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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작도 > 猫雀圖

변상벽卞相璧, 1726?~1775
18세기 중반, 비단에 채색, 93.9 × 43.0cm

변상벽은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시대를 대표하는 도화서 화원으로 초상화의 대가였


다. 그는 대상 인물의 얼굴을 정교하고 섬세하게 그린 극도의 사실주의적 초상화로
저명했다. 변상벽은 1763년과 1773년에 영조의 어진을 그렸으며 윤급尹汲, 1697~1770
을 비롯해 수많은 인물들의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아울러 변상벽은 고양이와 닭을
잘 그려 ‘변고양이卞古羊, 卞怪羊,卞猫’ 혹은 ‘변닭卞鷄’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동물화
에 뛰어났다. 그는 이미 20세 무렵에 고양이 그림으로 명성이 높았다. 매일 변상벽
에게 고양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백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고양이의 생태生態를 면밀하게 관찰한 후 정확하고 치밀하게 그렸다. 그 결과
그가 그린 고양이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사실적이었다고 한다. 변상벽의 대표적
인 고양이 그림인 <묘작도>는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 마리의 고양이와 나뭇가지
에 앉아있는 참새 여섯 마리를 그린 작품이다. 고목에 뛰어오른 고양이는 몸을 틀
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변상벽은 이 고양이의 털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묘사하
였다. 밑에 있는 고양이는 고개를 돌려 고목 위의 고양이를 쳐다보고 있다. 나뭇가
지에 있는 참새들은 각기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입을 벌린 참새들은 갑자기 등
장한 고양이들 때문에 놀랐는지 다급하게 지저귀고 있다. 고양이와 참새의 동작, 표
정, 심리까지도 정확하게 묘사한 변상벽의 경이로운 그림 솜씨를 <묘작도>는 생생
하게 보여준다.

글 장진성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그림(소장) 국립중앙박물관
목차•Contents
U RIM U N HWA
A KORE AN LOCAL
C U LT U R E M O N T H LY

월간 우리문화 별별마당
vol.287 | 2020 09
4 테마기획Ⅰ
발행인 김태웅
말馬들의 유토피아, 제주도의 말 문화 / 강만익
발행일 2020년 9월 1일
편집고문 권용태
10 테마기획Ⅱ
편집주간 한춘섭
편집위원 곽효환, 김종, 김찬석, 오광수, 한국의 말馬, 선사 시대부터 지금까지 / 전성원
오양열, 장진성, 지두환
편집담당 음소형 14 시와 사진 한 모금
발행처 한국문화원연합회 열매 직전 / 이원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49(도화동, 성우빌딩) 12층
전화 02)704-4611 | 팩스 02)704-2377
홈페이지 www.kccf.or.kr
등록일 1984년 7월 12일
문화마당 Cultural Encounters
등록번호 마포,라00557
기획편집번역제작 서울셀렉션 02)734-9567 16 옹기종기 Iconic Items
돌에 예술혼 불어넣는 석공예石工藝 / 안유미
Stone Crafts: Breathing the Soul of Art into Stone / An Youmee

18 한국의 서원 ⑥ Korea’s Seowon


호방함과 당당함이 느껴지는 함양 남계서원 / 이종호
Namgyeseowon in Hamyang: An Experience of Spirit and Dignity / Lee Jongho

24 지역문화 스토리 Local Culture Stories


정선의 또 다른 삶, 삼베길쌈 / 최원희
Jeongseon’s Hemp Weaving: Another Way of Life / Choi Won Heui

32 느린 마을 기행 ⑤ Slow City Travel


세월의 더께만큼 오래된 아름다움, 담양 창평슬로시티 / 임운석
Changpyeong Slow City in Damyang: Entering a Slow Landscape / Im Unseok

38 팔도음식 Provincial Cuisine


곰국에 돼지머리, 순대, 내장 한가득! ‘창평국밥’ / 김지현
Changpyeong Gukbap: A Hearty Bowl of Bone Broth and Chitterlings! / Kim Chihyun

42 한류포커스 Hallyu Focus


‘코로나19’와 ‘K-방역’ / 이진한
우리 놀이문화 _ 강강술래
COVID-19 and Korea’s Response / Lee Jin-han
표지 이야기
달 밝은 추석날 밤, 수십 명의 여자들이 손을 맞잡고
원을 만들어 돌며 노래하고 춤을 추는 민속놀이

표지 그림 박수영 일러스트레이터
공감마당
04 46 이달의 인물
은빛 정신 이어가는 장도장 보유자, 박종군 장인 / 이행림

52 조선 人 LOVE ⑨
허난설헌을 세상에 알린 ‘누나 바보’ 허균 / 권경률

56 문화보고
민족의 장醬맛 담은 순창장류박물관 / 김종

24 60 오! 세이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 오광수

우리마당

62 있다, 없다?
LP판과 전축의 흥망성쇠 - 바이닐과 턴테이블의 부활 / 피터 김용진

64 칼럼

32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문화기획 / 안영노

66 북한사회 문화 읽기 ⑲
‘전민 과학기술 인재화’를 목표로 원격교육에 힘 쏟는 북한 / 오양열

70 문화달력
한국문화원연합회, 지방문화원 일정

72 NEWS, 편집후기
화성문화원 《이동안 선생의 예술세계》 등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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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1599-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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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테마 기 획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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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馬들의 유토피아, 예로부터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라고 했다.
이는 조선 중기 이항복李恒福이 말한 “준마駿馬가 서울에서 새끼를 낳으면 외방外方

제주도의 말 문화 에서 길러야 하고, 선비가 외방에서 자식을 낳으면 마땅히 서울에서 길러야 한
다”는 말에서 유래했다. 제주도는 말들이 살기에 최적인 목마牧馬의 섬이었다.
영조英祖는 제주도를 두고 “국마의 부고府庫”라 했고, 이인엽李寅燁은 “우리나라의
익북翼北, 중국의 대표적 명마산지”이라 했으며, 오명항吳命恒은 “조선의 말은 전적으로
제주도에 의존한다”라고 했다.

제주마방목지 조랑말. 제주마는 천연기념물 제347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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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제주마의 역사
제주마馬의 원조는 3~10세기 무렵인 탐라 시대
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곽지리 패총에서 출토된 말
의 이빨과 뼈 그리고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해안에
서 발견된 말 발자국 화석 등은 탐라 시대에도 원시
적 말들이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또한 문종 27년1073
탐라국이 고려에 말을 진상했다는 《고려사》 기록도
있다. 1105년 탐라국이 고려에 편입된 후, 말 사육이
더욱 늘어나 이제현이 《익제난고》에서 강조한 것처
럼 관사우마官私牛馬들이 들판을 덮을 정도였다. 1276
년 몽골원이 설치한 탐라목장1276~1374에 몽골산 종마
들이 방목되면서 말의 수가 늘어났다. 고려 말 이성
계李成桂는 제주마를 중시했던 인물로, 제주마를 타고
위화도 회군1388을 일으켰다. 당시 말은 팔준마八駿馬
의 하나였던 ‘응상백凝霜白’으로, 성삼문은 이 말에 대
해 ‘크고 온화하고 강하며 슬기롭다’고 칭송했다.

제주마 공급지, 국마장십소장과 어승마 공급지, 산마장


조선 시대에 말의 안정적 확보는 통치자들의 1

중요한 과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2 1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때
1430년 제주의 중산간 초지대200~600m에 국마장 설 탔다는 제주마, 응상백
2 조선 숙종 때 문신 이형상이 그린
치를 국책사업으로 추진했다. 제주 출신 고득종高得 《탐라순력도》 중 <공마봉진>.
임금께 진상할 말을 각 목장에
宗, 1388~1452이 세종 11년1429 임금에게 한라산 사면을 서 징발한 후 제주목사가 최종
적으로 말을 확인하는 광경을
따라 돌담을 쌓아 목장을 설치하자고 건의함에 따라 그린 그림이다.
1430년경부터 제주목사가 주민들을 동원해 목장 경
계용 돌담잣성을 쌓고, 국마장 예정지 내에 있던 344
호의 주민들을 국마장 예정지 밖으로 옮기게 하여 국
마장을 조성했다. 당시 형성된 국마장은 18세기 초에
‘십소장十所場’으로 정비되었다. 이것은 송정규 제주목
사가 1705년 규모가 작은 목장을 큰 목장에 편입시
키며 국마장을 10개로 통폐합시킨 결과였다.
제주 동부지역 십소장 위의 산간지대에는 산마장山
馬場이 존재했다. 이곳의 산마山馬들은 아무나 다룰 수
없을 정도로 야생 상태에 가깝고 매우 민첩해 전마
나 군마로 적격이었다. 송정규 제주목사의 《해외문
견록》에 따르면, 순치 기해년효종 10년, 1659 조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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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마공신’ 김만일金萬鎰, 1550~1632의 자손들이 보유했 10척 정도가 왕래하였으며, 주로 화북포와 조천포
던 일부 말들을 국마와 맞바꾼 다음, 산마목장山馬牧場 에서 남풍이 불기를 기다려 출항하였다. 공마는 관
을 설치했다. 산마장은 김만일 직계 자손이 산마감목 선과 사선을 이용했으며, 1척당 30~40필씩 실어 여
관을 맡아 운영했으며, 정조 6년1782 《승정원일기》의 러 차례 운송했다. 제주목장마가 해마다 여름철이면
기록처럼, ‘침장針場’, ‘녹산장鹿山場’, ‘상장上場’으로 구 40~50마리, 60~70마리씩 떼 지어 계속 꼬리를 물
분되었다. 고 옴으로 공마가 지나는 각 고을에서는 견마잡이군
말고삐를 잡고 끄는 사람들을 동원했기 때문에 농사에 피해
말 문화의 원형, 공마와 낙인 를 주는 경우도 있었다《성종실록》, 1474.
제주마들은 고려 시대부터 현재까지 목축민들 ‘낙인’은 《세종실록》1433에 처음 등장한 용어로, 말들
과 같이 호흡하면서 다양한 말 문화들을 만들어냈다. 의 소유주와 관리 목장을 구별하기 위하여 일정한 문
역사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공마貢馬는 국마장에서 자, 기호, 도형이 새겨진 쇠붙이를 신체의 특정 부위
품질이 우수한 말을 골라 바치던 것을 의미한다. 암 에 나타낸 표식을 의미한다. 낙인은 기상 변화가 심
말은 새끼를 낳아야 하므로 수말이 공마 대상이었다. 한 방목지에서 말의 관리 목장과 소유주를 구별하기
공마에는 매년 국가에 바치는 연례공마로 세공마, 삼 위해 필요했다. 국마國馬는 사마私馬와 구별하기 위해
명일정조, 동지, 탄일 진상마, 연례진상마 그리고 3년마다 천자문 글자를 이용해 낙인했다.
보내던 식년공마로 차비마, 어승마, 수시로 보내던
흉구마, 노태마가 있었다. 국마장 경계돌담, 잣성
공마는 해로를 이용해 전라도 해남, 이진, 강진 포구 잣성은 국마장 경계를 따라 쌓은 돌담을 가리킨
로 운송되었다. 배가 포구에 도착하면 휴식을 취하게 다. 제주도민들은 ‘잣’ 또는 ‘잣담’이라고 부른다. 대체
한 후, 육로를 이용해 한양까지 수송했다. 공마선은 로 해발 150m∼250m 일대에 하잣성, 해발 450m∼
조선 전기 한라산 기슭을 10개
구역으로 나누어 10개의 국영 600m 일대에 상잣성 그리고 해발 350m∼400m
목장(십소장)이 갖춰졌다.
일대에 중잣성이 위치했다. 하잣성은 해안 지대의 농
사진은 5소장의 상잣성
경지와 중산간 지대의 방목지와의 경계 부근에 그리
고 상잣성은 중산간 지대의 방목지와 산간 지대의 삼
림 지대와의 경계 부근에 위치해 있다. 하잣성은 표
면적으로는 중산간에 방목 중인 우마들이 해안 지대
의 농경지에 들어가 농작물에 입히는 피해를 예방하
기 위해서 축장되었다. 상잣성은 우마들이 한라산 삼
림 지역으로 들어가 동사하거나 잃어버리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농목 문화 ‘밭 밟기’와 목축 의례 ‘백중제’
제주 지역은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화산회토
로 이루어져 토양이 건조하고 푸석하다. 그래서 여
름철 씨앗을 파종해도 흙과 함께 씨앗이 바람에 날
려 버리기 때문에 말들을 농경지로 들여보내 토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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밟아주어야 했다. 땅을 밟아주면 수분 증발을 막아주 마조제 치제기록은 세종 1년1419 12월 3일, 현종 10년
어 씨앗이 정상적으로 발아할 수 있었다. 밭 밟기에 1669 2월 23일, 영조 8년1732 2월 20일, 정조 21년1797
대해 제주목사 김정준金廷雋, ?~1433은 “제주는 토질이 7월 8일 등 4회 정도 등장한다. 한양에서 마조제는
푸석푸석하여 곡식을 심을 때는 반드시 마소말과 소를 살곶이 목장 내 마조단현재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중앙도서관
모아다가 땅을 밟아 땅이 굳어져야만 씨를 뿌린다. 부근에서 행해졌다. 마조제를 위해 마조단을 쌓았다.
이 때문에 관청 소유의 우마들이 기진맥진해진다. 공 중앙정부에서는 사복시司僕寺가 마조제를 주관했으며,
가에서 비록 금령이 있으나, 몰래 목자와 짜고서 말 제사의 제물로는 돼지 한 마리를 이용했다. 제주에서
을 병들게 한다《태종실록》, 1411”고 했다. 씨를 뿌린 후 밭 는 마조단이 1852년에 설치된 것으로 확인된다.
밟기를 했지만 《태종실록》 기록에서는 순서가 바뀌
었다. 목축지에 연중 방목했던 제주마
백중제는 목축민들이 우마의 번성을 기원하던 목축 《성종실록》에 등장한 “제주삼읍공사둔마, 상방
의례였다. 테우리들은 백중날 전날 밤음력 7월 14일 자시 산야濟州三邑公私屯馬, 常放山野”라는 기록처럼 제주삼읍
11:30~12:30경 또는 백중 당일 아침에 방목지 근처에서 의 말들은 항상 산야에 놓아 길렀다. 제주의 방목풍
백중제를 지냈다. 이것을 ‘테우리 코사고사’, ‘테우리 습에는 연중방목, 계절적 방목이목, 순환방목, 상산방
멩질명절’이라고도 했다. 테우리들은 백중제를 위해 목이 있다. 연중방목은 계절과 관계없이 말을 목축지
메밥, 제숙, 수탉계란, 채소, 과일, 상애떡, 술, 음료수 등 에 놓아서 기르는 목축 방법이었다. 상산방목은 해발
을 준비했다. 메 위에는 숟가락 대신에 ‘새띠’를 꺾어 1,400m 이상의 한라산 백록담 부근 상산上山, 마을 위의 산
세 개씩 꽂는 것이 특징이다. 밥을 먹을 주체가 사람 초지대에 말을 올려 방목하는 형태였다. 이곳은 질
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조상이 아니기 때 좋은 목초와 물이 풍부하고 서늘한 날씨로 인해 진드
문에 따로 배례하지 않는다.

제주도 돌담과 조랑말


제주 목축 문화를 상징하는 또 하나 ‘테우리’
테우리는 우마를 길렀던 목축민을 말하는 제주
어로, ‘쇠 테우리’, ‘ 테우리’로 구분된다. 조선 시대
에는 ‘목자牧子’, 일제 강점기에는 ‘목감牧監’으로 불렸
다. 테우리는 2008년 제주문화상징으로 선정될 정
도로 조랑말, 잣성과 함께 제주의 목축 문화를 상징
하는 존재이다. 조선 시대 테우리목자들은 16세부터
60세까지 국마 생산과 관리를 담당했다. 또한 관청
에 말 먹이馬草, 소고기, 소가죽, 말가죽 등도 공납해야
했다. 목자들은 자신들이 관리하던 말이 죽었을 때는
동일한 색의 말을 구입해 바쳐야 했다. 목자의 역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어 몰래 타지역으로 도
망가는 사례도 있었다.
마조제馬祖祭는 관청에서 말의 번식을 기원하기 위
해 말의 조상에게 올렸던 제사 의례였다. 조선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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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당리 테우리 코사 장면. 코사는 고사의 제주어다.

기가 거의 없어 우마에게는 그야말로 유토피아였다. 아니라 고유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유전학적 가치


상산방목의 모습은 정지용의 《백록담》과 이은상의 를 지닌 조랑말은 1986년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
《탐라기행한라산》에도 나타나 있다. 정되어 혈통 보존을 위해 여름철에는 제주마방목지
오늘날 제주마는 곧 조랑말을 의미한다. 조랑말이라 에서 관리되고 있다.
는 용어는 상·하의 진동 없이 매끄럽게 달리던 몽골
마인 ‘조로모리’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박
원길, 2005. 시바 료타로 역시 《탐라기행》1998에서 “13
세기 대몽골 제국의 말은 제주도에만 남아있다”고 했
다. 그러나 2019년 농촌진흥청 국립축산과학원 연구
진이 제주마의 유전체를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제주 글 강만익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위원, 《한라산의 목축생
활사》 저자
마는 몽골마와 섞이지 않고 독립적으로 진화해온 품
사진 강만익, 국립중앙박물관,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
종이라고 발표했다. 조랑말은 몽골마와의 교잡종이 부, 제주관광공사(visitjej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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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테마 기 획 Ⅱ

한국의 말馬,
선사 시대부터 지금까지
※ 필자의 의견에 따라 이 글에서는 ‘몽골’을 해당 시대에
불리던 이름 그대로 ‘몽고’라고 표기하였습니다.

구석기 시대기원전 2만 년~1만 년 프랑스 솔뤼트레Solutré 유적에서 발견된 1만 마리의 말뼈와 라스코 동굴벽화의 말 사냥 모습에서 알 수 있
듯, 말은 고기나 가죽을 얻기 위한 수렵 대상이었다가 BC 3500년 무렵이 돼서야 중앙아시아에서 가축화하였다. 전 세계에 퍼져있는
중대형45kg 이상 가축인 양, 염소, 소, 돼지, 말 중에서, 말은 가장 늦게 사람과 함께한 축종이다. 말은 식량과 생활용품을 얻기 위해 길러
졌으며 이후 소 대신 수레와 전차를 끌었다. 고대 국가들은 영역을 넓히는 정복 전쟁의 핵심 자원으로 말을 사용했다. BC 3000년 수
메리아 문명부터 이집트 문명을 거쳐 BC 612년 아시리아 제국의 멸망 때까지 말은 고대문명 국가들의 탄생과 멸망의 현장을 지켜본
주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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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허리에 올라탄 인류 나, 결국 우거가 5천 필을 무제에게 내주어 화친을 맺
전차는 기동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말을 타고 싸 었다는 것이다. 위만조선BC 194~ BC 108이 말을 대량
우는 기병騎兵이 등장했다. 아시리아는 말의 품종을 사육하였기에 가능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개량하고 기마술을 고안하여 기병을 체계적으로 운 《삼국지三國志》의 부여夫餘 편은 사람들이 가축을 잘
영한 최초 국가다. 이를 바탕으로 아시리아는 이란 기르며 명마와 적옥 등이 난다고 하여, 부여에 좋은
북부부터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까지 거대한 영역 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시조 주몽이 부
을 차지했다. 하지만 막강했던 아시리아도 스키타이 여에서 말을 길렀다는 기록과 고구려, 백제, 신라의
민족에 의해 막을 내렸다. 스키타이는 BC 6세기부터 기마전騎馬戰 자료를 통해서는 삼국 시대에 말이 흔하
BC 3세기까지 흑해 지역을 중심으로 남부 러시아, 우 였으며, 교통이나 운반 수단보다 군사적으로 이용되
크라이나,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대에서 활약한 최초 었음을 알 수 있다.
의 기마유목 민족이다.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고, 농 삼국 시대는 국왕이 직접 기병을 통솔하였다. 국왕이
경이 아니라 목축을 했다. 스키타이 문화는 동방의 여 친정하였기에 각국의 기병은 매우 강력한 군대였다.
러 유목 민족으로 확산해 중국의 화북 지역을 거쳐 우 전쟁에 기병이 나간 숫자는 고구려 1만 명, 백제와 신
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라가 각각 8천 명 달했다. 농경 문화가 정착되면서
5세기 무렵 그려진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에는 공성전攻城戰이 주요 전투 형태였지만 기병들은 적의
5명의 무사가 말을 타고 역동적으로 사냥하는 모습이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선봉 역할과 물러나는 적을 추
담겨있다. 제일 위쪽에 있는 사람은 말 달리는 반대 격하여 승패를 결정짓는 역할을 담당했다.
방향으로 몸을 돌려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이런 방법 우리나라는 부여, 고구려, 동예 시대부터 과하마果下馬
을 ‘파르티안 기사법騎射法’이라 한다. 기원전 2세기부 가 특산물이었다. 과하마는 키가 3척으로서 이를 타
터 기원후 3세기까지 이란 북부 지역에 있던 파르티 고 과일나무 아래를 능히 지나갈 수 있다는 의미다.
아 국가에서 유래된 활쏘기로 스키타이 문명과 함께 과하마는 남쪽 백제와 신라에도 전래되어 삼국 모두
고구려까지 전파됐다. 수렵도에는 재갈, 등자, 안장 과하마를 특산물로 중국에 보냈다. 삼국 시대 기마전
등 마구들도 등장한다. 발을 딛는 등자는 기원전 300 이 잦아지면서 무거운 갑옷을 입은 기병도 견딜 수
년경 중국에서 발명되었으나 중세 유럽은 7세기가 되 있는 중형마를 외국에서 들여왔지만 과하마가 다수
어서야 도입한 장비다. 등자는 무거운 갑옷을 입은 기 를 차지했다. 고려 시대 탐라도에 말 목장을 건설하
사들이 말 위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안장 면서 토종말을 토마土馬 또는 향마鄕馬라 하고, 외국에
은 스키타이 군사들이 사용한 카펫이 흉노의 나무 안 서 들여온 말을 호마胡馬라 불렀다. 지금도 제주마가
장으로 발전했고, 서기 100년경에 이르러 현재와 비 아닌 외국에서 도입된 중대형 말을 호마라 칭한다.
슷한 모습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 때부터 말을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

통제하는 데 필요한 첨단 장비를 모두 갖춘 것이다.

한민족과 제주마
우리나라는 선사 시대부터 말과 함께했다. 70만
년 전 구석기 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말뼈가 이를 뒷
받침한다. 최초의 말 사육 기록은 《사기史記》에 있다.
한漢 무제와 위만조선 우거右渠 사이에 알력이 있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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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 시대에 재래종인 토마를 외래종인 호마 관계는 원나라의 일본 정벌 계획으로 변화를 맞았다.
와 교잡하여 큰 품종으로 개량하였지만, 4척 이상 말 원나라는 고려를 말 생산기지로 만들기 위해 충렬왕
은 원과 명에서 징발했다. 현재 천연기념물인 제주마 2년1276 탐라도에 몽고식 말 목장을 건설하고, 몽고에
는 과하마가 숱한 역사적 변천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 서 말 관리 인력과 말을 보내 목마 사업을 시작했다.
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사업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말먹이 징발도 중단하
였다.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군마 요구는 더욱 심해졌
원과 명나라의 가혹한 징발 다. 명나라는 북원北元 등을 치기 위해 양국의 교역품
고려는 거란, 여진 등 북방 민족과의 전쟁을 위 으로 금, 은보다 마필을 요구했다. 공민왕 21년1372 말
해 군마가 필요했다. 특히, 몽고 및 명나라와 국교 관 을 명나라에 보내는 것에 제주 목호들이 반기를 들자
계를 맺은 후, 이들 국가로부터 대규모 말의 징발 요 이들을 정벌하는 일까지 생겼다. 고려 후기 명나라로
구가 있어, 국가 차원에서 목장을 설치하고 체계적으 보낸 누적 말 두수는 3만여 두에 달했다. 고려의 말
로 말을 관리했다. 몽고는 1차 침입1231 때 화의 조건 두수가 약 3만 마리였음을 비춰볼 때 상당한 양을 징
으로 큰말大馬 1만 두, 작은말小馬 1만 두를 요구했다. 발한 것이다.
이후 원나라는 자신의 군대가 사용할 말 사료를 요구 조선 시대는 말을 군마뿐만 아니라 역驛마, 파발마, 수
했는데, 1만8천 마리를 먹이기 위해 한 해 27만 석의 레용마, 농용마 등으로 이용하면서 그 수요가 크게 늘
사료를 보내야 했다. 백성들이 풀뿌리와 나뭇잎을 먹 었다. 조선 전기는 명의 막대한 군마 요구를 해결하
는 상황에서 정부의 창고도 고갈되어 감경을 요구했 는데 국력을 기울였다. 태조1392∼문종1451까지 약 7만
신라 시대의 각종 말갖춤이
사실적으로 표현된 <기마 인 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일방적인 외교 두를 명나라에 보냈다. 조선에 좋은 말이 줄어들고
물형 토기>(국보 91호)

12
말 없는 군사들이 속출하자 말 생산을 위한 목장을
확대했다. 조선 시대 목장은 사육하는 목축에 따라
말 목장, 소 목장, 양 목장, 돼지 목장, 염소 목장, 노루
목장, 고라니 목장 등이 있었다. 이 중 말 목장이 전
체의 90%를 차지했다. 말 목장의 수는 138개에 달
하였으며 경기도 30개, 충청도 10개, 전라도 49개,
경상도 23개, 함경도 7개, 황해도 10개, 평안도 4개,
제주 5개였다. 소 목장은 소만 전문적으로 사육하는
곳으로 2개소, 말과 함께 사육하는 목장은 10개소였
다. 말 목장 대부분은 섬이나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
인 곶串에 설치했다. 전국 목장에서 관리했던 말 두수
는 성종 원년1470에 4만 두를 최고로 하여 연산군 8 승마 체험하는 어린이들

년1502 3만 두, 중종 17년1522 2만 두로 감소했다. 임 동안 개량마 4만 두를 증식한다는 것으로 변경했다.


진왜란 후 선조와 인조를 거쳐 현종 4년1663에는 말 군마 4만 두 조성을 위한 재정은 경마에서 조달키로
목장 50개소, 소 목장 1개소로 감소했다. 이 중 말 두 했다.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 야기로
수는 20,213두였고 소는 895두였다. 제주도가 말 군마 수요가 더욱 증가하자 조선마사회를 설립하여
12,411두를 키워 전체의 61.4%를 점유했다. 말 5천 군용 및 산업용 마필 자원을 확보하게 했다. 1945년
마리 이상 목장은 1개소, 2천 마리 이상 목장은 2개 광복과 함께 마산계획도 큰 성과 없이 종결되었다.
소였으며, 말 키우는 목자牧子가 5,178명에 달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오랜 기간 인류와 함께해 온 말
은 승마와 경마처럼 레저 수단이 되었다. 우리나라도
군용에서 레저용이 된 말 1950년 한국전쟁 이후 군마와 역용말이나 농용말의
일본은 러일전쟁1904~1905을 거치는 동안 일본 수요가 줄어, 말 생산보다 경마 시행에 집중했다. 경
군마의 빈약성을 실감했다. 일본 말을 러시아 말처럼 마에서 나온 수익은 군마 조성 대신 축산 발전 재원
개량하자는 논의가 대두되자 마정馬政 30년 계획을 으로 사용했다. 1980년대 국민 소득 증가와 여가 확
수립하고, 자국뿐만 아니라 조선, 대만, 사할린, 만주 대로 경마는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경마 매출액은
등 해외도 자체적으로 마사진흥馬事振興을 추진하게 1981년 3백억 원에서 1991년 8천억 원, 2001년 6조
했다. 일본은 조선 말이 너무 왜소하여 군용은 물론, 원, 2012년 7.8조 원이 되었다. 이러한 성장은 경주
승용이나 잡역말로도 쓸모없다고 생각해 마종개량 마의 국내 생산과 승마 활성화로 이어졌다. 전체 경
을 추진했다. 몽고 암말에 일본 수말을 교배시켜 ‘신 주의 75%에 국산마를 사용하고, 연간 86만 명이 승
조선마新朝鮮馬’를 생산했지만 실적은 미미했다. 시험 마를 체험한다. 2019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말 두수
생산이 시작된 후 15년이 지난 1931년에 조선의 마필 는 2.7만 마리, 경마 매출액은 7.4조 원, 정기승마 인
보유 두수는 54,100두인데, 이중 신조선마는 554두 구는 5.7만 명이다. 지난 5천여 년 동안 다양한 국가
에 불과했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군마의 필요성이 와 민족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말이 지금은 현대인의
커진 조선총독부는 마산계획馬産計劃을 수립했다. 처 여가 생활을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
음에는 1932년부터 1943년까지 체고 145cm 내외
글 전성원 제주대학교 동물생명공학전공 교수
말 3만 두를 조성하는 것이었으나, 1937년부터 15년 사진 전성원, 국립중앙박물관,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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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ㅣ 시와 사진 한 모 금

열 매 직 전

이원

시인
1992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 《사랑은 탄생하라》,
《나는 나의 다정한 얼룩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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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의 둥지가 나무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나무 아래를 지나는데 열매가 툭 떨어졌다

모난 곳이 없어 뒹굴더니 발 옆에 와 멈췄다

덜 익은 열매 하나 발 하나

아기 새가 눈을 처음 뜨는 중이었다

햇빛은 야외 수영장 한쪽에 남겨진 검은 샌들에 담기는 중이었다

철 지난 발을 만드는 중이었다

오르게도 내려가게도 설계된 곳을 계단이라고 부른다면

맨발이 더 드러나는 샌들이어도 괜찮겠다

여름은 가을 속에서 더디 가도 괜찮겠다

나무는 뛰어오른다 열매는 무거워진다

나 : 자를 것이 필요할까

새 : 담을 것이 필요할까

열매는 손만 가지고도 구할 수 있어

점점점

안에서부터 길어지는 부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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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옹기 종 기

돌에 예술혼 불어넣는 Stone Crafts: Breathing


석공예石工藝 the Soul of Art into Stone
투박하고 거친 돌을 수천 번 두드리고 다듬어야 비로소 탄생되 Created by striking and polishing coarse stone thousands
는 석공예품은 그야말로 석공들의 피와 땀의 결정체라 할 수 있 of times, stone crafts truly can be said to embody the
다. 특히 현대화된 장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전통 방식을 고수하 toils of their artisans. Made by those master craftspeople
는 명장들에게 석공예石工藝는 하나의 도구, 하나의 작품 그 이상 who insist on traditional methods without drawing on
의 가치를 지닌다. the help of modern equipment, the pieces possess value
that goes beyond that of an individual tool or craftwork.

석재전시관 전시 작품

1 권태만 작가의 <산수연(山水硏)>, 전국에서 가장 큰 남포벼루다.(100 × 140cm)


Kwon Taeman’s Sansuyeon, Korea’s largest Nampo ink stone (100 × 140 cm)
2 <성주사지 5층 석탑(축척 1/5)>
Five-story stone pagoda at Seongjusa Temple Site (1/5 scale)
3 고호성 작가의 <거북연>
Go Hoseong’s Geobukyeon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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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I c onic I tem s

Human beings have employed many different tools in our time on

this planet, including stone, bone, wood, and more. But while bone

and wood items have corroded and decayed over the passage of time,

many of the tools made from stone have survived to this day.

Beyond the use of stone for tools, stone items were produced

to worship deities and to commemorate ancestors and event. As

civilizations developed, the aesthetic aspects of stone became

emphasized, with the creation of architecture, sculptures, and


3 ornaments possessing artistic value.

For a coarse piece of stone to be transformed into a work of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이래 돌·뼈·나무 등으로 많은 도구 art, the sketching of a design is a very important first step. The basic
를 만들어 썼다. 그 가운데 뼈나 나무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work of design sketching involves transferring the mental image into
부식하여 없어졌지만, 돌로 만든 도구는 지금까지도 많이 남아 a drawing so that any flaws can be addressed to produce a perfect
있다. final work. Only after this basic process is complete can the real
돌은 도구로서의 용도 외에 신의 숭배, 조상의 추모, 사건의 기념 sculpting begin. In the past, stones were individually worked by hand
등을 위한 것으로도 제작되다가 문명이 점차 발달함에 따라 미적 with hammers; now, people often employ the assistance of modern
인 면이 중시되어 예술적 가치를 지닌 건축·조각·장식 등으로 제 equipment. But even so, there are master artisans who continue to
작되었다. use the traditional sculpture methods for key parts of the process. It
투박한 돌이 예술품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제작의 첫 단계라 할 is because of this that the inheritance and perpetuation of traditional
수 있는 도안 그리기가 매우 중요하다. 도안 그리기는 머릿속 구 methods has become known as the “artisanal spirit.”
상을 그림으로 그려 부족한 것을 보완해 작품에 완벽을 기하기 Among the regions of Korea known for traditional stone craft,
위한 기초 작업이다. 이 기초 작업이 끝나야 본격적으로 조각에 Boryeong, Chungcheongnam-do, has stood out through time.
들어갈 수 있는데, 옛날에는 일일이 망치질로 돌을 가공하던 것 Boryeong has long produced large amounts of a type of stone known
을 요즘은 현대화된 장비의 힘을 빌리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도 as Nampo oseok (black granite). With superior qualities that allows
명장들은 중요한 부분에선 전통 조각 방식을 고수한다. 전통 방 for fine carvings such as script and text to be preserved for a long
식의 명맥을 유지하고 이어가는 것, 이것이 장인 정신이라 불리 time, oseok has often been used for monuments. During the Joseon
는 이유다. era, around half of the markers for the royal tombs were made with
우리나라에서 석공예를 대표하는 지역을 꼽으라면 충남 보령이 oseok. Boryeong’s high-quality stone transformed it into a “Mecca of
빠질 수 없다. 보령 지역에는 예로부터 남포오석藍浦烏石으로 불리 stone sculpture.”
는 우수한 돌이 많이 생산되었다. 남포오석은 석질이 좋아 오랫
동안 글씨를 보존할 수 있어 비석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조선 시
대 왕릉 비석의 절반 정도도 남포오석으로 만들 정도였다. 질 좋
은 돌이 충남 보령을 ‘돌조각의 메카’로 만든 셈이다.

글 안유미 편집팀 Written by An Youmee, editing team


사진 김정호 사진작가 Photographs by Kim Jeongho
촬영 협조 웅천돌문화공원 석재전시관 Location provided by Ungcheon Stone Culture Park’s Seokjae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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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한국 의 서 원 ⑥

호방함과 당당함이 느껴지는


함양 남계서원

Namgyeseowon in Hamyang:
An Experience of Spirit and Dignity

남계서원 전경
A panoramic view of Namgyeseo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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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Korea’s Seowon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남계서원길 8-11에 위치한 남계서원灆溪 Located at 8-11, Namgyeseowon-gil, Sudong-myeon,
書院은 명종 7년1552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학문과 덕행 Hamyang-gun, Gyeongsangnam-do, Namgyeseowon
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어, 현존하는 서원 중 영주 소수서원 다 Confucian Academy was built to honor the scholarship
음으로 가장 오래된 서원이다. 명종 21년1566에 ‘남계灆溪’라는 이 and virtue of Jeong Yeo-chang (1450~1504, pen name
름으로 사액 되었는데 ‘남계’는 서원 곁에 흐르는 시내 이름이다. Ildu) during year seven of the reign of King Myeongjong.
After Sosuseowon Confucian Academy in Yeongju, it is
the oldest of the currently extant seowon academies. It
was royally bestowed with the name “Namgye” in year 21
of Myeongjong’s reign (1566) after the stream that flows
by it.

성리학계의 순교자로 추앙받았던 ‘정여창’ Jeong Yeo-chang: A martyr of neo-Confucian scholarship


한양에서 볼 때 낙동강 왼쪽인 안동과 오른쪽인 함양은, ‘좌 Respectively situated on the left and right sides of the Nakdonggang
안동 우함양’이라 하여 예로부터 훌륭한 인물을 배출해내고 학문 River from the perspective of Hanyang, Andong and Hamyang
과 문벌에서 손꼽히던 고을이다. 안동이 퇴계 이황으로 유명하다 were collectively referred to with the term Jwaandong Uhamyang
면, 함양은 남계서원에 모신 정여창으로 유명했다. (literally “Andong to the left, Hamyang to the right”). Since ancient
함양 지곡면 개평리에서 태어난 정여창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성 times, the communities had been noted in the fields of scholarship
리학을 배운 인물로, 성종 21년1490 학덕이 뛰어나다고 천거되어 and lineage for the outstanding personages who emerged from
소격서도교의 초제를 맡아보던 관아 참봉이 되기도 하였으나 벼슬에 연 them. While Andong was famous for Yi Hwang (pen name Toegye),
연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벼슬에 나가서도 강직한 선비의 자세를 Hamyang was renowned for Jeong Yeo-chang, the figure enshrined
잃지 않아 주변에서 ‘속일 수 없는 사람’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at Namgyeseowon Confucian Academy.
하지만 불행히도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이 화 Born in the village of Gaepyeong-ri in Jigok-myeon of
를 입자 그의 제자였던 정여창도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고, 끝 Hamyang, Jeong studied neo-Confucian philosophy under Kim
내는 그곳에서 사망한다. 그 뒤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가 일어 Jong-jik. Commended for his superlative learning and virtue, he was
나 벗이었던 김굉필이 사사될 때 부관참시 되는 극형을 받았다. made a chambong official in the Sogyeokseo (an agency in charge
이를 계기로 김굉필과 함께 성리학계의 순교자로 추앙받게 되었 of Daoist choje rituals) in the 21st year of King Seongjong (1490)—
고 5현으로 인정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5현 중 나머지 네 명은 but he was not the sort of person to focus on official status. Even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다. 그의 호 ‘일두一蠹’는 ‘한 마리 as an official, he never let go of his upright virtues as a Confucian
의 좀’이라는 뜻으로 정여창이 자신을 낮추어서 부르기 위해 지 scholar, earning him a reputation among those around him as
었는데, 이는 중국 북송의 유학자인 정이천程伊川, 1033∼1107의 ‘천지 “undeceivable.” Unfortunately for him, Kim Jong-jik fell afoul of
간에 한 마리 좀에 불과하다’라는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the Muo Sahwa literati purge in the fourth year of Yeonsangun’s

reign (1498), and as his student, Jeong was banished to Jongseong,


서원 건축의 초기 형식을 보여주는 ‘남계서원’ Hamgyeong-do province, where he would eventually pass away.
남계서원은 조선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건물 배치에 있 His friend Kim Goeng-pil was subsequently sentenced to death
어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못한 것과 달리, 서원의 제향 공간에 during the Gapja Sahwa purge of 1504, and Jeong’s remains w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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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서원 풍영루 뒤 연지
Pond behind Namgyeseowon’s Pungyeongru Pavilion
disinterred for posthumous execution. This would lead to him being

revered alongside Kim Goeng-pil as a martyr of neo-Confucian


속하는 건물들은 서원 영역 뒤쪽에 자리 잡고, 강학 공간에 속하 scholarship and recognized as one of five sages (the other four being
는 건물들은 서원 영역 앞쪽에 자리 잡는 등 조선 시대 서원 건축 Kim, Jo Gwang-jo, Yi Eon-jeok, and Yi Hwang) who were enshrined
의 초기 배치 형식을 잘 보여준다. in the Munmyo Confucian Shrines. His pen name Ildu—literally
남계서원에는 커다란 앞뜰이 있다. 누각을 지나 서원 안에 들어가 meaning “a single moth”—was one he chose to refer to himself in
자마자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이 앞뜰이다. 보통의 뜰은 담이 humble terms. His choice quoted the words of the Northern Song
나 단으로 구획되어 비교적 그 경계가 명확하지만 남계서원의 앞 philosopher Cheng Yi (1033~1107), who spoke of “being a mere
뜰은 그 경계가 모호하다. 담이나 단 없이 그냥 열려 있는 자연 상 moth between heaven and earth.”
태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남계서원의 앞뜰이 가진 고유한 특
성이다. 남계서원만의 특성은 또 있다. 다른 서원과는 달리 정문 Namgyeseowon: Exemplifying the early seowon architecture
이 설치되지 않고 3칸 문루인 풍영루風咏樓의 아래층이 정문을 겸 Whereas Sosuseowon, Joseon’s first seowon, does not possess
하고 있다는 점이다. 풍영루는 창건 당시 ‘준도문遵道門’이라 불리 a defined form in terms of its architectural arrangement,
던 출입 삼문이었으나 후에 다락집을 올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Namgyeseowon offers an excellent illustration of the early
풍영루 2층 다락에서 서원을 바라보면, 경사지를 이용하여 건물 organization of Joseon-era seowon architecture: the buildings that
들이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으면서도 정형화를 추구하고 있는 correspond to its ritual spaces are located to the rear of the seowon
남계서원의 면면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모습에서 호방함과 당 precincts, while the structures that represent its lecture spaces are
당함이 느껴진다. 풍영루에는 유교의 보본사상報本思想을 알게 하 located in front of them.
는 내용이 단청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 또한 특별하게 다가온다. Namgyeseowon boasts a large yard in front. This yard is the first
강학 공간을 구성하는 중심 건물인 명성당明誠堂은 1559년에 완 thing one encounters walking past the pavilion and into the seowon
성된 강당으로 정면 4칸 규모의 건물에 중앙의 2칸은 마루이고, area. While the borders of ordinary yards are defined relatively
양쪽 각 1칸은 온돌방으로 된 협실이다. 강당 이름 ‘명성明誠’은 clearly with walls and grades, the boundaries of the Namgyeseo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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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의 ‘밝으면 성실하다明則誠’에서 따왔다. front yard are vague. It could be described as a simply open state
명성당의 앞쪽 양옆으로는 유생들의 생활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of nature, with no walls or platforms—a defining characteristic of
강당 앞마당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듯 배치되어 있다. 동재 the Namgyeseowon front yard. It has other unique properties as
는 양정재養正齋라고 하는데 이는 《역경》에 나오는 ‘교육을 함으 well: unlike other seowon, it has no front gate, with the lower story
로써 사람을 바르게 기르는 것은 성인의 공덕이다’라는 구절에 of its Pungyeongru Pavilion—a gatehouse with three kan (spaces
서 따왔다. 서재는 보인재輔仁齋라고 하는데 이는 《논어》의 ‘군자 between columns)—serving concurrently as a front entrance. At
는 글로써 벗을 사귀고 벗으로써 인을 돕는다’라는 구절에서 따 the time that it was built, Pungyeongru was a triple gate (sammun)
온 말이다. 양정재와 보인재의 1칸은 누마루 형식으로 만들어 각 referred to as Jundomun; a second story was subsequently added
각 애련헌愛蓮軒, 영매헌咏梅軒이라 이름하였다. 이 누마루 아래 누 and has survived through to today. Looking out from the second
문 쪽으로 연지가 하나씩 조성돼 있다. 이 연지는 명종 19년1564 story of Pungyeongru, one can see all the different aspects of
동재·서재와 함께 건설된 것으로 두 개의 연지가 서원에 조성된 Namgyeseowon and its pursuit of regularity even as its structures
예는 다른 서원에서는 보기 드물다. are naturally positioned to take advantage of slopes. In its forms, one
사당은 경사지 가장 위쪽, 높은 언덕에 위치한다. 이 경사와 언덕 can sense both spirit and dignity. Another special aspect is the use of
은 거의 원래의 자연 상태 그대로로, 이를 통해 경사를 그대로 두 dancheong decorative coloring for the explanation about Confucian
고 사당을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사지 일부에는 축대가 있 bobon (“rewarding the origin”) ideas.
지만, 이 축대는 경사지 전체로 볼 때 극히 일부분이므로 시선을 Myeongseongdang, the central building that makes up the
끌지 못한다. lecture space, is a lecture hall completed in the year 1559. It consists

명성당을 중심으로 좌, 우에 있는 동재(양정재)와 서재(보인재)


Myeongseongdang flanked by the eastern jae (Yangjeongjae) and the western jae
(Boinj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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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four kan from the front, the two middle kan with wooden floors

and the kan on either side serving as side rooms with under-

floor ondol heating. The hall’s name of “Myeongseong” means

“enlightened-sincere” and comes from the Doctrine of the Mean,

which has a passage reading, “If one is enlightened, one will be

sincere.”

On either side in front of Myeongseongdang, the eastern

and western jae (houses) that served as living spaces for students

are positioned facing each other across the lecture hall’s front
1 yard. The eastern jae is called Yangjeongjae, taking its name from

a passage in the Book of Changes that reads, “The merit of the

holy man lies in properly training people through education.” The

western jae is known as Boinjae, which comes from a passage in

the Analects that reads, “The noble man uses his refinement to meet

his friends, and through his friends develops his benevolence.” One

kan each in Yangjeongjae and Boinjae has been built in the form

of a loft, respectively referred to by the names Aeryeonheon and

Yeongmaeheon. To the front of each of these lofts is a pond that

extends toward the gate tower. Ponds such as these two, which were
2 built together with the eastern and western jae during year 19 of
1 정여창 고택 정문 Myeongjong (1564), are seldom found at other seowon.
Main gate to Jeong Yeo-chang’s home
2 정여창 고택 사랑채 The shrine is located on a tall hill that represents the uppermost
Sarangchae (men’s quarters) in Jeong Yeo-chang’s home
point of the slope. Both the slope and the hill retain their original

natural state more or less completely, from which it can be seen


1561년에 완성된 사당은 정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전면에 퇴칸을 that the slope was left intact when the shrine was built. There is an
구성했다. 사당은 정여창을 주벽主壁으로 하며 숙종 때 좌우에 정 embankment covering a portion of the slope, but when viewed in
온鄭蘊, 1569∼1641과 강익姜翼, 1523∼1567의 위패를 모셨다. 별도의 사당 terms of the slope as a whole, it occupies only a very small section
에 유호인兪好仁과 정홍서鄭弘緖를 배향하였으나 1868년 별사別祠는 and does not attract attention.
헐어서 치워졌다. 사당 뒤쪽 산기슭에 정여창의 무덤이 있다. Completed in 1561, the shrine is a structure consisting of a

three-kan façade, with a toekan (space in front of a shrine room) at


남계서원과 함께 둘러봐야 할 ‘함양 일두 고택’ the front. Jeong Yeo-chang has been enshrined in the shrine’s main
남계서원을 찾을 때 반드시 방문해야 할 곳이 ‘함양 일두 고 space, with tablets added for Jeong On (1569~1641) and Gang Ik
택정여창 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제186호’이다. 남계서원 자체가 개평마을 (1523~1567) during the reign of King Sukjong. Yu Ho-in and Jeong
의 정여창 고택으로부터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 Hong-seo were honored in a separate shrine, which was demolished
다. 남계서원에서 서북쪽으로 약 3km 거리에 위치한 개평마을은 in 1868. Jeong Yeo-chang’s tomb is located in the foothills behind the
정여창과 풍천 노씨 옥계 노진玉溪 盧禛, 1518∼1578을 배출한 곳으로, sh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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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ong Yeo-chang’s home: Another must-visit
Jeong Yeo-chang’s home (Hamyang Ildu Historic House, National

Folklore Cultural Heritage No. 186) is another must-see for

anyone visiting Namgyeseowon. It would not be overstating the

case to say that Namgyeseowon itself has its origins in Jeong’s

home in Gaepyeong Village. Located to the seowon’s northwest,

Gaepyeong Village was the setting that produced both Jeong and

No Jin (1518~1578, pen name Okgye) of the Pungcheon No clan.

It is the model of a yangban (aristocrat) clan village, as well as a

traditional village that offers an excellent glimpse at characteristics

정여창 고택 석가산 of noble residences during the Joseon era in terms of its structural
Seokgasan artificial rockmountain in Jeong Yeo-chang’s home
arrangement and the composition of its outside spaces.

Jeong Yeo-chang’s historic house in Gaepyeong Village was


전형적인 양반 씨족 마을이자 건물 배치 및 외부 공간 구성 등에 originally built in 1570 on the site of his birth home, and it has been
서 조선 시대 사대부 주거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전통 마을이다. rebuilt several times since by his descendants. One of its most noted
개평마을 속 정여창 고택은 1570년 정여창 생가 자리에 지어진 features is the artificial rock mountain called Seokgasan built in front
이후 후손들에 의해 여러 번 중건 되었는데, 이곳에서 유명한 것 of its sarangchae (men’s quarters). For this formation, natural stones
가운데 하나가 사랑채 앞에 조성된 석가산石假山이다. 석가산은 자 were used to form a tall, three-peaked main mountain, with other
연석을 이용하여 삼봉형의 주산을 높게 만들고 그 좌우에 주산보 lower peaks positioned to its left and right. A deep stone valley was
다 낮은 각각의 높이로 봉우리를 만든 후 산봉 아래 깊은 석곡을 then formed under the peaks and made into a garden planted with
만들어 매화 등을 심은 조원이다. 풍수적인 비보裨補로 쌓는 조산 apricot blossoms and other flowers. Differences from other artificial
造山과 다른 점은 규모가 훨씬 작고 관념적이라는 것이다. 작은 규 mountains created to remedy topographical defects according to
모지만 산과 바위, 물과 나무가 모두 들어 있다. 한마디로 동양 전 feng shui principles include the much smaller scale and abstract
통의 신선 사상을 조형물로 나타낸 것으로 정여창 고택은 비교적 quality. Even at its small scale, it includes everything: mountains
그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and rocks, water, and trees. In a word, it is a design that expresses

the shenxian (Daoist saint) ideas of the Eastern tradition.The Ildu

Historic House offers a well-preserved example of this in more or


less its original form.

Written by Lee Jongho, author of UNESCO World Heritage: Korea’s Seowon


Academies, former member of the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글 이종호 《유네스코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저자, 前 ‘조선왕조실록 Return Committee
환수위원회’ 위원 Photographs courtesy of Lee Jongho, Hamyang County Office, and Lee
사진 이종호, 함양군청, 이범수-한국관광공사, 문화재청 Beomsu, Korea Tourism Organization, Culture Heritage Administ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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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지역 문 화 스 토 리

짐물주기
Pouring water over the covered pit filled with hemp stalks for steam retting

24
Cultural Encounters ㅣ L oc a l Culture Stories

[ 지방문화원 원천콘텐츠 발굴지원 사업 ]

정선의 또 다른 삶
삼 베 길 쌈
정선은 예로부터 ‘삼’의 고장으로, 마을 곳곳이 삼베를 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봄에는 소로 밭을 갈고 역씨를 파종하고, 한여름까
지 삼을 재배·수확하여 온 마을 사람이 참여하는 삼굿 과정을 거
친다. 한겨울이 오면 긴긴밤 호롱불 옆에, 또는 코클고콜; 관솔불을 올
려놓기 위해 벽에 흙으로 붙여 만든 자리 앞에서 가족들이 둘러앉아 삼삼기
를 하였고, 이른 봄이면 베를 짜서 옷감을 만들어냈다.

[ Regional Cultural Content Development Project ]

Jeongseon’s Hemp
Weaving: Another Way
of Life
As a region known for its hemp, all the villages of
Jeongseon historically took part in hemp weaving. In the
spring, farmers sowed hemp seeds on fields plowed by
cows; by summertime, they would harvest hemp crops
and hold a samgut (steam retting) festival for all the
villagers. When winter arrived, family members would
spend the long evenings making hemp thread, sitting by
a kerosene lamp or a small torch placed within a holder
built on the wall with mud. In early spring, the hemp was
woven into fabr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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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1 삼 재배
Hemp crop
2 삼 긋기(베기)
Harvesting hemp (cutting stalks) Jeongseon, preserving all stages of hemp weaving
Tucked away deep in the old wardrobe in our living room is a
삼베 관련 전全 과정 이어오는 정선 burial garment made of finely woven hemp. Every now and then,
우리 집 안방 낡은 장롱 깊숙이에는 곱디고운 삼베로 만든 my mother alludes to it tacitly—never openly—as her own. There
수의가 한 벌 잘 보관되어 있다. 어머니는 굳이 대놓고 말씀을 안 used to be two sets of hemp garments kept with care, but my father
하셔도 본인의 것임을 가끔 넌지시 암시하신다. 원래는 두 벌 고 donned the first set when he passed too soon a few years ago, leaving
이 간직하고 있었는데 몇 해 전 아버지가 뭐가 그리도 급하신지 the family behind in tears as he departed heavenward.
먼저 한 벌을 입으시고, 우리 가족의 눈물을 뒤로하며 멀리 하늘 When my mother first moved in as a newlywed, she brought a
나라로 떠나셨다. 처녀 시절에 정성 들여 짜신 아홉 세 고운 베를 traditional robe for my father along with rolls of fine, nine-sae (one
시집올 때 아버지 도포와 함께 삼베 몇 필을 가져오셔서 그것으 of the thinnest hemp threads, typically measured on a scale of six
로 손수 지어 놓은 옷이었다. 어머니는 그 당시 동네에서 최고의 sae to ten sae) hemp she wove before getting married. She used the
삼삼기삼에서 외올실을 뽑아내는 일 기술자로 소문난 처녀였다고 이웃 어 hemp to make the burial garments herself. According to the village
른들이 말씀해주셨다. elders, when it came to making and weaving hemp thread in those
어느 날 어머니께서는 나에게 “옛날 골골이 마을마다 대마를 심 days, there was no match for my mother in the entire neighborhood.
지 않은 집이 거의 없었지. 처서가 가까이 다가오면 잘 자란 숫삼 One day, my mother told me her story. She recalled, “Back in
에서 꽃이 날리고, 마을에서 삼굿삼찌기 준비를 할 때쯤, 외할머니 my day, nearly every county and village grew hemp plants. By the
가 생선을 한 두름 사주시면서 ‘며칠 지나면 마을에서 삼을 찐다 seasonal day of Cheoseo (day when the late summer heat subsides)
니 이걸 가져다주고 잔심부름을 해주고 오렴’ 하시길래, 생선을 in late August, the well-grown plants would bloom and the village
가져다주고 삼굿하는 분들을 위해 옆에서 거들고 삼을 찌고 껍질 would prepare for samgut or samjjigi (steam retting). My maternal
벗기는 일까지 마다치 않고 열심히 도와주었단다. 그랬더니 삼 grandmother bought me a string of fish, telling me, ‘The village is
주인들이 고생했다며 벗긴 삼을 몇 아름씩 주었는데 그것이 계기 steaming hemp in a few days, so go give them this fish and help run
가 되어 삼삼기를 시작했지”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어머니께 their errands.’ I delivered the fish and helped the villagers with the
서 들려주신 옛이야기는, 내가 전통 삼베길쌈에 관심을 갖게 된 samgut, steaming the hemp and trimming the bark as best I could.
연유이기도 하다. The hemp growers thanked me by giving me several armfuls of
정선문화원과 남면 유평리 주민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정선전통 trimmed hemp. That’s how I began hemp-weaving.” Such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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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베길쌈전승보전회’는 맥이 끊어져 있던 삼베 관련 전 과정을 of yore recounted by my mother sparked my interest in traditional
생활문화 복원 전승 사업의 일환으로 몇 해 전부터 현재까지 이 hemp weaving.
어오고 있다. 우리 조상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삼베길쌈 The Jeongseon Cultural Center and the Jeongseon Traditional
의 전 과정을 어르신들의 구술 고증과 현장 지도를 통해 복원하 Hemp Weaving Preservation Society, centered around the residents
여 이를 후대에 전승하고자 함이다. of Yupyeong-ri village in Nam-myeon township, has spent the past
나는 수년째 삼베길쌈 사업을 하면서 ‘그 힘든 일을 무엇 때문에 several years retracing and restoring the neglected craft of hemp
하냐’는 주위의 핀잔을 들을 때가 있다. 하지만 요즘 같은 삭막한 weaving, reviving all stages of the process as part of the society’s
현대사회에서 이제는 거의 느낄 수 없게 된 ‘이웃애愛’와 정선의 Living Culture Preservation Project. Drawing on the elders’ oral
또 다른 삶을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일일이 설명하 testimony and on-site instruction, the project aims to restore all
기 쉽지만은 않다. stages of traditional hemp weaving that reveal our ancestors’ way of

life, passing it on to the next generation.


‘삼굿’은 수증기로 ‘삼대마’ 찌는 방법 As the project continued over the years, people often asked why
늦은 여름 주민들과 나는 삼굿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 I took on such a challenging project. It is no easy task to explain the
직인다. 전국에서 유일한 ‘전통삼굿’을 재현하는 축제가 열리기 project’s great importance each and every time—that there is great

value in learning about this other way of life in Jeongseon, a life of

neighborly camaraderie hardly found in today’s bleak, contemporary


3 삼굿터 만들기
Digging the samgut (steam retting) site society.
4 몽굿에 역심대, 모태 놓기
Adding wooden motae and yeoksimdae to the monggut

Samgut, a steam retting method for hemp


In the late summer season, the villagers and I grow busy preparing

for the samgut process. The village hosts Korea’s one and only samgut

festival, reenacting the traditional steam retting method for soaking

hemp. The samgut involves making a high-temperature fire in a kiln-

like pit that heats stacked stones and pouring water over them to

generate the hot vapor needed to steam the hemp. This steam retting

method is unique to Yupyeong-ri, adding a distinction to its hemp

3 weaving culture.

The villagers prepare the samgut site before harvesting the hemp

crop. There are largely two sections to the site: the hwajip where logs

covered with stones are lit on fire, and the monggut where stacks of

hemp are steamed. The hwajip is dug deeper in a circle while the

monggut takes an elongated rectangular shape, sloping upward as it

moves father away from the hwajip. Sammorigi refers to the process

of stacking hemp stalks on the monggut. The first step involves

laying down long sticks of wood called motae to ensure the passage
4 of steam from the hwajip. Because the steam automatically trav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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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6

5 화집에 불 달기
Lighting a fire in the hawjip
6 삼 모리기
Stacking hemp stalks
7 짐물 준 후 삼굿놀이
Samgut nori performance after pouring in water
8 삼 꺼내기
Removing hemp stalks
9 삼 벗기기
Peeling hemp bark
10 삼 널기
Hanging hemp to dry

8 10

28
때문이다. ‘삼굿’이란 구덩이 안에 불을 지펴 돌을 뜨겁게 달군 후, all the way to the back of the monggut given its upward slope, the
물을 부어 그 수증기로 삼을 찌는 방식을 말하는데, 삼을 찌는 유평 motae must be placed with meticulous care to ensure that the hemp
리의 방식은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창적인 전통문화다. stalks lie horizontally. The right-hand and left-hand walls of the
마을에선 미리 삼굿터를 만들고 한편에선 삼을 벤다. 삼굿터는 monggut are lined with wooden columns called yeoksimdae. Once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나무에 돌을 쌓고 불을 피우는 ‘화집’ the yeoksimdae are in place, the motae are covered with a layer of wet
과 삼을 쌓아 쪄내는 ‘몽굿’ 부분이다. 화집은 둥글고 좀 더 깊게 pine twigs and grass, over which the pre-cut hemp stalks are layered
파고, 몽굿은 길고 화집에서 멀어질수록 조금씩 지면을 높여가며 and covered with more grass. When the entire pile is covered with
판다. ‘삼 모리기’란 몽굿에 삼대를 쌓는 과정을 말한다. 가장 먼 soil, the hemp is ready to be steamed.
저 하는 일은 몽굿에 화집에서 나오는 김이 잘 통하도록 모태를 The harvest and steam retting of hemp requires the collaboration
놓는 일이다. 몽굿은 화집에서 나온 김이 자연스레 끝까지 전달 of villagers since it cannot be managed alone. Preparing the samgut
될 수 있도록 비스듬히 파여 있기에 삼대가 수평으로 놓일 수 있 site, stacking the hwajip, gathering hemp stalks, steam retting, and
도록 세심하게 계산하여 모태를 놓아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몽 retrieving the steamed hemp require many helping hands. Back
굿의 좌·우측 벽에 ‘역심대’란 나무 기둥을 세운다. 역심대까지 in the day when resources were scarce, our ancestors sought out a
놓고 나면, 모태 위 적당한 두께로 젖은 소나무 잔가지를 깔고 진 method for steaming large amounts of hemp at a time. Their age-old
내비 풀을 놓은 뒤 그 위로 미리 베어 놓은 삼대를 쌓고 진내비 wisdom, refined through trial and error, is encapsulated in samgut.
풀을 더 덮는다. 그리고 그 위에 흙을 덮으면 삼 찌는 준비가 마
무리된다. A small village celebrating its Samgut festival
삼을 베는 것과 삼굿을 하는 과정은 마을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 The day before the samgut festival, all the villagers of Yupyeong-ri are
아서 해야 하며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삼굿치기를 하 kept busy with preparations. The women cook food to serve guests
는 것부터 화집을 쌓고 삼을 모으는 절차며, 삼을 찌고 마지막 삼 at the festival while the men break into sweat preparing the samut
꺼내는 과정에 많은 일손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부족하던 시절, site. The customary mid-day snack for workers helps them stave off
대량의 삼을 한 번에 찌는 방법을 고민했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hunger. With the late-August sun ablaze, it is a time of sweltering
경험으로 쌓은 지혜, 그것이 바로 삼굿이다. late-summer heat, but the villagers fend it off with spicy, tangy food:

homemade noodles in gasugi (a spicy noodle soup with flour-and-


작은 마을의 ‘삼굿 축제’ bean noodles, red pepper paste, and traditional soybean paste),
축제 하루 전 유평리 주민 모두 축제 준비에 눈코 뜰 새 없 mustard leaf kimchi, buckwheat pancakes, and refreshing rice wine.
다. 여인네들은 손님 접대를 위한 잔치 음식 준비, 남정네들은 땀 Complimented by the chatter of women sharing pleasant small talk,
을 뻘뻘 흘리며 삼굿 준비에 혼이 다 빠진다. 그 와중에 새참은 the food revives the villagers’ spirits and drives away their fatigue.
빠질 수 없는 요깃거리다. 8월 말 이글거리는 태양과 후덥지근한 When the dark gradually sets in, the villagers finish their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이열치열인지라 동네 어르신이 직접 preparations for the samgut festival. At 5 a.m. the next morning, the
밀어서 만든 가수기콩가루가 섞인 칼국수로 고추장과 막장을 넣은 장칼국수와 갓 village elders gather for an ancestral rite held with care, after which
김치, 메밀부치기가 곁들어진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은, 재잘거 the hwajip is lit on fire. The torch used to kindle the fire is called the
리는 여인네들의 소담과 함께 지친 마을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bulbangmangi. Once the bulbangmangi is lit as the final touch to all
없는 활력을 불러일으킨다.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삼굿축 preparations, the master of the samgut festival gives the signal: “Light
제를 위한 준비가 마무리된다. 다음날 새벽 5시 동네 어르신들과 the fire inside. Here comes the fire.” When the fire starts burning
정성 들여 제를 올리고 화집에 불을 지핀다. 화집에 불을 붙일 때 properly, white smoke begins to rise. The villagers refer to the 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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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막대를 불방망이라 한다. 불방망이에 불을 붙여 준비를 마 smoke as Baekgu (a common name for a white Jindo) as if it were a
치면 삼굿대장이 신호를 준다. “불 넣으시오, 불 들어갑니다.” 제 white dog, calling out, “Come on, Baekgu. Come this way!” All the
대로 불이 붙으면 위로 하얀 연기가 올라온다. 하얀 연기를 강아 villagers hope the stones will be well heated.
지에 비유해 불이 잘 붙어서 연기가 나오면 뒤에서 “요요요… 백 When the stones get fully heated by the afternoon, the hwajip
구야 이리 오너라!” 하고 강아지를 부른다. 다 같이 돌이 잘 달구 is covered with soil and the men begin pouring water on the samgut
어지길 바란다. 한낮에 돌이 다 달궈지면 화집에 흙을 덮고 삼굿 master’s cue, “Water, water!” Along with the red sparks of fire comes
대장의 신호에 맞추어 마을 남정네들은 짐물을 주기 시작한다. yellowish smoke rising amid the vapor. As tourists observe the
“짐물이여, 짐물이여” 벌건 불꽃이 쏟아 오르면 노란 수염이 수증 process, some watch with fascinated, curious looks while some relive
기에 휩싸여 올라온다. 찾아온 많은 관광객 중 어떤 이는 신기한 their memories, explaining the hemp-steaming process to others as
듯 호기심 어린 눈으로, 어떤 이는 과거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옆 they watch. With the sound of “Jeongseon Arirang” ringing out, the
사람에게 설명을 곁들이며 삼 찌는 광경을 지켜본다. 정선아리 merriment of villagers reveling in rice wine, and the clanging beats
랑 소리, 막걸릿잔을 기울이는 흥겨운 소리, 농악대의 소리가 한 of nongak (Korean traditional music performed by farmers) melding
바탕 뒤엉켜져서 모두가 삼이 잘 삶아지길 바라며 어수선한 삼굿 together, everyone wishes for well-steamed hemp at the rowdy
행사가 이루어지고 그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samgut festival as the day winds down.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Alive in our memory


늦가을, 유평리 마을에서 삼 껍질을 벗겨서 삼베길쌈을 하는 In the late autumn season at Yupyeong-ri, the task of trimming
과정은 주로 아낙네의 일이다. 작고 가는 삼베 실을 뽑기 위하여 and weaving hemp falls mostly to the women. Making short thread
무릎의 살갗이 벗겨져도 연실 입으로 삼을 삼는다. “어르신, 삼 requires tearing out thin strands of hemp by the mouth and rubbing
삼는 일이 힘들지 않으셔요?” “아이구~ 요즘 누가 이런 일을 하 those threads against the knees to connect them, leaving the women’s
겠어. 배고플 때 일이지. 요즘 젊은 사람들이 배우려고 하겠나.” knees scraped raw. Nevertheless, they carry on. When asked, “Ma’am,
추수가 끝나면 아낙네들은 기나긴 겨우내 삼베길쌈을 해야 했고 isn’t it grueling work to make hemp thread?” they reply, “Dear, me.

No one would care to do such work anymore. We did it in hard


11 삼삼기 times. But I dare say young folks nowadays wouldn’t care to learn it.”
Making short thread
12 물레질 하기
After the year’s harvest, the women wove hemp over the winter,
Spinning hemp thread

11 12

30
13 14

13 돌개 실 풀기
Unraveling the hemp reel
as work never ceased in the mountain village. The familiar scenes
14 삼베짜기
Weaving hemp cloth of hemp-weaving in this village that treasured its traditional craft

gradually became a thing of the past kept alive in our memory. The
겨울 농한기에도 쉴 틈이 없던 곳이 산촌이다. 삼베길쌈이 전부인 changing times notwithstanding, hemp still speaks to the joys and
듯 소중하게 여기며 길쌈하는 풍경이 낯설지 않았던 과거 산촌의 sorrows of Jeongseon’s villagers. Stories of my mother before her
풍경이 어느 순간인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이제는 추억이 되었 marriage, the ordeals of her hemp-weaving during my childhood,
다. 그렇지만 정선 사람들의 삶의 애환이 담겨 있는 것이 바로 삼 the lives of Jeongseon farmers working on fire-fallow fields and
베길쌈이다. 어머니 처녀 시절 이야기, 나 어릴 적 고생하시던 어 living clustered on the remote mountainside—these stories of hard
머니의 모습 속에 새겨진 삼베길쌈, 과거 오지 중 오지로 계곡을 times I collected for the preservation project painted vivid pictures
따라 좁은 터에 옹기종기 마을이 자리하고 화전을 일구면서 살아 of the painstaking work that went into cultivating, steam retting, and
온 정선 사람들의 삶, 말만 들어도 그 어려웠던 시절의 삶을 나는 weaving hemp.
직접 전승 사업을 진행하면서 삼 재배 과정과 삼굿, 길쌈, 삼베짜 Retracing the footsteps of erstwhile neighbors fading from
기 등이 얼마나 고된 일이었는지 몸소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Jeongseon’s collective memory, I am now taking utmost care to
나는 잊혀간 정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이 어려운 삼베길 record all stages of the arduous hemp weaving process through
쌈 과정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정성을 가지고 기록하고 영상과 written texts, video footage, and photographs. I am making haste to
사진으로 담고 있다. 또한 우리 무형 유산에 대한 자부심을 지니 apply for the craft’s cultural heritage status, hoping to instill pride in
고 보존하고자, 문화재 지정 신청도 서두른다. 내 고장 정선에 대 our intangible heritage and ensure its preservation. It is a worthwhile
한 일에 몰두할 수 있어서 그 보람이 더없이 기쁘다. 또 이 힘든 endeavor I am delighted to make on behalf of my hometown
일을 마다하지 않는 유평리 주민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Jeongseon. I can only thank the villagers of Yupyeong-ri for their
dedicated work.
글 최원희 정선문화원 사무국장
사진 정선문화원

Written by Choi Won Heui, secretary-general of the Jeongseon Cultural


‘지역N문화’ 누리집에서 Center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Photographs courtesy of Jeongseon Cultural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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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느린 마을 기 행 ⑤

세월의 더께만큼 오래된 아름다움


담양 창평슬로시티

경마는 앞만 보고 달린다. 왜 달리는지 이유도 모른 채. 그저 기


수의 거친 호흡과 다른 경마들이 달리기 때문에 질주할 뿐이다.
어느 틈엔가 우리도 경마처럼 달리고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숨
이 턱 밑까지 차오르면 꽉 막혔던 숨이 한순간에 터져 나온다.
그제야 털썩 주저앉아 주변을 살핀다. 쉬어 갈 때다. 지친 몸을
쉬기 위해 전남 담양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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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Slow City T ravel

Changpyeong Slow City in Damyang:


Entering a Slow Landscape
In horse racing, your eyes are only focused on what is in
front of you—without your even knowing why you race.
There are only the heavy breaths of the jockey and the
other horses running. Somewhere along the way, we
too became like those racing horses. Eventually, we find
ourselves feeling the breath rising up underneath our
chins and bursting out all at once. Only then do we settle
down and examine our surroundings—a time for repose.
We visited Damyang in Jeollanam-do as a place to rest
our weary bodies.

명옥헌 원림에서는 붉디붉은 백일홍을 마주한다.


Myeongokheon garden features baegilhong flow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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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삶을 선택한 남다른 기질 A unique temperament that opts for the slow life
조선 시대까지 창평은 담양에 버금가는 큰 고을이었다. 정조 As recently as the Joseon era, Changpyeong was nearly as large a
13년1789에 간행된 전국의 호수와 인구수를 기록한 《호구총수戶口 county as Damyang. According to a general census of nationwide
總數》에 따르면 창평은 2,041가구, 7,601명이었다. 그러던 것이 일 households and population (Hoguchongsu) published in 1789 (year
제 강점기인 1914년 조선총독부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담양 13 of the reign of King Jeongjo), Changpyeong was home to 7,601
군에 편입된 이후 인구수가 감소하기 시작해 지금은 절반가량이 people in 2,041 households. Its population entered a decline after it
감소한 3,762명에 지나지 않는다2020년 7월 31일 기준. 조선총독부가 was absorbed into Damyang-gun when the Joseon governor-general
창평을 담양에 편입시킨 이유는 창평 사람들의 남다른 기질 때문 redrew administrative boundaries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in
으로 여겨진다. 예부터 전라남도에는 ‘3성 3평’이라는 말이 전해 1914; today, it stands at only half as many with just 3,762 inhabitants.
온다. 3성은 보성·장성·곡성을, 3평은 창평·함평·남평을 일컫는 The reason the governor-general had Changpyeong merged with
다. 이들 고장 사람들은 유독 기질이 강한 탓에 임진왜란 때는 의 Damyang is believed to have had to do with the unique temperament
병을 일으켰고,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마을에 발붙이기가 of its residents. Since long ago, people in Jeollanam-do have spoken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조선총독부는 창평을 눈엣가시 같은 of the “three seongs and three pyeongs”—the three seongs referring
존재로 여겼으리라. 하지만 새옹지마라고 했다. 속도가 미덕인 to Boseong, Jangseong, and Gokseong and the three pyeongs to
세상이 되면서 옛 기질을 그대로 지켜온 창평만큼은 속도에 휘말 Changpyeong, Hampyeong, and Nampyeong. Endowed with
리지 않고 옛 모습을 지켜온 것이다. 느리지만 그것이 현대인들 particularly strong temperaments, people from these places raised
에게 삶의 여유로 다가가고 있음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때 armies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the Korean Peninsula in 1592,
로는 묵은 것이 맛있고, 오래된 것이 멋스러울 때가 있듯, 슬로시 and the Japanese are said to have had difficulty establishing themselves
티 창평에는 세월의 더께만큼 오래된 것이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there during the occupation. The office of the Joseon governor-general
있다. 더불어 창평은 2007년 신안 증도, 완도 청산도와 함께 아시 must have seen Changpyeong as a thorn in its side. But some curses
아에서 최초로 슬로시티로 지정되었다. can be blessings in disguise, and vice versa. Having held on to its own
창평면을 삼지내마을 또는 삼지천마을이라 부른다. 월봉천과 운 temperament in a world where speed is a virtue, Changpyeong carries
암천, 유천 세 갈래 물길이 마을 앞에 모인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on in the same form without getting carried away with fast paces. It’s a
그 세 물길을 따라 국가지정문화재 제265호인 ‘담양 삼지천마을 slow way of life—but no one can deny that such a thing can seem like
옛 담장’을 비롯해 10점의 문화재가 있다. 그것들은 마을 여행에 true leisure to modern individuals. Just as aged foods can be the most
서 대부분 만나볼 수 있다. 마을 여행의 시작은 담양 향토유형문 flavorful and vintage items the most fashionable, the old things in the
화유산 제3호인 남극루南極樓에서 출발한다. 1830년대 세워진 이 slow city of Changpyeong possess a beauty to match the layers of time.
누각은 안동의 선비들과 창평의 선비들이 봄가을 서로 오가면서 In 2007, it was designated alongside the islands of Jeungdo, Wando,
시詩와 가歌를 나누었던 곳이라 한다. 2층 누각에 오르면 창평의 and Cheongsando in Sinan as one of Asia’s first Slow Cities.
너른 들녘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특히 해 질 녘 풍광이 빼어나 시 The township of Changpyeong-myeon is referred to by the
름을 잊게 한다. names “Samjinae Village” or “Samjicheon Village.” The name is

believed to be a reference to the three waterways that converge


달팽이처럼 느린 마을 여행 in front of it—the streams of Wolbongcheon, Unamcheon, and
남극루 왼쪽 길을 따라 접어들면 방문자센터다. 이곳에서 마 Yucheon. Following these three streams takes you to 10 pieces of
을 여행에 필요한 기본적인 자료를 살펴보면 좋다. 마을 고샅길을 cultural heritage, including the old Changpyeong Samjicheon Village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3.6km에 이르는 돌담이 계속 이어진다. Wall, which is a nationally designated cultural property. Most of

34
them can be encountered on a tour of the village. That journey

begins at the pavilion of Namgeungnu, which has been designated

as Local Tangible Cultural Property No. 3. Built in the 1830s, this

pavilion is said to have been a setting where the seonbi (Confucian

scholars) of Andong and Changpyeong would share poetry and

songs in their mutual visits during the spring and fall. Ascending

the two-story pavilion, you see a panorama view of the broad fields

of Changpyeong—with sunsets in particular offering a superb

landscape that washes away all your cares.

Village tour at a snail’s pace


Following the road to the left of Namgeungnu Pavilion takes you to

선비들이 시(詩)와 가(歌)를 나누었던 남극루 the visitors’ center, which is an excellent place to look over the basic
Namgeungnu Pavilion where seonbi shared poetry and songs
materials needed for your village tour. As long as you do not stray far

from the village’s narrow path, the stone wall stretches continuously
이곳 돌담은 돌과 흙을 사용해 쌓은 토석담으로 자연스럽게 휘어 for 3.6 kilometers. Assembled from stone and earth, the wall forms a
진 S자를 그리고 있다. 자박자박 돌담을 따라 걷다 보면 묵직한 naturally curving “S” shape. As you gently walk along its length, you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된다. experience the weighty flow of time.
창평은 500여 년 동안 고 씨 집성촌이었다. 이런 연유로 대부분 For over 500 years, Changpyeong has been the home village for
의 고택이 고재선 가옥, 고정주 가옥, 고재환 가옥처럼 고 씨의 고 the Go clan. For this reason, most of the old homes are Go homes—
택이다. 더불어 그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을 지냈던 고경명 장 like the Go Jae-seon House, Go Jeong-ju House, and Go Jae-hwan
군의 후손들이다. 마을에 남아 있는 고택은 현재 20여 채인데 대 House. The Go clan members here are also descendants of General
부분 1900년대 초에 지어졌다. 그 가운데 고재환 가옥은 고재환 Go Gyeong-myeong, who raised and commanded a volunteer army
의 아버지 고광표가 창평상회를 만들어 각종 공산품을 판매하는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the late 16th century. Some 20 old
한편, 저리 융자를 통해 지역 상권을 장악했는데 이를 토대로 항 homes remain in the village today, most of them built in the early
일운동을 전개했으며, 광복 후에 건국준비위원회 사무실로 사용 1900s. Go Gwang-pyo—father of Go Jae-hwan of the Go Jae-hwan
된 바 있다. 370년 된 느티나무 서너 그루가 우뚝 선 곳은 옛 창 House—was founder of the Changpyeong Sanghoe, a store where
평현정 자리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창평이 분할되면서 담양군에 he sold various industrial items while dominating local commerce
편입된 이후 창평현정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현재 위치한 한 through low-interest loans. He used the home as a base for a
옥 건물은 창평면사무소다. 그 맞은편에 있는 달팽이 가게는 슬 movement to oppose the Japanese, and it also served as an office for
로시티 창평의 특산품인 쌀엿과 한과를 비롯해 농부들이 직접 재 the preparatory committee for national establishment after Korea’s
배하고 말린 각종 나물류를 판매한다. liberation. The place where three or four 370-year-old zelkova trees
창평에 온 만큼 고택에서 하룻밤 묵어보자. 빠듯한 시간 중에 찾 stand is the former site of the Changpyeong community center. That
았다면 더더욱 그렇다. 마을에는 사람의 온기가 전해지는 민박 office disappeared into history after Changpyeong was partitioned
집 10여 곳이 있다. 그 가운데 100년 이상 된 고택인 ‘고택 한옥’ and absorbed into Damyang-gun by the Joseon governor-general.
에서는 정갈한 한옥과 단아한 마당이 일품이고, ‘매화나무집’은 The traditional hanok building that now occupies the spot is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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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담근 전통 장아찌에 구수한 누룽지 밥상을 선보인다. 하룻 Changpyeong township office. Across from it is the Dalpaengi Gage
밤의 휴식을 통해 몸은 물론이고 마음에까지 쉼표 하나쯤 찍어 (Snail Shop), which sells rice yeot (a taffy-like confectionary) and
줄 것이다. traditional sweets—a Changpyeong specialty—along with various

sprouts grown and dried by local farmers.


바람도 시간도 쉬어 가는 담양의 풍경 Since you’ve arrived in Changpyeong, why not spend the night in
디지털 알람 소리가 아닌 새소리에 맞춰 잠이 깬 이튿날. 창 one of its old homes? This is an especially good idea if you are pressed
평에서의 하루를 마감하고 담양의 다른 명소를 찾아 나선다. 첫 for time. The village is home to around a dozen bed-and-breakfasts,
여행지는 명옥헌 원림이다. 조선 시대 오희도가 자연을 벗 삼아 all of them radiating human warmth. One of them, called Gotaek
살던 곳으로 그의 아들 오이정이 선친의 뒤를 이어 은둔생활 중 Hanogeseo (In an Old Hanok), is over a century old and boasts a
에 정원을 꾸미기 시작했다. 원림은 일반 정원과 달리 자연과 인 trim building with an exquisitely elegant courtyard. Maehwanamujip
간의 조화에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 그 덕분에 어디까지가 (Apricot Tree House) serves up the dining table with traditional
자연의 것인지, 또 어디까지가 사람의 손으로 매만진 것인지 모 hand-pickled vegetables and savory scorched rice. Through a good
호하다. 원림 속 정자에 앉아 망중한에 빠지면 그제야 깨닫는다. night’s rest, you can experience leisure for both body and mind.
구분한다는 게 어리석음을. 원림에서는 정자와 네모난 연못 두
개, 그리고 적송과 울창한 배롱나무가 주인이다. 배롱나무는 7월 Damyang: A landscape of wind and time in repose
부터 100일간 꽃을 피우는데 그 꽃을 백일홍이라 부른다. 여름과 On my second day, I awoke not to a digital alarm, but to the
가을이 겹치는 9월에도 붉디붉은 꽃을 만날 수 있다. 행운이다. tweeting of birds. Having wrapped up a day in Changpyeong, I set

out for different sights in Damyang. My first stop was the garden at

Myeongokheon. Created in the setting where O Hui-do (1583~1623)


‘담양 삼지천마을 옛 담장’. 담장과 작은 물길, 고택이 어우러저 편안한 풍경을 만든다.
Old stone wall of Damyang Changpyeong Samjicheon Village. The wall, stream, and lived in the bosom of nature during the Joseon era, the garden was
old houses make a picturesque sc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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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cultivated by his son O I-jeong (1619~1655), who followed in

his father’s footsteps while living in seclusion. What sets this garden

apart from others is its focus on the harmony between nature and

people. As a result, it is difficult to tell how much of it is natural and

how much of it has been cultivated by human hands. It is only when

you sit down in the garden’s pavilion and let go of your cares that

you realize how foolish it is to distinguish the two. The true “masters”

of the garden are its pavilion, its two square ponds, its pines, and its

leafy crape myrtles. Every July, the crape myrtles begin blossoming

for 100 days with flowers known as baegilhong (literally “hundred-

day red”). Bright red flowers can be seen in the month of September,

when summer overlaps with fall—a true stroke of good fortune.

소쇄원은 우리나라 민간 정원의 백미로 손꼽힌다. Like Myeongokheon Garden, Soswaewon Garden is a
Soswaewon Garden is a noteworthy privately cultivated garden.
superlative example of a privately cultivated garden in Korea. It was

cultivated over a 10-year period by Yang San-bo, a student of Jo


담양 소쇄원은 명옥헌 원림에 버금가는 곳으로 우리나라 민간 Gwang-jo who moved to the countryside. Located amid a lush forest
정원의 백미로 꼽히는 곳이다. 조광조의 제자 양산보가 낙향해 of bamboo, Soswaewon Garden offers an unparalleled experience
10년에 걸쳐 가꿨다. 울창한 대숲 사이에 자리한 소쇄원은 느리 with the true flavor of “slow living.”
게 사는 참맛을 느끼기에 더없이 좋다. Bamboo has been planted in Damyang since the Goryeo
담양은 고려 때부터 대나무를 심어왔는데 담양읍내에 있는 죽녹 Dynasty, and the Juknokwon Bamboo Garden in Damyang-eup may
원은 그 결정판이라 하겠다. 죽녹원에서 대나무의 사사삭 거리는 be described as the zenith of this. Setting out after listening to the
노랫소리를 듣고 나서 길을 건너면 수령 200~300년 된 노거수 rustling sounds of Juknokwon’s trees, you enter the wide embrace
의 넓은 품에 안긴다. 바로 관방제림이다. 그리고 그 품을 따라 곧 of enormous trees that have stood for 200 to 300 years—the forest
장 걸어가면 하늘을 찌를 듯 곧게 자란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 known as Gwanbangjerim. Continue walking in that embrace, and
나온다. you find a road lined with straight-backed metasequoias that seem
담양에서 보낸 1박 2일은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시간이 천천히 to soar into the sky.
흐르는 듯해 모처럼 긴 휴식을 가진 것 같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The two days that I spent in Damyang were not that long, yet
24시간이 담양에서는 느리게 흘러간다. they seemed to offer me a long rest as the time drifted slowly by. We

may all receive the same 24 hours in a day—but in Damyang, they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seem to pass slowly.
Written and photographed by Im Unseok, travel writer
Travel Course
여행 정보
•About the course Changpyeong Slow City > Myeongokheon >
•추천 코스 슬로시티 창평~명옥헌~소쇄원~죽녹원~관방제림~메타세쿼이 Soswaewon > Juknokwon > Gwanbangjerim >
아 가로수길 Metasequoia Road

•문의 담
 양군청 관광정책과 061-380-3147 •Contact D
 amyang-gun Office Green Tourism Division 061-380-3147,
담양창평슬로시티위원회 061-383-3807 Damyang-Changpyeong Slow City Committee 061-383-3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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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팔도 음 식

곰국에 돼지머리, 순대, Changpyeong Gukbap:


내장 한가득! A Hearty Bowl of Bone
‘창평국밥’ Broth and Chitterlings!

창평국밥
Changpyeong gukb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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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Pr ovinc ial Cuisine

담양군 창평면 맞은편에 자리한 창평 읍내에는 5일장이 서는데 In downtown Changpyeong, located a short way across
쌀엿과 한과뿐만 아니라 ‘창평국밥’과 ‘암뽕순대’로도 유명하다. the Changpyeong-myeon Township Office in Damyang-
창평국밥과 암뽕순대는 창평장을 끼고 이어온 장터 음식으로, gun, a five-day market (held every five days) offers
특히 창평국밥은 하나의 브랜드가 될 만큼 인기가 좋아 담양 인 rice yeot (traditional taffy), Korean sweets, as well
근 지역인 광주와 목포에서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창평이 아닌 as renowned local fare: Changpyeong gukbap (rice
곳에서 맛보는 창평국밥은 무언가 아쉽다. 창평국밥을 제대로 soup) and amppong sundae (pork uterus served with
맛보고 싶다면 창평국밥 거리를 찾아보자. blood sausages made of makchang, or pork rectum).
Changpyeong gukbap and amppong sundae enjoy a
long reputation as hearty marketplace food sold at the
Changpyeong Traditional Market. As a popular dish,
Changpyeong gukbap has become a brand in its own
right, now sold in neighboring cities of Gwangju and
Mokpo. Yet Changpyeong gukbap eaten elsewhere leaves
something to be desired. The Changpyeong gukbap alley
is the best place to taste a proper bowl in all its original
flavor.

맛도, 종류도 다양한 창평국밥 The many types and tastes of Changpyeong gukbap
창평국밥은 가마솥에서 푹 고아낸 곰국이 일품으로 그 국물 Changpyeong gukbap boasts superb bone broth boiled in a
에 돼지머리와 순대, 내장 등을 듬뿍 넣어 밥을 말아 먹는 음식이 traditional iron caldron called a gamasot, in which various
다. 2004년 창평 장터는 기와 형태의 지붕을 올리고 전통을 살린 ingredients—pork head meat, sundae, pork intestines, and such—
상점들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장터 안과 주변에는 10여 개의 국밥 are complemented by rice. In 2004, the Changpyeong Traditional
집들이 있다. 이곳에서 내놓는 창평국밥의 인기 덕분에 장이 서는 Market was given a tiled roof and its shops were renovated with
날은 물론 장이 서지 않는 날에도 장터는 많은 사람으로 북적인 traditional accents. In and around the market, there are some 10
다. 필자 역시 창평국밥 맛을 잊지 못해 종종 창평 장터를 찾는다. eateries selling gukbap. Thanks to the popularity of Changpyeong
창평국밥은 모듬국밥, 새끼보국밥, 암뽕순대국밥, 내장국밥, 콩나 gukbap, the area bustles with visitors on market days and off-market
물국밥, 선짓국밥 등 그 종류가 다양해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뚝 days alike. I, myself, frequent the market for this dish, unable to
배기에 국과 밥이 함께 나오기도 하고 공깃밥이 별도로 나오는 따 resist the lingering memory of its taste. Given the many varieties of
로국밥도 있다. 반찬으로는 깍두기, 배추김치, 양파, 청양고추, 된 Changpyeong gukbap, choosing a bowl is part of the fun. Choices
장, 새우젓이 나온다. include modeum (assorted ingredients) gukbap, saekkibo (pork

uterus) gukbap, amppong (blood sausages made of pork rectum)


숙련된 손놀림에서 나오는 국밥 맛의 진수 gukbap, naejang (chitterlings) gukbap, kongnamul (bean sprout)
국밥은 먼저 뚝배기에 밥을 담고 위에 그 위에 머릿고기와 내 gukbap, seonji (clotted blood) gukbap, and more. The soup is either
장을 얹어 뜨거운 국물을 수차례 부어 따라내고 다시 부어 따라내 served in a ttukbaegi (a traditional earthenware vessel) with rice
기를 반복한다. 주인장의 숙련된 손놀림은 오랜 경력과 노하우가 already in the broth or served with the rice in a separate bowl. Dic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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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어나는 퍼포먼스와도 같은 과정으로 재료 간의 온도와 맛이 고 radish kimchi, napa cabbage kimchi, onions, hot peppers, soybean
루 섞이게 해 창평국밥 맛의 진수를 보여준다. 레스토랑 주방에는 paste, and salted shrimp are typical side dishes that accompany the
접시를 따뜻하게 해주는 온장고가 있지만, 창평국밥이 담겨지는 soup.
뚝배기는 뜨거운 국물이 여러 차례 적셔져 적당히 따뜻하며 그릇
을 비울 때까지 일정한 맛이 유지되게 하는 장점이 있다. 음식점마 Quintessential gukbap born of skilled hands
다 조금씩은 다르지만 ‘원조 창평국밥’은 큰 솥에서 푹 고아낸 육 Serving a bowl of gukbap requires adding steamed rice to the
수에 미리 삶아 썰어 놓은 돼지 머릿고기와 내장을 풍성하게 넣고 ttukbaegi, topping it with pork head meat and chitterlings, and then
순대를 넣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국밥 위에는 대파와 우리가 흔히 repeating a process of ladling hot broth over them, draining the broth
‘다대기’라 부르는 양념장을 얹는다. 창평국밥은 칼칼한 맛을 내 off, and pouring in another scoop. The skilled, nimble movements of
기 위해 청양고추를 잘게 다져 넣거나 고춧가루를 뿌리는 다른 국 the owner’s hands attest to long-held experience and know-how—
밥과 비교해 곁들이는 양념이 맵지 않고 국물 맛이 자극적이지 않 the process of balancing the ingredients’ temperatures and flavors
으며 온순하다. verges on a culinary performance, resulting in a quintessential bowl

of Changpyeong gukbap. Modern restaurant kitchens are equipped


수십 년의 노하우가 응축된 창평국밥 with plate warming cabinets, but the ttukbaegi used for Changpyeong
창평국밥 국물은 나주곰탕보다는 약간 진하고 설렁탕보다는 gukbap is warmed to an optimum temperature by the repeating
맑은 느낌이다. 그 뽀얀 국물에 새우젓으로 간을 하고 다대기를 pouring of broth, allowing the soup to maintain the same taste
푼 다음 맛을 보면 머릿고기와 내장이 부드럽다. 대파와 함께 먹으 throughout a meal. While the recipe varies at each restaurant, the
니 잡내가 나지 않고 딱히 진한 맛은 없이 쫄깃한 식감만 느껴지 original gukbap at Changpyeong Traditional Market features bone
는데 이는 소 내장과 다른 돼지 내장의 특성 때문이다. 고기양이 broth boiled for long hours in a caldron, boiled and cut slices of pork
많은 것도 창평국밥만의 특징이라면 특징인데 양파를 된장에 찍 head added within, along with generous amounts of chitterlings that
어 먹으면 달달한 양파의 맛이 돼지고기 국밥 맛을 더욱 북돋아 do not include sundae. The gukbap is topped with chopped green
푸짐한 양에도 금세 한 그릇 뚝딱이다. onion and a dollop of seasoned red pepper sauce commonly known
유일하게 창평 5일 장터 내에 있는 ‘원조 창평국밥’은 70여 년 전 as dadaegi. Unlike other varieties of gukbap that include finely diced
부터1949년 추정 창업주 故 조지옥 할머니가 장이 서는 매달 5일과 hot peppers or red pepper powder for a spicy flavor, Changpyeong

gukbap uses a milder seasoning, offering a soothingly savory broth.

장이 서지 않는 날에는 대부분의 상가들이 문을 닫지만 국밥집은 영업을 한다.


Most shops close on off-market days, but not the gukbap shop.
Encapsulating decades of know-how
The broth in Changpyeong gukbap is heavier than Naju gomtang (beef

bone soup) but lighter than seolleongtang (ox bone soup). Once the

rich, milky white broth is seasoned with salted shrimp and dadaegi,

it is time to taste the soup with the tender pork head slices and softly

boiled chitterlings. The chopped green onions keep the fatty aroma

at bay, and the pork chitterlings offer pleasantly chewy textures

without the overpowering flavors that beef chitterlings would

give. Changpyeong gukbap is known for having generous amounts

of pork, but the hearty dish is bound to be gone in an inst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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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pecially when eaten with onion slices dipped in soybean paste that

complement the soup with a sweet relish.

Dating back 70-odd years, the restaurant fittingly named

Changpyeong Traditional Market Gukbap—the only gukbap shop

located within the market grounds proper—is believed to have been

founded in 1949 by the late Jo Ji-ok, who sold sulguk, a meat and

vegetable soup frequently enjoyed with alcohol, on the market days

that came around every five days. Back then, the shop was a humble
1 shanty built of plank walls covered with iron sheets for a roof.

Customers would sit on a straw mat laid out in front of the shop,

eating gukbap served on low-rise tables. Upon joining the family, Jo’s

daughter-in-law Jeon Hyeon-suk began helping at the shop, adding

rice directly to the sulguk on the request of marketers rushing out

in a hurry, launching the soup shop into fame as the local landmark

for “marketplace gukbap.” Although Jo Ji-ok passed away in 1999,

Jeon Hyeon-suk has carried on the tradition to this day, serving


marketplace gukbap that stays true to its original taste.
2

1 창평국밥 기본 상차림
Changpyeong gukbap with sides
2 '원조 창평국밥' 창업주 故 조지옥 할머니의 뒤를 이어 국밥집을 운영하고 있는
며느리 전현숙(왼쪽) 씨와 함께
The writer with Jeon Hyeonsuk (left), daughter-in-law of the late Jo Ji-ok, founder
of the original Changpyeong gukbap

10일에 술국을 팔았다. 당시 가게는 나무로 벽을 대고 함석지붕을


얹은 궁색한 판잣집으로 가게 앞에 멍석을 깔고 앉은뱅이 상에 국
밥을 냈다. 며느리 전현숙 씨가 시집와 시어머니를 도왔고 급하게
장을 보고 떠나는 장꾼들의 요청으로 술국에 밥을 말아내기 시작
하면서 장터의 술국집은 일명 ‘시장국밥’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
다. 1999년 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전현숙 씨는 지금까지
시장국밥을 말아내며 이곳 국밥만의 한결같은 맛을 지켜나가고
있다.

Written and photographed by Kim Chihyun, professor, Department of Food


글·사진 김지현 광주여자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 and Nutrition, Kwangju Women’s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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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ㅣ 한류 포 커 스

‘코로나19’와 ‘K-방역’
COVID-19 and Korea’s Response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구조를 실제와 비슷하게 구현한 3D 이미지(CDC 제공)


3D model of the SARS-CoV-2 virus that causes COVID-19, created by the US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courtesy of CDC)

필자는 대구에서 코로나 환자가 급증하는 시기였던 3월 7일부 I went to Daegu to provide volunteer medical services for
터 10일간 의료봉사를 하러 대구에 갔었다. 당시 환자는 급증하 10 days from March 7, right when COVID-19 cases were
고 있지만, 병상이 부족해 집에서 대기하는 환자들이 많았다. 급 spiking in the city. Cases of the virus were peaking at
기야 집에서 입원 대기하고 있던 환자 중에서 사망자까지 나왔 the time, but many sick people were left waiting in their
다. 상황이 악화하자 의료계에선 코로나19를 효율적으로 대처하 homes because of the lack of hospital beds. At one point,
기 위한 수많은 아이디어가 나왔다. death struck even those waiting at home for medical
treatment. As the situation worsened, the medical
community came up with many ideas to effectively deal
with COVID-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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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Encounters ㅣ H allyu Foc us

K-방역 이끈 ‘생활치료센터’ A guiding light towards recovery: community treatment centers


코로나19에 대처하기 위한 수많은 아이디어 중 가장 대표적 One of the most prominent of those many ideas to deal with COVID-19 was
인 것이 ‘생활치료센터’였다. 코로나19 환자들 90% 이상이 경증 to create “community treatment centers.” Over 90 percent of the COVID-19
또는 무증상이니, 이들을 병원에 입원시키기보다는 병원과 가정 patients in Daegu had either light or no symptoms at all. The emergence of
의 중간 개념인 치료센터를 만들어 관리·관찰하자는 아이디어가 residential treatment centers was based on the idea that we could manage
생활치료센터의 출발점이었다. 간혹 생활치료센터에 입원한 환 and observe these patients in a treatment center that was conceptually
자 중에서 중증 또는 최중증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somewhere between a hospital and a home, instead of placing them directly
런 환자들을 조기에 찾아내 큰 병원으로 이송하고 나머지 환자들 in a hospital. There were occasionally times when the symptoms of patients
은 퇴원할 때까지 생활치료센터에서 생활하게 했다. 결과는 대성 in these residential treatment centers would grow worse, even critical; we
공이었다. 환자들이 머물 곳이 없어 집에서 방치되는 상황을 피 identified these cases early on and sent them to a bigger hospital, while the
하게 된 것이다. 당시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세 곳의 치료센터가 rest stayed at the residential treatment centers until they recovered. This idea
만들어졌다. 이곳에 천 명 이상의 환자들이 입소해 2주간 의료진 was a major success. We had avoided a situation where COVID-19 patients
의 관찰을 받았다. 환자의 상황에 따라서는 4주 가까이 입소한 경 would be neglected because they had no place to go. At the time, three
우도 있었다. 필자는 경주생활치료센터에서 3일 동안 근무하면 residential treatment centers were established to serve the Daegu area. More
서 환자들을 진료했다. than 1,000 patients stayed in those facilities for two weeks under observation
경증 환자, 무증상 환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개념의 생활 by a team of doctors. Some patients stayed in the centers for almost four
치료센터는 가정을 중심으로 코로나19가 확산하는 것을 막는 데 weeks. I worked in the Gyeongju Community Treatment Center for three
큰 역할을 했다. 센터에 입원한 환자들도 2주간의 입원 기간을 잘 days, helping treat patients there.
참아가며 힘든 시간을 잘 극복했다. Community treatment centers became a new tool to treat patients with

light or no symptoms, and they played a major role in preventing the spread
빠른 진단과 빠른 입원이 K-방역의 핵심 of COVID-19 among families. Despite the hardship and inconvenience,
K-방역은 진단 쪽에서도 돋보였다. 우리 정부가 RT-PCR 진 patients who were treated at the centers endured their two weeks in the
단기기 업체 5곳을 신속 승인 절차로 허가해준 결과, 6시간 만에 facilities and were soon able to return to their lives and families.
코로나 진단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기존엔 진단 검사 뒤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이틀이 걸렸으나 하루 만에 결과를 알 수 있게 되었 Korea’s success lies in fast testing and quick hospitalization
다. 이에 더해 2월 말부터 드라이브스루가 세계 처음으로 코로나 One of the major successes of Korea’s virus containment was in testing. The
19 방역에 응용됐다. 차량을 이용한 코로나19 진단 검사인 드라 Korean government made it possible to test for COVID-19 just six hours
이브스루는 김진용 인천의료원 감염내과장이 처음 제안했다. 칠 after the RT-PCR testing kit was approved through an expedited approval
곡 경북대병원, 영남대병원, 경기 고양시 덕양구보건소 등에서 process involving five different companies. It had taken two days for results
도입해 빠른 검사 속도로 확진자 확산을 막는 데 기여했다. 이제 from previous testing kits to be made available; now, however, we were
드라이브스루는 미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도입해 활용하고 able to get results in just one day. Then, beginning in late February, Korea
있다. 필자는 직접 드라이브스루를 체험해 유튜브에 관련 동영상 became the first country in the world to use drive-through screening centers
을 올리기도 했다. to combat COVID-19. The idea of using drive-through screening centers
이 밖에도 2월 보라매병원이 공중전화 부스처럼 생긴 곳에 들어 to test for COVID-19 was first proposed by Kim Jin-yong, the director of
가 검사하는 워크스루를 시작했다. 3월 초에는 에이치플러스 양 the Division of Infectious Diseases at the Incheon Medical Center. The new
지병원이 이를 시작해 미국 «워싱턴포스트»와 일본 «아사히 screening technique was implemented at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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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소개됐다. 워크스루 역시 환자들의 대기 시간을 줄이 Chilgok Hospital, Yeungnam University Medical Center, and the Deogyang-
고, 의료진의 감염 위험을 줄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의심 환자는 gu Public Health Center in Goyang, Gyeonggi-do, among other places, and
검사를 받고 집에서 대기한 뒤 결과가 나오면 그에 따라 생활치 continues to help prevent community spread by delivering fast screening
료센터 입원이 결정되거나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results. Drive-through screening centers are now being used in many

countries, including the United States and Japan. I even uploaded a video of
이제는 백신과 치료제 확보가 관건 my own experience at a drive-through screening center on YouTube.
지금은 무엇보다 백신과 치료제의 확보가 중요하다. 집단면 In February, Seoul National University Boramae Medical Center began
역 60%가 되어야 코로나19 확산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operating “walk-through” screening centers, where people could get tested
백신 개발의 선두는 미국과 영국, 중국, 러시아다. 미국 제약회사 by walking into a small cubicle that looks a bit like a public telephone booth.
모더나와 화이자는 올해 안에 백신 개발을 마무리하고 공급까지 In early March, H+ Yangji Hospital also began using these walk-through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최근 발표했다. 또 공동 개발에 나선 영국의 screening booths, a story that was soon picked up by both the Washington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와 옥스퍼드대는 9월부터 백신 생산에 들 Post and the Asahi Shimbun. The walk-through booths reduced the amount
어가겠다면서 한발 먼저 치고 나갔다. 중국의 경우 제약사 칸시 of time patients had to wait to receive test results, while also decreasing the
노 바이오로직스와 베이징 생명공학연구소에서 임상 3상을 진행 danger of infection among medical staff. Suspected COVID-19 patients
하고 있다. 러시아도 임상 3상을 마치고 백신 생산과 수출에 들어 were able to wait at their homes after taking the tests and, depending on the
갔다. 하지만 러시아의 경우 효과에 대한 논문 등이 부족해서 백 results, enter either residential treatment centers or hospitals.
신에서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알 길이 없다. 물론 현재는 대부분
의 백신이 논문으로 증명돼 나온 경우가 거의 없다. 어느 회사가 All eyes on the development of vaccines and medical treatments
됐든 만일 올해 안에 백신 개발에 성공한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It is now more important than ever to acquire a vaccine and develop medical
빨리 만들어낸 백신으로 기록될 것이다. treatments for COVID-19, because at least 60 percent of a population must
현재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뛰어든 제약회사는 세계적으로 140 gain immunity for the virus to stop spreading. The US, UK, China, and
곳이 넘는다. WHO에 따르면 이 중 3상 단계에 들어선 회사는 5 Russia are currently leading efforts to develop a vaccine. Moderna and Pfizer,
곳 정도이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연내에 백신을 개발할 가능성은 two American pharmaceutical companies, recently announced that they
적어 보인다. 국내 제약사들이 임상 시험을 시작한 백신 후보물 would finish vaccine development and could even start supplying vaccines
질은 두 가지인데 모두 1상 단계에 있다. 이러한 추세라면 국내는 by the end of this year. British pharmaceutical company AstraZeneca and
내년이 지나야 백신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Oxford University, which have joined forces to develop a vaccine, have

gone even further, saying they will begin producing a vaccine in September.

CanSino Biologics, a pharmaceutical company in China, along with the

Beijing Institute of Biotechnology, is currently conducting stage-three trials

on its vaccine. Russia, too, has currently completed stage-three trials with a

vaccine and begun export, but there aren’t enough studies to know whether

the vaccine will produce any side effects. In fact, almost none of the vaccines

have been verified through academic research at this point. If any of these

companies are successful in developing a vaccine by the end of this year, it

will be the fastest vaccine developed in human history.

There are more than 140 pharmaceutical companies that have ru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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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develop COVID-19 vaccines across the globe. According to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 (WHO), only around five of these companies have

moved to conduct stage-three trials with their vaccines. It is not likely

that Korea will be able to develop a vaccine by the end of this year. Korean

pharmaceutical companies have two “candidate materials” used to develop

a vaccine for clinical trials, and both are currently in stage-one trials. This

means that Korea will likely have to wait until at least next year before a

vaccine is developed domestically.

Signs of a second wave—three dos and don’ts


As of August 20, 2020, more than 200 people are being confirmed with the

virus day after day, showing signs of sudden community relapse. This is a

result of the spread waning early in August, which brought slack to social
2차 대유행 조짐, 더욱 필요한 ‘3행3금’ distancing. Without caution, Korea is in for a second wave of infections.
그러나 현재2020년 8월 20일 기준 코로나 환자들이 매일 200명 We must continue to follow the basics of virus prevention practices as long
이상 발생하면서 급등 추세로 돌아서고 있다. 8월 초 코로나의 확 as there are no vaccines or medical treatments available. Recently, it has
산이 주춤한 틈을 타 사회적 거리 두기가 느슨해지면서 일어나고 become even more important to follow the “three dos and three don’ts” of
있는 상황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2차 대유행에 들어갈 가능성 virus prevention as more and more people have begun traveling. The “three
이 높다. 백신도 없고 치료제가 없는 현 상황에서 꼭 기억해야 할 dos” include: 1) do wear masks, especially indoors, 2) do stay only as long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K-방역의 기본을 계속 지켜나가는 것이 as necessary at roadside rest areas and restaurants; and 3) do keep more
다. 최근 3가지 행동 수칙과 3가지 피해야 할 수칙 ‘3행3금’을 실 than two meters apart from others. The “three don’ts” include: 1) don’t travel
천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3가지 행동 수칙은 △실내에서 마 when you have a fever or other symptoms, 2) don’t visit enclosed areas or
스크 쓰기 △휴게소와 음식점 등에서는 가능한 한 짧게 머물기 busy travel spots, and 3) don’t spit in public or make physical contact with
△사람 간 2m 이상 거리 두기이다. 3가지 피해야 할 수칙은 △발 other people.
열 등 증상 시 여행 가지 않기 △밀폐·밀집 장소와 혼잡한 여행지 While these rules may be difficult to follow now, it is important not to
피하기 △침방울 튀는 행위와 신체 접촉 피하기다. 당장은 힘들 forget the reasons why Korea has been able to have one of the lowest death
겠지만, 코로나19에 의한 사망률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낮은 편 rates from COVID-19 in the world, and the reasons the country has been
에 속할 수 있었던 것과 또 이를 지속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온 국 able to keep it that way: Koreans have continued to practice social distancing,
민이 사회적 거리 두기를 지금까지 이어온 결과이며 의료진의 헌 Korean medical professionals have been devoted to their work, and, of
신, 그리고 K-방역이 존재했기 때문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course, the basics of virus prevention have continued to be followed.

Written by Lee Jin-han, medical doctor and Dong-A Ilbo journalist


글 이진한 «동아일보» 의학전문기자, 의사 specializing in medical affairs
사진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Images courtesy of the US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아이클릭아트 iclick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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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이달 의 인 물

은빛 정신
이어가는
장도장 보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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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고도 예리한 은빛을 발하며 한민족의 역사와 함
께해 온 장도粧刀. 이 장도를 만드는 기능 혹은 사
람을 ‘장도장’이라고 한다. 장도장의 길은 1,500℃
가 넘는 불에 강철을 달궈 칼날의 형태를 잡기까
지 수백 수천 번을 두드려야 하는 고된 노동의 연
속이다. 하지만 우리 장도의 정신과 아름다움을
잇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가야 하는 길. 그 길에서
2011년 보유자로 인정받아 전통 장도 전승 활동에
매진해 오고 있는 박종군 장인을 만났다.

장도의 고장 광양에서 만난 박종군 장인


박종군국가무형문화재 제60호 2대 장도장 장인을 만난
곳은 전남 광양에 위치한 광양장도박물관. 박물관
이름처럼 ‘광양’은 ‘장도’와 짝을 이루고 있는 곳이
다. 삼국 시대부터 칼날의 주재료인 철이 많이 나
와 장도 만드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의 손끝에서
우수한 장도가 많이 나왔기 때문인데 지금도 광양
‘장도’ 하면 역사가 깊고 공예미가 뛰어나기로 유
명하다. 여기에는 박종군 장인의 부친인 고故 박용
기 옹국가무형문화재 제60호 제1대 장도장이 기여한 바가 크
다. 고 박용기 옹은 14세 때 패도佩刀; 몸에 차는 칼 장
인, 고 장익성 옹의 문하에 입문한 뒤 일평생 장도
제작에만 몰두한 장인이다. 박종군 장인은 그런 아
버지를 보며 장도장의 길로 들어섰다. 처음부터 장
도장의 맥을 잇겠다는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힘든 아버지를 도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봐오면서 느낀 건 너무 힘들
게 사신다는 거였어요. 단단한 철을 두드리고 펴고
늘이는 일을 총칭해서 담금질이라고 하는데 그 작
업은 중노동에 가깝거든요. 단번에 내가 원하는 칼
의 두께가 나오는 것이 아니니까 그 과정이 모질고
고될 수밖에 없어요. 근데 그렇게 힘들게 일하면서
도 가난을 못 벗어났어요. 어린 시절 기억이라고 해
봐야 작업장에 빗물 새고, 빚쟁이한테 쫓겨 다니고,
굶주린 기억밖에 없어요. 아버지는 장도만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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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3

1 칼날 단조하는 모습
2 은장도 부속품 '여치' 만드는 모습
3 칼날 열처리 후 확인하는 모습
4 박종군 장인의 장도 작품
(왼쪽부터)대추나무금은장당초문갖은네모도,
은장환용문낙죽장도, 대추나무죽절형장도,
금은장매조문갖은을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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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살기 힘드니까 밤나무 접목할 때 쓰는 접목도 커나가니까 걱정이 되더라고요. 이렇게 어려운 환
도 만들고, 뽕낫도 만들고, 밤 깎는 칼도 만들고…. 경에서 아버지부터 나, 그리고 내 아들들에 이르
아무튼 칼이란 칼은 다 만드셨어요. 아버지가 칼에 기까지 3대에 걸쳐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
빠져 사시는 동안 어머니 고생도 이루 다 말할 수 죠. 그래서 아버지께 말씀드렸습니다. ‘장도장을
없을 정도였죠. 아들 된 도리로 부모님 고생하시는 대물림해 가야 하는데 이런 분위기로는 곤란하지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어서 도와드린다는 게 일찍 않겠습니까. 우리 대에서 장도를 할 수 있는 발판
부터 장도장의 길로 들어서게 된 거고요. 어머니는 을 마련합시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의 오랜 숙원
저한테 공부 잘해서 학교 선생님 되라고 하셨어요 사업이기도 했던 장도박물관이 이곳에 들어서게
(웃음).” 된 겁니다.”

177가지 공정, 부친의 염원이


수개월의 시간 끝에 탄생하는 장도 ‘광양장도박물관’ 건립으로 이어져
우리 선조들이 허리띠나 주머니 끈에 늘 차고 장도박물관 건립 계획부터 실제로 박물이 세
다니면서 장신구와 호신용 겸용으로 사용했던 칼, 워지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장도를 만들 때처럼 오
장도. 그 크기는 한 뼘 남짓에 불과하지만, 그 작은 랜 정성과 시간을 들이고 나서야 비로소 만날 수
칼 하나가 나오기까지의 공정은 무려 177가지에 이 있었던 것이다.
른다. “부친께서 70년대 후반부터 우리 장도 문화를 후
“말이 177개 공정이지 철이 어떤 형태가 나올 때까 손들한테 알리는 장도박물관 건립을 꿈꾸셨는데
지 수천 번을 때리든 수만 번을 때리든 그걸 하나 그 꿈이 실현된 건 2006년도였죠. 아버지께서는
의 공정으로 보니까, 실제 작업 양은 어마어마합니 이 장도박물관 건립에 전 재산을 다 쏟아부으실 정
다. 그리고 모든 공정이 다 중요해요. 칼자루, 칼집 도로 큰 뜻과 애정을 갖고 계셨어요. 아버지의 사
만 잘 만들고 장식은 못한다? 그럼 그냥 못만든 거 재에 더해 정부출연금과 광양시 예산이 들어간 공
죠. 장식은 잘했는데 칼자루, 칼집은 못만든다? 그 공시설이긴 하지만 아버지 평생의 숙원 사업이었
것도 못만든 거예요. 칼날만 잘 나온다? 그것도 못 던 만큼, 장도박물관은 아버지가 뜻한 대로 우리
만든 거예요. 그래서 어느 하나도 소홀함 없이 정 장도를 알리기 위한 전시와 전수 공간으로 운영되
성을 다하고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가장 간단한 고 있습니다.”
장도 하나 만드는 데 보통 나흘이 걸려요. 장도에 현재 박종군 장인이 관장으로 있는 광양장도박물
다가 조각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나전칠기를 관에는 박용기 옹이 14세 때부터 평생 만들어 온
입힌다면 수개월이 걸리기도 하죠.” 각종 장도와 2대 장도장 박종군 장인의 작품들이
수개월이 걸려도 좋으니 찾는 사람만 있다면 좋으 전시되어 있으며, 장도를 만드는 전통적인 공구들
련만, 장도를 필수품으로 여기던 시절은 아주 오 과 장도 작업실의 광경이 재현되어 있다. 체험 학
래전에 가버렸다. 박종군 장인은 장도를 찾지 않는 습 공간도 마련되어 있는데, 이 체험 공간에서 장도
시대에 장도장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고민이 컸던 만들기를 체험할 수 있는 체험 학습뿐만 아니라 칠
때가 있었고, 그것이 광양장도박물관의 건립으로 보 공예, 부채, 도자기 제작, 탁본 교육 등이 이루어
이어졌다고 말한다. 지고 있다. 물론 그중에서도 박종군 장인이 가장 관
“고생길인 줄 알고 시작한 일이긴 하지만 애들이 심을 기울이는 것은 장도에 관한 것인데 배우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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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많지 않다고 한다. 공예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으로만 볼 수는 없지 않
“국가로부터 장도와 관련한 전통문화의 전승·보전 을까. 장인의 땀과 열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아온
을 명받은 무형문화재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우리 가족만큼 그 일의 가치와 중요성을 잘 아는 이도
장도의 홍보와 전수 교육에 힘을 쏟고 있지만, 여 없을 테니 말이다.
전히 우리 장도에 대한 관심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박종군 장인과 같이 미술을 전공한 아내 정윤숙 씨
어쩌면 이런 현실이 우리 가족 모두를 장도장의 길 도 남편의 장도 만드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
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며 장도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1992년도부터 수련
을 쌓아 어느덧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큰
장도장 명맥 잇기 위해 아들 박남중29세 씨도 체계적인 수련을 쌓아 이수
아내와 장·차남까지 이수자 길 걸어 자의 길을 가고 있으며 대학에서 금속공예를 전공
한때 장도장의 명맥이 끊길 뻔한 위기도 있었 하고 있는 둘째 아들 박건영23세 씨도 올해 10월에
다. 희생이 따르는 그 길을 아무도 걸으려 하지 않 있을 이수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았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장도장에만 해당하는 이 박종군 장인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장도 일을 하
야기는 아니어서 공예 분야의 인간문화재 가운데 는 것처럼 누구나 장도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수제자가 직계 가족이 하지만 그 일에 정신을 새기고 담는 것은 누구나
라 한다. 하지만 이를 가족의 희생에 기대어 전통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스승이 하는 것을 새겨 보고 수없이 만들다 보면
장도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도에
정신을 새겨 넣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
죠. 그래서 마음공부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스승에

국가무형문화재 제60호 제1대 장도장이었던 고 박용기 옹 게서 그 정신을 함께 배워야 하는 것이죠.”

때론 혼자서, 때론 협업으로
칼이 아닌 보물을 만들다
박종군 장인은 40여 년 동안 장도장 외길을
걸었다. 그 세월만큼 수많은 장도를 만들었다. 그리
고 그 가운데서 특별하게 여겼던 작업이 있었다.
“20여 년 전 우연히 조선 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비
녀장도를 본 적이 있어요. 은으로 만든 화려한 장
도였죠. 그 유물이 어떤 경로로 가게 됐는지는 모
르지만, 6.25 전후해서 미국으로 흘러 들어갔다가
2000년경에 한국으로 다시 들어온 걸로 아는데,
그 비녀장도를 보여주신 분이 궁중에서 썼던 거라
며 저한테 그걸 사라고 하시는 거예요. 근데 그때
그걸 살만한 형편이 못됐어요. 못 사는 대신 후에
그 비녀장도를 직접 만들어봤죠. 그 작업이 기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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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요. 또 어느 기업의 지원으로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보검을 만들었던 일도 기억에 남네요. 재
현보다는 재창작이라고 볼 수 있는 작업이었죠. 문
헌에는 보검에 대한 것으로 ‘금으로 만들고 옥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재료 정도만 언급되어 있었으니
까요.”
박종군 장인은 ‘금으로 만들고 옥으로 만든 장도’
라 하여 장도를 과거 귀족들이나 사용했던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는 말도 덧붙인다. 물론 귀족이나
왕족의 장도에 비싼 재료가 들어가는 건 맞지만 장
도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백성이 지니고 다
녔다는 이야기다. 박종군 장인이 광양장도박물관 전시품을 소개하며 활짝 웃고 있다.

“장도는 모든 백성이 다 가졌던 건데, 심지어 어


린이들도 장도를 가지고 있었어요. 벙어리장도라
고 해서 칼날이 없는 장난감 장도였죠. 다만 평민
과 사대부의 칼이 달랐을 뿐이죠. 평민들이 가지고
다녔던 칼은 귀금속이 안 들어간 막칼이었어요. 사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 다른 분야 장인들과 교류도
대부가 되어야지만 장도에 은을 사용할 수 있었거 활발하고 다 친합니다(웃음).”
든요. 그래서 사대부가 가지고 다녔던 장도는 칼이 활짝 웃는 박종군 장인에게 끝으로 장도장으로서
아니라 계급을 나타내는 귀한 보석이 되기도 했었 의 바람을 묻자 결혼을 앞둔 신랑·신부에게 장도를
죠. 보석 같은 장도에는 장인들의 협업 작품이 많 선물하고, 성인이 되는 아들·딸에게 의미를 담아
았습니다. 막칼은 그냥 장도장 혼자 만들 수 있지 장도를 선물하는 그런 일들을 일상에서 만나고 싶
만, 지체 높은 분들의 비위를 맞추려면 한 사람의 다는 바람을 전한다. 아울러 장도장이자 현 국가무
기술로는 안 됐으니까요.” 형문화재 기능협회 이사장으로서 무형문화재의 지
지금도 보석 같고 보물 같은 장도를 만들기 위해서 원과 보유자분들의 기능 활성화를 위해 더욱 노력
는 다른 분야의 장인들과 협업하고 교류한다는 게 하겠다는 포부도 밝힌다.
장인의 설명이다.
“예를 들어 화각장도를 만들고 싶다고 하면 칼자루
와 칼집을 가져다가 화각장인한테 의뢰를 해요. 그
러면 협업을 해줘요. 나전칠기는 또 나전칠기 장인
에게 가는 거죠. 저는 철도 다루지만 칼자루, 칼집
뿐만 아니라 장식도 다 만들기 때문에 굳이 협업
을 안 해도 돼요. 하지만 저 역시 기존 작업에 더해
뭔가 새로운 걸 넣어서 장도를 더 발전시키고 싶다
면 무엇을 만들지에 따라서 화각장인을 만나기도
글 이행림 편집팀
하고 나전칠기 장인을 만나기도 하는 거죠. 그것이 사진 김정호 사진작가, 광양장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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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조선 人 LO V E ⑨

허난설헌을 세상에 알린
‘누나 바보’ 허균 창가에 하늘거리는 난초 가지와 잎 그리도 향기롭더니盈盈窓下蘭 枝葉何芬芳
서풍 한차례 떨쳐 일자 가을 서리에 서럽게 떨어지네西風一被拂 零落悲秋霜
빼어난 색깔 시들어도 맑은 향기만은 끝내 죽지 않고秀色縱凋悴 淸香終不死
그 감흥에 내 마음 아파 눈물이 흘러 옷소매를 적시네感物傷我心 涕淚沾衣袂
- 허난설헌, <감우感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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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한 오빠 ‘허봉’ 질타했다. 특히 하늘이 내려준 재능을 억압하는 유교 윤리와 신
<감우感遇>, 이 시를 지을 때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은 제 운 분 질서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생각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
명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을 서리에 떨어지는 향기로 르지 못하는’ 서얼庶孼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운 난초. 그것은 ‘여자는 재주 없음이 곧 덕女子無才便是德’이라는 가 여성의 재능을 귀하게 여기고 이를 세상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
부장 사회의 차가운 편견 속에서 맑은 시향詩香을 뿜어내는 자기 그 출발점은 바로 누나 허난설헌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었다.
자신이다. 16세기 후반에 성리학적 지배 질서가 완성되면서 그녀
의 재능은 다른 수많은 여인처럼 시들어 묻힐 운명이었다. 하지
만 허난설헌에게는 ‘누나 바보’ 허균이 있었다. 남동생이 전한 난
초향의 시는 조선을 넘어 중국, 일본으로 퍼져 나갔다.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이자 이단아였던 허균許筠, 1569~1618은 최초
의 국문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홍길
동전》에서 그는 성리학적 지배 질서의 위선과 모순을 통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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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과 허균 남매는 초당 허엽許曄, 1517~1580의 후처 소생이었 초희와 균은 어려서부터 붙어 다녔다. 6살 연상의 자상한 누나를
다. 허엽은 도학의 큰 스승 서경덕의 제자로서 1576년 사림이 분 철부지 막내가 졸졸 따라다닌 것이다. 글공부도 같이 했다. 두 사
열하자 동인 영수로 받들어졌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가장 람은 당대 최고의 시인 이달에게 시문을 배웠다. 이달은 서얼 출
존경받는 선비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첫 번째 부인 신이라 벼슬길이 막혔지만, 선조 때 당시唐詩 풍의 시로 명성을 떨
청주 한씨에게서 허성과 두 딸을 얻은 뒤 사별하고, 두 번째 부인 쳤다. 이 특별한 과외수업을 주선한 이는 허난설헌의 오빠 허봉許
강릉 김씨와 재혼해 허봉, 허난설헌, 허균을 낳았다. 남매는 당시 篈, 1551~1588이었다. 미암 유희춘의 문인이었던 그는 어린 여동생의
결혼 풍습에 따라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 허엽 문재文才를 알아보고, 막역한 벗 이달을 선생으로 초빙한 것이다.
은 명망 높은 유학자였지만, 성리학뿐만 아니라 원시유학, 장자, 초희는 이미 8세 때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
불교 등 다양한 학문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서경덕 문 어 천재성을 뽐낸 바 있다. 자기가 신선 세계의 궁궐에 초대받아
하의 특색으로 주자 성리학의 정통성만 고집하던 이황·이이 학 그 상량문上樑文; 새 건물의 내력을 담은 글을 썼다는 내용으로 풍부한 상
파와 달리 자유롭고 개방적이었다. 그리고 강릉에는 신사임당의 상력과 번뜩이는 기지가 돋보이는 글이었다. 강릉은 물론 도성에
예와 같이 여성에게 폭넓은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전통이 이어져 까지 소녀 신동이 나왔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허봉은 여동생이
내려왔다. 이런 가풍과 지역색 덕분에 허난설헌은 동시대 여성들 예쁘고 기특했다. 남녀를 떠나 시인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
에 비해 자유로운 교육 환경에서 재능을 키울 수 있었다. 여자들 도록 후원하고 이끌어줬다.
이 별도의 이름을 쓰지 않던 시절 ‘초희’라는 아명까지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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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고 불행했던 규방 시인의 시집살이 한스러운 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여류시인의 삶은 최대 난관에 부딪힌다. 1577년, 허난
설헌은 나이 15세에 한 살 연상의 김성립과 결혼해 시집살이에 들 허균에 의해 ‘조선판 한류스타’로…
어갔다. 《주자가례》가 보급되어 남자가 여자 집에 ‘장가드는’ 데 허난설헌은 죽기 전에 자기가 쓴 시를 모두 태우라는 유언을
서 여자가 남자 집에 ‘시집가는’ 것으로 풍습이 변모하고 있었다. 남겼다고 한다. 방 한 칸 분량의 작품들이 허망하게 불탔다. 그러
시집의 내력은 흠잡을 데 없었다. 5대 연속으로 과거시험에 급제 나 남동생 허균은 사랑하는 누이를 그렇게 보낼 수 없었다. 누나
한 명문가였다. 문제는 가풍이 친정과 사뭇 달랐다는 점이다. 시 가 강릉 친정에 두고 간 시와 자신이 암송하고 있는 시를 합해
어머니는 ‘삼종지도三從之道’의 화신이었다. 여자의 존재 이유는 《난설헌고蘭雪軒藁》를 엮은 것이다.
딸, 아내, 어머니로서 집안을 위해 헌신하는 것뿐이었다. 그이에 허균은 1594년 과거에 급제하며 벼슬길에 올랐으나 관직보다는
게 시인 며느리는 애물단지였다. 여성의 재능을 무시하고 며느리 시 비평가로 명성을 떨쳤다. 그의 말 한마디에 새로운 시인이 주
를 구박하기 일쑤였다. 자유로운 가풍 속에서 성장한 허난설헌에 목받고 문단의 평판이 뒤바뀌었다. 이 ‘누나 바보’는 유력한 사람
게 가부장적인 시집살이는 감옥과 같았다. 남편 김성립도 아내를 들을 만날 때마다 허난설헌의 시를 소개하고 세상에 알리려고 했
살뜰히 챙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고지식하고 무뚝뚝한 선비는 다. 1606년에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과거시험 공부를 핑계 삼아 바깥으로 나돌기만 했다. 어쩌면 규 누이의 시 211수가 담긴 《난설헌고》를 중국에 전했다. 주지번은
방 시인으로 이름을 날리는 아내에게 자격지심을 느꼈는지도 모 북경으로 돌아가 《난설헌집蘭雪軒集》을 출판했다. 이 시집은 한시
른다. 그럴수록 시어머니는 아들의 기를 죽인다고 며느리를 나무 의 본고장인 중국에서 문인들의 격찬을 받으며 날개 돋친 듯이
랐을 것이다. 허난설헌은 외롭고 고통스러웠다. 그것은 여성의 팔려나갔다. 명나라가 망한 뒤에도 청나라 강희제가 찾아볼 만큼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시대와의 불화이기도 했다. 유명한 시집이 되었다. 1711년에는 분다이야 지로가 일본에서 펴
그녀의 마음 풍경은 자신의 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처음에는 내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허난설헌은 조선판 한류스타였
남편을 그리워하며 연시戀詩를 띄웠지만, 점차 가부장 사회에 절 고, 《난설헌집》은 국제적인 베스트셀러였다.
망하여 현실을 외면하는 시로 바뀌어 갔다. 중국을 사대한 조선에서도 그녀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그
엄혹한 가부장 사회에서 규방의 여류시인을 인정하고 추켜세운
보슬보슬 봄비는 못에 내리고春雨暗西池 것이다. 허난설헌의 재능은 실로 하늘이 내려준 것이었다. 그 천
찬 바람이 장막 속 스며들 제輕寒襲羅幕 재성을 오빠와 남동생이 알아보고 도우미를 자처했다. 허봉은 여
뜬시름 못내 이겨 병풍 기대니愁依小屛風 동생에게 당나라 시성詩聖 두보의 시집을 읽히며 규방 시인의 꿈
송이송이 살구꽃 담 위에 지네墻頭杏花落 을 심어주고 후원했다. 허균은 재능을 온전히 펼치지 못하고 요
- 허난설헌, <춘우春雨> 절한 누나를 애틋하게 여겨 세상에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난설
헌蘭雪軒’, 난처럼 청초하고 눈처럼 시린 그녀의 재능은 여성에게
규방 시인의 시름은 가족사의 불행으로 이어졌다. 1580년, 아버 가혹한 시대를 만나 서럽게 꺾였지만, 오빠와 남동생의 ‘남매애
지 허엽이 상주 객관에서 세상을 떠났다. 8년 후에는 최대 후원자 愛’를 양분 삼아 역사의 한 페이지에 오붓하게 꽃피었다.
인 오빠 허봉이 관직을 버리고 방랑하다가 금강산에서 죽었다.
아버지와 오빠의 객사는 친정의 몰락을 의미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끔찍한 불행이 연거푸 그녀를 덮쳤다. 돌림병으로 딸과
아들을 차례로 잃고 배 속의 아이마저 유산한 것이다.
가혹한 운명의 장난 앞에 허난설헌은 목이 메어 피눈물을 흘렸다.
글 권경률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그것이 수명을 단축했을까? 천재 시인은 1589년 27살의 나이로 그림 양예람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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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문화 보 고

민족의 장醬맛 담은 ‘장맛’이라면 ‘순창’


고추장과 된장 맛이라면 이 나라의 으뜸으로

순창장류박물관 순창을 꼽는다. 수려한 산천과 인심이 맞물린 손맛


의 고장이 바로 순창이기 때문이다. 자별自別한 손
순창장류박물관을 찾아 나서던 날, 개망초꽃이 흐 끝에 물맛을 버무려 발효시킨 장류가 그 같은 명성
드러진 들녘은 숨쉬기조차 가뿐하다. 필자의 어린 을 만들었을 것이다.
날엔 ‘풍년초’라고도 불렀던 이 꽃이 언제 지구에 순창은 입구에서부터 황금 된장 빛깔의 금계국이
저리도 풍성했었나. 찰랑찰랑 논물을 담아 모내기 우리를 반기더니 고을 전체가 고추장 항아리를 병
하면서 들밥 먹은 게 엊그제 같은데 빠르도다. 만 정처럼 보초 세운 고추장의 거대 야전장 같았다.
드리 논매기가 눈앞이로다. 길거리 전봇대나 다리 난간마저 옹기 모양으로 조
경할 정도이니, 순창은 과시 ‘대한민국 국가대표
고추장’ 등 장류의 메카가 분명했고, 들어선 ‘순창
장류박물관’은 국내 최초의 장류 테마박물관이란

순창장류박물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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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이 늘어질 만했다. 이 지역 사람들은 고추장만 우리나라의 메주가 중국에 전해져 중국은 종래의
먹나 싶게 나붙은 거리의 홍보 전단도 고추장 일색 장과 전혀 다른 형태의 장을 만들었다. 8~9세기경
이다. 수년 전 순창의 어느 식당에서 할머니 두 분 에는 우리의 장 문화가 일본에도 전해졌다고 한다.
이 차려낸 밥상의 반찬 가짓수가 무려 70가지가 넘 701년에 저술된 일본의 <대보율령>에는 ‘시豉, 메주’
었던 걸 기억한다. 그것들을 젓가락질로 확인하며, 란 용어가 보이며, 771년에 저술된 《봉사일정경고
순창의 장맛에 감탄했었는데 오늘 다시 그 청라언 작해》에는 “콩 5말로 메주를 만들고 소금물에 담가
덕 같은 순창에 와서 장류 문화를 살피게 됐다. 간장 4말 2되를 얻는다”라는 구절이 있어 우리나
한국에서 “음식 맛은 장맛”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라 장 제조와 일치함을 보여준다. 또한 1717년 편찬
아는 말이다. 장맛이 모든 음식을 좌우한다는 말이 한 《동아東雅》에는 “고려의 장인 ‘말장末醬’이 일본에
겠다. 그래서 오래된 종가는 그 가계만의 장맛을 전해져 ‘미소’라 불린다” 하여 우리 장의 전래를 뒷
지켰고 대를 이어 씨간장독을 애지중지했었다. 어 받침한다. 중국에도 우리의 된장, 간장에 해당하는
린 날 시렁 말목에 매달아 숙성시키던 메주 띄우기 함두시와 청국장에 해당하는 담두시, 말린두시인
의 광경은 웬만큼 나이 든 분들은 익숙한 풍경 중 간두시 그리고 숙성 기간이 긴 습두시 등이 있다.
의 하나다. 세월 따라 풍속 또한 변하는지라 메주
띄워 장 담그는 광경이 이제는 한참을 지난 일이지
만, 지금껏 우리의 뇌리를 어른거리는 추억이기도
옹기체험장에 설치된
하다. 고추장독 조형물

중국과 일본에까지 전해진 우리 ‘장 문화’


우리의 괄목할 경제 발전으로 목구멍이 포도
청이라는 말을 넘어 건강을 ‘엄지 척’ 삼는 시대에
들어섰다. 발효 식품이 건강식품으로 주목받는지
라, 예로부터 발효 식품을 상식한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새삼 조명을 받고 있다. ‘으리번쩍’한 과학
문명의 시대에도 우리 음식 문화의 역사라 해도 좋
을 만큼 발효 식품은 이미 《삼국지》나 《위지》 등에
보인 고구려조의 발효 식품 언급과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신문왕 3년’ 메주의 기록 등을 통해 우
리 음식의 유장한 역사가 확인된 터이다.
우리나라의 장류 문화는 콩 재배와 관련이 깊다.
콩 문화의 발상지였던 우리나라는 콩으로 메주를
쑤어 장을 담갔고, 중국의 장 가공 기술을 콩에 접
목해 전혀 새로운 장을 만들어냈었다. 초기의 된
장은 간장과 된장이 섞인 걸쭉한 형태였으며, 삼
국 시대는 메주를 쑤어 몇 가지 장을 담그고 맑은
장도 떴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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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가 한국의 음식 문화에서 발효 식품의 역 특례사항엔 특허출원에 우선 심사<특구법 제36조 8>,
가적力價的 가치는 대단하다. 전통 장류만도 간장, 용지역 변경, 농업진흥지역 해제, 지구단위계획변
고추장, 된장, 청국장 등과 채소 발효 식품인 절임 경 의제처리 <특구법 39조>, 농지전용허가 의제처리
김치류, 어패류 발효 식품인 젓갈류, 주류와 식초 <특구법 제40조>, 식품표시기준 별도 고시<특구법 제43조>
등이 두루 꼽힌다. 등이 있다.
제조 원리가 과학적이지 못한 전통사회에서는 발
효 식품의 맛이 변하기만 해도 귀신이 장난친다고 순창고추장이 자별한 다섯 가지 이유
여겼었고, 산모의 접근이나 상갓집의 출입을 금하 순창고추장의 명성이 커진 것은 태조 이성계
곤 했었다. 우리의 대표 발효 식품인 김치와 된장, 가 순창으로 무학대사를 찾았다가 그때 맛본 고추
고추장 등은 발효 과정에서 활성화 물질을 생성한 장을 진상품으로 올리면서였다고 한다. 고추장을
다. 이 활성화 물질들이 성인병과 항암 효과에도 가장 즐겼던 군주는 정조였다. 입맛이 없을 때는
탁월한 효능이 있다는 것이 속속 보고되면서 ‘발효 고추장에 식사했다는 기록이 《정조실록》에 보일
식품의 산업화’에 진입했다. 바로 그 중심에서 순창 정도다.
은 장류 특구로 선정되어 특례 적용을 받고 있다. 순창의 장류 산업은 ‘진흥’은 물론이고 ‘문화’의 차
원까지를 목표하고 있다. 강천산에서 흘러내린 식
수의 우수성은 순창의 장류 문화가 일찍부터 발달
할 수 있었던 배경을 짐작하게 한다.
장류박물관은 국내 최초라는 자부심과 함께 2007
년도에 장류를 테마로 문을 열었다. 장류박물관에
들어서니 태원애 관광해설사가 손 소독과 마스크
착용을 확인하며 반갑게 맞았다. 곧바로 자세한 해
설이 이어졌는데 순창고추장이 맛이 자별난 이유
를 다섯 가지로 압축하여 설명했다. 첫째는 자연조
건으로 물과 기후가 적합하다. 실제로, 순창의 날씨
는 연평균기온 12.4도, 습도 72.8%, 안개일수 77일
로 발효에 최적이다. 둘째는 발효균이 풍부하여 숙
성과정에서 미생물의 활동이 활발하다. 셋째는 고
추장 메주를 다른 지방과 달리 멥쌀과 콩을 혼합

1 하여 도넛 형태로 제조한다. 넷째는 고추장 메주를


음력 처서 전후8월 말~ 9월 초에 띄우고 동짓달 중순에
서 섣달 중순 사이에 담근다. 다섯째는 섬진강 상
류의 맑은 물과 기름진 토양에서 생산된 고추, 콩,
찹쌀 등 최적의 재료를 사용하는 것 등이었다.
박물관은 3개의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로 이
루어져 있었다. 제1공간에는 우리나라 장류의 유
1 순창고추장 메주 작업 모습
2 2 장독 속 순창고추장 래 및 역사를 소개하였고 제2공간은 장 담그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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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삿갓 모양의 김치냉장고 황금빛 콩, 붉은 고추, 메주와 발효, 오감체험과 장
4 장류박물관 멧돌 체험 모습
5 고추장독 운반수레 담그는 풍경 등을 그림으로 전시하고 있다. 제3공
간은 세계 여러 나라의 소스 전시를 통해 우리나라
장류의 우수성이 비교되어 있었다. 기획전시실은
유물과 문헌 사료를 통한 장류의 유래와 순창의 향
토사를 전시하는 공간이었다. 사라져 가는 향토 민
속자료 및 장류 관련 유물 1,258점을 전시하는 박
물관을 통해 전통 장류의 맥을 이해할 수 있었다.
또 다양한 기획 전시로 전통문화 보존 및 계승에
핵심 역할을 수행하며, 장류의 역사, 장 담그는 법,
3 모형을 통한 순창고추장 소개, 대형 고추 속 어린
이 애니메이션 상영, 순창 초가, 장류 관련 민속 유
품 등 70여 점의 소상한 소개가 인상적이었다. 특
히 전시공간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지금의 김치냉
장고와 같은 삿갓 모형의 김치냉장고였다. 땅을 파
서 김치 항아리를 묻고 그 위에 움집을 지어 서늘
하게 보관하는 방식이었는데, 거기에서 김치 냉장
4
고가 개발된 셈이니, 새삼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놀랍다.

맛과 영양 만점 우리만의 식품, 고추장


고추장은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
든 우리만의 식품이다. 맛과 영양도 특출나 단백
질·지방·비타민B2·비타민C·카로틴 등 우리 몸에
5
유익한 영양성분을 다수 함유하고 있다. 최근의 연
구 결과에 따르면 비만 방지에도 그 효과가 탁월한
것으로 나타났다.
관람을 마치고 박물관을 나오는데 학예사가 친절
순창장류박물관
하게도 봉숭아 모종을 선물로 주었다. 새삼 순창의
문의 063) 650-1627
인심을 느끼며 강천산에 들렀다. 강천산은 입구부
주소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장류로 43
터 맑은 물이 흐르고 숲 그늘에 들어서니 금방 흐
시간 하절기(3월~10월) 9시~18시
동절기(11월~2월) 9시~17시 르던 땀이 걷혀버렸다. 순창은 강천산 계곡물 같은
문화가 있는 날(매월 마지막 수요일) 개관 2시간 연장 인심이 누룩처럼 잘 발효된 따뜻한 고을이라는 생
휴관 매주 월요일, 1월 1일
각을 하며 차를 몰았다.
관람료 무료
※ 코로나19 재확산으로 휴관 조치 되었으며 재개관 시점은 글 김종 시인, 화가
추후 정해질 예정입니다. 사진 김종, 순천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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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마당 ㅣ 오! 세이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예감豫感’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암시적으로


또는 본능적으로 미리 느낌’이라고 돼 있다. ‘예감’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은 가을이다. 봄 예감, 여름 예감, 겨울 예
감보다 가을 예감은 맞춤옷처럼 잘 어울린다. 그만큼 가을은 지
상의 모든 이들이 기다리는 계절이다. 짧지만 강렬하고, 아름답
고, 감성적인 계절이기 때문이다.

‘여름은 벌써 가버렸나 / 거리엔 어느새 서늘한 바람 / 계절은 이 ‘그리움이 눈처럼 쌓인 거리를 / 나 혼자서 걸었네. 미련 때문에
렇게 쉽게 오고 가는데 / 우린 또 얼마나 어렵게 사랑해야 하는지 / 흐르는 세월 따라 잊혀질 그 얼굴이 / 왜 이다지 속눈썹에 또다
/ 나뭇잎 사이로 여린 별 하나 / 그 별빛 아래로 너의 작은 꿈이.’ 시 떠오르나 / 정다웠던 그 눈길 목소리 어딜 갔나 / 아픈 가슴
조동진, <나뭇잎 사이로> 달래며 찾아 헤매이는 / 가을비 우산 속에 이슬 맺힌다.’
최헌, <가을비 우산속>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밥 딜런Bob Dylan에 비유되는 조동진은


가을을 이렇게 예감했다. <행복한 사람>부터 <제비꽃>, <겨울 비 오는 봄날에 박인수의 <봄비>가 있다면 가을비 내리는
비>, <흰 눈이 하얗게> 등 그의 노래들은 시인의 감성을 뛰어넘 날엔 최헌의 <가을비 우산속>이 있다. 최헌이 1978년 발표한 4
는다. 이 노래에서도 시적인 감성으로 가을을 읽고 있다. <나뭇 집 솔로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최헌은 허스키한 목소리의 매력
잎 사이로>는 1980년 발매한 2집 앨범 수록곡이었다. 그가 기타 에 ‘뽕 끼’가 가미된 이 노래로, 1970년대 말 방송사의 10대 가수
리스트 겸 작곡가로 활동하던 그룹 ‘동방의 빛’ 멤버였던 강근식, 상을 휩쓸면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보면
배수연, 조원익, 이호준 등이 함께 참여했다. 이 앨범은 당시 밀리 대중들을 매료시킨 ‘허스키 보이스’의 매력이 오랜 밴드 생활에
언셀러가 되면서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도화선이 됐고, 서 우러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1970년대 당시 최고 인기를
조동진은 얼굴 없는 가수의 효시가 됐다. 가을비라도 추적추적 누리던 밴드 ‘히식스He6’에 스카우트돼 보컬과 기타리스트로 활
내리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노래도 있다. 약하면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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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편지라는 단어가 낯설기까지 한 시대지만 가을 하늘이 높 자신의 낯을 비추어보며 추억을 빨래하고 있는 가을 저녁입니다
아지기 시작하면 생각나는 노래도 있다. 가을을 여는 노래로 이 // 잉걸불처럼 타들어 가는 개심사 배롱낭구 꽃잎에는 어느 먼 옛
만한 노래가 있을까 싶다. 날 백제 처녀의 마음도 하나 들어 있을 테지요 / 저녁 예불을 드
리던 개심사 범종 소리는 서른두 번째에서 한참을 머뭇거립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 / 마지막 종소리는 가을 저녁寺로 불어오는 바람에게나 내어주
낙엽이 쌓이는 날 /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고요 // 가을 저녁寺에 호롱불이 돋는 地上의 유일한 저녁입니다.
고은, <가을 편지> (하략)’
박정대, <가을 저녁詩>

어느 겨울날 동숭동의 막걸릿집 술자리에서 고은과 대중음


글 오광수 시인, 대중문화평론가
악평론가 최경식당시 이화여고 음악 교사이 마주 앉아 술을 마셨다. 거
나하게 취한 고은이 즉석에서 <가을 편지>를 썼다. 이 시에 당시
서울대학교 미대에 재학 중이던 김민기가 곡을 붙였다.
여하튼 이 가을, 편지 한 장 쓰는 일은 생경한 일이 되어 버렸다.
페이스북을 쓰거나 메일을 쓸 수는 있지만, 특히 신세대에게 편
지지에 편지를 써서 가을 우체국 빨간 우체통에 집어넣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긴 조용필의 노래 <서울 서울 서울>에 나오
는 ‘베고니아 화분이 놓인 우체국 계단, 누군가에 엽서를 쓰던 그
녀의 고운 손’도 구문이 되었다. 최백호가 부르는 <내 마음 갈 곳
을 잃어>는 마음을 뒤흔드는 가을 노래다.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 낙엽 지면 서러움이 더해요 / 차라리 하


얀 겨울에 떠나요 / 눈길을 걸으며 눈길을 걸으며 / 옛일을 잊으
리다 // 거리엔 어둠이 내리고 / 안갯속에 가로등 하나 / 비라도
우울히 내려 버리면 /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최백호,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나이 들어서 노래가 깊어지는 가수를 딱 한 사람만 꼽으라면


단연 최백호다. 젊은 최백호가 겉절이처럼 싱그럽게 노래를 했다
면 지금의 최백호는 묵은지처럼 웅숭깊게 노래한다. 그의 노래가
자주 들려온다면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는 신호다.
박정대 시인의 <가을 저녁寺>는 고요한 가을 저녁에 어울리는
시다. 밤새 귀뚜라미 소리에 젖은 마음이 너무 무거워지고, 바지
랑대 끝에서 희게 펄럭이는 빨래들이 눈부시다면 그냥 이 가을에
흔들려도 좋으리라.

‘나는 걸어서 가을 저녁寺에 당도합니다 // 한 사내가 물거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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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당 ㅣ 있다 , 없 다 ?

LP판을 처음 만져 본 건 어린 시절 우리 집 다락방에서였다. 원래 다락방에는 오래된 신기한 것들이 많은 법.


초등학교 1, 2학년쯤 되었을까. 다락방 한쪽 귀퉁이에 빨간색 나일론 줄로 묶여있는 한 무더기의 물건을 발견했다.
호기심에 줄을 풀었고 쌓인 먼지를 털어낸 뒤 물건을 꺼냈다. 반짝반짝 빛나는 검은색에 토성 띠 같은 무늬가 있는 LP판.
우주선에서 쓸 것만 같은 물건이었다. 아마 그때 <스타워즈>에 빠져 있어서 그런 상상을 했는지 모른다.

과 전축의흥
P판 망
L


바이
닐과 부활
턴테이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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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뛰게 했던 새로운 모습으로
LP판의 추억 다시 유행하고 있는 LP판
세계문학전집 50권 옆에 쌓여있던 그 LP판은 오랫동안 펴 기타를 배우러 떠났던 스페인 세비야의 어느 봄날. 낯선 곳
보지 못한 책처럼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에서 이제는 좀 적응이 되었다 싶었을 때 동네 서점을 들락거리
땐 이미 음악을 테이프와 시디로 듣는 시대였고, 전축은 거실에 게 되었다. 꽤 널찍한 동네 서점의 한쪽은 LP판으로 가득했다. 그
서 사라져가던 시절이었다. 다락방에서 발견한 LP판, 그 30㎝가 곳의 LP판은 유물이 아니었다. 콜드플레이부터 제이슨 므라즈,
조금 넘는 정사각형은 나에게 커다란 사진첩이고 스케치북이었 The XX까지. 우리 시대 뮤지션들의 시원한 표지가 베스트셀러
다. 조금 촌스러운 옷을 입은, 기타를 들고 있는 형아들의 모습은 처럼 펼쳐져 있었다. 시디의 3~4배 가격이었지만 잘 팔린다고 했
멋지다기보다는 뭔가 유물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그 큼직한 사진 다. 여기서 턴테이블을 다시 사야 하나. 그러고 보니 홍대 앞에서
과 활자가 여느 책의 모습과는 달라서 그랬는지 한 장 한 장 펼쳐 활발히 활동하는 음악가들도 한 장씩, 두 장씩 LP를 내기 시작했
보는 게 좋았다. 다. 한때는 나도 콘서트를 같이 기획하던 회사로부터 LP판을 내
LP판을 다시 만난 건 친구 집에서였다. 친구의 형은 레코드판을 볼 생각이 없냐는 제안을 받았다. 동부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LP
모으고 있었다. 어느 날 형이 전축 앞에서 하나씩 꺼내서 조심스 를 찍는다고 했다. LP판에 관심은 많았지만, 열정이 조금 모자랐
럽게 닦고 있었다. 다락방의 색바랜 종이 커버만 펼쳐보다가 화 었는지, 마음속으로 누가 요즘 LP를 듣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는
려한 표지의 LP판을 만나니 자꾸만 눈이 그쪽으로 갔다. 다행히 지 일이 잘 진행되지 않았다. 그때 잘 만들었으면 나도 LP판을 한
그 형은 나의 관심에 화답하듯 표지 사진 설명과 함께 몇 곡을 들 장 낸 음악가로 기억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려줬다. LP판에 바늘을 올려놓던 형의 조심스러운 손이 기억난 2020년, 다시 유행하고 있는 LP판. 이제 ‘바이닐Vinyl’이라고 부른
다. 나중에 알았지만 검은색이 가득했던 표지의 그 가슴 뛰는 음 다. 전축도 ‘턴테이블’이라고 심플하게 디자인되어 공간도 적게
악은 엔니오 모리코네의 <원스 어펀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차지하고 예쁘기에 곳곳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2001년생 미국
upon a time in America> O.S.T였다. 나중에 시디로 사서 많이 들었지 가수 빌리 아일리시도 신곡을 내면 바이닐을 꼭 낸다. 얼마 전에
만 그때의 LP판만큼 내 가슴을 뛰게 하진 못했다. 본 영화 <라라랜드>의 O.S.T 바이닐은 검은색이 아니라 푸른빛
LP판은 22분밖에 음악을 담을 수 없는 대신 뒷면도 사용이 가능 이 도는 컬러판이었다. LP판도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하다. 에이(A) 면과 비(B) 면이 있어 한 면의 음악이 끝나고 티딕 요즘은 어차피 시디를 사는 사람들도 적어지다 보니, 바이닐 판
티딕 소리를 내며 헛돌고 있을 때 조용히 바늘을 올리고 판을 뒤 매량이 시디 판매량을 앞섰다는 기사도 나오고 있다. 어쩌면 이
집는다. 그러면 또 새로운 분위기의 곡이 시작된다. 에이(A) 면과 제는 시디보다는 바이닐을 기억하는 새로운 세대가 많아지지 않
비(B) 면으로 앨범을 구성하던 시절에는 두 번의 시작이 필요했 을까. 지금 여덟 살인 딸아이가 고등학생쯤 되면 “아빠, 시디가
던 셈이다. 하지만 이제는 음악가들도 시작 곡을 무엇으로 해야 뭐야? 작은 바이닐 같은 거야?”라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고, 팬들도 뒷면을 듣기 위해 자리를 지키 흥망성쇠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은 것 같다.
고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 나는 아주 가끔 두 번의 시작이 필요 1분에 45바퀴를 도는 회전목마에 타면 어떤 기분일까? 그건 아
했던 그때를 떠올리며 향수에 젖곤 한다. 마도 우주에 있는 기분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또 이
글을 쓰며 어린 시절 다락방에서 생각했던 그 우주가 내 음악과
우주에 대한 관심의 시작이 아니었을까를 생각해본다. 그리고 좀
갑작스럽지만, 엔니오 모리코네를 추모하며 LP판을 통해 들었던
그의 음악을 다시금 떠올려 본다.

글 피터 김용진 경주신촌서당 대표. 음악가

63
우리마당 ㅣ 칼럼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문화기획
코로나19로 사람들 사이에 ‘접촉’은 하지 않으나 ‘접속’은 증가하
는 양상이 두드러졌다. 나는 이를 ‘비접촉 다접속’ 현상이라 부른
다. 일상적으로 소통은 줄지 않고, 소외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
임이 늘어났다. 일에서도 재택근무와 원격사무의 시대가 온다.
온라인 활동이 강화된다. 온라인 활동의 앞뒤로 새로운 풍토가
펼쳐진다.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데, 밀레니얼 세
대 이후 ‘코로니얼Coronial’ 세대가 나타난다고 말하기도 한다.

변화를 예민하게 보는 일 역설적으로 모임과 만남이 가치를 발하는 시대


사람들은 마스크를 쓸지언정 만나기를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그동안 오프라인을 받치는 것이 온라인이었다. 지금 사람들은
마스크, 머플러, 안경, 모자 등 우리를 꾸미던 것들이 변할 것이다. 오프라인을 갈아치운 온라인만 남을 것처럼 걱정하곤 한다. 하지만
디자인이든 기능이든 사용 방식이든 말이다. 2미터씩 떨어져 앉고, 오프라인은 여전히 중요할 수밖에 없다. 실제 모임과 만남을 가치
악수와 포옹을 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약품을 들고 다니며 쓰거나 있게 생각하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불변한다면, 온라인이 주가 되
어디서나 손을 씻고, 텀블러를 들고 다닌다. 화장실, 대합실, 카페 등 는 시대에도 그것을 받치는 것으로 여전히 오프라인이 그 진가를 발
의 풍경도 바뀔 것이다. 휘하든지, 온라인은 오프라인을 촉진하고 지원하기 위해 더 효과적
이것을 디자인이나 패션의 변화로 봐도 좋다. 전체적인 라이프스타 으로 쓰는 소통 수단이 될 수밖에 없다.
일도 달라진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사람들이 낮보다 밤을 누리게 했 모두 느끼다시피 온라인으로 모든 것이 이뤄지지만은 않는다. 소통
었다. 스마트폰을 쓰면서 페이스북 메신저는 밤에 보내도, 카카오톡 의 피로도가 쌓이고, 유대와 환대의 감각이 줄어든다. VR가상현실·AR
채팅은 밤에 쓰지 않아야 하는 것이 예의가 되었다. 코로나19 사태 증강현실 기술이 발전하여 우리의 모니터는 실제 눈으로 보는 것 같은
이후, 낮에만 일하는 예절과 밤에는 자신을 위해 투자하는 풍속이 임장감臨場感과 박진감을 주게 되었지만, 여전히 오프라인의 감성적
생길지, 그 반대가 될지, 아니면 밤낮이 구분되지 않는 풍습이 번질 소통 없이는 되는 일이 없다. 기능은 좋으나 효능감이 적어진다. 온
지, 그 변화를 두고 볼 일이다. 라인이냐 오프라인이냐 여부가 아니라, 디지털인지 아날로그인지
문화기획은 이런 생활상을 관찰하고 예민하게 찾아내어 일상 속의 선택이 아니라, 온라인을 하면서 어떻게 아날로그가 되도록 할 것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체험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포스트 코로나 인지, 제한된 오프라인을 돕는 디지털을 어찌 슬기롭게 만들어갈지,
시대의 문화기획은 사이버 소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 매개체 바로 그런 태도가 형성될 것이다.
를 이용하여 더 매력적인 소통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를테면 디지 문화기획은 관찰과 성찰 두 가지를 통해, 시민 혹은 대중에게 공감
털 원격 실무로 뚝딱 만들어내는 오프라인 행사, 누구도 소외되지 을 끌어낼 수 있는 서비스 혹은 콘텐츠를 제시해야 한다. 결론은 간
않고 더 효과적으로 소통하는 축제, 개별 오디션으로 응시하는 것이 단하다. 오프라인 모임의 격조와 값어치가 높아질 것이다. 고급스럽
아니라 스마트폰을 활용한 공동 작업을 촉진하는 방식으로 변모하 고 희소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이런 성찰에 도달했다면
는 공모 사업 같은 것을 창조하는 일이다. 당연히 시대를 앞선 문화기획자는 시민이나 대중이 이에 맞게 소통
하고 또 감동할 만한 프로그램, 혹은 프로덕트를 제시할 수 있다.

64
큰 모임 대신 작은 것, 공식적이기보다는 비형식적인 모임, 격식 함께 만들어간다고 느껴야 좋은 문화기획이다.
을 갖추기보다는 개방적이고 공개적인 데 주목하여 모임을 조직하 코로나19만이 아니라 ‘혼술’, ‘혼밥’ 하는 일인 가구의 증가 현상, 비
는 것이 가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바로 그런 살롱Salon과 개더링 혼으로 자신의 삶을 찾지만 외로움은 늘어가는 세태, 시간이 없거나
Gathering, 소사이어티Society를 시도하는 것이 날이 선, 문화기획이다. 돈이 없거나 하여 친구를 만들 수 없는 시대, 복지와 사회 보장만으
사람들을 동원하는 포럼이나 세미나, 심포지엄과 워크숍 같은 전시 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을 민간에서 기꺼이 시민운동이나 자원 활동으
적 행사보다 정서적 교감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동아리와 사랑방을 로 만들어내는 시대를 감지하고 예견해야 한다. 문화기획자들은 이
만들고, 으레 하는 관행적 행사보다는 감성을 자극하고 깊이 교감하 런 세대와 경향에 맞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
는 커뮤니티, 정신적이고 사회적 가치를 단단히 이어주는 네트워킹 언택트Untact 시대에 맞추어 생활의 향유방식, 여가의 향수 방식을
같은 것이 중요해진다. 마치 시디의 보급에 LP가 사라졌다가 최근 바꾸어주어야 하지만, 한편으로 문화기획의 기본개념은 달라지지
부활하여, 다시 아날로그 감성을 줄 수 있고 훨씬 격조 있는 아이템 않는다. 문화기획자는 문화 콘텐츠만이 아니라 다양한 정서적인 서
으로 자리매김했듯 말이다. 비스를 만든다. 예술작품만이 아니라 폭넓게 문화적 체험이라 부르
는 것, 정서적으로 향유하고, 감성적으로 향수하는 프로덕트, 의식
변화 앞에서 문화기획자가 할 일 주와 연관된 일상생활 속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것은 모두 문화기획
문화기획은 시대의 변화를 잘 감지해야 한다. 부상하는 추세를 이다.
읽고 지배적인 경향을 파악해, 대중과 시민에게 가장 필요한 것, 가 정서적 충족에 초점을 맞추고, 이왕이면 정신적 가치를 가진 것을
치 있는 것을 찾아 제공해야 한다. 그런 비즈니스를 통해 사람들이 제시하기만 한다면 어떤 전달 매체와 표현 수단을 쓰더라도 문화기
누릴 만한 삶, 즐길 만한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이 제대로 된 문화기 획이다. 문화를 활용한 여가나 복지를 제공 받았다고 느끼게 하고,
획이다. 문화적인 것 중에서 향유 거리와 향수할 것들을 감각적으로 이를 통해 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나아가 사회적
찾아내는 데에서 문화기획은 시작한다. 가치가 있는 것을 체험하고 있다고 느껴야 한다. 자기존중감이 높아
무엇보다도 시민과 대중이 체험하고 학습하면서 직접 실천할 수 있 지거나 사회적 결속이 증가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코로나19 이후
는 것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 활동을 통해 시민과 대중이 성장하 언택트 시대라고 예외는 아니다.
고 소통하게 만들고, 무엇보다도 참여자들이 실제로 가치 있는 것을
글 안영노 안녕소사이어이티 대표
몸소, 스스로 만들어간다고 느껴야 한다. 그리고 참여한 사람들과 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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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당 ㅣ 북한 사 회 문 화 읽 기 ⑲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증이하 ‘코로나19’의 팬데믹 상황이 9개월째 계속되고 있다. 코로나
‘전민 과학기술 인재화’를 목표로 19의 창궐은 사람들 간의 접촉을 꺼리게 만들어, 기존의 생활 패
턴을 온통 뒤바꿔 놓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대다
원격교육에 힘 쏟는 북한 수 사업의 매출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인터넷 쇼핑이나 온라인 교육과 같은 비접촉언택트; Untact 사
업들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온라인 교육을 북
한에서는 ‘원격교육일명 ‘가상교육’이라 하는데, 2010년 처음 도입
당시에는 ‘먼거리교육’이라 부르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서도 ‘원
격’이라는 용어는 ‘온라인’과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원격교
※ 이 글의 인용문은 북한 맞춤법 규정에 따라 표기한 것으로 우리나라 맞춤법
규정과 다를 수 있습니다. 육, 원격수업, 원격의료, 원격진료 등이 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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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격교육의 목표가 된 ‘전민 과학기술 인재化’
북한에서 원격교육을 처음 시작했고, 오늘날에도 시스템, 재
학생 수, 교수 수준 등 모든 면에서 가장 앞서 나가고 있는 대학
은 평양에 있는 김책공업종합대학 원격교육학부구 원격교육대학이다.
북한 언론매체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2010년 2월 김정일이 김책
공대에 원격교육대학당시을 신설하도록 지시했고, 그해 10월 황
해제철련합기업소보통 ‘황철’이라 줄여 부름 근로자제대군인들 40명을 대
상으로 원격교육이 시행되었다. 김책공대 원격대학은 이후 몇 년
사이에 크게 확대되어, 김정숙평양제사공장, 천리마제강련합기
업소를 비롯한 수천 개의 각지 공장과 기업의 수만 명의 근로자
가 고등교육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김책공대는 2015년에 백여 명의 제1기 원격대학 졸업생들을 배
출했고, 2020년 현재까지 6기에 걸쳐 942명이 대학 과정안을 마
쳤으며, 현재 북한 전역에 2만여 명의 학생을 두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재학생들과 졸업생들 속에서는 박사, 석사도 나오고, 발명
가, 창의고안 명수名手들도 계속 배출되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에
는 김책공대 외에도 김일성종합대학2018년 2월 첫 졸업생들 배출, 평양건
축종합대학, 평양기계종합대학, 평양출판인쇄종합대학, 김형직사
1 김책공업종합대학 원격교육대학(당시) 2015년 모습
2 김책공업종합대학 원격교육학부 2020년 모습 범대학, 김철주사범대학, 함흥화학공업종합대학, 평성석탄공업대
학, 원산농업종합대학 등 많은 대학에서 원격교육대학을 운영하
고 있다.
북한에서 원격교육이 지향하는 목표는 ‘전민全民 과학기술 인재
화’라는 구호로 표현할 수 있다. 원격교육을 통해 북한의 전체 근
로자들을 과학기술 인재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물론 정보기술,
외국어, 기업관리, 예능 관련 학과들도 설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원격교육의 중점은 어디까지나 실용성이 큰 과학기술 분야에 두
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원격교육의 목표가 된 ‘전민 과학기술
1
인재화’는 김정은이 담화를 통해 과학기술 중시 기풍을 강조하면
서 하나의 구호로 제시한 것이다. 한편 원격교육체계를 ‘전민학
습체계’라고도 하는데, 이 또한 김정은이 2013년 6월 초 평양기
초식품공장을 현지 지도하던 중 공장 원격강의실에 들렀을 때 명
명한 것이다.

2019년부터 평성의학대학, 수술 화상 원격교육실 운영


≪조선의 오늘≫2016.7.28.은 평양기초식품공장 원격강의실을
2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하루 일을 끝낸 공장의 종업원들은

67
원격강의실에서 콤퓨터를 통하여 김책공업종합대학에서 진행하
는 강의를 받고, 잘 모르는 문제들은 음성과 화상을 통하여 물어
도 보고 시험도 치면서, 교육의 전 과정을 마치게 된다. 앞벽에 있
는 대형TV 화면에는 김책공업종합대학의 원격교육체계 《리상》
홈페지홈페이지가 그대로 현시되어있다. 대학에서는 매 학생별로
강의 받은 정형情形, 구체적인 형편이나 상태, 과제 수행 정형, 자체시험
에 응시한 정형과 과정안 집행 정형을 평상시 성적과 함께 소개
해 주고 있으며, 특히 학생들의 학습 정형을 순위를 갈라 매일 사
3
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학생들이 자기 진도가 정상진도보다
앞섰는지 뒤떨어졌는지, 학급 진도에 비하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면서 학습할 수 있도록 시스템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김책공대를 중심으로 원격교육체계시스템와 프로그램의
개발을 위해 노력해 왔다. 핸드폰손전화기에 의한 원격교육체계는
2016년 상반기에 개발했는데, 이동통신망에 의한 원격교육체계
가 확립되면서부터 많은 사람이 스마트폰지능형 손전화기뿐 아니라
4 태블릿PC판형 콤퓨터, 노트북PC휴대형 콤퓨터를 비롯한 각종 단말기

3 컴퓨터망을 통해 원격교육대학 강의를 받고 있는 근로자들 를 이용하여 어디서나 강의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4 김책공업종합대학 원격교육대학 학생들
2016년에는 또한, 학생들이 강의하는 교원의 모습과 칠판, 직관
물直觀物, 그림, 도표, 모형, 도식 등, 교편물 등 필요한 대상을 선택하는, 다
시 말해 강의를 받는 학생 위주의 실시간 강의 및 질의응답 체계
를 개발했다. 기술적 난제를 극복하고 1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개발한 이 원격교육체계는 학생들이 교실에 앉아 강의를 받는 것
과 같은 실감을 주어 교수敎授의 효과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이어서 2018년에 동 대학은 “원격교육체계 《리상》을 더욱 갱신
하여 교수사업에 구현하고, 원격시험체계와 실시간 강의 및 질의
응답체계 프로그람 등을 포함한 학업진행 관리프로그람 《도약》
을 새롭게 개발하여, 이를 전국의 각 대학들에 도입했다”≪조선의 오
늘≫, 2018.12.22.. 또한 2019년에는 “먼저 학생들이 망네트워크을 통하
여 강의를 받은 즉시에 자체로 시험을 치게 한 다음, 학생들의 인
식 정형을 료해하고 부족한 지식이 무엇인가를 자동적으로 분석
하여 필요한 학습자료를 제공해 주는 교수관리체계”를 새로 도입
했다≪로동신문≫, 2020.5.20..
2020년 올해에도 “원격지능교수관리방법을 실현하고 증강현실
기술을 도입하여 원격강의안의 수준을 한 계단단계 높인 것”≪조선
의 오늘≫, 2020.5.4.을 비롯하여, “학부들과 과학기술전당과의 긴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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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계 밑에 수백 권의 도서와 맞먹는 방대한 교수자원을 구축했으며, 에는 원격교육대학에서 “근로자들은 기계, 건설, 금속, 화학, 의
학생들이 망을 통하여 서로 토론과 론쟁을 할 수 있게 원격교육 학, 경공업, 정보기술, 외국어, 기업관리, 예능에 이르기까지 희망
홈페지에 새로운 기능을 보충하였다.”≪로동신문≫, 2020.5.20., ≪류경≫, 하는 모든 과목들에 대한 원격강의를 무료로 받으며, 현대 과학
2020.5.22. 기술을 마음껏 배우고 있다”고 북한은 선전하고 있다≪조선의 오늘≫,
≪로동신문≫2020.5.30., 7.11.은 올해 김책공대가 아닌, 강계교원대학 2017.9.18..

1.0판과 리계순사리원사범대학2.0판이 새로운 원격교육 지원프로그 최근 북한은 원격교육에 대한 소개·선전을 크게 강화하고 있다.
램인 ‘비직결식 학습지원체계’를 개발했다고 보도했다. 과거에는 원격교육에 관한 언론 기사는 2016년부터 2019년까지만 해도 매
보통 미래원각 시·도의 과학기술지식보급 기지이나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 년 2~4건에 불과했으나, 2020년에는 1월부터 7월 말까지 9건이
의 과학기술 보급거점을 비롯한 정해진 곳에서만 원격교육을 받 검색되었다. 북한이 최근 들어 원격교육에 힘을 쏟고 있는 것은,
을 수 있었는데, 이들 대학에서 개발한 프로그램을 도입하면 농 멀리 보면 사회주의 문명국 건설을 목표로 4차 산업혁명 시대, 정
촌 지역, 산간지역의 교원들이나 학생들도 원격교육을 아무 때나 보산업 시대, 지식경제 시대라는 세계사적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에 앞서 작년에는 평성의학대학이 수술 으려는 노력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각을 보다 좁힌다
화상 원격교육실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평안남도인민병원의 수 면 당의 “전민 과학기술 인재화 방침”을 통해 자력갱생을 도모하
술실들과 손소독실들, 조산원의 수술실과 망으로 련결되여, 수술 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북한은 산업 현장에 직접 도
시간에 강의를 조직하고 학생들에 대한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움을 주는 실용 교육에 중점을 두고, 이미 대학을 나온 과학자, 기
≪조선의 오늘≫, 2019.8.18. 술자, 교육자들에 대해서도 재교육 차원에서 원격 교육을 실시하
이보다 앞서 2016년에는 고급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고 있다.
대학에 직접 가지 않고서도 대학입학시험을 치는 원격시험체계 일반대학 운영에 비해 비용 차원에서도 장점이 많은 원격교육을,
를 시범 도입했다. 선발된 학생들이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 북한은 장애인 등 누구나 시간과 장소의 제한을 받지 않고 고등
합대학, 평양건축종합대학, 평양기계종합대학 등 평양에 있는 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우월한 교육체계로 보고 있다. 최근 신종 코
학들은 물론, 북단에 있는 라진해운대학과 동해에 있는 정준택 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창궐은 원격교육의 장점을 더욱 부각하
원산경제대학에 이르기까지 수십 개 대학에 직접 가지 않고서도 고 있다. 북한도 이러한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
입학시험을 치르게 된 것이다. 2017∼2018학년도 대학입학원격 다. “김책공업종합대학 학부에서는 세계적인 대재앙을 초래하고
시험에는 전년도에 비해 근 2배에 달하는 단위들이 참가하여 그 있는 신형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전파에 대처하여 전국 각지
범위가 더욱 확대되었다고 한다. 북한당국도 “나라의 교육 발전 에서 비상방역사업이 벌어지는데 맞게 원격교육을 더욱 발전시
을 힘 있게 추동할 수 있는 법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하여” 지난 키는데 힘을 넣고 있다.”≪로동신문≫, 2020.5.20.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3차 회의2020.4.12.에서 법령 <조선민주주
의인민공화국 원격교육법을 채택함에 대하여>를 만장일치로 채
택했다.

북한, 원격교육을 우월한 교육체계로 인식


북한에서 근로자들이 일하면서 배우는 고등교육체계는 전
쟁이 진행 중인 1951년 7월 15일 첫 공장대학이 창설되면서 시작
되었다. 그 후 1979년 12월 신포에 첫 어장대학이, 1981년 11월 청
산리에 첫 농장대학이 창설되었고, 1980년대에 공장대학은 근
글 오양열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초빙석좌연구위원
100개로 늘어났다고 한다≪류경≫, 2020.4.8.. 시대가 바뀌어 오늘날 사진 《조선의 오늘》, Flickr(@조선의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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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 MON TUE
1
CA LENDA R
문 화 달 력 2020 09
[대구 달서구문화원] 제2회 달서구문화원
[충북 충주문화원] 제46회 탄금대기차지
[충북 충주문화원] 제46회 충청북도 학생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학산백일장 접수
[광주 서구문화원] 제10회 빛고을 문예
[경기 의왕문화원] 제20회 백운서예문인화
■ [인천 연수문화원] ‘백제사신길을 따라서’
·‘연수시티투어’·‘2020 전통혼례식’ 참가자
접수(전화 및 방문 선착순, 10:00~)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미추홀 길잡이
■ [인천 연수문화원] 공동체 민주시민교육
(온라인강의)

6 7 8
[대구 달서구문화원] 제2회 달서구문화원 UCC 공모전 접수
[충북 충주문화원] 제46회 탄금대기차지 나라사랑 웅변대회 UCC공모전 작품 접수
[충북 충주문화원] 제46회 충청북도 학생 백일장 및 사생대회 공모전 작품 접수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학산백일장 접수
[광주 서구문화원] 제10회 빛고을 문예 백일장 접수
[경남 함안문화원] 제1회 아라가야전국서화대전 작품접수
[충북 충주문화원] 제30회 김생전국휘호대회 공모전 작품 접수
■ [인천 연수문화원] ‘돗자리 콘서트’ <나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미추홀 길잡이
의 음악앨범> 신청(전화 및 온라인 선착 ■ [인천 연수문화원] 공동체 민주시민교육
순, 10:00~) (온라인강의)
■ [경기 의왕문화원] 제20회 백운서예문
인화대전 심사
■ [인천 연수문화원] 먼우금 마을 이야기
교육 및 지역사회 아카이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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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서구문화원] 제2회 달서구문화원 UCC 공모전 접수
[충북 충주문화원] 제46회 탄금대기차지 나라사랑 웅변대회 UCC공모전 작품 접수
[충북 충주문화원] 제46회 충청북도 학생 백일장 및 사생대회 공모전 작품 접수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학산백일장 접수
[광주 서구문화원] 제10회 빛고을 문예 백일장 접수
[충북 충주문화원] 제30회 김생전국휘호대회 공모전 작품 접수
[울산 남구문화원] 제19회 한마음 미술대전 ■ [인천 연수문화원] 먼우금 마을 이야기 ■ [경기 의왕문화원] 제20회 백운서예문
입상작 전시(울산문화예술회관 전관, 꾸러 교육 및 지역사회 아카이빙 인화대전 심사발표
기 놀이터)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미추홀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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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서구문화원] 제2회 달서구문화원 UCC 공모전 접수
[충북 충주문화원] 제46회 탄금대기차지 나라사랑 웅변대회 UCC공모전 작품 접수
[충북 충주문화원] 제46회 충청북도 학생 백일장 및 사생대회 공모전 작품 접수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학산백일장 접수
■ [경기 안성문화원] 덕봉서원 추계제향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미추홀 길잡이
(덕봉서원, 12:00)
■ [인천 연수문화원] 먼우금 마을 이야기
교육 및 지역사회 아카이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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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서구문화원] 제2회 달서구문화원 UCC 공모전 접수 ■ [경남 함안문화원] 제1회 아라가야전국
■ 한국문화원연합회 서화대전 심사발표
■ [대전 대덕문화원] <소리, 소문 시즌2>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미추홀 길잡이
■ 지방문화원 (대덕문화원 유튜브, 11:00)
■ [인천 연수문화원] 먼우금 마을 이야기
※ 일정은 변동되거나 교육 및 지역사회 아카이빙
취소될 수 있습니다.

70
WED THU FRI SAT
2 3 4 5
UCC 공모전 접수
나라사랑 웅변대회 UCC공모전 작품 접수
백일장 및 사생대회 공모전 작품 접수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학산백일장 접수
백일장 접수
대전 작품접수
[경남 함안문화원] 제1회 아라가야전국서화대전 작품접수
■ [인천 연수문화원] 스토리텔러 및 유튜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역사를 거닐다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미추홀 시민기 ■ [인천 연수문화원] ‘꼬마작곡가’
버 양성(온라인강의) 집담회(네이버 밴드) 록단 ■ [ 인천 연수문화원] ‘전통문화 예절학교’
■ [인천 연수문화원] 몸 그리고 쉼표 ■ [대전 대덕문화원] <공연모음.zip>-퓨전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학산어린이노
퍼커션밴드 폴리 래단
■ [인천 연수문화원] ‘트롯은 인생을 싣고’

9 10 11 12
[대구 달서구문화원] 제2회 달서구문화원 UCC 공모전 접수
[충북 충주문화원] 제46회 탄금대기차지 나라사랑 웅변대회 UCC공모전 작품 접수
[충북 충주문화원] 제46회 충청북도 학생 백일장 및 사생대회 공모전 작품 접수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학산백일장 접수
[광주 서구문화원] 제10회 빛고을 문예 백일장 접수
[경남 함안문화원] 제1회 아라가야전국서화대전 작품접수
[충북 충주문화원] 제30회 김생전국휘호대회 공모전 작품 접수
[울산 남구문화원] 제19회 한마음 미술대전 입상작 전시(울산문화예술회관 전관, 꾸러기 놀이터)
■ [인천 연수문화원] 스토리텔러 및 유튜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9월 학산어린이극 <파란토끼 룰루>(학산소극장)
버 양성(온라인강의) ■ [ 대전 대덕문화원] <공연모음.zip>-미메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미추홀 시민기 ■ [인천 연수문화원] ‘꼬마작곡가’
시스 협동조합 록단 ■ [경기 의왕문화원] 제20회 백운서예문인
■ [인천 연수문화원] 몸 그리고 쉼표 ■ [인천 연수문화원] ‘트롯은 인생을 싣고’ 화대전 휘호심사
■ [인천 연수문화원] 먼우금 마을 이야기 ■ [인천 연수문화원] 2020 전통 성년식
교육 및 지역사회 아카이빙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학산어린이노
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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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서구문화원] 제2회 달서구문화원 UCC 공모전 접수
[충북 충주문화원] 제46회 탄금대기차지 나라사랑 웅변대회 UCC공모전 작품 접수
[충북 충주문화원] 제46회 충청북도 학생 백일장 및 사생대회 공모전 작품 접수
[광주 서구문화원] 제10회 빛고을 문예 백일장 접수 ■ [인천 연수문화원] ‘꼬마작곡가’
[충북 충주문화원] 제30회 김생전국휘호대회 공모전 작품 접수 (09:30~12:30)
■ [대전 대덕문화원] <공연모음.zip>-마당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미추홀 시민기 ■ [ 인천 연수문화원] ‘백제사신길을 따라서’
극패 우금치 록단 탐방 (백제사신길 일대, 09:00~13;00)
■ [인천 연수문화원] 몸 그리고 쉼표 ■ [ 인천 연수문화원] ‘트롯은 인생을 싣고’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학산어린이노
■ [인천 연수문화원] 먼우금 마을 이야기 래단
교육 및 지역사회 아카이빙 ■ [인천 연수문화원] ‘전통문화 예절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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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서구문화원] 제2회 달서구문화원 UCC 공모전 접수
[충북 충주문화원] 제46회 탄금대기차지 나라사랑 웅변대회 UCC공모전 작품 접수 ■ [인천 연수문화원] ‘꼬마작곡가’
[충북 충주문화원] 제46회 충청북도 학생 백일장 및 사생대회 공모전 작품 접수 ■ [인천 연수문화원] ‘연수시티투어’ 탐방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학산백일장 접수 ■ [광주 서구문화원] 5·18역사문화탐방
[대전 대덕문화원] 연극 <호연에 취하다>(대덕문예회관 2층 공연장, 19:00) ‘40주년, 오월 서구로(路)’
■ [인천 연수문화원] ‘돗자리 콘서트’
■ [대전 대덕문화원] 연극 <호연에 취하다>
<나의 음악앨범>(연수동 대학공원, ■ [경남 함안문화원] 제1회 아라가야전국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미추홀 시민기
■ [대전 대덕문화원] 김호연재 여성문화축
19:20~20:40) 서화대전 현장휘호 록단
제·제1회 대한민국 김호연재 휘호대회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여민과 함께 ■ [인천 연수문화원] 몸 그리고 쉼표 ■ [인천 연수문화원] ‘트롯은 인생을 싣고’
■ [인천 미추홀학산문화원] 학산어린이노
하는 호락호락 콘서트> ■ [인천 연수문화원] 먼우금 마을 이야기
래단
교육 및 지역사회 아카이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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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안 선생의 예술세계
U RIM U N HWA 편집·발행처 화성문화원

화성문화원은 화성에서 태어나 중요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발에 탈을 씌워 갖가지


동작을 행하는 탈놀이’의 초대 예능보유자였던 운학雲鶴 이동안 선생의 예술세계를

되짚어보고, 그 가치와 전승 방안에 대하여 논의하기 위하여 《이동안 선생의 예

술세계》를 발간하였다. 이 책을 통해 화성재인청의 마지막 도대방都大房을 지낸

이동안 선생의 일생과 우리나라 광대의 역사적인 기원, 경기 이남의 화랑이 집

단, 기·예능으로 보는 이동안의 삶 등을 이야기한다.

한국문화원연합회-세한대학교, 업무 협약 체결

한국문화원연합회는 세한대학교와 8월 19일(수) 상호 공동

발전 및 우호 증진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하였다. 왼

쪽부터 한국문화원연합회 송은옥 지역문화혁신팀장, 장상

호 사무국장운영지원팀장, 김요일 사무총장, 김태웅 한국문화

원연합회장, 이승훈 세한대학교 총장, 정건영 예술학부장,

신승우 실용음악학과 외래교수

편집후기

월간 《우리문화》 만족도 조사
Monthly Magazine Urimunhwa Reader 소소한 것의 위대함
Satisfaction Survey
100년 만의 최대위기 코로나19에 불안을 감

월간 《우리문화》의 만족도를 조사하고 있습 출 수 없고, 야행성 여름 장마의 물 폭탄 호우

니다. 귀하의 소중한 의견은 《우리문화》 발간 경보 또한, 안정된 삶이 도망간 세상에서도

에 큰 도움이 되오니, 바쁘시더라도 꼭 참여 《우리문화》는 한국 자랑의 야생마 역사와 삼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조사과정에서 베길쌈 한 올 한 올의 정감을 느껴 보이려고

얻은 모든 정보는 통계법 제33조(비밀의 보 했다. 이번 호는 숙련된 예술 공예 솜씨들을

호)에 따라 비밀이 보호되며, 통계 목적 이외 소개하면서 “작은 고음이 최고의 고음이다”

에는 사용되지 라는 어느 음악가의 말대로 소소한 것의 위대

않습니다. 함을 느껴본다. 백로. 추분 속 가을맞이 9월엔

(조사 기간 또 다른 희망을 만나러 가자. 공포의 바이러

~2020년 10월 스 말고, 행복 바이러스가 올 때까지 밑동이


2020 09

20일까지) 잘리더라도 동화 속 콩 나무 타듯이 우리는

바람과 기원의 높이를 따라 올라가야 하겠다.


https://bit.ly/3i0Auba
편집주간 한춘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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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강술래
Ganggangsullae

ISSN 1599-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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