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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법I.

사례모음

[사례1] '로터스호 사건' (The Lotus Case, PCIJ Series A, No.10, 1927)(France v. Turkey) (국가의 독립에 대한
제한은 추정될 수 없다.)

사실관계: 동 사건은 1926. 8. 2 프랑스의 우편선 로터스호와 터키의 석탄선 Boz-Kourt호가 Cape Sigri(Mitylene)
의 북쪽 5-6해리 사이 공해상에서 충돌(해상에서의 충돌)하였다. Boz-Kourt호는 침몰하였고 8명의 터키인이 생명을
잃었다. 다음날 Istanbul에 Lotus호가 도착하자마자 터키 당국은 충돌에 대한 조사를 착수하였고, 그 후에 Boz-Kour
t호의 선장인 Hassan Bey와 충돌시에 Lotus호의 관측병인 프랑스 국적의 Lieutenant Demons에 대하여 터키법에
따라 공범으로 제소하였다. 1926. 9. 15 Istanbul의 형사재판소는 Demons을 단기간의 구금과 약간의 벌금형에 선
고하였다. 반면에 Hassan Bey는 조금 더 많은 벌금형으로 가볍게 선고되었다. 이에 대해 로터스호의 선원들은 Lieut
enant Demons에 관한 터키 당국의 행동은 충돌이 공해상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터키 법정은 Demons을 재판하
기 위한 관할권이 없다고 주장하였던 프랑스 정부쪽에 대하여 즉시 외교적 보호를 요청하였으며, 기국의 법정, 즉 프
랑스의 법정에 의해서만 재판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관할권의 분쟁문제를 가지고 터키 정부가 그 스스로의 의
지를 선언하였기 때문에 1926. 10. 26 터키와 프랑스는 특별협정(타협)을 조인하였고, PCIJ에 제소하였다.

쟁점: 판결의 중요부분은 기국의 배타적 관할권(국가관할권)의 문제와 관련된다. 프랑스는 범죄가 프랑스 선박인 로
터스호로부터 범하여졌으므로 관할권을 주장하였으며, ① "국제법은 단순히 희생자의 국적을 이유로 국외에서 범하여
진 범죄에 관하여 어떤 국가에 경위를 조사하도록 허용하지 않으며(즉 국제법은 외국인의 국외범죄에 대한 피해자의
국적국에 의한 소추를 허용되어 있지 않으며)(명시적으로 피해자의 국가가 경위를 조사할수 있다는 것이 없으므로 그
러한 행위는 금지된다고 주장)", ②"국제법은 공해상의 선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관하여 기국주의의 배타적 관
할권을 인정하며", 그리고 "동 원칙은 충돌사건에서 특히 적용되어진다” 고 주장하였다. 터키는 국가들에 의해 수락
되고 그리고 행동의 제한을 구체화한 실증법이 없이는 한 국가의 행동에 제한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법정은 이
러한 원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동의하였다. (즉, 당해행위는 최초 프랑스선내에서 발생한 행위이나 그 결과는 터키선에
서 발생하였으므로 양자는 법적 불가분성이 있다고 하여 경합적 재판관할을 인정) 그러나, 터키의 관할권은 희생자의
국적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의 결과가 터키 선박에 발생하였으므로, 결과적으로 그 장소에서 "터키의 범죄법의
적용이 거부될 수 없다는 점에서 터키관할에 동화되었기 때문에" 터키 당국의 행위는 정당화된다고 하였다.

1927년 9월 7일 법원은 Lieutenant Demons에 대한 범죄경위를 조사함으로써 터키는 "국제법의 원칙에 상충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판결하였다. 12명의 판사의 표결은 6대 6 동수로 나누어졌으나, 법원장 Max Huber의 결정투
표에 의하여 터키가 승소하였다.

[사례 2] 상부 사보이 및 젝스 자유지역사건 Free Zone of Upper Savoy and the District of Gex, PCIJ(Switzerla
nd v. France, 1932)

사실관계: 동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15년 조약에 의하여 상부 사보이와 프랑스령 젝스에 자유지대가 설정되
었으나, 1919년 베르사이유 평화조약에의해 사정변경원칙에 따라 1815년의 조약이 무효이므로 프랑스․스위스 양당
사국은 적당한 조건으로 자유지대의 지위에 대한 새로운 협정을 맺으라고 규정했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자유지대철폐
법안을 채택하여 이를 스위스에 통보하였으나 스위스 국민투표에서 동 철폐법안이 부결되어 양국간의 교섭이 실패하
였다. 양국간의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자, 프랑스는 자유지대철폐법을 1923년 11월 10일 부터 실시한다는 의사를 스
위스에 통보하였고, 스위스의 계속적인 항의나 상설국제사법재판소에의 부탁을 무시한 채 국경에 관세경계선을 설치
하였다.

판결: 이에 대해, PCIJ는 프랑스에 의한 사정변경원칙의 적용을 배척하였다(PCIJ Series A/B, No.46, pp.156-158).
즉, 프랑스는 사르디니아(Sardinia)로부터 취득한 영역에서 이전에 사르디니아가 행한 관세자유지역(customs-freez
one)을 유지한다는 약속을 이행할 의무를 진다고 판시하여, 승계국은 선행국이 진 의무에 구속된다는 것을 확인하면
서, 스위스가 1815년의 조약 및 베르사이유 평화조약의 당사국이 아니므로 동의한 범위 이외에는 이에 구속되지 않으
며(PCIJ Series A/B, No.46, p.141)(즉 제 3자에 대한 불분명한 의사가 있을 때에는 그 조약에 제3자를 구속하지 않
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동 자유지역에 관한 조약규정은 계속 유효하다고 판시하였으며, "국제법이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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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간의 권리․의무를 결정짓는 표준이 되므로 프랑스는 국내법을 이유로 국제의무의 범위를 제한할 수 없다"고 판시
하였다.

[사례 3]Scotia 사건(국제관습법인정 case)

사실관계: 1863년 해상충돌방지에 관한 새로운 규칙을 영국이 제정하고, 익년 미국도 거의 같은 규칙을 제정하였으
며, 그 후 계속해서 해양국의 거의 전부가 그 예를 따랐다. 그런데 영국적 Scotia호가 미국선 Birkshire호와 공해에서
충돌하여 Birkshire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Scotia영국호의 과실로 충돌이 발생하였다고하여 손해를
배상받기위해 지방법원에 소송이 제기되었는데 이것이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간 것이다. 그때 Birkshire호는 채색된 등
을 전혀 켜지 않고 갑판 4피트 위의 뱃머리에 백색등만 하나 켜고 있었고, Scotia호는 해양선박충돌방지를 위한 새로
운 규칙인 1863년 영국추밀원령에 따라 필요한 등을 켜고 항해하고 있었다. 이에 Scotia호는 Berkshire호의 백색등
을 masterhead(교두)의 등으로 오인하고 거리측정을 잘못하여 충돌하였다.

쟁점: 이 경우 문제가 되었던 것은 영국추밀원령이 Berkshire호에도 적용이 되는가의 문제즉 종래의 일반국제법을 적
용할 것인가 아닌가에 관한 것이었다.

결정: 원고는 신규칙이 국제법화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으나, 미국연방대법원은 영국의 규칙이 널리 각국의 국내중립
국에 채택됨(34개국)으로써 생긴 새로운 국제관습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한다고 원고패소의 판결을 내렸다. 단독으로
문명사회의 공동의 동의없이 해양법을 변화시킬수 없지만 30개이상의 주요해양국가가 강제규칙으로 인정한 경우 관
행은 법적 관습으로 변화한다고 판결하였다.

주목할 점:①한 국가의 제정법이라 하더라도 거의 전체 주요해양국가들에 의해 채택, 수용된 경우에 ‘법으로 인정되고
있는 일반관행의 증거로서’ 국제관습법으로 변화됨을 지적하였다.

② 공동합의에 그 근거를 두었고

③ 관습법의 적용은 지역외의 효력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 의무로서 묵인됨을 밝혔다.

[사례4] 리비아. 몰타대륙붕사건(Libya-Malta Continental Shelf Case, ICJ(1985))은 해양법협약 채택후 대륙붕경
계에 관한 ICJ의 두 번째 판결이다.

사실관계: 지중해의 이탈리아령 시실리군 남쪽에 위치한 섬나라인 몰타와 리비아간의 오랜 대륙붕전쟁을 1976년 5월
특별합의로 ICJ에 부탁하여 당해 대륙붕획정에 적용될 국제법원칙과 규범을 제시하고 이들을 적용하기 위한 방법을
명시해 줄 것을 청구하였다. 그런데 양국간의 최단거리는 183해리이며, 주변국가의 대륙붕경계는 몰타. 이탈리아 간
리비아 튀니지 간. 이탈리아 그리스 간 및 이탈리아. 튀니지 간에 이미 획정되어 있었다.

쟁점: 몰타는 중간선원칙을 주장하고 200해리 이내의 대륙붕에 대한 자연적 연장원칙을 적용해 배려하려는 반하여,
리비아는 경계획정은 형평의 원칙에 입각해야 하며, 대향해안선의 장단은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하고 해저의 지질학
적. 지형학적 특성을 감안하여 육지의 자연연장원칙에 따라 몰타군 근처의 해구(깊고 길게 패인곳) rift zone을 경계
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판결: ICJ는 연안 200해리 이내의 대륙붕에 있어서는 자연적 연장원칙과 지질학적.지형학적 기준은 배제되고 등거리
원칙이 중시되어야 한다고 설시하면서 대향하는 해안선의 길이의 차이는 고려될 요소이나 반드시 산술적 비례로 계산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고 편의상 두 개의 극단적 경계인 리비아. 몰타 간 중간선과 리비아.시실리도 간 중
간선(북위 34 36)사이의 범위 중 몰타에 1/4 효과를 인정하여 중간선에서 북으로 18이동된 위치로 조정된 선을 경계
선으로 판시하였다.

문제점: ICJ는 판결에서 몰타에 1/4효과를 인정한 이론적 근거가 불분명하여 자연적 연장원칙을 배제하고 지질학적.
지형학적 요소를 무시한 최초의 판결로 강력한 비판을 받고 있다.(ICJ Reports, 1985)

[사례5] 북해대륙붕사건(North Sea Continental Shelf Case, ICJ(1969)) 관련페이지p.34,35

사실관계: 대륙붕분쟁에 관한 첫번째 ICJ판례로서 대륙붕에 관한 국제법 발달의 시금석이라 할 수 있다. 북해의 해저
는 노르웨이 근해의 해구(수심 200~650m, 넓이 80~100㎢)를 제외한 전해저가 수심 200m미만의 대륙붕을 이루
고 있다. 이 공유대륙붕의 경계획정에 관해 미국-노르웨이, 영국-네덜란드, 영국-덴마크, 네덜란드-덴마크는 중간선(등
거리원칙)에 의해 분할하는 조약을 각각 체결하였다. 그러나 서독-덴마크, 서독-네덜란드는 각각 주장하는 경계획정원
칙이 달라 연안국으로부터 각각 30해리와 25해리까지만 경계를 획정했을 뿐 그보다 등거리의 공유대륙붕경계에 대
해서는 합의하지 못하였다. 덴마크와 네덜란드는 타국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등거리원칙(이 경우 서독 몫은 23,600
㎢)을 주장했으나, 서독은 자국의 대륙붕지역이 영국과 대륙간의 중간선과 만나며 연안선 길이에 비례하는 정당하고
형평한 몫을 차지할 扇形分割(이 경우 서독 몫은 36,700㎢)을 요구했다. 이와 같은 3개국의 협상은 결실을 보지 못해,
드디어 1967년 2월 경계획정에 적용될 국제법상 원칙을 판결해 달라는 소송이 ICJ에 제기되었다.

쟁점: 대륙붕의 경계확정시 등거리원칙은 관습법화되었는가?

판결: ICJ는 대륙붕협약이 규정한 등거리원칙(principle of equidistance)은 각국의 관행에 비추어 국제관습법으로
되어 있지 않다고 하고, 또한 모든 경우에 의무적인 경계획정의 유일한 방법은 없다고 하며, 경계획정은 '형평의 원
칙'(equitable principles) 에 따라 각 당사국의 해면아래로 그 영토의 자연적 연장을 이루는 대륙붕부분을 타국영토
의 자연적 연장을 침해함이 없이 가능한 모든 부분이 각 당사국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합의에 의하여 행해져야 한다고
하였다.

주목할점: 새로운 관행의 형성에는 ‘광범위하면서도 사실상 획일적 그리고 관행의 형성에 ‘특별히 영향을 받는 국가들
(Specially affected States)의 참여가 있을 것으로 요건을 하여 관행의 형성을 인정하였다.

[사례 6] 콜롬비아와 페루간의 비호사건(Asylum 1950)

(계속적이고 일관된 관행이 관습법적 권리.의무를 형성한다.)

사실관계: 1948년 페루에서 반란이 실패로 끝난 후 반란주도자 중의 한 사람인 같은 나라사람인 Haya de la Torre에
게 반란으로 야기된 형사상의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그는 Lima에 있는 페루주재 콜롬비아 대사관에서 콜롬
비아당국에 의해 비호가 허용되었다. 콜롬비아 당국은 Torre를 정치적 난민으로 규정하여 출국을 허용토록 안도권(안
내)을 발급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페루당국은 이를 거부하였다. 콜롬비아당국은 페루정부를 상대로 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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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제소하여, 비호부여국으로서의 콜롬비아는 그 범죄인에게 전술한 비호를 위한 자격을 부여할 권한이 있다는 사실
을 판정하여 줄 것을 ICJ에 요구하였다. ICJ는 “조약규정과 미주 국제법”을 근거로 판결하였다.

쟁점: 콜롬비아의 비호부여조치가 라틴아메리카 국가간의 협약과 관습으로 페루에 구속력을 갖는가 하는 것

판결: 콜롬비아정부는 관련 재규정에서 발생하는 규칙에 첨가하여 소위 라틴 아메리카제국에 특유한 전지역적 그리고
지방적 관습을 채용하였다. 이러한 종류의 관습에 의존하는 당사국측은 이러한 관습이 확립되어 다른 당사국을 구속
하여 왔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않으면 안된다. (ICJ 규정 38조에 의한 것) ICJ는 콜롬비아의 이러한 비호가 관습으로
존재한다는주장을 기각하였다. 그 근거로서 ICJ는 국가관행상 계속적이고 일정한 관례가 있고 그러한 관례로 비호부
여국의 권리와 영토국의 의무를 명백히 알 수 있어야 하는데 콜롬비아가 그 근거로 제시한 1933년 ‘몬테비데오 협약’
은 그 비호국이 몇몇 국가에 불과하여 그 근거가 약하고 실제로 많은 사건에서 외교적 비호가 부여되었다는 콜롬비아
의 주장도 비호부여국이 그것을 권리로 보거나 영토국의 의무로 간주하여 부여한 것으로 받아들일수 없다는 점을 들
고 있다 즉 일관되지 않았었고 대부분 정치적 편의라는 고려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ICJ는 아울러
페루정부가 몬테비데오협약을 비준하지 않았고 계속 반대하였다는 점도 지적하였다(persistent objector). 이에 페
루정부가 Torre의 인도를 요구했다.

토레사건(The Haya de la Torre case, ICJ (Columbia v. Peru 1951))

사실관계: 콜롬비아는 Torre의 인도를 거절하고 ICJ에 대해 ‘비호사건’에 대하 ICJ의 판결의 지시를 청구하는 새로운
재판을 부탁하면서 1) 당해 판결을 이행할 구체적 방법이 무엇인지, 2) 콜롬비아는 꼭 Torre를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
는지, 그리고 3) Torre에 대한 비호는 당해 판결의 언도로 그리고 페루의 사법적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즉시 종료되어
야 하는지의 여부에 관한 판결을 청구하였다.

판결: ICJ는 Torre는 정치범이므로 콜롬비아는 Torre를 인도할 의무가 없으며 인도만이 비호를 종료하는 방법이 아니
라고 판시하고, 당사국간의 예양과 친선을 바탕으로 한 교섭으로 해결하도록 권고하였다.

[사례 7] Right of Passage Over Indian Territory(Portugal v. India) (1960 ICJ Rep. p.6)

사실관계: 1948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인도내에 외국식민지로 남아있는 지역이 있었는데 그 중에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Daman, Dadra, Nagar-Aveli등이 있었다. 이 중에 Daman은 해안이 있었으나, Dadra 와 Na
gar-Aveli는 완전히 인도영토에 둘러싸인 enclave였다. 인도는 1953년 10월 encalve에 대한 통행을 제한하였는데
1954년 7월 21일 인도는 Dadra, Nagar-Aveli, Daman상호간의 통행을 완전히 금지시키고 같은날 Dadra와 Naga
r-Aveli를 침공하였다. 그러자 포르투갈은 사태의 진압을 위해 Dadra에는 군수가 통과할 것을, Nagar-Aveli에는 진
상을 파악하기 위한 소규모의 행정관의 통과를 요구하였으나 인도는 모두 거부하였다. 결국 포루투갈은 이 사건을 ICJ
에 부탁하였다.

쟁점: 포루투칼의 통행권이 관습화되었는가?

판결: 재판소는 판결을 통하여 포르투갈의 민간인, 관리, 일반물품 등은 인도의 규칙과 통제에 따라 통행할 권리가 있
다고 하였는데 그 근거는 거의 125년이라는 오랜 기간동안 계속된 관행으로 그 성격은 encalve를 둘러싸고 있는 영
토의 주권이 변경되어도 인정되고 있었다는 점에 두 당사국이 합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군수, 경찰의 통과에 대해서 1
878년 이전에는 영국과 포루투갈이 상호주의에 의해서, 1878년 이후에는 ‘통상 및 범죄인인도조약’ 에 의해 규율하
였는데, 이에 따르면 포르투갈이 통과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영국의 승인을 받아야 했으므로 포르투갈은 통과의 권리
를 가진 것이 아니며, 따라서 영국을 승계한 인도는 구체적인 경우에 통과허용여부를 결정할 재량권이 있다고 판결하
였다.

[사례 8]Anglo-Iranian Oil Co.(UK v. Iran, ICJ 1952)

사실관계: 1933년 당시 이란의 국명인 페르시아와 영국국영회사인 Anglo-Iranian Oil Co간에 석유 Concession계
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계약은 1933년까지 유효하다는 것과 그 이전에는 일정한 조건을 충족하고 중재재판에 회부한
후에만 종료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1951년 이란정부가 석유산업을 국유화하자 이 계약은 자연히 취소하게 되
었는데 영국은 이러한 조치가 실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중재재판에 회부하려는 노력도 실패
하고 말았다. 영국은 1951년 ICJ에 이란의 임의조항의 수락을 근거로 일방적으로 제소하였고 아울러 이란의 국유화조
치가 Anglo-Iranian Oil Co에 취해지지 못하도록 가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판결: 재판소는 영국의 가처분신청은 인정하였으나 관할권을 부인하였다. 재판소가 이 사건의 관할권을 부인한 근거
를 보면 임의조항을 수락하면서 자국이 인정하고 임의조항수락선언 후에 조약 또는 협약의 적용에 관한 분쟁에 대해 I
CJ의 관할권을 인정하였는데 이란과 회사와의 계약은 한 국가와 외국기업간에 맺어진 계약에 불과하며 영국정부는 동
계약의 당사자가 아니므로 석유 concession 조약 또는 협약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례 9] '니카라과에 대한 군사적 활동 사건' (Military and Paramilitary Activities in and against Nicaragua, Ni
caragua v. United States of America, ICJ Reports, 1984)

사실관계: 동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70년대 후반부터 중미제국에서는 좌익세력의 대두, 경제상황의 악화, 사
회정세의 불안으로 전반적인 상태가 악화되었으며, 이런 와중에 니카라과에서는 1979년 소모사(Anastasio Somoza
Debayle) 정권이 붕괴되고 산디니스타(Sandinista) 국민해방전선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정권이 탄생하였다. 니카라
과는 산디니스타 정권이 들어선 후 엘살바도르 반군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을 할 뿐만 아니라 쿠바, 베트남, 이디오피
아 및 동유럽 여러 나라로부터 엘살바도르 반군에게`을 때까지 '잠정조치'들을 준수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1984년
11월 26일의 2차 결정에서 ICJ 규정의 선택조항인 제36조 2항과 미국․니카라과간의 우호통상항해조약에 의거 양국
간에 발생하는 분쟁에 대하여 재판관할권을 가진다고 판시하였다. 이와 같은 ICJ의 2차 결정 후 미국은 1985년 1월 1
8일 동 사건에 대하여 이후의 모든 소송절차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동 사건은 미국측이
결석한 채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판결: 동 사건에서 주요쟁점이 된 사항에 대한 ICJ의 판시는 다음과 같다. 국제관습법에 대하여 ICJ는 관습법규의 형성
에는 국가관행의 '완전한 일관성'은 요하지 않으며, 국가의 관행이 일반적으로 그러한 규칙과 일치되어 있고, 만일 국
가의 관행사례가 일치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새로운 규칙의 승인표시로서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당해 규칙의 위반으로
서 취급되면 충분하다고 하였다.

조약의 효력발생의 요건으로서 조약의 기탁문제와 관련하여, 니카라과가 PCIJ규정 가입서명의정서에 서명하고 선택
조항 수락선언을 행하였지만, 그 후 電報에 의한 의정서비준의 통고를 했을 뿐 비준서를 기탁하지 않은 것이 문제로
된 것에 대해 ICJ는 수락선언이 '구속력'은 갖지 않았지만 잠재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존속하기 때문에 현행 재판소규
정 제36조 5항의 요건을 충족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니카라과는 UN의 공문서에서 일관되게 선언수락국으
로 취급되었고 니카라과도 이를 묵인하여 온 이상, 사무총장에의 선언 기탁요건도 충족된 것으로 간주되어, 당해 선언
의 '유효성'을 인정받았다.

일국의 국내 반란단체를 지원하는 타국의 행위에 대한 책임구속문제에 대해, 니카라과는 미국의 니카라과내 반란단체
인 콘트라 반군에 대한 군사적 지원이 국제의무위반을 구성하기 때문에, 자국민에 대한 콘트라의 비인도적 행위의 책
임은 미국에 귀속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동 재판소는 미국이 콘트라에 대해 재정지원, 훈련, 무장 및 조직화에
관여한 것은 인정하지만, 미국이 콘트라에 대하여 '군사적․준군사적 작전의 실효적 지배권을 가지며' 그 과정에서 위의
행위가 행해졌다는 지배의존관계가 양자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여, 미국에의 책임귀속을 부정하였다.

자위권행사의 요건에 대해, 국제연합 헌장에는 명문규정이 없지만 그 필요성이 인정될 경우에 한정되며, 무력공격에
대하여 균형성이 지켜지는 것이어야 한다. 즉, 무력공격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정도의 반격행위만이 인정된다.
그러므로 ICJ는 미국의 니카라과에 대한 군사적 및 준군사적 활동의 시작이 니카라과에 의해 엘살바도르에 대한 주된
공격이 있은 후 수개월이 경과하였기 때문에, 무력을 행사할 필요는 없었으며, 미국의 니카라과 항구에 대한 공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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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라과에 의한 엘살바도르 반란단체에 대한 원조와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고 판시하였다.

[사례 10]Reparation for Injuries Suffered in the Service of the UN case(입법부적역할)

사실관계: 팔레스타인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UN요원이 살해당하고, 특히 이스라엘과격분자에 의해 UN이 팔레스


타인분쟁의 중개자로 파견하였던 스웨덴의 Bernadotte백작이 살해되자 이들 UN요원들의 보호문제를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총회가 ICJ에 권고적의견을 부탁한 사건이다.

쟁점: ① UN요원이 임무수행중에 국가책임을 수반하는 손해를 당하였을 경우 UN은 국제기구로서 책임있는 법률상 또
는 사실상 정부에 대하여 UN이 당한 손해와 희생자가 당한 손해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기위하여 국제적인 청구를
제기할 수 있는가 하는 것과 ②UN이 희생자가 당한 손해의 적절한 보상을 받기위한 국제적 청구를 제기할 수 있다면
희생자의 국적국의 외교적 보호권과 어떻게 조화를 시키는가 하는 것이었다.

판결: ①UN은 국제기구로서 그 요원이 임무수행중 손해를 입은 경우 그로 인하여 UN이 받은 손해와 그 희생자가 받은
손해를 책임있는 국가에 대하여 보상을 청구하는 국제적 청구를 제기할 권한이 있다고 판결하였다. ②UN은 그 요원이
입은 손해에 대한 손해청구를 UN에 대한 의무위반만을 이유로 제기할 수 있으므로 국적국과의 충돌은 조화될 수 있다
고 밝혔다.

주목할 점: 이것에 대해 UN은 사무총장에게 손해배상청구권한을 주었으며, 국가에 따라서는 자국민에 대한 국가의 권
위절하라고 하면서 비판을 하였다.

[사례11]법의 일반원칙을 적용한 국제판례로 지연이자의 원칙을 인정한 사건이 ‘러시아배상금중재사건(The Russia
n Indemnity Case, PCA(Russia v. Turkey, 1912)

사실관계: 1877-1878년 러시아와 터키 사이의 전쟁의 결과 패배한 터키는 러시아에게 배상금 600만 프랑을 지급할
의무를 부담하였다. 터키는 1902년까지에 겨우 완불하였는데 러시아는 돌연히 과거 20년간의 연체이자로 터키의 법
정이율에 의하여 산출한 약 2.000만 프랑의 지급을 요구하였다. 터키정부가 그 지급을 거절하자, 러시아는 전쟁에 호
소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결국 이 분쟁은 양국의 협정에 따라 PCA에 부탁되었다.

판결: PCA는 러시아.터키간의 외교문서를 보면 러시아정부는 1902까지의 사이에 연체이자에 관하여 언급한 바가 없
었고, 터키로부터 연부지급을 받을때에 잔액에 대한 이자청구권을 유보한다는 언명을 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수취
한 연부금을 이자로 충당하지도 않았으므로, 각국 사법의 일반원칙에 따라 러시아정부는 연체이자 청구의 권리를 상
실하였으며, 따라서 배상금의 변제를 다 받은 후에는 연체이자를 새로이 청구할 수 없다고 결정하였다.

[사례12]Corfu해협사건(Corfu Channel Case, ICJ (UK v. Albania , 1949)( 간접증거가 모든 법체계에서 채택되고
있고 그 사용이 국제판결에서 인정되고 있다고 판결하였다.)
사실관계: 1946년 5월 15일 영국해군은 알바니아본사와 Corfu도 북부사이에 위치한 Corfu해협에 두척의 군함을 파
견하였다. 항행중 이 군함은 아무런 경고없이 알바니아의 포탄공격을 받았다. 당시 Corfu해협은 1944년 10월 지뢰
제거작업이후 아무런 기뢰도 발견되지 않아 기뢰안전수역으로 간주되었다. 각서교환을 통해 영국정부는 사전통보 및
허락없이 Corfu해협의 무해통항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알바니아는 외국선박은 사전통보와 자국의 허
가하에서만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알바니아의 태도를 시험하기 현대의 기술과 교통 및 무역의 발전은
국가들간의 상호의존성을 더욱 증진시키고 있으며, 광범위한 분야에 있어서 공통의 관심사에 대한 규칙의 제정을 촉
진시키고 있다. 따라서 조약은 국제관계상 중요한 협력의 수단이며, 이러한 협력은 관계국간의 지위를 변화시키기도
하기 때문에 조약은 흔히 변화를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위하여 1946년 순양함 2척과 구축함 2척으로 구성된 함대
를 Corfu해협을 항해하도록 하였다. 항해도중 기뢰에 맞아 구축함 한 척이 심한 손상을 입었고 이것을 예인하던 구축
함 한척도 기뢰공격을 받아 손상을 입었다. 3주 후 영국함대가 해협으로 도로 가서 22발의 기뢰선을 절단하고 그 중 2
발을 말타로 옮겨와 조사한 결과 독일제 GY형 기뢰인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두 구축함의 파괴는 Corfu해협내의 알바
니아영해내에서 발생하였다.

영국은 기뢰지역이 알바니아의 편의제공으로 고의로 설치되었거나 아니면 알바니아정부가 기뢰지역이 자국영역내에
있음을 알았다고 주장하면서 1907년 제 8헤이그협약을 위반하여 기뢰지역이 있음을 타국에 경고하지 않았다고 주장
하였다. 또한 영국은 알바니아당국이 영국함대의 접근을 탐지하였고 기뢰지역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Corfu해협과 같은 국제수로를 무해통항하는 외국선박의 권리를 침해하였다고 주장하여 이에 대한 보상으로 구축함
피해 823,000파운드와 인명피해 및 기타 비용으로 50,000파운드를 배상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알바니아는 영군군함의 피해를 입힌 기뢰가 알바니아가 설치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으며, 알바니아를
대신하여 제 3국이 설치한 증거도 전혀없고, 알바니아의 원조, 인식 또는 고의에 의해 설치된 증거도 없다고 주장했
다. 또한 알바니아는 연안국을 예외적인 상황에서 그 영해를 통과하는 외국군함의 통과를 규제할 권한이 있으며, 이러
한 규칙은 Corfu해협에 적용되어야 하고 사고당시가 이러한 상황에 해당되므로 영국함대는 알바니아영해통과전에 사
전승인을 받아야 했고, 1946년 10월 22일의 영국의 Corfu해협통과는 사전승인이 없어 국제법위반이었으며 문제된
군함의 해협통과는 무해통항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판결: 공해를 연결하는 국제항로로 이용되는 국제해협에서는 평시의 경우 항행자체가 무해인한 군함도 무해통항권을
가진다. 영국군함의 항해는 그러한 무해한 항행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나아가 상황증거로 보아 자국영해내에 기뢰가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면서도 이것을 고지하지 않은 점을 들어 알바니아의 책임을 인정하였다. 군함의 다른나라영해에
서의 무해통항권은 아직 논쟁중이다. 우리나라는 외무부장관에게 선박명, 통항목적과 항로 및 일정 등을 통항개시 3
일전까지 사전통고하도록되어있다.

[사례13] 파케트 하바나사건(The Paquete Habana, U.S.Sup. Ct.((1900)에서 국제법의 당연한 국내적효력을 인정
했다.)

사실관계: 1898년 미국.스페인전쟁 중 전쟁을 알지 못하고 어로작업을 하던 2척의 쿠바선박이 연안에서 무저항으로
나포되어 전리품으로 미국에 몰수되자 이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이 제기되었다.

판결: 대법원은 어선의 몰수를 거부하면서 관습국제법으로 성숙된 관행에 의하면 이와같은 선박은 몰수로부터 면제된
다고 하고, 이 관습법은 조약. 제정법 또는 판결에 의해 폐지되지 않았으므로 국내법의 일부분으로서 포획법원을 대행
하는 연방법원을 구속한다고 선언하고, 다년간에 걸친 국가간의 관행이 관습국제법의 일부로 성숙하였는가의 여부를
확인하기위하여는 권위있는 학설을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손해배상을 판시하였다.

[사례14]노테봄사건(The Nottebohm Case, ICJ (Liechtenstein v. Guatemala 1955)(학설을 보조수단으로 사용


한 예 "동일한 경향은 국제법학자의 학설과 국가실행에 있어서도 지배적이다" )(국적관계)

7
사실관계: 생활본거지를 과테말라에 두고 리히텐슈타인에 귀화한 Nottebohm에 대하여 과테말라가 2차 대전중 그를
독일인으로 간주하여 체포하고 1949년 재산을 몰수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리히텐슈타인은 그의 재산반환과 보상을
요구, 제소하였던 사건이었다.

판결: ICJ는 1923년의 PCIJ가 '튀니지와 모로코의 국적법령에 관한 권고적 의견에서 밝혔던 설문의 내용을 이어받아
다시 확인하고 있다(ICJ Report, 1955, p.20). 한편 ICJ는 이중국적 등의 경우에 진정하고 실질적인 국적을 기초로하
여 외교적 보호권행사의 가부를 판정해야 하는 바, Nottebohm과 귀화국 리히텐슈타인과는 사실상 유대관계가 희박
하므로 리히텐슈타인은 과테말라에 대해 그에 대한 외교적 내지 사법적 보호를 주장할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ICJ Rep
orts, 1955, pp.4-65).

[사례 15] 윔블던호 사건(S.S. Wimbledon, PCIJ Series A. No1, 1923)

사실관계: 1921년 3월 프랑스해운회사가 용선한 영국선 윔블던호는 폴란드 해운기지를 향해 병기를 적하하고 키일
운하에 도착하였는데, 독일은 전시금제품 수송방지에 관한 중립의무의 준수를 이유로 동선의 통항을 거부함에 따라,
결국 동선은 우회항행하여 목적항에 13일이나 늦게 도착하였다. 당시 러시아와 폴란드간의 전쟁상태가 아직 정식 종
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이 행위는 베르사이유조약( 동 조약 제380조에서, “키일 운하와 그 입구는 독일
과 평화관계에 있는 일체의 국가의 상선과 군함을 위하여 오나전히 평등하게 개방되어 항상 자유로워야 한다”고 규정
한다)규정에 위반한다고 하여, 조약의 주된 체약국 및 연합국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4국이 공동원고가 되어
상설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였다. (후에 폴란드가 소송참가)

명령과 판결: 이에 상설국제사법재판소는 1923년 판결에서 다음과 같은 원고의 주장을 인정하고 독일에 손해배상을
명하였다. 즉 전술한 규정상 키일운하 통항의 유일한 조건은 선박이 독일과 평화관계에 있는 국가에 속하는 것이다.
거리에는 독일이 참전할 경우를 예상하여 적국 선박의 통항은 보류되어 있는데, 제3국상호간의 전쟁의 경우에는 통항
의 조건이 규정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키일 운하는 독일과 평화관계에 있는 모든 국가의 상선과 군함에 대하여 평시
뿐만 아니라 전시에도 개방되어야 하며, 특히 상선의 경우 교전국에의 전시금제품수송도 인정된다. 수에즈운하와 파
나마운하의 경우도 교전국 군함과 전시금제품을 수송하는 줄입상선의 통항이 연안국의 중립과 양립한다고는 생각되
지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의미에서 두 공해를 연결하는 국제운하는 자연적 해협과 동일시되어야 한다. 이리하여 독일
은 윔블던호의 통항을 인정하더라도 중립의무에 위반되지 않고 역으로 중립국인 권리의무를 원용함으로써 이를 거절
할 수 없다.

주요사항: 동 사건은 베르사이유 조약이 규정하는 키일운하의 국제적 지위를 명확히 하였다. 이에 의하면 독일이 교전
국의 경우에 있어 적국 선박이외의 상선과 군함의 구별이 없이 또 평시와 전시를 불문하고 통항의 자유가 인정되며,
특히 전시금제품수송도 허용된다. 또한 동 판결에 의하여 국제운하의 법적지위, 특히 전시의 자유통항과 연안국의 중
립의 관계가 밝혀졌다. 그러나 동 판결은 키일운하의 자유통항을 인정하는 조약규정이 평시에만 적용이 의도되고 있
다는 관점에서 유력한 반대의견이 있다. 전시의 운하 자유통항은 교전국에 의하여 존중될 근거 없이 추정되어서는 안
되며, 특히 중립화가 규정되어 있지 않은 키일 운하의 경우, 이 점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으면 연안국의 중립유지를 위
태롭게 한다고 한다.

[사례 16]Reservation to the Convention on Genocide, Advisory Opinion, ICJ(1951)

관련페이지 p.72

여기에서 ①1국의 유보에 대하여 일부 당사국은 반대하고 그 밖의 당사국은 반대하지 않을 경우에,그 유보가 조약목적
과 양립하면 유보국은 조약당사국으로 인정될 수 있으나, 조약목적과 양립하지 않은 경우에는 당사국으로 인정될 수
없으며, ②1국은 타국의 유보를 조약목적과 양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반대할 경우에는, 비록 유보가 조약목적과 양
립하는 것으로 인정됨으로써 유보부조약으로 성립된 경우라 하더라도, 그 당사국은 유보국을 당사국으로 인정하지 않
을 수 없고, ③1국이 유보를 조약목적과 양립하는 것으로 승인하였을 경우에는, 그 당사국은 유보국을 사실상 당사국
으로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ICJ Report, 1951, pp15-30)
[사례17]바르셀로나 전철. 전력회사사건 (The Barcelnoa Traction, Light and Power Co. Ltd., ICJ (Belgium v. S
pain 1970)

(국제법위반행위가 외국회사주주의 개인적 권리에 대해서가 아니라 회사에 대하여 가해진 경우에는 주주소속국은 외
국회사주주인 자국민의 손해를 회복하기 위해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할 수 없다)(부속적의견-국제법의 강행규범과 임
의법규를 구별하면서 ‘국가의 의무 중 국제공동체 전체에 대한 의무(대세적 의무)와 타국에 대한 의무는 구별해야 하
는데, 전자는 모든 국가에 대한 의무이다’라고 판시하였다.)(조약무효사유-강행규범위반)

사실관계: 개개의 스페인 소재 전력관계사업회사의 특수회사인 상기회사(캐나다법에 의해 토론토시에 설립되고, 1차


대전후 회사주식의 대부분은 벨기에 국민의 소유였음)에 대하여 1948년 스페인인 사채권자가 스페인정부의 불허로
사채이자를 지급받지 못한 것을 이유로 스페인법원으로부터 파산선고를 받아 선임한 파산관리인에 의한 재외 회사주
식의 무효선언 등 일련의 조치에 의해 동회사는 완전히 스페인화되었다. 이에대해 캐나다정부는 별도로 벨기에정부는
동회사의 자국민주주가 스페인의 국제위법행위로 입은 손해를 배상받고자 이 사건을 1958년 제소하였다가 일단 취
하한 후 다시 1962년 ICJ에 부탁하였다.

판결: ICJ는 벨기에의 청구를 기각하면서 ‘회사와 주주간의 관계에 대하여 국제법상 규정하고 있지 않은 국가들의 권
리에 대하여 법률문제가 제기되면 언제나 국제법은 관계 국내법규정을 참조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회사가 입은 손해
는 때때로 주주에게도 손해를 끼치는 경우가 있으나, 회사와 주주 쌍방이 손해를 입었다고 하여도 엄밀하게는 권리를
침해당한 실체는 그 중 하나이므로 쌍방이 모두 배상청구권을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외자투자회사에 대한 위법행
위가 문제가 되는 경우 국제법의 일반규칙은 동사의 설립준거법내지는 본점소재지 소속국만이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
할 수 있고, 따라서 배상청구도 제기할 수 있다’고 판시하였다.

[사례 18]US Diplomatic and Cosular Staff in Tehran(U.S. v. IRAN)(명령 1979, 판결 1980)

사실관계: 1979년 11월 4일 주이란 미대사관은 이란 데모집단에게 습격을 받아 침입.점거당하여 다수의 외교관이 인
질로 잡힌 사건이 발생했다. 더욱이 미임시대리대사등이 이란외무성내에 감금되고 지방의 미영사관도 점거당했다.

각당사국의 주장:

미국: 11월 29일 이란 행위를 국제법위반으로 ICJ에 제소하고 이란정부는 ①국제의무를 위반하고 있고, ②인질을 즉
시 석방할 것이며, ③배상을 지급하고, ④범죄책임자를 소추할 것 등에 대해 판결. 선언할 것을 청구하고, 동시에 인질
의 신체.생명의 안전과 즉시 석방에 대해 속히 잠정조치를 명령할 것을 요청했다.

이란: 외상은 ICJ는 이 사건에 대해 관할권이 없다고 서면으로 주장했다.

명령과 판결: ICJ는 양국이 당사국이 되어 있는 외무관계협약 및 영사관계협약의 분쟁의 의무적 해결에 관한 선택의정
서 제1 조의 규정에 의해 관할권이 있다고 판시한 후, 1979년 11월 15일의 미국의 요청을 인정하고 잠정조치를 명하
고, 1980년 5월 24일 본안재판에서 이란정부의 행위는 확립된 국제법에 위반하고 있으며 인질은 즉시 석방되어야 한
다고 판결했다.

판결이행여부: 이란정부는 판결을 이행하지 않았으며, 후일 정치적 협상을 통해 인질을 송환하였다.

국제거래법자료(국제법의 주체국가) | 수업관련


2006.03.13 22:58
겸손(kyumsonwoo)

http://cafe.naver.com/law2006/52

영세중립국

영세중립국이란 국제법상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타국으로부터 영토보전과 정치적 독립에 대한 보장을 받고 있는 나라


를 영세중립국이라 하고, 이 조약을 영세중립조약이라 합니다. 영세중립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
째, 그것은 조약의 산물이다. 따라서 일방적 선언으로서는 성립될 수 없다. 여기에서 조약이라 함은 국가간의 명시적

9
(明示的) 합의를 말하며, 조약체결에 관한 형식적 절차를 거쳐 체결된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 자위를 위한
무력행사는 영세중립과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영세중립국은 무장이 가능하며, 군대도 보유할 수 있다. 영세
중립국이라고 해서 전쟁능력이 박탈되는 것은 아니며, 그 국제법상의 능력에 제한이 가해지는 것도 아니다. 셋째, 자
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영구히 전쟁에 참가하지 않아야 한다. 여기에서 �영구히�라 함은 영세중립조약의 유효기간
전체를 말하는 것이며, 그 중 특정한 기간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영세중립국은 전쟁에 참가하지 않아야 하기 때
문에 전쟁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어떤 관계를 맺어서도 안된다. 이를테면 동맹조약 ․안전보장조약의 체결이나 자국 내
에서의 외국군의 주류(駐留) 또는 외국기지의 설치 등을 허용하는 것이 그것이다. 넷째, 영세중립국은 타국으로부터
그 영토보전과 정치적 독립에 대한 보장을 받는다. 이 경우 타국을 중립보장국이라 한다. 다섯째, 영세중립은 일반중
립과 구별된다. 전자는 평시(平時) 국제법상의 개념인데, 후자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 국가의 일반적 지위를 일컫는
전시(戰時) 국제법상의 개념이다.

영세중립제도는 평화유지방식으로서의 세력균형제도와 그 궤도를 같이한다. 즉, 강대국들 사이에 약소국이 있어 그


약소국의 자의적 또는 타의적 향배에 따라 세력균형이 깨어질 우려가 있는 경우의 평화유지의 한 방식으로 출현한 것
이 바로 이 제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강대국간의 세력균형유지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
자신의 안전보장 및 이들 국가를 포함한 지역 내의 평화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것이다. 영세중립제도는 세력균형과 궤
도를 같이하는 것이기에 집단적 안전보장체제하에서는 그 빛이 퇴색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집단적 안전보장체제란
대립관계에 있는 국가를 포함하는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서로 불가침을 약속하고, 이 약속에 위반해서 침략을 자행하
는 국가가 있을 때에는 전체의 힘으로 이를 응징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엔의 평화유지기능이 약화됨으
로써 영세중립제도에 대한 가치가 재인식되고 있다.

현재 영세중립국으로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라오스의 3개국이 있다. 이 밖에 로마교황을 원수로 하는 국제법상 특수


한 국가인 바티칸도 1929년 이탈리아와의 라테란협정에 의하여 영세중립국이 되었으나, 이것은 정치적 목적이 없는
특수한 경우이다. 스위스는 1815년 빈회의에서 영세중립국이 되었고, 그 후 파리회의에서 재확인되었다. 중립보장국
은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독일) ․러시아(소련) ․에스파냐 ․포르투갈 ․스웨덴 등 8개국이다.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은 1955년 오스트리아가 자국의 연방헌법규정을 통하여 영세중립을 선언하고 세계 각국에 이를 통지하여
승인을 얻음으로써 성립되었지만 이 경우 각국의 승인은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선언에 대한 존중의 의사표시에 머물
뿐, 이를 보장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따라서 성립형식이나 제국의 의무상에 있어서는 스위스의 경우와는 다르
다고 할 수 있다. 라오스의 경우는 1962년 제네바회의에서 라오스가 영세중립을 선언하고,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
스 ․중국 등을 포함하는 13개국이 이를 환영하며 라오스의 중립에 관한 선언에 서명함으로써 성립되었다. 이 선언에
의하면 13개국은 라오스의 독립 및 중립을 존중하고, 또 그것이 침범될 경우에는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 위하여 라오
스 정부와도 협의하고, 또 당사국 상호간에도 협의해야 한다고 하고 있으나, 그 때 취해야 할 의무의 내용에 대해서는
확정된 것이 없다.

동티모르, 21C 첫 독립국 초읽기

14일 대선 구스마오 당선 유력

21세기 최초의 독립국가 동티모르를 이끌 초대 대통령 선거가 14일 실시됐다.

3월 헌법 초안 마련에 이어 4주 간의 선거운동 끝에 열리는 이번 투표로 대통령이 선출되면 독립국가 선포를 위한 모


든 준비가 갖춰지게 된다.

대통령 당선자가 확정되면 내달 20일 유엔과도행정기구(UNTAET)로부터 통치권을 이양받아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


장 등 세계 지도자들과 주민 20만 명이 참석한 가운데 독립 선포식과 초대 내각 취임식을 가질 예정이다.

동티모르 헌법은 대통령을 국가 수반으로, 총리를 행정 책임자로 규정하고 있으며 대통령은 5년마다 선출하고 총리는
의회에서 뽑게 했다.

이번 선거에는 독립영웅 사사나 구스마오(56)와 사비에르 도 아마랄(65) 티모르 사회민주연합(ASDT) 대표 등 2명의


후보가 출마했으며, 후보자의 경력과 지지도로 보아 구스마오의 압승이 확실시된다. �동티모르의 넬슨 만델라� �
티모르 라로세(떠오르는 태양)�로 불리는 구스마오는 400년 간 식민 지배를 했던 포르투갈이 철수하고 인도네시아
가 침공해왔던 1975년 당시부터 극좌 독립 게릴라단체를 이끌었다.

15년 동안 아내와 두 아이를 남겨둔 채 산 속에서 독립 운동을 했던 그는 92년 인도네시아군에 체포돼 감옥에 있으면
서도 게릴라 활동을 지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99년 8월 동티모르 주민들이 투표로 독립을 선택한 직후 풀려나 공개
적인 정치활동을 해 왔다.

남경욱기자 kwnam@hk.co.kr

입력시간 2002/04/14
주민투표, 오랜 적으로부터의 예기치 않은 양보

1999년. 25년의 잔인한 세월이 흐른 후 드디어 공포의 시대를 끝장 낼 수 있는 순간이 다가왔다. 인도네시아는 1999
년 8월에 주민투표를 실시하는 것에 동의했다. 이는 동티모르인들의 끈질긴 독립운동의 결과인 동시에 인도네시아 정
치체제의 약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1998년 정치적 분위기는 마침내 동티모르인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1997년 통화 위기로 인도네시아
경제가 무너지면서 1998년 인도네시아에서는 대중집회와 거대부패사건이 잇따랐다. 학생 시위대는, 1967년 이래 주
로 서방 세계의 지지 덕분에 정권을 유지하고 있던 수하르토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한편 이제껏 수하르토 체제의
변함없는 지지자였던 미국, 호주 등 강대국도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태도를 보였다. 미국은 통치자 가족들의 부패가
미국 기업들의 투자 활동에 방해물이 될 수 있다고 여기기 시작했고, 정치적 변화를 지지하는 쪽을 택했다. 경제 구제
에 대한 조건으로 국제통화기금은 인도네시아 경제를 붕괴 위험에 빠뜨렸다는 부패 관행-당시 수하르토의 가족은 세
계에서 가장 부유한 축에 들었다-의 개혁을 요구했다. 결국 안팎에서 집중되는 압력으로 5월 21일 수하르토는 사퇴했
고, 정권을 그의 부통령 하비비에게 양도했다.

동티모르의 독립 문제는 조금씩 풀릴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1998년 8월 동티모르에 더 큰 자치권을 부여하도록 하
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같은 해, 12월 유엔의 특사가 방문했고, 마침내 인도네시아 정부가 동티모르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포르투갈과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하려 한다는 보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수감 중인 독립운동 지도자
자나나 구스마오도 협상의 대상에 포함되었다. 한편 티모르 해 유전 개발의 주요 이해 당사자인 호주 정부는 자신들이
동티모르의 미래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따라서 호주 정부는 개입을 결정했다. 존 하
워드 수상은 1998년 12월 23일 인도네시아 하비비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동티모르에 자치를 제공할 것을 제안하
고 앞으로 몇 년 안에 독립에 대한 투표를 실시할 것을 유도하였다. 이는 사실 포르투갈의 움직임을 막기 위한 것이었
고, 자치 기간을 연장함으로써 동티모르에 대한 호주와 인도네시아 간의 협력을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비비
는 이러한 내용을 가장 강력한 동맹이었던 호주의 입장 선회라고 해석하고, 하워드의 제안을 거절했다. 오히려 1999
년 1월, 하비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부의 자치 제안을 동티모르 주민들이 거부할 경우 이 지역을 독립시킬 수도 있
을 것이라는 내용을 발표했다. 처음으로 인도네시아 정부가 동티모르 독립의 가능성에 대해 공식적으로 내비친 것이
었다. 하지만 이는 "동티모르의 분리에 대한 압력이 강하다면 우리는 주민투표를 실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치안이
거부될 경우, 우리는 초토화 정책에 착수할 것이다"는 속내를 감춘 것이었다.

어떠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건 간에, 동티모르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오랜 적으로부터의 예기치 않은 특별한 양보를
맞이했다. 5월 5일 인도네시아와 포르투갈은 공식적으로 인도네시아의 자치 제안에 대한 주민 투표의 실시에 관해 합
의했다. 주민투표는 인도네시아의 국내법에 따라 실시하기로 했고, 유엔은 투표의 실시를 감독하기로 했다. 이 합의서
에는 자치 제안이 거부될 경우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로부터 "분리"될 것이라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민병대, 인도네시아 군의 살인 꼭두각시

결국 동티모르인들은 인도네시아 내에서의 "자치"와 그로부터 독립하는 것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투표


가 최소한 자유롭게만 진행된다면, 친 독립 세력이 이길 것이라는 게 당연시되었다. 하지만 독립이 현실적으로 가능하
다는 것이 천명된 이후, 폭력은 더욱 빈번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군의 수는 증강됐고, 친인도네시아계 민병
대를 조직하여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동티모르인들은 "경찰, 군대, 정보기관, 민병대, 그들은 다른 제복을 입고
있을 뿐 모두 똑같다"고 말했다.

13개의 주요 민병대 조직들의 대부분은 동티모르의 독립에 관한 주민 투표의 계기가 마련된 올해 초에 조직되었다.
하타락, 라카사오, 아블리아 드오가 같은 민족주의적 이름을 지닌 이들 민병대는 반(半)합법적 지위를 부여받았다. 한
편, 인도네시아 보안군이 살인자들을 무장․훈련시키는 것이 외국인 참관자들에 의해 직접 목격되기도 했다. 민병대는
1975년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략 이후 사회통제를 유지하고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Fretilin)과 싸우기 위해 만든
조직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많은 민병대 지도자들은 1990년대 초기 이래 코파수스가 조직해 활동한 민간무장조
직, 가르다 팍시(Garda Paksi)의 동창들이다. 코파수스는 미국의 그린 베레를 모델로 해 만들어진 인도네시아의 특수
부대로, 미국과 호주에서 훈련을 받았고 무자비한 폭력과 그 잔인성으로 악명이 높은 군사조직이다. 동티모르에서 민
병대와 인도네시아군의 목표는 "모든 사람들을 공포에 질리게 해 독립에 반대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목표는 거의
빈틈없이 수행되었다. 1999년 4월이래, 인도네시아가 조종하는 민병대원들은 여러 잔혹한 행위들을 자행했다. 교회
로 피신한 수백 명을 살해했으며 마을을 불태우고 수만명의 사람들을 밀집 캠프나 산악 지대로 끌고 갔다. 보고에 따
르면 거기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사실상의 노예 상태에서 커피 농장 수확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민병대의
인질이며, 만약 그들이 독립에 찬성하는 투표를 할 경우 죽게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고 있다. 즉, 고문과 살인, 협박 등
으로 동티모르인들에게 통합을 선택할 것을 강요했다. 수만 명이 겁에 질린 채 집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약 4만 명
의 주민들이 군대의 통제 하에 있는 '난민 캠프'에 머물러야 했다.

예견된 폭력, 국제사회의 방조

11
현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테러 행위를 보고하면서, 노벨상 수상자인 카를로스 크시메니스 벨로 주교는 인도네시아의
테러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고 주민투표를 제대로 진행시키기 위한 "국제적인 무장 개입"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 이
전부터 동티모르인들과 외국의 지원단체들은 주민투표가 공정하게 진행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인도네시아 군의 동
티모르 철수 ▲민병대의 무장 해제 및 해산 ▲유엔 평화유지군이 치안유지를 감독할 것 등을 줄기차게 제시해왔다. 하
지만 주민 투표 전까지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엔은 백여 명의 비무장 선거감시요원들을 파견하기로 결의했
지만, 이들에게는 민병대의 행동을 멈추게 할 수단이 없었다.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유엔의 입장을 억누르면서, 도
리어 선거감시요원의 파견마저도 사실상 지연시켰다. 자치안이 부결될 경우, 인도네시아 군과 민병대가 동티모르 민
중들에 대해 공격을 가할 것이란 사실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흔히 서방세력을 의미하는 소위 '국제사회'는
인도네시아 군에 의한 동티모르의 '안정'을 선호했던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해 군사적 개입의 명분을 쌓기 위한 서구 열
강의 음모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지난 3월부터, 베트남전 이후 가장 높은 강도의 군사적 준비를 진행한 호주의 경
우는 이러한 주장에 상당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결정의 순간은 다가오고..

투표일을 두 번 씩이나 연기시킨 바 있는 주택방화, 구타, 협박 등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투표 등록수는 놀랍도록 높았


다(45만명). 투표 등록을 위해 투표소 직원들 앞에 오래도록 줄서 기다리던 동티모르인들, 그들은 밤새도록 기다렸고
수많은 노인들은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1975년 이전에 발부된 포르투갈어로 된 서류를 가슴에 품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일단 자유롭고 공정한 투표가 이뤄진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치 제안을 거부할 것이 분명했다.

이와 같은 동티모르인들의 열망으로 인해 인도네시아 당국은 위협에 박차를 가할 수 밖에 없었다. 기표 내용의 비밀이


보장되지 않을 것이라고 유권자들에게 협박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투표 절차에 관해 사람들을 혼란시키려는 시도들도
많았다. 또다른 조작은 잘못된 독립 표식을 인쇄한 투표용지 샘플을 배포하는 것이었다. 일방적인 선거운동도 활개를
쳤다. 인도네시아 지지자들은 공식 선거운동 개시일인, 8월 15일 훨씬 이전부터 자치 투표를 호소하는 선거 운동을 벌
였다. 친인도네시아 선거운동원들은 아무 견제 없이 자유롭게 선거운동을 벌이는 반면, 독립지지파 활동가들은 많은
지역에서 선거사무소를 차릴 수조차 없었다. 사무실을 열 때마다 매번 습격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서부와 남부의 많은 지역에서는 친독립파의 선거운동이 지하에서 은밀히 진행되거나 아예 이루어지지도 못했다. 오히
려 더 큰 걱정은 투표 결과가 발표된 이후 발생할 폭력, 대량학살의 위협이었다. 민병대가 무기를 비축하고 있었으며,
인도네시아 정부는 주민 소개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에 표를 던지면 1975년과 같은 대규모의 전쟁을
맞이할 것이다.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이같은 예측은 공공연한 것이었다. 이러한 공포를 덜어줄, 국제사회를 대표하
는 세력이라고는 유엔의 비무장 선거 관리 요원들뿐이었고, 유엔은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로부터 분리될 것이며 자신
들이 독립으로의 이행과정을 감독할 것이라는 말만을 반복했다. 많은 사람들은 자치 거부, 즉 독립 결정 이후의 상황
을 두려워했다.

이러한 이유있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걱정 이면에는 거대한 희망이 살아있었다. 폭력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대규모 인파가 유권자 등록을 위해 몰려든 것은 바로 그 희망의 반영이었다. 테러로 얼룩진 수십년의
세월 끝에 동티모르 역사의 어두운 장을 그들 스스로 끊겠다는 의지의 발현이기도 했다.

<1999>

1월 27일 : 인도네시아, 자치 제안 거부될 경우 동티모르 독립 계획 발표.

4월 6일 : 민병대가 리퀴사의 교회에서 난민 25명을 살해했다고 벨로주교 폭로.

4월 17일 : 민병대, 딜리에서 21명 살해.

4월 23일 : 유엔-포르투갈-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자치협상 합의.

4월 27일 : 하비비 대통령, 주민투표 감시할 유엔 민간경찰대 배치 동의 발표.

5월 5일 : 인도네시아-포르투갈간 동티모르 자치관련 협정 인도네시아-포르투갈-유엔간 동티모르 자치투표 관련 협


정 인도네시아-포르투갈-유엔간 동티모르 치안유지 관련 협정 3개 협정 체결

6월 21일: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 안전 문제 등을 감안해 주민투표 8월 8일에서 8월 21일 또는 22일로 연기 발


표.

7월 28일: 유엔, 주민투표 8월30일까지로 재차 연기.

8월 15일: 각 정파, 주민투표 유세 시작.

8월 26일: 주민투표 앞둔 최종 유세과정에서 5명 사망. 인도네시아 정부는 구스마오가 9월 중순 석방될 것이라고 발


표.

8월 27일: 선거유세 종료. 또 다른 3명 사망 보도.

8월 30일: 동티모르 주민 자치/독립 투표 실시


9월 4일: 개표결과 동티모르 주민 78.5% 독립찬성

9월 5일: 동티모르 친인도네시아 세력 투표결과 거부 친인도네시아 민병대 독립세력 공격 강화

9월 7일: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계엄령 선포 동티모르 독립지도자 구스마오 공식 석방

9월 9일: 아펙 정상회담에서 다국적군 파병논의

9월 11일 : 클린턴, 평화유지군 수용 거부하는 인도네시아에 군사 판매 중단 선언

9월 13일 : 인도네시아 평화유지군 수용 발표

9월 15일 : 유엔안보리, 한국 정부에 동티모르 파병 공식요청

9월 16일:국가안전보장회의(NSC) 동티모르에 4백명 파병 결정

9월 17일:인도네시아군, 동티모르서 철수 시작

9월 20일:다국적군 선발대 동티모르서 활동 시작

2002년 4월선거에서 구스마오가 초대대통령으로 당선 21세기의 첫 독립국이 되었다.

1975년까지 포루투갈의 지배를 그 이후 인도네시아에 병합되어 99년까지 지배를 받았다.

과도정부

새로 독립한 국가가 완전한 자주적인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일시 과도적으로 성립 존속하는 정부.

과도정부는 행정부와 입법부가 모두 과도적으로 성립 ․존속함을 원칙으로 한다. 단순한 선거관리내각과는 구별되는
데, 선거관리내각은 새 정권 수립을 위한 선거를 공정히 관리하기 위하여 구성되는 행정부만을 의미한다.

한국에서는 광복과 더불어 1945년 9월 11일 군정장관(軍政長官)에 소장 A.V.아널드가 임명됨으로써 미군정이 실시


되었다가 행정권을 한국인에게 이양하는 첫 단계로서 47년 2월 10일 민정장관에 안재홍(安在鴻)이 임명되고, 47년 6
월 3일 종래의 미군정청을 남조선과도정부로 개편하였다. 기구개혁위원회가 설치되고, 미국인 부처장은 고문이 되었
으며 한국인이 그 후임 부처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5 ․10(오십선거) 결과 이승만(李承晩)이 48년 7월 24일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
에 따라 과도정부는 그 행정권을 대한민국에 이양하였다. 또한, 60년 4 ․19혁명으로 대통령 이승만이 하야하자 허정
(許政)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수립되었다.

아프간 과도 정부 출범 정파간 갈등 여전․복구비 마련등 난제 산적

탈레반 붕괴에 따라 아프가니스탄을이끌 과도정부가 22일 공식 출범한다. 과도 정부는 앞으로 6개월 내 부족 원로회
의인 로야 지르가(대부족 회의)가 소집돼 정부를 공식 승인할 때까지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며 전쟁과 내란으로 황
폐해진 아프간의 재건에 나선다.

20일 수도 카불에는 무기 소지 금지령과 함께 군인들의 병영 복귀 명령이 내려지고, 아프간 치안을 맡을 국제보안지


원군(ISAF) 선발대 영국군 53명이 도착하는 등 과도 정부 출범에 대비한 조치들이 속속 취해지고 있다. 또 카불에는
이미 외교공관을 재개한 러시아와 연락사무소를 개설한 미국을 비롯 영국 이란 인도 프랑스 독일 터키 등8개국이 공
관을 개설, 새 정부와 외교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활발하게 접촉하고 있다.

임시정부

13
국내 헌법이 정한 절차에 의하여 성립한 적법한 정부가 아니며, 국제적으로 국가를 정당하게 대표할 자격이 없는 사실
상의 정부.

가정부(假政府)라고도 한다. 한 나라의 정부가 국제법상의 주체가 되려면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임시정부
는 그와 같은 승인을 받지 못한 사실상의 정부이다.

한 나라의 반정부세력이 한 지방을 점령하여 모국의 정부와 대립하여 세운 정부, 혁명 또는 쿠데타로 기존 정부를 쓰
러뜨리고 새로 세운 정부, 자기 겨레의 독립을 위하여 또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해외에 세운 정부 등의 임시
정부가 있다. 정부의 변경이 급격하고 극단적인 방법에 의하여 실현된 경우(예컨대 이탈리아의 파쇼 정부나 독일의 나
치스 정부 등)라도 헌법상의 적법한 절차를 밟은 것은 적법정부이며 임시정부는 아니다.

반대로 비합법적 방법으로 성립된 정부는 비록 혁명 전과 동일한 정체(政體)를 채용한 경우라도 임시정부이다. 임시정
부는 실질적 정치권력을 확립하고 국제법을 준수할 의사와 능력을 지니는 등의 요건을 갖춘 뒤, 외국의 승인을 받음으
로써 국제법상의 주체인 정당한 정부가 된다.

한국은 1919년의 3․1운동 후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위하여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조직․선포하
였다. 그리고 8․15광복 때까지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통할하는 최고기관으로서 활약하였으나, 국제간의 정부승인을 받
지 못한 채 광복을 맞아 정부자격이 아닌 개인자격으로 환국하게 되었다.

PART I Article I General Most-Favoured-Nation Treatment

1. With respect to customs duties and charges of any kind imposed on or in connection with
importation or exportation or imposed on the international transfer of payments for imports or exports,
and with respect to the method of levying such duties and charges, and with respect to all rules and
formalities in connection with importation and exportation, and with respect to all matters referred to in
paragraphs 2 and 4 of Article III,* any advantage, favour, privilege or immunity granted by any
contracting party to any product originating in or destined for any other country shall be accorded
immediately and unconditionally to the like product originating in or destined for the territories of all
other contracting parties.

**국가승인문제-남한과 북한. 서독과 동독**

6․15 남북공동선언은 제2항에서 『南과 北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南側의 「연합제案」과 北側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고 선언하고 있다.이에
보수세력과 급진세력의 대립이 있다.

보수 세력의 주장은 첫째, 연방제의 채택은 북한에 의한 적화통일의 우려가 있다는 것, 둘째, 연방제의 채택은 북한을
국가로 승인하는 것으로 되어 이는 우리 헌법 제3조에 규정된 「영토조항」에 저촉되어 違憲(위헌)이라는 것이다.

남한의 연합제

제6공화국 정부가 1989년 제시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통일을 단계적 과정으로 보고 그 제2단계인 중간과정
으로 「남북연합」을 형성하도록 하고 있다. 이「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文民정부 시절인 1994년 8월15일「3단계․3
기조 통일정책」을 내용으로 하는「민족공동체 통일방안」으로 수정, 보완되었다.

金大中 대통령은 취임 이래 이른바 「햇볕정책」을 추진해 왔으나, 「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의 승계 여부에 관한 대통령
의 명시적 의사표명은 없었다. 그러나 林東源(임동원) 당시 통일부 장관은 1999년 10월 26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
민의 정부」는 남북연합의 제도화를 모색하고 있다』고 답변 한 바 있으며, 朴在圭(박재규) 통일부장관은 2000년 6월2
2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現 정부의 통일방안은「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계승 한 것』이라고 답변한 바 있
다.

따라서 오늘에 있어서 우리측의 공식적 통일방안은「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며, 이 통일방안은 남북연합을 내용으로
하는 종전 정부의 통일방안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를 「남북공동선언」 제2항은 「南側의 연합제案」이라고 표시하고
있다.「연합제案」이란 표현은 「남북공동선언」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이다.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

1960년대 「남북연방제 통일방안」으로 처음 제의되었던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은 1970년대「고려연방제 통일방안」


을 거쳐, 1980년대의「고려민주연방제 통일방안」으로 일단 완성되었다.

金日成은 1980년 10월10일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행한 중앙위원회 사업총 화보고를 통해 연방제에 관한 「10大 施
政(시정)방침」을 발표했다. 여기서 金日成은 종래 「과도적 조치」로서 주장하던 연방제를 「통일된 연방국가로 변경하
여 주장하였다. 1991년 1월1일 金日成은 신년사를 통해 기존의 「통일 완성형 연방제 案」은 「점진적 또는 단계적 연
방제案」으로 수정 될 수도 있다는 제의를 했다.

1997년 8월4일 金正日은 통일문제에 관한 북한의 입장을 집약한 「위대한 수령 金日成 동지의 조국통일 遺訓(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라는 논문에서 「조국통일 3大 원칙」,「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全민족 大 단결 10大 강령」
을 「조국통일 3大헌장」으로 규정하였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제2항에서 北側은「낮은 단계의 연방제案」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낮은 단
계의 연방제안」은 1991년 1 월1일 金日成의 신년사를 통해 제시되고 1997년 8월4일 金正日의 「8․4 勞作(노작)」을
통해 확인된 연방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2000년 10월6일 북한은 「고려민족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제시 20돌 기념 평양시 보고회」에서 안경호 祖平統 서기국
장을 통해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1민족․1국가․2제도․2정부」의 원칙에 기초하되 남북의 現 정부가 정치․군사․외교
권을 비롯한 현재의 기능과 권한을 그대로 보유한 채 민족통일기구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발표했다.

南側의 「연합제案」과 北側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案」의 공통성은 「연방제의 채택」에 있다. 우리측의「남북연합은 연합
기구의 구체적인 권한과 기능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지겠지만 넓은 의미의 연방제의 한 형태임을 부인할 수 없으므로
이 방안은 北側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案」과 같이 연방제의 채택을 제의한 것이다.

남한의 남북합의서에 기초한 공동선언이 북한을 국가로서 승인하는 것인가?

국제법상 국가승인의 효과는 「상대적」인 것이다. 예컨대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한 국가(예컨대, 미국)와
의 관계에서 국가이나,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하지 아니한 국가(예컨대, 쿠바)와의 관계에서 국가가 아니다. 이와 마
찬가지로 북한은 북한을 국가로 승인한 국가(예컨대, 중국)와의 관계에서 국가이나 북한을 국가로 승인하지 아니한 국
가(예컨대, 미국)와의 관계에서 국가가 아니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하지 아니한 북한과의 관계
에서 국가가 아니며, 북한은 북한을 국가로 승인하지 아니한 대한민국과의 관계에서 국가가 아닌 것이다.

南과 北은 「남북기본합의서」의 체결로 각기 상대방을 국가로 승인한 것이 아니다. 南과 北「남북기본합의서」의 체결로


각기 상대방을 국가로 승인하는 효과를 배제하기 위해 同 합의서에 『쌍방 사이의 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규정하고 있다(前文). 여기서 「나라와 나라사
이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보면 대한민국은 국가이나 북한은 국가가 아니고, 또한 북한의 입장
에서 보면 북한은 국가이나 대한민국은 국가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면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볼 때 북한의 法的 實體는 무엇이고,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대한민국의 법적 실체는 무
엇인가? 「남북기본합의서」는 이에 관해 어떠한 규정도 두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남북한의 법적 실체는 일반 국제법에
의해 규명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볼 때 대한민국은 「중앙적 법률상의 정부(de jure central government)로 구성된 실체」, 즉
「국가」이고, 북한은 「지방적 사실상의 정부(de facto loeal government)로 구성된 실체」, 즉 「交戰단체(belligeren
cy)」인 것이다. 「남북기본합의서」의 체결로 南과 北은 각기 상대방을 「민족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
러나 여기 「민족공동체의 구성원」이란 개념은 법학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학적․정치적 개념인 것으로, 이는 법적 개념
인 국가의 승인과 무관한 것이다.

요컨대, 南과 北은 「남북기본합의서」의 체결로 각기 상대방을 국가로 승인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남북기
본합의서」의 체결로 북한을 국가로 승인한 것이 아니므로, 이는 우리 헌법 제3조의 영토조항에 위반되지 아니하는 것
이다(헌법재판소 決定 1997. 16, 92헌바6․26, 「93헌바 34 ․35․36 참조).

남북한이 南側의 「연합제案」이나 北側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案」, 혹은 兩者(양자)를 절충한 방안에 의해 연합 또는
연방을 구성하기로 할 경우 이에 관한 남북한간의 합의의 법적 성격「조약」이 될 것이다. 이 때 정해지게 되는 南과 北
의 법적 지위는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유형 중 하나일 것이다.

첫째, 대한민국이 자신의 국가성을 인정하면서 북한을 국가로 승인하지 아니하고, 북한도 그들의 국가성을 인정하면
서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하지 아니한다. 이 경우는 대한민국이 북한을 국가로 승인하는 것이 아니므로 남북한의 연
합(연방)은 완전한 의미의「국가연합(confederation)」이 아니며 , 이는 우리 헌법 제3조에 위반되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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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남북한이 상대방을 국가로 승인한다. 이 경우는 대한민국이 북한을 국가로 승인하는 것이므로 남북한의 연합(연
방)은 완전한 의미의「국가연합」이며, 이는 우리 헌법 제3조에 위반된다.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다음과 같이 남북연합에 있어서 남북한의 관계를 「국가간의 관계」로 보고 있지 않다.

<이러한 기본적인 틀 안에서 南과 北은 「민족공동체」라는 하나의 지붕 밑에 연합의 형태로 연계됨으로써 잠정적으로


「국가간의 관계」가 아닌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를 가지게 되며, 안으로는 상호 간의 관계를 협의 ․조절하고 밖으로는
소모적 경쟁을 지양하고 민족이익을 추구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남북연합은 1민족 2국가를 의미하는 국가연합이 될 수 없으며, 분단상황하에서 완전한 통일실현시까지 통일을 추구
하는 「잠정적 관계」라는 점에서 특수한 결합형태라고 하겠다(국토통일원,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1989, pp. 24-2
5).

이상과 같이「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나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 의하면「민족공동체헌장」을 채택하여 남북연합을


형성하는 경우에도 대한민국이 북한을 국가로 승인하는 것은 아니므로 남북연합의 채택은 우리 헌법 제3조에 위반되
지 아니한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의 경우 南과 北이 각기 상대방을 국가로 승인하는 것인지에 관해 北側이 아직까지
어떤 제의도 한 바 없으므로 이는 명백하지 않다.●

서독과 동독은 어떠했는가

독일 통일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되어진 것」이라는 관점이 있다. 독일 통일은 서독이 적극적인 통일정책을 추진
한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통일을 사실상 포기한 채 동독과의 평화공존과 화해 협력을 강화해 온 결과 국제적여건 변
화에 따라 「偶然(우연)」의 모습으로 찾아 왔다고 보는 견해이다. 한국의 對北 햇볕정책도 근저에는 이같은 통일 철학
을 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독은 동독의 체제를 인정하고 대화와 협력을 강화해 나가는 과정에서도 자신들의 통일 의지를 스스로 약화
시키거나, 약화된 것으로 비쳐질 수 있는 말과 행동은 극도로 삼가했다. 서독 기본법은 서문에서 『모든 독일 민족은 自
決(자결)에 의하여 독일의 통일과 자유를 완수하도록 요구받고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고, 역대 서독 정부는 이를 최고
의 통일 이념과 통일 정책으로 삼아 對 동독 정책의 기본으로 유지했다. 기본법의 이 규정은 단순한 선언적 의미에 머
물지 않았다. 1972년 12월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되자 서독 바이에른 주정부는 이듬해 5월 연방헌법재판소에 기본
조약의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바이에른주는 독일에서 가장 보수적인 기사당(CSU)이 집권하고 있다.
위헌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기본조약에서 동독을 서독과 동등한 자격을 가진 독립된 자립 국가로 승인한 것은 기본법
에 규정된 「통일 완수의 使命(사명)」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기본조약은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은 동등자격의 원칙 위에서 상호 정상적 선린 관계를 발전


시킨다」 「(양측은) 주권상 의 평등, 독립의 존중, 자립과 영토의 불가침성, 자결권, 인권 보장 등 유엔헌장에 명시된 목
표와 원칙을 준수한다」는 등의 조항을 담고 있었다. 서독은 기본조약에서 동서독 관계를 「특수 관계」로 규정하려 했으
나, 동독의 강력한 반발로 이를 조약에 명시하지 못했다. 브란트 사민당 정부는 동독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기 앞서 동
독에 대한 국가 승인의 문제가 국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자 1969년 10월28일 『서독 정부가 동독을 국제법상 승인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설사 독일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한다 할 지라도 이들은 서로에게 외국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간의 관계는 특수할 수밖에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동독은 정권 수립 이후 줄기차게 서독으로부터의 국가 인정을 요구해 왔고, 기본조약 협상 과정에서도 독자


적인 주권 국가로서 서독으로부터 제한 조건 없이 국제법상의 국가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기본조
약의 해당 조항 표현은 양측의 타협의 결과였다.

서독 연방헌법재판소는 기본조약은 위헌이 아니라고 판결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동독은 국제법상 하나의 국가이다. 그러나 서독에 의한 동독의 국제법상 승인 문제는 별개이다. 서독은 동독에 대한
국제법상 승인을 공식적으로 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이와 반대로 되풀이하여 이를 분명히 거부하였다. 서독이 동독에
대하여 긴장 완화 정책의 일환으로 취한 태도와 특히 조약을 체결하면서 대두된 실제상의 승인 사실을 평가한다면 이
는 특수한 형태의 사실상의 승인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정부승인문제-베네수엘라 과도정부 출범**

2002년 4월 12일
총파업과 유혈시위가 계속돼온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12일 군 고위 장성들의 사임압력에 굴복, 중도 퇴
진하고 과도정부 대통령에 지명된 페드로 카르모나 상공인연합회장이 취임했다.

베네수엘라 과도 정부는 이날 오후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가운데 출범식을 갖고 1년내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고 총선
은 오는 12월까지 실시하겠다는 정치일정을 제시했다.

과도정부는 또 차베스 정권이 통과시킨 경제관련법 49개를 무효화하는 명령을 발표하고 총파업사태를 촉발시킨 베네
수엘라 국영 석유회사(PDVSA)에 대한 차베스전대통령의 낙하산식 새 이사진 임명조치를 철회, 기존의 이사진을 복귀
시켰다. 이에 따라 차베스 정권에 반대해 총파업을 벌여온 PDVSA경영진들은 정상 업무에 복귀했으며 PDVSA이사회
는 쿠바를 차베스 정권의 동맹세력이라고 비난하며 쿠바에 대해 한방울의 석유도 수출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베네수엘라 군부는 또 중도퇴진한 차베스 전 대통령의 쿠바망명 요청을 거부하고 카라카스 군항 포트 티우나에 억류
했으며 수일내 카라카스 남쪽의 한 군 형무소로 이송할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차베스 정부에서 각료를 지낸 인사및 협력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돌입해 라몬 로드리게스 차신 전 내무
장관을 체포했다.

미국과 스페인은 양국 공동으로 발표한 성명을 통해 베네수엘라가 평온을 되찾기 바란다는 입장을 발표했으며 라틴
아메리카 정상들은 베네수엘라 사태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미국. 스페인 공동성명은 베네수엘라 국민들에 대한 전
적인 지원과 연대감을 표시하면서 "안정적인 민주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것만이 베네수엘라 국민들에게 자유와 진보
의 미래를 제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양국은 또 미주기구(OAS)에 대해 베네수엘라가 민주적 제도를 공고히 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촉구했다.

애리 플라이셔 미국 백악관 대변인은 최소한 15명이 숨지고 350명이 부상한 대규모 유혈시위 끝에 축출된 차베스 정
권은 "위기를 선동했던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고 말해 차베스 정권 퇴진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플라이셔
대변인은 특히 차베스 정권이 최근 "정치 견해의 자유로운 표출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멕시코의 비센테 폭스 대통령은 과도정부가 새로운 선거를 실시할때까지 베네수엘라 과도정부를 인정하지 않겠지만
베네수엘라와의 외교관계는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으며 유럽은 차베스 대통령의 강압적인 사임에 우려를 표시하
고 군부가 조속히 민간에 권력을 이양할 것을 촉구했다.

군나르 비간트 유럽위원회 외교 담당 대변인은 유럽위원회가 이번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면서 베네수엘라 군부


에 "인권및 법률을 계속 존중해 줄 것"을 촉구했다.

국제통화기금은(IMF)의 토머스 도슨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을 통해 차베스 정권실각에 따라 새로 취임한 과도정부를 지


원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차베스 정권 퇴진으로 마비상태였던 세계 4위의 산유국인 베네수엘라의 석유 생산및 수출이 조만간 재개될 것이라는
예상으로 12일 런던시장에서 북해산 브렌트유는 배럴당 25센트 내린 24.29달러에 거래를 마쳤으며 뉴욕시장에서도
5월 인도분 원유가가 배럴당 1.52 달러 내린 23.47달러에 폐장했다.

한편 차베스 대통령의 퇴진과 관련, 그가 군부의 압력에 밀려 자진 사임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쿠데타의 피해자라는
주장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앞서 현지방송과 베네수엘라 군 소식통들은 차베스 대통령이 이날 새벽 반정을 선언한
군고위장성 3명의 퇴진압력에 굴복해 미라플로레스 대통령궁에서 공식 사임했다고 밝혔었다. 그러나 차베스 전 대통
령의 딸 마리아 가브리엘라 차베스는 "아버지는 자진 사임한 것이 아니라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에 체포돼 격리된 상
태"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차베스 정부의 교육장관이었던 아리스토불로 이스투리스도 차베스 대통령이 사임한 것이
아니라 체포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차베스는 사임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을 밝혔고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경우 그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을 군부에 전했다"고 말했다.

이사이아스 로드리게스 법무장관도 의회의 승인을 얻을 경우에만 대통령의 사퇴가 받아들여진다는 헌법조항을 들어
차베스가 아직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차베스를 인터뷰한 군검찰의 정보에 따르면 차베스는
사임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차베스가 외부와의 연락이 두절된 채 법무부와의 접촉도 거부되고 있다면서 이는 기본적
인 인권을 침해한 행위라고 비난했다. 로드리게스 장관은 또 과도정부가 군사정권으로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누
가 보장하겠느냐고 묻고 이번 사태로 베네수엘라가 독재주의로 회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루시안 감사원장은 헌법상
대통령이 사임하면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의회의장이 승계해야 하지만 그러한 권력승계
가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이번 사태를 쿠데타로 규정했다. (멕시코시티=연합뉴스) 성기준 특파원

**의회기능마비**

페드로 카르모나 대통령이 이끄는 베네수엘라 과도정부는 12일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이 주도한 1999년의 헌법개정
을 통해 설치된 단원제 의회의 기능이 정지됐다고 선언했다.

17
페드로 카르모나 대통령은 또 차베스 정부의 감사원장과 검찰총장등을 해임하고 차베스 정부의 `볼리바르 혁명'에 대
한 상징적 종식조치로 베네수엘라 공식 국가명에서 `볼리바르'라는 명칭을 제거했다.

차베스 대통령은 대통령에 취임하자 독립영웅인 시몬 볼리바르를 기리기 위해공식 국명을 `볼리바르 베네수엘라 공화
국'으로 바꿨었다.

**전대통령을 지지하는쪽이 이젠 반란군이 되는 겁니까?**

베네수엘라 과도정부 대통령에 페드로 카르모나가 취임한 지 수시간만인 13일 새벽(현지시간) 수도 카라카스에서 우
고 차베스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위가 발생, 정국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친(親) 차베스 시위대는 이날 차베스 전 대
통령이 억류돼 있는 것으로 알려진카라카스의 포트 티우나 군 기지로부터 200m 떨어진 곳에서 "차베스는 납치됐
다" "차베스를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이 과정에서 총성이 들리기도 했으나 시위대와 군경중 어
느쪽에서 총을 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시위대는 전날 밤부터 포트 티우나 기지 주변으로 모여들었는데, 차베스는 같은 날 오전 이 곳에 머물고 있던 것으로


최종 목격됐다.

차베스 지지자들이 거주하는 빈민지역에 위치한 포트 티우나 기지 상공에는 헬기들의 선회비행이 이뤄졌다. 이와 함
께 또다른 친차베스 시위대는 빈민지역 뿐만아니라 중산층 거주지역에서 빈 주전자 등을 두드리며 시위를 벌였다.

카라카스 서쪽 빈민지역에 거주하는 한 젊은 여성은 이날 AFP 지국에 전화를 걸어와 경찰이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경찰은 전날 밤 과도정부가 공식 출범한 직후 차베스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무장조직인 `볼리버리언 서클스' 본


부를 급습, 미구엘 다오 경찰청장 등 5명을체포하고 무기를 압수했다.

한편 전날 코스타리카에서 회의를 가진 남미 19개국 정상들중 상당수는 베네수엘라 과도정부의 출범은 헌법에 위배


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연합뉴스]

2002년 4월14일

**베네수엘라 차베스 권좌 복귀**

축출 이틀만에…임시 대통령 카르모나 체포

12일 일부 군부에 의해 축출됐던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이틀 만인 14일 다시 친 차베스 군부에 의해 대통


령궁에 복귀했다. 차베스는 구금돼 있던 카리브해의 라 오르칠라 섬 해군기지에서 군부 장성과 지지자 대표들을 대동
하고 헬기편으로 수도 카라카스의 대통령궁에 돌아왔다.

이에 앞서 13일 페드로 카르모나 임시 대통령은 취임 27시간 만에 전격 사임한 후 체포됐다. 이어 차베스의 측근인 디


오스다도 카베요 부통령이 의회로부터 새로운 임시 대통령에 임명됐다.

카베요 임시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차베스 대통령이 돌아오는 그 때까지 일시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할 것� 이라
며 차베스 대통령은 군부 지지자들과 함께 있다고 밝혔다.

카르모나 전 임시 대통령과 그가 임명한 내각, 지지 장성들은 카베요 임시대통령 취임 후 군부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


으로 알려졌다. 차베스 전 대통령은 대통령궁에 복귀하기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으로서 국민이 부여한 권력을 포기
하지 않겠다� 는 대 국민성명을 발표했다.

차베스가 축출된 12일 저녁 수도 카라카스 대통령궁 주변에는 친 차베스 시위대 수천명과 경찰 간 충돌로 시위대 9명
이 숨지는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차베스 사임은 베네수엘라 국민의 뜻이라며 차베스 축출을 환영했던 미국 정부는 이
날 차베스 전 대통령이 위기를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카라카스워싱턴 외신=종합

입력시간 2002/04/14 17:37

美, 좌익정권 용납 안할듯
■차베스 앞날은

베네수엘라와 차베스의 앞날은 군부간 주도권 다툼의 향배와 미국의 영향력 행사에 크게 좌우될 전망이다. 우고 차베
스 대통령이 축출 이틀만에 권좌에 복귀함으로써 군부 일부의 거사는 �실패한 쿠데타�가 끝나게 됐다. 이에 따라 베
네수엘라 정부는 차베스 정권의 명맥을 이어가면서 이번 사태로 확인된 군부와 중산층의 요구를 수용하는 체질 변화
를 꾀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돌아온 차베스가 권좌에 계속 머물 수 있을지는 현재로서 속단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미국의 반(反) 차베스 정서가 변수다. 애리 플라이셔 미국 백악관 대변인은 12일 �차베스 정권이 위기를 자초했다�
고 밝혀 새로운 군부 세력의 등장을 사실상 승인했다.

어느 때보다 신속하고 단호한 반응이었다. 따라서 이번 사태에 개입했든, 하지 않았든 차베스 정권의 축출을 어느정도
공식화했던 미국으로서는 향후 그가 다시 좌익 정권을 연장하는 상황을 좌시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미국은 그 동안 남미 국가들의 대통령궁에 친미 지도자들을 머물게 하려는 노력을 줄기차게 해왔다. 그들이 군인인가,
민간인 인가하는 점은 미국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은 1954년 과테말라의 민선 정부 전
복을 위해 우익 쿠데타를 지원했으며, 1973년부터 1990년까지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독재 정권을 용인해
왔다.

1980년대 니카라과 좌익 반군인 산디니스타에 대항하는 우익 세력을 구축하려는 끝없는 시도는 이란-콘트라 게이트
로 이어졌다.

이런 점에서 남미 좌파의 맹주를 자처하며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정권에 석유를 공급하고,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
과 무아마르 가다피 리비아 지도자와도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차베스는 미국의 우선 축출 대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테러와의 전쟁에 매달리고 있는 미국은 자신의 앞마당격인 남미에서의 불안정을 바라지 않는다. 뉴욕타임스는
�차베스는 미국의 세기를 추구하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비전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터키내 쿠르드족 분리운동 (쿠르드족-소수자) 한국국방연구원

▲ 개요

쿠르드족은 이라크 영토 내에 300만 명, 터키에 1000만 명, 이란에 500만 명, 그 밖에 시리아 및 구소련 아르메니아
등의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소수민족이다. 그들은 대부분 이슬람권에 거주하면서 해당 정부에 의해 압제와 박해를 받
아왔다. 특히. 터키와 이란 및 이라크는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면 이를 쿠르드족 박해로서 완화시키려고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쿠르드족 스스로가 자신의 거주 국가에 동화되지 않고 분리 독립운동을 전개해온 것
도 박해를 받는 원인 중의 하나이다.

쿠르드족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당시까지 중동지역을 지배해 왔던 터키가 패배하여 세력공백이 발생하게 되자 1922
년 6월 독립을 추구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쿠르드족이 거주하고 있던 이라크 북서부 모스르 지역은 유전지대
이기 때문에 영국이 개입하여 무력으로 쿠르드족 봉기를 진압하였다. 쿠르드족은 1930년 6월에는 이란과 터키 국경
에서 봉기를 일으켰으나 두 나라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1932년 4월에도 반란을 일으켰다가 영국군의 지원을 받는 이
라크군에 의해 제압되었다.

쿠르드족은 제2차 세계대전이후에도 자신들이 거주하는 국가 내에서 혼란이 발생할 때마다 분리 독립을 요구하였고,
그 때마다 정부군이 그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왔다. 터키에서는 1951년과 1965~1968년에, 이라크에서는 1958년
과 1970년 및 1978년에, 이란에서는 1950~1953년과 1970년 및 1979년에 쿠르드족 문제로 인한 분쟁이 발생되
었다. 그들은 어느 경우에도 소수로서 약자였기 때문에 항상 희생을 당할 수밖에 없었으며, 때로는 수만 명의 사상자
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10년에 한 번씩 쿠르드족 학살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
쿠르드족의 분리 독립운동은 1970년대에는 비교적 진정되는 듯 하였으나 1984년부터 '쿠르드 노동자당'(PKK)이 무
장투쟁을 벌이게 되면서 다시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PKK의 사령관인 오잘란(Abdullah Ocalan)은 이라크
와 터키 국경의 보단바디난 지방에 독립국가들 건설하기로 하고 각국에 거주하고 있는 쿠르드인 세력들에게 협력을
요청하였다. 이에 이라크와 터키는 PKK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이라크와 터키 정부는 1990년 온건 및 중도파 쿠
르드 세력과 협상을 진행하면서도 PKK에 대해서는 철저히 탄압한다는 방침을 견지하였다. 이라크의 후세인 대통령은
이란과의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쿠르드족 촌락에 화학무기를 사용하여 국제적 비난을 받고 있으면서도 쿠르드족에
대한 탄압을 늦추지 않았으며, 터키도 PKK 거점에 대해 지상군뿐만 아니라 공군까지 투입하여 공격을 가했다. 이라크
와 터키는 1991년의 걸프전을 전후하여 대립관계에 있었으면서도 PKK 공격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보조를 취하였다.

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을 말하는가?

지난 3월 27일, 최대의 종교적 명절인 유월절 휴일에 200여명이 모여있는 한 식당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20여명이
죽고 100여명이 다치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스라엘에서 �유월절 대참사�라 부르는 이번 팔레스타인의 자살폭탄테
러로 세계의 화약고 중동은 다시 전운에 휩싸여 있다. 예수가 태어난 곳, 기독교와 천주교, 이슬람교의 성지인 예루살
렘은 천여 년 전과 다름 없이 민족과 종교, 외세의 알력으로 끝없는 전쟁이 계속 되고 있다.

세계 평화의 화약고 중동

중동지역의 분쟁만큼 복잡한 역사와 상황을 갖고 있는 문제도 없을 것이다. 멀게는 로마시대의 유대민족 지배에서부
터 가깝게는 1948년 이스라엘 국가의 성립과 PLO(팔레스타인 해방 자치기구 /지난 3월 13일 유엔이 안전보장 이사
회 결의안을 통해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했다. 유엔이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안보리
에서 팔레스타인 결의안 채택을 줄곧 반대해 온 미국이 채택에 찬성한 것 또한 분쟁 당사자들에게 강력한 메시지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의 독립국가 인정을 위한 투쟁이 지속되어 왔다. 그러던 중동 지역에 잠시의 평화가 찾아왔는데, 19
93년 미국과 서방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수뇌부가 잠정적인 평화에 합의한 오슬로 협정이 그것이다. 팔레
스타인이 폭력을 중단하는 대신 이스라엘은 1967년 전쟁에서 점령한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립을 허용한다는 것이 오슬로 협정의 내용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아랍인-유대인 갈등원인은 무엇인가? 문제는 ‘땅’이다.

120여년 전인 188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대인들이 프랑스, 러시아등에서 대대적인 탄압을 받기 시작하자 그
들은 유대민족주의를 부르짖으며 팔레스타인으로 귀향하기 시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오랜 기간동
안 잠재의식 속에 숨겨두었던 향토, 즉 �하느님이 약속해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생각해 냈을 때부터 갈등은 시
작되었다. 유대인들은 135년에 로마에 의해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면서부터 1948년 이스라엘 건국까지 1800여 년
동안 이산상태에서 차별과 탄압을 받으면서 살아왔다.

강대국들의 땅나누기의 또다른 희생양

18, 19세기는 유럽에 산업혁명에 의한 근대화, 민족주의, 제국주의가 팽배해 있었고, 사회주의가 발흥하던 시기이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로의 제국주의 침투를 위한 전진기지로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러싸고 치열
한 각축전을 벌였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후세인-맥마흔 서한, 사이크스-피코협정, 발포어선언, 종전 직후인 1920년에는 산 레모


조약을 통해 결국 팔레스타인 지역을 위임통치하게 되었다. 산 레모 조약으로 프랑스는 시리아/레바논 지역을 위임통
치하게 되었다. 위임통치 기간에도 유대인들은 계속 이주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대
대적으로 이주했다. 그 대부분은 미국으로 이주했으나 일부는 팔레스타인으로 귀향하여 1948년 5월 14일에 이스라
엘이라는 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1차대전을 전후해 영국은 아랍측과 유대측에 각각 별도로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하였다.

아랍측에는 '후세인-맥마흔 서한'을 통해 독립국가를 약속하였고 유대인들과는 '발포어 선언문'을 통해 약속하였으나


영국이 전후에 이 지역을 위임통치하면서 실제로 영국의 정책이 유대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 되었다.

이후 UN이 팔레스타인 문제에 적극 개입하여 1947년 유엔총회에서 '독립아랍국가'와 '유대인국가'의 분할을 결정하
였다. 유대인들은 이 결정을 받아들여 1948년 5월 14일 국가수립을 선포하고 '이스라엘'을 탄생시켰다.

반면 아랍인들에게 UN의 결정은 받아들여질 이유가 없었으며 이스라엘의 독립은 마치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당시
에 이집트의 대통령 나세르는 단일통일 대 아랍국가 건설이라는 범아랍주의를 주창하였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팔레
스타인 지역주민들의 국가 건설기회를 놓치게 했다. 게다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와 팔레스타인이라는 '비국가단
체'간의 관계로 고착화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48년 5월 14일 오후 4시,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났을 때 바이즈만이 다윗의 기를 올리고 이스라엘 국가건설을 선포
하자 몇 시간 후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의 아랍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써 4차에 걸친 중동전
쟁은 시작되었다. 팔레스타인 5개국 연합군의 공격을 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외세의 지원을 받은 첨단 무기로 승리(제
1차 중동전쟁)를 거둔이후의 전쟁(1956년 시나이전쟁, 1967년의 6일 전쟁, 1973년 욤키퍼전쟁 등)에서도 연합군
(영국, 프랑스)의 도움으로 계속된 승리를 거두며 그들의 영토는 점차 늘어난다. 4차에 걸친 중동전쟁, 특히 3차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 전체와 요르단강 서안지역 및 동예루살렘, 그리고 레바논의 골란고원까지 점령해버
렸다.

4차 중동전쟁이 끝나면서 미국의 중재로 긴 평화협상이 진행되어 1978년에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캠프데이비드 평화
협정에 합의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87년에 인티파다(민중봉기)가 발생하여 1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1988년
PLO는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자체 선포함과 동시에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평화협상 환경을 조성한 것이
다.

1991년 마드리드 협상을 시작으로 하여 2000년 7월 캠프데이비드 협상까지 클린턴 행정부는 비교적 공정한 입장에
서 이스라엘과 PLO를 중재했다. 따라서 �불안정한 평화�이긴 했지만 1990년대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평화적 공존
에 대한 희망이 충만했던 평화과정(peace process) 시기였다.1993년 '오슬로 협정'으로 잘 알려진 '팔레스타인 평화
안'으로 PLO와 이스라엘은 상호존재와 대표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이 합의안에 의하여 1994년 이스라엘은
(1967년 '6일전쟁'으로 이스라엘 땅이 되었었다) 동부의 요르단강 서안(여리고)과 남서부의 지중해 연안 가자지구에
서 군이 철수했고 미국의 클린턴 정부가 중동평화협상을 중재하는 가운데 1996년 팔레스타인은 자치정부를 수립하
고 최초의 수반으로 아라파트를 선출하였다. 1997년 팔레스타인은 자치 의회 구성을 위한 총선을 실시하며 요단강 서
안 지구의 다른 점령 지역으로 자치가 확대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지역 전체를 사실상 장악하고
있다. 1993년 오슬로 평화회담 이후로 정착민 수는 꾸준히 늘어 70%의 증가율을 보였다. 요르단강 서안의 약 60%
와 가자지구의 약 40%는 20만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이 145개의 정착촌을 만들어 점거하고 있다. 국제법 상으로는 불
법 점령지에 세운 것들이다. 정착촌 건설을 비난하는 거듭된 UN결의안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역대 정권은 이를 무
시했다.

현재 팔레스타인 인들이 이스라엘에 대해 갖는 의구심은 이스라엘이 정착촌 건설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
거 이스라엘의 집단대량이주 정책에 의해 땅을 먼저 점령하고 국가를 세워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몰아냈던 쓰라린 경
험을 기억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은 그들의 정착촌 확장을 곱게 바라볼 수 없다. 아직도 해결하고 있지 못하는 이스라엘
정부의 동 예루살램 정착촌 강행으로 마지막 단계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져있다. 그만큼 종교적 상징성이 있는 예루살
렘은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 모두 양보할 수 없는 지역으로 인식되어 여전히 처절한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2000년 샤론정권, 2001년 부시정권이 들어오면서 중동평화협상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원래부터 그들은 숙적이었나?

7세기 이전부터 이슬람시대 이전부터 아랍인과 유대인은 서로 공존해 왔다. 이슬람 시대에도 유대인들은 소수집단으
로서 자신들의 종교를 지키며 살아왔으며 복합사회의 일원으로 살아왔다.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중동지역은 성서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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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 함께 어우러진 곳이기도 하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원래 같은 아프라함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
스마일과 이삭이 각각 오늘날의 아랍인과 유대인의 선조가 되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 왕국은 바빌로니아 왕에 의
해 멸망했고 유대인들은 그때부터 해외 이주와 본격적인 방랑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러 헝가리 유대인인 헤르츨(Theodor Herzl)을 중심으로 고대왕국을 그리워 하는 시온주의
운동이 태동하였고 정치운동, 건국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918년 당시의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유대인이 전체인구의
8%에 불과했으나 1948년의 국가 수립 당시에는 유대인이 전체의 35%를 점유하게 되었다.

이런 유대인 이주문제는 팔레스타인 주민, 즉 아랍인들의 거센 반발로 나타났다. 유대인은 아랍인들에게 기독교와 유
럽문화를 대변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다시금 불이 붙은 이유는?

인티파다(민중봉기)의 서막

2000년 9월 말에 발생한 제2차 인티파다의 직접적 원인은 보수 강경론자인 아리엘 샤론 당시 리쿠드당 당수가 동예
루살렘의 신전언덕에 위치한 알 아크사 사원을 방문하여 �예루살렘은 분리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수도�라고
주장한 데 대한 아랍인들의 시위와 이스라엘군의 강경 대응이었다.

7월 25일 캠프데이비드 협상이 결렬된 상태에서 발생한 샤론의 이러한 행위와 주장은 동예루살렘을 �독립 팔레스타
인 국가의 수도�로 낙점해 놓고 협상에 임하고 있는 아랍인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2,3,4차 중동전쟁에 참전한 군
출신, 1980년대 요르단서안/가자지구에 최대규모 이스라엘 정착촌을 건설한 주역, 레바논전쟁의 주도자, 아랍인에게
불도저-피의 인간으로 인식되어 있으며, 리쿠드당 내에서의 당권투쟁과 노동당의 바라크 수상과의 정권투쟁에 있던
샤론이 알 아크사 사원을 방문하여 공개한 과격발언은 시한폭탄과 같은 것이었다.

미국의 이스라엘 편향 정책

한편 일방주의 외교정책을 추구하고 있는 부시정권은 이스라엘의 아랍인에 대한 피의 보복을 묵인 내지는 지지해 왔


고, �딱딱한 권력(hard power)�을 추구해 왔다. 교토의정서에서 탈퇴했으며, 인종철폐회의에서 이스라엘 입장을
지지하면서 철수해 버렸다.

특히 2001년 9월의 9.11테러사건으로 인해서 미국은 반테러전쟁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아프간보복전쟁을 수행했다.
부시정부는 이란/이라크/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이슬람단체들의 테러에 대해서 응징하겠다는 입장
에 있었다. 샤론정권은 이러한 미국의 일방주의정책과 보복전쟁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문제의 주요 행위자는 이스라엘(보수세력을 포함한 샤론정부, 야당, 반전 시민세력), PLO와 하마스 등 이
슬람단체들, 부시정부, 유럽 국가들을 포함한 세계여론이며, 이 행위자들의 상호간 역학관계에 의해 문제 해결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특히 미국의 샤론에 편향된 대 팔레스타인 정책이 교정되지 않는다면 테러와 보복은 계속될 것이다. 대테러전쟁을 선
포하고 있는 미국의 대팔레스타인/대중동외교정책 기조는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틀린턴 행정부를 포함한 역대 미
국 행정부의 대중동정책은 이스라엘에 편향된 이중정책이었고 두 기둥정책이었기 때문이다.

하마스, 이슬람지하드, 헤즈볼라 등 이슬람단체들은 이슬람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이슬람국가 건설을 추구하기 때문에
팔레스타인민족주의에 기초한 아랍국가건설을 목표로 하는 PLO의 정책에 반대한다.
평화협상에 의한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 반대, 세속적인 팔레스타인지도자(아라파트) 반대, 서구식 자본주의국가 건설
을 반대하고 순수한 이슬람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이들은 서구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부시정권과 샤론정권의 �힘의
정치�를 지하드(聖戰)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이슬람단체의 테러와 이스라엘의 대대적인 보복은 항상 예
견되어 있다. 또한 이스라엘 내 보수 리쿠드당과 진보 노동당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세력의 당권, 정권 투쟁도 팔레스
타인 문제를 구성하는 한 요소이다.

그러나 1999년으로 예정되었던 팔레스타인의 자치 정부 수립이 지지부진해지고, 이스라엘의 총리로 아리엘 샤론이
선출되면서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 상태이다. 1994년에 중동 평화 안착의 공을 기려 노벨 위원회가 페레스 이스
라엘 외무장관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했던 것을 후회한다는 외신 보도도 있었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중
동분쟁을 완전히 해결하려는 미국의 시도는 결국 실패할 것이며 중동의 위기는 오직 관리될 수 있을 뿐 해결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외신 보도에는 이번 분쟁으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완전히 무장해제, 축소하려 한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중동지역의 분쟁은 언제나 세계의 관심사였지만 이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이 심각한 이유가 이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활

- 한 팔레스타인 사람 한명이 이스라엘 군의 불심검문에 걸렸다. 불온전단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그는 발가벗겨지고
바닥에 넘어뜨려져 짓밟힌 뒤 수갑이 채워져 개처럼 끌려갔다. 그리고 며칠 후 그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 팔레스타인 가족이 사는 집, 이스라엘 군이 매일 밤 집에 들어와 세간살이를 뒤진다. 아이들 책가방도 예외는 아니


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목에 총부리가 겨눠져도 더이상 놀라지 않는다. 군화에 공책이 짓이겨지고 연필이 부러지는 것
을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군인들이 나가면 아무일이 없었다는 듯 그것들을 다시 책가방에 집어 넣는다.

- 팔레스타인 여학생들이 하교하는 길에 이스라엘 군인들이 최루탄을 쏜다. 달아나는 여학생들을 보며 낄낄거리는 그
들에게 한 팔레스타인 사람이 항의를 한다. 그는 개머리판으로 맞는다.

- 산부인과에 가려던 팔레스타인 임산부 여성이 검문소 통과를 거부당했다. 그녀는 태아를 사산했다. 이스라엘 군당국
의 조사가 진행중이다. 그러나 조사과정 드러난 이스라엘 군인의 말은 더욱 더 충격적이었다.

'너를 죽일 수는 있어도 통과시킬 수는 없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가자지구를 드나들려면 꼬박 5시간 이상은 보안검사를 받기 위하여 공을 들여야 한다. 식량과
연료부족은 물론 약품 품귀현상도 빚어지고 있다. 일부 도시들은 차량뿐만 아니라 개인들도 도시로 들어가거나 나올
수 없다. 이유는 그들이 테러를 자행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군인들이 완전히 막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은 모든 외국인을 일단 테러용의자로 간주한다는 보안원칙이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통제와 봉쇄를 완
화했다고는 하지만 실제 팔레스타인 인들의 불편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어 보인다. 서안지구 팔레스타인인들의 70%
에 육박하는 실업률에서 보듯 이스라엘 군에 의한 거주지역 봉쇄조치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 경제 생활이 불가능 하
다.

팔레스타인의 시각에서 본 분쟁

이스라엘은 2천년간을 떠돌다가 정착했다지만 그로인해 4천년이나 그 땅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졸지에


생활의 터전을 빼앗겼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보기엔 유대인들은 평온하던 팔레스타인 땅을 무력을 앞세워 차지한
점령군에 불과한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UN도 '골란고원', '가자지구', '이집트의 시나이',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점령지역'으로 규정했다.

지난 세기의 제국주의는 식민지 강점 후 수탈을 자행했으나 그 곳에 살고 있던 식민지 인들을 강제로 내쫓지는 않았


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을 빼앗고 아예 내쫓아 버린 것이다. 그들의 '시오니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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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

이스라엘 시민이라고 해서 팔레스타인 시민들보다 편안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팔레스타인의 자살폭탄테러가 언제 어


디서 일어날 지 모르기 때문이다.

늦은 시간은 물론이고 낮시간에도 팔레스타인 인접 지역의 통행을 자제해야 한다. 대형쇼핑몰, 유명상점, 나이트클럽
등은 폭탄테러 가능성 1순위 지역이다.

이스라엘 국민중 14%는 해외 이주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고 28 ~ 34살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28%가 '떠나고 싶
다'고 한다. 유대인들의 '애국심 신화'도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젊은이들이 팔레스타인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든 아니든 간에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그들의 지도자와
정부와 군을 지지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젊은이들 중 적지않은 이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실제로 겪고 있는 삶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분
위기이다. 서로 왕래하지 못하는 팔레스타인인들과 이스라엘인들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인 간극이 더욱
커져가는 것이 당연하다. 이해하지 못하는 둘의 분쟁은 해결이 더욱 어렵다. 상황이 쉽게 호전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
는 시각이 다수다.

모든 이스라엘 군인이 잔혹한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에서 근무할 수 없다는 예비군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점령지 철수를 요구하는 양심적 군 복무 거부자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레퓨즈닉'이다.

이러한 복무거부운동에 앞장서는 단체는 '예쉬 그불(한계가 있다)'를 포함해 3개 시민단체가 있으며 서명자가 1천명
을 넘어섰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것을 '왜곡된 시오니즘의 부끄러운 범죄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부 강경파들은 불법차원을 넘어선 반역행위라고 보고 있다. 복무 거부 운동에 맞서 추가 복무를 지원하는 움


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정작 레퓨즈닉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테러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자살폭탄테러로 무고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때마다 레퓨즈닉의 목소리는 힘을 잃는
다. 그러나 점령지의 이스라엘 군의 난폭한 행동이 이스라엘의 명예를 더럽힌다는 그들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

힘이 있는 자가 영토를 차지하는 것이 역사의 법칙?

유대인은 2천년 동안이나 나라 없이 방황하고 돌아다녔어도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켜왔던 민족이다. 성서에 가나안땅
이라고 나와 있는 팔레스타인 땅은 신이 유대인을 위해 선택한 '약속의 땅'이라고 믿고 있다.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유
대민족은 2천년간 잃어버렸던 유대인의 땅을 되찾았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은 한 번도 전쟁을 먼저 일으키진 않았다.

수차례 아랍인들은 자신들에게는 이방인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내쫓기 위해 전쟁을 걸었고 번번히 무참하게 실패했다.
그들이 실패할 때마다 이스라엘은 전쟁에 이긴 대가로 확장된 영토를 얻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식민지를 늘
리기 위해 일부러 영토를 확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현 총리 샤론의 정치적인 입장

작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벌였을때 부시행정부는 아프간 전쟁과 관련해 아랍권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당시 부시
행정부는 이스라엘군의 즉각 철수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처럼 팔레스타인 테러리스
트들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중이니 미국이 참견하지 말라는 투로 일관했다.

최근의 중동 상황은 샤론이 아라파트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형국이다. 팔레스타인 측의 연쇄 테러로 샤론은 결국 아라
파트와의 모든 관계 단절을 천명했고 아라파트는 아랍 강경파의 압박과 국제적인 압력속에 정치생명이 끝났다는 말까
지 나오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샤론은 국내의 강경분위기를 타고 지지도가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텔아비브 대학의 평화연구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스라엘 국민의 55%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창설과 점령지 추
가 양보에 찬성하고 있다. 그러나 39%의 이스라엘 인은 그 안에 결사반대하고 있다. 아리엘 샤론은 그 39%의 과격한
소수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매파로 일컬어져온 아리엘 샤론 정권이 등장한 이래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통제는 훨씬 강화되었다.

지금 300만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2차대전 당시 유대인 수용소였던 '게토'에서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라파트를 10차례 이상 암살하려고 했던 샤론은 '인간불도저'니 '레바논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가 주
택장관으로 재직할 때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를 부도저로 밀어내어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고 모든 평화협상을
반대하는 등 강경책을 펴왔던 것이 그 이유다.

이러한 아리엘 샤론이 이끄는 이스라엘측의 표적암살 행위는 그동안 국제사면위원회, 인권감시등 국제 인권단체들로
부터 비판을 받아왔으며 탱크를 앞세워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을 밀고 들어가는 '재점령 정책'은 국제 사회 비난의 표적
이 되어 왔다. 그러나 '중동정치의 유일한 수단은 외교가 아닌 군사력'이라는 신념을 가진 샤론은 힘의 정책을 펴고 있
다.

대중의 인기로 총리가 된 샤론이 자신의 정치적 무기인 대중의 지지를 버리고 협상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샤론은 테러가 멈출때까지 자신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탱크를 동원한 무력진압, 암살과 학살을 계속할 것이고 그럼으
로써 정치적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국민이 진정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스라엘 국민들도 단기적으로는 샤론에게 지지를 보내겠지만 장
기적으로는 평화를 바라지 않겠는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의 분쟁을 '전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높은 단계의 충돌
(high-level conflict)라고 부른다. 국제적인 비난 여론을 무시하고 이스라엘이 전면전을 벌인다면 일단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가 문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미국
이 베트남에서 군사력이 약해 물러난 것이 아니라면 독립의지가 강한 민족이 이긴다는 그들의 주장에도 설득력이 있
다.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기 이전에 시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분쟁의 대가는 너무도 크다. 그 점에선 팔레스타인이나
이스라엘이나 모두 피해자가 아닌가.

미국의 입장

911 테러 이후 미 부시 대통령은 전 세계를 향해 '미국편이 아니면 적'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부시의 맞은 편
에서 빈 라덴은 모든 이슬람 교도가 지하드(성전)에 나설 것을 외쳤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아라파트로서는 명
분(지하드)이냐 실리(팔레스타인 독립국가)냐의 사이에서 고민했을 것이 당연하다.

지난해 있었던 부시행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은 팔레스타인 쪽에 희망을 던져 주었다. 취임뒤 샤론을 두번이나 만났으
면서도 아라파트와의 면담을 거부해 온 부시대통령은 911 테러사건을 겪고 난 후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을 들고 나왔
다. 이런 발언은 팔레스타인 민중들뿐만 아니라 아랍세계에 두가지의 가능성을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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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가 곧 현실과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시 한 번 미국에게 실망과
좌절감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부시는 무엇 때문에 911참사 직후에 팔레스타인 국가 탄생을 약속했던가? 이 약속으로 많은 아랍국가들이 미국 지지


연합에 참가 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군사행동이 예상보다 쉽게 미국에 유리하게 되자 지난 10월 유엔에 참
석했던 부시 대통령은 팔레스타인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와의 접견을 거부하며 이스라엘 일변도로 돌아가는 기세를
보였다.

미국의 대외 정책 변화가 이-팔 해결점

미국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문제가 빈라덴과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슬람 국가들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팔레스타인 문제를 반미주의의 최대원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는 반미주의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미국 자체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대외 정책


을 혐오하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미국의 대외 정책이 바뀜에 따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해결점을 찾을 수
도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미국이 비판대상이 되고 있는 정책을 바꿀 가능성이 911테러 이후 잠시 높아지는 듯 했으나
현재 상황은 그렇지 않다는 것.

한 예로 뉴욕 상원의원 힐러리 클린턴은 자신의 선거구의 유대계 유권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아라파트는 실패한 지도
자'라며 독설을 퍼부었다. 3년 전에는 포옹하며 동지애를 과시했던 아라파트를 비난하는 이유가 단지 정치인 개인으
로서의 입지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미 정치인들의 정책은 얼마나 가벼운 것인가.

결론은 우선 팔레스타인 인들은 즉각 테러와 폭력을 중단해야 한다. 폭력은 그들의 대의명분을 약화 시키고 보복공격
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이스라엘은 중화기를 동원한 팔레스타인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즉각 멈춰야 한다. 이스라엘은
점령지 철수를 서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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