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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국계몽운동은 항일운동이다.

찬성: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전후로 국가의 ‘실력’ 을 양성하여 국권을 수호하자는 새로운
종류의 국권수호운동인 애국 계몽운동이 나타났다. 애국 계몽운동은 기존에 무력을 통하여
국권을 지키려는 의병운동과는 상반되게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해주어, 국정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방법으로 국권 침탈을 막고자 하였다. 우리는 애국계몽운동 또한
항일운동이라고 생각한다.

1) 일본의 것을 받아들여 서라도 국력을 키우면 그 최종적인 결과는 독립을 향한


것이다.
2) 식민지화 의 원인을 늦은 근대화에서 찾자. 근대화를 위한 애국계몽운동은 항일운동
3) 무력운동은 무용하고 일본에 침략의 빌미를 제공할 뿐, 그때는 내공을 키워야 함
무력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뤄낼 수 없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순 한글로 발행된 <대한매일신보>에 의하면 국권 회복의 열쇠는 스스로의 힘을 닦아


강해지는 자수 자강, 실력 양상에 있다고 하였던 것을 보면 애국계몽운동을 진행하는
목적이 곧 항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1905년 대한제국과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한 사건을 전후로, 국가의 ‘실력’을 양성하여
일제가 강제로 빼앗아 간 국권을 되찾아오자는 새로운 종류의 국권 수호 운동인 애국 계몽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일어난 애국 계몽 운동은
기존에 일어났었던 무력을 통해 국권을 지키자는 의병 운동과는 다르게, 많이 아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교육하여 국정에 관심을 가지고 산업을 발달시키는 방법으로
국권 침탈을 막고자 하였습니다. 저희 조는 애국 계몽 운동 또한 항일 운동의 일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로 첫 번째로는, 애국 계몽운동은 근대화를 일으키려는 운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대한 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이유는 근대화가 늦었기 때문입니다. 주변국은 이미
근대화를 진행하고 모두 성장한 상태였는데, 대한 제국은 늦은 근대화로 힘이 약한
상태였습니다. 힘을 계속 키우려는 일제의 눈에 띈 힘이 약한 대한 제국은 식민지로 만들기
정말 좋은 국가였습니다. 이렇게 식민지가 된 대한제국의 국민들은 스스로 애국 계몽
운동을 통해 근대화를 일으키려 했습니다. 애국 계몽 운동을 통해 국민들을 교육하고,
언론을 계몽하고, 산업을 진흥하였습니다. 또한 국가의 빚을 우리의 힘으로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진행하기도 했고, 해외에 독립군 기지를 짓자는 운동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즉, 대한 제국을 일깨우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항일 의병 운동과 같은 무력운동은 결국 무용했습니다. 우리 의병들은


무기도 많지도 않았고, 일본의 군인들에 맞서기 위해 급하게 무기 교육을 했던 것처럼
완벽한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의병은 일제의 군인들을 상대로 승리하기 매우 어렵고,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 무력으로 일제에 맞선다면,
일제에게는 계속 침략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뿐입니다. 이럴 때에는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보다는 내공을 먼저 키워야 할 것입니다. 무력 운동을 계속 일으키는 것만으로는
일제를 이길 수 없고 독립을 이뤄낼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애국 계몽 운동은
조금 다른 방법으로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나려는 운동이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애국 계몽 운동을 일으킬 때 이미 근대화된 일본의 것을 받아들이기도
했는데, 이렇게 해서라도 국력을 키운다면 이 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독립일 것입니다

반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전후로 국가의 ‘실력’ 을 양성하여 국권을 수호하자는 새로운
종류의 국권수호운동인 애국 계몽운동이 나타났다.

1) 사회진화론이 너무 저열하다. -> 친일파로 변질된 인물들


2) 일본 문화를 배우면서 항일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모순적이다.
3) 우리나라가 잘 살기 위한 운동일 뿐이지 일본에 대해 반대하는 항일 운동이라고
보기에 어렵다. (오히려 일제의 지배를 용인)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전후로 국가의 ‘실력’을 양성하여 국권을 수호하자는 새로운
종류의 국권수호운동인 애국 계몽운동이 나타났다. 나라가 국권을 침탈 당한 것은 국민이
무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국민을 ‘계몽’
시키자 라는 목적을 갖고 벌인 운동이다.

애국 계몽 운동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진화론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바탕으로 사회현상을 해석한 이론이다. 사회진화론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원칙을
세계에 대입을 했는데, 강한 자만이 살아남고, 강하지 못한 나라는 도태가 된다는 사상이다.
애국계몽운동가들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탈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일본이
강해서 그런것 보다는 우리나라가 약하기 때문에 약탈을 당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
때문에 처음에 애국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친일파로 변질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애국 계몽
운동은 우리에게 독립의지를 키워주는 운동이 아니라 더 강한 나라에 대해서 굴복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운동이 되었다. 강대국들이 당시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 하기 위해서
진화론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들여온 사상을 기본 사상으로 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항일운동을 지칭하면서 일본에게 배울것을 찾고, 일본을 모방한다는 것은 상당히


모순적이다. 배움을 갈굼함에 있어서 우리의 국권을 침탈한 나라에서 배우게 된다면 왜
우리가 국권을 침탈당해야 했는지 정당화되는 주장을 들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배움을
갈굼할 때에 여러개의 나라에 나눠져서 지식을 얻고, 세계 동향을 파악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많은 선진국을 보고, 좋은 점을 얻고, 나쁜점을 빼서
우리만의 방향을 설립하지 않고 일본만을 모방하여 계몽을 하려고 한 점에 대해서는 모순이
있다고 생각한다.

항일 운동이라는 것은 일본을 우리나라에서 손을 때게 하고, 국권을 되찾는 것에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애국계몽운동은 우리나라 국민들을 교육을 시키는 데에 중점을
두었지, 일본에 대항하지않았다. 따라서 항일운동이라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런
면에서 일본에 대응을 하지ㅁ는 못하고, 사회진화론에 의하여 일제의 지배를 용인함은
애국계몽운동이 항일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2. 식민지 근대화론 => 조선에 자본주의의 싹이 있었냐?
찬성(식민지 근대화론) :

일제 강점기 라는 식민지배 기간 동안 이들의 식민지배가 조선의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고


근대화의 계기가 되었는지, 혹은 조선의 발전 가능성을 억압하고 경제적 몰락을
부추겼는지를 두고 식민지 근대화론과 식민지 수탈론이 대립하고 있다. 우리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한다. 단 우리가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하는 이유는 식민기간 동안 이뤄낸
객관적 경제성장 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 경제발전에 필요한 공업화와 자본주의 체제의
토대를 식민지 기간동안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꽤나 자명해 보이는 명제로부터 출발해보자. 현대 국제 정세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선진국은 자본주의 체제를 따르고 있으며, 이와 상반되는 공산주의 체제를 따르는 국가들은
대부분 극도로 낮은 경제수준을 보유하고 있거나, 자본주의 국가로 변화했다. 즉 우리는
현존하는 사상 중 자본주의가 경제성장에 어찌보면 필수적이며,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결국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여야 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은 식민지배가 없었다면 스스로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이러한 주장에 회의적이다. 조선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이후 반드시 성공시켰어야
할 개혁의 기회인 갑오개혁과 광무개혁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조선은
그때까지도 산업화와 공업화, 이에 필요한 물자조달을 위한 기본적인 철도나 공장등의
인프라도 마련하지 못했다. 게다가 의병운동가들이 단발령에 크게 반발해 신식 학교를
습격했던 사건에서 엿볼 수 있듯, 조선인들은 아직도 근대화를 위한 민주주의 사상과
자본주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어찌보면 실용성은 바닥에 가까운 유교 사상에
그때까지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스스로 자본주의 체제를 현재보다 더
신속하게 확립할 수 있었을 것이라 기대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한국이 빠른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세가지 경제사건에 식민지화가 끼친


영향을 살펴보자. 첫 번째는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이다. 목적은 일본으로 쌀을 조달하기
위한 계획이었지만, 그 덕분에 조선의 농업의 기반을 마련하고 농업이 한단계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두 번째는 1940년대 광복직전 식민지 공업화 정책이다. 이 과정에서 강제징용, 강제징병 등
수많은 인권유린이 이루어졌지만, 이는 조선이 처음으로 국가총동원 체제와 공업화,
자본주의를 경험하게 해주면서 분단 이후 경제 발전 계획을 추진할 때에도 분명 도움이 된
경험이었을 것이다. 세 번째는 1960년대 수출 지향 공업화 정책이다. 이시기에 크나큰
성장은 결국 공업화 정책 시기의 자본주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이룩할 수 있었던 성과이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제가 우리에게 행한 수많은 수탈과 유린들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절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일제 강점기 동안 강제로라도 경험해본
공업화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경험이, 독립과 전쟁을 거치고 나서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를 빠르게 확립하고 세계 최빈국에서 현재까지 성장 하는데 큰 영향을 준 경험이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우리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한다.


반대(식민지 수탈론) : 일본이 없었다면 다른 나라를 통해 자본주의를 수탈 없이 받아드려
성공적인 근대화를 달성했을 것이다. 일본은 한국의 경제를 침탈한 것 뿐만 아니라
체계적으로 잡혀 500년간 이어오던 조선의 정치체제를 무너뜨렸다.

1) 일제강점기 이후 조선이 남북으로 갈라져 전쟁을 하게 된 것도 일제강점기로 인해


정부가 사라진 영향이 크다. 일본에 의해 한국 정부의 기능이 쇠퇴되었고 유일한
정부가 없으니 남북으로 분단되어 미국과 소련의 지배를 받았다. 세계적으로도
분단된 국가인 독일, 베트남, 예맨 등의 분단 국가가 있었는데 전쟁에서 패한 독일을
제외하면 베트남, 예맨 등 또한 열강 국가들에 식민지배를 받은 뒤 독립하는
과정에서 분단되었다.
전쟁 이후 한국은 지금 세계적으로 유명한 빈민국들 조차 한국을 도와줬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가장 가난한 최빈민국 중 하나였다. 따라서 일제강점기가 그 시기에
경제적인 성장에 영향을 줬다고 가정해도 결과적으론 전쟁을 초래해 한국의 경제를
리셋시켰다. 결국 한국의 경제성장은 남북전쟁 이후 스스로 일궈낸 것이다.

2) 일본이 식민지배동안 한국 경제성장에 기여한 부분보다 경제성장의 장애로 작용한


부분이 더 크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한 목표는 많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렇듯이 일본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이를 위해 한국의 생산품과 노동력을
착취했다. 화폐정리사업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일본은 한국 경제의 축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는 한국의 화폐주권을 빼았았다. 일본은 강제적으로 조선의 화폐 발행권을
박탈하고 화폐를 신화폐로 바꾸었다. 구화폐를 신화폐로 교환해주는 과정에서
구화폐의 질을 등급별로 나누어 액면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교환해주었다. 교환
과정에서 구화폐의 가치는 ⅓ 수준으로 떨어지고 조선인 상인들과 은행이 파산하며
조선의 상업 자본이 몰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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