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fessional Documents
Culture Documents
漢代人의 來世觀
- 鎭墓文을 중심으로 -
尹 在 碩 (慶北大)
Ⅰ. 머리말
Ⅲ. 關洛 이외 지역 출토 鎭墓文의
Ⅱ. 鎭墓文의 출토 현황과 關洛地域
유형과 來世觀
출토 鎭墓文에 반영된 來世觀
Ⅳ. 맺음말
Ⅰ. 머리말
生과 死의 善循環을 바라는 인간의 열망이 靈魂不滅에 대한 염원과
더불어 궁극적으로는 사후세계에 대한 종교적 설계를 가능케 하였을
것인데, 고대 중국인들이 구축한 喪葬儀禮는 사후세계에 대한 선험적
혹은 종교적 사유의 결과라기보다는 “事死如事生”1)으로 표현되듯이
현세의 연장선상에 위치한 來世觀에서 비롯되었다. 시신과 함께 매장
하는 각종 부장품이 내세에서 사용할 생활도구로 구성되었을 뿐 아니
라 그것의 종류와 양적 질적 차이가 피장자의 생전 정치적 신분과 경
제적 지위를 철저히 반영한 것임은 물론이다.
漢代의 墓葬에서 발굴되는 告地策·鎭墓文·買地券 등의 喪葬文書는
지역적 시간적 편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이나 한대인들의 내
런 면 甁
그 데 후한대가 되 鎭墓 과 買地券을 중심으로 고지책에서 찾
아볼수없 변 감 목
는 화가 지되어 주 된다. 告地策이 주로 전한대의 현
호북 호남
· 견
등 장강 유역에서 발 되는 반 진묘 과 매지 은 중과 면 병 권 관
낙양 지역을 중심으로 하되 부는 일 감숙
과 산서·강 ·산동 등지에서도 소
견 많 변
발 되고, 내용상에서도 은 화를 보여준다. 이처 상장문서에서 럼
타 요
시대적·지역적 편차가 나 나는 인에 대하여 종 학계에서는 주로 래
후한대에 형성된 초기 도교가 상장의 에 영 을 례 향 미친
결과로 보는 것
일 러
이 반적이다. 그 나 후한대 도교의 내용과 성 시기에 대한 인식 립
루
의 공유가 이 어지지 않은 상 에서 진묘 과 매지 이 태 병 출토 권 새롭게
될 때마 근
다 이를 거로 도교의 성 시기를 립 소급
적용하는 것은 재고
할 필요 가 있다.
안
그동 진묘문에 대한 연구는 로 진묘문 자 가 발굴 새 운 료
다 될 때마
순 복 방법
단 반 적인 론이 동원되어 다. , 왔 즉 개별
진묘문에 대한 문자
考釋 체
과 서 의 연구, 진묘문에 반영된 영
3) 혼관
과 상장 속,4) 진묘문과 습
者 人
2) 尹在碩, 중국 고대 死 의 書와 漢代 의 來世觀 -告地策을 중심으로 (
8 pp 8 8 참조
中國史硏究 第 6輯, 2013), .6 - 1 .
석 체 측 찰
3) 문자 고 과 서 에 대한 연구는 중국 연구자의 가장 주된 고 대상으로
陳直 初平四 王氏朱 陶甁考釋 考古與 物 8
서, 대표적으로 , 漢 年 書 ( 文 19 1年 第
期 p ; 劉衛鵬 永平三 朱 陶甁考釋 物考古論集 咸陽市 物考古
4 ), .115 , 年 書 (文 - 文
所成立十周 紀念 三晋出版社
年 , pp ; 王育成 洛陽延光元 朱
, 2000), .164-169 , 年 書
陶罐考釋 原 物 期 pp 8 ; 賈麥明 韓城市 出土閭氏
(中 文 1993年 第1 ), .71- 1 , 漢墓
者 人
중국 고대 死 의 書와 漢代 의 來世觀 (尹在碩) 27
관
도교의 연 성5)에 대한 탐색
등이 가장 중심적 였다. 다 테마 만 최근
병 병 입
질 을 비롯한 후한대의 사회 리적 장에서 진묘문의 성행 인을 요
지적하거나 五石
에 대해 의학적으로 접근
하는 연구가 나 는가 하 ,6) 오 면
體 風 찰
진묘문 특유의 書 와 書 에 대한 고 7) 등이 시도되기도 한다. 그 러
러 향
나 이 한 연구경 도 기 연구의 존리에서 크 테두
어나지 않은 것 게벗
실
이 사 이다. 특히 전한대의 고지책에 비해 강한 주술적 내세 훨씬 관
립 찰
이 성 되는 과정에 대한 고 이 부 하고, 이와 족
하여 후한 후기 관련
朱書陶甁考釋 (東南文化 1993年 第3期), pp.59-62; 呂志峰, 東漢熹平二年張
叔敬朱書瓦缶考釋 (中文自學指導 2007年 第2期), pp.19-23; 黃景春, 早期買
地券·鎭墓文整理與硏究 (華東師範大學2004年度博士學位論文), pp.81-153 등을
들 수 있다.
4) 劉衛鵬, 陝西高陵出土的東漢建和三年朱書陶甁 (文物 2009年 第12期),
pp.82-86; 王承斌, 由鎭墓文看東漢民間厚葬之心態 (蘭臺世界 2010年 第20
期), pp.24-25; 王亞軍, 從鎭墓文化透視漢代民間信仰 (長江大學學報(社會科
學版) 2012年 第35卷 第5期), pp.24-25; 王亞軍, 試論漢代鎭墓習俗中靈魂信
仰 (管子學刊 2012年 第3期), pp.106-109.
5) 鎭墓文과 道敎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는 중국측 진묘문 연구자의 공동 관심사
로서, 대표적으로 吳榮曾, 鎭墓文中所見到的東漢道巫關系 (文物 1981年 第
3期), pp.56-63; 張勛燎, 東漢墓葬出土的解注器材料和天師道的起源 (道家文
化硏究 第9輯, 1996), pp.253-266; 王育成, 略論考古發現的早期道符 (考古
1998年 第1期), pp.75-81; 蔡運章, 東漢永壽二年鎭墓陶甁文考略 (考古 1989
年 第7期), pp.649-652; 連劭名, 洛陽延光元年神甁朱書解除文述略 (中原文物
1996年 第4期), pp.74-75; 連劭名, 漢晋解除文與道敎方術 (華夏考古 1998
年 第4期), pp.75-86; 劉昭瑞, 考古發現與早期道敎硏究 (文物出版社, 2007),
pp.12-38; 郝本性·魏興濤, 三門峽南交口東漢墓鎭墓甁朱書文考略 (文物 2009
年 第3期), pp.57-61; 楊愛國, 東漢時期道敎參與喪葬活動的考古學證據 (文史
哲 2011年 第4期), pp.86-91 등을 들 수 있다. 국내에서는 五石과 道敎의 관계
를 究明한 趙晟佑, 後漢魏晋 鎭墓文의 특징과 道敎 (東陽史學硏究 第117
輯, 2011), pp.51-80을 주목할 수 있다.
6) 劉衛鵬·程義, 漢晋墓葬中隨葬陶甁內盛物的初步硏究 (江漢考考 2008年 第3
期), pp.78-85; 劉衛鵬, 五石鎭墓說 (文博 2001年 第3期), pp.24-29; 易守菊,
槪述解注文中的傳染病思想 (南京中醫藥大學學報(社會科學版) 2001年9月 第
2卷 第3期), pp.139-142; 易守菊, 解注文之“注”與“注病” -從解注文看古代傳染
病 (四川文物 2001年 第3期), pp.34-36.
7) 郗文倩, 東漢鎭墓文的文體功能及其文體借鑒 (廣西師範大學學報(哲學社會科
學版) 2010年 第16卷5期), pp.65-69.
28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의 정형화된 關中· 洛陽
지역(이하 關洛지역으로 표기) 출토 진묘문의
석 만 관
분 에 치중할 뿐 내세 을 반영하고 있는 전한말과 후한 전기의 비
전형적 상장문서와 진묘문의 관련
성에 대한 분 은 거의 이 어지지 석 루
았
않 다. 아 울러
지역적으로 내용과 형식의 상이성이 지 나 두드러 게 타
類
나는 鎭墓文 의 상장문서로서 현 · 감숙 안휘 소
·강 ·산서·산동 등지에서
료 목 루
발굴되는 자 에 대한 주 은 거의 이 어지지 하고 있다. 이외에도 못
고지책과 리 달 훨씬
다양한 冥界의 구 와 生死 의 조 異路 관념 및 辟邪祈
福의 주술적 세계를 보여주는 진묘문의 형성 인에 대한 사회적 요 접근
족
도 부 한 편이다.
본
이에 고에서는 선 지금까 우지 발굴된 진묘문의 현황을 정리하는
합 석
한편, 진묘문에 대한 종 적 분 을 통하여 그것의 지역적 차이와 더
태 및 요
불어 내용과 형 상의 차이 그 인에 대하여 주 하고자 한다. 그 목
리고 진묘문에 나타난 관내세 이 전한대의 고지책의 그것에 비해 훨씬
脫政治化 요 살펴
된 인에 대하여도 보고자 한다.
初平元 年 郭 初平元 年
氏鎭墓文 (190) 陶罐 1953, 洛陽 洛陽區考古發掘隊
出版社, 1959
, 洛陽燒溝漢墓, 科學
三門峽 鎭墓
後漢後期 陶甁 1998, 三門峽 河南省 文物考古硏究所, 河南三門峽南交
口漢墓(M17)發掘簡報 , 文物2009年 第
文 (5건) 市 3期
洛陽玉衣 墓
鎭墓文 後漢末期 陶罐 1972, 洛陽 洛陽 文物工作隊, 洛陽發掘的四座東漢玉
衣墓 , 考古與文物1999年 第1期
弘農楊氏 鎭 後 漢 ( 2 세 1972, 河南省 河南省博物院, 靈寶張灣漢墓 , 文物
墓文 기 후반) 陶甁 靈寶縣 1975年 第11期
密縣后土郭 陶罐 1963, 河南省 河南省文物硏究所, 密縣后土郭漢畫像石
鎭墓文 後漢末期 (8건) 密縣 墓發掘報告 , 華夏考古1987年 第2期
洛陽解注甁
鎭墓文 不明 陶甁 1954, 洛陽 郭寶鈞等 , 一九五四年洛陽西郊發掘報告
, 考古學報1956年 第2期
永建三 年鎭 順帝 永建
墓文 3年(128) 陶器 不明 羅振玉, 古器物識小錄
元嘉元 年 袁 桓帝 元嘉
孝劉鎭墓文 元年(151) 不明 不明 羅振玉, 貞松堂集古遺文
熹平六 年鎭 靈帝 熹平 池田溫, 中國歷代墓券略考 , 東洋文化硏究
墓文 6年(177) 不明 不明 所紀要第68冊, 1981
殘鎭墓文 不明 鉛券 不明 羅振玉, 貞松堂集古遺文
劉伯平 鎭墓 羅振玉, 貞松堂集古遺文; 古器物識小
文 不明 鉛券 不明 錄
程氏鎭墓文 後漢
鉛券 不明 書道全集卷3; 王育成, 考古所見道敎簡
(4건) 牘考述 , 考古學報2003年 第4期
張氏鎭墓文 不明 陶甁 不明 書道全集卷3, 平凡社, 1931
大 吉日陶 鎭
墓文 不明 陶器 不明 羅振玉, 古器物識小錄
宜蟲桑 鎭墓
文 不明 陶器 不明 羅振玉, 古器物識小錄
序寧簡
章帝 建初 木牘 不明 陳松長編著, 香巷中文大學文物館藏簡牘
4年(79) , 香巷中文大學文物館, 2001
盱眙木牘 鎭 前漢末-新 1974, 江蘇省 南京博物院, 江蘇盱眙東陽漢墓 , 考古
墓文 莽 木牘 盱眙縣 1979年 第5期
高郵木牘 鎭 後漢末 추 1957, 江蘇省 江蘇省文物管理委員會, 江蘇高郵邵家溝
墓文 정 木牘 高郵縣 漢代遺址淸理 , 考古1960年 第10期
壽州西嶽神 20世紀初, 安 周季木, 居貞草堂漢晉石影第三十四; 羅
符鎮墓文 不明 石刻 徽省 壽州 振玉, 石交錄
壽州劉君 鎭 20世紀初, 安 周季木, 居貞草堂漢晉石影; 羅振玉,
墓文 不明 石刻 徽省 壽州 石交錄
壽州石羊 鎭 不明 石刻 20世紀初, 安 周季木, 居貞草堂漢晉石影; 羅振玉,
32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墓文 徽省 壽州 石交錄
永和五 年 遼 順帝 永和 1972, 遼寧省 許玉林, 遼寧蓋縣東漢墓 , 文物1993年
寧蓋縣磚文 5年(140) 磚
蓋縣 第4期
延熹九 年 韓 桓帝 延熹 1993, 山西省 王澤慶, 東漢延熹九年朱書魂甁 , 中國
袱興鎭墓文 9年(166) 陶甁 臨猗縣 文物報1993年11月7日第3版
熹平二 年 張 靈帝 熹平 1935, 山西省 郭沫若, 奴隸制時代 (郭沫若全集(歷史
叔敬鎭墓文 2年(173) 瓦盆 忻州 編, 第三卷), 人民出版社, 1984
熹平二 年 禳 熹 平 2 年 刻石 山東省 莒縣 羅振玉, 石交錄
禍刻石鎭墓 (173)
武威磨咀子
甘肅省博物館, 甘肅武威磨咀子漢墓發掘
1959, 甘肅 , 考古1960年 第9期; 甘肅省博物館·中
女子□寧 鎭墓 後漢 織物 省, 武威 國科學院考古硏究所編, 武威漢簡, 中華
文 書局, 2005
< > 료 陶甁 陶罐 절 수 점
표1 에서 보듯이 진묘문의 재 는 과 이 대 다 를
하지만 鉛 木牘 및 畵像石 石羊 石刻
券과 · 없 등에 된 것도 지 않다. 그
별 면紀 확
리고 시대 로 보 른 明帝
年이 인되는 것 중 가장 이 것은 후한
永平 ① 章帝 건 和帝 건 安帝
3年(60)의 이고, 이후 시대 1 , 시대 3 , 시대 1
건 順帝 건 桓帝
, 시대 4 , 건 帝 건 獻帝 건 순
시대 12 , 靈 시대 7 , 시대 7 등의
으로 나타난 럼 和帝 터 獻帝
다. 진묘문이 가장 성행한 시기는 통설처 부
까
代 지이고, 특히桓帝 帝 獻帝 ·靈 · 알수
등 후한 말기에 성행하였음을
있다.
따
라서 지 금까 소
지의 연구는 위 關洛지역에서 출토된 후한 후기의
참
10) 이하 인용하거나 고하는 鎭墓文의 번호는 모두 <표1>에 제시된 진묘문의
번호
임을 밝혀둔
다.
者 人
중국 고대 死 의 書와 漢代 의 來世觀 (尹在碩) 33
者 人
17) 尹在碩, 중국 고대 死 의 書와 漢代 의 來世觀 -告地策을 중심으로 ,
pp 8 참조
.46- 3 .
8 咸陽市 物考古 所 咸陽敎育學院 淸理簡報 咸陽市 物考古 所
1 ) 文 硏究 , 漢墓 ( 文 硏究
編 物考古論集 咸陽市 物考古所成立十周 紀念 三晋出版社
, 文 - 文 年 , , 2000),
者 人
중국 고대 死 의 書와 漢代 의 來世觀 (尹在碩) 35
서26) 황제가 제의 천
敎令 수 존 면
을 행하는 재임을 보여주는가 하 , 특히
壽州劉君 天帝 除居巢劉君冢惡氣: …… 央黃帝主
鎭墓文 중에는 “ 告 告中
除 方黑帝之凶
北 천 명령
”이라 하여, 황제가 제의
27) 북방 黑帝 을 받아 의
凶 존 천
을 제거하는 재로 등장한다. 이는 황제가 제보다 하위의 신 임 격
우 명 례 수
을 보여주는 매 분 한 사 라 할 있다.
天帝 黃神
와 黃帝 관
혹은 또
의 계와 더불어 목 격하나 주 되는 신 은
泰山 태 治鬼
이다. 산은 수 최 府 神格
의 기능을 행하는 고의 冥 이자 으로
서, 현세의 관료조직 일 조 루 官組織
과 동 한 구 로 이 어진 地 을 구축하여
治鬼 의 기능을담당 治鬼
하였다. 28) 名簿 악
의 출발은 사자의 를 장 하는
일 熹平二 張叔敬
로서, 年 黃神 五嶽 主 人祿 錄 召 召
鎭墓文의 “ 生 , 生 ( ), 魂
魄 主 人籍
, 死 .” 에서 보듯이, 한대인들은
29) 黃神 모체 五嶽 을 로 한 의 대
격 泰山神
표 인 수명
이 인간의 鬼籍 관
을 결정하는 을 장한 것으로 생각
하였다. 여기서 生 人錄 일 태
은 사망 시가 기재된 장부로서, 산신은 여기
록 일 맞추
에 기 된 사망 대상자의 사망 시에 혼백 러어 이들의 을 불 들여
실 름 人籍 곧 鬼籍
( 제로는 사망) 그들의 이 을 死 에 등재한 것이다. 그리
귀
고 적에 등재된 신 입 귀 鬼里 蒿里
신은 인 로 이동하여 거주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蒿里 泰山 래
는 聚居
아 위치한 사자들의 태 마 명 地인데, 산이 치 계의
곳 수 같 면 蒿里
지도부가 거주하는 으로서 현세의 도와 다 , 일 는 현세의
민
반 이 거주하는鄕里 같 ‘ 人 里’ 무 廣陵
와도 은 死 의 이다. 한 제의 아들
王 劉胥 蒿里召兮郭門閱 不得取 庸身自逝 노래
가 임종시에 “ , 死 代 ”30)라
한 것은 蒿里 관념 미
에 대한 터존
이 이 전한대부 재하였음을 보여준다.
미 운
흥 로 것은 후한대 鎭墓文에 “死人歸蒿里 蒿里君 ”와 더불어 “ ”31)·
耗 蒿 里父老 耗里伍長
“ ( ) ”32)·“ 점
”33) 등이 기술되어 있다는 이다. 이는 호
리 역시 父老 子弟 및 里民
와 里 일 조
으로 구성된 현세의 와 동 한 구 로
운 영되었고, 현세의 什伍制度 일 게 伍長
와 동 하 을 중심으로 한五家一
伍 의 인보조직 운 이 영된 것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蒿里 귀
에 거주하는 신은 현세에서 戶籍 배
에 등재되어 피지 대상으
로 파악 民 마찬
된 과 下 籍
가지로 사후에는 地 死 에 등재되었다. 의 앞
熹平二 張叔敬
年 았 泰山
鎭墓文에서 보 듯이 五嶽 人錄
으로 대표되는 이生
일 맞추
의 사망 시에 魄 소환
어 그 대상자의 魂 을 官
하고, 地 은 이 장부
름 조 호
와 사자의 이 을 대 한 후 이를 사자의 적에 등재하였 것이다. 던
관 목
이는 한대인들의 사후세계 을 잘 보여주는 대 으로서, 인간은 생시
호 만
에 현세의 적에 등재되지 사후에는 지하세계의 적에 등재된다는 호
인식을 반영한 것이 , 며 ⑨永壽二 成桃椎 年 異簿
鎭墓文의 “死生 ”34)도 바
러
로 이 한 인식을 그대로 드러낸 겠 호
것이라 하 다. 이는 현세의 적이
관
그대로 내세로 이 된다는 인식을 보여준 전한대 고지책과 간의 차 약
만 호 민 배 루
이가 나는 것이지 ,35) 지하세계 역시 적에 의한 대 지 가 이 어
건 건
진다는 인식은 고지책이 진묘문이 차이가 음을 보여준다.없
호 목
사자를 지하 적에 등재하는 적 역시 현세의 그것과 크 다 지 게 르
호
않다. 현세의 적 작성의 주 요목 금 요 징수
적이 세 과 역 에 있다는 것
은 잘 알려 실 러
진 사 인데, 진묘문에서도 이 한 현상을 발 할 견 수 있다.
熹平二 張叔敬
年 黃豆 瓜子 人持給 下賦
鎭墓文에서 “ · , 死 地 .” 라 하여,
36)
사자가 “地 下賦 곧 명 관 게 賦稅 납 수 록 黃豆
” 계의 리에 를 부할 있도 와
瓜子 를 부장하였다는 내용을 기재하고 있다. 그리고 弘農楊氏 鎭墓文
에서 “ 宗君自食 下租歲二千萬
地 弘農楊氏 宗長
”37)이라 하여, 의 이 지하
세계에서 2 천만석 租稅 수입
의 록
으로 생활하도 한 것 등에서 볼때 ,
지하세계에서도 공적 사적 영역에서 賦稅 租 수수 루
혹은 地 의 가 이 어
진다는 인식을 인할확 수 러
있다. 이 한 인식 역시 지하세계에서 徭賦
가 징수 된다는 고지책의 인식과 일맥 즉 荊州 謝家橋 號
상통하다. , 1 漢墓
출토 고지책의 “ 昌家復無有所與 有詔令 江陵 高臺 8號
, ”,38) 1 漢墓 출토
고지책의 “ 家優 復 算 颢 徭 江陵 毛家園 號
( )不 不 ( )” , 39) 1 漢墓 출토 고지책
의 “此家復 不事” 등은 어느 것이나 지하세계에서도 사자는
40) 徭賦 의
징수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진묘문 중에서 사자가 계의 명 賦稅
같 격
부과 대상으로 묘사된 것과 은 성 으로서, 지하세계에서의 인 역 개
시 현세와 마찬 탱 일개
가지로 음계를 지 하는 의 구성분자에 지나지 않
는다는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 다. 겠
럼
이처 고지책과 진묘문에 반영된 한대인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인
본 조
식은 기 적으로 현세와 내세의 동질성을 강 하는 “事死如事生”41)의
관 루 져
생사 으로 이 어 있다고 할 수 러
있다. 그 나 진묘문은 고지책과
달리 현세와 내세의 맹목 적 동질성에 사로 잡혀 았 있지는 않 다. 고지책
관
에 비하여 진묘문의 내세 은 현세에 대해 훨씬 독립 체 적이고 계적이
까
기 지 한데, 이는 生死 異路 관념 모든
의 이 관 진묘문을 통하고 있다는
실 확 수
사 에서 인할 異路 관념 체
있다. 生死 명
을 구 적으로 시한 진묘문
<표2>
출토
진묘문명 生死異路 관념의 표현 내용
지역
④陽嘉二年(133)曹伯魯鎭 西安 生人得九, 死人得五, 生死異路, 相去萬里
墓文
⑧建和三年(149)鎭墓文 陝西 生人有里, 死人有鄕……生人當前, 死人當却; 生人
古陵縣 入□, 死人出鄕
⑭熹平元年(172)陳叔敬鎭 西安 生人上就陽, 死人下歸陰, 生人上高臺, 死人深自藏.
墓甁 生死各自異路
⑮熹平四年(175)胥氏鎭墓 西安 死人歸陰, 生人歸陽, 生人有里, 死人有鄕, 生人屬
甕 西長安, 死人屬東大山.
延光元年(122)鎭墓文 洛陽 生自屬長安, 死人自屬丘丞墓.
初平元 年(190) 郭氏 鎭 生人入成(城), 死人生郭, 生人在宅舍, 死人在□□,
墓文 洛陽 各□千秋萬歲, 長□□□
密縣后土郭鎭墓文 河南 密縣 死人行陰, 生人行陽, 各自有分畫, 不得復交通.
延熹九 年(166) 韓袱興 山西 生人自有宅舍, 死人自有棺椁, 生死異處, 無與生人
鎭墓文 臨猗縣 相索.
熹平二 年(173) 張叔敬
鎭墓文 山西 忻州 生人築高臺, 死人歸深自貍(埋)
熹平六年(177) 鎭墓文 不明 生人西屬長安, 死人東屬大山. 生人屬陽, 死屬陰
殘鎭墓文 不明 死生異處, 莫相干□. 生人屬西長安, 死人屬太山
을 정리하면< > 같
표2 와 다.
< > 포
위의 표2 에 함된 진묘문은 작성의 시기와 지역이 서로 다 지 르
만 어느 것이나 生死異路 관념 체
의 명
을 구 적으로 시하고 있다. 이 한 러
관념 人 人 귀 격
은 生 과 死 의 속처 혹은 성 의 상이성에 좀 더 구 적으로 체
즉 人 陽 長安 里 城 高臺 宅舍 人
표현되어 있다. , 生 은 · · · · · 에 死 은 · · 陰 泰山
鄕 深自藏 棺槨
· · ④ 럼
에 속하거나 위치하고, 이들 양자는 처 서로 나 萬里
떨 존 점
어진 재로서, 생사를 기 으로 더 이상 통교하거나( ), 서로 아 찾
절 안 존
서도( ), 간여해서도( ) 대 던
되는 재로 인식되었 것이다. 따
라서 사자는 현세에서 철저히 제된배 채 棺槨
지하의 에 매장된 상 에 태
명 핵
서 계의 심이라 할 泰山 소 명 官
에 속되어 계의 地 들로부 지 를 터 배
존
받는 재였다. 이 한러 관념 者
은 한편으로는 死 에 대한 철저한 부정
터 taboo 관념 터 겨난 일 터
혹은 부( )의 으로부 생 것 인데,42) 生死 異路 관
池澤優, 中國の死生觀 -中国古代·中世における“死者性”の転倒- (死および
42)
者崇拝·死者儀礼の宗教的意義に関する比較文化的·統合的研究 (2000~2002年
死
40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이 렇게 볼 때 解注
의 행위는 사자를 위한 것이기 보다는 생자를 전
염성이 강한 사자의 邪氣 터 호
로부 보 하기 위한 치라 할 조 수
있는데,
력 또 터 taboo
이는 사자에 대한 강 한 부정 는 부( )의식이 작동한 결과로
서, 그 원인은 사자가 생자에 게 ‘祟’ 곧 ‘ 코 ’ 존
해 지 를 부리는 재로서 인
때 일
식되었기 문 것이다. 이는 夭折者 戰 者 受刑 亡者 自殺者 및
· 死 · 死 · 기
타무 게죽
고하 어 원한에 사 무친 厲鬼
가 원한을 생자에 게풀기 위해
코
해 지를 부리는 것으로 인식된 결과인데, 여기에는 생자와 연 계 혈 관
가 는없 厲鬼 조 귀 포
뿐 아니라 상의 신도 함된 것으로 인식되었다.
조 까 포 厲鬼
상신 지 함된 에 대한 인식은 수많 寃
은 魂을 양산한 전국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 측면
도 적지 않을 것인데,50) 후한대에도 이 러
개
한 양상이 그대로 전 되었음을 北 ⑦ 斗君
鎭墓文에서 아 찾 볼수 있다.
즉, “北斗君 / 主乳死 (咎)鬼, 主句死 (咎)鬼, 主帀死 (咎)鬼, 主星
死 (咎)鬼”51)에 의하면, 北斗君이 주관하는 鬼名으로 乳死咎鬼·句死
咎鬼·帀死咎鬼·星死咎鬼가 있다. 이중 乳死咎鬼는 출생과 더불어 사망
한 영아의 凶鬼, 句死咎鬼는 자살한 凶鬼 , 帀死咎鬼는 戰死한 凶鬼,
星死咎鬼는 刑死한 凶鬼로서, 이들은 모두 비명에 사망한 寃鬼인 까닭
에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咎殃의 위력을 가진 존재로 인식되었
고, 이러한 咎殃을 피하기 위하여 진묘문을 작성하여 부장한 것이다.52)
이처럼 비명횡사한 자들의 寃鬼가 생자에게 해코지를 할 수 있다는 인
식은 질병 등의 요인으로 젊어서 사망한 자들의 혼령에 대해 경계한
진묘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但以死人張叔敬, 薄命蚤死.53)
50) 池澤優, 中國の死生觀 -中国古代·中世における“死者性”の転倒-, pp.210-211
참조.
51) 이 朱書 陶甁은 1957년 長安縣 三里村에서 발굴된 것으로서 王育成, 南李王
村陶甁朱書與相關宗敎文化問題硏究 (考古與文物 1996年 第2期), pp.62-64에
소개되었으나 아직 공식 발굴보고서는 나오지 않은 상태이다.
52) 王育成, 南李王村陶甁朱書與相關宗敎文化問題硏究 , pp.62-64 참조.
53) 郭沫若, 奴隸制時代 (郭沫若全集), p.665.
42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今平陰偃人鄕萇富里鍾仲游妻, 薄命蚤死.54)
天帝下□移別……弓主涼自薄命蚤□.55)
死者河南□□□郭□□□, 汝□薄蚤死.56)
天帝下令移前雒東鄕東郡里劉伯平, 薄命蚤……醫藥不能治.57)
⑥後死婦加亡, 方年二十四.58)
건
이들 6 의 진묘문은 전 진묘문에 비해체 건수 많
가 은 편은 아니지
만 름 명
, 사자의 이 이 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사망의 정황과 그 인을 요
점 목
제시하고 있다는 에서 주 된다. 사망 연 이 24세로 령 밝혀져 있는
⑥加氏 鎭墓文을 제외하 면 모두
사망 인을 요 ‘薄命蚤 ’ 밝
死 로 히고 있는
러 실
데, 이 한 표현은 현 적으로는 에서 보듯이 의 으로 치 할 약 료 수
없 병 요 러
는 질 이 주된 인이었을 것이다. 이 한 사자의 질 은 상술 듯 병 했
이 생자에 게 注入 또 른 죽
되어 다 래
음을 초 할 것으로 인식되었을 것인
데, 위의 진묘문에서 사자가 薄命蚤 者
死 임을 분 히 명 밝힌것은 이들이
夭折者 寃鬼 로서 게
가 되어 생자에 질 등의 해 지를 부병 코 릴수 있는
존 일 따
재로 인식한 결과 것이다. 라서 이를 지하기 위하여 사자에 방
대한 解謫 解注과 필요
의 행위가 하였을 것인데, 후술하는 熹平二年
張叔敬 鎭墓文에서 특히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럼 게 코
이처 사자가 생자에 해 지를 할 수 순있다는 인식은 단 히 진
묘문이 유행하는 후한대에 나만 타난 睡虎 秦簡日
것은 아니다. 地 書에
甲乙有疾 父母爲祟 ; 丙丁有疾 王父爲祟 ; 戊己有疾 巫堪 王母
“ , ” “ , ” “ , 行,
爲祟 ; 庚辛有疾 外鬼傷 殤 爲祟 ; 壬癸有疾 毋 戊 逢人 外鬼爲
” “ , ( )死 ” “ , ( ) ,
祟 면 戰 및 秦帝
”59) 등에 의하 , 國 일금 살
國 시기의 시 기 중에 아있는
병 걸 요
자가 질 에 리는 인으로서 생자의 사망한 父母 祖父母 및 혈 관 · 연
계에 있지 않은 외부의 신인 귀 外鬼 ‘祟’ 곧 코
가 렸 때
해 지를 부 기 문이
포 게 병 걸 록
라는 내용이 함되어 있다. 여기서 생자에 질 이 리도 한 주
체 外鬼
는 뿐 아니라 사망한 父母 祖父母까 포
와 점
지 함되어 있다는 이
목
특히 주 되는데, 이는 사자에 대한 부정 는 부( 또 터 taboo )적 인식이
일 귀 만
반 신뿐 아니라 부 와 부 에조 모 모 게까 미쳤 지 명 음을 분 히 보여주
는 것이다.
러 졌 前 景帝
이 한 인식이 漢代에도 이어 음을 漢 추 代의 것으로 정되
는 孔家坡 簡日漢 확 수
書에서도 인할즉 ……辛汗 閒 父
있다. , “ ( ). 大 䄅
祟 ; 辰有疾 四日小汗 閒 七日 汗 閒 祟 父 ; 巳有疾 三
( )” “ , ( ), 大 ( ). 䄅( )大 .” “ ,
日小汗 閒 九日 汗 閒 祟 高姑姊□ 따르면 辰日 巳日
( ), 大 ( ). 䄅( ) ” 에
60) , 과 에
발생하는 小汗 汗 병 父 高姑姊 코 터
과 大 의 질 은 사망한 大 와 의 해 지로
명
비롯되었음을 시하고 있는데, 이 역시 사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서
명 럼
비롯되었음이 분 해 보인다. 이처 진한대에 사자에 대한 부정적 인
조 게까 확
식이 상신에 병 개 조 손 징벌
지 대되어 질 을 매 로 상신이 후 을 할
수 본 터 taboo 관념
있다는 인식은 기 적으로 사자에 대한 부정과 부( )의
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注’ 마찬
사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극단적 표현은 상술한 와 가지로
者 떠 요 소 안 家屬 게 또
死 가 어 한 인에 의하여 그가 생전에 속된 집 의 에
른
다 사망을 유발할수 찾 볼수 즉일
있다는 인식에서도 아 있다. , 부
一家 重
진묘문 중에는 줄
에서 喪(한국어로는 초상)의 발생을 경계하는
포 < > ⑥建和元 加氏
내용을 함하기도 하는데, 표1 중 ⑨永壽二 年 鎭墓文,
年成桃椎 ⑱初平元 劉氏
鎭墓文, 南李王村張氏
年 鎭墓, 洛陽唐 鎭墓文,
寺門成氏 오 ‘重復’
鎭墓文 등에 나 는 미 이 이와 유사한 의 로 보인다. 다
만 重復 미
학계에서는 異說
의 의 에 대해서는 즉 干支 이 분분하다. , “ 가
겹 凶日 承負 來源
서로 치는 ”, “
61)重 의 미 籍
으로서 喪의 의 ”, “死 에 등
62)
일 른 령 똑같 忌日
재된 망자의 사망 시가 다 망 과 이 에 등재되어 있다는
미
의 ,” “사자와 그의
63) 家屬 름 壽命 年 月 日 時
의 이 혹은 뭔
· · · · 등에서
일 者 게 咎殃 래
가의 치로 인하여 生 에 미
을 초 한다는 의 ”64) 등의 주장이
러 본 석 뒤 미루
제기되었다. 그 나 고에서는 이에 대한 분 은 로 기로 하고
여기서는 重復 관점 만
을 사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표출이라는 에서
살펴 秦 日 조
보기로 한다. 이를 위해 漢代 書의 다음 문을 보자.
명 조
다음으로 진묘문에 묘사된 계의 구 에 대하여살펴 보기로 한다.
명 관 조직 운
상술하였듯이 계의 부 官 천 관 최
을 영한 地 은 지를 장하는 고
신인 제의천 律令 따 움직 존
에 라 천 총
이는 재였다. 사자는 제의 은 에
힘입 겪
어 지하세계에서 어야 할 온갖 면
고초를 제받고, 나아가 사자의
손
후 에 대한 복락 증 게 료 석
도 보 받 되는 것이다. 다음 자 의 분 을 통해
이를 좀
더 상세히 살펴
보기로 한다.
到 約勅 吏 勿復煩擾張氏之家 急急 律令 熹平
行. 傳 , 地 , . 如 일 .70)( 2年 12월16 ,
天帝使者 張氏之家 三丘五
가 의 右 央 主 塚丞 塚令 主塚司命
墓·墓左·墓 ·中 墓 · · · ·
魂門亭長 塚 游徼 게
· 中 丘丞 伯 下二千石 東塚侯 西塚
등에 告하기를, ·墓 71)·地 · ·
侯 下擊犆卿 耗 蒿 里伍長 게
·地 · ( ) 같 감 게 했 오늘
등에 다음과 이 히 고하 다.
은 吉良 른 人 張叔敬 薄命蚤
한데, 다 이유가 아니다. 死 인 丘 이, 死하여, 墓
돌
로 아가고자 한다. 黃神 五嶽 이 人 錄 관 며
을 生하고, 死 의 을 주 하 , 魂을
르 魄 르며 人 籍 관
부 고 을 부 人 高臺 築
, 死 의 을 주 한다. 生 은 人 를 하고, 死
깊 돌
은 은 地中으로 아가 스스로를 히 묻 게 됨 眉 鬚 모두 떨 져 에, 도 도 어
버 모두 土灰
리고, 러 까닭 復除 藥
가 된다. 이제 그 한 에 의 을 진상하니, 이
터 안 者 오 록
후로부 는 (이 집 에서) 더 이상 死 가 나 지 않도 해주기를 원한
다.上黨 人參 九枚 人
의 게 鉛人
로 生 을 대신하 하고, 人 으로 死 을 대신하
게 며 黃豆 瓜子
하 , (사자가) · 下 賦 록 制
를 가지고 地 의 로 내도 한다. 를 세
워 牡厲 막 土咎 辟除 며 禍殃
를 고 를 하 ,록 이 不行하도 해주기를 바란다.
러 착 면 吏
(이 한 내용의) 傳이 도 하 , 地 를 단속하여, 다시는 張氏 안 煩 집 을
擾 게
하 하지 말라. 신속히 律令 같 과 이 집행하라.)
⑥建和元 十一月丁未朔十四日解 天帝使者謹爲加氏之家別解 下 後
年 , 地 , 死
婦加亡 方 二十四 等汝名借 或同歲月重復鉤挍 校 日 或同日鳴重復鉤
, 年 . , ( ) 死,
挍 校 日 上司命 下司祿 子孫所屬 皇使者 轉相 語 故以自 鉛
( ) 死. 告 · , , 告墓 , 告 . 代
人 鉛人池池 能舂能炊 上車能御 把筆能 於 高長 伯(陌)上游徼
, , , , 書. 告 中 , .
千秋萬歲永無相墜物與 人 食□九人□□□□ 建和元
生 , 일解
72) ( 年 11월14 의
날 天帝使者 삼 加氏之家
에, 가 가 神 게 別解 :
를 위하여, 지하(의 들)에 함에
後 婦 加 름 했 방
死의 인 (사자의 이 )가 사망 는데, 년 24세이다. 너희 지하의
신들은 지하의 관소 名籍에 있는 달
을 함께 비교하여, 혹 이 해의 이 에
加氏 름
( 듭확
의) 이 이 있는지 거 같 일 加氏 름
인하고, 혹 은 시에도 ( 의 이
이) 있는지 거듭확 司命 게 래 司錄 게 加氏
인하라. 위로는 에 아 로는 에 ( 의)
손 소 곳 加氏
자 이 속된 에 ( 실 게 皇使者 게
의 사망 사 을) 고하 하고, 墓 에 고
加 실 널
하여 ( 가 사망한 사 을) 리 고하여 알게 鉛人 加氏 하라. 으로 를 대
게
신하 함에, 鉛人 근면 은 舂 炊 수 며車 올
하고, 능히 하고 할 있으 , 에 라
말을 몰수 筆 잡 能
있고, 을 고 書한다. 中 高長 伯 陌 上游徼 게 과 ( ) 에 고하
여,千秋萬歲까 언 잊 록 게 ……
지 제나 이것을 지 않도 하 하라 )
⑳初平四 十二月己卯朔十八日丙申直危 天帝使者謹爲王氏之家 後 黃
年 , , 死
母當歸舊閱, 慈告丘丞·莫(墓)伯·地下二千石·蒿里君·莫(墓)黃·莫(墓)主·莫
(墓)故夫人·決曹尙書令: 王氏冢中先人, 無驚無恐, 安隱如故, 令後曾財益口,
千秋萬歲, 無有央(殃)咎. 謹奉黃金千斤兩, 用填冢門, 地下死藉削除文, 他央
咎, 轉要道中人. 和以五石之精, 安冢莫(墓), 利子孫, 故以神甁震(鎭)郭門,
如律令.73)(初平4년 12월 18일 直危에 해당하는 날, 天帝使者가 삼가 王氏
之家를 위하여, 後死한 黃母가 이미 조성된 (이 집안의) 墓穴로 돌아감에,
丘丞·莫(墓)伯·地下二千石·蒿里君·莫(墓)黃·莫(墓)主·莫(墓)故夫人·決曹尙書
令에게 고하기를: “王氏 묘역에 안장된 조상들은,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이전처럼 安隱하며, 후손들로 하여금 재산을 증식하고 食口가 늘어
나게 하며, 千秋萬歲에 이르기까지, 재앙이 없도록 하라. 삼가 黃金 2千斤
兩을 바치니, 이것으로 冢門을 填(鎭)하고, 地下의 死藉에서 文(死者와 生
者의 이름이 중복되어 있는 文)을 削除하고 여타의 재앙도 없도록 하고,
이를 要道中人에게 전하라. 五石의 精(곧 神藥)으로써, 冢墓를 鎭安하고,
子孫을 이롭게 하라. 神甁으로써 郭門을 鎭하라. 이러한 것들을 律令대로
집행하라.”고 하였다.)
명 최 명 天帝
들임이 분 해 보인다. 그리고 에서는 고 신 으로 와 그의
대리인인 天帝使者 오 만 명 실
가 나 지 신 은 진묘의 행자인 丘丞 伯 둘 ·墓
런
에 불과하다. 그 데 이들 두 명또신 天帝
한 에서 명령 의 진묘 을
직접 수 존 점
행하는 재로 묘사되어 있는 에서 보아 이들 역시 계의 명
官 명
地 임이 분 하다.
금까 견
한편, 은 지 지 발 된 진묘문 중 墓域을 다스리는 地 神名 과
명계의 地 官및 관
이들 제신의 위계 계가 가장 잘드러 목 나 있어 주 된
우 ⑥⑳
다. 선 과 더불어 여기에서도天帝使者 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면 천
표 적으로 제의 사자로서 제의 천 명령 달 미 만
을 전 하는 자를 의 하지
실 체 관 巫
제 현세에서는 진묘문의 작성은 물론 상장의식 전 를 주 하는
師 볼수
로 있다.명령 달순
의 전 면천
서는 에 의하 우 제사자가 선 사
관
자의 묘역을 장하는 하 신에 급 게 천 명령 달 면 제의 을 전 하 서 이들로
금 명령 명 上級神 官 게
하여 그 을 계의 수
인 地 에 고하여 진묘의 역할을
록
행하도 하였다. , 즉 天帝使者 張氏之家
가 관 神
의 墓域을 장하는 地 인
三丘五 右 央 主 塚丞 塚令 主塚司命 門亭長 冢 遊擊 游
墓·墓左·墓 ·中 墓 · · · ·魂 · 中 (
徼 게 새 안 실
) 등에 사자가 로이 장된다는 사 과 이에 대한 제의 천 명령
달
을 전 하고, 이들 묘역의 지신은 제의천 명령 上級神 명
을 다시 인 계
의 丘丞 伯 下二千石 東塚侯 西塚侯 下擊犆卿 耗 蒿 里伍長
·墓 ·地 · · ·地 · ( ) 등에
게 달 명 급
전 하여 계의 상 신들이 生 人除殃 人解謫 명령 실 과 死 등의 을
게
행하 하였다. 이는 곧 수순 天帝→天帝使者→
진묘의 이 관 墓域을 장
하는 下級神→ 冥界의 上級神 官 (地 )으로 구성되었음을 보여준다.
러 같 천
그 나 이상과 은 제의 진묘 명령 달 실 수순 모든
의 전 과 행 이
일 게 타
진묘문에 동 하 나 나는 것은 아니다. 에서 ⑥ 天帝使者 달 가 전 하
천 명령 下 司命 司祿 皇使者 高長 伯 陌 上游徼
는 제의 은 地 와 · , 墓 와 中 , ( )
게
에 각각 전 달됨 알 수
을 천 명령 달 諸
있다. 이는 제사자의 을 전 받는
神 른 때 일
이 서로 다 기능을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문 것이다. 그리
⑳ 천
고 에서는 제사자의 명령 게 달
이 묘역의 지신들에 전 되지 않고 곧
명
바로 계의 地 인 官 丘丞 莫 伯 下二千石 蒿里君 莫 黃 莫
· (墓) ·地 · · (墓) · (墓)
主 莫 故夫人 決曹尙 令 게 달
· (墓) · 만
書 에 전 되기도 하였다. 뿐 아니라 에 ⑳
50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는決曹尙 令 타
書 을 비롯하여 여 의 진묘문에서 등장하지 않는 神名 도
다수포 럼 마 천 명령 달
함되어 있다. 이처 진묘문 다 제의 이 전 되고 집행
되는 과정이 상이하고, 아 울러 명 요
신 이 상이한 인에 대하여 현재로서
명 길 없 만
는 구 할 이 다. 다 사후세계에 대한 巫師 道士 개
혹은 의 인적
견 일
해가 반영된 결과 정도로 추측 볼을 해 뿐이다.
천 린
한편, 제가 내 것으로 표현된 진묘 명령 본
의 내용은 기 적으로
生死異路 관점 입
의 에 각하여 死 人解謫 人除殃 곧 者 陰
과 生 死 가 界의
邪鬼 혹은邪氣 터 벌
로부 처 을 받지 않고, 사자
존 게 려
의 생 중인 가속에 는 재앙이 내 지지 않도
록 만
하는 것이지 , 그 세부적 내용과 방법 은 진
마 약 씩 르 우 ⑭
묘문 다 간 다 다. 선 에서는 생자와
사자의 엄격 한 분리와 死 人解謫 人除殃
·生 이 나
타날 뿐 그방법 에 대해서는 언급 되어 있지 않
면 ⑥
다. 반 에서는 진묘의 방법 체 이 구 적으
타
<그림1: 弘農楊氏墓 출토 로 나 나 있다. 즉 , 사자를 대신하여 징벌 을 받
써 人解謫 목 달
鉛人>
음으로 궁극적으로 死 의 적을 성하
< 림 > 럼 鉛人 만
기 위하여 그 1 처 명
을 들어 부장하였음을 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生人除殃 을 위하여 에는 金玉 을 에는上黨人蔘 을
까
부장하기 지 하였다. 특히 에서⑥ 鉛人 근면 만은 舂炊
할 뿐 아니라 · ·
御 존
·書에 능한 재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연인이 死 人解謫 의 대리
일 조 존
자 뿐 아니라 사자의 지하생활을 보 하는 재로서, 전한대 고지책
수 승 노 같 격
에서 사자를 행하여 저 으로 이동하는 비와 은 성 으로 인식
되었음을 보여준다.
진묘의방법 으로또 목 ⑳
하나 주 되는 것은 에 제시된 것들이다. 여
기에는 첫째 冢門 의邪氣 압 명 관 호
를 진 하고 계에 보 중인 사자의 적에
못 복
서 잘 중 기재되어 다시 을또 죽 수 름 삭
있는 생자의 이 을 제함으
써 안 重
로 한 집 에서 喪이 발생하지 않도 록 ‘黃金 千斤兩’ 친2 을 바 다고
점 둘째 冢
한 , 安 손 롭게
墓를 鎭 하고 자 을 이 五石
하는 용도로 을 정제
하여 만든 神藥 친 점 셋째 郭門 邪氣 압
을 바 다는 , 의 를 진 하는 용도로
者 人
중국 고대 死 의 書와 漢代 의 來世觀 (尹在碩) 51
병 前室 後室 및 甬道 섯 방
에서 발굴된 진묘 은 과 벽 등다 위에 위치한
또 둥 래 土坑 묻혀
는 기 아 의 에섯 개 陶甁 면 朱
있었고, 다 의 표 에는 書
된 진묘문과북두칠 五石 실 채 병 안
성을 서사하였음은 물론 을 물 로 도
넣 두
에 어 었다. 이는五石 天干 五神 조 켜 五方 배
78) 을 · 과 화시 에 치함으
써 相剋 당
로 각기 섯방
에 해 하는 다 위의 재앙을 물리치고자 하였음을
보여준다. 79)
①
한편, 이 발굴된 咸陽敎育學院 號 漢墓 중 2 漢墓에서는 진묘문에는
언급 되지 않은 鉛人 쌍 점 목 < 림>
한 이 출토되었다는 도 주 된다. 그 2 에
서 보듯이 鉛人 쌍 추
은 한 으로서 이중 하나는 여성으로 정되는데, 이
< 림 > 弘農楊氏
는 그 1 의 남녀
墓 출토 연인이 형상으로 구성된 것과도
일 < 림> < 림> 마찬
치하는 현상이다. 그 2 의 연인 역시 그 1 의 연인과 가
지로 死人解謫 당
을 위한 용도로 부장되었을 것인데, 해 진묘문 중의
爲人立 先除央去咎 利後子孫 令 人無適 人無患
“ , , , 死 爲人立
, 生 ”에서 “ ”이
< 림 > 鉛人
바로 그 2 의 미 목
의 부장을 의 하는 것으로 보이고, 그 적은
바로 이들 鉛人 써 人解謫
이 사자를 대신하여 재앙을 받음으로 死 과 生
人無患 달 록
을 성하도 한 것이다.
Ⅲ. 關洛 이외 지역 출토 鎭墓文의 유형과
來世觀
<표1>에서 보듯이 비록 출토 건수는 많지 않으나 關洛 이외 지역에
서도 약 10건의 진묘문이 발굴되었다. 이중 熹平二年張叔敬鎭墓文과
序寧簡에 대한 연구를 제외하면 거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관락지역에서 출토된 전형적인 진묘문과 서사구조와 내용
생자를 위한 除殃
의 내용을 갖춘 鉛 木牘 石刻 織物
券· · · 등도 진묘문의
일종으로 파악
하여 여기에 반영된 생사 을 관 살펴
보고자 한다.
우
선지 금까
지 발굴된 진묘문 중 시기적으로 가장 이 것은 표1 른 < >
①
의 로서, 1999년 함양에서 발굴된 漢 後 明帝 永平
3年(60)의 기년을
甁 래
가진 鎭墓 이다. 특히 이 진묘문은 종 학계에 초의 진묘문으로최
알려져 던 ② 永元四
있었 의 年鎭墓文보다 약 앞
30년 선 것으로서, 이를
계기로 진묘문의 제작시기가 후한 중기 지 까 소급 점
된다는 이 주 된 목
다. 그 내용은 다음과 다. 같
①永平初三年十月九日丙申, 黃神使者□地置根, 爲人立先除央去咎, 利後
子孫, 令死人無適, 生人無患, 建立大鎭·慈礜·雄黃·曾靑·丹沙, 五石會精扆藥
輔神, 冢墓安寧解狼□草□□爲盟, 如律令.82)(永平3年 10월 9일, 黃神使者
가 地에 根을 置함에, 人(鉛人?)을 立하여 먼저 殃咎를 제거하고, 후손을
이롭게 하며, 死人으로 하여금 適(謫)이 없게 하고, 生人으로 하여금 患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大鎭·慈礜·雄黃·曾靑·丹沙를 建立하고, 五石으로 精
을 會하고 扆藥으로 神을 補하며, 冢墓의 安寧과 ……을 盟함에, 律令과
같이 하라.)
라 하여, 사자에 대한 解謫 無患 및 福利
과 생자에 대한 五石
, 그리고
에 의한 補神 冢 안녕
과 墓의 병안
을 기원하고 있다. 그리고 진묘 에는
실제 大鎭· 慈礜 雄黃 曾靑 丹沙
· · · 五石 담 놓았
등의 을 아 다. 이것은 이
병 ②
진묘 이 이하의 關洛지역 출토 진묘문에 선행하는 전형적 진묘문
일 뿐 아니라 특히 진묘 행위에 五石 실이 제 사용된 시기가明帝 까 代
지 소급 점 미
된다는 에서도 의 가 있다.
① 향 따
한편, 은 후 발굴 상황에 라 진묘문의 작성 시기가 이보다 훨
씬올 갈 충 陶
라 가능성도 분히 보여준다. 특히 鎭墓 書 중심의 진묘문
습
작성 속이 매 우 완만 게 착 쳤 추
하 정 되는 과정을 거 을 것이라는 정에
서 볼 때 ① 럼 당 완벽 태
, 처 상 히 병 明帝
한 형 의 진묘 이 미
代에 이 제작
① 태 닐 짐
되었다는 것은 이 진묘문의 초기 형 가 아 것이라는 작을 하 게
82) 咸陽市文物考古硏究所, 咸陽敎育學院漢墓淸理簡報 , p.233; 劉衛鵬, 永平三
年朱書陶甁考釋 , p.164.
者 人
중국 고대 死 의 書와 漢代 의 來世觀 (尹在碩) 55
즉① 명
한다. , 의 제작시기인 제시대 이전에 이 다양한 형 의 진묘미 태
향
문이 작성되었을 것이고, 이는 후 고고발굴에서도 가능성이입증될
매우높 미 러
다는 것을 의 한다. 이 한 차원에서 성 감숙 武威 磨咀子
15
號漢墓에서 발굴된 武威磨咀子女子□寧
鎭墓文 주 해 보자. 목
姑臧北鄕西夜里女子□寧死下世, 當歸冢次, □□□□□水社毋□河(苛)
留, □□[有天]帝敎如律令83)(姑臧縣 北鄕 西夜里의 女子인 □寧이 死하여
세상을 하직하여, 冢次로 돌아감에 이르러, ……[天帝가 告(令)하기를
]……水社(神名)가 이를 막아 저지하지 말고……天帝의 敎가 있으니 律令
에 따라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길 Cm 너 Cm 織物
이것은 이 59 비 45 의隸 朱 에 4行의 書로 書된 것으
棺 덮 따
로서 을 고 있었다. 라서 발굴보고서에는 柩銘 일 소개 의 종으로
면
하 서도 “[有天]帝敎 律令 如延熹四 鍾仲游妻
”이 年오 鎭墓文에 나 는
有天帝敎 律令
“ 如 일 점 근
”과 동 하다는 을 거로 鎭墓券으로 분류하였
有天帝敎 律令
다.84) “ 如 劉伯平
”은 이외에 오 天帝鎭墓文에도 나 고,
최 神名
가 진묘문에 등장하는 고위 점 律令
이라는 , 그리고 “如 ” 역시
미 오 투 점 水社 水神 일
진묘문 말 에 나 는 상 적 표현이라는 , “ ”가 의 종으
천 명
로서 제의 을 받아 진묘의 역할을 한水神 일 볼수 의 종으로 있다
점 무 없
는 85) 등등에서 을 진묘문으로 분류하여도 아 문제가 을 것
이다.
런 또
그 데 여기서 목 점
하나 주 해야 할 은 “ □□□□□水社毋□河
苛 留 冢次
( ) ”과 “ 우 잔
”이다. 전자의 경 , 결된 부분이 “ 天帝下令 또
” 는
天帝 □□
“ 告 天帝使者令
” 혹은 “ 높
(告)” 등의 내용이었을 가능성이 다.
의 木劍人俑 이 흥미롭 즉 다. ,
이 묘에서는 10-1 8Cm 木劍 의
人俑 개 5 가 발굴되었는데,
< 림> 얇 목
그 4 에서 보듯이 은
판 깎 칼날 人形 모
을 아서 과
루 게
양의 자 가 연결되 한 형
태로서,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묘주인의 좌측 손 놓 부위에
여 있었다고 한다. ) 이것은 88
묘주가 이들 목검 을 가지고 <그림4: 武威 磨咀子48號漢墓 출토 木劍人俑>
지하의 邪氣 또 邪鬼 는 를 진
압 태 록 만 목
하는 형 로서, 비 진묘문은 아니지 그 적은 진묘문과 결 코
르 았 8號 主 남
다 지 않 을 것이다. 그리고 4 墓 의 편의 묘장인 磨咀子 號 62
墓에서는 “□甲子時 / 甲子時 人 □已…… 死 告 木几
”이 기재된 가 발굴되
8
기도 하였다. 이것은9) 마멸 명 뜻 파악 수 없
이 심하여 분 한 은 할 으나
체
대 로 사자의 사망 시기와 음계로의 진 과 입 관련 된 내용으로 보이는
만큼 8호 木劍人俑
, 4 묘의 목 곧
과 유사한 적 진묘의 용도로 서사되었을
가능성도 전 혀배 수 없 제할 는 다.
이처럼무 른 태
위 지역에서 關洛지역의 진묘문과 다 형 로 진묘의 목
관 습 < 림>
적을 철하는 상장 속은 그 5 에서 보듯이 武威 磨咀子 號 의 21 漢
墓에서 출토된 木人俑 木羊 과 확 수에서도 인할 따르
있다. 발굴보고에
면 호21 묘에는8개 木人俑 실 우측벽 횡 놓
의 이 묘 내 에 열로 여 있었고,
棺 앞 개 木羊
에는 4 의 며 室門 목 獨角獸
이 진열되었으 , 墓 에는 제의 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중 木人俑 8개 앞 8호
90) 木劍俑
는 의 4 묘 출토 과 유
게 배 명 만
사하 진묘의 용도로 치되었음이 분 해 보인다. 뿐 아니라 특히
목
주 되는 것은 木羊 棺
이
면 배
의 전 에 치되었다는
실
사 이다. 후술하듯이
‘羊’ ‘陽’ 방 吉
은 을 표 하는
祥의 동물이자 陰氣 를 진
압하는 기능을 가진 동물
로서, 木羊 木人
은 바로
俑과 더불어 지하의 邪氣
혹은 邪鬼 터로부 사자를 <그림5: 武威 磨咀子21號漢墓 出土 木人俑과 木羊>
호
보 하기 위한 용도로 부장되었음이 분 하다. 명
이 렇게 볼 때 무 위 지역에서 진묘의 용도로 매장된 부장품은 처
럼직 물에 기재된 진묘문 뿐 아니라木劍人俑 木俑 木羊
· · 등 다양한 형
태였음을 알수 런 목 점 8호 前
있다. 그 데 여기서 주 해야 할 은 4 묘가 漢
末期 호 王莽時期
, 62 묘가 추 점 木劍人
의 묘장으로 정된다는 이다. 이는
俑 木人俑 및 木羊
· 료
등을 진묘의 재 로 사용하는 상장의식은 전한대
래 색 면 왔 며따
이 지역적 특 을 반영하 서 진행되어 으 , 라서 후한대의 진
묘문은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필요 가 있음을 시사한다.
마 호 木羊 마찬
한편, 저자 21 묘의 과 石
가지로 진묘의 용도로 제작된
羊 石刻
의 목 필요
文도 주 할 료 < > 壽州
가 있다. 이 자 는 위의 표1 중
石羊 鎭墓文으로서, 20세기초안휘 壽州 劉君
성 의 건
墓에서 출토된 세
의 진묘문 중의 하나로 알려져 며 같
있으 , 내용은 다음과 다.
고, 水精 청흑색
( 安 글 쓴 절
)으로 (鎭 의) 을 다. (사자는 생자와) 서로 단 되어
있음에, (생자가) 鰝漁 肉 黃米 升
의 과 2 으로 제사를 올릴것이니, (이 사
실 祖 누 약 轉 者 없 록
을) 와 券을 나 어 속함에, 世에는 더 이상 死 가 도 해주
기 바란다. 만일 者 면 드 石羊 개 돌려 큰
死 가 생기고자 한다 , 반 시 이 고 를
소 춤 수 때까
리로 이야기하고 다리로는 을 출 있을 려
지 기다 서야 비로 소
(망자의) 소환 응 실 믿 못
에 할 것이니, 이 사 을 지 한다고 생각하여, 이 石
羊 증 삼 律令 따
으로 그 거를 으니, 에 라 처리하기 바란다.)
㉯余……移葬……居, 子孫不譽, 留者……去者已去. 東嶽圖, 靑石黃裏, 書
以水精, 與相絶. 以肉·黃米二升, 與祖□卷, 轉世無有……. 即欲有, 須右羊能
顧告而吒, 足可以莎, 乃應召呼. 以爲不信, 石羊爲真, 如律令.
㉮와 ㉯는 두 마리의 石羊에 새겨진 각각의 진묘문으로서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 주요 내용은 死者와 生者의 엄격한 분리와 더불어 사
자에 대한 제사를 약속함으로써 사자의 살아있는 가족에 더 이상의 죽
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원하고, 이를 보증하는 차원에서 이러한 진묘
의 내용을 石羊에 각석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진묘문은 진묘의 재료
측면에서도 그렇거니와 내용 면에서도 關洛의 그것과 매우 상이하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關洛지역의 그것과 동일하게 生死異路의 생사관이
분명히 표현되어 있는가 하면, 사자 또는 조상신의 해코지로 남겨진
가족성원이 사망할 수 있는 상황을 모면하려는 내용 또한 關洛지역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리고 石羊에 진묘문을 석각한 것도 사악한 陰氣로부터 사자를 보
호하기 위한 배려로 볼 수 있는데, 禮記月令: “羊, 火畜也”와 釋名
釋姿容: “羊, 陽也”에 의하면, 羊은 곧 陽을 상징하는 동물로서 陰에
속하는 지하의 邪氣 혹은 邪鬼로부터 사자를 보호하는 데 가장 적합한
동물이었다. 이렇게 볼 때 위의 石羊鎭墓文은 關洛지역의 진묘문과 형
식 및 내용 그리고 이를 기재한 재료의 측면에서 일정한 차이를 보이
지만 진묘의 기본 목적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이는 전술한 무위
마저자 출토 진묘문 및 진묘 기물과 마찬가지로 지역성을 띤 喪葬習俗
의 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적 상장습속을 반영한 또 하나의 사례로서 陶罐 또는 陶甁이
60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목독 첫 조 모 미 王父
머리에 사망한 부 의 형상을 의 하는 “
牘(4.2×23.6C
m)
母范 < 림> 조 모 목
”을 기재한 것은 그 6 에서 보듯이 부 를
독 했
으로 형상화 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陶甁 또
있다. 이는
는 陶罐 陶 우 른 태
에 진묘문을 기재한 關洛지역의 鎭墓 書와는 매 다 형
만
이지 이 묘장과 인 한 접 高郵縣 < 림>
의 漢墓에서도 그 7 에서 보듯이
목독 형 진묘문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는 이 지역의 목독 형 진묘문
습
작성 속을 반영하여 제작된 것으로 볼수 있다.
에서 또 미 운 점 神名 吳王 會稽 및 鹽官 배
하나 흥 로 은 으로 과 치
귀
지역의 신들이 나 오며 게
, 이들에 사자를 保佑 달 해 라는 기원을 표현
했 점 吳王
다는 이다. 은 외에江蘇省 邗江 胡場 號 5 漢墓에서 발굴된
이 목독 소 高郵縣 邵家溝
은 1957년 강 성 下層 號
漢代 유적지 중 의2
灰溝 鄭□私印 天帝使者
에서 “ ”과 “ 건 篆 封泥
”가 각각 양각된 2 의 書 와
함께 발굴되었다. 이와 관련 실 때 언
된 발굴보고가 부 하기 문에 단 하기
렵 만 鄭□私印
는 어 지 , “ 鄭□
”은 이 유적지가 “ ”라는 묘주의 분묘임을
암시하고, “天帝使者 篆 封泥
”의 書 天帝神師 격 神
는 바로 의 “ ”와 동 의
名으로서 天帝 使者 미
의 를 의 하는 것으로 보인다.天帝神師 안 는 서 에
서 발굴된 ⑯光和二 段氏
年 남 陝縣
鎭墓文과 하 성 陽嘉四
에서 발굴된
年唐氏 오
鎭墓文에서도 나 는 것으로 볼때 오 神格
, 여기에 나 는 은 이
만
지역 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전국적 망을명 갖춘 격 알 신 임을
수 러 또 른 神名
있다. 그 나 다 豸今立奇 금까 알려
으로 보이는 는 지 지 진 진
디 오 명 목
묘문 어 에도 나 지 않는 신 으로서 주 된다.
필 豸今立奇 석독
위에서 자가 로 래 給? □
한 부분은 원 보고서에는 “*( ) ”로
석독 러 < 림>
되어 있다. 그 나 그 7 에서 이 부분을 자세히 보 “면 □ ”로
되어 있는데, 앞글 좌변 豸 우변 今
자의 자형은 의 “ ”와 의 “ ”으로 구성되
어 있는 까닭 豸今 읽 무방
에 이를 “ ”으로 어도 □
할 것이다. 그리고 “ ”
뒷
바로 부분이 “ 令來食汝 □
”라 하여, “ 금 汝 곧 者
”로 하여 “ ” 死 의
鬼名 天光 잡 먹 록 겠
인 을 아 도 하 다고 하는데, 이처 럼귀 잡 먹 신을 아 는
鬼名 으로서 睡虎 秦簡日 豸今立奇强飮强食
地 書에 “ 豸今立奇
”이라 하여 “ ”가 있고,
豸今 석독
이중 “ ”자로 < 림> 우흡
된 “ ”은 그 7 의 “ ”와 매 따
사하다.97)
라서 의豸今立奇 鬼名 일
는 의 종으로 이해할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체 모 모 乙巳日
, 의 전 적 내용은 년 월 에 사망한 墓主
의 鬼名 天光 天光
은 이고, 떠 못 배
이 현세를 나지 하고 회할 경 생 우 존
족 게 코
중인 가 원에 해 지를 할 가능성이 있는 만큼 天帝神師 력 의 위 을
빌려 冥界로 신속히 떠날 면 렇게
것을 종용하 서, 그 하지 않을 경우귀
잡 먹 귀 豸今立奇
신을 아 는 신인 금 귀 먹 우 록
로 하여 사자의 신을 어치 도 하
겠 협박
다는 루 졌 알수
성의 내용으로 이 어 음을 있다.일견 당황 한 내
만 게
용인 듯 보이지 이는 生死를 철저하 분리하는 후한대 진묘문의 공
통적인 生死 異路 관념의 이 여기에도 반영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렇 면
그 다 의 경 비 우 록 木牘 점
에 작성되었다는 공통 외에 와
게 견 실
내용의 상이성이 적지 않 발 되는 것도 사 이다. 그 다고 하여 렇
일
의 내용이 상술한 關洛지역의 진묘문과 치하는 것도 아니다. 그 런
미 운 실
데 여기서 흥 로 사 은 鎭墓文 木牘 층 窖
과 함께 2 유적지의 地 에
隸 體 朱 灰陶壺
서 55자의 書 로 書된 점
가 발굴되었다는 이다.98) 마멸 이
朱 복 수 없 렇 만 高宜至
심하여 현재로서 書의 내용을 원할 는 다. 그 지 “
池坤神 日月
” “年 확
” 등이 인되는 것으로 보아, 이 역시 진묘문의 종 일
렇 면 일 층
으로 보인다. 그 다 동 한 유적 에서 鎭墓文 木牘 과 더불어 陶
罐과 유사한 형 인태 陶壺 에 기재된 진묘문이 함께 발굴되었고, 한 또
에서 關洛지역 진묘문의 生死 異路 관념 타
이 그대로 나 나고 있다는
점 등에서 미루 건 조 던 後 末 무렵
어 보 대, 이 유적지가 성되 漢 이 지역
에서 작성한 진묘문은 舊來 습 면
의 지역적 속을 유지하 서도 인 한 접 낙
일 化 향 았 높
양 대 鎭墓文 의 영 을 받 을 가능성이 다는 것을 작할 짐 수
있다.
한편, 과 더불어 또하나의 木牘
鎭墓文으로 주 을 는 것은목 끄
“ 人有惡夢, 覺, 乃釋髮西北面坐, 禱之曰: ‘皐! 敢告爾豸今立奇 . 某, 有惡夢, 走歸豸今立奇
之所. 豸今立奇强飮强食, 賜某之幅(富), 非錢乃布, 非繭乃絮.’ 則之矣.” 그리고 이 부
분에 대한 圖板은 p.104의 13背簡 및 14背簡壹 참조.
98) 江蘇省文物管理委員會, 江蘇高郵邵家溝漢代遺址淸理, p.21에 게재된 석문은
다음과 같다. “圭(?)□郡不(?)□□□□ / □□高宜至池坤神 / □□□同砐無□□
□ / 彊 □□亨 / 闓通曰同闓□□ / □□於道時□□□ / □□□年日月□□.”
64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일 녕 끝
나 7월12 서 은 내 사망하였다. 이에 그 의 아들과 녀 큰
느리 큰며
녕
가 서 을 위하여 造君 게 祭禱
에 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229·232·239
簡 면 일 8 8일 두
에 의하 7월20 과 월 례
차 더 제도 의식을 거행하였음을
여러天 게公에 고하고, 이와 더불어 生死 의 異路 관념
을 기초로 하여,
죽 만 오 없
사자의 음에 생자가 책임질 한 과 가 음을 강 하 서 사자의 조 면
혼령 게
이 생자에 재앙을 내리지 않도 하고, 아 록
사자 역시 사후 울러
세계에서 재앙을 받아서는 안 점 조 면
된다는 을 강 하 서, 이것은 公이 天
증 실 점
보 한 사 이라는 을 券書 혹은 券 에 기 하여 刺 입 입증
하고자 다. 했
같 조
이상과 은 내용 구 는 위에서 나열한 4 의 이외에도 거의개 簡
일 게 오 면
동 하 나 는데, 이를 정리하 다음 표3 과 다. < > 같
<표3: 序寧簡의 구성>
祭禱 대상 입증
일자 簡號 祭禱 주체 祭禱의 내용
神名 형태
序寧의 큰아들·큰
炊 序寧의 쾌유
226 며느리·손자 券書
7월1 일 序寧의 큰아들·큰
( 外家西南 ) 請 序寧의 쾌유
227 며느리·작은아들·
子社 券刺
君吳(?)
生死異路와 死者의 죽
序寧의 큰아들·큰 음에 대한 生者의 책임
226 며느리 造君 없음과 死鬼가 生者에 券書
게 내리는 재앙의 면
제, 死者에 대한 解謫
7월12일 227 上同 券刺
228 張氏請子社 上同 券書
229 序寧
며느리
의 큰아들·큰 郭貴人 上同 券書
230 上同 殤君 上同 券書
231 上同 田社 券書
232· 巫(序寧의 큰아들· 水上 上同 : 刺
232 券 ,
233 큰며느리를 대신) :
233 券書
234 上同 獦君 上同 券刺
235 上同 東 北官保社 上同 券刺
7월20일 序寧 큰 큰
236 며느리 의 아들· 官社 上同 券書
237· 巫(序寧의 큰아들· 大 父母 · 田社 · 上同 :
237 券
238 큰며느리를 대신) 男殤 · 女殤 · 司 刺 8:
,23 券
者 人
중국 고대 死 의 書와 漢代 의 來世觀 (尹在碩) 67
命君 書
8월8일 239 趙明 趙君 上同 券 刺
이에 따르면 祭禱 체 게 두
, 의 주 는 크 누 첫째
부류로 나 어진다. 는 서
녕 손
의 자 으로서 皇男 큰 皇婦 큰며 皇子 손 皇弟 둘째
( 아들)· ( 느리)· ( 자)· ( 아
들)인데, 이중皇男 皇婦 祭禱
과 가 둘째 皇男
의 가장 중심 인물이다. 는
과 皇婦 巫 簡 令巫夏 下 脯酒 8
를 대신한 로서, 232·234·235·237 의 “ ( ) ”와 23
簡 令趙明下脯酒
의 “ 면巫 금 祭禱 式 관 게 했
”에 의하 , 로 하여 儀 을 주 하
< > 디
음을 보여준다. 이는 표1 에서 제시한 鎭墓文 어 에도 나 지 않는오
鎭墓儀式 담당 자로서의巫人 첫 례
이 등장하는 미 우 사 로서 의 가 매 크
다. 상장의식의 진행과 상장문서의 작성 등을 巫人 담당했 이 을 것이라
점 래많
는 은종 은 논자들이 지적하였지만실 녕 실증제 서 간은 이를 하
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序寧簡 목 격 簡
의 제작 적과 그 성 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14 전
체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을 한 神 향 祈願 살펴볼 필요의 내용을 가
있다. 이와 관련 하여 그간病簡 巫禱 禱
103) · 券書 · 券 으로 이해하는
104) 105)
등의 異說 왔 런 녕 요 목
이 제기되어 다. 그 데 서 간의 가장 중 한 적을 보
神
여주는 부분은 에 대한 祭禱 녕 져
와 그 결과를 서 이 冥界로 가 가서
天 터 름 籍
公으로부 사망한 자신의 이 이 死 에 등재되어 있는지를 인하 확
天 터 입
고, 그 후 公으로부 사자와 생자가 재앙을 지 않도 보 을 받 록 증
簡 皇男皇婦爲序寧所禱造君 皆序寧持
는 것이었다. 이 과정을 226 의 “ ,
去 天 所對 人 負責 債 人毋適 謫 卷 【明白】 살
, 公 , 生 不 ( ), 死 ( ), (券)書 ”에서
펴 면 造君
보 , 녕 손 직접 祭禱 올
은 사망한 서 의 자 이 를 리는 대상이고,
녕 祭禱 式
서 은 이 儀 에서 사용된禱辭 脯酒 祭物 와 최
등의 을 가지고 고
天 터 름 籍
신인 公으로부 사망한 자신의 이 이 死 에 등재되어 있는지의
여부를 대 조확 人 녕
인하고,106) 生 은 서 의
<그림8: 徐寧簡의 형태>
죽 음에 아 무런 없 며 人곧
책임이 으 , 死
녕 벌
서 자신은 재앙의 을 받을 것이 다 없
天
는 것을 公으로부 터약 았 속받 음을 券書
刺 명
(券 )에 분 히 기재하였음을 천명 하였
다. 이는 生死 異路 관념
의 에 기초하여 生
死의 철저한 분리와 死 의 者 解謫 및 者 生
의 免殃 을 기원하는 진묘문의 전형적 형
포
식과 내용을 그대로 함하고 있는 것으
녕 격
로서, 서 간이 진묘문의 성 으로 작성
목 실
된 간이라는 사 을 잘 보여준다.
녕
서 간에서 또 목
하나 주 되는 것은 위
< >
의 표3 에서 보듯이 다양한 神格 이 등
점 격
장한다는 이다. 이들 신 은 상술한 關
洛지역의 神名 天帝 필두 명
이 를 로 계를
관 급 관
장하는 상 신과 묘지를 장하는 하 급
신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는 매 다 우 르
게 구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神名 에서도
큰 차이가 난다. 107) 關洛지역 진묘문에
簡 簡 227簡
오 명 달 < > 神名 社
나 는 신 과 리 표3 의 은
236 232
神 外家西南請子社 張氏請子社 田社 官社
( · · · ·
天 陳松長 編著 香巷 學 物館藏簡牘 p
106) “ 公”에 대하여 , 中文大 文 , .99는 이것이
籍 관 天翁 별칭 당 神靈名
生死의 을 주 하는 의 했 連邵名
에 해 하는 으로 이해 고, 과
劉邵瑞 일 最高神格 天帝 같 존
는 반적인 진묘문에서 인 았 며 楊華
와 은 재로 보 으 ,
天 녕 오 타 격 높 존 았 필
는 公이 서 간에 나 는 여 의 신들보다 신 이 은 재로 보 다. 자
天 天帝 같
역시 公은 籍 관 존 점
와 은 반열에서 死 을 주 하는 재라는 에 동의한다.
따 天 所對 천
라서 “ 公 름 籍 조확
”는 공이 망자의 이 이 死 에 등재되었지 대 인하는
죽 夭 또 戰 刑 같 태
과정으로 이해하고, 그 음이 死 는 死· 死와 은 비정상적인 형 가
님 써 人 負責 債 人毋適 謫 곧 者 免殃 者
아 을 인정받음으로 “生 不 ( ), 死 ( )” 生 의 과 死
의解謫 증 미
을 보 받는 것을 의 한다고 이해하였다.
小南一郞
107) の祖靈 念 p 참조
, 漢代 觀 , .49 .
者 人
중국 고대 死 의 書와 漢代 의 來世觀 (尹在碩) 69
刺
인 券書와 券 의 형식을 빌려 목 陶甁
간에 작성한 것으로서,109) 鎭墓
罐 격 확 른
( )과 그 성 이 연히 다 것이라 할 수 렇게 볼 때 녕
있다. 이 , 서
소 일 습
간은 현 강 성 대의 상장 속을 반영한 진묘문으로서, 이 역시 상
술한 감숙 무 안휘 수
성 위와 성 주 등지의 진묘문과마찬 가지로 關洛지
달 색 습
역의 전형적 진묘문과 리 지역적 특 을 반영한 상장 속이 반영된
진묘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 막 격
지 으로 關洛지역 내에서도 상이한 성 의 진묘문이 작성되었음
례 五方
을 보여주는 사 로서 목 필요
鎭墓文을 주 할 가 있다. 이것의 가장
례 8 河南省 三門峽市 南交口
대표적인 사 로서 199 년 의 후한 후기묘
M 三門峽
( 17)에서 발굴된 넣 둔 오석 수
鎭墓文과 여기에 어 을 들 있
면 < > 같
는데, 이를 정리하 다음 표4 와 다.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이 묘
병 前室 後室 및 甬道 섯 곳 벽 또
장에서 발굴된 진묘 은 과 등 다 의 는
둥 래 土坑 묻혀
기 아 의 에 < > 섯 陶甁
있었고, 표4 에서 보듯이 다 의 표
면 朱
에는 書된 진묘문과 북두칠 五石 실
성이 서사되어 있음은 물론 의
물을 도병안 넣 놓 목
에 어 고 있었다. 그 적은 상술하였듯이 五石 天 과
干 五神 조
· 의 화를 통하여 각기 相剋 당 섯방
에 해 하는 다 위의 재앙을
물리치고자 한 것인데, 關洛지역의 전형적 진묘문과는 내용과 형식에
서 뚜렷 한 차이를 보여준다.
우 神格 측면
선 의 에서, 關洛지역의 진묘문에 반적으로 나 는 일 오 天
帝 및 黃帝 黃神혹은 그리고 冥界의 地 官또
는 墓域의 地 神名 혀
이전
타 五方 배
나 나있지 않고, 에 속된 · 靑龍 朱雀 勾陳 白虎 玄武 올
· · · 가 나 뿐
이다. 아울러 五神이들 과 더불어 解謫
을 위하여 五石 병 넣
을 진묘 에
109) 序寧簡 簡 미
에는 매 의 말 에 “券書 明白 刺明白
” 혹은 “券 엄격
”이라는 표현을
쓰
히 분리하여 고 있는데, 陳松長 編著 香巷 學 物館藏簡牘 p
, 中文大 文 , .100에
刺卽
서 “券 , 券書”라 간단히 말하듯이 양자간에 큰 견 수 없
차이를 발 할 가 다.
러 체목
그 나 전 또 簡 만
간중 2행 는 3행이 기재된 227·232·234·235·237·239 에
“券 刺明白 오 만 簡 모두 明白
”이 나 고, 나머지 1행 기재된 에는 “券書 ”으로 표현
되어 있다. 이는 1행의 木簡 木牘 刺 칭했
은 券書로, 2·3행의 은 券 로 음을 보여
만 일 약
준다. 다 진한대의 券書가 반적으로 계 문서를 의 하는 미 만큼 序寧簡 역
건 刺 건 모두 일
시 그것이 券書이 券 이 약 격
종의 계 문서이되 그 성 은 인간과 신
약
이 맺은 계 문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者 人
중국 고대 死 의 書와 漢代 의 來世觀 (尹在碩) 71
鎭墓 甁
M17:6 M17:7 M17:8 M17:9 M17:10
五石
墓 내室 後室 東北쪽 前室 東南쪽 後室門 중간 甬道 東南쪽 前室 東北쪽
위치 모퉁이 아래 모퉁이 아래 甬道 아래 모퉁이 아래 모퉁이 아래
東方·甲乙·神 南方 · 丙丁 · 神 中央·戊己·神 西方· 庚辛· 神 北方·壬癸·(神
靑龍, 曾靑九 朱爵(雀), 丹沙 如(勾)陳, 女 白虎, 礜(礖) 玄武), 慈(磁)
兩, 制中央, (砂)七兩, 制西 (七)兩, 制北 石八兩, (制東 石六兩, 制南
鎭墓文 令母守子, 礻 方, 令母守子, 方, 令母制 方), 礻局 (祸) 方, 令母守子,
局 (祸)不起, 礻局 (祸)不起, 子, 礻局(祸) 不起, 令母制 礻局 (祸)不
從今日是, 如 從今日是, 如 不起, 從今日 子, 從今日是, 起, 從今日是,
律令 律令 是, 如律令 如律令 如律令
五方 東方 南方 中央 西方 北方
天干 甲乙 丙丁 戊己 庚申 壬癸
五神 靑龍 朱雀 勾陳 白虎 玄武
五石 曾靑 丹砂 雄黃 礜石 磁石
制壓方位 中央 西方 北方 東方 南方
五行 木 火 土 金 水
五色 靑 赤 黃 白 黑
어 五方의 邪氣 또는 惡鬼를 진압하고자 하였는데, 그 기본 원리는 五
行 相剋說로서,110) 이는 신격의 힘을 빌려 死者解謫과 生者除殃을 달성
하고자 한 關洛지역의 진묘문과 내용상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러
이 한 부류의 진묘문은 鎭墓文으로 성 지어도 五方 할것 격 무방
이다.
五方鎭墓文은 위의 三門峽에서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이 西安과 安
徽의 壽州, 山東의 莒縣 등에서도 발굴되었다. 즉,
110) 郝本性·魏興濤, 三門峽南交口東漢墓鎭墓甁朱書文考略 物
(文 2009年 第3
期), p.59 참조.
72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⑬建寧四年鎭墓文: 南方 建寧四年十月己卯朔……帝……母□□神□□□
起 律令.111)
不 , 如
劉君鎭墓文: 曰天帝告除居巢劉君冢惡氣: 告東方靑帝主除黃氣之凶, 告
南方赤帝主除西方白氣之凶, 告西方白帝主除靑氣之凶, 告北方黑帝, 北方黑
帝主除赤帝之凶, 告中央黃帝主除北方黑帝之凶. 告六丁天門, □□名曰侯社.
/ 五氣之英, 一主除刻去凶, □孫孫壽老, 如律令.112)
熹平二年鎭墓文: 熹平二年四月已卯朔十九日丁酉時加午□, 東方靑帝禹
靑龍患禍欲來, 南方赤帝禹朱爵(雀)患禍欲來, 西方白帝禹白虎患禍欲來, 北
方黑帝禹玄武患禍欲來.113)
宜蟲桑鎭墓文: 南方赤, □□屬徵. □臧在心, □□齒, 其□朱爵(雀), 身
有□□處大陽, 有火, □□爲熒星, 丙丁下入地中. 丹沙石政重□兩以塡, □主
憂, 五□[石]辟金兵, 立塡以後宜蟲桑, 如律令. / □母萬世無旡咎.114)
우선 ⑬은 서안에서 발굴된 것으로서, 잔결이 심하여 내용을 온전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南方……□不起, 如律令”은 위의 <표4>중
M17:7의 “南方……礻局(祸)不起, 從今日是, 如律令”과 같은 구조의 내용
으로 볼 수 있는 까닭에 이 역시 五方鎭墓文으로 이해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는 天帝가 劉君이 매장된 묘장의 惡氣를 제거하도록 東方의
靑帝에게 中央의 黃氣의 凶을 제거하게 하고, 南方의 赤帝에게 西方의
白氣의 凶을 제거하게 하며, 西方의 白帝에게 東方의 靑氣의 凶을 제
거하고, 北方의 黑帝에게 南方의 赤帝의 凶을 제거하며, 中央의 黃帝에
게 北方의 黑帝의 凶을 제거하도록 각기 告하여, 궁극적으로 死者의
解謫과 後孫의 萬壽를 달성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들 五方과 五色에
호응한 五神 및 이들이 제거하는 각 방위마다의 五凶은 기본적으로
<표4>의 그것과 일치한다. 이는 후한대 당시 五方鎭墓文의 기본 구조
가 각 지역마다 거의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
겠다.
은 山東 莒縣에서 발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재료가 陶甁·陶
Ⅳ. 맺음말
고지책과 진묘문에 나 타난 한대인의 내세관은 이들 자료의 시대적·
74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
지역적 차이 만큼
이나 다양성이 발 된다. 전자가 주로 견 과 을 호북 호남
중심으로 한 장강유역의 전한대 묘장에서 발굴되는 반 , 후자는 중 면 관
낙
과 양을 중심으로 한 후한대 묘장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고 있다.
관 ‘
고지책에 반영된 내세 은 事死如事生 의’ 관념 입 에 각하여 來世 역시
現 면 개
世의 연장성산에 설정되어 있고, 그 이 에는 문서행정을 매 로 한
권 배 조 명 까 향 미칠
중앙집 적 지 구 가 계의 설정에 지 영 을 명정도로 계의
조 닮 者
구 는 현세의 그것을 아 있다. 死 는 문서행정을 통해 현세로부터
가지고온 戶籍 縣官
을 冥界의 前 일 게명 호
에 신고하여 生 과 동 하 계의
요 담 존 며
적에 등재되어 역과 부세를 부 하는 재로 인식되었으 , 현세의
신분과 경제적 조건 까 려 담
을 내세에 지 연장하 는 열망을 고지책에 고
있다.115)
者 人
115) 尹在碩, 중국 고대 死 의 書와 漢代 의 來世觀 -告地策을 중심으로 ,
pp 8 8 참조
. 2- 3 .
者 人
중국 고대 死 의 書와 漢代 의 來世觀 (尹在碩) 75
<참고문헌>
左傳
漢書
羅振玉, 古器物識小錄; 貞松堂集古遺文, 居貞草堂漢晋石影, 居貞草堂漢晋
石影
書道博物館, 書道全集第三卷(平凡社, 1931)
[日]中村不折 著, 李德范 譯, 禹域出土墨書書法源流考 (中華書局, 2003)
郭沫若, 奴隸制時代 (郭沫若全集(歷史編, 第三卷), 人民出版社, 1984)
陳松長 編著, 香巷中文大學文物館藏簡牘 (香巷中文大學文物館, 2001)
睡虎地秦墓竹簡整理小組 編, 睡虎地秦墓竹簡 (文物出版社, 2001)
甘肅省文物考古硏究所 編, 天水放馬灘秦簡 (中華書局, 2009)
洛陽區考古發掘隊, 洛陽燒溝漢墓 (科學出版社, 1959)
湖北省文物考古硏究所·隨州市考古隊 編, 隨州孔家坡漢墓簡牘(文物出版社, 2006)
甘肅省博物館·中國科學院考古硏究所編, 武威漢簡 (中華書局, 2005)
湖北省博物館, 荊州高臺秦漢墓 (科學出版社, 2000)
饒宗頣, 饒宗頣二十世紀學術文集(卷三), 簡帛學 (中國人民大學出版社, 2009)
劉昭瑞, 考古發現與早期道敎硏究 (文物出版社, 2007)
楊華, 古禮新研 (商務印書館, 2012)
湖北省博物館 編, 書寫歷史 - 戰國秦漢簡牘 (文物出版社, 2007)
蔣曉春, 三峽地區秦漢墓硏究 (巴蜀書社, 2010)
仁井田陞, 中國法制史硏究-土地法取引法 (東大出版社, 1980)
黃景春, 早期買地券·鎭墓文整理與硏究 (華東師範大學2004年度博士學位論文)
吳竣錫, 秦漢代 문서행정체계 연구 (2013년 8월 경북대학교박사학위논문)
者 人
중국 고대 死 의 書와 漢代 의 來世觀 (尹在碩) 77
(中文提要)
中 国古代“死者之书”与汉代人的来世观念
—以镇墓文为中心—
尹在 硕
目前, 有關東漢時期來世觀念的研究, 主要參考資料是出土於關洛地區墓
葬的“典型的”鎮墓文. 筆者認爲:爲更好地理解形制、內容多元化的鎮墓
文所反映的來世觀念, 有必要同時考察甘肅、安徽、江蘇、山西、山東等
地區出土的鎮墓文. 並且, 有關鎮墓文的主要內容 -“生死異路”的觀念, 以
及對解謫、解注的認識, 不能僅從後代道教來世觀的角度進行考察, 而是有
必要追溯到東漢之前的時代, 這也是本稿的主旨所在.
鎮墓文中一貫出現的“生死異路”觀念可能源於對死者的否定意識. 根據
睡虎地秦簡日書等資料可知, 戰國時代以來的中國人認爲, 包括祖先神在內
的鬼神會招來導致後孫身患疾病或是死亡的“祟”. 也許, 這就是“生死異路”
觀念出現的原因. 因此, 爲躲避死者的“祟”, 便出現鎮住死者靈魂使其遠離
邪鬼, 以及免除死者罪過的做法, 具體表現爲盛行於後漢時期制作鎮墓文,
以及隨葬五石、鉛人、金錢等行爲.
另外, 目前出土於甘肅、安徽、江蘇、山西、山東等地的鎮墓文的書寫
構造、內容, 以及書寫材料等情況, 與關洛地區出土的鎮墓文差異甚多. 如,
甘肅武威、江蘇盱貽和高郵, 以及出處不明的徐寧簡鎮墓文中的神格都是
由各地固有的鬼名構成, 書寫材料也比較多元化, 爲木牘、石物、織物等.
除此以外, 五方鎮墓文以五行相剋說爲基礎, 借五神、五石之力, 以求鎮壓
五方的邪氣和惡鬼. 西安、三門峽、安徽壽州、山東莒縣等地也出土過此
類鎮墓文. 由此可知, 東漢時期五行對鎮墓文的制作產生一定影響.
80 中國史硏究 第90輯 (201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