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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극

페스티벌_‘아버지와 살면’
스터디 1회차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 (1959)
“당신은 히로시마에서 아무 것도 보지 않았소“


-알렝 레네 감독, 마르그리트 뒤라스 작

알렝 레네 감독의 연출적 특징: 해체, 불연속적인 편집. 비선형적인 시간흐름, 플레시백 기법


사용. 등장인물의 심리를 따라가는 이야기 구성이 특징이며 기억과 역사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이다.

영화에서는 과거가 사건이나 행동의 인과적 선상에서 시간 순으로 일어난다거나 시간을


역행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그러한 전통적인 시간 구성방식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이
현재에도 존재하여 무의식중에 상처로 남아 현재의 현상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사실이
비전통적인 플래시백으로 구현된 경우이다. 그 점이 1959 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의 근대성이며,
시간적 구성의 면모임.

인상적인 장면: ‘재와 먼지로 뒤덮인 어깨‘


두 남녀 주인공은 전쟁 이후 살아남은 자, 혹은 전쟁의 목격자에 해당된다.
영화 첫 머리에 두 상체가 서로 보듬는데, 살갗이 금속성의 빛나는 재로 뒤덮여 있다. 오버랩
되어 연결되는 이러한 이미지들에서 육체는 먼지로 뒤덮여 마치 오랜 기억 속의 장면을 보고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뒤덮은 먼지가 야기하는 과거는 과거의 연인인 독일 병사의 죽음으로도 읽힐
수 잇지만 과거에 일어난 사랑 이야기에 대한 기억 자체가 죽고 소멸되었음 즉, ‘망각‘의 개념을
은연중에 전달한다.
2인극 페스티벌_‘아버지와 살면’
스터디 1회차

2 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역사와 철학 및 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성찰과


더불어 아우슈비츠 이후 예술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불러왔다. 여기서 예술 특히 문학의
가능성이란 예술이 과연 허구를 빌려 모든 현실 혹은 진실을 그려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관련된다. 이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현실을 증언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만장일치로 내려진
데 따른 것이다. 수용소생활을 체험하고 간신히 살아돌아온 사람들마저 공통적으로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자크 데리다는 이러한 ‘말할 수 없음‘ 자체가 바로 “불가능한 증언으로서의 순수한 증언“이라고
말한다. 한편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은 그 자체를 향해서, 사라짐이라는 본질을 향해서 가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문학의 사라짐에 대한 성찰은 말하지 않음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음‘을
끊임없이 말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존의 문학적 글쓰기의
파국 속에서 ‘끊임없는 말하기’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그러한 예로 글쓰기에 대한
성찰의 컨텍스트 또는 그 연장선상에서 전개되었던 프랑스에서의 누보로망에 관련된 글쓰기를 들
수 있을 것이며, 20 세기의 새로운 장르인 영화중에서는 누보시네마로 불리는 작품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알렝 레네는 영화작업을 통해 역사를 증언하는 대표적 영화감독 이다. 그는 이전의 고전영화가


보여주는 관습적이고, 선형적인 흐름을 깨고 누보로망이 보여주는 전통적인 객관적 사실묘사와
합리주의적 심리분석을 기축으로 하는 전통적인 소설 형식을 부정하고, 작가의 자연 발생적인
지각이나 충돌, 그리고 기억을 그에 알맞은 형식과 기교를 구사하여 재현하려고 하는 방식을
영화에 적용시켰다. 흔적으로 남아있는 과거를 포착하려 했다.

영화 전체는, 특히 두 주인공의 서로 사랑하는 몸과 그 사이로 내비치는 과거와, 혹은 폐허가


된 현재의 파편들은 바로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그 시간의 지속적 삶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녀는 마치 정신분열증 환자처럼 지난날의 기억에 괴로워한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특정한 이름도 없이 ‘그녀’와 ‘그’, 즉 ‘프랑스 여자’와 ‘일본인 남자’로 단지
인식되는 이유는 이들이 공간과 동일하며 서로에게 공간으로서 규정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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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 1회차

0927 스터디 내용 기록


<워밍업>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나눠봅시다!

수현: 이 작품을 보면서, 원폭 피해자들의 수기, 다른창작물 ‘맨발의 겐’ 이라는 것을 보고
공통적으로 느낀 것이. 그 사건에 대해 우리가 공감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인류이기 때문에
같이 슬퍼할 수 있지만 ‘아주 밝은 빛’을 보지 못한 입장으로서 제가 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슬퍼하다 보니 문학 작품으로서 극으로서 이 사건을 재현해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시
이 일이 공동체의 기억으로 남아서 기억을 어떤 방식으로 재현할지 결정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박물관이나 이런 곳에 가서 전투기를 보여주는 부분들이 있는데, 아직 뭔가를 명확하게 정하지


못하고 그날을 더듬으면서 맞춰나가려고 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히로시마 내사랑>이 좋은
작품일 수 잇었던 것이 작품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사랑을 매개로 두 작품을 소환할 수
잇는 장을 만드는 구조였기 때문에 아직까지 힘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이 봤을 때, 일본만의 이야기로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 공감이 많이 됐습니다.

윤후: 영화 보면서 한시간 넘게 히로시마는 같은 배경인데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의아했었다. 영화 끝나고 났을때 느껴진 것은 남자 역할이 너무 다케조의 역할과 비슷하게
느껴졌고, 두 작품 다 단순히 히로시마, 느베르, 2 차 세계대전을 기억하고, 애도하자는 의미로
만든 것은 아닌 것 같고, 이 <히로시마 내사랑> 영화가 사랑 영화인가? 하기에는 애매하고, 전쟁
영화인가? 라고 봤을 때 애매했는데.. 사랑을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와 살면>또한
그럼에도 다시 사랑하라. 망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고, 저도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받게되는 지점에서 저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민정: 영화 볼때 이게 뭔가 배경은 비슷한데, 뭐가 공통점이 있나? 지금도 정확하게 알겠는 것은


아닌데 다시 사랑하는 용기 이런 것이 미쓰에가 어려워하는 지점이기도 하잔하요? 영화의 여자도
14 년 전에 운명적인 사랑을 하고 운명적인 감정을 14 년만에 다시 느끼면서 .. 근데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아름답게 그리긴 했지만 왜 불륜인지 ? 그리고 저한테는 영화가 좀
어려웠습니다. 뭘 말하려는지는 알겠는데, 저한ㅌ는 좀 어려웠습니다.

<자유 토론>
궁금증 1: 감독은 왜 둘을 불륜 관계로 설정한 것일까?
수현: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여성의 감정선이 분명이 있고, 그 당시 남성들의 선택이 있는 것
같았다.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연대감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지나감.

우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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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 1회차
누보로망. 반소설적.
웃으면서 보지는 못했던 , 난해한

궁금증 2: 영화 중간에 남자가 여자의 뺨을 때리는 장면 실제인것인지?


실제인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면 현실이 오히려 연극보다 더 극적일 때가 있잖아요. 지극히 현실적인 묘사일
수도 있겠다. 기억의 외상을 입은 사람들이 그것을 잊고 살아가다가 서로 그것을 이야기할 수
있고, 들어줄 수 있으니까. 운명의 짝은 오히려 그걸 말할 수 없는 상대가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상대여서 그런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고, 둘의 행동은 논리적 인과성으로 이해가진 않지만,
현실적인 행동.

가까운 지인이나, 직계 가족의 경우 그 사람의 말을 내재화하게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사람의


말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서 체화시키는 경우가 있는 것 같거든요. 근데 다케조가 나오는 것이
여기서는 물리적 실체는 없는, 사람 , 더이상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닌 것으로 나오지만 미쓰에
안에서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궁금증 3: 새롭게 재구성되고있는 것이 아닌가?


미쓰에가 굉장히 복잡한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표면이나 대사에 드러나는 것들이 다케조의 말에
대해서 잔잔하게 거부하거나 쳐내는 대사들이 있는데, 겉으로 봤을 때, 미쓰에에게 주어진 설정을
봤을 때 , 그 혼란이 감히 짐작이 안 가는 느낌을 받았다.

궁금증 4: 미쓰에는 어떤 인물인 것 같으세요?


미쓰에가 자신은 사랑해도 안 되고, 행복해도 안 되고, 신념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처럼
누리면서 살고 싶은 마음도 당연히 있다는 생각.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해주는 아빠가 생겨나지
않았나. 사실은 나도 그 말을 듣고싶고, 하고싶어. 라는 것이 미쓰에가 아빠를 만들어내지 않았나.

궁금증 4: 이부분 이해가 잘 안 됐다. 아버지의 마지막 대사 의미는 무엇일까?


사람도 자신이 듣고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 것을 꺼낸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랬을 때 이게
맞는거야. 맞아 그 얘기가 맞구나,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 있다. 미쓰에도 굳어진 마음의 응어리가
‘나도 행복하고 싶어’ 가 안나오는 것 같았다. 속으로는 자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있었을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상황때문이었어. 하지만,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오해로 그것들을 인정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이걸 인정할 용기를 얻어서, 아버지가 떠나는 것으로
아버지 이제 나한테 더이상 위로 안해줘도 괜찮아요,

미쓰에 1 막에서 연기를 할 때 처음에는 밝고 명랑한 아이였는데 웃음도 읽고 어두워졌다고


언급하는데, 미쓰에가 조금 밝고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지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

민수: 죄책감 때문에 아버지라는 존재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미쓰에가 가상으로


아버지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죄책감 때문에 가상의 존재인 아버지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라는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라면… 마지막에 사라진 이유가 죄책감을 씻어내서
사라진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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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후: 저는 미쓰에라는 캐릭터의 목표가 다케조에게 용서를 구한다.
미쓰에도 기노시타랑 사랑하고 싶었을 것. 아버지가 있을 때는 아닌 척을 한다. 죄책감을 느끼는
상대 앞에서는 그것을 표현할 수 없음. 용서를 받고싶어한다고 생각.
농담조 : 기노시타를 만나러 갈 것이니까 이제 못 만날지도 모른다는 말.
또 다른 의견: 말을 다 들었으니까 쉬셔라 , 고맙다는 의미로.

수현: 맨발의 겐; 작가가 실제로 히로시마 원자폭탄 생존자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묘사가
굉장히 쎄더라고요. 한국인으로서 ~~ 이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맨발의 겐이라는 만화에도
박씨라는 조선인이 나옵니다. 그사람이 마을에서 따돌림을 받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상황이 역전되고 박씨가 취하는 태도, 겐의 가족들의 태도 그런 환경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이해관계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공유한 질문에 대한 이야기>


-여자가 히로시마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이부분에서 뭘 보고싶어 하는지 모르겠었다.
자신의 고향 느베르의 자연이 책에 묘사되어 있거든요. 고향의 파편들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남자는 어떻게 망각을 이뤄냈을까? 이룬걸까?


순간적으로는 이뤘지만, 영구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반에 여자는 안다고 이야기하고 남자는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부분이 여자는 자신의 간접적인
경험에 의거해 안다고 이야기하고 남자는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을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거
같다.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도 '아는 것'이 되는가?
수현: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도 아는 것이 되는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사람은 너무나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것 아닐까 하는데 그것이 또 틀린 것은 아니니까. 안다고 말하고
기억한다고 말하는 것이 어떤 기준을 갖고 서술하는지에 따라서 안다는 것 자체가 정의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민수: 안다는 것의 기준이 각자 다르니까, 경험하지 않은 사람도 안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안다고 말하고,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각자마다 다르니까 이런 상황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저는 들은 것도 아는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영: 안다는 환상? 왜곡이 너무 많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민정: 블랙스완을 봤는데 사람 찔러서 피가 많이 나왔는데, 그때는 아무렇지 않게 보다가 작게
손톱을 뜯어서 피가 나는 것은 얼마나 아픈지 아니까 못보겠다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직접 겪지
못하 것은 가늠이 안가서, 안다고 말하기 조금 어려운 것 같아요.

여자가 전쟁에서 죽은 전 남자친구? 얘기를 하며 시간이 지나면 잊게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끔찍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기억을 잊어야하는가? 기억해야하는가?
잊을 수 없다.
잊을 수 있지만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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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 1회차

본래 민정이에게 <아버지와 살면>을 제안받기 전에 시나리오 형태인 <히로시마 내사랑>을


공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 작품은 주제의식의 측면에서 남녀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고 여겨지지만, 기억, 망각을 통해서 이들의 기억이 향하고 있는 공간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직접적이고, 재현적이지 않게 전쟁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사건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함부로 재현하거나, 대상화하지 않고 어떻게 함께


감각할 수 있을까는 이번에 제가 작품을 준비하면서, 최근 연극을 보면서 가장 많이 고민하는
이슈이기도 합니다. 결국 타인의 이야기를 어떻게 관객에게 받아들여지게 할 지, 그것들을
윤리적으로, 에술가의 창작윤리를 위배하지 않으면서 전달할 방식을 함께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쓰기 방식과 알렝 레네 감독의 연출 방식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테이블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연출적 컨셉과 방향성에 대해서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하지만 오늘 앞서 말씀드렸듯, 저희 희곡은 글쓰기의 방식에서 <히로시마 내사랑>과는 분명히


다른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알렝 레네의 접근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전쟁의 비극, 반전,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는데, 관객이
그것만을 가져가기 위해 연극을 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국인인 우리가 지금
이 희곡을 읽고, 어떤 생각이 들고, 느껴지는 것들을 담아내고자 합니다. 아버지 다케조의 존재가
영혼이라는 특이점이 있지만, 기승전결이 있는 드라마 극 구조를 차용하고 있고, 선행적인 시간
흐름을 갖고 있습니다. 각색이 어렵다고 하신 만큼 형식적인 측면에서 (배우의 연기를 포함하여)
우리는 어떤 시도를 할 수 있을지 함께 활발하게 이야기 나눠보고 싶습니다. 재밌고도 어려운
작업이 될 것 같아요. 잘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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