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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읍내

(원 작 : 쏜톤 와일더 작 OUR TOWN)


등장인물
무대감독 / 깁스 / 조오 크로웰 / 하우이 뉴우썸 / 깁스부인 / 웹 부인 / 조오지 깁스 / 레베카 깁스 / 월리
웹 / 에밀리 웹 / 웹 / 워린 보안관 / 싸이 크로웰 / 싸이먼 스팀슨
윌라드 교수 / 쏘옴즈 부인 / 쌤 크레이그 / 조오 스터더드 / 객석인물들(2-3) / 친구들(2-3) / 죽은사람들
(2-3)
제 1 막
막도 장치도 없다.
관객이 입장해서 볼 수 있는 건 희미한 조명에 텅 빈 무대뿐이다.
이윽고 무대감독이 들어와 앞무대 좌우에 각기 식탁 하나와 의자 세 개씩을 놓는다. 그리고는 왼쪽 웹씨
네 집이 될 곳 모퉁이에 낮은 벤치 하나를 놓는다.
‘왼쪽’과 ‘오른쪽’은 배우가 객석을 향한 상태에서이고, ‘뒷무대’는 안쪽 벽 쪽을 말한다.
무대감독은 객석 불이 꺼지기 시작할 무렵 무대 배치를 끝내고 오른쪽 프로시니엄 기둥에 기댄 채 늦게
들어오는 관객들을 보고 있다.
객석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무대감독이 입을 연다.
무대감독 : 이 연극은 「우리 읍내」라고 합니다. 손톤 와일더 작, 아무개 기획·연출입니다.
이 읍내의 이름은 그로버즈 코너즈인데, 메사추세츠 주 경계 바로 너머 뉴 햄프셔 주에 있습
니다. 위도 42도 40분, 경도 70도 37분이죠.
첫째 막은 우리 읍내의 하루입니다.
때는 1901년 5월 7일, 동이 트기 직전입니다.
(닭이 운다.)
저기 동녘 하늘엔 산 뒤로 햇살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샛별은 지기 전엔 늘 저렇게 영롱한 빛을 내죠.
(잠시 샛별을 주시하고는 뒷무대로 간다.)
자, 그럼 지리부터 알아볼까요?
(안쪽 병과 평행하게)
여기가 큰길입니다. 기차역은 저 뒤쪽이고, 철길은 저쪽으로 뻗어 있고요. 철길 너머는 폴란
드 사람 마을인데, 프랑스계 캐나다인들도 몇집 있죠.
(왼쪽을 향하여)
저쪽엔 조합교회가 있습니다. 장로교회는 그 건너고, 감리교회하고 유일신교회는 저 너머고
요. 침례교회는 개울가 골짜기에 있죠. 천주교회는 철길 저쪽이고요.
이건 읍사무손데, 우체국도 같이 있고, 지하실은 감옥입니다.
브라이언이 바로 이 계단에 서서 연설을 한 일이 있죠.
이쪽 줄로 상점이 즐비한데, 집집마다 말뚝하고 승마대가 앞에 있군요. 자동차는 5년 후에나
등장하죠. 저 언덕 위 하얀 저택에 사는 은행가 카트라이트 씨가 살 겁니다. 여기서 제일 부

- 1 -
자거든요.
이건 식품점이고, 이건 모오건 약국입니다. 대개들 하루 한 번은 들르게 마련이죠.
초등학교는 저쪽이고, 고등학교는 더 저쪽이고요. 아침 9시 15분하고 점심시간, 또 오후 3시
가 되면, 운동장에서 애들 떠드는 소리가 온통 읍내까지 다 들립니다.
(앞무대 오른쪽 식탁과 의자 쪽으로 다가간다.)
여긴 의사 선생이신 깁스 씨 댁입니다. 뒷문이예요.
(포도넝쿨과 꽃으로 덮인 아취형 시렁 두 개가 양쪽 프로시니엄 기둥 옆으로 밀려나온다.)
장치를 고집하실 분들을 위해 간단히 준비해봤죠.
여긴 텃밭입니다. 옥수수, 완두콩, 강낭콩, 접시꽃, 헬리오트로프, 우엉이 한창이군요.
(무대를 가로지른다.)
당시 신문은 주2회 발행인데, 여기가 바로 그로버즈 코너즈 센티널의 편집장이신 웹 선생 댁
입니다.
이 댁 텃밭엔 또 해바라기까지 한창이군요.
(뒷무대 중앙을 보며)
바로 여기··· 커다란 호두나무가 있습니다.
괜찮은 읍내죠?
물론 아주 특출난 인물이 나온 적은 없지만 말입니다.
저기 산마루 묘지엔 천육백 칠, 팔십년대 세워진 비석들도 있습니다. 그로버즈, 카트라이트,
깁스, 허어시. 대개 이런 성들이죠. 지금도 그네 집안 사람이 제일 많고요.
자, 다시 동틀 무렵입니다.
하지만 불켜진 집은, 저 철길 너머 오두막하고, 폴란드 여인네가 방금 쌍둥이를 낳았거든요.
신문 배달하는 조오네 집, 아, 기차역도 있군요.
자그마한 호킨스씨가 5시 54분 보스톤행 열차에 신호를 하려고 대기중입니다.
(기적 소리가 들린다. 무대감독은 시계를 꺼내 보고 끄덕인다.)
사실 읍내선 대개 늦잠들을 자죠. 읍내 밖 농가들은 우유를 짠다 뭘 한다 버얼써 불을 켰지
만요.
자, 하루가 시작됐습니다.
저기 큰길로 의사 선생이 오십니다. 쌍둥일 받고 오시는 길이죠. 또 여긴 그 부인이 아침을
지으로 내려옵니다.
(통통하고 상냥해 보이는 30대 중반의 여인이 오른쪽 ‘아래층’으로 내려온다. 부엌에서 가상의 창 차일을
올리고 스토브에 불을 지피기 시작한다.)
깁스 선생은 1930년에 작고했습니다. 새 병원은 저 양반 이름을 땄죠. 사실은 부인이 훨씬
먼저 죽었어요. 보험사원한테 시집간 딸 만나러 오하이오 주 캔톤에 갔다가 거기서 폐렴으로
그만. 유해는 옮겨와서 저 위 공동묘지 깁스와 허어시 문중 무덤들 사이에다 모셨습니다. 저
기 조합교회에서 깁스 선생하고 결혼하기 전에는 줄리아 허어시였거든요.

- 2 -
여기선 서로들 모르는 게 없답니다.
저기 웹 부인도 아침을 지으러 내려옵니다. 새벽 한 시 반에 왕진을 나셨던 깁스 선생입니
다.
조오가 웹 선생이 내는 센티널을 돌리면서 옵니다.
(깁스가 한쪽에서 큰길을 걸어와 자기 집 쪽으로 돌려다가 멈춰선다. 가상의 검은 가방을 내려놓고 모자를
벗는다. 그리고는 커다란 손수건으로 피곤한 듯 얼굴을 닦는다.
마른 데다 진지하고 또랑또랑해 보이는 웹 부인이 앞치마를 두르며 왼쪽 부엌으로 들어온다. 역시 스토브
에 불을 붙이고 조반 준비를 하는 일련의 동작을 취한다.
갑자기 열한 살 먹은 조오 크로웰 2세가 한길 오른쪽부터 가상의 신문을 이집 저집 문간에 던진다.)
조 오 : 안녕하세요?
깁 스 : 오냐.
조 오 : 누가 아픈가요?
깁 스 : 아니, 저 폴란드 마을에서 쌍둥이를 낳았단다.
조 오 : 신문 여기서 드릴까요?
깁 스 : 응, 다오. 지난 수요일 이후 뭐 별일은 없던?
조 오 : 있죠. 포스터 선생님이 콩코드로 시집가신대요.
깁 스 : 저런. 그래, 너희들 생각은 어떠니?
조 오 : 글세, 제가 뭐랄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번 선생님이 됐으면 계속해야죠.
깁 스 : 그래, 무릎은 어떠니?
조 오 : 좋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근데 말씀대로요, 비가 오려면, 꼭 신호가 와요.
깁 스 : 오늘은 뭐라던? 비가 오겠다던?
조 오 : 아뇨.
깁 스 : 정말?
조 오 : 네에.
깁 스 : 무릎은 실수 안한다던?
조 오 : 그럼요.
(조오 나간다. 깁스는 서서 신문을 읽는다.)
무대감독 : 저 애 얘기 좀 해볼까요? 쟨 여기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반에서 일등이었죠. 그래
장학생으로 메사추세츠 공대에 들어가 학과 수석으로 졸업했고요. 그때 보스톤 신문에 굉장
했었죠. 헌데 막 훌륭한 엔지니어가 되려는 순간 전쟁이 터져 프랑스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
다. 모든 공부가 허사가 된 거죠.
하 우 이 : (왼쪽 무대 뒤에서) 이려! 오늘 왜 이래?
무대감독 : 우유 배달하는 하우이 뉴우썸입니다.
(삼십세 가량의 하우이 뉴우썸이 가슴 앞이 달린 작업복 차림으로 왼쪽 큰길에서 온다.
그 옆에는 가상의 말과 마차가 있다.
- 3 -
거기에 가상의 시렁을 달고 우유병들을 실었다.
우유병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웹 부인 집 아취문 앞에 몇 병 내려놓고 깁스 부인 집으로 건너가다 중앙에 멈춰 깁스에게 말한다.)
하 우 이 : 안녕하십니까?
깁 스 : 어이.
하 우 이 : 누가 아픕니까?
깁 스 : 고루슬랍스키 씨 집에서 쌍둥이를 낳았어.
하 우 이 : 쌍둥이요? 우리 읍내도 해마다 식구가 느는군요.
깁 스 : 비가 오겠나?
하 우 이 : 아뇨. 좋은 날씹니다. 이려!
깁 스 : 여. 이놈 이제 몇 살이지?
하 우 이 : 열일곱이요. 록카트 씨네서 우유를 끊고 나선, 길이 헷갈리는지, 꼭 들러온다고 난리예
요.
(하우이는 깁스 부인이 기다리는 뒷문에 도착한다.)
깁스부인 : 어서 오세요.
하 우 이 :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오시네요.
깁스부인 : 네, 좀 늦었죠?
하 우 이 : 네, 그놈의 분리기가 고장나서요. 어떻게 된 건지. (뒷무대 중앙의 깁스 앞을 지나며)
갑니다.
깁 스 : 잘 가게.
깁스부인 : 얘들아! 일어날 시간이다!
하 우 이 : 이려! (오른쪽으로 사라진다.)
깁스부인 : 조오지! 레베카!
(깁스는 자기 집 뒷문에 오자 아취문을 통해 들어간다.)
잘 하셨수?
깁 스 : 거, 뭐, 별거라구.
깁스부인 : 베이컨 금방 되니까, 앉아서 커피부터 드세요. 아침나절 둬 시간 주무시구려.
깁 스 : 음! ··· 앤트워즈 부인은 열한 시니까. 거 보나마나 위장병인데.
깁스부인 : 원, 세시간도 못 주무시겠수. 여보, 어디든 가서 좀 쉬어야지. 정말 큰일나요.
웹 부 인 : 에밀리! 일어나라! 월리! 일곱 시다!
깁스부인 : (스토브 앞에서 바삐 일하며) 여보, 조오지한테 얘기 좀 하세요. 이상해졌어요. 손도
까딱 안하고. 장작도 내가 뻐갠다니까요.
깁 스 : (수채에서 손을 씻고 수건질을 하며) 건방지게 굽디까?
깁스부인 : 아뇨, 그냥 툴툴대면서, 그놈의 야구 생각뿐예요. 조오지! 레베카! 학교 늦는다!
깁 스 :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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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스부인 : 조오지!
깁 스 : 빨리 해라!
조 오 지 : 네.
깁 스 : (나가며) 어머니 부르는 소리 안 들리니? 난 올라가 눈 좀 붙여볼까?
웹 부 인 : 월리! 에밀리! 학교 늦는다. 월리! 깨끗이 씻어! 아님 내 올라가 씻길테다.
레 베 카 : 엄마, 나 무슨 옷 입어?
깁스부인 : 떠들지 마. 밤새 왕진 다녀오셨어. 주무셔야지. 파란 옷 빨아서 다려놨다.
레 베 카 : 나 그 옷 싫어.
깁스부인 : 조용하래두.
레 베 카 : 맨날 병난 칠면조처럼···
깁스부인 : 무슨 소리야? 얼마나 예쁜데.
레 베 카 : 엄마, 오빠가 비누 던져요.
깁스부인 : 내 둘 다 때려줄 테다.
(공장의 기적 소리 들린다. 애들이 뛰어들어와 식탁 앞에 자리잡는다.
오른쪽에 열여섯 살쯤 된 조오지와 열한 살 된 레베카, 왼쪽에 같은 나이의 에밀리와 월리. 그들은 교과서
를 끈으로 매서 들었다.)
무대감독 : 우리읍내에도 공장이 하나 있습니다. 들리시죠? 담요 공장인데, 카트라이트 씨네는 저
걸로부자가 된 겁니다.
웹 부 인 : 얘들아, 이게 뭐니? 아침도 중요해. 천천히들 먹어. 살로 안 간다. (월리에게) 책 치워.
월 리 : 아이, 참, 열 시까지 캐나다에 대해서 달달 외워야 돼요.
웹 부 인 : 밥 먹을 땐 책 안 보기로 했잖아. 공분 좀 못해도 몸 건강한 게 최고다.
에 밀 리 : 몸도 건강하고 공부도 잘해야죠. 나처럼요. 엄마, 난 머리가 참 좋은가봐요.
웹 부 인 : 먹기나 해.
월 리 : 나도 우표책 볼 땐 머리가 좋아.
깁스부인 : 이따 일어나시면 말씀드려보마. 네 나이에 일주일 25센트면 충분하지 않니? 그 돈을
다 뭐에 쓸까?
조 오 지 : 내 참, 살 게 좀 많아요?
깁스부인 : 스트로베리 탄산수?
조 오 지 : 레베카는 무슨 돈이 그렇게 많죠? 1달라도 넘어요.
레 베 카 : (숟가락을 문 채 웅얼대듯) 맨날 조금씩 모은거야.
깁스부인 : 물론 가끔은 돈을 써 보는 것도 좋겠지.
레 베 카 : 엄마, 내가 최고루 좋아하는 게 뭐게? 응? 돈이야.
깁스부인 : 먹기나 해.
아 이 들 : 첫 종이 났어요. 늦겠어요. 고만 먹을께요. 빨리 가야지.
(애들은 일어나 책을 들고 아취문을 통해 뛰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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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앞무대 중앙에서 만나 재잘대며 큰길 쪽으로 걸어가 왼쪽으로 돈다.
무대감독은 조심스럽게 오른쪽으로 나간다.)
웹 부 인 : 그냥 빨리 걸어. 안 뛰어도 돼. 월리야, 바지 바짝 추켜. 에밀리, 어깨 펴고.
깁스부인 : 포스터 선생님께 축하드린다고, 꼭.
레 베 카 : 응.
깁스부인 : 아유, 참 예쁘다. 얼른 가.
아 이 들 : 다녀오겠습니다.
(깁스 부인은 앞치마에 닭 모이를 담아서 객석 쪽으로 나온다.)
깁스부인 : 자, 구구, 구구, 넌 저리 비켜. 저리 가. 넌 또 왠일이냐? 또 싸웠구나. 싸우는 게 일이
야. 응, 이건··· 넌 뉘 집 병아리냐? 어디서 왔어? (앞치마를 흔들어 턴다.) 겁내진 마. 안 잡
아먹을게.
(웹 부인은 아취문 옆 벤치에 앉아 콩깍지를 벗기고 있다.)
에밀리 엄마, 감기는 좀 어때요?
웹 부 인 : 아직도 목이 간질간질해요. 오늘 밤 성가 연습은 못 가겠어요. 가나마나예요.
깁스부인 : 높은 소리 좀 내봤어요?
깁스부인 : 안돼요. 길게 뽑을 수가 없어요. 쉬면서 콩깍지나 벗겨야죠.
(잡담을 하려고 무대를 가로지르며 소매를 걷어올린다.)
깁스부인 : 거들어드릴까? 올핸 콩이 잘 됐어요.
깁스부인 : 어떻게든 두 자루는 하려고요. 애들은 지겹대요. 겨우내 저희들이 다 먹어치울 거면서.
(사이, 잠시 닭 울음 소리가 들린다.)
깁스부인 : 에밀리 엄마, 얘기가 있어요. 털어놓지 않음 너무 답답해서.
깁스부인 : 뭔데요?
깁스부인 : 저번 금요일에, 혹시, 보스톤 골동품상이라고, 누가 안 왔습디까?
깁스부인 : 아뇨.
깁스부인 : 나한텐 왔어요. 처음엔 남편 찾아온 환잔 줄 알았죠. 근데 어물쩡 거실로 올라오더니,
저희 할머니가 물려주신 장롱 있죠. 그걸 팔라고, 글세, 350달러를 내미는 거예요.
깁스부인 : 네에?
깁스부인 : 네에, 그 고물을요. 주체를 못하게 커서 사촌이나 줄까 했는데.
깁스부인 : 파실 거죠?
깁스부인 : 글세.
깁스부인 : 글쎄라니, 제정신이예요? 350달러가 얼만데.
깁스부인 : 그야 그이만 좋다면, 그래 정말 여행이라도 갈 수 있다면, 팔죠. 평생 소원이 불란서
빠리 구경인데. 에그, 미친소리지. 하지만 벌써 몇 해째 맘먹길 기회만 되면···
깁스부인 : 선생님은 뭐라세요?
깁스부인 : 아시잖아요. 그 양반 안 뒤로 진지한 얘긴 들은 적이 없어요. 안된대요. 유럽에서 얼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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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 여기가 싫어질지도 모른다나요. 그냥 살자는 거죠. 2년마다 남북전쟁때 싸움터나 돌아
보면서요. 그럼 충분하대요.
깁스부인 : 하긴, 우리 그인 깁스 선생님이 부럽대요. 남북전쟁엔 훤하시다고요. 나폴레옹 집어치
고 일껏 남북전쟁으로 바꿨다가 정말 전문가를 만나서 기가 팍 꺾인 거죠.
깁스부인 : 정말 그인 엔티이텀이나 게티즈버그에 갔을 때가 제일 행복한가보요. 수풀만 보면 멈
춰서 발로 거리를 재보곤 해요. 꼭 사기나 할 것처럼요.
깁스부인 : 그건 그렇고 아까 그 골동품상이 정말 사겠다면, 파세요. 빠리 구경하세요. 바깥양반한
테 수시로 암시를 하세요. 나도 그래서 대서양 구경을 했잖아요.
깁스부인 : 괜한 소리예요. 그저 죽기 전에 영어 안 쓰는 동네 한 번 가봤으면 해서요.
(무대감독이 오른쪽에서 활발하게 들어온다.
두 부인에게 모자에 손을 가볍게 대며 인사한다. 부인들은 고개를 끄덕여 답례한다.)
무대감독 : 감사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두 부인은 일거리를 모아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 사라진다.)
이제 몇 시간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아, 그 전에 몇가지 더 알아볼 게 있군요. 과학적인 설
명이라고나 할까요. 그래 주립대학 윌라드 교수님께 여기 역사를 좀 설명해달라고 청했습니
다. 교수님.
(넓은 공단 리본이 달린 코안경에 원고를 든 시골풍의 학자 윌라드 교수가 오른쪽에서 들어온다.)
주립대학 윌라드 교수님입니다. 선생님, 간단히 말씀해 주십시오. 시간이 많지 않아서요.
윌라드교수 :그로버즈 코너즈라··· 어디··· 그로버즈 코너즈는 애팔래치아 산맥 홍적세 화강암 위에 자리잡
고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육지중 하나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데본기 현무암
층이 가로질렀고, 중생대 이판암의 흔적이 있으며, 사암의 노출이 눈에 띕니다. 하지만 그건
2, 3억년 밖에 안됐으니까, 상당히 최근이죠. 대단히 흥미있는 화석이 발견됐습니다··· 정말
특이한 화석입니다··· 읍내서 2마일 떨어진 사일러스 페컴 목장서 나왔죠. 언제고 우리 대학
박물관에 오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물론 열려 있을 때 오셔야죠. 그루버 교수의 기상학적
분석결과를 읽어드릴까요? 평균 강수량 같은 거 말입니다.
무대감독 : 시간이··· 이 고장 인류사에 대해서 몇 말씀 해주시죠.
윌라드교수 :네··· 인류학적 자료는, 애초엔 아메리카 인디언인데, 코타핫치족이고··· 10세기 이전 기록은
거의··· 음··· 전혀 없지만··· 세 집안 정도 자취가 있군요. 17세기말 영국계 이민이 있었고,
이후 슬라브족과 지중해···
무대감독 : 인구는 어떻게 됩니까?
윌라드교수 :읍내만 하면 2640명입니다.
무대감독 : 저, 잠깐. (교수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윌라드교수 :아, 그래요? 그럼 현재 이 순간의 인구는 2642명입니다. 거기에 우편구 507명을 더하면, 총
3149명이고요. 사망률과 출생률은 일정한데, 맥퍼슨식 계산으로 6.032군요.
무대감독 : 네, 감사합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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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라드교수 :원, 천만에, 별 말씀을.
무대감독 : 이쪽입니다. 자, 안녕히 가십시오.
(윌라드 교수 퇴장)
이번엔 정치·사회적인 걸 좀 알아보죠. 편집장님. 웹 선생님?
(웹 부인이 자기 집 뒷문에 나타난다.)
웹 부 인 : 금방 올거예요. 사과 깎다 손을 베어서요.
무대감독 : 네, 알겠습니다.
웹 부 인 : 여보! 다들 기다려요. (퇴장)
무대감독 : 웹 선생은 그로버즈 코너즈 센티널의 발행인 겸 편집장입니다. 우리 지방 신문이요.
(웹이 상의를 입으며 집에서 나온다. 손가락을 손수건으로 잡아 맸다.)
웹 : 뭐, 당연한 얘깁니다만, 우리 읍은 행정위원회에서 다스리고, 남자는 21살부터 투표권
이 있고, 여자는 간접투표를 합니다. 중하류 계층이지만, 전문직도 좀 있고··· 문맹률은 10%
쯤 됩니다. 정치적으로는 86%가 공화당, 6%가 민주당, 4%가 사회당, 나머지는 무관심팝니
다.
종교는 85%가 개신교, 12%가 천주교, 나머지는 역시 무관심팝니다.
무대감독 : 그러니까···
웹 : 네, 아주 평범합니다. 다 비슷하겠지만, 활기가 없죠. 하지만 젊은 애들은 여길 무척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90%가 여기 남거든요. 대학엘 가도 졸업 후엔
돌아오고요.
무대감독 : (관객석에 대고) 웹 선생님께 뭐 질문하실 분 안 계십니까?
객석여자1 :여기선 술들을 많이 마시나요?
웹 : 글세, 많이가 얼만지 모르겠지만, 주말 저녁 일꾼들이 엘러리 그리노우네 마굿간에 모
여 떠드는 정도죠. 물론 주정꾼도 한둘 있습니다만, 전도사가 올 때마다 회개를 하고요. 사실
술이란 게 가정 생활에 유익할 리 없죠. 약으로 쓸 때 말곤요. 뱀에 물렸다든가.
객석남자1 :사회적 불의라든지 경제적 불평등같은···
무대감독 : 앞으로 좀. 안 들립니다. 뭐라셨죠?
객석남자1 :사회적 불의라든지 경제적 불평등같은 얘기들은 안합니까?
웹 : 다들 하죠. 지겹게. 누군 부자니, 누군 가난하니 하면서 시간을 다 보냅니다.
객석남자1 :그럼 뭔가 해야 할 거 아닙니까?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물러간다.)
웹 : 글쎄요··· 근면하고 양식있는 사람은 올라가고, 게으르고 난폭한 사람은 떨어지는 세상
이야 우리도 다 원하죠. 물론 쉽진 않지만, 그래도 우린 자립이 힘든 사람들을 힘껏 돕고 있
습니다. 아닌 사람은 놔두고요. 또 질문 있으십니까?
객석여인2 :저, 웹 선생님, 여기도 문화나 예술의 애호같은 게 있습니까?
웹 : 아뇨, 별로 없습니다. 말씀하시는 의미의 것은요. 물론 졸업식 때 몇몇 여학생들이 피
아노를 치지만, 별건 아녜요. 네, 문화랄 게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도 즐거운 일은 많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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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아침이면 산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보고, 온갖 새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누구나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거 말곤, 네, 별로 없습니다. 로빈슨크루소와 성경,
헨델의 라르고야 다 알지만, 더 가봤자 휘슬러의 ‘어머니 초상’정도죠.
객석여인2 :네, 역시. 고마워요.
무대감독 : (웹에게) 갑사합니다. (웹 퇴장) 자, 읍내 얘기로 돌아와서, 이른 오후입니다. 다들 점심
을 먹고 설거지도 끝냈습니다. (웹은 상의를 벗고 나와 잔디 깎는 기계를 이리저리 밀기 시
작한다.) 이른 오후의 안온한 평와. 학교에서는 웅성대는 소리. 한길엔 마차 몇 대뿐. 말뚝에
묶인 채 졸고 있는 말들. 깁스 선생은 진찰실에서 환자를 보고, 웹 선생은 저기서 잔디를 깎
고. 열에 하나 잔디 깎는 걸 특권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답니다. 이런, 시간이 더 됐군요. 벌
써 애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왼쪽 무대 뒤에서 여학생들의 높은 목소리가 들린다. 에밀 리가 책 몇권을 들고 큰길을 따라온다.
태도로 보아 자신을 대단히 우아한 귀부인으로 상상하는 듯 하다.)
에 밀 리 : 안돼. 집에 가서 엄마 거들어야 돼. 약속했어.
웹 : 그냥 걸어라. 귀부인이나 된 줄 아니?
에 밀 리 : 내 참, 몸 펴고 걸으랄 땐 언제고 금방 뭐라 그러셨어요? 아빠 말 안 들어요.
(아빠에게 벼락 키스를 한다.)
웹 : 야, 이런 귀부인한테 키스받긴 처음인걸.
(웹은 사라진다. 에밀리는 자기 집 문앞에서 몸을 숙이고 꽃을 꺾는다. 조오지가 몸을 이리저리 기울이며
한길을 따라 온다. 공을 까마득히 던졌다 기다려서 받곤 한다. 여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 받기도 한다.
그러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늙은 부인과 충돌한다.)
조 오 지 : 아, 죄송합니다.
무대감독 : (포레스트 부인이 되어) 넓은 데 가서 놀아야지. 길에서 야구를 하면 어떡하니?
조 오 지 : 잘못했습니다··· 어, 에밀리.
에 밀 리 : 어.
조 오 지 : 너 발표 잘하더라.
에 밀 리 : 뭘··· 원래 먼로주의였는데, 갑자기 코코란 선생님이 루이니아나 퍼처어스를 하래잖아.
사실 두 개 다 많이 준비했거든.
조 오 지 : 야, 되게 웃겨. 밤에 내 창에서 네 머리가 보여. 너 숙제할 때.
에 밀 리 : 정말?
조 오 지 : 너 정말 열심이더라. 어쩜 그렇게 오래 앉아 있니? 공부가 좋으니?
에 밀 리 : 어차피 할 건데, 뭐.
조 오 지 : 그야.
에 밀 리 : 또 싫지도 않고. 시간 보내기 좋잖아.
조 오 지 : 으응. 야, 이거 어떨까? 네 창하고 내 창하고 전화를 놓는거야. 그래 가끔 대수 문제
모르는 게 있을 때 힌트도 좀 주고. 해답이 아니라··· 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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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밀 리 : 그래, 그 정도야. 음, 아, 그럴 땐 휘파람을 불어. 그럼 힌트를 줄게.
조 오 지 : 넌 원래 머리가 좋은가봐.
에 밀 리 : 그 정도 머린 다 갖고 태어나.
조 오 지 : 그래. 난 농부가 될거야. 외삼촌은 언제든 농장으로 들어오래. 나만 잘하면 차차 다 주
신다고.
에 밀 리 : 집이랑 다?
(웹 부인이 큰 사발을 가지고 들어와 아취문 옆 벤치에 앉는다.)
조 오 지 : 그럼, 고마워··· 야구하러 가야겠다. 그거, 고마워. (웹부인에게) 안녕하세요?
에 밀 리 : 응, 그래.
조 오 지 : 잘 있어.
에 밀 리 : 잘 가.
웹 부 인 : 이리 와서 콩이나 좀 벗겨라. 조오지가 말도 걸고 그러니? 꽤 컸어. 몇 살이지?
에 밀 리 : 몰라요.
웹 부 인 : 가만, 열여섯이겠구나.
에 밀 리 : 엄마, 오늘 발표했는데, 되게 잘했어요.
웹 부 인 : 저녁 때 아버지 앞에서 해보렴. 뭐였는데?
에 밀 리 : 루이지아나 퍼어처스요. 한 번도 안 막혔어요. 일생 연설을 해야지. 이런 것도 벗겨요?
웹 부 인 : 그래, 다 벗겨.
에 밀 리 : 엄마, 나··· 예뻐?
웹 부 인 : 요!
에 밀 리 : 예뻐요?
웹 부 인 : 그럼, 우리 애들이야 다 예쁘지. 아님 창피해 살겠니?
에 밀 리 : 아이, 그게 아니고···요. 잘 생겼냐고···요.
웹 부 인 : 글세, 그렇대도. 그만하면 문제없다. 예쁘냐구? 그런 바보 질문이 어딨니?
에 밀 리 : 치, 순 엉터리.
웹 부 인 : 정말이래도.
에 밀 리 : 엄만 예뻤어요?
웹 부 인 : 그럼, 예뻤지. 메이미 카트라이트 빼곤 제일 예뻤는걸.
에 밀 리 : 엄마, 저기요··· 누가··· 날··· 좋아할 것 같으냐고요?
웹 부 인 : 얘, 피곤하다. 그만 해라. 문제 업대도 그러니. 가서 그릇이나 가져와.
에 밀 리 : 엄만 내 말은 듣지도 않아.
무대감독 : 자, 됐습니다. 고기서 끝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다.
(웹 부인과 에밀리 퇴장)
좀 더 알아볼 게 있어서요. 마침 기회가 좋아서 말씀입니다만, 카트라이트 씨네서 은행을 새
로 짓는데, 돈으로 도배를 했어요. 제 친구한테 정초석에다 뭘 넣었으면 좋겠느냐고 묻더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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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한 천 년쯤 있다 파낸다고 가정하고요··· 물론 뉴욕 타임지하고 웹 선생이 내는 센티
널이야 들어가죠··· 몇몇 과학자들이 인쇄물에 아교, 규산염 아교를 칠하는 법을 발견했는데,
그럼 천 년이나 이천 년 쯤 간답니다.
그래 성경도 넣고··· 헌법도 넣고, 또 셰익스피어 전집도 넣고요. 어떻습니까? 어떻게들 생각
하십니까?
옛날 바빌론에는 이백만 명이나 살았습니다만, 남은 거라곤, 왕들의 이름하고, 밀이나 노예
매매계약서 몇 장뿐입니다. 하지만 바빌론에서도 저녁이면 굴뚝마다 연기가 오르고, 아버지는
일터에서 돌아오고, 그리곤 둘러앉아 식사를 했을 겁니다. 여기 우리처럼요. 사실 그리스나
로마도 그 실제생활은 그저 재미있는 시구절이나 연극대본을 통해서 아는 정도죠.
그래 저도 이 연극의 대본 한 권을 정초석에 넣을까 합니다. 천년 후의 사람들이 우리의 평
범한 삶을 알도록 말입니다. 전 그게 베르사이유 조약이나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비행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아시겠죠?
네, 천 년 후의 사람들이나, 지금 여기 우리들이나, 자라서, 결혼하고, 살다가, 죽는 거. 그거
야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오케스트라 피트에 있어 일부분만 보이는 성가대와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싸이먼 스팀슨이 서서 지
휘하고 있다. 사다리 두 개가 밀려 들어와 있다. 각기 깁스와 웹의 집 2층을 나타낸다. 조오지와 에밀리가
사다리에 올라가 숙제를 한다. 깁스는 부엌으로 들어와 책을 읽으며 앉아 있다.)
자, 시간이 꽤 지났군요. 밤입니다.
들리시죠? 교회에선 성가연습이 한창이고, 애들은 집에서 숙제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
도 피곤한 시계처럼 맥이 풀렸습니다.
싸이먼스팀슨 :이거 봐요, 이거 봐. 음악이면 즐거움을 줘야죠. 좀 더 부드럽게. 소리만 지르면 좋은 음악인
줄 알아요? 계속 악악대려면 감리교회로 가요. 악쓰기로야 그 사람들 못 당하니까. 자, 다시,
테너.
조 오 지 : 휙! 야!
에 밀 리 : 응.
조 오 지 : 뭐 해?
에 밀 리 : 공부가 안 돼. 저 달 좀 봐.
조 오 지 : 야, 3번 문제 풀었니?
에 밀 리 : 몇 번?
조 오 지 : 3번.
에 밀 리 : 응, 풀었지. 쉽잖아.
조 오 지 : 글세. 힌트 좀 줄래?
에 밀 리 : 간단해. 벽종이.
조 오 지 : 벽종이?
에 밀 리 : 벽지의 무늬를 세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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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오 지 : 벽지의··· 무늬?
에 밀 리 : 그럼 몇 제곱 야아든지 알 수 있잖아?
조 오 지 : 벽지의··· 아, 알겠다. 고마워.
에 밀 리 : 뭘. 저 달 좀 봐. 찬송가 소리하고··· 숨을 죽이고 있으면 아주 먼 기차 소리도 다 들
려. 들어봐.
조 오 지 : 음··· 어, 정말.
에 밀 리 : 이제 공부해야겠다.
조 오 지 : 그래, 고맘다. 안녕.
에 밀 리 : 안녕.
싸이먼스팀슨 :아참, 화요일 오후 결혼식 때 몇 분이나 오실 수 있죠? 손들어 보세요. 네, 됐습니다. 좋습니
다. 저번에 불렀던 걸로 할 겁니다. 자, 다음은 ‘힘드느냐, 지치느냐?’ 이건 문답식입니다. 준
비.
깁 스 : 예, 조오지야. 잠깐 내려온.
네. (사다리를 내려온다.)
깁 스 : 어려워 마라. 잠깐이면 되니까. 지금 몇 살이지?
저요? 열일곱이요.
깁 스 : 졸업하곤 뭘 하련?
아시잖아요. 외삼촌 농장이요.
깁 스 : 그럼 새벽에 일어나서 우유 짜고, 사료 주고, 하겠단 말이냐?··· 온종일 괭이질에, 건초
에 할 수 있겠어?
그럼요, 그런 걸··· 왜 물으세요?
깁 스 : 음, 오늘 진찰실에 있는데, 무슨 소리가 들리더라··· 뭔지 아니? 너희 어머니가 장작
뻐개는 소리였어. 생각해보렴. 어머닌 일찍 일어나서, 온종일 식사준비에 , 빨래에, 다림질에.
그뿐이냐, 뒷마당서 장작까지 뻐개잖니. 너한테 말하기도 지친게야. 단념하고 직접 하는 게
맘 편하지. 그런데 넌 어머니가 만든 음식을 먹고, 어머니가 애써 지은 옷을 입고, 그리곤 뛰
어나가 야구나 하지. 식모하고 다를 게 뭐 있니? 그걸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옛다, 손수건,
그리고 네 용돈 일주일 50센트로 올려주마. 물론 장작하곤 상관없다. 그거야 어머닐 위하는
순수한 마음일 테니. 어쨌든 자꾸 커가니까. 돈 쓸 데도 많을 거고.
조 오 지 : 고맙습니다.
깁 스 : 아, 내일이 용돈날이지? 자, 세어봐라. 레베카도 올려달라 그러겠지? 헌데 네 어머니가
왠일이냐? 성가연습이 이렇게 늦진 않았는데.
조 오 지 : 인제 8시 반인데요.
깁 스 : 그 거지같은 성가댄 왜 자꾸 나가는지. 꼭 돼지 멱따는 소리밖에 못 내면서··· 야밤에
싸다녀봤자··· 너 잘 시간 안됐니?
조 오 지 : 네. (사다리 위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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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무대에서 웃음 소리와 작별 소리가 들리며 깁스 부인, 쏘옴즈 부인, 웹 부인이 등장하여 큰길을 따
라 오다 무대 모퉁이에 멈춰 선다.)
쏘옴즈부인 :잘 가요. 조심해 가세요.
웹 부 인 : 얘길 해야겠어요. 신문에 좀 내라고요.
깁스부인 : 늦었네.
쏘옴즈부인 :잘 가요.
깁스부인 : 오늘 연습 괜찮았죠? 에밀리 엄마, 저 달 좀 봐요. 감자 풍년 들겠네.
(모두들 잠시 말없이 달을 본다.)
쏘옴즈부인 :이제 우리끼리니까 말이지만, 정말 해도 너무 하잖아요.
깁스부인 : 뭐가요?
쏘옴즈부인 :싸이먼 스팀슨 말예요.
깁스부인 : 그만해 둬요.
쏘옴즈부인 :어떻게 성가대 지휘자가 밤낮 술독에 빠져 살아요? 오늘도 취했잖아요.
깁스부인 : 글세, 누가 몰라요? 그 동안 말썽 부린 거 다들 잘 알죠. 퍼거슨 박사님도 아세요. 박
사님이 그냥 두시는데, 우리야 모른 척 해야죠.
쏘옴즈부인 :모른 척이요? 점점 더 하는데요?
웹 부 인 : 아녜요. 나아진 거예요. 옛날보다 얼마나 뜸해졌다고요··· 아, 이런 밤엔 자기도 싫어.
늦었네. 애들이 안 자고 기다릴 텐데. (쏘옴즈 부인에게) 잘 가요.
(서로들 작별 인사를 나눈다. 웹 부인은 앞무대로 서둘러 와서 자기 집으로 들어가 사라진다.)
깁스부인 : 괜찮겠어요?
쏘옴즈부인 :대낮같은데요. 그이가 창에서 잔뜩 찌푸리고 있군요. 춤바람이라도 난 줄 알고요. 남자들이
란.
(다시 작별 인사. 깁스부인은 자기 집에 이르자 아취문을 통해 부엌으로 들어간다.)
깁스부인 : 여보, 참 재미있었어요.
깁 스 : 지금이 몇 시요?
깁스부인 : 뭐가요? 딴 날하고 똑같은데.
깁 스 : 길바닥에 서서 남 흉이나 보고. 암탉들이란.
깁스부인 : 까다롭긴. 달빛에 나가 헬리오트로프 향기나 맡읍시다.
(둘이 팔짱을 끼고 무대 앞 객석 라인을 따라 거닌다.)
좋지 않수? 뭐 했어요?
깁 스 : 책 봤지, 뭐. 그래 누구 흉들을 봅디까?
깁스부인 : 정말이지, 문젠 문제예요.
깁 스 : 흠! 싸이먼이 또 취했군.
깁스부인 : 정말 심했어요. 어떻게 될까요? 박사님도 계속 놔두진 못하실 거고.
깁 스 : 그 사람 내가 잘 아오만, 이런 작은 마을엔 안 맞는 사람이오. 결국 어떻게 될 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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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 알겠소? 내버려둘 수밖에. 자, 들어갑시다.
깁스부인 : 좀 이따요··· 정말 걱정은 당신이예요.
깁 스 : 뭐가?
깁스부인 : 정말 어디 가서 좀 쉬도록 해드려야지. 유산만 있다면 당장 그러련만.
깁 스 : 거, 쓸데없는 소리 좀 작작 해요.
깁스부인 : 정말 융통성이라곤.
깁 스 : (집으로 들어가며) 들어가요. 늦었소. 감기 걸려요. 아까 그 녀석 좀 나무랬소. 며칠은
장작을 뻐개갰지. 그만 올라가요.
깁스부인 : 잠깐 이거 좀 치우고요. 근데, 여보. 페어차일드 부인은 밤마다 앞문을 잠급디다. 윗마
을선 다들 그런데요.
깁 스 : (램프를 불어 끄며) 되도 않게 도시 흉내는. 뭐 훔쳐갈 게 있다고. 뻔히 다 아는걸.
(두사람 사라진다. 레베카가 사다리 위 조오지 옆으로 파고 든다.)
조 오 지 : 비켜. 좁다니까, 왜 또 방해야?
웹 부 인 : 나 잠깐만 볼게.
조 오 지 : 네 창에서 봐.
웹 부 인 : 내 창에선, 달이··· 오빠. 내가 무슨 생각하는 줄 알아? 아무래도 달이 점점 가까이 와
서 쾅하고 폭발할 것 같아.
조 오 지 : 야, 이 바보야. 달이 가까이 오면 밤새 망원경으로 지키는 사람들이 먼저 보고 알리지.
그래 신문마다 다 나고.
웹 부 인 : 오빠, 달은 남미하고 캐나다, 그리고 전세계의 절반을 비추는 거야?
조 오 지 : 음, 그럴걸.
(무대감독이 무대를 거닌다. 사이.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무대감독 : 아홉시 반입니다. 거의 불이 꺼졌습니다. 아, 저기 워린 보안관이 문단속을 하고 있군
요. 그리고 여기 웹 선생이 편집을 끝내고 돌아옵니다.
(중년이 지난 나이의 워린이 오른쪽 큰길에서 오고, 웹이 왼쪽에서 온다.)
웹 : 수고하십니다.
워 린 : 네, 늦으셨군요.
웹 : 달이.
워 린 : 네.
웹 : 별일 없죠?
워 린 : 싸이먼 스팀슨이 좀 취해서요. 그 부인이 저쪽 길을 찾고, 전 이쪽을 찾는 중입니다.
저기 오네요.
(싸이먼 스팀슨이 큰길 왼쪽에서 비틀거리며 걸어온다.)
웹 : 이보게··· 다들 잠들었어, 조용하다구··· 이봐, 다들 잠이 들어 조용하다니까··· 우리도
자야지. 바래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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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먼은 말없이 계속 비틀거리며 오른쪽으로 사라진다.)
워 린 : 결국 어떻게 될지.
웹 : 글쎄요. 말썽이 끊이질 않으니··· 참··· 우리 집 놈이 담배피는 것 보면 좀 혼내주세요.
꽤 어려워하니까.
워 린 : 담배 안 필걸요. 퓌워봤자 일 년에 두세 가치겠죠.
웹 : 음··· 그렇기야 하면야··· 자, 그럼.
워 린 : 네, 쉬십시오. (퇴장)
웹 : 거 이층에 누구야? 당신이오?
에 밀 리 : 아뇨, 저예요.
웹 : 왜 안자니?
에 밀 리 : 모르겠어요. 잠이 안 와요. 달빛이 너무 좋아요. 레베카네 헬리오트로프 향기도 그렇고
요. 맡아 보세요.
웹 : 음··· 그래. 헌데 너 무슨 걱정 있니?
에 밀 리 : 걱정이요? 아뇨.
웹 : 그래, 좋을 대로 하렴. 그래도 엄마 모르게 하고, 잘 자거라.
에 밀 리 : 네, 안녕히 주무세요.
(웹은 휘파람으로 ‘성도 하나됨에 축복이’를 부르며 집안으로 들어가 사라진다.)
레 베 카 : 제인이 아플 때 목사님이 편지보낸 얘기 안했지? 봉투에 주소가 말야. 제인 크로프트,
크로프트 농장, 그로버즈 코너즈 읍, 싸튼 군, 뉴 햄프셔 주, 미합중국.
조 오 지 : 그게 뭐?
레 베 카 : 들어봐. 아직 아냐. 미합중국. 북미 대륙, 서반구, 지구, 태양계, 우주, 하느님의 뜻. 주
소가 이랬다니까.
조 오 지 : 이야!
레 베 카 : 또 우체부 아저씬 고대로 배달하고.
조 오 지 : 이야!
무대감독 : 여러분, 이걸로 1막은 끝입니다.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십시오.

제 2 막
두 집 부엌의 식탁과 의자는 그대로 있다. 사다리와 작은 벤치는 없다. 무대감독은 예의 자기 자리에서 관
객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있다.
무대감독 : 3년이 흘렀습니다.
네, 해가 천 번도 더 떴다가 졌죠.
저 산들도 세월에 깎이고 빗물에 쓸려서 조금 낮아졌습니다.
3년 전엔 있지도 않던 애들이 제법 똑똑한 말을 하게 됐고, 펄펄 젊다고 믿던 사람들도 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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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서 계단을 못 뛰어오르게 됐죠. 천 날 동안 무슨 일인들 안 일어났겠습니까?
그런데 자연이 하는 일이 또 있죠. 네, 많은 젊은이들이 사랑을 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수백만 갈론의 물이 산을 깎고 물방앗간 옆을 흐르는 동안 여기저기 새 가정이 들어선 겁니
다.
물론 결혼이야 대부분 하는 거지만, 여기서는 정말 예외가 없습니다.
네, 거의 누구나 기혼자로서 임종을 맞죠.
첫째 막이 일상생활이었다면, 이번 막은 사랑과 결혼입니다. 다음엔 또 한 막이 있습니다. 무
슨 얘기가 될 지 짐작하시겠죠?
자, 3년 후 1904년 7월 7일, 고등학교 졸업식 직후입니다. 이때면 젊은이들은 서둘러 결혼을
하죠.
최종시험으로 그 딱딱한 기하와 키케로 화술을 통과하고 나면 갑자기 결혼해도 될 것 같아지
는 모양입니다.
이른 아침입니다. 이맘때는 비가 잦습니다. 천둥이 치면서 쏟아붓곤 하죠. 양쪽 집 텃밭도 흠
뻑 젖었습니다. 완두콩 덩굴하고 버티목들도요.
큰길은 어제 종일 비바람에 앞이 안 뵐 정도였습니다.
음··· 금방이라도 또 올 것 같군요. 들리시죠? 5시 45분 보스톤행 열찹니다.
(두 부인이 각기 부엌으로 들어와 1막에서처럼 일과를 시작한다.)
두 부인께서 오늘도 다른 날처럼 아침을 지으러 내려옵니다. 여성 관객들께야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겠습니다만, 앞에 보시는 이 두 분은 하루 세 번씩 식사 준비를 해오셨습니다. 한
분은 20년, 또 한 분은 40년, 휴가도 없이요. 두 분 다 남매를 키우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그런데도 신경쇠약 한 번 안 걸리셨죠.
중서부 지방 어느 시인 말마따나 ‘살기 위해 삶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기 위해 살라.’ 소위
순환논법이란 겁니다.
하 우 이 : (무대 뒤에서) 이려!
무대감독 : 우유 배달하는 하우이 뉴우썸입니다. 저기 싸이 크로웰이 그 전 자기 형처럼 신문을
돌리면서 옵니다.
(싸이 크로웰이 가상의 신문을 이집 저집 문간에 던지며 들어오고, 하우이 뉴우썸이 베씨를 끌고 큰길로
온다.)
싸 이 : 안녕하세요.
하 우 이 : 그래. 뭐 특별한 얘기가 났니?
싸 이 : 별거 없어요. 우리 읍내 최고의 투수가 없어진다는 기사 말곤요.
하 우 이 : 조오지 말이냐?
싸 이 : 타격에다 주력까지 좋았잖아요.
하 우 이 : 암, 최고였지. 워! 잠깐 얘기도 못해?
싸 이 : 결혼한다고 야구까지 그만두는 건 이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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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우 이 : 글세, 나야 그런 재주가 없으니.
(워린 보안관이 들어온다. 서로들 아침 인사를 주고받는다.)
일찍 나오셨네요.
워 린 : 걱정이 돼서. 밤새 물이 많이 불었거든.
하 우 이 : 조오지가 야구를 관둔다고 이렇게 야단이예요.
워 린 : 그게 정상이란다. 20년 전에도 선수가 있었지. 행크 터드라고. 조오지는 상대도 안될
걸. 헌데 메인에 가서 목사가 됐어. 정말 잘했는데. 날씨가 어떻겠냐?
하 우 이 : 괜찮아요. 개겠는데요.
(워린과 싸이 크로웰은 계속 자기 길을 간다. 하우이는 깁스 씨 댁부터 우유를 배달한다. 깁스 부인이 아
취문에서 하우리를 맞는다.)
깁스부인 : 어서 오세요. 날씨가 어떻겠어요?
하 우 이 : 안녕하세요. 그만큼 쏟아졌으면, 갤 겁니다.
깁스부인 : 제발 그래야지.
하 우 이 : 오늘은 얼마나 쓰십니까?
깁스부인 : 친척들이 많이 올 거예요. 우유 세 통하고 크림 두 통이요.
하 우 이 : 잘들 살 겁니다. 제 처도 그러더군요.
깁스부인 : 고마워요. 부인보고 꼭 오라 그러세요.
하 우 이 : 네, 갈 겁니다. 꼭 갈 겁니다.
(웹 씨 댁으로 건너간다.)
안녕하십니까?
웹 부 인 : 네, 안녕하세요. 우유 네 통이라 그랬죠? 한 통 더 주세요.
하 우 이 : 네··· 크림 두 통 하고요.
웹 부 인 : 비가 또 오겠어요?
하 우 이 : 아뇨, 저 댁서도 말했지만, 갤 겁니다. 제 처가 축하 말씀 전해달라고요. 잘들 살 겁니
다.
웹 부 인 : 고마워요. 두 분 다 꼭 오셔야 돼요.
하 우 이 : 아, 가야죠. 가다마다요, 이려!
(하우이 퇴장. 깁스가 와이셔츠 바람으로 내려와 아침 식탁 앞에 앉는다.)
깁 스 : 드디어, 당신 강아지를 뺏기는구료.
깁스부인 : 그러지 말아요. 눈물나 죽겠는데. 앉아서 커피나 드세요.
깁 스 : 무슨 면도를 한다고, 겨우 솜털 몇 개 갖고. 휘파람에, 콧노래에, 떠나는 게 좋은가봐.
그러다 거울에 대고 네, 네, 서약하는 연습도 하고. 영 못 미더워.
깁스부인 : 정말 잘 살지. 옷도 꼭 내가 챙겨주고, 춥지 않게. 너무 애들이라. 에밀 리가 잘할까?
금방 독감에 걸려서···
깁 스 : 우리 결혼 날 아침 생각이 나는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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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스부인 : 또 그 얘기유?
깁 스 : 어떻게 겁이 나던지. 꼭 실수할 것만 같고. 헌데 신부입장 때 보니까 얼마나 예쁜지.
사실 그게 제일 걱정이었거든. 난생 처음 만난 여자하고 결혼을 하다니.
깁스부인 : 난 어땠다고요. 정말 결혼식은 끔찍해요. 웃기고요. (깁스 앞에 접시를 놓는다.) 드세
요.
깁 스 : 응, 웬걸? 프렌치 토스트잖아.
깁스부인 : 간단하니까. 뭐고 해야겠기에.
(사이. 깁스는 시럽을 따른다.)
깁 스 : 잠은 좀 잤소?
깁스부인 : 시계치는 소릴 여러 번 들었어요.
깁 스 : 그래, 그 녀석이 가장이 된다니. 참, 그 싱거운 녀석이. 세상에 아들만큼 무서운 게 어
딨겠소? 부자관계란 정말 거북하고 조심스럽고···
깁스부인 : 모녀관곈 뭐 거저먹긴 줄 아슈?
깁 스 : 앞으로 고생들이 많겠지. 하지만 어쩌겠소? 저희들이 알아서 해야지.
깁스부인 : 그래요··· 그렇게 둘씩 둘씩 살아가는 거죠. 혼잔 어색해요.
(사이, 깁스가 웃기 시작한다.)
깁 스 : (웃음) 여보, 결혼할 때 별 게 다 겁나는데···
깁스부인 : 그만 좀 해요.
깁 스 : 몇 주 지나면 얘기거리가 없어서 어떡하나?
(함께 웃는다.)
밥 먹을 때도 벙어리처럼. 헌데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할 얘기가 있으니.
깁스부인 : 사노라면 얘기거리야 늘 있죠. (계단 밑으로 간다.) 레베칸 일어났습디까?
깁 스 : 글세, 어째 조용합디다. 오늘은 남 참견도 안하는지. 제 방서 우는 것도 같고.
깁스부인 : 네에? 안돼요. 얘, 레베카, 아침 먹자.
(조오지가 활발하게 계단을 쿵쾅거리며 내려온다.)
조 오 지 : 안녕히 주무셨어요. 이제 다섯 시간이면··· 끽!이예요.
(목을 따는 흉내를 내고는 크게 킥킥대며 웃은 뒤 아취문으로 나간다.)
깁스부인 : 어디 가니?
조 오 지 : 옆집에 색시 보러요.
깁스부인 : 덧신 신어. 비 쏟아진다. 준비도 없이 어딜 나가?
조 오 지 : 아, 요긴데요, 뭐.
깁스부인 : 글세, 감기 걸려. 식장에서 콜록댈래?
조 오 지 : 어머니 말씀 들어라.
(깁스는 이층으로 올라간다. 조오지는 마지못해 부엌으로 돌아와 가상의 덧신 신는 동작을 취한다.)
깁스부인 : 내일부턴 날씨가 어떻든 맘대로 하렴. 하지만 이 집에 있는 동안은 안된다. 아침 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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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찾아가면 좋아하겠니? 자, 우선 커피나 들어.
조 오 지 : 금방 올게요.
(웅덩이를 뛰면서 무대를 가로지른다.)
안녕하세요?
웹 부 인 : 아이, 깜짝이야. 비 맞는데 잠깐··· 들어오란 소린 못하네.
조 오 지 : 왜요?
웹 부 인 : 그것도 몰라? 결혼식 날은 식장에서나 색실 보는거야.
조 오 지 : 아, 거 미신이예요. 안녕하세요.
(웹이 들어온다.)
웹 : 그래.
조 오 지 : 장인께선 그런 미신 안 믿으시죠?
웹 : 미신이라고 다 틀린 건 아냐.
(오른쪽으로 향하여 식탁 앞에 앉는다.)
웹 부 인 : 남들 다 지키는데, 혼자 나서서 어길 필요가 어딨나?
조 오 지 : 에밀린요?
웹 부 인 : 아직 자. 기척도 없어.
조 오 지 : 자요?
웹 부 인 : 그럼. 꿰메고 짐 싸고 다들 꼬박 샜어. 앉아서 장인하고 커피나 들게. 내 올라가볼 테
니. 자네 좀 놀래주라고. 베이컨도 있어. 하지만 빨리 먹게.
(나간다. 어색한 침묵. 웹은 커피에 도우넛을 적신다. 다시 침묵)
웹 : (갑자기 큰 소리로) 그래, 어떠니?
조 오 지 : (깜짝 놀라 커피를 꿀꺽 삼키며) 네? 좋아요. (사이) 그런 미신이 왜 생겼을까요?
웹 : 그거야. 결혼날 아침에 신부 머리가 복잡하니까··· 옷이니 뭐니. 안 그렇겠니?
조 오 지 : 아, 네에. 그거까진 미처.
웹 : 아무래도 신경이 예민해지지.
(사이)
조 오 지 : 이런 복잡한 것 좀 없었으면 좋겠어요.
웹 : 옛날부터 남자들이야 다 그랫지. 하지만 소용없어. 결혼식을 만든 건 여자들이거든. 그
러니 자기들 마음대로지. 결혼식에서 남잔 아무것도 아냐. 여자들끼리 온 세상에 신랑신부의 연분을
공표하는 셈이지.
조 오 지 : 그래도··· 인정 하시잖아요.
웹 : (민첩하게) 그야 물론. 하지만 오해는 마라. 그래도 결혼은 좋은 거다. 암, 정말이다.
조 오 지 : 네. 장인께선 몇 살에 결혼하셨어요?
웹 : 응, 나야, 대학 다니고, 직장 잡느라고 좀 늦었지. 저 사람은 에밀리보다 약간 더 먹었
었고. 하지만 나인 중요한 게 아니다. 정말 중요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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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오 지 : 뭔데요?
웹 : 글세. (사이) 결혼 전날 우리 아버지 말씀이. ‘처음부터 꽉 잡아라. 제일 좋은 건 명령
하는 거야. 무조건 복종을 시켜. 그리고 바가질 긁거나. 어쨌든 화가 나면, 벌떡 일어나서 나
가버려. 그럼 정신차린다. 또 절대로, 죽어도, 너한테 돈이 얼마 있는지 가르쳐주지 마라.’
이러셨거든.
조 오 지 : 에이··· 그래도 어떻게···
웹 : 그래 난 그 정반대로 했지. 그랬더니 아직까지 이렇게 편안하단다. 명심해라. 이런 일
에 남의 충고는 소용없다는 걸. 너 농장에서 양계해 볼 생각 없니?
조 오 지 : 네?
웹 : 닭 키워볼 생각 없냐고?
조 오 지 : 외삼촌은 별 관심이 없지만, 전···
웹 : 사무실로 책이 한 권 왔는데. 최신 양계법 책이야. 한 번 읽어봐. 난 뒷곁에다 한 번
해보려고. 지하에 부화기나 한 대 들여놓고···
(웹 부인이 들어온다.)
웹 부 인 : 또 그 부화기 얘기예요? 난 또 둘이 뭐 대단한 얘기나 한다고.
웹 : (날카롭게) 대단한 얘기 하구료. 둘이서. 난 올라갈 테니.
웹 부 인 : (조오지를 일으키며) 에밀리도 아침 먹어야지. 인사는 전하데만, 만나기 싫대. 자.
조 오 지 : 네.
(당황하고 풀이 죽어 자기 집으로 건너간다. 천천히 웅덩이를 피해 집 안으로 사라진다.)
웹 : 여보, 당신 그 미신 모르지?
웹 부 인 : 뭐요?
웹 : 옛날 고래적부터 결혼 임박한 신랑은 장인을 만나면 안된다는 거. 알아?
(두사람 퇴장)
무대감독 : 네, 감사합니다. 여기서 끊고, 자초지종을 좀 알아보죠.
결혼. 백 년을 해로한다는 이 계획.
이런 큰 일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말입니다.
스물한두 살에 몇 가지 결정을 하면, 눈 깜짝할 새에 일흔이죠.
변호사 생활 오십년에다, 옆의 백발 부인과 식탁을 마주한 건 오만 번 이상이고요.
이런 일이 어떻게 시작될까요?
이제 두 젊은이가 어느 날 주고받던 대화를 들려드릴 겁니다.
다들 젊었던 시절을 기억해 주십시오.
특히 사랑에 빠져, 몽유병자처럼, 어딜 걷는지, 무슨 얘길 듣는지 몰랐던 시절, 그러니까 약
간 돌았던 때를 말입니다.
세 시가 되면 학교가 파합니다.
조오지는 2학년 회장으로 뽑혔습니다. 물론 지금은 학년말이니까 일은 3학년 1년동안 하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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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
또 에밀린 서기 겸 회계로 뽑혔습니다. 중요한 자리죠.
(깁스 댁 식탁 의자 두 개를 가져다 등받이 위에 판자를 걸쳐놓는다. 그리고 무대 옆에서 높은 걸상 두 개
를 가져다 판자 뒤에 놓는다.
걸상에 앉으면 객석을 마주하게 된다. 이것은 모오건 약국의 판매대이다. 왼쪽 무대 뒤에서 아이들의 소리
가 들린다)
아, 저기들 오는군요.
(에밀 리가 가상의 책을 잔뜩 안고 왼쪽 한길로 온다.)
에 밀 리 : 안돼. 집에 가야 돼. 잘가. 어, 이따 우리집에 올래? 라틴어. 정말 지겨워. 말씀드려봐.
잘 가. 그래. 잘 가. 잘 가.
(역시 책을 든 조오지가 에밀리를 쫓아온다.)
조 오 지 : 어, 내가 들어줄게.
에 밀 리 : (차갑게) 됐어··· 그래, 잠깐이니까. (조오지에게 책을 준다.)
조 오 지 : 잠깐만. 야, 먼저들 연습하고 있어. 대충 하지 말고.
에 밀 리 : 잘 가.
조 오 지 : 잘 가. 너도 뽑혀서 잘 됐어.
에 밀 리 : 고마워.
(둘은 뒷벽 바로 앞 한길에 서 있다. 객석 쪽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조오지가 멈추며 말문을 연다.)
조 오 지 : 너 왜 날 보면 화를 내니?
에 밀 리 : 내가 언제?
조 오 지 : 요즘.
에 밀 리 :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선생님 한 분이 지나가는 것을 본다.)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조 오 지 : 안녕히 가세요··· 말해봐.
에 밀 리 : (꾸짖는 태도는 아니나 말하기가 어려운 듯) 넌 일 년 동안 너무 변했어. 난 그게 싫
어. 기분 나쁘겠지만. 사실대로 말해야지.
조 오 지 : 변해? 무, 무슨?
에 밀 리 : 일 년 전만 해도 네가 좋았어. 그래 뭘 하든 열심히 지켜봤지··· 소꿉친구니까··· 그런
데 넌 야구에 팔려서··· 말도 안하고. 식구들한테도 그런다며··· 잘난 체 하고 거만해졌대. 여
자애들이 다 그래. 네 앞에선 안 그래도 뒤에선 다들 그런다고. 그런 얘기, 나도 속상애. 하
지만 어느정도 사실인 걸 어떡해. 기분 상태도··· 할 말은 해야지.
조 오 지 : 응··· 그래, 고마워. 정말 몰랐어. 누구나 완벽할 순 없잖아.
(그들은 한두발짝 내딛다간 괴로운 듯 멈춰선다.)
에 밀 리 : 남잔 완벽해야 돼. 그래야 돼.
조 오 지 : 응··· 하지만 어떻게 그래?
에 밀 리 : 우리 아버진 그래. 너희 아버지도 그렇고. 너만 안되란 법이 어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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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오 지 : 아니, 정반대야. 남자란 원래 안 좋아. 여잔 다르지만.
에 밀 리 : 날 보고서도 그런 소릴 하니? 여잔 완벽해질 수 없어. 남자랑 달라. 속도 좁고··· 미안
해. 괜한 소릴.
무슨.
에 밀 리 : 정말은 안 그렇다는 거 알아.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조 오 지 : 저기··· 아이스크림이나 뭐 좀 먹고 갈래?
에 밀 리 : 그래.
(둘은 객석 쪽으로 나오다가 오른쪽으로 꺾어져 모오건 약국의 문을 연다. 에밀리는 몹시 감동한 듯 고개
를 숙이고 있다. 조오지는 지나가는 이들에게 인사한다.)
조 오 지 : 야, 오랜만이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안경을 쓰고 모오건 역을 하는 무대감독이 오른쪽에서 갑자기 나와 소다수 용기가 있는 판매대와 객석
사이에 선다.)
무대감독 : 어서들 오너라. 뭘 줄까? (에밀리에게) 아니, 울었니? 왜?
조 오 지 : (설명하느라 더듬대며) 저기요··· 철물점 아저씨가 마차를 막 몰아서요. 하마터면 치일
뻔 했어요.
(물을 따르며) 거, 참. 자, 물 마셔라. 놀랬구나. 요샌 큰길 건널 때 조심해야 돼. 갈수록 심
해지니, 원. 그래, 뭘 들련?
에 밀 리 : 스트로베리 탄산수요.
조 오 지 : 그거 말고, 딸기 아이스크림 소오다 둘 주세요.
무대감독 : (꼭지를 틀며) 네에, 딸기 아이스크림 소오다 둘이요. 어제 주 검열관이 왔었는데, 지
금 우리 읍내에 말이 백스물 다섯 마리란다. 헌데 그 무슨 자동차라는 게 또 나온다니. 죽치
고 집에만 있든가 해야지. 에이, 개란 놈이 길바닥서 퍼질러 자도 까딱없던 시절도 있었건만.
(두사람 앞에 가상의 잔들을 놓는다.)
자, 맛있게 드세요.
(오른쪽에 손님이 온 것을 본다.)
어서 오세요. 뭘 드릴까요?
(무대감독은 오른쪽으로 나간다.)
에 밀 리 : 이건 비싸잖아.
조 오 지 : 아냐. 우리 당선 축한데. 그리고 또 무슨 축한 줄 알아?
에 밀 리 : 아니.
조 오 지 : 뭐든 충고해주는 친구가 생긴 축하.
에 밀 리 : 제발 그 얘긴 관둬. 내가 왜 그랬을까? 진심이 아냐. 넌···
조 오 지 : 아냐. 잘했어. 고맙고. 이제 두고봐. 금방 달라질 거야. 믿어도 돼. 그리고, 나, 부탁이
있어.
에 밀 리 :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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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오 지 : 내년에 나 농과대학 가면 가끔 편지할래?
에 밀 리 : 그럼. 꼭 할게.
(사이. 빨대로 소오다를 홀짝거리기 시작한다.)
3년이나 떠나 살다 보면, 이런 시골에서 가는 편진 시시해 보일걸. 나야 여기가 좋지만.
조 오 지 : 여기 일이 어떻게 안 궁금하겠어? 정말이야.
에 밀 리 : 그래. 내 편지 재미있게 쓸게.
(사이)
조 오 지 : 저, 사실은, 꼭 농과대학을 가야 좋은 농부가 되는지 물어봤거든. 농부들 볼 때마다.
에 밀 리 : 뭐하러···
조 오 지 : 근데 시간낭비란 사람도 있더라. 정부에서 나오는 책자만 봐도 다 알 수 있다는 거지.
또 외삼촌도 자꾸 늙어가시고. 당장 내일이라도 물려주시겠대. 내가 문제지.
에 밀 리 : 어머!
조 오 지 : 그리고 네 말대로. 그렇게 오랫동안···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하고··· 가기 싫어. 정
말, 낯선 사람들이 오랜 친구만 하겠니? 아닐 거야··· 너처럼 좋은 친구가 있는데, 굳이 다른
데서 새 친구를 사귈 필요도 없고.
에 밀 리 : 그래도 배우는 게 좋지 않을까? 가축 감정이나 토질이나 그런 거··· 잘 모르지만.
(잠시 후 아주 진지하게)
조 오 지 : 결심했어. 안 갈래. 오늘 밤 아버지께 말씀드리겠어.
에 밀 리 : 지금 꼭 결정할 게 뭐 있어? 1년이나 남았는데.
조 오 지 : 고마워. 아까 그 얘기··· 내 결점 말야. 네 말이 맞아. 하지만 한 가진 틀렸어. 내가 아
무한테도 아는 체를 안했다고? ··· 너한테도? 너 내가 뭘하든 열심히 지켜봤다며? ··· 나도
계속 그랬어. 항상 너를 생각했단 말야. 중요한 사람으로. 관중석 어디에, 누구랑 있었는지도
알아. 또 요 사흘동안은 바래다 주려고 했는데. 꼭 뭐가 막히더라고. 어제도 벽에 기대서 기
다렸는데, 코코란 선생님하고 갔잖아.
에 밀 리 : 참··· 희한해. 그것도 모르고 난···
조 오 지 : 저기, 농과대학 말야. 만약 너한테 좋은 사람이 생기면··· 물론 그 사람도 널 좋아하고.
성격같은 것까지도··· 그게 대학만큼. 아니, 대학보다 더 중요하지 않을까? 난 그런데.
에 밀 리 : 나도.
조 오 지 : 저기.
에 밀 리 : 그래, 알아.
조 오 지 : 저기, 나, 노력할게. 달라질게. 그럼··· 너···
에 밀 리 : 그래, 알아.
조 오 지 : (잠시 후) 무슨 얘긴지 알지?
에 밀 리 : 그래, 알아.
조 오 지 : (숨을 크게 쉬고 몸을 바로 세운다.) 잠깐만, 내가 바래다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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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에서 돈을 찾으며 점점 놀래는 기색이다. 무대감독이 오른쪽에서 들어온다. 조오지는 쩔쩔매며 무
대감독에게 솔직하게 말한다.)
죄송해요, 아저씩. 금방 갖다드릴께요.
무대감독 : (짐짓 불쾌한 듯) 뭐가 어쩌고 어째?
조 오 지 : 좀 그렇게 됐어요. 여기 시계요. 금방 올께요.
무대감독 : 됐다. 널 믿으마.
조 오 지 : 5분 안에 올께요.
무대감독 : 10년 안에만 갚으면 된다. 이제 괜찮니?
에 밀 리 : 네, 고맙습니다.
조 오 지 : (판매대에서 책을 집어들며) 가자.
(둘은 묵묵히 무대를 가로질러 웹씨 댁 뒷문의 아취문을 지나 사라진다. 무대감독은 그들이 나가는 것을
보고는 안경을 벗으며 객석 쪽을 향한다.)
무대감독 : 자··· (손뼉을 쳐서 신호를 한다.) 이제 결혼식 준비를 하겟습니다.
(무대감독은 다음 장면을 위해 무대를 준비하는 동안 서서 기다린다. 무대 일꾼들이 양쪽 집의 의자와 식
탁과 아취문을 치우고, 무대 중앙에 교회 좌석을 마련한다.
손님들은 뒷벽을 향해 앉게 된다. 교회 통로는 뒷벽에서부터 객석쪽으로 나 있다. 나중에 무대감독이 목사
역을 하면서 올라설 작은 단을 뒷벽에 붙여놓는다. 환등기로 색유리창의 형상을 뒷벽에 투사한다.
무대감독은 준비가 끝나자 앞무대 중앙에서 서성대다 생각에 잠겨 관객에게 말한다.)
결혼에 대해선 할 말도 많고, 결혼식 동안엔 생각도 많습니다.
하지만 결혼식 한 번에 그걸 다 확인할 순 없겠죠. 게다가 여기 결혼식은 정말 간소하고 짧
거든요.
하지만 오늘은 제가 목사 노릇을 하니까 몇 마디는 더 할 수 있죠.
이제 잠시 연극이 좀 엄숙해질 겁니다. 결혼을 성사라 부르는 교회도 있잖습니까. 그 의미를
확실히는 몰라도 짐작은 갑니다. 아까 깁스 부인께서도 그러셨지만, 인간은 둘씩 살아가게
마련이니까요.
이건 훌륭한 결혼식입니다. 하지만 이런 자리라도 인간이 모이면 맘속 깊이 복잡하게 엉킨
것들이 있게 마련이죠. 오늘 연극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 장면의 정말 주인공은 무대에 없습니다만, 다들 아실 겁니다. 어떤 유럽 친구가 말했듯,
아이들을 세상에 탄생시켜 인간으로 완성시키는 자연의 섭리죠. 네, 자연은 꾸준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양적으로, 또 질적으로요. 덕분에 저도 목사 노릇을 하는 거고요.
그리고 이 결혼식에 또 다른 증인이 있는 걸 잊지 마십시오. 수백만의 우리 조상님들 말입니
다. 그 분들도 거의 둘씩 둘씩 인생을 시작하셨죠. 네, 수백만 명이요. 이상이 제 설교 내용
입니다. 오래 안 걸립니다.
(오르간으로 헨델의 ‘라르고’를 치기 시작한다. 신도들이 교회로 밀려들어와 조용히 앉는다. 교회 종소리가
들린다. 깁스 부인은 오른쪽 맨 앞줄 통로 쪽 첫 자리에 앉는다. 그 옆에 레베카와 깁스, 통로 건너 웹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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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 월리, 웹. 소규모 성가대가 색유리창 아래에 객석을 향하여 자리잡는다. 웹 부인이 자리로 가다가 돌
아서서 객석에 대고 말한다.)
웹 부 인 : 왜 눈물이 날까요? 울 일도 아닌데. 아침을 먹다 터졌답니다. 우리 애도 같이 먹는데,
불쑥 17년 동안 먹던 아침도 이젠 다른 집서 먹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그랬나
봐요.
근데 걔가 갑자기 ‘더 못 먹겠어요’ 하더니 식탁에 머릴 떨구고 울지 않겠어요.
(자기 자리 쪽으로 가려다가 다시 돌아서서 덧붙인다.)
정말이지, 딸을 이런 식으로 시집보내는 건 너무 가혹해요.
친구들이 몇 가지 알려줬겠지만, 제가 뭘 어떻게 하겠어요. 저도 장님처럼 시작한걸요.
(다소 우습게 화를 내며)
세상이 다 틀려먹었어요. 아유, 벌써 오네.
(서둘러 자기 자리로 간다. 조오지가 극장 객석의 오른쪽 통로를 따라 내려오기 시작한다. 갑자기 야구부
친구 세명이 야구복 차림으로 오른쪽 프로시니엄 기둥 옆에 나타나 휘파람과 괴성으로 놀려댄다.)
친 구 들 : 야, 좋겠다. 왜 죽을 상이냐? 순진한 척 하지 마. 네 속 다 알아. 야구단 망신이다.
무대감독 : 자, 자, 그쯤들 해둬.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무대밖으로 몰아낸다. 그들은 상체를 뒤로 젖히며 몇 마디 더 놀린다.)
이런 장난이야 어디서나 다 하는 거 아닙니까. 옛날부터요.
(성가대가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부르기 시작한다. 무대에 도착한 조오지는 잠시 신도석을 보더니 움츠린
채 오른쪽 프로시니엄 기둥 쪽으로 몇 발짝 물러선다. 앞줄의 깁스 부인이 아들이 당황한 걸 알아챈 듯
재빨리 일어나 통로를 통해 온다.)
깁스부인 : 얘, 왜 그러니?
조 오 지 : 난 어른 안 될래요. 왜들 이렇게 서둘러요?
깁스부인 : 네가 서둘렀지.
조 오 지 : 글세···
깁스부인 : 글쎄고 절쎄고 넌 인제 어른이야.
조 오 지 : 제발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저는요···
깁스부인 : 얘, 누가 들을라. 그만 해. 정말 창피해 못 살겠다.
조 오 지 : (정신을 차리고 무대를 둘러보며) 알았어요. 에밀린 어딨죠?
깁스부인 : (안심하며) 얘, 정말 놀랬다.
조 오 지 : 걱정 마세요. 결혼할게요.
깁스부인 : 그래, 잠깐 숨 좀 돌리고.
조 오 지 : (어머니를 위로하며) 목요일 저녁은 꼭 비워놓으세요. 저희가 뵈러 갈께요··· 왜 우세
요? 준비해야죠.
(깁스부인은 감정을 추스리며 아들의 넥타이를 잘 매주고 귓속말을 한다. 이동안 에밀리는 흰 옷에 면사포
를 쓰고 객석을 통하여 무대에 오른다. 에밀리 역시 교회 신도석을 보고는 놀라서 뒷걸음을 친다. 성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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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성도 하나됨에 축복이’를 시작한다.)
에 밀 리 : 아, 미치겠어. 어쩜 저런 표정을. 밉살맞어. 죽고 싶어. 아빠!
웹 : (자리에서 일어나 걱정스럽게 다가온다) 이게 무슨 짓이냐?
에 밀 리 : 아빠, 저 시집 안 갈래요.
웹 : 쉿, 겁낼 거 없어.
에 밀 리 : 잠깐 그냥 있을께요. 저랑 어디 가서···
웹 : 자, 자 진정해라.
에 밀 리 : 늘 그러셨잖아요. 늘이요. 전 아빠 거라고요. 어디라도 가요. 제가 다 할께요. 살림도
요.
웹 : 어허. 그럼 못쓴다. 겁낼 거 없어.
(돌아서서 조오지를 부른다.)
여보게, 이리 잠깐 오게.
(딸을 조오지 쪽으로 인도하며)
자, 네 신랑감이다. 훌륭한 청년이지.
에 밀 리 : 아빠···
(깁스 부인은 조용히 자리로 돌악나다. 웹은 한 팔로 딸을 감은 채, 조오지 어깨에 팔을 얹는다.)
웹 : 자, 내 딸을 데려가게. 잘해주겠지?
조 오 지 : 그럼요. 열심히 할께요. 에밀리, 힘껏 노력할게. 사랑해. 에밀리가 필요해.
에 밀 리 : 그래. 그럼 좀 도와줘. 난 사랑이 필요해.
조 오 지 : 그래, 그럭할게.
에 밀 리 : 영원히. 알겠어? 영원히.
(서로 포옹한다. ‘로오엔그린’ 행진곡이 들린다. 무대감독이 목사로서 뒷벽 중앙단 위에 선다.)
웹 : 자, 다들 기다린다. 잘될거야. 어서 가자.
(조오지는 가만히 무대감독 옆으로 가 자리잡는다. 에밀리는 아버지의 팔을 끼고 통로를 통해 나아간다.)
무대감독 : 신랑에게 묻겠습니다. 신랑 조오지 군은 신부 에밀리 양을 아내로 맞이하여···.
(맨 뒷줄에 앉아 있던 쏘옴즈 부인이 옆 사람들에게 째지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 소리에 무대감독의 나머
지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쏘옴즈부인 :정말 짭짤한 결혼식이지 뭐유. 이렇게 훌륭한 결혼식은 처음 봐요. 마음이 흐뭇하네요. 제법
색시 티가 나지 않아요?
조 오 지 : 네.
무대감독 : 신부에게 묻겠습니다. 신부 에밀리 양은 신랑 조오지 군을 남편으로 맞이하여···
(역시 다음말은 쏘옴즈 부인말에 묻혀 버린다.)
쏘옴즈부인 :정말 이렇게 훌륭한 결혼식은 본 적이 없다니까요. 헌데 이럴 땐 왜 그런지 꼭 눈물이 난다
니까. 행복하게 잘들 살아야 할 텐데. 아유, 대견도 하지.
(반지와 키스 교환의 절차. 무대는 갑자기 조용해진다. 무대감독은 먼 곳을 응시하며 혼자말 하듯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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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감독 : 지금까지 이백쌍 이상의 주례를 섰습니다. 정말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을 하고··· 또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오두막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고, 일요일 오후에 산책을 나가고, 신경통에 걸리고, 손주들이 생기고, 두 번째 신경통,
임종, 유서 낭독···
(비로소 관객을 본다. 다음 말부터는 미소를 곁들임으로써 자조적인 분위기가 사라진다.)
살다 보면 즐거운 일보다는 괴로운 일이 많은 법이죠. 훨씬이요. 자, 멘델스존의 ‘결혼행진
곡’을 부탁합니다.
(오르간 연주가 시작된다. 신랑신부는 기쁨에 차서, 그러나 엄숙하게 통로를 통과한다.)
쏘옴즈부인 :정말 어울리는 한 쌍 아녜요? 이렇게 훌륭한 결혼식은 난생 처음이예요. 잘들 살 거야. 행복
해야지. 그게 최고야. 암, 최고구 말고.
(신랑 신부는 객석 앞 계단에 이른다. 그들에게 밝은 조명이 떨어진다. 그들은 객석으로 내려가 즐겁게 통
로를 뛰어나간다.)
무대감독 : 이것으로 2막이 끝났습니다. 10분간 쉬겠습니다.

제 3 막
막간에 무대일꾼들이 무대 정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중앙에서 조금 오른쪽으로 열 개 내지 열두 개의 평범한 의자를 석 줄로 간격을 두어 객석을 향하여 놓는
다.
이것은 공동묘지의 무덤이다.
휴식시간이 끝날 무렵 배우들이 들어와 자리잡는다.
무대감독 : 그 동안 9년이 흘러서, 1913년 여름입니다.
우리읍내도 조금씩 변했습니다. 마차가 줄어들고.
농부들도 자동차로 읍내출입을 하게 됐죠.
또 밤이면 집집마다 문을 잠그고요. 아직 도둑이 든 적은 없지만, 소문은 많거든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놀랄만큼 변화가 없습니다.
자, 여긴 우리 읍내에서 정말 중요한 곳입니다. 산등성이라 바람이 세지만, 위로는 끝없는 하
늘에, 수많은 구름에, 시시각각 해와 달과 별이 빛나는 곳이죠.
맑은 날 한낮에 올라오면 짙푸른 산맥 너머 저쪽으로 써너피 호수와 위니페소키 호수가 보이
고··· 망원경으로는 북 콘웨이와 콘웨이가 있는 화이트 산과 워싱턴 산까지 보입니다. 물론
우리가 잘 아는 모나드 녹크 산은 바로 조기고요. 그 주위에 제프리, 동 제프리, 피터브러,
더블린, (객석을 가리키며) 그리고 바로 저 아래 그로버즈 코너즈가 있는 겁니다.
네, 여긴 아름다운 곳입니다. 월계수에 라일락이 한창이군요. 왜들 우드로온이나 브루클린에
묻히고 싶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뉴햄프셔에 머물 수도 있을텐데.
저쪽으로 (무대 왼쪽을 가리키며) 오래 된, 천육백 칠, 팔십년대 무덤들이 있습니다. 자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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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 이 멀리까지 온, 의지가 굳은 분들이죠. 여름이면 사람들이 찾아와 재미있는 비문을 보
며 웃곤 한답니다. 나쁠 거 없죠. 또 보스톤의 족보학자들도 옵니다. 경비는 조상을 찾는 도
시 사람들이 대고요. 자기들이 독립전쟁과 메이플라워의 후손임을 확인하려는 거죠. 역시 나
쁠거 없잖습니까. 세상 도처에 웃기는 일인데.
저긴 남북전쟁 참전자들입니다. 쇠로 만든 깃발이 꽂혀 있군요··· 뉴햄프셔 밖으로··· 50마일
도 못 나가본 청년들이 합중국이 단결해야 한다며 나가서 죽은거죠. 오로지 미합중국이란 이
름밖에 모르면서, 그 미합중국을 위해서요.
여기도 공동묘집니다. 잘 아시는 깁스부인. 그리고, 어디보자, 아, 성가대 지휘하던 싸이먼
스팀슨. 또 쏘옴즈 부인. 생각나시죠? 결혼식때 그렇게 좋아하시던. 그러고도 많습니다. 편집
장 웹 선생 댁 아들 월리, 소년단에 들어서 크로포드 놋취로 여행을 갔다가 급성 맹장염으로
그만.
네, 수많은 슬픔이 서린 곳입니다. 이 위에다 혈육을 모시며 슬픔에 몸부림치는 사람들. 상상
이 되죠? 하지만 해가 쪼이고··· 비가 오고··· 눈이 오고··· 아름다운 곳 아닙니까? 다행이
죠. 언젠간 우리도 와야 하니까요.
그런데 다 알면서도 좀체 안 꺼내보는 게 있습니다. 바로 영원한 무엇이 있다는 사실이죠.
그건 집도, 이름도 , 지구도, 별도 아닙니다. 하지만 다들 뼛속 깊이 알고 있죠. 뭔가 인간과
함께하는 영원한 게 있다는 걸. 과거 위대한 인간들 모두가 말합니다. 우리 인류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까맣게 그것을 잊고 살았는가를. 네, 인간 누구에게나 영원한 무엇이 있답
니다.
(사이)
죽은 이들은 우리 산 사람들을 별로 오래 기억하지 않습니다. 차츰 이승과 연을 끊고··· 야망
도··· 기쁨도··· 고통도··· 사랑도 다 잊고, 떨어져나갑니다.
네, 떨어져나가죠. 사실 여기도 육신이 썩어 사라지는 동안 잠시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서 차
츰 우리 읍내 일에도 무심해지는 거고요.
기다리는 거죠. 느껴지는 뭔가가 오길요. 뭔가 중요하고 위대한 것이. 자신의 영원한 뭔가가
분명해지길 기다리는 거 아니겠어요?
죽은 사람들 말 중엔 기분 언짢은 것도 좀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할 수 없죠. 어머니와 딸···
남편과 아내··· 원수와 원수··· 돈과 제물··· 이렇듯 중요하던 것들도 여기선 점점 빛을 잃거든
요. 그러다 모든 기억이 없어지면, 자기가 누군지나 알겠습니까?
(잠시 객석을 보다가, 무대쪽으로 돌아선다)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기 장의사 주인 조오 스터더드가 갓 만든 무덤을 살
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긴 마을을 떠나 서부로 갔던 청년입니다.
(조오 스터더드가 뒷무대에서 서성거린다. 우산을 든 쌤 크레이그가 힘이 드는 듯 이마의 땀을 닦으며
왼쪽으로 들어와 앞무대에서 왔다갔다한다.)
쌤 : 아저씨,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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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더드 : 응, 응, 가만 있자, 누구야?
쌤 : 쌤 크레이그예요.
스터더드 : 아이구, 이게 누구야? 장례식 때문에 왔구먼. 떠난 지 꽤 됐지?
쌤 : 12년이 넘었죠. 버팔로에서 사업을 하는데, 마침 동부에 왔다 사촌 형수 돌아가셨단
소식을 들었어요. 그래 고향집도 들러볼 겸 왔죠. 좋아 보이시네요.
스터더드 : 응, 그냥 사니까. 가슴아픈 일일세.
쌤 : 네,
스터더드 : 정말이지, 젊은 사람들 일 치르는 건 영 싫어. 이제 금방들 올 걸세. 난 일찌감치 올라
왔지. 상가 일은 아들놈 맡기고.
쌤 : (비석을 보며) 매카시 영감님. 그 댁 일도 꽤 했는데. 방과 후에요. 늘 요통으로 고생
하시더니.
스터더드 : 그래, 여기 모신 지 꽤 됐지.
쌤 : 아, 이모님··· 돌아가신 것도 잊어버리고··· 그래, 맞아.
스터더드 : 응, 의사 선생님, 2, 3년 전에 상처하셨지. 이맘때일걸. 헌데 또 이런 흉사를 당하시다
니.
깁스부인 : (싸이먼 스팀슨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내 이질이라우. 조카요. 쌤··· 쌤 크레이그.
싸이먼스팀슨 : 난 산 사람들이 옆에 오면 불편해요
깁스부인 : 가만 있어요.
쌤 : 비문은 보통 자기가 써 놓나요?
스터더드 : 아니, 대개 유족들이 고르지.
쌤 : 이모한텐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이모들도 거의 다 돌아가셨네요. 가만, 아버지 어머니
산소가···
스터더드 : 저쪽··· F줄이야.
쌤 : (싸이먼 스팀슨의 비문을 읽으며) 이 양반, 성가대 지휘자였죠? 술주정뱅이요.
스터더드 : 그럴 줄 누가 알았겠나? 말썽은 많았지만.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자살했다네.
쌤 : 네에?
스터더드 : 다락방에서 목을 맸어. 쉬쉬 했지만, 비밀이 있나? 비문도 제가 골랐지. 보게. 좀 이상
하지?
쌤 : 아니, 이건 악본데요?
스터더드 : 글세, 난 잘 모르네만, 그게 신문마다 실리고 떠들썩했지.
쌤 : 근데 무슨 병으로?
스터더드 : 누구?
쌤 : 제 이종 형수요.
스터더드 : 몰랐나? 어린애 낳다 그랬지. 둘째였는데. 위로 네 살쯤 된 아들이 하나 있고.
쌤 : (우산을 펴며) 산소를 저기 쓰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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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더드 : 응, 여기 깁스댁 쪽은 다 차서, 저쪽 B줄에 새로 마련했지. 자, 올라들 오는군.
(뒷무대 왼쪽에서 중앙으로 장례 행렬이 들어온다. 남자 넷이 가상의 관을 들었다.
나머지는 우산을 썼다. 대충 깁스, 조오지, 웹 부부 등이 보인다.
그들은 뒷무대 중앙 약간 왼쪽에 있는 무덤 주위에 모여 있다.)
쏘옴즈부인 :누구유?
깁스부인 : (시선을 올리지 않으며) 내 며느리, 에밀리요.
쏘옴즈부인 :(약간 놀라나 감정 없이) 원, 저런, 이 진창에 여기까지 오다니. 어쩌다 죽었수?
깁스부인 : 해산하다.
쏘옴즈부인 :해산.
(거의 웃을 뻔하며) 다 잊어버렸군. 참 전생엔 얼마나 (한숨을 쉬며) 좋았수!
싸이먼스팀슨 : (곁눈질하며) 좋았다고요?
깁스부인 : 잘 생각해봐요.
쏘옴즈부인 :걔 결혼식 때. 얼마나 짭짤했수? 졸업식 때 답사를 잘도 읽더니, 교장선생님이 여러 번 그럽
디다. 걔만큼 똑똑한 애도 드물다고. 내가 죽기 직전에 걔들 농장에 가봤는데, 정말 잘해 놓
았습디다.
죽은여자 : 바로 우리 옆이었어요.
죽은남자 : 농장이 정말 아담했어요.
(죽은 이들은 침묵한다. 무덤 옆의 사람들은 ‘성도 하나됨에 축복이’를 부른다.)
죽은여자 : 좋아하는 찬송가예요. 들었으면 했더니.
(사이.
갑자기 우산 사이로 에밀리가 나타난다. 흰 옷 차림에 머리는 뒤로 늘어뜨리고 소녀처럼 하얀 리본을
했다.
에밀리는 천천히 오면서 죽은 이들을 이상한 듯 보고 약간 얼떨떨해 한다.
도중에 멈추고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잠시 조객들을 보고는 깁스 부인 옆의 빈 자리로 천천히 가서 앉
는다.)
에 밀 리 : (모두에게 조용히, 미소지으며) 안녕하세요.
쏘옴즈부인 :어서 와.
죽은남자 : 어서 와요.
에 밀 리 : 어머니.
깁스부인 : 그래.
에 밀 리 : 안녕하셨어요? (놀라며) 비가 와요. (조객들을 돌아본다)
깁스부인 : 그래··· 금방들 갈 거다. 좀 쉬어라.
에 밀 리 : 몇 천년이 지난 것도 같고··· 제가 좋아하는 찬송가예요. 아빠가 아시고. 저도 진작 올
걸 그랬어요. 낯이 설어서··· (싸이먼에게) 안녕하세요?
싸이먼스팀슨 : 오랜만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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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는 이상한 듯 계속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본다.
그리곤 조객들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다소 초조한 태도로 깁스 부인에게 말을 건다.)
에 밀 리 : 어머니. 조오지하고 둘이서 농장을 잘 가꿔 놓았어요. 늘 어머니 생각을 했죠.
새로 지은 축사하고 시멘트로 만든 길다란 급수대도 보여드리고 싶었고요. 어머니께서 남겨
주신 돈으로 마련했거든요.
깁스부인 : 내가?
에 밀 리 : 생각 안 나세요? 유산이요. 350달러도 넘었잖아요.
깁스부인 : 아, 그래.
에 밀 리 : 근데 그 급수대는요, 묘한 장치가 돼 있어서, 물이 넘치지도 않고, 또 어느 선 아래로
내려가지도 않아요. 참 좋아요.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며 조객들 쪽으로 눈을 돌린다.)
조오지도 혼자선 힘들거예요. 좋은 농장인데.
(갑자기 깁스 부인을 똑바로 보며)
산 사람들은 이걸 모르겠죠?
깁스부인 : 그래, 잘 모르지.
에 밀 리 : 작은 상자 속에 갇혀들 사는 건데. 한 천 년은 된 일 같아요··· 애는 낮이면 카터 씨
댁에서 놀아요.
아, 안녕하세요. 우리 애가 낮이면 댁에 가서 논답니다.
죽은남자 : 그래요?
에 밀 리 : 네, 아주 재미 붙였어요. 어머니, 저흰 자동차도 있어요. 고장도 없어요. 전 운전 못하
지만요. 어머니, 이런 기분이 언제나 없어지나요? 제가 꼭 산 사람같은··· 이 기분이요···
깁스부인 : 기다려라. 꾹 참고.
에 밀 리 : (한숨을 쉬며) 네. 어, 끝났어요. 가네요.
깁스부인 : 쉿.
(우산행렬이 무대를 떠난다. 깁스가 부인 무덤 앞에 와서 잠시 서 있는다.
에밀리는 시아버지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깁스 부인은 시선을 올리지 않는다.)
에 밀 리 : 어머니, 아버님 오셨어요. 꽃을 가지고요. 부자분이 꼭 닮으셨죠? 몰랐어요. 얼마나 괴
롭고··· 얼마나 어두운 속에서 사는 건지요. 아버님 좀 보세요. 좋은 분이신데. 다들 하루 종
일 괴로운 일 뿐이죠.
(깁스 나간다.)
죽은사람 : 좀 시원해졌군. 비가 오더니. 북동풍도 그렇지. 비가 안 와도 바람만 불면 시원해지거
든.
(무대 위에 조용한 침묵이 깔린다. 무대감독이 담배를 피우며 프로시니엄 기둥 옆에 나타난다.
에밀 리가 무슨 생각이 난 듯 돌연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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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밀 리 : 어머님, 돌아갈 수 있죠? 저 세상으로요··· 전 느껴요. 전 알아요··· 잠시 생각을 해 봤
어요··· 농장을요··· 잠시 가서 아이를 무릎에 앉혀 봤어요. 생시처럼요.
깁스부인 : 물론 갈 수야 있지.
에 밀 리 : 돌아가서 일생을 다시 살수도··· 있잖아요.
깁스부인 : 잊어버려.
에 밀 리 : (무대감독에게 애타게 호소한다.) 되죠? 돌아가서··· 다시··· 살 수 있죠?
무대감독 : 더러 그런 사람이 있지만··· 금방 돌아옵니다.
깁스부인 : 글세. 아서.
쏘옴즈부인 :그만둬. 생각하곤 달라.
에 밀 리 : 슬펐던 날 말고. 기뻤던 날을 고르면 돼요. 네, 그날이 좋겠네요. 조오지하고 둘이서
사랑을 확인하던 날이요. 그럼 괴로울 까닭이 없잖아요.
(죽은 이들은 대답이 없다. 결국 무대감독에게 질문하는 셈이 된다.)
무대감독 : 그 하루를 살 때, 자신을 보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이 있을 겁니다.
에 밀 리 : 네?
무대감독 : 산 사람들은 절대 모르는 걸 아는 상태고요. 미래요. 다음에 어떻게 될 지를 안단 말
입니다.
에 밀 리 : 그게 왜 괴롭죠?
깁스부인 : 꼭 괴로워서만 그러는 건 아니다. 여기 좀 더 있다보면 알게 돼. 지난 일은 잊고, 앞일
만 생각하고 대비하는 거야. 좀 있으면 알 게다.
에 밀 리 : (부드럽게) 하지만 전생의 일을 어떻게 잊겠어요? 아는 게 그것뿐인데요.
쏘옴즈부인 :글세, 나중에 후회말고.
에 밀 리 : 직접 확인해 보겠어요. 행복했던 날 하루를 골라서요.
깁스부인 : 안된다. 정 그럼 평범한 날을 골라라. 그래도 충분하다.
에 밀 리 : (혼자말로) 그럼 결혼 후는 안되고, 아이 낳은 후도 안되고.
(무대감독에게 간절히) 생일쯤은 괜찮겠죠? 열 두 번째 생일이요.
무대감독 : 좋습니다. 1899년 2월 11일, 화요일입니다. 시간을 정하시겠습니까?
에 밀 리 : 아뇨, 하루 종일이요.
무대감독 : 그럼 새벽부터 하겠습니다. 며칠 동안 눈이 내린 거. 기억나시죠? 하지만 지난 밤에
그쳐서 제설 작업이 시작됐고요. 자, 동이 틉니다.
(일어나며 큰 소리로) 큰 길이예요··· 어머. 약국, 식품점··· 다 옛날 그대로네.
(3막의 조명이 특별히 어두웠던 건 아니나, 이 장면에서 무대 왼쪽 절반이 차츰 아주 밝아진다.
날카로운 겨울 아침의 밝음이다. 에밀리는 한길 쪽으로 걸어간다.)
무대감독 : 네, 14년 전, 1899년의 모습이죠.
에 밀 리 : 어쩜, 어렸을 때 그대로예요. 어머, 우리집이예요. 저 하얀 울타리. 까맣게 잊었었는데,
예뻤었지. 안에들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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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감독 : 네, 모친께서 곧 아침을 지으로 내려오실 겁니다.
에 밀 리 : (부드럽게) 그래요?
무대감독 : 부친께선 사나흘 어디 가셨다 오늘 새벽 차로 오시고요.
에 밀 리 : 글세···?
무대감독 : 모교에서 강연이 있으셨죠.
에 밀 리 : 어머. 우유 배달 아저씨예요. 보안관 아저씨 하고요. 어, 저 아저씨, 돌아가셨는데.
(무대 왼쪽에서 하우이 뉴우썸과 워린 보안관, 조오 크로웨의 목소리가 들린다.
에밀리는 기뻐서 듣는다.)
하 우 이 : 이려! 이려! 안녕하세요?
워 린 : 어이.
하 우 이 : 일찍 나오셨습니다.
워 린 : 사람 하나 겨우 살렸네. 저 아랫마을서 얼어죽게 생긴 걸. 술이 고래가 돼가지고 눈더
미 속에 누워 있더라고. 제 이불 속인 줄 아는지
에 밀 리 : 어머, 조오 크로웰.
조 오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웹 부인이 부엌에 나타난다. 그러나 에밀리는 자기를 부를 때까지 미처 어머니를 못 본다.)
웹 부 인 : 얘들아! 월리! 에밀리! ··· 일어날 시간이다.
에 밀 리 : 네, 엄마. 어쩜 저렇게 젊으실까? 몰랐어.
웹 부 인 : 옷은 여기 불 옆에 와서 입어라. 빨리
(하우이 뉴우썸이 큰길로 와서 웹씨 댁에 우유를 배달한다.)
어서 오세요. 후, 춥죠?
하 우 이 : 저희 집 창고는 영하 10도예요.
웹 부 인 : 옷이라도 좀 두둑이 입으세요.
(벌벌 떨면서 우유병을 들여 놓는다.)
에 밀 리 : (애를 쓰며) 엄마, 내 파란 머리 리본 어딨어요?
웹 부 인 : 잘 좀 봐. 다 알아서 내놨다. 화장대 위에 있잖니.
에 밀 리 : 네, 네···
(한 손을 가슴 위에 댄다. 웹이 큰길로 오다 워린을 만난다.
그들의 동작과 음성이 차가운 대기 속에서 차츰 활기를 띤다.)
웹 : 수고하십니다.
워 린 : 네, 일찍 나오셨군요.
웹 : 네, 어디 출장 좀 다녀오느라고요. 별일 없죠?
워 린 : 술 취해 얼어죽게 된 사람 하나 살렸습니다.
웹 : 거, 신문에 내야겠네요.
워 린 : 뭘, 그런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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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밀 리 : (속삭이며) 아버지.
(웹은 발의 눈을 흔들어 털고 집으로 들어간다. 워린은 오른쪽으로 퇴장한다.)
웹 : 여보.
웹 부 인 : 잘 하셨수?
웹 : 응, 그런대로. 여긴?
웹 부 인 : 뭐, 별일 없었어요. 너무 추운 거 빼곤. 우유 창고는 영하 10도래요.
웹 : 해밀턴 대학은 더 추워. 학생들 귀가 떨어질 정도라고. 신문엔 뭐 잘못 된 거 없습디
까?
웹 부 인 : 안 보이던데요. 커피 금방 돼요.
(웹은 이층으로 올라간다.)
여보. 아시죠? 오늘 에밀리 생일인 거? 약속 안 잊었죠?
웹 : (주머니를 두드리며) 응, 여기 다 준비했어.
웹 부 인 : (계단 위쪽을 보고 부르며) 얘, 우리 이쁜이 어딨니?
웹 : 놔둬요. 아침 먹을 때 보면 되잖수. 얘들아! 빨리 해라! 일곱시다. 인제 안 부른다.
에 밀 리 : (부드럽게, 슬프기보다는 놀라서) 못 참겠어요. 저렇게 젊고 아름답던 분들이. 그렇게
늙으시다니. 엄마, 제가 왔어요. 어른이 돼서요. 전 엄마 아빠가 좋아요. 정말 못 보겠어요.
(무대감독을 보며 제안하듯 묻는다.
‘들어가도 돼요?’
무대감독은 짧게 끄덕인다.
에밀리는 부엌으로 통하는 어머니 왼쪽의 안쪽 문으로 가서 안으로 들어가려는 듯 열두살짜리 소녀의 목
소리로 말한다.)
에 밀 리 : 엄마.
웹 부 인 : (딸에게 와서 포옹하고 키스하며, 특유의 덤덤한 태도로) 자, 우리 따님 생신이라. 축
하한다. 식탁 한번 봐. 깜짝 놀랄걸.
에 밀 리 : 정말?
(무대감독에게 괴로운 시선을 보낸다.)
도저히. 도저히.
웹 부 인 : (스토브 앞에서 객석을 향한채) 하지만 생일이라도 음식은 천천히 잘 씹어 먹어야 한
다. 그래야 튼튼하게 자라지. 그 파란 종이로 싼 건 이모가 보낸 거고, 우표책은, 누군지 알
겠지? 아까 우유 들여놓다 보니까 문 앞에 있더라. 조오지가··· 이 추운데 새벽부터··· 애가
됐어.
에 밀 리 : (혼자말로) 아, 조오지! 까맣게···
웹 부 인 : 베이컨도 잘 씹어 먹어. 그래야 추위를 안 타지.
에 밀 리 : 엄마, 잠깐 저 좀 보세요. 옛날처럼요. 벌써 14년이 흘렀어요. 전 죽었어요. 엄만 손주
를 보셨고요. 전 조오지하고 결혼했어요. 월리도 죽었어요. 캠핑갔다 맹장이 터져서요.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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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들 놀랬어요? 하지만 잠시 이렇게 다시 모였어요. 엄마, 잠시 동안 행복한 거예요. 그
러니 서로 좀 쳐다보고 있자고요.
웹 부 인 : 그 노란 종이로 싼 건 다락방에서 나온 건데 할머니가 입으시던 거야. 너한테 인제 맞
을거다. 어때, 맘에 들지?
에 밀 리 : 그리고 이건 엄마가 주시는 거죠? 얼마나 갖고 싶었다고요. 너무 예뻐요.
(두 팔로 어머니의 목을 안는다. 웹 부인은 음식 만들기를 계속하면서도 기쁜 표정이다.)
웹 부 인 : 그래, 그럴 줄 알았다. 가게마다 온통 다 뒤졌지. 콩코드에 없어서 보스톤까지 갔다 왔
어. 노라 아줌마가.
(웃으며) 월리 선물도 있다. 공작 시간에 만들었다고 얼마나 자랑인지. 아빠도 뭘 사오셨는
데, 뭔진 모르겠다. 쉿, 오신다.
웹 : (무대밖에서) 얘, 우리 이쁜이 어딨니?
에 밀 리 : (무대감독에게 큰 소리로) 도저히. 더는 도저히. 너무 빨라요. 서로 쳐다볼 시간도 없
어요.
(울음이 터진다. 왼쪽 무대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진다.
웹 부인이 사라진다.)
몰랐어요. 모든 게 그렇게 지나가는데. 그걸 몰랐던 거예요. 데려다주세요. 산마루 제 무덤으
로요. 아, 잠깐만요. 한 번만 더 보고요.
안녕. 이승이여, 안녕. 우리 읍내도 잘 있어. 엄마, 아빠, 안녕히 계세요. 째깍거리는 시계도,
해바라기도 잘 있어. 맛있는 음식도, 커피도, 새 옷도, 따뜻한 목욕탕도, 잠자고 깨는 것도.
아, 너무나 아름다워 그 진가를 몰랐던 이승이여, 안녕.
(눈물을 흘리며 무대감독을 향해 불쑥 묻는다.)
살면서 자기 삶을 제대로 깨닫는 인간이 있을까요? 매 순간마다요?
무대감독 : 없죠.
(사이)
글쎄요, 성인들이나 시인들이라면 아마.
에 밀 리 : 자, 데려다 주세요.
(깁스 부인 옆의 자기 의자로 돌아간다.
사이)
깁스부인 : 괜찮았니?
에 밀 리 : 아뇨··· 말씀을 들을 걸 그랬어요. 산다는 게, 다들 장님이더군요.
깁스부인 : 날이 개는구나. 별 좀 보렴.
에 밀 리 : (싸이먼에게) 괜히 갔었어요.
싸이먼스팀슨 : 그래요. 이제 아셨군. 산다는 게 그런 거였소. 무지의 구름 속을 헤매면서, 괜히 주위 사람들
감정이나 짓밟고, 마치 백만 년이나 살 듯 시간을 낭비하고, 늘 이기적인 정열에 사로잡히고.
그래, 행복한 생활이란 게, 다시 가보니 어떻습디까? 무지와 맹목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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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스부인 : (힘차게)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얘, 에미야. 저 별 좀 보렴. 이름이 뭐더라?
죽은남자 : 우리 아들은 선원이었는데, 별이라면 훤했죠. 밤이면 문가에 앉아서 별 이름을 외곤
했어요. 굉장했답니다.
죽은사람 : 별만큼 좋은 친구도 없죠.
죽은여자 : 그럼요.
싸이먼스팀슨 : 산 인간이 또 하나 오는군.
죽은사람 : 거 참, 이 시간에 왠일이람.
에 밀 리 : 어머니, 조오지예요.
깁스부인 : 쉬, 가만 있어.
에 밀 리 : 조오지요.
(조오지가 왼쪽에서 들어와 천천히 죽은 이들 쪽으로 다가온다.)
죽은남자 : 우리 아들이 그러는데, 저 깜박이는 빛이 지구까지 오려면 수백만 년이 걸린다는 거예
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얘기지만 그애 말이라니까요. 수백만 년이래요.
(조오지는 무릎을 꿇더니 에밀리 발 앞에 엎어진다.)
죽은여자 : 세상에, 저게 무슨 짓이람.
쏘옴즈부인 :집에 있지 않고.
에 밀 리 : 어머니.
깁스부인 : 그래.
에 밀 리 : 다들 남의 맘을 몰라주는군요.
깁스부인 : 그래. 그렇단다.
(무대감독이 오른쪽에 나타나 한 손으로 검은 막을 잡고 천천히 무대를 가로지른다.
멀리서 시계 종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무대감독 : 우리 읍내에선 거의 다 잠이 들었습니다.
몇 군데만 불이 켜져 있군요.
기차역에선 자그마한 호킨스 씨가 올바니행 열차를 기다리는 중이고, 마차 세놓는 집에선 몇
몇이 앉아 두런대고 있습니다.
네, 날이 갰습니다.
하늘엔 별이 총총합니다. 옛날부터 저 별들은 하늘을 이리저리 오가고 있습니다. 학자들도
아직 정확히 규명은 못했습니다만, 저 별들엔 생물이 안 산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그저 돌
덩어리거나··· 아니면 불덩어리거나요.
하지만 이 지구만은 뭔가를 해보려고 쉬지 않고 움직입니다.
그게 너무 과해서 열여섯 시간이 지나면 꼭 한 번 누워서 쉬어야 하고 말입니다.
(시계의 태엽을 감는다)
음, 벌써 열한 시가 됐습니다.
자, 여러분도 이제 쉬셔야죠. 안녕히들 돌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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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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