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on page 1of 5

우리겨레미술이야기 8

석굴암 이야기
신창중 조소영
“내가 전생에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일이 생긴담.”
어른들께서 가끔씩 하시는 푸념입니다. 전생이란 태어나기 전의 삶을 말합
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다음에 다시 태어
난다고 믿습니다.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고 나쁜 일만
하면 동물이나 곤충으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면 다음 생에서 훌륭한 집안의 자식
으로 태어나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믿었습니다.
경주의 석굴암과 불국사에도 전생에 관한 설화가 전해 내려옵니다. 고려
때 스님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
신라 751년에 재상 김대성이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경덕왕 때에 신라에는 김문량 이라는 재상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이
김대성인데 원래는 다른 집의 아들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양
자를 들인 것이냐고요? 그게 아니라 여기에는 재미있고 신기한 일이 얽혀
있습니다.
경주 부근 모량리라는 곳에 경조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일찍 죽어 혼자 사는 여인인데 몹시 가난해서 부잣집의 일을 해주
면서 살았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대성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이마가 평평하다 하여 대성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두 모자가 너무나 성실히 일하는 것을 보고 하루는 복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부자 주인이 그 어머니를 불렀습니다.
“그 동안 열심히 일을 해줘서 정말 고맙구나. 마을 입구의 작은 밭을 하
나 떼어 줄테니,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먹을 것, 입을 것이라도 마련하거
라.”
밭이 수백 마지기에 부리는 노비만 이 천명이 넘는 부잣집에서 작은 밭 하
나 떼어 주는 일이야 별것 아니겠지만 대성이네는 정말 뛸 듯이 기뻤습니
다. 조금만 더 열심히 일을 한다면 밭에서 나는 곡식으로 먹을 것을 해결
하고 남는 것은 장에 내다 팔아서 저축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날 흥륜사의 점개스님이 복안의 집에 시주를 얻으러 찾아왔습니다.

- 1 -
불교 법회가 흥륜사에서 열리는데 법회를 준비하려면 여러 가지가 필요하
기 때문이지요.
“스님, 부족하나마 베 50필을 드릴테니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하고 복
안이 쾌히 승낙을 하자 점개스님은
“늘 보시를 좋아 하시니 부처님께서 보호하실 것입니다. 하나의 보시로
그 만배를 얻으시고 편안히 오래 사십시요.”하며 축원을 했습니다.
보시란 자비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조건 없이 베푸는 것을 말합니
다. 재물을 주기도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도 하며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재물로써 공양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
다.
문 뒤에서 이 모습을 본 대성은 급히 어머님께 달려갔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헉헉, 흥륜사에서 스님이 오셨는데요.”
뛰어 오느라고 숨이 찬 대성이 계속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가난한 것은 전생에 선한 일을 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
아요 어머니. 지금 또 보시를 하지 않으면 다음에는 더욱 가난할 것이니,
고용살이해서 받은 밭을 흥륜사 스님께 보시하는 것이 어떨까요?”
어머니도 좋다고 하셔서 그 밭을 점개스님에게 보시했습니다. 자신은 괜
찮지만 대성이만은 가난하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해 오셨기 때
문입니다.
얼마 후 저녁 먹은 것이 체해서 갑자기 대성이 죽었습니다.
그날 밤, 재상 김문량의 집에 갑자기 환한 빛이 나더니 하늘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모량리의 대성이라는 아이가 지금 너의 집에 태어날 것이니라.”
곧 바로 모량리에 사람을 시켜 찾아보았더니 과연 대성의 집에서는 그 어
머니의 통곡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로부터 꼭 열달 뒤 김문량의 부인은 복스러운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런데 태어난 아이가 웬일인지 왼손을 꼭 쥐고 펴지를 않는 것입니다. 7일
이 지나자 손을 폈는데 그 손안에 ‘대성’이라고 새긴 금으로 만든 조각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또 이름을 대성이라고 짓고는 모량리의 어머니를 모셔
와서 함께 살도록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대성은 늠름한 대장부가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지금의 부

- 2 -
모님과 전생의 어머님이 모두 돌아 가셨습니다.
평소에 사냥을 좋아하던 대성은 어느 날 토함산에 올라가 큰 곰 한 마리
를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산 아래 마을에 내려와 점을 잤는데 꿈을 꾸었습
니다. 낮에 잡았던 큰곰이 온 몸에 피를 흘리며 나타나서 울부짖는 것이
었습니다.
“나는 네게 해를 입힌 적이 없는데 너는 어찌하여 나를 죽였느냐? 내가
너를 잡아 먹고야 말겠다.” 하며 대성을 덮쳤습니다. 도망가려고 했으나 다
리가 떨어지질 않았습니다. 꼼짝 못하고 있던 대성이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자 곰귀신이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절을 세울 수가 있겠느냐?”
대성이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자 갑자기 곰이 사라지더니 꿈에서 깨어났
습니다. 온몸과 잠자리가 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그때부터 대성은 절대로 사냥을 하지 않았고 곰을 잡았던 그 자리에 ‘장
수사’라는 절을 세웠습니다. 이일로 깨달은 바가 있어 현생의 부모님을 위
해서는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님을 위해서는 석굴사를 지었으니, 여기
서 석굴사는 바로 석굴암을 말합니다.
김대성에 얽힌 이야기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두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
다.
전생과 현재의 두 부모를 모두 모신 그 효심이 정말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지금 어렵게 사는 것도 다 전생에 잘못을 했기 때문이니 불
만을 갖지 말고 그러려니 하면서 살라는 뜻으로 생각되어 조금 씁쓸한 기
분이 들기도 합니다.
석굴암처럼 바위나 절벽에 굴을 파서 절을 짓고 불상을 만들어 놓은 것
은 원래 인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인도에는 거의 1,200여 개나 되는 석굴
사원이 있는데 덥고 비가 많이 오는 기후를 피해서 스님들이 도를 닦기 위
해 만든 곳입니다. 석굴사원은 아프가니스탄, 중앙 아시아를 거쳐서 중국,
한국으로 건너 왔습니다. 인도에는 아잔타 석굴, 중국에는 돈황, 운강, 용문
석굴이 유명합니다.
우리 나라 산천은 커다란 바위 벼랑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석굴암은
화강암을 정확히 다듬어 산 중턱까지 끌어와서 인공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 무거운 화강암을 동해가 바라다 보이는 산중턱까지 옮겨왔다니 정말 대

- 3 -
단한 기술이지요?
석굴암은 네모난 모양의 앞방과 둥그런 모양의 뒷방으로 이루어져 있습
니다.
앞방에는 인왕상과 사천왕상이 벽에 도드라지게 조각되어 있고 주로 기도
를 드리고 공양을 드리는데 이용되었습니다.
인왕은 금강역사라고도 불리는데 절을 지키는 수호신이고, 사천왕은 동
서남북을 지키는 수호신입니다. 악귀와 질병을 물리치는 신이기 때문에 모
습이 굉장히 험악하고 무섭게 생겨 있습니다. 절에 가면 법당에 들어서기
전에 통과하는 문이 있는데 그곳에 나무로 만든 사천왕상이 금방이라도 눈
이 튀어나올 듯 무시무시하게 서 있습니다.
뒷방에는 가운데 커다란 부처님상이 있고 주변 벽에는 보살과 제자들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가운데에 듬직하게 앉아 있는 부처님의 모습은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삼국통일이 되기 전의 부처님 얼굴은 주로 서서 다정하게
웃는 모습이 많았지만 석굴암의 부처님은 높은 연꽃 단위에 앉아 우아한
모습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조금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습니
다.
토함산에 맑은 아침해가 떠오르면 부처님 이마에 있는 구슬이 햇빛을 받
아 붉은 빛을 뿜어내는데, 실내가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어 마치 또 다른
세상이 열리는 듯 신비했다고 합니다. 원래 부처님 맞은편 천장부분에 옥
으로 만든 보살이 두 개 있었는데 부처님 이마의 구슬에 반사된 붉은 태양
빛이 비치면 옥보살들이 그 빛을 받아 붉은 광채를 실내에 뿜어냈기 때문
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옥보살들은 지금은 없습니다. 일본에 약탈되었기 때
문이지요. 자기 나라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빼앗길 정도로 나라의 힘이 약
해지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하겠습니다.
신라사람들은 아름다운 육체와 아름다운 정신은 따로 뗄 수 없는 것이라
고 생각했습니다. 석굴암 부처님을 만들 때에도 부처님의 자비로움을 그대
로 드러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는 석굴암 부처님의 모습에서 신라 사람
들이 좋아하던 남성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 주위의 보살
님들은 신라인들이 아름답게 생각하는 여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석굴암은 토함산 위에 있습니다. 토함산은 동해의 바닷물을 들이 마셔서
구름과 안개로 토해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동해에서 밀려오는 물

- 4 -
기 머금은 공기 때문에 습기가 몹시 많은 곳입니다. 그렇다면 석굴암은
이런 습기와 안개 속에서 어떻게 풍화되지 않고 천년이 넘게 남아 있을 수
가 있었을까요?
거기에 바로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과학적 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석굴암은 맑고 차가운 물이 흐르는 돌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서늘한 샘
물이 석굴암 밑으로 흘러서 석굴암 안의 습기가 아래로 모이게 한 것입니
다. 벽이나 천정에도 얇은 돌을 끼워 맞추는 식으로 지었기 때문에 바람이
서로 잘 통하게 했습니다. 어때요? 상당히 놀랍지요?
석굴암에는 또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석굴암의 천장을 만들 때 천장에 뚜껑 돌을 만드는데 갑자기 돌이 세 쪽
으로 갈라졌습니다. 김대성은 너무나 안타까워 자는 둥 마는 둥 선잠을 잤
는데 한밤중에 하늘에서 신이 내려와 다 만들어 놓고 갔습니다. 급히 일어
나 천신이 사라진 남쪽고개로 달려가 향나무를 태워서 천신에게 보답했습
니다. 그후로 이곳을 향령(향고개)라고 했습니다.
김대성의 전생 이야기나 향령 설화가 생길 수 있었던 것은 정교한 건축
과 조각들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감동을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석굴암은 무려 23년의 긴 세월이 걸려 완성됐는데 수많은 사람들의 솜씨
와 구슬땀 그리고 나라에서의 뒷받침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김대성 개인이 조각과 건축 등에 뛰어난 재능과 안목을 갖춘 예술가였
으며, 23년이라는 긴 세월을 소모하면서도 완성하고자 했던 그 끈기 때문
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석굴암은 동양의 3대 미술품 중의 하나이자 우리 나라의 국보 24
호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 5 -

You might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