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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재 기 사

세라믹과학기술사

조선시대의 석회 사용

글 _ 송 종 택
단국대학교 신소재공학과 교수

1. 머리말 으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임원십육지(林園十


六誌) 등에 석회석의 산지가 자세히 조사·기록 되어 있
석회, 석고가 시멘트재료로서 인류사에 등장한 것은 으며 또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는 소성석회
반만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가 석회·석고를 의 제조법을 설명하고 있다.
결합제로 사용하여 만든 구조물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것 석회의 최초 용도는 토목건축재료로서 사용되었다. 우
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것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이다. 리나라에서 석회의 용도는 성벽의 축조, 건축물 기초다
이때 쓰여진 결합제는 석회석을 구워서 만든 생석회와 짐 그리고 묘지축조와 시체안장에 사용되었다. 특히 고
석고를 구워서 만든 소석고로서 기경성(氣硬性) 시멘트 건축물에 있어 구조재, 결합재, 방수재, 마감재 등의 용도
였다. 로 매우 중요하게 사용된 재료가 석회(강회)이다.
최근에 발굴된 유적의 분석 결과는 신석기시대에 이미 여기에서는 먼저 세계속의 석회 사용의 역사를 살펴보
석회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신석기 시 고, 고문헌상에서 본 조선시대의 석회석의 산지, 석회의
대의 요새도시로 알려지고 있는 Jeriko 발굴에서 발견된 제조에 대한 기록, 석회의 시공방법 및 용도에 대하여 기
석회콘크리트는 그 부착물의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결과 술하고자 한다.
기원전 7,000년 전후의 것으로 추정 되고 있으며 Yiftah
에서의 석회콘크리트의 발견등 석회콘크리트 기술이 이 2. 석회 사용의 역사
미 보급되어있는 것으로 추정되어 결합제(시멘트)의 뿌
리는 10,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2.1. 석회석의 사용
우리나라에서 석회의 사용은 삼국사기에 기록이 있는 석회석은 인류가 사용한 가장 오래된 재료중의 하나이
것과 고구려 고분 내벽에 두껍게 회를 바르고 벽화를 그 다. 아마도 원시인들이 석기시대 이전부터 이를 사용한
렸다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전에 개발되어 사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대왕조는 장대한 신전이나 능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건축물에 사용한 예로는 발해의 묘를 구축하였는데, 오늘날에도 그 웅대한 고대문명의
도성인 동경성의 옛 집터와 백제에 의해 전래되어 축조 유적이 수 없이 남아 있다. 최초의 기록은 약 5,800년전
된 일본 나라현 동대사(東大寺) 삼월당의 기단 부위가 석 이집트 제2왕조의 Giza 피라미드(Fig. 1)의 건설에 관련
회를 사용한 것이다. 조선시대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것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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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 석회암으로 축조된 Giza 피라미드.

기원전 2,500~1,500년에 걸쳐서 만들어진 이집트의 시멘트를 기재로 하는 콘크리트용 골재로서 그 수요증가
피라미드나 스핑크스 또는 그리스·로마의 신전 등은 거 의 요인이 되었다.
대한 석회석 석재로 이루어져 있다. 또, 고대 그리스 밀
로의 비너스 상이나 16세기 초 르네상스시대 미켈란젤로 2.2. 석회의 사용
의 모제 조각 등은 백색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대리석이 석회를 사용한 가장 오래된 증거는 10,000년 전으로
다. 이와 같이 석회석은 고대 중세에 있어서 건축문명이 거슬러 올라간다. 터키 동부의 Cajenu 지역의 유적은
나 예술의 소재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는데, 이것 7,000년 전에서 14,000년 전의 것으로 그 바닥이 석회
은 석회석이 지닌 장식성, 가공성, 내구성, 균일성 등의 특 모르타르로 되어 있다. 근동에 8,000년 전 석회가 사용된
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확실한 증거가 있다. 옛 유고슬라비아의 Lepenski vir에
서기 75년에 로마인들은 석회석을 석회와 함께 도로 서 6,000년 전의 바닥이 1,960년 발굴 되었는데 그것은
건설에도 널리 사용하였다. 1세기 동안 석회석은 건설· 석회, 모래, 점토, 물로된 모르타르로 만들어진 것이다.
건축에서 골재로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다. 석회석은 석회에 의한 점토의 안정화 공법은 5,000년 전 티베트에
로마시대 이후 석회를 결합제로 사용하는 콘크리트의 골 서 Shersi 피라미드의 건축에 사용 되었다. 석회는 역시
재로 사용되었고, 최근에는 시멘트를 결합제로 사용하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의 건설에 석회석과 함께 사용 되었고
콘크리트의 골재로 이용되어지고 있다. 1세기 로마인들 그리고 중국의 만리장성의 건설에도 사용 되었다.
은 니회(泥灰, marl)및 연질백악이 토양의 알칼리화에 최근 발견된 유적의 분석 결과 신석기 시대에 이미 석
유익함을 알게 되었다. Mainz 북쪽에 있는 Ubian 사람 회가 사용 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즉, 신석기
들이 백토[석회질 니회토(泥灰土)]를 자신들의 경작지를 시대 요새도시로 알려지고 있는 Jeriko 발굴시 발견된 석
기름지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였음을 Pliny가 보고하고 회콘크리트의 부착물의 방사선 동위원소 분석결과 기원
있다. 전 7,000년 전후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Yiftah에서의
고순도의 석회암은 많은 세기에 걸쳐 석회소성용, 유 석회콘크리트(Fig. 2) 발견 등으로 석회콘크리트 기술이
리제조용 그리고 금속제련산업에 이용되었다. 1824년 포 이미 보급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석회계 시멘트의
틀랜드시멘트의 발견은 석회석이 시멘트 원료로서, 또 뿌리는 10,000년 이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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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석회 사용

으로서 사용하였다. 의약용으로 석회 포화 수용액 사용


에 대하여는 서기 75년 Dioscorides에 의해 기록이 전해
지고 있다.
생석회는 중세시대의 전쟁에서 초기 화학무기 형태의
하나로 사용이 되었는데 1,217년 잉글랜드인들은 해상
전투에서 생석회를 적의 얼굴을 향하여 세게 던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유럽의 연금술사들은 목회(木灰)속의
Fig. 2. Yiftah에서 발굴된 약 9,000년전의 석회 콘크리트. 탄산칼륨을 가성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생석회를 사용
하였다. 1,400년대를 통하여 건축의 목적으로서 석회의
석회의 사용에 대하여 성경(구약전서 신명기 27장 1~5 사용은 전 유럽으로 퍼져있었다.
절)에도 그 기록이 있다. 18세기 영국 화학자 Joseph Black이 처음으로 충실한
기원전 1,000년 전부터 그리스, 이집트, 로마, 잉카, 마 석회소성법을 보고하였으며, 이 이론은 몇 년후에
야, 중국, 인도, Mogul 인디언 같은 많은 문명권에서 건 Lavoisier에 의하여 확인되고 더 많은 것이 밝혀졌다. 19
축시 생석회·소석회가 널리 퍼져 사용 되었다는 증거가 세기에 들어와서 프랑서 과학자 Vicat, Debray 그리고
있다. 아마 가장 오래된 석회가마는 기원전 2,450년 메소 Le Chatelier는 건축용 석회나 모르타르 평가법과 아울
포타미아 지역에 있는 Khafaje에서 발굴 된 것으로 추정 러 석회석의 해리온도와 압력과 같은 초기의 기초적인
된다. 여섯 개가 한 구조로 된 석회가마가 고대 로마군단 data를 대부분의 측정을 통하여 검증하였다. 그러나 포틀
의 주둔지였던 독일의 Iversheim에서 발굴이 되었는데 랜드 시멘트가 출현함에 따라 건설재료의 중요 부분은
이는 로마군들이 군대 주둔지에서 많은 양의 석회를 생 이것에 자리를 양보하였다.
산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마에서의 석회생산에 대
하여는 Cato(기원전 184년)에 의하여 언급이 되었다. 로 3. 조선시대의 석회 사용 역사
마인들은 수경성 석회와 석회-포졸란(pozzolan) 혼합물
을 Appian Way를 포함한 건축물 등에 사용했던 것으로 고문헌에 나타난 조선시대 석회사용의 역사에 대하여
보인다. 또한 로마인들은 석회 소성기술과 석회를 접착 석회석의 산지, 석회의 제조에 대한 기록, 석회의 시공방
제로 사용하는 모르타르, 시멘트 그리고 콘크리트의 용 법 및 용도를 기술한다.
법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석회는 그리스나 초기 로마제국에서는 화학 시 3.1. 석회석의 산지
약으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350년 크세노폰(Xenophon) 우리나라 석회석의 매장은 고생대 캠브리아(Cambria)
은 린넨(아마섬유)의 표백에 석회사용을 언급하였다. 지 기에 속하는 광상이 두꺼운 지층을 형성하여 황해도, 평
중해 연안 사람들은 석회를 도료로 사용하는데 익숙해져 안도, 강원도, 충청북도, 함경남도 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다. 석회는 가죽의 무두질에 사용이 되었고 버터와 있으며 매장량이 많고 품질이 비교적 우수하여 예전부터
아교를 생산하는데 유기물질과 혼합하여 사용 되었다. 강회(剛灰, 생석회)의 원료로 쓰였으며 현재의 시멘트 공
앗시리아인들은 유리 제조를 하는데 있어서 석회의 중요 업이 발전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성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석회는 또한 도자기류의 유약 석회석 산지에 대하여는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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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기록에 나타난 석회석 산지 조(燔造)하였다고 전한다. 여기에서 암석이라함은 석회


도별 지역 고문헌 석을 말하는 것이며 이를 절단하여 번조하였다는 것은
강화군 하도면 마니산, 개풍, 이천, 양평, 안성, 세종실록지리지 등
경기도
용인, 수원, 양주, 파주, 장단, 포천, 연천의 각 군 고문헌 석회가마에 넣어 소성하였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이천), 양근, 지평, 죽산, 양지, (수원), (양주),
임원 십육지
(파주), (장단), 영평, 풍덕, 삭녕, (연천)의 각 군
충청북도 충주, 청주, 보은 및 진천의 각 군 임원 십육지 2) 문종실록(文宗實錄) 원년(1451년) 삼월조(三月條)
아산군 염치면 중방리, 공주, 연기, 미산, 대전,
세종지리지 등 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홍성, 당진, 부여, 예산, 청양 및 보령군의
고문헌
충청남도 각 부군현
「통사(通事) 김퇴(金槌)가 서(書)를 올려 계주(啓奏)하
(아산), (공주), 전의, 은진, 회덕, 진잠, 홍주,
임원 십육지
홍산, 덕산, (청양), 대흥, (보령)의 각 부군현 되 신이 왕경(王京)에 부임하여 석회의 번조법을 물으니
순창, 임실, 진안, 장수, 금산, 익산, 전주, 정읍, 세종실록지리지 등
고창의 각 부군현 고문헌 토중의 흑청석(黑靑石)을 가마 안에 쌓고 삼주야(三晝夜)
전라북도
(순창), (임실), (진안), (장수), (금산), 진산, 를 불때면 그 색이 희(白)다. 석성(石性)이 유(柔)해진 것
임원 십육지
여산, 고산, 태인, 고창의 각 군
세종지리지 등 은 더욱 희게되어 사용하기 좋게 된다. 여기에 물을 부으
곡성, 순천, 보성, 화순, 광주의 각 군
전라남도 고문헌
옥과, (순천), (보성), 동덕, (화순), 광주의 각 군 임원 십육지
면 바로 석회로 화(化)한다. 가마의 대소에 따라 백석(白
세종지리지 등 石) 혹은 七·八十석 혹은 三十석을 취하는데 가마의 모
경상남도 진주, 산청, 협천의 각 군
고문헌
황 해 도 토산, 금천의 양군 임원 십육지 양은 본국에서 번조하는 가마와 동일합니다 … 운운(云
강서군 세종지리지
평안남도 云)」
(문종실록 권六, 원년三월三일)
함종군 여재섭요
평안북도 벽동, 초산, 강계, 구성, 위원의 각 군 임원 십육지 이 글은 통사 김퇴가 중국에 갔을 때 그곳의 석회 번조
강 원 도 춘천군 동면 감정리 세종지리지
함경남도 북청군 북청부읍지 법을 물어 들은 바를 왕에게 상주(上奏)한 것인데 그곳에
※ 괄호는 앞에 표기된 고문헌과 중복된 지명임 서 사용하는 석회번조의 가마는 본국 즉 우리 나라의 번
조 가마와 그 형상이 같더라는 이야기이다. 이로 미루어
람(東國與地勝覽, 성종 16년) 그리고 임원십육지(林園十 볼 때 석회 번조법은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알고 있었으
六誌, 영조조)에 상세히 조사·기록되어 있으며 석회석 며 실제로 석회를 제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전국각지에 산출되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Table 1).
또 문종실록의 기록에는 우리나라 석회석은 강화, 양주 3) 박제가(朴薺家)의 북학의(北學議)에 다음과 같은 기
의 것이 가장 질이 좋다고 전하고 있으면서 박제가(朴齊 록이 있다.
家)의 북학의(北學議)에는 석회석의 산출지대를 알아보는 「수고(물창고)의 물재(物材)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탐사방법 등이 적혀 있다. 쌓는 것(築), 덮는 것(蓋), 바르는 것(塗)으로써 구비하게
된다. 축조와 복개공사에는 세 가지 물재가 있으니 방석
3.2. 석회의 제조에 대한 기록 (方石, 모난돌)과 영적(암기와 및 벽돌)과 석란(石卵, 알
1)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석회제조법을 보면 다음 돌)이다. 바르는 물재에는 세 가지가 있으며 석회와 모래
과 같다. 강화도 호부조(江華都 護府條)에는 강화의 토산 와 기와라 하였다. 분말도료 공사의 물재 세 가지를 배합
(土産)으로는 청란석(靑蘭石)과 암석이 있는데 청란석은 한 것을 삼화회(三和灰)라고 한다. 만일 모래나 기와의
마리산 서해빈(摩利山 西海濱)에서 산출되며 비석을 조 어느 하나를 버리면 이화회(二和灰)라고 한다. 회를 구어
각하는데 적당하며 헌릉신도비(獻陵神道碑)도 이 청란석 낼 돌은 혹은 푸르고 혹은 희며 정밀하게 다루면 윤이나
을 사용하였다고 하며 암석은 이를 절단하여 석회를 번 고 그렇지 않으면 거칠고 차분하지 못하다. 즉, 불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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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석회 사용

펴 구우면 석회가 되는 것인데 불을 지피는 것은 2일 반 영조·정조 때에 와서는 우리나라의 석회번조법이 중


이나 끊임없이 구어야 흡족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시험 국의 번조법만 같지 못하여 중국으로부터 그 법을 받아
해 보려면 우선 돌 하나를 다루어 시험해 보면 알게 되는 들이는 것이 좋겠다는 의론이 가끔 있었다.
데 질이 좋지 못한 잡석을 굽는 경우에는 제품은 이를 다 - 영조때의 기록
루는 사이에 1/3이나 파손된다. 돌의 질은 곱고 불길이 영조 20년(1744년) 7월 14일「강도(江都)에는 옛날에
고루 가야 한다.」
[박제가 북학의 내편 벽조( )] 토성이 있었는데 유수(留守) 김시환(金始煥)이 번벽으로
박제가의 기록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석회를 굽는 방 이를 증축하여 준공을 고하니 주상이 우의정 조현명(趙
법 및 시험해보는 방법 그리고 석회의 사용방법 등이 이 顯命)에게 명하여 가서 심사하라 하셨다 … 중략 … 현명
미 상당한 기술적 노·하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석회를 이 또 말하되 번벽의 법을 중국에서 얻어오면 사반공배
굽는 방법도 이틀반이나 끊임없이 굽되 불길이 고루 가 (事半功倍)하여 그 이(利)가 무궁할 것이니 장차 각 군문
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또 석회를 번조함에 있어서 과 와서(瓦署)로 하여금 그 제조법에 따라 번조를 시험함
는 질이 좋은 석회석을 선택하여야 하며 이러한 우량한 이 좋겠다고 하니 주상이 그의 말대로 따르기로 하였다.」
석회석은 강화와 양주가 으뜸이라고 하였다. (영조실록 권59, 20년 7월 14일조)
- 정조 때의 기록
4) 문종 즉위 경오년(1450년) 석회번조의 기록 정조 7년(1783년) 7월 12일「대사헌 홍양호(洪良浩)가
「전 현령 김승비(金承庇)가 상소하되 “옛적에 석회를 상소하되 토벽의 번조공사에 있어서 번벽론은 예로부터
번조함에 있어서는 좋은 돌과 나무가 무성한 곳을 택했 있으되 아직 그 요법(要法)을 얻지 못하였으며 뜻은 있으
던바 이것은 노력이 적게 들고 공이 많기 때문이었습니 되 시용(試用)할 수 없는바 입니다. 청컨대 군문으로 하
다. 근자에 와서는 나무에 관계되기 보다는 돌에 관계되 여금 그 제법을 중국(연중 : 燕中)에서 취하되 번조방법
는 것입니다. … 중략 … 어리석은 신(臣)의 생각으로는 천 을 상세히 탐지하시와 수용(需用)함이 좋겠다하니 주상
도 이래로 번조지처는 양주와 강화의 양읍에 비길만한 께서 그의 말을 따랐다.」
(정조실록 권16, 7년 7월, 12조)
곳이 없는줄 압니다. 이 양읍에서 번조하게되면 관(官)이 석회제조법 및 이용법은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알려져
공사(公事)를 폐해야할 염려가 없고 또 백성이 나무를 운 있었으며 특히 조선 초기 및 중기에 걸쳐서는 그 기술이
반하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원컨대 다시 옛 곳으 상당히 발전하고 있었으며 이용범위도 넓었던 것이다.
로 돌리옵소서 의정부(議政府)에서 논의하되 능실(陵室) 그러나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오히려 쇠퇴한 것으로 보여
을 보수함에는 반드시 양호한 석회가 필요케 되는 것이 진다. 이 것은 석회의 용도가 한정되어 대량 생산을 촉구
니 만약에 국용(國用)이 있을 때는 양주·강화의 석회를 하지 못했다는 점과 관업(官業)으로 관용을 충당하는 정
가져다 씀이 좋겠습니다.” 하니 주상(主上)께서 그리하라 도에 그치고 민업(民業)으로서 민수를 상대로 하는 방향
고 하셨다.」
(문종실록 권四, 즉위 十월十일조). 즉 좋은 석 으로 전개되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었다고 하겠다.
회석으로는 강화와 양주의 것이 으뜸이라는 것이다. 석회 실제로 숙종조에 북한산성을 축조할 때 비변사에서 획
석이 좋아야 좋은 석회를 얻는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며 급한 석회는 9,638석 이었다. 석회장 6명, 한 가마에서 100
석회석의 질에 관한 이야기는 이 외에도 자주 나타난다. 석이 나오고, 1회 3일씩 잡는다고 하면 1년 동안의 물량
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가마가 석회장 6명에게 하나씩 6기
5) 영조·정조 때 석회번조에 관한 기록 가 있었다면, 경공정이 1년에 생산하는 석회는 1년에 5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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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내외라 할 수 있다. 이것으로는 건축물과 능묘의 시설 고구려 고분 회벽도 회삼물 벽으로 보이는데, 천 수백
에도 넉넉하지 못하여 일반인들이 필요로 하는 물량의 공 년 동안을 습기찬 지하에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그 견
급은 자연 억제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도가 가히 입증되고도 남음이 있다.
벽을 바르는 것을 분벽(粉壁)이라고 한다. 면회(面灰)
3.3. 석회(강회)의 시공방법 로 분벽 하였다고도 하는데 이것은 궁궐이나 사찰 등 고
전통적으로 흙을 써서 하는 일은 그 종류에 따라 다르 급 건물의 벽 치장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면회에 쓰
다. 백토와 석비례는 판축(版築)이나 입사기초의 재료로 이는 흙손은 박달나무 등으로 별도로 만든다.
좋고, 백토(白土)는 굴림백토를 만들어 사벽(砂壁)하는데 기구(용구)로는 간단한 것이 사용되었으며, 흙손, 면토
쓴다. 굴림백토란 모래가 섞인 흙을 진흙과 굵은 모래와 (面土) 흙손, 흙받기, 흙체가 있는데, 흙손은 쇠 흙손, 나
섞으면서 이겨서 쓰도록 되어있는 것인데, 모래가 고루 무 흙손이 있으며, 작은 것과 큰 것이 있다. 주걱은 사무
섞이게 하기 위하여 흙덩이를 자꾸 되풀이하여 굴린다. 리를 섞고 푸기위한 것으로, 이 또한 나무 주걱과 쇠 주
굴릴 때 담벼락에 치는 방법이 있고 모래는 어레미로 치 걱이 있다. 흙체는 흙과 모래를 치기 위한 체로서, 고운
거나 해서 굵은 것은 가려낸다. 점력이 중화되고 모래가 체와 굵은체가 있으며, 굵은체를 어레미, 얼금체라고도
알맞게 섞여서 사벽하면 트지 않고 마르면 색도 희끄무 한다. 이외에 팡개 (새 벽흙을 떨어내는 참대쪽 또는 철
레하거나 흰색이어서 보기에도 좋다. 차지고 점력이 강 편) 등을 사용하기 편리하게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으
한 흙은 마르면 튼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여물 며, 수평(水平), 자, 줄눈자, 실, 긴 오리대목, 결속철물 등
을 섞어 쓴다. 여물로는 식물성인 삼(麻)이나 짚, 동물성 이 있었다고 한다.
인 털(毛)이 사용된다. 짚여물이나 삼여물은 초벽을 치거 참고로 현재 문화재 수리·보수에서 강회가 사용되는
나 담장을 쌓거나 하는 일에 주로 쓰인다. 털여물은 고급 곳은 기초공사(Fig. 3), 기단공사, 벽 미장공사, 지붕공사,
의 담벼락이나 천장을 앙토(仰土)하는 회사무리 반죽에 성벽공사(Fig. 4)에서 주로 이용되고 있으며, 시공방법은
쓰인다.
구워진 상태의 생석회는 덩어리 모양인데, 이것을 강
회라 한다. 강회를 필 때는 흙더미위에 강회를 퍼얹고 가
마니를 덮는다. 그리고 물을 부으면 김이 나면서 덩어리
의 석회가 부셔져 가루가 된다. 이것을 분회(粉灰)라 한
다. 분회는 물을 먹은 상태이다. 이것으로 회사무리를 한
다. 회삼물 또는 삼화토라 부르는 이 가공 혼합물은 회와
백토와 고운 모래의 세 가지를 같은 비율로 혼합하여 만
드는 것인데, 만드는 과정을 회방아 찧는다고 한다. 분회
가 지닌 수분과 백토와 고운 모래가 지닌 수분만으로 자
꾸 회방아 찧으면 좋은 회삼물이 된다. 이것은 굳으면 트
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강도가 마치 돌과 같아서 회삼물
로 만든 능묘의 회광(灰壙)을 깨뜨릴 때는 정(釘)으로 쪼
아도 잘 깨뜨려지지 않을 정도이다. Fig. 3. 기초공사에서 강회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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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석회 사용

예가 많았다. 선조 27년 6월에는「석회탄(石灰灘)」


으로
왜적을 방비했고 선조 38년 4월에는 구성(龜城)의 석성
을「번벽(燔壁)」
으로써 보축(補築)했다는 기록이 있다.
박제가의 북학의에도「今舊光化門有灰宛然」
이란 기록이
있다. Fig. 5는 남한산성의 여장이란 구조물로서 적의 화
살이나 총알을 피하는 목적으로 지어진 담장을 말한다.
이 구조물은 전돌과 전돌 사이에 강회를 접착제로 이용
하여 한 덩어리가 된 것으로 붕괴나 파손률이 적은 훌륭
한 축조물이 된 것이다.

Fig. 4. 성벽축조에서 강회다짐.


2) 다음으로 석회는 건축 기초를 다지는데 많이 사용
주로 점토나 백토등의 흙과 혼합하여 타설한 후 달고나 되었으며 이것은 근년에 이르기까지 그 유법(遺法)을 볼
평삽 등으로 다짐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수가 있다.

3.4. 석회의 용도 3) 석회는 묘지 축조 및 시체 안장에도 이용 되었다.


대표적으로 석회가 사용된 곳은 다음과 같다. 중종 17년 4월조(條)에는 석회장(葬)으로서는 안동산이
가장 좋다는 기록이 있으며 석회장의 유법(遺法)은 오늘
1) 우리 나라에 있어서 석회가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날에도 전해지고 있다. 역대 왕 능의 능실(陵室) 즉 시체
성벽 축조로 생각된다. 성벽 축조는 돌을 그대로 쌓아 올 안장처는 대개 석회로 축조했으며 문종 즉위년 10월조에
리는 방법과 돌과 돌 사이를 점토 및 석회 등으로 메우며 김승비(金承庇)의 상소문중에서도 능실을 수보(修補)하
쌓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고대에는 대체로 전자의 는 데는 양호한 석회가 필수품인데 국용의 필요한 석회
방법이 많이 사용되었고 후대에 와서는 후자의 방법을 는 양주와 강화의 석회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에
사용한 것이 많다. 도시 주변의 큰 성은 석회를 이용한 서도 볼 수가 있다. Fig. 6은 조선 중후기에 사용되어진
무덤으로써 2007년 충남 연기군 남면 송원리에서 출토
되어진 것이다.

Fig. 5. 남한산성의 여장. Fig. 6. 2007년 충남 연기군에서 출토된 회곽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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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중국에서는 석회를 선박 건조에도 사용하였다고 한 드 시멘트의 발견으로 인하여 건설재료로서 주요 부분을


다. 문종 원년 3월조에는 통사 김퇴(通使 金槌)가 상소한 그것에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다.
서간(書簡)가운데「…… 또한 통주(通州)에 도착하였을 석회의 제조 및 이용법은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알려
때에 조선공에게 물으니 그의 대답이 선박의 틈을 메우 져 있었으며, 특히 조선 초기 및 중기에 걸쳐서는 그 기
는데는 마유(麻油)를 사용하여 메우며 또 이 석회와 동유 술이 상당히 발전하고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오히려
(桐油)를 배합하여 바르되 동유가 없으면 어유(魚油)를 배 석회제조법이 퇴보하여진 상태로 보인다. 이 이유는 석
합해도 또한 가하다 … 중략 … 왕이 수성전(修城典)의 회의 용도가 성벽축조, 건축기초 및 능실건조 등에 제한
선읍(船邑)에게 그 뜻을 전하다.」
(문종실록 권六, 원년三 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또한 주로 관의 용도로만 사용되
월三일조)라고 하였다. 었기 때문이다. 즉, 석회의 대량생산을 구축하지 못하여
이것은 김퇴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에 각 지방을 시찰 기술적 발전에까지 이르지 못하였다고 생각된다.
하고 듣고 본 바를 국왕에게 아뢴 글중의 한 구절인데 왕 그러나 석회계 시멘트 재료는 우리나라 문화 유적의
이 이 방법을 수성전(修城典)에서 선박 건조하는 담당자 보수에는 가장 잘 어울리는 재료이므로 앞으로는 강회의
에게 전하였다하니 그 방법이 우리나라에서도 실시 되었 시공방법 등을 연구 및 분석 파악하여 이론적 고찰을 통
을 것으로 짐작된다. 해 선조들의 지혜를 전승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찾아
야 될 것이다.
5) 석회는 또 수고(물탱크)를 만드는 데도 사용되었다.
즉 수고를 만들 때에 내부를 발라서 물이 새지 않게 하기 부기 : 본고에서 인용된 “고문헌 자료”에 대해서는「東
위하여 소위 삼화회(三和灰)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洋시멘트 10年史(1967)」
,「문화재 수리용 강회 혼합재
조사·연구(문화재청, 1999)」
와「韓國 石灰石加工業協同
이와 같이 석회는 여러 가지 공사에 사용되었음을 알 組合 三十年史(2003)」
를 주로 참조 하였다.
수 있다.

4. 맺는말
송종택
세계속의 석회사용의 역사를 먼저 살펴보고, 우리나라
1968년 한양대학교 요업공학과 (공학사)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고문헌에서 나타난 석회석의 산지, 1980년 일본동경공업대학 (공학박사)
석회의 제조에 대한 기록, 석회의 시공방법 및 용도에 관 1980년~1982년 (주) 금강 중앙연구소
(책임연구원)
하여 소개했다. 1982년~현재 단국대학교 신소재공학과 교수
2003년~2005년 단국대학교 율곡기념도서관
석회는 최초의 시멘트 재료로서 인류사에 등장하여 토 (관장)
목·건축 재료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나, 19세기 포틀랜 2005년 한국세라믹학회 회장

제12권 제1호, 2009년 2월 | |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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