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fessional Documents
Culture Documents
(KING코브라) 싱크 인 (Sink in) 2권 PDF
(KING코브라) 싱크 인 (Sink in) 2권 PDF
✲ ✲ ✲ ✲ ✲
❊ 중❤️독 ❊
✲ ✲ ✲ ✲ ✲
@UMVC3 / 뉴토끼 / 공금
5 장 Everything flows
“또 못 들은 척하지.”
“싫어. 난 잘 잤는데.”
“…….”
버터 바른 빵을 내밀며 재준이 투덜거렸다. 그것을 받으며 나는 무언으로 동감을 표시했다. 녀석이 어떻게
해석할지는 내 알 바 아니다.
“개꿈이야.”
“개꿈은 무슨. 너 지금 속으로 그게 뭐 어떠냐고 생각하고 있지? 백스물두 살까지 그 지경일 수 있으면 진짜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마시며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마재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한숨에 무게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걸로 레스토랑 바닥이 다 내려앉았을 테니까.
그야 그렇겠지.
약간 흠이 있다지만 성격도 이만하면 괜찮은 편이고, 재산-아니, 아직 용돈일까-이 얼마나 많은지 구체적으론
몰라도 평생 고생 안 하고 살 만큼은 될 거다. 게다가 똑똑해서 뭘 해도 밥은 굶지 않을 거고, 손끝도
야무지고 빨라서 살림도 잘했다.
백스물두 살이 되도록 동정인 악몽을 꾸었다며 아침 내내 씩씩대고 있는, 올해로 순결을 지킨 지 26 년 차에
접어든 마재준은 누가 봐도 당장 채가고 싶어 할 일등 남자친구감에 신랑감이었다.
“……하아.”
나를 이글대는 눈으로 째려본 녀석이 순순히 젓가락을 들었다. 어째 저게 흉기처럼 보이는 건 내 눈의 착각일
것이다.
“기다려 봐.”
“뭐?”
얘가 속고만 살았나.
테이블에 놓인 폰을 눈으로 가리켰다. 시간을 확인한 녀석이 콧등을 팍 찡그리고는 다시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하아…….”
“……하지 마. 그런 거.”
“…….”
아마 스물다섯을 넘었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녀석이 이런 노골적인 표현을 써가며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은.
막 스물다섯이 된 어느 겨울밤, 황당한 얼굴로 나타난 녀석은 대체 어디서 찾았는지 모를, 신석기인이
빗살무늬토기를 만들던 시절 인터넷을 떠돌던 유머글을 보여줬더랬다. 스물다섯 넘도록 동정인 남자는 마법을
부릴 수 있게 된다는,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개소리였다.
‘하, 우리 이제 마법도 쓸 수 있겠다.’
‘…….’
“……야.”
“…….”
어젯밤 얘가 꿨다는 백스물두 살 운운하던 그 꿈은 굉장한 흉몽이 틀림없었다. 녀석이 아니라 나에게.
이 새끼가 진짜…….
나는 빠르게 덧붙였다.
“야!”
“장담할게. 엄청 맛있을걸.”
“야, 너 오늘 왜 그래…….”
“그만 좀 해…….”
“세상에, 그동안 수영장 같이 다니면서 젖꼭지를 그렇게 봐놓고도 열일곱 때 이후로 한번 만져보지를 못했네.
심지어 어제도 그랬지. 진짜 미쳤다, 내가.”
“…….”
“…….”
귀가 너무 뜨거웠다. 나는 물고 있던 것을 놓았다.
“……나 내려?”
잠시 말이 없던 재준이 곧 낄낄 웃었다.
“하아…….”
재준이 에어컨 풍량을 높였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녀석의 일방적인 화풀이에 잊혔던 음악이 그제야
귀에 들어왔다.
차는 막힘없이 나아갔고, 스피커에선 리트가 흘러나왔다. 잔잔한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성악가의
목소리에 폭탄이라도 맞은 것 같던 마음은 다행히도 차분해졌다.
“현아, 다 왔어.”
“응. 너 집에 갈 거지?”
재준이 차 문 잠금을 풀었다. 둔탁한 소리가 짧게 음악 소리에 섞였다. 스피커에선 아직도 리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른 앨범인지 가수는 바뀌어 있었다. 이번 건 나도 자주 들어 귀에 익숙했다.
“그러든가.”
“타이밍 죽인다.”
“뭐라고 말한 거야?”
“왜?”
나는 대답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나는 도서관 코앞에 있는 꽃집으로 뛰어갔다. 차를 타고 오는 내내 고민하던 것이 무색하게도 들어가자마자
한눈에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보라 수국 꽃말 아세요?”
“아뇨. 뭔데요?”
“진심이래요.”
“……감사합니다.”
“이거였어?”
“이제 가도 돼. 이따 봐.”
“잠깐만.”
……네가 더 예뻐.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기다리라고 호언장담을 하길래 맘에 안 들면 성질 내려고 했는데…… 어휴, 내가 졌다. 그래, 백스물두 살이면
뭐 어떠냐. 그때까지 다른 건 몰라도 네가 꽃 선물은 해주겠지.”
“…….”
“……응.”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무거나.”
“알았어.”
“이따 봐.”
“시현아.”
도서관으로 들어서기 직전, 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나는 돌아섰다. 텅 빈 도로를 거슬러 오른
차는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것을 확인하고서야 나는 활짝 열린 도서관으로 발을 내디뎠다.
Doch wenn ich küsse deinen Mund, So werd’ ich ganz und gar gesund.
[하지만 내가 네 입을 키스하면
* * *
헛기침 소리가 은은히 울렸다. 오랜만에 들린 그 소리가 반가워서, 한참 집중해서 공부하던 나는 펜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 쪽으로 걸어 나가며 살짝 살피니 할아버지께선 두꺼운 한문 서적을 필사하고 계셨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한동안 보이지 않으셔서 어디 편찮으신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었는데 건재하신 것 같아 다행이었다.
오늘도 도서관에 모인 고정 멤버들과 뜨내기 방문자를 포함해 열 두엇 남짓한 사람들은 저마다 책이나 노트북
앞에서 집중 중이었다.
노트북에 별도의 기계식 키보드까지 장착해 작업을 하던 키보드 마스터는 오늘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키를 치는 소리는 이전에 비하면 훨씬 작았다.
나는 키 스킨의 효용이 이렇게 큰 줄 몰랐다. 그리고 역시 우리 고등학교 후배로 밝혀진 그에게 키보드 모델에
딱 맞는 키 스킨을 떠안긴 사람은 마재였다.
올해 스물셋,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는 안 하고 웹소설을 썼다는 키보드 마스터는 전역 후 새로 시작한 연재가
대박이 나 매일같이 쫓기듯이 글을 써대느라 피가 마르는 중이라고 했다. 피가 마르는 대신 통장에 돈이
꽂히니 그럭저럭 버틸 만하다며 퀭한 얼굴로 웃고는 미안하고 고맙다며 키 스킨을 받았다고 했었다.
그리고 반쯤 협박이 섞인 선물을 떠안긴 장본인은 오늘도 그 애 앞에 노트북을 펼치고 앉아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을 퇴치하는 동시에 마재는 담배 냄새를 풍기는 아저씨들 때문에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며-그
아저씨들은 자기 옆에 앉지도 않았는데도-도서관 측에 흡연자석과 금연자석을 따로 나누어줄 수는 없겠냐고
건의하기도 했다.
시험 기간도 아닌데 웬일로 토요일에 열람실에 몰려온 남고생 무리는 상대적으로 손쉽게 제압되었다. 마재는
가장 서열이 높은 한 놈을 붙잡아다 공부도 안 하는 것들이 도서관에서 떠들지 말고 밖에 나가 놀기나 하라며
협박해 쫓아냈다.
그렇게 도서관의 떠오르는 신생 빌런이 된 녀석은 내가 문 쪽으로 다가가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 떨어졌어?”
시간이 흐르면 무엇이든 변하게 마련이다. 서울시에서 공공시설 자판기에서 탄산음료 판매를 금지하는 바람에
열다섯 이후로 나는 도서관 자판기에서 더는 사이다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오래 묵은 자판기 앞에서 불현듯 세월의 흐름을 느끼는 사이 녀석이 비타민 음료병을 내밀었다. 병뚜껑은
없었다.
오후 5 시 즈음, 여름날의 긴 태양이 위세를 부려대는 도서관 뜰에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음료병을 입에 대며 나는 묘한 감회에 젖었다.
“내 쪽이 쓰레기통 더 가까워.”
“나도 알아.”
예전보다 많이 성숙해진 얼굴에 어릴 때부터 한결같은 웃음이 걸렸다. 자판기 앞에서 그 웃음을 마주하니 꼭
중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정시현, 너 지금 무슨 생각 해?”
“집에 뭐 있는데?”
“너 먹고 싶은 거 다 있어.”
가끔 나도 동행했다. 하지만 시험이 목전인 요즘은 수요일이 아니라면 나는 늘 도서관 붙박여 있었므로 이번
주의 식재료 품목은 몰랐다.
“이따 밤에 내가 끓일게.”
재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원한 눈시울이 그린 곡선을 눈으로 덧그리다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나는 얼른
녀석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더운 바람이 입구 부근에 있는 어린나무의 이파리를 흔들고 있었다. 내 귓가에는 녀석의 시선이 닿았다.
“그 새끼?”
“코 곤다는 놈.”
코골이 빌런은 요즘 부동산 아주머니 눈치를 보느라 조신해진 전화 빌런보다 한층 성질이 더러운 것 같았다.
성질 더럽고 집요하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 새끼랑 그 아저씨가 한판 뜨게 된다면 간신히 평화를 찾은
열람실은 아주 풍비박산 날지도 모른다.
“안 오는 게 좋잖아.”
오면, 대체 뭘 하려고?
“응. 근데 과연 얼마 안 남았을까…….”
우리나라는 머리 좀 돌아간다 싶은 남자 놈들이 이과로 편중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과에서도 차고 넘치게
잘할 마재준은 학교는 달랐으나 나와 같은 경제학부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당연히 이과를 택할 줄 알았던 녀석이 문과를 선택했을 때, 학교에선 작은 파란이 일었다.
녀석을 의대 보낼 꿈에 부풀어 계시던 선생님들은 돌아가며 녀석을 붙들고 설교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줏대로는
어디 가도 꿇리지 않는 마재는 그 말을 모두 귓등으로 흘리고는 기어이 문과반으로 왔다.
녀석이 저지른 만행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차피 1 학년 때의 사태 때문에 내신으론 대학도 못 간다며 중간,
기말고사는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게 싫어서 일부러 틀렸던 게 아닐까. 녀석은 아니라고 잡아뗐지만 나는 아직도 의심 중이다.
나는 내신 싸움이 치열한 학교에서 그럭저럭 선방한 편이었지만 그 성적으로 한국대는 턱도 없었다. 모의고사
성적이 좀 더 나았으나 그쪽도 한국대에 확실하게 붙을 만한 수준은 또 아니었다.
그리고 녀석이 저지를 만한 일을 상상해 보면, 무리하더라도 내가 한국대에 가려고 애쓰는 게 나았다.
그래서도 안 되고.
‘너 얼굴이 이게 뭐야?’
‘어제 술을 좀 많이 마셨어.’
‘그렇네! 그럼…….’
그날 녀석은 오랜만에 동아리 술자리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자리엔 종종 나에게 기분 나쁘게 집적대며
더러운 말을 지껄이던 어떤 남자 선배가 있었다.
그날도 진상짓을 해대는 그 선배를 유심히 보던 녀석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그 선배를 따라 일어서더니 그
선배를 패버렸다.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선배는 이미 종적을 감춘 후였고, 자리로 돌아온 녀석의 뺨에 부러
맞은 게 분명할 자국이 생겨 있었을 뿐이었다.
당연히 학교에선 이래저래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녀석이 무슨 수로 구워삶았는지 앞니까지 날아간 당사자마저
그날 일에 대해선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원래부터 어린 후배들을 데리고 더러운 짓을 해댄다는 소문이 돌던 그 선배는 평판도 지극히 나빴던 탓에 편을
들어주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조금 곤란해졌던 내 학교생활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평안을 되찾았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입 몇쯤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르는 피상적인 인간관계에 나는
그다지 미련이 없었다. 그런 일로 상처받고 침울해지기엔 녀석의 존재가 너무 컸다.
‘늦는 날도 있잖아.’
술집들이 모인 골목에서 약간 떨어진 한적한 길가에 차를 대고 기다리던 녀석은 내가 차에 오르면 웃기도 하고,
술독에 빠졌다가 왔냐며 인상을 구기기도 했다.
보통은 이런 걸 귀찮아하겠지.
라면은 내가 사 갈 테니까 그냥 와♥
어제보다 더 사랑해♥♥♥♥♥
* * *
수험장을 빠져나와 복도로 나왔다. 에어컨이 돌고 있는 복도는 조금 싸늘했다. 창밖에는 빛이 부서지고 있었고,
하늘은 새파랬다.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자 나처럼 시험을 마친 수험생 몇이 학교 정문 쪽을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들의 뒤를 따라 건물들이 드리운 그늘 속을 기계적으로 걸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녀석이 점점 가까워졌다. 예쁜 얼굴에는 의아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그게 괜히 웃겨서 웃음이 나왔다.
“……고생했어.”
그제야 나는 내가 저지른 짓을 깨달았다.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의 존재도, 열다섯 이후로 내가 먼저 녀석을
끌어안은 적이 없었다는 것도 하얗게 잊어버린 채였다.
아마 해야 할 말이 남아서였을 것이다.
“……고마워.”
“가자.”
“어.”
“응.”
‘그동안 너 저녁밥 재준이가 챙겨준 거 아냐? 그거 말고도 걔한테 고마운 게 많으니까 이참에 괜찮으면 같이
가자고 해. 엄마가 한턱 내겠다고. 아, 그럼 재준이가 운전할 테니까 좀 미안한가?’
‘……물어볼게.’
“넌?”
역시 내가 먼저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나, 잘 본 거 같아.”
“응.”
가슴이 두근거렸다.
“……응.”
“내 뒤에 앉은 사람 다리 떨더라.”
“뭐?”
“아무렇지도 않았어.”
“그러게.”
“코 고는 놈은 없었어?”
“설마.”
우리 열람실에 출현하던 코골이 빌런은 그 후로도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와 녀석이 도서관을 떠나는
날까지.
“…….”
떠오를 때마다 애써 덮어두었던 그 물음은, 어째서인지 그날부터 머릿속 한가운데 쐐기처럼 박혀서 뽑아낼 수도,
묻을 수도, 가라앉힐 수도 없게 되었다.
* * *
일요일 오후, 맛집으로 소문이 자자한 장어구이 가게는 만석이었다. 우리는 가게 앞에서 15 분을 기다려서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언니 아들들이야?”
자리로 안내하기 위해 우리를 맞은 직원 아주머니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엄마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하하하, 둘 다 학생이에요.”
그린 듯한 어르신 접대용 미소를 짓고 있는 녀석에게 향했던 아주머니의 시선이 내 쪽으로 왔다. 녀석에 묻어
잘생겼다는 소리를 얻어들은 나는 멋쩍게 웃었을 뿐이었다.
농조로 탄식한 아주머니가 우리를 이끌었다.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헤치고 지정된 자리에 도착한 나는
녀석을 사람들 눈에 덜 띄는 자리에 먼저 밀어 넣고 그 옆에 앉았다. 엄마는 맞은편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엄마는 술을 주문해도 되겠냐며 우리에게 물었다. 녀석은 운전을 핑계로 사양했으므로 사이다도
한 병 추가되었다.
소주와 사이다를 들고 다시 돌아온 사장님이 장어를 불에 올려주고 떠나자마자 재준이 집게를 들었다.
엄마, 엄마 고기 잘 못 굽잖아…….
“어머니, 제가 먼저 올릴게요.”
“너도?”
“응.”
많이 마시지 마.
다른 자리도 아니고, 엄마랑 술을 마시는 자리였다. 심지어 술도 못 마시는 자기를 두고 내가 마셔봐야 얼마나
마신다고. 하여간에 극성이었다.
“우리 아들, 그동안 고생 많았어. 재준이는 우리 시현이 챙겨줘서 고맙고. 엄마가 다 알지. 오늘 많이
먹어.”
“네. 잘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 엄마.”
통통하게 살이 오른 장어가 불판에서 부지런히 익어갔다. 고소한 냄새가 솔솔 피어오르는 동안 엄마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종종 장어를 뒤집었다. 녀석은 다소곳하게 웃으며 엄마의 말에 맞장구를 치거나 자기
이야기를 덧붙였다. 나는 그 중간에 적당히 끼어들었다.
“먹자.”
엄마의 서툰 솜씨에도 장어는 맛있게 익어 있었다. 통통한 민물장어살은 묵직하고 기름진 맛이었다.
간장과 물엿을 베이스로 만든 특제 소스에선 희미하게 생강과 레몬향이 풍겼다. 이번엔 소스에 살짝 찍어 입에
넣었다. 짭쪼름하면서도 달큰하고 약간 새콤한 소스는 고기의 풍미에 조화롭게 어울렸다. 고기의 풍미는 해치지
않으면서도 느끼한 맛이 너무 오래 남지 않게끔 잡아주는 소스는 자꾸 고기를 불렀다.
“엄마, 맛있어.”
“그러셨어요? 어쩌다가요?”
“아버님이 어머니를 많이 사랑하셨나 봐요. 좋아하는 사람이 바라는 건 어떻게든 들어주고 싶잖아요. 그게
쉽든 어렵든.”
조금 슬픈 미소를 떠올린 엄마의 입술에서 작은 한숨이 샜다. 그리고, 녀석이 담담하게 내놓은 말에 가슴이
지끈거린 사람은 엄마만이 아니었다.
나는 빈 술잔을 들었다.
“엄마, 나 잔 비었어.”
그제야 엄마의 얼굴에 서린 슬픈 기운이 가셨다. 엄마가 짓궂게 웃으며 술병을 기울였다.
나는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나 술 별로 안 좋아해…….”
“어. 그런 거로 해두자.”
장어 두 점을 올려 쌈을 싸던 엄마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렸다.
엄마가 만들어준 쌈은 무척 맛있었다. 하지만 너무 크기도 해서, 나는 한동안 입을 열 수 없었다.
거기에 스위스 작업실에서 얼마 후 프랑스에서 열릴 개인전 준비에 몰두 중이신 재준이네 어머니 소식도
곁들여졌다. 녀석이 얼마 전 스위스에 다녀왔던 것도 막바지 작업에 몰두 중이신 어머니의 자잘한 잡일을
도와드리기 위해서였다. 안 그럴 것 같은데, 의외로 마재준은 자기 어머니와 엄청 사이가 좋다.
“시현아.”
“응.”
올 게 왔다는 느낌이었다.
“응. 축하해요.”
나는 얼른 엄마를 달랬다.
“축하드려요.”
내 기색을 살피던 재준이 활짝 웃으며 축하를 건넸다. 하지만 엄마 얼굴에 서린 슬픈 기운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나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 시험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준 거지? 고마워요.”
“시현아.”
엄마가 다급히 냅킨을 뽑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눈가를 닦으며 나는 어이없는 상념을 쫓아내려 애썼다.
“이거 써.”
“……응, 나도 그랬어.”
눈물을 글썽이는 사이, 불판 위에선 장어가 노릇노릇 익어가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씻어낸 엄마가
갑작스레 태도를 바꿔 쾌활하게 외쳤다.
“어이구, 이게 무슨 궁상이야! 아들아, 술이나 마시자!”
나는 술병을 들어 엄마 잔을 반만 채웠다.
“이 녀석이……!”
화제는 자연스레 엄마의 재혼 쪽으로 쏠렸다. 조만간 새아버지가 되실 그분은 작게 사업을 하고 계시고, 7 년
전 이혼을 하셨으며, 올해 고 2 가 된 딸이 하나 있다고 했다. 엄마는 양가 식구들끼리 모여 간단한 식사
자리를 마련하는 걸로 식을 갈무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쯤?”
합격 발표는 두 달 뒤, 8 월 말이었다.
“응.”
“……그럼 우리 집은?”
“시현아, 엄마 집 팔까 해.”
“아…….”
그제야 나는 내가 이 문제를 여태 직시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의 재혼은 단순히 엄마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직 독립하지 못한 나의 거취도 같이 걸린 일이었다.
그럼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으므로 생각해 보겠다는 어정쩡한 말을 막 입에 담으려던 때였다.
진정하라는 듯 어깨를 툭툭 두들기는 손길에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던지지 못할 질문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랬다. 지금 느끼는 껄끄러움과 불안의 밑바닥에는
녀석의 존재가 얽혀 있었다.
나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분 댁은 어디신데요?”
“음……. 좀 머네요.”
“그렇긴 해.”
마재준은 우리 엄마나 선생님들, 관장님 같은 어른들 앞에서 가끔 저런 얼굴을 했다. 그리고 곤란한 기색이
깃들면 묘하게 처연해지는 녀석의 얼굴은 마주한 사람의 걱정과 근심을 단숨에 끌어 올리는 데 특효가 있었다.
어이가 없어 녀석을 째려보았다. 녀석의 눈에 짧게 이채가 스쳤다. 매섭게 번뜩인 그 눈빛은 방해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음…….”
그사이 재준이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녀석이 조금 얄미웠으므로 나는 모르는 척했다. 그랬다가 또 찔렸다.
내버려 두면 옆구리가 쑤실 때까지 찔러댈 기세였다.
보이지 않으니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 새끼가 엄마 앞에서 못 하는 짓이 없었다. 그렇다고
떨어지라는 티를 낼 수도 없어서 나는 잠자코 그 손을 아프도록 맞잡았다.
돌연 가슴이 찡했다.
넌 내가 그렇게 좋아?
이 오랜 시간 한결같이 곁에 머물러 줄 만큼, 조금이라도 멀어질까 매 순간 안달하며 전전긍긍할 만큼?
아들 친구와 아들의 암묵적 담합을 눈치채지 못한 가엾은 엄마가 손사래를 쳤다. 녀석의 얼굴에 수심이
깃들었다. 뻔뻔스레 해대는 연기를 나는 조금쯤 남 일 같은 기분으로 감상했다.
“신세라니, 그런 서운한 말씀 마세요. 어차피 지금도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인데…… 가뜩이나 요새 엄마도 안
계셔서 저 너무 외로워요. 집에 남는 방도 많고요.”
“그리고 현이랑 있으면 제가 더 좋아요. 현이 요리도 잘하잖아요. 얘 때문에 그동안 안 굶었어요, 제가.”
“어머…… 그랬어?”
“그럼요. 저야 진짜 좋죠.”
“현아, 넌 어때?”
어리고 불안했던 그 여름, 우리가 나누었던 그 엉터리 약속을 이제는 조금쯤 수정해야 할 때일까. 녀석이 지금
울겠다고 협박하는 것도 어쩌면 그러자는 뜻이려나.
* * *
양평에서 돌아온 후, 엄마를 먼저 집에 모셔다 드린 우리는 나란히 솔숲으로 산책하러 나왔다. 실은 나는 그냥
들어가 자고 싶었는데, 따라 나오라고 눈으로 윽박지르는 새끼에게 못 이겨 반쯤 억지로 끌려 나왔다.
뭐라 말을 하려던 재준이 입을 다물고 내 손을 잡았다. 어느새 우리는 산책로 깊숙이 들어와 있었고, 주변은
조용해져 있었다.
“너 나랑 같이 안 살 거야?”
하지만 나도 녀석도 알고 있었다. 이 문제는 단순한 거취 문제가 아니라 지난하게 이어져 온 이 기묘한 관계의
변곡점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그래서일까. 내심 녀석의 말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좀처럼 그러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너, 나랑 결혼 안 할 거야?”
“…….”
“…….”
“결혼하고도 설마 따로 살자고 할 건가, 우리 자기는.”
결혼이라.
“근데 우리 어디 가?”
“어디 가고 싶은데?”
“……팔공산 갓바위?”
“자기, 나랑 결혼하게 해달라고 부처님한테 빌려고? 뭘 그렇게까지. 난 언제든 준비돼 있어. 내친김에 지금
당장 할까?”
“국내 여행하자고?”
“왜 안 돼. 돼.”
“야!”
“야…….”
나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좀 이상해. 우리 집이 없어진다니…….”
지금도 녀석의 그럴싸한 겉모습과 알맹이 사이엔 약간 괴리가 있었다. 그 괴리는 어릴 적에 더 심했다. 아기
천사 같았던 마재준은 빈말로도 얌전한 놈은 아니었다.
“응……. 너 그때 진짜 크게 울었는데.”
“…….”
“내가 깨먹은 너네 집 화분만 모아도 진작에 꽃집을 차렸을 거야. 진짜 너희 집에서 별별 일이 다 있었다.
침대에서 하도 뛰다 매트리스 가라앉을 뻔한 날에는 너희 엄마도 못 참고 우리 혼내셨었잖아. 팰 데도 없는
이것들을 어쩌지 하고 보시던 얼굴 아직도 선명하다.”
“그런 일도 있었네.”
시간은 많은 것을 변하게 한다. 변화엔 결말도, 종착지도 없다. 그냥 계속 흐르고, 변할 뿐이다. 그 흐름을
비껴 갈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
“……응.”
“……아니거든.”
“쓸데없는 생각?”
“너 두고 안 죽어. 절대.”
“…….”
“야, 말이 되는 소릴 해…….”
눈앞이 흐렸다. 녀석의 옷자락에 눈물을 쏟으며 나는 이 어처구니없고, 그렇다고 마냥 무시할 수 없는 무서운
생각을 지워 버리려 애썼다. 그러나 한번 깃든 망상은 손끝에 깊이 박힌 가시처럼 좀처럼 뽑아낼 수 없었다.
“너 뭐 해.”
그 세심한 손길에 오랫동안 속에 숨겨두었던 마음에 켜켜이 쌓인 더께가 눈물과 함께 닦여 나갔다. 새삼스레
까발려져 드러나 버린 마음을 나는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아.
“……응.”
“넌 울 때 제일 귀여우니까 괜찮아.”
“…….”
“……고마워.”
“……입 좀 다물 수 없어?”
“헐, 진짜야?”
“…….”
“…….”
“……마재준, 좀 닥쳐.”
부끄러워서 내가 먼저 죽을 거 같으니까.
순순히 끌려와 고개를 숙인 녀석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다. 맞닿은 입술은 따뜻했다. 나는 망설임을 떨치고
혀끝으로 녀석의 입술을 살짝 핥았다. 말캉하고 부드러운 살은 머금어보고 싶은 감촉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입술이 떨어진 후에도 녀석은 좀처럼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화끈거리는 내 귓바퀴를 입술로 지근대던 재준이
속삭였다.
“나 너무 좋아서 지금 죽을 거 같긴 한데…….”
부끄러움은 키스가 끝나고서야 밀물처럼 몰아닥쳤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어서 숨이 고르지 못했다. 아까부터
화끈거리던 귀는 아예 타들어갈 것 같았다.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재준이 내 머리칼에 입술을 눌렀다. 등에 닿은 녀석의 가슴도 두근거리고 있었다.
넌 정말 왜 그러냐.
너도 나 신경 안 쓰고 네 맘 가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도 있는 거잖아.
정작 너는 그러지도 못하면서.
……안 그럴 거면서.
6 장 Sink in
동해 고성에서 재준이 이참에 서핑도 해보라고 권유한 것이 시작이었다. 녀석은 훌륭한 강사여서 나는 어렵지
않게 파도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원래 물을 좋아하는 나는 서핑이 몹시 재미있었다. 사흘 동안 밥 먹고
서핑만 하다 고성을 떠났다.
한여름 성수기였고, 미리 행선지를 정하지 않았던 탓에 숙소 잡기가 곤란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지만 마재준은
그런 쪽으론 빈틈없는 새끼였다.
뒤척이며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봐도 결론은 하나였다. 녀석이고 나고, 떨어질 생각 따윈 없으므로 앞으로도
우리는 이렇게 살 것이었다. 마치 인력으로 묶여 억만년을 같이 돌 수밖에 없는 쌍성계의 별들처럼.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가끔 녀석의 방으로 찾아갈까 싶은 충동이 드는 날도 있었다. 나는 이제 열일곱 살도
아니었고, 그때처럼 재준이나 내가 버티지 못하고 도망갈까 봐 겁이 나지도 않았다. 다만 관성을 벗어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나는 재준이 왜 그러는지 알았다. 녀석도 나름대로 고집이 있었다. 왜 자기를 안 잡아먹고 내버려 두냐며 들들
볶아대면서도, 정작 내가 자기한테 휩쓸려 어영부영 관계가 변하는 게 싫은 거였다.
그 암묵적인 요구는 타당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러고 있는 까닭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었으므로 변곡점을 찍든
말든 움직이는 사람은 나여야 했다.
여행 일주일째 날이었다. 우리는 재준이 석 달 전에 광클해서 예약을 해두었다는 국립수목원 캠핑장에 도착했다.
우리는 수목원에 머무르는 동안 별다른 대화도 없이 울창한 숲속을 산책하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차를 타고 나가 쏟아질 것 같은 별을 보고, 잠을 잤다.
그리고 수목원의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에 물든 사람은 녀석만은 아니었다. 이틀째 밤, 일찌감치 침낭에
들어가 불을 끄고 녀석과 나란히 누운 나는 결국 평소라면 입에 담을 엄두도 내지 못할, 그간, 아니, 스물
즈음부터 오래도록 혼자 고민해 왔던 질문을 녀석에게 던지고 말았다.
“…….”
평소라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덮쳐들어 뻔뻔스레 입술부터 들이밀었을 녀석은 내 질문의 의도를 읽었는지
얌전히 덧붙였다.
“왜 하고 싶어?”
“넌 안 하고 싶어?”
“……응.”
“……좋을까?”
“정시현, 너 설마 자위 한 번 안 해본 건 아니지……?”
깊게 내려앉은 어둠에 잠겨 녀석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일까. 나는 의외로 편안히 대꾸할 수 있었다.
“너 자위할 때 내 생각 하지?”
“…….”
“우리야 너무 어릴 때부터 이러고 있었으니 이 상태가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거고.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몸에 사리가 생길 것 같긴 하지만.”
“……가게 놔둘 거야?”
“아니.”
“……뭐라는 거야. 근데 너 웃긴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주기적으로 이상한 소리 하면서 사람을 닦달해
놓고는.”
“…….”
“…….”
“되게 웃긴다. 나나 너나 상대 생각하면서 자위하는 주제에 나란히 누워서 한다는 게 이런 대화라니. 남들이
우리 이야기 들으면 미쳤다고 할걸.”
“…….”
“응.”
* * *
신령스러운 숲을 떠나 속세로 돌아온 우리는 그날 이후 다시 다른 방을 썼고, 경상도 쪽으로 먼저 내려가
전라도 쪽으로 이동하는 여정을 밟으며 본격적으로 맛집 투어를 시작했다. 재준이 미리 골라둔 곳도 가고, 그
동네 분들에게 물어 찾아가기도 했다.
먹을 때마다 오만상을 써가면서도 나는 수육과 김치를 곁들인 홍어 삼합을 막걸리까지 곁들여 다 해치웠다.
이걸 대체 왜 먹는 걸까, 하고 주변 아저씨 아주머니에게 들리지 않게 소곤대던 녀석도 결국 나와 비슷하게
인상을 구긴 채 접시를 비우는 데 한몫했다.
비행기 퍼스트 클래스는 나중에 태워줄 테니 일단 여객선 특실부터 타보자는 이상한 말을 남기며 녀석은 예약을
마쳤다.
아니나 다를까, 발권할 때 직원이 오늘은 바람이 좀 세서 파도가 약간 높은 편이라고 했다. 발권을 마치고,
신분증을 다 까고 승선인 명부를 쓰면서도 묘하게 찝찝하고 불안했다. 만에 하나 사고가 났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직원의 한마디가 그렇게 귀에 새록새록 박힐 수가 없었다.
“너 자격증 있댔지?”
“그랬나?”
“그랬어.”
“다른 건 없어?”
“그러네.”
“응.”
재준이 예약을 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가슴이 빠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시계는 2 시 20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10 분쯤 더 있으면 승선을 시작할 것이다.
“……응.”
어째서 이리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심장 뛰는 속도가 평소 두 배쯤 되는 것 같았다. 왼쪽
가슴이 욱신거리다 못해 명치까지 조여들어서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길게 내쉬었다.
“괜찮아. 그냥 좀 긴장되네.”
“혹시 배 무서워?”
“그런 건 아닌데…….”
“아냐, 신경 쓰지 마. 괜찮아.”
“너 지금 맥박 진짜 빠르다. 정말 괜찮아?”
“응.”
재준이 웃었다.
“앞으로 배만 태워야겠네.”
“……일단 오늘 타보고.”
어깨를 부드럽게 도닥이는 손길에도 심장의 박동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도리어 조금 빨라진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있으니 심장 뛰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했다. 나는 다시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남은 날짜도 슬슬 해둘까 싶은데 성수기라 두 개 나란히 잡기가 쉽지 않네. 자기야, 우리 그냥 같이 잘래?”
“응.”
“너…… 괜찮아?”
“……괜찮아.”
“……응.”
“응.”
“화장실 다녀올게.”
차마 그 얼굴을 더 볼 자신이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물을 틀었다. 화장실에 왔으니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고,
녀석의 얼굴을 다시 보기 전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고 싶었다.
수도를 잠그고, 핸드 드라이어 앞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자 미지근한 바람이 세차게 쏟아졌다. 웅웅대는 바람
소리도 복잡한 머릿속의 소리를 지워주지는 못했고, 쓸데없이 성능 좋은 드라이어는 젖은 손을 금세 말려
버렸다.
나는 차가워진 손으로 귀를 문지르고, 가까스로 표정을 다잡고, 머리를 비우려 애썼다. ……소용없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재준이 일어섰다. 화장실로 도망치기 직전 봤던 놀란 기색은 간데없었다. 녀석의 얼굴은
차분해 보였다.
하긴, 열여섯 살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의식하고 쑥스러워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걸지도 모른다.
“……지금 타면 되는 거지?”
“어. 가자.”
그제야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와 같은 배를 탈 사람들은 저마다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디 어디가 맛있다며 신나게 대화를 나누는 그 애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묘하게 긴장이 풀렸다.
줄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여학생 셋이 검표를 마쳤다. 그들이 게이트 밖으로 걸어 나가자마자 재준이 직원에게
표를 내밀었다.
게이트 밖으로 나서자 길게 차양을 친 통로가 이어졌다. 옆으로는 우리가 탈 배가 보였다.
하얗고 커다란 배에 줄지어 오르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나는 어느새 발권 후 덮쳐들었던 불안이
가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큰 문제가 생기자 상대적으로 작은 문제는 그새 잊히고 만 모양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통로가 끝나 있었다. 차양 밖으로 나가자 뜨거운 햇빛이 쏟아졌다. 눈이 부셔서
눈살을 찌푸렸을 때였다.
겨우 잦아들었던 가슴이 또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어지러워진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쓰며 승선을 위해
걸쳐놓은 계단을 올랐다. 내 뒤를 따르는 녀석의 발소리에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았다.
“우리 몇 호실이야?”
“6007 호.”
달칵.
달칵.
“너 뭐 해…….”
“……뭐 하는 거 같아?”
녀석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없었다. 잔뜩 가라앉아 끝이 갈라진 목소리는 꼭 열일곱, 사고 치려다 불발로
끝났던 그날 같았다.
“아……. 거기 핥지 마.”
입술로 지분거리는 감촉을 견디다 못한 나는 녀석의 어깨를 떠밀었다. 그런데 녀석은 떨어져 나가기는커녕 내
양손을 내려 움켜쥐고는 목덜미를 빨았다.
어쩔 수 없었다.
곧 입술이 포개졌다. 조르듯이 입술을 머금고 잇새를 두드리는 혀를 이기지 못하고 나는 입술을 열었다.
코끝이 닿고, 입술이 짓눌려 비벼졌다. 혀뿌리가 아릴 만큼 세게 빨아당기고, 목구멍까지 집어넣고 싶다는 듯
깊숙이 혀가 파고들었다.
입가가 젖어 엉망진창이 되었을 무렵에는 다리가 후들거렸고 맞붙은 아래엔 피가 몰려 있었다. 나나 녀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깨닫고 흠칫한 순간 바닥이 흔들렸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밖에서는 객실 안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재준의 어깨를 밀었으나 녀석은 떨어질 기미가 없었다. 떨어지긴커녕 티셔츠 아래로
손이 들어왔다. 척추의 마디를 세듯 천천히 타고 올라온 손은 견갑골을 집요하게 매만지다 가슴으로 옮겨 갔다.
녀석은 거침없이 손끝으로 유두를 문질렀다.
숨을 몰아쉬는 사이 밀려 올라간 티셔츠가 흘러내렸다. 뜨거워진 몸도, 어정쩡하게 서버린 아래의 상태도 몹시
난감했다. 나는 녀석의 얼굴을 어떻게 마주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어 고개를 푹 숙인 채 흐트러진 티셔츠를
정리했다.
그러나 재준이 티셔츠를 내린 내 손을 붙잡고 그것을 다시 확 들어 올렸다. 가슴팍이 훤히 드러났지만 놀랄
틈도 없었다. 녀석이 곧장 허리를 숙여 유두를 물었다.
“아…….”
나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밖에 사람 있잖아.”
“이리 와.”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녀석의 나신은 위압적이었다. 넓은 어깨와 흉곽을 따라 허리까지 이어지는 선을 눈으로
덧그리는 동안 얘가 이렇게 컸나 싶은 새삼스러운 감상이 덮쳐들었다.
“안 돼?”
나는 얼결에 그 손을 붙잡았다.
“마재, 여기 배야.”
“알아.”
“아무래도 좀…….”
방음이 안 된다는 소리를 해놓고도 순식간에 티셔츠를 벗겨 버린 녀석이 가슴팍에 입술을 묻으며 허리를
더듬었다. 그 손은 이내 바지 허리 밴드에 달린 매듭을 풀었다. 그만두라는 소리를 하기도 전에 바지 속으로
손이 들어왔다.
거침없이 열이 오른 아래를 더듬는 손길에 화들짝 놀란 나는 나도 모르게 허리를 세웠다. 그러나 재준이 자기
몸으로 나를 내리누르는 바람에 상체가 넘어갔다. 바닥에 머리가 닿았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미안해. 더는 못 기다리겠어.”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알았어.”
“……괜찮아. 하자.”
“응.”
“허리 들어볼래?”
파도를 가르며 나아가는 배가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물 위에서 아주 오래된 친구이면서 형제 같은 녀석과
이런 짓을 하는 기분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이 막막했다. 근친상간을 저질렀다는 사람들도 지금 같은 배덕감을
느꼈을까.
당치도 않은 생각인 줄 알면서도 그 상념은 좀처럼 머리에서 떨어져 나갈 줄 몰랐다. 가슴 한구석에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누르며 허리를 들자마자 속옷째로 옷이 벗겨져 나갔다.
재준이 곧장 일어선 것을 훑어 올리고, 끝을 문질렀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손끝의 감촉에 나는 그제야
선단이 젖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녀석이 그 꼴을 빤히 보고 있다는 것도.
“아…….”
소리가 새어 나가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방음이 안 된다는 말이 머릿속을 후려쳤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나는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씨발…….”
“시현아, 사랑해.”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마치 그 말밖에 모르는 것처럼, 녀석은 연신 귓가에 사랑한다는 말을 흘려 넣었다.
곧 눈꺼풀에 입술이 닿았다. 속눈썹을 더듬듯 조심스레 눈물을 거두어 가는 키스에 가슴이 욱신거려서, 나는
녀석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뜨거운 숨을 이마에 쏟아낸 녀석이 입술을 포갰다. 스치듯이 짧은, 평소와 같은
버드키스였다.
“야! 너 지금 뭐 해!”
그러나 녀석은 멈추지 않았다. 목을 핥는 것으로도 모자라 턱에 입술을 대고 빨아대는 짓에 기겁해 녀석의
어깨를 팍팍 쳤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 손을 당겨 매트리스 위로 내리누른 녀석은 기어이 가슴팍에 흩어진
것들까지 남김없이 핥고서야 입술을 뗐다.
대답은 없었다. 자기도 남자면 이런 짓이 얼마나 괴로운지 알 텐데도, 녀석은 좀처럼 그 짓을 멈추지 않았다.
고통과 쾌감이 동시에 덮쳐들었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꽉 움켜쥐며 그 감각을 견뎠다. 그러는 사이 기가
막히게도 아래에는 또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그만, 읏, 하라니까…….”
나는 어느새 놓여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재준이 얼굴을 가린 손등에 입술을 찍어대며 속삭였다.
“너, 너는 안 해?”
“나도 너 해줄게.”
“고마운데, 그건 좀 이따가.”
“야!”
“괜찮아. 다들 하는 거야.”
“아니, 안 할 거 같은데…….”
“…….”
“너 먹고 싶다고 했었잖아.”
“야…….”
녀석은 거침없었다. 깊이 머금었다 내뱉고, 혀끝으로 민감한 선단과 소대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듣고 싶지
않은 젖은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정말이지 더는 못 버틸 것 같다고 생각한 그 순간, 딱딱한 입천장을 긁으며 속으로 파고든 선단이 말캉하고
좁은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천천히 기둥을 훑으며 아래로 내려온 입술과 뜨거운 숨결이 치골에 닿았다. 덜덜 떨리는 내 허벅지를 콱 누른
재준이 다시 고개를 드는 동안 타액이 기둥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수치를 모르는 허리가 또 들썩였다.
“흑…….”
녀석의 입안에 정액을 쏟아내는 사이 또 눈물이 났다. 감당하기 버거운 감각, 당황, 부끄러움, 미안함 따위가
마구잡이로 섞여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스물여섯이나 먹고 이런 일로 질질 짜는 것도 민망한 일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눈물은 쉽게 멎지 않았다.
재준이 등을 툭툭 두들겼다.
“…….”
“……어쩌지. 진짜 떨린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손을 녀석의 가슴에 댔다. 손바닥을 두드리듯 뛰어대는 심장의 박동이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걸리는 것 하나 없이 부드러운 피부, 근육의 윤곽이 뚜렷한 가슴과 배를 더듬는 동안 가슴이 두근거렸다. 낮게
신음한 재준이 깊이 입술을 겹치고는 내 허벅지를 길게 쓸어내렸다.
“……싫은 거 아니지?”
“……응.”
“그럼 만져줘.”
“응.”
“……끝도 만져줄래?”
“늘 네 생각 하면서 했어.”
목구멍에서 신음이 끓었다. 그 소리를 받아 간 녀석이 입술을 떼고 귓바퀴를 물었다. 아마도 빨갛게 달아올라
있을 뜨겁고 딱딱한 살을 지분대던 녀석은 곧 혀를 내밀어 귀를 핥기 시작했다.
“현아, 넌?”
나는 멍하니 대꾸했다.
“응?”
뻔히 알면서 괜히 물어보는 말에 대꾸하고 싶지 않아서 녀석의 입술을 내 입술로 막으려 했다. 하지만 녀석은
고개를 물려 피하고는 눈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왜 대답 안 해.”
“읏, 그런 거 왜 물어.”
이딴 걸 묻다니.
“제발 좀!”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얼어붙었다.
“먹어봐.”
“맛있어?”
그래도 도착한 날에는 리조트 내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그러나 그 이튿날부터 나는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아니, 방 밖으로 나가긴 했다. 마재는 이 리조트에 방을 두 개 잡아두었다. 이런저런
짓을 하다 침대가 엉망이 되면 다른 방으로 옮겨 가 잠드는 짓을 사흘씩이나 했다.
섹스하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일어나면 씻고, 또 섹스하고, 그러다 눈을 뜨면 룸서비스로 끼니를 때웠다. 기가
막히게도, 제주까지 와서 밥 먹고 기운 내서 한 짓이라곤 그 짓뿐이었다.
사흘간 영화도 세 편인가 보긴 했는데 끝까지 본 영화는 하나도 없었고, 옷을 입고 있었던 시간보단 벗고
있었던 시간이 더 길었다.
그렇게 내가 희망에 부풀어 있는 동안 녀석은 간간이 나를 살펴가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 참돔회가 마음에
드는지 젓가락이 그쪽으로 제일 많이 갔다.
“안 가.”
“응? 너 그거 하고 싶댔잖아.”
“취소했지, 당연히.”
“……요트는?”
“그것도.”
나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을 기어이 입에 담는 바보짓을 했다.
“……취소했어?”
마재가 정색했다.
“…….”
“절대 아니야.”
“많이 힘들었어?”
“야!”
“나중에 해.”
“…….”
더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플 것 같았다.
헛된 저항을 포기한 나는 숟가락을 들어 따뜻한 전복죽을 열심히 퍼먹었다. 전복구이도 꼭꼭 씹어먹고, 차가운
딱새우회와 참돔회도 먹고, 와인도 마셨다. 두 잔째의 와인은 금세 비었다.
“인터코스, 해볼래?”
밥 먹다 듣기엔 심히 뜨악한 말에 놀란 나머지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콜록대느라 목구멍이 아팠고, 생리적인
눈물이 솟았다.
“괜찮으니까…… 앉아.”
“현아, 괜찮아?”
“……미안. 많이 놀랐어?”
어이없는 소리를 툭 던지며 뻔뻔스레 굴던 녀석은 내가 조금 탈이 났다고 그새 또 시무룩해져 있었다.
그래서 쟤도 그동안 입으로 잔뜩 해줬던 거겠지. 그렇게 해주면서도 정작 녀석은 입술 찢어질까 겁난다는 말을
앞세워 나는 절대 못 하게 했다.
나는 민망함을 꾹 참고 입을 열었다.
“……안 들어갈 거야.”
넌 그걸 어떻게 알아?
욱 치밀어 오른 물음을 겨우 목구멍 너머로 삼키는 사이 희미한 회의감이 덮쳐왔다. 어차피 거절하지도 못할
거, 입을 열면 수치만 늘릴 뿐이었다.
그러니 밥 먹으면서 하기에 심히 부적절한 망측한 생각과 대화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실제로 닥치기 전에는 해도 소용없을 마음의 준비를 하며, 네 맘대로 하라고 막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야!”
경험치가 좀 쌓이고 난 후라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이 시점에선 그랬다. 아니, 난 사실
인터코스 자체가 별로 내키지 않았다. 쟤가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면 할 생각 따윈 영영 하지 않았을 거다.
“싫은 건 아닌 거지?”
“그럼 해보자.”
“……내키지 않는 거랑 싫은 건 뭐가 달라?”
“…….”
“……그래서?”
“자기야, 군대에도 신병훈련소가 있고, 야구는 시범 경기를 해. 심지어 게임에도 튜토리얼 적응 기간 있잖아.
20 년 동안 나 너만 해바라기처럼 보고 살았어. 내가 좋아서 한 일이니까 그걸로 공치사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우리 자기 그렇게 매정한 사람 아니잖아. 다섯 번 정도는 별로여도 너그럽게 봐줄 수 있지?”
“……아픈 건 싫어.”
“안 아프게 할게.”
마재가 냉큼 대답했다.
* * *
‘……다녀와.’
재준이 나를 안은 채로 침대에 앉았다. 찬물로 씻었는지 옷 아래로 파고든 손은 서늘했다. 허리부터 흉곽을
더듬고 올라온 두 손이 가슴과 등을 더듬었다. 뜨거워진 살갗에 닿는 찬 기운이 좋았다. 나는 눈을 감고
신음했다. 뺨에 닿는 숨결이 거칠어졌다.
상의가 벗겨지고, 입술이 떨어졌다. 녀석은 곧 드러난 목덜미를 길게 핥아 올렸다. 귀 아래를 눅진하게
지분대던 입술이 뺨을 머금었다. 무른 과일을 베어 물듯 조심스럽게 뺨을 물고 핥던 재준이 낮게 웃었다.
“또 로션 안 발랐네.”
“나도 벗는 게 좋아?”
“……응.”
“벗겨줘.”
“더 세게 물어도 돼. 너 먹고 싶은 만큼.”
새콤한 향이 코끝을 스치자 입안에 타액이 고였다. 믿을 수 없게도, 좀 더 먹고 싶다는 충동이 스쳤다. 나도
모르게 이를 세워 깨물었다. 그사이, 등을 타고 올라 목덜미에 닿은 서늘한 손이 물기가 남은 머리칼 속으로
파고들었다.
매트리스에 등이 닿기가 무섭게 반바지 속으로 손이 들어왔다. 다리 사이를 더듬던 녀석이 흠칫하더니 눈을
둥글게 떴다.
“……속옷 안 입었네.”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런 거 아니라니까.”
저놈의 입이 또 시작이었다. 가까스로 대답하는 사이 달아오른 뺨이 화끈거렸다.
그 시선에 흠칫한 찰나 재준이 내 허리를 지그시 누르고는 천천히 흔들었다. 뜨겁고 딱딱한 것이 민감해진
살갗을 긁었다. 그 진저리나는 감각에 아랫배가 움찔거리고, 목구멍에서 소리가 끓기 시작했다.
“응…….”
못된 새끼는 아프다는 말에도 아랑곳없이 도리어 손끝으로 돌기를 꼬집듯 비비며 귓가에 속살댔다.
“아!”
“흑…….”
“아! 하지 마!”
그러나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이미 유두를 문 녀석은 단번에 유륜까지 세게 빨아들였다. 안 아프게 한다더니
이번에도 역시 거짓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등줄기를 시큰거리게 하고, 가슴을 파르르 떨리게 만드는 이 감각이 고통인지 쾌감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었다. 녀석이 양쪽 가슴에 번갈아가며 그 짓을 해대는 동안 나는 아프다는 말을 헛되이
되풀이하며 참지 못한 신음만 흘렸다. 내 목소리가 날카로워질 때마다 녀석은 뜨거운 숨을 가슴팍에 쏟아내며
돌기에 이를 세웠다.
“현아, 봐봐. 젖꼭지, 진짜 예쁘게 익었어. 어쩌지……. 자꾸 먹고 싶다.”
잠긴 목소리로 수치스러운 말을 쏟아낸 녀석이 게걸스레 가슴을 빨았다. 수치심과 흥분으로 돌 것 같았다.
연신 잇새로 신음과 더운 날숨이 터졌다. 쾌감보다 아픔이 더 크게 느껴질 즈음에야 겨우 입술이 떨어졌다.
“아프다더니, 여긴 왜 이래?”
녀석의 손가락이 선액이 흐르는 끝을 살짝 문질렀다. 그 감질나는 자극에도 허리가 튀었다. 혀끝으로 유두
끝을 살짝 누른 재준이 페니스를 쥔 손아귀에 힘을 실었다.
“흣, 너, 제발 입 좀 다물어…….”
“…….”
자기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해대는 개소리에 수치심이 확 솟구쳤다. 꼬리뼈까지 찌르르 저렸다. 내 페니스를
쥔 녀석의 손은 어느새 흘러나온 선액으로 잔뜩 젖어 있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너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너, 제발…….”
“제발? 빨아달라고?”
“야!”
미친 새끼가 지껄이는 소리에 귀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녀석을 원망스레 노려보았지만 녀석은 태연하게 웃을
뿐이었다.
축축하고 뜨거운 혀와 매끄러운 점막이 페니스를 빈틈없이 둘러싸고 조여댔다. 허벅지가 후들후들 떨렸다. 몸이
뒤로 넘어갈 것 같아서 나는 침대 헤드를 붙잡고 버텼다. 어지간하면 나도 맨정신이 아니고 싶었는데 도무지
그럴 수가 없는 것이, 이 자세는 너무 부끄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이렇게까진 안 할 것 같았다. 나 아니면 서지도 않는다던 말이 의심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이 새끼는 대체 어디서 뭘 보고 왔길래 이런 난행을 당연하다는 듯 해대는지 모를 일이었다.
걱정이 들끓던 머리가 하얗게 변했을 무렵 불현듯 입술에 손가락이 닿았다. 정신이 반쯤 나간 나는 반사적으로
입술을 열어 그것을 물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목구멍 깊숙이 밀어 넣었던 페니스를 뱉어낸 재준이 열이 들끓는 눈으로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입안에 들어온 것을 핥았다. 혀를 가볍게 누르던 손가락은 혀 아래를 훑고, 모양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이를 덧그리고, 미끄러운 점막을 매만지며 온 입안을 헤집었다.
“응…….”
손가락이 목구멍 가까이 깊숙이 파고들자 입안에 타액이 잔뜩 고였다. 목이 말랐으므로 나는 손가락을 빨며
타액을 삼켰다. 살이 비벼지며 나는 찌걱대는 소리와 질척이는 물소리에 머릿속이 좀 더 아득해졌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열은 한층 뜨거워져 있었다.
“……씨발, 너 지금 너무 야한 거 알아?”
그러나 녀석은 이번에도 내 뜻대로 해주지 않았다. 침대 헤드에 기대 있던 재준이 아래로 쑥 내려갔다. 놀랄
새도 없이 녀석의 손에 허벅지가 끌려 내려갔다. 곧 회음에 뜨겁게 열이 오른 입술이 닿았다.
“야!”
“그만해…….”
하지만 다리 사이에 고개를 처박은 녀석은 만져줄 생각이 별로 없어 보였다. 내 손으로 할까 말까. 나는 곧
망설임을 접고 내 것을 쥐었다. 이미 쟤 앞에서 한 적도 있는 데다 이미 별별 짓을 다 하는 참인데 못 할 건
또 뭐 있나 싶은 생각이 든 걸 보면 나도 지금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응……. 만져줄까?”
“…….”
녀석의 손에 이끌려 나는 무릎을 세우고 엎드렸다. 수치스러운 자세와 몰아닥친 불안으로 몹시 심란했다.
그 양심 없는 새끼는 귓가와 목덜미, 등과 어깨, 아무튼 보이고 닿는 곳마다 입술을 찍어대고 있었다.
다정하고 살가운 접촉에 어지럽던 머릿속은 다행히 조금이나마 깨끗해졌다.
뒤에 혀가 닿자마자 나는 화들짝 놀라 등을 세우고 허리를 앞으로 뺐다. 지난 나흘간 녀석은 내 온몸을 샅샅이,
꼼꼼히도 물고 빨았다. 하지만 그런 곳까지 핥을 줄은 몰랐다.
나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베개 안는다고 뭐가 달라지냐.
담담히 해대는 대꾸에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사이 재준이
덧붙였다.
“익숙해져야지. 이제 맨날 해줄 텐데.”
“으흐읏, 응…….”
“아!”
그저 흥분한 탓에 가라앉은 것에 불과할 텐데도 어쩐지 그 목소리가 거짓말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그치는
것처럼 들려서, 나는 조금 서러워졌다.
커다란 손이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곧 등에 재준이 가슴을 포갰다. 녀석의 가슴팍도 뜨거웠다. 맞닿은 살을
타고 열이 번졌다.
그 열기에 괜히 심장이 욱신거렸다. 마치 그것을 알아챈 것처럼 재준이 내 왼쪽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곧 목덜미에 입술이 닿았다.
“내 말이 못되게 들렸어?”
“…….”
“……알아.”
“…….”
다정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엔 열이 끓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정해진 대답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응.”
“하아…….”
“힘들었어?”
“응…….”
“……그래도, 괜찮아.”
낮은 한숨을 흘린 재준이 재차 목덜미에 깊이 입술을 묻었다. 불현듯 또 키스하고 싶었다. 고개를 돌리자
녀석은 어렵지 않게 내 바람을 이루어주었다.
짧은 키스를 하는 동안 녀석은 협탁에 놓인 튜브를 집었고, 입술이 떨어졌을 때는 튜브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등줄기에 입을 맞추며 물러난 재준이 속삭였다.
“……응.”
“아프면 참지 말고 말해.”
“알았어.”
“읏…….”
“아파?”
“아니. ……괜찮아.”
혀로 풀어놓은 아래는 생각보다 쉽게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이물감이 심했다. 녀석은 종종
허리와 등에 얕은 키스를 남기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안쪽 깊숙한 곳까지 손가락이 파고들었을 때는 약간
힘들었지만 버틸 만은 했다.
“하나 더 넣을게.”
“……응.”
그 행위에 수반되는 감각은 여전히 불쾌함에 가까웠다. 그러나 얼마간 더 견디자 빡빡하던 아래는 좀 더
부드러워졌고, 불쾌함과 이물감도 꽤 줄어 있었다.
“……네 안, 엄청 뜨거워.”
등줄기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리는 녀석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살갗에 닿은 숨결은 뜨거웠다. 체간을 타고
전율이 흐르기 시작한 그 순간, 아래가 잘게 움찔거렸다. 젖은 소리는 좀 더 커져 있었다.
“하……. 으흑.”
압박감이 심했다. 그 뻐근한 감각이 누그러질 때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프진
않았다. 아마 당장 속에 집어넣고 싶을 텐데도 녀석은 서두르는 기색 없이 줄곧 조심스러웠다.
시간이 걸릴 거라던 말을 나는 그제야 온전히 이해했다. 아프지 않게 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는 거였다.
나는 부끄러움을 꾹 참고 입을 열었다.
“아직 아니야.”
나는 눈을 꽉 감았다. 그러자 몸속을 드나드는 손가락의 감촉, 온몸에 차올라 끓는 감각이 더 극심해졌다.
이미 열이 올라 있던 살갗은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졌다. 너무 더웠다. 가슴이 가쁘게 들썩였다. 관절 끊어진
목각 인형처럼 무릎과 팔이 무너졌다.
“미치겠다, 진짜…….”
“오늘 찾을 줄은 몰랐어.”
“……한 번 더 할 수 있겠어?”
“응. 하자.”
짧은 평생, 내심 나는 내가 성적으론 꽤 담백한 편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 생각이 무색하게도 녀석이
나를 만지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너무 쉽게, 다시 흥분했다. 나흘간 으레 그랬듯.
“으…….”
“아파?”
“아직, 괜찮아.”
“좀 더 넣을게.”
“아직, 읏, 이야?”
“반도, 안 들어갔는데.”
“……응.”
“아!”
“하아, 씨발.”
“현아, 괜찮아?”
“또 거짓말하네. 너 지금 아픈 거지?”
재준이 내 페니스를 쥐었다. 조금 전까지 서 있었던 그것은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소리가 끓는 목을
가다듬었다.
“네 거 크기를, 흣, 생각해……. 하나도…… 안 아프면, 으읏,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냐?”
“괜찮으니까…… 그냥 해.”
“……너 이럴 때, 그런 말 하면 안 돼.”
곧 녀석의 것이 확 치고 들어왔다.
“아!”
“읏…….”
묵직한 살덩이가 속살을 낱낱이 뭉개며 드나드는 동안 조금 전 절정에 달하기 직전 느꼈던, 찌르르한 쾌감이
아주 살짝 일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고통에 묻혔다.
“아……. 흑, 으읏…….”
그도 그럴 것이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삽입의 과정은 지겨울 만큼 느렸다. 그동안 녀석은 내가 아플까
염려해 치솟은 충동과 흥분을 계속 억누르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애쓴 것이 무색하게도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너, 괜찮아?”
“쓰라리다고?”
“언제부터?”
“왜 빨리 말 안 했어.”
“아니. 그땐 괜찮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뭐라는 거야.”
“만져줄까?”
“넌 못 했잖아.”
아직 열이 남은 눈에 짓궂은 빛이 떠올랐다.
“…….”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그냥 하면 안 돼?”
“응? 뭘?”
“콘돔 없이 하면 큰일 나?”
“하자.”
“그때 가서 생각할게.”
“정시현, 너 진짜…….”
“안 아파?”
“……응.”
“눈 감지 마. 너도 나 봐야지.”
녀석의 목소리는 어느새 낮게 잠겨 있었다. 그 목소리만으로도 몸에 열이 올랐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눈을
마주하기가, 또 떨리고 있는 몸을 내보이고 있는 상황이 너무 부끄러웠으므로 나는 차마 눈을 뜨지 못했다.
“또 못 들은 척하지.”
처음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간지러운 느낌이 번졌다. 그리고 그것은 곧 미약하게나마
쾌감으로 바뀌었다.
“응…….”
“여기 좋아?”
“아…… 아! 으응…….”
들뜬 허리가 떨렸다. 아래가 멋대로 조여들었다 풀리기를 반복했다. 단단히 수축한 아랫배가 욱신거리고 살갗이
저렸다. 손가락이 몇 차례 더 같은 곳을 짓누르는 동안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했다.
“하…….”
“하아, 하아.”
“넣을게.”
“응. 아, 아읏…….”
여유가 없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대답하자마자 선단이 쑥 밀려들었다. 그것은 단번에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아!”
아팠다. 하지만 고통보다는 쾌감이 더 컸다. 버겁고, 힘든데도 그랬다. 제멋대로 요동치며 들어온 것을
빨아들이는 내벽의 감각은 너무, 너무 이상하고 견디기 힘들었다.
제일 예쁠 때 먹으라고 했었지.
찌푸린 낯으로 웃은 재준이 몸을 기울여 키스해 주었다. 녀석의 말대로 엄청, 맛있었다.
페니스는 점점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몸에 차오른 감각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벌어진 허벅지가
경련했다. 닫히려는 허벅지를 재준이 확 벌려 눌렀다. 허리가 떴다. 길게 빠져나간 페니스가 단숨에 깊숙이
박혔다.
“하, 윽…….”
욕지거리 섞인 말을 마치자마자 재준이 다급히 입술을 물었다. 뜨겁고 거친 숨이 입안으로 쏟아졌다. 녀석이
느끼고 있을 흥분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아! 아아!”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가 완전히 맞붙었다. 어느새 페니스는 끝까지 몸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명치를 짓눌린
것 같았다. 숨도 쉴 수 없었다.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고통과 뒤섞여 덮쳐든 쾌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 안고 싶어?”
“응…….”
“아! 응, 하, 흐윽.”
“아, 아!”
“흑, 뭐, 아아!”
“네 안에, 하고 싶어.”
“……개새끼.”
“너…….”
“씨발, 정시현…….”
곧바로 입술이 포개졌다. 입안으로 뜨거운 숨이 쏟아졌다. 녀석이 짐승처럼 목을 울리는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이제 여유라곤 조금도 없이 빠르게 박혀드는 것을 견디며, 나는 괘씸하고 예쁜 개새끼의 입술을 세게 빨았다.
* * *
가슴이 욱신거렸다.
난 실은 별거 아닌데.
“재준아, 사랑해.”
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절대 네가 혼자 울게 두지 않을게.
한편, 조상님들의 보우하심이 이어진 덕으로 지원했던 회계법인 네 곳에 무사히 합격했다. 그중 연말에 입사할
법인은 내가 아니라 재준이 정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간 나보다 더 열심히 각 법인들의 그라운드 분위기를 리서치한 녀석은 상하 분위기 엄격한 곳에서 내가
개같이 구르면서 고생하는 꼴은 못 본다며-사실 대형 회계법인은 그런 곳이 별로 없는데도-가장 분위기가
편하다는 곳으로 콕 찍어 지정해 주었다. 나는 군말 없이 그 말에 따랐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심지어 녀석은 이런 식으로, 집안의 온갖 잡다한 살림살이 하나하나를 집어 들 때마다 사연을 읊어대곤 했다.
그리고 사흘째인 오늘,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우리 집으로 온 녀석은 지금 내 방 책장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앨범은 네 권이나 됐다. 두 권은 엄마와 아빠가 연애하던 시절, 그리고 내가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이 담긴 것이었고, 나머지 두 권은 녀석을 알게 된 이후 찍은 사진들이었다.
“그걸 다 보게?”
“그럼 다 봐야지.”
“몇 번이나 봤잖아.”
“그럼 내 폰에 찍어놔야겠다.”
“…….”
“난 재미있었는데.”
아마 초등학생 때였다면 또라이 마재준은 담임선생님에게 쫓아가서 행패를 부리고도 남았을 거다. 하지만
중학생 마재준은 조금이나마 철이 들었던 모양인지 별다른 풍파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수학여행을 갔었다.
대신 녀석은 애꿎은 내게 행패를 부렸다. 수학여행 내내 나 없이 재미있냐, 너 없으니까 밥맛이 없다, 날씨는
왜 이 지경이냐, 누구누구랑 너무 찰싹 달라붙어 다니지 말아라, 사진 찍을 때 절대 옆에 있는 새끼랑
어깨동무하지 말라 따위의 시답잖은 폰 메시지가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들었다.
하루하고도 반나절, 메시지 폭탄에 시달리던 나는 결국 이틀째 오후부터는 적당히 읽씹하다 저녁에 그날 찍은
내 사진 몇 장을 보내는 것으로 사태를 무마했었다.
“너 없어서 웃고 있는 거라니까.”
“아무도 없긴.”
난데없는 말에 나는 흠칫했다.
“……너 무슨 짓, 했어?”
“…….”
“…….”
“…….”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다만 내 앞에선 마재준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었던 지수가 녀석과 몰래 연락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
“…….”
“현아, 사랑해.”
“……사진이나 봐.”
녀석의 예쁘고 귀여운 얼굴을 찬찬히 훑어가며 페이지를 넘기는 일은 즐거웠다. 엄마와 둘이 찍은 사진도
있었다. 녀석은 종종 어떤 사진들을 가리키며 나에게 자기 폰으로 사진을 찍으라고 시켰고, 나는 얌전히 그
말을 따랐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재준이 입술을 포개는 바람에 녀석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나는 녀석을 떠미는
대신 순순히 입술을 열었다. 왜냐면, 이제 키스하는 시간 정도는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매일, 지겹게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런 말 좀 안 할 수 없어?”
“왜.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인데. 봐봐. 너희 어머니 미인이시고, 아버지는 미남이시잖아. 안 그래?”
“…….”
다시 코끝이 찡해졌을 무렵, 페이지가 넘어갔다. 한동안 말없이, 우리는 엄마와 아빠의 젊은 날을 훔쳐보았다.
“야…….”
여태 들어온 개소리 중에서도 수위를 다툴 만한, 정말이지 충격적이고 참신한 개소리에 나는 대꾸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야…… 야, 이 미친 새끼야!”
“너, 당장 떨어져!”
앨범을 턱 덮은 나는 나를 휘감고 있는 팔을 떼어내고는 얼른 녀석으로부터 도망쳤다. 그러나 막 침대에서
내려가려는데 배에 팔이 감겼다.
“또 귀 빨개져서는…… 어딜 도망가.”
불길한 예감이 해일처럼 덮쳐왔다. 나는 다시 도망가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꼼짝하지 못하게 내 다리를 타고
앉은 개새끼가 내 티셔츠를 끌어 올리며 속살거렸다.
저 개소린 또 뭐고.
우리는 여전히 같이 운동을 하고, 놀고, 밥을 먹었다. 솔숲으로 산책을 가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었으며,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이나 쉬는 날이면 종종 동네 밖으로 외출을 했다.
내심 그렇게 생각했던 나는 이사 첫날 저녁, 내 방으로 지정된 녀석의 옆방에 들어가 자려고 했다.
‘……그럼 안 돼?’
‘…….’
그렇게 나는 어영부영 녀석과 같은 침대를 쓰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내년에 취직해서 바빠지면 많이
못 할 테니 한가할 때 부지런히 해두자는 개소리를 지껄이며 덮쳐드는 개새끼에게 거의 매일 밤 시달리게
되었다.
주말 아침부터 해가 중천에 뜨도록 사람을 침대에 가둬놓고 쥐어 짜대던 녀석이 기진맥진해진 나를 뒤에서
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현아, 장 보러 가자.”
아침부터 기력을 소진한 탓에 장이고 뭐고 만사가 귀찮았다. 못 들은 척 눈을 감고 있던 나는 곧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왜 못 들은 척해. 데이트하자니까?”
“너, 읍……!”
“야! 장 보러 가자며!”
“안 되겠다. 한 판만 더 하고 가자.”
“늦어, 늦는다고!”
“야!”
“마트 가?”
“기왕 나온 김에 옷 좀 보고 가자.”
“……그래.”
녀석의 전적으로 미루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선 나는 갑작스레 닥친 또 하나의
위기를 타개할 방도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마땅한 대책은 떠오르지 않았고, 허둥대는 사이
에스컬레이터는 착실하게 움직여 4 층에 다다라 있었다.
어떡하지. 그냥 못 받겠다고 우겨야 하나? 그랬다가는 분명 삐쳐서 툴툴거릴 텐데, 그 뒷감당을 하려면 또
골치깨나 아플 게 뻔했다.
“여기야.”
백화점 구조가 으레 그렇듯, 이 층은 남성복 브랜드만 모아놓은 것 같았다. 댄디하고 캐주얼한 스타일의 옷을
파는 매장이나 골프 웨어, 가방이나 구두 매장도 있었지만, 가장 많은 건 수트 매장이었다.
“……너 뭐 사려고?”
재준이 말없이 웃었다. 갓 비가 갠 늦봄 오후, 햇살을 맞으며 만개한 장미 같은 그 미소는 매우, 매우, 매우
불길했다. 그 순간 눈에 띈 브랜드 이름을 보자마자 그 불길함은 들불처럼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왜냐면 그 브랜드는 이런 쪽으론 일자무식이나 다를 바 없는 나조차 이름을 아는, 무척 유명한 명품
브랜드였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네.”
“이 친구요.”
“야, 너나 해. 난 됐어.”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직원이 미소를 남기고 안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얼른 녀석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재준이
빨랐다.
이 새끼가 또 이딴 짓을 하다니.
“나 네 애인 아니야?”
그랬다. 우리는 여전히 친구였지만, 또 친구이기만 한 건 아니었다. 굳이 관계를 정의하는 말을 골라야 한다면
이제 친구보다는 애인이 적합하겠지.
“……맞아.”
“……많이 서운했어?”
“어. 굉장히. 너무. 무척. 매우. 엄청. 몹시. 진짜. 정말로. 많이. 대단히. 극히. 아주. 심히. 지극…….”
“알았으니까 그만해.”
“무슨 소리야. 준 게 왜 없어. 꽃도 주고, 과자도 주고, 책도 주고, 이모티콘도 사주고, 커피에 케이크에,
내가 그동안 받은 게 얼마나 많은데?”
선물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소소한 물건들을 죽 늘어놓는 녀석을 보고 있으니 정말 그동안 얘한테 받기만
했구나 싶어 더 미안해진 찰나였다.
“그리고 너 줬잖아.”
“…….”
너는 너 안 줬냐.
“아뇨.”
원단 샘플과 태블릿이 우리 앞에 놓였다. 테일러는 말끔한 기본 스타일과 좀 더 가볍고 경쾌해 보이는 스타일,
그리고 가장 포멀하고 격식 있어 보이는 세 번째 스타일을 차례로 보여주고는 첫 번째 스타일이 나에게 가장
적합할 거라 말했다.
남들 보는 데서 이게 무슨 짓이야.
“6 주 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직원이 녀석에게 카드를 돌려주며 말했다.
떠밀리다시피긴 해도, 어차피 받기로 마음먹은 참이었다. 그러니 선물의 가격 같은 건 묻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고 말았다.
“……얼마야?”
“십만 원.”
“장난치지 말고.”
“만 원.”
“고마워.”
“현아, 내가 또 괜한 짓 했어?”
“아니야. 잘 입을게.”
“아니긴.”
“…….”
“근데, 난 네가 이런 거 부담스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잖아. 난 그냥 내가 줄 수
있는 거라면 그중에서 제일 나은 걸 주고 싶었을 뿐이야.”
그리고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면, 나라도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 예쁘고 좋은
것만 잔뜩 가져다 녀석에게 떠안겼겠지.
선물을 받았으면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다. 하지만 에스컬레이터가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기분은 점점 더 가라앉았다.
에스컬레이터를 막 갈아탔을 때였다. 내 어깨를 살짝 끌어당긴 재준이 머리칼에 입술을 눌렀다. 조심스럽고
다정한 접촉에 가슴이 술렁였다.
* * *
지하 식품관까지 돌아 쇼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을 때까지도 무거운 마음은 여전했다. 나는
멀쩡한 척은 하지 않기로 했다. 내 속을 뻔히 들여다보는 녀석 앞에서 그러는 건 녀석을 더 속상하게 할
뿐이란 걸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넌 진짜 왜 그러냐.
꺼내지 못할 말 대신 한숨만 샜다. 그사이 소파 옆자리에 앉은 녀석의 얼굴엔 마뜩잖은 기색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맘에 안 들어?”
“안 들면 물러줄 거야?”
“…….”
그린 듯이 예쁜 눈썹이 살짝 휘어졌다.
“…….”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재준이 나 대신 답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봐. 너 그렇게 못 할 거잖아. 아무리 나 때문에 힘들어도, 너까지 없어지면 내가 울다 죽을까 봐 걱정돼서
도망도 못 가고 주저앉아서 나 보살펴 줄 거잖아.”
“……응. 근데 너도 그럴 거잖아.”
“……응. 미안해.”
“……근데 너 맘 상했잖아.”
툴툴거린 재준이 내 어깨를 살짝 밀고는 입술을 포갰다. 짧고, 가볍고, 따뜻한 버드키스를 여러 차례
되풀이하던 녀석이 피식 웃으며 내 눈을 응시했다.
코끝이 찡했다.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는 녀석을 끌어안았다. 재준이 가만히 내 등을 쓸어내렸다.
“사과하지 말라니까.”
맞물린 입술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우리는 천천히 숨을 나누며 조금 엇갈린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수도 없이 들은 말이었다.
“골라.”
“프랑스, 미국, 캐나다,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핀란드. 중남미는 브라질, 멕시코, 가깝게는 호주,
뉴질랜드, 아, 영국이랑 남아공, 몰타도 있어.”
나는 뜬금없이 줄줄 쏟아진 나라 이름에 당황해 허둥댔다. 재준이 씩 웃었다. 오늘도 무척, 사악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우리 결혼할 수 있는 나라들. 프랑스는 여행자끼리 결혼은 불가능한데 내가 거기 살았던 기록 있으니까 되고,
나머지는 여행자 결혼도 인정해 주는 나라들이야.”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우리 엄마는 내가 열다섯 살 때부터 너 사위라고 생각하고 계시니까 걱정할 거 없어. 너희 엄마랑 새아버지
허락만 받으면 되는데, 막 재혼하신 분들 놀라게 해드리기도 좀 뭐하니까 그분들께는 좀 천천히 말씀드리자.
맡겨둬. 나 자신 있어.”
“우리 엄마?”
“응.”
재준이 입가를 끌어 올렸다. 가늘어진 눈시울 속에 빛나고 있는, 여전히 진지하기만 한 눈동자에 옅게나마
짓궂은 빛이 서렸다.
“…….”
“다는 아니고.”
그런 걸 보통 엄마한테 물어보나?
“…….”
“아니야. 아닌 거 알잖아.”
재준이 대답 없이 내 등을 꼭 끌어안았다.
대답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내 어깨에 이마를 댄 채 침묵을 지키던 녀석은 내가 기다리다 못해
초조해지고서야 작게 속삭였다.
속이 잔뜩 상한 나는 녀석의 등을 콱 끌어당겼다.
“억지라니, 그런 말 하지 마, 제발…….”
그런 생각이 스치기 무섭게 실없이 웃음이 터졌다. 또 이러고 있었다. 얘가 울기만 하면 나는 늘 이랬다.
그리고 이 새끼는 나 때문에 웃고, 나 때문에 울었다.
그럼 이제는 항상 웃게 해줘야겠지.
결혼을 하네 마네 하는 중에 이건 또 무슨 개소리람.
재준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현아, 실은…….”
“…….”
재준이 냉큼 덧붙였다.
기가 막혀서 골이 다 띵했다.
“있잖아, 현아…….”
“응.”
“…….”
“…….”
“응? 안 돼? 안 돼?”
“받아줄 거지?”
“응.”
“약속 꼭 지킬게.”
가슴이 뭉클했다.
그렇게 네가, 또 내가, 우리가 존재하는 그 모든 순간의 흔적은 반짝반짝 빛나는 채로 우리 안에 간직될
것이다.
외전 Happy birthday to us
이렇게 찰싹 붙어서도 세상모르고 잔 게 웃겼다. 잠 정도는 편하게 자자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으므로,
우리는 항상 나란히 천장을 보고 누워 손만 잡고 잠이 들곤 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깨고 보면 지금처럼
재준이 내 등짝에 붙어 있거나, 내가 녀석의 가슴팍에 파묻혀 있기 일쑤였다.
“어디 가…….”
설마, 얘가 깼나?
“가지 마…….”
달라붙은 채로 깨어나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9 월 어느 날 아침, 녀석은 어차피 끌어안고 잘 거라면
애써 옷 챙겨 입을 필요 없이 차라리 벗고 자야겠다는 개소리를 해대며 그날 밤부터 아예 내 옷까지 홀라당
벗겨놓기 시작했다.
‘…….’
오늘은 그 웃기고 귀여운 새끼의 생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그 녀석의 생일상을 차려줄 생각이었다.
미역을 적당히 뜯어내 물에 불려두고 냉장실 문을 열었다. 신선칸을 열자 예상대로 양지가 있었다. 아마 내일
내 생일상을 차려주려고 사다 놓은 거겠지.
미역국은 내가 끓일 테니 넌 다른 걸 해.
문득 돌솥밥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여태 재준이 해주는 걸 먹기만 했을 뿐 돌솥밥을 해본
적이 없는 나는 곧 그 생각을 접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녀석의 생일날 타거나 설익은 밥을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나는 그냥 21 세기의 과학 기술이 집약된 전기밥솥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어찌어찌 작업을 마치고, 새우 손질을 시작했다. 굵은 소금으로 새우를 문질러 씻고 머리와 꼬리를 가위로
자른 후 껍질을 벗겼다. 포크로 내장을 제거하고 물기를 닦아낸 다음 살짝 다져서 청주와 소금, 후추로 밑간을
하고 나니 어느새 미역이 불어 있었다.
나는 빨래하듯 미역을 박박 빨았다. 다음으로 종이행주를 갈아가며 쇠고기의 남은 핏물을 부지런히 빼고,
간장으로 미역과 쇠고기에 밑간했다.
그런 어이없는 생각을 하며 레시피대로 제육볶음과 알배추 겉절이용 양념도 만들었다. 제육 양념은 고추장은
넣지 않고 고춧가루만 넣는 게, 겉절이 양념엔 액젓을 조금 넣는 게 포인트라면 포인트였다. 겉절이는 먹기
직전에 무쳐낼 생각이었으므로 배추 옆에 양념을 따로 놔두었다.
달궈둔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자 기름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얼른 밑간한 고기를 넣어 핏기가 사라질 때까지
볶고 미역을 넣었다.
그런데 예상외의 복병이 있었다. 애호박전 정도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호박과 계란이 완전히 익기 전에
다진 새우를 뚫어둔 구멍에 예쁘게 집어넣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게다가 물기를 뺀다고 뺐는데도,
기름이 튀어서 손등이 살짝 따가웠다.
“아이고…….”
삼겹살이 익게 내버려 두고 옆 프라이팬에서 익어가는 애호박전을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신중하게 뒤집었다.
새우가 다 익었을 무렵, 종이행주를 깔아둔 접시에 전을 옮겨 담았다. 어느새 밥솥이 칙칙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구수한 냄새가 피어오르는 미역국 냄비에 국간장으로 간을 한 후 불을 줄이고, 삼겹살이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는
웍을 흔들어 고기를 뒤집었다.
오늘처럼 생일날 아침을, 아니, 녀석의 생일날이 시작되는 순간을 함께 맞은 적은 올해가 처음이었다. 스무
해를 같이 보내면서도 의외로 우리는 생일날 같이 있었던 적이 드물었다. 우리의 생일은 항상 방학
중이었으므로 이때쯤이면 녀석은 으레 어머니와 함께 해외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갑게 웃으며 기어이 고무장갑을 다시 빼앗아 간 재준이 내 이마에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그 입술은
이내 내 입술 위로 내려왔다.
“황송은 또 뭐야…….”
네가 이 정도로 황송하면 맨날 너한테 밥 얻어먹는 나는 뭐가 되냐.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나는 결국 녀석을
말리지 못했다.
나는 그 옆에서 하던 요리를 마무리하고 그릇을 꺼냈다. 완성된 요리를 접시에 옮겨 담아 식탁에 올리고,
냉장고를 열어 얼마 전 재준이 문제의 김치 클래스에서 배워 와 만든 동치미와 배추김치도 덜어서 올렸다.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테이블 매트를 깔고, 수저를 놓고, 마지막으로 밥을 퍼서 올렸다.
“그만하고 얼른 와. 다 됐어.”
“어. 다 했어.”
“응?”
“……그냥 먹어.”
“야, 난 왜 찍어.”
“하, 완벽하네…….”
“응?”
녀석의 얼굴에 서린 아련한 기색은 더 짙어져 있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자 내 가슴도 조금 욱신거렸다.
“사진 찍자.”
“…….”
“자기야, 웃어.”
다시 자리로 돌아가 폰을 놓은 재준이 드디어 숟가락을 들었다. 녀석은 미역국을 한술 뜨자마자 활짝 웃었다.
“…….”
그걸 한 점 먹어보고 아냐.
“안 힘들었어.”
“응.”
식사를 끝낸 후 녀석은 설거지를 했고, 그동안 나는 식탁을 닦고 커피를 내렸다. 우리는 곧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며칠 전에 재준이 찜해둔 오페라 공연 실황 영상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옛날이야기라 그런가, 오페라는 은근 막장 스토리가 많다. 캐릭터들의 전근대적인 사고와 행동을 화제로 몇
마디 나누다 보니 잔은 금세 비었다.
생일날까지 밥을 시키고 싶진 않아서 나는 그렇게 물었다. 신중하게 타이 매듭을 살피며 위치를 바로잡던
재준이 사르르 눈웃음을 쳤다.
“너 먹고 싶어.”
“…….”
한 해의 마지막 날에도 저놈의 개소리는 변함없이 여전했다. 개소리를 뱉는 데 쓰기엔 너무 아까운, 물기를
잔뜩 머금은 장미 꽃잎 같은 입술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으니 녀석이 배시시 웃으며 덮쳐들었다.
“…….”
“알았어.”
“손 떼.”
“읏……. 야, 너 지금 뭐 해.”
“……야.”
“안 돼.”
나는 새내기 딱지가 제대로 붙지도 않은 출근 이틀째부터 결근하라는 개소리를 해대는 녀석을 얼른 떨어내고
드레스룸 밖으로 도망쳤다. 낮은 웃음소리가 내 뒤를 따랐다.
다행히 방 밖으로 탈출한 후로는 녀석도 더는 달라붙어 집적대지 않았다. 그 대신 한가하니 오늘도
데려다주겠다며 한사코 억지를 써댔다. 거절하면 출근이고 뭐고 당장 침대에 눕힐 거라는 당치도 않은 협박을
해대는 개새끼를 이기지 못한 나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녀석의 차를 얻어타고 출근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뺨에 스쳤다. 나는 얼른 가라고 녀석을 향해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하지만
얼마간 걷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도 녀석의 차는 거기 그대로 있었다.
* * *
[아니.]
[그럼 몇 시?]
[새벽 두 시]
[거짓말하지 말고]
어제에 이은 지루한 교육을 마치고 회사를 나온 나는 녀석의 생일 선물을 사러 가까운 백화점에 들렀다.
뭘 살지는 정해두었는데, 의외로 그걸 파는 곳이 많지 않았다. 그 물건을 팔 만한 백화점 매장을 모조리
돌고도 목적했던 만큼의 선물을 구하지 못했다. 나는 얼른 다른 매장을 검색했다. 다행히 백화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선물을 마저 살 수 있었다.
다음 역에서 지하철에 오르신 할머니께 자리를 비켜 드렸고 25 분 후에는 지하철에서 내렸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저녁 지하철은 몹시 붐볐다. 나는 혹시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딪혀 케이크가 망가지지 않도록 신경 쓰며
환승해야 하는 노선 플랫폼을 향해 걸었다.
지하철은 바로 도착했다. 만원 지하철에 몸을 밀어 넣자마자 케이크 상자와 선물이 든 쇼핑백을 선반에 올렸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차차 줄어들었다. 30 분 후, 나는 무사히 지켜낸 케이크와 함께 지하철에서
내렸다.
“응.”
-어디야?
“마을버스 타러 가고 있어.”
“알았어.”
“케이크 사 왔어?”
“응.”
“어떤 거?”
“이따 봐.”
“응.”
“선물은 뭐야?”
“…….”
10 분 후, 우리는 집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재준이 내 손에 들린 짐들을 채갔다. 나는 현관문을
열었다.
“별거 안 했어.”
“현아, 혹시 지금 배고파?”
“난 좀 많이 고파.”
“점심 안 먹었어?”
“너 저녁 준비 다 한 거지.”
“어.”
막 드레스룸으로 가려는데 허리에 팔이 감겼다. 뽀뽀하고 가라고 이러나 싶어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재준이 고개를 기울였다.
“생일 축하해.”
“응. 지금 풀어볼래?”
“어.”
대답을 마친 재준이 나를 자기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별거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이 녀석은 내 코트를 벗겨내 책상 의자에 걸치고, 들고 있던 쇼핑백과 내 가방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응? 지금 풀어보겠다며.”
쇼핑백을 빼앗아 다시 책상에 올려둔 녀석은 웃으며 내 재킷 버튼을 풀기 시작했다. 채워둔 두 개의 단추를
풀어낸 녀석이 재킷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어깨를 쓸었다.
그 바람에 벗겨진 재킷이 뒤로 떨어질 것 같아서 나는 얼른 팔을 굽혔다. 그러나 어깨를 쓸었던 손이 팔오금을
붙잡는 바람에 나는 다시 팔을 펴야 했다. 곧 재킷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씻고 올게.”
“내 선물은 저거야.”
“알아. 근데 난 이게 더 갖고 싶어.”
“하루 종일 기다렸어.”
손바닥에 닿은 녀석의 살결은 따뜻했고, 너무 부드러웠다.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는 녀석은 지독하리만큼 예쁘게
웃고 있었다.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피하지 않고 눈을 마주하던 재준이 곧 피식 웃으며 나를
잡아끌었다.
곧 귓불 뒤에 입술이 닿았다.
녀석의 코끝에서 흐른 더운 숨결이 귓속에 스몄다. 마치 귓구멍을 억지로 벌려 바늘로 고막을 긁어 내리는 것
같았다. 몸은 삽시간에 뜨거워졌다.
또 이러지, 또.
“아…….”
“빨리 선물 줘, 시현아.”
집에 오자마자 이건 또 무슨 짓일까.
“내 선물 포장을 왜 네가 풀어.”
“읏…….”
평소엔 있는지도 모르고 사는 작은 살덩이는 벌써 딱딱해져 있었다. 돌기를 누른 손가락이 느릿하게 원을
그렸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간지러우면서도 찌릿한 감각이 살을 타고 번지자 가슴이 흠칫 튀어 올랐다.
어깨를 빨던 개새끼가 보란 듯이 유두를 비틀었다. 인상을 쓴 나는 고개를 기울여 녀석의 머리에 내 머리를
살짝 부딪쳤다. 그제야 재준이 고개를 들었다.
“너 진짜…… 읍!”
거칠게 덤벼드는 집요한 키스에 가슴이 마구잡이로 뛰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서, 나는 고개를 비틀어 녀석의
입술을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녀석은 내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재준이 내 머리칼 속으로 손을 밀어 넣어 그대로
가볍게 쥐었다. 두피에 가해진 자극에 흠칫하기 무섭게 빈틈없이 입술이 포개졌다.
맞닿은 피부에 열이 오르고, 머릿속이 부옇게 흐려졌다. 감긴 눈꺼풀마저 떨리는 것 같았다. 나는 녀석의 팔을
꽉 붙든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재준아, 생일 축하해.”
순간 나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은 재준이 내 머리칼에 입술을 묻으며 속삭였다.
“가슴이 너무 아파.”
“힘내볼게.”
“야! 옷 더러워지잖아!”
역시 소용없었다.
“네 입이, 흣, 더 큰일이야.”
“근데 너 내가 말 많은 거 좋아하잖아.”
“……아니거든. 아…….”
목구멍을 비집고 날카로운 신음이 튀어 나갔다. 열이 오른 살갗에서 온갖 감각이 동시에 일었다. 간지럽고,
따갑고, 아프고, 좋았다.
“아파? 근데 너 약간 아픈 거 좋아하잖아.”
네가 잘 알긴 뭘 잘 알아.
미끈거리는 피부를 쓸어내리는 손은 너무 뜨거웠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목구멍에서 자꾸 소리가 끓었다.
“현아, 어디?”
왼쪽 가슴을 매만지는 손끝은 얇은 천이 쓸리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질 만큼 부드러웠고, 오른쪽을 괴롭히는
손길은 고통과 쾌감의 경계가 모호할 만큼 강했다.
“정말 모르겠어?”
정답에 가까운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렇다고 말하지 못했다. 섹스하기 시작한 지 벌써 몇 달째였다.
무슨 일에든 항상 내 반응을 면밀하게 살피는 녀석은 이미 내가 어디를 어떻게 만져주면 좋아하는지를 뻔히
알았다.
알면, 좀 작작 하지.
그 말에 홀린 듯이 눈이 뜨였다.
녀석의 손은 커다랗고, 새하얬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분홍빛 손톱, 마디가 살짝 두드러진 긴 손가락, 그
손가락이 구부러질 때마다 솟는 둥근 관절, 불거진 손목뼈, 하얀 손등 위로 비치는 푸른 힘줄까지, 어느
한구석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예쁜 손은 질척해진 살갗을 끈적하게 매만졌다. 갈비뼈를 더듬고, 허리를 쓸고, 들썩이는 아랫배를 느리게
덧그리는 손길은 너무 야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떻게 될 만큼.
“흐윽…….”
“아파…….”
“더 안 봐?”
“왜 안 봐. 젖꼭지 지금 진짜 예쁜데.”
녀석이 해대는 난잡한 짓의 수위는 나날이 올라가고 있었고, 반강제로 그 짓에 동참하는 동안 나름 경험치도
많이 쌓였다. 그런데 어째서 부끄러움의 역치는 좀처럼 늘지 않는 걸까.
“싫어……. 그게 뭐야…….”
대체 또 뭘 하려고?
“흐으윽…….”
“아직 부드럽네.”
“아……”
“……키스해.”
오늘도 어김없이 사람을 괴롭혀 대는 새끼였다. 나는 괘씸한 말만 쏟아내는 입술을 조금 아프도록 깨물고는
녀석의 팔목을 붙잡았던 손으로 녀석의 뒤통수를 끌어당겼다.
“아!”
손가락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이번에도 얕은 곳을 맴돌 뿐이었다. 속살이 빠져나가려는 손가락에 달라붙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몸의 반응이라는 걸 알아도 부끄러움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자꾸 달라붙네.”
수치를 부채질하는 말을 지껄이며 쿡쿡 웃은 재준이 가슴을 만지던 손으로 내 페니스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확 번진 쾌감에 아랫배가 조여들었다. 나는 목을 뒤로 젖히고 신음했다.
“더 깊이 넣어주면 좋겠어?”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아래엔 다시 손가락이 얕게 파고들었다. 덜덜 떨리는 허벅지가 벌어지려 했다. 그러나
다리는 내려가다 만 옷에 걸려 있었다. 답답했다. 그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마자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떨어졌다.
“흐윽, 으, 으응…….”
미친 소리가 떨어지자마자 녀석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을 꾹 눌렀다. 느끼는 곳을 눌리자마자 내벽이 조여들고
등이 덜덜 떨렸다. 떨리는 내 등을 재준이 자기 가슴으로 지그시 누르며 속살거렸다.
“야!”
이게 대체 뭐야.
너무 부끄럽고 기가 막혀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어느새 눈가에는 찔끔 눈물이 번져 있었다. 귀신같이 그것을
알아차린 개새끼가 눈가에 입술을 대며 웃었다.
“네 안, 진짜 뜨겁지. 근데…….”
나는 변태 같은 소리만 내뱉는 입술을 막아버리려 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입술을 피한 녀석은 기어이
뒷말을 꺼냈다.
“내 거 넣으면, 더 뜨거워져.”
그 말을 끝으로 입술이 포개졌다.
정말이지 미칠 것 같다고 생각한 찰나 재준이 입술을 뗐다. 변태 같은 새끼는 언제나 그렇듯 이 와중에도
꽃같이 예뻤다.
재준이 다시 눈을 맞댔다. 그제야 녀석의 손가락이 아래에서 빠져나갔다. 그런데 이 망할 새끼는 이번엔 자기
손만 쏙 빼냈다. 나는 눈물이 번져 흐릿해진 눈을 깜빡이며 얼른 내 손도 끄집어냈다. 아래는 손가락이
빠져나간 후로도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너…… 지금 진짜 예뻐.”
나는 흥분이 들끓는 눈으로 개소리를 지껄이는 녀석의 상의 아래로 손을 넣었다. 위로 끌어 올리자 재준이
쿡쿡 웃으며 얌전히 팔을 들었다.
드러난 녀석의 가슴을 내려다보던 중 연분홍빛 유두가 눈에 띄었다. 이 새끼는 이런 곳도 예쁘고 난리였다.
벚꽃 빛깔 젖꼭지를 보고 있으니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오늘도 빨갛게 부어오른 내 가슴을 흘깃 내려다본
나는 몸을 숙여 녀석의 유두에 입술을 댔다.
“하, 하하.”
“……안 좋아?”
“…….”
녀석의 앞섶은 잔뜩 부풀어 있었다. 바지 단추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속옷을 끌어 내리자마자 속옷 밴드에
눌려 옆으로 기울어 있던 페니스가 툭 튀어 올랐다.
“자기야, 지금 해야 할 건 그게 아니잖아.”
입을 크게 벌려 녀석의 페니스를 머금었다. 선단이 들어오자마자 입안이 꽉 찼다. 정액만큼은 아니어도 프리컴
역시 좀 이상한 맛이었다. 얘 때문에 어디 가서 말 못 할 것들의 맛까지 알게 된 게 조금 웃기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입을 더 크게 열었다.
“윽…….”
재준이 해주던 짓을 떠올린 나는 페니스 아래에 혀를 대고, 이가 닿지 않도록 주의하며 천천히 빨아들였다.
그래 봤자 들어온 부분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녀석처럼 목구멍까지 쓸 수 있다면 좋겠지만 도저히 이 말도 안
되는 물건을 더 삼킬 엄두는 나지 않았으므로 그냥 할 수 있는 만큼 깊이 넣은 후 고개를 들어 페니스를
빼냈다.
“너…… 갑자기 왜 안 하던 짓, 흣, 하고 그래.”
가슴을 핥아줄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 조금 웃겼다. 다시 고개를 숙이자 페니스가 입천장을 긁으며 밀려
들어왔다. 목구멍 부근 연한 살에 선단이 닿기 무섭게 숨이 턱 막히고, 팽팽하게 벌어진 입가가 욱신거렸다.
입술 찢어질까 겁난다던 녀석의 말을 사실로 만들지 말아야 할 텐데. 그런데 이럴 때 손은 어떻게 해야 하더라.
“응!”
깊숙이 박힌 손가락이 내벽을 짓눌렀다.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신음했다. 흠칫거리는 등 곳곳에 입을 맞추며
재준이 중얼거렸다.
얄미운 소리를 지껄인 재준이 히죽히죽 웃고는 젤 튜브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나는 말없이 손바닥에 젤을
짜서 녀석의 페니스를 훑었다.
“읏…….”
나름대로 경험치가 쌓여서 이젠 그다지 아프지 않았고, 심지어 곧 좋아질 거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페니스가 내벽을 비집어 벌리는 감각은 쉽게 익숙해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녀석의 것을 쥔 손을 놓기도
전이었다. 아직 한참이나 더 집어넣어야 했다.
좀 더 작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 커다란 새끼는 이런 곳까지 쓸데없이 커서 사람을 힘들게 하나.
“현아, 얼른.”
“아…….”
“힘들어?”
아무리 힘들어도 그런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녀석을 원망스레 쏘아본 나는 다물려 있던 입술을 열었다.
신음과 더운 숨이 쏟아져 나왔다. 조금이나마 긴장이 풀린 순간,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윽.”
“아…… 읏.”
녀석은 그새 내 허리를 붙잡아 돌리고 있었다. 속살에 딱딱한 것이 비벼지자 틈 없이 맞물린 아래가 떨렸고,
달라붙은 다리 사이에선 젖은 소리가 났다. 나는 엄한 짓을 하는 녀석의 손을 콱 움켜쥐고 신음했다.
“듣고 싶었는데.”
“움직여야지, 시현아.”
“아! 아, 흐으윽.”
이 예쁜 애가 내 거라니.
“사랑해, 재준아…….”
“읏, 너…….”
질척이는 소리에 세차게 살 부딪는 소리가 섞였다. 흥분과 긴장으로 달아오른 살갗에 전율이 흘렀다. 몇 번을
겪어도 여전히 감당하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그에 휩쓸려 만신창이가 된 나는 녀석의 등을 끌어안고 허덕였다.
“사랑해, 시현아.”
“하, 윽.”
재준이 웃었다. 곧 상체를 세운 녀석은 내 다리 사이에 치골이 닿도록 페니스를 박아 넣고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페니스는 움직임을 멈췄지만 속살은 가쁘게 그것을 안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배는 이미 꽉 찼고, 이젠 더
들어올 것이 없는데도.
“정말 그만해?”
“하…….”
한숨 같은 신음이 귓가를 스치기 무섭게 덮쳐든 재준이 내 두 손을 끌어당겨 자기 어깨에 걸치며 속삭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쾌감은 차라리 고통에 가까웠다. 하지만 몸은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다리가 멋대로
녀석의 허리를 휘감아 당겼다. 녀석은 그럴 때마다 목을 울리며 웃고는 부들부들 떨리는 내 허벅지를 당겨
안고 몸이 부서지도록 페니스를 처박았다. 샅이 달라붙을 때마다 시끄럽게 물소리가 나고, 맞물린 곳에서
녹아내린 액이 뒤로 줄줄 흘러내렸다.
나는 곧 흘러나올 것이 정액이 아니란 사실을 이제 알고 있었다. 그것을 침대에 쏟아내는 짓 따위는 정말이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거 아니야!”
“아, 그거야?”
“그렇게, 싫어?”
“……귀엽긴.”
“흑, 내려줘…….”
“씨발, 나 꽉 잡아.”
“응! 으응…….”
“미치겠다. 너 이럴 때 진짜 예뻐…….”
“현아, 왜 그래.”
“왜 울어.”
“안 좋아?”
너무 좋았다. 차라리 예전처럼 좀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나는 덜덜 떨리는 몸을 녀석에게 붙이며
간신히 대꾸했다.
“어디가?”
“좋은 거지?”
“아, 아…….”
“하아, 읏…….”
목덜미에 간간이 신음을 흘리며 녀석이 느릿하게 페니스를 찔러 넣었다. 녀석은 곧 내 손을 끌어가 내
아랫배를 덮었다.
“하, 아읏…….”
“마재, 아! 야……!”
“으흑, 나쁜 새끼…….”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 나갔다.
“으응, 아, 흑, 아!”
민감해진 피부에 닿는 뜨거운 손길에 전율이 흘렀다. 발씬거리는 살틈을 무시하고 치골과 음낭, 회음부만
집요하게 덧그리는 손길에 애가 타서 미칠 것 같았다. 저린 듯 간지러운 듯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감각으로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너, 오늘…… 흐윽, 왜 그래…….”
“오늘 내 생일이잖아.”
생일을 핑계로 수치를 모르는 짓에 동참하라고 종용해 댄 개새끼가 부어오른 유두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덧붙였다.
“아!”
그동안 이 새끼가 온갖 개소리로 괴롭혀 대긴 했어도 나한테까지 개소리를 하라고 요구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젠 그 짓까지 하려는 모양이었다.
왜 하필 오늘은 얘 생일이람.
눈을 뜬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열었다.
“……개새끼.”
나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미간을 깊게 찌푸린 개새끼는 언제 애를 태웠냐는 듯 살 부딪는 소리가 나도록 허리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나는 단숨에 치밀어오른 쾌감과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뒤에서 치받아오는 기세에 몸이 자꾸
앞으로 떠밀렸다. 나보다 훌쩍 키가 큰 녀석이 거칠게 덮쳐들기 시작하자 발뒤꿈치가 들렸다.
“하, 씨발…….”
“아!”
“하…… 윽.”
“더?”
“그만하라고…… 흑, 이 개새끼야…….”
더는 못 버티겠다고 생각한 순간, 허리를 붙잡고 있던 손 하나가 가슴팍에 휘감겼다. 터질 것처럼 뛰는 가슴을
진짜 터지도록 꽉 껴안은 녀석의 목에서 사나운 신음이 끓어올랐다.
음낭까지 집어넣을 듯이 페니스를 처박은 녀석은 잔뜩 젖어 뜨겁게 달아오른 속에 그대로 정액을 쏟아냈다.
그동안에도 허릿짓은 느리게나마 계속 이어졌다.
부정할 수 없는 개소리에 울컥한 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눈썹을 찌푸리며 웃은 재준이 내 뺨에 입술을 댔다.
“…….”
진짜 작작 좀 했으면 좋겠다.
뭐든 웬만하면 받아주자고 매일같이 다짐하며 얘랑 같이 살고 있지만, 오늘은 정말 너무 힘들었다. 울컥한
나는 입을 여는 대신 녀석의 배에 가볍게 주먹을 꽂았다. 그러나 윽, 하고 부러 아픈 시늉을 한 꽃 같은
개새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아…….”
“하아…….”
“…….”
“…….”
그래, 누가 널 말리겠니.
그렇게 오늘도 체념과 포기를 학습한 나는 녀석의 손에 이끌려 따뜻한 물줄기 아래 섰다.
* * *
우리는 생일날 밤에 어울리지 않는, 조금 어둡고 진지한 내용의 스릴러 영화를 보며 나란히 앉아 저녁을
먹었다.
새콤한 비네그레뜨 소스를 곁들인 샐러드와 오래 볶은 양파의 풍미가 느껴지는 양파 수프, 생굴과 산뜻하게
구운 대구살 스테이크, 부드러운 감칠맛이 느껴지는 새우 아보카도볼과 망고 처트니를 곁들인 오리 콩피,
그리고 아침에 남은 제육볶음과 시금치나물까지 우르르 올라온 저녁 식탁은 상다리가 부러지겠다는 관용 표현이
절로 떠오를 만큼 풍성하고 휘황찬란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얼른 화면에서 눈을 떼고 음악이 사라질 때까지 열심히 음식을 먹거나 녀석의 얼굴을
훔쳐보며 두근거림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어느덧 사건의 범인과 주인공은 취조실에서 입씨름 중이었다. 화면 속에선 선량해 보이는 인상의 범인이 태연히
웃으며 주인공에게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저 새끼 개소리 너무 심해.”
으깬 새우와 아보카도를 버무려 아보카도 껍질에 담아낸 아보카도볼 하나를 해치우며 물었다. 녀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제 샐러드 채소가 다 떨어졌었다. 그러니 얘는 오늘 채소도 다듬었을 거고, 양파도 오래 볶았을 거고, 소스
여러 개를 만드느라 양념과 향신료를 죄 꺼냈을 거고, 오리 콩피를 오븐에 넣고 한참을 지켜봤을 거고,
숟가락으로 아보카도 과육을 파내고, 핀셋으로 대구 뼈도 발랐을 거다.
얘가 아무리 손이 빠르다지만 절대 별로 고생 안 했을 밥상이 아닌데,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냥 웃을
뿐이었다.
“다 맛있어. 고마워.”
오랜만에 나온 키 이야기에 조금 욱한 찰나, 화면 속에선 주인공이 범인의 멱살을 쥐고 흔들며 쌍욕을 퍼붓고
있었다. 미국에서도 저런 식으로 경찰서에서 형사가 난동을 피우는 모양이었다.
“…….”
“…….”
그랬다. 내가 좀 마르긴 했다. 그렇지만 나보다 15 센티 가까이 큰, 온몸에 근육뿐인 이 새끼도 나보다 20
킬로밖에 더 안 나갔다.
손을 거둔 녀석의 낯이 약간 진지해졌다.
나는 회의적으로 대꾸했다.
우리나라 회사들이 모두 서울에만 있는 게 아니므로 지방 출장도 잦은 편이고, 심지어는 해외로 나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했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씩 출장이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나.
“우리 자기, 웬일로 오늘 재밌는 소리를 길게도 하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알았어. 출장은 안 따라갈게.”
“야!”
“……알았어. 안 할게.”
피트향의 강렬함이 가신 입안에는 달콤한 셰리향이 은은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녀석의 손에 이끌려 턱이
돌아갔다.
천 갈래 만 갈래로 심장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는 개새끼는 사람을 언제 협박했냐는 듯 화사하게 웃으며 입술을
떨어뜨렸다. 스치듯 가벼운 버드키스를 남기고 떠난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응.”
기가 막혔다. 하지만 오늘이 녀석의 생일이란 사실을 상기한 나는 괜한 말을 덧붙이는 대신 녀석의 입에도
생굴을 들이댔다.
“일 너무 열심히 안 할게. 밥도 많이 먹고. ……당장 60 킬로는 무리일 거 같지만, 그것도 노력해 볼게.”
뒷정리까지 마치자 시계는 11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끈 우리는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곧 소파에
다리를 올려 길게 엎드린 녀석은 12 시가 될 때까지 책을 읽을 셈인지 소파 한쪽에 놓인 리더기를 집으며
말했다.
“올라와.”
“스페인어야? 뭔데?”
이 시대의 세계인 마재준은 외국어 공부가 취미인 놈이었다. 한국어와 불어는 물론이고 영어도 네이티브
수준으로 잘하는 이 새끼는 중학생 때부터 배우기 시작한 중국어와 독어도 생활 회화 수준 이상이었다.
언젠가 로망스계 언어는 뿌리가 같으니 심한 사투리 배우는 기분으로 대강 하다 보면 금방 배운다는,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망언을 한 녀석은 어느 순간 스페인어까지 공부하고 있었다.
“어렵지 않아?”
“읽어줘.”
‘중 1 때?’
내가 난해한 철학책을 한 페이지쯤 읽었을 무렵 녀석의 눈이 감겼고, 두 페이지를 더 읽었을 때 녀석은 그대로
잠이 들어 있었다. 그다음 날 밤엔 재준이 자기가 쓰고 있던 졸업 논문을 읽어주었다. 그날 평소보다 일찍
잠든 나는 아침까지 꿈도 꾸지 않고 잘 잤다.
낭독이라지만 실은 거의 자장가 대신이었다. 스페인어는 쥐뿔도 몰랐으므로 얘가 발음을 똑바로 하는지 마는지
알 리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얘가 책을 읽어줄 때의 목소리가 좋았다.
“……일 분만.”
곧 공영방송 채널이 화면에 등장했다. 올해도 변함없이 보신각 부근은 타종을 보기 위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축하 공연을 하는 가수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부엌으로 가 케이크를 꺼내고, 차를 끓였다. 그것을 거실
탁자에 놓아두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우리는 준비한 선물을 들고 다시 거실로 돌아와 나란히 앉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저녁을 먹기 전, 생일 케이크는 이걸로 끝내기로 합의한 참이었다. 그러므로 이 케이크는 스물여섯
번째 생일을 맞은 녀석의 것이기도, 스물일곱 번째 생일을 맞은 내 것이기도, 평생 함께하기로 약속하고
올해를 무사히 보낸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마재, 생일 축하해.”
“현아, 생일 축하해.”
재준이 속삭였다. 한참 전부터 가슴이 아팠던 나는 침묵으로 동조하며 녀석의 허리를 콱 끌어당겼다.
“나도 잘 부탁해.”
“무슨 말씀 하셨어?”
“…….”
“…….”
나는 부러 농담조로 중얼거렸다.
“…….”
녀석의 말이 정말이든 아니든 우리는 숱한 우연을 뛰어넘어 무사히 만났고, 그 후로 떨어져 본 적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으므로 이제는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그래도 녀석에게 이 말은 해주고 싶었다.
너도, 그랬을까?
타종이 끝난 직후 재준이 텔레비전을 껐다. 나는 선물이 든 쇼핑백을 녀석에게 안겨주었다. 곧 녀석의 선물도
내 손으로 넘어왔다.
재준이 씩 웃었다.
나는 지갑을 손에 들고 웃었다.
“안 열어봐?”
“아, 그건 좀 이따 봐.”
“응? 뭔데?”
이럴 거면 뭐 하러 같이 준 거지.
“…….”
호들갑도 정성이었다. 그리고 호들갑이 특기인 녀석은 상자 하나를 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 걸 보니 맘에 드는 것 같았다.
“미치겠다. 코알라, 사자, 호랑이, 팬더, 고양이…… 뭐야, 이건. 개야, 곰이야?”
“세상에, 양도 있어.”
나는 씩 웃으며 덧붙였다.
갑작스레 어깨를 붙들려 끌려간 나는 눈도 감지 못하고 녀석의 키스를 받았다. 뺨과 이마, 코와 입술, 아무튼
닿는 곳마다 마구잡이로 격하게 입술을 찍어대며 웃던 재준이 나를 꼭 끌어안고 짓궂게 속삭였다.
“이거 입고 네 생각 나서 시도 때도 없이 서면 어떡해?”
“나 아직 네 선물 덜 풀어봤어.”
“케이크는 안 먹어?”
“차는?”
“이따 다시 끓여줄게.”
“나 내일 새아버지 댁에 가야 해.”
“……됐어.”
“우리 늘 열두 시 넘어서 잤잖아. 하루쯤 두 시 넘겨서 잔다고 큰일 안 나. 게다가 오늘은 특별한 날인데.”
“…….”
재준이 그 손을 끌어갔다. 녀석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입술을 열고는 천천히 검지를 핥아 올렸다. 말캉한
살덩이가 손가락을 훑는 동안 나는 눈도 감지 못하고 그 아찔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야.”
가까스로 한 음절을 토해놓자마자 재준이 입술을 내밀어 비죽였다. 커다란 새끼가 삐친 척하는 꼴은 너무
같잖고, 귀여웠다.
“…….”
“…….”
“외로워. 서러워.”
“내년엔 같이 가자.”
“알았어. 그럼 한 번. 한 시간.”
“알았어. 안 할게.”
“……응?”
그 후로 나는 소파 위를 뒹굴며 끙끙 앓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또라이 같은 새끼는 ‘자기야, 앞으로 뭐 하지 말라고 할 땐 구체적인 행위의 내용을
상세하게 지정하도록 해’라는 말까지 더해 나를 깊이 빡치게 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또라이 같은 새끼가 건네준 또 다른 선물 뭉치를 보자마자 나는 거의 기절할 지경이
되었다.
가증스럽게 귀여운 개새끼의 동그란 머리통을 노려보던 나는 결국 또 한숨을 쉬고는 기껏 때린 등짝을 쓰다듬어
주고 말았다.
그제야 재준이 감췄던 얼굴을 들었다. 나는 내 눈치를 살피며 배시시 웃는 또라이 같은 새끼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괘씸한 건 괘씸한 거고, 예쁜 건 예쁜 거였다.
“…….”
그리고 아마 내년에도 우리는 오늘과는 조금 다른, 그러나 비슷하게, 아니, 어쩌면 더 행복한 생일날을 맞게
되겠지.
✲ ✲ ✲ ✲ ✲
❊ 중❤️독 ❊
✲ ✲ ✲ ✲ ✲
@UMVC3 / 뉴토끼 / 공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