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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기 동아시아 지역협의체에 대한 비교연구 Asean의 성공과 Aspac의 실패
냉전기 동아시아 지역협의체에 대한 비교연구 Asean의 성공과 Aspac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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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현
(한양대학교)
Sang-Hyun Lee
(Hanyang University)
차례
Ⅰ. 서론
Ⅱ. ASPAC과 초기ASEAN의 결성과정 비교
Ⅲ. ASPAC과 초기ASEAN에 대한 제도적 비교
Ⅳ. ASPAC과 초기ASEAN의 미중 데탕트에 대한 대응비교
Ⅴ. 결론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plain the reason why the organizations, ASEAN
and ASPAC were in light and shade in 1970’s: the former had been successful while
the latter had not been, in fact, it turned out failure in spite of having many
similarities when they were found in the mid 60's and in the early organizations
by comparing the early ASEAN and ASPAC.
Most studies on these East-Asian organizations generally say that the dramatic
change of international situation based on US-china relations leaded to the result
of the ASEAN’s success and the ASPAC’s failure. However, this study will review
the fact which ASPAC have broken up since the competitive interrelationship with
ASEAN and rapid change of the regional order in East Asia influenced the dissolution
of ASPAC
Key words: Association of South East Asian Nations(ASEAN), Asian and Pacific
Council(ASPAC), East Asian Regionalism, Regional Coop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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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필자 작성
이처럼 조직의 규모나 참가국의 면면에서 차이를 보이긴 했지만, 창설당시 공산진영 국가들
로부터 공산중국을 봉쇄하고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후방지원하기 위한 반공동맹으로 간주되었
다는 점, 그리고 경제, 사회, 문화면에서의 지역협력이라고 하는 조직의 목적이나 느슨한 연합
이라고 하는 조직의 성격면에서 양 협의체는 상당한 유사성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유사성으로
인해 일부 회원국들로부터는 두 조직의 통합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70년대에 들어와 미
중관계개선이라는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에 직면하여 ASPAC은 자연소멸의 길을 걷게 된 반
면 ASEAN은 존속하여 21세기 현재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지역기구로서 지역통합
의 과정에서 중핵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2) 그렇다면 양 협의체가 유사한 성격을 가진 회의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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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SPAC 설립과정
ASPAC 결성은 1964년 9월 한국정부가 마련한 아시아 외상회의구상에서 비롯되었다.4) 한국
전쟁이 종결된 이후 10여 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아시아 최빈국 중 하나인 한국이 아시
아의 다자간 지역협력회의를 개최하기 위해서는 주변국의 협력이 절실했다. 한국이 가장 먼저
회의개최를 타진하고 지지를 요청한 것은 다름 아닌 동맹국 미국이었다. 미국의 첫 반응은 회
의적이었다. 미국무부는 회의 목적의 불명확성, 한국정부의 국제회의 개최 능력에 대한 우려,
일부국가의 회의참가 거부가능성 등을 내세워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5)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
아 영미양국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음에도 상호 연대의식이 희박한 지역국가들의 협력
강화에 도움이 되며, 중국의 핵실험 성공으로 인한 대만과 한국의 고립감을 완화시키는 데도
유용하다는 인식에서 후방지원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6) 하지만 미국은 동회의가 미국의
사주에 의한 것이며, 미국의 대아시아정책에 협력하기 위한 회의라는 인상을 피하기 위해 어디
까지나 측면지원에 머물렀다.
미국이 역외 강대국의 입장에서 한국주도의 다자간 지역협력회의의 결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면 역내 참가국 중에서 큰 역할을 한 나라로는 일본과 태국, 호주를 들 수 있다. 당시 호
4) 1961년 필리핀의 제창으로 아시아 지유진영 국가들 간의 모임인 ‘아시아 4개국 외상회의’가 캐손
(Quezon)시에서 개최된 이후 한국 외무부는 1962년부터 후속회의를 개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대만 등과
물밑 접촉을 해왔다. 그러던 중 1964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발탁된 30대 신임 외무부장관인 이동원이
‘아시아외상회의’ 구상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5) Telegram to Seoul(196). 9/1/1964, POL 7 KOR S, SNF. Box 2401, RG59, National Archives at College Park
[이하 NA로 표기]
6) Telegram to Seoul(434). 11/18/1964, POL 7 KOR S, SNF. Box 2401, RG59, 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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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아, 호주, 뉴질랜드 등 9개국의 각료급 인사가 대표로 참가하였으며, 라오스가 옵서버로 출
석했다. 회의에서 논의의 초점이 된 것은 상설기구의 설치 여부 및 회의의 정례화 문제였다.
상설기구의 설치에 대해서는 한국, 대만, 필리핀, 남베트남이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반해,
일본, 말레이시아, 뉴질랜드 등의 국가들은 ECAFE나 콜롬보플랜(Colombo Plan)과 같은 기존
국제기구의 활용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상설기구의 설치에는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결국
에는 태국, 호주 등의 국가가 우선 각료회의를 계속해서 개최하기로 하자는 타협안을 제시하여
합의를 보았다. 구체적으로는 차기회의의 방콕개최가 결정되었고, 차기개최국인 태국이 실질
적인 사무국 업무를 담당하고 방콕주재 관계국 대사로 구성되는 상임위원회(Standing
Committee)가 설치되게 되었다.12) 이렇듯 상임위원회는 상설기구화를 강하게 바라는 국가 그
룹과 그리고 상설기구화는 시기상조이며, 우선 회의의 계속이라는 선에서 현상유지를 바라는
국가들 사이에서 타협의 산물로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상설기구의 설치문제는 사
실상 유보되었지만, 회의의 계속적인 개최에 대해서는 참가국들 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한편
회의의 정례화와 상임위원회 설치가 결정되자 ‘아시아태평양지역 각료회의’라는 명칭이 실
체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명칭을 둘러싼 논의가 다시 이루어졌다. 우선
필리핀 대표가 ‘아시아태평양협력이사회(Asian and Pacific Cooperation Council)’로 할 것을
제안했고, Association, Community, Conference 등의 제안이 추가로 이어졌지만, 최종적으로는
‘아시아태평양이사회(Asian and Pacific Council)’로 하자는 뉴질랜드의 제안이 채택되었다.13)
2. 초기ASEAN 설립과정
(THW-0454). 1966년 4월21일. 『ASPAC창설 예비회담. 제2차. Bangkok. 1966.4.18.~20』. MF. C-0014(1783).
외교부 외교사료관.
12) 일본정부는 standing committee를 ‘대사급연락위원회’로 해석하여 어디까지나 상설기구 설치를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한편 한국의 김영주 외무차관은 “이번회의에서는 헌장이나 규약은 채택되
지 않았지만, 상임위원회를 설치하게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상설기구가 설치된 것이나 같다”고 하여 사
실상 상설기구라는 인식을 보였다. 이러한 인식차이로 인해 일본은 ASPAC이 상설기구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아시아태평양협의회(アジア太平洋協議会)’로 호칭하고, 한국은 사실상의 상설기구임을 강조하기
위해 ‘아시아태평양이사회’로 칭하게 된다. 『朝日新聞』 1966년 6월 17일; 『読売新聞』 1966년 6월
18일.
13) 이동원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보고서 “제6차 본회의 경과보고” 1966년 6월16일 『ASPAC각료
회의. 제1차. 서울. 1966.6.14.-16. 전8권(V.3 보고서)』. MF. C-0015(03). 외교부 외교사료관.
14) 말레이시아 분쟁과 관련해서는 John Subritzky, Confronting Sukarno: British, American, Australian and
New Zealand Diplomacy in the Malaysian-Indonesian Confrontation, 1961-5, (London: Macmillan, 2000); 宮
城大蔵, 『戦後アジア秩序の模索と日本ー海のアジアの戦後史1957~1966』 (東京:創文社, 2004)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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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arno) 대통령은 신식민주의 세력인 영국의 음모라고 비난, 사바와 사라왁이 식민지화되기
이전에는 인도네시아의 영토였음을 강조하며 말레이시아에 대한 ‘대결(Confrontation)정책’
을 전개했다. 필리핀의 마카파갈(Diosdado Macapagal) 대통령 또한 사바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제기하면서 사바지역 영유권을 둘러싼 동남아 3국간의 분쟁은 베트남 전쟁과 더불어 동남아지
역의 안정을 저해하는 지역문제로 대두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65년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국내에서 일어난 정치정세의 변화는 분쟁해결에
큰 계기가 되었다. 상원의원 시절부터 필리핀의 사바영유에 반대하던 마르코스(Perdinand E.
Marcos)는 11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자 말레이시아와의 관계개선에 착수했다. 인
도네시아에서는 9월 30일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이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전략사령관이던 수
하르토(Suharto)가 이끄는 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듬해인 3월 11일 수카르노 대통령은 수하
르토 장군에게 행정권한을 이양하였고, 실권을 장악한 수하르토는 아담 말리크(Adam Malik)를
외상에 발탁하여 인도네시아를 국제적 고립으로부터 탈피시켜 국제사회로 복귀시키는 임무를
맡겼다. 말리크는 이러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수행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인도네시아의 국제적
고립을 초래한 말레이시아 대결정책은 실질적으로 폐기되었다. 1966년 6월 3일과 8월 11일 필
리핀-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양국은 각각 국교정상화에 합의하였다. 이로써 해
양부 동남아시아에는 대결의 시대가 종식되고 화해의 시대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
다.
말레이시아 분쟁 이후 새로운 지역협력기구 설립을 위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66년 3월 태
국, 필리핀, 말레이시아가 참가하는 기존 지역협의체인 동남아시아연합(ASA: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이 그 활동을 재개하면서부터다.15) 말레이시아 분쟁으로 인한 활동정지 이후 만
3년만의 일이었다. 당초 ASA 3국은 말레이시아분쟁 종식 이후의 지역안정을 위해 인도네시아
의 ASA참여를 적극 희망하였다. 그러나 지역 강대국이자 비동맹외교의 맹주임을 자처하는 인
도네시아가 ASA의 반공색을 이유로 난색을 표하자, 인도네시아도 참가할 수 있는 새로운 지역
기구 창설과 ASA의 발전적 해체로 논의가 옮겨가게 되었다.16)
1966년 8월부터 4개국 외상들은 상호 방문을 통해 새로운 지역기구 결성을 둘러싼 논의를
거듭했고, 12월에는 인도네시아와 태국 외무성 주도하에 동남아시아지역협력연합(SEAARC:
South East Asian Association for Regional Cooperation) 설립을 위한 공동선언안을 마련하여 관
계국 정부에 전달했다. 이 공동선언안은 ASA의 목적과 조직을 규정한 방콕선언을 기초로 하여
인도네시아의 비동맹주의를 가미한 것이었는데, 새로운 기구의 목적이나 참가국의 범위를 둘
러싸고 관계국들은 입장 차이를 노정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새로운 지역협력기구 설립을 위한 구체적인 논의는 1967년 8월 5일부터
3일간 태국 방콕 교외의 휴양지인 방사엔(Bangsaen)에서 동남아 5개국의 외상급 인사들이 참
15) ASA의 설립배경 및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안청시(1981), 제4장; Vincent K. Pollard, “ASA and ASEAN,
1961~1967: Southeast Asian Regionalism”, Asian Survey, Vol. 10, No. 3(Autumn 1970); 山影進(1991), 제1
장; 岡部達味編, 『ASEANをめぐる国際関係』 (東京:日本国際問題研究所, 1977) 제1장을 참조할 것.
16) 井原伸浩, “ASEAN設立過程再考: 原加盟国の対インドネシア不信に注目して”, 『国際政治』 第164号
(日本国際政治学会, 2011), pp.11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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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비교
(1) 주도국의 의도
1966년 ASPAC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 한국은 ASPAC을 통해서 아시아 자유진영 국가들간
의 반공적 유대를 강화하려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정부는 처음부터 중립성향의 국가가 동회
의에 참가하는 것에 대해서 소극적이었다.17) 정치적 입장이 상이한 국가들의 참가는 참가국의
단결을 어렵게 하고, 회의진행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편 전통적으로 비동맹 중립성향의 외교정책을 실시해 온 인도네시아는 1967년 ASEAN 결
성을 주도함에 있어 이것이 “ASPAC 2중대”라는 이미지를 주게 될까 우려했다. 즉 가맹 교섭
국 중 필리핀, 태국이 미국의 동맹국이며,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에는 영국군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도네시아는 새롭게 결성되는 ASEAN이 반공연합으로 비쳐질 것을 우려하
여 대외적으로 비동맹중립 성향을 표방했으며,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역내의 비동맹국인 버마,
캄보디아, 라오스의 가입실현에도 적극적이었다. 나아가 인도네시아는 일본, 호주, 뉴질랜드와
같은 역내선진국들의 거듭된 ASPAC 가입설득에도 불구하고 참가반대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2) 역외 강대국의 영향
앞서 봤듯이, ASPAC의 경우 미국의 측면적 지원이 회의개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주도국인 한국은
동북아의 반공의 보루로서 비동맹중립성향의 동남아 국가들에게 경원시되는 존재였으며, 60년대 중
반의 한국의 외교역량 또한 대규모 국제회의를 자국의 힘만으로 개최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반면 ASEAN결성은 역내 국가들의 주도에 의해 이루어 졌으며, 이 지역에 영향력을 가진 미
국과 영국과 같은 역외강대국의 개입은 배제되었다.18) 인도네시아는 동남아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인구, 국토, 자원 등의 측면에서 잠재적 역량을 가진 지역강국이었으며, 이러한 그
들의 저력은 역외 강대국의 지원없이도 역내 지역협력에서 리더 역할을 가능하게 했다.
17) 옵서버국가인 라오스와 전년에 수하르토 군부 우파정권이 들어선 인도네시아의 참가에 대해서는 긍정적
이었지만, 버마와 싱가포르의 참가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입장이었으며, 캄보디아, 파키스탄은 참가를 저지
시킨다는 입장이었다. ‘아주지역주재 대사회의 토의자료: 아세아태평양이사회를 통한 외교활동지침.’
외무부 아주국. 1966.6.21.『ASPAC 등에 관한 아주지역 공관장 회의. 서울, 1966.6.21.』 MF. C-0015(09).
외교부 외교사료관.
18) ASEAN 창설과정에서 있어 미국이 측면지원을 했다는 미국관여설이 일부에서 제기되기는 했지만 아직까
지 직접적 관여를 밝혀 줄 수 있는 미국의 내부문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山影進, “初期ASEAN再考-冷
戦構造下のアジア地域主義とASEAN”, 『国際政治』 第116号(日本国際政治学会, 1997), pp.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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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산권의 반응
ASPAC과 ASEAN 창설에 대한 공산권의 반응은 아주 비판적이고 냉소적이었다. 이들은 새로
운 지역협력기구의 결성을 SEATO의 연장선상에 있는 반공 군사블럭의 형성으로 인식하여 강
경반대의 입장을 천명하고 비난했다.19)
소련은 ASPAC 창설과 관련해서는 참가국의 대다수가 미국의 베트남 침략에 대해 군사원조를
제공하고 있는 국가라는 점, 그리고 미국의 베트남 개입에 가장 충실한 한국이 회의를 주도했다
는 점을 들어 “지역의 평화에 위협을 주는 블록형성 시도”라고 비난하였고, ASEAN 발족은
ASPAC과 같은 시도라는 입장과 함께 경제적 곤란상황에 처해 있는 인도네시아를 이용하여 중
립정책을 포기시키고 침략 블록에 관여시키는 것이 ASEAN의 진짜 의도라는 입장을 보였다.
공산중국은 ASPAC을 중국봉쇄정책의 일환으로 파악하여 미국이 일본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
치군사동맹을 결성하여 아시아에서 침략전쟁을 확대하려 한다고 비난하였고, ASEAN과 관련해
서도 미제국주의의 반중국 포위망 형성의 일환이라는 인식과 함께 인도네시아 군사정권이 미
국의 사주하에 결성한 반중국 반공조직이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이와 같은 공산권국가들의 비난들로 인해 양기구의 회원국들은 반공군사동맹이 아님을 강조
할 필요가 있었고, 정치 군사적인 색채를 완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경제사회문화 분야에서의 협
력을 적극 추진하게 된다.
(4) 상호간의 영향
ASEAN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ASA와 마필린도(MAPHILINDO: 1963년 인도네시아, 말레이
연방, 필리핀에 의해 결성) 의 기능부전은 ASPAC형성을 위한 한국의 주도적 노력에 동력이
되었다. 즉 ASA와 MAHILINDO와 같은 동남아의 소규모 지역협의체가 말레이시아 분쟁으로
인해 개점휴업상태에 빠지자, 한국정부는 이를 아시아 자유진영국가들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적기로 인식했다는 것이다.20)
한편 ASEAN결성에 있어 ASPAC이 미친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즉 66년 4월 일본 주도하
의 동남아시아개발각료회의의 개최, 그리고 같은 해 6월 한국의 주도로 개최된 ASPAC 개최
등과 같은 지역협력 움직임이 동남아시아에도 파급효과를 미쳐 이듬해인 67년 인도네시아 주
도에 의한 새로운 지역기구 설립움직임이 가속화 되었던 것이다.21)
뿐만 아니라 ASEAN은 1년 앞서 결성된 ASPAC이 공산권 국가로부터 반공동맹으로 간주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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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을 기울였지만, ASPAC의 제도화에 반대하는 일본 등의 회원국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한
국정부는 제3차 각료회의에서 채택된 공동성명에 7개항으로 구성되는 ASPAC의 행동강령을 포함시켜 동
기구의 목적과 원칙을 명확히 함은 물론 동 행동강령에 실질적인 헌장의 역할을 부여하려 했다. 외무부
아주국. “아시아태평양이사회 제3차 각료회의에 대한 우리정부방침.” 작성일불명. 『ASPAC각료회의, 제
3차 Canberra, 1968.7.30.~8.1(V.1 기본문서철)』 MF. C-0024(31). 외교부 외교사료관.
26) 대한민국 외무부, 『대한민국외교연표 1967』, 1968, pp.253~258.
27) 외무부장관이 주일대사에게 보내는 전문(WJA-07283) 1968년 7월 25일. 『ASPAC각료회의. 제3회.
Canberra. 1968.7.30.~8.1(V.1 기본문서)』. MF. C-0024(31). 외교부 외교사료관.
28) 주일대사가 외무부장관에게 보내는 전문(JAW-07329). 1968년 7월 24일. 『ASPAC각료회의, 제3회.
Canberra, 1968.7.30.~8.1(V.1 기본문서)』. MF. C-0024(31). 외교부 외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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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비교
1. ASEAN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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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ZOPFAN 선언 채택
동남아 중립화 구상은 영미 양국의 철수라고 하는 지역 안보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직면하여
ASEAN 국가들이 이에 대한 대응책을 모색하는 가운데 등장한 개념이다. 이 구상을 처음 제시
한 국가는 말레이시아였으며 1970년 라자크(Tun Abdul Razak)신정권이 등장한 이후 비동맹중
립 외교노선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69년 5월
말레이인과 화교간의 충돌을 중심으로 하는 폭동이 발생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라자
크 정권에게 있어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의미하는 중립화는 국내의 중국계 주민에 대한 회유책
이기도 했다.
말레이시아가 제시한 동남아 중립화 구상의 핵심내용은 다음과 같다.39) 우선 동남아의 역내
국가들이 주권과 영토보존을 상호존중한다는 기초하에 불가침을 지지하고 평화와 안전을 달성
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스스로 모색해야 하며, 나아가 역외 강대국인 미국 및 소련, 중국이
동남아의 불가침을 보장함과 동시에 중립유지를 위한 감독수단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레이시아가 중립화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ASEAN 회원국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SEATO의 회원국이기도 한 태국과 필리핀의 입장은 소극적이었다. 태
국의 경우 우방인 미국이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를 추진하고, 공산중국이 국내공산세력에 대
한 전복활동을 지원하고 있는 상황에서 역내 중립은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였다.40) 뿐만 아니
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역외강대국들로부터 중립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 내는 것에 대해서도
회원국 정상들은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말레이시아의 라자크 수상은 각론은 제쳐 두고 중립화라고 하는 큰 틀의
방향에 대해서 만이라도 ASEAN 회원국의 동의와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회원국을 직접 찾아가
는 방문외교를 통해 설득공작을 벌였다. 그 결과 라자크 수상은 회원국 정상들로부터 중립화에
대한 지지획득에 성공했고, 1971년 10월 유엔총회 출석을 위해 뉴욕에 와 있던 ASEAN 회원국
외상들이 회합하여 입장을 조율한 결과 11월 쿠알라룸푸르에서의 외상회의 개최에 합의를 보
았다.
11월 27일 개최된 쿠알라룸푸르 특별 외상회의에서 채택된 ‘쿠알라룸푸르 선언’은 중립
화가 바람직한 목표임을 확인한다는 내용의 전문과 2개의 조항(① 5개국은 동남아시아가 역외
구각의 어떠한 간섭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자유/평화/중립지대’로 인식되고 존중받도록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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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②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강화, 연대, 긴밀한 관계에 도움이 되는 협
력지대를 확대하기 위해 공동보조를 취해야 한다) 으로 구성된 아주 간결한 내용의 선언이었
다. 다시 말해서 ZOPFAN 선언은 동남아시아가 역외세력의 간섭을 받지 않으며 평화 자유 중
립지대로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다는 장기적인 목표를 결의하고 표명한 것에 지나지 않았
다.41) 하지만 이 선언은 동남아시아를 평화, 자유, 중립지대로 설정함으로써 외부세력의 간섭
으로부터의 자유를 유지할 것을 역내외에 선언하는 것이자 동시에 ASEAN이 대외적으로 공동
협력의 자세를 보인 최초의 사례로서 이후 ASEAN 회원국이 정치협력을 해나가는 데 있어 이
정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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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ASPAC의 대응45)
ASEAN이 지역안보정세의 급격한 변동에 대해 공동대응의 방침을 채택한 것과는 대조적으
로 ASPAC의 경우 회원국 간의 위기극복을 위한 공동대처방안을 둘러싸고 합의점을 도출하기
가 어려웠다 . 대만이 회원국으로 참가하고 있었던 만큼 말레이시아를 필두로 중국과의 관계개
선을 희망하는 회원국이 등장하면서 대만문제가 ASPAC 존속을 가로막는 최대의 문제로 등장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아래에서 보듯이, ASPAC의 미중데탕트에 대한 대응은 ASPAC결
성을 주도한 한국이 앞장을 서는 단독대응의 양상을 보이게 된다.
(1) 대ASEAN 접근
1972년 2월 닉슨의 중국방문 직후 ASPAC 재결속을 위해 한국정부가 마련한 방침은 ASPAC
의 성격을 경제협력체로 전환하는 것과 더불어 ASEAN과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었다. 사실 ASPAC과 ASEAN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는 1967년 ASEAN이 결성
될 당시부터 회원국의 관심을 모았던 문제였다.
하지만 ASEAN 창설 직후 열린 ASPAC 제2차 캔버라 상임위원회에서 ASEAN의 참가국인 필
리핀, 말레이시아, 태국 대표들이 ASEAN의 목적과 가능에 대해서 보고한 데 대해, 상임위원회
는 이 기구의 발족을 환영하고, 양 기구 간에 긴밀한 협력관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 캔버라에서 개최된 각료회의에서 채택된 공동성명에는 “각료들은 대략 비슷한 목적을 추
구하는 몇 개의 기관이 역내에 존재하는 것을 환영했다. 이들 기관의 참가국이 어느 정도 중복
한다는 사실은 상호간에 긴밀하고 조화로운 협력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점과 관련
해서 각료들은 ASPAC 상임위원회가 ASEAN의 창설을 정식으로 환영한 것에 유의했다.”라는
표현이 포함되었다. 즉 표면상으로는 양기구가 경합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하는 관
계이며, 긴밀하게 협력해 가야 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양 기구간의 협력 관계를 모색하는 움직임은 진전을 보이지 않았고, 각각 독자
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정부는 ASPAC과 ASEAN의 협력을 도모함으로써
양 기구에 동시에 가입하고 있으면서도 ASPAC보다는 ASEAN을 중시하는 국가들의 ASPAC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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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만탈퇴공작
대만 문제가 ASPAC 존속의 열쇠를 쥔다고 판단한 한국정부는 대만 탈퇴공작을 전개했다.
ASPAC해체가 그동안 쌓아온 대동남아 외교기반을 현저하게 약화시킬 것으로 인식하는 한국정
부에게 있어 ASPAC의 존속은 북한의 동남아 진출을 저지하는 방파제이며, 일본의 아시아 외교
를 견제할 수 있는 유효한 협의체였다. 또 전통적 우호국인 대만의 배제를 어쩔 수 없는 것으
로 간주하는 한국의 대 ASPAC 정책은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중국과의 국교회복을 서두를 것
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아시아에서의 고립, 즉 “제2의 대만”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고육책
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만 스스로가 ASPAC에서 탈퇴해 줄 것을 바라는 한국정부에 대해 대만
정부는 격렬하게 반발했다. 대만정부는 ASPAC 회원국 지위 문제를 중국 대표권에 관련된 문제
이며, 자국의 사활적 이익을 위협하는 문제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 우호국인 한국마저도 중
국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하는 상황에서 중국의 ASPAC 참가라는 최악의 사태를 저지하기 위해
서도 ASPAC 탈퇴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대만의 자진탈퇴를 유도하여
ASPAC의 존속을 도모하려 한 한국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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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연구 제18집 1호, 2015
[1차자료]
□ 한국: 외교부 외교사료관
『아세아태평양이사회(ASPAC)창설계획1963~65』. MF. C-0010(22).
『ASPAC창설 예비회담. 제2차. Bangkok. 1966.4.18.~20』. MF. C-0014(1783).
『ASPAC각료회의. 제1차. 서울. 1966.6.14.-16. 전8권(V.3 보고서)』. MF. C-0015(03).
『ASPAC 등에 관한 아주지역 공관장 회의. 서울, 1966.6.21.』. MF. C-0015(09).
『ASPAC각료회의, 제3차 Canberra, 1968.7.30.~8.1(V.1 기본문서철)』 MF. C-0024(31).
『ASPAC각료회의, 제7차. 서울, 1972.6.14.-16(V.3 참가국별 교섭: 말레이시아-월남)』 MF.
C-0053(04).
□ 미국: National Archives Ⅱ, College Park, Maryland. [NA]
Records of the Department of State, Record Group 59
Subject Numeric Files, 1964-1966
□ 일본: 外務省 外交史料館
外務省情報公開請求文書
開示請求番号: 2008ー00345,2006ー01247,2006ー0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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歴史資料としての価値が認められる開示文書
開示文書番号: 04-1100, 04ー1037ー2
[2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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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자료]
http://www.asean.org/news/item/the-asean-declaration-bangkok-declaration(검색일:2015.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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