편, 삼재편, 기예편, 공방편, 무기편, 품새편, 기초편 등을 제시하고 있다.
국기원(1999)의 『국기 태권도교본』는 국기 태권도는 우리 민족고유의 무도이며
세계인의 스프츠라고 언급했다. 이 교본은 대한태권도 협회와 세계태권도연맹의 중
진임원으로 구성된 편찬위원회가 각 분야의 전문지식과 실무적인 지도체험을 토대
로 언급하고 있다. 송형석(2011)의 『태권도의 철학적 탐구』는 태권도학의 연구대
상인 태권도를 개념적으로 규정한 책이다. 1부 총론에서는 태권도 개념은 어떻게
정의 내려질 수 있을지 알아보고, 태권도 기술과 태권도 정신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
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2부 각론에서는 태권도 기술과 태권도 문화에 관한 구체적
인 내용을 말하고 있다.

서성원(2007)의 『태권도 현대사와 길동무하다 (1945년부터 2006년까지의 생생


한 기록) 』은 1945년부터 2006년까지의 생생한 기록을 담은 책으로 태권도 전공
학생의 교재로 활용하기 위해 만든 역사서이다. 태권도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
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학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관련 사진을 풍부하게
곁들여, 해방 이후 태권도 현대사의 발자취를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허인욱(2008)의 『태권도 형성사 (관을 중심으로 살펴본)』은 현재의 태권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제시하고 있다. 특히 해방 이후 창설된 청도관, 송무관, 무
덕관, 조선연무관권법부, 중앙기독교청년회 권법부 등을 5개 모체관의 무예를 모태
로 형성되었다고 보고 이를 중심으로 태권도의 역사를 제시하고 있다. 최점현
(2008)의 『대한민국 태권도 오천년사』는 고조선부터 광복 이후까지, 각 시대별로
대한민국 무예와 태권도사를 정리하고 있다. 태권도가 우리 전통 무예라고 할 수 있
는 만큼 정식으로 태권도란 명칭이 사용되기 이전의 무예 흐름도 소개하여 이해를
돕는다. 또한 태권도사의 각종 논쟁거리를 제시하고 있다.

김기홍 외 2명(2007)의 『태권도의 역사철학적 탐구』는 태권도의 기원부터 태


권도의 세계화까지, 태권도에 관한 전반적인 배경지식과 정보를 제공한다. 먼저 태
권도철학과 정체성, 한국 정부의 체육 및 태권도 진흥정책의 특징을 정권별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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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태권도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태권도의 스포츠화 과정에 대한 각종
논의를 살펴보고 태권도가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세계화의 길을 걸어가기 위한
방법, 무도성과 스포츠화의 조화도 탐색을 상세히 제시하고 있다. 김영선(2011)의
『우표로 보는 태권도 발자취』는 68개국 나라에서 발행된 145종의 태권도 테마
우표를 수록하고 있다. 우표가 발행된 시기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태권도가 세계적
인 스포츠로 인정받기까지의 역사를 상세히 엿볼 수 있다.
이경명(2002)의 『우리 태권도의 역사』는 앞서 간행된 '태권도 현대사'의 잘못을
바로 잡고 한민족의 고유 무예를 포함, 오늘날까지의 태권도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
다. 이 저서는 모두 5장으로 구성되어 한민족의 고무예를 시작으로 현재 태권도의
번창기까지를 흑백 사진과 함께 설명하고 있으며 태권도인의 시.공간적 기록이며
교훈적 개념으로서의 태권도 역사의 의미를 찾고 있다.

안용규(2000)의 『태권도 역사 정신 철학』은 우리 민족 고유의 격기인 태권도


는 어떻게 발현되었으며 전개되어 왔는지를 살피고, 태권도가 지닌 정신, 도복과 띠
의 색채가 나타내는 의미, 품새의 미학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이창후(2003)의 『태권
도의 삼재강유론』는 이 책 『태권도의 삼재강유론(三才剛柔論)』의 내용은 두 가
지로 간단히 말할 수 있다. 첫째, 태권도 철학의 주요 개념으로서 '삼재'와 '강유'의
개념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삼재와 강유의 개념이 태권도에서 나타나고
중요한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실제 태권도 기법에 연관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포함된다. 둘째, 삼재와 강유를 중심으로 태권도 철학에 기존의 전통적인 동양철학
의 사상들이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보여준다. 태권도 철학이 태권도의 내면적인 모
습이라면 그것은 한국 전통문화의 한 단면일 수 있다. 한국 전통문화를 형성한 다양
한 전통적 동양철학들과 연관된다고 하였다.

배영상(2002)의 『오늘에 다시 보는 태권도』는 태권도에 대한 체계적이고 합리


적인 이론화를 시도한 연구서이다. 태권도의 개념과 역사에서부터 태권도의 기술,
교육에까지 전반을 다루고 있으며, "태권도는 우리 나라의 전통 무예인가?", "태권
도가 무도인가 스포츠인가?" 등 현재 태권도와 관련하여 쟁점이 되고 있는 주제들
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경명(2002)의 『태권도의 어제와 오늘』은 대한
태권도협회가 방행하는 태권도 전문지 <월간 태권도>에 연재된 것과 최근 태권도
와 관련된 여러 매체에 발표된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태권도 문화의 뿌리, 태권
도의 학문적 체계 및 문화적 가치관 등에 관련된 글을 다양하게 수록하여 제시하고
있다. 김주형(2004)의 『이야기 태권도』는 태권도에 관련된 주변 이야기들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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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으로 구성된 저서로 태권도 선수와 수련생들, 도장 그리고 태권도를 사랑하고 알
고 있는 일반이들 모두의 이야기가 상세히 제시하고 있다. 이경명(2012)의 『태권
도 인명사전』은 오늘의 태권도가 있기까지에는 1950~60년부터 해외 각지에 진출
하여 씨앗을 뿌린 한인사범들의 노력이 있었으며 우리는 그 분들의 소중한 업적을
기려야할 의무를 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런 측면에서 초기 한인사범들의 노고를
기리는 의미에서 ‘태권도인명사전’ 작업을 하게 되었다. 150여 명에 이르는 개척자
및 국내유관기관의 장들이 포함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주요 학위 논문들은 송문철(2015)의 「제주 태권도 경기 변천과정」


에서 제주 지역의 태권도 도입은 1954년 6월 문대식(文大植․본명 문봉준)에 의해
사사로 이루어졌다. 초창기 태권도 보급은 1955년 6월부터 창무관, 강덕원, 청도
관, 오도관, 지도관 그리고 송무관 등의 주요 6개 관(館)에 의해 보급되어 졌다. 창
무관이 가장 큰 규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제주태권도 보급에 많은 영향을 가져 왔다
고 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김동우(2014)의 「광복이후 한국 태권도 경기의
변천과정」은 제 1·2공화국(1945~1962년), 제 3·4공화국(1963~1980년), 제
5·6공화국(1981~1992년), 문민·국민정부(1993~2002), 참여·MB정부(2003~2012
년) 등 시대별로 구분하여 분석하였으며 정치적 상황에 따라 국기 태권도가 발전하
였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김상천(2013)의 「태권도의 아프리카 주요국가 진출과
변천 : 이집트, 튀니지, 코트디부아르를 중심으로」는 아프리카에서 태권도가 전파
되고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해외 사범들의 역량이 가장 주요했으며, 이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한국의 국기 태권도가 아프리카 대륙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해외 사범들은 한국외교의 불모지였던 아프리카 대륙에 최초의 외교적 씨앗
이 되어 태권도를 통해서 한국문화와 예절까지 알리는 한류바람을 일으키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박민호(2012)의 「태권도 세계화 전략의 전개양상과 향후 과제」는
WTF와 ITF의 두 단체 간의 교류를 통하여 서로간의 이질화된 문제점을 극복하고
앞으로 태권도가 올림픽 영구종목으로 채택 될 수 있는 협력 방안을 추진하면서
WTF와 ITF 간의 사회 전 분야에 걸쳐 태권도로 활성화에 대하여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정정규(2008)의 「광복이후 태권도 시대적 변천사에 대한 문헌적 연구」에서
태권도의 외형적인 발전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태권도사에 대한 연구는 난항을 거
듭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전통무예설과 가라데 유입설의 갈등에서 비롯되었으며
아쉽게도 태권도형성의 전통성을 세우고,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연구된 전통 무예설
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에 있어 부족한 면을 부인할 수 없다고 이를 세세히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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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방(1986)의 「解放 以後 韓國 跆拳道의 發展過程과 그 歷史的意義」는 태권
도사는 ‘카라테 유입론’으로도 일컬어진다. 하지만 이는 ‘실증주의(實證主義) 사관’
을 통해 태권도의 역사서술을 진행한 것이다. 실증주의 사관은 문헌을 통해 객관적
이면서 과학적으로 역사를 탐구하는 것이 목표이다. 실증주의 사관에 따른 태권도
사의 서술은 전통성에 흠집으로 여겨질 수 있는 주장〔일본 카라테에 영향을 받은
태권도〕이다. 제도권에서 인정하기에 곤란함을 가진다고 하였다.

논문으로는 김산, 김창우, 송일훈(2008)의 「ITF 태권도 형성과 발달에 관한 연


구」에서 한국의 태권도는 최고의 신체문화 상품 중 하나지만 현재의 태권도는 많
은 한계에 부딪치며 발전과 퇴보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언급했다. 즉, 경기 무도로
서 성공한 WTF 태권도의 한계인 성인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 부재와 태권도의
역사 문제가 갖는 정체성 확립이 그 대표적인 한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한계를 극
복하기 위해 이 연구에서는 근본은 같지만 다른 길을 걷고 있는 ITF 태권도의 형성
을 상세히 제시하였다. 김방출(2006)의 「태권도사 논쟁에 대한 쟁점과 과제」는
체육사를 연구하자면 서양에서는 스포츠의 역사가 주된 연구대상이지만 동양에서
는 무예의 역사가 주된 연구대상에 포함된다. 사실, 무예의 역사적 정통성 문제는
한국 체육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관심사 중의 하나이다. 전 세계에 한국의 전통무예
로 잘 알려져 있는 태권도 역시 그것의 역사적 정통성에 대해 많은 의심을 받고 있
으며, 이로 인해서 지난 10년 이상 동안 치열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이러한
논쟁을 올바르게 발전시키고 한국 체육사의 정통성을 정립하기 위한 노력의 필요성
이 제기된다. 따라서 오늘날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로 크게 대별되는 태권도 역사에
대한 논쟁을 정리하고 양측의 입장을 평가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태권도 역사
논쟁에 있어 구체적으로 어떤 쟁점들에서 각기 입장들이 대립되는지를 분명히 함으
로써 차후의 논의를 한 단계 성숙시키면서 확대해 나갈 계기를 마련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권혁정, 이동건(2015)의 「한국의 태권도사상에 관한 연구」는 한국 고유의 주요


사상인 풍류도(風流道), 화랑도(花郞道), 선비도, 홍익인간(弘益人間)사상을 토대로
태권도에 내재한 함의를 밝혀 한국의 태권도사상을 정립하고자 함에 있다. 먼저 태
권도의 신체사상은 태권도의 목표와 목적을 명확하게 정립하는데 중요한 사항으로
한국 주요사상의 중심인 도를 체득하기 위하여 심신을 부단히 닦음과 깨침을 얻기
위한‘심신일여론적 신체관(心身一如論的 身體觀)’을 가진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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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원(2015)의 『태권도 9갸관 역사 자료집』은 강덕원, 오도관, 창무관, 무덕
관, 정도관, 청도관, 송무관, 지도관, 한무관 등 각 관의 탄생배경을 다루고 있다. 특
히 관의 활동과 계보에 따른 유물 중심으로 개괄적 내용만 제시하고 많은 아쉬움이
남아 있다. 그나마 태권도 원류 9개관 학술저서 및 유물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좀더
가치 있는 연구물이 있어 후속 연구가 기대가 된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바, 국기 태권도 원류 무덕관 역사서에 관련된 선행연구물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역사 및 사상 그리고 철학 등의 다양
한 측면에서 연구는 자산을 풍부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이에 관한 논쟁 및 비판적 사고에 따른 재검토와 재해석을 탐구하는 연구


자들의 심층적인 후속 연구가 미진한 상태이기 때문에 더 이상 진보하지 못하고 퇴
보할 수 있는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이 현 태권도계의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황기
무덕관과 태권도 원형에 관한 통합적이면서도 미시적 관점으로 비교․조사 및 검토
가 없었다. 그러므로 국기 태권도 원류 무덕관에 관한 무적공방의 실제와 사상을 미
시적인 관점으로 이를 살펴보아야 그 의미를 정확하게 풀이할 수 있을 것이라 그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특히 국기 태권도에 관련된 선행연구들은 객관적인 연구
보다는 주관적 입장에 의해 자의적 해석을 하는데 크나큰 문제점이 있다. 이를 해
결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견지의 눈, 즉 사관 또는 다양한 시선이 존
재하여야 한다.

따라서 황기 무덕관과 국기 태권도 역사에 관한 종합 검토하여 맥락(context)적


관점인 동일선상에서 상호 비교․검토한 체계적인 분석방법으로 연구가 진행되어야
이에 관한 정확한 무적공방 실제를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태권도계의 역사적
근원과 실제에 관한 정체성 제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필자는 이 연구의 성
과를 통해 태권도의 원류 무덕관의 원형에 대한 진실이 밝혀져 태권도계의 올바른
역사 가치관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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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초 연구 내용, 범위 및 방법

1) 연구의 문제

이 연구에서는 이론적인 토대 구축하는 과정으로 태권도 원류 무덕관의 역사성을


탐구하고자 한다. 태권도 원류 무덕관 변천에서의 내재된 태권도 원형에 품새의 특
성 및 문화재적 가치를 상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태권도의 현재적 문제점을 파악하
여 나아갈 방향을 제시함은 물론 무덕관의 발전과정 등을 살펴보기 위해 아래 제시
된, 여러 사항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문제점을 주목하여 검토할 것이다.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연구문제의 제시는 다음과 같다.
첫째, 태권도의 역사성을 분석하고 통합과정에 나타난 무덕관 변천사의 역사적 함
의를 탐구한다.
둘째, 태권도 역사성에 관계된 전문가의 인터뷰와 무덕관에 내재된 역사성을 논
의·분석·탐구한다.
셋째, 태권도와 무덕관 여러 가지의 무예 실제를 비교·분석·논의하여 전통성과 정
통성을 탐구한다.

국기 태권도 정체성 논의

이상의 구체적인 연구문제점을 주목하여, 태권도 원류인 무덕관을 모색하고, 태권


도의 발전 전략 및 정체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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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구범위와 방법

이 연구를 보다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 아래와 같이 범위와 방법을 설정


하였다. 이에 따른 연구의 범위는 태권도 원류 무덕관사(史)에 관련된 역사논문, 고
대고증문헌, 고대동양무술서적, 인터넷 자료 등을 조사․분석․논의하여 살펴보았다.
이에 관한 1차 사료와 2차 사료의 다양한 자료를 참고하여 태권도 원류 무덕관을
상세히 검토하였다. 뿐만 아니라, 무덕관 황기가 여러 무예 서적 및 《武藝圖譜通
志》를 종합 검토하여 수박도와 무덕관을 창안하였듯이 필자 역시 이러한 분석방법
으로 이 연구과제를 진행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구체적인 연구쟁점을 설정하여 태권도 원류 무덕


관사(史)를 통해 품새의 실제에 관한 복원과 재현에 있어서 태권도계에 어떠한 영
향력을 주었는지를 다양한 각도로 살펴볼 것이다. 이에 관련된 구체적인 연구쟁점
의 조사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태권도 원류 무덕관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이에 관련된 역사논문을 조사․분


석․논의하였다.

둘째, 태권도 서적에 보이는 무덕관을 역사적 흔적들을 조사․분석․논의하였다.

셋째, 황기 무덕관과 태권도의 여러가지 실제의 신체기법을 비교․조사․분석․논의하


였다.

넷째, 황기 무덕관에 관련된 고증문헌자료검증을 조사․분석․논의하였다.

다섯째, 태권도 원류 무덕관에 관한 신체문화유산으로서의 활용계획을 조사․분석․


논의하였다.

여섯째, 태권도 원류 무덕관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이에 관련된 역사논문을 각 분


야별로 조사․분석․논의하였다.
일곱째, 무덕관의 실천철학과 태권도의 철학적 사유적 사고를 비교․조사․분석․논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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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7가지의 연구쟁점을 선정할 것이다. 이상의 구체적인 접근방법으로
하여, 태권도와 무덕관의 무예실제와 신체사상사를 비교 및 분석을 통해 이에 대한
연관성 및 전통성을 밝혀내는 데에 그 초점을 맞추어 이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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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연구수행 내용 및 결과

1차년도 - 황기의 당수도·수박도·태권도 70년 무덕관 중심으로


-

Ⅰ. 전통무예 당수도 무덕관 역사적 재조명

우리 무예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 전통무예 당수도 무덕의 역사관


이다. 역사관에는 전통무예 실제의 극치와 신체사상의 이치가 내포되어 있다. 전통
무예 당수도의 역사관은 우리 무예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이를 어떻
게 하는지를 상세히 말해주지 못하고 있다. 우리 무예인들은 그 본질적인 면을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전통무예 당수도 무덕관 사관의 역사자료다. 이 자료는 우리의 본질


에 대한 생각이나 지금 행하고 있는 역사관에 대한 모든 일체인 것이다. 이 사관이
지향해야할 것을, 이를 체계화하여 이론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관의 실질적
인 역사학을 올바르게 정립하고 이를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이 역사를 자랑하는 전
통무예 당수도 무덕관은 현재 우리에게는 이러한 작업이 있어야 하는데, 즉 그 시대
에 대한 역사관의 이치와 무덕관 실제의 극치에 관해 생각하고 이를 분석하여야 한
다. 이것을 초석으로 삼아 미래의 무덕의 역사관을 비상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신체
학문의 체계가 될 것이다. 전통무예 당수도 역사적 함의를 체계화하기에 앞서 우리
의 신체학문이 지금 직면하고 있는 크나큰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이런 이유로 여러 가지의 문제점이 존재하지만 그 중에서도 전통무예 당수도
무덕관 분야의 역사학이다. 이 분야는 옛 전통무예 당수도 무덕의 선배들의 무예 실
제이자 우리가 살아가는 정신적 지주의 역사관이다.

이와 같이 전통무예 당수도 무덕관 역사관을 구체적으로 조사‧분석하자면 정확한


문헌검증정립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저해요인으로는 무예관 역사에 보이는 사진 및
유물 등의 1차 사료가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대한민국 전통무예의 중심인 전통무예 당수도 무덕관이 가지고 있는 역사관과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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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관 그리고 신체사상관의 이치 및 실제의 극치에 대한 의미와 가치관을 명확히 제
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의 인식을 통해 뿌리 없는 실체의 존재 없는 현
상에 난립하고 있는 역사성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이다. 올바른 전통무예 당수도 무
덕의 신체관과 역사관에 나타난 의미와 가치를 제시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
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주제의식은 전통무예 당수도 역사관과 철학관 그리고 신체사상관의


가치와 의의를 밝혀 무덕관의 전통성과 정통성을 역사적 근원과 신체학문실제에 관
한 정체성 제시를 규명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전통무예 당수도 무덕관의 정통이 가
지고 있는 역사관과 철학관 그리고 신체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실제의 극치와 신체
사상사의 이치인 그 위대한 신체무예문화유산을 우리 무덕 후손들에게 물려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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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예도보통지]와 권법(당수도)의 역사적 함의

중국에서 전해진 것은 32세인데 [무예도보통지]에는 총38세이다. 권법은 맨몸


무예로 창검을 배우기 전에 익혔다. 백병전을 벌일 때 때때로 무기 없이 맨몸으로
적을 제압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현각허이세와 요란주세, 순란주세, 복호세 등 중국
권법의 영향을 받았다. 권법보의 주요한 특징이 발보다는 손을 주로 사용하는 수박
의 형태가 남아 있는 듯 하다. 문헌을 찾아보면 조태조 장권에서 그 유래를 찾는다
고도 한다. [무예제보]에 소개된 권법과 [무예도보통지]의 권법을 비교하면 조선에
서 유래한 것으로 짐작되는 6가지의 세법이 추가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효신서]의 저자 척계광은 “권법은 전쟁에 대비하는 무예가 아니다. 그러나 손


발과 팔다리와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게 습관화되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권법은
무예에 입문하는 첫걸음이다.”라고 말했다. 또 모원의는 [무비지]에서 “점을 찍고
획을 긋는 법을 안 다음이라야 영자8법(永字八法)을 가르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로 말안장에 의지할 줄 알아야만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을 가르칠 수 있는데, 권법도
역시 마찬가지이다.”라고 했다.

당순지는 [무편]에서 “권법에도 자세가 있는데, 그 자세에는 변화가 있다. …모두


울타리와 문이 있어 지킬 수도 있고 공격할 수도 있는데, 이런 것을 세勢라고 한다.
그러나 권법에 정세가 있다고 하더라도 실전에서는 정세를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으
로 변화시키면서 사용해야 한다. 변화에는 정세가 없지만 기본자세를 잃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당송시대 이래 권법술은 2개 유파로 나누어졌는데 하나는 외가권이고, 다른 하나


는 내가권이다. 단련법에는 손동작을 위주로 하는 35가지 수련방법과 발동작을 위
주로 하는 18가지 수련방법이 있다. 중국의 24가지 창법과 32가지 권법은 수시로
변화하므로 수백 가지 자세로 변화하게 된다. [무예도보통지]에는 별로 쓸모없다고
판단되는 열 가지 자세를 빼버리고 새로운 권법의 비결 6가지를 증보하였다.

두 사람이 각각 왼손과 오른손으로 허리를 끼고 쌍으로 섰다가 처음에는 탐마세를 하되 오른손으


로 왼편의 어깨를 쳐서 벗기고 즉시 요란주세를 하되 오른 손으로 오른편 어깨를 쳐서 벗기고
兩人 各 以左手左夾要 雙立 初作 探馬勢 右手打開 左肩 旋作 拗鸞?勢 左手打開 右肩

앞으로 나아가서 현각허이세를 하되 오른 발로 오른 손을 차고 왼 발로 왼손을 차고 오른발로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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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 손을 차고 즉시 순란주세를 하되 왼편으로 한번 돌아 왼손으로 오른 발을 한번 치고
進前 作 懸脚虛餌勢 右足蹴右手 左足蹴左手 右足蹴右手 卽作 順鸞?勢 左一廻 左手一打 右足

그대로 칠성권세를 하되 좌우편으로 씻어 고사평세를 하되 오른 손과 왼다리로 앞을 한번 찌르라.


仍作 七星拳勢 左右洗 作 高四平勢 右手左脚 前一刺

즉시 도삽세를 하되 왼손과 오른 손을 높이 들어 뒤를 돌아보며 몸을 돌려 뒤를 향하여 일삽보세


를 하되 오른 손을 오른편 겨드랑이에 끼고
卽作 倒揷勢 左右手高擧 後顧 回身 向後 作 一?步勢 右手夾右腋

그대로 요단편세를 하되 한걸음 뛰어 오른 손으로 우둔(오른편 볼기)을 차고 그대로 복호세를 하


되 나아가 앉으며 오른편으로 돌아 일어서며 또 현각어이세를 취하고
仍作 拗單鞭勢 跳一步 右手打 右臀 仍作 伏虎勢 進坐右廻 起立 又作 懸脚虛餌勢

그대로 하삽세를 하되 왼편으로 한번 돌며 오른손과 왼발을 한번 치고 즉시 당두포세를 하되 왼손


으로 앞을 막고 오른 손으로 이마를 가리우며
仍作 下揷勢 左一廻 右手左足 一打 卽作 當頭砲勢 左手防前 右手遮額

그대로 기고세를 하되 좌우편을 씻고 또 중사평세를 하되 오른 손과 왼 다리로 뒤를 한번 찌르고


그대로 도삽세를 하고
仍作 旗鼓勢 左右洗 又作 中四平勢 右手左脚 後一刺 仍作 倒揷勢

앞을 돌아 보고 몸을 되돌려 도기룡세를 하되 왼손과 오른 손을 열어 버리고 요단편세를 하여 앞


으로 나아가 그대로 매복세를 하되 일자로 나아가 앉고 일어서며 현각허이세를 하고 그대로 하삽세
와 당두포세를 하고 또 기고세와 고사평세와 도삽세를 하고 즉시 일삽보세와 요단편세를 하고
前顧 廻身 作 倒騎龍勢 左右手 開張 作 拗單鞭勢 進前 仍作 埋伏勢 一字進坐 起立 作 懸脚虛餌勢
仍作 下揷勢 當頭砲勢 又作 旗鼓勢 高四平勢 倒揷勢 卽作 一삽步勢 拗單鞭勢

즉시 오화전신세를 하되 오른 손과 오른 다리로 오른 편으로 돌아


卽作 五花纏身勢 右手右脚 右廻

두 사람이 마주 서서 안시측신세와 과호세를 하되 두 손을 개합하여 좌우로 서로 찾고


兩人對立 作 雁翅側身勢 跨虎勢 兩手開闔 左右相尋

갑이 현각허이세를 하되 왼편으로 차고 오른 편으로 차고 몰아 쫓아 앞으로 나가거던 을이 구유세


를 하되 왼 손과 오른 손으로 막아 물러나고 안시측신세와 과호세를 하여 서로 돌아 서라. 을이 즉
시 현각허이세를 하여 나가거던 갑이 또 구유세를 하여 물러나고 두사람이 즉시 안시측신세와 과호
세로 서로 돌아서고
甲 作 懸脚虛餌勢 左축右축 驅逐前進 乙 作 丘劉勢 左右手 遮退 作 雁翅側身勢 跨虎勢 相廻立 乙
作 懸脚虛餌勢 進 甲 又作 丘劉勢 退 兩人 卽作 雁翅側身勢 跨虎勢 相廻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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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이 나아가 복호세를 하거던 을이 금난세를 하여 뛰어 넘어 즉시 복호세를 하고 갑이 또 금나세
를 하여 뛰어 넘고
甲 進作 伏虎勢 乙 作 擒拿勢 跳越 旋作 伏虎勢 甲 亦作 擒拿勢 跳越

두 사람이 즉시 포가세를 하되 왼손과 오른 손으로 오른 편 발등을 치고 또 점주세를 하고


兩人 卽作 抛架勢 左右手打 右足背 又作 점주勢

갑이 오른 손으로 을의 왼편 어깨를 잡거던 을이 오른 손으로서 갑의 오른편 겨드랑이 아래를 쫓


아 갑의 목을 꼬아서 갑의 왼편어깨를 잡고 각각 등뒤로써 왼 손을 걸어 당기고 갑이 을을 업고 빗
겨 들어 거꾸어 던지거던 을이 물레돌듯하여 얼풋 땅에 내려서고 을이 또 갑을 업어 전법과 같이 하
여 마쳐라.
甲 以右手攫 乙左肩 乙 以右手從 甲右腋下絞過 甲項攫甲左肩 各 以背後 勾左手 甲 負乙 橫擧 倒擲
之 乙 作 紡車 旋作 삽然 下地立 乙 又 負甲 如前法 畢

나찰의출문가자변하세로 사뿐히 걸어 단편으로 적을 상대하여 담력이 없을 것 같으면 먼저 공중을


향하여 눈에 보이는 곳부터 손을 놀린다.
금계독립세로 넘어졌다가 일어나서 넙적다리를 싸고 주먹으로 가로 지른다. 마치 등을 부딪힌 누
운 소가 거꾸러져 울부짖는 것이 하늘에 연결한 것 같이 한다.
懶찰衣 出門架子 變下勢 ?步單鞭對敵 若 無膽 向先空 自眼明 手便 金鷄獨立 顚起裝腿 橫拳 相兼?
背 臥牛 雙倒遭 著叫 若連天

우물난간이 사면에 평평하듯 곧게 나아가 정강이를 짜르고 무릎을 찰 자세로 물이 산을 뚫고 한


개의 깔뀌의 어긋난 모양을 바르는 듯한 동작을 취하면 장군도 달아난다.
귀신같이 다리를 차서 다른 사람을 잡아 채어 먼저 나타나서 앞을 보익하고 휩쓸면서 돌다 맨몸을
올려서 등에 진 활이 쓰러지는 것을 받추어 올려 팔꿈치 가운데를 통하여 일으킨다. 묘술은 전하기
어렵다.
井欄四平 直進 剪??膝 當頭滾穿 劈?抹 一鉤鐵樣 將軍也走 鬼蹴脚 ?人先著 補前掃轉 上紅拳 背弓顚
披 揭起穿心?? 妙難傳
지당세는 개정법이다. 다른 사람은 나가기 어려우나 나는 앞을 향해 나가기는 좋아져서 무릎을 차
고 쑥 뻗으며 얼굴을 들고 급히 돌아서 맨몸을 짧게 젓힌다.
指當勢 是 箇丁法 他難進 我 好向前?膝滾? 上面給 回步顚 短紅拳

수두세로 패와 같이 강하게 나아가서 빠른 다리에 맞게 의지하고 나는 바삐 놀램을 줄이고 취함을


높여서 다른 사람의 방위하기에 어려울 때 접전을 짧게하고 홍충을 올린다.
獸頭勢 如牌埃 進?快脚遇 我慌?低驚高取他難防接 短披紅衝上

신권을 얼굴 가까이 대었다가 아래로 꽂아 내리면서 앞으로 걸어서 불꽃이 중심으로 모이듯 만남
을 교묘히하여 즉시 잡고 도사렸다가 손을 들어 사정없이 동작으로 옮긴다.
한줄기의 재찍을 가로 세로 흔들며 돌산을 파헤치듯이 두 다리가 앞으로 나아가서 상인이 다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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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상대의 힘이 약하거나 담이 크면 나는 교묘히 신을 통하는 힘으로 들어치기
를 좋아 하라.
神拳 當面 揷下 進步 火??心 遇巧就拿就跌擧手不得 留情 一條鞭 橫直披? 兩進腿 當面傷人 不? 他
力粗膽大 我巧好打通神

참새가 땅에 내리고 용이 땅에 내려와 용트림하는 방법으로 앞으로 쳐들었다가 뒤로 물러나서 맨


주먹으로 상대가 물러서면 나는 비록 쓰러지더라도 충격을 보완하여 다만 휴식을 취하며 연장하라.
조양수편신세로 다리를 방어하고 봉쇄하지 않고 핍박하여 영결들이 물러서면 진세를 무너뜨리고
상대방의 다리를 퉁기라. 이것은 좋은 본보기로 상대의 명성을 상케한다.
雀地龍 下盤腿法 前揭起後 進紅拳 他退我雖顚補衝來 但當休延 朝陽手 偏身防腿 無縫鎖 逼退豪英
倒陳勢 彈他一脚 好敎師也 喪聲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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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초창기 무덕관 당수도(수박도) 무명의 역사적 함의

황기의 무덕관 수박도에 창시한 내용이다. 그는 《武藝圖譜通志》에 나오는 권법


에 《수박도》언급하였다. 1957년에 처음으로 무예서적인 《武藝圖譜通志》를 발
견한다. 그 이유는 1945년까지 36년간 에서도 일본 무예에 대한 것만 보고 들어와
우리나라의 문화와 무예 대해서는 지식이 전무한 상태였다. 수박도를 보급 발전시
켜 공헌하고자 결심한 그는 놀라움과 환희에 도취된다. 이 고서를 발견한 후부터 그
는 매일 서울 대학 도서관에 나가 보고 연구하면서 58년까지 이 책 전부를 복사해
왔다. 그는 이 책을 연구하여 정교한 해설과 그 기법의 해설을 한국인은 물론 온 세
계인들에게 보급시키고자 결심한다.7)

그러나 이 서적은 번역 보완하여 우선 한글판을 발간하기 위해 착수하는데 참으


로 어려운 나관에 봉착한다. 즉 이 중요한 기법을 번역하고 그 해설을 발표함에 있
어서 중대한 사명감은 물론 이에 대한 능력 양성과 갖가지 준비가 수반되어야 한다
는 점이다. 특히 《武藝圖譜通志》에 기재된 원문이 내포하고 있는 철학적인 사상
이 기본무예정신에 위배되지 않아야 한다. 기법과 역사와 전통이 자연스럽게 부합
되어 본질적인 면을 최대한 살려내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번
역과 해설을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 외의 모든 문장이 모두 각 동작의 중요골자만
기록되어 있어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고 한다. 각 동작은 물론 자세와
요령, 보법에 있어서도 서로 상기되어 있지 아니한다. 주 동작에 대해 부수되는 동
작은 대부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원래 한문자는 글자 한자로써 광범위한 의미와
방법, 여러 가지 표현을 내포하고 있다.

문장 기록을 한 당사자외에는 의사와 방법을 완전히 이해가 참으로 어렵고, 사람


에 따라 여러갈래로 해석하기 쉽고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전문 기술 분야에 대한
문장이기 때문에 한학을 전공한 사람도 이문장의 완벽한 번역과 해설을 참으로 어
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장을 가급적 완전하게 번역해설 하기에는 다음의 조건
들이 구비되어야 한다.

첫째, 한학에 능통해야 한다. 둘째, 진정한 무예가 무엇인가를 터득하여야 한다.
셋째, 무예 수박에 대해 실적으로 장구한 시일을 체엄하여야 한다. 넷째로, 십삼세
에 대한 진리에 입각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상기한 네가지 조건을 구비한 사람만

7) 황기의 무덕관 《武藝圖譜通志》에 나오는 권법에 1957년 《수박도》언급한 내용을 조사·분석, 논의하여 전개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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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완전에 가까운 번역과 해설을 할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문장에 내포되어 있는 요소와 조건, 그리고 기본동작을 그대로 살리는데 최선의 노
력을 하였고 상기한 네 가지 조건을 부합시켜 모든 주 동작은 물론 부수되는 연결
동작을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면서도 실질적인 면을 참작하여 번역한다.《武藝圖譜通
志》를 발간 기록한 사람의 동작방법과 일치하도록 완전한 번역 해설을 한다는 것
은 있을 수 없지만 그 근사치에는 도달 할 수 있었다. 그러나 《武藝圖譜通志》에
기록된 실기에 대한 문장을 그대로 직역한다면 이는 무예로서의 진정한 가치는 이
미 상실한 설명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팔괘오행이라는 용어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십삼세라는 용어는 잘 알


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로 십삼세는 무예계에서 자주 통용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현재 무예계의 인사들이 잘 아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그렇다면 십삼세 용어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팔괘오행에서 팔괘의 8이라는 숫자와 오행의 5라는 숫자를 합하면 13이 되고 세


는 무예계 실기면에서 사용되는 용어인 동시에 중요한 의미와 내용을 표현하는 단
어이다. 이 13이 되고 세는 무예계 실기면에서 있어서 팔괘오행과 십삼세는 동일한
것이다. 《武藝圖譜通志》 권법편에는 십삼세에 대한 용어는 물론 그 내용에 대하
여 일체 언급이 없다. 그러나 이 십삼세 즉 팔괘오행은 우리 인간의 일상생활에 있
어 기본조건이 되는 철학적인 요소로써 무예계에 있어서도 근본적인 조건을 지닌
불가분의 중요한 존재이다. 이 팔괘오행, 즉 십삼세는 광범위하고도 숭고하며 철학
적이고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를 상세히 기록하기 위해 주역을
비롯한 수많은 철학 문헌전반을 열거, 설명하고 기록해야 한다, 무예의 원간이 되는
십삼세에 대해서만 상세히 기록한다, 현대인들의 대부분은 유상 유형에만 치중할분
무상 무형 대해서는 경시하는 경향이 많으므로 특별히 십삼세를 강조, 기록했다고
한다. 십삼세는 사도는 물론 모든 무예의 근본적인 이념과 행동의 원리 원칙적인 요
소가 되므로 이치 또한 여기에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십삼세에 대한 기준, 실기법
이 있지만 다음 실기, 형에 내포되어 있다.

이를 통해 재현 및 복원된 수박도의 권법을 대략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증입부 대련법이다. 중입부 제1번 대련공법 번역해설인데 마음을 안정하고 안에
서 서두르지 말고 서서히 옷을 벗고 (여기서는 상의) 문을 나서서 즉 행공을 시작한
다. 처음에는 좌우 양족을 자기 어깨넓이 정도로 벌리고 우수는 우쪽옆 위로 반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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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 좌수는 좌쪽옆으로 내려 갖는다. 이때 좌수 팔굽을 약간 굽히고 전신과 자우
양수에 힘을 많이 주지말고 우수권 갑향은 자기 후면향 좌수 장향은 하양이 되게
갓는다. 즉 원도 제 1번도와 같은 동작으로서 가자세 시작전 준비자세를 취한다. 그
리고하세 즉 좌족을 약간 옆(상대방향)으로 내어 놓으면서 좌우 양족 무릎을 굽혀
서 몸을 낮추어 가지고 사고립자세나 후굴자세를 취하는 동시에 좌수는 팔굽을 45
도 정도 굽혀 위로 세워서 팔을 올려 가지고 우수는 팔굽을 굽혀 저가 명치앞 위치
에 수평하게 뉘어 중단 방어동작을 취한다. 이때 명치와 우하완부간의 거리는 7cm
정도이고 우수갑향은 상향이 되게 가지고, 즉 단편세를 취하고 대적 태세를 갖춘
다.n 즉 대련 준비동작을 취한다. 이때 마음을 조급해하거나 딱딱하게 갖지말고, 자
연스럽고 태연하게 가지며, 전신에 힘을 너무 많이 갖지 않고 앞면 공간을 향하여
즉 상대방을 향하여 눈, 즉 시선과 자기 마음의 통일과 마음을 명쾌하게 가지고 좌
우 양수는 힘을 약간주고 자연스럽고 편하게 갖는다. (상대방은 이와같은 방법, 요
령으로 시선과 몸향이 반대가 되게 갖는다.

증입부 제2번 대타공법 번역해설이다.


준비자세에서 좌족을 상대방을 향하여 횡진 이동하고 우족을 좌쪽옆으로 이동하
여 좌족 옆쪽으로 횡진하여 좌우에다 중심을 많이 지붕하고 좌우 양족 무릎을 굽혀
서 몸을 낮춘다. 즉 금계 독립자세를 취하는 동시에 우수는 팔굽을 굽혀 자기 중단
앞으로 눕히면서, 좌쪽 배후로 깊숙히 돌려 힘주어 껴안으면서, 원도와 같이 낮춘
몸의 둔부를 좌쪽으로 허리를 틀며, 가능한 한 많이 틀어 상대방의 하복부에 깊숙이
집어 넣어 밀착시킨다. 이와 동시에 좌수는 팔굽을 많이 굽히면서 좌쪽 위로 많이
올려서 (다음 제2번도와 같은 자세이다) 위에서 아래를 향하여 상대방의 우쪽 어깨
너머 배후에 밀착하여 힘주어 잡는 동시에 굽힌 양다리를 힘주어 뻗어 올려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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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동시에 상체는 허리를 앞쪽으로 힘주어 많이 굽혀 엎드린다. 이렇게 되면 자신과
상대방은 밀착하여 즉 자신의 배우에 상대치 두 마리의 소가 밀착하여 누워 있는
것 과 같은 형태로서 계속하여 좌우 양수에 힘을 많이 주면서 앞쪽으로 허리를 더
욱 많이 굽히면 자신의 등위 밀착하여 엎혀 있던 상대방은 사진의 앞쪽으로 빙돌아
지상에 떨어져 넘어지게 된다. 이 순간 천지가 진동할 정도의 큰 목소리로 부르짖어
기합소리를 낸다. 이 공법 동작은 유도의 업어치기와 흡사한 방법 요령의 대련법이
다.

증입부 제4번 대타공법 번역해설이다. 준비자세에서 대련 예비동작을 취한후 우


족 앞차기 (높이차기) 공격동작을 취하면서 전면을 향하여 일보 전진하여 우족을
내려 놓고 그 위치에서 좌족을 많이 굽혀 몸을 최하단 좌족 후굴자세를 취하면서
우족은 힘주어 전면 우쪽을 향하여 뻗어서 상대방 최하단 발을 향하여 찌르는 듯이
공격 동작을 취하는 동시에 좌우 양수는 동시에 뻗어서 아래로 내려 양수를 지면에
밀착시킨다. 이때 좌우 양수의 간격은 자기 어깨넓이 정도로 갖고 양수에도 중심을
두어 자세를 고정, 안정시키고 행공한다. 그리고 그위치 그자세 그대로 서연속하여
좌족 최하단 후굴자세로 우족도 뻗은 그대로 우쪽으로 향하여 지면을 쓰는 듯이
180도 회전 이동하여 상대방 최하단(발)을 반등을 주며 우족을 뻗은채 푸려치는 공
격동작을 더욱 보강하면서 우족은 그대로 가진채 서서히 둔부를 지면에 밀착시키면
서 앚아서 마음과 중심과 자세를 안정하면서 좌우 양수를 팔굽을 많이 굽혀, 양수
동시에 자신의 젖가슴 밑까지 위로 올려서 양수 하완부를 수평하게 뉘어서 양수 동
시 중단 방어동작을 취한다. 그리고 약간 등을 굽혔다가 펴면서 좌우 양수를 동시에
좌우 양쪽으로 힘주어 쭉벌려 펴면서 올려 갖는다. 이때 좌우 양수와 어깨가 일직선
이 도게 갖는다. 그리고 연속적으로 동작하여 일어서면서 그 위치에서 우족을 끌어
세우면서 사고립자세를 취하고 상대방의 심장을 향해, 즉 중단 명치 급소를 향하여
시선은 후면 좌쪽을 향하면서 좌수 팔굽을 많이 굽혀 돌출시켜서 좌수 하완부를 수
평하게 뉘어갖고 우수는 팔굽을 굽혀 좌수 주먹을 덮는듯이 감싸고 좌수 공격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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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합해 동시에 강타 공격동작을 취한다. 이 공겁은 신비롭고 행공하기 어려운 동
작으로서 전수와 수련이 어려운 공법 동작이다.

수박도의 권법에 관련된 문장번역해설이다.

번역해설이다. 즉 육로형 동작에서 두날개(양팔)를 벌리고 두문세로 환원하는 것


이나, 좌마세로써 벌리고 흔들며 도는 동작과 같은 것등 율로와 십단금과는 서로 같
은 것이 많이 있다. 육로는 골근을 건전하게 단련하는데 사용토록 단련시키는데 있
고 십단금은 근골을 단련한 후에 합리적인 기법으로 자유자재로 활용하는데 적합하
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저자의 생각으로는 십단금은 원형에서 상대성, 즉 대련에
적합하게 되어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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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해설이다. 중국의 이십사창법이나 삼십이권 법은 때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다. 비로 몇가지 기법세가 있어서 이 세들이 서로 연결이 있거
나 반드시 공법의 세와 세가 서로 상승, 연락 또는 끊어지지 아니하는 것은 고서,
역서에 서괘가 있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라.

번역해설이다. 그런고로 모씨가 논하기를 조선 검법세에도 역시 분세법과 자법,


격법으로 나누었고 우리나라의 예도법은 이미 기재된 모씨 설을 복습하는 것이다.

번역해설이다. 속보, 즉 권법에 있어서 척보, 척계광문서에서 말하기를 반드시 두


사람이 상대하여 행공하는데 있어서, 그동작, 행공세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갑이 탐마세를 취하면 을은 요단편세를 취하고 또 갑의 칠성세를 취면 을은 기룡세
를 취하는등 모든 것이 공격과 방어법이 자연스러운 세인 것이다. 지금의 권법행공
법은 처음에 어떤 동작세를 취하고 재차 어떠한 동작세를 취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있게 보이나 이는 본의를 상실한 것이다. 하물며 갑과 을이 같은 동작을 동시
에 취하는 것은 그림자가 형체를 따라 다니는 것처럼 상박인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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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해설이다. 여기서 서로 상박, 즉 두사람이 서로 대련할 수 있는 동작 자세는
불과 안시측신세와 구류세등 몇몇세에 그치고, 두사람이 일어서서 서로 잡고 씨름
하는 식으로 업어서 넘기는 동작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이것은 위태롭고 또 유희하는
것에 가 다. 그러나 이 행공법은 이미 오래전부터 거듭하여 전해 내려오는 구보기
법인 것이다. 식자는 이러한 점을 스스로 알아주기 바란다. 그 열가지 방법 자세가
이 책에는 누락되어 있으므로 증보하여 그결 문과 같이 병서, 기록 삽입한다.

이와 같이 《武藝圖譜通志》에는 이번 번역해설문 원문이 실기 십단금과 화선형


권법보 사이에 기재되어 있어 순서상으로는 화선형 보다 먼저 기재함이 마땅하나
형에 대하여는 제4절 원형편에 한데 묶어 기재하기 위하여 화선형을 먼저 기재하고
이번 문장 번역 해설문은 제5장으로 하여 뒤로 미루어 기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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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전통무예 당수도 무덕관 역사적 재조명과 학문적 검토 및 논의

무덕관[ 武德館 ] 8) 연혁을 보면 무덕관은 1945년 11월 9일 서울 용산역 부근의


철도국에서 '황기(黃琦, 1914~2002)'에 의해 교통부 소속 운수부 당수도부로 창설
된다. 그 후 1955년 5월 정식으로 무덕관 이름으로 중앙도장이 서울 중구 동자동에
개관한다. 그는 1936년 남만주 철도국에 재직 당시 양국진 선생으로부터 무예를 수
련한 후 해방 후 국내에서 서적을 이용해 무예를 독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6
년 각 지방의 기차역 창고에 도장을 개관하면서 1955년도에 전국에 9개의 지관을
신설한다. 같은 해 10월 한ㆍ중 친선 연무대회를 대한당수도 이름으로 시공관에서
개최하였음. 이 대회는 국제행사로는 유사 이래 최초로 개최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
다.

당시 철도국에서 수련생 지도는 함께 재직했던 현종명(청도관 출신)이 전담하고


1952년 한국 경찰전문하교 사범을 비롯해 1953년 전국 중고등학교 사범, 1954년
마포 서대문교도소 사범 및 그 외 공군, 해군 사관학교에서 사범으로 활동했다.
무덕관의 수련생들은 대부분 철도국 직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무실, 신성, 정의
를 목표로 하여 수련하였다. 홍종수와 지상섭은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북지역에, 전
쟁 때문에 부산에 내려간 김인석은 경남지역에, 남삼현, 임명수는 대전 및 충남북
지역에, 오용균은 전북지역에, 박용화는 인천에, 김창진은 전남에, 박영진은 강원도
에 세력을 확대함. 이처럼 전국에 9개의 지관을 신설한 뒤에는 한ㆍ중 친선 국제 당
수도 연무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949년 5월에 『화수도교본』을 저술했다. 무예계에 최초로 간행된 것으로 기록


되고 있다. 그는 1956년 『 《武藝圖譜通志》』를 접하고 한국 전통무예인 수박희
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그 후 명칭을 수박도로 정착하는 계기가 된다. 그는 당시 복
사기가 없던 시절, 2년에 걸쳐 < 《武藝圖譜通志》>를 꼼꼼하게 필사했다고 하는
데 이것이 대한수박도협회가 탄생하게된 원동력이 된다. 1970년 5월 『수박도(唐
手)대감』, 1993년 8월 『무예철학』 등 모두 11권의 저서를 집필하게 된다.
황기의 전통무예 당수도 무덕관은 국내외적으로 지부가 설치돼 수많은 제자를 배
출한다. 수박도의 보급현황은 미국, 프랑스, 그리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영국 등
20여개국이 된다. 무덕관 도복은 고구려 무사복장의 사양에 따랐고, 특히 < 《武藝
圖譜通志》>에서 복원한 무예가 '수박도'라고 함. '수박(手搏)'의 수(手) 자는 손이

8) 이경명, 2011.3.1., 태권도문화연구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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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사람을 뜻하고 고수(高手), 명수(名手) 등의 자(字)와 같다고 한다.

황기의 무덕관은 국내외적으로 지부가 설치돼 수많은 제자를 배출한다. 수박도의


보급현황은 미국, 프랑스, 그리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영국 등 20여개국이 된다.
무덕관 도복은 고구려 무사복장의 사양에 따랐고, 특히 < 《武藝圖譜通志》>에서
복원한 무예가 '수박도'라고 함. '수박(手搏)'의 수(手) 자는 손이 아니라 사람을 뜻
하고 고수(高手), 명수(名手) 등의 자(字)와 같다고 한다.
이러한 7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사단법인 세계무덕관연맹이 2015년 5월에 창
립식을 하였다. 이 자리에서 초대 총재로 서상렬 전 무덕관 사무총장을 추대 하였
다. 영문 표기로는 World Moodukkwan Federation 이라하고 약칭은 W M F 명칭
이다. 연맹의 취지는 전 세계에 퍼져있는 무덕관 무예인들을 융합과 태권도의 발전
을 지향하는 단체로 발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특히 서상렬(구명, 백낙언)은 2006.3월 “무덕관을 통합 하여야 한다”는 책을 발
간, 무덕관의 재건과 통합을 역사적 사명감으로 집필 하였고 1955년 공군대학에서
정규과목인 당수도의 실제와 이론을 강의하였다. 또한 세계무덕원 충재에 추대
(2005.7)되어 통합 선봉에 있어서 유일한 선구자였다.

이와 관련하여 세계무덕관연맹이 경기 수원시 남창도장에서 현판식을 거행하였


다. 태권도의 혼' 무덕관 부활한 이유가 있다. 무덕관 전통성과 세계무덕관연맹의
향후 정책 방향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태권도의 스포츠화와 무덕관의 역사적 흔적을 찾아야 한다.


오늘날 과거 사범들은 태권도가 너무 변해져 가고 있는 현실을 보고 유감스러운
생각들을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태권도는 상대와 대결에서 임전무퇴하
고 일권필살로 상대를 제압하는 무예로, 시간과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심신을 도약
하고 올바른 인간완성을 목적으로 하여야 한다.

특히 태권도가 과거와 달리 쇠퇴해지고 태권도단체 내부에 잡음이 끊이지 않은


것은 단체를 장악했던 인사들의 정책의 결과물이다. 태권도 현대화 과정에 열중하
던 나머지, 협회를 구성한 주주인 모체관을 장애물로 여기고 집행부를 중앙집권제
인 전횡체제로 전환한데서 생긴 역사적 흔적물이다.

한편 무덕관은 지난 1945년 11월 故 황기 선생이 ‘화수도’로 명명, 권법을 사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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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한때는 ‘당수도’로 개칭하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 《武藝圖譜通志》』를
연구하던 중 고려시대부터 수박희라는 고유무예가 존재해 왔던 것을 알게, 권법을
더욱 연구하고 재정립했다. 수박도 무예를 보급 전념하고자 1960년 6월 정부로부
터 법인체 인가를 받았다. 특히 1970년대 초에는 무덕관 관세가 제일일 정도로 자
랑할 만했다. 그러던 중 태권도 단일화와 모체관 해체 및 관명 불사용 조치가 시행
되면서 법인체인 수박도를 제외한 당수도 무덕관, 태권도 무덕관은 분열에 서막을
맞게 된 것이다.

둘째, 무덕관 70년의 전통성과 세계무덕관연맹의 향후 정책 방향성이다. 무덕관


을 다시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첫번쩨로 무덕관의 흩어진 관세를 모아 잊혀져가는
뿌리를 찾아는 것이다.
두 번째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무덕관 70년사이다. 태권도 무덕관 70년사 역사관
의 영역과 범위를 정립하고 무덕관 출신 각종 국제대회 경기 실적과 해외 보급과정,
역사적 학술적 방안 공식화ㆍ표준화의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 신체문화자원인 태권
도 무예문화의 활용한 태권도계의 학문에 관련 자료를 수집ㆍ분석해 타당성을 검토
하고 나아가 세계무덕관연맹 태권도로 수립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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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결론 및 제언

이 연구는 황기의 당수도·수박도·태권도 무덕관의 정체성을 통해 태권도의 원형인


수박도 역사적 근원과 신체학문실제의 학문적 방안을 제시하였다. 태권도 원형에
관한 무덕관이 어떤 시사점을 주는지를 다양한 각도로 분석 및 논의하여 결론으로
도출하였는데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오늘날 태권도인들에게 주고 있는 것이 무덕관의 원형의 본질적 가치이다.


태권도 원형인 무덕관은 70년 역사를 자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무한한
무예의 실제가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태권도 원형의 전통의 맥을 이어줄 수 있는
무형의 유산이 담겨져 있다. 이 원형적 무형의 유산을 통해 새로운 국기 태권도의
한국화와 세계화를 가속화 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지나친 태권도의 무
적 행위예술로 인하여 그 전통의 무덕관 원형 무도로서 태권도가 사라지고 있다. 이
를 다시 복원 및 전승하는 무덕관의 실제를 복원 및 재현 그리고 체계적으로 연구
가 있어야 할 것이다.

둘째, 황기가 《武藝圖譜通志》의 권법을 발견한 시기는 1957년이다. 일제강점기


공수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모든 관들은 일본무도 형식의 틀이 존재하였다. 하
지만 황기가 《武藝圖譜通志》의 권법을 발견하고 재정립하고 부터는 무명 역시
한국적 표현인 수박도와 태권도로 다시 승화 시킬 수 있는 매개체가 되었다. 이로
인해 무예인들에게 무형의 문화유산을 다시 남겨주었으며 다시 한 번 무예 소중함
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태권도인과 무덕관 수박도인들에게 복원•재현할 수 있는 역
사적 가치를 주었던 것이다.

셋째, 황기의 무덕관이 영향을 미친, 즉 국기 태권도, 당수도·수박도에 있어서 역


사적 재조명이 필요한 작업이다. 그는 초창기 태권도의 역사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이었는데 국내외적으로 지부가 설치돼 수
많은 제자를 배출하여 세계 속에 한류 문화를 알리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세계 각국은 미국, 프랑스, 그리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영국 등 20여 개국이 되었
다. 특히 《武藝圖譜通志》권법에서 복원한 무예가 '수박도'라고 명명하였고 또 그
이치의 어휘적 의미를 수박(手搏)'의 수(手) 자는 손이 아니라 사람을 뜻하고 고수
(高手), 명수(名手) 등의 자(字)와 같다고 하여 태권도 원형 수박도를 창립하게 되었
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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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태권도의 원형인 수박도 역사적 근원과 신체학문실제의 정체성 제시를 통
해 무도적 측면과 전통성 측면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무적 실제의 역사적 사관
이 지향해야할 것을, 이를 체계화하여 이론화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 태권도 원형
수박도의 실제와 역사관을 올바르게 정립하고 이를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며 이것을
초석으로 삼아 신체학문의 체계가 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종합해 볼 때, 황기의 당수도·수박도·태권도 무덕관의 정체성을 통해


태권도의 원형인 수박도 역사적 근원과 신체학문실제의 학문적 방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태권도 관장 및 지도자 및 수련생, 전공학생들에게 교육적
가치와 태권도 원류 무덕관의 무형유산의 문화적 가치를 통한 제반적인 학문적 지
식체계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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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년도 무덕관 당수도 · 수박도·태권도 실제와 상관관계
중심으로

Ⅰ . 태권도 원류 무덕관의 역사 변천과정 및 요인분석 체계

태권도 원류 무덕관의 역사성을 탐구하고자 한다. 태권도 원류 무덕관 변천에서의


내재된 태권도 원형에 품새의 특성 및 문화재적 가치를 상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태
권도의 현재적 문제점을 파악하여 나아갈 방향을 제시함은 물론 무덕관의 발전과정
등을 살펴보기 위해 아래 제시된, 여러 사항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문제점을 주목하
여 검토할 것이다.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연구문제의 제시는 다음과 같다.

첫째, 태권도의 역사성을 분석하고 통합과정에 나타난 무덕관 변천사의 역사적 함


의를 탐구하였다.
둘째, 태권도 역사성에 관계된 전문가의 인터뷰와 무덕관에 내재된 역사성을 논의·
분석·탐구하였다.
셋째, 태권도와 무덕관 여러 가지의 무예 실제를 비교·분석·논의하여 전통성과 정통
성을 탐구하였다.

이상의 구체적인 연구문제점을 주목하여, 태권도 원류인 무덕관을 모색하고, 태권


도의 발전 전략 및 정체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태권도 원형에 관한 통합적이면서도
미시적 관점으로 비교․조사 및 검토할 것이다. 그러므로 국기 태권도 원류 무덕관에
관한 무적공방의 실제와 사상을 미시적인 관점으로 이를 살펴보아야 볼 것이다.

따라서 황기 무덕관과 국기 태권도 역사에 관한 종합 검토하여 맥락(context)적 관


점인 동일선상에서 상호 비교․검토한 체계적인 분석방법으로 연구가 진행하고자 한
다. 이를 통해 태권도계의 역사적 근원과 실제에 관한 정체성 제시를 할 수 있을 것
이다. 나아가 필자는 이 연구의 성과를 통해 태권도의 원류 무덕관의 원형에 대한
진실이 밝혀져 태권도계의 올바른 역사 가치관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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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태권도 교서와 태권도 원형 지침서에 관해

태권도 교서는 1972년 정연사에서 출판한 ITF 태권도의 세 번째 교범이다. 이 책


의 의미는 ITF 태권도의 기본 형식이 완전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것에 있다. 이는
앞서 서술한 최홍희가 《마르스》와의 인터뷰 내용과 같이 후굴서기, 전굴서기와
같은 가라데식의 동작 용어를 ㄴ자 서기, 걷는 서기와 같은 우리말 용어로 다시 구
성하였다. 즉, 수련하는 형의 체계를 24개의 창헌류의 형으로 규정하여 형식적인
면에서 가라데로 독립한 ITF 태권도의 수련 체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승급 승단의 심사 내용을 통해 본 수련 체계에서 이전 《태권도 지침》의 내용과


달라진 것은 8개의 급이 10개의 급으로 달라졌다는 것과 급 심사 형이 정해진 것과
같이 단 심사 형들이 정해졌다는 것이다.

달라진 승급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10급에서 심사를 보는 항목으로 《태권도 지


침》의 기본 수련에서 사주 찌르기라는 항목으로 있었던 사주 지르기이다. 사주 지
르기는 하나의 형은 아니지만 걷는 서기에서 하단 막기하고 뒷발이 앞으로 한걸음
나가면서 나가는 발과 같은 손의 주먹으로 중단 지르기를 하는 동작을 와 중단 지
르기로 조합된 동작을 한발을 고정시킨 상태에서 十자의 네 방향으로 행하는 수련
법이다. 사주 지르기는 좌우를 따로 수련해야 하기 때문에 완성도는 높지 않지만,
천지형의 동작 요소인 하단 막기와 중단 지르기를 습득하는 좋은 수련방법으로 급
심사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9급 심사에는 천지형을 사용하였다. 이후 승급심사의 형은 《태권도 지
침》의 순서와 같이 8급에는 단군형, 7급에는 도산형, 6급형에는 원효형, 5급형에
는 율곡형, 4급형에는 중근형, 3급형에는 퇴계형, 2급형에는 화랑형을 심사하였다.
급수가 10개로 늘어나는 이유여서인지《태권도 지침》에서 유단자 형에 속해있던
충무형이 1급을 보는 심사형으로 규정되었다.

또한 《태권도 지침》과 확실히 구분되는 것은 유단자 형을 확실히 규정하였다는


것이다. 1단 심사에는 광계형, 포은형, 계백형이, 2단 심사에는 의암형, 충장형, 고
당형이, 3단 심사에는 삼일형, 유신형, 최영형이, 4단 심사에는 연개형, 을지형, 문
무형이 규정하여 4단까지는 승단하기 위해서 3개의 형을 심사 받게 규정하고 있다.
이후 5단에는 서산형과 세종형 두형을, 6단 심사에는 통일형 하나를 심사 받게 규
정하였다. 이 일련의 승단 규정은 이후 《태권도 백과사전》에서도 계속 유지되며
현재 ITF 태권도의 독특한 특징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었다.

승급과 승단 심사의 대상이 되는 형들은 이전 《태권도 지침》에서의 20개 형들에


이외에 의암형, 연개형, 문무형, 서산형의 4개의 형이 더 제작되어 총 24개의 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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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구성되었다. 이후 《태권도 백과사전》에서 다른 형이 추가적으로 제작되지 않
았으며, 현대 ITF 태권도에서 24개의 형으로 승급과 승단을 사용하고 있다.
최홍희(1972)는 24개 형을 만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자신의 전 생애라는 의미를
부여 하면서 자신의 태권도관을 서술하였다.

인간의 일생은 가령 100년을 산다고 하드라도 이것은 영원한 세월에 비하면 단 하


루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생은 영세를 잠깐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다. 이
처럼 사람은 제한된 수명 밖에 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물질의 노예가 되는데, 이는
실로 우매한 처사라 아니 헐 수 없다. 그러므로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후세들에게
훌륭한 정신을 유산으로 넘겨주는 것뿐이다. 사실상 물질은 변하여 없어지지만 정
신을 영원불멸한 것이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인류
복지를 위하여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이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 나는 20세기에 잠깐
지나가는 한 나그네로서 인류평화는 물론 나의 발자취를 남기고저 태권도를 만들었
다. 그리고 또한 24개형을 만든 것은 하루가 24시간 즉 나의 전 생애를 의미한 것
이다.

태권도를 통해서 최홍희가 남기고 싶었던 것은 한국의 위인들이 창조해낸 한국의


정신적 유산인 것이다. 그가 형의 동작으로 의미를 부여했던 이름에는 이 땅에 나라
를 세운 단군 왕검에서 시작하여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받쳤던 이들과 이 땅
에 훌륭한 정신적 문화를 만든 이들로 구성되어있고, 마지막으로 남북으로 갈라진
이 땅이 다시 하나가 되길 원하는 그의 희망을 담은 통일로 마무리 되어 있다.

그가 처음 만든 화랑, 충무, 을지, 삼일, 우남(충장) 다섯 개의 형에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은 군인으로서 이 땅을 지킬 수 있는 무예의 이상을 형상화 한 것으
로 보인다.
삼국을 통일했던 화랑도의 기백과 외적에게서 이 땅을 지켰던 충무공 이순신, 을지
문덕의 기개, 일제에 우리 것을 되찾고자 힘을 모았던 삼일운동의 정신, 그리고 이
후 충장형으로 바꾸었지만, 독립운동을 한 우남 이승만과 같은 독립 운동가들의 의
기를 태권도에 담고자 했던 것이다.9)

5개의 형을 만들어진 이후 제작된 도산형, 광개형, 포은형, 의암형, 고당형, 최영형,


연개형, 문무형, 서산형은 앞서 형상화 했던 이 땅을 지킨 정신적 전통을 담은 형들
이며, 원효형, 율곡형, 퇴계형은 한국적 불교와 유학으로 발전시킨 한국 정신문화를
전통을 담은 형들이다. 또 세종형은 한글과 측우기로 대표되는 한국 과학문화의 전
통을 담은 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 이것은 이후 새로 제작된 형들 중에 도산 안창호, 의암 손병희, 고당 조만식 등의 이름에서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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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형들은 최홍희가 박정희 대통령과의 불편한 관계로 군복을 벗고 말레이시아
대사로 가 있던 1962년에서 1964년에 정립하였다고 한다. 그가 말레이시아에 있었
던 1962년 당시는 국제적으로 한국이라는 나라가 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을 알리는 방법으로 자신이 수련하고 체계화 하던 태권도를 사용하고자 하였다
고 한다.

그는 한국이 중국이나 일본의 문화와 다른 독자적이며 우수한 문화를 가진 나라이


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외교적인 노력에 열심이었고, 그중 하나가 태권도를 수련하
고 가르쳤던 것이다. 또한 태권도가 일본의 가라데와 확연히 구분 할 수 있는 영문
태권도 교본을 만드는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이때 만들어진 교본이 앞서 서술한 영
문판《태권도 지침》이다.

이 책에 수록된 20개의 형들은 1964년까지 제작된 것이다. 즉, 수련하는 형을 통해


한국의 정신문화를 담는 작업은 1966년 나머지 4가지 형을 만드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고,《태권도 교서》에는 이 24가지 형을 수록한 것이다(최홍희, 2000).

한병철(2001)은 WTF 태권도는 품새에 동양철학을 접목하였고, ITF 태권도는 틀


에 한국사를 적용하였다고 평가하였다고 한다. 즉, 민족주의적 의지가 강했던 최홍
희는 이 24개의 형을 통해 후대에 전하고 싶었던 정신적 전통을 담아 ITF 태권도의
형식을 완성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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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대한민국 태권도•수박도•당수도 황기와 최홍희의 사관에 관해

1950년 이후 5대 관도장이 탄생하게 된다. 무덕관, 청도관, 지도관, 송무관, 창무


관 등을 일명 모체관이 탄생되어 이탈한 신흥관이 형성된다. 이로 인해 당수도계는
통합과 명칭과 단체를 구성 필요성이 요구되던 시기였다.

1950년⁓1960년대에 관 신생도장이 40여개가 넘는다. 로 인해 청도관에서 분관


한 최홍희의 오도관, 강서중의 국문관, 이용우의 정도관, 고재천의 청룡관, 지도관
에서 분관한 한무관, 창무관에서 분관한 이교윤, 홍정표, 박철희의 강무원등 국무
관, 연무관, 수무관, 창헌관, 문무관등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우리가 여기
서 중요한 사안은 5개관 관세의 등장이다. 즉 자타가 인정하는 무덕관에 속한 사범
이 단 한사람도 없었다. 무덕관 유단자들은 말 그대로 무덕을 수련한 무도인이었다
(서상렬, 2012).

최초 당수도 5개관 통합은 1947년 3월 황기가 맨 처음으로 시도했다. 하지만 실


패했고 1950년 초 부산 피난지에서 이종우 등의 노력으로 대한공수도협회를 결성
했으나 무덕관이 이탈하고 1953년 대한당수도협회를 조직함으로써 와해된다.

이후 1959년 원효로에서 가옥을 신축한 최홍희이가 신축가옥 자축연을 한다는 이


유로 초대하는데, 황기를 비롯한 노병직, 윤쾌병, 이남석 등 4개 관장을 초청한다.
특히 청도관 최홍희이가 명예관장 자격으로 참석했으며 통합의 모임을 가졌다. 하
지만 오랜 시간 회의 종국에 최홍희에 의해 명칭을 태권도로 잠정 합의를 보았다.
이 자리에서도 황기는 우리 고유무예 수박도의 명칭을 고집했으나 무산된다(서성
원, 2007).

황기가 언급한 수박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어휘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전통무예이
기에 역사적으로 고고학적으로 고증할 수 있는 무예이다. 즉 몸과 마음을 닦아 참된
사람을 만드는 인간사상의 철학이다. 경기단체에 가입하여 무예를 경기화 하고 또
상품가치를 높인다는 것은 무도의 본질을 망각하는 처사이며 심사숙고할 문제라고
경고했다. 이날에 모임이 후일 최홍희이가 태권도 명칭으로 명명하는 데에 무게를
실어준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서상렬, 2012).

특히 최홍희이는 청도관, 오도관 등을 주측으로 하였으나 1959년 9월 대한태권도


협회를 창립하여 대한체육회에 가입하고 절차를 밟던 중 4∙19 학생혁명으로 가입하
지 못하게 된다.

이때 무덕관은 우리나라 무도인 수박(手搏)을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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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한 수박도(手搏道)로 하여 사단법인체로서 주무부처인 문교부에 법인등록 승인
을 받는다. 이 시기가 1960년 6월 30일 사단법인 인가일자이다. 국제간의 교류가
단독적으로 법적행위가 가능하게 된다.

이렇듯 무덕관이 법인체로 등록이 된다. 이는 태권도계는 큰 파장을 맞이하게 됐


다. 이로 인해 최홍희이는 문교부와 대한체육회에 진정서를 제출하면서 대한태권도
협회의 법인체 인가신청을 했다. 하지만 문교부에서는 헌법이 보장한 결사의 자유
를 막을 수 없으며 같은 종목에서 두 개의 단체를 인준할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서
류일체를 반려하고 수박도회와 통합회의를 거쳐 정식으로 등록서류를 제출해 달라
고 했다.

박정희 정부 5∙16 군사혁명정부는 국가재건 최고회의를 걸친다. 모든 사회단체의


재등록을 명령한다. 이에 따른 문교부는 유사단체 통합을 시도한다. 즉 대한수박도
회, 대한태권도회, 대한공수도회 등 대표를 소집하여 통합을 하려 하였으나 의견대
립으로 결실을 보지 못하자 대한태권도협회 창립총회 회의를 문교부 체육과장과 대
한체육회 이사의 입회하에 대한체육회 회의실에서 5개 관 최홍희의 오도관이 추가
되어 6개관 대표로 강행하게 되었던 시기이다(서상렬, 2012).

이 시기에 협회명칭에 대한 논란이 계속된다. 1950년대 중반부터 태권도 명칭을 사


용해온 청도관과 오도관의 입장이 크게 작용해 문교부의 중재로 최홍희이가 작명한
태권도로 의결하였으나 임원구성과 심사위원 구성 등 각 유파들의 이해관계로 갑론
을 반박하던 중 엄운규, 이종우 등 젊은 대표하는 사람들의 비방적 언행에 격분한
황기는 탈퇴를 선언하고 퇴장한다. 이는 궁여지책 대안이 자율적인 기한부 통합을
하기로 했다. 1961년 9월 16일 태권도를 고집하는 최홍희와 의견조율을 한 끝에
태수도협회로 잠정 합의 결정을 하기로 했다. 즉 명칭을 태수도로 한 원동력은 태권
도에 태자와 수박도, 당수도, 공수도 등에 수자 어원을 통해 태수도로 명명했다.

이후 1963년 2월 23일 대한체육회에 등록승인을 받는다. 동년 10월 9일 제44회


전국체전에 경기종목으로 채택되는데 엄운규, 이종우, 이남석 등에 의해 태수도협
회를 운영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즉 태수도협회를 창설하고 경영하던 중
경기화 과정에서 채점에 불공정성, 각 관의 의견마찰, 심사시 관, 파벌조성으로 인
한 공정의 미흡 등 발전에 저해요소가 작용함으로서 많은 어려움이 겪게 된다. 태
수도협회 각 관이 좋지 않는 관계에서 최홍희이가 말레이시아 대사직을 마치고 귀
국하여 전국은 불안적 상태로 갔던 시기이다.

특히 태수도협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던 이종우, 엄운규, 이남석 등은 불안한 시


기를 맞이하게 된다. 최홍희이는 1965년 1월 대한태수도협회 제3대 회장으로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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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후 태권도계 통합 작업을 재차 서두르기 시작했다. 이 시기 무덕관을 제외한 태
수도협회 구성은 명분이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최홍희이는 무덕관 황기를 다
각도로 회유하고 압박하기 시작했다(서성원, 2007).

황기가 이끌고 있는 당시 수박도회는 절대 다수의 관원을 보유하고 있는 단체이며


태수도협회에 비해 그 관세가 비교가 되지 안했다. 이러한 제시에 불구하고 조건이
명목상 통합이었을 뿐이다. 이는 태수도협회가 수박도회 무덕관을 흡수하려는 조건
임이 분명했다.

이때의 통합의 상대는 수박도회와 태수도협회와의 통합이었고 통합 후 태권도협회


로 하는 것이었다. 통합조건으로 명칭은 태권도로 정하고 회장은 태권도 측에서 맡
고 21명의 이사중 수박도회에 3명에게만 권한을 준다. 즉 군사정부의 절대적 배경
을 가진 사람들의 권력이 지배적이었다.

사상렬에 의하면 “어느 정도 협상이 이루어지는 단계에서 황기에서 사려 깊은 생각


에서 최홍희에게 통합을 하되 문교부에서 인가받은 수박도법인체를 한국무도연구
단체로 존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서상렬, 2012).

이에 대해 최홍희이는 흥분하여 감정을 앞세워 후배들 앞에서 모욕적인 언행으로


수박도회와는 두 번 다시 협의할 필요가 없음을 선언하고 감정싸움으로 변해버렸
다.

황기와 최홍희 두사람 대립은 대단했다. 이로서 태권도가 무도인데 대한체육회 산


하단체로 가입이 되어 경기단체가 된다. 하지만 무예의 정통을 지켜갈 수 있겠는
가? 또 오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전수되어 온 고유무예를 연구 발전시키는 법인체
하나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지난 과거 황기 청도관 이원국을 연배로서 또는 일본가라데(공수도) 전수


유단자로서 예의를 갖추듯이 최홍희도 선배인 황기를 보다 따뜻하고 예의를 갖춘
언행으로 교류하였다면 매사가 순리대로 성사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갖게 한
다. 이것은 역사의 뒤편에서 다시 반박귀진으로 돌아보아야 한다.

한편 통합회의가 결렬 된 후 대한수박도회의 등록 주무부처인 문교부장관을 통해


대한수박도회를 불법적 단체로 몰아 해산 명령문을 보내왔다. 이에 수박도회는 고
등법원에 문교부장관을 상대하여 행정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다. 하지만 문교부가
또다시 대법원에 상고를 제기하였으나 대법원에서도 수박도회가 승소판결을 받는
다. 이에 최홍희를 정점으로 크게 실망했다. 특히 최홍희가 회장이 된 태수도협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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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8월 5일 대한태수도협회를 대한태권도협회로 명칭을 명명하고 전국체전을
앞두고서 무덕관 지방도장을 통합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태권도에 있어서 황기와 최홍희는 대단한 인물이다. 두 사람에 의해 오늘


날 대한민국 태권도는 세계적인 무도를 대표한다. 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대
한민국 무예를 세계위상에 알리는 것과 또 전 국민이 무예로서 찬란한 유산을 지키
는데 있다. 어이하든 태권도를 세계위상에 알리고자 하였으며 한사람은 다른 무예
로서 수박도를 세계정상에 올려놓아야 했던 것을 알아야 한다. 무명에 따라 비록 다
른 행보를 했더라도 두 사람의 의지에 따라 국익선양에 이바지해야 했다(서상렬,
2012).

특히 어느 면에서는 같은 의지를 했고 이것은 같은 유사종목으로 오르지 국익을 생


각하고자 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안타까운 현실은 두 사람이 통합했더라면 무언가
새로운 역사적 근원으로서 수박도나 태권도를 재창출 있었다고 생각되어진다. 하지
만 생각으로는 태권도 원형으로 가되 품새적 측면에서는 수박, 즉 권법을 추구하여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을 만들어야 한다. 국익적 선양으로 볼 때 가라데(공수도)설과
혁파할 수 있는 것을 재창출해야 한다. 모든 역사적 근원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
은 역사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법에 관련된 근본적 초석은 《武藝圖
譜通志》이라는 우리나라의 위대한 유산을 물려주었다. 그때 당시 황기가 물려준
수박도와 화수도 그리고 당수도 저서에서 그가 편찬한 내용은 대단하다. 그 이유는
인문과학적 측면 자연과학적 측면을 다양하게 신체학문의 근원을 만들었으며 더욱
진보된 형태를 완성했기에 가능하였다(서상렬, 2012).

또 한사람은 정치적 수단이 탁월했으며 그로 인한 태권도를 세계정상에 올려놓았


다. 이는 강한 진념으로 승화되어 우리나라의 무예를 무적으로 한걸음 도약할 수 있
는 매개체를 만들 수 있었다.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오르지 무예를 세계정상에
올려놓고자 했다. 비록 북한 태권도에 영향을 미쳐 다른 행보를 했다. 북한 태권도
의 형태적 측면에 있어서 한국 태권도와 다른 측면을 주고 있어서 보다 심도 있는
연구를 해야 한다(김산, 김창우, 송일훈, 2008).

지금이라도 우리나라에 고유한 무예의 연구단체로 수박도회를 존속시키고 태권도


협회는 스포츠 단체로 발전시키는 이원화로 다시 한 번 부활을 해야 한다. 이를 통
해 우리민족의 독특한 무예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된다. 황기가 주장하는 것처
럼 우리나라의 고유무예로서 그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으며 역사학계에서 일본 가
라테나(공수도) 중국무술의 시비 거리가 되지 않도록 정론을 세워낼 수 있는 기반
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된다(서상렬, 2012). 그 이유는 간단하다. 황기가 연구
한 수박도는 우리고유로서 고증을 했고 이로 인하여 일본 가라테(공수도)와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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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는 하등의 연관성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기에 보다 심오한 역사적 기반을 형성하
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누구나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권


법에 무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만주 길림성 집안 현에 고구려벽화고분에서 발견한
사료를 바탕으로 다시 집대성 한다면 태권도는 스포츠경기로서 전통무예 수박도로
서 그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국기 태권도 역사적 근원을 제시할 수 있으며 보다 심오한 우리 전통무예


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문화유산이 될 수 있고 태권도가 현재 지향하고자 하
는데 그 본질에 가까워 질 것이라 판단된다.

그렇다면 수박도 창시자 황기와 태권도 창시자 최홍희의 인생철학에 대해서 살펴보
자.
5.16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무질서한 정국을 수습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무예계도
통합하여 국기를 만들었다. 이를 지원하고자 한다는 미명으로 대한체육회 산하 대
한태권도협회로 통합하라는 강권이 나왔으나 통합의 조건이 무덕관을 흡수하려는
조건이고 보니 당시 무도계에서 관세가 제일 큰 무덕관의 반발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는 대한태권도협회 초대회장이 군 장성인 채명신을 보아도 알 수 있다(서상렬,
2012).

특히 무덕관이 통합조건에 불응하자 황기가 오래전부터 출장하고 있던 공군사관학


교와 경찰전문학교의 태권도 교관직에서 강제 해임을 당하였다. 무덕관이 관여하고
있는 각 기관 당수도 도장들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매년 실시하는 전국체전은 자
기 고향에 명예를 걸고 출전하여 기량을 겨루는 국가 체전인데 무덕관 관원은 대한
체육회의 산하단체가 아니라 하여 선수 선발에서부터 제외 시켜버리니 지방 유지들
의 불만이 커져갔다. 이는 협회 행사는 협회가 발행한 공인 단증 소지자에 한하여
출전할 수 있다는 구실로 무덕관 관원은 제외 시켜 버리니 무덕관 단증을 무력화
시키는 전법도 시작이 되었다(서성원, 2007).

이로 인해 지방도장에서는 타관들의 유인으로 유급관원들이 전관하는 사태까지 발


생하기도 하였다. 태권도협회 통합에 복잡한 이해관계의 실정을 잘 모르는 사범들
의 불평도 쌓이게 되니 중앙본관의 고단자들도 난감 할 뿐이었다. 이 시기 무덕관의
위계질서는 황기를 정점으로 하여 누구도 불편한 건의를 함부로 말을 못하는 실정
들이었다.

고단자 그룹은 8, 7단 몇몇 사범이 일선 관무와 각도 본관장 자리에서 활동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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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으나 모두가 직장과 생업형편이 여의치 못해 시간의 여유가 없다보니 관무에 전
념하기도 어려운 실정들이었다.

특히 관장들도 신념도 일리가 있었지만 시대의 흐름에 반대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절박한 형편이었다. 절박한 이 현실을 타개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실사구시(實事求
是)에 따라 함을 명분으로 생각하는 의지가 투합된 사범들(경상북도 도 본관장 지
상섭 사범 7단, 강원도 도 본관장 이창복 사범 6단, 중앙도장 서상렬 사번 7단) 3인
이 결의를 다진 후 회초리 세 개를 준비하고 관장님 댁을 방문하여 무릎 꿇고 엎드
려 [관장님 성인도 종시속이란 속담도 있습니다.] 라며 눈물로 태권도 통합을 간청
하였다. “무덕관 장래를 크게 내다 보시고 저희들을 믿어 주십시오! 무덕관 일부라
도 태권도와 통합 합류 할 것을 허락하여 주십사”하고 애원을 했다. 당수도 보급과
무덕관 관세 확장에 공로가 많고 크다고 할 수 있는 애제자들의 간청에 황기의 억
장이 무너졌다(서상렬, 2012).

그때 분위기는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 이렇다 할 말이 없었으나 황기는 “모두들


어딜 가던지 무덕관 금도를 지키고 몸조심들 하게나” 하시면서 세 사람의 등을 다
독거리며 울먹이던 모습과 함께 “인자하신 선생님, 자애로운 관장님 다시 뵙고 싶
다.” 같이 갔던 두 사범들은 작고했고 당시의 장면을 기억하는 서상렬 전)사무총장
만이 있을 뿐이다.

1965년 3월 16일 뜻을 같이하는 중앙의 고참 사범들과 각시도 본관장들이 마포도


장에 모였다. 소위 마포회의이다. 방대하던 무덕관은 탄압을 견디다 못해 두 갈래,
즉 태권도협회에 가담하는 신간파(身幹派)와 순수무도단체로서 대한수박도회에 남
는 수구파(守舊派)로 양분되고 말았다. 태권도파로 일컬어는 마포회의 참가자들은
비참하리만치 처절, 비장함을 보였다.
그들은 “우리민족이 배달의 민족인 것처럼 황기 선생님은 우리 무덕관의 사부이시
며 영원한 우리 무도의 선생님으로 모신다. 시류에 따라 길을 달리한다 하여도 무인
으로서 換父易祖(환부역조 : 애비와 할애비를 바꾼다는 것)를 할 수는 없다. 어느
곳에 가있더라도 무덕관 관원의 긍지를 지키고 의리를 지키자.”라고 했다.

취기가 오른 가운데 누군가 말했다. 마시던 우물에 침을 뱉는 행위는 절대하지 말자


고 함께 결의했다. 황기와 등을 돌려 갈라설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현실은 무덕관
앞날과 관원들을 살려야 한다는 충정이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역모 같이 보였지만,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받을 만한 일은 아니었음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이는 3월
16일 전국 시도 본관장 및 고단자회의에서 태권도 무덕관을 이끌어 갈 집행부를 만
장일치로 구성했다. 태권도 무덕관 초대관장 이강익 사범 8단, 상임고문에 정창영
사범 8단, 홍종수 사범 8단, 무덕관 사무총장에 서상렬 사범7단, 중앙도장 전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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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에 문선선 사범 7단을 선출하였다(서상렬, 2012).

많은 사람들의 정은 시간과 공간에 반비례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37년의 세월이 흐


르면서 서상렬 전) 사무총장은 “우리 무덕관이 다시 통합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한
시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황기선생님 살아 생전에 흩어진 당수도무덕관, 태권도
무덕관, 수박도무덕관 등이 한자리에 모여 관장님 앞에서 무덕관 창립총회 기념식
을 성대히 거행하고 무덕관 무술올림픽 같은 경연대회를 열어 을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잊은 적도 없다.”고 했다. 또한 그는 “세월 앞에 장사는 없다. 관장님
께서 연로하시어 노환으로 별세 하셨다는 부고를 받고 상청 앞에 엎드리니 하늘이
大怒(대노) 하심을 느꼈다.

호왈 세계 각국에 100만명이 넘는 무술인 제자를 양성하신 선생님의 마지막 가시


던 날 가족장으로 초졸하게 치루어진 영정 앞에 통한의 눈물만 흘렸다. 그 사람의
성격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선생님을 사회장 못지않게 무
덕관장으로 성대 장엄하게 모실수도 있는 장례가 아니었고 기막힌 일이었다. 수박
도가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에서 정규과목으로 채택되어 생도들이 고구려
무인복장 무덕관 유단자 도복으로 수박도를 수련하는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시던 관
장님, 만면에 희색이 가득하시던 관장님, 생전에 어려웠고 섭섭하시던 일 모두 다
잊으시고 편히 쉬시옵소서 천추만대 왕생극락하시면서 우리 무덕관을 보살펴 주시
옵소서! 서기 2002년 7월 14일 향년 89세로 장서 하시다.”라고 서상렬 전)사무총
장은 회상하고 있다.

반면 최홍희는 1918년 함경북도 화대군 룡원리에서 출생했다. 1937년 일본 동경에


서 1년 반 예비학교를 다니고 중앙대학에 입학 한 후 학병으로 일본 군대에 들어가
8.15해방을 맞이한다. 1946년 1월 국방경비대에 입대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쌓아
1954년 육군소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6군단장을 거쳐 1962년 예비역에 편입
되었다(서상렬, 2012).

1954년 4월11일 태권도라는 명칭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휘호를 받아 채택하여


자기 휘하 군부대에 급격히 확장 보급해 나갔다. 당시 당수도, 공수도, 수박도, 권법
등을 고집하던 타관의 반발 때문에 1961년부터 1965년 8월경까지는 태수도라는
타협 명칭으로 협회를 구성하였으나 1965년 1월 주 말레이시아대사를 사임하고 귀
국한 후 최홍희가 태수도협회 회장이 되었고 그해 8월 자신이 주장한대로 공식 명
칭을 대한태권도협회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최홍희의 평생소원이 이루어
진다.

무덕관을 제외하고 오만 등등하던 태권도협회에 역사적인 이변이 생겼으니 태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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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회 회장에 취임 한지 채 1년도 안되서 최홍희가 1966년 정기총회에서 자기수족
과 다름없던 집행부일파의 계략으로 협회에서 불명예 퇴진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으
니 최홍희로서는 안타깝고 절통한 일이었다(서상렬, 2012).
태권도를 신앙처럼 여기며 살아온 최홍희는 1966년 3월22일 자기가 해외 대사로
근무하면서 닦아 놓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베트남, 서독, 터키, 미국, 이집트, 아
랍공화국, 이태리, 한국 등 10개국을 주축으로 하여 국제태권도연맹을 조직하여 총
재가 되었지만 국내 기반이 허약하다 보니 해외에서도 떠돌이 신세가 된다. 그토록
심혈을 경주하여 만든 오도관도 최홍희가 태권도협회에서 불신임으로 퇴출당하고
국제태권도연맹을 조직하니 급격히 쇠퇴해 갔다. 현종명, 곽병오의 작고로 백중기
가 관장직을 맡아 명맥을 유지하는데 급급하였다(김산, 김창우, 송일훈, 2008).

그나마도 1971년 김운용은 대한태권도협회 6대회장으로 등장하면서 최홍희의 운


신의 폭이 좁아져 갔다. 1972년 국제태권도연맹을 토론토로 옮겨간 최홍희는 그곳
에서 연맹 산하 세계조직을 관장하는 노력을 많이 하였으나 국내 기반이 허약하다
보니 어려움이 뒤 따랐다. 특히 김운용은 1976년 문교부에 국제태권도연맹을 유명
무실한 단체로 몰아인가를 취소하도록 하였다. 모든 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최
홍희는 평소 친분이 두텁던 천도교 교령을 지낸 최덕신의 유혹에 캐나다에서 친북
활동을 벌인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최홍희가 평생토록 어렵게 창안해 만든 태권도를 통해 입신양명한 사람들이 많을


텐데 최홍희를 구제하여 줄만한 방법은 없었다. 불치의 병마에서 시달리면서도 막
다른 골목에서 허덕이던 최홍희가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시키는데 앞장섰으니 그 공
로는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최홍희 그는 2002년 6월 15일 향년 84세의 나이에 숙
환으로 별세하였다. 그는 어려울 때 우리 무덕관 몇몇 사범들이 최홍희를 도와준 것
으로 알고 있지만 역부족이었으니 연민의 정을 금할 수 없다. 세계태권도에 아버지
라 일컬이었던 최홍희의 뛰어난 재주와 태권도의 기여한 공로를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번엔 국기 태권도로서와 전통무예 수박도로서 역사적 관점을 논의해 보면 대한민


국 태권도에 있어서 황기와 최홍희는 대단한 인물이다. 두 사람에 의해 오늘날 대한
민국 태권도는 세계적인 무도를 대표한다. 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대한민국
무예를 세계위상에 알리는 것과 또 전 국민이 무예로서 찬란한 유산을 지키는데 있
다. 어이하든 태권도를 세계위상에 알리고자 하였으며 한사람은 다른 무예로서 수
박도를 세계정상에 올려놓아야 했던 것을 알아야 한다. 무명에 따라 비록 다른 행보
를 했더라도 두 사람의 의지에 따라 국익선양에 이바지해야 했다(서상렬, 2012).

특히 어느 면에서는 같은 의지를 했고 이것은 같은 유사종목으로 오르지 국익을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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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고자 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안타까운 현실은 두 사람이 통합했더라면 무언가
새로운 역사적 근원으로서 수박도나 태권도를 재창출 있었다고 생각되어진다. 하지
만 생각으로는 태권도 원형으로 가되 품새적 측면에서는 수박, 즉 권법을 추구하여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을 만들어야 한다. 국익적 선양으로 볼 때 가라데(공수도)설과
혁파할 수 있는 것을 재창출해야 한다. 모든 역사적 근원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
은 역사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법에 관련된 근본적 초석은 《武藝圖
譜通志》이라는 우리나라의 위대한 유산을 물려주었다. 그때 당시 황기가 물려준
수박도와 화수도 그리고 당수도 저서에서 그가 편찬한 내용은 대단하다. 그 이유는
인문과학적 측면 자연과학적 측면을 다양하게 신체학문의 근원을 만들었으며 더욱
진보된 형태를 완성했기에 가능하였다(서상렬, 2012).

또 한사람은 정치적 수단이 탁월했으며 그로 인한 태권도를 세계정상에 올려놓았


다. 이는 강한 진념으로 승화되어 우리나라의 무예를 무적으로 한걸음 도약할 수 있
는 매개체를 만들 수 있었다.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오르지 무예를 세계정상에
올려놓고자 했다. 비록 북한 태권도에 영향을 미쳐 다른 행보를 했다. 북한 태권도
의 형태적 측면에 있어서 한국 태권도와 다른 측면을 주고 있어서 보다 심도 있는
연구를 해야 한다(김산, 김창우, 송일훈, 2008).

지금이라도 우리나라에 고유한 무예의 연구단체로 수박도회를 존속시키고 태권도


협회는 스포츠 단체로 발전시키는 이원화로 다시 한 번 부활을 해야 한다. 이를 통
해 우리민족의 독특한 무예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된다. 황기가 주장하는 것처
럼 우리나라의 고유무예로서 그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으며 역사학계에서 일본 가
라테나(공수도) 중국무술의 시비 거리가 되지 않도록 정론을 세워낼 수 있는 기반
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된다(서상렬, 2012).

그 이유는 간단하다. 황기가 연구한 수박도는 우리고유로서 고증을 했고 이로 인하


여 일본 가라테(공수도)와 우리와는 하등의 연관성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기에 보
다 심오한 역사적 기반을 형성하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누구나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권


법에 무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만주 길림성 집안 현에 고구려벽화고분에서 발견한
사료를 바탕으로 다시 집대성 한다면 태권도는 스포츠경기로서 전통무예 수박도로
서 그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국기 태권도 역사적 근원을 제시할 수 있으며 보다 심오한 우리 전통무예


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문화유산이 될 수 있고 태권도가 현재 지향하고자 하
는데 그 본질에 가까워 질 것이라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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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태권도의 신체행위 품새에 관해

태권도의 신체행위 동작인 품새에 있어서 무도인들이 닦음과 깨달음이다.


즉, 품세의 이론은 우주만물(宇宙萬物)의 명칭들을 가지고 사용하는데, 이들 품세의
명칭은 태극(太極)1장〜태극(太極)8장, 고려(高麗), 금강(金剛),태백(太白), 평원(平
原), 십진(十進), 지태(地跆), 천권(天拳), 한수(漢水), 일여(一如) 등이 있다. 이렇듯
이들 이론은 우주만물(宇宙萬物)의 명칭들을 붙여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美의 이론
에 대해 실천의 몸짓인 것이다.

이에 관한 내용을 김대식, 김광성의 《태권도지도이론》과 국기원의 《품새의 종


류》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다
(http://www.kukkiwon.or.kr)
.
태극 1장이라는 품세는 팔괘 건(乾)의 의미이요. 건은 하늘과 양(陽)을 뜻한다. 즉,
건이 만물의 근원이 기에 있다. 그리고 태권도의 신체기법에서는 품새의 시작이다.
이 신체기법의 서기에서는 걷기 위주이며 동작은 기본적인 몸통막기, 몸통지르기,
아래막기, 앞차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태극 2장은 팔괘 태(兌)의 의미이요. 태는 안쪽으로 단단하고 바깥으로는 부드럽다


는 뜻이다. 태극 1장을 수련하여 품새에 대한 심법이 자연스레 생겨 기본적인 방어
(막기)와 공격(차기, 지르기)을 할 수 있다.

태권도 품새에 보이는 테크네(Techne) (사진자료 : 국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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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상의 태극과 팔괘에 보이는 테오리아(Theoria) (자료 : 국기원).

태극 3장은 팔괘 이(離)의 의미이요. 이는 불을 나타내고 뜨겁고 밝음을 뜻한다. 태


권도 품새 수련을 통해 불같은 정의심과 수련의욕이 자연스레 몸에서 풍긴다. 신체
기법동작은 손날목치기, 손날막기이고, 여기서 서기는 뒷굽이다. 그리고 기술은 연
속 막고 치기와 차고 연속 지르기가 있다. 빠른 속도로 상대로부터의 치기를 막고
되치는 기법이다.

태극 4장은 팔괘 진(震)의 의미이요. 진은 우뢰를 나타내고 큰 힘과 위엄 있는 뜻이


다. 이 품새에는 고급 기술과 신체동작으로 되어 있다. 신체기법동작은 편손끝지르
기, 제비 품목치기, 손날몸통막기, 옆차기, 몸통바깥막기, 등주먹얼굴앞에치기 등이
있다. 특히 겨루기에 대비한 각종 동작과 뒷굽 서기가 많다.

태극 5장은 팔괘 손(巽)의 의미이요. 손은 바람을 나타내고 바람의 강약에 따라 위


세와 고요의 의미이다. 힘의 강약을 조절할 수 있는 수련단계라 할 수 있다. 신체기
법동작은 메주먹내려치기, 옆차며 옆지르기, 팔굽돌려치기, 팔굽표적치기 등이 있
다. 서기는 꼬아서기와 왼쪽서기, 오른쪽서기가 나온다. 또 차기 뒤에 아래 막고, 몸
통막기가 막기만 연속되는 동작과 뛰어 구르면서 치는 동작이 특수하고 표적치기가
있다.

태극 6장은 팔괘 감(坎)의 의미이요. 감은 물을 나타내고 끊임없는 흐름과 유연함을


의미한다. 즉, 만물의 생명원인 물의 이치처럼 기법의 연결이 물 흐르듯 해야 한다.
신체기법동작은 한손날얼굴, 돌려차기, 얼굴바깥막기, 바깥막기, 바탕손몸통막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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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다. 품새의 중간에 편히서기가 있다.

태극 7장은 팔괘 간(艮)의 의미이요. 즉, 산을 나타내고 육중함과 굳건하다는 뜻이


있다. 신체기법동작은 손날아래막기, 바탕손거들어막기, 보주먹 가위막기, 무릎치
기, 제친두 주먹몸통지르기, 몸통헤쳐막기, 엇걸어아래막기, 표적치기, 옆지르기 등
이 있고, 서기에서는 범서기와 주춤서기가 있다.

태극 8장은 곤(坤)의 의미이요. 곤은 음(陰)과 땅을 나타내고 뿌리와 안정이다. 그리


고 시작과 끝의 뜻이 있다. 신체기법동작은 두발당상 바깥팔목몸통거들어바깥막기,
외산틀막기, 거들어아래막기, 턱지르기, 뛰어차기, 팔굽돌려치기 등이 있다.

고려 품새에 보이는 테크네(Techne)와 테오리아(Theoria) (사진자료 : 국기원).

고려품새는 선배의 의미이요. 선배는 강력한 상무정신과 곧은 선비정신을 나타내는


뜻이다. 신체기법동작은 거듬차기, 손날아래막기, 엎은손날바깥치기, 칼재비 무릎눌
러꺽기, 몸통헤쳐막기, 주먹표적지르기, 편손끝제쳐찌르기, 바탕손눌러막기, 팔굽옆차
기, 메주먹아래표적치기 등이 있다. 준비서기는 통밀기이며, 손의 위치가 상단전과
중단전 사이로 신(神)과 정(精)이 합쳐지는 지점이므로, 정신통일을 중요하게 생각
하는 서기이다. 품새선은 士자로 고려품새의 의미인 선배(선비)의 표상이다.

금강이란 더할 수 없이 강함과 무거움의 의미이요. 강함과 무거움은 한반도의 정기


가 모인 영산인 금강산과 부처의 호법으로 음양의 두 신작(神將)이다. 무(武)가 가
장 강하다는 금강역사 가운데 더욱 강맹하고 파괴되지 않음이로다. 남성을 상징하는
금강을 나타내고, 이 두 가지 요소가 한데 어울려 품새이다. 신체기법동작은 바탕손
턱치기, 금강막기, 한손날몸통안막기, 산틀막기, 큰돌쩌귀 등이 있다. 서기로는 학 다
리서기가 있다. 품새선은 山자로 되어 있다. 그 뜻은 웅장함과 안정성이므로, 품새의
수련시 동작은 힘이 있고 강하게 중심을 안정시켜 천천히 행하여 힘을 길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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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은 한민족의 고대국가인 단군조선이 개국한 아사달(아씨땅)의 성산인 붉메(밝
산)의 의미이요. 밝은 산은 얼과 전통의 근원 신성함을 나타내는 뜻이다. 그리고 홍
익인간의 이치와 사상을 의미한다. 태백은 수없이 다른 위치와 말로 나타나 있지만,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민족의 태반(胎盤)이고 상징인 백두산이다. 단군의 높은
이상을 바탕으로 품새에 의미를 두고 있다. 신체동작은 손날엎어잡기, 잡힌손목빼기,
금강몸통막기, 등주먹얼굴바깥치기, 손날아래헤쳐막기, 돌쩌귀 등이 있다. 품새선은
工자로 열린 하늘과 땅 사이를 사람이 올바로 이어주는 개천과 개국을 뜻이 있다.
품새의 동작은 몸통막기와 치기로 주로 구성되어 하늘과 땅 사이에 바로 선 사람을
나타내는 의미이다.

평원은 아득한 사방으로 넓게 펼쳐진 대지의 의미이요 땅은 생물의 모체로서 생명


의 보존과 영장인 사람으로 인한 삶의 터전을 나타내고 본디(本)와 쓰임(用)에 따
른 평화와 투쟁을 바탕으로 품새가 이루어졌다. 신체기법동작은 팔굽올려치기, 거들
어 당겨턱지르기, 멍에치기, 헤쳐산틀막기, 얼굴옆막기 등이 있다. 준비서기, 모아서
기, 왼겹손은 땅이 삶의 시작과 근본인 것 같이 인체의 힘의 근원인 하단전의 기운
을 모으고 얻어서 행동하기 위한 서기가 있다. 품새선 一은 평원의 본디와 바뀜을
뜻한다.

십진은 십장사상에서의 십장생의 의미이요. 십장생은 해, 달, 산, 물, 돌, 소나무, 불


로초, 거북, 사슴, 학을 일컫는 것이다. 이 두개의 천체와 세개의 자연, 두개의 식물
과 세 가지의 동물은 사람의 믿음과 바램과 사랑을 나타내므로, 이를 상징하고 변화
하는 품새가 십진이다. 신체동작은 십장생의 수에 따른 열 가지로 황소막기, 손바닥
거들어막기, 손날아래 막기, 바위밀기, 손날등몸통헤쳐막기, 걷어올리기, 엎은손날지
르기, 쳇다리지르기, 손날엇걸어아래막기, 손날등몸통 막기 등이 있다. 품새선은 十
자로 십장생의 사상근본과 십진법에 의한 무한대의 숫자 형성, 그리고 무궁한 발전
을 뜻한다.

지태는 땅위의 사람이 하늘을 향해 두 발을 딛고 지상인(地上人)의 의미이요. 지상


인은 사람이 삶의 터전인 땅위에서 두 발로 차고 밟고 뛰는 삶과 싸움을 나타낸다.
사람의 생존경쟁 속에서 나타나는 갖가지의 양상을 동작으로 엮은 것이 지태품새라
한다. 신체기법동작은 한손날 얼굴막기, 메주먹 옆표적치기, 금강몸통지르기 등이 있
다. 이 품새선은 땅위에서 선 사람과 땅위에서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사람의 모양으
로 땅에서 나고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천권은 만물의 근본이요. 우주 그 자체이기도 한 하늘이 가진 능력이다. 그 무한한


능력은 창조와 변화와 완성을 나타내므로, 사람이 능력을 무서워하고 경외하는 마음
이 생겨서 으뜸가는 지상의 모양이다. 그 뜻에는 하늘의 명칭을 하였다. 신체동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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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펴기, 밤주먹솟음치기, 휘둘러막기, 휘둘러잡아당기기, 금강옆지르기, 태산밀기
등이 있다. 신체기법동작은 움직임이 큰 동작과 팔동작이 완만한 곡선을 이루어 천
권의 이치와 사상을 담았다. 품새선 ㅜ는 하늘에서 내리는 사람과 하늘의 뜻에 의한
사람, 그리고 하늘로부터 힘을 받은 사람과 하늘을 받드는 사람인 하늘사람이란 뜻
과 하늘과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

한수는 만물의 생명을 키워주는 근원이 되는 한물의 의미이요. 한물은 생명의 탄생


과 성장, 그리고 강함과 부드러움으로 큰 포용력을 나타내는 융화력이라 할 수 있
다. 그리고 적응력을 나타낸다. 한은 하나라는 뜻과 많다, 크다, 가운데, 같다, 가득
하다, 함께, 포인다, 잠깐, 오래 등 여러 가지 많은 뜻을 가지고 있다. 하늘이라는 뜻
과 모든 것의 뿌리라는 뜻도 담겨져 있다. 이런 의미와 부술 수도 끊을 수도 없는
물의 특성을 기술에 적용하여 한수가 꾸며졌다. 신체기법동작은 손날등몸통헤쳐막
기, 메주먹양옆구리치기, 거둘어칼잽이 안팔목아래표적막기, 손날금강 막기 등이 있
다. 서기에서 모둠발이 있고, 동작의 연습은 물처럼 유연하게 하되 한 방울의 물이
큰 바다를 이루는 것처럼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심법으로 꾸준히 수련을 해야 한
다.

일여는 신라의 위대한 승려, 원효대사의 사상 정수의 의미이요. 원효사상은 마음(정


신)과 몸(물질)이 하나이면서 원리는 오직 하나뿐이라는 높은 천리를 언급하고 있
다. 이것은 점이나 선이나 원이 하나가 된다는 뜻을 나타낸다. 태권도 수련의 완성
은 모든 기법과 동작이 모양이나 운용을 다르게 배우고 행하지만 궁극에서는 합쳐
지며 나아가 정신과 동작이 일체가 되는 깊은 무예의 진리가 바탕에 깔려져 있는
품새가 일여이다. 신체동작은 손날(얼굴)막기, 두손펴비틀어잡아당기기, 외산틀옆차
기, 뛰어옆차기가 있고 서기로는 오금학다리서기가 처음이다. 준비서기는 보주먹모
아서기이며 태권도의 마지막 품새이므로, 통일과 중용의 의미가 있는 턱 앞에 준비
손을 두고 두 손이 맞붙고 감싸져서 기(氣)가 인체와 두 손으로 막힘없이 흐르게
하는 것이다. 품새선 卍은 원효대사를 기리기 위해 일여사상을 나타내는데 부족함이
없는 불교의 상징으로 했으며. 본(本)․체(體)․용(用)이 일치하는 무아의 경지를 의미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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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여 품새에 보이는 테크네(Techne와 테오리아(Theoria) (사진자료 : 국기원).

위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미 태권도 품새이라는 이론 속에 실천이라는 몸


짓의 움직임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음양(陰陽)의 조화(調和)이다.

그래서 어떠한 것이 우선이 될 수 없으며, 또한 동양의 사상은 실천과 이론이 우주


만물(宇宙萬物)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법칙에 기본바탕을 두고 있다(송일훈,
2003).

그렇다면 임일혁의 《태권도 특성에 관한 연구》에서 품새에 내재된 미적(美的) 요


소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다.

품새란 가장 일반적인 상황에서 태권도를 하는 사람이 따라야만 하는 움직임이다.


그리고 기술적인 형식을 일반화 한 것이다. 이 동작과 움직임을 수련함으로써, 연속
적인 기술적 형식을 자신의 몸에 가장 적절하게 적응시키는 요소이다. 품새란 그런
가상의 상대와 나와의 경쟁이고 일정한 길을 따라 동작을 연무해 나가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누구나 수련을 하면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단순히 신체행위 몸짓의 흐름과 움직임에 그치지 않고, 그 속에 우주의 진기


를 받아들이는 도가 있다. 수련을 통해서 쌓여지는 도는 의식되는 도가 무의식 속에
세계에 서로 합일(合一)되는 도인 것이다. 이러한 도가 몸 밖으로 표출되어 우주 만
물의 자연과 일치될 때, 비로소 품새에 나타나는 미적(美的)인 부분이 표현된다.

품새에 내재된 미적(美的) 요소는 무예의 형식적인 유형, 즉 품새는 단지 싸우는 기


술의 향상을 위해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품새의 미적(美的) 부분은 형이 있다
는 것이다. 이 형은 형식美를 내포하여 형식은 품새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유급자 품새의 형식은 강하고 빠르며 유단자 품새는 힘이 넘치는 기법의 美가 요구
되며 동작자체가 하나하나 반복적이고 상하, 좌우의 형식이 서로 대치되지 않고 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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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을 유지한다.

그러므로 품새의 동작 표현에서 점은 신체의 각 부분에서 보듯이 주먹․손끝․손날․발


차기 시 발끝은 점이 공간상에 표현되는 예술적 존재로 인식할 수 있는 요소이다.
품새 수련에서 보듯이 각 동작의 구성요소는 미적(美的)으로 표현 될 수 있다. 즉,
태권도의 품새는 집중과 수련의 정신적 요소에 의해 크게 좌우되며, 여기서 미적(美
的) 즐거움은 수행자 스스로 美의 인식, 즉 동작의 강약과 빠름, 힘의 강약조절 속
에서 美를 느낄 것이다. 이것의 반복적 훈련을 통해 고통을 이겨내고 정신적으로 새
롭게 태어나는 승화의 과정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태권도의 품새 수련은 격투술과
동시에 예술적 즐거움을 수련생들에게 부여하고 격투 중심을 예술에 대한 즐거움으
로 승화시켜 주기 때문에 하나의 예술적인 형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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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결론 및 제언

이 연구는 무덕관 황기 당수도와 수박도와 오도관 최홍희 태권도 역사적 재조명을


통해 역사적 근원과 신체학문실제의 학문적 방안을 제시하였다. 즉 무덕관 황기 당
수도와 수박도와 오도관 최홍희 태권도에 관한 어떠한 시사점을 주는지를 다양한
각도로 분석 및 논의하였다.

황기와 최홍희와 유사점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다른 점은 황기는 과묵한 반


면 최홍희는 달변이 있고 설득력이 강한 소유자이다. 두 사람은 태권도 명칭 문제로
내심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최홍희가 완전 태권도 통합을 이루지 못한 것은 황기
가 장악하고 있는 무덕관 관세가 월등하였다. 즉 무덕관을 제외한 통합이란 명분이
서지 않았으며 최홍희는 황기를 다양한 방법으로 설득하였으나 그는 호락호락 않았
을 뿐만 아니라,

절대 굽히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시간이 갈수록 감정이 쌓이게 되었다. 이는


두 사람은 절대 통합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아쉬운 점이다. 황기는 우리나라의 고
유무예가 있는데 왜 일본 가라테(공수도)와 우리와는 하등의 연관성이 없고 역사성
도 없는 태권도라는 이름을 쓰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누구나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권법에 무보가 상세하게 전해오고 있다는 것과 만주
길림성 집안 현에 고구려벽화고분에서 발견한 논리를 주장하였다.

무덕관이 통합조건에 불응하자 황기가 오래전부터 출장하고 있던 공군사관학교와


경찰전문학교의 태권도 교관직에서 강제 해임을 당하였다. 무덕관이 관여하고 있는
각 기관 당수도 도장들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매년 실시하는 전국체전은 자기 고
향에 명예를 걸고 출전하여 기량을 겨루는 국가 체전인데 무덕관 관원은 대한체육
회의 산하단체가 아니라 하여 선수 선발에서부터 제외 시켜버리니 지방 유지들의
불만이 커져갔다. 이는 협회 행사는 협회가 발행한 공인 단증 소지자에 한하여 출전
할 수 있다는 구실로 무덕관 관원은 제외 시켰고 무덕관 단증을 무력화 시키는 전
법도 시작이 되었다.

다음은 김운용은 1976년 문교부에 국제태권도연맹을 유명무실한 단체로 몰아인가


를 취소하도록 하였다. 모든 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최홍희는 평소 친분이 두텁
던 천도교 교령을 지낸 최덕신의 유혹에 캐나다에서 친북활동을 벌인 것은 널리 알
려진 사실이다. 최홍희가 평생토록 어렵게 창안해 만든 태권도를 통해 입신양명한
사람들이 많을 텐데 최홍희를 구제하여 줄만한 방법은 없었다. 불치의 병마에서 시
달리면서도 막다른 골목에서 허덕이던 최홍희가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시키는데 앞
장섰고 그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 어려울 때 우리 무덕관 몇몇 사범들이 최홍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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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역부족이었으나 연민의 정을 금할 수 없다. 세계태권도
에 아버지라 일컬이었던 최홍희의 뛰어난 재주와 태권도의 기여한 공로를 높이 평
가하여야 한다.

그 다음은 대한민국 태권도에 있어서 황기와 최홍희는 대단한 인물이다. 두 사람에


의해 오늘날 대한민국 태권도는 세계적인 무도를 대표한다. 그들이 추구하고자 했
던 것은 대한민국 무예를 세계위상에 알리는 것과 또 전 국민이 무예로서 찬란한
유산을 지키는데 있다. 어이하든 태권도를 세계위상에 알리고자 하였으며 한사람은
다른 무예로서 당수도와 수박도를 세계정상에 올려놓아야 했던 것을 알아야 한다.
무명에 따라 비록 다른 행보를 했더라도 두 사람의 의지에 따라 국익선양에 이바지
하였다. 특히 어느 면에서는 같은 의지를 했고 이것은 같은 유사종목으로 오르지 국
익을 생각하고자 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안타까운 현실은 두 사람이 통합했더라면
무언가 새로운 역사적 근원으로서 당수도와 수박도나 태권도를 재창출 있었다고 생
각되어진다. 하지만 생각으로는 태권도 원형으로 가되 품새적 측면에서는 수박, 즉
권법을 추구하여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을 만들어야 한다.

국익적 선양으로 볼 때 가라데(공수도)설과 혁파할 수 있는 것을 재창출해야 한다.


모든 역사적 근원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역사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
다. 권법에 관련된 근본적 초석은《武藝圖譜通志》이라는 우리나라의 위대한 유산
을 물려주었다. 그때 당시 황기가 물려준 당수도와 수박도와 화수도 그리고 당수도
저서에서 그가 편찬한 내용은 대단하였다. 그 이유는 인문과학적 측면 자연과학적
측면을 다양하게 신체학문의 근원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무덕관 황기 당수도와 수박도와 오도관 최홍희 태권도 역사적 재조명을 통
해 역사적 근원과 신체학문실제의 학문적 방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태권도 관장 및 지도자 및 수련생, 전공학생들에게 교육적 가치와 무덕관 황기 당수
도와 수박도와 오도관 최홍희 태권도의 무형유산의 문화적 가치를 통한 제반적인
학문적 지식체계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된다.

마지막으로는 대한민국 전통무예인 태권도 원류 무덕관이 가지고 있는 역사관과 철


학관 그리고 신체사상관의 이치 및 실제에 대한 사료들이 존재하고 있으나 그 의미
와 가치관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문제점의 인식을 통해
각 도장에 난립하고 있는 역사성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한다.

태권도 원류 무덕관의 신체관과 역사관에 나타난 의미와 가치를 제시할 수 있는 매


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국기 태권도의 원류 무덕관의 주제의식은 역사관과 철학
관 그리고 신체사상관의 가치와 의의를 밝혀 전통성과 정통성을 역사적 근원과 신
체학문실제에 관한 정체성 제시를 규명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더 나아가 무덕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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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성이 있는 역사관과 철학관 그리고 신체관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실제와 신체
사상사의 이치인 그 위대한 신체무예문화유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 것이
다.

이 연구는 「태권도 무덕관사(史)」의 활용방안이다. 역사관과 철학관 그리고 신


체관의 각 영역별의 역사적 발달과정의 유형과 특징 그리고 개념 및 이념들에 관한
전통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태권도 원류 무덕관의 설립배경의 의의와
가치를 제시함으로써, 태권도 각 영역별에 관한 역사성을 통한 태권도 공공기관과
태권도인들에게 소중한 교육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특히 「태권도 원류 무덕관에
따른 역사」를 연구하여 태권도를 학문적으로 한 층 더 끌어 올릴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한 활용방안의 제시를 통해 현 교육에서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 나아가 국기 태권도의 기타 각 영
역별의 소중한 역사 교육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이 연구는 국기 태권도의 원류 무덕관에 관한 올바른 역사성과 정체성을 조사․분석․


논의를 통하여 전통무예의 역사적 체계를 규명하고자 한다. 국기 태권도의 원류 무
덕관에 보이는 무예실사에 관한 微視的 方法(Micro Method)으로 연구가 진행되어
야 올바른 신체가치관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태권도 관장 및 지도자 및 수련생, 전공학생들에게 교육적 가치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국기 태권도 원류 무덕관의 무형유산의 문화적 가치를 통한 제반적
인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한국무예의 교육적 질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이 연구과정
에서 습득한 지식들을 정부기관 태권도원, 국기원, 대한태권도협회. 세계태권도연맹
과 전통무예 단체를 통해 기대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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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연구결과 활용계획

1. 연구결과 활용계획

「태권도 원류 무덕관사(史)에 따른」각 영역별에 내재된 의의와 가치를 도출


하여 역사성과 정체성을 정립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주제의식을 정립하기 위해 다
음과 같은 연구의 기대효과를 도출할 수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태권도 원류 무덕관사(史)에 따른 학문적․사회적 기여도이다. 이 연구를 통


하여 역사성을 학문적으로 재정립하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이와 아울러 태권
도 공공기관과 무덕관 각 시도별로 공조체계를 공고히 하여 각 영역별에 관한 역사
성을 재정립하여 溫故知新과 法古創新의 이념아래 계승과 발전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 연구의 영역별에 관한 새로운 역사성을 제시함으로써 그 의의와 가치가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둘째, 태권도 원류 무덕관사(史) 연구에 따른 학문적 활용방안이다. 이 연구를 통


하여 각 영역별에 관한 역사성을 학문적으로 재정립하여 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소중한 우리 국기 태권도의 문화유산을 보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태권도의 百年
之大計를 위한 역사성을 재정립함과 동시에 교육학문의 일환으로서 태권도 공공기
관과 태권도인들에게 소중한 교육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셋째, 태권도 무덕관사(史)에 따른 학문적 파급효과이다. 이 연구를 통하여 각 영


역별에 관한 역사성을 밝혀, 이에 따른 의의와 가치를 명확히 제시할 수 있을 것이
다. 이를 통해 역사성이 갖는 의의와 가치의 소중한 교육문화유산을 인식시켜줄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역사성의 유형 및 특징 그리고 개념 및 이념들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각 영역별 역사적 유형 및 특징 그리고 개념 및 이념들을 제시함으로써 태
권도 공공기관과 태권도인들에게 역사성과 정체성에 관련된 소중한 교육자료로 활
용될 것이라 기대된다.

이와 같이 「태권도 무덕관사(史)」의 활용방안에 대한 핵심을 제시하여야 한다.


역사관과 철학관 그리고 신체관의 각 영역별의 역사적 발달과정의 유형과 특징 그
리고 개념 및 이념들에 관한 전통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태권도 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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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덕관의 설립배경의 의의와 가치를 제시함으로써, 태권도 각 영역별에 관한 역사
성을 통한 태권도 공공기관과 태권도인들에게 소중한 교육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특히 「태권도 원류 무덕관」을 탐구하여 태권도를 학문적으로 한 층 더 끌어 올


릴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한 활용방안의 제시를 통해 현 교
육에서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 나아가 국기
태권도의 기타 각 영역별의 소중한 역사 교육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
다.

위에서 살펴보듯이 태권도 원류 무덕관의 역사관과 철학관 그리고 신체관의 각


영역별의 역사성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가 산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해
결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태권도 원류 무덕관의 역사」를 기본바탕으로 하여 여러
가지 역사성의 주제의식에 대한 다양한 측면에서의 기대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
이다.

따라서 태권도 원류 무덕관의 역사관과 철학관 그리고 신체관의 각 영역별에 관


한 역사적 가치․문화적 가치․교육적 가치 등을 융합하는 태권도 역사성에 초석이 될
것이다. 이를 통해 본 태권도 원류 무덕관사(史) 연구에 따른 각 영역별 그리고 무
덕관에 대한 정체성 제시를 할 수가 있을 것이라 기대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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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구성과

이 연구의 성과는 태권도 원류 무덕관의 역사관과 철학관 그리고 신체관의 각 영


역별에 관한 역사적 가치․문화적 가치․교육적 가치 등을 학문적으로 탐구하였다. 이
를 통해 한국연구재단 등재후보지 게재 성과와 학술저서로 편찬하여 태권도 역사성
을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 본 태권도 원류 무덕관사(史) 연구에 따른 각 영역별 그
리고 무덕관에 대한 정체성 제시를 할 수가 있을 것이라 기대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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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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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기관생명윤리위원회(IRB) 심의
→ 해당목차는 삭제불가(심의대상이 아닌 경우, 대상아님으로 표기)
1. 대상 여부(해당 칸에 ‘o’표시)
IRB 심의 대상 IRB 심의 대상 아님

2. IRB 심의결과서 첨부(IRB 심의대상만 해당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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