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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체육학회지, 2023, 제62권 제6호, 17-31 The Korean Journal of Physical Education, 2023, 62(6), 17-31

https://doi.org/10.23949/kjpe.2023.11.62.6.2 ISSN 1738-964X(Print) / ISSN 2508-7029(Online)

경영(京永) 단축마라톤대회(1931~1963)의 변천 과정
The Evolution Process of the Gyeong-Yeong Short Course Marathon(1931~1963)
김재우 중앙대학교 교수ㆍ하정희 순천향대학교 교수ㆍ왕심위* 중앙대학교 대학원생
Kim, Jae-Woo Chung-Ang Univ.ㆍHa, Jung-Hee Soonchunhyang Univ.ㆍWang Xinyu Chung-Ang Univ.
요약
본 연구는 경영 단축마라톤대회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첫째, 대회 창설 당시 한국 마라톤의 환경은 어떠하였는지,
둘째 대회의 창설과정과 주최 및 후원의 변화는 어떠하였는지, 셋째 대회의 참가자 현황, 코스와 기록 등은 어떻게 변화하
였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일제강점기하 규모가 있는 마라톤대회는 일본인 단체에 의해 주최되었고, 이 대회에는 조선인
과 일본인이 공동으로 참가하였다. 대회의 참가자는 회수를 거듭하면서 확산하는 추세를 보였고, 경성에서 지방으로 확산
하여 전국규모의 대회로 발전되었다. 제1회부터 제6회 대회까지의 경기기록은 자주 이루어진 코스의 변경으로 인해 기록
을 비교하기 어렵다. 다만 코스가 거의 확정된 제7회 대회부터 기록은 단축되었다. 광복 이전에는 김은배, 손기정, 남승룡
등이 그리고 광복 이후에는 서윤복, 함기용, 황영조, 이봉주 등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대회에 참가하여 좋은 성적을
내기도 했다.

주요어: 단축마라톤, 고려육상경기회, 조선체육회, 동아일보

Abstract
This study focuses on examining the changes in the Gyeong-Yeong Short Course Marathon. Firstly, it investigates the
context of the Korean marathon at the time of the competition's establishment. Secondly, it delves into the process of
the competition's creation and changes in its organization and sponsorship. Thirdly, it analyzes the participant
demographics and course variations and records developments for the competitio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significant marathon competitions were organized by Japanese groups, with both Joseons and Japanese participating
together. The number of participants in these competitions increased over time, spreading from Gyeongseong to
various regions, eventually evolving into a nationwide event. The race records from the first to the sixth competitions
are challenging to compare due to frequent changes in the course. However, the records improved from the seventh
competition when the trail became more stable. Before Korea's liberation, notable athletes such as Kim Eun-bae, Son
Ki-jung, and Nam Seung-ryong, among others, participated in the competition and achieved commendable results. After
independence, athletes like Seo Yun-bok, Ham Ki-yong, Hwang Young-jo, and Lee Bong-joo, who represented Korea,
also participated and performed well in the competition.

Key words: Short Course Marathon, Goryeo Athletic Association, Joseon Sports Association, Dong-A Ilbo

* wangxy1993@cau.ac.kr
Copyrightⓒ2023 KAHPERD
18 한국체육학회지 제62권 제6호

서론 혹은 ‘산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동아일보,


1998. 3. 6). 하지만 이 한국 최고의 연륜과 전통을 자
랑하는 동아마라톤대회가 처음부터 동아마라톤대회라
한국 육상경기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마라톤을
는 이름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동아마라톤대회’라
대표종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한
는 이름으로 개최된 것은 1964년 제35회 대회부터였
국의 마라톤을 말하면, 1936년 베를린올림픽대회에서
고(동아일보, 1964. 3. 12), 그 이전에는 ‘경영(京永) 단
손기정이 전인미답이었던 2시간 30분의 벽을 넘어 동
축마라톤대회’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다.
양인 최초의 올림픽 마라톤 우승이라는 기념비적인
위업이 떠오른다. 동아마라톤대회의 전신인 경영 단축마라톤대회(이
광복 이후 국제마라톤 무대에서 한국 마라토너가 후 경영단축마라톤)는 1931년 3월 21일 제1회가 개최
세운 첫 쾌거는 1947년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서윤복 되었다. 동아일보사가 있던 광화문에서 영등포 간을
의 우승이었다. 그리고 3년 후인 1950년 제54회 보스 왕복하는 대회로, 조선인 체육단체가 주최하고 후원하
턴마라톤대회에서는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각각 1, 였으며 조선인 선수만이 참가하는 대회였다. 경영단축
2, 3등을 차지하면서 한국 마라톤의 저력을 세계만방 마라톤은 일제강점기하 일본으로 압박을 받던 당시
에 과시했다. 또한 황영조는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조선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었던 민족의 행사
대회에서 2시간 12분 23초의 기록으로 우승함으로써 였다(동아일보, 1959. 4. 17). 그리고 광복 초기에는 한
다시 한번 세계에 한국 마라톤의 우수성을 알렸다. 국 마라톤 중흥의 견인차로서 수많은 우수선수를 배
이후, 현재 2시간 7분 20초로 한국 신기록을 가지 출해 한국 마라톤의 위상을 굳건히 지켜 왔다(동아일
고 있는 이봉주, 2010년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 마라 보, 1996. 3. 24). 따라서 1931년부터 1963년까지의 경
톤 우승자 지영준 등 수많은 엘리트 마라토너들이 한 영단축마라톤을 연구하는 것은 한국 마라톤의 역사를
국 마라톤을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하면서 마라톤 강 연구하는 데 있어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국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리고 여자마라톤의 경우 역 있다.
사는 짧지만, 임은주, 권은주, 이미옥, 이은정 등도 국 그렇다면 경영단축마라톤은 어떻게 창설되고 어떠
제마라톤 무대에서 활약하였다. 한 과정을 겪으면서 꾸준히 개최되고, 발전해왔는가?
이상과 같은 찬란한 업적의 주인공에게는 공통된 체육사와 관련된 한국 마라톤의 선행연구를 살펴보며,
특징이 하나 있다. 이들 모두 동아마라톤대회를 거쳐 손기정의 생애와 사상,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이 한국
국제 마라톤대회로 진출하였다는 점이다. 민족에게 미치는 역사적 의의 등을 고찰하는 연구(정
한국의 마라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동아마라 찬모, 1997; 황영조, 1998; 김기한, 2004; 손환, 2004;
톤대회는 매년 봄에 열리고 있으며, 많은 한국 마라 곽형기·이현정, 2009; 하정희, 2012; 손환·하정희,
토너들이 이 대회에 참가하여 한국 신기록을 기록하 2013; 김명권, 2013; 허진석, 2014 등)가 가장 큰 비중
였고, 더 나아가 세계무대로 진출하였다. 대한육상연 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서윤복(임석원·조문기, 2009;
맹은 이러한 동아마라톤대회를 공식 국가대표 선수 조문기, 2012), 권태하(권오륜·한동일·남중웅, 2016;
선발전으로도 활용하였다(김세호, 2006: 39). 특히, 한 박귀순, 2016), 남승용(이상우, 2010), 류해붕(안진규,
국 민족이 힘들었던 IMF시절에 동아마라톤대회는 단 2020)의 생애와 체육활동에 관한 연구도 이루어졌다.
순히 마라토너들만이 참석하는 스포츠 행사가 아닌 그리고 경영단축마라톤의 후신(後身)인 동아마라톤대
국민적 화합과 사랑의 실천을 목표로 한 문화체육축 회 특히, 2000년 이후 동아마라톤대회의 개최 양상,
전으로 승화되었다(동아일보, 1998. 3. 30). 대회 기록, 국내·외적 위상 등에 관한 연구(남상남·
이러한 동아마라톤대회는 2023년 3월 19일까지 총 어경태, 2018; 김영희, 2014)도 있다. 한편, 신문학 영
93회가 개최되었다. 동아마라톤대회는 기록과 순위를 역의 선행연구로는 동아마라톤대회가 주최 측인 동아
가리는 경주만은 아닌 한국 마라톤의 ‘살아있는 역사’ 일보사의 발행 부수와 수입 창출에 미친 영향에 관해
경영(京永) 단축마라톤대회(1931~1963)의 변천 과정 19

살펴본 연구가 있다(박관용, 1996). 두를 독차지했다(동아일보, 1920. 5. 17).


이상과 같이 마라톤의 역사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 1920년 마라톤이 공식 종목으로 채택되기 이전, 조
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경영단축마라톤에 관해 선에서는 대운동회의 한 종목으로 개최되는 등 인기
서는 제1회 대회의 개최 시기, 주최기관 등에 관한 를 끌고 있었다. 한 예로, 1917년 4월 8일 부산일보사
연구에 머물러 있다. 가 개최한 연합대운동회에서는 36명의 선수가 참가한
따라서 기존의 선행연구로는 경영단축마라톤의 창 가운데 ‘마라톤경주’가 열렸다. 36명의 선수 중, 일본
립과 변화 과정 등을 밝히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부 인이 대부분이었으나 조선인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분이 많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경영단축마라톤의 변 (부산일보, 1917. 4. 8). 그리고 마라톤은 기념일을 기
천 과정을 규명하기 위해 첫째, 대회 창설 당시 한국 리는 행사로도 개최되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1918년 4
마라톤의 환경은 어떠하였는지, 둘째 대회의 창설과정 월 원산에서 개최된 원산항 개항 기념 마라톤대회였
과 주최와 후원의 변화는 어떠하였는지, 셋째 대회의 다(매일신보, 1918. 4. 28).
참가자 현황, 코스와 기록 등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공식 종목으로 마라톤을 개최한 조선체육협회는
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1921년 3월, 극동올림픽대회 파견 육상경기회에서 10
본 연구에서는 연구과제를 규명하기 위해 부산일 마일 마라톤 경기를 개최하였고(매일신보, 1921. 3.
보,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매일경 11), 1922년 6월 11일 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는 마라
제신문 등의 신문, 동아일보사 발행 서적 등의 단행 톤을 종합경기대회의 일부 경기가 아닌 단일 경기대
본을 기초 사료로 이용하였다. 회로 ‘東亞마라손大會’를 개최하기도 했다(매일신보,
본 연구는 경영단축마라톤이 창설하는 시기의 한국 1922. 6. 3). 특히, 경성 협찬회(協贊會)는 ‘전조선마라
마라톤의 시대적 상황에서 33년간 개최된 대회의 변 톤경쟁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대회에는 130여 명의
천 과정 즉, 대회의 주최 및 후원 기관, 경기 코스, 선수2)들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매일신보,
출전 선수 및 대회 기록을 규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1923. 10. 21).
일제강점기와 광복 초기 한국 마라톤 연구의 기초 자 한편, 1924년에는 조선인 체육단체에 의해 마라톤
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마라톤대회를 대 이 개최되기 시작했다. 1924년 6월 15일, 대한체육회
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종목사 특히 육상사 연 의 전신인 조선체육회(朝鮮體育會)가 제1회 전조선육
구에도 일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상경기대회에서 15마일 마라톤경주를 개최한 것이다.
이 마라톤경주는 오후 2시 35분 80여 명의 선수가 참
가한 가운데 시작되었으며, 강찬격, 최경낙, 안진규가
일제강점기하의 조선 마라톤대회 각각 1등과 2등 그리고 3등을 차지했다(동아일보,
1924. 6. 17).
한국에서 마라톤이 하나의 공식 종목으로 채택된 이상과 같이 1924년까지 한국에서 개최된 마라톤
것은 1920년 5월 16일 용산 신(新) 연병장에서 거행된 경기는 10마일 혹은 15마일 마라톤 즉 단축마라톤 경
조선체육협회(朝鮮體育協會) 주최 제1회 조선육상경기 기였다. 그리고 한국에서 풀코스 마라톤이 처음 개최
대회부터이다(박종진, 2013: 21). 경성 10마일을 일주 된 것은 조선신궁경기대회(朝鮮神宮競技大會)에서였다.
(一週)하는 이 대회에는 100여 명의 선수가 참가했는 조선신궁경기대회는 일본인 체육단체였던 조선체육
데, 조선인 선수들이 각각 1, 2, 3착1)을 함으로써 선
은 일본인 선수가 차지하였다(동아일보, 1920. 5. 17).
1) 1등을 한 최흥석 선수는 마루니샤(丸二社)의 인력거부(人力車 2) 이 대회는 소인조(素人組)와 직인조(職人組)로 나뉘어 대회가
夫)였으며, 기록은 1시간 11분 27초이었다. 2등은 오사카지보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소인(素人)’은 직업이 없는 순수한 아마
샤(大阪時報社)의 배달원으로 기록은 미상이다. 3등은 동아경계 추어를 의미하며, ‘직인(職人)’은 인력거를 모는 사람, 신문 배
사 배달원인 김일만 선수가 했는데 기록은 미상이다. 4착, 5착 달부 등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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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회에 의해 개최된 대회이다. 1925년 10월 조선체육 주(長距離競走)는삼일정오부터 거행하얏는바 참가학교


협회는 조선신궁(朝鮮神宮) 진좌제(鎭坐祭)의 봉축과 는 십팔교이며 경성인천간을 륙구로 난호아각학교에
경성운동장 개장을 기념해 제1회 조선신궁경기대회를 서 선수륙명식이 참가하얏느대 뎨 일착의 우등은 두
시사십분으로 배재고등보통학교에 도라갓는바도착 순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는 학생은 물론 조선 각지의
서대로긔록하면 아래와갓흐며 상은오등까지 주엇는대
청년단체 등 일반 남녀들이 총출동하는 조선 운동계
오등의걸닌시간은 두시사십오분이며 제일느진사람은
미증유의 대규모 대회로, 본 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들
삼십팔분이라더라.
은 명치신궁경기대회(明治神宮競技大會)의 조선 대표
로 파견되었다(손환, 2003: 18-19). 이후 1925년 5월 16일 두 번째 경인역전경주가 조
이러한 조선신궁경기대회 육상경기의 한 종목으로 선일보사 주최로 개최되었으며, 조선체육협회는 1930
풀코스3) 마라톤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27년 제3회 대 년부터 3년간 정기적인 경인역전경주대회를 개최하였
회부터이다. 이때 한국 최초의 풀코스 마라톤 기록이 다. 그리고 마라톤 전성기인 1934년부터 1942년까지는
공인되었는데, 우승을 차지한 마봉옥 선수가 세운 3 전조선육상경기연맹이 이 대회를 주최하였다(대한육
시간 29분 37초이다(조선일보, 1927. 10. 19). 상경기연맹. 2013: 171-172).
한편, 마라톤과 관련된 경기종목 중 하나인 역전경 이상과 같이 1920년 이전 한국에서의 마라톤은 단
주대회(驛傳競走大會)가 조선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축마라톤을 중심으로, 운동회의 한 종목 혹은 기념행
역전경주는 각 주자가 담당 구역을 달리면 중계소에 사로서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1920년 일본인 체육단
서 다음 주자가 배턴을 받아 들고 달리는 경주를 말 체인 조선체육협회에 의해 첫 공식 경기가 개최된 이
한다. 후에는 육상경기대회의 한 종목으로 이루어졌고, 1922
일본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 역전경주대회는 1923 년부터는 단일경기 대회로 개최되기 시작했다. 이 시
년 6월 3일 경성일보사가 ‘경성-인천 간 리레이 장거 기의 마라톤대회는 주로 일본인에 의해 개최되었으며,
리경주대회’라는 이름으로 역전경주대회를 개최하면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참가하였다. 그리고 첫 풀코
서 조선에서도 첫선을 보였다. 18개 중학교 선수가 스 마라톤은 1927년 제3회 조선신궁경기대회의 육상
경성부청 앞에서 시작하여 인천 해안가의 전 세관 앞 경기에서 개최되었고, 마라톤과 관련된 경기종목 중
까지의 거리를 6개 구간으로 구분하여 1개 팀 6명씩 하나인 역전경주대회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의 선수가 역주하였는데, 한강 인도교의 준공을 기념
하는 행사였다. 당시 기차로 1시간 30분이 소요되었
는데, 제1착을 한 배재고등보통학교 팀의 기록은 2시
간 41분4)이었다. 당시 1923년 6월 4일 자 동아일보는 대회 창설과 주최 및 후원의 변화
최초의 역전경주대회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 대회 창설 주최와 후원
경성일보사 주최로 경성인천간 『리레이』장거리경
조선에서 마라톤과 역전경주대회의 인기가 높아지
3) 첫 풀코스 마라톤은 경성운동장에서 동대문, 청량리로 해서 망
던 1931년 3월 21일, 제1회 경영단축마라톤이 개최되
우리 고개 밑에서 되돌아 동대문에서 종로, 의주로를 거쳐 신
용산 전차 종점(현 용산역 전)에서 서울역을 지나 한국은행 앞 었다. 이 대회를 주최한 단체는 고려육상경기회(高麗
을 통과, 을지로입구에서 광화문(을지로 7가)을 거쳐 왕십리 초 陸上競技會)였다.
등학교 앞에서 다시 되돌아 또다시 광화문을 통과, 경성운동장
에 귀환하는 코스였다(김세호, 2006: 22). 대회를 주최한 고려육상경기회는 1929년 6월 28일
4) 대한육상경기연맹이 출판하는 한국육상경기 100년사라는 책에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회관에서 창립총회를
는 우승한 배재고보의 기록을 2시간 41분(대한육상경기연맹.
2013: 171)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동아일보 1923년 6월 4일 자
개최하고 발족하였다(동아일보, 1929. 7. 2). 중학을 졸
기사에는 2시간 40분(동아일보, 1923. 6. 4)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영(京永) 단축마라톤대회(1931~1963)의 변천 과정 21

업한 선수5)들이 중심으로 되어 발족한 이 단체의 창 창립 이후 조선체육회는 새동무사 주최 ‘소년야구


립 목표는 경성에 있는 조선인 육상경기에 대한 연구 대회’(1921), 경성일보사 주최 ‘전선전문학교야구대
(동아일보, 1929. 7. 2)와 지도 및 장려, 그리고 조선인 회’(1924), 동아일보사 주최 ‘미국여자야구단과 서울군
선수 상호 간의 연락 및 친목(조선일보, 1933. 4. 27)을 대항전’(1925) 등 다양한 경기대회를 후원했다. 따라서
도모함에 있었다. 즉, 고려육상경기회는 조선인 육상 조선체육회와 목적과 사업 규정에 부합했기에 조선인
경기 발전과 육상인들의 친목을 위해 창립한 것이다. 이 주최하는 마라톤대회를 후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
창립 이후, 고려육상경기회는 독일 육상선수와 조 이었을 것이다. 또한 1931년부터 1936년까지 6년간
선인 선수 간의 대항 경기를 계획6)하는 한편, 국내에 고려육상경기회의 회장을 역임하고 있던 유억겸이 조
서 개최되는 육상경기대회의 심판을 담당7)하는 등 활 선체육회의 부회장, 총무부 부장 등의 직무를 담당하
발하지는 않지만, 꾸준히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고 있었다는 점도 경영단축마라톤을 후원하는 데 일
고려육상경기회는 창립된 지 3년 만에 첫 사업으로써 정 정도 역할을 했을 것이다.
경영 단축마라톤을 주최하였다. 1931년 3월 15일 자 한편, 동아일보사는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을 자임
동아일보는 ‘來廿一日에擧行될 마라손競走大會’라는 함’, ‘민주주의를 지지함’, ‘문화주의를 제창함’을 창간
제목으로 제1회 경영단축마라톤의 개최에 대해 다음 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이해창, 1971: 74-76). 이러
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한 동아일보사의 창간 정신은 문화사업 전개에 영향
을 미쳤고, 1920년대 초창기의 문화사업은 민족적 단
봄이다. 스포ㅡ츠의 봄이다. 양춘이 따스하니 거리 결과 협동 정신을 키워 상부상조(相扶相助)하는 관습
에는 「런닝」하는 선수들의 련습의 용자가 가한 겨을 을 조장했고 젊은 기상을 위해 체력의 단련, 풍부한
동안 주리든 행인의 눈을 힘잇게 이끈다. 정서의 육성에 힘썼다(동아일보사사편천위원회, 1975:
一九三一년 운동경기계의 첨단을 대표하여 고려륙
186. 박관용, 1996: 31-32). 특히, 창간 후 동아일보는
상경기회가 창립된지 三년만에 그 첫 사업으로 京城-
체육 사업에 많은 노력과 투자를 기울였다.
永登浦간 왕복 十四마일 三八분의 제一회 마라손경주
창간 초기 동아일보사가 후원한 스포츠대회를 살펴
회를 조선체육회와 본사 후원으로 래二十一일 공휴일
을 택하야 거행하기로 하엇다. 보면, 1921년에는 동경유학생야구대회, 조선체육회 주
최 전조선정구대회와 전조선야구대회, 1923년에는 연
한편, 이 대회의 후원사는 조선체육회와 동아일보 희전문 주최의 중등육상경기가 있었으며, 주최한 스포
사였다. 츠대회로는 1922년에는 전조선여자여정구대회 등이
주지하는 바와 같이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 있었다.
회는 ‘조선인의 체육을 지도 장려함’을 목적으로 1920 이처럼 동아일보는 문화사업으로서 젊은 기상을 위
년 7월 13일 창립하였다. 그리고 조선체육회는 ‘체육 한 체력의 단련을 목적으로 다양한 스포츠대회를 후
에 관한 각종 경기대회의 주최와 후원’을 주요 사업 원, 주최하였다. 특히, 동아일보를 창간한 김성수는
중 하나로 규정하고, 사업을 진행하였다. 조선체육회의 창립 발기인으로 조선체육회와 깊은 관
계를 맺고 있었기에 당시 조선 체육의 중심 역할을
5) 고려육상경기회의 임원은 주흥근, 최경낙, 노좌근, 마봉옥, 김동 담당했던 조선체육회의 사업에 더욱더 적극적이었다.
근, 박충근, 최희원, 화대선, 유악한, 곽석근, 이정상 등이었다
(동아일보, 1929. 7. 2). 이에 동아일보가 조선체육회와 함께 고려육상경기회
6) 고려육상경기회는 일본을 방문하는 독일 육상선수들을 조선에 가 주최하는 경영단축마라톤을 공동으로 후원하거나,
초청하여 조선인 선수들과 대항경기를 개최하고자 계획하고,
재경독일유학생구락부 등과 접촉하였다(조선일보, 1929. 8. 14).
조선체육회가 고려육상경기회와 함께 공동으로 주최
그러나 이유는 확인할 수 없으나 계획은 실천으로 옮겨지지 할 때 동아일보사가 이를 후원하는 것은 그다지 놀라
못했다.
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7) 고려육상경기회는 1930년 11월 15일 개최된 제1회 사립전문학
교 육상경기대회에서 심판을 담당하였다(동아일보, 1930.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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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회 주최와 후원의 변화

제1회 대회부터 제6회 대회까지 대회의 주최와 후


원에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1937년 제7회 대회 때
개최와 후원에 변화가 발생했다. 후원에서 동아일보사
가 빠진 것이다. 이는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인해 동아일보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간 처분을 받았
기 때문이다. 그 기간은 1936년 8월 29일부터 1937년
6월 3일까지였다. 따라서 1937년 3월 21일에 열린 제7
회 대회에는 후원사로 참가할 수 없었다.
1938년 3월 19일 개최된 제9회 대회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전년과는 달리 조선체육회가 대회 후원사에
서 빠지고, 동아일보가 다시 후원사로 들어온 것이다.
정간 처분에서 벗어난 동아일보가 다시 대회의 후원
을 맡은 것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나, 왜 조선체육
회가 후원에서 빠졌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한편, 제10회 대회부터 주최와 후원에 있어 매우 그림 1. 제10회 대회 광고
큰 변화가 발생했다. 기존의 주최자였던 고려육상경기 출처: 동아일보, 1939. 3. 5

협회 대신 후원사였던 동아일보사가 주최자가 되었고,


전조선육상경기협회(全朝鮮陸上競技協會)가 후원을 담 고 있다.
당하게 된 것이다. <그림 1>은 1939년 제10회 대회의
광고문이다. (전략) 이대회는 작년九회까지고려육상경기협회(高
이와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조선인 체육단체에 대 麗陸上競技協會)주최와 조선체육회(朝鮮體育會)본사공
동후원으로 거행되어오던바 작년체육단체통제로 말미
한 조선총독부의 식민주의적 정책이 있다.
암아 전기양주최, 후원단체가 해산하게되어 금년제十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조선총독부는 국가총
회대회때부터는이의의깊은 대회를 본사에서인게주최
동원법(國家總動員法) 실시에 따른 1938년 7월 7일 국
하기로 되엇다. (후략)
민정신총동원연맹(國民精神總動員聯盟) 조선지부의 설
립에 앞서, 총독부 관리와 조선체육협회 간부들을 동 이후, 이러한 주최와 후원은 1940년 제11회 대회까
원하여 ‘체육 기관의 일원화’라는 미명 아래 조선체육 지 지속되었고, 동아일보의 주최는 광복 이후 1954년
회를 조선체육협회에 흡수·통합시키고자 했다(이학 제25회 대회부터 경영단축마라톤이 막을 내리는 1963
래, 2000: 271). 이에 1938년 7월 4일 조선체육회는 조 년 제34회 대회까지 계속되었다. 다만, 서울시 육상경
선체육협회로 통합되면서 해산되었다(동아일보, 1938. 기연맹과 대한육상경기연맹이 주관과 후원을 담당하
7. 5). 그리고 조선체육회뿐만 아니라 고려육상경기협 는 등 변화를 보였다. <표 1>은 경영단축마라톤의 주
회를 포함한 총 90여 개의 체육단체도 ‘조직체가 불 최와 후원의 변화를 나타낸 것이다.
완전하며 내용이 빈약한 체육단체’로 규정되어 조선
체육협회에 통합되었다(조선일보, 1938. 5. 12). 이 때
문에 1939년 제10회 경영단축마라톤은 동아일보사에
8) 제8회 대회는 1938년 개최되었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동
서 인계 주최하기로 되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동아
아일보의 착오로 1938년 개최된 대회를 제9회로 계산하였고,
일보 1939년 2월 19일 자 보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 이것이 지속적으로 고착화되었다.
경영(京永) 단축마라톤대회(1931~1963)의 변천 과정 23

표 1. 경영단축마라톤의 주최 및 후원의 변화

개최회수/연도 주최, 주관, 후원 단체


제1회(1931)~제6회(1936) 주최: 고려육상경기(협)회; 후원: 조선체육회, 동아일보
제7회(1937) 주최: 고려육상경기(협)회; 후원: 조선체육회
제8회8) -
제9회(1938) 주최: 고려육상경기(협)회, 조선체육회; 후원: 동아일보
제10회(1939)~제11회(1940) 주최: 동아일보; 후원: 전조선육상경기협회
제12회(1941)~제24회(1953) -
제25회(1954)~제26회(1955) 주최: 동아일보사, 서울시 육상경기연맹
제27회(1956) 주최: 동아일보; 주관: 서울시 육상경기연맹
제28회(1957) 주최: 동아일보; 주관: 서울시 육상경기연맹; 후원: 대한육상경기연맹
제29회(1958)~제32회(1961) 주최: 동아일보; 주관: 서울시 육상경기연맹
제33회(1962)~제34회(1963) 주최: 동아일보; 주관: 대한육상경기연맹
출처: 동아일보 및 조선일보 등의 신문보도를 통해 구성

대회의 변화 과정 일보, 1932, 3. 21). 제1회 대회와 비교하여 약 두 배


의 선수들이 참가하면서 양적으로 증대했음을 알 수
있으며, 특히 참가자들의 지역이 제1회 대회보다 확
1. 참가선수의 변화
대되었다.

동아일보는 제1회 대회의 ‘참가 신청’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參加를 申請한選手中에서 第一異彩를 띄
“참가신청은 래十九일까지 본사 운동부로 회비十五전
울것은 江華島에서 丁氏의 三兄弟가 出戰케된것이며
에주소, 년령, 직업 또는소속단체등을명긔하야 보내주
멀리는 新義州와 江原道에서 參加된것이다(동아일보,
기를 바란다”(동아일보, 1931. 3. 15)는 기사를 실었다. 1932. 3. 17).
이 기사 내용을 통해 15전의 회비를 내면 누누나 참
가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제2회 대회부터 경성을 비롯한 신의주와 강원
제1회 대회에는 양정고등보통학교 6명의 선수를 비 도 등지에서 선수들이 참가하면서 출신 지역이 확대
롯하여 당시 ‘마라톤왕’으로 정평이 나 있던 이성근과 된 것이다.
장거리 기록보유자인 진남포의 변룡환 등 총 14명9)의 제3회 대회에는 전년보다 2명이 늘어난 33명의 선
선수가 참가했다. 첫 대회의 참가자 수가 14명으로 수가 참가했다. 지역적으로는 경성을 비롯하여 멀리
비교적 적었는데, 대회가 개최되었던 3월이 학교 진 황해도 장연으로부터 해주, 개성, 양주 등 여러 지역
급과 졸업, 입학시험을 앞둔 시기였기에 학생 선수의 에서 선수가 참가함으로써 지역이 다양화되었다. 그리
참여가 저조했기 때문이었다(동아일보, 1931. 3. 21). 고 참가선수의 평균 연령은 22세였으며, 최저 16세부
1932년 개최된 제2회 대회에는 1회 대회의 우승자 터 최고 27세의 선수가 참가했다(동아일보, 1933. 3. 21).
인 김은배를 비롯하여 31명의 선수가 참가했다(동아 제4회 대회는 멀리 개성, 충주, 공주 등지에서 39
명의 선수가 참가하면서 전에 없는 성황을 이루었다
9) 제1회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는 양정고보의 金恩培, 趙寅相, 柳海 (동아일보, 1934. 3. 20a). 선수 중에는 작년 대회 우승
鵬, 咸炳文, 金珍培, 金正福, 총독부의 崔慶洛, 진남포의 邊龍煥,
백마구의 李成根, 그리고 소속불명의 吳登伊(교원), 朴明鉉(무직), 자인 양정고등보통학교의 손기정을 비롯해 경성-해주
朴永大(철공), 崔仁植(학생), 黃慈龍(우체국) 등 총 14명이었다 간 내한(耐寒) 마라톤에 성공한 유장춘, 작년 풀코스
(동아일보, 1931. 3. 21).
24 한국체육학회지 제62권 제6호

마라톤 대회 우승자 김성학 등이 참가했다. 특히, 개 수 있도록 참가 자격도 완화하였다. 그 결과, 제10회
성에서 참가하는 19세의 박승준, 장주형, 백연패 등은 대회에는 전남 순천을 비롯하여 평남 순안 등 49명의
마라톤으로 경성에 도착하는 진귀한 모습을 연출하기 선수가 참가 신청을 하였다(동아일보, 1939. 3. 21). 그
도 했다(동아일보, 1934. 3. 20b). 특히, 제4회 대회에 러나 제10회 대회에 출전한 실제 선수는 총 23명이었
서는 선수들의 참가를 독려하기 위해 참가선수에게 다. 그 이유는 지방 선수들이 전부 기권하였으나 경
특제 참가 메달을 제작하여 증정하기도 했다. <그림 성의 유명 선수들이 경인 역전경주대회를 위하여 이
2>는 1934년 제4회 대회 때 증정한 참가 메달이다. 번 대회에 출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조선일보, 1939.
1935년 제5회 대회에는 40여 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3. 22). 따라서 대회의 침체 상황은 제10회 대회까지
예년과 비슷한 경향을 보였다(동아일보, 1935. 3. 18).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36년 제6회 대회에는 예년과 비교해 10여 제11회 대회는 동아일보사 창간 20주년 기념행사로
명 적은 29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예년에 비해 참가 서 ‘마라손에 新人은 나오라!’, ‘마라손王을 길러내는
선수가 줄어든 이유에 대해 명확하지는 않다. 다만, 京永斷郊大會’라는 보도들을 통해 ‘마라톤 왕’이 되고
대회 일주일 전인 1936년 3월 29일 서울육상연맹이 싶은 유명한 선수들의 참가를 호소하였다. 특히, 동아
주최하는 제12회 ‘A마라손’대회10)(동아일보, 1936. 3. 일보는 2주간 이 대회와 관련된 신문보도를 7편 게재
29)에 다수의 선수가 참가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하였는데, 이는 1939년 제10회의 2주간 4편의 보도
수 있다. 빈도보다 훨씬 높은 것이었다. 이러한 동아일보의 노
고려육상경기협회와 조선체육회가 공동 주최한 제7 력으로 제11회 대회의 신청자는 42명에 달하였다(동
회 대회에는 30여 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지난해와 비 아일보, 1940. 3. 21).
슷한 면모를 보였다. 이에 1939년 제10회 대회에서 광복 이후, 대회가 사라진 지 10여 년 만인 1954년
주최 측은 선수들의 부진한 참가를 만회하고자 등록 부활하였다. 당시 국제무대에 좋은 성적을 내고 있던
비 50전을 취소하는 한편, 아마추어 규칙에 위반되지 한국 마라토너의 영향으로 마라톤 경기의 인기는 매
않는 남자면 누구라도 참가(동아일보, 1939. 2. 19a)할 우 높았다. 따라서 부활된 제25회 대회의 신청자는
광복 이전의 대회보다 40여 명이 늘어나 73명에 달하
였다. 특히, 이번 대회부터 군인 선수들이 국군체육회
를 통하여 신청하여 대회 참가하기 시작하였다(동아
일보, 1957. 4. 19).
제34회 대회 때까지 10년 동안 대회에 참가하는 선
수의 수는 완만한 증가세를 나타냈다. 또한, 이 10회
대회의 참가 선수를 분류하면, 전국각지의 중⋅고등학
교, 대학교를 비롯하여 군인과 일반 선수 등으로 나
눌 수 있다. 아쉽게도 유명 선수들은 해외 대회11) 출
전하는 이유로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였다(동아일보,
1959. 4. 19). 특히, 제32회 대회의 경우, 이상철12) 선
수를 제외하면 모두가 무명의 신진 선수들이었다(동
그림 2. 제4회 대회 때 특제 참가메달
출처: 동아일보, 1934. 3. 20.
11) 1950년대의 유명 마라톤 선수들은 3, 4월에 보스턴마라톤대회
10) 1935년 2월부터 서울육상경기연맹에서는 장거리 선수들의 실 를 비롯한 세계급 마라톤대회, 그리고 중국과 일본 등 인근
력증진을 목적으로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A마라손’대회가 개 나라들에 개최되는 육상경기와 단일 마라톤대회를 자주 참가
최하기로 되었다. 코스는 광화문 4거리를 출발점으로 한강제 하였다.
1인도교 종점으로 왕복 8리이다(조선일보, 1935. 2. 21). 12) 이상철 선수는 1960년 로마올림픽대회를 참가하였다.
경영(京永) 단축마라톤대회(1931~1963)의 변천 과정 25

아일보, 1961. 4. 17). 표 2. 경영단축마라톤 신청 선수


제33회 대회에는 외국인 선수가 처음 출전하는 기
록을 세웠다. 당시 화교(華僑)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
던 중국인 이연지(李延智)가 대회에 참가한 것이다(동
아일보, 1962. 4. 15). 또한 제33회 대회는 대회 역사
상 출전 수가 가장 많다는 대회였다. 당시 대회의 참
가선수가 155명이었는데 이것은 전년에 비해 약 30여
명이 증가한 수였다. 과거 대회 때마다 10명 내외 증
가하였으나, 이와 같은 대폭적인 증가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번 대회부터는 대한중석을 비롯한 한국 국 출처: 동아일보 및 조선일보 등의 신문보도를 통해 구성
내 각 실업팀의 일반 선수들이 대거 참가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1962. 4. 14).
회 때 우승한 김은배의 기록보다 11초 빠른 1시간 21
제34회 대회 때는 각 실업팀 간의 치열한 경쟁이
분 54초로 우승을 차지했다(동아일보, 1932. 4. 1). 특
본격화하였다(동아일보, 1963. 4. 22). 특히, 제34회 대
히, 제2회 대회에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
회에는 63세의 노장 유정채를 비롯하여 14세의 어린
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손기정이 처음 마라톤에
이까지 출전하였다(동아일보, 1963. 4. 20). 광복 이전
출전하여 2위를 차지하는 성적을 거두었다(동아일보,
의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의 평균 나이는 20대였으며,
1932. 3. 22). 이는 손기정의 마라톤의 시작이었고, 이
최고 나이와 최저 나이는 각각 30대와 15세였다. 이
대회를 기점으로 그는 장거리 경주에 필요한 실력을
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63세의 노장과 14세의 어린이
길러나가게 되었다.
가 참가했다는 점은 대회에 참가하는 연령층이 매우
1933년 제3회 대회는 경인가도의 도로 개수(改修)
다양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사 때문에 동아일보 앞 광장에서 출발하여 청량리
이상과 같이 대회 참가선수 수는 전체적으로 증가
를 거쳐서 망우리 고개까지 왕복하는 코스에서 개최
세를 보이고 있고, 참가 규정은 더욱 많은 신진 선수
되었다(동아일보, 1933. 2. 24). 이번 대회에서는 손기
가 참여할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해 끊임없이 강조하
정이 1시간 24분 3초 2로 1등을 획득하였으며 유해붕,
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 2>는 1932년부터
남승룡이 그 뒤에 들어왔다(동아일보, 1933. 3. 22).
1963년까지 32년간 20회의 대회에 신청한 참가선수
1933년에는 경인가도의 공사로서 부득이 동대문 밖
수를 나타낸 것이다.
망우리고개를 왕복하는 것으로 이루어졌지만, 1934년
제4회 대회는 이전 코스에서 이루어졌다. <그림 3>은
2. 코스와 기록의 변화
제1회, 제2회, 제4회 대회의 경기코스이다.
제4회 대회는 눈과 강한 바람이 부는 악천후 속에
제1회 대회는 1931년 3월 21일 정오 ‘싸이렌’ 소리
서 개최되었다(동아일보, 1934. 3. 22). 열악한 날씨 속
와 함께 시작되었다. 대회의 총 거리는 왕복 15마일
에서 유장춘은 1시간 20분 34초로 우승하였고, 손기
즉, 약 24km였으며, 대회의 첫 코스는 동아일보사 정
정은 25초 차로 2위를 차지하였다. 두 기록 모두 대
문-태평통-남대문-한강철교-노량진-영등포역을 반환
회 신기록이었다(조선일보, 1934. 3. 22). 악천후 속에
하는 코스였다(동아일보, 1931. 3. 21). 역사적인 첫 대
서 신기록을 세운 이유는 참가 선수의 경험에 있었다.
회에서 김은배는 1시간 22분 5초의 기록으로 1등을
제4회 대회에 참가한 선수 대다수는 3월 4일 개최된
차지하면서, 최초 기록을 세웠다(동아일보, 1931. 3. 22).
경인 역전경주대회를 참가하였는데, 경인 역전경주대
제2회 대회는 제1회 대회와 같은 코스에 개최되었
회의 제1구간과 제6구간이 경성-영등포의 편도이므로
다. 제1회 대회 때 4위를 차지한 변용환이 제1회 대
26 한국체육학회지 제62권 제6호

우승하였다(조선일보, 1937. 3. 22). 그리고 신인 우광


흥은 경기 후반의 역주로 2등을 차지했는데, 베를린
올림픽대회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은 우광흥의 역주
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와 찬사를 보내면서 경영단축
마라톤을 통해 더욱 많은 신진 선수를 배출하면 좋겠
다고 말하였다(조선일보, 1937. 3. 23). 특히, 우광흥은
그림 3. 제4회 경영 단축마라톤대회 경기코스
출처: 동아일보, 1934. 3. 16 제9회 대회에서 1시간 29분 9초로, 작년 기록을 2분
36초나 단축하면서 대회 신기록을 수립하였다(조선일
경영 단축마라톤의 코스와 유사했다(동아일보, 1934. 보, 1938. 3. 20).
3. 2). 따라서 참가 선수가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1939년 제10회 대회 때부터 공동 후원사이던 동아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일보가 주최기관이 되었다. 그리고 동아일보는 새로운
1935년 제5회 대회의 코스는 전년과 같은 코스였으 코스를 개발하여 대회를 개최하였다. 새로운 코스는
나, 코스 컨디션은 전년에 비해 매우 좋은 상태였다. 동아일보사 광장-의주통 서대문 사거리-봉래교-서울
태평통-남내문-한강철교-영등포로 이어지는 거리가 역-한강교-영등포역을 왕복하는 15마일이었다(동아일
아스팔트로 새롭게 공사를 마쳐 ‘탄탄대로’가 되었기 보, 1939. 2. 19).
때문이다(동아일보, 1935. 3. 7). 이번 대회의 경우, 좋 지용연이 작년의 기록을 39초 단축하는 1시간 28분
은 기록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기록은 12초 대회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하였고(조선일보,
저조했다. 이태우가 1시간 22분 43초로 우승하였는데, 1939. 3. 22), 정순명과 김재억이 2등과 3등을 차지하
이 기록은 작년 대회에서 유장춘이 작성한 신기록보 였다. 이들 모두는 소속이 없는 무명 선수로 무소속
다 2분 9초 늦은 기록이었다(조선일보, 1935. 3. 23). 선수들이 대회 3위 안에 든 것은 경영단축마라톤 사
1936년 제6회 대회는 제5회 대회와 같은 코스를 사 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동아일보, 1939. 3. 22).
용하여 실시하였다. 경기 당일, 비가 오고 눈도 뿌리 1940년 제11회 대회는 전년도와 같은 코스에서 개
는 악천후였다(동아일보, 1936. 4. 4). 그럼에도 불구하 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현정효가 1시간 29분 18초 2
고 오동우는 작년 기록을 돌파하는 1시간 20분 11초 로 우승을 차지하였고, 김국배와 윤도헌이 각각 2등
의 기록으로 우승하였다(조선일보, 1936. 4. 4). 과 3등을 차지했다(동아일보, 1940. 3. 22).
제7회 대회는 새로운 코스에서 개최되었다. 조선일 1941년부터 광복 후인 1953년까지 대회는 개최되지
보 1938년 3월 17일 자 기사는 새롭게 바뀐 코스에 않았고, 1954년 대회가 재개하였다. 제25회로 계산된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조선일보, 1938. 3. 17). 대회는 동아일보사 광장-서대문 의주통-서울역-한강
교-영등포 코스에서 개최되었다(동아일보, 1960. 4.
코스는 광화문통광장을 떠나 서대문을 거처서 의
17). 이 코스는 마지막 대회인 제34회까지 계속되었다.
주통으로나 경성역전을 통과한 후 영등포역전을 귀환
광복 후 첫 대회인 제25회 대회에는 전국에서 정예
점으로 동일 코스를 밟아서 돌아오게 되는 왕복 15리
(후략)
마라톤 선수가 참가하였고, 그 결과 1위인 임종우부
터 10위까지의 기록 모두가 대회 신기록이었다(동아
즉, 제7회 대회의 코스는 전년도의 코스와는 달리 일보, 1954. 4. 19).
태평통을 통과하지 않고 서대문을 거쳐 의주통을 지 1955년에 개최된 제26회 대회에서 임종우가 1시간
나 영등포로 가는 코스였다(조선일보, 1937. 3. 21). 23분 16초로 제25회 대회에 이어 2연패를 달성했다
작년 대회에서 2등을 하였던 이종록이 새롭게 바뀐 (경향신문, 1955. 5. 10).
코스에서 개최된 제7회 대회에서 1시간 31분 45초로 제27회 대회 때에는 좋은 성과를 거둘 것이라는 예
경영(京永) 단축마라톤대회(1931~1963)의 변천 과정 27

상이 있었다. 대회 이전인 3월에는 보스톤마라톤 파견 시 이창훈, 한재덕 등 실력과 비중이 큰 선수들이 질


예선대회가, 4월 초에는 경인 역전경주대회가 개최되어 병으로 인해 출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동아일보,
많은 선수가 컨디션을 조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동 1963. 4. 22). <표 3>은 제1회 대회부터 제34회 대회까
아일보, 1956. 4. 21). 예상대로 결과는 좋았다. 1, 2, 3 지의 기록과 입상자를 나타난 것이다.
착이 모두 대회 신기록이었다(동아일보, 1956. 4. 23). 이상과 같이 1932년부터 시작하여 1963년까지 계속
1957년 제28회 대회에서는 1956년 멜버른올림픽대 된 경영단축마라톤은 동아일보사를 출발하여 영등포를
회 마라톤 경기에서 4위로 입상한 이창훈이 1시간 20 반환하는 다양한 코스에서 개최되었다. 그리고 대회 기
분 28초로 신기록을 기록하면서 영예의 우승을 획득 록은 해를 거듭해 나가면서 좋아졌고, 특히 광복 이후
하였다(동아일보, 1957. 4. 22). 이로써 대회가 부활된 기록은 훨씬 단축되었고, 신기록 갱신의 빈도도 늘었
이후 4년 연속으로 신기록이 달성되었다. 다.
그러나 제29회 대회는 이러한 영광을 이어가지 못 또한 멀리는 베를린올림픽대회의 손기정을 비롯하여
하였다. 오천택이 1시간 21분 15초로 1등을 차지했지 보스턴마라톤 제패의 꿈을 이룩한 서윤복, 함기용, 아
만, 신기록을 세우지 못하였다(동아일보, 1958. 4. 20).
경기 당일, 강우(强雨)로 인해 선수들의 기록이 대체 표 3. 경영 단축마라톤대회의 기록과 입상자
로 저조했기 때문이다(동아일보, 1958. 4. 21).
횟수 성적 횟수 성적
제30회 대회에는 여러 차례 경영 단축마라톤에 출
김은배(1:22:05) 임종우(1:23:43)
전했던 중견 선수들과 장거리의 학생 실력파 신진 선 제1회 류해봉(1:26:22) 제25회 장홍석(1:23:51)
수들이 다수 출전하였다. 대회 경기 당일의 날씨는 이성근(1:27:23) 이기환(1:24:22)
온화하고 풍속도 심하지 않았다(동아일보, 1959, 4. 변용환(1:21:54) 임종우(1:23:16)
제2회 손기정(1:25:25) 제26회 한태봉(1:23:59)
20). 이번 대회에서는 이상철이 1시간 20분 12초라는 백규복(1:28:45) 이중엽(1:26:48)
대회 신기록으로 우승하였다(동아일보, 1959. 4. 19). 손기정(1:24:03) 한승철(1:21:42)
제31회 대회에서는 차대만이 1시간 20분 17초로 우 제3회 유해봉(1:24:30) 제27회 이창훈(1:22:00)
남승룡(1:26:46) 임종우(1:22:26)
승을 차지했다. 작년 기록보다 5초가 늦어 신기록을 유장춘(1:20:34) 이창훈(1:20:28)
달성하지 못했다(동아일보, 1960. 4. 17). 제4회 순기정(1:20:59) 제28회 한태봉(1:21:58)
안삼진(1:23:10) 이영희(1:22:36)
제32회 대회에는 130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홍익대
이태우(1:22:43) 오천택(1:21:15)
학교의 강용태가 1시간 19분 55초의 대회 신기록으로 제5회 오동우(1:23:5) 제29회 정천권(1:23:14)
당당히 우승했다. 2등(이상철), 3등(이경환), 4등(한재 안삼진(1:24:27) 채정진(1:23:35)
덕) 모두 홍익대학교의 학생 선수가 차지하는 이변을 오동우(1:20:11) 이상철(1:20:12)
재6회 이종록(1:20:40) 제30회 채정진(1:21:10)
낳기도 했다(동아일보, 1961. 4. 16). 안삼진(1:23:53) 김학균(1:21:52)
1962년에 개최하는 제33회 대회에는 경영단축마라 이종록(1:31:45) 차대만(1:20:17)
제7회 유광흥(1:33:33) 제31회 강용태(1:20:37)
톤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의 선수가 참가했다. 그 수는 최준근(1:34:3) 정천권(1:21:28)
155명으로, 작년보다 25명이 많은 수였다. 이번 대회 유관흥(1:29:09) 강용태(1:19:55)
는 질적으로도 우수한 대회였다. 한재덕의 우승 기록 제9회 김국배(1:31:10) 제32회 이상철(1:20:11)
오찬준(1:32:34) 이경환(1:20:40)
은 1시간 18분 54초였는데, 이는 작년의 우승 기록을
지영용(1:28:12) 한재덕(1:18:54)
1분 1초를 단축시킨 경이로운 기록이었다(동아일보, 제10회 전순명(1:31:01) 제33회 박정래(1:19:59)
1962. 4. 15). 김재억(1:32:03) 이영환(1:20:07)

마지막 대회인 제34회 대회에서는 김봉래가 1시간 현정효(1:29:18) 김봉래(1:21:53)


제11회 김국배(1:31:10) 제34회 강희규(1:22:22)
21분 53초로 우승을 차지했다(조선일보, 1963. 4. 23). 윤도헌(1:32:42) 차대만(1:22:53)
예년의 기록과 비교해 매우 저조한 기록이었는데, 당 출처: 동아일보 및 조선일보 등의 신문보도를 통해 구성
28 한국체육학회지 제62권 제6호

시아경기대회를 석권한 이창훈 등이 모두 이 경영단축 증가했다.


마라톤을 거쳐 세계무대로 진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제1회부터 제6회 대회까지의 경기기록은 자주 이루
있다. 한편 <표 3>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각 대회의 어진 코스의 변경으로 인해 기록을 비교하기 어렵지
기록은 거의 11등까지 남아있으며, 상위 6명에게는 인 만, 코스가 거의 확정된 제7회 대회부터 대회 기록은
센티브가 주어졌다. 기록이 남아있는 선수의 면모를 살 단축되는 보였다. 초창기 한국 마라톤의 대표 주자라
펴보면, 신인선수의 비중이 높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 할 수 있는 김은배, 베를린올림픽대회의 손기정과 남
다. 이를 통해 경영단축마라톤은 신인의 등용문 역할을 승룡, 그리고 보스턴마라톤대회와 아시아경기대회 등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광복 이후의 세계무대에서 뛰어난 성적을 올린 선수들은 이 대회
기록은 이전보다 훨씬 단축되었고, 신기록의 갱신 빈도 에 참가해 좋은 성적을 내기도 했다. 특히, 손기정은
도 늘었다는 점에서 경영단축마라톤은 단축마라톤 신 이 대회를 계기로 마라토너의 길을 걷게 되었다.
기록의 산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경영단축마라톤은 풀코스 마라톤대회
로 변경됨으로써 역사에서 사라지기까지 한국에서 가
장 오랜 기간 개최된 대회이며, 일제강점기는 물론
결론 광복 이후에도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 선수를 배출하
고, 신인선수의 등용문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한국
마라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대회였다고 할 수 있을
본 연구에서는 1931년부터 1963년까지 33년간 개최
것이다.
된 경영단축마라톤의 변천 과정을 알아보기 위해서
발족 당시 한국 마라톤대회의 상황, 주최 및 후원단
체의 변경, 출전선수와 경기기록 등의 변화를 살펴보
고자 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참고문헌
1920년 이전 조선에서의 마라톤은 단축마라톤을 중
심으로, 운동회의 한 종목 혹은 기념행사로서 열리고 경향신문(1955. 5. 10). 一着에 林鍾禹君 京永短縮
있었다. 그리고 1920년 일본인 체육단체인 조선체육협 마라톤.
회에 의해 첫 공식 경기가 개최된 이후에는 육상경기 곽형기·이현정(2009). 마라토너 손기정의 체육사
대회의 한 종목으로 이루어졌고, 1922년부터는 단일경 적 의미. 한국체육과학회, 18(3), 3-13.
기 대회로 개최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마라톤대회 권오륜·한동일·남중웅(2016). 마라토너 권태하의
는 주로 일본인에 의해 개최되었으며, 일본인과 조선 스포츠정신. 한국체육철학회, 24(4), 17-44.
인이 함께 참가하였다. 그리고 첫 풀코스 마라톤은 김기한(2014). 마라톤 영웅 손기정의 생애와 민족사
1927년 제3회 조선신궁경기대회의 육상경기에서 개최 적 의미. 서울: 21세기교육사.
되었고, 마라톤과 관련된 경기종목 중 하나인 역전경 김명권(2013). 일본 언론매체의 손기정 마라톤 우승
주대회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보도에 나타난 민족주의. 한국체육사학회
경영단축마라톤의 참가자는 대회를 거듭하면서 확 지, 18(1), 47-58.
산하는 추세를 보였다. 경성에서 지방으로 확산하여 김세호(2006). 한국육상경기의 변천사에 관한 연구
전국규모의 대회로 발전되었으며, 제33회 중국인 선수 -마라톤경기를 중심으로. 신라대학교 석사
의 참가는 국제화 추세가 예고되었다. 그리고 20대 학위논문.
젊은 선수 위주에서 노소(老少) 누구나 참여할 수 있 김영희(2014). 엘리트 체육에서 대중 스포츠까지:
는 일반인의 대회로 발전하였다. 특히, 광복 이후 마 언론사 주최 마라톤대회의 역사. 서울: 한국
라톤의 인기에 동승하여 참가자들의 수가 급격하게 언론진흥재단 제6장, 244-283.
경영(京永) 단축마라톤대회(1931~1963)의 변천 과정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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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투고일: 2023. 10. 06


논문심사일: 2023. 10. 18
심사완료일: 2023.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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