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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r: Lee Do Eon, Ye Yun Lee, Soon Myeong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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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Contents

4-5 외면 받았던 진짜 이름, 동해 6-7 독도 8-9 간도


10-13 동북공정 14-15 난타
16-17 가장 유쾌한 풍자, 탈춤
18-22 도심 속 다섯개의 진주알, 5대궁
24 신화 천년의 역사가 깃든 경주 역사유적지 25 고인돌
26 조선의 꽃, 수원 화성 27 떠나요 제주도로
28 가야를 찾아서 29-30 마지막 로마인에게 북방의 칼을 묻다
31 조선의 첫 인상 32 대몽항쟁 33 과거로부터 배운다
34-35 조선의 5대 왕
35 칠지도 36-37 붕당제와 정당제
38 한국 디아스포라 39 한국인의 열정
40 What It Takes to Make People Care
41 역사의 위기, 우리의 위기
42-43 독일인의 관점에서 본 한국
44-45 최고 (最古)와 최고 (最高)
46 Thanks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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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평범한 여자 고등학생이 있었습니다.

남들보다 특별한 것도 없었고, 남들보다 잘하는 것도 딱히 없던 이 고등학생이 친구들에게 말을 했습니다. “우리


함께 한국에 대한 역사 오류를 고쳐보지 않을래?”

현재 450여 명의 학생들이 전세계적으로 함께 하고 있는 HIFCO의 시작은 아주 작은 말 한마디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HIFCO를 처음 만들었고 현재 단체장으로 있는 이도언이라 합니다.

사실 2009년 여름에 HIFCO를 시작할 때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역사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대학준비에 여념이 없고 심지어는 선택과목이 되어버린 역사에 대해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관심을 보일
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엔 단 10명 만이라도 저와 동참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 작년 여름이었습니
다.

하지만 현재 HIFCO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 지역에서 450여명의 한국학생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고
등학생 중심으로 회원을 모집하였지만, 지금은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회원이 다양합니다. 그만큼 대한민국에 애
국심으로 가득 찬 학생들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는 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제가 VANK에서 시작했던, 이메일을 통한 오류 시정 작업을 지속해 온지 어느새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


지만 이미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생각보다 한국은 세계에 잘못 알려져 있었
고, 더 큰 문제는 많이 알려지지도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사람들끼리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해외에 나갔을 때, 보통의 사람들은 “Are you Japanese? (일본인이십니까?)”라고 물어보고, 아니라고 한다면
“Then are you Chinese? (그렇다면 중국인이십니까?)”라고 물어본 뒤, 그 또한 아니라 한다면 “Then where are
you from? (그러면 어디서 오신 것입니까?)”라고 물어본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기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
인들이 잘 모른다는 것이 저희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낮은 인지도는 분명 국제화 사회를 살아가
는 우리들에게 큰 약점이리라 생각하여 저희는 한국을 바로 알리는 간행물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번 간행물에서는 우리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와 우리나라를 아름답게 가꿔주는 문화유
산에 대해서 이야기도 해보려 합니다. 우리 역사에 대한 왜곡 사실을 고치는 것만큼이나 우리에 대해 더 많은 사람
들이 정확히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간행물의 목표는 매년 600만에서 700만 명의
외국인들이 방문하는 한국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를 제대로 알리는 것입니다.

지금의 HIFCO가 있을 수 있도록 했던 그 용기 있는 한 마디의 말처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 있는 말을 하려 합


니다. 이제는 더 많은 분들께서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더 많은 외국인들이 반 만년의 역사
를 가진 한국의 아름다움을 알길 바라며, 대한민국을 꼭 한 번 방문해보고 싶은 나라로 생각하실 수 있으시다면 좋
겠습니다.

현재 HIFCO는 우리 역사를 바로 잡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저희의 최종 목표는 우리와 같은 문제를 안고 있


는 모든 나라의 학생들과 함께 이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도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할 때야 비로소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듯이, 모든 나라가 진실된 역사
를 갖게 되었을 때 자존감을 갖게 되고 이것이 결국 서로 존중하며 잘 살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 사실이 아닙니다. 역사는 우리의 현재이고, 미래를 향한 원동력입니다. 지금 이 순간 순간도
하나의 역사가 되어 훗날 우리를 지탱해주는 힘이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한국의 예전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보여드
리며 여러분들께 우리를 소개하려 합니다. 저희의 글솜씨가 한국을 모두 담아내기에는 부족하지만, 우리 나라를 아
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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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 받았던 진짜 이름, 동해
글 | 장석준

당신은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 있는 바다의 이름을


아십니까? 만약 일본인에게 이 질문을 한다면
칭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었습니다. 같은 기준을 적용해
보면, 아시아 대륙의 동쪽에 위치한 이 바다를 ‘동해’라
‘일본해’라는 대답을 얻을 것이고, 한국인에게 같은 질 고 부르는 것이 옳은 것 입니다. 몇몇 사람들은 서양 고
문을 한다면 ‘동해’라고 답할 것입니다. 이 바다의 명칭 지도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는 ‘한국해(Sea of Corea)’의
을 두고 아직까지도 두 나라는 대립하고 있습니다. 일본 명칭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나, 국제적 관행에 비
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일본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추어 볼 때, 이 역시 옳은 명칭은 아닙니다. 즉, 특정 국
있다는 점을 들며 명칭을 고수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가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 대륙을 기준으
역사적으로도 ‘동해’라는 명칭이 많이 쓰였으며, 대륙의 로 한 ‘동해’라는 명칭이 가장 타당성 있는 것입니다.
동쪽에 위치한다는 점을 들며 ‘동해’라는 명칭의 정당성 그렇다면, 왜 세계는 동해를 ‘일본해’라고 부르고 있을
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까요? 19세기 말, 열강들은 제국주의를 앞세워 조선을
점령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나라 중 1910년 일본이 결
뭐라고 불러야 할까 : 국 조선을 점령했고, 한국은 1945년까지 일본의 식민지
로 전락하여 엄청난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런 식민지 시
‘일본해’가 아닌 ‘동해’ 기에, 일본은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의 이름을 ‘일본
해’로 공식 발표했습니다. 1929년, 일본은 ‘국제수로국’
한국과 일본 사이의 갈등은 두 나라 사이의 바다 이름 에서 ‘일본해’라는 명칭 사용을 주장한 것입니다. 현재
을 무엇으로 하는가를 주된 내용으로 합니다. 일본은 국 ‘국제수로기구’라고 불리는 이 단체는 ‘해양과 바다의
제적으로 ‘일본해’라는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합 경계’라는 간행물을 통해 바다 이름을 정하는 규칙을 발
니다. 그들은 그 바다가 18세기 후반부터 ‘일본해’라고 표합니다. 당시 한국은 일본의 지배하에 있어 힘이 없었
불려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동해 문 기 때문에, 바다의 이름은 ‘일본해’로 결정됩니다. 하지
제를 다시 언급하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만 이는 그 바다가 계속 ‘동해’라고 불려온 것을 무시한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다양한 역사적 사료를 일본의 일방적인 행동입니다.
보면 ‘동해’라는 명칭이 상당히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이러한 점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는 ‘동해’로
명칭임을 알 수 있습니다. 5세기에 세워진 ‘광개토대왕 불려야 한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일본은 단지 이 바다를
릉비’를 보면 ‘동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차지하기 위해 진실을 숨기려고 할 뿐입니다.
한, 고려시대에 쓰여진 정사인 ‘한국사기’ 역시 한반도
와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다를 ‘동해’라고 부르고 있습니
Historical Fallacy Correcting Organization

다. 1530년에 제작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


ㅡ 1740년에 제작된 ‘영남지도’, 18세기 중엽에 제작된
일본측의 옳지 않은 주장들
‘서북계도’, 18세기 말에 제작된 ‘여지도’ 중 ‘아국총도’,

현재 일본이 ‘일본해’라는 명칭을 주장하는 것은 총 4
18세기말에 제작된 ‘천하도지도’ 등 역시 모두 동해라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이미 세계의 95%가 일본해라는
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18세기말 ‘일본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명칭을 바꿔서 혼란을 일으
명칭이 1602년 제작된 ‘곤여만국전도’에서 처음 쓰였다 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 일본해는 18세기 말부터 19
는 것을 고려하면, ‘동해’라는 명칭이 역사적으로 훨씬 세기 초에 서양에서 많이 쓰던 명칭이며 일본이 강요해
타당성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 서 사용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 일본해는 태평양 중
단법인 ‘동해연구회’가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한 ‘동해명 간을 가르고 있는 일본의 위치로 인해 붙은 이름이며,
칭’ 관련 국제세미나에서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16세 일본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유
기부터 20세기에 제작된 서양의 고지도 407종을 조사 엔이 ‘일본해’라는 명칭만을 공식 인정했다는 것이 그
한 결과, ‘동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고지도가 총 네 가지 근거입니다. 하지만 이는 모두 논리적으로 옳지
298종으로 약 73.2%에 달했으며, ‘일본해’라고 표시된 않은 주장들입니다. 먼저, 일본은 국제적으로 널리 쓰이
지도는 109종으로 26.8%에 불과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고 있는 명칭을 바꾸는 것은 혼란을 일으키므로 옳지 않
‘동해’라는 명칭은 ‘일본해’보다 더 오래 전부터, 그리고 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과거에 일본이 저
더 널리 쓰였던 것입니다. 지른 만행임을 알아야 합니다. 국제적으로 더 많이 쓰이
국제적 관행을 고려해봐도, ‘동해’라는 명칭이 훨씬 타 던 ‘동해’라는 명칭을 ‘일본해’로 바꾸어 지금의 혼란을
당성이 있습니다. 현재 세계적으로 바다의 이름은 인근 일으킨 것은 일본이었으며, 현재 우리는 오히려 이 혼
국가에 의해 정해집니다. 그렇다면 일본과 한국과 모두 란을 수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일본해가 서양에서 많
접해있는 바다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에 대해 우리 이 쓰이던 명칭이므로 옳다는 주장 역시 타당성이 없습
는 ‘북해’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바다의 경우, 영 니다. 바다의 이름을 정하는데 인근 국가인 한국 국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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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이나 독일의 입장에서 보면 북쪽에 위치하지만, 북유 의 의사는 반영하지 않으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서양국
럽의 기준에서 보면 남쪽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바다 가를 고려하는 점은 평등성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지도
는 ‘유럽대륙’의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북해’라는 명 제작 시 명칭은 해당 지역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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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동아일보 기사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310150108)
우리 모두의 사전, 위키백과-동해의 이름에 대한 분쟁
네이버 개인 블로그 (http://blog.naver.com/jeongjinyi;
http://blog.naver.com/jeongjinyi; http://blog.naver.com/cfcp)
한국외교통상부 홈페이지(http://www.mofat.go.kr/)
헤럴드경제 기사 (http://biz.heraldm.com/common/Detail.jsp?newsMLId=20100630000347)

먼저 고려한다는 지도 제작의 일반적인 원칙에도 어긋 (Sea of Japan)’이라는 명칭이 잘못되었다며 정부차원


납니다. 또한 일본이 태평양과 동해를 구분하는 기준이 에서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합니다. 1998년 제7차 유
므로 ‘일본해’라고 불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설 엔 지명 표준화 회의, 그리고 2002년 제8차 유엔 지명
득력이 떨어집니다. 섬이 바다와 대양을 가르기 때문에 표준화 회의에서 한국은 계속하여 이 문제를 제기합니
바다에 섬의 이름이 붙는 경우는 전례가 없습니다. 오히 다만 일본은 이 문제가 국제적 쟁점으로 커지는 것을 막
려 이런 경우 대륙과 비교해서 바다의 상대적인 위치에 기 위하여 한국 측의 협상 요구를 거절합니다. 하지만
따라 이름을 붙이기 때문에 ‘동해’라는 명칭이 훨씬 타 한국의 계속된 협상 요구 및 동해 표기에 관한 문제 제
당합니다. 마지막으로 유엔이 ‘일본해’라는 명칭을 인정 기로 점점 국제적인 이슈가 되기 시작합니다. 이에 더
했다는 주장 역시 근거가 없습니다. ‘일본해’라는 명칭 해, 한국 정부는 ‘동해’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인정받
을 단독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유엔사무국으로, 이것 기 위해 2007년, 2009년에 동해명칭 홍보 브로셔를 만
도 유엔사무국 내에서 편의상 사용하고 있을 뿐이며 옳 들었으며, 홍보 동영상도 제작하여 외교통상부 홈페이
은 표기는 아니라고 유엔 측에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오 지에 올려놓는 등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히려 1977년 채택된 ‘유엔 지명 표준화 회의’를 살펴보
면, 분쟁 지역의 명칭 사용에 있어 인근 국가들끼리 협
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두 명칭을 복수 표기하는 것 ‘동해’와 관련된 국제적 분쟁들
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엔이
‘일본해’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는 전세계적으로 ‘일본해’라는 명
칭이 더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잡
바다의 명칭의 중요성? 지 ‘TIME’은 2010년 8월달에 한국의 ‘천안함 사건’을
보도하는 과정에서 삽입한 지도에 ‘Sea of Japan’이라
몇몇 분들은 바다 이름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실지
는 명칭만을 단독 표기했다. CNN 역시 8월 8일 북한 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이름과 관련된 문제는 일본과 한
승호 나포소식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Sea of Japan’이
국에게 굉장히 큰 의미를 지닙니다. 먼저, ‘일본해’라는
라는 명칭만을 사용했다. 미국 정부의 대부분의 부서들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암묵적으로 바다의 소유권을 일
역시 아직까지도 ‘Sea of Japan’만을 단독 표기하고 있
본에게 넘긴다는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또한, 한국
다. 이러한 것은 아직도 세계 대부분에서는 이 바다의
이 ‘동해’라는 명칭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것은 동해
정확한 명칭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 한반도의 동쪽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아시아의 동쪽
하지만, 긍정적인 변화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Historical Fallacy Correcting Organization


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본해’라는 명칭
외교통상부에 따르면, 2000년(일본이 조사)에는 세계의
은 ‘동해’라는 명칭을 계속 사용해 온 한국사를 부정하
2.8%만이 동해/일본해를 병기하였으나, 2005년(일본
는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또 다른 역사왜곡이 계속
이 조사)에는 10.8%, 2007년(한국이 조사)에는 23.8%
될 수 있습니다. ‘동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정확
가, 그리고 2009년 (한국이 조사)에는 28.07로 두 지명
한 역사를 지키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
을 모두 사용하고 있는 지도의 비율이 점점 늘고 있습니
다.
다. 또한, 유명한 검색엔진인 ‘구글(Google)’이 제공하
는 3D 지도프로그램인 ‘구글어스’ 역시 2005년부터 동
‘동해’와 관련된 국제적 분쟁들 해와 일본해를 복수 표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도 ‘동해’라는 명칭을 단독 표기하는 지도는 거의 없다
이미 설명했듯이, ‘동해’와 ‘일본해’라는 명칭에 대한 는 점은 안타깝지만,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가 계속 이루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1929년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한 어지고 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국제적으
반도에 위치하던 ‘조선’을 일본은 강제로 점령하여 외교 로도 동해명칭에 관한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
권, 입법권, 사법권 등을 모두 빼앗았습니다. 조선에게 미하기 때문입니다.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국제수로기구에서 이미 ‘동해’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는 ‘동해’라는 원래의 이름
라는 명칭이 널리 쓰였음을 무시하고 ‘일본해’라는 이름 을 잃고 오랜 세월을 보내왔습니다. 동해바다는 다시 그
을 공식적인 명칭으로 정합니다. 하지만, 외교권을 박탈 이름으로 불려지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당한 조선은 이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현재는 복수 표
후, 한국은 결국 독립 후 1957년 ‘국제수로기구’에 가입 기가 이루어 지고 있지만, 진실은 하나입니다. 역사적
하며 1970년대부터 한국은 꾸준히 ‘동해’라는 명칭이 인 관점으로, 지리적인 관점으로, 그리고 국제법을 고려
옳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974년, IHO는 한국과 일 한 관점 등의 다양한 시각을 가지고 이 문제를 접근했을
본에게 ‘동해’와 ‘일본해’라는 명칭 모두 사용할 것을 건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하나-‘동해’-입니다.
의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절합니다. 그 후, 1992년 제6
차 유엔 지명 표준화 회의에서 남한과 북한은 ‘일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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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글 | 민경현
이미지 제공 | 대한민국 해양경찰청

한국의 중,고교에서 쓰는 국사 교과서에는 독도와 관


련된 내용이 거의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
단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숙종 시대에 살던 어부였
는데, 1693년 울릉도에서 어로 및 농사 활동을 하던 중 일
니, 많은 학생들은 영토 분쟁이 가열되었을 때만 독도에 본의 오오야 집안의 어부들과 충돌한 후부터 여느 어부와
관심을 갖습니다. 하여, 오늘은 독도에 대한 관심을 불러 는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오키섬까지 납치되었다가 돗
일으킬 수 있는 세 개의 주제와 독도 영유권 분쟁에 대해 토리성의 호키슈 태수에게 이송된 안용복은 당당한 태도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로 태수에게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강조하고 일본인
의 출어를 금지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호키슈 태

(1) 독도의 이름 변천사 수는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라는 서계를 써 주


었으나, 안용복과 일행이 조선에 도착하기 전, 대마도에
독도의 옛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는 ‘우산도’는 원래 울 서 대마도주에게 서계를 빼앗겼습니다. 그 후 1696년 안
릉도의 옛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울릉도라는 명칭이 용복은 또다시 일본 어선들이 울릉도에서 어로 활동을 하
정착되면서, ‘우산도 옆 작은 섬’이었던 독도가 ‘우산’ 이 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선들을 쫓아낸 그는 돗토리번주
라는 명칭을 이어받게 됩니다. 여기서 ‘우산국’의 ‘우산’ 에게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명확히 하며 일본인
이란 고구려의 말로, 위쪽의 높은 지대 또는 높은 산이라 들의 계속되는 침범을 근절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
는 뜻이라고 합니다. 에 돗토리번주는 "두 섬이 이미 당신네 속한 이상, 만일 다
조선 시대에는 ‘우산도’와 함께 ‘삼봉도’와 ‘가지도’라 시 국경을 넘어 침범하는 자가 있으면 국서를 작성하고 역
는 명칭도 쓰였습니다. 이 중, ‘삼봉도’는 세 개의 봉우리 관을 정하여 무겁게 처벌할 것이다." 라고 하며 독도가 조
로 된 섬이라는 뜻이며, ‘가지도’는 물개가 많은 섬이라는 선의 땅임을 인정했습니다. 안용복의 활약의 결과로 일본
뜻입니다, 독도는 물개가 살기 좋은 환경을 갖고 있으므로 의 에도 막부는 울릉도 도해 금지 명령을 내렸고, 일본의
인간의 포획이 심해지기 전에는 독도 근처에 많은 물개들 메이지 정부도 1877년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이 살았다고 합니다. 것을 인정했습니다.
19세기 후반 이후, 독도의 이름은 섬 전체가 바위로 되 안용복 이후, 순조 때에는 무신 이규원이 독도를 지키기
어 있다는 뜻의 ‘석도’로 바뀌었습니다. 실제 ‘독도’라는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순조 33년 이었던 1811년 일본
공식 명칭이 생긴 지금도, 울릉도의 주민들은 독도를 ‘석 인들이 울릉도에 들어와 무단으로 벌목을 하자, 조정에 의
도’의 훈독인 ‘독섬’ 이나 ‘돌섬’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해 울릉도 검찰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울릉도 검찰사의 신
Historical Fallacy Correcting Organization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이 처음 사용한 ‘독도’라는 명 분으로 그가 일본인들이 표목을 세우고 벌목을 하고 있다
칭은 현재 이 섬의 공식 명칭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홀로 는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자, 조정은 즉시 일본에 항의 서
‘독’, 섬 ‘도’를 사용하는 독도의 뜻을 한자 그대로 풀이하 한을 보내고 울릉도 재개척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울릉도
여 ‘외로운 섬’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잘못된 발음으 에서 400여 년 간 실시되었던 쇄환정책과 수토 정책 대신
로 인한 착오였다고 합니다. ‘독도’라는 명칭 이전에 쓰이 울릉도 관리 정책이 수립된 것이 모두 그의 덕택입니다..
던 ‘석도’를 발음하면 ‘독섬’이나, ‘돌섬’이 되는데, 이를 세 번째로 20세기에 들어와 독도를 위해 남다른 헌신을
초기 이주민이었던 전라도 남해 출신의 사람들이 발음을 하신 분이 한 분 계셨습니다. 홍순칠이 바로 그 사람인데
잘못하면서 이름이 ‘독도’로 정해졌다고 합니다. 요, 그는 1952년 울릉도 경찰서의 마당에서 "시마네현 오
이렇게 독도에는 굉장히 다양한 이름이 있습니다. 이제 키군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竹島)"라고 쓴 표목을 발견
두 번째 주제인 ‘독도를 지킨 사람들’로 넘어가겠습니다. 한 후 독도를 지키기로 결심했습니다. 이후 그는 군에서
제대한 청년들을 규합하여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였
(2) 독도를 지킨 4인 습니다. 홍순칠은 독도를 지키기로 결정한지 약 1년 후인
1953년 4월에 독도에 첫 상륙을 하였고, 이후 독도의용수
독도를 지킨 사람이라고 하면 누가 생각나세요? 많은 사
비대를 이끌면서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과 수차례의 총
람들이 독도 하면 안용복만을 떠올리지만, 그 이외에도 많
격전을 벌였습니다. 그의 활동은 오늘날 독도를 실효적으
은 사람들이 한국 최동단의 섬인 독도를 지키기 위해 많은
로 지배하는데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노력을 하였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네 명의 인물에 대
마지막으로는 독도주민등록 1호인 최종덕씨에 대해서
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1980년에 일본이 다시 독도의 영
제가 제일 먼저 소개할 인물은 이 셋 중 가장 먼저 독도
유권을 주장하자 “단 한 명이라도 우리 주민이 독도에 살
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안용복입니다. 그가 독도를 위해
고 있다는 증거를 남게겠다”며 1981년 10월 14일 주민등
한 일은 한 편의 영화와도 같습니다. 안용복은 출신이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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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에 독도를 주소지로 등재했습니다. 그 이후 그는 22년
동안 독도에 거주하면서 몰골을 발견하고 집과 계단을 설
치하는 등 후세의 편익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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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사이버 독도 (www.dokdo.gov.kr)
네이버 백과사전
매일 신문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1341&yy=2009
http://dokdo.kcg.go.kr/sub04/c_1.asp)
한국외교통상부 홈페이지(http://www.mofat.go.kr/)
헤럴드경제 기사 (http://biz.heraldm.com/common/Detail.jsp?newsMLId=20100630000347)

(3) 독도의 동물-강치 ③ 일본은 주인 없는 섬이었던 독도를 먼저 차지하였다.


→ 독도는 512년부터 한국의 영토였으며, 일본의 자
혹시 글 (1) 에서 독도의 옛 이름이 가지도라고 했던 것 료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을 기억하십니까? 이 이름은 강치의 옛 명칭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명칭은 독도에게 강치가 많 <1905년 이전>
았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독도하면 떠오르는 대표 생물 - 임자평의 삼국접양지도(1785), 총회도(18세기)
은 괭이 갈매기이기에 . 많은 분들이 괭이 갈매기 외에는 <1905년 이후>
독도의 생물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강치는 몇 년 전까지 - 부산 주재 일본 영사관의 ‘울릉도 현황’ 보고서
만 해도 동해연안에서 멸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1905년), 박애관에서 발간한 ‘조선전도’ (1910), 일본
2009년에 독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독도에 강치가 돌아 해군성 수로부 발간 ‘일본수로지’ 등
온 만큼, 이제는 우리가 독도 강치에 대해서도 좀 더 잘 알
아야합니다. ④ 1905년 시마네현 고시 공포 이후, 일본은 독도를 토지
19세기 독도에는 강치가 3만에서 5만 마리 정도 있었다 대장에 등재, 독도 주변에서 어업 허가, 1940년에 해군
고 합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 가죽과 지방을 얻기 군용지로 사용하는 등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위해 강치를 많이 포획하였고, 이 때문에 독도에서 강치가 여러 증거가 있다.
사라졌다고 합니다, → 이는 모두 한국과 일본의 합방이 합법적이라는 전
1975년에 사라진 이후 33년 만에 다시 나타난 강치...... 제하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따라서, 합방이 무효로 판
이번에는 강치가 다시 사라지지 않도록 관심을 갖고 지켜 결 난 이상, 위의 증거들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을 뒷받
주어야 합니다, 침하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⑤ 독도의 편입(1905)은 한일 합방(1910)과는 전혀 별개


(4) 독도의 영유권 분쟁 의 상황이다.
→ 시기적으로 독도의 편입은 한반도 침략의 일부분
독도영유권분쟁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96
이었으므로 일본은 1945년 패전하면서 맺은 ‘포츠담
년 2월에 일본이 자신의 배타적 경제수역 내에 독도를 포
선언’과 ‘카이로 선언’의 의무를 수행하여 협박과 강요
함할 것이라고 한 것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부터였습니다.
를 통해 갖은 영토를 침략 이전의 상태로 해놓을 법적
벌써 이로부터 10년이 넘게 지났지만, 아직 한국인의 대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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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이 일본의 주장이 어떻게 틀렸는지 조차 잘 모르고 있
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이 기사의 마지막을 일본의 주장을
이로서 독도의 이름 변천사, 독도를 지킨 3인과 독도의
반박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장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강치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독도에 관한 관심이 많
이 생기셨나요? 독도문제는 일본과의 영토 분쟁이 과열될
① 한국은 1430년부터 약 300년간 공도정책을 시행하여
때만 관심을 가졌다가 열이 식으면 잊어버려도 되는 쉬운
내버려두었고 이 때 일본이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주제가 아닙니다. 또한, 독도를 ‘그냥 예전부터 한국의 땅
독점하였다.
이었으니까~’라는 이유만으로는 국제사회에 독도가 한국
→ 공도 정책이라는 것 자체가 영유권의 표시이며, 한
의 영토임을 충분히 알릴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현재
국에서는 변방지역에 흔히 사용하던 방법이었습니다.
와 같이 적은 관심으로 전 세계에게 독도는 한국의 땅이라
또한 공도 정책 시행 중에도 정기적으로 관직자를 파견
고는 설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했다는 점에서 독도를 방치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
따라서 전 국민이 독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다.
독도의 역사에 대해 숙지하고 있어야 우리나라를 넘어서
다른 나라에도 한국의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
② 1905년 정식 영토편입조처로 원시적 법률적 원인을
습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여러분도 몇 십 년 후 ‘독도를 지
확정적 법률적 원인으로 대체하였다.
킨 사람’으로 역사에 남을 수도 있습니다. 한 번 해보지 않
→ 일본은 1905년 시마네현 고시로 독도에 대한 영유
으시렵니까? ■
의사를 밝힌 것을 실정 국제법이 요청하는 법률적 원인
으로 대체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국제법은 고
유의 영토를 국제법의 변천에 따라 계속 확인하도록 요
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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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間島)
글 | 이제인

중 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한 뒤 한국인들의 북방 영토 의


식이나 간도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그러
후 혼란기, 한국전쟁, 남북분단과 같은 혼란한 사회를 거치면
서, 의의를 제기할 만한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현재에까지 암
나 아직도 대다수의 국민들이 간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고 묵적으로 그 효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또한 간도협약이 무효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간혹 간도를 섬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 화 된다고 해서 간도가 곧바로 한국의 영토가 되는 것은 아닙
도 있는데, 간도는 사실 섬이 아니라 두만강, 압록강 이북 지 니다. 간도협약 이전의 상태에서 한중 간에 영유권을 새로 확
역을 일컫는 지명입니다. 일반적으로 한민족이 서간도보다 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북간도에 집중적으로 이주하여 살기 시작하면서 북간도 (동
간도) 를 그냥 간도라 부르게 되었으며, 압록강 이북 지역은 2. 간도를 되찾는 이유
서간도라 부르고 있습니다. 1) 간도는 민족, 건국의 발상지입니다.
간도지역의 백두산, 송화강, 흑룡강 일대는 애초 우리 민족
1. 간도 분쟁의 성격 건국의 발상지로서 그 중요성이 매우 큰 곳입니다. 특히 고
원래 간도지역은 조선과 청나라가 맺은 강도회맹에 의해 출 구려의 옛 도읍지가 서간도지역에 있으며 발해 옛 도읍지
입이 금지된 봉금지역으로 양국이 공동 관리하는, 무주지(無 는 북간도지역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이루어진
主地), 즉 주인이 없는 땅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간도지방 반만년의 역사 중 한족의 지배기간은 5백년 정도에 불가하
은 조선과 중국 사이에 오랫동안 소속이 분명하지 않은 채 방 지만, 우리 민족이 3,352년을 지배하였습니다.
치되었습니다. 또한, 이 때는 아직 국경선이 확정되지 않고 지 2) 옛날부터 역사적, 문화적, 경제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역이 국경의 개념을 대신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무주지 또는 대한민국의 영토입니다.
봉금지대 가 국경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간도지역은 우리 민족의 발원지로서 수천 년간 점유해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던 1712년(조선 숙종 38년), 중국은 던 곳이며, 근대 조선과 청나라가 봉금지대를 설정하여 무
조선과의 국경을 명확히 할 필요를 느끼고 오라(길림)총관 목 인지대인 상태에서도 우리 민족이 개간하였습니다. 간도가
극동을 파견하여 조선과 국경을 확정하도록 했는데, 이때 세 조선의 영토임은 후에 청나라에서 봉금지대의 개념이 사라
운 비석이 바로 백두산정계비입니다. 청과 조선의 경계는 서 지면서 기정사실화 되었습니다.
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으로 한다는 내용입니
다. 그러나 현재는 토문이라는 지명이 더 이상 쓰이지 않기 3. 간도가 우리땅인 이유
때문에, 동쪽의 경계인 토문이 어느 강이냐를 놓고 한국과 1)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표시한 여러 지도들이 간도가
중국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 측에서는 토문 우리땅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강이 송화강 상류를 가리킨다고 해석하지만, 중국 측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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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 지도 제작자 레지는 “봉황성의 동방에는 조선국


토문강이 현재의 두만강이라고 주장합니다. 의 국경이 있다”고 서술합니다. ‘조선정계비구역약도’와 ‘백
우리나라의 외교권이 빼앗기기 직전까지, 조 청 양국은 끊 두산 정계비도’ ‘로마 교황청의 조선말의 조선지도’등 당시
임없이 국경획정 회담을 했지만 청의 무리한 요구로 끝내 결 의 수많은 지도들은 동간도를 토문강 동쪽지역으로 표시
렬되고 말았습니다. 후에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일본이 하고 있으며, 압록강 북쪽의 봉황성 일대에서 두만강 위쪽
1909년 청과 간도협약을 맺음으로써 조선과 청의 국경은 두 의 연길로 이어지는 구격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런 자료
만강과 압록강 경계선으로 확정 지어졌습니다. 들로 살펴볼 때 적어도 1909년 간도협약 이전까지는 이와
그러나 간도 협약은 원천적으로 무효입니다. 국제법상 강제 같은 국경선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 주권을 침탈한 국가가 맺은 조약은 아무런 효력을 발생하
2) 우리가 간도를 청나라보다 먼저 개간했습니다.
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1952년 중일간 평화조약에서 ‘중
간도지역은 조선과 청나라가 맺은 강도회맹에 의해 출입이
일 양국은 1941년 12월 이전에 체결한 모든 조약 협약 및 협
금지된 봉금지역으로 양국이 공동 관리하는 무주지였습니
정을 무효로 한다’고 명시했기 때문에 1941년 이전인1909년
다. 청나라가 봉금 지역을 설정하였다 하더라도 자국민의
에 체결한 간도협약은 역시 무효일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동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주인이 없다고 보여지는 것입니
‘100년 시효설’ 즉, 국제 사법 재판소에 간도 협약에 대한 이
다. 무주지는 국제법적으로 선점하여 개간하는 쪽이 영유
의를 제기할 수 있는 시한이 2009년 8월까지라는 주장에 대
권을 가지게 되는데 간도에 대한 우리의 개간은 무주지 선
해서는 “국제법으로 정해진 내용은 아니며 확실한 증거가 있
점이론에 의한 영토획득의 경우로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으면 100년이 넘어도 영토 반환 요구를 할 수 있다”고 합니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
법적으로 명백히 무효임에도 불구하고, 간도 협약은 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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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간도되찾기운동본부 간도는 누구의 땅인가(이성환 저)
간도에서 대마도까지(임채정외 저) 네이버 지식in

3) 조선이 간도에 대한 실질적인 행정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 이 같은 문제 때문에 국내전문가들은 변경문제 연구에 관
니다. 해서는 정부가 중심이 되어 연구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
조선은 1903년에 북간도를 함경도에, 1909년에 서간도를 고 있습니다. 국익과 직결되는 장기적인 전략을 세워야 하는
평안북도에 각각 행정적으로 편입시켰습니다. 이후 국가는 문제이니만큼 기획력을 갖춘 구심기관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
이 곳의 거주민에게 세금을 징수하여 행적과 군인훈련비 니다.
로 충당했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조선의 행정력이 간도에
도 똑같이 미치고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5.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가 간도문제를 직접 거론하
4. 동북동정과 간도영유권문제 고 나서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미래에 간도문제를 다시 협상
할 때도 한국이 간도 영유권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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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은 중국 동북지방의 역사 지리 민족 문제 등을 연
구하는 국가적 연구사업으로, 현재 국내에는 동북공정이 고 은 중요한 발판이 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영토문제를 공
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하려는 시도로 대부분 알려져 있습 식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경우, 현실적으로는 문제의 땅을 점
니다. 유한 나라에 우선권이 돌아간다는 것이 국제 사회의 통념입
니다. 일본의 경우 독도 문제를 언급하는 공문서를 거의 매년
그러나 많은 국내 전문가들은 동북공정의 목적이 간도 영
한국에 보내고 있는 것도 위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권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남북 통일이 되기 전에 고
정부는 국제사회에 간도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함과 동시에
구려사를 중국사에 귀속시킴으로써 소수민족의 분리를 막고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간도지역의 영유권을 확보하는 것이 동북공정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더 나아가, 북한 체제가 붕괴될 경우 북한 영 또한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는 재중동
토의 소유권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조심스럽 포에게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국가간의 영유권 분쟁 시
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현지 주민의 의사가 중요한 결정변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
다. 그런데 현재 조선족 자치주의 조선족 인구는 전체 주민의
경인교육대 강석화 교수는 “굉장히 많은 돈을 들여서 자국
40%선(2004년 추정)으로 떨어지는 등 앞으로 10년 내에 조
학자들에게 공부를 시키는 것이 동북공정의 힘”이라며 “결
선족 자치구 자체가 소멸될 수도 있는 위기상황입니다. 따라
국 영토분쟁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연구 축적이 더 되어
서 간도에 대한 영유권 확보에 있어서 중국동포의 와해를 막
있는가”라고 말했습니다.
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사업은 대단히 시급하고 중요한 과
강 교수는 “국내에도 간도 협약의 부당성이나 연고권에 관
제입니다. 그러므로 학계에서는 간도의 역사에 대한 치밀한
한 연구는 상당히 진행돼 있으나 국제 사례 연구나 실제 영토
연구를, 국민들은 간도에 대해 뜨거운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
분쟁이 일어났을 경우에 대비한 대응 전략에 대한 연구가 부
요합니다. ■
족하다”라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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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東
북北
공工
정程
글 | 김명선
Historical Fallacy Correcting Organization

여 러분은 ‘역사왜곡’이라는 단어를 들으시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세계적인 이슈화가 되었던 독도 분쟁, 거짓을 써놓고
도 당당히 국정교과서로 인정하는 일본의 역사왜곡. 역사는 과거의 일이건만 그것을 지키고 고치려는 노력은 현재에
도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에 다양한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국을 제멋대로 재단하려는 노력을 하는 국가
는 일본만이 아니라는 것, 알고 계시죠? 일본에 버금가는 스케일로 중국도 열심히 역사를 마음대로 주물렀고, 그 연구의 성
과물이 동북공정이랍니다.

정식 명칭은 동북변강의 역사와 현상계열 연구공정(東北邊疆의 歷史와 現狀系列 硏究工程)입니다. 동북공정이란 동북 변


강의 역사와 그에 따라 파생되는 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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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북공정의 내용과 추진 실태,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므로, 이 상황들을 미연에 방지하고
동북지역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 프로젝트를 발주한 것입니
그리고 우리의 오해 다. 둘째, 남북통일 등 한반도 정세변화의 영향을 연구하는

(1) 동북공정의 출현 배경 것입니다. 중국은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만 만일 한반도


가 통일될 경우 민주 자본주의 국가와 서로 마주보아야 하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동북공정은 다른 역사공정의 연 는 상황에 놓입니다. 이때 국민들에게 사상의 혼란이나 급격
장선상입니다. 먼저 중국이 동북공정 이전에 실시했던 공정 한 민주화 바람이 불 수 있고, 강력한 경제력을 가진 통일 대
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국으로 인해 경제적 측면에서도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할 수
있겠지요. 설령 통일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핵을 개발하는
① 하은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
북한의 동세와 남한의 대응을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
중국의 9.5, 즉 9차 5개년 계획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제
다. 셋째, 국가적 안정이 그 목적입니다. 이것은 첫 번째 목
개발 5개년 계획 같은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각 분야의
적과 연계되는 것인데요, 조선족 이탈뿐만이 아니라 이로 인
전문가 200명을 모아 ‘하상주’에 대한 존속 연대를 확립하
해 다른 소수민족들이 각각 독립 또는 분리를 주장할 수 있
려는 공정이었지요. 중국 최초의 나라는 하나라라고 말하지
으므로 아예 소수민족 문제의 돌출과 확대를 차단하려는 생
만, 실제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진나라부터지요. 그런데
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대공정을 통해 중국은 하나라가 기원전 2070년에도 존재
했다는 연구결과를 얻었습니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중국고
(3) 동북공정의 주요 내용
대문명탐원공정, 줄여서 탐원공정을 시작했죠.
다들 아시다시피 동북공정의 주요 목적 중의 하나는 조선족
② 중국고대문명탐원공정(中國古代文明探原工程)
의 이탈을 막는 것이므로, 동북공정의 내용에는 조선족을 한
탐원공정은 글자 그대로 중국 고대 문명의 기원을 탐구한 국사가 아닌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그들의 만주관이 드러
다는 취지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이 황하문명이 있음에도
나 있습니다. 설명하자면 고구려는 중국에 속했고 지금 한반
굳이 돈을 들여 다시 탐구하는 이유는, 더 앞선 문명을 발굴
도에 사는 우리와는 무관하다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고구려
해내었기 때문이죠. 1973년에 장강 하류에서 하모도 유적이
의 유적, 유물과 문화는 중국의 것이라는 주장이죠.
발굴됨에 따라 문명의 시작을 기원 전 5000년까지 올립니
다. 그런데 80년대 후반, 요하 일대에서 하모도보다도 1000 ◎ 중국(동북공정)의 고구려 인식
년 이상 앞서있는 신석기 문명이 발견됨에 따라 요하 지방을
고구려를 서한(西漢) 현토군 고구려현 경내의 변강 민족
중화문명의 시작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요하 지
방이 그들이 생각하는 중국의 범위를 벗어났다는데 있습니 이 수립한 지방정권으로 규정합니다. 따라서 고구려는 중국
다. 예맥족이 거주하는 북적의 땅이었죠. 그런데 이 예맥족 변강지구의 소수민족 정권으로 중화민족의 역사 범주에 속
은 한민족의 조상이라서, 요하지역을 예맥족의 문화권으로 하는 것이죠. 그들이 주장하는 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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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하면 발굴 자료를 고스란히 한국으로 넘겨주는 꼴이 되 째, 고구려 초기에 서한이 직접 관할했기 때문입니다. 고구
는 거겠죠. 그래서 황제의 영역을 ‘오랑캐’의 땅까지 포함하 려의 활동 범위는 한사군의 관할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는 동북 만주지역까지로 확대합니다. 그리고 역사연구의 과 장수왕의 평양 천도 이후에도 사실상 한사군의 관할 범위에
제가 동북공정으로 계승되는 형태입니다. 머물렀습니다. 또한 중국 역대 왕조와 신속관계(臣屬關係)를
정리하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동북공정은 고구려 역사 유지했으며, ‘중국’ 밖에 존재했던 적이 없습니다. 둘째, 고
왜곡이다’라는 명제는 오류 그 자체입니다. 그들이 정성 들 구려의 멸망 후 대다수의 유민이 한족으로 흡수되었습니다.
여 진행하는 탐원공정은 ‘한민족의 시조’가 중국인이라는 전 국민 70여만 명 중 당 태종과 고종 때 약 30만 명이 중원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이니까요. 우리가 잘 대처하지 못하 으로 이주해 한족에 융합, 흡수되었습니다. 나머지 40만 명
면, 티베트이나 위구르와 같이 중국사에 편입 당하는 결론을 중 약 10만 명은 신라에, 약 10만 이상은 말갈의 발해에 망
맞게 될 수도 있습니다. 명하여 발해의 구성원이 되었다가 금대에 여진족에 흡수되
었고 그 후 대부분은 한족에, 그리고 나머지 1만 명은 돌궐
(2) 동북공정의 추진 목적과 주요 연구과제 족에 융합, 흡수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동북공정 프로젝트는 대체로 역사에 비중을 두되 한국과
이 주장이 큰 문제점을 가진 이유는, 중국이 주장하는 ‘일
의 관계로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사양용론’을 벗어나는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중국은 영
동북공정의 목적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파악할 수 있습니 토에 근거한 역사관을 주장한다고 했죠? 원래 중국의 기본
다. 첫째, 동북지역을 중국사로 편입시켜 조선족 사회를 안
주장은 ‘평양성 천도 이전의 고구려사는 중국사이다’였습니
정시키는 것입니다. 한국의 역사논리에 따르면 조선족 사회
다. 그런데 지금 중국의 주장은 ‘알고보니 평양천도 이후
는 민족 정체성 혼란을 겪을 수 있고 중국으로부터 이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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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도 중국사였네’입니다. 일각에서는 고구려를 계 형벌 불소급의 원칙이라는 법률 용어가 있습니다. 쉽게 말
승했다고 주장하는 북한이 혹여 붕괴할 경우, 개입하기 위한 해 어떤 죄를 처벌하는 법이 제정되기 전 죄를 지은 사람은
역사적 명분을 세우는 것이 아닌가라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 그 죄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뜻인데요, 마찬가지로
습니다. 역사도 소급적용이 필요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민족,
영토에 대한 개념과 현재의 우리가 가지는 개념은 분명히 다
◎ 고구려와 한반도의 계승관계 부정
릅니다. 더군다나 민족의 경우 그 개념이 생긴 지 한 세기가
고구려 민족은 한반도의 한민족과 무관하다는 것이 그들 겨우 지난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근대 이후에 형성된 영토,
의 주장입니다. 정권 수립 자체가 부여족 일부와 서한 고구 국경 개념을 전근대까지 소급하여 적용하고, 전근대적 화이
려현 기타 민족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민족 관(華夷觀)에 입각하여 역사를 해석한다는 것은 현대판 중화
과 무관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고구려 민족의 원류는 한민족 주의라고 밖에 해석되지 않습니다. 고대 민족의 역사 문화유
(韓民族)이 아닌 부여족 일파, 서한 고구려현의 변강민족이 산에 마저도 힘의 논리를 강조하는 중국판 문화패권주의는
기반이 되어 옥저, 소수맥 등 예맥족, 한족(漢族), 선비족, 숙 반드시 고쳐야 할 그들의 오류입니다.
신인이라는 것이죠. 또한 고구려와 한반도의 계승관계 역시
◎ 고구려의 ‘고주몽’은 한족이다?
부정합니다. 민족이 다를 뿐만 아니라 문화도 계승하지 않았
다는 주장인데요, 현재의 한민족은 고려, 조선족과 역사적 주몽의 성이 고씨인데, 기원전 10세기에 산동지역의 ‘고의
연속성, 계승성, 상관성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이 뿐만 아니 족’, 기원전 2,500년 전의 전설적인 인물 ‘고양씨’를 고주몽
라 고려의 건국군주인 왕건마저도 서한 낙랑군 한족(漢族) 과 연결시켜 주몽은 한족이라는 주장의 반박입니다. 여러분,
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반만년의 한국 주몽이 고씨입니까? 주몽의 성은 원래 해(解)씨입니다. 해,
사는 순식간에 고구려 멸망 이후의 1300여 년으로 줄어들게 태양의 고유어입니다. 해모수도 있지 않습니까. 주몽은 성이
됩니다. 해씨이므로, 전혀 근거 없는 주장입니다.

◎ 고구려인의 유적, 유물은 중국의 문물과 고적이다. ◎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 그 근거로 고구려는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다.
고구려 민족은 중국 땅에서 활동했고 민족의 원류도 한민
이 주장의 반박은 고등학교 국사책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
족(韓民族)이 아니며, 현재의 조선족과는 역사적 연속성마
니다. 사료에 기록되길, 고구려에 새 왕이 뽑히면 중국에 조
저 존재하지 않으므로,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은 온전히 중국
공을 바치고 왕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중국의 주장은
의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조공을 바쳤으니 제후국이고, 조공을 받았으니 종주국이라
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대 역사학에서는, 조공을 단순한 주
2. 동북공정의 비판과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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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관계의 표식이라고 해석하지 않습니다. 일종의 공무역으


◎ 중국적 민족관의 문제점 로 보는 입장이죠. 특산물로 이루어진 조공을 바치면 역시
민족이라는 개념은 언제 처음 생겼을까요? 진시황이 중국 그 나라의 특산물로 이루어진 하사품을 받고, 조공 사신 외
을 통일할 때 ‘We are the one’을 불렀을까요? 춘추전국시 에도 수많은 상인이 동행하여 무역이 이루어집니다. 조공 역
대에 사람들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느꼈을까요? 중국이 ‘민 시 한 나라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관계가 한,
족’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은 근대 이후입니다. 사실 민족 중, 일, 북방 민족 사이에 보편화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조
주의는 외세의 침략을 받을 때 더욱 강하게 표출되는 경향이 공은 종속관계의 인정이 아닌, 하나의 외교적 수단이라고 보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침략전쟁 이후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는 것이 타당한 해석입니다.
민족의식이 형성되었고, 이것이 ‘민족’주의의 시초입니다.
◎ 계승성 문제
이후 19세기에 아시아 침략을 강행한 유럽과 미국에 맞서
고구려 민족의 원류가 한민족이 아니라서 고구려에서 고
아시아에서는 민족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중국이 민족 개
려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논리는 그대로 중국 측에 돌려줄 수
념을 도입한 것은 이 무렵입니다. 그렇다면 근대 이후에 출
있는 내용입니다. 거대한 중국 본토에 오직 한족만이 나라를
현한 근대적 영토관념, 민족관념을 전제로 하여 중국의 현재
세웠던가요? 송나라는 한족, 요나라는 거란족, 금나라는 여
영토 범위에 속한 모든 시대, 모든 민족을 중국사, 중국 민족
진족, 원나라는 몽골족, 명나라는 다시 한족, 청나라는 만주
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이는 현재적 편의의 역사관입니다. 역
족이 세웠습니다. 그렇다면 중국 역사는 단절의 역사인 셈이
사(Historiography)에 의한 역사(History)의 재구성이죠. 현
죠.
재에 따라 역사가 바뀔 수 있다면 얼마나 편리하겠습니까?
이는 역사가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을 무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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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사에 기록된 고구려사 동북공정은 종료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 왜곡은
현재진행형입니다. 동북공정도 끝난 마당에 그들이 무엇을
고구려사가 처음 기록된 중국의 역사책은 『삼국지 위지동
더 하겠느냐고요? 여러분, 동북공정은 이론일 뿐입니다. 그
이전』입니다. 중국인들은 스스로의 역사를 ‘서’라던가 ‘본
저 구조를 잡은 것에 불과해요. 중화주의에 입각한 민족관과
기’라는 명칭을 붙여 입전합니다. 반면 다른 나라의 역사는
역사관, 국가관이라는 지반 위에, 문명탐원공정과 하은주단
‘열전’에 집어넣습니다. 따라서 동이‘전’은 중국인들 스스로
대공정이라는 골조를 잡고 동북공정으로 건물의 뼈대를 세
가 고구려사가 외국사라는 것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운 겁니다. 이제 동북공정이라는 이론으로 무장한 그들은 사
◎ 제천기록 람들에게 널리 알리겠죠. 만주는 우리 땅이다, 고구려는 우
리역사다, 고구려의 유물은 중국의 것이다, 왜냐하면 단군
국사시간에 배웠듯이 고구려는 제천행사를 지냈습니다.
이 한족이었으니까, 라고요. 친애하는 여러분, 그들만의 논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이름까지 잘 전해지고 있지요.
리에, 그들의 이익만을 위한 이론에 우리가 속아 넘어가서는
그런데 중국에서, 제천행사를 지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안 됩니다. 고구려는 우리의 역사이고, 단군은 우리의 조상
천자입니다. 아무리 땅이 많은 제후라도 하늘의 뜻을 받은
이고, 이 모두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뿌리입니다. 혹여 누가
천자가 아닌 이상 지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만일 고구려가
동북공정을 언급하거든 우리는 논리 정연하게 반박할 수 있
중국의 지방정권이고, 제후국이었다면 제천행사를 지낼 수
는 능력을 갖추어 오히려 그를 설득시켜야 합니다. 이 글은
있었겠습니까?
그러한 목적에서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왜 중국이 동북공정
덧붙이자면, 제천행사 말고도 온돌 문화는 한반도에만 전 이라는 주장을 했는지, 그 주장은 무엇인지, 그리고 무슨 오
해지는 고유한 문화입니다. 류가 있는지를 최대한 쉽고도 간결하게 설명하려 노력했습
니다.
◎ 제사
혹자는 말합니다. ‘중국 수출로 우리가 이만큼 먹고 사는
서원이란 학문에 큰 기여를 한 학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그
건데, 그까짓 역사쯤 그냥 줘버리자’구요. 하나를 인정하는
뜻을 이어받아 공부하는 곳인데요, 붕당의 정체성을 확립하
순간, 다른 것에 대한 포기 역시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
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처럼 제사를 지낸다는 의
고 계실 겁니다. 고구려사 하나를 뺏기면 한국사 전체는 더
미는 후손의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주몽
쉽게 빼앗길 테지요. 혹시 북한이 붕괴할 경우, 중국이 북한
이 고구려를 세운 이후, 고구려에는 주몽사가 생겼고 백제에
지역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
도 동명묘가 만들어졌습니다. 동명사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니까?
조선시대까지 이어집니다. 반면, 중국 측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죠. 한족은 주몽을 자신의 뿌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 동북공정에 대한 관심은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관심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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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고구려사가 한국사임을 증명하는 다. 한국 내에서의 관심도 중요하지만, 세계 곳곳에 잘못 기
재되어 있는 한국사들을 고치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가장 결정적인 근거가 됩니다.
훗날 중국의 교과서에도 고구려가 당당히 우리의 조상으
▼ 강서대묘 벽화 현무도 ▶ 장군총(중국 지린성 지안현)
로 표기되어 있길 바라며, 이만 글을 마칩니다. ■

3. 글을 마치며…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인 네이버 백과사전 ‘위구르족’, ‘서북공정’. ‘서남공정’. ‘위구르 문자’
연합뉴스 ‘중국 역사왜곡, 서남 서북에 이어 동북공정까지’ 우실하 교수 인터뷰 자료 ‘월간개벽’ 200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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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타
글 | 이도언
이미지 제공 | 난타 공식 홈페이지

하 얀 옷을 입은 주방장들이 나와서 신나게 박자를 맞


추기 시작합니다. 요리를 할 때만 사용하던 칼과 도
니 또 다른 무대 위의 소리가 필요했고, 한국의 전통적이
고, 독창적인 사물놀이의 리듬인 사물놀이를 떠올리게 되
마 등의 주방 기구들이 흥겨운 박자를 만들어내는 악기가 되 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든지 자신들의 독특한 리듬을 가
어 한국 특유의 박자를 만들어냅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저절 지고 있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사물놀이가 독특한 소리
로 흥이 나고, 어깨가 들썩거립니다. 일을 사랑하며, 즐거워하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는 요리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도 행복해지기 시작합니 Q. 난타를 본 외국인들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다. - 지금까지 난타는 30개 국의 250여개 도시에서 공연을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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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난타를 제작하신 송승환 PMC Production 대표님 고, 매 도시마다 앙코르 요청을 받는 등 뜨거운 관심을 받
을 인터뷰 해보았습니다. 한국의 문화와 난타의 세계로 여러 고 있습니다.
분을 초대합니다. 초연에서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나가기 전까지 계속
작품을 수정했습니다. 브로드웨이 연출자와 함께 작품도
Q. 난타의 역사를 간단하게 설명해주세요. 수정했습니다. 한국적인 독특함만을 가지고 공연을 구성한
- 난타는 1997년 10월 서울 호암 아트홀에서 초연을 했고, 2 다면, 독특함이 매력이 될 수는 있지만 글로벌한 보편성이
년 뒤인 1999년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에딘버러 프린지 페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스티벌 (Edinburgh Fringe Festival)에 참가하여 외국 프 저희는 구성에서 보편성을 찾았습니다. 전 세계 어디나 주
로모터나 극장 관계자들에게 알려지면서 해외공연을 본격 방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주방을 배경으로 하였고, 모든 요
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리사들에게서 보이는 하얀 요리사 옷이 배우들의 옷이 되
Q. 난타를 제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었습니다. 한국적인 박자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공연이지
- 난타를 만들게 된 것은 우리 공연을 가지고 해외에 진출해 만, 이러한 보편성을 얻음으로 전 세계 어떤 사람이 보더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 세계에 한국 도 똑 같은 장면에서 웃고, 박수가 나오며, 함께 즐길 수가
을 알리고 싶었고, 문화 수입국에서 수출국이 되었으면 하 있게 된 것입니다.
는 마음에서 처음 만들게 되었지요. Q. 어떤 한국의 문화적인 부분이 잘못 알려져 있나요?
Q. 난타를 만드신 과정을 설명해주세요. - 우선, Korea하면 떠오르는 선택과 집중된 이미지가 없다
- 기획하는데 약 1년, 연습하는데 6개월 정도가 걸렸습니다. 는 것이 가장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파리를 생
세계로 수출할 생각을 처음부터 하고 기획을 하다 보니 가 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고, 일본을 생각했을 때도 떠
장 큰 문제는 언어였습니다. 그래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호주의 경우에도 이미지의 선
극을 만들게 된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다 택과 집중을 통해 호주를 생각하면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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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언어 없이 무대를 구성하려 와 풀밭 위의 캥거루가 떠오르게 되는데, 아직도 외국인들
에게 있어 한국의 이미지는 남북분단, 전쟁에 국한되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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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멋지고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는 굉 로 한국을 알려오지 않았던 것이 서양 사람들이 한국을 제
장히 안타까운 사실이지요. 대로 접해보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다행인 것은 최근 아시아 시장에서는 한류로 인해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아직은 완성도가 낮은 문화산업
서 좋은 이미지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점점 나아지고 있기에 이
방콕 스타디움에서 있었던 K-pop 콘서트 3만석 티켓이 3 문제는 곧 해결이 될 것이라 기대해봅니다.
시간만에 매진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K-Pop을 즐겨 듣 Q. 혹시 한국을 알리기 위한 또 다른 아이디어가 있나요?
게 되었고, 여러 한국 드라마들은 한국의 좋은 이미지를 생 - 현재 안동하회탈을 모티프로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고 있습
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아직 미국, 유럽 쪽은 약하 니다. 전 세계 어디든지 마스크 문화가 있지만, 조형적 아름
지만, 조금씩 우리의 문화를 알려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 청 다움, 표정이 살아있는 탈, 캐릭터가 분명한 탈 (할미탈, 각
신호라 봐도 좋을 것입니다. 시탈, 총각탈 등이 있습니다) 은 우리가 유일합니다. 그래서
Q. 그렇다면 문화적인 부분에 있어서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 탈을 가지고 우리의 문화를 알리려 합니다. 올 9월말 안동
은 어떤 것일까요? 에서 공연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 우리는 한국의 전통문화만을 알려주고 싶어하는 강박관 Q. 한국을 알리는 선구자의 역할을 한 난타가 나아갈 방향
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접했던 것은 영국의 을 살짝 귀띔해주세요.
전통 folk song이 아니라, 비틀즈, 퀸의 노래였습니다. 그렇 - 현재 매년 600만~700만 명 정도의 외국인들이 한국에 들
게 알기 시작한 영국의 문화는 조금씩 더 많이 알려지게된 어옵니다. 그리고 그 중 50만~60만 정도의 외국인들이 난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도 현재 잘 하고 있는 대중문화, 음 타를 봅니다. 하지만 저는 100만 명 이상의 외국인들이 난
악, 영화,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것이 더 좋 타를 봤으면 좋겠습니다. 난타를 보면서 한국 문화에 대해
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도 소개하지만, 대중문 서 알고, 그 옛날 농부들이 일하면서 노래를 해온 것처럼
화의 흐름에 대한 소통과 나눔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입 일과 놀이를 구분하지 않던 우리 선조들의 모습을 알아갔
니다. 그런 소통이 더 빠른 소통이 되지 않을까요? 으면 좋겠습니다.
Q. 그런데 왜 서양은 우리나라를 잘 모르는 것일까요? 그리고 외국에 난타 전용관을 세울 수 있다면 더 좋겠습니
- 우선은 교과서나 공식적인 책에 한국이 잘 소개되어 있지 다. ■

않습니다. 소개가 되어 있더라도 한국전쟁이 다입니다. 박


물관이나 도서관에 한국에 대한 소개 자료가 존재하지 않
는다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중국이나 일본처럼 정책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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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에 응해주신 송승환 대표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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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이미지 저작권 (c) 날공장

가장 유쾌한 풍자 탈춤 글 | 김명선

마지막은 불교계의 타락성 고발인데, 우리나라가 불교 문화


노승취발이춤
였기 때문에 이런 주제가 담겼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무
튼 탈춤이 가진 주제의식의 대부분이 사회를 고발하는 것입
니다. 탈을 써서 자신을 감추고 목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실
제 탈춤의 대사를 보면 중국 고사성어가 많이 사용되었는
데, 이는 출셋길은 막혀있는데 의식은 깨어있는 서자들이 많
이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Q. 현재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탈춤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탈춤은 전국적으로 열 세 개가 있
습니다. 전국적으로 각자 다른 특색을 가진 탈춤이 열 가지
가 넘으니, 우리나라는 탈춤이 매우 발달한 나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이북지방부터 시작해보면, 함경도의 북청사
자놀음, 황해도의 강령탈춤, 봉산탈춤, 은율탈춤이 있습니
다. 황해도는 예술의 고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탈춤이 발달했는데, 현재 남한에는 탈춤 세 개와 굿 하
나가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서울지방으로 내려오면
송파 산대놀이와 양주 별산대놀이가 있고, 강원도에 강릉
관노가면극이 있습니다. 영남지방이 또 춤의 고을인데, 특히
경상도가 그렇습니다. 안동의 하회별신굿탈놀이, 부산의 수
영야류, 동래야류, 고성오광대, 통영오광대, 가산오광대. 이
렇게 총 열 세 개입니다.전라도는 소리의 고장이라 창이 많

한 국인들의 의식을 가장 잘 설명하는 문구는 “웃음으로


눈물 닦기”라고 합니다. 한국인들은 불행과 슬픔, 괴로
이 발달했습니다. 바로 옆에 경상도가 있는데 경상도는 춤
이, 전라도는 소리가 발달했으니까 참 독특한 것입니다. 그
움에 직면했을 때, 그저 그 자리에 의연히 서서, 태산과도 같은 만큼 우리나라는 작은데도 그 속에서 고장 별로 특색이 뚜
악몽도 웃음으로 맞서 이겨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흘린 눈물 렷합니다.
을 너무 웃어서 나오는 것인 양 닦아냅니다. 우리에게는 한국
Q. 선생님께서 하시는 강령탈춤에 대해 알려주세요.
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풍자와 해학의 정서가 있습니다. 그리
- 강령탈춤은 전문가적 요소가 많은 탈춤입니다. 영남지방 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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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러한 한국식 풍자의 집합체는 오늘의 주제, 탈춤입니다.


춤이 주로 춤 위주인데 반해서 강령탈춤은 뮤지컬처럼 춤,
중요무형문화재 34호로 지정된 강령탈춤의 무형문화재 준
노래, 대사가 골고루 녹아있습니다. 강령탈춤은 정 3품 이상
보유자 백은실 선생님을 만나, 탈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
에게 주는 옥관자를 수여 받을 만큼 뛰어난 예인이었던 김
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들었습니다.
금옥이라는 기생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정3품
이상에게 주는 옥관자를 수여 받을 정도로 뛰어난 예인이었
Q. 먼저, 탈춤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는데, 해주 감영이 일제합병으로 폐쇄되자, 김금옥은 고향
- 탈춤의 역사는 200년 정도 되었습니다. 탈 자체는 선사시대
인 강령으로 돌아가고, 이때 그녀를 따르던 예인들이 함께
에도 발견되었지만, 이후에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내
강령으로 가서 탈춤을 중흥시켰고, 그것이 강령탈춤이 되었
려오면서 중국과 일본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산대도감이라는 관청까지 두어서 산대놀이를
강령탈춤은 예인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예술성이 짙어서 그
장려했다고 하는데, 인조 때 산대도감이 폐지되면서 연희자
만큼 어렵기도 한데, 추는 보람이 큽니다.
들이 전국 각지로 흘러 들어가 탈춤을 전승해왔습니다.
탈춤은 지방색을 짙게 반영하는데, 강령탈춤은 대표적인 해
탈춤이 만들어진 계기를 알려면 먼저 모든 탈춤에서 공통적
안지방의 탈춤입니다. 그래서 추운 지방이라도 해안이니까
으로 나타나는 탈춤의 주제의식 네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동작이 크고 활발하다가도 섬세한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
첫 번째는 벽사의 의식무. 흔히 귀신 쫓는다고 표현하기도
Q. 탈춤 공연 하실 때, 황해도 지방의 말투를 쓰시나요?
합니다. 두 번째는 양반계급의 풍자입니다. 양반 같지도 않
- 당연합니다. 문화재를 전승한다는 것은 지방색을 살린다는
은 양반들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일부 처첩간의
것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투나 사투리까지 모두
갈등을 표현합니다. 미얄과장에서 보면 미얄할미가 남편이
완벽하게 해야 합니다.
처첩을 들여서 쫓겨나는 장면이 그 예라고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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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현재 전승되는 탈춤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Q. 공연은 많이 다니세요?
- 6.25때 월남하신 오성환 할아버지가 강령탈춤을 복원하 - 많이 하는 편입니다. 얼마 전에 국립국악원에서 초록음악
는데 많은 기여를 하셨습니다. 피난을 오면서 말뚝이 옷만 회를 했고, 이번 8월 14일에는 춘천 인형극 축제에도 나갑
챙겨올 정도로 애착을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강령탈 니다. 안동 탈춤 페스티벌에는 매년 나가고요. 보통 지역축
춤의 근거지인 북한에서는 강령탈춤의 명맥이 끊겼습니다. 제나 국가기관, 예를 들어 국립 국악원 같은 곳에서 많이
공산주의를 채택하면서 아무래도 먹고 사는 게 힘들어졌 부릅니다. 무형문화 엑스포 같은 곳에서도 공연합니다.
고 사상문제도 있기 때문입니다. 6~7년 전에 문화재청에 Q. 국가에서 관심을 많이 가져주는 것 같은데요.
서 인간문화재랑 후보를 공짜로 금강산 구경 시켜준 적이 -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기능 보유자들에게 지원은
있었습니다. 그때 안내한 이북사람의 고향이 강령이었는데 가지만, 전승 활동비가 사실 많이 부족한 것이 큰 문제입니
옛날에 강령탈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전승은 다. 돈뿐만 아니라 대상도 너무 좁습니다. 인간문화재와 전
안 되고 끊겼다고 했습니다. 전승되었다던 동영상을 보니 수교육조교까지만 혜택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수생
그것도 영 아니었습니다. 딱 열 명에게 교통비만이라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는 말도
Q. 남한은 어떻게 보존을 했나요? 우리도 한국전쟁 끝나고 합니다. 경제적 보조가 되지 않다 보니 확실히 이수자 급부
꽤 어려웠을 텐데요. 터는 사명감이 떨어지는 편이기도 합니다.
- 이두연씨와 박정희 대통령의 공로가 컸어요. 이두연씨는 이수생들은 대게 평일에는 다들 일하고, 주말에만 잠깐 나
90세가 다 돼가는 서울대 노학자신데, 그 분께서 박대통령 와서 배웁니다. 사실 지금 지원금으로는 문화재 후보조차
에게 말을 올려서, 돈이 없던 그 시절에도 탈춤보존을 나라 먹고 살기 힘들어요.
에서 밀어줬습니다. 그래서 판소리 탈춤 다 복원된 거니까,
두 분이 아니었으면 다 없어졌을 것입니다. 외국 물건이 막 Q. 그럼 탈춤을 어떻게 지켜내야 할까요?
들어오던 시절에 정말로 다행스러운 것이었습니다. - 그게 우리에게도 숙제입니다.
Q. 처음 시작하시게 된 계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우선, 언론이 너무 서양 문화에만 치우쳐 방송한다는 점이
- 일단 제 소개를 정식으로 하면, 저는 중요무형문화재 전수 큰 문제입니다. 일주일 동안 TV국악 관련 프로그램은 딱
교육 조교입니다. 쉬운 말로는 인간문화재 후보, 또는 준 하나, 토요일 밤 12시의 국악한마당이 다입니다. 우리나라
보유자라고 합니다. 국가에서 주요무형문화재를 지정하면, 의 문화정책이 잘못되어서 아이들은 국악을 접하기 전에
그 기능 보유자를 선정하게 되고 그 밑에 전수 교육 조교를 힙합이니 랩이니 하는 것들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
두게 되는데, 그게 저라는 소립니다. 니다. 미얄 할미 대사에도 나오는데, 사실 랩의 원조는 탈춤
현재 제 어머니가 인간 문화재이시다보니 자연스럽게 탈춤 이거든요. 하지만 다들 잘 모르죠. 즉, 가장 근본적인 해결
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환경이 만들었다고나 할까요. 방안은 우리 것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걸 고쳐야 탈춤이 살
Q. 그래도 재미있으니까 탈춤을 하시는 거겠죠? 수 있습니다.
- 예인들이 만들어 전문적이고 어려운 강령탈춤에서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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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은 역할은 할미역인데, 춤뿐만 아니라 노래도 참 전문적 감사합니다.
입니다. 이런 걸 그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만들었나 싶기까 중요무형문화재 제 34호 강령탈춤 전수교육조교 백은실 ■

지 할 정도입니다. 이런 건 정말로 후대까지 잘 보존돼야 한


미얄할미춤
다는 생각도 들고, 내가 잘 가꾸어서 지속시켜야겠다는 사
명감도 듭니다. 특히 내가 맡은 미얄할미 역은 다른 작품의
모티프로 많이 쓰이거든요.
Q. 한국인들에게 탈춤이란 무엇일까요?
- 표면적으로 탈춤은 흥미롭고 독특한 장르의 예술입니다.
그런데 이 예술을 파고들어 보면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의
식이 독창적이고 분명하다는 것이 눈길을 끕니다. 사회를
꿰뚫어 보고 그 안에 웃음을 담아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탈춤 속에는 한국인의 의식이 녹아있고, 그래서 우리에게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Q. 요즘에도 탈춤이 만들어지나요?
- 창작탈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만들어서
공연을 올리기도 합니다만, 안타까운 사실은 지원이 부족
해서 보존하기에 급급하다는 점입니다. 경제적, 시간적 여
유가 없어서 창작에만 매달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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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다섯 개 의

커버 사진 | 엄향용
진주알
글 | 최현진, 배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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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 랑스에는 베르사유 궁전이 있고 중국에는 자금성이 있다. 그
렇다면 대한민국에는? 대한민국에는 조선왕조의 5대궁이
있다. 독자적인 형태와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는 대한민국의 궁은 우
리를 숨쉬게 하고 대한민국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
조선의 정궐(正闕)인 경복궁,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인 창덕궁,
조선의 효(孝) 정신을 느낄 수 있는 창경궁, 대한제국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덕수궁, 뼈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경희궁. 알고 보면 더
자세히 느낄 수 있는 조선의 5대궁, 이제부터 이 궁들에 대해 이야
기 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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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근정전

김정호 | 수선전도

경희궁 숭정문

경복궁 있다. 근정전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무반이, 왼쪽에는 문반


이 서 있었는데 동쪽의 문반을 동반, 서쪽의 무반을 서반이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그 어떤 나라보다도 단단한 뿌리를 라 한 데서 양반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는 말도 있다.
가진 국가로 건설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새로운 나라
를 맞이하는 백성들이 새 국가의 지엄함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무언가를 갈구했었다. 그리하여 가장 먼저 짓게 된 것이
경희궁
1395년에 지어진 조선의 첫 궁궐, 경복궁이다. ‘큰 복을 빈다’ 경희궁은 조선 후기의 이궁으로, 광해군 때 짓기 시작하여
는 뜻을 지닌 경복궁은 많은 침략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조선 광해군 때 완성된 궁이었다. 경희궁이 들어서기 전 이곳에는
의 뿌리가 500년 이라는 시간 동안 더욱 더 단단해질 수 있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 있었는데, 이곳에 왕기가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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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도와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려 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 터를 몰수하고 왕궁을 지었다는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정궐이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해 소실되었다가 고종이 1867년에 중건하였다. 경복궁 안에 서궐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부르는 동
는 왕과 관리들의 정무시설, 왕족들의 생활 공간, 휴식을 위 궐이란 명칭과 대비되는 별칭이다.
한 후원 공간이 조성되었고,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 경희궁은 인조 때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
이 만든 건청궁까지 궁궐 안에 여러 작은 궁들이 모여있던 웅 금들이 이궁으로 사용한 곳이었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
장한 조선의 얼굴이었다. 반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전해진다. 경희궁에는 승정전을 비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첫 궁전이며 정궁이었기에 조선의 롯한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으나 흥선대원군이
첫 번째 왕 태조는 궁궐을 중건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고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희궁에 있던 건물의 상당수를 옮겨갔
전해진다. 왕권을 중요시하던 국가로서는 궁궐의 영건이 가 다고 한다.
장 중요한 일이었고 특히 경복궁은 국왕이 거처하며 모든 일 하지만 경희궁의 수난은 1910년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의
들을 관장하던 곳이었기에 더 중요했다고 할 수 있다. 경복궁 자녀들을 위한 경성중학교가 경희궁의 안에 들어서면서 지대
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타기 전까지 조선왕조 8명의 임금이 를 고르게 하지 위해서 인지 깎고 메우는 과정에서 지형이 많
즉위식을 올리고 용상에 앉았던 곳이었으며 나라의 중심이 이 변형되며 또다시 시작되었다. 또한 전각들이 조계종 등 여
었다. 러 다른 기관에 팔리게 되었고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지나쳐 들어가면 근정전을 볼 사당을 문으로 쓰려고 궁궐의 문을 떼어가기도 했었다. 심지
수 있는데 이 근정전은 경복궁의 공식적인 정치 공간이었다. 어 왕과 왕비의 침전 아래에는 지하 벙커까지 만들어 졌었다
임금의 즉위식과 대례 등 크고 작은 국가 행사가 치러졌던 곳 고 한다. 이렇게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경희궁은 현재 간
이며 외국 사신을 접대하기도 했던 곳이다. 근정전의 앞에는 신히 명맥만 유지한 채 제자리에 복구되지 못한 채 역사의 아
종 9품부터 정 1품까지 양쪽에 각각 12개의 품계석이 놓여져 픔을 감당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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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창경궁은 성종이 1483년에 할머니, 작은어머니, 그리고 어
머니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은
1418년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을 위해 마련한 궁이었
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영역을
형성하였지만 반대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해 주었다.

창경궁 또한 임진왜란의 화마(火魔)로 인해 모든 전각이


창덕궁
소실되고, 광해군 때 재건되었지만 또 다시 인조 때 일어난 이 창덕궁은 조선왕조의 이궁으로 1405년에 지은 조선 왕조
괄의 난과 순조 때 일어난 대화재로 인해 내전이 소실되었다. 의 이궁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며 이웃했던 창경
현재는 화재에서 살아남은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이 17세기 궁과 더불어 동궐이라고도 불렀다. 창덕궁은 임진왜란으로
의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인해 경복궁이 타버린 이후부터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전까지 조선의 정궁 역할을 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의 궁궐
창경궁은 건립 취지가 세 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만들어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었으며 현
진 만큼 경복궁과 창덕궁과 비교했을 때 더 아늑하고 독특한
재 가장 그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궁이다.
느낌을 준다. 당시 성종은 창덕궁이 점차 좁아지자 대비들이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창덕궁에 이웃해 창경궁을 건립했기 때 창덕궁은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될 만큼 그 아름다움과 역
문이다. 창경궁은 조선시대 다른 궁궐 전각들이 남향으로 지 사적 가치가 높다. 정궐인 경복궁의 주요 건물이 좌우대칭의
어진 것과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도 다른 궁과 일진선상으로 배열되어 있다면,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를
다른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창경궁은 왕족들이 주로 기 바탕으로 산자락을 따라 건물들을 골짜기에 안기도록 배치
거했기 때문에 다른 궁들에 비해 왕가에서 일어난 이야기가 하였다. 이는 한국 궁궐 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유독 많다. 최근 TV에서 상영했던 드라마 <동이>에서 장희빈 있다고 할 말 하다. 창덕궁의 아름다움은 비원으로 잘 알려진
과 인현왕후,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도 이곳에서 펼쳐졌었 창덕궁의 후원에서 그 절정을 맞는데, 비원은 다양한 정자,
다. 연못, 수목, 괴석이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 같은 곳이다.

창덕궁에는 소박한 궁이 하나 있다. 조선의 마지막 왕족들


이 살았던 곳으로도 잘 알려진 낙선재. 낙선재는 조선의 24
대 왕 헌종이 자신이 사랑한 여인을 위해 지었던 궁으로 유명
하다. 그는 1847년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맞이하여 낙선재를
지었다고 한다. 후궁을 위해 궁궐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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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조선 왕조 역사상 이례적인 일로 볼 수 있다. 소박한 것을


사랑했던 조선의 로맨티스트 헌종은 그녀와 그 자신을 위해
낙선재를 개인적인 공간으로 사용했고, 이를 위해 단청 을 하
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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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경춘전 창덕궁 주합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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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 인에게 궁궐을 개방하기에 이른다. 대한제국의 상징이었던 덕
수궁이 일개 미술관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해방이 된 후에
임진왜란으로 인해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서울로 돌아 도 석조전은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이 우리나라를 분할 통치
왔다. 하지만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버려서 왕이 할 것을 결정하면서 우선 남한만 단독으로 정부 수립을 하기
거처할 왕궁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왕족의 집 중 가장 규모 로 결정한 장소가 가 되어 현재까지 민족의 아픔으로 남아있
가 크고 완전했던 월산대군가를 행궁으로 삼가 왕이 거처하 는 남북 분단의 시작이 되어 우리의 슬픈 역사를 담고 있다.
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선조는 이 행궁의 침전에서 승하하고 ■

선조의 아들인 광해군이 행궁의 서청에서 왕위에 즉위하게


되었다. 그는 이 행궁을 경운궁이라 하였다. 비록 조선 후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지만, 경운궁은 구한말 역사적 현장이
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게,
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게.”
이후 약 270여 년 동안 빈 궁궐로 남아 있게 된 경운궁은 우리의 궁궐은 검소한 민족성이지만 한국의 뿌리는 결코
대한제국 시기에 다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을미 누추할 수 없고, 지혜와 과학의 조화로 화려하게 치장되었
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껴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던 고종 지만 결코 민족의 얼을 배제하지 않는 한국의 모든 모습을
이 1897년 경운궁을 확장하고 격식을 갖추어 돌아오게 되기 담고 있다. 어느 한 부분 놓치지 않고 섬세하고 과학적이게
때문이다. 고종은 자주 독립 국가를 만들기 위해 나라이름을 지어진 다섯 궁은 절대적으로 보존해야 할, 후대에게 고스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로 등극하였으며 광무개혁을 실시 란히 물려주어야 할 역사인 것이다.
하게 된다. 하지만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으로 인해 고종이 강 조선의 500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 조선의 5대 궁들은 그
제 퇴위 당하고 순종이 황제에 오르면서 경운궁의 궁궐로서 각각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웅장한
의 기능은 다시 끝나게 된다. 이 때 순종을 경운궁에 계신 태 조선의 기개를 보여줌과 동시에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조선
황제 고종을 위해 ‘덕수’란 이름을 지어 올리는 데, 이 때부터 의 궁들은 알면 알수록 사람을 매혹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경운궁은 덕수궁이 된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에는 거대한 힘
덕수궁에는 다른 궁궐에서는 보지 못하는 건물을 하나 볼 이 있다. 이 힘은 세계인에게도 충분히 발휘될 수 있다. 멀
수 있는데, 바로 석조전이다. 근대 서양식으로 지은 석조전은 리에 있는 파리의 베르사유, 중국의 자금성을 찾지 말고 지
정부의 재정적인 고문 역할을 했던 브라운이 고종에게 건의 금부터라도 조선의 5대궁을 방문해 보면 어떨까. 이 나라를
해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고종이 머물렀던 석조전은 그가 승 지켜온 한국인들의 정취와 멋, 그리고 희로애락을 느껴보
하하자 일본이 이곳을 미술품을 전시하는 장소로 쓰고, 일반 자.

경운궁 중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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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석가탑 다보탑

불국사

신라 천년의 역사가 깃든

경주 역사유적지 글 | 홍새미

로 축조한 방식들이 그 예이다. 또한 석굴 벽면을 채우고 있는 불상조각



주는 국보 31개, 보물 82개, 사적 및 명승이 78개 등 국가지정
문화재만 212개를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역사유적 들은 사실적이면서도 수준 높은 기술을 자랑한다.

지이다. 그 중에서도 경주 역사유적지구 (Gyeongju Historic Areas)는 불국사는 통칭‘부처님의 나라’로 지상 위에 지어진 낙원이라고 할 수

신라의 오래된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있어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있다. 훼손된 부분이 많고 복원작업이 미숙하여 더 이상 과거의 완벽한

경주 역사유적지구에는 천 년 역사의 신라의 유적지라고 해도 과언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지금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신라의 아름다운 예

이 아닐 정도로 많은 신라 유적들을 보유하고 있는데 몇 개만 꼽아보자 술적 면모를 느낄 수 있다. 불국사는 크게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법신

면 석굴암, 불국사, 첨성대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오늘날까지 한국 불, 관음보살이 있는 네 영역으로 나뉘고, 각 불당으로 가는 길에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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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
의 건축물과 불교역사연구에 많은 자료로 쓰이고 있으며, 관광객의 발 름다운 축조물들이 위치해 있다. 그 중에서도 청운교와 백운교는 부처

걸음 또한 끊이지 않고 있다. 한국의 학생들이라면 누구든지 알만한 이 의 나라로 갈 수 있는 세계로 통하는 다리를 표현한 건축물로, 아름다운

름들이고 그만큼 우리들에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유적들이 바로 경주 역 외형을 자랑한다. 다음으로 불국사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다

사유적지구의 대표 유적들인 것이다. 보탑과 석가탑이 있는데 이들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신라의 독특한 양

이들은 하나같이 신라 특유의 예술성과 과학기술을 섬세하게 내포하 식을 뽐낸다.

고 있어 외관상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역사학자들의 역사적 사료이기 먼저 석가탑은 단순한 외형을 갖고 있지만 완벽한 비례미를 통해 단

도 하다. 그 중에서도 석굴암과 불국사는 경주 역사유적지구와 따로 세 순미와 절제미를 뽐내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많은 탑들의 모방의 대상이

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만큼 이 유적들의 풍미가 뛰 되고 있다. 대조적으로 다보탑은 인도의 양식을 모방하여 만들어졌기

어나기 때문이다. 때문에 석가탑과 달리 화려하고 복잡한 구조를 보인다. 이 두 탑은 서

각 유적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석굴암은 경덕왕 (8세기) 로 같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신라인들의 과감한 시도를 보

때 건축된 유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유일한 인조 석굴이다. 이 여준다. 대비되는 양식의 건축물을 한 곳에 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것은 당시 굴 속에서 수행하던 인도인들의 풍습을 따르기 위한 것이었 때문이다. 그 밖에도 건축물의 세부적인 면까지 표현한 섬세한 조각이

다. 그러나 대부분의 돌이 단단한 화강암이었던 탓에 석굴을 만드는 것 나 선들은 유려하고 아름다운 신라인들의 예술성을 잘 보여준다.

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인조 석굴을 만들기로 결심했고, 그 결 한국의 유물과 신라의 유산을 한 눈에 보고 싶다면 경주 역사유적지

과 만들어 진 것이 석굴암이다. 석굴암의 내부는 당시 신라인들의 과학 구로 가보는 것이 어떨까? 단순한 문화의 멋이 아닌 옛 선인들의 지혜와

과 미적 의식에 기초해서 만들어졌는데 석굴 내의 습도를 낮추기 위해 눈을 즐겁게 해주는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

바닥에 샘을 만들고, 불상의 위치를 예배자의 눈높이에 맞춰 과학적으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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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세용 고인돌

주는 국보 31개, 보물 82개, 사적 및 명승이 78개 등 국가지정 은 사실적이면서도 수준 높은 기술을 자랑한다.
문화재만 212개를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역사유적지 불국사는 통칭‘부처님의 나라’로 지상 위에 지어진 낙원이라고 할 수
이다. 그 중에서도 경주 역사유적지구 (Gyeongju Historic Areas)는 신 있다. 훼손된 부분이 많고 복원작업이 미숙하여 더 이상 과거의 완벽한
라의 오래된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있어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다.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지금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신라의 아름다운 예
경주 역사유적지구에는 천 년 역사의 신라의 유적지라고 해도 과언이 술적 면모를 느낄 수 있다. 불국사는 크게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법신
아닐 정도로 많은 신라 유적들을 보유하고 있는데 몇 개만 꼽아보자면 불, 관음보살이 있는 네 영역으로 나뉘고, 각 불당으로 가는 길에는 아
석굴암, 불국사, 첨성대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오늘날까지 한국의 름다운 축조물들이 위치해 있다. 그 중에서도 청운교와 백운교는 부처
건축물과 불교역사연구에 많은 자료로 쓰이고 있으며, 관광객의 발걸 의 나라로 갈 수 있는 세계로 통하는 다리를 표현한 건축물로, 아름다
음 또한 끊이지 않고 있다. 한국의 학생들이라면 누구든지 알만한 이름 운 외형을 자랑한다. 다음으로 불국사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들이고 그만큼 우리들에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유적들이 바로 경주 역 다보탑과 석가탑이 있는데 이들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신라의 독특한
사유적지구의 대표 유적들인 것이다. 양식을 뽐낸다.

이들은 하나같이 신라 특유의 예술성과 과학기술을 섬세하게 내포하 먼저 석가탑은 단순한 외형을 갖고 있지만 완벽한 비례미를 통해 단
고 있어 외관상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역사학자들의 역사적 사료이 순미와 절제미를 뽐내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많은 탑들의 모방의 대상
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석굴암과 불국사는 경주 역사유적지구와 따로 이 되고 있다. 대조적으로 다보탑은 인도의 양식을 모방하여 만들어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만큼 이 유적들의 풍미가 기 때문에 석가탑과 달리 화려하고 복잡한 구조를 보인다. 이 두 탑은
뛰어나기 때문이다. 서로 같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신라인들의 과감한 시도를

각 유적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석굴암은 경덕왕 (8세기)때 보여준다. 대비되는 양식의 건축물을 한 곳에 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

건축된 유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유일한 인조 석굴이다. 이것 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건축물의 세부적인 면까지 표현한 섬세한 조

은 당시 굴 속에서 수행하던 인도인들의 풍습을 따르기 위한 것이었다. 각이나 선들은 유려하고 아름다운 신라인들의 예술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돌이 단단한 화강암이었던 탓에 석굴을 만드는 것이 한국의 유물과 신라의 유산을 한 눈에 보고 싶다면 경주 역사유적지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인조 석굴을 만들기로 결심했고, 그 결과 구로 가보는 것이 어떨까? 단순한 문화의 멋이 아닌 옛 선인들의 지혜
만들어 진 것이 석굴암이다. 석굴암의 내부는 당시 신라인들의 과학과 와 눈을 즐겁게 해주는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을
미적 의식에 기초해서 만들어졌는데 석굴 내의 습도를 낮추기 위해 바 것이다. ■

닥에 샘을 만들고, 불상의 위치를 예배자의 눈높이에 맞춰 과학적으로


축조한 방식들이 그 예이다. 또한 석굴 벽면을 채우고 있는 불상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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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꽃
수원화성 글 | 고담비

수원화성이란 무엇인가? 실습장으로 커다란 모험을 했던 것이다.


수원화성에는 국왕의 애민정신 또한 가득 담겨 있다. 정조가 설계
정조는 아버지 장현세자(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이 무척 깊은 왕이
를 변경해가면서까지 주민들을 성 안에서 지낼 수 있도록 했던 것을
었다. 그는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
통해 알 수 있다. 그 당시 계획과는 다르게 성 축조과정에서 많은 민
우고, 정조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
가들이 성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는데, 정조는 성을 세 번 구부렸다
년에 완성하였다. 수원성은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하
폈다 해서라고 모두를 성 안에 수용하라는 국왕의 명을 내리기도 하
여 축조되었다.
였다.
성의 둘레는 약 5.74km로 동쪽 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
성곽의 꽃, 조선의 꽃이라 불려왔던 수원화성은 조선의 절정기에
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이다. 총 48개의 시설물로 이루어져
탄생했다. 그 시작은 비운에 죽은 사도세자의 묘원을 옮기는 것으로
있었으나, 이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의 시설물이 소멸되어 현재 41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지금은 세계인들이 즐겨 찾는 문화 유산이 되
개의 시설물이 존재하고 있다.
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책임은 물려받은 이 소중한 유산을 잘
수원화성은 평산성 형태를 띠고 있는데, 평산성이란 군사적 방어
가꾸어 보존하는 것이 되었다.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는 산성을 말한다. 이는 가
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수원화성은 중국의 이론들을 섭렵한 정약용이 총체적 지휘를 한 것 세계 유산적 가치
으로 유명한데, 그는 설계에 있어 구체적인 형태부터 공사법, 임금 수원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8
관리, 재료, 기계발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합리적인 대안들을 제 세기에 완공되어 짧은 역사를 가진 문화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
안하였다고 한다. 또한 기존의 읍성은 단순히 도시 경계 표시와 보 시설 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
안의 역할을 띠는 소극적인 형태였던 것에 비하여. 수원화성은 도시 징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
민이 그 안에서 편안히 살 수도 있게 배려하는 성이었다. 군사적인 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놀라울 수 밖에 없다. ■
Historical Fallacy Correcting Organization

면에서도 전쟁의 양상이 소총이나 활에서 대포로 바뀔 것에 미리 대


비하였으니, 이 또한 그 당시 굉장한 건축물이 탄생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적 의의
수원화성은 실학과 깊은 연관이 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서양의 과학과 기술 문명이 청나라를 통해 들어오던 때, 반계 이형
원의 실학 사상이 새로운 길을 열었고,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여러
실학자들이 축성에 이바지하였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조선 실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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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요 제주도로 글 | 홍애영


계 자연유산은 최상의 자연현상이나 뛰어난 자연미와 미학적 중 거문오름 용암동굴계는 지금으로부터 약 10~30만년 전에 거문오름에
요성을 지닌 지역을 포함한다. 또한 생명의 기록, 지형의 발달에 서 분출된 용암으로 만들어진 여러 개의 동굴이며, 이 동굴계에서 세계자연
있어 중요한 지질학적 진행 과정, 또는 지형학이나 자연지리학적 측면의 중 유산으로 지정된 동굴은 벵뒤굴, 만장굴, 김녕굴, 용천동굴, 그리고 당처물
요특징을 포함하여 지구 역사상의 주요 단계를 입증하는 사례여야 한다. 우 동굴이다. 만장굴은 용암동굴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만장굴과 김녕굴 역
리나라에서 최초로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지역은 제주도이다. 제주도는 시 모두 동굴의 길이와 규모면에 있어서 세계적이다. 벵뒤굴은 미로형 동굴
한반도 남서 해상에 있는 섬으로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화산지형으로 지 로서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통로의 형태를 보인다. 대부분의 용암동굴은 다
질학적 중요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수많은 측화산과 세계적인 규모의 용암 양한 규모와 형태, 지형, 그리고 동굴생성물을 보여주어 학술적으로 가치가
동굴, 다양한 희귀생물 및 멸종 위기종의 서식지가 분포하고 있어 지구의 높다. 세계적인 경관과 가치를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동굴은 제주도 해안 저
화산 생성과정 연구와 생태계 연구의 중요한 학술적 가치가 있으며, 한라 지대의 용천동굴과 당처물 동굴이다. 이들 동굴 내에는 용암동굴 내에서는
산 천연보호구역,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성산일출봉 응회환의 3개 구역이 흔히 볼 수 없는 석회질 동굴생성물이 성장하고 있으며, 이들 동굴생성물의
2007년 6월 27일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규모, 형태, 분포 및 밀도는 가히 세계적인 수준이라 평가된다, 특히 종유
관, 종유석, 석순, 석주, 휴석, 커튼, 동굴산호 등 아주 다양한 동굴생성물이
한라산은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서 화산활동에 의해 생성된 순상(방
잘 보존된 이 동굴들은 전 세계적으로 용암동굴 내의 탄산칼슘으로 이루어
패모양) 화산체이다. 약 180만년 전부터 역사시대에 걸쳐 일어난 화산활동
진 2차 동굴생성물이 가장 발달된 동굴로 평가된다. 당처물 동굴은 규모가
으로 만들어진 한라산 정상부에는 한라산 조면암과 백록담 현무암이 분포
매우 작은 동굴이지만, 이 동굴 내에서 발견되는 석회질 동굴생성물은 세계
하며 한라산 조면암은 점성이 높으며 돔상으로 솟아 한라산을 더 웅장하게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용천동굴의 큰 규모와 석회질 동굴생성물은
만들고 있다.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화려한 장관을 이룬다. ■
성산일출봉은 제주도에 분포하는 360개의 단성 화산체 중의 하나이며,
약 12만년에서 5만년 전에 얕은 수심의 해저에서 화산분출에 의해 형성된
전형적인 수성화산이다. 높이 179m로 제주도 동쪽 해안에서 사면이 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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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거대한 고성처럼 자리잡고 있는 이 분화구는 바다에서 바라볼 때는 마치
왕관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으며, 하늘에서 바라보면 웅장함과 자연이 만든
조각의 오묘함이 어우러져 그 자체만으로도 뛰어난 경관임을 확인할 수 있
다. 특히 '일충봉' 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해 뜨는 시각에 태양을 배
경으로 바라보는 모습은 그 경관의 장엄함과 아름다움이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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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를 찾아서 글 | 윤세연


야는 한반도의 남동쪽. 백제와 신라 사이에 존재했던 연맹 왕국이
다. 다른 고대 국가들에 비해 가야의 역사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적지만, 현존하는 문헌, 고분과 토기 등을 통하여 가야가 높은 수준의 문화
를 보유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야의 역사는 기원전 200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변한 지역의 12


개의 나라 중 하나였던 구야국은 아홉 마을로 이루어져 있었고, 각각의 마을
은 각각 촌장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후에 구야국은 금관 가야, 아라 가야, 고
령 가야, 대가야, 성산 가야, 소가야로 이루어진 6가야가 된다. 이 가야국의
성립에 얽힌 건국설화 가 바로 알에서 태어난 6가야의 왕들의 이야기다. 구
야국 사람들이 하늘의 계시를 받고 ‘구지가’를 부르자 하늘에서 자주색 빛이
내려왔고 그 빛이 닿은 곳에 황금알 여섯 개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그 알들
에서 여섯 아기들이 나왔고, 이들은 곧 청년이 되어 여섯 가야국을 다스렸는
데, 이 중 가장 먼저 세상에 나타난 김수로 왕이 금관 가야를 다스렸다고 한
다. 이 설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토착 집단인 기존 구야국과 김수
로 왕을 내세운 이주 집단이 결합하여 가야국이 성립된 것이라는 해석이 지
배적이다.
가야의 역사는 전기 가야와 후기 가야로 나누어지는데, 전기는 금관가야,
금관가야의 왕인 김수로왕의 왕비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 후기는 대가야에 의해 주도되었다. 금관가야는 중계 무역으로 세력 기반을
다. 그의 왕비는 아유타국의 허황옥 공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아유타국이 확장하고 전기 가야 연맹을 이끌었지만 당시 신라의 서진 정책, 고구려의 남
어느 나라인지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 진 정책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고, 백제-왜-가야 동맹 대 고구려-신라 동
는 설은 아유타국이 갠지스 중류에 위치했던 ‘아요디아’로 불린 나라라는 설 맹의 싸움에서 고구려에 패했다. 이후 고령의 대가야가 후기 가야 연맹의 맹
이다. 이 지역의 물고기 문장이 김수로 왕이 썼던 문장과 비슷하다는 사실은 주로 부상하고, 금관 가야는 신라에 병합된다. 대가야는 이후 신라와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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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잘 알려진 근거이다. 쌍어문이 아유타국으로부터 가야에 전해져 일본 동맹을 추진하지만 실패하고 신라가 남은 가야국들을 하나하나 병합하면서
에서까지 발견됐다는 사실은 아유타국의 존재뿐만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정 가야 연맹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세에서 가야의 위치를 말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김해의 한 고분에서 채취
같은 연맹왕국의 단계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한 고
한 DNA 분석 결과 허 황후의 후손이 인도 남방계열이라는 결론도 이 주장
구려, 백제, 그리고 신라와 달리 가야는 연맹왕국 단계에서 멸망한다. 신라
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이외에 ‘아리’라고 부르던 지방의 공주였던 허
와 고구려의 세력 확장 때문에 잦은 전쟁을 치러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할
황후가 양쯔강을 따라 가야국에 도착했고 이러한 여행길에서 불렀던 노래가
기반을 닦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야는 철 생산과 무역을 통해 번창했
‘아리랑’으로 전해져 내려왔다는 설 등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허 황후는 자
고, 발전된 농업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양질의 철광석을 생산하여 수출한
신의 후손들에게 성씨를 물려주는데 이들이 바로 김해 허씨이다. 따라서 김
사실은 역사 자료 곳곳에서 발견 할 수 있다. 철 수출국이라는 위치는 상대
해 허씨와 김해 김씨는 각각 허 황후와 김수로왕의 후손으로서 동성동본이
적으로 약한 가야가 고대 국가들 사이에서 버틸 수 있던 요인 중 하나였다.
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가야 토기는 일본에도 전해져 일본의 토기 문화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가야 전기에 웅천 지대 중심으로 발전한 적갈색 토기를 만드는 기술이 더욱
다양한 토기를 만드는 밑거름이 되어 일본의 도기인 ‘스세키’를 만드는 기술
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토기 문화를 통해 쌍어문으로 밝혀진 가야와 일본과
의 관계가 단지 정치적인 관계가 아니라 문화적 교류도 활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야가 한반도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적을지 몰라도 무시해서는


안 될 우리 역사의 일부분이다.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전해 주기 위해
서, 가야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기를 소망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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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로마인에게 북방의
칼을 묻다 (The Last Roman in Northeast Asia) 글 | 정병훈


히 역사를 배울 때 단골로 등장하는 문구가 있다. ‘과거를 통 인으로 남은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애국심이 강
하여 현재를 보고 미래를 예측한다.’ 이것은 동북아의 현실을 한 장군을 통해 발해의 뿌리를 찾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
한마디로 압축해주는 구절이다. 현재 한국은 새로운 미래를 주도하 을 수 있다.
며 이끌어 나가려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노력을 견제하는 중
최후의 로마인으로 칭송 받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스틸리코의 핏
국은 한국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동북아의 맹주로 부상하려는
줄은 로마인답지 않다. 그의 어머니는 로마인이지만 아버지는 북방
움직임을 보인다. 그러한 노력 중 하나를 든다면 동북아의 북방사를
의 게르만족, 그 중에서 반달족 출신이다. 아버지는 테오도시우스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하고자 하는 동북공정이다.
(346~395), 혹은 그전의 그라티아누스 (359~383) 황제 시절 귀화하
이에 대한 우리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동북공정의 주요 대상인 고 여 기병 장교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려와 발해 중 고구려는 건국 주체와 이념에서 중국과는 다름을 분
스틸리코는 20대에 제국의 중추
명히 하고 있다. 이는 광개토대왕릉비, 모두루묘지에서 확인할 수 있
로 부상했다. 페르시아와의 협상
으며, 풍부한 기록유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신뢰도가 높은 중국
에서 로마에게 유리하도록 협상을
측의 다양한 사서들이 이를 증명하며 , 한국의 정사인 삼국사기의 기
타결하는 데에 그는 결정적인 역
록 역시 무시할 수 없다.
할을 했고,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하지만 문제가 되는 쪽은 발해이다. 발해의 경우, 고구려만큼 많은 양녀이자 질녀인 세레나와 그를
유적이 발굴되지 않았고, 이에 대해 기록한 사서의 절대수가 부족하 결혼시켰으며, 이후 게르만족 격
다. 국조 대조영에 대해 기록한 중국 측 사서로 대표적인 것이 구, 신 퇴에 큰 공을 세운 스틸리코는 황
당서인데, 문제는 이들이 대조영의 출신에 대하여 다르게 서술하고 제의 서거 전 군사령관의 지위까
있다는 것이다. 구당서는 그를 고려별종 (高麗別種)으로, 신당서는 속 지 올랐다. 스틸리코는 황제가 아
말말갈 (粟末靺鞨)로 기록하였다. 이는 국조를 통하여 나라의 귀속 들의 후견을 부탁할 만큼 신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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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부를 판단하는 현재의 경향에 불리하다. 한국도 사정은 다르지 않 는 신하였으며, 훗날 서로마 총사
다, 발해에 관하여 직접적으로 다룬 것은 유득공의 발해고 뿐이다. 유 령관이 된 그는 13년 동안 혼신을
득공은 발해고에서 대조영을 고구려 무장 출신으로 기록하였다. 이 다해 서로마제국을 수호했다.
는 한국 측이 기록하였다는 점에 의의가 있지만 18세기에 기록되었
하지만 스틸리코의 영광 뒤에는 수많은 정적들의 모함이 따랐다. 부
고, 고찰로 기록되었다는 점이 그 한계이다. 이외에도 직접적 형식은
계사회인 로마에서 아버지가 반달족 출신인 그는 정적들에게 반야만
아니지만 삼국유사에서 신라고기를 인용하여 그를 고구려의 옛 장수
족으로 치부되었고, 이로 인해 군사들도 비협조적이었다. 이러한 상
(高麗舊將)로 기록했으나 신라고기가 부재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보
황은 그가 서고트족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로마를 지키려는 계획을 내
인다.
놓은 이후 더 악화되었고, 심지어는 그의 부하들조차 그를 역적으로
이러한 한계성으로 인해 한중 양측은 이 부분을 다르게 해석하며 사 매도했다. 이를 기회로 황궁의 정적들은, 스틸리코가 반역을 일으켜
실 판단을 어렵게 한다. 이는 또 다른 역사왜곡을 유발할 수 있다. 즉 자신의 아들을 제위에 올리려 한다고 황제에게 간언을 하였다. 스틸
이러한 논쟁은 우리가 1차적 자료에 크게 의존하는 기존의 방식 대신 리코는 사태를 해명하고자 황제를 알현하고자 하지만, 황제는 그에게
당시와 오늘날의 상황을 총괄하는 제 3의 시각으로 문제에 접근해야 사형을 선고하였고, 추종자들의 만류에도 불과하고 그는 죽음을 받아
함을 시사한다. 들였다.

여기서,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스틸리코 (Flavious 서로마 총사령관인 그는 마음만 먹으면 제위를 차지할 수 있었고 선
Stillicho). 그는 로마가 동서로 갈라진 시기 서로마의 군사령관이다. 왕의 지지도 무시할 수 있었지만, 그는 정적들조차 제거하지 않았고,
로마사에 생소한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중요한 심지어는 사형선고에 승복하였다. 마지막 그 순간까지 그는 자신을
것은 그가 로마를 진정으로 사랑했으며, 마지막까지 로마인다운 로마 로마인으로 여겼고, 옛 로마의 미덕을 존중했으며, 로마인으로써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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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황제에게 충성해야 할 의무를 지켜야 한다 믿었기 때문이다. 순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는 용맹하고 무예에 매우 뛰어나다. 영주
로마인들조차 살길만을 모색했던 시절이었기에 ‘반야만족 스틸리코’ 를 탈출한 그는 고구려인이기에 특유의 패기와 진취정신을 발휘해 발
의 행동은 최후의 로마인으로 더욱 추앙 받는 것이다. 해를 세웠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타국의 인물 스틸리코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한 이유는 그의 그는 고구려인의 외교 전술을 답습했다. 즉위 후, 그는 돌궐의 추장
삶이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대조영과 유사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묵철에게 사절을 보내어 동맹 관계를 수립하고, 일본에도 외교 사절
단을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방식은 중국과 신라를 견제하기
먼저, 그들은 소속 국가의 순수 혈통이 아닌 국민이다. 앞에서 언급
위한 전략이었다. 건국 초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고구려다운
했듯 스틸리코는 반달족을 아버지로 가진 로마인이다. 마찬가지로 대
모습을 보여준다.
조영 역시 순수 혈통은 아니다. 구당서의 표현을 따르자면 고려별종
이다. 이것은 당시 동북아의 사회 질서 체제를 반영한 단어이다. 눈여겨볼 점은 대조영의 시호이다. 그는 죽은 후 고왕 (高王)으로 추
존되는데, 이는 그의 삶을 한마디로 보여준다. 시호에서 죽을 때까지
고구려는 순수 고구려인과 말갈인으로 나누어져, 초기 연맹 왕국의
고 (高 고구려)의 후예라고 칭하는 그는 진정한 고구려인이다.
단계로 시작되었다. 순수 고구려인은 졸본 (卒本)에서 추모왕 (鄒牟
王, 주몽)과 함께 건국에 참여한 무리를 말하지만, 말갈인 역시 고구 중국은 대조영을 말갈인이라 칭하고, 발해를 말갈의 국가로 여기는
려를 구성하였기에 마땅히 고구려인으로 불려야 한다. 그러나 엄연히 데, 이는 대조영을 단순히 현대적인 시각에서 보기 때문이다. 말갈인
본 고구려인과는 다르므로 (당시의 입장으로는) 이를 반영해 구당서 이 살던 곳은 현재 중국영토고, 발해의 수도 역시 중국의 영토이기에,
는 별종이라는 용어로 표기했던 것이다. 고려별종이라는 기록은 무시하고 속말말갈만을 현대적으로 보기 때
문이다.
이러한 결론은 신당서의 속말말갈에 대한 의문을 해소시켜준다. 속
말말갈이란 속말수의 말갈이라는 뜻으로, 오늘날의 송화강 지류로 보 이러한 논리는 혈통과 오늘날의 귀속 여부에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이는 태백산 (백수산이라 함)에서 발원했다. 고구려 영토 확장사에 따 는 현재 근대의 민족주의를 가지고 고대를 논의하고 있다는 뜻이다.
르면 문자왕(491∼519) 이전인 5세기 말 (494년)에 편입되었고, 668 그러나 근대와 고대는 시대부터 맞지 않는다. 근대의 민족주의는 강
년의 고구려 멸망까지의 기간을 보면 고구려에 동화되기에 충분한 시 제로 주권을 잃은 국가가 분할이나 다른 피해 없이 재립할 명분으로
간이다. 이것은 그가 고구려 지배층으로 동화되었고 고구려의 유력자 존재하는 것이다. 영토를 같은 혈통이 사는 지역으로 정의하려는 이
라는 점을 증명한다. 정리하면 대조영과 스틸리코 모두 방계이지만 유도 거기에 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민족의식의 관점에서도 생각해
모두 그 나라의 국민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보아야 한다. 당시 모든 고구려인들은 자신을 중국과 다른 민족으로
생각했고 이는 고구려의 독자적 세계관을 잘 표현한 광개토대왕릉비
두 번째는 스틸리코와 대조영 모두 그 나라의 사고방식을 따랐다는
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그 당시에도 열린 국경이었던 북방은 여러 민
점이다. 스틸리코는 로마인의 전통을 이용한 이이제이 전술로 로마
족이 교차한 곳이다. 북만주에서 한반도 전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를 구원했다. 또한 옛 로마인의 미덕 신사협정을 그대로 받아들였으
부족들이 병립한 곳인데, 이를 근대적 시야로 보는 것은 의미 없는 일
며, 이는 선황의 유지를 끝까지 지켜 억울한 죽음을 받아들인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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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며, 56개 민족이 사는 중국 역시 이를 비껴나가지 못한다.


확인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로마를 사랑했고, 이는 정적들조차
제거하지 않고 게르만족과의 굴복협상을 통해서라도 로마를 지키려 북방을 바라볼 때는 북방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그들이 한나라로
했다. 그가 자신의 일신과 명예만을 중시했다면 이러할 수 없을 것이 뭉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의식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피보다 의식을
다. 더 중요시했기 때문에 이민족-당시 이동할 능력이 있던 지식인, 군인
또는 준군사계층 (유목민, 수렵민)을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었으며,
대조영 역시 고구려인의 후예로써 거리낌 없는 삶을 살아갔다. 여러
그들 역시 그러한 정신을 계승하여 정착지를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스틸리코가 로마인이었던 것처럼 대조영도 우리의 조상이고, 그래


야만 한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스틸리코도, 대조영도 누구를 향하
여 칼날을 겨누었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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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첫 인상 글 | 최효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근무하던 헨드릭 하멜은 대만 적, 학문적, 사회적 발전이 멈춘 것처럼 조선이 앞으로 나
에 가려고 했다. 하지만 항해를 시작한지 3개월 만에 그는 아갈 방향을 막아버리는 정책이었다. 다른 나라와의 무역
오늘날의 제주에 포류당하고 말았다. 그는 조선에 머무르 과 교류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변
면서 17세기 한국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한다. 예를 들어 화하는 세태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왕은
정부 구조, 계급 구성, 그리고 종교의 역할 등을 분석했다. 하멜과 그의 일행에게 편한 방문이 되도록 배려했다. 조
하멜이 서술한 내용은 외국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조선을 선 밖의 세상에 대해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행동은 조
담았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하멜의 관찰은 완전히 믿을 선이 인종차별주의나 엘리트 의식에 사로잡힌 나라가 아
만 하지는 않지만 매우 귀중한 정보이다. 니라 단지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방지하기 위해 수교를 거
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멜의 일기는 호기심에 가득 차 완전히 다른 문화와 사
람들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하멜은 조선 사회에서 계급의 중요성을 주목한다. 그는
가 쓴 내용에는 고정관념이 섞여있을 수도 있다. 왜냐하 법에 의해 주인에게 소유물로 취급받는 노비들에 대해 썼
면 그는 그의 문화, 그가 알고 있는 중국과 일본의 문화 다. 노비들은 그 계급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와 신분 상승
에 조선의 문화를 비교하기 때문이다. 그가 조선에 도착 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여자들에 대한 남편들
하기 전, 그는 다른 동아시아 국가인 일본과 중국을 알고 의 의식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다. 그는 여자, 즉 아내들과
있었다. 물론 이 지식들은 그가 조선을 알아가는데 영향 딸들이 개인 소유물을 가질 수 없고 남편에게 이혼을 요
을 주었다. 게다가 그는 크리스쳔이었다. 당시 조선은 약 구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썼다. 이런 법은 아내와 마음
간의 불교의 영향을 받은 유교가 국가 사상의 기반이었 대로 이혼할 수 있고 여러 명의 아내를 가질 수 있었던 남
다. 하멜은 그의 글에서 조선의 종교를 비판한다. 그는 유 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이것은 하멜이 그의 일기에
교를 종교를 받아들이기 보단 도덕 기강으로 보았다. 불 적어놓은 조선에 대한 많은 설명 중 부분에 불과하다. 그
교에 대해서는 그들과 사회 부패를 관련지었다. 불교 의 의 글은 외국인의 입장에서 직접 경험한 조선을 그려놓았
식을 “… do pay their idol some superstitious rites” 다는 점에서 소중한 자료이다. ■
(Hamel 141). His use of the word “some” seems very
apathetic and a bit downgrading.

이 시기 조선 왕조는 스스로를 걸어 잠근 상태였다. 열


강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주변국가와의 교류지속은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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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새로운 국가들과의 수교조차 거부했다. 조선의 기술

하멜 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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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항쟁
올해는 경술국치 백 주년이 되는 해이다. 사실, 일제 는 몽골의 3차 침입 때의 황룡사(皇龍寺)가 있다. 당시
강점기는 한민족이 외세에 의해 고통 받았던 첫 번째 의 가장 높은 목조 구조물이라 여겨지는 황룡사 9층 목
사건이 아니다. 쌀을 생산하기에 좋고 중국의 강력한 탑은 불에 타고, 사찰의 금부처상도 함께 녹았다. 덧붙
우방이라는 전근대적인 이유 때문에 한반도는 지속적 이자면, 황룡사는 국토의 남쪽 끄트머리의 경주에 위치
으로 ‘침략의 명소’였다. 그래서 야심 많은 침략자들은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는 당시 고
중국을 치기 전에, 먼저 한국을 겨냥했을 정도였다. 이 려의 군사 체계가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반증한다.
는 한국을 약하고 의존적인 나라라고 생각하기 쉽게 만 그런데, 고려는 어떻게 독립을 지켜냈을까? 정부의
든다. 그러나 한국의 길고 긴 오천 년의 역사를 상기해 힘이 국가를 수호하는 데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고
본다면, 이 국가는 독립을 수호하는 것에 많은 노력을 려인들은 게릴라전 형식으로 몽골에 대항했다. 몽골 군
기울였고, 그 성과를 이루어내었음을 알 수 있다. 주변 의 주력은 기마병이기 때문에, 산 속에서는 평지만큼의
민족들의 끊임없는 습격과 침략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효과를 내지 못했다. 고려 정권의 남아있던 미약한 세
중요하게 여기는 파괴적인 침략은 고작 두 건만이 있었 력은 이 점을 이용했다. 기마병이 쳐들어오면, 농민들
을 뿐이다. 가장 유명한 침략은 조선 왕조가 지배하던 은 산으로 올라가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것이다. 제 1차
1592년의 임진왜란이지만, 이 글에서 다룰 내용은 고 침입 때에, 한 승려는 국가의 힘을 하나로 모아 처인성
려 후기 몽골의 침략이다.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에서 몽골군에게 대항하여 장수를 죽이는 성과를 올리
글 | 최세훈
악명 높은 몽골인들이 고려를 지배하는 것을 포기했다 기도 했다.
는 말을 들으면 놀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작은 그러나 전쟁이 지속됨에 따라, 고려 무신 정권에서는
반도를 몽골의 손아귀에서 지켜냈는가? 질문에 대한 주화론이 힘을 얻게 된다. 더 이상의 전쟁은 소모전일
답은 민중들에게 있었다. 뿐이며 반드시 항복해야 한다는 주장은 곧 주류가 되었
고려와 몽골이 거란족을 예속시키는 과정에서 처음 다. 그러나 이 주장은 왕의 측근들에 의해 제기된 것이
만났을 적에, 이 둘은 동맹 관계였다. 그러나, 몽골이 었기 때문에, 무신 정권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성장하고 광활한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것이다. 결국 주화론에 찬성할 수 없었던 무신 정권 (정
고려 역시 복속시키기로 결정한다. 몽골의 침략은 그들 확하게는 최씨정권)의 사병 집단이었던 삼별초가 다른
의 사신이 몽골로 돌아가는 와중에 살해당했을 때 시작 섬으로 옮겨가 항쟁을 지속했다. 이들은 세 번째로 옮
되었다. 고려가 강력히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몽골정 겨간 제주도에서 전원 사망하게 되는 것으로 고려의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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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는 고려를 사건의 주범으로 고발했다. 실제로 그 사 쟁은 끝을 맺게 된다.


신이 누구에게 죽었는지의 여부는 차치하고, 몽골은 그 비록 이들 정부가 몽골 인들로부터 고려를 지키기에
들의 기마병 부대를 한반도로 급파했다. 그때부터, 몽 미흡하였으나, 민중들은 그들의 생계를 위해 필사적으
골은 각개적이고 거대한 침략을 일곱 차례 거행했다. 로 침략자들에게 대항했다. 이러한 예는 일제강점 하의
침략이 시작됨에 따라, 무신 정부는 긴 전쟁에 대비하 조선에서도 볼 수 있다. 끊임없는 일본의 탄압에도 불
여 수도에 가까웠던 강화도로 천도했다. 내륙에서만 활 구하고 조선의 민중들은 조선이 해방되던 그 날까지 투
동하던 몽골 군은 강력한 수군이 없을 것이니, 물로 둘 쟁했다. 우리의 역사는 자신의 나라를 지켜내리라 마음
러 쌓인 섬에서는 승산이 있으리라는 계산에서였다. 이 먹는 것이 한국인의 특성이라 말하고 있다. 외세에 절
와 같은 정부의 생각은 맞아 떨어져, 그들은 주권을 보 대 굽히지 않는 우리의 자긍심이 있었기에 현재의 대한
호하고 강화도를 방어하는 데에는 간신히 성공하였으 민국이 있다. ■

나, 그 사이 한반도 전역은 폐허로 변해가고 있었다. 수


많은 역사적 유물들이 소실(消失)되고 사찰 역시 소실
(燒失)되었다. 소실된 문화유산 중 가장 대표적인 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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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부터 배운다
글 | 한지영

과거로부터 배운다 :
조선의 민중들은 어떻게 사회를 개혁하려고 하였는가?

‘인간은 국가를 비롯하여 현실 세계의 모든 사물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과 대응


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주관적인 측면도 확립되었는데 인간은 이제
정신적인 개성을 지닌 존재가 되고, 또한 그러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부르크하르트

18, 19세기에 절대 왕정, 귀족 정치를 타파하기 위한 주장하는 평등 운동이자 민권 운동이었다.


시민 혁명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다. 프랑스의 대혁명,
둘째로는, 거족적인 민중 계몽 운동이 있다. 특히 19세
영국의 명예 혁명, 미국의 독립 혁명이 대표적인 예이다.
기에는 시민들이 직접 조직하였던 애국 계몽 단체들의 활
이에 따라 국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절대왕정과 귀족정
동이 활발하였다. 계몽 운동은 민족의 자주 의식의 계발
치는 시민들의 저항에 의하여 무너졌으며, 시민들은 근대
과 교육을 통한 근대적인 의식 함양, 민족 경제 육성 등을
의 민주주의 정치제도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목표로 하였다. 이 시기에 많은 단체들이 성과를 거두었
서양에서 이러한 바람이 불어올 때, 조선에서도 봉건적 는데, 그들 중 주목해야 할 단체는 독립협회와 신민회가
사회에 대한 저항 의식이 싹트면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기 있다. 독립협회는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열강의 내정 간
시작하였다. 이전까지의 조선의 봉건사회는 토지를 매개 섭, 이권 요구를 물리쳤고, 역사상 최초로 백성과 관리가
로 한 지주, 전호 관계를 통해 운영되어 왔는데, 조선 후 함께한 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로 기존
기에 이르러 이와 같은 봉건적 신분제는 더 이상 유지될 관리와 백성이 참여하는 의회 설립이 추진되었다. 더 나
수 없었다. 일차적으로는 소수의 세도 가문이 권력을 독 아가 신민회는 전국적으로 근대식 학교와 회사를 설립하
점하여 지배층의 부패와 도덕적 타락이 나타났기 때문이 였다. 이는 국민들의 애국심과 근대 의식을 고취하였고,
었다. 이로 인하여 봉건 제도의 불합리성과 모순을 깨달 더 나아가, 이러한 단체들의 활동이 이후 독립 운동의 장
은 민중들의 의식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 주요 요인이라 기적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근대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였

Historical Fallacy Correcting Organization


볼 수 있다 다는데 의의를 둘 수 있다.

18, 19세기 근대 태동기의 봉건적 사회에서 탈피하기 조선 민중들의 근대적인 사회를 향한 활동들은 정부에
위한 민중들의 노력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의존하지 않고 대부분이 민중 자체적으로 조직되었다. 부
패한 지배층에 대항하여 사회를 변혁시키고, 민족의 자주
첫째로, 민중 봉기는 근대 사회로 변화하는 최초의 움
적인 힘을 기르자는 민중들의 외침은 어두운 시대 상황
직임이었다. 19세기 조선의 백성들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이었을 것이다. 국내
잦은 침략과 부패한 관료들의 수탈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의 문란한 정치 기강과 외세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
있었다. 농촌의 경제가 파탄으로 치닫자, 백성들의 사회
지 못했던 관료들과는 달리 조선의 민중들은 근대화로 나
변혁에 대한 욕구는 점점 커져갔으며, 농민 운동으로 이
아가는 발판을 스스로 마련하였으며, 위기에 처한 나라를
어지게 되었다. 1894년, 역사상 가장 조직적이고 전국적
구하려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의 민중들은 장차
이었던 농민 봉기인 동학 농민 운동이 발생하였다. 이들
대한민국이 평등, 자유를 지향하는 사회가 될 수 있던 내
은 외세의 침략, 신분적인 차별을 배척했고, 그 당시로는
부적 역량을 지니고 있던 것이다. ■
획기적이었던 지금의 지방자치제와 비슷한 ‘집강소’를 설
치하는 것을 주장했다. 이와 같이 동학 농민 운동은 지배
계층 중심이었던 사회 구조에서 백성의 권리와 자치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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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5대 王
글 | 한일고등학교

조 선왕조 500년이라는 긴 시간은 이씨 성을 가진 스물 일곱


남자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 중에는 성군이라 추앙 받던
펼친다. 그는 왕 중심의 육조 직계제에서 의정부 서사제로 정치체
계를 바꾸며 체계를 유연화 하였고, 그러한 정치를 실현하는 데에
왕도, 폭군이라 쫓겨난 임금도 있지만, 조명을 받지 못해 잊혀진 필요한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한 학사기관인 집현전을 세워 인재
왕도 있다. 이 글에서는 27명의 왕들 중 업적에 비해 잘 알려지지 를 양성하였다. 집현전 학자들은 세종 때의 빛나는 문화를 이룩하
않은 두 명의 왕들과 많이 알려진 네 명의 왕들을 알아보도록 하 는데 큰 힘을 보탰으며, 중국의 의례와 제도를 비판ㆍ연구하여 그
자. 들의 장점을 우리 실정에 맞게 수용하기도 했다.

제 일 먼저 소개할 왕은 5대 왕 문종이다. 문종은 왕위에 즉


위한 지 2년 3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그러나 그는 29년 동
세종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 받는 일은 ‘훈민정음’의 창제이
다. 한글은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해 만든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이
안 왕세자의 신분으로 지냈으며 세종이 병상에 있었던 1442년부 며 현존하는 문자 중 유일하게 창제자와 창제취지가 명확한 문자
터 1450년까지 8년 동안 섭정을 했다. 그는 문신과 무신을 고루 이기도 하다.
등용하고 언관과 언론에 대해 관대한 정치를 펴 세종을 잘 보필하
세종은 국가의 수입을 증대시키고 백성들을 여유롭게 하기 위
였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능력 있는 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종
해 「농사직설」등 농업기술에 관한 서적을 발간하여 농업기술
은 또한 어렸을 때부터 인품이 후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측우
을 발전, 알렸으며 조세제도를 개혁하였다. 그는 정치 서적, 지리
기를 발명할 정도로 천문학과 산술에 뛰어났다고 한다. 문종은 재
서, 천문서적 유교 경전 등의 발간을 장려하여 문화의 부흥을 일
위 기간 동안 6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윤대를 허락하는 등 언론의
으키기도 했다. 이것은 각 분야를 종합ㆍ정리하려는 세종 자신의
활성화를 위해 힘썼다. 또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하였으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세종은 다양한 도서의 간행과 함께 3종의
며, 동국병감, 병장도설과 같은 병법서를 펴내었다. 그리고 태종
금속활자를 새로 발표, 인쇄술의 혁신에 기여하기도 했다.
때의 화차를 개조한 문종화차를 만들어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비록 2년 동안의 짧은 재위 기간이었지만, 문종은 섭정 기간을 포 세종은 혁신적으로 천민 출신 과학자인 장영실을 등용한 후, 천
함하여 약 10년간 재위하며 과학 및 역사와 같은 분야에서 훌륭 문대와 해시계, 물시계 등을 제작하여 과학기술을 당시 세계 최고
한 성과를 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유연하고 강한 모습을 동시에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뿐만 아니라, 화약과 화기의 제조에도 큰
보여주며 언론의 활성화를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훌륭한 왕이라 관심을 기울여 독자적인 화포의 개량과 발명을 계속하였다. 또 한
할 수 있다. 편으로는 여진을 정벌해 4군 6진을 세워 북쪽 백성들을 안정시키
고 국경을 튼튼히 하였다.

두 번째로 이야기할 왕은 예종이다. 예종은 세조의 아들로써


19세에 왕위에 올랐지만,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정희왕후
의 섭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왕으로서의 카리스마를 보여주기
조 선 시대에 외교와 정치에 능했던 임금 중에 유독 주목을
받지 못하는 임금이 바로 광해군이다. 그의 업적은 세자
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민수의 옥 사건이다. ‘민수의 옥’이 시절의 활동과 즉위 뒤로 나눌 수 있다. 그가 세자로 책봉됐을 당
란 민수라는 이름의 사관이 자신이 기록한 사초에서 왕의 허물을 시 조선은 일본과의 전쟁에 휘말려있었는데, 그는 왜적에 대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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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한 것은 그대로 두었던 반면 대신의 허물을 기록한 것만을 삭 기 위해 강원도, 함경도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의병을 하여 훌륭하
제하였던 사건이다. 이에 예종은 대신들이 자기보다 더 무서운 것 게 그가 맡은 업무를 이루어 낸다.
이냐고 사관을 옥사시켰다. 또한, 세조의 묘 이름을 지을 때에는,
전란이 끝난 뒤, 광해군은 조선의 15대 왕으로 즉위한다. 광해
대신들의 8자 의견을 반박하며 자신의 의견대로 밀어붙여 12자
군은 피폐해진 국가의 재정을 회복하기 위해 토지 제도를 개선하
로 만들었다. 이러한 세조의 묘 이름과 관련된 논란은 단순히 부
는 등 나라의 내실을 다지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경제를 활성화
왕의 업적을 높이는 것 이외에, 부왕의 죽음으로 혹 느슨해질 수
시키기 위해 창덕궁을 중건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 그는 변방
있는 정치 권력을 제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궁 안의 모습
쪽의 지휘관들을 교체하고, 대포들을 주조하면서 국방을 강화한
과는 다르게, 예종은 병영에 딸린 논밭에서 일반 백성들이 농사를
다. 그러던 중 명나라와 여진족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면서 명은
지을 수 있게 하는 등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록 20세에
조선에 원군을 요청한다. 광해군은 신흥 강국인 후금과 마찰을 피
요절하긴 했지만, 성군의 자질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가 오
하기 위해 강홍립이라는 장군에게 군사 1만을 주어 명을 지원하
래 살아있기만 하였다면 대신들과의 세력 분배에 조화를 이루는
라고 보내면서 후금과 싸우는 것을 되도록 피하라고 명한다. 광해
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 적절한 중립 외교를 펼치면서 조선의 안전
을 확보한다. 또한 일본과의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하여 주변 나
세 종은 역사상 두 명뿐인 ‘대왕’칭호를 가지고 있을 정도
로 우리 국민이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왕 중 하나이다. 그 라들과 외교 관계를 개선한다.
는 1418년부터 1450년까지 32년 간의 재위기간 동안 정치ㆍ문
그는 비록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지만, 그 당시 현명한
화ㆍ사회ㆍ기술ㆍ군사 등 거의 모든 방면에 업적을 이루었으며
외교술을 통해 국제 정세에서의 평형점을 찾는 왕이었다.
사회 전반적 기틀을 잡은 임금이다.

세종은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상으로 생각하여 왕도정치를 영 조는 조선 왕조의 21대 왕으로, 탕평책과 일반 민중들을
위한 정책으로 현명한 정치를 한 왕이다.
펴고, 황희ㆍ맹사성과 같은 훌륭한 재상들과 이상적 유교정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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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지도
글 | 이소윤


지도는 일본의 국보이다. 완벽히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가 공물로써 일본에 바친 것이 칠지도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칠지
칠지도는 일본이 고대 한국을 지배했었느냐를 둘러싼 논 도를 일본의 국보로 정해버렸다. 그러나 한국의 학자들은 당시 강
란을 잠재울 열쇠가 될 수 있다.. 력했던 백제의 태자가 “일본영주”에게 칠지도를 선물로 하사한
칠지도는 일곱 개의 가지를 가지고 있는 칼이라는 뜻으로, (七= 것이라 하며 일본측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곱, 支=가지, 刀=칼) 하나의 중심 가지와 그 옆에 달린 6개의 가 근초고왕은 마한을 백제의 영토로 만들었으며, 중국의 요서지
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 칠지도는 1873년 일본의 나라현에 위치 방과 산둥 지방까지 세력권을 넓힌 왕으로 칠지도가 제작된 시기
한 이소노카미 신궁 (신성한 궁) 의 경비였던 “마사모토”라는 일 의 백제의 왕이다. 그는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백제는 369년 전
본인에게 발견되었다. 이 신궁에는 궁 안에 보관돼있던 상자는 절 후로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또한 근초고왕은 왕권을 키우고 백제
대로 열면 안 된다는 금기가 있었으나, 마사모토는 금기를 어기고 의 문화와 문명을 일본 등에 전파했는데, 이 칠지도 역시 문화를
열었고, 칠지도를 발견했다. 전해주는 과정에서 전해졌다고 알려져 있다.
칠지도에는 61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앞면에는 “태화 4년 하지만 이처럼 일본과 한국의 주장이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369년) 음력 5월 16일 병오날 정오에 백 번이나 담금질한 강철 아직 아무 결론도 나지 않고 있다. 이 문제의 결론은 어느 쪽이든
로 칠지도를 만들었노라. 모든 군사를 물리칠 수 있도록 후왕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양국은 모두 이 문제에 대해 민감
게 주노라” 라고 써있고, 뒷면에는 ‘선대 이래로 아무도 이런 칼 하다. 만약 한국이 옳다면, 한국은 고대에 한번도 일본에게 지배
을 가진 일이 없는데 백제 왕세자는 덕이 있는 까닭으로 왜왕 지 당한 적이 없음을 증명할 수 있다. 반대로 만약 일본이 옳다면, 한
(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까지 길이 전해 보존토록 하라‘ 라 국은 지배당한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칠
고 새겨져 있다. 하지만 이 어구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으 지도의 문제는 상당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
면서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일본은 칠지도가 일본이 세계대전 때뿐만 아니라 고대 한국을
지배했다는 설인 임나본부설의 증거라 주장하고, 그 이유로 백제

영조가 실시했던 탕평책은 그 당시 조선에 큰 혼란을 일으켰던 장각을 육성하여 규장각이 과거제도의 시행과 초계문신교육을
붕당적 갈등을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처음 담당하도록 하였다. 초계문신제도란 젊고 유능한 인물들을 뽑아
에 각 붕당 간의 화목을 권하고 이에 협조하지 않는 관리들을 축 규장각에서 교육받도록 하는 제도인데, 정조는 그들을 직접 가르
출하였다. 나아가 그는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기 보다는 각 붕당의 치는 등의 방법을 통해 그들을 자신의 정치적 친위세력으로 만들
온건적인 인물을 등용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는 완벽한 탕평 정치 었다. 또한 그는 장용영이라는 왕실 친위부대도 만들어 자신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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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실현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탕평책에 기초한 정부 구조를 설 호하는 것은 물론 그의 정책을 시행하는 것을 돕도록 하였다. 이
립하였다. 와 같은 정책들은 정조의 즉위기간 내내 정조에게 많은 정치적 도
움을 주는 바탕이 되었다.
또한 그는 일반 민중들을 위한 정책을 폈다. 그는 두 필에서 한
필로 군포를 줄이는 법인 균역법을 시행하였고, 이는 합리적 세금 또한 그는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한 많은 정책들을 시행하였다.
징수와 일반 민중들의 부담 완화를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가혹 먼저 정조는 서얼과 노비에 대한 차별을 완화하였다. 서얼 중 능
한 형벌들을 폐지시켰고 첩의 자식인 서자가 공직에 진출하는 것 력 있는 자들을 뽑아 규장각에 임명하여 자신의 충성스러운 신하
을 허용하는 등, 그는 민중을 위한 정치를 하는 왕이었다. 가 되도록 하는 파격적인 인사정책을 시행하기도 하였고, 경제적
으로 백성들을 돕기 위해 통공 정책을 실시했다. 이에 사람들은

정 조는 조선 후기인 1776년부터 1800년까지 나라를 다스


렸다. 비록 그가 세종대왕만큼 존경 받지는 못하지만, 정
자유로운 상업행위를 할 수 있어 상업이 발전되었고, 광산이 개발
되어 그곳에서 일함으로써 생계를 벌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정
조는 세종대왕 못지않게 조선을 위해 많은 일을 한 왕이다.
책들은 백성들의 생활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세금을 낼
첫 번째로 그는 붕당들의 싸움을 완화하기 위해 탕평책을 시행 수 있게 되어 국가의 재정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밖에도 암
하였다. 정조가 즉위하기 전, 붕당들은 서로를 숙청하며 정치적으 행어사를 많이 보내 지방 수령들의 횡포를 감시하였다.
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노론이 승리하여 모든
위와 같이 정조는 조선을 더욱 발전시키는 데에 많은 기여를 하
권력을 장악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조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
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고 있던 관리들을 제거하고 권력에서 물러나있던 소론과 남인 계
그의 사후 그의 개혁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만약 그가 조금 더
열의 유능한 관리들을 중용하였다. 이를 통해 정조는 정치세력의
오래 살았다면, 그의 개혁은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우
균형을 유지하여 붕당정치의 폐단을 없앨 수 있었다.
리는 그를 오늘날 ‘정조 대왕’으로 불렀을 지도 모른다. ■
정조의 두 번째 업적은 왕권의 강화이다. 그는 왕실 도서관인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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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제와 정당제 글 | 임민혁

대 한민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정당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정당제가 500여년 전 한반도에 있
었던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도 시행되었다면 당신은 과연 믿겠는가? 형태는 조금 다르지만, 조선에서도 ‘붕당’이라고
하는, 정당과 비슷한 제도가 있었다. 이 글에선 정당제와 붕당제를 비교해보고, 그 속에서 교훈을 찾아 정당제를 좀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방향을 찾아보고자 한다. 먼저, 정당제와 붕당제에 대해 알아보자.

붕 당은 ‘사림’이라는, 중소 지주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였다. 상대 붕당이 관직에 나가 비판하는 것을 인정하였던 것


양반 집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조선 제 9대 왕 성종 이다.
때부터 등용되기 시작한 사림은 훈구 세력이라고 불리는 보수
하지만 제 19대 왕 숙종 때 환국 을 거치면서 붕당정치는 그
파와 대립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고 정계에서 밀려나기도 하
본질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붕당정치의 비판과 견
였으나, 제 14대 왕 선조 때 적극적으로 등용되면서 권력을
제의 균형이 무너지며 정치가 매우 혼란스러워졌다. 환국 때
잡게 되었다.
는 서인에 의한 일당 독재화가 이루어졌고, 비판세력의 존재
사림은 권력을 잡자 종래의 ‘외척에 의한 정치 를 어떻게 없 를 부인하였으며, 사상적인 대립이었던 예송과는 달리, 환국
앨 것인가?’ 라는 문제와 이조전랑이라는 관직을 놓고 훈구와 때는 실리적인 이유로 대립하였다.
대립하였다. 그 당시 이조전랑직은 인사와 관련된 업무를 담
제 21대왕 영조와 22대왕 정조는 이러한 붕당정치의 폐단을
당하며, 자신의 후임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중요한 관
시정하고자 탕평책을 시행하였다. 영조는 소론과 노론을 골고
직이었다. 이조전랑의 임명문제와 척신정치를 개혁할 방안을
루 등용하여, 정치적 균형관계를 재정립하려 했다.
두고 대립이 격화되자 사림은 심의겸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과
김효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인으로 나누어졌다. 이 시기의 붕 정조가 어린 세자를 두고 세상을 떠나자, 왕실의 친척(벽파)

당정치는 인재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고 각 이 권력을 잡게 되었고, 붕당 문제는 더욱 심화되었다.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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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끼리 서로 비판, 견제하여 균형을 맞출 수 있게 하는 등 붕당이라도 왕실의 친척과 관계가 없으면 등용되지 못했고,

긍정적인 효과를 낳았다. 벽파 외의 모든 붕당의 존재는 부정하는 등 붕당의 원래 의의


가 사라져버렸다.
붕당은 15대 왕 광해군 때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화되
었다. 이때부터 광해군을 지지하며 권력을 얻은 북인, 그리고 이제 정당과 붕당을 비교해보자. 정당은 붕당과 마찬가지로

서인과 남인의 총 3가지 붕당이 존재하였는데, 서인의 인조반 정권의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인 조직이며, 다수인의

정으로 인해 광해군과 그를 지지하던 북인이 몰락하였다. 이 조직이고, 여당과 야당으로 구성되어 정치체계의 유지와 안정

당시 붕당은 서인이 권력을 잡고 남인이 비판과 견제를 하며 을 목적으로 하며, 정부를 조직하고 통제하며 정치 지도자를

두 세력이 공존하는 정상적인 구조였다.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 각 붕당은 예송 논쟁, 반정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정권을 획득하기 위해 서로 대립했다. 또한 집권당
서인과 남인은 제 18대 왕 현종 때 아버지인 효종이 승하 하
(여당)을 비집권당(야당)이 비판, 견제하면서 정치체계를 유지
였을 때(1차 예송)와 효종비가 상을 당했을 때(2차 예송) 상복
하고 안정시켰다. 뿐만 아니라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수정
을 입을 기한을 두고 대립한다. 이를 예의범절을 둘러싼 대립
하는 등 정부를 통제하는 역할도 했으며, 다수의 관리들이 참
이라는 뜻의 예송문제라고 부른다. 1차 예송 때는 서인이 승
여했던 거대한 조직이었다. 붕당에서 정치 지도자까지는 아니
리하였고, 2차 예송 때는 남인이 승리하였다. 예송이 벌어질
었지만 핵심적 부서(이조, 병조 등)의 우두머리가 배출되었다
때만 해도 정치구조는 남인과 서인이 공존하는 정상적인 구조
는 것도 정당과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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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당과 붕당의 차이점도 존재한다. 정당은 국민들이 정하지 않았으며 상호 비판, 견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였
나 각 집단의 요구를 표현하고 정책으로 집약하는 역할을 한 기 때문이다. 여러 인재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장을 마
다. 즉, 국민과 정부의 매개체인 셈이다. 또한 정당의 여론은 련하였다는 점도 수용하면 좋을 것이다. 또한 영, 정조 시대에
정당의 구성원들의 의견과 국민 여론을 종합하여 결정된다. 이루어진 탕평제도 부분적으로는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당은 의회제도와 선거제도가 성립되어야 존재할 수 왕이라는 한 권력자가 중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 맞
있다. 정당은 정치적 이념에 따라 분화되며, 정책 노선이 같다 추어 국민의 여론 혹은 각 당의 합의를 통해 공평한 인사정책
면 통합되기도 한다. 정당에서 야당과 여당은 민주적 절차에 을 펴는 형태로 말이다.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붕당의 여론은 정계에는 몸담지 않고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소수 산림의 주재에 의
지방에서 정당의 지도자 역할을 했던 ‘산림’이라는 지방 원로
해 붕당의 여론이 결정되었던 것과 같이 소수에 의해 정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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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따라서 붕당의 여론에는 일반 백성
여론이 결정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고 양반의 의견만이 반영되었기 때문
국민의 의견이 정당의 정책결정과정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할
에, 붕당은 백성들의 요구를 대변하지 못했다. 게다가 붕당이
뿐더러 자칫하면 정당의 민주화가 이루어 질 수 없기 때문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된 과정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붕당은 자
다. 또한 북인의 권력 독점 시도나, 환국 후 서인의 일당 독재
체 분화 되었기에 설립될 때 의회제도와 선거제도가 필요하지
화 같이 서로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행위도 배제되어야 한다.
않았다. 그리고 붕당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붕당은 각자
정당의 상호 비판, 견제의 기능이 사라지고 국민을 위한 정책
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화되었고, 통합은 없었다. 붕당의 통합
의 개발에 소홀해지기 때문이다. 정당은 이 점을 배제하고 주
이 없었던 이유는 아마 공익이 아닌 사익을 위해 행동했기 때
체적으로 자당의 정책을 실현해야 할 것이다.
문일 것이다. 붕당에서 여당과 야당은 정당과 달리 왕의 신임
여부나 붕당 간 대립의 승패로 결정되었다. 북인이 광해군의 지금까지 조선의 붕당과 현대의 정당에 대해서 알아보고, 정

신임으로 집권한 것이나, 예송 때 서인과 남인 중 대립에서 승 당과 붕당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해보았다. 그리고 이를

리한 붕당이 정권을 잡은 것을 대표적 사례로 들 수 있다. 통해 붕당으로부터 현대의 정당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보
았다. 보다 민주적인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정당이 붕당의 장
이처럼 정당과 붕당 사이에는 여러 가지 공통점과 차이점이
단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정당의 발전에 활용했으면 좋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들 중 어떤 것을 수용하고 어떤 것
다.
을 배제하여 정당의 발전에 활용해야 할까? 우리는 붕당 초기
의 모습을 수용해야 한다. 초기의 붕당은 상대 당의 존재를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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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오피니언

한국 디아스포라
Korean Diaspora

글 | 최효주 암스트롱 교수는 한국 디아스포라와 그 최근 100년간의 영향에 대해 분석했습니다. 19세기 후반 한국인들의 이주는
과거의 대이동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교수는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디아스포라가 일어난 이유에 대해 한국이 급변하는
세태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디아스포라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파악
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는 그 사람들이 전세계 여러 나라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암스트롱 교수는 한국이 분단 국가이기 때문에 한국 디아스포라와 관련된 사람들이 정체성과 이념의 혼란을 겪을 수
있다고 한다. 한국이 불안정한 사이, 놀랍게도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도 본인들의 이념에 따라 정치적인 의견 표출
을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 한국의 공산당은 소련과 중국에 사는 한국인들이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동포들
이 모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살지만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미국의 한인 인구가 이민 2세대를 맞이하는 반면 러시아와 중국의 한국 이민자들은 벌써 5세대를 지나고 있습
니다. 우리 동포들은 놀랍게도 일본을 제외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중산층에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기독교인’이라는
트렌드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국 동포들이 한국 디아스포라 이후 스스로 변화를 일으킨 점도 있지만
아직 한국과의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개인적으로 가족들이 로스앤젤레스에 살지만 아직
한국의 주요 명절들을 지내며 최소 일년에 한번은 한국을 방문해 친척들과 함께 지내곤 합니다. 전세계에 퍼져있는 한
인 사회가 발전한 이유는 한국 이주민들의 끊임없는 지원이라는 사실을 반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디아스포라의 또 다른 영향을 설명하자면 세계에 불어 닥치는 ‘한류 열풍’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한국 문
화는 마치 들판에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불처럼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 음악 산업은 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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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원더걸스가 미국의 인기 스타인 조나스 브라더스와 저스틴 비버의 콘서트에서 오
프닝 무대를 맡기도 하고 빅뱅 멤버인 태양의 ‘웨딩 드레스’라는 노래가 네덜란드 빌보드 차트에서 3위를 하기도 했습
니다. 이러한 노력들은 세계 각지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외국 음반 산업이 K-pop을 받아들
인다는 것은 한국 문화를 받아들인 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한국 디아스포라는 한국의 복잡한 근현대사를 보여주는 우리 역사의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디아스포라는 사회


급변동과 정치 불안정 등으로 처음으로 되었지만 현재는 세계에 퍼져있는 한국인들로 인해 우리나라를 더 알리는 새로
운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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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오피니언

한국인의 열정
열정이란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 이 아니라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구호 아래 붉은 옷을 글 | 박서영
음을 뜻합니다. 인간이 가진 그 어느 감정보다 더 깨끗하 입고 하나가 된 한국민의 단결심과 열정이 진정 그들을
고 뜨겁게 활활 타오를 수 있는 열정은 때로 지나치게 불 놀라게 했던 것입니다. 인간 승리에 가까운 결과의 중심
타올라 자칫하면 데일 수도 있습니다. 이 감정은 내가 잘 에 있던 한국인 특유의 국민성, 바로 한 마음으로 축구 대
아는 나라를 닮았습니다. 바로 대한민국을. 표팀을 응원하는 열정 말입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소개하는 데 있어 이 단어가 빠질 그러나 이 열정은 비단 특정 시기에만 표출되는 것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의 제목과 주제를 ‘열정’으로 아닙니다. 한국인의 일상에는 그 특유의 열정이 녹아 있
잡았습니다. 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로워진 지금까지도 한
한국인의 뜨겁다 못해 끓어 넘치는 열정을 단적으로 보 국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일어나고 가장 늦게 잠드는 나
여주는 예가 바로 2002 한일 월드컵입니다. 일본과 공동 라들 중 하나입니다. 새벽 별을 보고 잠들고 새벽 별을 보
으로 개최한 월드컵이었지만, 88올림픽 이후로 그만큼 큰 고 일어난다는 뉴욕 한인들의 부지런함에는 끊임없이 꿈
행사를 주최해보기는 처음이었던 우리나라는 당시 흥분 틀대는 야성과도 같은 열정이 숨어 있습니다. 한국의 아
의 도가니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2002년의 여름 빠들이 철야를 마다하지 않고 늦은 밤에도 열심히 일하는
은 비단 날씨 때문이 아니었더라도 한층 더 뜨거웠던 것 것도, 한국의 엄마들이 유난스러울 만큼 억척스러운 것
같습니다. 사상 최초로 우리나라가 4강에 올랐던 때 온 국 도, 한국의 학생들이 꽃다운 청춘을 반납하고서 밤낮없이
민은 이미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축구 역사상 유례 없 책에 코를 박은 채 공부에 매달리는 것, 이 모든 것들이 한
이 모든 국민들이 빨간 옷을 입고 한 목소리로 같은 응원 국인의 열정을 잘 보여줍니다. 즉, 열정이라는 단어는 한
가를 부르며 때로는 카드를, 때로는 대형 국기를 미리 맞 국인의 생활 곳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춘 순서로 흔들며 그 순간의 열정을 불태웠었습니다. 당 한국인의 열정은 때로는 무식함으로, 때로는 급한 성질
시만 해도 한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가려진 동양의 알 로, 때로는 무례함으로 오해 받곤 했습니다. 한국인의 열
려지지 않은 나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002 월 정의 온도를 미처 가늠하지 못한 일부 외국인들에게서 이
드컵 개막 직전만 해도 일본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췄던 러한 오해가 특히 더 잦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외신들은 한국이 보여준 경이로운 선전에 경악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그런 오해를 하는 외국인들, 심지어 우리
작은 고추가 맵다더니, 동양의 작은 나라일 뿐이었던 한 국민들에게도 밝히고 싶습니다. 불타오르는 청춘을 닮은
국이 상상 이상의 경기를 펼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열정이야말로 우리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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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보여준 것은 단순한 축구 실력뿐이 아니었습니다. 입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인을 한국인답게 만든 요인이
외국인들을 감탄하게 한 것은 비단 한국 축구의 저력뿐만 고, 한국만의 매력의 결정체나 다름없으니까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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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오피니언
What it Takes to Make People Care
글 | 윤세연 HIFCO의 회원이라는 사실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만듭 Goryeo가 고려의 원래 발음에 더 가깝지만 외국인들에
니다.’ 길거리를 가다가도 한국 역사나 문화와 관련된 포 게는 Koryo가 더 발음하기 편할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스터, 팜플렛, 또는 광고가 보이면 걸음을 멈추거나 되돌 Goryeo와 Koryo 둘 중 어느 것으로 표기를 해야 할까요?
아가서 유심히 쳐다보곤 합니다. 제가 HIFCO에 가입하기
이러한 문제는 우리 역사 알리기뿐만 아니라 우
전에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홍보하는 일에 이렇게 관심
리 문화를 널리 알리고자 하는 노력에서도 볼 수 있습니
이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몇 개의 프로젝트에 참
다. 며칠 전 막걸리의 영문 표기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가 후, HIFCO가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를 좀 더 이해하게
있습니다. 정부가 막걸리를 세계적으로 즐기는 음료로 발
되었습니다. 특히 국립 중앙 박물관에 방문했을 때 한국이
전시키기 위해 “Drunken Rice”라고 부르기로 했다는 기
앞으로 우리 문화와 역사를 세계에 알리면서 겪을 딜레마
사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누리꾼들이 이 결정에 반대했습
를 경험하면서 제가 HIFCO를 통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니다. 그들은 막걸리의 뿌리를 지키기 위해 다른 나라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도 막걸리로 불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반면 또 다른 누리
AP 세계사 시험을 본 이후에 국립 중앙 박물관 꾼들은 막걸리가 외국인들에게는 발음하기 힘들 수도 있
을 방문하여, 박물관의 연도표에 나와있는 모든 왕조와 나 으므로 발음하기 쉬운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고 주장
라 이름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가 공부 했습니다.
한 이름들과 연도표에 나와있는 이름들이 같지 않다는 것
결국 이 모든 문제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
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사전과 책에서 그 이름들을 찾아
들이 한국을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로 끝납니다. 한
봤고, 우리나라 왕조 이름 등의 영문 표기가 다르게 사용
국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과 세계화 시키는 것. 앞으로 한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를 들어, 고려왕조를 박
국을 널리 알리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지도 모릅니
물관에서는 Goryeo라고 표기했지만 제가 찾은 영어로 쓰
다. 그래도 긍정적인 부분은 한국인들이 이러한 문제에 관
인 책에서는 Koryo로 표기했습니다. 한국인들은 두 영문
심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사람들이 우리 문화와 역
표기를 보고 쉽게 고려왕조를 생각하겠지만, 외국인들은
사를 다른 나라에 알리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면 이런 딜레
그렇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Goryeo
마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이냐, 국
와 Koryo를 보고 혼동하진 않을까요? 두 표기법 모두 고
제성이냐의 문제는 우리가 가장 좋은 해결책에 도달할 때
려를 지칭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을까요?
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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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역사의 위기, 우리의 위기


서울대학교 교수 주경철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방향으로 나아갈지 지표를 제공하는 핵심 요소이다. 기
새삼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현재 우리의 역사 교육 억이 없으면, 다시 말해서 역사를 망각하면 민족 의식도
이 너무나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라지고 결국 좀비 같은 존재로 떨어질 것이다. 이것이
역사 공부의 의미를 일부러 묻는 데에는 요즘 우리 학생 국사의 기능이다. 한편 세계사는 조금 더 넓은 차원에서
들이 역사 공부를 워낙 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가다가 틀을 잡아주고 우리의 위치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우
는 우리가 어떻게 될지 걱정이 앞선다는 사실을 은연 중 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어떻게 해서 현재의 모습을 갖 역
에 포함하고 있다. 추게 되었는지는 세계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제
이제 누구나 알고 있는 비밀을 툭 터놓고 이야기해 보 우리 사회는 전 세계를 상대로 하고, 실제 세계 각국 사
자. 사회탐구 중에 여러 과목이 있지만 학교 차원이든 개 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럴진대 이 세계의
인 차원이든 거의 대부분 세계사를 선택하지 않는다. 너 기본적인 틀을 이해하지 못 하면 그 순간 우리는 지진아
무 외울 것이 많고 어려워서 입시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 신세가 되고 만다. 우리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 우리 스스 민
이라고 한다. 놀랍게도 국사 역시 필수에서 거의 멀어져 로 까맣게 모르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가 어떻
가고 있다. 이제 서울대학교에 가고자 하는 학생만 이 과 게 구성되어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 이것이 역사 교육
목을 열심히 공부하고 그렇지 않은 학생은 국사에서 손 실종 세대의 미래다.
놓게 되기 십상이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입시 준비에 심 우리는 역사를 애써 알지 않고도 그냥 살 수 있다. 그렇


신이 완전히 찌들어 있는 요즘 학생들에게 어느 대학을 지만 그것은 솔직히 말하면 3류 인생이라는 이야기다.
가든 그래도 국사는 공부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면 만일 당신이 장차 기업가가 돼서 외국의 교양 있는 파트


너무 한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래저래 요즘 학생들 너와 대화를 한다고 해 보자. 5분만 이야기 해 보면 서로
은 역사에 한해서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세대라 하지 않 상대방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이 사람이 탄탄한 지성
을 수 없다. 의 소유자인지, 완전히 텅텅 빈 깡통인지… 그 탄탄한 교
역사 공부를 하지 않아도 살 수는 있다. 지난 과거의 흔 양의 많은 부분은 우리 삶을 구성하는 많은 이야기들, 결
적을 잘 모른들 뭐가 그리 큰 문제냐고 되물을지 모른다. 국 역사라 할 수 있다. 현재 우리 교육은 미래 세대를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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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렇다. 오히려 지난 우리의 과거 역사를 잊고 맘 비 혹은 ‘깡통’으로 만들고 있다. 학생들은 정말 힘들게
편하고 생각하고 속 편하게 살 수 있으며, 어쩌면 과거의 공부하는데 결과적으로는 무지몽매의 인간으로 만든다
덫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미래를 향해 용감하게 전진할 는 것이 우리 교육의 비극(어쩌면 코미디)이다.
수 있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과연 그럴까? 입시에 찌들어 사는 학생들에게 아무리 바빠도 배울
역사는 비유하자면 일종의 집단 기억이라고 할 수 있
다. 기억이라는 관점에서 한번 생각해 보자. 흔히 하는
것은 배워야 한다며 국사와 세계사를 부지런히 공부하
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 교
상상으로, 내가 만일 자동차 사고로 뇌를 다쳐 어느 날 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 공부하는 중에 뭔가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병원 침대에 심각한 결핍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잘 알아야 한다. 그
서 깨어나 보니 내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겠고, 저 사람들 래야 나중에라도 채울 수 있다. 프랑스혁명이 15세기 때
이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 내 동생이라고 하는데 도 이야기인지 19세기 때 이야기인지 모르고, 강희제와 옹
무지 알 수 없다. 열흘 전에 내가 무엇을 했는지 까마득 정제가 어느 시대 어느 황제이고 어떤 일을 했는지 모른
하고, 5년 전 혹은 10년 전 일이 하나도 기억에 없다. 이
렇게 되면 그야 말로 ‘나’가 실종되고 만다. 나의 정체성
다면 이것은 분명 심각한 상태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어
야 한다.

이 증발되고,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가 다 끊어지 내가 역사학과 교수라서 하는 말만은 아니다. 많은 대
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된다. 가만 학 교수들이 그런 말을 한다. 요즘 학생들이 도대체 너무
히 생각해 보면 나를 형성하는 핵심은 결국 내가 살아온 나 무식하고 너무나 무능력한 원인이 무엇인가 봤더니
지난 날의 경험의 누적, 곧 기억임을 알 수 있다. 그 근본 원인이 역사 지식의 부재에 있더라는…
역사는 한 집단이 공유하는 집단 기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대학에 가서 처음 할 일은 아마도 역사 책을 한
그것은 곧 우리 민족, 우리 사회가 누구이며, 지난 날 어
떻게 살다가 현재 어느 좌표에 와 있으며, 앞으로 어떤
두 권 읽어보는 일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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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독일인의 관점에서 본 한국
대원 외국어 고등학교 독일어 교사 Holger Preut

냉 전에 관한 정책의 면에서만 보더라도, 남한과


(서)독일은 비슷한 점이 많다. 두 국가는 각각 경
제 기적-한강의 기적과 라인강의 기적-으로 유명하며, 미
국의 확장 정책의 큰 도움을 받았고 성실하고 즉시 일할
수 있던 많은 노동력이 있었으며 세계 시장에서 수출로 많
은 이익을 받은 것도 비슷하다. 하지만 많은 독일인들은
아직도 한국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며, 한국을 아는 사람
들은 세계적 운동 경기에서 최근 점점 성공하며 첨단기술
제품을 잘 만드는 분단국가로만 인식하고 있다. 이 글을
통해 나는 한국의 특수성, 한국 사람들의 문화, 삶의 방식,
그리고 사고에 대해 좀 더 집중해보려고 한다 ▲ 북적이는 도심의 모습

한국은 사람들로 붐비고, 상업화되었으며, 빠르게 변하 은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이 얼마나 비슷한지 보고

고 있다.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수와, 거의 모든 곳에 놀라게 된다. 사람들의 패션, 자동차, 머리스타일, 소비성

위치해 있으며, 첨단화 되어있으면서도 전문적인 서비스 향, 그리고 여가 활동 등은 모두 비슷해 보이며, 이러한 평
균치를 벗어나는 사람들은 드물다. 한국은 또한 매년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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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제공하는 옷 가게, 레스토랑, 그리고 서구식 커피숍들


은 당황스러울 정도이다. 이국적인 아시아의 빌딩이나 문 외국인 신부들, 외국인 노동자들 또는 영어선생님 등이 들

화를 보기 위해 온 관광객들은 미국식 거리들과 신용카드 어옴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민족 구성이 단순하기

를 갖고 다니는 젊은이들, 그리고 서구식 옷을 입고 다니 로 유명하다. 심지어는 길가를 지나다니는 외국인을 찾아

는 한국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보기도 쉽지 않다. 유럽이나 앵글로 색슨족의 다양한 문화
가 이렇게도 민족적이고 핏줄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받아
유럽식 레스토랑이나 명품 매장을 제외한다면, 한국이 들여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심지어 한
서구세계로부터 받은 영향은 다분히 미국적이다. 많은 한 국인의 핏줄을 타고 난 외국인들도 스스로 공평하게 대우
국인들이 아직도 ‘서구’라고 하면 미국문화를 떠올리며, 받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며 백인보다 흑인들의 경우 한국
서양으로 이민을 간다고 하면 보통 미국을 생각한다. 미국 에서 지내는 것이 더 힘들다고 여길 수 있다.
에서의 한국인 디아스포라는 엄청나다; 미국의 운동들은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으며 많은 한국 대학교들에는 미국 한국인들은 급한 성격을 지녔지만, 야망적이고 열정적

인 교수나 한국인이지만 미국에서 졸업을 한 사람들이 굉 이다. 그들은 종종 서두르고, 이러한 모습은 관광객들의

장히 많다. 한국에는 아직도 수 만 명의 미군이 주둔해 있 입장에서 보면 무언가가 급하게 되어야만 한다는 느낌으

으며, 학교에서는 영어수업을 하고, 교통 시스템도 미국의 로 다가온다. 또한 한국인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1등을 하

것을 일부 차용한 듯 하다. 는 것을 좋아하는 듯 하다. 유명 학교나 대학들은 세계적


리더를 기르겠다고 하며 각종 가게에는 이러저러한 것에
한국에서 있었던 종교 다양화 운동을 무시해보면, 한국 최고이다. 그들이 항상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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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그들의 ‘진심을 담는 태도’와 ‘끝까지 하는 지구력’은 황스러울 정도이다. 한국에 처음 오는 외국인들은 올바르
한국을 세계적 위치에 올려놓았다. 예를 들어, 한국 학생 게 행동하지 못하여 한국인에게 모욕을 줄까 걱정해야 할
들은 학업 성취도 부문에서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며, 세 수도 있다. 한국인들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는지’를 크
계적으로 2번째로 큰 선교활동을 했었으며, 아직도 대형 게 신경쓰기 때문에, 공공의 조화와 예의 바른 행동을 하
선박을 제작하는 공업들은 빠르고도 품질 좋은 배를 만드 려고 하며, 이러한 경향은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는 한국 쪽으로 넘어왔다. 사실, 대부분의 독일 회사들은 사람 앞에서 더욱 심해진다. 이것은 또한 대중과 개인이라
공식적인 시간보다 2배 가까이 일하면서도 독일인들처럼 는 이중적 잣대를 만드는 데에도 기여했을 수 있다. 한국
추가적인 이윤을 바라지 않는 한국사람들을 매우 고용하 의 사이버 공간은, 예를 들자면, 익명성의 자유로운 대화
고 싶어 할 것이다. 들의 공간으로 맹렬하고 공격적이며 비판적인 대화들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은 한번 친해지면, 호의적이고, 따뜻한 마
음을 지녔으며 다정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강력한 옆 국가 성별간의 가치와 일의 구분은 한국에서는 굉장히 심하
인 일본에게 역사적으로 지배 받았었기 때문일까? 한국인 다. 여자들은 보통 분홍색을 가장 선호하며 남자아이들은
들은 외국인들은 한국말을 하지 못하며 한국 문화를 이해 파란색을 가장 좋아한다. 여자대학교가 흔하며, 여자들은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외국인들과 길게 대화하지 커피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거나 요리를 하는 반면, 남자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이 워낙 들은 떼지어 밤새 외박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한국
많기 때문에, 몇몇 백인들은 ‘영국식 우정’의 대상이 될 수 사회가 모계적이고 ‘여성의 힘’이 점점 증가하고 있지만,
있다. 보통 백인들을 미국, 혹은 영국 사람들로 여겨지고, 한국인의 삶에서는 남성 중심의 모습이 쉽게 발견된다.
그들이 한국말로 대화를 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어를 배
독일인들은 ‘외부에서’ 적용되는, 국가적 복지 제도에
우려는 외국인 학생들 역시 한국어를 배우는데 어려움이
의해 삶의 질을 보장받는다. 한국의 경우는 반대로 가족에
있을 수 있다.
서부터, 즉 ‘내부에서’ 복지를 기대한다. 특히, 각 가정의
한국인들은 또한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다른 한국인 어머니들은 가족의 ‘웰빙’을 위해 각가지 방법을 쓴다. 대
이라도 얘기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단 내에 부분은 교육을 통해 이러한 삶의 질을 찾고 있으며, 가족
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식당은 항상 같이 일하는 동 의 많은 재산이 사교육이나 단기간 해외 연수를 위해 사용
료들이나, 가족 구성원들, 학교 친구들, 또는 동네 친구들 된다. 자식을 굉장히 사랑하는 문화가 있지만, 이는 자식
의 모임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단체의 크기는 특히 교회 들의 교육을 거의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모습으로 변질되
나 국가적 문제가 있을 때 더 커지는 경향이 있다. 독일에 었다. 독일의 학생들이 이른 오후에 공부하는 것을 끝내는
서는 환영 받지 못할 애국심과 국가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 반면, 한국인들의 생활은 방과 후에도 영어를 배우고, 한
이 한국인들에게는 쉽게 관찰된다. 문, 피아노, 수학 등을 배우는 일과로 가득하다. 독일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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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진로를 개척해나가고, 대학은 그
한국에서는 지위, 외모, 그리고 아름다움이 굉장히 중
중 한가지 방법으로만 여겨지는 데에 비해 한국에서는 역
요하다. 한국은 굉장히 유교적인 사회라서 한 사람을 이해
사적으로 대학에 가고 각종 시험에 통과하는 것이 주된 성
하는 데에 나이와 사회적 위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한
공방법이다.
국인들은 ‘그들이 누군지’ 알고 있으며, 늙은 세대에서는
가족적 배경이나 좋은 교육이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한국 사람들은 서양의 것들을 좋아한다. 바흐, 베토벤
결정한다. 한국에서는 지하철역이나 엘리베이터, 심지어 그리고 모차르트의 음악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연주되고
는 산에 있는 공원에서도 거울이 있다. 여성들은 보통 자 가르쳐지며 유럽 스타일의 식당과 제품들 역시 굉장히 유
기 자신을 완벽하게 꾸미며 서양인 같은 외모-작은 얼굴, 명하다. 하지만 ‘서양의 것이 최고다’라는 생각이 만연하
큰 눈, 높은 코와 작은 광대뼈- 등을 선호하여 젊은 여성 여도, 한국인들은 유럽 문화를 그들의 전통의 그것에 위협
들 중에서는 성형수술을 받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 잘 생 이 되는 것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비록 오래된 동아시아의
긴 것은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말투와 연결되어 생각된다. 모습이며 서양의 생각, 기술 등이 차용되고 바뀌지만, 한
독일인에게 공식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한국인 국의 정신은 기본적으로 굉장히 동아시아적이다. ■

들이 보여주는 엄청난 수준의 교양은 흥미로운 동시에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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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최고 (最古)와 최고 (最高)
칠레가톨릭대학교 아시아프로그램 교수 민원정


간이 허락하는 한 아시아와 관련된 행사는 모두 히 말씀 드리자면, ‘일본해’가 아니라 ‘동해’입니다’라고
보는 편이다. 학회, 전시회, 공연 등을 보면서 국 말하자, ‘아, 참, 동해지’ 한다. ‘일본해’라고 생각한다면
가별로 어떻게 행사를 조직하고 홍보하는지, 그리고 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차라리 논리적인 의견을 댔으면
레사람들의 반응은 어떤지를 살핀다. 나았을 것 같다.
모 대학에서 한국과 관련된 세미나를 한다고 해서 보 저명한 경제학자라는 교수님은 한국경제발전의 원동
러 갔다. 남북문제에 대한 발표를 듣자니 한국은 전통적 력은 모두 ‘일본’ 덕이라고 설명했다. 일제지배는 1905
으로 중국과 일본의 영향을 죽 받던 나라고, 그래서 오늘 년부터고, 50년간의 일제 식민지가 끝나고 일본인들이
날 남북문제도 남한과 북한이 단독적으로 해결하지 못 남기고 간 산업시설을 기반으로 한국이 발전했다는 게
하고 중국과 일본의 개입을 받는 거라는 논리가 나왔다. 그 분의 생각이었다. 90년대 말 아시아경제위기를 단기
발표자는 중국전문가라고 하는데, ‘중국과 일본의 영향’ 간에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불교와 신토이즘에 근거한
이라는 말을 계속 듣고 있자니 비위에 거슬리고 남한이 한국인들의 정신력이라고 한다. ‘신토이즘은 한국과 관
든 북한이든 ‘한국’ 자체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인식 방 련 지을 일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자, 오히려 네가 잘 몰
법에, 저런 시각으로 왜 남의 나라를 연구한다는 거야 라 라서 그런다고 한다. 식민기간은 1910년부터 1945년까
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라고 말하자, 자기가 볼 때는 역사 자체가 식민지로 보
아시아와 관련된 수업에서 각기 전공이 다른 교수들 인다고 한다.
이 한국에 대해 설명한다고 해서 ‘교수님들의 고급스런 2004년 BBC 인터넷 판은 경상남도 울산의 반구대 암
스페인어를 배우고 싶다’고 핑계를 대고 매 시간 들어가 각화 (국보제285호)에는 선사인류가 고래를 잡기 위해
봤다. 일본에 오래 계셨던 교수님은 당신이 한국 방문 시 작살과 부구, 낚싯줄을 사용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고
찍어 온 사진을 보이며, ‘금속활자’는 서양 보다 이미 ‘중 소개하면서 이는 세계 최초의 고래잡이 흔적이라고 소
국과 한국’에 이미 존재했다고, 일제지배는 ‘현대화’라 개했다. 한반도 곳곳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은 우리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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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긍정적인 면과 ‘한국인들에게는 힘든 시기’였다는 부 이 약 2만년 전에는 “세계 최초”로 쌀농사를 지었으며,


정적인 시각이 있다고 설명한다. 약 8천년 전에 “세계 최초”로 배를 만들고 고래잡이를
지리를 전공한 교수님은 그 날의 테마가 ‘한국’인데 하고 고인돌과 빗살무늬토기를 만들었다는 것을 말해주
‘일본해’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없다. 수업이 끝나고, ‘감 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우리민족은 “세계 최초”로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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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활자, 측우기, 거북선을 발명했고, 20세기 이후에는 다 한국에도 관심이 생겼다고 한다. 늘 검은색 메니큐어
각종 “세계 최초”의 신기술을 개발해왔다. 를 칠하고 눈 주위에는 검은색 섀도우를 바르고 다니는
그런데, 정작 외국인들에게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데 처음엔 보는 것만으로도 섬찟했다. 그러나 알레한드
물어보면, 과연 몇 명이나 “세계 최초”로 고래를 잡고, 로는 중간 시험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고 비록 해저판이
금속활자, 측우기, 거북선을 만든 나라라고 대답할까. 몇 지만 스페인어 자막이 깔린 한국영화를 구했는데 수업
년 전 칠레에서 한국과 한국인의 이미지에 대해 조사해 시간에 같이 보면 어떻겠냐며 가지고 오고는 한다. 페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북분단, 경제발전, 칠레 한인 드로는 2007년 미스유니버스에서 이하늬를 보고 반해
촌, 테크놀로지, 태권도 등을 꼽았다. 그러나 남북분단에 YouTube를 뒤지다가 가야금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
대해 알고 있어도 정작 아시아에 관심 있는 지식인층이 다.
아니면 남한과 북한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신 지금 나와 함께 한국문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한국
문에는 한국이 “세계 최초”로 해양플랜트 설계 핵심기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내 고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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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개발했다거나, “세계 최초”로 신종플루백신을 개 과연 우리나라를 얼마나 객관적으로 가르칠 것인가, 그
발했다는 소식은 보이지 않지만, 북한핵문제관련 소식 래서 어떻게 그들이 가슴으로 한국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은 끊이지 않고 나온다. 남한과 북한을 잘 구별하지 못하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지만 남북분단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일반인들은 칠레 우리는 속으로는 그 원동력이 ‘일본해’를 면한 중국의
와 북한은 외교관계를 맺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 한 부분인 한국이 ‘일본’이 만들어준 산업시설을 바탕
느 한국에서 온 거야?”라고 종종 묻는다. 으로 ‘신토이즘’ 덕에 정신력까지 갖춰 이룬 발전이라고
이들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한국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한국의 놀라운 경제발전에 감탄할 뿐’이라
강요할 수는 없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이해하고 표현해 고 말하는 외국학자를 보고 대단하다고 칭찬할 수도 있
주는 것만도 아니다. 외국인들은 때로는 의외의 것에서 다. 남북한을 잘 구별하지도 못하면서 남북문제에 대해
한국을 발견하기도 한다. 한국문화 수업을 듣던 안드레 고민하는 사람들을 보며 한국에 대해 조예가 깊다고 오
스가 처음 교실에 나타났을 때 ‘이게 뭐야’ 하고 깜짝 놀 해할 수도 있다.
랐었다. 양쪽 귀 여러 곳을 뚫어 귀걸이를 한 작고 통통 1997년 베를린에서 열린 G7 회담에서 당시 미국의
한 남학생이 ‘전 한국문화 수업을 꼭 듣고 싶었어요’ 라 부통령이었던 고어 (Gore)는 “금속활자는 한국이 세계
고 말하는데, 한국문화 수업을 듣고 싶다는 말이 신통하 최초로 발명하고 사용했지만, 인류문화사에 영향력을
고 반갑기 전에 겉모양에 놀라 흠칫했다. 그러나 안드레 미친 것은 독일의 금속활자이다” 라고 말했다. 우리 문
스는 학기가 끝나는 것이 그도 나도 서운할 만큼 공부를 화가 인류문화사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도록 자산을 가
잘했다. 꾸로 발전시키며 국력을 길러야 한다는 반성 이전에 우
이번 학기에 한국문화수업을 듣는 알레한드로는 늘 리가 진정 반성해야 할 일은, 금속활자가 한국에서 발명
검은 색 복장을 하고 다닌다. 일본 만화가 좋아 닥치는
대로 보다가 어느 날 한국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그러
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조차 실제로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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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al Remarks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던 저희의 첫 간행물도 끝이 났습니다.

학업과 함께 진행해나가느라 힘든 점도 많았지만, 마무리 글을 쓰는 이 시점 지난 몇 달 간의 간행물 작업을 생각


하면 저희도 참 많이 성장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던 우리의 역사가, 문화가 조금 더 가깝게 다
가오고,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 사실들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은 저희에게 큰 영광이었습니다.

부족한 글들이지만, 저희의 작은 노력으로 한 사람이라도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고, 한국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할 수 있다면 저희는 너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이 간행물을 작업하는데 이리저리 힘 써 주신 모든 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늘 뒤에서 지지해주신 부모님들께 너무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간행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저희들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신 주창욱 선배님께 감사 드립니다.

이 간행물을 발간할 수 있도록 저희를 믿고 재정적으로 지원해주신 Gymboree, 호텔신라, PMC Production, 전
통문화생활학회에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또한 바쁘실 텐데 흔쾌히 저희의 인터뷰에 응해주신 백은실 선생님,
송승환 이사님 감사 드립니다.

함께 해준 모든 회원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끝까지 이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한국을 알리려는 HIFCO의 노력은 이제 시작입니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바르게 아는 날이 올 때까


지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Credit 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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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in Chief 이도언

Translator in Chief 예윤지

Layout in Chief 윤순명

Editing Team 김명선, 장석준, 민경현, 최세훈, 신연재, 우창균, 우주현, 임혜송, 배인해

Translation Team 권선향, 김지은, 여인영, 류정민, 최재훈, 김영은, 김민성, 이장원, 박지영, 조세연, 조협, 이경민,
조세연, 박서영

Layout Team 김수엽, 권기연, 장혜은, 김지윤, 박승은, 최경록

Article 민경현, 장석준, 이제인, 김명선, 주경철 교수님, Holger Preut, 민원정 교수님, 김명선, 이도언, 정세용,
안희섭, 홍애영, 홍새미, 고담비, 최현진, 배인해, 윤세연, 최세훈, 한지영, 임민혁, 최효주, 박서영, 정병훈, 한일 고등
학교

Interview 중요무형문화재 제 34호 강령탈춤 전수교육조교 백은실, PMC Production 대표이사 송승환

Supporters Gymboree, 호텔신라, PMC Production, 전통문화생활학회

Supervisor 대원외국어고등학교 배진희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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