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on page 1of 4

대구무용제를 참석하여 인코드프로젝트의 ‘유랑자’, 팀.베이비슬로(TEAM.

Babyslo)의 ‘지음-
베어진 나무 그루터기에 홀로 있음에’, SJ 김건우무용단의 ‘꽃이 피지 않으면 나비의 인생은
비참해진다’를 관람하였다. 먼저 안내책자에서의 안무의도와 작품내용을 관람 전 먼저 읽고
들어가서 무대에 각 공연에서 먼저 어떤것을 표현하는지를 더욱 이해 할 수 있었다.

인코드프로젝트의 ‘유랑자’의 무대의 작품을 설명하자면 삶과 죽음의 반복 속에서 시간이란


수레에 올라타 한없이 굴러가고 있는 인간을 표현하였다. 무대를 보면서 인간는 태어남에
따라 삶이라는 여행이 시작되어 더 멋지고 잘사는 성공한 삶에 대한 갈망으로 수많은
선택에 하고 그로 인해 갈등, 후회, 실패등 여러 힘든 상황을 마주하기도 한다. 요즘
사람들이 “나 멋진 사람이야”, “이렇게 나 잘살아” 등을 보여줄려고 SNS 에 글을 올리고 하는
것처럼 인간은 완성되고 완벽하고 잘난 삶을 살아가고파 한다. 무대에서 이러한 것들에
집학하고 의지하며 고통이 발생하여도 그것을 놓지못하는 사람들을 윤회의 굴레에서
벗아나지 못하고 헛바퀴 돌듯 한없이 맴도는 것을 안무를 표현한 것으로 느껴졌다.
완성이라는 것은 개인적으로 완벽한 상태를 표현하는것이 아니라 이전보다 더 좋은 상태를
나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품내용 설명에서도 완성은 변화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완벽한
상태가 유지 될 수도 없고, 유지될 필요도 없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설명에 적극
동의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바퀴는 네모여도 굴러간다”
바퀴가 잘굴려갈려면 완벽한 원의 상태여야 잘굴러가지만 네모여도 굴러갈때 덜컹거리고
흔들리뿐이지 못굴러가는게 아니라 어찌됬든 굴러간다. 사람들이 멋지고 완벽한 삶을
살아갈려고 노력하고 그게 아니라면 실패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굳이 완벽한 삶이
아니더라도 나아갈 수 있다. 네모인 바퀴여도 굴러가다보면 사각형이 마모가 되어 점점
원처럼 변화해 갈것이니 너무 처음부터 완벽한 원, 내가 원하는 멋진 삶에 대해 집착을 놓아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 공연을 통해 세삼 느꼈다.

팀 베이슬로의 ‘지음-베어진 나무 그러터기에 홀로 있음에’의 무대 내용에 대해 설명하자면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무엇이든 사랑과 애정을 듬뿍 담아 내 옆에 두어본 경험이
누구에게는 과거이며, 누구에게는 현재 진행형일 것인데, 이러한 것들을 상실한다면 이
아픔을 경험한 인간은 굉장한 슬픔을 느낄 것이다.

이 무대는 상실의 5 단계로 알려져 있는 퀴블로-로스의 접근을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단계를 표현하였다. 이 무대를 보면서 느낀 것은 우리는 사라가면서 사랑을 했고, 어떠한
이유로든 사랑을 보내버렸다. 그 보냄의 슬픔을 다시 한번 느낀 순간이 되었다. 부정의
단계를 표현할때는 나의 사랑이었던 사람이 나를 떠났고 남겨졌을 때 홀로 생각하던 나를,
분노의 단계를 표현했을 때 모든 세상 모든이들과 인간에 대한 분노를, 협상에 단계였을 때,
나를 떠난 사람이 왜 떠난지에 대한 이유를 찾기시작한 나를 회상할 수 있었다. 이유가
필요했고 어떻게든 합리화해서 나의 아픔, 슬픔, 분노를 합리화 할 수 있는 이유를 찾던
나를. 우울의 단계에서 뒤늦은 후회로 그 사람에 대한 상상에 빠지게 한 나를 느끼게 되었다.
나의 상상속에서 떠난 나를 대신하여 누군가 옆에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힘들었던 나를 다시 생각하여 무대를 보면서 먹먹해져 간것이 처음이 었을 것이다. 수용의
단계를 무대를 보고 있을 때 안무를 보니 아픔들이 점점 시들어져가고 시간이 지나 상처가
아물었을때 수용을 마친 나를 표현한것 같아 더욱 몰입이 되었던것 같다. 앞선 공연과
비슷하면서 다른 주제를 하는데 삶이란 완벽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경주를 표현하면서 그
와중에 사랑이란 목표에 대해 달려가다 넘어진 나를 발견한 무대이었다.
SJ 김건우무용단의 ‘꽃이 피지 않으면 나비의 인생은 비참해진다’의 무대내용은 전국시대
중국의 철학자 ‘순자’가 주장한 성악설을 기반으로 무대를 표현하였다. 인간은 악한
본성으로 태어나지만 삶속에서 예절과 교육을 통해 선함의 꽃봉오리를 피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무대를 통해 표현하였다.

무대를 시작과 동시에 이브의 선악과가 생각나는 나무를 가운데에 두고 악을 나타내는


남성과 시작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인간은 태어남에 따라 악한 모습으로 태어남을
표현하는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점차 지나 한쪽은 흰색옷을 입은 ‘선’을 나타내는
사람들과 반대쪽은 검은옷을 입은 ‘악’을 나타내는 사람들의 안무가 돋보였다. 그렇게
인간은 선과 악 둘중에서 선택하고 아니면 한쪽으로 물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것 같았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더 지나 색깔로 구별되던 선과 악이 상의에는 흰색, 하의에는 검은 옷을
입은 남성 안무가들과 얼룩덜룩해져 더러워진 흰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안무가들을 보면서
결국 인간의 어느한쪽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누군가에 따라, 어떤 선택에 따라 선과 악을
왔다갔다하는 것임을 느꼈다. 누군가는 분명 “저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착한 사람이야”
라고 단정지을 순 있어도 그 사람이 분명히 선, 악을 한쪽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을 자신이 원하는 것에 따라
행동하는 주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대에서도 처음에 검은색과 흰색으로 나뉘었지만
결국 흰색이 더러워지고 검은색과 흰색이 한 인간에 같이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선함과 악함이 같이 공존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선과 악중에서는 그대는
어느쪽 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난 그 누구도 어느 한쪽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같다. 우리 모두는 선함과 악함이 공존하는 복잡한 존재이며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본성이며, 인간성이라고 생각한다

순수무용인 발레(Coppelia), 현대무용(탈피), 현대무용(Jamais vu), 발레(사과나무)에 대해


강상문을 써보고자 한다. 첫 무대를 장식한 발레(Coppelia)를 책자를 통해 좀 더 자세히
알고자 한 사전 조사가 도움이 되었다.

Coppelia-코펠리아 (발레)

처음 많은 무용수들이 안무를 하고 움직일 때 1 장에서 마을 광장인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여주인공 스와닐다가 춤을 추고 있었다. 옆의 한 여자 무용수가 상체는 거의
움직이기 않고 박자에 맞춰 다리만 움직이는 안무를 할 때 상체와 하체가 별개로
움직여진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시간이 지난 뒤 ‘코펠리아’는 괴짜 과학자 ‘코펠리우스’
가 만든 인형이라는 내용이 기억이 났고, 이 안무가 인형처럼 움직이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남자 주인공 프란츠가 나왔고 춤을 추며 남자 주인공이 느끼는
사랑이란 감정의 행복과 설렘을 뛰어다니며 점프하는 행위적 예술을 통해 그 감정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인형인 코펠리아와 여주인공 스와닐다, 남주인공 프란츠가 나와
일어나는 일과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 무용의 표현으로 느낄 수 있는 무대였다.

탈피(현대무용)

현대무용 “탈피”를 보고 처음 중앙에서 남자 무용수가 복면을 쓴 채 혼자 춤을 추고, 나머지


무용수들이 그 남자 무용수를 돌면서 남자 무용수의 행동에 대해 영향을 받으며 같이
안무를 맞춰 춤을 추었다. 복면 쓴 남자 무용수와 그를 둘러 싸고 있는 다른 무용수들의
춤의 상징은 힘겹게 지나온 과거가 날 물어뜯고 괴롭게 상처가 남기는 것을 의미함을 알 수
있었다. 다른 무용수들이 그냥 주변을 도는 것이 아니라 가운데 남자 무용수를 바로 보고
다같이 복면 쓴 무용수를 바라보며 안무 하는 것이 상처와 과거의 아픈 기억들을 상징함을
알 수 있었다. 점차 빨라지는 박자와 강렬해지는 안무가 이 고통을 애써 이겨 내고 싶어하는
남자의 마음을 대변하였고, 고통의 흔적의 허물이 하나씩 벗겨지고 있음을 느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행복했던 기억과 추억이 남기도 하지만 반대로 아픈 기억과 상처도
남는다. 무수한 선택과 그로 인한 결과, 후회가 남기도 하고 그것으로 인한 아픔을 느끼면서
고통이 되는 기억들이 지워지지 않은 채로 내일을 위해 또 살아간다. 이것이 현대인의 삶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삶을 달려나가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통과
상처가 늘면서도 그 상처는 점차 아물고 이 공연에서 상징하는 것처럼 허물이 된다. 결국
우리는 그 허물을 벗어 던지고 미래를 향해 달려간다. 허물들은 과거에 남겨지고 우리는
내일이라는 미래를 위해 앞으로 보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임을 다시금 느끼는 무대였다.

현대무용 (Jamais vu)

처음에 Jamais vu 의 제목을 보고 이게 무슨 말인지 싶어 안내책자를 보았다. “데자뷰”의


반대 개념으로, 이미 경험하거나 잘 알고 있는 상황을 처음 경험하는 것처럼 기억의
착각현상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내용인지 이해할 수 없었고 무대를 처음 보았을
때에는 공포감이 느껴졌다. 개와 산책하는 사람을 표현하는 무용수들이 나와 무대에서
이동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들을 보여 주었다. 즐겁게 지나다니던
무용수들의 안무가, 갑자기 총소리가 들리고 무대 뒤에서 안무가들이 소리치면서 도망가는
모습과 사람이 도망가면서 총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이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갑자기
돌변하여 보여준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총소리가 나고 죽은 사람이 나오는데도 반대로
평화롭다는 것이 소름이 끼치고 공포로 느꼈다. 계속에서 앞에서는 평화로운 모습들과
뒤에서는 총소리와 죽어가는 사람들이 반복해서 보여진다. 그리고 나서 평화롭게 앞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들이 보이는 안무가들중 몇몇이 점점 과격해지는 행동을 보이고
폭력을 나타내는 안무를 시작하게 된다. 사람을 다리잡아 총을 형상화하여 조준하여 총을
쏘는 모습과 폭력성이 나타나는 다른 안무들을 보면서 그와중에 그것들을 신경쓰지 않는
평화로운 춤을 추는 안무가들을 보면서 이게 꿈속을 나태는 것으로 느꼈다. 개와 산책하는
안무를 하던 안무가가 목마를 하고 나와 목마를 탄 사람이 담배와 비슷한걸 피면서 연기를
점점 뿜으면서 무대를 도는데 점점 주변사람들이 안무하다가 홀린듯이 연기를 내뿜는 것을
따라가기 시작할 때 몽환적인 상황에서 Jamais vu 를 경험한다는 책자의 말이 기억이 났다.
더 나아가 익숙한 상황에서 처음 경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무대 소개말과 더불어
현대사회를 비판하고 있다고 난 개인적으로 느껴졌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평화롭지만
지구반대편에서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수단 내전등 크고 작은 여러 나라들의
내전들처럼 우리는 6.25 전쟁의 아픔을 겪었음에도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것에만
치여살고 다른나라들의 아픔을 무관심에 두고 살아가는 것을 비꼬고 있다고도 느꼈다. 또한
점점 불이꺼지고 라이트 하나만 들고 무대를 오가며 사물을 연기하고 있는 무용가들을 비출
때 폐허가 된 상황에서 전쟁이 끝나고 남은건 폐허 뿐이라는 생각과 꿈에서 어두운 곳에서
라이트 하나만 들고 의지하며 무언가 바라봤을 때 움직일 수 없는 사물이들이 움직여
도망가는 것을 볼 때 기괴한 느낌을 받아 더욱 공포심을 느꼈다.그리고 점차 불이 꺼지고
모든 안무가들이 가운데에 모여 중앙에 있는 사람을 둘러싸고 무슨 말인지 모를 말들로
빠르게 속삭일 때 가운데 사람은 고통을 받으며 귀를 막는다.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듣기 싫어하는 말과 무수한 정보속에서 사람들이 지쳐감을 알 수 있다. 남들이 날
헐뜯는 말과 아무런 근거 없이 날 비난할 때 또는 날 욕할 때 우리는 아무런지 않고
살아갈려고 하지만 내면속으로는 많은 상처와 고통을 받으며 살아간다. 이러한 무대를 보며
어색한 상황으로 인해 공포를 느끼게까지 되었다.

You might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