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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FCO Magazine Ver. 1 - Kor
HIFCO Magazine Ver. 1 - Kor
www.hifco.or.kr
The organization do not claim any right for pictures used in the magazine.
Publisher: Lee Do Eon, Ye Yun Lee, Soon Myeong Yoon
사실 2009년 여름에 HIFCO를 시작할 때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역사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대학준비에 여념이 없고 심지어는 선택과목이 되어버린 역사에 대해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관심을 보일
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엔 단 10명 만이라도 저와 동참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 작년 여름이었습니
다.
하지만 현재 HIFCO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 지역에서 450여명의 한국학생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고
등학생 중심으로 회원을 모집하였지만, 지금은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회원이 다양합니다. 그만큼 대한민국에 애
국심으로 가득 찬 학생들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는 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해외에 나갔을 때, 보통의 사람들은 “Are you Japanese? (일본인이십니까?)”라고 물어보고, 아니라고 한다면
“Then are you Chinese? (그렇다면 중국인이십니까?)”라고 물어본 뒤, 그 또한 아니라 한다면 “Then where are
you from? (그러면 어디서 오신 것입니까?)”라고 물어본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기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
인들이 잘 모른다는 것이 저희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낮은 인지도는 분명 국제화 사회를 살아가
는 우리들에게 큰 약점이리라 생각하여 저희는 한국을 바로 알리는 간행물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번 간행물에서는 우리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와 우리나라를 아름답게 가꿔주는 문화유
산에 대해서 이야기도 해보려 합니다. 우리 역사에 대한 왜곡 사실을 고치는 것만큼이나 우리에 대해 더 많은 사람
들이 정확히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간행물의 목표는 매년 600만에서 700만 명의
외국인들이 방문하는 한국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를 제대로 알리는 것입니다.
사람도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할 때야 비로소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듯이, 모든 나라가 진실된 역사
를 갖게 되었을 때 자존감을 갖게 되고 이것이 결국 서로 존중하며 잘 살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 사실이 아닙니다. 역사는 우리의 현재이고, 미래를 향한 원동력입니다. 지금 이 순간 순간도
하나의 역사가 되어 훗날 우리를 지탱해주는 힘이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한국의 예전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보여드
리며 여러분들께 우리를 소개하려 합니다. 저희의 글솜씨가 한국을 모두 담아내기에는 부족하지만, 우리 나라를 아
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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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이나 독일의 입장에서 보면 북쪽에 위치하지만, 북유 의 의사는 반영하지 않으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서양국
럽의 기준에서 보면 남쪽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바다 가를 고려하는 점은 평등성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지도
는 ‘유럽대륙’의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북해’라는 명 제작 시 명칭은 해당 지역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이름을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이 처음 사용한 ‘독도’라는 명 분으로 그가 일본인들이 표목을 세우고 벌목을 하고 있다
칭은 현재 이 섬의 공식 명칭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홀로 는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자, 조정은 즉시 일본에 항의 서
‘독’, 섬 ‘도’를 사용하는 독도의 뜻을 한자 그대로 풀이하 한을 보내고 울릉도 재개척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울릉도
여 ‘외로운 섬’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잘못된 발음으 에서 400여 년 간 실시되었던 쇄환정책과 수토 정책 대신
로 인한 착오였다고 합니다. ‘독도’라는 명칭 이전에 쓰이 울릉도 관리 정책이 수립된 것이 모두 그의 덕택입니다..
던 ‘석도’를 발음하면 ‘독섬’이나, ‘돌섬’이 되는데, 이를 세 번째로 20세기에 들어와 독도를 위해 남다른 헌신을
초기 이주민이었던 전라도 남해 출신의 사람들이 발음을 하신 분이 한 분 계셨습니다. 홍순칠이 바로 그 사람인데
잘못하면서 이름이 ‘독도’로 정해졌다고 합니다. 요, 그는 1952년 울릉도 경찰서의 마당에서 "시마네현 오
이렇게 독도에는 굉장히 다양한 이름이 있습니다. 이제 키군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竹島)"라고 쓴 표목을 발견
두 번째 주제인 ‘독도를 지킨 사람들’로 넘어가겠습니다. 한 후 독도를 지키기로 결심했습니다. 이후 그는 군에서
제대한 청년들을 규합하여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였
(2) 독도를 지킨 4인 습니다. 홍순칠은 독도를 지키기로 결정한지 약 1년 후인
1953년 4월에 독도에 첫 상륙을 하였고, 이후 독도의용수
독도를 지킨 사람이라고 하면 누가 생각나세요? 많은 사
비대를 이끌면서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과 수차례의 총
람들이 독도 하면 안용복만을 떠올리지만, 그 이외에도 많
격전을 벌였습니다. 그의 활동은 오늘날 독도를 실효적으
은 사람들이 한국 최동단의 섬인 독도를 지키기 위해 많은
로 지배하는데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노력을 하였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네 명의 인물에 대
마지막으로는 독도주민등록 1호인 최종덕씨에 대해서
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1980년에 일본이 다시 독도의 영
제가 제일 먼저 소개할 인물은 이 셋 중 가장 먼저 독도
유권을 주장하자 “단 한 명이라도 우리 주민이 독도에 살
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안용복입니다. 그가 독도를 위해
고 있다는 증거를 남게겠다”며 1981년 10월 14일 주민등
한 일은 한 편의 영화와도 같습니다. 안용복은 출신이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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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에 독도를 주소지로 등재했습니다. 그 이후 그는 22년
동안 독도에 거주하면서 몰골을 발견하고 집과 계단을 설
치하는 등 후세의 편익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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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이 간도에 대한 실질적인 행정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 이 같은 문제 때문에 국내전문가들은 변경문제 연구에 관
니다. 해서는 정부가 중심이 되어 연구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
조선은 1903년에 북간도를 함경도에, 1909년에 서간도를 고 있습니다. 국익과 직결되는 장기적인 전략을 세워야 하는
평안북도에 각각 행정적으로 편입시켰습니다. 이후 국가는 문제이니만큼 기획력을 갖춘 구심기관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
이 곳의 거주민에게 세금을 징수하여 행적과 군인훈련비 니다.
로 충당했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조선의 행정력이 간도에
도 똑같이 미치고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5.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가 간도문제를 직접 거론하
4. 동북동정과 간도영유권문제 고 나서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미래에 간도문제를 다시 협상
할 때도 한국이 간도 영유권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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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러분은 ‘역사왜곡’이라는 단어를 들으시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세계적인 이슈화가 되었던 독도 분쟁, 거짓을 써놓고
도 당당히 국정교과서로 인정하는 일본의 역사왜곡. 역사는 과거의 일이건만 그것을 지키고 고치려는 노력은 현재에
도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에 다양한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국을 제멋대로 재단하려는 노력을 하는 국가
는 일본만이 아니라는 것, 알고 계시죠? 일본에 버금가는 스케일로 중국도 열심히 역사를 마음대로 주물렀고, 그 연구의 성
과물이 동북공정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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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인의 유적, 유물은 중국의 문물과 고적이다. ◎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 그 근거로 고구려는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다.
고구려 민족은 중국 땅에서 활동했고 민족의 원류도 한민
이 주장의 반박은 고등학교 국사책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
족(韓民族)이 아니며, 현재의 조선족과는 역사적 연속성마
니다. 사료에 기록되길, 고구려에 새 왕이 뽑히면 중국에 조
저 존재하지 않으므로,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은 온전히 중국
공을 바치고 왕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중국의 주장은
의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조공을 바쳤으니 제후국이고, 조공을 받았으니 종주국이라
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대 역사학에서는, 조공을 단순한 주
2. 동북공정의 비판과 문제점
Historical Fallacy Correcting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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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을 마치며…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인 네이버 백과사전 ‘위구르족’, ‘서북공정’. ‘서남공정’. ‘위구르 문자’
연합뉴스 ‘중국 역사왜곡, 서남 서북에 이어 동북공정까지’ 우실하 교수 인터뷰 자료 ‘월간개벽’ 200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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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난타를 제작하신 송승환 PMC Production 대표님 고, 매 도시마다 앙코르 요청을 받는 등 뜨거운 관심을 받
을 인터뷰 해보았습니다. 한국의 문화와 난타의 세계로 여러 고 있습니다.
분을 초대합니다. 초연에서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나가기 전까지 계속
작품을 수정했습니다. 브로드웨이 연출자와 함께 작품도
Q. 난타의 역사를 간단하게 설명해주세요. 수정했습니다. 한국적인 독특함만을 가지고 공연을 구성한
- 난타는 1997년 10월 서울 호암 아트홀에서 초연을 했고, 2 다면, 독특함이 매력이 될 수는 있지만 글로벌한 보편성이
년 뒤인 1999년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에딘버러 프린지 페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스티벌 (Edinburgh Fringe Festival)에 참가하여 외국 프 저희는 구성에서 보편성을 찾았습니다. 전 세계 어디나 주
로모터나 극장 관계자들에게 알려지면서 해외공연을 본격 방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주방을 배경으로 하였고, 모든 요
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리사들에게서 보이는 하얀 요리사 옷이 배우들의 옷이 되
Q. 난타를 제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었습니다. 한국적인 박자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공연이지
- 난타를 만들게 된 것은 우리 공연을 가지고 해외에 진출해 만, 이러한 보편성을 얻음으로 전 세계 어떤 사람이 보더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 세계에 한국 도 똑 같은 장면에서 웃고, 박수가 나오며, 함께 즐길 수가
을 알리고 싶었고, 문화 수입국에서 수출국이 되었으면 하 있게 된 것입니다.
는 마음에서 처음 만들게 되었지요. Q. 어떤 한국의 문화적인 부분이 잘못 알려져 있나요?
Q. 난타를 만드신 과정을 설명해주세요. - 우선, Korea하면 떠오르는 선택과 집중된 이미지가 없다
- 기획하는데 약 1년, 연습하는데 6개월 정도가 걸렸습니다. 는 것이 가장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파리를 생
세계로 수출할 생각을 처음부터 하고 기획을 하다 보니 가 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고, 일본을 생각했을 때도 떠
장 큰 문제는 언어였습니다. 그래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호주의 경우에도 이미지의 선
극을 만들게 된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다 택과 집중을 통해 호주를 생각하면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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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언어 없이 무대를 구성하려 와 풀밭 위의 캥거루가 떠오르게 되는데, 아직도 외국인들
에게 있어 한국의 이미지는 남북분단, 전쟁에 국한되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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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에 응해주신 송승환 대표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가장 유쾌한 풍자 탈춤 글 | 김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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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사진 | 엄향용
진주알
글 | 최현진, 배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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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 수선전도
경희궁 숭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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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경춘전 창덕궁 주합루
경운궁 중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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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탑 다보탑
불국사
신라 천년의 역사가 깃든
경주 역사유적지 글 | 홍새미
지이다. 그 중에서도 경주 역사유적지구 (Gyeongju Historic Areas)는 불국사는 통칭‘부처님의 나라’로 지상 위에 지어진 낙원이라고 할 수
신라의 오래된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있어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있다. 훼손된 부분이 많고 복원작업이 미숙하여 더 이상 과거의 완벽한
경주 역사유적지구에는 천 년 역사의 신라의 유적지라고 해도 과언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지금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신라의 아름다운 예
이 아닐 정도로 많은 신라 유적들을 보유하고 있는데 몇 개만 꼽아보자 술적 면모를 느낄 수 있다. 불국사는 크게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법신
면 석굴암, 불국사, 첨성대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오늘날까지 한국 불, 관음보살이 있는 네 영역으로 나뉘고, 각 불당으로 가는 길에는 아
Historical Fallacy Correcting Organization
고인돌
의 건축물과 불교역사연구에 많은 자료로 쓰이고 있으며, 관광객의 발 름다운 축조물들이 위치해 있다. 그 중에서도 청운교와 백운교는 부처
걸음 또한 끊이지 않고 있다. 한국의 학생들이라면 누구든지 알만한 이 의 나라로 갈 수 있는 세계로 통하는 다리를 표현한 건축물로, 아름다운
름들이고 그만큼 우리들에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유적들이 바로 경주 역 외형을 자랑한다. 다음으로 불국사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다
사유적지구의 대표 유적들인 것이다. 보탑과 석가탑이 있는데 이들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신라의 독특한 양
고 있어 외관상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역사학자들의 역사적 사료이기 먼저 석가탑은 단순한 외형을 갖고 있지만 완벽한 비례미를 통해 단
도 하다. 그 중에서도 석굴암과 불국사는 경주 역사유적지구와 따로 세 순미와 절제미를 뽐내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많은 탑들의 모방의 대상이
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만큼 이 유적들의 풍미가 뛰 되고 있다. 대조적으로 다보탑은 인도의 양식을 모방하여 만들어졌기
각 유적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석굴암은 경덕왕 (8세기) 로 같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신라인들의 과감한 시도를 보
때 건축된 유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유일한 인조 석굴이다. 이 여준다. 대비되는 양식의 건축물을 한 곳에 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것은 당시 굴 속에서 수행하던 인도인들의 풍습을 따르기 위한 것이었 때문이다. 그 밖에도 건축물의 세부적인 면까지 표현한 섬세한 조각이
다. 그러나 대부분의 돌이 단단한 화강암이었던 탓에 석굴을 만드는 것 나 선들은 유려하고 아름다운 신라인들의 예술성을 잘 보여준다.
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인조 석굴을 만들기로 결심했고, 그 결 한국의 유물과 신라의 유산을 한 눈에 보고 싶다면 경주 역사유적지
과 만들어 진 것이 석굴암이다. 석굴암의 내부는 당시 신라인들의 과학 구로 가보는 것이 어떨까? 단순한 문화의 멋이 아닌 옛 선인들의 지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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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하나같이 신라 특유의 예술성과 과학기술을 섬세하게 내포하 먼저 석가탑은 단순한 외형을 갖고 있지만 완벽한 비례미를 통해 단
고 있어 외관상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역사학자들의 역사적 사료이 순미와 절제미를 뽐내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많은 탑들의 모방의 대상
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석굴암과 불국사는 경주 역사유적지구와 따로 이 되고 있다. 대조적으로 다보탑은 인도의 양식을 모방하여 만들어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만큼 이 유적들의 풍미가 기 때문에 석가탑과 달리 화려하고 복잡한 구조를 보인다. 이 두 탑은
뛰어나기 때문이다. 서로 같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신라인들의 과감한 시도를
각 유적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석굴암은 경덕왕 (8세기)때 보여준다. 대비되는 양식의 건축물을 한 곳에 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
건축된 유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유일한 인조 석굴이다. 이것 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건축물의 세부적인 면까지 표현한 섬세한 조
은 당시 굴 속에서 수행하던 인도인들의 풍습을 따르기 위한 것이었다. 각이나 선들은 유려하고 아름다운 신라인들의 예술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돌이 단단한 화강암이었던 탓에 석굴을 만드는 것이 한국의 유물과 신라의 유산을 한 눈에 보고 싶다면 경주 역사유적지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인조 석굴을 만들기로 결심했고, 그 결과 구로 가보는 것이 어떨까? 단순한 문화의 멋이 아닌 옛 선인들의 지혜
만들어 진 것이 석굴암이다. 석굴암의 내부는 당시 신라인들의 과학과 와 눈을 즐겁게 해주는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을
미적 의식에 기초해서 만들어졌는데 석굴 내의 습도를 낮추기 위해 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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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의의
수원화성은 실학과 깊은 연관이 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서양의 과학과 기술 문명이 청나라를 통해 들어오던 때, 반계 이형
원의 실학 사상이 새로운 길을 열었고,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여러
실학자들이 축성에 이바지하였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조선 실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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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계 자연유산은 최상의 자연현상이나 뛰어난 자연미와 미학적 중 거문오름 용암동굴계는 지금으로부터 약 10~30만년 전에 거문오름에
요성을 지닌 지역을 포함한다. 또한 생명의 기록, 지형의 발달에 서 분출된 용암으로 만들어진 여러 개의 동굴이며, 이 동굴계에서 세계자연
있어 중요한 지질학적 진행 과정, 또는 지형학이나 자연지리학적 측면의 중 유산으로 지정된 동굴은 벵뒤굴, 만장굴, 김녕굴, 용천동굴, 그리고 당처물
요특징을 포함하여 지구 역사상의 주요 단계를 입증하는 사례여야 한다. 우 동굴이다. 만장굴은 용암동굴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만장굴과 김녕굴 역
리나라에서 최초로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지역은 제주도이다. 제주도는 시 모두 동굴의 길이와 규모면에 있어서 세계적이다. 벵뒤굴은 미로형 동굴
한반도 남서 해상에 있는 섬으로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화산지형으로 지 로서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통로의 형태를 보인다. 대부분의 용암동굴은 다
질학적 중요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수많은 측화산과 세계적인 규모의 용암 양한 규모와 형태, 지형, 그리고 동굴생성물을 보여주어 학술적으로 가치가
동굴, 다양한 희귀생물 및 멸종 위기종의 서식지가 분포하고 있어 지구의 높다. 세계적인 경관과 가치를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동굴은 제주도 해안 저
화산 생성과정 연구와 생태계 연구의 중요한 학술적 가치가 있으며, 한라 지대의 용천동굴과 당처물 동굴이다. 이들 동굴 내에는 용암동굴 내에서는
산 천연보호구역,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성산일출봉 응회환의 3개 구역이 흔히 볼 수 없는 석회질 동굴생성물이 성장하고 있으며, 이들 동굴생성물의
2007년 6월 27일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규모, 형태, 분포 및 밀도는 가히 세계적인 수준이라 평가된다, 특히 종유
관, 종유석, 석순, 석주, 휴석, 커튼, 동굴산호 등 아주 다양한 동굴생성물이
한라산은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서 화산활동에 의해 생성된 순상(방
잘 보존된 이 동굴들은 전 세계적으로 용암동굴 내의 탄산칼슘으로 이루어
패모양) 화산체이다. 약 180만년 전부터 역사시대에 걸쳐 일어난 화산활동
진 2차 동굴생성물이 가장 발달된 동굴로 평가된다. 당처물 동굴은 규모가
으로 만들어진 한라산 정상부에는 한라산 조면암과 백록담 현무암이 분포
매우 작은 동굴이지만, 이 동굴 내에서 발견되는 석회질 동굴생성물은 세계
하며 한라산 조면암은 점성이 높으며 돔상으로 솟아 한라산을 더 웅장하게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용천동굴의 큰 규모와 석회질 동굴생성물은
만들고 있다.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화려한 장관을 이룬다. ■
성산일출봉은 제주도에 분포하는 360개의 단성 화산체 중의 하나이며,
약 12만년에서 5만년 전에 얕은 수심의 해저에서 화산분출에 의해 형성된
전형적인 수성화산이다. 높이 179m로 제주도 동쪽 해안에서 사면이 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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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야는 한반도의 남동쪽. 백제와 신라 사이에 존재했던 연맹 왕국이
다. 다른 고대 국가들에 비해 가야의 역사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적지만, 현존하는 문헌, 고분과 토기 등을 통하여 가야가 높은 수준의 문화
를 보유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미 잘 알려진 근거이다. 쌍어문이 아유타국으로부터 가야에 전해져 일본 동맹을 추진하지만 실패하고 신라가 남은 가야국들을 하나하나 병합하면서
에서까지 발견됐다는 사실은 아유타국의 존재뿐만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정 가야 연맹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세에서 가야의 위치를 말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김해의 한 고분에서 채취
같은 연맹왕국의 단계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한 고
한 DNA 분석 결과 허 황후의 후손이 인도 남방계열이라는 결론도 이 주장
구려, 백제, 그리고 신라와 달리 가야는 연맹왕국 단계에서 멸망한다. 신라
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이외에 ‘아리’라고 부르던 지방의 공주였던 허
와 고구려의 세력 확장 때문에 잦은 전쟁을 치러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할
황후가 양쯔강을 따라 가야국에 도착했고 이러한 여행길에서 불렀던 노래가
기반을 닦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야는 철 생산과 무역을 통해 번창했
‘아리랑’으로 전해져 내려왔다는 설 등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허 황후는 자
고, 발전된 농업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양질의 철광석을 생산하여 수출한
신의 후손들에게 성씨를 물려주는데 이들이 바로 김해 허씨이다. 따라서 김
사실은 역사 자료 곳곳에서 발견 할 수 있다. 철 수출국이라는 위치는 상대
해 허씨와 김해 김씨는 각각 허 황후와 김수로왕의 후손으로서 동성동본이
적으로 약한 가야가 고대 국가들 사이에서 버틸 수 있던 요인 중 하나였다.
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가야 토기는 일본에도 전해져 일본의 토기 문화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가야 전기에 웅천 지대 중심으로 발전한 적갈색 토기를 만드는 기술이 더욱
다양한 토기를 만드는 밑거름이 되어 일본의 도기인 ‘스세키’를 만드는 기술
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토기 문화를 통해 쌍어문으로 밝혀진 가야와 일본과
의 관계가 단지 정치적인 관계가 아니라 문화적 교류도 활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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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
히 역사를 배울 때 단골로 등장하는 문구가 있다. ‘과거를 통 인으로 남은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애국심이 강
하여 현재를 보고 미래를 예측한다.’ 이것은 동북아의 현실을 한 장군을 통해 발해의 뿌리를 찾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
한마디로 압축해주는 구절이다. 현재 한국은 새로운 미래를 주도하 을 수 있다.
며 이끌어 나가려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노력을 견제하는 중
최후의 로마인으로 칭송 받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스틸리코의 핏
국은 한국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동북아의 맹주로 부상하려는
줄은 로마인답지 않다. 그의 어머니는 로마인이지만 아버지는 북방
움직임을 보인다. 그러한 노력 중 하나를 든다면 동북아의 북방사를
의 게르만족, 그 중에서 반달족 출신이다. 아버지는 테오도시우스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하고자 하는 동북공정이다.
(346~395), 혹은 그전의 그라티아누스 (359~383) 황제 시절 귀화하
이에 대한 우리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동북공정의 주요 대상인 고 여 기병 장교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려와 발해 중 고구려는 건국 주체와 이념에서 중국과는 다름을 분
스틸리코는 20대에 제국의 중추
명히 하고 있다. 이는 광개토대왕릉비, 모두루묘지에서 확인할 수 있
로 부상했다. 페르시아와의 협상
으며, 풍부한 기록유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신뢰도가 높은 중국
에서 로마에게 유리하도록 협상을
측의 다양한 사서들이 이를 증명하며 , 한국의 정사인 삼국사기의 기
타결하는 데에 그는 결정적인 역
록 역시 무시할 수 없다.
할을 했고,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하지만 문제가 되는 쪽은 발해이다. 발해의 경우, 고구려만큼 많은 양녀이자 질녀인 세레나와 그를
유적이 발굴되지 않았고, 이에 대해 기록한 사서의 절대수가 부족하 결혼시켰으며, 이후 게르만족 격
다. 국조 대조영에 대해 기록한 중국 측 사서로 대표적인 것이 구, 신 퇴에 큰 공을 세운 스틸리코는 황
당서인데, 문제는 이들이 대조영의 출신에 대하여 다르게 서술하고 제의 서거 전 군사령관의 지위까
있다는 것이다. 구당서는 그를 고려별종 (高麗別種)으로, 신당서는 속 지 올랐다. 스틸리코는 황제가 아
말말갈 (粟末靺鞨)로 기록하였다. 이는 국조를 통하여 나라의 귀속 들의 후견을 부탁할 만큼 신임 받
여기서,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스틸리코 (Flavious 서로마 총사령관인 그는 마음만 먹으면 제위를 차지할 수 있었고 선
Stillicho). 그는 로마가 동서로 갈라진 시기 서로마의 군사령관이다. 왕의 지지도 무시할 수 있었지만, 그는 정적들조차 제거하지 않았고,
로마사에 생소한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중요한 심지어는 사형선고에 승복하였다. 마지막 그 순간까지 그는 자신을
것은 그가 로마를 진정으로 사랑했으며, 마지막까지 로마인다운 로마 로마인으로 여겼고, 옛 로마의 미덕을 존중했으며, 로마인으로써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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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타국의 인물 스틸리코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한 이유는 그의 그는 고구려인의 외교 전술을 답습했다. 즉위 후, 그는 돌궐의 추장
삶이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대조영과 유사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묵철에게 사절을 보내어 동맹 관계를 수립하고, 일본에도 외교 사절
단을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방식은 중국과 신라를 견제하기
먼저, 그들은 소속 국가의 순수 혈통이 아닌 국민이다. 앞에서 언급
위한 전략이었다. 건국 초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고구려다운
했듯 스틸리코는 반달족을 아버지로 가진 로마인이다. 마찬가지로 대
모습을 보여준다.
조영 역시 순수 혈통은 아니다. 구당서의 표현을 따르자면 고려별종
이다. 이것은 당시 동북아의 사회 질서 체제를 반영한 단어이다. 눈여겨볼 점은 대조영의 시호이다. 그는 죽은 후 고왕 (高王)으로 추
존되는데, 이는 그의 삶을 한마디로 보여준다. 시호에서 죽을 때까지
고구려는 순수 고구려인과 말갈인으로 나누어져, 초기 연맹 왕국의
고 (高 고구려)의 후예라고 칭하는 그는 진정한 고구려인이다.
단계로 시작되었다. 순수 고구려인은 졸본 (卒本)에서 추모왕 (鄒牟
王, 주몽)과 함께 건국에 참여한 무리를 말하지만, 말갈인 역시 고구 중국은 대조영을 말갈인이라 칭하고, 발해를 말갈의 국가로 여기는
려를 구성하였기에 마땅히 고구려인으로 불려야 한다. 그러나 엄연히 데, 이는 대조영을 단순히 현대적인 시각에서 보기 때문이다. 말갈인
본 고구려인과는 다르므로 (당시의 입장으로는) 이를 반영해 구당서 이 살던 곳은 현재 중국영토고, 발해의 수도 역시 중국의 영토이기에,
는 별종이라는 용어로 표기했던 것이다. 고려별종이라는 기록은 무시하고 속말말갈만을 현대적으로 보기 때
문이다.
이러한 결론은 신당서의 속말말갈에 대한 의문을 해소시켜준다. 속
말말갈이란 속말수의 말갈이라는 뜻으로, 오늘날의 송화강 지류로 보 이러한 논리는 혈통과 오늘날의 귀속 여부에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이는 태백산 (백수산이라 함)에서 발원했다. 고구려 영토 확장사에 따 는 현재 근대의 민족주의를 가지고 고대를 논의하고 있다는 뜻이다.
르면 문자왕(491∼519) 이전인 5세기 말 (494년)에 편입되었고, 668 그러나 근대와 고대는 시대부터 맞지 않는다. 근대의 민족주의는 강
년의 고구려 멸망까지의 기간을 보면 고구려에 동화되기에 충분한 시 제로 주권을 잃은 국가가 분할이나 다른 피해 없이 재립할 명분으로
간이다. 이것은 그가 고구려 지배층으로 동화되었고 고구려의 유력자 존재하는 것이다. 영토를 같은 혈통이 사는 지역으로 정의하려는 이
라는 점을 증명한다. 정리하면 대조영과 스틸리코 모두 방계이지만 유도 거기에 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민족의식의 관점에서도 생각해
모두 그 나라의 국민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보아야 한다. 당시 모든 고구려인들은 자신을 중국과 다른 민족으로
생각했고 이는 고구려의 독자적 세계관을 잘 표현한 광개토대왕릉비
두 번째는 스틸리코와 대조영 모두 그 나라의 사고방식을 따랐다는
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그 당시에도 열린 국경이었던 북방은 여러 민
점이다. 스틸리코는 로마인의 전통을 이용한 이이제이 전술로 로마
족이 교차한 곳이다. 북만주에서 한반도 전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를 구원했다. 또한 옛 로마인의 미덕 신사협정을 그대로 받아들였으
부족들이 병립한 곳인데, 이를 근대적 시야로 보는 것은 의미 없는 일
며, 이는 선황의 유지를 끝까지 지켜 억울한 죽음을 받아들인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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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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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부터 배운다 :
조선의 민중들은 어떻게 사회를 개혁하려고 하였는가?
18, 19세기 근대 태동기의 봉건적 사회에서 탈피하기 조선 민중들의 근대적인 사회를 향한 활동들은 정부에
위한 민중들의 노력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의존하지 않고 대부분이 민중 자체적으로 조직되었다. 부
패한 지배층에 대항하여 사회를 변혁시키고, 민족의 자주
첫째로, 민중 봉기는 근대 사회로 변화하는 최초의 움
적인 힘을 기르자는 민중들의 외침은 어두운 시대 상황
직임이었다. 19세기 조선의 백성들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이었을 것이다. 국내
잦은 침략과 부패한 관료들의 수탈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의 문란한 정치 기강과 외세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
있었다. 농촌의 경제가 파탄으로 치닫자, 백성들의 사회
지 못했던 관료들과는 달리 조선의 민중들은 근대화로 나
변혁에 대한 욕구는 점점 커져갔으며, 농민 운동으로 이
아가는 발판을 스스로 마련하였으며, 위기에 처한 나라를
어지게 되었다. 1894년, 역사상 가장 조직적이고 전국적
구하려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의 민중들은 장차
이었던 농민 봉기인 동학 농민 운동이 발생하였다. 이들
대한민국이 평등, 자유를 지향하는 사회가 될 수 있던 내
은 외세의 침략, 신분적인 차별을 배척했고, 그 당시로는
부적 역량을 지니고 있던 것이다. ■
획기적이었던 지금의 지방자치제와 비슷한 ‘집강소’를 설
치하는 것을 주장했다. 이와 같이 동학 농민 운동은 지배
계층 중심이었던 사회 구조에서 백성의 권리와 자치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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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한 것은 그대로 두었던 반면 대신의 허물을 기록한 것만을 삭 기 위해 강원도, 함경도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의병을 하여 훌륭하
제하였던 사건이다. 이에 예종은 대신들이 자기보다 더 무서운 것 게 그가 맡은 업무를 이루어 낸다.
이냐고 사관을 옥사시켰다. 또한, 세조의 묘 이름을 지을 때에는,
전란이 끝난 뒤, 광해군은 조선의 15대 왕으로 즉위한다. 광해
대신들의 8자 의견을 반박하며 자신의 의견대로 밀어붙여 12자
군은 피폐해진 국가의 재정을 회복하기 위해 토지 제도를 개선하
로 만들었다. 이러한 세조의 묘 이름과 관련된 논란은 단순히 부
는 등 나라의 내실을 다지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경제를 활성화
왕의 업적을 높이는 것 이외에, 부왕의 죽음으로 혹 느슨해질 수
시키기 위해 창덕궁을 중건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 그는 변방
있는 정치 권력을 제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궁 안의 모습
쪽의 지휘관들을 교체하고, 대포들을 주조하면서 국방을 강화한
과는 다르게, 예종은 병영에 딸린 논밭에서 일반 백성들이 농사를
다. 그러던 중 명나라와 여진족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면서 명은
지을 수 있게 하는 등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록 20세에
조선에 원군을 요청한다. 광해군은 신흥 강국인 후금과 마찰을 피
요절하긴 했지만, 성군의 자질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가 오
하기 위해 강홍립이라는 장군에게 군사 1만을 주어 명을 지원하
래 살아있기만 하였다면 대신들과의 세력 분배에 조화를 이루는
라고 보내면서 후금과 싸우는 것을 되도록 피하라고 명한다. 광해
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 적절한 중립 외교를 펼치면서 조선의 안전
을 확보한다. 또한 일본과의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하여 주변 나
세 종은 역사상 두 명뿐인 ‘대왕’칭호를 가지고 있을 정도
로 우리 국민이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왕 중 하나이다. 그 라들과 외교 관계를 개선한다.
는 1418년부터 1450년까지 32년 간의 재위기간 동안 정치ㆍ문
그는 비록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지만, 그 당시 현명한
화ㆍ사회ㆍ기술ㆍ군사 등 거의 모든 방면에 업적을 이루었으며
외교술을 통해 국제 정세에서의 평형점을 찾는 왕이었다.
사회 전반적 기틀을 잡은 임금이다.
세종은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상으로 생각하여 왕도정치를 영 조는 조선 왕조의 21대 왕으로, 탕평책과 일반 민중들을
위한 정책으로 현명한 정치를 한 왕이다.
펴고, 황희ㆍ맹사성과 같은 훌륭한 재상들과 이상적 유교정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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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
지도는 일본의 국보이다. 완벽히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가 공물로써 일본에 바친 것이 칠지도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칠지
칠지도는 일본이 고대 한국을 지배했었느냐를 둘러싼 논 도를 일본의 국보로 정해버렸다. 그러나 한국의 학자들은 당시 강
란을 잠재울 열쇠가 될 수 있다.. 력했던 백제의 태자가 “일본영주”에게 칠지도를 선물로 하사한
칠지도는 일곱 개의 가지를 가지고 있는 칼이라는 뜻으로, (七= 것이라 하며 일본측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곱, 支=가지, 刀=칼) 하나의 중심 가지와 그 옆에 달린 6개의 가 근초고왕은 마한을 백제의 영토로 만들었으며, 중국의 요서지
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 칠지도는 1873년 일본의 나라현에 위치 방과 산둥 지방까지 세력권을 넓힌 왕으로 칠지도가 제작된 시기
한 이소노카미 신궁 (신성한 궁) 의 경비였던 “마사모토”라는 일 의 백제의 왕이다. 그는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백제는 369년 전
본인에게 발견되었다. 이 신궁에는 궁 안에 보관돼있던 상자는 절 후로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또한 근초고왕은 왕권을 키우고 백제
대로 열면 안 된다는 금기가 있었으나, 마사모토는 금기를 어기고 의 문화와 문명을 일본 등에 전파했는데, 이 칠지도 역시 문화를
열었고, 칠지도를 발견했다. 전해주는 과정에서 전해졌다고 알려져 있다.
칠지도에는 61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앞면에는 “태화 4년 하지만 이처럼 일본과 한국의 주장이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369년) 음력 5월 16일 병오날 정오에 백 번이나 담금질한 강철 아직 아무 결론도 나지 않고 있다. 이 문제의 결론은 어느 쪽이든
로 칠지도를 만들었노라. 모든 군사를 물리칠 수 있도록 후왕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양국은 모두 이 문제에 대해 민감
게 주노라” 라고 써있고, 뒷면에는 ‘선대 이래로 아무도 이런 칼 하다. 만약 한국이 옳다면, 한국은 고대에 한번도 일본에게 지배
을 가진 일이 없는데 백제 왕세자는 덕이 있는 까닭으로 왜왕 지 당한 적이 없음을 증명할 수 있다. 반대로 만약 일본이 옳다면, 한
(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까지 길이 전해 보존토록 하라‘ 라 국은 지배당한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칠
고 새겨져 있다. 하지만 이 어구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으 지도의 문제는 상당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
면서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일본은 칠지도가 일본이 세계대전 때뿐만 아니라 고대 한국을
지배했다는 설인 임나본부설의 증거라 주장하고, 그 이유로 백제
영조가 실시했던 탕평책은 그 당시 조선에 큰 혼란을 일으켰던 장각을 육성하여 규장각이 과거제도의 시행과 초계문신교육을
붕당적 갈등을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처음 담당하도록 하였다. 초계문신제도란 젊고 유능한 인물들을 뽑아
에 각 붕당 간의 화목을 권하고 이에 협조하지 않는 관리들을 축 규장각에서 교육받도록 하는 제도인데, 정조는 그들을 직접 가르
출하였다. 나아가 그는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기 보다는 각 붕당의 치는 등의 방법을 통해 그들을 자신의 정치적 친위세력으로 만들
온건적인 인물을 등용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는 완벽한 탕평 정치 었다. 또한 그는 장용영이라는 왕실 친위부대도 만들어 자신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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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한민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정당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정당제가 500여년 전 한반도에 있
었던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도 시행되었다면 당신은 과연 믿겠는가? 형태는 조금 다르지만, 조선에서도 ‘붕당’이라고
하는, 정당과 비슷한 제도가 있었다. 이 글에선 정당제와 붕당제를 비교해보고, 그 속에서 교훈을 찾아 정당제를 좀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방향을 찾아보고자 한다. 먼저, 정당제와 붕당제에 대해 알아보자.
붕당끼리 서로 비판, 견제하여 균형을 맞출 수 있게 하는 등 붕당이라도 왕실의 친척과 관계가 없으면 등용되지 못했고,
서인과 남인의 총 3가지 붕당이 존재하였는데, 서인의 인조반 정권의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인 조직이며, 다수인의
정으로 인해 광해군과 그를 지지하던 북인이 몰락하였다. 이 조직이고, 여당과 야당으로 구성되어 정치체계의 유지와 안정
당시 붕당은 서인이 권력을 잡고 남인이 비판과 견제를 하며 을 목적으로 하며, 정부를 조직하고 통제하며 정치 지도자를
두 세력이 공존하는 정상적인 구조였다.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 각 붕당은 예송 논쟁, 반정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정권을 획득하기 위해 서로 대립했다. 또한 집권당
서인과 남인은 제 18대 왕 현종 때 아버지인 효종이 승하 하
(여당)을 비집권당(야당)이 비판, 견제하면서 정치체계를 유지
였을 때(1차 예송)와 효종비가 상을 당했을 때(2차 예송) 상복
하고 안정시켰다. 뿐만 아니라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수정
을 입을 기한을 두고 대립한다. 이를 예의범절을 둘러싼 대립
하는 등 정부를 통제하는 역할도 했으며, 다수의 관리들이 참
이라는 뜻의 예송문제라고 부른다. 1차 예송 때는 서인이 승
여했던 거대한 조직이었다. 붕당에서 정치 지도자까지는 아니
리하였고, 2차 예송 때는 남인이 승리하였다. 예송이 벌어질
었지만 핵심적 부서(이조, 병조 등)의 우두머리가 배출되었다
때만 해도 정치구조는 남인과 서인이 공존하는 정상적인 구조
는 것도 정당과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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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으로 집권한 것이나, 예송 때 서인과 남인 중 대립에서 승 당과 붕당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해보았다. 그리고 이를
리한 붕당이 정권을 잡은 것을 대표적 사례로 들 수 있다. 통해 붕당으로부터 현대의 정당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보
았다. 보다 민주적인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정당이 붕당의 장
이처럼 정당과 붕당 사이에는 여러 가지 공통점과 차이점이
단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정당의 발전에 활용했으면 좋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들 중 어떤 것을 수용하고 어떤 것
다.
을 배제하여 정당의 발전에 활용해야 할까? 우리는 붕당 초기
의 모습을 수용해야 한다. 초기의 붕당은 상대 당의 존재를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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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디아스포라
Korean Diaspora
글 | 최효주 암스트롱 교수는 한국 디아스포라와 그 최근 100년간의 영향에 대해 분석했습니다. 19세기 후반 한국인들의 이주는
과거의 대이동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교수는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디아스포라가 일어난 이유에 대해 한국이 급변하는
세태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디아스포라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파악
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는 그 사람들이 전세계 여러 나라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암스트롱 교수는 한국이 분단 국가이기 때문에 한국 디아스포라와 관련된 사람들이 정체성과 이념의 혼란을 겪을 수
있다고 한다. 한국이 불안정한 사이, 놀랍게도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도 본인들의 이념에 따라 정치적인 의견 표출
을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 한국의 공산당은 소련과 중국에 사는 한국인들이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동포들
이 모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살지만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미국의 한인 인구가 이민 2세대를 맞이하는 반면 러시아와 중국의 한국 이민자들은 벌써 5세대를 지나고 있습
니다. 우리 동포들은 놀랍게도 일본을 제외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중산층에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기독교인’이라는
트렌드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국 동포들이 한국 디아스포라 이후 스스로 변화를 일으킨 점도 있지만
아직 한국과의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개인적으로 가족들이 로스앤젤레스에 살지만 아직
한국의 주요 명절들을 지내며 최소 일년에 한번은 한국을 방문해 친척들과 함께 지내곤 합니다. 전세계에 퍼져있는 한
인 사회가 발전한 이유는 한국 이주민들의 끊임없는 지원이라는 사실을 반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디아스포라의 또 다른 영향을 설명하자면 세계에 불어 닥치는 ‘한류 열풍’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한국 문
화는 마치 들판에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불처럼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 음악 산업은 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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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원더걸스가 미국의 인기 스타인 조나스 브라더스와 저스틴 비버의 콘서트에서 오
프닝 무대를 맡기도 하고 빅뱅 멤버인 태양의 ‘웨딩 드레스’라는 노래가 네덜란드 빌보드 차트에서 3위를 하기도 했습
니다. 이러한 노력들은 세계 각지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외국 음반 산업이 K-pop을 받아들
인다는 것은 한국 문화를 받아들인 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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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열정
열정이란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 이 아니라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구호 아래 붉은 옷을 글 | 박서영
음을 뜻합니다. 인간이 가진 그 어느 감정보다 더 깨끗하 입고 하나가 된 한국민의 단결심과 열정이 진정 그들을
고 뜨겁게 활활 타오를 수 있는 열정은 때로 지나치게 불 놀라게 했던 것입니다. 인간 승리에 가까운 결과의 중심
타올라 자칫하면 데일 수도 있습니다. 이 감정은 내가 잘 에 있던 한국인 특유의 국민성, 바로 한 마음으로 축구 대
아는 나라를 닮았습니다. 바로 대한민국을. 표팀을 응원하는 열정 말입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소개하는 데 있어 이 단어가 빠질 그러나 이 열정은 비단 특정 시기에만 표출되는 것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의 제목과 주제를 ‘열정’으로 아닙니다. 한국인의 일상에는 그 특유의 열정이 녹아 있
잡았습니다. 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로워진 지금까지도 한
한국인의 뜨겁다 못해 끓어 넘치는 열정을 단적으로 보 국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일어나고 가장 늦게 잠드는 나
여주는 예가 바로 2002 한일 월드컵입니다. 일본과 공동 라들 중 하나입니다. 새벽 별을 보고 잠들고 새벽 별을 보
으로 개최한 월드컵이었지만, 88올림픽 이후로 그만큼 큰 고 일어난다는 뉴욕 한인들의 부지런함에는 끊임없이 꿈
행사를 주최해보기는 처음이었던 우리나라는 당시 흥분 틀대는 야성과도 같은 열정이 숨어 있습니다. 한국의 아
의 도가니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2002년의 여름 빠들이 철야를 마다하지 않고 늦은 밤에도 열심히 일하는
은 비단 날씨 때문이 아니었더라도 한층 더 뜨거웠던 것 것도, 한국의 엄마들이 유난스러울 만큼 억척스러운 것
같습니다. 사상 최초로 우리나라가 4강에 올랐던 때 온 국 도, 한국의 학생들이 꽃다운 청춘을 반납하고서 밤낮없이
민은 이미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축구 역사상 유례 없 책에 코를 박은 채 공부에 매달리는 것, 이 모든 것들이 한
이 모든 국민들이 빨간 옷을 입고 한 목소리로 같은 응원 국인의 열정을 잘 보여줍니다. 즉, 열정이라는 단어는 한
가를 부르며 때로는 카드를, 때로는 대형 국기를 미리 맞 국인의 생활 곳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춘 순서로 흔들며 그 순간의 열정을 불태웠었습니다. 당 한국인의 열정은 때로는 무식함으로, 때로는 급한 성질
시만 해도 한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가려진 동양의 알 로, 때로는 무례함으로 오해 받곤 했습니다. 한국인의 열
려지지 않은 나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002 월 정의 온도를 미처 가늠하지 못한 일부 외국인들에게서 이
드컵 개막 직전만 해도 일본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췄던 러한 오해가 특히 더 잦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외신들은 한국이 보여준 경이로운 선전에 경악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그런 오해를 하는 외국인들, 심지어 우리
작은 고추가 맵다더니, 동양의 작은 나라일 뿐이었던 한 국민들에게도 밝히고 싶습니다. 불타오르는 청춘을 닮은
국이 상상 이상의 경기를 펼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열정이야말로 우리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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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회
사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방향으로 나아갈지 지표를 제공하는 핵심 요소이다. 기
새삼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현재 우리의 역사 교육 억이 없으면, 다시 말해서 역사를 망각하면 민족 의식도
이 너무나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라지고 결국 좀비 같은 존재로 떨어질 것이다. 이것이
역사 공부의 의미를 일부러 묻는 데에는 요즘 우리 학생 국사의 기능이다. 한편 세계사는 조금 더 넓은 차원에서
들이 역사 공부를 워낙 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가다가 틀을 잡아주고 우리의 위치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우
는 우리가 어떻게 될지 걱정이 앞선다는 사실을 은연 중 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어떻게 해서 현재의 모습을 갖 역
에 포함하고 있다. 추게 되었는지는 세계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제
이제 누구나 알고 있는 비밀을 툭 터놓고 이야기해 보 우리 사회는 전 세계를 상대로 하고, 실제 세계 각국 사
자. 사회탐구 중에 여러 과목이 있지만 학교 차원이든 개 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럴진대 이 세계의
인 차원이든 거의 대부분 세계사를 선택하지 않는다. 너 기본적인 틀을 이해하지 못 하면 그 순간 우리는 지진아
무 외울 것이 많고 어려워서 입시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 신세가 되고 만다. 우리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 우리 스스 민
이라고 한다. 놀랍게도 국사 역시 필수에서 거의 멀어져 로 까맣게 모르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가 어떻
가고 있다. 이제 서울대학교에 가고자 하는 학생만 이 과 게 구성되어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 이것이 역사 교육
목을 열심히 공부하고 그렇지 않은 학생은 국사에서 손 실종 세대의 미래다.
놓게 되기 십상이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입시 준비에 심 우리는 역사를 애써 알지 않고도 그냥 살 수 있다. 그렇
한
신이 완전히 찌들어 있는 요즘 학생들에게 어느 대학을 지만 그것은 솔직히 말하면 3류 인생이라는 이야기다.
가든 그래도 국사는 공부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면 만일 당신이 장차 기업가가 돼서 외국의 교양 있는 파트
족
너무 한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래저래 요즘 학생들 너와 대화를 한다고 해 보자. 5분만 이야기 해 보면 서로
은 역사에 한해서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세대라 하지 않 상대방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이 사람이 탄탄한 지성
을 수 없다. 의 소유자인지, 완전히 텅텅 빈 깡통인지… 그 탄탄한 교
역사 공부를 하지 않아도 살 수는 있다. 지난 과거의 흔 양의 많은 부분은 우리 삶을 구성하는 많은 이야기들, 결
적을 잘 모른들 뭐가 그리 큰 문제냐고 되물을지 모른다. 국 역사라 할 수 있다. 현재 우리 교육은 미래 세대를 좀
국
독일인의 관점에서 본 한국
대원 외국어 고등학교 독일어 교사 Holger Preut
고 있다.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수와, 거의 모든 곳에 놀라게 된다. 사람들의 패션, 자동차, 머리스타일, 소비성
위치해 있으며, 첨단화 되어있으면서도 전문적인 서비스 향, 그리고 여가 활동 등은 모두 비슷해 보이며, 이러한 평
균치를 벗어나는 사람들은 드물다. 한국은 또한 매년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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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한국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보기도 쉽지 않다. 유럽이나 앵글로 색슨족의 다양한 문화
가 이렇게도 민족적이고 핏줄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받아
유럽식 레스토랑이나 명품 매장을 제외한다면, 한국이 들여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심지어 한
서구세계로부터 받은 영향은 다분히 미국적이다. 많은 한 국인의 핏줄을 타고 난 외국인들도 스스로 공평하게 대우
국인들이 아직도 ‘서구’라고 하면 미국문화를 떠올리며, 받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며 백인보다 흑인들의 경우 한국
서양으로 이민을 간다고 하면 보통 미국을 생각한다. 미국 에서 지내는 것이 더 힘들다고 여길 수 있다.
에서의 한국인 디아스포라는 엄청나다; 미국의 운동들은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으며 많은 한국 대학교들에는 미국 한국인들은 급한 성격을 지녔지만, 야망적이고 열정적
인 교수나 한국인이지만 미국에서 졸업을 한 사람들이 굉 이다. 그들은 종종 서두르고, 이러한 모습은 관광객들의
장히 많다. 한국에는 아직도 수 만 명의 미군이 주둔해 있 입장에서 보면 무언가가 급하게 되어야만 한다는 느낌으
으며, 학교에서는 영어수업을 하고, 교통 시스템도 미국의 로 다가온다. 또한 한국인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1등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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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最古)와 최고 (最高)
칠레가톨릭대학교 아시아프로그램 교수 민원정
시
간이 허락하는 한 아시아와 관련된 행사는 모두 히 말씀 드리자면, ‘일본해’가 아니라 ‘동해’입니다’라고
보는 편이다. 학회, 전시회, 공연 등을 보면서 국 말하자, ‘아, 참, 동해지’ 한다. ‘일본해’라고 생각한다면
가별로 어떻게 행사를 조직하고 홍보하는지, 그리고 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차라리 논리적인 의견을 댔으면
레사람들의 반응은 어떤지를 살핀다. 나았을 것 같다.
모 대학에서 한국과 관련된 세미나를 한다고 해서 보 저명한 경제학자라는 교수님은 한국경제발전의 원동
러 갔다. 남북문제에 대한 발표를 듣자니 한국은 전통적 력은 모두 ‘일본’ 덕이라고 설명했다. 일제지배는 1905
으로 중국과 일본의 영향을 죽 받던 나라고, 그래서 오늘 년부터고, 50년간의 일제 식민지가 끝나고 일본인들이
날 남북문제도 남한과 북한이 단독적으로 해결하지 못 남기고 간 산업시설을 기반으로 한국이 발전했다는 게
하고 중국과 일본의 개입을 받는 거라는 논리가 나왔다. 그 분의 생각이었다. 90년대 말 아시아경제위기를 단기
발표자는 중국전문가라고 하는데, ‘중국과 일본의 영향’ 간에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불교와 신토이즘에 근거한
이라는 말을 계속 듣고 있자니 비위에 거슬리고 남한이 한국인들의 정신력이라고 한다. ‘신토이즘은 한국과 관
든 북한이든 ‘한국’ 자체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인식 방 련 지을 일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자, 오히려 네가 잘 몰
법에, 저런 시각으로 왜 남의 나라를 연구한다는 거야 라 라서 그런다고 한다. 식민기간은 1910년부터 1945년까
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라고 말하자, 자기가 볼 때는 역사 자체가 식민지로 보
아시아와 관련된 수업에서 각기 전공이 다른 교수들 인다고 한다.
이 한국에 대해 설명한다고 해서 ‘교수님들의 고급스런 2004년 BBC 인터넷 판은 경상남도 울산의 반구대 암
스페인어를 배우고 싶다’고 핑계를 대고 매 시간 들어가 각화 (국보제285호)에는 선사인류가 고래를 잡기 위해
봤다. 일본에 오래 계셨던 교수님은 당신이 한국 방문 시 작살과 부구, 낚싯줄을 사용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고
찍어 온 사진을 보이며, ‘금속활자’는 서양 보다 이미 ‘중 소개하면서 이는 세계 최초의 고래잡이 흔적이라고 소
국과 한국’에 이미 존재했다고, 일제지배는 ‘현대화’라 개했다. 한반도 곳곳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은 우리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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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글들이지만, 저희의 작은 노력으로 한 사람이라도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고, 한국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할 수 있다면 저희는 너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이 간행물을 발간할 수 있도록 저희를 믿고 재정적으로 지원해주신 Gymboree, 호텔신라, PMC Production, 전
통문화생활학회에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또한 바쁘실 텐데 흔쾌히 저희의 인터뷰에 응해주신 백은실 선생님,
송승환 이사님 감사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Credit 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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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ing Team 김명선, 장석준, 민경현, 최세훈, 신연재, 우창균, 우주현, 임혜송, 배인해
Translation Team 권선향, 김지은, 여인영, 류정민, 최재훈, 김영은, 김민성, 이장원, 박지영, 조세연, 조협, 이경민,
조세연, 박서영
Article 민경현, 장석준, 이제인, 김명선, 주경철 교수님, Holger Preut, 민원정 교수님, 김명선, 이도언, 정세용,
안희섭, 홍애영, 홍새미, 고담비, 최현진, 배인해, 윤세연, 최세훈, 한지영, 임민혁, 최효주, 박서영, 정병훈, 한일 고등
학교
Interview 중요무형문화재 제 34호 강령탈춤 전수교육조교 백은실, PMC Production 대표이사 송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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