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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x.doi.org/10.18217/kjhs.14.1.202105.

모호성과 예언적 기능:


그리셀다 감바로의 수용소 읽기*1)

2)송병선**

울산대학교

Song, Byeong Sun(2021), The Ambiguity and the Prophetic Function:


Reading of The Camp by Griselda Gambaro, The Korean Journal of
Hispanic Studies, 14(1), 1-24.

Argentine dramatist Grisselda Gambaro is one of the representatives in


Latin American contemporary theater. Gambaro's works are good
examples of a perfect harmony between political commitment and
aesthetics, and sucessfully deal with the abuse of power and the problem
of violence that not only Argentina but many Latin American countries
have experienced. The Camp is Grisselda Gambaro's fourth play and it
was first staged in 1968. Ambiguity is the core and dominant element of
The Camp. And another important characteristic is that its interpretation
is never carried out at the level of connotation. This work is full of
verbal and non-verbal signs, so it is necessary to understand them to
define what this ‘camp’ is. In other words, Martin continues to interpret
these signs, and this act is an exercise in reading the connotation of the
signs he perceives there. This article attempts to examine the opposite
and contradictory messages that constitute ambiguity in The Camp
through three representative scenes. First, it observes the conflict
between Franco and the two opposing signs at the beginning; then it
studies Emma's ambiguity through the disagreement between Emma's
appearance and motion; and finally it tries to find out how the opposing
structure creates the ambiguity of the last scene. Also this article would
like to analyze how the intertexts that appear explicitly or implicitly in
this work help to clarify the ambiguous content.

Key Words: Griselda Gambaro/ El campo/ Ambiguity/ Intertextuality/


Facism

* 이 논문은 2016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6S1A5A2A01927793)
** 울산대학교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avionsun@ulsan.ac.kr. 단독저자)
2 스페인라틴아메리카연구 제14권 1호

송병선(2021), 「모호성과 예언적 기능: 그리셀다 감바로의 수용소 읽기」, 스페인


라틴아메리카연구, 14(1), 1-24.

아르헨티나의 극작가 그리셀다 감바로는 라틴아메리카 현대연극의 대표자 중의


하나이다. 감바로의 작품은 정치 참여와 미학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대표적인
본보기이며, 아르헨티나뿐만 아니라 많은 라틴아메리카 국가가 경험한 권력 남용과
폭력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글의 분석대상인 『수
용소』는 그리셀다 감바로의 네 번째 극 작품이며, 1967년에 발표되어 1968년에 처
음으로 상연되었으며, 초연 당시 관객과 비평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 작품은
군사독재가 끝난 1984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다시 상연되면서 재조명된다. 이
런 현상이 일어난 것은 모호성이 이 작품의 핵심이며 지배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
리고 『수용소』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으로는 결코 겉의미로 해석되지 않는다는 것
이다. 이 작품은 언어 기호와 비언어 기호로 가득하고, 이 기호들을 해석해야 그
시설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작품에서 마르틴은 계속해서 이
런 기호를 해석하고, 이 해석행위는 그가 감지하는 기호의 속의미를 읽는 연습이다.
그래서 이 글은 『수용소』에서 모호성을 구성하는 대립적이고 모순적인 메시지의 충
돌을 대표적인 세 장면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우선 시작 부분에서 프랑코와 대
립적인 두 기호의 충돌을 살펴보고, 이후 엠마의 외모와 동작의 불일치를 통해 엠
마의 모호성을 연구하며, 대립적 구조가 어떻게 마지막 장면의 모호성을 만드는지
알아본다. 그런 다음 이 작품에서 명시적 혹은 암시적으로 나타나는 상호텍스트들
이 모호한 내용을 분명하게 밝히는데 어떻게 도움을 주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주제어: 그리셀다 감바로/ 수용소/ 모호성/ 상호텍스트성/ 파시즘

1. 들어가는 말: 감바로의 초기 연극 세계와 수용소

아르헨티나의 극작가 그리셀다 감바로(Griselda Gambaro, 1928~ )는


라틴아메리카 현대연극의 대표자 중의 하나로, 오늘날 국제적으로 널리 인
정받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소개되지 않은 작가이다. 일반적으로
감바로의 작품들은 정치 참여와 미학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대표적인
본보기이며, 아르헨티나뿐만 아니라 많은 라틴아메리카 국가가 경험했고 인
간관계에서 자주 나타나는 권력 남용과 폭력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Sánchez Acevedo 2012, 101).
그리셀다 감바로의 창작 작업은 특정 그룹에 속하지 않고 전개되었으며,
당대의 많은 아르헨티나 극작가와 달리 연극계 내부와 상대적으로 거리를
두고 이루어졌다. 감바로는 1963년에 『담장 Las paredes』을 발표했고,
모호성과 예언적 기능:
그리셀다 감바로의 수용소 읽기⋅송병선 3

1965년 8월에 두 번째 작품인 『어리석음 El desatino』으로 연극계에 널리


알려졌다. 이 작품은 1960년대 아르헨티나 아방가르드 예술의 핵이라는
‘디 테야 Di Tella’ 극장에서 상연되며, 잡지 《연극 20 Teatro XX》이 수여
하는 현대 아르헨티나 작가 최고상을 받는다. 그러자 ‘반성적 사실주의자
(realistas reflexivos)’1)와 ‘신전위주의자(neovanguardistas)’의 논쟁이 촉
발되는데, 반성적 사실주의자들은 감바로의 작품이 아르헨티나의 사회정치
적 현실에서 동떨어진 형식주의라고 혹평했다.2)
이후 감바로는 『샴쌍둥이 Los siameses』(1965), 『수용소 El campo』
(1967)와 같은 극 작품을 썼지만, 아르헨티나 사회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이
지 않으며,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의 잔혹극 혹은 베케트(Samuel
Beckett)나 이오네스코(Eugène Ionesco), 또는 핀터(Harold Pinter)의 부
조리극 같은 유럽 연극의 경향을 따른다는 비판을 받았다.3) 그러나 주제를
살펴보면, 1960년대에 발표한 이 네 작품은 권력 남용과 그로 인한 종속과
예속을 문제시하고 있으며, 희생자-가해자, 억압자-피억압자의 관계에 초점
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의 분석대상인 『수용소』는 그리셀다 감바로의 네 번째 극 작품이
며, 해외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라틴아메리카 잔혹극의 대표작이다. 이 작
품은 후안 카를로스 옹가니아(Juan Carlos Onganía) 장군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이듬해인 1967년에 발표되어 1968년에 처음으로 상연되었으며, 초
연 당시 관객과 비평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유럽 연극이론의 영향을
받아 유럽을 주제로 쓰면서, 작품이 상정하는 나치 수용소라는 주제가 아르

1) 반성적 사실주의자들은 이전의 사실주의 미학 요소들을 취하지만, 1950년대부터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널리 유포된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신사실주의 새로운 요소들을 통합하
여 재가공하면서, 아르헨티나 중산층의 문제를 반영하는 연극을 추구한다. 주인공들은 대
부분 평범하며 이해받지 못하고 적응하지 못하며 실패한 인물이다.
2) 이에 관해 자세한 것은 Kive Staiff(1992)를 참고할 것.
3) 많은 비평가가 감바로의 작품을 유럽 잔혹극과 부조리극의 추종자라고 여겼지만, 감바로는
그런 계보를 부정하면서, 자기는 아르헨티나의 그로테스크 연극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
다. 여기서 말하는 ‘아르헨티나 그로테스크(el grotesco criollo)’는 아르만도 디세폴로
(Armando Discépolo)가 사용한 용어로 1960년대에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Pottlitzer
2004, 103). 이런 점에서 감바로가 부조리극이나 잔혹극의 시학을 흡수하여 사용한 것이라
고는 말할 수 없고, 아마도 자신을 둘러싼 아르헨티나의 복잡한 현실을 설명하는 기법을
찾다가 유럽 잔혹극과 부조리극과 비슷한 전략을 구사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조리극과 잔혹극 시학이 감바로 시학의 몇몇 측면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그 시학을 흡수하여 적용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4 스페인라틴아메리카연구 제14권 1호

헨티나의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이유로 외면받은 것이다.


『수용소』는 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행위는 세 등장인물에 집중된다.
그들은 프랑코, 마르틴, 엠마이다. 마르틴은 회계원이다. 이 작품은 그가 일
하기 위해 시골의 어느 시설로 가고, 그곳에서 시설 책임자 프랑코와 만나
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치 친위대 제복을 즐겨 입는 프랑코의 행동은 스페
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이름을 연상하게 한다. 마르틴은 때때로
소란스럽고 불안한 상황(아이들 목소리, 개 짖는 소리, 신음)을 감지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른다. 프랑코는 다정하게 행동하기도 하고,
공격적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그곳을 지배하는 모호한 상황과 분위기는 엠마라는 인물이 도착할 때까
지 지속된다. 유일한 여성 인물인 엠마는 그곳의 불길한 성격과 프랑코의
진정한 신원을 밝혀주는 단서가 된다. 엠마는 나치 집단수용소에 있는 것처
럼 육체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고통받았다는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보여
준다. 팔에 찍힌 낙인, 상처 입은 손, 박박 밀은 머리, 틱 현상, 가려움증,
기억 상실 등이 그것이다. 그녀는 모든 상황의 주인인 프랑코에게 전적으로
지배되어 몰개성 상태에 있다. 그러나 마르틴은 사실을 정확하게 감지하지
못한다. 엠마는 수용소의 완벽한 산물, 즉 개성이 거의 완전히 소멸한 존재
이다. 반면에 마르틴은 그 소멸 과정을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것을 확
인해주듯이 점차 파멸로 나아간다.
엠마는 자기가 피아노 연주자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연주하지 않고 연
주하는 척만 한다. 3장의 연주 장면은 피아노 독주회를 우스꽝스럽고 기괴
하게 흉내 낸다. 죄수복을 입은 인물들이 나치 친위대와 함께 들어온다. 엠
마는 피아노를 치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실패한다. 마르틴은 억지로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하며, 병사들의 명령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움직인다. 그는 협
박받고 매 맞은 엠마처럼 자동인형이 된다. 4장은 두 사람이 탄압자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심지어 프랑코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서 두 사
람에게 ‘수용소’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라고 부탁한다. 마르틴과 엠마는 떠
나라는 권고를 받아들이지만, 프랑코의 부하들은 마르틴의 집까지 뒤쫓아온
다. 그리고 집 안으로 들어와 마르틴을 협박하면서, 마르틴에게 신원을 묻
고, 두 사람을 쉽게 잡을 수 있는 먹잇감처럼 다룬다. 관리들, 즉 프랑코의
부하들은 마르틴에게 주사를 놓아서 제압한다. 이후 쇠도장으로 낙인을 찍
모호성과 예언적 기능:
그리셀다 감바로의 수용소 읽기⋅송병선 5

으려고 하는데, 이 작품은 이렇게 끝난다.


이 작품에는 구체적인 시간이 언급되지 않으며, 공간의 모호성도 강조된
다. 그래서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으며, 모호한 공간과 시간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카프카적인 세계로 빠져든다. 마르틴은 그 누구에게도 강요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그 시설로 들어와 일하지만, 그곳이 어떤 곳인지,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곳에서 서로 모순된 메시지와 이상하고 왜
곡된 현실이 제시되기 때문이다. 그리셀다 감바로는 이런 모호성
(ambiguity)을 통해 여러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
모호성의 힘은 이 작품이 군사독재가 끝난 1984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서 다시 상연되면서 재조명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80년대에
이 작품은 아르헨티나가 겪은 폭력의 분위기와 부에노스아이레스 말투를
사용하는 프랑코를 통해 아르헨티나의 현실과 연결되었던 것이다
(Pellettieri 2003, 315). 이렇게 초연 당시 아르헨티나 현실을 외면한다고
비판받은 이 작품은 재상연되면서 사실주의 극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그것
은 관객들이 군사평의회에 반대한 사람을 납치하고 고문하는 수용소를 그
리고 있으며, ‘더러운 전쟁’ 기간에 정부의 잔인함과 폭력으로 점철된 추한
현실을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은 ‘국가 재건 과정(Proceso de
Reorganización Nacional)’이라고 불린 군사독재보다 10년 앞서 발표되었
지만, 모호성의 효과로 관객들은 아르헨티나를 수용소로, 즉 체포하고 고문
하며 죽이는 곳으로 그리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Puga 2008, 146).
감바로는 1967년에 폭력으로 점철된 아르헨티나의 과거를 연구하고 파시
즘의 부활을 보면서 이 작품을 썼고, 그래서 당시 진행 중인 현실, 즉 국가
가 집단수용소로 변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모호
성을 통해 1976년에 시작되는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이라는 냉혹한
현실로 전개될 정치폭력을 예견했고, 그래서 이 작품이 발표되고 10여 년
이 지난 1970년대 말부터 감바로가 그린 집단수용소는 사실주의적 효력을
발휘했다.4) 오스발도 폐예티에리(Osvaldo Pelletieri)는 이렇게 설명한다.

최근 국내에서 일어난 새로운 정치적‧사회적 사건 때문에 이 작품은

4) 이렇게 초연 당시 부조리하고 이질적으로 보였던 것이 1984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


은 감바로가 외국의 연극 경향을 단순히 복제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6 스페인라틴아메리카연구 제14권 1호

사실주의적 성격을 획득하면서 정말로 소름 끼칠 정도로 예언적이었음을


보여주었다. 포학한 권력 앞에서 거의 저항하지 못하는 주인공, 이후 전
혀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 앞에서 복종하고 절대적으로 고독하게 있는 주
인공은 1984년 관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은유적 표현이었다(1989,
80).

스페인 왕립학술원 사전(DRAE)은 모호성을 여러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


거나 다양한 해석을 허용하며, 따라서 의심이나 혼란 혹은 불확실성의 동기
를 제공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여기에는 말이나 행동으로 자신의 행위를 분
명하게 규정하지 못하거나 밝히지 않는 것도 모호성에 포함될 수 있다. 모
호성은 불확실성이나 혼란을 초래하거나, 혹은 행위나 실제 의도를 숨기는
것을 상정하기에 부정적인 속의미5)가 들어 있다(Navarro Cameo 2012,
292). 하지만 『수용소』에서 모호성은 부정적인 면보다는 몇몇 위대한 예술
작품이 보여주는 ‘예언성’을 드러내는 데 큰 역할을 한다(Staiff 1992,
228).
이런 점에서 모호성은 이 작품의 핵심이며 지배 요소이다. 그리고 『수용
소』의 중요한 특징으로는 결코 겉의미로 해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작
품에는 언어 기호와 비언어 기호로 가득하고, 이 기호들을 해석해야 시설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작품에서 마르틴은 계속해서 이
런 기호를 해석하고, 이런 행위는 마르틴이 그곳에서 감지하는 기호의 속의
미를 읽는 연습이다. 마르틴은 점차 그곳의 속성을 이해하게 되지만, 그 속
성은 끊임없이 감추려는 프랑코의 의도로 숨겨진다.
그래서 이 글은 『수용소』에서 모호성을 구성하는 대립적이고 모순적인
메시지의 충돌을 대표적인 세 장면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우선 시작 부
분에서 프랑코와 대립적인 두 기호의 충돌을 살펴보고, 이후 엠마의 외모와
동작의 불일치를 통해 엠마의 모호성을 연구하며, 대립 구조가 어떻게 마지
막 장면의 모호성을 만드는지 알아본다. 그런 다음 이 작품에서 명시적 혹
은 암시적으로 나타나는 상호텍스트들이 모호한 내용을 분명하게 밝히는
데 어떻게 도움을 주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5) 이 글에서는 denotation을 ‘외연’ 대신 ‘겉의미’로, connotation을 ‘내포’ 대신 ‘속의미’라


는 용어로 대체하여 사용한다.
모호성과 예언적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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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모호성 분석: 대립적이고 모순적인 메시지의 충돌

이 작품은 제목부터 모호하다. 제목 ‘campo’는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것은 들판, 시골, 휴양지, 군 막사 혹은 수용소라는 의미로 사용된
다. 모호하게도 이 작품에서는 이런 의미들이 모두 구현된다. 여기서 들판
이나 시골 혹은 풀밭은 야외에서 즐겁게 뛰놀 수 있는 공간이다. 다른 하나
는 그런 놀이가 있지 않은 공간이다. 전자는 즐거움과 편안함을 뜻하고, 후
자는 심각하고 진지하며, 잠재하는 폭력을 의미한다. 이런 두 의미는 서로
모순되고 공존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더 이상의 정보가 없기에
이 충돌을 해결할 수 없으며, 이렇게 이 작품은 처음부터 모호한 분위기로
시작하지만, 이런 모호성은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그것은 처음에는 겉으로
보기에 시골에 설치된 아이들 캠프장처럼 보이지만, 이후 구체적이지 않은
곳에 설치된 잔학한 집단수용소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제목은 짧고
단순하지만, 이 작품의 성격과 주제를 적절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렇게 제
목은 앞으로 일어날 것과 관련하여 관객의 기대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일종의 예비 기호로 작용한다(McAleer 1982, 161).

2.1. 시작 부분의 모호성: 프랑코와 대립적인 두 기호의 충돌

한편 극 작품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문학작품의 시작 부분은 필수 정보


를 전달한다. 『수용소』를 시작하는 1장의 무대장치는 단순하다. “반짝이는
하얀 벽. 무대 왼쪽으로 가구로는 책상 하나, 의자 하나, 안락의자 하나가
전부이다. 휴지통 하나가 있다”(Gambaro 1992, 233).6) 이것은 그리 특별
하지 않은 전형적인 사무실이며, 암시하는 의미는 효율성과 몰개성이다. 그
런데 사무실의 용도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될 징후도 없으며, ‘그곳’이 어떤
성격의 장소인지를 보여줄 기호도 없다. 작중인물 마르틴은 ‘그곳’으로 들
어오고, 책임자를 기다리는 동안 모호한 소리를 듣는다. 아이들의 고함인
데, 이상하게도 딱딱하고 권위적인 명령과 뒤섞여 있다.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모호하기 짝이 없는 “하나! 둘!”(233)이다. 이런 소리와 더불

6) 앞으로 작품 『수용소』를 인용할 경우는 괄호 안에 숫자로만 표시한다.


8 스페인라틴아메리카연구 제14권 1호

어 일종의 신음이 들리는데, 너무나 희미해서 환청과 같다. 마르틴은 깨끗


한 책상 표면을 살펴보는데, 거기에는 인터폰만이 놓여 있다. 인터폰 버튼
하나를 누르자, 맥 빠지고 지루한 음악이 들린다. 그는 빙긋 웃고는 다시
버튼을 누른다. 그러자 밖에서 들려오던 소리도 멈춘다. 그는 앉는다.
『수용소』의 시작 부분은 기호들이 암시하는 의미에 따라 크게 두 그룹으
로 나뉜다. 첫 번째 그룹은 아이들의 소리로, 이것은 즐거움과 순진한 놀이
라는 속의미를 지닌다. 작품의 지문(地文)에서 명시적으로 지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상하게”(233)라는 말은 이런 소리가 권위적인 명령과 대립 관계
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 그룹의 기호는 신음과 명령을 포함하
며, 고통과 내키지 않는 의무라는 암시적 의미를 띤다. 명령조의 권위적 말
투는 다정한 말투와 대립 관계를 이룬다. 그런데 그것은 놀이라는 맥락에서
는 생각할 수 없기에 신음처럼 뜻밖의 것이 된다.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은
명령을 받는 아이들과 모순되며, 그런 대조는 혼란스럽고 모호한 분위기를
만든다. 이런 혼란은 신음이라는 요소로 더 강화되는데, 그것은 실제로 무
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르틴이 감지하는 정보
는 너무나 모순적이다. 하지만 마르틴은 인터폰 단추를 누르면서 그 미스터
리를 해결한 듯이 보이는데, 그 소리는 녹음된 것이며, 그래서 실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시 후 다른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가 사무실 밖의 복도를 뛰어
다니고, 성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것 같은 목소리가 소리친다. “뛰어! 그
쪽이 아니야! 그쪽이 아니란 말이야!”(233). 아주 가까이서 성난 개 짖는 소
리가 들린다. 누군가를 물어뜯는 것 같은 개의 소리이다. 문이 잠시 빼꼼히
열리더니, 다시 쾅 하며 닫힌다. 모든 소리가 멈춘다.
개가 짖고, 누군가가 뛰며, 문이 힘껏 닫히는 청각 기호는 또다시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속의미는 하나가 아닌데, 그것은 기분 좋은 상
태일 수도 있고 분노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뛰고 문이 힘껏 닫히는
것은 놀이일 수도 있고, 진짜 사람사냥일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라면 잔인
함과 위험을 암시하는데, 놀이라는 기호는 잔인한 사람사냥이라는 의미와
충돌된다. 개 짖는 소리는 의심할 바 없이 위협을 암시하는 기호이다. 이
기호가 덧붙여지면서, 이 텍스트는 갈수록 모호해지고 불안해진다. 또한 이
런 모든 행위가 무대 바깥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어떤 상황인지 이해하기
모호성과 예언적 기능:
그리셀다 감바로의 수용소 읽기⋅송병선 9

매우 힘들다. 갑작스러운 침묵 역시 이런 몰이해를 가중하고, 이것은 그 장


소의 분위기를 모호하고 위협적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잠시 후 그곳 책임자인 프랑코가 들어온다. 눈부신 나치 친위대 제복을
입고 손목에는 채찍이 묶여 있다. 그것은 나치 친위대가 쓰는 길고 가늘며
꼬인 가죽 허리띠이다. 그렇지만 그는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는 젊으며, 얼굴은 매우 다정해 보인다. 몹시 바쁜 것처럼 들어온다. 너무
많은 서류와 오래된 서류철을 손으로 들고 있거나 팔 밑에 끼고 있다. 그가
방으로 들어오면서 그것들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옷과 채찍으로 독자는 이 작품이 나치 독일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나치 독일이 범한 잔혹한 행위인 홀로코스트를 떠
올린다. 여기서 처음으로 이곳의 정체를 알 수 있는 직접적인 기호가 등장
하면서, 시골 휴양지가 아니라 ‘집단수용소’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프랑코의
얼굴과 제스처와 관련된 기호는 다정함을 암시하고, 심지어 둔하고 비효율
적임을 뜻하기도 한다. 이런 호의와 친절은 나치 제복과 채찍이 전하는 잔
인함과 충돌한다. 이렇게 두 개의 대립하는 의미가 청각 기호가 전달하는
것과 연결되면서 앞에서 설정된 모호성을 유지한다.
프랑코의 역할과 관련해서는 그가 선의의 사람임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마르틴은 그에게 왜 그 제복을 입느냐고 묻고, 프랑코는 “좋아하기 때문이
지요. 우리는 살면서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하지요. 그러면서 나는 그 누구도
해치지 않아요. 난 무장하고 있지 않아요”(235). 이 말은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며, 무기를 갖고 있지 않기에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없음을 드러낸다.
제복은 그가 좋아하기에 선택한 것이다. 그러면서 프랑코는 나치의 행동과
연결되어 있음을 부정하며, 또한 암묵적으로 청각 기호로 전달된 집단수용
소라는 가공의 메시지를 반박한다.
그러나 때때로 대화를 나누면서 프랑코의 의도가 그다지 순수하지 않다
는 것이 드러난다. 물론 그것은 암시라는 차원을 넘어서지 않는다. 예를 들
어 대화하면서 프랑코는 마르틴에게 공산주의자나 유대인이 아니냐고 묻는
다(235). 그러나 속의미 차원에서 보자면, 나치 제복 때문에 그 말은 집단
수용소에서 벌어진 잔혹한 행위와 유대인 학살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런 기호는 고립되어 있고, 속의미는 프랑코의 또 다른 말들과 일치하지 않
는다. 그래서 ‘유대인’이냐고 물었던 진정한 의도는 숨겨지고, 집단수용소라
10 스페인라틴아메리카연구 제14권 1호

는 위협적인 분위기도 확대되지 않는다. 마르틴은 여러 모순된 정보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려고 하지만, 그 노력은 성공하지 못한다.

2.2. 엠마의 기호와 모호성: 외모와 동작의 불일치와 맥락 없는 말들

엠마는 머리를 삭발한 젊은 여자이며, 거친 회색 천의 긴 상의를 입고


있고, 맨발로 다닌다. 오른쪽 손바닥에는 검푸른 상처가 있고, 얼굴에는 오
랫동안의 고통으로 엉망이 된 흔적이 새겨져 있다. 마르틴을 만나자, 그녀
는 몸을 곧추세우고서 일어나 미소 짓는다. 마치 연기를 하듯이 엄청나게
노력하면서, 환영한다고 손짓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녀의 손동작은 외모
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파티복을 입은 여자의 제스처이자 행동이
다. 목소리는 고상한 체하며, 심지어 우쭐댄다. 그러나 목소리가 그대로 드
러나면서 그녀의 괴로워하고 버려진 모습과 일치할 때도 있다. 엠마가 보여
주는 외모는 집단수용소 죄수의 모습을 투영하고, 마르틴도 이 사실을 깨닫
는다. 하지만 그녀의 말투는 휴양지를 방문하는 상류층 여인의 것처럼 보인
다.
그러나 가끔 가면이 부서지고 엠마를 억누르는 긴장이 드러나는데, 이것
은 무엇보다도 그녀가 긁는 데에서 나타난다. 여기서도 엠마는 모호성을 드
러낸다. 그녀는 계속된 위장의 산물이다. “그녀는 손을 비빈다. 처음에는
시치미를 떼면서 비비지만, 그런 다음에는 갈수록 급하다는 표정으로 손과
팔, 그리고 온몸을 긁는다. 동시에 웃으며 아주 사교적이고 유쾌한 척하면
서, 우아하게 계속 말한다.”(246) 엠마는 완전히 정신 나간 인물이 아니라,
어느 정도 현실감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의 자기기만과 꾸미기
는 의식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녀는 목숨을 구하고 도망
치려고 짐짓 꾸미는 것이다. 『수용소』의 가해자인 프랑코의 고문 계획은 엠
마에게 그녀의 것이 아닌 개성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이다(Ortiz
Padilla 2017, 287). 그녀의 사형집행인인 프랑코는 그녀의 공연 연출자이
기도 하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엠마는 목숨을 구하려고 복종하지만, 자신의
복종이 단지 노예화로만 기능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4장에서 마르틴은 엠마와 함께 일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새로운 청각
기호가 들려온다.
모호성과 예언적 기능:
그리셀다 감바로의 수용소 읽기⋅송병선 11

(갑자기 개 짖는 소리와 기관총 사격 소리가 들린다)


마르틴: 저게 뭐죠?
엠마: (서두르면서) 여우 사냥이에요, 초대받지 못했어요? 난 예전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 부스럼 때문에…… 그리고
이 쓸모없는 손 때문에. 쓸모없는 건 아니에요, 난 일할 수 있어
요. 난 사냥을 좋아해요. 당신은 그렇지 않나요?
마르틴: (일을 멈추고서 괴로운 듯이 그녀에게 대답한다) 아니에요.
엠마: (급하게) 아니에요, 아니에요. 일을 멈추지 말아요. 시키는 대로 해
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혼나게 돼요! 난 수를 놓고 있어요.
새끼 염소예요. 자, 보세요. (다시 생각하고는) 아니에요, 그냥 거
기에 있어요(273).

개 짖는 소리와 기관총 소리는 집단수용소의 잔인함에 해당한다. 이제


소리는 분명한 폭력과 위험을 보여주고, “재미있기도 하고 성나기도
한”(233) 모호한 기호는 사라진다. 엠마는 그것이 여우 사냥에서 비롯된다
고 말하지만, ‘서두르면서’와 ‘급하게’라는 지문은 정말로 ‘여우 사냥’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그리고 방금 들은 소리 앞에
서 엠마는 초조해한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 급하게 대답했으며, ‘인간 사냥’
임을 감추려고 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마르틴은 그럴 수 있다고 의심한다.
엠마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결정적인 모호함은 여우
사냥이라는 겉의미 차원의 것과 정반대일 수 있다는 결론을 암시한다. 그리
고 엠마의 말은 이런 생각을 재확인해준다. 가령 “난 일할 수 있어요”라면
서 일할 필요성을 드러내고, 그것은 약해지지 않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집
단수용소의 과정을 떠올린다(McAleer 1982, 167). 집단수용소라는 사실이
갈수록 분명해지지만, 마르틴은 구체적으로 확인하지 못한다. 그는 의심하
지만, 아직도 모순적인 정보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한다. 엠마와 마르틴은
대화하면서 같은 상황을 언급하지만, 내용은 완전히 모순된다.

엠마: 일하도록 해요! 아무 일도 없어요. 프랑코는 내게 영화를 들려주었


어요. 말과 기사들, 승마복, 윤나는 부츠……
마르틴: 누구를 쫓는 거죠?
엠마: 채찍 소리가……
마르틴: 저건 기관총 소리예요. 문이 열려 있고…… 자기들이 자유의 몸
이라고 생각했나 봐요. 거짓말 같지만, 그게 현실이에요. 문은
12 스페인라틴아메리카연구 제14권 1호

열려 있고, 웃는 얼굴로 떠나라고 권하면서……


엠마: 물론이지요, 그들은 사냥하면서 몹시 즐겨요…… 어서 쓰세요, 나
는 자수를 끝내야만 해요. 연필을 들어요!
마르틴: 그들은 나갔고 다른 사람들은 뒤쫓았어요. 서치라이트를 켰고,
목표물은 충분했고 완벽했어요(273).

이 대목은 이 작품의 마지막 장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이며, 동시에 마르


틴의 언어는 죄수들을 사격 연습용으로 사용했던 집단수용소에 대한 기억
을 보여준다. 반면에 엠마는 동물사냥의 몇몇 모습을 드러내며, 마치 휴양
지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 같다. 여기서 마르틴이 분명하게 묻지만, 사냥의
대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 부재의 기호는 희생자가 언
급된 여우가 아님을 암시한다. 그리고 엠마는 ‘채찍’을 언급하지만, 그것은
기관총 소리와는 아무 연결 관계도 없으며, ‘채찍’이 의미하는 현실은 현재
상황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렇게 모호성이 만들어지고,
마르틴의 생각과 병치 되면서 그것이 사람사냥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일
리가 있음을 드러낸다.

2.3. 마지막 장면의 모호성: 대립적 구조의 의미

마지막 장에서 마르틴은 그곳이 제2차 세계대전의 집단수용소와 같은 곳


이며, 그때까지의 설명은 모두 거짓말이라는 확신에 이른다. 그는 엠마와
함께 그곳에서 나와 그의 집으로 간다. 그곳은 안전하지만, 아직도 소리가
들린다. “처음과 똑같은 아이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만, 물론 명령이
나 신음은 없다.”(282) 이것은 밖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있음을 의미하며,
신음과 명령이 없다는 사실은 이제 권위적이거나 억압적인 상황이 존재하
지 않으며, 아무도 고통받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소리가 첫 장면
과 유사하기에, 속의미 차원에서 집단수용소를 떠올리게 된다. 그렇게 그들
은 위험에서 벗어나 있지만, 아직도 집단수용소와 휴양지가 대립하면서 모
호함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더 많은 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 속에
서, 그리고 그것이 점차 줄어들기도 전에, 고통의 비명과 같은 소리가 지나
간다”(283). 이 변화는 마르틴의 집에 있으면서도 안전함을 의문시한다는
모호성과 예언적 기능:
그리셀다 감바로의 수용소 읽기⋅송병선 13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구체적인 것은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계속 놀고 있다. 이런 모순적 요소들이 등장하면서 긴장감이 조성되는 순
간, 모르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가 그곳에 있게 된 것을 설명한다. “믿어주
세요, 나는…… 나는 좋은 사람이고, 아무도 괴롭히고 싶지 않습니다. 모두
가 나처럼 되길, 그리고…… 그리고 [……] 사실, 모두가 행복하길 바랍니
다”(288-289).
이 말은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프랑코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순진함으로 가득한 겉의미가 아니라, 반대의 속의미
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은 잔인한 짓을 할 수 있
다는 것이다. 그는 “유대인인가요?”와 “공산주의자인가요?”(289) 라고 이
작품의 시작 부분에서 프랑코가 던진 질문을 그대로 반복한다. 이런 질문은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는 잔인한 사람이라는 속의미를 확인한다.
이렇게 끝까지 대립하는 두 요소가 계속 충돌하면서 작품은 모호성을 유
지한다. 등장인물의 말은 선의를 보여주지만, 비언어적 요소들은 위험과 악
의를 전한다. 진실은 간호사들이 도착할 때까지 숨겨져 있고, 마르틴에게
예방주사를 놓고 낙인을 찍어 숫자를 새기려고 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 그
러면서 그 장소는 사실상 집단수용소이며, 도망칠 수 없는 곳임이 드러난
다. 청각 기호인 소리는 작품 전체를 통해 진실을 전하지만, 거짓을 전하는
언어 때문에 모호성은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된다.
이렇게 『수용소』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호성이 지배한다. 그리고 이
런 대립의 결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무서운 감정이나
심지어 자기 목숨도 그런 모호함에 좌우된다는 느낌을 드러낸다. 집단수용
소임을 보여주는 징후들은 무대 밖에서, 그리고 때때로 인터폰과 같은 설명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다. 소리만이 실제로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
지고 있는지 알려준다. 하지만 이런 소리조차 많은 것이 의도적으로 모호하
다. 가령 작품 처음에 나오는 신음이 그렇다.
마르틴은 결코 사건 자체를 목격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프랑코와 엠마의
말은 마르틴의 그런 느낌조차 부정한다. 프랑코와 엠마에 따르면, 의심스러
운 집단수용소는 아이들이 뛰놀고 여우 사냥을 하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사
람들은 이성적이고 정돈된 의사소통 방식이라는 이유로 언어의 효용성을
믿는다(McAleer 1982, 170). 이런 이유로 마르틴은 충격적인 증거를 듣거
14 스페인라틴아메리카연구 제14권 1호

나 보면서도 수동적인 방식으로 반응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어요”(273)


라는 당국의 말을 수긍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용소』에서 말은 속
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이런 점에서 『수용소』는 단순한 해석에 도전하면서 겉의미의 위기를 보
여주는 사례이다. 이런 의미의 위기와 더불어 『수용소』는 제라르 주네트
(Gérard Genette)의 문학 의미론 연구에서 핵심이 되는 ‘존재함(être)’과
‘나타남(paraître)’의 대립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존재함은 진실이며 소리를
비롯한 비언어적 기호로 나타나지만, 언어가 주를 이루는 ‘나타남’은 거짓
이다. 여기에는 두 개의 현실이 동시에 존재한다.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
인 것, 위장된 것과 실제적인 것이다. 가시적인 것은 예행 연습한 공연 같
은 냄새가 나지만, 다른 현실은 눈에서 벗어나 있다. 그것은 무대 뒤에 있
으며, 단지 미약한 징후만 보일 뿐이다. 이렇게 모순되는 두 개의 요소가
나타나면서 작품은 모호해지고, 마르틴은 자기 상황의 진실과 맞서지 않고,
결국 그것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그렇게 수용소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보
다도 언어로 가장한 진실의 가면을 벗기는 일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3. 상호텍스트성 분석과 모호성의 해석

현대 문학 이론과 문화이론은 상호텍스트성 이론에 바탕을 두고 그 어떤


문학작품도 사회적 규약이나 문화 체제, 그리고 다른 문학적 혹은 비문학적
형식에서 완전하게 독립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그 어떤 작품
도 이전과 이후의 작품과 고립되어 자족적 의미를 갖지는 못하며, 따라서
모든 작품 분석이나 해석은 반드시 일련의 다른 작품과의 관계를 포함해야
하고, 그런 관계 속에서 그 작품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
작품에서 의미를 추출하거나 발견하는 이런 독서 과정은 그 작품이 언급하
고 있고, 그런 관계망 속에서 서술되는 다른 텍스트로 옮겨가게 이끈다. 이
런 점에서 각 문학작품은 여러 작품이 교차하는 장소이며 수많은 담론으로
짜여 있고, 기존에 존재하는 의미로부터 파생된다고 이해될 수 있다.
모호성과 예언적 기능:
그리셀다 감바로의 수용소 읽기⋅송병선 15

상호텍스트성에는 여러 범주가 있다. 예를 들어 주네트(Gérard Genette)


는 인용, 표절, 언급의 세 형태를 이야기하고, 로브 포프(Rob Pope)는 명
시적, 암시적, 추측적 상호텍스트성을 제시한다. 그러나 상호텍스트의 분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호텍스트의 의미산출과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이다.
이런 작업은 추상적인 평으로 페이지를 장식하면서 문학작품에 관해 사색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독서의 즐거움을 되돌려주거나 증가시키는 행위
로, 무엇보다 독자의 사전 지식이나 능력을 통해 작품을 이해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그리셀다 감바로 작품의 상호텍스트 연구는 신화와 그리스
고전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특히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프로메테우스,
오르페우스는 감바로의 작품을 분석할 때 자주 등장하는 신화 혹은 작품이
다. 이 상호텍스트는 그리셀다 감바로 극 작품의 주요 주제가 무엇인지 보
여주는 데 이용된다. 즉, 권력 남용, 제도적 폭력, 기억과 망각, 의사소통의
불가능성, 거짓 지배권을 의문시하는 페미니즘이 드러난다. 그러나 『수용
소』의 경우는 이러한 것보다는 역사적 담론과 같은 것이 사용되면서, 사회
정치적 현실의 문제를 심화한다.7) 여기서는 그리셀다 감바로의 『수용소』의
공간과 관련된 몇 가지 정치 역사적 상호텍스트를 살펴보고자 한다.

3.1. 이름과 나치의 문구들

우선 이름과 복장으로 볼 때, 프랑코는 이 작품에서 가장 대표적인 상호


텍스트 중의 하나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상황에서 그는 스페인의 독
재자를 연상시키게 하고, 이 작품에서 탄압과 폭력의 이름으로 작용한다.
프랑코는 이렇게 무대로 들어온다.

[...] 오른쪽 문이 열리고 프랑코가 들어온다. 그는 눈부신 나치 친위대


(SS) 제복을 입고 있고, 그의 손목에는 채찍이 묶여 있다. 그것은 SS가
사용하는 길고 좁게 꼰 허리띠이다. 그렇지만 그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
다. 그는 젊으며, 얼굴은 아주 다정하다. 그는 몹시 바쁜 것처럼 들어오
고, 수많은 종이와 낡은 파일들을 손에 들고, 혹은 겨드랑이에 끼고서
가져온다. 하지만 너무 많이 들고 온 탓인지, 그가 방을 가로지르자 서

7) 이것에 대해서는 Lorenzo, Alicia N.(ed.)(2018), Teatro e intertextualidad: Griselda


Gambaro, Mendoza(Argentina): Universidad Nacional de Cuyo를 참고할 것.
16 스페인라틴아메리카연구 제14권 1호

류와 파일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프랑코: (종이를 주우면서 온화하게 투덜댄다) 이 아이들! 이 아이들! 정
말 명랑하고 활기차요! (서류와 파일을 책상에 올려놓는다. 그리
고 자연스럽게 손목에서 채찍을 빼고, 책상 아래에 있는 발로
그것을 밀어버린다. 마르틴에게 손을 내민다) 드디어 내가 여기
있게 되었군요. 어땠나요? 많이 기다렸지요?(234).

프랑코라는 이름은 스페인의 독재자이자 나치 군대를 암시한다.8) 그는


여기서 voseo를 사용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말투를 구사한다. 그래서 독
재정권이 있었던 세 국가의 지시물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여기서 ‘다른 것’
을 의미하는 기호가 아니다. 즉, 텍스트는 관객/독자에게 공개적으로 그의
신원을 확인시키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
시 쓰기의 특별한 표현으로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상호텍스트 차원에
서 이름은 그들의 신원을 밝히고 해석할 수 있는 지시적 가치이자 속의미
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름 혹은 고유명사는 작품 속에서 다양한 동
기와 주제를 종합적으로 보여주고, 정체성을 드러내는 서사적 틀을 그리도
록 배열하면서 서로 연결된다.
여기서 서사적 틀은 ‘상호텍스트의 기억’ 방식으로 모이는 가치나 범주에
내재하는 사상적 흔적을 지닌다. 『수용소』에서는 프랑코는 명시적으로 존재
하는 역사적 인물이며, 암묵적으로 상황을 보여주고 작품의 주제와 연결된
등장인물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작품의 제목은 다양한 의미를 지닐
수 있지만, 불행하게도 여기서 제목은 독자/관객이 수용할 수 있는 여러
의미 세계에서 최악을 대표한다. 또한 3장의 거짓 공연에 동원될 제복 입
은 사람들과 죄수들, 그리고 프랑코 이외에도, 다른 인물이 홀로코스트의
명백한 기호를 보여주는데, 그녀는 엠마이다.
연극 작품의 기호들은 그녀를 모순적으로 특징짓는다. 그녀는 머리를 박
박 밀고 거친 천의 회색 셔츠를 입은 맨발의 젊은 여자로 묘사된다. 그리고
오른손 손바닥에는 자줏빛 상처가 있다. 또한 “파티복을 빛낼 수 있는 여인
의 동작과 행위”(246)를 하는 여자이다. 이 작품에서 “그녀의 동작은 겉모
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246)와 “그녀 목소리는 세련되지만, 실제 목소

8) 흥미롭게도 1966년에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르투로 이이아(Arturo Illia) 정부를 전복시킨


옹가니아 장군의 별명도 ‘프랑코’였다(Hodges 1991, 16).
모호성과 예언적 기능:
그리셀다 감바로의 수용소 읽기⋅송병선 17

리가 드러날 때면, 그것은 괴로워하고 버림받은 모습에 해당한다”(246)라는


지문(地文)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녀가 모순적인 존재임을 강조한다. 무대에
서 엠마는 수용소의 죄수로 나오지만, 이 조건은 결코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프랑코의 “어릴 적 친구”(259)로 소개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녀의 말 중에는 수용소의 규정된 메시지를 보여주는 것이 눈에 띄는데,
이것은 상호텍스트로 그곳의 성격을 드러내는 기호가 된다.

엠마 (모범생처럼): 방해받지 않고 일하게 될 거예요.


프랑코: 그게 바로 내가 요구한 거야.
엠마(같은 말투로): 노동은 당신을 자유롭게 하며……
프랑코: 이제 그만해.
엠마: 프랑코, 그에게 오후는 자유롭게 놔두나요? (마르틴에게) 당신을
위해 연주하겠어요. 그리고 선택된 소수를 위해서요. 정말 매력적
인 사람들을 위해서요(254).

“Arbeit Macht Frei”, 이 말은 흔히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


고 번역된다. 이 문구는 대부분의 집단수용소 문에 표어로 새겨져 있는데,
그중에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도 있다.9) “Arbeit Macht Frei”는 독일의
문헌학자 로렌츠 디펜바흐(Lorenz Diefenbach)가 1873년에 발표한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역사적 인물의 연상관계라는 명시적 기호로
구성된 프랑코는 엠마와 반대되는 위치에 있다. 엠마는 특정한 역사적 주체
와 동일시되지는 않지만, 그녀의 정체성에는 집단적 주체, 다시 말하면, 집
단수용소 죄수들의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
한편 나치의 ‘퇴폐예술(Entartete Kunst)’이라는 표현도 이 작품에서 암
묵적으로 사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음악은 모든 예술
중에서 가장 독일적인 예술로 인정받는다. 모차르트부터 바그너까지 수많은
작곡가가 이 독일 예술의 전통을 증명해준다. 『수용소』의 3장에서 엠마가
거짓으로 피아노 콘서트를 여는 장면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해석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전간기(戰間期)에 나치가 권력을 잡으면서, 국가 타락의 상징
으로 예술의 타락에 관한 논쟁을 주도한다. 그러면서 ‘퇴폐예술’이란 용어

9) 부헨발트(Buchenwald) 집단수용소에는 ‘Jedem das Seine’(각자에게 자신의 몫을, 자업자


득)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호엔촐레른 프로이센 왕가의 표어이기도 하다.
18 스페인라틴아메리카연구 제14권 1호

를 만들어 국민정신을 찬미하지 않고 볼셰비키나 유대 영향을 보여주는 근


대 예술을 비판한다. 『수용소』에서 이것은 아름다움을 주장하면서 집단수용
소의 공포를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방식과 관련된다.

3.2. 『수용소』와 「혼란」의 상호보완성

감바로 시학의 특징 중의 하나는 특정한 주제를 철저히 다루려는 의지인


데, 그래서 감바로는 다른 장르의 작품에서도 같은 주제를 전개하고 같은
이미지를 반복한다. 그래서 상호텍스트 관점은 감바로 작품에 내재하는 기
호의 모호함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수용소』의 경우, 감바로의 단
편 소설 「혼란 El trastocamiento」을 상호텍스트로 염두에 둘 필요가 있
다. 시작부터 「혼란」의 모든 기호는 모호한 서사적 분위기를 구성하는 『수
용소』의 문체와 유사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국내 여행이나 파티에 초대받을 수 있는 것처럼, 아


우슈비츠 집단수용소로 초대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엇을 볼 것인
지, 무엇을 발견할 것인지 알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그곳에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편안하지 않고 두 배나
더 혼란스러웠다. 그것은 고통이 기억 없는 본래의 살 위가 아니라, 오
래되고 괴로운 바로 그 고통 위에 앉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에서
내려 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길로 나아가 중앙건물로 다가가면서, 너무
나 놀라 아연실색했다. 풍경이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길은 아주 잘 다
듬어져 있었고, 나무는 빛났으며, 잎은 아주 깨끗하고 싱싱해서 비 온
다음의 나무 같았다. 햇빛이 비쳤다. 그는 햇빛이 환한 아우슈비츠를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눈과 진흙, 추운 겨울 하늘 아래서 벌
벌 떨며 의지할 데 없는 벌거벗은 남자들과 여자들만 생각했다. 시퍼렇
게 멍들고 곱은 살을 생각했지, 아무도 없는 오솔길이나 햇빛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Gambaro 2014, 141).

『수용소』에서는 그곳이 어디인지 구체적인 장소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다. 모욕적인 언사가 나타나고, 사악함은 프랑코의 의심스럽지만 다정한 동
작 혹은 엠마의 우아한 모습 뒤로 자취를 감춘다. 한편 「혼란」에서는 장소
명이 언급되면서 지시적 기능을 수행하는데, 그것은 『수용소』에서 나치 제
복을 입은 프랑코와 유사하다. 그리고 「혼란」에서 공간은 모순된 분위기와
모호성과 예언적 기능:
그리셀다 감바로의 수용소 읽기⋅송병선 19

함께 제시되는데, 거기에서 풍성한 초목은 역사적 지시물과 대조된다. 여기


에서는 극 작품에서 더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몇몇 일화들이 재생산된다. 우
선 여기에는 프랑코와 같은 인물, 즉, 다정하고 의뭉스러우며 비굴한 인물
이 있다.

책상 앞에 앉은 남자는 대화하기 시작했다. 주로 도로 상태, 수확물, 음


악에 관해 다정하게 말했다. “음악을 좋아하나요? 수상한 예술이지요.”
그는 적대적으로 말했다. […] 다른 사람은 끝없는 대화를 나눈 끝에 일
어났고, 그에게 한번 돌아보자고 권했다. 그는 수용소라고 말하지도 않
았고, 아우슈비츠라고도 말하지 않았으며, 집 혹은 시설이라고 말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귀찮거나 혹은 몇 시간만 함께 있을 방문객을 대할
때처럼 형식적으로 그를 대했다는 사실이다(Gambaro 2014, 142).

「혼란」은 이렇게 시작하면서 프랑코와 유사한 존재를 보여주면서, 매우


악명높다고 알려진 강제수용소의 분위기로 이끈다. 그것은 사무실, 수용소,
진부한 대화, 수상한 것의 평범성이다. 감바로는 분위기를 보존하고 이미지
를 반복함으로써 특정 주제를 철저하게 다루는 작가이다(Córdova Romero
2018, 48). 이것은 주로 징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가령 프랑코라는
이름은 사라지지만 장소 이름, 수용소 이름은 화자의 목소리에서 나타난다.
『수용소』에서 제복과 채찍의 비유는 이 단편 소설에서 왜곡된 다정함, 즉
예의 바름과 의미의 사악함으로 종합된다.
한편 작가는 「혼란」에서 극 작품에서는 약간만 언급된 사건들과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수용소』의 1장에 나오
는 ‘환청’이다. 「혼란」에서 무대의 환영적 현상, 즉 환청으로서의 신음은 다
음과 같이 일어난다.

오솔길을 따라가자 다른 건물이 나왔다. 석판 지방과 외부로 커다란 창


문이 난 건물이었다. 창문을 통해 사람들이 보였다. 문에서 대화를 나누
는 웅성거림이 들렸다. 그런데 기쁜 웃음소리를 듣자, 마치 비명을 들은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Gambaro 2014, 144~145).

여기서는 겉으로 보이는 장소가 실제로는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감바로는 강박적일 정도로 같은 주제를 다시
20 스페인라틴아메리카연구 제14권 1호

쓰고, 그것을 재평가한다. 이렇게 이 단편 소설은 짧지만, 『수용소』의 모호


한 내용을 분명하게 밝혀준다. 감바로가 단편 소설 「혼란」을 언제 썼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작품집 『최고의 것 Lo mejor que se tiene』(1998)에 처
음 수록된 것 같다(Córdova Romero 2018, 47). 따라서 극 작품 『수용소』
와 이 단편 소설 사이에는 30년이 넘는 시간적 거리가 존재하며, 그 기간
에 감바로는 망명을 경험하기도 했다. 아마도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로 인한
망명으로 그녀는 이 역사적 공간을 상상의 행위로 다시 살펴보면서 『수용
소』를 다른 시각으로 썼고, 같은 일화를 비판적으로 재가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맺음말: 모호성의 기능과 아르헨티나에서의 파시즘

『수용소』가 모호성으로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은 감바로가 아르헨티나의


현실만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작가는 권력에 관한
성찰을 보여주고, 독재정권의 결과를 보여주려고 했지, 아르헨티나의 특정
정권을 고발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멘데스 페이스는 이렇
게 지적한다. “여기서 나치즘은 은유로 사용되면서 아르헨티나 정권을 포함
한 모든 전체주의와 잔혹한 방법, 그리고 고문을 지칭한다.”(Méndez-Faith
1985, 837) 이런 보편성은 아르헨티나의 현실이나 지시물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 것에 바탕을 두지만, 감바로의 연극이 ‘반응 연극’ 즉, 다양한 상황 앞
에서 인물들이 어떻게 반응하며 행동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작품이기 때
문이다. 이런 것들이 그녀의 작품을 보다 보편적으로 읽게 만드는 힘이다.
마리아 에우헤니아 티롤러(María Eugenia Tyroler)는 감바로의 연극이
“인간의 본질과 행위와 의지와 연결된 주제를”(2010, 130) 다룬다고 지적
하면서, 그렇게 시간에 제한받지 않는 작품이 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수용소』는 권력 남용과 잔인성에 대한 작품이며, 독재정권의 통
제 방법을 보여주고, 동시에 복종과 거부와 관련된 위험을 강조한다. 그래
서 나치 집단수용소는 억압체제의 은유로 작용하고, 그 억압체제는 라틴아
메리카의 독재체제뿐만 아니라 그 어떤 성격의 전체주의 체제이기도 하다.
모호성과 예언적 기능:
그리셀다 감바로의 수용소 읽기⋅송병선 21

우리가 한 것이라고는 같은 주제를 다양하게 다룬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


다. 항상 내가 관심을 보인 몇 개의 주제가 있었는데, 나는 그것들을 다
른 방식으로 다룬 것이었다. 그 주제들이란 권력 남용, 희생자와 가해자
의 관계, 두려움이었다. 나는 이것들이 내 작품에서 항상 나타나는 중요
한 주제라고 생각한다(Roster 1989, 43).

감바로 그리셀다의 이 말은 권력 남용과 거기서 파생하는 폭력이 자기


작품에서 근본적인 주제라는 것을 지적한다. 권력 남용이라는 중요한 문제
를 연극으로 구성하기 위해, 감바로는 구체적인 충돌 관계를 만들어, 그것
이 행위의 핵심축으로 기능하게 한다. 즉, 희생자와 가해자 사이에 설정되
는 관계를 만든다. 거기서 지배자는 독단적이고 잔인하며 포학한 권력을 희
생자에게 행사하고, 약하고 무감각한 인물인 희생자는 자기 상황을 받아들
여 그것과 맞서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는 자기 집행인의 암묵적
인 공범이 된다. 희생자와 가해자는 작품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역할을 받
아들이고, 그 마지막 결과는 대부분 비극적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감바로가 이 작품을 1967년에 발표할 당시, 아르
헨티나의 현실과 관련 없는 외국적 요소를 선택했다면서 많은 비판을 받았
다. 이렇게 당시에는 나치즘과 관련한 권력의 폭력으로만 작용했지만, 더러
운 전쟁이 끝난 1984년에 재상연되면서 나치의 집단수용소와 아르헨티나
군사독재 기간의 비밀 구금기관은 유사성을 띠면서 예언적 작품으로 재평
가된다. 초연 당시 관객의 반응은 아마도 마르틴이 프랑코의 시설에서 겪는
경험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틴은 자기가 엠마를 비롯한 다른 죄수
들과 다르다고 여기고 그들과 근본적인 거리가 있다고 상정한다. 그래서 그
는 자기가 위협받는 조건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마르틴의 이런
실수는 1960년대 관객의 부정적 수용과 그들이 감바로의 희생된 인물들과
거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공포와 희생을 아르헨티나의 맥락과
아무 관계가 없는 외국의 현실로 간주한 것이다.
감바로의 작품이 유럽의 파시즘과 나치즘에서 권력 남용과 폭력을 보았
고, 그것을 통해 아르헨티나의 사회정치적 위기를 읽으려고 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 번의 군사쿠데타로 대표되는 정치폭력과 사회적 불안
이 감바로의 폭력 연구와 동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재 권력
과 피해자의 수동성, 그리고 자율성 파괴와 같은 폭력의 결과는 모두 격동
22 스페인라틴아메리카연구 제14권 1호

의 역사를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1950년대 정치폭력은


정치조직의 권리를 박탈했고,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살해로 격화했으며,
1960년대에는 도시 게릴라 운동과 군부의 비밀 고문으로 심화했다(Beltrán
2012, 116). 그래서 감바로의 작품은 폭력과 그 위험한 결과를 보여주면서,
‘더러운 전쟁’이 벌어진 1970년대에 아르헨티나를 강타했던 정치폭력과 일
반화된 테러를 예견하게 된다.
이런 이유와 함께 아르헨티나와 유럽 파시즘의 유대는 오래되었고 강했
다는 점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초에 아르헨티나 군대는 독일 장교
들에게 훈련을 받았으며,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독일과 이탈리아와 스페
인 이민자들은 파시스트 이상을 채택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아르헨티나는
공식적으로 중립을 지켰지만, 후안 페론(Juan Perón) 대통령은 추축국 편
을 들었으며, 전쟁 후에는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초청을 자
주 받았다. 『수용소』가 보여주는 것처럼, 유럽에서 잠잠해진 이후에도 파시
즘과 ‘프랑코’, 그리고 집단수용소는 아르헨티나에 남아 있었고, 파시스트
전범들과 그들의 사상은 몇몇 진영에서 호의적으로 수용되었다(Taylor and
Townsend 2008, 221).
『수용소』는 아르헨티나의 신나치 집단수용소를 통해 이런 유대관계를 강
조한다. 기관총 소리, 살 타는 냄새, 들판으로 행진하면서 강제로 노래를
부르는 죄수들,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표어, “손에 책가방
을 들고 마치 집을 옮기는 것처럼 걸어가는 아이들”(240) 같은 것들은 의심
의 여지 없이 이 수용소가 독일의 원래 수용소를 본뜬 것임을 보여준다. 그
러나 『수용소』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아르헨티나의 파시즘과 범죄적 정치를 다루지만, 역사적 기록의 의도는 없
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 연극과는 달리, 이것은 증언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유대인 강제 거주 지역과 수용소에서 어땠는가의 느낌을 묘사해
야 할 필요는 없던 것이다.
모호성과 예언적 기능:
그리셀다 감바로의 수용소 읽기⋅송병선 23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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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접수일: 2021년 04월 15일


심사완료일: 2021년 05월 13일
게재확정일: 2021년 0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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