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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놀이

(Jeux de massacre)

외젠 이오네스코 작
오세곤 역

@ 이 작품은 1970 년 9 월 11 일 파리 몽빠르나쓰 극장에서 초연되었으며, 연출은 Jo-rge Lavelli,


장치는 Pace, 의상은 Hortense Guillemard, 음향은 Jean-Yves Bosseur 였고, Luice Amold,
Michele Loubet, Josine Comellas, Liliane Rovere, Paulette Frantz, Maia Simon, Claude Genia,
lsabelle Zouc 등의 여자 배우들과 Dominique Bemard, Andre Julien, Andre Cazalas, Philippe
Mercier, Gilles Guillot Andre Thorent, Alain Janet, Fran-cois Viaur, Raymond Jourdan 등의
남자 배우들이 출연했다.

@ 번역에 사용한 원본은 갈리마르 출판의이오네스코 희곡집 제 6 권(1974 년 판)이다.


* '살인놀이' 삽화에 대한 출전: 이 삽화는 1970 년 파리 몽빠르나스 극장에서 Jorge Lavelli 의
연출로 공연된 '살인놀이'의 연습 과정을 Marika Hodjis 가 그린 것으로서 대사 부분만 우리말로
바꾸었다.

1 장 광장에서
무대는 어느 도시의 광장이다. 현대풍도 아니고 고대풍도 아닌, 특징이 없는 도시여야 한다. 아마
1880 년에서 1920 년 사이의 도시풍이 가장 알맞을 것이다. 장날이다. 대극장이면 많은 인원이,
소극장이면 훨씬 적은 인원이 등장할 텐데, 인물간의 간격을 넓힌다든지, 또는 동일한 인물들이 반복
등장하며, 모자를 바꿔쓰거나, 우산을 들었다 안 들었다 하거나, 수염을 붙였다 떼었다 한다면, 적은
인원으로 많은 인원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꽤 오랫동안 묵묵히들 걷는다. 특별히 즐거운 것도
슬픈 것도 없는 표정들이다. 모두들 장을 보러 오거나 보러 가는 길이다. 장을 보고 오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전부터 왁자지껄하게 물건을 팔고 사는 소리가 들려서 무대 안쪽에 시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척 생동감이 넘치는 가운데 종소리가 들린다. 만약 단역배우가 충분치 않다면 꼭둑각시나 큰
인형(마네킹)으로 대치해도 무방한데-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고- 꼭둑각시들은 실물인가
그림인가에 따라 움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제 1 장이 끝날 때, 실물 꼭둑각시라면
고민스러운 듯 돌아서서 관객을 마주보고 멈추든가, 아니면 차라리 정확하게 사건 현장을 직시하도록
할 것이며, 고정되거나 그려진 인형이라면 음침한 어둠 속으로 사라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이때가 되면 이미 무대에 반쯤 어둠이 스며들어 설령 실물 꼭둑각시라 해도 희미한 가운데 그림자만
움직이는 듯할 것이다.) 주부 1 과 주부 2 가 등장하기 직전, 키가 무척 크고 검은 옷에 두건을 쓴
수도사 하나가 주부들이 등장하는 오른쪽으로 들어와 무대를 가로지르지만, 주부들 눈에는 띄지
않는다.

[주부 1] 그 병은 원숭이만 걸린대요.

수도사 퇴장

[주부 2] 개를 기르니 망정이지.


[주부 1] 고양이도죠.
[주부 2] 그래도 병균은 사람이 옮긴대요.
[주부 1] 손으로요? 고의는 아니겠죠.

주부 1,2 퇴장

[주부 3] 우리 그이가 그러는데 인간들은 대부분 엉망으로 살고 있대요. 정확한 도덕관념도


없고요. 그래서 인간은 죽나 봐요.
[주부 4] 어쩔 수 없겠죠.

주부 3,4 퇴장
[주부 5] (주부 6 과 함께 왼쪽으로 들어오며) 옛날엔 당근을 잘 안 씻어 먹으면 문둥병에
걸렸잖아요.
[주부 6] 요샌 감자가 당뇨병이나 비만증의 원인이 되고요. 시금치도 나쁘죠. 혈액과다가
되니까요.
렌즈콩엔 녹말이 너무 많고, 과일이나 야채는 날로 먹으면 결장염에 걸리고, 익히면
비타민과 효소 결핍으로 죽게 되고, 술은 중독이 돼서 나쁘지만, 물도 안 좋아요.
야채 다발에 묻은 정도도 안 되죠. 위가 붓거든요, 위 속에 개구리가 득실거리게 될
거예요.
[주부 5] 고기엔 요산이 들어있고, 생선을 먹으면 신경과민이 되죠.
[주부 6] 신경과민이요?
[주부 5] 네, 인 성분 때문에 신경이 터진대요.
[주부 6] 머리 속에서요?
[주부 5] 또 섭조개는 페스트를 옮기고, 굴이나 다른 조개도 그렇고요.
[주부 6] 저희 남편은 아스파라거스도 안 먹어요. 요통에 걸린다고요. 의사니까 잘 알겠죠.
환자 중에 그런 사람들이 있나 봐요.
[주부 5] 가지도 먹어 봐야 감기나 걸리죠.
[주부 6] 그건 페스트보다 더 싫어요.
[주부 5] 아참, 가지엔 발암물질도 있대요.

주부 5, 6 퇴장하며 주부 7, 8 등장

[주부 7] 제 남편 얘기가 인간이 달까지도 올라갈 거래요. 더 높이도 가능하고요.


[주부 8] 소방사다리보다 훨씬 높은 사다리가 필요하겠군요. 하지만 거꾸로 세워야겠죠.
여기서 달이 안 보이면 지구 아래쪽에 있다는 얘기잖아요.
[주부 7] 그렇죠. 여기서 안 보이면 그 이유야 뻔하죠, 뭐.
[주부 8] 위험할 거예요. 도대체 며칠이나 걸릴까요, 사다리로요?
[주부 7] 못 할 걸요. 숨이 차서 되겠어요?
[주부 8] 릴레이 식으로 하겠죠. 중간 중간 정거장을 만들고요.
[주부 7] 현기증은 어떡하고요? 거꾸로나 바로나 어지럽긴 마찬가질 텐데.,
[주부 8] 포탄은 어때요? 포탄에 말을 싣고 그 위에 올라타서요.
[주부 7] 죽을 거예요. 바람도 세고, 겁도 나고, 죽을 거예요.

주부 7, 8 퇴장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면 주부들이 퇴장하지 않고 무대 주위를 둥글게 선회할 수도


있다. 남자들의 대사와 여자들의 대사는 수가 같아야 한다. 그러나 만약 남자들의 대사가 여자들에
비해 많다면 여자들의 대사를 늘려야 하고, 그 반대 경우에도 마찬가지 원칙이 적용되는 데, 이것은
모든 인물들이 한 데 모여 최초의 사건, 즉 한 남자와 한 여자, 또 여러 남자와 여러 여자가 죽기 전에
발생하는, 아기의 죽음을 접하고, 모두들 놀라 공포에 사로잡히는 순간까지 유효하다. 제 1 장이 끝날
때, 즉 몇 분후에는 1 장에 등장했던 모든 인물들이 죽어서 무대를 뒤덮을 수도 있다. 묵묵히
등장하는 검은 옷의 수도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남자 1 과 남자 2 가 왼쪽으로 등장한다.

[남자 1] (남자 2 에게) 우린 다 바보죠. 멍청이들이 우릴 다스리니.


[남자 2] 뭔가 방도를 찾아야 하는데, 그게 오리무중이니.
[남자 2] 좀 가르쳐 주세요. 아는 게 힘이라는데,
[남자 1] 그럼요, 지식과 힘은 인간만이 갖는 두 가지 능력이죠.
남자 1,2 퇴장. 왼쪽으로 남자 3,4 등장

[남자 3] (유모차를 밀며) 일요일엔 애들 유모차를 제가 밀죠. 쌍둥이예요. 마누란 뜨개질을


하고요.
[남자 4] (뜨개질을 하며) 우리랑 반대군요.

남자 3,4 퇴장. 남자 5,6 등장.

[남자 5] 별로 안 좋았다니까요. 꼭 짙은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겠고, 마음은


불안하고, 글쎄요. 일종의 심신불안상태라고 할까요? 하여튼 안 좋았어요, 아주요.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설 수도 없는데, 걸으면 피곤하고, 그렇다고 가만 있을 수도
없고.
[남자 6] 방법은 있어요. 썩 유쾌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것뿐이죠.
[남자 5] 뭔데요?
[남자 6] 목을 매세요. 직접도 좋고, 부탁을 해도 좋고
[남자 5] 그거야 위험해서 ---
[남자 6] 감수해야죠. 그래도 전 그게 낫던데요. 온 세상이 강철처럼 꽉 막혀서 도무지
파고들 수 없는, 아득한 혹성처럼 느껴졌거든요. 온통 낯설고 적대적인 그 무엇,
대화도 없는, 완전한 단절. 갇혔던 거죠. 밖으로 갇혔던 거예요.
[남자 5] 뚜껑은요? 안에 있던가요, 밖에 있던가요?
[남자 6] 여하간 꿈쩍도 않더군요. 천근만근 납덩이, 아니, 강철이라고 했죠? 납덩이면
그래도 녹일 수나 있게요.
[남자 5] 전 60 킬로만 넘어도 못 들겠던데. 물론 납덩이 60 킬로보다는 지푸라기 60 킬로가
쉽겠지만. 어쨌든 지푸라긴 가볍잖아요.
[남자 6] 가끔 어떻게 해야 사는지 생각할 때도 있죠. 친구놈 말마따나 사는 게 항상 즐거운
건 아니지만.
[남자 5]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남자 6] 불길한 애길랑 그만 둡시다.

남자 5,6 오른쪽으로 퇴장. 남자 7, 8 등장

[남자 7] 우리같은 족속들은 별나라에 못 가.


[남자 8] 하늘로부터 버림받은, 저주받은 족속이니까.
[남자 7] 고도의 기술을 갖춘 자들만이 달에도 가고, 별에도 가겠지. 하지만 더 멀리 간다고
더 많이 보는 건 아닐걸. 시야가 넓어야 얼마나 넓겠어.
[남자 8] 우리보다야 넓겠지.
[남자 7] 물론. 하지만 그래도 모든 걸 다 보진 못 해. 전체에 대해선 하나도 모르는 거지.
중요한 건 전체야. 나머진 별 볼일 없다고.
[남자 8] 물론 별 건 아니지. (잠시 사이). 그래도 난 높은 층이 좋아. 아래층보다는 위층에
사는 사람들이 더 높이서 더 넓게 볼 수 있거든.
[남자 7] 꼭 그런 건 아냐.
[남자 8] 어떻게?
[남자 7] 만약 언덕을 깎아 집을 지었는데, 위층 사람들이 창문을 모조리 언덕 쪽으로
냈다면, 아마 꼭대기 층이라도 동굴 같을걸. 그런데 아래층은 반대 쪽으로 창을
냈다. 그럼 아래층 사람들이 더 높이서 보게 되는 거 아냐?

남자 7,8 퇴장. 여자 1,2 등장.

[여자 1] 저희 시동생이 하는 일은 반사신경이 중요하대요. 무조건 반사요. 조건반사라면


그래도 쉬울 텐데.
[여자 2] 누구든 시키는 일만 하면 되죠. 그게 너무 많아서 탈이지만.

여자 1,2 퇴장. 남자 5,6 등장.


[남자 5]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군요. 좋아졌어요. 발밑에서부터 심장을 향해 올라오는 것
같아요. 이런, 다리가 저려서 막혀 버렸네.
[남자 6] 선생, 전 즐거운 인생까진 안 바랍니다. 그저 중화된 삶이면 만족할 거예요.
담담하게 삶을 관조하면서 괴롭지 않은 상태말예요.

남자 5,6 퇴장. 여자 3,4 와 남자 3,4 등장. 역시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으로 등장한다. 남자
3,4 는 여전히 하나는 뜨개질을 하고, 하나는 유모차를 밀고 있다. 그러나 아까와는 반대로, 뜨개질을
하던 이가 유모차를 밀고, 유모차를 밀던 이가 뜨개질을 하고 있다.

[남자 3] (남자 4 에게) 미래란 건 없어요.


[여자 3] (여자 4 에게) 별 일 없겠죠. 다 예방이 되니까.
[여자 4] (여자 3 에게) 치료보단 예방이 낫죠.
[남자 4] (남자 3 에게)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어요.
[여자 3] (여자 4 에게) 아무것도 치료할 수 없어요.
[남자 3] (남자 4 에게) 예측이 가능해 보여도 아녜요.
[여자 4] (여자 3 에게) 치료가 가능해 보여도 아녜요.
[남자 4] (남자 3 에게) 오히려 예측이 될 법한 게 더 어렵죠.
[여자 3] 오히려 치료가 될 법한 게 더 어렵죠. 정말 위험해요.

나머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여자들은 오른쪽으로, 남자들은 왼쪽으로 들어와 무대 구석에


멈춰선다. 그러나 말이 없을 뿐 아니라 말하는 시늉도 하지 않으며, 긴장이 풀린 듯한 태도로 쳐다볼
뿐, 움직이지도 않는다. 앞서와 같이 키가 무척 크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중간에 발판이 있는 긴
막대기를 사용), 검은 옷에 두건을 쓴 남자가 들어와 무대 중앙에 묵묵히 멈춰서지만 누구도 그
존재를 인식하는 것 같지 않다.

[남자 4] (객석을 마주한 채 무대 중앙을 향해 유모차를 밀며-물론 수도사도 중앙에 있기는


하지만 안쪽 무대이다- 남자 3 에게) 종소릴 들으니 미사가 끝났나 본데, 마누라
나오기 전에 얼른 가서 한 잔 합시다.
[남자 3] (남자 4 에게) 빵집에 가시겠죠, 제 마누라하고요.
[남자 4] (남자 3 에게, 뜨개질감을 유모차에 놔 두라는 뜻으로) 그건 여기 놔 두세요. 애들이
먹진 않을 테니. (여자 4 에게) 저, 아주머니, 애들 잠깐만 봐 주시겠어요?

여자 4 가 다가오고 그 뒤를 여자 3 이 따른다.
[여자 4] 안녕하세요?
[여자 3] 아직 전 댁의 쌍둥일 못 봤어요. 그렇게 예쁘다면서요?
[남자 4] 깨우지만 마세요. 딱 한 잔만 하고 올께요.
[남자 3] 네, 딱 한 잔씩만 할 겁니다.

남자 3, 4 가 나가기도 전에, 여자 3, 4 는 아이들을 들여다본다.

[남자 4] 금방 올게요.
[남자 3] (미안하지만 제 거도 좀 봐 주세요.
[여자 4] (유모차 안을 보며) 금발이라더니 역시. 그런데 피부가 희진 않군요.
[남자 4] (남자 3 과 함께 안쪽 무대로 좀 가다가) 금발엔 피부가 좀 붉어야죠.
[여자 3] (유모차 안을 보며) 흙빛이네. 새까매요. 자나?
[남자 3] 흙빛이요?
[남자 4] 새까맣다고요?
[여자 3] (유모차 안의 아이들을 만져 보며) 추운가 봐요. 잘 좀 덮어야지.
[여자 4] 만져도 가만 있네.
[여자 3] (유모차 안을 보며) 아유, 귀여운 것들.
[여자 4] (아이들을 만져 보며) 왜 이렇게 차갑지? 에그머니나!
[남자 4] 왜 그래요?
[여자 3] 죽었어요.
[여자 4] 숨이 막혀 죽었어요. 에그!
[남자 3] 뭐요?
[남자 4] 멀쩡한 애들을 갖고. (유모차 안을 들여다보곤 비명을 지른다) 죽었어!
여자 3, 4 가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나머지 인물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일기
시작하고, 남자 4 가 악을 쓴다.

[남자 4] 질식했어! 목을 졸랐어! 애들을 죽였어! 누구야? 누가 그랬어?

나머지 인물들은 눈을 크게 뜬 채, 유모차 주위에 모여 있는 두 남자와 두 여자를 향해 천천히


다가온다.

[여자 1] 누가 이런 짓을?
남자 6 이 남자 4 에게 거의 도달했을 때 남자 4 가 쓰러진다.

[남자 4] (쓰러지며) 아이고, 죽겠다.

양팔을 십자가처럼 벌린 채 자빠진다.

[남자 3] (남자 6 에게) 내 친구를 죽여? 살인자! 나쁜 놈!


[남자들과 여자들] (남자 4 의 시체를 살피고 있는 남자 2 와 여자 5 를 제외하곤 모두 남자 6 에게
위협하듯 다가가며) 나쁜 놈! 살인자!
[남자 6] 아녜요. 못 찔렀다고요. 혼자 쓰러졌어요. 미끄러졌나 봐요.
[남자 2, 여자 5] (바닥의 남자 4 를 살핀 뒤) 이거 봐요. 새까매요. 흙빛이에요.
[여자 8] 못 참겠어. 경찰! (손을 심장에 갖다 댄다) 아, 가슴이!

여자 8 이 쓰러져 죽는다.

[남자 8, 남자 3] (남자 6 에게) 나쁜 놈! 살인자!


[남자 5, 여자 7] (여자 6 과 함께 끼어들며) 아니라잖아요.
[여자 7] 그냥 혼자서 죽었대요.

이 동안 남자 1, 2 는 여자 1, 3, 4, 5, 6,과 함꼐 여자 8 의 시체를 살핀다.

[남자 1] 꼼짝도 안 해요.


[여자 3] 하여간 의사를 불러야죠.
[여자 6] 구급대를 불러야죠. 119 구급대요.

여자 6 은 안쪽 무대로 향하다 쓰러진다.

[남자 6] 아냐, 아니라니까. 정말 아냐.


남자 6 은 남자 3, 5, 8 과 여자 7 에게 둘러싸인 채 주저앉는다. 물론 둘러싸더라도 남자 6 이
쓰러지는 것을 볼 수 있도록 객석 쪽을 터 놓아야 한다. 남자 1, 2 와 여자 1, 3, 4, 5,는 바닥의 여자 8
을 둘러싼 채 살펴 보고는 팔을 하늘로 쳐든다. 남자 6 주위에 있던 사람들 (남자 3, 5, 8, 여자 7)과
여자 8 주위에 있던 사람들(남자 1, 2, 여자 1, 3, 4, 5)은 서로를 향해 다가가면서 "어쨌든 예삿일이
아녜요. 도저히 못 믿겠어요. 차마
못 보겠어요. 잘못한 게 있겠죠. 죄를 지었을 거예요. 죄는 무슨 죄예요?" 등의 말들을 한다.

[남자 1] 심장마빈 아녜요.


[남자 2] 심장마빌 거예요.
[여자 1] 안색이 끔찍해요.
[여자 7] (바닥의 남자 6 을 보며) 죽었어요.
[여자 3] 벌받아 싸지.
[남자 5] 그냥 기절한 거 아녜요?
[남자 7] (죽은 여자 6 을 가리키며) 어, 왜 저러고 있죠? 구급댈 부르러 간다더니. (여자 6 을
향해 달려간다.) 일으켜야죠.
[여자 7] 설마 또 죽진 않았겠죠?
[남자 1] 끝났겠죠. 설마 다 죽일라고요.
[남자 7] (여자 6 의 손을 잡으며) 꼼짝도 안 해! 죽었어!

남자 7 이 여자 6 위에 쓰러지며 죽는다.

[여자 1] 이젠 놀랍지도 않아!


[남자 8] 벌썩 익숙해진 거야.

남자 8 이 여자 6 과 남자 7 위로 쓰러진다. 나머지 아홉 명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비틀며, 무대


사방으로 뛰기 시작한다.

[여자 1] 자비를!
[남자 1] 재앙이야, 대재앙!
[여자 3] 자비를!
[남자 2] 전 도둑질을 했습니다.
[여자 5] 신이시여, 자비를!
[남자 3] 전 존속살해를 했습니다.
[여자 5] 전 근친상간을 했습니다.
[남자 5] (무대 중앙에 쓰러지며) 자비를, 은총을, 자비를, 은총을!
[여자 7] 용서하소서!
[남자 1] 이건 지옥이야.

남자 1 이 정면을 향한 채 우측무대에 쓰러진다.

[여자 1] 속죄하겠습니다.

여자 1 이 남자 1 의 반대편에 쓰러진다.

[여자 3] 전 그렇게 나쁜 여자가 아닙니다.

여자 3 이 남자 1 뒤에 쓰러진다.

[남자 2] 여보, 어디 있소? 여보!

남자 2 가 여자 3 옆에 쓰러진다.

[여자 4] 아이고, 배야! 속애서 불이 나!

여자 4 가 남자 2 옆에 쓰러진다.

[남자 3] 온몸이 아파, 전 죄인입니다. 아, 얘들아!

남자 3 이 여자 4 근처에 쓰러진다.

[여자 5, 여자 7] (아직도 무대 이쪽 저쪽을 뛰어다니며) 난 싫어! 못 참겠어!


[여자 5] 여보, 당신 점심도 못 차렸는데!

여자 5 와 여자 7 이 무대 양쪽 구석에 쓰러진다.
3 장 어느 집에서
빈 방, 한 사람이 장갑을 낀 채, 등받이와 팔걸이가 달린 둥근 의자를 날라오고 역시 장갑을 낀 다른
사람이 단(檀)을 가지고 들어온다. 오른쪽 벽 중앙에 단을 놓고 그 위에 의자를 놓는다. 안쪽 벽에는
밑에서 꼭대기까지 이르는 초대형 창문이 길을 향해 나 있다. 안쪽 벽 좌측으로는 출입문이 하나
있다. 하인들은 나갔다가 분무기를 들고 다시 들어온다. 세 번째 등장인물은 여자이다. 그녀 역시
분무기를 들고 들어온다. 모두들 벽과 의자와 단에 분무질을 한다. 또 다른 여자 하나가 작은 의자
두개를 들고 오른쪽 문으로 들어와 문 양쪽에 놓는다. 그녀도 가구들과 바닥, 벽, 천정 드에 분무질을
한다. 창문을 통해서 길에서 벌어지는 일이 보이는데, 면도도 하지 않고 반쯤 벌거벗은 사내 하나가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외치며 안쪽 무대 한끝에서 다른 끝까지 달려가 사라지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그 뒤로는 검은 옷에 장갑을 끼고, 세균으로부터 코와 입을 보호하기 위해 마스크를 쓴 두
사람이 곤봉을 든 채 쫑아간다. 쫑기던 사람이 길에 넘어졌는지 첫번째 추격자가 곤봉으로 내려친다.
비명 소리가 들린다. 한 명은 곤봉을 들고, 또 한 명은 들것에 축 늘어진 시체를 끌고 가며, 하나는 '
전염병 환자요'하고 외치고, 또 하나는 '비켜요. 비켜!' 하고 외친다. 집 주인이 등장한다. 갈색 머리에
키가 크고 마른 편의 남자인데, 짙은 양복 위에 실내가운을 걸치고, 챙 없는 모자를 썼으며, 혹시
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을까하는 희망에서 다른 이들처럼 장갑을 꼈다. 그는 무척 겁을 먹은듯
수시로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내 뚜껑을 열어 들이마시곤 다시 뚜껑을 닫는 행위를 반복한다.
창문을 통해 누더기를 걸친 여자 하나가 좀전의 남자의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다가 '전 제 자식을
죽였습니다. 제 영혼을 구원하소서.'하고 외치며 사라지는 것이 보인다. 예의 추격자들이 쫑아가고
이어 그녀를 들것에 담아 끌고오며 길에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 명은 '전염병 환자요.' 또
한명은 '비켜요.'하고 외친다. 또 경관 복장의 남자 하나가 자신의 리스트와 집 주소를 대조한 뒤
분필을 꺼내서 정면으로 보이는 대문에 커다랗게 붉은 십자가를 그려 넣는 장면도 보인다. 누군가
안쪽에서 문을 열려고 하다가 경관이 권총으로 위협하며 '외출금지' 라고 외치자 문을 다시 닫는다.
잠시 후 그 남자가 창문으로 다시 나타나지만 경관의 총을 맞고 허수아비처럼 집안으로 쓰러지는
것이 보인다. 울부짖는 여인의 장면부터는 무대에 집 주인이 등장한 뒤에 이루어진다. 즉 이 장면들은
집안에서 벌어지는 장면과 동시에 행해진다. 집 주인은 소독을 위해 분무질을 하고 있는 하인들을
쳐다본다.

[주인] 완전 멸균. 완전 멸균, 안전. 또 안전. 소독 향수는?


[하인 1] 여기 있습니다.
[주인] 예방 기름은?
[하인 2] 여기 있습니다.
[주인] 작은 틈새 하나도 놓쳐선 안돼. 기름칠을 해. 빨리. 분무질만 갖고는 안돼. 송진은?
파우더는? (두 여자 중 한 명에게) 골고루 칠해. 향료는? 송진은? 살충제는?
유황은?
[하인 1] 네, 네, 합니다요.

하인 1 은 칠을 한다.
[하인 2] 네, 유황칠도 합니다요.

하인 2 는 칠을 한다.

[주인] (하녀 2 에게) 식사 가져와. 잘 닦았나? 가구에 기름칠도 잘 했어?


[하인 1] 네. 네, 분부대로 다 했습죠.
[주인] (퇴장하는 하녀 2 에게) 음식을 만질 땐 흰 장갑을 껴. (하녀 1 에게) 향불을 피워. 문
열어, 창문 옆에, 구석구석에 놔.

하녀 1 은 그대로 시행한다. 그동안 다른 이들은 계속 칠을 하며 마루판과 벽 등을 소독한다. 하녀 2


가 음식이 담긴 쟁반을 가져오자 주인은 팔걸이 의자로 가서 앉는다.

[주인] (앉으면서, 음식 냄새를 맡으며) 생선 냄새가 나는데. 과일 냄새도 나고. 약을 덜 친


거 아냐? 더 쳐야 돼. 먹긴 해야겠지만 위험해. 맛을 따질 때가 아냐.
[하인 1] 이렇게 더우니 전염병도 더 기승이지.
[하인 2] 빗물도 뜨겁더라니까.
[하녀 1] 눈오고 얼음 얼면 병도 끝나겠죠.
[하녀] (주인에게) 이젠 사람이 죽어도 종도 안 치네요. 너무 많이 죽으니까 종칠 시간도
없나 봐요.
[하인 1] 안심시키려고 그러는 거야.
[하녀 1] 종칠 사람인들 있을라고. 사분의 삼이 죽었는데/
[주인] 답답해. 저리들 가. 떨어져 있는 게 위생적이야. 문은 잘 막았나? 창문도?

모두들 주인으로부터 멀어진다.

[하인 2] 문으론 바늘 하나도 못 들어옵니다요.


[주인] 실오라기 하나도 안 돼.
[하녀 2] 다 막았어요.
[주인] 밀가루도 있고, 쌀도 있고, 말린 고기, 말린 생선, 말린 과일, 땅콩까지 있어. 쥐새끼
걱정도 없고. (하인 1 에게) 지붕을 잘 살펴. 기왓장 하나라도 날아가면 안 돼.
아무도 못 들어와. 아무도 못 나가고. 당연하지. 그래야 안전해. 창밖도 내다보지마.
보기만 해도 전염될지 누가 알아. (음식조각을 입에 넣는다) 정말 조심들 해. 어,
공기가 조금 움직이는 것 같은데. 병균을 옮기는 건 바람이야. 틈도 없는데. 하긴,
저절로 생겼을지도 모르지. 바람과 공기가 벽을 밀어붙이니까. 파고 들려고 말야.
긴장을 풀어선 안 돼. 항상 초를 갖고 다니면서 구멍이란 구멍은 죄다 막아. 자,
찾아 봐. 살펴 보라니까. 어서.
하녀 2 만 주인 옆에서 식사 시중을 들고, 하인 1, 2 와 하녀 1 은 여기서기 살피며 틈을 막거나 그러는
척하느라 부산스럽다. 이 동안 대형 창문을 통해선 검은 옷을 입고 검은 깃발을 든 남자와 그 뒤로
검은 옷을 입은 마부가 검은 말들이 끄는 짐마차에 관을 하나 싣고 가는 것이 보인다. 미늘창을 든
근위병 하나가 관 뒤를 따른다. 그는 나팔을 불다가 수시로 멈춰서서 '비키시오' 하고 외쳐댄다. 무대
장치상의 편이 정도에 따라 짐마차를 사용하는 대신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관을 들 수도 있다.
주인은 음식을 관찰하고 냄새를 맡는 등, 조심스럽게 먹으며 말을 한다. 따라서 접시 위에는 주인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은 뒤 먹지 않고 남겨 둔 음식 조각이 남게 된다.

[주인] 죄다 틀어막아. 저절로 생긴 틈이 있을 거야. 그리로 썩은 공기가 들어온다고.


분무질도 해. 음식이라고 분무질을 못 할 건 없어. 맛이 없어도 할 수 없지.
분무질을 해. 악마같은 바람은 아무리 두꺼운 벽도 뚫고 들어오거든. 요술쟁이니까.
사악한 자들 앞에 벽이나 담이 무용지물인거나 마찬가지지. 더구나 바람은
보이지도 않잖아.
[하인 1] 자꾸 생각하시면 생각을 통해 들어올지도 모릅니다요.
[주인] (소리치며) 안 들어온다고 생각해. 안 들어온다고 생각해. 벽도 철통같아야 하지만,
마음 또한 그래야 돼. 우리가 원하지 않으면 절대 못 들어와. 우리는 절대 못
들어와. 우리는 절대 못 건드려. 하지만 소독도 계속해. 갈라진 곳이 없나, 틈이
없나 계속 살펴. 꽉꽉 틀어막아. 내가 없으면 세상도 없는거야. 우린 난공불락이다.
이렇게 생각해. 우린 난공불락이지? 대답해.
[하인 1, 하인 2] (계속 칠을 하고 소독을 하면서) 우린 난공불락입니다.
[주인] (하녀 1 에게) 대답하라니까!
[하녀 1] 전 난공불락입니다. 전 절대 못 건드립니다.
[주인] (하녀 2 에게) 대답 안 해?
[하녀 2] 우린 절대 못 건드립니다.
[하녀 1, 하녀 2] 우린 절대 못 건드립니다.
[주인] 난 난공불락이다. 난 절대 못 건드린다.

주인은 음식 쟁반을 엎으며 바닥을 향해 곧바로 엎어진다. 하인들이 겁에 질려 주인 쪽으로


달려온다. 하녀 1 이 주인은 손을 들었다 떨어뜨린다.

[하녀 1] 손바닥이 새까매요.


[하인 1] (머리털을 잡아 주인의 머리를 들어올리며) 눈이 빨개! 얼굴은 파랗고!
[하녀 2] 다 엎었어! 접시도 깨지고! 여분도 없는데!
[하인 2] (하인 1 에게) 걸렸어.
[하녀 1] 걸린거야.
하인들은 겁에 질려 시체를 버려둔 채 문 쪽으로 달려가 문을 연다.

[경관] (총을 들고) 환자가 발생한 집에서는 나올 수 없다. 만약 허튼짓하면 발포하겠다.

경관은 총을 겨눈다. 하인들은 뒤로 물러난다. 문이 밖으로부터 요란스럽게 닫힌다. 하인들은 창문


쪽으로 달려가 부수려 한다. 다른 무장경찰이 그곳에 있다. 하인들은 다시 물러난다. 하인들은
서로에게도 겁을 먹은 듯하다. 네명의 하인이 각기 네 귀퉁이에서 무릎을 끓을 때 밖으로부터 어두운
색깔의 육중한 덧문이 창문을 가린다. 무대에 어둠이 스며든다.
4 장 어느 병원에서
등장인물
알렉산더, 쟉크
에밀, 카샤
의사, 간호원

어느 병원의 병실. 안쪽으로 창문. 좌우 간막이는 투명하다. 오른쪽에 작은 문. 왼쪽에는 알렉산더가


침대에 누워 있다. 의자 서너 개, 알렉산더는 60 세 쯤이고, 카샤는 훨씬 젊다. 에밀과 쟉크는
알렉산더보다 약간 젊다. 막이 오르면 무대에는 알렉산더와 카샤, 그리고 방금 도착한 에밀과 쟉크가
있다.

[알렉산더] (쟉크와 에밀에게) 앉아요들. 의자가 썩 편하진 않을 텐데.


[에밀] (알렉산더에게) 거의 이십년이 됐군요, 못 뵌 지가. 이젠 병이 드시고 ---
[알렉산더] 아직 죽진 않았소.
[에밀] 그래요. 일을 많이 하셨죠. 대단한 업적이라고들 하더군요.
[쟉크] 네, 단편적으로 읽긴 했지만 훌륭하더군요.
[에밀] 어리석은 싸움이었죠?
[알렉산더] 오해였지.
[에밀] 네, 오해였죠. 그게 뭐라고 우정까지 팽개쳤는지, 그렇게 오랫동안. 그래도 이렇게
다시 뵈니까 ---
[카샤] 그게 그렇게 어렵던가요? 노력을 하셨어야죠.
[에밀] (카샤에게) 그래요. 하지만 저 양반이 한 발짝 다가올 수도 있었겠죠.
[카샤] 받아주긴 하시고요?
[쟉크] (중재하려는 듯) 아, 그럼요. 자, 자, 카샤.
[에밀] (카샤에게) 프랑스 인 이시죠? 노르망디 출신. 이름이 꼭 러시아 사람 ---
[알렉산더] 애칭이지, 그건. 자기가 붙였어. 체홉을 좋아했거든.
[에밀] 재밌군요. 다 용납해도 사상이 다른 사람만은 용납 못 하시는 분이. 생각이 다르면
곧바로 적이죠.
[쟉크] (에밀에게) 그건 우정이 뭔지 몰라서 하는 소리요. 이념보다는 우정이 강한 법이지.
당신도 변했잖소? 그래서 다른 사상을 택했고. 누구나 변하는 거요.
[에밀] 제겐 생각이 같은 사람이 친구예요. 제가 생각을 바꾸면 친구도 생각을 바꿔야죠.
농담 같지만 사실이예요. (알렉산더에게) 사상을 바꾸셨었죠? 그리고 나서 다시
바꾸셨고, 그래서 다시 저와 같아졌고요. 벌써 십년 전 얘기죠. 그런데도 우린 계속
안 만났어요. 왜죠? 이유가 뭘까요? 그걸 알아보러 왔어요. 함께 얘기하면서 그걸
따져 보고, 밝혀 보고, 이해해 보려고 왔다고요.
[카샤] (에밀에게) 관두세요. 머리만 아파요. 저 양반도 피곤하고요. 의사가 그러면 안
된댔어요. 면회도 한참 망설이다 허락했다고요.
[알렉산더] 우리 다른 얘기 하지. 만난 것만도 좋아. 아무 말 말자고.
[에밀] 아무튼 우연치곤 묘하죠. 제가 그놈의 문학상을 받은 다음날 싸웠으니.
[카샤] 그런 건 초월한 분이에요.
[알렉산더] 엉뚱하긴.
[에밀] 물론 질투를 하셨다는 건 아네요. 다만 심사위원들하고 사상적 대립이 있었던 거죠.
그렇지 않았다만 상을 타셨을 거고. 저보다야 적격자였으니까. 아마 제가 수상을
포기하리라고 믿으셨던 거겠죠. 입장이 바뀌었다면 그렇게 하셨을 테니까.
[카샤] 당연히 그러셨겠죠.
[알렉산더] 병원에서 몇 달 지내다 보니 이것도 과히 나쁘진 않아. 처음엔 힘들지만 결국
익숙해지거든. 글쎄, 멸균된 세계랄까? 세상에 어떤 소문이나 격동도 순화되고
무력해져서 들어오지. 더 이상 무서울 것도 성가실 것도 없다고.
[에밀] 저희도 들어오기 전에 소독약 세례를 받았어요.
[쟉크] 요즘 많이들 죽거든요.
[에밀] 평소보다 훨씬 많이요. 길에서들도 죽어요. 풀썩 쓰러져서는 남자들은 넥타이를
쥐어뜯고, 여자들은 비명을 토해내고, 그러다 죽는 거죠.
[쟉크] 그것도 유행인지.
[알렉산더] 알아요. 들었어요.
[쟉크] (알렉산더에게) 건강이 좋아지셨나 봐요. 혈색이 좋은 걸 보니.
[알렉산더] (쟉크에게) 선생도 그렇소. 온종일 거리를 쏘다닌 사람 같진 않아요.
[에밀] (카샤에게) 제가 댁에 갔던 거 생각나세요? 그 조그만 아파트 말예요. 같이 저녁을
먹었죠? 그런데 대화 도중에 언뜻 --- 네, 그래요. 불만스런 표정을 읽었죠. 저
양반하고 안 만나게 된 데엔 그런 이유도 있었던 것 같아요.
[카샤] 생각이 안 나요.
[에밀] 분명히 그랬어요.
[쟉크] (에밀에게) 당신이 잘못 본 거야.
[알렉산더] (에밀에게) 여전하구만.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에밀] 하지만 확실히 그때부터 절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셨다고요.
[쟉크] (에밀에게) 피곤하시겠소. 다 끝난 일 아니오?
[에밀] 피곤해 하는 건 오히려 카샤 같은데요.
[알렉산더] 그 뒤로도 우리 일 많이 했잖아. 쫑기듯이. 하긴, 서둘 수 밖에 없었지.
[에밀] 사람들이 들을 여력이 있는 동안에 얘길 끝내야 했으니까요. 요즘 같으면야 어디
듣겠어요? 걱정거리가 많아서, 당장 죽음이란 문제도 있고.
[알렉산더] (에밀에게) 맞아. 할 말은 즉시 해야지. 그래야 표현사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어.
언제고 적합한 표현은 꼭 하나뿐이거든. 수많은 말들과 함께 사장돼 버리기 전에
그것을 사람들이 듣도록 해 주는 거야. 서두르지 않으면 그 말은 이해될 수 없고,
결국 의미를 잃고 무시되는 거지.
[쟉크] 이따금 묻혀 있던 작품을 발굴해서 되살리기도 하잖습니까?
의사가 들어오고, 간호원이 따라 들어온다.

[의사] (간호원과 함께 알렉산더에게 다가가) 좀 어떠세요?


[알렉산더] 좀 덜하긴 한데, 그래도 아파요.
[카샤] (알렉산더에게) 아깐 괜찮으시다더니.
[의사] (간호원에게) 주사를 놔 드려요.

간호원이 주사를 놓는 동안 의사는 쟉크와 에밀 쪽으로 돌아선다.

[의사] 아, 그냥 앉아 계세요. 정말 일이 너무 많아요. 오늘 하루에도 천여 명이 죽었으니.


길에서요. 똑같은 병으로.
[쟉크] 따로따로요?
[의사] 따로따로도 죽고, 열댓명이 한꺼번에도 죽고, 과학도 소용없어요. 아직 뭔지도
모르니. 그저 이상한 전염병이다 할 뿐이죠. 미리 식별할 만한 증세도 없고요. 단 한
명도 치료를 못 했어요. 시체 해부도 소용이 없고요.
[간호원] (알렉산더에게) 아프셨죠?
[알렉산더] 아니, 아주 좋아요. 이렇게 좋은 건 처음이야.
[카샤] (알렉산더에게) 다른 땐 그렇게 엄살이시더니.
[의사] 자, 그럼 전 내려가 보겠습니다. 또 한 무더기가 들어왔다니. 어쨌든 해부를 해
봐야죠.
[간호원] 날마다 수가 늘어요.
[쟉크] (의사에게) 어쨌든 이 병을 규명하고 퇴치하겠다는 희망은 가지신 거죠?
[의사] 글쎄, 그게 가능한 건지.
[알렉산더] 여보게들! 여보게들!
[카샤] 왜 그래요?
[에밀] 뭐래요?
[쟉크] 우릴 부르나 봐.
[간호원] (나가려는 의사에게) 가지 마세요. 보세요. 눈이 돌아갔어요.
[알렉산더] 여보게들!

알렉산더는 침대에서 반쯤 일어났다가 다시 쓰러진다.

[간호원] 기절했어요.

의사가 알렉산더에게 다가간다.


[의사] 운명하셨습니다.
[카샤] 아녜요. 아니, 정말. 나 혼자 어떻게 살라고.
[에밀] 얘기도 다 못 했는데. 너무 늦었어!
[쟉크] 마지막 말씀은 '여보게들' 이었습니다.
[의사] (카샤에게) 치료받던 병으로 돌아가신 게 아닙니다. 주사 때문도 아니고요.
[에밀] 여보게들? 왜 그랬을까? 무슨 얘길 하려고? 맞아,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일어나 앉았던 거야.
[의사] (간호원에게) 눈을 감겨 드려요. 연락해서 시체를 영안실로 옮기도록 하고.
5 장 거리의 해후
등장인물
부르주아 1
부르주아 2

두명의 부르주아가 왼쪽과 오른쪽에서 동시에 등장한다.

[부르주아 1] 아니, 안 죽었소?


[무르주아 2] 귀신은 아니외다. 하긴, 나도 가끔 내가 안 죽은 걸 보고 놀라니까. 어쨌든 안
죽었으니 이렇게 살아 있죠.
[부르주아 1] 아직도 21 구에 사쇼? 여긴 왜 왔소. 그쪽은 피해가 심하던데. 25 구보다도
심하다면서요? 27 구보단 덜 하지만, 헌데 어떻게 들어왔죠? 오염지역 주민들이
우리 1 구처럼 병이 덜한 지역으로 들어와 피신하지 못하게 경계를 긋고
바리케이트를 치도록 했는데. 바로 내가 그걸 입안애서 시의원 다수의 동의를
얻었단 말이오.
[부르주아 2] 피해 안 줄 테니 걱정 마쇼.
[부르주아 1] 천만에. 당장 헌병대에 신고하겠소.
[부르주아 1] 시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온 거요. 난 식량책이오. 날 과일이 금지된 이후 절인
과일의 보급을 맡고 있소. 이게 통행증이고, 이게 명령서요.
[부르주아 1] 아, 멀리서도 볼 수 있소. 가족들은 어떻소?
[부르주아 2] 더러는 살고, 더러는 죽었소.
[부르주아 1] 21 구 사람을 식량책으로 쓰다니 어떻게? 아, 좀 떨어져요. 3 미터, 아니, 5 미터쯤
떨어져서 말하쇼. 괜히 병균 옮기지 말고.
[부르주아 2] 그래, 형씨 가족은?
[부르주아 1] 아픈 사람도 없고 죽은 사람도 없소. 근처 열두 집 중 의심나는 경우도 없고.
[부르주아 2] 내일 일은 아무도 몰라요.
[부르주아 1] 천만에, 난 괜찮을 거요. 우리 식구들도 그럴 거고, 허, 가까이 오지 말라는데,
더러운 지역에서 온 주제에.
[부르주아 2] 대단한 자신감이군. 도시 전체에 재앙이 닥쳐서 사람이 수도 없이 죽어가는데
어디서 그런 확신과 생기를 얻는 건지, 참.
[부르주아 1] 어려울 거 없지. 병에 걸렸거나, 죽어가거나, 죽었거나 간에 다 조심성이 없기
때문이오. 사람들 많은 데 안 가고, 환자들 가까이 안 가면 되는 거요. 형씨처럼
아직 환자는 아니지만 환자하고 접촉한 사람도 물론 멀리 해야 되고, 나처럼.
그러니까 위험한 사람만 안 만나면 된단 말이오.
[부르주아 2] 그럼 의사나 간호원이나 장례요원이라면 어떻하시겠소?.
[부르주아 1] 물론 가정이지만 사표를 내고 연금만 갖고 살거요. 위험한 직업은 양보하겠단
말이오. 난 안전해요. 환자하고 접촉한 적도 없고.
[부르주아 2] 남들을 위해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니 참 좋겠소이다. 남들은 형씨를 위해 목숨을
걸고 있는데 말이오. 하지만 너무 좋아히진 마쇼. 누가 건강하고 누가 안 건강한진
전혀 모르니까. 생기있고 발랄하고 활기차고 건강하던 사람이 한 시간도 못돼서
죽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부르주아 1] 여태 잘 피했는데 앞으론들 못 피할라고. 희생의 대가가 너무 크지만 않다면 나도
이기적인 건 싫소. 평상시라면 기꺼이 구호에 나섰겠죠. 하지만 지금처럼 예외적인
상황에선 누구나 조심하고 경계할 권리가 있고, 또 의무도 있는 법이오. 극한
상황에선 잠시나마 이기적이 될 권리와 의무가 있단 말이오.
[부르주아 2] 말 되네요. 그런 식의 윤리도 가능하겠죠.
[부르주아 1] 난 안전해요. 직감이 있으니까. 누구든 조금이라도 위험하면 절대 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고, 의사도 간호원도 안 만나고, 장례요원도 피했소. 식료품도 제일 비싼
가게서만 사고, 꺼림칙한 것보다야 돈 몇 푼 더 쓰는 게 나으니까. 뭐니뭐니해도 내
목숨이 최고 아니오?
[부르주아 2] 그저께 칠면조집에서 식사할 때 다니엘 씨하고 같이 앉지 않으셨소?
[부르주아 1] 그렇소만, 상의할 일이 있어서 만났던 거요. 좀 뚱뚱하지만 건강하고, 또 나처럼
조심하는 친구니까. 게다가 거긴 특실이었고, 병을 옮길 만한 사람도 전혀 없었소.
[부르주아 2] 아하!
[부르주아 1] 아하라니?
[부르주아 2] 아하가 아하지, 뭐겠소? 아하! 가까이 오지 마시오.
[부르주아 1] 제대로 얘기 안 해 줄 ---
[부르주아 2] 해줄 말이 없소.
[부르주아 1] 해줄 말이 없어도 하고 싶은 말을 해 보시오.
[부르주아 2] 글쎄, 가까이 오지 말라니까, 귀 먹었소?
[부르주아 1] 그 사람이, 나랑 식사한 그 친구가, 병에 걸렸소? 말해요. 그 사람도 환자요?
[부르주아 2] 아니, 지금은 환자가 아니오.
[부르주아 1] 그럼 금방 나은 거요?
[부르주아 2] 아니, 죽었소.
[부르주아 1] 무슨 습격을 받았겠지, 사고였나? 정말 죽었소? 암살당한 거요?
[부르주아 2] 정히 알고 싶소? 바로 그 병으로 죽었소.
[부르주아 1] 그럼 나도 죽겠네.
[부르주아 2] 아무리 그래도 가까이 오진 마쇼. 벌써 세 번째 경고요. 한발만 더 내밀면 총을
뽑겠소.
[부르주아 1] 아이고, 죽었구나. 기적이 없는 한 난 죽었어.

간호원이 하나 지나간다.

[부르주아 1] 간호원! 전염이 됐나 봐요. 이리 좀 와 봐요.


부르주아 1 은 웃옷을 열어제치고 셔츠 단추를 푼다.

[간호원] (부르주아 1 의 가슴을 살피며) 아, 늦었어요. 너무 늦었어요. 이젠 어떤 약도


소용없어요.

간호원은 부르주아 1 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부르주아 1] (왼쪽으로 달아나며 외친다) 난 죽었다! 난 죽었어!

부르주아 2 는 부르주아 1 의 뒤를 쫑아가며 총을 쏘고, 간호원은 부르주아 2 를 쫑아가며 악을 쓴다.

[간호원] 여보세요. 선생님도 죽은 거예요. 저도 죽었고요.


6 장 감옥에서
등장인물
죄수 1, 2
간수

[죄수 1] 창살 두 개를 끊었어. 조금만 밀어 봐. 됐어. 자, 창문으로 탈출하자.


[죄수 2] 창 밖은 호수야. 물이 깊어.
[죄수 1] 언젠 몰랐니? 너 수영 잘 하잖아. 5 분이면 땅에 닿는다니까. 양지바른 초원에. 그
다음엔 공원도 있고, 길도 있고, 가게, 빵집, 고깃간, 술장수, 과일장수, 다 있단
말야.
[죄수 2] 잠깐, 쇠를 감춰. 간수 온다. 왔어.

간수 등장.

[간수] 문은 열려 있다. 방금 내가 들어온 문도 안 잠갔고 다른 문들고 다 안 잠겼다.


창문으로 도망치려는 것도 알고 줄칼이 있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젠 그렇게 애쓸
필요 없다. 우리들 간수보다 훨씬 무서운 대재앙이 우리 모두를 감시하고 있으니까.
[죄수 1] 겁나지 않소. 물이고 불이고 두렵지 않소.
[간수] 그런 애기가 아냐.
[죄수 1] 어쩌든 난 포기 안해. (죄수 2 를 가리키며) 저 친구한테야 겁을 줄 수도 있겠지.
어차피 왔다갔다 했으니까. 하지만 난 맘대로 안 될걸.
[간수] 문을 지키던 감시병들은 다 죽었다.
[죄수 2] 네? 왜요? 그럼 다른 감시병들이 안 왔나요?
[간수] 왔지. 하지만 눈에 안 보이는 감시병이야.
[죄수 1] 놀리지 마시오.
[간수] 천만에. 온 도시에 병이 창궐하고 있다. 도시의 모든 문은 폐쇄됐다. 군인들이 언제
죽을 지 모르면서도 그 문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 군인들도 그 문을 열지는 못
한다. 도시 밖에서 아무도 못 나오게 지키고 있는 감시병들이 있기 때문이다.
[죄수 1] 상관없어. 난 시내까지만 나가면 돼.
[죄수 2] 나도.
[간수] 도시 밖의 감시병들은 병에 안 걸린 자들이다. 적어도 아직은 그렇다. 그러니 계속
안 걸리기를 바라고, 따라서 아무도 못 나오게 하는거다. 전염이 두려운 거지. 도시
안에선 거의 모두가 전염됐다. 아직 안 걸린 사람도 조만간 그렇게 될 거고.
[죄수 2] 무슨 병이죠?
[간수] 걸리면 죽는 병. 절망적인 전염병이다. 인도에도, 차도에도, 꽉닫힌 아파트에도,
교회에도, 성당에도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다. 이젠 한 군데로 모을 수조차 없다.
병에 안 걸리기로 맹세한 장례요원들까지도 위험하다. 선서를 했으니까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개와 고양이, 말과 쥐들도 인간 시체 옆에서 뒹굴고 있다. 이번 주
들어 남자, 여자, 짐승까지 합쳐 3 만구의 시체가 새로 집계됐다. 지난 주에 비해선
두배고, 지지난 주에 비해선 세배나 되는 숫자다.
[죄수 2] 말도 안 돼.
[지수 1] 거짓말. 괜히 겁 주려고. 그래, 맞아, 이건 정책적인 거짓말이야.
[간수] 그럼 나가서 직접 확인해라. 아마 금방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하게 될 테니.
교도소장도 나갔다가 죽었다. 매일 밤 처자식을 만나러 가더니 식구들한테서 병이
옮아 사랑하는 시체들 가운데서 죽은 거다. 어젠 전차 한 대가 승객을 가득 태우고,
출발했는데, 가는 도중에 다 죽어서, 종점엔 87 구, 아니 운전수까지 88 구의 시체만
도착하기도 했다.
[죄수 2] 꼭 전하를 타야 하는 건 아니니까.
[간수] 걸어다닌다고 안전한 건 아니다. 창문에서 떨어진 시체나 환자가 보행자 머리를
덮치는 수도 많으니까. 난 독신에다 친척도 없다. 난 감옥 밖엔 절대 안 나간다.
여긴 안전하다. 저 두터운 벽을 봐라. 아무것도 통과 못 한다. 병균도 마찬가지다.
물론 너희들은 감옥에 있다. 그러나 여긴 안전하다. 건강과 안전이 보장된다. 정말
감옥은 밖에 있다. 선택해라. 감옥이냐, 죽음이냐?
[죄수 1] 아냐, 그럴 리 없어.
[간수] 그럼 나가.
[죄수 1] 이건 함정이야.
[간수] 문은 열어 놨다니까. 확인해 봐. 모든 문이 열려 있단 말이다.

간수 퇴장.

[죄수 2] (죄수 1 에게) 어떡할래?


[죄수 1] 거짓말이야. 사기야.
[죄수 2] 거짓말은 아냐.
[죄수 1] 네가 어떻게 알아? 무슨 증거로?
[죄수 2] 간밤에 꿈을 꿨는데, 악몽을 꿨는데, 사람들이 다 죽었어. 시체가산더미 같았어.
시체더미가 7 층집보다도 높았어. 저거 봐. 정말로 문을 열어 놨잖아.
[죄수 1] 도망칠 용기가 없는 거지? 겁이 나는 거지?
[죄수 2] 봐. 문이 열려 있잖아.
[죄수 1] 꿈 따위를 믿는다는 얘긴 관둬.
[죄수 2] 꿈이야말로 진실이야. 낮엔 감히 생각 못 하는 것도 밤에 꿈속에선 실체가
드러나거든.
[죄수 1] 꿈하고 타협하는 거지. 겁나서 못 하는 일을 실현시켜 주니까. 엉터리 핑계야. 겁이
나니까 둘러대는 거야.
[죄수 2] 문이 열려 있다는 건 이젠 감시병이 필요없다는 얘기야. 난 감옥에서라도 오래 사는
게 낫겠어.
[죄수 1] 혼자라도 가겠어. 하지만 다른 문에는 감시병이 있을 거야. 그 자 말을 어떻게 믿나?
분명히 시퍼렇게 살아 있을 감시병들이 있을 거야. 간수 말을 믿을 수야 없지. 갈께.
우리 친구들한텐 내가 필요해. 난 친구들한테 의무와 책임이 있어. 자, 이젠 자유다.
따라오고 싶으면 따라와. 창문으로 나갈 거야. 문은 못 믿어. 잘 있어.

죄수 1 은 창살 두개를 뽑아 바닥에 던진 뒤 채광창으로 뛰어나간다.

[죄수 2] (나무 걸상에 올라가 채광창으로 내다보며) 멀리 못 갈 텐데.


[죄수 1 의 목소리] 아, 쥐한테 물렸어. 온몸이 아파. 헤엄을 못 치겠어. 어어, 빠진다. 사람살려.
[죄수 2] (걸상에서 내려와 객석을 향한 채) 벌써 시체가 떠올랐어. 퉁퉁 불어서.
[간수] (들어오며) 어때, 내 말이 맞지?
[죄수 2] 전 처음부터 믿었어요. (간수가 권총을 꺼내자 겁에 질려) 처음부터 믿었다니까요.
정말 처음부터 믿었다구요. 정말이예요. 살려 주세요.

간수는 죄수 2 를 쏘아 쓰러뜨린다. 그리고는 별 뚜렷한 이유 없이 주머니에서 잡아당기면


죄어지도록 매듭을 지은 밧줄을 꺼내 목을 맨다. 검은 옷의 수도사가 무대를 가로질러 죄수의 맥박이
뛰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이어 간수가 목에 맨 밧줄이 튼튼한지 검사한 뒤 나간다.
8 장 거리에서
[행인] (친구에게) 친구 집에서 나올 때 두 명이 있었거든. 그런데 신문을 사 갖고 올라가서
문을 열었더니, 글쎄, 시체가 열둘이나 널브러져 있잖아.
[친구] 어떻게 그렇게 늘어났지?
[행인] 궁금한 건 말야, 그러니까 꼭 밝혀 보고 싶은 건, 과연 늘어나서 죽었느냐, 아니면
죽어서 늘어났느냐 하는 문제야. 어쨌든 불과 오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거든.
[친구] 무슨, 그런, 기계가 있나?
9 장 실내 동시 장면
무대는 둘로 구분되어 있고, 다음의 장면 1 과 2 는 동시에 진행된다. 객석에서 보아 왼쪽 부분에는
안쪽에 창이 하나 있고, 객석에서 보아 왼쪽에 문이 하나 있으며, 오른쪽에는 침대 하나가 실제건
가상이건 무대를 구분하는 간막이에 붙여져 있다. 다른 쪽 부분에도 역시 침대 하나가 간막이에
붙여져 있고, 안쪽에 창이 하나 있으며, 객석에서 보아 오른쪽에는 문이 하나 있다. 또한 이렇게
구성된 두 방에는 각기 의자도 하나씩 있다.

장면 1
이 장면은 객석에서 보아 좌측에서 진행된다. 장면 2
첫번째 여인 쟌느가 걱정에 사로잡힌 듯 힘들게 이 장면은 객석에서 보아 우측에서 진행된다. 이
의자에서 일어난다. 이어 문 두드리는 소리가 장면의 여인 뤼시엔이 힘들게 의자에서
들린다. 쟌느가 달려가 문을 연다. 쟝이 일어난다. 이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들어온다. 뤼시엔이 달려가 문을 연다. 삐에르가 들어온다.
[뤼시엔] 아니, 어떻게?
[쟌느] 아니, 어떻게? [삐에르] 밤을 틈타 감시병들 사이로 빠져
[쟝] 밤을 틈타 감시병들 사이로 빠져 나왔지. 오다가 순찰대한테 몇
나왔지. 오다가, 순찰대한테 몇 번이나 번이나 들킬 뻔했어.
들킬 뻔했어. [뤼시엔] 그냥 시골에 계시는 게 더
[쟌느] 그냥 시골에 계시는 게 더 안전했을 안전했을텐데. 하지만 당신이 오시니
텐데. 하지만 당신이 오시니 행복해요. 행복해요. 포기하고 있었는데.
포기하고 있었는데. 오셨으면 했지만, 오셨으면 했지만. 그래도 그냥
그래도 그냥 계시지 않고요. 계시지 않고요.
[쟝] 하여튼 난 왔소. 애들은 장인 장모께 [삐에르] 하여튼 난 왔소. 애들은 장인 장모께
맡겼고. 잘들 있으니까 걱정 마. 맡겼고 잘들 있으니 걱정 마.
[쟌느] 우린 어떻게 될까요? [뤼시엔] 우린 어떻게 될까요?
[쟝] 어찌 알겠소? 참, 집 앞에 수도사가 [삐에르] 어찌 알겠소? 참, 집 앞에 수도사가
있던데, 아는 사람이오? 있던데, 아는 사람이오?
[쟌느] 그냥 지나가는 거겠죠. [뤼시엔] 그냥 지나가는 거겠죠.
[쟝] 그렇겠지. 어쨌든 외출을 삼가요. 길도 [삐에르] 그렇겠지. 어쨌든 외출을 삼가요. 길도
쥐죽은 듯 고요해. 옆에 문 연 가게가 쥐죽은 듯 고요해. 옆에 문 연 가게가
있던데, 뭐 좀 사올께. 있던데, 뭐 좀 사올께.

장면 2 의 대사는 장면 1 의 대사와 번갈아 이루어지다가 끝 무렵에 가서 달라지는데, 그 시점은


명시될 것이다. 즉 쟌느가 "아니, 어떻게?" 하며, 이어 뤼시엔이 "아니, 어떻게?" 하고, 다음에 쟝의
"밤을 틈타 --- "와 삐에르의 "밤을 틈다 --- " 가 이어지는 식으로 적당한 순간까지 진행된다.
[쟌느] 서둘지 말아요. 여보 이리 좀 오세요. (쟝의 손을 잡는다. 두 사람은 나란히
침대에 앉는다. 쟝은 쟌느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날씨는 어땠어요? [뤼시엔] 1층 사람들이 죽었어요. 시체를
[쟝] 시원하고 좋았어. 바닷가잖아. 실어갔어요. 위층 사람들은 어디론지
바닷바람 덕분에 모든 게 깨끗하지. 다 도망갔어요.
당신, 불안해 보이는데. [삐에르] 거리를 헤매다, 검문에 걸려 다시 잡혀
[쟌느] 여긴 끔찍하게 더웠어요. 썩는 냄새가 오겠지. 수용소로 끌려가든가.
[쟝] 겁내지 마. 그럴 필요 없어. 이렇게 [뤼시엔] 다들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 지경이
같이 있잖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됐죠?
[쟌느] 1 층 사람들이 죽었어요. 시체를 [삐에르] 잘못한 거 없어. 그냥 이렇게 된 거야.
실어갔어요. 위층 사람들은 어디론지 이유가 없어. 설령 이게 신의
다 도망갔어요. 징벌이라도 ---
[쟝] 거리를 헤매다, 검문에 걸려 다시 잡혀 [뤼시엔] 신의 징벌일 수도 ---
오겠지. 수용소로 끌려가든가. [삐에르] 그럼 우리가 왜 이렇게 불안하지?
[쟌느] 다들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 지경이 잘못한 게 없어. 이유없는 재앙이야.
됐죠? [뤼시엔] 정말 행복했는데.
[쟝] 잘못한 거 없어. 그냥 이렇게 된 거야. [삐에르] 그땐 그걸 몰랐지만.
이유가 없어. 설령 이게 신의 [뤼시엔] 무서워. 못참겠어. (사이, 일어난다.)
징벌이라도 ---
[쟌느] 신의 징벌일 수도 --- [쟌느] 아니, 여기 못 있겠어요. 좀 나가요.
[쟝] 그럼 우리가 왜 이렇게 불안하지? [쟝] 좀 쉬어요. 얼굴이 창백해.
잘못한 게 없어. 이유없는 재앙이야. [쟌느] 창백하다고요?
[쟌느] 정말 행복했는데. [쟝] 아니, 그냥 신경성이야. 잠깐 누워요.
[쟝] 그땐 그걸 몰랐지만. (쟌느를 도와 눕힌다) 자, 됐소. 곁에
[쟌느] 무서워. 못참겠어. (사이, 일어난다.) 있을게. 손 좀 줘 봐요. 손이 덥군. 땀이
당신이 안 오셨으면 전 미쳐 버렸을 차고.
거예요. [쟌느] 머리가 아파요.
[쟝] 정신차려요. 이제 좀 진정해요. [쟝] 창문 좀 열까?
[뤼시엔] 서둘지 말아요. 여보 이리 좀 오세요. [쟌느] 길에서 뭐가 들어올 지 알고요?
(삐에르의 손을 잡는다. 두 사람은 [쟝] 나가고 싶다며? 아니, 이마가 불덩이야!
나란히 침대에 앉는다. 삐에르는 (쟌느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어 준다)
뤼시엔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아이구!
날씨는 어땠어요? [쟌느] (손에 목을 대고) 저 붓지 않았어요?
[삐에르] 시원하고 좋았어. 바닷가잖아. 이거 봐요. 손바닥이 빨개졌어요. 배가
바닷바람 덕분에 모든 게 아파요. 힘이 없어요. 온몸이 아파요.
깨끗하지. 당신, 불안해 보이는데. [쟝] 걱정 마요. 걱정 마.
[뤼시엔] 여긴 끔찍하게 더웠어요. 썩는 냄새가 [쟌느] 향수병!
[삐에르] 겁내지 마. 그럴 필요 없어. 이렇게 [쟝] (주머니에서 향수병을 꺼내며) 힘껏
같이 있잖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들이마셔요.
[쟌느] 못 하겠어요. [뤼시엔] 여보, 해 봐요. 제가 있잖아요. (
[쟝] 들이마시라니까. 뤼시엔은 공포에 사로잡힌다.)
[쟌느] 냄새를 못 맡겠어요. 하나도 [삐에르] 당신이 안 보여 꼭 안개 속 같아.
[쟝] 여보, 해봐요. 내가 곁에 있잖소. 바로 [뤼시엔] 집안에서 무슨 안개예요?
옆에. [삐에르] 너무 아파.
[쟌느] 당신이 안 보여요. 꼭 안개 속 같아요. [뤼시엔] 괜찮아요. 여보, 괜찮아요.
[쟝] 집안에서 무슨 안개야? [삐에르] 당신 말 소리도 잘 안 들려.
[쟌느] 아파요. 무서워요. [쟌느] 말 좀 해 봐요.
[쟝] 괜찮아. 여보, 괜찮아. [쟝] 당신을 꼭 껴안고 있소. 품에 안고
[쟝] (외치며) 겁만 먹지마. 자극을 주면 좀 있다고 지켜 줄께. 절대 못뺐아가. 절대
나을까? 안아 줄께. 절대 안 떠날께. 안 내 줄거야.
[삐에르] 당신이 안 오셨으면 전 미쳐 버렸을 [쟌느] 여보, 옆에 계세요? 안 보여요. 얘기
거요. 소리도 안 들리고요. 절 안고 계신가요?
[뤼시엔] 이제 좀 진정해요. 감각이 없어요.
[삐에르] 아니, 여기 못 있겠어. 좀 나갑시다. [쟝] 여보, 안돼. 살아야 돼. 당신을 위해서
[뤼시엔] 좀 쉬세요. 얼굴이 창백해요. 왔는데. 나랑 있어야 돼.
[삐에르] 창백하다고? [쟌느] 너무 힘들어요 거기 계세요? 당신을
[뤼시엔] 아니, 그냥 신경성이예요. 잠깐 기다렸어요. 목이 빠지게요. 왜 안
누우세요. (삐에르는 눕는다.) 네, 오셨어요? 나 혼자 놔두고
됐어요. 곁에 있을게요. 손 좀 줘 [쟝] 이렇게 왔잖소. 여보, 내 말 좀 들어요.
봐요. 손이 덥군요. 땀이 차고. 날 좀 봐요. 날 모르겠소? 말 좀 해요.
[삐에르] 머리가 아파. 말 좀 해 봐요.
[뤼시엔] 창문 좀 열까요?
[삐에르] 길에서 뭐가 들어올 지 알고? 쟌느는 한숨을 내쉬며 죽는다.
[뤼시엔] 나가고 싶다며요? 아니, 이마가
불덩이예요. 아이구! [쟝] (쟌느를 껴안으며) 당신곁에 있겠소.
[삐에르] 아이구! 떠나지 않겠소. 영원히 여기 있겠소.
[뤼시엔] 당신 부은 것 같아요. 이거 봐요. 당신
손바닥이 빨개졌어요.
[삐에르] 배가 아파. 힘이 없어. 온 몸이 다
아파. [뤼시엔] (외치며) 도와 줘요. 아무도 없어요?
[뤼시엔] 어떡하지? 어떡해요? [삐에르] 말 좀 해봐.
[삐에르] 향수병! 향수병을 줘! [뤼시엔] (이미 조금 문쪽으로 향하며) 어떡해?
[뤼시엔] 맙소사! 너무 늦었어. 벌써 걸렸나봐. 약한 여자 혼자서. 죽어가는 사람을
[삐에르] 들이마시지 못 하겠어. 품에 안고. 전부들 우릴 버렸어.
[뤼시엔] 여보, 무서워요. [삐에르] 여보, 옆에 있소? 안 보여. 얘기 소리도
[삐에르] 냄새를 못 맡겠어. 안 들리고. 날 안고 있는거요? 감각이
없어. (뤼시엔은 비명을 토하면서
문을 연다) 여보, 안돼. 당신을 [삐에르] 힘이 들어 거기 있소? 거기 있지? 떠날
위해서 왔는데. 나랑 있어야 돼. 너무 리가 없지. 날 버릴 리가 없지. 응,
힘들어. 거기 있군. 여보, 당신이 보여. 당신
[뤼시엔] 저이를 기다렸는데. 함께 떠나려고 말 소리도 들려. 오, 당신이로군. 좀
했는데. 함께 살아남을 줄 알았는데. 크게 얘기해요. 그래, 난 혼자가
아냐.
뤼시엔을 울부짖으며 나간다.
10 장 실내 동시 장면
무대는 둘로 구분된다. 두 장면은 동시에 진행된다. 객석에서 보아 왼쪽 부분에는 등받침과
팔걸이가 없는 긴 의자 하나와 화장대. 또 다른 의자가 하나 있고, 안쪽으로 창문이 하나 있다.
객석에서 보아 오른쪽 부분에는 침대가 하나 있다. 어떤 여관방이다. 왼쪽에는 어머니와 딸, 그리고
하녀가 있다. 딸은 경대 앞에 있다.

[어머니] 예쁘게 해, 귀걸이도 하고, 목걸이도 해. 비밀무도회에 갈거니까.

오른쪽에 몹시 피곤해 보이는 여행객과, 이어 여관 하녀가 들어온다.

[여관 하녀] 여기 꽤 유명한 여관이에요. 믿으셔도 돼요. 빈대도 없다구요.

왼쪽에서.

[하녀] 아씨, 여기, 향수요.


[어머니] (딸에게) 그래, 예쁘게 해. 그래야 약혼자가 좋아하지. 더 좀 예쁘게 해.
[딸] 네, 알았어요.

오른쪽에서.

[여관 하녀] (여행객에게) 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자나갔어요. 누군지 아세요?

왼쪽에서.

[어머니] 슬픈 생각은 그만해. 넌 젊잖니. 즐겨야지. 너만 친구들이 죽은 게 아냐. 친구들


애도할 시간이 없어.
[하녀] 마님, 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지나갔어요.

오른쪽에서

[여행객] 맥주 한 잔 주쇼. 큰 걸로.


[여관 하녀] 우리 집 맥주는 기가 막히죠. 건강에도 좋구요.

여관 하녀 퇴장. 여행객은 침대에 눕는다. 이어 신음하기 시작한다. 몸이 뻣뻣해진다. 침대에서


떨어진다. 힘들여 다시 올라간다. 헐떡거린다. 빈사상태에 빠진다. 죽는다. 이 동안 무대 왼쪽에서는
딸이 똑같은 증세를 보이는데, 그 진행 과정은 다음과 같다.
[딸] 어머, 또 그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도대체 뭘까?
[어머니] 걱정 말래도.
[딸] 아침부터 계속 창 밑을 왔다갔다 하잖아요.
[어머니] 그냥 수도사야. 하잘 것 없는 수도사라고. (하녀에게) 넌 또 왜 그래? 아씨
불안하시게.
[하녀] 좋은 일로 나타나진 않거든요.
[어머니] 환자들을 만나서 격려하고 용기를 주려는 거야. 용감한 사람이지. (딸에게)
화장에나 신경 써. 즐거운 것만 생각해. 그러니까, 뭐, 봄이라던가, 호수, 초원,
꽃처럼 ---
[딸] 어머닌 이 목걸이가 좋으세요? 전 하기 싫은데.
[어머니] 재앙도 우린 비켜갈 게다. 틀림없이.
[하녀] (딸에게) 향수 다른 거 드려요? 여기 반지요. 분이요.

딸은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얼굴에 분을 바른다.

[어머니] 입술에 루즈 좀 발라. 분칠도 좀 더 하고.


[딸] 얼굴이 창백하죠?
[하녀] 건넛집 대문 앞에 감시병들이 있어요.
[어머니] 우리 집은 아냐. 우리 집은 아니라고.
[하녀] 제발 덕분에 그래야죠.
[딸] 피곤해요. 정말 피곤해요. 만사 다 귀찮아요.
[어머니] 자, 자 힘을 좀 내. 버텨 봐. 옷 입는 거 도와 주련?
[딸] 머리가 아파요.

딸은 일어난다. 비틀거린다.

[하녀] (딸에게) 아씨, 왜 그러세요?


[어머니] 아니라니까. 정말 아무것도 아냐. 그냥 가벼운 두통이야. 내성적이라, 사람들
만나는 게 싫어서 그래. 좀 떨리기도 하고, 좀 겁도 나고. (딸에게) 자, 내가 입혀
주마. 알아서 해 줄께.
[딸] 그냥 --- 그냥 좀 눕고 싶어요.
[어머니] 정 그렇담 좀 쉬렴. 잠깐만이다. 금방 나가야 되니까.

딸이 쓰러지려고 한다. 어머니가 달려간다.

[어머니] (하녀에게) 좀 거들어. 냉수 좀 떠 와. (딸에게) 그냥 좀 불편한 거다.


어머니와 하녀는 딸을 도와 긴 의자에 눕힌다.

[딸] 어머니, 정말 아파요.


[하녀] 새하얘지셨어요.
[어머니] 어떤데? 어디가 아픈데?
[딸] 머리요. 눈이요. 목이요. 배가 아파요. 추워요. 너무 더워요. 숨이 막혀요.
[하녀] 이마가 불덩이예요. 손은 얼음장 같구요.(어머니는 딸의 블라우스 단추를 끌러
준다) 보세요. 얼굴이 새빨개요. 흙빛이에요. 손바닥이 새까매졌어요. 만지면 안
돼요.
[어머니] 아냐. 아냐.
[하녀] (외치며) 그 병이에요.
[어머니] (딸에게 달려들며) 걱정마라. 내 고쳐 주마. 아무것도 아냐. 곧 나을거야.
[하녀] 걸렸어요.
[어머니] 조용해. 그냥 좀 불편한 것 뿐이라니까.
[딸] 아파요.
[하녀] 하느님!

오른쪽에서

[여관하녀] (들어오며) 손님, 맥주 가져왔습니다. 엄마야. 죽었어. 우리 여관에서 죽었어.

왼쪽에서

[하녀] 사람 살려!

하녀는 간막이 문으로 도망쳐 여행객의 방을 가로 지른다. 이때 여관 하녀는 "죽었어! 죽었어!"를


외치며 맥주를 바닥에 던지고 나가다가 방을 가로 지르던 앞의 하녀와 부딪친다. 두 하녀는 "사람
살려!"를 외치며 서로 떼밀면서 나간다. 왼쪽에서는 어머니가 딸의 몸을 격렬하게 부둥켜 안고 있다.

[어머니] 얼마나 행복했는데. 넌 없는게 없었어. 그런데, 아이고. (무섭게 비명을 지르며 창
쪽으로 갔다가 다시 딸 쪽으로 온다) 아이고, 살려 줘요! 살려 줘요! (딸의 침대에
몸을 던졌다가, 창 쪽으로 갔다가 다시 딸 쪽으로 와 침대에 몸을 던진다) 도와줘요.
오, 하느님!

검은 옷의 수도사가 왼쪽으로 들어와 묵묵히 움직이지 않고 있다.


14 장 의사들
회의실 무대중앙에 커다란 탁자. 남자 셋과 여자 셋으로 이루어진 시내 의사들의 모임이다.

[의사 1] 과학은 무력합니다.


[의사 2] 지금 이 경우만 그런 거죠. 앞으론 무력하지 않을 겁니다.
[의사 3] 과학이 무력하다면 신비주의란 얘긴데, 그건 법으로 금지돼 있고, 아니면
불가지론이라 하겠지만, 그런 의사나 화학자, 물리학자, 생물학자는 물론이고,
행정부와 위생당국까지도 배척하잖습니까?
[의사 4] 길이 온통 수천수만의 시체로 뒤덮인 게 신비주의 때문은 아닙니다.
[의사 5] 과학 때문도 아니죠. 위생 규칙들을 안 지켜서 죽은 겁니다.
[의사 2] 대학내 의학 교육은 물론이고, 민간에 대한 위생 교육과 기초의학 교육도 잘못됐던
겁니다. 교육이 전혀 없는 지역도 있고요. 그러니까 책임은 행정당국에 있습니다.
시의원, 시장, 부시장, 간부들, 모조리 체포해야 합니다.
[의사 3] 재판해서 사형을 시켜야 돼요.
[의사 1] 이미 그럴 필요조차 없는 사람이 많아요.
[의사 4] 무지 때문에 죽는 건 아닙니다.
[의사 6] 그럼 신비주의를 지지하시는 건가요? 무지해서들 죽는 겁니다.
[의사 2] 의학 규칙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성실히 지킨다면 아무도 안 죽을 겁니다.
[의사 3] 이론상 주의를 안 하는 사람들만, 왜 죽는지도 모르고, 깨닫지도 못하고 죽습니다.
물론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나, 사형수나, 전사자들도 죽지만 말입니다.
[의사 4] 평화시에도 죽습니다. 의지와 상관없이도 죽고요. 그러니까 죽기 싫어하면서도
죽는 사람들이 많죠. 그 중엔 배운 사람들도 많고요.
[의사 5] 죽음에 동의할 때 죽는 겁니다. 물론 이 경우 동의란 상당히 복합적이지만요.
[의사 6] 의식하건 안 하건 죽음을 수락할 때 죽는 겁니다. 굴복하고 포기한 거죠. 용감한
사람들, 자유를 위해, 자신의 자유의지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은 결코 굴하지
않습니다.
[의사 1] 그럴 순 없어요.
[의사 2] 그럴 수 있어요. 그래야 하고요.
[의사 3] 죽는다는 건 악에 대한 굴복입니다. 그건 반동이예요. 그것 때문에 진보 역량이
저해를 받아선 안 됩니다.
[의사 4] 하지만 누구도 영원히 살진 못합니다. 극히 평범하고 간단한 진리죠. 유감스럽게도
죽음은 존재합니다. 그런 진리를 논박하시려 하고, 그래 그걸 재론해야 하다니 정말
유감이군요.
[의사 5] 그럼 사형 선고를 내리겠소. 죽음을 받아들인다니 그걸 드리겠단 말이요. 약식
재판에 약식 판결이오, 어떻소?
[의사 6] 집단적 전진 앞에 죽음도 무력해요. 신념과 확신을 갖고 계속 앞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없어요. 죽음은 반동의 유혹이에요.
[의사 1] (의사 4 를 지칭하며) 제 생각엔 이분 말씀이 옳습니다. 삶의 끝에는 필연적으로
죽음이 있습니다.
[의사 2] 필연이라니, 그게 무슨 뜻인지 좀 들어 볼까요?
[의사 3] 필연 같은 건 없어요. 물론 판사들이 국가와 인류에 대해 죄를 지은 일부 시민들을
처벌하기로 결정하거나, 또는 의사들이 전체적인 수요 충족이 불가능하니 시민의
20% 내지 3,40%를 줄여야겠다고 판단하는 경우엔 예외겠지만, 바로 그럴 때
신비주의에 빠져 죽음을 믿는 자들이나 공중위생법을 안 지키는 자들, 또는 삶보다
죽음을 더 믿는 자들을 처단하는 거죠. 안됐지만 쓸모없는 자들이거든요.
[의사 4] 우린 다 죽습니다. 유예상태일 뿐이죠.
[의사 5] 증거를 대시오.
[의사 6] 증거를 어떻게 대겠어요?
[의사 1] 자고로 아무리 건강하고 고집센 사람도 다 죽었습니다. 그 엄청난 양의 시체는 생각
않더라도, 생물학적 법칙만으로도 간단히 증명되는 얘기 아닙니까?
[의사 2] 죽은 사람들은 모두 늙고 병들어 우연히 죽은 겁니다. 심장과 뇌가 기능을 멈춘
거죠. 다들 교육과 경험을 통해 잘 아시겠지만, 이건 애들도 알 걸요. 과학을 믿고,
그러한 이론과 경험을 염두에 두는 한 절대 안 죽습니다.
[의사 3] 거 옳으신 말씀입니다.
[의사 4] 그러니까 여러분들 주장은 수십만의 사람들이 모두 무지하고 불성실해서, 또는 그
학설의 진실성을 안 믿어서 죽었다는 겁니까?
[의사 5] 단연코 그렇소. 악의적 선전에 솔깃했던 거요. 거기에 희생된 거지. 우리의 과학이
제대로 힘을 못 쓰는 것도 실은 그놈의 악의적 선전 때문이오. 하지만 희생은
당사자들 책임이오. 우릴 안 믿고, 엉뚱한 걸 믿었으니, 낡고 유해한 걸 말이오.
[의사 6] 심지어 혁명과 진보까지 포함한 모든 행동이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더군요. 결국엔 누구나 죽는다나요.

다음 대사부터는 노래(엉터리 오페라 곡조)로 처리할 수 있다.

[노래시작]
[의사 1] 생각해 볼 만한 주장이오.
[의사 2] 패배주의자 아니오?
[의사 3] 반동분자 아니오?
[의사 4] 난 죽음을 믿소.
[의사 5] 부끄러운 일이오.
[의사 6] 난 절대 안 죽소.
[의사 1] 내기합시다.
[의사 2] (의사 1 에게) 죽는 자는 나쁜 시민이오.
[의사 3] 죽는 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으니, 후손들에게 벌을 줍시다.
[의사 4] 죽으면 모든 것과 분리되는 법이오.
[의사 5] 하느니 진부한 생각뿐이군.
[의사 6] (의사 1 에게) 상식에서 얻을 건 거짓 진실뿐이오. 상식과 진실 사이엔 엄청난
간극이 있소.
[의사 1] 죽음을 생각하기 싫으시오? 죽음을 생각하시오. 죽음을 막을 순 없소.
[의사 2] 거짓말.
[의사 3] 거짓말.
[의사 4] 여러분들이 옳은 것 같소. 마음이 중요하오만, 난 용기가 없소. (일어난다)
용서하시오.

의사 4 가 쓰러진다.

[의사 5] 죽었소.
[의사 6] 난 안 놀랍소.
[의사 1] 나도 안 놀랍소.
[의사 2] 이유가 다를 거요.
[의사 3] 자기 잘못이오. 동의했던 거요. 기가 막힌 오시범이오. 이 죽음은 법칙이 아니고
예외요.
[의사 5] 오시범도 전염성이오.
[의사 6] 대중은 어리석소. 오시범도 따라할 거요. 계몽을 합시다.
[의사 1] 이 병은 전염성이오. 용서하시오. 미안하오.

의사 1 이 쓰러져 죽는다.
[의사 2] 보시오.
[의사 3] 보시오.
[의사 5] 보시오.
[의사 6] 보시오.
[의사 2] 죽어 마땅했소.
[의사 3] 죽음을 믿어서 죽은 거요.
[노래끝]

노래식 대사가 끝난다.

[의사 5] 우리에겐 죽음이 없음을 증명해 보입시다.


[의사 6] 과학과 진보를 믿는 우리가 올바를 시범을 보입시다.
[의사 2] 죽음을 타도하자!
[의사 3] 삶이여, 만세!
네 명의 의사들이 퇴장한다. 무대 밖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시 오페라 식으로

[노래시작]
[의사 5] 쓰러지지 마시오

쓰러지는 소리.

[의사 6] 쓰러지지 마시오.

쓰러지는 소리.

[의사 2] 쓰러지지 마시오.

쓰러지는 소리.

[의사 3] 여러분, 쓰러지지 마시오. 여러분, 난 안 쓰러지겠소.

쓰러지는 소리. [노래끝]


15 장 거리에서
구급차를 부르는 경관의 목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오른쪽으로 노인과 노파가 등장한다. 노인이
노파를 부축하고 있다. 그들은 천천히 힘을 들여 오른쪽을 향해 걷는다. 잠시 후 벤취에 앉을 것이다.

[노파] 오늘 날씨 참 좋았죠? 저 노을 좀 보세요. 아름답죠? 말씀 좀 하세요. 파란 하늘이


싫으세요? 노을도 싫고요? 옛날엔 좋아하시더니.
[노인] 당신한텐 모든게 항상 아름답군. 비도, 눈도, 파란 하늘, 태양, 차도, 인도까지도.
[노파] 그래요. 하수도까지요.
[노인] 그렇겠지.
[노파] 뭘 봐도 전 행복해요.
[노인] 젊어, 정말 젊어.
[노파] 모든 게 신비롭고, 삶의 모든 순간이 기뻐요.
[노인] 나도 처음엔 세상을 보며 넋이 나갔었소. 그래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지. 그
마비 상태를 벗어난 뒤엔 내가 누군지 물었고, 하지만 이것 역시 또다른 마비였소.
그러니까 세상에 취하고, 나 자신에게 빠져, 말할 수 밖에 없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거요. 누구한테? 나한테. 그리고는 남들한테. 우선은 고독한 질문이지. 자기한테
묻는 거니까. 무형의 우주를 탐색하는 절대적 고독이랄까? 하지만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다가 '난 뭔가?' , '난 누군가?' 로 이어지고, 결국 '난 왜 이 모든 것에
둘러싸여 여기 있는가?' 를 묻게 되지. 사실 이 세 번째 단계에 이르면 이미 불순한
거요. 형이상학보다는 현실과 역사에 가까우니까. 하지만 애초 넋이 나갔을 때부터
위기감은 있었소. 세상과 자신에게 느끼는 불안과 공포말이오. 인생은 위기감은
있었소. 인생은 위기감과 함께 시작되는 거요. 물론 질문을 않게 되고, 피말리는
불안과 위기감만 남게 되지. 세상은 평범하고 너무나 당연하고, 그래 피로와 권태,
또한 처음부터 계속 있었던 공포만이 존재하고, 인생은 신비롭지 않소. 인생은
악몽이오. 당신은 어떻게 그 신비감을 그대로 간직하는지 모르겠소. 난 매순간이
공허하고 부담스러운데. 모든게 끔찍하고, 괴롭고, 지겨운데.
[노파] 지겹다니요? 저 나무가, 저 길이 지겨워 하나요? 호수와 하늘도 서로 비추며 하나가
되는데.
[노인] 가구들도 지겨워 하고, 벽에선 권태가 스며나오고, 문은 슬퍼하고 있소. 열리면
울부짖고, 닫히면 신음하고.
[노파] 햇빛 속에 활짝 핀 저 초목들을 보세요. 잎사귀 하나 안 시들었어요. 난 저 얼굴들을
눈빛으로 애무하죠.
[노인] 서로 가리고 있는 얼굴들. 난 그 눈빛도 싫소. 시커멓고 더러운 머리통, 그건 장작일
뿐이오. 저 돌들도 무거운 침묵에 짓눌린 채 감옥에 갇혀 있소.
[노파] 돌에도 얼굴이 있어요. 미소를 짓고, 노래를 하죠.
[노인] 다 시들었어. 나도 시들었고. 난 이백살이오. 줄곧 기다리며 살았지. 하지만 이젠
기다리지 않소. 기다릴 게 없소. 아무것도.
[노파] 당신의 슬픔만이 제 마음의 어둠이에요. 유일한 상처죠. 제가 곁에 있는데,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죠? 전 이 우주에 둘러싸여 당신만 있은면 족한데. 계셔
주시기만 해도 이렇게 고마운데.
[노인] 오래 전부터 --- 이미 오래 전부터 ---
노파] 첫날부터, 변함없이, 물론 사랑은 항상 새롭고요. 제겐 매일매일이 첫날이에요.
날마다 첫날을 맞이하죠. 전 절 감싸고 있는 세상의 신비스런 모습에 만족했고,
존재한다는 의식에 만족했어요. 그 이상 알 필요는 못 느꼈어요. 모든 의문은
존재를 파고들어 상처를 내죠. 모든 의문은 모든 것을 의심하니까요. 자신에 대한
질문은 자신에 대한 거부예요, 설령 거분 줄 모르더라도. 자신에 대한 불신이거나,
아니면 공허감이죠. 물론 이건 기질상의 문제예요. 태어나자마자 거부냐
인정이냐를 선택하니까. 그래도 당신만 만족한다면 제 하늘엔 구름이 안 낄 텐데.
당신만 좋다면 전 환성을 지르며 춤을 출텐데. 당신만 허락하면 제 기쁨으로 당신을
사로잡을 텐데. 자, 우리 춤춰요. (그들은 계속 힘들게 걷는다.) 세상은 아침마다
새롭고, 새벽마다 깨끗하고 순결해요. 당신이 슬프다면 절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
[노인] 그 무엇도 사랑않소만, 당신만은 사랑하오. 내 방식대로, 내가 할 수 있는 한, 내
힘껏 말이오.
[노파] 그래봤자 무관심에서 크게 벗어날라구요.
[노인] 아니, 그렇지 않아. 어쨌든 당신이 필요하니까.
[노파] 전 당신만 필요해요. 그리곤 그저 약간의 하늘과, 약간의 햇빛, 약간의 그늘, 약간의
온기만 있으면 돼요.
[노인] 여보, 좀 둘러보구려. 어떻게 우리가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겠소?
[노파] 주위를 못 보는 건 당신이예요.
[노인] 당신이오.
[노파] 당신은 멀리까진 못 봐요. 아니, 싸우진 맙시다.
[노인] 어떻게 당신은 이 불안을 수용한단 말이오? 모두가 공포에 떨고, 모두가 불행 속에
갇혔는데.
[노파] 당신은 항상 겁을 냈죠. 겁낼 이유가 없을 때조차요. 남들의 공포는 남들한테 놔
두세요. 스스로 치유되도록 말예요.
[노인] 그래, 난 항상 불안했소. 하지만 내 불안만도 버거운데 어찌 남의 공포까지
떠맡겠소? 그런데 오늘 보니 모든 이들 눈에 그 불안이 어른대고 있소. 불안이
증식되고 있는 거요.
[노파] 다리가 좀 아프군요.
[노인] 피곤하오?
[노파] 괜찮아요. 팔이나 좀 줘요.
[노인] 아주 오래 전이지만 한땐 나도 고뇌와 투쟁을 했소. 내게도 결코 마르지 않으리라
믿었던 기쁨의 샘과 삶의 원천이 있었으니까. 기쁨과 번민의 대결이었지. 그 정열!
그 젊음! 그 풍요! 물론 고뇌도 강했소. 하지만 그보단 생명력이 더 강했지. 그런
내가 이렇게 금방 늙다니. 내가 늙는 만큼 당신은 젊어지고. 내겐 한 순간이
일년처럼 지겨운데, 또 일년은 잠깐이거든.
[노파] 여보, 전 사랑하는 법을 잘 알아요. 매일 조금씩 더 당신을 사랑하는 거죠. 하지만
당신만은 정말 모르겠어요.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는 건 너무나 고통스러워요.
[노인] 그게 언제까지 갈까? 난 몇백년 전에 세상에 왔소만, 불과 한 순간밖엔 안됐소.
그렇게 길고, 그렇게 짧은 거요. 짐은 점점 무겁고, 세상은 온통 어둡소.
[노파] 전 점점 가벼워요. 당신의 고통만 아니면 더 가벼워져 전혀 무게를 안 느낄 거예요.
제 몸무게만 남겠죠. 풀어 버리세요. 저 창문을 보고, 저 예쁜 장미를 보세요.
[노인]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 이 도시에선 이제 못 살겠어. 갇혔어. 이젠 집에서도 못
살겠어. 갇힌 거야. 집은 싫어. 어떤 집도 싫어. 당신도 갇혔어. 갇힌 거야. 돌아가기
싫어. 물론 돌아가게 되겠지만.
[노파] 스스로 뭘 찾는지 모르셨던 거예요. 여보, 당신이 걱정돼요. 사랑해요.
노파가 말하는 사랑의 구절들과 노인이 뱉어내는 부정의 말들은 당연히 노인들의
쉰 목소리로 이루어진다.
[노인] 나도 사랑하오. 하지만 난 밖에서도 못 살 것 같소. 들어가기 위해 나오고, 나오기
위해 들어가고, 항상 떠났지만 그건 항상 귀환을 위한 거였소. 귀한, 자기를 향한
귀환. 돌아오고, 또 돌아오고, 항상 그런 식이었지. 하지만 그래도 왔다 갔다는 했소.
그런데 이젠 다리도 꺾이고 팔도 쳐져서, 이렇게 쓰러져 --- 어, 왜 그래?
[노파] (쓰러질 뻔 하다가 노인의 부축을 받으며) 미안해요. 왠지 갑자기 힘이 빠져서.
괜찮겠죠.
[노인] 몸이 안 좋소? 좀 쉬려오?
[노파] 됐어요, 인제. 계속 걸어요. 당신 팔을 끼고 산책하는 게 좋아요.
[노인] 난 산책도 지겹소. 하지만 집은 더 못 견디겠고.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설 수도 없소.
달리고 싶소. 아, 피곤해
[노파] 세상은 부드럽고 심오해요. 전 거리에서도 즐겁고, 우리 집 창가에서도 즐거워요.
[노인] 세상은 파고들 수 없는 거대한 강철 공이오. 그래도 전엔 꽃으로 뒤덮인
초원이었는데. 비록 독초였지만 그래도 꽃은 꽃이었소. 난 풀밭과, 밀밭과, 강변을
달렸지. 꿈을 잡으려고 말이오.
[노파] 애초부터 틀렸군요. 달리다니요? 약간만 숙이면 딸 수 있는 걸. 모든 게 지척에
있는데. 꿈을 잡다니요? 꿈이 우릴 잡는 거고, 우리 자신이 꿈 속에 있는 건데.
[노인] 내 인생은 실패야.
[노파] 당신만 얻으면 제 인생은 성공이예요. 여보, 왜 제 말을 안 듣죠? 왜 못 받아들여요?
왜 못 하세요?
[노인] 난 자유와 승리를 위해 태어났다고 믿었지. 하지만 그렇게 못했소. 감히 끝까지 못
간 거요. 결단력이 없어서.
[노파] 진심으로 원하지 않아서겠죠.
[노인] 고통의 끝까진 가 봤소. 시간은 끝의 끝까지 가 봤고. 그런데 왜 짧은 순간 하
나도 정복을 못 했을까? 왜 별나라를 정복 못 했을까? 왜 우주는 나를 피했을까?
[노파] 당신은 사랑을 배울 수 있어요. 전 당신한테 희망을 갖고 있어요.
[노인] (냉소적으로) 물론. 죽지만 않는다면. (잠시 사이) 완전히 자유로운 삶. 이제 그것도
나하곤 상관없어. 한땐 유일한 치료책이었지만.
[노파] 도와 드릴께요. 마지막 힘 닿는 데까지요.
[노인] 관심없소. 아무것도 바라지 않소. 다만 나를 갉아먹는 이 권태와 이 고뇌만
면했으면 할 뿐이오.
[노파] 여보, 당신은 환자예요. 하지만 아직 희망이 있어요. 희망이요. (갑자기 몸이 불편한
듯) 아, 목이야. 아, 머리야.
[노인] (비틀거리는 노파에게) 왜 그래?
[노파] 아녜요. 걱정 마세요.
[노인] (노파를 부축하며) 약해졌군. 몸도 못 가누잖아.
[노파] 배가 아파요. 열이 나요.
[노인] 내게 기대요. 들어갑시다.
[노파] 걱정 마세요.
[노인] 제발 좀 버텨 봐요. 내가 잡아 줄께. 자, 내가 돌봐 줄께.
[노파] 답답해요. 꼭 좀 잡아요. 괜찮겠죠. 아까도 그랬어요.
[노인] 이런 적이 없었는데. 당신, 아픈 적 없었잖아? 아이구, 하느님. 그 병인가 봐. 그
증세야.
[노파] 좀 도와 줘요. 너무 걱정 말고요. 살살 갑시다. 누워야겠어요. 곁에 계실거죠? 곧
나을 거예요. 당신도 낫고요.

노파가 쓰러지며 하자 노인이 간신히 붙잡는다.

[노인] (노파를 부축한 채 아주 힘들게 걸으며) 여보, 끝까지 나랑 같이 있겠다 그랬지? 날


두고 떠날 순 없어. 약속했잖아. 그럼 안 돼. 정말 안 돼. 오, 하느님, 도대체 어디
계시길래 ---
[노파] 저 좀 데려다 주세요. 저도 데려다 드릴께요.
[노인] 집에 다 왔어.
[노파] 저렇게 먼데요. 하지만 갈 수 있어요. 당신이 계시니까.
[노인] 여보, 힘 좀 내요 당신 혼자 두 몫의 사랑을 지켜야 돼. 나한텐 없잖소?
[노파] 그래요. 좀 누울께요. 당신도 옆에 누우세요. 나란히요. 행복해요. 둘 다 나을
거예요. 오래오래 삽시다 --- 같이요.
[노인] 안 돼. 날 두고 가면 안 돼. 내가 지켜 줄께. 왜 이걸 몰랐을까?
[노파] 이젠 이해를 ---
[노인] 너무 늦었어. 곧 밤이 우릴 삼킬 텐데. 기쁨이 여기 있는 걸 몰랐다니. 여보, 내
데려다 주리다. 당신을 날 데려다 주고. 당신의 밤으로.
[노파] 얼마간의 시간은 있을 거예요.

노인이 노파를 거의 끌다시피하여 왼쪽으로 나간다.

[노인] 이보시오. 사람 살려.

노인과 노파 퇴장. 얼마 전부터 무대 오른쪽 구석에 여자 네 명이 모여 엿보고 있다. 왼쪽에서


시체운반용 수레 하나가 나타난다. 말로 분장한 배우 두 명이 끄는 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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