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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 인(Sink in) 2 권 @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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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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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VC3 / 뉴토끼 / 공금

5 장 Everything flows

“내가 그때 왜 그런 멍청한 소릴 했을까.”

오믈렛과 스크램블드에그가 든 접시 두 개를 들고 돌아온 녀석의 미간에는 주름이 져 있었다.

달이 차고 기울듯, 전역 후 언젠가부터 시작되어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탄식 타이밍이란 걸 알아차린 나는


모르는 척, 녀석이 내 앞에 놓아준 오믈렛에 포크를 찔러 넣었다. 한입 크기로 잘라내자 몽글몽글하게 익은
달걀에서 모락모락 김이 솟구쳤다.

나는 아직 이만큼 예쁘고 부드러운 오믈렛을 만들어본 적이 없다. 오믈렛도 은근 어려운 요리 중 하나였다.


모양을 만들기도 쉽지 않고, 익히는 정도를 맞추기도 꽤 까다로웠다. 물론 지금 인상을 쓰며 자리에 앉은
마재준은 이만큼 예쁘게 잘 만든다.

“또 못 들은 척하지.”

버터나이프를 집으려던 마재가 나를 은근히 노려보았다. 녀석을 힐끔 살핀 나는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눈빛이


오늘따라 스산한 것이 영 예감이 안 좋았다.

군대 가서 사람 되는 놈들도 있다지만 성질 버려 나오는 놈도 많았다. 마재는 굳이 따지자면 후자였다.

열일곱 그날 이후 녀석은 다시 덮쳐드는 일 없이 조신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랬던 녀석은 군대 밥이 맛이 없어서 성질을 버렸는지, 합리성이라곤 개미 털만큼도 없는 후진적인 시스템에


빡 돈 모양인지, 그도 아니라면 그 많은 놈이 아무리 청소를 해도 하루만 지나면 더러워지는 경악할 만한
환경에 미쳐 버린 건지, 전역하기가 무섭게 태도를 바꿔 틈만 나면 심장에 나쁜 눈웃음을 살살 쳐가며 사람을
꼬드겨 댔다.

하지만 나는 녀석과는 달리 은근 군대 체질이었다. 그 덕에 소심하고 찌질하고 이기적이고 비겁한 성정을


그대로 품고 멀쩡하게 제대했으므로 우리는 무탈하게-마재는 이 부사어에 결코 동의하지 않겠지만-시간을
흘려보냈다.
물론, 그사이에도 몇 번인가 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겸사겸사 진로 계획까지 처리할 요량으로 수험생이
되었고 공부를 방패 삼아 오늘에 이르렀다.

“오십 년이라니 미쳤지. 그때 열일곱이었으니까 그냥 삼 년이라고 할걸. 탈미성년 할 때까지만 얌전히


있겠다고 할걸. 그랬으면 이날까지 이러고 있진 않았을 거야.”

풋풋했던 열일곱 살로부터 아홉 살이나 더 먹으며 푹푹 썩어빠진 어른이 된 스물여섯의 나는 오십 년이든 삼


년이든 별다를 바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괜히 이럴 때 말을 보태봤자 덤터기만 쓸 뿐이란 걸 모르지
않을 만큼 교활해지기도 했으므로 조용히 입을 열어 잘라낸 오믈렛을 밀어 넣었을 뿐이었다.

크림을 넣어 살짝 익힌 프렌치 오믈렛은 부드럽게 입안에서 뭉개졌다. 그것을 삼킨 나는 마재가 잔뜩 퍼 온


샐러드를 주의 깊게 살펴 케일을 피해 포크를 찔렀다.

“지난 세월 고생을 생각하니 새삼 서러워서 눈물이 다 나네. 정시현, 어제 그러고 잠이 오던? 야, 케일


먹어.”

탄식하는 중에도 귀신같이 남의 포크 끝을 보고 있는 지독한 새끼에게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싫어. 난 잘 잤는데.”

역시 케일같이 뻣뻣하고 쓴맛 나는 풀보단 아삭하고 단맛 나는 양상추가 훨씬 낫다. 나는 소스를 거의 뿌리지


않은 생채소를 아삭아삭 씹으며 인상을 쓴 채 빵에 버터를 바르고 있는 녀석을 다시 흘깃 살폈다.

실은 나도 오랜만에 핏덩이 시절 생각을 하느라 잠을 조금 설쳤다는 말을 했다가는 마재의 들을 이 없는


탄식은 오늘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아침 식사에 전념하기로 했다.

“진짜 지독하다, 너.”

“…….”

버터 바른 빵을 내밀며 재준이 투덜거렸다. 그것을 받으며 나는 무언으로 동감을 표시했다. 녀석이 어떻게
해석할지는 내 알 바 아니다.

“오죽하면 내가 꿈도 그딴 걸……. 어휴.”

제 몫의 빵에 버터를 바르며 버터나이프를 노려보던 마재가 갑자기 휙 고개를 들어 나를 쏘아보았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표정이라 상황도 잊고 빵을 씹다 말고 또 열심히 그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빵을 다 먹었으니 이제 쇠고기 향이 그윽한 쌀국수나 먹어볼 셈으로 젓가락을 막 들었을 때였다.

녀석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무슨 꿈 꿨는지 안 물어봐?”

척 봐도 내가 들어서 좋은 꿈이 아닌데 굳이 물어야 하나……?

나는 또 못 들은 척했다. 내 앞에선 그러는 일이 잘 없는 녀석이 웬일로 미간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기색을


풀풀 풍겨대는 중이었다. 역시 모르는 척하는 게 낫다는 결론만 나왔다.

하지만 마재는 내가 그러든 말든 자기 할 말은 하는 놈이다.

“세상에, 어제 꿈속에서 내가 백스물두 살까지 동정이더라. 야, 정시현, 대답해. 이거 누구 책임이야.”

백스물둘은 또 어디서 나온 디테일한 숫자람. 게다가 그 나이가 되도록 안 죽고 살아 있을 생각까지 하다니.


이 새끼는 역시 보통 놈이 아니다.

“개꿈이야.”

나는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네가 그 지경이면 나도 똑같을 텐데 뭐가 그리 억울하냐고 한마디


덧붙이려다 이 역시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격이란 걸 깨닫고 얌전히 쌀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단 속담을 녀석이 부디 상기해 주길 바라며.

“개꿈은 무슨. 너 지금 속으로 그게 뭐 어떠냐고 생각하고 있지? 백스물두 살까지 그 지경일 수 있으면 진짜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까진 아닌데. 애초에 그 나이까지 살아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마시며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마재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한숨에 무게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걸로 레스토랑 바닥이 다 내려앉았을 테니까.

그나저나 얘도 참 큰일이었다. 안 그럴 거 같으면서 은근 꿈 같은 데 신경을 쓴다.

“내가 스물여섯 먹도록 순결을 지키고 있을 줄은 진짜 몰랐다. 밖에 나가서 나 티 한 점 없는 깨끗한


몸이라고 말하고 다니는데 아무도 안 믿어.”

그야 그렇겠지.

솔직히 텔레비전에 나오는 배우들보다 얘가 더 잘생겼다. 키도 더 크고, 둔해 보이지 않을 만큼 날렵하게


근육을 키운 몸도 더 예쁘고.

약간 흠이 있다지만 성격도 이만하면 괜찮은 편이고, 재산-아니, 아직 용돈일까-이 얼마나 많은지 구체적으론
몰라도 평생 고생 안 하고 살 만큼은 될 거다. 게다가 똑똑해서 뭘 해도 밥은 굶지 않을 거고, 손끝도
야무지고 빨라서 살림도 잘했다.
백스물두 살이 되도록 동정인 악몽을 꾸었다며 아침 내내 씩씩대고 있는, 올해로 순결을 지킨 지 26 년 차에
접어든 마재준은 누가 봐도 당장 채가고 싶어 할 일등 남자친구감에 신랑감이었다.

그러니 합리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녀석의 말 따위 안 믿겠지. 나라도 안 믿는다. 내가 그


원흉만 아니었다면.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지금 더 중요한 것을 말했다.

“마재, 쌀국수 맛있다. 식기 전에 얼른 먹어.”

“……하아.”

나를 이글대는 눈으로 째려본 녀석이 순순히 젓가락을 들었다. 어째 저게 흉기처럼 보이는 건 내 눈의 착각일
것이다.

젓가락질도 고상하게 하는 놈이었다. 우아하게 국수 한 젓가락을 들어 맛을 본 녀석은 또 울컥한 모양이었다.


가느다란 젓가락을 쥔 손등에 힘줄이 섰다.

“너 진짜…… 이 정신적, 육체적 고통 어떻게 보상할 거야.”

나는 국수 안에 든 쇠고기를 집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기다려 봐.”

“뭐?”

젓가락을 들다 말고 재준이 눈을 치떴다. 불신 가득한 눈빛이었다.

얘가 속고만 살았나.

나는 야들야들하게 익은 쇠고기를 입에 넣는 걸 잠시 보류하고 한마디 덧붙였다.

“밥부터 먹어. 아홉 시까진 데려다준다며?”

테이블에 놓인 폰을 눈으로 가리켰다. 시간을 확인한 녀석이 콧등을 팍 찡그리고는 다시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콧잔등에 생긴 주름까지 예쁜 새끼.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쇠고기를 입에 넣었다. 푹 익혀 보들보들한 살점은 몇 번 씹기도 전에 녹아


사라졌다.
여덟 시쯤 체크 아웃을 하고 집으로 향했다.

출근 시간 정체에 걸린 차는 느릿느릿 기었다. 다행히 조금만 더 가서 도심으로 들어가는 도로만 빠져나가면


교통 체증도 끝이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아침을 맞아 부지런히 빠져나오는 곳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므로.

“하아…….”

운전을 하던 재준이 불현듯 한숨을 쉬었다.

“너도 정말 어지간하다. 나 보고 안 꼴리는 거 아니면서. 막 나 덮치고 싶어서 얼굴 맨날 빨개지는 주제에


잘도 참는다, 진짜.”

끝난 줄 알았던 탄식은 아직 끝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럴 때는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이란 걸


축적된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샐쭉하게 나를 흘겨보며 좌회전 신호를 넣은 마재가 이어 툴툴거렸다.

“자기야, 하나만 물어보자. 내가 자기 꼬시려고 얼굴 관리 몸 관리 얼마나 열심히 하는 줄은 알아?”

나는 내심 기겁했다. 세상에 이런 극악무도한 놈이 다 있다니. 너 같은 놈이 그런 짓까지 하면 평범한


사람들은 어쩌라고?

닫고 있으려던 입이 저절로 열렸다.

“……하지 마. 그런 거.”

“뭔 소리야. 더 정진해야지. 그래야 네가 내 옷 벗길 생각 들지 않겠냐?”

“…….”

아마 스물다섯을 넘었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녀석이 이런 노골적인 표현을 써가며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은.

막 스물다섯이 된 어느 겨울밤, 황당한 얼굴로 나타난 녀석은 대체 어디서 찾았는지 모를, 신석기인이
빗살무늬토기를 만들던 시절 인터넷을 떠돌던 유머글을 보여줬더랬다. 스물다섯 넘도록 동정인 남자는 마법을
부릴 수 있게 된다는,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개소리였다.
‘하, 우리 이제 마법도 쓸 수 있겠다.’

‘……아래 댓글 엄청 달렸잖아. 평범한 거야.’

‘그래, 생각보다 평범하긴 하네. 근데 자기야, 다들 울면서 아우성치는 건 안 보여?’

‘…….’

‘이거 왜 옛날 글이야. 댓글 못 달잖아. 하, 나 댓글에 만인소 쓸 자신 있는데.’

‘너 댓글도 달아……? 글구 넌 아무리 길게 써도 만인이 아니니까 일인소야.’

‘정시현……. 너, 말 돌린다 이거지.’

그날 이후 마재의 탄식 공세는 점점 수위가 높아졌다.

지은 죄가 있었으므로 나는 대개 조용히 들었다. 게다가 우리 또래 남자들 사이에서 오가는 음담패설에 비하면


사실 마재의 말은 어린애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마재 없이 대학을 다니게 된 후로 나는 본의 아니게 그런 개소리들을 꽤 많이 들어야 했다. 스물 초반이


지나자 나름대로 단련이 되었는지, 저런 놈들을 주워 가는 여자들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스칠 뿐 그런
말을 듣는다고 새삼스레 낯이 뜨겁거나 부끄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녀석의 말은 들을 때마다 부끄러워서 잠시 기절했다 깨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무리 나를 콕


찍어 하는 말이라지만 이렇게까지 부끄러울 일인가. 그냥 대수롭잖게 받아칠 수도 있을 법도 했다. 그런데
찌질한 나는 한 번도 그게 안 됐다.

자극은 무뎌지게 마련이라는데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이건 다 매일이


새삼스러운 이 새끼 때문이겠지.

“너 정말 사람 승부욕 돋게 하는 거 알아? 나 이참에 피부과라도 끊을까?”

살결에 모공 하나 제대로 안 보이는 새끼가 좌회전 신호를 받고 차를 돌리며 헛소리를 지껄였다. 나는 다시


유구무언의 태도를 고수했다.
새 도로에 진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스티어링 휠을 잡은 녀석의 손등에 와락 핏줄이 불거졌다.

“정시현, 설마 너…… 나 안 서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야.”

“너 말고 아무한테도 장가 못 가는 거 확신할 때까지 묵혀두려고 그러는 거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리가


없어…….”

“…….”

“내가 무슨 위스키야? 산삼이야? 보이차야? 씨간장이야? 남자 나이 서른 넘으면 폐물이라는데 어떡해. 이제 4


년밖에 안 남았어!”

어젯밤 얘가 꿨다는 백스물두 살 운운하던 그 꿈은 굉장한 흉몽이 틀림없었다. 녀석이 아니라 나에게.

운전대를 잡고 있지 않았다면 자기 머리털이라도 쥐어뜯을 것처럼 부러 극적으로 토해내는 말은 조금 웃기게


들렸다. 그중 서른 넘으면 폐물이라는 말이 제일 웃겼다.

정말이지 가증스러운 놈이었다. 정말 서른 되면 폐물 될 만한 남자들이 지금의 망언을 들으면 얠 죽이려고


달려들 거다.

약간 침착함을 되찾은 나는 얼마 전에 기사에서 본 내용으로 녀석을 위로해 주기로 했다.

“마재, 너무 걱정 마. 유엔에서 청년 나이 기준 새로 설정해서 이젠 65 세까진 청년이야.”

“하, 우리 자기, 반성은커녕 그렇게 나온다는 거지?”

나는 뻔뻔스러움을 가장하고 녀석을 슬쩍 살폈다. 녀석은 심상한 태도로 말했다.

“상미기한이라는 거 알아, 자기야? 제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기간.”

이 새끼가 진짜…….

나는 빠르게 덧붙였다.

“마재, 앞 봐. 신호 바뀌려고 하잖아.”

다시 앞을 향해 눈을 돌린 녀석의 입술이 깊게 휘어 있었다. 불길한 징조였다. 눈을 떼야 했는데 떼지 못했다.


그사이 녀석의 말이 떨어졌다.

“아까운 짓 그만하고, 그냥 내가 제일 예쁠 때 먹어.”

“야!”

하지만 녀석은 멈추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틀어 눈을 맞댄 녀석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장담할게. 엄청 맛있을걸.”

차마 맨정신으로 들을 수 없는 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도 너 예쁠 때 먹고 싶어. 물론 넌 할아버지가 돼도 귀엽고 예쁘겠지만.”

기어이 뺨이 확 달아올랐다. 나는 화끈거리는 뺨을 녀석에게 보이지 않으려 오른쪽을 향해 고개를 홱 틀었다.

하지만 녀석은 나를 봐주지 않았다.

“아, 진짜…… 너 뺨이랑 귀 빨개지면 진짜 귀엽고 야한 거 알아? 하, 지금 또 목덜미까지 빨개진 거 봐.”

나는 뜨거워진 목덜미를 손으로 얼른 감쌌다.

“야, 너 오늘 왜 그래…….”

내 말에 대꾸하는 대신 녀석은 자기 할 말만 했다.

“내가 그걸 손 놓고 보고 있다. 미쳤다, 미쳤어.”

“그만 좀 해…….”

“세상에, 그동안 수영장 같이 다니면서 젖꼭지를 그렇게 봐놓고도 열일곱 때 이후로 한번 만져보지를 못했네.
심지어 어제도 그랬지. 진짜 미쳤다, 내가.”

“…….”

“내가 그거 보고 좆 설 거 같아서 부른 애국가 모아서 재생하면, 너 삼십 년은 족히 들어야 할걸. 아,


어제도 열심히 불렀으니까 이제 삼십 년 치 넘었겠다.”
나는 더 참지 못하고 녀석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벌컥 소리쳤다.

“야! 마재준! 아침부터 정말!”

다시 시선을 마주한 녀석이 피식 웃었다.

“아침 아니면 해도 돼?”

“…….”

일견 장난스럽게 살짝 휘어진 눈시울 속 눈동자엔 위험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목구멍이 까슬까슬했다. 나는 컵 홀더에 놓아둔 커피 컵을 들었다. 그러나 진작에 다 마셔 버린 내 컵은 이미


비어 있었다. 허망하게 그것을 다시 내려놓은 나는 대신 커피가 남은 녀석의 컵을 들어 빨대를 물었다.

입술에 시선이 닿았다. 나는 빨대를 빨았다. 산미가 있는 커피가 목구멍을 축였다.

“있잖아, 내가 제일 후회되는 게 그거야. 여태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한번 빨아보기나 할걸.”

그 얼굴을 더 보지 못하고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괜히 커피만 쪽쪽 빨았다.

얼마 남지 않은 커피는 금방 사라졌고, 빨대에선 꾸륵대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가 백 배쯤 커지면 좋을 것


같았다. 저 새끼가 하는 소리가 안 들리게.

귀가 너무 뜨거웠다. 나는 물고 있던 것을 놓았다.

“……나 내려?”

잠시 말이 없던 재준이 곧 낄낄 웃었다.

“아니. 속이 좀 시원해졌으니까 오늘은 이걸로 끝.”

“하아…….”

그제야 나는 긴 한숨을 토해내고는 시트에 깊이 등을 파묻었다. 에어컨이 돌고 있는 차 안은 시원해야 했는데,


어느새 등까지 타고 오른 열 때문에 약간 더웠다.

재준이 에어컨 풍량을 높였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녀석의 일방적인 화풀이에 잊혔던 음악이 그제야
귀에 들어왔다.

“그래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한동안 조용히 운전하던 재준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불신의 빛을 지우지 못한 눈으로 하도 뚫어지게 쳐다보는 바람에 나는 조금 움찔했다.

가슴이 아직도 두근거렸다. 나는 오늘 공부가 안 되면 다 이 새끼 탓이라고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태연해


보이도록 나름대로 애를 써가며.

“너 앞 좀 봐. 나 시험도 못 봤는데 도로에서 죽기 싫어.”

“시속 18 킬로로 달리는 차들끼리 추돌했다고 죽으면 그것도 뉴스감이다.”

“……아직 아니야. 일단 가.”

차로 꽉 찬 도로에선 뜻한 바를 달성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빨갛게 달아오른 앞차의 테일램프가 꺼지는 순간을


기다려 앞을 가리켰다.

차는 부드럽게 나아가다 얼마 가지 못하고 또 섰다. 마치 나처럼.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넉넉한 도로에 이르렀다.

차는 막힘없이 나아갔고, 스피커에선 리트가 흘러나왔다. 잔잔한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성악가의
목소리에 폭탄이라도 맞은 것 같던 마음은 다행히도 차분해졌다.

녀석은 간혹 입술만 움직여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소리 없는 음악을


들었다.

“현아, 다 왔어.”

어깨를 가볍게 흔드는 손에 얕은 잠에서 깬 내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어느새 내려와 있는 선바이저였다.

나는 그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며 물었다.

“응. 너 집에 갈 거지?”

“어. 차 놔두고 다시 올게.”

재준이 차 문 잠금을 풀었다. 둔탁한 소리가 짧게 음악 소리에 섞였다. 스피커에선 아직도 리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른 앨범인지 가수는 바뀌어 있었다. 이번 건 나도 자주 들어 귀에 익숙했다.

그래, 슈만이라고 했었다. 시인의 사랑. 하이네의 시에 곡을 붙였다고 했던가.


언젠가 녀석이 말해준 적이 있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벨트를 풀었다.

“뭐 하러. 그냥 집에 있어. 저녁에 갈게.”

“봐서 알아서 할게.”

“그러든가.”

내 말을 듣다 말다 하는 녀석이었으므로 나는 길게 말하는 대신 차 문을 열었다. 막 발을 내디디려던 차였다.

“현아, 너 빠뜨린 거 없어?”

“응? 가방은 뒤에 있는데?”

돌아보자 내 왼손을 슬쩍 잡아당긴 녀석이 고개를 기울였다.

좀 전에 못되게 군 녀석이 약간 얄미워서 인상을 쓰고 고개를 물렸다. 재준이 피식 웃고는 내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

요즘 너무 잦은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마지못해 눈을 감았다.

아주 짧은 키스를 남기고 물러난 녀석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타이밍 죽인다.”

의아해하는 나를 두고 녀석은 무어라 또 속삭였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었다.

“뭐라고 말한 거야?”

“노래 가사야. 지금 나오는 거.”

남이 모를 소리를 해놓고 혼자 웃고 있는 녀석을 바라보는 사이 간신히 잦아들었던 가슴이 또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차 밖으로 빠져나와 뒷문을 열고 가방을 챙겼다.

“마재, 가지 말고 잠깐만 있어.”

“왜?”

나는 대답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나는 도서관 코앞에 있는 꽃집으로 뛰어갔다. 차를 타고 오는 내내 고민하던 것이 무색하게도 들어가자마자
한눈에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보라 수국 꽃말 아세요?”

능숙하게 꽃을 포장하던 사장님이 뜻밖의 말을 건넸다.

“아뇨. 뭔데요?”

“진심이래요.”

가벼울 줄 알았던 꽃이 무거웠다.

“……감사합니다.”

물을 가득 머금고 풍성하게 피어난 은은한 연보랏빛 수국 몇 송이를 들고 돌아온 나는 차 문을 열었다.

꽃을 받아 든 녀석은 꽃보다 아름답게 웃었다.

“이거였어?”

그 얼굴을 더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나는 얼른 인사를 던졌다.

“이제 가도 돼. 이따 봐.”

“잠깐만.”

재준이 또 나를 붙잡았다. 나는 약간 몸을 뒤로 물렸다. 그 속을 알 만하다는 듯 녀석이 피식 웃었다.

“뭘 하려나 했더니 오랜만에 귀여운 짓을 다 하네, 정시현. 고마워. 예쁘다.”

……네가 더 예뻐.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녀석이 꽃잎에 코를 가까이 대 향기를 맡았다.

“기다리라고 호언장담을 하길래 맘에 안 들면 성질 내려고 했는데…… 어휴, 내가 졌다. 그래, 백스물두 살이면
뭐 어떠냐. 그때까지 다른 건 몰라도 네가 꽃 선물은 해주겠지.”
“…….”

꽃 몇 송이에 전날 밤 꾼 꿈의 잔상을 깨끗이 털어버린 속도 없는 새끼는 몹시 예쁘게 웃었다.

“점심 같이 먹어. 도서관으로 갈게. 1 시.”

“……응.”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무거나.”

“알았어.”

“이따 봐.”

인사를 마치고 문을 닫고 돌아서려는데 창문이 내려갔다.

“시현아.”

스티어링 휠에 손을 올린 채 나를 부른 재준이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렸다.

슈만의 리트에 섞여든 소리 없는 세 음절을 들은 나는 볼이 붉어지기 전에 돌아섰다.

도서관으로 들어서기 직전, 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나는 돌아섰다. 텅 빈 도로를 거슬러 오른
차는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것을 확인하고서야 나는 활짝 열린 도서관으로 발을 내디뎠다.

열람실에 들어와 의자에 앉자마자 휴대폰 창이 밝아졌다.

[Dichterliebe, Op. 48 : 4. Wenn ich in deine Augen seh’

Doch wenn ich küsse deinen Mund, So werd’ ich ganz und gar gesund.

아까 네가 무슨 말이냐고 물어봤던 거. 가끔은 독어 공부도 좀 해.]


프랑스어라면 모를까 독일어는 쥐뿔도 모르는 나는 이상한 권고와 함께 메신저 창으로 날아든 독일어 문장을
복사해 번역기 창에 붙였다.

[시인의 사랑, Op. 48 : 4. 네 눈을 보면]

제목은 이런 뜻이었다. 나는 이어 가사로 추정되는 문장을 붙였다.

[하지만 내가 네 입을 키스하면

그것이 바로 내가 건강해지는 방법이야.]

……감기 한 번 앓지 않는 새끼가 설마 더 건강해지려고 나한테 여태 그랬던 건 아니겠지.

번역기의 불완전함은 잠시 무시하고서, 나는 한국어로 번역된 문장을 읽으며 의혹에 잠겼다.

곧 휴대폰 상단에 또 녀석의 이름이 나타났다.


[아니다. 띨띨한 정시현, 그냥 이거 봐.

When I look into your eyes]

곡목에 이어 날아온 영문 번역일 가사를 물끄러미 노려보던 나는 화끈거리는 뺨을 문지르며 폰을 꺼버렸다.

[But when I kiss your lips, Then I am wholly healed.]

시인도 아닌 새끼가, 부끄러운 줄을 몰라.

* * *

“흠, 크흠, 흠, 으흠.”

헛기침 소리가 은은히 울렸다. 오랜만에 들린 그 소리가 반가워서, 한참 집중해서 공부하던 나는 펜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 쪽으로 걸어 나가며 살짝 살피니 할아버지께선 두꺼운 한문 서적을 필사하고 계셨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한동안 보이지 않으셔서 어디 편찮으신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었는데 건재하신 것 같아 다행이었다.

헛기침이 끝나자 열람실은 놀라우리만치 조용해졌다.

오늘도 도서관에 모인 고정 멤버들과 뜨내기 방문자를 포함해 열 두엇 남짓한 사람들은 저마다 책이나 노트북
앞에서 집중 중이었다.

노트북에 별도의 기계식 키보드까지 장착해 작업을 하던 키보드 마스터는 오늘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키를 치는 소리는 이전에 비하면 훨씬 작았다.

나는 키 스킨의 효용이 이렇게 큰 줄 몰랐다. 그리고 역시 우리 고등학교 후배로 밝혀진 그에게 키보드 모델에
딱 맞는 키 스킨을 떠안긴 사람은 마재였다.

올해 스물셋,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는 안 하고 웹소설을 썼다는 키보드 마스터는 전역 후 새로 시작한 연재가
대박이 나 매일같이 쫓기듯이 글을 써대느라 피가 마르는 중이라고 했다. 피가 마르는 대신 통장에 돈이
꽂히니 그럭저럭 버틸 만하다며 퀭한 얼굴로 웃고는 미안하고 고맙다며 키 스킨을 받았다고 했었다.

그리고 반쯤 협박이 섞인 선물을 떠안긴 장본인은 오늘도 그 애 앞에 노트북을 펼치고 앉아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안 계신 동안 마재가 퇴치한 빌런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부스럭거리며 간식을 먹곤 하던 취식 빌런은 행위 발생 때마다 실시간으로 고자질을 해댄 녀석으로 인해 도서관


직원에게 주의를 받고 열람실 내 취식 행위를 중단했다.

가끔 혼자 독경이라도 읊듯 혼잣말을 약간 시끄럽게 해대던 사람은, 아예 옆자리를 꿰차고 앉아 뭐라 말을


하려 치면 기다렸다는 듯이 오만 눈치를 주며 눈으로 째려대는 녀석에게 질렸는지 이틀 만에 조용해졌다.

그들을 퇴치하는 동시에 마재는 담배 냄새를 풍기는 아저씨들 때문에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며-그
아저씨들은 자기 옆에 앉지도 않았는데도-도서관 측에 흡연자석과 금연자석을 따로 나누어줄 수는 없겠냐고
건의하기도 했다.

도서관 측은 공간 문제 때문에 당장 구역을 나누긴 어렵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그 대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서관 곳곳에는 담배 냄새에 주의해 달라는 요지의 주의문이 커다랗게 프린트되어 부착되었고, 도서관
출입구에는 탈취제까지 비치되었다.

시험 기간도 아닌데 웬일로 토요일에 열람실에 몰려온 남고생 무리는 상대적으로 손쉽게 제압되었다. 마재는
가장 서열이 높은 한 놈을 붙잡아다 공부도 안 하는 것들이 도서관에서 떠들지 말고 밖에 나가 놀기나 하라며
협박해 쫓아냈다.

대체 그 녀석들의 이름은 언제 다 봐두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이들의 이름을 일단 줄줄 호명한 마재는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떠들 시엔 학교에 항의 전화를 할 것이며, 그걸로 시정되지 않으면 서울시 교육청에,
그것으로도 안 되면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넣고, 각 신문사 기자들에게도 메일을 넣어 너희 학교까지 매스컴에
오르내리게 해주겠다는 얼토당토않은 협박을 했다나.
그 말을 믿었는지 어쨌는지, 순진한지 띨띨한지 모를 남고생들은 일요일부턴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그냥 잘생긴 또라이가 눈을 부라리는 도서관에서 공부하기 싫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녀석이 그런 짓을 바쁘게 하는 사이 나는 공부하느라 바빴으므로 빌런 퇴치 현장을 실제로 목격하진


못했다. 일련의 처리 과정은 모두 저녁을 먹을 때 녀석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것이었다.

일주일도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을 해치운 것으로도 모자라 매일같이 열람실에 앉아 눈을 번뜩이고 있는 저


새끼 덕에 열람실은 전에 없이 쾌적했다.

그렇게 도서관의 떠오르는 신생 빌런이 된 녀석은 내가 문 쪽으로 다가가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가 너무 티 나게 나만 졸졸 따라다녀서 그런지 요즘 나를 보는 도서관 고정 멤버들의 눈빛이 약간


이채로워졌다. 심지어 주변 일에 관심이라곤 없어 뵈는 수학 논문 아저씨마저 그랬다.

나는 약간 멋쩍고 민망했지만 그 눈빛의 의미를 두고 깊이 생각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앞서도


말했듯이 그런 사소한 데 신경 쓰다가는 마재준이랑 친구 못 한다.

나는 문을 열고 나와 계단으로 향했다. 녀석은 바로 어깨를 나란히 했다.

“당 떨어졌어?”

“시원한 거 마시고 싶어서.”

우리는 곧 시멘트로 마감한 황량한 도서관 뜰에 도착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접힌 지폐 두 장을 꺼냈다. 그새 그것을 채간 녀석이 지폐를 펼쳐 투입구에 넣었다. 십 년


전엔 한 장이면 두 개를 살 수 있었는데 이젠 두 장을 넣어야 했다.

재준이 비타민 음료 버튼을 두 번 눌렀다.

시간이 흐르면 무엇이든 변하게 마련이다. 서울시에서 공공시설 자판기에서 탄산음료 판매를 금지하는 바람에
열다섯 이후로 나는 도서관 자판기에서 더는 사이다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오래 묵은 자판기 앞에서 불현듯 세월의 흐름을 느끼는 사이 녀석이 비타민 음료병을 내밀었다. 병뚜껑은
없었다.

어쩌면 변화란 생각보다 다면적이고, 다층적일지도 모르겠다.

오후 5 시 즈음, 여름날의 긴 태양이 위세를 부려대는 도서관 뜰에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음료병을 입에 대며 나는 묘한 감회에 젖었다.

병은 금방 비었다. 자기 몫을 다 마신 마재는 물 흐르듯 내 손에서 병을 빼앗아 뚜껑과 병을 분리수거했다.


순순히 건네준 주제에 나는 괜한 말을 붙였다.

“내 쪽이 쓰레기통 더 가까워.”

“나도 알아.”

예전보다 많이 성숙해진 얼굴에 어릴 때부터 한결같은 웃음이 걸렸다. 자판기 앞에서 그 웃음을 마주하니 꼭
중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서서히 재준의 웃음이 더 깊어졌다.

“정시현, 너 지금 무슨 생각 해?”

“……오늘 저녁밥이 뭘까 하고.”

“아직 나도 모르는 저녁 메뉴 생각하면서 그렇게 아련하게 웃냐?”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나도 웃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보기 좋으니까 뭐든 그거 계속 생각해,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말하고.”

나는 화제를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집에 뭐 있는데?”

“너 먹고 싶은 거 다 있어.”

“헛소리하지 말고. 장 봐놓은 거 있을 거 아냐.”

가끔 동네 마트의 채소나 과일 상태가 영 부실하다며 녀석은 종종 백화점이나 부촌인 옆 동네 마트를 털어


오곤 했다.

가끔 나도 동행했다. 하지만 시험이 목전인 요즘은 수요일이 아니라면 나는 늘 도서관 붙박여 있었므로 이번
주의 식재료 품목은 몰랐다.

재준이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흐트러뜨리며 입가를 끌어 올렸다.

“어. 거기 다 있어.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아무거나 말해. 없으면 훔쳐 와서라도 만들어줄게.”

요즘 도서관에서 눈을 부라리느라 바쁜 놈을 절도죄까지 저지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라면 먹자. 먹고 싶다.”

“소박하기는. 알았어. 가끔은 인스턴트도 괜찮겠지.”

“이따 밤에 내가 끓일게.”

그러니까 오늘은 손에 물 묻히지 말고 좀 쉬어라, 이 징한 놈아.

속으로 말을 삼킨 나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우리 자기 또 쓸데없는 걱정 하네. 내 백옥 같은 손에 주부습진이라도 생길까 봐 무서워?”

재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원한 눈시울이 그린 곡선을 눈으로 덧그리다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나는 얼른
녀석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더운 바람이 입구 부근에 있는 어린나무의 이파리를 흔들고 있었다. 내 귓가에는 녀석의 시선이 닿았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 이제 너 없어도 열람실 조용해.”

“그러고 보니 그 새끼는 왜 안 와?”

녀석의 목소리가 조금 불퉁했다.

“그 새끼?”

“코 곤다는 놈.”

크림 같은 미소를 머금고 있던 예쁜 얼굴이 어느새 스산해져 있었다. 이 새끼가 또 무슨 꿍꿍이를 품고 저러나


싶어 가슴이 덜컥했다.

코골이 빌런은 요즘 부동산 아주머니 눈치를 보느라 조신해진 전화 빌런보다 한층 성질이 더러운 것 같았다.
성질 더럽고 집요하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 새끼랑 그 아저씨가 한판 뜨게 된다면 간신히 평화를 찾은
열람실은 아주 풍비박산 날지도 모른다.

“안 오는 게 좋잖아.”

오면, 대체 뭘 하려고?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내 코끝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누른 마재가 피식 웃었다.


“하긴. 어차피 너 여기 올 날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동안 안 보이면 그다음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일주일 남짓 남은 시험일을 떠올리자 급격히 기분이 울적해졌다.

“응. 근데 과연 얼마 안 남았을까…….”

마재가 인상을 확 구겼다.

“어. 끝이야. 넌 이제 책 빌릴 일 아니면 여기 올 일 없어. 정시현, 넌 무조건 붙을 거니까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공부는 기세로 하는 거야. 알았냐?”

기세로 공부한 적도 없는 주제에 저렇게 말하고 있으니 정말 얄미웠다.

그 미운 말을 끝으로 우리는 다시 열람실로 돌아왔다.

우리나라는 머리 좀 돌아간다 싶은 남자 놈들이 이과로 편중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과에서도 차고 넘치게
잘할 마재준은 학교는 달랐으나 나와 같은 경제학부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당연히 이과를 택할 줄 알았던 녀석이 문과를 선택했을 때, 학교에선 작은 파란이 일었다.

녀석을 의대 보낼 꿈에 부풀어 계시던 선생님들은 돌아가며 녀석을 붙들고 설교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줏대로는
어디 가도 꿇리지 않는 마재는 그 말을 모두 귓등으로 흘리고는 기어이 문과반으로 왔다.

‘자연계에 가고 싶은 과 없어. 의사 될 일은 더더욱 없고. 그런데 뭐 하러 이과를 가? 수학 과학 공부는


재밌으니까 그냥 내가 따로 하면 돼.’

이과 수학을 잘할 자신이 없어 문과로 온 나에게 녀석은 이따위 망언을 남겼다.

녀석이 저지른 만행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차피 1 학년 때의 사태 때문에 내신으론 대학도 못 간다며 중간,
기말고사는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그 덕에 석차 한 자릿수로 내신 등급이 오락가락하는 불쌍한 최상위권 중생들은 한시름을 놨다. 그중에는 나도


있었다.
그런 주제에 녀석은 모의고사 때면 항상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그런데 수능 때는 뭐가 씌었던
모양인지 저 용의주도한 놈이 웬일로 마킹 실수를 했다. 그 바람에 국어와 영어에서 각각 하나씩, 두 문제를
틀린 마재는 수능 만점자 인터뷰를 피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게 싫어서 일부러 틀렸던 게 아닐까. 녀석은 아니라고 잡아뗐지만 나는 아직도 의심 중이다.

더 무서운 의심은 따로 있었다. 만약 수능 직전 내 모의고사 성적이 한국대에 원서를 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면 녀석이 저지른 실수의 규모는 어쩌면 좀 더 커지지 않았을까. 이 생각이 내 망상으로 끝나서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내신 싸움이 치열한 학교에서 그럭저럭 선방한 편이었지만 그 성적으로 한국대는 턱도 없었다. 모의고사
성적이 좀 더 나았으나 그쪽도 한국대에 확실하게 붙을 만한 수준은 또 아니었다.

그런 주제에 나는 고 3 가을, 수시를 모두 상향 지원을 하는 미친 짓을 저질러 담임선생님을 기함하게 했다.

심지어 엄마까지 학교에 불려 오셨다. 살면서 별로 고집을 부릴 일이 없었던 나는 그때 평생 부릴 고집을 다


부렸다. 실은 원서비도 아까워 한국대 한 장만 쓰고 싶었지만 담임선생님이 나를 죽일까 무서워 그러지는
못했다.

난데없는 내 행태에 엄마는 한숨을 쉬며 결국 손을 들었고, 엄마가 그렇게 나오자 담임선생님은 이를 박박


갈며 너 알아서 하라고 나를 내팽개쳐 주었다. 당연히 수시는 모두 떨어졌고, 친구들은 내가 돌았다며
수군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수능 날 아파서 드러눕지 않는 한 마재가 한국대에 붙을 것은 뻔한 일이었으므로.

그리고 녀석이 저지를 만한 일을 상상해 보면, 무리하더라도 내가 한국대에 가려고 애쓰는 게 나았다.

우리는 정시 원서 세 장을 나란히 같은 학교, 같은 과에 넣었다. 그랬지만 결과는 내가 바란 것과는 달랐다.

최초 합격자 발표일, 내가 한국대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을 들은 마재는 추가 합격이 안 되면 그냥 내가 붙은


학교를 같이 다니면 되겠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나 거기 수석 뜨던데. 장학금도 준다니까 잘됐네.’

‘네가 그러면 내가 진짜 좋아할 거 같아?’

‘한국대 집에서 너무 멀어서 별로야. 글구 자기야, 나 장거리 운전하는 거 무서워.’


‘닥쳐, 이 미친 새끼야. 지금 농담이 나와?’

당연히 나는 정색을 했다. 자연계에 흥미 없어 운운까지는 가까스로 수용했지만 그 이상은 나도 어려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아무리 얘가 내 껌딱지라지만, 나 때문에 자기가 가질 수 있는 몫을 포기하는 건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녀석의 마음을 갉아먹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결코 녀석의 곁에 머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도 안 되고.

그걸 알았으므로, 나는 헛소리를 해대는 녀석에게 진심으로 화를 냈다.

‘다시 내 얼굴 볼 생각 없으면 그딴 짓 해.’

자긴 회사 다닐 생각도 없는데 그깟 학벌이 뭐 중요하냐고 오만상을 구기며 헛소리를 해대던 개새끼는 내


완강한 태도에 풀이 죽어 토라졌다.

그런 녀석을 보다 속이 터질 것 같았던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나라고 너랑 같이 안 다니고 싶겠어? 근데 안 되는 걸 어떡해! 앞으로도 이런 일은 무수히 많을 거야.


그때마다 네가 이러면 내가 어떻게 너랑 같이 있을 수 있겠어? 너 나더러 널 좀먹는 놈이나 되라는 거야? 난
그런 거 못 해!’
그 말을 듣고 생각 좀 해보겠다며 시무룩하게 돌아간 녀석은 다음 날 나타나 내 말대로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곤 며칠이 채 지나기도 전에 천만 원이 넘는 시계를 던져놓고 도망가 나를 또 빡치게 했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학기 초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술자리와 쏟아지는 과제에 정신없이 허덕이다 보니


녀석을 만날 새가 없었다.

4 월 첫째 주 일요일, 일주일 만에 얼굴을 맞댄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투덜거렸다.

‘너 얼굴이 이게 뭐야?’

‘어제 술을 좀 많이 마셨어.’

‘몸도 부실한 애가 술은 왜 많이 마시고 그래?’

녀석은 뭐든 다 자기 기준으로 생각해서 큰일이었다. 나는 그저 녀석에 비해 좀 작고 비실비실할 뿐 지극히


멀쩡하고 튼튼했다. 그런데도 재준은 나를 보면 항상 병약한 어린아이를 둔 부모님처럼 굴었다.

‘안 되겠어. 외국 나간 것도 아닌데, 이렇게 너 안 보고는 못 살겠어.’


이런 별스러운 말을 툭 던진 녀석은 곧 우리 학교 근처에 출몰하게 되었다.

자기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이면 우리 학교 근처, 혹은 교내 카페에 죽치고 앉아 나를 기다렸고, 동아리


술자리에서 끈질기게 달라붙는 선배가 있다는 소리를 흘리기가 무섭게 아예 우연을 가장하고 나타나 우리
동아리 모임 뒤풀이에 뻔뻔스럽게 끼어들었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이상한 병명을 핑계로 술은 못 마신다고 못 박은 녀석은 그날 답지도 않게 회장 선배의


비위를 열심히 맞추고, 여자 선배들을 반쯤 홀려놓고는 밤늦게 나를 챙겨 떠났다.

대체 내가 모르는 곳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은 우리 동아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객원


멤버 비슷한 뭔가가 되어 있었고, 학교 밖에서 모일 때면 종종 얼굴을 들이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시현에게 눈 돌아가게 잘생긴 친구가 있다는 소문이 학내에 퍼졌다.

사람들은 나를 붙들고 녀석의 정체를 물어댔다. 나는 같은 동네에 사는 15 년 된 절친이라 자기 하교하는 길에


태워다 주려고 온다는 허술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학우들, 특히 여학우들은 별 희한한 경우를 다 보겠다며 낄낄 웃으면서도 종종 나타나는 녀석을 보는 게 싫지


않은 것 같았다.

당연히 내가 재준에 대해 가장 많이 들은 물음 중 하나는 녀석에게 여자친구가 있냐는 것이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므로 나는 그때마다 그저 모르쇠로 일관했다.

어느 날, 동아리방에서 절친이라면서 그런 것도 모르냐며 닦아세우던 모 선배에게 쫄아서 찔끔하는 사이, 그


선배 옆에 있던 다른 선배가 뭔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없겠지. 있으면 얘 태워다 주겠다고 저렇게 자주 오겠어?’

‘그렇네! 그럼…….’

희망에 부풀어 눈을 반짝이는 그 선배를 지켜보던 다른 선배는 묘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 학년 2 학기 중간고사 직후 그 일이 일어났다.

그날 녀석은 오랜만에 동아리 술자리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자리엔 종종 나에게 기분 나쁘게 집적대며
더러운 말을 지껄이던 어떤 남자 선배가 있었다.

그날도 진상짓을 해대는 그 선배를 유심히 보던 녀석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그 선배를 따라 일어서더니 그
선배를 패버렸다.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선배는 이미 종적을 감춘 후였고, 자리로 돌아온 녀석의 뺨에 부러
맞은 게 분명할 자국이 생겨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대체 무슨 짓을 했냐고 추궁했다. 평소엔 수다스러운 마재준은 별거 아니니까 나까지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말로 내 물음을 틀어막고는 그 일에 대해선 더는 입을 떼지 않았다.

당연히 학교에선 이래저래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녀석이 무슨 수로 구워삶았는지 앞니까지 날아간 당사자마저
그날 일에 대해선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원래부터 어린 후배들을 데리고 더러운 짓을 해댄다는 소문이 돌던 그 선배는 평판도 지극히 나빴던 탓에 편을
들어주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조금 곤란해졌던 내 학교생활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평안을 되찾았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입 몇쯤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르는 피상적인 인간관계에 나는
그다지 미련이 없었다. 그런 일로 상처받고 침울해지기엔 녀석의 존재가 너무 컸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나는 녀석에게 더는 학교에 찾아오지 말라고 말했다.

내가 곤란해서는 아니었다. 그저 녀석이 이런 식으로 굴게 내버려 둬선 안 됐었다는, 내가 확실하게 선을


그었어야 했다는 후회 때문이었다.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하지만 늦었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학교까지 힘들게 오지 말고, 너도 너 할 거 해. 나도 그럴 테니까.’


말을 마치기도 전에 녀석은 서운하다는 듯 나를 흘겨보았다.

‘그 대신, 우리 학교 다녀와서 보자. 밤에.’

‘늦는 날도 있잖아.’

‘너 내 시간표 다 알잖아. 술자리 있는 날만 빼면 괜찮아.’

탐탁잖은 기색으로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신 술 마시는 날은 전화해. 데리러 갈게.’

‘나 많이 안 마셔. 늘 버스 끊기기 전에 오는데 뭘.’

‘그래도 전화해. 걱정되니까. ……학교 애들 눈 신경 쓰이면 좀 떨어진 곳에서 기다릴게.’

‘……그런 거 아냐. 그냥 너 학교생활 제대로 하는지 걱정돼서 그래.’

‘내 걱정 할 때야, 띨띨한 정시현? 내 걱정 할 시간에 네 걱정이나 해.’

그렇게 말한 재준은 그 후로 우리 학교 사람들과 얽히는 일이 없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맞을 때마다, 특히


술자리가 있는 날은 항상 나를 데리러 왔다.

술집들이 모인 골목에서 약간 떨어진 한적한 길가에 차를 대고 기다리던 녀석은 내가 차에 오르면 웃기도 하고,
술독에 빠졌다가 왔냐며 인상을 구기기도 했다.

늦은 밤 녀석이 나 때문에 나오는 게 부담스러워서 술자리가 있다는 말을 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걸 들킨


날, 어찌나 서운해하며 걱정을 빙자한 잔소리를 해대는지 종국에는 내가 질려 버리고 말았다. 그 후로 나는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순순히 불었다.

보통은 이런 걸 귀찮아하겠지.

하지만 미안하다는 생각은 들어도 귀찮다는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는 걸 보면 녀석만큼이나 나도 답이 없는


게 분명했다.

자조적인 한숨을 작게 흘린 나는 펜을 들었다. 이제 다시 공부를 해야 할 때였다.

얼마 후 등 뒤로 녀석이 다가오는 기척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벌써 6 시가 된 모양이었다.

오늘도 쪽지 한 장이 책 위에 곱게 놓였다. 녀석은 씩 웃으며 내 어깨를 가볍게 주무르고는 도서관을 떠났다.

-자기야, 조금만 더 힘내.

라면은 내가 사 갈 테니까 그냥 와♥

어제보다 더 사랑해♥♥♥♥♥

수백, 수천 번을 보고 들은 말인데 오늘따라 괜히 코끝이 찡했다.

네 사랑은 무한히 팽창하는 우주 같은 걸까.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찬찬히 그것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여섯 번째 상자를 구해야 할 때였다. 버리기도 뭐해서 여섯 살 때부터 모아오고 있는 쪽지는 다섯 상자에


달했다. 이번 상자를 채우는 데는 삼 년이 걸렸다.
그날 밤 우리는 꽃게가 든 해물 라면과 꽃게찜을 먹었다.

찜을 올린 접시를 아예 자기 앞으로 끌고 가 나는 손도 대지 못하게 한 녀석은 능숙하게 꽃게살을 발라 내


접시에 놓아주었다.

말없이 그것을 먹던 나는 재준의 오른손 검지 끝에 생긴, 어제까지는 없던 긁힌 자국을 발견했다.

6 월, 제철을 맞은 꽃게살은 너무 달았다. 나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 * *

6 월 마지막 주 일요일, 오후 12 시. 나는 시험을 마쳤다.

수험장을 빠져나와 복도로 나왔다. 에어컨이 돌고 있는 복도는 조금 싸늘했다. 창밖에는 빛이 부서지고 있었고,
하늘은 새파랬다.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자 나처럼 시험을 마친 수험생 몇이 학교 정문 쪽을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들의 뒤를 따라 건물들이 드리운 그늘 속을 기계적으로 걸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문 앞 광장이 나타났다. 저 멀리, 그 광장 한편에 있는 아름드리나무, 그 아래 놓인


벤치에 앉아 있던 재준이 일어섰다.

나를 향해 걷기 시작한 녀석을 보자 발이 멋대로 움직였다.

녀석이 점점 가까워졌다. 예쁜 얼굴에는 의아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그게 괜히 웃겨서 웃음이 나왔다.

“뭘 그리 급하게 뛰어? 어……?”

이마에 녀석의 어깨가 닿았다. 곧장 너른 어깨에 팔을 감은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끝났어…….”

그 말을 뱉어놓고서야 현실감이 돌아왔다. 두 해를 훌쩍 넘게 끌어온 지난한 일 하나가 드디어 끝났다는 것을.

“……고생했어.”

내 어깨에 턱을 괴고 귓가에 속삭인 녀석이 팔에 힘을 실었다. 곧 머리칼에 입술이 닿았다. 목과 등에는


녀석의 손이 감겨 있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저지른 짓을 깨달았다.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의 존재도, 열다섯 이후로 내가 먼저 녀석을
끌어안은 적이 없었다는 것도 하얗게 잊어버린 채였다.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한발 물러서려는데 재준이 활짝 웃으며 가방째로 나를 꽉 끌어안았다.

보는 눈도 많으니 그만 떨어져야 하는데, 어쩐지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 해야 할 말이 남아서였을 것이다.

“……고마워.”

말을 내뱉자마자 가슴이 뭉클했다.

이 순간 가장 먼저 보인 얼굴이 녀석이어서 기뻤다. 아침부터 여기까지 데려다준 녀석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새삼 그랬다.

얽힌 팔을 풀어내고 몸을 물린 재준은 말없이 웃으며 내 머리칼을 흐트러뜨리고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가방을 벗겨내 자기 어깨에 메었다.

그 웃음에 또 낯이 뜨거워지려 했다. 나는 한발 먼저 내디뎠다.

“가자.”

“어.”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정문을 빠져나왔다.

차를 대놓은 곳까지 걸어가는 동안 우리 사이엔 말이 오가지 않았다. 시험을 보고 나온 이에게 으레 물을 법한


잘 봤느냐는 말조차 없었다. 사흘 전 저녁 먹을 때만 해도 떨어지기만 해보라며 윽박질러 대던 녀석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주차장 안으로 들어가 차에 오르고서야 재준의 입이 열렸다.


“바로 어머니 모시러 가면 돼?”

“응.”

열흘 전 아침, 엄마는 역시 양평 가서 장어를 먹고 오는 게 좋겠다며 나의 의사를 물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엄마는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이 녀석도 데려가자고 말했다.

‘그동안 너 저녁밥 재준이가 챙겨준 거 아냐? 그거 말고도 걔한테 고마운 게 많으니까 이참에 괜찮으면 같이
가자고 해. 엄마가 한턱 내겠다고. 아, 그럼 재준이가 운전할 테니까 좀 미안한가?’

‘……물어볼게.’

그리고 녀석은 내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승낙했다.

“배는 안 고파? 곧 점심땐데. 너 맨날 1 시에 점심 먹었잖아.”

“넌?”

“고픈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장난스러운 대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이 상황에서도 배고프냐는 물음이 먼저라니.

역시 내가 먼저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나, 잘 본 거 같아.”

막 창문을 열고 주차비를 계산하던 녀석이 휙 나를 돌아보았다.

표정이 잠시 사라졌던 얼굴엔 곧 평소와 꼭 같은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당연하지. 내가 수능 치는 자식 둔 부모들보다 간절하게 빌었는데. 마음만은 팔공산 갓바위에 있었어.”


“팔공산 갓바위? 거긴 또 어디야…….”

“대구에 영험하신 갓 쓴 부처님이 있대. 나도 안 가봤으니까 나중에 같이 가보든가.”

“응.”

재준은 또 씩 웃으며 내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진짜 애썼어, 띨띨한 정시현. 시험 끝났으니까 당분간 아무 걱정 하지 말고 나랑 놀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응.”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는 동네로 이르는 도로에 올랐다.

일요일, 도로는 한적했고, 차 안은 조용했다. 녀석은 종종 나를 돌아보며 웃을 뿐이었고, 그 시선을 느낄


때마다 괜히 웃음이 나왔다.

오래도록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시험도 시험이었지만 나는 그 순간 또 다른


무언가도 내려놓았던 것 같다.

시험장이었던 대학교에서 우리 집까지는 차로 20 분 거리였다. 길이 뻥 뚫려 있었으므로 차는 막힘없이


나아갔다.

평화롭게 10 분쯤 달렸을 무렵,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내 뒤에 앉은 사람 다리 떨더라.”

“뭐?”

내 말에 온화하던 녀석의 얼굴에 금이 갔다. 따라 들어와서 그놈을 끌어냈어야 하는데, 하는 얼굴이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새끼가 또.

그런데 그 얼굴에 또 웃음이 나왔다.

“감기 걸렸는지 계속 기침하는 사람도 있었어.”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뭐냐.”


마뜩잖다는 듯 투덜거리는 말에 가끔 여름 감기에 걸리는 나는 녀석을 슬그머니 노려보았다.

신호 앞에서 차를 멈추고 내 눈을 본 재준이 피식 웃었다.

“서운해하긴. 넌 당연히 예외야. 그래서? 거슬리지 않았어?”

나는 녀석의 뒷말만 챙겨 대답했다.

“아무렇지도 않았어.”

무슨 정신으로 앉아 있었는지도 모를 시험장 안의 상황을 다시 돌이켜 본 나는 내 대답에 확신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가 바뀌었다. 차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앞을 보며 운전하던 녀석이 장난스레 대꾸했다.

“열람실 빌런들이 이런 식으로 널 도와주네.”

“그러게.”

“코 고는 놈은 없었어?”

“설마.”

우리 열람실에 출현하던 코골이 빌런은 그 후로도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와 녀석이 도서관을 떠나는
날까지.

인생엔 이런 행운이라 부르기 모호한 행운도 종종 생기는 모양이다.

시답잖은 깨달음을 곱씹던 중, 아주 오래전, 엄마가 나에게 해줬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좋은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는 건 행운이라고 생각해.’


그 순간 나는 내 짧은 인생에 주어진 가장 큰 행운이 무엇인지도 깨달았다.

나는 녀석에게 들리지 않게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이 잦아들기를 바라며.

그러나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내가 그러는 사이 앞을 보던 재준의 옆얼굴에 뭔가 탐탁지 않은 기색이


서렸다.

“가끔은 강하게 키워야 하는 걸까? 근데 난 너 고생시키기 싫은데.”

“…….”

대체 누가 누굴 키운다는 건지. 고생은 또 뭐야.

얘는 자기가 나보다 어리다는 걸 자꾸 까먹는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는 녀석이 나를 키운다는 말을 당당하게 부정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얘는 내


온갖 수발을 다 들어주고 곤란한 일을 나서서 해치우다 못해 공부에 방해될까 봐 도서관까지 평정하는 새끼였다.

……그 무엇 하나 내가 해달라고 말한 적은 없었지만.

어쨌든, 녀석이 나에게 쏟고 있는 마음의 크기만은 키운다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걸 모를 만큼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니, 바보라도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우리 사이, 이대로 괜찮은가?

시시하고 편안한 대화를 나누며, 나는 또 해묵은 물음을 끄집어냈다.

떠오를 때마다 애써 덮어두었던 그 물음은, 어째서인지 그날부터 머릿속 한가운데 쐐기처럼 박혀서 뽑아낼 수도,
묻을 수도, 가라앉힐 수도 없게 되었다.

조금 당황하는 사이, 집 앞에 도착했다.

차 시동을 끈 녀석은 말없이 내 손을 한 번 꼭 쥐었다 놓고서야 차 문을 열었다.

* * *
일요일 오후, 맛집으로 소문이 자자한 장어구이 가게는 만석이었다. 우리는 가게 앞에서 15 분을 기다려서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언니 아들들이야?”

자리로 안내하기 위해 우리를 맞은 직원 아주머니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엄마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얘는 내 아들이고, 얘는 아들 친구예요.”

“하이고, 둘 다 너무 잘생겼네. 혹시 연예인이야?”

“하하하, 둘 다 학생이에요.”

그린 듯한 어르신 접대용 미소를 짓고 있는 녀석에게 향했던 아주머니의 시선이 내 쪽으로 왔다. 녀석에 묻어
잘생겼다는 소리를 얻어들은 나는 멋쩍게 웃었을 뿐이었다.

“언니는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다. 하이고…… 빛이 난다, 빛이 나. 가게가 갑자기 훤해졌네. 식당 가운데


앉혀놓고 봤으면 딱 좋겠구만 자리가 구석밖에 없네. 에잉.”

농조로 탄식한 아주머니가 우리를 이끌었다.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헤치고 지정된 자리에 도착한 나는
녀석을 사람들 눈에 덜 띄는 자리에 먼저 밀어 넣고 그 옆에 앉았다. 엄마는 맞은편이었다.

재준의 미모에 깊은 감명을 받은 아주머니는 실은 사장님이셨던 모양인지, 주문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더미 같은 장어를 들고 돌아왔다.

“잘생긴 학생들, 많이 먹고 가.”

“어머, 언니, 이렇게 주면 남는 거 있어요? 너무 많다.”

“남으니까 걱정 말고, 필요한 거 있을 때마다 팍팍 불러.”

“고마워요. 잘 먹을게. 술 많이 마셔야겠다.”

기분이 좋아진 엄마는 술을 주문해도 되겠냐며 우리에게 물었다. 녀석은 운전을 핑계로 사양했으므로 사이다도
한 병 추가되었다.
소주와 사이다를 들고 다시 돌아온 사장님이 장어를 불에 올려주고 떠나자마자 재준이 집게를 들었다.

술잔을 세팅 중이던 엄마가 그 모습을 보고 눈에 불을 켰다.

“아니, 엄마가 있는데 왜 네가 해. 애들은 가만히 있어.”

엄마는 녀석이 쥔 집게를 빼앗아 자기 앞에 두었다.

엄마, 엄마 고기 잘 못 굽잖아…….

턱밑까지 차오른 그 말을 내뱉는 대신, 나는 오늘 하루 엄마의 보살핌을 받는 아들 몫을 열심히 하기로


결심했다.

엄마가 술병을 따느라 시선을 돌린 틈을 타, 녀석이 내게 흘깃 눈짓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녀석이 엄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머니, 제가 먼저 올릴게요.”

“어머, 그럴래? 고마워.”

재준이 공손하게 엄마의 잔을 채우는 동안 나는 녀석의 잔에 사이다를 부었다. 귀신 같은 녀석은 그새 뚜껑을


따놓은 후였다.

엄마 잔을 채운 녀석이 내 쪽으로 술병을 들이밀었다.

“너도?”

“응.”

많이 마시지 마.

하여간에 별별 걱정이 많은 놈이었다. 눈으로 말하는 녀석에게 나는 알겠다고 눈짓했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엄마랑 술을 마시는 자리였다. 심지어 술도 못 마시는 자기를 두고 내가 마셔봐야 얼마나
마신다고. 하여간에 극성이었다.

잔이 다 차자 엄마가 술잔을 들었다. 아직 장어는 익지도 않았는데, 시험을 잘 본 것 같다는 내 말에 신이 난


엄마는 벌써부터 건배사를 읊고 있었다.

“우리 아들, 그동안 고생 많았어. 재준이는 우리 시현이 챙겨줘서 고맙고. 엄마가 다 알지. 오늘 많이
먹어.”
“네. 잘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 엄마.”

잔이 부딪쳤다. 엄마와 나는 잔을 비웠고, 녀석은 사이다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소주는 아주


조금 달았고, 많이 썼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장어가 불판에서 부지런히 익어갔다. 고소한 냄새가 솔솔 피어오르는 동안 엄마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종종 장어를 뒤집었다. 녀석은 다소곳하게 웃으며 엄마의 말에 맞장구를 치거나 자기
이야기를 덧붙였다. 나는 그 중간에 적당히 끼어들었다.

잔이 한 잔 더 비었을 무렵, 장어가 다 익었고, 엄마는 고기를 잘라 우리 앞에 놓아주었다.

“먹자.”

“어머니 먼저 드세요. 한 잔 더 올릴까요?”

“아유, 재준이는 말도 이쁘게 하지. 그래.”

소주잔을 다시 채운 엄마가 장어를 들었다. 그제야 녀석과 나도 고깃점을 집었다.

엄마의 서툰 솜씨에도 장어는 맛있게 익어 있었다. 통통한 민물장어살은 묵직하고 기름진 맛이었다.

간장과 물엿을 베이스로 만든 특제 소스에선 희미하게 생강과 레몬향이 풍겼다. 이번엔 소스에 살짝 찍어 입에
넣었다. 짭쪼름하면서도 달큰하고 약간 새콤한 소스는 고기의 풍미에 조화롭게 어울렸다. 고기의 풍미는 해치지
않으면서도 느끼한 맛이 너무 오래 남지 않게끔 잡아주는 소스는 자꾸 고기를 불렀다.

“엄마, 맛있어.”

“그래. 여긴 옛날부터 맛이 한결같아. 처음 왔을 때가 세상에 벌써 삼십 년 전이네.”

한참 전부터 아빠 생각을 하고 있었을 엄마의 얼굴에 옅은 그늘이 졌다. 나도 오랜만에 아빠 생각이 나서


코끝이 조금 찡해졌다. 아빠는 말수는 적으셨지만 다정하고 따뜻했던 분이었다.

“아버님이랑 처음 같이 오셨었다고 들었어요.”

“그랬지. 내가 여기서 쟤네 아빠한테 반해서 결혼까지 한 거잖아.”

“그러셨어요? 어쩌다가요?”

“막 연애하기 시작했을 때였을 걸. 뭐 좋아하냐길래, 가족들이랑 놀러 와서 이 집에서 장어를 먹었던 기억이


나서 지나가는 말로 맛있었다고 했었어. 근데 그 말 한마디를 안 잊어버리고 한 달 뒤에 여기 가자고 하더라.
가난한 고학생 주제에 무슨 돈이 있다고.”

엄마가 설핏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술잔을 맞댔다. 젓가락을 내려놓고 잔을 들어 공손하게


엄마 잔에 맞대며 재준이 살짝 웃었다.

“아버님이 어머니를 많이 사랑하셨나 봐요. 좋아하는 사람이 바라는 건 어떻게든 들어주고 싶잖아요. 그게
쉽든 어렵든.”

“응……. 그랬나 봐. ……좋은 사람이었어.”

조금 슬픈 미소를 떠올린 엄마의 입술에서 작은 한숨이 샜다. 그리고, 녀석이 담담하게 내놓은 말에 가슴이
지끈거린 사람은 엄마만이 아니었다.

나는 빈 술잔을 들었다.

“엄마, 나 잔 비었어.”

그제야 엄마의 얼굴에 서린 슬픈 기운이 가셨다. 엄마가 짓궂게 웃으며 술병을 기울였다.

“우리 아들, 오늘 너무 빨리 마시는 거 아냐?”

“오늘 정도는 마셔도 되는 거 아냐? 나 그동안 술 안 마셨어.”

술병을 내려놓은 엄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공부하느라 그랬구나. 얼마나?”

엄마의 물음에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아서 나는 술잔을 든 채로 기억을 더듬었다.

“아들아, 너 설마, 반년 동안 술 한 번도 안 마셨어?”

대답은 녀석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제가 아는 한 그래요. 어머니 앞에서 올릴 말은 아니지만, 쟤 진짜 독한 애예요. 그러니까 이런 어려운


시험도 보죠. 하루에 열두세 시간씩 공부해 가면서.”

그제야 나는 내가 도서관에 틀어박힌 반년간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었다는 걸 깨달았다.

딱히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다는 거창한 다짐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컨디션 무너지는 게 싫어 멀리했을 뿐인데


어느새 반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어쩐지, 약간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냥 안 마신 건데, 독하다는 소리까지 들을 일이야?”

“너 아예 마시고 싶다는 생각까지 묻어두고 잊어버린 거잖아. 술 안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재준이 피식 웃으며 이번엔 내 잔에 자기 잔을 댔다. 잔 부딪는 소리가 나자 나는 반사적으로 술잔을 비웠다.

사이다 잔을 또 조금 비운 녀석이 장난스레 눈웃음을 쳤다. 사람을 홀려 간을 빼 먹는다는, 전설 속 천년


묵은 구미호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나 술 별로 안 좋아해…….”

“어. 그런 거로 해두자.”

“아유, 우리 아들 고생했구나……. 어쩐지 냉장고에 맥주캔이 내내 그대로 있다 싶었어.”

엄마가 측은하다는 듯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이 사람들이 왜 이러지. 그냥 가끔 맥주캔 좀 홀짝였을 뿐인데.

“……그게 언제 일이야? 그리고 그거 엄마가 한참 전에 마셨잖아.”

“네가 안 먹길래, 맛이 없나 싶어서 내가 먹은 거지.”

“맛없는 걸 엄마가 왜 먹어. 엄만 맛있는 것만 드세요.”

장어 두 점을 올려 쌈을 싸던 엄마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엄마가 맥주 몇 캔 먹었다고 툴툴거리는 거야? 이 불효자가.”

“그런 말이 아니잖아.”

“됐어. 이거나 먹어.”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렸다.
엄마가 만들어준 쌈은 무척 맛있었다. 하지만 너무 크기도 해서, 나는 한동안 입을 열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도 같은 꼴이 되었다. 평소엔 쌈을 먹지 않는 마재준은 방싯방싯 웃는 얼굴로 그


후로도 두 번 더 엄마가 내미는 쌈을 받아먹었다.

올해로 20 년, 오랫동안 같이 지내온 우리의 대화는 화기애애하게 이어졌다. 어린 시절 추억만 끄집어내도 한


달 밤낮은 새야 할 만큼이니까 화제가 끊일 일은 없었다.

거기에 스위스 작업실에서 얼마 후 프랑스에서 열릴 개인전 준비에 몰두 중이신 재준이네 어머니 소식도
곁들여졌다. 녀석이 얼마 전 스위스에 다녀왔던 것도 막바지 작업에 몰두 중이신 어머니의 자잘한 잡일을
도와드리기 위해서였다. 안 그럴 것 같은데, 의외로 마재준은 자기 어머니와 엄청 사이가 좋다.

불판이 갈리고, 새로 올린 고기가 다 익었을 무렵이었다.

조금 전부터 머뭇거리는 기색을 내비치던 엄마가 내 눈을 바라보았다.

“시현아.”

“응.”

“엄마, 재혼할까 해.”

올 게 왔다는 느낌이었다.

열흘 전 엄마가 이곳에 오자고 했을 때부터 내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응. 축하해요.”

엄마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어렴풋이 웃을 뿐이었다.

나는 얼른 엄마를 달랬다.

“경사를 전하는 사람 얼굴이 왜 그래. 누가 보면 나 시험 떨어진 줄 알겠어.”

“축하드려요.”

내 기색을 살피던 재준이 활짝 웃으며 축하를 건넸다. 하지만 엄마 얼굴에 서린 슬픈 기운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나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 시험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준 거지? 고마워요.”

엄마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엄마는 15 년 넘게 혼자 몸으로 나를 키우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엄마는 한 번도 그런 기색을 내비친 적이


없었지만, 분명 재혼하라는 권유도 여러 번 있었을 거다. 아빠도 아빠지만 엄마가 여태까지 혼자였던 까닭은
아마 나 때문이었겠지.

나는 엄마도 이제 행복해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다만 엄마도 아빠를 이렇게 보내는구나, 싶은 생각이


스치자 조금 쓸쓸해졌다.

뒤따라 어떤 생각이 막 뇌리에 떠올랐을 때였다.

“시현아.”

엄마가 다급히 냅킨을 뽑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눈가를 닦으며 나는 어이없는 상념을 쫓아내려 애썼다.

만약에 재준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뜨면 난 어쩌지?

혹시 내가 먼저 죽으면 녀석은 어쩌지?

엄마의 재혼 소식을 앞두고 떠올릴 만한 생각도, 고작 스물여섯밖에 안 먹은 새파란 놈이 떠올릴 생각도


아니었다. 대체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조금 당황한 나는 자꾸 쏟아지는 눈물을 종이냅킨으로 얼른 찍어냈다.

“이거 써.”

엄마 앞이라서일까. 직접 닦아주고 싶어 손이 근질거릴 녀석은 담담한 표정으로 손수건을 내밀 뿐이었다. 그걸


받아 들자 속이 더 욱신거렸지만 나는 간신히 눈물을 참았다.

엄마는 말도 못 하고 눈을 글썽이고 있었다. 졸지에 불효자가 되고 만 나는 코를 훌쩍이며 멋쩍게 중얼거렸다.

“엄마,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엄마 그동안 고생 많이 했잖아. 잘 키워주셔서 고마워요. 이제


엄마도 많이 행복해져야지.”

“……난 늘 행복했어, 시현아.”

“……응, 나도 그랬어.”

눈물을 글썽이는 사이, 불판 위에선 장어가 노릇노릇 익어가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씻어낸 엄마가
갑작스레 태도를 바꿔 쾌활하게 외쳤다.
“어이구, 이게 무슨 궁상이야! 아들아, 술이나 마시자!”

나는 술병을 들어 엄마 잔을 반만 채웠다.

“응. 엄마, 근데 내일 일은?”

“내일의 내가 어떻게든 할 거야. 이따 너 엄마 숙취해소제 사줘.”

“알았어. 근데 그분, 엄마 이러는 건 아셔?”

“이 녀석이……!”

엄마의 손이 뻗쳐왔다. 아프지 않은 꿀밤 한 대를 맞으며 나는 손수건을 내 주머니에 넣고 술잔을 들었다.

엄마가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라주었다. 넘칠 것 같아서, 나는 얼른 술잔에 입을 댔다. 옆에서 얕은 한숨


소리에 실린 웃음소리가 작게 울렸다.

화제는 자연스레 엄마의 재혼 쪽으로 쏠렸다. 조만간 새아버지가 되실 그분은 작게 사업을 하고 계시고, 7 년
전 이혼을 하셨으며, 올해 고 2 가 된 딸이 하나 있다고 했다. 엄마는 양가 식구들끼리 모여 간단한 식사
자리를 마련하는 걸로 식을 갈무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쯤?”

“네 허락도 받았으니까 너무 늦지 않게 하려고. 너 합격 발표 난 뒤면 될까?”

합격 발표는 두 달 뒤, 8 월 말이었다.

“엄마 편한 대로 해요. 난 아무 때나 괜찮아.”

“조만간 자리 만들게. 인사해야지.”

상견례를 가리키는 말에 나는 순순히 수긍했다.

“알았어. 정해지면 말해줘요.”

그것을 끝으로 우리는 다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장어를 먹었다.


그렇게 나온 음식을 거의 해치웠을 때였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재준이 불현듯 뭔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어머니, 그럼 이제 그분 댁으로 가시는 건가요?”

“응.”

엄마의 대답에 나는 멈칫했다.

“……그럼 우리 집은?”

내 물음을 들은 엄마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나를 응시했다.

“시현아, 엄마 집 팔까 해.”

“아…….”

대꾸할 말을 잃은 나를 두고 엄마는 녀석에게 웃어 보였다.

“재준아, 우리 이사 가도 자주 만나자. 어차피 같은 서울 안인데 뭐. 그래줄 거지? 엄마가 너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재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당연한 말씀을. 저 보기 싫다고 하셔도 찾아뵐 건데요.”

그 말을 듣고서야 한평생 살아온 그 집을 떠나야 한다는 현실이 목전에 닥친 파도처럼 나를 뒤덮었다.

나는 그 집에서 태어나 자랐다. 집이 그곳에 있고, 엄마와 내가 그 집에 있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이 문제를 여태 직시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의 재혼은 단순히 엄마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직 독립하지 못한 나의 거취도 같이 걸린 일이었다.

그럼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당황한 나는 얼굴빛을 얼른 단속했다. 그러나 늦고 말았다. 나를 보는 엄마의 얼굴엔 미안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시현이는 엄마랑 같이 그 사람 집에 들어가자. 만나보면 알겠지만, 좋은 사람이야. 너 보고 싶다고, 같이


살면 좋겠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었어.”
이 경우엔 엄마의 말대로 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입 밖으로 대답이 쉽게 나가지
않았다.

정 내키지 않으면 따로 집을 얻어 나가 살겠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를 데려가고 싶을 엄마를


생각하면 그 말도 쉽사리 꺼낼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으므로 생각해 보겠다는 어정쩡한 말을 막 입에 담으려던 때였다.
진정하라는 듯 어깨를 툭툭 두들기는 손길에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시선을 마주한 녀석은 지극히 침착해 보였다. 그 태도에 불쑥 괜한 질문이 솟아올랐다.

넌 내가 우리 동네를 떠나도 괜찮아?

던지지 못할 질문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랬다. 지금 느끼는 껄끄러움과 불안의 밑바닥에는
녀석의 존재가 얽혀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 묻는 대신 내 몫의 물음에 답했다.

나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

평생 같은 동네에서 같이 살 수는 없다는 걸 모를 만큼 어리지 않은데도, 이 일은 고작 우리 사이에 물리적


거리를 만들 뿐이란 걸 모를 만큼 바보가 아닌데도, 앞으로도 그 집에, 그 동네에 계속 살겠다고 녀석처럼
떼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머뭇거리는 사이 녀석은 태연하게 웃으며 엄마에게 묻고 있었다.

“그런데 그분 댁은 어디신데요?”

엄마가 대답한 곳은 서울 남부에 있는 지명이었다.

“음……. 좀 머네요.”

“그렇긴 해.”

재준의 얼굴이 난감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표정이었다.

마재준은 우리 엄마나 선생님들, 관장님 같은 어른들 앞에서 가끔 저런 얼굴을 했다. 그리고 곤란한 기색이
깃들면 묘하게 처연해지는 녀석의 얼굴은 마주한 사람의 걱정과 근심을 단숨에 끌어 올리는 데 특효가 있었다.

녀석은 대개 얻고자 하는 바가 있을 때 꼭 이런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저 얼굴은 연기였다.

재준이 갑자기 폰을 꺼내 보란 듯이 지도 앱을 켰다.


“어머니, 거기 가면 현이 통학이 너무 힘들어지겠는데요.”

나는 곧 나이가 두 자리가 된 이후, 웬만한 일론 당황하지도, 걱정하지도 않게 된 뻔뻔스러운 애가 이


상황에서 연기를 시작한 까닭을 알아차렸다. 물론 그 속마음까지도. 지금 녀석은 속으론 신이 났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랑 먼저 이야기도 안 하고 자기 멋대로 굴려고 들다니.

얄밉고 괘씸하기 짝이 없는 새끼였다. 그 새끼를 일단 밖으로 끌어내야겠다고 마음먹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의자가 움직이지 않았다. 옆을 돌아보자 벌써 팔을 뻗친 재준이 내 의자 등받이를 누르고 있었다.


힘을 줘 밀어도 의자가 밀리지 않을 정도니 어지간히 세게 누르고 있을 텐데도 녀석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온했다.

어이가 없어 녀석을 째려보았다. 녀석의 눈에 짧게 이채가 스쳤다. 매섭게 번뜩인 그 눈빛은 방해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덮쳐왔던 불안은 물벼락 맞은 성냥불처럼 맥없이 꺼져 버렸다.

네가 날 가만두지 않으면, 뭘 어쩔 건데. 내 껌딱지 주제에.

분명 조금 전까지 슬펐는데, 갑작스레 닥친 이 상황이 이제는 그냥 웃겼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저 수작에


놀아나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우리 엄마만 심각했다.

“그래……. 그게 조금 걱정이긴 하네.”

의자 등받이를 누르던 손을 자연스레 거둬간 재준이 엄마 쪽으로 자기 폰을 돌려놓았다.

“일단 말씀하신 역으로 찍어봤는데, 최단 거리도 한 시간 반이 걸리고 환승을 세 번이나 해야 하는데요?


만약에 그분 댁이 역에서 좀 멀면 마을버스까지 한 번 더 타야 하니까…….”

“세 번……. 세 번은 너무 많다. 난 거리만 생각했지 그 생각은 또 못 했네. 어떡하지. 통학하다 애 기운 다


빠지겠어.”

화면에 뜬 경로를 살핀 엄마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는 말에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 엄마까지 걱정시키다니.

불여우 같은 놈은 차치하고, 나는 우선 엄마를 달래기로 했다.


“엄마, 괜찮아. 한 학기밖에 안 남았잖아.”

“그럼 졸업할 때까지만 학교 부근에 방 잡아줄까? 졸업하면 엄마랑 같이 살고.”

“우리 학교 부근 집세가 얼마나 비싼데 뭘 그렇게까지 해. 한 학기래 봤자 넉 달도 안 되는걸.”

“그래도…….”

“걱정하지 마. 편도 두 시간씩 걸려서 통학하는 애들도 많아.”

“음…….”

엄마가 탐탁지 않은 기색으로 침묵에 잠겼다.

그사이 재준이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녀석이 조금 얄미웠으므로 나는 모르는 척했다. 그랬다가 또 찔렸다.
내버려 두면 옆구리가 쑤실 때까지 찔러댈 기세였다.

참다못해 옆을 돌아보았다. 일견 태연하고 침착해 보이는 얼굴로 녀석이 또 한 번 다그쳤다.

방해하지 말고 제발 가만히 있어.

내 거취 문제를 두고 당사자인 나는 입도 못 떼게 하려는 웃긴 새끼였다. 다 차린 밥상에 내가 깽판 놓을까


싶어 엄마 눈을 피해 자꾸 째리는 걸 보면 그 웃긴 새끼는 지금 나름대로 필사적이었다.

근데, 내가 더 웃긴 새끼였다. 자기 멋대로 구는 저 새끼가 귀여워 보이다니.

그랬다. 짧은 평생 나는 늘 이랬다. 아주 어릴 때부터 녀석이 이런 식으로 굴 때마다 어영부영 받아주다 결국


여기까지 와버린 거였다.

내 전투 의지가 꺾인 걸 그 와중에 알아챈 녀석이 탁자 아래로 내 손을 꽉 잡았다.

보이지 않으니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 새끼가 엄마 앞에서 못 하는 짓이 없었다. 그렇다고
떨어지라는 티를 낼 수도 없어서 나는 잠자코 그 손을 아프도록 맞잡았다.

손으로도 말을 하는 새끼였다. 녀석의 손은 시끄럽고, 따뜻했다.

돌연 가슴이 찡했다.

넌 내가 그렇게 좋아?
이 오랜 시간 한결같이 곁에 머물러 줄 만큼, 조금이라도 멀어질까 매 순간 안달하며 전전긍긍할 만큼?

또 녀석에겐 던지지 못할, 또 던질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몫의 물음에 스스로 대답했다.

나를 보고 짓궂게 웃은 재준이 손을 놓고 집게를 들었다. 얘는 벌써 한참 전에 엄마에게서 집게를 빼앗았다.

솔직히 얘가 구운 게 엄마가 구운 것보다 좀 많이 맛있었다. 집게를 도로 내놓으라고 닦달하지 않는 걸 보면


엄마도 생각이 비슷한 게 분명하다.

장어를 살살 뒤집어가며 재준이 평온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게까지 하실 거 없이 그냥 현이 저희 집에서 같이 살면 되겠네요.”

“아니, 재준아.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너한테 그렇게까지 신세를 지니?”

아들 친구와 아들의 암묵적 담합을 눈치채지 못한 가엾은 엄마가 손사래를 쳤다. 녀석의 얼굴에 수심이
깃들었다. 뻔뻔스레 해대는 연기를 나는 조금쯤 남 일 같은 기분으로 감상했다.

“신세라니, 그런 서운한 말씀 마세요. 어차피 지금도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인데…… 가뜩이나 요새 엄마도 안
계셔서 저 너무 외로워요. 집에 남는 방도 많고요.”

엄마는 망설이는 듯했다. 녀석은 때를 놓치지 않고 밀어붙였다.

“그리고 현이랑 있으면 제가 더 좋아요. 현이 요리도 잘하잖아요. 얘 때문에 그동안 안 굶었어요, 제가.”

“어머…… 그랬어?”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엄마가 의외라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내 일천한 요리 실력이야 엄마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으므로 엄마의 의혹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두 해 동안 손가락 까닥 않고 얻어먹기만 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어정쩡하게 웃었다. 기분이


매우 이상했다. 뭐랄까. 마음의 준비도 없이 천하에 다시 없을 불효자가 된 기분이랄까.

내가 불효자가 된 기분을 만끽하는 사이, 제일 통통하고 맛있게 익은 장어 한 점을 집어 엄마의 앞접시에 곱게


놓은 재준이 이어 술병을 들었다. 엄마는 홀린 듯이 잔을 받았다.

“그러니까 어머니만 괜찮으시면 저희 집에서 같이 살게요.”

엄마는 이미 반쯤 넘어간 기색이었다.


“정말 그래도 되겠니?”

“그럼요. 저야 진짜 좋죠.”

엄마 잔에 자기 잔을 대며 재준이 무척 예쁘게 웃었다.

괜히 목이 타서, 나는 사이다를 내 컵에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탄산으로 목구멍이 따끔거려서 눈살을


찌푸렸을 때였다.

“현아, 넌 어때?”

녀석은 담담한 척 내 의사를 물었다. 침착한 모습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나를 보는 눈에 서린 말은 퍽 흉흉했다.

거절하기만 해봐. 나 여기서 운다.

징한 새끼 같으니라고. 안 울기로 약속했던 거 아니었나.

십 년 넘게 흘려보낸 지금에야 하는 생각이지만, 돌이켜 보면 해묵은 그 약속은 처음부터 엉터리였다.

무슨 일이 생겨도 녀석은 나를 놔주지 않았을 테니까 자기보다 좋아지는 사람 생기면 놔주겠다던 말은


개소리였다. 또 밀어내지 말고 곁에 있어달라는, 자기를 좋아하려고 노력하라는 그 요구는 처음부터 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어리고 불안했던 그 여름, 우리가 나누었던 그 엉터리 약속을 이제는 조금쯤 수정해야 할 때일까. 녀석이 지금
울겠다고 협박하는 것도 어쩌면 그러자는 뜻이려나.

차분하게 나를 보는 녀석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갑작스럽잖아. 제안은 고마워. 생각 좀 해볼게.”

* * *
양평에서 돌아온 후, 엄마를 먼저 집에 모셔다 드린 우리는 나란히 솔숲으로 산책하러 나왔다. 실은 나는 그냥
들어가 자고 싶었는데, 따라 나오라고 눈으로 윽박지르는 새끼에게 못 이겨 반쯤 억지로 끌려 나왔다.

“생각은 무슨. 그냥 너 이제 나랑 같이 사는 거야.”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골이 나 있었다. 자기 말 바로 안 들어줬다고 몇 시간을 못 버티고 사람을 쪼아대다니,


하여간에 쪼잔한 놈이었다.

“……아직 결정된 거 아니잖아.”

골을 내면서도 수풀 속을 살피던 재준이 코웃음을 치며 나를 돌아보았다. 하얀 조명에 비친 녀석의 얼굴은


핏기없이 창백했다. 그저 조명 때문일 텐데도 차갑고, 또 지쳐 보이는 그 얼굴에 괜히 속이 아렸다.

뭐라 말을 하려던 재준이 입을 다물고 내 손을 잡았다. 어느새 우리는 산책로 깊숙이 들어와 있었고, 주변은
조용해져 있었다.

사람이 없어지기가 무섭게 민망한 짓을 시작한 녀석이 장난스레 속삭였다.

“너 나랑 같이 안 살 거야?”

“……같이 살아야 해?”

사정이 생겨 친구 집에 반년 신세 지게 된 상황. 객관적으로 보면 별거 아닌 일이었다.

하지만 나도 녀석도 알고 있었다. 이 문제는 단순한 거취 문제가 아니라 지난하게 이어져 온 이 기묘한 관계의
변곡점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그래서일까. 내심 녀석의 말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좀처럼 그러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나는 아직도 조금은 무서운 걸지도 모른다. 가슴은 아직도 수런거리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내가 찌질하게 머뭇거리는 꼴을 한두 번 본 게 아닌 녀석은 내 망설이는 태도에도 아랑곳없이 내 손을


꽉 쥐며 농담조로 투덜거렸다.

“너, 나랑 결혼 안 할 거야?”

“…….”

“하겠지. 할 수밖에 없을 텐데.”

“…….”
“결혼하고도 설마 따로 살자고 할 건가, 우리 자기는.”

녀석의 얼굴에 갑자기 불신의 빛이 어렸다.

“설마 정시현……. 너 진짜 그러는 거 아니지?”

내가 그동안 얘 피를 좀 많이 말리긴 한 모양이었다. 근데 웃긴 새끼였다. 저런 이상한 의심은 하면서 결혼은


자기랑 안 할 거란 의심은 또 안 했다.

결혼이라.

현실감이라곤 없이 까마득하기만 한 말을 머릿속에서 한 번 굴려본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뭐라는 거야, 정말.”

“넌 충분히 그러자고 할 거 같아.”

여기서 뭐든 말꼬리를 잡으면 결혼 이야기까지 끌어내 한참 입씨름을 해야 할 게 뻔했으므로 나는 침착하게


말머리를 돌렸다.

“근데 우리 어디 가?”

장어구이집에서 집 문제로 엄마 혼을 쏙 빼놓은 녀석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한술을 더 떴다.

‘그동안 저희 공부만 하느라 바빴잖아요. 어머니만 괜찮으시면 복학하기 전에 한 달쯤 쉬면서 같이 여행하고


싶어요. 그간 계속 같이 가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벌써 졸업이 목전이네요. 현이는 졸업하고 바로 법인 들어갈
텐데…….’

‘어머, 그것도 그렇다…….’

아직 붙는다는 보장도 없는데 녀석은 헛소리를 해댔다. 그런데 그 말에 홀랑 넘어가 버린 우리 엄마는 그간 안


받아 간 용돈 모아서 줄 테니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오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허락해 주었다.
또 말을 돌린다고 지그시 사람을 째리던 녀석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바뀐 화제를 받았다.

“어디 가고 싶은데?”

조금 심통 난 창백한 얼굴이 그 와중에 예뻤다.

진짜 이 새끼 얼굴이 조금만 덜 예뻤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말리면서 살지는 않았을 텐데. 인생은 정말 쉽지


않다.

나는 셀 수 없이 반복한 뻔한 상념을 대강 갈무리하고는 막 머리를 스친 지명을 꺼냈다.

“……팔공산 갓바위?”

“자기, 나랑 결혼하게 해달라고 부처님한테 빌려고? 뭘 그렇게까지. 난 언제든 준비돼 있어. 내친김에 지금
당장 할까?”

왜 기껏 돌린 화제가 다시 돌아온 걸까.

나도 녀석을 째려보았다. 기세등등하게 내 시선을 받던 녀석의 눈이 곧 웃음기를 머금고 휘어졌다.

“국내 여행하자고?”

나는 그제야 눈에서 힘을 풀었다.

“응. 엄마 일도 있고 하니까…… 너무 멀리 가긴 좀 그래. 내가 도와드려야 할 일이 있을 수도 있잖아. 게다가


우리 엄마도 일하느라 바쁘셔서 아직 해외여행 길게 못 해보셨는데 나만 홀랑 놀러 가려니까 마음이 안 좋아.”

“……네 말도 맞네. 그렇다고 아직 내가 보내 드리기도 좀 그렇고.”

짐짓 심각한 척 고개를 끄덕인 재준이 흠,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우리 엄마 여행을 자기가 보내 드리겠다는 헛소리에 꼬리를 잡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오늘의 대화는 결혼의 루프를 돌다 내 기운만 빠지고 끝날 게 뻔했다.

“너 저번에 만화책 보면서 맛집 투어하자고 했잖아. 그거 하면 안 돼?”

“왜 안 돼. 돼.”

선뜻 대답한 재준이 설핏 웃으며 손을 놓고는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나는 어깨 너머를 살피려다 말았다. 뭐,


볼 테면 보라지. 뽀뽀도 아니고 이 정도야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발을 멈춘 재준이 나를 당겨 안았다.

방심할 틈을 안 주는 새끼였다. 끌어안는 것으로도 모자라 녀석은 또 자기 멋대로 내 머리칼에 입술을


찍어대고 있었다. 늘 햇빛 냄새가 나는 녀석의 셔츠에선 희미하게 연기 냄새가 났다.

“야!”

“안 되겠다. 자기야, 뽀뽀하자.”

“야…….”

녀석은 내 말을 무시하고 내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앞으로 나아갔다. 그에 이끌려 걷던 중 문득 이제 정말


우리 집이 없어진다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좀 이상해. 우리 집이 없어진다니…….”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많이 서운하면 아예 사줄까? 거기서 나랑 살래?”

아무리 변두리 동네의 허름하고 낡은 집이라도 집은 집인데 마치 사탕이라도 사주겠다는 양 해대는 말에 기가


막혔다.

“그런 짓 하기만 해봐.”

대답 없이 더 조용하고 음습한 곳까지 성큼성큼 나아간 재준이 나를 마주 세우고는 가만히 웃었다.

스물여섯의 녀석은 이제 햇살 드는 창가에 앉아 책을 점잖게 뒤적이면 딱 어울릴 만한 온화하고 다정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새삼스레 그 사실이 웃겼다.

지금도 녀석의 그럴싸한 겉모습과 알맹이 사이엔 약간 괴리가 있었다. 그 괴리는 어릴 적에 더 심했다. 아기
천사 같았던 마재준은 빈말로도 얌전한 놈은 아니었다.

“옛날 생각 난다. 너 우리 집 옥상에서 날뛰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뻔한 적도 있었는데.”

뜬금없는 말을 꺼내놓고 보니 가슴이 더 허전했다.

“그거 우리 여덟 살 때야. 그때 너 나 넘어가려는 거 잡아당기다 엎어져서 손바닥 다 까졌었잖아. 화분 하나


박살 나고.”
내가 꺼낸 이야기에 살을 붙인 재준이 내 팔을 끌어가 자기 허리에 감고는 나를 끌어안았다. 밀어내기에는
맞닿은 녀석의 온기가 너무 따뜻했다. 가만히 있으니 이내 설핏 웃은 녀석이 등을 도닥였다.

편안한 손길에 마음이 물러졌는지 엄마 앞에서 참았던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응……. 너 그때 진짜 크게 울었는데.”

“어. 너네 옆집 아저씨가 시끄럽다고 창문 열고 소리도 질렀잖아. 너는 아저씨한테 나한테 소리 지르지 말라고


대들고, 나도 같이 화내고, 애하고 어른이 싸우니까 동네 사람들 다 구경하러 나오고……. 결국 그 쪼잔한
아저씨가 너희 집까지 찾아와서 따지는 바람에 우리 엄마랑 너희 아빠가 차례로 우리 끌고 그 집에 사과하러
가고……. 아주 개판이었어.”

그때 그 아저씨의 화난 얼굴은 꽤 무서웠었다. 그런 표정으로 작은 녀석에게 겁을 줘가며 혼내는 게 너무


싫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잘못이 맞는데도, 나는 잘잘못을 따지기도 전에 그냥 얘가 욕먹는 게 싫고 서러워서


소리부터 질렀었다.

“그때 우리 자기 진짜 멋있었는데. 내가 그때 또 반했잖아.”

“…….”

아마 지금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또 비슷한 짓을 하겠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제는 녀석이 나보다 열술


더 뜨니 내가 나설 일이 없지만.

괜히 코가 시큰해서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피식 웃은 재준이 내 등을 꼭 당겼다.

“내가 깨먹은 너네 집 화분만 모아도 진작에 꽃집을 차렸을 거야. 진짜 너희 집에서 별별 일이 다 있었다.
침대에서 하도 뛰다 매트리스 가라앉을 뻔한 날에는 너희 엄마도 못 참고 우리 혼내셨었잖아. 팰 데도 없는
이것들을 어쩌지 하고 보시던 얼굴 아직도 선명하다.”

“그런 일도 있었네.”

“이제야 드는 생각이지만, 네 방 벽에 같이 낙서했던 그림들, 그거 사진이라도 찍어놓을걸. ……이렇게 되고


보니 아쉽다, 나도.”

어릴 적 열심히 그렸던 그 낙서들은 이미 한참 전에 새로운 벽지에 덮여 사라졌다. 곧 그 그림을 덮었던


벽지마저 새로 덮이거나, 뜯어지게 될 것이다.

시간은 많은 것을 변하게 한다. 변화엔 결말도, 종착지도 없다. 그냥 계속 흐르고, 변할 뿐이다. 그 흐름을
비껴 갈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

나는 녀석의 목덜미에 뺨을 댄 채 중얼거렸다.


“뭔가 허전하고 쓸쓸해.”

고개를 물린 재준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괜찮아. 우리는 아직 여기 있잖아.”

“……응.”

가슴에 고여 있던 것들이 울컥 흘러넘친 순간 장난기 어린 얼굴로 웃은 재준이 내 목덜미에 손을 밀어 넣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뺨에 입술이 닿았다. 입술은 곧 입술로 옮아 갔다가 떨어졌다. 눈이 마주쳤다. 어둠에 물든 눈은 짓궂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 자기 또 울려고 하네.”

“……아니거든.”

“아까도 쓸데없는 생각이나 해서는.”

“쓸데없는 생각?”

재준이 다시 입술을 겹쳤다. 소리가 나도록 세게 입을 맞춘 녀석은 이어 뺨과 눈가에도 입술을 댔다. 내처


이마에도 입술이 닿았다.

“너 두고 안 죽어. 절대.”

“…….”

“당연히 너도 나 두고 갈 리가 없고. 그런 짓 하기만 해봐. 그날 나도 죽는 거야. 알았어?”

농담조로 툴툴대는 그 말을 이해하자마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에 놀라 당황하기도 전에 등에 감긴 팔이 몸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야, 말이 되는 소릴 해…….”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다. 그런데 그 개소리에 가슴이 짓눌려 터질 것 같았다. 살아 있으므로 언젠가 올


수밖에 없는 우리의 마지막 날 따위, 그 모습도 형태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살아 있는 존재는 누구도 자신의, 가까운 이의 소멸을 직시하지 못하고 산다. 아빠가 그렇게 일찍 떠날 줄
알았을까. 예기치 못한 아빠의 이른 죽음에 남겨진 엄마와 나는 오래도록 괴로워했다.

어쩌면, 우리에게 남은 시간도 그리 길지 않을지도 모른다.

눈앞이 흐렸다. 녀석의 옷자락에 눈물을 쏟으며 나는 이 어처구니없고, 그렇다고 마냥 무시할 수 없는 무서운
생각을 지워 버리려 애썼다. 그러나 한번 깃든 망상은 손끝에 깊이 박힌 가시처럼 좀처럼 뽑아낼 수 없었다.

녀석은 옅은 한숨을 웃음으로 감추었다.

“우리 자기, 내 말에 너무 감동해서 우는 거지? 자기 먼저 죽으면 나 순장해 달라고 할 거니까 절대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 돼.”

너무 목이 메어서 닥치라는 말도 못 하고 훌쩍이는 사이, 관자놀이에 부드럽게 입을 맞춘 녀석이 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허벅지를 더듬는 갑작스러운 짓에 놀라 흠칫했을 때였다.

“이럴 때 잡아먹을 거면 이십 년 도 닦으면서 기다렸겠냐? 긴장 풀어. 안 잡아먹어.”

헛소리와 달래는 말을 돌아가며 지껄인 녀석이 괘씸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 이마를 살짝 부딪쳤다. 곧 다른 쪽


주머니에도 손이 들어왔다.

긴장하지 말라는데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녀석의 손목을 붙잡았다.

“너 뭐 해.”

대답은 없었다. 대신 주머니에 넣고 잊어버렸던 녀석의 손수건이 눈가에 닿았다.

그 세심한 손길에 오랫동안 속에 숨겨두었던 마음에 켜켜이 쌓인 더께가 눈물과 함께 닦여 나갔다. 새삼스레
까발려져 드러나 버린 마음을 나는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든, 내가 마지막으로 눈에 담는 사람이 너였으면 좋겠다.

네 눈에 담길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아.

나 말고는 아무도 너를 보지 못했으면, 세상에 우리 둘만 있었으면 좋겠어.

아직 들려줄 자신이 없는 말을 억누른 나는 손수건을 빼앗고 한 발짝 물러서서 눈가를 닦아냈다. 울보는 내가


아니라 재준이었는데 시간은 이조차도 바꾸어놓았다.

가만히 지켜보던 재준이 내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네 방 비워놓고 기다릴게. 여행 다녀오면, 우리 같이 살자.”

“……응.”

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덧붙였다.

“자꾸 울어서 미안해.”

재준이 입가를 끌어 올렸다.

“넌 울 때 제일 귀여우니까 괜찮아.”

“…….”

맥이 빠진 나머지 나는 귀가 썩을 것 같은 말에도 대꾸하지 못했다.

재준이 부러 짓궂게 속살거렸다.

“진짜야. 이거 비밀인데…… 그래서 내가 밤마다 너 엄청 울려.”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사람이 오래 우울할 틈을 안 주는 새끼였다. 작게 소리친 나는 마지막으로 눈가를 훔치고는 손수건을 접어


내밀었다.

“……고마워.”

이 인사에 담긴 복잡한 감정을 읽어주길 바라며 눈을 들었다.

재준이 아련하게 웃으며 눈썹에 입을 맞추고는 내 손을 잡았다. 남은 산책로를 마저 걸을 생각인지 천천히


걷기 시작한 녀석과 발을 맞췄다.

“너랑 한 달 여행도 하고, 같이 살 거 생각하니까 좋아서 죽을 거 같아. 실은 너 지금 너무 귀여워서


키스하고 싶어 죽을 거 같은데, 그랬다간 협심증 와서 진짜 죽을 거 같으니까 오늘은 뽀뽀로 참을게.”

대체 죽을 거 같다는 소리를 몇 번 하는 거야, 이 웃긴 새끼가. 재수 없게.

녀석이 주절주절 내뱉은 말에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나는 녀석의 손을 잡아끌었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내 뒤를 따르던 재준이 의심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 설마 지금 우리 자기, 날 죽이려고 그러는 거야?”

“……입 좀 다물 수 없어?”

“헐, 진짜야?”

“…….”

“정말?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

“우리 자기 오늘 장어 먹고 이러는 거야? 안 되겠다. 너 앞으로 맨날 장어 먹어.”

“……마재준, 좀 닥쳐.”

귀에 열이 오르고 있었다. 눈물이 흘렀던 뺨도 조금 화끈거렸다. 하지만 나는 꾹 참고, 방금까지 있었던


어둡고 인적 드문 곳으로 돌아가서는 녀석을 끌어안았다.

욱신거리던 심장이 너무 가쁘게 뛰고 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들었다.

엉겁결에 나를 마주 안은 녀석은 묘하게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맨날 사람을 쪼아대더니 정작 상황이 이렇게


되자 꽤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그 얼굴에 또 웃음이 나왔다.

설마 정말 죽을 거 같아서 저러는 건 아니겠지.

“너, 절대 죽으면 안 돼…….”

부끄러워서 내가 먼저 죽을 거 같으니까.

고개를 들어도 녀석의 입술은 닿지 않았다. 어쩔 수 없어서, 나는 녀석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순순히 끌려와 고개를 숙인 녀석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다. 맞닿은 입술은 따뜻했다. 나는 망설임을 떨치고
혀끝으로 녀석의 입술을 살짝 핥았다. 말캉하고 부드러운 살은 머금어보고 싶은 감촉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그 순간 허리에 팔이 감기고 머리칼에 손이 들어왔다. 목을 단단히 떠받친 재준이 입술을 열고 고개를


기울였다. 혀가 얽히고, 숨이 오갔다. 젖은 살이 섞이는 눅눅한 소리에 귀가 달아올랐다.
누구도 우리에게 가르쳐 준 적 없는 짓은 자연스레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어째서 사람들이 아무하고 키스하지
않는지를, 또 왜 입으로 이런 짓을 하는지를 알았다. 먹고 싶다던 녀석의 개소리는 어쩌면 개소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어이없는 깨달음과 함께.

조금 길었던 세 번째 키스에선 술맛이 났다.

입술이 떨어진 후에도 녀석은 좀처럼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화끈거리는 내 귓바퀴를 입술로 지근대던 재준이
속삭였다.

“나 너무 좋아서 지금 죽을 거 같긴 한데…….”

그 목소리에 등이 흠칫거렸다. 이 이상은 역시 안 될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녀석을 살짝 밀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러움은 키스가 끝나고서야 밀물처럼 몰아닥쳤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어서 숨이 고르지 못했다. 아까부터
화끈거리던 귀는 아예 타들어갈 것 같았다.

“……죽을 거 같단 소리 좀 그만해. 그리고 이제 떨어져.”

낮게 웃으며 순순히 몸을 물린 재준의 얼굴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긴장한 나는 숨을 삼켰다.

“현아, 너무 무리하지 마.”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나는 얼른 돌아서며 작게 대답했다.

“……무리 아니야. 그냥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재준이 내 머리칼에 입술을 눌렀다. 등에 닿은 녀석의 가슴도 두근거리고 있었다.

“기다린다는 말 신경 쓰였어? 그거 농담인 거 알잖아.”

농담으로 여태 사람을 그렇게 괄시했냐고 한마디 해주려던 참이었다. 몸을 감은 팔에 힘이 실렸다. 꼼짝 못


하게 나를 옭아맨 녀석이 또 귓바퀴에 입을 맞췄다.

“넌 이미 내 건데 내가 뭘 더 기다리냐? 나 신경 쓰지 말고, 뭐든 너 맘 가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얼어붙었다. 그 말에 짓눌린 가슴이 아팠다.

넌 정말 왜 그러냐.

너도 나 신경 안 쓰고 네 맘 가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도 있는 거잖아.
정작 너는 그러지도 못하면서.

……안 그럴 거면서.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녀석의 손을 꼭 쥐었다.

6 장 Sink in

일주일 후, 우리는 여행을 떠났다.

둘 다 운동을 좋아했으므로 자연스럽게 여행은 액티비티 위주로 굴러가게 되었다.

동해 고성에서 재준이 이참에 서핑도 해보라고 권유한 것이 시작이었다. 녀석은 훌륭한 강사여서 나는 어렵지
않게 파도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원래 물을 좋아하는 나는 서핑이 몹시 재미있었다. 사흘 동안 밥 먹고
서핑만 하다 고성을 떠났다.

그 후로는 발 닿는 대로 다녔다. 정해진 목적지는 없었다. 그냥 아무 때고 폰으로 검색을 하다 얻어걸리는


곳으로 갔다.

래프팅, 번지점프, 수상스키, 지프 와이어, 패러글라이딩 등등을 섭렵하다 못해 어느 날은 여행 떠날 때는


상상조차 못 했던 배낚시 체험까지 했다. 마재준은 선장님에게 생선회 뜨는 법을 배웠고, 갓 잡은 해물을 넣고
미친 듯이 맛있는 라면을 끓여 선장님의 폭포수 같은 찬사를 받았다.

한여름 성수기였고, 미리 행선지를 정하지 않았던 탓에 숙소 잡기가 곤란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지만 마재준은
그런 쪽으론 빈틈없는 새끼였다.

무슨 수를 쓰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우리는 다행히 차나 길바닥에서 자는 일 없이 지붕 있는 숙소에서 매일 발


뻗고 잘 수 있었다. 성수기에 사치스럽게도, 방은 늘 따로였다.

공부하는 데 쏟던 시간과 에너지를 노는 것만으로 소모하기는 어려웠던 탓에 나는 가끔 혼자 잠자리에 누워


우리의 앞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뒤척이며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봐도 결론은 하나였다. 녀석이고 나고, 떨어질 생각 따윈 없으므로 앞으로도
우리는 이렇게 살 것이었다. 마치 인력으로 묶여 억만년을 같이 돌 수밖에 없는 쌍성계의 별들처럼.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가끔 녀석의 방으로 찾아갈까 싶은 충동이 드는 날도 있었다. 나는 이제 열일곱 살도
아니었고, 그때처럼 재준이나 내가 버티지 못하고 도망갈까 봐 겁이 나지도 않았다. 다만 관성을 벗어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이럴 때 재준이라도 평소에 하던 만큼만 집적거렸으면 대충 휩쓸렸을 텐데, 양평에서 돌아온 그날 밤 솔숲에서


내가 저지른 짓에 꽤 놀랐던 모양인지 녀석이 내 몸에 손대는 빈도는 묘하게 줄어 있었다.

그랬다. 시험 끝나기만 하면 가만 안 두겠다며 사람을 볶아대더니 그것도 말뿐이었다.

나는 재준이 왜 그러는지 알았다. 녀석도 나름대로 고집이 있었다. 왜 자기를 안 잡아먹고 내버려 두냐며 들들
볶아대면서도, 정작 내가 자기한테 휩쓸려 어영부영 관계가 변하는 게 싫은 거였다.

친구이기만 했던 우리의 관계는 열다섯, 녀석으로 인해 한 번 변곡점을 맞았다. 그 후로 녀석의 태도는


변함없이 확고했다. 그러니 이번엔 내 차례라는 뜻이겠지.

그 암묵적인 요구는 타당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러고 있는 까닭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었으므로 변곡점을 찍든
말든 움직이는 사람은 나여야 했다.

그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심지어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말까지 해놓고도, 막상 일을 저지르려니 쉽지


않았다. 밤마다 재준이 자기 방으로 떠난 후 혼자 천장을 보며 갈등하다 보면 슬그머니 이대로도 괜찮지 않나
싶은 속 편한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일쑤였다.

처음 만나서 20 년, 그 오랜 시간 동안 우리가 함께 만들어온 과거는 내 안에서 항상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날들을, 그날들을 있게 해준 우리를 나는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나는 녀석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많은 것이 뒤섞여 복잡다단했다. 나는 분명 녀석에게 발정했지만 녀석을


친구처럼, 동생처럼, 또 형처럼 여기는 마음도 컸다.

우정, 그리고 가족에게 느끼는 친애. 그런 감정들이 자꾸 벽이 되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여섯 살 때부터


볼꼴 못 볼 꼴 다 보며 자란 사이에 새삼스레 그런 짓을 하려니 아무래도 껄끄러웠달까.

사랑스럽고 소중한 상대와 꼭 살을 섞어야 하는 걸까?

나는 답하기 껄끄러운 이 질문을 오랫동안 이런저런 핑계를 대가며 묻어두기만 했었다.

지금보다 좀 더 어릴 적에는 녀석에게 혹시 다른 사람이 생긴다면 이 물음 때문에 고민하는 것조차 무용할 것


같아 모르는 척했고, 그런 슬픈 일이 도무지 생길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후에도 녀석과 그런 짓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아 미루어두기만 했다.

마치 번지점프를 앞두고 뛰어내리는 순번을 뒤로 미루고 싶은 마음과 비슷했다. 뛸 생각은 있지만 지금 뛰고


싶지는 않은, 그런 소심하고 안일하고 찌질한 생각이나 해가며 나이를 먹었다.

여행하는 동안 나는 해묵은 질문을 파내어 며칠을 두고 고민했다. 하지만 역시 나는 그 물음에 뚜렷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녀석을 찾아가지도 못했다.

그러나 녀석과 나란히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날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여행 일주일째 날이었다. 우리는 재준이 석 달 전에 광클해서 예약을 해두었다는 국립수목원 캠핑장에 도착했다.

요즘 전국에 캠핑장이 널렸는데 뭘 그렇게까지 했냐고 물었더니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날짜를 세어가며


예약하려고 난리 치는 곳은 얼마나 좋은가 싶어 그냥 해봤다나. 그 캠핑장 1 박 대여료는 2 만 원 남짓이라고
했다. 과연 광클을 부를 만한 금액이었다.

우리는 수목원에 머무르는 동안 별다른 대화도 없이 울창한 숲속을 산책하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차를 타고 나가 쏟아질 것 같은 별을 보고, 잠을 잤다.

텐트에서 같이 자야 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긴장했던 게 멋쩍게도 녀석은 손 닿을 때마다 해대던


포옹이나 머리칼에 입을 맞추는 짓조차 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가벼운 스킨십은 일상적으로 해왔던 터라
나는 그게 오히려 이상했다.

하지만 재준이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저 눈치 빠른 녀석이 내가 고민 중이란 걸 모를 리 없었다. 그


상황에서 같이 자게 되었으니 괜히 헛짓하다 불이라도 붙어 엉겁결에 사고라도 칠까 걱정스러웠던 거겠지.

또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닌데 텐트 안에서 그런 짓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온 사방을 둘러싼


까마득하게 높은 나무들의 신령스러운 기운에 감화된 걸지도 모르고.

그리고 수목원의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에 물든 사람은 녀석만은 아니었다. 이틀째 밤, 일찌감치 침낭에
들어가 불을 끄고 녀석과 나란히 누운 나는 결국 평소라면 입에 담을 엄두도 내지 못할, 그간, 아니, 스물
즈음부터 오래도록 혼자 고민해 왔던 질문을 녀석에게 던지고 말았다.

“너…… 내가 평생 너랑 섹스 안 한다고 하면 도망갈 거야?”

“…….”

시커먼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던 녀석은 내 질문에 놀랐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미쳤냐. 너 안고 싶어서 죽을 거 같지만 그거 안 한다고 죽진 않아. 근데 너 없으면 난 죽어. 그러니까 안


가. 아니, 못 가.”

평소라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덮쳐들어 뻔뻔스레 입술부터 들이밀었을 녀석은 내 질문의 의도를 읽었는지
얌전히 덧붙였다.

“나 신경 쓰지 말라고 했잖아. 현아, 난 지금처럼 평생 너랑 이렇게 살면 좋겠어.”

그 말이 거짓이 아닌 걸 알았다. 하지만 나는 다른 것도 알고 있었다.


“근데 너 나랑 하고 싶잖아.”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망설임이라곤 없는 대답을 들은 나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하나 더 던지기로 했다.

“왜 하고 싶어?”

“넌 안 하고 싶어?”

“……일단 대답부터 해주면 안 돼?”

왜 안 돼, 하고 피식 웃은 재준이 대답을 시작했다.

“일단 난 너 사랑하고, 너한테 몸이 반응하니까. 근데 이걸로는 네 질문 해결 안 되지? 그걸로 될 거면 우린


진작 하고도 남았겠지. 아니니까 지금 네가 이런 질문도 하는 걸 테고. 맞아?”

“……응.”

“별거 없어. 간단해. 난 그냥 좋은 건 뭐든 너랑 같이 다 하고 싶어.”

“……좋을까?”

내 찌질한 물음에 녀석의 목소리에 의혹이 서렸다.

“정시현, 너 설마 자위 한 번 안 해본 건 아니지……?”

깊게 내려앉은 어둠에 잠겨 녀석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일까. 나는 의외로 편안히 대꾸할 수 있었다.

“그건 아닌데. 그냥 그런 생각도 들어. 혼자서도 할 수 있는데 굳이 같이해야 할까.”

“너 자위할 때 내 생각 하지?”

지극히 심상한 어조로 노골적인 질문을 던진 녀석은 내가 가타부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럼 같이하면 되는 거 아냐? 밥도 혼자 먹을 때보다 둘이 먹을 때 더 맛있잖아. 같이 운동도 하고 밥도


먹고 놀러도 다니는데 섹스는 왜 같이 못 해.”

“……같이 논다고 다 섹스하는 건 아니잖아.”


“그거야 그렇지. 근데 서로 같이 있는 게 너무 좋다 못해 자위할 때 그 사람 생각까지 날 지경쯤 되면 대개
그 사람들은 같이 섹스도 해.”

“…….”

“우리야 너무 어릴 때부터 이러고 있었으니 이 상태가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거고.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몸에 사리가 생길 것 같긴 하지만.”

개소리 같으면서도 묘하게 설득력 있는 말을 곱씹고 있으니 재준이 작게 웃었다.

“정시현, 너 나 버리고 도망갈 거야?”

“……가게 놔둘 거야?”

“그럴 리가. 하나 더. 너 아직 나 못 믿어? 내가 너 놔두고 도망갈 거 같아?”

“아니.”

“그럼 하고 싶을 때 하면 되는 거 아냐? 그냥 편하게 생각해. 같이 밥 먹는 거랑 똑같은 거야.”

아무리 그래도 밥 먹는 거랑은 결이 다른 문제 같았지만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볼게.”

“나 십 년 넘게 공력 닦아서 이제 괜찮아. 급할 거 없으니까 천천히 해. 아, 우리 조만간 결혼할 거니까


그건 꼭 검토 사항에 넣어.”

“……뭐라는 거야. 근데 너 웃긴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주기적으로 이상한 소리 하면서 사람을 닦달해
놓고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나도 사람인데 몸과 마음이 따로 놀 수도 있는 거 아니냐.”

“…….”

“너도 그렇잖아. 나랑 하고 싶은 주제에 옆에 지금 날 두고도 덮치긴커녕 별스러운 질문이나 하고 있잖아. 안


그래?”

나는 침묵으로 녀석의 말에 수긍했다. 재준이 농담조로 덧붙였다.

“많이 컸다, 정시현, 이런 질문도 하고. 이십 년 더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앞으로 십 년이면 될 거


같네.”

“…….”

“되게 웃긴다. 나나 너나 상대 생각하면서 자위하는 주제에 나란히 누워서 한다는 게 이런 대화라니. 남들이
우리 이야기 들으면 미쳤다고 할걸.”

이번에도 녀석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이어 나는 쓸데없는 생각만 많은 나 자신을 돌아보고 잠시 반성했다.

“근데 난 너 그래서 좋아. 너 아니면 내가 누구랑 이십 년을 이러고 있겠어.”

“…….”

낄낄 웃던 재준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알아. 너 나랑 자면 지금 상태가 혹시 변할까 봐 그게 무섭고 껄끄러운 거지?”

나는 속을 꿰뚫어 보는 말에 순순히 수긍했다.

“응.”

재준이 장난스레 웃었다.

“근데 안 그럴걸. 솔직히 섹스만 안 했지 우리가 지금까지 한 게 연애가 아니면 뭐냐?”

그 말도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더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잠자코 눈을 감았다.

그날 밤에도 우리는 좁은 텐트 안에 나란히 누워 아무 일 없이 잘 잤다. 떠나는 날 아침, 나는 어렵지 않게


사람들이 광클을 하는 이유를 알았다.

* * *
신령스러운 숲을 떠나 속세로 돌아온 우리는 그날 이후 다시 다른 방을 썼고, 경상도 쪽으로 먼저 내려가
전라도 쪽으로 이동하는 여정을 밟으며 본격적으로 맛집 투어를 시작했다. 재준이 미리 골라둔 곳도 가고, 그
동네 분들에게 물어 찾아가기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역시 목포의 한 허름한 가게에서 먹은 홍어였다. 코를 찌르는 냄새와 더불어 삼킬 때면


목구멍까지 찌릿한, 정말이지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살갗에 소름이 돋을 것 같은 충격적인 맛이었다.

먹을 때마다 오만상을 써가면서도 나는 수육과 김치를 곁들인 홍어 삼합을 막걸리까지 곁들여 다 해치웠다.
이걸 대체 왜 먹는 걸까, 하고 주변 아저씨 아주머니에게 들리지 않게 소곤대던 녀석도 결국 나와 비슷하게
인상을 구긴 채 접시를 비우는 데 한몫했다.

그렇게 우리는 20 일의 강행군을 거쳐 완도항에 와 있었다. 며칠 전 해남 땅끝 마을에서 재준이 기왕 남해


끝까지 왔으니 제주에도 가자고 했기 때문이었다.

서울 촌놈인 나는 당연히 근처 공항에서 비행기를 탈 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가 탈 교통수단은 비행기가


아니라 배였다. 완도에서 제주까지는 가장 빠른 페리로 1 시간 40 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여태 제주가 부산에 더 가깝다는, 근본을 알 수 없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약간 놀랐다. 내친김에


오랜만에 한국 전도를 띄우고서야 나는 제주도가 전라남도 쪽으로 훨씬 치우쳐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새삼
되새겼다.

우리가 탈 배는 오후 3 시 출발 예정이었다. 1 시간 40 분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페리는 규모가 작아서 차량


선적 예약이 이미 끝나 버린 탓에 우리는 2 시간 40 분이 소요된다는 더 큰 여객선을 탈 예정이었다.

차량 선적을 위해 1 시 50 분쯤 항구에 도착한 우리는 막 차를 싣고 터미널로 와 발권을 마친 참이었다.

살면서 배라곤 타본 적이 없는 나는 막연히 버스나 기차 같은 좌석 배치만 생각했다. 그러나 배표 예약을 하기


위해 이틀 전 폰을 들여다보던 녀석을 통해 이 배에는 의자 없이 방만 있다는 3 등실과 의자가 있는 2 등실,
그리고 무려 2 층 침대 두 개가 있다는 1 등실과 싱글 베드 두 개가 딸린 특등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행기 퍼스트 클래스는 나중에 태워줄 테니 일단 여객선 특실부터 타보자는 이상한 말을 남기며 녀석은 예약을
마쳤다.

태풍 같은 기상 악화만 없다면 배는 거의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어쩐지 걱정을 떨칠 수가 없어서


나는 오늘 숙소를 나서자마자 멀미 방지 패치까지 사서 붙인 상태였다.

아니나 다를까, 발권할 때 직원이 오늘은 바람이 좀 세서 파도가 약간 높은 편이라고 했다. 발권을 마치고,
신분증을 다 까고 승선인 명부를 쓰면서도 묘하게 찝찝하고 불안했다. 만에 하나 사고가 났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직원의 한마디가 그렇게 귀에 새록새록 박힐 수가 없었다.

쓸데없는 걱정으로 걸핏하면 불안해지는 이 소심한 성격을 고칠 수 있는 약이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내가 그런 찌질한 생각을 하는 동안 녀석은 태평하게 폰을 들여다보며 제주에서 할 만한 액티비티를 찾는


중이었다.
“현아, 다이빙해 볼래? 우리 열흘 넘게 있을 거니까 자격증 따도 되고.”

“너 자격증 있댔지?”

“어. 예전에 태국에서 땄어.”

“그럼 나 교육받는 동안 넌 뭐 해.”

“뭐 하긴, 너 하는 거 봐야지. 오픈 워터 실습할 땐 너 따라다니면 되고. 넌 다이빙도 좋아할 거야, 분명.


내가 바닷속 사진 보내줄 때마다 너 엄청 좋아했잖아.”

“그랬나?”

“그랬어.”

나도 언제고 다이빙 자격증은 딸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녀석을 내버려 두고 혼자 자격증을 따는 건 좀


그랬다.

“다른 건 없어?”

“우리 승마할 거야.”

권유가 아니라 통보인 걸 보니 승마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게 틀림없었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요트 빌릴까? 개인적으로 대여 가능하대. 멀리 나가서 수영하고 스노쿨링하면 재밌을 거야.”

“그러네.”

“그럼 다이빙은 일단 보류하고 이것만 예약한다.”

“응.”

재준이 예약을 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가슴이 빠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시계는 2 시 20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10 분쯤 더 있으면 승선을 시작할 것이다.

“우선은 이것만 해두고 상황이랑 컨디션 봐서 추가하든지 빼든지 하자. 다른 거 생각 안 나면 서핑해도


되고.”

“……응.”
어째서 이리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심장 뛰는 속도가 평소 두 배쯤 되는 것 같았다. 왼쪽
가슴이 욱신거리다 못해 명치까지 조여들어서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길게 내쉬었다.

숨소리를 들었는지 재준이 고개를 들었다.

“현아, 너 왜 그래. 괜찮아?”

“괜찮아. 그냥 좀 긴장되네.”

“혹시 배 무서워?”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비행기 탈래?”

차까지 다 실어놓고 이제 와 무슨 비행기인지. 나는 피식 웃었다.

“아냐, 신경 쓰지 마. 괜찮아.”

말을 마친 나는 다시 숨을 내쉬었다. 잠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녀석이 팔을 뻗어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나는 보는 눈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녀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곧 목에 녀석의 손이 닿았다.

“너 지금 맥박 진짜 빠르다. 정말 괜찮아?”

“응. 괜찮아. 이따 배 타면 한숨 잘래. 침대 있댔지.”

“어. 옆에서 안고 재워줘?”

심장이 이상한 탓인지 별거 아닌 그 말이 괜히 웃겼다.

“응.”

재준이 웃었다.

“앞으로 배만 태워야겠네.”

“……일단 오늘 타보고.”

“기대고 있어. 곧 승선할 거니까.”


“응.”

“아, 그리고 숙소 말야. 일단 3 박만 예약했어. 바로 앞에 바다도 있고 리조트 내에 풀도 큰 거 있다니까


사흘은 그냥 거기서 푹 쉬자.”

“……응. 너 알아서 해.”

어깨를 부드럽게 도닥이는 손길에도 심장의 박동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도리어 조금 빨라진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있으니 심장 뛰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했다. 나는 다시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남은 날짜도 슬슬 해둘까 싶은데 성수기라 두 개 나란히 잡기가 쉽지 않네. 자기야, 우리 그냥 같이 잘래?”

“응.”

멍하니 대꾸해 놓고서야 내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를 깨달았다.

흠칫 놀란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놀란 건 나만이 아닌지 어깨에 올라와 있던 녀석의 손에도 긴장이


깃들었다.

나는 황급히 몸을 바로 했다. 돌아보니 팔을 거둬들인 재준이 인상을 쓴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너…… 괜찮아?”

“……괜찮아.”

“……방금 무슨 소리 했는지는 알고?”

나는 터질 것 같은 심장과 함께 잠시 맹렬하게 갈등했다. 그리고 마음을 정했다. 찌질하게 구는 꼴을 보다


못한 수목원의 신령님이 엉덩이를 발로 차주셨나 보다, 라는 희한한 생각을 하며.

“……응.”

녀석의 미간에 진 주름이 더 깊어졌다.

“진짜 하나만 잡아?”

“응.”

“……너 그 말 내 귀에 어떻게 들리는지 알고 하는 소리지?”

굳이 또 확인까지 해야 하나. 마냥 좋아할 줄 알았더니 역시 이 새끼도 쉽지 않은 놈이었다.


“알아.”

이번엔 녀석이 얼어붙었다.

예쁜 얼굴이 당황으로 엉망진창이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서야 실감이 났다. 그 순간 나는 너무 부끄러워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난 나는 아무 소리나 지껄였다.

“화장실 다녀올게.”

머릿속은 부끄러움과 당황으로 개판이었지만 발은 알아서 움직였다.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을 향해 가면서 같이


밥 먹는 거랑 똑같은 거라는 녀석의 괴상한 논리를 되새기며 침착해지려 애썼다.

그러나 그때도 완전히 납득하지 못한 논리가 이제 와 들을 리가 없었다. 몇 년을 미뤄왔던 일을 난데없이


코앞에 두게 되자 아까부터 불안하게 두근거리던 심장은 이제 귓가에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릴 만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뛰쳐 들어간 화장실은 비어 있었다. 나는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은 아주 가관이었다.


붉게 상기된 뺨과 새빨갛게 물든 귀가 내가 저지른 짓을 증명하고 있었다.

차마 그 얼굴을 더 볼 자신이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물을 틀었다. 화장실에 왔으니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고,
녀석의 얼굴을 다시 보기 전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고 싶었다.

그러나 비누 거품을 잔뜩 내 오래도록 손을 씻고 헹굴 때까지도 요동치고 있는 가슴의 고동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줄 모르고 애꿎은 물만 흘려가며 세면대 앞에서 머뭇대는 사이 승선 안내 방송이 울렸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2 시 35 분이었다.

수도를 잠그고, 핸드 드라이어 앞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자 미지근한 바람이 세차게 쏟아졌다. 웅웅대는 바람
소리도 복잡한 머릿속의 소리를 지워주지는 못했고, 쓸데없이 성능 좋은 드라이어는 젖은 손을 금세 말려
버렸다.

왜 이렇게 빨리 말라 버린 걸까. 좀 더 오래 걸리면 좋을 텐데.

다 마른 손을 괜스레 미적미적 문지르던 나는 안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에 그제야 손을 내렸다.

이런 짓을 해봐도 바뀌는 건 없었다. 정말 내키지 않으면 그냥 싫다고 말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싫은 게


아니라서 더 당황스러웠다.

이럴 땐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걸까. 평소처럼 굴면 되는 걸까. 그런 거겠지.


그런데 도무지 배를 타고 가는 동안 멀쩡하게 있을 자신이 들지 않았다. 다시 본 거울 속의 내 얼굴은 여전히
당황으로 얼룩져 있었다.

새로 들어온 사람이 세면대로 다가왔다. 아주 짧게 나를 흘깃 살핀 그 아저씨가 손을 씻기 시작했다. 승선


안내 방송이 또 울려 퍼졌다.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밖으로 나가야 할 때였다.

같이 밥 먹는 거랑 똑같은 거라고. 당황할 게 뭐 있어. 침착해. 남들도 다 하는 거야.

납득하지 못한 논리를 다시 한번 되뇌며 크게 숨을 들이쉬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몇 걸음 나아가자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녀석이 보였다.

나는 차가워진 손으로 귀를 문지르고, 가까스로 표정을 다잡고, 머리를 비우려 애썼다. ……소용없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재준이 일어섰다. 화장실로 도망치기 직전 봤던 놀란 기색은 간데없었다. 녀석의 얼굴은
차분해 보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심상해 보이기만 하는 녀석의 얼굴에 나는 더 민망해졌다. 자기가 했던


말대로 쟤한테는 어쩌면 이 일이 정말 별거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열여섯 살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의식하고 쑥스러워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걸지도 모른다.

“……지금 타면 되는 거지?”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아서 뻔한 말을 던지자 녀석이 주머니를 뒤져 표를 꺼냈다.

“어. 가자.”

가방은 차에 두고 왔으므로 우리는 빈손이었다. 게이트 앞에 나란히 줄을 서서 검표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조금 침착해졌다.

그제야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와 같은 배를 탈 사람들은 저마다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바로 앞에 줄을 선,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학생 셋이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고기 국수부터 먹으러


가자며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맛집 투어가 목적인지 셋 중 한 명은 폰을 들여다보며 여정을 확인하고 있었다. 고기 국수 먹기, 시장에 들러


회 사기, 흑돼지 삼겹살 먹기가 오늘, 카페 거리 투어가 내일의 여정인 것 같았다.

어디 어디가 맛있다며 신나게 대화를 나누는 그 애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묘하게 긴장이 풀렸다.
줄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여학생 셋이 검표를 마쳤다. 그들이 게이트 밖으로 걸어 나가자마자 재준이 직원에게
표를 내밀었다.
게이트 밖으로 나서자 길게 차양을 친 통로가 이어졌다. 옆으로는 우리가 탈 배가 보였다.

하얗고 커다란 배에 줄지어 오르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나는 어느새 발권 후 덮쳐들었던 불안이
가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큰 문제가 생기자 상대적으로 작은 문제는 그새 잊히고 만 모양이었다.

그게 조금 웃겨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흘 동안 하루 다섯 끼는 먹어야 한다고 비장하게 다짐을


해대던 여학생들 덕분에 긴장이 많이 풀린 나는 녀석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우린 오늘 뭐 해? 아까 저 앞에 가는 애들 말하는 거 들으니까 고기 국수 맛있을 거 같은데 그거 먹으러


갈래?”

재준이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오늘은 무리지 않을까?”

내가 가끔 뭐든 하자고 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던 애가 뜻밖에 퇴짜를 놓는 바람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흘은 푹 쉬자더니 설마 얘가 밥 먹으러 나갈 생각도 없는 걸까?

“제주 도착해서 우리도 밥 먹고 숙소 들어가면 안 돼?”

“나 그렇게 오래 기다릴 자신 없는데.”

“오늘 날씨 더워서 그래? 하긴 줄 오래 서야 할지도 모르니까…….”

사람들이 몰리는 맛집이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하긴, 오늘같이 더운 날 국수 한 그릇 먹자고 한참


기다리기도 뭐하긴 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통로가 끝나 있었다. 차양 밖으로 나가자 뜨거운 햇빛이 쏟아졌다. 눈이 부셔서
눈살을 찌푸렸을 때였다.

“정시현, 너 또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거야?”

그 말을 듣자마자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그제야 오래 기다릴 자신이 없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았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겨우 잦아들었던 가슴이 또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어지러워진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쓰며 승선을 위해
걸쳐놓은 계단을 올랐다. 내 뒤를 따르는 녀석의 발소리에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았다.

배에 오른 우리는 말 없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나는 그동안 뒤를 돌아보지도, 녀석에게 말을


걸지도 못했다.
당장 도망치고 싶은 기분을 꾹 참고 얼마간 오르자 데스크가 나타났다. 재준이 키를 받아 왔다. 우리가 예약한
객실은 6 층이었다. 우리는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문득 갑판 위치를 알리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앞에 시선을 둔 채 작게 물었다.

“우리 몇 호실이야?”

“6007 호.”

“바다 보고 싶어. 나 갑판 올라 갔다 올게. 너도 갈래?”

뒤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우리는 6 층에 도착했다.

7 층에 있는 갑판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로 발을 막 떼려던 나는 녀석에게 팔을 붙잡혔다. 재준이 나를


끌어당겨 통로 쪽으로 이끌었다.

“바다는 나중에 제주 가서 실컷 봐. 난 지금 바다보다는 너 보고 싶어.”

나를 돌아보는 녀석의 얼굴은 조금 굳어 있었다. 그 낯선 얼굴을 마주한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발을


옮겼을 뿐이었다.

지금도 보고 있으면서 보고 싶다니, 뭘?

좁은 통로 양쪽으로 늘어선 객실 문들 앞을 지나는 동안 나는 새삼스레 보고 싶다는 말의 뜻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설마, 아니겠지. 여기서 그럴 리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너, 여기서 그런 짓 하려는 거 아니지?

묻고 싶으면서도 묻고 싶지 않은 말을 입속으로 굴리는 사이 녀석은 벌써 문에 키를 꽂아 넣고 있었다.

달칵.

잠금쇠가 풀리는 작은 소리가 귓속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나는 잠시 이대로 녀석을 뿌리치고 도망갈까, 치열하게 갈등했다. 그러나 미처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문은


열렸고, 녀석은 망설일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내 어깨를 끌어당겨 그 안으로 집어넣었다.

검색하면서 봤던 것과 같은 구조의 방이었다. 입구 좌측에 간이 욕실이 딸려 있었고, 작은 창 아래엔 짙은


푸른색 카우치와 작은 탁자,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한 사람이 누우면 꽉 찰 것 같은 작은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객실 구조를 파악하자마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

잠금쇠를 거는 그 작은 소리에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숨을 삼켰다.

곧바로 나를 돌려 문으로 밀어붙인 재준이 턱에 손을 댔다. 들어 올리려는 그 손을 피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녀석이 깊이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곧 드러난 귓바퀴에 입술이 닿았다. 달아올라 화끈거리는 귓바퀴에
닿는 숨결이 거칠었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얼어붙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뭐든 일단 제주에 도착해서 하든지 말든지 하자고


녀석을 말려야 했는데, 입술을 피했다고 귀를 핥고 있는 개새끼에게 이미 말려 버린 나는 갈 곳을 잃은 애꿎은
손만 꽉 움켜쥐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손도 곧 붙잡히고 말았다. 내 두 손을 끌어다 자기 목에 감게 한 재준이 귓불을 빨기 시작했다.


예민한 살을 뒤덮은 말캉하고 미끈한 점막의 감촉, 귓속으로 파고드는 더운 숨결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긴장으로 등이 저릿저릿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너 뭐 해…….”

“……뭐 하는 거 같아?”

녀석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없었다. 잔뜩 가라앉아 끝이 갈라진 목소리는 꼭 열일곱, 사고 치려다 불발로
끝났던 그날 같았다.

대꾸 없이 물음만 던져놓은 녀석이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아……. 거기 핥지 마.”

입술로 지분거리는 감촉을 견디다 못한 나는 녀석의 어깨를 떠밀었다. 그런데 녀석은 떨어져 나가기는커녕 내
양손을 내려 움켜쥐고는 목덜미를 빨았다.

아무리 눈이 돌아가도 그렇지 이 개새끼가 사람 손은 왜 붙잡고 난리일까. 설마 이 새끼한테 사람을 구속하는


이상한 취향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덜컥 겁이 난 나는 팔에 힘을 줘 녀석의 손을 떼어내고는 다시 어깨를 밀었다. 이번에도 안 떨어지면 한 대


칠 생각이었으나 다행히 녀석은 순순히 물러났다. 그리고 녀석과 눈을 맞대자마자 나는 녀석을 밀어낸 걸 잠시
후회했다.
검은 눈에 도사린 탐욕은 검고, 끈끈했다. 그것은 열일곱 그날보다 훨씬 짙고, 무거워 보였다.

저런 걸 잘도 이렇게 오랫동안 감추고 있었구나. 그러면서 괜찮으니 뭐니 잘도 지껄였구나.

놀란 나는 여기서 이러지 말라는 말조차 내뱉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살짝 인상을 쓴 채 나를 내려다보던


재준이 엄지손가락으로 내 아랫입술을 덧그렸다.

“이런 곳에서 정말 미안한데, 나 더 못 기다리겠어. ……안 돼?”

못 기다리겠다는 말을 해놓고 안 되냐고 묻는 건 반칙 아닐까.

어처구니없는 말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따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입술에


닿은 녀석의 손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손을 뻗어 녀석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곧 입술이 포개졌다. 조르듯이 입술을 머금고 잇새를 두드리는 혀를 이기지 못하고 나는 입술을 열었다.
코끝이 닿고, 입술이 짓눌려 비벼졌다. 혀뿌리가 아릴 만큼 세게 빨아당기고, 목구멍까지 집어넣고 싶다는 듯
깊숙이 혀가 파고들었다.

녀석은 조급했고, 탐욕스러웠다. 나는 어느새 다시 끌어안고 있었던 녀석의 등을 꽉 움켜쥐었다. 허리를 감아


당기는 억센 손길에 하반신이 바싹 맞닿았다.

몸에 열이 올랐다. 숨이 가쁘고, 내내 두근거리던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코로 숨을 내쉬어야 하는 걸


아는데도 그것만으로는 모자라 자꾸 입으로 남은 숨이 흘러 나갔다. 녀석은 그마저 남김없이 가져가 버렸다.

입가가 젖어 엉망진창이 되었을 무렵에는 다리가 후들거렸고 맞붙은 아래엔 피가 몰려 있었다. 나나 녀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깨닫고 흠칫한 순간 바닥이 흔들렸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밖에서는 객실 안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재준의 어깨를 밀었으나 녀석은 떨어질 기미가 없었다. 떨어지긴커녕 티셔츠 아래로
손이 들어왔다. 척추의 마디를 세듯 천천히 타고 올라온 손은 견갑골을 집요하게 매만지다 가슴으로 옮겨 갔다.
녀석은 거침없이 손끝으로 유두를 문질렀다.

밖에 아직 인기척이 있었으므로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끓어오른 소리를 참았다. 더 깊이 입술을 포갠 녀석은


흠칫 튀어 오른 내 등을 한 번 꽉 끌어안았다 놓고서야 입술을 뗐다.

숨을 몰아쉬는 사이 밀려 올라간 티셔츠가 흘러내렸다. 뜨거워진 몸도, 어정쩡하게 서버린 아래의 상태도 몹시
난감했다. 나는 녀석의 얼굴을 어떻게 마주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어 고개를 푹 숙인 채 흐트러진 티셔츠를
정리했다.
그러나 재준이 티셔츠를 내린 내 손을 붙잡고 그것을 다시 확 들어 올렸다. 가슴팍이 훤히 드러났지만 놀랄
틈도 없었다. 녀석이 곧장 허리를 숙여 유두를 물었다.

“아…….”

입술 밖으로 왈칵 더운 숨이 터졌다. 혹시 밖에 있는 사람이 그 소리를 들었을까 겁이 났다. 나는 남은


손으로 입술을 틀어막고는 녀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녀석이 빠는 곳에서 피어난 진저리 나는 감각이 온몸으로
번지고 있었다.

나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만해. 너 문 앞에서 왜 이래…….”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극에 꼿꼿이 솟은 돌기가 젖은 살 위로 미끄러졌다. 등줄기가 흠칫거렸다. 자꾸


터져 나오려는 소리를 겨우 억누르며 녀석을 다시 떠밀었다.

밀리지도, 대답하지도 않은 녀석은 곧장 유두에 이를 세웠다. 아팠다. 그러나 아픈 것만은 아니었다. 열이


끓어오른 몸이 덜덜 떨렸다.

나는 눈이 돌아가 버린 재준이 제발 정신을 차리길 빌며 말했다.

“……밖에 사람 있잖아.”

그제야 가슴에서 입술을 뗀 재준이 굳은 얼굴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이리 와.”

객실 안으로 들어간 재준이 왼쪽 침대에 다짜고짜 나를 눕혔다. 신발을 벗을 새도 없었다. 내가 신고 있던


플리플랍을 벗겨 바닥에 던져놓은 재준이 머리맡에 개켜져 있던 침구를 옆 침대로 옮겼다. 녀석은 이어 창으로
다가가 커튼을 치고는 내 위로 올라왔다.

팔꿈치로 상체를 지탱한 어정쩡한 자세로 누운 나는 티셔츠를 벗는 녀석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녀석의 나신은 위압적이었다. 넓은 어깨와 흉곽을 따라 허리까지 이어지는 선을 눈으로
덧그리는 동안 얘가 이렇게 컸나 싶은 새삼스러운 감상이 덮쳐들었다.

당황해 눈만 깜빡이는 사이 자기 상의를 뒤로 내던진 재준이 내 티셔츠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옷을 위로


끌어 올리는 그 손이 뜻하는 바가 너무 명확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옷자락을 붙잡았다.

재준이 희미하게 웃었다.


“옷 입고 하게?”

……안 한다는 선택지는 없는 걸까. 아무리 침대가 있는 객실이라지만 배 안에서 이런 짓을 하는 건 역시 내


상식으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너 진짜 여기서 하려고?”

“안 돼?”

짧은 말을 툭 던진 재준이 몸을 숙이고 뺨에 입을 맞췄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올라가다 만 옷 아래로


가슴을 더듬는 손에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나는 얼결에 그 손을 붙잡았다.

“마재, 여기 배야.”

“알아.”

“아무래도 좀…….”

“침대 있고 욕실 있고 시간 있어. 뭐가 문젠데?”

그 말을 끝으로 뺨을 지분거리던 입술이 턱선을 타고 목덜미로 내려갔다. 목젖에 입술이 닿자 어깨가 튀어


오르고 턱이 위로 들렸다. 기다렸다는 듯 부드럽게 목젖을 빨아대는 감촉을 견디기 힘들었다. 열이 오른 몸은
내 의지를 배신하고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자꾸 목구멍에서 끓어오르는 소리를 참기 힘들어서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손등에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자기 손을 붙든 내 손등에 키스한 재준이 속삭였다.

“참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데…… 벽이 얇은가 봐. 방음 안 되는 거 같아, 현아.”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녀석은 내 손을 떼어내고는 티셔츠를 확 끌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가방 안 들고 왔으니까 구겨지기 전에 옷은 벗는 게 낫겠다.”

방음이 안 된다는 소리를 해놓고도 순식간에 티셔츠를 벗겨 버린 녀석이 가슴팍에 입술을 묻으며 허리를
더듬었다. 그 손은 이내 바지 허리 밴드에 달린 매듭을 풀었다. 그만두라는 소리를 하기도 전에 바지 속으로
손이 들어왔다.

거침없이 열이 오른 아래를 더듬는 손길에 화들짝 놀란 나는 나도 모르게 허리를 세웠다. 그러나 재준이 자기
몸으로 나를 내리누르는 바람에 상체가 넘어갔다. 바닥에 머리가 닿았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미안해. 더는 못 기다리겠어.”

재준이 굳은 얼굴로 내 손을 끌어가 자기 아래에 댔다. 처음 손에 닿은 것의 감촉에 나는 흠칫 굳었다. 얇은


천 아래로 닿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알았어.”

대답하자마자 재준이 물었다.

“장소도 장소지만…… 혹시 너 지금 무서워?”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의 얼굴에 순간 망설임이 일었다. 아마 그만둬야 할지 밀어붙여야 할지를 고민하는 거겠지.

파도가 이는지 바닥이 얕게 출렁거렸다. 나는 마음에 남아 있던 일말의 망설임을 몰아냈다.

“……괜찮아. 하자.”

얕은 숨을 내쉰 재준이 잡고 있던 내 손을 끌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미안해. 급하게 굴어서. 정말 안 되겠거든 참지 말고 말해.”

“응.”

“허리 들어볼래?”

그 말에 놀란 나머지 잠시 잊고 있었던 부끄러움이 덮쳐왔다.

온몸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내 나체 따위 수도 없이 본 녀석 앞에서 옷을 벗는 게 이렇게까지 부끄러워질


줄 몰랐다. 마치 무언가 금기를 범한 죄인이라도 된 것 같았다.

파도를 가르며 나아가는 배가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물 위에서 아주 오래된 친구이면서 형제 같은 녀석과
이런 짓을 하는 기분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이 막막했다. 근친상간을 저질렀다는 사람들도 지금 같은 배덕감을
느꼈을까.

당치도 않은 생각인 줄 알면서도 그 상념은 좀처럼 머리에서 떨어져 나갈 줄 몰랐다. 가슴 한구석에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누르며 허리를 들자마자 속옷째로 옷이 벗겨져 나갔다.
재준이 곧장 일어선 것을 훑어 올리고, 끝을 문질렀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손끝의 감촉에 나는 그제야
선단이 젖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녀석이 그 꼴을 빤히 보고 있다는 것도.

겨우 억누른 수치심과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

소리가 새어 나가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방음이 안 된다는 말이 머릿속을 후려쳤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나는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씨발…….”

작게 욕지거리를 뱉은 녀석이 거칠게 몸을 기울여 내 손을 떼어내고는 입술을 물었다.

아래를 쥐고 훑는 손길은 너무 능숙했다. 아무리 같은 남자 몸이라지만 녀석도 분명 처음일 텐데 이럴 수가


있을까. 끝에서 흘러나온 액으로 젖은 손이 선단 아래 민감한 곳을 훑을 때마다 아랫배가 움찔거리고, 등이
저릿저릿했다.

타인의 손을 처음 타는 살갗은 너무 쉽게 뜨거워졌고, 어쩔 줄 모르고 떨렸다. 내 몸의 반응이 너무 낯설어


미칠 것 같았다.

옆 객실에서 작게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자꾸 솟는 소리를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맞물린 녀석의


입안에 억누른 소리를 쏟아냈다. 그럴 때마다 살갗에 닿는 숨결이 거칠어졌다.

흥분의 기색이 역력한 그 반응에 몸은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올랐다. 나는 갈 곳을 잃은 손을 녀석의 목에


감았다. 끌어당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절정이 목전이었다. 녀석의 손에 쏟아내고 싶지 않았다. 그만두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녀석은 내가 말을


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덮쳐드는 입술과 다리 사이를 함부로 더듬는 손은 끈질기고, 집요했다.

재준이 뺨에 입술을 대며 속삭였다.

“……너 지금 너무 예뻐. 보기만 해도 미칠 거 같아.”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얼굴을 차마 볼 자신이 없어서 다시 눈을 감았다. 숨이


모자랐고,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크게 숨을 몰아쉬고는 눈을 떴다. 그만두라는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재준이 빨랐다.

“시현아, 사랑해.”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마치 그 말밖에 모르는 것처럼, 녀석은 연신 귓가에 사랑한다는 말을 흘려 넣었다.

낮게 잠긴, 귀에 약간 선 그 목소리가 토해놓은 수도 없이 들은 그 말에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왈칵


눈물이 솟았다.

곧 눈꺼풀에 입술이 닿았다. 속눈썹을 더듬듯 조심스레 눈물을 거두어 가는 키스에 가슴이 욱신거려서, 나는
녀석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뜨거운 숨을 이마에 쏟아낸 녀석이 입술을 포갰다. 스치듯이 짧은, 평소와 같은
버드키스였다.

결국 나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정했다. 가슴팍을 더럽히다 못해 목과 턱까지 치고 올라와 떨어진 정액이


살갗을 타고 흐르는 감각이 선뜩해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오래도록 넘어가길 망설이고 있던 벽을 삽시간에
무너뜨리고 만 그 미지근한 감촉은 우리가 결국 저지르고 만 짓의 증거였다.

재준이 정액이 흐르는 목덜미를 길게 핥았다. 침울해할 새도, 부끄러워할 새도 없었다. 깜짝 놀란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야! 너 지금 뭐 해!”

그러나 녀석은 멈추지 않았다. 목을 핥는 것으로도 모자라 턱에 입술을 대고 빨아대는 짓에 기겁해 녀석의
어깨를 팍팍 쳤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 손을 당겨 매트리스 위로 내리누른 녀석은 기어이 가슴팍에 흩어진
것들까지 남김없이 핥고서야 입술을 뗐다.

“너…… 너무 귀엽게 굴지 마. 돌 거 같으니까.”

기가 막힌 짓에 이어 기가 막힌 소리를 내뱉은 녀석은 흥분이 역력한 얼굴로 덮쳐들어 키스했다. 녀석의


입안에 남은 쓰고 비릿한 맛에 정신이 혼미해진 찰나 다리 사이로 녀석의 다리가 들어왔다. 허벅지가 확
벌어졌다. 이어 벌어진 곳으로 손이 파고들었다.

“현아, 사랑해. 이거 꿈 아니지?”

또 사랑한다는 말을 귓가에 쏟아놓은 녀석은 막 사정을 마쳐 민감해진 끝과 그 바로 아래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덧그렸다. 손길은 유순했지만 치미는 감각은 아플 만큼 찌릿했다. 허리가 뜨고, 아랫배가
욱신거렸으며, 등이 부들부들 떨렸다. 순식간에 몸을 가득 채운 감각을 견디다 못해 눈물이 핑 돌았다.

“으흑, 그만 좀 해……. 아파…….”

대답은 없었다. 자기도 남자면 이런 짓이 얼마나 괴로운지 알 텐데도, 녀석은 좀처럼 그 짓을 멈추지 않았다.
고통과 쾌감이 동시에 덮쳐들었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꽉 움켜쥐며 그 감각을 견뎠다. 그러는 사이 기가
막히게도 아래에는 또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그만, 읏, 하라니까…….”

“……근데 너 지금 또 젖었어. 이것 봐.”


액이 흘러나오는 구멍을 문지르며 지껄이는 말에 수치심이 들불처럼 번졌다.

혼자서 할 때는 사정하고 나면 늘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어서 두 번을, 그것도 이런 식으로 잇달아서 해본 적


따위 없는 나 같은 초심자가 버티기엔 자극이 너무 강했다. 지금 자꾸 사람을 괴롭히는 녀석도 분명 처음일
텐데 이런 짓은 어디서 배워 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어느새 놓여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재준이 얼굴을 가린 손등에 입술을 찍어대며 속삭였다.

“왜 가려. 보고 싶어. 보여줘, 현아, 응?”

어르듯이 졸라대는 말은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 하고 있는 짓도, 엉망이 되었을 얼굴도, 그


얼굴을 보겠다고 졸라대는 녀석까지, 온통 더는 버티기 어려운 것들뿐이었다.

열이 끓어 더워진 몸을 하릴없이 뒤척이며 이대로 녀석을 후려쳐 버릴까 잠시 갈등하던 나는 불현듯 스친


생각을 입 밖에 냈다.

“너, 너는 안 해?”

아까 잠깐 손에 쥐었던 것은 이미 터질 듯이 솟아 있었다. 그 상태로 여태 내버려 뒀으니 녀석도 지금쯤 꽤


괴로울 것이다.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꾹 참고 간신히 중얼거렸다.

“나도 너 해줄게.”

그새 귓가를 핥고 있던 재준이 입술을 떼고 상체를 일으켰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내 손을 기어이 떼어낸


녀석은 눈썹을 일그러뜨린 채 짧게 웃었다.

“고마운데, 그건 좀 이따가.”

재준이 뒤로 물러났다. 곧이어 벌어진 일에 기겁한 나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야!”

나는 옆방에 소리가 들릴 수도 있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어버린 채 버럭 소리치며 녀석을 떠밀었다.

물고 있던 내 것을 뱉어낸 재준이 입술 앞에 검지를 세웠다. 조용히 할 수가 없는 짓을 해놓고 해대는 당치도


않은 요구에 기가 막혔다. 나는 녀석이 입을 뗀 틈을 타 얼른 다리를 끌어모으고 뒤로 엉덩이를 물렸다. 등에
벽이 닿았다.

차분한, 하지만 열이 번진 눈으로 내가 하는 짓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재준이 다가와 마주 앉았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야, 아무래도 그건, 그건 좀 아닌 거 같아.”

“괜찮아. 다들 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재준이 끌어모은 내 다리를 쓸어올렸다. 정강이를 거쳐 올라온 손이 무릎을 붙들었다.

나는 그 손을 치우려고 했다. 그러나 달라붙기라도 한 것처럼 그 손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안 할 거 같은데…….”

아무리 내가 이런 쪽으로 둔하다고 해도 스물여섯씩이나 먹었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다들 하긴 뭘 한다는


건지. 언젠가 술자리에서 동기 새끼들이 떠들어대던 말 중에는 여자친구한테 입으로 해달라고 말했다가 뺨을
맞았다는 소리도 있었다.

재준이 담담히 지껄였다.

“아무렴 어때. 난 하고 싶어.”

“…….”

허락을 구하듯 빤히 바라보는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피한 찰나 목덜미에 입술이 닿았다. 끈끈하게 살을


물고 지분거리던 재준이 붙잡고 있던 무릎을 열며 속살거렸다.

“너 먹고 싶다고 했었잖아.”

“야…….”

맨정신이 아닌 혼란스러운 머리로도 견디기 어려운 수치스러운 말을 마친 녀석이 빗장뼈를 아프도록 세게


빨아들이고, 피부 위로 끈적하게 혀를 미끄러뜨렸다. 온몸에 열이 번졌다. 신음을 억누르는 사이 뜨거운 손은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들어 눅진하게 살을 매만지고 있었다.

“분명 좋을 거야. 그냥 넌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나만 봐. 응?”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빗장뼈 위로 낮은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어. 너 벌써 이러면 이거보다 더한 짓 할 땐 어쩌려고 그래?”


이보다 더한 짓이라니, 대체 뭘 하려고?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짧게 입을 맞춘 재준이 허벅지를 확 열어젖히고 내 다리 사이에 엎드렸다. 녀석은


질척해진 내 것을 지체 없이 덥석 물었다. 뜨겁고 축축한 살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에 막을 새도 없이
신음이 터졌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녀석은 거침없었다. 깊이 머금었다 내뱉고, 혀끝으로 민감한 선단과 소대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듣고 싶지
않은 젖은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페니스를 빨리는 내내 나는 더 깊숙이 집어넣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했다.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본능적으로 허리가 튀었다.

좋을 거라던 녀석의 말은 과연 거짓이 아니었지만 쾌감보다 더 큰 수치가 덮쳐와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꽉 눌러 내린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소리를 억누르느라 제대로 숨도 쉴 수 없었던 탓에 꽉 막힌 가슴이


간헐적으로 툭툭 튀어 올랐다. 녀석의 손에 눌려 벌어진 허벅지가 후들거렸다. 어느 한구석 멀쩡한 곳이
없었다. 몸이 고장 난 것 같았다.

녀석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자기만 보라고 했지만 오르내리는 녀석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는 내내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정말이지 더는 못 버틸 것 같다고 생각한 그 순간, 딱딱한 입천장을 긁으며 속으로 파고든 선단이 말캉하고
좁은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녀석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자마자 배가 크게 요동쳤다. 쏟아지는 감각과 흔들리는 바닥에 놀란 탓에


애써 누르고 있던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아! 아, 흐윽, 읏.”

나는 다급히 손등으로 입술을 눌렀다. 그것만으로는 소리를 막을 수가 없어 손등을 깨물었다. 깨물린 살이


아픈 걸 느낄 새도 없이 꽉 조여드는 점막의 감촉에 등줄기와 목덜미가 저릿저릿했다.

천천히 기둥을 훑으며 아래로 내려온 입술과 뜨거운 숨결이 치골에 닿았다. 덜덜 떨리는 내 허벅지를 콱 누른
재준이 다시 고개를 드는 동안 타액이 기둥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수치를 모르는 허리가 또 들썩였다.

가쁜 호흡을 쏟아내며 목을 겨우 추스른 나는 녀석의 어깨를 콱 붙들었다.

“너, 읏,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런, 흑, 거…… 하지 마!”

재준이 물고 있던 것을 뱉어내고는 아래부터 길게 핥아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붉은 혀가 기둥을 타고 오르는


동안 내리뜬 눈꺼풀 끝에서 긴 속눈썹이 팔랑이고 있었다.

붉고 예쁜 입술이 선단을 머금는 순간 나는 차마 더 볼 수 없어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감자 끝을 할짝대는


살덩이의 감촉이 더 적나라해졌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아무 생각 하지 말라고 했잖아. 눈은 왜 감아. 나 봐.”

대체 뭘 보라는 걸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재촉하는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왜 그래, 너 진짜…….”

곧 입술이 떨어졌다. 입술 대신 손이 질척질척해진 페니스를 훑어 올렸다. 나는 얼른 손등을 깨물었다. 눈을


뜨자 재준이 잔뜩 젖은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고 있었다. 기가 막히게도, 얘는 이런 짓을 하면서도 예뻤다.
자길 보라는 말을 따르고 싶지 않았는데도, 눈은 녀석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너무 귀엽게 굴지 말랬지……. 하, 너 때문에 진짜 미치겠다, 내가.”

어이없는 말에 대꾸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대꾸하기도 전에 녀석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하지 말라, 읏, 니까…….”

내 말에도 아랑곳없이 그 짓은 여러 번 이어졌다. 녀석의 목구멍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댔다.

누가 너한테 이런 짓까지 하라고 했어.

이럴 때까지도 녀석은 자기 마음대로였다. 그리고 해달라고 말한 적은커녕, 말할 생각조차 못 한 짓을 해대는


개새끼를 말릴 방도는 하나뿐이었다. 정색하고 더는 안 보겠다고 말하면 됐다. 하지만 이제 와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걸 뻔히 알고 이런 짓이나 해대는 개새끼를 말릴 방도를 나는 이십 년째 알지 못하는
채였다.

바닥이 몇 번 더 출렁거리는 동안 몸에 끓던 열도 정점에 다다랐다. 아랫배부터 치고 오른 날카로운 쾌감에


이미 몸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모자랐는지 녀석은 어느새 허벅지를 누르던 손으로
눅눅하게 젖은 음낭과 회음부를 더듬고 있었다. 달아올라 뜨거워진 살갗을 짓누르며 비비는 짓에 숨이 막혔다.

“제발…… 그만해! 나올, 으흐윽, 거 같아…….”

녀석의 어깨를 세게 미는 동안 울고 싶어졌다. 이렇게 말해도 소용없을 거란 확신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곧 사실이 되었다.

“흑…….”

녀석의 입안에 정액을 쏟아내는 사이 또 눈물이 났다. 감당하기 버거운 감각, 당황, 부끄러움, 미안함 따위가
마구잡이로 섞여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스물여섯이나 먹고 이런 일로 질질 짜는 것도 민망한 일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눈물은 쉽게 멎지 않았다.

입술을 닦은 재준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녀석은 곧 훌쩍이고 있는 나를 끌어당겼다.


“이리 와.”

자기 다리 위에 나를 앉혀놓은 재준이 뺨에 흘러내린 눈물을 핥고는 눈가에 짧은 키스를 여러 번 거듭했다.


우는 꼴을 보이기 민망했다. 나는 얼른 녀석의 목을 끌어안아 얼굴을 감췄다.

재준이 들썩이는 목덜미를 훑어내리기 시작했다. 그 손은 곧 어깨와 등, 팔 안쪽과 흉곽, 가슴과 배를


매만지며 허리로 내려갔다. 뼈와 살의 모양과 감촉을 낱낱이 확인하고 기억하겠다는 듯 집요하게, 또 애달프게
닿아오는 손길에서 나는 녀석의 마음을 읽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내가 아는 건 한참 모자랐다. 맞닿은 피부의 감촉, 열기, 탐욕으로 끓는


눈, 손길. 이 모든 것이 전하고 있는 한마디가 몸 안에 차올라 출렁거렸다. 그 말로 꽉 찬 가슴이 아렸다.

내가, 너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구나.

눈물이 멎지 않았으므로 나는 얌전히 녀석에게 매달려 훌쩍였다.

재준이 등을 툭툭 두들겼다.

“너 나한테 미안하다는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지, 지금.”

“…….”

“좋아서 우는 거 아니면 이럴 때는 우는 거 아니야.”

별스러운 소리에 나는 녀석의 어깨에 턱을 쿡 찍으며 팔을 당겼다.

“너도, 흑, 처음이면서 뭘 잘난 척이야…….”

“아무리 그래도 너보단 내가 낫지. 근데 나 재능 있나 봐. 어려울 줄 알았는데, 괜찮던데? 내가 좋아서 한


거니까 너 그만 울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낮게 웃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기가 막혀서 나는 발끈했다.

“개소리하지 마. 힘들잖아……. 그런 걸 누가 좋아해.”

“나는 좋았는데. 진짜야. ……만져볼래?”

말을 마친 재준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녀석도 긴장하고 있었다.

나는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닦고, 녀석의 어깨에 둘렀던 손을 풀고 상체를 조금 뒤로 물렸다.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재준이 뺨에 키스하며 중얼거렸다.

“……어쩌지. 진짜 떨린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손을 녀석의 가슴에 댔다. 손바닥을 두드리듯 뛰어대는 심장의 박동이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잠시 그대로 손으로 심장 소리를 듣던 나는 손을 미끄러뜨렸다. 여태 숱하게 보기만 했을 뿐 만져본 적 없는


그림처럼 예쁜 몸을 녀석이 나를 만지던 감각을 떠올리며 차근차근 매만졌다.

걸리는 것 하나 없이 부드러운 피부, 근육의 윤곽이 뚜렷한 가슴과 배를 더듬는 동안 가슴이 두근거렸다. 낮게
신음한 재준이 깊이 입술을 겹치고는 내 허벅지를 길게 쓸어내렸다.

나는 망설임을 떨치고 허리 부근에서 머뭇대던 손을 녀석의 바지 속으로 집어넣었다. 아직 한 번도 만져준


적이 없는데도 녀석의 것은 터질 듯이 부풀어 솟아 있었고, 끝을 감싼 속옷은 젖어 있었다.

나는 녀석의 것을 손에 쥔 채 멈칫했다. 서 있지 않을 때도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나 싶을 정도였지만 발기한


페니스는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질릴 정도였다.

대체 다리 사이에 뭘 달고 다니는 걸까, 이 새끼는.

상황에 맞는 듯 맞지 않는 듯한 생각이 스친 찰나 난잡하게 혀를 얽던 재준이 입술을 떼고는 눈을 맞댔다. 곧


손이 붙잡혔다.

“……싫은 거 아니지?”

끝이 갈라진 그 목소리는 흥분의 기색이 짙었다. 평소보다 한층 낮은 그 음성은 너무 야하게 들렸다. 귀가


간질간질하고, 목덜미 부근에 소름이 끼쳤다.

“……응.”

“그럼 만져줘.”

“응.”

내 대답을 듣자마자 녀석은 나를 앉힌 채로 하체를 살짝 들어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끌어내리고는 내 손에


솟아오른 페니스를 쥐여 주며 속삭였다.

“너 만지고 이렇게 된 거야.”

그 말에 귀가 확 뜨거워졌다. 손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것은 잔뜩 열이 올라 있었다. 머뭇거리고 있으니


재준이 자기 손으로 내 손을 둘러 꽉 쥐었다. 내 머리에도 열이 올랐다.
녀석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그대로 손을 끌어내렸다. 불거진 혈관과 힘줄 따위가 감각이 예민해진 손끝을
긁었다. 녀석에게 이끌려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 손이 다시 위로 올라왔다.

“……끝도 만져줄래?”

나는 대답 없이 재준이 했던 대로 잔뜩 젖은 선단을 엄지로 문질렀다. 녀석의 미간에 주름이 패고,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 새로 뜨거운 숨이 밀려 나왔다.

그새 왈칵 흘러나온 선액으로 손이 축축했다. 나는 그대로 젖은 손을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나도 남자였으므로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내가 손을 움직이는 동안 녀석은 간간이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지독하게 열이 끓는 눈을 내게서 떼지 않았다.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눈을 피하고 싶었으나 피하게 두지 않겠다는 듯 시선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곧 내 손을 덮은 커다란 손은 어디가 좋은지 가르쳐 주려는 것처럼 어느 부분에 닿을 때면 힘이 들어갔다.


나는 말 없이 녀석이 바라는 대로 했다.

만져지고 있는 건 녀석인데도 어쩐지 내 목이 말랐다. 내 숨결도 조금 흐트러졌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사정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몸은 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미친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독하게 예쁜 녀석이 잔뜩 흐트러져 신음하는


얼굴을 눈앞에 두고도 멀쩡하게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늘 네 생각 하면서 했어.”

재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툭 토해놓은 말에 가슴이 지끈거렸다. 목이 너무 말랐다. 마른침을 몇 번 삼키던 나는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녀석의 입술을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여는 녀석의 혀를 빨았다. 곧 타액이 넘쳐
말라붙은 목구멍을 적셨다.

나는 빠르게 손을 움직이며 녀석에게 키스했다. 재준이 쏟아내는 숨을 받아 삼키는 동안 온갖 사념으로


어지럽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목덜미에서 시작된 전율은 등줄기를 타고 허리까지 흘러내렸다. 어깨를 움츠린
순간, 마치 그것을 알고 있다는 듯 커다란 손이 땀이 솟은 등을 훑으며 올라왔다. 잔뜩 민감해진 살갗이
찌르르 저렸다.

목구멍에서 신음이 끓었다. 그 소리를 받아 간 녀석이 입술을 떼고 귓바퀴를 물었다. 아마도 빨갛게 달아올라
있을 뜨겁고 딱딱한 살을 지분대던 녀석은 곧 혀를 내밀어 귀를 핥기 시작했다.

솜털이 곤두설 것 같은 감촉을 얼마간 견디자 혀가 떨어졌다. 나는 녀석의 것을 꽉 쥐었다. 그르렁거리는 듯한


신음을 흘린 녀석이 입을 열었다.

“현아, 넌?”

나는 멍하니 대꾸했다.
“응?”

귀 아래 살을 지분거리던 재준이 내 손을 덮고 있던 손을 떼고는 반대쪽 손을 뻗쳐 내 것을 쥐었다.

“너도, 흣, 내 생각 하면서 했어?”

뻔히 알면서 괜히 물어보는 말에 대꾸하고 싶지 않아서 녀석의 입술을 내 입술로 막으려 했다. 하지만 녀석은
고개를 물려 피하고는 눈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평소에도 수다스러운 새끼긴 했지만 이럴 때까지 말이 많을 줄 알았을까.

원망스레 노려보자 녀석은 일어서기 시작한 내 것을 멋대로 괴롭히며 다시 물었다.

“왜 대답 안 해.”

이 새끼한테 이런 이상한 취향이 있었다니.

갑자기 앞날이 막막해졌다. 이대로 당하고 있으려니 괜히 억울했다. 나는 지금 막 알게 된 녀석의 약한 부분을


지그시 눌러 훑으며 입을 열었다.

“읏, 그런 거 왜 물어.”

내가 한 짓과 똑같은 짓이 되돌아왔다. 터져 나오는 신음을 간신히 삼키자마자 녀석이 또 추궁했다.

“왜겠어. 대답해, 정시현…… 하아, 그랬어?”

“너, 정말, 흑, 왜 그래. ……다 알면서.”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 대답을 마치자마자 재준이 덮쳐들었다. 짧은 키스를 끝낸 녀석이 내 어깨에 입술을


묻고는 남은 손으로 유두를 눌러 덧그리며 지껄여 대기 시작했다.

“내가 어떻게 너 만져줬어?”

이딴 걸 묻다니.

경악한 나는 어깨를 진득하게 빨아대는 녀석의 팔을 찰싹 때렸다. 재준이 쿡쿡 웃었다. 뭐가 웃기냐고 벌컥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신음을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응? 네 상상 속에서도, 흣, 내가 가슴 만져줬어?”


수치도 모르고 지껄여 대는 미친 새끼가 쏟아내는 숨결과 페니스와 솟은 돌기를 짓눌러 문지르는 감각에 허리가
징징 울렸다. 차라리 더 이상한 소리가 나오기 전에 빨리 끝내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눈꺼풀을 꼭
눌러 감고는, 개새끼의 물건을 훑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윽, 너…… 지금 부끄러워서 이러는 거지.”

“마재준, 응…… 좀, 닥쳐.”

“젖꼭지 선 거, 하, 너무 예쁘다. 이따…… 잔뜩, 빨아줄게.”

개소리를 듣자마자 막을 틈도 없이 그 짓의 이미지가 뇌리를 파고들었다. 옆방이고 뭐고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녀석의 민감한 부분을 확확 문지르고 훑으며 버럭 소리쳤다.

“제발 좀!”

인상을 잔뜩 구긴 채 입술을 끌어 올려 웃은 재준이 온 얼굴에 마구잡이로 버드키스를 쏟아부었다. 곧 억누른


신음을 쏟아낸 녀석이 내 입술을 빨고는 입을 열었다.

“나올, 거 같아. 네 손에 해도 돼?”

나는 녀석의 목덜미를 콱 끌어당기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응. 앞으로 그런 거, 흑, 물어보지, 마.”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마주하자마자 다시 입술이 포개졌다. 재준이 내 손으로 자기 것 끄트머리를 감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짐승처럼 목을 울리는 소리가 들리고, 녀석의 넓은 흉곽이 크게 들썩였다.

곧 손이 흠뻑 젖었다.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눅눅한 감촉이 선뜩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젖은 손으로 끝을


문지르고 기둥을 훑어내렸다. 억누른 신음을 삼키며 숨을 몰아쉰 녀석이 내 목을 확 끌어안으며 몸을 기울였다.
곧 등이 뒤로 넘어가 머리가 매트리스에 닿았다.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녀석은 조금 괴로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 얼굴에 흥분이 치밀었다. 나도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한 찰나 기겁할 만한 짓이 벌어졌다.

“하아, 너한테 내 거 묻혀놓으니까 미치겠다. 이래서 마킹을 하나 봐.”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얼어붙었다.

“현아, 보여줘. 넌 어떻게 해?”

개새끼가 짖는 소리에 나는 수치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온몸을 태울 것처럼 솟구치는 부끄러움은 몸에


잔뜩 차오른 흥분에 기름을 부었다.
재준이 자기 정액으로 젖은 내 손에 내 페니스를 쥐여 주고는 떼지 못 하도록 손을 꽉 둘러 훑어내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손등으로 입술을 눌렀다.

열이 끓는 몸도, 머릿속도 개판이었다. 이 또라이 같은 새끼는 정말 오늘 처음 이런 짓을 하는 게 맞는 걸까.


설마 그동안 나 모르게 어디 가서 이상한 짓이라도 하고 온 거 아닐까.

갑작스레 닥친 의심을 입 밖에 내기도 전에 녀석에게 붙들린 손이 움직였다.

“부끄러워할 게 뭐 있어. 나도 알려줬잖아. 응?”

낮은 목소리로 어르듯이 몰아붙이며 개새끼가 또 짖었다. 젖은 소리를 삼키느라 말을 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눈을 뜨고 녀석을 노려보았다.

눈을 마주한 녀석의 붉은 입술이 깊게 호를 그리고, 긴 눈시울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미친 짓을 하면서도


미치게 예쁜 새끼였다.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빤히 보고 있는 동안 아래에서는 미친 짓이 이어지고
있었다.

녀석이 빤히 보는 앞에서 녀석의 것으로 젖은 손으로 내 것을 훑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이상했다.


몰아닥친 쾌감과 부끄러움으로 덜덜 떨던 나는 입술을 덮었던 손을 내려 녀석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
당연하게도 떨어지지 않았다. 쓸데없이 힘만 센 또라이 같은 새끼를 쏘아보는 내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만 좀, 해……. 이딴, 흐윽, 짓.”

“이딴 짓이 뭐 어때서. 난 너 어디 좋아하는지 알고 싶어. 그래야 내가 그렇게 해주지. 현아, 난 너한테


예쁨받고 싶단 말야.”

개소리를 듣는 내내 나는 몹시 후회했다. 여기서 이딴 짓까지 할 줄 알았으면 아까 절대, 절대 하자는 말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참이나 때늦은 후회로 속을 끓이는 사이 나보고 하라던 개새끼는 그새 눈이 돌아가 자기 멋대로 내 손을


쥐고 흔들고 있었다.

이딴 식으로 동정을 떼다니, 정말이지 그냥 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몸은 이성을 배반하고 열로 절절 끓고


있었다. 허덕이던 나는 내 몸을 자기 멋대로 만지며 흥분하고 있는, 말릴 길이 없는 개새끼의 목을 끌어당겨
개소리만 지껄여 대는 입을 막아버렸다.

절정의 여운은 끔찍할 만큼 길었다.


* * *

“먹을 건 없는데 고소하긴 하네.”

막 박살 낸 딱새우 머리를 먼저 맛본 마재의 손에서 새우 머리 하나가 또 하나 부서졌다. 그것은 곧 내


앞접시로 올라왔다.

“먹어봐.”

나는 부드럽고 달콤한 새우 살을 삼킨 후, 녀석이 놓아준 새우 머리를 집었다.

“껍질 날카로우니까 조심해.”

그렇지 않아도 막 새우 껍질에 손끝을 살짝 찔린 참이었다. 약간 따가웠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새우 머리를


물었다.

평소에 종종 먹는 대하나 흰다리새우, 블랙타이거 같은 껍질이 연한 종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또 다른


맛이었다. 튀긴 음식 특유의 기름지고 고소한 향에 이어 감칠맛이 진하게 남는, 짭짤한 튀김 과자 같은 속살은
제법 맛있었다.

나는 머리 하나를 더 집어 살을 뜯었다. 살이 별로 없어서 먹을 건 이번에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감칠맛은


강한데 먹을 건 없어 감질이 난다. 딱새우 머리 튀김은 아마 그 맛으로 먹는 모양이었다.

“맛있어?”

비닐장갑을 추켜올리며 녀석이 묻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먹을 게 없는 게 맛인가 봐.”

“입술 상할라. 너무 열심히 먹지 마.”

네 개째의 새우 머리를 물고 있던 나는 나도 모르게 녀석을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요 나흘간 저 새끼가 하도 물고 빨아댄 탓에 입술이 다 부르틀 지경이었다. 날카로운 딱새우


껍질보다 내 입술에 해로운 짓을 잔뜩 해댄 새끼가 하는 이딴 말을 죄 없는 새우들이 듣지 못해 다행이었다.
걔들이 이 말을 들었다면 기가 차서 구천을 떠도는 황망한 넋이 되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입에 올리는 멍청한 짓을 하는 대신 조용히 와인을 마셨다.


부드럽고 달큰한 생새우 살에 잘 어울리던 화이트 와인은 튀긴 새우 머리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튀긴
음식엔 역시 맥주였다. 하지만 얼마 되지도 않는 새우 머리를 먹자고 맥주를 시키기도 좀 그랬으므로 나는
잠자코 와인과 녀석이 껍질을 벗겨준 새우 머리 튀김을 해치웠다.

제주에 도착한 지 오늘로 나흘째, 우리는 처음으로 제주에서 먹을 만한 음식을 먹는 중이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땅에 발 한번 디딜 틈 없이 사람을 리조트로 납치해 가듯 옮겨놓은 녀석은 나흘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짓만 해댔다.

그래도 도착한 날에는 리조트 내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그러나 그 이튿날부터 나는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아니, 방 밖으로 나가긴 했다. 마재는 이 리조트에 방을 두 개 잡아두었다. 이런저런
짓을 하다 침대가 엉망이 되면 다른 방으로 옮겨 가 잠드는 짓을 사흘씩이나 했다.

원래 3 박만 예약했다고 했었는데 숙박 일수를 연장했는지 우리는 나흘째인 오늘도 같은 리조트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나는 돌아올 대답이 무서워서 며칠이나 연장했냐고 차마 묻지 못했다.

제주 가서 바다 실컷 보라던 개새끼는 방 창 너머로 바다가 보이니 된 거 아니냐는 개소리를 지껄이며


밤낮없이 사람을 쥐어 짜댔다.

섹스하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일어나면 씻고, 또 섹스하고, 그러다 눈을 뜨면 룸서비스로 끼니를 때웠다. 기가
막히게도, 제주까지 와서 밥 먹고 기운 내서 한 짓이라곤 그 짓뿐이었다.

심지어 나는 하지 않을 때는 늘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으므로 메뉴를 고를 새도 없었다. 이틀째 저녁부터는


하도 기운이 달려서 비몽사몽한 지경으로 뭘 먹는지도 모르고 먹었다.

마주 앉아, 혹은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채 이것저것 입에 넣어주는 개새끼는 식사가 끝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덮쳐들 게 뻔했다. 마음이 어수선한 나머지 밥을 먹으면서도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눈이 돌아가서는 밖에 나갈 시간도 아깝다는 개소리를 해대던 새끼가 룸서비스나마 꼬박꼬박 끼니라도 챙긴 건


밥도 안 먹이면 쥐어 짜이다 못해 내가 나가떨어질까 걱정되어서였겠지. 요 나흘, 끼니때마다 나는 마녀의
집에 갇힌 헨젤과 그레텔의 마음에 깊이 공감해야 했다.

창 아래로는 당장에라도 뛰어들고 싶을 만한 커다란 풀이 있고 그 앞으론 투명하고 아름다운 제주 해변이


펼쳐져 있었지만, 죄 그림의 떡이었다.

체크인을 하자마자 또 사람을 털 뽑힌 닭 꼴로 만들어놓고 덮쳐든 개새끼가 온몸에 찍어놓은 키스 마크 때문에


나는 풀장은커녕 이 더운 여름에 자칫 터틀넥 티셔츠와 긴바지를 입어야 할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이
삼복더위에 사람을 쪄 죽일 생각은 없었는지 녀석도 목과 팔다리만은 깨끗하게 남겨주었다.

사흘간 영화도 세 편인가 보긴 했는데 끝까지 본 영화는 하나도 없었고, 옷을 입고 있었던 시간보단 벗고
있었던 시간이 더 길었다.

얘가 왜 이렇게 폭주하는지를 모르지 않았으므로 나도 어지간하면 그냥 받아주려고 했다. 또 저렇게 열이 올라


덮쳐드는 애를 두고 맨정신으로 버틸 재간이 없기도 했고.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정도라는 게 있었다.

이 새끼 체력 좋은 거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막상 내 몸으로 겪어보니 감당이 안 됐다. 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튼튼한 주제에 이 망할 새끼는 저는 한 번 사정하는 동안 꼭 나는 두세 번씩 쥐어 짜대는 만행을
저질렀다.

어제 새벽에는 진짜 너무 힘들어서 욕이 절로 나왔다. 죽일 거 아니면 작작 좀 하라고 욕을 해도 이 정도로


안 죽는다며 개새끼는 온몸을 물고 빠는 걸 멈추지 않았다.

엉엉 울던 나는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그간 맨날 비리비리한 어린애 대하듯 챙겨대던 새끼는 간데없었다. 더


기가 막힌 건 힘들어 죽을 것 같은 와중에도 몰아치는 감각에 휩쓸려 부들부들 떨리는 내 몸이었다.

이쯤 되면 생존의 문제였다. 정말이지 이제는 부끄러워할 기운도 없었다. 어쨌든 지금 나는 방 밖으로


탈출했고, 눈앞에는 음식이 있었다. 지난 일, 또 앞날이 어떻든 간에 우선은 부지런히 먹어야 할 때였다.

참돔과 딱새우회, 전복구이와 전복죽이 오늘 저녁 메뉴였다. 아까 들어오면서야 알았는데, 개별 룸이 있는 이


가게는 예약이 필수인 것 같았다. 아마 지난 며칠 내가 잠든 사이에 재준이 해둔 거겠지.

나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전복구이를 집어 탱글하고 쫄깃한 살을 꼭꼭 씹어 삼켰다. 나흘 만에 바깥


공기를 쐬며 밥을 먹고 있으니 감개무량했다. 마치 갓 출소해 자유를 되찾은 죄수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흘이나 그렇게 지냈으니 남은 동안에는 뭐라도 할 수 있겠지.

그렇게 내가 희망에 부풀어 있는 동안 녀석은 간간이 나를 살펴가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 참돔회가 마음에
드는지 젓가락이 그쪽으로 제일 많이 갔다.

다소곳하게 입을 다물고 회를 씹고 있는 청순한 얼굴에선 조금 전까지 짐승처럼 굴어대던 모습 따윈 흔적도


없었다.

햇빛을 맞아도 약간 붉어지기만 할 뿐 좀처럼 타지 않는 흰 피부는 오늘도 뽀얗고 투명했고, 자꾸 개소리를


지껄여 사람을 수치스럽게 만들던 붉은 입술은 오늘도 부드럽고 촉촉해 보였다.

하기야 요 나흘간 나는 하루에 반절은 잠만 잤다. 깨어나 보면 쟤도 내 앞이나 뒤에 찰싹 달라붙어 자고


있었으니 저 새끼도 잠이 부족하진 않았을 거다.

그 예쁘고 멀쩡한 얼굴에 괜히 울컥했다. 쟤보다 훨씬 많이 잤는데도, 나오기 전에 씻으면서 본 내 얼굴은


피죽 한 그릇 못 먹은 사람처럼 시들시들했다.

“현아, 왜 그래? 전복 맛없어?”

전복을 집으려다 말고 마재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대답은 절로 뚱하게 튀어 나갔다.


“아니. 맛있어.”

“근데 얼굴이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무슨 일이야.”

이 새끼가 정말 모르는 걸까, 모르는 척을 하는 걸까.

나는 참돔회 한 점을 집어 간장 없이 입에 넣고는 잠시 녀석을 째려보았다. 재준이 눈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나는 대답 없이 고소하고 담백한 생선 살을 씹었다.

회는 맛있었고, 녀석은 예뻤다. 그 예쁜 얼굴 때문에 치민 울화는 그 예쁜 얼굴 때문에 그새 또 사그라들고


있었다.

……나는 정말 바보가 아닐까.

이십 년간 셀 수 없이 되풀이한 짓을 또 한 번 반복하고 만 나는 깊은 회의에 빠졌다.

나는 언제나 되어야 얘한테 안 말리고 살 수 있을까.

그러려면 쟤가 안 예뻐 보이는 날이 와야 하는데, 슬프게도 그런 날은 평생 올 것 같지가 않았다.

지금 와 다 소용없는 생각이었다. 조금 우울한 현실을 받아들인 나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진짜 괜찮아. 근데 우리 승마하러 언제 가?”

괜찮다는 내 말이 못 미더운지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살피던 녀석이 피식 웃었다.

“안 가.”

“응? 너 그거 하고 싶댔잖아.”

“취소했지, 당연히.”

“……요트는?”

“그것도.”
나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을 기어이 입에 담는 바보짓을 했다.

“……취소했어?”

“응. 그런 거 할 새가 어딨어. 우리 바쁘잖아.”

마재가 화사하게 웃었다. 세상에 악마가 있다면 이 새끼가 아닐까.

조금 우울해진 나는 부끄러운 말을 선뜻 입에 담았다.

“……이 정도 했으면 됐잖아.”

마재가 정색했다.

“되긴 뭐가 돼. 장난치냐, 정시현. 간에 기별도 안 갔거든.”

“…….”

“너도 아직 모자라잖아. 아니야?”

당치도 않은 개소리였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만져줄 때마다 너 어쩔 줄 모르고 나한테 매달렸잖아. 더 해달라고.”

너무 기가 막혔다. 나는 쥐고 있던 젓가락을 탁 내려놓고 눈을 치떴다.

“내가 언제 그랬어? 그건, 그건…… 하다 죽을 거 같아서 그런 거잖아!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런 식으로 며칠


더 하면 나 진짜 죽을지도 몰라!”

“많이 힘들었어?”

태평하게 웃으며 묻는 말에 새삼 서러워진 나는 인상을 팍 썼다.

“너 그걸 말이라고 해? 너도 하루에 사…….”

열이 오른 나머지 밥상 앞에서 입에 올리면 안 되는 말을 확 뱉어버릴 뻔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짧게 숨을


고르는 사이 마재가 뻔뻔스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정 너무 많이 해서 힘들다고?”

“야!”

“내가 많이 해봐서 아는데, 그 정도론 안 죽어. 그냥 우리 자기는 그동안 너무 금욕적으로 사느라 많이 안


해봐서 그런 거야. 내가 너 진짜 힘든 거 모를 리가 있어? 더 할 수 있는데도 너 이런 일 익숙하지 않은 거
아니까 아쉬워도 늘 짧게 끝내고 재워줬잖아. 맘 같아선 잠도 안 재우고 싶었다는 것만 알아둬.”

개새끼가 꽃같이 웃으며 짖어대는 소리에 골이 띵했다.

진짜 힘든 걸 모를 리 없다는 말도, 더 할 수 있다는 말도, 짧게 끝냈다는 말까지도 구구절절 헛소리였다.


게다가 많이 해봐서 안다니, 이 새끼는 그동안 혼자서 무슨 짓을 한 걸까.

“내가 열일고여덟 살 때는 진짜 네 생각 하면서 하루에…….”

귀신같이 남의 속을 꿰뚫어 보는 개새끼가 하루에 몇 번 했는지 듣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므로 나는


마재를 째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알았으니까 닥쳐. 근데 난 스물여섯 살이야. 십 대가 아니라고…….”

“우리 자기 튼튼한 거 내가 다 아는데. 너 부끄러우니까 괜히 약한 소리 하는 거잖아.”

맨날 몸도 비리비리하면서 술은 왜 그렇게 마시냐, 과제, 공부는 뭘 그리 열심히 하냐며 사람을 닦아세우더니


이럴 때만 입 싹 씻고 튼튼하다고 추켜세우는 시커먼 속내가 가증스러워서 눈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짧게 한숨을 내쉰 나는 한 번 더 헛된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어쩌면, 어쩌면 먹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 다이빙하고 싶어. 자격증 딸까 봐.”

빈 잔에 와인을 따라주던 마재의 입술이 호를 그렸다.

“나중에 해.”

“……우리 제주까지 뭐 하러 온 거야?”

“조금 전까지 하던 짓 하러.”

역시 쓸데없는 짓이었다. 침울해진 나는 와인 한 모금을 홀짝이며 푸념했다.

“너무 아깝잖아.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뭐가 아까워. 난 지금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

더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플 것 같았다.

나는 쓸데없이 입을 열어 에너지를 쓰는 대신 부지런히 배나 채우기로 했다. 방으로 다시 돌아가면 일어날


일이야 뻔했다.

게다가 끝났을 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면 얘가 나를 씻기게 될 것이다. 그제 낮에 한 번 당해봤는데,


웬만하면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또 겪지 않으려면 칼로리 비축은 필수였다.

헛된 저항을 포기한 나는 숟가락을 들어 따뜻한 전복죽을 열심히 퍼먹었다. 전복구이도 꼭꼭 씹어먹고, 차가운
딱새우회와 참돔회도 먹고, 와인도 마셨다. 두 잔째의 와인은 금세 비었다.

다시 잔을 채워주던 녀석의 눈시울이 슬쩍 휘어졌다.

“자기야,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 고운 눈웃음에서 불길한 기색이 피어올랐다. 갑자기 술이 몹시 당겼다. 내가 막 와인잔을 들어 마시기


시작했을 때였다.

“인터코스, 해볼래?”

밥 먹다 듣기엔 심히 뜨악한 말에 놀란 나머지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콜록대느라 목구멍이 아팠고, 생리적인
눈물이 솟았다.

마재가 심각한 낯으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병을 주더니 이제 약 주려는 개새끼를 향해 나는 손을


휘저었다.

“괜찮으니까…… 앉아.”

넘어간 게 얼마 되지 않았는지 다행히 기침은 곧 잦아들었다. 크게 숨을 내쉰 나는 눈가를 닦고 물을 마셨다.

“현아, 괜찮아?”

“응. 살짝 사레들린 거야.”

“……미안. 많이 놀랐어?”
어이없는 소리를 툭 던지며 뻔뻔스레 굴던 녀석은 내가 조금 탈이 났다고 그새 또 시무룩해져 있었다.

고작 사레 좀 들렸는데 죽을병 걸린 사람 보듯 걱정이 줄줄 흐르는 눈을 보고 있으니 어이없는 소리를 듣고


놀란 와중에도 허탈한 웃음이 샜다.

……너 진짜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내가 너 이럴 때마다 약해지는 거 알고.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내심 중얼거리며 나는 녀석을 흘겨보았다.

“그럼, 안 놀랄 일이야? 그리고…… 그걸 꼭 굳이 밥 먹으면서 말해야겠어?”

“그러네.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 밥 먹을 땐 주의할게. 근데, 미리 말 안 하면 너 놀랄 거잖아.”

그 말에 또 골이 띵했다. 저 말인즉슨, 결국 하겠다는 소리였다.

산 하나를 넘었다고 생각했더니 그 앞엔 또 다른 산이 있었다. 막막했다. 그런 한편으론 올 것이 왔다는


기분도 들었다. 마치 태풍 예보를 듣고 마음을 졸이다 진짜 태풍을 맞은 그런 느낌이랄까.

인터코스라니. 그래, 남자끼리도 그런 걸 한다는 소리는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남자 몸이 그렇게


생겼다. 어디든 넣고 싶어지는 거, 그건 본능적인 거였다.

그래서 쟤도 그동안 입으로 잔뜩 해줬던 거겠지. 그렇게 해주면서도 정작 녀석은 입술 찢어질까 겁난다는 말을
앞세워 나는 절대 못 하게 했다.

이 새끼가 이러려고 한사코 입으로 못 하게 한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그간 멍하니 있을 게 아니라 뭐라도 좀 봐둘 걸 그랬다. 그래야 하자고 하든 말든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할 텐데, 안타깝게도 지금의 나에겐 판단 근거 자료가 전무했다.

결국 나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낯빛을 지우지 못한 녀석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너…… 나한테 하고 싶어?”

“어. 실은 첫날부터 하고 싶었는데 그날 그러면 너 기겁하고 도망갈 거 같아서 말 못 했어.”

망설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겨우 사레들린 거 보고도 안절부절못하는 주제에 그런 짓은 또 아무렇지도 않게


하려고 드는 걸 보니 약간 기가 막혔다.

기력 없어 말라 버린 줄만 알았던 부끄러움이 확 솟구쳤지만 녀석과 이런 짓을 하는 사이가 된 이상 이 역시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나는 민망함을 꾹 참고 입을 열었다.
“……안 들어갈 거야.”

이번엔 물잔에 물을 따라주며 마재가 대답했다.

“사람 몸이 은근 유연해. 잘 풀어주면 들어간대.”

넌 그걸 어떻게 알아?

욱 치밀어 오른 물음을 겨우 목구멍 너머로 삼키는 사이 희미한 회의감이 덮쳐왔다. 어차피 거절하지도 못할
거, 입을 열면 수치만 늘릴 뿐이었다.

그러니 밥 먹으면서 하기에 심히 부적절한 망측한 생각과 대화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실제로 닥치기 전에는 해도 소용없을 마음의 준비를 하며, 네 맘대로 하라고 막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아니면 네가 나한테 넣어도 되고.”

“야!”

드디어 걱정스러운 기색을 떨쳐낸 녀석이 피식 웃으며 던진 노골적인 말에 뺨이 확 달아올랐다.

이 새끼는 수치심이라곤 새우 눈알만큼도 없는 게 분명했다.

무려 나흘 만에 밖에 나와 이 맛있는 음식들을 앞에 두고 대체 우리는 무슨 당치도 않은 소리만 지껄여 대고


있는 걸까.

그러나 그것도 끝이 아니었다. 곧 스멀스멀 피어오른 회의감에 불을 지피는 소리가 떨어졌다.

“난 어느 쪽이든 진짜 괜찮아. 그러니까 너도 부끄러워하지 말고 말해.”

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눈가를 가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한테 하라는 저 소리는 진심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나는 도무지 쟤한테 그런 짓을 할


맘이 들지 않는다는 거였다.

경험치가 좀 쌓이고 난 후라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이 시점에선 그랬다. 아니, 난 사실
인터코스 자체가 별로 내키지 않았다. 쟤가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면 할 생각 따윈 영영 하지 않았을 거다.

애꿎은 젓가락만 꽉 쥐고 부들부들 떠는 사이 재준이 덧붙였다.

“싫으면 싫다고 해. 너 싫어하는 거 할 생각 없어. 알지?”


이 말도 진심이었다. 그래서 나도 조금 솔직해지기로 했다.

“실은 별로 안 내켜. 근데 그게 뭔지 잘 모르니까 싫다고 말하기도 좀 그래. 그리고 넌 하고 싶다고 했고.”

“싫은 건 아닌 거지?”

“싫은지 아닌지도 모른다고 했잖아.”

“그럼 해보자.”

선뜻 나온 대답을 들은 나는 눈가를 가린 손을 치우고는 속에서 솟아난 물음을 툭 쏟아냈다.

“……내키지 않는 거랑 싫은 건 뭐가 달라?”

“내키지 않는 건 여지가 있으니 우선 해보고 판단하면 되는 일이고, 싫은 건 하면 어디든 탈 나니까 하지


말아야 하는 거지.”

“…….”

“약속해. 해보고 싫으면 더 하자고 안 할게.”

정말이지 물에 빠뜨리면 입만 동동 뜰 새끼였다.

어릴 때부터 온갖 기적의 논리를 펼쳐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던 녀석은 이제 도망갈 구석을 주는 척, 발 뺄


구멍 없는 그물을 용의주도하게 쳐대는 어른으로 자라 있었다.

어릴 때부터 이기지 못했는데 한층 레벨업한 녀석을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내가 그러는 꼴을 본 마재가 배시시 웃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런 일은 처음부터 잘하긴 어렵잖아. 손장난이야 수도 없이 했으니 너랑 같이해도 어려울


거 없지만 이건 또 다를 수 있으니까……. 게다가 우리 둘 다 처음이고.”

“……그래서?”

“자기야, 군대에도 신병훈련소가 있고, 야구는 시범 경기를 해. 심지어 게임에도 튜토리얼 적응 기간 있잖아.
20 년 동안 나 너만 해바라기처럼 보고 살았어. 내가 좋아서 한 일이니까 그걸로 공치사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우리 자기 그렇게 매정한 사람 아니잖아. 다섯 번 정도는 별로여도 너그럽게 봐줄 수 있지?”

무슨 대본이라도 읊듯 청산유수처럼 줄줄 말을 쏟아내는 녀석의 눈이 반짝반짝했다. 그 꼴이 또 너무 예뻤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 게임은 이미 다 끝난 거였다.

하지만 차마 눈을 보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멍하니 듣던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아픈 건 싫어.”

“안 아프게 할게.”

마재가 냉큼 대답했다.

* * *

그 후론 무슨 정신으로 밥을 먹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꾸역꾸역 음식을 먹는 내내 마재는 뭐가 그리 좋은지 대놓고 배시시 웃었다. 그 얼굴을 볼 때마다 곧


닥칠 일이 두려워졌다. 한편으론 저렇게 좋아하는 애를 스물여섯이 되도록 참고 기다리게 만든 게 새삼
미안해져서 나는 좀 많이 심란했다.

가게를 나온 우리는 해변가로 뻗은 길을 산책했다. 파도 소리를 귀에 담으며 우리는 별다른 대화 없이 천천히


걸었다. 녀석과 있을 때면 으레 그랬듯 침묵은 편안했다. 인적 드문 곳에 이르러 손을 잡았고, 밀물과 함께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짧게 키스했다. 심란했던 마음은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숙소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다시 심란해지고 말았다.

‘먼저 들어가 있어.’

‘어디 가게? 같이 가.’


내 대답을 들은 마재가 머리칼을 흐트러뜨리며 짓궂게 웃었다.

‘젤이랑 콘돔 사러 가는데 같이 갈 거야?’

‘……다녀와.’

녀석을 뒤로하고 방으로 먼저 들어와 곧 닥칠 일에 안절부절못하던 나는 마음을 다잡고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검색했다.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들을 대강이나마 훑고, 내친김에 동영상도 검색했다. 성인인증을
위해 날아온 번호를 찍어 넣으며 한층 깊어진 심란함은 동영상을 훑어보는 동안 절정에 달했다.

세상에, 저런 게 되는구나, 정말.

배우들은 기분 좋아 보였다. 그러나 포르노가 진짜라고 믿을 만큼 어리숙하지 못한 나는 그들의 반응보다는


그들의 몸이 벌이고 있는 일에 훨씬 신경이 쓰였다.

나는 오래지 않아 영상을 껐다. 깊이 알아봤자 걱정만 늘 뿐이었다. 어쨌든 되긴 된다는 걸 알았으니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애써 머리를 비웠다. 그러나 돌아온 녀석이 그다지 받고 싶지 않은 물건들을 건네주며 키스했을 때는


그냥 다 집어치우고 기절하고만 싶었다.

‘내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정말 안 되겠거든 무리하지 말고 그냥 와.’


어이가 없었다.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정말 안 되는 건 또 뭐람.

복잡한 마음으로 몸을 꼼꼼히 씻은 후 대강 옷을 걸치고 나가 녀석의 방문을 두드렸다.

문은 곧 열렸다. 씻고 나온 듯 녀석의 머리칼에도 물기가 남아 있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재준이 덮쳐들어


키스했다.

목에 팔을 감기가 무섭게 녀석이 나를 들어 올렸다. 레몬밤 향이 확 풍겼다. 녀석이 눈이 돌아가 덮쳐들 때는


제정신을 유지하려고 들면 나만 힘들다. 지난 나흘을 보내면서 느낀 바가 있었으므로 나는 내려달라는 헛된
저항을 하는 대신 녀석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끈적하게 혀가 얽혔다. 이내 민트향이 나는 혀가 깊숙이 파고들어 입천장을 긁었다. 따뜻한 물로 씻은 몸은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침대까지는 열 걸음 남짓이었다.

재준이 나를 안은 채로 침대에 앉았다. 찬물로 씻었는지 옷 아래로 파고든 손은 서늘했다. 허리부터 흉곽을
더듬고 올라온 두 손이 가슴과 등을 더듬었다. 뜨거워진 살갗에 닿는 찬 기운이 좋았다. 나는 눈을 감고
신음했다. 뺨에 닿는 숨결이 거칠어졌다.

상의가 벗겨지고, 입술이 떨어졌다. 녀석은 곧 드러난 목덜미를 길게 핥아 올렸다. 귀 아래를 눅진하게
지분대던 입술이 뺨을 머금었다. 무른 과일을 베어 물듯 조심스럽게 뺨을 물고 핥던 재준이 낮게 웃었다.

“또 로션 안 발랐네.”

네가 그렇게 물고 빠는데 얼굴에 뭘 바르겠냐고 핀잔하는 대신 나는 녀석의 상의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마주한 녀석의 눈시울은 예쁘게 휘어 있었다.

“나도 벗는 게 좋아?”

지난 나흘간 새롭게 알게 된 것은 꽤 많았다. 그중 하나는 녀석과 맨살을 맞대는 감각이었다.

“……응.”

“벗겨줘.”

웃으며 말을 마친 녀석이 짧게 입가에 키스했다. 나는 녀석의 티셔츠 자락을 끌어 올렸다.

곧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예쁜 몸이 드러났다. 나는 근육의 경계가 뚜렷한 날렵하고 긴 목덜미와 곧게 뻗은


빗장뼈, 각이 진 하얀 어깨에 차례로 키스했다. 입술에 닿은 피부는 크림처럼 부드러웠다. 먹고 싶다는 충동이
스칠 만큼이나.
그래서 나는 녀석이 내 뺨에 했듯 입을 벌려 살갗을 베어 물었다. 손바닥 아래 닿은 등 근육이 꿈틀거렸다.
더운 숨을 토해낸 재준이 속삭였다.

“더 세게 물어도 돼. 너 먹고 싶은 만큼.”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깊이 문 살을 빨아들이고, 핥았다. 살갗에서도 레몬밤 향이 났다.

새콤한 향이 코끝을 스치자 입안에 타액이 고였다. 믿을 수 없게도, 좀 더 먹고 싶다는 충동이 스쳤다. 나도
모르게 이를 세워 깨물었다. 그사이, 등을 타고 올라 목덜미에 닿은 서늘한 손이 물기가 남은 머리칼 속으로
파고들었다.

부드럽게 뒤통수를 어루만지던 재준이 곧 손에 아주 살짝 힘을 실으며 장난스레 웃었다.

“소심하긴. 자국 남아도 돼. 나도 네 몸에 많이 남겼잖아.”

내 몸에 무수히 찍힌 붉은 자국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돌연 녀석의 몸에도 같은 자국을 잔뜩 남기고 싶어졌다.


하지만 나는 결국 더 세게 살을 빨지 못했다. 이 예쁜 살결에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입술을 떼고 물고 있던 어깨에 살짝 입을 맞춘 나는 좀 더 세게 물어도 흔적이 남지 않는 곳으로 입술을


옮겼다. 입술이 겹쳐지기 직전, 재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콧잔등을 살짝 찌푸리며 웃었다.

입안을 녀석에게 내준 나는 서늘하고 매끈한 살갗 위로 손을 미끄러뜨리며 움푹 팬 척추와 근육의 윤곽을


더듬었다. 낮게 신음한 재준이 나를 당겨 안고는 침대에 올랐다.

매트리스에 등이 닿기가 무섭게 반바지 속으로 손이 들어왔다. 다리 사이를 더듬던 녀석이 흠칫하더니 눈을
둥글게 떴다.

“……속옷 안 입었네.”

요 나흘간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는지 갑자기 부끄러움이 확 솟구쳤다. 쿡쿡 웃은 재준이 콧잔등과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벗기기 쉬우라고 그런 거야? 우리 자기, 야한 짓도 할 줄 아네.”

“……그런 거 아니거든.”

“십 년 넘게 쌀쌀맞게 굴더니…… 살 맞댄 지 고작 나흘 만에 이런 귀여운 짓을 다 하네. 너 나 미치는 꼴


보려고 이러는 거지.”

“그런 거 아니라니까.”
저놈의 입이 또 시작이었다. 가까스로 대답하는 사이 달아오른 뺨이 화끈거렸다.

그냥 조금 전 씻고 옷을 입으려다 문득 어차피 몇 분 안에 벗게 될 속옷, 입어봤자 빨랫감이나 늘 뿐이라는


회의가 스쳤을 뿐이었다. 야한 의도는커녕 지극히 실용적 관점에서 충동적으로 저지른 짓에 녀석은 또 잔뜩
흥분해 있었다.

웃긴 새끼였다. 옷을 한 장 더 입고 말고 뭔 상관이람. 내가 발목까지 오는 패딩 점퍼로 몸을 꽁꽁 싸매고


있어도 달라붙어 집적댈 거면서.

그런 어이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순식간에 바지가 벗겨져 나갔다. 녀석의 것도 곧 같은 처지가 되었고, 우리


사이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에는 열이 번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곧 그 눈을 위에서 내려다보게 되었다. 나를 당겨


안고 몸을 한 바퀴 굴린 녀석이 베개에 등을 기댄, 상체를 반쯤 일으킨 어정쩡한 자세로 누웠다. 나는 무릎을
매트리스에 댄 채로 녀석 위로 포개졌다.

큰 손이 내 골반을 살짝 들어 옮겼다. 벌어진 다리 사이에 단단해지기 시작한 녀석의 것이 닿았을 때, 녀석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흠칫한 찰나 재준이 내 허리를 지그시 누르고는 천천히 흔들었다. 뜨겁고 딱딱한 것이 민감해진
살갗을 긁었다. 그 진저리나는 감각에 아랫배가 움찔거리고, 목구멍에서 소리가 끓기 시작했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어 신음을 참으며 눈꺼풀을 내리눌렀다. 거칠어진 숨결이 뺨 위로 흩어졌다.

“소리, 참지 말라고 했잖아. 듣고 싶어, 응?”

귓가를 간질이는 그 말은 역시 부끄러웠고, 아직은 무시할 수 있었으므로 나는 못 들은 척했다. 그러나 옅은


웃음을 흘린 재준이 골반을 깊이 누르며 꾹 다문 입술에 키스하기 시작하자마자 열린 입 밖으로 신음이 샜다.

“응…….”

소리를 내는 건 어째서 이렇게까지 부끄러울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녀석은 가슴을 만지고 있었다. 물기 없는 손으로 유두를 문질러 대자 저릿저릿한


쾌감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인상을 찌푸린 나는 고개를 돌려 끈질기게 달라붙는 입술을
떼어냈다.

“거긴 그만 만져. 아파…… 아!”

못된 새끼는 아프다는 말에도 아랑곳없이 도리어 손끝으로 돌기를 꼬집듯 비비며 귓가에 속살댔다.

“그렇네. 여기 너무 예뻐해 줬나 봐. 빨갛게 부었어. 아프겠다.”


“응, 으흑. 아파…….”

아프다는 말은 어디로 들었는지 거친 숨을 쏟아낸 재준이 손끝으로 꼿꼿이 솟은 돌기를 세게 튕겼다. 순간


피부를 바늘로 찌르는 듯 첨예한 감각이 등줄기를 관통했다.

“아!”

나는 녀석의 어깨에 손톱을 세우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데…… 아프기만 해? 응?”

“흑…….”

달래는 듯 몰아붙이는 그 음성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파르르 떨었다.

다리 사이를 느긋하게 문지르고 있던 페니스는 한층 커져 있었다. 그것이 곧 몸속으로 들어올 거란 생각에


흠칫한 순간 재준이 내 팔 아래로 손을 넣으며 속삭였다.

“왜 거짓말해. 아프기만 한 거 아니잖아, 너.”

반박할 새도 없이 몸을 끌어 올리는 손에 이끌려 무릎을 세웠다. 나를 올려다보며 자기 입술을 살짝 핥은


재준이 내 유두를 꾹 짓눌러 문지르며 지껄였다.

“손으로 예뻐해 주면 아파? 그럼 잔뜩 핥아줄게. 안 아프게 살살.”

“아! 하지 마!”

그러나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이미 유두를 문 녀석은 단번에 유륜까지 세게 빨아들였다. 안 아프게 한다더니
이번에도 역시 거짓말이었다.

“아, 으읏, 아파, 아프다고……. 흐으윽.”

나흘간 지독하게 괴롭힘당한 탓에 빨갛게 부어올라 커져 버린 유두가 지끈거렸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못된 새끼는 내 사정 따윈 나 몰라라 하고 자기 멋대로 굴고 있었다. 따갑다 못해 쓰릴 만큼 세게,


젖은 소리가 흐르도록 빨아들이다가도 내가 못 견딜 때쯤 되면 입술을 떼고 부어오른 것을 부드럽게 핥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등줄기를 시큰거리게 하고, 가슴을 파르르 떨리게 만드는 이 감각이 고통인지 쾌감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었다. 녀석이 양쪽 가슴에 번갈아가며 그 짓을 해대는 동안 나는 아프다는 말을 헛되이
되풀이하며 참지 못한 신음만 흘렸다. 내 목소리가 날카로워질 때마다 녀석은 뜨거운 숨을 가슴팍에 쏟아내며
돌기에 이를 세웠다.
“현아, 봐봐. 젖꼭지, 진짜 예쁘게 익었어. 어쩌지……. 자꾸 먹고 싶다.”

잠긴 목소리로 수치스러운 말을 쏟아낸 녀석이 게걸스레 가슴을 빨았다. 수치심과 흥분으로 돌 것 같았다.
연신 잇새로 신음과 더운 날숨이 터졌다. 쾌감보다 아픔이 더 크게 느껴질 즈음에야 겨우 입술이 떨어졌다.

곧 재준이 입가를 끌어 올리며 내 페니스를 훑었다.

“아프다더니, 여긴 왜 이래?”

녀석의 손가락이 선액이 흐르는 끝을 살짝 문질렀다. 그 감질나는 자극에도 허리가 튀었다. 혀끝으로 유두
끝을 살짝 누른 재준이 페니스를 쥔 손아귀에 힘을 실었다.

“응? 현아, 여긴 왜 이렇게 됐어?”

“흣, 너, 제발 입 좀 다물어…….”

내 목덜미를 끈적하게 핥은 녀석이 낮게 웃었다.

“하, 우리 자기 너무하네. 나 지금도 하고 싶은 말 엄청 참고 있는 거 몰라? 자기가 너무 부끄러워하니까


배려해서 이만큼만 하는 건데…….”

“…….”

“갸륵한 내 맘도 몰라주고. 너무 서운하네. 너 자꾸 그러면 진짜 나 이제 하고 싶은 말 다 한다.”

열이 끓는 와중에도 기가 막혔다. 이 수다스러운 새끼를 어쩌면 좋을까.

기겁해 도망치고 싶었던 첫날보다는 나았지만 저런 소리에 익숙해지기에 역시 나흘은 역부족이었다.

잠시라도 저 입을 막고 싶었으므로 나는 녀석의 턱을 들어 입술을 포갰다. 과연 녀석은 조용해졌지만 대신


농밀하게 입안을 핥아대며 페니스를 괴롭히는 바람에 내 몸은 더 뜨거워지고 말았다.

겨우 입술이 떨어졌다. 내가 가빠진 숨을 고르는 동안 젖은 입가를 간질이듯 살짝 키스한 재준이 눈을 휘며


웃었다. 무척 야하고 예쁜 그 얼굴에 혼이 팔려 멍하니 보는 사이 녀석은 상체를 아래로 조금 더 내리고는 내
허벅지 안쪽에 손을 넣어 지분댔다.

서늘하던 손은 어느새 뜨거워져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손이 닿는 곳마다 살이 녹을 것 같다는 착각이


스친 찰나, 재준이 바들바들 떨리는 내 허리를 붙들어 세우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곧 열이 올라 평소보다 더 붉어진 녀석의 입술이 열렸다. 입술 안쪽에 가지런히 돋은 흰 치아와 잔뜩 젖은


붉은 혀의 대비에 눈이 어지러워졌을 때였다.
“현아, 네 거 여기 넣어줘. 먹고 싶어.”

자기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해대는 개소리에 수치심이 확 솟구쳤다. 꼬리뼈까지 찌르르 저렸다. 내 페니스를
쥔 녀석의 손은 어느새 흘러나온 선액으로 잔뜩 젖어 있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너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들썩이는 배 위로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부끄러워? 근데 부끄러운 게 좋은가 봐, 우리 자기는. 여기 엄청 젖었네.”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너, 제발…….”

“제발? 빨아달라고?”

“야!”

“넣어주면 빨아줄게. 응?”

미친 새끼가 지껄이는 소리에 귀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녀석을 원망스레 노려보았지만 녀석은 태연하게 웃을
뿐이었다.

“처음도 아니고, 벌써 몇 번이나 해줬잖아. 뭐가 그렇게 부끄러워? 나밖에 없어. 괜찮아.”

연신 수치스러운 말을 지껄인 녀석은 내 페니스를 쥐고 흔들며 보란 듯이 입술을 열었다.

오늘 오후까지 눈이 돌아가 여유라곤 없이 덤벼들던 개새끼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느긋하게 굴어대는 작태가 심히 괘씸했다. 그러나 나는 곧 체념했다. 어차피 하고 싶은 건 결국 어떻게든 다


하는 새끼였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내가 이딴 식으로 구는 녀석에게 약하다는 거였다.

한참 전부터 아랫배에서 뭉근하게 끓기 시작한 쾌감에 부들부들 떨던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촉촉하게 젖어


벌어진 붉은 입술 사이로 내 것을 밀어 넣었다.

저지르고 만 짓이 너무 수치스러워 눈을 꼭 감고 떠는 사이 어이없게도 녀석은 마치 아이를 칭찬하는 것처럼


톡톡 가볍게 내 엉덩이를 두드리고는 단번에 기둥을 세게 빨았다.

축축하고 뜨거운 혀와 매끄러운 점막이 페니스를 빈틈없이 둘러싸고 조여댔다. 허벅지가 후들후들 떨렸다. 몸이
뒤로 넘어갈 것 같아서 나는 침대 헤드를 붙잡고 버텼다. 어지간하면 나도 맨정신이 아니고 싶었는데 도무지
그럴 수가 없는 것이, 이 자세는 너무 부끄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이렇게까진 안 할 것 같았다. 나 아니면 서지도 않는다던 말이 의심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이 새끼는 대체 어디서 뭘 보고 왔길래 이런 난행을 당연하다는 듯 해대는지 모를 일이었다.

벌써 이 지경인데 앞으론 어쩌지.

쾌감에 휩쓸리면서도 나는 나흘째 되풀이하고 있는 걱정을 놓지 못하고 끙끙 앓았다. 남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페니스를 문 채로 엉덩이와 허벅지, 다리 사이를 멋대로 만지고 있었다.

걱정이 들끓던 머리가 하얗게 변했을 무렵 불현듯 입술에 손가락이 닿았다. 정신이 반쯤 나간 나는 반사적으로
입술을 열어 그것을 물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목구멍 깊숙이 밀어 넣었던 페니스를 뱉어낸 재준이 열이 들끓는 눈으로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입안에 들어온 것을 핥았다. 혀를 가볍게 누르던 손가락은 혀 아래를 훑고, 모양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이를 덧그리고, 미끄러운 점막을 매만지며 온 입안을 헤집었다.

“응…….”

몸이 미쳤는지 머리가 미쳤는지 녀석이 입안을 더듬는 손길에 목덜미가 저릿저릿해졌다.

손가락이 목구멍 가까이 깊숙이 파고들자 입안에 타액이 잔뜩 고였다. 목이 말랐으므로 나는 손가락을 빨며
타액을 삼켰다. 살이 비벼지며 나는 찌걱대는 소리와 질척이는 물소리에 머릿속이 좀 더 아득해졌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열은 한층 뜨거워져 있었다.

내가 반쯤 넋이 나가 그 짓을 하는 동안 녀석은 손으로 내 페니스를 훑으며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느긋한 기색이 감돌던 눈에는 깃든 조급함을 알아차린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말이지 눈에 나쁜 새끼였다. 이럴 때까지도 예쁘기만 한 건 너무하지 않나.

사리 판단이 흐려진 머리로 멍청한 생각을 하는 사이 혀뿌리를 지그시 훑던 손가락이 불쑥 빠져나갔다. 뭔가


허전했다. 물고 있던 사탕을 뺏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입가는 엉망진창으로 젖어 있었다. 멍하니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고 있을 때였다.

“……씨발, 너 지금 너무 야한 거 알아?”

이 새끼가 왜 또 욕지거리일까. 나는 녀석을 노려보았다. 헛소리를 듣느니 키스하고 싶었다.

그러나 녀석은 이번에도 내 뜻대로 해주지 않았다. 침대 헤드에 기대 있던 재준이 아래로 쑥 내려갔다. 놀랄
새도 없이 녀석의 손에 허벅지가 끌려 내려갔다. 곧 회음에 뜨겁게 열이 오른 입술이 닿았다.

“야!”

놀랄 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녀석은 벌린 다리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회음부와 음낭을 핥아대기


시작했다.

바로 누워 당할 때도 버티기 힘들었는데, 이런 꼴로 이 짓을 하고 있으니 너무 수치스러워 죽을 것 같았다.

“흐…… 응, 너, 뭐 하는, 아…….”

대답 대신 거친 숨소리와 젖은 소리만이 다리 사이에서 번지고 있었다. 녀석은 흐물흐물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민감한 살을 물고 끈적끈적하게 빨아댔다.

허리가 덜덜 떨리고 목이 뒤로 넘어갔다. 견딜 수가 없었으므로 나는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허벅지를 누른


손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만해…….”

역시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침대 헤드를 꽉 움켜쥔 채, 정신을 놓을 만하면 꼭


뜨악한 짓을 저질러 사람을 기겁하게 만드는 개새끼를 견뎠다. 그러는 사이 다리 사이는 잔뜩 젖었고, 나는
그만큼 소리를 흘려야 했다.

잔뜩 피가 몰린 채 방치된 페니스 때문에 조금 괴로웠다. 녀석은 어떻게 이런 상태로 그렇게 오래 버티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좀 힘들었다. 오늘 오후까지 그렇게 해댔는데도 아직도 나올 게 있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었지만 어쨌든 한 번 정도는 빼고 싶었다.

하지만 다리 사이에 고개를 처박은 녀석은 만져줄 생각이 별로 없어 보였다. 내 손으로 할까 말까. 나는 곧
망설임을 접고 내 것을 쥐었다. 이미 쟤 앞에서 한 적도 있는 데다 이미 별별 짓을 다 하는 참인데 못 할 건
또 뭐 있나 싶은 생각이 든 걸 보면 나도 지금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게 막 수치 하나를 늘리려던 참이었다. 갑작스레 몸이 뒤로 넘어갔다. 어어, 하는 사이 녀석은 어느새 내


위로 올라와 있었다. 번들거리는 입가를 손등으로 훔친 재준이 인상을 쓰며 손끝으로 내 페니스 선단을 툭
튕겼다.

“정시현, 너 진짜…… 귀여워 죽겠네.”

멋대로 짖은 개새끼가 격하게 덮쳐들어 키스했다. 나는 녀석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짧은 키스가 끝나자


녀석의 얼굴에 짓궂은 웃음이 떠올랐다.

“너 하는 거 진짜 보고 싶어. 정말 아깝긴 한데…… 귀여운 짓은 나중에 다시 해줘. 지금은 내가 급해서 안


되겠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이 아래로 내려갔다. 녀석의 페니스는 흉흉할 만큼 커져 있었다. 볼 때마다 새삼스레


기가 질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응……. 만져줄까?”

“괜찮아. 아까 씻으면서 한 발 뺐어. 오늘 시간 걸릴 거니까.”


시간이야 늘 걸렸는데 뭔 소린가 싶어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던 나는 그제야 지금부터 벌어질 일을 깨닫고 흠칫
굳었다.

이마에 입을 맞춘 녀석이 내 등 아래로 손을 밀어 넣었다.

“처음엔 엎드리는 게 편하대.”

“…….”

녀석의 손에 이끌려 나는 무릎을 세우고 엎드렸다. 수치스러운 자세와 몰아닥친 불안으로 몹시 심란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걸 대체 어떻게들 하는 거지?

안절부절못하는 내 기색을 읽었는지 재준이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너무 긴장하지 마. 아프게 안 할게.”

너 아까 가슴 핥을 때도 아프게 안 한다고 했잖아…….

이미 녀석의 언행불일치를 잔뜩 겪은 터라 도무지 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녀석의 페니스 사이즈는


규격을 한참 초과했다. 원래 넣으라고 있는 곳도 아닌 데다 저런 걸 넣는데 어떻게 안 아플 수가 있을까.

갑자기 서러워졌다. 저런 걸 나한테 넣으려고 하다니, 양심이라곤 없는 새끼였다.

그 양심 없는 새끼는 귓가와 목덜미, 등과 어깨, 아무튼 보이고 닿는 곳마다 입술을 찍어대고 있었다.
다정하고 살가운 접촉에 어지럽던 머릿속은 다행히 조금이나마 깨끗해졌다.

내 긴장이 풀린 걸 알아차렸는지 재준이 뒤로 물러났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불쑥 손이 들어왔다. 약간 시든


페니스를 훑던 그 손은 곧 남의 손을 탈 거라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곳을 조심스레 더듬었다. 그제야
지금부터 벌어질 일을 실감한 나는 흠칫 굳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또 기겁해야만 했다.

“야! 마재준! 하지 마!”

뒤에 혀가 닿자마자 나는 화들짝 놀라 등을 세우고 허리를 앞으로 뺐다. 지난 나흘간 녀석은 내 온몸을 샅샅이,
꼼꼼히도 물고 빨았다. 하지만 그런 곳까지 핥을 줄은 몰랐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몹시 당황한 나는 무릎걸음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침대 위에 도망갈 곳은


마땅치 않았고, 심지어 두 걸음 가기도 전에 허리를 강하게 붙들렸다.
“뭘 그렇게 놀라. 진정해. 너 그럴수록 나 더 흥분해.”

낮게 중얼거린 재준이 내 허리를 확 끌어당겼다. 시트와 무릎이 같이 끌려 내려갔다. 나는 다시 도망치려


했으나 허리를 붙든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잘 풀어주지 않으면 다쳐.”

나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젤 있잖아. 그냥 손으로 하면 안 돼?”

“손으로도 할 거야, 당연히. 새삼 부끄러워하긴. 이미 아까 여기랑 여기도 다 핥아줬잖아.”

녀석은 한 손으론 내 허리를 잡고 다른 손으로 회음부를 꾹꾹 짓눌렀다. 그 손은 곧 애널을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간지러웠다. 등이 살짝 떨렸다.

“아무리, 흐윽, 그래도 거기는…….”

“우리 자기 또 차별하네. 다 똑같은 살이야. 정 부끄러우면 베개 끌어안고 있어.”

베개 안는다고 뭐가 달라지냐.

담담히 해대는 대꾸에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사이 재준이
덧붙였다.

“익숙해져야지. 이제 맨날 해줄 텐데.”

“읏, 꼭…… 해야, 해?”

“어. 그러니까 그냥 넌 야한 생각이나 하고 있어.”

결국 이번에도 도망가지 못한 나는 당황으로 얼룩졌을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곧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짓이 이어졌다. 축축하고 말캉한 살덩이가 벌어진 다리 사이, 회음부터 꼬리뼈에


이르는 예민한 살갗을 낱낱이 훑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수치심에 몸서리치며 애꿎은 베개만 쥐어뜯었다.

하다못해 소리라도 안 나면 버틸 만할 것 같은데 재준이 잔뜩 타액을 흘려내 뒤를 핥는 내내 젖은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아래가 젖어 열리는 느낌은 뭐라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입술을 꾹 다물고 버티던 중, 갑자기 간지러움을


닮은 쾌감이 일기 시작했다.
미약한 파동처럼 몸에 번져 나가던 그 감각은 젖을 리 없는 곳이 젖어 곧 내 의지와 무관하게 움찔거리기
시작했을 때쯤엔 견디기 어려울 만큼 강해져 있었다.

“으흐읏, 응…….”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 비음이 자꾸 흘러나왔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깊이 파묻었다.

“소리, 참지 말라고 했잖아.”

그 말에 대꾸할 새도 없었다. 완연히 부드러워진 구멍 속으로 불쑥 혀가 들어왔다. 말캉하고 눅눅한 살덩이는


조금씩, 끈질기게 속살을 적셔가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허리가 튀고, 등과 배에 팽팽하게 긴장이 깃들었다.
숨이 가빴다.

나는 결국 베개에 파묻은 얼굴을 들었다. 입을 열자마자 신음과 숨이 쏟아졌다.

“아, 하아, 읏! 하아…….”

피가 끓는 것 같았다. 머리도 몸도 너무 뜨거웠다. 숨을 몰아쉰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으…… 이제, 그만해…….”

낮은 숨소리가 들린 직후, 녀석이 내 페니스를 쥐었다. 그제야 나는 놀라 가라앉았던 아래가 바짝 서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랬다. 몸은 또 내 이성을 배반하고 흥분해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그사이 핥고 있던 곳에서 입을 뗀 재준이 돌연 허벅지를 세게 빨아들였다.

“아!”

따끔할 만큼 강한 압력이었다. 분명, 저곳에도 붉은 자국이 남을 것이다.

눈을 질끈 감은 나는 베개를 콱 움켜쥐었다. 아프도록 빨린 살에 곧 깃털 같은 키스를 떨어뜨린 재준이 액이


흐르는 선단을 지그시 눌러 문질렀다.

어이없게도, 나는 버티지 못하고 사정했다.

“대답해, 정시현. 좋아, 안 좋아?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웃음기 없는, 심지어 녀석답지 않게 조금 무뚝뚝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저 흥분한 탓에 가라앉은 것에 불과할 텐데도 어쩐지 그 목소리가 거짓말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그치는
것처럼 들려서, 나는 조금 서러워졌다.

“너, 흐윽, 왜 이렇게 못되게 굴어…….”

말을 꺼내자마자 돌연 코끝이 찡해졌다. 울 일이 아닌데 갑자기 왜 이러지. 당황한 나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커다란 손이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곧 등에 재준이 가슴을 포갰다. 녀석의 가슴팍도 뜨거웠다. 맞닿은 살을
타고 열이 번졌다.

그 열기에 괜히 심장이 욱신거렸다. 마치 그것을 알아챈 것처럼 재준이 내 왼쪽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곧 목덜미에 입술이 닿았다.

“내 말이 못되게 들렸어?”

“…….”

“미안해. 근데 아닌 거 알잖아. 내가 어떻게 너한테 못되게 굴어. 못 해, 그런 거.”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건 나였다. 코끝이 더 찡해졌으므로 나는 베개에 고개를 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너 만지다 너무 흥분해서 그래.”

“…….”

“알려줘, 시현아. 안 좋아? 그만할까?”

대답하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는 사이 녹을 듯이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인 재준이 귀 아래에 얕은 키스를


거듭하며 속삭였다.

“우리 뽀뽀하자. 자기야, 얼굴 좀 보여줘.”

그제야 나는 베개에서 얼굴을 들어 고개를 돌렸다.

녀석은 조금 난감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자 가슴의 둔통은 좀 더 심해졌다.

나는 살짝 올라간 녀석의 입가에 키스했다. 곧 혀가 섞였다.

짧은 키스를 끝내고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은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안 싫어. 좋아. 그런데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아.”

내 가슴을 꽉 끌어안은 재준이 낮게 웃었다.

“귀엽기는. ……그냥 아무 생각 하지 말고, 감각에 집중해. 몸에 힘 빼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엔 열이 끓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정해진 대답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응.”

행위는 이어졌다. 녀석의 말대로 몸에 힘이 다 빠질 때까지.

어느새 아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럽게 풀려 있었고, 사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몸은 어이없을 만큼


착실히 반응해 다시 열이 올랐다. 허덕이는 사이 아래에서 입술이 떨어졌다.

“하아…….”

드디어 끝났다는 안도감에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재준이 몸을 숙여 등에 키스했다.

“힘들었어?”

“응…….”

잠시 갈등하던 나는 망설임을 접고 덧붙였다.

“……그래도, 괜찮아.”

낮은 한숨을 흘린 재준이 재차 목덜미에 깊이 입술을 묻었다. 불현듯 또 키스하고 싶었다. 고개를 돌리자
녀석은 어렵지 않게 내 바람을 이루어주었다.

짧은 키스를 하는 동안 녀석은 협탁에 놓인 튜브를 집었고, 입술이 떨어졌을 때는 튜브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등줄기에 입을 맞추며 물러난 재준이 속삭였다.

“이제 손가락 넣을 거야.”

“……응.”

“아프면 참지 말고 말해.”
“알았어.”

젤을 짜내는 소리가 났다. 나는 길게 숨을 뱉어내며 긴장을 풀기 위해 애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지근하고


묽은 액체로 젖은 손가락 하나가 조심스레 안을 파고들었다.

“읏…….”

“아파?”

“아니. ……괜찮아.”

혀로 풀어놓은 아래는 생각보다 쉽게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이물감이 심했다. 녀석은 종종
허리와 등에 얕은 키스를 남기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안쪽 깊숙한 곳까지 손가락이 파고들었을 때는 약간
힘들었지만 버틸 만은 했다.

“하나 더 넣을게.”

“……응.”

두 개째는 조금 더 버거웠다. 녀석도 그렇다고 느꼈는지 곧 젤을 더 짜내는 소리가 들렸다. 미끈거리는


손가락은 느리게 몸속을 드나들었고, 종종 내벽을 지그시 누른 채 둥글게 미끄러지기도 했다.

그 행위에 수반되는 감각은 여전히 불쾌함에 가까웠다. 그러나 얼마간 더 견디자 빡빡하던 아래는 좀 더
부드러워졌고, 불쾌함과 이물감도 꽤 줄어 있었다.

“……네 안, 엄청 뜨거워.”

등줄기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리는 녀석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살갗에 닿은 숨결은 뜨거웠다. 체간을 타고
전율이 흐르기 시작한 그 순간, 아래가 잘게 움찔거렸다. 젖은 소리는 좀 더 커져 있었다.

재준이 내 페니스를 쥐고 부드럽게 훑기 시작했다. 몸에 흥분이 돌기 시작하자 아래가 조여들었다. 몹시


부끄러웠다. 부드러워진 속살이 손가락에 들러붙는 느낌이 몹시 생경해서, 나는 작게 신음했다.

그리고 내 몸을 열고 있는 녀석은 이상하게도 너무 조용했다.

그 이후로도 녀석은 말이 없었고, 내 숨소리와 신음 소리, 찌걱대는 젖은 소리만이 방 안을 울렸다. 곧 세


개째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하……. 으흑.”

압박감이 심했다. 그 뻐근한 감각이 누그러질 때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프진
않았다. 아마 당장 속에 집어넣고 싶을 텐데도 녀석은 서두르는 기색 없이 줄곧 조심스러웠다.
시간이 걸릴 거라던 말을 나는 그제야 온전히 이해했다. 아프지 않게 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는 거였다.

나는 부끄러움을 꾹 참고 입을 열었다.

“……이제 괜찮은 거 같아.”

“아직 아니야.”

잠긴 목소리로 단호하게 잘라 말한 녀석은 다시 말이 없어졌다. 그래서 나는 감각에 집중하라던 녀석의 말을


상기하며 입을 다물었다.

얼마 후 손가락이 드나드는 속도가 조금 빨라졌을 때였다.

손가락이 어느 지점을 스친 순간 배 속에 찌르르한 감각이 번졌다. 지각하기도 전에, 입술에서 신음이


쏟아졌다.

“아, 아! 으흣, 흑.”

갑작스러운 몸의 반응에 놀랄 새도 없이, 손가락은 이미 같은 곳을 짓누르고 있었다.

“아아! 으응, 아! 흐으윽! 그만, 그만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녀석도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느슨하게 풀려 있던 아래가 꽉 조여들어 손가락을 물고 있었다. 부끄러워할 정신도 없었다. 온몸을 덮친


쾌감은 여태 겪어본 적 없는 강도였다. 몸이 멋대로 덜덜 떨렸다.

나는 눈을 꽉 감았다. 그러자 몸속을 드나드는 손가락의 감촉, 온몸에 차올라 끓는 감각이 더 극심해졌다.
이미 열이 올라 있던 살갗은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졌다. 너무 더웠다. 가슴이 가쁘게 들썩였다. 관절 끊어진
목각 인형처럼 무릎과 팔이 무너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사정한 후였다.

머릿속은 하얬고, 몸은 아직 잘게 떨리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당황해 어쩔 줄 모르고 숨을


몰아쉬던 중 재준이 덮쳐들었다.

“미치겠다, 진짜…….”

뜨거운 숨이 어깨에 쏟아졌다. 곧 나를 바로 눕힌 녀석이 깊이 입술을 물었다.

입술을 떼자 인상을 찌푸린 채 웃고 있는 예쁜 얼굴이 보였다. 나는 그 얼굴을 마주하고서야 내 몸에 일어난


일을 깨달았다. 곧, 아까 혼자 검색하다 알게 된 사실 몇 가지가 머릿속을 스쳤다.

세상에, 첫날부터 이럴 수가 있나. 분명 쉽지 않다고 했는데.

갑자기 미치도록 부끄러워졌다. 나는 얼른 녀석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는 너른 등을 꽉 끌어안았다. 나만


잔뜩 만져줬을 뿐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녀석의 심장은 거세게 뛰고 있었다.

그게 더 부끄러워서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다리가 얽혔다. 딱딱한 것이 허벅지를 긁었다. 흠칫한 나는 녀석의


등을 더 꼭 껴안아 얼굴을 숨겼다. 그러나 재준이 내 팔을 떼어내고는 조금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내 노력은
수포가 되고 말았다.

내 뺨을 부드럽게 쓰는 녀석의 눈은 무척 다정했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은 곳에는 격렬한 탐욕이 도사리고


있었다.

“오늘 찾을 줄은 몰랐어.”

뭐라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좀 많이 부끄러웠으므로 나는 말 없이 눈을 내리떴다.

“실은 다섯 번 안에 될까 걱정 엄청 했는데…… 세상에, 나만 재능있는 줄 알았더니, 우리 자기도 재능있네.”

개소리를 하며 내 눈썹과 눈꺼풀에 입을 맞춘 재준이 속삭였다.

“……한 번 더 할 수 있겠어?”

아래를 저렇게 세워놓은 주제에 이제 와 망설이는 기색이 못마땅했다. 나만 좋자고 하는 일이 아닌데, 이


새끼는 왜 이럴 때마다 물러서려고 할까.

나는 녀석의 페니스를 꽉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자.”

짧은 평생, 내심 나는 내가 성적으론 꽤 담백한 편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 생각이 무색하게도 녀석이
나를 만지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너무 쉽게, 다시 흥분했다. 나흘간 으레 그랬듯.

콘돔 포장을 뜯는 소리가 들렸다. 다리 사이로 녀석의 것이 천천히 미끄러졌다.

손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굵기의 물건을, 정말 내 몸으로 받을 수 있을까.

겨우 이완되었던 몸에 다시 긴장이 서렸다. 녀석이 나를 다치게 할 리가 없다는 걸 알아도 두려움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넣을게. 긴장 풀어. 아프면 말하고.”


그러나 긴장 풀라고 말하는 녀석의 목소리에도 긴장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곧 선단이 안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부드럽게 열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끝이 다 들어오기도 전에 숨이 턱 막혔다. 손가락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뭉툭하고 굵은 선단이 파고들자 잘 풀어두었다고 생각한 아래가 단번에 빠듯해졌다.

“으…….”

나는 숨을 길게 내쉬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몸을 이완시켜도 손가락과는 크기부터 다른 페니스는 좀처럼


받기 어려웠다. 문자 그대로 뚫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여유라고는 없이, 내벽을 억지로 벌리며 페니스가 밀려드는 내내 나는 선뜻 하자고 말한 내 입을 한 대 때리고


싶은 강한 충동에 휩싸였다.

“하……. 현아, 힘 빼.”

웃기게도, 정작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손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미, 그러고 으흣, 있어…….”

“아파?”

골반을 쥔 녀석의 손가락이 살갗에 아프도록 파고들었다.

깊이 쑤셔 넣고 싶은 충동을 참고 있는 거겠지. 녀석의 입에 페니스를 넣을 때마다 느꼈던 충동을 상기한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아직, 괜찮아.”

“좀 더 넣을게.”

조금 다급하게 돌아온 말에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좀 더, 란 말이 무색하게도 삽입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속이 짓눌리는 감각이 버거웠다. 숨은 또 짧아져


있었다. 압박감과는 별개로, 페니스를 물고 있는 살이 살짝 따끔거리고 쓰라렸다.

“아직, 읏, 이야?”
“반도, 안 들어갔는데.”

이미 배는 꽉 찬 것 같았다. 반도 안 들어왔다는 말이 너무 막막했다. 게다가 젤을 그렇게 짜 넣었는데도


살갗이 쓸리고 따가운 느낌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왜지.

내가 당황하는 사이 들어온 것이 느리게 바깥쪽으로 빠져나갔다.

“지금부터 깊이 넣을 거니까…… 아프면 참지 말고 말해.”

이미 깊은 곳까지 들어왔는데 더 깊이 넣겠다는 소리에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순순히


대답했다.

“……응.”

페니스가 다시 밀려 들어왔다. 조금 빠르게 치고 들어온 것은 곧 여태 열리지 않은 곳을 꿰뚫었다.

“아!”

충격으로 등이 확 튀었다. 나는 베개에 고개를 처박고 부들부들 떨었다.

“하아, 씨발.”

재준이 내뱉은 거친 숨소리에 욕지거리가 섞였다. 억누른 그 목소리에 끓고 있는 흥분을 읽은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몇 번 더 페니스가 드나들었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그것은 점점 더 깊이 파고들었다. 내벽이 무리하게


벌어지다 못해 내장이 다 밀리는 것 같았다.

속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뻐근하고, 아팠다. 무엇보다도 살갗이 너무 쓰렸다. 버겁기는 해도 분명 부드럽게


들어오고 있는데, 어째서 살이 이렇게까지 따가운지 모를 일이었다.

눈가가 뜨거웠다. 쓰리고 아팠지만 도저히 그만두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현아, 괜찮아?”

전혀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버틸 만은 했으므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 거짓말하네. 너 지금 아픈 거지?”

재준이 내 페니스를 쥐었다. 조금 전까지 서 있었던 그것은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소리가 끓는 목을
가다듬었다.
“네 거 크기를, 흣, 생각해……. 하나도…… 안 아프면, 으읏,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냐?”

녀석은 말이 없었다. 보나 마나 뺄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게 뻔했다. 그래서 덧붙였다.

“괜찮으니까…… 그냥 해.”

갑자기 등 뒤로 가슴을 포갠 재준이 목덜미에 키스했다. 대답은 사이를 두고 돌아왔다.

“……너 이럴 때, 그런 말 하면 안 돼.”

곧 녀석의 것이 확 치고 들어왔다.

“아!”

페니스는 말도 안 되는 곳까지 들어와 있었다. 어이없게도, 몸 전체를 관통당한 것 같았다.

곧 내벽을 긁으며 뒤로 쭉 빠져나간 것이 다시 배 속 깊은 곳까지 박혀 들었다. 뒤에서 억누른 신음이 터졌다.

“읏…….”

숨이 막혀 허덕이는 사이 행위는 몇 차례 더 이어졌다. 너무 버겁고 아파서 등줄기까지 욱신거렸다.

묵직한 살덩이가 속살을 낱낱이 뭉개며 드나드는 동안 조금 전 절정에 달하기 직전 느꼈던, 찌르르한 쾌감이
아주 살짝 일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고통에 묻혔다.

“아……. 흑, 으읏…….”

버티지 못하고 팔이 무너졌다. 입술 새로 연신 가쁜 숨이 새고, 눈가에 눈물이 번졌다.

어느 순간 허릿짓이 멈췄다. 녀석은 내 몸에 닥친 충격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듯 더는 안으로 밀고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가슴을 내 등에 포갠 채 덜덜 떨리는 내 몸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귓가와 목덜미에 얕은 키스를
반복했다.

따뜻하고 다정한 손길이었지만 등에 닿은 녀석의 가슴은 크게 오르내리고 있었고, 숨소리는 거칠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삽입의 과정은 지겨울 만큼 느렸다. 그동안 녀석은 내가 아플까
염려해 치솟은 충동과 흥분을 계속 억누르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애쓴 것이 무색하게도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괜찮으니 맘껏 하라고 말해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차마 그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아래는 자칫 찢어질까


겁날 만큼 빠듯하게 벌어져 가까스로 녀석의 것을 받고 있었다.

“너, 괜찮아?”

재준이 물었을 때쯤 몸도 익숙해졌는지 압박감은 약간이나마 가라앉았다. 하지만 맞물린 살 틈에서 번진


쓰라림은 오히려 더 심해져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솔직히 대답하기로 마음먹었다.

“응……. 근데 따갑고, 쓰라려.”

“쓰라리다고?”

의혹이 깃든 목소리가 들린 직후 페니스가 불쑥 빠져나갔다. 녀석에겐 좀 미안했지만 그제야 살 것 같았다.


나는 막혀 있던 숨을 길게 토해냈다.

뒤로 물러난 재준이 아래를 더듬으며 물었다.

“언제부터?”

“……실은 처음부터 그랬어.”

“왜 빨리 말 안 했어.”

속상하다는 듯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손으로 할 때도 그랬어?”

“아니. 그땐 괜찮았는데…….”

잠시 말이 없던 재준이 나를 바로 눕히고는 콘돔을 빼냈다.

“아마 콘돔 때문이지 싶네. 현아, 너 라텍스 안 맞나 보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간혹 라텍스 알레르기 있는 사람들이 있대.”

콘돔을 처리하고 누운 재준이 내 머리 아래로 팔을 괴어 주었다.


“미안. 내가 그것도 모르고 너 아프게 했네.”

자기가 미안할 일이 아닌데 사과부터 하는 녀석이 못마땅했다. 나는 몸을 돌려 녀석에게 달라붙으며 중얼거렸다.

“나도 몰랐던 걸 네가 어떻게 알아.”

“넌 몰라도 난 알아야 해.”

부러 인상을 쓰며 투덜댄 재준이 내 이마에 입술을 콱 눌렀다.

“그런 게 한둘인 줄 아냐. 너는 모르고 나만 아는 거.”

가슴이 또 욱신거렸다. 나는 녀석의 가슴팍에 팔을 두르며 말을 돌렸다.

“고무장갑도 라텍스 아냐? 여태 멀쩡했는데.”

“그러고 보니 너 고무장갑 끼기 싫어하잖아. 혹시 간지럽거나 그랬던 거야?”

“아니, 전혀. 그건 그냥 귀찮아서 그런 건데…….”

내 어깨를 끌어안은 재준이 뺨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그럼 여긴 점막이라 예민해서 그런가 보다. 아직 따가워?”

“……이제 괜찮아. 알레르기, 심한 편은 아닌가 봐.”

“아프면 꼭 말해. 곧 가라앉을 것 같지만 혹시 또 모르니까. 그리고 앞으로 너, 고무장갑…… 아니다. 그냥


설거지도 하지 마.”

인상을 쓴 채 또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녀석을 보자 또 코끝이 찡해졌다.

“……뭐라는 거야.”

나는 녀석의 가슴에 두른 팔을 꼭 끌어당기며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맞닿은 녀석의 살갗은 아직 너무


뜨거웠다. 다리가 얽히자 여전히 형태가 온전한 녀석의 페니스가 닿았다. 역시 신경 쓰였다.

“만져줄까?”

나는 녀석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피식 웃은 재준이 내 턱을 들어 살짝 키스했다.


“신경 쓰지 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넌 못 했잖아.”

아직 열이 남은 눈에 짓궂은 빛이 떠올랐다.

“그동안 많이 했어. 나중에 또 하면 되고. 아, 너 별로여도 다섯 번은 봐주기로 한 거 까먹으면 안 돼.”

“…….”

재준이 내 콧잔등에 입술을 대며 속삭였다.

“잠시만 이렇게 있다 씻고 자자. 몸 식었지. 에어컨 바람 춥지 않아? 이불 덮어줄까?”

조금 전까지 그렇게 흥분한 주제에 미련이라곤 한 점 없어 보이는 태도 때문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그냥 하면 안 돼?”

“응? 뭘?”

발등으로 발치에 밀려 있던 이불을 끌어당기던 재준이 눈을 둥글게 떴다.

몸속을 꽉 채우던 압박감과 고통이 떠오르자 잠시 망설임이 일었다. 나는 눈을 한 번 꽉 감았다 뜨고는


망설임을 치워 버렸다. 어쩐지 오늘 못 하면 당분간 다시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콘돔 없이 하면 큰일 나?”

뭘 잘못 들었다는 듯 인상을 쓴 녀석은 말이 없었다. 다만 녀석의 손은 내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살짝 당황한 기색이 깃들기 시작한 예쁜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자.”

늘 수다스럽기 그지없던 녀석은 나를 가만히 보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녀석의 눈에 서려 있던


열은 다시 번지고 있었다. 나는 그 눈에서 망설임과 탐욕을 읽었다.

“이제 괜찮을 거 같아. ……아프면 말할게.”


복잡한 얼굴로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던 재준이 나를 확 끌어안고는 어깨에 이를 박았다.

역시 몸이 미친 게 틀림없었다. 등을 타고 흐르는 따끔한 아픔이 달게 느껴졌다.

물고 있던 곳에 입을 맞춘 재준이 고개를 들었다. 새카맣게 물든 눈을 마주하자 잦아들었던 가슴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너…… 벌써부터 나 버릇 잘못 들였다 나중에 어쩌려고 그래?”

언제부터 버릇 있었다고 이딴 소리를 할까. 어이가 없어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샜다.

“그때 가서 생각할게.”

“정시현, 너 진짜…….”

내가 녀석의 입술을 막아버렸으므로, 그 말을 끝으로 우리 사이엔 말이 없어졌다.

녀석은 식어버린 내 몸에 너무 쉽게 불을 붙였다. 욕심껏, 탐한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을 만큼 내 몸을


만지던 재준이 입술을 뗐다. 달라붙어 있던 몸을 떼자마자 내 다리를 활짝 열고 그 사이로 들어온 재준이
베개를 끌어와 내 허리 밑에 밀어 넣으며 약간 곤란한 듯 웃었다.

“얼굴, 보고 싶어서. 힘들면 말해.”

조금 부끄러웠지만 나는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곧 아래에 손가락이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녀석의 것이 들어 와 있었던 아래는 아직 젖어 있었고, 부드러웠다.


페니스에 비하면, 정말이지 이제 손가락쯤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런 식으로 경험치가 쌓이는 건가. 상황에 맞는 듯 맞지 않는 듯한 생각을 하는 사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은 마치 확인하듯 내벽을 문지르며 드나들고 있었다. 이물감은 여전해도
불쾌하지는 않았다.

“안 아파?”

“……응.”

다만 아래를 늘리듯 움직이는 손가락을 받는 내내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녀석의 시선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았다. 곧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눈 감지 마. 너도 나 봐야지.”
녀석의 목소리는 어느새 낮게 잠겨 있었다. 그 목소리만으로도 몸에 열이 올랐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눈을
마주하기가, 또 떨리고 있는 몸을 내보이고 있는 상황이 너무 부끄러웠으므로 나는 차마 눈을 뜨지 못했다.

“또 못 들은 척하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덜미에 입술이 닿았다. 살갗을 머금고, 흔적이 남지 않을 만큼


살짝 빨아대는 감질나는 짓이 얼마간 이어졌을 무렵, 아래를 넓히듯 움직이던 손가락이 내벽 위쪽을 부드럽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간지러운 느낌이 번졌다. 그리고 그것은 곧 미약하게나마
쾌감으로 바뀌었다.

나도 모르게 비음이 샜다.

“응…….”

“여기 좋아?”

뺨에 입을 맞추며 묻는 말에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런 거 같아……. 아!”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한 자극이 덮쳐들었다. 찰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같은 지점을 덧그리며 드나드는


손가락을 속살이 움찔거리며 물고 있었다.

“아…… 아! 으응…….”

들뜬 허리가 떨렸다. 아래가 멋대로 조여들었다 풀리기를 반복했다. 단단히 수축한 아랫배가 욱신거리고 살갗이
저렸다. 손가락이 몇 차례 더 같은 곳을 짓누르는 동안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했다.

“하…….”

덮쳐든 재준이 세게 입술을 빨았다. 그사이 속에 들어 있던 손가락이 쑥 빠져나갔다.

“하아, 하아.”

머리가 멍했다. 그리고 녀석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녀석의 예쁜 얼굴은 웃음기 없이 굳어 있었다.

튜브를 집어 든 재준이 손바닥에 넘쳐 흐르도록 젤을 짜냈다. 곧 차가운 젤이 속으로 밀려들며 쿨쩍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부끄러워 눈을 질끈 감은 순간 덮쳐든 재준이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차갑지. 미안, 나 지금 진짜 여유가 없어. 너 보고 있으니까 돌 거 같아.”


빠르게 지껄인 녀석은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덧붙였다.

“넣을게.”

“응. 아, 아읏…….”

여유가 없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대답하자마자 선단이 쑥 밀려들었다. 그것은 단번에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아!”

고통을 기억하고 있는 몸이 움츠러들었다. 겁을 낸 탓인지 열이 올라 움찔대던 안이 빡빡하게 조여들었다.


짓눌린 내벽이 떨리는 느낌에 나는 반사적으로 시트를 움켜쥐고 신음했다.

아팠다. 하지만 고통보다는 쾌감이 더 컸다. 버겁고, 힘든데도 그랬다. 제멋대로 요동치며 들어온 것을
빨아들이는 내벽의 감각은 너무, 너무 이상하고 견디기 힘들었다.

“으흑, 이거 뭐야……. 응…… 이상해! 이상해…….”

입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쏟아졌다. 내가 어쩔 줄 모르고 떠는 사이 내 허벅지를 붙든 녀석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곧 녀석의 입에서도 거친 신음이 터졌다.

허릿짓은 느리게 이어졌다. 그러나 그 자극만으로도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더 미칠 것 같은 건 녀석의


얼굴이었다. 깊게 미간을 찌푸린 녀석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넓은 흉곽이 크게
오르내리고, 바짝 조여든 근육의 윤곽이 선명했다. 반쯤 넋이 나가 정신없이 허덕이면서도, 나는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제일 예쁠 때 먹으라고 했었지.

언젠가 들은 적 있었던 헛소리를 떠올린 나는 참지 못하고 팔을 뻗었다. 그 말대로였다. 이렇게 예쁜 새끼를


왜 여태 내버려 두는 아까운 짓을 했을까.

찌푸린 낯으로 웃은 재준이 몸을 기울여 키스해 주었다. 녀석의 말대로 엄청, 맛있었다.

페니스는 점점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몸에 차오른 감각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벌어진 허벅지가
경련했다. 닫히려는 허벅지를 재준이 확 벌려 눌렀다. 허리가 떴다. 길게 빠져나간 페니스가 단숨에 깊숙이
박혔다.

“하, 윽…….”

“흐으…… 아…… 응! 으흐읏.”


너무 괴로웠다. 감당하기 힘든 감각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바짝 솟아오른 내 페니스를 쥐었다.
제대로 훑을 새도 없었다. 그 손을 붙잡아 들어 올린 녀석은 고개를 젓고는 손등에 키스했다.

“귀여운 짓은, 나중, 에…… 해달라고 했잖아.”

말을 마치기 무섭게 녀석은 그 손을 매트리스에 누르고 깍지를 꼈다.

아래에선 미칠 것 같은 감각이 일고 있는데도, 이미 두 번이나 사정한 탓인지 아까와는 달리 만지지 않고서는


절정에 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조금, 아주 조금만 만지면 될 것 같은데, 만져주지도 않으면서 직접 하지도 못하게 하는 개새끼가 몹시


괘씸해서, 나는 깍지 낀 녀석의 손을 꽉 쥐었다.

열이 잔뜩 오른 살갗에 땀이 배었다. 녀석의 허릿짓은 점점 빨라졌다. 여유 없이 벌어진 속살이 짓이겨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만으론 모자란 것처럼, 열이 오른 아래는 그때마다 움찔대며 들어온 것을 물고 늘어졌다.
압박감은 더 심해졌지만 그보다 큰 쾌감이 덮쳐왔다. 감각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강렬했다. 입이 제멋대로
소리를 쏟아냈다.

“응, 흣, 아…… 흐윽, 아! 아아…….”

“씨발, 너무, 너무…… 좋아.”

욕지거리 섞인 말을 마치자마자 재준이 다급히 입술을 물었다. 뜨겁고 거친 숨이 입안으로 쏟아졌다. 녀석이
느끼고 있을 흥분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정신없이 녀석의 혀를 빨아당겼다. 열이 올라 욱신거리는 목구멍으로 흘러드는 타액을 삼키며 녀석의 넓은


등을 끌어안았다. 땀이 배어난 살갗 위로 손가락이 미끄러져서, 나는 나도 모르게 손톱을 세웠다. 그러는 사이
삽입은 점점 더 깊은 곳까지 빠르게 이어지고 있었다.

깊이 찔린 배 속이 아팠고, 쓸려 경련하고 있는 내벽이 제멋대로 움찔거렸다.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숨이


짧았다. 녀석의 것을 빼앗아 들이쉬던 나는 곧 눈을 크게 떴다.

“아! 아아!”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가 완전히 맞붙었다. 어느새 페니스는 끝까지 몸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명치를 짓눌린
것 같았다. 숨도 쉴 수 없었다.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고통과 뒤섞여 덮쳐든 쾌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흑, 흐으윽, 아, 아아…….”

“하, 다 들어갔어……. 네 안, 뜨겁고, 부드럽고…… 너무 좋아……. 진짜, 미치겠다.”

내가 울고 있는데도, 이미 정신이 나간 개새끼는 아무 데나 입술을 찍어대며 좋다는 말만 해대고 있었다. 너무


기가 차고 어이가 없는데, 그게 또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가슴이 쥐어짜인 것처럼 아팠다.
이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치부를 다 드러내는, 이런 아프고 번거롭고 힘든 짓을 하는 거구나.

너무 갖고 싶어서, 더 가까이 닿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워서.

순간 스친 생각에 울컥한 나는 녀석의 등에 감은 팔을 꼭 끌어당기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너, 흑…… 이리 와.”

“너무, 윽, 당기지 마. 못 움직이겠, 잖아.”

“닥쳐……. 나 지금, 으흑, 너, 안고 싶어…….”

재준이 그제야 내 목덜미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어 눈을 맞댔다. 지금도 안고 있으면서 무슨 소리냐는 말을


하는 대신, 녀석은 내 눈가에 번진 눈물을 훑어내며 웃었다.

“나 안고 싶어?”

“응…….”

“좋아. 나도…… 너 안고 싶어.”

녀석의 팔이 내 등 아래로 들어왔다. 그 손에 이끌려 나는 녀석의 다리 위에 앉았다. 그 직후,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한 손으로 배를 움켜잡았다. 내 몸의 무게까지 실린 탓일까, 너무 깊었다.

“아! 응, 하, 흐윽.”

녀석의 어깨에 턱을 댄 채 나는 몸서리치며 신음했다. 이내 배를 잡고 있던 내 손을 끌어가 자기 목에 두르게


한 재준이 속삭였다.

“손은 하아, 여기. 나, 안아줘야지.”

녀석의 손에 끌려 골반이 들렸다. 깊숙이 박혀 있던 페니스가 길게 빠져나갔다. 순간 곧 닥칠 일을 직감한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녀석의 목을 콱 끌어안았다. 무섭다고 생각할 틈도 없었다.

“아, 아!”

배는 물론이고, 가슴까지 욱신거렸다. 너무 아프고, 너무 좋았다. 아픈데 좋다니, 어이가 없어 눈물이


쏟아졌다. 그사이에도 녀석의 손에 다시 올라간 허리가 떨어지고 있었다.

조금, 조금만 덜 들어오면 좋을 것 같았다. 몇 차례 행위를 견디던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무릎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녀석의 손에 제지당했다.

내 허벅지를 거칠게 끌어당겨 자기 몸에 바짝 붙인 재준이 입술을 포개고, 제멋대로 내 골반을 흔들었다. 잔뜩


젖은, 이제 완전히 풀린 속으로 녀석의 것이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눈물도, 소리도 참을 수 없었다.

눈가가 뜨거웠다. 흐느끼는 나를 으스러지게 끌어안고 목덜미에 마구 입술을 찍어대던 녀석이 열이 오른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지금부터, 하아, 미친 소리 할 거니까, 거절, 해. 알았지?”

“흑, 뭐, 아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재준이 내 허리를 꽉 내리눌렀다. 깊이 꿰뚫려 부들부들 떠는 동안 눈을 맞댄 녀석의 목이


크게 일렁였다.

“네 안에, 하고 싶어.”

그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뜨겁고 격렬한 눈으로 마치 노려보듯 나를 바라보던 재준이 나를 와락 끌어안으며


덧붙였다.

“사랑해, 시현아……. 빨리, 흣, 거절해.”

거절하라면서 사랑한다는 말은 대체 왜 하는 걸까.

“……개새끼.”

욕을 듣고도, 녀석은 인상을 구긴 채 웃고 있었다. 나는 깊이 팬 미간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그런 거, 흑…… 묻지, 응, 말라고 했잖아.”

“너…….”

“닥치고, 응…… 키스나 흐읏, 해…….”

“씨발, 정시현…….”

곧바로 입술이 포개졌다. 입안으로 뜨거운 숨이 쏟아졌다. 녀석이 짐승처럼 목을 울리는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이제 여유라곤 조금도 없이 빠르게 박혀드는 것을 견디며, 나는 괘씸하고 예쁜 개새끼의 입술을 세게 빨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움직임이 멈췄다. 재준이 몸이 으스러지도록 나를 끌어안았다. 곧 속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을 맹목적으로 끌어당겼다. 그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절정의 순간, 하얗게 비어 있던 머리에
떠오른 것이라곤 그뿐이었다.

* * *

눈이 뜨였다. 암막 커튼 사이로 햇빛이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너는 평온하게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 잠겨 잠든 네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좀 더 잘 보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거짓말처럼 네가 눈을 떴다.

‘잘 잤어?’라고 웃으며 말한 너는 나를 끌어안고 머리칼에 입술을 눌렀다. 곧 흩어진 내 머리칼을 걷어낸


너는 내 이마에도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독서등을 켰다.

오렌지빛 조명 아래로 드러난 너는 조금 부스스했다. 베개에 눌려 뻗친 머리카락도, 잠이 아직 남은 눈도,


얕은 하품이 새어 나오는 입술도.

내가 평소보다 조금 못생긴 네 얼굴을 보는 동안 너도 평소보다 많이 못났을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잠들기


전에 많이 울었으니 아마 눈도 부어 있었겠지.

말없이 내 얼굴을 보던 네가 ‘우리 자기, 아침엔 못생겼네,’라고 장난스레 말했다. 하지만 네 눈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너는 항상 내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장 연약한 아이인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인 것처럼 보곤 해.

난 실은 별거 아닌데.

네 앞에선 난 늘 그 사실을 잊어.

순간 가슴속에서 뜨겁고 아릿한 뭔가가 울컥 터져 나왔다. 그것은 네가 내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동안 차츰차츰


몸속에 차올라 부드럽게 출렁거렸다.
그리고 그것은 네가 웃었을 때 입 밖으로 흘러넘쳤다.

“재준아, 사랑해.”

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오래도록 애써 가라앉혀 두었던, 네가 듣고 싶어 하는 줄 알면서도 듣기만 했을 뿐, 한 번도 들려준 적


없었던 그 말은 네가 끌어 올린 거였다.

나도 모르게 내뱉어 버린 말에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곧 그럴 필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왜냐면, 어쩔 수 없는 거였다. 아무리 꼭꼭 숨겨두어도, 못 본 척해도 소용없는 거였다. 어쩌면 너를 처음


만난 날부터 가슴에 고이기 시작했을 그 마음은 더는 감출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렸으니까.

나는 조금 체념적으로 너와 나에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네가 기뻐해 주면 좋겠다고, 이제는


내가, 네가 더 꽉 잡고 있었던 손을 더 세게 맞잡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웃고 있던 너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네 목이 한 번, 두 번, 세 번, 크게 일렁였다.

너무 가슴이 아파서, 나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네 어깨를 끌어당겼다. 입술을 깨문 너는 덮쳐들듯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곧 가슴에 뜨거운 것이 번지기 시작했다. 나는 손수건이 없었으므로 그저 너를 꼭 끌어안고 들썩이는 어깨와


등을 천천히 쓸었을 뿐이었다. 어릴 때 늘 그렇게 했듯이.

너는 울보였는데 나 때문에 십 년 넘게 울지도 못했어.

그동안 너도 울고 싶은 순간이 많지 않았을까.

너는 내 앞에선 항상 웃고 있었어. 아마 너는 그 시간들을 혼자 버텨왔겠지.

목구멍이 욱신거렸다. 아직 남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늦어서 미안해. 하지만…… 한순간도 널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네 입에서 억누른 울음소리가 터졌다. 내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졌다.

수다스러운 네가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우는 동안 뜨거워진 네 등을 끌어안은 채 나는 혼자만의 약속을 여러


번 되풀이해 새겼다.
넌 이제 다시 울보가 되어도 괜찮아.

하지만 앞으로 네가 울지 않게 할게.

절대 네가 혼자 울게 두지 않을게.

그날 아침, 스물여섯이 된 우리는 벌거벗은 채로 서로를 끌어안고, 오래도록 울었다.

열다섯 여름에 그랬던 것처럼.

7 장 Ripple and sparkle

조상님의 가호로 나는 운이 좋게도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9 월이 되자 좀 바빠졌다.

첫째 주엔 개강을 했다. 반년 만에 학교에 돌아가 수업을 듣고 친구들, 선후배들에게 얼굴도장을 찍고, 미리


지원해 두었던 회계법인 면접 중 남은 하나를 보고 나니 한 주가 훌쩍 지났다.

둘째 주 토요일엔 엄마가 재혼을 하셨다. 여행을 떠나기 전 이미 뵌 적이 있는 새아버지는 엄마 말대로 좋은


분이셨고, 새로 생긴 여동생은 귀여웠다. 그날 나는 아주 오랜만에 친척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고, 새로 생긴
새아버지 쪽 가족들과도 안면을 텄다.

한편, 조상님들의 보우하심이 이어진 덕으로 지원했던 회계법인 네 곳에 무사히 합격했다. 그중 연말에 입사할
법인은 내가 아니라 재준이 정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간 나보다 더 열심히 각 법인들의 그라운드 분위기를 리서치한 녀석은 상하 분위기 엄격한 곳에서 내가
개같이 구르면서 고생하는 꼴은 못 본다며-사실 대형 회계법인은 그런 곳이 별로 없는데도-가장 분위기가
편하다는 곳으로 콕 찍어 지정해 주었다. 나는 군말 없이 그 말에 따랐다.

셋째 주엔 우리 집이 팔렸다. 엄마는 9 월 초에 이미 새아버지 댁으로 들어가신 후였다.

그 후 우리 집과 녀석의 집을 오가는 생활을 하던 나는 그제부터 조금씩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챙겨


가지 않은 남은 가구들은 모두 버리기로 했으므로 그 외 세간들을 간추려 엄마에게 보내고 내 짐은 녀석의
집으로 옮기기로 했다.
사실 마음먹고 덤벼들면 하루 이틀 안에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사흘째에 이른 오늘도 짐 정리는 좀처럼
마무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왜냐면 평생 살아온 집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은 온갖 물건과 자취들이 마치
지층처럼 켜켜이 쌓여 있어서, 짐을 정리하다 튀어나오는 물건들을 마주할 때마다 자꾸 딴짓으로 빠지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헐, 이거 우리 중학교 때 성적표 아냐. 우리 자기, 이렇게 공부를 못했었구나.”

“이게 뭐야. 뽕뽕이 인형이잖아. 세상에, 너 이걸 아직 갖고 있었어?”

“이 맨투맨 티셔츠, 대학 입학하자마자 샀던 거네. 이거 입은 너 귀여웠는데…….”

“우리 자기 교과서에 낙서해 놓은 것 좀 봐……. 이거 머메이드맨이야? 어떡하냐……. 우리 자기 그림도 못


그리네.”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데도 짐 싸기 같은 힘든 일을 혼자서 어떻게 하느냐며 저녁마다 우리 집에 쫓아온


마재준은 자기 기억에 남아 있는 물건 하나가 나올 때마다 호들갑을 떨며 나를 불러다 앉히고는-내가 안 가면
굳이 또 그 물건을 들고 쪼르르 쫓아와서는-그 물건의 주인인 나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한 옛날이야기를 줄줄
늘어놓기 일쑤였다.

내 물건만이라면 차라리 나았다.

“어, 이 쇼핑백, 그때 그 케이크가 맛있었던 가게 거잖아. 그 가게 아직 있나?”

“이 물병, 너 고등학교 때 쓰던 거네. 너 감기 걸렸을 때 너희 엄마가 생강차 끓여서 넣어주셨던 거 기억난다


……. 이거 아직 쓸 수 있을까?”

“이 컵, 그 카페 새로 생겼을 때 가서 사은품으로 받은 거잖아. 더럽게 맛없어서 금방 망했는데…… 여기서 그


흔적을 다 보네.”

심지어 녀석은 이런 식으로, 집안의 온갖 잡다한 살림살이 하나하나를 집어 들 때마다 사연을 읊어대곤 했다.

문제는 우리 집에 있는 물건 중 마재준의 기억에 없는 게 그리 많지 않았다는 거다. 게다가 자기 기억에 없는


물건이 나오면 그건 또 그것대로 뭐냐고 추궁을 해대는 저 징한 새끼 때문에 짐 싸기 진도는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녀석이 호들갑을 떨어댈 때마다 그 옆에서 동조한 나도 일이 늦어지는 데 한몫했다는 걸
부정하진 않겠다.

그리고 사흘째인 오늘,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우리 집으로 온 녀석은 지금 내 방 책장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현아, 이리 와봐. 앨범 보자.”

부엌 살림살이들을 정리하던 나는 피식 웃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오늘도 짐 정리 마무리는 글렀다. 하긴, 애초에 앨범 같은 함정은 미리 치워 버렸어야 했는데,
녀석의 눈에 띌 때까지 놔둔 게 잘못이었다.

집기가 대강 빠진 내 방은 휑하고 어수선했다. 그리고 녀석은 챙기다 만 박스를 펼쳐놓은 채 아예 앨범을 들고


내 침대에 올라가 앉아 있었다.

앨범은 네 권이나 됐다. 두 권은 엄마와 아빠가 연애하던 시절, 그리고 내가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이 담긴 것이었고, 나머지 두 권은 녀석을 알게 된 이후 찍은 사진들이었다.

“그걸 다 보게?”

침대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붙이며 묻자 재준이 자기 무릎을 툭툭 두들겼다. 나는 못 본 척했다. 하지만 거기


앉기 싫다는 내 암묵적인 의사 표현 따윈 단번에 무시한 마재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끌어당겨 자기 다리
사이에 앉히고는 내 어깨에 턱을 척 괴며 중얼거렸다.

“이거 어머니 보내 드릴 거 아냐?”

“응. 엄마가 보내달랬어.”

“그럼 다 봐야지.”

“몇 번이나 봤잖아.”

“이제 다시 보기 어려울 거 아냐. 이참에 우리 자기 귀여운 사진은 몰래 빼 갈래.”

“……엄마 드려야 해.”

“그럼 내 폰에 찍어놔야겠다.”

“…….”

재준이 자기 폰을 나에게 쥐여 주었다. 앨범의 시대순까지 꿰고 있는 녀석은 네 번째 앨범을 내 무릎 위에


올렸다.

“오늘은 거꾸로 보자.”

나는 대답하는 대신 앨범 표지를 넘겼다. 첫 페이지는 중 2 가을, 수학여행지였던 제주에서 찍은 우리 반 단체


사진이었다.

“여기 식물원 재미없었어. 아니, 이때 수학여행 최악이었어.”


재준이 투덜대는 까닭을 모르지 않는 나는 심상하게 대꾸했다.

“난 재미있었는데.”

“뭐야. 이럴 땐 나도 그래, 라고 해야지.”

부러 골이 난 척 툴툴댄 재준이 내 가슴을 꽉 끌어안고는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중 2 수학여행 때, 반이 달라 같은 조로 묶이지 못했던 우리는 매일 행선지가 달랐다. 심지어 숙소도 달라서


수학여행 내내 우리는 거의 만나지도 못했다.

아마 초등학생 때였다면 또라이 마재준은 담임선생님에게 쫓아가서 행패를 부리고도 남았을 거다. 하지만
중학생 마재준은 조금이나마 철이 들었던 모양인지 별다른 풍파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수학여행을 갔었다.

대신 녀석은 애꿎은 내게 행패를 부렸다. 수학여행 내내 나 없이 재미있냐, 너 없으니까 밥맛이 없다, 날씨는
왜 이 지경이냐, 누구누구랑 너무 찰싹 달라붙어 다니지 말아라, 사진 찍을 때 절대 옆에 있는 새끼랑
어깨동무하지 말라 따위의 시답잖은 폰 메시지가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들었다.

그즈음, 나는 녀석 때문에 몹시 심란했었다. 그래도 첫날은 그 메시지가 올 때마다 꼬박꼬박 읽고 대충 성의


없는 답신을 날렸다. 괜한 짓이었다. 왜냐면 그 이후 메시지가 날아오는 텀이 훨씬 짧아졌기 때문이었다.

하루하고도 반나절, 메시지 폭탄에 시달리던 나는 결국 이틀째 오후부터는 적당히 읽씹하다 저녁에 그날 찍은
내 사진 몇 장을 보내는 것으로 사태를 무마했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징한 새끼였다. 그 새끼는 이제 나를 꼭 끌어안은 채 내 어깨에 턱을 콕콕 찧어대고


있었다. 언제 적 일로 새삼 뚱해지는 녀석이 조금 귀여워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덧붙였다.

“이때 너 없어서 진짜 편하고 좋았는데.”

“세상에. 난 네 생각 하느라 시름시름 앓았는데 그렇게 말하기냐. 못됐어, 정시현.”

뾰로통하게 툴툴댄 녀석은 곧 사진 속에 있는 내 얼굴을 가리켰다.

“볼 때마다 성질난다. 나도 없는데 웃고 있다니…….”

“너 없어서 웃고 있는 거라니까.”

“화나는데…… 웃는 얼굴 귀여워서 내가 참는다. 근데 너 앞으론 내가 볼 때만 웃어. 절대 아무 데서나 웃지


마. 너 자꾸 웃으니까 여자애들이 달라붙는 거 아냐.”

페이지를 넘기며 재준이 툭 던진 뜬금없는 말에 나는 또 웃고 말았다.


여자애들이라니. 수아 이후론 이 새끼 말고 여태까지 나 좋다고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뭔 개소리인지
모를 일이었다.

“달라붙긴 누가. 아무도 없었어.”

“아무도 없긴.”

당치도 않다는 듯 피식 웃은 녀석이 내 옆구리를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그 애들 떨어낸다고 내가 고생을 좀 많이 한 줄 아냐. 특히 너 대학 입학 직후가


제일 힘들었어.”

난데없는 말에 나는 흠칫했다.

“……너 무슨 짓, 했어?”

곧 재준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뭐랬어. 네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다 묻어버릴 거라고 했잖아.”

“…….”

그랬다. 분명 그런 개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런 짓을 할 일이 있었을까?

“준희 선배랑 선아 선배, 또 운영이랑 예서, 희진이…… 말고도 좀 더 있었는데.”

“…….”

녀석의 입에서 줄줄 쏟아진 대학 동아리 선배들과 동기들의 이름에 나는 약간 당황했다.

그냥 친하게 지냈을 뿐 그들이 나를 좋아했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저 이 새끼 눈에 이상한 필터가 낀 게


분명했다.

내가 의혹과 의심에 잠겨 허우적대는 사이 헛소리는 이어지고 있었다.

“걱정 마. 별거 안 했어. 그냥 너한테 오래 사귄 애인 있다고 소문내고, 너한테 관심 보이는 애들 꾀어다


단체로 소개팅도 시켜주고, 너랑 친한 네 동기 지수 있잖아. 걔랑 가끔 연락하면서 네 주변에 누구 없는지
넌지시 물어보고…… 생각나는 건, 뭐 그 정도?”

“…….”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다만 내 앞에선 마재준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었던 지수가 녀석과 몰래 연락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

이 새끼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저런 짓까지 굳이 하지 않아도 별일 없었을 텐데.

고생, 아니, 별스러운 짓을 사서 하는 새끼였다. 졸업을 코앞에 둔 지금에야 겨우 알게 된 사실에 약간 기가


막혔지만 나는 쓸데없는 말을 보태는 대신 사진을 보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페이지를 막 넘기려는데 낄낄 웃은 재준이 내 뺨에 세게 입술을 눌렀다.

“나 진짜 너무 힘들었어. 그러니까 자기야, 앞으론 절대 남 앞에선 웃으면 안 돼.”

“…….”

“현아, 사랑해.”

“……사진이나 봐.”

나는 팔꿈치로 괘씸한 녀석을 한 번 쿡 찍고는 페이지를 넘겼다.

중학생 시절엔 둘이 같이 놀러 다니며 찍은 사진이 많았다. 놀이공원이나, 한강변, 동네 산 정상 같은 곳을


배경으로 나란히 선 우리는 지금보다 한층 앳된 얼굴이었다.

그때는 녀석이 다 자랐다고 생각했었는데, 다 자란 지금 다시 보는 중학생 마재준은 키가 훌쩍 클 뿐 애티가


줄줄 흘렀다. ……물론 나는 그냥 애였다.

녀석의 예쁘고 귀여운 얼굴을 찬찬히 훑어가며 페이지를 넘기는 일은 즐거웠다. 엄마와 둘이 찍은 사진도
있었다. 녀석은 종종 어떤 사진들을 가리키며 나에게 자기 폰으로 사진을 찍으라고 시켰고, 나는 얌전히 그
말을 따랐다.

페이지가 넘어가 고등학생이 되자 녀석의 어머니께서 한국에서 개인전을 하실 때 가서 찍은 사진이라든가,


녀석의 외할아버지이신 마 화백님 기념 미술관에서 찍은 사진 같은 것들도 종종 나왔다. 내 옆에서 웃고 있는
마재준은 한층 더 자라 있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지도 제주였다. 그때는 반이 달랐어도 같은 조로 묶였었다. 그래서 나와 녀석이 같이 찍은


사진이 많았다. 한동안 페이지를 넘기던 나는 그 사진을 발견했다.

나는 녀석이 나온 사진은 모두 좋아했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사진은 지금 보고 있는, 성산 일출봉


화구를 배경으로 나란히 찍은 사진이었다.

약간 어정쩡하게 선 나는 조금 부끄러운 듯 웃고 있었다. 그 옆에서 산책로 울타리에 팔을 걸치고 쏟아지는


빛을 맞고 있는 녀석은 보기만 해도 따라 웃고 싶을 만큼, 입을 크게 연 채로 활짝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이 너무 예뻐서, 나는 한동안 그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 뒤에 붙어 있는 징한 새끼도 사진을
보는 듯 말이 없었다.

문득 녀석의 얼굴이 보고 싶어져서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재준이 입술을 포개는 바람에 녀석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나는 녀석을 떠미는
대신 순순히 입술을 열었다. 왜냐면, 이제 키스하는 시간 정도는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매일, 지겹게 볼 수
있을 테니까.

짧은 키스를 끝낸 우리는 다시 앨범 속으로 돌아갔다. 초등학교 시절 사진들로 가득 찬 세 번째 앨범엔 종종


나보다 작은 마재준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 앨범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녀석은 나보다 커져 있었다. 두 번째
권은 더 어렸던 날들이 담겨 있었고, 녀석과 같이 찍은 사진보다는 엄마, 아빠와 같이 찍은 사진이 더 많았다.

첫 번째 권을 열자 우리 또래의 엄마와 아빠가 우리를 반겼다. 앳된 엄마와 아빠의 모습에 괜히 코끝이


시큰해져서 눈을 두어 번 깜빡이는 사이 녀석은 그새를 못 참고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우리 자기가 왜 이렇게 예쁜가 했더니 엄마 아빠를 많이 닮아서 그렇네.”

“……그런 말 좀 안 할 수 없어?”

나는 저 예쁜 거 몰라서 그냥 입 다물고 사는 줄 아나.

내심 투덜거리는 동안 낄낄 웃은 재준이 티셔츠 아래로 손을 넣어 내 배를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말려봤자


소용이 없으므로 나는 잠자코 페이지를 넘겼다.

“왜.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인데. 봐봐. 너희 어머니 미인이시고, 아버지는 미남이시잖아. 안 그래?”

“…….”

이번엔 내가 입도 못 떼게 엄마 아빠를 끌어들이는 치졸한 짓을 저지른 녀석이 페이지를 넘겼다.

곧 한 페이지 가득 차도록 크게 현상된, 코스모스가 잔뜩 핀 들판에서 웃고 있는 엄마가 나타났다.

재준이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이 사진 볼 때마다 놀라. 너, 어머니랑 진짜 많이 닮았다. 웃는 얼굴이 완전 판박이야.”

내 웃는 얼굴을 스스로 볼 일이 거의 없는 나는 녀석의 말에 의구심을 표하는 대신 이 사진을 찍어주었을


아빠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를 상상했다.

아마 아빠도 엄마처럼 웃고 있었을 거다. 왜냐면 사진 속 엄마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아마 마주 보고 있는,


웃고 있었을 아빠가 사랑스러워서 저런 표정을 지으셨던 거겠지.

지금 내 배를 함부로 만지고 있는 새끼도 나를 볼 때면 엄마처럼 웃었다. ……그리고 엄마랑 내가 웃는 얼굴이


판박이라고 했으니 나도 녀석을 볼 때 저렇게 웃고 있는 거겠지.

다시 코끝이 찡해졌을 무렵, 페이지가 넘어갔다. 한동안 말없이, 우리는 엄마와 아빠의 젊은 날을 훔쳐보았다.

두 분이 공유해 온 아름다운 날들은 약간 촌스러운, 하지만 행복해 보이는 결혼사진으로 이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등장했다.

재준이 내 배를 꽉 끌어안으며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세상에, 우리 자기 귀여운 거 봐. 백일 때부터 꼬추가 토실토실했네.”

“야…….”

백일 사진 찍을 때 애를 홀딱 벗기는 이 이상한 관습은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거람. 그 와중에 목에 나비


리본은 또 뭐야.

왕좌를 연상케 하는 작은 의자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벌거벗은 채 앉아 있는 민머리의 나를 차마 더 두고 볼 수


없었던 나는 얼른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나 넘긴 보람도 없이 내 손을 잡아 다시 그 페이지를 펼친 재준이
뺨에 입을 맞추며 짓궂게 속살거렸다.

“우리 자기, 임신하면 좋겠다. 아기 낳으면 너 닮았을 거 아냐.”

여태 들어온 개소리 중에서도 수위를 다툴 만한, 정말이지 충격적이고 참신한 개소리에 나는 대꾸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그사이, 바지 밴드 안으로 손을 넣어 내 아랫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개새끼가 또 짖었다.

“혹시 알아? 앞으로 열심히 하면, 임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야…… 야, 이 미친 새끼야!”

부들부들 떨던 나는 버럭 소리치며 등 뒤에 찰싹 달라붙은 녀석을 팔꿈치로 사정없이 찔렀다.

좀 아팠는지 윽, 하고 신음한 개새끼가 나를 꽉 끌어안으며 귓바퀴를 콱 깨물었다.

“아무리 부끄러워도 그렇지, 그렇게 세게 때리면 아프잖아.”

“너, 당장 떨어져!”
앨범을 턱 덮은 나는 나를 휘감고 있는 팔을 떼어내고는 얼른 녀석으로부터 도망쳤다. 그러나 막 침대에서
내려가려는데 배에 팔이 감겼다.

“또 귀 빨개져서는…… 어딜 도망가.”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침대 위로 끌어 올리고 내 위로 덮쳐든 녀석은 요사스럽다는 말이 절로 떠오를 만큼


예쁘게 웃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해일처럼 덮쳐왔다. 나는 다시 도망가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꼼짝하지 못하게 내 다리를 타고
앉은 개새끼가 내 티셔츠를 끌어 올리며 속살거렸다.

“아기 만들자, 시현아.”

귀가 썩을 것 같은 말에 얼어붙어 있는 사이 또 나를 홀라당 벗겨놓은 개새끼가 격하게 덮쳐들어 키스했다.

이삿짐 싸다 말고 이게 대체 무슨 황당한 짓이야.

저 개소린 또 뭐고.

나는 경악했다. 하지만 희희낙락 덮쳐드는 개새끼를 차마 밀어내지 못하고 등을 끌어안으며 나는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우리 사이, 이대로 괜찮은가.

스멀스멀 피어오른 해묵은 질문을 곱씹던 나는 곧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그날도, 우리는 짐을 다 싸지 못했다.

다만 그날 나는 전날 서랍 깊은 곳에서 찾아낸, 오래된 삼단 우산과 손수건을 뒤늦게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 물건의 주인인 울보 새끼는 그것들을 앞에 두고 조금 눈을 글썽였고, 나는 그 울보 새끼 때문에 눈을


글썽였다.

오래 묵은 엉터리 약속의 시효는, 그렇게 끝났다.


* * *

녀석의 말대로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같이 운동을 하고, 놀고, 밥을 먹었다. 솔숲으로 산책을 가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었으며,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이나 쉬는 날이면 종종 동네 밖으로 외출을 했다.

하지만 달라진 게 없는 건 아니었다. 엄마와 함께 매일 이른 아침을 먹던 나는 이제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게 되었고, 공부하느라 뒷전이었던 운동을 거의 매일 저녁 하게 되었다.

운이 좋게도 시간표를 대충 비슷하게 맞출 수 있었던 탓에 나는 학교 갈 때나 올 때 녀석의 차를 얻어타는


경우가 많아졌고, 우리 집 대문 열쇠 대신, 녀석의 집 대문 비밀번호를 알게 되었다.

01011231. 1 이 네 개씩이나 들어가고, 고작 0123 네 개의 숫자로 구성된 허술한 그 번호는 녀석의


어머니가 집을 떠나시자마자 새로 세팅된 거라고 했다.

나는 너희 집 대문 비밀번호에 내 생일이 왜 끼어 있냐는 말을 하는 대신 그냥 징한 새끼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녀석은 올해 생일이 벌써부터 기대된다며 낄낄 웃었을 뿐이었다.

아주 소소한 갈등도 있었다.

아무리 그렇고 그런 짓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지만 결혼한 부부 사이도 아닌데 매일 침대를 같이 쓰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내심 그렇게 생각했던 나는 이사 첫날 저녁, 내 방으로 지정된 녀석의 옆방에 들어가 자려고 했다.

‘잘 자. 내일 너 오후 수업이지? 몇 시에 일어날 거야?’

‘잘 자란 인사를 왜 거기서 해?’

‘응? 여기가 내 방이잖아. 나 이제 들어가 잘 건데.’


내 말을 들은 녀석은 피식 웃으며 내 허리를 잡아끌었다.

‘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너 이제 나랑 같이 자야지.’

‘아무래도 그건…… 좀 그렇지 않아?’

‘뭐가 그렇다는 거야. 아직 뭐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각방 쓰자고? 그거야말로 좀 그런 거 아냐?’

‘……여기 너희 어머니 집이잖아.’

‘엄마 방에서 같이 자자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야.’

아무리 어머니는 안 계신다지만, 그분 댁에서 그분 아들과 버젓이 한 침대를 쓰는 뻔뻔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녀석을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우린 애도 아닌데, 방 정도는 따로 써야 하는 거 아닐까?’

재준이 내 뺨을 쭉 잡아당기며 짓궂게 웃었다.


‘애가 아니니까 같은 방을 쓰는 거잖아. 너 맨날 섹스하고 난 다음에 네 방에 돌아가서 잘 거야?’

‘……그럼 안 돼?’

코웃음을 친 재준이 인상을 팍 썼다.

‘되겠냐? 세상에. 우리 자기가 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네. 절대 안 돼. 불가. 기각.’

‘…….’

그렇게 나는 어영부영 녀석과 같은 침대를 쓰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내년에 취직해서 바빠지면 많이
못 할 테니 한가할 때 부지런히 해두자는 개소리를 지껄이며 덮쳐드는 개새끼에게 거의 매일 밤 시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은 녀석의 집으로 와서 살기 시작한 지 열흘째 되던 토요일이었다.

주말 아침부터 해가 중천에 뜨도록 사람을 침대에 가둬놓고 쥐어 짜대던 녀석이 기진맥진해진 나를 뒤에서
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현아, 장 보러 가자.”
아침부터 기력을 소진한 탓에 장이고 뭐고 만사가 귀찮았다. 못 들은 척 눈을 감고 있던 나는 곧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아, 아하하, 아! 야! 그만, 그만해!”

“왜 못 들은 척해. 데이트하자니까?”

사람을 잠시도 가만두지 않는 새끼였다. 나는 옆구리와 겨드랑이 부근을 마구 간지럽히고 있는 마재의 손을


붙잡았다. 떼어내려고 했으나 쓸데없이 힘만 센 개새끼는 손을 떼기는커녕 아예 내 몸을 덮어 누른 채로 더
성심성의껏 간지럼을 태우기 시작했다.

“장 보러 가기 싫어? 아, 우리 자기 하루 종일 침대에서 나랑 구르고 싶은 거구나?”

“아, 아니…… 으, 하하, 읏, 야!”

나는 녀석의 손목을 붙들고 맹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종일 구르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여기서 더 하면


난 오늘 아무것도 못 하고 또 죽은 듯이 잠만 자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일어날 게 뻔했다.

그런 참담한 상황을 맞느니 차라리 장을 보러 나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깨를 움츠린 채 부들부들 떨며


강제로 웃던 나는 오늘도 녀석이 원하는 답을 낼 수밖에 없었다.

“아, 알았, 아, 하하, 읏, 다고! 가, 가면 되, 하하, 아…… 잖아!”

그러나 내 대답을 듣고도 마재는 손을 떼지 않았다. 살갗 위로 손가락이 미끄러질 때마다 나는 온몸을


퍼득거리며 웃어야 했다. 웃느라 배가 다 당겼고, 조금 식었던 몸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더 버티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나는 녀석의 손목을 콱 움켜쥐었다.

“그만, 그만…… 하, 하하, 읏…….”

어느 순간 간지럼이 뚝 멈췄다. 그제야 나는 웃느라 막혀 있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뒤를 돌아보며 눈을


부라리자마자 내 다리를 타고 앉은 재준이 씩 웃었다.

“우리 자기, 또 몸이 뜨거워졌네?”

“너, 읍……!”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개새끼가 다짜고짜 덮쳐들어 입술을 덥석 물었다. 곧 커다란 손이 열이 잔뜩 오른


등을 더듬기 시작했다.
이건, 이건 안 된다.

강렬한 위기감을 느낀 나는 녀석의 아래에서 빠져나가려 발버둥 쳤다. 곧 녀석에 손에 이끌려 몸이 휙


돌아갔다. 몸을 일으킬 새도 없이 맨가슴이 겹쳐지고, 다리가 얽혔다. ……이 징한 새끼는 그새 또 발정이 나
있었다.

나는 재준의 어깨를 밀쳐 입술을 떼어내고는 다급하게 외쳤다.

“야! 장 보러 가자며!”

자기 무게를 그대로 실어 나를 내리누른 개새끼가 화사하게 웃었다.

“안 되겠다. 한 판만 더 하고 가자.”

“늦어, 늦는다고!”

재준이 협탁에 놓인 시계를 흘깃 살피고는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괜찮아. 아직 시간 있어. 빨리할게.”

“빨리고 뭐고, 나 더 하면 죽어…….”

“안 죽는다니까. 엄살 피우긴, 귀엽게.”

양심이라곤 진짜 머리카락 한 올 만큼도 없는 새끼였다.

아침 내내 사람을 달달 볶아놓고도 엄살이라니. 너무 억울해서 죽을 것 같았다. 나는 한껏 눈을 치뜨고 녀석을


노려보았다.

내 눈가에 짓궂게 입을 맞춘 개새끼가 피식 웃었다.

“이거 다 네 탓이야. 누가 웃을 때 그렇게 야하게 등을 들썩이래? 그걸 어떻게 가만히 보고만 있냐. 그거


보고도 안 서는 새끼는 남자도 아니다, 진짜.”

“야!”

빨리하겠다던 개새끼는 그 후로 한 시간 넘도록 사람을 또 쥐어짰다. 아침 9 시에 일어난 우리는 결국 정오를


넘기고서야 침대를 벗어났다.

마재준, 이 새끼는 어쩌면 사람을 홀려 정기를 쪽쪽 빨아먹는다는 구미호의 일곱 번째 꼬리 같은 게 아닐까.


그런 황당한 생각을 하며 외출 준비를 마친 나는 녀석과 파스타와 샐러드로 아침 겸 점심을 간단히 때우고
나란히 차에 올랐다.

“마트 가?”

“아니. 백화점. 오늘은 좀 멀리 갈 거야.”

그 말에 옆 동네 백화점을 생각했던 나는 곧 그 생각을 수정해야 했다. 옆 동네를 지나고도 한참을 나아가던


차는 어느새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무슨 장을 보러 여기까지 와?”

“가끔 다른 동네엔 뭘 파는지 구경도 해야지.”

우리는 오후 3 시쯤 되었을 무렵 백화점 내부로 들어왔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곳이었으므로 나는 얌전히


녀석의 곁에서 걸었다.

“응? 내려가는 거 아니었어?”

위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앞에 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식품관은 보통 지하에 있지 않나?

먼저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내디딘 재준이 나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기왕 나온 김에 옷 좀 보고 가자.”

“……그래.”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으니 녀석은 가을 옷을 좀 사고 싶어진 모양이었다.

혹시, 내 것까지 마구 사서 떠넘기면 어쩌지.

녀석의 전적으로 미루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선 나는 갑작스레 닥친 또 하나의
위기를 타개할 방도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마땅한 대책은 떠오르지 않았고, 허둥대는 사이
에스컬레이터는 착실하게 움직여 4 층에 다다라 있었다.

여차하면, 화장실 간다고 하고 그냥 도망쳐야겠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곧 그 허술한 생각의 허점을


찾아내고 좌절했다. 소용없었다. 이 새끼는 이미 내 사이즈를 다 알고 있었다.

어떡하지. 그냥 못 받겠다고 우겨야 하나? 그랬다가는 분명 삐쳐서 툴툴거릴 텐데, 그 뒷감당을 하려면 또
골치깨나 아플 게 뻔했다.

나는 그냥 너무 비싸 보이는 것들은 맘에 안 든다고 퇴짜를 놓고, 적당해 보이는 티셔츠나 몇 장 골라서 후딱


결제해 버리는 전술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을 옷 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는데 난데없이 이게 웬일이람. 골이 띵해진 찰나 재준이 살짝 내 팔을


잡아끌었다.

“여기야.”

백화점 구조가 으레 그렇듯, 이 층은 남성복 브랜드만 모아놓은 것 같았다. 댄디하고 캐주얼한 스타일의 옷을
파는 매장이나 골프 웨어, 가방이나 구두 매장도 있었지만, 가장 많은 건 수트 매장이었다.

매장들은 하나같이 번쩍번쩍했다. 아는 브랜드라곤 하나도 없었지만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봐도


내가 대강 집어 계산할 수 있을 만한 옷 따위는 팔지 않을 것 같았다.

예상외의 상황이었다. 나는 떨떠름함을 감추지 못하고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너 뭐 사려고?”

재준이 말없이 웃었다. 갓 비가 갠 늦봄 오후, 햇살을 맞으며 만개한 장미 같은 그 미소는 매우, 매우, 매우
불길했다. 그 순간 눈에 띈 브랜드 이름을 보자마자 그 불길함은 들불처럼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왜냐면 그 브랜드는 이런 쪽으론 일자무식이나 다를 바 없는 나조차 이름을 아는, 무척 유명한 명품
브랜드였기 때문이었다.

백화점 같은 층엔 대개 비슷한 가격대의 매장이 몰려 있지 않나?

내가 불안에 떨든 말든 태연하게 걷던 재준이 멈춰 섰다. 나는 곧 녀석에게 떠밀려 이름 모르는 브랜드의


매장으로 들어갔다.

매장 안은 눈이 부시게 밝던 통로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약간 조도가 낮은 노란빛 조명은 아늑했다. 면밀하게


계산되어 배치되었을 진열대와 상품들은 무척 정제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는 남자 직원을 앞에 둔 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곧 옷을 둘러보는 커플 한 쌍과


그들을 안내하던 직원의 눈이 우리에게, 정확히는 내 뒤에 선 녀석에게 쏠렸다.

“MTM 예약, 부탁드렸는데요.”

“오늘 세 시 반에 예약하신 마재준 님이십니까?”

“네.”

온 김에 둘러보자던 말이 뻥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챈 나는 나도 모르게 뒤를 휙 돌아보았다. 뭐가


문제냐는 듯 씩 웃으며 재준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우리는 직원에게 이끌려 비싸 보이는 소파에 앉았다. 곧 웰컴 드링크가 나왔다.


백화점 매장에서도 웰컴 드링크가 나오는구나. 대체 뭘 사야 이런 서비스를 해주는 걸까.

내 의문은 곧 직원이 해소해 주었다.

“수트 1 착 예약하셨지요. 어느 분께서 착용하실 겁니까?”

“이 친구요.”

주스를 홀짝이며 눈만 굴리던 나는 흠칫 놀라 녀석을 돌아보았다.

“야, 너나 해. 난 됐어.”

“난 많아. 너도 이제 멀쩡한 수트 하나쯤은 있어야지. 조만간 회사도 다녀야 하잖아.”

그렇지 않아도 한 벌쯤 살 생각은 했었다. 물론 이런 곳에 와서 살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지만.

내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직원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이쪽 고객님께서 취업을 앞두고 계시는군요.”

“네. 평상시에 편하게 자주 입을 만한 걸로 하고 싶은데요.”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직원이 미소를 남기고 안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얼른 녀석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재준이
빨랐다.

“별로 안 비싸.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그냥 합격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줘.”

말을 마친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주스를 홀짝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순간 다른 직원이 우리 뒤에 있던


커플에게 수트 가격을 말하고 있었다. 예전에 받았다 겨우 돌려줬던 시계 가격의 반절쯤 되는 금액을 귀에
담자마자 나는 경악했다.

이 새끼가 또 이딴 짓을 하다니.

얼굴이 저절로 굳었다. 듣는 귀가 있었으므로, 나는 아주 작게 말했다.


“나 이런 거 못 받아. 너 살 거 아니면 가자.”

내 말을 듣자마자 녀석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나 네 애인 아니야?”

그 말을 듣자마자 가슴이 철렁했다.

그랬다. 우리는 여전히 친구였지만, 또 친구이기만 한 건 아니었다. 굳이 관계를 정의하는 말을 골라야 한다면
이제 친구보다는 애인이 적합하겠지.

머뭇대는 사이 재준이 눈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맞아.”

“그땐 친구라서 안 된다며. 그럼 이젠 되는 거 아니야?”

문제의 시계 사건을 입에 올린 녀석은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작게 덧붙였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그때 나 되게 서운했어. 다른 것도 아니고 시험, 또 입사 합격 선물이잖아. 이 정도는


그냥 받아주라. 그냥 내가 너 예쁜 옷 입은 거 보고 싶어서 그래. 물론 넌 거적때기를 걸쳐도 세상에서 제일
빛이 나겠지만.”

끝에 붙은 개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서운했다는 말이 가슴에 콕 박혀서 어쩔 줄 모르고 끙끙 앓던 나는


녀석의 눈을 보며 아주 작게 물었다.

“……많이 서운했어?”

재준이 피식 웃고는 곧 정색했다.

“어. 굉장히. 너무. 무척. 매우. 엄청. 몹시. 진짜. 정말로. 많이. 대단히. 극히. 아주. 심히. 지극…….”

“알았으니까 그만해.”

우리말 겨루기 대회에 나가면 당장 일등 먹을 새끼였다.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쏟아진 부사어들을 귀에 담던


나는 고개를 숙이고 주스 잔을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근데 역시 좀 그래. ……난 너한테 아무것도 준 게 없잖아.”

“무슨 소리야. 준 게 왜 없어. 꽃도 주고, 과자도 주고, 책도 주고, 이모티콘도 사주고, 커피에 케이크에,
내가 그동안 받은 게 얼마나 많은데?”
선물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소소한 물건들을 죽 늘어놓는 녀석을 보고 있으니 정말 그동안 얘한테 받기만
했구나 싶어 더 미안해진 찰나였다.

재준이 예쁘게 웃었다.

“그리고 너 줬잖아.”

“…….”

너는 너 안 줬냐.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은 그때, 사라졌던 직원이 다시 나타났다. 그의 뒤에는 포멀한 정장 베스트와 팬츠를


멋지게 차려입은, 오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백인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상담은 마스터 테일러 님과 함께 진행하겠습니다. 영어로 상담이 진행되겠습니다만 통역 필요하십니까?”

“아뇨.”

재준이 짧게 대답했다. 그렇게 나는 도망갈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진 직원의 설명에 나는 또 경악해야 했다. 눈앞에서 사람 좋게 웃고 있는 이 백인 아저씨는 본사


테일러 스쿨을 수료하고 32 년간 수트를 만들어온 분으로, 누구나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저명인사들의 옷을
만들어왔다는 장인 중의 장인이었다.

생전 첨 들어보는 MTM, 그러니까 made to measure 서비스는 이른바 맞춤 제작 같은 것이었다. 나는


너그럽게 웃으며 질문을 던지는 장인님을 거스르지 못하고, 묻는 족족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선호하는
스타일이나 취향이 있느냐 같은 난감한 질문은 나 대신 재준이 답했다.

원단 샘플과 태블릿이 우리 앞에 놓였다. 테일러는 말끔한 기본 스타일과 좀 더 가볍고 경쾌해 보이는 스타일,
그리고 가장 포멀하고 격식 있어 보이는 세 번째 스타일을 차례로 보여주고는 첫 번째 스타일이 나에게 가장
적합할 거라 말했다.

문외한인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지만 녀석은 두 번째가 더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고민하는 재준에게


직원은 출근용으로 입기엔 첫 번째가 나을 거라고 조언했다. 그 말을 듣고 인상을 살짝 찌푸린 녀석은 ‘그럼
둘 다 할까?’라는 망언을 꺼내 내 눈총을 샀다.

가족도 아니고 그저 친구 사이에 이런 옷을 사주진 않겠지, 보통.

실은 상담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좀 떨떠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앞에서 완벽한 접객 스마일을


내보이고 있는 직원과 테일러의 눈에 우리가 평범해 보이진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이어지려는 상념을 접어버렸다. 오늘 일은 약간 과하긴 했지만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닌데 괜히 속


끓이지 말자 싶었다. 이런 사소한 일에 일일이 신경 쓰면 앞으로 얘하고 어떻게 같이 살겠냐는, 예전과 비슷한
듯 조금 다른 듯한 생각을 하면서.

어수선한 마음은 그렇게 대강 수습했다. 하지만 내 앞에 남은 문제는 아직 잔뜩 있었다. 옷감 샘플과 모델이


입은 피팅 사진을 훑어봐도 도무지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곤란해하는 기색을 보다 못했는지 재준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많이 어려워? 그럼 그냥 내가 골라줄까?”

“응. 하나도 모르겠어.”

선택권이 재준에게 넘어가자마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고를 건 끝도 없이 많았다. 칼라 종류와 폭, 길이, 단추의 소재, 하다못해 재킷 단추를 실제로 풀 수


있는 것으로 할지 장식용으로 달지, 셔츠 소매는 단추를 달지 커프스링크를 쓸 수 있는 프렌치식으로 할지
등등, 등등 질문과 추천으로 점철된 상담은 한참을 이어졌다.

나도 영어는 못하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전혀 모르는 전문 분야 용어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외계어


같기만 한 말들을 멍하니 흘려듣는 사이, 녀석은 나를 대신해 척척 뭔가를 골랐다.

지난한 과정이 끝난 후 나는 매장 안쪽에 감춰진 공간으로 치수를 재러 들어갔다. 역시나 재준이 졸졸


따라왔다.

이렇게까지 복잡할 줄이야.

나를 마네킹처럼 세워둔 채로 테일러는 내 몸 구석구석의 치수를 쟀다. 나는 곧 수트를 맞추기 위해서는


어깨나 팔다리, 허리의 치수뿐만 아니라 엉덩이의 굴곡과 목, 허벅지, 종아리, 손목, 발목의 두께까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내 양팔과 양다리의 길이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고, 바지 앞섶 쪽 치수를 잴
때는 매우 민감한 정보를 요구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내가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테일러에게 작게 속삭이는 사이 녀석은 내 왼쪽 허벅지를 흘깃 쳐다보고는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남들 보는 데서 이게 무슨 짓이야.

한 대 때려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남들 보는 데서 차마 그럴 수가 없어 원통할 따름이었다.

거의 40 여 분이 걸리고서야 우리는 주문을 마칠 수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나는 반쯤 넋을 놓은 채 밖으로


나왔다. 나보다 조금 먼저 밖으로 나와 있던 녀석은 직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6 주 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직원이 녀석에게 카드를 돌려주며 말했다.

영수증은 없었다. 나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까 커플이 보고 있던 옷은 기성품인데도 그 가격이었다.


무려 마스터 테일러가 전담하는 이 옷은 당연히 그보다 훨씬 비쌀 게 분명했다.

떠밀리다시피긴 해도, 어차피 받기로 마음먹은 참이었다. 그러니 선물의 가격 같은 건 묻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고 말았다.

“……얼마야?”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느긋하게 걷던 재준이 짓궂게 웃었다.

“십만 원.”

“장난치지 말고.”

“만 원.”

역시 말해줄 생각 따윈 없어 보였다. 틀림없이, 나에게 쉽게 말해줄 수 없을 만큼 비싼 거겠지.

아까 직원의 설명이 떠오르자 나는 조금 우울해졌다. 매장에서 MTM 서비스는 상시 진행하지만, 오늘처럼


마스터 테일러를 초빙해 제공하는 경우는 2~3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특별 이벤트 같은 거라고 했었다.

에스컬레이터에 먼저 올라선 나는 녀석의 얼굴을 차마 보지 못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고마워.”

녀석의 손이 내 머리칼을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현아, 내가 또 괜한 짓 했어?”

그렇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거짓말을 했다.

“아니야. 잘 입을게.”

그리고 녀석은 쉽게 내 거짓말을 알아차렸다.

“아니긴.”

“…….”
“근데, 난 네가 이런 거 부담스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잖아. 난 그냥 내가 줄 수
있는 거라면 그중에서 제일 나은 걸 주고 싶었을 뿐이야.”

녀석은 좀처럼 쉽지 않은 요구를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면, 나라도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 예쁘고 좋은
것만 잔뜩 가져다 녀석에게 떠안겼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차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왜냐면 나는 재준의 눈에 찰 만한 예쁘고 좋은 걸


줄 수가 없었다.

아직 사회생활은 시작도 안 한 주제에 약한 소리 하고 싶지 않지만, 아마 앞으로 아무리 부지런히 일해도 나는


얘한테 이런 선물을 덥석 사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녀석은 앞으로도 갖은 핑계를 대며 이런 분수에도
안 맞는 선물을 건네주겠지.

선물을 받았으면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다. 하지만 에스컬레이터가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기분은 점점 더 가라앉았다.

에스컬레이터를 막 갈아탔을 때였다. 내 어깨를 살짝 끌어당긴 재준이 머리칼에 입술을 눌렀다. 조심스럽고
다정한 접촉에 가슴이 술렁였다.

오늘도 병 주고 약 주는 새끼였다. 보는 눈이 없었으므로 나는 말리지 않았다.

* * *

지하 식품관까지 돌아 쇼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을 때까지도 무거운 마음은 여전했다. 나는
멀쩡한 척은 하지 않기로 했다. 내 속을 뻔히 들여다보는 녀석 앞에서 그러는 건 녀석을 더 속상하게 할
뿐이란 걸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선물을 무를 생각 따윈 없을 녀석은, ‘잊었어? 네 건 네 거고 내 건 네 거고 너는 내 거라고 했잖아’


라는, 예전에도 했던 이상한 말을 툭 던진 후로는 그저 내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길 기다리는 듯 별말이 없었다.

상을 닦던 나는 한숨을 쉬고 말았다. 그날 이후 라텍스 접촉 금지령을 내린 녀석 때문에 고무장갑을 끼지


못하게 된 나는 이제 설거지마저 못 하게 된 처지였다.
상을 대강 닦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릇을 헹구고 있는 녀석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울컥 원망이 치솟았다.

넌 진짜 왜 그러냐.

이런 식으로 부딪친 건 시계 사건 이후로 처음이었다. 시계 때는 자기가 물러섰었으니, 이젠 내가 물러설


차례라는 걸까.

녀석의 암묵적인 요구를 모르지 않았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나는 녀석의 등을 노려보며 재차 작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식기세척기를 돌리고 돌아선 재준이 고무장갑을 벗으며 여상히 중얼거렸다.

“왜 자꾸 한숨 쉬고 그래. 설마 내 꼴도 보기 싫어진 거야?”

그게 되면 내가 한숨을 쉬겠냐, 너희 집을 나가고 말지.

꺼내지 못할 말 대신 한숨만 샜다. 그사이 소파 옆자리에 앉은 녀석의 얼굴엔 마뜩잖은 기색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맘에 안 들어?”

“안 들면 물러줄 거야?”

“…….”

녀석은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가까스로 열었다.

“선물 안 받겠다는 말은 안 할게. 근데 앞으론 좀 더 평범한 걸로 주면 좋겠어.”

그린 듯이 예쁜 눈썹이 살짝 휘어졌다.

“뭐가 평범한 건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질문은 잇달아 날아왔다.

“넌 나한테 평범한 거 주고 싶어? 아니잖아. 그래서 꽃 선물 자주 해줬던 거 아냐? 나한테 꽃 줄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재준이 나 대신 답했다.

“네가 나한테 줄 수 있는 제일 예쁘고 특별한 선물이 그거였던 거잖아.”

취향도 까다롭고, 안목도 높은 녀석이었다. 내가 뭘 줘도 좋아하던 녀석이었지만 기왕이면 저 까다로운 눈에


찰 만한 걸 주고 싶었다. 하지만 주머니가 가벼운 학생 신분에 마땅한 물건을 찾을 수가 없어 꽃을 주기
시작했던 거였다.

“……너 진짜 못됐다, 정시현. 넌 그렇게 하면서 왜 나한텐 그런 말 하고 그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런 말을 들을 만한 선물이 아니었다. 나름 고른다고 고른 선물이었지만 고작해야


꽃이었다. 재준이 고심해 나에게 준 선물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녀석은 인상을 쓰고 있었다.

“정시현, 너, 나중에 내가 사업 말아먹거나 해서 빈털터리 되면, 나 버릴 거야?”

당치도 않은 개소리에 놀란 사이 재준이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내가 개털 돼서 더는 너한테 아무것도 못 주게 되면, 너한테 빌붙어서 평생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면, 너 나


버리고 도망갈 거냐고.”

그런 일은 생기지도 않겠지만, 만약 생긴다 해도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 내가 어떻게 그래…….”

“봐. 너 그렇게 못 할 거잖아. 아무리 나 때문에 힘들어도, 너까지 없어지면 내가 울다 죽을까 봐 걱정돼서
도망도 못 가고 주저앉아서 나 보살펴 줄 거잖아.”

당연히 내가 그렇게 할 거라고 믿고 단정적으로 잘라 말하는 녀석의 얼굴은 약간 굳어 있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자 속이 상했다.

“……응. 근데 너도 그럴 거잖아.”

“당연하지. 너 자꾸 잊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우리 그런 사이야.”

그런 사이, 라는 말이 가슴을 툭 두들겼다.


나는 녀석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는, 말없이 녀석의 크고 따뜻한 손을 꼭 쥐었다.

이내 내 손을 당겨 손등에 입을 맞춘 재준이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근데 네가 거리낄 게 뭐 있어? ……네 맘 모르는 건 아냐. 그래도 역시 난 네가 안 그랬으면 좋겠어.”

사람은 어째서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걸까.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으니 그냥 마음 편히 받으면 되는 건데, 그게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작게 대답했다.

“……응. 미안해.”

어깨를 감싼 손이 올라와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곧 아주 작은 한숨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올려다본 녀석의


눈은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네 잘못이 아니잖아, 정시현. 사과하지 마.”

“……근데 너 맘 상했잖아.”

“너는 안 상했어? 근데 난 사과 안 하잖아.”

재준이 살짝 돌아앉으며 내 팔을 끌어당겼다.

“너도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나 좀 안아주라.”

나는 그 손이 이끄는 대로 녀석의 무릎을 타고 앉아 녀석을 끌어안았다. 곧 귓가에 옅은 키스가 떨어졌다.

“뭐냐, 이게. 아까부터 네 눈치 보느라 뽀뽀도 못 하고.”

툴툴거린 재준이 내 어깨를 살짝 밀고는 입술을 포갰다. 짧고, 가볍고, 따뜻한 버드키스를 여러 차례
되풀이하던 녀석이 피식 웃으며 내 눈을 응시했다.

“친구 때는 안 된대서 이젠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네. 역시 쉽지 않아, 우리 자기.”

얘는 왜 자꾸 남이 할 소리를 빼앗아서 할까. 넌 한 번도 나한테 쉬운 적이 없었는데.

녀석을 원망스레 내려다보던 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조금 곤란한 빛을 띤 채 가늘어진 눈가에 키스했다.


결국 나는 이번에도 네가 하자는 대로 하게 되겠지.

녀석에겐 절대 말할 수 없지만, 나는 재준이 자기 멋대로, 막무가내로 퍼부어대는 배려와 사랑이 종종


버거웠다.

바보 같을 만큼 한결같고, 한계가 보이지 않을 만큼 깊고 넓고 무거우며, 끈질기고 집요하다 못해 편집증적인


집념이 느껴질 만큼 지독한 사랑을 마음 편히 받을 수 있을 만큼 나는 그릇이 크지 못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치 가랑비에 옷이 젖듯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녀석을 사랑하게 되어 있었고,


내가 사랑하는 녀석은 그런 식으로 사랑하는 인간이었다.

가랑비는 어느 순간 폭우가 되어 있었지만 쏟아지는 비에 머리끝까지 잠겨 허우적대게 되었을 때, 그것을 피할


길은 이미 없었다.

왜냐하면, 내 세계엔 녀석 말고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그리고 앞으로도 영영 생기지 않겠지.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최선을 다해 그 사랑을 받아내는 것뿐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도 우리 같을까.

코끝이 찡했다.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는 녀석을 끌어안았다. 재준이 가만히 내 등을 쓸어내렸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체온을 나누었다. 맞닿은 녀석의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애인 정도로는 아직 안 되는 거구나.”

시무룩한 말을 듣자마자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서운하게 해서 미안해.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사과하지 말라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준이 입술을 포개 내 말을 막았다.

맞물린 입술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우리는 천천히 숨을 나누며 조금 엇갈린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어느 순간, 등에 닿아 있는 녀석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내 입술이 떨어졌다.

마주한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고, 조금 떨렸다.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진 않았는데…….”

작게 숨을 고르던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흠칫했다.

이 새끼가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러나 살짝 겁이 나서, 나는 얼른 녀석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그러나


재준이 곧 자기 몸에 달라붙은 나를 떼어내 눈을 맞댔다.

“우리 결혼하자, 시현아.”

수도 없이 들은 말이었다.

그러나 나를 직시하고 있는 눈에는 장난기라곤 한 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그 말을 흘려 버리지 못했다.

당황한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머뭇대는 사이 재준이 다시 내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전에 없이 진지한 눈을 마주하자마자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어쩔 줄 모르고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나는 나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를 지껄이고 말았다.

“한국에선 남자끼리 결혼 못 해…….”

돌연 녀석의 미간에 팍 주름이 졌다.

마뜩잖은 기색이 서린 그 얼굴에 깜짝 놀란 나는 해야 할 말을 찾기 위해 바삐 머리를 굴렸다. 막,


거절하려는 건 아니었다는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재준이 피식 웃으며 내 아랫입술을 콱 물었다. 심통이 잔뜩 섞인 키스 아닌 키스가 조금 아파서, 나도 인상을


찌푸렸을 때였다.

“골라.”

뭘……? 하고 묻기도 전에 녀석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프랑스, 미국, 캐나다,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핀란드. 중남미는 브라질, 멕시코, 가깝게는 호주,
뉴질랜드, 아, 영국이랑 남아공, 몰타도 있어.”

“뭐, 뭐야. 갑자기.”

나는 뜬금없이 줄줄 쏟아진 나라 이름에 당황해 허둥댔다. 재준이 씩 웃었다. 오늘도 무척, 사악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우리 결혼할 수 있는 나라들. 프랑스는 여행자끼리 결혼은 불가능한데 내가 거기 살았던 기록 있으니까 되고,
나머지는 여행자 결혼도 인정해 주는 나라들이야.”

얘는 언제부터 이 많은 나라 이름을 다 외우고 있었을까. 설마 결혼하자는 말을 처음 했던 열일곱 살 때부터는


아니겠지.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내 뺨에 거칠게 입을 맞춘 용의주도하고 집요하기 짝이 없는 징한 새끼는 예쁘고


사악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한국만 나라냐?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촌스러운 소리를 누가 해. 자, 그럼 그 문제는 해결됐지? 아, 너


우리 엄마랑 너희 엄마한테 어떻게 말해야 하나 걱정하겠네.”

대꾸할 정신이 없었으므로 나는 멍하니 녀석의 눈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내 허리를 바짝 당겨 자기 몸에 붙인 재준이 심상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엄마는 내가 열다섯 살 때부터 너 사위라고 생각하고 계시니까 걱정할 거 없어. 너희 엄마랑 새아버지
허락만 받으면 되는데, 막 재혼하신 분들 놀라게 해드리기도 좀 뭐하니까 그분들께는 좀 천천히 말씀드리자.
맡겨둬. 나 자신 있어.”

줄줄 쏟아진 말 중에 신경 쓰이는 말이 하나 끼어 있었다. 나는 녀석의 쓸데없이 넓은 어깨를 나도 모르게 콱


움켜쥐었다.

“열다섯 살 때부터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우리 엄마?”

“응.”

재준이 입가를 끌어 올렸다. 가늘어진 눈시울 속에 빛나고 있는, 여전히 진지하기만 한 눈동자에 옅게나마
짓궂은 빛이 서렸다.

“생각해 봐. 열다섯 살 때, 하필이면 정확히 그 타이밍에 나 데리고 해외 간 게 누구라고 생각해.”

“…….”

놀란 나를 보던 재준이 피식 웃으며 코끝에 입을 맞췄다.

“그 여행,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거 아니었어. 있잖아, 너 박수아랑 사귀기로 한 날. 내가 집에 가서 하도


울고불고 지랄을 하니까 엄마가 혹시 내가 미쳐서 너한테 패악이라도 부릴까 봐 강제로 나 데리고 나른 거야.”
십 년을 넘게 지나고서야 그 여행의 내막을 알게 된 나는 기겁했다. 이 새끼는 대체 자기 엄마한테 무슨
소리를 했길래 어머니가 애를 데리고 해외로 나갈 생각까지 하셨던 걸까.

내가 경악하거나 말거나,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너 여태까지 한 번도 안 물어봤지, 그때 나 어디 갔었냐고. 그때 나 뉴질랜드 외딴 리조트에 거의 감금당해


있었어. 진짜 엄마한테 뒈지게 혼났다. 너한테 내 감정 강요하지 말라고. 여자친구…… 하, 아직도 빡치네.
아무튼 여자친구 있는 너한테 억지 써서 헤어지게 만들거나 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매일같이 세뇌하셨어.”

난데없이 폭로된 진실을 듣고 있으니 새삼 기가 막혔다.

“……너 그 이야기를 엄마한테 다 했었어?”

“다는 아니고.”

“우리 이야기 엄마가 언제부터 아셨는데.”

“나 열세 살 때 처음 몽정했는데, 너 꿈에 나와서. 그때 엄마한테 물어본 게 시작이야.”

그런 걸 보통 엄마한테 물어보나?

밀려온 의구심을 해소하기도 전에 재준이 내 뺨을 조심스레 매만지기 시작했다.

“근데 20 일 그러고 있다 돌아왔어도 너만 보면…… 너무 슬프고 화가 나서 안 되겠더라.”

“…….”

살짝 살갗을 누르며 미끄러져 내려간 그 손은 입술과 턱을 지나 목에 닿았다. 나는 숨을 죽였다.

그 손이 내 뒷목을 쓸어내리기 시작했을 무렵 녀석의 얼굴에 갑자기 슬픈 기색이 어렸다.

“내가 너무 바보 같았어. 난 네가 당연히 내 거라고 생각했는데, 당연히 너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 믿고


멍청하게 있었던 건데…… 아니었던 거잖아.”

그즈음의 기억이 떠오르자마자 코끝이 찡해져서, 나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 입술 위로 엄지손가락을


미끄러뜨리는 녀석의 얼굴은 조금 아파 보였다.

울보 새끼의 눈동자는 그새 살짝 부풀어 있었다. 나는 그 눈가에 입을 맞추고 작게 속삭였다.

“아니야. 아닌 거 알잖아.”
재준이 대답 없이 내 등을 꼭 끌어안았다.

맨날 뻔뻔스럽게 사람을 볶아대던 녀석의 속은 실은 잔뜩 곪아 있었다. 언제 적 일을 두고 아직도 슬퍼하는


애새끼에게 나는 좀 더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은, 너한테 갔을 거야. ……나도 너밖에 없잖아.”

대답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내 어깨에 이마를 댄 채 침묵을 지키던 녀석은 내가 기다리다 못해
초조해지고서야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 시현아. 내 억지 받아줘서. ……나한테 와줘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이딴 말을 기다린 게 아니었는데.

속이 잔뜩 상한 나는 녀석의 등을 콱 끌어당겼다.

“억지라니, 그런 말 하지 마, 제발…….”

지난날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너무, 너무 속이 상했다.

“왜 그래. 너 맨날 내가 네 거라고 했잖아. 너 믿지도 않으면서 그런 말 했던 거야?”

“그건 아냐. 그럴 리 없잖아. 세상이 멸망해도 넌 내 거야.”

“그럼 됐잖아. 앞으론 절대 억지네 뭐네 그런 개소리 하지 마.”

마주한 눈에 찔끔 맺힌 눈물을 보자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 눈가에 키스하던 나는 조금 반성했다.

그러게. 그깟 옷, 그냥 받아서 입으면 그만인 걸, 그게 뭐라고 애를 또 속상하게 했을까.

그런 생각이 스치기 무섭게 실없이 웃음이 터졌다. 또 이러고 있었다. 얘가 울기만 하면 나는 늘 이랬다.
그리고 이 새끼는 나 때문에 웃고, 나 때문에 울었다.

그럼 이제는 항상 웃게 해줘야겠지.

나는 살짝 젖은 속눈썹에 입을 맞추고는 입을 열었다.

“마재준, 너 나랑 하나만 약속해.”


눈을 내리뜬 채 키스를 받던 재준이 잽싸게 말을 받았다.

“무슨 조건이든, 헤어지자는 건 절대 안 돼.”

결혼을 하네 마네 하는 중에 이건 또 무슨 개소리람.

어이가 없었다. 피식 웃은 나는 물기에 살짝 부풀어 오른 크고 또렷한 검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곁에 있어줘. 아무 조건 없이, 그냥 시간이 허락되는 한. 나도 그럴게. ……약속해 줄 거지?”

녀석의 눈에 삽시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나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지만 가까스로 웃으며 덧붙였다.

“후보군이 너무 많아서 당장 고르지는 못하겠지만…… 아까 그 나라들 있잖아. 천천히 같이 골라보자. 너 안


가본 데가 어디야? 거기로 가면 좋지 않을까?”

재준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사랑해. 진짜 사랑해, 현아.”

으스러지게 나를 끌어안은 채, 사랑한다는 말을 연신 쏟아내는 애새끼의 등을 천천히 쓸며 나는 부러 장난스레


말했다.

“너무 비싼 건 못 사주겠지만…… 반지는 내가 준비할게. 내가 그거 사 오면, 그때 우리 결혼하자.”

훌쩍이던 재준이 내 뺨에 세게 입술을 눌렀다.

“현아, 실은…….”

다시 맞댄 녀석은 조금 난감한 얼굴이었다.

이내 배시시 웃은 재준이 내 귓가에 키스했다. 곧 아주 작은 속삭임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실은 반지도 이미 내가 사버렸어.”

“…….”

재준이 냉큼 덧붙였다.

“이따 끼워줄게. 그건 약혼반지로 하고 결혼반지는 네가 사줘.”


이럴 땐 행동력이 뛰어나다고 칭찬을 해줘야 하나, 설레발이 심하다고 핀잔을 해야 하나.

기가 막혀서 골이 다 띵했다.

대체 반지는 또 언제 사놓은 거람. 혼자 몰래 반지를 사놓고 그동안 언제 줄까 전전긍긍 내 눈치를 보고


있었던 걸까.

정말이지 감당 안 되게 귀여운 새끼였다. 그렇게 내가 작게 한숨을 쉬며 녀석의 어깨를 꽉 쥐었을 때였다.

“있잖아, 현아…….”

재준이 평소보다 한층 더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그 목소리가 영 불길했다. 살살 눈치를 살피는 걸


보아하니 필시 뭐가 더 있는 게 틀림없었다.

웬만하면 놀라지도, 뭐라 하지도 말아야지.

나는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대꾸했다.

“응.”

길고 예쁜 선을 그린 눈시울이 사르르 휘었다.

“내친김에 그때 네가 퇴짜놨던 그 시계, 그것도 받아주면 안 될까?”

“…….”

“그거 내 거랑 같은 시리즈란 말야. 나도 너랑 커플 시계 차고 싶어.”

“…….”

재준이 내 옆구리를 아주 살짝 간지럽히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안 돼? 안 돼?”

눈물 공세에 이은 애교 공세에 더 버틸 여력 따위는 없었다. 게다가 안 된다고 해봤자 이 새끼는 된다고 할


때까지 간지럼이나 태우겠지.

진짜 지독한 새끼였다. 오늘도 완패하고 만 나는 녀석의 이마에 내 이마를 툭 부딪치며 핀잔했다.

“마재준,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못 살겠다…….”


재준이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싸며 다그쳤다.

“받아줄 거지?”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녀석의 반듯한 이마에 입술을 콱 찍었다.

“응.”

내 대답을 들은 재준이 그제야 활짝 웃었다.

티 없이 해맑게 웃는 녀석은 꼭 여섯 살 먹은 아기 같았다. 그 웃음을 보고서야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살짝


벌어진 녀석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다.

가벼운 버드키스가 끝난 순간 재준이 내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약속 꼭 지킬게.”

나는 짧은 대답과 더불어, 맞잡은 녀석의 손이 하는 말을 들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여태 그래왔듯, 우리가 함께 보낸 그 반짝이는 순간들은 앞으로도 빛을 더해가게 될 것이다. 또 우리는,


과거부터 쌓아온 시간 위에 여태 공유해 온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차곡차곡 쌓게 되겠지.

그렇게 네가, 또 내가, 우리가 존재하는 그 모든 순간의 흔적은 반짝반짝 빛나는 채로 우리 안에 간직될
것이다.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을까.

그 순간 나는 너무 행복하고 기쁠 때도 가슴이 아플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다정하게 웃고 있는, 녀석의


눈가에 키스하며 속삭였다.

“응. 그 약속…… 깨지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거야.”

세상에서 가장 예쁜 새끼가 천사처럼 웃으며 내 입술에 키스했다. 나는 녀석의 등을 끌어안으며 웃었다.

어쩌면 우리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시작되었을 기적은, 그렇게 이어졌다.


[싱크 인(Sink in) @중독 完]

외전 Happy birthday to us

눈을 뜨자마자 얼른 창으로 눈을 돌렸다. 조금 열어둔 커튼 사이로 보이는 밖은 아직 캄캄했다. 제 시각에


일어날 수 있을지 약간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늦지 않게 일어난 것 같았다.

이제 재준이 깨지 않게 방 밖으로 빠져나가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그 일이 어째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왜냐면 녀석은 오늘도 내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상태가 더 심해서, 나는 아예 녀석의 팔을 베고 모로 누운 채였다. 목덜미에는 녀석이 내쉬는


고른 숨결이 흩어지고 있었다. 겹쳐진 맨살은 한 해의 마지막 날 새벽에도 변함없이 따뜻했다.

이렇게 찰싹 붙어서도 세상모르고 잔 게 웃겼다. 잠 정도는 편하게 자자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으므로,
우리는 항상 나란히 천장을 보고 누워 손만 잡고 잠이 들곤 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깨고 보면 지금처럼
재준이 내 등짝에 붙어 있거나, 내가 녀석의 가슴팍에 파묻혀 있기 일쑤였다.

나는 내 배를 덮고 있는 녀석의 손을 살그머니 들어 올렸다. 베고 있던 팔에서 머리를 들고, 무거운 다리


아래 깔린 다리를 막 빼냈을 때였다.

“어디 가…….”

잠이 뚝뚝 묻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마자 겨우 떨어냈던 팔이 몸에 휘감기고, 등에 더운 가슴팍이 들러붙었다.

설마, 얘가 깼나?

나는 숨을 죽였다. 그사이, 커다란 손은 내 배를 성의 없이 도닥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덜미에


웅얼거리는 소리가 스며들었다.

“가지 마…….”

대답하지 않고 기다렸다. 곧 녀석은 고르게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잠꼬대인 모양이었다.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고는 다시 움직였다. 다행히 이번에는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협탁에 놓인 폰에 찍힌 시각은 4 시 56 분이었다.

폰을 들고, 옷걸이에 걸린 옷을 챙기고 있으니 속옷 한 장 달랑 입은 내 꼴에 새삼 기가 막혔다. 헐벗은 채로


자기 시작한 지도 벌써 넉 달째였다. 당연히 내 탓은 아니었다.

달라붙은 채로 깨어나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9 월 어느 날 아침, 녀석은 어차피 끌어안고 잘 거라면
애써 옷 챙겨 입을 필요 없이 차라리 벗고 자야겠다는 개소리를 해대며 그날 밤부터 아예 내 옷까지 홀라당
벗겨놓기 시작했다.

‘……알았어. 알았는데, 그래도 우리 인간적으로 속옷 정도는 입자.’

‘난 개새끼라 인간적인 건 모르겠는데.’

‘…….’

짓궂게 웃으며 내 입을 틀어막은 개새끼는 인간인 나를 배려해 속옷 한 장은 남겨주기로 했다. 꽃 같은


개새끼를 이길 방도를 모르는 나는 그렇게 또 조금 별스럽고 변태 같은 짓에 반강제로 동참하게 되었다.
그리고 늘 녀석보다 일찍 일어나는 나에게는 그날 이후 눈을 뜨고도 침대에서 미적거리는 나쁜 습관이 생겼다.

오늘은 그 웃기고 귀여운 새끼의 생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그 녀석의 생일상을 차려줄 생각이었다.

방 밖으로 나온 나는 주로 쓰는 2 층 욕실 대신 1 층에 있는 욕실로 내려가 샤워를 했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대강 닦아내고 욕실 밖으로 나와 부엌으로 직행했다. 목표는 냉장고였다.

설거지도 못 하게 하는 저 징한 새끼가 내가 자기 생일상 차리겠다고 새벽부터 일어나 설치는 꼴을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출근하기도 바쁜 네가 밥을 왜 하냐, 요리도 못하는 게 그냥 먹기나 해라 운운하며 불 앞에
서지도 못하게 할 게 뻔했다.

그 눈치 빠르고 징한 새끼 때문에 따로 뭘 사 올 수가 없었으므로 나는 그냥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털기로


작심한 참이었다.

냉동실을 열어 빠르게 재료를 스캔했다. 어디 가서 주부 9 단이라고 말해도 부끄럽지 않을 살림 솜씨를 뽐내는


마재준의 냉장고는 깔끔했다.
나는 재료별, 날짜별로 소분해 정리해 둔 기본 재료 중 필요한 것을 골라냈다. 그중에는 산모용으로
제격이라는 완도 특산 미역도 있었다.

미역을 적당히 뜯어내 물에 불려두고 냉장실 문을 열었다. 신선칸을 열자 예상대로 양지가 있었다. 아마 내일
내 생일상을 차려주려고 사다 놓은 거겠지.

미역국은 내가 끓일 테니 넌 다른 걸 해.

나는 들리지도 않을 성의 없는 사과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쇠고기를 집고, 수육용으로 두툼하게 썰린 삼겹살도


집었다. 마침 잘됐다 싶었다. 뭘 해줄까 고민하며 검색하다 체크해 두었던 고창 명인의 제육볶음 레시피를
써먹으면 될 것 같았다.

야채칸을 열어 애호박과 알배추, 시금치도 꺼냈다. 애호박을 보자 막 스친 메뉴가 있었다. 나는 신선칸을 다시


열어 새우도 꺼냈다. 그렇게 마재준의 스물여섯 생일상 메뉴는 양지 미역국과 제육볶음, 새우 애호박전,
알배추 겉절이와 시금치나물로 결정되었다.

메뉴가 정해졌으니 이제 움직일 일만 남았다. 우선은 밥이었다. 나는 냉장실 제일 아래 꽂혀 있는 밀폐 용기를


꺼내 이천 대왕님표 쌀을 한 컵 반 펐다. 옆에 있는 진도산 흑미도 두 숟갈쯤 꺼냈다.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쌀을 살살 씻고, 국에 넣을 마지막 쌀뜨물은 따로 받아놓았다. 다 씻은 쌀을 체에 밭쳐놓고 손을 닦았다.

문득 돌솥밥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여태 재준이 해주는 걸 먹기만 했을 뿐 돌솥밥을 해본
적이 없는 나는 곧 그 생각을 접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녀석의 생일날 타거나 설익은 밥을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나는 그냥 21 세기의 과학 기술이 집약된 전기밥솥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늘어놓은 재료들을 한번 훑어보고 폰을 켰다. 요리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믿는 대신,


인터넷에 떠도는 명인과 요리왕들의 레시피를 믿을 생각이었다.

신중하게 레시피를 숙지하고 팔을 걷어붙였다. 5 시 20 분이었다. 녀석은 8 시쯤 일어날 것이다. 2 시간 반


남짓이면 그럭저럭 될 것 같았다.

명인님의 레시피에 따르면 삼겹살을 살짝 데쳐야 했다. 시금치도 데쳐야 했으므로 냄비 두 개에 물을 받아


렌지에 올렸다. 다음으로 종이행주를 넓게 펼쳐 쇠고기를 둘둘 말아 대강 핏물이 빠지게 두고 꺼낸 채소를
깨끗이 씻었다.

씻은 알배추는 채소 탈수기로 물기를 털어 한입 크기로 썰어두고, 애호박은 둥글게 썬 후 틀로 새우가 들어갈


구멍을 뚫어 소금을 살짝 뿌려서 종이행주 위에 올려두었다. 전에 올릴 홍고추도 썰었다.

물이 끓고 있었다. 시금치와 삼겹살을 얼른 데쳐내 찬물에 헹궈 물기를 뺐다. 데친 삼겹살을 썰다 겉만 살짝


익은 고기가 잘 썰리지 않아서 칼도 한 번 갈았다. 그랬는데도 어째 썰린 고기 모양이 영 시원찮았다. 서툴던
칼질 실력이 갑자기 늘 리 없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어찌어찌 작업을 마치고, 새우 손질을 시작했다. 굵은 소금으로 새우를 문질러 씻고 머리와 꼬리를 가위로
자른 후 껍질을 벗겼다. 포크로 내장을 제거하고 물기를 닦아낸 다음 살짝 다져서 청주와 소금, 후추로 밑간을
하고 나니 어느새 미역이 불어 있었다.
나는 빨래하듯 미역을 박박 빨았다. 다음으로 종이행주를 갈아가며 쇠고기의 남은 핏물을 부지런히 빼고,
간장으로 미역과 쇠고기에 밑간했다.

사용한 조리도구 설거지까지 대강 마쳤을 때는 6 시 40 분이었다. 나름 소리를 죽인다고 애쓴 보람이 있었는지,


녀석은 깨지 않은 것 같았다.

올해도 고생 많았어, 마재준. 여덟 시까진 꿈도 꾸지 말고 푹 자라.

속으로 중얼거린 나는 소금과 간장, 마늘 약간과 참기름을 넣어 시금치부터 무쳐냈다. 한 줄기 먹어보니


나쁘지는 않았지만 역시 녀석이 해준 것만은 못했다. 똑같은 걸 넣어서 만드는데 대체 무슨 차이인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래도 마재준의 손에선 조미료라도 나오는 게 아닐까.

그런 어이없는 생각을 하며 레시피대로 제육볶음과 알배추 겉절이용 양념도 만들었다. 제육 양념은 고추장은
넣지 않고 고춧가루만 넣는 게, 겉절이 양념엔 액젓을 조금 넣는 게 포인트라면 포인트였다. 겉절이는 먹기
직전에 무쳐낼 생각이었으므로 배추 옆에 양념을 따로 놔두었다.

7 시였다. 밥솥에 쌀과 물을 맞춰 넣었다. 조금 불려둘 생각이었으므로 그대로 내버려 두고 렌지 앞으로 갔다.


이제 미역국을 끓일 차례였다.

달궈둔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자 기름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얼른 밑간한 고기를 넣어 핏기가 사라질 때까지
볶고 미역을 넣었다.

미역을 오래 볶아야 맛있다는데 그 오래가 대체 얼마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어 조금 난감했다. 원랜 나도 그런


데 별로 신경 안 쓰고 적당히 만들었었는데, 미각 예민하기 짝이 없는 마재준에게 먹일 걸 만들고 있으니
아무래도 신경 쓰였다.

그렇다고 갑자기 레시피에도 없는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으므로 나는 그저 미역이 파랗게 익어


흐물흐물해지고, 쇠고기와 참기름 냄새가 솔솔 풍길 때까지 달달 볶은 후에 쌀뜨물을 붓고 냄비 뚜껑을 덮었다.

7 시 20 분, 밥솥 취사 버튼을 눌렀다. 8 시쯤 되면 딱 맛있게 밥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애호박전과 제육볶음이었다. 상대적으로 쉬운 애호박전이 먼저였다.

그런데 예상외의 복병이 있었다. 애호박전 정도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호박과 계란이 완전히 익기 전에
다진 새우를 뚫어둔 구멍에 예쁘게 집어넣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게다가 물기를 뺀다고 뺐는데도,
기름이 튀어서 손등이 살짝 따가웠다.

“아이고…….”

가까스로 호박 여덟 개에 새우를 집어넣고 홍고추까지 올리는 데 성공하자마자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요리란 게 정말 쉽지 않았다. 나는 이런 고된 노동을 매일같이 하는 녀석의 노고를 새삼 실감했다.
앞으론 맛이 없더라도 종종 내가 밥을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달궈둔 웍에 썰어둔 삼겹살을 올리고 불을
줄였다. 약불에서 살살 익혀야 고기가 부드럽다나.

삼겹살이 익게 내버려 두고 옆 프라이팬에서 익어가는 애호박전을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신중하게 뒤집었다.
새우가 다 익었을 무렵, 종이행주를 깔아둔 접시에 전을 옮겨 담았다. 어느새 밥솥이 칙칙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구수한 냄새가 피어오르는 미역국 냄비에 국간장으로 간을 한 후 불을 줄이고, 삼겹살이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는
웍을 흔들어 고기를 뒤집었다.

거기까지 하고 나니 갑자기 목이 말랐다. 나는 컵을 챙겨 돌아섰다. 그리고 돌아서자마자 기절할 만큼 놀랐다.

텅 비어 있던 아일랜드 식탁엔 어느새 말끔하게 씻은 재준이 앉아 있었다.

“야……. 왔으면 기척을 해야지…….”

놀란 탓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가볍게 숨을 내쉬고는 녀석이 앉은 식탁으로 다가가 정수기에 컵을 댔다.


나 대신 버튼을 눌러준 녀석은 물이 컵으로 쏟아지는 내내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어디 갔나 했더니……. 눈떴는데 너 없어서 깜짝 놀랐잖아.”

오늘따라 유독 화사해 보이는 미소였다. 가슴이 뭉클했다.

오늘처럼 생일날 아침을, 아니, 녀석의 생일날이 시작되는 순간을 함께 맞은 적은 올해가 처음이었다. 스무
해를 같이 보내면서도 의외로 우리는 생일날 같이 있었던 적이 드물었다. 우리의 생일은 항상 방학
중이었으므로 이때쯤이면 녀석은 으레 어머니와 함께 해외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론 매년 생일날에 같이 있을 수 있겠구나.

이전과 달라진 것을 또 하나 찾아낸 나는 막 떠오른 말을 입에 올렸다.

“마재, 스물여섯 번째 생일 축하해.”

어느새 가늘어진 녀석의 눈은 예쁘게 휘어 있었다.

“어젯밤에 잠들기 전에도 축하해줬잖아.”

“……원래 축하는 많이 해줄수록 좋은 거라며.”

드물게 만날 수 있었던 생일날에는 말로, 만날 수 없었던 생일날에는 문자로 사랑한다는 말과 축하한다는 말을


번갈아가며 시간마다 해대던 새끼는 내 대답을 듣고는 말없이 웃었다.
그 눈이 하는 말을 읽은 나는 컵을 내려두고 허리를 숙였다. 우리는 식탁을 사이에 두고 짧게 키스했다.

어느새 이런 짓도 나서서 하게 됐구나.

같이 보내온 20 년에 비하면 얼마 되지도 않는 몇 달 남짓한 시간은 꽤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다. 새삼스러운


감회가 스친 순간 눈에 들어온 거실 유리창은 어느새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녀석의 콧잔등에 입술을
댔다.

“조금만 기다려. 거의 다 됐어.”

녀석은 가만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괜히 부끄러워져서 나는 얼른 돌아섰다.

살을 맞대기 시작한 후로 정말이지 별별 짓을 다 하고 있는데 고작해야 버드키스에 아직도 뺨이 달아오르는


까닭은 뭘까.

렌지 앞으로 돌아가 잘 익은 삼겹살에 양념을 넣어 다 볶아낼 때까지도 나는 그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녀석은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고무장갑을 들고 있었다.

“설거지하지 말랬잖아. 너 맨손으로 이거 다 씻었어?”

나는 얼른 웍을 내려놓고 재준이 든 고무장갑을 빼앗았다.

“내가 할 테니까 내버려 두고 넌 저기 얌전히 앉아 있어.”

피식 웃은 녀석이 고개만 기울여 내 머리칼에 입술을 묻었다.

“이것만 할게. 네가 다 해놔서 설거지할 것도 없네.”

슬그머니 고무장갑을 빼앗아 가려는 손을 피해 나는 얼른 손을 뒤로 돌렸다.

“내가 할게. 오늘 네 생일이잖아.”

살갑게 웃으며 기어이 고무장갑을 다시 빼앗아 간 재준이 내 이마에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그 입술은
이내 내 입술 위로 내려왔다.

“이 정도는 하게 해줘. 안 그럼 너무 황송해서 나 밥도 못 먹을 거 같아.”

“황송은 또 뭐야…….”
네가 이 정도로 황송하면 맨날 너한테 밥 얻어먹는 나는 뭐가 되냐.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나는 결국 녀석을
말리지 못했다.

나는 끼기만 하면 줄줄 흘러내리는 대형 고무장갑이 딱 맞는 녀석의 큰 손은 싱크볼에 쌓인 설거지거리들을


삽시간에 처치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옆에서 하던 요리를 마무리하고 그릇을 꺼냈다. 완성된 요리를 접시에 옮겨 담아 식탁에 올리고,
냉장고를 열어 얼마 전 재준이 문제의 김치 클래스에서 배워 와 만든 동치미와 배추김치도 덜어서 올렸다.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테이블 매트를 깔고, 수저를 놓고, 마지막으로 밥을 퍼서 올렸다.

“그만하고 얼른 와. 다 됐어.”

“어. 다 했어.”

고무장갑을 벗고 다가온 재준이 자리에 앉으며 과장스레 탄식했다.

“출근하는 애가 새벽부터 일어나서 웬 고생이야.”

……누가 들으면 내가 매일 새벽같이 출근해 격무에 시달리는 줄 알겠다.

하지만 나는 어제 막 첫 출근을 한 참이었다. 한 일이라곤 멍하니 앉아 교육받은 게 전부였다. 1 월, 시즌이


시작되면 곧장 실무에 투입된다지만 며칠은 교육을 더 받아야 했으므로 아직 한가했다.

숟가락 들 생각은 않고 가만히 음식들을 보고 있는 녀석의 얼굴은 묘하게 아련해 보였다.

별것도 아닌 걸 두고 저러는 꼴을 보니 조금 멋쩍었다. 나는 먼저 숟가락을 들었다.

“식기 전에 얼른 먹어. ……별로 맛은 없겠지만.”

“현아, 숟가락 잠깐 내려놔 봐.”

“응?”

“그냥은 못 먹겠어. 사진이라도 찍어야겠다.”

“……그냥 먹어.”

사진은 무슨 사진이람. 자기가 매일 차려주는 밥상에 비하면 별것도 아닌데.

더 멋쩍진 나는 얼른 밥공기에 숟가락을 꽂았다. 내 폰을 든 재준이 씩 웃었다. 아래를 향할 줄 알았던


렌즈는 내 쪽을 향해 있었다. 곧 찰칵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숟가락을 물고 있던 나는 얼른 얼굴을 가리고는 입속에 든 것을 삼켰다. 그러는 사이 셔터 눌리는 소리는 세
번쯤 더 울렸다.

“야, 난 왜 찍어.”

“하, 완벽하네…….”

내 말을 무시하고 찍힌 사진을 확인한 재준이 이어 중얼거렸다.

“어떡하지, 현아. 나 지금 가슴이 너무 아파.”

난데없는 말에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응?”

“너무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아.”

……하여간에 유난한 새끼였다.

녀석의 얼굴에 서린 아련한 기색은 더 짙어져 있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자 내 가슴도 조금 욱신거렸다.

순간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아침부터 저 새끼가 또 질질 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런 참담한


상황만은 막고 싶었으므로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숟가락을 들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밥은 먹고 죽어.”

“나 먼저 죽을까 봐 울 때는 언제고, 이제는 막 죽으래. 하, 우리 자기 너무하네.”

새침하게 투덜대며 일어난 녀석은 어느새 내 뒤로 다가와 내 어깨를 끌어안고 있었다.

“사진 찍자.”

“…….”

곧 장난스러운 속삭임이 귓가에 울렸다.

“자기야, 웃어.”

호들갑도 정성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숟가락을 든 채 잠자코 렌즈를 향해 웃었다.


녀석이 보여준 사진 속의 우리는 행복해 보였다. 조금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사진 찍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난 언젠가 이 사진을 열어보면 틀림없이 기쁠 테니까.

다시 자리로 돌아가 폰을 놓은 재준이 드디어 숟가락을 들었다. 녀석은 미역국을 한술 뜨자마자 활짝 웃었다.

“진짜 맛있다. 미역 잘 볶았구나. 우리 자기가 이렇게 요리 잘하는 줄 몰랐네.”

“…….”

나도 먹고 있는 이 미역국은 실은 뭔가 빠진 듯 심심한 맛이었다. 좋은 재료로 나름 애써서 만들긴 했지만


객관적으로 이 미역국은 미각 예민한 마재준이 진짜 맛있다고 할 만한 맛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어 제육볶음을 맛본 재준이 눈을 둥글게 떴다.

“잡내 하나도 안 나네. 너 설마 삼겹살 데쳤어?”

그걸 한 점 먹어보고 아냐.

얘는 역시 음식 평론가나 요리 연구가, 혹은 소믈리에나 조주사, 조향사나 커피 로스터 같은 미각이나 후각을


써먹는 직업을 택해야 하는 거 아닐까.

진짜 귀신 같은 새끼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기 데치는 거 손 많이 가는데 뭘 그렇게까지 했어. 고기 써는 거 힘들었지.”

“안 힘들었어.”

뻔히 보이는 거짓말 하지 말라는 듯 재준이 피식 웃었다.

“제육 맛있네. 이따 레시피 보내줘. 나중에 나도 해줄게.”

역시 명인님의 레시피는 뭔가 달라도 다른 모양인지 내 어설픈 솜씨에도 제육볶음은 그럭저럭 맛있었다. 그


레시피로 얘가 만들면 진짜 맛있겠지.

나는 내 분투의 흔적이 남은, 마구잡이로 썰린 고기 한 점을 집으며 대답했다.

“응.”

녀석은 그 후로도 내가 어설프게나마 신경 쓴 부분들을 콕콕 찍어가며 칭찬 세례를 이어나갔다.


내가 뭘 하든 예쁘다 잘한다 소리를 달고 사는 새끼였으므로 나는 잠자코 밥이나 먹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밥에 넣은 흑미가 귀여워 보인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하도 기가 막혀서 그만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새
내 눈도 미쳤는지 작고 검은 쌀알들이 정말 귀여워 보여서 나는 또 웃었다.

스무 해 만에 처음 같이 맞은 녀석의 생일날 아침은 그렇게 조금 어이없고, 웃기고, 행복하게 이어졌다.


우리는 으레 그랬듯 시시한 대화를 나누었고, 가끔 눈을 맞대고 웃었다.

식사를 끝낸 후 녀석은 설거지를 했고, 그동안 나는 식탁을 닦고 커피를 내렸다. 우리는 곧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며칠 전에 재준이 찜해둔 오페라 공연 실황 영상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옛날이야기라 그런가, 오페라는 은근 막장 스토리가 많다. 캐릭터들의 전근대적인 사고와 행동을 화제로 몇
마디 나누다 보니 잔은 금세 비었다.

커피를 마신 후로는 출근 준비를 했다. 나는 이를 닦고, 아직 몸에 설기만 한 정장을 입었다. 넥타이는


오늘도 재준이 매어주었다.

“마재, 오늘 저녁은 나가서 먹을래? 먹고 싶은 거 없어? 내가 사줄게.”

생일날까지 밥을 시키고 싶진 않아서 나는 그렇게 물었다. 신중하게 타이 매듭을 살피며 위치를 바로잡던
재준이 사르르 눈웃음을 쳤다.

“너 먹고 싶어.”

“…….”

한 해의 마지막 날에도 저놈의 개소리는 변함없이 여전했다. 개소리를 뱉는 데 쓰기엔 너무 아까운, 물기를
잔뜩 머금은 장미 꽃잎 같은 입술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으니 녀석이 배시시 웃으며 덮쳐들었다.

내 뺨을 꽉 잡고는 부러 시끄럽게 소리를 내며 뺨과 입술에 버드키스를 해대던 재준이 탄식했다.

“미쳤다. 우리 자기 예쁜 옷 입혀놓으니까 너무 예쁘고 섹시해서 환장하겠다.”

“…….”

첫 출근 날이었던 어제, 나는 마스터 테일러 님이 만들어주신 눈이 튀어나오게 비싼 옷을 입고 갔었다. 옷이


너무 예쁘다며 어디서 샀느냐고 묻는 붙임성이 좋은 입사 동기들을 상대하며 진땀깨나 빼야 했던 나는 녀석을
슬그머니 노려보았다.

내 눈가에 또 두어 번 쪽쪽댄 재준이 부러 툴툴거렸다.

“예쁜 옷 괜히 사줬어. 사람들이 다 너한테 달라붙으면 어떡하냐.”


지금 입은 옷도 재준이 사준 것이었다. 매일 똑같은 옷 입고 출근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며 또 나를 끌고
백화점으로 간 녀석은 그때 맞춘 옷만큼 비싸지는 않아도 여전히 사회 초년생이 선뜻 살 수 없는 금액대의
옷을 여러 벌 떠안겼다. 셔츠와 넥타이, 코트와 구두, 지갑과 가방은 덤이었다.

역시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이 새끼가 또 울까 무서워서 결국 그것들도 거절하지 못했다.

나는 그새 내 허리를 부러져라 끌어안고 있는 녀석의 등을 툭툭 두들겼다.

“먹고 싶은 거 없냐니까. 오늘 네 생일이잖아. 나가서 먹기 싫으면 내가 퇴근해서 저녁 해줄게.”

허리에 감겼던 팔이 풀렸다. 내 어깨를 짚은 재준이 나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생각해 볼게. 생각나면 연락할 테니까 우선은 출근하자.”

“알았어.”

부드럽게 웃고 있는 얼굴이 예뻤다. 나는 살짝 들린 녀석의 입가에 키스했다.

순간 재킷 안쪽으로 손이 파고들었다. 천천히 허리를 가로지른 손은 곧 등을 타고 올라왔다. 척추를 따라 팬


골을 지그시 눌러 훑는 그 손길은 출근을 앞둔 사람에게는 너무 자극이 강했다. 귀에 또 열이 오르고 있었다.

조금 곤란해진 나는 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녀석의 팔을 붙잡았다.

“손 떼.”

그러나 녀석은 떨어지기는커녕 내 등을 꼭 끌어안고는 귓바퀴에 입술을 댔다.

“진짜 보내기 싫다.”

“읏……. 야, 너 지금 뭐 해.”

등을 매만지던 손은 어느새 가슴을 더듬고 있었다. 셔츠 위로 유두를 지그시 눌러 문지르며 개새끼가 또


짖었다.

“지금 당장 네 옷 벗기고 싶어.”

“……야.”

“현아, 오늘 출근하지 말고 그냥 나랑 놀자.”


녀석의 손이 닿은 곳에서부터 열이 오르고 있었다.

나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아무리 그렇고 그런 짓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지만 얘가 만지기만 하면 대뜸 몸이


이상해지는 건 역시 좀 너무하지 않나.

“안 돼.”

나는 새내기 딱지가 제대로 붙지도 않은 출근 이틀째부터 결근하라는 개소리를 해대는 녀석을 얼른 떨어내고
드레스룸 밖으로 도망쳤다. 낮은 웃음소리가 내 뒤를 따랐다.

다행히 방 밖으로 탈출한 후로는 녀석도 더는 달라붙어 집적대지 않았다. 그 대신 한가하니 오늘도
데려다주겠다며 한사코 억지를 써댔다. 거절하면 출근이고 뭐고 당장 침대에 눕힐 거라는 당치도 않은 협박을
해대는 개새끼를 이기지 못한 나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녀석의 차를 얻어타고 출근했다.

9 시 50 분, 우리는 회사 부근에 도착했다. 나는 회사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운 징한 새끼에게 생일


축하 기념 뽀뽀를 해주고 차에서 내렸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뺨에 스쳤다. 나는 얼른 가라고 녀석을 향해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하지만
얼마간 걷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도 녀석의 차는 거기 그대로 있었다.

괜히 코끝이 찡해져서 나는 얼른 돌아섰다. 평생에 한 번뿐인 녀석의 스물여섯 번째 생일이자 한 해의 마지막


날 아침은 그렇게 지나갔다.

* * *

오후 3 시쯤 녀석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자기야, 오늘은 그냥 집으로 와♥]


나는 답신을 보냈다.

[알았어. 저녁은 내가 할 테니까 너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있어.]

녀석은 대답 대신 질문을 보냈다.

[오늘도 같은 시간에 마쳐?]

[아니.]

[그럼 몇 시?]

[새벽 두 시]

[거짓말하지 말고]

마치는 시간을 알려주면 또 쪼르르 데리러 올 게 뻔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화면을 껐다.

어제에 이은 지루한 교육을 마치고 회사를 나온 나는 녀석의 생일 선물을 사러 가까운 백화점에 들렀다.
뭘 살지는 정해두었는데, 의외로 그걸 파는 곳이 많지 않았다. 그 물건을 팔 만한 백화점 매장을 모조리
돌고도 목적했던 만큼의 선물을 구하지 못했다. 나는 얼른 다른 매장을 검색했다. 다행히 백화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선물을 마저 살 수 있었다.

선물 준비를 끝낸 후엔 며칠 전 케이크를 예약해 두었던 가게에 들렀다. 연말연시는 케이크집 대목이었으므로


맛있다는 소문이 자자한 그 가게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줄이 꽤 길었다. 십 분쯤 기다려 예약해 두었던
케이크를 샀다.

녀석의 살결처럼 뽀얀 생크림 케이크를 포장하던 직원이 초가 몇 개 필요하냐고 물었다. 잠시 고민하다


스물일곱 개를 달라고 말했다. 마재도 나도 이틀 만에 케이크 두 개를 해치울 만큼 단걸 좋아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생일 날짜도 비슷하니까 그냥 케이크는 이걸로 끝내자고 할 생각이었다.

지하철을 탄 후 녀석에게 지금 가는 중이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느러미를 파닥이며 우는


바다표범 이모티콘이 창에 떴다. 며칠 전 녀석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귀여운 얼굴로 처량 맞게 우는 바다표범을 잠시 들여다보던 나는 금방 가겠다는 메시지를 찍어 보냈다.


옆구르기를 하며 웃는 바다표범이 떴다. 나는 촛불 켠 케이크를 앞에 두고 박수를 치고 있는 펭귄 이모티콘을
보냈다. 그러고는 창을 바꿔 며칠 전 시작한 책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다음 역에서 지하철에 오르신 할머니께 자리를 비켜 드렸고 25 분 후에는 지하철에서 내렸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저녁 지하철은 몹시 붐볐다. 나는 혹시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딪혀 케이크가 망가지지 않도록 신경 쓰며
환승해야 하는 노선 플랫폼을 향해 걸었다.

지하철은 바로 도착했다. 만원 지하철에 몸을 밀어 넣자마자 케이크 상자와 선물이 든 쇼핑백을 선반에 올렸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차차 줄어들었다. 30 분 후, 나는 무사히 지켜낸 케이크와 함께 지하철에서
내렸다.

이제 마을버스를 타야 했다. 개찰구를 빠져나와 출구로 향할 무렵 코트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재준이었다.

“응.”

-어디야?

“마을버스 타러 가고 있어.”

-나 역 앞이야. 지금 앞으로 갈 테니까 올라와.

“알았어.”

나는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는 2 번 출구로 향하던 발을 4 번 출구 쪽으로 돌렸다. 밖으로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의 차가 나타났다. 조수석 문을 열자 따뜻한 공기가 뺨을 감쌌다.

“집에 있지, 번거롭게 왜 나왔어.”


“우리 자기, 오늘 짐이 많네.”

재준이 손을 뻗어 내 가방과 케이크 상자를 받아 들었다. 차에 오른 나는 녀석이 받아 간 것들을 다시 받아


조심스레 내 다리 위에 올려놓고 안전띠를 맸다. 곧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는 얼마 가지 못하고 사거리에서 신호를 받고 멈췄다. 재준이 내 무릎을 흘깃 살폈다.

“케이크 사 왔어?”

“응.”

“어떤 거?”

부드럽게 웃는 얼굴을 마주하자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나는 녀석의 눈을 피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따 봐.”

“모르는 가게네. 이거 사러 멀리까지 간 거 아니야?”

“아냐. 회사 부근에 있었어.”

“백화점도 갔었어? 그건 내 생일 선물?”

“응.”

“그거 사려고 나 못 오게 한 거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스티어링휠을 돌리는 녀석은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선물은 뭐야?”

다정한 목소리였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별거 아니니까 너무 기대하지 마.”

“나 벌써 기대돼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아.”

“…….”
10 분 후, 우리는 집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재준이 내 손에 들린 짐들을 채갔다. 나는 현관문을
열었다.

환기하려고 했는지 거실 창이 활짝 열려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간 나는 곧 부엌에서 솔솔 피어오르는 고소한


기름 냄새를 맡았다.

“너 뭐 만들었어? 오늘은 내가 하겠다고 했잖아.”

“별거 안 했어.”

배시시 웃은 재준이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 문을 열어 케이크를 넣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냥 어디든 괜찮은 가게를 골라서 그리로 나오라고 통보하는 게 나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녀석은 개수대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

“자기야, 뭐 해. 집에 왔으면 손을 씻어야지.”

맞는 말이었으므로 나는 1 층 욕실로 가서 손을 씻고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재준이 내 손을 잡았다.

“현아, 혹시 지금 배고파?”

나는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살폈다. 7 시 45 분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괜찮아. 너는?”

씩 웃은 재준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그 손에 이끌려 2 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재준이


뒤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난 좀 많이 고파.”

평소 저녁 먹는 시간에 비하면 아직 일렀다. 그런데도 벌써 배고프다고 하는 걸 보니 얘가 오늘은 아침 말고는


아무것도 안 먹은 모양이었다.

“점심 안 먹었어?”

“먹었어. 미역국 시간 지나니까 더 맛있더라. 사랑이 들어가서 그런가 봐. 나 먹다 울 뻔했어.”

나는 녀석의 뒤통수를 의심스레 노려보았다. 점심도 먹었다는데 벌써 배가 고프다니. 얘가 설마 저녁을 너무


열심히 준비하느라 기운을 다 뺀 걸까.
까닭이야 뭐든 간에 배가 고프다니 얼른 저녁을 먹어야 했다. 2 층에 도착한 나는 녀석의 손을 놓으며 물었다.

“너 저녁 준비 다 한 거지.”

“어.”

“얼른 씻고 나올게. 조금만 기다려.”

막 드레스룸으로 가려는데 허리에 팔이 감겼다. 뽀뽀하고 가라고 이러나 싶어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재준이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곧장 녀석의 뺨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생일 축하해.”

나를 끌어안은 재준이 활짝 웃었다.

“고마워. 선물도 줄 거지?”

해맑게 웃는 그 얼굴은 눈이 아찔할 만큼 예뻤다. 나는 곱게 접힌 녀석의 눈가를 손으로 더듬으며 웃었다.

“응. 지금 풀어볼래?”

“어.”

대답을 마친 재준이 나를 자기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별거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이 녀석은 내 코트를 벗겨내 책상 의자에 걸치고, 들고 있던 쇼핑백과 내 가방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책상 앞에서 서서 보기보다는 소파에 앉아서 차분하게 풀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았으므로 나는 책상으로 다가가


쇼핑백을 들었다.

그러나 재준이 창가로 가려는 나를 붙잡았다.

“그건 좀 이따가 볼게.”

“응? 지금 풀어보겠다며.”

쇼핑백을 빼앗아 다시 책상에 올려둔 녀석은 웃으며 내 재킷 버튼을 풀기 시작했다. 채워둔 두 개의 단추를
풀어낸 녀석이 재킷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어깨를 쓸었다.
그 바람에 벗겨진 재킷이 뒤로 떨어질 것 같아서 나는 얼른 팔을 굽혔다. 그러나 어깨를 쓸었던 손이 팔오금을
붙잡는 바람에 나는 다시 팔을 펴야 했다. 곧 재킷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녀석의 손은 벌써 베스트 단추를 풀고 있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나는 녀석의 손을 콱 붙들었다.

“……씻고 올게.”

긴 눈시울이 살짝 휘어졌다. 웃음기 머금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재준이 자기 손을 붙든 내 손을 끌어가


손등에 입술을 댔다.

“선물, 지금 풀어봐도 된다고 했잖아.”

“내 선물은 저거야.”

떨떠름하게 중얼거리자마자 녀석이 입가를 끌어 올렸다.

“알아. 근데 난 이게 더 갖고 싶어.”

내가 잡지 않은 손은 이미 베스트를 벗겨낸 후였다. 그 손은 그새 넥타이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셔츠 칼라를


마찰하며 빠져나간 넥타이도 곧 바닥에 떨어졌다.

사락거리는 그 작은 소리가 귓속을 파고든 다음 순간 녀석의 손가락이 귀 아래에 닿았다. 움푹 팬 귓불 아래로


천천히 미끄러지는 손끝의 감촉에 흠칫한 찰나, 붙잡고 있던 내 손을 자기 상의 아래로 밀어 넣은 재준이
속삭였다.

“하루 종일 기다렸어.”

손바닥에 닿은 녀석의 살결은 따뜻했고, 너무 부드러웠다.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는 녀석은 지독하리만큼 예쁘게
웃고 있었다.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피하지 않고 눈을 마주하던 재준이 곧 피식 웃으며 나를
잡아끌었다.

나를 침대로 끌고 간 녀석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는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질질 끌려가 녀석의 가슴에


등을 포개자마자 목덜미에 입술이 닿았다.

곧 귓불 뒤에 입술이 닿았다.

“너무 애태우지 말고…….”

얇은 살갗 위로 쏟아진 낮은 목소리에 삽시간에 귓가와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매끈한 입술이 귀 아래


도드라진 뼈를 누르고, 혀가 귓불 뒤로 깊숙이 파고들어 귓바퀴를 타고 올랐다.
“읏.”

녀석의 코끝에서 흐른 더운 숨결이 귓속에 스몄다. 마치 귓구멍을 억지로 벌려 바늘로 고막을 긁어 내리는 것
같았다. 몸은 삽시간에 뜨거워졌다.

또 이러지, 또.

대상이 나인지 녀석인지 모를 말이 머릿속에서 점멸한 순간 젖은 점막이 빈틈없이 귓불을 감쌌다.

“아…….”

막을 틈도 없이 신음이 샜다. 재준이 웃었다. 웃음소리가 실린 뜨거운 숨이 귓속을 찌르고 이내 귓불에 이가


박혔다. 아픔, 흥분과 긴장으로 어깨가 확 움츠러들고 가슴과 배가 조여들었다.

나는 내 가슴을 가로지른 녀석의 팔을 꽉 잡았다. 재차 웃은 재준이 귓바퀴에 입술을 댔다.

“빨리 선물 줘, 시현아.”

집에 오자마자 이건 또 무슨 짓일까.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셔츠 단추에 손을 올렸다. 이미 스위치가 올라간 녀석은 이제 말려도


소용없었으므로 오늘 새로 입은 옷이라도 구해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제일 윗단추 하나를 풀기도 전에 재준이
내 손을 붙잡았다.

“내 선물 포장을 왜 네가 풀어.”

자꾸 선물 운운하는 소리에 귀가 뜨거워졌다. 저놈의 입은 대체 무슨 수를 써야 막을 수 있을까. 여태 풀지


못한 고민에 휩싸여 있는 사이 녀석의 손은 내 손을 대신해 셔츠 단추에 닿아 있었다.

“내가 벗기고 싶다고 했잖아.”

대꾸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목덜미를 부드럽게 핥은 재준이 다른 팔로 내 몸을 꼭 끌어안고 작게 중얼거렸다.

“제일 받고 싶은 선물을 받으면 이런 기분이구나.”

녀석의 목소리는 정말로 기쁜 기색이었다. 결국 나는 이번에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깃에 달린 단추가 풀렸다. 단추 다섯 개를 잇달아 풀어 내린 녀석은 단추 두 개를 남겨두고 손을 멈췄다.


그 손은 곧 벌어진 옷깃 사이로 파고들어 유두를 가볍게 짓눌렀다.

“읏…….”
평소엔 있는지도 모르고 사는 작은 살덩이는 벌써 딱딱해져 있었다. 돌기를 누른 손가락이 느릿하게 원을
그렸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간지러우면서도 찌릿한 감각이 살을 타고 번지자 가슴이 흠칫 튀어 올랐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우리 자기는 가슴 만져주면 너무 좋아하는 거 같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낮은 웃음을 흘린 재준이 오른쪽 셔츠 칼라를 젖히고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곳을


부드럽게 머금었다. 반쯤 벗겨진 셔츠가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동안 등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 저릿저릿한
감각은 좀 더 강해져 있었다. 숨은 벌써 흐트러진 후였다.

간지러울 만큼 살살 유두를 눌러 문지르던 손끝에 힘이 실렸다. 뒤통수가 욱신거릴 만큼 강한 자극이었다.

“하지…… 마. 흑, 그거 아프다고 읏, 했잖아…….”

어깨를 빨던 개새끼가 보란 듯이 유두를 비틀었다. 인상을 쓴 나는 고개를 기울여 녀석의 머리에 내 머리를
살짝 부딪쳤다. 그제야 재준이 고개를 들었다.

열이 오른 눈과 잔뜩 젖은 입술이 동시에 부드럽게 휘었다.

“너 진짜…… 읍!”

입술이 포개지기 무섭게 열린 입속으로 혀가 밀려들었다. 녀석은 말할 틈 따위 주지 않겠다는 듯 내 숨을


빼앗고, 혀를 빨아당겼다. 조급하게 맞물린 입술은 순식간에 젖었고 미처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한 타액이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거칠게 덤벼드는 집요한 키스에 가슴이 마구잡이로 뛰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서, 나는 고개를 비틀어 녀석의
입술을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녀석은 내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재준이 내 머리칼 속으로 손을 밀어 넣어 그대로
가볍게 쥐었다. 두피에 가해진 자극에 흠칫하기 무섭게 빈틈없이 입술이 포개졌다.

맞닿은 피부에 열이 오르고, 머릿속이 부옇게 흐려졌다. 감긴 눈꺼풀마저 떨리는 것 같았다. 나는 녀석의 팔을
꽉 붙든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소리 없이 눈웃음을 친 재준이 더운 날숨이 새는 내 입술을 살짝 머금었다. 유두를


괴롭히던 손은 어느새 내 왼쪽 가슴을 부드럽게 매만지고 있었다. 그렇게 녀석이 손으로 내 심장 소리를 듣는
동안 나는 등으로 녀석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다시 입술이 떨어지고 눈이 마주쳤다. 열이 끓는 그 눈에서 흘러넘치는 말을 읽자마자 가슴이 아렸다. 나는


그만 괴롭히라는 말보다 더 중요한 말을 입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재준아, 생일 축하해.”
순간 나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은 재준이 내 머리칼에 입술을 묻으며 속삭였다.

“가슴이 너무 아파.”

그게 어떤 감각인지 이미 알고 있는 나는 내 몸을 안고 있는 녀석의 손등에 내 손을 겹쳤다.

“나 진짜 오래 살아야겠다. 그래, 우리 힘내서 백스물두 살까지는 살자. 자기가 동정도 떼줬으니까 이제 겁날


것도 없고.”

아무리 힘내도 백스물두 살은 쉽지 않을 것 같았지만, 장난스러운 말에 담긴 마음을 읽은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힘내볼게.”

“우리 자기가 선물 증정식 힘내서 해준다니 너무 좋은데?”

장수하도록 노력해 보겠다는 말이 어쩌다 이렇게 왜곡되어 버린 건지 모를 일이었다. 기가 막혀 대답할 틈을


놓치고 머뭇대는 사이 녀석은 협탁 서랍을 열어 젤을 꺼내고 있었다.

“가슴, 아프다고 했지?”

“……너무 세게 꼬집지 말라고 했잖아.”

낮게 웃은 재준이 튜브를 열었다. 아직 옷도 다 벗지 않았는데 쟤가 뭘 하려고 저걸 열까 싶은 의구심이


스치자마자 훤히 열린 옷깃 사이로 젤이 쏟아졌다.

기겁한 나는 녀석에게 기대 있던 등을 세우며 소리쳤다.

“야! 옷 더러워지잖아!”

“옷이야 빨면 되지 뭐가 문제야? 원래 선물 포장지는 막 뜯는 거랬어.”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 어깨를 끌어당기고는 젤 튜브를 눌렀다. 튜브 입구는 어느새 아직 살을 덮고 있는


왼쪽 셔츠 자락 위로 올라와 있었다. 쏟아진 젤로 젖은 셔츠 자락이 살갗에 들러붙었다.

그 어이없는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소용없을 줄 알면서도 입을 열고 말았다.

“그냥, 옷 벗고, 읏, 하면 안 돼?”

튜브를 대강 던져놓은 재준이 젖은 셔츠 위로 도드라진 유두를 슬쩍 눌러 비비며 지껄였다.


“이건 안 아프지?”

역시 소용없었다.

“우리 자기, 너무 민감해서 큰일이야. 자꾸 아프다 그러고.”

“네 입이, 흣, 더 큰일이야.”

“근데 너 내가 말 많은 거 좋아하잖아.”

“……아니거든. 아…….”

내 말 따위 들을 생각 없는 말 많은 새끼가 젖은 손으로 내 가슴팍을 천천히 훑고는 낮게 웃었다. 나는


괘씸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 녀석의 손목을 우악스레 쥐었다. 순간 차가운 액체로 젖은 손끝이 오른쪽 유두를
세게 비틀었다.

“아! 아프, 으흑, 다고…….”

목구멍을 비집고 날카로운 신음이 튀어 나갔다. 열이 오른 살갗에서 온갖 감각이 동시에 일었다. 간지럽고,
따갑고, 아프고, 좋았다.

“아파? 근데 너 약간 아픈 거 좋아하잖아.”

귀에 닿은 거친 숨결이 귓바퀴를 지나 목덜미까지 흘러내렸다. 피부 아래로 열과 진동이 스며들었다. 자꾸


입술 새로 가쁜 숨이 샜다.

“아니, 흐읏, 야!”

“아니긴. 내가 너보다 더 잘 알아.”

네가 잘 알긴 뭘 잘 알아.

남의 몸을 두고 기가 막힌 개소리를 뱉어낸 새끼가 셔츠에 덮인 왼쪽 유두를 둥글게 덧그렸다.

“그럼 왼쪽이랑 오른쪽, 어디가 더 좋은지 말해줘. 이번엔 왼쪽.”

천에 쓸린 돌기가 간지러웠다. 멍하게 뜨인 눈에 간헐적으로 오르내리는 아랫배가 눈에 들어왔다. 몸에 번진


열이 모두 아랫배에 둥글게 고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고개를 비틀어 녀석의 목덜미에 눈가를 댄 채
파르르 떨었다.
“어때? 뭐가 더 좋아?”

“몰, 라……. 그런 거, 흣.”

이어 오른쪽 유두를 손끝으로 굴린 재준이 짓궂게 웃었다.

“그럼 다시 해야겠네. 천천히 할 테니까 이번엔 알 수 있을 거야.”

미끈거리는 피부를 쓸어내리는 손은 너무 뜨거웠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목구멍에서 자꾸 소리가 끓었다.

“현아, 어디?”

이상한 짓에 열이 오른 녀석은 양쪽 돌기를 번갈아 가며 비벼대고 있었다.

왼쪽 가슴을 매만지는 손끝은 얇은 천이 쓸리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질 만큼 부드러웠고, 오른쪽을 괴롭히는
손길은 고통과 쾌감의 경계가 모호할 만큼 강했다.

왼쪽은 살이 녹을 것처럼 간지러웠고, 오른쪽은 살이 뜯겨 나갈 것처럼 따가웠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잔뜩


민감해진 가슴에서 번지는 감각은 똑같이 머리를 돌게 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나는 고개만 저었다. 목덜미를 핥던 재준이 곤란한 척 덧붙였다.

“정말 모르겠어?”

“그런 거…… 묻, 흐윽, 지 마, 좀…….”

“아, 둘 다 좋아서 못 고르겠어?”

정답에 가까운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렇다고 말하지 못했다. 섹스하기 시작한 지 벌써 몇 달째였다.
무슨 일에든 항상 내 반응을 면밀하게 살피는 녀석은 이미 내가 어디를 어떻게 만져주면 좋아하는지를 뻔히
알았다.

그런데도 아직 이런 짓을 하는 까닭이야 뻔했다.

“우리 자기 또 부끄러운가 봐.”

알면, 좀 작작 하지.

울컥한 나는 내 몸을 감싼 녀석의 허벅지를 세게 움켜쥐었다. 재준이 목을 울리며 웃었다.

곧 왼쪽 가슴을 덮고 있던 셔츠 자락마저 녀석의 손에 끌려 내려갔다. 무거워진 옷자락이 어깨에 휘감겼다.


재준이 가슴에 올린 두 손을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지금 눈 감고 있지. 눈 떠봐.”

그 말에 홀린 듯이 눈이 뜨였다.

녀석의 손은 커다랗고, 새하얬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분홍빛 손톱, 마디가 살짝 두드러진 긴 손가락, 그
손가락이 구부러질 때마다 솟는 둥근 관절, 불거진 손목뼈, 하얀 손등 위로 비치는 푸른 힘줄까지, 어느
한구석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나는 내 몸을 만지는 녀석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손이 만지고 있는 건 분명 내 몸이었고, 심지어


손길이 닿는 곳마다 저릿저릿한 감각이 번지고 있는데도 어쩐지 영화나 그림을 보는 것처럼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몸과 머리가 유리된 감각은 몹시 이상했다. 하지만 나는 그 때문에 평소라면 부끄러워 차마 보지 못할 모습을


빤히 지켜볼 수 있었다.

예쁜 손은 질척해진 살갗을 끈적하게 매만졌다. 갈비뼈를 더듬고, 허리를 쓸고, 들썩이는 아랫배를 느리게
덧그리는 손길은 너무 야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떻게 될 만큼.

나는 더운 숨을 길게 토해냈다. 날숨에 가라앉은 가슴을 낱낱이 훑은 아름다운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다시 흉곽이 크게 부풀었다. 빨갛게 물든 돌기가 새하얀 손가락 사이로 도드라진 모습은 지독하게 선정적이었다.
그제야 나는 그 손이 만지고 있는 게 내 몸이란 사실을 새삼 인지했다.

그 순간 몸에 들끓던 열이 머릿속까지 확 치고 올랐다.

“흐윽…….”

몸이 덜덜 떨렸다. 삽시간에 열이 오른 머리가 이상했다. 더 버티지 못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뒤에서도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고 있었을 재준이 작게 웃으며 목덜미에 입술을 눌렀다. 녀석은


그새 유두를 아프도록 꼭 쥐고 비비고 있었다.

“아파…….”

“더 안 봐?”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신음과 더운 숨을 함께 흘렸다. 목덜미에 뜨거운 숨이 쏟아졌다.

“왜 안 봐. 젖꼭지 지금 진짜 예쁜데.”

“마재준, 흐윽, 너, 제발…… 좀…….”


연신 이어지는 개소리에 귀가 너무 뜨거웠다. 역시 부끄러웠다.

녀석이 해대는 난잡한 짓의 수위는 나날이 올라가고 있었고, 반강제로 그 짓에 동참하는 동안 나름 경험치도
많이 쌓였다. 그런데 어째서 부끄러움의 역치는 좀처럼 늘지 않는 걸까.

재준이 쿡쿡 웃고는 뺨에 입을 맞췄다.

“이제 너 내가 이렇게 가슴만 만져줘도 갈 수 있을걸. 오늘 해볼래? 내 생일 기념으로.”

“싫어……. 그게 뭐야…….”

“그래. 그건 다음에 하자. 오늘 나도 하고 싶은 거 있거든.”

대체 또 뭘 하려고?

무서운 일이 닥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눈을 번쩍 뜬 나는 눈 아래 보인 광경에 곧 흠칫 놀라 얼른


고개를 들었다. 녀석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눈을 감았는데도 잔뜩 젖어 빨갛게 부어오른 유두의 잔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당황하는 동안 재차 가슴팍을 낱낱이 훑으며 내려간 녀석의 오른손은 흠칫거리는 내 배를 느릿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고,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가 이어졌다.

“아, 오늘은 악어야?”

한 달 전, 녀석은 온갖 동물이 그려진 속옷 무더기를 떠안기며 배시시 웃었다. 그 탓에 엄마와 따로 살게 된


지금도 내 속옷은 죄 동물무늬뿐이었다. 나에게 온갖 동물 속옷을 입히고 또 벗기며 좋아하는 변태 같은
새끼는 정작 아무 무늬 없는 속옷만 입었다.

언제까지 웃을 수 있나 두고 보자, 마재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녀석은 손바닥에 젤을 짜내고 있었다. 곧 속옷 안으로 손이 들어왔다. 흠뻑 젖은


손이 페니스를 훑었다. 막을 틈도 없이 비음이 샜다.

“흐으윽…….”

“이거 봐. 잔뜩 섰잖아. 너 아픈 거 좋아한다니까.”

……아픈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네가 만져서 그렇게 된 거야.

나는 입 밖에 내지 못할 소리를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내 바지와 속옷을 살짝 끌어 내린 재준이 내 가슴을


조금 당겨 안았다. 페니스를 훑던 젖은 손이 회음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 다물린 살을 가볍게 눌러 덧그렸다.
이내 다물린 아래도 젖었다.
키스하고 싶었다. 나는 녀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아래에 손가락이 들어왔다.

나는 예쁘게 휘어진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눈에 남은 잔상 때문일까. 찰나 하얀 손가락이


살틈을 비집고 안으로 파고드는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기겁한 나는 눈꺼풀을 꽉 내리눌렀다.

“아직 부드럽네.”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온 직후 콧잔등에 입술이 닿았다. 들어온 손가락이 얕은 곳을 지분거리고 있었다.


찌걱대는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가락은 세 개로 늘어났다.

“아……”

그러나 점막이 손가락에 들러붙기 시작하기가 무섭게 마치 놀리기라도 하듯 손가락이 불쑥 빠져나갔다. 다시


손가락이 들어오고, 금세 빠져나가는 감질나는 짓이 몇 차례 이어졌다. 만지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아래는 벌써 벌어져 있었다.

입술 밖으로 새는 숨은 좀 더 가빠졌다. 페니스는 아플 만큼 솟아올랐으며, 그 와중에도 재준이 집요하게


만지고 있던 왼쪽 가슴이 따끔거렸다. 오늘 아침 갓 꺼내 입은 새 셔츠는 구겨지고 젖어 엉망진창이 되었고,
말끔하던 바지는 어중간하게 내려가 허벅지를 구속하고 있었다.

뭐 하나 멀쩡한 게 없었다. 사람을 끙끙 앓게 만들어놓은 녀석은 심지어 아래를 괴롭히는 동안 키스조차


해주지 않았다.

그것을 깨닫자 갑자기 억울해졌다. 인상을 쓴 나는 손을 들어 녀석의 뒤통수를 콱 끌어당겼다.

“……키스해.”

열이 끓는 눈을 마주하자마자 입술이 맞물렸다. 다급하게 녀석의 입술을 머금고 혀끝을 빨아당겼다.

다리 사이에 젤이 쏟아졌다. 젤을 훑은 손가락이 속으로 깊숙이 들어오기 무섭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속살이


손가락에 휘감겼다.

“읏, 응, 흐…… 으응…….”

손가락이 드디어 느끼는 곳을 뭉근하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젖은 점막에서 나는 물소리에 귀가 화끈거렸다.


허리가 튀어 오르고, 허벅지 안쪽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녀석의 팔을 움켜쥐었다.

입술을 뗀 재준이 낮게 웃었다.

“여긴 잔뜩 조르고 있는데 팔을 잡으면 어떡해.”


나는 수치스러운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손가락은 또 밖으로 빠져나간 후였다. 벌어진
아래가 움찔거렸다.

녀석의 눈이 짓궂은 빛을 띠었다.

“팔 안 놓으면 안 넣어줄 거야.”

……입 다물고 그냥 하면 세상이 멸망하기라도 하는 걸까.

오늘도 어김없이 사람을 괴롭혀 대는 새끼였다. 나는 괘씸한 말만 쏟아내는 입술을 조금 아프도록 깨물고는
녀석의 팔목을 붙잡았던 손으로 녀석의 뒤통수를 끌어당겼다.

“아!”

손가락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이번에도 얕은 곳을 맴돌 뿐이었다. 속살이 빠져나가려는 손가락에 달라붙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몸의 반응이라는 걸 알아도 부끄러움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자꾸 달라붙네.”

수치를 부채질하는 말을 지껄이며 쿡쿡 웃은 재준이 가슴을 만지던 손으로 내 페니스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확 번진 쾌감에 아랫배가 조여들었다. 나는 목을 뒤로 젖히고 신음했다.

“더 깊이 넣어주면 좋겠어?”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아래엔 다시 손가락이 얕게 파고들었다. 덜덜 떨리는 허벅지가 벌어지려 했다. 그러나
다리는 내려가다 만 옷에 걸려 있었다. 답답했다. 그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마자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떨어졌다.

“그럼, 다리 더 벌려야지. 응?”

“읏, 너…… 흐읏, 그만 좀 해…….”

귀와 뺨이 확 뜨거워졌다. 왜 항상 수치는 내 몫일까.

나는 손톱이 박히도록 녀석의 팔을 콱 움켜쥐었다. 그사이, 부끄러움 따위 모르는 변태 같은 새끼는 내


허벅지에 걸려 있던 바지를 느긋하게 무릎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오늘 내 생일이잖아. 우리 자기, 나 선물 안 줄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개소리를 지껄인 재준이 다시 내 페니스를 훑어 올렸다. 젖은 살이 마찰되는 소리에 혼이


나갈 것 같았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데, 몸은 멋대로 녀석의 손에 반응하고 있었다.
잔뜩 흥분해 벌어진 아래가 간지러웠다. 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다리를 움직여 무릎에 걸린 바지를 벗어버렸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도무지 더는 할 수가 없었다. 평소처럼 마주 보고 있었더라면 녀석의 등이라도 꽉


끌어안고 뭐든 적당히 했을 텐데, 뒤에서 이 모든 꼴을 빤히 보고 있는 눈을 두고 뭘 하려니 너무 부끄러워
미칠 것 같았다.

괘씸한 새끼였다. 뒤에 닿은 녀석의 것은 이미 잔뜩 커져 있었다. 자기도 실은 급하면서 아닌 척 느긋하게


사람을 괴롭히다니.

나는 무릎을 세운 채 어쩔 줄 모르고 부들부들 떨었다.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춘 재준이 또 웃었다.

“아직도 이렇게 부끄러워하면 어떡해. 너 때문에 내가 진짜 돌겠다.”

아래에서 손가락이 불쑥 빠져나갔다. 잔뜩 젖은 그 손은 이내 내 손을 끌어갔다.

“우리 자기 너무 귀여워서 어쩔 수 없네. 도와줄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릎에 손이 닿았다. 곧 다리가 활짝 벌어졌다. 그러고도 녀석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오른손이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또 자위나 시키려고 이러는 거겠지. 나는 반쯤 자포자기하고 눈꺼풀을 꽉 눌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번쩍 떴다.

“야! 읏, 야…… 응, 손 놔!”

내 손가락이 안에 들어와 있었다. 기겁한 나는 녀석에게 기댔던 등을 세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짓을 시키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손가락을 빼내려 했으나 녀석은 내 손을 꽉


붙든 채였다. 그랬다. 들어와 있는 건 내 손가락만이 아니었다.

“생일 선물 증정식 중이란 거 잊지 마, 자기야.”

“흐윽, 으, 으응…….”

미친 소리가 떨어지자마자 녀석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을 꾹 눌렀다. 느끼는 곳을 눌리자마자 내벽이 조여들고
등이 덜덜 떨렸다. 떨리는 내 등을 재준이 자기 가슴으로 지그시 누르며 속살거렸다.

“지금 눈 감고 있지. 눈 떠, 현아. 여기 봐야지.”

“보긴…… 흐으윽, 뭘 봐, 이 미친…… 새끼야!”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미 감고 있는 눈꺼풀을 더 꽉 내리눌렀다.

“이 정도로 미쳤다는 소리 듣는 건 역시 좀 억울한 거 같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녀석의 가슴이 작게 들썩였다. 여태 애태우던 것이 무색하게도 내 손등을 꾹 눌러


손가락이 깊이 파고들게 한 개새끼가 또 짖었다.

“그거 알아? 진짜 미친 짓은 아직 너한테 하지도 못 해.”

“마재, 으응, 아, 준! 손…… 읏, 안 놔?”

“그러니까 그 말은 아껴뒀다가 나중에 내가 못 참고 진짜 미친 짓 할 때 해.”

미쳤어. 얘가 진짜 미쳤나 봐. 이 변태 새끼를 어쩌면 좋을까.

나는 어쩔 줄 모르고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고개를 기울여 내 입술에 가벼운 버드키스를 떨어뜨린 재준이


짓궂게 덧붙였다.

“그리고 원래 이런 짓은 좀 미쳐서 해야 더 좋은 거야. 우리 자기는 너무 보수적이야, 진짜.”

“야!”

내가 놀라 굳어 있든 말든 변태 같은 마재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의 손을 자기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랑…… 또 여기. 우리 자기 좋아하는 곳.”

“아! 으응, 마, 흐으윽, 아, 읏.”

“더 깊은 곳에도 있는데, 거긴 손가락은 안 닿으니까.”

이게 대체 뭐야.

너무 부끄럽고 기가 막혀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어느새 눈가에는 찔끔 눈물이 번져 있었다. 귀신같이 그것을
알아차린 개새끼가 눈가에 입술을 대며 웃었다.

“네 안, 진짜 뜨겁지. 근데…….”

나는 변태 같은 소리만 내뱉는 입술을 막아버리려 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입술을 피한 녀석은 기어이
뒷말을 꺼냈다.

“내 거 넣으면, 더 뜨거워져.”
그 말을 끝으로 입술이 포개졌다.

열이 오른 속살이 내벽을 벌리며 드나드는 손가락 네 개에 끈끈하게 휘감기고 있었다. 평생 모르고 살 줄


알았던, 눅눅하게 젖은 살의 감촉이 너무 생경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미칠 것 같다고 생각한 찰나 재준이 입술을 뗐다. 변태 같은 새끼는 언제나 그렇듯 이 와중에도
꽃같이 예뻤다.

녀석의 눈이 일렁였다. 내 눈과 뺨, 목덜미와 가슴을 낱낱이 훑고 내려간 녀석의 시선은 엉망진창이 된 내


다리 사이에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재준이 다시 눈을 맞댔다. 그제야 녀석의 손가락이 아래에서 빠져나갔다. 그런데 이 망할 새끼는 이번엔 자기
손만 쏙 빼냈다. 나는 눈물이 번져 흐릿해진 눈을 깜빡이며 얼른 내 손도 끄집어냈다. 아래는 손가락이
빠져나간 후로도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너무 괘씸해서, 나는 녀석의 아랫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윽, 하고 아픈 시늉을 한 개새끼가 내 가슴을 꽉


끌어안았다.

나는 녀석을 원망스레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제발 입 좀, 하아, 다물 수 없어?”

흥분의 기색이 짙은 눈이 장난스레 빛났다. 부러 소리를 크게 내며 뺨에 키스를 쏟아부은 녀석이 내 등을 살짝


밀며 중얼거렸다.

“그럼 조용해지게 해줘, 자기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잖아.”

나를 밀어놓은 녀석은 옆으로 몸을 옮기더니 그대로 드러누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부러 눈만 깜빡이는 가증스럽고 예쁜 얼굴을 잠시 노려보던 나는 발목에 걸려 있던


악어 속옷을 벗어 던지고, 양말도 벗었다.

재준이 배시시 웃으며 자기 허리 위를 손으로 가리켰다. 나는 말 없이 녀석의 허벅지에 걸터앉아 이미 입고


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상태인 셔츠의 나머지 단추를 풀었다. 소매 단추에 손을 대자 재준이 내 손목을
끌어가 단추를 풀어주었다. 아직 옷을 다 입고 있는 녀석의 눈앞에서 나는 그렇게 나신이 되었다.

“너…… 지금 진짜 예뻐.”

나는 흥분이 들끓는 눈으로 개소리를 지껄이는 녀석의 상의 아래로 손을 넣었다. 위로 끌어 올리자 재준이
쿡쿡 웃으며 얌전히 팔을 들었다.

드러난 녀석의 가슴을 내려다보던 중 연분홍빛 유두가 눈에 띄었다. 이 새끼는 이런 곳도 예쁘고 난리였다.
벚꽃 빛깔 젖꼭지를 보고 있으니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오늘도 빨갛게 부어오른 내 가슴을 흘깃 내려다본
나는 몸을 숙여 녀석의 유두에 입술을 댔다.

나만 당하란 법 있나. 이 새끼도 한 번쯤은 얼마나 아픈지 겪어볼 필요가 있었다.

“하, 하하.”

유두를 세게 빨자마자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아니꼬웠다. 나는 녀석이 늘 하듯, 돌기에 이를 세웠다. 조금


아프게 물었는데도 녀석은 아픈 기색 없이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나름 애써 가슴을 괴롭히는 내내
웃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살짝 울컥한 나는 물고 있던 것을 뱉어내고 세게 꼬집었다. 그제야 녀석의 미간에 살짝 금이 갔다. 그러나


벌어진 입술에서 터져 나온 것은 신음이 아니라 웃음이었다.

“……안 좋아?”

나는 고개만 들어 녀석을 보았다. 녀석의 입술이 깊게 휘었다.

“네가 해주는데 안 좋을 리 없잖아. 좋아.”

“…….”

쟤 머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몸은 아닌 게 분명했다. 정말 좋으면 저렇게 여유만만하게


웃고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얘가 만지기만 해도 좋은데 얜 왜 이러지. 역시 내가 못 하는 건가.

나는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내 기색을 알아차린 재준이 내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가슴도 좋은데…… 나 지금 좀 급해, 자기야.”

말을 마친 재준이 내 한 손을 끌어가 자기 바지 앞섶에 올리고는 장난스레 덧붙였다.

“너무 애태우지 말고, 빨리.”

여태 사람 피가 마르도록 애를 태운 게 누군데 이딴 소리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적반하장이 특기인


새끼를 지그시 노려보고는 조금 아래로 내려갔다.

녀석의 앞섶은 잔뜩 부풀어 있었다. 바지 단추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속옷을 끌어 내리자마자 속옷 밴드에
눌려 옆으로 기울어 있던 페니스가 툭 튀어 올랐다.

오늘 당한 게 있는 탓일까. 어쩐지 조금 괴롭히고 싶어졌다. 나는 젖은 선단에 손끝을 대고 천천히 문질렀다.


그제야 녀석의 입에서 신음이 샜다.

나도 이제는 재준이 어디를, 어떻게 만져주면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다. 손으로 약한 곳을 몇 번 훑자 녀석의


허리가 살짝 튀어 올랐다.

커다란 새끼가 이러는 꼴이 귀엽게 느껴지는 걸 보면 나도 역시 좀 이상한 거겠지.

나는 손을 움직이며 고개를 들었다. 나를 빤히 보는 녀석의 얼굴은 조금 곤란해 보였다.

“자기야, 지금 해야 할 건 그게 아니잖아.”

그 얼굴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입술이 열렸다.

“선물 증정식이라며. 그러니까…… 넌 가만히 있어.”

말을 하는 동안 스친 생각을 실천하기로 한 나는 열린 입술을 그대로 아래로 내렸다.

“읏, 현아, 너 뭐 해.”

맨날 내 입에서 나오던 소리가 녀석의 입에서 나오는 걸 듣는 것도 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입을 크게 벌려 녀석의 페니스를 머금었다. 선단이 들어오자마자 입안이 꽉 찼다. 정액만큼은 아니어도 프리컴
역시 좀 이상한 맛이었다. 얘 때문에 어디 가서 말 못 할 것들의 맛까지 알게 된 게 조금 웃기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입을 더 크게 열었다.

벌떡 등을 세운 재준이 내 어깨를 붙들었다.

“그런 거…… 하지, 마. 입도 작은 애가 뭐 하는 거야.”

이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아래에 집어넣는 새끼가 할 말이 아니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나는 그만 녀석의


것을 문 채 웃고 말았다.

“윽…….”

재준이 신음했다. 내 어깨를 쥔 손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하지 말라면서도 떼어놓지 않는 걸 보면 역시 좋은 거겠지. 진작 해줄 걸 그랬나.

재준이 해주던 짓을 떠올린 나는 페니스 아래에 혀를 대고, 이가 닿지 않도록 주의하며 천천히 빨아들였다.
그래 봤자 들어온 부분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녀석처럼 목구멍까지 쓸 수 있다면 좋겠지만 도저히 이 말도 안
되는 물건을 더 삼킬 엄두는 나지 않았으므로 그냥 할 수 있는 만큼 깊이 넣은 후 고개를 들어 페니스를
빼냈다.
“너…… 갑자기 왜 안 하던 짓, 흣, 하고 그래.”

가슴을 핥아줄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 조금 웃겼다. 다시 고개를 숙이자 페니스가 입천장을 긁으며 밀려
들어왔다. 목구멍 부근 연한 살에 선단이 닿기 무섭게 숨이 턱 막히고, 팽팽하게 벌어진 입가가 욱신거렸다.

입술 찢어질까 겁난다던 녀석의 말을 사실로 만들지 말아야 할 텐데. 그런데 이럴 때 손은 어떻게 해야 하더라.

어렵지 않게 해야 할 일을 떠올린 나는 곧장 딱딱한 기둥을 손에 쥐고 훑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녀석의 숨소리가 조금 더 거칠어졌다. 흥분이 역력한 녀석의 반응에 내 몸에 서린 흥분도 좀 더 짙어져 있었다.

이래서 얘가 내 거 물기만 하고도 맨날 그렇게 흥분했던 거구나.

흥분으로 흐릿해진 머릿속으로 그 생각이 스쳤을 때였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응!”

“읏, 이 세우면 아파, 자기야.”

나는 다급히 물고 있던 것을 뱉어내고 어깨를 움츠렸다. 아래에 손가락이 들어와 있었다.

“내 생일, 이라고 우리 자기, 너무 애쓰는 거 아냐?”

깊숙이 박힌 손가락이 내벽을 짓눌렀다.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신음했다. 흠칫거리는 등 곳곳에 입을 맞추며
재준이 중얼거렸다.

“너무 좋아서, 죽을 거 같아…….”

“죽겠, 다는 소리…… 아, 좀…… 흐으윽.”

나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녀석의 허리에 올린 손을 움켜쥐었다. 고개가 떨어지자 잔뜩 솟아오른 페니스가 뺨을


긁었다. 녀석의 배에 고개를 파묻고 몸에 흐르는 열을 견뎠다. 얼마 후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팔 아래로 손이
들어왔다. 곧 나는 녀석을 마주 보고 앉았다.

또 찔끔 눈물이 번진 눈가에 키스한 재준이 내 허벅지를 끌어당겼다. 솟아오른 두 개의 페니스가 맞닿았다.


녀석은 그것을 한꺼번에 쥐고 훑으며 짓궂게 웃었다.

“웬일로 우리 자기가 큰맘 먹은 거 같으니까…… 난 이제 얌전히 누워 있을게.”

얄미운 소리를 지껄인 재준이 히죽히죽 웃고는 젤 튜브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나는 말없이 손바닥에 젤을
짜서 녀석의 페니스를 훑었다.

조금 괘씸했으므로 프리컴이 잔뜩 흘러나오는 구멍을 손끝으로 살짝 괴롭혀 주었다. 얼마 후 나는 웃음과


신음을 함께 흘리느라 들썩이는 녀석의 배에 젖은 손을 대강 문질러 닦고 무릎을 세웠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막상 넣으려니 덜컥 겁이 났다. 녀석의 것을 손에 쥔 채 잠시 망설이고 있으니 재준이 내


허리를 붙잡았다. 장난기와 탐욕이 뒤섞여 끓고 있는 녀석의 눈을 잠시 응시하던 나는 길게 숨을 내쉬고
천천히 허리를 내렸다.

“읏…….”

끝이 들어오자마자 압박감에 호흡이 끊겼다.

나름대로 경험치가 쌓여서 이젠 그다지 아프지 않았고, 심지어 곧 좋아질 거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페니스가 내벽을 비집어 벌리는 감각은 쉽게 익숙해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녀석의 것을 쥔 손을 놓기도
전이었다. 아직 한참이나 더 집어넣어야 했다.

좀 더 작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 커다란 새끼는 이런 곳까지 쓸데없이 커서 사람을 힘들게 하나.

“현아, 얼른.”

내 속을 뻔히 읽고 있을 녀석은 살짝 인상을 쓴 채 웃고 있었다. 예쁜 그 얼굴에 괜히 울컥한 나는 녀석을


노려보고는 좀 더 몸을 내렸다.

“아…….”

페니스가 조금씩 밀려들자 긴장한 내벽이 떨렸다. 속은 벌써 꽉 찬 것 같았다. 더 내려가야 하는데, 역시


막막했다. 나는 어정쩡하게 무릎을 세운 채 배를 움켜잡고 신음했다.

허리를 붙들고 있던 녀석의 손이 내 페니스를 훑기 시작했다. 아랫배가 바짝 조여들었다. 녀석의 것이 든


아래도 마찬가지였다. 압박감과 뒤섞인 쾌감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힘들어?”

젖어 있는 페니스 아래를 훑는 녀석의 손은 너무 뜨거웠다. 입술에선 대답 대신 신음만 흘러나왔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눈을 꽉 감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페니스를 훑던 손이 아래로 파고들었다. 질척하게 젖어 맞물린 곳을 감질나게 매만지던 재준이 낮게 웃었다.

“넣어달라고…… 말해. 그럼, 읏, 도와줄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등이 파르르 떨렸다. 너무 부끄럽고 기가 막혀서 뺨이 화끈거렸다.


안 도와줄 거면 가만히 있기나 할 것이지, 또 개소리나 해서 사람을 수치스럽게 하다니. 게다가 도와주긴 뭘
도와준단 말인지. 실은 자기도 급하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그런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녀석을 원망스레 쏘아본 나는 다물려 있던 입술을 열었다.
신음과 더운 숨이 쏟아져 나왔다. 조금이나마 긴장이 풀린 순간,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윽.”

“아…… 읏.”

단숨에 깊이 꿰뚫린 속이 욱신거렸다.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들어온 것은 어느새 더 커져 있었다. 나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넣어달라는 말이…… 그렇, 게 하기 싫었어?”

“절대, 안, 흐윽, 해……. 아!”

녀석은 그새 내 허리를 붙잡아 돌리고 있었다. 속살에 딱딱한 것이 비벼지자 틈 없이 맞물린 아래가 떨렸고,
달라붙은 다리 사이에선 젖은 소리가 났다. 나는 엄한 짓을 하는 녀석의 손을 콱 움켜쥐고 신음했다.

“듣고 싶었는데.”

마찰이 시작된 아래가 달아올랐다. 내가 끙끙 앓는 꼴을 빤히 바라보며 내 허리를 자기 멋대로 흔드는 녀석의


눈엔 어느새 장난기가 사라져 있었다.

“움직여야지, 시현아.”

그 말에 홀린 것처럼 허리가 들렸다. 깊이 박혀 있던 것이 내벽을 모조리 긁으며 빠져나가는 감각에 목이 뒤로


넘어갔다. 밭은 숨을 뱉어내고 다시 몸을 가라앉혔다. 파고든 페니스가 배 속을 헤집었다. 견디지 못하고 다시
허리를 든 순간 재준이 허리를 쳐올렸다.

“아! 아, 흐으윽.”

“아픈, 거…… 읏, 아니지?”

충격으로 배 속이 욱신거렸다. 이것도 아픈 거라면 아픈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왜냐면, 그 아릿한 둔통마저도 쾌감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쾌감에 휩쓸리기 시작한 몸은 이제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열에 녹은 젤이 흘러내려 다리 사이에


마구잡이로 번졌다. 살 부딪는 소리와 녀석의 입, 또 내 입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가 엉망으로 뒤섞여 방을
가득 채웠다.
녀석도 더는 말이 없었다. 맞물린 아래에서 번진 쾌감은 삽시간에 온몸으로 번졌다. 어젯밤에도 녀석의 것이
들어왔던 아래는 완전히 풀려 거칠게 파고드는 녀석의 페니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물고, 빨아들였다.

어느 순간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더는 아프지도, 부끄럽지도 않았다. 그냥, 너무 좋았다.

나는 내 몸을 붙들고 있는 단단하고 부드러운 손을 꼭 쥐고, 그저 몸이 시키는 대로 감각을 좇아 움직였다.


시선은 자연스레 아래에 누운 녀석의 얼굴에 꽂혔다. 내가 아는 가장 예쁘고 아름다운 존재는 낯을 찌푸린
채로 신음하며 종종 웃었다.

물끄러미 녀석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예쁜 애가 내 거라니.

이렇게 예쁜 게 세상에 숱한 멋진 사람들을 다 내버려 두고 별 볼 일 없는 나만 보고 있다니.

심지어 나만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으며, 사랑할 거라니.

정말, 내가 얘를 평생 사랑해도 된다니.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상기하자마자 너무 기뻐서, 좋아서, 가슴이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나는 녀석의 손을 끌어와 미친 듯이 뛰고 있는 내 가슴에 댔다. 그 손은 어렵지 않게 내 심장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가슴이 쥐어짜인 것처럼 저렸다.

그 아릿한 통증은 삽시간에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사랑해, 재준아…….”

“읏, 너…….”

벌떡 일어난 재준이 내 목을 당겨 안았다. 입술을 깨문 녀석의 미간은 깊게 파여 있었다. 삽시간에 몸이 뒤로


넘어가고, 다리가 활짝 벌어졌다. 숨 돌릴 틈도 없이 페니스가 깊게 박혔다. 낯을 굳힌 재준이 허리를 쳐대기
시작했다.

“아, 아! 흑, 아, 너무, 빨, 으흐윽…….”

질척이는 소리에 세차게 살 부딪는 소리가 섞였다. 흥분과 긴장으로 달아오른 살갗에 전율이 흘렀다. 몇 번을
겪어도 여전히 감당하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그에 휩쓸려 만신창이가 된 나는 녀석의 등을 끌어안고 허덕였다.

뜨거워진 뺨에 더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이럴 때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자기는 맨날 하면서 이건 또 뭔 소리람.

어이없는 말에 눈이 절로 뜨였다. 바로 앞에 있는 녀석은 무서울 정도로 흥분한 낯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머릿속에서 뭔가가 끊어졌다.

“아, 흐으, 아, 아아!”

“사랑해, 시현아.”

거친 숨에 섞여 나온 작은 한마디가 감각이 활짝 열려 끓고 있는 몸속 깊은 곳에 스민 순간, 허리가 아래로


꺼지고 등이 튀어 올랐다.

덜덜 떨리며 휘어진 등을 따라 목이 뒤로 넘어가자마자 목젖을 깨물렸다. 목덜미에 연신 쏟아지는 뜨거운


숨결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아래가 경련하며 조여들었다.

“아! 아읏, 흐으윽…….”

“하, 윽.”

거친 신음을 짧게 뱉은 재준이 내 페니스를 쥐었다. 사정은 갑작스러웠다. 몇 번 훑기도 전에 녀석의 손과


선단이 젖었다. 그러나 녀석은 아직이었다. 몸이 식을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아래를 치받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하, 읏, 그만…… 아, 안 돼…….”

재준이 웃었다. 곧 상체를 세운 녀석은 내 다리 사이에 치골이 닿도록 페니스를 박아 넣고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흐윽, 하아, 아…….”

페니스는 움직임을 멈췄지만 속살은 가쁘게 그것을 안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배는 이미 꽉 찼고, 이젠 더
들어올 것이 없는데도.

게걸스러운 몸의 반응을 고스란히 느낀 나는 부끄러움과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열을 주체하지 못하고


흐느꼈다.

녀석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곧 녀석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이어 입가를 끌어


올린 재준이 내 정액으로 젖은 자기 손을 핥기 시작했다. 붉은 혀가 손목을 타고 올라 손바닥을 훑고, 손가락
끝에 이르렀다.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온갖 생각이 어지럽게 들어찬 머리는 아무것도


처리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멈춰 있을 뿐이었다. 결국 나는 바보처럼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그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고 말았다.

자기 손을 다 핥은 녀석의 눈이 휘어졌다. 이어 재준이 느릿하게 허리를 당겼다. 페니스가 천천히 빠져나가는


동안 빈틈없이 긁힌 내벽이 잘게 경련했다. 달라붙는 속살을 떨어내고 거의 끝까지 페니스를 빼낸 재준이 다시
삽입을 시작했다. 그 역시 몹시 느렸다.

열이 오른 몸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멋대로 허리가 들렸다. 겨우 다리 사이가 다시 맞붙은 순간,


재준이 또 웃었다.

“정말 그만해?”

너무 부끄러웠다. 그러나 나는 차마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아니. 흐윽, 더…… 더 해줘.”

솔직하게 말은 했지만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비틀어 녀석의 눈을 피하고는 얼른 손으로


얼굴을 감췄다.

“하…….”

한숨 같은 신음이 귓가를 스치기 무섭게 덮쳐든 재준이 내 두 손을 끌어당겨 자기 어깨에 걸치며 속삭였다.

“지금 너…… 얼마나 귀여운, 흣, 줄 알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감긴 눈꺼풀에 입술이 닿았다.

“근데 얼굴을 왜 가려. 그 손으로, 빨리 나 안아줘.”

나는 대답 대신 녀석의 어깨를 꽉 끌어당겼다. 뜨겁게 열이 오른 맨살이 겹쳐졌다. 세차게 뛰어대는 가슴으로


내 몸을 누른 재준이 입술을 포개고 강하게 허리를 쳤다.

나는 정신없이 흔들렸고, 또 허덕였다. 더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녀석의 등을 세게


끌어안았고, 미칠 것 같은 순간에는 손톱으로 녀석의 등을 긁었다.

녀석은 내 몸을 열고 들어올 뿐 말이 없었다. 대신 내 목덜미와 입안에 연신 거친 숨을 쏟아냈고, 가끔


머리칼을 그러쥐거나 내 페니스를 훑고, 가슴을 물고 빨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쾌감은 차라리 고통에 가까웠다. 하지만 몸은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다리가 멋대로
녀석의 허리를 휘감아 당겼다. 녀석은 그럴 때마다 목을 울리며 웃고는 부들부들 떨리는 내 허벅지를 당겨
안고 몸이 부서지도록 페니스를 처박았다. 샅이 달라붙을 때마다 시끄럽게 물소리가 나고, 맞물린 곳에서
녹아내린 액이 뒤로 줄줄 흘러내렸다.

너무 괴로웠고, 너무 좋았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녀석의 등을 끌어안고 흐느꼈다.


갑자기 아랫배가 저렸다. 아주 가끔 찾아오는, 사정 욕구와는 조금 다른 배출 욕구였다. 그것을 느끼자마자
눈을 번쩍 뜬 나는 녀석의 어깨를 확 밀치며 소리쳤다.

“읏, 그만, 그만해! 나와…….”

“지금…… 좋은 거지? 괜찮으니까, 그냥 해.”

나는 곧 흘러나올 것이 정액이 아니란 사실을 이제 알고 있었다. 그것을 침대에 쏟아내는 짓 따위는 정말이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다.

“비켜, 그만, 해, 아읏, 아, 안 돼! 아…… 흐흑, 싫어!”

그러나 내 몸을 누르고 있는 녀석은 비켜줄 생각 따윈 없어 보였다. 깊이 드나들던 페니스는 이제 얕은 곳에


있는 느끼는 지점을 집요하게 뭉개고 있었다. 돌 것 같았다. 나는 열이 끓고 있는 녀석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거 아니야!”

“아, 그거야?”

녀석의 눈에 서린 흥분이 짙어진 순간 페니스가 확 치고 들어왔다.

나는 울고 싶어졌다. 얘는 왜 자꾸 내가 이상해질 때마다 더 흥분하고 난리일까.

“비켜! 이불…… 더러워지잖아! 싫어, 이거 싫어……. 아!”

숙였던 허리를 세운 재준이 내 페니스를 쥐었다. 더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진짜 싫은데, 왜 안 비켜주는 거야. 기겁한 나는 내 것을 쥔 녀석의 손목을 밀어내며 버둥거렸다.

“그렇게, 싫어?”

“아! 흑, 흐으으윽, 너 비켜……. 싫어, 진짜 싫어…….”

“……귀엽긴.”

재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삽시간에 등에 팔이 감겼다. 몸을 이은 채로 나를


덥석 안아 든 녀석이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그럼, 욕실 가자. 거기라면 괜찮지?”


재준이 걸음을 뗄 때마다 이어진 아래가 흔들렸다. 미칠 것 같았다.

그냥 나 혼자 보내주면 안 돼?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몸에 몰아치고 있는


감각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나는 녀석의 몸에 매달려 밭은 숨만 몰아쉬었다. 나를 매단 개새끼가
부러 느긋하게 걷고 있다는 걸 아는데도 그랬다.

드디어 욕실 문이 열리고, 차가운 타일이 닿았다. 놀란 등이 흠칫했다. 그제야 조금 정신이 돌아온 나는


녀석의 목덜미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흑, 내려줘…….”

“씨발, 나 꽉 잡아.”

눈이 마주치자마자 작게 욕지거리를 뱉은 재준이 거칠게 내 입술을 물고는 자기 허리에 감겨 있던 내 다리를


풀었다. 금방이라도 몸이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아 나는 다급하게 녀석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놀랄 틈도 없었다. 나를 벽에 밀어붙인 채 벌어진 내 허벅지를 꽉 누른 재준이 그대로 허리를 쳐올렸다.

“응! 으응…….”

나는 말도 안 되는 짓에 기겁했다. 억눌린 비명은 맞물린 입술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녀석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녀석의 것이 다시 깊이 박혀들자마자 몸이 멋대로 퍼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페니스에서 말간
액이 줄줄 쏟아지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꼴로 녀석의 것을 받는 내내 뜨겁게 열이 오른 입술이 끈질기게 달라붙어 내 입을 막았다.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드는 쾌감에 몸부림치며 무력하게 흐느꼈다.

곧 입술이 떨어졌다. 내가 수치에 짓눌려 우는 꼴을 빤히 지켜보던 녀석이 남의 속도 모르고 귓가에


속살거렸다.

“미치겠다. 너 이럴 때 진짜 예뻐…….”

잔뜩 흥분해 가라앉은 목소리로 지껄여대는 개소리에 몸이 덜덜 떨렸다.

네 눈에나 그렇겠지. 나는 돌아버릴 것 같아.

그러나 울음을 쏟아내느라 바쁜 입은 말을 내뱉지 못했다.

쏟아진 눈물로 뺨이 엉망진창이었고, 배와 다리 사이는 페니스에서 쏟아진 것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러나 머리가 어떻게 되는 게 아닐까 겁날 만큼 몸을 휩쓴 쾌감에도 불구하고 사정은 아직이었다. 녀석의


페니스가 느릿하게 드나들고 있는, 열이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래는 활짝 열려 그것을 받아 물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또 주륵 눈물이 났다. 아무래도 몸이 이상해진 것 같았다.

내 기색이 심상치 않다는 걸 귀신같이 알아챈 재준이 내 입가에 입술을 대며 속삭였다.

“현아, 왜 그래.”

짧게 녀석과 눈을 맞댄 나는 얼른 입술을 꾹 다물고 녀석의 목덜미에 다시 얼굴을 파묻었다.

“왜 울어.”

낮게 쉰 목소리는 너무 다정했다. 당장 욕을 한 바가지 퍼부으려던 나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내 목덜미에


조심스레 입을 맞춘 재준이 부드럽게 페니스를 밀어 넣으며 또 물었다.

“안 좋아?”

너무 좋았다. 차라리 예전처럼 좀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나는 덜덜 떨리는 몸을 녀석에게 붙이며
간신히 대꾸했다.

“몸이, 흐…… 윽, 몸이 이상해…….”

“어디가?”

“다, 읏…… 으으응, 아, 흑.”

“좋은 거지?”

이번에도 거짓말은 하지 못했다. 나는 얼굴을 숨긴 채 고개만 끄덕였다.

“나도, 너무 좋아. 우리 둘 다 좋으니까…… 아무 문제 없네.”

“흑, 흐흑, 내려줘. 내려줘, 재준아…….”

뜨거운 숨결에 실린 작은 웃음소리가 목덜미로 흘러내린 직후 녀석의 페니스가 빠져나가고, 발이 땅에 닿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휘청거리는 사이 몸이 돌아갔다. 내 손을 끌어다 벽에 대고 깍지를 낀 재준이 내 등을
매만지며 목덜미를 핥기 시작했다.

아직도 끝이 아니었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울었다.

엉망진창으로 젖은 아랫배와 다리 사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만져대던 재준이 벌어진 살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확 조여든 내벽이 손가락을 물었다. 아직도 이러다니, 역시 몸이 이상했다.

“아, 아…….”

신음을 흘리는 사이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이내 녀석의 것이 배 속을 꿰뚫었다. 나는 그저 눈을 질끈 감은 채


살을 타고 번지는 흥분을 견뎠다.

“하아, 읏…….”

목덜미에 간간이 신음을 흘리며 녀석이 느릿하게 페니스를 찔러 넣었다. 녀석은 곧 내 손을 끌어가 내
아랫배를 덮었다.

“여기, 까지 들어갔어. 현아, 느껴져?”

재준이 내 손등을 꾹 눌렀다. 피부 아래로 느껴지는 딱딱한 감촉과 그것으로 인한 압박감으로 숨이 가빠


허덕이는 사이, 들어온 것이 주륵 빠져나갔다. 입술 사이로 젖은 소리가 쏟아졌다.

다시 다리 사이가 맞붙기 무섭게 내 아랫배를 꾹 짓누른 개새끼가 짓궂게 웃었다.

“아직도 모자라? 우리 자기…… 오늘 너무, 조르네.”

열이 올라 움찔대는 속살이 기둥에 끈끈하게 들러붙었다. 녀석의 개소리를 부정할 수 없는 몸의 반응을


느끼자마자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 직후 재준이 허리를 쳐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느리게 들어온 페니스는 얕은 곳에 있는 민감한 부분만 살짝 문지르고는 자꾸 아래로 빠져나갔다.

“하, 아읏…….”

너무 좋은데, 뭔가 부족했다. 좀 더 깊은 곳이 저릿저릿했다. 쾌감에 절어 이상해진 몸은 페니스가 들어올


때마다 멋대로 움직였다. 조금 더 깊게 넣어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녀석의 개소리가 진짜인 것처럼.

당연히 내 사정을 뻔히 알고 있을 개새끼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느릿하게 얕은 곳만 찔러대며 중얼거렸다.

“자기야, 지금, 흣, 허리 흔드는 거야?”

“닥, 아흑, 쳐…….”

가까스로 말을 뱉어내는 사이 페니스가 쑥 빠져나갔다. 허전하고, 간지럽고,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몸을


태우는 듯한 수치를 견디지 못한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흐느꼈다.
내 등에 가슴을 포갠 재준이 페니스를 천천히 밀어 넣으며 화끈거리는 귓바퀴에 입을 맞췄다.

“넣어, 달라고 말해. 시현아.”

“흑, 싫…… 어.”

“말하면, 원하는 만큼 박아줄게.”

나를 괴롭히려고 작정한 게 분명했다. 귀에도 입에도 담기 어려운 말을 부러 지껄여 댄 녀석은 이번에도 끝만


살짝 찔러 넣었을 뿐이었다.

“마재, 아! 야……!”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덜덜 떨었다. 못된 새끼 따위 확 밀치고 도망가고 싶었는데, 몸은 내 의지를 배반한 지


오래였다.

아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벌름대는 살틈으로 끝만 살짝 넣어 문지르는 감질나는 감각에 애가 탔다. 그간


녀석이 하도 괴롭혀 댄 통에 이제 더해달라는 말은 할 수 있게 되었어도, 아직 그 말은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빨리, 빨리 해줘. 겨우 뒤를 돌아본 나는 입 대신 눈으로 재촉했다. 그러나 눈썹을 일그러뜨린 채 낮게


웃은 녀석은 내 입가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고는 도리어 들어왔던 선단마저 쑥 빼버렸다.

“으흑, 나쁜 새끼…….”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 나갔다.

“개, 하아, 새끼…….”

넣어달라는 말은 안 나와도 욕은 너무 쉽게 나왔다. 나는 내 눈가에 맺힌 눈물을 입술로 훑어내는 개새끼의


팔을 아프도록 움켜쥐었다. 돌연 오늘 하고 싶은 게 있다던 개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새끼는 하루에 변태 같은 짓을 몇 개나 하는 거야.

그러나 오늘도 사람을 잡고 있는 개새끼는 쿡쿡 웃으며 잔뜩 젖은 내 다리 사이를 끈끈하게 더듬을 뿐이었다.

“으응, 아, 흑, 아!”

민감해진 피부에 닿는 뜨거운 손길에 전율이 흘렀다. 발씬거리는 살틈을 무시하고 치골과 음낭, 회음부만
집요하게 덧그리는 손길에 애가 타서 미칠 것 같았다. 저린 듯 간지러운 듯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감각으로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너, 오늘…… 흐윽, 왜 그래…….”

“오늘 내 생일이잖아.”

생일을 핑계로 수치를 모르는 짓에 동참하라고 종용해 댄 개새끼가 부어오른 유두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덧붙였다.

“아!”

“얼른…… 얼른, 선물 줘, 시현아.”

그동안 이 새끼가 온갖 개소리로 괴롭혀 대긴 했어도 나한테까지 개소리를 하라고 요구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젠 그 짓까지 하려는 모양이었다.

눈앞이 깜깜했다. 이 예쁜 새끼는 얼굴 아깝게 왜 자꾸 변태 같은 짓만 할까.

울고 싶은 기분으로 그 변태 같은 새끼의 손길을 견디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탐욕과 당치도 않은 기대로


번들대는 눈을 원망스레 쏘아본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아까 절대 안 한다고 했는데. 난 그냥 하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왜 하필 오늘은 얘 생일이람.

눈을 뜬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열었다.

“……개새끼.”

“빨리 내 거 달래, 여기는.”

얘는 생일을 핑계로 아주 작정한 것 같았다. 욕을 듣고도 웃은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수치스러운 말을 더할


뿐이었다.

……모르는 척 내버려 두면 또 온갖 개소리를 해가며 나를 괴롭히겠지.

그 개새끼에게 휩쓸린 나는 오늘도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무언가를 하나 더 내려놓고 말았다.

“……빨리, 넣어줘, 이 징한 새, 하읏, 아흑!”

나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미간을 깊게 찌푸린 개새끼는 언제 애를 태웠냐는 듯 살 부딪는 소리가 나도록 허리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나는 단숨에 치밀어오른 쾌감과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뒤에서 치받아오는 기세에 몸이 자꾸
앞으로 떠밀렸다. 나보다 훌쩍 키가 큰 녀석이 거칠게 덮쳐들기 시작하자 발뒤꿈치가 들렸다.

이내 벽을 짚은 손에 낀 깍지가 풀렸다. 녀석은 풀린 손을 내려 내 허리를 움켜잡고 끌어당겼다. 벽을 짚은


내 손이 아래로 미끄러지자마자 하반신이 떠올랐다.

“아! 읏, 흐윽, 천, 천히…… 아아!”

나는 발끝만 겨우 대고 선 채로 속살을 짓누르며 드나드는 녀석의 페니스를 받아냈다. 빠르게 드나드는


페니스에 눌려 긁히고 있는 내벽이 들어온 것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하, 씨발…….”

종종 정신이 나갈 때면 재준이 자기도 모르게 뱉어내는 욕지거리를 듣자마자 등줄기가 확 뜨거워졌다.

녀석에게 붙잡혀 반쯤 떠 있는 다리가 걷잡을 수 없이 후들거렸고, 흥분으로 미친 듯이 뛰고 있는 가슴이


가쁘게 들썩일 때마다 짧게 쏟아지는 날숨에 연신 신음이 뒤섞였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 절정은 삽시간에 덮쳐왔다.

“아!”

“하…… 윽.”

내벽이 빡빡하게 조여들었다. 몸에 끓고 있던 열이 끓어 넘친 그 순간, 나는 진저리를 치며 사정했다.


사정하는 동안에도 녀석은 꽉 맞물린 아래를 억지로 비집어 벌리며 페니스를 찔러 넣고 있었다.

“그만, 그만해! 흑, 아!”

평소엔 수다스럽기 짝이 없으면서 꼭 이럴 때만 말이 없는 개새끼는 좀처럼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더, 더…… 아!”

“더?”

더는 못 한다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내 말을 멋대로 채간 재준이 빠르게 허리를 쳐댔다. 돌아버릴 것 같았다.

“아, 더, 못…… 해! 그만, 아, 흐으윽, 아!”

몸도, 머리도 엉망진창이었다. 죽을 만큼 힘들었고, 죽을 만큼 좋았다. 오랜만에 폭주하는 녀석을 감당하느라


만신창이가 된 나는 어느 순간 또 울고 있었다.

“그만하라고…… 흑, 이 개새끼야…….”

더는 못 버티겠다고 생각한 순간, 허리를 붙잡고 있던 손 하나가 가슴팍에 휘감겼다. 터질 것처럼 뛰는 가슴을
진짜 터지도록 꽉 껴안은 녀석의 목에서 사나운 신음이 끓어올랐다.

음낭까지 집어넣을 듯이 페니스를 처박은 녀석은 잔뜩 젖어 뜨겁게 달아오른 속에 그대로 정액을 쏟아냈다.
그동안에도 허릿짓은 느리게나마 계속 이어졌다.

이 나쁜 새끼는 오늘도 쉴 틈 한 번 안 주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사람을 잡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녀석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렸다.

어느 순간 페니스가 확 빠져나갔다. 미처 다물리지 못한 아래로 미지근한 것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그것들이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아주 작은 소리가 귓속으로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더 버티지 못한 무릎이 풀썩 꺾였다. 바닥에 주저앉으려는 나를 확 끌어당긴 재준이 덜덜 떨리는 내 등에


가슴을 포갰다. 녀석은 곧장 내 목덜미에 거칠게 키스하며 낮게 웃었다.

“근데 어떡하냐……. 너, 하, 그 개새끼 사랑하잖아.”

부정할 수 없는 개소리에 울컥한 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눈썹을 찌푸리며 웃은 재준이 내 뺨에 입술을 댔다.

“괜찮아. 그 개새끼도, 너…… 죽도록 사랑하니까.”

가슴이 으스러지도록 아팠다.

퇴근하자마자 온몸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사람을 쥐어 짜놓은 괘씸한 새끼를 노려보던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아직 뜨거운 숨이 흘러나오는 입술을 콱 물어버렸다. 아픈 척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물린 재준이 나를
돌려세워 끌어안았다.

넓고 뜨거운 가슴은 아직 세차게 뛰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등을 꽉 끌어당겼다.

내 머리칼에 입술을 누른 재준이 배시시 웃었다.

“선물 잘 받았어. 자기야.”

“…….”

“진짜 예쁘고, 귀엽고…….”

진짜 작작 좀 했으면 좋겠다.
뭐든 웬만하면 받아주자고 매일같이 다짐하며 얘랑 같이 살고 있지만, 오늘은 정말 너무 힘들었다. 울컥한
나는 입을 여는 대신 녀석의 배에 가볍게 주먹을 꽂았다. 그러나 윽, 하고 부러 아픈 시늉을 한 꽃 같은
개새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무 야하고……. 나 너 보다가 죽는 줄 알았어.”

“하아…….”

나도 모르게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샜다. 내 한숨 따위 개무시한 녀석은 내 입가에 쪽 소리 나도록 키스하며


속삭였다.

“생일 아니어도 가끔은 우리 자기가 선물 줬으면 좋겠다.”

안 줘도 억지로 뺏어 갈 새끼가 뭐래.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움직여 녀석을 문 쪽으로 밀어내고 인상을 팍 썼다.

“넌 내년부터 생일 없어. 나 씻을 거니까 나가.”

다리 사이에서 뭔가가 계속 흐르고 있어 몹시 난감했다. 나는 녀석을 열린 문밖으로 밀어내고 문을 닫았다.

그러나 한발 늦었다. 문을 잠그기 직전, 닫힌 문을 벌컥 열어젖힌 개새끼가 방싯방싯 웃으며 덮쳐들었다.

“세상에, 그런 매정한 말을 하다니. 그것도 모자라서 너 지금 나 혼자 씻으라고 쫓아낸 거야? 오늘 내


생일인데?”

“하아…….”

“자기야, 곧 부부 될 사이에 그런 정 없는 짓 하는 거 아니야.”

“…….”

내 손을 잡은 재준이 자못 심각한 척 고개를 갸웃했다.

“끝난 직후엔 몸 가누기도 힘들어하면서 왜 자꾸 혼자 씻겠다고 고집을 피우는지 모르겠네, 우리 자기. 그냥


가만있으면 내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반짝반짝하게 씻겨줄 텐데.”

녀석에게 팔을 붙잡혀 샤워부스로 끌려 들어가자마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 손은 왜 쟤보다 느린 걸까. 문


하나 빨리 못 잠그는 둔한 손 탓에 나는 오늘도 얘 손에 씻기는 수난을 당해야 할 모양이었다.
“배고프지. 얼른 씻고 밥 먹자.”

여태 입고 있던 바지와 속옷을 홀랑 벗어 던지고, 샤워기를 틀어 물 온도를 맞추는 녀석의 얼굴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

그 예쁜 얼굴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조금 전까지 했던 개고생도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그만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그래, 누가 널 말리겠니.

그렇게 오늘도 체념과 포기를 학습한 나는 녀석의 손에 이끌려 따뜻한 물줄기 아래 섰다.

길고 험난했던, 얼토당토않은 마재준의 스물여섯 번째 선물 증정식은 그 후로도 좀 더 이어지고서야 겨우


끝났다.

……이러니 내가 너랑 안 씻으려고 하는 거잖아, 이 징한 새끼야.

한참 시달리다 진이 빠진 나를 달랑 들고 욕실을 나서며 녀석은 히죽히죽 웃었다. 나는 만사를 포기하고


얌전히 안겨 있었을 따름이었다.

* * *

“코스대로 내는 거 귀찮으니까 그냥 다 같이 먹자.”

한국 사람은 원래 그런 거 아니냐며 피식 웃은 마재가 예쁘게 음식을 담았다. 나는 그것을 부지런히 거실 소파


앞 테이블로 옮겼다. 저녁을 먹으며 어제 보다 만 영화를 마저 볼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생일날 밤에 어울리지 않는, 조금 어둡고 진지한 내용의 스릴러 영화를 보며 나란히 앉아 저녁을
먹었다.

새콤한 비네그레뜨 소스를 곁들인 샐러드와 오래 볶은 양파의 풍미가 느껴지는 양파 수프, 생굴과 산뜻하게
구운 대구살 스테이크, 부드러운 감칠맛이 느껴지는 새우 아보카도볼과 망고 처트니를 곁들인 오리 콩피,
그리고 아침에 남은 제육볶음과 시금치나물까지 우르르 올라온 저녁 식탁은 상다리가 부러지겠다는 관용 표현이
절로 떠오를 만큼 풍성하고 휘황찬란했다.

둘 다 필요 이상으로 잔인한 묘사는 질색이라 미리 평을 보고 고른 영화의 장면들은 대체로 무난했다. 다만


소리에 예민한 편인 나는 스산한 음악이 나올 때마다 종종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얼른 화면에서 눈을 떼고 음악이 사라질 때까지 열심히 음식을 먹거나 녀석의 얼굴을
훔쳐보며 두근거림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어느덧 사건의 범인과 주인공은 취조실에서 입씨름 중이었다. 화면 속에선 선량해 보이는 인상의 범인이 태연히
웃으며 주인공에게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세상에 저런 썩을 놈이 있나. 나는 그 얼굴을 보다 말고 날씬한 오리 다리에 포크를 푹 꽂았다.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익혀 만들었을 오리 콩피는 고소하고 부드러웠다.

큰 살점을 대강 발라 먹고, 자잘하게 붙은 나머지 살에 포크를 찍었을 때였다. 범인의 궤변을 듣다 빡친


주인공이 탁자를 팍 치는 소리에 놀라는 바람에 포크가 삐끗했다.

나이프로 고기를 자르던 마재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냥 손으로 잡아. 집인데 뭐 어때.”

“저 새끼 개소리 너무 심해.”

“그러네. 머리 좋다는 설정치고는 말에 논리가 너무 없어.”

기적의 논리왕이 내놓은 진지한 평에 돌연 웃음이 터졌다. 나는 오리 다리를 손에 든 채 잠시 어깨를 들썩였다.

내가 웃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던 재준이 피식 웃으며 티슈를 뽑아 건넸다. 다리에 남은 살점을 뜯어 먹은 나는


그것을 받아 손에 묻은 기름을 닦고, 포크 대신 숟가락을 들었다.

“오늘 요리하느라 너무 고생한 거 아냐? 네 생일인데…….”

으깬 새우와 아보카도를 버무려 아보카도 껍질에 담아낸 아보카도볼 하나를 해치우며 물었다. 녀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냥 종류가 많은 거지 별로 고생 안 했어. 고생이야 아침에 네가 했지. 한식이 손이 좀 많이 가나.”

어제 샐러드 채소가 다 떨어졌었다. 그러니 얘는 오늘 채소도 다듬었을 거고, 양파도 오래 볶았을 거고, 소스
여러 개를 만드느라 양념과 향신료를 죄 꺼냈을 거고, 오리 콩피를 오븐에 넣고 한참을 지켜봤을 거고,
숟가락으로 아보카도 과육을 파내고, 핀셋으로 대구 뼈도 발랐을 거다.
얘가 아무리 손이 빠르다지만 절대 별로 고생 안 했을 밥상이 아닌데,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냥 웃을
뿐이었다.

아침에 오랜만에 했던 고군분투를 떠올린 나는 깨끗하게 비운 아보카도 껍질을 빈 접시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다 맛있어. 고마워.”

“우리 자기 맨날 맛있다고 해주니까 먹이는 보람 있어.”

“맛있으니까 맛있다고 하는 거야.”

“안타깝지만 이제 키는 더 안 클 거 같으니까, 많이 먹고 살 좀 쪄.”

오랜만에 나온 키 이야기에 조금 욱한 찰나, 화면 속에선 주인공이 범인의 멱살을 쥐고 흔들며 쌍욕을 퍼붓고
있었다. 미국에서도 저런 식으로 경찰서에서 형사가 난동을 피우는 모양이었다.

잘한다, 더 해라. 나는 옆에 있는 괘씸한 녀석에게도 해주고 싶은 짓을 열을 내며 해대는 주인공을 속으로


열심히 응원했다.

나이프를 내려놓은 마재가 내 허리를 더듬으며 개소리를 덧붙였다.

“넌 진짜 살 좀 쪄야 돼. 할 때 허리 잡으면 뼈밖에 안 잡히는 게 말이 되냐. 굶겨가면서 하는 것도 아닌데


이게 뭐야.”

“…….”

같이 살게 된 후로 얘가 아침저녁으로 나를 열심히 먹이고 있긴 했다. 하지만 나는 원래 좀처럼 살이 붙지


않는 체질이었다. 그런데 정말 내가 살이 안 찌는 게 걱정이라면 얘는 저런 말을 하는 대신 매일같이 내
몸에서 단백질을 쭉쭉 쥐어 짜대는 짓부터 좀 줄여야 하지 않을까.

조금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눈에 힘이 들어갔다. 허리를 더듬던 손이 올라와 아마도 샐쭉해져 있을


눈가를 쓸었다.

“너 너무 가벼워. 안아 들 때 저항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거 아냐. 코점이도 너보다는 무겁겠다.”

“…….”

“진짜 맘만 먹으면 나 하루 종일 너 들고도 할 수 있을걸.”

그 말에 조금 전 당했던 짓이 머릿속을 스쳤다. 눈에 더 힘이 들어갔다. 미간에도 주름이 진 모양인지 녀석의


손끝은 이제 미간을 쓸고 있었다.
요즘 전에 없이 부지런히 손톱을 다듬고 핸드크림을 발라대는 녀석의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 손이
미간을 어루만지는 내내 너무 기가 찬 나머지 입술이 달라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랬다. 내가 좀 마르긴 했다. 그렇지만 나보다 15 센티 가까이 큰, 온몸에 근육뿐인 이 새끼도 나보다 20
킬로밖에 더 안 나갔다.

……그냥 네가 쓸데없이 힘만 센 거겠지. 내가 너무 가벼운 게 아니라.

손을 거둔 녀석의 낯이 약간 진지해졌다.

“말 나온 김에 우리 새해 목표는 일단 너 60 킬로부터 넘기는 걸로 하자.”

내 몸무게 늘리기가 어쩌다 우리의 새해 목표가 되어버린 건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회의적으로 대꾸했다.

“내 생각에 그거, 아마 3 월까지는 무릴 거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마재의 미간에 주름이 팍 졌다.

“하, 진짜…… 너 왜 하필 고르고 골라 회계사야.”

회계사는 이른바 시즌과 비시즌의 업무 강도가 확연히 차이 나는 직종 중 하나였다. 그리고 1 월부터 3


월까지는 회계사들이 가장 바쁘다는 감사 시즌이었다. 모레부터 다시 출근하게 되면, 나는 다른 신입
회계사들이 모두 그러하듯 교육을 며칠 더 받고 바로 실무에 투입될 것이다.

이제 갓 들어간 신입인 나는 사정이 조금 낫긴 할 거다. 하지만 대개 회계사들은 3 월까지 이어지는 감사 시즌


동안에는 휴일 따위는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고, 새벽 퇴근을 밥 먹듯이 해야 하며, 필드라 불리는, 감사
의뢰를 맡긴 클라이언트 회사로 출근하는 경우도 꽤 많다고 들었다.

우리나라 회사들이 모두 서울에만 있는 게 아니므로 지방 출장도 잦은 편이고, 심지어는 해외로 나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했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씩 출장이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나.

문득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그간 방학 때면 한두 달 떨어져 있기 예사였지만, 그건 이런 사이가 되기 전이었다. 대학 입학 첫해에도 남의


학교까지 쪼르르 쫓아오던 새끼였다. 내가 며칠씩 집에 안 오면 이 징한 새끼가 출장지까지 쫓아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나는 이제 영화는 안중에도 없이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너, 나 출장 갔을 때 절대 따라오지 마.”


매끈한 미간에 진 주름이 더 깊어졌다. ……이 새끼, 역시 따라올 생각이었어.

나는 이 새끼를 말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카드를 꺼냈다.

“따라오기만 해봐. 나 집 나갈 거야.”

녀석의 콧잔등에도 살짝 주름이 졌다.

“자기야, 우리 약혼한 사이야.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약혼했다고 한집에 사는 경우가 더 드물지 않아? 우리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우리 자기, 오늘 세게 나오네.”

나는 징한 새끼의 샐쭉해진 눈을 피해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바뀐 화면 속에서는 범인의 트릭에 걸린


피해자가 제 발로 죽을 곳을 찾아들고 있었다.

“너 한 번이라도 쫓아오면…… 나 새아버지네 집으로 가 버릴 거야.”

“결혼한 후에 내가 따라가면 어떡할 건데.”

“결혼했다고 무조건 한집에 살라는 법도 없잖아.”

내 말이 어이없는지 마재가 코웃음을 쳤다.

불길한 웃음이었다. 나는 내 안온한 회사 생활을 사수해야 할 필요성을 더 강하게 느꼈다.

“세상엔 주말부부도 있고, 여러 사정 때문에 떨어져 사는 부부도 많아.”

“우리 자기, 웬일로 오늘 재밌는 소리를 길게도 하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알았어. 출장은 안 따라갈게.”

녀석이 투덜대는 소리를 모르는 척한 나는 피트향 위스키를 살짝 뿌린 생굴을 집어 입에 넣었다. 병원 냄새를


닮은 싸한 향이 날카롭게 콧속을 파고든 찰나 재준이 내 어깨를 콱 끌어안았다.

“야!”

상에 지천으로 널린 음식을 내버려 두고 밥 잘 먹고 있는 사람 귀를 콱 깨문 개새끼가 나긋하게 속삭였다.

“근데 너…… 따로 살자는 소리 한 번만 더 해봐. 나도 가만 안 있어.”


그 말이 진짜 마음에 안 들었는지 부드러운 어조와는 달리 가라앉은 목소리는 꽤 흉흉했다. 화면 속에서는
덫에 걸려들어 목숨이 경각에 달린 피해자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귓속으로 파고든
협박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자기는 맨날 나를 달달 볶아대면서, 맘에 안 드는 소리 한마디 했다고 그새 사람을 협박하고 난리였다.

그러게 이런 말 안 해도 되게끔 네가 좀 얌전히 있으면 되잖아. 게다가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정말 가긴


어딜 가겠냐, 이 징한 놈아.

나는 속으로 투덜대며 탱글탱글한 생굴을 삼켰다. 그래도 역시 얘가 가만 안 있는 것보단 가만있는 게 내


일신에 이로울 테니 앞으로 저 말만큼은 꺼내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알았어. 안 할게.”

피트향의 강렬함이 가신 입안에는 달콤한 셰리향이 은은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녀석의 손에 이끌려 턱이
돌아갔다.

“꼭이야. 농담으로라도 안 돼. 나 지금 심장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줄 알았어.”

천 갈래 만 갈래로 심장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는 개새끼는 사람을 언제 협박했냐는 듯 화사하게 웃으며 입술을
떨어뜨렸다. 스치듯 가벼운 버드키스를 남기고 떠난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래. 너 60 킬로 만드는 건 일단 올해 시즌 지내보고 다시 이야기하자.”

“응.”

“미리 말해둘게. 너 일하느라 몸 상하거나 지금보다 더 가벼워지면 나 속상해서 앓아누울 거야.”

몸 상하거나 가벼워지는 건 난데 왜 네가 앓아눕냐.

기가 막혔다. 하지만 오늘이 녀석의 생일이란 사실을 상기한 나는 괜한 말을 덧붙이는 대신 녀석의 입에도
생굴을 들이댔다.

“일 너무 열심히 안 할게. 밥도 많이 먹고. ……당장 60 킬로는 무리일 거 같지만, 그것도 노력해 볼게.”

그러니 너도 협박만 하지 말고 협조를 해. 네가 밤에 나 조금만 덜 쥐어짜도 금방 60 킬로 될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눈에 담아 녀석을 올려다보며 촉촉한 붉은 입술 안으로 굴을 밀어 넣었다.


가정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녀석은 조신하게 입술을 닫았다.
역시 얘는 입 다물고 있을 때가 제일 예뻤다. 피식 웃고 만 나는 닫힌 입술 위에 살짝 키스했다.

영화는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고, 우리는 저녁 식사를 마쳤다.

뒷정리까지 마치자 시계는 11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끈 우리는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곧 소파에
다리를 올려 길게 엎드린 녀석은 12 시가 될 때까지 책을 읽을 셈인지 소파 한쪽에 놓인 리더기를 집으며
말했다.

“올라와.”

녀석에겐 코점이보다 가벼울 나는 사양하지 않고 녀석의 등에 올라가 엎드렸다. 어깨너머로 힐끗 본 리더기에는


로마자가 듬성듬성 채워져 있었다. 눈으로 한 줄 따라가 봤지만, 읽을 수 없었다.

“스페인어야? 뭔데?”

녀석이 대답한 제목은 굉장히 유명한 남미 작가의 소설이었다.

이 시대의 세계인 마재준은 외국어 공부가 취미인 놈이었다. 한국어와 불어는 물론이고 영어도 네이티브
수준으로 잘하는 이 새끼는 중학생 때부터 배우기 시작한 중국어와 독어도 생활 회화 수준 이상이었다.

언젠가 로망스계 언어는 뿌리가 같으니 심한 사투리 배우는 기분으로 대강 하다 보면 금방 배운다는,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망언을 한 녀석은 어느 순간 스페인어까지 공부하고 있었다.

“어렵지 않아?”

“내용 다 알잖아. 어렵긴 해도 그럭저럭 읽을 만은 해.”

우리는 어릴 때부터 책을 돌려 읽곤 했다. 누구든 읽다 맘에 드는 책이 생기면 툭 가져다 안기는 식이었다.


지금 얘가 읽고 있는 책은 삼 년 전쯤 내가 읽고 재밌어서 녀석에게 읽으라고 건네주었던 소설의 원서였다.

“읽어줘.”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왜 읽어달라고 하느냔 말 대신 녀석은 곧바로 소리 내어 글을 읽기 시작했다.

낭독은 같이 살기 시작한 후 우리에게 새로 생긴 취미, 혹은 습관 같은 거였다.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졌으므로 자연스레 우리는 혼자 하던 일을 같은 공간에서 같이하게 되었는데, 독서도 그중 하나였다.

처음부터 낭독을 했던 건 아니었다. 11 월 초 어느 날 밤, 나는 침대에 엎드려 교양 수업 레포트용 철학책을


설렁설렁 읽고 있었다. 뭔 소린지 알 듯 말 듯한 문장들을 눈으로 훑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재준이
읽어달라고 말한 게 시작이었다.
‘왜?’

‘갑자기 중 1 때 생각이 나서.’

‘중 1 때?’

‘국어 선생님이 교과서 읽힐 때 네 이름 자주 부르셨었잖아. 또박또박 잘 읽는다고. 그러고 보니 그때 이후로


너 책 읽는 거 들어본 적이 없네. 듣고 싶어, 오랜만에.’

말을 마치자마자 녀석은 냉큼 베개를 베고 누워 눈을 반짝였다. 굳이 거절할 까닭을 찾지 못한 나는 그날 밤,


아주 오랜만에 소리 내어 글을 읽었다.

내가 난해한 철학책을 한 페이지쯤 읽었을 무렵 녀석의 눈이 감겼고, 두 페이지를 더 읽었을 때 녀석은 그대로
잠이 들어 있었다. 그다음 날 밤엔 재준이 자기가 쓰고 있던 졸업 논문을 읽어주었다. 그날 평소보다 일찍
잠든 나는 아침까지 꿈도 꾸지 않고 잘 잤다.

낭독이라지만 실은 거의 자장가 대신이었다. 스페인어는 쥐뿔도 몰랐으므로 얘가 발음을 똑바로 하는지 마는지
알 리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얘가 책을 읽어줄 때의 목소리가 좋았다.

나는 녀석의 등에 뺨을 대고 눈을 감은 채 평소보다 조금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에 실린 이국의 말을 들었다.

“현아, 일어나. 열두 시 다 됐어.”

나직이 속삭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역시나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일 분만.”

따뜻해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내 맘을 읽었을 녀석은 재촉하지 않고 등을 내주었다. 아마도 1


분보다는 더 길었을 시간을 가만히 녀석의 등에 붙어 흘려보내고서야 나는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섰다.

“현아, 나 일으켜 줘.”

재준이 사르르 눈을 기울이며 팔을 뻗었다.

다 큰 새끼가 부리는 애교가 웃기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잠자코 큰 손을 끌어당겼다. 부러 미적미적 일어난


재준이 나를 끌어안고 뺨에 키스했다. 나는 녀석의 뺨에 같은 짓을 되돌려 주었다.

재준이 리모컨을 들고 씩 웃었다.

“모처럼 한국에서 맞는 새해니까 제야의 종소리는 들어줘야겠지.”

곧 공영방송 채널이 화면에 등장했다. 올해도 변함없이 보신각 부근은 타종을 보기 위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축하 공연을 하는 가수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부엌으로 가 케이크를 꺼내고, 차를 끓였다. 그것을 거실
탁자에 놓아두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우리는 준비한 선물을 들고 다시 거실로 돌아와 나란히 앉았다.

탁자 위에 올라온 선물 꾸러미들을 보고 있으니 괜히 가슴이 찡했다. 이맘때쯤이면 재준이 해외에 나가 있는


일이 잦았으므로 우리는 생일날에 맞춰 선물 교환을 한 적도 별로 없었다. 하물며 한 해의 끝과 새해의 시작이
이어지는 순간을 같이한 적은 올해가 처음이었다.

화면 속 시계가 11 시 58 분으로 바뀌었다. 재준이 작은 초 세 개를 꺼냈다.

“세 개만 하자. 하나는 네 거, 하나는 내 거, 하나는 우리 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저녁을 먹기 전, 생일 케이크는 이걸로 끝내기로 합의한 참이었다. 그러므로 이 케이크는 스물여섯
번째 생일을 맞은 녀석의 것이기도, 스물일곱 번째 생일을 맞은 내 것이기도, 평생 함께하기로 약속하고
올해를 무사히 보낸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재준이 성냥에 불을 붙였다. 곧 눈처럼 하얀 생크림 케이크 위에 꽂힌 초 세 개에도 불이 붙었다.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는 사이 화면 속에서 초읽기가 시작됐다.

새해까지 3 초를 남겨둔 순간, 재준이 자기 몫의 초를 불어 껐다.

“마재, 생일 축하해.”

눈을 맞대고 환하게 웃는 녀석이 너무 예뻤다. 나는 재빨리 녀석의 하얀 뺨에 키스했다.

무사히 세상에 태어나 줘서, 나를 만나러 와줘서, 여태까지 같이 있어 줘서, 올해 네 생일을 같이 보낼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네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면, 어쩌면 나는 네 스물여섯 번째 생일을 축하해 주지 못했을지도 몰라. 그런


무서운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줘서 고마워.

조금 부끄러우니까 다 말하진 못하겠어. 하지만 그래도 너는 분명 내가 하지 못한 말을 다 읽어주겠지.


뺨에서 입술을 뗀 순간 첫 번째 종이 울렸다. 나는 내 몫의 초를 불었다.

“현아, 생일 축하해.”

다시 맞댄 녀석의 눈이, 너무 시끄러웠다.

나는 두 번째 종소리를 들으며 녀석의 입술에 다시 키스했다. 세 번째 종소리가 울렸을 때 마지막 초를 같이


끈 우리는 마주 보고 웃었다. 다섯 번째 종소리가 울렸을 때 나는 녀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고, 녀석은 손을
들어 내 목덜미를 감쌌다.

“……또 가슴이 아파.”

재준이 속삭였다. 한참 전부터 가슴이 아팠던 나는 침묵으로 동조하며 녀석의 허리를 콱 끌어당겼다.

“올해도 잘 부탁해, 현아.”

“나도 잘 부탁해.”

“스물일곱 번째 생일 많이 축하해. 지금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언제나 나보다 말이 많은 녀석은 오늘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었다. 나는 크고 따뜻한 손을 끌어와


꼭 잡았다.

녀석의 눈에 아련한 빛이 서렸다.

“저번에 너랑 같이 살게 됐다고 하니까 엄마가 말해준 건데…….”

“무슨 말씀 하셨어?”

“나, 예정일보다 열흘쯤 일찍 나왔대.”

“…….”

낮게 웃은 재준이 내 머리칼에 입술을 눌렀다.

“너 만나려고 서둘렀나 봐.”

돌연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나는 가슴 속에서 울컥 치고 올라온 아릿한 뭔가를 애써 삼키며 녀석의 손을 더 꽉


맞잡았다.
얘가 며칠 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어쩌면 나는 평생 얘를 모른 채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제
마재준이 없는 세계에 혼자 있을 내 모습 따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녀석은 나를 이루는
가장 큰 조각이었다.

뺨에 옅은 키스를 남긴 재준이 장난스레 속삭였다.

“네 생일날 말해주고 싶어서 들은 지 좀 됐는데도 여태 참았어.”

“…….”

볼썽사납게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두어 번 눈을 깜빡여 눈물을 참고,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어 녀석과 눈을 맞댔다.

재준이 엄지손가락으로 내 뺨을 쓸며 덧붙였다.

“틀림없어. 너도 좀 더 일찍 나올 수 있었는데, 새해 첫날까지 나 기다렸던 걸 거야.”

머리로는 녀석의 말이 말도 안 된다는 걸 알았다. 나는 어쩌다 보니 새해 첫날 새벽에, 녀석도 어쩌다 보니


한 해 마지막 날 밤에 태어났을 것이다. 녀석은 그저 우연에 불과한 일에 자기 멋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가슴이 아렸다.

나는 부러 농담조로 중얼거렸다.

“나 태어났을 때 넌 생기지도 않았을 텐데.”

“우리 자기는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선견지명이 있었나 보지.”

“…….”

“넌 내가 오는 거 알았을 거야, 분명.”

나도 모르는 걸 자기 멋대로 단정해 말한 녀석은 아련하게 웃으며 내 눈가를 쓰다듬었다.

“나 기다려 줬던 거지? 그렇지, 현아?”

나는 말없이 녀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녀석의 말이 정말이든 아니든 우리는 숱한 우연을 뛰어넘어 무사히 만났고, 그 후로 떨어져 본 적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으므로 이제는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그래도 녀석에게 이 말은 해주고 싶었다.

“나 만나러 와줘서 고마워.”

내가 너를 기다렸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아마, 같은 해에 태어나지 못했더라도 어디선가 너를 만났다면,


나는 분명 너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을 거야.

나는 입 대신 눈으로 남은 말을 녀석에게 전하고, 또 물었다.

너도, 그랬을까?

친구로 만나지 못했어도, 이렇게 오랫동안 같이 자라지 못했어도 너는 나를 사랑해 줬을까?

“……당연하지. 우리는 분명 그랬을 거야.”

말 없는 물음에 조용히 대답한 재준이 입술을 포갰다.

그렇게 서른세 번째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우리는 조용히 종소리를 들었다.

타종이 끝난 직후 재준이 텔레비전을 껐다. 나는 선물이 든 쇼핑백을 녀석에게 안겨주었다. 곧 녀석의 선물도
내 손으로 넘어왔다.

녀석의 선물은 꽤 묵직하고 두툼한 꾸러미 하나와 작은 상자 하나였다.

“작은 것부터 풀어봐.”

나는 그 말대로 했다. 상자 속에 든 것은 명함 지갑이었다.

재준이 씩 웃었다.

“이제 필요할 거 같아서.”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었다. 늘 나보다 조금 더 멀리 내다보고 챙겨주는 녀석에게 나는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마워. 아껴서 잘 쓸게.”

“맘 같아선 내가 네 명함도 예쁘게 만들어서 주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건 좀 그렇지? 나중에 나 회사 차리고


너 우리 회사 오면, 그때 완전 멋지게 만들어줄게.”

아직 차리지도 않은 회사에 나를 스카웃하겠다는 말을 하는 녀석의 얼굴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날은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 얘한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되어야겠지.

나는 지갑을 손에 들고 웃었다.

“응. 기대하고 있을게.”

재준이 내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안 열어봐?”

나는 그제야 지갑을 열어 안을 살폈다. 빳빳한 종이 한 장이 눈에 띄었다. 그것을 끄집어내자마자 나는 웃고


말았다.

평소 쪽지를 써줄 때보다 훨씬 공들여 쓴 글씨였다. 그럴듯하게 집 주소와 내 전화번호, 그리고 뜬금없이 자기


전화번호까지 적어 넣은 수제 명함에는 내 이름과 직함도 쓰여 있었다.

-마재준 예비 ♥남편♥ ♥♥♥정시현♥♥♥

무려 여덟 개나 되는 하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가슴이 아렸다. 나는 찡해진 코끝을 누르고 애써


가볍게 중얼거렸다.

“하트 빠뜨리면 큰일 나?”

재준이 의기양양하게 대꾸했다.

“당연하지. 내 사랑의 수억조분의 일이라도 표현을 해야 할 거 아냐. 우리 자기가 내 사랑을 먹고 사는 거


뻔히 아는데.”

수억조라니. 자주 쓰는 쌀집 계산기에도 찍히지 않을 숫자를 가늠해보던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녀석을


끌어안았다.
얌전히 안긴 채 짓궂게 웃은 재준이 내 왼손 약지를 매만졌다. 아까 씻자마자 득달같이 녀석이 반지를
끼워놓은 손가락이었다.

“자기야, 얼른 결혼반지 사 와서 예비 빼줘.”

이렇게 잘생기고, 예쁘고, 다정하고, 야무진 애한테 청혼하는 데 필요한 게 달랑 반지 하나라니. 나는


세상에서 제일 운이 좋은 놈이었다.

나는 녀석의 손에도 끼워진 반지를 매만지며 작게 대답했다.

“응. 조금만 기다려 줘.”

조금 아련한 얼굴로 웃던 재준이 내 선물이 든 쇼핑백을 열었다.

“그럼 이젠 내가 선물 풀어볼 차례네.”

나도 두툼한 꾸러미를 들었다.

“나도 나머지 풀어봐야겠다.”

재준이 그것을 채가 탁자에 놓았다.

“아, 그건 좀 이따 봐.”

“응? 뭔데?”

녀석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젓고는 묵직한 선물 꾸러미를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치워 버렸다.

이럴 거면 뭐 하러 같이 준 거지.

스멀스멀 피어오른 불길한 예감에 나는 녀석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귀여운 척 눈을 두어


번 깜빡인 재준이 내 선물이 든 쇼핑백을 열었다.

쇼핑백 안을 보자마자 녀석의 눈이 커졌다.

“응? 상자가 세 개나 있어? 뭘 이렇게 많이 샀어?”

그 장난스럽고 귀여운 얼굴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심혈을 기울여 골랐어. 맘에 들면 좋겠다.”


“우리 자기가 주는 거라면 씹다 버린 껌이라도 좋지, 난.”

“…….”

호들갑도 정성이었다. 그리고 호들갑이 특기인 녀석은 상자 하나를 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하하하. 이게 뭐야.”

웃는 걸 보니 맘에 드는 것 같았다.

아무렴 그래야지. 저것들을 구하느라 매장 몇 군데를 돌았는데.

낄낄 웃으며 두 번째, 세 번째 상자까지 다 뜯은 재준이 상자 속 내용물을 꺼내 하나하나 탁자 위에 펼치기


시작했다.

“미치겠다. 코알라, 사자, 호랑이, 팬더, 고양이…… 뭐야, 이건. 개야, 곰이야?”

“나도 몰라. 귀여우니까 개든 곰이든 뭐 어때.”

“세상에, 양도 있어.”

“겨울이니까 양 보면 따뜻해질 거 같아서.”

재준이 흰 털이 북슬북슬한 양 떼가 뛰놀고 있는 팬티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깨까지 떨어가며 웃는 걸 보니,


맨날 남의 속옷을 보고 놀리던 녀석은 자기도 같은 처지가 된 게 몹시 기쁜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반응이
격렬한 게 아주 뿌듯했다.

나는 씩 웃으며 덧붙였다.

“일곱 개니까 매일 돌아가면서 입어. 읏!”

갑작스레 어깨를 붙들려 끌려간 나는 눈도 감지 못하고 녀석의 키스를 받았다. 뺨과 이마, 코와 입술, 아무튼
닿는 곳마다 마구잡이로 격하게 입술을 찍어대며 웃던 재준이 나를 꼭 끌어안고 짓궂게 속삭였다.

“이거 입고 네 생각 나서 시도 때도 없이 서면 어떡해?”

이렇게 귀엽고 깜찍한 동물 팬티를 보고도 저딴 말이 나오다니. 게다가 이 새끼는 내가 안 사준 속옷을


입고서도 이미 시도 때도 없이 세우고 있었다.

어이없는 말에 나는 코웃음을 쳤다.


“너 지금은 안 그런 것처럼 말한다.”

녀석의 눈이 가늘게 접혔다.

“우리 자기, 이제 야한 말도 잘하게 됐네. 어떡하냐. 나 또 설 거 같아.”

개소리를 지껄인 재준이 내 뺨을 덥석 물었다.

이 새끼는 늘 자기 좋을 대로 내 말을 곡해하기 일쑤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실을 적시했을 뿐인 단순한


말이 어째서 야한 말이 되는 걸까. 게다가 그 말에 대뜸 발정이 나는 건 또 뭐람.

얘 머릿속 언어논리 시스템이 대체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불가해한 메커니즘을 두고


고민하는 사이 녀석은 나를 끌어 올려 소파에 눕혔다.

나는 그새 바지 속으로 파고든 녀석의 손을 콱 쥐었다.

“나 아직 네 선물 덜 풀어봤어.”

“이따 보라고 했잖아.”

이걸로는 얘를 막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심상한 대꾸가 떨어지자마자 기어이 속옷 안으로 손이 들어왔다.


나는 얼른 다른 핑계를 댔다.

“소파 더러워지는 거 싫어.”

“우리 자기 자꾸 사소한 데 신경 쓰네. 안 그래도 소파 클리닝할 때 됐어. 걱정하지 마.”

“케이크는 안 먹어?”

“열두 시 넘었잖아. 밤에 단 거 먹으면 몸에 안 좋아.”

“차는?”

“이따 다시 끓여줄게.”

“나 내일 새아버지 댁에 가야 해.”

“딱 두 번만 할게. 당연히 데려다줄 거고.”

아까 샤워하면서 기어이 한 번 더 했잖아. 벌써 두 번이나 해놓고 또 두 번이라니.


불현듯 의문이 생겼다. 그러고 보니 한 번이고 두 번이고, 횟수를 세는 기준은 대체 뭐지. 쟤가 끝날
때까지가 한 번인 건가. 같이하는 건데, 그건 좀 이상하지 않나? 그간의 경험을 미루어 보면 난 쟤가 한 번
끝내는 동안 한 번만 했던 적이 거의 없는데, 난 왜 여태 그 기준을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거지?

나는 막 생겨난 의문을 녀석에게 던졌다.

“……그 두 번의 기준이 뭐야.”

재준이 배시시 웃었다.

“알면서. 모르겠으면 자세히 설명해 줄까?”

나는 질색해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요사스럽게 웃는 꼴을 보니 그 두 번은 역시 자기 기준인 게 분명했다.

“……됐어.”

세상엔 왜 양심을 파는 곳이 없을까. 있다면 잔뜩 사다 매일 이 새끼한테 먹였을 텐데.

나는 녀석을 흘겨보며 물었다.

“근데 지금 열두 시 넘었는데 지금부터 두 번 하면 난 언제 자?”

내 말이 일리 있다는 듯 녀석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우리 자기의 건강한 수면 패턴을 고려해서 빨리할게. 휴식 시간 포함해서 두 시간.”

“마재, 사람은 열 시부터 두 시 사이에 자야 건강해진댔어. 근데 지금 벌써 열두 시야.”

“우리 늘 열두 시 넘어서 잤잖아. 하루쯤 두 시 넘겨서 잔다고 큰일 안 나. 게다가 오늘은 특별한 날인데.”

“…….”

7 월 말부터 10 월까지, 약 석 달 가까이는 정말 붙어 있기만 하면 시도 때도 없이 덮쳐드는 이 새끼한테


시달리느라 반쯤 죽을 뻔했었다. 작작 좀 하라고 할 때마다 녀석은 십 년 넘게 참은 게 한 번에 터지는
바람에 자기도 자제가 잘 안 된다며 우는소리를 했다. 그 말을 하는 녀석의 얼굴은 정말 곤란해 보였다.

그것도 다 내 업보였다. 그래서 나는 결국 녀석을 막지 못했다. 그 결과 나는 마지막 학기 거의 모든 수업을


빠질 수 있을 만큼은 다 빠져야 했다. 살면서 그렇게 결석을 많이 해보긴 지난 학기가 처음이었다.

석 달쯤 그렇게 지내고 나니 어지간한 이 새끼도 좀 진정이 된 건지, 아니면 내가 이러다 진짜 말라 죽을까


걱정이 됐는지 그 후로는 그나마 자제하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도통 물러설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괘씸해서, 나는 나를 내 허벅지를 타고 앉은 녀석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재준이 그 손을 끌어갔다. 녀석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입술을 열고는 천천히 검지를 핥아 올렸다. 말캉한
살덩이가 손가락을 훑는 동안 나는 눈도 감지 못하고 그 아찔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나는 좀 억울해졌다. 매번 부끄러운 짓을 하는 건 쟨데, 왜 항상 부끄러워하는 건 나지?

가만히 있어도 눈에 나쁜 새끼였다. 그리고 그 새끼는 내가 자기 얼굴에 몹시 약하다는 걸 뻔히 알고는 부러


이런 짓을 해서 내 피를 말리고 있었다.

재준이 손끝을 물었다. 나는 얼른 손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야.”

가까스로 한 음절을 토해놓자마자 재준이 입술을 내밀어 비죽였다. 커다란 새끼가 삐친 척하는 꼴은 너무
같잖고, 귀여웠다.

“너 내일 오후에 어머니 댁에 가면 거기서 자고 바로 출근할 거잖아. 나 내일 밤에 혼자 있어야 하는데…….”

“…….”

“내일 1 월 1 일인데…… 새해 첫날인데…….”

“…….”

“외로워. 서러워.”

그 말이 떨어진 찰나 나는 움찔했다. 농담으로 치부하기엔 조금 마음에 걸리는 말이었다.

얘네 어머니께선 이미 우리 사이를 아시지만, 아직 우리 부모님께는 말씀드리지 못했으므로 나는 얘를 혼자


남겨두고 내일 부모님을 뵈러 가야 했다. 나중에 같이 말씀드리러 가자고 약속하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미안했다.

녀석의 팔을 끌어당겼다. 재준이 얌전히 몸을 포갰다. 내 몸 위에 얹힌 녀석은 무거웠다. 나는 녀석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내년엔 같이 가자.”

작게 한숨을 내쉰 재준이 투덜거렸다.


“뭐야. 너 갑자기 왜 미안해하고 그래. 그러라고 한 말 아닌 거 알면서.”

부러 샐쭉하게 투덜대는 까닭을 모르지 않는 나는 애써 장난스레 대꾸했다.

“내가 미안해하는 게 속상해? 그럼 우리 이제 얌전히 자자.”

이마에 입술이 닿았다. 다시 마주한 녀석의 눈이 짓궂게 빛났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속상하니까 자기가 달래줘야지.”

결국 나는 또 지고 말았다. 얄미운 녀석을 올려다보며 피식 웃고 만 나는 조금이나마 협상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알았어. 그럼 한 번. 한 시간.”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깜빡이는, 귀엽고 가증스러운 표정을 가장한 개새끼가 우는소리를 했다.

“오늘 우리 자기 생일이잖아. 내일 쉬는 날이고. 한 번은 너무하지 않아?”

“아까 생일 핑계로 막 해놓고 지금 또 하려고 드는 네가 너무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

“그땐 내 생일이었고, 지금은 우리 자기 생일이잖아. 자기한테 줄 진짜 선물은 난데, 안 받아줄 거야?”

뻔뻔스러운 그 말에 저녁에 있었던 참사를 다시 떠올리고 만 나는 인상을 팍 썼다. ……망할 선물 증정식. 그런


짓을 또 당할 수는 없었다.

“좋아, 두 번. 근데 아까 같은 짓 안 하겠다고 약속해.”

또 사람 정신을 산란하게 하는 말로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던 녀석은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알았어. 안 할게.”

재준이 배시시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녀석의 손에 홀랑 바지가 끌려 내려갔다.

……네가 너무 예뻐서 나한테 큰일이다, 진짜.

짧게 한숨을 내쉰 나는 뽀얀 이마에 입술을 댔다.

“케이크 냉장고에 넣고 와. 크림 녹으면 어떡해.”


재준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곧 녀석의 눈이 불길하게 반짝였다.

“자기야, 생각해 보니까 생일 케이크, 지금 먹어도 괜찮을 거 같아.”

“……응?”

그 후로 나는 소파 위를 뒹굴며 끙끙 앓았다.

과연 녀석은 저녁때와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저녁때와는 또 다른, 차마 입에 담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


참신한 변태짓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나는 견디다 못해 이딴 짓은 하지 않기로 약속하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그러나 수치를 모르는 변태 새끼는


아까랑 같은 짓이 아니니 약속을 어긴 건 아니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며 태연히 웃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또라이 같은 새끼는 ‘자기야, 앞으로 뭐 하지 말라고 할 땐 구체적인 행위의 내용을
상세하게 지정하도록 해’라는 말까지 더해 나를 깊이 빡치게 했다.

경건히 맞아야 할 새해 첫 새벽, 몸도 마음도 탈탈 털린 나는 반쯤 넋을 잃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또라이 같은 새끼가 건네준 또 다른 선물 뭉치를 보자마자 나는 거의 기절할 지경이
되었다.

스물일곱 번째 생일에 받은 두 번째 선물은 카마수트라와 소녀경, 그리고 48 수 체위집이었다.

나는 책 세 권을 앞에 두고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를 꼭 끌어안은 예쁜 개새끼는 쉬운


것부터 하나씩 해보자며 수줍게 웃었다.

그 웃음에 울컥한 나는 이를 악물고 녀석의 태평양 같은 등짝을 짝 소리가 나도록 후려갈겼다.

녀석은 곧장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아프다며 우는 시늉을 했다.

가증스럽게 귀여운 개새끼의 동그란 머리통을 노려보던 나는 결국 또 한숨을 쉬고는 기껏 때린 등짝을 쓰다듬어
주고 말았다.

그제야 재준이 감췄던 얼굴을 들었다. 나는 내 눈치를 살피며 배시시 웃는 또라이 같은 새끼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괘씸한 건 괘씸한 거고, 예쁜 건 예쁜 거였다.

나는 흰 이마에 콱 입술을 찍으며 이제 입버릇이 되고 만 말을 입에 올렸다.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못 살겠다…….”

사르르 눈웃음을 친 녀석이 속살거렸다.

“생일 축하해, 현아.”

“…….”

오늘처럼 당황스럽고, 어이없고, 기쁘고, 행복한 생일날은 평생 처음이었다.

그리고 아마 내년에도 우리는 오늘과는 조금 다른, 그러나 비슷하게, 아니, 어쩌면 더 행복한 생일날을 맞게
되겠지.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괘씸한 짓을 잔뜩 해댄 징한 새끼의 생일 축하에 어이없게도 금세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는 말없이 녀석의


등을 콱 끌어안았다.

그렇게 또 한 해 치의 시간을 매듭지어 지난 시간 위에 쌓아 올린 우리는, 함께 스물일곱 살이 되었다.

[싱크 인(Sink in) 외전 @중독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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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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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VC3 / 뉴토끼 / 공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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