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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x.doi.org/10.15235/jir.2015.6.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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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현
(한양대학교)
Sang-Hyun Lee
(Hanyang University)

차례
Ⅰ. 서론
Ⅱ. ASPAC과 초기ASEAN의 결성과정 비교
Ⅲ. ASPAC과 초기ASEAN에 대한 제도적 비교
Ⅳ. ASPAC과 초기ASEAN의 미중 데탕트에 대한 대응비교
Ⅴ. 결론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plain the reason why the organizations, ASEAN
and ASPAC were in light and shade in 1970’s: the former had been successful while
the latter had not been, in fact, it turned out failure in spite of having many
similarities when they were found in the mid 60's and in the early organizations
by comparing the early ASEAN and ASPAC.
Most studies on these East-Asian organizations generally say that the dramatic
change of international situation based on US-china relations leaded to the result
of the ASEAN’s success and the ASPAC’s failure. However, this study will review
the fact which ASPAC have broken up since the competitive interrelationship with
ASEAN and rapid change of the regional order in East Asia influenced the dissolution
of ASPAC

Key words: Association of South East Asian Nations(ASEAN), Asian and Pacific
Council(ASPAC), East Asian Regionalism, Regional Cooperation,

* 이 논문은 2012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2S1A5B5A07035643). 논문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도록 유익한 코멘트를 해 주신 익명의 세 분 심사
위원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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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연구 제18집 1호, 2015

본 연구의 목적은 아시아태평양이사회(ASPAC: Asian and Pacific Council)와 초기의 동남아시


아국가연합(ASEAN: Association of South East Asian Nations)1)을 제도적 측면에서 비교분석하
고 이들 사이의 역사적 상호관계를 살펴봄으로써 60년대 중반에 생성된 유사한 성격의 두 지
역협의체가 70년대 들어 명암을 달리한 과정을 밝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ASPAC과 ASEAN은 1960년대 중반 아시아내부의 지역이니셔티브에 의해 형성
된 지역협력체였다. 창설당시 참가국을 보면 ASPAC은 결성 주도국인 한국을 비롯하여 일본,
대만,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월남, 호주, 뉴질랜드, 등 아태지역 9개국이 참가하는 광역 레
짐인데 반해 ASEAN은 주도국인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싱가포르 등 동남아
지역 국가만을 원가맹국으로 한 소지역 레짐이었다.

<표 1> 초기ASEAN과 ASPAC 회원국 비교

출처: 필자 작성

이처럼 조직의 규모나 참가국의 면면에서 차이를 보이긴 했지만, 창설당시 공산진영 국가들
로부터 공산중국을 봉쇄하고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후방지원하기 위한 반공동맹으로 간주되었
다는 점, 그리고 경제, 사회, 문화면에서의 지역협력이라고 하는 조직의 목적이나 느슨한 연합
이라고 하는 조직의 성격면에서 양 협의체는 상당한 유사성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유사성으로
인해 일부 회원국들로부터는 두 조직의 통합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70년대에 들어와 미
중관계개선이라는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에 직면하여 ASPAC은 자연소멸의 길을 걷게 된 반
면 ASEAN은 존속하여 21세기 현재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지역기구로서 지역통합
의 과정에서 중핵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2) 그렇다면 양 협의체가 유사한 성격을 가진 회의체

1) 초기 ASEAN의 정의와 관련해서는 야마카게(1991)의 정의를 따르기로 한다. 즉 초기ASEAN이란 1967년 결


성에서부터 1976년 최초의 ASEAN 정상회의가 개최되기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2) 냉전종결은 ASEAN이 발전하는 데 있어 큰 계기가 되었다. ASEAN은 심화와 확대의 과정을 통해 AS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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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음에도 불구하고 ASEAN이 동아시아 지역협력의 중심체로 발전한 데 비해 ASPAC은 성장하


지 못하고 단명에 그친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ASPAC의 소멸원인과 관련해서는 지역질서의 변화라고 하는 외부요인에서 찾는 것
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3) 즉 1972년 2월 닉슨(Richard M. Nixon) 대통령의 북경방문으로 시작
된 미중화해가 전후 아시아질서를 규정해 온 미중냉전구도를 타파하고 데탕트의 도래를 알렸
음은 물론 당시 아시아 여러 지역기구의 존립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1966년 일본주
도하에 설립된 동남아시아개발각료회의가 1975년 와해된 것도, 1954년 1차 베트남전쟁이후 미
국주도하에 결성된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 The Sou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가
1977년 해체의 운명을 맞이한 것도 미중냉전구도라는 지역질서의 해체가 근본적인 원인이며,
ASPAC 또한 반공의 전초기지였던 한국의 주도하에 결성된 반공동맹이었던 만큼 미중화해라고
하는 지역질서의 큰 흐름을 비켜갈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선행연
구의 업적을 수용하되 초기 ASEAN과 ASPAC의 상관관계 속에서 ASEAN의 존속과 ASPAC 소멸
의 단서를 찾아 보고자 한다.
초기 ASEAN과 ASPAC을 비교분석하는 이유로서는 이하의 두 가지 점을 들 수 있다. 우선
ASPAC에 대한 이해를 보다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ASEAN은 냉전해체를
전후하여 심화와 확대의 과정을 거치면서 지역공동체로서의 발전을 거듭해 왔고, 아태지역의
지역협력에 있어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도맡아 오고 있다. 이렇듯 그 활동이 널리 알려진
ASEAN과의 비교를 통해서, 한국주도로 결성된 ASPAC이 비록 단명으로 끝나긴 했지만,
ASEAN과 같은 지역협력기구로서 발전해 갈 수 있는 상당한 잠재력을 가진 회의체였다는 점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이다. ASEAN 또한 ASPAC과의 비교를 통해 그 초기적 특성이 보다 더 뚜
렷이 부각될 것으로 기대된다.
둘째로 초기ASEAN과 ASPAC의 상호관계를 분석함으로써 ASPAC의 해체에 대한 또 다른 시
각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미중화해 이후의 지역질서의 대변화과정에서
ASPAC은 반공동맹이라고 하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소멸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지금까지
연구들의 주된 인식이었다. 하지만 본 연구에서는 냉전체제에서 데탕트체제로의 변화와 같은
체제 변수에 주목하기 보다는 지역레짐의 상호관계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들

헌장을 제정하고 ASEAN+10 체제를 수립했다. 뿐만 아니라 APEC(1989), ARF(1994), ASEAN+3(1997),


EAS(2005) 등 다수의 지역협력체가 등장하여 중층적인 협력구조를 보이는 가운데 ASEAN은 이러한 중층
적인 질서에서 중핵의 역할을 담당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본 연구는 초기ASEAN에 초점을 맞춘 연구이
기 때문에 냉전이후의 ASEAN의 발전상은 본 연구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음을 언급해 둔다.
3) 초기ASEAN과 ASPAC에 관한 주요 선행연구로서는 변창구, 『ASEAN과 동남아 국제정치』(서울: 대왕사,
1999); 안청시, 『동남아와 ASEAN』(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1981); 이승헌, 『아세아태평양협력체제론』
(서울:신신문화사, 1975); 이승헌, “아세아태평양 협력체제의 특성.” 『국제정치논총』. 제15집, (한국국
제정치학회, 1976); Norman D. Palmer, The New Regionalism in Asia and the Pacific(Lexington: Lexington
Books, 1991); W.W. Rostow, The U.S. and Regional Organization of Asia and the Pacific: 1965-1985(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1986); Norman D. Palmer, John Redwood, Building ASEAN: 20 years of
Southeast Asian cooperation. (New York: Praeger, 1987); Michael Leifer, ASEAN and the Security of
Southeast Asia(London: Routledge, 1989); 山影進, 『ASEAN-シンボルからシステムへ』(東京大学出版会,
1991); 黒柳米司, 『ASEAN35年の軌跡-󰡐ASEAN Way'の効用と限界』(東京:有信堂,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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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기구가 결성초기에는 기능상의 중복에도 불구하고 긴밀히 협력해야 할 상대라는 것이 강


조되었지만, 실제로는 ASEAN이 공산권 국가들로부터 반공동맹이라 비난받는 ASPAC에 흡수
통합되는 것을 우려하여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하였고, 이러한 양자간의 역학관계가 두 지역기
구의 운명을 가른 이유 중의 하나였음을 제시하고자 한다.
본 연구의 구체적인 비교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양 협력체의 결성과정에 대한 검토를 통
해 주도국의 의도, 역외강대국의 영향, 공산권 국가들의 반응, 상호간의 영향 등의 측면을 중심
으로 비교분석을 실시할 것이다. 둘째로, 양 협력체가 채택한 기본문서들에 주목하여 이들 문
서에서 규정한 양 조직의 목적과 주요기관을 제도적 측면에서 비교분석을 시도할 것이다. 셋째
로 미중 데탕트에 직면한 양 협력체의 대응과 전략을 비교분석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초기ASEAN과 ASPAC에 대한 비교연구이기 때문에 ASPAC이 결성되고 와해되는
시기, 그리고 이 시기의 ASEAN의 동향 등이 주된 연구범위가 될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ASPAC과 ASEAN의 결성 움직임이 본격화되는 1960년대 중반부터 미중화해로 인해 동아시아
의 냉전구도가 변화되는 1970년대 중반까지를 분석을 위한 시기적 범위로 한다.

1. ASPAC 설립과정
ASPAC 결성은 1964년 9월 한국정부가 마련한 아시아 외상회의구상에서 비롯되었다.4) 한국
전쟁이 종결된 이후 10여 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아시아 최빈국 중 하나인 한국이 아시
아의 다자간 지역협력회의를 개최하기 위해서는 주변국의 협력이 절실했다. 한국이 가장 먼저
회의개최를 타진하고 지지를 요청한 것은 다름 아닌 동맹국 미국이었다. 미국의 첫 반응은 회
의적이었다. 미국무부는 회의 목적의 불명확성, 한국정부의 국제회의 개최 능력에 대한 우려,
일부국가의 회의참가 거부가능성 등을 내세워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5)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
아 영미양국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음에도 상호 연대의식이 희박한 지역국가들의 협력
강화에 도움이 되며, 중국의 핵실험 성공으로 인한 대만과 한국의 고립감을 완화시키는 데도
유용하다는 인식에서 후방지원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6) 하지만 미국은 동회의가 미국의
사주에 의한 것이며, 미국의 대아시아정책에 협력하기 위한 회의라는 인상을 피하기 위해 어디
까지나 측면지원에 머물렀다.
미국이 역외 강대국의 입장에서 한국주도의 다자간 지역협력회의의 결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면 역내 참가국 중에서 큰 역할을 한 나라로는 일본과 태국, 호주를 들 수 있다. 당시 호

4) 1961년 필리핀의 제창으로 아시아 지유진영 국가들 간의 모임인 ‘아시아 4개국 외상회의’가 캐손
(Quezon)시에서 개최된 이후 한국 외무부는 1962년부터 후속회의를 개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대만 등과
물밑 접촉을 해왔다. 그러던 중 1964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발탁된 30대 신임 외무부장관인 이동원이
‘아시아외상회의’ 구상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5) Telegram to Seoul(196). 9/1/1964, POL 7 KOR S, SNF. Box 2401, RG59, National Archives at College Park
[이하 NA로 표기]
6) Telegram to Seoul(434). 11/18/1964, POL 7 KOR S, SNF. Box 2401, RG59, 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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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뉴질랜드, 말레이시아와 같은 회의참가 예정국들은 일본참가를 자국참가의 전제조건으로


내걸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참가 문제는 ASPAC 결성유무를 가름하는 중대한 문제였다. 한국정
부가 외상회의 개최안을 제시했을 때 일본의 첫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일본은 자유진영의 일원
이긴 하지만 온건한 자유진영 국가인 반면, 피초청국의 대부분이 군사적 집단동맹인 SEATO의
일원이거나 한국, 대만, 남베트남과 같은 강성 반공국가들이라 이들과 보조를 맞출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7) 하지만 일본은 1965년 한국과의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한국과의 우호관
계 증진’, ‘아시아 자유진영국가들의 정치적 경제적 결속’을 위해 ASPAC참가를 결정하였
다.8)
태국은 두 차례의 예비회담을 자국에서 개최하여 한국이 주도하는 ASPAC결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태국은 동남아 국가들 중에서 유럽열강이나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고 정치적 독립을
유지해 온 유일한 나라이다. 당시 태국은 미국과 상호방위원조협정(1950)을 체결하고 반공군사
동맹인 SEATO(1954)에도 가맹하여 사무국을 자국에 유치하는 등 비동맹 중립성향이 강한 동
남아 국가들 중에서도 비교적 반공 성향이 강한 국가였다. 뿐만 아니라 유엔 산하 기구인 유엔
극동경제위원회(ECAFE)의 자국 유치를 통해서 다자외교의 중심적인 역할도 담당하고 있었
다.9) 이러한 국가적 전통과 배경으로 인해 태국은 한국정부의 다자회의 개최구상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두 차례의 예비회담을 자국에서 개최하여 한국이 주도하는 ASPAC결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호주 또한 일본, 뉴질랜드, 말레이시아의 참가를 종용하고 두 차례에 걸쳐 개최된 예비회담
에서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는 등 ASPAC결성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호주가 이처럼 아시
아의 다자지역협의체 결성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배경에는 영국과의 전통적 유대관계의 쇠
퇴라는 요인이 있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호주는 영국의 해외식민지에서 출발해 국가발전
을 이룩하였으며, 따라서 자국의 안보와 경제를 상당부분 영국에 의존해 왔다. 하지만 영국이
60년대에 들어와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을 신청하고 수에즈 동부지역의 영국군 철수를 고
려하게 되자, 영국이 주는 ‘방기의 위협’을 인접지역인 아시아 국가들과의 연대를 통해 해소
하려 했던 것이다.10)
당초 한국정부가 의도했던 ‘아시아외상회의’구상은 ‘아시아태평양지역 각료회의
(Ministerial Meeting for Asian and Pacific Cooperation)’라는 명칭으로 1966년 6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에 걸쳐 서울에서 개최되었다.11) 한국, 태국, 일본, 대만, 필리핀, 남베트남, 말레

7) 주일대사가 외무부장관에게 보낸 전문(JAW-11317호). 1964년 11월 14일. 『아세아태평양이사회(ASPAC)창


설계획1963~65』. MF. C-0010(22). 외교부 외교사료관.
8) 北東アジア課. “東南アジア外相会議に対するわが国の態度(試案)” 1966年1月17日(外務省開示文書:
2006ー01247)
9) 中野亜里, 『東南アジア現代政治史』 (東京:福村出版, 2010), p.113.
10) 졸고, “1960년대의 동아시아 지역주의와 호주외교: ASPAC을 통한 동아시아관여”, 『국제정치논총』 제
52집 1호(한국국제정치학회, 2012), p.114.
11) 66년 4월 18일부터 20일까지 3일간에 걸쳐 방콕에서 개최된 제2차 예비회담에서는 본회의의 명칭을 ‘아
시아태평양외상회의’로 하기로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지만, 명칭의 정치적 영향력을 우려한 말레이시아의
반대로 인해 ‘아시아태평양 각료회의’로 변경되었다. 태국대사가 외무부장관에게 보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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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아, 호주, 뉴질랜드 등 9개국의 각료급 인사가 대표로 참가하였으며, 라오스가 옵서버로 출
석했다. 회의에서 논의의 초점이 된 것은 상설기구의 설치 여부 및 회의의 정례화 문제였다.
상설기구의 설치에 대해서는 한국, 대만, 필리핀, 남베트남이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반해,
일본, 말레이시아, 뉴질랜드 등의 국가들은 ECAFE나 콜롬보플랜(Colombo Plan)과 같은 기존
국제기구의 활용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상설기구의 설치에는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결국
에는 태국, 호주 등의 국가가 우선 각료회의를 계속해서 개최하기로 하자는 타협안을 제시하여
합의를 보았다. 구체적으로는 차기회의의 방콕개최가 결정되었고, 차기개최국인 태국이 실질
적인 사무국 업무를 담당하고 방콕주재 관계국 대사로 구성되는 상임위원회(Standing
Committee)가 설치되게 되었다.12) 이렇듯 상임위원회는 상설기구화를 강하게 바라는 국가 그
룹과 그리고 상설기구화는 시기상조이며, 우선 회의의 계속이라는 선에서 현상유지를 바라는
국가들 사이에서 타협의 산물로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상설기구의 설치문제는 사
실상 유보되었지만, 회의의 계속적인 개최에 대해서는 참가국들 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한편
회의의 정례화와 상임위원회 설치가 결정되자 ‘아시아태평양지역 각료회의’라는 명칭이 실
체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명칭을 둘러싼 논의가 다시 이루어졌다. 우선
필리핀 대표가 ‘아시아태평양협력이사회(Asian and Pacific Cooperation Council)’로 할 것을
제안했고, Association, Community, Conference 등의 제안이 추가로 이어졌지만, 최종적으로는
‘아시아태평양이사회(Asian and Pacific Council)’로 하자는 뉴질랜드의 제안이 채택되었다.13)

2. 초기ASEAN 설립과정

동남아시아의 국가들이 ASEAN을 결성하는데 있어 단초가 된 것은 말레이시아 분쟁이었


다.14) 말라야 연방이 현재의 말레이시아 연방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보르네오섬 북부지역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필리핀 간에 발생한 이 분쟁은 1961년 5월 말라
야 연방의 라만(Tunku Abdul Rahman) 수상이 말레이시아 연방 구상을 발표하면서 비롯되었다.
영국의 구식민지인 말라야 연방, 싱가포르, 보르네오섬 북부지역의 사바(Sabah), 사라왁
(Sarawak)으로 구성되는 라만 수상의 말레이시아 연방 구상에 대해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THW-0454). 1966년 4월21일. 『ASPAC창설 예비회담. 제2차. Bangkok. 1966.4.18.~20』. MF. C-0014(1783).
외교부 외교사료관.
12) 일본정부는 standing committee를 ‘대사급연락위원회’로 해석하여 어디까지나 상설기구 설치를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한편 한국의 김영주 외무차관은 “이번회의에서는 헌장이나 규약은 채택되
지 않았지만, 상임위원회를 설치하게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상설기구가 설치된 것이나 같다”고 하여 사
실상 상설기구라는 인식을 보였다. 이러한 인식차이로 인해 일본은 ASPAC이 상설기구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아시아태평양협의회(アジア太平洋協議会)’로 호칭하고, 한국은 사실상의 상설기구임을 강조하기
위해 ‘아시아태평양이사회’로 칭하게 된다. 『朝日新聞』 1966년 6월 17일; 『読売新聞』 1966년 6월
18일.
13) 이동원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보고서 “제6차 본회의 경과보고” 1966년 6월16일 『ASPAC각료
회의. 제1차. 서울. 1966.6.14.-16. 전8권(V.3 보고서)』. MF. C-0015(03). 외교부 외교사료관.
14) 말레이시아 분쟁과 관련해서는 John Subritzky, Confronting Sukarno: British, American, Australian and
New Zealand Diplomacy in the Malaysian-Indonesian Confrontation, 1961-5, (London: Macmillan, 2000); 宮
城大蔵, 『戦後アジア秩序の模索と日本ー海のアジアの戦後史1957~1966』 (東京:創文社, 2004)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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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arno) 대통령은 신식민주의 세력인 영국의 음모라고 비난, 사바와 사라왁이 식민지화되기
이전에는 인도네시아의 영토였음을 강조하며 말레이시아에 대한 ‘대결(Confrontation)정책’
을 전개했다. 필리핀의 마카파갈(Diosdado Macapagal) 대통령 또한 사바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제기하면서 사바지역 영유권을 둘러싼 동남아 3국간의 분쟁은 베트남 전쟁과 더불어 동남아지
역의 안정을 저해하는 지역문제로 대두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65년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국내에서 일어난 정치정세의 변화는 분쟁해결에
큰 계기가 되었다. 상원의원 시절부터 필리핀의 사바영유에 반대하던 마르코스(Perdinand E.
Marcos)는 11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자 말레이시아와의 관계개선에 착수했다. 인
도네시아에서는 9월 30일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이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전략사령관이던 수
하르토(Suharto)가 이끄는 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듬해인 3월 11일 수카르노 대통령은 수하
르토 장군에게 행정권한을 이양하였고, 실권을 장악한 수하르토는 아담 말리크(Adam Malik)를
외상에 발탁하여 인도네시아를 국제적 고립으로부터 탈피시켜 국제사회로 복귀시키는 임무를
맡겼다. 말리크는 이러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수행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인도네시아의 국제적
고립을 초래한 말레이시아 대결정책은 실질적으로 폐기되었다. 1966년 6월 3일과 8월 11일 필
리핀-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양국은 각각 국교정상화에 합의하였다. 이로써 해
양부 동남아시아에는 대결의 시대가 종식되고 화해의 시대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
다.
말레이시아 분쟁 이후 새로운 지역협력기구 설립을 위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66년 3월 태
국, 필리핀, 말레이시아가 참가하는 기존 지역협의체인 동남아시아연합(ASA: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이 그 활동을 재개하면서부터다.15) 말레이시아 분쟁으로 인한 활동정지 이후 만
3년만의 일이었다. 당초 ASA 3국은 말레이시아분쟁 종식 이후의 지역안정을 위해 인도네시아
의 ASA참여를 적극 희망하였다. 그러나 지역 강대국이자 비동맹외교의 맹주임을 자처하는 인
도네시아가 ASA의 반공색을 이유로 난색을 표하자, 인도네시아도 참가할 수 있는 새로운 지역
기구 창설과 ASA의 발전적 해체로 논의가 옮겨가게 되었다.16)
1966년 8월부터 4개국 외상들은 상호 방문을 통해 새로운 지역기구 결성을 둘러싼 논의를
거듭했고, 12월에는 인도네시아와 태국 외무성 주도하에 동남아시아지역협력연합(SEAARC:
South East Asian Association for Regional Cooperation) 설립을 위한 공동선언안을 마련하여 관
계국 정부에 전달했다. 이 공동선언안은 ASA의 목적과 조직을 규정한 방콕선언을 기초로 하여
인도네시아의 비동맹주의를 가미한 것이었는데, 새로운 기구의 목적이나 참가국의 범위를 둘
러싸고 관계국들은 입장 차이를 노정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새로운 지역협력기구 설립을 위한 구체적인 논의는 1967년 8월 5일부터
3일간 태국 방콕 교외의 휴양지인 방사엔(Bangsaen)에서 동남아 5개국의 외상급 인사들이 참
15) ASA의 설립배경 및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안청시(1981), 제4장; Vincent K. Pollard, “ASA and ASEAN,
1961~1967: Southeast Asian Regionalism”, Asian Survey, Vol. 10, No. 3(Autumn 1970); 山影進(1991), 제1
장; 岡部達味編, 『ASEANをめぐる国際関係』 (東京:日本国際問題研究所, 1977) 제1장을 참조할 것.
16) 井原伸浩, “ASEAN設立過程再考: 原加盟国の対インドネシア不信に注目して”, 『国際政治』 第164号
(日本国際政治学会, 2011), pp.11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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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연구 제18집 1호, 2015

가한 가운데 비공식회의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논의를 통해서 당초 SEAARC로 정해질 예정이


었던 신기구의 명칭은 이것이 상어의 영단어인 ‘shark’와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동남아
시아국가연합(ASEAN)으로 변경되었고, 8월 7일에는 동남아를 대표할 새로운 기구 설립에 5개
국 대표들이 합의를 보았다. 이리하여 다음날인 8월 8일 ASEAN설립을 위한 공식회의가 방콕
에서 개최되었고, 이 자리에서 ASEAN 설립선언인 방콕선언(Bangkok Declaration)이 채택되었
다. 이로써 이후 동남아의 지역협력의 역사를 주도할 ASEAN이 탄생하게 된다.

3. 비교
(1) 주도국의 의도
1966년 ASPAC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 한국은 ASPAC을 통해서 아시아 자유진영 국가들간
의 반공적 유대를 강화하려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정부는 처음부터 중립성향의 국가가 동회
의에 참가하는 것에 대해서 소극적이었다.17) 정치적 입장이 상이한 국가들의 참가는 참가국의
단결을 어렵게 하고, 회의진행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편 전통적으로 비동맹 중립성향의 외교정책을 실시해 온 인도네시아는 1967년 ASEAN 결
성을 주도함에 있어 이것이 “ASPAC 2중대”라는 이미지를 주게 될까 우려했다. 즉 가맹 교섭
국 중 필리핀, 태국이 미국의 동맹국이며,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에는 영국군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도네시아는 새롭게 결성되는 ASEAN이 반공연합으로 비쳐질 것을 우려하
여 대외적으로 비동맹중립 성향을 표방했으며,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역내의 비동맹국인 버마,
캄보디아, 라오스의 가입실현에도 적극적이었다. 나아가 인도네시아는 일본, 호주, 뉴질랜드와
같은 역내선진국들의 거듭된 ASPAC 가입설득에도 불구하고 참가반대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2) 역외 강대국의 영향
앞서 봤듯이, ASPAC의 경우 미국의 측면적 지원이 회의개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주도국인 한국은
동북아의 반공의 보루로서 비동맹중립성향의 동남아 국가들에게 경원시되는 존재였으며, 60년대 중
반의 한국의 외교역량 또한 대규모 국제회의를 자국의 힘만으로 개최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반면 ASEAN결성은 역내 국가들의 주도에 의해 이루어 졌으며, 이 지역에 영향력을 가진 미
국과 영국과 같은 역외강대국의 개입은 배제되었다.18) 인도네시아는 동남아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인구, 국토, 자원 등의 측면에서 잠재적 역량을 가진 지역강국이었으며, 이러한 그
들의 저력은 역외 강대국의 지원없이도 역내 지역협력에서 리더 역할을 가능하게 했다.

17) 옵서버국가인 라오스와 전년에 수하르토 군부 우파정권이 들어선 인도네시아의 참가에 대해서는 긍정적
이었지만, 버마와 싱가포르의 참가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입장이었으며, 캄보디아, 파키스탄은 참가를 저지
시킨다는 입장이었다. ‘아주지역주재 대사회의 토의자료: 아세아태평양이사회를 통한 외교활동지침.’
외무부 아주국. 1966.6.21.『ASPAC 등에 관한 아주지역 공관장 회의. 서울, 1966.6.21.』 MF. C-0015(09).
외교부 외교사료관.
18) ASEAN 창설과정에서 있어 미국이 측면지원을 했다는 미국관여설이 일부에서 제기되기는 했지만 아직까
지 직접적 관여를 밝혀 줄 수 있는 미국의 내부문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山影進, “初期ASEAN再考-冷
戦構造下のアジア地域主義とASEAN”, 『国際政治』 第116号(日本国際政治学会, 1997), pp.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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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기 동아시아 지역협의체에 대한 비교연구: ASEAN의 성공과 ASPAC의 실패

(3) 공산권의 반응
ASPAC과 ASEAN 창설에 대한 공산권의 반응은 아주 비판적이고 냉소적이었다. 이들은 새로
운 지역협력기구의 결성을 SEATO의 연장선상에 있는 반공 군사블럭의 형성으로 인식하여 강
경반대의 입장을 천명하고 비난했다.19)
소련은 ASPAC 창설과 관련해서는 참가국의 대다수가 미국의 베트남 침략에 대해 군사원조를
제공하고 있는 국가라는 점, 그리고 미국의 베트남 개입에 가장 충실한 한국이 회의를 주도했다
는 점을 들어 “지역의 평화에 위협을 주는 블록형성 시도”라고 비난하였고, ASEAN 발족은
ASPAC과 같은 시도라는 입장과 함께 경제적 곤란상황에 처해 있는 인도네시아를 이용하여 중
립정책을 포기시키고 침략 블록에 관여시키는 것이 ASEAN의 진짜 의도라는 입장을 보였다.
공산중국은 ASPAC을 중국봉쇄정책의 일환으로 파악하여 미국이 일본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
치군사동맹을 결성하여 아시아에서 침략전쟁을 확대하려 한다고 비난하였고, ASEAN과 관련해
서도 미제국주의의 반중국 포위망 형성의 일환이라는 인식과 함께 인도네시아 군사정권이 미
국의 사주하에 결성한 반중국 반공조직이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이와 같은 공산권국가들의 비난들로 인해 양기구의 회원국들은 반공군사동맹이 아님을 강조
할 필요가 있었고, 정치 군사적인 색채를 완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경제사회문화 분야에서의 협
력을 적극 추진하게 된다.

(4) 상호간의 영향
ASEAN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ASA와 마필린도(MAPHILINDO: 1963년 인도네시아, 말레이
연방, 필리핀에 의해 결성) 의 기능부전은 ASPAC형성을 위한 한국의 주도적 노력에 동력이
되었다. 즉 ASA와 MAHILINDO와 같은 동남아의 소규모 지역협의체가 말레이시아 분쟁으로
인해 개점휴업상태에 빠지자, 한국정부는 이를 아시아 자유진영국가들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적기로 인식했다는 것이다.20)
한편 ASEAN결성에 있어 ASPAC이 미친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즉 66년 4월 일본 주도하
의 동남아시아개발각료회의의 개최, 그리고 같은 해 6월 한국의 주도로 개최된 ASPAC 개최
등과 같은 지역협력 움직임이 동남아시아에도 파급효과를 미쳐 이듬해인 67년 인도네시아 주
도에 의한 새로운 지역기구 설립움직임이 가속화 되었던 것이다.21)
뿐만 아니라 ASEAN은 1년 앞서 결성된 ASPAC이 공산권 국가로부터 반공동맹으로 간주되고

19) 공산진영 국가들의 ASPAC 비판과 관련해서는 外務省情報文化局, “アジア太平洋地域の協力のための閣


僚会議に関する各国の反響”, 1966年6月23日 (歴史資料としての価値が認められる開示文書: 04ー1037ー
2) 日本外務省 外交史料館을 참조; 한편 중소양국의 ASEAN비판과 관련해서는 毛利和子, “中国と
ASEAN”, 岡部達味(編), 『ASEANをめぐる国際関係』 (日本国際問題研究所, 1977), pp.79-80; 中西治,
“ソ連の東南アジア政策1964~1977”, 岡部達味(編), 『ASEANをめぐる国際関係』(日本国際問題研究所,
1977), pp.66~67.
20) 대통령비서실보고서, “아주외상회의의 연내개최를 촉구함”, 1964.8.19., 『제2차 아시아지역 외상회의 개
최계획』, MF. C1-0011(08). 외교부 외교사료관.
21) アジア局地域政策課. “ASEANについて.” 1969年11月4日. 『ASEAN』. (歴史資料としての価値が認めら
れる開示文書: 04-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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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음을 의식하여, 결성당시 ASPAC과의 차별성을 두기 위해 고심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1967년 8월 방콕회의에 앞서 개최된 방사엔 회의에서 신조직 선언에 대한 마지막 교섭이 실시
되었을 때, 필리핀이 제시한 안은 “자유주의 국가들의 공동체”등 ASPAC의 공동성명에서 몇
몇 문장을 인용했기 때문에 말레이시아를 중심으로 한 다른 회의참가국의 반대에 직면했다. 말
레이시아는 이러한 표현이 공산주의진영의 반발 및 신조직과 ASPAC의 병합으로 이어질 수 있
음을 우려하였던 것이다.22) 방콕회의 직후 채택되었던 방콕선언에서 ASEAN의 목적으로 경제,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의 지역 국가간의 협력이 강조되고, 정치적 협력이 배제되었다는 점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표 2> 1960년대 동남아 지역협력체의 현황


명칭 기간 가맹국
미국, 영국,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 1954 ~1977
태국, 파키스탄
동남아시아연합(ASA) 1961~1967 말레이연방(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
마필린도구상(MAPHILINDO) 1963 인도네시아, 말레이연방, 필리핀
일본,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동남아시아 개발각료회의 1966~1975
캄보디아, 라오스, 남베트남
한국, 태국, 대만, 일본, 호주, 뉴질랜드,
아시아태평양이사회(ASPAC) 1966~1973
필리핀, 남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1967~현재 싱가포르, 브루나이(1984), 베트남(1995),
라오스(1997), 미얀마(1997), 캄보디아(1999)
출처: 中野亜里(編), 『東南アジア現代政治史』 (東京:福村出版, 2010), p.184를 참조하여 필자작성

여기에서는 각료 및 외상들간의 합의에 의해 채택된 ASPAC과 초기ASEAN의 기본문서들에


주목하여 양 조직의 목적과 주요기관을 대비시켜 살펴보고 이를 통해서 양 지역기구의 유사점
과 상이점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표 3> ASPAC과 초기 ASEAN의 목적 및 원칙


ASPAC 공동성명 ASEAN 설립선언
(1968년 제3차 각료회의에서 채택) (1967년 채택)
13. 각료들은 역내국가들간의 연대 강화와 여기에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경제, 사회, 문화 분야에서의 상호협력 첫째, 동남아국가들간의 지역협력을 위한
증진을 위해 ASPAC이 이미 이룩한 연합 설립
공헌을 인정하고 이들 국가들 간에 둘째, 연합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존재하는 협의와 협력을 위한 귀중한 동남아국민에 의한 번영되고 평화로운

22) 井原伸浩(2011),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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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기초를 강화하기 위해 평등과


동반자 정신에 의한 공동노력을 통해
유효한 체제를 한층 강화할 필요성을
지역의 경제성장, 사회진보, 문화발전을
지지하고 또 제1차 및 제2차 회의의
가속한다.
공동성명에 비추어 이하 원칙 및 목적을
역내국가들간의 관계에서는 정의와 법의
지지하는 ASPAC 국가들의 결의를
지배를 존중하고 유엔헌장의 원칙에
확인했다.
동의하면서 지역평화와 안정을 촉진한다.
(1) 국가주권, 정치적 독립 및 영토보전의
3. 경제, 사회, 문화, 기술, 과학 행정 분야
상호존중
에서 공통된 이해사항에 대해 적극적인
(2) 만인을 위한 평등, 자유 및 정의의 실현
협력과 상호지원을 촉진한다.
(3) 평화의 추구 및 분쟁의 평화적 해결 및
4. 교육, 고도전문, 기술, 행정 분야에서의
법의 지배의 존중
훈련과 조사연구 편의 등의 형태도 상호
(4) 평화, 질서 및 진보가 보장되는 지역공동
지원을 제공한다.
사회의 실현
5. 각국의 농업, 공업의 한층 활용, 무역확
(5) 공동 운명과 지역적 연대 의식에 입각한
대, 운수, 통신설비 개량, 각국민의 생활
아시아태평양 제국민의 자주성 고양
수준향상을 위해 한층 효율적으로 협력
(6) 아시아태평양제국으로 이룩되는 번영된
한다.
공동사회의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한 경제,
6. 동남아연구의 진흥
사회 및 문화면에서의 밀접한 협조 증진
7. 유사목적을 가진 기존 국제적 지역적기구
(7) 타국 및 현존하는 국제적 지역적
간에 긴밀한 협력을 유지함과 동시에 각
기관과의 협력강화.
국 상호간의 긴밀한 협력을 한층 강화하
기 위한 모든 방안을 모색한다.
출처: http://www.asean.org/news/item/the-asean-declaration-bangkok-declaration(검색일: 2015.3.10.); 대한민
국외무부, 『아세아태평양지역각료회의』 (서울: 동아출판사, 1966) pp.111~113; 대한민국외무부, 『대한민국외
교연표 1968』. 1969. pp. 165~168.

1. 공동성명과 설립선언을 통해 보는 ASPAC과 초기 ASEAN의 목적


일반적으로 국제기구의 기본문서인 설립조약이나 헌장은 두 가지 성격을 가진다. 즉 가맹국
간의 상호권리와 의무관계를 규정하는 국가간 조약으로서의 성격과 더불어 기구의 목적 및 구
조, 기능, 운영 등을 규정하는 국제기구의 헌법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23) ASEAN의 경
우 1967년 창설 당시 국제기구 설립에 있어 법적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설립조약이나 헌장을 제
정하지 않았지만, ASEAN설립선언인 방콕선언이 ASEAN의 목적과 원칙 등을 담고 있어 2008년
ASEAN 헌장(ASEAN Charter)이 공식 발효하기까지 기본문서의 역할을 해 왔다.24) 한편
ASPAC의 경우 1966년 창설당시 기구설립의 법적 기초가 되는 설립조약은 물론 ASEAN의 방콕
선언과 같은 설립선언조차도 채택하지 못했다. 하지만 66년 창설이래 매년 채택되어 온 회원국
각료들 간 합의문의 성격을 가지는 공동성명에서 ASPAC의 목적 및 기관과 관련된 조항을 찾아
볼 수 있다.25) 먼저 1966년 서울에서 개최된 각료회의 공동성명 제4항에서는 “평화·자유 및

23) 유병화, 『국제법Ⅰ』(서울: 진성사, 1995), pp.591~592.


24) ASEAN헌장과 관련해서는 외교부, 『ASEAN 개황』, 2013.10, p.23; 清水一史, “ASEAN憲章の制定と
AEC”, 石川幸一(編), 『ASEAN経済共同体』 (東京:ジェトロ, 2009)을 참조.
25) 1966년 ASPAC이 창설된 이후 한국정부는 동 기구를 명실상부한 국제기구로 발전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회
원국의 행동규범과 사업원칙, 목적 등을 명확히 규정하는 ASPAC 헌장(ASPAC Charter)을 제정하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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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이라는 공동목표의 달성에 헌신할 것과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직면하여 자국의 주권과 영토


보전을 유지하겠다는 결의를 재확인하였다.”라고 하여 회원국들간의 공동목표를 설정하였다.
이어서 67년 방콕에서 개최된 각료회의의 공동성명에서는 제4항에서 ①모든 위협에 대해 국가
의 안전과 독립을 유지할 것, ②각국 국민의 필요와 실정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자유주의 사회
의 제도를 유지하고 강화할 것, ③아시아태평양국가들의 전반적인 번영을 위한 기초를 강화하
기 위해 평등 및 대등정신에 기초하여 이 지역에서의 경제적 및 물질적인 성장을 촉진할 것, ④
인종, 피부색, 및 종교적 차이를 이유로 하는 차별없이 이 지역 국가들의 문화적 유산 및 문명에
대한 상호이해와 평가를 확대 및 심화시킬 것, ⑤이상과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다른 국가 및 기
구와의 긴밀하고 유익한 협력관계를 유지할 것 등의 5개의 지역협력원칙을 채택했다.26) 그리고
이러한 5개의 지역협력원칙을 보다 더 구체화시켜 ASPAC의 목적과 원칙을 명확히 한 것이 68
년 캔버라에서 개최된 제3차 각료회의의 공동성명 제13항에 규정된 ASPAC의 행동강령이다.
주목할 점은 한국정부가 ASPAC의 행동강령을 작성함에 있어 ASEAN의 설립선언을 의식했
다는 점이다. 한국정부는 주일대사에게 보내는 장문의 전문에서 ASPAC 헌장제정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입장을 전달하고 있다.27)

헌장을 가지고 있지 않은 현 단계에서는 일반원칙의 형태로 ASPAC의 목적이나 성격, 기능 등의


행위능력에 합의해 두는 것이 앞으로의 ASPAC의 건전한 발전에 도움이 되리라 본다. ASA나 ASEAN
도 헌장은 없지만 설립선언에서 그 목적이나 기능, 성격 등을 확인하고 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이 행동강령이 한국정부에 의해 기초되었지만, 일본정부의 적극적인 개


입으로 인해 반공성향의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색채를 띠는 항목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일본정부의 입장은 ASPAC은 어디까지나 역내 국가들간의 상호이해를 돕기 위한 ‘의견교환의
장’이어야 하며, 특별한 정치적 색채를 띠는 조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입장에 기초하여 한국측의 기안에 수정을 가하고 표현을 완화시키려 했다.28) 가장 대표적인 것
이 제3항인데 한국측의 초안에는 ‘평화의 추구 및 분쟁의 평화적 해결 및 평화유지에 대한 공
동책임 확인’으로 되어 있었지만, 일본측은 ‘공동책임’이라는 것이 결과적으로 군사적인
책임을 포함하는 것이라 하여 수정을 요구하였고, 결국 ‘평화유지에 대한 공동책임 확인’이
라는 표현은 삭제되고 대신에 ‘법 지배의 존중’이라는 표현이 추가되었다.

노력을 기울였지만, ASPAC의 제도화에 반대하는 일본 등의 회원국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한
국정부는 제3차 각료회의에서 채택된 공동성명에 7개항으로 구성되는 ASPAC의 행동강령을 포함시켜 동
기구의 목적과 원칙을 명확히 함은 물론 동 행동강령에 실질적인 헌장의 역할을 부여하려 했다. 외무부
아주국. “아시아태평양이사회 제3차 각료회의에 대한 우리정부방침.” 작성일불명. 『ASPAC각료회의, 제
3차 Canberra, 1968.7.30.~8.1(V.1 기본문서철)』 MF. C-0024(31). 외교부 외교사료관.
26) 대한민국 외무부, 『대한민국외교연표 1967』, 1968, pp.253~258.
27) 외무부장관이 주일대사에게 보내는 전문(WJA-07283) 1968년 7월 25일. 『ASPAC각료회의. 제3회.
Canberra. 1968.7.30.~8.1(V.1 기본문서)』. MF. C-0024(31). 외교부 외교사료관.
28) 주일대사가 외무부장관에게 보내는 전문(JAW-07329). 1968년 7월 24일. 『ASPAC각료회의, 제3회.
Canberra, 1968.7.30.~8.1(V.1 기본문서)』. MF. C-0024(31). 외교부 외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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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3>에서와 같이, ASPAC과 초기ASEAN은 둘 다 7개의 활동목적 분야를 들고 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유사한 내용의 항목이 있는 반면에 전혀 상이한 항목도 다수 눈에 띔을
알 수 있다. 우선 유사항목을 보면 ASEAN의 제1항목과 ASPAC의 제6항목이 일반적인 활동방
침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항목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주목할 점은 ASEAN은 물론
ASPAC도 그 설립목적으로 경제, 사회, 문화발전의 촉진을 들고 있으며, 정치, 군사영역에서의
협력은 배제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두 조직 모두 정치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는데,
ASPAC은 아시아 자유진영 국가들간의 결속강화라는 한국정부의 의도하에서 창설되었으며,
ASEAN의 경우 영국과 미국의 철수와 그에 따른 이 지역에서의 영향력 감소가 예상되는 상황
에서 지역질서의 안정을 바라는 5개국간의 협력강화라고 하는 정치적 측면이 존재하고 있었
다.29) 차이가 있다면 ASPAC은 창설 초기에 반공적인 색채가 전면에 부각되었기 때문에 일본
의 중심으로 한 온건파 국가들이 ASPAC이 가진 반공색을 배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반면
에, ASEAN의 경우 ASPAC을 반면교사로 삼아 정치적인 색채를 최대한 배제한 상태에서 출범
했지만, 이후 회원국들간의 영토분쟁이 재현되고 미국과 영국의 철수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조
직내에서의 정치·안보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 졌다는 점이다.30)
또 ASEAN의 제2항목과 ASPAC의 제3항목이 회원국들간의 행동원칙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
에서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ASEAN의 제7항목과 ASPAC의 제7항목 또한 국제적 지역적 기
구와의 협력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거의 동일한 항목이다. 여기서 말하는 국제적 기구의
대표적 사례로서는 유엔을 들 수가 있겠고, 지역적 기구로서는 ASEAN의 경우 ASPAC과의 협
력을, 그리고 ASPAC의 경우 ASEAN과의 협력을 전제로 한 항목이라고 할 수 있다. 부언하자면,
양 기구 모두 기본문서를 통해 봤을 때 서로를 배타적인 경합대상이 아닌 상호보완적인 협력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2. 공동성명과 설립선언을 통해 보는 ASPAC과 초기 ASEAN의 주요기관

회원국간의 협력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설치와 관련해서는 ASPAC은 1차 각료회의 공동성명 제


8항에 언급되어 있으며 ASEAN의 경우 방콕선언 제3조에 명확히 규정되어 있다. 양 기구 모두
느슨한 협의체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직의 제도화란 측면에서 보면 초보적인 수준
에 머물렀다.
<표4>에서와 같이 우선 ASPAC과 ASEAN에 설치된 기관 중 공통된 것으로는 회원국이 돌아
가면서 매년1회 개최하는 최고의사결정기관인 각료회의(Ministerial Meeting)와 차기 각료회의
주최국에 설치되며 주최국의 외교장관을 의장으로 하여 주최국 주재 회원국 대사를 위원으로
하여 구성되는 상임위원회(Standing Committee)가 있었다.31) 양 기구 모두 매년 개최되는 각료

29) 리콴유, 『인류국가의 길』(서울: 문학사상사, 2001), pp.431~432.


30) 1968년 말레이시아와 필리핀 간에 보르네오섬 북서부지역의 사바(Sabah)를 둘러싼 영유권문제가 재현되면
서 ASEAN은 한동안 와해위기에 직면했다.
31) 1966년 4월에 개최된 예비회담에서 처음에 상정되었던 회의의 명칭은 ‘외상회의(Foreign Minis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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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에서의 주된 의제는 역내 안보문제나 조직강화를 위한 문제 등이었다.32)

<표 4> ASPAC과 초기ASEAN 조직도

출처: 초기ASEAN조직도는 山影進, 『ASEAN-シンボルからシステムへ』 (東京大学出版会, 1991), p.252.를 참


조하여 필자작성, ASPAC조직도는 필자작성

Conference)’였지만 회의의 명칭이 가지는 정치색을 약화시키기 위해 말레이시아가 ‘각료회의


(Ministerial Meeting)’로 할 것을 주장하여 변경된 경위를 봤을 때, 형식적인 명칭은 각료회의지만 실질
적으로는 외상회의의 성격을 가진다고 하겠다. 실제로 이후 개최된 각료회의를 보면 수상이 외상을 겸임
하는 뉴질랜드와 말레이시아를 제외한 대다수 회원국은 외교장관(외상)을 대표로 파견했다. 태국대사가
외무부장관에게 보낸 전문(번호불명). “동남아시아외상회담을 위한 제2차 대사급 예비회담 참석 보고
서.” 1966.4.27. 『ASPAC창설 예비회담. 제2차. Bangkok. 1966.4.18.~20』 MF. C-0014(1783). 외교부 외교
사료관.
32) 佐藤孝一, 『ASEANレジーム:ASEANにおける会議外交の発展と課題』 (東京:勁草書房, 2003)
pp.5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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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상임위원회는 양 기구 모두 상설적인 사무국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각료회의와 각


료회의 사이에 실무적인 업무를 담당하고 차기 각료회의에 1년간 활동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
하여 승인받는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ASPAC의 경우 제3차 각료회의를 주최하게
된 호주정부가 정치문제에 대한 의견교환을 연1회의 외상급 각료회의에 한정시키지 말고 대사
급인 상임위원회에서도 실시하도록 하여 ASPAC운영의 중심적인 역할을 상임위원회가 담당하
도록 그 위상을 강화시켰다.33)
이 외에 명칭은 다르지만 회원국간의 기능적 분야에서의 협력을 실시하는 기관으로써
ASEAN의 경우 다수의 상설위원회(Permanent Committee)가 있었고, ASPAC에는 협력 프로젝
트가 존재했다. ASPAC의 경우 66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1차 각료회의에서 7개의 협력프로젝트
가 제시되었는데, 우선순위와 실현가능성을 중심으로 상임위원회에서 검토한 결과 1,2개의 프
로젝트를 우선적으로 실현하되 이 외에 프로젝트는 시간을 두고 신중한 검토를 통해 실현해
나가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34) 그리하여 1968년 기술자풀(캔버라)과 사회문화센터(서울)가 먼
저 설치되었고, 이어서 1970년 식량비료기술센터(타이뻬이), 경제협력센터(방콕), 해양협력계획
(동경)이 설치되는 등 총 5개의 협력프로젝트가 단계적으로 설치되었다.35) ASEAN의 상설위원
회 또한 수년에 걸쳐서 점차적으로 11개의 위원회가 설치되었는데, 1968년의 2차 각료회의에
서는 식량생산공급(인도네시아), 통신항공기상(말레이시아), 민간항공수송(싱가포르), 해운(태
국) 등 4개 분야에서, 1969년의 3차 각료회의에서는 관광(인도네시아), 재정(말레이시아), 운수
통신(말레이시아), 메스미디어(말레이시아), 상공업(필리핀) 등 5개 분야에서, 1971년의 제4차
각료회의에서는 과학기술(인도네시아), 사회문화활동(필리핀) 등 2개 분야에서 상설위원회 설
치가 결정되었다.36)
ASPAC에는 없지만 ASEAN에 설치된 기관으로 특별외상회의와 국내사무국(National
Secretariat)이 있었다. 특별외상회의는 필요에 따라 소집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초기
ASEAN의 기간 동안 한 번도 개최되지 않았다. 국내사무국은 각료회의 및 상임위원회를 보좌
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와 연관하여 회원국내의 ASEAN 사무국장으로 구성되는 사무국장회
의가 있었다. 이 사무국장회의는 본래 ASEAN의 사무적, 기술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었지만, 68년에 들어 회원국간 영토분쟁으로 상임위원회가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하자 상
임위원회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33) 南西アジア課, “ASPACの在り方に関するブッカー豪外務次官補との協議概要”, 1967年11月9日(情報公


開法による開示文書:2008ー00345)
34) 1차 각료회의에서 제시된 7개의 협력프로젝트와 제안국은 다음과 같다. 경제조정센터(태국안), 기술조정센
터(태국안), 사회문화센터(한국안), 상호정보교환센터(태국안), 상품 비료은행(대만안), 기술자풀(필리핀안),
아세아태평양연구소(대만안). 이 중 태국이 제안한 상호정보교환센터는 지역안보와 관련되는 정보나 첩보
의 수집 및 배포를 목적으로 한 구상이었는데, 일본 등의 국가가 정치적 색채를 띤다는 이유로 반대하여
설립되지 못했다. バンコク粕谷大使発外務大臣宛電信(第1067号)1966年9月2日(情報公開法による開示
文書:2006ー01247)
35) ASPAC 공동프로젝트의 구체적인 내용과 관련해서는 Michael Haas, The Asian way to Peace: A Story of
Regional Cooperation, (New York: Praeger, 1989), pp.75-90을 참조.
36) 山影進(1991),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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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비교

이상의 분석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첫째, ASPAC과 ASEAN은 조직설립의 법적 근거가 아주


미흡하였다. 일반적으로 국제기구가 창설될 때에는 설립의 법적 근거가 되는 헌장이나 조약에
기초하게 된다. 그러나 ASEAN의 경우 설립의 근거가 국회비준을 요하지 않는 5개국 외상급 각
료들간의 합의인 방콕선언에 불과했다. 그 내용 또한 회원국정부의 권리 의무관계에 대한 규정
은 찾아 볼 수 없었고, 오직 기구의 목적이 7개의 항목으로 추상적으로 명기되어 있을 뿐이었
다. ASPAC의 경우 66년 창설될 당시 설립선언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겨우 3차 각료회의에 가
서야 공동성명에서 ASPAC의 목적과 원칙을 담은 7개의 행동강령이 채택되긴 했지만 그 내용
은 모호하고 추상적인 표현에 그쳤다.37)
둘째로, 양 기구는 창설될 당시 조직적 실체로서의 사무국이 존재하지 않았다. 공동성명과
설립선언에는 매년 회원국이 돌아가면 개최하는 외상급 연차각료회의와 각료회의주최국의 외
상과 주최국주재 회원국 대사로 구성되는 대사급 상임위원회가 명기되어 있을 뿐 상설적인 사
무국은 설치되지 않았다.
이처럼 양 기구는 설립의 법적기초가 되는 헌장이 존재하지 않으며 조직적 실체로서의 상설
사무국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엄격한 의미에서의 국제기구로는 보기 어려우며, 국가들
간의 느슨한 형식의 협의체에 불과했다고 하겠다.38)

196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자 동아시아에는 영국의 수에즈 동부지역(East of Suez, 구체적으


로는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으로부터의 71년 철수발표(68.1), 미국에 의한 베트남 정책 전환발
표(68.3), 베트남 평화파리회담 개시(68.5), 괌 독트린 발표(69.7) 등 동아시아의 안보와 관련된
중요한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했다. 그리고 1971년 7월에는 닉슨 대통령의 72년 방중이 발표되
었다. 1972년 닉슨대통령의 중국방문으로 실현된 미중관계개선은 전후 아시아 질서를 규정해
온 미중냉전구도를 타파하고 데탕트의 시작을 알렸음은 물론 동아시아 지역기구의 존폐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초기ASEAN과 ASPAC 또한 60년대 중반 미중냉전대립을 전제로 하여 만들
어진 협의체인 만큼 미중관계개선이라고 하는 지역질서의 대전환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하에
서는 미중 데탕트에 직면한 초기ASEAN과 ASPAC의 대응과 전략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ASEAN의 대응

37) 두 기구 모두 창설초기 헌장채택과 상설사무국 설치를 위한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ASPAC의 경우


한국정부가 상설사무국의 조기설치와 함께 1968년 3차 각료회의에서 헌장제정을 위한 실무자 그룹을 상임
위원회에 설치할 것을 주장했고, 초기ASEAN의 경우 70년대 초반 필리핀 정부가 헌장채택과 사무국의 마
닐라 설치에 적극적이었다. 山影進(1991), pp.241-242; 鈴木早苗, 『合意形成モデルとしてのASEAN:国際
政治における議長国制度』 (東京:東京大学出版会, 2014), pp.60-61.
38) 이런 의미에서 ASEAN이 이후 명실상부한 국제기구로서의 모양새를 갖추는 것은 1976년에 개최된 ASEAN
정상회담에서 자카르타에 사무국 설치를 결정하고, 2008년 ASEAN헌장이 발효되고 나서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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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기 동아시아 지역협의체에 대한 비교연구: ASEAN의 성공과 ASPAC의 실패

ASEAN 회원국들은 미중화해와 유엔에서의 공산중국의 대표권 승인이라고 하는 급격한 국


제정세의 변화에 직면하여 대외적으로 공동 대응하는 자세를 보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1971년
11월 제1차 특별정상회의에서의 동남아시아 평화자유중립지대(ZOPFAN: Zone of Peace,
Freedom and Neutrality)선언을 채택한 것과 공산중국과의 국교수립에 공동대응 방침을 채택한
것을 들 수 있다.

(1) ZOPFAN 선언 채택
동남아 중립화 구상은 영미 양국의 철수라고 하는 지역 안보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직면하여
ASEAN 국가들이 이에 대한 대응책을 모색하는 가운데 등장한 개념이다. 이 구상을 처음 제시
한 국가는 말레이시아였으며 1970년 라자크(Tun Abdul Razak)신정권이 등장한 이후 비동맹중
립 외교노선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69년 5월
말레이인과 화교간의 충돌을 중심으로 하는 폭동이 발생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라자
크 정권에게 있어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의미하는 중립화는 국내의 중국계 주민에 대한 회유책
이기도 했다.
말레이시아가 제시한 동남아 중립화 구상의 핵심내용은 다음과 같다.39) 우선 동남아의 역내
국가들이 주권과 영토보존을 상호존중한다는 기초하에 불가침을 지지하고 평화와 안전을 달성
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스스로 모색해야 하며, 나아가 역외 강대국인 미국 및 소련, 중국이
동남아의 불가침을 보장함과 동시에 중립유지를 위한 감독수단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레이시아가 중립화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ASEAN 회원국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SEATO의 회원국이기도 한 태국과 필리핀의 입장은 소극적이었다. 태
국의 경우 우방인 미국이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를 추진하고, 공산중국이 국내공산세력에 대
한 전복활동을 지원하고 있는 상황에서 역내 중립은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였다.40) 뿐만 아니
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역외강대국들로부터 중립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 내는 것에 대해서도
회원국 정상들은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말레이시아의 라자크 수상은 각론은 제쳐 두고 중립화라고 하는 큰 틀의
방향에 대해서 만이라도 ASEAN 회원국의 동의와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회원국을 직접 찾아가
는 방문외교를 통해 설득공작을 벌였다. 그 결과 라자크 수상은 회원국 정상들로부터 중립화에
대한 지지획득에 성공했고, 1971년 10월 유엔총회 출석을 위해 뉴욕에 와 있던 ASEAN 회원국
외상들이 회합하여 입장을 조율한 결과 11월 쿠알라룸푸르에서의 외상회의 개최에 합의를 보
았다.
11월 27일 개최된 쿠알라룸푸르 특별 외상회의에서 채택된 ‘쿠알라룸푸르 선언’은 중립
화가 바람직한 목표임을 확인한다는 내용의 전문과 2개의 조항(① 5개국은 동남아시아가 역외
구각의 어떠한 간섭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자유/평화/중립지대’로 인식되고 존중받도록 필요

39) 변창구(1999), p.155.


40) 黒柳米司, 『ASEAN35年の軌跡-'ASEAN Way'の効用と限界』 (東京:有信堂, 2003),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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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②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강화, 연대, 긴밀한 관계에 도움이 되는 협
력지대를 확대하기 위해 공동보조를 취해야 한다) 으로 구성된 아주 간결한 내용의 선언이었
다. 다시 말해서 ZOPFAN 선언은 동남아시아가 역외세력의 간섭을 받지 않으며 평화 자유 중
립지대로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다는 장기적인 목표를 결의하고 표명한 것에 지나지 않았
다.41) 하지만 이 선언은 동남아시아를 평화, 자유, 중립지대로 설정함으로써 외부세력의 간섭
으로부터의 자유를 유지할 것을 역내외에 선언하는 것이자 동시에 ASEAN이 대외적으로 공동
협력의 자세를 보인 최초의 사례로서 이후 ASEAN 회원국이 정치협력을 해나가는 데 있어 이
정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공산중국과의 국교수립을 위한 협의


72년 미중관계개선이 이루어 질 때까지 ASEAN 회원국들과 공산중국과의 관계는 대립적이
고 비우호적인 것이었다. 회원국 중 친서방진영에 속하는 필리핀과 태국은 대만정부를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로 승인하고 있었고, 1963년 연방국가로 출범한 말레이시아 또한 친서방적인 라
만(Tunku Abdul Rahman)정권하에서 1967년 대만정부와 국교를 맺었다. 1965년 말레이시아로
부터 독립한 싱가포르는 공산중국과 대만정부 어느 쪽과의 국교수립도 미뤄두고 있었다. 인도
네시아의 경우 비동맹운동을 주도했던 수카르노(Sukarno)정권기에 공산중국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지만, 1965년에 발생한 쿠데타 사건(9.30사건)이후 양국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어 1967년 10
월 이후부터는 양국 모두 자국대사를 소환하는 조치를 취하여 국교를 동결한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71년 미중관계의 해빙무드가 일어나자 ASEAN회원국 중 일부는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했다. 그 중 가장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인 것이 말레이시아였는데, 1970년 9월
라만수상의 뒤를 이어 등장한 신임수상 라자크는 비동맹중립 노선을 전면에 내세웠으며 그 일
환으로 동남아중립화구상을 제시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중국과의 관계개선에 착수했다. 중국
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사전작업으로 라자크 신정권은 1971년 중국대표권을 둘러싼 유엔총회투
표에서 공산중국에 대한 안보리 상임이사국지위 인정과 대만추방을 요구하는 알바니아안에 지
지를 표명했으며, 1972년에는 아시아 자유진영 국가들의 의원모임인 아시아국회의원연합(APU)
을 탈퇴, 1973년에는 ASPAC회원국 중 가장 먼저 탈퇴를 선언하게 된다.42)
한편 회원국 중에는 중국과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국가
도 존재했다. 태국의 경우 공산중국과의 화해를 모색하는 정부에 대해 이에 비판적인 군부가
1971년 11월 17일 쿠데타를 감행하여 실권을 장악하였으며43), 인도네시아 내부에서도 65년 중
국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쿠데타에서 수 명의 장군이 살해된 군부를 중심으로 뿌리
깊은 대중국 불신감이 남아 있었다.
이처럼 ASEAN 회원국의 대중국정책은 미중화해가 실현된 직후까지 분열 양상을 보였지만,

41) 黒柳米司(2003), p.44.


42) 말레이시아 주재대사가 외무장관에게 보낸 전신(MAW-0137). 1972년1월17일 『ASPAC각료회의, 제7차. 서
울, 1972.6.14.-16(V.3 참가국별 교섭: 말레이시아-월남)』 MF. C-0053(04). 외교부 외교사료관.
43) 『경향신문』 1971년11월18일. 제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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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2월 쿠알라룸푸르에서 개최된 외상회의에서 중국과의 국교정상화를 실현하는 시기는


각국정부가 알아서 판단한다는 선에서 회원국 간의 합의가 성립했다.44) 이후 말레이시아를 필
두로 중국과의 국교정상화 교섭을 추진하여 1974년 5월 국교정상화를 실현하였고, 말레이시아
가 가교역할을 하여 1975년 6월과 7월에 필리핀과 태국이 각각 중국과 국교정상화를 달성했다.
이처럼 ASEAN 회원국들은 중국과의 국교정상화라고 하는 중요 대외정책을 추진함에 있어 회
원국들간에 긴밀히 협의하고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2. ASPAC의 대응45)
ASEAN이 지역안보정세의 급격한 변동에 대해 공동대응의 방침을 채택한 것과는 대조적으
로 ASPAC의 경우 회원국 간의 위기극복을 위한 공동대처방안을 둘러싸고 합의점을 도출하기
가 어려웠다 . 대만이 회원국으로 참가하고 있었던 만큼 말레이시아를 필두로 중국과의 관계개
선을 희망하는 회원국이 등장하면서 대만문제가 ASPAC 존속을 가로막는 최대의 문제로 등장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아래에서 보듯이, ASPAC의 미중데탕트에 대한 대응은 ASPAC결
성을 주도한 한국이 앞장을 서는 단독대응의 양상을 보이게 된다.

(1) 대ASEAN 접근
1972년 2월 닉슨의 중국방문 직후 ASPAC 재결속을 위해 한국정부가 마련한 방침은 ASPAC
의 성격을 경제협력체로 전환하는 것과 더불어 ASEAN과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었다. 사실 ASPAC과 ASEAN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는 1967년 ASEAN이 결성
될 당시부터 회원국의 관심을 모았던 문제였다.
하지만 ASEAN 창설 직후 열린 ASPAC 제2차 캔버라 상임위원회에서 ASEAN의 참가국인 필
리핀, 말레이시아, 태국 대표들이 ASEAN의 목적과 가능에 대해서 보고한 데 대해, 상임위원회
는 이 기구의 발족을 환영하고, 양 기구 간에 긴밀한 협력관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 캔버라에서 개최된 각료회의에서 채택된 공동성명에는 “각료들은 대략 비슷한 목적을 추
구하는 몇 개의 기관이 역내에 존재하는 것을 환영했다. 이들 기관의 참가국이 어느 정도 중복
한다는 사실은 상호간에 긴밀하고 조화로운 협력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점과 관련
해서 각료들은 ASPAC 상임위원회가 ASEAN의 창설을 정식으로 환영한 것에 유의했다.”라는
표현이 포함되었다. 즉 표면상으로는 양기구가 경합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하는 관
계이며, 긴밀하게 협력해 가야 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양 기구간의 협력 관계를 모색하는 움직임은 진전을 보이지 않았고, 각각 독자
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정부는 ASPAC과 ASEAN의 협력을 도모함으로써
양 기구에 동시에 가입하고 있으면서도 ASPAC보다는 ASEAN을 중시하는 국가들의 ASPAC 이

44) 山影(1991), pp. 157-158.


45) 이 부분은 논문의 완결성을 위해 필자의 졸고(2011), “데탕트기 한국의 동아시아 외교: ASPAC의 존속을
위한 한국의 대응과 좌절1972~1973” 『한국정치학회보』, 제45집 5호의 Ⅱ장과 Ⅴ장의 내용을 수정 보완
하여 정리하였음을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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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연구 제18집 1호, 2015

탈을 막을 수가 있으며, 나아가서는 인도네시아, 싱가포르와 같은 잠재적 회원국의 ASPAC가입


에도 기대를 걸 수가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전년의 특별외상회의에서 동남아시아
중립화 선언을 표방한 ASEAN과의 협력을 연출함으로써 ASPAC의 탈정치, 탈이데올로기라는
궤도수정을 인상지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한국정부는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닉슨 방중이후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처하고 ASPAC과
ASEAN의 협력체제를 이루기 위해 ASEAN 회원국과의 개별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ASEAN의
반응은 냉담했다. 인도네시아의 말리크 외상은 ASPAC은 SEATO와 같은 반공정치기구인 반면,
ASEAN은 경제협력을 위한 비정치기구임을 강조하고 ASPAC이 정치색을 탈피하지 않는 한
ASEAN과의 협력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2) 대만탈퇴공작
대만 문제가 ASPAC 존속의 열쇠를 쥔다고 판단한 한국정부는 대만 탈퇴공작을 전개했다.
ASPAC해체가 그동안 쌓아온 대동남아 외교기반을 현저하게 약화시킬 것으로 인식하는 한국정
부에게 있어 ASPAC의 존속은 북한의 동남아 진출을 저지하는 방파제이며, 일본의 아시아 외교
를 견제할 수 있는 유효한 협의체였다. 또 전통적 우호국인 대만의 배제를 어쩔 수 없는 것으
로 간주하는 한국의 대 ASPAC 정책은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중국과의 국교회복을 서두를 것
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아시아에서의 고립, 즉 “제2의 대만”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고육책
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만 스스로가 ASPAC에서 탈퇴해 줄 것을 바라는 한국정부에 대해 대만
정부는 격렬하게 반발했다. 대만정부는 ASPAC 회원국 지위 문제를 중국 대표권에 관련된 문제
이며, 자국의 사활적 이익을 위협하는 문제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 우호국인 한국마저도 중
국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하는 상황에서 중국의 ASPAC 참가라는 최악의 사태를 저지하기 위해
서도 ASPAC 탈퇴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대만의 자진탈퇴를 유도하여
ASPAC의 존속을 도모하려 한 한국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본 논문에서는 ASPAC과 초기ASEAN의 역사적 상호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양 협의체에 대한


비교 분석을 시도했다. 이들 양 협의체가 결성된 역사적인 배경과 과정, 설립초기 조직의 목적
과 제도적 성격, 미중데탕트라는 국제질서의 변화 속에 양 협의체가 택했던 정책과 대응을 비
교하되 양 협의체의 관계 및 상호인식에 주목하여 살펴보았다.
우선 결성과정에 대한 검토결과, 양 협의체 모두 결성당시 공산권 국가들로부터 반공 군사블
럭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에서는 유사성을 보였지만, 주도국의 의도 및 결성당시 역외강대국의
영향과 관련해서는 차이를 보였다. ASPAC 결성을 주도한 한국은 아시아 자유진영 국가들의 결
속을 강화하려 하였고 미국의 측면적 지원이 ASPAC결성에 영향을 준 반면, ASEAN을 주도한
인도네시아는 새로운 조직이 반공연합으로 인식될 것을 우려하여 비동맹중립 성향을 전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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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기 동아시아 지역협의체에 대한 비교연구: ASEAN의 성공과 ASPAC의 실패

내세웠으며 이를 위해 역외강대국의 개입을 차단하고자 했다.


제도적인 측면에서 ASPAC과 ASEAN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국제기구라기 보다는 느슨한 형
식의 협의체였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보였다. 양 협의체 모두 조직설립의 법적 근거가 미약하였
으며, 조직적 실체인 사무국조차도 설립되지 않았다. 이러한 제도적 특징은 결성당시 양 협의
체 모두 ‘지역협의체를 신설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회원국간의 명확한 합의가 존재
하지 않았던 데서 기인했다.
미중데탕트라고 하는 지역질서의 급격한 환경변화에 대한 대응에 있어 양 협의체는 차이를
보였다. ASEAN의 경우 ZOPFAN선언을 채택하고 공산중국과의 국교수립에 있어 공동대응방침
을 정하는 등 대외적으로 회원국이 공동 대응하는 자세를 보인 반면, ASPAC의 경우 대만 문제
가 ASPAC 존속을 가로막는 최대 문제로 등장하면서 회원국들간에 위기극복을 위한 공동대처
방안을 둘러싸고 합의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대외적 환경변화에 대한 대응의 차이가 결
국 양 협의체의 명암을 달리하게 만들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60년대 중반에 결성된 초기ASEAN과 ASPAC이 유사한 성격을 가진 회의
체였음에도 불구하고 70년대에 들어와 명암을 달리한 이유를 도출해 볼 수 있다. 본문에서의
논의를 토대로 할 경우 ASEAN이 설립당시부터 비동맹중립성향을 전면에 내세워 반공연합으
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ASPAC과 거리를 두고자 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ASPAC에 대한 ASEAN 회원국의 경계는 ASEAN이 결성되는 과정에서부터 나타났다. 앞서 언
급했듯이 1967년 8월 방콕회의에 앞서 개최된 방사엔 회의에서 신조직의 설립선언을 둘러싸고
마지막 교섭이 실시되었을 때, 필리핀이 제시한 안은 ASPAC 공동성명의 문장을 인용하였다고
하여 말레이시아의 반대에 직면했다. 말레이시아는 이러한 표현이 공산주의진영의 반발 및 신
조직과 ASPAC의 병합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방콕회의에서 채택된 설립선
언에서 ASEAN의 목적으로 경제,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의 지역 국가간의 협력이 강조되고, 정
치적 협력이 배제되었다는 점도 ASEAN의 ASPAC에 대한 경계라는 측면에서 고려해 볼 수 있
다.
ASEAN 결성이후에도 “ASPAC 2중대”가 되길 꺼리는 ASEAN 회원국의 대ASPAC 경계심은
계속되었다. 일본, 호주와 같은 온건성향의 ASPAC회원국들은 ASPAC의 태생적 한계라 할 수
있는 반공색을 완화시키고 지역을 대표하는 아시아정치공동체로 발전시키기 위해 중립성향의
비참가국을 회원국으로 맞이하려 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ASEAN의 회원국이자 친서방국가
인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를 포섭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들 양국은
ASPAC 참가에 대해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9.30사건을 계기로 탄생한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Suharto) 정권은 친미반중의 외교정책을
취하긴 했지만, 비동맹중립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외교노선에서 생기는 제약과 ASEAN의 주도
국으로서의 입지로 인해 ASPAC 참가에는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4차 각료회의의 주
최국인 일본이 적극적인 가입공작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는 옵서버를 파견하는 데
그쳤다. 국민의 70% 이상이 중국계인 싱가포르는 문화적 인종적으로 공산중국과 깊은 유대감
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중국이 반공연합으로 간주하는 ASPAC에 참가하는 것은 심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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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문제를 초래할 수 있었다.46) 뿐만 아니라 ASEAN 회원국인 이들 양국이 ASEAN의 청사진


으로 정치협의체로의 발전을 바라고 있었던 점도 ASPAC에의 참가를 주저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ASEAN의 회원국인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이 이미 ASPAC의 회원국으로 활동 중
인 상황에서 ASEAN이 정치포럼으로 발전하길 바라는 이들 국가들마저 정치포럼인 ASPAC에
참가하게 된다면 회원국의 중복으로 인해 ASEAN의 존재의미가 사라지게 되고 종국에는
ASEAN이 ASPAC에 흡수 통합되리라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미중화해를 전후한 시기의 ASEAN은, 비동맹중립노선을 보다 명확히 하여 동남아중립화 구
상을 천명했으며, 중국과의 관계개선에도 공동대응했다. 이러한 가운데 ASPAC과 ASEAN에 동
시 가입한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태국은 ASPAC보다도 ASEAN을 보다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국은 ASPAC의 노선전환을 인상지우기 위해 ASEAN과의 협력을 원했지만, “ASPAC 2중대”
가 되길 꺼리는 ASEAN은 이러한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말레이시아의 경우 동남아 중립
화구상을 제창하여 ASEAN을 기축으로 한 외교정책을 강화함과 동시에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서두르고자 ASPAC 탈퇴를 선언하여 ASPAC 와해를 결정짓는 한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ASEAN은 ASPAC과의 관계를 결성초기 강조되었던 상호보완관계가 아닌
경합관계로 인식했으며, 이러한 ASEAN회원국의 인식이 미중데탕트 시기 ASPAC이 소멸해 가
는데 있어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1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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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PAC창설 예비회담. 제2차. Bangkok. 1966.4.18.~20』. MF. C-0014(1783).
『ASPAC각료회의. 제1차. 서울. 1966.6.14.-16. 전8권(V.3 보고서)』. MF. C-0015(03).
『ASPAC 등에 관한 아주지역 공관장 회의. 서울, 1966.6.21.』. MF. C-0015(09).
『ASPAC각료회의, 제3차 Canberra, 1968.7.30.~8.1(V.1 기본문서철)』 MF. C-0024(31).
『ASPAC각료회의, 제7차. 서울, 1972.6.14.-16(V.3 참가국별 교섭: 말레이시아-월남)』 MF.
C-0053(04).
□ 미국: National Archives Ⅱ, College Park, Maryland. [NA]
Records of the Department of State, Record Group 59
Subject Numeric Files, 1964-1966
□ 일본: 外務省 外交史料館
外務省情報公開請求文書
開示請求番号: 2008ー00345,2006ー01247,2006ー01247

46) 졸고(2012),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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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기 동아시아 지역협의체에 대한 비교연구: ASEAN의 성공과 ASPAC의 실패

歴史資料としての価値が認められる開示文書
開示文書番号: 04-1100, 04ー1037ー2
[2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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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자료]
http://www.asean.org/news/item/the-asean-declaration-bangkok-declaration(검색일:2015.3.10)

투고일자 : 2015년 5월 15일


심사완료일자 : 2015년 5월 24일
게재확정일자 : 2015년 6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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