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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탕부 하나님』, 윤종석 역 (서울: 두란노서원, 2017)

∎. 목차
∎. 들어가는 말: 아들들을 위해 사랑을 탕진하시는 하나님
∎.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

I. 나는 왜 예수 앞에 나오는가
–오늘도 두 부류가 예수님 주위를 맴돈다.

II. 우리도 ‘잃어버린 두 아들’처럼 질주한다.


-나는 맏아들인가, 둘째 아들인가

III. 스스로 하나님 노릇한다면, 충성했어도 죄다.


-‘죄’는 단순히 규범을 어기는 것 그 이상이다. ( ‘죄’에 대한 더 깊은 은혜 )

IV. 두려움에 기초한 맹종, 불순종만큼 위험하다.


-맏아들도 둘째 못지않게 ‘잃어버린 존재’다. ( ‘잃어버림’에 대한 더 깊은 은혜 )

V. ‘진정한 형’이 날 찾으러 오셨다.


-형이 찾아야 하고, 형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 ( ‘대속’에 대한 더 깊은 은혜 )

VI. 이 세상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귀향의 여정이다.


-그날에 우리는 아버지 집, 영원한 잔치에 참여할 것이다. ( ‘희망’에 대한 더 깊은 은혜 )

VII. 아버지 잔치는 이미 시작됐다, 들어가 누리라.


-예수 복음은 지금, 여기서의 삶부터 바꾼다. ( ‘구원’에 대한 더 깊은 은혜 )

/ / / / / / / / / /

prodigal
1.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베푸는
2. 남김없이 다 써버리는

『The Prodigal God』


- 탕부 하나님 -

∎. 들어가는 말: 아들들을 위해 사랑을 탕진하시는 하나님


이 책의 취지는 복음의 본질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책은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동생)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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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탕부 하나님』, 윤종석 역 (서울: 두란노서원, 2017)
류의 사람들과 ‘맏아들’(형) 부류의 사람들 양쪽 모두를 위한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한 아들만을 이야기의 유일한 초점으로 삼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 내러티브는 동생 못지않
게 형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두 아들 못지않게 아버지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탕자로 번역되는 문구의 형용사 Merriam-Webster’s Collegiate Dictionary(메리엄 웹스터 대학생용 사전)에
따르면 ‘prodi-gal’은 무모할 정도로 헤프고, 하나도 남김없이 다 써버린다는 의미다.
이 단어는 둘째 아들만이 아니라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하나님은 앞뒤 재지 않고 아낌없이 다 내주시는 분이다. 그분은 자녀인 우리에게 그야말로 탕부이시다. 이런 하
나님의 무모한 은혜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자 삶을 변화시키는 경험이다. 이 책의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1장-5장은 비유의 기본의미를 살필 것이다. 6장에서는 이 비유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밝힐 것이다. 7장에서는 이 가르침이 어떻게 세상에서 우리의 생활방식으로 구현되는지 알아볼
것이다.

∎.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
•본문의 정황
1. A.D. 1c 당시 ‘죄인’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간다.
2. 바리새인들의 수군거림: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3.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탕자의 비유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이야기
1. 두 아들이 있는 아버지가 있다.
2. 버릇없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자기 몫의 유산을 먼저 달라는 막말을 한다.
3. 아버지는 혼내기는커녕 둘째 아들의 말대로 유산을 나누어준다.
4. 유산을 받은 둘째 아들은 외국으로 나가 방탕하게 살다 결국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처럼 지내게 된다.
5. 둘째 아들은 거지가 되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한다.
6. 둘째 아들은 자신을 아들이 아니라 품꾼중 하나로 삼아달라고 간청할 작정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
7. 집에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는데도 항상 먼 거리를 나와 둘째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가 달려와 안아준다.
8.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종으로 삼아주실 것을 간청한다.
9.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쓴 것에 대해 정죄하지 않고 그저 기뻐한다. 바보 같은 아버지는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온 것이 너무 기쁠 뿐이다.
10. 아버지는 거지가 되어 반지를 잃어버린 둘째 아들에게 다시 반지를 끼워주며 신분을 복원시켜주고 큰 잔치
를 연다.
11. 맏아들이 밭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큰 잔치가 열린 것을 알게 된다.
12. 맏아들은 잔치가 열린 이유가 동생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13. 맏아들은 아버지께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집안일을 할 때에는 염소 한 마리를 잡아주신 적이 없었는데 잘한
것 하나 없는 동생을 위해서는 이렇게 큰 잔치를 열어주시냐고 항의한다.
14. 아버지의 대답.
-“아들아, 너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네 것이 아니냐?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하지 않겠느냐?” (쉬운성경)

I. 나는 왜 예수 앞에 나오는가 –오늘도 두 부류가 예수님 주


위를 맴돈다.
1. 이야기의 타깃은 따로 있다.
•사람들은 대체로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에게만 집중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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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탕부 하나님』, 윤종석 역 (서울: 두란노서원, 2017)
•형에게도 똑같이 집중되어야 한다.
•이 이야기에서 두 형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서로 다른 길을 대변한다.
•누가복음 저자가 제시한 역사적 배경
-1. 세리와 죄인들이라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간다.
-> 정결의식과 규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 둘째 아들 상징
-2.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 맏아들 상징
-이 두 부류는 서로 상반되게 예수님께 반응한다.
-저자 누가는 둘째 아들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항상 예수님께 나아왔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반면 맏아들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이를 보고 분개한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고대 근동에서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상대를 수용한다는 의미
•탕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이 염두에 두고 의도하신 부류는 누구인가?
-두 번째 부류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애초에 이야기가 시작된 발단은 그들의 태도에 대한 반응이었다.
•이 이야기가 의도하는 대상은 제멋대로 사는 죄인들이 아니다
-매사에 성경의 규정대로 행하는 종교적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예수님이 이야기로 타이르시는 대상은 부도덕한 외부인이 아닌, 도덕적인 내부인이다.
-스스로 의로운 줄 착각하고 그로 인해 주변 사람도 망하게 하고 자신도 망한다.
-예수님이 의도하신 것은 죄와 구원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개념을 허무시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동생의 해로운 자기중심성과 형의 도덕주의적 삶 모두를 조명한다.

2. 종교가 되어버린 교회
•예수님은 종교적 도덕주의를 치명적인 영혼의 병으로 꼽으신다.
•종교가 너무나 당연했던 A.D. 1c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로 여겨졌다.
-신전도 없고, 제사장도 없으며, 제사도 없었기 때문
-기독교는 타 종교와 동류로 분류될 수 없었다. -> 당시 기독교는 제 3의 무언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진리가 아닌, 종교에 충실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반면에, 종교나 도덕과 거리가 먼 사람들은 예수님께 매료되고 마음이 끌렸다.
-소외된 사람들은 매번 예수님과 가까운 사이가 되지만, 형 부류의 사람은 그렇지 못했다.
•오늘날의 교회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님과 같은 효과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가 끌어들이는 사람들은 보수적이고 반듯하며 도덕적인 사람들이다.
-인습을 벗어난 난잡한 사람들이나 소외되고 망가진 사람들은 교회를 피한다.
-우리의 설교/행동의 영향이 예수님과 다르다면 우리의 메시지는 예수님의 메시지와 다른 것이다.
-우리가 동생들의 마음에 가닿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교회가 생각보다 더 형들의 세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II. 우리도 ‘잃어버린 두 아들’처럼 질주한다. -나는 맏아들


인가, 둘째 아들인가
1. 타산하지 않는 사랑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는 2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1막: 잃어버린 둘째 아들
-2막: 잃어버린 맏아들
•유산을 먼저 나누어 달라는 둘째 아들의 무엄한 요청 눅 15:12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다는 것과 같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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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탕부 하나님』, 윤종석 역 (서울: 두란노서원, 2017)
-고도의 가부장 사회였던 중동의 아버지가 순순히 ‘살림’을 나눠준다.
-‘살림’의 본래 의미: ‘생명’
-당시 땅은 사람들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매개였다.
-아버지는 자신의 자아와 지역사회 내에서의 지위를 포기하고 아들에게 땅의 분깃을 내준다.
-> 유산을 미리 달라는 둘째 아들의 요구는 아버지의 목숨을 찢어달라는 것과 같은 의미다.
-하지만, 아버지는 거부당한 사랑의 고통과 명예훼손까지 견딘다.
-아버지는 거부당한 사랑을 거두고 복수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사랑하며 고통을 감내한다.

2. 뼈저린 참회로 얻어낼 수 없는 은혜


•1막 2장
-거지가 된 아들은 아버지에게 돌아가 품꾼 중 하나로 삼아달라고 요청하려 한다.
-성경주석가들의 해석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지역사회의 규범을 어긴 사람은 사죄만이 아니라 배상까지 해야 한다.
-둘째 아들은 품꾼으로 들어가 품삯으로 빚을 갚으려 했을 것이다.
•1막 3장
-둘째 아들이 오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달려가 안아주고 입맞춘다. 아들의 옷을 갈아입히고 축하연을 연다.
-원래 중동에서 기품있는 가장은 절대 달리지 않으며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지역사회의 기둥이자 대농장
소유주)
-옷을 갈아입힘으로 신분회복
-당시에 고기는 대단히 비싼 진미였다.
-살진 송아지를 잡아 연 축하연은 필시 온 마을이 초대되었을 것이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든 상관없다.
-고의로 사람을 괴롭히거나 심지어 살해했어도 상관없고 자신을 지독히 학대했어도 상관없다.
-아버지의 은혜와 맞먹는 죄는 없다.
•1막은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예시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끌어안은 시점은 아들이 개과천선을 입증하기 전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돼지우리에서 연습했던 말을 말하기 전부터 안아버린다.

3. 맏아들도 잃어버리다.
•2막
-아버지가 돌아온 동생의 신분을 회복시켜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노하는 맏아들
-맏아들은 아버지가 베푼 공적인 큰 잔치에 입장하지 않는다. 눅 15:28
-아버지가 연회장에서 나와 아들을 설득한다. 눅 15:28
-대연회의 주최자가 자리를 비우고 아들에게 직접 찾아가 대화하는 것은 체신이 깎이는 일
-맏아들이 격노한 이유: 동생을 다시 상속자로 들였기 때문에 자신의 지분이 그만큼 줄어듦
-맏아들은 자신의 일을 꾸준히 하면서 몫을 지켰는데 뺏기게 생겼다.
-헬라어 원문상 맏아들은 아버지께 “보소서!”라고 한다.
-당시 문화상 윗사람을 대할 때에는 극진한 예를 갖추어야 했다.
-맏아들은 “존경하는 아버지여”라고 하지 않는다. “이거 보세요!”와 같은 발칙한 행동을 한다.
-아버지의 반응
-당시 문화상 아버지는 부자의 연을 끊을 수 있는 충분한 요건이 주어졌다.
-그러나, 예상을 뛰어넘는 인자한 호소가 심금을 울리게 한다. 아버지의 말은 “아들아”라는 말로 시작된다.
•당시 비유를 듣던 청중들의 반응
-아버지의 호소에 따라 형제는 화해하고 가정은 다시 사랑으로 연하하게 될 것인가?
-그러나, 뒷 이야기인 맏아들의 반응이 나오지 않고 이야기는 끝난다.
•예수님이 이야기를 마무리 짓지 않고 결과가 나올 찰나에 끊어버리신 이유
-예수님이 염두에 둔 청중은 바리새인들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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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탕부 하나님』, 윤종석 역 (서울: 두란노서원, 2017)
-형제들, 곧 바리새인들의 대답과 반응을 촉구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재정의 하신다.
-죄, 잃어버린 바 된 상태, 구원의 바른 의미

III. 스스로 하나님 노릇한다면, 충성했어도 죄다. -‘죄’는


단순히 규범을 어기는 것 그 이상이다. (‘죄’에 대한 더 깊은 은혜)

1. 행복을 찾는 막다른 두 길
•예수님의 비유는 사람들이 행복과 만족을 찾으려는 2가지 길을 보여준다.
•각자의 길은 각각의 세계관과 의미와 가치를 찾는 인생관, 세상의 악을 해결하는 방법, 선악을 구분하는 기준
이다.
-1. 형의 길: 도덕적 순응의 길
-제멋대로 구는 부도덕한 사람들이 세상의 문제라고 주장
-2 동생의 길: 자아발견의 길
-진리가 자신들에게만 있다고 하는 독선적이고 완고한 사람들이 세상의 문제라고 주장
-3. 왔다갔다 하는 사람
-겉으로는 형의 모습을 보이나, 실상은 동생의 삶을 배출구로 삼아 비밀스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비유에 담긴 예수님의 메시지: 둘 다 틀렸다.
-예수님은 전혀 다른 대안을 제시한다.

2. 방법은 다르나, 마음은 같았다.


•형과 동생 모두 똑같다.
-형과 동생 모두 아버지와 떨어져 있다.
-형과 동생 모두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 사랑으로 불러들여야 한다.
-잃어버린 아들은 하나가 아닌 둘이다.
•형이 잔치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
-형이 아버지의 사랑을 잃고 있음은 착함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착함 때문이다.
-잔치에 동참하지 못하게 막은 것은 악이 아니라 ‘의’다.
•두 형제의 마음은 똑같았다.
-둘째 아들이 원했던 것: 가산의 지분에 대해 아버지의 감독을 받는 것이 싫었다. 간섭하는 아버지에 대한 반

-맏아들이 원했던 것: 동생 못지않게 아버지에게 반감이 있었고 재물을 원했다.
-이 둘은 단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방식만 달랐을 뿐이다.
•충격적 메시지
-율법에 힘써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반항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3. 죄, 하나님 자리에 내가 올라서는 것


•형은 스스로가 구주 역할을 한다.
-예수님을 피하려면 도덕법을 지키면 된다.
-그러면 당신에게 ‘권리’가 생긴다.
-용서해줄 구주는 필요없다. 스스로가 구주이기 때문.
•죄에 대한 예수님의 재정의
-대부분의 사람은 죄를 일련의 규범을 어기는 것으로 정의한다.
-예수님은 규범을 어기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는 것을 죄라고 한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판단하고 대상에게 의무를 이행받아야 할 권리를 판정한다.
-형은 선행으로 하나님께 빚을 지워 그분을 통제하려 했다. 형은 스스로 구주로 행세했다.
•스스로 구주가 되는 2가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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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탕부 하나님』, 윤종석 역 (서울: 두란노서원, 2017)
-1. 모든 도덕법을 어기고 자기 기준대로 제멋대로 사는 것
-2. 모든 도덕법을 지키고 극도로 착해지는 것
•형이 아버지께 그토록 노한 이유
-유산의 지분이 줄어들자 본색이 드러난다.
-형은 단지 목표물을 얻기 위해 아버지를 이용할 뿐이었다.
-당신도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통제하려 한다면 당신 역시 하나님을 이용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다 하지만, 사실 희생은 없다.
-다 자신을 위한 일이기 때문.

4. 둘 다 틀렸으나, 둘 다 사랑받다.
•두 아들 모두 틀렸으나,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 잔치에 불러들인다.
-이는 복음이 세상의 것과 전혀 다른 제 3의 무엇임을 말한다.
-각각 형과 동생의 색깔을 지닌 사람들은 세상을 둘로 나눈다.
-형의 부류: “착한 사람들이 실세고, 문제는 나쁜 사람들이다.”
-동생의 부류: “넓은 마음으로 관용하는 사람들이 실세고, 문제는 옹졸한 고집불통들이다.
-예수님: “겸손한 사람들이 실세고 교만한 이들이 문제다.”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에게로 간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은혜가 필요함을 아는 것이 선결조건이기 때문.
•이야기의 다른 결말
-두 아들 모두 사랑받았으나 결말은 다르다.
-동생은 잔치에 참여했으나 형에게는 선택권만 주어진 채로 끝난다.
•예수님이 다른 결말로 이야기를 끝내신 이유
-둘 다 틀렸지만, 똑같이 위험한 것은 아니다.
-형의 경우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종교적인 사람들의 반응
-하나님과 관계가 바르지 못하다는 소리를 들을 경우 그들은 노발대발 한다.
-“나한테 감히, 교회 문이 열릴 때마다 항상 교회에 있는데!”

IV. 두려움에 기초한 맹종, 불순종만큼 위험하다. -맏아들


도 둘째 못지않게 ‘잃어버린 존재’다. (‘잃어버림’에 대한 더 깊은 은혜)

1. 스스로 만들어낸 감옥에서 살다.


•예수님은 죄와 구원을 ‘잃음’과 ‘찾음’의 은유로 말씀하신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3가지 비유
-1. 잃어버린 양 비유
-2. 잃어버린 동전 비유
-3. 방식만 다를 뿐 잃어버린 두 아들
->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구조작전으로 요약하신다.
-> 그분이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 이다. 눅 19:10
•영적으로 잃어버려진 상태
-1. 동생의 잃어버려진 상태
-삶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
-2. 형의 잃어버려진 상태
-스스로 만들어낸 감옥: 깊은 분노
-1. 그들은 결과 지향적인 계산적인 방식으로 환경을 통제하려 한다.
-그들의 도덕은 결과 지향적이다. 즐거워서 지키는 것이 아니다.
-인과응보: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주어져야 하고, 선행에는 상이 따라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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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탕부 하나님』, 윤종석 역 (서울: 두란노서원, 2017)
-삶이 꼬이고 역경이 닥쳤을 때의 반응
-1. 도덕기준대로 잘 살았을 때는 하나님께 격분한다.
-2. 도덕기준대로 잘 살았다는 자신이 없을 때는 자신을 혐오하고 자학한다.
-형의 부류에 있는 사람들은 역경이 닥쳤을 때 자신의 삶에 자신이 없다면 하나님을 미워하거나,
자신을 미워하는 양극단을 비참하게 왔다 갔다 한다.
-늘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보다 덜 받았다고 느끼며 남들의 삶이 잘 풀리는 것을 보며 불평한다.
-“저 사람은 잘되는데 난 왜 이런가? 더 열심히 했는데!”
-자신의 행위로 삶을 통제하려 하기 때문
-삶이란 결코 우리의 바람대로 풀리지 않는다.
-2. 형은 우월감에 찌들어 있다.
-경쟁적 비교야말로 형들이 자신을 확인하는 주된 방식이다.
-우월감은 특히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자신의 종교를 내세울 때 강해진다.
-은총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품는다.
-하나님의 적들에게 대항한다는 그들의 주장 이면에는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자세가 숨어있다.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우월감은 상대를 용서하기 어렵게 만든다.
-상대보다 우월감을 품은 상태에서는 용서하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을 향한 형들의 반감은 고도의 수양과 도덕적 행동 밑에 숨어있다.
-> 때문에 누구를 향해서든 우월감을 느낀다.
-자신의 기준에 비도덕적이거나 기도하지 않는 상대를 깔본다.
-알코올 중독자의 전형적인 예
-중독자의 아내는 많은 고생으로 자기연민과 독선적인 태도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내의 독선적 태도가 남편의 알코올 중독을 가중시킨다.
-아내가 남편의 죄의 전력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기 때문에 남편의 자기혐오가 더 깊어진다.
-자기혐오가 깊어진 남편은 술을 마신다.
-남편이 중독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이상 아내도 계속 고생하게 되고 악순환이 반복된다.
-어쩌면, 형에게는 자신의 자아상을 떠받치기 위한 비난의 대상으로 동생이 필요했는지도 모른
다.
-어쩌면, 동생에게는 잘난 척 하는 형 때문에 개과천선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어쨋든, 자신의 본심을 통찰하지 못한 형은 동생을 용서하지 못하고 스스로 만들어 낸 감옥
(깊은 분노)에 갇혀 산다.

2. 두려움과 이기심이 동기가 될 때


•형의 태도를 품은 사람들의 징후 1: 기쁨없이 두려움에 기초한 맹종
-형들의 윤리와 도덕은 기쁨과 사랑 때문이 아닌 두려움 때문
-형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만으로는 보상이 되지 않는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 눅 15:29
-그들이 도덕적인 이유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정직하려 하는 이유: 장기적으로 이익이 되기 때문
-만약, 정직했을 때 손해를 보게 된다면? 형들의 논리에는 맞지 않는다.
-두려움에서 비롯된 그들의 정직은 악의 근본 원인인 이기심을 근절하지 못한다.
-그들의 선행은 결국 사리를 위한 것이고 자신에게 베푼 선행이다.
-수많은 교회가 험담과 싸움에 시달리고, 외관상 반듯했던 사람이 추악한 죄에 빠지는 이유
-사심없어 보이는 행동 밑에 엄청난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
-형들에게 종교와 도덕의 의무는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다.
-행복하고 편안해 보여야 한다는 강박으로 자신을 숨막히게 한다.
-때로는 그런 사슬을 벗어던진 형들이 동생처럼 살면서 주변을 충격에 빠뜨리기도 한다.
•형의 태도를 품은 사람들의 징후 2: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다.
-눅 15:29. “내게는 ...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 7 -
팀 켈러, 『탕부 하나님』, 윤종석 역 (서울: 두란노서원, 2017)
-형이 아버지와 맺은 관계에는 춤이나 흥겨움이 없다.
-증상 1
-삶이 꼬이거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자신을 정죄한다.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으면 기분이 상하는 정도가 아닌 무너져내린다.
-하나님의 사랑을 추상적으로만 알기 때문에 인간의 인정이라도 받아야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받기 때문
-증상 2
-죄책감에서 헤어나오기 힘들어 한다.
-알고 지은 죄가 있으면 회개하고도 오래도록 양심을 괴롭힌다.
-회개가 충분히 깊었는지 자신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자학한다.
-확신이 없다는 가장 확실한 증상: 메마른 기도생활
-기도에 열심은 내나 친밀함이 없다.
-연인과 같은 사랑의 관계는 아름답다는 칭찬이 오가는 인격적 대화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형들의 기도는 인격적 내용 보다는 필요를 구하는 간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들의 주된 기도목적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아닌, 환경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3. 어디서 답을 찾을 것인가
•중요한 사실
-형의 상태는 동생의 상태 못지않게 해롭다.
-이유: 동생은 아버지와 떨어져 있는 줄을 스스로 알았으나, 형은 자신의 상태를 몰랐다.
-병이 있는 줄 모르기 때문에 의사를 찾지 않고 가만히 있다 병이 커진다.
•형의 태도가 동생이 집을 나가게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버리는 이유: 주요 종교마다 형들이 득실거린다.
-비신자가 된 동생들은 종교가 세상의 불행과 갈등을 조장하는 원인중 하나라는 결론을 내린다.
-예수님의 대답: 비신자가 된 동생들의 생각이 맞다고 하신다.
-종교에 등을 돌린 사람들은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예수님의 대답: 이 말은 틀렸다.
-기독교의 복음은 동생의 방탕한 삶 뿐만 아니라, 형의 도덕주의 또한 단죄한다.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형들의 분노와 우월감은 죄책감과 두려움에 찌든 영적 맹인을 대거 양산한다.
->형들이 그들을 ‘동생’으로 만들어 버린다.
•참된 그리스도인인 세 번째 부류 중에도 형의 모습에 가까운 사람이 많다.
-동생이었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다시 동생으로 돌아가려는 유혹과 싸운다.
-형이었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다시 형으로 돌아가려는 유혹과 싸우게 된다.
•형과 동생 두 가시 인생관 모두에 자체적으로 파멸의 씨앗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히 다르게 접근하길 원하신다.
-접근 방법은 예수님이 비유에서 일부러 빼놓으신 인물에 해답이 있다

V. ‘진정한 형’이 날 찾으러 오셨다. -형이 찾아야 하고, 형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 (‘대속’에 대한 더 깊은 은혜)

1. 의의 뿌리까지 회개하라.
•잃어버린 바 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 1. 하나님의 주도적 사랑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올 때 달려가 입을 맞추고 자백할 겨를도 주지 않는다.
-회개가 아버지의 사랑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아버지는 맏아들에게도 나가서 잔치에 들어오라고 다독인다.
-도덕적 사람들도 똑같이 잃어버린 상태로서 하나님의 주도적 은혜가 필요하다.
-바리새인에게도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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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탕부 하나님』, 윤종석 역 (서울: 두란노서원, 2017)
•당시 비유의 대상청중: 바리새인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처형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런데도, 이야기의 결말은 바리새인을 상징하는 맏아들을 타이르는 것으로만 끝난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일 적들을 사랑으로 타이르신다.
-예수님은 자칭 의인들 앞에서 그들과 똑같이 자기 의를 내세우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방법은 각기 판이하다.
-둘째를 맞는 방법과, 맏아들을 타이르는 방법은 달랐다.
•하나님이 당신을 설득하시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만약, 길잃은 상태가 느껴지고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다.
•우리의 회개는 개별적 죄의 뉘우침보다 더 깊어야 한다.
-사람들은 보통 회개가 죄의 목록을 꺼내 항목별로 사죄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회개란 그 이상이다. 맏아들의 상태는 죄의 목록으로 접근해서는 다룰 수 없다.
-바리새인은 죄를 지으면 비참한 심정으로 회개한다.
-자신을 벌하거나 비통해 하지만 그것이 끝나면 다시 형으로 돌아간다.
->참회와 뉘우침도 자력구원사업의 일환일 뿐이다.
-바리새인의 회개는 깊이가 없어 문제의 핵심에 가지 못한다.
•문제의 핵심: 선한 행실에 대한 교만
-형이 잔치에 못가도록 막은 것은 나쁜 행실이 아닌, 선한 생실에 대한 교만이다.
-형의 영적문제
-정체성을 성취와 행위에 근거하는 연유하는 지독한 정서불안
-자신이 옳다는 느낌을 끊임없이 떠받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깎아내리고 흠잡아야 한다.
•참된 회개
-잘한 일들의 동기까지 회개해야 한다.
-바리새인은 죄만 회개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의의 뿌리까지 회개한다.
-모든 죄와, 모든 의의 이면에 깔려있는 죄를 회개할 줄 알아야 한다.
-잘못된 행동이든, 바른 행동이든 하나님을 통제하여 다른 것을 얻고자 했던 동기
-죄악과 착한 행실 양쪽 모두의 배후에 스스로 구주가 되려는 갈망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사실을 알 때 비로소 복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인이 되기 직전까지 온 것이다.
-중생을 거듭남, 즉 새로운 출생이라 하는 이유는 그만큼 근본적인 전환이기 때문이다.

2. 진정한 형이 오셨다!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바리새인들의 트집에 대한 세 비유
-1. 잃어버린 양의 비유
-2.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
-3.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공통점: 1. 잃어버렸다가 되찾는다, 2. 되찾은 것으로 기뻐한다.
-차이점: 앞의 두 비유와 탕자의 비유간에 차이점이 있다.
-앞의 두 비유는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찾아 나선다.’
-탕자의 비유에는 찾아나서는 이가 아무도 없다.
•진정한 형
-찾아나서는 이는 형이어야 했다.
-형은 자기 몫을 희생해서라도 방황하는 동생을 찾고 데려왔어야 했다.
-사실, 동생은 형의 희생으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
-동생이 떠나기 전 아버지가 이미 유산을 분할했기 때문이다.
•용서의 대가
-비유의 1막은 아버지의 값없는 용서를 보여준다.
-비유의 2막은 용서에는 큰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누군가 조명을 깼을 때 가해자를 용서하려면 피해자의 돈으로 다시 조명을 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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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탕부 하나님』, 윤종석 역 (서울: 두란노서원, 2017)
-조명을 사지 않는다면 어두워서 활동할 수 없다.
-진정한 형은 어떤 대가라도 치르고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올 사람이다.
-예수님은 이런 인물을 등장시키지 않는다.
-예수님은 결격된 형을 등장시켜 진정한 형을 상상하도록 유도하신다.
•우리의 진정한 형
-다행이 우리에게는 비유와 달리 예수님이라는 진정한 형이 계시다.
•마음 깊은 곳의 역동이 두려움과 분노에서 사랑과 기쁨, 가사로 바뀌려면
-당신을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치러진 대가를 보고 가슴이 뭉클해져야 한다.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제자의 핵심적 차이는 마음 깊은 곳의 동기다.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은 자애로운 아버지가 아니라 깐깐한 상전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에 마음이 변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정도만큼 동생이나 형으로 만드는 두려움과 결핍에서 자유한다.

VI. 이 세상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귀향의 여정이


다. -그날에 우리는 아버지 집, 영원한 잔치에 참여할 것이다.
(‘희망’에 대한 더 깊은 은혜)
1. ‘본래 집’을 향한 온 인류의 향수
•‘집’에 대한 향수는 우리의 ‘영적 향수’를 증거한다.
-C.S. 루이스 ‘영광의 무게’: “우리는 자신이 우주의 무언가로부터 단절되었다고 느낀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
것과 다시 이어지고 싶은 그리움이 있다. 늘 바깥쪽에서만 보았던 어떤 문의 안쪽으로 들어가고 싶은 평생의
향수가 있다.”
-그 집은 우리의 참 자아를 발견하거나 참 자아가 될 수 있는 곳이다.
•본래 우리의 집은 하나님의 동산이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닮도록 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그 집의 ‘아버지’시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권위에 둘째 아들처럼 반감을 품었다.
-우리는 아버지의 간섭없이 살기 위해 등을 돌렸고 하나님과 멀어졌다.
-둘째 아들이 집을 잃은 것과 똑같은 이유로 우리도 집을 나왔고 잃었다.
•이 내러티브는 성경 전체에 반복되며 인류의 상태를 말해준다.
-아담과 하와가 집에서 쫓겨나 유랑했고 아벨을 죽인 가인이 유리했다. 야곱도 유랑했으며 이스라엘 백성 모
두가 포로가 되어 끌려간다.
-성경의 이야기마다 유랑이 되풀이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성경은 인류 전체가 영적 향수를 채우기 위한 귀향을 시도하는 유랑민이라고 말한다.

2. 죄로 망가진 세상, 쉽지 않은 귀향길


•성공적인 귀향이 반드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죄의 장벽이 있기 때문
•바벨론 포로기에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귀환과 귀향을 예언했다.
•그러나, 귀환한 후에도 여러 다른 강대국들에게 다시 공격받고 압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궁극적이고 완전한 귀향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
-1. 인간 내면이 망가졌기 때문
-인간의 본성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끊임없이 죄를 생산해내는 본성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
-2. 인간의 주변이 망가졌기 때문
-진정한 귀향은 인간의 본성만이 아니라 물질세계의 성질 자체에도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
-예: 이기심을 작동원리로 하여 개인의 이기심이 재화를 생산하고 그 재화들이 모여 재화의 총량을 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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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탕부 하나님』, 윤종석 역 (서울: 두란노서원, 2017)
는 국부론에 기반한 자본주의 시스템은 개인의 화평만을 강조하며 누군가 풍요를 누리면 다른 누군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구조적 병폐가 있다. 한 생명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취하는 원리는 원래
타락 이전의 창조세계에는 낯설고 이질적인 것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표범이 염소와 함께 눕고 송아지와 사
자가 함께 어울리는, 강자와 약자가 공존하며 연합하는 곳이다.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 “하나님의 나라”를 들여놓고 있다고 선포하셨다.
-생애 끈에 그분은 도성의 성문 밖에 십자가에 달리셨다.
-이는 공동체에 거부당한 유랑자의 상징이다.
-그분이 겪으신 유랑은 원래 우리가 당해야 할 몫이었다.
-아버지의 임재로부터 축출되고 영적소외라는 극한의 절망과 어둠에 내던져지였다.

3. 역사의 종말에 벌어질 대잔치


•예수님은 죽음과 부패, 무질서를 이기셨다.
-예수님은 죽으셨을 뿐 아니라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 죄의 형벌을 치르시고 죽음과 부패, 무질서를 이기셨다.
-이 세상을 진정한 집이 되지 못하게 막는 세력들을 무찌르셨다.
-어느 날 그분은 다시 오셔서 그 승리를 완전히 완성하실 것이다.
•새 예루살렘
-탕자의 비유는 잔치로 끝난다. 계시록도 잔치로 끝난다.
-이 잔치가 벌어질 곳은 새 예루살렘, 즉 이 땅을 가득 채울 하나님의 도성이다. 계 21-22장
-이 도성에는 놀랍게도 생명나무도 있다.
-이 생명나무의 잎사귀들이 만국을 치료한다. 계22:2
•다른 종교들과 달리 우리의 미래는 신묘한 비인격적 형태의 의식이 아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다시 우리의 완벽한 집으로 만드실 것이다.
•더이상 우리는 계속 유랑하며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했던 ‘에덴의 동쪽’에 살지 않을 것이다.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VII. 아버지 잔치는 이미 시작됐다, 들어가 누리라. -예수


복음은 지금, 여기서의 삶부터 바꾼다. (‘구원’에 대한 더 깊은 은혜)

1. 매일의 삶이 달라지다.
•우리는 복음을 믿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정체성을 받는다.
-예수님의 메시지에 기초해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이 달라진다.
•마지막 귀향도 잔치로 끝날 것이다.
-예수님이 남기신 구원의 은혜의 증표: 성만찬
-우리는 네 가지 방식으로 이 잔치를 경험한다.

2. 구원은 체험적이다.
•잔치는 식욕과 오감이 채워지는 자리다.
•예수님의 사역을 알리는 전조
-예수님이 처음 행하신 기적: 요한복음 2장.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에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다.
-요한은 이 기적을 ‘표적’이라 칭하며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된다는 전조를 알린다.
-> 예수님은 잔치의 참 주인이시다.
•구원은 주관적이고 체험적이다.
-예수님이 대속하심으로 우리에게 무죄평결을 확보해주신 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시 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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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탕부 하나님』, 윤종석 역 (서울: 두란노서원, 2017)
-예수님의 구원은 잔치다.
-그분의 사랑은 꿀이나 포도주 같다.
-죄책감이 있다면 하나님의 자비를 추상적 개념으로 믿기만 해서는 안 된다.
-염려와 불안이 있다면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임을 믿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 사랑을 심령으로 맛보고 느껴야 한다.
•중용
-기질상 이성적인 통제가 강한 사람들은 이런 경험을 어렵게 느낀다.
-신비체험에 목마른 사람들은 모든 직관과 감정을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같이 여긴다.
-우리는 종종 그분을 느끼려는 열의가 너무 강하거나 너무 부족하다
•분명한 것
-우리가 평생에 걸쳐 그분의 얼굴을 구하고 기도하는 동안 기복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을 그분을 누릴 수 있다. 그분이 아버지의 임재에 들어가게 해주신다.

3. 타락한 물질세계도 구속하신다.


•식사는 매우 물리적인 경험이다.
•예수님은 물질세계를 중요하게 여기셨다.
-성만찬을 남기셨고 역사의 최종 목표도 어린 양의 혼인잔치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신 후 물리적인 창조세계를 보시며 좋다고 하셨다.
•이 세상은 사람들이 천국에 가고나면 버려지고 말 곳이 아니다.
•하나님은 ‘몸’과 ‘영’ 둘 다를 구속하신다.
-동양철학과 서구의 플라톤 사상 모두 물질세계를 하등하게 본다.
-그러나, 기독교는 영과 육 모두를 총체적으로 본다.
•그러나, 마지막 날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빈민으로 위장한 예수님을 대접한 이들이 해당된다.
•구원받은 죄인이라면 그 불가피한 증거로 사회적 양심이 민감해지고 이웃을 섬기게 된다.
-동생 부류의 사람들은 너무 이기적이어서 무관심하다.
-형 부류의 사람들은 너무 독선적이어서 무관심하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회개혁 모두 주어진다.
•카를 마르크스의 말: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내세’가 현세의 불의에 대항하지 못하도록 수동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물질세계의 고난과 압제를 미워하셔서 그 속에 성육신하셨고 싸우셨다.

4. 복음의 내면화, 복음의 생활화


•식사는 몸에 영양분을 공급해 성장을 촉진한다.
-성찬식. 복음은 우이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계속 자라게 한다.
•종교의 원리: 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 (자격달성 후 자격부여)
•복음의 원리: 예수님을 통해 이미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순종한다. (자격부여 후 자격달성)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마틴 루터의 근원적 통찰: 종교가 인간 심령의 기본값이다.
-우리의 마음은 복음으로 회심한 후에도 틈만 나면 다른 원리로 돌아간다.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에서 찾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에서 찾으려 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우리는 한 차원에서는 복음을 믿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는 믿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단순히 의지력만으로는 변화될 수 없다.
•영속적 변화는 더 깊이 이해하고 마음에 베어들게 해야만 가능하다.
-변화가 일어나려면 그리스도의 구원을 깊이 이해해야 하고, 그 이해에서 비롯된 마음의 변화들이 삶으로 옮
겨져야 한다.
-복음을 믿으면 우리의 동기, 자아에 대한 이해, 정체성, 세계관 등이 뜯어고쳐진다.
-마음의 변화없이 규정만 지키는 행동은 피상적이고 일시적일 뿐이다.
•반론: 값없는 은혜와 수용만 강조하면 선을 행할 이유가 없다. 종교의 원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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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탕부 하나님』, 윤종석 역 (서울: 두란노서원, 2017)
-딥변: 종교의 원리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다.
•마태복음 13장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복음을 받고 받아들인 사람은 세 부류다.
-변화된 결실을 맺는 부류는 더 열심히 노력했거나 더 순종한 사람이 아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들이다. 마 13:23
-본회퍼: “삶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 은혜에 수반된 엄청난 희생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이다.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이다.”
-마틴 루터: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그 믿음은 믿음으로만 남아 있지 않는다.
•문제의 중심: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생활방식에 아무런 변화가 없을 때
-해결책은 힘써 믿음에 행위를 더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예수를 진정으로 이해하거나 믿지 못했다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5. 혼자서는 성장할 수 없다.


•잔치는 본질상 공동체적이다.
•그러나, 많은 구도자들이 형들이 점유하고 있는 교회를 떠나간다.
•하지만, 형들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교회를 멀리한다면 이 또한 방식만 다를 뿐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행동이
다.
•공동체에 깊이 참여하지 않고는 결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C. S. 루이스의 에세이
-“친구들 안에는 각각 누군가 다른 친구만이 온전히 이끌어내줄 수 있는 무엇이 있다.”
-“나 혼자서는 너무 작아서 한 친구의 전인을 불러내 활동하게 할 수 없다.”
-“찰스가 죽었으니 찰스의 농담에 대한 톨킨의 반응을 다시는 볼 수 없다.”
-“찰스가 떠난 후 톨킨은 ‘내 차지’가 되었지만, 내가 누리는 톨킨은 더 많아지기는커녕 줄어들었다.”
-“우리 각자에게 있는 하나님의 열매가 허다한 복된 무리로 인해 배가된다.”
-> 한 개인을 알아가는 데도 공동체가 필요하다.
-> 하물며 예수님을 알아가는 데에는 어떻겠는가?

6. 생명 길이 되어 주신 예수
•예수님은 가장 흔한 두 가지 인생의 길의 오류를 보여주신다.
-동생의 감각적인 길도, 형의 윤리적인 길도 영적으로 막다른 길이다.
-예수님은 바로 자신이 길임을 알려주신다.
•그 길로 들어가 그분의 구원에 기초해 살아갈 때 우리는 역사의 종말에 최고의 잔치에 이른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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