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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고고학 제19호(2014.

3)
125~163쪽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순장

김용성*
목 차

Ⅰ. 머리말

Ⅱ. 고령지역 순장묘 순장곽의 인식

Ⅲ. 지산동고분군 순장묘의 순장 양상
1. 초기유형
2. 제1유형
3. 제2유형
4. 제3유형
5. 제4유형

Ⅳ. 지산동고분군 순장의 전개와 특징


1. 순장의 전개
2. 순장의 특징

Ⅴ. 맺음말 - 순장과 사후세계

* (재)한빛문화재연구원
국문초록

●○ 대가야의 순장자는 순장묘의 주곽과 부곽, 순장곽에 매장되었다. 순장곽 순장자


에 대한 의문이 있었으나 이 순장곽을 일반 대가야 석곽과 비교할 때, 작은 크기이면서
금제수하부이식 등의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고, 목곽이나 목관이 사용되지 않은 직장이
라는 특징이 있어 순장자로 인식할 수 있다. 또한 순장곽의 매장자가 어린이와 노인보
다 청장년의 비율이 높음은 그들이 강제적 죽음으로 인했을 가능성을 높여주어 순장자
로 볼 수 있게 한다. 다만 몇몇의 순장곽으로 인식되던 것은 별도의 장례가 시행되었다
든지 봉분과 함께 축조된 것으로 순장이라기보다는 배장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 지산동 순장묘를 검토하면 73호분과 75호분에 10인 내외,
44호분에 36인 이상, 45호분에 15인 이상, 30호분에 5인 이상, 74호분에 4인 이
상, 32호분과 34호분에 각각 2인, 33호분과 35호분에 각각 1인의 순장자가 매장되
었다. 따라서 순장자 수는 대략 5인 미만은 개별의 수이나 그 이상은 5의 배수와 10의
배수가 된다.
지산동의 순장은 5세기 초부터 6세기 초까지의 고분에서 관찰되나 더 이른 시기에
출발하여 대가야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순장자
의 수도 증가하고, 순장묘주의 범위도 확대되는 특징이 있다. 이는 대가야가 국가로 발
전하는 과정과 관련이 있다.
지산동 순장묘의 특성은 한반도에서 가장 많은 수를 순장한다는 것과 순장곽을 별도
로 축조하면서 순장자를 매장한다는 점, 무덤에서 순장묘주가 중앙의 가장 아래에 배치
되어 순장자가 그를 둘러서서 호위한다는 점에 있다. 순장묘주는 남녀의 구분이 없이
대가야의 왕과 왕족, 그리고 최고 귀족에 해당하나 남성의 무덤에 더 많은 순장이 시행
되었다. 순장자는 순장묘주의 근신자로 호위무사, 의례관련자, 재산관리자, 시종, 비
첩 등 주인 생활의 각 방면에서 봉사하던 인물로 상당한 지위를 가진 자들이다. 특히
왕의 순장에는 지방의 지배자급에 해당하는 지위를 가진 자도 있었다. 가족이 대상이
된 경우도 상정되고 산채 매장된 것이 아니라 살해된 후에 매장되었다.
대가야의 순장묘는 그들의 사후생활에 대한 관념인 계세사상에 충실하게 고분이 축
조되었음을 적극적으로 지적한다. 이는 고분의 입지, 거기서 출토되는 유물의 풍부함
등에서도 확인된다. 순장자가 청장년으로 한참 노동으로 주인에게 봉사할 수 있는 연령
대라는 점은 사후에도 생전에 봉사하던 인물을 데려가 봉사를 받아야한다는 순장의 근
본 목적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무력적 성격의 지배층 특성에 따른 그들의 사후관
을 적극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대가야 순장이다.

주제어 : 지산동고분군, 대가야, 순장곽, 순장자, 사후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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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지금까지 한반도의 순장에 대해서는 다양한 고고학적 논의(강인구 2000; 권오영 1991;
김세기 1997, 2003; 김수환 2005, 2010; 김용성 2002, 2009a; 김재현 1997; 김종철 1984; 이
성준 2009)가 있었다. 이들 논의에서 비록 부정하려는 견해도 있었으나 순장이라는 장법
이 명확해져 가고 있으며, 신라와 가야지역에 순장이 보편적인 장법으로 시행되고 있음
이 밝혀지고 있다. 즉 4세기부터 6세기 전반까지 신라와 그 지방, 금관가야, 그리고 아라
가야의 대형고분이라고 하면 대부분에 순장이 시행되었음이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순
장묘 가운데 가장 대규모의 순장이 행해진 대가야의 순장에 대해서는 일부 천착(김종철
1984; 김세기 2003; 이영식 2012)이 있었으나 이것만을 대상으로 한 본격적이며 세부적인
검토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가야의 순장은 지산동 44호분과 45호분이 발굴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한국의
순장이라고 하면 대가야 지산동고분을 떠올릴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대가야 순장묘
1)
의 특이한 특징의 하나인 주부곽의 둘레에 조성된 소형 석곽의 피장자가 순장자 냐 아니
냐의 논쟁이 일어났다. 이는 과연 이들 소형 석곽의 피장자가 주피장자와 함께 사망하였
느냐는 동시성에 의문이 있었기 때문일 터이다. 그리고 순장묘의 주피장자와 순장자에
대한 분석은 피상적일뿐 본격적인 논의가 없었다.
이글은 이러한 문제점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문제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자료가 축적되고, 그 검토가 충실하게 시행된 이후가 더 좋을 것이다. 이렇게 충
분한 여건은 조성되지 않았으나 앞으로 순장 연구에 대한 기반을 마련한다는 의미에서는
현재적 검토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2)
대가야 고총 가운데 순장묘로 인식되는 것은 고령지역 지산동의 여러 고분 과 본관동
34〜36호분(계명대박물관 1995), 합천의 반계제 가A호와 다A호(국립진주박물관 1987)
등이 있다. 본관동과 반계제의 순장묘는 지산동의 비교적 하위 순장묘로 인지되고 있는
32〜35호분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지산동의 것만을 따져도 대가야 전체의 순장을
인식하는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지산동 순장묘를 중심으로 살펴
본다.

1)  피순장자라고 해야 마땅하나 김세기(2003: 192)의 견해와 같이 순장자라고 불러도 이미 순장된 무덤의 주인공과는 구분이 되고
순장 당한 사람을 뜻하기에 여기서는 순장자라고 쓴다. 그리고 순장이 시행된 무덤은 순장묘라고 쓰고, 순장자가 매장된 묘곽은 순
장자곽이라고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으나 관례에 따라 순장곽으로 쓴다.
2)  44호분(윤용진·김종철 1979; 경북대박물관 2009), 45호분(윤용진·김종철 1979), 30호분(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 1998), 32
〜35호분(계명대박물관 1981), 73〜75호분(조영현 2012) 등이 있다.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순장 127
글은 먼저 이들 고령지역의 대가야 순장묘로 인지되는 고총고분에 나타나는 몇 가지의
자료를 검토하여 순장곽의 존재를 인정하고자 하는데, 특히 장례의 과정을 상정하여 분
석해 보도록 한다. 이 검토 과정에서 축조의 동시성 확보나 검토되는 요소에 위배되는 것
은 배장묘로 규정하여 순장곽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도록 한다. 다음에 이 기준을 가지고
지산동 고분군의 순장묘를 좀 더 적극적으로, 그리고 세부적으로 살펴 순장 양상을 파악
하도록 한다. 여기서는 대가야 순장묘를 대가야 고총의 분석에서 나눈 유형(김용성 2012:
286-287)을 기준을 약간 변형하여 살펴볼 것이며 일부 출토된 순장묘의 순장곽 인골의 분
석(김재현 2009)을 참조하여 논의하도록 한다.
이후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대가야의 순장 시행 시기, 순장묘의 특성과 순장묘주와
순장자의 지위나 신분 등을 찾아 대가야 순장의 특성을 설정해 보도록 한다. 여기서는 대
가야 순장묘의 유형에 따른 등급을 나누어 순장묘주의 지위를 따질 것이며 순장곽 순장
자의 착장유물에 주목하여 대가야의 일반 고분과 비교함으로써 순장자의 지위와 신분을
규정하도록 한다. 특히 인골이 많이 출토되어 분석된 지산동 44호분을 중심으로 이를 살
핀다. 또 순장묘의 특성 등은 신라의 자료, 특히 비교적 많이 분석되어 있는 경산 임당의
자료와 비교를 통해 찾아보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이 순장이 대가야의 사후세계와 관련
이 있음을 논하여 결론에 대하고자 한다.

Ⅱ. 고령지역 순장묘 순장곽의 인식

순장묘로 인지되는 대가야 고총의 중심에 설치된 주곽과 부곽에 매장된 사람 가운데
주곽의 중심에 안치된 주피장자 외의 매장인을 순장자로 인정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수혈식석곽이라는 묘제의 특성상 주피장자와 함께 매장된 것이 확
실하고, 매장된 위치에서의 존중도나 착장한 유물인 성복유물에서 차등성이 확실하기 때
문이다. 물론 수혈식석곽이라 하더라도 후대 추가장이 시행될 가능성은 있으나 그러한
경우는 드물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석곽과 부곽을 둘러싸고 설치된 소형 석
곽에 매장된 사람이 순장자냐는 데에는 선뜻 답하기가 곤란하다. 이러한 소형 석곽이 주
석곽과 동시에 축조된 것인가의 의문이 발생하고, 설사 동시에 축조되었다고 하더라도
고분의 축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주피장자 묘역의 설정 이후나
매장주체부의 축조과정에 소형 석곽이 축조되어 배열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
고 봉분의 축조과정에 소형 석곽이 축조될 여지도 있다. 이러한 의문점 때문에 주석곽을
둘러싸고 축조된 소형 석곽을 배곽으로 파악하는 견해(김광명 외 2009)도 있는 것으로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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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다. 그러나 최근 대가야 순장묘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볼 수 있는 지산동 73
호분(조영현 2013)에서 묘광의 주곽 석단을 돌아가며 순장묘가 배치된 현상이 발견되어
이들 주부곽을 둘러싼 소형 석곽이 순장곽일 가능성이 훨씬 커졌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
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의문이 될 수 있기에 아직 문제점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지산동의 순장을 논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선결해야할 과제로 보인
다. 여기서는 먼저 소형 석곽에 나타나는 몇 가지의 현상을 짚어 이제까지 순장곽으로 불
리고 있던 소형 석곽 가운데 대부분은 실제 순장곽으로 인식할 수 있고 일부는 배장석곽
으로 볼 수 있음을 논하여 순장곽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한다.
지산동 순장묘인 대형의 고분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주피장자 주검이 발생하기 이전에 일부 축조되는 수릉적인 요소도 고려할 수 있
게 된다. 그리고 주피장자 주검이 발생하고 난 후 축조되기 시작한다하더라도 매장주체
부의 축조나 빈장 등을 고려하면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나 주검이 매장되게 된다. 만약
이러한 과정에 주피장자와 가까운 인물이 죽어 같은 묘역에 매장되고 봉분이 덮이게 되
었다면 이는 명확한 순장이라고 할 수 없고 배장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순장곽으로 인
정하기 위해서는 장례의 동시성이 확인되어야할 것으로 판단된다. 즉 순장곽에 매장된
피장자 각각에 대한 장례의식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주피장자의 매장에 따른 장례에 부
속되어 매장된 현상을 찾으면 순장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순장곽에 매장
된 각 피장자의 장례가 별도로 진행된 사실이 확인되면 이는 배장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이다.
대가야의 장례에는 무기와 마구, 그리고 모형철기를 위주로 한 의기가 사용되었다(김
용성 2009b: 329-336). 그러므로 지산동의 대가야 일반 석곽에서는 이들 유물의 출토 빈
도가 상당히 높다.
무기 가운데 철모
는 특히 방상시를
고려하면 장례물
품으로 인정되고,
모형철기는 신라
권의 유자이기나
겸형철기를 대신
하여 장례행렬의
지산 Ⅰ-10호묘(영문) 지산 Ⅱ-4호묘(영문) 44호분 6호 순장곽
어떤 표식으로 사
<그림 1> 지산동의 일반 석곽과 순장곽 비교
용된 것이다. 이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순장 129
러한 유물이 출토된다면 별도의 장례를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가야의 순장곽
으로 인식되고 있는 소형 석곽에서는 이들 유물의 출토가 아주 빈약하다. 44호분 25호 석
곽에서 마구류와 철부, 45호분 2호 석곽에서 철부와 철촉, 30호분 3호 석곽에서 철겸, 철
부, 철촉이 출토되었고, 본관동 36호분 석곽에서 재갈 등 마구류, 모형철기 등이 출토되
었을 뿐 다른 소형 석곽에서는 토기류와 성복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식과 도자 등만 출
토되었다. 철모의 출토 예가 전혀 없는 것이 명확하고, 모형철기가 출토되어 개별적인 장
례를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본관동 36호분 석곽의 예뿐이다.
한편 이들 소형 석곽은 장법에 있어서 아주 간단한 직장이 위주이고, 그 크기에 비해서
대가야 일반 석곽과는 달리 화려한 복식품을 착용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대가야의 순장
묘로 인지할 수 있는 고총은 대부분 주석곽의 내부에 목곽을 설치하였고, 그 내부 목관에
시신을 안치하고 있다. 그리고 대가야 일반 석곽의 경우도 많은 것이 목곽이나 목관을 사
용한 것이 관찰된다. 그러나 순장묘의 주곽 주피장자의 두부나 족부 부장처와 부곽에 순
장된 사람은 목관 등 다른 장구가 사용되지 않고 석곽 내부에 직장된 것이 확인된다. 순
장묘 주변 소형 석곽의 경우를 이와 비교하면 45호분 1호 석곽이 석관을 설치한 석관장
이고, 앞서 언급한 본관동 36호분 석곽이 목곽과 목관을 함께 사용하였을 뿐 모두 석곽의
내부에 직장되었다.
또 순장곽으로 인지되는 지산동 44호분 6·11호 석곽, 45호분 7호 석곽 등에서 금제수
하부이식이 출토되는 등 화려한 복식품이 출토되나 직장인데 비하여 대가야 일반 석곽에
서는 비록 석곽의 크기는 훨씬 큰 것이 많으나 금제수하부이식이 출토된 예는 아주 드물
다. 단지 대가야왕릉전시관부지 Ⅰ지구 40호(영남문화재연구원 2006)에서 그것이 출토되
었을 뿐이고 이것은 길이가 4m가 넘는 비교적 큰 석곽이다. 다른 일반 석곽에서는 수하
식이 없는 금제이식이나 금동이식이 출토되고, 수하부이식이 출토된 경우는 32NW-2호
(계명대박물관 1981)의 금동제수하부이식만 알려져 있다.
이외 후술하다시피 피장자의 성과 연령이 밝혀진 지산동 44호분 소형 석곽의 피장자는
대부분 20∼40대의 한참 경제활동을 하는 시기의 인물들이고, 사망률이 높았을 유소아나
노년의 비율은 지극히 낮다. 이는 이들 피장자가 자연적인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강제적인 죽음이었을 가능성을 크게 높여준다.
이러한 점에서도 대가야 순장묘 주부곽 주변의 소형 석곽은 순장곽으로 인식할 수 있
다. 다만 본관동 36호분의 석곽과 지산동 45호분 1호 석곽은 고려의 대상이 된다. 두 석곽
모두 일반적인 소형 석곽의 축조 레벨과는 달리 그 위층의 봉분 중에 지상식으로 설치되
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봉분 중에 석곽이 설치되었음은 주피장자의 매장이 완료되고 난
후 봉분을 축조하는 과정에 이들 석곽이 축조된 것을 알려준다. 따라서 순장곽이라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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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주피장자의 고분
을 축조하는 과정에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의 주검이
발생하여 같은 봉분에
합장해주는 배장의 성
격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45호분 1호 석
곽은 지산동 연결석곽
과 같이 판석조의 석
관(내석곽?)을 가졌으
지산 44호6곽 지산 44호11곽
며, 본관동 36호분의
<그림 2> 지산동 44호 순장곽 금제수하부이식 석곽은 내부에 목곽을
사용한 흔적이 있어
다른 소형 석곽들과는 구분되기도 한다.
다음 순장곽이라고 한다면 일관성이 있는 배치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순장자를 살
해한 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30호분의 경우 주곽의 개석이 덮이고 난 후 순장곽이
설치된 것이 확인되는데, 이는 주피장자의 안치가 완료되고 봉분을 축조하기 전에 일시
에 순장곽이 축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일관적인 어떤 모식에 따라
순장곽이 설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일관성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주부곽의 장축
이나 단축과 나란하게 돌아가며 평행배치한 점일 것이다. 이는 둥근 묘역의 내부에 효율
적으로 순장곽을 배치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뒤에서 설명하는 제3유형인 소형 석곽 1
기만 가진 나란한 배치, 주부곽을 둘러싸고 ㄷ자상으로 배치한 제2유형은 이를 잘 알려
준다. 이에 어긋나는 것이 제1유형으로 설정된 44호분과 45호분의 경우이다. 그러나 45호
분의 경우는 그래도 대략 주부곽을 둘러싸고 평행하게 배치를 하고자하는 의도가 엿보인
다. 이에 비하여 44호분의 경우는 平行配置의 석곽 외에도 주곽과 봉분 주연을 축으로 한
交行配置의 석곽 10기(8〜10·12〜17·23호)가 확인되어 양상이 다르다.
이는 일반적인 순장곽의 배치와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으로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의 특징은 평행배치된 소형 석곽들 사이에 억지로 끼워 넣은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 9·10호, 12·13호, 14·15호, 16·17호는 나란하게 세
트를 이루며 배열되었다. 이 가운데 14호는 15호의 부곽, 16호는 17호의 부곽으로 알려져
있다. 또 10호와 12호에서는 아무런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유물의 도굴이나 곡물 등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순장 131
3)
유기물의 부장을 감안하면 이들도 부곽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게 된다.
이렇게 주부곽이 나란하게 설치된 소형 석곽은 아직 지산동고분군의 일반 소형 석곽에
4)
서 발견된 바가 없다. 따라서 일반적인 묘곽의 배치 현상이라고 볼 수 없게 된다. 이외
이들 교행배치의 석곽은 주로 봉분의 주연에 몰려있는 점도 눈에 띤다. 이러한 점들을 감
안하면 이들 교행배치는 원래 기획된 배치가 아니라 나중에 어쩔 수 없이 끼워 들어간 석
곽이라고 인식할 수 있다. 즉 봉분의 축조과정이나 그 후에 주피장자 근친자의 주검이 발
생하여 묘역 내부에 추가된 석곽일 가능성이 크다. 주부곽식은 묘를 축조할 공간이 부족
하여, 즉 이미 평행배치로 확정되어 있는 순장곽으로 인해 긴 석곽을 축조하지 못해 별도
의 부곽을 축조하여 이를 보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하다면 이들 교행배치의 석곽은
기획된 순장곽이 아니라 후에 매장된 분 내 배장곽으로 볼 수도 있게 된다. 이들에서 토
기 외의 성복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장신구를 비롯한 다른 유물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는
데, 이는 본래 순장곽에 매장된 순장자보다 이들의 신분이 낮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이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단정지울 수 없고 배장석곽일 가능성만 점쳐 볼 수
있겠다. 만약 이들도 순장곽이라고 한다면 뒤에 설명할 73호분과 75호분의 봉토 중에 설
치된 순장곽으로 불리는 묘곽과 같이 다른 시기에 순장이 시행된 것이 된다.
순장자의 소형묘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가운데 확실하게 봉토 중에 축조된 것이 확인된
지산동 73호분 봉분 내 소형 석곽 1기와 지산동 75호분 봉분 내 소형 석곽 3기이다. 이들
은 고분의 축조과정을 염두에 두면 순장이라기보다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
이 크게 된다. 두 고분은 모두 깊이 묘광을 파고 그 내부에 주곽이나 주부곽을 설치하였
고, 그 묘곽을 둘러싼 묘단(이층대)이라고 할 수 있는 보강석이나 보강토 위에 소형묘를
둘렀다. 이들 묘광 내부의 소형묘는 주곽인 목곽과 석곽이 축조될 당시에 축조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어 동시성이 인정된다. 따라서 확실하게 순장묘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봉분 내 순장곽으로 불리는 것들은 주곽인 목곽과 석곽에 주검이 안치되고 뚜껑이 덮인
후 묘광을 매토하고, 봉토를 축조하는 과정에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어 동시성이 확보되
지 않는다. 특히 봉분 내부 주부곽을 둘러싼 흙둑을 감안하면 주피장자의 매장 후 상당
한 시간의 경과를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앞의 45호분 1호 석곽과 본관동 36호분 석
곽과 같이 봉토를 축조하는 과정에 발생된 주검을 매장한 것으로 볼 수 있게 되어 배장의
성격이 더 짙다.
또 75호분에서는 봉토 중에 이들 소형묘 외에 (추정)동물매장곽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3)  8·10호 석곽은 도굴로 파괴된 것이며, 23호 석곽은 인접한 24호 석곽보다 개석 레벨이 높다.
4)  또한 이들 부곽에는 많은 토기가 부장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다른 순장곽에서 볼 수 없다.

132 야외고고학 제19호


5)
동물 순장(殉牲)일 수도 있지만 祭牲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이것이 제생이라면 봉토의 축
조과정에 희생의례를 생각해 볼 수 있어 봉분 중 소형묘는 人牲일 가능성도 있게 된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에서 인생이 발견되고 있지 않고, 희생된 주검을 묘곽을 설치하면
서 매장하고 유물을 부장해주었을까 의문이 들기에 그 가능성이 적다. 만약 이들도 순장
이라고 한다면 두 고분에서는 봉토의 조성 중에도 시간을 달리하며 순장이 시행된 것으
로 보아야한다.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기에 앞으로 여러 방향에서 검
토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의 결과를 종합하면 고령지역의 순장묘 주부곽을 둘러싸고 설치된 소형묘는 대부
분 순장곽으로 인식할 수 있으나 44호분에 주부곽과 교행배치된 8기의 석곽과 73호분과
75호분의 봉토중에 축조된 소형묘는 배장곽일 가능성이 있고, 비교적 크고 장구가 갖추
어진 45호분의 1호 석곽과 본관동 36호분의 석곽은 피장자의 장례가 완료되고 난 후 봉분
속에 추가되어 합장된 배장묘라고 할 수 있다.

Ⅲ. 지산동고분군 순장묘의 순장 양상

<표 1> 고령지역 순장묘와 순장자


크기(단위 m)
유물 성
고분 묘제 위치 피장자 두향 연령 착장유물 등
배치 별
길이 너비 높이 면적

유목곽 중앙 주피장자 동남? 남   대도,경식,요패


주곽 할석 9.4 1.75 2.1 16.5
목관 두,족 순장자1,2 동남?      
남부곽 할석   좌평 5.1 1.3 1.85 6.6   순장자3 동남?      
서부곽 할석   족평 5.7 1.7 1.8 9.7   순장자4 ?      
1호 판석 부장칸 2.6 0.4 0.32 1 순장자5 북동?      
2호 할판   두평 1.7 0.46 0.58 0.8 무매장?
3호 할판   (1군) 1.8 0.4 0.33 0.7 양단 순장자6 북동   성후 금장이식,방추
지산 4호 할판   1.76 0.4 0.33 0.7 양단 순장자7 북동?     금제이식
44 순장자8, 여 숙전
호분 5호 판석   2.28 0.46 0.36 1   ?  
순장자35 ? 성전
우평
두단 순장자9 동남 남 성후 금제수하부이식,철침,방추
6호 할판 (2군) 3.78 0.48 0.36 1.8
두단 순장자10 북서 남 성전 금동이식,도자
7호 할판   2.5 0.38 0.52 1 두단 순장자11 북서 남 성후 도자
8호 할판   1.73 0.4 0.37 0.7 무매장?
9호 할판   교행 1.73 0.49 0.3 0.8 양단 순장자12 동 남 성후  
10호 할판 9호부? (3군) 1.5< 0.41 0.35 0.6< 무매장?
12호 할판 13호부? 1.61 0.46 0.28 0.7 무매장

5)  대가야나 신라에서 말의 제생은 흔히 발견되고 있다. 대가야의 경우 지산동 44호분 17·18·19호 사이에서 출토된 말이빨, 반계
제 가A호분의 말이빨 등은 말머리를 제사에 사용한 제생의 흔적으로 보인다.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순장 133
순장자14 남서 남 성후
13호 할판 1.84 0.43 0.25 0.8
순장자15 북동 여  
14호 주부 1.87 0.44 0.44 0.8
할판 북향 여 성후
15호 주15호 교행 1.8 0.45 0.24 0.8 족단 순장자16
(3군)
16호 주부 1.64 0.34 0.26 0.6
할판
17호 주17호 1.73 0.42 0.39 0.7 순장자17
23호 할판 2.06 0.4 0.35 0.8 순장자24
순장자13 남 숙전 금제수하부이식,
11호 할판 1.8 0.41 0.34 0.7 양단 동북
순장자36 ? 유아 환두대도,도자,철촉
우평
18호 할판? 부장칸 2.56 0.64 1.6 순장자18
(4군)
19호 할판 2.35 0.42 0.27 1 순장자19 동남 여 숙전 청동환
20호 할판 부장칸 3.33 0.36 0.3 1.2 순장자20 서북 여 성후
2.9 0.53 0.49 1.5 양단 순장자21 서북 남 약년
21호 할판 우평 2.9 0.53 0.49 1.5
순장자22     소아
지산 (5군)
22호 할판 2.85 0.41 0.46 1.2 양단 순장자23 동 여 성전
44
호분 24호 할판 1.94 0.4 0.51 0.8 족단 순장자25 동북 여 숙전 (출산흔) 

철부,철겸,재갈,등자,
25호 할판 부장칸 족평 2.48 0.6 0.53 1.5   순장자26 동북 안교,운주,십금구,
(6군) 청동마령,교구
26호 할판   1.87 0.56 0.43 1 족단 순장자27 북 남 성전 청동이식
27호 할판   2.05 0.42 0.43 0.9 양단 순장자28 북 여 성전 도자
    순장자29 동남 여 숙전
28호 할판   2.24 0.5 0.28 1.1 양단 순장자30 동남   소아
    순장자31   남 ?
좌평
(7군) 1.4< 0.5 0.28 0.7< ?
29호 할판   순장자32 서북 여 노년 은제이식
(두단)
30호 할판 연결 1.7 0.3 0.24 0.5 양단 순장자33 동남 남 성후  
31호 할판 칸막이 1.38 0.34 0.32 0.5 무매장?
좌평
32호 할판   2.1 0.4 0.33 0.8 양단 순장자34 동남 여 성전 금제수하부이식,방추
(8군)

중앙 주피장자 동북 여? 경식

유목곽 금제수하부이식,
주곽 할석 두 7.15 1.64 1.85 11.7 순장자1 동북 남
목관 곡옥부경식,환두
족,북 순장자2 동북? 금제수하부이식,유리경식
족,남 순장자3 동북 은제이식,(금동관)
금제수하부이식,
순장자4 동북
부곽 할석 좌평 4.88 1.5 1.77 7.3 곡옥부경식,도자
순장자5?
지산 1호 할석 유석관 2.1 0.9 0.8 1.9 양단 배장자? 동북? 철촉
45
우평 은제수하부이식,도자,
호분 순장자6 동북 남 숙전
2호 할판 부장칸 (1군) 2.9 0.52 0.6 1.5 두단 철부,철촉
순장자7   여 성후 (출산흔)
족횡
3호 할석 2.7 0.6 0.5 1.6 양단 순장자8 동남     금동수하부이식,도자
(2군)
4호 할석 2.3 0.45 0.35 1 무매장
5호 판석 2.5 0.55 0.45 1.4 무매장(칸막이부장칸)
좌평
6호 할석 (3군) 2.7 0.6 0.35 1.6 족단 순장자9 동북 은제이식,도자
금제수하부이식,도자,
7호 할석 2.1 0.55 0.3 1.2 양단 순장자10 동북
철침

134 야외고고학 제19호


은제수하부이식,도자,
좌평 순장자15 동북
철침
(3군)
지산 8호 할석   2.15 0.5 0.35 1.1 두단? 순장자11    
45
호분 9호 판석 연결 두평 2.55 0.5 0.4 1.3 두단? 순장자12    
10호 판석 칸막이 (4군) 2.9 0.6 0.6 1.7 양단 순장자13 북 금제이식,도자,방추,철침
11호 할판   순장자14 북 은제수하부이식,도자
유목곽
주곽 할석 중앙 6.45 1.26 1.7 8.1   주피장자 북동 ?   경식,(대도)
목괸
하부 할판 하평 3.35 0.55 0.44 1.8   순장자1?        
지산
부곽 할석   족평 4 1.25 1.3 5   순장자2        
30
호분 1-1호 할판 연결 1.9 0.4 0.5 0.8 양단 순장자3 서북    
두평
1-2호 할판 칸막이 2.1 0.4 0.5 1.4 두단 순장자4 서북?     도자
2호 할석   우평 2.42 0.7 0.65 1.7 족단 순장자5 북동 유,소아 금동관,도자
3호 할판   좌평 2.8 0.65 0.57 1.6 양단 순장자6 북동?     철겸,철부,철촉
지산 주곽 유목곽 중앙 주피장자 동북 남?   대도
할석 5.64 0.98 1.2 5.5
32 목관 족 순장자1 동북   (금동관)
호분 소석곽 할석   좌평 2.5< 0.4 0.6 1< 두단? 순장자2 동북?      
지산 은제이식,유리경식,
중앙 주피장자 북 여  
33 주곽 할석 유목관 4.5 0.86 1.4 3.9 은장도자
호분 두 순장자? 북 남?   대도소지?
지산 중앙 주피장자 동북 남?  
주곽 할석 6.33 1.14 1.53 9.1
34 두 순장자1 동북    
호분 소석곽 할석 좌평 3.12 0.55 0.57 1.7 양단 순장자2 동북    
지산 중앙 주피장자 북 여  
유목곽
35 할석 6.66 1.01 1.56 6.7
목관 두 순장자? 북 남?   대도소지?
호분
단봉환두대도,곡옥부경식
중앙 주피장자 동북 남?  
(금제이식, 금제지환)
주곽 목곽 동혈 5.0 2.1 1.5 10.5 순장자1 북 곡옥부경식
주부곽 족 순장자2 북 곡옥부경식
순장자3 북 곡옥부경식
지산 부곽 목곽 족평 3.7 1.7 1.2 6.3   순장자4,5 북서 ?    
73
호분 서순곽 할석 족평 2.4 0.71 0.76 1.1   순장자6 남서 남 성후 금동관식
순장자7 서남 남 성전
남순곽 할석 묘광내 좌평 2.81 0.67 0.33 1.9 두단
순장자8 동북 ? 성전
석단
순장자9 서남 남 성후
북순곽 할석 우평 2.84 0.62 0.44 1.8 두단
순장자10 동북 여 약후
봉분내 할석 좌평 2.6 0.6 0.7 1.6 배장자? ?
중앙 주피장자 동북
주곽 할석 유목곽 5.87 1.25 1.78 7.3
지산 족 순장자4? 동북?
74 부곽 할석 족평 2.85 0.8 1.58 2.3 순장자1
호분 북순곽 할판 우평 2.3 0.45 0.58 1.0 순장자2 동북 금동이식
남순곽 할판 좌평 2.7 0.5 0.7 1.4 순장자3 서남 금동이식
중앙 주피장자 동북 남? 경식,환두대도(금동천)
주곽 할석 유목곽 7.06 1.4 2.02 9.9
족 순장자1 동북 경식
지산 부곽 할석 족평 4.68 1.16 1.63 5.4 순장자2,3    
75 1호 할판 두평 1.85 0.5 0.6 0.9 양단 순장자4        
호분 2호 할판 주곽 좌평 1.8 0.55 0.73 1 족단? 순장자5 동북?
묘광내
3호 할판 토단 좌평 1.62 0.6 0.75 1 순장자6
4호 할석 족평 1.53 0.6 0.47 0.9 순장자7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순장 135
5호 할석 주곽 족평 1.72 0.47 0.56 0.8 순장자8
지산 6호 목판? 묘광내 우평 순장자9
75 토단
7호 목판? 우평 순장자10
호분
봉분내 3기 배장자? 철관식

본관 주곽 할석 유목곽 중앙 6.02 1.04 1.2 6.3   주피장자 동남?     유리경식,은환


34
호분 소석곽 할석   우평 1.7 0.52 0.33 0.9   순장자 동남?      

본관 주곽 할석 유목곽 중앙 8.23 1.12 1.5 9.2   주피장자 북동?     유리경식


35
호분 소석곽 할판   좌평 2.46 0.75 0.56 1.8   순장자 북동?      

중앙 10  주피장자 남
주곽 할석 유목곽 1.35 1.8 13.5  
족 10  순장자1 남 남   대도
본관
금제수하부이식,
36 유목곽
석곽 할석 좌평 5.1 0.97 0.85 4.9 양단 배장자? 남     유리경식,재갈등,
호분 목관
모형철기,관정,꺾쇠

폐석곽 할석   좌평 2.76 0.6 0.6 1.7   순장자2?        


범례 : 묘제에서 할석은 할석조, 판석은 판석조, 할판은 할석과 판석을 섞어 축조한 것을 가리킨다. 위치는 주피장자를 기준으로
주곽 내에서는 두부부장처와 족부부장처, 여타는 두부, 우측, 좌측, 족측에 평행한 것과 주피장자의 주곽 단벽이나 장벽과
교차하는 방향으로 배열된 것을 구분하였다. 연령은 김재현의 분류를 따라 소아는 10세 미만, 약년은 10대, 성전은 20대,
성후는 30대, 숙전은 40대, 숙후는 50대, 노년은 60대 이상을 말한다.

<표 2> 대가야 순장고총의 유구배치 유형

136 야외고고학 제19호


앞에서 검토한 결과를 기준으로 지산동고분군 순장묘의 순장 양상을 정리하면 <표 1>
과 같다. 대가야 고총은 주부곽의 배치, 순장곽의 배치에 따라 크게 네 개의 유형으로 나
눌 수 있다(김용성 2012: 287). 이들 유형은 위계와도 관련이 있고, 시기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에 이 유형에 따라 순장 양상을 살피도록 한다. 한편 최근 조사된 지산동
73호분과 75호분은 다른 것들과 달리 묘광의 내부 주곽이나 주부곽의 보강토 또는 보강
석 위에 순장곽을 설치하여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이들 고분은 비교적 이른 시기로 편년
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이를 초기유형으로 나누어 먼저 살펴보도록 한다. 이를 정리하
고 단순화시켜 대가야 순장고총의 유구배치 모식을 작성하면 <표 2>와 같다.

1. 초기유형

묘제가 목곽묘에서 석곽묘로 변화하는 시기의 유형이다. 동혈묘광 주부곽식의 주부곽


을 둘러싼 석단에 ㄷ자상으로 순장곽을 설치한 73호분과 이혈묘광 주부곽식의 주곽을 둘
6)
러싼 토단(이층대)에 ㅁ자상으로 순장곽을 배치한 75호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 묘광
내 순장곽은 주곽과 동시에 축조되었을 것이다.

1) 지산동 73호분 순장 양상

지산동 73호분은 1기의 주곽과 1기의 부곽을 하나의 깊고 넓은 묘광 내부에 완전 지하


식으로 축조한 동혈주부곽식이다. 묘광벽과 이 주부곽 사이에는 돌을 채워 보강한 목곽
묘의 형식이다. 이 채운 석단의 상면에 주부곽을 돌아가며 3기의 소형 석곽을 설치하여
순장곽으로 삼았다. 봉분 기저의 호석은 장경 23m, 단경 21m이나 원래 봉분은 장경 24m,
단경 22m로 판단된다.
주곽은 북동-남서향으로 설치된 목곽으로 다른 대가야의 순장묘에 비해 넓은 장방형
(너비 2.1m)이다. 내부에서 꺾쇠와 관정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내곽과 목관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주피장자가 착장한 단봉문환두대도와 곡옥부경식이 출토되어 주피장자
는 남성으로 추정된다. 목관에 안치된 주피장자 외에 그 발치에서 3조의 경식이 출토되었
는데, 순장자 3인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주피장자 발치에 엇갈린 방향으로 설치된 부곽
북반부에 공간이 있고 여기에도 순장자 2인이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피장자의 두
측인 동북쪽의 토기들 사이에 비교적 넓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여기에도 순장자가 배
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6)  전고(김용성 2012: 287-287)에서는 이 형식을 제2유형에 포함하였으나 시기나 묘형을 감안하여 초기유형으로 재분류한다.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순장 137
주부곽의 둘레 석단 위에 배
치된 소형 석곽은 발치인 부곽
의 서측(서순장곽), 주곽의 남
측(남순장곽), 북측(북순장곽)
에 주곽이나 부곽과 나란하게
배치되었다. 주곽과 나란한 남
측과 북측의 소형 석곽에는 각
<그림 3> 지산동 73호분 주피장자와 순장자 배치
기 두향이 반대인 인골 2구가,
부곽과 나란한 서순장곽에서는 금동관식을 가진 인골 1구가 확인되었다. 이 중 서순장곽
의 순장인은 성년 후반의 남성, 남순장곽의 2인은 성년 전반의 남성과 역시 성년 전반의
성별 미상, 북순장곽의 2인은 성년 후반의 남성과 약년 후반의 여성으로 밝혀졌다.
한편 이 고분 봉분 축조과정에 축조된 1기의 할석조 소형 석곽 1기가 확인되어 봉분 내
순장곽으로 불리고 있다. 이 경우 주부곽의 묘광이 깊어 각각에 목곽을 설치하고 매토를
했을 것이고, 묘광을 둘러싸고 조성된 것으로 판단되는 토제가 발견된 것을 감안하면 그
작업량은 무시할 수 없어 묘광 내 매장과는 상당한 시간이 경과된 후에 이 석곽이 축조된
것이 되어 동시성에 문제가 된다. 따라서 이는 후술하는 75호분의 경우와 같이 배장곽으
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싶으나 앞으로 검토를 요한다.
결국 이 고분에는 주피장자 외에 주곽에 3인, 3기의 소형 석곽에 5인, 부곽에 2인 등 적
어도 10인의 순장자가 매장된 것이 확인된다. 그러나 봉분 내 순장곽을 인정하면 순장자
의 수는 더 늘어나 그 이상이 된다.

2) 지산동 75호분 순장 양상

지산동 75호분은 1기의 주곽과 1기의 부곽을 별도의 묘광을 파서 설치한 것이다. 주곽
의 묘광을 넓고 깊게 파고 그 중앙에 세장한 석곽을 축조하여 묘광 벽과 이 주곽 뒤채움
공간에 토단이 넓게 형성되게 되었는데, 거기에 주곽을 돌아가며 7기의 소형묘를 배치하
였다. 봉분 기저의 호석은 장경 25m, 단경 22m이나 원래 봉분은 장경 26.5m, 단경 23.5m
로 판단된다.
주곽은 북동-남서향으로 설치된 할석조의 수혈식석곽이다. 내부에서 꺾쇠와 관정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중앙에 목곽을 설치하고 그 안에 주피장자의 시신이 납입된 목관
을 안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 발치에서 1조의 경식이 출토되어 순장자 1인이 배치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장하고 긴 대가야식 석곽의 형식으로 보아 주곽의 주피장자 두부에
도 순장자가 배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주피장자 발치에 엇갈린 방향으로 설치된 부곽

138 야외고고학 제19호


의 내부에서 긴 공지 두 부분
이 발견되어 2인의 순장자가
매장된 것으로 보인다.
주곽의 둘레 토단 위에 배치
된 소형묘는 주피장자 발치에
2기, 머리측에 1기, 좌우에 각
2기이다. 이중 5기는 석곽묘, 2
7)
기는 목관묘 이다. 모두 주곽
의 장축이나 단축과 나란하게
<그림 4> 지산동 75호분 주피장자와 순장자 배치
배치되었다. 소형 석곽 가운데
1기는 개석이 발견되었으나 나머지 4기는 목개로 추정된다. 이들 소형 석곽은 공간의 문
제 때문인지 주곽 묘광에 붙여 그 벽을 한쪽 장벽 또는 한쪽 장벽과 단벽으로 삼고 나머
지 면만 석축한 특징이 있다.
한편 이 고분 봉분 속에 축조된 3기의 소형묘가 발견되었다. 이들은 봉분 내 순장곽으
로 불리고 있으나 73호분의 것과 같이 주곽과 부곽을 둘러싼 흙둑의 내부 성토가 완료
된 후 축조된 것으로 마찬가지로 배장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중 하나의 묘에서
는 동침으로 추정되는 피장자가 철제관식을 착용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또 봉분 속
에서는 우마 등 큰 짐승을 묻었던 시설도 발견되었다. 여기에 묻은 동물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순장 성격의 殉牲이라기보다는 제생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봉분 축조와 관련된 의례의 결과일 것이다.
결국 이 고분에는 주피장자 외에 주곽 주피장자 발치에 1인, 7기의 광내 소형묘에 7인,
부곽에 2인 등 적어도 10인의 순장자가 매장된 것이 확인된다. 그러나 주곽의 길이를 감
안하면 주곽 내부에도 순장자가 더 배치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봉분 내 순장을 인정하면
순장자의 수는 더 늘어나 적어도 13인이 된다.

2. 제1유형

주부곽식의 고분으로 주부곽의 둘레에 10여기 이상의 순장곽이 ㅁ자상으로 배열된 것


이다. 지산동 44호분과 45호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7)  목관묘로 표현하였으나 운구하여 하관하는 본래의 목관이 아니고, 간단하게 판재를 현지에서 조립해 시신을 매납할 수 있도록 한
시설이거나 목판을 깔고 시신을 안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순장 139
1) 지산동 44호분 순장 양상

지산동 44호분은 1기의 주곽과 2기의 부곽, 32기의 소형 석곽으로 구성된 지금까지 조
사된 대가야 고분 가운데 가장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복잡성은 그 규모와 함께 5
세기 후반 또는 6세기 초의 대가야왕릉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으로 지산동 순장묘를 대표
한다. 비록 도굴이 심하여 주피장자가 착장한 성복유물을 확인할 수 없으나 대도를 착장
하고 있던 것은 확인되어 남성인 왕으로 볼 수 있다.
봉분은 동서 27m, 남북 25m, 사면 하부에서 높이 6m이다. 봉분 내부의 주체는 할석으
로 축조한 주곽을 정 가운데 서북-동남향으로 설치하고, 그 서쪽에 주곽과 엇갈리는 방
향으로 할석으로 축조한 하나의 부곽(서곽)과 그 남쪽에 주곽과 평행하게 역시 할석으로
축조한 또 하나의 부곽(남곽)을 설치한 1주곽 2부곽의 주부곽식 석곽이다. 고분 호석 내
부의 이 주부곽 둘레에 할석과 판석을 혼용하거나 판석으로 축조한 32기의 소형 석곽을
설치하였다. 이 소형 석곽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주곽의 장벽 또는 단벽과
나란하게 돌아가며 설치된 것(평행배치)
과 엇갈리는 방향으로 설치된 것(교행배
치)이 그것이다. 이 중 후자는 앞에서 논
의한 바와 같이 배장석곽으로 볼 수도 있
다. 또 소형 석곽 가운데는 부장칸을 구분
한 것이 몇 기 관찰된다. 부장칸은 석곽의
피장자 머리측이나 발치측을 칸막이로 구
분한 것으로 4기(1·18·20·25호)가 이
에 해당한다.
주곽에는 중앙에 목곽을 설치하였고,
<그림 5> 지산동 44호분 순장자 배치
그 가운데 주인공을 두향을 동남으로 하
여 목관 속에 안치하였다. 이 목곽의 바깥 주인공의 머리측과 발치측 유물부장공간에 각
각 순장자를 매장하였다. 그 수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적어도 각 1인(순장자1,2)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들 순장자의 두향도 후술하는 지산동 45호분의 예로 봐서는 주인공과
같이 동남침으로 추정되고, 목관 등 별도의 장구를 사용하지는 않은 것 같다. 두 부곽에
도 각각 순장자를 배치하였음은 확인할 수 있으나 정확한 수는 알 수 없다. 각각의 너비
가 후술하는 소형 석곽(너비 0.3〜0.65m)보다 넓은 점에서 2인 이상을 나란하게 안치시킬
수 있는 공간(너비 1.3m 이상)이 되므로 더 많은 순장자가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여기서는 편의상 각 1인(순장자3,4)으로 파악한다. 주곽과 평행한 남부곽의 순장자는 주

140 야외고고학 제19호


인공과 같이 동남침으로 배치한 것으로 추정되고 각 순장자의 성복유물로 볼 수 있는 것
은 하나도 없고 토기만 출토된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순장곽으로 불리는 32기의 소형 석곽 가운데는 토기만 출토되어 부곽으로 볼 수 있는
것이 2기가 있다. 14호와 16호로 석곽의 배치 상태로 보아 각각 15호와 17호에 병렬배치
된 부곽으로 판단되고 있다. 또한 석곽의 속에 피장자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은 것이 있는
데, 허장으로 불리는 이것이 모두 4기(8·10·12·31호)이다. 이 가운데 31호는 30호와 칸
막이로 연결된 것으로 실제는 하나의 석곽으로 볼 수 있는 것이고, 나머지 3기는 모두 북
측의 교행배치로 단독곽이다. 이 교행배치의 석곽 가운데 허장으로 알려진 10호는 9호,
12호는 13호와 근접하여 나란하게 배치된 것이 확인되는데, 같은 배치의 주부곽식 2기를
고려하면 이들도 병렬의 주부곽식이었을 가능성이 있게 된다. 그러하다면 모두 27기의
석곽이 배치된 셈이고 이들 가운데 6기가 교행배치, 21기가 평행배치가 된다.
소형 석곽은 다시 대략 몇 개의 군집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앞에서 언급한 교행배치(3
군 : 8〜10·12〜17호·23호)를 한 것이 구분되고, 평행배치를 한 것은 주피장자의 머리
측에 배치를 한 4기(1군 : 1〜4호), 그 우측에 배치를 한 3기(2군 : 5〜7호), 주피장자 우측
의 서측에 근접하여 배치를 한 4기(4군 : 11·18〜20호), 이와 좀 떨어져서 배치를 한 2기
(5군 : 21·22호), 주피장자의 발치에 배치를 한 5기(6군 : 24〜27호), 주피장자 좌측의 서
측에 배치를 한 3기(7군 : 29〜30호), 주피장자 좌측 동측에 배치를 한 1기(8군 : 32호) 등
이 그것이다.
8)
이들 소형 석곽에 매장된 인골은 모두 27구가 확인되었다 . 대부분은 한 석곽에서 1구
의 인골이 확인되었으나 5·6·11·13·21호 석곽에서 각 2구, 28호 석곽에서 3구가 합장
된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인골이 확인되지 않았으나 독립된 석곽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모두 5기(4·17·18·23·25호)이다. 따라서 소형 석곽에는 모두 32인 이상이 매장된 셈
인데, 교행배치 석곽의 매장자가 5인, 평행배치의 매장자가 27인이다.
소형 석곽의 매장자는 인골분석에 의하면 성별이나 연령이 감정되는 것이 모두 27인
으로 성별이 확인되는 21인 가운데 남성이 10인, 여성이 11인이다. 또 연령대가 확인되는
것은 모두 24인으로 소아 또는 유아가 3인, 10대인 약년이 1인, 20대인 성년 전반이 5인,
30대인 성년 후반이 8인, 40대인 숙년 전반이 5인, 노년이 1인이다. 이 가운데 유아나 소
아는 모두 다른 매장인과 합장된 특징이 있다.
이상의 결과를 종합하면 지산동 44호분에는 주피장자 외에 주곽에 최소 2인, 부곽인 남

8)  이하 순장자에 대한 인골의 동정은 김재현(2009)의 의견을 따른다. 이 의견과 발굴보고서의 주강(1979)에 의한 분석은 약간의 차
이가 있으나 크게 다르지 않고 김재현의 분석이 더 세밀하다.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순장 141
곽과 서곽에 최소 2인, 순장곽에 최소 32인이 매장된 셈이다. 따라서 주피장자 외에 최소
36인 이상이 매장된 것이 된다. 그리고 이 36인이 모두 순장자이거나 31인이 순장자이고
나머지 5인은 배장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지산동 45호분의 주부곽 순장자를 고려하면
주곽에 3인, 두 부곽에 4인이 순장되었을 가능성도 있어 많게는 40여인이 순장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2) 지산동 45호분 순장 양상

지산동 45호분은 1기의 주곽과 그 부곽, 1기의 중형 석곽(1호 석곽)과 10기의 소형 석곽


으로 구성되었다. 봉분의 규모는 남북 23.5m, 동서 22m, 사면 하부에서 높이 7m 정도이
다. 44호의 후면에 배치되었고, 그보다 좀 늦지만 유사한 시기에 축조되었으며 44호분보
다 약간 크기가 작은 점, 출토유물의 현상 등으로 보아 주인공은 여성으로 추정되어 대가
야 왕비의 능으로 볼 수 있다.
봉분 내부의 주체는 할석으로 축조한 주곽을 정 가운데 동북-서남향으로 설치하고, 그
남동쪽에 그와 나란하게 할석으로 축조한 하나의 부곽을 설치한 주부곽식의 석곽이다.
또 고분 호석 내부의 이 주부곽 둘레에 할석으로 축조한 비교적 큰 석곽 1기와 할석만을
또는 할석과 판석을 혼용하거나 판석만을 사용해 축조한 소형 석곽 10기를 설치하였다.
주부곽 외의 석곽은 약간 엇갈리게 배치된 것도 있으나 대략 주부곽의 장벽, 단벽과 평행
하게 돌려진 평행배치이다.
주곽에는 중앙에 목곽을 설치하였고, 그 가운데 두향을 동북으로 한 주인공을 목관 속
에 안치하였다. 이 목곽의 바깥 주인공의 머리측과 발치측 유물부장공간에 각각 순장자
를 배치하였다. 머리측에는 1인(순장자1)의 순장 흔적이, 발치측에서는 2인(순장자2,3)의
순장 흔적이 확인되었다. 이중 순장자1은 금제수하부이식, 곡옥부경식, 환두대도를 착장
한 것으로 추정되어 남성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발치의 순장자2는 금제수하부이식과 유
리경식을 착용하였고, 순장자3은 은제이식을 착용하였는데, 주변에서 금동관이 출토되
어 이것을 소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 순장자의 두향도 주인공과 같은 동북으
로 판단되고 목관 등의 다른 장구는 확인되지 않아 직장으로 추정된다. 주곽과 평행한 부
곽에는 동북부에 1인(순장자4)의 순장 흔적이 확인되었으나 그 흔적이 북쪽으로 치우쳐
있고, 남쪽에 비교적 넓은 공간이 남아있어 거기에 1인(순장자5)이 더 매장되었을 가능성
이 크다. 순장자4는 금제수하부이식과 곡옥부경식, 도자를 착용하고 있다. 주곽과 부곽의
순장자는 모두 직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순장곽으로 불리는 주부곽의 둘레에 조성된 석곽 11기는 주인공의 우측에 2기(1·2호),

142 야외고고학 제19호


발치에 1기(3호), 좌측에 5기(4〜8호), 머
리측에 3기(9〜11호)로 구분된다. 인골의
출토 정황을 알 수 없으나 알려진 2호 석
곽에는 숙년 전반의 남성과 성년 후반의
여성이 합장되었고, 이 여성에게서는 출
9)
산흔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4호 석곽과 5
호 석곽에서는 교란된 흔적이 전혀 없었
음에도 불구하고 인골이나 유물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이 가운데 5호 석
곽은 칸막이의 부장칸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부장칸까지 축조하면서 아
무런 유물이나 인골 매장 흔적이 없는 것 <그림 6> 지산동 45호분 순장자 배치

은 유기물의 부장이 이루어졌던 것도 아


니라 허장(윤용진·김종철 1976: 274, 이영식 2012: 216)으로 불리는 것이었음을 분명히
한다.
착장유물의 위치로 파악한 각 소형 석곽의 피장자들은 발치의 3호 석곽 피장자가 동남
향인 외에 모두 동북향, 혹은 북향으로 피장자의 두향과 유사한 방향을 택하고 있다. 배
장석곽으로 보이는 1호 석곽을 제외하면 할석만을 사용해 축조한 것이 5기(3, 4, 6〜8)이
고, 판석만 사용한 것이 3기(5·9·10호), 할석과 판석을 혼용한 것이 2기(2·11호)이다.
석곽 가운데 판석으로 축조한 9호와 10호는 긴 석곽을 칸막이로 구분한 연결석곽이라는
특징이 있고, 2호 석곽은 족측에 칸막이한 부장칸을 두고 있다. 이들 순장자는 모두 석곽
외의 별다른 장구 없이 직장되었다.
소형 석곽의 순장자들도 양질의 장신구를 착장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2호 석곽에서 은
제수하부이식과 도자, 3호 석곽에서 금동수하부이식과 도자, 6호 석곽에서 은제이식과
도자, 7호 석곽에서 금제수하부이식, 은제수하부이식과 도자, 10호 석곽에서 금제이식과
도자, 11호 석곽에서 은제수하부이식과 도자가 출토되어 순장자가 화려한 복식을 착용하
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중 7호 석곽은 2쌍의 이식이 출토되어 2인이 순장된 것을 알려
준다.
이상의 결과를 종합하면 지산동 45호분에는 주피장자 외에 주곽에 3인, 부곽에 2인 정

9)  45호분 2호 석곽에서는 40대의 남성 1인의 인골이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김재현(2009: 521)의 분석에 의하면 30대의 출산
흔이 있는 여성의 인골이 함께 매장되었다.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순장 143
도, 순장곽에 적어도 10인이 매장되어 순장자가 모두 15인 이상이고, 1인이 배장된 것으
로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주인공의 주검이 발생하여 무덤 축조를 기획할 때에는 더 많
은 순장이 계획되어 소형 석곽이 배치되었으나 어떤 연유이든 4호 석곽과 5호 석곽에는
순장이 시행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칸막이까지 설치하며 축조된 5호 석곽이 빈 채 남
아 있음은 무덤의 축조와 순장의 시행시기가 달랐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3. 제2유형

주부곽식의 고분으로 주부곽의 둘레에 몇 기의 순장곽이 ㄷ자상으로 배열된 것이다.


지산동 30호분과 74호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1) 지산동 30호분 순장 양상

지산동 30호분은 1기의 주곽과 1기의 부곽, 주부곽 둘레 4기의 소형 석곽, 주곽의 하부
석곽으로 구성되었다. 봉분은 동서 18m, 남북 15m이며 주곽의 개석 상면부터 1.5m 높이
가 남아 있었다. 주곽은 할석으로 축조한 것으로 봉분의 정 중앙에 동북-서남 방향으로
설치되었고, 그 서남부에 역시 할석으로 축조한 부곽을 배치하였다. 순장곽으로 추정되
는 석곽은 주곽의 하부와 좌우에 각각 주곽과 평행한 방향으로 1기씩 배열되었고, 부곽의
반대편인 주피장자의 머리측에 단벽과 평행한 2기의 석곽을 연결시켜 배치하였다.
주곽에는 목곽을 설치하고 피장자
를 목관에 안치하여 매장하였다. 워
낙 도굴이 심하여 주피장자의 머리측
과 발치측에 순장이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부곽도 도굴이 심하여 매
장원상을 알 수 없으나 유물이 서북
부에만 남아 있고, 동남부가 비어있
는 점으로 미뤄 이곳에도 순장자가
배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부곽의
너비로 보아서는 2인의 순장자가 배
<그림 7> 지산동 30호분 주피장자와 순장자 배치 치되었을 수도 있다. 주곽의 하부에
할석과 판석을 혼용하여 축조한 석곽
이 요갱과 같이 축조된 특징이 있는데, 이 소형 석곽도 크기로 봐서는 순장곽으로 볼 수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주피장자의 착장유물이 남아있지 않아 그 성격을 알 수는 없다.

144 야외고고학 제19호


주부곽의 둘레에 평행배치된 4기의 석곽은 주피장자의 좌측에 1기(3호), 우측에 1기(2
호), 두측에 2기(1-1,2호)이다. 이 가운데 두측의 2기는 긴 석곽의 중앙에 판석을 세워 칸
막이한 연결석곽이다. 이들 순장곽은 주곽의 개석이 덮이고 난 후에 축조된 것으로 확인
되었다. 순장된 인골의 흔적은 2호 석곽에만 남아 있어 순장 양상을 파악할 수 없으나 적
어도 각 소형 석곽에 1인이 매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확인된 2호 석곽의 인골은 유아 또
는 소아로 감정되었다. 이 순장자는 금동관을 착용하고 있었으며 도자가 함께 출토되었
다. 각 순장자는 모두 석곽 외에 별다른 장구 없이 직장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의 결과를 종합하면 이 고분에는 주피장자 외에 하부석곽 1인, 부곽에 1인 이상, 둘
레 석곽에 4인 등 적어도 6인의 순장자가 매장되었음이 확인된다. 이 가운데 하부석곽을
피장자의 장례 중에 발생한 근친자의 죽음으로 축조된 배장 성격의 고분으로 본다고 하
더라도 적어도 5인이 순장된 것이 된다.

2) 지산동 74호분 순장 양상

지산동 74호분은 1기의 주곽


과 1기의 부곽, 주부곽 둘레 2기
의 소형 석곽으로 구성되었다. 봉
분의 기저에 돌린 호석은 장경
10m, 단경 9.8m이고 평면이 6각
형에 가까운 원분이었다. 주곽은
할석으로 축조한 것으로 봉분 중
앙에 동북-서남향으로 축조되었
<그림 8> 지산동 74호분 주피장자와 순장자 배치
고, 그 서남부에 역시 할석으로
축조한 부곽을 배치하였다. 순장곽으로 추정되는 석곽은 주곽의 좌우에 그와 나란하게 1
기씩 배열되었다.
주곽의 내부에서 꺾쇠와 관정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목곽이 설치되고 그 속에 시신
을 납입한 목관이 안치되었다. 주곽의 내부에 주피장자의 발치측인 서남단벽측에 납작
한 할석을 깐 시설이 발견되어 거기에 순장이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부곽은 상당 부
분 도굴되었으나 북반부에 배치된 토기들이 서편으로 편재하고 그 동편이 공지로 남아
있고 거기서 도자가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1인이 순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 순장자는 직
장되었다.
주곽의 북편에 설치된 소형 석곽은 할석으로 축조한 것이고, 남편에 설치된 소형 석곽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순장 145
은 판석으로 축조되었고 모두 목관·곽의 사용 흔적은 없다. 각 소형 석곽에 1인이 매장
된 것으로 보이고 이들은 금동이식을 착용하고 있다.
이상의 결과를 종합하면 이 고분은 주피장자 외에 주곽에 1인, 부곽에 1인, 두 소형 석
곽에 각 1인 등 모두 4인 정도의 순장자가 매장된 것이 된다. 주곽의 길이를 감안하면 주
피장자의 두부에도 순장자 1인을 배치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 5인이 순장되었을 가능성
도 있다.

4. 제3유형

부곽이 없이 주석곽의 옆에 나란하게 1기의 순장곽을 배치한 형식이다. 지산동 32호분


과 34호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지산동고분군 외에 본관동 34〜36호분, 반계제 가A호와
다A호도 이 형식에 속한다.

1) 지산동 32호분 순장 양상

지산동 32호분은 주곽인 할석으로 축조


한 석곽과 그 좌측에 평행하게 축조된 소
형 석곽 1기로 구성되었다. 봉분은 장경
13.1m, 단경 12.6m가 남아 있었고, 호석
으로 판단한 묘역의 규모는 직경 11.2m이
다. 주곽은 봉분의 중앙에 동북-서남향으
로 축조되었고, 소형 석곽은 그 동남부에
주곽과 평행하게 배치된 것으로 역시 할
석으로 축조되었다.
주곽은 중앙부에 목곽을 설치하였고,
그 속에 주피장자를 목관에 안치하여 매
장하였다. 주피장자는 동북침으로 판단되
<그림 9> 지산동 32호분 주피장자와 순장자 배치 고 대도를 착용하고 있는 점으로 미뤄 남
성으로 판단된다. 목곽의 바깥 주피장자
의 발치 유물군 하부에서 주피장자와 같이 동북침을 한 순장자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이
피장자에게서 다른 착장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그 발치에서 금동관이 발견되어 이를
소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순장곽인 소형 석곽은 파괴되고 일부만 남아 있어
매장 원상을 알 수 없으나 피장자는 동북침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32호분에는 주피장자

146 야외고고학 제19호


외에 2인의 순장자가 매장된 것으로 판단되는데, 모두 석곽의 내부에 직장된 것으로 추정
된다.

2) 지산동 34호분 순장 양상

지산동 34호분은 주곽인 할석으로 축조한 석곽과 그 좌측에 평행하게 축조된 소형 석


곽 1기로 구성되었다. 봉분의 호석은 장경 14.5m, 단경 11m이고 봉분의 높이는 주곽 개석
상면에서 1.6m였다. 주곽은 봉분의 중앙에 동북-서남향으로 축조되었다. 소형 석곽은 그
동남부에 주곽과 평행하게 배치된 것으로 역시 할석으로 축조되었다.
주곽의 내부에서는 꺾쇠나 관정 등의 장구와 관련된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주피장자는 석곽의 내부 중앙에 직장된 것으로 판단되고 두향은 동북으로 추정되고 있
다. 주곽의 주피장자 머리측인 동북부에서 치아의 파편이 확인되어 순장자가 배치되었음
이 확인되었다. 이 순장자도 주피장자와 같이 동북침이고 별다른 착장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순장곽인 소형 석곽에는 1인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북침으로 직장되었으
며 별다른 착장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이 34호분에는 32호분과 같이 주피장자 외
에 2인의 순장자가 매장되었다.

5. 제4유형

부곽이나 순장곽이 설치되지 않은 형식이다. 지산동 33호분과 35호분이 여기에 해당


한다.
두 고분은 모두 독립된 원분으로 중앙부에 할석으로 축조한 석곽만으로 구성된 것으로
33호분은 봉분 호석의 장경
8.2m, 단경 7m, 35호분은 호
석의 장경 12.8m, 단경 11.3m
이다. 석곽의 장축은 모두 남-
북향이고 33호의 경우 목관
의 사용 흔적이, 35호분의 경
우 목곽과 목관의 사용 흔적
이 있다. 주피장자는 두 고분
모두 북향이고 여성으로 추정
34 35
되고 있다. 각각 목곽이나 목
관의 북측과 남측 공간에 유 <그림 10> 지산동 34ㆍ35호분 유구배치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순장 147
물을 부장한 것으로 보이는데, 북측인 주피장자 두측의 공간에서 대도편이 같이 출토되
었다. 이로 보면 그 공간에 각각 남성의 순장자를 배치했을 가능성이 크나 대도가 단순한
부장품이고 순장이 시행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Ⅳ. 지산동고분군 순장의 전개와 특징

1. 순장의 전개

고령지역에 순장이 시행되기 시작한 시점은 아직 알 수가 없다. 신라나 금관가야 지역


의 경우는 이미 목곽묘단계인 3세기 후반 또는 4세기 초에는 순장이 시행된 흔적(김용성
2009a: 204, 경성대박물관 2000)이 확인되고 있는데, 고령지역의 경우도 4세기 중후반대
에는 순장이 시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반절된 채 조사된 쾌빈동 1호 목곽묘(영남매
장문화재연구원 1996)의 경우 목곽의 보강토인 토단 위에서 순장의 흔적으로 보이는 시
10)
설 이 발견되었고, 내부에도 순장이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앞으로 더 앞 시
기의 대형목곽묘가 조사되면 순장의 시작 시기가 더 소급될 수 있을 것이다.
고령지역에 목관묘단계가 종언을 고하고 지산동에 고총이 축조되면서는 순장이 고총
의 보편적인 장법으로 사용되었음이 확인된다. 지산동 고총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로 볼
수 있는 지산동 73호분에 이미 10인 정도의 순장 흔적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
어지는 지산동 75호분에서도 적어도 10인의 순장을 추정할 수 있다. 이후 지산동 30호분,
35호분 등에서 위계에 따라 순장곽의 배치 형식이 성립되는 등 순장묘주의 폭이 넓어지
11)
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후 5세기 후반 또는 6세기 초 에는 44호와 45호 등으로 보아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많은 수의 순장자를 매장하는 풍습이 발생하여 순장의 전성기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발전한 대가야의 순장이 언제 소멸하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이는 대가야 말
기에 해당하는 고총의 발굴이 없었기 때문일 터인데, 지산동 44호분과 45호분보다 늦게
조성된 것으로 믿어지는 그 상위에 분포하는 금림왕릉으로 전하는 현47호분(구39호분)
(藤井和夫 2002)에서 소형 석곽이 조사된 바 있고, 그 후면에 분포하는 고분 봉분의 크기

10)  조영현(2013)의 발표에서 이 시설이 순장과 관련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11)  여기에서 고분의 연대는 박천수(2009: 597)의 안을 따르되 지산동 30호와 35호분의 연대를 5세기 2/4분기로 약간 늦추어 보고
자 한다. 이는 옥전 23호분 출토의 신라토기를 5세기 전반에 두는 필자의 연대관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부부로 인정되는 지산동
35호분과 34호분, 33호분과 32호분을 한 세대 간격의 세트라면 두 세대는 각각 5세기 2/4분기와 5세기 3/4분기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148 야외고고학 제19호


로 보아 상당한 기간 더 순장의 풍습이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현재의 자료로는 대가야의 순장은 늦어도 5세기 초에 출발해서 빨라도 6세기
전반까지의 기간에 시행되었다고 할 수 있고, 대가야가 멸망하기 직전인 6세기 중엽 무렵
까지 유지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지산동 순장묘의 순장은 일률적이지 않고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한 것이 감지된다. 특
히 순장자의 배치 방식과 순장자의 수가 변화하는데, 이를 초기형식과 전성기형식으로
구분해서 살필 수 있다.
초기형식인 지산동 73호분과 75호분은 주곽의 내부와 부곽에 순장이 시행되었을 뿐 아
니라 묘광의 내부에 순장곽이 설치된 특징이 있다. 73호분은 동혈묘광의 주부곽식이기
때문에 주부곽을 둘러싼 보강석의 석단에 ㄷ자상으로 순장곽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75호
분은 이혈묘광의 주부곽식으로 주곽의 묘광을 아주 넓게 파고 그 가운데 축조된 석곽의
뒤채움 토단에 순장곽을 ㅁ자상으로 돌아가게 배치하였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묘광이
깊어 이층대라고도 할 수 있는 묘단에 순장자를 배치한 점에서는 동일하다. 한편 후자는
순장곽을 설치함에 있어서 주곽 묘광의 벽면을 벽으로 삼아 ㄷ자상, 또는 ㄴ자상으로 석
축하여 순장곽을 조성한 특징이 있다. 이는 작업의 효율성이 고려된 때문으로 보인다.
이렇게 묘광 내 순장곽 조성 방식은 순장묘가 대가야식의 본격적인 수혈식석곽으로 바
뀌면서 같이 변화하게 되었다. 정형화된 대가야식 수혈식석곽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
의 것으로 지산동 30호분과 35호분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석곽을 축조할 지면과 내부 석
곽의 상면 레벨이 같아져 고분의 축조과정에 묘광 내부의 매토가 생략되게 되었다. 따라
서 순장곽도 지면으로 올라와 배열되었다. 그러나 주곽과 부곽의 순장은 지속된다. 이러
한 순장곽의 배치 형식은 전성기인 44호분과 45호분까지 이어진다.
따라서 지산동 순장묘에서 순장은 주부곽의 순장은 지속적이고, 별도의 묘곽을 축조하
여 순장을 시행하나 그 배치는 묘광 내부에서 외부 별곽으로 바뀌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
다. 그러한 변환 시기는 지산동 30호분과 35호분의 예에서 보듯이 대가야식 수혈식석곽
의 완성과 괘를 같이하는 것으로 5세기 전반쯤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산동 순장묘 가운데 최고위계의 대형묘로 볼 수 있는 것은 5세기 초의 73호분과 75호
분, 5세기 후반 이후의 44호분과 45호분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해당 시기 지산동에 고분을
축조한 최고 위계자의 무덤, 즉 대가야의 왕이나 왕비의 왕묘로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전자는 75호분에서 10인 정도의 순장자가 확인되나 후자인 44호분에서는 적어도 30여인
이상의 순장자가 확인되고 있다.
이렇게 같은 위계에서 순장자의 수가 크게 증가하는 것은 대가야가 5세기 후반에 들어
전격적으로 발전한 현상을 지적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5세기 초에는 대가야가 아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순장 149
직 광역의 영역을 지배하는 국가로서 성립되지 않아 순장의 대상이 제한적이어서 그 수
가 적었으나 후반에 이르러 주변 지역을 복속시킴으로써 광역의 영역을 지배하기 시작했
고, 따라서 지배집단 권력의 성장과 함께 순장의 대상도 늘어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 아직 자료의 미비로 그 현상을 명확하게 짚어내기가 곤란하지만 대가야의 성장에
따라 순장을 시행할 수 있는 지배층의 범위가 확대됨을 관찰할 수 있다. 시간을 고려하지
않고 고령지역 순장묘의 순장자 수만을 가지고 그 위계를 나누면 앞에서 나눈 제1유형을
1등급, 제2유형을 2등급, 제3유형과 제4유형을 3등급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초기형
식은 제2등급의 상위에 둘 수 있다. 즉 15인 이상의 순장이 행해진 제1등급, 5인 정도의
순장이 행해진 제2등급, 1인이나 2인의 순장이 행해진 3등급으로 구분되고 10인 내외의
순장이 행해진 것이 초기형식이다.
이렇게 등급별로 구분해 놓고 보면 제2등급과 제3등급은 초기형식보다 더 나중인 5세
기 전반에 출현한 것이 확인되고, 제1등급은 더 나중인 5세기 후반 이후에 출현한 것이
된다. 이러한 사실은 적어도 지산동 고분군에서 순장묘의 축조가 처음에는 국의 최고위
계집단에 한정되어 있었으나 시일이 흐르면서 순장을 시행하는 계층의 폭이 넓어졌음
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순장을 시행할 수 있는 계층은 적어도 3개
의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는 지산동고분의 축조 세력이 처음 고
총을 축조할 때는 신라의 지방소국과 유사하여 고령지역의 영역을 크게 벗어나 발전하지
못했으나 시일이 흐르면서 영역을 확장하여 5세기 후반 이후에는 광역의 정치체인 본격
적인 초기국가 대가야로 발전한 현상(김용성 2012: 293-301)과 연결된다.

2. 순장의 특징

대가야 순장의 가장 큰 특징은 순장자의 수에 있다. 신라 순장묘의 순장자 수는 10인을


넘지 않는다. 왕릉으로 인지되는 황남대총의 남분과 북분에 각각 적극적으로 해석할 때
10인의 순장이 유추되고 유일한 순장의 기록에도 왕의 순장에 남녀 각 5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지방의 순장묘 가운데 비교적 많은 순장이 행해진 경우도 순장자 수는 5인
내외에 불과하다. 금관가야의 경우 6인 이하(김수환 2005: 57), 아라가야의 경우 5인 내외
(김수환 2010: 48)가 보편적이다. 그러나 지산동의 왕릉급인 44호분에서 최소 31인, 많게
는 40여인이, 왕비릉급인 45호에서 최소 15인이 순장되어 그 수에서 다른 지역을 압도한
다. 또한 지산동 순장묘의 순장자 수를 검토하면 대략 1인, 2인, 5인 내외, 10인 내외, 15
인 내외, 30인 내외나 40인 내외 등 5인 미만은 개별 수의 순장, 그 이상은 5의 배수와 10
의 배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150 야외고고학 제19호


지산동을 비롯한 대가야지역 순장묘에서 주부곽에 순장자를 배치하는 것은 영남지방
순장묘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신라권을 비롯한 영남 다른 지역의 경우 대가야와
같이 별도의 묘곽을 조성하여 순장자를 배치하는 현상은 아직 찾아지지 않는다. 최근 조
사된 김해 대성동의 88호와 91호 목곽묘(대성동고분박물관 2013)에 비록 목곽의 외부 보
강토인 토단 위에 순장이 시행되어 곽 외 순장이 인정되고, 신라 적석목곽묘의 석단 위에
순장이 시행되었으나 이들도 별도의 묘곽을 축조해 순장자를 안치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대가야 순장의 가장 커다란 특징의 다른 하나가 순장자를 위한 묘곽이 조성되었다는 점
일 것이다.
순장묘의 주피장자와 순장자의 배치에 있어서 지산동의 순장묘는 주피장자를 가장 아
래에, 그리고 중앙에 배치하고자 하는 의도가 명확하다. 주곽에 목곽을 설치하고 그 중간
목관에 주피장자를 안치하고 목곽의 바깥 두부와 족부의 유물부장처에 순장자를 안치하
였고, 주피장자의 묘곽을 둘러싸고 순장곽을 배치한 것은 중심의 가장 아래에 주피장자
를 두어 구분하고자하는 의도가 확실하다. 그리고 순장자의 두향도 주피장자와 같은 방
향을 유지하려고 의식한 것도 발견된다. 이러한 현상은 순장의 근본 목적인 ‘旋環左右 以
衛死者’의 방식(김용성 역 2011: 128)이 그대로 적용된 것이고, ‘深尊淺婢’의 형식도 지켜
졌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하여 신라권 순장의 경우 주피장자 머리 위에 순장자를 배치하는 현상은 잘 보
이지 않는다. 다른 가야지역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잘 알려진 경산 임당 순장묘의 경우
주곽의 주피장자 발치에 순장자를 두향이 다르게 배치하고 발치에 있는 부곽에 순장자를
배치(김용성 2009a: 213)하여 주피장자의 머리 위로 순장자가 배치되는 경우는 없다. 다만
경주 적석목곽묘의 경우 석단에 순장자를 배치함으로써 ‘深尊淺婢’의 형식은 지켜진다.
즉 신라의 경우 주피장자 머리 쪽을 상위로 하여 가장 상위에 주피장자가 자리하고, 좌우
와 그 아래에 순장자를 배치하여 주피장자가 순장자를 거느리고자 한 의도가 보여 대가
야와 다른 양상이다.
순장을 하기 위해서는 순장자를 살해하거나 산채 매장하여야 한다. 지산동의 경우 어
떠할까 고려하면 산채 매장의 경우보다는 살해하여 매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순장
묘라는 거대한 고분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을 것이고, 그 사이에 상장
의례의 각종 의식이 행해졌을 것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지산동의 순장자는 주피장자와 같이 주곽과 부곽에 순장된 자와 별곽을 축조하고 매장
된 것으로 나눌 때 이들은 동시성이라기보다는 시차가 있었을 것이다. 순장묘의 축조 방
식을 고려할 때 비록 초기형식은 분명하지 않으나 등급화된 후대의 형식에서는 이것이
명확하다.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순장 151
순장묘의 축조는 묘광의 굴착, 주석곽의 축조, 내부 목곽의 축조, 하관과 유물부장, 목
곽의 복개, 석곽의 복개, 순장곽의 축조, 봉분의 조성 등의 순서를 유추할 수 있다. 이 가
운데 순장곽의 축조가 주석곽의 축조와 같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있으나 지산동 30호분
의 경우는 석곽의 복개가 이루어진 이후 순장곽이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다 그러한지
는 아직 알 수 없고, 허장으로 불리는 순장곽이 축조되었으나 순장자가 거기에 매장되지
않은 45호분의 일부 순장곽(4호와 5호)의 경우로 보아서는 순장곽 순장이 주부곽 순장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 경우는 73호분과 75호분의 묘광 내 순
장묘곽으로 보아 주석곽과 함께 순장곽의 축조가 이루어졌고, 그때 순장자의 수나 대상
이 정해져 있었으나 특수한 사정으로 인해 순장이 시행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 점은 주피장자와 함께 주검이 안치되는 순장자인 주곽과 부곽의 순장자와 달리 순
장곽 순장자는 더 후에 매장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즉 주인의 하관시 순장이 행해지고,
주석곽이 복개된 후 순장이 행해져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특히 후자의 경우 순장자
를 살해한 상태에서 매장한 것이지 산채 소형 석곽 속에 매장하고 봉분을 축조해 올라갔
다고 볼 수 없게 한다. 30여인을 산채 소석곽에 매장했을 때의 아우성은 문제가 되기 때
문이다. 또한 대부분 순장곽에는 그 순장자를 위한 간단한 공헌유물이 부장되어 사후 매
장되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대가야에서 순장자의 살해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그 매장 시
기는 주피장자의 하관시와 봉분의 축조가 이루어지기 직전의 성분제 성격의 의례에서 행
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주피장자의 죽음이 발생하고 고분의 축조가 시작되었을 때
순장이 기획되나 고분의 축조, 빈장 등의 기간에 변화가 발생하여 순장의 대상도 바뀌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순장묘의 주인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가야의 왕과 왕족을 포함한 상위 위계의
인물일 것이다. 3등급으로 구분되는 이들 가운데 왕과 왕비로 부를 수 있는 1등급을 제외
하면 대가야의 귀족층으로 볼 수 있다. 제3등급의 순장묘형은 지산동고분군 외에 본관동
고분군, 합천 반계제고분군 등에서도 발견된다. 이러한 등급은 또 대가야가 초기국가로
완성된 이후 지방의 최고지배자와 비견된다. 그러므로 대가야에 부체제가 시행(노중국
1998: 454)되고 있었다면 적어도 부의 지배자급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대가야 순장
묘주는 대가야의 상위 귀족과 왕과 왕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신라의 경우도 마찬가지
로 경주의 왕과 왕족, 최고 귀족, 지방 소국의 간층 지배자 가족이 순장묘주로 인정되고
있다(김용성 2009a: 223).
이들 순장묘주는 같은 등급이라 하더라도 남녀의 차별이 있었다. 왕으로 추정되는 44
호분(최소 31인)과 왕비로 추정되는 45호분(최소 15인)의 순장자 수에서의 차이, 남성으

152 야외고고학 제19호


로 추정되는 32호와 34호(제3유형)에서는 주곽의 순장 외에 순장곽이 조성되었으나 여성
으로 추정되는 33호와 34호(제4유형)에서는 주곽에만 순장이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있을
12)
뿐 순장곽이 조성되지 않은 차이가 이를 알려준다. 45호분의 순장자 수는 44호분의 1/2
에 불과하고, 부부 중 남성으로 추정되는 32호와 34호는 2인, 여성으로 추정되는 33호와
35호는 1인이 순장되었거나 순장이 시행되지 않아 마찬가지이다. 이는 대가야에서는 주
피장자의 성별에 따라 순장자의 수가 차등이 있었음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것으로 신라와
다른 현상이다.
신라의 왕과 왕비로 추정되는 황남대총 남분과 북분의 순장자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삼국사기』 지증왕 3년조의 기록과 같이 10인 내외가 되고, 경산 임당의 경우도 남성과 여
성 순장묘주의 순장자 수에서 차이를 엄격하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대가야
의 지배세력이 무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과 관련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와 달
리 대가야의 고총이라고 하면 대부분에서 갑주 등의 중장무기가 출토되어 신라와 다른
데, 이것은 지배세력의 성격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 이들 순장묘에 순장된 인물은 누구일까? 비교적 순장자의 수가 많고 인골이 출
토되어 분석된 지산동 44호분을 중심으로 이를 찾아보도록 하자.
기존의 연구(김종철 1984; 이영식 2012)에서 지산동 44호분 11호 석곽의 피장자는 대도
등의 무기를 가지고 있어 호위무사로, 마구류를 소지한 25호 석곽의 피장자는 주인의 시
종자로, 주석곽의 피장자는 시비, 부곽의 순장자는 창고지기 등으로 추정되었다. 44호분
의 순장곽 가운데 무기를 소지한 경우는 11호 석곽 뿐이며, 마구를 소지한 경우는 25호
석곽 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선행 추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또한 부곽은 사후생활을
위한 유물을 가져간 창고 역할을 하는 것임으로 창고지기이며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순장자가 주인공에게 봉사하던 인물,
즉 근신자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를 대표적인 존재로 보면서 다시 순장자의 신분과 직능
에 대해 접근해 보도록 하자.
지산동 44호분의 순장자는 최소 31인이고, 교행배치의 소형 석곽도 순장자로 보면 최
소 36인이다. 이 가운데 성별이 확인되는 순장곽에 순장된 자는 남성 10인과 여성 11인이
다. 이 점에서 적어도 순장곽 순장자는 남녀 성별의 차이가 없었고, 남녀가 모두 대상이

12) 대가야 고총 묘주의 남녀 구분은 착장유물이 대부분 도굴되어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나 신라의 경우를 참고하면 대도를 확실하게
착용한 지산동 32호, 73호, 75호, 반계제 가A호는 남성으로 볼 수 있다. 이중 지산동 73호와 75호에서는 발치에도 환두대도의
뭉치가 부장되고 있다. 이에 반하여 피장자가 착장하지 않고 대도가 출토된 고분으로서 지산동 32호와 세트를 이루는 33호, 34호
와 세트를 이루는 35호, 45호에서는 머리 측에 대도가 부장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자에는 발치에서 갑옷류 등 중장무기가 많이 출
토되었으나 후자에서는 그러한 유물이 빈약하다. 따라서 전자는 남성, 후자는 여성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다만 지산동 44호와 45
호, 32호와 33호, 34호와 35호가 부부인지는 알 수 없다.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순장 153
었음이 명확하다. 다음 연령대가 확인되는 것은 유아나 약년인 미성년자가 3인, 20대가 5
인, 30대가 8인, 40대가 5인, 60대 이상 노년이 1인으로 모두 22인이다. 주부곽의 순장자
가 어떠한지는 알 수 없으나 순장의 주된 대상이 성년인 20〜40대임을 알 수 있다. 지산
동 73호분의 순장자 역시 마찬가지로 밝혀진 것은 20대와 30대의 젊은이가 주류이고 10
대 후반의 여성만 좀 어리다. 이는 비록 미성년이나 노년이 섞여 있지만 순장자가 대부분
경제활동을 하고 있던 사람이라는 것이 된다. 즉 주인공의 사후에도 노동으로 주인을 위
해 봉사할 수 있는 연령대가 주된 대상이었다는 것이 된다.
순장곽 순장자 가운데 유아나 약년인 미성년자와 노년의 여성(29호 석곽)이 섞여 있는
데, 이들은 경제활동을 하는 연령대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이 섞여 있음은 순장의
대상이 개별 인물에 한한 것이 아니고 가족이 대상(이영식 2012: 215)으로 된 경우도 있었
을 것임을 알려준다.
44호분의 순장곽을 앞에서 나눈 8개의 군집에 따라 살펴보면 주피장자 두측에 평행배
치된 1군의 4기 순장곽 가운데 3호 석곽의 순장자가 30대이다. 2군인 우측의 두측에 평행
배치된 3기 순장곽 가운데 5호 석곽에는 40대의 여성과 20대의 성별 미상인이, 6호 석곽
에는 30대의 남성과 20대의 남성이, 7호 석곽에는 20대의 남성이 순장되었다. 4군인 중앙
부 우측에 평행배치된 4기의 순장곽 가운데 11호 석곽에서는 40대의 남성과 유아가, 19호
석곽에는 40대의 여성이, 20호에는 30대의 여성이 순장되었다. 이중 11호 석곽의 남성이
앞에서 언급한 무기류를 소지한 순장자이다. 5군인 4군의 바깥에 평행배치된 2기의 석곽
가운데 21호 석곽에는 10대의 남성과 소아가, 22호 석곽에는 20대의 여성이 순장되었다.
6군인 주피장자 발치에 평행배치된 4기의 순장곽에는 24호 석곽에 출산흔이 있는 40대의
여성이, 26호 석곽에 20대 남성이, 27호 석곽에 20대 여성이 순장되었다. 7군인 주피장자
의 좌측 발치측에 배치된 4기 가운데 28호 석곽에 40대의 여성과 소아, 그리고 연령 미상
의 남성이, 29호 석곽에 노년의 여성이, 30호 석곽에 30대의 남성이 순장되었다. 한 기가
독립된 주피장자 좌측 두부측인 8군의 32호 석곽에는 20대의 여성이 순장되었다. 그리고
교행배치된 3군에는 9호 석곽에 30대의 남성, 13호 석곽에 30대의 남성과 연령 미상의 여
성이, 15호 석곽에 30대의 여성이 매장되었다.
위의 배치에서 주피장자 우측의 두부에 평행배치된 2군과 단독배치인 8군을 제외하면
대략 남녀 성인이 쌍을 이루고 거기에 노년과 유아나 약년 등이 추가된 현상을 보여준다.
이는 이들 군집이 대략 가족 단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가족 단위
로 묶인다면 순장의 대상에 가족 단위가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지산동 45호분 2호
석곽에 40대의 남성과 출산흔이 있는 30대의 여성이 합장된 현상에서도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지산동 44호분에는 개별적인 순장자도 존재했으나 가족 단위가 함께 순

154 야외고고학 제19호


장되었다는 것이 된다. 이렇게 가족 단위가 순장의 대상인 경우가 신라권에도 있을 가능
13)
성이 있으나 아직 확실한 증거는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면 이들 순장자의 지위는 어떠했을까? 44호분의 주곽과 부곽의 순장자가 소지했던
착장유물은 모두 도굴되어 그 현상을 알 수 없다. 그러나 45호분의 주곽 머리측 순장자는
금제수하부이식과 경식을 착용하고 있고, 환두대도도 소지하고 있다. 발치의 순장자 가
운데 1인은 금제수하부이식과 유리경식을, 나머지 1인은 은제이식을 착용하고 있고, 금
동관을 소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 부곽의 순장자 가운데 1인은 금제수하부이식
과 곡옥부경식을 착용하고 있다. 44호분의 주곽과 부곽 순장자도 이와 유사했을 가능성
이 크다. 다음 44호분의 순장곽 순장자는 금제수하부이식을 착용한 경우가 3인(6호, 11
호, 32호), 금제이식을 착용한 경우가 1인(4호), 은제이식이나 금동이식을 착용한 경우가
4인(3호, 6호, 26호, 29호)이다. 따라서 이식을 착용한 순장자는 8인으로 순장곽 순장자의
25%를 점유한다. 도굴이 심했음을 감안하면 이식을 착용한 순장자의 비율은 훨씬 더 높
았을 것이다. 45호분 순장곽의 경우는 순장곽에 순장된 10인 가운데 7인이 금제수하부이
식(1인), 은제수하부이식(3인), 금동수하부이식(1인), 금제이식(1인), 은제이식(1인)을 착
용하고 있어 70%를 점유한다.
대가야 고분에서 착장유물을 가지고 위계를 구분하는 것은 워낙 도굴이 심하여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금제수하부이식은 아무 고분에서 출토되지 않는 유물이고, 소환의 이
식도 그리 흔하지 않은 유물이다. 일반 고분으로 생각되는 대가야왕릉전시관부지(영남
문화재연구원 2006)와 역사관부지(경북문화재연구원 2000)의 대가야시기 고분 210기 가
운데 이식이나 경식이 출토된 고분은 20기, 지산동 32-35호 주변석곽 15기(계명대박물관
1981) 가운데 5기에서 이식이 출토되었고, 본관동 주변석곽 9기(계명대박물관 1995)에서
는 이식이 전혀 출토되지 않았다. 따라서 대가야 일반 고분 234기 가운데 착장장신구가
출토된 고분은 대략 10% 미만에 해당한다. 만약 이식만을 따지면 더 줄어들 것이다. 그리
고 이들 가운데 금제수하부이식이 출토된 경우는 대가야왕릉전시관부지 Ⅰ지구 40호묘 1
기에 불과하다.(<표 3> 참조)
이러한 사실은 적어도 대가야고분의 착장유물에 의한 위계를 금제수하부이식, 금제이
식이나 금동 또는 은제의 수하부이식, 금동 또는 은제의 소환이식, 이식이 출토되지 않는
고분 등으로 나눌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중 금제수하부이식은 상당한 신분을 가진 인물
을 의미한다. 금제수하부이식이 대략 대가야의 지방고총에서 출토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

13)  다만 창녕 송현동 15호분의 경우 횡구식석곽의 입구 측에 순장된 4인이 남녀남녀로 배열(이성준 2009: 238)되어 있어 가족 단
위 순장일 가능성이 있다.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순장 155
면 그것을 착용한 인물은 지방의 최고지배자나 바로 그 하위의 인물로 볼 수 있다. 반면
에 이식이 출토된 비율로 보면 이식을 착용한 고분의 피장자는 적어도 자영농 가운데도
유력한 인물, 즉 자연촌의 유력 인물 정도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기준으로 살펴보면 지산동 44호분과 45호분에 순장된 인물은 지방고총주에 버
금가는 지위를 가졌거나 그보다 약간 하위의 인물부터 일반민과 유사한 지위를 가진 인
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대가야의 귀족으로 보이는 2등급과 3등급 순장묘
의 순장자는 금동이식을 착용한 경우만 발견되고 있어 일반민과 자연촌 유력자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된다. 결국 주피장자의 지위에 따라 순장자의 지위도 연동되
고 있으며 특히 왕묘급의 순장자에는 귀족층과도 비견되는 인물도 있었다는 것이 된다.
특히 주곽과 부곽에 순장된 인물의 지위가 그러하다.
이렇게 다양한 지위를 가진 순장자들의 구체적인 직능은 무엇일까를 고려하면 앞에서
언급한 선행연구를 참조할 수 있다. 즉 호위무사, 재산관리자, 시종 등의 근신자가 성립
된다. 이에 대해 착장유물을 가지고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주곽 두부의 순장자가 대도를 소지하고 있는 현상이 발견된다. 지산동 45호분, 33
호분, 35호분 두부에서 대도가 출토되었는데, 특히 45호분의 경우 두부의 순장자가 소지
한 물품일 가능성이 크다. 이 45호분 두부 순장자는 금제수하부이식과 곡옥부경식을 착
용하고 있는 고위의 인물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이 45호분 주피장자 두위의 순장자는 무
사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하다면 이 무사는 주피장자에 가장 근접하여 호위하
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주피장자가 여성인 33·35·45호분에서 이러한 현상임을 감
안하면 순장묘주의 성별에 따라 순장자 성격이 달랐을 가능성이 크다. 즉 남성의 경우는
44호분의 무기를 소지한 호위무사로 본 11호 석곽의 순장자와 같이 별곽에 매장되었으나
여성은 두위에 호위무사를 순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남성으로 추정되는 순장묘
의 묘주 두위에서는 무기가 별로 발견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시중을 들던 비첩 등이 거기
에 순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표 3> 순장묘 외 착장유물 출토 고령지역 고분


크기(단위 m)

고분 묘제 착장유물 기타

길이 너비 높이 면적
2호 할석석곽 단곽식 양단부장 3.60 0.85 0.90 3.1 금제이식,곡옥부경식  
3호 할석석곽 단곽식 양단부장 3.40 0.75 0.50 2.6 금제이식,봉황문대도  
왕릉전시관
38호 할판석곽 부장칸 족단부장 2.35 0.40 0.60 0.9 금제이식,대도  
1 지구
40호 할석석곽 단곽식 양단부장 4.05 0.80 0.90 3.2 금제수하부이식,곡옥부경식,은제천  
53호 할석석곽 단곽식 양단부장 3.30 0.70 1.15 2.3 금제이식  

156 야외고고학 제19호


57호 할석석곽 유목곽 양단부장 4.20 0.80 1.12 3.4 유리경식 목관장
66호 할석석곽 단곽식 양단부장 4.00 0.80 0.60 3.2 금제이식  
왕릉전시관
107호 할석석곽 단곽식 양단부장 3.60 0.70 0.58 2.5 금동태환,금제이식,곡옥부경식  
1 지구
136호 할석석곽 단곽식 양단부장 3.55 0.80 0.60 2.8 금제이식  
145호 할판석곽 단곽식 두단부장 1.88 0.50 0.85 0.9 관옥  
1-2호 판석석곽 단곽식   0.70 0.40 0.25 0.2 유리경식  
7호 할석석곽 단곽식 양단부장 4.00 0.75 0.88 3.0 금제이식 목관장
16호 할판석곽 부장칸 두단부장 2.90 0.50 0.50 1.5 금제이식,대도  
25호 할판석곽 단곽식 양단부장 2.50 0.55 0.70 1.4 금동이식 목관장 
왕릉전시관 33호 판석석곽 단곽식 양단부장 3.15 0.60 0.95 1.9 삼엽환두대도, 금제이식
2 지구 70호 할석석곽 단곽식 양단부장 3.55 0.75 0.62 2.7 금제이식,곡옥부경식  
91호 판석석곽 단곽식 족단부장 1.22 0.25 0.33 0.3 유리경식  
96호 할판석곽 단곽식   2.60 0.45 0.60 1.2 금제이식,유리경식  
113호 할판석곽 단곽식 족단부장 2.45 0.45 0.53 1.1 금제이식  
120호 할석석곽 단곽식   3.50 0.75 0.25 2.6 금제이식  
10호 할판석곽 부장칸 두단부장 3.70 0.80 0.65 3.0 금동이식,환두대도  
역사관 43호 할석석곽 단곽식 양단부장 3.95 0.80 0.80 3.2 금동이식  
55호 할판석곽 부장칸 양단부장 2.90 0.55 0.60 1.6 금동이식  
32NE-1 할석석곽 단곽식 두단부장 3.32 0.70 0.90 2.3 금제이식,봉황문환두대도  
32NW-1 판석석곽 단곽식 양단부장 1.75 0.51 0.55 0.9 환두대도  
32NW-2 판석석곽 단곽식 양단부장 1.30 0.40 0.45 0.5 금동수하부이식 소아
32SW-6 판석석곽 단곽식 두단부장 1.57 0.44 0.45 0.7 유리경식  
35NW-2 판석석곽 단곽식   0.87 0.36 0.43 0.3 유리경식  
이중석곽
연결석곽 할석석곽 양단부장 2.60 0.65 0.70 1.7 금제이식,유리경식,대도 소아
부장칸
 관동 9기의 무봉분 석곽 중 1기에서만 유리구슬 출토. 지산동 영남대발굴분(영남대박물관 2004)의 12기 대가야 고분에서는 대도의

착장 예는 3기이나 이식은 6호 출토 금제이식이 유일하다.

이에 비해 주곽의 족측부장처 순장자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대가야 고총


의 족측부장처에서 출토되는 유물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마구류와 금동관, 모형철기 등
이다(김용성 2011: 476). 지산동 고분에서 금동관의 경우 출토위치는 45호분 족측부장처,
30호분 우측 순장곽, 32호분 족측부장처이고, 관식의 경우 73호분 주곽 서순장곽(족측)에
서 출토되었다. 즉 금동관이나 관식의 경우 주피장자가 착용한 정치적 위세품이 아니고
족측부장처나 순장곽에 부장되어 있다. 이는 그것이 피장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유물이
라기보다는 의례용구의 가능성이 더 큼을 알려준다. 모형철기 역시 의례용구로 볼 수 있
다. 그리고 마구의 경우, 특히 장식마구도 장례행렬을 감안하면 의례와 관련된 유물(김용
성 2009b: 335)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게 된다. 따라서 족측부장처에 매장된 순장자 중에
의례를 집행하거나 의례용 물품을 관리하는 인물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다만 남
성으로 추정되는 순장묘주의 발치에서는 중장무기가 많이 발견되는데, 이는 이들 무기를
관리하는 인물인 무사가 거기에 매장되었을 가능성을 크게 한다.
고대국가에서 “國之大事 在祀與戎”(『춘추좌전』 성공 13년조)이라는 일반적 원칙을 생각
할 때 주피장자의 주위 인물에 바로 무사와 의례와 관련된 인물이 들어감을 이해할 수 있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순장 157
다. 의례와 관련된 지산동 45호분 족측부장처의 순장자 2인 가운데 1인은 금제수하부이
식과 유리경식을 착용하였으나 나머지 1인은 은제이식을 착용하고 있어 차등성이 있다.
이는 서로 신분이 달랐다는 것을 의미할 터인데, 주관자와 보조자, 즉 사수와 조수로 볼
여지가 있게 된다. 또 금동관을 고려하면 종묘제사에서의 尸童과 같은 성격의 인물도 상
정해 볼 수 있다.
경산 임당유적의 경우 주곽의 순장자는 여성이거나 미성년자가 많다. 이는 그들을 시
녀나 侍童 등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부곽의 순장자는 청장년의 남성이 많다. 그리
고 그 가운데는 무기를 소지하거나 농공구를 소지한 인물이 눈에 띤다. 이러한 사실에서
부곽의 순장자는 재산관리인일 가능성을 높여준다. 따라서 지산동과 신라의 경우를 대비
하면 부곽의 순장자는 같은 재산관리자인 창고지기로 볼 수 있으나 주곽의 순장자는 그
성격이 아주 다름을 엿볼 수 있다.
지산동 순장곽 순장자에도 시비나 비첩이 존재했지 않을까 상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없다. 신라권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는 지산동의 순장곽
순장자는 앞에서와 같이 위계의 폭이 넓고, 가족 단위도 존재한 특징이 있다. 그리고 44
호분에서는 여성만 군집을 이루는 현상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대가야의 순
장곽 순장자 가운데는 비첩의 존재를 쉽게 인정할 수 없다. 시비나 비첩이라고 하더라도
당시에는 상당한 신분일 터인데, 44호분 순장곽에는 10대 후반의 여성은 보이지 않고, 20
대나 30대 여성으로는 5인이 확인되나 군집을 이루어 가족 단위의 성원일 가능성이 큰 것
이 대부분이고, 32호 석곽의 금제수하부이식을 착용한 20대 여성만 눈에 띨 뿐이다. 이
순장자가 시녀나 비첩일 가능성은 있다(이영식 2012: 210-216). 그러하더라도 남성이 묘
주인 대가야의 순장곽에 시비나 비첩 순장은 흔하지 않은 현상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묘
주가 여성인 경우는 달랐을 가능성도 있다.
결국 대가야 순장묘의 순장자는 주곽의 경우 호위무사와 의례관련자, 비첩, 부곽의 경
우 재산관리자가 되고, 순장곽에는 다양한 계층의 인물이 순장되었고, 그 직능도 다양했
음을 알 수 있다. 순장곽에도 시비나 비첩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말을 다루는 시
종, 무사 등도 확인된다. 이외 주피장자의 생활을 각 방면에서 봉사하는 인물이 상정될
수 있다.

Ⅴ. 맺음말 - 순장과 사후세계

대가야 고총의 대표적이며 왕묘급인 지산동 44호에 2기의 부곽이 설치되었고, 그 주부

158 야외고고학 제19호


곽을 둘러싸고 32기의 소형 석곽이 배열된 것은 후장이라는 당시의 장제에 기인한 것으
로 볼 수 있다. 고분에 별도의 부곽을 축조하고 거기에 실생활에 사용되었던 많은 유물을
부장한 것은 신라와 대가야의 사후관과 관련된 것으로 계세사상에 의한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계세사상은 죽은 후의 세계에서 삶이 현재의 삶을 이어간다는 의미로 볼 수 있
다. 즉 현생에서의 지위나 권력이 유지되며 사후세계의 생활이 현생의 일상생활과 다르
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따라서 사후의 세계가 현세의 세계와 같은 것으로 인식되며
죽은 후의 세계에서 삶을 위하여 많은 생활유물을 저승으로 가져 간 것이 후장으로 나타
나는 것이다. 이러한 후장의 가장 적극적인 표현이 대가야의 순장이라고 할 수 있다.
순장은 종교적 행위의 하나로 시작된 희생의 한 범주로 인신희생, 즉 人牲과 밀접한 관
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순장은 인간을 제의의 제물로 인식하여 희생하는 인생과
는 달리 주인을 위해 함께 죽이는 것으로 人殉이라고도 한다. 인생이란 원시종교의 사상
에서 기원한 것으로 祖靈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개념으로 시행되는데 비하여 인순은 주인
이 사후에도 인력을 사용하기 위해 데려간다는 개념에서 시행되어 다른 것이다(김용성
역 2011: 10-19).
대가야의 순장묘에 순장된 사람은 호위무사, 의례관련자, 재산관리자, 시종, 비첩 등
을 포함하여 주피장자 가까이에서 주인의 생활 각 방면에서 봉사하는 성격의 근신자들
이고, 가족 단위가 인정되는 것도 특징이다. 이것은 바로 순장의 근본 목적인 사후세계
에서 사용하기 위해 데려갔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적해 준다. 순장자가 대부분 노동력
이 있는 젊은이 위주였음은 바로 주인을 위해 봉사하는 대상으로서 순장자가 정해졌음
을 의미한다.
신라의 경우도 근신자인 시동과 시녀, 호위무사나 재산관리자 등의 순장이 시행된 것
이 관찰된다. 그러나 가족이 단위가 되고 각종의 직능을 가진 봉사자 모두가 대상이 되지
는 않았다. 이러한 것이 명확하게 보이는 것은 대가야의 순장뿐이다.
중국의 신석기시대 부녀와 영아의 순장, 단지 육욕을 충족시키는 대상인 여성이 위주
가 된 전국시대 일부와 진한 이후 비첩순장이나 명청시기 궁비순장과는 그 범위가 다르
다. 유사한 것으로는 중국 은상시기 이후 전국시대에 걸쳐 시행된 근친, 신하와 집안의
하인 순장, 말과 마부의 수레구덩이 순장 등이 있다(김용성 역 2011). 특히 춘추시기 秦
의 穆公(기원전 660-621)에게는 고위의 신하인 三良을 비롯한 177인이 순장되었다는 기
록(『사기·진본기』 진목공 39년조)이 있어 순장이 무력적인 지배자와 관련됨을 알려준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신분차가 있는 166인의 순장이 시행된 秦 景公(기원전 577-537)의 묘
로 추정되는 秦都 雍城의 秦公墓이다(김용성 역 2011: 307-308).
여기에서 대가야 순장의 성격이 국가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 나타나는 현상이었음과 대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순장 159
가야 지배세력이 무력에 기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가야 순장묘에 특히 많은 중장무기
가 출현하고 묘주의 성별에 따라 순장자의 수가 차별화되었음은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이 점에서 대가야 순장의 큰 특징을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
도 사후관인 계세사상에 충실하게 대가야 지산동의 순장묘가 축조된 것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철저하게 주피장자를 중앙의 아래에, 순장자를 그를 둘러싼 주위에 배치하여 旋
環左右하여 以衛死者하는 모습도 바로 그러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고분이 축
조된 곳이 항시 자기가 살던 곳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는 점도 그러한 의미일 것이다.

▶논문접수일(2013.12.16) ▶심사완료일(2014.2.5) ▶게재확정일(2014.2.27)

※ 이글은 2013년 10월 10일 고령군 대가야박물관에서 경상북도에서 개최하고,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
원에서 주관한 『대가야 고분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국제학술대회』에서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순
장과 사후세계」라는 주제의 발표문을 수정 보완하여 작성한 것임을 여기서 밝힌다.

160 야외고고학 제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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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야외고고학 제19호


Burial of the Living with the Dead in the
Goryeong Jisandong Tumuli
Kim Young-sung
(Hanbit Institute of Cultural Properties)

The burial of the living with the dead of Daegaya were buried in the main stone
outer coffin, the subordinate outer coffin, and Sacrificial burial. Sacrificial burial and
human sacrifices raised a question, but through the comparison between this sacrificial
burial and the ordinary Daegaya stone outer coffin, it is small and splendor artifacts were
excavated from it, burial style is not wooden outer coffin or wooden coffin. So this tomb
can be recognized by Sacrificial burial. Human sacrifice rates are higher young adults and
middle-aged people than child and old age men. It is mean that young adults and middle-
aged people were killed by force, they can see human sacrifices. Just, several Sacrificial
burial can see subordinate tomb, separate funeral ceremony and was built with the mound.
Jisandong Tumulus as this standard, No. 73 and 75 had ten human sacrifices,
No. 44 had over 36 human sacrifices, No. 45 had over 15 human sacrifices, No. 30 had 5
human sacrifices, No. 74 had over 4 human sacrifices, No. 32 and No. 34 had each 2 human
sacrifices, No. 33 and 35 had each 1 human sacrifice. The number of human sacrifice can
multiple of five and ten in case of over five, but in case of below five, human sacrifice can
each of number.
Sacrificial burial of Jisandong have observed tomb between the beginning of the
Fifth Century and the beginning of the Sixth Century, A.D. But it will make an early start
and will be sustainable until the wrack of Daegaya. Over time, the number of human
sacrifices have increased and is characterized by the scope of Sacrificial burial’s extension.
It have relevance to Daegaya’s a progress of development at nation.
Jisandong Tumulus have distinct features that is the most number of human
sacrifices among the Korean Peninsula, buried human sacrifices at a separate outer coffin,
the major person of sacrificial burial, he is placed in edge of center, were escorted burial
human sacrifices. the major person of sacrificial burial is king and queen, noble of Daegaya.
Human sacrifices is guard warrior, shaman, attendant etc. they have a good social position.
Particularly, sacrificial burial of the king is such the man as powerful man of region.
Everybody is not buried alive, but is buried after get the chop.
Sacrificial burial of Daegaya was reflective of Daegaya’s afterlife, is verified position
of tomb and a great store of excavated relics, etc. Sacrificial burial of Daegaya shows
sacrifices burial’s fundamental purpose well, the human sacrifices serves to master in death
as in life. Especially, force nature of establishment appeared on the Sacrificial burial of
Daegaya.

Key words : Jisandong Tumuli, Daegaya, Sacrificial burial, human sacrifices, afterlife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순장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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