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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세기 한국소설의 이해 조별보고서(6.

28) 4 조 2023-17417 이근호


최제훈, 「퀴르발 남작의 성(成)」

4 조에서는 최제훈이 쓴 소설 「퀴르발 남작의 성」을 읽고 생겨나는 여러가지 질문 및


흥미로운 점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이 소설은 내용 속에서 「퀴르발 남작의 성」이라는
소설을 다루는 것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최제훈이 쓴 것을 ‘글’이라, 이 글 속 「퀴르발
남작의 성」을 ‘소설’이라 부르도록 하겠다.
이 글의 흥미로운 부분들 중 하나는 바로 소설 전개 방식이었다. 첫 부분부터 매우
특이하며, 읽다보면 소설 「퀴르발 남작의 성」의 내용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소설과 관련된 사건들을 짜깁기해 놓은 듯한 전개 방식을 나타내고
있고, 오히려 가장 원초적인 소설의 소스는 글의 맨 밑에 나오며 이 마저도 명확한 결말을
맺지 않고 있다. 대학교 수업시간의 작품설명이나 뉴스 보도, 영화감독의 인터뷰 등 다양한
시점에서 소설 「퀴르발 남작의 성」에 대한 정보가 각 이야기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는 소설의 원래 내용조차도 제대로 알고 있지 않은 채 이 정보들을 통해 소설을
떠올리며 이해하게 된다.
또 다른 부분은 예술의 해석적인 특성이다. 제작자 토마스 브라우닝과 영화감독 에드워드
피셔 사이의 대화를 다룬 이야기에서, 감독과 제작자는 소설을 영화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아무런 의미 없이 단순히 영화의 상업적인 흥행을 위해 결말의 내용을 극적으로
뒤바꿔버린다. 이 영화에 대한 평론이 다른 이야기에 나와있는데, 미국 제임스 허스트
기자의 저널 이야기를 보게 되면, 기자는 이 영화가 만든 새로운 결말에 대하여, 남작의 붉은
조끼 및 문서들을 근거로 들며 ‘공산주의의 몰락’을 표현하려 했다고 해석하였다. 한편
영화감독 나자카와 사토시의 인터뷰 이야기를 살펴보면 퀴르발 남작의 성을 ‘서로의
이해관계가 뒤얽히며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자본주의 체제’라고 하였고, 영화의 결말에
대하여 ‘터져버린 자본주의 체제’라고 표현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한가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는데, 바로 예술은 제작의도보다는
당사자의 해석에 조금 더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을 보고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각자의 판단을 하며, 심지어 같은 내용에 대해서도 각각 ‘공산주의
몰락’과 ‘터져버린 자본주의’라는 대립되는 해석을 하게 된다. 또한 이와 연관하여 조원들과
‘과잉해석’에 대해서 고민해보았다. 김영하의 소설<나쁜 버릇> 속에서 아무런 의미 없이
김영하가 글을 썼듯이 우리가 의미를 가지지 않은 것들 여러가지에 모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혹은 과잉해석이 존재해야 그로부터 또다른 창작을 유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논의를 거쳤다.

다음은 이 글에 관련하여 조원들과 궁금한 점에 대하여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을


떠올렸던 내용들이다.
이 글에서 시간적 표현이 등장하는데, 모두 6 월 9 일을 가리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에관하여 이야기해 보았다. 애당초 소설 「퀴르발 남작의 성」은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
최제훈이 만들어낸 이야기이고, 따라서 모든 시대상황들이 인위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굳이 작가가 6 월 9 일로 날짜를 고정을 한 이유에 대하여, 우리는 이야기의 모음들이
짜깁기처럼 보이고, 난잡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나름의 통일성을 부여하려는
시도였다고 보았다. 결국 소설 「퀴르발 남작의 성」에 관련한 내용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부각하기 위해 날짜를 인위적으로 통일시켰을 것이라는 관점이다. 또는 같은 날
퀴르발의 이야기가 연속되어가는 느낌을 통해 음산한 느낌을 준다는 의견도 존재했다.
또다른 것은 인간의 욕망과 관련된 질문들이었다. 인간의 욕망을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하여 인간의 욕망 자체가 나쁜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대하여 토의를 해보았는데,
욕망이 지나친 상황은 이미 구축된 현대사회의 자정작용에 의하여 도태될 것이 뻔하고, ‘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는 듯 욕망이라는 것이 마냥 나쁜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발전에 필요한 것이며,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 사회가 일종의 디스토피아의
형태로 나타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욕망을 해결하는 기준에 있어서는
스스로 저울질을 통해 해결하되 법의 기준 안에서는 괜찮을 것 같다는 의견들이 나왔고
마약을 예시로 들어 일상 생활에 지장이 없는 정도 내에서는 충분히 욕망의 해결이 가능할
것이란 의견이 나왔다.
또 출산을 통해 유전자를 물려주는 것이 아닌 직접 먹어서 남작의 배 속 안에서 똑같이
유지한다는 퀴르발의 주장에 대하여, 이러한 상황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했을 때 옳은 일인
것인가에 대한 간단한 토론을 진행하였다. 출산 및 육아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이
인간에게 크게 작용할 것이라 생각했고, 유전병을 낮추고 다양한 형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난자가 유전정보를 고려하여 정자를 선택한다는 과학적인 사실과 함께 이러한 행위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내용의 소설의 결말은 주인공이 괴물을 처단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와 달리 소설 원작은 주인 부부가 설득당하여 딸을 남작에게 맡기고, 결국 딸로 만들어진
요리를 남작과 같이 식사하게 되는 암울한 결말을 가진다. 소설의 작가의 인터뷰 이야기를
확인해보면 그가 심지어 ‘회피하고 싶은 욕망들의 찌꺼기의 융합체’ 라고 퀴르발을
칭했음에도 불구하고, 굴복적인 엔딩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하여 논의를
진행하였는데, 이는 인간이 결국 욕망을 극복해내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며 인간의 이러한
나약한 특성을 반영하여 엔딩을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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