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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문

‘법신불사은’호칭 재고*

정순일(鄭舜日)**

<요약문>
개교 100주년을 앞두고 있는 원불교가 신앙의 본질을 다시 점검하고
보편 종교로서 거듭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 중의 하나가 신앙의
호칭에 대한 정비작업이다.
신앙의 대상에 대한 호칭은 종교적 정서를 대변할 뿐 아니라 신앙자
의 집단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매개가 된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 대상에 대한 호칭과 신앙적 정서 간의 관련성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원불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기도시의 호칭은‘법신불 사은’이다.
그러나 원불교의 공식적 신앙 대상은‘법신불’이다. 이처럼 공식적 명
칭과 기도시의 호칭이 다름으로 인하여 교학적 혹은 신앙정서상 혼선
을 가져올 우려가 있다.
‘법신불 사은’처럼 신앙행위에 병렬 또는 설명개념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점도 문제가 된다. 간결하고 단일화한 개념은 신앙의 대상

* 본 논문은 2009년도 원광대학교 교내연구비 지원에 의한 논문임.


** 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sichung@wku.ac.kr).
122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49집 연구논문

을 명확하게 하며 신앙감을 고취시키는 데에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


기 때문이다. 신앙호칭을 단일개념으로 통일하자는 것이 본 연구의 목
적이다. 방법은 법신불 사은의 명칭이 지니는 의미와 한계를 여러 면에
서 비판적으로 생각해 보는 방법을 사용하고자 한다.
그 결과 원불교의 신앙 행위시의 호칭은 일반적 통칭으로는‘부처님
(Buddha)’으로 하고, 공식 명칭을‘법신불(Dharmaka-ya-Buddha)’로 통
일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보편적이고 대중적 감성에 호소한
다는 점에서‘부처님’이라는 통칭을 쓰고, 신앙의 대상을 공식적으로
표현할 때는‘법신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좋겠다. 일각에서는‘일
원불’혹은‘원불님’이라는 호칭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는 특유하다는
장점은 있으나 보편적이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주제어:부처님, 법신불, 사은, 법신불사은

목 차

Ⅰ. 시작하는 말
Ⅱ. 교법 정신에서의‘법신불사은’
Ⅲ. 용어상에서의‘법신불사은’
Ⅳ. 교리 해석상에서의‘법신불사은’
Ⅴ. 맺는 말
‘법신불사은’호칭 재고 123

Ⅰ. 시작하는 말

원불교가 개교 100주년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여러 종교의 역사가


보여 주듯이 신앙의 본질을 다시 점검하고 참된 종교로서 거듭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 중의 하나가 신앙의 호칭에 대한 정
비작업이다. 여러 해 전에 제기하였던 문제를 다시 정리하는 것은 그 중
요성 때문이다.1)
신앙의 대상에 대한 호칭은 종교적 정서를 대변할 뿐 아니라 신앙자의
집단적 정체를 표현하는 중요한 매개가 된다. 따라서 신앙의 대상에 대
한 호칭은 종교 창시자의 깊은 통찰과 대중적 공감대가 만나는 지점에
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 대상에
대한 호칭과 신앙적 정서 간의 관련은 말할 필요조차 없이 중요하다. 신
앙의 대상과 인간과의 통로는 호칭으로써 연결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
하면 신앙의 대상에 대한 인간의 언어가 가지는 최대의 형식은 호칭으로
써 나타나며 신앙인은 절대자의 호칭을 통하여 신앙의 생명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2)
현재 원불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기도 행위시에는‘법신불 사은’이라
는 호칭이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원불교의 공식적 신앙 대상
은‘법신불’이다. 이처럼 공식적 명칭과 기도시의 호칭이 다름으로 인
3)
하여 교학적 혹은 신앙정서상 혼선을 가져올 우려가 있다.‘법신불 사

1) 필자는 오래 전 다양한 형태의 호칭은 신앙적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야기하고 교화의 약


화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이를 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사은신앙의 형성사적
연구」 『원불교학』제4집,
( 한국원불교학회, 1999) 또한 원불교 신앙의 대상의 호칭에 관한
문제점을 2008년 2월, <원불교신문> 지상에 제기하기 시작하여 여러 사람들과 수차례에
걸친 논쟁을 벌인 바 있으며, 호칭을 단일개념으로 정비할 것을 요청하였다.
2) Rudolf Bolren, 박근원 역,『설교학원론』,대한기독교출판사, 1992, 134-144쪽.
3) 원불교의 신앙의 대상에 대한 호칭의 문제를 제기한 논문들로는 서경전의「원불교 신앙
의 대상 호칭문제」 『원불교사상』제7집,
( 원불교사상연구원, 1983)이 효시를 이루고 있다.
124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49집 연구논문

은’은 교리적으로는 매우 유용한 호칭이지만4), 신앙행위에 병렬 또는 설


명개념으로 덧붙여 부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점이 주목된다. 간결하고
단일화한 개념은 신앙의 대상을 규정하는 데에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
기 때문이다. 고도의 상징성과 함축적 간결성이 요구되는 신앙의 대상
에 사은이라는 중복 혹은 병렬개념을 붙일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다. 신
앙호칭을 단일개념으로 통일하자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하여 그 명칭이 지니는 의미와 한계를 다각도로
생각해 보는 방법으로 접근할 생각이다. 어떤 논의를 진전시키는 데에
있어서 문제점들을 도출하며 접근하는 비판적 접근은, 그것의 순기능을
적시하며 접근하는 것 못지않게 효율적인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Ⅱ. 교법 정신에서의‘법신불사은’

우선『정전』
「심고와 기도」에 나오는‘법신불사은’이라는 호칭이 원
불교의 신앙행위와 의례에서 통용되는 명칭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적절한 표현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은 면이 있다고 본다.
‘법신불사은’이라는 용어가 지닌 신앙 호칭으로서의 미흡성을 교리정
신에서 살펴보자.

그 후를 이어서 노권용(「원불교 신앙론의 과제」,『원불교학』창간호, 한국원불교학회,


1996), 백준흠(「원불교 신앙 강화를 위한 과제」,『원불교학』제4집, 한국원불교학회,
1999), 류성태 「원불교
( 신앙호칭에 있어서 신앙성 강화모색」,『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36집, 원불교사상연구원, 2007), 김성장(「신앙의 대상 호칭문제와 일원상 부처님 봉안
의미」,『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제37집, 원불교사상연구원, 2007) 등 여러 학자들이 이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4) 일원즉 사은, 사은즉 삼라만상의 교리가 원불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대종 (
경』교의품 4장)
‘법신불사은’호칭 재고 125

첫째, 원불교의 교법정신에서 볼 때 신앙의 대상은 법신불 일원상이며


법신불 사은이 아니다.
원불교 교법정신을 총체적으로 밝히고 있는『정전』교법의 총설을 보
면 원불교 신앙의 대상은‘법신불 일원상’임이 분명히 밝혀져 있다.5)
‘법신불 사은’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정전』일원상장의「일원상의
신앙」에 보면“일원상의 진리를 우주 만유의 본원으로 믿으며, 제불 제
성의 심인으로 믿으며, 일체 중생의 본성으로 믿으며…”라 하여 믿음의
대상이 일원상의 진리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대종경』에서도“그러므
로 우리는 불상 한 분만 부처로 모실 것이 아니라 천지 만물 허공 법계를
다 부처님으로 모시기 위하여 법신불 일원상을 숭배하자는 것이니라.”6)
라 하여 법신불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한 자료
는 무수히 많다.
둘째, 원불교 규범의 핵심이 되는 교헌에서도 신앙의 대상은‘법신불
일원상’이다.7)
원기 9년(1924)에 발간된 원불교 최초의 규약서인『불법연구회 규약』
에는 신앙의 대상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교단종교로서
의 초창에 불과했던 당시로서는 신앙의 대상에 대한 정비가 심도 있게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교리로는 삼학·팔조 정도가 눈
에 뜨이고 있을 뿐이다. 원기 19년(1934)에 발간된 개정본『불법연구회
규약』에서도 거의 비슷한 수준이며, 교리 구조상 사은·사요가 출현하
고 있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그러나 원기 27년(1942)에 개정된『불법연

5)“그러므로 우리는 우주 만유의 본원이요, 제불 제성의 심인인 법신불 일원상을 신앙의 대


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모시고”(『정전』교법의 총설)
6)『대종경』교의품 14장.
7) 최근 일원상과 일원을 구분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필자는 일원상은 형
상으로 그려진 일원을 가리키는 용어로, 일원은 그 이면에 있는 진리 전체를 포함하는 개
념으로 구분하여 사용하자는 생각이 있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그러한 논의에 본격적
으로 참여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126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49집 연구논문

구회 회규』에서는 상당한 신앙적 정비가 나타나고 있다. 제 3조에서‘본


회는 불교정전의 심인 즉 법신불일원상의 진리에 근본하여’라는 내용
이 있고 제 5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본회는 우주만유의 근본이 되는 법신불(淸淨法身 毘盧遮那佛)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과 진리적 신앙의 대상으로 본당정면에 안치하고 석가모니불
을 교주로 숭배함.8)

소태산 사후 원불교로 정식 명칭을 개정한 원불교 교단은 원기 33년


(1948)에『원불교 교헌』을 최초로 제정하는데, 제 2조에서“본회는 우주
의 원리요 제불의 심인인 즉 일원의 대도에 근본하여 정신·정각·정행
을 종지로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그 후 원기44년(1959)과 49년(1964)
의 두 차례의 개정을 거치면서 큰 변화가 없다가, 원기 62년(1977)에 개
정된 교헌에서 비로소 현대적 형태의 총강이 이루어지면서 신앙의 대상
에 대하여 명확한 규정을 한다.

제1조 <종지> 원불교(이하 본교라 칭한다)는 우주의 원리요 제불(諸佛)의


심인(心印)인 일원상(一圓相)의 진리를 종지로 하고, 이를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다.9)

여기에서 볼 때 원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은 분명히 일원상의 진리이다.


또한 제3조‘본존’을 보면“① 본교는 법신불 일원상을 본존으로 한다.
② 일원은 사은의 본원이요 서가모니불과 소태산대종사의 정전 심인이
심을 신봉하여 진리로써 숭배한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제 5조에“본

8)『불법연구회 회규』.
9)『원불교 교헌』초판본.
‘법신불사은’호칭 재고 127

교는 일원상을 본존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원불교의 공식적인 신앙의


대상은 법신불 일원상임을 공식화한 것이다.
원불교 신앙의 대상이 법신불 일원상이라면 그에 대한 호칭 또한‘법
신불 일원상’, 만약 줄인다면‘법신불’, 혹은‘일원상’이어야 하지 않겠
는가. 그 중에서 보편성이라는 면에서 일원상 보다는 법신불 쪽이 타당
하다고 본다면, 현재 의례상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법신불 사
은’은 교헌에 적절히 부합하지 않는 용어임이 분명하다.
셋째, 원불교의 교리 형성사에서 볼 때에도‘법신불 사은’은 타당성이
적다.‘법신불 사은’이라는 용어는 적어도 소태산은 알지 못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연구는 이미 발표한 바 있다.10) 소태산은 그
의 생전에‘법신불사은’이라는 용어는 결코 사용한 적이 없었다. 만약 소
태산이 알지 못한 용어라면 심각하게 다시 고려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소태산의 대각 후 초기 제자들을 모을 당시 신앙의 대상은‘천제’였
다. 이후 천지신명· 천지허공·허공법계 등으로 변화하다가 원기 14년
(1929)에 사은이 출현한다. 원기 17년(1932)에 발간된『보경삼대요령』
에서「심고와 기도」장이 삽입되고, 예회식순에 심고 식순이 생기면서 이
후 심고의 대상은‘사은’으로 정착된다.
한편, 원기 20년(1935) 대각전에 일원상이 봉안되는데 이때의 명칭은
‘심불’이었으며, 같은 해 출간된『예전』에서 이 용어가 공식 명칭이 된
다. 이후 소태산 말기에 이르기까지 교단은 내면적으로는 사은신앙으로
부터 심불 즉 일원상 신앙으로 급격히 이행하였으며, 교리 면에서는 사
은이 곧 일원이라는 원리적 연결을 시도하고 있었다. 두 용어의 연결을

10) 졸고「일원상신앙의 초기 형성과정 연구」,『원불교학』창간호, 한국원불교학회, 1996;


「초기 일원상신앙의 성격」,『원불교학』제2집, 한국원불교학회, 1997;「사은신앙의 형성
사적 연구」,『원불교사상』제21집, 원불교사상연구원, 1997;「일원상 신앙 성립사의 제
연구」,『원불교학』제8집, 한국원불교학회, 2002 등 필자가 작성한 몇 편의 원불교 신앙
의 흐름에 관한 선행논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128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49집 연구논문

염두에 두더라도 이 사이 불법연구회의 신앙사는 사은과 일원상의 두 줄


기가 흐르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표면적이며 공식적으로 신앙의 대상에 대한 변화는『불교정
전』을 기다려야만 하였다. 불법연구회는 원기 28년(1943)에 종합 교리
서인『불교정전』을 출간하는데, 여기에서 일원상을‘법신불’로 규정하
며 교리사적인 획을 긋게 된다. 심불에서 법신불로 변화한 것은 선적(禪
的)이며 심성적인 의미를 포함하면서도 우주적 이미지까지를 강하게 표
출함으로써,‘천지신명’에서‘사은’에 이르는 초기의 신앙적 의미를 포
월(包越)하며 보편종교로써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 중요한 용어로 발전
한 것이라고 평가된다.11)
한편 원기 21년(1936)의 법회의례에서‘사은전 심고’를‘심불전 심
고’로 바꾸는 등 의례상에서도 심불 곧 법신불이 신앙의 대상으로써 확
고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삼대요령』에서 심고의 대
상을 사은으로 규정하였던 것을 원기 28년의『불교정전』에서도 그대로
존치한 것을 보면, 외형적으로는 법신불이라는 개념을 채용하면서도 내
적 신앙행위에서는 사은을 그대로 대상 삼았던 관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
인다. 이러한 신앙행위의 이중성이 후일‘법신불 사은’이라는 복합개념
을 채용하게 하는 혼선의 씨앗이 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소태산의 열반 19년 뒤인 원기 47년(1962)에 출간된『원불교 교전』의
「심고와 기도」에서 기존의 두 개념을 물리적으로 병치하여‘법신불사
은’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다. 이후 원불교 교단은 지금껏 법신불사
은이라는 이중적 복합개념을 기도의 대상 즉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한편 상산 박장식 종사의 말이라 하여‘소태산도 법신불사은이라는
용어를 선택했다’하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12) 그 말의 진의를 다른 각도

11) 각주 10)에 나타나 있는 필자의 논문을 참조할 것.


12) 김성택,『원불교신문』,2008년 3월 7일자.
‘법신불사은’호칭 재고 129

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다른 예로『불법연구회 창건사』의 내용을 상


기해 보자. 소태산의 대각 후‘자력으로 구하던 중 사은의 도움이라.’는
내용이 있는데,13) 이 자료를 바탕으로 대각 당시 사은이라는 용어가 나온
것으로 규정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불법연구회에서 사은이 출현
한 것은 그보다 훨씬 후인 원기 14년(1929)경이기 때문이다. 정산이『불
법연구회 창건사』를 썼던 당시의 눈과 당시의 용어로 과거를 조명한 것
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14) 법신불사은이라는 용어는 소태산 사후 시간이
흐른 후에 대두되었고, 그러한 기억이 겹쳐 99세의 원로가 말했을 가능
성은 없을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또 다른 면을 생각해 보자.『불조요경』
의 형성과정을 보면 거의 모든 내용이『회보』등에서 공시된 후 편입되
고 있다. 소태산은 매우 주의심이 깊고, 용어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만약 그의 생전에 법신불사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면
왜 마지막 공식 교과서인『불교정전』에 싣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
다. 그 중요한 포인트를 간과하고“나의 포부와 경륜의 대강이 이 책 한
권에 다 들었다.”15)고 말했을 리가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상산종사의 말
은 와전되었든지 아니면 잘못된 기억에 바탕하고 있을 가능성이 없지 않
다 하겠다.
넷째, 현재 원불교의 텍스트인『정전』과『대종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주된 개념은 법신불이다. 즉『정전』과『대종경』에서 나온 자료를 분석해
보면‘법신불 사은’보다는‘법신불‘이란 단일개념을 압도적으로 많이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법신불 사은’이라는 용어는『정전』에서

13)『불법연구회 창건사』제6장. 대종사 불법에 대한 내정“대종사께서 도를 얻으신 후로 심


독희자부하사 그 경로를 생각하시되 순서 알기가 어렵다 하시고 강연히 그 말을 하자면
자력으로 구하난중 사은의 도음이라고 하시였다.”『원불교 교고총간』제5권, 정화사,
1973, 19쪽.
14) 졸고,「사은신앙의 형성사적 연구」,『원불교사상』제21집, 원불교사상연구원, 1997.
15)『대종경』부촉품 3장.
130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49집 연구논문

‘심고와 기도’장에서 유일하게 출현하고 있다. 나머지 부분은 모두가


‘법신불’혹은‘법신불 일원상’이다.『대종경』에서는‘법신불’이라는
단일개념이 7곳이며‘법신불 일원상’은 5곳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법신불 일원상’은 존재에 대한 설명을 위해 사용한 것이었으며,‘법신
불 사은’은 단 1곳에 불과하다.16) 그러나 이 또한 불공의 대상으로서 법
신불이 지닌 성격을 설명하기 위한 내용이다. 오히려 진리불공의 대상
을 법신불이라 명기하고,‘몸과 마음을 재계하고 법신불을 향하여’17)라
한다든지‘법신불전에 매일 심고 올리는 재미’18)라 하여 기도의 대상에
서조차‘법신불’단일개념을 사용한 경우가 더 많다.『대종경』에서 사용
하고 있는 법신불의 용례 중 하나를 들어 보자.

불상은 부처님의 형체를 나타낸 것이요, 일원상은 부처님의 심체(心體)를


나타낸 것이므로, 형체라 하는 것은 한 인형에 불과한 것이요, 심체라 하는
것은 광대 무량하여 능히 유와 무를 총섭하고 삼세를 관통하였나니, 곧 천
지만물의 본원이며 언어도단의 입정처(入定處)라, 유가에서는 이를 일러
태극(太極) 혹은 무극(無極)이라 하고, 선가에서는 이를 일러 자연 혹은 도
라 하고, 불가에서는 이를 일러 청정법신불이라 하였으나, 원리에 있어서
는 모두 같은 바로서 비록 어떠한 방면 어떠한 길을 통한다 할지라도 최후
구경에 들어가서는 다 이 일원의 진리에 돌아가나니…19)

이곳에서 심체 즉 청정법신불이 곧 일원임을 말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사은은 전혀 연결하여 생각하고 있지 않으며, 법신불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그 뜻을 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산종사 법어』에서도‘법신불’단일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곳은 31

16)『대종경』교의품 10장.
17)『대종경』교의품 16장.
18)『대종경』신성품 16장.
19)『대종경』교의품 3장.
‘법신불사은’호칭 재고 131

곳이며,‘법신불 일원상’이 1곳임에 비하여‘법신불 사은’은 3곳에 불과


한데 모두가 심고의 예문이다. 뿐만 아니라『대종경』에서와 마찬가지로
심고나 기도의 대상으로‘법신불’단일 개념을 사용하기도 하였고,20) 참
회의 방법으로도“항상 법신불 전에 참회의 기도를 올리는 것이요”21)라
하여‘법신불사은’보다는‘법신불’단일개념을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
하고 있다.
이처럼『정전』과『대종경』혹은『정산종사 법어』에서도 법신불사은
보다는 법신불이라는 단일용어가 압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점으로 미
루어 보더라도 법신불사은이라는 복합개념보다는 법신불이라는 단일개
념이 타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Ⅲ. 용어상에서의‘법신불사은’

한편 용어적으로 살펴 볼 때 법신불사은은 신앙행위 혹은 신앙적 정서


에 적합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이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고찰
을 해 보자.
첫째,‘법신불’과‘사은’은 등가적 병치개념(等價的 竝置槪念)이 아
니다. 등가적 병치개념이란 앞의 언어와 뒤의 언어 사이의 가치적 등가
성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두 개의 용어를 동원하여 하나의 개념으로 삼
기 위해서는 당연히 두 용어 사이의 등가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앞의
용어와 뒤의 용어가 가리키는 바가 같은 말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20)『정산종사법어』예도편 9장, 10장.


21)『정산종사법어』경의편 31장.
132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49집 연구논문

물론 법신불 일원은 사은임은 분명하다.『대종경』교의품에서는“일


원상의 내역을 말하자면 사은이요, 사은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우주만유
로서 천지 만물 허공 법계가 다 부처 아님이 없나니”22)라는 내용은 그것
을 증명하고 있다. 그 사실을 반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법신불은 다
면적 해석이 가능한 존재이므로 사은이 지닌 속성만으로 법신불 일원 전
체를 커버하기는 어렵다는 생각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법신불은‘공원정’의 3속성의 측면으로도 해석이 가능하
다. 공원정의 속성을 잘 응용하고 있는 교리는 사은보다는 삼학이다. 자
신할만한 타력이‘법신불사은’이라면 자신할만한 자력은‘법신불삼학’
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정전』의 교리도에는 신앙문과 수행문이 일원
상의 하부구조로써 나란히 제시되어 있으므로 충분한 근거가 된다. 우
주만유의 본원을 사은에 배대시킬 수 있다면 일체 중생의 본성은 삼학에
배대가 가능할 것이다.23) 교리도를 생각하지 않아도 원불교에서 신앙과
수행은 별립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법신불삼학’은‘법
신불사은’에 못지않은 타당성을 지닌다. 만약 신앙의 대상의 호칭에 삼
학까지 포함하는 것이 무리가 된다면 같은 원리로 신앙의 대상의 호칭에
사은을 포함하는 것도 다시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24)
어떤 부분은 신앙의 영역이므로‘사은’을 써야 하고, 또 수행의 영역
에서는‘삼학’을 써야 한다는 식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일원상과 수행
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대종경』에 있는 자료를 통해 살펴보자.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하고 그 진리를 체 받아서 자기의 인격을 양성


하나니 일원상의 진리를 깨달아 천지 만물의 시종 본말과 인간의 생·

22)『대종경』교의품 4장.
23)『정전』교리도
24) 이 부분에 대하여는 일찍이 노권용의 문제제기가 있었다.
‘법신불사은’호칭 재고 133

로·병·사와 인과보응의 이치를 걸림 없이 알자는 것이며, 또는 일원과


같이 마음 가운데에 아무 사심이 없고 애욕과 탐착에 기울고 굽히는 바가
없이 항상 두렷한 성품자리를 양성하자는 것이며, 또는 일원과 같이 모든
경계를 대하여 마음을 쓸 때 희·로·애·락과 원·근·친·소에 끌리지
아니하고 모든 일을 오직 바르고 공변되게 처리하자는 것이니, 일원의 원
리를 깨닫는 것은 견성(見性)이요, 일원의 체성을 지키는 것은 양성(養性)
이요, 일원과 같이 원만한 실행을 하는 것은 솔성(率性)인 바, 우리 공부의
요도인 정신 수양·사리 연구·작업 취사도 이것이요…25)

이처럼 법신불과 수행은 그 이질성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중요한 관


계임을 알 수 있다.
신앙을 떠난 수행 또는 수행을 떠난 신앙이 존재할 수 없다면, 신앙의
대상에 대한 호칭에 사은 하나 만을 부가하는 것 보다는 법신불 하나의
단일 개념만 사용하는 것이 훨씬 타당성이 크다 할 것이다.26)
법신불과 사은은 구체적 교학적 논증이 필요하기는 하겠으나27) 완벽
한 의미에서의 등가적 개념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등가적 개념이 아닌
개념을 병렬하여 하나로 묶어 호칭하는 것은 재고해야 마땅하다고 판단
할 수 있다.
둘째, 법신불, 일원상, 사은 등 신앙의 대상을 지칭하는 호칭이 사변적

25)『대종경』교의품 5장.
26) 한편 등가성을 논외로 할 경우, 병렬 혹은 병치하면서 하나의 개념을 형성하게 하는 기
법은 가능하다. 그러한 시도는 불전에서 등장한다. 이는 중국불교의 번역과정에서 사용
되어지는 수가 가끔 있었다. 예를 들면 참회의 산스크리트어는 ks·ama인데 이를 음역하
면 참(讖)이 되며 그 의미인 회(悔)를 병치시켜 참회라는 낱말을 만들어 내고 있다. 또한
게송이라는 용어의 산스크리트어는 gatha인데 이를 음역한 게(偈)와 그 의미인 송(頌)을
함께 하여‘게송’이라는 낱말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러한 구도를 법신불사은
이라는 용어에 적용시킬 수는 없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법신불사은’은 번역 상에서
보충설명이 필요 없는 우리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전의 번역과정에서의 이중
개념과는 구분되어야 마땅하다.
27) 그 밖의 여러 가지 예를 들 수 있겠으나, 이는 후일의 연구로 미룬다.
134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49집 연구논문

이고 철학적인 점을 들 수 있다. 허공법계 삼라만상을 총칭하는 법신불


에 대한 호칭이 사변적이고 난해하다면 신앙의 대상으로 친근하게 느껴
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변적이고 난해한 이유는 일차적으로 일
원상의 진리가 철학적이고 이법적인 특징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적 종교로서의 원불교의 일원상은 우리들에게 철학적 묘리의 실상
임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일원상에는 신의 섭리가 깃들어 있는 것도 아니
요, 오직 그 안에 철학적 진리만이 함축되어 있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고
이을호도 지적한다.28) 특히 소태산은 일원상의 진리를 설명할 때 유가의
태극이나 무극, 도교의 도, 불교의 청정법신불 등 매우 이법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감성을 수반하는 신앙성 강화에 한계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29) 용어가 신앙감을 고취하는 데에 덜 효과적이라면 효과적
인 쪽으로 개선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셋째, 법신불은 주개념이고 사은은 그것을 설명하는 종속개념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병렬시켜 부르는 것을 용인하는 사람들은
좋은 예를 기독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하느님 아버지’라는
예가 그것이다. 이는 논리적으로는 일면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을 아버지
로 부르는 것은 첫째, 하느님이 인간의 생명의 근원이라는 고백이다. 둘
째, 하느님이라는 추상성은 아버지라는 구체성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밖
에 없다는 뜻이다. 하느님이 만물의 근원이라는 의미를 제자들은 하느
님이 아버지라는 인격적 은유를 통해서 이해하고 나타내었으며, 이것은
당시 제자들이 하느님을 이해하는 필연적인 방식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신론은‘인간에 의해 상상되고 표현되는 하느님’과‘하느님 자체’사이

28) 이을호,「원불교 교리상의 실학적 과제」『원불교사상』


, 제8집, 원불교사상연구원, 1984, 264쪽.
29) 류성태,「원불교 신앙호칭에 있어서 신앙성 강화모색」,『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제36
집, 원불교사상연구원, 2007, 73-74쪽.
‘법신불사은’호칭 재고 135

의 긴장의 관계 속에서 유지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30)


그러나 원불교의 경우 사은은 법신불이라는 추상성을 이해하는 도구
로서의 구체성을 지닌 개념이 아니다. 사은 또한 구체적 인격성을 지닌
개념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 대상의 호칭을 주개념과 종속 또는
설명개념을 병렬시켜 함께 부른다는 것은 원불교는 그리스도교의 경우
와 다르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넷째, 신앙의 대상을 법신불사은으로 호칭하는 것은 소태산 대종사의
근본 의도와 합치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소태산
은 때로 사은과 법신불을 실지불공과 진리불공의 대상으로 엄격히 구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영신이 여쭙기를“사은 당처에 실지 불공하는 외에 다른 불공법은 없나


이까?”대종사 말씀하시기를“불공하는 법이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사
은 당처에 직접 올리는 실지불공이요, 둘은 형상 없는 허공법계를 통하여
법신불께 올리는 진리불공이라…”31)

여기서 본다면 법신불사은을 신앙의 대상에 대한 통일된 호칭으로 삼


는다면 실지불공의 대상인 사은과 진리불공의 대상인 법신불로 나누어
접근하게 한 소태산의 뜻이 혼선을 빚을 수 있다는 말이다. 궁극에 가서
는 서로 상통하는 것일지라도 실지불공은 사은에, 진리불공은 법신불에
올리는 것으로 구분하려는 것이 소태산의 기본적인 의도였음을 잊어서
는 안 된다. 한편 사은을 신앙의 대상이 아닌, 신앙의 강령으로 규정한
것32)이 소태산의 숨은 또 하나의 의도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30) 이찬수,「법신불 일원상, 그 비판적 고찰- 그리스도론과 비교하며」, 마음인문학연구소


학술대회 발표논문, 2011.
31)『대종경』 「교의품」16장
32)『정전』「교법의 총설」.
136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49집 연구논문

Ⅳ. 교리 해석상에서의‘법신불사은’

교리 해석적으로 법신불 사은이라는 호칭이 지닌 몇 가지 문제를 살펴보자.


첫째, 앞에서 거론한 문제와 연결되면서‘법신불사은’은 함의 상에서
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법신불 사은’은 법신불이며
사은인가? 아니면 법신불이신 사은인가? 이 두 가지 의문은 일견 매우
유사한 듯 보이지만 실질상으로는 상이한 각도에 놓여 있다.
우선 법신불이며 사은이라는 해석은 논리상 맞지 않는 내용이다. 왜냐
하면 법신불과 사은을 별개로 상정하는 사유는 적어도 원불교의 기본적
인 정서상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법신불이신 사은’의 경우도
적합하지 않은 조합이라 생각된다. 법신불과 사은은 그 관계를 도식으
로 표현하면 법신불 = 사은 보다는 법신불 사은의 경우가 더 적합하다
하겠다. 송천은은 이 부분에 대하여 본체와 현상을 동일시할 때에 생기
는 문제점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특히 현상의 본질인 본래불의 문제를
중시할 필요가 있다. 일원상의 근본 원형과 일원상으로부터 유출된 현
상적인 생산품 또는 제품이 꼭 일치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과
학이나 산업 현실에서 자주 경험하는 문제로서 동일한 원료에서 많은 종
류의 생산품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33)
사은은 법신불을 설명하기 위해서도 함의가 충분치 않은 용어이다. 앞
서 고찰한 바와 같이 사은이라는 개념은 이(理)로써 본체를 삼는 자성신
으로써의 법신의 본질을 충족시키기 어려운 용어이기 때문이다. 불타의
깨달음의 내용이 법이라 한다면 법은 불타의 창작물이 아니다. 본래부
터 불타 안에 있는 것이며, 영겁 이전부터 존재하였고 영원한 미래에 또
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본래부터 주체 안에 있으면

33) 송천은,「법신여래 일원상」『원불교사상과


, 종교문화』제47집, 원불교사상연구원, 2011, 24쪽.
‘법신불사은’호칭 재고 137

서 그 주체와 하나 된 깨달음의 본질을 후일의 제자들은 법신(dharma-


ka-ya)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몸(ka-ya)은 생물학적
혹은 형태적인 몸이 아니다. 깨달음의 본질 혹은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
이다.34) 그러한 면을 사은은 다 커버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일원상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우주만유로서 천
지 만물 허공 법계가 다 부처 아님이 없나니”35)라는 소태산의 말씀이 있
으므로‘법신불사은’이 아닌‘법신불사은우주만유’혹은‘법신불사은허
공법계우주만유’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원불교
교단의 역사성과 법신불과의 의미적 등가성으로만 따진다면‘법신불허
공법계’가 더 적절할 수도 있다.36) 그런 의미에서 뒤에 붙는 여러 부가적
표현을 제거하고 단일개념으로 통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이다. 소
태산이 모든 신앙처를 통일하기 위하여 법신불의 신앙법을 정하였다는
정산종사의 말37)을 상기하여도 그렇다.
둘째, 자타력 병진의 입장에서 볼 때, 사은 한 가지만을 표기하는 것은
적절치 못할 수 있다. 타력과 자력으로 구분해 생각해 본다면 타력에 못지
않게 자력도 중요하다. 타력신에 못지않게 자력신도 중요한 것이다. 실제
로 원불교 교의상에서 타력과 자력은 병진이요 아울러야 할 대상이므로
사은 한 가지만을 표기하는 것은 교법정신에 적합하다고 하기 어렵다.38)

34) 사실 원불교의 법신불은 이러한 법신의 의미에서 훨씬 확대해석된 것이라 하겠다.‘우주만


유의 본원’이라는 우주적 해석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고에 대하여 필자는 불교의 성리학적
필터링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구는 다른 기회로 미룬다.
35)『대종경』 「교의품」4장.
36) 그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의『대종경』 「교의품」14장에도 나와 있다.“…복이 많고 지혜가
많은 사람은 법신불일원상의 이치를 깨치어 천지 만물 허공 법계를 다 부처님으로 숭배
하며, 성공의 기한 구별도 분명하며, 죄복의 근원처를 찾아서 불공하므로 무슨 서원이든
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니, 그러므로 우리는 불상 한 분만 부처로 모실 것이 아니라 천지
만물 허공 법계를 다 부처님으로 모시기 위하여 법신불 일원상을 숭배하자는 것이니라.”
37)『정산종사법어』 「예도편」11장.
38) 이에 대하여는 노권용의「불타관에 관한 연구」 『원불교사상』
( 제 8집, 1984)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에 걸친 뛰어난 연구와 제언이 있다. 특히 그는 법신불 사은과 자성불 삼대력
138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49집 연구논문

『정전』
「일원상 서원문」의 내용으로 가 보자. 법신불은 천지·부모·
동포·법률의 본원이며 제불·조사·범부·중생의 성품이다. 본원과 성
품은 교리의 두 축이 된다. 여기에서 만약 본원만을 강조한다면 기독교적
인 모습이 된다. 또한 성품만을 강조하면 선불교가 되고 만다. 원불교가
기독교나 선불교적인 것을 넘어서서 병진의 원만한 종교가 되기 위해서
소태산은 본원과 성품을 함께 강조하였다고 본다. 즉 자타력 병진신앙을
지향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은이 부가된 표현은 원불교의 자타력 병진신
앙이라는 특징을 온전히 살리지 못할 수가 있다. 자력신앙의 측면인 내재
성을 강조한 자성불의 의미까지 포함한 표현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39)
따라서‘법신불 사은’은 일체중생의 본성40)으로서의 법신불이라는 의미
를 충족시키지 못하여 편향된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은은 법신불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엄
밀히 말한다면 함의가 한편에 치우쳐 있는 용어라는 평가를 받을 가능성
이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은은 법신불의 본질을 온전히 충족시
키기 어려운 용어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셋째, 사은의 인격화에 대한 우려가 있다. 요즈음 법회나 공식행사에
서 거론되는 신앙의 대상에 대한 호칭이‘법신불사은’에서‘법신불사은
님’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 자신도 별다
른 생각이 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쉬움이 생긴다.‘님’이라는
인격적 명칭이 붙게 되면 집착을 본질로 삼고 있는 중생의 속성상 법신
불 혹은 사은을 인격적으로 한정할 우려를 낳게 된다. 인격적 통로를 통
해 접근하는 신앙의 대상은 실은 필자가 오히려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

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39) 노권용,「원불교 신앙론의 과제」,『원불교학』창간호, 한국원불교학회, 1996, 31-32쪽.
40)『정전』 「교리도」에 보면“일원은 법신불이니 우주만유의 본원이요 제불제성의 심인이
요 일체중생의 본성이다.”라고 되어 있다.
‘법신불사은’호칭 재고 139

고 싶은 내용이다. 즉 우리가‘어리석은 중생’인 이상 신앙의 대상에서


인격적 요소를 가미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그
러나 천지·부모·동포·법률이라는 다의적(多義的)이고 이질적인 요
소들을 통합하여 인격화 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자칫 심각한 신앙상의 아노미에 빠질 우려가 있는 점에 문제가
있다. 이는 소태산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를 전후해서 나타난 교조의 인
격숭배 현상보다도41) 오히려 신앙감 형성에 혼선을 야기하는 사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냥‘부처님’혹은‘법신불’등 단일개념으로 호칭을 통일하고, 그에
대한 교학적 설명이 필요할 때 사은과의 교리적 연계성에 대하여 설명하
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지 않을까. 인격화가 신앙적 정서를 고양시키는
데에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것이라면 사은이 아닌 부처님이라는 인격화가
훨씬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넷째, 인과와 연결 지어있다는 면에서 사은신앙은 신앙의 호칭으로 덜
적합할 수 있다.「교리도」에 사은신앙은‘인과보응의 신앙문’에 속하여
있다. 이는 대중을 향한 계몽의 단계에서는 유용할지 모르나 목숨을 바
칠 귀명(歸命)의 대상으로는 너무도 이법(理法)에 치우쳐 있는 규정으로
평가될 수 있다. 물론 궁극적 존재의 속성에 인과 신앙적 요소가 없는 것
은 아니다. 그러나 사은을 인과보응의 신앙문에 귀속된 것으로 규정하는
한42), 호칭을‘법신불사은’이라 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법신불이 지니고 있는 무한 덕상과 무한 차원을 인과보응이
라는 하나의 틀로 제한하는 것이 되고, 법신불의 광대 무량한 위력과 속
성을 나타내는 데에 흡족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인과보응의 신앙

41) 김성장,「원불교학 연구의 당면 과제」,『원불교학』,제9집, 한국원불교학회, 2003, 193쪽.


42)『정전』「교리도」에서 일원상에 이르는 두 문을 인과보응의 신앙문과 진공묘유의 수행문
으로 나누고 있다.
140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49집 연구논문

문’이 지니는 문제에 대해서는 따로 고찰해야 하겠으나, 일단은 사은을


이법신앙에 귀속시키는 틀이 남아있는 한에서 이 사은을 다시 법신불과
병렬하여 호칭하는 것은 옳은 태도라 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모든 언어
는 정의를 부가할수록 그 의미는 좁아진다. 예를 들어‘하늘’이라 하면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까지 생각할 수 있지만‘푸른 하늘’이라
하면 눈에 보이는 스카이로 그 개념이 좁아진다. 게다가‘고향의 푸른 하
늘’이라 하면 어린 시절 내 눈에 비쳤던 것으로 시공이 한정되고 만다.
앞에 용어를 부가하여 의미를 좁히는 시도는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다섯째, 법신불을 사은과 연결 짓는 태도는 법신불이 지니고 있는 무
한한 자비의 속성을 충분히 나타내기 어렵다. 존재의 속성을 은혜로 연
결하는 것은 원불교적 특색을 나타내는 매우 우수한 시도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을 네 가지로 범주화시키고‘풍운우로의 은혜’라든지‘낳고
기르는 은혜’43)등의 표현은 가시적이며 부분적 속성으로 은혜를 한정시
킬 수 있어 신앙의 대상이 지니는 절대 무한성을 한정시킬 우려가 있음
을 생각해야 한다. 법신불이 지니는 무한한 위력과 생명력과 자비는 가
슴으로 느낄 여지를 남겨 주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
하여는 매우 중요하며 다시 논의가 필요하므로 후일의 과제로 남긴다.

Ⅴ. 맺는 말

원불교의 신앙 행위시의 호칭은 일반적 통칭으로는‘부처님


(Buddha)’44)으로 하고, 공식 명칭을‘법신불(Dharmaka-ya-Buddha)’로

43)『정전』교의편 사은
44) 여기에서 깨친 사람을 표현할 때는 보통명사로서 소문자를 써서‘buddha’라 쓰고, 우주
‘법신불사은’호칭 재고 141

통일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어머니’라는 말처럼, 호칭이란


뇌리에 익숙한 것이 가슴을 적시는 법이다. 보편적이고 대중적 감성이
라는 면에서‘부처님’이라는 통칭을 쓰고 공식적인 신앙의 대상으로는
‘법신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좋겠다는 말이다.
시대나 환경이 바뀌면 신앙에 대한 호칭도 바뀔 수 있다. 청조에 중국
에 온 선교사 마테오리치(1552-1610)가 여호와를‘천주’로 부르자는 품
신을 거부하고 300년 후인 1939년에야 용인하던 교황청이었지만, 1997
년 한국천주교에서는‘천주’를 다시‘하느님’이라는 호칭으로 전면 개
정하고 있는 것을 참고할 필요도 있다. 따라서 한 번 정해진 호칭을 개정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고착된 사유는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일각에서는‘일원불’혹은‘원불님’이라는 매력적인 호칭을 제시하
기도 한다.45) 이는 특유하다는 장점은 있으나 보편적이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또한 그러한 호칭들은 원불교 교서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치명적 한계도 있다.
원불교에서 무엇을 믿느냐는 물음에‘부처님’이라는 보편화된 이름으
로 답하고, 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때, 그 부처님은 법·보·화 삼신을
아우르는‘법신불’이며, 그것은‘일원상’으로 상징되고, 그 성격은 우주

적 의미를 부가한 신앙의 대상으로서는 고유명사로서 대문자를 써서‘Buddha’를 쓰자


는 것이다. 켄 윌버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우주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는 cosmos를, 그
에 신격과 지성을 부여하여 최상의 주재자의 의미까지 포함한 것으로는 Cosmos 혹은
Kosmos를 사용하는 것에서 예를 볼 수 있다.
45) 서경전이 대표적이며(「원불교 신앙의 대상 호칭문제」,『원불교사상』제7집, 원불교사상
연구원, 1983), 그의 견해에 공식적으로 찬성한 학자로는 노권용 등이 있다.(「원불교 신
앙론의 과제」,『원불교학』창간호, 한국원불교학회, 1996) 그러나 이들 학자들의 공통점
은 일원불이 아니면‘부처님’으로 호칭하자는 점에서 필자와 일부 공통점이 있다. 또한
부처님으로 호칭하자는 데에 공감하는 학자로 류성태(「원불교 신앙호칭에 있어 신앙성
강화모색」,『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제36집, 원불교사상연구원, 2007)가 있고, 조건적
공감자로 김성장(「신앙의 대상 호칭문제와 일원상 부처님 봉안 의미」,『원불교사상과 종
교문화』제37집, 원불교사상연구원, 2007)을 들 수 있으며, 원불님의 호칭에 호의적이면
서 법신불에 주안점을 두어 법신여래라는 호칭을 제시하는 송천은등의 입장이 있다.
142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49집 연구논문

적이며 초월적일 뿐만 아니라, 실지불공의 대상으로는‘사은’으로 범주


지을 수 있는 우주만유라고 차제로 설명한다면 신앙적 감성과 논리적 타
당성을 함께 충족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한다.46)
만약 심고와 기도를 행할 때의 신앙대상의 호칭을 원래대로 해야만 한
다면 소태산 최후의 용어인‘사은’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
나 만약 그렇다면 소태산의 창조정신에도 맞지 않고 교학적으로도 합리
적이지 않다. 따라서 원기 47년(1962)년의『원불교 교전』을 정비할 때에
상황적 요청에 따라 바뀐 것은 일단 좋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다시 물리적으로 조합한 것을 그대로 두지 말고 세련되고 단일의 호칭으
로 바꾸는 것을 다시 고려해야 한다.
일각에서는‘법신불’이라는 단일개념은 새 불교로서의 특징과 상징
성이 모자란다는 점을 말하기도 한다.47) 그러나 생각해 보면 원불교의
법신불은 법보화 삼신 중의 하나의 개념이 아닌 세 가지를 아우르는 훌
륭한 의미를 지녔다. 명칭은 간략히 하고 해석은 풍부하게 하는 것이 종
교라고 볼 때, 새 불교로서의 원불교가 지닌 특징과 상징성은 신앙의 대
상의 호칭이 아니더라도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요는 그런 것은 교학적
으로 혹은 실천적으로 보완해도 충분하다는 말이다. 지수화풍공식 육대
를 본질로 하는 밀교의 법신불을 대일여래육대라 부르지 않고 그냥 대일
여래라고 부르는 이유를 잘 생각해야 한다.

46)“진실의 반대는 거짓이 아니라 신화이다.”라는 버나드 쇼의 말을 상기하자. 신화화된 용


어에는 변화란 있을 수 없고, 변화하지 않는 진리는 그 이상 진리가 아니다.‘법신불 사
은’이라 말하면 교단의 효자요,‘법신불’이라 말하면 신앙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라는 식
의 사고야말로 진리적 신앙의 태도도 아닐 뿐더러 교단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47) 김성택, 앞의 기사.
‘법신불사은’호칭 재고 143

<참고문헌>

『원불교 교전』
『정산종사 법어』
『원불교 교헌』
김성장,「원불교신앙현상에대한연구」
『원불교학』
, 7집, 한국원불교학회, 2001.
______,「신앙의 대상 호칭문제와 일원상 부처님 봉안 의미」,『원불교사
상과 종교문화』제37집, 원불교사상연구원, 2007.
______,「일원상 신앙의 재조명」,『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제47집, 원
불교사상연구원, 2011.
노권용,「기신론의 일심 삼대 사상을 통해 본 일원상 신앙 소고」,『원불
교사상』제6집, 원불교사상연구원, 1982.
______,「원불교 법신불 신앙의 의의와 과제」,『원불교 신앙론 연구』, 원
불교사상연구원, 1996.
______,「원불교 신앙론의 과제」『원불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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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신불사은’호칭 재고 145

Reassessing the title,


‘Dharmaka-ya Buddha - Fourfold Grace’

Chung, Soon-Il
Prof., Wonkwang Univ.

<ABSTRACT>
With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foundation of Won-Buddhism fast
approaching, it is vital to review the nature of faith and reform as represented
in this universal religion. One important task is to re-establish a title for the
object of faith in Won-Buddhism.
The title of the object of faith not only represents the religious emotion of its
members but is also a medium to express the collective identity of faith. In
religious activities, a title of the object of faith is significant in evoking religious
emotions. Currently, the name of the object of faith in a Won-Buddhist prayer
is‘Dharmaka-ya Buddha - Fourfold Grace’, but the official title of the object of
faith of Won-Buddhism is‘Dharmaka-ya Buddha’. The difference between
the titel used in prayers and the official title of the object of faith could cause
potential academic and emotional confusion.
Whether it is necessary to use a parallel or explanatory concept in preyer
like‘Dharmaka-ya Buddha - the Fourfold Grace’is another concern. A concise
and unified concept is an important factor to clarify the object of faith, which
inspires emotions towards faith.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unify the titles
currently used to express the object of faith into a single concept. The method
of this study is to review meanings and the limitations of“Dharmaka-ya
Buddha - the Fourfold Grace”from multiple aspects .
146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49집 연구논문

This study argues that‘Buddh’should be the name used in conventional


religious activites and‘Dharmakaya-Buddha’should be used as the official
title. Using the term‘Buddha’will appeal to universal and popular emotion,
but as a formal object of worship,‘Dharmaka-ya-Buddha’is more reasonable.
Although other alternative terms such as ‘ lI-Won-Bul(一圓佛) ’or
‘Wonbulnim(圓佛님)’have been suggested, they both lack a universal
appeal.

Key words : Buddha, Dharmaka-ya-Buddha(法身佛), The Fourfold Grace,


Dharmaka-ya Buddha - the Fourfold Grace(法身佛 四恩)

논문투고일 : 2011년 8월 26일 1차 심사일 : 2011년 8월 29일 심사 완료일 : 2011년 8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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