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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次

1. 緖論

2. 淨土思想의 根據
(1) 大乘佛敎의 定義
(2) 救濟의 機緣

3. 普照知訥의 淨土觀
(1) 普照知訥의 思想的 基盤
(2) 定慧結社文 의 文獻的 分析
(3) 定慧結社文 의 淨土觀

4. 太古普愚의 정토관
(1) 한국불교사에 있어서의 태고보우국사의 지위
(2) 태고보우국사의 사상
(3) 태고보우의 정토관

5. 나옹혜근의 정토관

6. 結論

*이 연구는 2004년도 한국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육성 인문사회분야


일반연구(KRF-2004-072-AM3024)비 지원에 의해서 수행되었음.
** 동아대학교 교수
38 佛敎硏究 26

1. 緖論

고려불교는 왜 몰락했을까? 이러한 문제는 거시적으로 본다


면, 삼국시대 이래 근 1,000년간 주도적인 사상ㆍ종교로서 존재
한 불교 중심의 사회에서 주자학이라는 새로운 유교 중심의 사
회로의 이행에 대한 구조적인 해명과 관련된다. 불교가 몰락하
게 된 이유나 배경이 무엇인가는 단순히 교단의 부패, 타락이라
는 차원에서만 제기될 성질의 것이 아니며, 기본적으로 불교사
의 흐름 속에서 불교가 갖는 사회적ㆍ사상적 한계가 무엇인가,
이런 중요한 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가 있어 왔으나, 논자
는 그 정토신앙의 단절 내지 왜곡이 고려불교 몰락의 중요한 원
인 중의 하나라고 논증하고자 한다. 논자는 우선, 정토신앙의 본
질과 구제사상을 연구하고 고려시대의 중요한 승려들의 정토사
상을 연구하고자 한다. 특히, 고려를 대표하는 보조와 고려말기
중국을 유학하여 이름을 떨쳤던 태고와 나옹의 정토사상을 깊이
연구하고자 한다.
佛敎의 실천이라고 하는 문제를 가지고 접근할 때, 그 대상이
되는 것은 「禪」과 「念佛」이다. 念佛에 대한 관념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新羅의 元曉에게까지 소급되어지는데, 그 思想的인 전개
는 三國遺事 를 비롯하여 元曉ㆍ憬興ㆍ法一ㆍ義寂 등에 의해서
撰述된 一連의 淨土系典籍을 통하여 살펴볼 수가 있다.1) 그러나
新羅末에 流入된 禪의 관념이 「九山禪門」을 형성하고, 高麗末에
「臨濟宗」의 宗致를 계승한 普照ㆍ太古의 「曹溪宗」이 그 極盛을

1) 이 部分에 관한 硏究로는,
※安啓賢, 新羅淨土思想硏究 (서울, 1976.5).
※源弘之, 韓國淨土敎硏究序說 (京都, 1978.4).
를 비롯해서 많은 硏究報告가 있다.
정토신앙의 중생구제와 高麗時代의 淨土思想 39

이룬데 반하여 念佛은 끝내 宗派를 이루지 못하고, 고려시대에


는 독립된 전적마저 단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 굳이 찾는다
면, 禪師들의 전적 가운데에서 간혹 비난과 비판의 대상으로 언
급되어지거나, 天台나 密敎의 전적에서 부수적인 실천항목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을 엿볼 수가 있을 따름이다.
신라에서는 貴族佛敎ㆍ護國佛敎로서 군림했던 불교가, 원효
이후에는 일반서민에게까지 이르는 大衆佛敎ㆍ信仰佛敎로서 신
라왕조와 신라인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것을 부정할 수는 없
다. 대중불교ㆍ신앙불교의 구체적인 전개 양상은 원효가 소승계
율을 파기하고 대승보살의 길을 선택한 데서부터 찾아야 할 것
이다. 대승보살의 길이란 보살의 願과 行이 일치되는 실천을 뜻
하며, 그것은 절대적인 신앙을 통한 중생구제가 첫째 요건이 된
다. 그것은 원효가 많은 典籍에서 중시하고 있는 一心이, 단지
관념의 세계가 아닌 중생구제라는 실천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
는 절박한 신앙심의 발로라고 하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바꿔
말해서 신앙을 통한 가치관 설정이 가능한 종교로서의 불교, 그
것이 대중불교이며, 신앙불교이며, 정토신앙인 것이다. 정토신앙
은 신라가 가장 바라던 이상국가---불국토건설을 가능하게 하였
으며, 후대에도 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남겼다.
정토신앙이 이와 같이 신라의 정신적 支柱가 되었지만, 고려
왕조에서는 무슨 연유로 독립된 전적마저 남기지 못하고 다른
종파의 부수적인 실천항목이거나, 혹은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지조차 검토되지도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현대의
한국불교가 놓인 위상이, 普照ㆍ太古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원효
의 대승불교적인 廻心이, 신앙적으로도 교리적으로도 계승되어
이해되어지지 않는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40 佛敎硏究 26

2. 淨土思想의 根據

(1) 大乘佛敎의 定義

불교란 佛陀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통해서 모든


중생이 불타임을 자각할 수 있는 길이 제시된 종교이다. 불타임
을 자각한다는 것은 成佛을 의미한다.
불교가 불타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데에는 아무런 이견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고 하는 데에는
많은 의견이 제시되며, 또 多義의 해석이 가능하여진다. 성불이
란 인간 석가가 깨달음을 성취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모
든 인간이 각자로 되는 것을 뜻하고 있다. 이것은 불교의 사상
적인 始源임과 동시에 궁극적인 목표이다. 특히, 대승불교에 있
어서는 성불이 의미하는 바가 단지 형이상학적인 추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구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데에 중점을 두고 관
찰할 때 大乘의 意義가 더욱 명백하여진다. 다시 말해서 성불이
란, 釋尊이 過去因行時로부터 現世의 樹下成道에 이르기까지의
숱한 난행ㆍ고행이 논리적으로 究明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樹下
成道에서 鹿苑轉法으로 이행하게 되는 대승적인 轉回를 통해서
얻어지는 無上等正覺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성도
한 불타에서 설법하는 如來로 이어지는 대전회로 설명되어진다.
龍樹가 中論 의 「歸敬偈」에서 귀의의 대상으로 삼았던, 「戲論을
寂滅시키는 吉祥한 緣起를 가르치신 正覺者, 가장 殊勝하신 說
法者」2)가 바로 여래인 것이다.
如來의 語義는 大乘佛敎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如來란

2) 「大正藏」第30卷. 本稿의 引用은 月稱釋 ‘Prasannapadā’의 梵文에 依據했


다.
정토신앙의 중생구제와 高麗時代의 淨土思想 41

그 原語 tathāgata에서 「如來」(tathā+āgata)와 「如去」(tathā


+gata)의 두 가지 뜻을 가지고 說明되어 진다. 十住毘婆沙論
卷一에서는, 「如란 이름하여 實이라고 한다. 來란 이름하여 至라
고 한다.眞實中에 이르는 故로 이름하여 如來라고 한다」라고 敍
述하면서 眞實을 열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3). 이것은
분명히 「如來」를 의도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지지만, 그 다음에
이어서 「如去不還인 故로 如來라고 이름한다4)」고 하는 表現은 「
如去」를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大智度論 卷二에 「法相처럼 알
고 法相처럼 說한다. 諸佛이 安穩道에서 오는 것처럼 佛도 또한
이와같이 와서 다시 後有中에 가지 않는다. 그런 故로 多陀阿伽
陀라고 이름 한다5)」고 「如來」․「如去」의 二義를 說明하고 있으
며, 다시 卷五에서도 거의 같은 뜻으로 如來를 定義하고 있음을

3) 「如來者, 如名爲實, 來名爲至, 至眞實中, 故名爲如來, 何等爲實.


① 所謂涅槃, 不虛誑故, 是名爲實
② 如名不壞相, 所謂諸法實相是, 來名智慧, 到實相中 通達其義, 故名爲如來
③ 空無相無作, 名爲如, 諸佛來至, 三解脫門, 亦令衆生, 到此門, 故名爲如來
④ 如名四諦, 以一切種, 見四諦, 故名爲如來
⑤ 如名六波羅密, 所謂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 以是六法, 來至佛地, 故名
爲如來
⑥ 諦捨滅慧, 四功德處, 名爲如來, 以是四法, 來至佛地, 故名爲如來
⑦ 一切法名爲如, 是如來至諸佛, 故名爲如來.
⑧ 一切菩薩地, 喜淨明炎, 難勝, 現前, 深遠, 不動, 善慧, 法雲, 名爲如, 諸
菩薩, 以是十地, 來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 故名爲如來.
⑨ 以如實八聖道分來, 故名爲如來.
⑩ 權智二足來至佛, 故名爲如來.」( 十住毘婆沙論 卷一, 「大正藏」第26卷, p.25a~
b)
4) 「如去不還, 故名爲如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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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佛敎硏究 26

볼 수가 있다6).
이상에서 如來란 「眞如가 來至했다」고 해석할 수 있음을 보았
다. 그것을 다시 모든 衆生이 如來의 德相을 具備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衆生이 모르기 때문에 法을 說하여 가르침을 펴
게 되는 필연적인 如來의 不可思議妙用을 뜻하기도 한다7). 하지
만 一切衆生이 모두 如來의 德相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것 그대로의 상태로 곧 「成佛」하는 것은 아니다. 維摩經 을 비
롯한 많은 大乘經典에서 「娑婆卽淨土」ㆍ「生死卽涅槃」이라고 말
하고 있는 것처럼 眞如의 世界는 衆生을 떠나서 있을 수 없으
며, 衆生은 곧 覺者인 것이다. 同時에 衆生은 衆生인 것이다. 왜
냐하면 一切衆生이 成佛할 수 있는 근거는 釋尊이 說法하신 敎
法에 있는 것이지 衆生의 知解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如來의 金口聖言에 대한 「믿음」이 먼저이며, 成佛에
대한 「知解」는 모두 「敎法」에 의거해서 성립되어지는 分別智이
기 때문에 모두 「棄捨」하여야 하며, 오직 如來의 無限한 慈悲에
包容되는 것만이 곧 成佛의 길인 것이다.
說法에 의해서 모든 衆生이 구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一切衆生의
要請이며, 그 요청을 무시해서 佛陀가 樹下成道만으로 끝나 버린다
면 그것은 小乘의 깨달음에 지나지 않는 獨覺(pratyeka-buddha)
인 것이다. 佛陀가 小乘의 범주를 벗어나서 鹿野苑으로 나아가게
된 轉機가 「發菩提心」이며, 說法으로까지 이끈 힘이 「本願」

6) 「或以佛名, 名爲如來, 或以衆生名字, 名爲如來, ……佛名如來者, 如定光佛


等, 行六婆羅密, 得成佛道, 釋迦文佛亦如是來, 故名如來, 如錠光佛等, 智知
諸法如, 從如中來, 故名如來, 釋迦文佛亦如是來, 故名如來」 (上揭註 p.454
b~c)
7) 華嚴經 (60卷本), 「寶王如來性起品」卷32, 涅槃經 등의 「佛身常住, 悉有
佛性」을 통한 永遠相으로서의 如來의 出現을 提示함으로서 衆生이 곧 如來
임을 確約하고 確信하는 不可思議妙用을 말하는 것이다.
정토신앙의 중생구제와 高麗時代의 淨土思想 43

(pūrva-pranidhāna=vow, prayer)이며 「菩薩行」인 것이다.


이 「發菩提心」→「本願」→「菩薩行」으로 연결되는 方程式이 바로
大乘의 起點이 되는 것이다.

(2) 救濟의 機緣

여래가 이 세계에 출현하는 것은 如來의 慈悲의 顯現이며, 그


목적은 중생제도에 있다. 중생의 성불의 근거가 중생에 있으면
서 중생에 있지 않는 연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緣起를 보는
자는 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여래를 본다는 유명한 이야기
는 대소승의 여러 경전에서 볼 수 있는 말이다. 이것은 여래의
본질이 법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涅
槃經 에서 말하는 「如來의 法身은 常住하며 不滅이다」라는 의미
가 살아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諸行無常, 諸法無我 등의 불
교의 근본교리가, 열반경 의 「常樂我淨」이라던가 法華經 의 「
常在靈鷲山」 등의 영원상과 대립되는 것이지만, 여래의 본질이
법이 될 때에 그 대립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론화된
것이 法身이다.
如來가 眞如이며 法身이며 常住不滅한 것은 많은 대승경전에
서 강조되는 바이기도 하다. 상주불멸의 법신은 시공을 초월한,
우리의 分別智로서는 인식될 수 없는 無爲의 존재이다. 그것은
不可得이며, 相이 없으며, 說할 수도 없으며, 念할 수도 없다.
그러나 법신의 방편의 상으로서 중생에게 상주불멸의 법상을 보
이고자 하는 자비의 妙用이 바로 석존이며 十方三世佛인 것이
다.
여래의 본질은 무한한 지혜와 무한한 자비에 있다. 여래의 자
비를 感得할 수 있는 機緣은 현재라고 하는 시대의 제한 속에서
44 佛敎硏究 26

三毒煩惱를 覺知하는 데에 있다. 바꿔 말하자면 여래의 구제하


겠다는 자비와 중생의 구제받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함이 만남을
가질 때에 구제의 기연은 성립하는 것이다. 이 때의 자비의 근
거는 願으로써 표상된다. 여래는 모두가 菩薩因行時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發願하였으며, 그 원이 원만성취되어서 佛果를
이루게 된 것이다. 阿彌陀佛의 48願, 藥師如來의 12願, 普賢菩
薩의 10願 등이 그것이다. 한편 중생이 발원하는 수도 있다. 중
생의 원은 貪瞋癡의 삼독번뇌의 제약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래의 원과는 구별된다. 그것은 원을 받치는 力用이 자비로서
不可思議하게 廻向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여래의 그것은 願
行滿足, 自利利他, 自覺覺他, 覺行窮滿인 것을 전제로 한다. 그
래서 여래의 원은 本願이라고 한다.
如來의 本願과 衆生의 願이 만남을 가질 때에 비로소 구제의
기연은 성립하게 된다. 이때의 중생의 원이란 시공의 제약 속에
서 탐진치의 삼독번뇌에 허덕이지 않을 수 없는 凡夫의 自覺이
다. 중생이 스스로 각지하는 계기는 물론 여래의 敎法에 대한
聞法과 절대적인 믿음에 의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彌陀의 本願을 眞實로 받아들이고 믿고 信仰한다는 것이 용이
한 일은 아니다. 無量壽經 에서는 그것을 「信樂하여 受持하는
것은 難中의 難이요, 이 難보다 더한 것은 없다」8)고 말하고 있
으며, 阿彌陀經 에서도 「이 法을 믿기란 지극히 어렵다」9)고 하
였다. 「如來가 出世할 때에 出世하기 어렵고, 如來를 보기도 어
려우며, 諸佛의 經道는 難得難聞이다. 또 菩薩의 殊勝한 法ㆍ모
든 波羅蜜도 또한 듣기 어렵다. 善知識을 만나 聞法하여 能行하
는 것 또한 어려운 것이다」10) 그런 어려운 가운데서 믿고 信仰

8) 「若聞斯經, 信樂受持, 難中之難, 無過此難」 (上同, p.279a)


9) 「爲一切世間, 說此難信之法, 是爲甚難」 (上同, p.384a)
정토신앙의 중생구제와 高麗時代의 淨土思想 45

한다는 종교심의 발로를 재촉하고, 그 근거를 本願은 제시해 주


고 있다.
本願思想은 釋尊에 의해서 自覺된 慈悲와 智慧가 바탕이 된
如來의 大悲心이 阿彌陀佛의 本願이라는 구체적인 모양을 갖추
고 표현된 것이다. 그것이 如來의 大悲心의 발로라고 한다면, 인
간은 단지 如來의 本願에 의지하기만 하면 구제되는 것이다. 여
기서 구제되는 因마저도 衆生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如來
에게 있는 것임을 알아야만 한다. 그것을 元曉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릇 往生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人間


의 힘으로> 能히 그 正報莊嚴을 感得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며, 또
한 그 依報淨土를 感得할 수 있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如
來의 本願力의 <能動的인 妙用으로> 인하여 비로소 隨感受用되는
것이다. <결코> 自業因力으로 成就되어지는 것이 아니다.11)

本願이란 衆生이 좌절의 밑바탕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純


粹生命이며 絶對價値이다.12) 眞理 앞에서는 無力할 수밖에 없는
凡愚衆生이, 그를 「攝取不捨」하겠다는 如來의 本願(=約束)을 믿
고 의지할 때에, 거기에 本願의 意義는 뚜렷이 現前하는 것이며
淨土往生의 근거도 明示되어지는 것이다.
이상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大乘佛敎思想은 바로 淨土思想
일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0) 上同, p.279a.


11) 無量壽經宗要 , 「大正藏」 第37卷, p.128b.
12) 玉城康四郞, 「佛敎における法の根源態」, 佛敎における法の硏究 G (平川彰
博士選曆記念)
46 佛敎硏究 26

3. 普照知訥의 淨土觀

(1) 普照知訥의 思想的 基盤

신라에 있어서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는 禪宗의 導入으로 인


해서 차츰 귀족불교로 전환되었고, 密敎의 流入으로 인해서 신
비주의적 색채가 짙어지고, 圖讖思想이 그 두 가지를 결정적으
로 위치짓는 역할을 하였다. 신라 후기에 있었던 많은 戰變과
戰亂은 고려왕조의 성립으로 끝을 맺었으나, 지방 토호들을 중
심으로 중앙 귀족에 이르기까지 大乘의 利他精神을 망각해버린
自利ㆍ小乘的인 불교와, 신비주의에 채색된 祈福佛敎가 정신계
를 지배하게 되었다. 본래적인 불교는 논외로 하더라도, 민족의
윤택함을 生育시켜주는 종교로서의 불교가 있어야 할 所以를 망
각하여 버린 것이 고려시대의 귀족불교였다.
불교의 특징을 한 말로 표현하기는 무척 어렵지만, 靜的인 실
체를 인정하지는 않지만 動的인 作用을 인정하는 사상적인 특징
을 가지고 있다. 그 사상적 특징의 기반에는 「空」의 觀念이 있
다. 空이라고 하는 것은 龍樹의 定義를 빌리자면 「戱論寂滅」13)이
다. 戱論寂滅이라고 하는 것은 「空性」(sūnyatā)이며, 다른 말로 「法性」이
라고 한다. 더 분명히 하자면, 「法身」이며, 「緣起」(pratītya-samutpāda)이
며, 「眞如」(satya)이며,「法」(dharma=法)이다. 그러나 그것은 靜的인
實體도 아니며, 더군다나 「造物主」나 「創造主」는 더더욱 아니다.
金剛經 에서 말하는 「應無所住」이며, 앞에서 이야기했던 佛陀에
서 如來로 轉換하는 力用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空性眞如」는
그안에 모든 것을 眞如化하지 않고서는 안되는 甚深不可思議妙

13) 「戱論寂滅」은 中論 의 至上 目標이기도 하며, 中論 G 全般에 걸쳐서 言


及되어 있다.
정토신앙의 중생구제와 高麗時代의 淨土思想 47

用이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龍樹는 「空亦復空」14)이라고


表現하고 있다.
樹下成道라고 하는 靜에 머무르는 獨覺으로서의 佛陀가 아니
라, 鹿苑說法이라고 하는 力動的인 如來로 轉換되는 空을 「空用
」 혹은 「空因緣」이라고 한다.15) 그것이 「空亦復空」이다. 앞의
空은 佛陀가 스스로 體得한 空性眞如이며, 뒤의 空은 一切衆生
의 戱論을 寂滅시키는 大悲願力의 眞空妙用16)이다. 그것은, 眞
如는 모든 것을 眞如化하지 않을 수 없는 本源的인 것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空性」→「空用」이라고 하는 도식
이 제시되고, 그것을 구체화한 것이 「空性眞如法身」→「本願」이라
고 하는 도식인 것이다.
空用인 本願이 言語와 文字로 表象될 때에 그것을 「空義」라고
하며, 「法身」이라고 하며, 「聖典」이라고 하며, 그것은 八萬四天
의 방대한 大藏經으로 구체화되었다. 龍樹의 中論 은 이 空性
→空用→空義의 도식을 제시하기 위하여 모든 理論을 否定한 것
이다.
世親은 여기서 다시 이것을 唯識의 체계로서 재정비한 것이
轉識得智의 理論體系이며, 그것은 바로 佛敎의 價値觀이기도 한
것이다. 普照知訥의 思想的 基盤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가 있다.

一心을 깨달아서 無邊의 妙用을 일으키는 것이 諸佛이다.17)

14) 中論 卷第四, 「觀四諦品」第二十四, 第十三偈長行釋 等.


15) 上揭書, 第七揭.
16) 본래는 「眞空妙有」이지만 여기서는 「有」가 아니라 「用」이어야만 한다. 山
口益, 大乘としての淨土 (東京, 1963.3.), pp.55~56 參照.
17) 知訥撰, 勸修定慧結社文 ( 韓國佛敎全書 G 第四輯, 東國大學校出版部,
1982.4, p.698a).
48 佛敎硏究 26

空은 本來 無空이며 오직 如來의 圓覺明淨之心이 虛空과 같아서


法界에 두루하여 衆生心을 에워싸고 놓치지 않는다.18)
眞心妙體는 本來不動하여 安靜하며 眞常한 것이지만 <그것은 반드
시> 眞常體上에 妙用이 現前하여 흐름에 따라 妙를 얻음에 거리낌
이 없는 것이다.19)
이미 法界의 性과 相(空性과 空用)이 바로 自心의 體用임을 보지
못하고 있는데, 언제 自心의 情塵을 열 것이며, 大千經卷을 다 할
것인가.20)

知訥의 사상적 기반은 어디까지나 대승불교사상에 있다고 볼


수가 있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인 요건이라던가 불교 이해의
방향이, 그로 하여금 정토사상의 몰이해로 가게 하였던 것이다.
특히 무신정권과의 연결은 고려의 시대사조적인 귀족불교의 위
치를 더욱 확고하게 하였으며, 지눌은 그런 뒷받침 아래에서 자
기의 믿고 사모하는 바의 방향을 다음과 같이 언명하고 있다.

形容(=몸)은 寰宇(=宇宙)에 드러났으나, 그윽하고 신령한 마음은


法界에 잠기어서 機를 따라 感得함이 適然하여 구제받지 아니한다.
내가 사모하는 바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지눌에게 있어서는 定과 慧이며, 그것을 얻는 방법은


修禪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의 지눌의 정토관을 그의
초기의 저작인 勸修定慧結社文 을 통해서 검토하여 보기로 한
다.

18) 上揭書, p.706a.


19) 知訥撰, 眞心直說 ( 韓國佛敎全書 G 第四輯, p.717b).
20) 前揭, 勸修定慧結社文 ( 韓國佛敎全書 G 第四卷, p.703b).
정토신앙의 중생구제와 高麗時代의 淨土思想 49

(2) 定慧結社文 의 文獻的 分析

知訥(1158~1210)은 高麗 毅宗 12年에 鄭光遇의 아들로 태


어났다. 8歲에 宗暉에게서 具足戒를 받고, 一定한 스승이 없이
道를 求하여 遊歷하였다. 明宗 12年(1182) 25歲에 僧科에 及第
하였으며, 그 後 六組壇經 , 金剛經 , 大慧語錄 G 등에서 깨달
음을 깊이 하였다. 明宗 20年(1190) 得才의 권유로 公山 居祖
寺에서 「定慧結社」라는 修行團體를 결성하여 定慧双修를 내걸고
修行을 실천하였다. 勸修定慧結社文 은 이때에 撰述된 것이며,
定慧結社의 宣言文이기도 하다. 그 後 松廣山 吉祥寺로 옮겨 그
곳을 曹溪山 修禪社라고 改名하고 53歲로 入寂할 때까지 이 곳
에 住하였다(熙宗 6年). 入寂하자 熙宗은 「佛日普照國師」라 謚
號를 賜하고 그의 高德함을 기리었다.
지눌은 평범한 民僧이었으나 松廣山에 住한 後로는 왕족으로
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많은 존경을 받았다. 특히 修禪社 第二
世때에 당시의 最大權門인 崔氏一門의 歸依를 받았던 것은 주목
해도 될 것이다.
지눌이 활동하였던 시기는 바야흐로 무신정권이 득세하던 시
기와 겹친다. 毅宗 24년(1170)에 鄭重夫, 이의방 등이 난을 일
으켜 이어 이의민, 경대승 등이 득세하였으나, 明宗 26년
(1195)에 최충헌이 이의민을 죽이고 많은 朝臣들을 죽임으로써
최씨 일문의 집권이 시작되니, 이 때에 지눌이 38세였다. 그 전
후에 조위총의 난을 비롯하여 대소 10여 차례의 난이 있었고,
특히 僧軍과 무신정권과의 충돌은 비참할 정도의 양상을 드러냈
으며, 수차례의 격돌로 인해서 수천의 사상자를 내었다.
지눌이 활동하던 시기는 이와 같이 朝野ㆍ僧俗간에 수라장을
이루던 때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지눌은 정치에 전혀 개
50 佛敎硏究 26

입하지 않고, 순수한 입장에서 종교운동을 전개하려 하였던 것이


「定慧結社」로서 부각되었고, 그 선언문이 勸修定慧結社文 이다.
정혜결사문 을 보면, 명종 12년 정월에 普濟寺에서 있었던 談禪
法會에서 同學 10여 인과 함께, 법회가 끝난 다음에 산림에 은둔
하여 結社 修行할 것을 제의하자, 일곱 가지의 문답이 왕래했다.
그 문답을 중심으로 지눌의 사상을 피력하여 서술한 것이 바로
定慧結社文 의 내용이다. 먼저 일곱 가지의 質問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諸公이 이 말을 듣고서 「지금은 末法의 時代요. 正道는 가리워


졌는데 어찌 능히 定慧를 다할 수 있으리요. 부지런히 彌陀를
念하여 淨土의 業을 닦는 것만 못하지 않겠는가」21)
② 「그대가 지금 말한 것은, 먼저 自身의 性淨妙心을 信解하여야
비로소 그 性을 의지하고 修禪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인데, 그것
은 예로부터 佛心을 스스로 닦고 佛道를 스스로 이루는데 있어
서 가장 중요한 方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修禪하는 사람
이 神通智慧를 發하지 못하는가. 만약 神通力이 없다면 如實하
게 修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22)
③ 「만약 自己의 眞性이 本自圓成이라고 한다면, 다만 마음의 自在
로움에 맡기기만 하여도 옛 聖人의 말씀과 다르지 아니할텐데
어찌하여 觀照한다 하여 無繩自縛하려 하는가」23)
④ 「諸佛의 妙道는 深曠難思한데 이제 末世衆生으로 하여금 自心
을 觀照하여 佛道를 바라게 한다면 제가 上根이 아닌 바에야
疑心하고 誹謗할 뿐이 아니겠는가」24)
⑤ 「修多羅(sūtra=經) 가운데에 百千三昧와 無量妙門을 演說함이

21) 上揭書, p.698b.


22) 上揭書, p.699b~c.
23) 上揭書, p.700b.
24) 上揭書, p.701c.
정토신앙의 중생구제와 高麗時代의 淨土思想 51

그물을 펼치어 天地를 덮어 둘러싼 것과 같다. 모든 菩薩이 가


르침에 따라 奉行하면 斷․證의 階位에 따라서 제각기 三賢․
十地와 等․妙 二覺에 이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다
만 惺惺寂寂의 二門으로 昏深緣慮를 對治하여 마침내 究竟位를
期한다는 것은 마치 작은 물거품을 보고서 큰 바다를 다 보았
다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 어찌 惑見이 아닐손가」25)
⑥ 요즘 修心하는 사람으로서 만약 博學多聞하여 說法度人한다면,
이는 곧 內照함에 損傷을 끼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약 利
他의 行이 없다면 이는 곧 제 혼자 고요함을 取하는 무리와 무
엇이 다르다고 하겠는가」26)
⑦ 요즘의 行者는 아무리 定慧에 專念하려 하더라도 대개는 道力
이 미치지 못한다. 만약에 淨土를 求하지 아니하고 이 穢土에
머무른다면 온갖 苦難을 만나 退失할까 두렵다」27)

위와 같이 일곱 가지 질문에 대하여 살펴볼 때에 첫 번째와


일곱 번째의 질문이 淨土敎의 立場에서 發問한 것이라고 할 수
가 있다. 여기에 관하여 權寄悰 교수28)는, 첫 번째와 마지막 질
문에 淨土敎의 立場을 이끌어 說明함은 知訥의 意圖的인 展開이
며,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반드시 淨土敎를 言及해야
할 必要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指摘하고 있는데, 筆者도 全的으
로 同意하는 바이다.
權寄悰 교수는 다시 이같은 질문을 삽입시킨 底意에 대하여,
知訥은, 그만큼 淨土敎에 대한 관심과 비중을 두고 있었으며, 그
관심과 비중이 부정적이건 긍정적이건 간에 定慧結社를 提唱하

25) 上揭書, p.702a.


26) 上揭書, p703c.
27) 上揭書, p.704b.
28) 權寄悰, 「高麗時代 禪師의 淨土觀」, 韓國淨土思相硏究 (東國大學校 佛敎
文化硏究所 編, 1985. 10).
52 佛敎硏究 26

는 글에서 禪과 淨土를 對比해서 言及할 만큼 知訥에게 있어서


는, 淨土敎가 큰 問題로 대두되었다29)고 推斷하고 있으며 그 推
斷은 說得力이 있다고 보여진다.
筆者는 여기서 다시 定慧結社文 의 도입부분으로 돌아가서,
「同學 十餘人과 함께」라는 文章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談禪法會
에 모였던 大衆들의 질문이었다는 것도 중시하고 싶다. 서론에
서 지적했던 것처럼, 高麗時代에 淨土敎가 전혀 그 모습을 보이
지 않지만, 談禪法會에 모인 大衆들의 입을 통해서 淨土敎의 信
仰과 思想이 얼마나 깊이 뿌리박혀 있는가를 엿볼 수 있다는 것
은 흥미로운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定慧結社文 에서 知訥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大乘禪」이
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세 번째 물음에 대한 答을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末法時代에는 사람들이 乾慧를 내세워 苦輪을 免하지 못하는 것이


다. 마음 씀씀이 虛妄한 것을 이어받고 거짓에 의지하고 있다. 말
은 제 분수에 넘친 것만 이야기하며, 知見은 偏枯하고 行解는 고르
지 못하다. 요즘의 禪門에서 공부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런
病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덧붙여 모두가 이미 自心이 本淨이어서
有無에 속하지 않는데 뭣 때문에 몸을 괴롭히면서 망령되이 修行
할 것인가 라고 하고 있다30)

이렇게 그 시대의 禪者들은 질타하고 있다. 그 시대의 소위


禪을 한다는 사람들이 修行보다는 寺院의 田地와 奴婢에 더욱
큰 관심을 보였던 것은 많은 論者에서 지적되고 있는 바와 같
다.31) 그런 世間的인 富와 권력을 위하여 많은 僧軍들이 武臣政

29) 上揭書, pp.120~121.


30) 前揭 韓國佛敎全書 G 第四輯, p.700b.
정토신앙의 중생구제와 高麗時代의 淨土思想 53

權과 대립ㆍ충돌한 것은 당시의 宗敎界가 이미 精神的인 支柱의


역할을 못하게 된 상태로 되었음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知訥은 「觀行하는 餘暇에 宗敎와 古德의 入道因緣을 상세하게
파헤쳐서 邪와 正을 決擇하는 것은 오로지 利他와 利己에 힘쓰
려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지 밖으로 名相을 分別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32)라고 하면서, 古德의 말을 빌려서, 「菩薩은
본래 남을 濟度하기 위하여 定慧를 닦는다」33)고 定慧의 궁극적
인 목적이 「衆生濟度」에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것은 知訥이
목표로 하고 있는 定慧修行은 그 목적이 어디까지나 衆生濟度에
있다는 것이며, 大乘菩薩이 그랬듯이, 衆生을 위하여서는 定慧도
깨달음도 버릴 수 있다는 자세이기도 하다. 그래서 知訥은 「信」
에 대하여는 지나치리만큼 강조하고 있다. 그 예를 몇 가지 보
면 다음과 같다.

末法과 正法의 때가 다름을 論하지도 말고, 自心의 우매하고 지혜


로움을 걱정하지도 말라. 오로지 우러러 믿는 마음(仰信之心)만을
일으켜 分에 따라 修行하여…34)
神通의 智慧는 스스로 올바르게 信佛하는 마음에 따르는 法力이
加行用功해서 얻어지는 것이다(中略). 만약에 信解가 바르지 못하
고 功行이 깊지 못한 채로 꾸뻑 꾸뻑 앉아 졸면서 아무소리 안하
는 것을 禪이라고 한다면 거기서 어떻게 神通이 나올 수 있는가35)

31) 金鍾國, 「高麗武臣政權と僧徒の對立抗爭に關する一考察」, 朝鮮學報 G 21․


22, 1961.
崔柄憲, 「羅末․麗初 禪宗의 社會的 性格」, 史學硏究 G 25, 1975.
閔賢九, 「月南寺址 眞覺國師碑의 陰記에 대한 一考察. -高麗의 武臣政權과
曹溪宗」, 震檀學報 G 36, 1973 等 參照.
32) 前揭, 韓國佛敎全書 G 第四輯, p.704a.
33) 上同.
34) 上揭書, p.699a.
54 佛敎硏究 26

三寶를 愛敬하는 淳厚한 마음이 있음으로써 부처님의 威神加被力


을 힘입어 능히 業障을 消滅하고 善根이 不退한다.36)

이와 같이 如來에로 向한 「信」은, 知訥에게 있어서는 가장 요


긴한 것이었다. 「定慧結社」는 이런 大乘的인 바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知訥이 추구한 禪은 大乘의 禪이며 最上乘의 禪이다.

禪이라고 하는 것은 깊고 얕은 것이 있다. 이른바 外道禪․凡夫


禪․二乘禪․大乘禪․最上乘禪이 그것이다.37)

이러한 最上乘의 禪을 追求하여 定慧結社를 結成하려고 하면


서도 단지 山林에 숨어 살며 自利만을 위한 것이 아님이 그의
사상적 기반은 어디까지나 大乘菩薩道에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修道하는 사람이 捨命入山한다고 하더라도 이 行을 닦지


아니하고서 거짓으로 威儀를 나타내어 信心있는 檀越을 속인다면,
그것은 차라리 名利와 富貴를 求하며 酒色에 貪着하여 身心이 荒
迷한 채로 一生을 헛되이 보내는 것보다 못한 것이다.38)

(3) 定慧結社文 의 淨土觀

定慧結社文 에 나타난 지눌의 사상적 기반은 대승보살도에


있었으나, 그가 본 淨土信仰은 그 대승의 범주에 넣지 않았다.
그것은 禪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自利가 중심이 되기 쉬운 사상

35) 上同, p.966c.


36) 上同, p.704c.
37) 上同, p.700c.
38) 上同, p.707b.
정토신앙의 중생구제와 高麗時代의 淨土思想 55

체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禪 사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수하성도의 불타만을 목표로 한다면 소승ㆍ독각 이외에 아무것
도 아닌 것이다. 지눌이 아무리 成道한 뒤에 그 道力으로 중생
을 구제한다고 하는 대승적인 사상기반을 가졌다 하더라도, 成
道한다는 自利가 앞서 있는 한, 그가 질타하였던 다른 禪 수행
인과 같은 연장선상에서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눌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時代는 비록 바뀔지라도 心性은 바뀌지 않는다. 法道에 興衰가 있


다고 보는 것은 곧 三乘權學의 所見이기에 智慧있는 사람은 이와
같이 보아서는 아니 된다. 그대들과 나는 이미 最上乘法門을 만났
으며, 또한 이것을 見聞하여 熏習하였으니 어찌 宿緣이 아니겠는
가. 그것을 스스로 경사로이 여기지 아니하고 도리어 제 分에 넘친
다는 생각을 일으켜 즐겨 權學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는가. 그것은
先祖를 저버리는 일이며, 最後의 佛種을 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念佛하고 轉經하고 萬行施爲하는 것은 妙門이 住持하는 法이기에
이 어찌 妨碍가 있으랴마는, 根本을 저버리고 相에 執着하여 밖으
로만 求한다면 智慧있는 사람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39)

여기서 지눌은 「修淨土之業」을 「三乘權學之見」이라고 定義하


고 있으며, 스스로 「有智之人」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어서 華嚴
論 , 圓覺經 , 唯心訣 G 등을 인용하면서, 어디까지나 淨土의
業은 「不了義」의 사상이며 權學方便의 이론이라 논증하려고 하
고 있다.

다만 佛祖의 誠實之言을 거울삼아서 自心은 本來부터 靈明淸淨하


며, 煩惱의 性은 空임을 알아서…40)

39) 上同, p.698b.


56 佛敎硏究 26

이 말은 앞에서 누누히 이야기 하였듯이, 自心이 本來부터 靈


明淸淨하다는 것은 佛祖의 誠實之言에서 비롯된 것이지, 衆生은
그것을 거울삼아서 믿고 의지하는 것일 뿐이다. 時空을 초월한
佛智와 時空에 매일 수밖에 없는 衆生의 옅은 智慧를 같은 차원
에서 논한다는 것은 驕慢이며, 「先祖를 저버리는 것이며 最後의
佛種을 끊는 것」이 될 뿐이다. 그것을 「우리처럼 智慧있는 사람
」이라고 자처한다면, 그야말로 佛智의 無限함을 보지 못한 三乘
權學의 견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에 彌陀의 四十八願이 權學方便이라고 한다면, 知訥이 「
發弘誓願하고 廣度群品하는 것은 一身이 獨求解脫하려는 것이
아니다41)」라고 한 것이, 단지 樹下成道에 뜻이 있는 方便의 이
야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서 利他를 위해서 自利
를 실천한다는 方便을 내세우고 결국은 自利에만 급급하고 있다
는 것이다. 知訥도 또한 당시의 많은 慧修行人과 같은 틀 속에
서, 觀念的이고 高踏的이고 利己的이고 貴族指向的인 「有智之人
」일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곱 번째 質問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答하고 있다.

만약에 大心衆生이 있어서 이 最上乘法門에 의지하여 결정코 四大


는 泡幻과 같은 것이며, 六塵이 空花와 같고, 自心이 佛心이며 自
性이 法性인 줄을 信解한다면……(中略). 이와 같이 法에 맡겨서
習氣를 調治하면 理智가 增明되고 緣에 따라 衆生을 利롭게 하여
菩薩道를 行하면 비록 三界內에 處한다 하더라도 法性淨土 아님이
없다(中略). 이런 것을 미루어 본다면 念佛求生하지 않더라도 다만
唯心임을 了知하여 隨順觀察하면 自然히 極樂으로 往生할 것이 必
定無疑한 것이다42)

40) 上同, p.699b.


41) 上同.
정토신앙의 중생구제와 高麗時代의 淨土思想 57

여기서 지적해야 할 문제점은 또한 大乘佛敎의 교리해석이다.


「自心是佛心이요 自性是法性이다」라고 하는 말은 이 또한 앞에
서 누누히 서술하였듯이, 如來의 見地에서는 自心是佛心이며 衆
生是佛이지만, 衆生의 見地에서는 自心是自心이며 衆生是衆生일
뿐인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흉악한 殺人鬼나, 弱하고
외로운 者를 괴롭히는 파렴치한이 「自心是佛心」이라고 큰 소리
치고 다닌다면 이는 語不成說이다. 정도의 차는 있을지라도, 衆
生은 잠시도 時空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轉識得
智하고 轉迷開悟하지 못한 凡夫는 「自心是自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淨土는 觀念的인 實在가 아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은 一
神敎의 天國과 다를 바가 없다. 淨土는 時空을 초월한 「淸淨佛
國土」임은 世親의 無量壽經優婆提舍願生偈 를 引用할 것도 없
이 大乘思想에서는 自明한 論理이다. 따라서 往生도 「生理的인
生」을 의미하지 않는다. 時空을 초월한 淨土에 왕생하는 것이
어떻게 世間的인 生일 수가 있을 것인가. 그러니 極樂에 왕생하
는 것이 반드시 「死後의 再生」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死後의
再生」이라면 그것은 轉廻轉生과 다를 것이 없다. 往生은 轉廻轉
生이 아니다.
물론 知訥이 지적한대로 三學에 의하지 않고서 成道한 부처는
없다.43) 더군다나 念佛해서 成道한 부처도 없다. 하지만 如來의
무량무변의 大悲願力을 信解한다면, 自信있게 떳떳하게 念佛往
生할 수 있는 것이다. 如來 그 자체는 時空을 초월했지만, 大悲
願力이 用으로써 衆生을 無限하게 淨化시켜 주기 때문에 時空에
구속받는 凡夫일수록 往生은 기약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無師正

42) 上同, pp.704~705b.


43) 上同, p.707a.
58 佛敎硏究 26

覺할 수 있는 佛陀라고 한다면 따로이 法門이 필요하지 않지만,


衆生에게는 如來의 大悲願力이 절대불가결이기 때문이다. 설령
智慧있는 자가 定慧에 힘쓴다고 한다면, 그에게는 如來의 大悲
願力이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元曉의 往生因
에 관한 定義44)가 뚜렷이 부각되는 것이다.
지눌은 비록 대승불교에 그 사상적 기반을 두고 있다고는 하
지만, 「無非法性淨土」를 관념적으로 보고 있는 한, 山林에 隱遁
하여 修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定慧結社의 慕緣趣旨
에서

업드려 바라옵건대 禪敎이거나 儒道이거나, 厭世하는 高人으로서


티끌세상을 벗어나서 높이 物外에 노닐면서 內行之道에 專精하고
자 하는 뜻에 부합하는 사람은 지난 날에 結契之因이 없다 하더라
도 結社文 뒤에 그 이름 쓰기를 허락하노라45)

라고 맺고 있다. 이로서 知訥의 定慧修禪의 목적이 불타는 신


앙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4. 太古普愚의 정토관

(1) 한국불교사에 있어서의 태고보우국사의 지위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신 일대사인연이란 오직 중생의


교화에 있었다. 그런데 중생들의 근기는 너무나 각양각색이라

44) 前揭註, 11)


45) 前揭, 韓國佛敎全書 G 第四輯, p.707b.
정토신앙의 중생구제와 高麗時代의 淨土思想 59

그에 대응하는 부처님의 교화방법도 다양하였으니 교화에 대응


하여 나투신 몸을 천백억의 화신이라 하고 그 나타내 보이신 법
을 팔만사천의 법문이라 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1천 6백여 년이라는 유구한 역
사의 흐름속에서 우리의 독특한 지역성, 시대성, 민족성, 문화성
등을 가늠하여 수 없는 방편이 더해지고 덜해지면서 종파들이
성립되었으니 이를 불교의 교단적인 내면에서 볼 때에 교리의
발달사와 종파의 변천사가 된다 하겠다.
이러한 교리의 발달과 종파의 변천이라는 역사적인 면에서 볼
때에 보우국사가 처하였던 시대적 배경과 사상적 위치는 참으로
획기적인 중요성을 가졌다 하겠다. 태고보우국사 이전의 우리나
라 불교는 흔히들 五敎九山으로 불리어져 왔다. 이 5교9산에 대
하여는 그 교리의 발달, 선양면에서 또는 종파의 성립과 변천의
면에서 앞으로 많은 고증과 연구가 더 있어야 하겠다.
그러나 불교가 삼국시대 이후 특히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오
는 동안 교리적으로나 종파적으로나 많은 변천과 분파가 있었던
것은 뚜렷한 사실이라 하겠다. 불교의 이런 종파적 분립은 한때
불교의 저변확대를 이루어 종지의 선양과 교세의 확장을 가져오
는데 큰 구실을 하였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차차 말기로 내려오
면서 도리어 분립으로 인하여 모순과 대립이 심하였으니 그것은
부처님의 제자이면서도 이교도 이상으로 서로 배척을 일삼기만
하여서 그 결과는 한 국민으로서의 사상에까지 혼란과 대립이
극심한 상태에 이르렀다.
태고국사는 이러한 시대적 폐단을 절실하게 느낀 나머지 이의
지양에 힘썼다. 그것은 국사의 수행기에 있어서도 어느 한 종파
특히 禪과 敎에 치우치지 않고 폭넓은 수행을 하였고 따라서 왕
사, 국사가 된 뒤 종파정책의 시행에 있어서는 원융부를 두어
60 佛敎硏究 26

九山圓隆五敎弘通에 힘을 다하였다.
태고국사의 이러한 행적은 그 시대적 폐단을 구하려는 한 방
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국사 이후 우리나라 불교계의 한 지표
가 되었으니 이는 한국불교가 선과 교를 겸수한다는 독특한 사
상이 형성되었던 것이며 또한 국사의 종파의 원융을 도모한 정
책은 그 뒤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국사의 본뜻과는 다른 측면
에서이지만 국가적 정책으로 여러 종파의 통합을 강행하였으니
태종 이후에는 선종, 교종만을 인정하여 조선말기까지 내려오게
된다.
이렇게 볼 때에 국사이전의 우리 불교계는 여러 종파로 갈리
어 성립되어서 각 종파 마다 宗祖와 宗旨와 宗徒와 宗勢가 따로
있었지만 국사 이후에는 국사의 수행관과 원융정책에 의하여 종
파를 총괄하려는 사조가 형성되었고 더구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국가적 정책에 의한 여러 종파의 통폐합이 행하여졌기 때문에
종전처럼 각기 종조와 종지와 종도와 종세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불교의 국사 이전은 소위 五敎九山이 각기
성립하여 발전하던 시기이고 국사로부터 이후는 여러 종파를 포
괄하여 원융하는 시기라 하겠다. 그러므로 태고국사는 한국불교
사에 있어서 그 수행관으로 보나 종파정책상으로 보나 중흥조의
위치를 확보하였고 따라서 오늘날의 한국 불교도는 국사의 사상
과 법통을 계승한 문손들 뿐이다.

(2) 태고보우국사의 사상

태고국사의 사상은 너무나 거룩하고 커서 감히 무엇이라 단적


으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을
정토신앙의 중생구제와 高麗時代의 淨土思想 61

간추려보면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선과 교의 원융이다. 국사는 수행이나 종파정책의 면에
서 禪과 敎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겸수일치시킨 자세였
다. 위의 행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먼저 국사의 수행면을 보
면 국사께서 19세에 일찍이 선지를 탐구하였지만 동시에 교학도
연구하여 26세에 화엄선에 합격하였고 37세에 원각경을 보고
깨달았으며 38세에 無字화두로서 견성하는 등 선과 교를 겸수하
여 크게 성취하였다. 따라서 이후부터 선과 교의 겸수는 한국불
교도의 수행에 큰 표본이 되었으며 한국불교의 특징을 이루었
다.
또 국사의 종파정책면을 보면 공민왕의 왕사가 되던 때에 국
가의 일을 진언하면서 9산원융5교홍통 을 주장하고 원융부까지
설치하여 여러 제종포괄에 힘을 기울이면서 불교의 근본정신으
로 회통하고 국민의 사상 순일에 이바지하였다. 국사의 이러한
운동은 불교의 종파이기 이전에 먼저 한 부처님의 제자인 것이
요, 한 종파의 사람이기 이전에 한 나라의 백성임을 스스로 깨
닫자는 것이었다. 이는 종교인으로서 크게 명심해야 할 문제점
이라 하겠다.
둘째, 세간과 출세간의 도리를 원융한 것이다. 행적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국사께서 부모님에 대한 효양을 보자 종전의
출가승들은 대개 割愛辭親이라 하여 부모친척을 멀리하는 것을
수도의 요체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국사께서는 출가수도의
목적이 4가지의 은혜를 갚는데 있음을 알아서 38세에 견성오도
한 후에 제일먼저 부모를 찾아가 효양에 힘썼으며 또 왕사, 국
사가 된 뒤에는 그 영예를 전부 부모와 향리에 돌리어서 부모가
모두 직위를 얻었고 부모의 고향이 승격되었다. 철저한 효양이
었다.
62 佛敎硏究 26

또 국사의 국가에 대한 봉공의 정신을 살펴보면 행적에서 본


바와 같이 국사께서 공민왕의 知遇를 받은 이후 공민왕의 왕사
로서 16년간, 공민왕ㆍ우왕 두 왕의 국사로서 12년간 봉직하면
서 위로는 국왕의 마음을 순화하여 선정을 베풀게 하고 아래로
는 백성의 복리증진에 이바지하기에 전 생애를 바치었다. 국사
께서는 이렇게 부모에 대한 효양과 국가에 대한 봉공에 몸과 마
음을 다 바치면서도 한편으로는 출가한 사람의 본분을 잊지 않
아서 세상의 부귀나 권력에 취하지 않고 주로 용문산 소설암에
살면서 塵世에 조금도 물들지 않았다. 이는 출세간에 있으면서
도 세간을 버리지 않고 또 세간에 출입하면서도 출세간에 철저
한 것이니 이는 참으로 진리를 통달한 고승이 아니고는 하기 어
려운 일이라 하겠다.
셋째, 국사께서 중국에 외유한 일이다. 행적에서 본 바와 같이
국사께서 46세에 원나라에 건너갔을 때 명성이 널리 퍼져서 石
屋淸珙 선사와 같은 고승으로부터 심계를 받았으며 원나라 황제
의 특수한 우대를 받아 몇 차례 법회를 주관하였고 永寧禪寺의
주지로 개당까지 하였다. 이 외유는 국사께서 자신의 깨달음에
대하여 증명을 구하는데 주안이 있었으므로 약 2년간의 외유를
마치고는 본국에 돌아왔다. 외유란 흔히 외국화되기 쉽고 외국
문화에 심취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국사께서는 그러한 자세
에서 벗어나 우리의 우수성을 도리어 과시하면서도 많은 견문을
넓히고 돌아온 점은 우리들이 영원히 존경하고 본받을 위대한
모범이라 하겠다.
끝으로, 태고보우국사 법어집은 국사께서 원나라 永寧禪寺에
서 개당한 법어를 비롯하여 본국에 돌아온 뒤 봉은사 등 여러
큰절에서 개당한 법어와 그리고 위로는 공민왕, 우왕과 아래로
는 대신과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교화로 80평생을 바치신 법
정토신앙의 중생구제와 高麗時代의 淨土思想 63

어들을 모아 엮은 것으로서, 국사의 사상을 연구하는데 가장 귀


중한 자료가 됨은 물론이요, 당시의 불교사를 연구하고 시대성
과 사회상을 고찰하는데 있어서도 막중한 史料가 된다고 하겠
다.
더욱이 고려말기에 있어서 학문과 예의범절로서 가장 이름이
높은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포은 정몽주(三隱)들이 모두 국사
의 법어집을 존중한 나머지 각기 서문과 발문을 썼음은 이 법어
집의 고귀성을 한층 더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3) 태고보우의 정토관

태고보우(1301~1382)는 지눌의 입적, 약 1백여 년 후의 인


물이다. 그의 저술로는 태고화상어록 G 2권이 현존할 뿐이다.
이 책에도 정토에 대한 언급이 적은 것은 보우 자신이 철저한
선승으로 정토에는 깊은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에 그의 법어와 게송을 통해 그의 정토관을 살펴보고자 한다.

방편이 많지만 요점을 말하면, “마음이 바로 정토라는 것과 자기


성품이 아미타불이라는 것으로서, 마음이 깨끗하면 불토가 깨끗하
고 본성이 나타나면 불신이 나타난다.” 하였으니 바로 이것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아미타불의 깨끗하고 묘한 법신은 일체 중생들의
마음에 두루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을 차
별이 없다.”하였고, 또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이다. 마
음 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마음이 없다.” 하였습니다. 만일
상공이 진실로 염불하려면, 그저 자성미타를 그대로 생각하되, 24
시간 무엇을 하든지 간에 아미타불의 이름을 마음속과 눈앞에 두
어야 합니다. 마음과 눈과 부처님의 이름을 한 덩이로 만들어 마음
마음에 계속하고 생각 생각에 어둡지 않게 하며, 때로는 “생각하는
64 佛敎硏究 26

이것이 무엇인가”하고 자세히 돌이켜보아 오랫동안 계속해야 합니


다. 그러면 갑자기 생각이 끊어지고 아미타불의 참 몸이 앞에 우뚝
나타날 것이니, 그때서야 비로소 “본래부터 움직이지 않는 것을 부
처라 한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46)

위의 글은 보우가 낙암거사에게 염불 수행의 요체에 대해 설


법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보우는 아미타불의 개념을 아예
선적인 측면에서 정의한 후에 “마음이 깨끗하면 불토가 깨끗하고
본성이 나타나면 불신이 나타난다.”라고 하여 철저하게 唯心淨土
自性彌陀의 정토관을 설하고 있다. 그리하여 보우는 아미타불을
염하더라도 사후의 극락왕생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자성에서 미
타를 찾는 수행을 권하고 있다. 다음의 글에서 이러한 면은 다
시 한 번 확인된다.

아미타불의 이름을 마음속에 두어 언제나 잊지 않고, 생각 생각에


틈이 없이 간절히 참구하십시오. 그리하여 생각과 뜻이 다하거든
“생각하는 이것이 무엇인가”를 돌이켜 관찰하고, “또 이렇게 돌이켜
보는 이것은 무엇인가”하고 관찰하십시오. 이렇게 자세히 참구하고
또 자세히 참구하여, 이 마음이 갑자기 끊어지면 자성미타가 앞에
우뚝 나타나리니 힘쓰고 힘쓰십시오.47)

위의 글에서 잘 드러나듯이 보우는 아미타불을 염송하는 정토


신앙의 본래적인 수행법이 아니라 아미타불을 염송하는 주체가
무엇인가를 아예 공안으로 삼아 참구하고, 그러한 참구의 결과
자성미타가 드러난다고 제시함으로써 철두철미하게 화두 참구법
과 동일한 방법론을 구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보우가

46) 태고화상어록, 한국불교전서 G 권6, p.679


47) 상게서, p.680.
정토신앙의 중생구제와 高麗時代의 淨土思想 65

표방한 유심정토설은 그 자신만이 주장한 독특한 것이라기보다


당시 선종계에서 일반적으로 성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보우의 염불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거나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을 생각하는 그 자체가 누구인가를 관하는
것이니 이는 선가의 공안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선의 입장에서
정토를 흡수하여 염불을 공안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5. 나옹혜근의 정토관

나옹혜근(1320~1376)은 태고보우와 더불어 여말의 선풍을


진작한 대선사이다. 나옹의 정토사상은 그의 어록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하여 하루 24시간 옷 입고 밥 먹고 말하고 문답하는 등 어디


서 무엇을 하든지 항상 아미타불을 간절히 생각하여라. 끊이지 않
고 생각하며 쉬지 않고 기억하여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각나
는 경지에 이르면, 나를 기다리는 마음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육도
에서 헤메는 고통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48)

자성인 아미타불 어느 곳에 있는가.


언제나 생각 생각 부디 잊지 말지니
갑자기 하루아침에 생각조차 잊으면
물건마다 일마다 감출 것이 없어라.49)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나옹은 육도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

48) 「나옹화상어록」, 한국불교전서 G 권6, pp.727~728.


49) 상게서, p.743.
66 佛敎硏究 26

해 아미타불을 염할 것을 권한다. 그런데 그는 아미타불이 다른


곳에 있는 부처가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부처라
고 하였다. 곧 정토신앙에서 설하고 있는 대상으로서의 아미타
불이 아닌 중생이 미혹한 마음을 벗어나기만 하면 늘 현전하는
부처인 자성의 아미타불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염불
수행에 대한 방법론을 제시하면서 “모든 행위가 아미타불을 염하
는 것으로 모아지고 이것이 계속되어 자기가 염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염하는 경지에까지 이른다.”라고 한 것은 화두를 들어서
의심덩어리가 의심을 하지 않더라도 의심이 되는 경지에 이르는
것과 같은 차원을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우나 나옹은 모두
간화선의 입장에서 유심정토설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옹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정토신앙에서 제시하던 칭
명염불도 수용하고 있다.50) 다만 칭명염불을 통한 극락왕생의
희구는 기본적으로 일반민을 중심으로 한 재가 신도들을 대상으
로 하는 것이며, 출가 수행자까지 적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6. 結 論

高麗時代의 정토사상에 대하여는 다루어야 할 과제가 많은데


도 불구하고 本稿에서는 단지 勸修定慧結社文 을 中心으로 知
訥의 淨土觀을 살펴보았다. 이어서 보우와 나옹의 정토관도 살
펴보았다. 그런데 지눌과 특히 보우와 나옹의 정토관은 정토신
앙의 본질을 받아들여서 중생구제에 나선 것이 아니고, 선종이
고려 말에 이르러 불교계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스스로의 우월
성과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의도에서 표방하는 것이라고 볼

50) 상게서, p.742.


정토신앙의 중생구제와 高麗時代의 淨土思想 67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정토신앙의 본질과 중생구제를 외면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信仰으로서의 佛敎,
衆生救濟의 사명감을 지닌 大乘菩薩道로서의 利他思想, 모든 계
층의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精神的 支柱로서의 宗敎,
이런 모든 것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佛敎思想이 高麗時代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앞에서 연이어서 天台宗과 密敎 안에서
부수적인 실천항목으로 설정된 淨土思想, 僧俗의 많은 文集에서
言及되어지고 있는 것과 金石文에 이르기까지의 淨土敎의 관련
사항을 검토해 보지 않고서는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庶民과 凡夫ㆍ惡人들 조차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민족적인 가
치관을 제시해 주는 信仰은 없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 밖에
도 新羅末에서부터 高麗中期까지의 淨土敎의 공백이 설명되어져
야 할 과제로 남겨진 아쉬움이 있다.
淨土思想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韓國의 傳統思想에 있어서,
현대에도 創造能力을 부여해 줄 수 있는 가치관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것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淨土思想이라고 생
각하는 筆者의 管見으로 인한 것이다. 그것은 凡夫의 自覺이 결
여된 知者然하는 佛敎觀에서 보는 觀念的인 것도 合理的인 것도
아닌, 大乘의 佛陀觀에 입각한 「利他」의 精神을 그 바탕으로 하
는 菩薩道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淨土往生」을 단순히 生理的
인 태어남, 經驗的인 태어남이라고 하는 世俗的인 입장이 아니
라, 宗敎的인 「태어남」이고 수용할 수 있을 때 轉迷開悟의 轉機
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며, 이때의 「開悟」는 깨달음이 아니라 「
價値觀이 設定됨」을 의미하며, 그것은 「驚異」과 「歡喜」가 수반되
며, 또 一回性의 것도 아니다. 轉迷開悟는 一回性일 수 없으며,
十信ㆍ十住ㆍ十行ㆍ十廻向ㆍ十地를 거쳐서 等覺ㆍ妙覺에 이르기
68 佛敎硏究 26

까지 거듭되는 것이다.
現代韓國佛敎의 方向錯誤는 高麗時代에 비롯되었으며, 그 是
正 또한 高麗時代에서 찾을 수가 있다. 그것은 新羅의 佛國土建
設, 淨土化의 純粹精神을 계승하는 데에 있다. 그것이 현대적 의
의를 지닐 때에 새로운 價値觀이 設定될 수가 있는 것이다.

주제어
정토신앙, 중생구제, 지눌의 정토신앙, 보우의 정토신앙, 나옹의
정토신앙
정토신앙의 중생구제와 高麗時代의 淨土思想 69

Abstract

The Relief of Mankind in a Sect of Pure


Land and a View of Pure Land and a View of
Pure Land on Koryo Dynasty

Kwak Man-Youn
(Dong-A University)

The transition from Koryo to Chosun was not only


the change of regime but involved the change of the
whole society. Most of all, the Buddhism-centered
society turned into Confucianism-centered one based
on Neo-Confucianism of Chu Hsi and the change had
significant influences on politics, society and culture.
Nevertheless, previous researches tend to understand
the transition simply as a switch from Buddhism to
Confucianism caused by the fall of Buddhism due to
its corruption and depravity and reform-oriented
officials.
Reaching the late Koryo Dynasty Zen Buddhism was
unified exclusively into Koan Zen, and Zen Buddhism
came to dominate the world of Buddhism both in
name and reality. This resulted in the tendency of
making Zen Buddhism absolute by maintaining its
religious tradition succeeding Linzai Zen and the
theory of Yusimjeongto(唯心淨土) and emphasizing the
70 佛敎硏究 26

superiority of Zen Buddhism over other Buddhist


sects. Zen Buddhism promoted such a tendency with
the object of maintaining its superiority and justness
as Zen, which had co-existed with various other sects,
came to take initiative in the world of Buddhism in
name and reality in the late Koryo Dynasty. the trend
made it impossible for various Buddhist thoughts to
co-exist and blocked the way for Buddhism to evolve into
a new stage. Because of such an ideological limitation,
Buddhism could not cope with Neo-Confucianism of Chu
Hsi effectively and at last lost its ideological initiative
to the new thought.

keyword
A view of Pure Land on Goryeo State, Pure Land,
Yusimjeong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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