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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學(선학)

제16호

ISSN : 1598-0588(Print)

능가경의 선(禪)사상

운월스님

To cite this article : 운월스님 (2007) 능가경의 선(禪)사상, 禪學(선학), 16, 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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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경의 선(禪)사상

운월스님(동국대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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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능가경은 법화경, www.earticle.net


금강경, 승만경, 화엄경, 반야경 등 다양한
대승 경전의 사상 및 초기불교의 수행, 부파불교의 새로운 해석,
외도(外道)의 다양한 주장과 후기 불교에 해당하는 유식(唯識), 여
래장(如來藏)사상까지 가미되는데다가,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인
열반경 사상까지 포함하고 있어, 대승 경전 가운데에서도 가장
뛰어난 백미(白眉)라고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예로부터 능가경에 접근하는 데는 몇 가지 어려움이
있었으니, 첫째는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에 이르는 넓은 범주에
걸친 다양한 불교 용어뿐만 아니라, 인도 철학의 다양한 외도들
의 사상까지 총망라되어 있어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는 점이요,
둘째는 비역사적인 장소인 랑카산(현재 아담봉)에서 설해져서 직
접 설해진 불설(佛說)이 아니라는 분별로 믿음이 생기지 않아, 접
근할 마음조차 잘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10 韓國禪學 第16號

필자도 선종의 초조(初祖)인 보리달마가 중국에 도착해서 가장


의지할 만한 경전으로 능가경을 추천했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에,
몇 번씩 정독을 시도해 보았다가 처음부터 너무나 비역사적인
장소 및 다양한 용어가 나와서 (예를 들면, 야차의 왕 라바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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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에 포기하고 만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다가 능가경을 강의할 기회가 있어 강제로 통독하다보니,
왜 보리달마 선사가 이 경전을 권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으며, 그
동안 학계에서 선종의 조사선(祖師禪)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주
로 조사어록을 중심으로 학자들 나름대로 짐작하고 주장했기 때
문에 의견이 분분하던 여러 가지 선(禪)사상의 근거가 능가경에
분명하게 설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생각으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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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三寶)에 귀의한다고 했지, 실제로 깊은 마음속으로부터 제
대로 삼보에 귀의하지 못했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
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또한 능가경은 선종(禪宗)
에서만 중요한 경전이 아니라, 밀교사상에도 대단한 영향을 끼친
것을 알 수 있는데, 경전 안에도 비밀히 설해진다는 표현이 자주
보이며, 현재 세계를 무대로 불법을 전하는 티벳불교의 사상적
근거도 많이 보이고 있다. 이것은 대승불교사상이 다양하게 포함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비교적 후기에 발생한 여래장, 유식,
중관, 밀교 사상이 모두 망라되고 있어, 비교적 늦게 불교가 전해
진 티벳불교 사상에 영향을 준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
오랫동안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선종 실천행의 명맥이 이어져
온 한국의 조계종은 이제 국제화 시대를 맞이하여, 자체 종지(宗
능가경의 선(禪)사상 11

旨)에 대한 특징을 대외적으로 제대로 알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종(禪宗)의 초조인 보리달마에 대한 역사적
탐구와 아울러 선종 사상의 우수성과 그 특징을 밝히는 논문이
많이 나와야 할 실정이다.
필자는 능가경에 대해서 󰡔승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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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에 「능가경의 선사상 고


찰」에 대한 논문으로, 능가경의 선사상을 아(我), 법(法), 심(心)의
세 가지 관점에서 발표한 적이 있다.
그때는 비교적 초기 능가경에 해당되며 보리달마가 권한 구나
발타라 번역의 4권 능가경인 󰡔楞伽阿跋多羅寶經󰡕과 후기 능가경
에 해당하는 실차난타가 번역한 7권 능가경인 󰡔大乘入楞伽經󰡕을
중심으로 주로 공통되는 부분에 대해서만 조명하였는데, 이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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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주로 후기 능가경에 해당하는 󰡔대승입능가경󰡕을 중심으로 선
사상을 고찰해 보고 수행단계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7권 능가경을 선택한 이유는 화엄경 80권을 번역한 실차난타
의 매끄럽고 분명한 번역의 실력과 4권 능가경처럼 생략되지 않
고 원문에 충실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Ⅰ.선(禪)사상의 이론적 근거

1. 능가경의 조사선(祖師禪) 사상

선종(禪宗) 어록을 보다 보면 조사선(祖師禪)이 여래선(如來禪)보


다 높은 위상에 있는 것을 보고 당혹스러운 때가 있었다.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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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들의 선(禪)이 부처님이 설하신 선(禪)보다 높다는 것일까?


능가경에 의하면 성문, 연각, 외도는 삼매의 즐거움에 취해 더
향상하려는 의지가 없는 데에 반해서, 보살은 선행(善行)을 쌓아
왔고 부처님의 가지력(加持力)으로 삼매에 들어서도 예전의 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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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願)을 잊지 않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내기 때문에, 더욱


수행이 진전된다는 구절이 있다. 게다가 경전으로 전해진 교(敎)
는 화신불(化身佛)이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른 가르침이나 능가경
은 수행자들을 위한 여실(如實)한 가르침이라는 표현도 보인다.
능가경의 조사선 사상은 이와 같이 보살지위에 있는 수행자들
을 위해 특별히 설해진 가르침인 것을 알 수 있다.
인도 철학에서 베다 시대 이후에 나타난 󰡔우빠니샤드󰡕에는 주
로 수행자인 스승과 www.earticle.net
제자가 서로 자신의 수행을 제자에게 전승
하는 전통이 있다. 그래서 ‘우빠니샤드’라는 말 자체가 ‘가까이
아래에 앉는다’는 뜻으로 스승과 제자가 서로 법을 전하는 사자
상승(師資相承)의 의미를 가진 말이다.
그러한 전승은 초기에는 주로 구전(口傳)으로 비밀스럽게 전승
되었고, 아무에게나 전승시킨 것은 아니었다.
제자의 성품과 근기(根機)를 살펴서 수행이 익어, 진리를 남용
하지 않고 중생을 이롭게 할 만한 자격이 갖추어지게 되었을 때,
스승은 제자에게 비밀스럽게 자신의 깨달음을 가만히 전하는 전
통이 사자상승(師資相承)제도인 것이다. 이러한 전통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늘날 인도에서는 종교의 성직자들이 물질에 오염된 현
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이 땅에 숫자만 늘고 있는 여
러 종교 성직자들에게도 적용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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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질이 안 된 성직자들의 물리적 팽창은 오히려 없는 것만도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인데, 마치 한 장님이 여러 장님
을 이끄는 것과 같아, 오히려 사회가 오염되는 정도를 가속화시
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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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는 기원후부터라고 하지만, 언제부터 그러한 가르침들이


문자나 서적으로 기록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현재 전해지
는 50편이 넘는 것 가운데 중요한 󰡔우빠니샤드󰡕로 대개 13여 종
이라 한다.
선종어록을 보다보면 경전의 내용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우빠
니샤드󰡕의 내용과 유사한 점이 많이 보여서, ‘양쪽 모두 수행을
전통으로 하기 때문이겠지.’라고 막연한 추측만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www.earticle.net
󰡔우빠니샤드󰡕} 철학의 주제는 ‘범아일여(梵
我一如)사상’이다. 부처님도 우빠니샤드 철학이 번성하였을 때 탄
생하신 분이고, 실제로 스스로 수행을 통해 진리를 증득한 분이
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진리는 일정한 형식이나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증
득한 분을 ‘부처님’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 깨달음의 내용을 어떤
방식이나 말로 표현하는가보다는, 그 깨달음의 내용을 어디까지
자세하게 구체적으로 표현했는지가 후학들에게는 더 중요할 것
이다.
‘범아일여(梵我一如)’를 통해 해탈을 추구했던 인도인들은 밖에
있는 전지전능한 창조주인 브라만(梵)과 참다운 내(眞我)가 온전
히 하나가 되었을 때(一如), 우주와 나는 일치하여 더 이상 분별
과 구분이 없는 경지를 해탈이라고 여겼다. 이 때 우주는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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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신이 되고, 나는 그대로 우주가 된다. 그 둘은 더 이상 나뉨


이 없다. 더 이상 상대(相對)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선종(禪宗)에서 불성(佛性)을 지닌 중생이 성불
(成佛)한다는 이론으로 전개되며, 일여(一如)의 내용은 능가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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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표현을 달리하여 ‘일승(一乘)’이라는 언어로 나타내고 있다.


‘일여(一如)’가 되지 못했을 때는 중생은 상대적으로 벌어지는 대
상세계인 업(業)의 굴림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업에 따라
거기에 해당하는 상대적인 세계가 펼쳐진다. 왜냐하면 3업(身口
意) 가운데에서도 마음이 중심이 되어, 마음의 상태에 따라 같은
대상경계에 대해서도 느끼는 바는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것을 능
가경에서는 “일체유심소현(一切唯心所現)”이라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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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빠니샤드 시대 가운데 후기로 갈수록 궁극적 진리와 세간적
진리, 즉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에 대한 구분이 생기는데, 불교에
서는 역사적으로 용수보살이 그러한 분류를 하기 시작했다고 전
한다.
진제(眞諦)를 능가경에서는 ‘제일의(第一義)’라고 표현한다. 뿐
만 아니라, 능가경의 환(幻)이라는 표현은 경전에서는 공이라는
표현인데 후기 우빠니샤드에 자주 보이는 표현이다. 마음은 모든
업(業)의 주체가 된다. 마음에 업의 종자가 남아 그 그림자를 남
길 때, 그것을 연기된 자성(自性)이라고 한다. 자성(自性)은 본래
청정한 빛의 성품을 지녔는데, 업으로 말미암아 그림자의 형태로
마음의 거울에 그 모습을 나타낸다고 한다.
능가경에는 원래 잔잔했던 해수(海水)에 업의 바람이 불어 파
도의 변형이 생기는 것과 같이, 파랑(波浪)이 생기는 작용을 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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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性)이 연기한다고 하고, 그 연기하여 생긴 파도를 식(識)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마음과 자성은 한 몸에서 생긴 것이지만, 마음에
업이 없으면 자성은 생겨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고요한 해수(海
水) 상태에서 바람이 불지 않아 자성(自性)이 생기지 않았을 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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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이 청정하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본래 성불(成佛)이라는 말도


생긴 것이다. 마음의 그림자가 생기지 않으면, 그 때 마음이 부처
님이 된 것이다. 이것을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한다. 이와 같
이 능가경의 가르침은 우빠니샤드의 가르침과 매우 유사하다. 그
렇다고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닌데, 능가경에서는 모두 마음의
연기(緣起)로 회통시키기 때문이다.
인도철학 사상의 흐름 가운데 우빠니샤드 시대가 흐르면서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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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로 해탈을 추구하고 스스로 증득하는 수행은 다양한 근기의
중생들을 섭수하지 못했는지, 다시 창조의 신(神) 브라흐만, 유지
(維持)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시바가 생겨나고, 신에 의지해서
위안 받으려는 타력 신앙의 요소가 부활한다. 뿐만 아니라 각 지
역과 그들의 전통에 따라, 다양한 신(神)들과 신의 부인과 신의
아들과 딸이 생겨나고, 중생들은 신들의 가족까지도 친절하게 모
두 받아들이고 의지하려 한다.
그래서 신들의 가족도 포함되고, 다양한 동물, 추상적인 개념
까지도 모두 포함되어 더욱 많은 신(神)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
한 힌두교의 여러 신(神)의 부활은 대승 불교의 여러 부처님과 다
양한 보살들의 등장에 영향을 준다. 뿐만 아니라, 앞의 3신(神)은
불교에서는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의 3신불(三身佛)로
등장하고, 다양한 원력(願力)을 지닌 보살들이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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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력신앙(他力信仰)은 업(業)이 다양한 중생을 제도하는 데 더


효과적인 측면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은 중생들이 모
두 스스로 ‘좁은 문’으로 들어갈 정도의 상근기(上根機)는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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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승가에서도 국제화 시대에 다양한 중생을 섭수하기 위해


서는, 다양한 방편의 시설이 요구되며, 다양한 근기(根機)에 맞는
다양한 가르침이 필요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초보자에 대한 가
르침에서 좀 더 단계적으로 향상시키는 가르침이 제시되는 체계
성이 요구된다.
대승불교에서는 무량수경과 같은 정토의 타력신앙이 등장하
고, 주력(呪力) 및 염송(念誦) 등 타력적 수행요소가 추가되는데,
능가경에도 부처님의www.earticle.net
가지력(加持力)이 있어야 수행자가 쉽게 열
반에 이를 수 있다는 표현이 보이며, 도신의 일행삼매(一行三昧)
나 선종에 정토적 요소가 보이는 것은 이러한 대승불교의 영향
으로 나타난 능가경의 내용 때문으로 보인다. 능가경에는 성인
(聖人) 4과(果)에 대한 해석이 초기경전과는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부파 불교부터 시작된 것이라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한 새로운 해석이 생겨나는 역사적 배경에는 명색(名色)만
갖추고 내용은 다른 자들이 등장함으로 인해서, 좀더 자세하고
확장된 새로운 해석이 시대적으로 요청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티벳의 위대한 스승 아띠샤는 “명색(名色)에 속지 않는 사람이
야말로 진정한 지혜인”이라고 했다. 이름과 겉모습에 속지 말고
안의 내용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인데, 불교계에도 이
러한 존재들이 존재하고 있고, 그들의 영향력은 미래의 한국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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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조차 어둡게 하고 있다.


대승불교를 표방하면서도 산중에만 칩거하면서, 형식과 남의
평가에 연연하는 수행자들도 이제 수행이 어느 정도 되었으면
자신이 속한 종단 자체의 일과 한국 불교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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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하게 방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된다.


서양의 학자들이 제일 경외하는 부분은 유식(唯識)분야이다. 불
자들과 같이 계(戒), 정(定), 혜(慧)를 통해서 실제로 수행하여, 직
접 체득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상세한 식(識)의 이론과 분류
는 특히 서양의 심리학 교수들을 모두 유식학자로 만드는 데 기
여하였다.
창조주와 창조물이라는 이분(二分)법적 사고와 믿음과 찬탄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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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일관했던 서양인들이 자내증(自內證)의 세계를 실천하고 체험
해서 스스로 불교를 인정하고 귀의하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능가경에서도 스스로 증득하기를 권하고 찬탄하고 있는 것은
이 경전이 다른 경전과 달리 수행자들을 위한 경전임을 보이는
것이다.

1) 유심소현( 唯心所現)

서양 불교학자들은 유식(唯識)이나 여래장(如來藏)을 설한 학자


들은 그냥 경전을 읽고 실천하는 정도의 불자가 아니고, 수행자
가 마음 수행을 통해 직접 얻은 실제 체험을 통해 설해졌으리라
는 짐작을 한다. 그리고 그들의 경전이나 논서는 보통 범부들이
지식으로 듣고 이해하거나 머리로서 분별하여 얻어지는 경지는
아닐 것이라는 전제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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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경에도 가장 많이 보이는 표현이 ‘자성청정(自性淸淨)’과


‘유심소현(唯心所現)’이라는 말이다. 유심소현의 이론적 근거는 여
래장(如來藏) 설이다.
여래장(如來藏)은 일체 중생의 번뇌 가운데 덮여 있는 본래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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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 여래법신(如來法身)을 말하고, 여래장은 번뇌 가운데에 있어


도 번뇌에 더러워짐이 없고 본래부터 절대 청정하여 영원히 변
함이 없는 깨달음의 本性이라 한다.
능가경에서는 능가왕이 깨달음을 얻은 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
하고 있다.

그때 능가왕은 묻자 곧 깨달음이 열려 모든 어지럽게 물든 것을 여


의고, 오직 자신의 마음(唯自心)임을 증득하여 무분별에 머물렀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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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옛적에 심은 바 선근(善根)의 힘 때문으로, 일체 법에 여실(如實)
한 견(見)을 얻어서, 다른 이의 깨달음에 따르지 않고, 능히 지혜(智)의
선교(善巧)로써 관찰하여, 영원히 일체 추측과 삿된 견해를 여의고, 큰
수행에 머물러 수행의 스승이 되어, 가지가지 몸을 나타내고, 잘 방편
에 통달하여 모든 지(地) 가운데 증진해 나아가는 상(相)을 잘 알고,
항상 즐거이 마음, 의(意), 의식(意識)을 여의어서 세 가지 상속하는 견
(見)을 여의고, 외도의 집착을 여의고, 안으로 스스로 깨달아 여래장
(如來藏)에 깨달아 들어가서, 불지(佛地)에 나아간다.1)

라고 하여 유심소현(唯心所現)은 여래장에 깨달아 들어감과 일치


하는 내용인 것을 보여 주고 있다.
한국 승가는 주로 좌선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선근(善根)

1) 󰡔대승입능가경󰡕}
1, (대정장 16, p. 588, 하)
능가경의 선(禪)사상 19

을 심는 수행이 결여되면 단지 좌선을 통해서만 깨달음에 들어


가기가 어려운 점도 인식해야 된다고 생각된다.
능가경에서 삼계(三界)가 다 오직 자신의 마음이라는 표현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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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가 오직 자심(唯自心)임을 요달해서 환(幻)과 같은 정(定)을 얻


고, 모든 영상(影像)을 끊고, 지혜를 성취해서 무생법(無生法)을 증득하
고, 금강유(金剛喩)삼매에 들어가, 마땅히 불신(佛身)을 얻어, 항상 여
여(如如)함에 머물고, 모든 변화를 일으키고 힘이 자재함에 통한다.2)

여기에서 ‘삼계가 오직 마음’이라는 것은 깨달음의 경지를 언


어로 표현한 것이지, 범부들이 분별하고 추측하거나, 주관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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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하고 객관의 세계를 무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일부학자들이 불교는 주로 마음만 인정하는 유심론(唯心論)이
라는 말은 바른 표현이 아니다.
여래장은 여래장식(如來藏識)과 구분되어야 한다. 다음은 장식
(藏識)이 일어나는 모습을 비유한 것이다.

대해(大海) 파랑(波浪)의 성품(性)은 두드리고 오름(鼓躍)이 가히 분


별하는 것이요. 장식(藏識)도 이와 같이 일어나니, 어찌 알지(覺知) 못
할까.3)

능가경에서 아뢰야식(阿賴耶識)은 장식(藏識)으로 번역되기도

2) 상동, p. 594, 상.
3) 상동, p. 595, 상.
20 韓國禪學 第16號

하는데, 아뢰야는 바다와 같다는 표현은 다음과 같다.

아뢰야는 바다(海)와 같고, 식(識)이 굴러감(轉)은 파도의 물결(波浪)


과 같다. 범부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비유하여 널리 열어 연설한 것
이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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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는 원래 바람이 없어서 영상이 나타나지 않는 거울이었


다. 중생의 업풍이 불어와 파도의 물결이 생기는 것을 식(識)이
생겨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다음은 ‘유심소현(唯心所現)’에서 ‘心’을 ‘분별(分別)’이라고 바꾼
표현이 보이는데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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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여, 몸과 의식주(資生) 및 우리가 사는 세간(世間) 등 일체는 다
오직 분별이 나타낸 바이다. 대혜여, 응당히 토끼의 뿔과 같은 줄 알
아서, ‘있다’, ‘없다’는 모든 법(法)에 분별을 내지 마라.5)

라고 하여, 유심(唯心)의 심(心)은 경계가 일어나지 않을 때는 청


정한 마음이고, 경계가 보일 때는 분별(分別)이 일어난 오염된 마
음의 그림자임을 알 수 있다.
보통 불교에서 ‘마음’이라고 구분하지 않고 표현하지만, 마음
에도 ‘찌따’와 같이 연기(緣起)가 일어난 상대적인 마음도 있고,
‘히르다야’처럼 청정한 마음도 있어서 어떤 마음을 가르치는지
잘 구분해야 한다.

4) 상동, p. 595, 상.
5) 상동, p. 595, 하.
능가경의 선(禪)사상 21

‘분별소현’일 때는 ‘찌따’가 될 것이고, ‘유심소현’일 때는 ‘히


르다야’의 청정심이 되는 것이다.
마음에 나타난 유(有)와 무(無)는 오직 마음을 의지해서 일어나
므로, 몸과 의식주의 그림자(影)는 중생의 장식(藏識)이 나타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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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며, 이와 같이 오직 마음이 안립(安立)한 바는 나쁜 견해를 가


진 자(惡見者)는 믿지 않으며 외도나 성문(聲聞)은 행(行)할 수 없
으며, 스스로 증득한 경계(自證之境界)라는 표현이 보이고 있다.6)
그래서 서양 학자들은 여래장(如來藏)설이나 유식(唯識)설은 아
무나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한 것이라 생각된다.
성문의 열반은 분별로 생긴 것이며, 보살의 열반은 장식(藏識)
에 의지한 바를 굴리면 대 열반이 된다는 표현이 보이는데 다음
과 같다. www.earticle.net

모든 성문은 생사(生死)를 망상하여 고(苦)라고 두려워하고 열반을


구하나, 생사열반의 차별의 상(相)은 일체가 다 이러한 망령된 분별로
있는 것이지 있는 바가 없기 때문에, 미래에 모든 감각기관(根)과 경
계(境)가 멸할 것을 망령되이 헤아려서(妄計) 열반을 삼지만, 증득한
스스로 지혜의 경계처럼 장식(藏識)에 의지한 바를 굴리면(轉) 대열반
이 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저 우치한 사람들에게는 3승(三乘)을 설하
고, 오직 마음(唯心)이며 경계가 없음(無有境界)을 설하지 않았다.7)

여기에서 성문은 열반조차 상대적인 분별의 경계에 있음을 주


장하고, 보살의 경계는 분별이 그친 마음, 즉 장식(藏識)이 생겨난

6) 상동, p. 596, 상.
7) 상동, p. 597, 상.
22 韓國禪學 第16號

그 본래자리로 돌아가 무분별의 경지가 되는 것이 대열반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서 성문(聲聞)은 부처님 당시 법을 듣고 완
전히 깨달은 성문제자들 같지는 않고, 일반적으로 법을 듣고 분
별을 일으키는 수준의 수행자를 통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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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 법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나타낸 것이


며, 자성(自性)이 따로 있어 생기는 것이 아니며, 유무(有無)의 분
별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표현은 다음과 같다.

미래 현재 모든 여래는 일체 법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不生)고 설


한다. 왜 그런가? 자기 마음이 나타낸 바(自心所現)여서 성(性)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있다’, ‘없다’라는 생각이 나는 것(有無生)을
떠났기(離)때문이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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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실성이 여래장심(如來藏心)이라는 표현도 보이는데 다음과
같다.

무엇이 원성자성(圓成自性)인가? 이르기를 명상(名相), 사상(事相), 일


체 분별을 여의어서, 스스로 증득한 성인의 지혜로 행하는바 진여(眞
如)이다. 대혜여, 여기에 이러한 원성실성이 여래장심(如來藏心)이다.9)

여기에서 여래장심은 이름에 대한 상이나 현상계의 모습이나


분별을 여읜 진여(眞如)의 마음임을 알 수 있다.
몸(身)과 의식주가 다 오직 마음의 그림자라는 것은 다음과

8) 상동, p. 597, 상.
9) 상동, p. 598, 상
능가경의 선(禪)사상 23

같다.

몸과 의식주 다 오직 마음의 그림자(影像)라


범부와 어리석은 이들은 능히 알지 못하고
건립(建立)과 비방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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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으킨 바는 다만 이 마음이니,
마음을 떠나서 얻을 수 없네.10)

외도나 범부들이 있다 없다 등 4구(句)의 분별도 또한 분별의


훈습력(熏習力)으로 일어난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다.

이러한 것은 분별하는 훈습력(熏習力)으로


같다, 다르다, 함께 한다.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으킨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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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설하고 있다.
모든 법은 항상(常)하지도 않고 무상(無常)하지도 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바깥의 법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요, 3계(三界)는 오직 마음뿐(唯心)


이기 때문이요, 모든 모습(相)을 설하지 않기 때문이요, 대종성(大種性)
이 있는 곳마다 가지가지 차별이 불생불멸(不生不滅)한 까닭이요 능조
(能造), 소조(所造)가 아니기 때문이요,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두 가
지 체성(體性)이 일체가 다 분별을 따라 일어났기 때문이요, 여실하게
두 가지 취하는 성(性)을 알기 때문이요, 오직 이것은 자기의 마음이

10) 상동, p. 598, 중


11) 상동, p. 601, 중
24 韓國禪學 第16號

나타낸 줄 요달(了達)하였기 때문이요, 밖의 ‘있다’, ‘없다’ 하는 두 가


지 견해(見)를 떠났기 때문이다.12)

여기에서 모든 법은 오직 마음이 나타낸 것이라고 하며, 창조


주(能造)와 창조물(所造)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여러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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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創造神)이나 다양한 신(神)에 대해서 강력히 부정하고, 오직


마음에서 창조된 것임을 보이고 있다. 이 구절로 보아 당시 힌두
교의 창조신(神)등을 신봉하는 것을 초월한 불교 수행자의 사상
을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일체는 모두 자신의 업풍(業風)으로 인해서 마음
에 나타나는 그림자이지만, 그 그림자는 실체가 원래는 없는 것
이고 세세생생의 훈습으로 생긴 업풍(業風)으로 생겨난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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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영상을 비추는 마음 바탕인 거울의 체(體)는 본래 항상 청
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림자를 생기게 하는 것은 분별(分別)하는 업의 바람 때문이
며, 분별이 그쳐서 더 이상 거울에 비치는 그림자가 없어지면, 거
울은 본연의 모습만 비추게 되는데, 그것을 오직 마음이라 하는
것이며, 본래는 오직 마음 만이었던 모습임을 밝히고 있다.
유심소현은 상대적인 경계가 그친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며, 스
스로 수행을 통해 증득해야 알 수 있는 경계이다.

2) 자성청정( 自性淸淨)

능가경에는 자성(自性)에 대해 자세히 밝히고 있는데, 자성(自

12) 상동, p. 618, 상.


능가경의 선(禪)사상 25

性)이 없다는 설은 다음과 같다.

다시 서로 매어(繫) 속하는 가지가지 환인 현상(幻事)은 다 자성(自


性)이 없는 것인데, 모든 중생들이 가지가지로 집착하여 가져서(取)
실(實)을 삼는데, 다 가히 얻을 수 없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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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여 원래 없는 것인데, 집착과 취함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참인 줄 알지만, 원래는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자성은 인연 따라
나타나지만 원래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이미 나타난 것은 참다
운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능가경에서 표현되는 3자성(自性)의 모습(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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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셋이 되는가? 이른바 망계(妄計)자성, 연기(緣起)자성, 원성
(圓成)자성이다.14)

라고 하여 자성의 모습을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여기에서 망계 자성은 모양을 따라 일어나는데, 연기(緣起)에 의해


서 사상(事相)의 종류가 나타나는 것(顯現)에 헤아림과 집착(計著)을 내
는 것이라 하고, 의지하는 바를 따라 연기하는 것을 연기자성이라 하
며, 명상(名相), 사상(事相), 일체분별을 여의고 스스로 증득한 성지(聖
智)의 행하는 진여(眞如)를 원성자성이라 하고, 여기에 이러한 원성자
성을 여래장심(如來藏心)이라 한다.15)

13) 상동, p. 596, 중


14) 상동, p. 597, 하
15) 상동, pp.597-598, 하-상.
26 韓國禪學 第16號

능가경의 망계자성은 변계소집성을 의미하고, 연기자성은 의


타기성을 의미하고, 원성자성은 원성실성을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결국 연기자성이 생기면 망계자성도 생기고, 연기자성이
그치면 원성자성이 되며, 그때 원성자성이 여래장심이 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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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있다.
자성이 없다는 무자성(無自性)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대혜여, 자성이 없다는 것은 나지 않기(無生) 때문에 비밀한 뜻으로


설하는 것이다. 대혜여, 일체의 법이 자성이 없다는 것은 찰나도 머물
지 않기 때문에, 뒤에 변하고 달라짐을 보기 때문에, 자성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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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은 원래 생기는 것이 아니고, 또한 무상(無常)하게 찰나마
다 변하기 때문에 고유한 성품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성
이 없다는 말은 물과 파도의 관계처럼 마음의 변형이기 때문에
새로이 생겨남이 없음을 설하고, 또한 시시각각 변하고 있기 때
문에 일정한 자성이 없다는 두 가지 의미를 보이고 있다.
능가경에는 세존이 설한 ‘여래장’의 뜻은 외도의 ‘아뜨만’ 설
과 같은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대혜여, 여래 응정등각이 자성(性)이 공(空)한 실제 열반은 불생(不


生), 무상(無相), 무원(無願) 등 모든 구(句)의 뜻(義)으로서 여래장(如來
藏)이라 설하고, 범부로 하여금 무아(無我)의 공포를 여의게 하기 위해
서, 분별이 없고 그림자가 없는(無影像) 곳에 여래장을 설했으니, 미래

16) 상동, p. 599, 상


능가경의 선(禪)사상 27

현재 모든 보살들은 여기에 집착하여 ‘나(我)’라고 하지 마라.


대혜여, 비유하면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이 흙을 취하여 사람의 노
력과 물, 막대기, 물레, 노끈 등의 방편으로써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드
는 것과 같이, 여래도 또한 그러하여, 일체 분별상(分別相)을 여읜 무
아(無我)의 법 가운데에 여러 가지 지혜 방편선교(方便善巧)로써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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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장을 설하고 혹은 무아(無我)가 된 것을 설한 것과 같이 가지가지


명자(名字)의 각각의 차별인 것이다.17)

라고 하여 자성(自性)이 공(空)한 경계에서 설해진 여래장을 외도


의 유아(有我)론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있다. 다시 두
가지 자성(自性)의 모습(相)을 설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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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혜여, 두 가지 자성의 상이 있으니 무엇이 둘인가? 이르기
를 언설(言說)에 집착하는 자성의 상(相)과, 모든 법에 집착하는 자성
의 상이다. 언설에 집착하는 자성의 상(相)이라는 것은 비롯함이 없음
으로부터 희론(戱論)과 언설에 집착하는 습기(習氣)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고, 모든 법에 집착하는 자성의 상(相)이라는 것은 자기 마음이
나타낸 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18)

라고 하여 본래 없는 것을 집착과 습기로 인해서 생겨나는 자성


의 모습을 설하고 있다.
또한 가지가지의 마음이 모든 법을 분별함으로 말미암은 것이
지, 모든 법에 자성이 있는 것은 아니며, 다 허망한 헤아림(妄計)

17) 상동, p. 599, 상


18) 상동, p. 602, 중
28 韓國禪學 第16號

이라19)하고 성인(聖人)의 법은 ‘있다’, ‘없다’라는 분별을 떠났으


며, 자성이 있다는 것은 망집(妄執)하는 자성이 나타난 것과 같다
고 하여, 모든 법과 자성(自性)의 존재를 모두 파(破)하고 있다.
여래장의 본성(本性)은 청정(淸淨)하나 객진(客塵)에 물든 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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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 깨끗하지 못하게 된 것이며, 일체 2승(乘)이나 모든 외도는


추측으로 헤아려서(臆度) 견해(見)를 일으키기 때문에 능히 현증
(現證)하지 못한다20)고 하여 자성은 본래 청정했으나 경계에 물
들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상과 같이 자성이 없다는 말과 자성이 청정하다는 말은 같
은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며, 다양한 모습의 자성이 나타나는 것
은 집착과 습기와 추측과 분별 등으로 물들어서 나타나는 허상
이지 실상의 모습은 www.earticle.net
아니라는 것이다.
법조차 있는 것이 아닌데, 어찌 그것의 성품(自性)이 존재하겠
느냐는 것이다.

3) 일승( 一乘)

일승(一乘)이라는 표현은 아함경에도 언급은 되고 있으나, 그


의미에 대해서는 설해지지 않았다. 능가경에는 일승(一乘)을 불승
(佛乘)이라도 하는데 다음과 같다.

제일의 법문(第一義 法門)은 멀리 2 취(取)를 여읜다.21)

19) 상동, p. 611, 중


20) 상동, p. 619, 하
21) 상동 p. 597, 하
능가경의 선(禪)사상 29

라고 하여, 제일의(第一義)는 궁극의 진리 즉, 깨달음의 경지를 말


하는데, 여기에는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분별이 생기지 않는
일승의 경지가 깨달음의 궁극적 진리 즉 제일의 법문이라는 뜻
으로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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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승도(一乘道)를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


이 답하고 있다.

이르기를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분별을 여의고 여실(如實)하게


머무는 것. 대혜여, 이것이 일승도(一乘道)이며, 오직 여래를 제외하고,
외도나 2승(二乘), 범천왕 등이 능히 얻을 바가 아니다.22)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소지장(所智障)과 업의 습기(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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氣)를 제거하지 못했으며, 법무아(法無我)를 깨닫지 못했으며, 부
사의 변역사(不思議 變易死)라 이름하지 못하기 때문에 3승(三乘)
을 설하고, 일승(一乘)을 설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승은 깨달음의 경지이며, 주관과 객관의 분별이
생기지 않은 경지인데, 성문, 연각이나 외도는 아직 법에 대한 소
지장(智障)과 업의 습기를 녹이지 못했고, 보살의 원력에 따라 나
는 부사의 번역사가 아니기 때문에 일승을 설하지 않았다고 설
한다. 즉 일승(一乘)은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한 말이고, 속제(俗諦)
가 아닌 진제(眞諦)의 최고의 진리를 표현한 말인 것을 보이고 있
다.
여기에서 능가경은 성문이나 연각이나 외도들은 이해할 수 없

22) 상동, p. 607, 상


30 韓國禪學 第16號

는 심지 법문(心地法門)임을 보이고 있다.

4) 금생성불( 今生成佛)

능가경에는 성인4과(果) 가운데 첫째인 수다원과(須陀洹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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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중하로 나누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대혜여, 모든 수다원의 수다원과에 차별이 셋이 있다. 말하면 하,


중, 상이다. 대혜여, 하(下)라는 것은 모든 유(有) 가운데 극히 7번 돌이
켜 나는(反生) 것이다. 중(中)이라는 것은 3번 나거나(生) 5번 나는 것
이다. 상(上)이라는 것은 곧 이생에 열반에 드는 것이다.23)

라고 하여 수다원과에서 바로 금생에 열반에 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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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수다원은 천상과 인간을 7번 왕복해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초기경전의 설인데, 이와 같이 수다원에 대해 새로
운 해석이 나오면서, 금생에 열반, 즉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 생존의 가르침인 아함경과 다른 새로운 해
석과 주장이 능가경에 펼쳐지고 있는데, 당시에 깨달음을 추구하
는 수행자들이 많았으며, 그들 가운데 깨달음을 성취한 자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이는 구절이다.

5) 즉심시불( 卽心是佛)

능가경에서 설하는 ‘마음이 부처’라는 측면은 여래장(如來藏)설

23) 상동, p. 604, 하


능가경의 선(禪)사상 31

이 나오면서 모든 것의 주체는 마음이라는 설로부터 출발했다고


본다.
모든 것이 마음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마음은 모든 것의 시발
점이 되어, 현재 있는 자리에서 전(轉)하여 본래 마음의 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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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면 된다는 시각(始覺)의 측면과 마음은 업(業) 경계인 바람


이 불기 전에는 고요한 해수(海水)처럼 본래 부처였다는 본각(本
覺)의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다음은 의지한바 장식을 굴리면 증득한 스스로의 지혜경계가
대열반이 된다는 설이다.

증득한 스스로 지혜의 경계(證自智境界)인 의지한바 장식(藏識)을 전


(轉)하여 대 열반이 되는 줄 알지 못한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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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전(轉)함 통해 대열반을 얻음을 설하고 있는데, 이와 같


이 밖을 통해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마음을 직접
바꿈으로 열반까지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능가경의 특징이다.
망법(妄法)이 모든 성인의 지혜라는 설은 다음과 같다.

대혜여, 곧 저 망법(妄法)이 모든 성지(聖智)이다. 심, 의(意), 의식,


모든 악습기(惡習氣)의 자성법은 의지함을 전(轉)했기 때문이다. 곧 이
망(妄)을 이름하여 진여(眞如)라 한다. 이런 까닭으로 진여는 심식(心
識)을 여읜 것이다.25)

24) 상동, p. 597, 상


25) 상동, p. 603, 중-하
32 韓國禪學 第16號

여기에서 망법은 의지한바 진여를 굴린(轉) 것이기에, 이 굴림


만 여의면 바로 진여라는 뜻이다. 이 말은 망법의 바탕은 진여라
는 의미로 범부에게도 불성이 존재한다는 설의 근거가 되는 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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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성인은 망법(妄法)을 보지 않는 다는 표현이 보이는데


다음과 같다.

성인(聖)은 망법(妄法)을 보지 않는다. 중간도 또한 진실(實)이 아니


다. 망은 진여(妄卽眞)에 즉(卽)하므로 중간 또한 진실(實)이다.26)

망(妄)과 진(眞)은 분별에서 벌어지는 차별이므로, 성인은 분별


이 그친 실상을 본 자이기에 망법이나 진실 아닌 것에 대한 겉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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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겉모습의 근원을 보았기 때문에 모두 진
여로 본다는 것이다. 위의 중간은 망법의 중간을 의미하기 때문
에 진실이 아니라고 하고, 아래 문장의 중간은 근본 바탕인 체
(體)를 알기 때문에 중간도 또한 진실이라는 의미로 표현한 것으
로 보인다.

6) 돈오( 頓悟)와 무차제( 無次第)

현재 학계에서 일부 학자는 ‘돈오’에 대해 중국에서 새롭게 주


장한 중국적인 선사상이라는 주장도 있고, 이치로 몰록 깨닫는
것이 ‘돈오’라는 주장도 있다.
능가경은 물론 최고의 깨달음의 경지를 궁극적인 진리의 말로

26) 상동, p. 603, 하


능가경의 선(禪)사상 33

표현하고 일체가 벌어지는 근본 바탕은 마음임을 보이는 경전이


기 때문에 모든 것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깨닫는 것을 ‘돈
오’라고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치적으로 깨닫는 경지를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국 불교의 문제는 학자들의 주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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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이나 논서에 의거하지 않고, 자가 마음대로 주장하는 풍토가


관행처럼 존재하고 있는 점이다.
능가경에는 중생들의 자기 마음의 흐름(現流)은 몰록(頓) 정화
되는 것이 아니라, 점차(漸) 정화되는 것이라고 여러 비유를 들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정화된 경계가 나타나는 것은 갑자기 나
타난다(頓現)는 표현이 보이고 있다. 이것은 돈오(頓悟)의 의미는
수행이 익어 무상(無相)경계와 무분별(無分別)의 경지가 갑자기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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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난다는 것이지, 수행에 몰록(頓) 업(業)이 정화되는 것은 아님을
설하는 것이다. 따라서 능가경에서 돈오(頓悟)의 경지는 적어도
견성(見性)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비유하면 밝은 거울이 몰록 뭇 상(衆像)을 나타내지만 분별이 없듯


이, 모든 부처님과 여래가 모든 중생의 자심현류(自心現流)를 정화하
는 것도 또한 이와 같아서 몰록(頓) 일체 무상(無相)경계와 무분별(無分
別)을 나타낸다.27)

이와 같이 중생의 업이 녹아서 깨달음이 나타날 때 몰록 깨닫


는다는 의미이다.
스스로 증득한 성인의 경계가 몰록 나타난다는 표현은 다음과

27) 상동, p. 596, 중


34 韓國禪學 第16號

같다.

자증성경(自證聖境)도 또한 이와 같아서
몰록(頓) 법상(法相)을 나타내 비추어서(照曜)
하여금 일체의 유무(有無)의 악견(惡見)을 여의게 한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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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돈오는 실제 수행을 통해 나타나는 경계를 설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능가경에 나타난 차제가 없다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대혜여, 제일의(第一義) 가운데는 차제(次第)가 없고, 또한 상속(相續)


이 없다. 멀리 일체 경계의 분별(分別)을 여의었기 때문에 적멸(寂滅)
의 법이라 이름한다.www.earticle.net
29)

라고 하여 차제가 없다는 것은 궁극의 진리(第一義)에서는 차제와


상속이 없다는 것이다. 돈오와 마찬가지로 궁극의 진리에 도달했
을 때, 차제가 없는 것이지, 업을 정화하는 과정에 차제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음은 차제가 없음을 보이는 게송으로 다음과 같다.

10지(地)는 초지(初)가 되고,


초지는 8지(地)가 된다.
제9지는 7지가 되고

28) 상동, p. 596, 중


29) 상동, p. 619, 상
능가경의 선(禪)사상 35

제7지는 8지가 된다.


제2지는 3지가 되고
제4지는 제5지가 된다.
제3지는 제6지가 된다.
무상(無相)인데 무슨 차제가 있을까?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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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무상인데 무슨 차제가 있을까하는 말은 이미 무상(無


相)을 체득한 초지(初地) 이상의 보살에게는 차제가 필요 없다는
의미를 보이고 있다. 초지 이상의 보살은 이미 법의 실상인 무상
(無相)을 보았기 때문에, 미혹되는 일이 없으므로 차제도 필요하
지 않은 경지인 것을 알 수 있다.
보불(報佛)은 색구경천(色究竟天)에서 몰록 능히 일체 중생을 성
숙시켜 하여금 모든 www.earticle.net
행(行)을 닦게 한다는 표현은 다음과 같다.

보불(報佛)도 또한 그러하여, 색구경천(色究竟)天에서 몰록(頓) 능히


일체 중생을 성숙시켜 하여금 모든 행(行)을 닦게 한다.31)

색구경천 이후에는 즉 4선(禪) 이후에는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이 펼쳐지는데, 보불(報佛)은 일체 중생을 색구경천에서 몰록 능
히 일체중생을 성숙시킨다는 말은 무상(無相)인 공(空)을 체험하
게 만든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처음 공(空)을 체험한 것을 보살의 10지(地) 가운데,
초지(初地)로 보기 때문에, 이러한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30) 상동, p. 619, 상


31) 상동, p. 596, 중
36 韓國禪學 第16號

비상비비상처정을 거쳐 멸진정에 이르러 깨달음을 증득하는 과


정에서, 여기에서 하여금 모든 행을 닦게 한다는 의미는 제4선
(禪)에서 모든 행을 갖추어 닦아서, 몰록(頓) 공을 체험하는 공무
변처정(空無邊處定) 이후 단계도 몰록 나타나는 것을 보이는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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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따라서 ‘돈오’의 경전적 의미는 이치로 깨닫는 경지가 아니


고, 제4선(禪)에서 공무변처 및 무색계 4정(定)이 한꺼번에 펼쳐지
는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한 말임을 알 수 있다.

7) 타력( 他力)적 요소

능가경에는 오직 자력(自力)의 요소만 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타력(他力)의 요소가 많이 언급된다. 여래가 가지(加持)하는 이유
를 다음과 같이 들고www.earticle.net
있다.

그로 하여금 마업(魔業)인 모든 번뇌를 멀리 여의게 하기 위해서,


하여금 성문지(聲聞地)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여금 빨리 여
래의 지(地)에 들게 하기 위해서 , 하여금 얻은바 법을 증장하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까닭으로 부처님은 가지력(加持力)으로써 모든 보살을
가지게 한다.32)

모든 부처님은 2종의 가지(加持)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이르기를 하여금 삼매에 들게 해서 몸을 그


앞에 나타내 손으로 그 이마에 관정(灌頂)한다.

32) 상동, p. 602, 하


능가경의 선(禪)사상 37

대혜여, 초지(初地)의 보살마하살은 모든 부처님의 가지력(加持力)


을 입고(蒙) 보살의 대광명정(大光明定)에 들어간다. 들어가서는 시방
의 모든 부처님이 그 앞에 나타나 몸과 말로 가지한다. 금강장(金剛藏)
및 나머지 이와 같은 공덕의 상(相)을 성취한 보살마하살이 이들이다.
대혜여, 여기 보살마하살이 부처님의 가지력을 입고, 삼매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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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는 백천겁(百千劫)에 모든 선근(善根)을 쌓아서, 점차로 모든 지


(地)에 들어, 잘 능히 다스림(治)과 다스려지는(所治)의 상(相)을 통달하
고, 이에 법운지(法雲地)에 이르러, 대연화미묘궁전에 있어서 보좌(寶
座)에 앉아 동류의 보살이 함께 둘러싸고, 머리에는 보배관을 쓰고 몸
은 황금의 첨복화(瞻蔔花)색과 같고 풍성한 만월과 같은 대광명을 놓
아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연화(蓮花)의 손을 펴서, 그 자리 위에서
그 이마를 관정(灌頂)한다. 전륜왕의 태자가 관정을 받고 자재(自在)함
을 얻은 것과 같이, www.earticle.net
여기 모든 보살마하살도 또한 다시 이와 같다.33)

라고 하여 두 가지의 가지를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도 어느 보살은 가지의 힘으로 빨리 보살의 초지(初地)
에 들고, 어느 보살은 여러 겁(劫)에 걸쳐서 수행이 완성되는 것
을 보이고 있다. 특히 금강장(金剛藏)보살은 등각(等覺 )보살이 금
강유정(金剛喩定)에 든 모양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가지를 하는 이유도 다양하고, 가지를 받고 수행에
이르는 것도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금생에 몰록 깨닫는(頓悟) 근기(根機)가 있다면 그것은 가지(加
持)의 힘 때문으로 보인다.
선종 4조(祖)인 도신(道信 580-651)의 일행삼매(一行三昧)나 선종

33) 상동, p. 602, 중-하


38 韓國禪學 第16號

의 선사들이 정토사상이 보이는 것은 이러한 가지력(加持力)에 의


해 수행을 증장(增長)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2. 능가경에 나타난 조계종 종지(宗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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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경은 이름은 분명히 경(經)이지만, 수행자들을 위해 설해


진 경(經)으로, 다양한 근기(根機)를 위해 설해진 경전과는 차이가
있다.
그 동안 선학(禪學)을 공부하면서도 조계종 종지(宗旨)에 대한
확실한 근거를 몰라서, 그 뜻을 추측으로만 짐작했던 여러 의미
들이 능가경을 통해서 분명하게 이해가 된 부분을 여기에 밝히
고자 한다. 그 동안 조계종에서 분분했던 의미를 능가경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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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1) 교외별전( 敎外別傳)

능가경에서 이 법을 설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외도나 2승


(乘)들의 경계로써 수승한 즐거움(樂)으로 집착하지 말고, 이 법은
수승(殊勝)하여 대승의 도(道)이며, 능히 하여금 스스로 증득한 성
인의 지혜(自證聖智)를 성취하도록 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2승(乘)이나 외도의 경계로써 수승한 즐거움(樂)을 삼지 말고,


무릇 수행자들의 분별하는바 외도는 아견(我見)에 집착하여 아상(我
相)을 내고 및 실(實, 드라비야), 구나(求那, 구나)를 취하여 집착을(取
著) 내며, 2승(乘)은 무명(無明)을 연(緣)하여 행(行)이 있다고 보고, 성
능가경의 선(禪)사상 39

공(性空) 가운데 어지러운 생각으로 분별한다.


능가왕은 이 법이 수승해서 대승의 도이며, 능히 하여금 자증성지
(自證聖智)를 성취하게 하도록 하여, 모든 유(有) 가운데 상묘생(上妙生)
을 받아서, 능가왕이 이 대승의 행(行)으로 무명(無明)의 가림을 파(破)
하고, 식(識)의 파랑(波浪)을 파하고, 외도의 모든 삿된 행(行) 가운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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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지 않게 함이라.34)

라고 해서 능가경은 스스로 증득하는 성인의 지혜를 얻게 하기


위한 법이며, 외도나 2승의 법에 집착하여 분별을 내는 병을 고
쳐서, 식의 물결을 파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목표를 밝히고 있
다. 여기에서 일반적인 경전의 가르침에만 의존하고 실제 수행이
결핍되면 법에 집착하는 병을 낳을 수 있고, 분별을 그치게 하는
데는 미흡함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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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경은 모든 식(識)의 파도가 그친 스스로 깨달음에 나아가
성인의 지혜를 얻도록 하기 위한 경전임을 밝히는 것이다.
또한 이전의 가르침의 법은 상사한 법(相似法)을 보인 것이고
후에 진실한 법을 준 것이라는 표현이 보이는데 다음과 같다.

왕과 장자와 같이 모든 아들들로 하여금 기쁘게 하도록 하기 위해


서, 먼저 비슷한 물건을 보이고, 후에 진실한 것을 주는 것과 같이, 나
도 이제 또한 그러하여, 먼저 상사한 법(相似法)을 설하고, 뒤에 이에
그들을 위하여 자증의 실제법(自證實際法)을 편 것이다.35)

34) 상동. pp. 588-589, 하-상


35) 상동, p. 600, 하
40 韓國禪學 第16號

라고 하여, 법화경의 비유를 들어 앞에 설한 법은 상사(相似)한


법이고, 능가경은 자증(自證)의 실제법(實際法)이라는 주장이 보이
고 있다. 이것은 능가경은 앞에 설했던 교(敎)와는 차원이 다른
가르침의 법인 것을 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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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경에서 설하는 법은 수행자들을 위한 설이며, 진실한 자증


처(自證處)이고, 능소의 분별(能所分別)을 여읜 것36)이라는 표현도
보이는데, 교외별전의 의미는 실상(實相)을 보인 것이며, 스스로
증득하는 법이라는 의미가 많이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체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은 다 화신불(化佛)의 설이며,
법신불(法佛)의 설이 아니며, 화신불이 법을 설한 것은 다만 어리
석은 범부가 일으키는 견해에 맞춘 것(順)이고, 자증성지(自證聖
智)의 삼매의 즐거운www.earticle.net
경계(樂境)는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37)는 주
장도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 일반적인 교(敎)는 화신불이 중생의 근기(根機)에 수
순해서 설한 법이고, 법신불의 자내증(自內證) 경계는 아님을 설
하는 것이다. 교(敎)를 통해 듣고 이해해서 수행하는 성문(聲聞)의
경계는 구경처(究竟處)가 아니라는 설은 다음과 같다.

비유하면 바다의 물 같아서 항상 파도를 따라 전(轉)한다. 성문의


마음도 이와 같아서, 상(相)의 바람에 뜨고 나부끼는 바가 되어, 비록
멸했다가도 번뇌를 일으켜, 오히려 습기(習氣)에 얽힘(縛)을 입는다.
삼매의 술에 취한 바가 되어 무루계(無漏界)에 머물지만, 그것은 구경

36) 상동, p. 595, 상-중


37) 상동, p. 601, 중
능가경의 선(禪)사상 41

처(究竟處)도 아니고, 또한 다시 불퇴전(不退轉)도 아니다. 삼매의 몸을


얻음으로써 이에 겁(劫)에 이르도록 깨닫지 못한다. 비유하면 술 취한
사람이 술에서 깨어난 후에 뒤에 깨닫듯이, 성문도 또한 이와 같아서,
깨어난 후에 마땅히 성불한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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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여 성문은 법을 분별하거나 삼매의 즐거움에 취해 있는


습기(習氣)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기 때문에, 번뇌가 그쳤다가도
다시 일어나는데, 그것을 깨달은 이후에야 성불한다는 주장이다.
능가경의 가르침은 성문(聲聞)의 법과 다른 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나의 지혜는 모든 상(相)을 여의어서 2승(乘)을 초과한다. 모든 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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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聲聞) 등은 모든 법이 있음에 집착한다. 여래의 지혜는 번뇌(垢)가 없
는 것은, 오직 마음(唯心)인 줄 요달했기 때문이다.39)

성문은 법에 대한 집착이 끊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세(世) 여래는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언설법(言說法)
과 여실법(如實法)이라고 하면서, 언설법은 범부를 위해 보인 것
이고, 여실법은 수행자에게 마음이 나타낸 바이고, 모든 분별을
여의게 하는 것40)이라고 구분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교외별전의 의미는 수행자를 위한 교이며, 법에
대한 분별의 습기와 삼매의 낙(樂)에 취하는 습기(習氣)가 깨어난

38) 상동, p. 607, 중


39) 상동, p. 610, 하
40) 상동, p. 612, 중
42 韓國禪學 第16號

성문과 외도를 초과한 여실한 법이며 , 오직 마음임을 요달한 스


스로 증득한 법인 것을 주장하는 궁극적인 교임을 나타내는 표
현인 것을 알 수 있다.

2) 불립문자( 不立文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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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조계종에서는 그 동안 불립문자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그 동안 승려들이 경전 공부를 소홀히 하고 오직 참선하는데 만
열중하여, 설사 자신의 공부 경지가 있어도 자신의 경지를 문자
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거나, 또는 평생 문자만 보고 실제로 수
행하지 않아서 마음 수행과는 오히려 거리가 먼 문자법사들이
교(敎)를 입으로만 가르쳐서 오도(誤導)하는 풍토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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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경의 ‘불립문자’의 의미를 알아볼 필요가 여기에 있다.

대혜 보살마하살이 세존이 ‘내가 어느 날 밤 최정각을 이룬 후 내


지 어느 날 밤 미래에 열반에 드는데, 그 중간에 한 자도 설하지 않
았으며(不說一字), 또한 이미 설하지 않았으며, 미래에도 설하지 않을
것이다. 설하지 않는 것이 부처님의 설이다.’라고 설하셨는데, 어떤
비밀한 뜻으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대혜여, 두 가지 비밀한 법에 의지해서 이
와 같이 말한 것이다.
무엇이 두 가지 법인가? 이르기를 자증법(自證法)과 본주법(本住法)
이다. 무엇이 자증법(自證法)인가? 이르기를 모든 부처님의 증득한 바
이며, 나도 또한 같이 증득하여,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다. 증득
한 지혜(智)의 행(行)하는 바는 언설상(言說相)을 여의고, 분별상(分別
相)을 여의고, 명자상(名字相)을 여읜다. 무엇이 본주법(本住法)인가?
능가경의 선(禪)사상 43

이르기를 법의 본성이 금 등이 광산에 있는 것과 같아서,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거나 안 나오거나 법은 법의 위(位)에 머무른다. 법계(法
界)의 법성(法性)은 다 실로 항상 머문다(常住).41)

여기에서 문자를 세우지 않은 것은 자증법을 설하기 때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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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자증법의 행하는 바 지혜는 언설상과


명자상을 떠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능가경과 같이 설함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
은 다음과 같다.

일체 모든 법은 문자를 떠났으나, 뜻을 따르지 않고 분별해 설하지


않은 것은 없기 때문에, 한자(一字)도 설하지 않고, 한자(一字)도 답함
이 없다고 하였는데,www.earticle.net
만약 설하지 않는다면 교법(敎法)은 끊길 것이고,
가르침의 법이 끊어지면 일체의 성문, 연각, 보살, 모든 부처님도 없
을 것이니, 만약 모두 없다면 누가 설하고 누구를 위해서 설하겠는가?
그러므로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응당 문자에 집착하지 말고(不著文字)
마땅함을 따라 법을 설해야 한다. 나와 모든 부처님도 다 중생의 번
뇌와 이해와 욕구가 가지가지로 같지 않기에, 열어 설한(開演) 것이다.
하여금 모든 법은 자심(自心)에 나타난 바이며, 밖의 경계가 없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며, 두 가지 분별을 버리고, 심의식(心意識)의 그름을
전(轉)하여 성인(聖)의 자증처(自證處)를 성립하게 하기 위함이라.42)

라고 하여 불립문자의 의미는 자내증의 경지에서 보살이 문자에

41) 상동, p. 608, 중


42) 상동, pp. 615, 하-616, 상
44 韓國禪學 第16號

집착하지 않고, 중생을 깨닫게 하기 위해 설한다는 의미가 있음


을 알 수 있다.
진실한 법은 문자를 여읜다는 뜻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진실한 법은 문자를 떠나기 때문이다. 대혜여, 비유하면 어떤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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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손가락으로 물건을 가리키는데, 어린아이가 손가락만 보고 물건을


보지 않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범부도 또한 이와 같아서, 언설(言說)
의 손가락을 따라 집착을 내고, 이에 다 명이 마칠 때에 이르기까지
능히 문자의 손가락을 버리고 제일의(第一義)를 취하지 않는다.43)

라고 하여, 문자는 물건을 가리키는 손가락인데, 평생 손가락만


보고 물건을 보지 않는 범부를 위하여 불립문자의 뜻을 설했으
며, 이 뜻은 문자에만www.earticle.net
집착하지 말고 자내증(自內證)을 통해 제일
의 진리(義)를 취하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진실은 문자를 여읜다’는 말은 성인의 지(聖智)에는
분별이 끊기었으므로, 분별로 이루어진 문자 또한 떠난다는 의미
이다.
이상과 같이 불립문자의 의미는 문자를 따라 집착하지만 말고,
자내증(自內證)을 증득하기를 바라는 당부이자, 자내증의 경계는
문자의 분별이 없다는 의미도 함께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직지인심( 直指人心)

능가경에는 특히 모든 것은 마음의 나타낸 바이고, 이것은 밖

43) 상동, p. 616, 상


능가경의 선(禪)사상 45

에 실체가 있어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업의 바람이 불어


해수에 파도가 이는 것과 같이, 모두 마음의 거울에 나타나는 그
림자에 불과하다는 표현이 자주 보인다. 능가경은 모든 법조차
모두 파하고 분별이전의 본래 청정한 마음을 회복할 것을 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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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밖의 것은 모두 분별로 나타난 거


짓(幻)이므로, 안으로 마음에 의지하여 전(轉)한 바를 다시 본래
마음의 자리로 돌아갈 것을 보이는데 다음과 같다.

너는 응당히 영원히 심, 의, 의식을 여의고 응당히 부지런히 일체


모든 법을 관찰하여, 응당히 안의 행을 닦을 것이요, 밖으로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마라.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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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실한 곳을 보는 것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다.

일체 법의 여실(如實) 처(處를) 보는 것은 이르기를 능히 오직 마음


(唯心)이 나타낸 바를 요달(了達)하는 것이다.45)

라고 하여, 오직 마음이 나타낸 바 인 것을 요달하는 것이 일체


법을 실(實)과 같이 보는 것이라 하고 있다. 여기에서 ‘직지인심
(直指人心)’은 모든 현상계를 나타내는 주체는 오직 마음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있거나 없다고 하는 것은 자
기 마음이 나타낸 것이고, 밖의 물(物)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표
현은 다음과 같다.

44) 상동, p. 588, 하


45) 상동, p. 604, 상
46 韓國禪學 第16號

유(若有)와 무(若無)는 자기 마음이 본 바(所見)이고, 밖의 물(物)은


없기 때문이다.46)

이와 같이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는 ‘직지인심’은 모든


법의 근원은 마음이며, 식(識)이 생기지 않는 무분별(無分別)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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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 지위에 들 수 있는 것도 마음에 의지한바 식(識)을 전(轉)해


서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수행이므로, 마음이 모든 것의
주체가 됨을 밝히고, 수행의 결과도 오직 마음임을 체득하는 것
임을 밝히는 것으로 보인다.

4) 견성성불( 見性成佛)

견성과 성불은 같은 위상(位相)인가 아닌가? 정확히 말하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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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 것이다. 선종에도 견성 후 보림(保任)과정이 있고 교학에도 견
도(見道)와 수도(修道)는 구분이 된다. 대개 초견성(初見性)을 견도
와 같은 선으로 보고, 보림(保任)은 수도(修道)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능가경에도 경계가 없어진 것을 식(識)이 멸한 것인 줄
착각하는 풍조에 대해서 잘 구분해야 된다고 설하고 있는데, 경
계가 없는 경지에도 마음에 훈습된 습기는 여전히 남아 있어 견
성(見性)한 후에도 제8 부동지에 이르기까지는 수행이 지속되어
야 한다.
또는 능가경에는 행하는 바 상(相)을 여의고, 오직 자기의 마음
이라고 표현하는 경계도 자주 보이는데 오직 마음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또한 제7지는 유심(有心)이요, 제8지는

46) 상동, p. 610, 하


능가경의 선(禪)사상 47

자재(自在)하여 의생신(意生身)을 나툴 수 있는 경지라고 하는 표


현도 보인다. 그리고 제8지부터는 불보살이라 하는 같은 위상으
로 불리운다. 뿐만 아니라 능가경에는 아라한도 세 가지로 분류
하여 일향(一向), 취적(取寂), 퇴(退)의 3종으로 분류하고 성문의 지
위는 보살의 지위 가운데 5-6 지(地)로 분류하기도 하는데47) 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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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연각은 아직 법무아(法無我)를 깨닫지 못했고, 특히 성문은


삼매의 낙(樂)에 취하거나, 습기(習氣)가 아직은 남아 있는 지위로
보고 있다.
다음은 여래승(如來乘) 종성(種性)의 증득한 법을 세 가지를 설
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대혜여, 여래승 종성이 증득하는바 법이 세 가지이다. 이른바 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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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성법(自性無自性法), 내신자증성지법(內身自證聖智法), 외제불찰광
대법(外諸佛刹廣大法)이다.48)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의 지혜(智)를 얻고는 초지(初地)


에 들어가 환희(歡喜)를 낸다49)는 표현이 보이는데, 보살 초지(初
地)에 이르는 것도 이와 같이 2무아의 지(智)를 얻어야 가능한 것
을 알 수 있다. 법무아(法無我)를 정화(淨)해서 원행지(遠行地)에 들
어 무량자재 삼매를 성취하고, 의생신(意生身)을 얻고, 여환(如幻)
삼매의 힘으로 통하여, 자재가 다 구족하고, 마치 대지(大地)가 군
생(群生)을 널리 이익하게 하는 것과 같다50)고 하여 보살의 제7지

47) 상동, p. 597, 중


48) 상동, p. 597, 중
49) 상동. p. 598, 상ㆍ하
48 韓國禪學 第16號

인 원행지를 묘사하고 있다.


보살의 제 8지에 이르는 모습을 성문과 연각을 보살과 비교하
여 설하고 있는데,

성문과 연각은 보살 제8지에 이르러서 그 가운데에 삼매의 낙(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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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혼미하게 취한 바가 되어, 능히 잘 오직 마음인 줄 알지 못하고,


자 공상(自共相)의 습기에 얽혀 그 마음을 덮는다. 2무아에 집착하여
열반이라는 지각을 내지만, 적멸의 혜(慧)는 아니고, 모든 보살마하살
은 적멸 삼매락(寂滅 三昧樂)의 문(門)에서 곧 문득 본원대비(本願大悲)
를 억념(憶念)하여, 10무진구(無盡句)를 구족하게 수행하기 때문에 곧
열반에 들지 않으나, 열반에 드니 과(果)를 내지 않기 때문이라.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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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여 2승(乘)과 보살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 10무진구(無盡句)는 초지(初地)의 보살이 일으키는 광
대한 원(願)을 말하는 것이고 법락에 취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
는 2승과 보살의 원을 수행하는 대승 보살의 수행의 차이를 보이
고 있다. 초지 보살에서 여여(如如)를 얻은 경지까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초지(初地)에서는 경계를 비추어 나타냄이 없음을 밝히고, 환희지


(歡喜地)에 올라 외도의 악취(惡趣)를 여의고, 출세의 법에 들어가 법
상(法相)을 잘 알아서 일체의 법은 환(幻) 등과 같은 줄 알아, 자성지
(自聖智)의 행하는 바 법을 증득하고, 억탁(臆度)하는 견해를 여의고,

50) 상동, p. 605, 하


51) 상동, 618, 하
능가경의 선(禪)사상 49

이와 같이 차제로 법운지(法雲地)에 오른다. 법운지에 올라서는 삼매


의 모든 힘의 자재신통으로 열고 펴는 것(開敷)을 만족하여 여래를 이
룬다. 여래를 이룬 후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물에 비치는 달처럼 중
생의 욕락(欲樂)에 따라 그 몸을 널리 나타내 법을 설하나, 그 몸은 청
정하여 심의식(心意識)을 여의고, 큰 서원의 옷을 입고, 10무진원(無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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願)을 구족하게 성취한 것을 보살마하살이 여여(如如)를 얻은 바에 들


어갔다고 이름한다.52)

라고 하는데, 여여(如如)는 성불 후 에 중생을 제도하는 원(願)을


실천하는 경지로 능가경이 대승경전임을 보이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여래를 이룬 성불(成佛)한 후에는 욕락(欲樂)이 다른 다양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팔만대장경의 다양한 방편 시설을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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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한 가지만 주장하지 말고, 다양한 중생들을 섭수(攝受)함에
부족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능가경의 가르침이다.
이상과 같이 견성은 자성(自性)이 모양 없는 것(無相)을 본 것이
고, 견성 후에도 원(願)을 잊지 않고 수행해서, 여여(如如)의 자리
에 오르려면 중생을 위한 보살의 원력과 자비의 길을 가야함을
알 수 있다.

맺는 말

불교의 진리는 마음이 일체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

52) 상동, p. 620, 중


50 韓國禪學 第16號

사회는 불교의 진리와는 어긋나서 물질에 마음이 오염되어 가는


현상이 심하다. 한국은 그 동안 민족상잔(民族相殘)의 시절이 있
어서 전 후에 어렵고 힘들어서 판단이 안 되는 상황에서 무조건
받아들인 원조와 외래문화는 우리의 주소를 바꿔 놓고 우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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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심하게 전도(顚倒)시켜 왔다. 특히 무계획적인 개발은 국


토를 공해(公害)와 환경오염으로 얼룩지게 하였으며, 그리고 국민
들의 정신은 타락하여 분열과 대립이 생겨나고 윤리도 땅에 떨
어져 있다.
능가경에서 일체는 우리의 마음이 나타낸 바이라고 하듯이, 어
려웠던 시절 무방비로 받아들인 어리석은 마음 때문에 생긴 결
과로 우리 사회는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러한 병을 고치는 것도
또한 마음을 통하지 www.earticle.net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
을 쇄신해서 새로운 가치관과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식견을
가지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
중국은 거대한 노동력에 사회주의로 합쳐진 마음을 가지고 조
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날마다 자기 땅 올려서, 가난한 서민만 힘들게 하는 ‘부익부(富
益富) 빈익빈(貧益貧)’의 경제 원리에서 벗어나, 넓게 세상을 보고
세상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찾아보고, 일자리를 창출해서 새로
운 것을 생산하고 소비시키는 지혜로운 국민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일본은 한 발 앞서 가고, 중국은 힘을 합쳐 밀고 오는데, 우리
는 무엇으로 살아남아야 할까? 그것은 우리의 고유한 문화상품
을 만들고, 관광자원을 개발하고, 우리의 특산품과 문화상품을
능가경의 선(禪)사상 51

널리 세계에 알려, 우리의 것을 찾는 단골 고객을 만드는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의 우수한 자원은 아름다운 산하(山河)와 물, 공기, 다양한
전통 음식, 소금, 갯벌, 과일, 버섯, 의류, 도자기류, 건설업, 컴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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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 영화, 연속극, 문방구류, 신발류 등 너무나 많다.


이러한 것 등을 상품화해서 다른 나라로 향해 홍보하고 알려
서 수출해야 한다.
능가경은 우빠니샤드적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설을 다시 환원
시킨 느낌이 들지만, 분명한 것은 스리랑카에 역사적으로 불법을
전한 아쇼카 왕(B.C. 268-B.C. 232년간 재위)의 아들(또는 동생)로
알려진 마힌다 장로의 숨결이 능가경에도 보이는데, 앞의 게송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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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장16, p. 588, 상)에 무원(無憂園)은 원어가 '야쇼카 와니까'임
을 알 수 있다. 성문의 삼매의 즐거움에 취함과 분별하는 습기(習
氣)가 다 녹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보살의 대승 원력(大乘
願力)을 강조하고 있다. 마음이 모든 것의 주체이자 결과이며, 되
돌아와야 할 본래의 자리임을 밝히고 있다. 마음을 방심해서 생
긴 일은 마음을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근
시안적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다가 자기 집 닭 잡아먹기만
하지 말고, 대승적인 마음으로 자기 한 몸 희생해서라도 나라의
국민 모두가 살 수 있는 대승적 원력(願力)이 많이 생겨났으면 한
다.
52 韓國禪學 第16號

◎ 국문요약문

한국 조계종의 전통은 간화선 수행을 계승하고 있고, 여름과


겨울에 각각 석 달씩 안거 제도가 내려오고 있는 선종의 영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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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매우 큰 종단이다. 그러나 선종의 토대가 되며, 초조인 보리달


마가 권한 능가경은 전통 강원이나 선원에서도 배제되는 실정이
고 그 대신 금강경이나 천수경 등 다른 경전이 대신 독송되고 있
다. 그러한 원인은 능가경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는 점과 비역
사적인 곳에서 설해졌다는 점이 있으며, 선종은 ‘교외별전(敎外別
傳)’이라는 선입견도 한 몫하고 있다.
우연히 다시 능가경을 대할 기회가 생겨 접해 보니, 그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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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頓悟), 무차제(無次第), 교외별전(敎外別傳), 유심소현(唯心所
現), 불립문자(不立文字) 등 선사상과 내용이 능가경에 자세히 설
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동안 의미도 많이 왜곡되어 전달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보리달마가 중국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주로 법회 및 독송,
불사 등 유위법(有爲法)을 중심으로 불교가 수행되고 있었고, 달
마는 이러한 상황에 무위법(無爲法)을 알리고자 능가경을 권했음
을 알 수 있었다.
일체는 오직 마음에 나타난 그림자임을 알리고(唯心所現), 우리
의 마음은 부처님과 다름이 없었으나(卽心是佛) 업풍(業風)으로 옮
겨있는 상태이며, 이것은 밖으로 어떤 것을 듣거나 이해하는 수
준이 아닌 마음의 실제 옮김(轉)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알리고자
능가경의 선(禪)사상 53

했으며, 마음이 부처님과 같이 되어 더 이상 상대적인 경계가 없


을 때, 일체의 경계는 무상(無相)으로 나타나고 그 상태를 일승(一
乘)이라고 하고, 이러한 초견성의 상태를 돈오(頓悟)라고 하고 있
으며, 돈오는 색구경천 즉 제4선(禪)의 경지임을 말하고 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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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나 돈오했다고 수행이 그치는 것은 아니고 제8 부동지(不動地)


까지는 계속 정진을 그치지 않아야 수행이 물러나지 않음을 밝
히고 있다.
능가경에서는제 4선(禪)에서 무색계(無色界)의 네 가지 4무색정
(無色定) 즉 공무변처정, 식무변처정, 무소유처정, 비상비비상처정
에 오르는 것은 오랜 기간이 걸리는 것은 아니고 돈현(頓現)한다
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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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지에서 제8 부동지에 오르려면 자신만 깨닫겠다는 이기심
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보살행과 원력행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도달함을 밝히고 있다. 당시 성문이나 연각 및 외도들이 삼매의
즐거움에 빠져있거나 법의 분별심이나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머
물러 있는 것을 각성시키기 위해, 능가경에서는 성문이나 연각에
대한 비판도 거침없이 나오고 있으며, 다양한 근기의 수행자가
있으나 선업(善業)을 쌓고 보살행을 수행하는 수행자가 더 빨리
깨달음에 도달함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초기경전과는 사뭇 다른 해석이 보이는데, 수다원을 세
가지로 분류하여 금생에 깨닫는다는 해석도 있고, 아라한도 물러
서는 아라한이 있다고 하는 등 종전의 경전의 권위에 도전하는
새로운 해석이 보이며, 이러한 근거는 ‘금생성불(今生成佛)’의 이
론적 근거를 제공한다.
54 韓國禪學 第16號

수행의 차제가 없다는 것은 돈오한 후 즉 무상(無相)을 체득한


후부터 차제가 없다는 의미임을 밝히고 있다. 경전을 독송하는데
그치지 말고 마음 수행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을 성취하도록 권
하는 내용이 교외별전(敎外別傳)이며, 능가경은 이름은 경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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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수행자들을 위한 실상(實相)을 보이는 법신불(法身佛)의 가르침


을 설해서 기존 경전과는 다른 방편의 가르침이 아닌 점을 강조
하고 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는 문자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이지, 경
전을 배우지 말라는 가르침은 아니다.
기존의 돈오(頓悟)에 대한 해석도 재고할 필요가 있는데, 능가
경에서 ‘돈오’는 보살 10지 가운데 초지 이상의 높은 단계를 성
취한 것을 의미한다.www.earticle.net
오늘날 우리가 부딪히는 어려운 문제도 결국 우리의 마음에서
발생한 것임을 깨닫고, 마음에 대한 가치와 중요성을 새삼 생각
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고, 이러한 문제의 해결도 또한 큰마
음의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인식했으면 한다.
능가경의 역사적 전승의 근거도 찾을 수 있었는데, 스리랑카에
법을 전한 사람은 아쇼카 왕의 아들(또는 동생)이라고 전해지는
마힌다 장로가 있는데, 능가경에 아쇼카 정원이라는 명칭이 보이
며, 한자로는 무우원(無憂園)이라는 용어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
서 능가경은 역사적으로도 위경이거나 근거 없는 가르침은 아닌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음을 통한 전환과 보살의 원력행이 깨
달음의 요긴한 주제임을 알 수 있었다.
물질문명과 정보,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물질이나 기계의
능가경의 선(禪)사상 55

과도한 영향력을 받는 시대가 되어, 인간은 너무 바쁘고 힘들며


나약해지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마저 기계에 의해 설자리
를 잃고 있다. 마음과 물질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어떠한 통제
가 필요해 보이며, 그러한 통제할 수 조직이 국제적으로 구성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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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인간을 물질의 노예로 만드는 경지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


으로 보인다.

◎ 국문핵심어

유심소현(唯心所現)
교외별전(敎外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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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頓悟)
보살행(菩薩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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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문요약문

A study on the Seon(Zen) Thought of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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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kavatara-Sutra

As time passed, the interpretation of the sutra al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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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ed, because the men's characters had changed.
This Sutra is a Special Teaching for the Trainee, so does
not use an Expedient.
Like other Maha-yana sutra, Lankavatara-Sutra, also, lay
emphasis on the Mind which is the origin of creating all.
When the state of Mind is not calm, we can see the
Object, and When the Agitation of the Mind finishes, we
can see the Thing as It Is.
At this moment, we can get a Sudden Enlightenment, and
there is no more the Object, and this state of the Mind is
called Only Mind.
Though we have gotten the above state of Mind, we
have to continue the practice until we can get an
능가경의 선(禪)사상 57

Imperturbable Mind.
The Practice of the Bodhisattva's Vow and Action helps
us to achive that purpose easily.
This sutra says, our Karma purified gradually, and the
Enlightenment comes sudden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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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핵심어

Everything is Created Only by the Mind


Outside the Sutra Special Transmission
Sudden Enlighte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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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dhisattva's 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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