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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남자

신경숙

나는 이상하게 11월이 되면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 그래서 매년 11월만 되면 길거리에서 헤매


고 있어. 이유가 있어서라면 그 이유를 해결하면 될 텐데 아무 이유가 없어.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
이 없어서 그런 걸까? 기다리는 사람이 없기는 10월도 마찬가지고 3월도 마찬가진데 왜 유독 11월
만 그러는 걸까. 술을 마실 줄 알면 술집이라도 갈 텐데. 나는 술을 한 잔도 못하는 사람이지. 냄새
만 맡고도 얼굴이 시뻘게지거든.
그래서 이즈음 드나들게 된 곳이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북카페야. 11월이 되면 퇴근 후에 길
거리를 헤매다가 이 북카페를 발견했지.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으니 이전에 눈에 띄었을 법도 한
데 11월이 되기 전에는 이 북카페를 본 적도 없네. 나는 이제 이 북카페에서 기타까지 배우고 있
어. 정신없이 살던 내가 갑자기 이 낯선 카페의 단골이 되어 기타를 배우고 있다니, 참. 하여간 어
서 11월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고독하게 기타를 배우고 있지. 기타를 함께 배우는 사람들은 서
로 잘 아는 사이가 아니라 이 카페를 드나들다가 만난 사람들이야.
11월이 되기 전의 나는 매우 성실한 샐러리맨이야. 똑같은 하루를 불평 없이 잘 이어 나가는 정
확한 사람이지. 11월이 되기 전의 나는 절대 집에 가다가 북카페 같은 곳에 들를 사람이 아니지.
커피값이 아까워서라도 말이야. 어쨌든 나는 11월이 되면서 이 북카페의 단골손님이 됐어. 탁자가
유리창 바깥과 벽 쪽을 향해 길게 놓여있는데, 나는 늘 벽을 마주 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
곤 했어.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은 솔직히 한 번도 펼쳐 읽은 적이 없지. 책 읽는 일이라는 게 어
느 날 갑자기 되는 일이 아니잖아. 책 읽는 습관을 들이지 못한 채 서른이 되다 보니 이제 책 좀
보려 해도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어. 누군가 생일에 책을 선물해서 펼쳐 읽어보려 했는데
몇 장 넘기지도 못하고 내가 졸고 있더군. 그런 내가 하필 북카페에 앉아 있다니. 11월이 아니면
참 생각지도 못 한 일이야. 그래도 집엔 들어가기 싫은 걸 어떡해. 다행히 여기엔 혼자 오는 사람
들도 많아서 나 혼자 벽 쪽에 앉아 있어도 어색하지 않다. 오래 앉아 있어도 탓하는 사람도 없고.
나를 제외하곤 대부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거나 책을 읽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생각도 안 들어서 좋아.
난 증권회사에 다녀. 온종일 객장에서 사람들과 섞여 있다 보면 솔직히 퇴근 후엔 오로지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좀 쉬고 싶은 마음. 어쩌면 11월에
그 마음이 자제할 수 없을 정도로 발동하는 건지도 몰라. 그런데 어디나 사람이 모이는 곳에선 무
슨 일이 벌어지게 마련이잖아. 여기 드나들기 시작한 처음엔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점차 얼굴들이
익숙해지기 시작했어. 여기서 일주일에 한 번씩 기타리스트를 초빙해 기타를 배는 모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지. 몇 번 기타를 배우는 모습들을 지켜보다가 내 방에 오래 세워둔 클래식 기타가 생
각나서 나도 끼어도 되느냐 물었더니 흔쾌히 그러라더군. 그래서 자연스럽게 끼게 되었어. 다른 사
람들도 서로 잘 아는 사이가 아니더라고. 나처럼 11월 때문은 아니겠지만 뭣 때문인지 집에 들어가
기 싫은 사람이 이 북카페에 들러 커피를 한 잔씩 마시곤 하다가 말을 트게 된 것 같았어. 역시 우
연히 일찍 집에 들어가기 싫은 기타리스트가 이 카페에 드나들게 되었고, 그가 기타 치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가 좀 가르쳐달라고 한 게 시작이 되어서 몇 사람으로 늘었고, 급기야는 나까지 끼게
된 거야.
그런데 어제는 연락도 없이 기타리스트가 오지 않았어.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는데 말이야.
가르쳐줄 사람이 오지 않으니 우리 몇은 그냥 멀뚱히 앉아 있었지. 각자 기타 하나씩을 들고 말이
지. 그제야 깨달았어. 우리가 서로 이름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을. 우리는 선생을 기다리며 통성명을
하기로 했어. 책을 만드는 편집자도 있고 게이머도 있더군. 스파게티 전문점에서 낮에만 아르바이
트한다는 이도 있었지. 그러다가 어떤 이가 나는 그저 온종일 고양이를 뒤치다꺼리하면서 살아요,
그러는 거야.
- 고양이요?
누군가 물었지.
- 네, 고양이요.
그이는 백수라더군. 대학을 졸업하던 해 취직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다가 서른 번쯤 실패를 하고
돌아오는 밤길에 길고양이가 졸졸 따라오더래. 그 고양이를 집으로 데려온 후부터 고양이와 살게
되었다고 했어. 취직하길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길에서 헤매고 다니는 고양이를 만나
면 한 마리씩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대. 우연히 시작된 일이 지금은 집에 고양이만 마흔세 마리라고
하더군.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은 거의 고양이 사룟값으로 들어간대. 누구도 더이상 뒷이야기를 묻
지 않았어. 나는 슬그머니 그이를 올려다봤어. 겉으로 보기엔 고양이가 아니라 애인이 마흔세 명은
있어 보이는 잘생긴 사람이더군. 저런 사람이 왜? 싶더라고. 하긴 나더러 누군가 11월이 되면 왜
집에 들어가기 싫은데요? 물으면 할 말이 없긴 해. 그 남자가 이 북카페에 드나들게 된 것도 고양
이 때문이래. 이제는 너무 많아진 고양이들 때문에 고양이들을 피해서 북카페에 나와 앉아 있곤 한
다는 거야. 고양이들을 내보내면 될 게 아니냐 하니, 그럴 수 없다고 하더군. 이제는 고양이들이 없
으면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냥 가끔 고양이들을 피해서 북카페에 나와 커피나 한 잔씩 마시면
된다는 거야. 우리는 모두 말없이 커피를 마셨어. 처음엔 기타 선생을 기다리는 것 같았는데, 나중
엔 누구를 기다리는 것도 잊고서 그냥 각자의 상념 속에 앉아 있었어. 그러다가 고양이 남자가 제
일 먼저 일어섰어. 고양이들에게 가봐야겠다고 하더군. 사료를 줄 시간이라면서. 우리는 모두 고양
이 남자가 북카페 문을 열고 나가 길을 건너가는 걸 바라보고 있었어.
- 저거 좀 봐!
우리들 중 누군가 나지막이 속삭이기에 모두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창밖을 내다봤지. 저쪽 길모
퉁이에서 길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와 묵묵히 고갤 숙이고 걸어가는 고양이 남자 뒤를 바삐 쫓아
가더라. 길고양이는 어떻게 고양이 남자를 알아본 걸까. 우리는 모두 그 풍경을 주시했어. 곧 고양
이 남자가 뒤돌아 보았어. 어쩐 일이람. 길고양이가 고양이 남자의 발등 위로 폴짝 뛰어오르는거야.
가만히 발등에 올라앉은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던 고양이 남자가 할 수 없다는 듯 길고양이를 안아
들더군. 고양이 남자의 고양이 숫자가 마흔 세 마리에서 마흔네 마리로 늘어나는 순간을 목도했네.
눈시울이 따끔해지더군.
어서 11월이 지나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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