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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한 작품들에서 ‘행복의 추구’는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논하시오.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난쏘공>) 그리고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 (<거여키>)는 각 작품 속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으로 인한 피해와

약자들이 원하는 이상적 세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들이다. <난쏘공>은 1970년대

대한민국의 심각한 빈부격차와 노사대립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작가는 구체적으로

도시 재개발 사업으로 터전을 잃게 된 난장이 가족을 통해 사회적 모순과 문제점을

비판하였다. 마찬가지로, <거여키>는 좌, 우익의 대립이 심화되던 시기에 인정 받지 못하는

감성적인 성소수자와 이성적 이념을 우선시하는 좌익혁명가 정치범의 대화를 통해

사회적인 불평등과 모순에 대해 논하고 있다. 비록 두 작품 모두 사회의 비극적인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작중 인물들의 완벽한 행복의 성취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두 작가 모두

사회를 비판하며 독자들에게 자신들이 생각하는 사회의 진정한 행복을 알려주었다.

<난쏘공>의 작가는 화합과 공존으로 불합리를 줄여야 한다 주장하고 있으며, <거여키>

작가는 사랑의 힘으로 사회의 불평등을 이길 수 있다고 제시하였다. 두 작가들이 주장하는

행복과 이를 성취하는 과정은 작품의 인물, 구조, 상호텍스트성을 통해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난쏘공>과 <거여키>의 작가 모두 사회 약자들을 주인공으로 두어 본인들이

주장하는 사회의 진정한 행복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또한, 인물들이 놓인 배경과

상황들은 작가들이 생각하는 행복이 이 사회에 달성되었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난쏘공>과

<거여키>에서는 사회적 약자의 시선에서 사회의 진정한 행복을 서술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인물이 <난쏘공>의 주인공 “김불이”와 <거여키>의 주인공

“몰리나”이다. “김불이”는 변두리 생활을 하는 도시 난쟁이로 표현된다. 온갖 궂은 일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지만 현실의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작품 속에서

김불이는 난쟁이로 표현되는데, 이는 피지배계급,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경제적으로 빈곤한

자를 의미한다. 김불이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은 사회적 약자들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곧 이상적인 사회의 행복임을 주장하는 작가의 생각이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거여키>도 마찬가지로 사회적 약자가 주인공으로 그려진다. 그 인물이 바로

“몰리나”이다. ‘몰리나’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최고형을 받은 인물이다. 이는 판사가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가 있으며 이는 동성애자 무시당하는 사회적 약자에 해당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럴 것이, 발렌틴 또한 평등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외치고 있으면서 여러 대화를

통해 몰리나를 은근히 무시하는 모순적인 행동을 표한다. p25. 이를 닦지 않아서 입 냄새가

심하게 나니까 그랬겠지 / 그렇게 계속 비아냥거리면, 더 이상 영화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

거야 p.30

그녀가 파이프 담배를 피는 청년과 결혼하려는 데까지 말했지. 자, 이제 네 말을 듣고 있을게

/ 왜 그렇게 비아냥거리는 말투지? / 아무것도 아니야, 어서 영화 이야기나 해줘

이러한 모습 역시 동성애자들이 사회에서 무시받는 약자임을 나타낸다. 이렇게, 두 작품

모두 사회적 약자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두 인물들을 통해 작가가 생각하는

행복의 메시지가 드러난다. <난쏘공>의 에서는 , 영호와 영수가 일을 하지 않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을 만큼 난장이 가족들이 비교적 행복한 삶을 살았을 때에는 아버지인 김불이가

경제적 활동을 통해 가정을 이끌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가 사고를 당하고 철거 계고장이

날라오기 시작하면서 가족 구성원 내의 의견 충돌로 인한 불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자 난장이

가족들의 행복은 사라졌다. 이를 통해서 작가는 사회에서의 행복은 화합과 공존이 있어야

이뤄진다고 말하고 있다. . 또한, 두 작가는 두 인물의 죽음을 통해서 행복 추구 여부를

확인하게 한다. 작가는 김불이의 삶으로 사회에 진정한 행복을 찾는 과정을 알려주었지만

그를 죽게함으로 그 사회적인 행복 추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알려주었다. 이는

난쟁이로 상징된 노동자들이 거대 자본을 상징하는 거인들과의 대결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재차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몰리나는 발렌틴과의 관계가 깊어지며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이 또한 몰리나를 통해 주장하는 행복은 사회적인

현실 앞에 좌절할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불이와 몰리나의 죽음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의 차이점은 <난쏘공> 작가는 김불이를 통해 행복을 추구할 수 없는

사회의 좌절만 강조했다면, 몰리나를 통해 사회적 행복이 이뤄질 수 있는 희망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김불이의 죽음은 거대한 자본주의와 싸우려던 다른 난쟁이

가족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준 채 끝났다. “끝까지 자본에 맞서려던 영희는 상상 속에서

오빠에게 아버지의 복수를 맹세한다. 아버지를 만나지 못한 현실, 상상에서만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하는 현실 모두 작가가 추구하는 행복을 이루지 못한 난쟁이 가족들의 좌절을

느낄 수 있다.” 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난쏘공>의 “상상"은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몰리나는 발렌틴을 변화시켰고 그가 곧 사회의 행복을 가져다줄 희망이

되는 것이다. 16장에서 고문을 당한 발렌틴은 상상 속에서 마르타와 대화하며 바다와

섬처녀 영화를 상상한다. 그리고 거미 여인 몰리나의 모습을 환상적으로, 한 편의 영화처럼,

마치 4장의 엔딩처럼 그려낸다. <거여키>에서도 상상이 사용되는데 여기서의 상상은

환상성이 결합되어 더 동화같은 효과가 이뤄지는데 몰리나를 보고 싶어하는 염원과 그를

통해 이해한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정확하게 익힐 수 있다.

다음으로, <난쏘공> 과 <거여키> 에서는 작가들이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통해서 행복을

정의하고자 했다. 이분법적 대립구도란 작품 속에서 서로 대립하는 2가지 기준으로 나누어

이야기를 진행하는 형식을 뜻한다. 이러한 대립구도는 대립되는 성질을 통해 각각의 구조를

더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며 결과적으로 제 3의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도록 한다.

두 작품 모두 이러한 특징을 지닌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통해 작가가 생각하는 행복과

행복하지 않는 것을 설명하며 행복에 대한 가치관을 전달하고 있다. <난쏘공>은 단편

소설이 이어지는 형태인 연작 소설로, 그 중, “뫼비우스의 띠”는 <난쏘공>의 주인공인

난쟁이 가족이 주가 아니라 어느 고등학교에서 수업을 가르치는 수학 선생님의 이야기를

위주로 흘러간다. 수학 선생님은 ‘사물을 옳게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굴뚝 청소를 하는 두 아이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대립되는 두 아이의 특징을 통해

<난쏘공>에서 전반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착취당하는 노동자와 착취하는 자본자라는

사회적인 대립을 암시하고 있다. 이렇듯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가해자가 될 수도, 혹은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이분법적인 구조는 “클라인씨의 병"에서도 드러난다. “클라인씨의

병”에서는 내부와 외부, 안과 밖을 구분 할 수 없는 클라인 씨의 이상한 병이 등장한다. 이 병

안에서는 안이 곧 밖이며, 밖이 곧 안이기 때문에 이 병 안에 갇혀 있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병의 벽만 따라가게 된다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설정이 언급된다. 이를

<난쏘공>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와 연관지어 본다면, 현실에서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난쟁이 일가를 향한 핍박이 절대적인 갇힘이 아니라 노력을 통해 빠져나올 수 있는

현실임을 암시하고 있는 희망적인 장치라고 해석 될 수 있다. 결국,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씨의 병”에서는 올바른 판단과 비판을 통해 현실을 인식해야함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며 단순히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것인지, 혹은 공동체의


선을 위한 사회적 윤리를 생각하는 것이 행복인지 독자들에게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난쏘공>과 동일하게, <거여키> 또한 “몰리나”와 “발렌틴”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작품 속 “몰리나”는 감성적인 사람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발렌틴”은 이와 반대되는 보다 이성적인 사람을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또한 작품에서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도 대부분 감성적인 사람과 이성적인

사람으로 나누어 대립구도를 형성한다. “몰리나”는 인정받지 못하는 성소수자의 삶을

살아가며 진정한 사랑을 찾고자 한다. 늘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태도를 보이며, 특히나

“사랑"이라는 감정을 늘 갈구하며 자신만의 행복을 찾으려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와

달리, “발렌틴”은 감성보다는 혁명가로서의 정체성이 더욱 강한 인물로 이성적 이념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몰리나"가 자신의 행복을 통해 세상에 힘을 가져다주는

사람으로 묘사된 것과는 달리 “발렌틴”은 너무나도 이성적인 사람으로 모순되며 속세에

사는 사람으로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이렇게 대립되는 묘사를 통해 생성된 이분법적 구도는

독자들로 하여금 작가가 주장하는 올바른 행복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돕고

있으며, 앞에서 제시되었던 “사회적 행복”이라는 메시지를 보다 쉽고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두 작품이 공통적으로 이분법적 대립 구도를 사용하여 주제를 전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차이점 또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난쏘공>의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씨의 병”은 모두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 씨의 병의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특징으로 인해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정확하게 언급되지 않는다. 이러한 모순은

사회적인 대립을 완화하고 차별이 없이 화합되는 사회가 행복이라 믿는 작가의 가치관을

방해하는 요소하며 독자들에게 혼란을 가져다 주는 요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요소를 통해 안과 밖이 정확하지 구분되지 않는, 즉 선과 악이 제대로 구분 되지 않는

사회가 행복할 수 없는 근본적인 원인을 암시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이와 달리, <거여키>는

이분법적 구도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보다 확실하게 보여지고 있다. 사랑이 많고,

낭만적이며, 감정적인 “몰리나”가 자신의 사랑이라는 요소를 통해 어떻게 사회에게 이바지

하고 있으며 어떤 사회적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지 그려지는가 하면 사랑이 없고, 이성적인

인물인 “발렌틴”은 자신의 행복이 아닌 사회의 이념만을 쫓으며 불합리하게 사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결국, 이러한 상반되는 묘사를 통해 “몰리나"는 보다 긍정적으로 그려지며 행복의

가치는 전달하고 있고, “발렌틴”의 이성은 올바른 행복이 아님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난쏘공>과 <거여키>에서 사용된 다양한 텍스트들은 독자들이 작가가

추구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보충하고 있다. 여러 텍스트들의 사이의

관계를 상호텍스트성이라 부르며, 이는 단순히 작가의 특성으로만 이루어진게 아닌 이미

존재하는 개별적인 텍스트들의 독창성이나 특수성의 의존해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작품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며, <난쏘공>과 <거여키>의 경우 ‘행복의

추구'라는 주제를 보다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먼저,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난쏘공>은 여러 단편들이 이어지는 연작 소설이다. <난쏘공>의 경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내용을 위주로 나머지 단편들의 이야기도 진행되고 있으며, 모든 이야기들이

많게든 적게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연관되어 있거나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이러한 연관성을 통해 작가는 행복의 방향을 간접적, 혹은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칼날”에서는 난장이 가족이 아닌 외부 사람이 주인공이 되어 그들을

서술해나가고 있다. 여기서 외부 사람이 난장이 가족들이 다같이 함께 밥을 먹는 장면을

보며 행복해보인다고 묘사하고 있다. 작품 속 난장이 가족은 ‘못 가진 자'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족들이 함께하는 모습이

행복해보인다고 느끼는 난장이 가족과 관련이 없는 제 3자의 묘사를 통해 화합과 공존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방법임을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와 동일하게, <거여키>는

“영화"라는 또 다른 텍스트를 불러와 이야기에 맞게 변명하며 전개하고 있다. 이렇듯, 과거

나치 영화는 사회적 상황 특성상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국가의 가치를 강조한 영화가

많았는데, <거여키>에서 언급된 “은 모두 국가보다는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거여키>에서

전개되는 내용 외에 영화라는 부가적인 텍스트를 활용함으로써 행복의 가치라는 핵심

이야기를 보충하고 있다. 이렇듯, 두 작품은 다양한 텍스트의 활용, 즉 상호텍스트성을 통해

행복의 가치를 전달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작가의 목적을 판단하고 보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지만, 전달하는 방식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난쏘공>은 여러 이야기, 즉

텍스트가 독립된 작품으로서 연결되고 있다. 따라서, 한 이야기 안에서는 여러 텍스트를

이용하는 모습을 찾기 어렵지만 여러 단편 작품들이 모여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형성해

나간다. <난쏘공>이 전체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비슷하나, 세부적으로 각 단품이

지닌 상징과 주제가 다르기 때문에 독자들에게로 하여금 작품 속 인물들이 어떠한 요소를


통해 행복을 느끼고 있는지, 혹은 느끼지 못하고 있는지 더더욱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와 달리, <거여키>는 독립된 이야기가 상호텍스트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작품 안에서 영화라는 또 다른 텍스트가 언급되고 있다. <난쏘공>의 경우,

각자의 이야기가 독립된 형태이기 때문에, 어느 한 작품이 빠진다고 해서 이야기가 이해가

가지 않거나, 각자의 세부적인 목적과 보다는 작품이 전체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전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여키>의 경우, 작품의 전체적인 흐름이 텍스트를

통해 보다 매끄럽게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영화가 언급되지 않으면 행복의 가치라는

작가의 궁극적인 목표가 전달되기 어려우며, 반대 또한 영화만 언급되고 이야기가 흘러가지

않는다면 주제를 전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거여키>라는 작품 안에서 영화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투입함으로써 독자들이 인물들의 감정에 더 이입할 수 있도록 돕고

있으며, 특히나 작품 전체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주제인 사랑과 행복이라는 감정을 깊게

묘사하며 그 효과를 더더욱 높이고 있다. 결국, 인물에게 깊게 감정 이입하며 영화의 어떠한

부분에서 행복을 느끼는지를 판단하며 행복의 가치가 무엇이고, 행복이 어떠한 방식으로

추구되고 있는지 또한 도출해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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