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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빛 소녀

작: 한민규
각색, 연출: 이지수
제3회 종로구우수연극전 공연본

때 현재, 그리고 회상
장소 이혁의 집 거실과 회상 속의 <사랑 둥지> 보육원 창고

등장인물

이혁: 37세의 남성으로 돌이 되기 전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아동양육시설 <사랑


둥지>에 버려져 유아 및 청소년기를 지냈다. 17세 때 이모 덕분에 연고자
인도퇴소 하여, 지금은 대학 전임 교수이고 아내와 아이가 있다.
은진: 부모의 동반 자살로 8세 때 고아가 되어 <사랑 둥지> 보육원에 위탁 양육
되었다. 18세 때 만기퇴소를 앞둔 상태에서 51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방화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7년간 복역 중이다. 35세의
여성이다.

<1장>

핸드폰 진동음 들린다.

이혁: 핸드폰 누구야. 수업 중에 전원을 끄던가 무음으로 하라고 했죠. 핸드폰 울


리면 강의실에서 퇴실시킵니다. 강의계획서에 분명히 명시했어요. 다시 확
인. (한 관객에게) 껐어? 옆에 친구는? 옆 친구는 퇴실 당해서 F 맞길 바라
는 거 아니야. 치사하게 자기꺼 껐으니까 옆 사람은 상관없다는 태도는 곤
란합니다. 핸드폰 울려서 수업 방해되면 전체 손해에요. 그리고 요즘엔 옆
사람의 과실을 방관만 해도 범죄가 될 수 있습니다. 음주 운전 동승자는 경
우에 따라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민형사 처벌 받아요. 몰랐단 말이야? 얼마
전에 중국에서도 그렇고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고, 다리에서 투신하려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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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만류하지 않고 핸드폰 카메라로 찍기만 하는 경우는 어떻게 되죠? 지근
거리와 행위의 강도에 따라 살인방조죄가 성립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
이 명백하게 죽어 가는데 사진작가가 살릴 생각은 안하고 사진만 찍다가 그
사람이 죽었다면,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에 해당됩니다. 부작위라는 것은 마
땅히 해야 할 행위를 하지 않은 것을 말해요. 죽어가는 사람을 마땅히 살려
야 할 의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지 않으면 일종의 살인방조가 되는 거에
요. 작년에 어떤 선장도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 선고받았잖아요. 방관만 해
도 범죄가 되는 겁니다. 지금부터 핸드폰 울리면 옆 사람도 핸드폰울림방조
죄에 따라, 퇴실은 너무 가혹하고 수업 후 강의실 전체 의자 정돈하기. 오
케이? (관객 "오케이")

음악, 그리고 전환.

이혁: 예, 이모. 운전하느라 못받았어요. 주말에 집들이? 어림도 없어요. 나는 수


업 때문에 정신없고, 정현이는 연주회가 겹쳐서 짐도 아직 다 못 풀었어요.
안와도 돼요. 끼니는 밖에서 해결하면 되는데 뭐. 소윤이야 어린이 집에 있
으니까. 정현이 오고 집 좀 정리하면 그때 이모 모실게요. 입에 안 붙어서
그래요. 예, 어머니.

혁과 은진 마주친다.
캐리어와 맥주캔, 그리고 검정 비닐 봉투.

이혁: 예, 전화 드릴게요.

묘한 정적.

은진: 짜잔!
이혁: 여기 어떻게 있어?
은진: 어떻게 있긴. 왔으니까 있는 거지. 연락했었잖아, 온다고.
이혁: 그랬었나?
은진: 까먹었어? 하긴 까먹을 수도 있겠다.
이혁: 아니, 잊은 건 아닌데 생각지도 못해서.
은진: 생각하기 싫었던 건 아니고? 뭐야, 귀신 본 사람처럼. 진짜 놀랬나 보네.
이혁: 놀라긴. 급작스러워서 그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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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 온다고 얘기했잖아.
이혁: 온다고야 했지. 그래도 이 상황이 그렇잖아.
은진: 이 상황이 어떤데?
이혁: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되잖아. 아니야, 온다고 했으니 있을 수 있지. 그래도.
은진: 잘못 왔나보네. 난 그래도 어렵게 온 건데. 아니면 내가 온 게 싫은 거야?
이혁: 아니야, 내가 싫을 리가 없잖아. 잘 왔어, 정말 잘 왔어. 은진아.

은진은 이혁을 안는다.

은진: 오빠가 당황해서 좀 서운하지만, 아무튼 이렇게 안으니까 살 것 같다. 보고


싶었어. 이게 얼마만이야.
이혁: 그러게.

시간의 정지, 그리고 묘한 소리.


은진은 자리로 돌아가 맥주를 마신다.

은진: 우리 몇 살 때 보고 못 본 거지? 오빠도 하나 딸래? 냉장고 뒤진 거 아니


야. 가게에서 비싼 돈 들여 사온 거야. 건배. 시간 참 빨리 간다. 그치?
이혁: 음, 시아시 잘 됐다.
은진: 시간 참 빨리 간다고. 그땐 이렇게 맥주 한 잔 하기도 어려웠잖아.
이혁: 그랬나?
은진: 오빠는 나 몰래 마시고 다녔나보지?
이혁: 나도 안마셨지. 그때는 용돈이라도 제대로 있었나. 다들 어렵게 공부했지.
은진: 맞아. 오빠는 학교를 다녔지. 나는 결국 다른 학교에 갔고. 오빠는 제대로
된 학교를 다녀서 그런가 되게 의젓해졌다. 존나 멋있어지고. 아, 미안. 요
말버릇.
이혁: 너도 좋아보이는 데 뭐.
은진: 아직도 이뻐? 한번 하고 싶을 만큼?
이혁: 근데 이 집을 잘 찾았다. 이사 온지 며칠 안 되는데.
은진: 고생 좀 했지. 알려준 전화번호로 걸었더니 사람 바뀌었다고 하더라고. 주
소대로 찾아갔더니 몇 년 전에 이사했다고 하고. 그래서 학교에 전화해서
오빠 연락처하고 주소 물어보니까 학교 방침상 알려줄 수 없다고 그러더라.
옛날 친구라고 해도 안 믿고, 가족이라고 구라 쳤더니 가족이 어떻게 연락
처 모를 수 있냐고 끊어버리고. 어쩔 수 없나보다 하고 돌아가려고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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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참 이상한 게 이번에 못 보면 앞으로도 영영 못 볼 것 같은 거야. 그
래서 그 뭐야 돈 내고 컴퓨터 하는데 갔지.
이혁: 피씨방?
은진: 맞아, 피씨방. 거기서 학교 홈피 가니까 오빠 이메일 주소 있더라고. 그래서
이메일 로그인 했더니 신상 정보에 여기 주소 있던데?
이혁: 이사했다고 하니까 조교가 알아서 업데이트 했구나. 안했으면 못 볼 뻔 했
네. 근데 로그인 하려면 비밀번호를 알아야 하는데.
은진: 비밀번호? 간단하던데? 950317. 오빠 보육원에서 퇴소한 날. 나 때문에 일
부러 쉽게 한 것 아니야? 난 그런 줄 알고 좋아했지. (건배) 짠!

정적.

이혁: 맞다. 나 옷만 갈아입고 다시 나가봐야 하는데.


은진: 어디? 퇴근한 거 아니야?
이혁: 수업이야 끝났지. 교무처장하고 단과대 교수들 간담회가 있어서.
은진: 이 시간에? 술 마시는 자린가 보네.
이혁: 바깥 생활이 술 마시는 것도 일이거든.
은진: 좋겠다. 술 마시는 것도 일이고.
이혁: 좋긴. 수업하기도 힘든데 이리 저리 윗사람 비위맞춰야 하고 행정 업무도
처리해야 하고. 요즘엔 교수도 3D 직종이라니까.
은진: 그래도 내가 있는 학교보다 낫잖아. 거긴 술 못 마시거든. 아무튼 갔다 와.
기다리고 있을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안 돼?
이혁: 주인 없는 집에 손님 혼자 있기가 좀 그렇지.
은진: 괜찮아. TV 보면서 맥주 마시고 있을게. 늦게라도 올 것 아니야?
이혁: 내일은 1교시 수업이라 술자리 길어지면 사우나에서 자고 바로 학교 가기
도 하거든. 지금은 나랑 같이 나가고, 내일 낮에 밖에서 보자.
은진: 그럼 나 신경 쓰지 말고 그렇게 해. 나도 오빠 기다리다가 늦나보다 싶으면
알아서 갈게.
이혁: 현관은 어떻게 하고. 들어올 때야 경비아저씨가 열어줬다지만 나갈 때도 잠
궈달라고 하면 이상하잖아. 경비아저씨가 열어준 것 아니야.
은진: 내가 알아서 들어왔는데.
이혁: 어떻게?

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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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 여자 있어?
이혁: 여자 누구?
은진: 누구긴 누구야. 부인이나 애인이나 여자 친구나. 여자 오기로 해서 나 내보
내려고 하는 것 아니야?
이혁: 오기로 한 사람 없어.
은진: 오기로 한 사람은 없어도 있기는 있나 보네, 없다고는 안하는 거 보니까.
있어? 없어?
이혁: 뭐가?
은진: 여자.

핸드폰 울린다.

은진: 만나기로 한 교수 전환가 보다. 안 받아? 누구?


이혁: 어, 최교수. 같은 과.
은진: 받아.
이혁: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
은진: 여기서 받아. 괜찮아.
이혁: 내가 불편해서.
은진: 오빠가 그러면 내가 더 불편해. 존나 열 받고. 받아.
이혁: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그랬어요? 다행이다. 잘 마쳐요. 아, 이제 가려
고요.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요. 알아서 할 테니까. 알아요. 금요일 일곱
시. 지금 교무처장님한테 전화가 왔나봐요. 조금 있다가 내가 다시 전화할
게요. 네, 나도요. (전화 끊는다)
은진: 최교수?
이혁: 어.
은진: (웃음)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 어쩜 그렇게 구라를 못치냐. 존나 티나. 거짓
말 할 때 눈 피하면 사람들이 의심할까봐 더 똑바로 보는 거. 지금도 일부
러 안 피하잖아. 착한 건지, 순진한 건지. 부인이 뭐래? 잘 도착했대?

정적.

이혁: 어.
은진: 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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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 하나.
은진: 애는 지금 어딨는데?
이혁: 애엄마가 같이 데리고 갔어.
은진: 뭐해? 부인 뭐 하냐고.
이혁: 피아니스트.
은진: 그래? 나도 초등학교 때는 가수하는 게 꿈이었는데. (은진은 서랍장에 기대
있는 결혼사진을 위로 올린다) 착하게 생겼더라. 잘사는 집 딸래미같아. 옛
날엔 착해 보이는 여자 싫다고 하지 않았나? 하긴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
까. 집 크고 좋더라. TV 보면서 이런 집엔 도대체 누가 사나 했더니 오빠
가 사네. (서랍장에 있는 보육원 독사진을 집어 든다) 보육원 때 사진은 왜
올려논 거야? 이때가 나 보육원에 막 입소했을 때 맞지? 내가 여덟 살이었
으니까 오빠는 열살. 부인이 오빠 고아원 출신인 거 알아? 아냐고?
이혁: 몰라.
은진: 근데 이건 왜 올려놨대? 하긴 액자 해놓고 보니까 배경이 학교인지 보육원
인지 모르겠다. 이때 멋있었지. 듬직했고. 지금도 말끔해. 좀 재수 없어져서
그렇지. 오빠는 이곳에 좋은 추억이 많았나봐. 난 떠올리기만 해도 분이 안
풀려서 이가 갈리는데.
이혁: 나 이제 나가봐야 할 것 같아.
은진: 일 보고 오라니까. 나는 내가 알아서 간다고. 사내새끼한테는 보육원에서
자라서 교수로 자리 잡은 게 더 멋있어 보이기도 하겠다. 또 그렇다며? 사
내새끼들끼리는 과거에 잘못한 것도 영웅담처럼 이빨 까고 그런다며. 오빠
도 나 만났던 얘기 자랑거리로 떠들고 다녔어?
이혁: 나가서 얘기하자.
은진: 싫다니까. 어렵게 왔다고 얘기했잖아. 내 말을 뻘로 들은 거야? 이번에 가
면 또 오기 힘들다고. 아예 못 올 수도 있어. 그러니까 보고 싶은 거 다 보
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갈꺼야. 오빠야 말로 너무하는 거 아냐. 부인 생
겼다고 모른 척 하기야.
이혁: 모른 척 하는 게 아니라 선약이 있다고.
은진: 교수들 만난다고? 그것도 개구라잖아. 아니야? 아님 말고.
이혁: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은진: 우리 사진 찍을까?
이혁: 경비아저씨한테 열어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 집에 들어왔냐고.
은진: 핸드폰으로 찍으면 바로 사진으로 나온다며. 우리도 찍어서 여기에 올려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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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오빠 결혼사진하고 보육원 때 사진하고 나란히. 난 사촌여동생이라고
해. 어때, 말 되지?
이혁: 열쇠 어디서 난 거야. 어떻게 들어왔냐고!
은진: 열쇠 내가 만들었는데. 그런 걸 갖고 신경질 내냐. 한 동안 안했구나. 내가
해줄까? 한번 할래? 오빠도 사실 나 막상 보니까 하고 싶었지. 아니야?
이혁: 그래, 알아서 있다가 가라.
은진: (혁의 말투 흉내) 하아 하아. 은진아 사랑해. 은진아 내가 책임질게. (은진
말투) 정말 책임질 수 있어? (혁의 말투 흉내) 약속할게. 너랑 결혼할 꺼
야. 결혼해서 널 데리고 나갈 꺼야. (은진 말투) 약속 지켜야 돼. (혁의 말
투 흉내) 은진아 사랑해. 넌 내 이상형이야! (심한 웃음) 빤쓰 벗길 때는
어쩜 하나도 안빼놓고 다 사랑한다 그러고 이상형이라고 그러냐. 어린 여자
애 그냥 건드리기는 미안했나봐. 오빠한테는 진짜 내가 이상형이었어? 보육
원에 입소했을 때 오빠가 눈을 못 떼긴 했지. 보육원 이름 촌스러웠던 거
기억나? 사랑 둥지. 애들 잘키우라고 사랑 둥지라고 지었겠지? 그런데 애들
제대로 키울 생각은 안하고 맨날 떡칠 생각만 했으니. 그래서 나 데리고 나
온다며. 근데 어떻게 이상형을 17년 동안 깜빵에 처박아놓고 지 혼자 새살
림을 차렸대. 그 말을 믿은 내가 병신이지, 병신. 마누라 따먹을 때도 이상
형이라고 그랬어?

묘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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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묘하게 일그러지는 조명.


소년 소녀의 목소리와 배우의 움직임 중첩된다.

원장: 인사의 시간이에요. <사랑둥지>에 또 한명의 여동생이 왔어요. 정말 예쁘게 생겼


죠. 인사해.
소녀: 안녕하세요. 최은진 입니다.
소년: 난 이혁이야. 여기선 내가 대장이니까 힘든 일 있으면 다 나한테 말해.

현실을 일깨우는 은진의 소리.

은진: 캬! 역시 맥주는 이 맛이라니까. 나 깜방에서 한 다섯 번은 마셔봤다. 열여


덟에 무기를 확정 받았으니 내가 할 게 뭐 있겠어. 스물여섯인가 일곱인가
까지는 기회만 생기면 목매단다고 일인실에 처박히고, 서른 될 때까지는 제
대로 한 대 때리지도 못할꺼면서 아무한테나 시비 걸다 맨날 처맞고. 초겨
울 무렵인가 한 번은 소장 새끼가 부르더라고. 군대에서는 사고로라도 죽을
수 있지만 깜빵에서는 골병이 들었으면 들었지 절대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
다고. 죽지 못해 사느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고. 그러면서 맥주를 하
나 딱 따서 주더라. 마셨지. 온몸이 뜨끈뜨끈하고 알딸딸한 게 절로 웃음이
나더라고. 그때부터 소장 새끼랑 일 년에 한 번씩은 마신 것 같애. 나 그래
도 그 새끼한테는 안 줬다. 오빠랑 하면 17년 만에 하는 거야.
이혁: 출소한 거야, 감형 받아서?
은진: 무기수가 감형 받기가 쉬운 줄 알아. 그것도 돈 있고 빽 있는 사람이나 하
는 거지. 시험 보러 나온 거야. 기숙사에 수업료 전액 공짜인 학교에 갔는
데 뭐 하나는 배워야 할 거 아니야. 선반 기능사 1급 자격시험. 2급은 학교
에서 땄거든. (목걸이 열쇠) 시간이 남아도니 열쇠 만드는 것도 간간이 배
웠고. 열쇠가 좀 많지?
이혁: 날 찾아 온 거 교도소 측에서도 알아?
은진: 알면 큰 일 나지. 관찰관 지금 좆 빠지게 날 찾고 있을걸. 어렵게 왔다고
했잖아.
이혁: 굳이 날 찾아온 이유는 뭐야?
은진: 보고 싶었다니까. 역시 오빠는 나 보는 게 싫구나.
이혁: 왜 왔냐고. 뭘 원하는데. 기능사 시험 보러 나왔으면 시험만 보고 다시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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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가면 되잖아. 지난 일 떠올려 봐야 서로 좋을 것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어
렵사리 날 찾아온 이유가 뭐냐고.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거 아니야?
은진: 원하는 거? 있지. 많지. 얼마나 많은지 짐작도 못할 걸? 이 집에서 오빠 기
다리면서 생각했어.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 왜. 나는. 개좆같이. 오빠 생각
만 할까. (웃음) 웃기지. 생각하는 걸 생각한 거야. 오빠 생각을 하면서 왜
오빠 생각을 하는 지 생각하고, 또 왜 이런 생각밖에 못하는지 생각하고.
그러면서 그게 아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살갗을 찢는 느낌인데도 또
웃음이 나오고. 이거 이상한 거잖아. 기를 쓰고 죽으려는 순간에도 생각나
고, 씨발년들한테 존나 얻어터지는 순간에도 생각나고. 아프면서 좋고, 좋으
면서 아프고. 좀 구질구질 하잖아. 지우고 싶어. 내 인생의 어디서부터 무엇
을 지워버려야 마음이 편해질까? 그래서 원하는 건 너무 많지만 그 중에 딱
하나만 하려고.
이혁: 상처라는 건 지우고 싶다고 해서 지워지는 게 아니야. 가릴려고 할수록 더
드러나고, 없애려고 할수록 더 선명해져.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인정하는
거야. 아, 나에게 이런 상처가 있구나. 맞아, 그 때 여차저차해서 이런 상처
가 생겼지. 그래, 이 상처가 나에게 아픔을 주는 구나. 그래서 내가 아프구
나. 왜 지워? 지울 필요 없어. 그냥 인정하면 돼. 그리고 내버려 둬. 그러면
그 아픔이 나의 일부분이 되면서 자연적으로 치유가 되는 거야. 그것이 자
연이야. 인류 역사가 말해주잖아. 세계 전쟁 때도 어땠어. 다 고통 받고 다
죽고 지구가 멸망할 것 같았어. 그런데도 살 사람들은 살고, 알아서 잘 살
아가고 있잖아. 나도 그랬어. 보육원 시절, 널 만났던 것, 화재 사건. 나도
한동안 미칠 듯이 괴로웠어. 그러다 그냥 있었던 일 인정하고 남일처럼 내
버려 뒀어. 그리고 내가 눈앞에 당장 해야 할 일을 한 거야. 시간이 지나니
까 이제는 말끔하잖아.
은진: 좋겠다, 말끔해져서.
이혁: 나를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난 이제 가정이 있어. 너는 무기징역으로
교도소에 있고. 물론 그렇다고 네가 영원히 교도소에 있으리란 법은 없어.
지금처럼 시험 보러 밖에도 보내준다며. 모범수도 귀휴를 보내주곤 한다던
데. 혹시 알아, 시간이 지나 가석방이 될 지.
은진: 오빠, 오빠의 시간은 가고 있지만 난 17년 전 그 때로 살아가고 있어. 나에
겐 그 때나 지금이나 다 똑같은 현재야.
이혁: 은진아, 네 심정은 알겠는데 트라우마란 말이야.
은진: 내가. 기억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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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야.
이혁: 그러니까 얘기 했잖아. 기억이든 마음에 남아있는 상처든.

은진의 담배, 그리고 정적.

이혁: 은진아, 나 담배 안 피거든. 담배 꺼줄래, 내 집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 없다


고. 여기는 애가 사는 곳이야. 담배 냄새가 한번 배면 안 빠진다니까.
은진: 내버려 둬. 언젠가 빠지겠지.
이혁: 안되겠다, 너 나가 줄래. 이 집에서 나가달라고. 나가라고!
은진: 불꽃놀이 했던 거 기억나? 보육원 적응 못해서 울때마다 오빠가 날 위해서
해줬던 거.
이혁: 됐다. 더 이상 아무 얘기도 듣고 싶지 않으니까 당장 나가라.
은진: 나 지금 가면 오빠가 후회하는데.
이혁: 나가! 너 정말 험한 꼴 보고 싶어?
은진: 불꽃놀이 하고 싶다. 그게 오빠하고 나하고의 시작이었지. 보육원 창고에서
남들 몰래 불꽃놀이 하는 게 우리만의 데이트였는데. 이제는 참 많이 멀어
졌네. 거리도 멀어지고 있는 시간도 멀어지고.
이혁: (잡아끈다) 나가. 네가 불꽃놀이를 하건 말건 상관 안 할테니까 씨발 당장
나가라고.
은진: 아파.
이혁: 그래, 내가 옛날 일을 생각해서 신고는 안한다. 그러니까 밖에 나가서 너가
보고 싶은 거 졸라게 보고 하고 싶은 거 씨발 졸라게 하라고.
은진: 씨발 아프다고! (캐리어) 갈껀데, 사실 나 오빠한테 듣고 싶은 말이 있어서
찾아온 건데.
이혁: 가.
은진: 할 말이 그거 밖에 없어?
이혁: 가.
은진: 나 17년 만에 보는 거야.
이혁: 가.

핸드폰 울린다.

은진: 받을 필요 없어.
이혁: 여보세요? 네, 선생님. 제가 늦어도 6시까지는 소윤이 데리러 갔어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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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학교 일이 좀 늦게 끝나서요. 지금 가는 중이니까 늦어도 20분 안에는
도착할 겁니다. 낮에 데려갔다고요? 누가요? 소윤이 고모가요?

캐리어. 어린애 울음소리.

은진: 받을 필요 없다고 했잖아. 수면제를 반알 밖에 안 먹여서 그런가 금방 깨


네. 갈게.
이혁: 은진아!
은진: 왜, 할 말 생겼어?
이혁: 나한테 왜 그래?
은진: 오빠야말로 나한테 왜 그랬어?
이혁: 미안해, 내가 놀래서 그랬어. 사실 너 생각 많이 했지만 교도소에 있는 네
가 정말로 내 앞에 나타날 줄은 몰랐어. 네가 나한테 온다고 편지했던 거
다 정신 나간 소리로 생각했어.
은진: 아니. 내가 무기 선고받고 깜빵에 끌려갔을 때, 왜 오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왜 나만 들어간 거야? 결혼할 사이고 사랑하는 사이인데, 화재 사
건이야 그렇다 치더라고 보육원에 있었던 일 정도는 얘기 했어야지.
이혁: 그래, 그것도 내가 미안해. 내가 정말 잘못했어.
은진: 그게 미안하다는 말로 될 일이야?
이혁: 그럼 내가 어떻게 할까? 지금이라도 경찰서에 가서 사고였다고 얘기할까?
그러면 되겠다. 검찰 쪽에 대학 동기가 있으니까 그 친구한테 말해서 다시
재판받게 해달라고 하자. 내가 어떻게든 책임지고 해결할게.
은진: (웃음) 책임지고 해결한다는 말은 나 따먹을 때부터 한 거잖아.
이혁: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내가 진심으로 사과할게. 내가 당장 그 친구한테 전
화해서 만나자고 할게. 아니, 여기로 오라고 해서 너랑 같이 만날게.

라이터.

은진: 불붙인다. 정말 나한테 미안해? 근데 왜 이제 미안해. 애 때문에 갑자기 미


안한 마음이 생겼어? 나 깜빵에 들어갈 땐 안 미안했어? 재판에서 무기징역
선고 받을 땐 안 미안했어? 내가 경찰에 잡힐 땐 안 미안했어? 나랑 결혼한
다 해놓고 말 바꿀 땐 안 미안했어? 그 지옥 같은 곳에 나 내버려두고 이모
만나 혼자 나갈 땐 안 미안했어? 나 안을 땐 지킨다 해놓고, 내가 밤마다
벌벌 떨면서 원장 새끼한테 끌려가는 거 지켜볼 때는 안 미안했어? 내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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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원하는 게 뭔지 알아?
이혁: 그래, 다 들어줄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원하는 걸 말해봐.
은진: (웃음) 참 어지간하다. 아니, 오빠가 맞춰봐. 내가 지금부터 힌트를 줄 테니
까, 오빠가 내 얘기를 듣고 내가 원하는 한 가지가 뭔지 맞춰보는 거야. 마
감 시간은? 이러면 좋겠다. 17년 전 사랑 둥지가 홀라당 타버렸던 시간인
새벽 4시까지. 단 더 이상 입에 발린 소리나 거짓말은 안 돼.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맞춘다면 순순히 두 손 놓고 물러갈게. 못 맞추면 오랜만에 불꽃놀
이나 할까?
이혁: 은진아. 내가 정말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아이만은 손대지 말아줘.
은진: 그러니까 맞추라고. 내가 원하는 게 뭘까? 힌트 하나. 17년 전의 방화사건,
그건 정말 나 혼자 저지른 일일까?
이혁: 아니야. 이럴 수 없어. 은진아, 너 지금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거야. 유아
납치, 가택 침입, 협박. 17년 전의 그건 사고였어. 안타깝게도 사상자가 생
기다 보니 너가 징역을 살게 된 건데. 내가 검찰 쪽 친구한테 얘기해서 재
심받게 해준다니까. 하지만 이건 아니야. 이건 고의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거야. 널 범죄자가 되게 만들 수 없어.
은진: 입에 발린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할 수 없네. 17년 만에 불꽃놀이나 해야
겠다.

캐리어에 불.

이혁: 안 돼!
은진: 안 붙네.
이혁: 소윤아. 소윤아, 괜찮아? 걱정하지 마, 아빠가 구해줄게. 소윤아, 대답해봐.
열쇠가.

캐리어에 자물쇠, 그리고 준비한 각목.


이혁 기절한다.
묘한 소리.

- 12 -
<3장>

묘하게 일그러지는 조명.


소년 소녀의 목소리에 따라 배우들 움직인다.

원장: 은진아, 상담의 시간이야. 아빠한테 와야지.


이혁: 왜 매일 밤 원장아버지한테 상담을 받는 거야.
은진: 오빠, 불은 빨간 색이 아니라 따뜻한 색이라고 했어. 엄마가.
원장: 아빠한테 상담 받는 거 애들한테는 비밀이야.
이혁: 밤에 원장아버지한테 가는 거 애들이 수군대서 내가 혼내줬어.
은진: 엄마 아빠 죽기 전에 셋이 다 같이 마지막으로 불꽃놀이 했어.
원장: 상담 받을 때 은진이는 뭐하라고 했지?
이혁: 밤마다 원장아버지 방에서 네 노랫소리가 들린대.
은진: 숲 속 작은집 창가에 / 작은 아이가 섰는데 / 토끼 한 마리가 뛰어와 / 문 두드리
며 하는 말 /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원장: (겹치게) 헉헉.

현실을 일깨우는 혁의 소리.


결박과 붕대, 그리고 페트병.

은진: (노래 오버랩) 일어났어? 머리는 피만 조금 나고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으니


걱정 마. 사람 목숨이 웬만큼 맞아서는 잘 안 끊어지더라고. 아님 나만 질
길 수도 있고. 벌써 12시야. 교수가 정말 3D 직업인가 봐. 코골면서 잘 자
대.
이혁: 소윤이는? 소윤아, 소윤아.
은진: 조용해. 이 시간에 시끄럽게 떠들어서 자는 사람들 깨우면 어쩌자는 거야.
층간 소음 몰라? 애는 남은 수면제 우유에 타 먹여서 재웠어.
이혁: 정말 괜찮아? 움직이는 것 확인했어?
은진: 우유 먹었어, 제가 직접. (열쇠)
이혁: 은진아, 알았어. 뭐든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그래 네가 원하는 거 맞춰볼
게. 그러니까 소윤이 방에다 옮겨 놓으면 안 될까. 나 이렇게 묶여 있잖아.
나는 꼼짝 않고 가만히 있을 테니까 네가 애를 방에다 데려다 놓으면 안 될
까. 낮부터 가둬놓은 거잖아. 아직까지야 생체 반응이 있겠지만 더 늦어졌
다간 호흡 곤란이 올 수도 있다고. 아이한테 호흡 곤란은 정말 위험하다니
까. 애가 수면제를 먹어서 고통을 호소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고. 대체

- 13 -
나한테 왜 그러니. 그래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니. 내가 너한테 죽
을죄를 지은 거야?
은진: 끔찍하다. 오빠 아이는 끔찍히 아낀다고. 분명히 아플 텐데 아픔을 호소 못
할까봐 걱정도 하고. 그런 사람이 아픈 걸 아프다고 호소하는 사람한테는
왜 외면했대? 내가 그렇게 아프다고 호소했잖아. 오빠 아이가 아니라서? 부
모가 되면 달라지는 건가? 그래도 나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했는데.
이혁: 너의 고통을 외면했다고? 그래, 얘기했잖아. 네가 재판 받을 때 아무 도움
을 못 준 것 진심으로 사과할게. 그리고 방화 사건도 나한테 책임이 있어.
아니, 내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야.
은진: 그거 말고. 그 전에.
이혁: 또 뭐가 있는데? 그래,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은진이한테 너무 너무 잘못
한 게 많아.
은진: 그래서 내가 뭘 원할까?
이혁: 잘못했다고 사과하잖아.
은진: 힌트 둘. 오빠는 내가 원장 새끼한테 매일 밤 당하는 걸 정말 몰랐을까? 오
빠는 원장 새끼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많이 따랐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
하는 분이 원장 아버지라며. 가장 따뜻한 분이고, 가장 배려심 많은 분이고,
원생들을 위해 불철주야 노심초사하시는 위대한 아버지라며. 내가 그 위대
한 오빠 아버지한테 불철주야 따먹히는 걸 왜 몰랐을까? 아님 알지만 모른
척한 걸까?
이혁: 은진아, 난 도무지 네가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어. 원장 선생님이.
은진: 원장 아버지.
이혁: 원장 아버지가 너를 겁탈이라도 했단 뜻이야?
은진: 어. 오빠도 알고 있었잖아. 그래놓고 나중엔 오빠도 나 건드리고. 부자가 구
멍 동서지간이 된 거지.
이혁: 아니야. 나 정말 몰랐어. 정말이야, 네가 원장 아버지한테 당한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 은진: 똑같아. 오빠는 거짓말 못한다고 했잖아. 얼굴은 그
때나 지금이나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데, 말은 절대 아니라고 하네.
차라리 그때 나 지켜준다는 말이라도 말지. 그럼 원장 새끼한테 매일 밤 당
하면서도 오빠가 언젠가 구해줄거라는 헛된 희망이라도 품지 않았잖아.
이혁: 정말 몰랐어. 사실이야. 맹세해.
은진: 그렇다면 그렇게 존경하던 원장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대들던 이유가 뭐였
어? 어느 날부터 오빠가 앞장서서 원장 새끼라고 욕했잖아. 내가 당했던 거

- 14 -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어? 그럼 뭐해. 결국 오빠는 이모가 나타나서 퇴소한
후 제 갈 길 갔고, 난 계속 남아서 끔찍한 추억만 쌓았잖아. 지금에서야 말
하는데 오빠가 퇴소한 후에도 한 달에 한 번씩은 나 보러 왔었잖아. 차라리
아예 오지 않는 게 더 나았을 거야. 지옥 같은 세상을 견디는 제일 좋은 방
법은 체념인데, 오빠 때문에 희망에 기대 버텼잖아. 결국 병신이 됐고.
이혁: 은진아. 진짜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나 정말 몰랐어. 하지만 내가 잘
못했어. 모든 일은 다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그렇지? 네가 원장 새끼한
테 당한 것도, 방화 사건이 일어난 것도. 다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내가
널 그곳에 내버려두고 퇴소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것도 잘못한 거야. 아
니, 애시당초 내가 널 사랑한 것도 잘못한 거야. 그래, 내가 보육원에 들어
간 것 자체가 잘못한 거야. 우리 부모가 잘못한 거야. 그러니까 제발 소윤
이만 살려주라.
은진: (웃음) 내가 원하는 게 뭘까?
이혁: 돈 필요하니?
은진: 내가 돈 쓸 데가 어딨어. 관찰관 엿 먹였으니 들어가면 다신 못나올 텐데.
이혁: 그럼 숨을 만한 곳을 알아봐줄까? 외국으로 나갈래? 내가 밀항하는 방법을
간구해볼테니까 그동안 숨어 지내면 되잖아.
은진: 이 나라 밖이라고 뭐가 더 낫겠어. 사람 사는 곳 똑같지.
이혁: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내가 한 동안 유학 생활을 했었잖아. 확실히 외국 생
활은 달라. 나가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은진: 흥미 없어. 겨우 체념으로 사는 방법을 익혔는데, 다시 희망의 늪에 빠지라
고?
이혁: 그럼 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뭔데.
은진: 힌트를 잘 생각해봐. 하나, 17년 전의 방화 사건은 정말 나 혼자 저지른 일
일까? 둘, 오빠는 내가 원장 새끼한테 매일 밤 당하는 걸 정말 몰랐을까?
이혁: 내 잘못이라고! 인정하잖아!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면 도대체 뭔데?

캐리어에 페트병.

은진: 어쩐지 불이 안 붙을 것 같더라. 천으로 되어 있으니까 혹시나 했는데. 이


거 휘발유야. 의심스러우면 불을 붙여볼까?
이혁: 안 돼. 하지마, 하지마.
은진: 시간은 4시까지라고 했어. 나도 오빠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오빠가 어서
맞춰서 나도 돌아가고 싶다고. 나 이래봬도 17년 동안 규칙적인 생활을 한

- 15 -
사람이야. 내가 원하는 게 뭘까? 힌트 셋. 검은 쓰레기 비닐봉투 이야기는
정말 사실이었을까?

정적.

이혁: 검은 쓰레기봉투 이야기는 또 뭔데? 그건 정말 처음 듣는 이야기야. 정말


몰라. 혹시 내가 퇴소한 다음에 있었던 이야기야?
은진: (노래) 숲 속 작은집 창가에 / 작은 아이가 섰는데 / 토끼 한 마리가 뛰어
와 / 문 두드리며 하는 말 /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이혁: 모르는 얘기라니까. 정말이야. 아, 생각났다. 그래, 기억난다. 그거 확실히
내가 알아. 그거 그냥 애들 사이에서 떠돌던 루머야. 새로 입소한 애들이
말을 안 들으니까 애들 겁준다고 고학년 애들이 꾸며낸 말이라고. 정말이
야. 정말이라니까. 그거 애들이 꾸며낸 말이라고. 아니라고, 이 씨발년아!
너 진짜 뒈지고 싶어?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내가 씨발, 이거 풀
면 너 가만 안 둬. 죽여 버릴 거야. 이 씨발년아!

라이터.

이혁: 말할게. 뭐부터 말할까?


은진: 검은 쓰레기 봉투이야기는 정말 사실이야? 오빠 퇴소하기 전에 그때도 분명
히 물었어, 쓰레기 봉투 이야기 들어봤냐고. 내가 사랑둥지에 들어가기 전
부터 해마다 서너명씩은 보육원을 퇴소하는데 꼭 한두 여자애는 퇴소가 아
니라 가출이나 실종이었다며. 근데 그게 사실은 원장이 여자애들 건드리다
가 말 안들으니까 죽여서 검은쓰레기 봉투에 담아 소각장에 태운거라며. 처
음 듣는 얘기가 아닐텐데. 오빠랑 같이 소각장 당번 맡았을 때 물었던 거잖
아. 왜, 기억에 없어? 이 집을 소각장으로 바꾸면 기억이 돌아올까?
이혁: 나야.
은진: 뭐가?
이혁: 나라고. 말 안듣는 애들 원장이 몰래 데려가 죽여서 쓰레기 봉투에 담아 태
운다는 얘기 내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사실이 아니야. 내가 꾸며서 퍼트린
얘기야.
은진: 왜?
이혁: 우리가 다른 애들 눈 피해 창고에서 데이트 하고 몇 달 지났을 때, 네가 원
장실에서 뭐하는지 궁금해서 쫓아갔다가 결국 무슨 일 당하는지 알게됐어.

- 16 -
원장이 너를 건드린 것을 알고 너무 화가 났어. 그런데도 어떻게 막을 방법
이 없었어. 너한테 원장실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도 이유를 얘기하면 안
될 것 같았어. 그래서 원장이 밤마다 너 불러내는 것 다른 보육원 선생한테
도 얘기해보고, 간간이 봉사 활동 오시는 외부 선생한테도 넌지시 물어봤는
데 다들 그럴리 없다며 원장만 두둔했어. 그 후로 원장이나 선생한테 반항
해봤자 매만 벌지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어. 그래서 원장을 험담하
려고 한 말이었어. 원장은 살인자다. 원장은 해마다 한두명씩 원생을 죽여
서 소각장에 태워버린다. 원장을 사람을 죽인다. 원장은 살인귀다. 내가 퍼
트렸어.
은진: 오빠가 만든 얘기라고? 원장은 자기가 정말 사람을 죽였던 것처럼 협박하던
데? 오빠랑 데이트 하고나서, 원장 새끼 때문에 애 지운다고 병원 갔다온
이후부터는 더이상 안할꺼라고 싫다고 했어. 그랬더니 자기 말 안들으면 먼
젓번 여자애처럼 쓰레기봉투에 담아 태운다고 때리고 협박하면서 그 짓을
계속 했어. 원장 새끼가 자기 말 안듣는 여자애 진짜로 죽여서 쓰레기 봉투
에 담아 태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근데 그게 오빠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그럼 원장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한 거야?
이혁: 내가 꾸며낸 말이 오히려 애들 겁주는 데 효과적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원
생 한명이 원장한테 고자질을 했는지, 어느날 날 쓰레기 소각장으로 불러서
소문을 퍼트리는 아이가 나냐고 호통을 쳤어. 난 암말도 안했지. 그랬더니
원장이 갑자기 표정이 돌변하면서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냐고 추궁하는 거
야. 자기가 원생들 죽인 걸 또 누가 아냐고 날 위협했어. 난 그저 꾸며낸
거짓말이었는데 도리어 그걸로 날 협박하기 시작했다고.
은진: 꾸며낸 이야기가 맞는 거야?
이혁: 나중에 원장이 다른 선생들한테 얘기하는 거 들었어. 혁이 녀석, 제가 지어
낸 말로 겁줬더니 꼼짝을 못하더라고. 종종 아이들 혼낼때 써먹어야겠다고.
그랬더니 다른 선생들도 좋은 방법이라며 다들 낄낄 댔으니까.
은진: 나한테는 사실을 말해주지. 정말 멈추고 싶었어. 원장이 날 올라타고 내 속
을 쑤셔대는 것 정말 싫었어. 병원 다녀온 다음부터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거절하려고 했어. 그런데 날 죽인다는 협박이 정말 두려웠어.
이혁: 사실을 말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거야. 나도 사실이 아닌 걸 알면서도 무
서웠어. 진짜로 날 죽여서 태워버릴 것 같았어. 그래서 네가 그 얘기를 했
을 때 처음 들은 척 한 거야. 마침 없는 줄 알았던 이모가 찾아와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거고.

- 17 -
은진: 그러면서 넌 그때 나랑은 왜 했니? 왜 나한테 결혼하자고 하고, 사랑한다고
하고, 이상형이라고 하고. 어차피 혼자 가버릴 거면서 나한테 왜 그런 거
야? 면회는 또 왜 온거야? 나도 병신같이 네 말을 믿었어요. 그런데 넌 면
회 올 때마다 원장새끼랑 똑같이 나한테 그 짓만 하고 가더라고. 다르긴 했
어. 너한테는 따뜻함이 느껴졌거든. 내가 너 나가고 난 후 얼마나 많이 탈
출을 시도했는지 알아? 그리고 얼마나 많이 죽을 뻔했는지 알아? 네가 이모
밑에서 편안히 학교 다니며 공부할 때 난 하루에도 몇 번씩 쓰레기봉투에
담겨 태워질까봐 두려웠어. 그런데 그게 네가 지어낸 말이라고. 그러고는
날 구한답시고 와서 네 원장 아버지랑 똑같이 욕정만 풀은 거야?
이혁: 널 구하려고 한 마음은 진짜였어.
은진: 그런 놈이 신고 하나 없었잖아.
이혁: 이모한테 피해가 갈까봐. 어떻게든 나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고 했어. 정말
이야, 널 구하려고 한 마음은 진짜였다고.
은진: 거긴 진짜 지옥이었어. 넌 나한테 사실을 얘기했어야 했어. 쓰레기봉투 얘
기가 사실이 아닐 꺼라는 거 어떻게 알았는지 알아? 병원 다녀온 걸 어떤
애가 알아서 네가 퇴소한 후 모든 원생한테 퍼트린 거야. 그랬더니 처음에
는 나를 병 걸린 애처럼 쳐다보더니 나중엔 더러운 년 취급 하더라. 더러우
면 차라리 피하던가. 원장 새끼가 나 건드리는 게 부러웠는지, 아니면 난
아무나 건드려도 괜찮은 애라고 생각했는지 어느새 지들도 나한테 그 더러
운 물건을 갖다 대더라고. 다른 선생부터 시작해서 고작 열 셋 넷밖에 안된
애들까지도 말이야. 다들 내 위에 올라타기 전에 뭐랬는지 알아? 가만히 안
있으면 쓰레기봉투에 담아서 태워버린다. (가만히 안 있으면 쓰레기봉투에
담아서 태워버린다, 쓰레기봉투에 담아서 태워버릴 거야, 쓰레기봉투에 담
아서 태워버릴까) 사람은 아무리 비인간적인 일이라 해도 익숙해지면 그게
평온한 일상이 되는 건가봐. 선생 아이 할 것 없이 <사랑 둥지>의 모든 남
자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날 찾았어. 그런 더러운 지옥에서 넌 이미 예전에
누릴 거 다 누리고 해방되고 난 아직까지도 그 지옥에서 해매고 있어. 너.
진짜. 나 사랑하기는 했니? 사랑 했어?

정적.

이혁: 널 사랑한 건 진짜야. 그리고 지금도 사랑해.


은진: (웃음) 오빠.
이혁: 정말이야.

- 18 -
은진: 근데 왜 저년이랑 결혼했어? 그냥 혼자 살지.
이혁: 널 잊지 못했으니까.
은진: 뭐?
이혁: 내가 하루하루 평온한 생활을 이어갈수록 네 생각이 떠나지 않았어. 아니,
오히려 너의 전부를 기억하려고 했어. 정말로 사랑했으니까. 근데 그게 너
무 힘들었어. 난 너만을 원하고 있는데, 널 더 이상 볼 수가 없으니까. 아무
리 그리워하고 지난 날을 자학해 봐도 널 볼 수는 없었잖아.
은진: 그래서 저년이랑 결혼했다고?
이혁: 그래. 널 계속 떠올리기 위해.
은진: 오빠, 그만 하자.
이혁: 집사람이 노래하는 모습 보고 네가 떠올랐어. 집사람도 너랑 나이가 같아.
서른 셋에 집사람을 만났는데, 너의 꿈이었던 음악을 하고 있고. 마치 너의
미래의 모습 같았어. 그래서 집사람을 보면서 널 계속 느끼고 싶었어.
은진: 됐어, 그만 해.
이혁: 정말이야.
은진: 그럼 저년이랑 할 때 내 생각하면서 했겠네?
이혁: 어.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은진: 그럼 저 웨딩사진 앞에서 한번 할까? 이젠 오빠가 상상할 필요 없이 현실이
니까.
이혁: 좋아.
은진: 그리고 오빠가 나 숨겨준다고 했으니까 우리 외국 가서 결혼해서 살까?
이혁: 얘기했잖아. 돈만 있으면 밀항 어렵지 않아.
은진: 오빠가 그렇게 아끼는 아이는 어떻게 해?
이혁: 아내에게 줘버리지 뭐.
은진: 오빠는 저 애 없어도 돼?
이혁: 나 애 필요없어. 너만 있으면 돼. 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지 다 해줄게.
은진: 이미 번듯하게 자리잡은 오빠가 나한테 왜 그래야 하는데?
이혁: 넌 나의 전부니까.
은진: 오빠.
이혁: 진짜야. 난 너밖에 없었어. 너만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은진: 오빠.
이혁: 내가 널 망친 거잖아. 내가 책임질게. 우린 예전부터 하나였어. 우리 처음
사랑을 나눴을 때 너랑 결혼하겠다고 한 말 잊었어? 나 아직도 기억해.

- 19 -
은진: 날 책임질꺼야? 그럼 저 애 필요없으니까 지금 없어져도 되겠네.

캐리어에 휘발유.

이혁: 아니, 그럴 것까진 없는 것 같아. 은진아, 우리 지금 돈 챙겨서 나가자. 여


기서 저 애 죽여봤자 괜히 사람들 시선이나 끌고, 우리가 밀항하는데 방해
만 될 꺼야. 안돼, 은진아. 은진아, 제발. 네가 원하는 거 내가 이혼하는 것,
나랑 같이 사는 것, 나랑 아이 갖는 것. 은진아 내가 잘못했어. 내가 착각했
어. 네가 나랑 새출발을 원하는 줄 알았어. 그래 나같은 놈이랑은 다신 상
종하고 싶지 않을 꺼야. 그래, 그럼 내가 처벌 받는 것. 감옥에 들어갈 놈은
나니까. 그렇지? 내가 나쁜 놈인 거잖아. 내가 네 앞에서 죽는 것! 맞아? 맞
지, 그냥 나 죽여. 그럼 되잖아. 은진아.
은진: (노래) 숲 속 작은집 창가에 / 작은 아이가 섰는데 / 토끼 한 마리가 뛰어
와 / 문 두드리며 하는 말
이혁: 살려줘, 제발.

묘한 소리.

- 20 -
<4장>

묘하게 일그러지는 조명.


소년 소녀의 목소리에 따라 배우들 움직인다.

은진: 뼈가 달랐대.
이혁: 이모가 찾아왔어.
은진: 닭 뼈도 아니고.
이혁: 날 친자식으로 입양하겠대.
은진: 고양이 뼈도 아니고.
이혁: 너가 18살이 되면 우리 결혼하자.
은진: 강아지 뼈도 아니었대.
이혁: 내가 너 책임질게.
은진: 검은 쓰레기 봉투에 뭐가 담겨있었을까?
이혁: 은진아, 나 믿지?
은진: 오빠, 쓰레기 봉투 얘기 정말 들은 적 없어?
이혁: 은진아, 사랑해. 넌 내 이상형이야.

현실을 일깨우는 혁의 소리.

이혁: (웃음) 은진아. 우리 그만하자. 내가 죽길 바라니? 내가 죽는 것을 원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둘 중에 누구 하나 죽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하나
도 없어. 기억은 지워지지 않으니까. 말 했잖아,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내버려 두는 거라고. 너 혹시 원하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거 아니야?
그런데 괜히 원하는 게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거지. 관심을 원하니? 아니
이렇게 수다만 떨까? 정말 그만하자. 벌써 세시다.
은진: 보육원에서 10년, 감빵에서 17년. 27년을 견뎠어. 오빠는 이제 겨우 열시
간 남짓이라고. 참아, 한 시간 남았어.
이혁: 그래, 한 시간 동안 뭐 할까? 진짜 17년만에 한 번 할까?
은진: 오빠, 방화 사건 일어나던 해가 원래 나 만기 퇴소하는 해였던 거 알아?
이혁: 그랬나? 그렇구나. 열여덟이면 다들 자립정착금 받아서 만기 퇴소 하지. 생
각해보니 그렇네. 그때는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은진: 나도 오빠가 결혼하자고 해서 그 생각만 했지, 만기 퇴소는 꿈에도 생각 못
했어. 만기 퇴소도 서른이 되서야 생각했어. 교도소장이랑 맥주 마시면서

- 21 -
얘기 좀 했거든. 60먹은 노인네인데 그러더라고, 방화 사건 일어났을 때 한
두달만 참으면 보육원을 나오는 데 왜 그랬냐고. 그렇게 화가 났냐고. 뒤통
수 빡 맞았지 뭐. 정말로 그 때는 오빠가 결혼하자고 할 줄 알았어. 그런데
아무 말도 없더라. 그 날 나랑 둘이서 결혼할 생각은 한 거야?
이혁: 아니.
은진: 짐작은 했었어.
이혁: 퇴소하고 3년 동안 밖에서 지내다 보니까, 그 나이 대에 결혼이라는 것이
나 혼자서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더라고. 전까진 정말 하고 싶었어.
은진: 그럼 방화사건이 일어난 날 왜 날 찾아온 거야? 결혼하자는 말도 안 할 거
면서.
이혁: 어떻게든 널 데리고 가려고. 몰래 빼내려고 했어. 3년간 이모가 주는 용돈
을 모아서 집 근처 고시원 하나를 구했거든. 6개월 정도 밖에 빌릴 수 없었
지만, 대학 들어갔으니 따로 아르바이트 하면서 원룸이든 얻어주려고 했어.
은진: 데려가지.
이혁: 다른 선생과 애들까지 너한테 몹쓸 짓 하는지는 몰랐어. 하긴 언제부턴가
내가 면회 가는데도 날 반기기는 커녕 눈치만 보더라고. 아니, 감시를 눈치
라 착각한거지. 내가 보육원을 나설 때까지 날 지켜봤어. 그래서 창고에서
보자 하고 다시 숨어들었잖아.
은진: 그날따라 유별나게 다들 덤벼들었어. 오빠가 온 날은 주로 그래. 원장새끼
는 오빠가 보육원 문을 나서자마자 날 오라했어. (은진아 자니?) 난 너무
싫어서 창고에 오빠랑 있었고. (은진아 어딨니?) 다른 때 같으면 내버려두
기도 했는데, 그 날은 원장이 보육원 전체를 샅샅이 뒤지면서 날 찾았어.
(은진아 상담 받아야지?)
이혁: 넌 결국 열시쯤에 다시 나가서는 돌아올 생각을 안했지. 열한시가 되고, 열
두시가 되고. 새벽 한시가 넘고 두시가 넘도록 돌아올 기미가 안보였어.

발자국 소리와 묘하게 일그러지는 조명.

은진: (소리) 어떡하지? 원장 아버지가 날 찾으러 여기까지 왔나봐.


이혁: 나가지마. 이대로 가만히 숨어있자.
은진: (소리) 이러다 오빠도 걸리면? 오빠는 여기 있어. 내가 갔다 올게.
이혁: 은진아. 아냐, 은진아. 가지마.
은진: (소리) 걸리면 우리 다시 못만나. 얼른 상담 받고 올게.
이혁: 은진아, 은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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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과 원생들의 숨소리.
스파클러가 타는 소리.
은진의 움직임.

이혁: 난 참을 수가 없었어. 그런데도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어. 무서워서 창고


에 꼼짝 않고 있었어. 그래서 나 혼자 불꽃놀이를 했어. 네가 불꽃이 피고
사라지는 순간을 바라보면서 좋았던 일 슬펐던 일 다 잊는다고 해서, 나도
스파클러에 불을 붙이고 그게 타들어가는 걸 보면서 다 잊으려고 했어. 계
속 스파클러만 바라봤어. 불꽃이 보이고 사그라지는 모습만을 계속 해서 봤
어. 근데 잊기는 커녕 네 생각이 떠나지가 않는 거야. 넌 내가 사랑하는 내
여자인데 그 원장새끼가 마음대로 널 유린하는 것도 보기 싫었고, 쓰레기
봉투 이야기는 내가 꾸며낸 말인데도 나 자신이 봉투에 담겨져 불에 태워지
는 영상이 머리를 떠나지가 않는 거야. 그래서 생각을 지우려고 손에 쥐었
던 스파클러를 다 던져버렸어.

묘한 소리.

이혁: 근데 뭔가 타는 거야. 내가 던진 스파클러 때문에 창고에 놓여있던 서류들


에 불이 옮겨 붙기 시작한 거였어. 그 불이 벽을 타고 천장을 타고 본관으
로 퍼지기 시작했어.
은진: (소리) 오빠, 뭐하는 거야? 어서 피해. 건물이 불타기 시작했어.
혁아: 가자. 나가자, 은진아. 다 깨끗이 잊는 거야. 저 불은 모든 걸 다 잊고 새롭
게 시작하라는 불이야. 가자, 은진아.
은진: (소리) 오빠, 오빠!

사이렌 소리와 불타는 소리.


각종 사건/사고 소식을 알리는 뉴스 소리.
사람들과 이혁의 울음소리.

이혁: 미안해. 미안해, 다 미안해. 널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네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널 데리고 가지 못해서 미안해. 내가 너무 미안해, 은진아.
은진: 보육원생과 선생들 51명 전원 사망. 오빠는 몰래 다시 온 거니까 출입기록
에서 빠졌으니 용의선상에 오르지도 않았고, 보육원에서 빠져나간 유일한
생존자인 나만 잡혀서 이 꼴이 됐지. 법원에서도 오빠 얘기는 꺼내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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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혹시 나 때문에 해를 당할까봐. 오빠는 가족도 있고 앞날이 창창한 대
학생이었잖아. 근데 적어도 오빠가 날 사랑했다면, 아니 조금이라도 아꼈다
면 가서 말 한마디라도 해주지. 어떻게 그러냐. 지금처럼 무기징역이었어도
좋아. 오빠가 말했는데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도 좋아. 내가 바란 건 오
빠의 마음이었거든. 그게 내가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내 상처야. 교
도소에 있던 초반에는 힘내라고 편지도 하더만 나중엔 답장도 없고. 17년
전에 내가 원한 건 오빠가 날 버리지 않는 거였어. 그럼 지금은 무엇을 원
하는지 이제 알겠어? 울지 마.

은진은 혁이를 안는다. 혁은 은진의 목을 입으로 문다. 은진은 비명을 지른다.


은진이 쓰러지자 혁은 손을 뒤로 묶인 상태에서 은진을 잡는다.

이혁: 씨발년아. 열쇠 내놔. 어서.

혁이는 은진의 목에 있는 열쇠를 꺼내려고 한다.

이혁: 야, 최은진. 말은 똑바로 해. 지워지지 않는 상처? 그게 왜 내 책임이야. 네


트라우마는 내가 만든 게 아니야. 내가 겁탈했어? 내가 임신하게 만들었어?
내가 꾸며낸 이야기도 널 도와준답시고 만든거였어. 결과가 그렇게 일어났
을 뿐이야. 나는 뭐 평생 동안 마음 편히 산 줄 알아? 나도 단 한 번도 두
팔 뻗고 제대로 자본 적이 없다고. 애들 죽은 것도 내 탓, 불난 것도 내 탓,
원장 새끼하고 보육원 남자 새끼한테 당한 것도 내 탓. 씨발, 그렇게 남 탓
만 할거면 차라리 죽어버려. 너는 뭐 책임이 없는 줄 알아? 네가 교도소에
갖혀있는 건 결정적으로 네가 자초한 일이야. 기억 안 나? 보육원 불 났을
때 네가 사람들 나올 문을 죄다 잠가놨잖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를 때 넌
아랑곳 하지 않고 문 못 열게 계속 무언가로 틀어막았어. 내가 어서 가자고
해도 넌 미친 듯이 문 앞에다 눈에 보이는 모든 짐들을 갖다 놨다고. 알어?
51명을 죄다 살인한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너라고! 네 시간은 멈춰 있지만
내 시간은 흘러간다는 개같은 소리 하지 말고 그렇게 억울하면 차라리 죽어
버려. 죽어, 죽으라고!

혁이는 열쇠를 탈취한다.


수갑과 캐리어, 그리고 녹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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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 소윤아. 대답해봐, 소윤아. 아빠야, 아빠가 구해줄게. 조금만 참고 기다려.
이게 뭐야? 소윤이 어디 있어? 말해. 말하라고!
은진: 오빠가 깜빵에 있는 나한테 보냈던 편지야. 내가 보냈는데 오빠가 주소 바
뀌어서 반송된 편지하고.
이혁: 소윤이 어딨냐고? 너 설마 소윤이를.
은진: 걱정 마. 아이는 손 끝 하나 안 건드렸으니까.
이혁: 어디에 있는데? 말해, 말해!
은진: 안전한 곳에 있어. 내가 원하는 걸 맞추면 알려줄게. 나 못 믿어?
이혁: 그래, 너 못 믿겠어. 당장 말해.
은진: 하지 마.

이혁의 겁탈.

이혁: 당장 말하라고. 소윤이 어딨어. 말하라고. 한 번 하자며. 17년 동안 안했다


며. 진심이 아니었나보지?
은진: 싫어, 싫다고.
이혁: 정말 싫은 거야? 말은 싫다고 하면서 네 몸은 항상 원하는 거 아니야? 나랑
할 때도 처음엔 싫다고 했잖아. 원장 새끼야 그렇다 쳐도 다른 애들이 건드
릴 때는 왜 거부하지 않았대? 쓰레기 봉투 얘기때문에 무서웠다고. 실은 네
가 더 원했던 것 아니야?
은진: (허밍) 숲속 작은 집 창가에 / 작은 아이가 섰는데.
이혁: 다 네가 꼬신 거지. 원장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다른 새끼들도 다 네가 꼬
신 거지. 다 네가 꾸민 거지. 소윤이 어딨어.
은진: (허밍) 토끼 한 마리가 뛰어와 / 문 두드리며 하는 말.
이혁: 어딨는지 말해. 당장 말하라고!
은진: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정적.
시계 알람 소리.

은진: 화 풀어. 네시네. 오빠 애는 어린이 집에 잘 있어. 아까 어린이 집에서 온


전화는 먼저 출소한 교도소 언니한테 부탁한 거야.
이혁: 소윤이 어린이 집에 있다고? 그럼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네가 원하는 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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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 집 정말 좋다. 부러워. 집이 부러운 게 아니야. 가족이 있다는 게 부러운 거
지. 이삿짐도 다 안 풀었나 본데 지금도 이미 가족이 사는 집 같아. 난 내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부모는 있었지 가족이라 할 만한 게 없더라고. 애
초에 태어나면 안 되는 애였나봐. 부모가 동반자살 했을 때 나까지 같이 죽
었으면 좀 좋아. 부모가 나한테도 수면제 먹였다는데 목숨도 질겨서 난 살
아났어. 살아났는데도 연고지는 아무데도 없고. 유일하게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사랑 둥지 보육원. 부모한테도 당하고, 거기서도 당하고, 교도소에서도
당하고. 이런데도 아직까지 살아있어요. 참 질기지. 법정에서도 사형을 때려
줬으면 좀 좋아? 이렇게 구질구질하게라도 살라고 무기징역을 때렸어요. 이
러니 내가 원하는 게, 아니 내가 원할 수밖에 없는 게 과연 뭘까?
이혁: 너 설마.
은진: (열쇠) 우리 창고 열쇠. 언젠가 이게 우리 집 열쇠가 되길 바랬는데. 괴롭
혀서 미안해. 책임진다 해놓고 도망갔으니 내가 이 정도 혼내는 건 괜찮지?
맘 같아선 나만큼 더 아프게 하고 싶었는데 따지고 보면 오빠도 무슨 죄야,
나 좋아했었고 사랑했었고 앞날을 약속했던 죄밖에 없는데. 아무 말이 없다
고 아무 말도 못하는 게 아니야.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를 뿐이야. 내 상처
를 짐지우고 싶지 않으니까. 이젠 확실히 놓을 수 있겠어. 잘 살아, 이혁.
숲속 작은 집 창가에 / 작은 아이가 섰는데 / 토끼 한 마리가 뛰어와 / 문
두드리며 하는 말. (퇴장)
이혁: (전화) 선생님, 새벽에 죄송합니다. 우리 소윤이.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진정) 뭐야,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 얼굴 보고 싶었다
는 얘기야? 아, 씨발년. 아니, 그냥 죽고 싶을 때 알아서 혼자 죽으면 그만
이지 왜 날 찾아온 거야. (담배) 나보고 너 죽는 것에 대해 죄책감 가지라
고? 알았다. 죽을 때까지 너에 대한 죄책감 가질 테니까 너무 날 원망하지
말고 가라. (웃음) 세상에 별 또라이 많다니까. 어차피 제 죽을 꺼면서 뭘
그렇게 나한테 원망이 많다고 어필한 거야. 개좆같은 씨발년. "내가 정말 원
하는 게 뭘까? 힌트 하나, 힌트 둘" 미친년. 방화사건, 내가 문을 막은 게
아니잖아. 원장 새끼한테 겁탈, 나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다니까. 쓰레기봉
투 얘기, 모든 사내 놈들이 그 얘기로 널 건드릴 걸 예상했겠어? 어쩌라고?
그래서 네가 나한테 원한 게 뭔데? 왜 나한테 왔는데? 이 열쇠를 왜 아직까
지 가지고 있던 거야? 알아주길 바란 거야? 도대체 뭘? 나도 보육원 사진
안버리고 가지고 있어. 그게 뭐 어떻다고? 설사 네가 원한 걸 알았다 치더
라도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나보고 대신 죽으라는 거야? 나 안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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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못 죽어. 악착같이 살아남을 거야. 나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어. 끝까지
살아남을 거야. 나 못 죽어. 죽고 싶지 않다고. 미안해, 은진아.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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