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fessional Documents
Culture Documents
작: 한민규
각색, 연출: 이지수
제3회 종로구우수연극전 공연본
때 현재, 그리고 회상
장소 이혁의 집 거실과 회상 속의 <사랑 둥지> 보육원 창고
등장인물
<1장>
- 1 -
을 만류하지 않고 핸드폰 카메라로 찍기만 하는 경우는 어떻게 되죠? 지근
거리와 행위의 강도에 따라 살인방조죄가 성립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
이 명백하게 죽어 가는데 사진작가가 살릴 생각은 안하고 사진만 찍다가 그
사람이 죽었다면,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에 해당됩니다. 부작위라는 것은 마
땅히 해야 할 행위를 하지 않은 것을 말해요. 죽어가는 사람을 마땅히 살려
야 할 의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지 않으면 일종의 살인방조가 되는 거에
요. 작년에 어떤 선장도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 선고받았잖아요. 방관만 해
도 범죄가 되는 겁니다. 지금부터 핸드폰 울리면 옆 사람도 핸드폰울림방조
죄에 따라, 퇴실은 너무 가혹하고 수업 후 강의실 전체 의자 정돈하기. 오
케이? (관객 "오케이")
혁과 은진 마주친다.
캐리어와 맥주캔, 그리고 검정 비닐 봉투.
이혁: 예, 전화 드릴게요.
묘한 정적.
은진: 짜잔!
이혁: 여기 어떻게 있어?
은진: 어떻게 있긴. 왔으니까 있는 거지. 연락했었잖아, 온다고.
이혁: 그랬었나?
은진: 까먹었어? 하긴 까먹을 수도 있겠다.
이혁: 아니, 잊은 건 아닌데 생각지도 못해서.
은진: 생각하기 싫었던 건 아니고? 뭐야, 귀신 본 사람처럼. 진짜 놀랬나 보네.
이혁: 놀라긴. 급작스러워서 그런 거지.
- 2 -
은진: 온다고 얘기했잖아.
이혁: 온다고야 했지. 그래도 이 상황이 그렇잖아.
은진: 이 상황이 어떤데?
이혁: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되잖아. 아니야, 온다고 했으니 있을 수 있지. 그래도.
은진: 잘못 왔나보네. 난 그래도 어렵게 온 건데. 아니면 내가 온 게 싫은 거야?
이혁: 아니야, 내가 싫을 리가 없잖아. 잘 왔어, 정말 잘 왔어. 은진아.
- 3 -
근데 참 이상한 게 이번에 못 보면 앞으로도 영영 못 볼 것 같은 거야. 그
래서 그 뭐야 돈 내고 컴퓨터 하는데 갔지.
이혁: 피씨방?
은진: 맞아, 피씨방. 거기서 학교 홈피 가니까 오빠 이메일 주소 있더라고. 그래서
이메일 로그인 했더니 신상 정보에 여기 주소 있던데?
이혁: 이사했다고 하니까 조교가 알아서 업데이트 했구나. 안했으면 못 볼 뻔 했
네. 근데 로그인 하려면 비밀번호를 알아야 하는데.
은진: 비밀번호? 간단하던데? 950317. 오빠 보육원에서 퇴소한 날. 나 때문에 일
부러 쉽게 한 것 아니야? 난 그런 줄 알고 좋아했지. (건배) 짠!
정적.
정적.
- 4 -
은진: 여자 있어?
이혁: 여자 누구?
은진: 누구긴 누구야. 부인이나 애인이나 여자 친구나. 여자 오기로 해서 나 내보
내려고 하는 것 아니야?
이혁: 오기로 한 사람 없어.
은진: 오기로 한 사람은 없어도 있기는 있나 보네, 없다고는 안하는 거 보니까.
있어? 없어?
이혁: 뭐가?
은진: 여자.
핸드폰 울린다.
정적.
이혁: 어.
은진: 애는?
- 5 -
이혁: 하나.
은진: 애는 지금 어딨는데?
이혁: 애엄마가 같이 데리고 갔어.
은진: 뭐해? 부인 뭐 하냐고.
이혁: 피아니스트.
은진: 그래? 나도 초등학교 때는 가수하는 게 꿈이었는데. (은진은 서랍장에 기대
있는 결혼사진을 위로 올린다) 착하게 생겼더라. 잘사는 집 딸래미같아. 옛
날엔 착해 보이는 여자 싫다고 하지 않았나? 하긴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
까. 집 크고 좋더라. TV 보면서 이런 집엔 도대체 누가 사나 했더니 오빠
가 사네. (서랍장에 있는 보육원 독사진을 집어 든다) 보육원 때 사진은 왜
올려논 거야? 이때가 나 보육원에 막 입소했을 때 맞지? 내가 여덟 살이었
으니까 오빠는 열살. 부인이 오빠 고아원 출신인 거 알아? 아냐고?
이혁: 몰라.
은진: 근데 이건 왜 올려놨대? 하긴 액자 해놓고 보니까 배경이 학교인지 보육원
인지 모르겠다. 이때 멋있었지. 듬직했고. 지금도 말끔해. 좀 재수 없어져서
그렇지. 오빠는 이곳에 좋은 추억이 많았나봐. 난 떠올리기만 해도 분이 안
풀려서 이가 갈리는데.
이혁: 나 이제 나가봐야 할 것 같아.
은진: 일 보고 오라니까. 나는 내가 알아서 간다고. 사내새끼한테는 보육원에서
자라서 교수로 자리 잡은 게 더 멋있어 보이기도 하겠다. 또 그렇다며? 사
내새끼들끼리는 과거에 잘못한 것도 영웅담처럼 이빨 까고 그런다며. 오빠
도 나 만났던 얘기 자랑거리로 떠들고 다녔어?
이혁: 나가서 얘기하자.
은진: 싫다니까. 어렵게 왔다고 얘기했잖아. 내 말을 뻘로 들은 거야? 이번에 가
면 또 오기 힘들다고. 아예 못 올 수도 있어. 그러니까 보고 싶은 거 다 보
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갈꺼야. 오빠야 말로 너무하는 거 아냐. 부인 생
겼다고 모른 척 하기야.
이혁: 모른 척 하는 게 아니라 선약이 있다고.
은진: 교수들 만난다고? 그것도 개구라잖아. 아니야? 아님 말고.
이혁: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은진: 우리 사진 찍을까?
이혁: 경비아저씨한테 열어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 집에 들어왔냐고.
은진: 핸드폰으로 찍으면 바로 사진으로 나온다며. 우리도 찍어서 여기에 올려놓
- 6 -
자. 오빠 결혼사진하고 보육원 때 사진하고 나란히. 난 사촌여동생이라고
해. 어때, 말 되지?
이혁: 열쇠 어디서 난 거야. 어떻게 들어왔냐고!
은진: 열쇠 내가 만들었는데. 그런 걸 갖고 신경질 내냐. 한 동안 안했구나. 내가
해줄까? 한번 할래? 오빠도 사실 나 막상 보니까 하고 싶었지. 아니야?
이혁: 그래, 알아서 있다가 가라.
은진: (혁의 말투 흉내) 하아 하아. 은진아 사랑해. 은진아 내가 책임질게. (은진
말투) 정말 책임질 수 있어? (혁의 말투 흉내) 약속할게. 너랑 결혼할 꺼
야. 결혼해서 널 데리고 나갈 꺼야. (은진 말투) 약속 지켜야 돼. (혁의 말
투 흉내) 은진아 사랑해. 넌 내 이상형이야! (심한 웃음) 빤쓰 벗길 때는
어쩜 하나도 안빼놓고 다 사랑한다 그러고 이상형이라고 그러냐. 어린 여자
애 그냥 건드리기는 미안했나봐. 오빠한테는 진짜 내가 이상형이었어? 보육
원에 입소했을 때 오빠가 눈을 못 떼긴 했지. 보육원 이름 촌스러웠던 거
기억나? 사랑 둥지. 애들 잘키우라고 사랑 둥지라고 지었겠지? 그런데 애들
제대로 키울 생각은 안하고 맨날 떡칠 생각만 했으니. 그래서 나 데리고 나
온다며. 근데 어떻게 이상형을 17년 동안 깜빵에 처박아놓고 지 혼자 새살
림을 차렸대. 그 말을 믿은 내가 병신이지, 병신. 마누라 따먹을 때도 이상
형이라고 그랬어?
묘한 소리.
- 7 -
<2장>
- 8 -
어가면 되잖아. 지난 일 떠올려 봐야 서로 좋을 것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어
렵사리 날 찾아온 이유가 뭐냐고.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거 아니야?
은진: 원하는 거? 있지. 많지. 얼마나 많은지 짐작도 못할 걸? 이 집에서 오빠 기
다리면서 생각했어.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 왜. 나는. 개좆같이. 오빠 생각
만 할까. (웃음) 웃기지. 생각하는 걸 생각한 거야. 오빠 생각을 하면서 왜
오빠 생각을 하는 지 생각하고, 또 왜 이런 생각밖에 못하는지 생각하고.
그러면서 그게 아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살갗을 찢는 느낌인데도 또
웃음이 나오고. 이거 이상한 거잖아. 기를 쓰고 죽으려는 순간에도 생각나
고, 씨발년들한테 존나 얻어터지는 순간에도 생각나고. 아프면서 좋고, 좋으
면서 아프고. 좀 구질구질 하잖아. 지우고 싶어. 내 인생의 어디서부터 무엇
을 지워버려야 마음이 편해질까? 그래서 원하는 건 너무 많지만 그 중에 딱
하나만 하려고.
이혁: 상처라는 건 지우고 싶다고 해서 지워지는 게 아니야. 가릴려고 할수록 더
드러나고, 없애려고 할수록 더 선명해져.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인정하는
거야. 아, 나에게 이런 상처가 있구나. 맞아, 그 때 여차저차해서 이런 상처
가 생겼지. 그래, 이 상처가 나에게 아픔을 주는 구나. 그래서 내가 아프구
나. 왜 지워? 지울 필요 없어. 그냥 인정하면 돼. 그리고 내버려 둬. 그러면
그 아픔이 나의 일부분이 되면서 자연적으로 치유가 되는 거야. 그것이 자
연이야. 인류 역사가 말해주잖아. 세계 전쟁 때도 어땠어. 다 고통 받고 다
죽고 지구가 멸망할 것 같았어. 그런데도 살 사람들은 살고, 알아서 잘 살
아가고 있잖아. 나도 그랬어. 보육원 시절, 널 만났던 것, 화재 사건. 나도
한동안 미칠 듯이 괴로웠어. 그러다 그냥 있었던 일 인정하고 남일처럼 내
버려 뒀어. 그리고 내가 눈앞에 당장 해야 할 일을 한 거야. 시간이 지나니
까 이제는 말끔하잖아.
은진: 좋겠다, 말끔해져서.
이혁: 나를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난 이제 가정이 있어. 너는 무기징역으로
교도소에 있고. 물론 그렇다고 네가 영원히 교도소에 있으리란 법은 없어.
지금처럼 시험 보러 밖에도 보내준다며. 모범수도 귀휴를 보내주곤 한다던
데. 혹시 알아, 시간이 지나 가석방이 될 지.
은진: 오빠, 오빠의 시간은 가고 있지만 난 17년 전 그 때로 살아가고 있어. 나에
겐 그 때나 지금이나 다 똑같은 현재야.
이혁: 은진아, 네 심정은 알겠는데 트라우마란 말이야.
은진: 내가. 기억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되는
- 9 -
거야.
이혁: 그러니까 얘기 했잖아. 기억이든 마음에 남아있는 상처든.
핸드폰 울린다.
은진: 받을 필요 없어.
이혁: 여보세요? 네, 선생님. 제가 늦어도 6시까지는 소윤이 데리러 갔어야 하는
- 10 -
데 학교 일이 좀 늦게 끝나서요. 지금 가는 중이니까 늦어도 20분 안에는
도착할 겁니다. 낮에 데려갔다고요? 누가요? 소윤이 고모가요?
라이터.
- 11 -
말 원하는 게 뭔지 알아?
이혁: 그래, 다 들어줄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원하는 걸 말해봐.
은진: (웃음) 참 어지간하다. 아니, 오빠가 맞춰봐. 내가 지금부터 힌트를 줄 테니
까, 오빠가 내 얘기를 듣고 내가 원하는 한 가지가 뭔지 맞춰보는 거야. 마
감 시간은? 이러면 좋겠다. 17년 전 사랑 둥지가 홀라당 타버렸던 시간인
새벽 4시까지. 단 더 이상 입에 발린 소리나 거짓말은 안 돼.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맞춘다면 순순히 두 손 놓고 물러갈게. 못 맞추면 오랜만에 불꽃놀
이나 할까?
이혁: 은진아. 내가 정말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아이만은 손대지 말아줘.
은진: 그러니까 맞추라고. 내가 원하는 게 뭘까? 힌트 하나. 17년 전의 방화사건,
그건 정말 나 혼자 저지른 일일까?
이혁: 아니야. 이럴 수 없어. 은진아, 너 지금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거야. 유아
납치, 가택 침입, 협박. 17년 전의 그건 사고였어. 안타깝게도 사상자가 생
기다 보니 너가 징역을 살게 된 건데. 내가 검찰 쪽 친구한테 얘기해서 재
심받게 해준다니까. 하지만 이건 아니야. 이건 고의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거야. 널 범죄자가 되게 만들 수 없어.
은진: 입에 발린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할 수 없네. 17년 만에 불꽃놀이나 해야
겠다.
캐리어에 불.
이혁: 안 돼!
은진: 안 붙네.
이혁: 소윤아. 소윤아, 괜찮아? 걱정하지 마, 아빠가 구해줄게. 소윤아, 대답해봐.
열쇠가.
- 12 -
<3장>
- 13 -
나한테 왜 그러니. 그래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니. 내가 너한테 죽
을죄를 지은 거야?
은진: 끔찍하다. 오빠 아이는 끔찍히 아낀다고. 분명히 아플 텐데 아픔을 호소 못
할까봐 걱정도 하고. 그런 사람이 아픈 걸 아프다고 호소하는 사람한테는
왜 외면했대? 내가 그렇게 아프다고 호소했잖아. 오빠 아이가 아니라서? 부
모가 되면 달라지는 건가? 그래도 나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했는데.
이혁: 너의 고통을 외면했다고? 그래, 얘기했잖아. 네가 재판 받을 때 아무 도움
을 못 준 것 진심으로 사과할게. 그리고 방화 사건도 나한테 책임이 있어.
아니, 내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야.
은진: 그거 말고. 그 전에.
이혁: 또 뭐가 있는데? 그래,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은진이한테 너무 너무 잘못
한 게 많아.
은진: 그래서 내가 뭘 원할까?
이혁: 잘못했다고 사과하잖아.
은진: 힌트 둘. 오빠는 내가 원장 새끼한테 매일 밤 당하는 걸 정말 몰랐을까? 오
빠는 원장 새끼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많이 따랐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
하는 분이 원장 아버지라며. 가장 따뜻한 분이고, 가장 배려심 많은 분이고,
원생들을 위해 불철주야 노심초사하시는 위대한 아버지라며. 내가 그 위대
한 오빠 아버지한테 불철주야 따먹히는 걸 왜 몰랐을까? 아님 알지만 모른
척한 걸까?
이혁: 은진아, 난 도무지 네가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어. 원장 선생님이.
은진: 원장 아버지.
이혁: 원장 아버지가 너를 겁탈이라도 했단 뜻이야?
은진: 어. 오빠도 알고 있었잖아. 그래놓고 나중엔 오빠도 나 건드리고. 부자가 구
멍 동서지간이 된 거지.
이혁: 아니야. 나 정말 몰랐어. 정말이야, 네가 원장 아버지한테 당한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 은진: 똑같아. 오빠는 거짓말 못한다고 했잖아. 얼굴은 그
때나 지금이나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데, 말은 절대 아니라고 하네.
차라리 그때 나 지켜준다는 말이라도 말지. 그럼 원장 새끼한테 매일 밤 당
하면서도 오빠가 언젠가 구해줄거라는 헛된 희망이라도 품지 않았잖아.
이혁: 정말 몰랐어. 사실이야. 맹세해.
은진: 그렇다면 그렇게 존경하던 원장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대들던 이유가 뭐였
어? 어느 날부터 오빠가 앞장서서 원장 새끼라고 욕했잖아. 내가 당했던 거
- 14 -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어? 그럼 뭐해. 결국 오빠는 이모가 나타나서 퇴소한
후 제 갈 길 갔고, 난 계속 남아서 끔찍한 추억만 쌓았잖아. 지금에서야 말
하는데 오빠가 퇴소한 후에도 한 달에 한 번씩은 나 보러 왔었잖아. 차라리
아예 오지 않는 게 더 나았을 거야. 지옥 같은 세상을 견디는 제일 좋은 방
법은 체념인데, 오빠 때문에 희망에 기대 버텼잖아. 결국 병신이 됐고.
이혁: 은진아. 진짜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나 정말 몰랐어. 하지만 내가 잘
못했어. 모든 일은 다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그렇지? 네가 원장 새끼한
테 당한 것도, 방화 사건이 일어난 것도. 다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내가
널 그곳에 내버려두고 퇴소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것도 잘못한 거야. 아
니, 애시당초 내가 널 사랑한 것도 잘못한 거야. 그래, 내가 보육원에 들어
간 것 자체가 잘못한 거야. 우리 부모가 잘못한 거야. 그러니까 제발 소윤
이만 살려주라.
은진: (웃음) 내가 원하는 게 뭘까?
이혁: 돈 필요하니?
은진: 내가 돈 쓸 데가 어딨어. 관찰관 엿 먹였으니 들어가면 다신 못나올 텐데.
이혁: 그럼 숨을 만한 곳을 알아봐줄까? 외국으로 나갈래? 내가 밀항하는 방법을
간구해볼테니까 그동안 숨어 지내면 되잖아.
은진: 이 나라 밖이라고 뭐가 더 낫겠어. 사람 사는 곳 똑같지.
이혁: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내가 한 동안 유학 생활을 했었잖아. 확실히 외국 생
활은 달라. 나가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은진: 흥미 없어. 겨우 체념으로 사는 방법을 익혔는데, 다시 희망의 늪에 빠지라
고?
이혁: 그럼 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뭔데.
은진: 힌트를 잘 생각해봐. 하나, 17년 전의 방화 사건은 정말 나 혼자 저지른 일
일까? 둘, 오빠는 내가 원장 새끼한테 매일 밤 당하는 걸 정말 몰랐을까?
이혁: 내 잘못이라고! 인정하잖아!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면 도대체 뭔데?
캐리어에 페트병.
- 15 -
사람이야. 내가 원하는 게 뭘까? 힌트 셋. 검은 쓰레기 비닐봉투 이야기는
정말 사실이었을까?
정적.
라이터.
- 16 -
원장이 너를 건드린 것을 알고 너무 화가 났어. 그런데도 어떻게 막을 방법
이 없었어. 너한테 원장실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도 이유를 얘기하면 안
될 것 같았어. 그래서 원장이 밤마다 너 불러내는 것 다른 보육원 선생한테
도 얘기해보고, 간간이 봉사 활동 오시는 외부 선생한테도 넌지시 물어봤는
데 다들 그럴리 없다며 원장만 두둔했어. 그 후로 원장이나 선생한테 반항
해봤자 매만 벌지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어. 그래서 원장을 험담하
려고 한 말이었어. 원장은 살인자다. 원장은 해마다 한두명씩 원생을 죽여
서 소각장에 태워버린다. 원장을 사람을 죽인다. 원장은 살인귀다. 내가 퍼
트렸어.
은진: 오빠가 만든 얘기라고? 원장은 자기가 정말 사람을 죽였던 것처럼 협박하던
데? 오빠랑 데이트 하고나서, 원장 새끼 때문에 애 지운다고 병원 갔다온
이후부터는 더이상 안할꺼라고 싫다고 했어. 그랬더니 자기 말 안들으면 먼
젓번 여자애처럼 쓰레기봉투에 담아 태운다고 때리고 협박하면서 그 짓을
계속 했어. 원장 새끼가 자기 말 안듣는 여자애 진짜로 죽여서 쓰레기 봉투
에 담아 태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근데 그게 오빠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그럼 원장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한 거야?
이혁: 내가 꾸며낸 말이 오히려 애들 겁주는 데 효과적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원
생 한명이 원장한테 고자질을 했는지, 어느날 날 쓰레기 소각장으로 불러서
소문을 퍼트리는 아이가 나냐고 호통을 쳤어. 난 암말도 안했지. 그랬더니
원장이 갑자기 표정이 돌변하면서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냐고 추궁하는 거
야. 자기가 원생들 죽인 걸 또 누가 아냐고 날 위협했어. 난 그저 꾸며낸
거짓말이었는데 도리어 그걸로 날 협박하기 시작했다고.
은진: 꾸며낸 이야기가 맞는 거야?
이혁: 나중에 원장이 다른 선생들한테 얘기하는 거 들었어. 혁이 녀석, 제가 지어
낸 말로 겁줬더니 꼼짝을 못하더라고. 종종 아이들 혼낼때 써먹어야겠다고.
그랬더니 다른 선생들도 좋은 방법이라며 다들 낄낄 댔으니까.
은진: 나한테는 사실을 말해주지. 정말 멈추고 싶었어. 원장이 날 올라타고 내 속
을 쑤셔대는 것 정말 싫었어. 병원 다녀온 다음부터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거절하려고 했어. 그런데 날 죽인다는 협박이 정말 두려웠어.
이혁: 사실을 말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거야. 나도 사실이 아닌 걸 알면서도 무
서웠어. 진짜로 날 죽여서 태워버릴 것 같았어. 그래서 네가 그 얘기를 했
을 때 처음 들은 척 한 거야. 마침 없는 줄 알았던 이모가 찾아와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거고.
- 17 -
은진: 그러면서 넌 그때 나랑은 왜 했니? 왜 나한테 결혼하자고 하고, 사랑한다고
하고, 이상형이라고 하고. 어차피 혼자 가버릴 거면서 나한테 왜 그런 거
야? 면회는 또 왜 온거야? 나도 병신같이 네 말을 믿었어요. 그런데 넌 면
회 올 때마다 원장새끼랑 똑같이 나한테 그 짓만 하고 가더라고. 다르긴 했
어. 너한테는 따뜻함이 느껴졌거든. 내가 너 나가고 난 후 얼마나 많이 탈
출을 시도했는지 알아? 그리고 얼마나 많이 죽을 뻔했는지 알아? 네가 이모
밑에서 편안히 학교 다니며 공부할 때 난 하루에도 몇 번씩 쓰레기봉투에
담겨 태워질까봐 두려웠어. 그런데 그게 네가 지어낸 말이라고. 그러고는
날 구한답시고 와서 네 원장 아버지랑 똑같이 욕정만 풀은 거야?
이혁: 널 구하려고 한 마음은 진짜였어.
은진: 그런 놈이 신고 하나 없었잖아.
이혁: 이모한테 피해가 갈까봐. 어떻게든 나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고 했어. 정말
이야, 널 구하려고 한 마음은 진짜였다고.
은진: 거긴 진짜 지옥이었어. 넌 나한테 사실을 얘기했어야 했어. 쓰레기봉투 얘
기가 사실이 아닐 꺼라는 거 어떻게 알았는지 알아? 병원 다녀온 걸 어떤
애가 알아서 네가 퇴소한 후 모든 원생한테 퍼트린 거야. 그랬더니 처음에
는 나를 병 걸린 애처럼 쳐다보더니 나중엔 더러운 년 취급 하더라. 더러우
면 차라리 피하던가. 원장 새끼가 나 건드리는 게 부러웠는지, 아니면 난
아무나 건드려도 괜찮은 애라고 생각했는지 어느새 지들도 나한테 그 더러
운 물건을 갖다 대더라고. 다른 선생부터 시작해서 고작 열 셋 넷밖에 안된
애들까지도 말이야. 다들 내 위에 올라타기 전에 뭐랬는지 알아? 가만히 안
있으면 쓰레기봉투에 담아서 태워버린다. (가만히 안 있으면 쓰레기봉투에
담아서 태워버린다, 쓰레기봉투에 담아서 태워버릴 거야, 쓰레기봉투에 담
아서 태워버릴까) 사람은 아무리 비인간적인 일이라 해도 익숙해지면 그게
평온한 일상이 되는 건가봐. 선생 아이 할 것 없이 <사랑 둥지>의 모든 남
자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날 찾았어. 그런 더러운 지옥에서 넌 이미 예전에
누릴 거 다 누리고 해방되고 난 아직까지도 그 지옥에서 해매고 있어. 너.
진짜. 나 사랑하기는 했니? 사랑 했어?
정적.
- 18 -
은진: 근데 왜 저년이랑 결혼했어? 그냥 혼자 살지.
이혁: 널 잊지 못했으니까.
은진: 뭐?
이혁: 내가 하루하루 평온한 생활을 이어갈수록 네 생각이 떠나지 않았어. 아니,
오히려 너의 전부를 기억하려고 했어. 정말로 사랑했으니까. 근데 그게 너
무 힘들었어. 난 너만을 원하고 있는데, 널 더 이상 볼 수가 없으니까. 아무
리 그리워하고 지난 날을 자학해 봐도 널 볼 수는 없었잖아.
은진: 그래서 저년이랑 결혼했다고?
이혁: 그래. 널 계속 떠올리기 위해.
은진: 오빠, 그만 하자.
이혁: 집사람이 노래하는 모습 보고 네가 떠올랐어. 집사람도 너랑 나이가 같아.
서른 셋에 집사람을 만났는데, 너의 꿈이었던 음악을 하고 있고. 마치 너의
미래의 모습 같았어. 그래서 집사람을 보면서 널 계속 느끼고 싶었어.
은진: 됐어, 그만 해.
이혁: 정말이야.
은진: 그럼 저년이랑 할 때 내 생각하면서 했겠네?
이혁: 어.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은진: 그럼 저 웨딩사진 앞에서 한번 할까? 이젠 오빠가 상상할 필요 없이 현실이
니까.
이혁: 좋아.
은진: 그리고 오빠가 나 숨겨준다고 했으니까 우리 외국 가서 결혼해서 살까?
이혁: 얘기했잖아. 돈만 있으면 밀항 어렵지 않아.
은진: 오빠가 그렇게 아끼는 아이는 어떻게 해?
이혁: 아내에게 줘버리지 뭐.
은진: 오빠는 저 애 없어도 돼?
이혁: 나 애 필요없어. 너만 있으면 돼. 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지 다 해줄게.
은진: 이미 번듯하게 자리잡은 오빠가 나한테 왜 그래야 하는데?
이혁: 넌 나의 전부니까.
은진: 오빠.
이혁: 진짜야. 난 너밖에 없었어. 너만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은진: 오빠.
이혁: 내가 널 망친 거잖아. 내가 책임질게. 우린 예전부터 하나였어. 우리 처음
사랑을 나눴을 때 너랑 결혼하겠다고 한 말 잊었어? 나 아직도 기억해.
- 19 -
은진: 날 책임질꺼야? 그럼 저 애 필요없으니까 지금 없어져도 되겠네.
캐리어에 휘발유.
묘한 소리.
- 20 -
<4장>
은진: 뼈가 달랐대.
이혁: 이모가 찾아왔어.
은진: 닭 뼈도 아니고.
이혁: 날 친자식으로 입양하겠대.
은진: 고양이 뼈도 아니고.
이혁: 너가 18살이 되면 우리 결혼하자.
은진: 강아지 뼈도 아니었대.
이혁: 내가 너 책임질게.
은진: 검은 쓰레기 봉투에 뭐가 담겨있었을까?
이혁: 은진아, 나 믿지?
은진: 오빠, 쓰레기 봉투 얘기 정말 들은 적 없어?
이혁: 은진아, 사랑해. 넌 내 이상형이야.
- 21 -
얘기 좀 했거든. 60먹은 노인네인데 그러더라고, 방화 사건 일어났을 때 한
두달만 참으면 보육원을 나오는 데 왜 그랬냐고. 그렇게 화가 났냐고. 뒤통
수 빡 맞았지 뭐. 정말로 그 때는 오빠가 결혼하자고 할 줄 알았어. 그런데
아무 말도 없더라. 그 날 나랑 둘이서 결혼할 생각은 한 거야?
이혁: 아니.
은진: 짐작은 했었어.
이혁: 퇴소하고 3년 동안 밖에서 지내다 보니까, 그 나이 대에 결혼이라는 것이
나 혼자서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더라고. 전까진 정말 하고 싶었어.
은진: 그럼 방화사건이 일어난 날 왜 날 찾아온 거야? 결혼하자는 말도 안 할 거
면서.
이혁: 어떻게든 널 데리고 가려고. 몰래 빼내려고 했어. 3년간 이모가 주는 용돈
을 모아서 집 근처 고시원 하나를 구했거든. 6개월 정도 밖에 빌릴 수 없었
지만, 대학 들어갔으니 따로 아르바이트 하면서 원룸이든 얻어주려고 했어.
은진: 데려가지.
이혁: 다른 선생과 애들까지 너한테 몹쓸 짓 하는지는 몰랐어. 하긴 언제부턴가
내가 면회 가는데도 날 반기기는 커녕 눈치만 보더라고. 아니, 감시를 눈치
라 착각한거지. 내가 보육원을 나설 때까지 날 지켜봤어. 그래서 창고에서
보자 하고 다시 숨어들었잖아.
은진: 그날따라 유별나게 다들 덤벼들었어. 오빠가 온 날은 주로 그래. 원장새끼
는 오빠가 보육원 문을 나서자마자 날 오라했어. (은진아 자니?) 난 너무
싫어서 창고에 오빠랑 있었고. (은진아 어딨니?) 다른 때 같으면 내버려두
기도 했는데, 그 날은 원장이 보육원 전체를 샅샅이 뒤지면서 날 찾았어.
(은진아 상담 받아야지?)
이혁: 넌 결국 열시쯤에 다시 나가서는 돌아올 생각을 안했지. 열한시가 되고, 열
두시가 되고. 새벽 한시가 넘고 두시가 넘도록 돌아올 기미가 안보였어.
- 22 -
원장과 원생들의 숨소리.
스파클러가 타는 소리.
은진의 움직임.
묘한 소리.
- 23 -
어. 혹시 나 때문에 해를 당할까봐. 오빠는 가족도 있고 앞날이 창창한 대
학생이었잖아. 근데 적어도 오빠가 날 사랑했다면, 아니 조금이라도 아꼈다
면 가서 말 한마디라도 해주지. 어떻게 그러냐. 지금처럼 무기징역이었어도
좋아. 오빠가 말했는데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도 좋아. 내가 바란 건 오
빠의 마음이었거든. 그게 내가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내 상처야. 교
도소에 있던 초반에는 힘내라고 편지도 하더만 나중엔 답장도 없고. 17년
전에 내가 원한 건 오빠가 날 버리지 않는 거였어. 그럼 지금은 무엇을 원
하는지 이제 알겠어? 울지 마.
- 24 -
이혁: 소윤아. 대답해봐, 소윤아. 아빠야, 아빠가 구해줄게. 조금만 참고 기다려.
이게 뭐야? 소윤이 어디 있어? 말해. 말하라고!
은진: 오빠가 깜빵에 있는 나한테 보냈던 편지야. 내가 보냈는데 오빠가 주소 바
뀌어서 반송된 편지하고.
이혁: 소윤이 어딨냐고? 너 설마 소윤이를.
은진: 걱정 마. 아이는 손 끝 하나 안 건드렸으니까.
이혁: 어디에 있는데? 말해, 말해!
은진: 안전한 곳에 있어. 내가 원하는 걸 맞추면 알려줄게. 나 못 믿어?
이혁: 그래, 너 못 믿겠어. 당장 말해.
은진: 하지 마.
이혁의 겁탈.
정적.
시계 알람 소리.
- 25 -
은진: 집 정말 좋다. 부러워. 집이 부러운 게 아니야. 가족이 있다는 게 부러운 거
지. 이삿짐도 다 안 풀었나 본데 지금도 이미 가족이 사는 집 같아. 난 내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부모는 있었지 가족이라 할 만한 게 없더라고. 애
초에 태어나면 안 되는 애였나봐. 부모가 동반자살 했을 때 나까지 같이 죽
었으면 좀 좋아. 부모가 나한테도 수면제 먹였다는데 목숨도 질겨서 난 살
아났어. 살아났는데도 연고지는 아무데도 없고. 유일하게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사랑 둥지 보육원. 부모한테도 당하고, 거기서도 당하고, 교도소에서도
당하고. 이런데도 아직까지 살아있어요. 참 질기지. 법정에서도 사형을 때려
줬으면 좀 좋아? 이렇게 구질구질하게라도 살라고 무기징역을 때렸어요. 이
러니 내가 원하는 게, 아니 내가 원할 수밖에 없는 게 과연 뭘까?
이혁: 너 설마.
은진: (열쇠) 우리 창고 열쇠. 언젠가 이게 우리 집 열쇠가 되길 바랬는데. 괴롭
혀서 미안해. 책임진다 해놓고 도망갔으니 내가 이 정도 혼내는 건 괜찮지?
맘 같아선 나만큼 더 아프게 하고 싶었는데 따지고 보면 오빠도 무슨 죄야,
나 좋아했었고 사랑했었고 앞날을 약속했던 죄밖에 없는데. 아무 말이 없다
고 아무 말도 못하는 게 아니야.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를 뿐이야. 내 상처
를 짐지우고 싶지 않으니까. 이젠 확실히 놓을 수 있겠어. 잘 살아, 이혁.
숲속 작은 집 창가에 / 작은 아이가 섰는데 / 토끼 한 마리가 뛰어와 / 문
두드리며 하는 말. (퇴장)
이혁: (전화) 선생님, 새벽에 죄송합니다. 우리 소윤이.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진정) 뭐야,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 얼굴 보고 싶었다
는 얘기야? 아, 씨발년. 아니, 그냥 죽고 싶을 때 알아서 혼자 죽으면 그만
이지 왜 날 찾아온 거야. (담배) 나보고 너 죽는 것에 대해 죄책감 가지라
고? 알았다. 죽을 때까지 너에 대한 죄책감 가질 테니까 너무 날 원망하지
말고 가라. (웃음) 세상에 별 또라이 많다니까. 어차피 제 죽을 꺼면서 뭘
그렇게 나한테 원망이 많다고 어필한 거야. 개좆같은 씨발년. "내가 정말 원
하는 게 뭘까? 힌트 하나, 힌트 둘" 미친년. 방화사건, 내가 문을 막은 게
아니잖아. 원장 새끼한테 겁탈, 나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다니까. 쓰레기봉
투 얘기, 모든 사내 놈들이 그 얘기로 널 건드릴 걸 예상했겠어? 어쩌라고?
그래서 네가 나한테 원한 게 뭔데? 왜 나한테 왔는데? 이 열쇠를 왜 아직까
지 가지고 있던 거야? 알아주길 바란 거야? 도대체 뭘? 나도 보육원 사진
안버리고 가지고 있어. 그게 뭐 어떻다고? 설사 네가 원한 걸 알았다 치더
라도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나보고 대신 죽으라는 거야? 나 안 죽
- 26 -
어. 못 죽어. 악착같이 살아남을 거야. 나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어. 끝까지
살아남을 거야. 나 못 죽어. 죽고 싶지 않다고. 미안해, 은진아.
암전.
- 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